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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출애굽기 설교 모음

출애굽기 20:12 - 14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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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강해 27. 십계명(5)_ 부모를 공경하라 /20:12/ 이종철목사

2022-05-23 09:08:02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

 

 

십계명 다섯 번째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다섯 번째부터 번째 계명은 인간의 삶과 관련된 계명입니다. 그중에 자리를 ‘부모공경’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돌판 위에 십계명을 쓰셨는데 둘째 판의 계명이 5계명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가히 인간관계 계명의 으뜸이라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효나 부모공경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는데 성서 또한 그렇습니다.

 

십계명 외에도 모세오경에서는 부모 공경에 대한 율법을 들고 있습니다. 그중에 ‘모트 유마트’ 법이 있습니다. ‘반드시 죽일지니라’는 조항이 들어가는 법입니다. 출애굽기 21 15절입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21 17절입니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레위기 20 9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대단하지요.

 

부모공경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자연의 순리는 새끼들이 장성하면 독립하는 것이고, 늙고 무력해지면 외롭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쩌면 고려장과 같은 풍습이 가장 자연적인 방식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동물들처럼 생존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목적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공경은 은혜를 아는 마음입니다. 우리나라 전통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3 상을 치릅니다. 3년이냐면 우리가 처음 태어나서 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까지 3 동안은 전적으로 부모의 손에 의해서 양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낳고 기르신 은혜에 대해서 기억하고 갚는 것입니다.

 

부모공경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5계명은 어린아이들에게 해당하는 조항이 아닙니다. 가장이 성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힘없고 연로한 부모를 공양하라는 뜻입니다. 가장 연약한 자를 돕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부모공경은 질서와 권위를 높이는 마음입니다. 부모에 대한 권위에서 세상이나 사회의 권위가 유지됩니다. 권위나 질서 의식이 세상을 약육강식의 사회나 무정부 사회로 가지 않도록 만듭니다.

 

부모공경은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이 나온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고 인간은 자신의 뿌리에 견고히 붙어 있을 허전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부모님 계신 곳이 고향입니다. 수구초심이라고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돌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대리자

 

이런 이유로 부모공경은 인간관계 계명의 으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가히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같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이 그렇습니다. 루터는 《대교리문답》의 십계명 해설에서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라 하였습니다. 125문과 126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아계신 부모를 주셔서 그들을 존경하고 따르게 하셨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있을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과 모든 천사들은 없이 기뻐하시며, 모든 악마들이 혼비백산한다. 뿐만 아니라 앞의 계명에서 묘사된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 다음으로 우리가 있는 최선의 노력임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보다 부모의 지위를 이렇게 높이셨다. 사실상 하나님은 부모를 땅에서 자신의 대리자로 삼으셨다”(125, 126)

 

실제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압니까? 땅의 부모님을 통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어린 시절 경험했던 부모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투영됩니다.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라면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이 됩니다. 무관심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하나님이 딱딱한 율법이나 법칙의 하나님이 됩니다. 사랑이 많은 부모님에게서 자랐다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되고 그래서 베풀고 후히 주는 사랑을 합니다. 유대인들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그렇게 하십니까? 바로 부모를 통해서입니다. 부모는 하나님 대신 자녀들을 먹이시는 분이요,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분입니다.

 

그래서 부모라는 위치는 자체로 소중하고 권위가 있습니다.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부모의 역할은 하나님이 세우신 직임이기에 자체로 권위가 있습니다. 루터의 《대교리문답》 108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강조해야만 것은 자신들의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여겨야 한다는 것과 부모가 아무리 낮고 가난하고 약하고 괴상하다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아버지와 어머니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신들의 처신이나 실패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영광을 박탈당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혹 부모들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인격성으로 판단해서는 되고 그렇게 창조하고 직임을 하나님의 뜻을 새겨야 한다.(108)

 

전에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란 책이 유행을 하였습니다. 요즘 능력 있는 부모에 대한 선망이 심해졌습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부자 되기 힘들고 부모가 부자여야 자기들이 여유 있게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있는 부모는 힘이 있고 그렇지 못한 부모는 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되었습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모든 아빠는 소중하고 영광스럽습니다. 그렇게 나누는 것이 잘못이고 이미 십계명의 5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맘몬의 질서를 따른 결과입니다.

 

부모공경이 어느 정도 무게가 있는 것인지 계속되는 루터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세우셨고 자신의 영광스러움 다음으로 복종을 명하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강제적이며 성취되어야 것이라면 부모의 뜻과 말씀보다 높이 존경받아야 것은 아무것도 없다.(116) “부모공경은 카투시안 수도사들의 모든 거룩함보다 낫다. 그들이 비록 금식하며 끊임없이 무릎 꿇고 기도하며 스스로를 부정한다 할지라도... 이런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 세상의 곤궁이요 불행한 맹목이다. 악마는 그렇게 거짓된 경건과 자기 스스로의 업적의 영광으로 우리를 속인다.(120) 산속에서 수도하고 있느니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낫고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루터의 십계명 강해 가장 많은 조항을 부모공경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1계명에서 4계명 해설이 102 조항인데 반해 부모공경 계명만 무려 75 조항입니다. 그만큼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권위와 질서

 

종교개혁자들은 5계명에 대한 해석을 세속 질서에 대한 존중으로까지 나아갔습니다. 루터의 해설입니다. “이 계명에 의해서 우리는 종류의 아버지를 갖는다. 육신의 아버지와 공직의 아버지이다. 가족을 돌보는 아버지와 나라를 돌보는 아버지이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인도하는 영적인 아버지가 있다.(158) 모두 종류의 부모입니다. 육신의 부모, 통치 질서, 목회자와 교사입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점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두신 사람들을 우리는 존경하며 경의와 복종과 감사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인 사람은 이유 없이 거룩한 칭호를 가진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어떤 신적인 것을 그에게서 인정해야 한다. ‘왕’이나 ‘주’가 되는 사람도 하나님의 영예에 어느 정도 참여한다.(.8.35)

 

인간 사회에서는 권위와 질서가 필요합니다. 권위와 질서는 먼저 가정에서부터 배웁니다. 가정에서 질서와 권위를 배운 사람들은 세상에서도 질서를 따릅니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의 어른에 대한 존경도는 매우 낮습니다. 매우 반항적이고 저항적인 사회입니다. 부모나 가정으로부터 제대로 질서와 권위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통계지만 2001년도에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에서 동아시아 17개국 1 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적이 있습니다. 어른들에 대한 존경도를 묻는 질문에서 한국의 청소년들은 13%만이 ‘매우 존경한다’고 답했는데, 이는 17개국 평균 72% 훨씬 미치는 꼴찌의 기록이었습니다. ‘전혀 존경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20% 17개국 평균 2% 열배에 달했습니다. 십여 조사지만 요즘도 이에서 차이는 없을 같습니다.

 

권위에 대한 인정이 없으면 무질서한 불안한 사회가 됩니다. 대통령의 권위, 판검사의 권위, 사장의 권위, 목회자의 권위가 인정될 질서 있는 사회가 됩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국민들이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권위의 당사자도 권위를 남용하거나 스스로 훼손하는 일을 가볍게 여긴다는 점입니다. 잘잘못은 지적할 있지만 자리마저 무시한다면 사회의 질서는 흐트러지고 것입니다. 권위를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 영혼도 불안해집니다. 우리 영혼을 통제할 있는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의 출발은 부모 공경을 통한 제대로 권위를 배우지 못한 점에서 기인한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라의 권위에 무조건하고 순종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붙입니다. “우리에게 대한 명령은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만 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율법을 어기게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부모가 아니고 우리를 참아버지에게 복종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외인이라고 인정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 군왕들과 귀족들과 밖의 각종 장상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기독교강요』 .8.38) 부모 공경이나 통치질서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는 됩니다. 벗어나면 거부할 있습니다. 부모공경을 그렇게 강조했던 루터도 아버지 한스의 뜻을 저버리고 법학도의 길이 아닌 사제의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부모 공경은 마땅히 해야 바이지만 말에 무조건 순종할 수는 없고 판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부모공경이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이유도 이와 유사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싶은데 그럴 없는 경험 때문입니다. 부모의 월권입니다. 루이 쉬첸회퍼는 독일의 저명한 심리학자입니다. 그는 『당신은 어떤 어머니입니까?』란 책에서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어머니의 유형을 4가지로 밝혔습니다. 권력형 어머니, 자기도취형 어머니, 희생형 어머니, 애정결핍형 어머니입니다. 자녀들은 대부분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가장 많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들의 잘못된 애정 표현 방식이 자녀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권력형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행하는 어머니입니다. 자녀의 사생활까지 통제하려 하며 폭력을 통해서라도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이런 어머니에게서 자란 아이는 매사에 소극적이고 자기주장이나 표현능력이 부족하게 됩니다.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증오하고 그것이 세상을 향한 증오나 냉소, 또는 폭력으로 표출됩니다.

 

번째는 자기도취형 어머니입니다. 자녀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유형입니다. 자기 못다 이룬 꿈을 성취하는 도구로 자녀를 이용합니다. 유형은 목표 지향적이지만 권력형처럼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자녀는 어머니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자기의 꿈이나 개성, 달란트를 피울 없습니다. 항상 자기 원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는 결핍감을 느낍니다.

 

번째는 희생형 어머니입니다. 자신이 희생당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녀들을 자극합니다. 한국사회에서 많은 유형인데 주로 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에 발생합니다.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란다. 나는 약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란다. 너는 나를 도와줘야해’고 말하면서 자녀의 죄책감을 자극합니다. ‘나는 때문에 시간도 쏟았단다. 때문에 내가 다른 것도 안하고 너를 위해서 모든 시간과 정성을 부어놓았단다.’고 말하면서 자녀를 붙잡으려는 어머니상입니다. 이로 인해 자녀들은 무거운 책임감과 끊임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정상적인 유년기를 박탈당합니다.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어머니에게 내가 최고로 잘해 야지.’하는 미덕의 가면 속에서 사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며 삶에서 우울증과 혐오감을 가지고 삽니다.

 

마지막으로 애정결핍형 어머니가 있습니다. 유형은 차갑고 냉정하며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랑을 표현할 줄도 모릅니다. 칭찬에 인색하며 감정을 억제합니다. 스킨십을 모르며 자녀들에게 무관심하거나 편애로 대합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감정표현 능력이 부족합니다. 냉혹하며 잔인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부모로서 공경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 부모가 되란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라는 직임을 맡기신 것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6:4) 자기 감정 기분 의지가 아니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부모도 자녀들이 공경할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약속 있는 계명

 

십계명 부모공경에는 약속이 딸려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 바로 장수의 약속입니다. 신명기에 있는 십계명에는 복이 하나 붙습니다. “너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땅에서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5:16)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6:2-3) 말씀합니다. 여러분 받고 싶습니까? 기도보다 헌신보다 헌금보다 부모공경이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착한 마음에 반드시 보답하십니다. 성경의 정경에는 들지 않았지만 외경 ‘집회서’가 있습니다. 비록 외경이었지만 초대교회 교인들은 헬라어로 기록된 외경을 많이 읽었고 대신학자 어거스틴도 많이 인용했습니다. 그중 부모공경과 관련된 계명입니다. 집회서 3장에 있는 내용입니다.

 

3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4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5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받아들여진다. 6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기울이는 이는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12 얘야,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13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힘을 다하여라. 14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혀지지 않으니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15 네가 재난을 당할 네가 기억되리니 죄가 따뜻한 서리처럼 녹아내리리라. 16 아버지를 버리는 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와 같고 자기 어머니를 화나게 하는 자는 주님께 저주를 받는다.

 

말씀을 들으니 저도 찔리는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만큼 부모 공경에 대해서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죄용서도 기도의 응답도 위험에서 건짐과 장수의 복을 받는다 약속합니다. 십계명은 마땅히 행해야 내용들이지만 부모공경에는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축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20:12/ 양인국목사

2021-12-11 08:47:50

 

1.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가정과 관련하여 주신 말씀들을 듣기 원한다. 지난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는 주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자녀들이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부모로서 마땅히 가르쳐야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들었다. 오늘은 번째 시간으로 자녀들이 부모를 위하여 마땅히 행해야 것들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 말씀은 자녀로서 부모에게 마땅히 행할 일은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신약도 구약과 동일한 사실을 말해 준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계명이니 이는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6:1,2)

 

특별히 우리는 본문이 십계명 중의 하나라는 사실과 그리고 십계명 중에서도 번째 돌판에 기록 계명들 가운데 번째로 기록된 계명이라는 것을 주목한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세상에 사는 동안 반드시 지켜 행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가지 계명 중의 하나라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가운데 행해야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번째 판에 기록된 계명들 가운데 번째 계명이라는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고 또한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합당한 삶을 수도 없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5계명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더해 갈수록 세상의 풍조에 영향을 받아 부모를 공경하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멀리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5계명에 대하여 가지 관점에서 중요성을 마음에 새기기 원한다. 하나는 이것은 십계명 중의 하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도 언젠가는 부모가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도 언젠가는 부모가 된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5계명에 따라 살지 않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부모들이 직면해 있는 불행이 우리의 불행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분문은 자녀로서 부모를 위하여 마땅히 행해야 일과 그리고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된 약속으로 구성 되어 있다. 자녀가 부모를 위하여 마땅히 행할 일은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에게 “네 부모를 안에서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공경(דבכ)”이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무겁다(,be heavy)” “존경하다(be honour, reverence)” 등의 뜻이 있다. 성경에서 말이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면 다양하다. 본문에 언급된 것처럼 자녀가 부모를 대할 때의 태도를 표현하는데 사용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신을 대할 때도 말을 사용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공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고(3:9, 43:23), 또한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할 때도 공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11:38),

 

물론 종이 주인을 대하는 태도 역시 공경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고(1:6),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도 공경이라는 언어로 표현하였다. 실례로서 다윗은 사울에게 쫓길 암몬왕 나하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그로부터 입은 은혜를 생각하고 조문사절을 보냈다. 성경은 이와 같은 다윗의 행위를 그에 대한 “공경”이라고 말하고 있다(삼하10:3).

 

이와 같은 용례들을 생각할 공경이라는 말은 사람을 대할 평범한 태도를 대하는 것을 표현하는 언어이기보다는 특별한 태도를 대하는 것을 표현하는 언어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을 일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구별된 특별한 태도로 부모를 대하는 것이라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공경할 열매를 드리는 것처럼 부모님께 무엇을 드리든지 최선의 것을 드린다면 행위가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것이고, 종이 주인을 대할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처럼 부모를 대할 특별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고, 은혜를 입은 자가 은혜를 베푼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고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대할 그것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가 부모를 공경할 축복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 여기 “생명이 길리라”라는 말씀은 “오래 산다”는 의미보다는 “복되게 산다”는 의미다. 신약에서는 말을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라는 말로 표현했다(6:2).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나와 부모님 모두가 복된 삶을 사는 길이다.

 

실제로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할 부모님은 복된 삶을 있다. 그리고 우리가 부모를 공경할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심으로 우리 역시 복된 삶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과 부모님 모두 복된 삶을 상실해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을 부모님을 불행해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하여 우리 역시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해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인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오늘의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노인의 문제다.

 

우리의 부모들 가운데 대부분이 외롭게 살고 있고, 경제적인 빈곤 가운데 살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노인들 대부분이 존재감을 상실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보다 불행한 삶이 있겠는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불행은 결국 우리가 5계명에 따라서 살지 않음으로 인하여 오는 불행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불순종이 바로 부모님들을 불행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행은 부모님들만의 불행으로 끝나는 않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다음 세로로 대물림 되는 불행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부모의 위치에 서게 되고 우리의 자녀들도 언젠가는 동일한 위치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의 부모들이 살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외롭고, 빈곤하고, 존재감을 상실한 살게 것이라면 그리고 동일한 불행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대물림 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이와 같은 불행을 가져다주는 저주의 고리를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동일한 불행이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현실적인 것이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저주의 고리를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불행은 계속 대물림이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불행을 가져다주는 저주의 고리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리를 끊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기 위하여 먼저 생각해야 것들이 있다. 세상에서 부모와 자녀관계는 가장 가까운 혈육 관계 일뿐만 아니라 친밀해야 관계인데 “어째서 이런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 되지 못할까?”이다.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것들 가운데 중요한 가지를 든다면 하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문제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문제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분주함일 것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문제는 그릇된 전통으로부터 내려온 고질적인 문제라고 있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박해했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두려웠고 또한 함께 살다는 자체가 불편함이었다. 그래서 며느리들은 있다면 시어머니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계가 서로에게 필요한 관계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때만 이루어질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 역시 삶의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함으로만 해결 있다. 소유지향적인 삶으로부터 가치 지향적인 삶으로 삶을 재정립할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자유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소유지향적인 삶을 사는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필요이상의 고비용을 지불해야 것이고 이와 같은 삶을 지속하는 부모를 위해 지불할 경제적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치지향적인 삶을 산다면 가족이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복된 삶을 있을 것이다. 분주함의 문제도 생각을 바꾸면 해결된다. 분주하기 때문에 부모를 모실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녀는 섬기는 자로 그리고 부모는 섬김을 받는 자로 규정했기 때문에 오는 문제다. 자녀가 분주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짐을 덜어 준다면 오히려 부모와 함께 하는 것은 자녀에게 힘이 것이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현재 자녀와 부모 사이에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새롭게 접근한다면 대부분의 문제들은 해결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로 접근한다면 가정의 형편에 따라 부모를 공경하는 방식도 다를 있을 것이다. 만일 공간적으로 함께 하기 어려운 가정은 서로 다른 공간에 살면서 함께 있는 방식을 찾을 있을 것이다.

 

2016년도 가정의 달을 맞이하며 우리 모두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는 부모의 문제 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이고 우리의 다음 세대의 문제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기 원한다. 이것은 우리가 5계명에 따라 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에서 우리가 우리의 생명도 길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오늘의 우리는 5계명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우리의 부모들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고 우리 역시 이와 같은 불행한 삶을 살게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도 동일한 길을 걷게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이처럼 모두를 대대로 불행하게 하는 저주의 고리를 끊는 일이야 말로 우리가 해야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가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저주의 고리를 끊고 5계명에 따라 산다면 모두에게 다시 복된 삶이 회복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5계명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있도록 지혜를 주심으로 계명에 비추어 오늘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이해할 있게 주시고 또한 고통으로부터 자유할 있는 길을 보게 주옵소서. -아멘-

 

 

 

 

부모 공경 /20:12/ 배혁목사

2021-11-21 05:03:55

 

부모는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입니다. 땅의 모든 사람들이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 받아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부모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특별히 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식들을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십계명에 분명히 기록하고 계십니다. "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에 나타난 개의 계명을 보면 크게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앞의 네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지켜야 일이고, 뒤에 여섯 개의 계명은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지켜야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지켜야 계명 중에서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것이 부모에 관한 계명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학창시절에는 학교에 다니면서 평생을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는 평생을 함께 배우자를 만나고 결혼해서는 자녀를 만납니다. 직장에서는 나의 생계를 좌우하는 상사들을 만나고 동료들을 만납니다.

 

이래저래 만난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때로는 이름도 헷갈리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관계가 있어도 중에서 가장 으뜸되고 기본적인 관계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인 것입니다.이러한 부모님을 대할 때에, 한결같게 대하기 보다는 어떨 때는 좋았다가 어떨 때는 싫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부모님 중에 특히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시간과 함께 변한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를 전능한 존재로 여긴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전지전능하다. 모르는 것도 없고, 못하는 것도 없다. 힘도 되게 세다."그러다가 십대가 되면 바뀝니다. “아빠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같고 구식이다.이해할 수가 없어" 이십대가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제법 아는 것도 있는 같고, 괜찮은 사람같다." 삼십대가 되면서 어떤 결정할 문제가 있으면, "아버지에게 의논하고 싶다." 생각한다고 합니다. 오십대가 되면 "역시 아버지는 훌륭했다." 그리고 육십이 넘으면 "나는 아버지만 못하다. 아버지는 정말로 훌륭하고 모든 것을 아는 분이었다." 라고 여긴다고 합니다. 사람의 성숙도에 따라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부모님에 대한 한결 같은 태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는 마땅히 공경의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성경에서는 부모를 훼방하는 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부모님이라고 하는 존재는 사실 공경해야 분이기도 하지만, 권위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어떻게 공경할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경에서 부모님을 어떻게 대하라고 하는지를 살펴 보면서, 우리 모두에게 계신 부모님에 대해서 어떻게 공경할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먼저 성경은 부모를 기쁘게 하라고 합니다.

 

부모들의 기쁨은 자녀들이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희생하며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고, 자녀의 좋은 진로를 위해서 헌신을 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자녀들은 부모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당연히 희생해야 사람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를 부모를 기쁘시게 드리라고 합니다.

 

잠언 23: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그 어떤 사람보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자녀의 도리인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 중에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꿈이 있는데, 그것은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선장이 되기 위해서 먼저 선원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짐을 꾸리고 하인들과 같이 배에 오를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님을 만나서 자신이 배를 타겠다는 계획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워싱턴의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못하시고, 아들의 손을 잡고 그대로 눈물을 흘리며 우시더랍니다. 워싱턴은 자신이 선원이 되기 위해서 떠나는 모습을 보시고 슬퍼하시는 어머니를 보고서 생각했습니다.

 

'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정도로 슬프게 하면서까지 내가 꿈을 좇을 있겠는가? 생각하면서, 선장이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에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잠언 17:25절에, “미련한 아들은 아비의 근심이 되고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누구보다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 분이 바로 부모님이십니다. 다른 사람은 기뻐하는데 부모님께서 근심하신다고 하면 그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한국 속담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지는 자식을 말하고, 바람은 걱정을 말합니다. “자식이 많은 집에 걱정이 끊임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녀가 많건 적던지 간에 가정마다 자녀로 인하여서 근심하고 걱정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미국에 사는 것도 부모님에게는 걱정이 것입니다. 자녀의 가정은 평안한지 걱정하십니다. 자녀의 건강도 염려스럽고 하는 일은 되고 있는지 걱정합니다. 미국에 자연재해나 사건이 터졌다고 하면 그것이 어느 지역이던지 간에 자식은 다치지 않았나 싶어서 전화하시는 분이 부모님이십니다.

 

세상에 있는 누구보다 자녀에 대해서 관심하며 걱정하시는 분이 부모님이실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린 적은 언제 있었습니까? 염려하지 않으시도록 자주 연락도 드리고, 집안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들을 함께 나눈다면 정말 행복해 하실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자가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인 것입니다.

 

 

2.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님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돌보아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19:3절에, “너희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부모가 공경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명기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경홀하게 가볍게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마땅히 공경과 경외를 받아야 대상이고, 만약에 그렇게 대하지 않는 자식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서서 자녀를 상대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살다가 보면 부모를 경홀히 여길 만한 때가 옵니다. 부모님께서 연세가 드시게 되면 힘이 없게 됩니다. 육신적으로도 힘이 없어집니다. 경제적인 힘도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경제적인 힘이라고 있는 부모라면 자녀들이 무시를 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물질을 끝까지 잡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도 또한 가련한 일입니다. 부모에 대해서 경홀하게 여기게 됩니다. 공경과 경외의 마음은 없어지고, 부담스럽게 여기는 일까지 생깁니다. 이럴 때에 더욱 부모님을 공경하며, 돌보아 드려야 합니다.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논어라는 책의 위정편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맹무백이라는 사람이 공자에게 ''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때에 공자왈, “부모는 오직 자식의 병을 걱정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효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동문서답과 같은 대답이라고 여겨지지만, 효는 결국 부모가 자식의 병을 걱정하듯, 자식이 부모를 걱정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병을 걱정합니다. 병에 들면 그것으로 인해 안타까워하고 자신이 아파하고 옆에서 자식이 낫기를 바라면서 밤을 세우는 것입니다. 효는 자식이 오직 부모의 병을 걱정하는 것으로 바꿀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걱정하면서, 병이 드시거나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을 때에 그것을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며 돌보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부모님을 경홀하게 여기면, 부모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보응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나의 부모님이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관심하시고 책임지시는 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식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부모님이 어떠한 형편에 있던지, 부모님을 한결같이 공경하며, 귀하게 여기며, 최선을 다해서 돌보아 드리는 자녀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부모와 자식간에 세대차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에 순종한다고 때에 공감이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학력이 자식보다 모자를 때에 부모님의 말씀을 업신 여길 때도 있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며 부모님의 마음을 속상하게 드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잠언 23: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 때에 대를 이을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아들은 보통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없이 번창할 것이라고 했는데, 아들 이삭을 통해서 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대를 잇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2:2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십니다. 이삭에게는 자신이 제물이 것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모리아산에까지 이릅니다.

 

22:9-10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자신의 아들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하려고 했습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대단하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순종도 대단한 것을 있습니다.

 

이삭은 당시의 나이 20 전후의 젊은이였던 것입니다. 100세가 훨씬 넘은 힘없는 아버지를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있는 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제물로 죽이려는 것이 어디를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연세가 너무 많이 드셔서, 혹시 미친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죽이려고 묶어서 제단 위에 올려 놓는 아버지를 미쳤다고 여기지 않고, 그래도 공경하며 순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서, 스스로 묶임을 당했고, 스스로 번제단에 올라서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민족을 이루셨고,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골로새서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도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전에 어머님을 여의신 집사님께서 이런 메시지를 보내 오셨습니다.

 

“살아계실 기회가 때마다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 부모님께 해드리세요. 지나고 나면 후회와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아무리 우리가 부모님께 해드려도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부모님께 받은 사랑과 헌신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세상이 부모를 경홀히 여기고, 불순종하고, 남남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자녀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은 자녀에게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주신 분입니다. 이러한 부모님들은 당연히 공경받아야 되고, 효도를 받으셔야 분들이십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부모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높여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서로 우애함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고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으로 보상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정들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부모를 경홀하게 여기고, 불순종하며, 불효하는 풍조를 이삭과 같이 끊어 놓을 있는 가정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우리 자녀들이 믿음의 유산들을 이어가고,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복이 누려질 있는 자녀들 또한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17, 6:1-9/, "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정준모목사

2019-02-02 05:54:02

 

오늘은 다섯번째 계명인 부모 공경, 효에 관한 계명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라는 계명입니다. 우리 말에는 부모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모는 호칭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호칭도 됩니다. 네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어머니라고 부르는 분을 공경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계명(5계명)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 중에서 계명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명을 약속이 있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6:2)

 

다른 계명과 달리 긍정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6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부정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5계명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책임만 다루고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럴까요?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에 대해 책임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5계명은 부모의 권위를 포함해서 모든 권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부모뿐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들에 대해 순종할 것인가 거역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효는 유교의 영향을 받은 동양 문화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졌을 ,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살펴본 것이 과연 기독교는 효를 중요시하는 종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였다고 합니다.

 

일단 사람들의 선입견으로는, 기독교는 서양 종교이고(실상은 서양 종교가 아님, 서양 선교사에 의해 전파되었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받음), 조상 제사를 거부하기 때문에 효를 강조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오해요, 선입관입니다.

 

성경보다 효를 강조하는 책은 없습니다.

 

십계명 중에 다섯째 계명이 효에 관한 계명인 것만 보아도 있습니다. 앞의 개의 계명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계명들이므로, 인간 관의 관계에서 지켜야 계명이 바로 효에 관한 계명인 것입니다.

 

1990 대초, 평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여, 평양 신학교를 세웠던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마포삼열)에게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데, 과연 기독교는 효를 강조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사람은 김종섭과 정익노였습니다.

 

사람은 마펫 선교사에게 묻습니다.

 

, :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는 것이 옳은가?

 

마펫 : 옳고 말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다.

 

, : 마선교사도 부모가 계시며 효도하고 있는가?

 

마펫 : 나도 부모가 계시며 공경하는 마음이 많다.

 

,: 그러면 지금 부모를 버리고 만리 타국에 있으니 이것이 어찌 효도인가?

 

마펫: 여러분,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효도요? 불순종하는 것이 효도요?

 

,: 물로 순종하는 것이 효도이다.

 

마펫: 그런데 우리 부모님이 날더러 “조선에 가서 예수교를 전하라고 하였소.(강영안, 십계명 강의, P.176)

 

말을 들은 사람은 기독교가 효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한글 개역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로 보면,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공경하라, Honor’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카베드’인데, ‘중히 여기라, 무겁게 여기라’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고 무겁게 여기고 존경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크게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5계명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였습니다.

 

에베소서6:1-2절을 같이 읽어봅니다.

 

“자녀들아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니” 여기서 동사만 뽑아보면, ‘순종하라’와 ‘공경하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부모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르라’는 계명입니다. 부모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무겁게 여긴다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 부모의 가르침에 대해 순종하는 태도를 갖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종은 특히 어린 자녀들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통해 생명을 탄생시키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계십니다. 자녀를 낳아서 기르는 것이 얼마나 수고인지는 아이를 낳아서 길러본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엊그제도 어떤 자매가 딸을 낳았는데 전날 밤에 들어가서 밤새 씨름하다가 다음 새벽에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가 어떤 사람이든,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것만으로 감사해야하며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적이었다라는 사실입니다. 2: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어머니는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잠언서에는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8, “내 아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라”

 

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둘째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뜻은 부모가 나이가 들었을 때에 부모를 부양하고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진국에서는 연금이나 국가의 보조금을 받는 경우가 있지만, 옛날에는 자녀들이 봉양하지 않으면 늙은 부모들은 생계가 불가능하였습니다.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성인 자녀들에게 주시는 명령이라고 있습니다. 어렸을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공경이고, 나이가 들어서는 부모를 경제적으로 돕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어떤 가정에서는 경제적인 것보다도 심리적 고독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몸이 쇠약해져 가면 심리적 고독감이 심해진다고 합니다.

 

양로원이나 요양원에 가서 산다고 해서 외로움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자주 찾아뵙고, 자주 전화를 하고, 자주 안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물이 아니라고 해도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드려서, 자식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다라는 느낌을 갖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효에 대해서는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5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풀어서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약속한 최고의 축복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비결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핑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효자에게는 무서운 저주의 말씀이 있습니다. 불효자에 대한 벌은 구약의 율법이 한국의 전통적 관습보다 엄격합니다.

 

21:15,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21:17,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예수님은 “누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르반)라고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사람”이라고 질책하셨습니다.(15:3-6)

 

부모 공경 계명은 사람이 바꿀 없는 하나님의 계명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문화가 바뀌어도 바뀔 없는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5명은 자녀들에게만 주는 계명은 아닙니다. 부모에게도 주는 명령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에게 존경받는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자녀들에겐 부모에게 순종과 공경을 명령하고, 부모에겐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양육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녀들을 양육해야 할까요? 에베소서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바울 사도는 자녀를 양육할 마음에 상처를 남겨 주어서는 안되며,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명기6 쉐마에서는 부모가 특히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 교육의 장소는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집에 있을 때에든지 길을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장소나 시간을 불문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모의 자녀 교육은 본을 보이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로 아무리 가르쳐도 부모가 본을 보여주지 않으면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특히 부모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6:4-9절을 읽어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그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부모 마음에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해도 자녀들만은 바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잔소리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녀 교육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부모가 말이 아닌 본을 보일 ,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부모가 인색하면 아이들도 인색해 있습니다. 부모가 돈돈하면 아이들도 물질에 얽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거짓말 하면, 아이들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부모가 다른 사람들 칭찬하지 않고 험담하는 것을 많이 보여주면, 아이들도 보고 부정적인 사람, 비판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모가 나그네를 대접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을 보이며 자녀도 커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뭐든지 부모를 보고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기 전에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 본을 보이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에서 놓을 없는 것이 훈계, 또는 훈육입니다. 잠언서에도 훈육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그런데 징계할 조심해야 점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해야지 감정적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비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잠언19:18절에서도 “네가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훈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문제는 방법론입니다. 어떻게 훈육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벌을 주어야 , 지켜야 원칙이 있습니다. (J. John, 십계명, P.150)

 

l 마음의 상처를 주면 안된다. 때리지 않더라도 모욕만으로도 아이가 상처를 입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l 화가 상태에서 훈육해서는 된다.

 

l 부부가 합의한 내용으로 훈육해야 한다.

 

l 아이의 잘못에 걸맞는 훈육이어야 한다.

 

l 기존에 정한 한계를 아이가 명확하게, 의도적으로 어긴 경우가 아니라면 훈육해서는 안된다.

 

l 훈육의 취지를 설명해야 한다.

 

l 잔인한 훈육은 된다.

 

l 훈육한 다음에는 바로 사랑을 확인시켜 줘야 한다.

 

l 아이가 벌을 받으면 대가를 치른 셈이므로 다시 언급하면 된다.

 

 

 

건강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가지 필요한 요소가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저는 가지 정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가정엔 수용, 용서가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완벽한 부모도 없고, 완벽한 자식도 없습니다. 가정에서 받아주지 않고, 가정에서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디서 용납받고 어디서 용서를 받을 있겠습니까? 것이 있다면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빨리 풀어야 하며 먼저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자신을 위해서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이 미운 감정의 노예가 됩니다.

 

부모에게 많은 상처를 받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부모를 용서해야 합니다. 자녀 때문에 상한 부모들도 있습니다. 자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화해하십시오.

 

둘째로, 많은 대화가 필요합니다. 정말 바쁜 시대가 되었지만, 가족 간에 많은 대화를 해야 하겠습니다. 통계에 의하면(미국) 아버지가 자녀들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하는 시간이 하루 평균-38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J. , 십계명, p. 183)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부부 간의 대화는 얼마나 하십니까?

 

셋째로, 건강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특히 자녀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의 아이들은 부모에게 최우선적으로 바라는 - 무슨 돈도 아니고, 휴가 멀리 여행 가는 것도 아니고, 제발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이 좋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끔 어떤 집안에서는 아이들 때문에 부부가 싸웁니다. 아이들을 위해 다툽니다. 아이들 교육 문제로 부부가 다투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겠어요?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살면 소원이 없겠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5계명은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책임에 관한 계명이지만, 나아가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권위에 대한 태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정 밖에서 학교나 교회나 직장, 국가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적인 태도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태도를 가질 것인가?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계명을 지키려면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 순종적인 성품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왕이시면서도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나귀 새끼를 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면서도 참으실 정도로 온유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순종적인 태도를 얼마나 강조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역하는 것은 우상 숭배와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삼상15)

 

부모와의 관계에서 순종해야 아니라, 국가의 권위에 대해서도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13:7, “모든 자에게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종들에게 명하길, 상전들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고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고 했습니다.(6:5,7)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어머니는 일찍 대가족에 시집오셔서, 온갖 고생을 다하셨습니다. 절구에 방아를 찧어서 식사 준비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둘째 며느리이셨기 때문에 시부모를 모시지 않아도 되는데, 시부모도 모셨습니다. 자녀를 둘도 아니고 아홉을 낳아 기르셨습니다.

 

제가 특히 어머니에게 감사드리는 것은 제가 목사가 되겠다고 결정하고 신학교를 가기로 했을 , 처음엔 반대하셨지만,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아시고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걸어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의 교회를 줄기차게 다니시면서 저를 위해 많은 기도를 주셨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버지께서 성경책을 아궁이에 넣은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목사가 되려는 아들을 위해 신앙을 지켰고, 중보기도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없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자녀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계명 앞에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계명은 부모를 위한 계명이면서 자신을 위한 계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딸린 계명입니다.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축복이 어떤 축복인지 우리는 정확히 몰라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에겐 기억하시고 반드시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기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5계명을 지켜서 땅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복들을 받으실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십계명 5 - 부모를 공경 하여라 장수하는 길이다! /20:12/ 김병삼목사

2018-06-25 10:03:33

 

12.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

 

“왜?

우리가 지난 6 동안 살펴본 계명들이 ‘부정적 명령’으로 ‘무엇을 하지 말라’였다면 오늘의 계명은 ‘긍정적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긍정적 명령은 다음 주에 다루게 4번째 계명과 더불어 십계명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중심에서 우리는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목적이 ‘규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십계명에 ‘자식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없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만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5번째 계명부터는 인간들의 관계에서 지켜야 것들을 말하고 있는데, 번째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그렇습니다.

 

지켜야 법을 준다는 것은 만큼 지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기념일’이 있는 이유는 그렇게 정해놓아야 만큼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꾸 잊기 때문이죠.

우리는 부모의 마음을 잊고 때가 많은 듯합니다. 세상을 떠난 황수관 박사의 영상인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예화1 황수관 박사 영상 발췌

http://manghyang21.blog.me/40207852714

황수관 박사의 아버지와 아들과 까치의 이야기이다

83 아버지와 53 아들이 마루에 함께 앉아 있다가 마당에 까치가 날아오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으셨다. “얘야, 저것이 무엇이냐?

아들은 대답한다. “까치예요”

조금 있다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으신다. “얘야 저것이 무엇이냐?

아들은 대답한다. 퉁명스럽게... “까치예요”

 

조금 있다가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으신다. “얘야, 저것이 무엇이냐?

아들은 짜증난 듯이 말한다. “저거 아까 까치라고 말했잖아요.

아버지가 번째 아들에게 물으신다. “얘야 저것이 무엇이냐?

아들은 버럭 화를 내며 대답한다. “아까 까치라고 말했잖아요. 그것을 그렇게 알아들어요?

 

순간 서러워진 아버지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 옛날 일기장을 꺼내 오셨다.

‘아들이 마당에 까치가 날아오자 아들이 묻는다. “아빠 저게 뭐예요?

나는 말해 주었다. “응 저건 까치란다”

조금 있다가 아들이 묻는다. “아빠 저건 뭐에요?

나는 대답해 주었다. “응 저건 까치란다.

 

아들은 조금 있다가 같은 질문을 한다. “아빠 저건 뭐에요?

이렇게 아들은 23번을 나에게 질문을 똑같이 했다.

아들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대답해 주고는 안아 주었다.

글을 읽은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죄스러운 생각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진재혁 목사가 십계명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이와 비슷한 예화를 사용 했던 적이 있습니다.

금융그룹에서 광고로 나왔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40개월 미만의 아빠들을 불러서 몰래 카메라를 집어넣고 그들에게 시험을 해봅니다. 아동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아버지의 역할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아버지들에게 설문조사를

시킵니다. 아버지 분이 사무실에 들어와 설문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설문지에 답하기 시작합니다.

 

설문지는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은? 아이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신 적이 있습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웃으면서 답을 신나게 써내려가는 아빠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핸드폰 책상 지갑에 아이의 사진이 장이나 있습니까? 전화를 뒤져서 장이나 있는지 뒤져보기도 하면서 웃으며 기쁨으로 답을 써내려갑니다. 최근에 아이를 안아본 적이 있습니까?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적이 언제입니까?

 

기쁨으로 웃으며 모든 설문을 끝낸 아빠들에게 설문지를 걷고 다른 세트의 설문지를 줍니다. 이번에도 똑같은 설문지의 질문입니다. 그런데 대상이 달랐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은? 멈칫합니다. 아버지가 자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까? 침묵이 흐릅니다. 핸드폰 책상 지갑에 아버지 사진 장이나 있습니까? 가슴을 움켜쥡니다. 최근에 아버지를 안아본 적이 있습니까? 흐느끼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적이 언제입니까?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립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오늘의 계명은 인간들이 지켜야 하는 계명의 번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까요?

또한 인간의 계명 중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번째인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의 시작이 ‘하나님 만’을 섬기는 것이었다면, 인간들의 관계에 있어서 시작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므로, 우리가 하는 일들의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듯이,

부모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하는 일들이 세상에서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과 부모가 모두 자격이 있기 때문에 공경하고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본의 감독 배우인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평생을 함께 살다보니 가족이 ‘원수’라는 생각이 때가 있는 같습니다. 힘든 것은 가족이 아니면, 그저 지나가 버리거나 참으면 되는 일이지만 가족은 함께 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래서 어른들이 이런 말을 같습니다. ‘전생의 원수가 이생에서 가족으로 만난다.’라고 말이죠. 오늘 우리가 다섯 번째 계명을 심각하게 다루어야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인데,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현상 중에 하나가 ‘존속 살해’라는 것이죠.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2008 4% 차지하던 존속 살해가 2010년에는 5.3%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2009년을 기준으로 미국이 2% 프랑스가 2.8% 그리고 영국이 1% 것에 비교하면 수치가 훨씬 높습니다.

[데칼로그]에서 김지찬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외국보다 가족끼리 부대끼는 비율이 높다 보니 갈등이 커질 위험이 높다는 지적에서, 생명을 주고받는 사이인 부모와 자녀관계도 얼마든지 천박해질 가능성이 있고 혼돈과 무질서에 휩싸일 위험이 크다는 점을 있다.

 

오늘날 가족관계에서 무서운 것은 단순한 ‘살인’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방치’하는 무관심의 문제가 아닐까요? 언젠가 [낮은 울타리]라는 잡지에 실렸던 글을 소개 합니다.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거리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이가 칠십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살을 것이었습니다.

앰뷸런스가 와서 할머니는 병원으로 실려 갔고 뒤이어 달려온 경찰들이 사람들을 해산시키고는 자살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할머니의 아파트로 올라갔습니다.

실내는 온갖 고급도구와 사치스런 장식품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왠지 썰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정도 살림으로 보았을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닌 같고, 건강상의 이유나 불치병 때문일지도 몰라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할머니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주 건강했다고 말했습니다.

골똘하게 고민하던 경찰관은 책상을 뒤져보았습니다. 그곳에서 할머니의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수첩을 펼쳐본 경찰관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하고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의 수첩엔 365 동안 똑같은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오지 않았음.

 

오늘 다섯 번째 계명이 우리들에게 도전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혹시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약속이 있는 계명으로 주셨다는 것은, 만큼 지키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라는 반증이 아닐까요?

 

부모는 사랑의 대상이 아닌 공경의 대상!

“네 부모를 공경하라!

성경은 여러 군데서 “사랑하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 . 그런데 어디에서도 “부모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부모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공경과 경외의 대상이라는 말이지요.

어떤 목사님이 설교에서 인용된 예화인데, 오늘의 계명, 그리고 ‘부모 공경’과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텍사스의 사내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30 그는 무일푼으로 죽었는데 그의 유언은 자신을 고향 텍사스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분개했다.

“그 사람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 그가 아버지로, 어머니의 남편으로 우리에게 해준 것들이 뭐가 있어? 사람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시체에 수고와 돈을 들여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신앙심 깊은 큰아들은 자기 트랙터와 농기계 등을 저당 잡혀가며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었다. 장례를 치르고 큰아들은 동생들에게 말했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쓰여 있을 ‘어떤 부모’라는 말은 없단다.

 

“경외”라는 말은 구약에서 여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어는 유일하게 “하나님”에게 대한 것입니다. 잠언 1 7절과 29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와 멸망의 원인이 것을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기 때문이다”(왕하17: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만 경외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입니다.

레위기 19 3절에 보니까

“너희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하나님과 함께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부모는 경외해야할 대상일까요?

이유는 바로 부모는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을 어는 정도는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으로 인하여 내가 존재하고 있으며, 때문에 나의 삶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신앙에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불경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불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책임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이죠. 요한복음 13 1절에 보니까, . .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의 존재가 가능케 되는 , 축복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과 부모의 동일한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큼이나, 부모가 자식을 향해 얼마나 많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를 아시는 분이시지요.

 

분당 중앙교회를 담임하는 최종천 목사님을 초청해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새벽 예배를 아이들의 이불을 덮어주고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식들은 모르지만 언제나 지켜보고 챙기는 아버지의 심정에서 깨닫게 하나님의 사랑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우리를 덮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노라고. .

언젠가 제주도로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갔는데, 도착하는 순간부터 쫑알쫑알 대고 싸우는 아이들을 챙겨 가지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래 하나님은 웬만큼 깽판을 쳐도 나를 버리시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말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누구나가 경험하는 것이지만,

안에서 싸우는 아이들을 수없이 협박하면서, “너희들 싸우면 여기에다 내려놓고 거야.”라고 했지만, 번도 내려놔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너희들 셋을 때까지 기회를 준다. 그러면서 숫자를 카운트 , 번도 “하나, , 셋”을 빠르게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고 준비를 하고 계신 분이라는 놀라운 사실, 그것이 또한 부모의 사랑과 동일하다는 것이죠.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는 이유만으로, 공경 받기에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갔기에 말을 있지만,

만나교회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면서 6 동안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함께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중에 하나가 아버지와의 갈등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이전에 같은 목사이기에 목회적인 비전의 차이도 있고, 아버지와의 다른 삶의 경험들 때문에 빚어지는 문제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때에는 ‘갈등’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와 생각이 다른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보려고 했던 같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힘들어도 제가 이겼다고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국 주시는 분이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부모가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부모에게 범한 죄는 하나님께 범한 죄와 같은 형벌로 대단히 엄하게 처벌되고 있습니다. 돌로 쳐서 죽이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 15, 17절의 말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명기 21 18-21 말씀에도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취해 방탕한 아들은 투석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물론 이와 같은 규정이 실제로 적용된 경우는 아주 드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악한 자식이라고 해도 돌에 맞는 사형에 처해질 것을 알면서 자식을 고발할 부모는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잔인한 영화이지만 부모를 죽인 패륜아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죽으면서도 애를 썼던 부모의 모습이 대조가 되었던 영화가 있습니다.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를 통해 오늘의 말씀을 묵상했던 권사님 이런 묵상 글을 썼더군요.

묵상1 문지윤 권사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에서 느낀 것이다.

아들은 부모님이 재산을 자신의 뜻은 상관없이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니 부모님을 살해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급기야 생각을 행동에 옮긴다.

밤에 몰래 부모님의 집에 들어가 무참히 살해하고, 중에 아들의 얼굴을 어머니는 무언가를 땅에서 주워 입으로 가져가 삼킨다.

나중에 형사가 현장검증을 하고 시체부검을 하여 어머니의 목에서 발견된 것은 아들의 부러진 손톱이었다.

아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면서도 아들의 죄가 드러날까 죽어 가면서까지 부러진 아들의 손톱을 입으로 가져가 삼키다가 죽음을 맞으며 목에 걸렸던 것이다.

사실을 아들은 순간에는 당연히 몰랐고 나중에야 알게 된다.

끝까지 악역을 맡은 배우는 아주 나쁜 아들의 역할을 연기했지만, 과연 저런 부모님에게 어떻게 저리도 악한 아들이 나올 있을까 생각되었던 영화였다.

부모님의 사랑은 한도 끝도 없다.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하는 자식에게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일 것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하다.

땅에서 부모님께 공경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기는 불가능할 같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7:11)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좋은 것을 주고자 함을 아는 나는 육신의 부모님에게도 당연히 공경을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분명한 것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었는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7 15-26절에는 열두 가지 종류의 저주받을 행동이 나열되어 있는데, 중에 제일은 우상숭배요, 번째가 부모에 대한 죄입니다.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7:16)

 

부모에게도 책임이 . . .

저는 오늘 말씀을 조금 깊이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공경’이 단순히 자녀들에게 부여된 의무의 차원을 넘어서, 공경을 받아야 하는 부모의 모습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요? 언제까지 자식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도 없고, 언제나 부모로만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가 되고, 부모도 누구의 자식이었으니까 말이죠.

5계명은 자식들에게만 주는 말씀이 아니라, 동시에 부모에게 향한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공경을 받을 있는 부모로서의 책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그리고 좋은 환경을 주었다고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식에게 공경을 받을 만한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가장 중요한 신앙 교육의 장이며, 부모는 가장 훌륭한 종교 교육가가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6 6-9,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그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제가 여러분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기에 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벌써 오래전 아이들이 어렸을 때입니다.

아이들이 기말고사를 치르는 첫날이라, 아침에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 건강하게 하시고, 공부한 대로 실력을 발휘하게 주세요”

그랬더니, 이놈이 학교에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공부한 대로 시험 보게 주세요. 그런데 공부한 것보다 조금 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점수가 좋지를 않아요. 그래서 제가 “너 설교 시간에 점수를 공개한다.”라고 했더니 협박하기를 “그러면 교회 옮길 거예요”라는 겁니다.

물론 자식이 공부를 잘하면 좋지만, 저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기도하고 시험을 보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의 자세만 가지고 있으면, 무엇이 되도 된다는 기대감이 있다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적으로 아이들을 지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부모는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있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대단히 주저하였다고 합니다. 이유는 루터가 그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신앙교육에 책임을 다할 , 자녀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부모를 공경하게 되는 원리입니다.

 

에베소서는 자녀 교육의 원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6 4절에서 (쉬운성경)

아버지는 자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화를 돋우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키우십시오.

 

사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양육하며 최선을 다한다고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양육하므로 인해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부모들의 위상이 세워지고, 부모들의 삶에 걸맞게 아이들이 자라주기를 원하는 마음들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 자녀들이 공부를 못하거나,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므로 인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자녀들을 질책하는 모습들을 말입니다.

어린 자녀들은 이런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숨이 막혀 합니다. 어쩌면 이런 부모들의 모습들 때문에 아름답게 창조된 하나님의 본성이 파괴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라고 기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녀의 부족함을 그대로 품고 사랑하는 부모가 되어서 자녀들을 훈계할 ,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녀들을 양육할 ,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로 자라나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열린 가정 소책자에 나온 아들의 눈물”이라는 짧은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환경 미화원인 아버지와 고물상을 운영하는 어머니, 그리고 외아들이 사는 가정에서 생긴 일입니다.

어느 아들이 아주 고급 상표의 청바지를 사들과 왔는데 이상하게 여긴 부모가 며칠을 추궁한 결과 아들은 “죄송해요, 버스 정류장에서 손지갑을 훔쳤어요.”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환경이 어렵다는 이유로 아들이 돈을 훔친 것이 견딜 없었고, 아들을 설득하여 경찰서에 자수를 시켰습니다.

조사를 하던 과정에서 다른 범죄 사실이 하나 밝혀지게 되었고 , 결국 아들은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아픈 일은 아버지가 아들의 행위를 마음 아파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게 것입니다. 재판이 열린 어머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 남편의 뜻대로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엄벌을 내려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판사는 아주 의외의 판결을 내렸습니다.

불기소 판정을 내리면서 판사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을 믿기 때문에, 아들이 평생 이러한 아버지의 교훈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믿기에 이런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에게 어떤 부모님이 되고 있습니까? 혹시 자녀들의 잘못을 감싸거나 모르는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키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우울하게 교회학교가 지나갑니다.

, 고등학생들이 중간고사를 치르는 주간이기 때문입니다. 시험 때가 되면 어김없이 시험에 드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학생이 청소년부에 있는 선배에게 화장실에서 몰래 전화를 했답니다. “언니, 교회 가고 싶은데 엄마가 가게 , 시험 공부하라고, 그리고 엄마는 일찍 교회 봉사하러 갔어.

세상의 행복은 공부를 잘한다고 오는 것이 아님을 그렇게 말을 해도 모르십니까?

공부만을 하도록 키운 아이들은, 이다음에 커서 절대로 부모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당신들이 언제까지 자녀들을 돌보아 주리라고 생각합니까? 결국은 당신들의 자녀에게 도움을 받아야 때가 텐데, 이기적으로 자란 아이들은 결단코 부모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다섯 번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성경은 “장수”하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6 1-3절에 보면,

 

1 자녀들아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여기에서 장수한다는 말씀은 단순히 생명이 길게 인생을 산다고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한 자식들은 다음 세대에 공경을 받을 것이며,

공경을 받도록 자녀를 교육한 부모들로 인하여 자손이 축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이지요. 십계명에 오직 부모에 대한 말씀만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 결국 가정 전체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힘들고 괴롭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당신의 부모가 공경의 대상이 된다면?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들 가운데 있는 “부모에 대한 증오심” 아니, 증오심은 아니더라도 “부모님이 공경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를 가장 힘들게 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혹시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들, 혹은 자녀들에게 불의한 일을 시키는 부모에게도 공경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공경하라”는 말과 “따르라”는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부모를 따르라고 하기 보다는 공경하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비록 부모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부모에 대한 비중을 높이 두라는 것입니다.

‘공경’이라고 번역된 말의 히브리어는 ‘카베드’(kabed)입니다 말의 근본 의미는 “무겁게 여기다” “비중 있게 생각하다” “중요하게 여긴다”라는 뜻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은, 우리의 삶에서 부모의 위치를 비중 있게 둔다. ‘부모를 고려한다.’라는 뜻이 것입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에 명령하고 있지만, 가지 예외 사항이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주안에서” 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도 보면, 부모가 자녀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경우는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예외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별하여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구실로, 부모님께 공경과 순종을 다하지 않는 구실로 삼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지 아주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부모님에게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간혹 주변에서 신앙생활을 핑계로, 부모에 대한 의무나 가정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7 9-13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9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것이 고르반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게을리 해도 된다고 정당화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바로 당신들의 부모가 하나님을 모르는 분들이라 할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의 육체적인 삶이 힘들어진다 할지라도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부모에 대한 의무를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고르반”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다. 라고 소리를 하면 물질을 가지고 부모님을 공양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당화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여러분들이 교회에 헌금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금전적으로 부모님께 봉양하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도전이 있는데,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이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소홀히 해서는 되는 성질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5 8절의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악한 자니라

 

이제 분명해 것은,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며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순종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여러분들 삶에 나타나는 순종의 흔적이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당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므로 삶에 각인되어 있는 분명한 흔적 말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힘이 없어, 자식들의 도움이 필요한 부모님에 대한 계명입니다.

* 당신들의 삶에서 부모를 위하여 삶에 상처가 경제적인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 당신들의 삶에서 부모를 위하여 삶을 희생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 당신들의 삶에서 부모를 위하여 당신들의 의지가 꺾이는 경험이 있어야합니다.

 

예화2 부모 효도 10계명

1. 부모님과 가능한 많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부모는 자식과 대화의 시간을 가장 즐거워하십니다.

2. 부모님께 일감을 드리십시오. 효도란 부모님을 방구석에 가만히 모셔만 놓는 것이 아닙니다.

3. 부모님도 취미를 가지시도록 도와 드리십시오.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즐길 있도록 하십시오. 특히 가정에서 취미 활동을 하시도록 협조해 드리십시오.

4. 여행의 기회를 드리십시오. 노인은 새로운 분위기와 경험을 즐기십니다.

5.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연세가 드시면 기억력도 쇠약해지고 마음도 소심해지고, 잔소리도 늘게 되고, 공연한 고집도 부릴 때가 있습니다. 이유를 파악하십시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미리 알아 해드리십시오.

6. 가족끼리 외출할 노부모님도 종종 모시고 가도록 노력하십시오. 어린 자녀들만 데리고 나가는 아들과 며느리에 대해 섭섭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7. 집에 손님이 오면 부모님께 먼저 인사드리도록 대화를 나누십시오. 이런 예법을 어린 손자 손녀들에게 가르치십시오.

8. 사소한 병이라도 나시면 병원으로 모시고 가십시오. 연세가 드실수록 생명에 대한 애착, 건강에 대한 근심이 많아집니다.

9. 매월 일정한 용돈을 드리십시오. 부모님의 이름으로 통장이라도 만들어 드리시면 더욱 좋아하실 것입니다.

10. 부모님께 신앙의 기회를 드리십시오. 천국의 안내자가 가장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6 17절에서 했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율법을 지키느냐 마느냐로 논쟁이 있을 , 그의 삶에 예수로 인하여 죽고, 예수로 인하여 흔적이 있노라고, 나에게 가타부타 이야기하지 말라던 자신감 있는 신앙인의 이야기 말입니다.

당신의 삶에 순종의 흔적이 무엇입니까?

“흔적” “상처”는 흘릴 때까지 반복하여, 그리고 굳은살이 박힐 때까지 반복해야 생기는 것이요,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오른손 중지에 보면, 연필을 하도 많이 써서 박힌 굳은살이 있습니다.

사람의 손과 발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를 있습니다.

12 호암상 수상자 중에 예술부문에서는 발레리나 강수진씨가 있습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인 강씨는 ‘강철나비처럼 강하고 아름답다’라는 평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쁘고 화려함 뒤에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으로 형편없이 변한 모양 사진이었습니다.

1986년에 슈투트가르트의 최연소 단원으로 들어가서 10 만에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기까지,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연습하는 날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시즌에만 150개가 넘는 토슈즈가 닳아 없어졌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로골퍼 구옥희는 하루에 1000 이상의 골프공을 쳤다는 기사를 적이 있습니다.

농구의 황제라고 불리는 마이클 조단은 고등학교 때까지 별로 이름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공하게 비결을 물으면, 그는 대답하기를 practice, practice. . .”라고 대답을 합니다.

삶의 프로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연습과, 굳어진 흔적, 그리고 피가 흐른 남는 상처를 가질 때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감정적 차원으로 끝이 난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새겨진 자국과 허리의 자국은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당신의 부모님을 위해 흘린 피와 땀의 흔적이 있을 , 우리들의 삶에 축복으로 연결됩니다.

놀라운 일은, 축복이 자손에게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 우리들의 삶의 공경과 순종의 흔적은 부모를 향한 도리를 다하는 것일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이 바로 흔적을 보면서 가슴에 새기게 되고, 따라하게 되는 축복이 임하는 것이지요.

결국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의 축복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는 것은, 부모와 자식 그리고 모든 세대 간을 연결시켜주는 아주 중요한 계명이라는 것이지요.

 

부모가 있으므로 해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인해 자녀들이 있는 것입니다. 세대 간의 관계가 아름답게 연결될 , 땅에서 장수하고 되는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들이 인간적인 자격으로 본다면, 세대 간의 연결은 끊어지고 것입니다.

부모이기에 공경하고, 부모이기에 희생하고 섬기고, 중히 여김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 길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에서 “장수의 축복”이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가문이 되는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어떠한 부모일지라도 내가 공경하고 섬기므로 자녀들이 나를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씀드리자면, 부모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공경의 대상입니다.

우리의 삶에 비중을 두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감당하십시오.

그분이 당신에게 생명을 있게 분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도 경외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당신이 존경받는 부모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로 자라기 힘들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녀에게 책임이 있듯이,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만나교회의 성도들 모두에게 장수의 축복과 땅에서 되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도 자녀들에게 경홀히 여김을 받는 부모가 없기를 바랍니다.

사람도 부모님을 경히 여기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조상관 /20:5/ 이재철목사

2015-07-30 21:15:37

 

자녀는 부모의 죄를 유전한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 20:5)

 

또한 자녀는 부모의 죄를 유전하지 않는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 18:2)

상반된 말씀이 모두 성경에 나온다. 모두 진리이다.

 

 

인간에게는 원죄와 자범죄가 있다.

원죄는... 유전하는 것이다. 연좌제가 성립 된다.

자범죄는... 유전하지 않는다. 연좌제가 성립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조상과 부모로부터 받는 영적 영향이 있다. 없겠는가?

또한 우리는 조상과 부모로부터 받는 영적 영향이 없다. 나는 새사람이기 때문.

 

 

가지 사실을 모두 인정하면서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에서 해방되었지만

완전한 해방은 천국에서 누릴 것이며,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원죄와 조상죄의 영향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은, 글의 주제는, 그래서 더욱 조심하고 탈피하자는 뜻이다!

잘못 읽으면, 모든 불행을 조상탓으로 돌리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조상의 영향을 , 간접적으로 받고 살아가는데....

성경은 거기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조상의 영향을 받음

 

사람은 조상의 저주를 3-4대까지 상속한다.

하나님은 죄인을 후손 3-4 까지 벌하신다( 20:5).

 

속담에 “어미가 어떠하면 딸도 그렇다 하리라”( 16:44)

 

“아비의 죄악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32:18)

 

 

,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주의> 요한다.

이것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해서 테두리 안에 영원히 갇혀서 살면 된다.

 

성경은 조상의 영향을 , 간접적으로 받고 사는 인간의 현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부정적 영향이라면 그것을 깨뜨리길 원하신다.

 

 

성경에 위의 말씀들이 기록된 것은

“너희는 어쩔 없다. 평생을 조상의 저주 속에 살아가라”가 <아니다>.

“너희 현실이 그렇다. 그것을 깨닫고, 그런 저주의 현실을 부단히 깨뜨리며

살아가라”이다.

 

 

하나님이 재앙을 선포하시는 것은,

재앙이 임하기 전에 빨리 돌이키기 원하시고,

그래도 사람이 미련해서 돌이키지 않고 예고된 재앙을 받게 된다면,

고난을 통해 새사람 되기 원하신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재앙을 선포하시지만,

인간이 재앙을 당하여 괴로워하는 것은 본심이 아니다.

인간이 재앙을 물리치는 것이 본심이시다.

 

(조상의 영향보다) 자신의 역량에 좌우됨

 

유다의 국운이 풍전등화처럼 위태해진 상황이었다.

나라가 어지럽고, 당장 국민들은 신변의 안전이 어렵게 되었다.

 

벌써 차례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조상 탓을 했다.

 

조상의 잘못으로 우리가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거기에 대해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비가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포도를 먹는 자마다 이가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 31:29-30)

 

 

에스겔도 똑같은 예언을 했다.

에스겔은 이미 포로로 잡혀 바벨론 땅에 살고 있던 상황이었다( 1:1).

 

여전히 사람들은 모든 현실의 불행이 조상 탓이라고 한탄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다시는 이런 속담 인용치 말라...

범죄하는 영혼이 죽으리라 ( 18:2-4)

 

 

이와 같이 사람이 잘되고 잘못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

조상에게 잘못이 있다 치더라도, 자기만 잘하면 얼마든지 회복하고 된다.

조상에게 잘못이 없다 치더라도, 자기가 못하면 얼마든지 못될 것이다.

(참조, 18:19-24)

 

 

▶과거에 얽매이지 맙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과거에 얽어매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롭게 사람들이다(고후 5:17).

 

성경에 조상의 죄의 영향을 받는다는 구절이 있는 것은,

그럴 있으므로 그것을 조심하고, 그것에서 탈피해서 살아라는 권고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조상의 저주를 포함한

모든 저주에서 자유함을 받는다( 3:13).

 

 

조상의 좋은 성격, 조상의 범죄로 인해 자손이 받는 저주,

조상의 나쁜 유전자 ... 사람은 조상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배우자를 고를 때는 가문과 근본을 중시 여겼다.

 

그러나 현재 나의 /불행을 좌지우지하는 요소는

스스로의 책임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스스로의 책임으로 조상의 부정적 영향력을 얼마든지 극복할 있다.

결국 되도 탓이요, 되도 결국 탓인 것이다.

조상 탓이 아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가정 /20:12, 6:1-4/ 이동원 목사

2014-11-28 15:39:20

 

최근에 우리 사회는 빠르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고령화 사회란 65 이상의 인구가 전체인구 수의 7%이상을 차지하는 사회를 말하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지난 2000년대에 진입하면서 65 이상의 인구 비중이 7,2% 되어 정식으로 고령화 국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금년 들어서서는 소위 노령인구가 417만명으로 집계되어 총인구의 8,7% 차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노인들의 평균 수명 증가와 가임 여성들의 출산율 저하로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급속한 속도로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201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인구 대비 노령인구 15% 소위 고령사회로 진입하게 것을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령화 사회현상이 촉진되면서 이미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노인들의 사회 보장 문제가 최대의 사회 현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의 뒤안길에서 아직도 논의되기를 기피하고 있는 최대의 숨겨진 하나의 사회 현안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소위 노인 학대의 문제입니다.

 

한국 보건 사회 연구원이 최근 전국 6 도시의 12 노인 종합 복지관을 이용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조사에 의하면 전체 응답 노인의 8,2% 무려 10% 가까운 노인들이 그들의 자녀 가족원으로부터 학대받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례들은 신문기사 제목들로 우리가 어렵지 않게 다반사로 접하는 뉴스들이 되었습니다.

 

“반찬 투정 꾸짖는 아버지 살해한 20 긴급체포”,“중풍 칠순 노모 살해한 50 아들 영장”,“꾸중들은 손자 할머니 살해”,“치매 걸린 아버지 구타 살인”, “고부갈등 고민 아들 치매 80 노모 강변에 고려장”,

 

거절당하자 어머니 폭행”, “집 팔게 인감 달라며 아버지 폭행 30 영장”,“장가 보내주지 않는다며 아버지 폭행”--

 

문제는 이런 존속 상해 살인 사건, 부모 유기 사건등의 노인 학대 사건 사례들이 극히 일부 불효자들의 인륜적 패륜행위로 행해지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노인 학대가 우리의 삶의 장에서 보편적으로 은밀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 못지 않은 빠른 사회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면 바로 1세기의 로마제국 시대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소위 로마제국이 세계를 정복하며 가져온 팍스-로마나의 식민지 문화, 개방적인 로마 문화는 당시의 기존 전통 윤리에서 사람들을 해방하기 시작했고 가정붕괴가 촉진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바울사도는 소아시아의 가장 로마적인 도시였던 에베소에서 복음을 받아드리고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들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6장에서 바울은 부모를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논하면서 이것은 약속있는 계명이라고 가르칩니다. 무슨 말입니까?

 

본래 십계명은 두개의 돌판에 나뉘어 쓰여져 모세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돌판에 1-4계명이, 둘째 돌판에 5-10계명이 쓰여졌던 것입니다.

 

첫째 돌판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지켜야 계명들(대신 윤리) 기록하고 있다면 둘째 돌판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지켜져야 계명들(대인 윤리)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5계명이 인간대 인간의 계명의 관점에서(둘째 돌판) 첫째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명에 나타난 자녀들의 부모를 향한 의무를 요약하면서 의무를 다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양적, 질적으로 행복한 웰빙 인생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양적인 행복은 장수이고 질적인 행복은 잘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 웰빙 인생을 살고 웰빙 가정을 만드는 법칙으로서의 자녀들의 부모 공경의 의무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부모 공경이 중요한 이유-무엇때문입니까?

 

첫째는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6:1 “자녀들아 주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것이 옳다”는 말은 이것이 당연한 '자연의 법칙'(natural law)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옳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에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자녀가 부모의 말을 따르는 것은 언제나 유익한 일입니다. 본래 여기서 사용된 ‘순종’이라는 단어는 “듣는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흔히 부모가 자녀들을 교훈하면서 “내 들어”하고 말합니다.

 

부모의 교훈의 충정이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부모의 말을 따르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며 상식의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법칙은 인간의 세계만이 아닌 동물의 세계에서도 일반적인 원칙으로 통합니다. 어미는 태어난 새끼를 돌보고 먹이를 주고 보호합니다.

 

어미는 또한 새끼들의 걷고 뛰고 나르고 싸우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해서 어리고 약한 새끼들은 필요한 보호와 안내와 도움과 교육을 그의 어미들에게 받습니다. 새끼들이 어미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은 생존을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순종은 자연질서의 규범으로 생존의 법칙으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전도자요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Tony Campolo) 글에 보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그가 초등학교 2학년 시절 그가 살던 집은 복잡한 도시 복판이었고 유난히 횡단 도로가 많아서 어머니는 옆집에 사는 6학년 누나에게 용돈을 주고 함께 학교로 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나가 옆에 동행하는 것을 창피하게 느낀 어린 토니는 어느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누나에게 용돈을 자기에게 주면 자기 혼자 걸어가겠다고 우겼다고 합니다. 마침내 허락을 얻어 그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보다는 일찍 학교에 혼자 등교하는 아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나중에 커서 중학생이 되었을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독립적인 소년인가를 자랑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토니의 어머니가 조용히 미소를 흘리면서 이런 말을 하시더랍니다.

 

“네가 그때 혼자 학교 가겠다고 독립 선언을 한후 너는 용돈도 생기고 자존심 세워서 편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토니야, 그때부터 2년이상 엄마는 네가 학교 나설때마다 몸을 숨기고 너를 따라 다녔고 네가 학교에서 귀가할 시간이면 나도 학교 모퉁이에 있다가 너를 따라 집으로 왔단다.

 

혹시나 혹시나 네게 엄마가 필요할 때가 있을까 해서 말이야”이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런 부모의 사랑을 알고 이해하는 인생이라면 부모에게 순종함이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둘째는 이것이 신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있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natural law) 아니라 신의 계명 신의 법칙(Divine law)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부모 공경을 자연의 법칙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신의 법칙임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본문에는 적어도 두가지 이유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한가지 이유는 명령이 우리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약속이 있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계명에는 없는 유일하게 계명에만 부연된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20:12 다시 읽어보십시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6:3 의하면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행복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이 효도하면 자동적으로 장수한다는 약속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유사한 건강과 상황이라면 부모와 축복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의 인생의 행복의 질과 양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과 비교할수 없을 것을 언약하고 보증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 신의 법칙으로서의 계명을 강조하는 이유로 바울 사도가 십계명의 5계명을 재해석하면서 자연의 법칙으로서의 순종과 신의 법칙으로서의 공경을 구별하는 것을 유의해 보십시오.

 

정말 계명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의 말을 마지 못해 따르는 수준(순종) 아닌 부모의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공경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경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카베드'(kabhed)라는 단어로 쓰여지는데 "무겁다", "무게를 둔다' 뜻으로 부모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은 인간적인 윤리 수준을 넘어서는 마음으로 부모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경험하는 번째 인간으로 그들에 대한 바른 태도를 통해 모든 인간에 대한 바른 태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대한 바른 태도를 학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들 혹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 부모와의 왜곡된 관계,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도 부모님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그분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삶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도록 하셔야 합니다.

 

저는 오늘 메시지를 시작하면서 노인 학대의 이야기을 언급했습니다만 가장 잔인한 부모 학대, 노인학대는 부모앞에서 우리가 잘못된 인생을 사는 일입니다. 그것보다 부모의 가슴을 찢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동안 따뜻한 책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철환씨의 “연탄길”에 보면 " 불빛"이라는 제목의 실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현태란 이름을 가진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고치고 친구들과 패싸움하고 심지어 절도까지--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인 아들, 언제 교도소로 들어갈지 모르는 위태 위태한 자식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마지막 충격 요법으로 아들이 교도소에 가기전 자신이 먼저 교도소에 가서라도 자식의 교도소 행을 막아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귀금속 가게에 들어가 마음에 없는 도적질을 하는체 하고 쉽게 붙잡혀 교도소에 간후 면회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아버지를 용서해라. 사는게 너무 힘들어 아버지가 순간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

아버지가 모양이니 넌들 바른 길을 갈수가 있었겠니.--그러나 한가지 부탁이 있다. 너는 꿈에라도 이런 곳을 기웃거려서는 안된다. 교도소는 인간을 처참하게 만드는 곳이란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를 면회하고 나오는 길에 어머니는 아들 현태를 붙잡고 통곡으로 절규하면서 폭탄 선언을 합니다.

 

“현태야, 말이 있다. 아버진 도둑질 같은 하지 않았어. 정말이다. 엄마가 아버지를 안다. 아버지는 절대 그런 하실 분이 아니다.

때문에 일부러 그러신 거야. 교도소가 사람있을 아니라는 너에게 보여 주려고--생떼 같은 , 거기서 젊은 시절 보낼까봐서--네가 곳에 미리 가셔서 네가 오는걸 막아 보시려고”

 

현태는 충격을 받습니다. 충격, 아버지의 희생으로 아들 현태는 날부터 마음먹고 다시 태어나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검정고시 치르고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인생의 길을 걷습니다. 작가는 이야기의 끝을 이런 말로 마무리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스스로 어둠이 되었다. 빛을 거부했던 아들의 어둠속으로 들어와 끝내는 그르치고야 그의 인생앞에 불빛 하나를 밝혀 주었다. 어둔 밤바다 같은 인생에서 표류할 때마다 두고 두고 바라 불빛, 아버지, 아버지--.

 

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분의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모든 인류의 창조자이신 여러분과 저의 영원하신 아버지 말입니다.---그분 또한 당신의 자녀들이 죄를 범하고 지옥가시는 것을 막아 보시고자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박히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분이 스스로 어둠이 것입니다. 그리하여 빛을 거부하고 살아가던 우리들의 어둠 속으로 들어와 끝내는 그르치고야 우리의 인생 앞에 불빛 하나를 밝혀 주신 것입니다. 어둔 밤바다 같은 인생에서 표류할 때마다 두고 두고 바라 불빛이 되시고자--말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사랑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작은 불빛들이십니다. 개혁자 말틴 루터는 "부모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들이라" 가르쳤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조건 없는 희생이 무엇인지를 보게하시고 오직 우리의 유익,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사랑을 알게 우리들에게 이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신 그분이 명하십니다.“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생명을 존중하는 가정 /20:13,4:1-8/ 이동원 목사

2014-11-28 15:33:58

 

다소 충격적인 한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김성한이란 분이 낙태아의 심정으로 기록한 시입니다.

제목은 “저도 사람이에요”입니다.

 

“어렴풋이 아침 잠에서 깨어 났을 때였어요. 알수 있었죠. 기분이 아주 나빴거든요. 설명할수 없는 어떤 불안감이라고 할까요? 둘러싸고 있는 평안함은 이미 없었어요/

공포 영화 본적 있죠? 죽은 알았던 괴물이 마지막에는 나타나 주인공을 괴롭히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어요/

피할수도 도망할수도 없었어요.-이건 아니에요. 살려 주세요-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그저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발버둥칠뿐. 비명도 지를수 없었어요/

입으론 양수가 쏟아져 들어왔어요. 숨은 가빠지고 터질 같은 고통이 가득차 올라왔지만 아무도 곁엔 없었어요.

-사랑해-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도, 지켜줄줄 알았던 그녀도, 어디 계셨죠?/집게의 날카로운 이빨이 다리를 , 작은 발을 잡아 찢고 있을 ,

조각난 몸이 양수속을 둥둥 떠다니며 펌프 속으로 빨려 들어갈 , 어디 계신거죠?---

좋아요, 내가 죽어야 당신들의 세상 당신들만의 천국이 안전할수 있다면 죽이세요.

세상은 죽어줘야 누군가를 원했으니까요.

예루살렘, 뻬이찡, 캄보디아, 아우슈비츠 그리고 자궁, 그래요 이젠 어머니 뱃속에서 사라져 가요. 당신들의 천국 당신들만의 세상을 뒤로하고-- 베비라 유아복 입어볼수 없는거죠?

 

오늘날 생명이 가장 위협받고 있는 곳은 아이로니칼 하게도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어머니의 자궁이 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일년에 55백만 내지 7천만의 아기가 낙태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인구 2 4천만을 가진 미국의 경우 일년에 150만건의 낙태가 보고되고 있는데 인구 4천백만의 한국의 경우 일년 낙태인구가 미국과 맘먹는 15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구비율로 미국의 5배에 달하는 숫자입니다.

 

이런 숫치는 한국의 낙태상황이 세계 1-2위에 해당될 것이라는 보고가 나와 있습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이땅 기혼여성들의 경우 53% 낙태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놀라운 것은 미혼여성의 30% 낙태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상 생명 존중의 사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낙태는 살인의 유형에 속할 따름입니다. 자살도 안락사도 성경적으로 보면 살인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미움도, 폭력도 살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살인의 범죄가 무서운 모르고 증가하는 오늘의 시대를 향해 십계명의 6계명은 여전히 “살인하지 말찌니라”고 가르칩니다. 다시 한번 계명이 순종되어지고 생명이 존중되어지는 우리의 가정과 사회가 되어지기 위해 우리는 매우 근본적인 세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첫째 질문-“왜 살인이 심각한 죄인가?

 

성경이 살인을 심각한 죄로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9:6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인간이 다른 모든 종류의 피조물과 차별화되는 특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안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있고 하나님의 신성,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아주 특별한 존재로 보고 아끼신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속에는 종종 인간의 존재이유를 기능적인 이유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있어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기능이 원활하면 그는 필요한 존재이지만 이상 기능이 불가능하면 그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가치관을 따르자면 이상 기능이 어려운 장애인이나 이상 거동이 어려운 병자들은 존재할 필요가 없고, 기능이 떨어지는 노인들, 어린이나 여성들은 중요한 인간이 것입니다. 성경적 기독교는 이런 생각을 철저하게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규정하고 대적해 왔습니다.

 

인간의 인간된 가치는 기능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기능 여부를 떠나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살인은 바로 이런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인간을 파괴하는 심각한 범죄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3:8-9 말씀을 구절 읽겠습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아버지를 찬송하고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종종 살인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 시도됩니다. 우리는 말로 우리의 이웃들을 상처내고, 말로 우리의 이웃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것을 조심할 이유를 설명하며 이것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 다시 한번 인간이 지니는 가치를 규정하며 그가 누구이든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이든 나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라고 우리의 기억을 상기시키고 있음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살인이나 언어 폭력을 포함한 일체의 모든 살인적인 폭력은 이런 하나님의 고귀한 작품을 손상시키는 범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경고되어지고 피해야 심각한 죄이며, 만일 살인의 죄를 범했을 경우 또한 심각하게 다루어 져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둘째 질문-“어떻게 살인의 죄를 짓게 되는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해 폭력이나 신체적인 살인을 행할 경우 반드시 보편적으로 거치는 감정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분노입니다. 사람들은 분노의 길을 거쳐 살인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인의 역동성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인간안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역학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본문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 본문에 거듭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분노”입니다.

 

4:5 보십시오.--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다시 이어지는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성경은 명백하게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과정적인 원인이 바로 분노였음을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음 7절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분노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5:26 말씀을 보십시오.“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적절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반드시 죄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분도 내지 못한다면 그를 어떻게 인간이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분노는 반드시 억제하는 것만이 미덕은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화병’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왔습니다. 화병은 분노를 부적절하게 억제한 결과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우리안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적절하게 그런 감정을 정직하게 건설적으로 형제와 자매들에게 표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나는 지금 화가 있다고 말하십시오” “내가 지금 너무 힘들다고 말하십시오” 이런 표현 자체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입니다. 오히려 정직한 감정의 교류를 통해 문제의 해결로 나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공격적인 반응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됩니다. 다만 자신의 정직한 감정의 토로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이렇다”고 말하십시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I-message"라고 일컫습니다.

 

당신-You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공격이나 복수의 의도쪽으로 발전되게 수가 있습니다. 일단은 감정의 솔직한 전달에 집중하고 다음 단계의 인도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상대뿐 아니라 무엇보다 나의 그런 상한 마음을 아시고 치유하실수 있고 억울함을 풀어주실 있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에게 나아가 아뢰일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네 마음을 내게 토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마음을 전달할 기회를 가지셨다면 이제는 한번 크게 쉬고 잠잠히 상대의 반응을 기다려 보십시오. 무엇보다 잠시라도 기도한 다음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 보십시오.

 

대부분의 폭력과 살인은 이런 여유를 갖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가인이 아우 아벨을 살해하기 이전에 이런 감정 표현의 여유나 기도의 기회를 가진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는 분노함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 분노를 다스리는 일에 실패함으로 살인의 범죄에 도달한 것입니다.

 

셋째 질문-“무엇으로 살인을 예방할수 있는가?

 

성경은 살인이나 살인의 원인을 만드는 미움이나 분노를 다룰때마다 가지를 강조합니다. 저는 가지가 우리 시대처럼 살인이 만연하는 사회에서 생명 존중을 실현하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열쇠 하나는 하나님의 관점이고, 하나의 열쇠는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첫째 열쇠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간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태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생명을 잉태하게 하신 것이라면 태아도 여전히 소중하게 보호되어야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원수같은 인간이라도 원수라고 생각하기전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십시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 아닙니까? 제가 안의 분노를 다루는 비책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저도 목회자이지만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기에 인간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는 경우가 없을수 없습니다. 그때 만일 제가 그런 사람을 대하면서 “아이구, 원수 언제 죽어”하면 정말 원수처럼 보이고 그가 죽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언제가부터 아니 야고보서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적용을 하기로 했습니다. 3장에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한다는 말씀에서 도전을 받고 그후 속상한 인간을 대하면 그를 지긋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자신에게 말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저, 인간도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다르게 보이더라구요. 물론 마귀가 작품을 적지 않게 손상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아끼시고 회복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소중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인 것입니다.

 

하나의 인간 존중을 실현하는 열쇠는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우리가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인 가인의 살인의 행적을 다룬 4장을 이미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신약 성경은 가인이 살인하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요한일서 3:12 대답이 기록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아우를 죽였으니-- 악한자가 누구입니까? 사단 마귀가 아닙니까? 정신으로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조종을 당한 것입니다. 가인이 살인할 그는 마귀의 지배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8:44에서 마귀를 가르쳐 --처음부터 살인한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생명을 도적질하는 , 빼앗는 자요, 생명의 파괴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못하면 순간적으로 사단의 지배를 받을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 26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바로 다음 4:27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마귀의 지배를 거절하고 살인의 영성에서 벗어나 인간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일생을 살아갈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순간 순간 하나님의 지배 성령의 지배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4:30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말라”고 권면합니다. 5:18에서는 “술 취하지 말고--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가르칩니다. 술에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충만하면 사람이 소중하고 존귀하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성령에 충만하지 못하면 마누라도 원수처럼 보입니다. 교우 여러분도 원수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하면 마누라가 갑자기 천사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성도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마누라가 아니고 교우 여러분이 아니라, 자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인의 미혹을 극복하는 두가지 열쇠--

 

첫째 열쇠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생으로 이웃들을 가족들을 바라보십시오.

 

둘째 열쇠는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매순간 순간 하나님의 지배 성령의 지배를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세상은 당신이 두팔을 벌려 사랑으로 껴안을 사람들로 차있는 것을 보시게 것입니다.

 

저는 은영이 엄마라는 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매가 예수 모르고 성령충만을 경험하기 전에는 자식이 썩일때는 “꼭 닮은 자식 하나 낳아서 속좀 썩어 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자매가 예수 믿고 성령 충만을 경험하고 나서는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은영아, 너도 닮은 자식 하나 낳아 기도로 자식 키우는 행복을 맛보고 살려무나” 얼마나 차이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 어떤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결혼의 언약을 지키는 가정 / 20:14,2:14-16/ 이동원 목사

2014-11-28 15:27:40

 

혼다 켄이라는 사람이 책가운데 "부자가 되려면 부자에게 점심을 사라"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연간 세금 1000만엔이상의 납부자 1 2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보내고 그중 1천명을 직접 인터뷰하여 부자의 의식세계를 연구하여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연구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들과 비교가 되는 평범한 사람들 2천명을 다시 인터뷰하여 무엇이 부자의 인생을 평범한 사람과 다르게 만드는 가를 비교하였습니다. 저에게 관심을 것은 그들의 가정생활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에서의 일반적인 부자에 대한 인식과 다르게 그들 대부분이 배우자와의 가정생활의 가치(37%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가정생활이다고 대답) 중시하는 사람들이며 그들 가운데 이혼자는 2%미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통계가 일본이외의 다른 선진국에서도 같은 통계로 나타나 있다고 서술하면서 건강한 부부관계는 인생성공의 기초이며 행복의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역설합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결혼이란 남자와 여인이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앞에서 서약(언약, 맹약)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2:14) 잠언 기자는 간음은 언약을 망각하고 깨트리는 범죄라고 가르칩니다.(2:17)

 

말라기 선지자는 또한 간음으로 초래되는 이혼과 학대를 하나님이 미워하신다(2:16) 가르칩니다. 간음은 일체의 성적 범죄에 광범하게 사용될수 있는 단어이지만 특히 기혼자의 성적 일탈을 의미하는 단어로 대부분 사용됩니다.

 

구약 성경에는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간음의 범죄에 대하여 엄중한 형벌이 시행되었습니다. 많은 경우 사형으로 다스려 졌습니다. 22:22 보면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동침한 남자와 여자를 둘다 죽여 이스라엘중에서 악을 제할 지니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가 구약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천만다행한 일입니까? 계명이 만일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형수들이 줄지어 날마다 사형대로 나아가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간음을 이렇게 심각한 죄로 다루셨을까요? 이유는 범죄는 자신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간음으로 깨어지는 가정들이 급증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십계명중 7계명-"간음하지 말라"- 말씀을 지켜 우리의 가정을 보호 할수 있을까요?

 

1.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결혼은 언약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결혼의 독특성은 결혼이 단순히 남자와 여인사이의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 앞에서의 남자와 여인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2:14 다시 읽어보십시오.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부터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여기 여호와께서 증인되신다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당신의 결혼식에 증인으로 참여한 모든 하객들은 시간이 지나가면 결혼식의 약속을 잊을 것입니다. 심지어 당사자 본인들의 의식도 희미해져 갈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한분 결혼의 제도를 만드시고 우리를 결혼의 자리로 인도하셨던 그분만은 우리의 결혼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않고 우리를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의 약속을 잊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그날 결혼식에서 당신은 어떤 약속을 하셨습니까? 전통적으로 가장 오랜 기독교적 결혼예식에서의 결혼 서약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곁에 서있는 여인(남자) 그대의 아내(남편) 삼아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순경에 처하든지 역경에 처하든지 변함없이 사랑하며 부부로서의 일정한 대의와 정절을 굳게 지킬 것을 서약하십니까?"

 

그때 우리는 분명히 ''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과연 약속을 지켜 오셨습니까? 그렇지 못하셨다구요? 그렇다면 당신은 간음하신 것입니다. 간음은 오늘 이상 구약시대처럼 사형으로 다스려지는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간음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배우자와의 약속은 물론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트린 심각한 범죄입니다. 1:1 부부관계를 통한 경건한 가정의 기대-이것은 변할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2:15 말씀이 그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만(언약의 상대)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간음의 범죄는 부부의 하나됨의 관계를 깨트린 것입니다. 간음은 물론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를 원하신다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며 들려 주셨던 주님의 당부가 지금 당신의 삶속에서 회복되고 있어야 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죄를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죄가 계속되고 있다면 당신은 아직 용서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진정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기를 원하신다면 주님과 배우자에게 죄를 자백하고 죄를 끊고 이제 이후로는 나를 넘어뜨린 죄로부터 떠나셔야 합니다.

 

2. 시험받을 있는 기회들을 피해야 합니다.

 

7계명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는 번째 원칙은 시험받을수 있는 기회들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적 유혹에서의 경계를 가르치는 상황마다 어김없이 "피하라" 단어를 일관성있게 사용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 가르칩니다.

 

아마도 이런 말씀을 지킨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요셉일 것입니다. 성경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줄기차게 유혹하는 상황에서 요셉의 태도를 39:10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도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중요한 행동이 무엇이었습니까? "함께 있지 아니했다"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포기하지 아니하고 집요한 유혹을 계속하자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은 요셉이 옷을 버려두고 "도망했다" 기록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불건강하게 우리의 성적 욕망을 자극할수 있는 기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인터넷 포르노, 불건강한 채팅, 케이블 TV 부도덕한 영화들, 심지어는 -메일이나 핸드폰의 유혹성 광고들, 정상적인 술자리, 사교춤의 기회들 모든 것들을 조심하고 할수 있으면 피해야 합니다.

 

잠언기자의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6:27-28 말씀입니다."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했습니다.

 

저는 CNN뉴스와 기독교 TV 시청하고 싶은 생각에서 한때 케이블 TV 신청했다가 가만 보니까 12시만 넘으면 이상한 영화가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이상하게 보고 싶은 생각이 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 취소해 버렸습니다.

 

이제 저희 TV에는 SBS, KBS1,2, MBC, EBS 채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어떤 우리 교회 성도의 가정에 가보니까 응접실에 컴퓨터가 나와 있어요. 아이들에게 되도록 유혹의 기회를 주지 아니하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칭찬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부부를 상담하게 되었는데 자기 아들이 딸을 성적으로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 남매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그런 유혹을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부모가 보는 성에 대한 비디오 시청하다가 우발적으로 남매가 성을 실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 책임입니까? 부모 책임 아닙니까? 피해야 합니다. 할수 있는 피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어떻게 가르칩니까? "복있는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성의 유혹에 관한 순간도 틈새를 제공하면 안됩니다. 방심하면 안됩니다.

 

3. 부부의 사랑을 성실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유혹의 기회를 피해야 한다든지 간음의 죄를 경계하라는 말이 부부도 성적으로 접근을 피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입니다. 부부가 성적인 만족을 깊이 경험할수록 외도의 유혹에서 가정을 지켜낼 가능성이 큽니다.

 

고린도 전서 7:2-3 읽어보십시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여기서 의무란 말할것도 없이 성적인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들은 서로에 대한 성적인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남편의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킬수 있는 유일하게 합법적인 대상이십니다.

 

당신의 남편이 당신에게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시선을 밖으로 돌리기 시작한다면 과연 남편의 외도에 아내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입장을 바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여러분, 들으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아내의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킬수 있는 유일하게 합법적인 대상이십니다. 만일 당신의 아내가 당신에게서 만족을 취하지 못하고 그래서 당신의 아내가 시선을 밖으로 돌리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과연 아내의 외도에 책임이 없다 할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부부의 적극적인 사랑의 누림을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5:15-16 읽어보십시오. "너는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샘물을 밖으로 넘치게 하며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도랑물이 집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조심해야 하겠지요.

 

, 계속되는 17절의 경고입니다. " 물이 네게만 있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부부의 성은 부부외에는 아무와 누구와도 나눌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인 경고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었을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연모하라" 이보다 적극적인 로맨스의 관리를 요청하는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년전 타임지에서 미국에서 가장 성적인 만족도가 높은 집단을 연구한 결과 복음주의적 교회에 나가는 부부집단으로 나왔을 미국 사회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만 저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부부가 행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맨스를 결코 성으로만 국한시키지 마십시오. 부부는 따뜻한 사랑의 몇마디로도 얼마든지 충분히 행복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경상도 사나이가 첫날밤에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I love you-그런 간지러워서 말못하니까 오늘밤 한마디하면 평생 유효한거다, 알겠나, I love you- 했답니다. 그때 지혜로운 신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런데 여보, 실은 제게 병이 있는데요,

 

저는 지금 하신 그런 중요한 말은 날마다 반복 안하시면 저는 절대로 기억을 못하는걸 이해해 주셔요"했답니다. 그렇습니다, 부부의 로맨스는 날마다 성실하게 관리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식사가 필요한 것처럼 사랑의 연료도 날마다 공급되어야 합니다.

 

여러 해전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날마다 아내에게 전화해서 I love you하는 그리스도인 남편이 있었는데 한번은 해외 출장을 갔습니다. 핸드폰이 없는 시절이어서 국제 공중전화를 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중간에 동전이 떨어지더랍니다.

 

그래서 황급하게 여보, I-하는데 전화가 끊어지더랍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얼결에 "주님, 아내에게 I love you 못했어요, 주님이 전해 주셔요"했답니다. 전화는 끊어졌는데 바로 잠시후 집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 벨이 울리더랍니다.

 

아내는 남편이 동전을 바로 구하여 전화했나보다 해서 전화를 받았더니 남편이 아니라 국제 전화 교환수였다고 합니다. "방금 전화한 댁의 남편께서 동전이 떨어진 전화에 주님-I love you 전해 주셔요-해서 제가 대신 전해드리고자 전화를 드렸습니다.

 

저도 그리스도인이거든요." 부부는 너무 놀라서 주님은 이런 부부의 작은 사랑의 표현까지도 간섭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이라고 간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런 주님께 우리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하여 도움을 구할 우리 가정의 기도제목은 무엇인지요?

 

정말 건강한 가정,웰빙 가정의 행복을 사모하십니까? 그러면 무엇보다 결혼의 언약을 지키는 가정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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