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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출애굽기 설교 모음

출애굽기 1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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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보라 와 부아 /1:15-22/ 유진 피터슨

2015-06-19 15:49:53

 

성경은, 피라미드와 파라오를 왕창 무시한다.

 

21세기까지도 여전히 곽광 받는 이집트 고대 역사 유물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그 고대문명은,

프랑스가 유럽을 제패했을 때는, 나폴레옹이 그 유물을 탐내었고,

대영제국이 세계를 제패했을 때는, 영국이 그 유물을 탐낼 만큼

세계역사를 대표하는 보물중의 보물로 통한다.

 

그리고 오늘날 21세기까지도

세계의 많은 관광객들, 역사학자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그 유물을 보기 위해서, 물밀 듯이 밀려들고 있다.

 

정말 기원전 1,500~2,500년이란 장고한 역사.

오늘 우리 시점에서 무려 4천 년 전에

감히 오늘날에도 시도하기 어려운, 놀라운 건축물을 완성했다는 점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경이롭고 경탄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성경 출애굽기에는, 피라미드의 위용은 단 한 구절도 안 나온다.

히브리 노예들이 고역에 시달렸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그 피라미드의 위용, 웅장함, 찬란한 건축문명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고 있다.

 

피라미드와 동시대에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 <출애굽기>..

이집트의 찬란한 건축문명, 진보한 수학/토목기술/기하학 등에 대해서는

일절 무시해 버린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무관심하다.

 

이런 점에서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러 다녔던 에베소, 아테네, 고린도의 도시들은

지금 우리가 성지순례를 가서 볼 때도, 그 문명과 건축기술에 경탄하는데,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서에 단 한 줄도 언급 하고 있지 않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 무너진 잔해만 보고도 경탄하는데..

실제로 그 실물을 목격했을 바울은,

그 경이로움과 경탄할만한 문명/건축의 업적에 대해.. 일절 무시하고 있다.

그의 서신서에는 아무런 언급도 안 나온다!

 

대신에 성경 출애굽기는, 사회적으로 별 볼일 없는 두 산파에게 주목하고 있다.

그 애굽 문명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가장 비천한 노예 여인 2,

십보라와 부아에게.. 성경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다.

피라미드와 찬란한 이집트 문명은, 십보라와 부아 두 사람의 배경backdrop일 뿐이다.

 

그 당시에 파라오와 히브리 산파의 신분 차이는,

오늘날로 치면, 빌 게이츠와 일용직 시급 근로자의 차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파라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아이들을 살린 :17

두 산파에 대해 자세히 토픽으로 다루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빌 게이츠처럼은 되지 못하더라도,

십보라와 부아처럼은..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 역사, 생명 역사의 주인공

 

성경과 하나님은 구원 역사/생명 역사에 주목하신다.

구원 역사는.. 다른 말로 생명 역사이다.

하나님은 멸망하는 세상에, 구원을 베푸시고, 생명을 베푸신다.

 

성경과 하나님이, 피라미드와 파라오를 일체 무시하시고,

일용직 시급 근로자에 불과한 두 늙은 산파(아마 늙었을 것임)에 주목하는 것은,

그들을 통해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은

세상에서 유명인사, 억만장자, 거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 들이 아니다.

우주계발사업 같은 큰 프로젝트도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 생명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

그들이 십보라와 부아와 같은.. 늙고 가난하고 비천한 여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바로 그들이다.

 

오늘날 당신을 통해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가?

그러면 당신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다. 그러면 유명인사가 안 부럽다.

 

세상에 유명 인사들이 많지만, 사실 그들은 모두 다

당신이 주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배경인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눅 들면 안 된다.

그런데 실제로

오늘날의 십보라와 부아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이

하나님의 눈과 귀가 그들에게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들 주눅 들어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방송언론/학교 강의실/모임, 사람들의 대화/심지어는 일부 교회까지도

끊임없이 세속적 가치관을 주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야! 그 사람, 연봉이 장난이 아니래

저 건물의 위용을 좀 봐!’

무슨 <시크릿>이란 자기계발서적이 몇 백만 부나 팔렸대

 

그래서 십보라와 부아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숨은 주인공들이,

세상의 가치기준 강요에 주눅이 들어서

토끼나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서, 그 속에 숨어버릴 수 있다.

 

성도는 절대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서, 자기 가슴을 펴고 살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야!’

 

신약에 등장하는 두 여인.. 엘리사벳과 마리아

출애굽기가 십보라, 부아.. 두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처럼

누가복음도 엘리사벳과 마리아.. 두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예수님 족보에 등장했던 네 여인들처럼

또한 십보라와 부아처럼

<구원과 생명의 역사>에 순종하며 동참했던 여인들이었다.

 

십보라와 부아,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했던 네 여인들이

모두 자기 목숨을 걸고,

구원과 생명의 역사에 동참한 것처럼..

 

엘리사벳과 마리아도

자기 목숨을 거는 위험을 무릅쓰고

구원과 생명의 역사에 기꺼이 동참한 것이다.

마리아가 처녀 임신에 순종한 것은.. 자기 목숨을 건 동참이었다.

그런 마리아를 비호한 엘리사벳 역시.. 목숨을 건 생명역사에 동참이었다.

 

생명역사, 구원역사의 동참에는 대가가 요구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다시 찾으리라고 하셨다.

 

산파들이

바로의 명을 거역하는 일은.. 죽기를 각오한 용기였다.

 

생명역사, 구원역사는

오늘도 우리 생명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사망이 내게 역사하는 동안에.. 생명이 저들에게 공급될 것이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4:12

 

 

십보라, 부아 같은 자부심

 

오늘 나는 생명역사에 동참하고 있는가?

요즘 한국의 스포츠스타들이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본다.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인 무대에서 선두를 달리는 것을 보면, 참 대견하고 부럽다.

또 그들의 활약상을 TV를 통해서 보면서 우리가 즐거워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동시에 생각해 보게 된다.

저것이 과연 생명의 역사인가?’

그들의 활약상이 흥미롭고, 부럽고, 오락을 주고, 국위선양을 준다고 하자.

그렇지만 생명의 역사인가.. 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생명의 역사는 아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우리가, 십보라와 부아처럼,

생명의 역사=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면,

(그게 크게 돈 버는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십보라와 부아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가 주인공인 것이다.

 

십보라는 그 이름 뜻이 공정함’ fair

부아는 그 이름 뜻이 눈부신, 광채 나는’ splendid 인데,

정말 십보라는 자기 이름대로 공평하게 행해서.. 히브리 아이들을 살렸고,

그 일에 동참한 부아는.. 자기 이름대로 광채 나는 삶을 살았다.

 

오늘 우리도 크게 유명한 스포츠 한류 스타는 아니더라도,

그보다 더 값지고 존귀한

십보라처럼 페어fair하고, 부아처럼 광채 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명역사에 위험과 손해를 무릅쓰고 동참할 때 그렇다.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튕겨버리셨다.

홍해에서, 뒤쫓아 오던 애굽의 군대가 물에 빠져 죽을 때,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14:27

 

여기서 엎으셨다는 말은

재미있게도, ‘하나님이 그들을 손가락으로 튕겨 버리셨다’ flick off

또는 ‘(손으로 먼지 털듯) 다 털어버리셨다라는 표현이다. shake off

 

그러니까 애굽 군대를 처리하시는 일이.. 하나님께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냥 손으로 한 번 튕기거나 휘저으시니까.. 엄청난 군대가 모두다 절단 난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경우에 이렇게 역사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면, 직접 나서신다. 친히 행하신다.

 

생명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정말 힘없고, 미약한 존재들처럼 보이고,

때로는 자신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지만,

 

필요할 때는, ‘보이지 않는 손이 직접 나서신다.

하나님의 손이 한 번 휘저으시니까,

애굽의 대군이 홍해 바다에 몰살했던 것이다.

그만큼 강력한 권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내 주(다윗)의 생명은,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삼상25:29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보다 크심이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일4:4

 

또한 원수들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발꿈치 정도를 상하게 하는 것이요,

성도가 하는 일은, 원수 마귀의 정수리를 밟는 것이다.’ 3:15

 

성경에 이렇게 담대함을 주는 말씀이 가득 차 있다.

문제는 그것이 내 피부와 내 마음에, 실감나게 믿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의 약속이 실감나게 믿어지려면,

내가 평소에 성령/은혜/말씀/감사/교제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약속이 실감나게 믿어지지 않고,

세상이 두렵고 무서워서, 내가 토끼굴로 황급히 도망가서 숨는 현실이 벌어진다면,

내게 지금 성령/은혜/말씀/감사/교제의 약효가 떨어졌구나생각하시면.. 맞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나름대로의 익숙한 방식으로, 속히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

 

내가 세상에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지,

내가 세상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역사, 구원역사로 날마다 충만한 사람은,

내 안에 계신 이가 세상보다 크심을 확신하고 살아가게 된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생명역사/구원역사를 자연스럽게 나타낸다.

십보라와 부아..

뭐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만..

아니다. 자기 일상을 매일 하던 그대로 살았을 뿐이다.

 

그들 안에 생명이 있으니까, 생명을 자연스럽게 나타낸 것 뿐이다.

꽃이 꽃이고, 풀이 풀이듯이,

십보라와 부아는,

자기 속에 있는 정체성(생명)을 자연스럽게 자기 삶으로 살아내었을 뿐이다.

 

오늘도 내 속에 있는 생명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내시면 된다.

그러면 당신도 십보라, 부아처럼,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대단한 피라미드 문명.. 그러나 죽음의 문명

고대 이집트 사람들도 나일강 동쪽은 삶의 도시, 서쪽은 죽음의 도시로 생각했다.

나일강 서쪽에 세운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원래 애당초 죽음을 위대서 건조한 것들이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에 자기 무덤을 크게 만드는 사람이 간혹 있었으나

어쨌든 온갖 용을 다 써봐야.. 결국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피라미드처럼 커도.. 결국은 죽음이다.

이 세상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져도.. 결국은 죽음이다.

그것은 생명의 역사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부심을 갖자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더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축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하고 값진 일이다.

하나는 죽음이고, 하나는 생명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 속에 이런 자부심은 거의 없고,

거대한 피라미드 같은 세상 문명만 동경하고 사모한다면,

그래서 우리도 복 받아서 거대한 가시적 업적을 남기자는 식으로 줄기차게 산다면..

 

그 이유는

자기 속에 생명이 아주 고갈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 생명으로 충만한 사람은,

세상의 부귀영화.. 그런 것 크게 안 부러워한다.

자기가 배부르기 때문이다.

 

*‘배부름관련글 배부른 상태에서 봐야 정확하다 사냥터인가, 관광지인가?

 

admin

 

 

 

비돔 라암셋에서 /1:8-14/ 이동원 목사

2014-11-29 00:05:16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1953년 미국 뉴욕 브르클린의 찢어지게 가난한 빈민가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어려서 운동을 좋아했고 운동으로 인생의 성공에 도전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미식축구 선수 쿼터백 장학금을 받고 노던 미시간 대학에 입학합니다. 그러나 그는 미식축구 선수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그는 새로운 인생의 출구를 찾아 대학 졸업 후 제록스 회사에 세일즈맨으로 취직을 합니다.

 

제록스에 이어 가정용품을 파는 해마플라스트(Hammarplast)에 취업한 그는 이 회사에서 처음으로 작은 성공을 경험합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일한 결과로 그는 회사의 부사장과 총 매니저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는 이제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고급 레스트랑에서 식사를 하고, 저녁이면 고급 파티를 즐기게 되었지만 왠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잘 살고 잘 노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 되고 있었던 어느 날 출장차 찾은 시애틀의 한 커피 가게에서 그윽한 원두커피 향을 맛보는 순간 그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합니다. 그는 커피 향을 만들어내는 그 커피점이 마치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거룩한 성전처럼 느껴졌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그가 마셨던 커피는 커피도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이 커피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마침내 그가 누리고 있던 회사의 모든 특권을 저버리고 이 시애틀의 작은 커피숍의 매니저로 다시 인생을 출발합니다.

 

그리고 1985년 원두 구매를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로 출장갔을 때 그는 에스프레소 바에 앉아 거기서 사람들이 커피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친구 연인들 그리고 사업 파트너들이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현대인들에게는 가정도 직장도 아닌 이런 제3의 땅, 약속의 땅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의 일생의 비전이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 나는 커피를 파는 사람이 아닌 신비와 로맨스의 문화를 파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고 그 약속의 땅으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바로 그 날, 그 비전을 꿈꾸던 그 순간에 천년의 커피 역사를 새로 쓰는 스타벅스가 사실상 태어나는 것입니다.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의 이야기입니다.

 

주전 1200년대의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잘 나가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의 리더 요셉은 애굽의 총리였고 그들에게 분배된 고센 땅을 잘 가꾸어 그들은 번영하고 성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존재를 잘 모르는 새로운 애굽의 지도자가 최고 통치자로 등극하자[8-오늘날 다수의 성서학자들은 람세스 II(1299-1232BC)로 봄],이스라엘 민족은 준비되지 못한 채로 고통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소위 고센 지역에 속하는 비돔과 라암셋(47:6,11/지도 참조)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학대를 받는 운명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고통의 시간이 바로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한 위대한 로드맵의 시작이 되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라암셋(라암세스)은 본래 당시 애굽의 통치자로 믿어지는 람세스 2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 라암셋에서 주의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으로 금년도 약속의 땅을 향한 우리의 여정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만일 우리 중에 희망의 새해가 왔지만 아직도 자신을 괴롭히는 어떤 고통 속에 새해를 맞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의 본문에서 고통의 시간을 이해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관점을 함께 배웠으면 합니다. 고통의 시간을 이해하는 두 가지의 관점-무엇일까요?

 

첫째는 소명의 관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많은 경우, 고통의 시간이 하나님이 고통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의 시간일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되는 시간, 왠지 내 인생의 현실이 불만스럽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의 어떤 부르심이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의 관점인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화란의 미술가 반 고흐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아시지요. 반 고흐는 본래 목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신학생이었습니다. 그의 부친이 목사였기에 목회의 길이 사실 더 편안한 인생의 선택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뜻대로 공부도 안 되고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던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화가로 부르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목회자의 길을 버리고 화가의 길을 선택하던 날 그는 이런 글을 남깁니다.

 

나의 운명의 길이 열렸다. 새로 태어난 나 빈센트--내 나이 스물 일곱 --나는 이제 화가의 길을 가련다. 이 길은 하나님의 약속속에서 시작되는 영원한 길. 어떤 시련이 닥칠지라도 나는 이 길을 갈 것이고 그 속에서 나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룰 것이다.”(빈센트 반 고흐:내 영혼의 자서전,pp.30-31)

 

그가 만일 이런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고 목화자의 길을 갔다면 인류는 위대한 화가를 잃어 버렸을 것입니다. 소명은 목회의 길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십시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이스라엘의 민족사적 고통에는 도대체 어떤 소명이 있었을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이런 바로의 압제를 인해서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소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만일 번영의 지속이었다면 그들은 결코 애굽을 떠날 생각을 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그들로 애굽을 떠나 시온의 땅으로 가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많은 경우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그 고통이 바로 소명의 마당인 것입니다. , 다시 한번 11절을 보십시오. “감독들을 그들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국고성은 아마도 통치자 람세스가 전쟁을 위해 군대들의 식량, 무기등을 비축하기 위한 창고 역할을 한 성으로 건축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실제로 오늘 날 이곳을 방문해 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를 위해 노역한 고고학적 증거들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람세스의 석상과 비문들이 발견됨, 사진들 참조)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고통의 현장이 아닌 소명의 자리이었음을 말입니다.

 

결과는 고통 그 자체로만 끝났을까요? 아니지요.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 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더라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섭리의 하나님이 개입하신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은 고통 중에서도 오히려 번성하고 오히려 새 역사를 준비하는 마당에 서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고통의 마당을 인하여 절망하지 마십시다.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서 있는 오늘의 고통의 마당은 오히려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출발하는 현장이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는, 기도의 관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통이 올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시간을 주시는 것으로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고성을 건축하는 동안 그냥 고통스럽게 견디며 노동만 하고 있었을까요? 아니지요. 그들은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7-8의 말씀을 보시지요. 모세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 가려 하노라

 

그래서 출애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고 그래서 이제 출애굽을 결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주께서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다음 출3:9에도 다시 한번 강조됩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고통의 현장에서 그냥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었고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의 시간은 기도의 시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올 때 걱정은 낭비입니다. 걱정한다고 염려 한다고 나아질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3).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약속의 다이얼 333’이라고 일컫지 않습니까? 고통스럽거든 즉시 약속의 다이얼 333을 기억하십시오. 예레미야33:3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르짖어 부모의 도움을 청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달려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여러분의 손을 내밀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를 구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필요한 도움을 베풀지 않으시겠습니까? 인생의 여정에는 이런 부르짖음의 기도가 필요한 시간들이 있습니다. 평범한 인생의 시간들은 평범한 기도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비상한 인생의 위기에는 비상한 SOS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비상한 기도는 비상한 응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비멜렉이라는 왕 앞에서 체포될 위기를 맞이했을 때(34편 제목 참조)그는 바로 이런 부르짖음의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렇게 간증할 수 있었습니다. 34:6입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런 주의 백성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마침내 모세가 등장하고 출애굽의 위대한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1992년은 제 일생 중 가장 고통스러운 한 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외적으로는 고통스러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미국 워싱톤 지구촌 교회에서 목회 9년째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부임 8년만에 꾸준한 부흥을 경험하고 있던 교회는 새 성전 증축을 완료하고 이민 교회로서 이제 모든 것을 갖추고 워싱톤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 교회가 되어 비교적 탄탄한 목회의 미래를 내다보던 전망할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교회당 건축 후 잠시의 안식의 시간을 갖고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제 마음에 평안이 없었고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제 가슴을 옥죄고 있었습니다. 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부르짖어 기도를 시작한 석 달이 지나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고국에 돌아가 교회 개척에 도전하라는 인도였습니다. 그때 저는 아이들이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3학년이어서 환경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3개월여의 고통스런 기도 후에

순종 하겠습니다

 

고 응답했을 때 그때 말할 수 없는 하늘의 평안이 제 가슴을 채우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래서 199311월 저는 가족들을 떠나 마침내 한국으로 나와 지구촌 개척을 준비했고 19941월 첫 주 정식으로 우리 교회의 탄생을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개척의 과정이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 회집 장소만 5번을 옮겨 다니면서 때로는 환경적 요인들 때문에 때로는 리더로서의 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밤을 지새워 눈물을 흘려야 했었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4년 정말 행복했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 중에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허락하실 제 목회의 남은 시간동안도 아름다운 성도들과 함께 그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섬길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메시지를 스타벅스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스타벅스-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 이야기라는 책을 읽다가 제가 굉장히 도전받은 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하워드 슐츠가 시애틀 출장에서 스타벅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흥분하여 자기의 기존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며 그는 자기 아내 세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보,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와 있소. 난 이제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알았소. 여기는 워싱톤 시애틀이라오. 난 여기서 스타벅스의 비전을 펼칠 것이오. 여보, 난 드디어 성지에 온 것이라오”(p.38)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워드 슐츠가 커피 사업 하나 때문에 이렇게 흥분하며 이 비전을 위한 헌신을 고백했다면 진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그 복음의 역사를 이룰 교회를 위하여 헌신 할 수 있다는 것-이 특권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면 이제 저와 함께 우리가 도달해야 할 그 약속의 땅을 향한 남은 하나님 나라의 모험의 여정에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1:1-14 칠십인의 새 출발

2002-02-15 21:56:44

 

 

 

[칠십인의 새 출발]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이 결심이 열매를 구체적으로 거둘 수 있는 실제적 출발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브라함은 75세 때 고향 하란을 떠났습니다. 동행했던 사람이라고는 아내 사래와 조카 롯, 그리고 몇 사람의 일꾼이 전부였습니다. 그가 본토와 친척을 떠나서 가보지 않았던 가나안으로 떠날 수 있었던 유일한 동기는 한가지, 124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다" 즉 여호와의 말씀 때문에 그는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새해를 출발하시면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셨기 때문에 내가 이제 그 길을 가기 원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신이 하란을 떠날 때에 가나안이 더 좋은 축복의 장소로 알았기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닙니다. 저쪽으로 가면 훨씬 더 사업이 잘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이유 때문에 떠난 것도 아닙니다.

어떤 장소에서 사업을 하다가 그것을 그만 두고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는 옮기는 이유가 있지요. 예를 들면 시청이 다른 곳에 신축을 하고 이전하면 먼저 있던 지역은 상권이 죽어버립니다. 시청 때문에 드나들던 사람들, 시청 때문에 되는 사업들이 다 새로운 장소로 이전해 가기 때문입니다. 왜 이사를 가느냐? 시청을 따라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출발 동기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새해를 출발하시면서 아주 중요한 결심을 하셔야 할 그런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믿음의 길을 떠나려고 모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46장에서 세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네가 애굽으로 갈 때에 나도 애굽까지 갈 것이다. 그러니 애굽으로 가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에 대한 확증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응답은 "네가 거기에 가면 민족을 이룰 기회가 될 것이다"이라는 약속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수백만명으로 번성해서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는 일에 하나님께서 중요한 삶의 터전으로 애굽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집트는 거의 사막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국민의 80% 이상이 나일강 하류 삼각지를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민족을 이룰 땅으로 가장 비옥한 나일강 삼각주, 그 중에서도 고센이라고 하는 땅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세 번째 응답은 이런 것입니다. "네가 거기서 민족 공동체를 이루면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이 세 가지 응답을 받고 나서야 야곱은 왕이 보낸 수레를 탈 수 있었고, 왕이 보낸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왕이 보낸 양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자녀를 통해 애굽에 쌀을 사러 몇 번씩이나 보냈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야곱이었습니다. 한끼가 아쉬운 그들에게 많은 양식을 보냈고, 귀한 옷을 보냈고, 왕이 타는 황금 마차를 보내주었습니다. 생각할 겨를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의 사람 야곱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먼저 예배할 수 있는 신앙의 사람이었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위기가 왔을 때 그저 그 환경에 끌려가기에도 바쁜 우리의 삶이지만 거기에서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수 있는 분명한 삶의 태도를 가진 야곱, 곧 이스라엘의 삶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요셉의 삶을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을 때리고 핍박하던 형제들이 요셉을 깊은 우물 속에 던져넣었습니다. 그중에 한 형제, 곧 유다가 "차라리 이스마엘 장사꾼들에게 팔면 어떻겠느냐?" 그래서 은 이십을 받고 요셉을 팔아 넘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의 옷에 양의 피를 묻혀 가지고 가서 "우리가 오다 보니까 이런 옷이 길에 떨어져 있는데 이것이 분명 들에서 짐승의 밥이 된 요셉의 옷이 아닙니까?"하면서 아버지를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거짓은 언제나 사탄이 즐겨 쓰는 방법입니다. 일시적인 모면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게 하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결국 요셉은 하루 아침에 가장 사랑받는 아들의 위치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종으로 전락을 해버렸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마음의 준비할 틈도 없었던 청소년기의 요셉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급변하는 자기의 삶의 환경 속에서도 지탱할 수 있는 한가지 내적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교육 받은 조상 대대로 역사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잘 나가던 분이 어느날 갑자기 삶의 방법이 달라져서 고통 받는 분이 많지요. 아침에 출근해보니까 자기 책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제 퇴직을 당한 것입니다. 내 삶의 스타일은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뢰는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요셉은 환경은 급변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까 감옥 안에서도 종살이하면서도 언제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축복하셔서 머리가 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하잖아요? "내가 너를 머리가 되게 하겠다" 우리가 처해있는 그 환경을 탓하지 말고 거기서 머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승승장구하게 하셨어요. 그 승승장구하는 것은 요셉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졌기 때문에 뒷짐지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거야" 해서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성장과정에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목숨을 걸고 감당하려고 하는 신앙적 확신과 의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고 해서 구경만 하는 그런 자세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온 마음을 다 투자해야 합니다. "이왕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기 원한다면 막대기 같지만, 지렁이 같지만 나를 써 주십시오" 그런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 그의 형제들이 쌀을 사러 가나안 땅에서 애굽까지 왔을 때 형제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은 알아볼 수 있었어요.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얼굴을 들어 자기를 보게 하고 "내가 당신들이 팔아 먹은 요셉이다"고 얘기했을 때 형들은 기절초풍할 노릇이었어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육신의 양식을 구하러왔다가 "이제는 진짜 죽게 되었구나"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두려워하고 근심하며 어쩔 줄 몰라했을 때 요셉이 한 말이 있습니다. 455절에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요셉의 신앙고백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실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눈에 훤히 보여지는 대목입니다.

 

성도 여러분,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주제로 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 속에 인도하셨는가를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99년 주일 낮 설교의 본문으로 출애굽기를 삼고 강해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가를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면서, 깨달아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의 목적이 나옵니다. 그 하나님의 분명한 목표 지향적인 구속사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이 출애굽기의 매력입니다.

미국 새들백 처어치의 '릭워렌' 목사님은 미국 역사상 가장 성경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로 지금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라는 책을 쓰셨는데 제가 한국에서 번역된 글을 보았고, 영국에서 영문으로 된 책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지 몰라요. 그분의 관심은 오늘날 적어도 21세기를 지향하는 교회의 중요한 관심사는 성장이 아니라 건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건강해지면 성장은 열매로 따라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리 성장을 소원해도 성장과는 관계없이 계속 죽어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해 있으면 그 교회는 성장이라고 하는 열매를 거둔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지난 한 해동안 여러분의 기도생활이 건강하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섬기는 사역이 건강하셨습니까? 사회를 향해서 우리가 해야 할 그 일이 건강한 모습으로 이루어졌습니까? 아니면 병든 닭처럼 그렇게 한 해를 지내셨습니까? 왜 성장이 되었느냐, 혹은 안되었느냐 그 분명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교회를 성장시킬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성장시키는 일에 관심 갖는 교회만이 21세기에 살아남을 교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이 성장하면 바로 교회가 성장하는 거예요.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살면 교회가 바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곧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조직보다 우선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내가 이제 새 출발을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새 출발을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 속회가 새 출발을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 선교회가 새 출발을 다짐해야 합니다. 모든 부서들이 새 출발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는 그런 모습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기는 이렇게 놀라운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준비시키셨는지를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목적으로 이끌어 가시는지 분명히 알았다면 이제 평안의교회도 그런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70인 공동체가 애굽으로 출발했던 것처럼 평안의 공동체가 출발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약속하신 브엘세바에서의 응답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가 너와 거기에 함께 갈 것이다. 거기서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거기에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미래지향적인 꿈을 가져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70명의 가족 공동체를 민족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고센이라는 땅을 사용하셨습니다.

성서학자들은 그 고센 땅을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환경은 어머니의 뱃속입니다. 태어날 때는 마굿간에서 태어나든, 호텔에서 태어나든 문제가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성장하는 10개월 동안이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70명의 가정 공동체를 어머니의 뱃속과 같은 고센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민족을 이룬 후에는 다시 가나안 땅을 향해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일해야 하는지, 왜 건강해야 하는지 목표가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우리가 그 천국을 바라보며 순례자의 길을 가는 그 삶의 모습이 분명하다면 우리의 새 출발은 가벼운 발걸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비록 환경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여전히 주고 있지만 새 출발하는 평안의 공동체의 발걸음은 새 힘으로 충만한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돌아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성도들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결론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돌아오는 그 시간까지 믿음 상치 않고 한 해를 소망으로 달려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동행하리라"고 브엘세바에서 무릎을 꿇은 야곱에게 약속해 주셨던 주님, 가서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뿐만 아니라 다시 돌아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 영광 돌리며 살 것이라고 주님께서 소망을 주셨습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놀라운 은혜들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99년 이 한 해를 출애굽하면서 평안의 공동체가 70인의 새 출발과 같이 소망 가운데 출발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함께 해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고, 역사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하나님 마침내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애굽기 강해 1. 이름들은 이러하니 /1:1-7/ 이종철목사

2022-05-22 03:57:37

 

1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2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 잇사갈과 스볼론과 베냐민과 4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창조와 구원

 

출애굽기 강의를 시작합니다. 금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된 지 70주년입니다. 70년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포로생활 70년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BC 586년에 바벨론에 망했다 BC 539년에 해방되어 돌아왔으니 정확히는 47년입니다. 그런데도 왜 70년이라고 하는가? 여러 가지 신학적인 이유를 들고 있지만 그 중 유력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입니다.

 

성전은 바벨론에게 망할 때 훼파되었습니다. 스룹바벨 때 다시 재건을 했는데 그때가 BC 516년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성전이 회복되기까지는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진정한 해방입니까?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었기에 통일이 되기까지는 진정한 해방이라 부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금년이 진정한 해방을 향해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해방은 생명의 탄생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 민족은 반만 년 전부터 존속해 왔습니다. 그러나 피지배나 억압이라는 굴욕적인 현실을 겪으며 민족은 거듭납니다. 고난을 통해서 민족의 하나 됨과 자유와 자존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압제를 통해서 민족의식이 비로소 살아났다 할 것입니다. 단순히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에게도 구원이 필요합니다. 구원은 자신이 죄의 사슬에 매여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풍성함을 누려야 할 생명이 왜곡되고 위축되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살다보니 자신의 본모습도 잃고 말았습니다. 구원은 바로 생명의 출발입니다. 생명의 탄생이고 새생명을 얻음입니다.

 

출애굽기는 그런 역사와 인생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는 두 번째 책이지만 실상은 첫 번째 책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의 하나님을 먼저 만났을까요, 아니면 창조의 하나님을 먼저 만났을까요? 순서상으로는 창조가 먼저고 구원이 다음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후 우리를 구원한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이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한 하나님은 바로 만물의 창조주시다. 이스라엘이 만났던 하나님은 해방자 하나님이었고, 이 해방자 하나님의 눈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먼저 만났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하나님을 먼저 만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신약이 있고 구약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생명을 얻은 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오시게 되었는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구약 성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순서는 구약이 먼저고 성부 하나님이 먼저이지만, 우리의 실제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도 없고, 설사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할지라도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후 그 아버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얼굴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얼굴이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가가 아무리 가혹하고 엄격하게 보여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는 말씀이 옳습니다.

 

이름들

 

출애굽기라는 책 이름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정한 제목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70인역은 그 성경의 중심되는 내용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어로 기록된 원래의 성경에서는 책 제목을 정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각 성경 첫 문장의 중요 단어를 제목으로 정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태초에(베레쉬트)’이고, 민수기는 광야에서(베미드바르)’입니다. 출애굽기는 쉐모트이름들입니다. 저는 이름들이라는 단어가 좋습니다. 이름은 그 존재를 말합니다. 이름은 생명입니다. 생명들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출애굽기입니다.

 

이름들이라 불리는 책답게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12족장을 대표하는 이름들이 나옵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구약 이곳저곳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언급된 족보들이 많습니다. 종교적이거나 다른 여러 목적이 있지만 그것을 떠나 하나하나의 이름들은 소중합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긴 인생을 다 담을 수 없어 우리는 이름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니 발음도 어렵지만 소중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납골당에 가면 수많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귀찮은 듯 그냥 지나쳐 가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은 매우 특별한 이름입니다. 사랑했던 사람, 그리운 사람, 가슴 깊은 사연을 함께 나눈 사람의 이름입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은 소중합니다.

 

출애굽을 해야 했던 이유는 이 이름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귀중한 생명이 남용당하고 착취당하는 땅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출애굽의 첫 장면에서 이름을 거론하였고 바로 이어지는 사건은 생명을 없애려 태어나는 아이를 강물에 던지는 반생명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15절에 등장하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이 반생명의 역사에 저항했던 자랑스러운 인물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놀라운 것은 일개 히브리 여인인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은 언급하면서도 바로의 이름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역사가들은 이 왕이 세티 1세니, 람세스 2세니 하지만 성경은 대제국 애굽 왕의 이름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억되지 않는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탕진하고 다른 생명을 억압하는 데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자의 이름은 없고 거지의 이름은 있습니다. 그는 나사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압니다. 요즘 드라마 징비록에서 임진왜란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가장 유명하고 권력은 정점에 있었던 사람은 선조였습니다. 이순신은 이에 비해 미관이었고 항상 경계의 대상이었고 마지막 싸움에서는 조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순신이라는 이름은 영웅으로 기억하지만 선조는 무능하고 질투심 많은 왕으로 기억할 뿐입니다.

 

역사보다 무서운 것이 하나님의 기록입니다. 역사는 수백 년, 길어야 수천 년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기억하는 그런 사람이 영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 또 신앙인들에 대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고후6:9)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아벨은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어둠 속에서 사라져 같지만 하나님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생육 번성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에서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이삭 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살았던 인생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십여 장에 걸쳐 아브라함의 신앙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은 이삭을 낳은 것이었습니다. 이삭 한 생명으로부터 야곱과 에서 둘이 되었습니다. 야곱에서 다시 열둘이 되었습니다. 열둘이 애굽으로 갈 때쯤이면 70명이 됩니다. 그런데 4백년이 흐른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7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생육하고(fruitful) 불어나(prolific) 번성하고(multiplied) 매우 강하여(exceedingly strong)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the land was filled with).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되었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같이 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12:2),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13:16),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5),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22:17) 오늘 본문 7절 말씀은 그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출애굽 당시 장정만 60만 명이었으니 그 가족까지 합치면 족히 2백만 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풍요롭고 안정된 땅 애굽의 뱃속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애굽의 보호 속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애굽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에 끼어서 강대한 민족을 이루기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예 애굽의 중심 속에 밀어 넣어 그 보호 하에 강성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처음 야곱과 70명의 조상들은 왜 약속의 땅을 떠나야 했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떠나더라도 잠시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4백년이 흘렀고 하나님은 당신의 방식으로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창세기 마지막 50장과 출애굽기 1장은 연달아 있지만 시간적으로는 4백 년 가까이 되는 공백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전혀 활동하지 않으셨던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때처럼, 모세 때처럼 직접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어느 곳에서요? 바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낳게 하고 기르시는 바로 그 현장에서였습니다. 주님은 부지런히 이스라엘이 번성하도록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손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 눈이 어두워 못 볼 뿐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나만 남았다고 탄식할 때 하나님은 바알에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예비해두셨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런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허드렛일 같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이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창세기 1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이 복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만 실상 이 축복은 모든 인류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반생명에 저항하여 생명을 풍성케 하는 역사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자연 세계의 위협에서 인류의 생명을 지켰습니다. 세계사는 소수의 지배에서 다수의 지배로 더 많은 생명이 그 풍성함을 누리도록 나아가는 민주주의의 역사였습니다. 잠시 제국주의가 발호해 소수 민족만의 번영을 추구하였지만 인류는 모든 민족이 풍성함을 누리는 인류 공영과 공존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류가 너무 많습니다. 아직도 더 인간이 번성해야할까요? 인류가 번영하는만큼 다른 뭇생명들은 죽임과 억압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에너지 낭비나 자연 착취가 심합니다. 전에는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이제 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갈수록 출산율이 줄어듭니다. 몇 십 년 후에는 우리나라 인구가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저출산의 원인은 자식 낳아서 기르기 힘들다는 것과 자신들의 삶을 희생하기 싫다는 태도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기를 낳지 않는 이런 세태를 보며 이기적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인류가 너무 많습니다. 자원을 너무 많이 사용합니다. 생명의 번성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 인간다운 삶이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도 억지로 출산율을 올리려는 시도는 실패할 것 같습니다.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자연히 아이를 낳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노동생산성을 염려하는데 꼭 이 땅에 한민족만 살 필요가 무엇입니까? 노동력이 부족하면 외국인들을 이주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노년 세대들이 놀기만 하는 것도 그렇고 적당히 일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썼던 전통적인 방식이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보다 출산율을 낮추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저출산을 받아들이고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생육과 번성, 곧 생명 충만의 복입니다.

 

떠남

 

애굽은 이스라엘이 번성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곳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떠나야할 때가 되니 진통이나 고난이 시작됩니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 캥거루는 그곳이 익숙합니다. 보호막이 됩니다. 그러나 다 자라서도 그곳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비좁습니다. 알도 부화할 때가 되면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안전했던 곳이 이제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곳이 됩니다. 출애굽은 애굽이 행한 핍박 때문에 일어났지만 실은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를 여행하다 보면 성서의 헬라 어 단어들을 목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스의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분깃점 표지판에서 엑서더스라는 단어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엑스 호도스;, 길에서 빠져나가다는 뜻입니다. 길이 좋다고 계속 가면 안 됩니다.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빠져나와야 합니다. 빠져나갈 때가 되면 사인이 옵니다. 안전했던 곳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위기의식을 느끼기도 하고 자주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기 시작합니다. 그 사인을 잘 분별하고 그 음성에 잘 순종하십시오. 이스라엘은 이제 애굽을 빠져나올 때가 되었습니다.

 

5절에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70명이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허리(야렉)와 같은 어원이 바로 환도뼈입니다. 환도뼈는 남성 생식기를 감싸고 있는 엉덩이 부근의 고관절을 말합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환도뼈 하면 연상되는 인물이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습니다.

 

꺾이지 않는 야곱의 고집에 하나님이 질려 그만 그의 환도뼈를 쳐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싸우고 환도뼈를 절며 떠오르는 해를 뒤로 하고 걸어가는 야곱의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야곱은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환도뼈가 꺾인 무능력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야곱의 환도뼈로부터 70명의 가족이 탄생했습니다. 이어서 수 백 만에 이르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탄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야곱은 무력해졌지만 그때로부터 하나님께서 대신 일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에게는 무너진 환도뼈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고난의 땅이었습니다. 이방의 땅이었고 반생명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곳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생명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에 달했습니다. 이제 그 허리의 임무는 끝이 났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명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에는 개인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민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커졌고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성장했으면 그에 맞는 땅과 법과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출애굽은 바로 그런 변화와 성장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강해 2. 히브리 여인들의 저항 /1:8-22/ 이종철목사

2022-05-22 03:59:13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고난의 땅

 

애굽은 이스라엘이 작은 가족에서 민족으로 번성하는 요람이 되었던 곳입니다.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번성하자 핍박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크니까 당하는 것이라고. 작으면 누가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반대나 박해를 받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잊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자 이스라엘을 향한 박해가 시작됩니다. 고난은 그곳이 더 이상 요람이 아니라 속박의 땅이 되었고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사인입니다. 성장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급격히 몸이 자라면서 이곳저곳의 관절들이 아픕니다. 고난은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성장합니다. 이스라엘에 임한 핍박 덕분에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이 새로운 땅, 약속의 땅으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곳으로 부르시는지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버질, 라틴명으로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고대 로마라는 나라를 건국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대서사시입니다. 이 책의 첫장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합니다. “무기들과 한 전사를 나는 노래하노라. 그는 운명에 의해 트로이야의 해변에서 망명하여 처음으로 이탈리아와 라비니움의 해안에 닿았으나로마의 건국은 트로이 전쟁의 패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의 장군입니다. 헬라 연합군에 의해서 패망하여 그 부하들과 함께 트로이를 떠났습니다.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고생하다 이탈리아의 로마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부터 로마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이런 향수를 가지고 있기에 시저나 로마의 황제들은 고대 트로이로 수도를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마침내 콘스탄틴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오늘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고난과 쫓겨남이 새로운 시작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그들은 신화로만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한 패배와 고난과 방랑이 살아 있는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위대한 로마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미국도 쫓겨난 자들의 땅입니다. 유럽에서 종교적 억압을 피해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미국인들이 가장 동일시 했던 것이 바로 이 출애굽의 모델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미국으로 건너가며 이스라엘처럼 자신들을 광야로 심부름을 받은 특별한 사명 공동체로 인식했습니다. 초기의 청교도들을 이끌었고 매사추세츠 주 총독을 12번이나 역임했던 존 윈스롭의 설교 중 일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건설하는 국가의 최종 목적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행복을 안겨주고 더 많은 봉사를 하기 위하여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덕 위의 도시와 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쫓겨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받았던 고난을 새로운 땅을 향한 부르심으로 해석했습니다. 고난은 위기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고난은 우리로 좌절하게 하거나 타협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이 고난이 우리를 빛나게 하는 연단이 되어 그것을 계기로 우리를 우뚝 서게 만들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이 위기가 있었습니다. 애굽에 안착하여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거칠지만 약속의 땅에서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것인가? 모세와 이스라엘은 후자를 선택했고 그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출애굽기입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

 

이스라엘이 애굽 땅으로 넘어 온 시기는 요셉 때였습니다. 그때는 시기적으로 힉소스 족이 애굽을 침범했던 때입니다. 애굽의 본토민들이 쫓겨나고 이민족인 힉소스 족이 통치하면서 애굽 15왕조를 열었습니다. 요셉이 총리의 자리에까지 이른 것은 그의 탁월한 역량도 있었지만 이민족 우대 정책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를 계기로 야곱의 가족이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안전한 보호를 받으며 민족 단위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본토민들이 다시 이민족들을 몰아내고는 18왕조를 세웠습니다. 19왕조의 람세스 2세는 고센 지역으로 확장 정책을 펴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학대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이것이 8절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라는 말씀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하기 위해서 첫 번째 내세웠던 정책은 고된 노동과 부역이었습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11) 몸을 괴롭게 하여 출산율을 낮추는 정책입니다. 그 노동의 강도는 매우 심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13)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14)

 

치졸한 정책이지만 이는 현대사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청년들의 결혼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시대의 유행이나 개인주의적 성향 때문에 그렇습니까? 신체적으로 볼 때 결혼 적령기는 10대 중후반입니다. 마리아도 요셉과 약혼 했을 때 15세 전후 빠르게는 13,4세로 보기도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성춘향과 이몽룡도 연애를 했던 시기는 16세 이팔청춘 전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청소년들은 이 나이에 공부나 스펙 쌓기나 알바나 취업준비로 바쁩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할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88만원 세대라는 책에서는 이를 첫 섹스의 슬픈 경제학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비군으로서 이곳저곳으로 돌려야 취직이라는 포화된 시장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깁니다. 이미 기득권을 쥐고 있는 기성세대가 분담해야 할 경제적 고통을 상대적으로 약자인 젊은 세대에게 강요하기에 결혼이 늦어집니다. 서구나 다른 나라보다 우리 사회가 더 심합니다. 이제는 20대에 결혼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 보일 정도입니다.

 

애굽과 바로는 고강도 노동을 통해 출산율 저하 정책을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지혜롭게 하자’(10)며 매우 현명한 결정을 한 것처럼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12절입니다.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20절입니다.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약자의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입니다. 미국 사회에 흑인들의 권리가 강해진 것은 그들의 출산율이 백인들보다 앞서 선거인수가 무시 못 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히스패닉 계가 신장 추세여서 미국의 이민정책을 바꾸고 있습니다. 약자는 힘이 약한 대신 수로 맞섭니다. 국민의 뜻이 무서운 것은 그들이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된 노동에 의한 통제 방식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출산율을 강제로 낮추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산파들을 불러 히브리인들이 아이를 낳을 때 딸은 살려두지만 아들이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여기 히브리인들이라는 단어가 언급됩니다. 히브리인들은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용어이지만 원래는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민들을 가리키는 사회학적 용어입니다. 히브리란 단어는 합비루에서 나왔는데 그 단어는 먼지라는 뜻입니다. 당시 중근동을 떠돌던 먼지와 하찮은 존재가 이 합비루들이었습니다. 유럽의 집시와 같은 세력이 합비루입니다.

 

수는 어느 정도 되지만 힘이 없는 유랑민들은 항상 경계와 학대의 대상이 됩니다. 중국이 티벳을 점령한 이후에 벌였던 정책도 이와 같습니다. 티벳인들을 강제 낙태와 불임수술을 시켜 인구를 축소시키려 하였습니다. 지구상에 소수 민족이나 유랑민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런 야만적 행동은 생명을 번성케 하는 하나님의 뜻과 위배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번성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1:28). 노아 홍수 후에도 하나님은 동일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제는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하여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수가 곧 200만 명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농촌에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다문화 가정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유럽처럼 이주민들에 대한 반감과 민족주의를 근거로 한 우파세력들의 반발이 우려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함께 번성하는 길을 찾아야합니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만 출애굽 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12:37-38) 히브리인이라 불리는 가난하고 중다한 잡족이 모여 하나의 신앙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약자들의 하나님, 유랑민들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성서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는 약자를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로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인데 예수님은 작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겸손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의 가난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하나님입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이스라엘에 처음 계시되었던 하나님이 바로 히브리인의 하나님, 가난한 자의 하나님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각인(刻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류동물이 처음 본 대상을 어머니로 생각하고 따르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 각인된 하나님은 바로 노예와 압제로부터 자유케 하신 해방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십브라와 부아

 

바로는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기 위한 조치를 히브리 산파들에게 내렸습니다. 왕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왕의 명령을 거부했던 두 여인이 있었습니다. 십브라와 부아입니다. 십브라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의 이름이고 부아는 찬란함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이들은 권력자의 편에 서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섬으로써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애굽은 히브리어로 미쯔라임이라 불립니다. 짜라르 곧 억압, 괴로움, 환란이라는 뜻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애굽은 풍요로운 땅이 아니라 억압의 땅이고 고난의 땅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노예로 살아야 했던 고난의 땅이었습니다. 이름이 중요합니다.

 

억압을 만들어냈던 바로는 대제국의 왕이지만 이름도 없이 바로라 불립니다. 그렇지만 십브라와 부아는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들은 일개 산파에 불과했습니다. 산파들의 지도자였을까요? 아니면 한 명의 산파에 불과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면 이들 두 명의 산파로는 그들의 출산을 다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들은 권력자 앞에 선 힘없는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자들이 대제국 바로와 맞장을 뜨고 있습니다.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고 태어난 남자 아기들을 살렸습니다. 생명을 낳는 산파가 될 것이냐 생명을 죽이는 산파가 될 것이냐에서 그들은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잦으니까 바로의 귀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바로가 묻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 그러자 산파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19)

 

사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 히브리 여인들이 강해서 아이를 잘 낳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아기들을 살리려는 두 산파의 갸륵한 마음을 보시고, 산파들이 도착하기 전에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조치하셨을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끄럽거나 곤란한 처지에 처하지 않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다른 한편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용납이 됩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도덕적 원칙보다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원칙이 더 높고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약자들의 거짓말에 대해서 강자의 거짓말과 같이 동일하게 취급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약자들의 거짓말은 살고자 하는 절박감에서 나온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장발장이 주인공인 소설 레미제라블에서는 거짓말과 관련된 사건들이 많습니다. 1) 장발장은 친절을 베푼 신부의 은혜를 기만하고 은수저를 훔쳐 달아납니다. 그러나 미리엘 신부는 붙잡혀온 장발장을 살리기 위해 은수저는 자기가 준 것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2) 자신의 신분을 바꾸어 존경받는 시장으로 일하고 있던 장발장을 대신 해서 다른 사람이 장발장이라 오해를 사 재판정에 서는 일이 벌어집니다. 완벽하게 신분세탁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이를 괴로워한 장발장은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정직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3) 장발장이 달아나며 어느 곳에 숨었습니다.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이 있느냐고 묻자 평생에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었던 쌩쁠리스 수녀는 장발장이 이곳에 없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이 장면에서 오 거룩한 처녀여, 그 거짓말이 낙원에서 보상을 받기 바라노라고 덧붙입니다. 제가 거짓말을 찬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을 행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도덕성에 대해서 근시안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종합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위대한 두 여인의 투쟁은 오늘에도 계승되어야 합니다. 거대한 구조와 권력 앞에 우리는 일개 산파처럼 무능력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여 손 놓고 있거나 악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저항해야 합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약탈적 시스템이 우리 사회를 삭막하게 만들며 생명을 위협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기업인으로서 사람을 이윤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살리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저는 이 두 산파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먹을 것으로 온갖 장난을 치는 세상이고 그걸헤 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업만은 생명을 살리는 그런 기업이 되겠다며 어떤 손해도 감수한다면 그는 이 두 산파처럼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저항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1:21)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할 결과 우리에게 좋지 않은 일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했다는 것으로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쉰들러 리스트”(1993)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2차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이 영화는 더 유명해졌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쉰들러는 폴란드에서 그릇 공장을 운영했습니다. 이 공장은 군수공장으로 인정을 받아서 유태인들을 노동자로 고용할 수 있었습니다.

 

쉰들러는 한 사람의 유태인이라도 더 고용하기 위해 자기 돈과 물건을 팔아 독일군에게 뇌물로 줍니다. 이런 덕분에 이 공장에서 일했던 1,100명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마지막 장면에서 쉰들러는 유태인들을 돌려보내며 한탄을 합니다. 그는 울면서 자기의 승용차를 팔았더라면 유대인 10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자기의 시계와 결혼반지를 팔았더라면 유태인 2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쉰들러는 두 산파와 같이 사람들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지혜롭고도 용기 있는 여인들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바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시대마다 하나님 편에 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위대한 이름을 얻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번성케 하는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이 생명의 역사에 함께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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