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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출애굽기 설교 모음

출애굽기 12:1 - 13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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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12:12-13/ 유기성 목사

2016-08-03 15:47:4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오늘부터 교회 절기 중 가장 중요한 한 주간이 이어집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이고, 이어지는 한 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주간이며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가장 놀라운 은혜가 있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에게 그저 매년 반복되는 절기로 여겨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이 우리 모두에게 보혈의 능력과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는 깊은 은혜의 주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피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의 중심에는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보배로운 피라 하여 보혈이라고 부릅니다. 왜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가리켜 보혈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구원과 해방을 받게 때문입니다.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모든 사람들이 죄 사함받게 되는 능력이 예수님의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2천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지금 나의 죄를 사할 수 있느냐?”

 

믿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듭나지 못한 지성인들은 보혈에 관한 메시지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집니다. ‘라는 말 자체가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예수의 피로 이루어졌다는 메시지를 어리석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보혈의 능력과 복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가장 귀한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어느 날 강도를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강도가 웨슬레 목사님 주머니를 다 뒤졌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실망한 강도에게 웨슬레 목사님이 여보시오. 내가 드릴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강도는 혹시 숨겨놓은 돈이라도 있는가 해서 그게 뭐요?“ 하니 웨슬레 목사님이 당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압니까? 당신이 비록 도둑질을 하고 다녀도 예수님의 보혈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당신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렸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보혈?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고 말한 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3년 후 웨슬레 목사님이 어느 집회에서 저녁 예배를 마치고 성도들과 악수를 하고 있는데 한 신사가 와서 목사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3년 전에 길거리에서 목사님을 세웠던 강도입니다. 그 날 목사님이 보혈에 대하여 말씀하신 후, 계속하여 내 마음 속에 보혈! 보혈! 소리가 들리는데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목사님의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이 회심한 강도를 보고 감격하여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축복해 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은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바깥에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도 많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과 치유를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의 보혈의 축복을 누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성경이 계시한 보혈의 능력과 축복에 대하여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보혈의 능력과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예수님의 보혈의 계시를 쉽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한 사건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 유월절 사건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엄청난 약속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430년 동안 애급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노예 생활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대략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사람다운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자기들의 소유라고 할 것도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애굽의 우상 숭배에 물들어 살았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여 세우시고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달 14일에 어린 양을 잡고, 그들이 사는 집 출입문의 인방과 기둥에 그 피를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날 밤에 죽음의 천사가 온 애굽 땅을 돌아다니며 애굽 사람들과 모든 짐승들을 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2:12 -13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 날 밤에 집의 문에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집에 장자와 처음 난 짐승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 끔찍한 밤이 채 지나가기도 전 게 바로는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 데리고 애굽을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노예였기에 구원은 받았지만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애굽 사람들이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 금과 옷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의 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게 보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치유까지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자 했을 때, 광야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광야가 어떤 곳인지 가 보지 않은 사람은 잘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실제로 이번에 가서 보니까 도저히 건강한 사람도 지나가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병든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건강한 사람도 가기 힘든 광야 길을 병든 몸으로 따라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병든 사람은 아마 하나님이 구원을 주셔도 자기 백성들과 함께 광야 길을 나설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짐만 될 터인데 당신들이나 가세요.’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시 편1053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침내 그들을 인도하여 은 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의 지파 중에 비틀거리는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몸이 아파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주실 때, 그들에게 애굽의 금 은 보화도 주셨고 병든 몸까지 치료하셔서 온전한 몸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인한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대한 이야기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의 모형이며 그림자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하나님이 보여주신 유월절 어린 양 사건을 통해서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냥 ''라고 말하지 않고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속의 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해 놓으신 그 피, 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의 피라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그 죄와 저주에서 건지신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그래서 언약의 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다는 말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보혈이 발라지게 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심령에 예수님의 피가 발라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14절에 마지막 환란에서 구원 얻은 백성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오는데 어린 양의 피로 씻어서 희게 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가 쓴 '진홍가슴 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만드실 때, 깊은 생각을 하신 후 잿빛 털을 가진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진홍 가슴 새'라고 붙여주셨습니다. 이 새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잇는데 어찌하여 '진홍 가슴 새'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참 사랑을 배우게 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진홍 가슴 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이 그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보던 진홍 가슴 새는 그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던지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로 날아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그 사람의 이마에 가시관이 씌어져 있는데 그 가시가 박힌 상처에서 붉은 피가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 새는 가엾은 사람의 이마로 날아가서 자신의 자그마한 부리로 그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아나서 이 작은 새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새는 지칠 때까지 그 가시들을 뽑다가 안타깝게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묻은 피가 도무지 깨끗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는 핏자국이 남게 되었고,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새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을 가진 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빛깔은 모든 진홍 가슴 새의 목과 가슴에 빛나고 있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보혈이 발라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영감있는 동화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254[내 주의 보혈은] 5절에 보면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됩니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를 영접한 자에게는 그 마음에 피의 증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보혈의 능력은 모든 사람,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사건을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유대인을 구원하고, 애굽인들에게는 저주를 내리겠다.” 고 선언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이 밤이 되면 앞을 잘 보지 못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사람을 구별하지 못할까 봐 어린 양의 피를 문에다 바르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이야기는 하나님은 애굽 사람이냐 유대인이냐 그걸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어린 양의 피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도 문에 양의 피만 발라져 있으면 심판의 천사는 건너가 살려주고, 유대인들이라도 문에 피가 발라 있지 않으면 죽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피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에 있는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 여러분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고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복을 받고 치유를 받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강력한 말씀은 요한복음 129절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짧지만 아주 깊고 강력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누구나 주 예수님 저를 구워해 주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러면 예수님의 보혈이 그 사람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다 예수님에게 나를 구원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고 누구든지 그렇게 요청하기만 하면 그는 주님의 보혈로 그 죄에서 놓임을 받고 저주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보혈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믿음으로 받는 자에게만 임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많이 들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보혈로 인하여 그가 정말 덮힘을 받고 보혈의 능력으로 살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알지만 하지 그 보혈의 능력을 정말 믿고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저주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패배하는 삶을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게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고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마틴루터가 몹시 아파서 병상에 누워 있는데 마귀가 들어와서 루터를 비웃듯이 응시하더니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안고 온 큰 두루마리 책을 마루에다 두르르 펴놓는데 보니까 마틴루터가 평생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더랍니다.

 

루터는 그것 때문에 크게 낙심하고 다시 일어날 소망을 잃었는데, 갑자기 십자가 복음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이것은 다 사실이다. 그러나 너 한 가지 잊은 것이 있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죄를 다 씻었다!”라고 외치자 참소하는 마귀와 두루마리가 사라져 버리고 말더랍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보혈의 능력을 선포해야 합니다.

 

멕스웰화이트 목사님이 쓰신 <보혈의 능력>이라는 책에서 목사님이 보혈의 능력을 믿음으로 누린 일화가 나옵니다.

 

목사님의 기정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에서 살았는데, 계속되는 독일 폭격기의 공습으로 몹씨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특히 밤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예수님의 보혈로 그가 살던 집과 그 가족을 덮어달라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 우리에게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위험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매일 밤 한 번도 깨지 않고 편안히 누워서 잘 수 있었다. 그 때 우리를 보호해 주셨던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너무도 생생해서 마치 우리가 어떤 종류의 폭탄에도 끄떡없는 튼튼한 방공호 속에서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우리 집을 중심으로 반경 1.2Km 이내에 13개 폭탄이 떨어졌을 때에도 우리 집 건물 일부가 사소한 피해를 입었을 뿐 가족 모두가 무사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정말 믿으면 죄에서 씻음을 받고 질병에서 고침 받고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그 보혈로 덮힘을 받도록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 그렇게 구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에 대하여 알고만 계시지는 않습니까? 정말 믿습니까?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오래 고생하셨던 한 여 성도가 계셨습니다. 약으로도 치유되지 않고 병원에서는 관절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절망적인 진단을 받았습니다. 매주 안수 기도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가 낙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몸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던 그 성도님의 마음에 목사님이 설교할 때마다 계속 말씀하시는 나는 죽고 예수는 살고라는 말씀이 정말 무엇인가?‘ 궁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답니다. “정말 이 말씀의 진리가 깨달아지게 해주세요.” 그런데 갑자기 십자가 복음이 정확하게 깨달아지더랍니다.

 

, 예수님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정말 예수님을 믿는 것이구나! 나는 죽었고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 되셨구나! 이것이 예수님이 나의 주님, 나의 왕이시라는 말이구나!’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지난 금요 치유 기도회에 참석하였는데, 안수를 받으러 나오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흥분이 되더랍니다. 찬양 반주 소리보다 자기 심장 뛰는 소리가 더 크게 드릴 정도였답니다. 안수기도 중에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임하시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시간에 관절염이 깨끗이 치유받았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관절염 수치가 제로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이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세요.‘ 복음의 능력과 그의 믿음으로 유월절 사건이 그에게도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다음 주일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가장 큰 감사절입니다. 1년의 추수감사절이 큽니까? 영원한 구원받은 날의 감사가 더 큽니까?

그러나 부활절의 감사는 보혈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 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보혈의 은혜가 믿어진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정말 믿는데 감사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보혈의 은혜를 믿지 않는데 감사하는 것은 더욱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감사를 보고 자신의 믿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안에서부터 억제할 수 없는 감사, 십자가 보혈의 능력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정말 보혈의 능력을 믿고 누리면서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주님께 구하십시오.

 

 

 

[기 도]

사랑이 많으신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이 시간 주의 보혈로 우리를 더욱 덮어 주시옵소서.

우리는 모두 다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죄의 사슬에 묶여 마귀의 종살이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여 죄악의 사슬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마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용서와 의와 영광을 얻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소망도 얻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에게 쏟아짐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의 보혈을 더욱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보혈을 더욱 굳게 붙잡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가정과 자녀, 기업을 덮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떠남의 원리 /12:1-13/9:31

2015-07-14 10:44:40

 

떠남이 출발점입니다.

 

기독교는 떠남에서 그 출발점을 갖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출애굽에서 출발합니다. 기독교는 떠남에서 그 출발점을 갖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기생 라합은 여리고를 떠났습니다.

룻은 모압을 떠났고, 베드로는 그물과 배와 고향과 친척을 떠났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으로 향하였고,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났고,

선교사들은 미국을 떠나 우리나라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가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고 확장되어 간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종살이를 하다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약 1400여 년 전,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유월절(逾越節)에 대한 내용입니다.

 

출애굽/유월절/떠남은.. 성경전체의 중심사상이요,

구약을 풀어 가는 열쇠요, 출애굽기의 핵심입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본토 아비 집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여 년 동안 살던 애굽 땅을 떠났습니다.

출애굽 exodus 라는 말은, ‘탈출또는 떠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의 생애를 마치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세상을 떠날 것에 대해서 자주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3: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실 쌔"(9:31).

 

별세의 뜻

위 눅9:31에서, ‘별세란 말의 원어는 헬라어로 exodos 인데

떠난다’, 또는 세상을 떠난다는 뜻입니다.

 

출애굽(엑소더스), 모세에게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민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듯이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서(별세, 엑소더스)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별세한다'는 말을 쓰신 것은

혼자 별세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듯이

주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이끌고

죽음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표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별세라는 말은 죽는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하나님 나라)을 산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9:22

 

이 말을 한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에 죽는 것은,

떠나는 별세고,

부활하는 것은 다른 세상에서 사는 별세입니다.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

 

그래서 별세라는 말 한마디 속에, 죽고 사는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변으로 떠났는데, 중심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이상현 박사는

기독교 신앙의 특성의 하나는 주변성이라고 했는데,

주변성이란 중심에서 쫓겨나고 중심에서 밀려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밀려나서 갈릴리에서 살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서 안디옥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에 간 사람들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삶을, ‘강요된 주변성을 지니고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강요된 주변성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

즉 흩어진 사람들(디아스포라)과 나그네 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발적이든지 강요를 당하든지.. 고향을 떠나 나그네가 되고,

애굽을 떠나 광야 생활을 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떠나 가난하고 약하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떠남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떠난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을 말하고 죽는 것을 말하는데,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떠나는 종교요 죽는 종교입니다.

 

고향을 떠나는 종교요, 고향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애굽을 떠나는 종교요, 애굽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종교요, 세상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몸을 떠나는 종교요, 몸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별세시키려고 택하셨는데,

결국 그들은 별세(엑소더스)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별세하기 위하여 믿고

별세의 삶을 살다가

영원한 별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떠나는 신앙

이제 예수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기 죽음을 선언한 바울의 신앙이

우리 자신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애굽을 떠난 출애굽 사건의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대해서 죽는 것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어린양들을 잡아서 죽여야 했습니다.

 

자기들이 죽는 대신 어린양을 잡아서 죽여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별세 사건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건이

예수님의 별세 사건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의 순종의 삶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모리아 산 위에서 이삭을 잡아죽이려는 순간

아브라함은 사실은 자신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주님만을 따랐던

사도 바울의 생애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4:1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2:20).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기독교는 십자가의 신앙이요, 다른 말로 떠남의 신앙이요,

세상에 대한 죽음의 종교입니다.

 

떠나면 중심에 서고.. 죽으면 생명에 이릅니다.

기독교에는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쫓겨나고 밀려나서 떠나면 망할 것 같은데.. 사실은 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이 쫓겨나고 밀려나서 황무지와 산지에 유리 방황했지만

어느덧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아서 쫓겨나고 밀려나서 고향을 떠났는데

얼마 후에는 그들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도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과 세상을 떠나

주변성을 지니고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성공한 것입니다.

 

의로운 죽음은 자기 자신을 생명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1~12

 

바울의 죽음은 바울을 생명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했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요 죽음의 종교이지만

실상은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종교요, 생명의 중심에 서 있는 종교입니다.

떠나면 중심에 서게 되고, 죽으면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마치는 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하나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말 못 할 어려움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선한 씨, 의의 씨, 사랑의 씨,

진리의 씨, 평화의 씨를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계속 뿌리노라면

통일과 자유 민주주의의 꽃이 피는 날, 세계평화의 날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났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세상적인 가치관과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고향을 떠나 이산가족이 된 것이 슬프고 아픈 일이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에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이기적이 되었고 배타적이 되었고 탐욕적이 되었습니다.

 

너무 자기중심적이 되었고, 너무 물질 중심적이 되었고, 너무 세상 중심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가치관과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진정한 떠남의 중심에는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붙잡으며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으며 우리의 정과 욕심이 죽어야 합니다.

 

떠남이 중심에 서는 길이고, 죽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20

 

.........................

 

서론

 

고집쟁이 성도 길들이기

소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집에 불이 나서 외양간의 소를 끌어내려고 하면

불빛을 무서워하는 소는 영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외양간에 있는 여물통을 엎어 버리면

그제야 소는 그 곳이 자기가 있을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제 발로 걸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인도하시고자 할 때

사람이 깨어지지 않고 고집부리며,

자기 뜻대로 하려 하면 사용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제일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을, 잠시 치우시는 것입니다.

 

육신에 병이 들어도 깨어지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플 때는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기도 좀 해주십시오. 병만 나으면 이제 예수 잘 믿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병이 나으면기도를 받고 병이 나았나?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지.”

라고 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쉬운 말로 해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밥통이 엎어지면 주님 앞에 나옵니다.

 

몸에 심한 병이 들고 직장을 잃고, 하는 일마다 안 되어 올 데 갈 데 없으면

그 때에는 손들고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되고 평안할 때, 주님께 손들고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년 / 새출발 /12:1-13

2011-03-03 14:05:56

 

새해가 되면 누구나 새로워지고 싶은 소원을 갖게 됩니다. 마음가짐부터 달라지죠. 예전에 잘못한 것도 만회하고 싶고, 새롭게 변화되어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결심도 하고 노력도 해 봅니다. 하지만 매년 경험하는 것처럼, 생각만큼 잘 되지 않습니다. 작심삼일이라고, 번번이 실패하고 본래의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돌아가기 일쑤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의 경험입니다. 새 학년이 되면 학교에 가서 새 책을 받아옵니다. 달력 종이로 책을 한 권 한 권 정성스레 쌉니다. 공책도 과목별로 사서 이름을 쓰고 정리해 둡니다. 이제 새 학년에 됐으니까 공부 좀 해보겠다고 큰 결심을 하는 겁니다. 새 책이 파손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루고, 새 공책에 글씨를 또박또박 정성을 다해 씁니다. 그런데 한 달 가면 많이 갑니다. 책이 더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쌌던 달력 종이가 너덜너덜해집니다. 그러면 보기 싫으니까 훌떡 벗겨버리죠. 공책에 쓰는 글씨도 뒤로 갈수록 비뚤비뚤해집니다. 이쯤 되면 에라! 기왕 버린 몸, 나도 모르겠다!”하고 괴발개발 글씨를 갈겨쓰게 됩니다. 그야말로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호들갑을 떨어보지만 원위치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비슷한 경험을 해보셨을 줄 압니다.

 

이러다 보니까 나이가 들수록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죠.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금년만큼은 뭔가 새로워지고 내 인생에도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새해 새 출발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씀을 통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만에 출애굽 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래 야곱 시대에 이스라엘이 흉년을 피해 애굽 이민을 갔습니다. 그 당시 요셉이 총리로 있어서 많은 혜택을 봅니다. 덕분에 70명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이 큰 민족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애굽에 영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새로운 국가를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침 애굽이 정권이 바뀌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탄압하고 강제부역을 시킴으로 출애굽의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그러나 이미 이스라엘의 많은 노동력을 이용하는 데 재미를 본 바로 왕이 순순히 놓아주지 않습니다. 바로 왕의 고집을 꺾고자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10가지 재앙을 내리는데, 마지막 열 번째 재앙에 가서야 항복하고 이스라엘을 놓아줍니다. 본문 출애굽기 12장은 열 번째 재앙과 출애굽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열 번째 재앙이 뭐죠? 장자 죽음의 재앙입니다. 왕으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장자가 다 죽임을 당합니다. 심지어 짐승의 첫 것도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와중에도 재앙을 면하고, 애굽에서 탈출합니다.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그 해방의 날 밤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제정하십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해방 기념일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시작하기 전 먼저 유월절 규례를 통보하십니다. 무조건 탈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을 따라 출애굽 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 규칙이 후일 이스라엘이 대대로 지키는 유월절의 규례가 됐습니다.

 

유월절 규례는 이스라엘이 구원받아 새 백성으로 살아갈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오늘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한 교훈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가 새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가르쳐 줍니다.

 

[1] 새로운 월력 : 새 출발

 

하나님은 먼저 월력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새 출발의 의미가 있습니다.

 

2.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그 전까지는 애굽의 월력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이스라엘 고유의 월력을 사용하라는 겁니다. 이른바 유대인의 종교력이죠. 그 첫 달 즉 1월을 아빕월이라 불렀는데, 양력으로 3~4월경입니다. 여기서부터 1, 2, 3... 이런 식으로 환산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역사를 보면 시대마다 나라마다 고유한 연호를 사용했죠. 왕의 이름을 사용해서 세종 00년 이런 식입니다. 나라를 잃었을 때는 지배하는 나라의 연호를 사용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 소화 00년 이런 식으로 사용했습니다.

 

매년 새해가 되면 제일 먼저 캘린더를 바꾸어 걸죠.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날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겁니다. 그 때 무슨 마음이 들죠? 새해에는 새롭게 살아야지 하는 결심이 섭니다.

 

이와 같이 월력을 바꾸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지배를 받는 노예가 아니라, 해방된 민족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 백성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게 새로워집니다. 새 나라, 새 백성이 되었고, 따라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컴퓨터로 말하면 리셋하는 겁니다. 프로그램이 엉키거나 먹통이 되면 다시 시작하죠. 이 때 리셋 버튼을 누르면 모든 게 새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아니라 천국의 새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새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중생(Born Again) 혹은 신생(New Birth)이라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새해가 된다 하더라도 예수 믿고 거듭남이 없으면, 그리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언제나 제자리입니다. 아니, 갈수록 후패해지고 멸망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2] 새 출발의 기점 : 유월절 십자가 구원

 

새 사람으로서 새 출발의 기점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기 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5~7.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나흗 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1년 된 것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 때가 가장좋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숫컷은 대표성입니다. 그리고 110일부터 14일까지 4일간 간직하는 것은 혹시 흠결이 있는지 검사하면서 정성을 쏟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은 그 집안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의 피라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 피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sign)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I will pass over you)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그날 밤 하나님의 재앙이 내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집집마다 난리입니다. 장자가 갑자기 죽습니다.

 

바로 왕의 세자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둘째 아들 왕자가 다음 왕이 됩니다. 당시 왕이 아멘호텝 2세였는데, 그 다음 왕이 투트모스 4새로 둘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어떻게 됐나요? 하나님께서 죽음의 천사를 시켜서 넘어가게 합니다. 피가 하나의 사인(sign)이 된 겁니다. 넘어간다는 단어가 영어로 'pass over'인데, 그래서 이 날을 기념하는 절기를 유월절(逾越節 Passover)이라 부릅니다.

 

유월절에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해서 어린 양이 피 흘려 죽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흘려 죽었습니다.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뭐라고 말합니까? 고전5:7() “ ...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스라엘은 이 피를 통해 새 나라의 새 백성이 된 겁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됐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리 잘났어도 옛 사람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세상 나라 백성입니다. 결국은 멸망할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이고 중요한 변화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거듭나는 겁니다. 이때부터 인생이 제대로 시작되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마아너스 인생입니다. 어느 꼬마가 엄마를 따라 교회에 처음 갔습니다. 정면에 걸려있는 십자가 보고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저기 봐! 엄청 큰 더하기표가 있어!” 정말 그렇죠. 십자가를 더하기표입니다. 예수 밖에 있으면 아무리 굽하고 더해도 마이너스입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됩니다. 예수 안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비로소 플러스가 됩니다.

 

[3] 새 출발의 자세 : 과거 감사, 과거 청산, 미래 지향

 

이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새 사람이 된 이스라엘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믿고 새 사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게 새해의 새 출발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연도가 바뀌는 게 새해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변화되는 게 새해의 삶입니다. 본문을 보면 새 사람의 삶을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과거 감사 :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하나님은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에게 과거를 회상하며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유월절 밤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 있었죠. 맛있는 별식이 아닌, 영적인 의미가 있는 별식입니다.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양 고기와 더불어 쓴 나물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쓴 나물은 과거 애굽에서 당한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쓴 나물을 먹으면서 과거 고난 가운데 함께 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기억의 절기입니다. 15: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이스라엘은 매년 유월절이 되면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며 깊이 감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세월 베풀어주신 은혜를 망각하면 절대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행복해질 수도, 발전할 수도 없습니다. 감사를 잃어버리는 게 불행의 씨앗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빈손 들고 왔는데 이만큼 살고 있고, 더욱이 십자가 은혜로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 천국 백성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새해 첫 주일 무엇보다 먼저 지금까지 베푸신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새해가 행복한 나날이 될 줄로 믿습니다.

 

과거 청산 : 옛사람의 추악한 습관 탈피

 

하나님은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에게 과거를 청산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애굽에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이방 문화, 우상 숭배의 문화, 그리고 추악한 문화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제 새 백성이 되었으니 새 사람답게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죄로 가득했던 옛 사람의 과거를 청산해야 합니다.

 

여러분, 습관이라는 게 정말 무섭죠. 새롭게 바꾸는 게 참 어렵습니다. 관성의 법칙이에요. 옛 사람의 모습이 불쑥 불쑥 나옵니다. 어느 택배 기사가 명절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처갓집에 갔습니다. 문 앞에서 벨을 눌렀습니다. 장모님이 안에서 말합니다. “누구세요?” 그러자 본능적으로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택배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이렇게 습관이 무서운 겁니다. 나쁜 습관의 경우 쌓이고 쌓이면 얼마나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지 성인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성인병을 생활습관병이라 부릅니다.

 

다시 8절 보시면 유월절 음식 중 또 하나가 무엇입니까? 무교병이 있습니다. 무교병은 누룩 없는 떡입니다. 시간 상 여유가 없는 급한 상황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누룩은 죄악을 상징합니다.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우리의 삶 가운데 누룩 즉 죄악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죄악된 것과 세속적인 것이 수두룩합니다. 못된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아예 단절해야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숙제를 안 해 갔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참 잘했어요라고 새겨진 고무도장을 아이들 공책에 찍어주는데, 저에게는 코에다 찍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 날 이후로 숙제는 반드시 해 가리라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나쁜 습관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새해에 어떤 결심 하셨나요? 그 가운데 끊고 싶은 못된 습관이 있습니까?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그래서 정말 이번에는 끊으세요! 그게 새 사람의 당연한 모습이고 진정한 새해 새 출발을 하는 겁니다.

 

아무리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도 옛 사람의 모습이 나아 있습니다. 매일 그것과 싸워야 합니다. 영적 전쟁이요,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치하면 어떻게 되나요? 고착됩니다. 영적인 고착상태(spiritual fixation)가 됩니다. 그러면 구원의 기쁨이 상실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더러운 그릇에는 음식을 담아 주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새해 벽두에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미래 지향 : 새사람의 거룩한 습관 형성

 

하나님은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고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애굽에서의 추악한 습관을 제거하고 이제는 거룩한 백성의 모습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급히! 한 마디로 순례자의 모습입니다. 명령만 떨어지면 애굽에서 신속히 빠져나가라는 겁니다.

 

더 이상 애굽에는 미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은 이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로 향합니다. 출애굽 한 백성은 더 이상 애굽을 향해 뒤돌아보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무장하고 새 사람의 모습으로 천국을 향해 전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하면서 얼마나 되를 돌아보았습니까? 그러다 매 맞고 죽어버리고 그랬습니다. 비극입니다.

 

이제 예수 믿고 변화된 우리는 새로운 거룩한 습관을 형성해야 합니다. 4:22~24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러분, 우리가 체득할 거룩한 습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기도 습관, 말씀 묵상 습관, 예배 습관, 물질 선용 습관, 정직 습관, 칭찬과 용서 습관, 시간 선용 습관, 섬김 습관, 순종 습관, 거룩한 언어 습관 등입니다. 이런 새로운 습관들을 형성하면서 천국 가는 그 날까지 달려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해가 갈수록 우리의 인생이 풍성해지고 성화되어 갈 뿐만 아리라, 이 땅에서 승리하고 저 천국에 들어가 하늘의 상을 받게 될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을 생애 목표로 삼고 중단 없는 전진을 했습니다.

 

3:13~14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I press on toward the goal)”

 

여러분, 새해 첫 주일입니다. 새해에 어떤 삶을 기대하고 계십니까? 어떤 결심을 하셨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속에 꼭 새기시고, 진정 예수 믿고 거듭난 새 사람으로 진정한 새 출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금년만큼은 더욱 더 거룩해지고, 더욱 더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다림과 서두름/12:1-14

2008-05-19 11:22:01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문자 그대로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초대 교회는 바로 이 기다림의 공동체였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란 말인 마라타나!”란 말을 초대교회 공동체는 모일 때마다 외침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그들의 자세를 늘 확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기다리고자 한 자세가 초대교회를 지탱할 수 있게 해 준 밑바탕이 된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다림에 대해서 그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에 집착하면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 중에도 이러한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한 채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한 기다림은 이들로 하여금 아무 일도 안 하는, 이른바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바람에 교회를 크게 어지럽히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이제 얼마 안 있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구태여 우리가 우리의 생활에 얽매여 살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경고를 합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먹으라 하노라”(살후 5:11-12).

 

이렇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에 있어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한 기다림은 결국 공동체에 해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재림이 지난 2000년 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았는데 기다릴 필요가 무엇이냐 하면서 기다림 자체를 거부해 버린다면 이러한 모습 역시 결국 세상에 빠져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기다리면서도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기다리고자 하는 자세를 우리는 기다림과 서두름이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저는 이러한 기다림과 서두름의 모델을 오늘 본문인 출 12장의 유월절 사건에서 발견하고 싶습니다. 이와 덧붙여서 저는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이 지키는 크리스마스 역시 이러한 유월절의 성격을 띨 수 있는 모습이 된다면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크리스마스라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절기를 바르게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제까지 이 유월절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과 결부시켜서 생각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던 날 밤, 자기들 집의 문설주에 발랐던 어린양의 피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를 구해주는 구원의 피라고 하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이 유월절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들의 삶과 신앙의 처음 시작이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유월절은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주님의 성탄과도 깊은 연관이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이 유월절 예식을 생각해 봄으로 우리의 기다림의 자세 뿐 아니라 우리가 성탄절을 어떻게 맞이하고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스스로 느끼는 성탄절은 그 고유한 의미가 상실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지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보면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한 채 기다림이란 말을 사용하는 모습과 다른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이 유월절 예식은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던 날 밤에 있었던 사건에서 비롯된 예식입니다. 그날 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하나의 기이한 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기이한 일이란 애굽 땅에 있는 사람이나 모든 동식물의 첫 번째 자손 - 사람이면 장남, 동물이면 처음 새끼, 식물이면 처음 난 싹을 말하는데 - 이러한 처음 자손을 다 죽이시겠다고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히브리 민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히브리 민족에겐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흠이 없고 일 년 된 양이나 염소를 잡아 죽여서 그 양이나 염소의 피를 대문의 문설주에 바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피를 하나님이 보시고 그 집은 건너 뛰어(pass over, 逾越) 그 집의 모든 맏배는 죽음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양의 피를 바른 그 문의 집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모습이 8-11절의 말씀입니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다 소화하라 (불에 태우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여기서 특히 11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기이하신 일을 기다리면서 해야 할 일과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곧 서둘러서 먹으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어떤 조급함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라 긴박함을 이야기하는 표현입니다. 특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라는 표현은 금방 어디를 향하여 갈 채비를 갖춘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일을 기다리면서 다른 한편으론 음식을 급히 먹는 이러한 모습은 한마디로 기다림과 서두름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다림의 공동체로서 이 기다림 속에 채워 넣어야 할 내용을 바로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향한 서두름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고 보면 그것은 그동안 종살이하던 애굽땅을 탈출하는 일과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한 서두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되 서둘러 나아갈 수 있는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일을 기다리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그러한 움직임 없이 기다리는 유월절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서두르는 모습이 없이 주님을 기다리겠다고 하는 자세나, 또 그러한 모습으로 성탄절을 맞이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교회의 사치요 게으름이요 나아가서는 안일한 하나의 행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운동성을 지닌 가운데 우리는 기다린다는 정체성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각 신앙인이나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력 안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서두름이 없는 기다림은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막연한 것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두름을 지닌 기다림은 히브리 민족에게 있어서 유월절의 사건이 그들로 하여금 종살이 하던 애굽을 탈출함과 동시에 가나안 땅을 향한 출발의 원동력이 된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는 죄의 권세를 뿌리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강한 추진력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우리가 기다림의 모습으로 지녀야 할 서두름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를 그날 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급히 (서둘러) 먹으라한 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다 소화하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5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1. 피를 문에 바른 그 양의 고기를 먹되 날로나 삶아 먹지 말고 반드시 태워 먹으라.

2. 무교병 (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을 먹으라.

3.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

4. 다 먹으라.

5. 혹 남은 것이 있으면 다 불에 태우라.

 

우리는 이러한 명령에 대한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특히 이러한 의미를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에서 채워야 할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죄의 권세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고자 서두르는 모습에 결부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우리의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를 그의 삶을 통해 보여 주셨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그의 오심으로 완성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우리는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1. “피를 문에 바른 그 양의 고기를 먹되 날로나 삶아 먹지 말고 태워 먹으라.”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른 이해를 지녀야 한다는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히브리 민족에게 그 양의 고기를 다 먹으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양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곧 양이 죽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양을 먹듯이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먹는다는 그 체험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저 다른 사람의 죽음처럼 눈으로 지켜보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 죽음을 먹어 소화시키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삶에 진정한 영양과 에너지를 가져다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4:16).우리들도 이처럼 나의 삶의 근본적 에너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오도록 하라는 이 점을 우리는 늘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를 날 것으로나 물에 삼지 말고 반드시 불에 태워 먹으라는 것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심판을 대신한 심판적 죽음이라는 사실을 간직하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그 분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내 대신 죽으신 분은 내가 받아야 할 불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누룩(이스트)를 넣어 부풀린 빵이 아니라 누룩을 넣지 않은 빵(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우리의 삶을 허황된 것으로 부풀려서 들뜬 삶을 살지 말고 순수하고 진실 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과장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순수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과장해서 살게 되면, 결과적으로 남을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삶을 과장해서 표현한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모습을 본 다른 사람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왜 나는 저러지 못할까?”라고 자기 자신을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과장되게 포장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부담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8:15).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과장되어 포장된 모습을 겁내지도 말고 우리 스스로 이러한 모습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 앞에 진실한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희생 외에 다른 희생을 나타내려 하지도 말고 요구하지도 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신의 삶을 부풀리게 되면, 이러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외식적인 사람이라고 꾸짖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10계명의 10가지 조항을 252개 조항으로 부풀려서 사람들을 무척이나 힘들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많은 조항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기들 마음대로 부풀려서 사람들 앞에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러한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삶이 모습이 포장된 모습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할 때 속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그럴듯하게 포장되기 쉽습니까? 우리는 이를 분별하고 또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

 

이는 고난의 삶을 함께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웃을 돌아보아 고난 받는 자가 없는지 염두에 두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두 가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경건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씀한 것처럼 참된 경건은 과부와 고아를 돌보며 자기를 지켜 세속에 빠지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행복이라는 병의 중독자들이라고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 박사는 말했습니다. 이러한 행복이라는 병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공허함(emptiness)’라는 더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인생의 귀한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경건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져다주는 유익은 이러한 고난의 삶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에 동참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은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높아지려 하는 삶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하지만 낮아지려 할 때에는 행복이 주어진다는 이 소박한 모습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4. “다 먹으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것으로 모든 것을 삼을 수 있도록 하라는 그리스도안에서의 철저한 삶을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모습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인생의 귀한 가치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보충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향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받음에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이 게재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에 대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잘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5. “혹 남은 것이 있으면 다 불에 태우라.”

혹 우리가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역시 다 심판의 대상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유보해 둔 것이 있지나 않은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하나님의 현재적 임재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내일로 미루거나 다른 날로 유보해 둘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체면 때문에,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기타 등등으로 우리는 현재적 결단을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결단하지 못하여 남겨둔 것이 있다면 그 역시 불타는 심판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말입니다(17:32).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결단을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번 성탄절을 이러한 서두름 속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기다림의 공동체로서 우리의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체험하기에 서둘러야 합니다.

순수하고도 단순한 삶을 서둘러야 합니다.

고난 받는 삶에 동참하기를, 낮아지는 삶에 힘쓰기를 서둘러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삶으로만 만족하기를 서둘러야 합니다.

그리고 남김없이 온전히 결단하기를 서둘러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여 서두르는 모습을 지닌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을 온전케 해 나가도록 하십시다.

 

<기도> 우리들에게 독생자를 어린 양처럼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대강절 둘째주일을 맞이하여 저희들의 기다림의 내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던 마지막 날 밤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의 모습이 어떠함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우리를 위해 어린양처럼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모든 삶이 전개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모든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게 하시옵고, 이러한 모습의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에 순수하게 나타날 수 있게 하시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의 모습을 간직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심으로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가운데에서 늘 주님 안에서 자라가기를 애쓰는 주님의 자녀들과 저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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