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중심적 예배(3) - 참 예배와 거짓 예배를 구별하는 기준 /출20:3-6/ 김형익 목사
2021-05-10 15:10:59
우리는 [오해에서 확신으로]라는 큰 주제 아래서, <하나님 중심적 예배>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떤 것이 하나님 중심적 예배인지를 다루기 앞서 어떤 것이 참 예배이고 어떤 것이 거짓 예배인가, 무엇이 그것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원리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던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목회사역 마지막 몇 년 동안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참된 예배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탄식하였습니다. 그는 이 불행한 현상이 세 가지 정도에 기인한다고 보았는데 첫째는 우리 시대가 경박한 시대라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 경향, 둘째는 이 시대가 반역적일 정도로 자아에 심취된 자아중심적 시대이기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상실했다는 점, 셋째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도 자유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참된 예배를 회복하는 것, 우리 자신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도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을 만드시고자 하시는 것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성경적 선언 때문입니다.
1. 무엇이 예배와 예배가 아닌 것들을 구별하는 기준인가?
무엇이 예배와 예배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기준입니까? 그것은 어떤 영향력 있는 교단이나 교회 혹은 어떤 신학자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예배와 거짓 예배를 가르는 기준은 오직 성경에서 나온 원리여야 합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배 방식은 우리가 얼마든지 자유롭게 구상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스 박사가 지적한 우리 시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성경’의 원리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만이 교회의 유일하고 최종적 권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예배를 어떻게 드리라고 원리를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십계명의 제일계명과 제이계명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2. 첫 계명과 둘째 계명: 예배의 대상과 예배의 방식
일계명과 이계명은 각각 예배의 대상과 예배의 방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A. 예배의 대상: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라(3).
일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사람들이 섬기는 다른 모든 헛된 우상들의 존재들을 너희 안에서 다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계실 수 있으며 어떤 우상도 그 자리에 설 수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약 시대의 우상들의 이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상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첫 계명을 잘 지키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오직 하나님만 계십니까? 과연 여러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모든 조건이 다 채워지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족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은 우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우상을 섬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일계명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B. 예배의 방식: 형상을 만들지 말라(4~5a).
이계명은 예배의 방식에 대한 명령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a).” 종교개혁자들은 이 계명을 따라서 예배당 안에 회중들의 시선을 끌어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형상들을 두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신교회의 예배당 실내는 매우 심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계명을 범한 대표적인 사례는 금송아지 숭배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시각화하여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서 그들이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
그리고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고 하면서 예배/제사를 드렸습니다(출 32:5~6). 그들은 이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진멸될 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분리 건국된 후에 여로보암 왕에 의해서 다시 재개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절기가 되어 백성들이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을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 단과 벧엘에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말했습니다(왕상 12:28).”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규정해 주신 원리가 이와 같이 인간의 편의주의에 의해서 User-friendly worship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는 산당 제사도 그런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가 있는 곳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계시해주셨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기들이 살고 있는 주변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편의주의 때문에 산당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산당 제사는 결국 이방인들의 제사제도와 혼합되면서 매우 혼탁한 혼합주의 제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이계명은 우리의 상상과 머리 속에서 조차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금하는 명령입니다. 가령, 예배 인도자가 “눈을 감고 지금 당신을 안아주시는 주님을 상상해 보십시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원튼 원치 않든 user-friendly god을 만들어냅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의 하나님을 상상 속에서 그리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밀려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심판자와 같이 무서운 모습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아버지로 생각하기를 좋아해요”하는 식으로 말하는데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형상뿐 아니라, 상상 속에서도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무한 광대하신 하나님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에 익숙해지게 되면 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언제나 상상의 세계 속에 자신을 던질 뿐(소위 관상기도의 위험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우리의 감각에는 와 닿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C. 두 계명은 분리될 수 없다.
예배의 대상을 규정하는 일계명과 예배의 방식을 규정하는 이계명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둘째 계명을 어기면서 첫째 계명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우리가 원하고 선택한 방식대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원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3.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와 규범적 원리(Normative principle)
이와 관련하여 오래된 신학적 논쟁이 있습니다. 예배와 관련하여 규정적 원리와 규범적 원리라 불리는 용어들이 있습니다. 먼저 규정적 원리는 성경이 예배에 대해서 하라고 명한 것들만을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규범적 원리는 성경이 금하고 있지 않은 것을 예배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자는 칼빈이, 후자는 루터가 강조한 입장입니다. 규범적 원리는 문화적 상황화를 포함하여 많은 자유를 허용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마는, 때로는 너무 많은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이교적인 혼합주의로 흘러갈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또 이 원리는 하나님 보다 우리의 즐거움과 만족을 예배의 척도를 삼을 수 있는 위험, 그리고 성경에 언급된 예배의 요소들 보다 언급되지 않은 요소들을 더 많이 사용할 위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많기 때문이지요. 반면, 규정적 원리는 예배의 방식을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실 뿐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성경을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이교적 요소들이 예배에 들어오는 것을 예방합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보듯이 우리는 그럴 가능성을 너무나 많이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합니다.
일례로, 소위 이머징 교회들에서 시작되어 적잖은 복음주의 교회들까지도 행하고 있는 미로걷기(labyrinth walk, 혹은 기도의 미로/오솔길)와 같은 것이 예배 가운데 들어오는 것을 규정적 원리는 막아줄 수 있습니다. 미로걷기는 고대의 이교적 예배의식에서 온 것입니다. 미로는 여러 갈래 길이 있는 실제 미로가 아니라 중앙에 이르는 한 길이고 밖으로 돌아 나오게 되어 있는 길입니다.
미로를 걷는 사람들은 길을 걷는 동안 고른 한 단어나 한 문구를 반복하면서 자기가 자신 안에 있는 신성에 도달하거나 신성에 이르게 된다는 기원을 가지고 걷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예배 가운데 들어와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7차 총회가 호주 캔버라(Canberra)에서 열렸을 때에는 당시 이화여대 신학과 교수였던 정현경 교수가 초혼제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행위가 참석자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고 즉각 퇴장을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 세계교회협의회가 추구하는 다원주의 안에서는 규범적 원리 조차도 논의되지 않는 세계 교회의 우상숭배적 타락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시대의 예배의 타락은 성수(聖水)라는 것을 떠다가 바치고, 향을 피우고, 촛불을 켜놓고, 심지어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림으로, 노래를 부를 사람은 노래로, 춤을 출 사람은 춤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들도 행해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이런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예배가 어느 정도까지 타락한 시대인가를 아실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배의 방식을 사람이 정할 수 있다는 생각 혹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금하지 않으신 것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런 결과들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것을 금할 길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규정적 원리는 중요합니다. 규정적 원리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적절한 방법은 그분 자신으로 말미암아 제정되고 그분 자신의 계시하신 뜻에 따라 제한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단의 암시를 따라 예배 받으시지 않으시고, 어떤 보이는 표현물이나 성경에서 규정하지 않은 어떤 다른 방식을 따라 예배 받지 않으신다.” 우리가 규정적 원리를 극단적으로 적용하게 될 때, 율법주의적 혹은 위선적 양상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조심해야 하지만, 이 원리는 예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성경적 원리입니다. 모든 타락의 이면에는 먼저 예배의 타락이 일어났다는 점을 생각할 때, 예배를 성경적으로 지켜주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누가 예배의 방식과 요소들을 결정하고 명령할 수 있습니까? 목사입니까? 당회입니까? 교인들의 다수의 의견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합니다. 목사나 어떤 교회 지도자도 예배자들에게 무엇을 하고 할 수 없는지를 규정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칼빈이 말한 대로 인간의 마음은 우상 공장이기 때문에 규정적 원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예배는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좋은 방식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를 결정합니다.
4. 성경?예배의 책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이 말씀합니다. 아벨과 가인의 제사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은 천상에 모인 모든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어린양의 신부들이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리는 경배로 마칩니다. 성경은 예배의 책입니다. 모세의 율법의 많은 부분이 예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레위기는 특별히 예배를 가장 큰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구약의 역사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일에서 벗어났으며 그 일로 인하여 멸망을 자초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도 어떻게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참된 예배를 벗어났는지를 지적하셨고, 서신서에서 사도들 역시 성령의 영감으로 참된 예배를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예배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이라는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어떤 것, 여러분의 인생 전체는 아닐지라도 여러분의 삶의 꽤 많은 부분을 좌우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을 따라서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과 영원을 결정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5. 참 예배와 거짓 예배가 초래하는 다른 결과
이것은 제가 그냥 지어낸 강조어법이 아닙니다. 예배의 결과는 실로 무섭습니다. 5절입니다.
A. 경고: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5b).”
이계명에는 상당히 무서운 경고가 첨부되어있습니다. 이 계명을 범하여 우상을 섬기고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사람의 삼 사대 후손에게까지 죄책을 넘겨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잘못된 습관이 자식에게 전수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죄책이 자녀손에게 전수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는 언약적 연대(covenant solidarit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단위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맡기시고 물으시는 기본 단위입니다. 그래서 만일 언약 가정의 가장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그 가족이 모두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 자녀들이 아무 죄가 없이 무죄한데 아버지 때문에 죄값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죄에 그들이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죄값을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우상을 섬기면 자식들도 그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잘못된 예배의 관행이 얼마나 참된 신앙을 훼손하는가를 이 경고를 통해서 보이십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선호하는 예배가 이런거야”, 혹은 “나는 이게 편해”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무시하고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닌 인간 중심적 예배입니다. 그 결과는 실로 무서운 것입니다.
B. 약속: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6).”
하지만 여기에는 약속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바르고 합당한 예배, 하나님 중심적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이들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6).” 이 약속은 경고의 말씀에 비할 수 없이 강력합니다. 죄책이 삼 사대에 이르는 반면, 은혜는 천대까지라고 말씀합니다
.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선하신 성품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그 가정을 뚫고 들어오는지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제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집안에 은혜로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의 죄의 흐름을 끊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어떤 가정이었느냐, 과거 여러분의 부모님께서 우상을 섬기던 분들이셨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책의 고리를 끊어버리시고 은혜의 자리에 우리를 부르셨고 부르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예배가 무너진 것을 회복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구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 안에 회복해 주신 것은 예배입니다. 신자들은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에게 회복된 영광이고 특권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로 중요한 일은 예배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예배의 대상이신 참되신 하나님을 성경이 계시하여주는 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부지런히 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 우리의 취향, 우리의 기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부름 받은 것을 인하여 감사함으로 개인적으로 날마다, 그리고 공동체로서 주일과 금요일에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나아온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받는 것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저는 그것을 기대합니다. 예배하는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또한 자기 방식대로 경박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도 마음에 새기십시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식으로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늘 말씀을 살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참되고 바른 예배로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하시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예배 가운데 우리가 살아계신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 뵐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그 은혜를 저는 기대합니다. 우리들, 죠이선교교회는 그 어느 것도 아닌, 바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자녀에게 복이 되라 /출20:6/ 유기성목사
2022-09-22 10:51:04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은 가문, 후손에게 이어지는데, 무려 천 대의 은혜가 약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은“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3대 후손도 보기 어려운데, 천대라구요!
그렇기에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에 대하여 약속하셨는데, 후손은 100세에 이삭을 낳게 하심으로 이루셨지만 땅에 대한 약속은 80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결코 소홀히 여기면 안됩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였지만 믿음이 달랐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복이 귀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속이고 형도 속이고 장자가 받을 복을 받아낸 것입니다.
그러나 형 에서는 사냥을 갔다가 돌아와 배고프다고 장자권을 팥죽 한그릇에 동생 야곱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만 못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정말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에서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합니다.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자녀에게 복이 임하였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말해 주세요 “넌 하나님의 자녀야 너 수지 맞은 줄 알아” “넌 참 복도 많다”
목사님 한 분이 어릴 때, 부모님이 3일 간 기도원에 가셨다가 너무나 환한 얼굴로 오셔서“하나님께서 너를 축복하고 계셔, 예수님이 너를 목마 태우고 계시더라”하시더랍니다. 그 말이 평생 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얼마나 복됩니까? 인생 고비마다 일어날 힘이 되는 것입니다.
“복을 받은 것 같지 않은데 말만 하면 되나요?” 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창 5장은 셋의 후손들의 족보입니다. 그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은 아이만 낳다가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시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의 반열에 속했다는 것 자체가 복인 것입니다. 이들이 없으면 노아도 없고, 아브라함도 없고, 다윗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도 나시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복이 하나님의 백성의 반열에 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과 동행하며 한 생애를 잘 사는 것 자체가 후손들에겐 엄청난 축복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받은 은혜는 복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먼저 복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자녀와 후손이 아니겠습니까?
저의 증조할머니께서 집안에서 첫 번째 예수님을 믿으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우리 가문의 첫 목사님이시면서 순교자셨습니다. 저는 그 분들을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사셨는지도 거의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제게 그 분들의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믿음의 세대인 성도들이 힘들어하고 시험을 겪는 것을 볼 때, 그 후손들을 생각합니다. 지금 이 사람이 예수 믿은 것이 힘들어 보이지만 그 후손들에겐 엄청난 복이구나!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러니 말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교회만 다닌다고 후손들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에는“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를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조롱도 핍박도 고난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후손들을 위하여 엄청난 복의 씨를 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할까?’ 안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려서 가정에서의 경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대영 박물관에는 강철같이 단단한 돌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는 작은 새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필경 그 단단한 돌이 언젠가는 작은 새가 디뎌도 발자국이 날 정도로 물렁물렁 했었다는 증거다. 그토록 물렁한 물체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단한 돌이 되었다. 지금은 큰 코끼리가 밟아도 발자국이 생기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는 돌이 되었다.
어린 아이의 마음은 굳어지기 이전의 물렁물렁한 것과 같습니다.
어려서는 누가 무슨 자국을 남기든지 그 자국은 오래 갑니다.
그래서 가정이 은혜로운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결혼 이후 받은 상처는 적당한 계기를 만나면 깨끗이 치유됩니다.
하지만 부모에게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 그 뿌리를 뽑아내는 일도 무척 어렵습니다.
가령,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서 자란 남성은 대개 폭력 가장이 됩니다. 어떠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주먹부터 휘두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같은 환경을 겪고도 폭력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자신의 폭력성과 싸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폭력을 쓰지 않는 부모 아래서 성장한 사람은 폭력을 쓰는 것이 힘듭니다.
어려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돈 문제로 잔소리하는 것이 가장 싫었습니다.
밥을 굶어도 싸우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 안에 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자기 대에서 좋은 전통을 만들어가는 사람과 좋은 유산을 물려받은 차이는 엄청납니다.
전자는 아주 작은 사랑의 행위도 깊이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실천에 옮기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후자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보고 자란 사람은 결혼생활에서도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할 줄 압니다. 서로 돕는다고 해서 자존심이 다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저희 부친은 어려운 목회를 하셨고 게다가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셨기에 저는 어려서부터 아내를 깊이 사랑하는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에 표현이 미숙할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혼 때부터 저희 부부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후 교인들의 가정 생활의 문제도 심각함을 깨닫고 가정 세미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 부부가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이 쉬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굳은 인상을 펴고, 아내와 아이들을 안아 주는 일, 손을 잡고 걷는 일은 내게 어색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바로 서지 못하면 딸들에게 복된 가정을 물려줄 수 없고 교인들을 바로 이끌 수 없다는 마음으로 주님만 붙잡았습니다.
저는 큰 딸 지영이에게 늘 미안합니다. 아버지로서 미숙하였음을 지영이가 중 1이 되었을 때에야 깨달았습니다. 솔직히 그 때도 제가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저를 가르치신 하나님의 방법을 통하여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가르치실 때, 말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회개할 때, 그것은 매를 맞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영이에게 계속하여 설교만 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기도했습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계속하여 기도만 하였습니다.
지영이가 고등학교 때 캐나다에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하루는 예수전도단 화요모임에 참석하였다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은혜를 체험했다고 했습니다. 그 때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도 치유받았다고 했습니다. 어느날 캐나다에서 아빠를 찾는 전화가 왔습니다. 학교에서 자신의 이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을 찾아 감사의 표현을 하라고 했는데, 아빠가 생각나더라고 했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울었습니다. 주님이 하시면 완벽하게 하십니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쓴 뿌리만 심어주며 살았다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부모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나면 부모의 변화된 모습 때문에 과거의 실패가 오히려 자녀에게 믿음의 능력에 대한 더욱 강한 확신을 주게 될 것입니다.
한 교인의 예수동행일기입니다.
“아이의 대인관계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저의 허물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대물림되어 간다 했습니다. 남편의 말에 동의 하지 못하겠다 하여 다투었지만 솔직히 딸 아이의 모습에서 가끔 나를 보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었습니다.
너무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주님도 생각지 못하고 내 자아에 충실한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나의 쓴뿌리를 내 대에서 끊어 낼수 있게 주님 도와주시고, 남편의 말에 진정한 순종의 시간들이 되게 도와주시고 용기 주시옵소서. 내 자아가 완전히 꺽이게 하시옵소서.“
제가 선한목자교회 담임목사로서 모든 지위와 권한을 활용하여 해야 할 일은 오직 성도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예수동행일기를 쓰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삶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자녀에게 복이 되지 못하면 어떻게 천대의 후순에게 복이 되겠습니까?
이 시간 자녀에게 복이 되는 부모가 되게 해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봅 시다.
주님과 연합하는 성찬을 받겠습니다.
찬양: 주님만 주님만
여호와로 가정의 유일한 주인 되게 /출20:1-3/ 이동원 목사
2014-11-28 15:56:18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로서 스위스에서 라브리 운동을 하신바있던 프랜시스 쉐이퍼 박사는 현대인들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동안에 ‘절망의 선’을 넘어섰다고 했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험한 변화가 그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19세기만 해도 그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우리 모두는 공유할수 있는 절대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중에 5계명이하(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거짓 증거하지 말라--)를 말하면 믿지 않는 분들도 “그것 맞는 말이다”고 동의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경우도 사실이었고 유교적 가치관이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그런 도덕적 기능을 감당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20세기 소위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그런 절대적 가치관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정적인 위기도 바로 이런 시대적 경향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가정 곧 웰빙 가정의 회복은 가치관의 회복에서부터 이루어 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웰빙 가정은 단순히 환경 바꾸고 식단 바꾸는 정도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돌아올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의 결론을 쉐마라고 말합니다. 쉐마는 “들으라”는 뜻으로 우리가 가장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으로 신명기 6:4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하나인) 여호와시니”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쉐마가 기록된 신명기 6장의 시작인 1-2절을 읽어보면 본래 십계명은 가정을 위해서 주어진 말씀인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어지는 3절에서는 이 말씀을 붙들고 살 때 복을 누릴 것이고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십계명은 가정에서 부모를 통해 그 자녀에게 그리고 손자에게 까지 대대로 가르쳐져야 하는 것이고 이 계명이 주어진 목적은 가족의 행복과 장수(건강)를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웰빙가정의 열쇠가 바로 십계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구약의 핵심을 율법으로 그리고 신약의 핵심을 은혜로 이해합니다. 이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이 결코 율법을 은혜의 반대 개념으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읽은 출20장은 십계명이 주어진 이유와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20:2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나는 너를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스라엘을 애굽 땅 노예의 자리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이미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삶의 규범, 삶의 법칙으로 이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계명은 구원받기 위한 법칙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의 인생의 법칙, 가정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 법칙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는 것입니다.
“신”이란 단어를 가장 일반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로 정의하자면 “인간이 삶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으로 믿고 의지하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 그런 존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되도록 많은 신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종교학적으로 인간은 다신론적인 존재입니다. 인도에는 수백만의 신이 존재하고, 일본에 가면 8만 신이 있고, 옛날 그리스인들은 3만신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일찍이 바울이 그리스 아덴에 갔을때 거리의 코너마다 신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만들어 낸 모든 신들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성경의 신 여호와는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는 피조물이 아닌 창조자이십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은 오늘도 끊임없이 다른 신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벌코프라는 신학자는 인간을 가르쳐
“치료 불가능하게 종교적인 존재”(incurably religious)라고 합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는 과연 우상이 다른 신들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신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신이란 믿고 의지하는 존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말틴 루터는
“지금 내가 내 마음으로 의지하는 것이 나의 하나님이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없다고 고백할수 있으시겠습니까? 여기 본문에 “나 외에는” 라는 표현은 본래 원문에서는 “내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앞에서 그분과 경쟁이 될 수 있는 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신이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과 제기 그분 앞에서 붙들고 있는 다른 신들은 과연 없을까요? 몇가지 현대인의 대표적인 신(우상)들을 예로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맘몬의 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맘몬은 마태6:24에서 예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가 없다”고 하실 때 재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본래 아람어인데 나중에 돈을 사랑하는 신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래 맘몬이란 말의 뜻이
“내가 믿는다”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필요의 차원에서 우리가 물질을 추구하지만 어느 정도 물질이 모아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물질이 우리의 행복과 안전을 지켜준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어느사이 물질이 우리 신이 되었고 우리는 물질을 예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배금주의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어느날 우리교회 어른신네들이 대화하는 곁을 지나치다가 한분이 열내고 침 튀기시며 강조하시는 이런 이야기가 귀에 들렸습니다.
”절대로 자식들에게 미리 돈주머니 풀면 안되지. 늙을수록 그 주머니 꼭 붙들고 있어야 해. 그것 놓치면 끝장이야 끝장. 그것 없어보라우. 자식새끼들 낯짝이나 볼수 있나“
저는 순간적으로 ”이분 예수 믿는 분 맞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분은 예수님보다 상위가치로 돈의 신을 붙들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2. 건강의 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건강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은 성도의 몸을 성령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는 그 무엇보다 소중히 다루어져야 하고 육체의 건강을 도모하기 위한 운동이라든가 환경 개선은 격려되어 마땅한 일입니다.
성경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운동의 유익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지나쳐 날마다 생각하는 것이 운동이고 눈을 감아도 골프장만 나타나고 건강에 좋은 음식찾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돌아 다니는 것이 그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었다면 그에게 건강은 또 다른 신인 것입니다.
요즈음은 웰빙 바람을 타고 바람쏘이러(미국 2세가 전화받고 아버지 어디가셨니 하니까?-바람나서 나가셨어요)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전전하는 분들도 많아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자연숭배자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 하나님은 아닙니다. 자연을 즐기십시오. 그러나 자연에 빠지시면 안됩니다.가족이 함께 자연을 찾아 즐기시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예배의 우선순위를 놓치지 마십시오. 건강을 성경적으로 추구하려면 가족이 함께 할수 있는 운동을 찾으십시오. 가족들을 운동과부, 운동 고아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을 돌보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나 건강을 예배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3. 쾌락의 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정당하고 건강한 즐거움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가족이 함께 하는 즐거움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전9:9에 보면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기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그러나 쾌락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었을때 이런 쾌락은 이미 우상입니다.
빌3:19에사 바울은 먹는 쾌락에 빠진 사람들을 가르쳐 배로 신을 삼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유형의 중독은 쾌락의 신에 복종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알콜중독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알콜의 쾌락때문이 아닙니까?
마약중독-마약의 쾌락에 빠진 것입니다. 도박중독-도박의 쾌락에 빠진 것입니다. 인터넷 중독-인터넷의 쾌락에 빠진 것입니다. 성중독도 무서운 것입니다. 부부생활을 떠난 성의 쾌락추구는 오늘날 가정을 파괴하는 무서운 중독입니다.
스포츠 중독도 적지 않게 건강한 가정 생활, 건강한 믿음 생활에 방해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스포츠를 즐기십시오. 그러나 빠지지는 마십시오. 쇼핑중독도 있습니다. 이 중독으로 위기에 빠진 가정들을 적지않게 보았습니다.
별로 위험하지 않은 유일한 중독으로는 코딱지 후벼파기 중독이 있습니다.(단 남이 없을때 하셔야 이웃의 기분을 해치지 않을수 있습니다.)
4. 인기의 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타락했을때 하나님 중심이어야 할 인간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 사건이었습니다.
“자, 이제 우리 이름을 내자”고 소리치기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존재이유가 자기 이름 석자 남기기 위해서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욕, 명예욕에 빠져 인생을 피상적으로 살아갑니다.
삶의 사명이나 가치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인정이 제일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바울 사도처럼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고 말하는 대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평가보다 보이는 사람들의 평가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기의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피상적인 가치관에 매달려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인기의 거품이 사라지는 순간 절망하고 맙니다.
예외는 있을수 있지만 대부분의 인기 연예인들의 가정이 건강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건강한 가정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가정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가치관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누가 우리의 가정을 다스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풀러 신학교에서 가족 사회학을 가르치는 잭 볼스윜(Jack O. Balswick)교수라는 분이 계신대 이분은 오늘날의 모든 가정을 세가지 종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1)전통적인 가정, 2)현대적인 가정, 그리고 3)성경적인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유형의 가정은 누가 가정의 주인인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전통적인 가정의 주인은 부모님이나 남편등의 가부장적인 권위라고 할수 있다면 현대적인 가정에는 주인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가정에는 엄격한 질서가 있지만 반면에 통제와 학대가 있습니다.
반면 현대적인 가정에는 자유가 있습니다만 무질서와 혼란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가정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가 다스리는 가정의 특성은 질서와 자유가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 (*도표 참고)
그렇다면 웰빙가정의 비밀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가정의 유일한 통치자로 모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습니까? 우리 가정의 전원 아니면 적어도 대부분의 가정 구성원들의 마음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신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출20:2에서 주께서 말씀하신“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를 받아드리고 이제 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여호와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정녕 이 예수를 내 인생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정 대부분의 가족들이 주님의 인도를 따라 날마다를 살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정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천국이 도대체 어떤 곳이냐?”고 묻는 우리 자녀들에게 이렇게 대답할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 집과 같단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정 /출20:4-6/ 이동원 목사
2014-11-28 15:52:02
서구적인 형태의 인류 최초의 대학, 유럽 최초의 대학은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국립 대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대학은 본래 1088년 교회법과 로마법을 가르쳐 교회 지도자들과 정부 관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법과대학으로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로 불리워져 오늘의 University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 대학의 하루는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믿었고 교육은 결코 지식의 전수만이 아닌 태도와 인격의 형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와 인격의 형성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볼로냐 대학에 남아있는 문헌에 의하면 이 대학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학교 생활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부모와 학생들의 서약을 받고 학생들의 입학을 허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육 정신의 기원은 바로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십계명의 교훈은 학교 생활의 중심이었고, 가정 생활의 근본이었던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1 계명이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유일하신 신 하나님을 강조한 것이라면 제 2계명은 예배의 올바른 방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 1계명이 우리가 누구에게 예배할 것인가를 가르쳤다면 제 2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제1 계명이 거짓된 신을 경계하도록 가르치고 있다면, 제 2계명은 거짓된 예배를 경계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처럼 근원을 달리하는 여러 세속적인 가치관들이 충돌하고 흔들리는 영적인 전쟁의 시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 2계명은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한 두가지 경고와 두가지 축복의 조건을 함께 전달하고 있습니다.
A. 먼저 두가지 경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우리가 이 말씀의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우상이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일단 본문에 우상은 예배의 대상으로 만들어지는 어떤 형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교육적인 목적이나 예술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작품 활동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 보면 모세 시대에 예배의 처소로서 성막이나 성전이 만들어 질 때 주님은 브사렐 오홀리압 같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재능을 주셔서 여러 예술 작품을 만들게 하신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작품들이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될 때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 제2 계명은 그런 예배의 목적으로서의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이런 우상이 우리 마음속에도 존재할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골3:5에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상을 우리 마음속에서도 만들어 낼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마음과 존재를 사로잡아 참되신 하나님에게서 우리의 시선을 앗아가고 오직 우리로 그것만을 탐하게 하는 일체의 탐욕이 모두 우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우상 공장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제 2계명은 이런 우상까지도 만들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2. 우상을 예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다시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것들(가시적 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얼마나 하나님이 단적으로 우상예배를 싫어하시는 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세계 모든 고급 종교들가운데 유독 유대교와 기독교(특히 개신교)전통이 신(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거부하게 한 배경이 되어 온 것입니다.
성상을 옹호하는 정교회나 오늘의 카톨릭 전통은 이 런 상징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잘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모든 시간마다 자신의 임재를 약속하신 주님-그 주님을 내가 직접 뵙고 경험할수 있는데 꼭 예배의 대상으로서 성상이 필요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를 가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배후 저를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본당 후면 복도에 서있는 제게 오시면 됩니다. 그런데 저 뒤에 서있는 저를 지나쳐 제 사무실로 들어가 오피스 구석에 있는 제 사진앞에 가서 절하고 중얼거리는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 일을 만일 계속하는 분이 계시다면 저는 그 사진을 폐기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때 그 사진은 더 이상 사진이 아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의미의 신앙의 상징까지도 우리는 우상화를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 우리 교회에 방문하신 분들이 우리 교회에 십자가 표시가 없다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해 전 지방 어떤 교회에 집회갔다가 새벽기도회 시간에 그 교회 십자가 앞에서 절하는 성도분을 실제로 목격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성도에게는 심지어 십자가도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살아계신 주님이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경배할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우리 가정에 딸들에게 값비싼 십자가 목걸이는 사주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 살아계신 주님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자가 되게 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신앙교육은 실패한 것입니다.
B. 이제 두가지 축복의 조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2 계명은 경계의 메시지만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지난 시간 저는 1계명을 강해하면서 십계명은 결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법칙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체험한 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칙이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가르쳐 성민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법칙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약속됩니다. 본문 6절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기 경고를 압도하는 은혜의 약속을 보십시오.
불순종의 영향은 삼 사대이지만 순종의 은혜는 천대인 것입니다. 가계의 저주를 믿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제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드리고 순종하는 순간 이미 저주는 십자가에서 깨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기에 그를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저주에 묶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은혜입니다. 이제부터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와 축복의 경험의 통로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예배하는 순간 순간마다 은혜가 부어질 것입니다. 축복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이 축복에는 두가지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최고의 사랑을 드릴수 있을까요? 예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예배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을 예배합니다. 지식을 사랑하는 자는 지식을 예배합니다.
권력을 사랑하는 자는 권력을 예배합니다. 쾌락을 예배하는 자는 괘락을 예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과연 돈이, 지식이, 권력이, 쾌락이 여러분과 저의 예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허락하시는 선물의 한 부분들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이 선물의 주인을 떠나서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들이 아닙니까? 전도서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들입니다.
전도서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1장에 보면 인간의 지혜가 헛되다고 말합니다. 2장에 보면 인생이 추구하는 일체의 즐거움, 쾌락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3장에 보면 인간의 모든 기회도 헛되다고 말합니다.
4장에 보면 권력과 성취의 헛됨을 말합니다. 5장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 꿈의 허무를 말합니다. 6장에 보면 재물의 헛됨, 욕망의 헛됨을 말합니다.--전도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전12:13에 “일의 결국(결론)은--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외(존경)를 받아 마땅한 유일한 가치를 지니신 분이심을 깨달은 사람들의 사랑의 고백을 위한 엎드림-그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우리가 청년의 때부터 그렇게 할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녀에게 예배를 가르친 부모는 이미 자녀 교육의 절반을 성공하신 것입니다. 스펄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있을 진져, 가정 제단이 없는 가정들이여. 복이 있으라. 가정 제단이 있는 가정들이여!”
2. 하나님의 계명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의 6절을 읽어보십시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의 명을 따르는 것은 저주스런 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명을 따르는 것은 신명나는 일입니다.
요일5:3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져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라면 사랑의 감격에 빠져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내 온 몸의 세포 마디 마디가 사랑을 갈구하는 목마름에 빠져 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마침내 그 사랑으로 내 존재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전율을 경험해 본일이 있으십니까? 마이크 메이슨(Mike Mason)은 예배의 감격이 그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예배를 드린 사람들은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못할 일이 없는 순종의 각오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 이런 예배를 드려 보셨습니까?
이런 예배가 갈망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물으셔야 할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혹시 당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은밀한 신을 예배하는 분은 아니신지요?
지금 교회당에 나와 예배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여러분과 나를 지금 지배하는 가장 큰 관심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여전히 돈의 우상에게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배의 감격에 빠지지 못하시는 이유일수 있습니다.
혹시 이 순간 우리의 최고의 관심이 우리의 출세나 인기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출세를 예배하고 인기를 예배하는 예배자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감격에 빠지지 못하시는 이유일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 순간 우리의 최고의 관심이 우리의 명예의 보존이나 자존심의 회복은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명목상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으면서도 실상은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자일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리대신 다른 소리를 듣고 있다면 어떻게 그를 하나님의 친구라고, 하나님의 예배자라고 할수 있을까요?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자기 배우자와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자신의 마음은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버렸다면 그가 어떻게 부부의 진정한 사랑의 감격에 빠질 것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다른 어떤 일의 성공보다 예배에 성공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다른 어떤 유산을 남기기 보다 더 예배의 영광을 물려주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이땅의 성도들의 모든 가정들이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이 땅과 이 역사를 고치시고 치유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으로 우리의 가정의 주인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예배함을 우선순위로 아는 가정을 만드십시오. 이런 가정들이 우리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가정 /출20:7,빌2:6-11/ 이동원 목사
2014-11-28 15:48:37
인터넷 문화가 널리 확산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사회의 큰 관심거리의 하나가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이 되었습니다.
싸이 월드의 사업본부 팀장인 신병휘씨는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글에서 “훌륭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첫 걸음은 커뮤니티가 사용자들에게 줄수 있는 가치에 집중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는 커뮤니티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성공에 집중하지 말고 가치에 집중하라고 충고합니다. 커뮤니티가 주는 가치야 말로 커뮤니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여러 커뮤니티가 있지만 성경적으로 가장 중요한 두가지 커뮤니티는 가정과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첫 창조의 절정에서 태어난 공동체가 가정이라면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인 구속사역의 결과로 태어난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커뮤니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가치에 의존하는 공동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치의 핵은 주님의 이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가정과 교회는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커뮤니티-가정과 교회의 성공과 실패는 주님의 이름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3계명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상적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말이나 행동을 가르쳐 “망령이 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망령되게”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본래 ‘샤웨’(shawe)라는 단어로 “헛되다”(in vain) 혹은 “가치가 없다”(worthless)는 말로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호칭해서는 안된다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하거나 가치없게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이 명령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명령이 준행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마당이 무엇보다 우리 가정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바로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부되기로 서약하고 하나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시작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웰빙가정을 만드는 열가지 법칙 그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가정이 되십시오”입니다.
1. 왜 주님의 이름이 존중되어야 할까요?
두가지 이유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받을수 없나니 천하사람중에 구원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고 했습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에서 친히 예수가 되어 이땅에 오신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봉독한 빌립보서 2장에서의 바울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하나님과 동등이시고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자신을 비우시고 이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의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한 대속의 제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예수의 이름보다 더 소중하고 더 위대하고 더 고귀한 이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찍이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였을 때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를 통한 메시아의 출생을 예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1:21) 91장 찬송가의 작시자 리디아 박스터(Lydia Boxter)는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왜 주님의 이름이 소중합니까?
그분의 이름으로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온 세상의 구원의 소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심판받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서 2장 본문에서 예수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이땅에 오셔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10에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아니라면 언젠가 강제라도 그렇게 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심판의 날인 것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는 또한 심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구원이지만 동시에 그의 이름은 심판입니다. 고후5:10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앞에 나타나게 되어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신 분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은 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심판하실 분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처방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3 계명은 그런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은 죄라고 합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한다는 말입니까?
2.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할수 있을까요?
두가지로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가 직접적인 형태에 속한다면 또 하나는 간접적인 형태라고 할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여기서 망령되다는 말은 가치가 없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이름을 가치없게 하는 것일까요?
1) 직접적으로 주님과 관련된 것들을 함부로 말할 때입니다.
출20장의 10계명을 번역하면서 공동번역이나 표준 새 번역은 “-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하나님이나 예수라는 단어(Gosh, Jesus등)가 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가장 고귀한 단어가 가장 비속한 욕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사단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추하게 변질시키는 일- 그것이 바로 사단의 전문사역입니다. 우리들 성도들은 특별히 이런 언어 사용에 사단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건전한 유머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계를 넘어선 농담으로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부를수 없다고 해서 여호와란 이름대신 아도나이(Adonay)라고 대신 표기하는 전통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신앙적인 언어사용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언어는 가치 전달의 수단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경박하게 사용할 때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의 가치를 농담수준으로 격하시킬지 모릅니다.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 앞에서 주님의 교회나 주님이 쓰시는 사역자들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들의 언어를 통해 가치를 학습받고 있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교회나 메신저를 실컷 비난하는 부모들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어떻게 신앙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자라 날 것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평생의 목회 생활을 통해 자녀들이 신앙을 따나는 가정에서 두가지 원인을 관찰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모들이 교회 생활은 하지만(심지어 직분도 갖고 있지만) 가정에서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모범을 배우지 못한 가정, 그리고 부모가 늘 교회나 사역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상을 갖고 있는 가정들이 결국은 신앙전수에 실패하는 것을 봅니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말이 씨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말을 바꾸십시오. 경건한 말, 거룩한 말, 따뜻한 말, 긍정의 말들을 말해 보십시오. 가정이 바뀔 것입니다. 자녀가 바뀔 것입니다.
2) 간접적으로 주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처럼 암시할 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께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주인이시라면 이제 부터는 그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그런가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할 때 기도할 때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시인되고 고백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진학지도를 할 때 혹은 취업 선택을 할때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허락한 은사보다 혹시 부나 출세나 명예를 더 고려하도록 영향을 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로는 예수를 주라고 가르쳐 놓고 실제로는 돈이 주라고, 인기가 주라고, 명예가 주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저는 오늘날 우리 자녀들의 신앙생활의 최대의 장애가 바로 이런 크리스쳔 부모들의 이중적인 가치관, 이중적인 행태 혹은 일관성이 없는 자녀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오늘의 부모들의 망령된 모습인 것입니다. 제가 이런 부모들에게 호소할 말은 꼭 하나입니다.--“제발 망령 부리지 마십시다”
3.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존중할수 있을까요?
두가지 결론적인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1) 매일의 일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예수의 이름을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의 신앙생활은 시작됩니다. 이제 그 이름으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찬양은 그 이름을 칭송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 이름으로 주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를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그의 이름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의 이름으로 모여 그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이름 때문에 살고 그 이름 때문에 죽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우리의 존재의 이유이며 우리의 행복의 비밀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이름을 높이는 삶인 것입니다. 장애 시인 송명희는 그 이름의 비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수 없네/그 이름속에 있는 비밀을/그 이름속에 있는 사랑을/그 사랑을 말할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못해서/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우리의 예배로 기도로 전도로 사랑함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그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2)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우리에게 비록 물질적인 손해가 있어도 주님앞에 바른 결정을 내려보십시오. 그 일이 비록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어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가치있는 결단을 내려보십시오.
이사할 때, 취직할 때, 사업을 전환할 때, 자녀의 진학지도에 성경적인 가치관이 반영된 결정을 내려보십시오. 그때 비로서 당신의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이 주님의 사람인 것을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서 당신의 가정은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가정이 되고, 당신의 인생은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린 삶으로 결산될 것입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자녀중에 한 사람이 부스에게 다가와서 “아버지, 힘드시겠지만 여기 서류에 서명해 주시면 재산 정리의 어려움을 피할수 있게 되겠습니다”고 말하자 부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그앞에 펼쳐진 서류에 그가 가까스로 힘을 내어 서명한후 그 서류는 봉해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세상을 떠난후 가족들이 서류를 열었을 때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직면해야 했습니다.아버지 부스가 남긴 마지막 서류 싸인에는 부스 자신의 이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 그 서류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그가 마지막 까지 남기고 싶었던 이름, 그가 세상을 떠나가는 순간까지 붙들고 있었던 이름, 그의 자녀들이 또한 붙들고 살아주기를 기대했던 이름, 아니 그가 그의 가족들에게 남길수 있었던 최대의 유산은 돈이 아닌 예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저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3계명을 통하여 직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서 주님의 이름이 얼마나 존중되고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 기독교 조상관 /출20:5/ 이재철목사
2015-07-30 21:15:37
자녀는 부모의 죄를 유전한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출 20:5등)
또한 자녀는 부모의 죄를 유전하지 않는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겔 18:2)
상반된 두 말씀이 모두 성경에 나온다. 모두 진리이다.
인간에게는 원죄와 자범죄가 있다.
원죄는... 유전하는 것이다. 연좌제가 성립 된다.
자범죄는... 유전하지 않는다. 연좌제가 성립 안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조상과 부모로부터 받는 영적 영향이 있다. 왜 없겠는가?
또한 우리는 조상과 부모로부터 받는 영적 영향이 없다. 나는 새사람이기 때문.
두 가지 사실을 모두 인정하면서 이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에서 해방되었지만
완전한 해방은 저 천국에서 누릴 것이며,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원죄와 조상죄의 영향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은, 이 글의 주제는, 그래서 더욱 조심하고 탈피하자는 뜻이다!
잘못 읽으면, 모든 불행을 조상탓으로 돌리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조상의 영향을 직, 간접적으로 받고 살아가는데....
성경은 거기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조상의 영향을 받음
사람은 조상의 저주를 3-4대까지 상속한다.
하나님은 죄인을 그 후손 3-4대 까지 벌하신다(출 20:5).
속담에 “어미가 어떠하면 딸도 그렇다 하리라”(겔 16:44)
“아비의 죄악을 그 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렘 32:18)
단,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주의>를 요한다.
이것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해서 그 테두리 안에 영원히 갇혀서 살면 안 된다.
성경은 조상의 영향을 직, 간접적으로 받고 사는 인간의 현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부정적 영향이라면 → 그것을 깨뜨리길 원하신다.
성경에 위의 말씀들이 기록된 것은
“너희는 어쩔 수 없다. 평생을 조상의 저주 속에 살아가라”가 <아니다>.
“너희 현실이 그렇다. 그것을 깨닫고, 그런 저주의 현실을 부단히 깨뜨리며
살아가라”이다.
하나님이 재앙을 선포하시는 것은,
재앙이 임하기 전에 빨리 돌이키기 원하시고,
그래도 사람이 미련해서 돌이키지 않고 예고된 재앙을 받게 된다면,
그 고난을 통해 새사람 되기 원하신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재앙을 선포하시지만,
인간이 재앙을 당하여 괴로워하는 것은 본심이 아니다.
인간이 재앙을 물리치는 것이 본심이시다.
▶(조상의 영향보다) 자신의 역량에 더 좌우됨
유다의 국운이 풍전등화처럼 위태해진 상황이었다.
나라가 어지럽고, 당장 국민들은 신변의 안전이 어렵게 되었다.
벌써 한 차례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조상 탓을 했다.
조상의 잘못으로 우리가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거기에 대해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렘 31:29-30)
에스겔도 똑같은 예언을 했다.
에스겔은 이미 포로로 잡혀 바벨론 땅에 살고 있던 상황이었다(겔 1:1).
여전히 사람들은 모든 현실의 불행이 조상 탓이라고 한탄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다시는 이런 속담 인용치 말라...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겔 18:2-4)
이와 같이 사람이 잘되고 잘못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
조상에게 잘못이 있다 치더라도, 자기만 잘하면 얼마든지 회복하고 잘 된다.
조상에게 잘못이 없다 치더라도, 자기가 잘 못하면 얼마든지 잘 못될 것이다.
(참조, 겔 18:19-24)
▶과거에 얽매이지 맙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과거에 얽어매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롭게 된 사람들이다(고후 5:17).
성경에 조상의 죄의 영향을 받는다는 구절이 있는 것은,
그럴 수 있으므로 그것을 조심하고, 그것에서 탈피해서 살아라는 권고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조상의 저주를 포함한
모든 저주에서 자유함을 받는다(갈 3:13).
조상의 안 좋은 성격, 조상의 범죄로 인해 자손이 받는 저주,
조상의 나쁜 유전자 등... 사람은 조상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배우자를 고를 때는 가문과 근본을 중시 여겼다.
그러나 현재 나의 행/불행을 좌지우지하는 요소는
스스로의 책임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
나 스스로의 책임으로 조상의 부정적 영향력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결국 잘 되도 내 탓이요, 잘 못 되도 결국 내 탓인 것이다.
조상 탓이 아니다.
출20:1-11/ 하나님께 관계된 계명 /조용기 목사
2014-09-03 15:43:26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께 관계된 계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십계명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로 나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향해 행진해 나가던 중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돌 판에 새겨 받은 계명인 것입니다. 이 십계명 중 4계명은 인간이 하나님께 관계된 계명이고 나머지 6계명은 인간 대 인간에 대한 계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고 요한일서 2장 3절로 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조건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주신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므로 열심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우리 스스로의 생활에 변화를 받을 뿐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생활을 해야만 진실로 하나님 믿는 백성으로서 영광을 나타낼 수가 있고 또 우리의 구원을 보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주신 계명을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성경에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유일무이하신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우리의 주위에 절대로 두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다른 신은 무엇일까요? 이 우주에 하나님 이외에 또 다른 신이 있을 수 있을까요? 성경말씀 가운데 보면 하나님의 천사장 중에 루시퍼, 우리 한국말로 변경하면 계명성이라는 아주 지위가 최고로 높은 천사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높여서 영화롭게 하고 심히 큰 권능을 주시매 그가 교만해 졌습니다. 하늘 천사 3분지 1을 데리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늘에서 쫓겨났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 되어 가지고서 다른 신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사야 14장 12절로 15절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여기에서 루시퍼는 자기의 영화로움과 권능의 큼을 보고서 자기 스스로를 높여 지극히 크신 하나님과 동등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럽게 여기셔서 이 아침의 아들 계명성 루시퍼를 하늘에서 내어쫓을 때 그는 하늘의 천사 3분지 1을 반역에 가담시켜서 쫓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다른 신이 되어서 끝임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꾀어서 하나님을 반역하게 하였었으며 이 사탄이 예수께서 40주 40야 광야에서 금식하셨을 때 찾아와서 예수그리스도를 어찌하든지 타락하게 하고 하나님을 반역하게 하려고 죽을 애를 썼던 것입니다.
오늘 이 원수 마귀는 우리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우리 인생들을 미혹케 하고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신들이 되어서 인생들을 미혹케 하여 잘못된 길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다 한가지다.
종교의 목적은 다 한가지다. 그러므로 어느 종교든지 우리가 성실하고 착실하게 믿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로 가는 길은 한가지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여러 가지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남의 종교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종교가 나쁘고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절대 주권자가 내게로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도리밖에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탄은 그의 종자와 함께 수많은 다른 신들을 만들어 내고 다른 종교들을 만들어 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오늘날에 와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도 이 마귀가 배후에서 일을 해서 세속적인 여러 가지 것을 신처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본주의를 신으로 섬깁니다. 18세기 계몽주의운동 이후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고 인간은 자유를 선포했었습니다.
인간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이성을 개발하고 우리가 자유를 누리면서 과학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면 인간은 무한대로 발전해서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했었습니다. 그 인본주의 사상이 오늘날에도 정치계나 경제계 그리고 학계나 교육계에 꽉 들어차 있습니다. 이러므로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내어쫓고 인간을 하나님 자리에 얹어 놓고 인간을 신의 위치에 앉혀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 신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은 소위 배웠다 하는 사람이나 과학을 공부했다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조건 등지고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신적인 위치에 얹혀놓고 사는 것이 참된 인텔리라고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가 가져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내어쫓고 하나님이 가르친 윤리와 도덕을 짓밟아 버리고 인간 중심으로 세운 세계는 세계 제1차대전과 제2차대전의 무자비한 살상과 오늘날 전 세계에 걸친 공산주의와 무신론자들의 만행을 보게될 때 인본주의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사람들은 권력의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내동댕이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사람들은 이 권력을 따라 정신 없이 발버둥 쳐가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의 신 이것을 위해서 인류의 생명도 초개같이 버리는 이와 같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번 권력을 맛보면 이 권력에 중독이 되어서 권력을 내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수많은 비극과 슬픔들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 권력의 이양을 정상적으로 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인 것입니다. 제도적으로 우리들은 권력을 어느 한정동안 가지고 있다가 이것을 이양해서 권력으로 다가오는 부패를 막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 사람이 한번 권력을 잡고 권력을 맛보고 나면 그것을 놓으려고 하나요? 이러므로 말미암아 수많은 고통과 슬픔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도 정의보다도 윤리와 도덕보다도 권력의 신을 섬기고 그에 무릎을 꿇고 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와 같은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돈을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스위스의 격언에 보면 하나님은 하늘을 다스리고 땅은 돈이 다스린다. 인간뿐 아니라 마귀도 돈 앞에서는 춤추라면 춤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얼마나 돈을 좋아하던지 마귀도 돈 앞에는 춤추라면 춤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있는 세계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앞에 수많은 다른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신들을 다 제쳐놓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우리 아버지 하나님만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천년을 살지도 못하고 만년을 살지도 못합니다. 사람이 살면 70이요 강건하면 80인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이 땅을 떠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셋집 세상에 전셋집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전세기한이 차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 이 세상 신을 섬기고 이 세상의 권력의 신이나 쾌락의 신이나 금전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가지고 갈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전히 세상에서 버림받고 우주의 심판자 되신 하나님 앞에 서서 가장 처절한 심판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오직 우리 하나님 밖에는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우리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는 근본적인 목표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지 하나님 중심에서 삐뚤어져 나가면 우리의 삶 전체가 다 방향을 잃어버리고 흐트러져 버리고 나중에는 처참한 슬픔과 절망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계명은 이런 것입니다.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와서 그들이 바알신과 아세라신이라는 그 토지에 있는 다른 신들을 섬겼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더럽게 여기셔서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자기 백성을 멸해버리고 가나안 땅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고 말은 것이 있습니다.
성경말씀 가운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으로 잡혀갔을 때 왕족 중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세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머리가 좋아서 바벨론 왕궁에서 특채 당하여 교육을 받고 바벨론 도의 지사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큰 금의 신상을 세우고 전 바벨론 도에 있는 모든 장관들과 지사들과 모든 지도적인 인물들을 모아 놓고 금 신상을 제막하는 날에 그 앞에서 절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악대들이 와서 임금이 지시하매 장엄한 음악을 연주할 때 온 세계 각지에서 온 지도적인 인물들이 그 금 신상 앞에 모두 다 무릎을 꿇고 절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에서 온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사람은 그 많은 군중들 가운데 장대처럼 서서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자 느부갓네살 왕이 치를 떨면서 자기 권위에 대한 도전을 하는 사람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렀었습니다.
'과연 네가 내가 만든 신상에 절하지 않았느냐?' '절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신상에 절하지 않고 내 명령에 거역한 사람은 큰 풀무를 만들어서 그를 7배나 뜨겁게 하여 그 속에 산채로 집어넣어서 태워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말했습니다. '왕이여 만일 왕이 그렇게 하면 풀무 가운데서라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시겠거니와 만일 주님께서 건져내 주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왕이 만든 금 신상에는 절하지 않겠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이 세 사람의 반역에 치를 떨고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 풀무를 7배나 뜨겁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풀무에 바람을 넣고 장작을 집어넣고 나뭇단을 넣으매 그냥 지옥같이 불이 타올랐습니다. 여기에다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사람을 묶어서 던져 넣는데 왕의 명령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급히 서둘러서 병사들이 이 세 사람을 풀무에 집어넣으려고 하다가 자기들도 그 불길에 휩싸여서 타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에 던져 넣었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왕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을 들여다 보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뿐 아니라 또 한사람 제 네 번째 사람이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그 주위에 불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때 느부갓네살 왕이 신하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불 속에 집어넣은 자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사람 밖에 없지 않느냐? 저 네 번째 사람은 누구냐? 그 모습이 신의 아들과 같도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우상에 절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목숨을 바쳐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정절을 지키고 불길 가운데 던짐을 받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보좌에서 뛰어 내려와 그 가운데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 사람만 불길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제 네 번째 사람 나사렛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며 불이 사람을 태우는 힘을 잃고 말은 것입니다. 불이 태운 것은 그들을 묶어놓은 밧줄밖에 태운 것이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서 그 입구에 서서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이리 나오라 그래서 이 세사람이 나올 때 네 번째 사람은 사라졌었습니다. 나온 그들을 붙잡고서 옷에 냄새를 맡아보니 불탄 냄새도 없고 몸에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으며 그들을 묶은 밧줄만 불타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크게 회개하고 그가 하나님을 섬기게 된 사실이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왕이 만든 금의 우상에 절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헌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여 주셔서 제 네 번째 사람 나사렛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우상에 절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새긴 우상을 만들지 아니하면 제 네 번째 사람 나사렛 예수께서 여러분의 개인과 가정과 생활에 같이 하여 주셔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거나 우상에 절하거나 섬기는 사람에게는 종교는 있을지 몰라도 의식과 형식은 있을지 몰라도 제 네 번째 사람 우리 나사렛 예수그리스도는 같이 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우상에 절하지 말아야 됩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우상에 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아비로부터 아들로 삼 사대까지 죄를 갚겠다고 했으며 우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있는 모습이나 땅에 있는 형상이나 물 아래 있는 형상이라도 아무 형상이라도 만들지 말며 그것에 절하고 섬기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가 단군 성전을 만들고 단군 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고 민족적인 하나로 단결시키기 위해서 그것에 절하게 하자는 이것은 인간적인 생각이요 사탄의 생각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유일하게 하나님밖에 섬기지 않습니다.
절대로 어떠한 형상과 우상도 만들어서 그곳에 절하는 것은 개인이 범죄 하게 되고 나라가 범죄 하게 되고 하나님의 미움을 받게 되고 삼 사대로 미워해서 심판하시겠다고 했는데 우리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견뎌낼 것 같이 생각되십니까?
실제적인 정사도 아닌 역사이전의 신화적인 조국 창건자 그를 역사적으로 우리가 깨닫고 존경하고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성전을 짓고 실제 인물처럼 상을 만들고 민족이 그곳에 와서 절하게 만든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민족이 통일이 안되나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뿌리를 잃어버리나요? 그렇다면 미국같이 잡다한 인종들이 다 모여 사는 나라가 어찌 그리 민주주의가 잘되며 어떻게 세계에서 최대의 강대국이 되었나요? 그 나라에 단군 같은 신화가 없어서 그 나라가 못 살며 그 나라가 민주주의가 안되나요?
민족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에 참된 민주주의가 되고 그 나라에 참으로 인권이 존중되고 그 나라의 제도가 국민들의 자유를 잘 보장해 줄 때 국민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신화를 통해서 성전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상을 만들어 놓고 절한다고 해서 뿌리를 찾아 민족이 하나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될 때 우리민족은 하나가 되지 말래도 하나가 될 것입니다. 서로 나라를 사랑하지 말래도 이렇게 좋은 나라를 왜 사랑하지 않겠어요? 이것이 우리가 해야될 일이지 무슨 큰 성전을 짓고 우상을 세우고 새로운 특별한 제도를 만들어서 국민을 하나로 묶어보겠다는 이와 같은 것은 어리석은 사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우리가 정신을 쏟거나 나라의 돈을 사용하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절대로 범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기 셋째 계명이 있습니다. 셋째 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지극히 크신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욕되게 불러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라의 법에는 국가의 원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면 국법으로 다스립니다.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부르면 사회에서 버림을 받고 못된 자식으로 지칭을 받습니다. 하물며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일컫고 난 다음 죄 없다고 인정되겠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을 결코 죄 없다고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정죄받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의 기도가 상달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존귀롭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길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귀하게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말로나 생각으로 행위로 장난으로 욕되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결코 없어야 될 것입니다.
넷째 계명은 이런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율법 하에 보면은 율법하의 안식일은 토요일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민족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킨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오늘날 교회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고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느냐고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유대인의 율법 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약 하에 살지 않고 우리는 새로운 언약 신약 하에 살고 있으며 우리의 언약의 주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주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고통 하는 자를 놓아주셨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일한다고 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께서는 말씀했습니다.
'너희 이 위선자들아 안식일에 소나 너희 염소나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그를 건져내지 않겠는가 안식일날 짐승들이 목이 말라 있으면 물을 마시지 않는가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병들어서 고생하는데 안식일에 내가 그를 고쳐주었다고 해서 네가 나를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느냐'고 주님께서 꾸짖으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지 않는다고 예수께서 말씀한 것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2장 27절로 28절에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계명 중에 모든 다른 계명은 그대로 다 인정하고 지키라고 하셨으나 안식일은 주님께서 변경시킨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의 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진실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안식일에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모두 다 놀아버리자 일선의 군인들도 이제는 다 놀아버리자 의사들도 다 놀아버리자 버스운전자들도 다 놀아버리자 저 발전소도 다 놀아버리자 그러면 오늘날 안식일의 온 세계는 지옥같이 변화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안식일에 자기 사사로운 쾌락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버리고서 나가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일은 해야되는 것입니다. 일선에서 군인은 국경을 튼튼히 지켜야 할 것이요 버스운전을 하시는 분은 교회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버스를 운행해야 될 것이요 전기발전소에서는 발전을 해서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해줘야 될 것이요 안식일에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은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 욕심을 위해서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그 날을 거룩히 지키지 아니하고서 자기의 일낙을 취하러 간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 가운데 보면 여러분, 우리는 안식일을 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일요일날을 지키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토요일이 아닌 주일날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언약의 출발 일로 삼은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날은 언제나 안식 후 첫날인 주일날이었습니다. 주일날 제자들이 함께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 홀연히 나타나서 그들에게 중대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럴 뿐 아니라 교회가 탄생한 날은 오순절날인 것입니다. 오순절날이 이르매 그들이 다 한곳에 모였더니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고 불의 혀 같은 것이 그들 머리 위에 나타나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해서 교회가 출발한 것입니다.
바로 그 안식일에 교회가 출발한 것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인 주일날에 성령이 강림해서 교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그가 탄생한 주일날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골로새서 2장 16절로 17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바로 그림자요 진실한 몸은 예수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마음속에 모신 사람은 매일같이 안식일인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안식이요 예수께서 우리 안식의 주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모신 사람은 매일매일 그때그때가 안식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날 성령이 강림하셔서 교회가 탄생한 날을 우리는 주일날로 지키며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날과 성령 강림의 날인 주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안식일에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사로운 일은 하지 않고 공중적인 일은 그 날도 해야 사람들이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계명을 저버리는 자는 하나님을 버리는 자인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믿음의 진실함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고 우리가 속한 사회 각계 각처에서 계명을 지키므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요 예수님의 제자임을 나타내야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우리 마음속에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아버지 우리 일생을 사는 동안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결코 두지 말게 도와주시옵소서.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다른 종교를 따라가든지 인생들이 좋아하는 권력의 신이나 쾌락의 신이나 돈의 신을 따라가지 말게 도와 주시옵시고 더더구나 인본주의적인 신을 따라가지 말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성경에 말하셨사오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 속에 있는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고 그것에 절하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고 하였으므로 이 땅에서 우상을 제하여 주시옵기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버지여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우상을 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과 대적하는 일이 없게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성호를 욕되게 하는 일을 하지 말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주일,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탄생한 이 주일날 우리는 함께 모여 하나님을 거룩이 예배드리고 찬미하고 주의 영광을 체험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워질수록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더욱 함께 모여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서로 신앙을 격려하여 그리스도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설교문 모음 > 출애굽기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애굽기 20:12 - 14절 설교 모음 (0) | 2023.09.12 |
---|---|
출애굽기 20:7 - 11절 <3,4번째 계명> (0) | 2023.09.05 |
출애굽기 19:1 - 6절 설교 모음 (0) | 2023.08.21 |
출애굽기 13:17 - 22절 설교 모음 (0) | 2023.08.14 |
출애굽기 14장 설교 모음 (4) | 2023.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