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경고 하셨습니다/출11:4-8
2006-10-11 15:39:38
요즈음 과학이 대단히 발달했습니다.
기상예보도 몇 년 후까지를 한답니다.
그래서 태풍이 분다, 스나미가 온다고 합니다.
전자제품도 고장이 나면 신호등이나 경고 신호를 보냅니다.
이처럼 민방위 훈련도 그렇습니다. 비상 사이렌을 울립니다.
피하라. 몸조심하라는 것들입니다.
우리도 구름이 끼면 비올 것 같다는 것 등을 잘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 가지 징조들로 경고하십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위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
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출 11:4-7)하셨습니다. 이 경고는 인류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고였습니다. 이 정도면 보통 사람 같으면 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의 똥배짱은 애굽의 대 비극을 가져옵니다. 얼마 전 신문에 박용우 교수가 “잊지 말자! 살 빼기 위한 여덟 가지 원칙”을 발표했습니다. 이제 밥상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젠 패스트 푸드(Fast Food)가 우리를 뚱보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가히 살과의 전쟁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살 빼는 비방이 있다면 가리지 않고 해 봅니다.
그런데 다음 8가지를 실천해 보십시오.
1. 아무리 바빠도 하루 세끼를 꼭 챙겨먹는다.
2. 채소(나물반찬, 샐러드), 해조류, 버섯은 눈에 띄는 대로 많이 먹는다.
3. 고단백식품(두부, 계란흰자, 생선, 해산물)을 하루 2끼 이상 먹는다.
4. 점심식사 이후에 설탕이 많이 들어간 밥, 빵, 면을 일체 먹지 않는다.
5. 물을 하루에 2ℓ(1되) 이상 많이 마신다.
6. 불포화지방산(생선, 견과류, 올리브유)을 매일 섭취한다.
7. 일상생활을 운동하듯 한다. 가급적 걷기를 즐기고 심장에 약간 부담을 느낄 정도로 빨리 걷는다. 전화하지 말고 찾아가서 이야기 하라.
8. 매주 한 번은 다이어트 휴일로 정한다. 이때는 먹고 싶었던 것을 실컷 먹는다.
이것은 의사가 말하는 건강비결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에게 주는 위험 경고 표지판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임금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 주세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임금님을 비롯해서 모든 가정에 사람이나 동물이나 먼저 난 것은 다 죽습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정신 차리세요.
Ⅰ. 하나님이 경고 하셨습니다.
아마 군부대 곁을 지나 보신 적 있으시지요. 철조망에 “접근금지, 발포합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이 경고문입니다. 삶에는 두 종류의 비극이 있습니다. 첫째가 사랑을 잃는 비극이랍니다. 둘째가 사랑을 얻는 비극이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료함으로 시작해서 싫증 때문에 끝나 버립니다. 목적을 이룬 기쁨은 아주 잠깐입니다. 우리는 중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어떻게 하면 삶이라는 선물을 한껏 누릴까? 어떻게 하면 덜 후회하며 살 수 있을까?” 이 시간에도 우리의 삶의 길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영원하다고 한다면,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흥분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평생 우리는 늘 긴장합니다. 어깨나 팔다리만 아파도 죽을병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한 사람의 결정에 죽고 사는 것이 달려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자기 이야기를 지어내서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경고 하셨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절대로 따 먹지 마라,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한창 배고팠던 해방 전후에 복어 알을 먹고 죽는 것 보았습니다. 산에서 따 온 버섯을 먹고 죽는 것도 본 적 있습니다. 선악과에 독이 들어서가 아닙니다. 그 열매는 보기에 그렇게 아름다웠습니다. 먹으면 지혜로워질 것 같았습니다. 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을 어긴 것입니다. 대학 수학 능력 고사 때 휴대폰, mp3(엠피쓰리), 전자시계 등을 반입하면 시험 무효다, 내년까지 시험치를 자격 안 준다고 신문, 방송에 많이도 말 했습니다.
전국에 27명이 적발 되었습니다. 본인은 물론, 학부모, 시민단체에서 이건 너무하다, 헌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합니다. 미리 경고했습니다. 이걸 보면 사람들의 주의가 산만합니다. 모든 약에 설명서가 있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또 부작용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제약회사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죄는 달콤할 수 있습니다. 마약과 같습니다. 순간적인 만족과 쾌감을 줍니다. 이는 습관이 들면 폐인이 됩니다. 술, 담배, 나쁘다고 말합니다. 담배 하나만 끊으면 많은 암을 예방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국가 수입이 는다고 해서 담배를 만들면 안 되지요. 병 주고 약 주는 꼴입니다. 그리고는 담배 끊으라, 담배 끊으라고 보건 복지부에서 말합니다. 이 성경이 경고문입니다. 또 축복 선언문입니다.
북한 헌법 서문을 보았습니다. “김일성 수령”이라는 말이 무려 17번 나옵니다.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이시다.”라고 시작합니다.
1974년 4월 김정일에 의해 만들어진 “10월 대책”은 수령 독재체제와 개인숭배사상을 유지, 강화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를 위반할 경우 재판을 거치지 않고 중형에 처하고 있어 사실상 “수령 독재 10계명”입니다.
그 10대원칙 한번 보실래요.
1.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 하여야 한다.
2. 김일성 동지를 충성으로 높여 우러러 모셔야 한다.
3. 김일성 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해야 한다.
4. 수령님의 교시를 신조화 해야 한다.
5. 교시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6. 김일성 동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당의 사상의 지적 통일과 혁명적 단결을 강화하여야 한다.
7. 김일성 동지를 따라 배워 공산주의 풍모와 혁명적 사업방법을 소유해야 한다.
8. 수령님의 크나 큰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충성으로 보답해야 한다.
9. 김일성 동지의 유일적 렬도밑에 전당, 전국, 전군이 한결같이 움직이는 강한 조직 규률을 배워야 한다.
10.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고 혁명위업을 대를 이러 끝까지 계승 완성하여야 한다.
세상에 이런 헌법이 어디 있습니까? 김일성 우상의 나라인 것입니다. 저는 금강산에 가서 김일성의 말을 돌에 새겨놓고 아침저녁 쓸고 닦습니다. 누가 그 돌이나 비석을 보고 비웃거나 손가락질하면 당장 잡혀갑니다. 미리 경고를 합니다.
Ⅱ. 맏이는 다 죽는다.
하나님은 바로 왕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 either ~ or”를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왕은 9번의 재앙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이제 보내주마, 이를 거두어 달라고 너희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해주면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젠 하나님의 최후통첩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더 이상의 기회를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도 재앙으로 진절머리가 났을 것입니다.
사람도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합니다. 급하면 무슨 소리 못합니까? 우리도 급하면 하나님께 제일 좋은 약속을 합니다. 큰 불 끄고 나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모세는 “만일 이번에 우리를 보내주지 않으면 왕은 물론 모든 사람과 동물의 처음 난 것은 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왕은 “설마 그럴라고." 했을 것입니다. “설마가 사람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르트르라는 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택하는 데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선택한 데 책임을 지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사탄의 달콤한 말에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온 것입니다. 지금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약속입니다. 대단한 축복입니다. 사랑의 선언입니다. 구원의 약속입니다. 이를 지켜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But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요 1:12))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Who were born not of blood, not of the will of the flesh, not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요 1:13) 이것이 약속입니다. 축복의 선언입니다. 구원의 대현장입니다. 인간은 정말 미련합니다. 어리석습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했겠습니까?
성경은 “천기는 분변할 줄 알면서...”라고 했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내가 너희를 품으려고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메나 솔개가 하늘을 휘 날면 모이를 줍던 어미 닭이 얼른 병아리를 자기 날개 아래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즈음 비전이라는 말이 일상화 되었습니다. 큰 비전을 가진 사람은 위대합니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초라합니다. 그런 사람은 열등의식을 갖습니다.
진센돌프 백작은 “나에게 단 하나의 열망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분, 오직 그분 뿐이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인 92명당 1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합니다. 바로 왕에게 선택할 때가 왔습니다. 이 기회 놓치면 엄청난 재앙을 맞습니다. 온 나라가 초상집이 됩니다. 우리도 늘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잃으면 반드시 후회합니다. 사람은 정말 간사합니다. 사람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주십니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아름다운교회(김종표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신학을 졸업해도 마땅한 교회가 없습니다. 100개 교회를 개척하면 자립하는 교회는 10%미만이라고 합니다. 200명 이하의 작은 교회가 전국에 60%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인 200명만 되면 새 교회를 개척한다고 뜻을 정했답니다. 그는 교인 200명만 되면 부목사를 보내 개척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온통 야단입니다. 세상이 용광로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에게 모세를 보냈습니다. 최후 통보였습니다. 우리말을 들으시오. 이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 주지 않으면 오늘 밤 사람과 짐승의 모든 첫째는 다 죽습니다. 무서운 경고였습니다. 그는 거절합니다. 바보지요. 이전에 아홉 가지 재앙에 혼쭐이 났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미련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늘 이 때가 마지막 때인 줄 압시다. 주일을 성수합시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립시다. 성경을 읽고 생활화 합시다. 늘 긍정적으로 살아 주 안에서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강해 12. 애굽의 장자를 치다 /출11:1-10, 12:29-36/ 이종철목사
2022-05-22 04:42:22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2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4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5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6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8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10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 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12: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않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31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33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므로 34 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하나님을 위한 변명
출애굽기 말씀을 전하다보니 하나님을 변명하는 설교를 많이 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와 애굽의 적들을 혼냈다며 신나게 읽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눈에는 심판의 다른 면이 눈에 들어옵니다. 독종이나 역병으로 죽어간 애굽의 짐승이나 동물들이 불쌍해 보입니다. 5절 말씀에서는 분명히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장자를 칠 때 죽어간 사람들, 그 중에는 상당수의 어린아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꼭 그렇게 하셔야만 했는지, 또 이렇게 무자비하게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일까 하는 물음입니다. 이런 심판은 그래도 이해할 만한데 전쟁이나 테러나 세월호 참사와 같이 대형사고 과정에서 애꿎고 선한 목숨들이 사라질 때 하나님은 그때 무엇하고 계셨는지 우리는 질문합니다. 모든 것을, 심지어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독교 신학에서는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는 신정론에 대한 문제이며 신정론과 관련된 내용들을 여러 번 말씀드렸기에 여기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신에 대한 변명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자녀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뜻이 있을 것이라 말하며 위로하지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을 버릴 수 있는가?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신을 원망할 수는 있지만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생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으며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을 이대로 우연의 힘이나 무질서한 것으로 방치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이유를 찾고 영원한 것을 꿈꾸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연의 폭군에 대항하여 싸울 힘이 필요합니다. 그 핵심에 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석이라도 해야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러신지? 이러니 하나님에 대해 자꾸 변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늘도 저는 하나님을 변명하려 합니다.
이스라엘을 편드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열 번째 재앙으로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을 다 쳤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한 밤중에 애굽 전역을 급습했습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자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날을 우리는 유월절이라 부릅니다. 한자로 넘을 유(逾) 넘을 월(越) 해서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 날입니다. 첫 태생들이 죽었기에 모든 가정마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어린아이들도 많이 죽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윤리성을 따지기보다 이 하나님이 누구 편인지를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성경 읽기입니다.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전쟁 중에는 윤리성이 잠시 유보됩니다. 즉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이 기적을 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약자입니다.
하나님은 억압당하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통쾌한 승리를 가져다주는 분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윤리성을 따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배부르다는 증거입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는 사건은 마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사건에 비할 수 있습니다. 원자폭탄으로 말미암아 수십 만 명의 인명이 살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인민들에게는 그것은 통쾌한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폭압적인 일본의 압제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해방을 맞게 된 계기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약자와 가난한 자인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시는 분입니다. 반생명적 문화와 폭력과 전제로 억압하던 애굽의 통치세력을 일시에 물리치셨습니다. 전쟁에서는 승리가 중요합니다. 더구나 강자와 약자 사이의 싸움에서 윤리성을 물어야 할 것은 강자들에게 입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하나님은 자기와 같은 약자를 철저히 편드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시편에서 악인이나 원수라는 표현들이 자주 나옵니다. 악인이 누구일까요? 도덕적 기준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 민족적 기준입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이방인들이 바로 원수들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이 되어 이 원수들을 물리칩니다. 하나님은 중립의 위치에 있는 분이 아닙니다. 싸움이 벌어졌는데 아버지가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고 중립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매우 섭섭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는 약하기도 한데.
사사기에 보면 여성 사사 드보라와 바락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의 시스라의 군대와 싸워 이깁니다. 시스라는 전쟁에 패하였고 여인의 손에 의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스라엘의 승리와 이방인의 패배의 실상을 한 가정의 모습을 적나라 하게 보여줍니다.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시녀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삿5:28-30) 반대로 지금 시스라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을 조롱시라고 합니다. 시스라의 어머니 입장에서는 얼마나 비극적인 장면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매우 통쾌한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 졌다면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립적인 분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편드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에 통쾌한 승리를 가져다주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열 번째 재앙을 계기로 애굽에서 해방됩니다. 해방되어 떠나는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12장 35, 36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여기 취하였다고 하였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plunder 곧 약탈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빌리거나 구입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리자들이 약탈하는 전리품과 같은 것입니다. 한밤중에 쫓겨나듯이 떠나는 탈출이 아니라 승리의 해방이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은 이제 좁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섰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만민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를 믿는 자녀들을 위하고 편드시는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실상 우리가 기도할 때 부르짖는 하나님은 어떤 보편적인 중립자가 아닙니다. 나에게만은 내 인생에 대해서만은 특별한 대우를 해주길 원하는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윤리성이나 보편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모르겠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를 특별히 더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고 우리 편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장자를 치다
애굽의 젖줄인 나일 강을 피로 물들여도 바로는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최고신으로 추앙받는 태양을 무력화해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애굽에 퍼부은 열 가지 재앙들은 실은 애굽을 다스리고 있던 우상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나일 강의 신 하피나 오시리스가, 다산의 신들이, 태양신 라가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너졌습니다. 그렇지만 바로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열 번째 재앙은 진짜 적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적은 우상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신들이 주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우상이란 것도 실은 인간이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에 대해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조롱합니다.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사44:15, 17)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악의 본산인 인간을 마지막으로 쳤을 때서야 비로소 바로가 무너졌습니다.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자연 재해가 어떻고, 사탄이 어떻고 하지만 결국 이 세계를 망하게도 흥하게도 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사탄도 인간 안에 있는 악을 이용할 뿐입니다. 악은 인간이 만들어냅니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었던 것은 인간이었습니다. 뱀이 유혹했다고 하며 이 뱀이 사탄이라고 해석을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는 그런 언급을 일절 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그것은 인간이 선택한 결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재앙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바로가 결정한 것입니다. 경고를 듣고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왜 반생명적 문화 체제를 구축했습니까? 자기들의 안정과 자기들만의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반생명적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그 반생명의 끝을 보여주는 열 가지 재앙 심판이었습니다. 메르스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메르스는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낸 바이러스입니다. 문화라는 것이 탐욕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인류에게 편리를 가져다주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관리능력입니다. 관리하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역병이라는 대재앙을 만들어냅니다. 심판 운운하기 전에 인간의 태도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고 함께 엮여 살아가는 하는 공동체가 겪게 되는 운명이기도 합니다. 애굽 백성들의 비극은 그들이 바로 체제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애굽의 장자를 친 것은 또한 하나님이 사랑하시던 이스라엘이 괴롭힌 대가였습니다. 출애굽기 4장 22, 23절입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고 죽인 벌로 애굽의 장자가 죽임을 당합니다. 애굽의 폭력 체제 하에서 이스라엘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부르짖었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이 산파들의 손에서 또는 나일 강에 빠져 죽임을 당할 때 울부짖었습니다. 고된 노동으로 인한 고역으로 못살겠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제는 그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은 애굽이 부르짖게 만드십니다. 11장 6절입니다.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12장 30절입니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을 괴롭게 하면 그만큼 내가 고통을 당합니다. 죄를 지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주어집니다. 우주의 종말에 왜 대파국이라는 우주의 철저한 해체가 있는가? 그것은 이 세상이나 인간이 저지른 악에 대한 응징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저지른 죄가 감추어졌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폭력의 결과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와 동일하게 복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석하는 속죄론이 대표적입니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인류가 범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인류가 저지른 죄는 어마어마해서 하나님의 죽임이 아니고는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응징한 대신 하나님이 응징을 당한 것입니다. 여기에도 복수의 법칙이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죄짓지 마십시오. 죄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가 따릅니다. 마찬가지로 선을 행하십시오. 선을 행하면 나에게 동일한 선이나 행복이 대가로 주어질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모세는 크게 되고 바로는 작아집니다. 8절입니다.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바로의 신하들이 모세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12장 32절입니다.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이제는 바로가 모세에게 축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참된 신이 누구이며 누구를 통해서 신의 복과 재앙이 쏟아지고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준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는 것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는 권세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권세와 유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권세를 가지고 있는 존엄한 사람들입니다. 이 권세를 잘 활용하십시오. 지금 나라가 메르스 사태로 어렵습니다. 이 음부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길 함께 기도합시다. 교회가 안식을 잃은 우리 사회에 참된 복과 평화를 주는 근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믿는 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 /출11:7-11
2021-05-26 10:10:55
하나님께서는 복을 약속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복을 구하지만, 그 결과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충만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설교를 통해서, 생육, 번성, 정복, 충만한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북조 이스라엘이 200년간 존속되다가 패망하여 많은 백성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패망 당시 앗수르와 애굽과의 외교적 실책이 한 요인이기도 하였지만, 주원인은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범죄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고 이방 사람의 규례를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명기4:23)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만약에 태양계의 중심을 지구에 내어 준다면 지구는 다른 모든 행성을 각자의 궤도에 붙잡아 둘 만한 중력이 없으므로 지구까지도 파멸될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받으려고 하는 것은 허상일 뿐입니다.
기독교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내면에 어떤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신 하나님 형상의 빈방이 존재합니다.”라고 설파한 것은 살아갈수록 인정하게 되는 명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위해서 애굽에 내린 10가지의 재앙을 통해서 인간이 만든 모든 그것들보다 더 크고 위대하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셔서, 세상의 무엇보다 더 하나님이 크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말씀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10가지 재앙은 애굽의 신을 무력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위대한 신이고,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0가지 재앙은 피, 개구리, 이, 파리재앙/ 생축,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장자 재앙으로 끊어서 암기하면 쉽습니다.
나일강은 애굽 사람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주면서 종종 범람함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신으로 섬겼지만, 피로 변하여 마시거나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개구리 재앙은 머리를 부활의 신을, 이 재앙은 땅과 사막의 신을, 생축 재앙은 암소와 수소의 신을, 독종 재앙은 의술의 신을, 우박 재앙은 하늘의 여신과 곡식의 신을, 메뚜기 재앙은 곡물의 신을, 어두움 재앙은 태양의 신과 하늘의 여신을 장자 죽음의 재앙은 출산의 신, 어린이 수호신, 다산의 신보다 하나님께서 크시다는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애굽사람들이 믿는 신들의 무력함을 입증하셨고, 사람들이 바라는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재앙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알숭배와 현대인의 신
설교자는 10가지 재앙을 한마디로 하나님을 섬기고 바알을 섬기지 말라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과 애굽 사람들을 넘어서 인류에게 실물로 교육한 것이라고 요약하였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바알숭배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바알은 가나안에서 농경지에 풍요를 주는 신으로 섬기던 바람과 풍요의 신의 이름입니다. 바알은 바람을 불어서 구름을 운반하고, 구름을 산에 걸리게 하여 물이 되게 하며, 이때 천둥과 번개를 쳐서 농경지에 비가 내리게 하고, 그 빗물이 땅속으로 들어가서 산과 농경지 사이의 샘물이 되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② 그리스인들도 바알을 유형으로 섬겼습니다. 그리스의 제우스 신화도 제우스는 하늘의 신으로서 빛의 신이요, 천기를 주관하는 신으로 “구름을 조성하는 자”, “번개를 사랑하는 자”, “천둥을 치는 자”로 묘사하였습니다. 제우스는 여러 여신과 인간의 딸들과 혼인하여 신들을 다산하는 생명이 강한 신이어서 풍요를 줄 수 있는 신으로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올림포스산에서 산다고 믿었습니다. 올림포스산 아래에 모여서 달리기를 하여, 일 등을 한 자가 생명력이 가장 강한 자이고 그가 제우스 신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믿고 시작한 것이 올림픽입니다.
③ 우리나라의 단군신화도 하늘의 신인 환인이 그의 서자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므로 허락하였고, 환웅은 풍백(風佰), 운사(雲師), 우사(雨師) 등 신하들을 데리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다스립니다. 범과 곰이 인간이 되기를 원하므로, 약쑥과 마늘을 주고 100일 동안 먹으며 빛을 보지 말라 한 즉, 곰이 21일을 견디므로 웅녀가 되자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신화입니다, 환웅도 바알 및 제우스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생산과 풍요와 인간사의 질서를 주관한다는 신화입니다. 바알 숭배의 본질은 생명과 생산과 풍요입니다. 그러나 바알을 섬기는 방법 자체에서도 비윤리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약하면 인류의 역사는 생육, 번성, 정복, 충만한 복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찾고 있었고, 현대에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을 부정하는 교육, 언론, 문화, 정치가 가득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발생하는 재앙
제가 10가지 재앙을 자연현상으로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오늘날에도 자연 재앙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10가지 재앙을 기후변화와 화산폭발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소개합니다.
기후변화로 기온이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나일강이 마르고 유속이 느려지자, 독성이 있는 수초가 번성하였고, 수초들이 죽을 때 붉은색으로 변하여 나일강을 물들였고, 독성이 있는 수초는 2~4번째 재앙인 개구리와 이, 파리떼의 등장 배경이 되었고, 개구리가 죽으면서 모기와 파리 등 곤충들이 질병을 옮겼고, 이때 지중해의 산토리니섬에서 일어난 거대한 화산폭발은 폭우 등의 재앙을 초래하여 우박을 동반한 폭우와 불이 내렸고, 칠흑 같은 어두움을 오게 하였고, 곡물에 달라붙어 있는 곰팡류에 의해서 장자가 죽었다는 연구발표도 있습니다.
여러분! 문명의 발달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시다. 코로나19 상황도 우리가 관리해야 할 자연을 파괴한 대가라고 생각해야 더 큰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복
『창세기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복 주시다’라는 단어는 ‘바라크’(??????)로 뜻은 (1) 복을 약속하시다는 뜻과 (2) 약속하신 복을 이루어 주시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복의 내용은 생육, 번성, 충만인바, 곧 생명의 생산과 증산과 풍요입니다. 따라서 바알이 생산, 증산, 풍요의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의 생산 및 풍요를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중에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신 이유는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땅이 저주받은 상태에서 가인은 땅을 개간하여 농작물을 얻어서 드렸고, 아벨은 양이 임신하거나, 태어나는 과정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 은혜로 얻은 것을 드렸기 때문에 받으신 것이라고 해석하면 해석이 됩니다.
여러분! 바알 우상숭배의 결과는 “칼과 기근과 염병”, 즉 사망입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로 모든 것을 매장한 것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바알을 숭배한 끝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 운행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결국은 인류의 재앙을 제공하고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도 지금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를 버리고 선거를 통해서 다수결을 이용한 부정과 부의 집중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지성인이시라면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심지어 에굽에서 종살이할 때도 『출애굽기1: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훈과 간증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실 때 축사하셨습니다. 축사는 유로게오(ε?λοΥ?ω)로 히브리어의 바라크의 헬라어 번역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마가복음6:41)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린 후, 마태복음14:19)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누가복음9:16)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요한복음6:11)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나누어 주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현재 가진 것은 어린이 도시락뿐이고, 눈앞에는 배고픈 사람들이 어린이와 여성을 빼고 오천 명이 있더라도, 다 먹고 남는다는 완료형 감사기도로 생육, 번성,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경험한 것을 간증하겠습니다.
① 목회하는 동안 너무나 헌신적인 분들이 보일 때 저분이 우리 교회 기둥이다, 또는 저분이 없으면 목회할 재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께서 그분을 시험 들게 하시기거나, 이사하도록 해서 교회를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하나님 영광 받으세요 라고 즉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받은 영감을 사람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② 외손자가 태어나자 정말 귀여웠습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상당한 시간을 드려서 아이를 돌보았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하남으로 이사하였고, 지난 일 년 동안 제가 외손자에게 전화한 것이 두 번 정도뿐입니다. 이유는 제가 하나님보다 누구나, 무엇이라도 더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받을 대상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최고 우선순위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재앙에 대한 경고 /출11:1-10/ 손재호목사
2021-04-22 08:42:16
출애굽기 11-15장 말씀은 마지막 장자 재앙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출애굽기 저자는 아홉 가지 재앙을 쭉 기술해 오다가 열 번째 재앙을 바로 기술하지 않고 마지막 재앙에 대한 경고(출 11:1-10)와 유월절 규례(출 12:1-14)와 무교절 규례(출 12:15-20)에 대해서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유월절 준비에 대해 지시한 후에(출 12:21-28) 마지막 장자 재앙에 대해서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출 12:29-36).
이와 같이 출애굽기 저자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곧바로 열 번째 재앙에 대해서 기술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을 먼저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기술한 아홉 가지 재앙은 이 열 번째 장자 재앙을 기술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이제까지 아홉 가지 재앙들이 이 마지막 장자 재앙을 향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출애굽기 11장 말씀을 통해서 바로에게 마지막 재앙을 경고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아홉 차례의 재앙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바로는 더 이상 모세와 협상하지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출애굽기 10:28절에 보면 바로는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바로와 애굽은 더 크고 혹독한 재앙을 당하지만 바로의 마음은 더욱 강퍅해져만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로의 마음을 꺾을 하나님의 최종 재앙이 펼쳐질 무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11장 말씀은 열 번째 재앙을 실행하기 전에 어떻게 하여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인 회고입니다.
그래서 NIV에서는 1절을 과거완료형으로 해석하여 ‘전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the Lord had said) 이라고 번역 하였습니다. 9절도 과거완료형으로 번역하여 본문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지난날에 있었던 일을 회고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이 장을 과거완료형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재앙들에 없는 역사적 회고가 왜 이 재앙에는 필요한 것일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열 번째 재앙은 재앙들 중에 가장 큰 파괴력과 고통을 동반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회고는 수많은 사람의 탄식과 울부짖음을 초래할 이 재앙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열 번째 재앙은 심판 이야기의 마지막이자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회고는 하나님의 심판이 절정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설명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마지막 재앙까지 온 것이 순전히 바로의 교만과 고집 때문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기회를 주셨지만 바로는 번번이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회고는 여기까지 온 것이 바로 바로의 어리석은 선택에서 비롯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제 바로에게 마지막 경고를 내리십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찌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내리니. 백성에게 말하여 남녀로 각기 이웃들에게 은, 금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국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뵈었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어 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앙이란 바로 장자 재앙 곧 모든 초태생을 다 죽이는 재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4-6절 말씀을 보면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밤중에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까지도 다 죽이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무섭고 엄청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재앙을 통해서 비로소 바로가 항복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재앙으로 인하여 바로가 이스라엘을 내어 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내되 쫓아내듯이 내어 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재앙이 얼마나 혹독한지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그들을 신속하게 쫓아낼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찌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내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동사 ‘쫓아내다’(vr'Gי 에가레쉬)라는 동사는 매우 강력한 의미를 지닌 동사인데 여기서 동사를 심화시키는 부정사 ‘정녕’(vr'G 가레쉬)이 추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꼭 몰아낼 것이다’, ‘신속하게 내칠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바로는 아홉 가지 재앙 속에서도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모두 모세를 두려워하고 모세가 증거 한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열 번째 마지막 재앙은 바로의 장자까지 치는 무서운 재앙입니다. 장자란 자신의 기력의 시작입니다(신 21:17). 그러므로 장자를 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로 인하여 애굽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 보내게 되는데 어느 정도로 내어 보내는가 하면 은과 금의 패물을 주면서 쫓아내듯이 내어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시라도 빨리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가야 된다고 했을 때 그들이 가지 못하도록 막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막강한 노동력을 상실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경고는 장자의 죽음입니다. 이러한 죽음 앞에서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재물까지 주면서 빨리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가리켜서 우리는 소위 장자 재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장자 재앙이라는 용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 말에서는 장자는 맏아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NIV에서도 우리 말과 같은 의미로 ‘fistborn son’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렇게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r/kB(베코르)라는 단어인데 단순히 ‘맏이’라는 뜻을 지녔을 뿐 성은 포함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맏아들’을 뜻하는 ‘남자 맏이’는 rk;z: r/kB(자카르 베코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민 3:40).
그러므로 대부분 영어 번역본과 학자들처럼 장자란 그냥 ‘맏이’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자 재앙이란 아들을 둔 집에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딸만 둔 집에도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짐승들까지도 모든 초태생은 다 죽이실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강퍅함은 이러한 마지막 재앙의 무시무시한 경고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9-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찌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사를 더하리라 하셨고,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사를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바로가 너희 경고를 듣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애굽 땅에 나의 기사를 더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바로의 강퍅함은 대단합니다. 이러한 강퍅함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진노의 그릇이라고 합니다(롬 9:22). 그러므로 이 강퍅함으로 인해서 바로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장자 재앙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의 장자는 살아남습니다. 7-8절을 보면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서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좇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곧 애굽의 장자 재앙 가운데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셔서 이스라엘 가운데서는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그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라고 합니다(출 4:22-23).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진노의 그릇이고, 어떤 것은 긍휼의 그릇입니다. 이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담아내는 그릇이 있고,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를 나타내기 위한 진노의 그릇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당장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어떻게 어떤 인간은 날 때부터 진노의 그릇이고, 어떤 인간은 긍휼의 그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유대인만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로마와 합동으로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합동으로 죽인 것이기에 모든 인류가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들의 욕심으로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 중에서 어떤 자들은 진노의 그릇으로, 어떤 자들은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시는 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우리 인간은 죄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마치 바로의 권세 아래 있는 애굽인들과 같습니다. 애굽인들 중에 개인적으로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좋게 대할 수 있다고 하여도 바로의 권세 아래 있기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재앙은 바로의 권세를 직접적으로 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별하여 내시고 바로의 권세 아래 있던 자라도 이스라엘에 편입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경고에 이은 마지막 재앙이란 장자의 죽음을 통하여 도장을 찍듯이 구별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지막 재앙은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심판입니다. 아홉 번째까지의 재앙도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물을 가지고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재앙은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시러 오시는 것입니다.
4절을 다시 보면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으로 내려가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밤중에 친히 애굽으로 내려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밤중에 애굽에서 나올 것을 말해 줍니다.
유대인의 절기 중 밤에 일어난 유일한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그러므로 캄캄한 애굽에서 출애굽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출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나온 것도 역시 죄와 사망이라는 캄캄함 속에서 구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에 친히 하나님께서 애굽에 가셔서 장자를 죽이신다는 것입니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임을 당합니다(5). 그리하여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을 것입니다(6).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대 당할 때 애굽은 잔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소리가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 잔치소리가 통곡소리로, 통곡소리가 잔치소리로 바뀌는 것입니다.
7절을 다시 보면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람에게나 짐승에게 어느 누구도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안전을 말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별하는 줄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고이었고, 이 경고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세상도 하나님께서 경고의 나팔을 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이 계속하여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라면 역시 이 세상에 대하여 경고를 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마치 요나가 니느웨 성으로 가서 이 성이 망한다고 외친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경고의 나팔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경고의 나팔을 불겠습니까?
사도행전 10:42-43절을 보면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 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서 증거 한 내용입니다. 누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라고 증거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심판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것도 되지만 예수님을 기준으로 산 자와 죽은 자가 결정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산 자요, 예수님 밖에 있으면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출애굽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애굽에 들어가셔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애굽인에게는 죽음이요, 이스라엘에게는 개도 감히 짓지 못하는 안정입니다. 이러한 구별이 물론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구별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의 구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행하신 그 심판의 권세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여호와의 권세를 가지고 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께서 앞으로 이 세상에 심판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통곡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기뻐 찬송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미 출애굽기를 통하여 계시하셨고, 또한 선지자들이 증거하였으며,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께서 자기의 종들을 통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리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다시 보면 “백성에게 말하여 남녀로 각기 이웃들에게 은 금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국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뵈었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인들에게 은과 금패물을 구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400년 동안의 노동의 대가라고도 합니다만 그러나 노예가 무슨 대가가 있겠습니까? 죽도록 고생하고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인들로부터 은금 패물을 받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승리로 인하여 주어지는 전리품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의 모습을 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에게서 호감을 가지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시고 또한 모세가 바로의 신하와 백성들에게 심히 크게 보에게 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모세가 바로 앞에 섰을 때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 할수록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니 이스라엘의 백성뿐만 아니라 애굽의 신하와 백성들까지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애굽이 진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패물을 가지고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금이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그 전리품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어떻게 사용했습니까? 두 가지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금송아지를 만드는데 사용했습니다. 이로인해 그들 가운데 무서운 재앙이 임했습니까?(출 32장) 또 하나는 하나님의 성전을 만드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영생을 선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4:7-12절을 보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선물이 다 은혜로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그 선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써야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장차 심판의 주로 오실 주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개의 혀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하나님 /출11:1-8/ 박진호목사
2019-02-14 03:13:46
출애굽기 강해 (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출11:1-8)
열 번째 재앙의 특성
하나님은 아홉 번이나 큰 재앙을 내렸으나 바로가 완악하게 버티자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열 번째는 애굽의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初胎生)까지 모두 죽는 엄청난 벌이다. 가축이라고 하지만 7절에서 다시 짐승과 개라고 풀어 설명했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유용한 가축과 말이나 낙타 외에 애완용과 우상숭배에서 신성시 되는 동물들도 포함된다. 말하자면 애굽의 가정 경제 국방 종교 등등 모둔 분야를 완전히 멸망시키겠다는 선언이다.
이 열 번째 재앙은 그전의 아홉 번의 재앙과 같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들이 훨씬 많다. 같은 점은 우선 재앙의 종류를 미리 경고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강력한 의지를 갖고 계획하시고 징벌의 전 과정을 주관하셨다는 뜻이다. 또 무엇보다도 애굽만 피해를 입었고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전혀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 구별하는 하나님임을 입증했는데 본문 7절에서 다시 그 점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아홉 번의 자연재앙에선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숨통을 틔어주었다. 인명에는 직접 손을 대지 않음으로써 바로의 여러 번 번복이 가능케 했다. 다른 점의 첫째는 이번에는 바로와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다는 것이다. 혹시 자녀가 없는 집에는 애완동물까지 죽었다. 단 한 집도 빠지지 않고 모두 초상집이 되었다. 그러니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6절)
둘째는 지금까지는 모세를 통해 간접적으로 징벌했지만 이번에는 밤중에 내가 애굽에 들어가겠다고 하셨듯이(4절) 하나님이 직접 심판의 칼을 휘둘렀다. 셋째로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고 나오면서 심하게 노했다.(8절)
가뜩이나 성질이 급한 모세가 그 동안 참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 모세는 팔십 년의 연단 기간을 거쳤고 하나님과 떨기나무 불꽃으로 대면하여 다섯 번의 질의응답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확립했다. 하나님의 종으로써 자기 맡은 일에 묵묵히 충성했고 그 결과는 하나님에게 맡겼던 것이다.
열이라는 숫자는 꽉 찬 충만한 의미다.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가 찬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계시를 받을 때에 당신께서 직접 심판하겠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를 절감했다. 또 성령의 간섭으로 하나님의 심정이 모세에게 그대로 심어진 것이다.
넷째는 모세가 바로의 면전에서 분노를 했음에도 바로가 꼼짝 못하고 당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세를 아주 위대하게 보았기 때문이다.(3절) 첫 대면 때에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멸시했다. 왕 체면에 점잖게 말한 것이지 그 뜻은 “도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이름이냐?”는 정도다. 지금 천하의 패권을 쥐고서 스스로 신이라 자부하는 바로다. 노예 종족이자 팔십이 넘은 노인이 화를 내는데도 평소 같으면 그 자리에서 처형감인데 찍소리도 못했다.
다섯째로 은금 패물을 챙겨 나왔다. 바로와 애굽이 단순히 출애굽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 돈까지 줘가며 제발 나가달라고 사정한 것이다. 다음번에는 모두가 죽을 판인데 은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히브리인들을 더 잡아두었다간 아예 나라가 지도상에서 사라질(map-out) 게 빤하다. 물론 애굽인들이 자진해서 은금을 준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먼저 요구했는데도(2절) 전혀 거절 못한 것이다. 그만큼 죽음이 바로 문턱 앞에 다다른 것을 애굽인들은 실감했던 것이다.
여섯째는 애굽의 모든 신하들이 모세에게 절하며 출애굽을 정중하게 요청할 지경까지 되었다.(8절) 바로의 신하들은 사실 셋째 이 재앙 때부터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했다. 일곱 번째 우박 재앙 때는 모세의 경고를 듣고 미리 대피한 자들도 있었다. 바로 혼자 고개를 숙이지 않았을 뿐 애굽의 전 국민이 여호와가 유일한 참 하나님임을 믿는 것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히브리인들의 신이 최고로 강력해 자기들 신들과 도무지 비교가 안 된다고 시인한 것이다. 무엇보다 거역했다가 큰일 나겠다는 것만은 확실히 인정했다.
너무나 일방적이고 통쾌한 승리
틀림없이 바로마저 모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살리든지 죽이든지 처분에 맡기겠다는 단계까지 된 것이다. 이는 완벽하고 일방적인 승리다. 이스라엘로선 통쾌하기 짝이 없고 애굽으로선 이런 비참하고 창피한 패배는 그들 역사에 없다. 성경 전체, 아니 인류 역사를 통 털어 이런 승전기록은 없다.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승리다.
그렇다고 아홉 번의 전초전 내지 힘겨루기 끝에 열 번째서야 비로소 완전한 승리를 했다는 의미는 전혀 없다. 처음부터 아예 게임이 안 되는 승부였다. 비유를 하자면 바둑 프로 9단이 이제 갓 바둑의 규칙만 배운 초보자와 시합을 하는 꼴이다. 프로 선수는 전술을 구사할 필요가 전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두어도 전멸시킬 수 있다.
바둑 용어로 호랑이 아가리를 뜻하는 ‘호구’(虎口)가 있다. 돌을 놓기만 하면 따먹히는 곳이다. 초보자는 잘 모르고 그곳에 놓으면 뭔가 좋은 수가 되는 것 같아서 호구에 자꾸 돌을 놓는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에게 아홉 번이나 호구에 들어오면 죽는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바로는 프로 9단 격인 하나님이 얼마나 강한지 잘 모르니까 호구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다. 그러다 열 번째는 시간제한이 걸리고 어차피 승패는 내어야 하니까 이미 다 죽어있는 대마(大馬)에 가일수 한 것이다.
승패는 시합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초보인 바로는 앞뒤 사정을 제대로 분별도 못하고 나름대로 아등바등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고 프로 9단에게 시합을 하자고 감히 맞선 용기와 담력을 가상히 여겨줄 여지는 전혀 없다.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너무나 우매한 자살행위였을 뿐이다.
출애굽을 이스라엘과 애굽, 모세와 바로, 여호와와 애굽의 우상 신들의 대결이라고 이해한다면 신앙상의 큰 오류다. 아직 하나님을 너무 모르는 것이다. 출애굽은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그분을 완악하게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하기 짝이 없는지, 반면에 하나님의 인자가 얼마나 풍성하고 끝이 없는지 대조하는 것이 그 첫째 의미다.
문제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중심에 두는 이기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애굽이 너무 일방적으로 당해서 조금 불쌍해 보인다. 마지막에 꼭 모든 장자를 죽였어야 하는지? 잘못을 따지자면 바로의 잘못이지 그 장남이 무슨 죄가 있는가 싶다. 처음부터, 아니면 지금 열 번째라도 신하들 몇 명만 본보기로 벼락을 내려 죽이면 큰 희생 없이 일찍 끝낼 수 있었지 않겠는가? 그러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가 훨씬 돋보이지 않는가?
절대로 본때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본때를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전혀 합당하지 않다. 민수기 16장에 고라당의 반역 때에 땅이 입을 벌려 250명을 삼켰지만 본때 보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는데 직접 참가한 자들이다. 그때에 모세 즉, 하나님에게 불평하고 원망하여 염병으로 죽은 14,700명 중에도 죄가 없이 억울하게 죽은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지금 애굽 백성 전부가 우상숭배를 했다. 인간 바로를 신이라고 추앙했다. 히브리 노예를 차별 학대하며 자기들만 호의호식했다. 하나님은 벌을 주어야 할 자는 반드시 벌을 주신다. 또 상을 주어야 할 자는 반드시 상을 주신다.
본때를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서 신속하게 항복하고 두려워서 믿는 척은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고 진정한 믿음의 경배가 성립되지 않는다. 몇 사람을 본때 보이는 것이야말로 차별하는 것이다.
장자만 죽인 데는 아주 중요한 영적 진리가 있다. 만약 사람들 사이에 도덕적 우열이 있는데 장자만 죽였다면 어떻게 되는가? 한 집도 빠지지 않고 모든 장남이 더 악하다는 법은 없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고 그야말로 장남만 차별하는 하나님이 된다. 당신의 성품과도 상충된다.
따라서 장자만 죽였다는 것은 애굽 전 국민을 대표해서 죽은 것이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모두의 도덕적 점수가 빵점이라는 의미다. 그래야 차별하지 않는 공평한 하나님이다. 누구만 특별히 죽어야 할 더 악한 자는 없다. 또 누구만 특별히 살려주어야 할 더 선한 자도 없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의인은 단 한 명도 없다.
하나님이 열 번째에야 처음으로 인간의 목숨에 직접 손을 대었다. 당신의 긍휼의 끝이다. 바로와 애굽 사람처럼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했다. 또 이 열 번 째 재앙과 동시에 출애굽이 이뤄졌다. 하나님 안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의 인내의 결실이 맺어져 구원이 실현되었다. 그들에겐 이전과 다른 새롭고도 더 풍성한 그분의 긍휼이 시작되었다.
애굽이 열 번이나 일방적으로 당해서 불쌍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적 정에 불과하다. 엄격히 말해 하나님의 공평과 인자를 모르는 영적 무지다. 하나님이 열 번이나 참고 기다려주는 동안에 당신의 백성들은 계속해서 더 큰 학대를 받았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재앙을 겪을수록 그 화풀이로 애꿎게 히브리인들에 대한 채찍질만 더 악랄해졌을 것 아닌가?
생명은 보존해주시는 뜻
출애굽 사건에서 주목할 것은 아홉 번의 자연 재앙 중에도 하나님이 바로와 애굽의 생명은 보존해준 이유다. 종교의 기원과 발전을 연구하는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선 고대인들은 필연적으로 자연을 숭배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한 해 열심히 농사해 놓은 것이 한 번의 자연 재앙으로 물거품이 된다. 수많은 사람이 파리 목숨처럼 사라진다.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가공할 힘이 자연에 있음을 인정한다. 강, 바다, 산, 천둥, 번개 심지어 메뚜기 파리 떼에도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 자체가 신이거나 그 배경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사무엘상 6장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블레셋에 탈취 당하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독종이 생기게 했다. 언약궤를 돌려주며 독종을 없애려고 금으로 쥐의 형상 다섯 개를 만들었다. 독종을 쥐가 옮긴다는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쥐가 큰 능력을 가진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이처럼 고대인들은 자연의 큰 형상이나 현상을 직간접으로 신으로 받들어서 최고 최대의 치성을 받쳤다. 제발 재앙만은 일으키지 말아달라고 간구했다. 오늘날에도 냉수 한 사발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올 한해 우리 집에 나쁜 일만 제발 생기지 않게 해주세요.” 하는 것과 똑 같다.
하나님은 아홉 번의 자연 재앙을 일일이 미리 예고했다. 생명에는 손을 대지 않고 큰 피해가 생기기 직전에 멈춰서 숨을 쉴 수 있게끔 일정을 조정했다. 아홉 번 재앙 전부를 다 모세의 말 한마디로 그랬다. 무슨 뜻인가? 아홉 번의 재앙 각각에 따로 신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여호와에게 희생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는데 말씀만으로 그 전부를 주관했다. 심지어 애굽인들이 회개도 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계속 거역할 것을 알고도 그랬다. 천하 만물을 사랑과 공평으로 다스리는 통치자가 과연 누구이냐는 질문을 아홉 번이나 제기한 것이다. 너희 스스로 그 엄청난 위력 때문에 신으로 모시고 경배했지만 그 모든 신들 위의 신이 누구인지 잘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솔직하고 진지하게 따져보라. 너희 신들의 통치를 정말로 받고 있느냐? 비나이다, 비나이다 간절히 기도한 제목들이 실제로 응답 받은 적이 있느냐? 대신에 너희 스스로 위로 받으려고 신들을 만들고 경배한다고 핑계 대는 것 아니냐? 무엇보다 그 핑계로 우상신들 제단 앞에서 온갖 음란한 행위를 더 즐기고 있는 것 아니냐? 그 모든 잘못을 열 번이라도 참고 용서해줄 테니 제발 돌아오라.” 하나님의 애굽인들에 대한 사랑의 프로포즈이다.
그런데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회개했는가? 아니다. 갈수록 더 패역했고 홍해까지 쫓아왔다.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딱 하나다. 아직 살아 있으니까, 자기에게 목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남이야 죽던 말든 상관 않는다. 바로가 열 번이나 버틴 첫째 이유도 백성들만 피해를 입었고 자기는 개구리가 침상에 올라온 것 말고 피해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조차도 사실은 하나님이 왕이라는 입장을 배려해준 것이었다. 단순히 체면을 살려준 것이 아니다. 왕이 진정으로 항복해야 백성들도 진심으로 항복할 것이다. 바로는 전 애굽을 대표하는 자였다. 그런데도 끝까지 거역했고 하나님도 끝까지 참아주었다.
바로는 겨우 규칙만 아는 바둑 초급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전혀 몰랐다. 프로가 바둑 초급자를 무참히 이겨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절망에 빠트리고 다시는 바둑을 두지 않게 하면 프로답지 못하다. 그럴수록 그 초급자가 자라도록 알아듣게 가르쳐 실력을 성장시켜야 하지 않는가?
열 번째 죽음의 근본적인 뜻.
하나님의 9번 재앙에 애굽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하나님도 얼마든지 수 천, 수 만 명을 죽일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대신에 이른 비, 늦은 비를 때에 따라 내려주시며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고센 땅보다 더 풍성히 허락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인간 육체의 생명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인간에게도 중요한 과제가 전혀 아니다. 어차피 인생은 모두 죽게 마련이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동식물에게도 해당되는 복으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80년이고 하루살이는 24시간이지만 먹고 마시는 것에 집중하는 인생을 살았다면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 수명의 차이 말고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는가? 오히려 오래 살아봐야 헛되고 헛된 고생만 더 할 뿐이다.
하나님은 아홉 번이나 재앙을 내리는 동안 죽음의 벌을 내리지 않았다. 언제든 생명은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육체적 생명으로 신자와 불신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께선 인간을 동식물의 수준으로 절대 판단하지 않는다. 짐승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한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살고 죽음으로 인간을 위협 조종하는 것은 당신의 창조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당신의 성품에도 거슬린다. 그 또한 일종의 본때를 보이는 것으로 독재다. 불신자들마저 천벌을 받아 죽어 마땅하다고 인정하는 천하의 흉악범인데도 활개치고 다니며 더 형통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가 짐승이라고 스스로 증명하고 다니는 꼴일 뿐이다.
신자들도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 받는가 의심 불만을 가지는데 하나님을 잘 모르는 탓이다. 본때를 보여 달라는 요구이다. 나는 그들보다 의롭다는 교만이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아직도 체험적으로 완전히 고백하지 않은 셈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에 코에 당신의 생기를 직접 불어 넣었다. 영적인 생명을 지니게 했다. 다른 어떤 피조물과는 다르게 만드셨다. 이 땅의 먹고 마시고 입는 것만으로 절대 기쁨 만족 행복을 못 느끼도록 구조적으로 제한을 두셨다.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동물은 본능을 소프트웨어로 깔아주었지만 인간은 영혼이라는 중앙전산장치(CPU)를 심어준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영적교제를 하지 않아 그분이 날마다 주시는 생기를 공급 받지 못하면 활기와 기쁨이 생기지 않는다. 의미와 가치 있는 인생을 절대 살 수 없다. 아무리 가진 재물, 권력, 명예가 많아도 하나님이 없다면 그 결말은 허망하고 갈급해진다. 그들이 선하고 업적도 크게 쌓을 수 있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고 최고의 노력을 해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는 구조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소망을 두는 것은 고달픈 인생길을 당신과 함께 걸어가자는 것이다. 인간의 영적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당신과 함께 하는 인생에는 그분 쪽에서 먼저 풍성하게 의미와 가치를 부어주신다. 단 한 가지만 요구하신다. 그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진심으로 겸손히 엎드려 나는 죄인이오니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 말이다.
인간이 짓는 가장 큰 죄
이런 맥락에서 열 번째 재앙이 그 앞 아홉 번 재앙과 가장 크게 다른 요소가 두 가지 더 있다. 먼저 하나님은 바로가 이스라엘을 ‘정녕’ 내보낼 것이라고 보장했다.(1절) 선악과 금령에서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고,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는 언약에서, 형을 피해 도주하는 야곱에게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등 중요한 약속마다 강조해온 수식어이다. 당신의 약속을 단 한 치의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당신께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이다.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개도 움직이지 않게 하신다고 했다.(7절) 애굽의 장자들이 죽는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개는 주위에 아주 작은 움직임은 물론 냄새의 변화도 제일 먼저 탐지하는 동물로 집을 지키기에 최적이다. 그런 개가 소리도 내지 않고 혀도 움직이지 않는다. 주위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뜻이다.
고센 땅에는 어떤 불안과 소요도 없이 오직 평강뿐이다. 육체적 생명이 고달프든 안락하든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애굽에는 초상집이 아닌 집이 단 하나도 없다. 눈물의 바다에 떠내려 갈 판이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애굽 관원의 가혹한 매질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은혜에는 전혀 손상을 받지 않았다. 이제 곧 출애굽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실현될 소망을 키우고 잠잠히 하나님 하시는 일을 기다리는 가운데 고요와 평화가 넘쳤다.
그럼 인간이 짓는 가장 큰 죄는 무엇인가? 하나님 밖에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영적 생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육체적 생명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그들 중에 도덕적 의인도 많다. 남들에게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자라고 칭찬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거역한다.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피조물 중에 가장 고귀한 존재로 만들었는데도 지금 열째 재앙에서 함께 죽은 생축과 같은 수준으로 자기를 스스로 비하시킨 것이다.
출애굽 때나, 가나안 정복 때에 왜 애꿎게 동물까지 다 죽이는지 의아해 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 아닌가라는 비난도 받는다. 인간 때문에 동물이 인간과 함께 죽은 것이 아니다. 인간들 스스로 완전히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바로 그 점을 깨달으라고 생축을 함께 죽인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함께 죽은 것이다.
아들 중에 갱 짓을 하다 감옥을 들락날락하며 평생 부모의 속을 썩이는 자가 있다. 그럼에도 항상 부모에게 너무나 죄송하고 불효자를 용서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온다. 반면에 부모가 너무 가난해서 자기에게 보태준 것 하나 없고 오히려 장애가 되었기에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절연하고 크게 성공한 자식이 있다. 둘 중에 누구를 부모가 더 사랑하겠는가?
당연히 부모로 인정조차 안 하는 아들은 자식도 아니다. 부모에겐 공부 잘하고 출세하든,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감옥에 가있든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부자관계를 절연하고 집을 나간 아들을 부모는 죽을 때까지, 그 육체적 생명이 다할 때까지 안타깝게 기다린다. 그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다 부모와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채 자식이 먼저 죽을 수 있다. 얼마나 부모 마음이 쓰라리겠는가? 그러나 더 이상 방도가 없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이 끝내 당신을 거역하고 죽으면 하나님의 바로 그런 안타까운 심정 가운데서 죽는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구원의 기회는 없다.
신자가 행하는 가장 큰 선은?
그럼 인간이 행하는 가정 선한 일은 무엇인가? 반대로 하나님 안에서만 인생의 기쁨, 만족, 안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분에게만 인생의 소망을 두는 것이다. 영적 생명의 충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매일매일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를 공급 받는 것이다.
이 땅에서 육체적 생명이, 그 겉 사람이 후패하든 풍부하든 상관없이 그 영혼에 ‘정녕’ 철저하고도 완벽한 구원을 주신다. 개의 혀도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그 주변에 하나님의 평강이 넘친다.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의 의미와 가치를 채워주어서 고귀한 인생으로 세우신다.
애굽에 내려진 아홉 번의 재앙과 열 번째 심판과 다른 점을 간단하게만 살펴봐도 여덟 개나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심판과 구원을 그만큼 공평하고도 완벽하며 철저하게 나누신다는 것이다. 아홉 번까지 참더라도 마지막 심판 내지 구원의 순간에는 어떤 부족도 하자도 없이 철두철미하게 나누신다.
인간이 행하는 최고 악한 죄와 선을 말했다. 불신자들에게 해당된다. 그럼 구원을 받고 난 후의 신자가 범하는 최고의 잘못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신자가 되어서도 불신자 시절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프로 구단인 것을 자꾸만 잊고 바로처럼 호구에 머리를 밀어 넣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여건에만 정신이 집중되어서 하나님이 개도 짖지 않게 해주시는 완벽한 섭리는 잊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는 것이다.
신자가 행하는 인생의 어떤 싸움도 하나님이 이미 승리를 확보해 두었음을 모르거나 잊고서 조금만 힘이 들어도 그저 불안해하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으로 확신은커녕 평강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그분을 모독하는 짓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이 모독 받는 것은 사실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 당신의 자녀들이 살아나는 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며 하나님을 모욕했지만 하나님은 열 번이나 기회를 주었다. 세상에서 의인으로 칭찬 받는 바리새인들은 나사렛 예수가 누구관대라고 모욕하며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럼에도 주님은 십자가에서 그 앞에 진심으로 엎드리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당신의 영적 생명을 나눠주었다. 오직 한 가지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정녕 지키기 위해서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신자가 된 후에 할 수 있는 가장 선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7/30/2017
하나님이 그럴 리 없다 /출11:1-10
2016-06-17 12:01:41
제임스 워런 존스와 인민사원
1931년 미국 대공황 중에 태어난 제임스 워런 존스(James Warren Jone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종교적으로는 오순절파 기독교에, 사회정치적으로는 책을 통해 배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목회자가 됐는데 그의 목회 경력은 1954년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y of God)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적극적인 인종평등과 통합을 강조한 그의 메시지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기에 그를 받아주는 교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제자회(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가 그를 목회자로 받아줬으므로 그는 이 교단은 1960년에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비록 공식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당시만 해도 제자회는 회중교회 전통이 강했으므로 공식 신학교육을 안 받은 사람도 목사로 안수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가 인디애나에서 목회하는 동안 그와 그의 교회는 다른 민권운동 단체들처럼 엄청난 적대와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교회는 1965년에 다른 인종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관대한 캘리포니아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거기서 그의 교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살았습니다. 개인재산과 부동산 등을 모두 공동의 소유로 하고 말입니다.
제임스 존스는 처음엔 ‘정통’ 기독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사도행전이 전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을 그대로 살려고 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 내부에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교주인 존스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데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생겨났던 겁니다.
그것이 바깥으로 알려지고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했고 세간이 시끄러워졌습니다. 결국 1974년에 존스와 일부 교인들은 미국을 떠나 아프리카 가이아나에 약간의 땅을 구입해서 그리로 이주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그는 점점 미국사회에 대해 더 적대적이 됐고 성서의 하나님도 ‘하늘 하느님’(sky God)이라고 부르며 적대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폐쇄적인 ‘사교집단’이 되어간 겁니다. 그는 심지어 신도들에게 신앙에 대한 충성심과 절개를 ‘자살’로 입증할 걸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에 대한 압박이 다가오자 이들은 존스의 명령에 따라서 1978년 11월 18일에 어린이 276명과 성인 638명이 독극물을 마시고 집단 자살했습니다. 이들이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인민사원(Peoples Temple)과 짐 존스입니다.
종교가 악으로 변할 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떻게 종교에서, 그것도 ‘사랑’을 가르치는 기독교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말입니다. 대체 짐 존스가 누구이고 뭘 어떻게 했기에 9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때 죽은 276명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대개는 그의 부모들이 억지로 아이들 입을 벌리고 독약을 들이부었다고 합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찰스 킴벌(Charles Kimball)은 <종교가 악으로 변할 때 When Religion Becomes Evil>이란 책에서 종교가 악으로 변하게 되는 몇 가지 요인들을 논합니다. 그 중 제 관심을 끄는 것 두 가지는 ‘절대적 진리 주장’(Absolute Truth Claim)과 ‘맹목적 순종’(Blind Obedience)이라는 겁니다.
절대적 진리 주장은 나만 옳다, 나만 진리를 깨달았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설교에서 여러 번 얘기했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맹목적인 순종은 교주나 숭배하는 절대자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가 악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저는 킴벌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교주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잘못된 자세임을 더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종교지도자는 신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지 자기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 믿는 신에 대해서도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태도는 내 신앙을 타락시키고 사악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신앙이 뭡니까? 종교가 뭡니까? 신앙은 절대자 하나님과 소통하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겁니다. 대화의 목적이 뭡니까? 대화의 목적은 서로를 알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과 나,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하,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하시는구나. 하나님은 내게 이런 걸 바라시는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고, 하나님도 나와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내가 누군지, 내가 뭘 바라는지를 알아가면서 점점 공감의 폭을 넓혀가는 겁니다.
신앙은 어떤 올바른 진술에 단순히 동의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은 살아있는 생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을 겁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상에 나오는 말씀으로서 사울 왕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제사장인 사무엘이 오지 않자 스스로 제사를 주관했을 때 뒤늦게 도착한 사무엘이 사울을 꾸짖으면서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일차적으로 그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순종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게다가 ‘맹목적인’ 순종은 더 합니다. 순종을 하든 불순종을 하든 맹목적이라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소통이라고 했는데 다른 모든 소통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과 신앙의 소통을 함에 있어서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맹목적 부정, 무조건적 거부과 맹목적 인정, 무조건적 순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합니다. 맹목적인 부정과 맹목적인 긍정은 사실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신앙에서 무조건적 순종은 맹목적인 부정만큼이나 건강하지 않고 위험합니다. 저는 그것을 저를 유혹하는 ‘악마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오늘 한 달 반 동안 계속해온 구약성서의 대량학살에 대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해야 할 얘기는 아직도 많지만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나올 책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제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 여러분이 가장 궁금해 할 질문에 대해 답해보겠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까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린아이들까지 말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까요? 젖먹이까지 말입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11장이 전하는 대로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야훼는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을 죽였을까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그렇게 명령하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명령을 실행했다고 믿었습니다. 훗날 그 사건의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도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믿고 그렇게 기록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역사를 그렇게 썼던 사람들도 결코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대량학살에 대한 불안감과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겁니다. 이 흔적으로 구약성서 곳곳에 남아 있다고 저는 말했고 지난 몇 주 동안 몇 군데를 찾아 읽어봤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들이 그렇게 믿었으니 우리도 그렇게 믿어야 할까요?
아무래도 우리들보다는 그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었으니 우리보다는 그들이 하나님을 더 잘 알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그들이 성서를 기록했던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우리 신앙을 그들에게 맞춰야 한다고 말하면 그게 옳은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들보다 더 유리한 자리에 있습니다. 지금부터 3천 년 전에 고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신앙은 철저하게 부족신앙이었습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이 나만, 우리 부족만 위해주고 보호해주고 번성케 해주고 승리하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이 한계를 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 한계를 넘어서는 분이란 생각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냥 부족신이었던 겁니다.
그로부터 3천 년 후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들이 넘지 못했던 테두리를 이미 넘어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났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뿐 아니라, 또는 당신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리고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종족신앙이 아니라 보편신앙을 갖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안타깝게도 아직껏 부족신앙을 유지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좋은 신앙이라고 믿고 있고 부족신앙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을 오히려 신앙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망대를 넘어뜨려 몰살하는 분이 아닙니다. 부모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시각장애자가 태어나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가나안 종족들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명령을 내리셨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람이 알 수 없는 분인 하나님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서는 무엇이냐고,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서가 어떤 책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서가 어떤 책인지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극히 일부만 들여다봤지만 성서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 중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얘기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죄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정말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믿는다 해도 맹목적으로 순종해선 안 됩니다. blind obedience를 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가 사악해집니다.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믿는다 해도 무조건적으로, 맹목적으로 순종하지 말고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대체 왜 그러셨냐고, 정말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끝내 하나님께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대답을 듣느냐고요? 그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그것은 여러분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진정 간절히 바란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께서 대답해주실 겁니다. 3천 년 전에 고대 이스라엘이 들었던 대답이 아니라 201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답해주실 겁니다.
한편 하나님은 그런 명령을 내리시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럼 그렇지,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지. 하나님이 대량학살 하라는 명령을 주셨을 리 없지, 없고말고.’ 라고 생각하면 그만일까요? 그게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얘기를 떠올립니다.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더 들어보세요. 헤롯왕이 동방박사들의 얘길 듣고 아기 예수를 죽이려다 실패하자 베들레헴 인근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였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아기 예수 때문에 몇 명인지 모를 어린 사내아이들이 몰살당한 겁니다.
이게 대체 무슨 얘기일까요? 이 얘기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대부분의 신약성서 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일이 실제 일어났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이 남아 있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럼 이 얘기는 왜 여기 있는 걸까요? 마태는 왜 이 얘기를 다른 데도 아닌 바로 여기에 적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이런 제 생각에 동의하는 글을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저는 이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얘기를 출애굽 때 이집트의 장자들이 몰살한 일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죄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얘기가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가 아니란 얘기는 앞에서 했지요. 하지만 이것은 사실은 아닐지라도 진실(truth)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뭔가를 말하기 위한 얘기란 뜻입니다. 물론 제 생각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저는 나사렛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경험했던 초대교회 신자들(대부분 유대인들)이 구세주 탄생이라는 기쁜 사건을 전하면서 그 옛날 일, 곧 자기들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나왔을 때 벌어진 이집트 장자 몰살사건을 떠올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사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얘기를 근거 없고 황당한 말로 치부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서 학자들도 헤롯왕의 어린아이 몰살과 예수님 가족의 이집트 피난이 출애굽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출애굽 시에 벌어진 일들과 정확히 대칭됩니다.
출애굽 때는 야훼에 의해 이집트 장자들이 몰살당했지만 여기선 헤롯왕에 의해 유대 아기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왔지만 예수님 가족들은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죠.
이 얘기가 어떻게 참회록이 되는지는 저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마 그들도 어찌해야 할 지 가늠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이게 전부였을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기 예수를 모세와 같은 반열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이 얘기가 필요했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초점은 두 사건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대량학살이 아닐까 싶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사죄해야 합니다. 설령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참변이 기록으로 남아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는 기독교인들이 오랫동안 그걸 사실로 여겨왔고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대량살상을 정당화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사죄해야 한다는 겁니다.
1970년 12월7일 아침 7시 폴란드 바르샤바 자멘호파 거리의 유대인 위령탑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초겨울 비가 눈물처럼 위령탑을 적시던 날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그 앞에 섰습니다.
그 탑은 1943년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맞서서 28일간 봉기했다가 5만 6천여 명이 참살당한 일을 기리는 탑이었습니다. 잠시 고개를 숙인 브란트가 뒤로 물러서자 의례적 참배가 끝났다고 여기고 일부 기자들도 따라서 몸을 움직였습니다.
이때 브란트가 위령탑 앞에 털썩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자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습니다. 브란트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브란트는 서독이 폴란드와 관계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조약을 맺는 날 아침 나치 독일의 잘못을 온몸으로 사죄한 것입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수상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던 차 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는 2차 대전 때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용서합니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습니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 그 뒤 폴란드 사람들은 바르샤바에 브란트 광장을 만들어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모습을 담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누구에 의해 누구에 대해 저질러졌든지 사죄와 용서와 화해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일이 우리 겨레에 의해서도 저질러졌습니다. 다름 아니라 월남 전쟁 때 파병된 한국 군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베트남 양민 학살 얘기입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군대성노예에 대해 사과하라고 주장하지만 그런 주장이 떳떳하려면 우리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도 진정 참회해야 할 겁니다.
이것으로 여섯 번에 걸친 ‘구약성서의 대량학살’ 주제의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마무리하면서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사죄하자’라는 말입니다. 거기서 새 출발해야 합니다. 그게 과거의 잘못을 씻어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물론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학살은 우리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사죄해야 하냐고요? 그게 맞다면 베트남에서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도 사죄할 필요 없지요. 또한 일본은 왜 사죄해야 합니까? 직접 죄를 지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사죄할 필요 없지요.
사죄의 방법은 여러 가지일 겁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후대에 남겼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사죄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걸 어떻게 기록으로 남길 것입니까? 이번 설교는 이렇듯 질문으로 끝난다는 게 아쉽습니다.
구별하시는 줄 알리라 /출11:4-8/ 피영민 목사
2015-09-02 11:53:50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서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좇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 출애굽기 11장 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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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왕은 아홉 가지 재앙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제 열 번째 재앙을 경고한 후에 심히 노하여 바로 왕 앞에서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성질한번 내지 못하더니, 열 번째 재앙을 선포할때쯤 되니까 모세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로왕 앞에 노하며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밤중에 애굽에 들어가셔서 바로의 장자로부터 시작해서 여종의 장자 뿐 아니라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은 모두 죽일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왕위 보좌에 앉아 있든지 맷돌 옆에서 곡식을 가는 여종이든지 신분의 고하, 성별의 차이를 불문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애굽의 장자와 첫 소생을 죽일 것이라는 것이 열 번째 재앙입니다. 이 열 번째 재앙으로 애굽 전역에는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출 11:7). 개가 혀를 움직이지 않는 것은 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집에서 곡소리가 나고 짐승 죽어서 쓰러져 나가면 개들이 짖는 이치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고센 지역에는 개들도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고 편안히 누워 자는 고요와 평안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시는 줄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구별하시는 하나님
애굽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비교해 보면 처음에는 애굽 사람이 압도적으로 강했습니다. 애굽 사람의 손에는 채찍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 사람의 등을 때렸습니다. 애굽 사람의 뒤에는 강한 군대의 무력이 뒷받침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벽돌을 만들라고 명령하는 명령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등에 채찍을 맞으며 명령에 순종해서 지푸라기를 주워서 만든 벽돌을 가지고 집을 만들면 애굽 사람이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애굽은 강하고 이스라엘은 약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둘 사이에 개입을 하시니 전세가 역전이 된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에게는 큰 곡성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평안과 고요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저주하셔도 이스라엘 백성은 축복하신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피부색으로 보면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이 있습니다. 국적으로 보면 대한민국, 일본,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가 있습니다만, 성경을 볼 때에 영적으로 인류는 정확하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영적으로 인류는 애굽 사람인가,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인가 나누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애굽사람은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백성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양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애굽백성은 염소의 모형입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요,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요, 알곡 아니면 가라지입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중간은 없습니다. 단지 영적으로 두 부류만 존재할 뿐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 속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택함에는 관심 없는 사람에 속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고 심판하실 때에는 양과 염소가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섞여서 살고 같이 밥 먹고 살고 때론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만, 최후 심판의 날에는 양과 염소는 정확하게 갈라질 것입니다. 그 날이 최후의 심판날입니다.
그러면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며, 어떤 때에 그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또 왜 그런 차이가 중요할까요?
두 부류의 차이
택하심의 차이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날마다 잔치하며 잘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거지였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고 버리는 음식을 주워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섬기던 백성이었습니다. 그 둘이 죽어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고 부자는 음부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지옥에서 얼마나 뜨겁고 목마른지 손가락에 물을 축여서 자신의 혀에 대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서 여기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가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도 건너올 수 없게 하셨느니라”(눅 16:26).
하나님께서 큰 구렁을 두셔서 음부와 그리고 천국 사이에 왕래할 수 없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천국백성과 지옥백성 사이에는 큰 구렁 같은 차이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차이는 영원 전부터 차이가 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영원한 때,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함을 받은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한 백성들을 미리 사랑하시고 미리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택함 받지 못한 백성들은 뱀의 후손으로서, 가라지로서, 염소로서 미리 사랑하심과 미리 예정하심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부류는 시작점은 똑같다가 점차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영원 전부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아니 그것을 어떻게 체험했소?”라고 물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원은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원전의 일을 알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알고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 수 없는 세계를 문서계시인 성경에 영감을 받은 계시로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차이
이 두 부류 사이에는 은혜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택자든 불택자든 공통으로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도 주시고 비도 주시고 물도 주시고 밥도 주시고 옷도 주십니다. 여러분 악인이라고 밥을 안 먹습니까?
악인이라고 햇볕 쬐는데 구름이 갑자기 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하나님은 공통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보통은혜 혹은 일반은혜(Common grace)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지 못한 백성들도 하나님의 보통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보통은혜를 넘어선 특별은혜를 받게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역사하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애통하게 하시고 용서받고 싶은 마음을 주시고 지옥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시고 거듭나게 되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택자에게 주시는 특별은혜요, 이 은혜를 가리켜 구원받는 은혜(Saving grace) 라고 말합니다. 불택자들은 보통 은혜만 받습니다. 그러나 택자들은 보통은혜와 더불어 구원받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택자들은 심령의 본질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납니다.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싫어하던 본성이 하나님을 순종하고 사랑하는 본성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차이는 인간 본질의 차이를 가져온 것입니다.
법적인 차이
또한 이 두 부류는 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심판할 때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죄를 반드시 처벌하는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죄는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처벌받습니다.
여러분 죄가 있으십니까? 그 죄는 다 처벌받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르는 죄가 있다구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르는 죄가 어디 있습니까? 죄인은 반드시 벌 받게 되어있습니다. 지옥 가는데 필요한 죄는 호리같은 죄만 있어도 충분한 것입니다.
애굽백성으로 상징되는 이 불택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을 때에 자신들이 지은 죄 값으로 말미암아 영영히 불타는 지옥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누가 변호해 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으로 상징되는 택자들은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석에서 “너는 지옥으로 떨어질 찌어다”라고 심판 받을 때,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변호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능한 변호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족제비가 빵을 훔쳐 먹는 죄를 지었습니다. 원숭이가 변호사가 되고 사자가 판사가 되었습니다. 원숭이가 변호를 하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증인이 다섯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원숭이가 변호를 시작합니다.
“재판관이시여 저 족제비가 빵 훔쳐 먹은 것을 본 증인은 다섯 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 족제비가 빵을 훔쳐 먹은 것을 못 본 증인은 수천수만 명이 됩니다. 고로 어떤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그러자 멍청한 사자가 무죄라고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변호사는 말을 잘해야 합니다. 변호사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예수를 믿은 백성들이 심판을 받을 때에는 그들 앞에 유능한 변호사가 나타납니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하나님 아버지께 못 박힌 손의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요, 불택자보다 더 많은 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제가 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저 사람의 죄 값을 내가 대신 갚았나이다. 그러므로 저 사람은 지옥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한번 죄를 가지고 두 번 처벌할 수 있습니까? 한번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로 인해서 두 번 벌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 원칙을 가리켜서 대한민국 형법에서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고 말합니다.
대한민국 형법에도 일사부재리가 있는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벌을 주시고 또 우리에게 벌을 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택자들은 죄가 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한번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벌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불을 면제받고 천상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가 없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대신 벌 받으셨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택자와 택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유능한 변호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모시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뽑아주시는 천선 변호사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변호사로 말미암아 멸망하지 않고,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섭리의 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결국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떻게 슬픈 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환란이 늘 없겠습니까? 고생은 없겠습니까? 때로는 축복도 있고 기쁨이 있을 수 있고, 때론 기쁨 뒤에 슬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합력해서 다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는 다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 선을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결코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애굽백성으로 상징되는 불택자들의 생애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악을 이루게 됩니다.
불택자들은 돈 좀 벌었다 하면 그 돈 때문에 타락하고 부패하고 악인이 됩니다. 출세 좀 했다고 해서 교만하고 거들먹거리다가 망하게 되고 사람취급도 못 받게 됩니다. 좀 일이 잘 풀린다 해서 기분 좋다고 술을 너무 많이 먹다 보면 그것이 나중에 병의 원인이 됩니다.
또한 불택자들에게는 슬픈 일이 생기면 그 슬픔은 점점 심해지고 절망이 되고 좌절이 됩니다. 슬픔을 이길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불택자들은 지금 당장은 형통한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 보면 그것은 악이 됩니다.
현세에는 그 악이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더라도 내세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서 “네가 평생에 한 것이 다 모여서 이런 악이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차이는 영원한 차이요, 은혜의 차이요, 본질의 차이요, 심판의 차이요, 섭리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큰 구렁은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 나는 양인가 염소인가? 나는 택자인가 불택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실 것입니다. 그것은 이 두 부류의 인간이 차이를 드러내는 다섯 가지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차이는 언제 드러나는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이 진리이다, 내가 이 말씀에 다 순종은 못하지만 순종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 분은 택자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죄를 지었던 분들은 괴로워합니다.
어떻게 나는 죄에 넘어질까? 그러나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나의 마음을 주장하셔서 말씀의 삶이 나의 삶이 되게 하소서 이런 기도가 나온다면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어도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이 말씀을 믿지도 않고 듣지도 않겠다. 어찌 하나님은 불공평하신가?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므로 나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마음이 들면 불택자인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모두 택자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있으며 양과 염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말씀을 들을 때에 나타납니다.
죄를 지었을때
그리고 택자와 불택자는 죄를 지었을 때에도 차이가 납니다.
택자들은 죄를 지으면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슬퍼합니다. “나는 예수 믿은 지 오래 되었는데 어째 이 모양인가? 내가 왜 이렇게 자꾸 죄에 빠지는가!”하며 죄짓는 자신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고 성령님을 의지해 벗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택자들은 죄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죄를 미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어디 재미난 죄 더 없을까하며 그들은 죄짓는 기회를 찾아다니고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죄를 두려워 하기 보다 오히려 죄를 품고 즐거워하고 그 기회를 노립니다. 죄를 지어도 불택자들은 회개할 대상도 없거니와 회개할 필요도 느끼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택자와 불택자는 차이가 납니다.
강한 유혹이 올 때
택자와 불택자는 강한 유혹이 왔을 때에도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 무역을 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는 사람이 마약을 한번만 밀수하면 부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제안해 왔는데 어떡하지?’ 택자들은 내가 신앙의 양심을 포기하고 수입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양심을 포기하지 않고 신앙을 지킬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신앙의 양심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정직하게 부자가 되느니 차라리 의로운 가난한 사람이 되겠다. 내가 내세에 멸망을 하느니 차라리 현세에 가난하고 양심적인 쪽을 택하겠다. 라면을 먹어도 발 뻗고 먹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택자들은 그런 갈등이 없습니다. ‘이게 왠 떡이냐 내가 그 동안에 바라고 노리던 노마크 찬스가 오게 되었구나’ 좋아하며 양심보다는 이익을 우선 삼습니다. 정의보다는 돈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밀수를 해가지고 돈 버는 것은 백억이고 이것을 걸려서 감옥을 가면 몇 년이라. 내가 몇 년에 백억을 벌 수 있나? 그러면 걸려서 감옥에 가더라도 하자!’ 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택자들입니다. 양심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책이 없습니다.
이처럼 강한 유혹이 올 때에 택자와 불택자는 선택이 다릅니다.
실패했을 때
그리고 인생이 실패했을 때에도 차이가 드러납니다.
언제나 성공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욥과 같은 위대한 사람도 큰 실패를 보았습니다. 자식 열 명이 모두 죽고, 재산도 하루아침에 날아가고, 몸도 병들어 기왓장으로 긁어야 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욥은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하며 입술로도 죄를 범치 아니했습니다.
모태에서 나오실 때 기저귀 차고 나온 사람 없듯이 우리는 모두 다 적신으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돌아갈 때도 알몸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분은 돌아가실 때 가슴에 은행통장을 품고 간다는데 그거 가지고 가서 어디서 쓰시려고 가지고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은 올 때에도 적신이요, 갈 때도 적신인 것입니다. 살면서 그저 먹을 것 입을 것 있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욥의 고백이 참으로 의로운 고백인 것입니다.
의인들은 인생을 살다가 실패를 해도 욥처럼 하나님을 원망치 않습니다. 도리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서 “하나님 내가 살다가 이렇게 어렵게 되었으니 날 좀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의로운 기도를 들으시고 두 배로 축복하셔서 자식 열을 더 주시고 재산은 두 배로 더 주십니다. 욥은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택자들은 실패하면 평소에 믿지도 않던 하나님부터 원망합니다. 언제 믿었다고 원망합니까? 자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국가를 원망하고, 대통령도 원망하고, 심지어 아내도 원망합니다. 또 자식들도 원망하고, 친척도 원망하고, 다 원망하고 반항하다가 실패와 좌절을 겪고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그렇기 때문에 인생 실패시에 하나님의 택자와 불택자는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생의 끝에서
그런데 제일 큰 차이는 죽을 때 납니다.
목사들은 임종의 현장을 많이 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돌아가시는 분과 믿지 않고 돌아가시는 분은 죽는 순간이 다르다는 것을 매번 경험합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 믿고 돌아가시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와서 그 영혼을 받들어서 천국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고통 받을지라도 죽는 순간만큼은 큰 평화가 있고, 그 얼굴에 심지어는 미소도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검은 사자가 와서 지옥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안간힘을 쓰고 버팁니다. “안가! 안가!” 라고 소리 지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앗! 뜨거! 뜨거” 이런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죽을 때 모습이 굉장히 다릅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여섯 살 된 에드워드라는 아이가 뇌종양으로 죽었습니다. 그 아이는 죽을 때 혼수상태로 한 열흘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기 한 5분전에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보고 말합니다.
“Daddy, I love you. Don’t cry Daddy. Don’t cry Mommy. Jesus is calling me. Granddaddy calling me!” 그 여섯 살짜리 아이가 죽기 전에 잠깐 깨어나더니 “아빠 엄마 울지마, 예수님이 날 불러, 할아버지도 날 부르고 있어. 아빠 엄마 사랑해” 말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 이후 그 부모가 교회에 아주 열심히 나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비록 여섯 살에 죽었지만 죽는 순간이 평온하도록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를 축복하셔서 천사들이 그 영혼을 받들어 천국에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자와 불신자, 택자와 불택자는 삶의 다양한 순간에 넘을 수 없는 차이가 큰 구렁처럼 존재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런 차이를 이야기해야 되고 이런 차이를 우리가 마음에 두고 살아야 되는 것일까요?
두 부류의 차이는 무엇이며 왜 이런 차이를 드러내야 하는가?
교회와 세상은 다릅니다. 달라도 많이 달라야 됩니다. 세상과 교회가 똑같고, 오히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악하고, 교회가 세상인지 세상이 교회인지 알 수가 없고, 교회가 세상의 방법을 쓰게 되면 소망 없는 사회가 됩니다.
저의 전공은 교회역사입니다. 역사학자로서 교회역사를 보면 교회가 세상과 분리되고 교회와 세상이 구별될 때에는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우리도 대 부흥을 목표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 부흥을 이루려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달라져야 됩니다. 지금 다르다고 할지라도 더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1세기 초대교회 때부터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될 때까지는 세상과 아주 달랐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로마의 열 명의 황제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카타콤으로 들어가고,
사자에 물려죽는 핍박을 당하고, 모든 권리를 빼앗기는 등의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크리스천이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 이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그때, 교회가 세상과 구분 되었던 때에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큰 부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300년대에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기독교를 인정해준 위대한 황제라고 추앙하지만 역사가의 눈으로 볼 때에는 콘스탄틴만큼 가짜신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십자가를 칼과 방패에 그렸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정권다툼을 할 때에 십자가를 이용했습니다. 십자가를 가지고 전쟁에 승리하리라는 목적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그려 넣은 칼을 가지고 사람을 찔러 죽였습니다.
십자가를 그려 넣은 방패로 칼을 막았습니다. 그런 방법을 통해서 성공을 하고 로마황제가 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313년에 소위 ‘밀라노칙령’이라는 것을 발표해서 기독교를 로마에서 인정받는 공인된 종교로 인정을 해 준 것입니다.
콘스탄틴 황제 후 테오도시우스 2세라고 하는 황제는 381년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인정을 해줍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세상과 다른 종교에서 점점 세상과 합해진 국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국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다 교회소속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인지 세상인지 알 수 없는 잡탕밥, 비빔밥, 돌솥밥이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로 들어가게 되었고 참된 부흥은 사라지고 교회의 진리는 죽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너무나 세속적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교회가 너무나 세상과 구별과 차이가 없어지지 않았는가, 우리가 지금 세상 사람과 뭐 다른 점이 있는가. 이런 문제에서 오늘날 우리의 혼란과 위기가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영원 전부터 차이가 났고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의 차이를 더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과는 더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방법 쓰지 말고 세상의 복수, 원수 이런 것 쓰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과는 다른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지금 다르다고 할지라도 더 달라져야 합니다. 달라지는 만큼 하나님은 교회에 부흥의 영을 내려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불택자를 택자로 바꿀 능력은 없습니다. 택자를 불택자로 바꿀 수 있는 그런 권리도 없습니다. 단지 제가 권할 수 있는 것은 마가복음 16장 16절의 말씀뿐입니다.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영영히 고통을 받을 것이요 믿는 사람은 죄사함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침례교가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나 성공회 등과 비교할 때 다른 점은 국가교회에 있습니다. 다른 교단은 국가교회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다른 종교를 배격하고 기독교 국가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침례교회는 아닙니다. 우리의 이상은 자유교회(free church in a free state)입니다. 침례교회는 국가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므로 국가교회를 반대합니다.
침례교회는 국교를 멀리하고 부정하고, 국교는 가짜교회라 하고 하나님의 백성 택한 백성들이 참되게 모여서 분리된 교회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분리주의(separatism)입니다. 세상으로 분리되고 국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침례교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가장 순수한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침례교회가 물 많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침례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성경의 원리이고,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순수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것이고 우리는 세상과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론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
우리가 하나님의 큰 부흥을 체험하려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더욱 세상과 분리되어 신앙으로 순수하고 깨끗하며,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교회가 되고, 성도 개개인이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과 열 재앙의 상관관계 /출11:1-10
2015-05-31 15:56:42
▲‘구원의 감격과 열 재앙의 상관관계’
구원의 감격과 열 재앙이 어떤 상관관계 속에 놓여 있는가를 한번 살펴봅니다.
대한민국 개신교인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사랑의 교회를 세우신 옥 한흠 목사님이 계십니다.
은퇴도 일찍 하셨고 은퇴하시고 나서도 참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하나님 품에 가셨습니다.
그 분이 사랑의 교회 강단을 섬기실 때에 하셨던 설교를 영상으로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편의 설교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지만 특별한 설교가 있었는데,
제목도 모르겠고 본문도 모르겠고 따로 노트해 두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잊히지 않는 점은 주제가 그것이었는지 아니면 설교 중에 그러셨던 것인지 절규를 하셨던 적이 있었는데,
교인들 속에서 구원의 감격이 사라졌고,
장로나 권사나 새 신자나 할 것 없이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틀에 박혀서
정형화된 습관적인 교회 생활만 남았다고 탄식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선 제 자신이 쿵- 얻어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회를 섬기고 있었을 때인데, 교회를 섬기는 입장에서 구원을 얘기하는 것인데,
구원이 무엇이며, 왜 구원의 감격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경우, 논산 훈련소에서 백 없고 힘없는 상태에서
카투사로 발령 받았을 때의 감격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그 당시에는 백 있는 사람들이나 카투사를 갔기 때문입니다.
미군 부대에 발탁되어도 그런 감격이 있었는데,
어떻게 구원받은 선민이 구원의 감격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도 구원의 감격이 없는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답을 안 주시고
넘어가시는 바람에 그것이 저에게는 화두가 되어버렸습니다.
‘왜 구원의 감격이 없고, 기쁨이 지속되지 않을까?’
맨 처음에는 누구에게나 감격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종적을 찾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옥 한흠 목사님과 더불어서 잘 나가고 있을 때에,
그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목사님께서 우시면서 구원의 감격이 없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격(感激)이 뭘까요?
사전을 찾아봤더니 두 가지로 이야기 되는데, 마음에 깊이 느끼어 크게 감동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마움을 깊이 느끼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마음이 깊이 감동하고 마음에 깊이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지요.
구원을 받은 것은 은혜로 받는 것이기에 이 두 가지의 의미가 합쳐져서,
구원의 감격은 마음에 깊이 감동하고 감사함이 넘치는 그런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마음이 깊이 감동한다는 것은 마음의 크기를 생각할 때에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전율하는 감동이 위까지 넘쳐흘러서 감사로 표현될 정도가 되는 것으로,
마음이 다른 것으로는 기뻐할 여력이 없을 만큼
구원 하나 만으로 기뻐하고 있는 상태가 구원의 감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 많이 벌면 기뻐하잖아요. 돈이 구원의 감격으로 대체되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돈 많이 벌게 해주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병 낫게 해주셨고…
다 대체되어 버렸습니다.
구원의 감격이라는 것은 구원을 기뻐하기 위해 마음이 다 동원되었기 때문에,
다른 기쁨으로 기뻐할만한 마음의 접촉면이 없어져 버린 상태이고,
선민이라면 이 구원의 감격이 지속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설명 / 구원의 감격 이유
본문의 내용은, 열 번째 재앙인 장자가 죽는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예고를 하시는 장면입니다.
바로에게 경고를 하시고, 이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게 될 것을 알려주시는 장면인데,
‘장자’라는 것은 가부장 제도의 사회 속에서 말할 것도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아홉 가지 재앙이 애굽에서 소중한 것들을 앗아갔지만,
소중한 것의 순서를 매기자면, 각 집안마다 장자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왕 조차도 맏아들이 세습하게 되어 있는 제도 속에서 살고 있고,
마지막 소중한 것을 가져가실 것이라고 모세가 바로에게 예고하면서,
7절에서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라고 하십니다.
‘개 한 마리도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이 말은 깜깜한 밤중에 개처럼 주변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물이 없습니다.
반응한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반응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지만,
개는 아주 작은 소리만 들려도 왕왕 짖어대는데,
애굽 전역에 곡소리가 전무후무한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머무는 고센 땅에는
개 한 마리가 혀를 움직이지도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충만한 평강과 평온함이 가득 차리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아홉 가지 재앙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선민 이스라엘로서는
그 감격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흑암이 온 애굽 땅에 덮였는데 고센 땅에만 광명의 빛이 임하고,
메뚜기 떼가 애굽 땅 전역을 갉아먹는데 고센 땅에만 없습니다.
모든 재앙이 고센 땅에서만 제어가 되는 이 놀라운 감격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이 감격이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고 합니다.
이제 보겠습니다만, 출애굽 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많은 보화를 받아서 나가게 되고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구별하실 때에 이방민족인 애굽으로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질투와 분노와 시기를 보낼 수도 있었는데,
그들이 보화를 내주고 모세를 위대하게 봅니다.
‘모세를 위대하게 보았다’라는 것은
모세가 영도하는 이스라엘 전체를 위대하게 보았다는 것인데,
자기들이 노예로 부릴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모르고 함부로 대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세상 주인의 자녀들이고 자신들이 오히려 찬밥 신세였는데,
찬밥 신세들이 주인의 아들을 함부로 대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감격이 우리에게도 있을까요?
우리나라를 못 살게 구는 이웃나라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 이웃나라들에 대해서 열 가지 재앙을 퍼부을 때에 그 감격?
그러나 우리나라가 다 선민입니까?
또 우리나라를 못 살게 구는 나라들 중에도 선민이 다 흩어져 있기 때문에
출애굽 때와 같은 식으로 재앙이 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선민과 애굽 사람이 구분되고 있는데,
우리는 도대체 이 구원의 감격을 어떻게 해서 얻을 수 있을까요?
선민이 섞여 있어서
민족 단위로 대규모의 하나님의 기적적인 재앙의 역사가 일어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태국이나 필리핀, 중국 오지에도 선교사님들이 들어가셔서
한 사람이라도 선민이 있을 것인데, 거기에 열 재앙을 퍼부으셔야 되겠습니까?
▲자, 오늘 본문에서 구원의 감격이 없는 이유는
재앙을 못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애굽 사람들에게 임하는 재앙을 보면서
선민으로서의 의식과 자부심을 갖게 되고, 선민으로서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구원의 감격이 없는 이유는 재앙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고센 땅에 고요와 평안을,
장자가 죽는 애굽의 곡소리와 비교할 수 있었으니
그 감격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메뚜기 떼가 고센 땅을 제외한 전 지역을 휩쓸었으니,
고센 땅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그 구원의 감격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민 됨의 감격입니다.
◑적용 / 구원의 감격이 없는 이유
▲구원은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재앙으로부터의 탈출이 구원의 시작이고,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부터 출재앙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에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저주 속에서 재앙이 주어져 있는 상태인데,
그 재앙을 지금까지 아홉 가지 측면과, 남은 하나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설교를 하고 계시는 거예요.
아담 이후의 삶은 이러한 열 가지 재앙의 측면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데,
이스라엘은 눈앞에서 그 열 가지 재앙이 보이고 있기 때문에, 무척 감격했을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은 단순하게 출애굽을 위한 보조 수단이 아닌,
하나님께서 영적 진리를 선민들에게 설교하고 계시는 것이고,
선민들에게 구원받은 선민의 위치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므로
이들에게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감격이 없어요. 그러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요.
“단지, 구원의 감격만 없을 뿐인지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에서의 재앙으로부터는
빠져 나온 것은 아닐까? 구원의 감격은 없지만 재앙으로부터 빠져나온 것은 아니냐?”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실제로는 풍요와 다산을 바라고 있는데,
개구리 재앙이 어떻게 청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그 개구리들이 덮인 침대 위에서 개구리와 더불어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피 재앙은 뭡니까? 내 마음 속에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고, 피가 생명을 상징합니다.
내가 사업이나 자식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서
그것 때문에 살고 잘 되면 웃고, 잘 못 되면 근심한다면 재앙을 벗어난 것이 아니기에
구원의 감격이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사업이 잘못 되더라도 기뻐할 정도로 큽니까? 아니잖아요.
구원의 감격이 없는 것이고, 구원의 감격이 없다면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처럼 구원의 감격은 재앙을 보는 가운데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재앙 속에 있는 것이 보이는 가운데
내가 재앙을 벗어났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감격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내 마음에는 현재 진행중인 이 편만한 재앙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위치 설정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부산에 가면
일본의 대마도가 보이는 위치가 있고, 안 보이는 위치가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지금 편만하게 현실로 있는데
그 재앙이 재앙으로 보이질 않는 이유는, 위치 설정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재앙이 재앙으로 보이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에덴을 상실하고 나서 에덴 밖에서의 삶이 재앙 가운데의 삶입니다.
즉, 에덴으로 들어와 있지 않으면 재앙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에덴의 삶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마음이 승천하신 주님 따라서 하늘에 올라가서 머물며,
이 땅에서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될 때에 그게 바로 에덴의 삶이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이 땅을 내려다보게 될 때에,
이 땅에서 일반 보통 사람들이 태어나서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재앙의 모습으로 보이게 됩니다.
내 삶에서 에덴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재앙이 보이지 않지만,
에덴이 회복되면 나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하는 바로 옆의 김 과장이
재앙 가운데 있는 것이 보이게 되고, 거기에서 감격과 동시에 사명이 생기게 됩니다.
재앙 가운데 있는 김 과장님을 출재앙을 시켜야겠다는 사명이 생기고
사명은 감격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으로 인한 난민의 처지라면,
에티오피아의 난민들의 처지는 난민으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모두가 다 식량난에 허덕여서 잘 사는 나라인 미국이나 일본 독일도
다 기근에 시달린다면 그것이 재앙이 아닙니다.
그냥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삶의 현실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재앙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스테이크도 먹고 쌀밥도 먹는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지 않으면
이 땅에서의 삶이 재앙으로 보일 수가 없고,
이 땅에서 보편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재앙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선민으로 받게 된 구원의 감격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아세요.
오늘 본문은 이제까지의 재앙을 결산하고 마지막 재앙을 예고하면서
선민의 위치를 확정하고 있는데,
선민은 구원의 감격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이고,
구원의 감격은 재앙을 봄으로 내가 재앙을 탈출했다는 것을 알고 감격해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을 향해서 나처럼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하늘에 가 있는 상태였고 이 땅에서 에덴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덴에서 볼 때에는 왕이고 총독이라도 그것이 재앙 가운데 있는 것임을 알았기에,
자기변호를 하라고 시간을 주는데도 자기 자신의 변호를 하지 않고
출재앙 하라며 예수를 전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구원의 감격을 위해서는 먼저 재앙을 반드시 봐야 하는데
지금 재앙을 보는 자들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재앙을 보면서 구원의 감격을 느껴야 하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민다운 선민이 되면 재앙을 볼 수 있게 되는데,
재앙을 못 보고, 재앙을 못 보기 때문에 구원의 감격이 없는 이유는
참 이스라엘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면 되었지만,
지금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브라함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마음속에 예수님의 피가 흘러야 하는데,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고백이 생활화되어 있고 그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어느 날 세례 받고 구원의 감동은 종적을 감춘,
옥한흠 목사님의 말씀대로 정형화된 습관적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과,
교회 안에서 오랜 시간을 머무는 자들이 선민이 아니고,
교회 안에 머물다 세상 밖에 나와서는 십자가를 잊고 사는 자들은
그야말로 교회라는 조직의 회원이고 멤버일 뿐이지 교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양이 아니고 선민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멤버와 교인은 다릅니다.
선민은 교회 밖의 일상생활 속에서 십자가를 생활화 하는 자들로,
그 마음과 생각의 모든 곳에서 주님의 피가 흐르면서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로 올라간 마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믿었으니 잘 했다고 하시며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령께서 감각이 되셔서 하늘과 하나님 아버지를 느끼게 해주시고,
하늘과 하나님 아버지를 느낄 수 있을 때에, 이 땅에서 이유가 없는데 기쁘고,
이유가 없는데 평강하고, 안정의 조건도 없고 기쁨의 이유도 없는데 평강합니다.
그런 평강의 상태에서 눈을 떠서 세상을 보니
모든 사람이 재앙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감격하게 되는데, 거기에 감격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이 재앙 가운데 있어서 고소하다는 게 아니라,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의 운명은 재앙 가운데 태어나서
재앙 가운데서 살고 몸부림을 치다가 메뚜기 떼의 공허를 느끼고,
모든 공허함이 생기게 되는 근본 원인인 흑암 재앙 속에서 살고,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 잃고 생이 끝이나버리고 마는데,
영원한 자기의 생명을 가지고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재앙이 보여야 되는데 마음이 천국에 가야만 보이게 됩니다.
▲내가 스웨덴 사람일 때에, 아프리카 난민들의 처지가 재난으로 보이게 됩니다.
스웨덴에서는 아무리 애를 많이 낳아도, 키우는데 돈이 들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다 해줘요. 우리나라에서 애를 못 낳는 이유가 하나 키우는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요?
둘이 먹고 살기도 힘든데, 애 하나를 낳아서 먹이고 입히고 교육을 시키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는데,
스웨덴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나라도 자식 재앙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을 때에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못하는 재벌 총수를 바라보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냥 그 집에는 개구리가 우리 집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있는 것입니다.
그 개구리가 보이면 돈 한 푼이 없어도 감격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십자가 생활화를 꿈도 꾸지 않는 선민이 아닌 사람들의 돈 많은 상황이
전부 개구리로 보여야 하는데, 그렇게 보이질 않으니 무슨 감격이 있겠습니까?
이거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정리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절규하신 이유는, 교회 안에서 구원의 감격이 종적을 감춰서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성화 되고 있었던 당시의 그 교회입니다.
요즘이야 말이 많지만 그 때에는 모든 교회와 모든 목사님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그 교회에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장자가 죽었을 때 애굽에서의 부르짖음이 전무후무할 것이라고 했는데,
교회가 습관화된 생활만 남았다며 목사님께서 소리치며 우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재앙을 봐야 구원의 감격이 있고,
나는 재앙이 없는데, 저쪽의 예수님 모르는 사람들은 재앙이 있다는 것을 봐야합니다.
그런데 재앙이 안 보이고 지금 이건O 씨가 부러우면 무슨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돈을 못 벌다 조금 벌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감격해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학, 박사가 있어요.
믿지 않은 검사와 결혼 시켜서 사위로 얻은 것을 부러워하는데 무슨 감격이 있어요.
그것들이 다 파리 재앙이고 이 재앙이고 안정된 인프라에 내리는 그런 재앙인데도
그것이 재앙인 줄을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고 몸은 에덴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고 초대교인들이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이 땅에서 한 번쯤 해볼 만한 좋은 일이 많이 있는데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돈도 한 번 실컷 써봤으면 좋겠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봤으면 좋겠고,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학, 박사가 되어 봤으면 좋겠는데
그런 것들을 다 제쳐놓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거기 올라가신 주님께 내 마음도 묶어서 보내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늘로 마음을 택배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셨던 것처럼 하늘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 다 불쌍해 보이고 감격이 철철 넘칩니다.
저들은 재앙에 있고 나는 저들이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보화를 가졌다고 하는
이 격차로부터 사명이 생기는데, 오순절에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구원의 감격이 없었을까? 재앙을 못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재앙을 못 봤을까dy?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지 않기 때문이고,
에덴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에덴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왜 마음은 땅에서 뒹굴며 땅에서 좋은 것을 찾고 땅에서 기쁠 수 있을까 하고
땅에 묶여 있고 땅에 얽혀있을까?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 마음이 풀어지고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로 올라간 마음이 땅을 보면서 재앙을 보고,
재앙을 보고 있는 마음에서 감격이 생기게 되고,
감격이 생긴 마음에서는 사명이 생기면서
사람들을 출재앙 시키는 역사가 예수님 오실 때까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도 오늘의 사건이고 십자가도 오늘의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출애굽 때의 구원의 감격을 내 것으로 삼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아버지!
당연히 있어야 될 감격과 당연히 지속되어야 될 감격이 종적을 감춘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이 간단한 사실을 반복함을 통해 에덴을 회복하게 하시고
에덴에서 보이는 재앙을 통하여 감격을 갖게 하시고, 이 감격으로부터 사명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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