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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마태복음 설교 모음

마태복음 18장 1절 - 14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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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마음으로 출발을 /18:1-4/ 이정익목사

2015-05-16 07:46:28

 

오늘은 일년52 가운데 주일 입니다. 이제 한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작의 시간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발작이 중요하고 단추를 끼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작이 반입니다. 단추를 끼우면 다른 단추는 문제가 없습니다.

 

한해의 시작을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한해를 끝낼 있기를 바랍니다. 2004년도의 시작을 어린 아이 마음처럼 신선하게 시작할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신선한 마음으로 출발하자” 라고 붙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하려면 가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

 

어린 아이는 마음이나 생각이 아주 순수합니다. 깨끗합니다. 맑습니다. 순진합니다. 아이들은 교회에서 하라면 그대로 실천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말은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고 맑아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여러분 한해를 이렇게 어린 아이들과 같이 순수한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가지고 살아갈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순수한 마음을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순수함입니다. 이것이 순수함의 삶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하늘을 감동시킵니다.

 

1886 겨울 정동에서 살던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 낫선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황해도 솔개에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를 믿고 성경도 여러 읽었으니 세례를 받고 싶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더우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 몰라 망설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옷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등을 보였습니다. 등에는 조그만 막대기로 십자가를 만들어 그것을 등에 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니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해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다닌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순수한 사람들입니까. 모습이 얼마나 진지합니까. 그래서 언더우드가 감동을 받아서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순수한 마음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면 그만 아닙니까.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것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감동하면 하늘도 감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을 감동시키려고 하지 말고 세상에서 사람들을 감동시키려고 힘써야 합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하늘의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일입니다.

 

1900 강화의 북부 해안의 홍의마을에 종순일이라는 지주가 살았습니다. 그분은 한학자이고 지주였습니다. 분이 동네사람들에게 빚을 많이 놓았습니다. 분이 마침내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8장을 읽게 됩니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에게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빚쟁이가 기분이 아주 좋아서 나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그에게 당장 빚을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 갚지 않으니까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소식을 들은 임금이 그를 다시 불러서 탕감한 빚을 갚으라 하고 갚기까지 감옥에 있으라고 가두어 버립니다. 분이 성경을 읽다가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어느 결단을 내립니다. 마침내 동네의 빚쟁이들을 모두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마태복음 18장을 읽었소. 여기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요. 내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만도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보다 크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의 빚을 오늘부로 탕감하기로 했소, , 여기 여러분의 문서를 모두 불에 태우겠소". 그리고 부자는 문서를 모두 불태워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순수한 마음입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감동하면 하늘도 감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그런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의 일생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새해에는 한번 그렇게 신선하고 참신하게 살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어린 아이 같은 마음과 생각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함”

 

어린 아이는 사욕이 없습니다.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습니다. 내일의 문제는 부모를 믿고 따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는 내일에 대해나 걱정 없이 그날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어린 아이의 삶의 태도입니다.

 

어떤 아이가 내일을 염려하여 밤잠을 설치며 걱정하고 근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어울리는 모습입니까. 때로 우리는 그렇게 장래와 미래에 대해서 너무 많이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그래서 신경안정제를 과다 복용하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모두 계획이 있으셨고 섭리를 가지고 계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불안해하고 걱정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염려해도 일이 되는 법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를 구해야 합니다.

 

어느 부흥사 지망생이 기도를 갔습니다. 가서 기도했습니다. “나에게 아브라함 같은 믿음을 주십시오” 그때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바칠 있느냐. 생각해 보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나에게 모세 같은 믿음을 주십시오”. 그때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모세같이 사람들 죽일 있느냐..”그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랬더니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너다, 너같이 기도하라”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각 다른 몫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바울은 그들의 몫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몫이 그들보다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조용히 생각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몫이 무엇인가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살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어느 고교생이 고교를 졸업했습니다. 학생이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일류 대학으로부터 입학허락을 받았습니다. 학생은 아버지가 법률가였습니다. 자신도 법률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크게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는 어려서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공부하느라 중단하고 교회와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날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한창 달리는데 지방방송이 들려오더니 어느 무명 목사의 설교가 들려왔습니다. 그날 설교 제목이 “잃어버린 하나님을 다시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방송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차를 멈추고 시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장차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하고 고민했습니다. 내가 일은 무엇인가, 내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고민을 합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그는 마침내 신학교에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미국의 남침례교 지도자인 듀크 맥콜(Duke McCall) 목사입니다. 나의 앞길은 이렇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여러분, 나의 앞길, 자녀들의 미래와 장래가 걱정될 것입니다. 너무 염려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언제는 그렇게 염려해서 일이 있습니까.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사람들이 억지로 앞길을 열려고 애를 쓰는데 그러니까 삶에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억지로 열려고 한다고 열려집니까. 엘리베이터 문은 억지로 열면 됩니다. 문은 저절로 열려야 그것이 형통입니다. 가장 안전합니다. 별로 힘도 들지 않습니다. 저절로 문이 열리는 , 그것이 형통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길이고 방법이고 가장 안전한 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먼저 하나님의 나에 대한 뜻을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가족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앞길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길일까를 먼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될까를 먼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앞길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나의 앞길이나, 자녀들의 앞길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데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는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공부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아인슈타인이 와도 낙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아주 복잡한 나라입니다.

 

어느 과학자가 죽어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아뢰었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유능한 과학자 한명도 없어서 강대국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유능한 과학자 다섯 명만 보내 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이 다섯 명의 과학자를 다시 살려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퀴리 부인, 뉴턴, 아인슈타인, 에디슨, 갈릴레이 다섯 명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모두 직업하나 변변하게 갖지를 못하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에디슨은 발명왕인데 학력수준이 국졸이라 특허심사를 마다 학력미달로 낙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학력미달로 면접에서 낙방 당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수학만 잘해서 수능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해서 대학 문턱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뉴턴은 논문을 많이 냈는데 대학교수들이 논문을 심사했는데 심사위원들이 논문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서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갈릴레이는 우리나라 과학정책을 꼬치꼬치 따지는 바람에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퀴리 부인은 어디 회사라도 가려고 하니까 얼굴이 바쳐주지 않아서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실업자로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런 나라입니다.

 

우리의 앞길, 불확실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미래창조는 불확실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해서 방황 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지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고 계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뜻을 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분이 나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와 장래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풀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길이 든든한 길이 됩니다. 새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한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사랑”

 

여러분, 금년 한해 예수님을 한번 끔찍하게 사랑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면 마음에 기쁨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은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사랑하려면 가지 내용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잡아 심문했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권능을 행하느냐”, 그때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칠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기도할 앉은뱅이는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자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를 자랑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를 자랑할 믿음이 성장합니다. 금년 동안 예수를 많이 자랑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의 사랑을 입게 것입니다.

 

번째는 “기쁨으로 헌신의 살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수고해 보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성가대로, 교사로, 식당에서, 거리에서 차안내로 수고하는 ,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일입니다.

 

주일날 열심히 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최고의 예수님 사랑입니다. 새해에 예수님을 위해서 한번 수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도 여러분을 향해서 어떤 행동을 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일만을 위해서 살면 됩니다. 그러면 어느 크게 외로울 날이 것입니다.

 

번째는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새해에는 열심히 11 생활도 보시기 바랍니다. 11 생활은 헌신의 표현입니다. 물질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피를 흘리고 죽는 것만 순교가 아닙니다. 물질을 바치는 삶도 순교의 삶입니다.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물질을 아무나 바치는 아닙니다.

 

한번 각오하고 바쳐보십시오. 앞날을 너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믿고 내가 일을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만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11 생활하려면 먼저 마음에 시험이 것입니다. 마음의 갈등이 시작되고 용단내리기 까지 갈등이 찾아올 것입니다. 순교하는 삶에 그런 갈등이 없겠습니까. 저는 11 생활을 강력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내가 모든 유혹과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증표가 내가 11조를 드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내게 상응하는 마음으로 다가오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주저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믿고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믿고 나아가면 믿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신앙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생활은 꾸준히 심는 생활입니다. 심은 사람이 기대가 있고 응답이 있고 거둘 것이 있습니다. 나는 자식들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삶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지를 대답해 주겠습니다.

 

하나는 “너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날 예배를 소홀히 하는 일은 없게 하라”는 것이고 하나는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11 드리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내가 아이들의 앞날을 세세히 챙기고 돌보고 인도하고 보살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자식들의 미래나 장래를 언제까지 내가 만들어주고 길을 열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맡기는 삶이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일날은 만사를 놓아두고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는 일이고 하나는 내가 가장 힘들게 벌고 아까워하는 물질을 유감없이 11조로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그렇게 하나님 우선주의로 살면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시겠습니까. 사람들이 길을 모릅니다. 그것이 가장 근본의 길이고 해결책인데도 방법을 모릅니다.

 

그리고 당장 아까운 것만 생각합니다. 그렇게 아낀다고 잘사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길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새해는 무엇보다도 어린 아이처럼 순박하고 신선하고 예수님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거룩한 습관(14)사랑 /18:1-6, 18:10/ 이동원목사

2014-12-03 10:54:02

 

어느 애완견 훈련사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한국에서 개를 기르는 분들의 조련 양상들을 관찰해 보면 가지 유형의 극단으로 갈라져 있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하나의 극단을 그는 과잉보호 형이라고 말하고 하나의 극단을 그는 방임형 혹은 학대 형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과잉으로 보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방임내지 학대하는 형으로 갈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개가 강아지 시절에 사람을 물면 아프지가 않기에 그것도 오히려 귀엽다고 쓰다듬고 좋아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런 과잉보호의 경우 성견이 되면 사람들을 무는 개가 됨으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인이 전혀 관심을 안주다가 시시 때때로 자기 기분에 따라 개를 차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는 등의 방임내지는 학대 형으로 기르는 경우도 역시 결과적으로 개와 가족간의 유대가 끊어져 도망갈 기회만 기다리든가 다른 견공이나 사람들에게 분풀이로 역시 물어버리는 비정상적 개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받아야 교훈이 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철이 지난 유머이기는 하지만 개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 아십니까? 정답은 ‘개인 지도’입니다.

 

우리 모두 개인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런 애견 양육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것이 시대를 사는 우리 부모들의 자녀 양육의 형태와 얼마나 유사한가를 떠올리지 않을 없었습니다.

 

자녀들의 빗나간 욕구에 부모들이 오히려 끌려 다니면서 자녀들의 무질서마저 귀엽다고 맹목적으로 옹호하며 자녀들을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오늘의 부모들이 바로 과잉보호 부모들이 아닙니까?

 

그런가하면 자녀들이 어떻게 행동하건 방임해 두었다가 어느 갑자기 자녀들에게 무분별하게 감정을 폭발시키고 분풀이 하는 부모들이 바로 방임형 혹은 학대 부모들이 아닙니까?

 

오늘 “어린이를 사랑하자” 혹은 “자녀를 사랑하자”는 구호적인 호소는 사실 의미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의 과제입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갖지는 않으셨지만 어린이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어린이 사랑은 그분의 거룩한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예수님의 제자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자녀 사랑 혹은 어린이 사랑을 실천할 있을까요? *진지한 ‘어린이 사랑’-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요?

 

1.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 마태 18장에 선행하는 마태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매우 특별하게 취급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변화 산상의 매우 특별한 체험 현장에서 베드로는 주도적으로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었고, 마태 17 말미에도 세금 문제를 둘러싼 베드로와 예수님의 특별한 대화가 다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이

 

‘그 때에’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것입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아마도 이런 질문의 밑바닥에는 천국에서도 여전히 주께서 베드로의 존재를 크게 인정하시겠는가? 라는 예수님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 것입니다. 제자들의 매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회를 예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천국의 가치를 가르치는 기회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불러 앞에 세우시고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4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자니라”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인정이나 인기가 아닌 어린 아이의 겸손함, 단순성, 혹은 순종 등의 특성이야 말로 천국에서 가장 귀하게 평가되는 가치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당시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이런 특성들을 강조하셨다면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님의 제자로서 양육하면서 우리도 여전히 이런 가치들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붙잡고 살아야 가치로서 출세와 , 성공, 일류 학교 등을 훨씬 강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 않습니까?

 

언제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과 겸손의 가치 혹은 순종의 가치에 대하여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적이 있었단 말입니까?

 

“아빠와 엄마는 네가 미국 가는 이상으로 좋은 대학 가는 이상으로 네가 이런 일에 정직하고 스승과 친구들 앞에 겸손한 모습이 훨씬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주님이 너를 인해 기뻐하실 같구나”--이런 대화를 나누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지난주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세계를 뒤흔든 버지니아 조승희 학생이 저지른 참사 사건을 지켜보며 느낀 솔직한 소감은 사건의 공범은 다름 아닌 자신을 포함한 한국의 모든 부모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부모들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잘못된 가치를 가르친 총체적인 사회적 결과가 그런 비극이었다면 지나친 진단일까요? 사건에서 특히 우리들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받아야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과연 우리의 자녀들에게 천국의 가치를 가르치는 일에 얼마나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왔을까요?

 

아니면 땅의 그리스도인 부모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망각한 소위 세속적인 가치에 함몰되어 우리의 자녀들에게 출세와 , 성공, 일류 대학, 일류 직장만을 가르쳐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주기도를 때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합니다. 뜻을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땅에 실현되게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가치를 먼저 우리가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자녀 사랑, 어린이 사랑-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요?

 

2. 하나님 나라의 믿음을 갖게 해야 합니다.

 

본문 5 이후 6-9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워드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실족’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강경하게 작은 자로서의 어린이 실족을 경계하십니다. 6-7절을 같이 읽어 보실까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작은 자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 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도대체 단어의 ‘실족’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내에서 단어가 피상적으로 이해될 때에 교회 안에서 울고 떠드는 아이들을 교회 섬기시는 분들이 예배 질서를 위해 제지하면 아이들을 실족하게 한다고 항의하는 부모들이 계십니다.

 

여기서의 실족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단어를 이해하는 열쇠는 6절에 ‘나를 믿는’이라는 말에 핵심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이어지는 12-14절에 보면 주님은 믿음을 떠나 잃어버려지지 않도록 누누이 부탁하는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14절을 읽어 보실까요. “이와 같이 작은 자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아니니라”

 

믿음의 실족을 경계한 말입니다. 본래 단어는 희랍어에서 ‘스칸달리조’(scandalizo) 영어의 스캔들이 말에서 나온 것인데 믿음을 떠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스캔들이란 말입니다.

 

핵심은 우리의 자녀들이 정말 믿음을 갖고 자라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부모가 믿음의 모범을 보이고 계십니까?

 

“자녀들은 부모 앞에서 배우지 않고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의 잔소리는 교육 효과가 없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어떻게 사느냐를 보이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성경 보면 자녀도 성경을 읽게 됩니다. 부모가 기도하면 자녀도 기도할 것입니다. 부모가 QT하면 자녀도 QT 것입니다. 부모가 정직하면 자녀도 정직할 것입니다. 부모가 이혼하면 자녀도 이혼의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부모가 부부 사랑의 모범을 보이면 자녀도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울 것입니다. 부모가 교회 생활에 신실하면 자녀들도 그렇게 살고자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들의 대화에서 믿음에 대한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갖습니까?

 

부모가 쉽게 세속적 가치와 쉽게 타협하고 믿음을 버리면 자녀도 그렇게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것이 바로 실족하게 하는 일입니다. 당신은 부모로서 자녀들의 믿음의 통로가 되고 계십니까? 아니면 실족의 원인이 되고 계십니까?

 

3. 하나님 나라의 보배가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 사랑 혹은 어린이 사랑의 출발점은 무엇보다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인류에게 기여한 가치 중에 하나가 어린이 가치의 발견이라고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이 땅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어린이라는 단어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정환 선생에 의해 처음 어린이 ‘어리신 이’말이 지어졌습니다만 전에는 어린이의 일반 호칭이 ‘이 놈’ ‘아 새끼’였습니다.

 

그런데 2천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5절을 기억하십시다.

 

 

 

“또 누구든지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니” 어린아이의 가치의 인정이 바로 이런 어린이를 지으신 주님을 영접함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10절을 읽어 보십시오. “삼가 작은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우리의 아이들을 지키고 인도하는 천사(흔히 교회역사에서 수호천사라고 호칭됨)들이 있어서 그들이 아버지 하나님을 뵈옵고 어린이들의 미래를 의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요 하나님 나라의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보배들을 보배가 되도록 하는 -이것이 바로 우리들 부모의 책임인 것입니다.

 

어떻게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있단 말입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가지 우리의 자녀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보여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지도자는 모든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을 보여 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우리 자녀들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유명한 시편 127편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127:1)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시편기자는 자녀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127:3)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말씀에서 경건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자녀 양육의 지혜를 찾았습니다. 127:4입니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부모는 활을 당기는 사수입니다. 그의 인생의 미래를 향한 올바른 방향 가늠만 도우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높이 멀리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향하여 날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보배들인 자녀들을 위탁받은 우리들 부모의 책임입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희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자녀들이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가치를 붙들고 사는 자들이 되도록 방향을 보이겠습니다. 이제 주님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셔서 주께서 친히 그들이 가야 길로 나아가도록 하옵소서”

 

레바논의 시인이며 철학자요 화가요 그리스도인이었던 지브란은 그의 유명한 ‘예언자’에서 시편 127편을 해석하는 명시를 남겼습니다. 제목이 “아이들에 대하여”입니다.

 

--그대들의 아이는 그대들의 아이가 아닙니다./아이들은 스스로를 갈망하는 위대한 생명의 아들 딸입니다./아이들은 그대들을 통해서 왔지만/그대들로부터 것이 아닙니다./아이들은 그대들과 함께 있지만/그대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수는 있지만/그대들의 생각까지 수는 없습니다./그들에겐 그들의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육신의 거처를 마련해 수는 있지만/영혼의 거처는 마련해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들이 결코 찾아갈 없는/꿈속에 조차 찾아갈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대들은 활입니다./그대들의 아이들이 살아있는 화살이 되어 앞으로 날아가도록/그들을 쏘는 화살입니다.

 

/활을 쏘는 분은/무한의 위에서 과녁을 겨누고/자신의 화살이 보다 빨리 보다 멀리 날아가도록/그대들을 힘껏 당겨 꾸부립니다./그러므로 그분의 활이 되어 그분의 손에 당겨 구부러짐을 기뻐하십시오./

그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는 만큼/흔들리지 않는 활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고통을 구부러지는 활의 보람으로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주님의 보배요 당신의 보배인 당신의 멋진 화살들을 준비시켜 때가 어느 보다 빨리 보다 높이 보다 멀리 날아가도록 그들을 이제 축복하며 떠나보내십시오.

 

 

 

 

이름으로 엽접하라 /18:1-10/ 곽선희 목사

2014-11-25 21:10:03

 

하우스파티라고 하는 생방송 프로그램을 26년간 진행한 Art Linkletter라고 하는 토크쇼 진행자가 애들을 앞에놓고 어린이날 특별한 질문을 했더랍니다. 어린이들은 자라서 장차 무엇이 되고싶습니까?

 

어떤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하고 꼬마들에게 물었더니 4살짜리 아이가 선뜻나서면서 대답을 하는데 “저는 엄마가 될래요. 엄마가 제일 예뻐서 엄마가 되고 싶어요. 그러나 애는 낳지 않을래요. 그러냐고 물었더니... 골치아프니까요...

 

여러분 대답속에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엄마가 되는것도 좋고 엄마와의 사랑스러운것도 좋아요. 그러나 가만히 보니까 어머니의 얼굴에 자기는 귀찮은 존재예요.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귀찮아 한다는거 잘알고 있어요. 아주 골치아파하는거 같애요. 그래서 문제예요.

 

어떤 교인가정을 심방을 갔다가 꼭같은 장면을 봤습니다. 마침 심방을 끝내고 제가 집에서 나올때 주부가 되는 어머니도 같이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외출을 하게 되는데 집에 3살짜리 어린애가 엄마 따라가겠다고 아주 막무가내로 억지를 쓰는겁니다.

 

엄마 같이 갈래, 엄마 따라갈래. 그렇게 이유는 얘가 막내인데 실은 3되는 자녀가 있는데 3 있고 그리고 늦게 늦둥이로 얘를 낳거든요. 되게 귀찮은거예요. 이게 말썽이예요.

 

어디 갈려고 해도 못가게 하고 그래서 큰소리로 우리한테 하는 말이 저애는 괜히 태어나가지고 괜히 생겨가지고 성가시게 말썽이라고... 가만히 보자 하니까 남편까지 원망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들어갑시다.

 

심방 다시해야겠어... 다시 들어가서 앉혀놓고 지금 무슨 말한거요? 어린애가 말을 알아듣는다면 얼마나 기가막힐거요? 생각해보라고... 당신의 입에서 이런말을 해도 되겠는가? 이런 저주스런말을 어데 생각이라도 그렇게 할수있는가?

 

한참설교를 했구요. 아구 잘못했습니다. 어쨌든 잘못했다고 회개했어요. 그래서 내가 용서해줬는데... 년후에 그집을 방문했을때에 하는말입니다. 막내둥이가 없었더라면 세상에 살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요. 너무너무 귀엽다는거예요.

 

여러분 우린 자녀들에게 때로 효도라는 얘기도 하고 효도를 가르치기도 하고 효도를 하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마는 여러분 잊지마세요. 효도는 물질 거래가 아네요. 많은 잔소리 그거 아네요.

 

가장 근본적인 것은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을 어렸을때부터 바로 알도록 바로 깨닫도록 가르치는 거예요.

 

얘길 해서 죄송합니다마는 저는 어렸을때 장난이 무척 심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아버지한테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한테는 매를 맞은일이 없는데 그러나 제일 제가 무서운건 어머니입니다. 언제한번 심한말씀도 한번 하지않습니다.

 

물론 때리지도 않는데 어머니가 제일 무서웠어요. 이유는 가끔 한마디 합니다. 내가 낳기 위해서 10년동안 기도했다. 낳은 이후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하루에 새벽과 저녁에 교회에가서 기도하고 있다. 그래도 네가 안들을거야? 이건 꼼짝을 못합니다.

 

이거... 더욱 마음을 뜨겁게 것은 제가 피난을 나온다음에 뒤에 온분들에게 들었습니다.

예배당은 불타서 없는데 예배당터에 거기서 새벽마다 엎드려 기도하신답니다. 어느날 눈이 하얗게 왔는데 눈이 덮혔는데 가마니떼기를 쓰고 거기서 밤새 기도를 했는데 눈을 털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그래요.

 

이야기를 들은후로 얼마나 마음이 괴로운지 제가 년전에 바로 자리 어머니가 엎드려서 기도하던 자리에 서서 한시간동안 자리를 뜰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나의 나됨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겁니까? 존재가 정말 의미가 있는겁니까?

 

우리아이들이 내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그걸 바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것이예요. 아니 정말 귀찮은 존재요? 아예 태어날때부터 염세적이예요. 태어나지 말아야 것이 아버지 어머니 불장난에 실수로 태어났다는 거지?

 

얘들이 이것부터 먼저 배워요. 그리고 생각합니다. 내가 정말 살아야 하나? 아주 살짜리가 벌써 이것부터 공부해요. 그리고 한평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것입니까?

 

여러분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고로 기독교 교육의 근본은 가정교육의 근본은 교육적 문제도 아니고 심리학적 문제도 아네요. 존재론적인 문제예요. 내가 존재하나? 그것부터 깊이 깨닫고 바르고 출발해야 된다는거예요.

 

생명자체를 소중하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렇게 기뻐하고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이렇게 기뻐했고 지금도 존재는 이렇게 소중하다 그것을 몸으로 느끼며 살아가야하는데 이건 말로 되는 것이 아니죠.

 

본문은 기독교교육의 원초적 교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아는대로 오직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라고 하는 교리적 신앙입니다. 그러나 윤리적 신앙은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천국이라는 말을 일단 행복이라고 생각해보십시다. 누가 행복합디까?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 저는 많은 사람들 높은 사람들 혹은 많은 소위 VIP 속하는 분을을 많이 만나봅니다마는 가만히 보니깐 성공하는분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봐요.

 

사람이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어떻게 성공할수 있었을까? 왜요? 너무나도 어린아이같으니까... 순진할정도로 어린아이같은데가 있어요. 어딘가모르게 어린아이와같은 사람들에게 행복이 있고 성공이 있더라구요.

너무 그렇게 어깨에 힘주고 어른같은사람 자기도 고생하고 남도 못살게 굴더라구요.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특별히 오늘은 어린아이를 영접해야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어린아이를 대할 어떻게 대해야 하나 관계성을 말해주고 있어요. 두가지로... 이름으로 영접하라. 둘째는 나를 영접함이니... 이름으로 영접하라 나를 영접함이니... 엄청난 아주 신비스러운 진리가 그속에 있습니다.

 

일단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한다는게 뭡니까? 소극적인면에서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라는 말은 이름이 아니란것이죠. 여러분 자녀를 내이름으로 부릅니다. 하지만 내거 아닙니다.

 

물건도 아니고 소유도 아니고 명예를 위해 존재하는것도 아닙니다. 물론 늘그막에 효도받겠다는것도 아닙니다. 이름으로라는 말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거예요. 어디서부터 빗나갑니까?

 

내것인줄알고 마음대로 되는줄 알고 소원을 이루는데 저것을 수단으로 사용할려고 그래요. 거기서 문제가 되는거예요. 거기서 반발이 나는거예요.

 

저는 어느 음악대학 교수님을 압니다. 이분은 음악에 소질이 없답니다. 내가보기에도 없는거 같애요. 그런데 음악대학 교수까지 됐습니다. 소질이 없는걸 억지로 어머니가 시켜서, 시켜서 오늘까지 왔는데 본인얘기가 다른사람의 다섯배를 노력한대요.

 

그러나 결과는 없대요. 정말로 어머니를 원망하더라구요. 일생을 망쳐놓았다고... 여러분 하고싶은짓 하라고 내버려두세요. 그거 내맘대로 되는게 아네요. 내맘대로 할려고 할때 벌써 그것은 성경에서 떠나는것이예요. 소유가 아닙니다.

 

뜻도 아닙니다. 나로 위해 저가 존재하는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슨말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어린아이는 다시 독립적 관계에 있어요. 그걸 잊지말아야 돼요.

 

나는 오히려 그것을 봉사하고 있는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저가 존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가 존재하는것이예요. 나는 일을 옆에서 심부름하고 있는거죠. 시중들고 있는 것이다 그걸 잊지말아야돼요.

 

예수님 중요한 말씀하십니다. 소자중 하나가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곧나를 영접함이니... 너무너무 귀한 말씀이예요. 우리가 아들 키우면서 딸을 키우면서도 하나님의 할수있어요. 그걸 잊지말아야돼요.

 

얼마나 소중한 얘기예요? 자식 바로 하나 키우는 것이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거예요. 이것을 바로 가르치는 바른 본을 보이는 것이 거룩한 역사란말예요. 나를 영접함이니... 예수님과 어린이 동일시했다는거예요.

 

Identify하고 있어요. 동일시한다는거 대단히 중요한 말이예요. 저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영접함이다. 저에게 잘못하는 것은 나에게 잘못하는 것이다. 저를 기쁘게 하는 것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고로 단적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예배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라는 것이예요.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대하라... 유명한 여러분이 너무나 세계적으로 아는 수산나라고 하는 어머니가 있지않습니까?

 

나는 이게 도대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요. 19명을 낳았다거든요. 부지런히 낳았어요. 좌우간... 19명의 자녀를 키운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13번째거든요. 그래서 농담으로 그럽니다.

 

만약 산하조절했더라면 얘는 못태어나는건데... 13번째 태어났으니까... 좌우간 19명을 키워서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들었어요.

 

세계가 아는 수산나 어머니 그의 기본은 뭡니까? 아이를 키울때 아이를 강보에 싸서 들었다 놨다 하고 젖을 먹일때 우주를 들었다 놨다 하는 마음으로 했다는거예요. 아이는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천사요 이제 하나님의 해야될사람이요 위대한 역사를 이룰 귀한 그릇이다.

 

아주 경건한 마음으로 어린아이 열아홉을 그렇게 키웠어요. 수산나 어머니의 자녀교육 감명있습니다. 첫째는 애가 울며 졸라댈때 절대로 주지마라. 여러분 울며 졸라댈 귀찮으니까 에이 이거나 가져라 줘버린다고요.

 

그거 나쁜버릇이예요. 왜요? 울면 통한다 이거야. 발버둥치면 통한다. 이게 이어지면 데모하면 통한다 그렇게 되는거래요.

울며 억지쓰는 놈은 절대 들어주면 안돼... 울음을 멈추고 웃는 얼굴로 다가와서 손을 내밀고 주세요 해야 그때 주는거지 우는아이에겐 절대로 주지말아야된다 대단히 중요한 대단히 중요한 교육입니다.

 

하나는 어떤 실수를 했더라도 자발적으로 고백하면 용서하라. 용서를 가르치는거예요. 언제든지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면 어떤 일이라고 용서한다. 이걸 마음에 깊이 익힌다는 것은 제일 중요한것이예요.

 

하나는 좋은 행위가 있을때는 반드시 칭찬하고 보상하라. 조금이라도 선한일했을때 좋게 보일때는 칭찬하고 그리고 보상을 하는거예요. 약속한 것은 사소한 일이라도 지켜라. 여러분 약속 참으로 중요한겁니다.

 

저는 상당히 늦게 이걸 깨달아서 진작알았더라면 자녀교육을 좀더 잘할수있었는데 하는게 하나 있습니다. 뉘우치는게... 그게 뭐냐하면 신학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깨달은겁니다. Promise and Fulfillment 약속과 성취의 긴장관계입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달라고 할때 절대로 바로 주지 말라는 거예요. 내일 아침 준다... 하룻밤 자면 준다. 한마디 하고는 다음에는 밤새껏 울어도 안줍니다. 이거는 약속이야.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애들은 잊어버렸지만 어제 약속한거다 하고 주는거예요. 고다음 크면은 세밤자면 준다 그래요.

 

그전에는 절대로 안주는거야. 세밤자면 챙겨서 줍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부터 권위가 통합니다. 약속하면 약속은 미래적 성취입니다.

 

약속하는 중간 됐다 이젠 얻었다 생각한단 말예요. 약속과 성취의 긴장관계가 바로 신앙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우린 약속을 바라보고 확실한 약속... 약속받았을 우리는 벌써 성취된 거예요. 이룬거예요. 이제 약속의 때만 기다리면 되겠어요. 얼마나 중요한겁니까?

 

여러분 자녀를 키우면서도 경건한 마음으로 대할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할수있는거예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되고 그래서 성경은 강조합니다. 실족케 하지 마라. 절대로 실족케 하지 마라. 아이들에게 실망을 주지마라. 그건 엄청난 죄가 된다고 말합니다.

 

테레사수녀가 노벨평화상을 받는 기자들이 집요하게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테레사 수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 빨리 집으로 가서 가정과 애들을 사랑하세요.

 

세계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 뭐냐? 빨리 돌아가서 가정에서 아이들을 사랑하는거 이게 가장 세계적으로 시급한일이라고 했습니다. 사실로 그래요. 세계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이 마이어라고 하는 분은 성공적 유산으로 남기는법, 성공을 유산으로 성공적 유산을 남기는 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유산의 토대는 사랑과 평등과 신앙과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마음의 유산을 주라. 감사하는 마음을 유산으로 주라. 얼마나 중요합니까? 감사하는 마음을 유산으로 물려주는게 가장 큰것이고 행동의 유산은 자기 극기와 훈련 그리고 약속을 지키는 법과 정직함이다. 이게 유산이예요.

 

셋째는 가치관의 유산입니다. 자발성과 청지기의 마음, 모든 것은 내것이 아니다. 그리고 섬기는 일만이 성공이다. 섬긴만큼만 소유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체의 유산으로서는 선택의 우선순위가 문제가 용서가 힘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행복은 낙관적 세계관에 있다는 것을 물려주는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유산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이들에게 공부, 공부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합니다. 아이들은 지쳤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가만히 짐작해보세요. 공부가 누구를 위한거냐? 아이들은 생각을 합니다.

 

여기 잔소리가 지나치면 이것은 아버지를 위해서 하는거다. 이것은 엄마의 명예를 위해서 하는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빗나갑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위한 것이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라는 것으로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야겠는데 공부하라고 할때 내가 누구를 위하나? 지금 이걸 묻고 있는겁니다. 바른 목적이 없으니까 바른 열정도 또한 바른 생활자세가 나오지 않는겁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다. 주의 이름으로 영접합시다.

 

자식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주를 위해 사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으로 키워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나를 영접함이다.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어린아이 하나를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다. 바로 신앙적 영접 경건한 영접 속에 가정교육이 있고 우리 삶의 보람도 우리의 행복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 -

하나님아버지, 우리에게 귀한 가정을 주셨고 귀한 자녀들을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는 것으로 주었고 우리는 별로 키우지 못했지만 주안에서 자라게 것을 감사합니다. 몸도 혼도 영도 항상 주께서 키워주시오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원컨대 이제 어린아이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해서 그를 영접한자의 마음속에 하늘나라가 있고 그들과 함께하는 세계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어른이 되고자하는 자는 /18:1-5/ 이동원목사

2014-12-03 10:59:12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얼마 앞둔 시점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마도 질문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질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은 "천국에서는 누가 큰자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마가복음서의 기사에 의하면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를 떠나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상에서 질문을 가지고 제자들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앞에 세우시고 가르치시기를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큰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문화권에서는 큰분을 가르켜 어른, 어르신네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의 교훈을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른이 되려면 먼저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하나의 믿음의 역설이 있습니다. 역설이란 모순되어 보이지만 진리인 것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지난 주일은 어린이 주일이었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의 교훈의 핵심이 어린이의 소중함이었다면 오늘 어버이 주일의 교훈의 핵심은 어른들의 소중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이와 어른의 소중함을 놀라운 진리의 역설로 가르치십니다. 어린이는 어른같이 다루어 질수 있어야하고, 어른은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 성숙한 인격의 질로서 '어른아이다움' 가르치신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벗어야 한다는 교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어린아이의 유치함, 어린아이의 나약함, 어린아이들의 흔들림등에 대한 적지않은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이에게서 배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성인들이 어린이들에게서 배울 것들은 천국백성들의 인격적 본질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천국백성들이 배워야 어린아이다움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1. 어린이의 신뢰성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를 어른과 비교할 가장 현저한 대조적인 특성은 신뢰성일 것입니다. 어린이는 믿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믿지 못합니다. 종종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주의시키는 가운데는 "사람 믿지 말라' 아닙니까?

 

어른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상처받은 혹은 배반당한 인생 경험 때문에 세상을 믿지 못합니다. 사람들을 믿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믿지 못함으로 인하여 하나님도 신뢰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없이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수도 천국에 들어 갈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이 혹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에도 불구하고 다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시람을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는 얼마나 믿습니까? 그들은 친구를 믿습니다. 이웃을 믿습니다.

 

선생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렸을 믿음을 갖지 못하면 어른이 될수록 늙어 갈수록 믿음갖기가 더욱 어려워 진다는 것은 통계학적인 진리입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은 믿지 못할 여러 배신의 경험으로 가득차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결코 창조적인 인생을 살아갈수 없습니다. 수학의 공식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믿음의 전제(명제) 수용하지 않고는 수학도 풀리지 않습니다. 과학자가 자기의 실험이나 탐구의 결과를 믿지 못한다면 그의 실험이나 탐구가 진행될수 있겠습니까?

사업가가 자기가 착수하는 사업의 결과를 믿을수 없다면 의욕적인 사업의 추진이 가능하겠습니까?

 

정치가가 자신의 선출을 믿지 못한다면 또한 자기의 정치참여를 통한 보다 낳은 세상의 개혁을 믿을수 없다면 정치에 투신할수 있겠습니까?

교육가가 자기의 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의 배움과 학문의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을 없다면 교육이 가능하겠습니까?

 

의사가 자기의 진단과 치료를 믿을 없다면 진료가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도 믿음입니다.

 

아시는 히브리서11:6 말씀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예수님의 구주 되심에 대한 믿음- 믿음 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없습니다.

 

"영접하는자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한1:12)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2. 어린이의 단순성을 배워야 합니다.

 

단순성의 반대는 복잡성입니다. 어른들의 사고는 복잡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단순합니다. 단순하기 때문에 믿고 따를 있는 것입니다.

 

금세기의 영성운동의 스승인 리챠드 포스터는 단순성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트레이드 마크(trade mark)이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단순성의 두가지 표현은 솔직함과 만족함이라고 가르칩니다.

 

단순성은 솔직함입니다. 단순한 사람은 투명합니다. 그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사고는 복잡합니다. 여러 가지를 계산하기 때문합니다. 어린이가 솔직할수 있는 것은 계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익계산을 다하고 예수님 따를 있겠습니까? 요즈음 수요예배에 12제자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처음 제자들에게 공통된 하나의 특성이 있습니다.

바로 단순성입니다.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단순함이 세상을 감동시키는 힘인 것입니다.

 

단순성의 하나의 표현은 만족함입니다. 단순한 사람은 단순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의 만족은 현재에 있습니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며 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를 보십시오. 별것아닌 가지고 기뻐하며 만족합니다.

 

누가 어린이에게 고가의 장난감이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까? 어른들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장난감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종이조각 하나, 떨어진 단추하나, 나무 가지 하나도, 기어다니는 곤충하나도 모두 신기한 장난감입니다.

 

이것들과의 놀이에 빠져 있는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지켜보십시오. 행복함 자체가 아닙니까? 지나치게 결과 중심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오늘의 가치관은 현대인들에게서 단순한 행복을 빼앗아 가고 말았습니다.

 

어떤 수도사 지망생이 산위 높은 곳에 있는 수도원을 찾아올라 와서 스승앞에 엎드려 진리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스승은 젊은 수도사 지망생에게 "산위에 오르는 동안 무엇을 보았느냐?" 묻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찾느라고 미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고 하자,"네가 산길을 걸어 오르는 동안 지나친 많은 꽃들의 행복과 시내물의 노래소리를 떠나 어디에서 너는 진리를 찾고 행복을 구하겠느냐" 되돌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눈을 떠서 보면 우리 주변에는 지금 여기서도 만족할수 있는 행복이 지천으로 늘어져 있습니다. 내가 숨쉴수 있는 행복,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울릴수 있는 행복,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수 있는 행복, 이런 단순함의 눈이 열린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천국을 보고 누리는 자가 것입니다. 단순성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3. 어린이의 개방성을 배워야 합니다.

 

개방성은 열린 마음입니다. 호기심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실로 어린이의 특성은 끊임없는 호기심이 아니겠습니까? 열린 마음의 반대는 닫힌 마음입니다, 폐쇄성입니다. 이상 새로운것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상 탐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성인들의 의식구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발전이 없습니다. 호기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탐구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의 신비를 알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백성들의 특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당시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상실한채로, 본질적인 것들을 가지고 논쟁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에 대한 호기심보다도 천국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는 것에만 관심이 고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개방성이야 말로 우리를 젊게하는 비밀입니다. 유대인 랍비 시드니 그린버그는 정신적인 청년과 정신적인 노인의 차이를 이렇게 구별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믿는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의심으로만 대한다면 노인이다. 우리가 받기보다 주고자 한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받기만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즐길 것을 즐길줄 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인생이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꿈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로부터 존재한 편견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아직도 성공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공상만 일삼고 있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매력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이상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다면 노인이다.

 

우리가 아직도 사랑을 찾고 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독을 떠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아직도 행복을 추구한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고 행복을 찾는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사랑을 주고 받을줄 안다면 우리는 청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받기만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모든 것은 나의 성실성에 달려 있다고 믿고 아직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면 우리는 청년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교회 모든 어버이들께서 이런 개방성을 지닌 어린이의 마음으로 혹은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개방성은 창조력의 원천이요 우리가 창조할수 있는 인생은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소위 창조적인 계절이 지났다고 생각하는 노년기에 오히려 위대한 창조를 남긴 사람들의 기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선 성경을 보십시오. 모세는 80세에 자기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위대한 모험을 시작했습니다. 안나 할머니는 84세에 메시야 대망의 기도가 응답받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갈렙은 85세에 아직도

 

" 산지를 내게 주소서"외치며 미완성 과업을 향한 인생의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90세에 주께로부터 환상을 받아 인류 역사에 대한 불멸의 계시를 기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된 생명 이삭을 품에 안을수 있었습니다.

 

대령 샌더스는 나이 66세에 유명한 캔터기 프라이 치킨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소설가 홈스는 70세에 '커피잔 너머'라는 명작을 저술했습니다.

 

레이건은 70세에 미국 대통령이 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인상깊은 스피치들을 남긴 대통령으로 또한 통치기간 가장 백성들을 행복하게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있었습니다. 괴테는 80세에 파우스트를 완성했습니다.

 

전도자 빌리 그래함은 80대에 아직도 왕성한 열정으로 세계적인 전도 집회들을 인도하며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시인 로버트 부라우닝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나와 함께 나이를 먹자./가장 좋은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나니/인생의 그것은 처음을 위하여 만들어졌나니/하나님을 신뢰히라. 전체를 보라. 두려워 하지말라." 그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태어날 모든 사람들은 웃었고 나는 홀로 울었나니. 그러나 내가 죽는 모든 사람들은 울고, 나는 홀로 웃을수 있는 삶을 살자"

 

그렇습니다. 젊음을 결정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우리교회 모든 어르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시고 어린이의 믿음, 단순성 그리고 개방성을 가지고 주님을 깊이 알아가시는 영원한 소년 소녀, 영원한 청춘을 누리시는 어버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어린이관 /18:1-10/ 이동원목사

2014-12-03 11:02:27

 

사회학자가 지나간 19세기를 여성을 발견한 세기요,20세기를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요, 21세기는 노인을 발견하는 세기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이를 발견한다' 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그전까지는 어린이가 하나의 인간이나, 인격으로 간주되기 보다 부모나 사회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되어 왔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것은 땅의 현실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1920년대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만해도 어린이라는 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어린이들은 이놈, 어린 , 애새끼라는 말로 불리 우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일본 유학생이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민족의 미래는 다음세대를 귀히 여기는데 있다고 확신한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했을 존대 쓰기 운동을 벌렸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어린이'(어리신 )라는 말을 사용했고 어린이도 하나의 인격체임을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1921년의 일이었고 ,다음해인 1922 51일에 처음으로 '어린이 ' 제정을 제안하고, 1923년에는 순수아동잡지 '어린이' 창간하게 됩니다.

그해 51 아동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 창설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어린이날의 유래가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한마디로 예수 님은 시대적으로 2,000년을 앞서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린이들에 대하여 말하고자하는 모든 것을 이미 2,000년전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3년의 공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워오고 있던 어느 ,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유명한 질문을 하신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오시던 도중에서 그분은 제자들 사이에 "천국에서 누가 자가 것인가?"라는 논쟁을 듣게 되셨습니다.

 

이런 제자들에 대하여 진정한 천국백성의 자격을 가르치기 위한 시청각적 샘플로서 '어린이 하나' 불러 앞에 세우시고 어린이에 대한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님의 어린이 관을, 걸음 나아가 어린이를 통한 '천국 백성관' 들여다보게 것입니다. , 그러면 예수 님은 어린이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1.어린이는 우리가 배워야만 대상입니다.

 

우리들 어른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생각 때에 즉각적으로 우리가 가르쳐야 대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님은 오늘의 본문에서 이런 발상을 역전시키는 선언을 하십니다. 우리가 오히려 어린이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에게는 천국에 들어 있는 어떤 마음의 자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질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신학자들은 대체로 가지 특성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겸손함, 둘째는 단순성, 마지막으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자질들이라고 있습니다. 먼저 겸손을 생각해 보십시오. 겸손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반면에 어린이들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도움을 호소하고 의존할 압니다. 이런 겸허함과 단순함이 어린이들에게 믿음을 가능케 합니다. 그들은 쉽게 하나님을 믿고, 어른들을 믿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어른들의 사고는 경쟁사회를 살면서 이웃을 믿지 못하도록 죄로 길들여져 있습니다. 이웃을 의심하고 믿지 못합니다. 사고가 복잡합니다. 그리고 깊은 요인은 자기가 살기 위한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의 본질입니다. 이런 교만함과 복잡함으로 인해 이웃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쉽게 누구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믿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로 천국의 문을 두드리려면 이런 어린이의 겸손함, 단순성 무엇보다 믿음을 배워야만 합니다.

3-4절의 말씀이 바로 교훈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어린이의 마음의 자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어린이처럼 단순히 주를 의지할 그의 마음에 천국이 열립니다.

 

오래 이런 예수님의 생각을 영국의 낭만파시인 윌리암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그의 '무지개'라는 시에서 탁월하게 표현하였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가슴은 뛰나니/ 어려서도 그러했고/어른이 지금도 그러하고/늙어서도 그러할진대/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으리/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a father of a man)/나의 하루하루가 천연의 경건함으로 이어지기를--.

 

어린이 주일에 예수님이 칭찬하신 어린이의 마음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어린이는 우리가 영접해야 대상입니다.

 

우리 한국사회의 윤리형성에는 유교가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런 영향 중에는 여러 긍정적인 요소들이 적지 않습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유교가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성숙한 미래 사회를 지향해야 시점에서 우리는 또한 만만치 않은 유교의 역기능적인 장애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중의 하나가 지나치게 어른중심의 사고 권위주의적이고 강자 중심적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사회의 문화적, 윤리적 사각지대는 어린이,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의 천시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유대나라도 동양문화권에 속합니다. 사회에서도 어린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당연시 되어온 사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구세주로 문명의 치유자로 오신 예수님은 다시 이런 전통적인 사고를 뒤집어 말씀하십니다.

 

5절에서 " 누구든지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라" 말씀하십니다. 아이가 어른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아이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영접함이 예수님을 영접함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린이를 대우하고 영접하는 마음에 천국의 가치관이 들어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계속 본문을 읽어보면(6절이하) 어린아이의 개념은 소자의 개념(아이와 다른단어/paidion-mikron)으로 발전합니다.

 

소자는 사회속에서 약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병자일수 있고, 정신적으로 고독한 사람일수 있고, 영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일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랑을 경험하고 기쁨을 경험하고 평안을 경험하는 나라--예수님이 설명하신 천국은 그런 나라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선포하시고, 어린이들,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어린이를 영접해 보십시오. 장애인을 섬겨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는 오히려 더욱 영접되고 환영되어야 대상인 것입니다.

 

3.어린이는 우리가 보호해야 대상입니다.

 

걸음 나아가 어린이는 적극적으로 보호되지 않으면 안될 대상입니다.

본문은 소자를 영접하라는 선언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본문6-9절까지에서 예수님은 매우 강경한 어조로 하나의 중요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십니다. 한마디로 그들을 '실족케 말라' 것입니다.

 

여기서 실족함이라는 말은 광범한 의미에서의 보호를 뜻하는 말로 이해할 있습니다. 마지막 10절의 말씀이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여기 10절에서 발견되는 매우 흥미로운 표현의 하나는 '저희 천사들'이라는 말입니다.

 

소자나 어린이들에게는 수호천사가 있다는 암시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지킬 없는 자들을 보호하도록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시고 그들에게 보고를 받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저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자기자신을 지킬 있기까지 필요한 도움을 베풀어야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도움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영적 도움을 베풀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여기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도움이 영적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문맥에서 주님은 도움을 베풀지 못하고 실족케 하는 것은 영생과 영원한 멸망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이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생 얻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제 우리의 도움이 아닌 하나님의 도움을 스스로 받으며 살아갈 있도록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하고도 궁극적인 도움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보호는 잘못된 과보호가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땅에서의 육아문제에 있어서 무관심이상의 문제는 과잉보호라고 생각합니다. 과잉보호는 자녀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파멸시키는 길입니다.

 

아이의 요구는 무조건 들어주고 아이들이 하고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도록 버려 두는 것은 자라가며 중대한 행동장애나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인기TV드라마였던 아줌마의 주인공 장진구는 과보호 속에 자라난 우리시대의 병리현상을 대표하는 성인아이의 표상입니다.(어떤 주교 선생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가르치는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자랑을 하면서--

 

너무 해주신다고, 그런데 걱정이 많데요--무슨 걱정이냐? 부모님이 도망갈까 걱정이래요./과보호의 증후군)

실패하더라도 실패를 디디고 일어설 있는 자율성을 키워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평생 부모를 의존해야 하는 무기력하고 유약한 인간으로 자라갈 것입니다. 부모가 아닌 주님을 의존할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호를 받고 평생을 살아가게 하는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 대한 영적 보호야말로 우리의 책임인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의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나는 땅에 있는 아버지입니다./나에게 아버지의 특권과 책임을 주심을 감사하나이다./나의 자녀들이 필요로 , 기꺼이 그들 곁에 머물게 하옵소서/그러나 나의 자녀들이 스스로 서야 , 그들의 곁에서 떠나 기도하게 하옵소서. -

 

그렇습니다. 어린이는 우리들 어른들이 오히려 배워야 대상입니다. 조건 없이 사랑 받고 영접되어야 대상입니다. 건강하게 보호되어야 대상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려서부터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의지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건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보호되어야 합니다. 우리교회, 아니 땅의 어린이들이 이런 어린이들이 되도록 기도하십시다.

 

 

 

 

 

 

작은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말라 /18:1-14

2019-04-16 23:53:16

 

1.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는 도중,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9:33)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9:40-48)......(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자니라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며 열띤 토론을 벌인 것은 사실 천국을 염두에 두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서로 누가 크냐, 소위 자리 다툼을 했던 것이고, 나아가 장차 예수께서 세속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 그때 가서 누가 높은 자리에 오르게 것인가를 두고 다툼을 벌였던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는 조금 전까지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기까지 했습니다. 850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승천한 엘리야, 그리고 1410 느보 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죽은 모세가 부활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예수님과 함께 계신 것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사람과 예수께서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 아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지금까지 베푸신 수많은 능력과 권능, 그리고 기적 등을 , 변화산에서 변형된 모습 등을 , 제자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머지 않아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곳을 정복하실 것이며, 따라서 자신들도 왕국에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가 것이라고 하는 기대에 부풀게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의 주된 관심은 소위 ‘자리 다툼’과 세속적인 권력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신앙고백을 들으신 이후 제자들에게 수차례에 걸쳐 가르치신 것은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길이었습니다.

 

(18:31-34)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생각과 달리 제자들은 예수께서 머지 않아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곳을 정복하실 것이며, 나아가 로마제국도 멸망시켜 왕국을 건설하고 자신들도 왕국에서 꽤나 힘쓰는 자리에 앉게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서로 보이지 않는 분쟁과 갈등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마음과 생각은 온통 십자가밖에 없는데,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제자들의 마음은 보다 ‘높은 자’, ‘높은 자리’였습니다. 껍데기는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데 마음과 정신 사상은 한마디로 속물이었습니다.

 

 

2. 그래서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자니라. 누구든지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니..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 예수께서 어린 아이를 세우신 것은 ‘어린아이’의 특성을 통해 잘못된 제자들의 생각들을 깨우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성은 천진함이나 순결함이나 믿음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이상형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의 대표격으로서 내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통해 무엇보다 참된 겸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없고, 부모의 안에서만 평안할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을 지닌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거나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 겸손의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에 덕과 의로써 나라를 다스리기로 이름난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니콜라이 황제로서 그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들에게로 향해 있었으며 최대 관심사 또한 백성들의 생활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황제가 평민으로 가장하여 거리로 시찰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처음 가보는 길이라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차였는데, 때마침 갈림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지나가던 군인에게 다가가서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군인이 어찌나 교만하게 굴던지 괘씸하게 생각한 황제가 입을 열었습니다.

 

“군인이신가 본대, 계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자 군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나서,

“어디 자네가 맞춰보지 그래” 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닌가. 내심 아니꼬왔지만 참고서 황제가 말했습니다.

“상사이신가요?

“아니”

“그럼 소위신가보군요?

“아니, 내가 그렇게 밖에 안보이나!

“중위신가요?

“아니야”

“그럼 혹시 대위?

“맞네, 내가 대윌세”

 

대위는 무슨 벼슬이라도 듯이, 미련하리만치 나온 배를 앞으로 내밀며 자랑스레 웃었습니다. 황제는 모습이 하도 우스워,

“아! 그러시군요. 하며 재빨리 뒤로 돌아서 길을 가려고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런데 황제의 뒷모습을 보던 대위가 모습이 보통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던지 황제를 불러 세웠습니다.

“저......혹시 자네도 군인인가?

“예”

“계급이 뭔가?

“한 맞춰 보세요.

“일등병?

“아닙니다.

“상병?

“아닙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람의 대화는 대위 계급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대위도 아니라고? 대답하자, 갑자기 대위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소령이십니까?

“아닐세”

 

대위는 뜻밖에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되자 떨리는 목소리로 황제의 계급을 조심스레 질문이 소장, 대장, 원수까지 이를 동안 황제는 ‘아니’라는 대답만 거듭했습니다. 드디어 황제의 계급만이 남게 되었을 , 대위는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이보게 대위계급이야 어떻든 우리는 마찬가지일세. 대위든 황제든 말이야. 자네나 나나 하나님 아래서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바로 어린아이의 겸손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마음과 사상을 지녀야, 그리고 예수닮은 모습으로 행동하고 살아야 예수 믿는 사람이요 예수 따르는 사람이라 있습니다. 십자가의 정신, 예수의 마음, 예수 닮은 모습과 생활이 있어야 교회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말씀하시던 십자가에는 전혀 생각이 없고 그저 세상 높은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던 제자들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천국시민이라 있으며,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고 있으면서 정작 높은 자리에 연연하여 분쟁과 갈등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 추잡한 모습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그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에게 장차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대부분 ‘소방관’이나 ‘경찰’, ‘간호원’이나 ‘선생님’이라고 말합니다.

 

이유를 물으면, 불이 나서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도둑이나 강도를 잡기 위해, 병든 사람들을 돕거나 어려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거침없이 말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검찰총장이 얼마나 힘이 세고, 국회의원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으며, 금융감독위원장이 재벌 총수보다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졌는가 사회적 지위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라며 세속적인 자리 다툼에 연연해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며 권력지향 신앙으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지만, 제자들이 꿈꾸었던 길은 십자가 없는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은 낮은 곳이었지만, 제자들이 가고자 했던 곳은 ‘높은 곳’, ‘높은 자리’였습니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들어 제자들을 깨우치고자 하신 것은 ‘자기를 낮추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자니라. 세상에서 자가 되는 길은 돈을 많이 벌거나, 줄을 서거나, 혈연, 지연, 학연 등이 좋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자가 되는 길은 오직 , ‘자기를 낮추는 것’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겸손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2:5-11) (5)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다시 말해 십자가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거듭 거듭 자기를 낮추어 사랑으로 섬기는 겸손을 보여주시며 본을 따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당부와는 달리 제자들은 “누가 크냐? 는데만 점점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적어도 예수의 제자라면 남보다 높아지려는 교만과 세상적인 정욕이나 명예욕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을 낮추어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일에 정진해야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성도 여러분이 되셔서 천국에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작은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이름을 욕되게 하며 남을 실족케 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작은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연자 맷돌과 같이 돌을 목에 매게 하여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형벌은 실제로 부모를 죽이거나 사회의 도덕을 문란케 하는 자를 처형하는 당시 로마 형벌제도 하나였습니다. 혹자는 여기 “깊은 바다”를 사해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사해는 염분이 너무 많아 그냥 던져 넣으면 가라앉지 않기 때문에 연자 맷돌같이 크고 무거운 돌을 목에 매달아 던져야 다시 떠오르지 않고 확실하게 처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염장(鹽藏)처리되어 이상 사람 사는 사회를 부패시키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작은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여기 “작은 자”는 비록 세상에서 미약하고 보잘 없어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천원 짜리 사는데 벌벌 떠는 사람, 농약쳐 키운 콩나물일지라도 없어서 먹는 사람, 새끼들 고아원이나 아동임시 보호소에 맡겨놓고 모자 깊숙히 쓰고 공공근로 다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작은 하나라도 실족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사들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마음만 낮추지 말고 생활까지 낮추시기 바랍니다. 물건하나 살지라도 이들 <작은 자들> 한번쯤은 생각하시라는 것입니다. 물질은 독점하는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데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엄청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작은 하나일지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안전한 곳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실족하여 잃어버린 마리의 연약하고 병들고 힘없는 양을 더욱 불쌍히 여기시며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실족하여 잃어버린 <달동네> 마리의 연약하고 병들고 힘없는 양을 더욱 불쌍히 여기시며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작은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세상에 대해 () 있다며 경고하십니다.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는 말씀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의 본능을 여실히 보여주며, 또한 그것을 너무나 이해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러한 죄의 본능을 지닌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죄를 범한 신체 부위를 즉각 즉각 찍어버린다면 지금까지 남아 있을 만한 곳은 군데도 없을 것입니다. 손과 발은 유혹과 범죄의 수단, 범죄의 기능에 불과할 죄의 원인과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곳은 아닙니다. 범죄할 악한 생각이 나오는 곳은 손과 지체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부위를 찍어버리라는 것은 죄질 생각,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썩은 마음의 생각을 찍어 잘라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남을 실족케 죄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찍어 버리라고 하는 경고의 말씀은 악한 생각,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마음의 썩은 생각을 잘라내야 한다는 말씀이며, 이는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회개하고 성결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참뜻은 리턴(return),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를 찾는 마음과 생활에서 돌이켜 자기를 낮추어 낮은 곳에 내려가 낮은 , 작은 하나를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들을 찾는 마음과 생활에서 돌이켜 자기를 낮추어 ‘작은 자’들을 찾아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머리 곳조차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윤택함과 풍요로움 속에 안주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고 하면 그들의 진정한 회개는 생활부터 낮추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셨지만 , 저금통장 하나 물려주신 없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지만 기도원세우고 수도원세우라 말씀하신 없습니다. 각종 부동산과 호화 건축자재, 온갖 상류층 사람들로 치장한 교회는 손과 발부터 찍어버리고 불구자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손과 발을 가지고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이상 작은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은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딤전2:4)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눈은 항상 ‘지극히 작은 하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마음과 생활을 낮추어 ‘작은 하나’라고 실족케 하지 않으며,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삶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자가 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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