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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출애굽기 설교 모음

출애굽기 13:17 - 22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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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는 이 길은 /13:17-22/ 김창진목사

2023-01-15 09:31:50

 

배 경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형통한 길을 안 주실까?’, ‘하나님은 왜 나에게 어려운 길을 주시는가?’, ‘기도가 부족한가? 정성이 부족한가? 믿음이 부족한가?’,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잘 되는데, 왜 나만 이럴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도 들고, 초라해 보이고, 때때로 자존감이 무너져, 인생의 패배자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믿고, 믿음으로 이겨내시는 분들도 많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삶에 펼쳐지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일희일비(一喜一悲)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을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끝내고 막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그들의 조상 요셉의 유언대로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나옵니다(50:25, 24:32, 11:22). 그렇게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십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가장 큰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은 블레셋 사람의 길이라고 부르는 지중해를 끼고 가는 해안 길입니다. 그 길로 가면 보통 4, 늦어도 일주일이면 충분한 거리입니다. 오늘날 자동차로는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대구 정도의 거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홍해의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40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거쳐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더 궁금한 것은 40년의 광야의 생활의 열 배가 넘는 430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에 출애굽을 시키시고, 가나안을 향해 가게 하셨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고, 미쁘신 분이시기에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신데, 43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실까?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그렇게 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2.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15:12~16) 가나안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차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죄악이 찰 동안 430년을 기다리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가장 빠른 길인 블레셋 사람의 길을 놔두고 광야로 돌리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17c“....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블레셋 사람의 길은 전쟁 위험이 있는 길입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허브 같은 곳이기에 힘을 가진 왕들이 제국을 이루기 위해 거쳐 가는 길로 전략적 요충지이기에 군대의 주둔은 당연합니다. 애굽도 이곳에 군대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고, 블레셋 족속 역시 이 요충지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블레셋은 가나안에 사는 족속 중에 가장 강한 족속으로 국가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을 끝까지 괴롭혔던 족속이며, 때로는 애굽을 공격할 정도의 힘을 가지기도 했던 족속입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는 이름이 블레셋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막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길로 가게 되면 애굽의 파견된 군대를 만날 것이고, 그들을 용케 피한다 할지라도 블레셋 족속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처럼 마음을 돌이켜, 후회하고애굽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광야의 길로 돌려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후회하는 백성

 

그러나 홍해 광야 길로 들어선 이스라엘이 보여 준 것은 끊임없는 후회였습니다. 그 후회함의 표현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으로 나타납니다. 모세를 원망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출애굽기 16:8c “...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애굽에서 차라리 하나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겠다.”라고 까지 합니다(16:3).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라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말씀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다라며 떠들고, 금송아지가 만들어진 다음 날을 여호와의 절기라고 선포하며 금송아지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먹고 마시고 뛰어놉니다(32:4~6).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애굽이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나님이 인도하여 따라왔다가 칼에 죽게 되었다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새로운 지휘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14:1-4).

 

우리가 출애굽기와 민수기 성경공부를 하면서 볼 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본다면 블레셋 사람의 길로 보내지 않으신 이유가 단지 전쟁을 만나 후회할까?”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야의 삶에서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후회하고, 원망하고, 전쟁도 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광야의 길로 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

 

홍해 광야 길로 돌리신 이유

 

그 이유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 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입니다. 그럼 왜 율법을 주셨을까요? 율법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고 살아가야 할 법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먹는 문제까지 거론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까지 언급하고 계십니다. 왜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시내 산 이전과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모습은 다릅니다. 시내 산 이전 곧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전에는 원망하고 범죄하는 이스라엘에게 경고로 그치시지만, 시내 산 이후 이스라엘을 율법에 따라 다스리시는데, 죄악의 모습이 이스라엘 전체에 전염되지 않도록 죽음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6, 민수기 15장에는 안식일을 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을 범한 일에 대해서는 경고하는 것으로 그치시지만, 시내 산 이후인 민수기에서 안식일을 어긴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은 죽이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사람들의 문화와 문명에 휩쓸리지 않고 당당하게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향한 지름길인 블레셋 사람의 길로 보내지 않으시고, 힘든 광야 길로 이스라엘을 돌리셨고, 40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련시키시고, 훈련 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400년 이상 애굽의 우상의 문화와 문명 속에 살았기에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훈련과 단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결국, 광야의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 위한 훈련의 길이고, 단련의 길이고, 연단의 길이였습니다. 힘든 길이었지만 하나님은 늘 그들 곁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40년의 광야의 삶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명기 29:5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우리 이야기

 

이제 우리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면서 힘들고, 어렵고, 답답한 일들이 없습니까? 모든 일이 생각대로, 마음먹은 대로, 기도한 대로, 술술 잘 풀리십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모든 것들이 잘 풀리는 지름길이 열려야 할 것 같은데, 실상 우리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무리 믿음 좋고, 신앙 좋은 가정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없고, 어려움이 없는 집은 없습니다.

 

남편 때문에, 혹은 자녀들 때문에, 때론 돈 때문에, 때론 건강 때문에, 저 집은 괜찮겠지, 평안하겠지 하고 들여다보면 예외 없이 문제를 안고 어려움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데 왜 이런 문제들이 반복되는 걸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라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단지 영원한 죽음의 길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옮기어진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이란하나님 형상답게 살게 하는 것, 천국 백성답게 만들어지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비유로 하셨습니다. 한 조각가가 불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 속에서 나무 하나를 꺼냅니다. 그 나무는 그대로 두면 불에 타 재만 남는 나무일 수밖에 없지만, 그 조각가에 의해 그 불 속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나무의 입장에서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조각가는 불 속에서 꺼낸 나무를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를 통해 만들고자 하는 것을 조각해 갑니다. 날카로운 조각칼로 자르기도 하고, 베어내기도 하고, 때론 깊숙이 도려내기도 하며, 그 나무를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나무의 입장에서는 아픔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이 지나면 나무는 결국에는 조각가에 의해 완성된 아름다운 조각품으로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이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져 가는 성화의 길입니다. 성화(聖化)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 속에는 아픔과 힘듦과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전도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라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7:14)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5:13) 신명기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3)

 

말씀을 정리하고 마칩니다. 인생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었던 광야의 길과 같습니다. 광야 같은 인생에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만들어 가시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훈련하시고, 단련시키시며, 연단시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하나님 나라인 천국 백성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런 모습을 욥기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10)

 

그런 인생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고, 고난이 있으면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광야 40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길을 말씀 따라 순종하며 살아 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dmin

 

 

 

13:17-22/ 광야를 지나는 삶/ 조용기 목사

2016-06-01 11:59:3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중략)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야훼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애굽기 131722)

 

 

한국의 세계적인 생산품과 수출의 호황은 선진국 대열에 서게 만들었고,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던 국가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었고, 우리 삶에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량실업이 눈앞에 나타나는 등 시련의 한파가 파도쳐 오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사람은 눈으로 본 것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그것에 따라 생각하고, 또 그 생각을 따라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인간을 유혹할 때도 보는 것을 사용했습니다.

 

창세기 3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고 기록되었듯이 마귀가 하와를 꾈 때, 선악과나무를 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첫째요, 열매가 지혜롭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왔고, 결국 생각은 행동으로 옮겨서 선악과를 따먹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무엇을 바라보는가가 우리 생활의 성패에 중대한 결정을 짓습니다. 어떤 친구를 사귀고 바라보고 있는가, 어떤 책을 중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바라보는 것이 여러분 생각을 만들어 내고, 생각이 행동을 만들어 내고, 행동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올 때, 모세는 그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출애굽기 1413절은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고 모세가 백성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했는데,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도로 포로로 잡으려고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나왔습니다.

 

모세는 무기도 없고, 군대도 없고,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 장정만 한 80만명이 된다하면 어린아이까지 쳐서 300만명 정도 되는 식구를 거느리고 나오는데, 이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도 가만히 있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했습니다. 바라보고, 믿고, 말하면 성령이 그에 따라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이 계신다고 자꾸 말하면서 성령이 어디 계신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믿고, 말하면 보혜사 성령님이 그 속에 들어와서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애굽에서 나오는데 자기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됩니다.

 

그래서 백성들과 합쳐서 모두 다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 성령이 역사하는 장면을 바라보고, 그러고 믿고, 그러고 성령이 일하신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입으로 시인해주면 성령이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그들 속에 들어와서 역사함으로 애굽의 군대를 다 물속에 빠져 죽도록 만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1. 출애굽에서의 하나님의 도우심

 

모세는 당황하여 지리멸렬 되어가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애굽 사람은 전차 600대를 앞세우고, 전군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도로 붙잡아 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이 임하여서 싸워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앞에 구름기둥이 있으면 뒤에 불기둥이 있고, 뒤에 불기둥이 있으면 앞에 구름기둥이 있고, 당장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차라리 종살이 하고 사는 것이 좋았겠다고 말을 하면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의지할 힘을 얻어야 됩니다. 따뜻한 성령의 손길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성령이 우리의 손을 붙잡고 나아가 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13절로 14절에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대리로 싸워주시는 것을 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꿈과 믿음과 입술의 선언을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나고, 꼭 기도 응답은 받아야 되겠고,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모르고 하는 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기도해서 하나님이 붙들어줄 것을 믿으십시오. 그러고 입술로 시인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신다. 나와 함께 행하신다이렇게 고백하면 성령께서 운행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30절에 보면 그 날에 야훼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을 때 모세가 지팡이로써 홍해수를 갈라놓았습니다. 갈라진 길을 따라 이스라엘 사람 전부가 육지로 건너갔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뒤늦게 따라와서 이스라엘이 걸어가는데 우리가 못 건널리가 어디 있냐?”면서 600대의 전차를 앞세워 백만 대군이 따라 들어갔습니다. 강 중간 쯤 들어가니깐 하나님께서 모세보고 지팡이를 들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지팡이가 들리자 물이 쏴아 원래 상태대로 복구가 되어 다 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과 인생을 같이 하면서 마귀의 일을 멸하고,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마음에 깊이 모시고, 그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역사를 고백하면 반드시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2. 수르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도우심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르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는 나무 한그루 없는 진짜 광야였습니다. 광야에서 3일 간 행진하는데, 물이 없어서 모두 다 목말라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1522절로 25절을 보면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극히 평범한 일도 하나님과 같이 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사흘길을 걸었는데 물이 없고, 물을 발견하고 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레미야 33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려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 엎드려서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지시하셨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달아진 것입니다. 화학반응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우리가 쓰디 쓴 환경 가운데 살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쓴 것을 달게 만들어 버릴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최근 가장 심각한 병이 우울증입니다. 옛날에는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는 여성들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많았지만 요즘은 우울증에 걸려서 기도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 중에 남자들이 많습니다. 중년 남자들도 있고, 60세가 넘은 분들도 우울증에 걸려서 옵니다. 왜 우울증에 걸렸냐고 물으니 직장도 잃어버리고, 돈도 못 벌고, 집에서 가장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울증이 뭔지 알아보라고 해서 저를 우울증 목욕탕에다 집어넣었다가 건져주신 기억이 있는데, 우울증이 다가오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습니다. 정말로 사는 게 귀찮습니다. 엄청나게 마음속에 고통이 따라옵니다. 우울증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십자가 밑에 엎드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살려 주십시오. 보혈로 씻어 주시고, 성령이 오셔서 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보혈로 씻기고, 성령이 마음을 붙잡아 주셔서 우울증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 같은 인생을 살면서 쓴물을 마시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십자가에 엎드리기 전에는 그 우울증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나뭇가지를 꺾어 던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나뭇가지를 꺾어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울증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 같은 세상에 들어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이길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줍니다.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 받고, 허물이 사함을 받고, 십자가를 통해서 채찍에 맞음으로 병이 고침을 받고, 건강을 얻게 되고, 또 십자가를 통해서 저주가 떠나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되고,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장사지내고 부활해서 영생을 얻는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십자가를 바라보면 치료받습니다. 기독교는 병 고치는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침례 받으시고 서른 살에 목회 사역을 출발했는데, 예수님이 3분의 1은 병 고치는 데 보냈습니다. 기독교는 죄를 용서받는 종교이고, 병 고침을 받는 종교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1526절에 보면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아예 우리 가정 의사가 하나님이 우리 가정 의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호가 야훼 라파인 것입니다. 야훼는 하나님 성함이시고, 라파는 병 고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병을 다 고치는 하나님이시므로 그 하나님을 끌어안고 주님이시여 나는 이천 년 전에 덕분으로 이미 나았는데 그것을 몰라서 여태까지 아팠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성경 시편 1032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야훼는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에 병을 무섭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미 이겨 놓은 우리 자신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3.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르 광야에서 조금 더 걸어오니 엘림동산에 도착했습니다. 물샘 열 둘과 종려나무 칠십 주가 있는 오아시스에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오아시스를 그냥 지나가지 않고 거기에 천막을 치고 기운을 돋우었던 것입니다. 정말 죽기 아니면 살기로 어려운 광야를 지났기에, 하나님은 오아시스에서 그들의 마음에 생기를 얻도록 해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62절로 3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야훼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랐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 이레입니다. ‘야훼 라파 는 우리 의사 선생님, ‘야훼 이레는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다 예비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살까하는 것들을 하나님은 이미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 예비해 놓은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깐 뭘 먹고 사냐. 우리는 고기도 먹고 싶고, 밥도 실컷 먹고 싶고 그런데 이게 뭐냐? 광야에 들어와서 배고프고, 고기 먹고 싶고, 이렇게는 못 살겠다라고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631절로 32절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 떡을 달라고 하면 뱀을 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독사를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십니다.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기를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천막 주변에 낱알만한 만나가 눈이 내린 것처럼 내려 있으니깐 그걸 모아서 지지기도 하고, 볶기도 하고, 굽기도 하고, 삶기도 하고 그거 가지고 먹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는 광야 하늘이 새카맣도록 메추라기를 준비해서 진 위에 떨어질 터이니 그걸 주워가지고서 실컷 고기 파티를 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께서 만나를 통해서 밥을 먹이고, 메추라기를 통해서 고기를 만들어 먹었다고요. 신약 성경에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000, 부녀자 기만명을 다 먹이지 않았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실력 있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더 많이 예수를 믿고 더 많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은 더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에게 복을 주셔서 빛나고 자랑스러운 조국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잠언 62절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경고하십니다. 우리의 말은 창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413절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이 바탕으로 먼저 바라보고,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바라보고, 그 다음 그것이 믿어지도록 기도하고, 그 다음에 입술 고백을 하면 성령이 들어와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가에 예수님이 마리아와 마르다를 데리고 와서 무덤 돌문을 옮겨 놓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이고 선생님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데 이걸 옮겨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자, 예수님은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갖고 있어야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꿈을 통해, 믿음을 통해, 생각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이 들어와서 일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그 마리아와 마르다가 두 사람이 믿음으로 무덤 문의 돌을 옮겨 놓자, 썩은 냄새가 확 나왔어도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수의를 입은 채 나사로가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고백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일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믿으면 믿은 대로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하나님의 뜻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고난의 학교에 입학시켜 고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고, 믿고, 범사에 하나님의 역사를 시인하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주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은 예레미야애가 332절로 33절에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10절에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 저에게 인사를 온 자매가 있었는데, 작년에 혈액암 말기가 되어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면서 기도 받아보라고 의사가 보냈어요. 그래서 제가 그에게 타일렀습니다. “네 마음의 즐거움이 암을 잡아먹는다.

 

마음에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을 가지면 암이 너를 잡아먹는다. 그러므로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감사와 찬송을 부르고 살면 그만큼 암을 잡아먹는다. 이제 암을 다 잡아먹고 난 다음에 건강이 회복되거든 내게 오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어머니와 같이 아주 건강하고 활발한 얼굴로 왔더라고요. 6개월도 못 살 것이라고 했던 의사가 진찰을 하더니 암이 온데 간데 없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혈액암은 좀처럼 잘 안 낫는 암인데 마음에 즐거움이 일어나 암을 다 잡아 먹어버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용혜원이란 시인의 성공노트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삼류 인생은 울어버린다. 이류 인생은 입술을 깨문다. 그러나 일류 인생은 웃어버린다

 

고난을 당했을 때 어떤 사람이 웃을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주시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웃으며 사는 우리가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광야같은 인생을 살아가고있는 우리들에게 성령님이 함께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삼중축복의 역사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우리들에게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admin

 

 

 

광야 길에서 /13:17-22/ 이동원 목사

2014-11-28 23:28:29

 

해마다 새해가 되면 저는 제가 참 좋아하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란 시를 떠올리게 됩니다.

 

노랗게 물든 숲 속 두 갈래 길이 있었네

/한 여행자의 몸으로 두 길 다 가지 못하는 서운함으로/한 길이 굽어 꺽어 내려간 데서 나는

/바라볼 수 있는 데 까지 오래 머물러 바라보았다네. --그리고 똑 같이 좋아 보이는 다른 길을 선택 했다네

/그 길에는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을 부르는 듯 하여

/물론 그 길을 걸음으로 결국 길은 같아지겠지만.” 이 시의 마지막 단원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난 한숨지으며 말하게 되겠지

/두 갈래 길이 숲 속에 나 있었다고

/ 그때 난 사람들이 적게 여행하는 길을 선택했다고/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은 달라졌다고.”

 

이 시는 무엇보다 인생이 여행길임을 보여 주고 있고 그 길은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을 교훈합니다. 그런데 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서 느끼는 특별한 감흥은 마지막 대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난 사람들이 적게 여행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은 달라졌다”(I took the one less travel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는 대목 말입니다.

 

인생에서 우리는 때로 가깝고 쉽게 갈수 있는 길과 멀고 험한 길, 그 두 갈래 길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경우 우리에게는 가깝고 쉽게 갈수 있는 길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멀고 험한 길로 가야 하는 선택에 직면할 수가 있습니다.

 

고센 땅을 떠나 광야 길에 들어 선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랬습니다. 당시 고센 땅 '라암셋을 떠나 숙곳에 도달'(17km-12:37/지도 참조)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달하는 두 개의 대표적인 길 중에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한 길은 수에즈 운하 북단을 지나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팔레스타인 서남단의 도시 가사에 이르는 길(Via Maris, the way of the sea)입니다. 이 길은 쉽고 가깝게 갈수 있는 길로 장애물만 없으면 당시에도 한달내에 도달할 수 있는 길(지금은 자동차로 수 시간이면 가능-지도 참조)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유에선지 이 길이 아닌 멀고 험한 길인 홍해를 따라 남방 시나이 광야로 가는 길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렇게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그는 지금도 자주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왜 주께서는 때로 우리로 그 멀고 험한 광야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1. 그 길이 인생을 완주할 최선의 길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아무리 가깝고 쉬운 길이라 할지라도 중간에 포기할 길이라면 그 길의 가까움과 쉬움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길은 우리를 목적지에 도달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라톤의 미덕은 완주에 있습니다. 그것이 직업 마라토너들의 대회가 아닌 평범한 생활인의 대회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많은 마라

 

톤 참가자들은 완주를 목표로 대회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완주가 곧 성공인 것입니다. 1등이냐 2등이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영화계의 새로운 화제가 되고 있는 <우생순-우리 인생 최고의 순간>은 바로 그런 감동이 아니겠습니까?

 

이 영화의 모델이었던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여성 핸드볼 팀이 1등을 했더라면 아마도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 악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한 아쉬운 2등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관객을 울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더 큰 감동은 그들이 비인기 종목 한국 여성 핸드볼의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아테네로 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이미 한물간 노장 아줌마들의 포기하지 않은 투혼과 열정-그것이 바로 작품성과 상관없이 국민들을 울린 감동의 의미였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 열악한 한국 핸드볼 상황에서의 선전은 사실 평소 생활공간에서 연마한 한국 아줌마들의 실력에 기인한다는 유머 글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한국 핸드 볼 실력의 원천이 한국 아줌마들의 지하철 자리 잡기에서 훈련된 것이라고 주장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중계 방송식으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지막 주자 한국 대표 박순자 아줌마입니다. 장소는 사람으로 꽉찬 공포의 개봉역. 과연 탑승 기술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열차 도착하고 있습니다. 문이 열리려고 합니다.

 

, 아줌마 돌진하고 있습니다. 네 역시 기본기가 좋습니다. 핸드백을 앞으로 한 채 고개 숙이고 돌진중입니다. 마침내 뚫었습니다. 탑승 성공입니다. 이제 착석 기술이 문제입니다. 너무 경쟁자가 많군요. 아줌마 잠시 생각중입니다. , ,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최고의 난이도를 가진 기술입니다. 7명이 앉아 있었는데 엉덩이부터 밀고 들어가서 착석에 성공! 이제 남은 것은 내리기 기술. 너무 많은 경쟁자가 서로 밀고 있습니다. 박순자 아줌마 드디어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온몸 밀기의 탄력으로 밀어 붙입니다.

 

, 다시 성공입니다. 내리지 않을 사람 12명과 함께 내립니다. 밀려 내린 사람 중 세 사람은 호흡 곤란 증세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아줌마의 저력입니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행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왜 주께서 그들을 홍해 광야 길-더 멀고 험한 길로 인도하셨습니까? 가까운 길을 놔두고 말입니다. 17절이 대답합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니라

 

그 지중해 연안의 길에는 바로 블레셋 족속들이 진치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그들과 전쟁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먼 길이지만 홍해 쪽 광야 길이 완주할 수 있는 길임을 주께서 아신 때문입니다.

 

다시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그러므로 인생의 힘든 길을 걸어야 할 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께서 최선의 길을 준비하셨다고” “이 길이 완주의 길이고, 최선의 길이라고 말입니다.

 

2. 그 길이 주님의 언약으로 예정된 길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아무리 어렵고 험해도 그 길이 확실하게 실현될 어떤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면 우리는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습니다. 약혼자들이 고난을 견디는 것은 결혼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군인들이 군대 생활의 고난을 견디는 것은 제대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땅이 아닌 가나안에 정착하리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바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약속을 기억하는 한 광야 길의 어떤 고난도 견디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어떤 약속도 쉽게 망각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한 시청각적 교훈을 그의 백성에게 상기시키는 방편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로 요셉의 해골을 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마지막 애굽 땅에서 죽기 전 최후의 유언으로 자신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야하고 그때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가라는 말씀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가지고 여기서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이제 그 백성들은 광야의 행진을 계속하며 요셉의 유골을 보면서 그들이 존경하는 민족의 어른이 남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곧 우리 민족은 어떤 시련이 있어도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을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변함없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요셉의 유골보다 더 확실하고 더 신뢰할만한 성경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구약과 신약의 말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이 언약의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은 광야 행진을 성공적으로 지속하기 위한 필수적인 작업입니다.

 

이 언약의 책을 열 때마다 볼 때마다 주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여행의 목적지가 하나님의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우리가 걷는 인생의 길이 멀고 험하게 느껴져도 이 길은 주님의 언약을 실현하기 위해 예정된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그가 말씀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성도의 모든 길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기억한다면 세상의 광야에서 어떤 일로도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광야에 고난이 있어도 시련이 있어도 앞으로만 나아가면 우리의 걸음은 그때마다 그 나라에 가까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3. 그 길이 주님의 임재가 함께할 길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로 이 멀고 험한 광야 길로 가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명백한 이유의 하나는 이 길에 당신의 임재가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가는 길이 멀고 험한 광야 길이라 해도 정말이지 전능하신 주의 임재가 함께 한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 다시 본문 21-22절을 읽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광야는 낮에는 더운 곳입니다. 그러나 구름 기둥은 주의 백성들을 시원케 하는 그의 임재였던 것입니다. 광야는 밤에는 추운 곳입니다. 그러나 불기둥은 주의 백성들을 따뜻하게 하는 그의 임재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의 임재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더운 광야에서 지쳐 쓰러지던 어느 날 갑자기 내 영혼을 소생시키던 은혜가 있지 않았나요?

그것이 바로 당신의 인생의 마당에 임한 그분의 구름 기둥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추운 광야에서 외로움과 추위에 떨며 자신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나를 붙들고 품에 안아 회복시키던 큰 사랑이 있지 않았나요?

 

그것이 바로 당신의 인생의 마당에 임한 그분의 불기둥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22절은 이 구름 기둥, 불기둥이 백성들을 떠나지 아니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백성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신 그분의 임재로 그의 백성들은 멀고 험한 광야 길을 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일하신 그분의 임재로 여러분과 저도 또한 인생의 광야 길을 완주할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다시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분의 함께 하시겠다는 임재의 약속을 믿으시겠습니까?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1813-73)이란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아프리카에 복음의 여명을 가져왔던 선교 개척자, 탐험가, 의사 말입니다. 그가 16년간 아프리카 선교사로 일하다가 그의 조국인 영국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글라스고 대학은 그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며 그의 영웅적인 수고와 헌신을 위로하였습니다.

 

당시의 대학가의 학생들은 명예 학위를 받는 인사들에게 때로는 야유를 보내곤 했습니다만 리빙스톤이 교단에 서는 순간 장내는 깊은 침묵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의 병약한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이미 심한 열병과 풍토병으로 고생하며 그의 육체는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었고 팔은 밀림에서 사자의 습격을 받아 찢어졌던 상처로 간신히 어깨에 매달린 형상이었습니다.

 

무려 30여회에 결쳐 그는 죽음을 모면하는 순간들을 겪어 온 그였습니다. 사회자는 그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알리며 이제 그의 말씀을 듣겠다고 그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내가 영국을 떠날 때 그리고 저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일할 때 나를 한결같이 지켜 준 성경의 말씀이 있었다는 말로 스피치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마태28:20의 말씀이었습니다.-“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분의 임재가 함께 하는 한 그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다시 아프리카로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아프리카로 돌아간 그는 말년에 다시 내출혈과 말라리아로 큰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187351일 그가 생을 마감했을 때 그는 잠비아, 일랄라 지역, 방웰루호수 근처 텐트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자세로 발견되었고, 그가 남긴 그의 마지막 일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난 그의 약속을 믿는다. 그는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지키실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광야길의 레슨 /13:17-20/ 이동원목사

2014-11-28 21:06:46

 

예수 믿는것이 제일 재미있는 때는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위 첫사랑의 계절이라 할까요? 말씀배우는 것이 꿀맛같고 기도의 응답이 척척오고 예배의 시간 시간이 감격이었던 때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때가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예배시간이 지루해지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오고 영혼이 사막처럼 메마르게 됩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이런 때를 가르쳐 광야길의 체험이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의 성요한(John of the Cross,1542-1591)이라 불리우던 사람은 이런 경험을 일컬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했고, 그리스도인 모두는 조만간 이 밤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광야길의 체험은 다양합니다.

 

당장 이루어 질것 같은 꿈이 이제는 실현 불가능한 꿈처럼 멀어지고 현실의 차가운 벽앞에서 절망을 느껴야 하는 때-이것도 일종의 광야 체험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그 사이에 끼어들수 없었던 하나됨으로 시작되었던 우리의 애정관계 혹은 우정관계가 어느날 삐꺽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의 얼굴을 대하는 것조차 부담으로 변해 버릴 때-그때 우리는 광야길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애굽을 떠나던 날-그것은 얼마나 대단한 민족적인 감격의 체험이었을까요? 노예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그들은 이제 자유의 새로운 세상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앞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굽땅을 벗어나자 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광야였습니다. 물론 처음에 광야를 대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직선으로 광야를 가로질러 가면 불과 200마일에 불과한 길이었고 직선으로 쉼 없이 걸어가면 40일이면 갈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40일이 무려 40년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17,18절에 보면 가까운 길을 놓아두고 홍해쪽 먼길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려서 인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원색적인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뺑뺑이 쳐 돌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길의 체험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셔야 했을까요? 광야길의 의미와 레슨-무엇인지요?

 

1. 광야길은 사랑으로 예비된 길입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사고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고생시키는 하나님이 잔인하신 분으로 이해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때문임을 분명히 합니다. 다시 17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북동쪽으로 인도하신다면 거의 직선으로 쉽고 가깝게 갈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그 길을 피하여 먼길을 돌아가게 하신 이유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장에 직면할수 있는 전쟁을 피하고 애굽으로 돌아갈 유혹의 마음을 차단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물론 남쪽으로 돌아가는 홍해길에도 후에 전쟁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17장에 보면 첫번째 전쟁인 아말렉과의 전쟁기사가 기록됩니다. 그러나 처음 애굽을 떠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은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을 아셨습니다.

 

만일 처음부터 전쟁을 치르고 어려운 일을 경험한다면 틀림없이 애굽을 떠난 것을 후회하고 아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애굽으로 돌아갈 유혹을 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밖에는 주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될때를 기다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그의 사랑의 배려이셨던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배워야 할 레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때로 그 길이 지름길이 아닌 멀고 험난한 돌아가는 길로 느껴질 때 왜 내가 이길을 걸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믿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길로 들어서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이 길이 먼 길로, 험한 길로 느껴져도 이 길은 사랑으로 예비된 길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 길을 지나감이 너무 고통스럽거든 자신에게 말하십시오.

 

-이 길은 그분이 예비하신 사랑의 길이라고.이 길을 지나감이 너무 아프거든 자신에게 말하십시오.-이 아픔은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마치 새생명을 출산하는 어미처럼 말하십시오. 이 고통은 사랑의 특권이라고, 사랑의 의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잊지 마십시오.어떤 광야의 외롭고 힘든 길도 사랑으로 예비된 길인 것을!

 

2. 광야길은 훈련위해 준비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가는 광야길을 걷게 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본문에는 17절에 전쟁을 보면 뉘우쳐애굽으로 돌아갈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뉘우친다는 말은 마음이 변할까 하여’(CHANGE MIND)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애굽을 떠난 이상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이 계획이 확실하게 실현되도록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요셉의 유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요셉의 유골을 볼때마다 자신을 가나안땅에 묻어 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19)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확고하게 받아드리는 광야의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경험은 직접 간접으로 하나님의 뜻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궁극적으로 수용할줄 아는 훈련인 것입니다. 이 훈련을 위해 40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 성경학자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빠져 나오는데는 하루가 필요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안에서 애굽을 빼내는데는 40년이 필요했다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주로 광야의 훈련과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도 40일간 집중적으로 계속되었고, 모세가 애굽에서 살인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보낸 세월이 40년이었고, 나중에 시내산에서 보낸 시간도 40일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왕과 이세벨을 피하여 호렙산으로 가는데 걸린 시간이 40일이었고, 물론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시간도 40일간 이었고, 그의 부활이후 승천까지 의심으로 연약해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어 주시기 위한 시간도 40일 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광야를 지납니다. 어떤 사람은 40일의 짧은 광야 체험을, 어떤 사람은 40년의 보다 긴 광야체험을 통과하기도 하지만 광야를 지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광야를 지내는 동안 우리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광야를 지날 때 우리는 무엇보다 예배의 훈련을 받고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3장에 보면 모세가 바로왕에게 나아가 애굽땅에서 떠나갈 허락을 구할 때

 

사흘길을 지나 광야에 나아가 희생의 제사를 드리려 한다고 말하라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십니다.(3:18)희생의 제사를 오늘날의 개념으로 바꾼다면 예배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예배할수 있지만 광야는 예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입니다.

 

고독한 광야를 지날 때 인적의 방해없이 다만 하나님의 임재의 달빛 속에 사랑을 내리시는 그분을 만나는 예배를 배우십시오. 오해의 광야를 지날 때 당신을 완벽하게 이해하시는 하나님앞에 홀로 나아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광야의 바람소리에 기도를 띄워 예배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고통의 광야를 지날 때 저녁의 서늘함속에 내 모든 피곤을 씻겨 주시는 산들바람의 치유를 맛보며 치유의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광야길은 예배의 훈련을 위해 예비된 길입니다.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마침내 그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3. 광야길은 성령으로 인도된 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경우 어떤 고난을 경험할 때 우리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때에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확신할수 있는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고난의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고난속에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만은 분명하게 신뢰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애급땅을 떠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왜 쉽고 빠른 지름길을 제쳐놓고 홍해로 향하는 먼길을 가야 하는지를 이해할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이 설명하셨어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납득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을 그가 친히 광야길에 인도하신다는 분명한 싸인만은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름기둥, 불기둥 이었던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인도하시고했고, 22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 구름기둥 불기둥은 백성앞에서 떠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구름기둥 불기둥이 백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중에 지리에 밝은 이들은 아마도 이 기둥이 북동쪽으로 움직여 갈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기둥은 남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가 분명했기에 그들은 싫어도 그길을 따라 갈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의 길을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8: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 하루 날마다 걸음마다 성령의 인도를 순종하며 끝까지 걸어가시겠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이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은 먼 앞의 여정은 볼수 없었습니다. 그냥 조금 앞쪽만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걸음 한걸음 순종의 걸음을 걸었을 때 어느날 그들은 약속의 땅앞에 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아이들이 여름방학이 되어 한국에 나와 있는데 함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저의 둘째 아이 범이는 차만 타면 불과 30분이 지나지 않아 묻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얼마 남았어요? 몇분 더 가요?”

 

그런데 성장하자 이제 더 이상 이 질문을 하지 않게 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장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여정이 어떤 길을 통과 하는냐,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달 하는냐 보다도 어떤 모습으로 성숙되어 주님앞에 마지막에 설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광야에서의 40-생각보다 훨씬 더 길었던 광야길은 실상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으로 성숙하기 위한 위한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광야길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유-아직 우리에게 성숙의 과제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의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느날 5살된 어린 아들이 이런 질문을 하더래요. 아빠, 아빠는 커서 뭐가 될래? 눈감고 대답해봐? 순간 아들이 상상의 게임속으로 자신을 초대하는 것을 느꼈지만 얼결에 대답하기를

 

나 아빠가 될거야하니까. “아니야, 아빠는 이미 아빠이니까 다른 것이 되어야 해하더랍니다. 잠시 다시 생각하다가 아빠는 목사님이 좋은데 목사가 될거야하니까 아이 아니라니까, 아빠는 벌써 목사님이잖아. 생각해봐, 아빠는 뭐든지 될수있어.

 

아직도 아빠는 될수있어하더랍니다. 그 순간 아직도 아빠는 될수 있어라는 아들의 말이 이분의 마음 깊은 곳에 와 닿았다고 합니다. 개척교회가 실패하고 있다는 절망감으로 좌절하고 있던 이 목사님은 그때 비로소 자신의 사역과 인생이 끝나지 않았고 아직도 자신의 인생의 길에 성숙의 과제가 남아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광야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성숙의 과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될수 있습니다 그 성숙을 향해서 우리는 때로 아프고 힘들더라도 이 광야길을 다시 걸어야 합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을 좇아 밤에는 불기둥을 좇아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이제 우리 다시 일어나 용기있게 광야 길로 나아가십시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13:17-22/ 이동원 목사

2014-11-28 21:02:50

 

홍콩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마약을 복용하는 청소년들의 치료를 담당한 영국의사가 청소년 몇 명을 데리고 대나무 숲속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형태의 대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먼저 자라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대나무 앞에 서서 학생 하나에게 뽑아 보라고 했습니다.

 

이 학생은 손가락 두 개로 쉽게 뽑을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학생들의 키만큼 자란 대나무 앞에 서서 손가락만 사용해서 뽑아 보라고 했습니다. 손가락으로 되지 않자 한손을 다 사용해서 뽑아 보라고 하니 겨우 뽑혔습니다.

 

이번에는 키를 훨씬 넘기고 꽤나 살찐 대나무 앞에서 한 손으로 뽑아 보라고 했습니다. 한 손으로 불가능하자 두 손으로 해보라고 하니 겨우 뽑혔습니다. 이번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자란듯한 왕 대나무 앞에 서서 두 손으로 뽑아 보라고 했습니다.

 

뽑히지 않자, 의사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대나무를 뽑아 다시 심으려면 처음 단계에서는 적은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의 힘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습관의 교정도 마찬가지인데 나쁜 습관은 초기 단계가 아니면 교정이 어렵다는 교훈을 주었다고 합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책가운데 하나가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일 것입니다. 그는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공적인 생활 습관이 존재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공을 방해하는 나쁜 습관이 존재한다고 지적합니다.

 

그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으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대부분의 성공하는 사람들은 뚜렷한 목표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그 목표가 건강한 가치관에 근거한 것일수록 건강하게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실패하는 사람들일수록 목표의식이나 가치관이 부재하고 대부분 무가치하거나 병적인 습관에 몰두하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양들의 생리가 그렇다는 것을 아십니까?

 

양들은 제멋대로 버려두면 목초지의 풀을 밑둥이 초토화될때까지 뜯어먹고 자기끼리 싸우면서 그 땅을 항폐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목자의 인도가 없이는 양들은 가지 말아야 할 같은 길로만 계속해서 다니고, 같은 곳만 지나치게 짓밟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목자들은 양들로 하여금 새로운 길, 새로운 초장으로 이동시켜 병적인 습관에 집착하지 않도록 훈련시킨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양들이 인도되어야 할 의의 길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에게 해방된후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까지 직선으로 갈수 있는 익숙하고 쉬운 길 대신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17-18)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대답은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양된 그의 백성들이 걸어야 할 의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1. 빠르거나 쉬운 길이 아닙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사람의 땅을 통과하면 가나안으로 쉽게 빨리 갈수 있는 가까운 길이라고 기록합니다. 지금도 에집트에서 이스라엘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은 수에즈 해협 북단에서 지중해 연안을 거쳐 가자로 가는 길인데 오늘날 자동차로 4-5시간이면 갈수 있는 길입니다.

 

당시로도 걸어도 한달이면 갈수 있는 길인데 이 길 대신 홍해 남쪽 광야 길로 가면서 이스라엘은 40년을 방황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고 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 이유는 대체로 두가지로 설명 될수 있습니다. 우선 불레셋 땅을 통과하려면 블레셋 사람들과 일전을 치러야 하는데 아직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17) 물론 남쪽 길로 가면서도 결국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는 준비된 후였습니다. 둘째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백성이 의로운 백성으로 훈련되는 것을 보고 싶어하신 때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주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이 이것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모두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성공을 소원하지만 올바른 성공과 성공에 이르는 올바른 훈련의 과정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교회 분당 비전센터와 나란히 위치를 함께하며 동역하는 2001아울렛의 모체인 이랜드 회사의 경영이념가운데 하나가 기업은 이익을 내는 과정에서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 부분의 설명을 그대로 이 랜드 홈 페이지에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기업은 반드시 이익을 내야하고 그 이익을 내는 과정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사회 각 분야에 많은 영향을 주는 기업일수록 국가 경제의 양적인 성장과 함께 질적인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저희는 과정의 정직함을 통해 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 내린 구조악을 개선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정의 정직이란 바른 삶의 모습을 통해 주변의 많은 사람과 기관에 도전을 주고 노력한 대가만을 이익으로 거두며 떳떳하게 세금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분의 이 랜드 경영이념 선언은 다음과 같은 표어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돌아가더라도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제가 여러해전 북경을 방문해서 이 랜드 지사장되는 분을 만났을 때 이런 간증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만해도 한국 기업들의 북경진출의 초창기였는데 제일 애로사항이 물건의 세관 통관이었다고 합니다.

 

이 랜드 회사 방침에 따라 인사봉투를 건네지 않기 때문에 이 분은 수없이 세관을 드나들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인사만 하고 계속 찾아가자 나중에는 세관 사람들이 봉투 하나만 주고 그만 오지 왜 그렇게 고생하느냐고 빨리 해결하자고 사정하더랍니다.

 

그래서 회사의 철학을 잘 설명했더니, 뜻밖에 이 세관원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그냥 찾아가라고 하더랍니다. 그 다음부터 이 랜드는 정직하고 뇌물 안주는 회사로 인정되어 모든 것이 무사통과되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돌아가더라도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지름길인 것을 중국에서도 증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처음에는 빠른 길도 쉬운 길도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 궁극적으로 유익한 길입니다.

 

의의 길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쉬운 길이 아닙니다. 어려운 길입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길입니다. 자신과 하나님을 유익하게 하는 길입니다. (1)자신에게 유익한 길입니다. 119:71의 말씀의 시편기자의 고백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같은 시편119:67에서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했습니다.

 

광야의 40년 길은 이스라엘 백성을 의의 백성으로 훈련하기 위한 학습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길이 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에게 유익한 길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자기의 이름을위하여라고 시편기자는 노래합니다.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명예를 위해서 그는 자기의 백성들이 의의 길을 걷기를 열망하십니다.

 

만일 인생을 쉽게 빨리 출세한 사람들이 다 천국에 간다면 천국은 사기꾼과 복권 당첨자들로 가득찰 것입니다. 그 곳이 천국이겠습니까? 천국은 의의 나라요 거룩한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통치자는 의로우신 여호와이십니다.

 

예레미야 23:6에 보면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말합니다. 만일 의로우신 절대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의 도덕적인 모든 주장들은 의미를 상실합니다. 의롭게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 그것이 의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불의한 사회구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로운 삶을 열망하고 의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의롭게 일하심을 믿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의는 의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함께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의 길은 때로 고난의 길이지만 결국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3.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의의 길을 걷는 자들을 인도하십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길은 결코 빠른 길도 쉬운 길도 아닙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길을 걷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함께 하십니다.

 

본문에도 보면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차가운 광야 길을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21-22절 말씀입니다. 우리로 이 길에서 탈선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걷도록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길에서 방황할 때 우리는 선한 목자의 인도를 벗어나 있음을 빨리 알아채려야 합니다. 이사야의 증언처럼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도움을 구하는 순간 목자는 지체없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나를 따르라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다시 그의 인도따라 걷는 길--이 길의 이름이 바로 의의 길인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우리가 다시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 깊게 우리를 주목하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물론 이 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편에서 보면 여전히 단호한 결심을 필요로 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에 고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모세가 이 돌아가는 험한 길을 가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흥미있는 시청각 교육을 시연하는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그는 이 길을 떠나면서 요셉의 해골을 취한 것입니다.

 

그의 해골로 요셉의 마지막 유언의 부탁을 상기시키고 단호한 결심과 함께 떠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까? 우리의 조상 요셉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이제 이 길에서 다시 돌이키면 안된다고 어떤 고난이 있어도 우리는 이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고 부탁하고 싶어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길은 결코 빠르지도 쉽지도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스런 선배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 길은 우리를 유익하고 온전케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목자의 인도따라 걷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마지막에 반드시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여정에서 의의 길로 인도함을 받은 우리시대의 한 믿음의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출생하여 미국 동부 아이비 리그 스쿨인 브라운 대학교를 나온후 조지 와싱턴 대학에서 JD과정을 공부한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합니다.

 

그는 와싱턴에서 가장 명성높은 로펌에 고용되어 명성높은 변호사의 길을 걷다가 젊은 나이에 법률사무실의 대표가 됩니다. 그는 돈과 명예를 갖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수 없었던 그는 정치에 투신하여 미합중국 대통령후보의 선거 캠패인 두뇌로 킹 메이커가 됩니다.

 

드디어 그는 미국 대통령 수석 보좌관이 되어 화이트 하우스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방에서 4년이상을 일하며 대통령의 브레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다시 대통령을 재선시키기 위해 대통령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서면서 대통령의 도끼, 면도날등의 별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선거 불법 청취 워터 게이트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그는 그의 감옥의 죄수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보내어진 C.S. LewisMere Christianity라는 책 한권을 감옥에서 읽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후 그는 법정에서 사실상 자기에게 책임이 없는 가벼운 죄만을 인정하고 경범죄 선고를 받고 감옥을 나올것인가, 아니면 사실대로 그가 정적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을 인정하고 실형선고를 받아 감옥에서 계속 복역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 그가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직해야 하겠다는 음성을 듣고 자기 죄를 스스로 시인하고 다시 감옥의 차거운 방으로 돌아가면서 시편 23편을 암송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촬스 콜슨의 이야기입니다. 그후 감옥에서 나온후 감옥의 수인들을 전도하는 교도소 선교에 헌신하여 종교 노벨상인 템플톤상을 수여하고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의 자리에서 수많은 고통받는 이웃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선한 목자가 그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선한 목자를 만나셨나요? 그의 인도를 받고 계신가요?

 

 

 

 

홍해의 광야 길 /13:17-22/ 곽선희 목사

2014-11-23 06:46:41

 

일사유사(逸士遺事) 라고 하는 우리나라 고전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한양에 김학성씨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어서 삯바느질을 하면서 두 아들, 형제를 서당에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여느 날과도 같이 그날도 집에서 삯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이 비오는 날 처맛물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주룩주룩,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울림같은 여운이 나서 '이상하다' 여겨서 처마 밑을, 땅 밑을 파보았더니 커다란 가마솥이 있고, 그 솥뚜껑을 열어보니까 그 속에 은이, 은전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아마도 잦았던 난리로 인해서 누군가가 이 은을 이렇게 가마솥에 넣어서 땅에 묻어놓고 피난을 갔다가 못돌아오고 그 어디선가 죽어버렸던가봐요.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 가난한 어머니는 재빨리 그 뚜껑을 덮고 그리고 되묻어서 흙으로 다 묻어서 그 집을 팔고 조그마한 오막살이로 옮겨가서 어머니는 여전히 삯바느질을 하면서 두 아들을 애써 가르쳐서 훌륭한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어머니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두 아들을 불러놓고 그 옛날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땀흘리지 아니한, 또 갑작스럽게 얻은 재물이라는 것은 곧 재앙을 부르는 것이다" 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오늘같은 날 이런 일이 있었으면 축하파티를 했습니다. 신문에 났을 겁니다.

 

재수 좋은 사람이라고 lucky라고, 팔자 고쳤다고, 이제 삯바느질 할 필요없다고 너희들 공부 걱정할 것 없다, 우리 운명이 이렇게 열렸고 복을 받았다고 기뻐하고 축하했을 것입니다.

 

공짜, 횡재, 그리고 불로소득, 이것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공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공은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닙니다. 성공 다음에 오는 무서운 시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대표적인 영화사 중에 하나인 Paramount Pictures라고 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여기 회장님은 여자 분입니다. 쉐리 랜싱(Sherry Lansing) 이라고 하는 분인데 아주 밑바닥에서부터 많은 수고를 해서 회장의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입지전적인 인물이올시다. 이 유명한 랜싱 회장의 좌우명이 있습니다. 그 회사원들을 가르치는 교훈이 있습니다.

 

"과정을 즐겨라. 그리고 성공을 염려하지 마라." 성공할까 실패할까, 이거 두려워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과정 자체를 즐겨라 이 말이죠. 과정 자체 속에 우리의 의미가 있고 행복이 있어야되고, 결과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더 빠른 것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훈계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가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출애굽을 합니다. 큰 권능으로 광야로 나오게 됩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었던가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인도해서 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이상하게도 말이에요 하나님이 정한 코스가 그 노정이 우리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인간들의 상식으로 말하면 그대로 북쪽으로 올라가서 동쪽으로 가야됩니다.

 

그럼 육로로 갈 수 있습니다. 북쪽으로 올라가서 동쪽으로 가야 하는 이럴 수밖에 없는 이게 정코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상식과는 달리 깊은 물이 무려 340m나 되는 수에즈만 앞바다, 홍해, Yam Suph로 인도했다는 겁니다.

 

얌수프라고 하는 이 홍해바다 길로 인도했습니다. 막다른 길로 인도했습니다. , 이렇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데로 동으로 동으로 와보니 앞에는 홍해가 있습니다. 뒤에는 분노한 애굽군대가 지금 원수를 갚겠다고 따라오고 있어요.

 

상상을 해 보세요.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이요 하나님이 가라고 한 길이요 모세가 인도한 길입니다. 그런데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점점 가까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저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속된 말로 독 안에 든 쥐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411절에 보면 저들이 원망을 합니다. 정말 원망할만 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느냐? 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가 죽이려느냐? 합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합리한 노정을 하나님이 택해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때 그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 또 다른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와 경륜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무언가 많이 잘못되었는데 하나님께는 깊은 뜻이 있었어요.

 

첫째는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시고 저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기서 떠나서 저 가나안 땅까지 가는 노정에는 말입니다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고로 이 시간에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보호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다 더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깊은 인상을 가지고 깊은 믿음을 가지고 출발하기를 원해서 이런 드라마틱한 사건이 이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말씀대로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주야로 항오를 벌여서 이렇게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히 저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하는 것을 깊이깊이 인상을 주고 깊이 감동하고 감격한 가운데 확신을 가지고 광야 길을 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랑의 계시를 확증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사랑이 뭡니까? 상대방의 처지를 알고 저를 사랑하는 겁니다. 상대방이 어느 수준에 있는 지를 알고 그의 약점거리에 미숙한 점 이걸 다 이해하면서 사랑하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지만은 아직도 확실한 신앙의 사람들이 못됩니다. 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가다가 북쪽으로 올라가서 이 직행하는 길로 가다가 만일에 블레셋 사람들을 만나서 전쟁을 하게 되면 이거 본문에 분명히 말했어요.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습니다.

 

전쟁을 보는 순간 아이구 어쩌자구 우리가 여길 왔는가?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 돌아갈거라는 거죠. 꼭 그러리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저들은 약하고 미숙해요. 하나님은 그것을 아세요. 그러기 때문에 오늘 같은 큰 사건을 통해서 저들에게 믿음을 줄뿐만 아니라 놀라운 것은 귀로를 차단해 버렸어요.

 

다시 돌아올 수 없게. 홍해를 열었다가 닫아버렸어요. 이것을 보는 순간 '이제는 못 돌아간다' 그러한 확실함을 주기 위해서 이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죠. 귀로를 차단했다, 다시 옛 노예생활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했다, 돌아갈 수 있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지만은 다시는 못 돌아가게 길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얘기요 놀라운 배려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도 종종 그런 경우가 많아요.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가 조금 어려운 일 당하면 옛날로 돌아가요. 옛 생활스타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런 나약함이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는 '노 리턴(No Return)!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그렇게 홍해를 가로막았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소중한 것을 저들에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내가 말한 일은 내가 책임진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데 대한 것은 하나님이 책임을 집니다. 가라면 갈 것이요, 오라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책임을 집니다. 여러분 그것 아십니까? 진정한 순종은 나를 순종케 하시는 자에게 내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자유합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사람은 자유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마음이 늘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는 사람, 거역하는 사람, , 예를 들어서 남편의 말을 거역하고 또 부모의 말도 거역하고 누구의 말도 거역하고, 거역하는 순간 전개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됩니다. 이 책임이 누적되면서 소위 스트레스라는 게 생기는 겁니다. 스트레스는 거역하는 반발형의 사람에게 생기는 거예요.

 

온유 겸손해서 부모님이 말씀하시면 부모님께, 또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선생님께, 잘 순종해서 사는 사람은 심령이 자유롭습니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없어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스트레스 많이 받는 사람은 고집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 멋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홍해의 광야 길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갑니다. 홍해가 딱 가로막혀 있습니다. '아이고 이제는 죽었다' 하는데 '걱정하지 마라. 내가 가라고 한 일이니까 내가 책임진다' 이거 아닙니까?

 

간단한 이치예요. 내가 하라고 한 일에 대해선 내가 책임진다. 내가 명령한 데 대해 순종한 것은 내가 책임진다 그 말이에요. 그리고 저 가나안땅을 계속해서 약속해 주십니다. '저 땅에 가는 것은 내가 허락한 것이니라, 내가 약속한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엔 큰 믿음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출발하게 하기 위해서 출애굽 벽두에 이같은 큰 사건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이같은 큰 권능과 능력을 출애굽 그리고 가나안으로 가는 노정에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종종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광야에 엎드러져 죽기도 하고, 많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거 왜 원망하느냐? 원망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건망증이 심해서 그래요. 지난날에 받은 은혜가 큰데 그 큰 은혜를 오늘도 기억하고 있으면 되겠는데 자꾸만 잃어버려요. 그때는 감사 감격하고 심지어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할만큼 충만할 때가 있었지만은 곧 잃어버린다는 거죠. 이게 문제올시다. 여러분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이제 홍해가 열립니다.

 

홍해를 건넌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찬송을 했는지 그 감격은 우리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고 나서 그 감격이 얼마나 갔느냐 이거예요. 성경학자들이 잘 연구해 보면 꼭 열나흘 갔어요.

 

열나흘 갔다가 쪼금 어려운 일이 있다고 또 원망을 하는 거예요. 전일에 보호하신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앞으로도 인도하실 거 아니겠습니까? 전일의 큰 능력으로 나와 함께 하셨으면 또 앞으로 오늘과 내일도 함께 하실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믿음이 없는 겁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적게 믿는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여러분 이걸 아셔야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지난날에 받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건망증 환자들이에요. 그래서 오늘의 문제에 대한 것을 바로 타개할 수가 없었어요.

 

또 하나는 너무 조급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 앞에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라고 하는 책을 쓰신 이규태 씨, 그 이규태 교수님의 칼럼이 매일같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규태씨의 글 가운데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사람의 성품 중에, 의식구조 속에, 그 체질 중에 고쳐야 할 것 하나가 있다, 하고 강조합니다. 그게 뭐냐하면 쿼터리즘입니다. 쿼터리즘. 쿼터리즘이라고 이렇게 학술적인 용어를 썼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쿼터라는 말은 15분이라는 말이에요.

 

"15분주의"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정에 성숙하지 못하고 결과에 집착한 나머지 너무 초조해. 꼭 뭐든지 15분밖에 못합니다. 아침 신문보는 거 자세하게 논설도 읽고 해야 하는데 큰 글자만 요렇게 요렇게 15. 뭐든지 15분으로 훌쩍 넘겨버려. 침착하게 오래오래 생각을 하고 그러지 못합니다.

 

15분이라고 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분이 지적한 대로 유원지에서 노는 아이들을 가만히 보아도 놀이터에 어떤 놀이기구에 앉아서 노는 아이들을 보아도 가만히 보면 5분밖에 안놀아요. 5분 있고 짜증을 내는 거예요.

 

어른들은 15분 얘들은 5. 이렇게 초조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요즘에 "느리게 사는 비결"이라는 책도 나오잖아요. 좀 느리게, 느긋하게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너무 속전속결, 바로 거기에 우리의 인간성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문제란 말입니다.

 

제가 쿠알라룸프에 갔을 때, 어느 중국집에 가서 대접을 받고 저녁식사를 하는데 제가 아는 대로 중국집에서 식사라는 건 한접시가 나오면 다 먹고난 다음에 그 다음 접시가 나오고 또 다 먹은 다음에 그 다음……, 그렇게 해서 보통 두시간 반동안 식사를 하는 것이 중국음식을 먹는 그 하나의 에티켓인데 가보았더니 한꺼번에 세접시씩 나와요.

 

그래서 궁금해서 왜 이러냐 물었더니 한국 사람들은 처음부터 "빨리빨리 빨리빨리" 그러기 때문에 아예 한국 사람 가면 안대요. 세접시씩 그냥 나온대요. 그것뿐만 아니라 빨리 먹고 가기 때문에 부탁을 안해도 음식값을 할인해 준답니다. 소문났어요.

 

아주 세계적으로 소문 났어요. 급하게 논다, 빨리빨리로 말해요. 그러니까 빨리 망하지. 이걸 아셔야 됩니다. 뭘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어요.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무슨 공사 뭐니……. 좀 느긋하게 하질 못해요. 급하게 해놓고 축하파티하고 무너지지 않습니까. 왜 이 모양 입니까?

 

걸려야 할 시간만큼은 걸려야 되는 거예요. 과정을 무시하는 거예요. 결과만 가지고 따지는 겁니다. 이것이 망조예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모든 것이 다, 보세요. 무엇 때문이에요? 쿼터리즘이에요. 조급해요. 조급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가는데 왜 이렇게 조급해요? 조금 일이 잘되면 감사하고, 찬송하고, 조금만 안되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종잇장처럼 벌컥벌컥 튀어요. 조급한 마음, 이것이 이렇게 원망으로치닫게 되는 것이예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어요.

 

또 하나, 믿음이 없었어요. 많은 사건을 통해서 은총을 경험하고 있지만은 그 마음 심성 속에 깊이깊이 신앙이 없었어요. 문제올시다. 그래서 1314절에서 보면 모세는 말합니다.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날 여호와 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그 구원을 보라. 그 말 합니다.

 

구원을 보라. Be still know that I am God, 조용하야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하나님 됨을 알라. 믿음을 요구합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을 돌보는 사람들을 호스피스라 합니다. 요새는 이 호스피스가 하는 직업이 대단히 중요한 직업입니다.

 

그들이 임종에 가까운 사람들을 봉사해 가면서 듣고 경험한 일을 집약해 놓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백만장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학자도 있고 그리고 무식한 사람도 있습니다. 천태만상의 사람이 자기들 앞에 와서 임종을 맞습니다.

 

그 지식과 재산 명예, 아무소용 없대요. 그들 앞에는 다같이 어린아이예요. 마지막 임종할 때 공통적으로 세가지를 후회하는 것이에요. 첫째가 그때 좀 더 참고 인내할걸……. 조금 더 참았으면 좋았는데 참지 못한 데 대해서 후회가 있어요. 두 번째는 그때 좀더 베풀 걸…….

 

얼마든지 선한 일 할 수 있었는데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왜 인색했던가? 베풀지 못한 데 대한 후회. 세 번째가 그때 좀더 재미있게 살걸……. 뭐 불만도 많지만은 그만하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는데 나는 왜 행복하지 못했던가. 좀 더 행복할 수 있었는데 하는 것을 이제서 후회한다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 이렇게 원망불평 해놓고 하나님이 큰 역사를 이루실 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볼 때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원망하지 말걸……. 아니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딘 길로 인도하십니까?

 

왜 직행하는 길을 빼놓고 먼길로 가라 하십니까? 왜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길로, 왜 가까운 길 놔두고 먼 길로 가라하시는 것입니까?

 

실패와 위기, 우리가 당하는 사건, 그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향한 특별한 배려가 있습니다.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우리로 하여금 옛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도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자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더 이상 거짓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이제 아무 불만없이 조용히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이 길로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으로 주신 이 길로, 묵묵히 감사하며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는 우리에게 은혜의 길로 인도하시건만 때때로 우리는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원망하기도 하고 주께서는 우리를 사랑해서 주시는 시련이건만 우리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힘에 부친다고 하나님을 원망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께서는 우리를 홍해의 광야길로 내몰고 인도하시는 줄 압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고 주께서 인도하시고 주께서 책임지시는 이 길로 우리가 따라가면서 조용히 참고 견디고 인내하면서 주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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