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출12:12-13/ 유기성 목사
2016-08-03 15:47:4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
오늘부터 교회 절기 중 가장 중요한 한 주간이 이어집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이고, 이어지는 한 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주간이며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가장 놀라운 은혜가 있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에게 그저 매년 반복되는 절기로 여겨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이 우리 모두에게 보혈의 능력과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는 깊은 은혜의 주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피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의 중심에는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보배로운 피라 하여 보혈이라고 부릅니다. 왜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가리켜 보혈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구원과 해방을 받게 때문입니다.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모든 사람들이 죄 사함받게 되는 능력이 예수님의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2천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지금 나의 죄를 사할 수 있느냐?”
믿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듭나지 못한 지성인들은 보혈에 관한 메시지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집니다. ‘피’ 라는 말 자체가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예수의 피로 이루어졌다는 메시지를 어리석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보혈의 능력과 복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가장 귀한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어느 날 강도를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강도가 웨슬레 목사님 주머니를 다 뒤졌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실망한 강도에게 웨슬레 목사님이 ‘여보시오. 내가 드릴 것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강도는 혹시 숨겨놓은 돈이라도 있는가 해서 ”그게 뭐요?“ 하니 웨슬레 목사님이 ‘당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압니까? 당신이 비록 도둑질을 하고 다녀도 예수님의 보혈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당신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렸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뭐! 보혈?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고 말한 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3년 후 웨슬레 목사님이 어느 집회에서 저녁 예배를 마치고 성도들과 악수를 하고 있는데 한 신사가 와서 “목사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3년 전에 길거리에서 목사님을 세웠던 강도입니다. 그 날 목사님이 보혈에 대하여 말씀하신 후, 계속하여 내 마음 속에 보혈! 보혈! 소리가 들리는데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목사님의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이 회심한 강도를 보고 감격하여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축복해 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은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바깥에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도 많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과 치유를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의 보혈의 축복을 누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성경이 계시한 보혈의 능력과 축복에 대하여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보혈의 능력과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예수님의 보혈의 계시를 쉽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한 사건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 유월절 사건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엄청난 약속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430년 동안 애급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노예 생활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대략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사람다운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자기들의 소유라고 할 것도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애굽의 우상 숭배에 물들어 살았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여 세우시고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달 14일에 어린 양을 잡고, 그들이 사는 집 출입문의 인방과 기둥에 그 피를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날 밤에 죽음의 천사가 온 애굽 땅을 돌아다니며 애굽 사람들과 모든 짐승들을 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출 12:12 -13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 날 밤에 집의 문에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집에 장자와 처음 난 짐승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 끔찍한 밤이 채 지나가기도 전 게 바로는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 데리고 애굽을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노예였기에 구원은 받았지만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애굽 사람들이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 금과 옷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의 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게 보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치유까지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자 했을 때, 광야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광야가 어떤 곳인지 가 보지 않은 사람은 잘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실제로 이번에 가서 보니까 도저히 건강한 사람도 지나가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병든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건강한 사람도 가기 힘든 광야 길을 병든 몸으로 따라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병든 사람은 아마 하나님이 구원을 주셔도 자기 백성들과 함께 광야 길을 나설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짐만 될 터인데 당신들이나 가세요.’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시 편105편 3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침내 그들을 인도하여 은 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의 지파 중에 비틀거리는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몸이 아파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주실 때, 그들에게 애굽의 금 은 보화도 주셨고 병든 몸까지 치료하셔서 온전한 몸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인한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대한 이야기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의 모형이며 그림자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하나님이 보여주신 유월절 어린 양 사건을 통해서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냥 '피'라고 말하지 않고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속의 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해 놓으신 그 피, 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의 피라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그 죄와 저주에서 건지신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그래서 언약의 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다는 말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보혈이 발라지게 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심령에 예수님의 피가 발라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마지막 환란에서 구원 얻은 백성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오는데 어린 양의 피로 씻어서 희게 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가 쓴 '진홍가슴 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만드실 때, 깊은 생각을 하신 후 잿빛 털을 가진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진홍 가슴 새'라고 붙여주셨습니다. 이 새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잇는데 어찌하여 '진홍 가슴 새'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참 사랑을 배우게 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진홍 가슴 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이 그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보던 진홍 가슴 새는 그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던지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로 날아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그 사람의 이마에 가시관이 씌어져 있는데 그 가시가 박힌 상처에서 붉은 피가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 새는 가엾은 사람의 이마로 날아가서 자신의 자그마한 부리로 그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아나서 이 작은 새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새는 지칠 때까지 그 가시들을 뽑다가 안타깝게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묻은 피가 도무지 깨끗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는 핏자국이 남게 되었고,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새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을 가진 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빛깔은 모든 진홍 가슴 새의 목과 가슴에 빛나고 있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보혈이 발라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영감있는 동화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254장 [내 주의 보혈은] 5절에 보면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됩니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를 영접한 자에게는 그 마음에 피의 증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보혈의 능력은 모든 사람,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사건을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유대인을 구원하고, 애굽인들에게는 저주를 내리겠다.” 고 선언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이 밤이 되면 앞을 잘 보지 못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사람을 구별하지 못할까 봐 어린 양의 피를 문에다 바르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이야기는 하나님은 애굽 사람이냐 유대인이냐 그걸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어린 양의 피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도 문에 양의 피만 발라져 있으면 심판의 천사는 건너가 살려주고, 유대인들이라도 문에 피가 발라 있지 않으면 죽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피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에 있는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 여러분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고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복을 받고 치유를 받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강력한 말씀은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짧지만 아주 깊고 강력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누구나 “주 예수님 저를 구워해 주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러면 예수님의 보혈이 그 사람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다 예수님에게 나를 구원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고 누구든지 그렇게 요청하기만 하면 그는 주님의 보혈로 그 죄에서 놓임을 받고 저주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보혈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믿음으로 받는 자에게만 임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많이 들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보혈로 인하여 그가 정말 덮힘을 받고 보혈의 능력으로 살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알지만 하지 그 보혈의 능력을 정말 믿고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저주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패배하는 삶을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게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고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마틴루터가 몹시 아파서 병상에 누워 있는데 마귀가 들어와서 루터를 비웃듯이 응시하더니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안고 온 큰 두루마리 책을 마루에다 두르르 펴놓는데 보니까 마틴루터가 평생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더랍니다.
루터는 그것 때문에 크게 낙심하고 다시 일어날 소망을 잃었는데, 갑자기 십자가 복음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이것은 다 사실이다. 그러나 너 한 가지 잊은 것이 있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죄를 다 씻었다!”라고 외치자 참소하는 마귀와 두루마리가 사라져 버리고 말더랍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보혈의 능력을 선포해야 합니다.
멕스웰화이트 목사님이 쓰신 <보혈의 능력>이라는 책에서 목사님이 보혈의 능력을 믿음으로 누린 일화가 나옵니다.
목사님의 기정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에서 살았는데, 계속되는 독일 폭격기의 공습으로 몹씨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특히 밤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예수님의 보혈로 그가 살던 집과 그 가족을 덮어달라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 우리에게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위험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매일 밤 한 번도 깨지 않고 편안히 누워서 잘 수 있었다. 그 때 우리를 보호해 주셨던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너무도 생생해서 마치 우리가 어떤 종류의 폭탄에도 끄떡없는 튼튼한 방공호 속에서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우리 집을 중심으로 반경 1.2Km 이내에 13개 폭탄이 떨어졌을 때에도 우리 집 건물 일부가 사소한 피해를 입었을 뿐 가족 모두가 무사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정말 믿으면 죄에서 씻음을 받고 질병에서 고침 받고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그 보혈로 덮힘을 받도록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 그렇게 구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에 대하여 알고만 계시지는 않습니까? 정말 믿습니까?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오래 고생하셨던 한 여 성도가 계셨습니다. 약으로도 치유되지 않고 병원에서는 관절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절망적인 진단을 받았습니다. 매주 안수 기도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가 낙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몸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던 그 성도님의 마음에 ‘목사님이 설교할 때마다 계속 말씀하시는 ‘나는 죽고 예수는 살고’ 라는 말씀이 정말 무엇인가?‘ 궁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답니다. “정말 이 말씀의 진리가 깨달아지게 해주세요.” 그런데 갑자기 십자가 복음이 정확하게 깨달아지더랍니다.
‘아, 예수님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정말 예수님을 믿는 것이구나! 나는 죽었고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 되셨구나! 이것이 예수님이 나의 주님, 나의 왕이시라는 말이구나!’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지난 금요 치유 기도회에 참석하였는데, 안수를 받으러 나오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흥분이 되더랍니다. 찬양 반주 소리보다 자기 심장 뛰는 소리가 더 크게 드릴 정도였답니다. 안수기도 중에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임하시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시간에 관절염이 깨끗이 치유받았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관절염 수치가 제로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이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세요.‘ 복음의 능력과 그의 믿음으로 유월절 사건이 그에게도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다음 주일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가장 큰 감사절입니다. 1년의 추수감사절이 큽니까? 영원한 구원받은 날의 감사가 더 큽니까?
그러나 부활절의 감사는 보혈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 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보혈의 은혜가 믿어진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정말 믿는데 감사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보혈의 은혜를 믿지 않는데 감사하는 것은 더욱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감사를 보고 자신의 믿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안에서부터 억제할 수 없는 감사, 십자가 보혈의 능력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정말 보혈의 능력을 믿고 누리면서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주님께 구하십시오.
[기 도]
“사랑이 많으신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주의 보혈로 우리를 더욱 덮어 주시옵소서.
우리는 모두 다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죄의 사슬에 묶여 마귀의 종살이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여 죄악의 사슬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마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용서와 의와 영광을 얻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소망도 얻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에게 쏟아짐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의 보혈을 더욱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보혈을 더욱 굳게 붙잡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가정과 자녀, 기업을 덮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admin
출12:1-14/ 유월절/ 조용기목사
2015-04-02 23:33:45
야곱에게는 열두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열한째인 요셉이 걸출했습니다. 요셉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그 특별한 꿈 이야기를 통해 요셉은 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꿈을 마음속에 품으면 꿈이 우리를 끌고 가나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시련과 고난의 일이 계속됩니다.
요셉은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결국은 애굽의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하고, 또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들어가 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꿈 때문에 바로왕을 만나 꿈을 해몽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온 중동을 뒤흔드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요
셉에게 주신 꿈 덕분에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근을 맞은 그의 온 가족들을 애굽으로 불러 고센이라는 기름진 땅에서 배고픔을 모르고 살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국무총리로 있을 동안 큰소리치며 아주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죽은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요셉의 이름이 역사적으로도 기억이 안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점점 늘어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 자유와 해방을 얻은 이스라엘
430년 동안 고센 땅에서의 생활속에서 하나님이 축복을 통해 얼마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번창했는지 정확한 계산은 나와 있지 않지만 200만에서 300만명가량 되었습니다. 그러니 바로왕의 마음에 두려움이 온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켜서 나의 왕위를 찬탈할지도 모르니 더 번창하게 두면 안되겠다’ 그래서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도록 아주 고된 일을 시켰습니다. 출애굽기 1장 13∼14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430년이 지난 후에 모세를 택하셔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준 가나안 땅, 상속하여 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입장에서는 일꾼이자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 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9번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고, 바로왕은 항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기로 약속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번번히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마지막 단계인 10번째 재앙으로 애굽을 치기로 결정하시고, “너희들은 모두다 밤중에 양을 잡아서 먹을 만한 수를 계산해서 양을 잡아서 양푼에 피를 받아 우슬초로 문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라. 피를 바르고 그리고 먼 길 갈 준비를 다 하고 가족들이 모여 앉아서 어린 양을 삼지 말고 불에 구워서 먹어라.
그날에 내가 죽음의 사자를 온 애굽 땅에 보내리니 임금님의 맏아들부터 종과 짐승의 맏이까지 다 죽겠다. 그 문설주에 인방에 피가 있으면 건너뛰어서 갈 것이거니와 피가 없으면 그 집에 들어가서 다 죽일테니 애굽의 역사상 그 많은 사람이 하루저녁에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집집마다 다 맏아들은 죽을 것이고 맏짐승은 죽을 것이니 이 밤에 전부 짐을 짊어지고 나가라. 나가기 전에 이웃인 애굽 사람에게 금붙이를 구하라. 금, 은, 동을 너희들에게 주게끔 내가 명령을 내려놓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먼 길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짐을 꾸리고 어깨에 걸머지게 짐발을 만들고, 양과 염소를 택해서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붙여놓고 고기를 구워서 먹었습니다. 그 순간 온 애굽 천지에 갑자기 울음소리가 진동했습니다. 멀쩡한 자식들이 다 죽어나가니 애굽 백성들이 모두 왕을 원망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저걸 안 내보냈다가는 우리 다 멸망하겠다’고 통곡합니다.
바로가 보니 국민들의 원망이 심상치 않습니다. 바로의 왕위도 위협받을 지경이되자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빨리 나가라! 짐승도 한 마리 남겨놓지 말고 다 데리고 빨리 나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되어 순식간에 430년간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떼를 지어서 광야를 향해서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의 시작입니다.
유월절은 영어로 말하면 ‘패스 오버(Passover)’ 한자로 말하면 ‘유월절’, 우리말로 하면 ‘지나가는 행사’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1년 행사 중에 가장 중요한 날이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은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양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 종살이 했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마귀의 종이 되어 마귀의 정사와 권세 아래 온갖 고통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 우리가 그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성령께서 그 피를 우리의 마음의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시고, 마귀가 우리를 해하려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그 피를 주장하면 예수의 피가 큰 증거가 됩니다. 죄가 우리를 덮치러 오거나, 허물이 우리에게 다가오거나, 질병이 우리에게 다가오거나,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와도 그 보혈의 피가 “지나가!”라고 말할 때 모든 저주가 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마음에 예수의 보혈을 받아들이고, 그 보혈이 마음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져서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기를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유월절 양이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비유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마음의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게 되면 우리 안에 사망의 세력이 떠나고 생명만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가슴의 문을 지키고 서서 좋은 것은 다 들어오게 하고 나쁜 것은 지나가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우리 신앙생활에 절대적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이 유월절 양을 적극적으로 표시한 것이 우리 성찬예식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 잔을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먹습니다.(마 26:26∼28) 오늘 성경에 양을 삶지 않고 불에 구워먹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당하신 것이 마치 유월절 양을 불에 굽는 것과 같은 고통당함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어린양을 불에 구워 먹어 힘을 얻어 먼 길을 갈 에너지를 얻었지만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흘리신 보혈을 통하여 아담 이후 마귀의 종이 된 인류에게 마귀의 정사와 권세 및 군대를 짓밟고 극복하고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2장 13∼15절에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마음을 지켜 서시고 우리를 정죄하려고 하는 율법, 마귀에게서 오는 여러 가지 정죄들, 죄악의 굴레, 질병, 저주, 죽음,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들을 다 물리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 피를 믿고 그 피를 주장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가 그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도 어린양 피를 문설주에 발라놓은 그날을 감당하지 못하고 항복 한 것처럼 오늘날 마귀가 온갖 부정적인 힘을 다 가지고 있어도 예수의 보혈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련과 환난과 고통이 마귀의 손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때가 많으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갈보리 십자가 보혈의 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 보혈이 우리와 같이 함으로 죄를 이기고 모든 허물을 짓밟고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전혀 환난과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되 우리가 이길 수 있는 힘은 예수님의 보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힘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그 힘을 통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마음이 되어야 되고 그것을 통해서 아름다운 내일의 꿈을 간직하고, 입으로 크게 승리를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의 고백은 마귀를 이기는 힘이 되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입술을 통해서 살아 나가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함에도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뭍이 드러나라” 말씀하실 때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운동력을 발휘해 만물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도록 말한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병자에게도 하루에 수천 번 치료 받음을 계속해서 말하므로 이 말씀이 들어가서 운동력을 나타내어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나쁜 병을 죽이고, 나쁜 세포를 잡아먹어 버리고, 치료를 주고,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살아서 역사하는 힘이 있고, 그 피가 우리의 가슴에 묻어 있으면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기적적인 능력을 체험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내일의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하고, 보혈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가지고서 우리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 피를 통해서 죄 사함의 복음, 거룩함의 복음, 치료의 복음, 축복과 형통의 복음, 부활과 영생의 복음을 소유할 수 있고, 또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전인구원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확실히 마음에 깨달아 알고 마음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어떤 종교로도 수양으로도 제도로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그 피를 우리 가슴과 문설주에 발라서 참된 자유와 해방을 주는 것은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마귀의 정사와 권세에서 해방을 얻고, 마귀가 가져다주는 모든 저주에서 자유를 얻고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것은 오직 보혈의 능력으로만 가능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1∼12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쓸모없는 돌로 여겨 버렸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의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불에 구워 먹은 양의 고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당한 고통과 흘리신 보혈은 마치 뜨거운 불 가운데 던져진 것과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어린양을 불에 구워서 먹어라. 삶아서도 먹지 말고 날것으로도 먹지 말고 불에 구워서 먹어라’고 명하신 것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먼 여행을 위한 체력을 얻기 위해서 고기를 구워서 먹으라고 하신 것도 있지만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에게 내려진 그 많은 형벌들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불에 굽는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지옥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당함으로써 우리 삶의 모든 저주들이 청산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에 대해 마태복음 27장 46절은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얼마나 괴로웠기에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고함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 한마디로 천사들을 불러 십자가를 벗어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이겨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통당하며 죽으신 것은 우리의 몸에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국 내 천국, 예수 영생 내 영생’이 된 것입니다. 나의 모든 나쁜 것은 예수님이 다 가져가시고, 예수님의 좋은 것은 내가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축복의 창고를 등에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죽음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당신의 의로움을 허락하시고, 우리의 불의를 짊어지시고 당신의 거룩함을 주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시고 당신의 건강을 주시고,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시고 자기의 축복을 주시고, 우리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모든 죽음을 예수님이 가져가시고 예수님의 모든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죽음과 생명을 바꿔치기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인해 바꿔치기 되어 생명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것을 믿고 입술로 시인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4. 희망찬 가나안을 꿈꾸라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평안을 얻고 장래에 희망을 갖는 것이고, 종으로 멍에를 메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싸워 나가야 합니다. 마귀와 싸우는 것도 축복을 받는 것도 입술의 말로써 하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야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피를 흘렸으므로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물러가라!’고 고백하는 그것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이와 같은 입술의 고백이 마귀를 쫓아내는 무기가 되고,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이 창조적인 역사를 받아들이는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입의 말로 내가 묶였고,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혔다고 말하며, 죽고 사는 권세가 입술에 있으니 입술을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전혀 고난 없는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오직 온갖 고난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식을 주시고 꿈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천국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꿈꾸는 본성을 주셨습니다. 더치 쉬츠 목사님은 『꿈꾸는 본성을 깨우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꿈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함께 꿈꿀 누군가를 원하시며, 하나님 대신 그 꿈을 실행할 자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꿈 친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꿈을 꿈으로써 아름답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의 유전자(DNA)속에 꿈을 심으셔서 우리를 꿈꾸는 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꾸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이 꿈을 꾸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꿈을 하나님 말씀과 더불어 꾸면 틀림없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 없이도 꿈꾸는 자가 꿈을 꾸지 않는 자보다 앞서는 것은 당연한데 더구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서 꿈을 꾸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꿈꾸는 자 요셉 덕분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가뭄 가운데서 살아났던 것처럼 이 세상은 꿈꾸는 자를 통해 만들어져 갑니다. 예수를 잘 믿는 다는 것은 하늘나라 꿈을 잘 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꿈을 버리지 말고 개인적인 꿈이나 가정적인 꿈이나 민족적인 꿈을 계속해서 꾸면 그 꿈이 우리를 이끌어가고 우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꿈을 꾸고 그 꿈을 바라보면 꿈이 우리를 이끌어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꿈꾸는 하나님의 친구였던 것처럼 우리도 꿈을 꾸는 하나님의 친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서 우리 가슴의 문설주와 인방에 당신의 피를 발라 놓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원수 마귀가 다가 올 때 보혈을 의지하고 쫓아내라고 하시며, 보혈을 통해서 생명을 꿈꾸고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이 땅에서 천국을 침노해서 빼앗으며,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가슴속에 꿈을 꾸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갖고 바라보고 믿고 말하고 나가야 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빈 손 들고도 일어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늘 버릇처럼 ‘나는 복 받고 승리한 사람이다. 어린양의 보혈로 나는 강건해졌다’라고 긍정적인 고백을 하는 꿈과 소망의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유월절 어린양의 보혈을 우리에게 주시고, 모든 죄와 허물을 제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참된 자유와 해방을 맛보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함으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의 꿈을 꾸게 하시며, 이 한주간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하늘의 언어를 사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보혈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떠남의 원리 /출12:1-13/눅9:31
2015-07-14 10:44:40
떠남이 출발점입니다.
▲기독교는 떠남에서 그 출발점을 갖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출애굽에서 출발합니다. 기독교는 떠남에서 그 출발점을 갖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기생 라합은 여리고를 떠났습니다.
룻은 모압을 떠났고, 베드로는 그물과 배와 고향과 친척을 떠났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으로 향하였고,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났고,
선교사들은 미국을 떠나 우리나라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가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고 확장되어 간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종살이를 하다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약 1400여 년 전,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유월절(逾越節)에 대한 내용입니다.
출애굽/유월절/떠남은.. 성경전체의 중심사상이요,
구약을 풀어 가는 열쇠요, 출애굽기의 핵심입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본토 아비 집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여 년 동안 살던 애굽 땅을 떠났습니다.
출애굽 exodus 라는 말은, ‘탈출’ 또는 ‘떠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의 생애를 마치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세상을 떠날 것에 대해서 자주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요13: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실 쌔"(눅9:31).
▲별세의 뜻
위 눅9:31에서, ‘별세’란 말의 원어는 헬라어로 exodos 인데
‘떠난다’, 또는 ‘세상을 떠난다’는 뜻입니다.
출애굽(엑소더스)때, 모세에게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민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듯이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서(별세, 엑소더스)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별세한다'는 말을 쓰신 것은
혼자 별세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듯이
주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이끌고
죽음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표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별세라는 말은 죽는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하나님 나라)을 산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9:22
이 말을 한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에 죽는 것은,
떠나는 별세고,
부활하는 것은 다른 세상에서 사는 별세입니다.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
그래서 ‘별세’라는 말 한마디 속에, 죽고 사는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변으로 떠났는데, 중심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이상현 박사는
기독교 신앙의 특성의 하나는 주변성이라고 했는데,
주변성이란 중심에서 쫓겨나고 중심에서 밀려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밀려나서 갈릴리에서 살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서 안디옥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에 간 사람들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삶을, ‘강요된 주변성을 지니고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강요된 주변성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
즉 흩어진 사람들(디아스포라)과 나그네 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발적이든지 강요를 당하든지.. 고향을 떠나 나그네가 되고,
애굽을 떠나 광야 생활을 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떠나 가난하고 약하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떠남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떠난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을 말하고 죽는 것을 말하는데,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떠나는 종교요 죽는 종교입니다.
고향을 떠나는 종교요, 고향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애굽을 떠나는 종교요, 애굽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종교요, 세상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몸을 떠나는 종교요, 몸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별세시키려고 택하셨는데,
결국 그들은 별세(엑소더스)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별세하기 위하여 믿고
별세의 삶을 살다가
영원한 별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떠나는 신앙
이제 예수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기 죽음을 선언한 바울의 신앙이
우리 자신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애굽을 떠난 출애굽 사건의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대해서 죽는 것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어린양들을 잡아서 죽여야 했습니다.
자기들이 죽는 대신 어린양을 잡아서 죽여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별세 사건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건이
예수님의 별세 사건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의 순종의 삶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모리아 산 위에서 이삭을 잡아죽이려는 순간
아브라함은 사실은 자신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주님만을 따랐던
사도 바울의 생애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4:1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2:20).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기독교는 십자가의 신앙이요, 다른 말로 떠남의 신앙이요,
세상에 대한 죽음의 종교입니다.
▲떠나면 중심에 서고.. 죽으면 생명에 이릅니다.
기독교에는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쫓겨나고 밀려나서 떠나면 망할 것 같은데.. 사실은 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이 쫓겨나고 밀려나서 황무지와 산지에 유리 방황했지만
어느덧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아서 쫓겨나고 밀려나서 고향을 떠났는데
얼마 후에는 그들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도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과 세상을 떠나
주변성을 지니고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성공한 것입니다.
의로운 죽음은 자기 자신을 생명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4:11~12
바울의 죽음은 바울을 생명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했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요 죽음의 종교이지만
실상은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종교요, 생명의 중심에 서 있는 종교입니다.
떠나면 중심에 서게 되고, 죽으면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마치는 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하나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말 못 할 어려움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선한 씨, 의의 씨, 사랑의 씨,
진리의 씨, 평화의 씨를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계속 뿌리노라면
통일과 자유 민주주의의 꽃이 피는 날, 세계평화의 날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났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세상적인 가치관과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고향을 떠나 이산가족이 된 것이 슬프고 아픈 일이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에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이기적이 되었고 배타적이 되었고 탐욕적이 되었습니다.
너무 자기중심적이 되었고, 너무 물질 중심적이 되었고, 너무 세상 중심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가치관과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진정한 떠남의 중심에는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붙잡으며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으며 우리의 정과 욕심이 죽어야 합니다.
떠남이 중심에 서는 길이고, 죽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
.........................
◑서론
▲고집쟁이 성도 길들이기
소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집에 불이 나서 외양간의 소를 끌어내려고 하면
불빛을 무서워하는 소는 영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외양간에 있는 여물통을 엎어 버리면
그제야 소는 그 곳이 자기가 있을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제 발로 걸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인도하시고자 할 때
사람이 깨어지지 않고 고집부리며,
자기 뜻대로 하려 하면 사용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제일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을, 잠시 치우시는 것입니다.
육신에 병이 들어도 깨어지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플 때는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기도 좀 해주십시오. 병만 나으면 이제 예수 잘 믿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병이 나으면“기도를 받고 병이 나았나?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지.”
라고 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쉬운 말로 해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밥통이 엎어지면 주님 앞에 나옵니다.
몸에 심한 병이 들고 직장을 잃고, 하는 일마다 안 되어 올 데 갈 데 없으면
그 때에는 손들고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되고 평안할 때, 주님께 손들고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admin
식구(食口)대로 믿어야 /출12:1-4
2013-06-05 15:42:42
식구라고 하는 말은 한 집안에서 같이 살면서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식구는 식솔食率이라고도 하는데 집안에 함께 딸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생활을 마감하고 출애굽을 하기 전 사건의 기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해방이나 민족적 동질성 차원의 사향심의 발동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 사건은 희생의 피를 통해 생명을 구원하는 대속의 원리를 보여주는 영적운동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을 잡고 양의 피를 문설주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사자가 애굽 땅을 칠 때 그 집을 넘어갔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3-14절에 『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유월절(Pass over)이라고 합니다.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고 했습니다. 이 유월절이 신약에 성찬식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궁극적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새 이스라엘을 탄생시키는 구원역사의 신기원을 이루는 구속사적 사건입니다.
우리는 유월절 사건에서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Ⅰ. 하나님은 가족(식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본문 12장 3-4절에 『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찌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가족중심의 공동식사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족 단위로 식사를 하게 한 것은 혈연 공동체에서 신앙 공동체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족이 한자리에서 양고기를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식구가 적으면 이웃가족과 연합해서 한 마리를 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형편(남여노유)과 식사하는 식구들의 식욕을 감안해서 잡으라는 말입니다.
다 먹어야만 하는데 만약 남으면 불에 태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양고기를 먹다가 남아서 아침까지 두면 더럽혀지거나 소홀하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는 것도 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양고기나 신약의 떡은 모두 흠없는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 가족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한 사람이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2장 50절에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은 요한복음 6장 40절에 『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49절에 『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상을 구원하는 것이 존재의의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34절에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모두가 새 가족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찬은 일차적으로 새 가족의 확인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새 일을 하기 위한 충전입니다.
요한복음 7장 16-17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혈연의 가족이 영적 가족으로 새롭게 변화가 아닌 창조가 되어야 합니다.
Ⅱ. 신령한 영적 가족(식구)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가정입니다.
여호수아 24장 15-16절에 『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임종을 눈앞에 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바알 우상이냐 하나님이냐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천명하는 여호수아를 따를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향후 저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내 가족이 짐 되게 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는 때는 철석같은 마음도 변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어매지 말라! 주님 따라가는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께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 『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Ⅲ. 신령한 영적 가족(식구)은 탁월한 윤리와 도덕성을 견지하는 가정입니다.
1) 부모에 대한 공경윤리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고 했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부모 공경에 대한 것은 제 5계명으로 인간에 대한 계명 중에는 으뜸이 되는 계명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명에 차등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의 "공경"은 히브리어로 "카베드"( )인데 이것은 "간"肝이란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무거운 것", "영광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부모를 무겁게 여기고, 존경하고 간肝처럼 소중하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부모는 이 땅에서 자녀에게 하나님을 대행하는 명령권자입니다.
2) 자녀에 대한 사랑윤리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부모가 자녀를 분노케 하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라는 의미 외에 부모의 권한을 남용하여 자녀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자로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에서 "자녀는 우연의 열매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분깃으로 나누어주신 열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성도들의 자녀는 거룩하게 태어난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자녀는 태중에 있을 때에 이미 영생의 언약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트랜트 회의 반박문」에서 강변했습니다.
이러한 필연적인 사실에 너무 고무된 나머지 현대인들은 자녀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자녀에 대한 부권과 모권이 상실되어 가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맹목적인 자유가 사랑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며 부권과 모권이 주의 교양과 훈계를 일탈逸脫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3) 부부에 대한 애정윤리입니다.
마태복음 19장 4-5절에 『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5절에 『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칼빈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괴물(monster)과 같다고 했습니다. 부부가 일부일처의 원리를 잠시 마음속으로라도 벗어나는 것은 죄악입니다. 무엇보다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는 부부가 되어야만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일부다처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다처는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의도하는 이상적인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다처는 인간의 죄의 실제적인 상황에 대한 하나의 조정으로서 단지 묵인되거나 허용된 것입니다. 일부일처는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으로 교훈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연합이 일부일처였습니다. 일부다처는 하나님을 배역한 죄 많은 사회에서 발생한 것입니다(창 4:23).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한결같이 일부다처로 인하여 인간들은 고통스러웠고 더욱이 솔로몬은 일부다처로 인하여 패가망신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다처를 의도하거나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 사악할 정도로 완악하기 때문에 다른 죄들과 같이 일부다처를 허용 내지는 묵인하신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 만큼 일부다처를 심히 미워하십니다(말 2:16). 왜냐하면 일부다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를 증거하는 남편과 아내의 이상적 관계를 흐려놓기 때문입니다.
4) 형제에 대한 화목 윤리입니다.
잠언 17장 1절에 『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 했습니다.
형제들과는 서로 용서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화목은 희생과 용서와 사랑을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칼빈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모든 경건한 자의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는가 하면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정들은 수많은 작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존 하워드 펜"이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이라는 노래를 만들어서 모든 이의 애창곡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내도, 자식도, 가정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즐거운 나의 집을 부른 것은 독신을 후회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와 나아가서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노래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가정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가정은 크리스천의 인격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은 장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은 그 누구도 되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정의 가훈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수요와 공급이 결정되고 수입과 지출의 계정과목이 설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정의 입법이 되고 사법이 되고 행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정의 출발이 되고 그 가정의 계승이 되고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정을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가도록 해야 합니다.
한문은 뜻글입니다. 글자 글자마다 이중 삼중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컨대 "손자"의 손孫자와 대 죽竹자는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밤 율栗자와 떨 율慄자는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대추 조棗자와 아침 조朝자도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樂자는 즐거울 락과 풍유 악, 좋아할 요로 쓰입니다. 愛자는 사랑 애와 아낄 애, 仁자는 어질 인과 사랑할 인자로 쓰입니다.
현대인들은 사랑 애愛자만 알았지 아낄 애愛자는 모르고 어질 인仁자만 알았지 사랑할 인仁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가족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양고기를 먹어야 출애굽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먹고 마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곧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묘비에는 R.I.P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평화 속에 잠들다"라는 라틴어 Requiescant In Pace의 약자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에게는 이 글자가 허구일 뿐입니다. 저는 R.I.P 앞에 In Jesus Christ라고 넣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이사야 43장 11절에 『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기 전에 아끼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어질고 착하다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지 말고 나에게 가족을 사랑하는 희생적이고 애타는 마음이 있나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3절에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라고 했습니다.
나 혼자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에는 대표성이 없습니다.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양을 잡고 양을 먹듯이 각 가족대로 다 식구대로 믿어야만 합니다.
믿음이 운명을 결정한다 /출12:21-36
2013-03-20 14:42:42
지난 주중에 3.1절이 있어서 남선교회 주관으로 양수리 수양관에서 진행되는 ‘성경 속 물건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오고 가는 길에 아이들의 개학을 앞두고 있는 마지막 연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움직여서 길들이 많이 막혀 있더라고요. 그래도 하루를 즐거운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수양관에 도착하여 먼저, 가벼운 산행을 했는데,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시시하게 생각했을 산행인데, 모처럼 운동을 하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산행 후, 점심 식사를 하고 ‘성경 속 물건 전시회’에 들어가서 관람을 했습니다.
전시회 타이틀이 ‘성경이 살아있다’였는데, 우리 제천에 지으려고 준비 중에 있는 세계기독교박물관 측 주최로 열리는 전시회였습니다. 전시된 물건들을 보니, 4천 년 전 아브라함 시대의 항아리, 예수님 시대의 옥합, 6백 년 전의 양피지 두루마리 성경, 유향과 몰약, 비파와 수금, 그리고 야곱의 아내인 레아와 라헬이 불경스런 거래를 할 때 쓰인 식물인 합환채, 탕자 비유에 나오는 쥐엄 열매, 등 많은 성경 속 물건들이 있어서 성경공부를 눈으로 체험하는 것 같아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중에 요즘 주일에 보는 출애굽기 말씀에 나오는 것들 중에 유월절 양의 피를 찍어 바르는데 쓰였던 우슬초와 무교절에 먹던 무교병, 그리고 누룩과 유교병, 등을 보면서 출애굽기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나오기 전에 무교병, 한 조각씩 먹어볼 수 있게 하였는데,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그 무교병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 무교병의 느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면서 무교절을 지켰습니다. 이 무교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무교절을 지켜야 했을까요? 그것은 마치 늪에 빠져 목까지 잠긴 것과 같은 상황, 결국 그 속에서 죽는 일만 남은 것과 같은 절대 절망의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하나님이 살려내신 사건을, 무교절을 지키면서 고난의 떡인 무교병을 먹으면서 그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날을 회상하고 그런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말고 기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 이 무교절에 대한 말씀을 보며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찾아와서 재앙으로 애굽을 심판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향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무교절을 지키면서....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는 백성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고 싶어 하셔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영원한 규례로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무교절에 대한 말씀에서 어떤 명제를 생각했습니까?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소원은 자신이 백성을 사랑하듯이, 백성들도 아버지를 잊지 않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무교병을 먹으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무교병을 먹으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새겨야 할 텐데,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무교병이란 기도와 말씀과 예배일 것입니다. - 여러분, 날마다 기도와 말씀의 무교병을 먹으면서 매일 매일을 무교절로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출 12:1~14절의 유월절에 대한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 21~28절까지의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을 불러서 유월절 지키는 방법을 전달하는 장면입니다.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우슬초 묶음으로 찍어서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한 사람도 문 밖으로 나가지 말라’, ‘문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왜요? 피가 뿌려진 집만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궁궐, 권력자의 집, 부잣집이라도 피가 뿌려지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피가 뿌려진 집에만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엡1: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집 문에 피가 뿌려져 있어서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23절),
여기에서‘친다’의 의미는 ‘패배시키다, 살해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않도록 피로써 표시해 놓은 것입니다. 결국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합니다. (
28절)“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29~36절까지의 말씀은 바로에게 경고한 대로 처음 난 것들의 죽음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그 밤에 사람과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셔서 죽게 하자 애굽 전체가 초상집이 되었습니다.
(30절)“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난리가 났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한꺼번에 일어났습니다. 각 가정에서 작별 인사도 못 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설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겠는가? 이렇게 건강한 큰 아들이 갑자기 죽다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 죽었습니다. 한 밤중에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는 곳마다 비명소리,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그러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렀습니다.
(31~32절)“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빨리 떠나라, 너희 말 대로 해라’, 그리고 ‘나를 위해 축복하라’고 했는데, 이 말은 항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애굽 사람들도 ‘어서 이 땅에서 떠나 달라’고 재촉합니다. 패배주의에 빠지니 또 어떤 재앙이 올지 몰라 두려움에 잠긴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나가라고 사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말대로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달라고 구합니다. 상식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순순히 다 꺼내어 주는 것입니다.
(36절)“...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그 물품들은 결국 이스라엘의 종살이에 대한 새경인 셈입니다
여러분, 어느 날 밤, 똑같이 그 밤을 지냈는데, 누구는 다 죽고, 누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운명을 결정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것은 그 말씀에 따라 유월절 어린 양(예수 그리스도)을 준비하고, 순종한 것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과 그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종말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믿음이 운명을 결정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믿으면 그것을 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어요. 그래서 어린 양을 잡고, 피를 내서, 그것을 우슬초에 찍어서 문에 뿌렸어요.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그대로 행했더니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수준은 믿음에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 하나님 믿으십니까? 그래서 걱정도 안 하시죠? 우리는 사실 하나님 안 믿고 돈 믿고 살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지금 만일 어디서 돈 1억 원 정도가 어떻게 생겼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유산이 어떻게 발견됐던지(에휴, 그런 유산이라도 발견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 드십니까?) 아니, 그냥 그렇다고 합시다. 정말 맘 좋은 어떤 친척이 엄청 돈을 벌게 되어서 1억 원을 주면서 이것 갖고 한번 어떻게 일어나 보라고 그래서 돈 1억 원이 생겼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1억 원에 해당하는 염려는 맡겨지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만큼 염려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애들 대학 학비, 대학생을 자녀로 두신 분들은 이렇게 3월 학기 초가 될 때까지 힘들죠? 등록금이 정말 부담스러운 돈 아닙니까? 적어도 몇 백만 원 되는 돈인데... ‘이거 어떻게 마련하나? 이번에도 또 융자를 받아야 할까? 누구한테 빌려볼까?’별의 별 생각을 다하잖아요? 그런데 1억 원이 생겼으면 등록금 걱정이 됩니까? 안 됩니까? 그냥 걱정이 안되요. 돈 1억 원이 있으니까... 그래서 돈에는 염려가 딱 맡겨져요. 그 힘을 아니까... 돈에는 힘이 있어요. 그 돈의 힘을 알아요 우리는... 전세 살고 있는 분에게 돈 1억 원이 생기면 ‘이번에 아주 집을 하나 살까?’그런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실제로 그래요? 안 그래요? 돈 백만 원만 있으면, 오늘 하루 뭘 먹을까? 뭘 입을까? 걱정이 안되요. 그 돈 백만 원에 걱정과 염려가 다 맡겨지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얼마짜리지요? 하나님은 얼마짜리입니까?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분입니다. 모든 걸 다 가지고 계시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신데, 그 하나님이 도대체 얼마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까? 그렇게 믿는다고 하면서도, 돈 몇 십만 원이 걱정되고, 돈이 중압감을 줍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또 우리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믿습니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 나를 도와주던 사람, 내 가족... 내 곁을 떠났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이 멀리 이민을 갔습니다. 그렇게 나를 좋아하던 친구가, 어려울 때 도움이 되던 친구가 멀리 떠나갔습니다. 그러면 갑자기 마음이 고독감이 밀려옵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사나? 여러분, 사실은 다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고 살았던 대상은 하나님 아닙니까?
남편 믿고 사는 것입니까? 자식 믿고 산 겁니까? 믿음의 대상이 남편이고 자식인 겁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 아닙니까? “믿음의 수준이 삶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훨씬 더 믿습니다. 다윗이 골리앗하고 싸울 때, 그때 사실은 군인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형을 위문하러 간 것임. 블레셋과 싸우는 형을 위문하러 갔다가 다윗이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 눈앞에 벌어진 것입니다. 골리앗이란 블레셋 장수와 전쟁을 하는데 구 척 장신이니까 키가 약 3m 정도 되는 거죠? 엄청난 거인이에요. 골리앗이 나와서 하나님을 모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군사들도 조롱하면서 “일대일로 한번 싸워보자, 우리가 다 싸울 필요 뭐 있느냐?” 그러면서 나와서 싸우자고 그러는데, 누구도 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싸워봐야 죽겠으니까...
여러분, 이 사울 왕과 군사들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쟁에 싸우러 나갈 때 하나님께 먼저 제사를 드리고 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눈앞에 구 척 장신 골리앗이 있으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왜 골리앗을 두려워해야 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에요.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래서 나라도 보내달라는 거에요. 자기는 군인도 아니고, 아직 소년인데, 누구도 나가서 골리앗과 싸우려 들지 않으니까 그러면 나를 보내 달라, 내가 가서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으니까 왜 골리앗이 문제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그 믿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니까 걱정과 염려도 없으시죠? “믿음이 운명을 결정합니다”,
저는 다윗의 믿음을 생각할 때, 진짜 믿음은 좀 무모하리만큼 담대하기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엊그제 성서유물 전시회에서 약간의 생각의 수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시회에서 나오는데, 다윗의 물매를 체험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물매의 한쪽 끈을 손가락에 걸고, 가운데에 공을 넣고, 나머지 한쪽 끈을 잡고 아래위로 돌리다가 힘껏 던지면서 한쪽 손에 잡고 있던 끈을 놓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공이 앞으로 날아가더라고요.
몇 번 해 보면서 좀 더 힘차게 돌리다가 놓으니까 더 세게 날아가더라고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다윗이 돌린 이 물매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안에 강하고 단단한 자갈돌을 넣고, 아주 힘차게 돌리다가 던지면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거기에다가 양을 치면서 심심했던 다윗이 바위를 향해서 숱하게 물맷돌 던지는 연습을 했을 터이고... 내려오면서 장로님하고도 이야기했는데, 이것을 힘차게 돌리다가 던졌을 때, 최고 시속 200km이상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야구 선수 중에 최고 투수도 약 160km정도 밖에 안 나오는데... 다윗은 물매 선수였습니다. 적어도 물맷돌을 강하게 던지며 정확하게 맞히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빠른 발로 거인 장수의 무거운 칼 정도는 피할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 자신감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더하여져서 자신의 정확한 기술로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믿음이 운명을 결정합니다”,
애굽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이 갈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 환경과 여건, 이러한 것 보다 믿음이 더 위대합니다. 믿음이 능력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믿음이 우리의 삶과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시고, 이 한 주간, 이 한 달,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큰 믿음으로 능력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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