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8 – 나와 별로 상관이 없다고? /출20:15/ 김병삼목사
2018-06-25 10:06:08
15. 도둑질하지 말라
김지찬 교수가 쓴 [데칼로그]에 보면, 현대인들이 이 8번째 계명을 하찮게 여기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이 계명이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든지,
다른 하나는 세상이 온통 도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372 p. 그림 스캔)
“야 이 도둑놈아!”
누가 뒤에서 이렇게 부른다면 백 사람 가운데 아흔아홉 사람은 돌아본다고 한다.
돌아보지 않는 한 사람은 누구일까? 도둑질을 하지 않은 성자가 아니라. ‘진짜 큰 도둑’이라고 한다. 도둑질을 못하는 소인배들이나 도둑이란 말에 신경을 쓰지 진짜 도둑은 눈 깜짝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리스 위(Moris Wee)의 [십계명]이란 책에 소개된 그림이다.
한 시골 정육점에서 닭을 사는 여인과 정육점 주인의 손을 주의해 보라!
저울을 보고 있기에 상대방이 속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신이 이익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여 두 사람 모두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우리가 도둑질하게 되는 근본 이유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더라도 이익을 챙기려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모리스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고용주, 맡은 일에 꾀부리는 일꾼, 성과를 거짓으로 보고하는 월급쟁이, 불량상품을 파는 상인, 낼 돈을 내지 않는 고객, 타인의 명성을 해치는 자, 친구의 신임을 의심하는 자. . .가정의 수입을 술이나 도박으로 낭비하는 아버지, 자녀들이 극장에 몰래 들어가도 모르 체하는 어머니, 소득세를 부정직하게 납부하는 사람, 무익한 것에 관심을 쓰며 시간을 보내는 목사, 이런 사람이 하는 일들은 바로 정육점 주인이 저울 눈금을 속이는 일과 같다.”
8계명을 시작하며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교묘하게 도둑질 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도 무감각하다는 것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자신들의 도둑질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들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8계명을 주셨을 때, 어떤 의미로 말씀하고 있을까요?
도둑질에 대한 성경의 견해는. . .
도둑질하지 말라! 는 계명에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무엇을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이 부분을 잘 이해하기 위해 ‘도둑질 하다’라는 동사 ‘가나브’의 뜻을 명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지찬 교수의 책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그의 동의나 인지 없이 가져가는 것”이 성경의 용례라고 설명합니다.
동서고금의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도둑질을 용납하는 곳은 없습니다. 가장 오래된 법전중의 하나인 함무라비 법전은 주전 18세기에 제정된 것인데, 도둑질 한 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권에서는 오늘날에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친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 손을 잘라버리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여러 곳에서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레위기 19:11)고 말씀하고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8번째 계명에서는 가혹한 형벌을 피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궁핍한 가운데 일으키는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가혹한 체형보다는 배상법을 적용시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소나 양과 같은 짐승을 도둑질한 경우 두 가지로 세분하는 데,
1) 도둑이 훔친 짐승을 가지고 있어서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경우에는 갑절로 배상하도록 되어 있으며 (출 22:4)
2) 도둑이 훔친 짐승을 팔아버렸거나 죽여 없앤 경우, 소는 5배 양은 4배로 보상해야 했습니다(출 22:1). 소에 대한 배상이 양보다 무거운 이유는 소를 잃음으로 생기는 일의 손해까지 배상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배상법에 대한 성경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 도둑을 맞아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우선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것에 대한 상실감이 클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도둑을 맞으면 상실감에서 끝나지만, 혹시라도 신체적인 위해를 당하면서 잃어버렸다면 오랫동안 정신적인 고통으로 시달려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현대의 형법체계는 가해자의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만을 내리고 있지만 성경의 법은 훔쳐간 사람으로 하여금 똑같은 고통을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도둑질한 죄인이 대가를 치루지 않는다면 또 그런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훔친 것이 들통이 나거나 붙잡혀서 배상을 할 경우에는 훔친 것을 돌려줄 뿐 아니라, 자신도 피해를 본 사람의 고통만큼을 느끼도록 100%을 더해서 갚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건을 훔쳐가고 나서 마음이 괴로워 참회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스로 죄를 자백하고 뉘우치는 경우에는 그 양의 20%만을 더해서 배상하도록 하였습니다.
스스로 죄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참회의 첫걸음이며, 자신이 손해를 보는 배상을 하고 용서를 구할 때, 그 도둑은 하나님과 사회로 들어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구약의 법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아주 귀중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흔히 너무나 은혜를 값싸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너무나 쉽게 용서를 받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을지 모르지만, 주님의 가슴에 또 피멍이 들고, 피를 흘리고 있음을 간과하면서 말입니다. 잘못한 것은 단순히 기도하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피해가 보상되어야 합니다. 잘못의 회개는 마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상이 되고, 내가 그것을 갚기 위해서 아픔을 경험해야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아니 계속해서 도둑질에 대한 종류를 다루게 될 텐데 (흔히 도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종류의), 마음의 뉘우침이 있다면, 죄를 처절하게 갚고 회개하는 역사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2004년 7월 28일 자 중앙일보에 “재일 동포 5년 만의 속죄편지”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연인즉 지난 달 22일 서울 면목동의 까르푸 점장에게로 편지가 온 것입니다.
일본 도치기현 고야마시에 사는 재일동포 이모씨가 두장의 편지와 함께 2만 5천엔을 보내온 것입니다.
이씨는 5년 전 면목동에 사는 아들을 방문하여 함께 쇼핑을 갔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샴푸 5개, 린스 2개, 내복 한 벌 등 20만원 상당의 물품을 계산하지 않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공짜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는데, 갈수록 죄책감이 커졌고,
그 죄책감으로 인해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하며, 그것이 물질이라면 그대로 돌려줘야 한다는 설교를 듣고” 5만원을 더해서 25만원 상당의 돈을 보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용서해 주신다면 지금 죽더라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고 합니다.
이 편지가 프랑스 지점장을 감동시켰습니다. 이것은 감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할 때 나타나는 변화의 역사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죄의 대가를 명확하게 치러야 하며, 그 아픔을 경험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작은 도둑질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잊어버렸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쯤 되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지갑에서 백 원을 몰래 꺼냈던 기억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 했던지. . .
사실은 조마조마한 마음에서부터 죄의 대가를 이루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조마조마한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소위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문제는 아프게 자기 잘못을 기억하지 않으면 큰 잘못을 쉽게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죠.
제 아들놈의 이야기인데, 설교시간에 자기 이야기를 하면 싫어해서 예화로 등장할 때마다 돈을 줬던 일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이야기를 하면 ‘교회를 옮긴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지요. 이제 많이 지나간 일이라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매를 든 지 벌써 20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이놈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어린놈이 집에만 오면 문을 잠그고 있는 것이 수상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불시에 검문을 했더니, 6천원 상당의 미니카를 조립해서 놀고 있더랍니다. 장난감 살 돈을 주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추궁했더니 이렇게 변명합니다.
어느 날 엄마 아빠 방에 들어갔더니 바닥에 만 원짜리가 떨어져 있어 그걸 주어다 샀다는 것입니다. 빤한 거짓말에, “엄마 아빠는 안 봐 도 다 알아”라고 하면서 협박을 했더니, 아빠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장난감을 사고는, 거스름돈은 숨겨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아들을 때렸는데, 엉덩이에 멍이 들 때 까지 때렸습니다. 가끔 그 이야기를 하면, 창피하다고 말을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머릿속에 그 기억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때 제가 아들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주의를 주고 용서해줘도 될 일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마음속에 오늘 일을 깊이 각인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매를 들었던 것이죠.
아마도 ‘도둑질’에 대한 계명을 주시고 지키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죄의 대가를 치루지 않는 용서는, 또 다른 죄의 씨를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든 크든 도둑질에 관한 것은 대가도 치루고 용서도 되는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도둑질을 하고 있는 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눈에 들어오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은 비난하고 있는데,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모르고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당신이 제 8 계명을 범하고 있지 않은 지. . .
사무엘하 12장은 예언자 나단이 다윗 왕을 찾아가 죄를 지적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단은 이런 비유로 다윗에게 말을 합니다. “한 마을에 많은 양과 소를 가진 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의 양이나 소를 잡지 않고 가난한 사람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암양을 빼앗아서 그것으로 자기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삼하12:1-4)
이 소리를 들은 다윗 왕은 대노하여 명령하였습니다. “그 양 새끼를 4 배나 갚아 주라” (삼하 12:6). 이것은 바로 출애굽기 22장의 배상법에 근거하여 배상하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그러자 나단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죄를 지은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지적합니다.
그 때까지 다윗은 자신이 밧세바를 취한 것이 그렇게 큰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왕의 권세를 가지고 그 정도쯤은 누려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와 자신이 취하는 이득을 생각 했지, 그것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못된 부자는 눈에 들어옵니다. 당장 명령하여 “정의”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도둑질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삶에서 그런 부분들이 없는 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의 목록은 로라 슐레징어와 스튜어트 보젤이 쓴 [십계명에서 배우는 인생]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런 변명들로 도둑질을 정당화 한다는 것이지요.
- 훔친 물건인지 몰랐습니다.
혹 길거리에서 싸게 파는 물건 들 중에 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불의한 것인 줄 알면서도 구매한 적이 있습니까? 유태 전승은 물건을 구입한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구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 발견한 사람이 주인 아닙니까?
성경은 능동적인 도둑질 뿐 아니라 잃어버린 물건을 되돌려 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이라고 말을 합니다. 아무리 내가 경멸하는 사람의 물건이라도 돌려주어야 합니다.
- 훔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바보 같은 실수를 한 겁니다.
정당하게 소유한 것이 아닌데도, 단지 자기 수중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계산원의 실수로 받은 돈, 혹은 식당에서 점원의 실수로 계산서에 올라오지 않은 음식 값. . .
- 과거에 겪은 불행과 고통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하죠.
자신이 과거에 불이익을 당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혹은 타인의 실수로 인해 어려움을 당해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태도 말입니다.
- 내게 없는 것이니 내가 갖는 것이 당연해요.
수년 전 미국에서 현금 수송차량이 고속도로를 벗어나 빈민가로 추락한 일이 있었습니다. 떨어진 충격으로 차의 문이 떨어져 나가면서 길거리에 돈이 쏟아 졌습니다. 주민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돈을 주웠는데,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도로 가져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돈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인터뷰한 사람에 의하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는 것 아니잖아요.
이런 경우는 주로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종종 일어납니다. 별로 아프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받아 내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회사는 손해를 봐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국은 이 모든 과용된 예산은 소비자의 부담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 잠시 빌리는 것 뿐 이예요.
주인에게 말하지 않고 빌리는 것은 명백히 도둑질입니다. 작은 학용품, 혹은 옷일 지라도 주인에게 말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 그 사람은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해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화나게 할 목적으로 물건을 가져가거나, 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도 명백한 도둑질입니다.
- 난 뭘 훔친 것이 아니예요.
극장이나, 놀이터, 목욕탕에 들어가면서 할인을 받기 위해 나이를 속이는 것. ‘내가 내 나이 가지고 무엇을 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이건 정당한 절약 방법입니다’라고 항변하지만, 이것은 명백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타인이 받아야 하는 영업 이익의 대가를 가로채는 것입니다. TV 회선을 몰래 끌어다 쓰는 것, 불법 복제하는 프로그램.
다음과 같은 설문 조사가 있었습니다.
절대 발각되지 않으며 시합에서 이기게 될 것이라는 두 가지 전제 조건하에 금지된 경기력 향상 약물을 복용하도록 제안을 받는 다면 이 약물을 복용 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200 여 명의 미국 올림픽 대표 선수들과 대표 선수를 꿈꾸는 운동선수들의 절반 이상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 잘 해보려고 그런 건데. .
성전을 밝히기 위해 촛대를 훔쳤다는 핑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과정을 더욱 중요하게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과정은, 아무리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 다른 사람도 다 하는데요.
죄의 무리성입니다. 제복을 입혀놓으면 무서워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동일하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무감각해 지는 것입니다.
- 사랑, 전쟁,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정당한 이윤을 남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이 하청을 주는 사업들이 대부분 정당하지 못한 이윤을 남깁니다. 또한 나이키회사에서 나오는 140불 정도의 운동화는 다른 나라에 외주를 주기 때문에, 원가가 5불 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매겨지는 가격역시 정직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모두에게 피해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
- 다른 사람의 순결을 훔치는 것.
우리들은 흔히 물질을 훔치는 것만을 생각하지만 성경은 “도둑질이란 일하지 않고 부당하게 불로소득 하는 행위이다”라는 것입니다. 즉 정당하게 땀을 흘리지 않고 벌어드리려고 하는 모든 왜곡된 행위들이 도둑질로 분류됩니다. 그러면 어떤 것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 마땅히 줄 것을 주지 않는 것
시편 37: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야고보서 5: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 뇌물을 바치는 것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뇌물은 정당하지 못한 대가이며, 잘못된 결정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간접적인 피해를 주기 때문에 도둑질로 간주됩니다.
- 정직하지 못한 상거래
잠언 21: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
특별히 성경은 무게와 부피를 속여 장사하는 행위를 하나님의 공의에 반하는 가장 잘못된 행위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모스 8장 4-6절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 고리대금
출애굽기 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율법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생계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빌린 돈에 대해서는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채권자 같이”라는 말은 “고리대금업자 같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법이 규정하는 이자를 통해 금융소득을 올리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개인 간의 금융거래에 있어서 서로의 인격에 손상을 주거나, 부당한 이자로 인하여 가난한 자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도록 하는 것은 부당한 일로 분명하게 간주하고 있습니다.
-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음
말라기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십일조는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 나 혼자 독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라고 주신 것임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종류의 십일조를 명하고 있는데, 성전 십일조와 사회적 경제적 약자를 돕는 ‘구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양심적인 신앙인을 만드는 중요한 원리이며, 십일조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한 ‘봉헌물’이란, 자원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장 2절에,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것을. . .받을지니라”
즉 마음으로 기쁘게 드리지 않는 예물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시기에 도둑질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을 지키기 위한 노력, 그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1) 탐심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면 남의 것을 탐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디모데전서 6장 10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탐심은 자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늘 갈증을 느끼며, 무엇으로든지 갈증을 채우려는 태도입니다. 이 탐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자족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하면 삶의 만족을 배우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기는 죄악입니다. 만족한 사람이 남의 것을 탐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는 곳곳에서 신앙고백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빌립보서 4장 11-12절에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말씀을 자세히 묵상하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그가 그런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신앙의 삶을 통해 배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바울이 빌립보에 편지를 보낸 것을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즉 옥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를 날을 기다리면서 보낸 편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곳곳에서 “기쁨” “감사” “만족”에 대한 말씀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놀라운 신앙의 비결을 발견한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김선주 목사가 쓴 [우리들의 작은 천국]에 보면 한 교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마니로 평생을 살았던 김귀현 씨의 이야기입니다.
보통 심마니들의 전통에서 산삼을 발견했을 때 ‘심봤다!’라고 소리친다고 합니다.
그것은 산삼을 발견한 사람이 자기만 은밀하게 그것을 감추어 이득을 취하지 않고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겠다는, 윤리적 선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산의 주인인 산신령으로부터 벌을 받게 된다는 믿음이 강하게 작용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혜안으로 발견한 산삼의 소유권을 포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산신령님이 나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마니 세계의 엄격한 계율이었던 것입니다. . .
그런데 김귀현씨는 산삼을 캐고 제일 먼저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앉아 산삼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른 심마니들은 김귀현 씨를 이 세계의 큰 어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결정이나 지시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분이 경우 없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함부로 지시하거나 나무라는 분은 아닙니다. . .
물론 동패들 중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었지만 그는 그들을 강제하거나 예배나 기도 의식에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산삼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동패들의 세계관을 흔들어 놓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의 예배 의식은 산신령이라는 불명확한 신 관념을 넘어 세계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 자연과 우주의 주인을 선포한 것입니다.
잠언 30장 7-9절에 유명한 ‘아굴의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 두 가지 일을 하나님께 구하였다고 합니다. 허탄한 거짓말을 멀리하고 가난하지도 부하지도 않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혹시 가난하여 범죄 할까, 혹시 부하여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두려워서 말입니다.
지혜자의 기도는 결국 자신의 가진 것으로 인해 좌우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도둑질 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둑질 하지 않도록 사는 것입니다. 돈에 좌우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소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야 합니다. 소명이 없는 삶은 게을러지고, 게으른 삶에 사단은 틈타는 것이죠.
어떻게 우리가 소명 있는 삶으로 분주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비록 옥에 갇혀있으나,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고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길을 가고 있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내 삶에 닿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확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의 부족하므로 인해 탐욕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객관적인 판단에 의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주관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 사도바울의 이런 고백과 권면이 이해가 되십니까? 빌립보서 4장 6-7절의 말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J. 존은 그의 책 [십계명]에서 제 8계명을 지키기 위해 세 가지를 실천하라고 제안 합니다.
1. 탐심을 미워하라 – 탐욕은 도둑질로 이어진다. 무엇을 간절히 원하다보면 그것을 얻는 방식은 개의치 않게 된다.
2. 나눔을 사랑하라 – 우리가 아무리 나눠 준다 해도 하나님께 받은 것이 훨씬 많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관대해 지는 것이다.
3. 하나님을 신뢰하라 –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돌보시고 공급하실 기회를 드리자.
2) 열심히 일하므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실성 혹은 우선순위와도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가장 큰 축복은 열심히 일한 것을 수확하는 기쁨입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의 말씀을 보면,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훈계합니다.
여기에서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있지요. ‘도둑질 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하는 사람이 또 한다는 것입니다. 신문에 나오는 절도범들도 보면 대개가 반복되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습성이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돌이켜”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삶의 가치관이 온전히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초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왜 중요한 지”를 아는 것이요, 두 번째는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정당한 결과를 얻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창조의 결과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만큼 열심히 일하며, 희생적으로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 한다”는 것과 연관 지어서 크리스천 리더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열심히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에 세계를 정복하여 나갔습니다. 그가 성공적인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앞장서 희생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전쟁에 지친 병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지 않으려 하자, 왕이 직접 성벽에 뛰어 올라 적병들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군사들은 열성적인 왕을 구하기 위해 우르르 성벽을 기어올랐고, 알렉산더가 비록 적군의 화살에 중상을 입었지만 또 한 번의 결정적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희생적인 사람을 따르고, 또한 이들을 돕는 것은 분명한 원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모든 순간순간에 진지하고 그리고 열심히 희생적으로 일하고 있는가?”
내가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분명한 열매를 거두어들인다는 자세야 말로 가장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어떻게 당신의 삶에 열매를 거두어들이기를 원하십니까?
헨리 블랙커비는 그의 책 [영적 리더십]에서 어느 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양심적인 리더는 “직장 사람들이 내게서 어떤 모습을 볼까?” 자문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리더는 날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집 서재에서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가진 뒤 그날 업무를 준비합니다. 출근할 때에는 이미 3시간이나 업무를 본 상태입니다. 그러나 직원들에게 보이는 그의 모습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블랙커비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이왕이면 회사에 일찍 출근해서 동일한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직원들은 출근해 사장실에 벌써 불이 켜 있는 것과 회사 주차장에 일착으로 세워진 사장의 차를 보게 될 것이며, 러더가 날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을 알기에 직원들도 근면하게 일할 의욕이 생길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그렇게 살려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교회 9층에서 삽니다.
하지만, 거의 집에 가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지만, 새벽 예배를 마치고 사무실에 나와 제일먼저 불을 켜고 일을 시작합니다.
열심히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가는 자에게 좋은 열매를 주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크리스천 리더는 “내 말대로 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하는 대로 열심히 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이어야합니다.
당신의 삶에 축복의 열매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목회자 세미나에 가면 그런 말을 합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보면서 불성실 하다, 일을 안 하는 것 같다”라는 말이 나오면 끝난 겁니다. 적어도 리더는 이끌고 가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전해져야합니다.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우선순위를 분명히 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
사람들 중에 성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며,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 보면,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소망을 돈에 두고 살아가면, 도둑질 하는 인생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돈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면, 하나님의 일정과 하나님의 계획보다 앞서 가려고 합니다.
자신이 잃어버릴 손해를 생각하면서 초조해 합니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생업을 이어가기 위해 주님과 제대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안타까워합니다. 늘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절대로 주님과 대화할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람의 삶은 주님의 계획에 따라 살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너무나 목회를 열심히 하다 보니까, 기도할 시간도 말씀을 묵상할 시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경우에 아무리 열심히 목회를 해도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허무해지겠습니까?
“계획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이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왜 여러분들은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아름다운 삶의 결과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까?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만나고 살아가면, 하나님 중심적인 결정들을 하게 됩니다.
너무나 많은 일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단지 당신의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이 멀어져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이 멀어져 있기 때문에, 불의한 일에 쉽게 넘어지고, 불의한 일을 거절하지 못하고, 도둑질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모든 불의, 뇌물, 공정하지 못한 거래, 다른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일들. . .
이 모든 것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일에 치여서 시간이 없다구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감당 못할 만큼 많은 일을 주시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들이 마땅히 거절할 책임까지 떠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기 위해 오늘 당신의 삶에서 마땅히 거절해야 하는 것을 거절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은 오늘부터 당신의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은 분명한 삶의 우선순위를 아는 자만이 지킬 수 있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자가 되면, 분명 축복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십계명 I0 – 죄의 근원을 차단하라는 것! /출20:17/ 김병삼목사
2018-06-25 09:49:03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제가 살아가는 삶에 작은 원칙이 있습니다.
“미련을 두지 말라!”
이 원칙을 시작한 것은 물건을 사고 나면 ‘억울한’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음을 경험하면서 부터입니다. 제가 처음 쇼핑이라는 것을 해 본 것은 유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살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이 되어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살 때면, 비슷하게 보이는 물건들의 가격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늘 ‘sale’이라는 사인이 붙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싸게 물건을 사고 나면 만족감 보다는 혹시 ‘더’ 싸게 살 수 있지 않았는가? 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죠. 실제로 같은 물건을 다른 매장에서 더 싸게 파는 경우도 보았구요.
그래서 그런 결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물건을 산 후에는 절대로 다른 곳에서 값을 물어보지 않는다!
내가 물건을 산 후에는 가장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자!
참 신기한 것은 ‘물건’ 혹은 ‘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고, 가져도 만족이 쉽게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10번째 계명은 바로 그런 문제가 아닐까요?
결국 마음에서 해결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탐욕이 생기고, 탐욕으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죄들 말입니다.
어떤 분의 책에서 본 것 같은데, 십계명 전체는 1계명과 10계명 둘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인정하면 죄지을 것도 없고,
하나님을 참으로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탐욕도 생기지 않으니 또한 죄 지을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10계명 말씀은 마음에서 시작해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아마도 이런 그림을 그리며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그것을 금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온전하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도하는 과정으로 들어가는 여정 말입니다.
탐욕이 무서운 것은 . . .
오늘의 계명이 앞으로 배우게 될 다른 계명과 다른 것은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탐심’에 대한 것입니다.
본래 “탐내다”라는 말에는 어떤 대상에 대해 기뻐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기쁨은 필연적으로 ‘소유’에 대한 감정으로 인도하죠.
탐심의 문제는 욕망을 자극하는 기쁨보다는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일어나는 ‘행동’의 결과가 악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욕망이 ‘다른 사람의 것’에 대해 일어나는 감정이기 때문이죠.
탐심이 무서운 것은 실제적인 죄로 인해 발생하는 비극적인 일들 뿐 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는 것이죠. 성경에서 지옥은 표현하는 말 중에 하나가 ‘무저갱’입니다. ‘무저갱’의 뜻은 ‘바닥이 없는 것’입니다. 떨어져도 떨어져도 바닥이 없으니 얼마나 공포스럽습니까? 그런데 이 탐심이라는 놈이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인생은 지옥과 같은 인생입니다.
유명한 이야기죠. 하도 떠도는 버전이 많이 어떤 부자인지 모르지만, 미국의 갑부였던 앤드류 카네기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죠.
“얼마나 돈을 더 가지면 만족하겠습니까?”
그의 대답은
“조금 만 더”였다고 하죠.
탐심을 품으면 우리 마음이 지옥이 되는 반면, 탐심을 물리치면 우리의 삶이 천국이 되지 않을까요? 아마도 10계명의 정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법’이 핵심이라면,
마지막 계명에 핵심이 있는 듯합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가 “탐욕으로 인한 불순종” 때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창세기 3장에서, 뱀의 유혹을 받은 여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6절에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사단의 유혹이 있기 전까지, 자신 속에 있는 탐욕을 건드리기 전까지 여자는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탐스럽기도”한 나무를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탐스럽다는 말은 히브리어의 ‘하마드’입니다. 탐욕을 유발시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많은 먹을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것이 먹음직스러웠고,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것이 보기에 좋았고,
하나님께서 충분히 살 수 있는 환경과 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혜, 즉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지혜에 대한 욕심이 생기더니, 불순종의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40년 만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진입합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처음으로 직면한 난관은 당시 근동지방의 가장 강력한 성읍 중에 하나인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신 전쟁은 이스라엘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었고, 하나님은 전쟁을 통하여 순종하는 방법을 가르치시기를 원했습니다.
여호수아서 6장 17-24절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얻는 전리품 모두를 하나님께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처음 전쟁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그러기에 전쟁을 통하여 얻은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앞으로 이스라엘이 누리게 될 축복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분명히 가르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물건 하나라도 이스라엘 사람이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물건을 훔치는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규칙을 깨뜨리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한 사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범죄를 숨기고 있던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성 “아이”의 전투에서 비참하게 패하고 만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 하시고, 탐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아간을 잡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과 함께 골짜기에서 돌로 쳐서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이곳이 ‘아골 골짜기’ 즉 괴로움과 재난의 골짜기라 불리게 됩니다.
아주 흥미롭지요.
인류 최초의 범죄와,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최초의 범죄가 탐욕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탐심’이 결국은 믿음과 관계되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이란, 나의 삶을 향한 전적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들의 물질적인 소유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자녀의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모든 유산을 상속받을 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위에서 소유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전체 유산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놀라운 권세와 축복을 다 맛보지 못했지만, 축복받은 자의 여유로 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천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본질적인 모습,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현재 소유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자족과 너그러움으로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 믿음을 상실하는 순간, 우리는 감사와 만족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탐욕의 시작입니다. 이 탐욕은 단지 도둑질의 가능성만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10계명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들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감사를 하고 있으며, 주어진 축복을 얼마나 누리고 있습니까?
제 10 계명이 우리의 삶에서 말하는 것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탐욕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오늘 본문에서는 “네 이웃의 집”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어서 그 대상이 집, 아내, 남종, 여종, 소, 나귀의 순으로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집”이라는 것은 단순한 건물적인 의미가 아니고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7장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여기서 “집”이란 건물의 의미가 아니고 노아의 아들들과 며느리들, 그리고 그의 모든 재산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사고에서는 “아내”역시 소유의 개념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탐욕의 대상으로 지정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제 7계명의 “간음하지 말라” 그리고 제 8계명의 “도적질하지 말라”라는 계명과는 중복 되는 듯 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위의 두 계명이 남의 것을 탐내어 빼앗고 훔치는 행동을 금하고 있는 것이라면,
제 10계명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한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내면의 탐욕과 탐심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본래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회적인 부정, 불의 부패의 근원이 됩니다. 특히 없어서 일으키는 범죄가 아니라, 가진 자, 권력이 있는 자의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를 일으키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탐욕에 대하여 아주 무섭게 질책합니다. 미가서 2장 1-3절에 보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 .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 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서 재앙을 계획하나니
탐욕과 탐심이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의 시발점이 되기에 예수님께서도 특별히 이 부분에 대하여 경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곡식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소출을 바라보면서,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부자를 향하여, 생명을 거두어 간다면 네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질책하십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누가복음 12장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문제의 핵심은 물질적인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소유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과 태도를 갖느냐 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정신은,
1) 가치의 우선순위를 알라는 것입니다.
물질의 소유가 나쁜 것이 아니라, 영혼과 하나님께 대한 관심으로 우선순위가 바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소유하는 것 보다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포기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올바른 삶에 우선순위를 두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재물을 동등한 위치에 둘 수는 없습니다.
이 우선순위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독특한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성경의 정신은 물질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거나, 가진 자의 것을 강제적인 폭력의 수단으로 나누도록 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가 탐욕을 자제하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가질 수 있도록 너그러움과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명기 24장 19-22절에 보면,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을 우선하는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을 위하며 포기 할 수 있는 이유들이 생기지만,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우선하는 삶을 살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선하여 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만,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다면, 탐욕의 마음이 들 때, 언제든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사람이 되어라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훈련받는 동안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주신다.”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하며, 신앙의 자세를 되짚어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간구함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필요를 구하고 있는지, 정욕을 위하여 원하는 것을 구하고 있는 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 주신 아주 귀한 교훈 가운데 하나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과의 매일 매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의 기쁨은 아주 근본적인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그것을 느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언 30장 7-9절의 말씀,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할 때,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필요한 것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더 이상 우리들에게 탐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면서 인격적인 만남을 갖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혹시 여러분은 너무 많은 것을 가짐으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오늘도 당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구하며,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살아가지 못하십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보았던 신승도 목사의 블로그에 보니, 10번째 계명을 어기면 크리스천의 아름다운 향기를 꺾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이렇게 열거하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하지만, 탐심이 일어나면
사랑 대신에 의심과 미움이 있을 것이고,
희락 대신에 슬픔과 번민이,
화평 대신에 심한 불안이,
오래 참음 대신에 성급함이,
자비 대신에 잔인함이,
양선 대신에 인색함이,
충성 대신에 불성실함이,
온유 대신에 오만함이,
그리고 절제 대신에 자만심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이 이 계명을 어김으로 인해, 인간에게 적용되는 두 번째 돌 판의 모든 죄를 짓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는 것이죠.
사람이 자기 부모를 봉양하는데 사용해야 할 재물을 보고 “고르반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탐욕 때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살인의 동기에는 부정한 욕망, 즉 자신의 만족이 채워지지 않음을 극단적인 행동으로 옮긴 것들이죠.
실제로 간음을 행하기에 앞서 언제나 육욕이 가득한 마음이 행동으로 옮겨졌다는 것이죠.
모든 종류의 도적질은 합법적인 방법에 의해 얻을 수 없는 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거짓 증거를 하게 되는 악한 마음은 어쩌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탐욕스러운 야망에 의해 자극되었을 것입니다. 이득을 취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굳이 거짓말을 하게 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 계명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탐욕’은 벌써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져 있다는 것을,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이 일어나면 첫 번째 돌 판에 새겨진 네 개의 계명을 어기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이기심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인간들은 하나님 말고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신들을 만들어 욕망을 채우려 합니다.
만족을 얻으려 하지만 여전히 목마르고 채워지지 않는 지옥을 경험합니다.
자신들을 위해 만든 거짓 신들과 형상들로 인해 ‘지옥’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죠.
욕망을 채우려는 공허함은 인간들에게서 ‘쉼’을 앗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위해 주신 삶의 ‘여백’이 감사와 기쁨이 아닌, 욕망의 도구가 됨으로 인해 점점 피폐해 가는 삶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행해지는 일인지, 아니면 탐욕으로 인해 하는 일인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늘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참 신기하죠?
하나님을 갈망하면 생수를 경험하는데, 육신의 욕망을 갈망하면 더욱 목마름을 느끼게 되는 것이 말입니다.
이 계명을 지킨다는 것.
이제 중요한 것은, 성경의 정신으로 돌아와 신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탐욕이 부족한 자의 산물이라면, 탐욕을 이기는 길은 충분한 사랑과 만족감을 가지고 사는 길이지요. 무엇이 우리의 삶을 만족하게 할까요? 우리 신앙의 놀라운 비결은, 어떤 때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완벽하게 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관심을 우리가 지금도 받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첫 번째 고백이 있다면, 하나님께 받고 있는 사랑과 은혜의 감격이지요.
만일 오늘 여러분들 중에 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보다 더 큰 만족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큰 사랑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분들 한사람 한 사람에게 동일하게 큰 사랑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몇 해 전 포천에서 열린 중앙연회 평신도 수련회 강사로 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 장로님들 얼굴만 제게 크게 들어오는 겁니다.
저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를 제일 사랑하겠습니까?”
두 말 할 여지없이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지요. 그 날은 저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시던 장로님들이 너무 좋아서 말씀을 마치고 한 사람 한사람 다 허깅을 했습니다. 아마 다른 교인들이 보면서 참 이상하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신가요?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어 소개합니다.
주일학교 교장 선생님 앞에 두 어린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교회에 처음으로 온 아이들이기 때문에 주일학교 학생으로 등록하기 위해서였지요.
아이들에게 이름과 생일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키가 좀 더 큰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둘 다 일곱 살이에요. 내 생일은 4월 8일이고, 내 동생의 생일은 같은 해 4월 20일이에요”
이 말을 들은 주일하교 교장 선생님은 의아해하며 말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사실이에요. 우리 중 하나는 양자거든요.”
교장 선생님은 자기도 모르게 “그러면, 누가 양자란 말이니?”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에 두 소년은 서로 바라보고 씽긋 웃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도 아버지에게 똑 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러나 아버지 말씀이 우리를 둘 다 너무나 사랑하셔서 누가 양자인지 잊어버리셨대요.”
사실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사랑을 받고 있지 않나요? 우리들의 모든 과거를 잊어버리신 하나님의 사랑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요한 것이죠. 이 사랑을 힘입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은혜의 삶’이죠. 이 은혜의 삶을 살아가면 우리는 영적 성숙을 경험합니다.
‘조금 더’ 채워져서 만족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충분히 부요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난 해 젊은 목회자들을 위한 수련회를 인도할 때입니다. 앞에서 강의하시는 목사님이 상담을 전공한 분인데 저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을 보세요. 저렇게 교회가 크고 부흥했지만 공황장애를 앓고 있어요. 교회가 크다고 행복한 게 아닙니다. . .”
그 때 강의 중간에 제가 손을 들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그 말은 조금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것은 맞지만 행복하지 않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공황장애가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제 속에 행복과 부요함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 목사님은 젊은 목회자들에게 교회의 크기에 관계없이 행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커서 일이 많고 바빠서, 그렇게 살다 병이 찾아와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현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고백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다른 것들을 부러워하는 것이죠.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오늘 당신의 삶에 감사가 있습니까?
저는 어제 어떤 집사님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병원 건물을 짓고 감사 예배를 드렸는데, 위치도 좋고, 보기도 좋고 근처 어떤 건물이나 병원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공예배를 드릴 때 보다, 살이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식사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사로 가장 힘들었던 때, 전방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했던 때가 참으로 행복했다고요. 지금은 그 때보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것이 행복은 아닌 것 같다고요. 저는 새로운 건물에서 축복기도를 하고,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서 축복을 받으라고 권면을 하고 왔습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분들이 부인하지 못할 것은, 결코 많고 적음으로 감사와 만족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바로 그것이“영적 성숙“의 가장 분명한 표징입니다. 탐욕을 버린 자만이 성숙된 신앙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버리는 영적 성숙의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마지막 십계명인 10번 째 금령은 단순히 죄냐 아니냐의 차원을 벗어납니다.
그 마음속에 탐욕이 들어가면, 하나님의 생각과는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속에 탐욕이 들어가면 여러 가지 변명들이 생각이 나고, 나 스스로를 정당화할 이유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소유하십시오!
래리 크랩이 쓴 [래리 크랩의 파파기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금 소개해 보겠습니다.
둘째 아들 켄이 여덟 살이었을 때 우리는 센트럴 파크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그 아이가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열까지 세는 동안, 나는 다른 나무 뒤에 숨었다. 아이는 계속해서 나의 시야 안에 있었다. 2분가량 지났을까, 아이에게서 신명난 미소가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공포에 질린 표정이 나타났다.
‘아빠가 어디에 있지?’ 아이의 눈빛에서 이런 의문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얼른 나무 뒤에서 나왔다. 그러자 아이는 “아빠!”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아빠를 못 찾을까 봐 겁이 났어요.”
그 순간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아빠가 사 주기로 한 장난감도 그 무엇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가 원했던 것은 오로지 나와 함께 있는 것뿐이었다.
선교사이자 전도자인 스탠리(E. Stanley)는 이렇게 썼다.
“기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얻는 일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얻으면 다른 모든 것은 뒤따라온다.
그러면 어떻게 이 탐욕의 마음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때 일어나는 일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됩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처럼,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단순히 금지의 명령으로만 생각한다면, 결단코 축복된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 때문에 우리는 더욱 많은 죄책감에 시달려야 할 것입니다. 율법은 오히려 죄를 더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은 능동적인 사랑의 계명으로만 완성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 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고 있을 때만, 가능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거짓증거하지 않으면, 훔치지 않으면 기본은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축복해 주지 못하면 잘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요즘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계속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속에 계십니까?”
“성령님께서 당신의 마음속에 계시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십니까?”
제가 설교를 하면서 종종 경험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해도,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실 때와 계시지 않을 때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중에 ‘충만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우리가 충만해 하나님의 영이 우리들에게서 흘러넘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인해 제 삶에 전면에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용하시는데 우리의 조건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부요함”
바로 이런 감정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 - 22절의 말씀,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것은, 내 속에 탐욕이 제하여진 만큼, 내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만큼 이라는 것이지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기도했던 것처럼,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
그래야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
그래야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탐욕을 정복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며 살아갑니다.
우리 삶에 가장 큰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은 남의 것을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남의 것도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왜 다른 사람의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까요? 다른 사람의 소유는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게 있는 소유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의 진짜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의 진짜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의 것을 탐내면 하나님의 주권을 범하는 것입니다. 탐심이 이렇게 큰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부자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부자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것을 모아두었으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누리자”라면서 자기의 영혼, 자기 생명이 ‘자기 것’이라고 외쳤는데, 예수님은 “네 것이라는 생명을 오늘 내가 도로 가져가면 네 자랑하던 수많은 재산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는 생명을 ‘자기 것’이라고 큰소리 쳤는데 하나님은 “그 생명을 오늘 밤 내가 도로 가져가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짜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지 확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자주자주 하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십일조 생활을 하십시오.
탐심을 물리칠 수 있는 실제적인 길은 온전히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 생활은 하나님 나라에 내가 귀하게 쓰임 받는 것도 되지만 또한 그것은 내 삶의 탐심을 물리치는 힘이 됩니다.
베푸는 삶을 사십시오.
탐심을 물리치는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은 자꾸 손을 펴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자꾸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사십시오.
탐심을 물리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어찌 탐심을 부릴 수가 있습니까? 사랑하면서 살 때 탐심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마십시오. 남의 것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내게 하나님이 맡긴 것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내게 있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내게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내게 있는 것에 신실하고 충성하십시오.
열 번째 계명의 말씀을 마치면서 시편 23편 1절 말씀을 묵상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나눔의 가치를 존중하는 가정 /출20:15,엡4:28/ 이동원 목사
2014-11-28 15:22:28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원인이 되었던 1904년 영국 웨일즈에 영적 부흥이 일어났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새로워지고 있고 교회에 큰 부흥이 임했다는 소문이 요란했습니다. 교회 안나가던 보석가게를 경영하던 한 상인이 이런 부흥의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들려온 소식과 달리 교인들이 예배시간에 좀 격한 감정으로 기도하고 울고 있다는 것외에 크게 그의 마음을 감동시킬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요란하게 알려진 ‘부흥’이라는 것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부흥이라는 것은 기독교인들만의 ‘요란한 감정의 잔치’라고 생각하고 다시는 교회에 발을 안 들여놓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후 자기 가게에 한 젊은이가 오더니 자기가 이 보석가게에서 보석을 훔친일이 있다고 보석을 내놓으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마음이 성령이 임하고 부흥이 일어나서 자기가 회개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다음 주일 교회에 나가 자신도 영적 부흥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당시에도 유사한 사건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평양 대 부흥운동을 목격하고 증언한 스왈른 선교사는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교회에서 부흥을 체험한 성도들은 단순한 통회로만 끝내지 않았다. 다음날 사람들이 거리에서 마을에서 교회에서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도둑맞은 물건들이 되돌아 왔다. 잃어버린 지갑도 돌아왔고 오래동안 갚지 않았던 빚도 청산되었으며 부정한 방법들도 시정되었다.” 진정한 부흥은 인생을 바로 잡습니다.
출20:15에 기록된 십계명의 제8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둑질하던 사람이 도둑질을 중단했다고 해서 이 말씀이 온전히 순종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언제 다시 도둑질을 시작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신약성경의 엡4;28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제8계명의 온전한 적용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사도는 도둑질하던 사람에게 구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때 그는 더 이상 훔치는 자, 빼앗는 자가 아닌 나누는 자가 된 것입니다.
실제로 진정한 영적 부흥을 체험하고 회개한 사람들의 인생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제가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이 계명을 지켜 나눔의 가치를 존중하는 인생을 살아갈수 있을까요?
1. 노동의 가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도둑의 유혹을 극복하려면 먼저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는 의식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본래 이 계명에서 ‘도둑질’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가나브’(ganab)로 “옆으로 제쳐 놓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상적인 아닌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일체의 행위가 다 도둑질에 속하는 것입니다. 부당한 뇌물공여에 의한 챙기는 행위, 높은 이자로 부를 획득하는 행위, 빌리고 갚지 않는 행위(책도 포함됩니다.)
허락 받지 않고 물건을 가져오는 행위,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행위, 피 고용인이 회사의 자원을 남용하는 행위, 부당한 속임수 거래등 일체의 바르지 못한 이익추구 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씨 조선 시대 배고픈 유생 선비가 남긴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픈데 선비 체면에 도둑질 할수 없는 터에 마침 시장에 갔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습니다. 시장 한편에 좌판이 발려져 있는데 잣이 수북히 쌓여 있기에 묻습니다.
“이것이 무엇이요?”했더니 “잣이요”합니다. 그래서 한참 먹다가 다시 좌판 한쪽에 머리에 쓰는 갓들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은 무엇이요?”묻습니다. “갓이요”하니까, 갔답니다. 상인이 돈 안내고 가느냐고 하니까, 아니 “자시오, 가시오”하지 않았느냐고 했답니다.
만든 유머일지 모르지만 도둑질의 정신은 허락된 승인없이 땀흘리지 않고 무엇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이런 사람들을 불한당-곧 땀흘림없이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라는 말을 사용해 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불노소득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정도를 넘어선 지나친 아파트 투기 행위, 도박심리도 넓은 의미로 보면 도둑 심리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로 진지한 행복을 누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국에서 거액의 복권 당첨자들의 당첨 이후의 인생을 추적하여 연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론은 그것으로 행복해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때 미국에서 이런 유머까지 유행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3백만불 복권이 당첨되었다는 통보를 받고고민에 빠졌습니다. 남편이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이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면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가 그 남편에게 충격이 안가도록 지혜롭게 통고해 주기로 했습니다. 의사가 이 남편과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만일 당신에게 백만불의 복권이 당첨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했더니 빙그레 웃으며 “제게 무슨 그런 행운이 찾아오겠습니까?”
“그래도 그런 행운이 찾아 오신다면요?”하니까? “그럼, 세계 여행이나 한번 해보고 그래도 남으면 고생한 제 아내를 위하여 좋은 자동차나 사주지요”하더랍니다. 그래서 “만일 1백만불이나 2백만불도 아니고 3백만불이 당첨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까 “주저 없이 ”그럼 선생님에게 절반을 드리지요“하더랍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정신과 의사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답니다.
요행을 바라지 말고 일하십시오. 땀흘려 일하고 일의 정당한 대가를 누리십시오. 바울은 오늘의 본문 엡4:28에서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시편기자는 시128편 1-2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행복한 인생의 정체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기여의 하나는 직업의 귀천사상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개혁자들은 모든 직업이 소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개혁자 루터는 자기 책상 앞에”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을 붙여 놓고 그는 성경번역을 하면서 틈틈히 땀을 흘려 노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인류사의 노동의 철학을 바꾸는 불후의 명언을 남기에 됩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고. 그런 면에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유형의 투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그리스도인 재정 전문가들은 투자와 투기를 구별합니다.) 그릇된 투기는 성공할수록 노동의 의욕을 상실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일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도둑질의 유혹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드림의 삶을 습관화해야 합니다.
성경은 도둑질의 근원을 하나님과의 바르지 못한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그릇 되이 소유하려는 욕망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물질의 주인이심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필요를 신실하게 공급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일학천금을 노릴 필요도 없고 투기에 매달릴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투기와 투자를 고민하는 대신 좀더 기도하고 좀 더 일상에 성실한 삶을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눈을 뜨든지 감든지 돈만 보인다면 우리는 이미 탐심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탐심은 언제라도 우리를 도둑으로 변신시킬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탐심에서 우리가 자유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이미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소유할 모든 것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임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림을 습관화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이 드림의 기본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십일조를 망각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도둑이 된다고 말합니다. 말3:8을 읽어보십시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이어서 3:10에서 그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최근 우연히 참존 화장품 김광석 회장(장로)님의 간증 테잎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본래 독실한 불교신자였는데 무허가 약품 제조로 도망 다니면서 양산 통도사 절간에서 범인인 자기를 찾는 신문 기사를 읽고 생전 처음 기도하기를
“하나님, 구해 주시면 하나님 믿겠습니다.”고 기도했답니다. 그후 자수하고 8억 벌과금 처벌을 받은후 교회 나가기 시작했는데 믿은지 얼마 안되어 한 여성도가 이분에게 “사장님, 혹시 십일조 하십니까?”고 도전했다고 합니다.
국민으로 세금안내면 국민 자격이 없고 성도로서 십일조 안내면 성도 자격이 없다고 도전하면서 말3:8-10을 읽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김광석 회장님은“하나님, 그러면 꼭 한번만 시험하겠습니다.
십일조를 도둑질 안하고 드릴터이니 저를 구체적으로 한번만 축복해 주십시오”기도 했답니다. 그때 이분이 일년 매출이 1억이었는데 결단하고 십일조 드린후 놀랍게도 8억 매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하나님은 이분의 모든 삶의 장에 문자 그대로 하늘 문을 열고 부어 주시는 것을 경험했다고 간증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십일조를 습관화해 보십시오. 자녀들에게도 십일조를 가르쳐 보십시오. 물질에서의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것입니다.
3. 나눔의 삶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림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눔을 생활화하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주는자와 받는자-두가지 유형의 인생이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는 주로 받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숙해 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주는 것,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배워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사도도 친히 그가 전도하고 양육한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는 마지막 말씀에서 행전20:35에서
“--주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한 최대의 사건은 요한3:16에서의“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 소중한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그들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3:16을 경험하고 이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얼마나 요일3:16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라는 신학자는 요한3:16을 체험한 모든 성도들이 요일 3:16에 순종하고 있지 않는 한 아직 그의 믿음의 삶은 온전하다고 할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일3:16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김광석 장로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가장 은혜가 되었던 부분은 이런 대목이었습니다. 십일조 헌금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축복을 경험하자 두려운 생각까지 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날 기도중에 이렇게 주님께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물질만이 아닐 터인데 물질 말고 제가 무엇을 주께 드려야 하겠습니까?” 그때 마음속에 두 가지 결심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하나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결코 부끄럼이 없도록 “간음하지 않고 살겠습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허락하신 물질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기뻐하시는 올바른 일에 쓰면서 살겠습니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가지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아내를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에게 주신 물질을 사용 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들, 선교사역, 장학 사역, 교회 개척 사역, 구제 사역들을 보여주시고 섬기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더 풍성하게 자신의 삶을 축복으로 붙들어 주시는 것을 경험했다고 간증하십니다. 제가 너무 은혜를 받아서 제 아내에게 “당신도 앞으로 반드시 참존 화장품만 쓰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의 제 8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에 대한 진정한 순종은 도둑질 안하겠다는 결심만으로 부족합니다. 중단했던 도둑질은 언제든지 다시 재개될수 있습니다.
오히려 도둑질하던 이 손으로 수고하여 일하고 그리고 이 땀의 결실로 이웃들과 적은 것이라도 나누기 시작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빼앗는자도, 훔치는 자도 아닌 나누는 자, 축복하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떼제 공동체에서는 성찬을 나눌 때마다 이런 찬송을 부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고. 성찬의 떡은 물론 우리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깨어진 주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떡은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욕심을 깨고 지갑을 깨고 이웃을 위해 기꺼이 깨트려 지고 나누어 져야 할 우리의 희생과 사랑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간접적인 도둑질의 유형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2. 도둑질의 원인들은 무엇입니까?
3. 어떻게 도둑질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4. 우리 가정에서 나눔의 정신을 격려하고 실천할 수 있는 방안들을 나누어 보십시오.
자족할 줄 아는 가정 /출20:17, 딤전6:6-10/ 이동원 목사
2014-11-28 15:12:31
유명한 부호 록펠러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현재 소유하는 모든 재산으로 만족하십니까? 그는 "아니지요, 그럴수 없지요"했습니다. 그래서 기자는 다시 "그러면 얼마나 더 소유하시면 만족하시겠습니까?"물었습니다.
그는 미소지으며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조금만 더"(Just a little more)입니다. 중동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더 좋은 옷, 더 좋은 신발을 모으는 욕망을 그칠 수 없어 괴로워하던 페르샤 여왕이 자기 나라에서 가장 지혜로운 스승이라고 알려진 현자를 불러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더 좋은 옷, 더 좋은 신발을 갖고 싶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소?" 현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자신의 현재의 삶에 자족할줄 아는 한 사람을 찾아 그의 옷과 신발을 하루만 입고 다녀 보시지요"했다고 힙니다.
그래서 여왕은 신하를 전국에 보내어 부지런히 그런 사람을 찾았으나 찾을수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매번 찾을수 없다고 보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왕은 포기하지 말고 찾으라는 엄명을 내립니다.
드디어 어느날 그런 사람을 국경선 근처 산에서 찾았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보고하던 신하가 "왕이시여,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무슨 문제냐?고 묻는 여왕에게 신하는 "그 사람은 옷을 입지 않고 신을 신고 있지 않습니다"고 보고했다고 합니다.
탐심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문제입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보고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느낀 그 때 이미 탐심은 존재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탐심은 어쩌면 인간됨의 존재의 양식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탐심을 다스릴지 못할 때 탐심은 우리를 죄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우리에게 "탐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탐심의 미혹을 극복하고 건강한 인생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건강한 인생이라는 말 대신에 경건한 인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 건강한 가정을 만들고 건강한 웰빙인생을 사는 열번째 법칙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 대답이 바로 자족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참된 자족의 삶을 위해서 먼저 우리는 탐심의 정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탐심을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한 세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려고 합니다.
1. 탐심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탐심의 미혹에서 승리하려면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탐심의 본질 혹은 그 정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1)우상숭배입니다.
골3:5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바울사도는 탐심의 정체를 규명해 놓았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그것을 극도로 탐하게 되면 우리가 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은 안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2)불법의 통로입니다.
탐심을 경계하는 계명은 십계명중 가장 마지막에 기록됩니다. 왜 그럴까요? 가장 중요하지 않은 계명이어서 그럴까요? 오히려 저는 이 계명이 모든 계명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다른 모든 계명을 깨트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계명은 모든 불법의 통로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탐심을 가진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유일하신 신으로 인정하고 그만을 예배하며 그의 이름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탐심을 가진 자가 어떻게 그 마음에 진정한 안식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탐심을 가진자가 부모를 온전히 공경할수 있겠으며 이웃의 생명을 존중할수 있겠습니까? 간음은 바로 이웃에 속한 사람을 탐하는 죄를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도적질 역시 이웃의 것을 탐내는 마음을 행동에 옮긴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탐심은 모든 불법의 통로입니다.
본래 탐심이라는 단어의 원어 "하마드"(chamad)는 소유할 권리가 없는 남의 것을 탐내는 불법한 욕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비단 탐심은 물질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10계명에 명시된 것처럼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성욕, 그외에 권력욕, 명예욕등도 다 포함됩니다.
2. 탐심은 왜 위험할까요?
1)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탐심은 강력한 관심이요 이 관심이 우리를 지배하는 순간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한 것입니다. 우상의 가장 단순한 정의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일체의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은 우리와 하나님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묘사할 때 그것을 '경건'이라고 부릅니다. 경건이라는 희랍어는 본래 eusebeia로서 eu+sebomai(바르게, 잘+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godliness'라고 하는데 역시 '하나님을 닮아 가는 바른 자세'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딤전 6:6에서 탐심을 극복한 자족의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유익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딤전6:6을 보십시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반대로 탐심은 결정적으로 경건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딤전6:10의 경고를 읽어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반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탐심이 우리를 참 믿음에서 떠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탐심의 가장 큰 위험이 있습니다.
2)이웃과의 건강한 관계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탐심은 우리로 이웃과의 건강한 관계도 위협합니다. 돈 문제가 끼어드는 순간 얼마나 많은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파괴되고 있는지요? 왜, 그렇습니까? 돈의 탐심이 작용하는 순간 우리는 이웃을 섬김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닌 것을 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군대간 그리스도인이 하루는 너무 너무 배고파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신자 친구가 빵을 혼자만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열을 받아
"야, 이 친구야, 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모르냐?했더니 그 친구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야, 이 친구야, 너는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도 모르느냐"고 하더랍니다.
탐심이 작용하는 순간 우리의 인간 관계는 즉각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순수한 관계일수록 돈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이웃에게 주는 것은 성경적이지만, 꾸어주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돈의 이기심에서 자유할 수 없다면 동업도 조심해야 합니다. 탐심은 언제라도 우리의 관계를 위협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3)자신의 행복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의 관계를 위협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 자신의 행복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딤전6:9에서 탐심은 탐심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여러 가지 시험에 들어가게 한다고 경고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절에서는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욕심을 저항하지 못하고 욕심에 굴복하는 순간 욕심은 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자리잡기 시작한 이 탐심의 죄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안에서 여러 형태로 계속 자라납니다. 많은 경우 이 죄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파멸 시킨후 우리를 놓아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파멸의 순간이 오기 전에 미리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레슨이 있다면 자족의 레슨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예수 믿고 평생을 통해 배우고자 한 가장 중요한 삶의 레슨이 바로 이 자족의 교훈이었던 것입니다. 빌4:11을 보십시오."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오늘 딤전 6장에서 바울은 동일한 진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특히 자족의 삶을 위해 무엇보다 우리가 인생의 출발점과 골인 지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 지금의 우리의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상황과 상관 없이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7절의 말씀입니다."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8절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는 것입니다.
3. 탐심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습관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좋은 습관만이 나쁜 습관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탐심의 습관을 대체하는 성경적인 경건의 습관 두 가지를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1)하나님께 드림을 습관화하십시오.
저는 목회생활을 하면서 종 종 사람도 좋으시고 교회도 비교적 열심히 나오시는데 정기적이고 규칙적인 헌금의 습관이 없으신 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신앙행태를 알아보면 거의 예외 없이 믿음의 고백이 불확실하고 신앙이 자라지 않고 계심을 봅니다.
그런데 그런 분중에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변화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개 이런 변화는 어떤 신앙의 체험을 수반함과 동시에 물질적인 헌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은밀한 욕심이 깨어짐과 동시에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첫 목회를 하던 시골 교회의 한 과부 아주머니를 잊을 수 없습니다. 이분에게 두 가지 별명이 있었는데 부자요, 노랭이 이셨습니다. 부자인데 인색한 분이셔서 좀처럼 남을 돕거나 동네 일에 돈을 내놓으시는 일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교회 부흥회에 나와 은혜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한 3개월 나오시던 어느 주일 이 분이 예배 시간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시는 시점이 설교 시간이 아니라 헌금시간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때가 이분이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내 놓는 순간이셨습니다. 욕심이 깨지면서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그동안 탐심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있다가 그 둑이 터지는 순간 은혜의 강이 그분의 영혼에 밀려온 것입니다. 아직도 헌금의 습관을 갖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지금 그렇게 해 보십시오.
고전16:2에 보면 바울 사도는 "매주 첫날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드리는 규칙적인 헌금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시간마다 드림을 생활화해 보십시오.
2)이웃과의 나눔을 습관화하십시오.
잠21:26에 보면 "어떤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베푸느니라"고 했습니다. 탐심은 베품으로만 나눔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의인의 모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인됨을 증명하는 것은 나눔의 삶입니다. 이제부터 얼마나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 가운데 부산에 한 자수성가하신 중소기업의 대표이사인 분이 있습니다. 교회 안수 집사님이십니다. 이 분은 거의 20년 가까이 매달 한번씩 정기적으로 주변 어려운 동리에 독고 노인 가정이나 소년 소녀 가정을 선정하여 선물을 가지고 가서 자기 자녀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집안일 도와 드리고 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중의 하나가 자식들에게 나눔의 중요성을 몸으로 배우게 하고 주변 이웃들의 가난을 잊지 않고 살게 하기 위해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제 목장 별로 적지 않은 목장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무디 신학교의 교장이었던 조지 스위팅 박사는 이런 말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최후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모았느냐, 벌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었느냐, 나누었느냐가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심판의 날입니다. 심판의 그 날 부끄럼없이 인생을 결산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러면 지금부터 나눔의 삶을 습관화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주신 것으로 자족할 줄 아는 인생을 사십시오.
<설교 적용 질문>
1. 탐심의 종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2. 탐심이 끼치는 영향들을 나누어 보십시오.
3. 나의 인생에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탐심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4. 탐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나누어 보십시오
admin
출애굽기강해 31. 십계명(9)_ 거짓 증거하지 말라 /출20:16/ 이종철목사
2022-05-23 09:16:19
출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거짓말? 거짓 증거?
제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입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 증거라고 하게 되면 재판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맥락이 잡히지만, 거짓말하게 되면 맥락을 잃어버리고 죄가 추상화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덕성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의 인권에 관심이 있습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내 자신의 성결함이나 양심의 법정이 아니라 이웃의 눈물이며 사회의 법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거짓말함으로써 타인이 받게 될 고통을 보라는 것입니다. 죄는 관계에서 발생합니다. 그것이 죄인 이유는 나의 잘못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피해자의 눈물과 고통에 맞추어져야 거짓말을 그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양심의 법정만 해매다 결국 반복해서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 못에 떨어진다”(계21:8)는 요한계시록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거짓말’은 모든 거짓말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는 예컨대 이단이나 적그리스도나 우상숭배자나 마귀를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죄가 무엇인지 알고 눈에 보여야 죄와 싸우거나 죄를 근절할 수 있습니다. 죄를 추상화하면 죄가 모호해집니다.
구약에서 규정하는 죄는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가 눈에 보입니다. 지키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율법 조항은 613가지이고 이것만 지키면 됩니다. 그래서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창6:9)로, 욥은 온전하고 정직한 자(욥1:1)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 14)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 얽어매길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우리가 정말 잘못이라 여기는 큰 죄들을 짓지 않는다면 아름답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 이후 수도원적인 영향으로 극단적인 성결을 추구하면서 세상은 온통 죄로 가득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절대 타락이라는 교리에 맞춰 세상을 온통 어둡게 칠하고 말았습니다. 마음속의 죄까지 따져 죄의 가짓수는 엄청 많아졌는데 그것에 묻혀 정말 큰 죄들이 간과됩니다. 실제 간음이 마음속의 간음보다 더 나쁜 것이 아닙니까? 미워하는 것보다 살인하는 것이 더 악한 죄가 아닙니까?
거짓말도 그렇습니다. 루터는 그래서 거짓말을 세 종류로 구분하였습니다. 익살스러운 거짓말, 유익한 거짓말, 해로운 거짓말입니다. 해로운 거짓말은 해서도 안 되고 이것이 죄입니다. 문제는 익살스러운 거짓말과 유익한 거짓말입니다. 익살스러운 거짓말은 아무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 가벼운 농담 같은 것입니다. 훌륭한 배우들이 관중을 속이는 연기도 여기에 속합니다. 유익한 거짓말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입니다. 예컨대 여호수아서의 기생 라합이 자기 집에 숨겨둔 두 정탐군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이 이미 떠났다고 거짓말을 한 경우입니다.
앞에서 히브리 산파들은 애굽 왕 바로를 속이고 히브리 아이들을 구했습니다.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는 미리엘 신부가 은수저를 훔쳐 달아났던 장발장을 살리기 위해 “내가 가지고 가라 한 은촛대는 왜 가져가지 않았느냐”며 거짓말을 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에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중 코린텐 붐의 가족들은 유태인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들이 숨겨둔 유태인의 가족이 없다고 독일군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루터는 이런 거짓말에 대해 “그것을 거짓말로 부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오히려 그것은 사탄의 광분을 잠재우고 타인의 명예와 생명과 유익에 이바지하는 미덕이요 훌륭한 배려”라고 평가했습니다.
반면에 같은 종교개혁가이면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를 작성했던 우르시누스는 루터와는 다른 견해를 보였습니다. “우리는 이익을 목적으로 악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예의상 사용된 거짓말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라합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그들이 한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한 그들의 마음 때문에 그들을 축복하셨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아무리 이웃의 생명을 위해서 한 거짓말이라도 거짓말은 죄라는 태도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떨까요?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거짓말을 두 번이나 행합니다. 한 번은 애굽 왕 바로에게 그렇고 다른 한 번은 블레셋의 아비멜렉 왕에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때문에 아브라함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애굽 왕과 아비멜렉을 혼내셨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처자를 빼앗기는 일이 고대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생존을 위해 거짓을 행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셨습니다. 물론 거짓말이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행하는 거짓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서 심각하게 문제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이 우리의 탐욕이나 어떤 사악한 동기에서 행해지고 그것이 이웃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고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혔을 때는 매우 심각하게 대하십니다.
재판상의 정의
바로 이것이 아홉 번째 계명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은 재판과 관련된 정의의 문제입니다. 9계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신명기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신19:15-19)
고대 사회에서 재판은 주로 마을 광장이나 성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과학적 수사 능력이 뒤떨어졌기에 고대 재판에서는 사람의 증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명만 입을 맞추면 어떤 죄도 뒤집어씌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당했던 사람이 나봇입니다. 나봇은 아합 왕이 자기 별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팔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이 주신 유업이라고 하여 팔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왕비 이세벨은 거짓 증인 둘을 매수하여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증언하게 합니다. 이 때문에 나봇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고 땅을 빼앗기게 됩니다.
외경 ‘수산나서’에서는 목욕을 하고 있던 수산나에게 못된 짓을 하려다가 실패한 두 노인이 수산나가 외간 남자와 간음을 행했다고 거짓 증언을 합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수산나 앞에 어린 다니엘이 나타나 지혜로서 그들이 거짓 증언했음을 밝혀 위기를 극복합니다. 이처럼 9계명은 재판상의 정의와 관련된 중요한 계명입니다.
오늘날에는 위증죄가 여기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위증죄나 무고죄가 매우 많습니다. 2007년 한 해 통계를 보니 일본은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이 9명이고 무고죄는 10명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위증죄로 1,544명, 무고죄로 2,171명이나 기소를 당했습니다. 인구 비례를 따져 계산하면 일본보다 위증죄는 857배, 무고죄는 1,085배나 되는 셈입니다. 위증죄는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증가추세입니다. 법정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는 온갖 거짓과 사기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장관들이나 고위직 후보자들이 청문회에서 거짓을 말하고 진실을 은폐하고 위증을 해도 제대로 기소도 되지 않고 부끄러워도 하지 않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나 정직 지수는 매우 낮습니다. 미국 같은 사회에서는 위증죄는 매우 큰 죄입니다. 대통령도 탄핵당할 수 있습니다. 닉슨이 실각한 이유는 야당 당사를 도청했다는 것보다 그것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거짓과 위증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클린턴 대통령도 비서와의 성추문으로 탄핵을 당할 뻔 했습니다. 그는 위증죄를 피하기 위해 성추문을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며 교묘히 빠져 나갔습니다. 그 교묘함이야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위증죄를 피하려는 모습에서 위증죄를 얼마나 무겁게 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언제쯤이면 사람 말을 믿을 수 있고 또 진실과 정직에 대해서 무겁게 대하는 그런 사회가 될 수 있을까요?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탐욕을 위해서 서슴없이 거짓말을 하고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여 년 전에 검찰총장 옷 로비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당시 권사요 집사로 신앙심이 좋다는 분들이 청문회에 불려나왔습니다. 그때 어떤 분은 성경에 맹서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고 하여 맹서도 하지 않은 권사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증언이 서로 상반되었습니다. 누가 거짓 증언을 했는지 모르지만 둘 중에 하나가 거짓말을 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서구는 오랜 기독교 전통이 있어서 그렇고 우리 사회는 짧아서 그런가요? 거짓이 횡행하는 데는 각 민족마다 사회 역사적 맥락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민족의 거짓됨에는 세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 사회가 혈연, 지연, 학연 등 패거리 문화가 강하다는 점입니다. 정의나 진실보다는 자기편이 중요하고 자기편을 위해서는 거짓을 스스럼없이 행합니다. 다른 하나는 분단과 전쟁과 오랜 이념 갈등을 들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진실인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느 편이냐가 중요합니다. 이념은 우리에게는 생존의 문제였고 지금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정의가 작동을 하지 못하고 어느 편인지가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근대화와 고도성장 과정에서 과정보다는 결과만 중시하는 태도에서 기인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면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이런 낡은 가치들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언제까지 빵에 매여 살겠습니까? 우리가 더 선진 사회로 들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진실, 정의, 민주에 대한 가치관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불신하는 사회, 자기만을 위해서 달리는 사회, 스트레스가 가득한 사회는 발전하고 행복하기에는 요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우리 민족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의 명예
종교개혁자들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이웃의 명예의 실추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칼빈의 9계명에 대한 해설입니다. “이 계명의 목적은 진리이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미워하시므로 우리는 서로 진실을 실행하여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남을 중상하지 말며 거짓으로 남의 재산을 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는 악의와 험담으로 이웃의 명예를 상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거짓말이나 심지어 훼방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다.”(『기독교강요』 Ⅱ.8.47)
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교리문답의 9계명 강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신체, 배우자, 소유물에 더하여 우리에게는 또 다른 보물이 있다. 바로 명예와 좋은 평판이다. 우리는 이것 없이는 살 수 없다. 노골적인 치욕과 경멸을 받으며 사람들 가운데 사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이웃의 명성, 훌륭한 이름, 곧은 성격이 그의 돈과 소유물만큼이나 사라지거나 감소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모든 사람은 그의 고결함을 유지하며 아내와 자녀와 종들과 이웃 앞에 설 수 있어야 한다.”(255,256문) 거짓 증언은 곧 말이고 거짓된 말로써 빼앗아가는 것은 재산만이 아니라 그 명예일 때가 많습니다. 명예를 잃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권력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분입니다. 이웃의 명예를 사실이나 정의가 아닌 거짓과 왜곡과 험담으로 실추시킨다면 그것은 아홉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다른 사람에 대한 명예를 공격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수준입니다. 이 또한 주로 정치권과 언론을 통해서 양산되고 확대되고 있습니다. 흔히 등장하는 비하적인 표현들, 요즘 들어 잦아진 ‘종북’이나 ‘빨갱이’ 표현은 매우 위험스럽습니다. 인터넷이나 댓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인신비방이나 왜곡, 원색적이거나 험한 표현 등 또한 상대방의 명예를 실추시킵니다. 이 또한 아홉 번째 계명의 위반이라 할 것입니다.
불의하다면 그 사실에 대해서 지적만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 이것을 지적해야 할 시점인지도 판단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명예가 실추될 행동이나 말에 대해서는 더 신중해야 합니다. 비판이나 판단하기 전에 마더 바실리아의 기도문을 한 번 읊조리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더라도 화평을 택하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의 친구가 될 것이다. 만약 네가 비판하는 자리에 서 있다면 하나님나라를 건축할 수 없고 오히려 이를 파괴하느니라”
불의에 대해서는 지적도 하고 비판하는 게 필요합니다. 워낙 요즘 한국사회나 한국교회에 불의가 관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비판과 험담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판을 하더라도 그 근본 마음은 사랑이고 용납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 증거에 능한 자가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욥을 거짓 증거로 송사하였습니다. 마귀는 또한 거짓의 아비라 불립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거짓 증거를 하고 거짓된 행동을 하는 것은 마귀를 좇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와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진실과 정직의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아멘’은 진실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계3;14)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길을 좇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출애굽기 강해 32/ 십계명(10)_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출20:17/ 이종철목사
2022-05-23 09:18:41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마지막 열 번째 계명입니다. 다른 계명들과는 달리 탐심이라는 마음의 욕구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하마드’라는 동사는 어떤 물건을 원하다 열망하다 탐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탐심이라는 마음의 죄를 문제 삼고 있는가? 아니면 실제 탈취해가는 행동을 문제 삼고 있는가?
구약 신학의 대가 마틴 노트는 “이 동사는 탐욕의 충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불법적으로 자기 것으로 취하려는 시도까지도 포함한다”고 주석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세계에서 죄는 마음속에 있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죄가 됩니다. 설사 탐심이라는 마음속의 죄가 문제가 될지라도 그것은 그 탐심이 반드시 행동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품은 간음이나 탐심에 대해서 책망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단지 마음속의 죄에 대한 책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속의 죄가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면서 은밀한 가운데, 또 교묘한 모습으로 행동화 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마음속에 탐욕이 있으면서도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통제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마음속에 아예 탐심이나 이런 욕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좋습니다. 그런 사람은 죄를 질 가능성도 적고 또 매우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네 이웃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웃’이라는 존재입니다. 십계명 한 구절에서 ‘네 이웃’ 이라는 단어를 세 번 반복하고 있고, ‘그의’라는 소유 대명사를 네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에 대한 금지명령은 이미 6계명 살인하지 말라, 7계명 간음하지 말라, 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 9계명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씀에 중복되어 있습니다. 구지 10계명은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열 번째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이웃’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한자로 ‘사람 인(人)’은 작대기 두 개가 기대어 서 있는 모습입니다. 홀로는 설 수 없습니다. 간자도 ‘사이 간(間)’입니다.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에는 감옥 생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좁은 감옥에 많은 사람이 살기에 냄새도 나고 늘 부딪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인간이 소중함을 느낄 때가 있는데 바로 추운 겨울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붙어서 잘 때 추위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인간이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더운 여름입니다. 냄새가 나고 더워서 견디기 어렵습니다. 책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징역살이는 여름이 더 괴롭습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36도의 열덩이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이웃이라는 존재가 그렇습니다. 소중하기도 하지만 또 경쟁 대상이거나 거추장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주로 유목 생활을 하기에 외부의 적의 공격에 취약합니다. 그래서 중동 문화에서는 적인지 이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이유로 중동식 인사는 매우 깁니다. 적의가 없고 서로 이웃임을 확인하는 행동입니다. 손님 환대 또한 중요합니다. 나그네가 머물면 극진히 대접해야 합니다. 대접한 음식의 소금기가 그 뱃속에서 사라질 때까지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기도 합니다. 손님을 이웃으로 만드는 작업이고, 자신이 낯선 곳에 갔을 때 동일한 보호를 받기 위한 의도가 담긴 행동이 관습으로 되었습니다.
이웃은 소중하지만 항상 파괴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같이 있다 보니 경쟁심이 발동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보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같습니다. 동물 사이에는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 서열 짓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인간 사이에서는 경쟁심으로 비교의식으로 발전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그래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에서 아벨보다 뒤처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좋은 것을 보면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자원은 제한되어 있기에 상대방의 것을 빼앗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배우자가 그렇고 이웃이 가진 좋은 물건을 보면 또 그렇습니다. 그렇게 빼앗고 뺏기다 보면 결국 인간은 공동체를 이룰 수 없고 함께 사는 게 지옥이 될 것입니다. 10계명은 우리가 공동체적 존재이며, 함께 살기 위해서는 특별히 이웃의 소유물을 인정하고 탐심을 내지 않는 것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것, 네 것, 공동의 것이라는 분명한 소유의식이 필요합니다. 내 것만이 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너무 당연한 소리인데 사람에게 욕심이 들면 이 분별심이 사라지고 자기 것인냥 착각합니다. 정당한 방법이나 상대방이 양도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소유의식을 가질 때 우리가 이웃의 소유를 넘보지 않게 됩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하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그 남편인 우리아를 살인교사합니다. 다윗의 죄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직접적인 죄는 제10계명 네 이웃의 소유를 탐한 죄입니다. 고대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로 여겼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소유물을 부당하게 빼앗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을 다음과 같이 책망합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12:9-10)
밧세바가 우리아의 소유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족보에서까지 ‘우리아의 아내’(마1:6)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소유를 부당하게 빼앗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업신여겼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다른 전제국가에서 왕은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소유를 마음대로 취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소유는 그 누구라도 침범할 수 없고 소중히 지켜져야 합니다.
제국주의가 문제인 것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마치 자기 것인 마냥 다른 나라의 소유를 빼앗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17:26)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 국가를 소중히 여기는 것도 제10계명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자족하라
이웃의 소유가 탐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제10계명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80문: 제10계명이 명하는 것이 무엇인가?
답: 제10계명이 명하는 것은 우리 처지를 만족히 여기며 이웃과 그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의롭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라 하는 것이다.
81문: 제10계명에 금하는 것이 무엇인가?
답: 제10계명에 금하는 것은 우리의 처지를 부족하게 여기거나 이웃의 행복을 시기하거나 이웃에 있는 모든 물건에 대한 불의한 행동과 감정이다.
탐심이 생기는 원인을 이 문답에서는 ‘우리 처지를 만족히 여기며’ 또는 ‘우리 처지를 부족하게 여기거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의 것에 욕심을 냅니다. 그러나 인간은 만족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목숨이 천하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하듯이 우리 마음 또한 천하보다도 넓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족함을 모르고 탐욕이 끝이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우화 중에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바흠이라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바흠은 평범하면서도 행복하게 살던 소작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흠은 우연한 기회에 땅을 조금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얻은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욕심이 생겼습니다. 땅을 계속 넓혀가야만 직성이 풀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지방에서 땅을 싸게 준다는 말을 듣고 그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땅을 파는 방식이 대단히 독특했습니다. 하루 종일 자기 발로 걸은 만큼의 땅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해가 지기 전에 그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무효가 됩니다. 바흠은 아침 일찍 출발했습니다. 계속 걷다보니 비옥하고 탐스런 땅들이 많아서 조금만 더 하다 보니 반환점을 돌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바흠은 마음이 급해 장화도 옷도 벗고 달렸습니다. 땀이 비오듯 했지만 조금이라도 멀리 가기 위해 마구 달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겨우 해가 막 질 무렵 출발점에 도착했지만 바흠은 그만 심장이 터져 그 자리에 피를 토하며 죽고 맙니다. 바흠의 하인이 바흠을 땅에 묻었는데 그 땅은 겨우 2㎡ 가 조금 넘는 규모의 땅이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지 한 평 남짓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지난 세기 최고의 부호였던 록펠러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재산으로 만족하십니까?” 록펠러는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기자는 “그러면 얼마나 더 소유하시면 만족하시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록펠러는 미소 지으며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Just a little more)”
성경은 우리에게 자족할 것을 명령합니다. 디모데전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갖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우리는 주어진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이 자족(아우타르케이아)은 당시 헬라철학에서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덕목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행복이 자기 마음 안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과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대화는 유명합니다. 디오게네스는 조그만 나무 통속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한 번 보고 싶어 초청을 해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마침 디오게네스는 통속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대 철학자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한 알렉산더 대왕이 “선생님, 당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고 싶소.” 하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청이 하나 있소. 저리 비켜 서 주시오.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는 알렉산더의 권세나 물질을 전혀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와 헤어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원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대왕이오. 누가 당신의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결코 디오게네스가 되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당시 땅 끝이라 생각했던 인도까지 가며 땅을 정복했지만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울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족하는 마음이 없었고 욕망의 포로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면 불행하게 되고 이것이 욕심으로 변하여 이웃의 소유를 탐하게 됩니다. 스토아 학파의 격언은 다음과 같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려거든 그 소유물을 증가시켜 주지 말고 그 욕심을 제거하도록 도와줘라.” 그런 점에서 잠언서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는 얼마나 겸손하면서도 정확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 아굴은 물질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탐심에 빠지거나 이웃의 담을 넘는 어리석을 행동을 하지 않도록 적당히 부요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나누라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않는 방법은 거꾸로 이웃에게 자기 소유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제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탐심은 베풀 때 사라집니다.
인간의 욕심이 큰데 자꾸 비우라고 하여 비울 수 있겠습니까? 그것보다는 좀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을 욕망하는 것이 낫습니다. 물질이나 권력보다는 일 자체를, 사랑을, 사상과 정신을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의 우애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의 재물이나 탐심을 참을 수 있습니다.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사랑하는 자는 일시적인 안락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보다는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좀 더 고상한 것들을 사모할수록 그것보다 저열한 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진리 중의 진리이며 빛 중의 빛이며 생명 중의 생명 중의 생명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천하보다 넓은 마음은 천하보다 크신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이념이나 이상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경험하며 맛보며 함께 함으로 자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계명의 첫계명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탐심은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는 말씀처럼 우상과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우상은 탐심입니다. 이 탐심을 이기고 이웃과 평화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출20:15/ 김의식목사
2022-03-19 08:43:49
우리가 말세 마지막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위해 십계명의 말씀을 계속해서 나누고 있는데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제5 계명은 부모 존중, 제6 계명은 생명 존중, 제7 계명은 가정 존중, 제8 계명은 물질 존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요. 제8 계명인 출애굽기 20:15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여기 ‘도둑질한다’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בנַגָּ(가나브)’란 단어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단어의 뜻은 ‘몰래 가져가다’(신 24:7), ‘속이다’(창 31:27)는 등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한 마디로 말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도둑질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구약성경의 십계명을 신약성경의 복음의 말씀으로 재해석해 주시는 가운데 이 시간도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의 것부터 도둑질하지 말아야 함
먼저 말라기 3:8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은 다름 아닌 십일조와 헌금이라는 거예요.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함으로 저주를 받아서요.
결국 하나님의 복을 다 잃어버렸다고 무섭게 경고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다가 갖가지 사고 나서 돈이 새어 나가고요. 병원에다 갖다 바치고요. 법원에다 갖다 바치고요. 세무서에다 갖다 바치고요. 돈은 돈대로 들고요. 고통은 고통대로 당하고요. 이보다 불행한 일이 어디에 있어요? 여러분,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돈이 없으셔서 우리의 십일조와 헌금을 요구하시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더 이상 도둑질하지 않고요.
온전한 십일조와 헌금을 드림으로 인해서요. 그 십일조 헌금으로 주님의 일도 힘 있게 이루어 나가시지만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거였어요. 그래서 말라기 3:10에 계속해서 이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세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러분,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강조하실 때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세요. 더욱 강조하실 때는 “나 여호와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세요. 그런데 가장 강조하실 때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고 말씀하세요. 그래서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에서는 더욱 간절한 심정으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는 말씀을 19번이나 반복하시며 강조하시면서요. 우리를 일깨워주시고자 하셨던 거예요.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면 복되게 살 수 없기 때문에요.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의 진정한 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면요. 이제부터라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요. 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하신 말씀이 여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요. 우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실 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들이나 성경에 대해 무지한 자들은 십일조 헌금은 구약의 율법이니까 지금은 안 지켜도 된다고 해요. 여러분,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에요.
그런데 십일조는 이미 율법 이전, 적어도 율법을 주어지기 600여 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의의 왕 멜기세덱에게 첫 번째 십일조 헌금을 바친 데서부터 시작되었고요. 그 후 믿음의 조상들인 이삭, 야곱, 모세, 사무엘, 히스기야, 느헤미야, 아모스, 말라기 등 구약성경을 통해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어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십일조를 바친다고 하면서요.
수입이 적을 때는 온전한 십일조를 곧잘 드려요. 그러나 아파트나 건물을 팔거나 퇴직금이나 큰 목돈이 생겼을 때는 거의 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마는 거예요. 그래 놓고도 겉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큰 소리를 쳐요. 다 현대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외식하는 자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하고 7번이나 경고하시면서요.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 23:24)고 책망하시고요. 결론적으로 마태복음 23:2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명령하셨어요.
다시 말하면 이것(the latter)도 행하라는 것은 후자에 나오는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으로 행하지만요. 저것(the former)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 것은 전자에 나오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도 버리지 말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신 거예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고 분명히 경고하셨어요.
우리가 이 땅 위에 살면 얼마나 산다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해 가면서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더욱이 그렇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해 가면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서요. 부자가 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결국에는 다 하나님의 심판 받을 일들이 아니에요? 그러한 여생도, 자손도 결코 하나님의 온전하신 복을 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예화) 안드리아스 휴브너가 쓴「기독교인이 부자 되는 비결(Presperity, God`s Will for Your Life)」란 책 이야기
가장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고 그분만 경외하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대로 지켜 나가고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간구하면서요. 온전한 십일조부터 철저히 시작하고요. 삶의 순간마다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면서요.
하나님의 축복이 지연되더라도 결단코 하나님의 축복을 포기하지 않으면요. 누가복음 6:38의 말씀처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라도 더 이상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리지 마시고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계시고요. 말씀이 약속대로 우리에게 복 주시는 이심을 확실히 믿는다면요. 온라인 예배를 본다고 지난 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던 것부터 다 토해내고요. 온전한 십일조 생활부터 새롭게 시작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여러분의 여생과 자손들까지도 부어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2. 사람의 것을 도둑질해서는 안 됨
계속해서 출애굽기 22:1, 4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구약의 율법에서는 우리가 남의 물건을 도둑질해서요. 죽였거나 팔았으면 소는 5배, 양은 4배로 갚으라고 해요. 그러나 도둑질한 것이 살아있으면 2배로 배상하라고 엄격하게 명령하신 거예요. 그래서 여리고 세무서장이었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영접한 후에 누가복음 19:8에서 뭐라고 해요?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을 뿐만 아니라요.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했던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하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물질이 삶의 최우선이었지만요. 예수님을 모시고 나니까 물질이 더 이상 중요한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속여 빼앗은 것은 네 배나 갚아주고요. 그 이상으로 물질을 아까워하지 않고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리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고 칭찬하시면서요. 그가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를 얻을 수 있었던 거예요.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삶의 증거를 보여주어야 할 때예요.
예화) 온라인 커뮤니티 ‘보배드림’에 올라온 “시계를 분실하였습니다”라는 제목의 이야기
예화) 남편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아 오랫동안 거액의 연금을 타낸 군인부인의 이야기
예화) 목사님의 돈을 빌려간 한 권사님의 이야기와 30년 전 훔친 돈을 이자와 함께 갚은 도둑의 이야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의 것을 도둑질한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요. 우리가 돌이키지 않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축복의 장애물이 되어서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라도 사람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 있었다면 이자를 계산해서라도 갚아야 하지만요. 정 어려우면 원금이라도 갚아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다 기억하시고 우리의 여생과 자손들에게까지도 차고 넘치도록 갚아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구제의 손길까지 펼쳐야 함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4:28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약의 율법은 “도둑질하지 말라”고 명령하시고요.
“도둑질한 것을 갚으라”는 소극적인 계명이라면요. 신약의 복음은 도둑질한 것을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의 손길을 펼칠 때 비로소 진정으로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라는 적극적인 계명을 강조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어짜피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떠나가는 인생인데요. 지금까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요?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요?
얼마나 많은 축복을 베풀어 주셨고요? 얼마나 많은 행복을 부어주셨느냐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의 빚진 자로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본을 받아야 해요.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서요.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면서요. 성전에서나 집에서나 음식을 나누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떡을 떼었을 뿐만 아니라요. 심지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요.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어요(행 2:42-46). 그러한 신앙의 아름다운 전통이 우리나라의 초대교회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서요. 평소에도 물질 아까워하지 않고 헌금하고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요. 성전을 지을 때는 다 논 팔고 밭 팔고 집까지 팔아서 지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어떠합니까? 옛날 우리 어렸을 때에 비하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엄청나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요. 더욱이 목사, 장로, 권사, 집사까지 되었다고 하면서도요.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이나 구제하는 데는 얼마나 인색합니까? 없어서 못 바치는 것은 주님도 다 이해하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치고 나누고 베풀며 살라고 그 많은 복을 주셨는데요. 자신과 자손들을 위해서만 다 쓰고요.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요청하시는데도요. 다 거절해버려요.
여러분, 거기서 하나님의 복은 멈추고 마는 거예요. 더구나 그렇게 쌓아놓고 하나도 못 쓰고 있다가 갑자기 세상 떠나버리면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26, 30)고 심판하실 때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 뜻을 깨닫지 못하고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어리석은 부자들은 머지않아 어느 날 갑자기 세상 떠났을 때 성경에 나와 있는 이러한 경고가 그대로 그들 앞에 펼쳐질 거예요. 우리는 지금 IMF때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어렵다는 코로나19의 위기의 때를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 교인들이 장사가 1/10도 안 되고요. 일거리가 없고요. 실직까지 당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당장 끼니 걱정을 하고요. 먹고 살아갈 앞날이 캄캄하고요. 죽고 싶은 심정까지 드는데요.
예화) 나훈아가 부른 ‘테스형’이라는 노래이야기
그런데 우리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형제나 이웃의 아픔을 무관심하게 지나치고요. 외면하고요. 아무런 도움도 안 준다면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이고요? 형제의 사랑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고요?
감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거예요?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 관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예수님께 물으니깐요. “네가 영생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시니깐요. 자신은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큰 소리를 치니깐요. 예수님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시니깐요. 그가 제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 청년과 우리가 다를 바가 뭐가 있겠어요? 그래서 새벽마다 코로나19로 고통 당하는 형제나 이웃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요.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벳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다가요. 해가 저물어서 양식을 구할 수가 없어 모두 다 굶주리고 있을 때인데요.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은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눠 줘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도 부족할 것이라”고 계산이나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어린 아이가 도시락으로 가져온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바쳐요. 그러자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까지도 “그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이 수많은 사람들의 누구 입에 붙이겠습니까?”하고 우습게 받아들여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는데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남자 어른들만 오천 명이었으니깐요
.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하면 약 이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요. 남은 조각만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차게 거두었다고 안하요? 이 얼마나 놀라운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이에요? 이 말씀이 뜨겁게 감동이 되어서요. 다함께 이 어린 아이의 헌신의 믿음을 본받아 행할 때에 이 기적의 축복을 뜨겁게 체험하게 되어서요. 내년까지 계속될 코로나19의 위기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목돈이 생길 때마다 오병이어 사랑의 헌금을 함께 나누게 될 때에 우리는 어떠한 고난도 기필코 모두 다함께 이겨낼 거예요.
예화) 한센병 환우들을 위해 돼지를 팔아 모금활동을 시작한 윌버의 이야기와 돼지 저금통
예화) 어려운 살림에도 주의 종을 위해 헌신하신 유정인 목사님의 어머니와 전주신일교회로 부임하신 유목사님 이야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나 고통 당하는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구제한 것을 살아계신 주님께서 다 기억하시고요. 다 응답해주시고요. 우리의 평생토록 다 갚아 주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고요. 사람의 것도 도둑질하지 말고요. 오히려 구제의 손길을 펼칠 때 만복의 근원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여생과 자손 대대로 천 배나 만 배나 차고 넘치도록 채워 주시고 부어 주시고 갚아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충성된 청지기가 되라 /출20:15/ 최종혁목사
2021-09-01 10:12:40
도둑질은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어떤 의미인지 모두 알 것이다. 그래도 굳이 찾아보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일”이라고 사전에는 정의되어 있다. 제 8계명에서 금하는 도둑질도 동일하다.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허가없이 취하는 것. 불법적으로 남의 소유물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 도둑질이다.
하지만 우리가 십계명을 다루면서 알게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탄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성경은 말한다(고후 11:14).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그런 사탄의 지혜로움은 죄를 포장하는 능력에서 잘 드러난다. 정말 더러운 죄를 깨끗하고 깔끔하게 포장한다.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좋아 보이게 만든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 사탄의 시도를 우리는 십계명을 배우면서 볼 수 있었다.
사춘기나 중2병이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불순종해도 괜찮은 것처럼 말한다. 아동학대라는 극단적인 죄를 이유로 자녀를 징계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기도 한다. 징계하지 않는 죄를 사랑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살인도 그렇다. 개나 고양이를 죽이는 것은 처벌 받는데,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죽이는 것은 괜찮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인권, 개인의 자기 주도권 같은 것이 포장지입니다. 결혼 서약을 지키는 것은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일로 치부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죄가 아니고 그 기준을 버리면 훨씬 나은 삶이 있다고 사탄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사람들은 그를 따르고 있다.
오늘 우리가 얘기하는 도둑질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도둑질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우리가 정당화하고 잘 포장한 것들을 벗겨내면 이 명령의 정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은 십계명 제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이 전제하는 것, 의미하는 것, 금지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자.
명령이 전제하는 것
도둑질도 범위를 넓히면 사람의 평판을 도둑질 한다거나 하는 얘기들도 할 수 있지만, 이 명령 자체는 물질적인 소유, 즉 재물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재물(소유)과 관련된 영역으로 한정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다른 사람의 재물을 도둑질 하지 말라는 명령에는 크게 두 가지 전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번째 전제는 사유 재산이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둑질은 성립되지 않는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은 개인이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에 둔 명령이고 성경을 그것을 정죄하지 않는다. 단순히 정죄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유 재산을 보호한다.
출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소나 양은 농경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자산이다. 그것을 도둑질 했을 때 그에 대한 형벌은 그것을 돌려놓는 것인데, 그대로가 아니라 훨씬 많이 배상하게 되어 있다. 즉, 이렇게 해서 남의 것을 훔치지 못하게 한 것이고 그렇게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출 22:2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이 말씀은 전에 살인에 대해서 말할 때 정당방위를 말하고 있다고 애기했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지킬 수 있게 법으로 규정을 한 것이다. 물론 3절을 보면 정당방위를 넘어선 행동은 처벌을 받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적극적으로 지킬 수 있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출 22: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이건 좀 더 지능적인 도둑질이다. 자기가 직접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은 아니지만,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고 내가 이익을 취했다는 면에서 도둑질이다. 그래서 이 경우도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을 해야했다.
소가 풀을 뜯다보면 옆 집 농장까지 갈수도 있는건데, 너무 야박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율법에서 종종 언급되지만 가축에 대한 책임은 주인에게 있고 따라서 주인은 가축이 남의 밭에 들어가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그만큼 하나님은 사유 재산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보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의도적으로 남의 밭에서 풀을 뜯게 한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출 22:6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
여기서는 불이 댕겨(옮겨 붙어서) 낟가리(추수한 곡식)나 거두지 못한 곡식 혹은 밭을 태우면, 불을 놓은 사람이 그 책임을 져야할 것을 말한다. 이웃의 곡식을 태우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없을지라도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 배상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유 재산을 보호하는 명령이다.
7절 이하의 말씀은 남의 돈, 물건, 가축 등을 빌렸거나 잠시 맡게 되었는데, 그것을 도둑 맞거나 잃어 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규정들이다. 이 규정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소유를 내가 빼앗지 말아야 하고, 그것을 내가 임시로 맡았을 때는 소중히 지키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임을 이 율법들은 말하고 있다. 개인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보장해주는 규정들이다.
이런 율법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회법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분명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는 것을 경제의 근간으로 보신 것을 알 수 있다. 율법을 보면 오늘날의 복지에 해당되는 말씀도 많다. 하지만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공동의 재산을 가지고 절대적 평등을 이루며 사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각자의 재산을 가지고 부족한 자들을 도우며 사는 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경제관에 입각한 사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초대 교회에서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기록은(행 4:32) 언뜻 보면 말 그대로 공동소유의 개념이 적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도들 각자가 자발적으로 자기의 소유의 일부를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고 사도들은 그것을 필요에 따라, 특히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사용했다.
잘 알려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헌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받았는데 이유는 다 팔지 않아서가 아니라 속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베드로는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라고 말했다(행 5:4). 여전히 그 때도 사유 재산은 사유 재산으로 인정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유 재산을 인정하시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보호하며 개인이 잘 사용할 것을 원하셨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런 원리로 다스리기 원하신다는 것은 경제를 벗어나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다양하게 창조하셨다.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격도 다 다르다. 능력에도 차이가 있다. 지적인 능력, 육체적인 능력, 정서적인 능력 등 모든 면에서 우리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똑같이 사람을 창조할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셨을까? 아니다. 하나님은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다양하게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던 것처럼, 좀 더 큰 범주에서 모든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것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가진 것들을 나누는 것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모두가 처음부터 똑같이 가지고 있으면 나눌 수 없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신 것이다.
죄는 이런 창조의 질서를 깨뜨렸다. 차이는 곧 힘이 되었다. 육체적인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은 그것을 힘으로 삼아 다른 사람을 억압했다.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마찬가지다. 돈이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부자를 악으로 보고 가난한 자를 선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죄인인 이상 사람은 무엇이든 자신이 가진 것을 통해 자기 유익을 추구한다. 절대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도, 상대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가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힘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 죄인의 성향이다. 그것이 가져온 악영향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부자는 부자대로 죄를 저지르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대로 죄를 저지른다.
문제는 차이가 아니다. 차이를 죄악되게 이용하는 것이 문제다. 다시 경제로 돌아와서, 사유 재산의 차이는 악이 아니다. 그것을 악하게 사용하려는 마음과 행함이 악이다. 하나님은 사유 재산을 지키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가 선하게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제 8계명의 첫째 전제다.
둘째 전제는 좀 더 근원적이다. 바로 우리 것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명령이란 권위가 있어야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그런 명령을 하실 수 있는 권위가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주인이시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 1:26-28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사람에게 주신 것이다. 일부는 이 말씀을 근거로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틀린 말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기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라는 말의 의미가 소유권을 완전히 이전한 것이라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성경은 여전히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라고 말한다.
시 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50: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고전 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사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소유권자라는 말씀은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서 모든 것들을 주셨다는 것은 소유권의 이전이 아니라 위임 혹은 위탁이라고 봐야한다. 여전히 모든 것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관리하고 돌볼 책임을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구체적인 임무도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것”이었다(창 2:15).
그래서 우리의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인의 뜻에 따라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위탁받은 청지기이다. 집사다. 관리자이지 소유주가 아니다. 사유 재산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다.
명령이 의미하는 것
앞서 언급한 두 전제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들 각자에게 뜻을 가지고 필요한 것들 것 맡기셨다. 그 중 일부가 재물이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주인이신 하나님께 가장 이익이 되도록 맡겨주신 재물을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다른 청지기에게 맡긴 것을 빼앗지 말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분배는 하나님의 몫이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그 뜻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을 주신다. 그것을 빼앗는 것은 주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빼앗긴 자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혹은 하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 된다. 해를 가한다라는 것이다. 도둑질 하나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현실이 그렇다. 재물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예) 미국에서 공부할 때 카드 사기를 당했던 적이 있다. 아마 주유소에서 카드를 사용할 때 그 정보를 복사해서 가짜 카드를 만들었던 것 같다. 아침에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엉뚱한 곳에서 카드가 사용되었다는 연락이 왔고 부랴부랴 통장을 확인해보니 이미 한참 마이너스가 되어 있었다. 은행에서 잘 해결해줘서 빠져나간 돈은 다시 돌려받기는 했지만, 순간 눈 앞이 캄캄해졌던 경험이 있다. 그 돈이 없으면 학교나 교회에 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먹을 것에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빼앗는 사람에게는 큰 이득이 아닐 수 있지만 빼앗긴 사람에게는 전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도둑질은 상대방에게 분명한 손해를 끼친다. 음식을 훔치면 그 사람을 배고프게 만들고, 가축을 훔치면 농경을 방해한다. 옷을 훔치면 추위나 더위로 고통 받게 한다. 무엇이든 누군가의 소유를 훔치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살아가기 어렵게 혹은 불가능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서 빼앗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미도 된다. 하나님은 주권적 섭리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셨고 계속해서 주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묘사한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필요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더하실 것을 말슴하셨다. 도둑질은 이것을 믿지 않는 것이고, 이것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나도 저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나에겐 저것이 지금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지 않으셨을거야”라고는 잘 생각하지 못한다. 내가 지금 가지고 싶으니까 할 수만 있으면 가지려고 한다. 조금 뒤에 다루겠지만, 눈에 보이는 도둑질은 하지 못하지만 보이지 않는 도둑질은 그래서 하게 되는 것이다. 만족하지 못하는 탐심과 믿지 못하는 불신의 결과가 도둑질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그대로 가지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고 무언가를 더 얻으려고 하는 것은 다 도둑질이냐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면서 주셨던 명령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 땅의 것들을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생산성있게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십계명의 제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의 가장 좋은 말씀 풀이는 에베소서 4:28일 것이다.
엡 4: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이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주신 것들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청지기로서 우리가 주신 것에 만족하며 그것으로 충성스럽게 일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을 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 가진 것의 차이는 의도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 남의 것을 빼앗는 도둑질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다. 충성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이것에 제 8계명의 의미다.
명령이 금지하는 것
이 명령이 금지하는 것은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떻게 정리를 해야할까 고민을 하다가 포기하고, 그냥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기본적으로 도둑질은 어떤 문화나 사회에서도 죄로 생각한다. 대상에게 명백한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제8계명도 모두가 인정하는 분명한 절도, 강도, 납치, 횡령, 사기 등을 모두 금지한다.
최근에는 디지털화된 무형의 물건들이 많아 그런 것에 대해서는 도둑질에 대한 개념이 모호해지거나 약해진 면도 있는데, 이런 무형의 물건도 분명 가치가 있는 것들로서 훔쳐서는 안된다. 요즘은 그런 것들이 “저작권”이라는 것을 통해 가치를 인정 받는다. 사람이 만든 법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노력을 통해 만들어낸 것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것이고 우리도 그런 면에서의 가치 기준을 바꿀 필요가 있다.
디지털화 된 물건들은 복제가 쉽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훔친다”는 생각이 잘 안든다. 내가 가져간다고 해서 원래 그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빼앗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로 책을 누가 훔쳐가면 나는 그 책을 빼앗기는 것이지만, PDF로 만들어진 책은 누가 복사해서 가져가도 나는 여전히 그 파일을 가지고 있다. 그럼, 이것은 훔친게 아닐까?
사실 오늘날 사회가 복잡해지고 서로 얽힌 것이 많아지면서 판단이 어려워진 것들이 많다. 지금 예로 든 PDF 책을 복사한 경우는 그 파일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서 내가 훔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파일을 판매한 사람에게서 훔친 것으로 봐야 한다. 내가 PDF 책을 구매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구매해야했기 때문이다. 판매자에게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얻어야할 PDF 책을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얻었다면 그것은 명백한 절도에 해당된다.
그래서 디지털화된 무언가를 구매한다면 개념 자체를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디지털 구매는 물건 자체를 내가 소유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리는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는 능력에 관계없이 판매자가 정해준다.
예) 어떻게 하다보니까 어버지와 내가 차를 바꿔서 타고 있다. 차의 소유자와 사용자가 다른 상황이다. 근데 꽤 오래 타나보니 이제는 진짜 누구 차인지도 헤깔린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아버지의 차를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는 없다. 차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만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권리를 행사하면 안된다. 디지털 물건들도 마찬가지다. 판매자가 정한 권리 이상으로 무언가를 누리는 것은 할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마느냐하는 문제인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부분은 시장 거래와 관련된 부분이다.
신 25:13-15 13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14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15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거래에 있어 공정할 것을 율법은 말하고 있다. 잠언에서도 속이는 저울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두 차례나 말한다(잠 11:1; 20:23). 공정해야 한다는 것은 이익을 봐서는 안된다는 말은 아니다. 정당한 이익을 얻는 것이 거래의 핵심이다. 다만, 그 이익을 상대를 속이는 것으로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둑질이다.
예) 의사를 생각해 보자. 요즘은 정보가 많이 공개되어서 다들 왠만한 의사보다 나은 지식이 있는 듯이 스스로 생각하지만, 사실 의학은 고도로 전문화된 분야로서 병원에 가면 절대적으로 의사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모르기 때문이다. 최종 결정은 내가 하겠지만, 의사가 준 정보를 토대로 결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의사가 환자의 그런 무지를 악용해서 이익을 취한다면 그것은 도둑질이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치료를 권하거나 시술을 권하는 경우가 그렇다. 비슷하게 자동차 정비소에서 당장에 불필요한 부품을 교체라하고 하는 것도 그렇다.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 악한 범죄인 것처럼, 상대방이 잘 모르는 영역이라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도 악한 범죄다.
예) 좋지 않은 것을 좋다고 속여서 혹은 본래 이상으로 과대 포장해서 물건을 판매한다면 그것도 도둑질이다. 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면에서 조심해야 한다. 효능이 검증되지 않는 건강 보조식품 같은 것을 마치 실험을 통해 입증된 효능이 있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차를 파는 사람이 객관적으로 차를 소개하지 않고 팔아야할 차가 있어서 마치 그 차가 세계 최고의 차인 것처럼 소개하는 것도 속이는 저울이다.
예) 아마 요즘 중고거래 해보신 분들도 많을 것이다. 중고 거래에도 이런 속이는 저울의 유혹이 있다.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팔고 싶은 마음에 알고 있는 결함을 말하지 않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도 이 계명을 기억해야 한다. 도둑질하지 말라.
앞에 몇 가지 예로 든 것들은 어쩌면 반대로 하는 것이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치아 하나만 치료하면 될 것은 두개 치료하게 하면 더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타이어만 교체하면 되는데 휠도 교체하게 하고 브레이크 패드도 교체하게 하면 유능한 직원이 되는 것이다. 특히나 영업직 같은 경우 실적에 더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성도가 대상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불신자를 대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괜찮을까? 절대 아니다.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어주어야할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청성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우선순위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부분은 일과 관련된 부분이다. 직장에는 두 부류의 도둑들이 공존하고 있다. 월급 도둑과 일 도둑이다. 일은 적게 하고 돈은 많이 타가려는 도둑과 일은 많이 시키고 돈은 적게 주려는 도둑이다. 믿는 자들은 어느 쪽의 도둑도 되어서는 안된다.
골 3:22-23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직원의 입장이라면 성실하게 일하고 그에 합당한 급여를 받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해야 한다. 마땅히 해야할 일을 눈속임으로 하지 않으면서 동일한 임금을 받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 여기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고용주라면 노동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특히 야고보는 그렇게 하지 않는 부한 자들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기도 했다.
약 5: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이런 기준을 따르는 것이 어쩌면 세상의 기준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다.
추가로 개인 경제 생활과 관련된 몇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채무와 관련해서, 빚 지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갚지 않는 것은 도둑질이다. 거기에 더해서 갚을 계획이 없이 돈을 빌리는 것도 그 자체로 도둑질이다. 예를 들어 대책없이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것도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도박은 제 8계명과 관련이 없을까? 관련있다. 도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확률 게임이다. 노력없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수단이다. 대부분이 잃고 일부만 얻는다. 당사자들의 합의가 있다고 해도, 청지기로서 합당한 삶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은 청지기들이 자기 손으로 일하면서 수고의 열매를 누리고 선한 일을 행하길 원하신다. 도박에는 열매가 없다. 생산된 것이 없다. 도박에는 확률에 근거한 부의 재분배만 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로또를 비롯한 복권도 마찬가지다. 이런 합의된 도둑질에 참여해서는 안된다.
주식을 비롯한 투자의 경우는 도박과는 다르다. 그 자체로서 죄라고 할 수 없다. 물론 그 안에 위험한 요소가 있어서 조심해야할 부분들이 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 가진 재물을 지혜롭게 또 거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부분도 꼭 기억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이 주식을 하는 모습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주식에 모든 것을 걸고 그것에 의해 그날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돈임을 기억하고 청지기로서 재물을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기타 도둑질들
– 일을 하지 않고 남의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의존하고 사는 경우
– 마땅히 내야할 세금을 내지 않는 것
– 거짓으로 국가의 돈을 타내는 것. 우리나라도 점점 사회 복지가 늘어나면서 여러 지원금들이 생겨난다. 장애인들을 지원하고, 청년을 지원하고, 농어민을 지원하고, 실업자를 지원하는 등 많은 복지 혜택이 있다. 이런 것들을 거짓으로 신고하여 돈을 타내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도둑질이다.
이 외에도 오늘날의 복잡 다양한 사회는 정말 각양각색의 도둑질이 있다. “다들 그렇게 한다더라. 이런건 그냥 이렇게 하는거야.”라는 말들에 쉽게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도둑질을 잘못하면 감옥에 가지만 도둑질을 잘 하면 능력으로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는 사회다. 어떤 도둑질이든 우리는 버려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충성된 청지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도전
우리는 왜 도둑질을 할까? 죄악된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영역에 있어 나의 이익을 추구한다. 재물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더 가지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불로소득을 원하는 것이고 그런 갈망과 탐심이 앞서 말한 그리고 이루 다 말하지 못한 다양한 모습의 도둑질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둑질은 내가 사랑해야할 이웃에게 해를 가하고 내가 사랑해야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소유로 살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의 좋은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신다. 다른 청지기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일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살아가기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재물을 이 땅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눠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게 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제 8계명이 무너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더 쉽지 않다. 경제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이렇게 말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삭개오는 진짜 부자였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사실 핵심은 그게 아니다. 삭개오는 지금 자기 삶을 바로 잡고 있는 것이다. 도둑질한 것은 돌려놓고, 자신에게 주신 많은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누겠다고 말한다.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었고 그 손실을 감수하고서도 따를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도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필요하다면 이런 경제적 손해를 감수해야한다. 내 삶에 혹시 충성스럽지 못한 청지기의 모습이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은 없는지, 이웃의 것을 교묘한 수단으로 빼앗지는 않는지 살펴봐야 한다. 도둑질로 누리고 있는 부가 있지 않은지 봐야 한다.
궁극적으로 나눔으로 하늘에 재물을 쌓고 있는지 아니면 욺켜쥠으로 이 땅에 재물을 쌓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결국 나의 재물이 어디에 쌓이고 있는지가 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하나님의 청지기라면 하늘에 재물을 쌓아야 함을 잊지 말자. 그렇게 하여 우리 모두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 주인께 칭찬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제 십 계명(탐내지 말라) /출20:17/ 계강현 목사
2020-07-07 08:30:21
십계명 강해를 연초에 시작했는데, 오늘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을 강론하게 되었습니다. 십계명을 안 지키면 죽거나 벌받는 무서운 법 정도로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기초로 하고 있는 율법은 언약으로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기 원하는데, 나라를 세우려면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백성, 영토, 주권, 이 세 가지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는 백성도 있었고 영토도 있었지만 주권이 없었기에 나라 행세를 하지 못하고 일본사람들에 식민 지배를 받으며 힘들게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한 예수그리스도와 피의 언약을 맺은 오늘 우리들을 백성 삼으시고, 교회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기 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순종하는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원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주권을 행사하도록 주신 지침이 언약의 말씀, 율법이요 계명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 중심의 율법은 이미 언약백성이 된 우리들이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지키며 살아야 할 법인 겁니다.
남의 집 자식에게 우리 집 규율을 순종하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된 우리들이기에 그런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십계명과 주의 명령의 말씀을 대하면서 '힘들다'는 생각을 지워버리고 '날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그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십계명 중이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입니다.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탐심’, ‘탐욕’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 열 번째 계명은 앞에 있는 계명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등은 그 범죄행위가 눈으로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계명들 중 어느 하나를 범하면 조만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들통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열 번째 계명은 볼 수 없는 죄입니다. 마음속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실재하고 있는 죄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10계명을 함께 살펴보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탐심이란 무엇인가요?
탐심은 ‘죄의 욕망’이고 ‘죄악의 동기’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이 계명은 아무도 모르게 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는 조만간에 어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청교도인 에스겔 홉킨스(Ezekiel Hopkins)는 탐욕이 죄로 발전하는 단계에는 4가지 단계가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① 제 1단계 - 싹의 단계입니다. 죄가 마음속에 자리 잡기 전에 죄의 영상이나 죄의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또는 죄에 대한 상상의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죄에 대한 소원’이라고 표현되어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자 분하여 아벨을 미워하고 있는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개역 한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② 제 2단계 - 번창의 단계입니다. 죄의 싹이 점점 번창하여 영혼을 더럽게 오염시킵니다. 생각이 죄로 물들게 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그 생각이 점점 번창하여 예수를 파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에 대해 분하여하고 미워하게 되더니 동생을 죽이려는 생각이 마음에 떠올라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③ 제 3단계 - 내적 반응의 단계입니다. 이제 마음속에서 죄에 가담하고 싶은 욕망이 확실해졌습니다. 이미 내적으로 그 죄에 가담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음욕을 품고 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실 때가 바로 이 단계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그 죄를 짓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죄가 행동화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시행하기 일보직전입니다. 건드리기만 하면 실행할 단계입니다.
④ 제 4단계 - 동조 및 허용의 단계입니다. 이제 안 보이던 마음속의 상상적 죄가 행동으로 밖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가책을 무참히 짓밟아 버립니다. 나중에 회개 할망정 이미 제어능력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제가 판단하기에, 1단계는 새가 우리 머리 위로 날아다니면서 똥을 싸는 단계일 것입니다. 새가 우리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걸 막을 수는 없습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가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똥이 차 유리에 떨어져 허옇게 붙어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운전하면서 그런 것까지 일일이 피하거나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저 와이퍼를 몇 번 작동시키면 윈도우 워서 액이 나와서 닦아버리게 됩니다. 악한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지워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2,3단계는 새가 우리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트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탐심의 단계입니다. 머리위에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막을 수 있습니다. 새가 내 머리 위에 앉아서 똥 싸고 있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으면 되겠습니까? 막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쫓아버려야 되지 않겠어요? 그걸 방치하고 앉아있는 날에는 머리가 똥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탐심이란 단어의 뜻은 ‘남의 것을 계속해서 바라고 탐하는 욕망’이란 의미입니다. 나에게 소유권이 없는 것을 불의한 방법으로, 부당한 방법으로 탐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출 20:17을 보면 소유격이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간음은 이웃의 정조를 탐내는 것의 결과죠. 도둑질은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의 결과입니다. 살인은 이웃의 생명을 탐낸 결과이고, 거짓증거는 이웃의 명예를 탐내는 것의 결과입니다. 이 탐심이야말로 우리 사람이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저지르는 죄악이고 ‘모든 죄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있었는데, 그에게서 탐심의 대표적인 예를 봅니다. 아합 왕은 왕궁 옆에 살고 있는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탐이 났습니다. 아마도 포도가 맛이 있고 포도주를 담그기에 가장 좋은 특 상품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가득하자 탐심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갖고 싶은 마음에 처음에는 그 토지를 자신에게 팔라고 나봇에게 부탁했습니다.
왕이 요구하면 백성은 당연히 팔아야하겠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토지법에 의해서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나봇은 여호와께서 금지하시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아합 왕은 마음이 답답하여지고 근심으로 가득 차서 왕궁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간교한 그의 아내 왕후 이세벨이 그의 근심어린 얼굴을 보고 묻습니다. 왜 그렇게 근심이 가득하냐고. 이때 아합 왕으로부터 사정을 들은 이방인 이세벨이 간계를 쓰지요. 결국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거짓증언을 세워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해버립니다.
이 사건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탐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죠. 그 탐심 때문에 그는 거짓증거하게 하는 제 9계명을 어겼습니다. 더욱이 아합 왕은 나봇을 사형에 처하는 살인 죄, 제 6계명을 범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포도원을 빼앗아 자기 소유를 삼았으니 제 8계명, 도둑질의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실로 탐심이 ‘죄의 어머니’란 말이 실감하는 실례입니다.
2. 탐심은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나요?
1) 물질적 방면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은 물질적 방면이죠.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보고 탐냈습니다.(왕상 21장) 엘리사 선지자의 종 게하시는 은과 의복을 탐냈습니다.(왕하 5:27)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의 기름진 것을 탐냈습니다.(창 19:23~) 여리고 성 함락 시에 아간이라는 사람은 금과 의복을 탐했습니다.(수 7:22-26) 가룟 유다는 돈을 탐하는 자였습니다.(요 12:6)
어느 날 예수님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3-15)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탐심을 지적하셨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글이 있습니다. 소작농으로 살다가, 손바닥만한 농지를 사서 농사지으면서 행복하게 사는 농부 ‘바흠’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좀 더 크고 넓은 땅을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한 나그네로부터, 넓고 좋은 땅을 손쉽게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바시키르 사람들이 사는 땅입니다. 그 땅을 사기 위해서는, 여우가죽 모자를 쓴 그 지방의 촌장어른의 허락이 필요했습니다. 촌장은 바흠에게 흔쾌히 땅을 팔기로 약조했습니다.
“좋습니다. 땅은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에 드시는 땅을 가지십시오. 우리 고장에서는 땅값이 균일합니다. 하루치가 1,000루블입니다.” 바흠은 촌장어른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루치가 도대체 어느 정도의 땅입니까?” 촌장이 대답합니다. “하루치 땅이란, 땅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하루 종일 걸은 만큼의 땅을 드리는 겁니다. 그 모든 땅이 하루치 1,000루블입니다.” 그 말은 들은 바흠이 속으로 놀라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루 종일 걸으면 상당한 면적이 되겠는데요.” “네, 그게 모두 당신 것이 됩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만약 해지기 전에 출발점까지 다시 돌아오지 못하면 그건 무효가 됩니다.”
바흠은 그날 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땅을 가질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동이 트자마자 촌장을 찾아가자, 촌장은, “이곳을 출발점으로 합시다. 자, 여기서 출발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곳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돌아오신 만큼의 땅이 모두 당신의 땅이 됩니다.” 바흠은 서둘러 출발했습니다. 단 1분인들 쉴 수가 있습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출발점에서부터 멀리멀리 나갔습니다. 신고 있는 구두가 거추장스러워 나중에는 맨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벗은 발이 찢기고, 베이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가다보니 출발점에서 너무 멀리 가고 말았습니다. 헛수고가 되지 않게 하려고 사력을 다해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욕심을 내어 너무 멀리 가버려서 돌아오는데 그만 해가 언덕위로 지고 말았습니다. ‘아, 내 고생이 허사가 되었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아니지, 언덕 밑에서는 해가 졌지만, 저 언덕 너머 출발점에는 아직 해가 지지 않았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사력을 다해 뛰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촌장이 두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큰 소리로 웃어대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은 바흠이 지난 밤 뒤척이며 꿨던 꿈의 광경과 똑같았습니다. 출발점을 코앞에 두고서 바흠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쓰러진 바흠에게 촌장이 소리칩니다. “허어, 장하구료. 땅을 완전히 잡으셨소!” 이 촌장이 누굽니까? 사람의 욕망을 무기삼아 거래하는 악마였습니다. 농부 바흠의 하인이 달려가서 주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그의 입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는 출발점 눈앞에 두고 일어나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바흠은 그 많은 땅을 얻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는 수없이 하인은 괭이를 집어 들고 자기 주인의 무덤으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의 치수대로 정확하게 구덩이를 파고 묻었습니다. 그 무덤이 바흠이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의 전부였습니다. 얼마나 허망한 인생입니까?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땅이 한 평 반뿐일세.”
황금 알을
제8계명 건전한 소유 /출20:15/ 최동규목사
2020-02-11 10:41:12
제8계명도 하나님의 백성이 최소한 넘어서지 말아야 한계선만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전 계명들처럼, 하나님께서 금하실 일을 살피는 동시에 그분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뜻까지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흉악한 범죄들이 난무하는 시대는 도적질이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도적질을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하와가 선악과 따먹은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의 문제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법적으로는 남의 것을 몰래 훔친 ‘절도’에 해당합니다.
계시록에는 여섯째 천사의 나팔 심판 이후에도 사람들이 회개치 않는 끈질긴 네 가지 죄(살인, 복술, 음행, 도적질) 중 하나에 도적질이 포함됩니다(계 9:21). 도적질은 인류의 최초 범죄와 함께 등장해서 세상 끝날 까지 함께 있는 셈입니다.
역사상 하와보다 더 부자는 없고 그녀보다 더 완벽한 남편을 가진 여인도 없습니다. 선악과만 빼고 온 세상이 모두 그녀의 것이었음에도, 하와는 소유하지 못했던 그 마지막 하나를 훔쳤습니다. 오늘날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가장 먼저 범하는 범죄도 도적질이 아닐까요? 도적질은 인간의 본성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도적질을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본질적인 악한 생각에 포함시키셨습니다(마 15:19).
초대형 목욕탕에서 한 달에 분실되는 수건의 엄청난 수량을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에 수건이 남아돌고 살림에 보탬이 되는 것 같지도 않는데도, 몰래 가져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잠언 말씀이 그 이유를 잘 말해 줍니다. “미련한 계집이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잠 9:13-17).
굶어죽지 않으려고 도적질 하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만, 일상생활의 흔한 도적질들은 이처럼 몰래 훔치는 한 순간의 아슬아슬함과 공짜로 얻었다는 짜릿함 때문에 행해집니다. 많으니까 하나쯤 가져가도 표시 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많이 쌓아 둔 큰 도둑놈의 것 중에 일부를 가져가는 것이라 그다지 나쁜 일이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 속에서 도적질이 행해집니다.
도적질 하는 본성은 대상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하와는 감히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고, 야곱의 아내 라헬은 아비의 우상을 훔쳤습니다. 라헬은 아주 뻔뻔하고 태연하게 우상을 되찾으러 온 아버지를 속여 넘겼습니다(창 31:32-35). 신약의 대표적인 도적 유다는 헌금조차 훔쳤습니다(요 12:6). 사람이 하나님의 것과 부모님의 것을 속여서 취할 수 있다면 누구의 것인들 속여 취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자들에게 성경은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정죄합니다(말 3:9).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잠 28:24)고 또한 정죄합니다. 성경이 심각하게 취급하는 것이라면 성도 역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는 1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도적질은 단지 소유물만 훔친 것이 아니라 소유물의 주인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잃어버린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훔친 자에게 상황에 따라 2배에서 5배를 배상하게 했습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몸을 노예로 팔아서라도 배상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도적질한 것이 살아 그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출 22:1-4).
“도적질 하지 말라”는 말씀은 정당한 소유를 명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무소유나 청빈을 성도의 최고 덕목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부자들도 종종 발견됩니다. 정직하게 땀 흘린 결과로 소유가 증대되었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하지만 공금을 횡령하거나 공공의 것을 개인이 착복해서 소득을 늘인다면 분명 잘못입니다.
장사꾼이 적절한 이득을 남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교묘하게 속이는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1:1)고 성경은 말합니다. 속이는 저울을 가진 세상 속에서 공평한 추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도적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잠 29:24)고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 중에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암 2:6)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남의 불행을 기회로 삼아 막대한 이득을 보려는 방법은 비록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을지라도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말씀은 외국인 노동자 착취문제나 고리대금 사업에 대해서 성도들이 마땅히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안내해줍니다. 성경적 소유관을 가지게 된 성도라면 정당한 노력 없이 인생역전을 꿈꾸는 로또복권 열풍에도 휩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부동산에 투자해서 이득을 얻는 일이나, 경매에 들어간 집을 싸게 구입하고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랑하는 일에 대해서도 한 번쯤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경주 교동 69번지에 가면 12대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던 최부자의 집이 있는데, 이 집안의 여섯 원칙이 참 멋집니다: ①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② 재산은 만석이 넘지 않게 하라, ③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④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⑤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⑥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재산을 만석이 넘지 않게 하기 위해 소작료를 거의 공짜에 가깝도록 대폭 줄이자 주위 소작인들은 자기들을 위해서라도 최부자의 소작지가 더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쌀 3천 석의 소작 수입도 1/3은 집안을 위해서, 1/3은 나그네 대접을 위해서, 1/3은 주변 빈민들을 돕기 위해 썼습니다. 흉년이면 죽 한 그릇으로 논을 사는 사람들이 있던 시대에,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이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1만여 평의 후원과 2천여 평의 부지와 99칸의 대저택이었지만, 며느리들은 근검절약 정신이 몸에 배도록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헌신적으로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마지막으로 영남대학재단에 재산을 희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현행법에만 저촉되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벌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해서 번 돈을 자랑스러워 책을 출판하는 부자도 있고, 현행법에 저촉이 되어도 벌금보다 이득이 많으면 기꺼이 감수하는 재벌들도 있습니다. 돈만 된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이 손상되건 인격이 파괴되건 가정이 파탄나건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민등록 번호를 도용하거나 인터넷을 이용해 사기 치는 머리 좋은 도적들도 많습니다. 정당하게 재물을 벌고 쓸 줄 알았던 최부자 집안의 원칙은 이런 사람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어쨌든 돈 많이 벌어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합리화하는 성도들 역시 부끄럽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돈 버는 과정에서도 그분께 영광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덕이 되는지를 고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기의 유익만을 생각하지 않고 이웃의 유익도 함께 생각해야 함도 뜻합니다. 바울 사도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롬 13:9)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도적질 하지 말라”는 말씀은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품꾼을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집주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은 오후 5시에 와서 겨우 1시간 일한 일군에게도 하루치 품삯을 줍니다. 주인으로 비유된 하나님은 하루 종일 일한 튼튼한 일군에게 뿐만 아니라 골골한 일군에게도 생존권을 보장하시고,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도 균등하게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은혜의 왕국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왕국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성품이어야 할 것입니다.
며칠 전에, 화란의 개혁교회 성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성숙한 모습에 감동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성도의 가정을 도울 때, 그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문화적 활동도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만큼의 생활수준까지 돕는다고 합니다. 도움을 주면서도 도움 받는 사람이 내 생활수준보다는 한 두 단계 아래에 있어야 배 아프지 않는 그런 계산적인 마음에 비하여 얼마나 성숙합니까? 이런 성숙한 마음이 동일한 은혜의 왕국 안에 있는 우리의 품성에도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재물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도 ‘도적질’이라 표현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백성과 다윗 왕 사이를 이간질해서 자기편을 만들었던 압살롬에 대해 “사람의 마음을 도적”했다고 말합니다(삼하 15:6). 자기 생각과 느낌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처럼 예언한 자들에 대해 “내 말을 도적질 하는 선지자들”이라 하셨습니다(렘 23:30).
마땅히 하나님께 드릴 번제나 십일조와 헌물 등을 몰래 감추거나 교묘히 빼돌리는 태도 역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으로 보셨습니다(수 7:11, 말 3:8).
결국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도 도적질이고, 그분께서 베푸신 은사들을 오용하거나 남용하는 것 역시 도적질입니다. 종교적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서 이익을 탐하는 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장사치들에게 성전을 ‘도적의 굴혈’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진노 하셨습니다(렘 7:11, 마 21:13, 딤전 6:5).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들이 이웃의 소유를 존중하기 원하시며 정당한 방법으로 소득 얻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답게 은혜 가운데서 재물을 분배하며 하나님께 돌려야 할 마음가짐과 영광도 바르게 돌리며 살기 원하십니다
admin
제9계명 진실한 이웃관계 /출20:16/ 최동규목사
2020-02-11 10:43:15
제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계명이 최소한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고 실천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제9계명이 최소한 금지한 것은 법정에서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법정에서는 목격자의 증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확실한 증인 2명만 있으면 사형도 가능했습니다. 신명기는 이 법을 악용해서 거짓 증언할 경우에, 피의자에게 덮어씌우려고 했던 처벌을 거짓 증인이 대신 받도록 규정합니다(신 19:16-20).
실례로 아합 왕과 이세벨 황후가 거짓 증인을 내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강탈했을 때, 그들은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왕상 21:1-19). 제9계명은 이처럼 이웃의 목숨과 재산을 합법적 권력을 악용해 탈취하는 일을 일차적으로 금합니다.
또한 제9계명은 법정에서뿐만 아니라 생활현장에서도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현장에서 거짓 증언으로 이웃에게 손해와 상처를 끼치는 일들은 허다합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 접촉 사고가 생겼을 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이상한 처세술을 배운 사람들은 자기의 실수를 뻔히 알면서도 억지로 우깁니다.
또, 여러 사람이 모여서 수다 떠는 곳에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돌아가며 험담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거짓말, 악평, 험담, 혹은 말의 뉘앙스를 살짝 바꾸어서 이웃의 평판을 나쁘게 만드는 일들이 모두 생활 속의 ‘거짓 증언’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이처럼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언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거짓 증언 중에서 이웃에게 가장 큰 해악을 주는 것이 거짓 교리를 말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단지 이웃의 소유에 손해를 입히고 이웃의 마음을 손상시키는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웃의 영혼을 망하게 합니다. 많은 이단들이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처럼 말하여 영혼을 파괴했고, 지금도 파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되게 선포하여 영혼을 망하게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헌금와 헌신을 강요할 목적으로 교리를 왜곡하거는 일들은 사악한 일에 해당합니다. 은근히 뉘앙스를 풍기는 일도 결코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병증을 가지고 농담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농담하는 일 역시 엄격하게 삼가야 할 일입니다.
제9계명에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거짓을 통해서 사단이 역사하지 않도록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뜻도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막 세워졌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교회를 속인 일이 있습니다. 소유를 팔고 나서 그 일부를 교회에 헌납했는데,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모든 소유를 바친 것처럼 꾸몄습니다.
이 일로 베드로 사도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지적하자 그 즉시 그의 목숨이 끊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했습니다(행 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교회 공동체가 진실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뜻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성도 상호간에 진실성을 깨뜨리는 일을 교회가 강력히 퇴치해야 할 사단의 역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거짓은 모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사단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거짓된 공동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파괴되고 맙니다. 성도들 상호간에 거짓이 난무한다면 그곳은 더 이상 거룩한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운동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나 성도 개개인은 무엇보다 거짓됨이 없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거짓말’은 크게 고의적인 거짓말과 비고의적인 거짓말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의적인 거짓말은 ‘진실성’이 부족한 것인데, 악심을 품거나 보복하려는 마음을 품은 거짓말입니다. 진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거나, 본인이 직접 거짓말 하지 않지만 상대방이 속도록 슬그머니 유도하거나, 진실을 숨기기 위해 고의적으로 침묵하는 아주 기술적인 거짓말도 있습니다.
비고의적인 거짓말은 ‘공정성’이나 ‘일관성’이 부족해서 생깁니다. 자기를 좀 더 옳게 보이려고 약간 과장하든지, 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든지, 꼭 말해야 할 것을 빠뜨리거나 강조해야 할 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공정성이 부족합니다.
충분히 관찰하고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못한 채 경솔하게 판단하거나, 혹은 이전을 기억하지 못하고 사건을 보는 관점이 그 때마다 달라지면 일관성이 부족합니다. 고의적이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에도 거짓말한 것과 같은 결과가 초래됩니다. 이 모두가 성도들의 언어생활에서 사라져야할 요소들입니다.
제9계명에는 다른 계명과는 달리 “네 이웃에 대하여”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성도가 한두 번 만나고 마는 사람들이 아니라 늘 함께 이웃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일까요? 아니면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이라는 평가일까요?
성도가 그 이웃에게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평가는 ‘진실한 사람’, ‘공정하고 일관성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입니다. 능력 있고 성공했더라도 머리를 잘 굴려 이득을 취하는 사람 혹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성도로서의 구별됨, 곧 성도의 거룩함은 이미 상실된 셈입니다. 목회자 역시 능력 있고 유능한 목회자라는 평가보다는 성도들과 이웃들로부터 진실하고 공정하고 일관성 있는 목회자라는 평가를 받을 때, 목회를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16)는 계명은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좀 더 나아가면 성도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의 이웃까지도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도록 되어야 마땅하다는 이웃 사랑의 의미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정에는 가풍이 있고, 동네마다 동네 분위기가 있습니다.
모이기만 하면 남을 헐뜯고 흉보는 가풍을 가진 집안이 있는가 하면,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면서 도울 일을 찾는 집안이 있습니다. 온통 깡패 같은 아이들로 넘치는 동네가 있는가하면 인심 좋은 동네가 있습니다. 기업들도 각자 독특한 분위기를 가졌고, 민족에게는 민족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이웃에게 제대로 영향력을 미쳤다면, 그가 속한 공동체는 점차 진실성과 공정성과 일관성이 많아지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성서계명교회는 어떤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또 10년쯤 후에는 어떤 분위기를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할까를 생각해봅니다. 저는 화려하게 성공한 교회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 없이 바르게 가르쳐지는 교회, 성도들 상호간에 진실한 사랑과 섬김이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접하게 되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가진 진실함과 공정함과 일관성이 나누어져서 자연스럽게 이웃교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이 일에 있어서 목회자인 저의 책임이 가장 막중하다고 생각됩니다. 동시에 성도님들의 헌신적인 동참이 있을 때 이룰 수 있는 꿈일 것입니다. 사회정의라도 이처럼 진실한 성도들이 점점 많아짐으로서만 이룩될 수 있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자기편 감싸주기보다 더 중요한 일은 진실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 편에 서야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을 겪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진리의 편에 서야 합니다. 잠언 16:32b절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개인의 감정이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일, 또는 물질의 유혹이나 성공보다 마음을 지키는 일이 더 가치있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무섭고 사단적인 것이 성도의 병든 마음과 죽어버린 목회자의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25절은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명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거짓말해야만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극단적인 경우가 가끔 있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히브리 산파들과 기생 라합이 거짓말로 생명을 살렸습니다(출 1장, 수 2장). 아브라함은 무법천지의 이방인들이 무서워서 아내를 누이라 말했는데(창 20장), 이는 반쯤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긍휼이었지 거짓말 때문에 복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거짓말 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 되면 거짓말할지 모릅니다. 받기 싫은 전화가 왔을 때, ‘없다고 해라’고 말하는 것이 피차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거짓말을 삶의 지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예의상의 거짓말도 점차 마음에서 우러난 표현이 되도록 일치시켜 나가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불가피한 거짓말을 정당화하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진리를 지혜롭게 말하는 법을 익히고자 힘써야 합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 방법이 어리석거나 무례해서 상대방을 노엽게 만들지 않도록 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으로 만연한 사회 속에서 진실하게 살려면 그냥 기분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손해를 볼지라도 진리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각오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손해 볼 일은 하지 않겠다는 독한 마음으로는 이웃에게 좋은 평판을 듣고 좋은 영향을 미치기가 불가능합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하면 오히려 공평성을 잃고 자기를 두둔하기 쉽고, 당파주의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제9계명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작은 일에서부터 손해를 감수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평상시의 연습과 연단이 필요합니다.
성도는 본래 진리에 기초를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웃관계도 마땅히 거짓이 아닌 진실함에 기초해야 할 것이고 이러한 영향으로 그의 이웃까지도 진실하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제10계명 마음지킴 /출20:17/ 최동규목사
2020-02-11 10:45:31
제10계명의 독특한 특징은 행위를 금한 다른 계명과는 달리 ‘탐내는 마음’을 금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구약 역시 마음이 바르지 못한 차원까지를 죄로 규정합니다.
흔히 탐심 없이는 아무런 발전도 없을 것 같은 염려 때문에 적절한 욕심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탐심을 조금도 두둔하지 않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3-4). 성경은 탐심을 성도의 삶에서 철저히 박멸해야할 심각한 죄로 언급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고 정죄합니다. 사람이 여러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이유는 자기 힘으로 채울 수 없는 탐심을 신들의 힘을 빌어서라도 채우기 위함입니다. 사실 우상은 인간 내적 욕망들을 밖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탐심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나, 부모 공경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 역시 탐심이 밖으로 표출된 현상들입니다. 십계명 전부가 탐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탐심은 약간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의욕’과 ‘탐심’은 냉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가 의욕적일 것을 명합니다. 하나님을 대충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했습니다.
또한 적당히 성숙해가라고 하지 않고,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3-15)고 했습니다.
오히려 대충 적당히 사는 삶에 대해서는 무섭게 경고합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감에 있어서, 성도는 의욕이 있고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갈망하는 것을 탐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살짝 살짝 어겨가면서라도 좇고자 하는 꿈이나 소원은 탐심입니다. 따라서 탐심은 가질수록 하나님께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 자녀다운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도 멀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기보다는 주시지 않은 것을 불평하게 합니다. 한꺼번에 왕창주시지 않고 꼭 필요한 정도만 감질나게 주심을 못마땅하게 여기도록 합니다. 자나 깨나 온 마음이 탐내는 것을 얻는데 열중하게 하고, 마침내 얻기까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추구하게 합니다. 그래서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은 한번 시동 걸리면 아무리 위험을 경고해도 브레이크를 잡지 않고 과속하다가 결국은 사고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 먼저 그녀의 마음에 탐심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하와는 갑자기 눈이 뒤집혀서 선악과가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로 보였고 어느새 따먹고 말았습니다.
아간도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수 7:21)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할 첫 승리의 전리품을 빼돌렸습니다. 탐심이 한 번 발동하자 그들은 하나님도 겁내지 않고 대담무쌍하게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을 세상이 감당할 수 어렵듯이, 탐심에 사로잡힌 사람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탐심에는 브레이크가 없기 때문입니다. 월세로 살 때는 전세면 만족할 것 같지만, 전세로 바꾼 후에는 마음도 바뀝니다. 90점이면 만족할 것 같다가도, 막상 1개 틀린 시험지를 받으면 백점이 아쉬워집니다.
그렇다고 자기 집을 마련하고 100점을 맞으면 만족할까요? 탐심은 끝이 없어서 하와처럼 세상 전부를 가져도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 자리까지 탐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까지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탐심입니다. 그러므로 유익이 될 정도로 약간만 탐심을 허용하겠다는 생각자체가 이미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상태입니다. 선악과 ‘한 입만’ 외투 ‘한 벌만’ 금덩이 ‘하나만’이라는 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악과 한 입의 결과로 온 인류를 죄의 고통에 빠졌습니다. 외투 한 벌과 금덩이 하나의 결과로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극렬한 진노를 받았습니다. 아간을 돌로 쳐 죽인 곳을 아골(r/k[) 골짜기라 했는데 그 뜻이 ‘괴로움’ ‘고통’ ‘재난’이라는 뜻입니다. 탐심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것은 최고의 낙원을 빼앗기고 비참하게 아골 골짜기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끔직한 사진과 함께 ‘이래도 담배를 피우시겠습니까?’라고 경고해도 담배를 못 끊는 사람처럼, ‘작은 욕망’에 미련을 두는 미련한 사람은 경고를 거듭해도 탐심을 결코 버리지 못합니다. 탐심을 품으면 그 결국은 파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잠 6:27)느냐고 말합니다.
제10계명은 단순히 “탐내지 말지니라”는 형태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씩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막연한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을 탐내는 특성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특히 이 한 구절에 “네 이웃”이라는 말이 3번이나 반복된 것은, 탐심이 주로 이웃(['r, 레아: 친구, 동료)과 비교하는 가운데 생긴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크게 탐내는 경우도 있지만, 이웃과 비교하면서 자기에게 없는 새로운 것을 보고는 갑자기 탐심이 생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집장만 했다고 기뻐하다가 몇 평 더 넓은 친구 집 구경한 후에는 탐심이 생겨 힘들어합니다. 고대에는 이웃의 아내가 탐나면 남편을 죽이고 빼앗거나 훔쳐가는 일들이 흔히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이혼과 재혼이라는 방법을 이용해서 더 좋은 남편과 더 좋은 아내를 탐하는 마음을 채웁니다. 땅값 올라 부자 된 이웃을 보면 땅에 대한 탐심이 생기고, 잘난 이웃집 아이 보면 자기 아이에 대한 탐심이 생겨 닦달합니다. 일 잘하는 이웃집 종 탐내듯이 경쟁업체 핵심 멤버를 로비해서 빼내가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웃 교회 교인을 탐하기도 합니다.
탐심은 이웃보다 소유가 많을 때도 생깁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가진 사람도 한 마리뿐인 이웃집 양을 탐냅니다. 집에 장난감 잔뜩 있는 아이도 이웃집 아이가 가진 새 장난감을 보면 탐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몰래 하려는 아이들처럼,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탐날 때는 더욱 은밀하고 탐욕을 채우기도 합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많은 아내가 있었는데도 교묘하게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삼하 12:10).
아마도 탐내는 이유는 ‘그러면 더 행복할 것 같아서’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가운데서 행복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꾀와 노력으로 더 나은 행복을 얻겠다고 하나님의 뜻을 살짝 살짝 어기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행복(eudaimovnia, 유다이모니아)이라는 단어는 ‘좋다’와 ‘귀신’의 합성어인데, 탐심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보다 행복귀신을 섬깁니다.
행복귀신은 목적(결과)만 좋으면 방법(과정)은 무시하라고 유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유혹이 넘어집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라야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바르게 따르기 위해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눅 9:23).
탐심을 제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주시지는 않고 오히려 감추는 분처럼 그릇되게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그 때 하와가 하나님께 대해 올바르게 알고 있었다면 그처럼 쉽게 탐심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내게 당면한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않은 것처럼, 참으로 나를 사랑하시지는 않는 것처럼, 그릇된 생각을 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나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시는 분이심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롬 8:28)실 줄 소망하는 성도는, 자기 꾀와 노력으로 행복을 추구하려는 탐심에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힘써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은, 불건전한 기복신앙, 신비주의, 윤리적인 신앙, 합리주의와 같은 잘못된 신앙으로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중생한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키지는 못합니다. 하나의 계명조차도 완전하게 지켜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중생한 사람은 참으로 순종하기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마음속의 작은 탐욕도 죄로 인식되기 때문에 순종의 실패를 무시하지 못하고 “곤고한 사람”으로서 “사망의 몸”에 갇혀 있는 것을 괴로워합니다(롬 7:24).
그러나 죄를 시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고서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회개한 후에, 또 다시 순종할 힘을 주시도록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중 일부를 순종한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온전히 순종하기를 갈망하며, 실패 할지라도 그분을 향해 내 마음 전부를 다하여, 내 영혼 전부를 다 드려서 온전히 순종하려는 마음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온전하지는 못할 것을 알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는 것을 신뢰하며 그 소망을 굳게 붙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죄인에게 값없이 주신 이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외치는 사람입니다(롬 7:25).
십계명을 통해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수준을 알게 하셨으니, 아는 만큼 실천할 은혜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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