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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마태복음 설교 모음

마태복음 5:43 - 48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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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5:43-48/ 곽선희 목사

2014-11-20 15:34:00

 

벌서 옛날 얘기가 됩니다마는 세계 제2차대전이라고 하는 큰 사건이 지나간 후, 우리 마음속에 가장 강하게 크게 남는 기억 하나가 바로 나치수용소입니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해서 나치 수용소에서 죄 없는 유대인을 끌어다가 600만명을 죽였습니다.

 

서로 마주서서 총을 쏘고, 싸우고 한 그게 아니고 아무 저항도 못하는 600만명을 무참하게 죽인 이 사건은 인류역사의 가장 처참한 사건으로 그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숫자를 의심할 만큼 엄청난 사람, 그렇게 희생시켰습니다.

 

이 나치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이 몇 있는데, 그 가운데에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저들은 다시 만나서 옛날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생각만 해도 오열이 끓고 도저히 분노를 잠재울 수 없는 그런 격한 감정이 있어서 "당신은 그 때, 그 놈들을 용서할 수 있소?" 나는 생각만 해도 잠시도 그 때 사건을 잊지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이 말을 듣는 친구는, "글쎄 이제는 오랜 이야기인데, 다 지나간 이야기를 이제 꺼내서 뭘 하겠노?" 이렇게 대답을 했더니, 그 친구는 여전히 말하면서 그걸 어떻게 잊고,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느냐고 또 한번 치를 떨었습니다.

 

그때에 다른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자네는 아직도 감옥에 있는 것일세."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물리적으로는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정치적으로도 해방됐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감옥에 있는 겁니다. 감옥에 있던 그 때 그 마음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는 사는 것이 그대로가 감옥입니다. 이걸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자유인인 줄로 알지만은 아니오. 경제적, 정치적, 물리적으로는 자유인인 줄 몰라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 동안은 당신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미워하고 있는 동안은 당신은 영영 자유인이 아닙니다. 여전히 증오라고 하는 무서운 감옥에 그대로 살고 있다 그 말입니다.

 

미국에 C.I.T 대학이라고 있습니다. 카네기 공과대학입니다. 여기에서 인생살이에 실패한 사람들, 직장생활에, 가정생활에, 그리고 사회생활에 실패한 사람들만 만명을 표본조사해서 철저하게 연구해 보았습니다.

 

실패한 이유가 무엇일까? 연구하기 전에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는 지식이 없어서, 기술이 부족해서, 혹은 무능해서, 능력이 없어서 실패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조사했는데 아니오. 전혀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전문적 기술과 지식이 결여되어서 실패한 사람은 15%밖에 없고, 85%가 인간관계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이런 통계를 얻고 연구한 사람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지식이 부족해서, 자본이 부족해서, 뭐 그래그래 잘못되는 줄 알지만 아니오. 85%가 인간관계에 잘못이 있었어요. 이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관계란 또 무엇이냐? 그 무슨 관계에서 실패했다는 거냐, 하고 추적해서 심층 연구해 보니까 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Negative Mental Attitude, 부정적 의식, 부정적 생활자세를 가지고 있어요.

 

성공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가지는 것이 긍정적으로 생각할 줄을 알고, 실패한 사람들은 항상 부정적이요. 인간관계가 그렇고, 사물에 대한 생각이 그렇고, 사건에 대한 이해가 그렇고, 언제나, 역사에 대한 이해도 항상 부정적이요. 그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결론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엄청난 말씀을 듣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바로 이 말씀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너무 높은 윤리 기준이다. 너무 높은 윤리 규범이라서 뭐 쳐다볼 수도 없고 우리가 감히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은 우리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거 생각할 수도 없는 거다, 아예 일축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이것이 바로 긍정적 자세입니다. 적극적 자세요, 그리고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는 창의적인 자세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 승리라는 게 뭐겠습니까? 백전백승이 가장 좋은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손자병법 모공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손자는 생각합니다. 평화로운 가운데서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으면 그것이 최상책이요, 싸움을 통해서 상대방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차선책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전쟁을 통해 이긴다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아쓰의 인간 경영이라고 하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매우 통쾌한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이겼으니 한 사람은 졌는데 그 진 사람의 고통만큼의 그림자가 남는 것이다.

 

그런고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싸워서 내가 이기고, 진 사람이 있고 그리고 저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면, 원수·대립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그건 절대로 승리가 아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공했습니까? 성공했는데 왜 문제가 많으냐 하고 물으면 나 성공하면서 많은 사람 실패하게 만들었거든요. 나 출세하면서 많은 사람 눈물 흘리게 만들었거든요.

 

나 돈 벌면서 다른 사람 전부 못살게 만들었다 이 말이야. 피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 나라 재벌이 온전히 서지를 못하는 거예요. 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하는데 그 짧은 생애 하나도 제대로 살지를 못하고, 내가 세운 사업이 곤두박질하고 무너지는 것을 보는 비극을 겪어야 해요.

 

? 이게 싸움이었기 때문이요. 내가 얻고 남은 잃고, 내가 성공하고 남은 실패하게 하고,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이런 대립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미워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이런 관계에 있는 이상 성공도 아니고 그리고 소득도 아닙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원수를 사랑한다' 이것은 바로 기본적인 것이올시다. 이 북한 사람들하고 같이 얘기를 하던가, 가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입맛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아 그저 좋았다고 그저 "참 맛이 있습니다. 아 냉면이 참 맛이 있습니다" 하고 칭찬하면 보통 우리 같으면 "예 고맙습니다" 라고 대답하는데, 북한 사람들 안 그렇습니다. 참 맛이 있습니다, 그러면은 "그거는 기본입니다" 그래요. 기본입니다, 그래요. 참 재미있는 표현이에요. 저도 배워 가지고 여러번 써 봤는데, 기본입니다. 이제 말씀드립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이게 높은 얘기가 아니요. 아주 기초적인 얘기예요. 원초적인 얘기입니다. 원수사랑 없이는 절대로 성공도 아니고 승리도 아닙니다. 물론 행복도 없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상호성 사랑을 생각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한다. 네가 나를 미워하면 나도 너를 미워한다. 이것을 공이라고도 하고, 정당하다고도 하고, 합리적이라고도 합니다. 이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자 네가 사랑하는 만큼만 내가 너를 사랑하겠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습디까? 여기에 사랑이 있드냐고요. 이건 말뿐이지 실제로 불가능할 것이고, 또 하나는 대가성 사랑을 말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겠는데 결국은 네가 나를 사랑할 만큼 사랑하겠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보장을 받고 내가 너를 사랑할 것이다. 조건적입니다. 이것 또한 생각뿐이지 실제로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다 소극적이요 부정적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건 심리학적으로 철저하게 종속적인 겁니다.

 

남에게 끌려가고 있는 겁니다. 저가 사랑하면 내가 사랑하고, 저가 미워하면 나도 미워하고, 내가 사랑한 다음에 또 대가를 기다리고,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의 하는 행동에 그 자세에 내가 종속되어 계속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묻습니다.

 

나는 누굽니까?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주체 의식이 없어요. 나라고 하는 정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내 인격은 어디에 간 거예요! 항상 다른 사람의 생활태도에 줄줄 끌려가는 이런 모습은 결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원수사랑, 이것이 기본이에요.

 

또 보세요. 공산주의가 생각하는 철학은 언제나 변증법적입니다. 그런고로 싸워서 이기고, 혁명을 통해서 이기고, 투쟁해서 이기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거기에 평화가 있다고. 그러나 기독교의 윤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희생해서 그래서 평화를 이루고 의를 이룬다 이거예요. 공산주의적 승리에는 항상 눌린 자가 있고, 억울한 자가 있고, 고통 당하는 자가 있습니다. 기독교적 윤리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은 네 원수, 이 주관적인 원수 개념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내게 원수요, 내 문제의 원수요, 나를 중심해서 원수요, 내 사업에 대해서 원수요. 내가 기준이 되고 있어요. 나의 원수, 이건 주관적 해석입니다. 그리고 내 판단에 따라서 원수요, 내 권익을 중심해서 내 판정대로 저건 원수라 이거죠. 그렇습니까?

 

생각을 한번 바꿔보세요. 객관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내게는 원수지만 저 사람은 착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내게는 나쁜 사람이에요. 이 사건을 놓고는 나쁜 사람이에요. 그러나 다른 일을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에요.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흑백논리라는 말이 있죠. 까만색하고 흰색만 있는 게 아니에요. 붉은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는 게 아닙니까? 내가 보는 대로 원수라고 해서 그대로 그가 원수가 되는 게 아니에요. 내게 원수니까 악하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예요. 내게는 나쁜 사람이지만은 하나님께는 소중한 사람일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일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그 형님이 아주 못마땅합니다. 재산을 다 없이하고 들어왔죠. 들어왔으니 이제 또 남은 재산을 또 나누어 가져야 되거든요. 여러 가지고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거예요. 아주 보기 싫은 동생이에요. 이 동생은 아주 못마땅해요. 저 창기와 함께 재산을 다 먹어버린 저 동생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아들을 왜 사랑합니까?" 라고 말합니다 만은 아버지는 그게 아니에요.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그럽니다요. 자 형님의 입장에서 보면은 내게 아주 나쁜 동생이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렇게 몽매 잊지 못하고 기다리고 기다린 그 아들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되요. 나와의 관계에서는 원수지만 하나님 보실 때는 착한 분이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라 이 말이요. 이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테레비프로에 말이죠 노인들 나와서 뭐 이렇게 하는 재미있는 대담 프로가 있었어요. 70, 80 된 노인들 내외간이 나왔는데, 그 아나운서가 안내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한 평생을 50평생을, 50년 동안 60년 동안 같이 살았으니까 이런 관계를 뭐하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 사회자가 기대한 것은 뭐냐면 "천생연분" 그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할머니가 뭐하고 하는고 하니 "원수!" 그러더라구요.

 

이 사회자가 너무 답답해서 이걸 또 말을 고쳐서 "넉자로 말하세요, 넉자로" 했더니 하는 말이, "평생원수!" 그래요. 그리고 말을 잘못했는지 마음이 고약한지 그렇게 하고 원수와 더불어 한 평생 산 거예요. 이걸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내게 원수, 거기서부터 벗어나야 되요. 그 내게는 잘못됬지만은 하나님 앞에는 착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일 수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되요.

 

또 오늘 여기에 주신 말씀대로 깊이 신학적으로 이해해 보십시다. 내가 하나님께 원수 되었던 자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510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원수라는 걸 잊지 마세요. 그러나 그는 나를 사랑하셨어요. ? 원수같은 나를 사랑 하셨어요. 그런고로 원수 사랑이 기본이에요. 원수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사랑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이에요. 지금도 내가 받고있는 사랑이 바로 원수 사랑인 거예요.

 

그러한 속성의 사랑이란 말이에요. ?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할 때가 너무나 많으니까. 곁길로 갈 때도 많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도 많고 그 많은 은혜 가운데 살면서 계속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까 이게 원수죠.

 

하나님 앞에 원수 된 나를 하나님이 원수 사랑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내가 입고 있는 사랑,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이 바로 원수 사랑이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이 뿌리요, 이것이 원초적인 사랑이요. 그런가 하면 또 하나 있습니다. 주변에 내 이웃을 놓고 생각할 때에도 역시 주변에 있는 모든 분들이 나를 원수 사랑, 그 높은 사랑으로 나를 수용해서 내가 오늘 있는 것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가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 입은 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남에게 손해 끼친 것을 생각 안 하죠. 나는 피해자라고만 생각합니다.

 

내가 가해자 됐다는 걸 잊어버렸어요.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손해보고 마음 아픈 생을 보낸다고 하지만 자, 나 때문에 다른 사람 괴롭고 어쩌면 한 평생을 망쳐버렸어요. 이래도 되는 겁니까? 가끔 보니까 아 이 시어머니들이 못 되가지고 며느리를 죽여요. 며느리를 못살게 만들어. 자 그거 보세요. 한 여자를 죽이고 내 아들 잘 되길 바래요?

 

이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요. 내가 남에게 손해본다는 생각은 하지만 내가 남을 얼마나 마음 아프게 하고 있다는 걸 모르거든요. 내가 남을 죽이고 있어요. 남의 일평생을 망쳐버렸어. 이러고도 하나님 앞에 복 달라고 빌어요? 천만의 말씀. 이걸 알아야죠. 얼마나 내가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내가 원수 맺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생각하며 울고 있는가? 이 생각을 왜 못합니까. 그런 가운데 내가 있는 것이요. 그런고로 원수 사랑의 그 너그러운 마음속에 오늘 내가 있고 그 속에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됩니다.

 

또한 오늘 성경 말씀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랬어요. 기도하라,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너와 적대관계에 있는 저 원수가 평안하게 잘 살게 되야 너도 평안한 것이요, 저가 어렵게 되고 어렵게 되면 점점 더 이를 갈고 증오하게 되고 마지막에 원수갚게 되면 그것은 내게 돌아오는 게야.

 

그런고로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적대관계가 아닌 화해의 관계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이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 아우성을 치며 창으로 찌르고 비난을 하고 조소하는 그 분들을 향해서 일곱마디 말씀 중에 첫마디 말씀이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이렇게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놓고 가끔 짓궂은 생각을 합니다. 이거 좋은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농담도 하고 진담도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에 그 극악한 발악하는 그 무리들을 내려다보시면서

 

"이놈들 두고보자. 내가 천벌을 내리리라" 그랬다면 어떻게 되겠냐 이거예요. 죄송하지만 저는 예수 안 믿겠습니다. 이 말 한마디가 이렇게 중요한 거에요. 그 한 마디의 기도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나의 구주가 되신 거예요. 이걸 잊지 마세요.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 기도하셨어요. 언젠가 한번 이북5도에 있는 지도자들이 모여서 조찬모임을 갖는다고 해서 "좀 말씀해 주세요", 가서 말씀을 드렸어요. 북한은 지금 어려우니까 우리 정성을 다해서 도와줍시다, 하는 얘기를 했더니, 마치고 나오는데 나이 많으신 장로님 한 분이 저를 딱 손을 잡더니 "목사님, 아무리 그래도 요 빨갱이 놈들은 안돼요?"

 

그러더라구요. 주면 안 된다고요. 그거 망해야지 안 된다고. 그래서 내가 "아니 왜 그러십니까? 그래도 우리가 북한을 잊어버리고 도와야되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거기다 한 마디 더하더라구요. "곽목사는 젊어서 모르지? 우리가 얼마나 어려움을 당했는가?" 그래서 제가 손을 잡고 "저 그렇게 어리지 않습니다.

 

제 아버지가 제 목전에서 총살당하는 걸 제가 본 사람입니다." 눈을 크게 뜨더니 "아 그래도 도와야 하나?" "그럼은요. 장로님의 마음속에 있는 그 미운 마음이 다 없어져야 통일이 되는 겁니다." 내 손을 잡고 놓지를 못하고 한참 우는 걸 봤어요.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배고프거든 먹이라.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원수가 잘못되는 걸보고 기뻐하지 마라. 이것이 성경이 주는 교훈이에요. 망하라고 하면 안됩니다. 위하여 기도하라.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그리하므로 자유인이 되고 오늘 본문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악한 자에 밭에도 비를 내리고, 선한 자에 밭에도 비를 내리느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네가 좋아하는 사람도 사랑하고, 네가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라.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래야 온전한 자유인이 될 것이다. 온전한 행복을 찾게 될 것이라고요. 내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내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리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가운데서 우리가 살면서도 은혜를 모르고 엄청난 사랑을 받고 살면서도 그 사랑의 참 뜻을 몰라서 우리는 아직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며 그렇게 스스로 증오의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참 자유를 허락하셔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원수도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을 주셔서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화, 멀지만 가야 할 길 /5:43-48/ 김기석목사

2015-07-05 19:00:38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비폭력적 저항

 

10여 일 전 눈빛이 맑은 젊은이들 몇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매우 분주한 날이었지만 이야기를 들으려는 그 열정을 내칠 수가 없어서 예정 시간보다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날의 만남을 닫아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대학을 졸업한 후 전국 노점상 연합회에서 일을 한다는 한 젊은이가 내게 물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평화는 무엇입니까?” 나는 쉽게 대답했습니다.

 

“‘평화란 이것이다할 때, ‘이것에 해당하는 것들은 참 많지요. 전쟁이 없는 상태일 수도 있고, 억눌림이 없고, 건강하고, 물질적으로도 궁핍함이 없고, 근심과 걱정이 없는 상태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평화의 시작은 밥을 나누어 먹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말은 남의 배고픈 사정을 헤아리고 그를 위해 밥을 덜어내는 것이 평화의 길이라는 말이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습니다.

 

내일이면 한국전쟁이 벌어진 지 57년이 되는 날입니다. 분단의 세월은 이미 회갑을 넘겼습니다. 아직도 이 땅에는 평화의 길은 요원합니다. 핵무기의 철폐를 둘러싼 공방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개성공단을 비롯해서 남북의 경제교류가 활발해지고, 문화인들의 교류가 활발한 것도 좋은 징조입니다.

 

비료를 공급하고, 식량을 지원하는 것도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극복하고,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 일일 겁니다. 이 일은 어쩌면 분단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평화로운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존재가 출현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말고,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이들만이 그 길의 초석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평화주의자(pacifist)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무골호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은 헤롯 안티파스의 위협이 가중될 때 그를 그 여우라고 부르셨고,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성전 마당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위선을 꾸짖으실 때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하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평화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분노와 꾸짖음의 바탕에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불의에 눈을 감거나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불의의 가면을 벗기시지만, 폭력적인 대응은 삼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원수를 좋아하라’(like)고 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라’(love) 하신 것이 참 다행입니다. 좋고 싫음은 거의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의지적인 노력을 포함합니다.

 

섣불리 사랑하려고 하다가는 스스로 상처입기 쉽습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주하는 기도를 하라는 말은 아닐 겁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이라는 책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품부된 역할을 감당하며 삽니다. 그렇게 보면 바로나 느부갓네살이나 빌라도는 다 가련하고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이 비인간의 자리로 추락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힘과 폭력을 가지고 다른 이를 억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순간, 우리는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뿐입니다. 성서에서 증언되고 있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긍휼’(compassion)입니다. 이 말은 함께를 뜻하는 ‘com’고통 받는다는 뜻의 ‘passion’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은 무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을 만들어 놓고 저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으십니다. 히브리어로 긍휼(rahum)을 뜻하는 단어는 자궁’(rehem)을 뜻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자궁은 여성에게 있어서 가장 깊은 감정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를 잘 압니다. 아이를 둘로 갈라 두 여인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라는 판결이 내려졌을 때 진짜 엄마는 자기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불타올라”(왕상3:26) 아이를 죽이지 말고 차라리 저 여자에게 넘겨주라고 말합니다.

 

이때 모정이 불타올라로 번역된 구절은 사실은 그녀의 자궁이 꿈틀하여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이 꿈에도 그리던 친동생 베냐민을 보자 마구 치밀어 오르는 형제의 정을 누르지 못하여, 급히 울 곳을 찾았다”(43:30)고 합니다.

 

여기서 마구 치밀어 오르는 형제의 정도 역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귀한 아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다.

그를 책망할 때마다 더욱 생각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31:20)

 

고통받는 이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곳이 떨립니다(God's womb trembles).

그렇기에 하나님은 부당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세우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사회적 표현은 정의입니다.

 

토라와 예언서를 꿰뚫고 있는 것은 불의에 대한 고발과 약자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정의를 회복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시면서 곧 이어 일용할 양식빚에 대한 탕감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의 문제야말로 하나님이 깊은 관심을 가지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엊그제도 여러 해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했던 회사로부터 계약 해지를 통보받은 노동자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빚에 몰려 비싼 이자를 물어가며 대부업체의 돈을 빌렸다가 파산 지경에 이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자본이 자본을 낳는 이런 구조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계 교회 협의회는 부자 나라를 향해 가난한 나라의 빚을 탕감해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세계의 분열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그런 문제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교회는 영혼 구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는 그 강도를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강도로 전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 체제를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회 체제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입니다.

 

우리는 자본에 종속된 많은 교회를 보고 있습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기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목사들은 정말 그것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분들은 꿩 잡는 게 매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스스로 부자가 된 교회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을지 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교회당을 짓고, 많은 땅을 사서 기도원을 짓고, 묘지를 조성하고, 큰 차를 타고 다니고, 기득권의 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하는 교회와 목회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백인 복음주의자(white evagelists)들의 80%가 이라크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는 통계를 보았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전쟁은 가장 큰 사치요 낭비입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들이 속절없이 죽어가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비가 들어가는 전쟁을 기독교인들이 정당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기독교인들을 비지성적이고 문자주의적이며, 자기 의에 사로잡힌 편협한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이건 경고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다른 것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하나님의 성품과 열정을 닮지 않는 기독교인이란 세모꼴 동그라미라는 말처럼 어불성설입니다.

 

새로운 존재의 요청

 

기독교인은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5:24)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모든 인간은 대포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을 불어넣으셔서 언제든 자극이 주어지면 크게 폭발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불발탄으로 끝납니다. 뇌관에 물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뇌관과 화약을 보호하는 것이 도덕성인데, 세상에 살면서 양심이 흐려지면 하나님이 탁 치셔도 폭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의를 보면서도 화낼 줄 모르고,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해 나서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불발탄입니다.

 

하나님이 탁 쳐도 폭발하지 못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타락한 실존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강아지똥>의 작가 권정생 선생님은 이라크 전쟁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이후로 밤이면 맥박이 120에 이르고, 열이 40도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세상의 아픔 때문에 아파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꼈던 것입니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허름한 집에서 가난한 한 작가가 온몸으로 아파하는 그 시간, 미국의 증권가인 월 스트리트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전쟁 특수로 군수산업체의 주가가 급등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악마화된 문명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고통받는 이가 있는 곳에서는 축배를 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평화를 원합니다. 하지만 세계는 지금 분쟁중입니다. 평화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어코 택해야 할 길입니다.

 

우리가 처한 삶의 여건이 어떠하든 미움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선언하는 이들을 통해 세상은 새로워질 것입니다.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새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시인의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무릎이 구부러지는 건

세상의 아름다운 걸 보았을 때

굽히며 경배하라는 것이고,

세상의 올곧지 못함을 보았을 때

솟구쳐 일어나라는 뜻이다

 

때를 가리지 못함이 무릇 몇 번이던가

-반경환, <1> 전문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굽힐 때 굽히고, 솟구쳐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날 줄 알아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피조세계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하나님의 정의로 세상의 불의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사람,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하나님께 그런 마음을 청하는 사람,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닮아가려고 늘 깨어 있는 사람, 이런 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길을 확고한 믿음으로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차별없는 사랑 /5:43-48/ 김기석목사

2015-06-29 16:26:49

 

계속되어야 할 사랑공부

 

며칠 전 신문에서 오백 년 묵은 씨앗을 심어서 거두었다는 소담한 꽃들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가도 속알이 썩지 않으면 생명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방에서는 씨앗의 알맹이를 가리켜 ''이라 합니다.

 

'어질 인' 말입니다. 그래서 살구씨의 속알은 '杏仁'이고, 복숭아씨의 알맹이는 '桃仁'입니다. '어질다'는 뜻의 '''씨앗'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습니다. 결국 생명의 근본, 알짬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사랑' 속에 있을 때 진정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고전13:13)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도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첫째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 둘째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30-31). 다른 계명들은 사랑을 실천하는데 필요한 부수적인 것들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생 해야 할 공부는 '사랑공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은 세월이 가면서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는데(고후4:17), 낡아지지 않는 속사람이란 바로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랑'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어머니'. 그렇지요? 어머니는 사랑의 대표선수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또 사랑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겠지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곧잘 무모한 용기를 보이기도 하지요.

 

 

자연발생적 사랑을 넘어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도 젊은이들의 사랑도 한계가 분명합니다. 그 사랑은 내 자식, 내 애인에 국한됩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물과 불 속에 뛰어들 수 있는 어머니이지만, 남의 자식을 위해서는 안 그런단 말이에요. 자기 애인을 위해서는 추운 겨울에라도 외투를 벗어 어깨를 둘러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못 그럽니다.

 

이런 사랑은 '자연발생적 사랑'입니다. 이것은 매우 감성적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애인을 사랑하는 마음도 그저 가수 김상희씨의 노랫말처럼 '그이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정도로 말할 수 있을 뿐이지요. 세상에 이런 사랑만 있다면 화창한 봄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꼴 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게 되고, 아주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도 생길 수 있습니다. 제일 쉬운 길은 좋은 사람은 좋아하고, 싫은 사람은 싫어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게 정직해 보입니다. 어느 시인은 '미운 놈 미워하며 살라'고 외칩니다.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미운 놈 미워하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 평화가 사라지고 맙니다. 내 속에 미움이 있는데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겠습니까? 미움은 우리 마음 한구석에 쌓여 우리 영혼을 압박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난감한 요청을 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

 

이 말씀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점잖은 권고가 아닙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스승으로 모시려 한다면 이 도전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감정과 느낌의 문제인데, 명령한다고 사랑할 수 있나요?

 

옛날 사람들은 부모의 명령에 따라 낯선 사람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부모의 명령에 따라 그 대상을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낯선 사람도 사랑하기 어려운데 예수님은 한술 더 떠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마음의 이끌림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감정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지로서 감정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기 한계를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감정에 바탕을 둔, 즉 마음의 이끌림에 근거한 사랑의 한계를 명백히 지적하고 계십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46-47)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 가족, '' 애인, '우리' 교회, '우리' 학교, '우리' 고향 사람이니까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외면해버린다면 우리는 영적 미성숙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부디 나를 비껴가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하나님이 ''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45)

 

 

차별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만일 그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리라고 한다면, 지우개를 들고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그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죄가 지워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허물을 지워주는 일에 인색합니다.

 

그리고 미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은 우리에게 불쾌한 일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내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불행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비약하게 됩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사랑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 프란시스의 말 한 마디만 더 인용하겠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뱃속 깊은 곳에는, 성스러운 고행자도 있고, 무섭고 더러운 유충도 잠들어 있습니다. 몸을 굽히고 이 유충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그 유충은 날개가 돋아서 나비가 됩니다.

 

 

유충은 징그럽고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비로 바뀌면 아름답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나비'처럼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에게 다가가 '사랑합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해줌으로써 깨어나도록 하는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은 유충의 단계를 지나 나비가 됩니다.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만나는 모든 이들 속에 있는 '유충'들을 향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의 씨를 뿌리도록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뿌린 사랑의 씨앗은 꽃을 피우지 않고 스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사랑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

 

모스끄바에 '장군'으로 불리우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그는 한평생 유형지와 감옥을 돌아보며 살았습니다. 노인은 죄수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 앞에 멈춰 서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누구에게도 훈시 따위는 거의 한 적이 없었습니다.

 

노인은 모든 죄수들을 '다정한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노인은 돈을 주기도 했고, 감옥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이따금은 성경도 가지고 갔습니다. 글을 깨우친 죄수들은 유형 길에 그 성경을 읽을 것이고, 또 글을 모르는 동료들에게도 읽어 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죄수에게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물어보는 경우는 드물었고, 죄수가 자기 죄에 관해 먼저 말을 꺼냈을 때만 들어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는 죄수들을 친형제처럼 대했지만, 나중에 죄수들은 그를 아버지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애를 안고 있는 여자 유형수가 눈에 띌 때면 다가가서 어린애를 어루만져 주고, 그 어린애한테 웃어 보라고 손가락을 딱딱 튀겨 보이기도 했습니다.

 

시베리아 유형지에는 어른들을 열 둘이나 죽이고 여섯 명의 아이를 찔러 죽인 살인자가 있었습니다. 20년을 그곳에서 보낸 그는 어느 날 엉뚱하게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 장군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묻습니다. "당신은 그 흉악범이 20년 동안 잊지 못했던 장군 할아버지가 그자의 영혼에 어떤 씨앗을 뿌려 놓았는지 알겠어요?"(도스토예프스키, 백치중에서)

 

 

그래요.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진리는 우리가 뿌리는대로 거두리라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6:8)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에게 보여주는 다소의 친절과 사랑은,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라 해도 어딘가에서 형체를 입고 쑥쑥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두고 보수적인 언론은 그것이 부시의 기독교신앙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선인과 악인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선인은 사랑하고 악인은 미워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힘있는 이들의 독선을 경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힘이 정의인 세상에서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고통받는 인류, 상처투성이인 피조 세계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보듬어 안을 그런 사람들을 말입니다. 이 사순절 순례길에서 우리의 사랑이 날마다 조금씩 자라나기를 기원합니다.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5:38-42/ 곽선희 목사

2014-11-20 04:41:47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어느 날 한가하게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모름 지기 문둥병 환자 같은 그런 분이 말입니다 마주 서서 적선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뭘 좀 도와 달라 고…….

 

그 때에 그는 자기 호주머 니를 뒤져보았는데 공교롭게도 한 푼의 돈도 없는 그런 시간이었습니 다. 그는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 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형제 여 내가 지금 가진 것이 있으면 꼭 도와줄 마음이 있는데 사실로 제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어떡하 면 좋겠습니까."

미안하다고. 그 거지는 만족한 얼굴을 가지고

 

"아니 올시다. 당신이 나에게 돈을 준 건 없지만은 당신이 나를 지금 형제라 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습니다. 이것이면 충분합 니다. 오늘 저는 큰 것을 얻었습니 다. 감사합니다."

 

하고 돌아서서 갑 니다. 이 사건은 톨스토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물질을 주고 물질을 받아서 그것이 선행이 아니 라는 겁니다. 그는 깊은 충격을 받 고 참 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에 있고 또 마음을 주는 가운데서 그가 얻은 큰 감격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리고 참 사랑은 그와 함께 하는 것 이다 라고 깊이 깨닫고 억압받는 농 민들과 함께 살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게 되고 경건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리고 말년에 불후의 명작

 

"부활"

이라고 하는 소설을 쓰게 됩니다. 여러분 현대가 이렇게 피곤하고 어 려워진 일이 물질적 빈곤 때문은 아 닙니다 물질을 못 주어서, 물질을 못 받아서,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어 서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강팍하고 또 절망적이고 많은 복잡한 문제, 또 왜 삶에 짜증이 나고 피곤하고 지치고 어째서 이런 겁니까? 이것 이 물질 때문입니까?

 

현대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한 책들이 많이 있 습디다 만은 제가 읽은 대로는 커밍 웍(Cuming Walk)의 그 말이 너무 마음에 가장 와 닿는 그런 내용이었 다고 생각해서 늘 기억합니다.

 

현 대인으로 성공하려면 먼저 지능이 높아야 한다. 요새는 너무 복잡한 세상에 사니까 머리 회전이 빠르면 참 어렵습니다. 어리둥절한 사람은 살기가 어려워요. 머리가 좋아야겠 다. 그러나 두 번째는 지식이 있어 야 겠다. 아무리 머리가 있어도 공 부하지 아니하면 빈 상자입니다. 소프트웨어가 없는 하드웨어는

 

"노 유스(No use)"

아무 소용 없는 거 요. 그런고로 아무리 머리가 좋아 도 공부를 많이 해서 많은 지식을 입력시켜야 한다. 셋째는 아무리 좋은 지식이 있어도 내가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는 능숙한 숙련된 기술 이 없으면 소용없다 이겁니다.

 

그 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자동차 를 봐도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있고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자동차를 만 드는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자동차 를 잘 운전할 수 있는 기술이 없으 면 그 자동차와 나는 관계가 없습니 다.

 

그런고로 잘 다룰 수 있는 아 주 스킬풀(Skillful)한 아주 능숙한 기술 그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세다 그랬어요. 애티튜드 (Attitude), 태도와 자세 즉 마음가 짐이 문제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 다 성공의 비결은 바로 97%가 자세 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건 깊이 생 각할 문제입니다.

 

목적이 중요합니 다 만은 그 목적에 따르는 내 자세 가 중요합니다. 환경이 인생을 불 행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 아닙 니다. 문제는 삶의 자세가 문제입 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도 자세요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마음가짐입니다.

 

마음의 자세가 문 제입니다. 같은 환경, 같은 처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직업, 같은 모양으로 사는 것 같으나 전혀 다릅니다. 한 사람은 낙원에 살고 한 사람은 지옥에 삽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삶의 자세에 대체로 크게 나누어 서 세 가지로 분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형벌의식에 쫓기며 사는 겁 니다 다시 말해서 억지로 살아가는 겁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겁니다. 왜 흔히 말하기를 팔자다, 내 운명 이다, 그렇거니 하고 살아갑니다 그 아까운 시간들을 그 많은 시간 그 렇게 살아갑니다. 노예적으로 삽니 다 참 불행한 것이올시다. 제가 어 느 미국 가정에 가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아침 조반 식사를 하는데 공 교롭게 내 앞에서 조반 먹다 말고 부부싸움을 하더만요. 그래 그 미 국사람 부부싸움 하는 거 한번 봤습 니다.

 

아내는 얘기가 이렇습니다. 이 집에 와서 내가 아이 낳아주고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당신을 위해서 난 다른 사람들처럼 직장도 가지질 않고 온전히 당신 하나만을 위해서 살았는데 나는 완전히 이 집의 노예 요 이 집의 식모라고 돈 받지 못하 는 식모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남 편은 하는 말이 나는 당신과 함께 이 자녀들 다 벌여 먹이느라고 밖에 나가서 아침부터 밤까지 이렇게 수 고하지 않느냐? 나는 이 집에 머슴 이라고. 그래 저는 재판을 했습니 다. 이 집에는 머슴과 식모가 사누 만, 그랬어요. 안 그렇습니까?

 

똑 같은 생을 사는데 억지로 사는 사람 많아요 심지어는 부부생활도요 한 평생 강간당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 람이 있어요. 이 웬일입니까? 무 사히 살았지요. 한 평생 무사했어 요. 이혼은 안 했어요. 심지어는 싸운 일도 없어요. 그러나 그건 산 게 아니요. 당신 참으로 불쌍한 사 람이요. 왜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 야 됩니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렇게 보냈습니까?

 

억지로 부득이해 서 할 수 없이. 그런가하면 또 형 벌의식이 무서워서 매맞을까봐, 벌 받을까봐, 저주받을까봐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심지어는 신앙생활도 이따위로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감기만 걸려도 아 벌받는가보다, 또 내가 남의 말을 좀 했더니 또 저주 받는구만. 이런 식의 의식, 얼마나 불쌍합니까? 벌벌 떨며 사는 거예 요. 그런가하면 또 하나는 보상을 바라고 사는 사람이 있어요.

 

좋은 일 하면 좋은 일이 오겠지. 아이들 잘 키워놓으면 효도 받겠지. 또 사 랑하면 사랑 받겠지. 항상 투자의 식을 가지고 상 받을 마음으로, 보 상받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 랬다가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안 는다고 원망 불평입니다. 항상 받 으려는 마음, 사랑 받으려는 마음, 칭찬 받으려는 마음에 아주 민감합 니다. 그래서 허영적인 사람도 되 고 위선적인 사람도 됩니다. 성경 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 를 말씀하십니다. 큰아들에게

 

"너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더니

"예 가겠습니다"

대답은 잘 했어요. 그 리고 안 갔어요. 둘째아들에게

"너 포도원에 가서 좀 일하렴"

대답하기 를

"안 가겠습니다"

 

거절하거든요. 아버지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뒤에 뉘우치고 갔어요. 나는 이 두 아들이 다 못마땅해요. 아들 하나 더 있으면 좋겠어요.

"가겠습니다"하고 간 사람, 예수님 의 시각으로 볼 때 그런 사람은 세 상에 없었던 거 같아요. 하나같이 이 모양이요.

 

한다고 하면서 안 하 고 안가겠다 하고선 억지로억지로 가는 거요. 이게 얼마나 불행하냐 말입니다. 참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사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요새요 직장 생활하는데 있어도 21세기를 지향하는 좋은 직장에서는요 출퇴근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은 집에 와서도 생각이 나서 연구를 하고 있 으면 그건 근무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고로 내 마음대로 출근하든 퇴 근하든 일만하면 된다 이거예요. 길거리에 있든 직장에 있든 상관없 어요. 이래서 출퇴근이 없는 직장 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러나 한번 옛날로 말하면은 출퇴근, 정확한 시 간에 출근하고 정확한 시간에 퇴근 하고 출퇴근에는 아주 명수요 하루 종일 담배 피운 거 밖에 없어. 이 런 사람 있으나 마나 월급만 타먹는 사람이요 비생산적인 직원이요. 이 젠 그런 거 안 통하는 세상이에요.

 

형식적인 충성, 구조적인 충성 이런 강요된 충성이라는 것은 아무의미가 없어요. 그런고로 마음의 자세. 그 래 세 번째 사람은 존경과 사랑과 감사로 일하는 거예요. 일이 주어 졌다는 것이 감사하고 오늘도 일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고 또 나로 하 여금 이만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 신 하나님께 감사, 또 회사에도 감 사, 지혜를 주신 것 감사, 즐거운 마 음으로 일합니다.

 

자나깨나 필요하 면 일거리를 집에 가지고 와서도 하 고 혹은 직장에서 밤을 새우면서도 하고 이걸 얼마 주느냐고 따지지 않 아요. 문제는 이 자체가 너무 소중 한 일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심취 해서 일한다. 자 이런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신상 수훈의 말씀을 하시는 그 중간부분 에 하신 말씀이요. 기독교인의 윤 리, 기독교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고 누누이 하나 하나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 중에 그 중심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너 무 높은 규범이라서 때로

 

"아이고 그거야 예수님이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야 어디 거기까지 생각을 하 나."

하고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가 있어요. 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그랬는데 난 그거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해요.

 

쳐다보기라도 해야 올라 갈 때가 있지 못 올라갈 나무라도 쳐다보아야 언젠가 올라갈 수가 있 는 거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은 영 끝난 거죠. 예수님의 윤리 아주 높 아요.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이요 너무나도 확실한, 요새말로 말하면 21세기 지향적입니다.

 

보세요, 속옷 을 달라고 하거든 속옷만 아니라 겉 옷까지 주어라. 오리를 억지로 가 자고 하자. '내가 길을 모르니 그 오리까지 좀 가주세요' 그러면 나는 십리까지 가 줘라 이거 통하는 얘기 입니까?

 

요새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요 많은 사람들이 신경을 써요. 또 남의 것 그저 할 수만 있 으면 갈취하려고 해요. 이런 무서 운 세상에 어떻게 달라고 하지도 않 은 것까지 주라 이거요. 이런 얘기 가 통하는 겁니까? 그러나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올시다. 행복한 생활 은 자유에서 얻어지는 거이니까요. 주도성 속에서 평가되는 것이올시 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주는 것 과 빼앗기는 것은 달라요. 물질적 으론 꼭 같은 겁니다. 주는 것이나 빼앗기는 것이나 어차피 내 물건이 저 쪽으로 넘어간 건 사실이요. 물 리적으론 똑같죠. 형식적으로는 같 으나 빼앗기는 것과 주는 건 다른 거예요. 빼앗기는 건 억지로 된 것 이고 주는 것은 내 마음에서 주는 거예요. 한 평생 주면서 사는 사람 이 있는가 하면 한 평생 빼앗기면서 사는 거예요.

 

항상 강도 만나며 사 는 거예요, 강도 만나는 그 마음으 로 한 평생 사는 불행한 사람이 있 다 말입니다. 그런고로 너희는 선 택적으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주 도적으로 살라.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보세요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 거든 십리까지 가라. 무슨 말씀입 니까? 오리까지 가는 것은 억지로 가는 거예요 이건 내 뜻이 아닙니 다. 한데 이건 어떤 사람이 와서 길을 잘 모르는데 좀 같이 가 주세 요. 아 이거 거절하기가 안 됐어요. 또 그 사람 딱하거든요. 그래 갑시 다하고 가 주었어요.

 

이거는 억지 로 되는 것이고 피동적이고 수동적 이고 끌려가는 것이요. 그런데 오 리까지 가서 보니 이 사람 이제부터 는 내가 찾아가겠습니다 하지만 그 거 또 길을 잃어버리기 쉽겠어요. 좋아요 당신이 바란 건 오리까지지 만 이제부터는 내가, 내가 가겠습니 다. 십리까지 가 드릴께요. 바로 이 마음이요. 이것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내가 선택적 으로 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이건 강요된 것이 아닙니다. 좀 더 깊은 말씀을 하나 여기서 생각하십시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일의 발단은 억지 로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도대체 오리 가는 거 가고 싶어 간 게 아니 에요. 내가 가야할 이유가 없어요. 그게 무슨 저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저 딴 에는 좋은 마음이지만 어쨌든 억지 로 시작한 거예요. 나에게 가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내가 갈 필요 가 없어요. 애당초 시작은 억지로 된 것입니다.

 

상황은 그렇고 현실 은 그렇고 사건은 피동적으로 시작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운명 여러분이 정했습니 까? 어떤 사람은 좌우간 삼년 동안 이나 남자가 따라다니면서 결혼하자 고 졸라서 결혼해 주었대요. 그리 고는 일생동안 우려먹는 거야 말끝 마다 당신이 하도 좇아 다녀서 해 주었더니 이게 뭐냐고. 나는 그 여 자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결혼은 그렇게 끌려가면서 하 는 겁니까 이게? 어째서 그렇게 살 아가야 합니까? 이 사람 딴에는 무 슨 값을 올리는 줄 아는가 본데 참 으로 불쌍한 여자입니다. 내가 선 택하지 못하고 남의 선택에 끌려간 거예요. 한 평생 그렇게 노예적으 로 살아야 되는 겁니까? 시작은 또 그렇다고 합시다. 그러면 결혼식 날부터는 얘기가 달라야죠. 이제는 내가 당신을 선택한 거요. 이러고 살아야지. 한 평생 그게 뭡니까?

 

이건 잘못이에요. 지금부터 바로 지금 이 현실부터는 빼앗기는 데서 부터 시작해서 주는 마음으로 억지 로 된 것이나 이제부터는 자발적으 로 다시 말해서 동기 전환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바꿔요. 마음의 태도를 바꿔요. 처음에는 억지로 했지만은 이제는 즐거움으로 하는 거예요. 여기에 자유가 있어 요. 이 자유함에 행복이 깃들이는 것이고 능률이 솟아오르는 것이죠. 그 뿐 아니라 보세요 남의 일이거든 요.

 

가자 할 때 끌려가면 오리동안 가는 동안에는 그건 남의 일이요. 내일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는 그래서 십리까지 가 줄 때는 이 건 내 일이 됩니다. 거기에 차이가 있는 겁니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농사하는 사람들이 품앗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 무 슨 말인지 모르지만 품앗이라고 하 는 말은 농촌에서 농사를 할 때 우 리 밭에 씨를 뿌려야겠고 또 김을 매야겠는데 나 혼자서 각각 따로 하 다가는 힘이 드니까 이웃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합니다.

 

이게 품앗이 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와서 우리 집에 하루 품을 일 해 주었으면 내 가 또 다른 집에 가서 하루 품을 일 하는 거예요. 이게 품앗이입니다. 그러니까 온 동네가 하루는 이 집에 가서 일하고 하루는 저 집에 가서 일하고 서로 품앗이를 하고 혹은 내 가 그 집에 김 매는 날 못 가게 되 면 다른 분을 대신 세워야 됩니다. 어쨌든 이렇게 품앗이라는 게 있는 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다 보면 내 집에 나의 집에서 내 밭에 일 할 수가 있지만 어떤 날은 남의 집에서 일 할 때가 많거든요. 여기서 인생 이 달라집니다.

 

자기 집 밭에 일할 때는 부지런히 일하고요 남의 집의 밭에 가서 일할 때는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어요. 요런 사람이 문제 라고요. 그걸 억지로 하는 것처럼 생각해요. 아니지요. 남의 밭이나 내 밭이나 내 일이나 남의 일이나. 처음에는 남의 일이요. 그러나 지 금은 내 일이요. 그 마음가짐으로 는 언제나 내 일처럼 내 것처럼 그 렇게 해야하는 것이거든요.

 

거기에 인간의 기본 자세란 말입니다. 그 것 뿐인가 하면 할 수 없이 시작한 일이지만 이제부터는 하고 싶어서 하는 일로 하라 그런 말이예요. 여 기에 진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나 중심에서 시작 한 것이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의 필요와 중 심을 생각하면서 일하라 그런 말씀 입니다.

 

영어에 이런 말이 있죠.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화 혹은 소통이 라는 말이죠. 라틴어에는 이 커뮤 니케이션이라는 말이 라틴말에서 나 오는데 코무누스(Communus)라고 합니다. 코무누스라는 말은 짐을 지고 함께 간다는 뜻입니다. 코무 누스. 신화에 오펠로라고 하는 힘 이 센 장사 하나가 있었는데 이 사 람의 소원은 가장 강한 자의 신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그래 왕하고 가까이 지내면서 보니까 왕이 무슨 얘기하 다가도 악마라는 말만 나오면은 벌 벌 떨어요. 아하 악마가 왕보다 더 세구나. 그래서 그는 또 악마의 부 하가 되었습니다. 악마하고 좇아 다니면서 심부름을 해 보니까 악마 는 예수의 이름만 나오면은 벌벌 떨 어요. 옳지 예수가 더 높구나 그래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를 섬 기고 사는데 어느 날 나루터에서 일 을 하고 있는데 어린아이 하나가

 

"어머니가 병들어서 지금 약을 구해 가지고 가는 중입니다. 나루를 건 네주세요."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부는데 도저히 배를 띄울 수가 없어 요. 이 어린아이가 하도 사정을 하 니까

 

"그래 그럼 내가 업고 가자."

그 물이 깊지 않아서 업고, 이 아이 를 업고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어 린아이가 점점 무거워 집니다. 하 도 무거워서

"애야 넌 쇳덩어리를 달았냐 왜 이렇게 무겁냐?"

 

하고 한 마디 했더니 어린아이가 조용히 그 의 귀에 대고 말합니다.

"나는 네 가 섬기는 예수다"

그랬어요. 여러 분 때때로 우리는 억지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게 억지가 그 다 음에 나가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때부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죠.

 

21세기를 지향하면서 많은 사람 들이 연구를 합니다. 소위 미래학 이라는 이름으로 앞으로 21세기에는 어떤 기업이 성공할까, 어떤 사람이 성공할까, 어떤 기술이 좋을까, 여러 가지로 연구합니다 만은 제가 그저 돌아가는 책들을 읽어 본 대로는 이 런 결론입니다. 21세기는 행복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남을 모방해서 는 살 수 없습니다.

억지로 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일할 때 창의력이 생깁니다. 창의 적이 아니고는 미래는 살아남을 수 가 없습니다. 남의 흉내나 내고 뒤 꽁무니 좇아가고 억지로 끌려가고 그거 가지고는 살지 못합니다. 이 것이 결론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 각해야 합니다. 음식 한가지를 먹 어도 먹는다는 형식은 같지만 맛있 게 먹는 사람과 억지로 먹은 사람하 고는 하늘과 땅입니다.

 

똑같은 일 을 한 장소에서 하는 것 같으나 그 마음 자세가 어디에 있느냐 그거요. 오리를 가자고 하지만 나는 십리까 지 간다 이거요 바로 이 마음입니 다. 라디오방송 프로에 나온 얘기 입니다만은 전대영이라고 하는 청년 이 고등학교 2학년때 교회봉사 활동 에 참여했다가 경험한 이야기를 서 술하고 있습니다.

 

어느 맹아원을 방문해서 하루를 맹아들과 같이 하 루를 지냈답니다. 시각장애자 아이 들하고 일대일로 하나씩 만나가지고 그 애를 즐겁게 하면서 같이 놀이를 하고 놀았어요. 근데 여섯살 난 종 민이라는 아이를 데리고 놀게 됐는 데 애가

 

"나 좀 업어 줘! 형 나 좀 업어 줘!"

그래요. 그래 업어주었답 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이 맹 아원 밖으로 좀 나가자"

그건 규칙 에 없지만은 하도 얘기를 하니까

"그러자"

하고 나갔어요. 그래

 

"가 게를 가자"

가게를 갔어요. 자 이 생각에

"너는 보지도 못하면서 밖으 로 나가면 뭘 하니? 또 이 가게는 가서 뭘 하니 보지도 못하면서?"

그 러고 싶지만은 본인이 원하니까 가 게에 갔더니

 

"인형하나 사 줘"

그러 더래요. 자기 주머니 돈을 다 털어 서 인형 하나를 샀더니 이걸 손에 만져 보고는 이 맹아원으로 들어오 다가 그 아이들이 노는 것을 듣고 이 아이가 하는 말이

"형아 이 인형 저 아이들에게 줘"

 

그러더랍니다. 그 때 그는 많이 생각했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만 되는 게 아니요. 합 리적으로만 되는 게 아니요. 저가 원하니까 그대로 따라 주었더니 이 제 와서 보니 얼마나 귀한 일을 했 는지 그 다음에야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강요된 현실이 있습니다. 그러 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마 십시다. 환경의 변화를 기대하지 마세요. 문제는 내 마음의 변화가 먼저입니다. 오리를 가지고 그럽니 까? 십리를 갑시다. 속옷을 달라 고 하십니까?

 

겉옷까지 주는 마음 으로 삽시다. 십자가란 기쁨으로 진자에게만 십자가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는 십 자가가 아닙니다. 순교자는 기뻐하 며 감사하며 죽을 때 순교자요 만일 에

"속았다"

 

그리고 죽는다면 그는 순교가 아닙니다. 죽는다고 순교가 아닙니다. 고통을 당한다고 다 의 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리를 가자 하 는데 십리까지 가는 바로 그 마음이 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엄청난 자유와 높은 지혜, 창조적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5:38-42/ 옥한흠 목사

2014-11-10 11:21:44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고 있는데 공감이 가면서도 저 자신이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버킹햄이라는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가끔 갖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적은 것입니다. 목사

가 설교를 하다 보면 가끔 사회악에 대하여 말씀을 가지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하는 일

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과거에 우리 나라 같으면 독재에 대해서 공격한다든지 부정부

, 인권유린에 대해서 설교자가 말씀에 근거해서 강하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이

목사님은 미국 목사님이어서 그런 것을 놓고 설교 하시지는 않았겠지만 미국 사회에 만연되

어 있는 사회악을 놓고 톤을 많이 높이는 때가 있었나 봅니다. 그럴 때마다 교인들의 표정

 

에 심상치 않은 증세가 흐른다는 것을 알아챘다고 합니다. 특히 한번은 낙태를 찬성하는 사

람들을 신랄하게 공격을 했답니다. 미국에는 낙태 찬성자가 참 많습니다. 이것을 놓고 "낙태

는 살인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낙태를 지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고 설교를 하자 청중들이 "아멘. 아멘." 하면서 화답을 하는데 얼굴에

살기가 돌더라는 것입니다.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분노, 좋지 못한 감정이 가

슴에 가득한 것을 그 청중들의 얼굴을 보면서 느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글을 읽으면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그런

마음 가짐과 감정과 표정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

습니다. 아무리 악을 놓고 이야기를 할 지라도 얼굴에 살기가 흐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한번 우리 상황과 비교해서 상상

해 봅시다.

 

만약 내가 직장 생활을 하다가 좋지 못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대뜸 내 오른 뺨을 때

렸다고 합시다. 오른 뺨을 때리려면 왼손잡이는 쉽게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오른손으로

때리는 사람은 손등으로 때려야지 손바닥으로 때리기는 어렵습니다. 유대나라에서는 손등으

로 남의 뺨을 치는 것은 인격을 이중적으로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오른 뺨을 때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인격 모독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떤 사람이 내 재산에 욕심을 내서 속옷을 빼앗으려고

재판을 걸어 소송을 했다고 합시다. 유대나라에서는 가끔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아예 한 집안의 뿌리를 뽑으려고 악심을 품고 소송을 한 악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

. 그런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반응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식민지에서는 가끔 있는 일입니다. 군인이나 관리가 나와서 길 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들고

", 이 짐 지고 저 쪽에 있는 동네로 옮겨라."고 하면 꼼짝 없이 짐을 지고 가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유도 없이 나를 강제로 끌어다가 5리 길을 함께 가자고 한다면 어떻

게 할까요? 구레네 시몬을 아시죠? 예수님이 십자가 틀을 지고 가실 수가 없자 결국 군인

이 구레네 시몬을 불러서

 

", 이거 지고 가."라고 한마디 할 때 꼼짝 못하고 죄도 없으면서

십자가 형틀을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런 식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

가 당했다면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을 대할

까요?

 

여러분 가운데는 특별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목사고 장로고 집사고 할 것

없이 이렇게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가슴에 증오의 불길이 타오를 것입

니다. 아마 복수하고 싶은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

 

. '내가 한 대 맞았으면 너는 두 대 맞아야 된다.'는 식으로 대할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렇

게 할 것입니다.

 

야곱에게 디나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세겜 성에 들어가서 구경하다가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

습니까? 참 억울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런 문제를

처리하는 것과는 좀 다르게 처리해야 되는데, 디나의 오빠들이 돌아와서 여동생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만히 둘 수 없다면서 자기네들이 모의해 가지고 들어가서 세

겜 성에 있는 남자란 남자는 전부 다 칼로 찔러 죽여 씨를 말리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인간

의 본성입니다. 여동생이 성폭행을 당한 것 하고 그 성에 있는 남자들의 모든 생명하고 맞

바꾼다는 것은 보복 치고는 너무나 잔인한 보복입니다.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악한 마귀의 심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이런 것들을 단순하게 다 받

아 들인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 보십시오. 피로 물들인 역사, 피가 피

를 부르고,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는 비극들이 연속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구석 구석을 보면 그렇게 피의 보복을 일삼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

나고 있는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인간 본연의 잔악성을 억제하고 형평에 맞는 법을 가지고 잘못한 사람에게 형벌을 가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 하나를 주셨습니다. 그것인 무엇인가 하면 '

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툼이 일어나고

 

나중에는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다가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그저 주

먹질을 해서 이가 하나 빠졌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

니다. '이가 하나 빠졌으면 때린 사람의 이도 하나 빼라.'

 

그런데 이 법을 개인적인 관계에서 사적으로 적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

?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이 법은 공정하게 시행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재판

관 앞에 가서 사실 관계를 충분히 확인한 다음에 손해를 준 것 만큼 가해자가 손해를 보도

록 하거나 보상 하도록 재판관이 판정을 내려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하나 빠졌다고 끌고

 

가서 가해자의 이를 빼도록 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일이 되지를 않기 때

문입니다. 우리 모두 다 알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식이 엄마의 화를 돋구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귀한 자식인데도 어

떤 때에는 화를 내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럴 때 화가 나서 때리든지 욕을 퍼붓습니다. 그러

면 그 아이가 나를 화나게 한 만큼만 욕합니까? 그 아이가 잘못한 것 만큼 때립니까? 우리

 

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자식이 잘못한 것 이상으로 아이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에도 흔히 나타나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이 법을

적용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이 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상대방에게 해를 끼친 악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보호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정신이 이 법 안에 들어 있습니다. 잘못하면 피

해를 가한 것보다 더 엄청난 벌을 받든지 고통을 당할 수 있기에 그 악한 자를 보호하기 위

 

해서 잘못한 것 만큼만 벌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자비의 정신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 안에 있는 자비의 정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소중한 교훈은 전부 다 내동댕이치고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 법을 해석

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했다. 그러므로 복수는 각자가

행사할 수 있는 본연의 의무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개개인에게 다 이 법을 적용해서 누

구든지 자기가 피해를 보면 피해를 본 것 만큼 앙갚음을 할 수 있고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고 가르쳤습니다.

 

얼마나 법을 잘못 악용하여 해석하면 엉뚱한 법이 되는가를 우리가 여기

서 새삼스럽게 볼 수 있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이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 가르친 바리새인들을 주님께

서 나무라시고 이 법 안에 들어있는 근본 정신과 근본 취지를 다시 일깨우시고 가르쳐 주시

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라고 해서

 

보복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피해를 보았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그 악

한 사람에게 보복한다든지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주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줍니다.

 

물론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 마음 한 구석에 동의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있습니다. '

무 이상론이다. 너무 비현실적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날마다 사회에서 당하기만

하라는 말인가?'

 

하는 생각을 은근히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피해를 보았을 때 내가 보

상을 요구하거나 상대방에게 어떤 형벌을 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당연히 그렇

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중요한 질문이 하나 따라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하고 안 믿는

사람하고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복수의 심리를 갖고 있습니다.

 

앙갚음한다고 하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가 조금만 다치면 절대 참지 못합니다. 이것

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향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당연하게 인정한다면 도대체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해야 됩니다.

 

유명한 성경 학자인 윌리암 바클리가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런 말 한 마디를 했습니다. '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이야말로 기독교가 보여 줄 수 있는 윤리의 가장 독특한 성격을 지니

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윤리의 독특함이 무엇인가

를 이 본문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살면 예수 믿는 사람다움을 보여주는 것이고 만약에 악한 자를 대

적하지 말라는 말씀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반응을 한다면 우리

 

는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마음으로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 자녀와 달라야 합니다. 다시 한번,

나님의 자녀는 세상 자녀와 달라야 합니다. 반드시 달라야 합니다. 절대 같을 수가 없습니

 

. 같아서도 안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 지금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두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우리 감정이나 우리 생각을

일단 접어두고 내가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보여주려면 이 말씀에 우리가 주목하

지 않으면 안되고 귀담아 듣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긍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악한 자가 너무 많습니다. 정말 많습니다. 날이 갈수록 악한 자가 더 많아

집니다. 그리고 그 악함이 과거와 달리 너무나 흉폭해지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악한 자라

고 해서 내가 안 보이는 곳에만 있습니까? 멀리에만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특별합니까?

 

아닙니다. 내가 나은 자식 가운데서도 악한 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부부 가운데서 남편이

부인에게 악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악한 자는 가까이 있습니다. 집안에 있습니다. 이웃에

있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 가운데 이야기를 듣고 하도 충격을 받아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이 있습

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 하나를 참 정성스럽게 키웠다고 합니다. 지방이

라고 하지만 아마 도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방에서 자녀를 키우고 사는 과부입니다. 남편

이 세상 떠나면서 재산을 약간 남겨 놓고 갔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그렇게 어렵지 않게 자녀

 

를 서울에 보내서 대학까지 마치게 했습니다. 이 아들이 나중에는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

르치는 아주 예쁜 자매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런

데 이 아들 며느리가 자주 지방에 있는 어머니에게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간청을 하는 것

입니다.

 

어머니 혼자서 그렇게 고생하지 마세요. 거기에 있는 살림 다 정리해 가지고 서울

로 오시면 우리가 집을 조금 더 넓혀서 어머니 모시고 살 수 있고 어머니도 우리와 함께 사

시면 좋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처음에 그 말을 들을 때는 어머니가 별로 동의를 안

 

했어요. 혼자 있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습니까? 괜히 자식 옆에 가서 마음 고생 하는 것 보

다도 혼자 있으려고 했는데 애들이 하도 간청을 하자 재산을 다 정리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자기가 갖고 있던 돈을 전부 아들 며느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함께 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냉장고를 절대 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침에 출근을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마다 냉장고에 음식을 다 넣어 놓고 가는데, 절대 어

머니가 냉장고를 열고 안에 있는 것을 쓰지 못하게 하고는 천원 짜리 한 장 들려 주고 밖으

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집에 있지 말고 밖에 계시라는 것입니다.

리고 학교 가면서 문을 딱 잠가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밖으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불과 이삼년 전이므로 천원 짜리의 가치를 아시지 않습니까? 이 천원을 가지고

어디를 가겠습니까? 무엇을 하겠습니까? 노인정에 가서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남부끄럽

습니다.

 

육십대 부인인데 아직 건강하십니다. 그러니 사실 노인도 아닙니다. 점심을 사 먹으

려고 하니 천원을 가지고 무엇을 사먹습니까? 라면 가지고 때우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것

도 하루 이틀이지 날마다 어떻게 그 생활을 합니까? 밖으로 돌다가 어떤 때는 직장에서 돌

아왔겠지 하고는 집에 와 보면 문이 잠겨 있습니다. 문간 바깥에 있는 계단에 앉아서 기다

 

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며느리가 돌아와 그 꼴을 보고는 막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이웃 사

람이 그렇게 늙은이가 문간에 앉아있는 것을 보면 우리를 욕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 와서 앉아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 미리 와서 기다릴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런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년을 버티지 못하고 어머니가 가출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어떻게 지하에 있는 조그마한 단칸방 하나를 구해 가지고 지금은 파출부 일을 다니

면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마음이 편하다고 합니다.

 

악한 자가 따로 있나요? 내 자식 속에 악한 자가 나올 수 있고, 내 남편이 악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악한 자가 너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악한 자에 둘러 쌓여

사는 우리를 향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다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

하십니다.

 

대적한다는 말은 복수한다는 말이요 앙갚음한다는 말이요 또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대한다는 말입니다. '악한 자가 너에게 오른뺨을 때렸느냐? 그렇다면 차라리 왼뺨도

치라고 돌려대라. 악한 자가 네 속옷을 탐내느냐? 차라리 겉옷까지 주어 버려라. 악한 자가

너더러 오리를 가기를 요구하느냐? 그렇다면 아예 십리까지 가주어라. 그렇게 해서 악한 자

를 악하게 대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으시면 안됩니다. 오른뺨 맞았다고 해서 왼뺨을 돌려 대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안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법정

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그 재판 자체가 불법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옆에 있던 어느 군인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쳤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오른뺨을 맞았구나. 왼뺨 여기 있다."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항의하셨습니다. 법정에서 피고가 서 있는데 어떤 혐의가 분명

히 밝혀지기도 전에 어떤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것은 어느 나라 법에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법이겠습니까? "네가 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느냐?"

 

주님이 그렇게 분명히 항의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글자 글대로 받으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또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하면 사회에서 악한 자를 절대 제지해서는 안되고 그들에게

벌을 가해서는 안된다는 극단적인 해석을 하기 쉽습니다. 위대한 문호 톨스토이가 그와 같

 

은 해석을 해서, 경찰도 만들어서는 안되고, 군인도 있어서는 안되고, 전쟁도 해서는 안되고,

어떤 악도 상대해서는 안된다는 이상론을 펴다가 결국 종말에 가서 후회를 한 일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공권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국가를 주셨습니

. 공권력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공무원들의 손에 칼을 쥐어 주셨습니다. 법을

쥐어 줘서 사람들의 악한 것을 견제하게 하고 악인들로 하여금 사회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

지하게 함으로써 함부로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악한 일을 행한 사람

은 특별히 격리시켜서 그의 악에 해당하는 벌을 가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말씀

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볼 때 우리가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럼 이 말씀의 요점이 무엇입니

?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개인적으로 악한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과 어떤 이해관계에 걸릴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손해도 보고 욕

도 당하고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왼뺨을 돌려대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네가 모욕을

당하게 될 때는 그것을 가지고 너무 가슴앓이를 하지 말고 차라리 모욕을 당해라. 대적하지

말고 모욕을 당해라. 그런다고 네가 죽는 것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아닌가? 하나

 

님이 계시는데 네가 왜 망하는가? 뼈가 부러지는가? 집안이 깡그리 부서지는가? 그러므로

당해라." 그 말입니다. "어떤 사람 때문에 재산을 손해 봤다면 그것으로 끝내라. 그것을 배

상 받기 위해서 악으로 대하지 말고 손해 보면 손해 봐라. 너의 축복이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이지 네가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고 네 축복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이야

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의 인권을 침해하고 네 자유를 침해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강제로 시킬 때에는 아예 십리까지 가 주어라. 이왕 그렇게 된 바에는 기쁜 마음으로 봉사

 

해 주어라. 누가 너를 이용해서 무엇을 좀 해 먹기를 원하느냐?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 되

겠지만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면 차라리 기쁜 마음으로 아예 그를 위해서 희생할 것은

희생해 주어라." 그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을 악으로 대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생명과 같은 진리인지 아십니까? 우리 생각에는 내가 모욕을 당하면 마음

껏 분풀이 해주어야 나도 편할 것 같지 않습니까? 내가 재산에 손해를 보았다면 악에 받쳐

 

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손해 본 것을 배상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어야 내

가 평안하고 행복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경험을 한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그

렇지 않다고 합니다.

 

아우슈비츠 포로 수용소를 아시죠? 죄 없는 유대인들을 끌어다가 6백만 명을 가스실에서 학

살한 인간 대학살의 현장이 아닙니까? 몇 년 동안이나 자기 형제들이, 자기 아빠 엄마가,

기 동생이 끌려가서 하루 아침에 가스실에서 시체가 되어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살아

 

남아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어떤 감정이 쌓여 있을까요? 나치를 보면 죽이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겠습니까? 밤이고 낮이고 복수하고 싶은 생각에 이를 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살아남은 유대인들이야말로 증오로 똘똘 뭉친 증오의 화신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도무지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나치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이를 갈

았던 엘리 바이젤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중에 석방되어 책을 하나 썼습니다. 그 책 가운데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증오심이 존재하는 곳이면 그 어디서나 미워하는 사람이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더 고통을 당한다.' 우리는 미움이 마음에 솟구칠 때 미워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아도 미워하면 미움 받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더 비참해진다는 것입니다. 복수

심을 가슴 속에 불태우고 있는 사람은 그 복수의 불길에 자기가 먼저 삼도 화상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경험을 해 보니 악한 자를 대적함으로써 절대 유익한 것이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런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악인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임을 꼭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아주

큰 마음 말입니다. 악한 사람이라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말입니다. 내가 모욕을 당하고 손

해를 보고 고통을 당해도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고 복수하고 싶어하지 않는 큰 마음 말입니

. 이 마음을 우리가 소유해야 됩니다.

 

이 마음이 누구의 마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소유해야 합

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고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우리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이 차지하게 되고, 예수님이 다스리는 천국

 

이 우리 마음에 있으면 악인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미워하거나 보

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만큼 멸시당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만큼 모욕당한 사

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만큼 공개적으로 침 뱉음을 당하고 뺨 맞은 사람이 누가 있습

니까? 예수님 만큼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매달린 젊은이가 어디 있습니까? 죄없는 분이면

서도 그와 같은 모욕과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는 악한 자들을 저주하시거나 증오하시지 않았

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

이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이것이 우리 주님

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마음을 지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남을 괴롭히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보실 때 마다 불쌍

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들이 예수님 곁으로 왔습니다. 죄인들이 예수님 곁으로 왔습

니다. 예수님이 미워하고 정죄했다면 그들이 어떻게 감히 가까이 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

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그들이 가까이 왔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자기를 지

 

키기 위해서 남을 해치고 도망가는 사람, 이 사람 만큼 약자가 없다고 합니다. 강자는 그러

지 않는다고 합니다. 약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남을 해치

, 먼저 자기가 주먹질을 하고는 도망가고 자기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절대로 그

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와 같은 인간의 나약성, 악한 자들의 약점,

이것을 보시고 그들을 가까이 오게 하시고 품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는 악한 자를 가장 약한 자로 보아야 합니다. 강해서 저러는 것이 아닙니다. 약하기 때문에

저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들이 나중에는 감동을 받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셨습

니다. 악한 자,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를 주님이 미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그들에

게 앙갚음을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품으시는 것을 나중에 모든 사람이 알고 나서 주님 앞으

 

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그 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천명의 장정들이 회개하고

가슴을 치며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며칠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에 그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치던 폭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사람들

 

이 어떻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가슴을 치고 돌아옵니까? 자기의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

시는 예수님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면 우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수님처럼 악한 자를 미워하지 마십시오. 보복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처럼 나에게 해를 끼친

악한 자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예수님처럼 그들에게도 구원의 손길이 미칠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를 원하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누가 이깁니까?

우리가 이깁니다. 우리가 승자가 됩니다.

 

우리 한국 초창기 역사를 읽어보면 참 재미있고 그러면서도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김익두 목사 하면 누구나 다 아는 이름입니다. 그는 평양에서 제일 가는 깡패 두

목이었습니다. 워낙 기골이 장대하고 힘까지 세고 성격마저 난폭해서 아무도 그를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만 보면 모두가 슬슬 피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

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선교사를 돌로 쳐 가지고 선교사가 거꾸러져서 큰 어려움

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교사가 자기를 악으로 대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을

보고 깊이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주님 앞에서 거듭나고 나니

자기가 얼마나 몹쓸 사람이었나를 십자가 앞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

하고 '나의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백한 다음 자신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좀더 공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 부고장을 썼습니다. '옛날의 김

익두는 죽었다.'

 

이렇게 써서는 사방에다 뿌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보고는 씩

웃었습니다. 믿기지 않았기 때문에 반신반의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옛사람이 죽었나

한번 김익두를 시험해 보자 생각하고는 추운 겨울에 물통에 물을 잔뜩 담아 가지고 김익두

가 지나가는 길에 딱 서서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성경책을 끼고 김익두가 지나갑니다. 가까

 

이 오는 것을 보고는 물통을 그냥 뒤집어 씌웠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뻑 뒤집어 썼

습니다. 물을 이렇게 뒤집어 쓴 김익두는 씩 웃으면서 그 형제를 바라보더니 "자네 말이야.

내가 예수 믿고 옛사람이 죽은 것을 참으로 기뻐하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자네는

요절이 났을거야." 하고 말했습니다. 평안한 얼굴로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물을 뒤

 

집어 씌운 사람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었습니다.

악을 대적하는 자가 승자입니까? 악을 대적하지 않는 자가, 악인을 대적하지 않는 자가 승

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주는 진리요, 또 위대한 우리 선배들이 보여준 진리

, 또 우리가 이 말씀대로 실천했을 때 우리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성경 여기 저기를 보면 예수님의 이 교훈이 그대로 반영된 말씀들이 많

이 나옵니다. 로마서 12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그리고 로마서 1221절 말씀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39

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

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된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악인이 너무나 많은 이 세상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을 세상 앞에 보여줌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 찾

아 나오도록 하려고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모셔야 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불편했습니다. "주님 저도 이렇게 못합니다. 당해 보진 않았지만 오른

뺨 때리는 사람에게 왼뺨을 돌려대면서 '여기요.' 하지 못합니다. 내 속옷까지 빼앗아 가려

 

는 악질을 보고 겉옷까지 내 줄 만큼 저는 그렇게 관대하지 못합니다. 목사지만 저는 그렇

게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못하는 일을 가지고 어떻게 설교합니까? 목사도 못 지키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교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가르칠 수 있습니까? 저는 못하겠습니다. 예수님,

지금 산상수훈 강해설교를 하지만 여기만은 좀 뛰어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이 불

편하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니다. 내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내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

못됐다.'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못할 일을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 아닙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

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우리는 살고 있

습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내 마음에 간직한 채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나

아가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가지고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못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내 안에 갖고 있으면 내 마음이 아니고 주님의 마음이면

주님이 교훈하신 이 말씀대로 악인을 대적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댈 수 있는 것입니다.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리를 가

자고 하면 십리도 기쁘게 가줄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주의 마음의 나의 마음으로

바뀌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을 여러분이 다시 기억하십시오. '

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누가 산 것

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진정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 되

기를 원한다면 우리 마음은 점점 죽어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우리도

삽니다.

 

우리가 이런 작은 예수가 되어서 악한 자들을 상대할 수만 있다면 이 사회는 분명히 달라집

니다. 이 흉악하고 살벌한 한국 사회에 분명히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더럽

고 포악한 사회를 누가 치유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우리 모두가 이 일

을 맡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에 부정적인 마음을 쓸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

,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작은 예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면 얼마든지 말

씀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주여, 은혜를 주시옵소서.' 하고 날마다 기도하면서 가정에서

 

살고, 직장 생활하고, 학원에 가고, 학교에 가고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이 이 사회에 일

어날 줄을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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