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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출애굽기 설교 모음

출애굽기 29:38 - 46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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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그 이후 /29:43-46/ 박영선목사

2015-07-30 13:20:39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 이후에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중요한 신학적 해석을, 아래 설교가 잘 보여줍니다.

프린트해서 여러 번 읽어야 하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핵심신학을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구원 그 이후’ : 성막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29:45~46

 

출애굽기의 목적은 위 본문 속에 분명히 나와 있다.

우리는, 출애굽기는 제목이 출애굽이라서

자꾸 노예생활에서 탈출해서 해방(구원)을 얻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기 쉽다.

 

그러나 왜 그 일이 일어났으며,

그 일이 가지는 목적의 전체가 무엇인가는... 자칫하면 놓치기 쉽다.

,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었다. 위 본문

 

성막의 목적 : 그들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 되심

그래서 출애굽기에 가장 많이 할애된 내용은 성막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해서

자기 백성을 삼고, 당신을 경배케 하며,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끔 하는

목적을 위하여 그들에게 출애굽(구원)의 역사를 베푸셨던 것이다.

 

바로의 종으로 비참함, 곤고함 가운데 살던 백성들이

이제 하나님(바로)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신 크신 두 가지는

바로 율법과 성막이다.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 백성들의 질서를 위함이요,

성막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만들게 하신 것이다.

 

25~31장까지는, 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세밀한 부분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설명하신 부분이고,

 

35~40장까지는 백성들이 그것을 지시받은 대로

어떻게 세밀한 부분까지 말씀에 맞추어 지었는가 하는데 길게 할애되고 있다.

 

그것이 출애굽기 후반부에, 성막에 관해 장황하고 길게 할애하고 있는 이유다.

,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 원하신다.

 

순종해야 구원의 은혜를 누린다.

성경은 성막이 얼마나 아름답고

그래서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얼마나 감탄했는가 하는 감상에 젖지 않는다.

 

,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하시고 임재하시는 것은

순종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시한 그대로 짓고, 명하신 규례대로 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이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저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성막을 통해 그들과 임재, 동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진실하심을, 즉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려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작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백성들이 순종해야 일어난다.

 

하나님이 베푸신 어떠한 은혜도

그 수혜자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효과가 없다.

 

 

사도 요한의 구원 그 이후’ : 붙어서 열매 맺음

 

출애굽기의 성막=요한복음의 가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5~8

 

포도나무의 가지는 독립적일 수 없다.

나무에 붙어있어야 그 생명의 기운을 누릴 수 있다.

그 가지에 열리는 포도나무 열매는 포도나무가 만든 것이지, 가지가 아니다.

열매는 그저 가지에 달릴 뿐이다.

 

그래서 나무에서 분리된 가지는, 새삼스런 형벌을 가할 필요가 없다.

분리된 자체로 형벌을 받게 된다.

, 말라져 버리게 된다.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그래서 요15:8절에서 보듯이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은 가지의 책임이고 의무이기 이전에,

그렇게 함으로써 나무의 영광을 나누는(나타내는) 것이 된다.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가지에 맺히는 열매로 인하여 그 나무의 영광이 드러나며

그것은 동시에 가지의 영광이다.

 

순종이라는 것은, 우리가 열매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적 복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의 존재의 위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고

의미나 가치를 스스로 창출할 수도 없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시지만

저들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고, 그 영광이 나타난다는 차원에서,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와 동일한 의미로)

출애굽 사건, 그 핵심 목적인 성막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백성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심으로써(나무에 붙어있음으로써)

그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과 구별됨으로써

 

(보호자가 되시고 복을 주시는 저들의 필요에 답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당신의 어떠하심이, 그 거룩하심과 그 영광이

온 세상에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 하나님의 영광은 반드시 그의 백성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아들이 전교 일등 하면, 그의 부모가 영광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의 차별성을 자랑함이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주 되시고, 구원자 되시고,

높으심과 그 충만하심이 가득하신 창조주, 구원주, 아버지, 하나님이 되신다.

 

우리 성도는 가지로서

그 분께 붙어있음으로 말미암아, , 교제함을 통해서

나 자신이 열매 맺는 삶을 살 뿐만 아니라,

그런 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이며,

-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사도 바울의 구원, 그 이후’ : 교회의 충만,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3~6

 

창조와 구원의 궁극적 목표

- 그의 은혜의 영광, 즉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것

이것이 창조와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다른 별명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것을

기억하자.

 

, 예수 안에서 성도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때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그를 통해서 세상에 나타나며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오늘 날 많은 성도들이, 오직 구원에만 매달리고,

신구약 성경에 관통하는 중요한 사상인

구원 그 이후 -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을 간과하는데 대해

설교자의 안타까움이 흐르고 있다.)

 

이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역사는

이미 출애굽 사건과 성막을 통해 예언되고 예표된 것이다.

 

출애굽에서 저들과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렇게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그 영광을 입은 자녀에게도 역시 영광이다.

자녀의 영광=아버지의 영광, 이것이 우리 구원의 이유이며, 구원 이후의 목적이다.

('구원'이란 개념 속에 '구원'은 물론이요, '구원 이후'도 포함된다.)

 

 

교회란 무엇인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20~22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임재 해 계실 때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가는(지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교회라 부를 때는

조직된 기관, 신앙의 공동체를 뜻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회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는 명칭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라 했을 때,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을 지칭하는 것과 같다.

이 구약 이스라엘의 신약적 지칭이 교회이다.

 

교회와 비슷한 말로 성도’, ‘신자가 있다.

*성도 - 믿지 않는 자와 구별해서 쓰는 말.

*신자 - 신앙고백으로 예수를 믿는 자를 가리키는 말.

*교회 -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된 자를 가리키는 의미. 1:22~23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1:22~23

 

그리스도와 묶여 있다.(연합)

위 엡1:22~24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와 각 신자가 연합되어있다는 뜻이다.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있어서 둘을 분리할 수 없다.

머리와 몸이 연합되어있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생사와 화복을 같이 하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로 쓰는 말이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강림하시고,

저들의 삶과 상황에 함께 하시는 약속의 실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하면,

신앙공동체로서 조직된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생각할 때도

바로 이런 개념의 공동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교회)를 당신과 묶어서

(출애굽기에서 보듯이)

종 되었던 애굽에서 꺼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구해 낸 그의 백성들을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묶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때 연합된 교회에서는 충만이 나타난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4-19

 

어떤 충만인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한 것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만물 충만이니라 엡1:23

이 말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충만이다.

 

, 하나님과 연합해 있으니,

자연히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성품이 교회(성도)에게 전이되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격, 사랑, 은혜, 능력 등 이런 것들로 충만해 진다.

 

믿음의 적극적의미

우리가 교회로 부름 받은 것은(구원 받은 것은)

구원에서 부정적인 부분만 말고 (, 위기, 영벌에서 구출함-구원-만 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후에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져 있으면,

당연히 내게 그 분의 충만이 전이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으로 끝나지 말고,

구원 이후에...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포도나무에 가지가 한데 묶여 있듯이,

출애굽기에 성막이 백성들 가운데 거했듯이,

에베소서에는 그리스도와 몸이 한데 묶여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충만, 열매)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 가지, , 교회로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영광을 나타내신다.

 

왜 이런 강조를 해야 하는가?

오늘 우리는 구원이 부정적 차원에서 구원,

억압과 비극으로부터의 해방에서만 끝나고

구원 받은 후에는

내가 주를 위해서 해야 할 일(헌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연합, 충만, 임재 개념을 빠뜨리고, 막바로 '봉사, 헌신'으로 들어가는데...

 

물론 헌신해야 한다. 그렇지만, 헌신이전에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인하여 충만해지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일들을 목적으로

하나님이 교회를 허락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

 

구원 받는 자로서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한다는 봉사와 헌신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일에 앞서)

너무 일찍 자기 소원이 되어서,

본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커가는 것에 비례해 나타나야할

세상과 구별(성화)에 무관심하고

세상의 가치들(윤리 도덕적 차원의 선행, 봉사)로서

자기의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나타내려 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잘 못 되었다.

 

기독교 신앙을, 일반적 가치(윤리, 도덕)속에서의 더 나은 존재로서의 싸움으로

그 방향성과 중요성을 빗나가게 하면 안 된다.

 

성도가 구원 받은 이후에

하나님과 붙어있음, 성막의 임재,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충만해지는 등의

이런 원리에 더 강조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보다, 사회봉사, 선행, 교회봉사 등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신학적 잘못이라고 설교자는 지적하고 있다. 그것들도 필요하지만 말이다.

 

쉽게 얘기해서, 교회란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케 되는 일을 위하여

서로 격려하고 도움이 되는 존재요

함께 하여 훈련하는 공동체로서 일차적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서로 사랑하고 용서가 잘 안되는 존재들이다.

그 사랑, 용서가 교회 안에서도 잘 안 되는데, 밖에 나가서야 오죽하랴!

그래서 교회는 일차적으로’(윤리 도덕적 봉사에 앞서) 이 일을 위하여 있다.

 

, 충만, 임재, 붙어있음...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유지, 성화시켜나가야 한다.

이런 것 제쳐놓고, 일부터 하려고 뛰쳐나가니... 종종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교회에 오시면 다른 이야기 하지 마시고,

자기 신앙의 정진을 위하여 교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거기에 집중하셔야 한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시라!

 

세상의 평가에 동요되지 마시라!

그런데 세상은 교회를 평가하는 것이

'생명과 진리'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의 기준으로 평가한다.

 

세상은 교회에 대하여

여러분들은 종교인이니까, 우리보다 나아야 될 것 아니냐!’ 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세상보다 나아야 한다.

그러나 성도가 가지는 윤리 도덕은, 생명과 진리로부터 나오는 윤리 도덕이다.

이에 반해 세상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은, 생명과 진리와는 무관한 것들이다.

 

우리가 저들보다 더 나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윤리 도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는 윤리 도덕이다.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윤리도덕이다.

 

세상은 그런 데(십자가)까지 가지 않는다.

먼저 자기 앞가림부터 하고, 그 다음에 윤리와 도덕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 싸움에 우리가 실족하기도 하고 도전을 받기도 하는 것은,

성도가 남들보다 더 나은 뿌리와 내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할 말이 없다. 물론 우리가 많이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도전을 입막음하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서 맺는 열매,

그런 열매로 인하여 변화된 나,

생명과 진리가 뿌리가 되어 나타난 열매가 아닌

 

기독교를 지키고 싶고, 우리가 갖는 신앙의 고급함을 확인시키고 싶은 일념에서

세상 앞에 그들보다 나은 선행(사회책임),

그들이 매기는 잣대로 만든 순위에 우리가 최고 위치를 점하려는 욕심으로

기독교를 증명하려고 하면, 거기에 매달리다보면,

우리는 말라버린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처럼...

 

생명과 진리가 없는 윤리, 도덕이나 선행 등 어떤 가치도,

사람의 영혼을 두드리지 못한다.

 

생명과 진리가 있어야만

사람의 영혼에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사회책임도 중요하고 교회가 꼭 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임재, 붙어있음,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을 드러냄을

먼저 우선해야 하며

그것이 우선되지 않는 사회책임이나 봉사는

신학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설교자의 주장.

 

 

기독교가 세상 윤리 도덕보다 더 고차원적인 이유 : 생명을 낳는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잘 보시면

그 하는 신앙고백에 비해서 일반적 성도의 삶의 모습이 형편없는데,

그의 사람을 통해서 어쨌든 열매가 맺힌다. 전도의 열매가 맺힌다.

자기가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낳는다.

 

아무리 고급한 철학과 세상지식을 갖고 있고, 고결한 도덕성과 인격성이 있어도

그것은 결단코 생명을 낮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를 변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허락된 복들이 무엇인지,

우리가 하는 신앙고백의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확인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윤리, 도덕적 사회책임도 마땅히 해야 한다.

그러나 혹시 우리가 그들보다 못 하다는 말(루머)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저들이 절대 할 수 없는 일(생명 나눔, 영혼구원)들을 하기 때문에

결코 기죽을 필요 없으며,

우리는 자기가 가진 생명으로 이웃과 생명을 나누는 이런 일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한다.

내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접목되어 있으면, 순종할 때, 자연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는

3:14-19 의 말씀은 이렇게 감격의 고백으로 연결된다.

 

바울의 찬송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엡3:20~21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그의 모든 구원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사실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교회로 불렀다.

 

, 우리를 당신과 묶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우리 것이 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작정, 허락된 구원의 경륜을 확인하게 되자

그의 결론은 넘치는 찬송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사회책임이 우선적이지 않다.

믿음의 공동체이고 우리가 고백하는 고백과 우리에게 허락된 약속들을

우리 자신들에게 충만케 하기위해 허락된 기관으로 교회를 이해해야한다.

 

여러분은 교회가, 보다 더 사회 봉사적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면 안 된다. 물론 빛과 소금으로서 사회봉사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더 우선할 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교회는 사회적인 봉사를 해야 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당연히 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 그렇게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충만해야한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고, 교회(신자)에게 요구해야할 일이다.

 

우리는 이런 도전을 기독교 역사 내내 해보았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을 포기하고 나와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다니는 이 유혹을, 이 시험을,

기독교가 역사 내내 받아온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말라버렸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무엇인가?

교회를 위하는 것이다. 1:24

성도들이 각각 온전한 교회로 서도록 수고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는데 끝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교회(우리)를 당신과 묶으셨다.

그 일에 바울이 수고하며 받는 괴로움(남은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했다.

 

이것이 출애굽기의 주제다.(이 설교는 출애굽기 강해)

요한복음, 에베소서도 마찬가지!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구원해내어서 그 한 가운데, 그 백성들 가운데

그들의 삶과, 존재, 여정 속에 저들과 함께하므로 (하나님과 백성을) 하나로 묶으셨다.

이것이 바로 성막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제사장 국가로 부름 받았는데,

그들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무슨 무력이나 경제력으로 시위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구약의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의 행실과 삶이 다름으로 인하여,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임재로 구별, 율법으로 구별, 거룩함으로 구별함으로 영광을 나타냄)

이것이 오늘날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의 다름이요, 구별이다.

 

이것을 위해서 교회로 허락되었고,

우리가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늘로 아직 불려가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 거룩함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혼자 쉽게 낙심하고 넘어지는데,

그래서 서로 붙들어주고, 서로 교회로 든든히 서 가도록 서로 격려함이 필요하다.

,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 성도를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일

이 일은, 1:28에 의하면 완전한 자로 세움이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1:28

 

이것이 교회(성도)가 가지는 책임이며, 우리에게 허락된 말할 수없는 신비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신 그의 창조주, 구원자, 아버지로서 가지시는

기쁘신 뜻이다.

우리가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이다.

 

여러분 각자가

남은 여생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느 지경까지 인도함을 받는지 기대하시며

그런 신앙생활이, 세상 앞에서 성도는 다르다! 라는 항복을 받아내시며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이 증거되고 영광을 받으시며

여러분에게는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신자의 인생이 되시길 바란다.

 

구원은, 한 번 구원 받은 사실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그 구원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괴로움이나 족쇄가 아니라, 즐거움과 특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영광과 생명과 충만함을 부여받고

또한 나를 통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렇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

그 목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근간이다.

 

 

 

 

함께 하시는 거룩한 삶을 위하여! /29:38-46

2020-06-07 10:44:19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누리는 5월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꼭 안아주시는 가정과 일터와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코로나19에 따른,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람 사이도 갈라놓은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몽골 북쪽에 아주 강한 고기압이 버티고 있어서, 지난 4월의 기온은 상당히 추웠습니다. 겨울은 따뜻했지만, 봄은 추웠습니다. 그래도 꽃은 피었습니다. 우리교회 예배당 주변에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철쭉은 요즘이 제철인 듯합니다.

 

꽃 잔디도 한창입니다. 철쭉인지 꽃 잔디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진분홍 꽃들이 예배당 주변을 감싸고 있습니다. 어릴 때 시골에서 보았던 빨간색 패랭이꽃을 만나니 반가웠습니다. 섶만 무성해서 원정식장로님이 캐냈는데, 노란색 황매가 몇 송이 남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 이것을 매화로 알았습니다.

 

꽃말이 평화또는 순진인 데이지는 몇 가지 화초와 함께, 남선교회에서 모종을 사다가 심었습니다. 몇 해 전에 심었는데, 끈질긴 생명력으로 보라색 꽃을 피운 매발톱꽃이 고혹미를 뽐내며, 수줍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넓지 않은 예뜨랑 앞 화단이지만, 있는 꽃은 다 있는(?) 꽃 대궐을 한창이루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두 달 이상을 사용하지 않은 예배당 정문의 계단을, 화분들이 씩씩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요기와 기쁨을 주는 듯합니다. 계단 화분에 있는 꽃은 송일국이 아니라 송엽국입니다. 길가에 세워둔 커다란 화분 두 개에는 삼색나비꽃이라는 팬지인데, 보라색팬지도 있고, 노란색팬지도 있습니다.

 

오월의 화단에는 마아가렛이라는데, 아프리카 북부의 카나리아제도를 떠나, 돌고 돌아서 우리 화단에서 순백의 정결함을 뽐내고 있습니다. 이름 외우기가 가장 힘들었던 라런큘러스가 있습니다. 라런큐러스의 꽃말은 당신은 매혹적입니다라는데, 본래 연못이나 습지에서 자라, 이름은 개구리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제가 어떻게 이렇게 꽃에 대하여 잘 아느냐고요? 저는 철쭉과 황매 밖에 모릅니다. 잘 아시는 고관달장로님께 여쭈었습니다.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꽃 이름을 알고 나면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꽃들이 아름답게 필 수 있는 것은 바쁜 시간을 내, 멀리 화훼농원에 가서, 모종을 사다 심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물을 주며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꽃은 퍼져갑니다. 지나가면서 향기를 맡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통하여 퍼져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이름은 누가 불러 줍니까? 아니 누가 불러주어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름을 계속 불러대도, 하나님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으시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영성을 어떻게 가꾸어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진실한 예배자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품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38절 말씀입니다.

:38 네가 제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모세를 준비시키셨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그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넜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이 지킴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는 길입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은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아주 자세하게 일러주셨습니다.

 

그 내용 중에, 하나님께 매일 드려야 하는 제사의 내용도 있습니다. 그것은 일 년 된 어린 숫양 두 마리를 날마다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매일, ‘라는 말과 이라는 두 단어로 구성되었습니다. [dymiT;타미드8548]끊임없이, 계속해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y3117]은 해가 뜨고 지고, 해가 지고 다시 뜨는 오늘이라는 시간입니다. 매일은 계속되는 시간입니다.

 

그 백성에게 오고 가고 또 가고 오는 시간 속에서, 계속하여 날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39절 말씀입니다.

:39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매일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리되,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한 마리는 저녁에 드리라고 하십니다. 아침에 드릴 때는 고운 밀가루와 찧어 짠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제물로 함께 드리라고 하십니다. 저녁에 드릴 때도 아침에 한 것처럼, 같은 양의 곡식제물과 부어 드리는 제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1. 하나님은 매일 드리는 예배를 명령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예배는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다섯 가지 제사가 있습니다. 소나 양, 염소, 비둘기를 불에 태워드리는 번제가 대표적입니다. 곡물의 가루를 하나님께 바치는 소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위한 화목제, 죄를 짓고 드리는 속죄제, 반드시 보상도 해야 하는 속건제가 있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방법에 따라, 번제와 희생제는 제물을 제단에서 불태워 바치는 화제입니다. 제물을 불에 태우지 않고 높이 들어 바치면 거제, 흔들어 바치면 요제입니다. 곡식을 태우면 화제이고, 흔들면 요제인데, 주로 곡식은 요제, 동물은 화제로 드렸습니다. 포도주와 같은 것을 부어 드리는 전제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의 피를 흘리고 태우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10)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14)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19[]) 그러니 다시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22:19)는 말씀을 따라, 성찬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기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제사라는 형식은 예배라는 형식으로 바뀌었지만, 그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유월절을 지키지 않지만, 유월절 어린양으로 돌아가신 예수님과 그 부활을 기억하고 부활절을 지킵니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신 부활을 매주일 기억합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양을 한 마리씩 잡아드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드리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명령하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매일 예배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42절 말씀입니다.

: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매일, 그것도 아침과 저녁으로 제물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거기에서 너희를 만날 것이고, 거기에서 너에게 말하겠다.”[]는 이유였습니다. 여기에서 만나다[d['y야아드3259]는 약속을 정하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정하여 만나는 것입니다. 약혼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모든 관계는 만남을 통하여 깊어집니다. 결혼을 약속하였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사귐을 쌓아가지 않으면 결혼에 이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귐이 없다면 서로를 이해하는 정도가 매우 빈약하여, 위기를 견뎌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예물을 드림으로 관계가 더욱 깊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은 제사장 개인의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매일 드리는 예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누구를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43절 말씀입니다.

: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거룩한 장소에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오직 제사장만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의식을 집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만나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드릴 때, 회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봄으로, 백성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드리는 예배를 명령하신 이유는 이것입니다.

 

 

2. 백성과 매일 만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그것도 아침과 저녁으로 그 백성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드린 제물이 제사장의 손길을 통하여,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있든지 떨어져 있든지, 하늘로 올라가는 제물의 연기를 보면서, 만나주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함께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물을 태워 연기를 올려드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더 이상 제사장의 손에 제물을 맡겨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단 한 번의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셔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에 대하여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제사가 아니라, 매순간 함께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머물러 계심을 누리고 있습니까? 행여나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거들떠보지(?) 않음으로써 성령님을 근심하게(4:30) 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어떤 남자가 여자를 보고 한 눈에 반했습니다. 남자는 매일 여자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여자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누가 누구와 결혼을 하였다고요? 편지를 쓴 남자와 여자가? 아닙니다!

 

매일 남자의 편지를 여자에게 전달해준 우편배달부가 여자와 결혼을 하였답니다.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은 사랑을 글로 적어서 보낸 사람이 아니라, 그 편지를 날마다 전달해 주며 얼굴로 만났던 사람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매일 편지를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일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는 만남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법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그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주 찬송을 흥얼거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필요를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회복해야 합니다. 더 이상, 제사장에게 맡겨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있는 각 사람이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세상을 껴안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올려드리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그 백성을 만나기 원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만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44절 말씀입니다.

:44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제사장이 매일을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만나주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니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됩니다. 회막뿐만 아니라, 제단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거룩합니다. 매일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그 백성이 거룩하여 집니다.

 

여기에서 거룩하다[vd'q카다쉬6942]는 말은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사람으로 준비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더럽고 추한 곳에 임하지 않으십니다. 더럽고 추한 곳을 변화시켜 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로, 하나님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45절 말씀입니다.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오늘 말씀을 비롯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예물을 드릴 때, 그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심으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믿을 때, 성령님께서 오셔서 함께 계십니다. 여기에서 거하다[@k'v;솨칸7931]는 말은 여관이나 호텔 따위에 잠을 자고 머무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46절 말씀입니다.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이유는 그들은, 바로 내가, 그들 가운데 머물려고하심입니다. 바로 이것을 알아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 중에 거하려고 인도하셨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매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 계심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드리는 예배를 명령하셨습니다.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매일 그 백성을 만나기 원하시는 이유는

 

 

3. 백성에게 거하여 거룩하게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여, 그들이 거룩하다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것은 제사가 예배형식으로 바뀌어도 결코 변하지 않은 진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거룩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세상의 빛으로 삼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함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이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문젯거리가 아주 많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그러니 더욱이 우리는 어떠하여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매일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신앙공동체가 함께 모이는 주일공동예배를 지켜야 합니다.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전혀 원하지 않음에도 주일공동예배가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기지개를 켜며 주일공동예배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 우리는 성도들이 자신의 삶과 말씀을 나누는 소그룹교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온라인으로 각자 드리는 것은 개인예배이지 공동예배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어느 곳에 있든지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소그룹교제는 완전히 중지되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소그룹교제인 속회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일공동예배나 소그룹교제인 속회와 상관없이 개인말씀묵상은 계속되었어야 했습니다. 함께 모이지 못해도, 심지어 말씀을 읽을 수 없고,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릴 수 없어도, 입을 크게 열어 찬송을 부르지 못해도, 성령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사람이라면 말씀을 마음에 생각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거룩하게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매일 제사를 명령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만나주시겠다고 하신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예배가 필요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펴는 구별된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교회 예배당 주변에 꽃들이 피어날 수 있는 것은 언젠가 누군가 심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꾸어 온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이 심어 놓았어도, 가꾸지 않았으면 잡초 속에서 녹아버렸을 것입니다. 심고 가꾸었기 때문에 꽃을 아름답게 피울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빛납니다.

 

그런데 오늘 꽃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 하나를 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보니, ‘라런큘러스가 심긴 화분에 꽃을 뽑아가지 마세요라는 글이 적힌 작은 팻말이 있었습니다. 물어보았더니 누군가 뽑아간다는 것입니다. 흔하게 보지 못하던 꽃이라서 집어간 것이겠지만, 제 마음이 좀 불편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참 동안 바라보며 행복해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보거나 카메라에 담는 것으론 부족해서, 자기 집으로 옮겨놓고 싶은 분도 있는 모양입니다.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많은 세상인데, 혼자 보겠다고 뽑아가야 하는가 싶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 밭에 잡초가 자라지 않도록 매일매일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성은 매일 가꾸어 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심긴 행복을 누군가 빼앗아 가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구약의 회막에서, 아침과 저녁에 제물을 드렸던 것처럼 하지는 않아도, 하루에 한 번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매일 새벽 기도를 하였다, 매일 QT를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거하실 자리를 만들어 드렸다는데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문제는, 함께 계심으로 누리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묵상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4:30)

 

매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찬송함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재물을 태워서 드리는 번제 /29:38-46/ 유장춘 목사

2022-04-24 10:33:39

 

구약의 그림자는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사라졌습니다. 신약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짐승을 잡지 아니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은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사야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를 찾으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요한복음4:20-24)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보다 신약의 예배는 너무나 형식이 단순해서 구약에서 제사의 의미를 잡지 아니하면 예배의 깊이와 감격을 알 수 없습니다.

 

구약의 5대제사를 통해서 예배의 의미의 진의를 깊게 깨달아서 거룩한 예배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구약의 5대 제사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번제는 동물의 가죽을 제외하고 모든 부위를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고, 소제는 곡물을 이용한 피 없이 드리는 제사로 고운가루, 기름, 유향, 소금을 그대로 드리거나 요리를 해서 번제와 화목제와 더불어 드렸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평과 은혜에 감사하거나 서원하는 경우에 드렸고, 속죄제는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을 범하거나 계명을 어겼을 때나 이웃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燔祭)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제사의 중요성을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1세대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죽은 뒤 다시 가나안 땅에 왔을 때 민수기 14장에서 정탐꾼들의 보고 후 백성들의 반란이 있은 후 레위기에서 주신 제사규례를 반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말씀대로 제사를 드릴 때 가나안땅의 원주민과 차별될 뿐 아니라 민족성과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 2000년 동안 외국에 흩어져서 살면서도 민족성과 언어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회당에 모여서 제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율법을 강론하고 암송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가 신앙을 유지하기 힘들도록 하는 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이겨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비신자와 다른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삼아 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향기로 드리는 제사

 

번제는 가장 보편적인 제사로 모든 제물을 불에 태워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를 드리려는 사람은 번제물로는 양이나 염소, , 비둘기 등의 흠 없는 수컷 동물과 새중에서 흠 없는 것을 준비하여 성소에 데리고(가지고)가서, 순서에 따라서 자신의 번제를 담당한 제사장 앞에 서면 제사장이 제물을 면밀히 살핀후 제사장으로부터 합격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손을 양의 머리에 얹고서 이 번제를 통해 비천한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왜 이 번제를 바치는지 이유를 말한 뒤 시편의 감사시를 낭송하여 부르면서 하나님께 찬송을 올린 뒤 도살용 칼로 그 짐승의 고통이 최대한 빨리 끝나도록 목의 급소를 찔러 짐승을 도살하였습니다. 가죽을 벗기고, 짜를 것을 짜르고, 내장을 들어낸 후에 제단 위에 올려서 태워 드렸고, 피는 제단에 뿌렸습니다.

 

번제는 매일, 안식일, 속죄일, 매월 초하룻날, 새해에 드렸고 부정을 벗기 위해서와 사제들을 성별할 때나 성전 축성과 정화 때도 번제물을 바쳤습니다. 일요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여 주일로 지킵니다. 주일예배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세상을 이길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첫 시간과 마지막 시간을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사례

 

가끔 일천번제 헌금이 강단에 올라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받은 최고의 축복은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후 하나님께서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하시자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워주셨지만 자신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왕상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하자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솔로몬과 같은 복을 받기 위해서 일천번제를 드리는 심정은 알지만 일천은 회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번제물 일천(마리)을 드렸다(왕상3:4) 그는 일천의 번제물을 드렸다(대하1:6)로 해석하는 것이 바르기 때문입니다.

 

특이한 것은 열왕기3장에서는 미완료형 동사를 사용하여 솔로몬왕이 반복적이며 습관적으로 드린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는 무엇을 더 얻기 위해서 예배드리는 것보다 받은 은혜 감사해서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교 훈

 

신약시대에 우리는 번제가 제물을 벗기고, 자르고, 들어내어 태워서 드린 것처럼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생각을 내려놓고 예배하면서 하나님 중심의 새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제물인 소가 별것아닌 풀이나 지푸라기를 먹으면서도 힘을 쓰는것 처럼 우리도 사소한 말씀과 사건일지라도 묵상하면서 인내하여 영적인 힘을 얻어야 합니다. 번제물을 가죽을 벗긴것 처럼 인간적인 것은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번제는 짐승을 잡아서 드렸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단번에 피를 흘리셔서 피없이 예배를 드립니다. 마틴 루터는 빨래를 짜 보아라. 물이 나올 것이다. 구약성경을 짜 보아라 짐승의 피가 나올 것이다. 신약성경을 짜 보아라. 예수님의 피가 나올 것이다. 성경에서 피를 보지 못하면 영적 장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늘 드리는 예배가 습관을 넘어서 구약백성보다 훨씬 더 거룩한 부담감과 감사로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번제는 제물이 없으면 드릴 수 없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우리는 짐승을 잡지 아니한 대신 예수님의 피를 들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값으로 계산 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것을 믿는 마음으로 몸과 헌물을 드리면서 예배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또한 피가 흐르고 있는 육체의 때에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서 이 땅과 천국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새소망 성도님들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은혜로운 향으로 바쳐지기를 바랍니다. 새소망 성도님들의 삶에서 나는 향기가 온 세상에 퍼지게 되는 꿈을 꾸면서 예배를 드립시다.

 

 

 

무엇을 왜 주시나? /29:42-46/ 김진흥목사

2022-01-12 03:29:16

 

(42)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43)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44)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45)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1.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이 말은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비롯하여 여러 부분의 상을 싹쓸이 한 우리나라 영화 기생충’(parasite)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계획이 다 있구나.’ 이 말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서 고난당하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그리고 부활하시어서 승천하시기까지 주님이 행하셨던 모든 것들은 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역은 아주 오래 전부터 계획이 되어 있던 일이고, 또 오셔서 행하신 것들마다 계획과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은 무슨 이유와 의미가 있어 그렇게 하셨는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 받습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예배와 관련한 규례와 예법을 알려주신 내용 중 일부입니다. 이런 구약의 예배법은 골2,17에서 이런 것들은 장래에 드리게 될 참예배의 그림자라 하였고 히8,5에서는 이런 성전 구조나 예배하는 예법을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하였습니다.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은 그 모형이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를 알게 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제사예법들은 아파트를 분양할 때, 건설회사는 모델하우스를 만들어놓고 앞으로 지을 집은 이런 구조와 방식으로 짓는다고 구매자들에게 알려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2. 예배법을 말하며 제일 먼저 말할 것은 예배 자체입니다. 42절에,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서 말하고 있는 다섯 가지의 예배 중 하나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번제 한 가지를 말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예배는 본문에 나오는 번제 외에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4가지가 더 있습니다. 또한 예배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화제, 요제, 거제, 전제 등 4가지가 있습니다.

 

번제(1,3-17)는 매일같이 일상적으로 하는 예배로 불로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예배이고, 소제(2,1-2)는 개인이 하고 싶은 때, 즉 매일이나 특정한 날처럼 정해진 시간이 아닌 때에, 본인이 자원하여 하고 싶을 때에 하는 예배로 곡식가루를 제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화목제(3,1 7,12&16) 또한 정기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의 특별한 친교를 목적으로 드리는 예배이고, 속죄제(4,1&13&22)는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의무적으로 드리는 예배로 신분과 지위에 따라 드리는 제물이 다른 것이 특징입니다. 속건제(5,1-4)는 주로 재산상의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보상 내지는 배상함으로써 하나님과 또한 이웃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예배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방식에 따라 분류된 화제(1,6-9)는 불로 태워서 하는 예배이고 요제(23,15&20)는 제물을 전후좌우로 흔들어 바치는 예배이며 거제(7,32 15,20)는 수직으로 들었다 놓았다 하는 예배입니다. 전제(23,13 28,7)는 포도주나 독주를 다른 제물과 함께 부어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하면 42절 끝부터 43절까지에 말씀하셨지요?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43)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것이 뚫어져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장애물들을 걷어버리고 고속도로가 열리게 하며, 인간이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변화되는데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아멘)

 

다시 한 번 상기시켜드립니다. 이런 구약의 예배는 참예배의 모형이고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모형이고 그림자라는 말은, 첫째, 이 예배들은 보여지는 것과 함께 그 보이는 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이 예배들은 아무리 정성과 진심을 다하여 한다 해도 예배의 본래적 목적인 하나님과의 화목 내지는 화평을 달성하기에는 온전치 못한 예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형과 그림자와 같은 예배를 드리게 하시면서 모형과 그림자가 아닌 본래의 것이고 완전한 것인 예배가 있어서 이 완전한 예배를 통하여 일상 속에서, 속죄와, 화목과, 감사와, 화평을 완벽하게 이루는 구원을 응답 받게 될 것을 암시하시고 또 인간들로 하여금 기대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벽하게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사라지게 하는 완벽한 번제, 완벽한 소제, 완벽한 화목제, 완벽한 속죄제, 완벽한 속건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예배입니다.

 

9,12-15입니다.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5)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셨다고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을 주셨을까요? 주님께서 행하신 십자가 고난의 길은 그냥 고생하신 것이 아니고 이 예배,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화목제와 속건제를 완벽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피 한 방울, 땀 한 방울까지, 주님이 모욕과 멸시를 당하신 것,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것 모두가, 완벽한 예배를 성공시키고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완벽하게 화평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으시기를 축복합니다.

 

 

3. 본문에서 예배법을 말씀하시면서 함께 언급된 단어가 회막과 제단과 제사장입니다. 44절입니다.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예배를 집행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회막과 제단과 같은 시설물이고 또한 예배를 집례하는 사람입니다. 예배를 위해 이 두 가지는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예배를 위한 시설물을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먼저 지성소와 성소가 있는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면서 성막 안에는 진설병과 향불, 속죄소가 있는 법궤를 두라고 하셨습니다. 성막 밖에는 번제단과 물두멍 등이 있는 성막 뜰을 두시고 울타리로 그 뜰을 막으라고 하시면서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만 그 뜰에 들어올 수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은 오직 대제사장, 제사장, 수종드는 레위인들에 의해서만 집행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성막을 거룩하게 관리하여야 하지만 아무리 거룩하게 관리한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사람 손으로 지은 불완전한 성막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아무리 선별하고 준비시키고 씻고 닦은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제사장 역할을 하기엔 모자라다는 것입니다. 즉 시설물도 섬기는 사람들도 완벽한 예배를 이루어내기에는 역부족이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예배의 목적,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구원의 세계에 들어가게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하늘 보좌 영광을 뒤로 한 채 낮고 천한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모든 고난 받으심은 그냥 몹쓸 땅에 오셔서 사시느라고 당하신 고난이 아니라 다 이유가 있는 행보였고 다 뜻이 있는 일이었음을 기억하시기를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들은 다 제의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행보이셨습니다. 사람의 반차나 사람의 약점을 물려받은 사람의 후손이 아닌 완벽한 조건을 갖춘 제사장으로서 완벽하게 예배를 집행함으로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의 은총이 인간에게 임하게 하시려는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아멘.)

 

10,11-22이 그 말씀입니다.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

 

(18)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진짜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꼭 알아야 할 것은 다 내어놓으신 행위 하나 하나, 입에서 나온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피땀을 흘리신 기도와 살점이 뜯기어진 채찍 맞으심, 십자가에서 숨을 헐떡이시며 돌아가신 것 등 하나하나가 모두 완벽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 계획되었던 것이고 계획에 맞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희생을 찬양합니다.

 

 

4. 주님께서 계획되고 의미가 있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것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거하여도 전혀 불편하지 않는 수준 높은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함임을 또한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 45-46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45)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선물은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그저 입고 먹고 마시는 것에 걱정 없이 살게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격, 우리의 품성, 우리의 습관, 우리의 언어, 우리의 취미생활,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등을 업그레이드하여 적어도 하나님과 함께 생활해도 껄끄럽거나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기 위함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옛날, 막 결혼한지 얼마 안 됐을 때 집사람과 처형 댁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장모님께서 제게 가만히 다가오시더니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먹을 때 꼭 컵에 따라서 먹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마 제가 우리 집에서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어 마실 때 그냥 캔에 입을 대고 먹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처형은 그런 거 보면 질색을 한다며 조그맣게 말씀하시는데 제가 속으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제대로 변화되지 않은 채로 천국에 가서 볼썽사나운 짓거리를 한다면 어떡합니까? 우리 십자가 아래에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꿈으로 나의 비전이 되게 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인격을 갖추며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조차 개독교인이라 욕먹는 꼴 해가지고 어찌 주님과 함께 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날 변화시키기 위해 모진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주님을 생각해서라도, 그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제발 변화를 위한 노력을 이 사순절에 꼭 하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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