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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마태복음 설교 모음

마태복음 3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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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사람의 외침 /3:7-12/ 김기석목사

2021-01-15 11:08:50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광야의 사람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일들을 성심껏 감당하신 여러분들의 수고를 주님께서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여름내 눅진눅진해진 옷가지와 이불을 거풍하듯이, 가끔은 우리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일상의 일들에서 눈을 돌려 우리 삶을 높은 자리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의 환기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희구했습니다. 속진에 묻혀 사는 우리들에게는 언감생심이지만 시인의 그런 고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맑음의 세계를 가리켜 보이고 있습니다.

 

힘겨운 날들이 계속되면서 우리의 양심도, 감성도, 신앙적 결의도 희미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부평초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것은 아닌지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가끔은 우리를 타격하는 말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말, 양심을 뒤흔드는 말, 위선을 벗겨버리는 말, 나약함을 질타하는 말을 멀리 할 때 영혼의 전락이 시작됩니다.

 

예언자를 가리켜 어느 목사님은 양심을 습격하는 사람들이라 표현했습니다. 예언자들은 세상의 불의 앞에서 적당히 눈감고 살면서 그래도 이만하면 내가 괜찮은 사람이지생각하는 알량한 자기 위안을 가차없이 짓부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험합니다. 인기도 없습니다. 영합(迎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언자의 반열에 선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열정에 사로잡혀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말하는 들사람이었습니다. 들사람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고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사람들을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할 종교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보고 그는 분노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 시대에 나타난다면 그는 광인 취급을 받을 겁니다. 교회는 그를 불경한 사람,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이라며 내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주님 오실 길을 닦는 사람임을 말입니다. 그는 굽은 길을 곧게 하고,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처신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유롭습니다. 체면이나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들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허위의식을 타격하는 사람, 껍질을 벗기는 사람, 옛사람의 낡은 옷을 사정없이 잡아채 발가벗기는 사람입니다.

 

독사의 자식들

세례자 요한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유력 인사일 수도 있었습니다. 유력자가 자기의 갱신운동에 공감을 표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내보일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그의 말은 고상하지 않습니다. 날 것 그대로입니다. 유력자의 비위나 맞추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는 일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요한에게 이끌린 까닭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기존의 종교에 절망감을 느껴 새로운 갱신운동에 동참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기야 어떻든 요한의 말은 과격합니다.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기존의 종교 질서에 대한 요한의 분노가 여실히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알량한 자존심, 허위의식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을 겁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첫째는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에게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감이지만 그 진실함은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만 입증되는 것이었습니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회개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위임된 권한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하고 말할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선민이라는 헛된 자부심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을 낮춰본다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살기 위해 확실한 것을 붙드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기 확신을 근거로 하여 다른 이들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종교적 확신이 때로는 교만으로 나타나고, 반사회적 행태를 부추기고, 타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으로 진행되는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사는 모습은 전혀 예수와 닮지 않았는데,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보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요?

 

자가당착에 빠진 이들이 지도자연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기 신념을 믿음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노출이 많은 사람일수록 말을 아껴야 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또 다른 호는 일속자(一粟子)입니다.

 

왜 그런 호를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 그럴 때 내 마음 지긋이 눌러주는 화두 같은 거야. 세상에서 제일 하잘 것 없는 게 좁쌀 아닌가. ‘내가 조 한 알이다하면서 내 마음 추스르는 거지.”(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이런 겸허함이 없을 때 종교적 자부심은 헛된 망상이 됩니다. 예수님은 헛된 미망에 빠진 이들을 향해 준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7:22-23)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말씀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정과 일치를 이루지 못한 이들, 오직 자기 확장을 위해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주신 준엄한 경고입니다.

 

16세기의 현자인 몽테뉴는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안인희 옮김, 유유, p.110) 질문을 명령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늘 남을 가르치려 하고 스스로 배우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요한 크리소스토모스(349-407)

기독교 역사 가운데 세례자 요한과 많이 닮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4세기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349-407)입니다. 사실 오늘은 그의 축일입니다. 성인들의 축일은 그의 사망일이니까 913일이 그의 사망일이라는 말입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안티오키아 출신인 그에게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황금의 입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역사상 최고의 설교자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정교회는 그를 매우 중요한 성인으로 간주합니다. 정교회의 중심 전례는 그의 이름을 따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거룩한 전례라고 지칭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이 전례 음악(Liturgy of St. John Chrysostom)을 가끔 듣습니다. 악기 소리 없이 오직 사람의 소리만으로 그렇게도 장엄하고 거룩한 아름다움을 자아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진리를 적당히 에누리해서 사람들 앞에 팔지 않았습니다. 예수 정신이 아닌 것을 검불처럼 여겨 내던졌습니다. 그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 곁에 서는 한편, 화려한 옷, 장신구, 금은으로 만든 식기에 집착하고 은요강을 사용하는 상류층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가차없이 비판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짓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계시는데 여러분은 그런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니 더 옳게 말하면, 그런 미친 짓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당신의 동료 인간이 추위에 얼어 죽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세간살이 따위나 마련하고 있습니까?”(루돌프 브랜들레,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p.118)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내인 황후 에브독시아도 그의 비판을 비켜갈 수는 없었습니다. 에브독시아는 처음에는 크리소스토모스에게 아주 호의적이었고 그가 하려는 많은 일에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황후의 권세를 동원하여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 크리소스토모스는 경고의 편지 보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황후의 권세를 주었다면 그것은 정의를 세우라고 주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흙과 재, 풀과 먼지에 불과하고, 인생 또한 그림자와 연기 그리고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듯이, 황제도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더 이상 고통과 불행을 지우지 마십시오. 당신은 포도밭과 무화과밭, 기름과 돈,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무덤에 내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요아니스 엘렉시우 대사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요한 박용범 옮김, 정교회출판사, p.83)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질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질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에브독시아는 주교를 유배지에 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박차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뒤에 오시는 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 회개하는 법

크리소스토모스는 성도들에게 다섯 가지 회개하는 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지음, 로버트 밴 더 웨이어 엮음, <단순하게 살기>, 이현주 옮김, 아침이슬, p.123-4 참조)

 

회개란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죄를 시인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다가오고, 용서의 은총이 부어집니다. 자기 죄를 시인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성도들에게 늘 자기 양심을 고발자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법정에서 다른 고발자를 만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잊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악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죄지은 이들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이웃이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에 이르기 위해서는 늘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판에 박힌 기도 말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내놓는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가 필요합니다.

 

회개하려는 이들은 널리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은 것에 감사하면서 그 빚을 사랑으로 갚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회개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 자신에게는 아무런 덕도 없거니와 하나님께 바칠 것은 다만 지은 죄가 있을 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의 마음 가운데 머물 때 우리 삶은 조금씩 맑아집니다. 우리 영혼에 드리운 어두운 구름이 걷히고 은총의 빛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웃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도 여물지 않는 벼를 보는 것은 슬픔입니다. 속이 꽉 들어찬 낟알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잎은 무성했지만 열매는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껍질이 벗겨졌기에 우리는 겸손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삶이 선물임을 늘 명심하면서,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 그런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으니 희망은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지금 일꾼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의 일터에서 기쁨을 수확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사순절에 찾은 사명(능력)의 십자가 /3:13-15/ 김병삼목사

2018-04-14 12:40:14

 

다시 찾은 나의 십자가 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16:24)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누가복음 23: 33-43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 . .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명 생각하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사명은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십자가에서 끝까지 고난의 자리를 지키셨던 예수님,

그리고 참 버거운 자리였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잘 지켰던 세례요한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사명의 시작이고, 자리를 지키는 것이 능력입니다.

사명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물어야 하는 사명 역시 참 두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책이 있습니다.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는 쉐인 클레어본의 책인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남자가 말했다.

나는 하나님께 이 세상에 가난과 고통과 전쟁을 허락하신 까닭을 묻고 싶어!“

친구가 대답했다.

그럼 물어보면 되잖아!”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러고 싶어도 너무 무서워서 그럴 수 없어.”

듣고 있던 친구가 무엇이 그렇게 무섭냐고 물었다.

하나님께서 나한테 똑같은 질문을 할까 봐 무서워...”

 

또한, 사명이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꿋꿋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해야 할 일을 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고통이라는 장애물로, 때로는 욕구를 충족하라는 유혹으로 우리 옆에서 늘 사명을 방해하는 것들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죠.

 

사명은 우리가 피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도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그 자리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엄마가 아들에게 슈퍼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 오도록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 아이는 돈을 들고 사야 할 품목을 생각하고 슈퍼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사야 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 먹고 싶었던 과자들입니다. 아이는 엄마가 준 돈을 가지고 자기가 사고 싶은 것을 잔뜩 사서 옵니다.

분명히 엄마의 말을 듣고,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 왔지만 주어진 사명을 완수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을 사명자라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소명과 동떨어진 열심일 경우입니다.

그래서 사명자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자신이 하고 싶은 열망들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명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욕망의 짐을 내려놓는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았던 어린아이의 이야기처럼, 자신이 먹고 싶은 과자를 앞에 두고 엄마의 음성이 기억나야 합니다. 자신이 먹고 싶은 과자를 들었다가, 엄마의 심부름이 생각나 다시 내려놓고 심부름에 합당한 것을 드는 순간 사명자가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사명자가 된다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벤구리온의 이야기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일인자의 자리에서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사표를 냅니다. 이유가 이렇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농장에 가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고 농장으로 들어가 일하렵니다.>

 

마태복음 311절 말씀을 보며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요한에게 주어진 사명이 그의 생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숙명처럼 그에게 주어져 있어서, 그의 아버지 사가랴도 이미 자기 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어쩌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살았던 삶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소리같은 삶을 사는 그에게 주님이 오셔서 세례를 받겠다고 하시는 참 난감한 상황이 된 것이죠.

 

게다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지금 앞에 계신 분은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인데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세례요한 자신에게는 참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똑같은 사람의 몸으로 우리와 같이 되셔야 했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정치적인 승자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요한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강권적이다라는 말을 쓸 때가 있는데, 그 말씀에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 때 행하는 것이죠.

우리는 흔히 사명자라고 하면 주관과 열정이 뛰어난 사람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생명을 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정 생명을 걸고 열과 열정을 다해야 하는 일은 그 일을 시키는 사람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명은 소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소명이 없는 사명은 방향을 잃어버린 열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요한을 사명자로 부르는 것은 자기 생각과 주장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주님은 억압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명자는 부르심에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심과 순종의 관계를 인격적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15절을 보세요.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인격적 순종을 만나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나는 소리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요 그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소리요

나는 물로 세례를 주나 그는 성령으로 나는 물로 세례를 주나 그는 불로 주리

그는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나는 소리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요 그의 길을 예배하라고 외치는 소리요

세례 요한은 단지 소리입니다.

, ‘소리그게 사명이구나!

자신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이런 고백을 하지요.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사명의 자리를 지킨 사람들. . .

세례 요한이 겸손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예수님의 사역을 예비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 주변에 어떤 사람이 그 자리를 지킨 사람들일까요? 계속해서 우리가 제주 땅을 순례하며 만났던 신앙 선배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 이기풍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제 이 목사님이 떠나고 난 후 그 자리를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 가려고 합니다.

 

제주 땅에는 이기풍 목사님의 전도를 받아 목사가 된, 제주 토박이 3인방이 있습니다. 강문호, 이도종, 조남수와 같은 분들입니다. 이도종 목사님은 제주의 첫 순교자로, 조남수 목사는 제주의 쉰들러 리스트로 알려진 것에 비하면 강문호 목사는 그렇게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명의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제주 한림에 가면 사명의 자리를 말해주는 교회 종탑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제주에 병참 기지를 만들고 가미가제 특공대를 주둔하게 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 개입된 미국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은 거대한 병참기지를 제주에 만든 것이죠.

 

전쟁 중 일본이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미군들은 교회를 폭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일본 군대는 교회를 군인들의 숙소로 만들기 위해 교인들을 내쫓았습니다. 이를 안 미군은 교회를 폭격했는데, 당시 한림교회도 폭격을 맞아 교인 4명과 담임자였던 강문호 목사의 여동생도 죽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 강문호 목사의 어머니는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강 목사는 교인들과 함께 그 자리를 지키며 예배를 드립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패망했고, 미 군정이 들어와 이 사연을 알게 됩니다. 미군은 교회에 용서를 구하고 다시 예배당을 복원하여 주고 종탑을 세워주게 됩니다.

 

종탑에 새겨진 글과 사진(사진)

 

한림교회를 담임했던 강문호 목사는 유교 가정에서 1898년에 태어났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목회 여정은 극심한 가족들의 반대로 인해 순탄치 않았습니다.

 

1914년 최대헌 이라는 전도자를 통해 처음 복음을 접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한 강목사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군산 영명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졸업 후에 서울 동양 성서학원에서 2년을 수료하고, 강목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 중앙신학교에서 5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목회자가 되기 전부터 강문호 목사는 교회를 지키는 일뿐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일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던 사람입니다. 신앙인이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를 때 꿋꿋하게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모습은 무신론자였던 아버지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들고 온 가족을 복음화합니다.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강문호 목사에게 가장 큰 고통은 일제에 의해 자행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이었습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사명의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한국말로 설교를 하면 무조건 잡아가던 때였기 때문이죠. 그때, 강문호 목사는 어떤 위대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때 유명한 침묵 설교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일제 강점기 말에 기도와 설교는 일본말로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일본말로 설교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은 무자격자라 하여 목사들을 강제로 추방시킬 구실을 찾기 위해 일본 경찰들이 교회마다 예배시간에 뒷자리에 앉아 기도와 설교를 일본어로 하고 있는지 감시하였다.

 

그러던 어느 주일예배 시간에 강 목사는 일제에 굴하지 않고 성도들에게도 더욱더 강하게 마음을 무장케 한 후, 성도들에게 묵상으로 기도하게 하고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은 다음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도들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설교를 하고 예배를 마친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아주 오랫동안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침묵 설교라는 말이 세간에 나돌아다녔다. 이후로는 일본 경찰들이 관여하지 않았다.

 

오늘 본문과 연관 지어 생각한다면 강문호 목사는 세례요한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인 듯합니다. 복음과 사명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던 사람, 자신의 명예보다는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이 되고 정부 수립 후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옥고를 치렀던 공로가 인정되어 포상이 거론될 때 강문호 목사는 끝까지 거부합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사양합니다. 결국, 1980년이 되어서야 지인들의 권유로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습니다.

 

강문호 목사를 보면서 그리고 세례요한을 보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가장 귀한 사명의 십자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는 것이 결국은 신앙의 본질이 아닐까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의 도를 말씀하신 이유야말로 가장 본질적 신앙의 도가 아닐까요?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본질에 대하여,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를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도전이 되는 십자가는, 우리 앞에 주어진 사명의 십자가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어떤 거대한 십자가, 신기루와 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 위해 우리가 부인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제가 모스크바에서 집회하다 만난 재미있는 청년이 있습니다.

40이 다 돼가는 나이에 아직 결혼하지 못한 이 청년은 결혼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함께 침대 기차를 타고 밤새 모스크바에서 빼째르부르크로 가는 동안 노총각의 꿈을 듣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침대 기차를 탈 때마다 이런 상상을 합니다. 밤새워 달려야 하는 기차 안에 우연히 금발의 예쁜 아가씨가 이 칸에 들어와 같이 가는 겁니다. 그리고 우연한 그 만남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러시아에서 연출을 전공하고 연극을 하는 친구이기에 그런 로맨틱한 꿈을 꾸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이런 꿈도 꿉니다.

목사님! 저는 영화 같은 장면을 상상합니다. 어느 날 슈퍼에 갔는데 어여쁜 아가씨가 물건 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순간에 나타나서 대신 돈을 지불하고는 시작되는 로맨스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답니다.

어느 날 슈퍼에서 앞에 있는 사람이 물건을 샀는데 물건 값이 모자라 머뭇거리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결국, 그 손님은 돈이 모자라 장바구니에 놓았던 소시지 하나를 덜어 놓아야 할 형편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예쁜 아가씨가 아니라 할머니였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순간 마음속에서 그런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예쁜 아가씨는 아니지만 네가 대신 돈을 내주어라!”

결국 음성에 순종해서 점원에게 그 소시지를 다시 담으라고 말하고는 돈을 내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도 점원도 이상하게 쳐다보더랍니다. 급기야 할머니가 자신에게 묻습니다. “왜 그러는 겁니까? “왜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까?”

그 때 가슴속에서 뜨겁게 울리는 한마디를 했답니다.

 

보그 류비트 바스러시아 말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다시 반복해서 말을 했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말을 하는데 한없는 기쁨이 마음속에 찾아오더랍니다.

허황된 꿈이 아니라 지금 자신 앞에 펼쳐진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전달하게 하신 그 일이 기쁨으로 다가오더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그런 마음으로 사명의 십자가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는 재밌는 말이 있었습니다. ‘소사’(小使) 라는 단어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많이 쓰던 단어라서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만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서 심부름하던 사람을 소사라 불렀습니다. 면사무소에서 심부름 하는 사람도 소사라고 불렀습니다.

 

소사(小使), 대사(大使), 특사(特使), 밀사(密使) 등을 말할 때, ‘는 심부름꾼을 의미합니다. , 소사는 작은 일을 심부름하는 사람, 대사는 큰일을, 밀사는 아주 비밀스러운 일을, 특사는 특별한 일을 심부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말에 공통점이 무엇인가요? 일의 크기와 관계없이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위대하거나 하잘것없어도 동일하게 심부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심부름은 자신의 것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져야 하는 십자가는 무엇인지, 그것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주 쉬운 불편한 진실은 아닐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 마음속에서 생각나는 이유들과 욕심을 거부하라는 것은 아닐까요?

 

사명 앞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사명즉 심부름의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보내신 이가 돋보이고, 보내신 이의 일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을 지나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공생애 3년을 통해 많은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고 앉은뱅이도 일으키셨으며, 물 위를 걷는 초자연적인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 됨이란 자기의 구원을 포기하는 데 있다는 것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고통 가운데, 그리고 사람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며 고통 가운데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나요?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분문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 세례요한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는데, 그분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위대한 분 앞에서 우리의 자그마한 재능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목회자가 가족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죠.

목회자들이 다른 목회자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목회자의 삶이 어떤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명자로 사용하시는 것은 꼭 자격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사명에 있어서 우리를 높이시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우리를 보내신 이를 위해 기꺼이 낮아지기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격이 안 되는데 자신을 세우시는 주님으로 인해 죄송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업적이 드러나지 않거나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묵묵히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골고다 언덕 즉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셨을 때 그곳에는 3개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33절을 보세요.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십자가는 당시에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중의 하나였습니다. 가장 중한 죄를 지은 사람을 죽이는 사형 도구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양편에 있었던 행악자는 아마도 가장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339절을 보세요. 십자가 위에서 그중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충돌 질합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예수님에게는 충분히 그럴 능력도 자격도 있으니 내려와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그런 능력도 충분하고, 그럴 자격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던 한 강도에게 있어서도 그 십자가는 무겁고, 아프고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죗값을 치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구원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구원이란 영적인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의 죽음을 벗어나서 아래로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유혹이 무엇입니까? “위대함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이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형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추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 사순절을 지나는 이때, 우리가 보아야 하는 내면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을 비난하며, 자신의 십자가도 피해 보려는 비열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뭐 대단한 이런 죽음의 십자가 말고, 아주 작은 십자가부터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늘 특혜를 보려는 마음, 어려움을 피해가려는 생각,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 같은 것들 말입니다.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는 모습들은 아닌지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정당한 대우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명 앞에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정당한 대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위해 는 쇠할 수 없느냐는 것이죠.

 

세례요한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22절 이하에 보면, 본격적인 예수님의 공생애의 행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침례를 베푸시더라.”

 

이미 요한복음 2장에서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을 보이신 후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본래 세례를 주는 일은 세례 요한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며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충동질 하며 비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넘어지면 사명의 십자가를 버리게 되는 것이죠. 요한복음 326-30절을 보세요.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요한의 훌륭한 점은 끝까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사명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먼저 예수님을 통해 보아야 하는 것이 있고, 세례요한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누군가가 충동질하는 것 때문에 십자가를 버리려 한 적은 없나요?

그리고 가만히 그 속내를 보면, 그 충동질이란 결국 우리의 명예욕과 욕심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었나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솔직하게 자신을 보지 않으며, ‘내가 흥하기위해 나를 보내신 그분을 쇠하게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재 우리교회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겁한 변명들이 바로 그런 욕심의 찌꺼기들입니다. 혹시라도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차를 사거나 바꿀 때 많이들 고민합니다. 어떤 차를 타야 목회자에게 합당한가?

 

여기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목회자든 나는 이런 차를 타려고 했는데 교인들이 권해서 이 차를 탑니다.”라고 변명하고 있다면 자신의 욕심에 굴복한 증거입니다.

 

종종 어느 단체나 교단의 감투를 써야 하는 자리에서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이 나는 원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이 자리에 나오라고 하네요.”라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십자가와 사명을 포기하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의 구차한 변명일 뿐입니다.

 

만일 사람들의 충동에 세례요한이 격분했다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명을 잃어버렸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만일 예수님께서 한 강도의 충동질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하나님의 사명을 저 버린 것이 아닐까요?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능력을 보여줬을지 모르지만, 사명의 십자가를 포기한 것이지요.

 

아마도 이런 유사한 일들을 우리는 인생에서 수없이 경험하며 살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도 수없이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한편 강도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정말 힘이 있는 분이라면, 이 십자가를 지지 않도록 능력을 보여 주세요.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고 왕이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참다운 능력이란 십자가를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편 강도의 비아냥거림에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오래전 모스크바에서 집회를 마치고 빼째르부르크라는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잘 정돈된 성당들을 보게 됩니다. 러시아의 실세인 푸틴 대통령의 어머니가 신실한 정교회 신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교회에 신경을 쓰는 모양입니다.

 

그곳에서 보았던 카잔 대성당이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요.

옛날 카잔이라는 도시에 불이 나서 성당이 완전히 잿더미가 돼 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당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그림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그 그림을 가지고 와서 성전을 지었기 때문에 카잔 성당이라 불리는 곳이죠.

 

제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그림 앞에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당 앞 한쪽에는 예수님의 가시면류관과 십자가 조각을 모셔놓은 곳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앞에서 바닥에 입을 맞추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와 그렇게 하는 이유는 화재 속에서 타지 않은 마리아 그림의 효력으로 자신들도 재난을 면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죠.

안내하는 분에게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전시한 면류관과 십자가 조각이 진짜인가요?” 그랬더니 안내하는 사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세계 곳곳에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과 십자가 조각이라고 모셔놓은 것을 다 모으면 아마도 상당한 양이 될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예수님을 믿고 예배하는 곳이 불행을 면하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장소로 변모해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이 지셨던 사명의 십자가를 보면서 사명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피할까? 를 고민하며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진리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고 평안함을 찾고, 복을 빌고 있는 여러분들의 모습에 참 기쁨이 있으십니까?

사순절은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세례요한을 충동질하는 어떤 사람들처럼, 그리고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도 구원해 보라고 조롱하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아니 이 순간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며 기적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아니 아주 아름답게 포장을 하지요,

하나님 제가 성공을 하고 잘 돼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제 사업이 잘 돼야 헌금도 많이 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구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명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제 얼굴에 침 뱉는 수치를 감수하겠습니다.”

사실 능력의 근원이 십자가를 지는 데서 비롯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실 때,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조롱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할 때, 한 사람은 마땅히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물론 그 십자가는 사명의 십자가라기보다는 죄 때문에 지어야 하는 형벌의 십자가였을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 강도를 평가절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데, 낙원을 허락하신 주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의 사명은,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하는 일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한 대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대가를 져야하는 것도 어쩌면 우리의 사명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누가복음 2341-42절 말씀에 나오는 한 강도의 말입니다.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십자가를 지는 그 강도가 주님께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피해 갈 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사명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마땅한 대가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 앞에 구할 수 있는 것은 자비밖에는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이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4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 순간 이 약속을 받은 강도의 고통이 덜어지거나 기적적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혼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여러분들 앞에 놓인 십자가 역시 능력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지금 여러분들이 당하는 고통이 당연한 십자가, 대가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우리 민족이 당해야 하는 고통,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근원들이 사실은 당연히 져야 하는 십자가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행악자들이 져야 하는 십자가도 그 가운데 서 있던 예수님의 십자가는 추상적인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생각으로 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두 행악자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기도, 죄를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를 피해가려는 어리석은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려는 자들을 위해 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올바른 사순절의 묵상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 머무르는 약속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우리들의 삶의 중간에 곧게 서 있을 때,

세상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영혼을 팔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이 잘못 살았던 삶에 대하여 누군가에게 핑계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당하는 아픔에 대하여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당당하게 서 있는 십자가가, 가장 영광스럽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그 어떤 세상의 고통도 여러분들의 영원한 생명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과,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보는 십자가가 다른 것입니다.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것이 사명입니다.

주변의 어떤 소리에도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누르는 것이 사명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헨리 나우웬/김명희 역/IVP /3:16-17

2015-09-02 18:08:14

 

*출처

심오한 내용이므로, 정독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Short Summary

이 책은 크게 '사랑받는 자가 되다',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다',

'사랑받는 자로 살아가다'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사랑받는 자'라는 단어를 키워드로 써 내려갔다.

 

이것은 예수님이 3년간의 이 땅에서의 사역을 하시기 직전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왔던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를 모티브로 했다.

 

예수님의 사역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도 동일하게 들어야 할 하나님으로부터의 음성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라고

헨리 나우웬은 말한다.

 

 

머리말 - 우정이 시작되다

 

이 책은 오랜 우정의 열매이다.

10여 년 전 예일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다.

한 청년이 뉴욕 타임즈에 들어갈 기사를 쓰기 위해 나를 인터뷰하러

사무실로 찾아왔다.

30분가량 우리 둘 다 별 관심이 없는 질문과 응답이 오가고 인터뷰는 끝났다.

 

그가 막 노트를 가방에 넣고 의례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때,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때요, 하는 일이 마음에 듭니까?”

놀랍게도 그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아뇨, 그저 직업이니까요.”

싫다면 왜 그 일을 하죠?”

물론 돈 때문이죠.”

 

문득 나는 그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치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는

'사회'라는 쇠창살 속에 갇혀 있는 죄수 같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연민과 사랑을 느꼈다.

 

그의 예리함, 자신에 대한 솔직함, 사심 없이 나를 믿어 주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예수님이 부자 청년을 보시고

사랑으로 가득하셨을(10:21)' 때 일어났던 일과 아주 흡사한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억눌린 상태에서 풀어 주고,

그가 자신의 가슴속 깊은 욕구를 성취할 방법을 발견하도록

돕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용솟음침을 느꼈다.

 

몇 달 후 프레드는 나의 권유에 따라 예일 신학교로 왔고,

소설을 쓰기 위해 애쓰면서 일 년을 보냈다.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되었고,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나는 그 우정의 결과로

이 책을 쓰고 있다.

 

우정이 시작될 때부터 우리는 서로의 종교적 배경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레드는 나를 가톨릭 사제로 존경했고,

반면 나는 그의 세속적 유대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둘 다 나이가 들고 성공, 경력, 명성, , 시간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자,

우리 관계의 중심에는 의미와 목적의 문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차이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유사점은 더 분명해졌다.

우정이 깊어지고 견고해짐에 따라, 영적으로 같은 기반을 갖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뚜렷해졌다.

 

유태인인 그는, 명백히 기독교적인 용어나 오랜 교회 생활에 근거를 둔 말로는

위로나 도움을 전혀 얻을 수 없었다.

 

프레드의 친구들을 알게 되고 점차 그들의 흥미와 관심에 공감하게 됨에 따라,

나는 세속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성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말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그와 그의 친구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영성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교수님이 뭔가 하셔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프레드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깊은 갈망에 대해,

우리의 수많은 소원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생존 전략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뢰에 대해서,

정서적 욕구를 채우는 새로운 방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변화무쌍한 우리의 관점보다 더 큰 비전에 대해,

대중 매체의 소음보다 더 깊이 있는 목소리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들보다 위대한 그 무엇이나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우리 시대와 사회의 중요한 모든 문제를 다룰 수는 없지만

 

생명, , 진리를 깊이 추구해 나가는 길동무로서

내가 알고 사랑하게 된 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적 추구에 대해 경청하기를’, 또 여기에 동참하기를 소망한다.

 

 

1. ‘사랑받는 자가 되다 (타고 나다)

 

모든 인류를 향한 성경의 가장 깊은 진리

자네가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위해 영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써 달라고 한 후로,

나는 자네가 내 편지(이 책)를 다 읽고 났을 때

정말 꼭 기억하길 바라는 한마디(액기스)가 무엇인지.. 계속 생각해 보았네.

 

지난 한 해 동안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 특별한 단어가 서서히 떠올랐지.

바로 사랑받는 자라는 단어였네.

난 그 단어가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위해 내게 주어진 단어라고 확신하고 있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나사렛 예수의 세례 이야기에서

이 단어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6-17).

 

수년 동안 이 말씀을 읽고 설교도 하고 강의도 했지만,

이 말씀이 내 종교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뉴욕에서 대화를 나눈 이후였지.

 

수많은 대화 덕분에 난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이 말은 모든 인류를 향한

가장 깊은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지.

 

인간 존재의 핵심 진리 - ‘나는 사랑 받는 자

프레드, 나의 유일한 소망은 자네의 존재 구석구석에서

이 말씀이 울려 퍼지게 되는 것이네.

 

자네에 대한 우정으로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자네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네.

또 나는 그 사실을 나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을 때에만

그것을 자네에게 선물로 가르쳐 줄 수 있네.

 

우정이란 게 무엇인가?

우리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선물을 서로 나누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받지 못 할때의 부작용

(사랑과)정반대의 목소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걸세.

우리가 가치 없고 사랑스럽지 못하다는 목소리를 믿게 될 때,

성공, 명예, 권력은 쉽게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다가오지.

 

그러나 진짜 함정은 자기 거부일세. 아마도 자네는 자기 거부보다도

교만이라는 유혹에 더 빠지기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네.

그러나 사실 교만이란 것도 자기 거부라는 동전의 다른 면이 아니겠는가?

 

영적인 삶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거부일세.

그것이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거룩한 목소리를 부인하게 하기 때문이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핵심 진리를 표현한 것이네.

 

사랑받는 자임을 발견하라

자네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그 목소리에 아주 세심하게 귀 기울이는 순간마다,

자네는 더 오래 그리고 더 깊게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내면의 욕망을 발견하게 될 걸세.

 

그것은 사막에서 샘을 발견한 것과도 같지.

일단 물기가 있는 땅을 접하게 되면 더 깊이 파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난 요즘 파고 들어가는 일을 하고 있네.

그리고 이제 막 건조한 사막을 뚫고 솟아나는 작은 물줄기를 발견했네.

나는 계속 파 들어가는 작업을 해야만 하네.

그 작은 물줄기는 사막 같은 내 삶 안에 깊숙이 숨어 있는

거대한 저수지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지.

 

우리 삶에는 아주 거대한 모래더미가 있을지도 모르네.

그러나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그분이,

우리가 그 모래를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걸세.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물을 발견하고자 하고

그 물을 마시고자 하는 강한 열망뿐이네.

 

 

2.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다 (이 진리로 성숙해 가다)

 

하루 종일 이 진리를 묵상하시라

자넨 실용주의적인 기질이 다분하니까,

우리가 어떻게 사랑받는 자가 된 상태에서(원리, 이론)

온전히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겠지.(실제 적용)

 

이건 아주 중요한 질문이네.

이 질문이 우리를 낭만주의나 이상주의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일상생활의 아주 구체적인 부분을 다루게 하니까 말일세.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는 것이란, 실제로 매시간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상사 속으로 그 계시된 진리를 붙잡는 것이네.

우리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우리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진리가

자리 잡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를 온전히 주장함으로써 큰 즐거움과 평화가 생겨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말하고 사랑하고 놀고 또 일하는 와중에서

생생하고 실제적으로 드러나게 되지.

 

나는, 아래 네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됨을 알게 되었네.

-선택받은(taken),

-축복받은(blessed),

-상처받은(broken),

-나누어주는(given).

 

내 경험을 통해 볼 때, 4가지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어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네.

 

 

1. 선택받은 자

선택받았다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되는 일의 토대가 된다네.

 

사랑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붙잡힌 존재가 되었음을 주장해야만 하네.

영적인 삶의 첫 단계는, 나의 전 존재가 이미 붙잡힌바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네.

 

거절과 거부로 둘러싸여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놓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적 투쟁이기도 한 이 투쟁을 위해 어떤 지침이 있을까?

 

첫째, 자네는 자네에 대한 세상의 거짓된 속삭임을 계속해서 밝혀야 하네.

이 거짓된 느낌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이건 진리가 아니야.

나는 날 귀히 여기셔서 영원 전부터 사랑받는 자로 부르시고

그 영원한 품에 안전하게 품고 계신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야.”

 

둘째, 자네에 대한 진리를 말해 주고,

선택받은 자라는 자네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을 상기시켜 주는

장소와 사람들을 계속해서 찾아야 하네.

또한 삶과 말씀을 통해 우리를 그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상의 수많은 사람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네.

 

셋째, 자네가 선택받은 사실을 계속해서 감사해야 하네.

감사는 자네가 우연적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존재라는 의식을 심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네.

사랑이 사랑을 낳듯이, 감사는 감사를 낳지.

 

내 경우, 이 세 가지 지침은 선택받은 자로 살기 위한 영적 훈련이었네.

마음의 훈련을 계속했을 때, 나는 나의 그늘을 뛰어넘어

진리에서 나오는 빛으로 들어갈 수 있었네.

 

전도의 열망

또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은 열망을

곧 발견하게 되었지.

다른 사람들 역시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는 것,

그건 선택받은 사실이 주는 커다란 기쁨이네.

 

상대도 역시 사랑받은 사람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신뢰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의 귀중함도,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그들의 독특한 자리도

인식할 수 있게 되네.

우정이란 서로가 선택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존재라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는 것이네.

 

 

2. 축복받은 자

 

서로 축복하라, ‘사랑 받은 자임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네.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칭찬과 비난의 구분을,

선행과 악행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지.

 

그것은 다른 사람의 근본적인 선함에 다가가는 것이며,

그가 사랑받는 자 되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네.

 

우리가 서로에게 주는 축복은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자아에 대한 가장 심오한 확증이네.

선택받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네. 우리는 또한 계속되는 축복(격려)을 필요로 하네.

 

우리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 분은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고

오히려 삶의 순간마다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듣게 해주는 축복 말일세.

 

사랑받는 자로 축복받으신 예수님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나서 축복의 음성을 들으셨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이 바로 축복이지.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찬양과 비난,

사랑과 저주 가운데서 예수님을 지탱시켜 준 것이네.

 

보통 자기가 저주받고 있다고 느끼는 기분은

축복받고 있다는 기분보다 더 쉽게 생기는 법이지.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계속 키워 내기에 충분한 논거들도 찾을 수 있네.

 

우리는 내면에서 자기자신이 악하고, 나쁘고, 썩었고, 가치 없고, 쓸모없다는 소리,

질병과 죽음으로 끝나 버릴 운명에 불과하다고 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네.

그러나 이러한 시끄럽고, 난폭하고, 소란스러운 저주들은 진리가 아니네.

그것들은 거짓말이지. 믿기 쉬운 거짓말, 그러나 분명히 거짓말이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축복을 듣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축복받았다는 사실이 단지 감상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형성하는 진리라면,

우리는 분명하게 이 축복을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하네.

이제 자네가 축복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도록 두 가지 제안을 하겠네.

그것은 기도그리고 함께 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네.

 

나에게는 기도가 축복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점점 더 좋은 방법이 되고 있네.

그것은 고된 훈련이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본 적이 있나?

 

우리 세계의 소리를 넘어서 침묵 속으로 들어가기가 쉬운 일은 아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독을 감싸 안고 침묵과 친구가 되려 한다면

그 축복의 목소리를 알게 될 걸세.

 

나는 환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귀, 내적인 마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네.

하루에 30분씩 사랑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지속해 나간다면,

서서히 자네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걸세.

 

은밀하게 나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을 일상에서 발견하시라

그리고 두 번째로 제안하는 것은, ‘함께 거하는 삶을 계발하라는 것이네.

거리에서 우리를 멈춰 서게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축복,

새 생명에 대해 알려주는 신선한 꽃과 나무들의 축복, 음악, 미술, 조각,

건축의 축복 등.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축복도 있네.

 

바로 감사, 격려, 애정, 사랑의 말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축복이지.

우리는 그 축복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하네.

그것들은, 은밀하게 숨어 있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기억나게 하지.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에 대해 좋은 것을 말씀해 주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말일세.

 

우리가 축복받았음을 주장하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싶은 깊은 욕망으로 이어진다네.

축복받은 사람의 특징은 그들이 어디를 가든, 항상 축복의 말을 한다는 것이네.

 

자네가 축복받았다는 사실에 접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을 축복하거나, 그들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들의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이끌어내는 일이 얼마나 쉬워지는지 알면 놀랄 걸세.

 

축복받은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축복하네.

내면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를 축복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

어둠은 더 이상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 못하네.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단어들을 알게 하실 것이고,

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축복받은 존재임을 보여 주실 걸세.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리를 소유한다면,

우리는 열린 눈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볼 수 있네.

 

 

3. 상처받은 자

 

상처는 보편적이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상처에 대해 이야기했었지.

자네는 고통스러운 이별과 이혼을 겪어야 했고, 나는 오랜 침체의 시기를 겪었네.

자네는 업무 가운데서 많이 낙담했고, 진짜 소명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방황했지.

반면 나는 계속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많은 요구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치고 실망했지.

분명 선택받고 축복받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선지자들도

모두 상처로 얼룩진 삶을 살았네.

 

 

 

상처받은 사람들은, 치료보다, 더욱 파멸의 길로 내닫는다.

 

에이즈는 아마 현대인의 상처를 가장 뚜렷하게 말해 주는 것 중에 하나일 걸세.

난폭한 포옹 속에 사랑과 죽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네.

친밀함과 교제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이 그것에 생명을 건 것이지.

 

우리 사회의 공허하고 커다란 공간 속에서 절규하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네.

계속해서 외로움 가운데 사느니,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일세.

그래, 에이즈의 위기는 우리 인간의 상처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조망을 요구하고 있네.

 

상처와 친해 지시라

우리가 어떻게 이 상처에 반응할 수 있겠는가?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싶네.

첫째는 상처와 친해지는 것이고,

둘째는 그 상처를 축복 아래로 가져다 놓는 것이지.

 

상처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그것에 정면으로 부딪혀서 그것과 친숙해지는 것이네.

우리가 거절, 이별, 무시, 학대, 감정적 조작 때문에 생긴

심한 고뇌와 고통을 직면하지 못하고 도망가기만 한다면,

이것들은 우리를 마비시킬 뿐이지.

 

인간의 고통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기쁨과 평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곳으로 이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네.

나는 그것이 분명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네.

 

우리의 진정한 보살핌은,

우리의 상처를 기쁨으로 이끄는 문으로 만들도록 기꺼이 서로를 도와주는 것이네.

 

상처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그것을 축복 아래로 갖다 놓는 것이네.

보통 우리가 상처에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을 저주 아래에 놓고 살기 때문이지.

우리의 아픔을 통해 자신을 쓸모없고 가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일세.

 

그러나 크고 무거운 짐이라도 축복의 빛 아래 거하고 있을 때는

가볍고 쉬운 법일세.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도전이 되고 낙심할 이유가 될 듯한 일이

정화의 근원이 되지.

형벌처럼 보이던 일이 불필요한 부분을 정리하는 일이 되고,

거절 같던 일이 더 깊은 교제에 이르는 길이 되네.

기쁨과 슬픔은 더 이상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로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려는 동일한 소망의 양면이 되는 거지.

 

자기 상처를 통해.. 남을 돕는 치유자로 승화되시라

우리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결론짓기 전에,

나는 다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말이 함축하는 바에 대해 말하고 싶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은 동시에

거의 없다는 사실을 더더욱 잘 알아 가고 있네.

그래, 사실 우리는 나누어주기 위해 선택받았고 축복받았고 상처도 받았네.

내가 지금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에 관한 것이네.()

 

 

4. 나누어 주는 자

 

사랑받는 자의 삶의 네 번째 모습은 나누어주는 것이네.

우리 둘 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로 얻는 기쁨을

경험으로 알고 있네.

자넨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했고, 나는 항상 자네가 준 것으로 인해 감사하고 있네.

 

우리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우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네.

고도로 발달된 경쟁심과 탐욕이 판치는 세상에서,

주는 기쁨을 상실한 모습을 보고 있기란 슬픈 일이네.

 

종종 우리는 행복이 소유에 달려 있는 것처럼 살고 있네.

그러나 나는 소유 때문에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을 본 적이 없네.

진정한 기쁨, 행복, 내적 평화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생긴다네.

행복한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지.

그러나 그 진리는 대개 우리가 상처에 직면할 때 발견하게 되네.

 

자기 상처로 깨어진 사람이.. 남을 잘 돕는다.

수년 동안 우리의 우정이 자라난 방식을 좀더 숙고해 보면

우리의 상처와 서로에게 주는 능력 사이에 신비한 연결 고리가 있음을 깨닫는다네.

우리의 상처 때문에 서로의 삶을 나누고 서로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더 깊이 알게 되었지.

빵을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쪼개는 행동이 필요하듯 우리의 삶도 그러하네.

 

함께 식사하라

상처를 안고 사는 서로에게 나누어주고자 하는 소망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되는 때는 함께 식사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하네.

나는 함께 떡을 뗀다는 표현을 아주 좋아하네.

 

함께 먹고자 하는 소망은

서로에게 양식이 되고자 하는 더 깊은 욕망까지 표현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사랑받는 자로서 우리의 가장 완전한 모습은 세상의 양식이 되는 것이네.

그것은 서로에게 우리 자신을 주고자 하는 가장 깊은 욕망을

가장 친숙하게 표현한 것이지.

 

삶으로 우리를 주는 것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네.

그것은 삶으로 우리를 주는 것죽음으로 우리를 주는 것이네.

우선 우리의 삶 자체가 나누어 줄 수 있는 훌륭한 선물이라네.

 

서로에게 우리의 존재를 주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독특한 재능이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주어야 하는 가장 큰 선물은 내 삶의 기쁨,

나의 내적인 평안, 나의 침묵과 고독, 나의 행복감이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네.

 

우리의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의 은사니까.

우정, 친절, 인내, 기쁨, 평안, 용서, 온유, 사랑, 희망, 신뢰 그리고 그 외

다른 많은 것들. 이것들이 우리가 서로에게 주어야 하는 진정한 은사들이네.

 

 

두 번째로 우리는 <죽음으로> 우리 자신을 주도록 부름 받았네.

우리가 나누어주는 삶을 살기 위해 상처받고 깨어진 존재가 되었다면,

최종적인 상처가 되는 죽음은

우리 자신의 최종적인 선물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에게는,

죽는다는 것이 온전히 사랑받는 자가 되는 길로 가는 문이 된다네.

선택받았고, 축복받았고, 나누어주기 위해 상처받았음을 아는 자들에게

죽음이란 순수한 선물이 되는 길일세.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가 사랑했던 이들의 죽음은,

서로에게 새롭고 더 근본적인 교제, 새로운 친밀감,

새로운 소속감을 향한 가능성을 열어 준다네.

 

정말로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면

죽음은 사랑의 끈을 강하게 하고 깊게 하는 잠재력이 있을 걸세.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신 후에야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네.

 

그러나 그것은 사랑 안에서 죽는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아니겠나?

우리가 죽을 때에만이 우리 영혼이 온전히 그 전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네.

 

그러나 준비 없이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네.

그래, 훌륭한 죽음이라는 것이 있지.

우리는 자신이 죽는 방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네.

사랑받는 자의 죽음은 많은 이들의 삶 가운데서 열매를 맺게 되지.

 

우리의 짧은 인생이 시간을 초월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하네.

우리는 그렇게 되기로 선택을 해야 하고,

우리를 기억할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화와 생명을 가져다 줄 영혼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해야 하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1226년에 죽었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네.

그의 죽음은 진정한 선물이었지. 그는 죽었지만 결코 죽지 않았네.

그의 생명은 전 세계에서 새로운 열매를 맺어 가고 있고,

그의 정신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전수되고 있네.

 

몇 년 내에 우리 둘은 땅에 묻히거나 화장될 걸세.

이 세상에서 쉽게 망각되어 버릴 우리의 짧은 여행이

모든 시간과 장소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삶을 나누어주는 일로 지속될 걸세.

일단 우리의 죽을 육체에서 자유로워진 사랑의 영은,

오고 감을 듣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조차도 원하는 대로 날아다닐 걸세.

 

그래서 죽음으로써, 사후에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 듯

성 프란시스나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목사님처럼..

 

 

3. 사랑받는 자로 살아가다 (‘영생의 삶으로 살아가시라)

 

주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과 연합해야

삶이란 우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시고

우리가 ,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수많은 기회를 만들어 주시지.

우리 내면에 ,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삶이네.

 

사랑받은 자는.. ‘연합을 도모하며 산다.

영적인 삶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파괴와 폭력을 일으키는

수많은 분리 현상을 거스르는 것이네.

이러한 분리 현상들은 내면적이기도 하고 외면적이기도 하지.

 

내 속에서 발견되는 기쁨과 슬픔의 분리 현상이나

내 주위의 문화, 종교, 종족들의 분열은

모두 어두움의 악마적인 세력에서 그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네.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성령은 통일체를 만들고

연합하게 하시는 영이시네.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분별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연합, 치유, 회복, 화해의 순간들을 알아내는 것이네.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마다, 분열은 사라지고 연합된 모습이 나타난다네.

 

매 순간 사랑하며 영생의 삶을 살며, 영생을 준비하시라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겠나?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위로부터의,

다시 말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사랑받는 자로서의 삶이라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독특한 기회가 된다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가?

나는 그것이 우리가 태어난 ’, 하나님이 거하시는 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네.

그러기에 우리의 죽음은 그분께 돌아가는 순간이 되는 것이지.

 

우리의 죽음이 충만한 삶을 향한 문이 되기를 기대할 수 있으려면,

우리 생애의 많은 순간들에 성령님이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요구해야 하네.

영생이란 우리 존재의 종말에 갑자기 다가오는 어떤 놀라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되는 우리 존재와 삶의 온전한 계시라고 할 수 있네. (매우 신학적인 개념)

 

남은 삶은 사랑할 수 있는소중한 기회

비록 나도 이 세상의 많은 두려움과 위협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땅에서의 몇 년(남은 인생?)

훨씬 거대한 사건(영생?)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네.

 

그것은 시간 속으로의 사명, 아주 즐겁고 흥분되기까지 한 사명이라고 생각하네.

그 사명을 이루도록 나를 보내신 그분은

내가 집으로 돌아와 이 땅에서 배운 것을 이야기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 /3:7-12/ 곽선희 목사

2014-11-24 23:08:12

 

철학자인 파스칼은 그의 팡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거니와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들은 천사처럼 살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천사같은 그런 존재로 살아가겠다고 높은 이상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 사는 것은 너무나도 모순적입니다. '짐승처럼, 그것도 가장 사악하고 더러운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고 고민이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을 비판하는 확실한 정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사함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도저히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를 많이 열거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 두가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가 회개하기 위하여 범죄하는 거죠. 지금 뉘우치는 것이 있어요. 회개하고 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 다른 죄를 짓는 거예요.

 

또 하나는 회개하고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죠. 회개하고 또 죄짓고 또 죄짓고.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늘 회개하며 늘 같은 죄를 반복하는 이러한 죄는 영영 사함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회개가 없기 때문이요. 회개하지 않는 죄가 사함 받을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열매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라고 하면 먼저 죄 짓는 죄가 있고, 둘째는 회개하지 않는 죄가 있고, 셋째는 변명하는 죄가 있고,

 

넷째는 죄를 정당화하는 죄가 있습니다. 다섯째는 정당화하기 위해서 내가 지은 죄를 죄 아니라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여기까지 나아가면 이제는 강퍅하게 되는 것이요 영영 구제 불능한 운명에 빠지게 됩니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사람이라는 것은 외부적인 요구에 대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보호장치를 몇 가지 가지고 있는 그런 경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가 변명입니다. 잘못된 것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밖에서 그것에 대하여 비판할 때에 또 자기 양심도 이것을 비판하게 될 때 변명을 하게 됩니다.

 

이러면은 영영 영영 구제받을 길이 없습니다. 변명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어떤 일에도 믿는 사람은 변명은 하지 말아야됩니다. 최소한도 변명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어떤 일에도 변명은 생각하지도 말 것입니다. 대체로 두가지로 변명을 합니다.

 

하나는 'Yes, but' 또 하나는 '단지 하였더라면' 하는 가정법을 씁니다. 먼저는 보세요. 예컨데 학생이 공부를 잘해서 시험을 잘 봐야 하는데 '잘 보려고 했는데 그러나 다른 과목도 공부해야되기 때문에 이 과목은 망쳤다'는 거요.

 

그렇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그러나' 하고 무엇 무엇 무엇 변명을 늘어놓아요. 또 한가지는 가정법을 써요. '만일에 나도 대학을 나왔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대학 못 나온 열등의식 때문에 이같은 일들이 있어졌다' 변명합니다.

 

'내가 만일에 돈이 있었다면, 내가 만일에 건강했다면, 나는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의 부족한 처지를 비롯해서 변명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 일로부터 정직함으로부터 자기를 회피하는 행위입니다.

 

또 한가지는 공격형입니다.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실패에 대한 원인을 타인에게 돌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돌려서 '너도 그랬지' '너라는 사람이' '너 때문이요' 이렇게. 공격형, 그런 심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아주 체질이 된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반성할 줄을 모릅니다. 회개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거리를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딜레이(Delay)형입니다. 회개는 하겠는데 '좀 더 있다. 아직은 이르다. 회개를 해도 하기야 죽기 전에 해야지. 예수님 옆에 있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도 직전에 회개했는데

 

아주 직전에 그곳까지 가서 해야지.' 자꾸 미뤄나가는 그런 가운데서 자기와 문제를 이렇게 문제되지 않게 끌고 나가려고 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게 체질이 됩니다. 이게 성품이 됩니다. 그러면 진실은 아주 멀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배제형이 있습니다. 이건 아예 문제 삼지를 않습니다. '나만 죄인이냐? 죄가 그것 뿐이더냐?' 세상을 탓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배제해 버리는 이러한 심리입니다. 이것은 강퍅하게 된 것이올시다. 다시 돌이킬 길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광야에 세례요한은 외칩니다.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 있어서 회개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회개란 뭐냐?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3장 그리고 호세야 14장에서 누누이 설명합니다. 여러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회개란, 죄를 떠나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먼저는 회개란 후회와 뉘우침만은 회개가 아닙니다. 한평생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려도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또한 죄에서 떠나는 행동이 있어야 됩니다. 죄스러운 생활에서 떠나야 되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참 엄격한 말씀이올시다.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형벌이 무섭고 비난이 무섭고 아니 지옥이 무서워서 그렇게 회개하는 것, 다시 말하면 강요된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자발적이래야 됩니다.

 

누가 하라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벌이 무서워서 심판이 무서워서 형무소가 무서워서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비난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강요되어서 억지로 하는 회개, 이런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남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양심을 내가 살피며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회개하는 회개만이 진정한 회개요 또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는 하면서도 이 현실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떠나기를 싫어합니다. 아주 이상합니다. 담배가 나쁜 줄 알면서도 끊지 않습니다. 이건 나쁜 줄 알면서도 여전히 거기서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그것을 즐기고 있어요. 심지어는 아주 위험한 모험을 모험을 즐기고 있어요. 언제까지 그럴 것입니까? 벌써 죄악된 생활에 길들어 졌어요. 심리적으로 길들어져서 아주 그 생활에서 떠나기를 싫어해요. 저는 그런 학생을 보았어요.

 

3학생이에요. 공부 열심히 하다가 병들어서 병원에 갔어요. 물론 병원에 있는 동안 공부 안했어요. 병은 나았어요. 그런데 자꾸 아프데요. 아픈 동안 모든 문제가 없으니까 그렇게 잔소리하던 어머니도 잔소리가 없고 그 병원에서 나오려고 하질 않아요.

 

의사는 아픈 거 없다는데 여기가 아파요. 저기가 아파요. 내 그런 놈을 봤다니까요. 정말 딱 하더라고요. 그래서는 아침 늦게까지 안 일어나요. 도대체가……. 가만히 보았더니 여기서 헤어나오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너 낳고자 하느냐?" 그랬어요.

"! 나아야지요." 그래서 "거짓말하지마!" 그랬습니다. 여러분 안주하려는 마음이 무서운 것이에요.

 

, 그렇다면 회개라는 것은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얘기할 수가 있는 거예요. 먼저는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 됩니다. 내가 회개하고 싶었는데 그만 갑자기 차사고로 죽었다. 이거 회개 못합니다. 그래서 전 생각합니다. 가끔 그런 지도도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가지고 몇 달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친구를 불러다가 사과하고 자기 부인에게 내가 그 동안 잘못했소 그런 장면을 내가 볼 때 본인에게 얘기합니다. 당신은 복이 많다고 죽고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오. 회개할 기회가 있잖아.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 그래요.

 

그 때 가서 울음을 터뜨리는 걸 봅니다. 만일에 꽝하고 죽었으면 어떻게 되겠냐. 이같은 회개를 할 수 있었겠냐.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돼요. 가룟 유다라는 사람을 여러분이 압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번 여러번 기회를 주셨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고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가담을 했고 그 다음에 뉘우쳤지마는 돌이킬 길이 없었어요. 이미 때는 지났어요. 이런 우스운 얘기가 있습니다. 11시에 회개하겠다고 했는데 10시 반에 죽었다고요.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 됩니다.

 

또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됩니다. 무슨 믿음인가. 사랑에 대한 믿음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신다. 내게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그것을 믿을 때 진정한 회개가 있는 거요. 아무리 때려도 거기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아이들 우는 거 같으면서 잘못했다고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두고보자 그런데요. 참으로 회개는 사랑을 깨달을 때만 있습니다. 어떤 고등학교 학생이 아버지 어머니 잔소리가 싫어서 집을 나가 버렸어요. 어머니는 기가 막힙니다.

 

그럴 줄은 몰랐는데 한 달을 수소문 해가지고 겨우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았습니다. 계단 밑에 있는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가지고 거기서 자취를 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아이가 없을 때 들어가보고, 보니 방안이 엉망이에요.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고 옷은 여기저기 벗어가지고 내던졌고. 어머니가 하루종일 다 청소하고 말끔하게 씻어줬어요. 냉장고를 가득히 채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않고 냉장고 벽에다가 그 아이의 백일사진을 떡 붙여놓고 왔습니다. 어머니가 백일 된 아이를 안고 너무 좋아하는 그 모습을 딱 붙여놓고 왔습니다. 애가 저녁에 돌아와서 그걸 보고 통곡을 했습니다. 왜요? 어머니는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가야됩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이 가야 됩니다. '아직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구나.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그 사랑을 확인하게 될 때에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될 때에 그때에 흘리는 눈물이 진짜요.

 

형벌이 무서워서 회개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무서워서 회개하는 회개가 회개가 아닙니다. 형무소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도 회개가 아닙니다. 오로지 사랑을 믿으며 회개하기.

 

또한 회개에는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셔야 됩니다. 용기가 없는 자는 회개 못합니다. 구약에서 보면 다윗이라는 사람을 압니다. 그는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취했을 뿐더러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숨겨졌던 악이지만 나단 선지가 와서 당신이 죄인이요 할 때 그는 왕의 보좌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회개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용기 없는 사람은 회개 못합니다. 회개해야지, 해야지, 그리고 한평생 찌그러진 얼굴로 삽니다.

 

구겨진 얼굴로 삽니다. 병든 양심으로 삽니다. 회개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용기요? 명예와 지위와 체면 다 내동댕이쳐야 됩니다. 왜요? 진실이 먼저니까. 이까짓 체면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 내 던져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길 겁니다.

 

회개한 다음에 되어지는 일, 그 어떠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상관할 것 없습니다.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 용기가 있고야 회개할 수 있어요. 회개가 쉬운 게 아니에요. 회개의 열매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줘야됩니다. 위선을 벗어버리는 힘을 주셔야 됩니다.

 

거짓을 활짝 벗어버리는, 체면같은 것 던져버려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못하고 그냥 자꾸 미뤄 미뤄 가는 동안에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그 어느 때에 가서는 회개할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회개할 때에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얼굴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회개할 때에 병도 치료받을 수가 있습니다. 환한 양심 환한 얼굴 온전한 인격을 다시 세우게 될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마음 가벼운 일은 없다."

 

어떻습니까? "I am sorry. That's my fault" 하는 순간, 마음은 편안해 집니다. 미안합니다. 그럼 그건 내 잘못이었어요. 이보다 더 신바람 나는 일은 없어요. 그런가하면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마음 무거운 일은 없다. 알아서 하세요. 어느 쪽을 선택하시렵니까?

 

내가 옳고 내가 잘났다고 하면서 점점 썩어가는 운명을 갈 것입니까? 아니면 그건 내 잘못입니다, 하고 환하게 광명을 찾을 것입니까? 회개는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오늘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 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특권의식이 내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어요. 내 과거에 새운 공로가 오늘의 죄를 정당화 해주지 못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아무리 특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해도 오늘 죄는 오늘 죄요, 오늘 죄인은 오늘 죄인입니다. 그 화려한 과거가 오늘 나의 이 불의함을 씻어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또한 조상의 의, 즉 아브라함의 의가 내 죄를 사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 자손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나의 죄를 씻어줄 수는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 회개할 용기를 주시는 것, 회개할 깊은 마음을 진실을 주시는 것, 그것이 은혜올시다. 병들어서 회개하든 실패해서 회개하든 감옥에 들어앉아서 회개하든 회개는 복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총의 기회가 됩니다.

은혜로 회개케 하시고 은혜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하십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고 여기에 새로운 능력이 있고 밝은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부르시사 오늘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회개하도록 말씀을 주시고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의 사랑 그 용서 그 거룩한 은총을 생각하며 감사 감격한 중에 잃어버린 진실을 찾게 하시고 참으로 회개하게 하사 온전한 자유인이 되게 하시고 밝은 빛을 지향하며 생명력 넘치는 그런 생을 살게 오로지 자유인으로 사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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