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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출애굽기 설교 모음

출애굽기 20:7 - 11절 <3,4번째 계명>

by Jessi J 2023.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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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강해 25. 십계명(3)_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20:7/ 이종철목사

2022-05-23 09:03:29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풀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명예

 

십계명의 제3 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입니다. 이스라엘 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여호와라는 이름이 있으면 대신 아도나이나의 주님이라는 말로 바꾸어 읽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모음이 불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아도나이의 모음을 따서 여호와라 불렀는데 정확한 발음은 아닙니다. 정확한 발음은 야훼에 가깝습니다. 공동번역 성경과 순복음교회에서만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어 표현에는 하나님의 이름인 ‘God’을 넣어 놀람이나 저주들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놀라거나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는 ‘Oh my God!’이라고 합니다. 저주나 욕으로 ‘God damn!’ 이라 합니다. 요즘은 God을 사용하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Goodness로 바꾸어 “Oh my Goodness”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대단하다는 뜻으로 성 대신 을 붙여 갓영민’, ‘갓종철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하나님 이름이 되어버린 을 이렇게 남발하는 것은 십계명의 제3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행동입니까? 물론 언어 사용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3계명을 주신 이유는 단순히 말조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까요? 이름이라는 것은 그 존재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의 이름을 알면 그 신의 신적인 능력을 이용할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신적인 능력을 이용해서 축복과 저주를 하고 심지어 귀신축출이나 마법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처럼 함부로 오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여 망령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은 맹세와 서원을 할 때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레위기 1912절에서는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대에서는 사람들이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진실을 주장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진실하면 무방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한 결과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이고 이에 대해서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사랑하시는 분, 자신의 명예에 매우 민감한 분이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도 합니다. 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여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이유도 하나님의 명예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916절입니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대제국 애굽의 바로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사술이나 마법을 행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은 오히려 작은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언제 더 더럽혀집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의 뜻에 거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14:11)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가진 백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은 화를 내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예가 걸린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민족이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진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은 망하여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수치스런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엔 포로가 되어 부끄럽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수치가 됩니다. 역사를 주관한다는 신의 능력이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지 못할 정도냐는 조롱을 하나님은 견디지 못합니다. 에스겔 3620절입니다.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된 땅에서 해방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에스겔 3621절과 22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언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집니까? 그냥 그 이름을 함부로 말로 발설했다고 해서 더럽혀지는 경우는 오히려 작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사술이나 마법을 쓰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라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면서도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대교리문답십계명 부분에서 제3계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거나 오용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면 이렇게 간단히 답하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한다는 뜻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주님으로 부르면서 거짓과 악한 습관을 일삼는 것을 말합니다.’”(51)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엉터리로 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부르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유와 같습니다. 베드로전서 29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선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신앙인이 예수쟁이라 불리면서도 거짓과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이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우습게 여김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 곳곳에서 성추행, 공금 횡령, 거짓, 불법, 권력욕, 탐욕, 분열, 배타성, 무례함, 몰상식 등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어느 존경받는 교회 원로 중 한 분은 한국교회를 일컬어 교회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회라고까지 평했습니다. 교회 분열과 편법과 거짓과 사치와 허영으로 비난받고 있는 어느 교회의 목사가 수 천 억대에 이르는 대형성전을 완공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앞에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욕 먹이자는 짓입니까? 자신들의 욕망을 좇아서 대형 건물을 지어놓고는 하나님이 하셨다고요? 세상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을 보면서 무슨 판단을 내릴까요? 우리의 행동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개독교라는 말은 우리 스스로 자초한 모욕스런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대표적으로 오용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목회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말씀에 실은 자신의 욕망과 어리석은 생각을 실어 보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서 1820절입니다.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계속되는 루터의 제3계명 해설입니다. “그러나 가장 빈번한 오용은 양심과 관련된 영적인 곳에서 일어납니다. 거짓 설교자들이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하나님 말씀인 것처럼 지껄이는 경우가 바로 이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장신구 정도로 여기는 것 또는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멋지게 치장하는 것입니다.”(54, 55)

 

이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되는 시내산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는 말씀을 선포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매우 조심해서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이념이나 욕망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장해서 섞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분별하는가?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미래가 결정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영원하듯 거짓은 거짓으로 판명나고 서지 못할 것입니다.

 

맹세의 문제

 

하나님의 이름은 맹세와 서원을 할 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기 1912절에서는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 증언했는데 그것이 거짓 증언이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힌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 말씀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땅으로도 네 머리로도 말라”(5:34-36)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만 하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에 사실 관계만 명확히 말하지 하나님 이름까지 들먹이며 죄를 더하지 말라는 의도입니다. 실제 종교개혁파들 중 재침례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떠한 맹세도 하지 않습니다.

 

이 제3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준수되어야 합니까? 법정에서 증언할 때 증인들에게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오른손을 들고 서약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맹세도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까?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제3계명을 해설하며 맹세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칼빈은 여기에서 주님은 율법의 표준을 어긴 거짓 맹세만 배척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맹세가 주의 영광을 변호하거나 형제의 덕을 세우려는 목적에서는 가능하다”(기독교강요』 Ⅱ8.27)고 해석했습니다. 재판이나 결혼이나 계약의 현장에서 맹세를 사용하여 진실을 물을 수 있어야 하고 그 경우는 허용이 된다는 해석입니다. 주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맹세에 대한 금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진실 된 삶을 살라는 명령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그 맹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것이라면 최대한지키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최대한이라고 한 이유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의도적인 것은 용서받기 힘들지만 인간의 부족함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앞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 이름의 능력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을 찬양하라는 뜻에서입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69:30) 우리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입으로 행동으로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우리는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신 이유는 우리로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입니다. 솔로몬은 성전 낙성식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8:29)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들어주시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상7:14)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예수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4:13) 예수의 이름의 기도는 얼마나 위대하며 능력이 있는지 모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있는 앉은뱅이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3:6)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하는 기도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마무리에 하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말에는 얼마나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루터의 제3계명에 대한 해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그분이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한 불행에 직면하게 될까요? 그러나 저는 제 자신이 시련과 경험을 통해 분명하게 배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갑자기 큰 재난이 변하고 사라졌습니다. 제게 이런 일은 늘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악마에 대항하십시오. 다시 강조합니다. 거룩한 이름을 항상 입에 두십시오. 악마는 우리를 상하게 하려 하나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72)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악한 것들이 물러납니다. 예수의 이름을 오용하거나 더럽히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예수의 이름의 능력과 권세와 축복을 사용하십시오. 3계명을 어떻게 지킬까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 이름의 권세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출애굽기강해 26. 십계명(4)_ 안식일을 지켜라 /20:8-11/ 이종철목사

2022-05-23 09:06:15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십계명 중 안식일을 지키라는 제4계명이 가장 독특합니다. 1에서 3계명은 하나님과 관련되고 5에서 10계명은 인간생활과 관련된 계명입니다. 상식적으로 타당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계명들입니다. 그러나 제4계명은 자연스럽게 유추될 수 있는 그런 계명이 아닙니다. 지금은 일주일이라는 시간 단위로 돌아가고 주일에 쉬기에 이 계명이 자연스럽게 여겨지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농번기 때는 쉬지 않고 일하고, 축제 때나 농한기가 되어서 계획 없이 여러 날 쉬고 즐기던 것이 당시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이 제정됨으로써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간관념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보통 한 해는 태양을 기준으로 하고, 한 달은 달을 기준으로 하지만 일주일은 자연과 유사성을 찾기 힘든 주기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삶은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요일은 기억해도 날짜는 계산해보아야 할 정도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늘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유대인이 안식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들 지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 전세계에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지켜주었던 것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일하고 바쁘게 사는 날에 유대인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예배드리며 경건하게 그 날을 지켰습니다.

 

예전에 신앙인들을 구분하던 표지중 하나가 주일은 쉽니다.”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성전이 무너지고 공간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그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자기 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임을 보여주는 표지였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소중히 지키기 위해서 여러 조항들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무려 39가지나 되었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353절에는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5:3)는 안식일 계명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현대의 경건한 유태인들은 엘리베이터의 스위치나 집안의 등불조차 켜지 않습니다. 대신 자동으로 전 층에 엘리베이터가 서도록 하거나 가정부를 통해서 대신 불을 켜도록 만든다고 합니다. 자동차도 운전하지 않습니다. 시동을 거는 것은 엔진에 불을 피우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안식일에 군사들이 칼을 드는 것은 일이라 하여 전쟁조차 하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나중에는 공격 받을 때는 방어할 수 있도록 그 조항을 고쳤을 정도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안식일은 이제 주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철저히 안식일을 지켜야 하니까? 안식일을 중시하는 안식교라는 이단까지 나왔습니다. 예전에 고신 측에서는 주일에 공부도 못하게 하거나 물건을 사고팔지도 않았습니다. 반면에 신약시대는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며 주일은 단순히 쉬면서 예배드리는 날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안식일은 단순한 휴일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4계명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왜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우리에게 내리셨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안식일에 쉬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쉬셨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하나님은 6일 동안 열심히 창조의 노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일주일 째 되는 안식일에 쉬셨습니다. 하나님도 피곤해서 쉬셨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물어 뭐하겠습니까?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더 필요합니다. 60년대 근대화 이후 한국인은 일벌레’ ‘빨리빨리가 한국인을 규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달려오기만 했고 쉬는 것을 낭비처럼 여겼습니다. 이 서울이라는 땅도 안식이 없었습니다. 제가 서울에 올라와서 산 것은 80년대 초반부터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서울에 공사가 멈추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지하철 공사, 상하수도 공사, 도시가스 공사, 고가도로 건설로 항상 도로는 공사중이었습니다. 재개발로 이곳저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20년도 안 된 아파트를 리모델링이다 재건축이다 하여 뜯어고칠 생각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조그만 골목길도 잦은 보도블록 공사로 편히 걸어 다니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발전하는 서울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발전이 아니라 무언가 일하지 않으면 불안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손에서 일을 놓으면 불안한 일중독자들입니다. 마치 자전거가 계속 달리면 넘어지지 않지만 멈추면 넘어질 것 같은 불안함입니다. 우리에게는 안식이 필요합니다.

 

안식일 명령은 더 이상 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휴식 선언입니다. 일하지 말고 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일벌레가 되기 쉬운 인간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셨을지 모릅니다. 과로사로 죽는 것은 인간들밖에 없습니다. 새나 동물들은 하루 양식만 있으면 족하고 더 이상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지나칠 정도로 일합니다. 1년치 양식이 없어서 불안하고, 남들이 나보다 앞서 가는 것이 불안하고, 또 욕심으로 더 가지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 것까지 빼앗으려 하니 일 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닙니다. 쉬지 않고 일하면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병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쉬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가 병입니다. 바쁘게 살면 앞서갈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바쁘게 살면 나중에 병원에서 그만큼 쉬어야 합니다. 우리 인체라는 몸을 하나님은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 섬기던 목사님은 정말 부지런히 사셨습니다. 그분은 쉬는 것을 몰랐고 목회자들의 안식일인 월요일에도 교회에 오셔서 무엇인가 일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평신도들은 주일에 쉬지도 못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데 목회자가 월요일에 쉬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개척하고 근 30년 동안 목회하시면서 한 번도 안식년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지 아십니까? 칠십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70년 동안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70년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나왔는지 아십니까? 역대하 362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어떤 분들은 이스라엘 역사 490년 동안 7년마다 지켜야 될 안식년을 한 번도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이 강제로 70년을 안식하게 하신 것이라 해석합니다.

 

출애굽기 31장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킬 것을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 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31:17) 제 칠 일에 쉬어 평안하였다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평안하였다는 단어는 영어로 ‘refresh’ 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충만해 지는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쉬어야 새 힘이 부어집니다. 쉴 때 묵은 것들이 밖으로 배출되고 신선한 에너지가 공급이 됩니다. 어떤 책에 나온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정글 사파리를 안내하던 원주민이 갑자기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쉬겠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몸을 따라잡을 수 있으니까요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안식일은 복된 날입니다. 안식일은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창조 때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열심히 모든 만물들을 만드셨습니다. 이제 세상은 완성되었고 지구는 생명체로 가득합니다. 하늘이나 바다나 육지나 새나 동물이나 인간이 새 몸을 입었습니다. 인간에게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도 받았습니다. 마치 출발선상에 서 있는 육상선수들처럼 모든 준비가 되었고 이제 총성이 울리면 바삐 뛸 자세입니다. 새 차를 구입하고 휘발유도 가득 채웠습니다. 이제 시동을 걸고 마음껏 질주하려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다 쉬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이 일곱째 날 안식일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쉬고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일하기 위해서 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세계관은 저녁이 먼저고 그 다음에 아침이 옵니다. 쉬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 순서를 분명히 하십시오. 하나님의 목표는 안식에 있습니다. 자녀를 낳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녀와 함께 인생의 행복을 즐기는 데 목적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집을 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는 것이 목적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안식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창조가 아니라 안식에 있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파우스트가 성경을 읽다가 요한복음 11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파우스트는 말씀이라는 말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철학, 법학, 의학, 신학에 지쳐서 다른 정말 멋지고 더 아름다운 것을 상상하던 파우스트에게 말씀이라는 단어는 너무 정적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이 구절을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로 바꾸고 만족해합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고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는 그것이 파우스트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침묵과 안식의 가치는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태초에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태초에는 평화와 침묵이 있었고, 태초에는 안식이 있었습니다. 안식이 목표입니다.

 

인간들은 일하는 목적을 바꾸려 합니다. 안식이 목표가 아니라 일이 목표입니다. 그게 제국주의의 억압과 폭력입니다. 반생명적 태도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유는 애굽이 안식을 주지 않는 반생명적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서에도 십계명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안식일을 주신 이유에 대해서 또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515절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려는 착취가 목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을 찾아 출애굽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도 안식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공부하고 아르바이트하느라 안식이 없습니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자기 자리나 일이 정해져야 제대로 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 정부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노동 개혁, 아니 노동 개악은 반안식 법입니다. 그 기조는 쉬운 해고와 저임금으로 일자리 나누기입니다. 사람이 잘 쉬려면 일자리가 안정되어야 하는데 그 기반을 흔들고 있습니다. 여전히 과거의 경제 운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업을 살려 성장으로 몰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현실은 그렇게 몰아붙인다고 하여 성장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평등만 심화될 것입니다. 실업과 비정규직, 불안 노동으로 인하여 헬조선 사회를 만들 뿐입니다. 우리 사회의 성장 잠재력은 지금 바닥상태에 있습니다.

 

오히려 해법은 안식에 있습니다. 저성장 현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언제까지 고속성장을 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국민들의 일자리를 안정화시키고 심화되는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는 복지정책을 추구해야 합니다. 재벌과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 출산율도 높아지고 소비의 여력도 생겨 새로운 성장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행복시대라는 좋은 슬로건을 가지고도 그에 역행하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명령은 노동이 목표가 아니라 누리고 쉬는 것이 목표임을 알려줍니다.

 

안식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계까지 향합니다. 안식해야 할 것은 인간들만이 아니라 가축이나 땅까지입니다. 동물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땅도 무한히 개발하면 힘을 잃습니다. 개발논리가 땅과 환경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인간의 고통은 안식을 허락받지 않은 땅의 반발입니다.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구약 시대처럼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지키는 그런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의 안식일은 이제 주일이 되었습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 주일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일합니다. 유대인 랍비인 아브라함 헤셀은 안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일이 평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평일이 안식일을 위해 있다. 안식일은 삶의 막간이 아니라 삶의 절정이다.”

 

우리는 안식일이라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매일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주일이라는 한 날을 구별하여 하나님을 만납니다. 안식일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삶이나 자기 삶의 방식에서 돌이켜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입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더 충실해집니다. 이 날은 기술문명이라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날입니다. 이 날은 이익을 얻고자 동료인간과 경쟁하던 것을 멈추는 날입니다. 이 날은 자연과 싸우다가 휴전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가장 중요한 날이기에 그 전날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목회자는 안식일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토요일 전날까지 설교로 끙끙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안식일은 평화의 날입니다. 이 날을 우리는 은총과 평화와 사랑 속에서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헤셀은 안식일에 화를 내는 것은 죄를 갑절로 지은 것이다.”고 까지 말합니다. 출애굽기 353절에서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보이는 불만 지피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논쟁의 불도, 분노의 불도 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은 걱정하거나 근심하는 날이 아닙니다. 즐거움을 떨어뜨리는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은 찬양하는 날이지 무언가 달라고 요청하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에는 금식, 애도, 슬픔의 표시를 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주일에는 장례를 치르지 않습니다.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에서 승리한 날을 기뻐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데 금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의 40일 기간 중 주일은 예외입니다.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기쁨과 찬양만이 가득해야 합니다. 안식일에는 수고와 피로 또한 없어야 합니다. 어떤 랍비는 친구의 병문안을 가서는 일어나시오. 오늘을 안식일입니다.” 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안식일입니다. 불평을 그치십시오. 병과 피곤에서 일어나십시오.

 

안식일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루터의 대교리문답86문의 제4계명 해설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단순하고 명확한 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안식일의 계명은 축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 축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 가장 중요한 직무는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입니다.” 90문입니다. “태아를 몸 안에 품 듯, 말씀을 끊임없이 실천하는 그 시간이야 말로 바른 안식일 준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축제일이라 불릴 수 없습니다.”

 

루터뿐만 아니라 칼빈 등 종교개혁가들은 안식일에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주일을 어떻게 거룩하게 보냅니까? 하나님 말씀을 들음으로써 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타성처럼 듣고 있습니까?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경박하게 대하고 있습니까? 4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안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우리에게 복된 날로 주셨습니다. 거룩하게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4) /20:8-11/ 원영대목사

2022-04-12 02:45:17

 

오늘은 지혜로운 건축자라는 주제의 네 번째 순서로 주일성수에 대한 부분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주일성수하는 것이다. 주일날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주일성수를 많이 강조하고 있고 그런대로 신자들이 주일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근자에 젊은 층으로 내려 갈수록 주일성수 의식이 약화되고 있다. 안식일이란 개념보다는 주일 예배 드린 것으로 의무를 완수한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사용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앙의 세속화와 직결되게 된다. 주일 개념이 약화될 때 자신의 신앙도 함께 퇴보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처음에는 한 두 번 빠지면 두려운 마음도 있고 각성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 일도 안생기면 대담해진다. 그러다가 결국은 가나안 신자가 되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들이 발생하는가? “주일성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신자들을 괴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구약시대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복주시고 참된 쉼을 주시기 위해 만드신 것이다. 제대로 알면 복이 되지만 모르면 짐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안식일관, 주일성수 개념에 대하여 살펴보면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율법주의적 태도 - 안식일에는 예배에 참석해야 하고, 정장해야 하고, 오락도 해서는 안되고, 돈을 써서도 안되고, 외식을 해서도 안되고... 안되는 것이 많아서 조심스럽고 불편한 날이 된 것이다.

 

2)반율법주의적 태도 -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에 의지해서 예배만 드리면 안식일을 지킨 것으로 알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사용하고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젊은 층에서 이런 현상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둘 다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율법주의적 태도는 안식일을 안쉴일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한 반율법주의적 태도는 안식일을 자기 편의대로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두 가지 모두 다 신앙적 퇴보를 가져오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주일성수가 되는가? 먼저 주일성수의 유래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1.주일성수의 유래

 

주일성수는 구약의 안식일로부터 유래한다. 그 시작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관련되어 있다.

 

2: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은 지치셨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창조의 사역을 완결하셨기 때문에 안식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안식은 인간의 노동 주기를 정하신 것이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쉬게 되는 개념이 여기로부터 기인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한 주를 단위로 되풀이되는 주기에서 하루를 따로 구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하심이 예배하는 날로 지정된 것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이 유래가 된다.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 계명을 받은 후, 광야에서 성막을 지었다. 그리고 그 성막이 완공된 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안식일의 유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종교개혁 당시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일반적으로 시간의 일부분을 구별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적극적이고 도덕적이고 항구적인 명령으로써 모든 시대의 사람에게 명령하셔서 특히 하루를 안식일로 하여 하나님께 거룩한 날로 지키게 하셨다.

이 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일주간의 마지막 날을 지켰고 그리스도의 부활 후부터는 일주일간의 첫날로 변경하였는데 성경에서는 이날을 주일이라고 부른다. 이 날은 세상 끝날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계속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21장 제7)

 

초기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20: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고전 16:1-2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이것이 신약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 모든 교회들은 안식 후 첫 날,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예배로 모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안식일요, 주일인 것이다.

 

 

2.주일성수의 이유

 

1)하나님께서 제정하심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구약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므로 안식일의 제창자이시기도 하다. 안식일 제도를 세우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구속함의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마땅히 그 날을 기억하여 지키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미 개척시대에 있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서부의 노다지를 캐기 위해 많은 이민자들이 동부에서 서부를 향하여 마차를 달렸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미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이레째가 되면 쉬고 예배를 드렸다. 노다지의 땅, 서부에 누가 먼저 도착했는가? 청교도들이 먼저 도착했다고 한다.

 

2)하나님의 명령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방 다른 민족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자유민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계명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서 끊쳐지는 형벌을 받았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다.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신약의 안식일은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이며 감사함으로 지키는 것이다.

 

3)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영원한 표징(언약).

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

 

표징이란 말은 영어성경에 ‘sign'이란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 신용카드로 결재할 때 계산대의 직원이 사인해 주세요라고 부탁한다. 만약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진위를 가리는 방법은 자신의 사인을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된 것은 무엇으로 증거할 수 있는가? 안식일을 지키는 여부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라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백성이요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킴으로 다른 모든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하는 표시가 된다는 것이다.

 

수백년, 수천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고 있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요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의무감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관계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유대인들의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거부하셨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인 것이다. 사랑의 관계로 안식일이 지켜진다면 무수한 세월이 흘렀다해도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에 틀림 없는 것이다.

 

 

3.주일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1)준비

이 안식일을 신자는 마음으로 잘 준비하고 미리 모든 일을 정돈해서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날에는 하루 종일 거룩하게 쉴지니 모든 일이나 말이나 생각 그리고 세상적인 고용이나 오락을 그만 두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쓰며 필요한 의무와 자비를 베푸는 일에 바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21장 제8)

 

예배 모범 제1장에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조속히 준비하여 식물까지도 미리 준비하고, 주일 아침에는 자기와 타인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하므로 공동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할 것이다로 되어 있다.

 

마음의 준비, 행사의 준비, 환경의 준비등 주일성수 위한 준비를 잘 해야 한다. 우리가 명절을 지키기 위해 준비하는 이상으로 주일성수를 위해 준비할 것이다.

)토요일 일찍자고 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기, 헌금, 성경, 찬송,필기도구, 복장, 10분 전 도착.

 

2)주일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소요리문답 제60- 어떻게 하여야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겠습니까?

4계명이 명하는 것은, 그날 종일 거룩하게 쉼으로 할 것이니, 다른 날에 합당한 여러 가지 세상 일과 오락까지 그치고, 그 모든 시간을 공적 또는 사적 예배로 사용할 것이며, 그 외에는 부득이한 일과 자선사업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1)예배하는 일: 모든 시간을 예배 중심으로 사용할 것.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경건성을 잃으면 안된다. 모여서 도리어 악을 행하면 저주와 화를 받는다(고전 11:17, 1:12-14)

2)필요한 의무를 수행하는 일: 당회, 제직회 기관의 월례회등 교회 봉사를 위한 일들

3)자비를 베푸는 일: 병자 위문, 가난한 자 구제, 낙오자 권위, 기타 유고자를 위한 기도등.

예배모범 제16, 예배 후 남은 시간은 기도, 성경읽기, 종교 담화, 양서 읽기, 교리공부, 찬송, 전도, 빈자, 유고자 심방등등.

4)꼭 필요한 일 - 재산과 생명에 관계된 일. 부득이한 일 - 공무수행 중, 직장 근무

 

3)주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해서

소요리문답 61- 4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계명이 명하는 것은, 그 명한 바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혹은 조심없이 이행한다거나 태만함으로 또는 죄되는 일을 행하거나 세상의 여러 가지 일과 오락에 대하여 불필요한 생각과 언어와 행동으로 그날을 더럽히는 일들입니다.

 

금해야 할 일 - 주일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모든 일 - 오락, 영업, 매매, 연회, 골프, 스포츠 관람, 영화. 불필요한 언행, 생각, 친구초청연회 등.

 

 

4.주일을 거룩하게 잘 지키는 자가 받을 복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영혼의 복

예배를 통하여 신령한 교제가 이뤄진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께서 함께 하시며,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22:3)이시며,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말씀으로 영의 양식을 공급하신다. 주일날 교회당에 나와 예배 잘 드리는 사람, 사도 요한의 간구처럼, ‘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케 되는복을 주신다.

 

2)육신의 복

10:27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짧아지느니라

 

쉰다는 말이 아무 일도 안하고 잠 자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낮 잠 실컷 자고 밤 늦게까지 잠 안오니까 텔레비전 보고, 야식 시켜 먹고... 월요병에 시달리고...

 

공산주의자 레닌, 7일 일하고 8일째 쉬게 했더니 생산성이 30% 추락했고, 프랑스 혁명때 9일 일하고 10일째 쉬게 했더니 일 효율이 40%가 추락했고. 영국 로얄아카데미에서 3, 5, 6, 10일 일하고 하루 쉬게 했는데 6일 일하고 하루 쉬게 할때 생산성이 제일 높았다고 한다.

 

주일날 나와서 주차 안내, 식당 봉사도 하고, 교사로, 찬양대로 기쁨으로 섬기면 더 잘 섬기도록 건강의 복도 주실 줄로 믿는다.

 

3)사업의 복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를 주셨으나 이레째 되는 날은 안 주셨다. 말씀을 안 듣고 만나를 줏으러 나간 사람들은 허탕치고 돌아 왔다. 전날에 욕심을 내서 많이 거둬간 사람들의 만나는 다 썩고 말았다.

 

친구의 전도를 받아 50대가 넘어서 교회 나온 사람이 있었다.

그 분이 하는 말, “교회 다니는 내 친구는 30년 동안 주일마다 쉬고 교회 갔고, 나는 일요일날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 형편을 보니 서로 비슷하더라. 이제는 일요일에 교회 나와 예배드리고 쉬면서 살겠다고 간증했다고 한다.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4)가정의 복

128:1-4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주일을 잘 지키는 가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로마 군인 백부장 고넬료가 솔선하여 경건의 모범을 보이고 가족들을 신앙으로 사랑으로 잘 단속했을 때 그 가정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게 되었다.

 

가장이 주일을 시원찮게 지키면 그 가정 복을 받지 못한다. 자녀들 과외 학원 보내고, 아람단, 보이스카웃 보내고... 주일 안 지키면 하나님 기뻐하지 않으신다. 토요일 미리 잘 준비하고, 주일날 가족들이 예배 참석하고, 돌아와서 함께 쉬는 시간도 갖고, 식사도 함께 하고 가족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화목하고 은혜가 넘치는 가정을 만들어 주신다.

 

 

결론적 메시지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다. 예수님께서 주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날을 도둑질하지 않기 바란다. 주일을 범하는 사람을 날도둑이라고 부른다. 그런 사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자기가 쌓은 성이 아무리 높고 견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시면 헛수고가 되고 만다.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 왕은 비로소 깨달게 되었다.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올해 믿음의 집을 잘 짓기 원한다면, 믿음의 첫 단추를 잘 끼우기 바란다. 주일성수는 율법이 아니다. 구속함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우리의 창조자 하나님을 찬송하며,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감사하는 날이다.

 

주일이 되어 교회당으로 나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참으로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오늘 말씀을 다시 묵상해 보기 바란다. 주일을 맞이하는 나의 자세, 주일 하루의 나의 모습, 이것이 과연 온전한 주일성수인가?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온전한 주일성수를 위해 재정비할 수 있기 바란다.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거룩하게 감사함으로 지킬 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참된 쉼과 복을 주신다. 안식일은 결코 속박하고 짐이 되는 날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참된 쉼과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주일을 지키십시오. /20:8-11/ 차용철 목사

2022-02-27 12:29:09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제목> 주일을 지키십시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강조해온 성도가 지켜야할 기본적인 3가지 신앙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상숭배를 청산하는 것이고, 둘째는 주일을 지키는 것이고, 셋째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상숭배에 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주일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1. 안식일의 의미와 목적

 

8절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는 십계명 중 제 4계명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안식일’(安息日)에 해당하는 이옴 솨빠트’(יום שבת)쉬는 날’ ‘휴식하는 날’(Sabbath day)을 뜻입니다. 이 안식일은 일곱째 날인 토요일입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였습니다. 이 날에는 생업을 위한 일을 그치고 쉬라고 했습니다.

 

9-10절에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신이나 자녀나 종이나 가축이나 객이라도 아무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날로 규정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1절에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고 했습니다 (20:11).

 

하나님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고 7일째 되는 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 날을 쉬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농사뿐 아니라 살아가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명기5: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430년 동안 애굽(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냈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해낸 날이 유월절이라고 했는데 그 유월절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래에 참 안식을 주실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골로새서2:16-17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그림자로서 안식일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12:8). 곧 안식일이 예표하는 것은 하나님이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안식을 주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 문제와 죽음 문제와 내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평생 그것에 얽매어 삽니다.

 

그것 때문에 하루도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그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므로 그를 믿은 자들을 구원해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죄와 죽음과 내세 문제를 해결하여 안식을 얻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것은 바로 그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주실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계시록21:3-4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했습니다 (7:15-17).

 

이 세상에서는 수고와 아픔 등 때문에 하루도 안식할 날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천국에 가서 완전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것은 그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일곱째 날로서 지금의 토요일이었습니다. 신약시대의 주일은 첫째 날로서 지금의 일요일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지켰지만 신약시대에는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安息日)은 쉬는 날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신약시대의 주일(主日)에 해당하는 퀴리아케 헤메라’(κυριακη ημερα)주의 날’(Lord's day)을 뜻하는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그림자이고 예표하는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이 대속하여 부활하므로 그를 믿는 자에게 안식일이 예표하는 참된 안식인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2:8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시므로 우리에게 참 안식인 구원과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안식일의 실제인 예수님이 구속을 완성하여 참 안식을 주신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지켜야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안식일을 주일로 드려야 합니다. 신약시대에 안식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속사역에 관한 섭리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다른 날로 바꾸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전의 계명을 폐하고 다른 날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호세아2:11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고 했고 (7:18),

 

히브리서4:7-8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 같은 율법은 연약하여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하므로 폐하고 진정한 안식을 주는 다른 날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삼위의 하나님이 주일을 기점으로 중요한 구속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마태복음28:1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고 했습니다.

 

여인들인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28:1-6). ‘안식 후 첫날은 안식일 후 첫째 날을 말합니다. 일곱째 날인 토요일 다음 날 첫째 날인 일요일을 말합니다.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전 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유월절 다음 날 부활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일곱째 날 안식일로서 토요일입니다. 안식일인 토요일 전 날 죽으셨다가 안식일인 토요일 다음 날 일요일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안식일 전날 죽으셨다가 안식일 다음날 주일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둘째, 성령님이 주일에 강림하셨습니다. 사도행전2: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제자들을 비롯한 120여명이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오순절에 성령이 불처럼 임했습니다 (2:1-4).

 

오순절’(五旬節)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다음날로부터 시작하면 49일째 되는 날입니다. 유월절은 안식일(토요일)이므로 유월절 다음날은 주일(일요일)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다음날인 주일(일요일)부터 49째이면 그 날도 주일(일요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게 할 성령님도 주일에 강림하셨던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주일에 계시를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1:10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도요한이 종말에 있을 일들에 대한 계시를 받은 배경에 대한 언급입니다. ‘주의 날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로서 주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에 행하실 구속역사에 대한 계획을 주일에 계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다른 날을 주시겠다고 약속했는데 삼위의 하나님이 친히 주일에 구속사를 이루시므로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도 주일을 지켰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주일을 지켰습니다.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무덤에 찾아가 부활한 것을 확인했고 제자들이 안식후 첫날에 모였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20:1,19). 제자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모였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간 것은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율법 강론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고 그들이 신앙공동체로서 모인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사역하던 때는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도행전20:7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고 했고, 고린도전서16:2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첫날은 주일을 말하고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라는 성찬식과 애찬식이 포함된 예배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매주 첫날 모여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교부들도 주일을 지켰습니다. 교부들은 사도들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교부시대부터 A.D.325의 역사를 기록한 책 ‘The Ante-Nicence Fathers’에 보면 교부들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주일을 지켰으며 당시대에는 그리스도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주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제칠일안식일재림교회하나님의교회’(안상홍증인회)에서는 지금도 안식일(토요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안식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대로 지켜야 할 언약적 표징으로 준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근거로 인용하는 구절은 출애굽기31:13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대대의 표징이라고 했기 때문에 대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문자적 해석에만 얽매인 결과입니다.

 

대대의 표징을 문자적으로만 보려면 이스라엘 자손에게도 문자적으로만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니 우리에게 해당하는 표징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대대의 표징이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면 할례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17:10-11에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했습니다. ‘할례는 남자아이를 낳으면 난지 8일 때에 돌칼로 생식기 끝 표피를 자르는 의식입니다.

 

할례도 언약적 표징이라고 했는데 왜 할례는 지키지 않는 것입니까? 구약의 대표적 성례는 할례와 유월절인데 신약시대에는 세례와 성찬식으로 대치되었습니다.할 례와 유월절은 세례와 성찬식으로 대치하면서 왜 안식일은 주일로 대치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사도들도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근거로 인용하는 구절은 사도행전13:14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와 같은 구절들입니다 (16:13, 17:2).

 

하지만 사도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거나 기도처를 찾은 것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모여 예배하며 기도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들은 안식일을 주일로 바꾼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을 주일로 바꾼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라고 말합니다.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us 306-337)는 로마의 황제로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 주일을 휴일로 선포하여 예배를 드리게 한 황제입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일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옳은 신앙을 가지고 행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그가 주일로 바꾸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콘스탄틴 대제 이전에 교부들과 그 이전에 사도들도 주일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주킨 것은 하나님이 주일로 바꾸어 지키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3. 주일을 지키는 방법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이 예표하는 실체인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시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하므로 영적인 안식을 누리게 해주시고 미래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구원하여 참된 안식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둘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어 대속하게 해 주시고 성령님을 보내어 대속이 우리에게 적용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으로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0:7).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족장들에게도 언약을 세울 때마다 제단을 쌓게 했습니다 (12:7,-8, 13:8, 22:9, 26:25, 33:20, 35:1).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도 예배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12,18).

 

예수님도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4:24). 천국에서 할 수 있는 최상의 것도 예배입니다 (4-5). 셋째, 영이 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영을 거듭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 영이 살도록 찬송과 기도와 성경공부 등을 해야 합니다. 넷째, 생명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을 살게 해 주셨으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교제와 전도와 심방과 봉사와 구제 등을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12:11-12, 5:9-10).

 

소극적으로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해야 것을 중심하되 그것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소극적인 면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약시대 주일은 구약시대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그대로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림자인 안식일의 실제로서 안식일이 예표하는 바를 친히 이루시고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셨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거나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일에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들을 더욱 온전하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규례를 전해서 지키는 것이 유익합니다 (4:24). 곡식에서 중요한 것은 껍질이 아니라 알맹이입니다. 하지만 알맹이를 온전히 얻기 위해서는 껍질이 있어야 합니다. 건물에서 철근과 시멘트로 이루어진 기둥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거푸집이 필요하고 부품에서 주물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형틀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주일에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일입니다 (20:9-10).

 

생업을 위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농사하는 사람은 농사,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직장,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을 쉬어야 합니다. 자신 뿐 아니라 자기 수하에 둔 직원들도 쉬게 해야 합니다. 주일에 생업을 위한 일을 하게 되면 가장 중요한 예배를 온전히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거래 행위를 절제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10:31, 13:15-17). 상거래 행위를 하게 되면 결국 주일에 다른 일을 하게 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고 그 대상으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4. 주일을 지키는 자에게 주신 약속

 

구약시대 때는 안식일을 어기면 투석 사형을 시켰습니다 (31:14-15, 15:32-36). 하지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에게는 복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하고 땅의 높은 곳에 올려주고 야곱의 업으로 길러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사야58: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므로 잃는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것을 얻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감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땅의 높은 곳에 올려주고는 일차적으로 가나안 땅을 가리키고 이차적으로 번영을 가리킵니다. 포로잡혀 갔을지라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평안과 번영과 행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는 야곱에게 주신 언약적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손과 땅(기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구속사적 은혜를 주도적으로 누리게 하고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뜻을 이룰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28: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거나 안식일 규례를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원리는 같습니다. 주일을 온전히 지키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와 비견되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신앙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계명이었습니다. 일제의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신사참배를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 곧 주일을 지키라는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철저한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주일을 지킬 수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일날 모임이나 여가 때문에 주일을 지키기 힘든 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힘들어졌습니다. 코로나 상황을 당해 보건상 이유 때문에 예배당에서 예배하는 것과 영상으로 예배하는 것을 겸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 개념이 없어지고 예배 개념이 약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모이지 못한 상황이라도 주일을 기억하여 지켜야 합니다. 최소한 가정에서라도 영상으로나마 철저히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31:13).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사는 증거였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주일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삶을 사는 증거이고 예수 그리스도께 가치를 두고 사는 증거이고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사람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려는 모든 구속사적 은혜와 사역적 은혜와 삶의 은혜를 받기로 결정된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입니다. 주일을 지키므로 손해 보는 것이 많을지라도 그것을 뛰어넘는 위로와 행복을 받기로 결정된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일을 지키므로 그 모든 은혜의 복을 누리길 바랍니다.

 

 

 

 

 

 

 

 

이렇게 살라(3) :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말라 /20:7

2021-02-12 12:42:10

 

우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살라는 주제를 가지고요. 십계명의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요. 1계명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인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하시고요. 2계명이 우리의 예배의 방법에 있어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시고요 오늘 제3계명에서는 우리의 예배의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있어요.

 

오늘도 제3계명의 말씀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여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명령하세요. 그것도 אלֹ()’라는 단어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세요. 그러면서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심판을 경고하세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쓰지도 않아요. 그래서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말씀이 나오면 주 하나님이라고 읽었어요.

 

여호와란 이름은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번, 속죄일에 지성소에서 속죄제물을 바친 후에 부를 수 있었다고 해요. 그렇다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거예요.

 

히브리어 원어성경에 보면 여기 나오는 망령되게라는 אוְשָּׁ֑לַ(랏솨웨)’라는 단어를 쓰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 망령되게라는 뜻이 무엇일까요?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에 나와 있는 망령되게라는 단어를 다 찾아서요. 그 가운데 깊으신 뜻을 깨닫게 되었어요.

 

 

1.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아야 함

 

먼저 시편 31:6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여기 거짓이란 단어가 망령되다는 단어와 같은 אוְשָּׁ֑(솨웨)’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요.

 

그것은 신명기 32:21에는 허무한 것’, 열왕기상 16:13에는 헛된 것들로 번역되는데요. NIV 영어성경에 보면 계속해서 ‘idols(우상들)’이라고 번역하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믿음도 없으면서도 그냥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깐요. 마지못해서 신들 중 하나를 우상으로 믿고요. 마치 점쟁이들에게 찾아가서 좋은 운세나 바라보고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하면서 복을 구하듯이요. 우상 섬기듯 하나님을 믿거나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그래요. 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돌변하는 세상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는 확실하게 아니면 아니요하는 신앙을 가져야 해요. 절대 믿는 둥 마는 둥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주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복도, 세상 낙도 다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늘 강조합니다만 말씀을 받을 때나 기도를 할 때나 찬양을 할 때나 성도의 교제 가운데도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도 진실로 그렇게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하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거예요. 그래서 전 세계 어디를 가보아도 영적인 성도들이나 주의 종들이나 성령 충만한 교회들을 보면요. 아멘의 믿음으로 충만한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말씀 가운데도 은혜를 부어주시고요. 기도 가운데도 능력을 부어주시고요. 찬양 가운데도 기쁨을 부어주시고요. 교제 가운데도 사랑을 부어주시는 거예요. 결국 우리 믿음대로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지 않으셔서 은혜를 못 받는 것 아니고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 부어주시지 않으셔서 능력을 못 얻는 것도 아니고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감격을 부어주시지 않으셔서 감격을 못 누리는 것도 아니고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부어주시지 않으셔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40)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9:22)

네 믿음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2)

너희 믿음대로 되라”(9:29)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고 우리의 믿음을 강조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코로나19의 대환란으로 인해 우리는 당장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부터 제한을 받고 있어요. 그러니까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쉽게 잡지도 못하고요.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 되고 있어요.

 

그런데도 노환으로 인해 건강이 걱정이 되어서 못 나오시는 어르신들도 계시고요. 직장에서는 월요일에 출근을 하면 교회에 나갔냐?”고 물으며 압력을 가해서요. 교회에 못 나온다고 호소하는 젊은 교인들도 많아요. 그러나 우리의 생사화복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요.

 

복의 근원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심을 확실히 믿는 믿음으로 나아와야 해요. 그래서 코로나19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안팎의 어떠한 대적이라도 우리 믿는 자들을 불행과 고통으로 몰고 갈려고 할 때에도 사무엘상 17:45에 나오듯이요. 20살도 안 된 청년 다윗이 갑옷으로 완전무장을 한 여섯 규빗 한 뼘(2m 83cm)의 거구인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상대하며 나갈 때 외쳤듯이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라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해요.

 

다윗이 무슨 힘이 넘치는 것도 아니고요. 전투 기술을 익힌 것도 아니고요. 완전 군장을 한 것도 아니고요. 큰 창과 칼을 가지고 나간 것도 아니에요. 단지 물매와 돌 다섯 개 가지고 나아가도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아가니까 기적의 승리를 일으킬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우상을 섬기듯이 불신앙을 가지고요. 결단코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고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때 코로나19나 어떠한 거대한 인생의 대적도 능히 승리하게 될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여호와의 이름을 거짓되게 부르지 말아야 함

 

계속해서 시편 12:2-3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여기도 거짓이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אוְשָּׁ֑(솨웨)’라는 단어를 사용하여서요. ‘망령되게부르지 말라는 말씀을 보충해 주세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요. 거짓으로 말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겉으로는 아첨하는 입술로 다가가면서요. 속으로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혀를 가지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남에게 아첨하는 입술과 자신을 자랑하는 혀를 다 끊어버리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요. 겉과 속이 다르게 이중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거짓되게 불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 주위에 보면 겉과 속이 다르고요. 앞과 뒤가 다르고요. 전과 후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해할려고 얼마나 온갖 거짓으로 달려들어요?

 

아무리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온갖 거짓으로 비방을 하고 험담을 해도요. 거짓은 진실을 결코 이기지 못하고요. 언젠가는 진실이 다 밝혀지고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계시기 때문에 거짓되고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선악 간에 다 심판하세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6: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분명히 경고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거짓되고 불의하고 사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 심판하시니깐요. 다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거짓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요. 진심으로 사랑으로 섬기고요. 끝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리하면 언젠가는 그들도 진실을 깨닫고요. 변화되고요.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될 뿐만 아니라요. 결국에는 모두 다 복을 누리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게 되는 거예요.

 

요즘 코로나19로 자녀들까지 학교에 못 가고요. 동영상 강의를 듣다 보니깐요. 부모님이 돌보지 않으면 자녀들이 강의를 틀어놓고 게임을 즐기면서요. 게임중독에 빠져든다고 해요. 또한 청년세대는 코로나19로 인해 취직이나 진로의 실패를 겪으면서요. 온 나라를 이념분쟁으로 두 동강 낸 기성세대에 대해서 원망하고 반항하고요. 지난 날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의 눈물의 기도와 희생으로 이루어진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못하고요.

 

오히려 자신의 삶에 불성실한 자녀들에 대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나 때에는 말이야!”하고 권면을 하면요. “라떼는 말이야!”라고 비꼬면서 꼰대 취급을 한다고 해요.

 

얼마나 감동적인 강렬한 외침으로 들려오던지요? 그의 삶이 진실하니까 독자들로부터 큰 감동과 반향을 불러일으킨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가면을 쓰고 의로운 체 하지 말고요. 더 이상 말로만 큰 소리 치지 말고요. 더 이상 사탄에게 속는 거짓된 삶을 살지 말고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남은 여생이라도 예수님처럼 온유하고요. 겸손하고요. 진실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서 새롭게 일어서서요. 진실되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길 바랍니다. 그것이 조용한 고백이고요. 사람들의 귀에 안 들려도요. 아무리 여호와의 이름을 소리치며 부르는 거짓된 자들보다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요. 변화를 일으키고요. 열매를 맺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3. 여호와의 이름을 범죄하며 부르지 말아야 함

 

마지막으로 이사야 5:18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여기 거짓이란 단어가 אוְשָּׁ֑לַ(랏솨웨)’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거짓으로 끈을 죄악을 끌 때 수레 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화가 있다는 거예요.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거짓된 믿음이고요. 다 자신의 의를 위한 것이고요. 부를 위한 것이고요. 복을 위한 것이고요. 다 사탄에게 속아서 거짓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요. 죄악을 끌여들여서요. 결국 죄악의 심판만이 있을 것을 경고하신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여호와의 이름을 범죄하며 부르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가 남은 여생 더 이상 부질없이 싸울 필요가 없고요.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하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행하지 않고요. 사탄의 시험에 빠져서요. 계속해서 육신적이고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만 따라가는데 우리의 신앙의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7:21에서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분명히 증거하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교회만 나온다고 구원 받는 것이 결코 아니에요. 평생토록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를 다니고요. 봉사를 많이 하고요.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되었다고 구원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자신의 종교적인 믿음으로 인해서 자신도 구원 받지 못하고요. 주위 사람들의 신앙의 걸림돌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7번씩이나 저주하시면서 그토록 격노하셨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23:13, 15, 16, 23, 25, 27, 29)이 되어가고 있는 거예요.

 

이처럼 우리가 평생을 아무리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도요. 자신이 사탄에게 속고 있는 줄도 모르고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요. 하나님의 복음을 가로 막고요. 하나님의 영광을 다 가리우며 범죄하는 교인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범죄하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0:31-33에 분명히 증거하지 않아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 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분명히 증거하시지 않으세요?

 

그러므로 그러한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속히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요. 죄악 된 길에서 돌이키고요.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복된 삶을 회복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지난 9개월 동안 안팎의 온갖 환난과 핍박 속에서 성전예배를 계속해서 드려 왔어요. 더욱이 지난 한 달 동안은 정부가 교회집회를 금지시킨 상황 속에서 더욱 더 그 박해가 극심했어요. 여러분, 집단감염이 일어나는 병원이나 관공서나 마트나 식당은 문을 다 열고요.

 

더구나 천주교 성당이나 불교 법당은 다 집회를 하도록 하면서요. 왜 몇몇 교회에 감염이 있었다고 진정으로 코로나19를 치유해야 할 교회만 예배를 못 드리도록 하느냐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탄의 계략이요, 말세 마지막 때의 우리의 현실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분별력도 없이 거기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심지어 우리 치유하는교회만은 계속해서 예배를 드리니깐요. 강서, 양천지역에서 우리 교회가 주타겟이 되는 거예요.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계신 하나님만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니깐요. 지난 주일에는 사탄이 더욱 더 극심하게 역사를 해서요.

 

SBS TV에서 또 다시 나와서는 교회 사방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고 촬영까지 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성령님의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지 아세요? 선임 부목사님이 교회 주위를 돌다가 우연히 그 카메라들을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교인들이 안전하게 귀가 할 수 있었어요.

 

정말 말세 마지막 때가 되어서요. 사탄이 범죄하는 자들과 함께 우는 사자와 같이 더욱 더 삼킬 자를 찾으려고 달려들어도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영적으로 죽이는 비대면예배에 결코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자 이러한 우리의 신앙중심을 하나님께서 다 보시고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과 주의 종들을 다 지켜 주시니깐요.

 

이렇게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요.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요. 하나님의 성전을 사수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님의 역사요, 기적적인 승리의 열매였던 거예요. 그러므로 말세 마지막 때 아무리 사탄에게 속은 죄악 된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침범하고요. 예배를 가로막고요. 우리의 신앙을 허물어 뜨릴려고 달려들어도요.

 

우리는 결단코 여호와의 이름을 범죄하며 부르지 말고요. 순결하고 온전하고 충만한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고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낼 때 기필코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해주실 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도 머지않아 예외 없이 다 떠나가게 돼요.

 

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이나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진정한 신앙의 유산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고요. 여호와의 이름을 거짓되게 부르지 않고요 여호와의 이름을 범죄하며 부르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여생을 자손 대대로 이어가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안식의 공동체 /2:1-4, 20:8/ 이동원 목사

2014-11-29 08:01:33

 

기독교 공동체의 기원은 안식입니다. 안식일이 없었다면 아마도 교회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소위 안식일 성수 혹은 주일 성수야 말로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할수 있게 된 마당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만일 이 주님의 계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교회 공동체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역사는 안식일이나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제도와 맞서 싸워왔고 그 결과로 교회를 지켜올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일주일의 하루를 직장이나 노동에서 면제받고 쉰다는 것과 안식일에 안식을 제대로 누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안식일이나 주일에 교회에 나옴으로 주일 성수를 해야 한다고는 소리를 높여 가르쳐 왔지만 안식의 성경적인 의미 그리고 안식을 누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온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안식하는 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안식은 무엇입니까? 저는 안식이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바꿀수 있다면 "마음의 공간" 혹은 "마음의 여유"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안식하는 것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아니 마음의 공간 혹은 여유를 갖고 살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기독교 작가는 성경적 안식을 가르쳐

"창조적인 괄호"혹은 "창조적인 쉼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들 인생의 여정에는 쉼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여유가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일곱째 날 안식의 날을 복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식다운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질문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안식 곧 마음의 여유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여유이어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처음 안식일을 만드시고 쉬시던 하나님 자신의 모범에서 찾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안식일의 여유-왜 무엇 때문 일까요?

 

1. 과거를 돌아볼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1-2에 보면 무엇보다 성경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이유가 일을 마치셨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절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고 했고, 2절에는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섯날의 창조의 노동으로 단순히 피곤하셨기 때문에 쉬신 것이 아니라 일을 다 마치셨기 때문에 곧 완성하셨기 때문에 쉬신 것입니다. 이제 이 일곱번째 날은 그가 성취하신 것들을 돌아보며 기뻐하고 즐거워 하시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하루 하루의 창조가 마칠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소감을 기록하고 있고, 여섯날의 창조가 다 끝났을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휘튼 대학 교수였던 라이켄(Leland Ryken)은 하나님은 만물을 단순히 실용주의적 관점뿐만 아니라 심미주의적 관점에서 지으셨다는 말을 했습니다.

 

왜 우주는 계절마다 그 옷을 번거롭게 갈아입도록 지어졌을까요? 봄철에 만물이 부활의 새옷을 갈아입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요? 여름의 푸르른 신록이 우거진 녹음을 만드는 이유는 무엇이며 가을의 단풍과 낙엽이 우리를 쓸쓸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인지요?

 

겨울의 백설이 온누리를 덮어 순백의 세계를 만드는 비밀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요? 아침에 동에서 뜨는 해는 저녁이면 서쪽으로 지면서 그 찬란한 석양의 슬픔을 남기도록 지어졌을까요?

 

지나는 여름 그 뜨거웠던 폭염은 어느 사이 식어가고 가을의 눈부신 조락을 준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요? 다시말하면 만물을 보고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도록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마음의 여백 곧 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바로 이런 여백을 위해 준비된 날이었던 것입니다.

 

노동은 인생에게 생존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모든 직업의 성직사상과 근면한 노동정신, 금욕의 정신이 격려되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인 복지사회를 만들었다고 막스 베버는 지적합니다. 그러나 이 노동이 안식과 균형의 리듬을 갖지 못할때 우리는 일 중독자가 되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가장 불쌍한 인생이 있다면 죽어라고 일하다가 죽어 버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이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도 우리의 노동의 보람을 돌아보는 쉼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 현재를 충전할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3절에서 하나님은 이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은 특별히 구별하여 다른 날과 차별화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복된 날입니다.

 

이 날의 쉼으로 우리는 인생의 행복을 누릴수 있어야 합니다. 이날의 가장 큰 행복은 쉼으로 우리의 마음과 몸이 새로워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급 시대에 이르러 주께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시게 됩니다.

 

우리의 유익,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였습니다. 이제 출애급기 3117절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이 날 안식일에 주께서 누리시는 행복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그런데 여기서 "평안하셨다"는 말을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God refreshed himself"라고 기록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뱌인나파쉬"-곧 성령(네페쉬)이 임하셨다(뱌인-들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쉬실 때 그는 임하신 성령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 우리는 안식일의 또 하나의 축복을 확인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를 성령으로 새롭게 충전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면 촛불을 켜며 "빛이 있으라"고 선포합니다. 이어서 그들은 촛불을 들고 일어나 찬미하며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래동안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미리 준비된 식탁의 음식을 즐기며 가족들의 대화를 즐깁니니다. 그리고 안식일 여유있게 해뜨기를 기다려 일어나 온 가족이 함께 영혼의 새힘을 얻고자 회당으로 손잡고 걸어가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하는 날이 이니라 축제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이 날을 가르쳐 안식일의 여왕 혹은 안식일이라는 신부와의 데이트 날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안식"이라는 책의 저자인 여성 신학자 마르바 던은 "그리하여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안식일을 지키며 "우리의 영혼은 쉴만한 물가(메누하) 곧 안식의 강가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즈음 우리가 많이 말하는 진정한 웰빙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무수히 웰빙을 선전하고 웰빙을 그리워하면서도 참된 웰빙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서두름의 노예가 되어버린 까닭입니다.

 

우리는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소위 인스턴트 컬쳐에 중독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현대 컬쳐를 대표하는 것이 라면이지요. 우리는 식사시간조차 기다리지 못하고 즐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여유-왜 필요할까요?

 

3. 미래를 계획할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한 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유대인들을 "게으르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키는 성경적 의미를 묵상하던 철학자 필로(Philo)는 안식일의 축복을 이렇게 변호했습니다.

 

"--안식일의 율법이 우리의 태만성을 고취하는 것이 아니다. 이날의 축복은 오히려 끝날줄 모르는 수고로부터 숨을 돌리게 해주고 또 사람들을 규칙적으로 계획된 쉼의 제도아래 둠으로써 사람들의 육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다시 옛 일터로 돌아갈수 있도록 해 주려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 뿐 아니라 운동 선수들도 숨 돌리는 휴식의 여유를 가짐으로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자신들 앞에 기다리는 과업들을 효율적으로 성취할수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안식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안식일 지나가면 다시 평일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안식을 우리로 한 주간의 사역들을 생각하고 계획하는 새로운 창조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학자인 라이켄 교수는 안식일의 축복을 영어 단어 3R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안식일은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는 reflection이며. 우리의 현재를 충전하는 refreshment이며,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창조하는 recreation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안식일의 목적 자체가 단순한 안식만 이었다면 성경은 창2:3로 끝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새 비전을 안고 다시 일터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 쓰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영적인 안식이 구원을 의미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새로운 행위의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을 선물로 받는 것처럼 구원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은혜로만 받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선한 일을 위해 삶의 현장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선한 일은 참된 안식을 모르고 사는 이웃들에게 안식의 주인을 소개하는 일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그리고 그렇게 안식의 선물을 이웃들에게 기쁨으로 나누기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안에 예비된 안식을 당신이 당당하게 누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당신이 안식이 되어 주시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바로 세상을 향해 세상이 찾고 있는 안식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우리 목장 교회에 나오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고 영적인 쉼을 얻고 자유와 평화를 경험하게 하는 공동체 바로 그런 쉼터가 되도록 다시 목장을 열어야 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 당신 곁에 있는 어떤 이웃들에게 정유찬의 시 한편을 선물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쉼표이고 싶다.(-정유찬)

 

쉼표처럼/휴식을 주고 싶다.

 

--힘들고/지칠 때마다 어김없이/당신옆에 찍히는 쉼표/--그 쉼표와 함께/당신이 잠시 침묵하거나/차를 한잔하고 호흡을 가다듬어/생기있게 다음줄로/넘어가면 좋겠다.--다음줄로 넘어가/내용을 만들고/지치면 또 쉬다/

 

하루를 마감하는 당신의 일기장엔/마침표가 되어 찍히고 싶다.

 

--그리고 다음장으로 넘어가/함께 아침을 맞이하면 행복하겠다.---그렇게 쉼표가 되고 마침표가 되

 

어 살다가/우리 황혼의 끝날--- 약해지고 늙어진 당신이/세상을 떠날때는--마침표가 아닌/영원한 쉼표로 남고 싶다./--사랑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가정 /20:7,2:6-11/ 이동원 목사

2014-11-28 15:48:37

 

인터넷 문화가 널리 확산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사회의 큰 관심거리의 하나가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이 되었습니다.

싸이 월드의 사업본부 팀장인 신병휘씨는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글에서 훌륭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첫 걸음은 커뮤니티가 사용자들에게 줄수 있는 가치에 집중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는 커뮤니티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성공에 집중하지 말고 가치에 집중하라고 충고합니다. 커뮤니티가 주는 가치야 말로 커뮤니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여러 커뮤니티가 있지만 성경적으로 가장 중요한 두가지 커뮤니티는 가정과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첫 창조의 절정에서 태어난 공동체가 가정이라면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인 구속사역의 결과로 태어난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커뮤니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가치에 의존하는 공동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치의 핵은 주님의 이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가정과 교회는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커뮤니티-가정과 교회의 성공과 실패는 주님의 이름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3계명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상적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말이나 행동을 가르쳐 망령이 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망령되게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본래 샤웨’(shawe)라는 단어로 헛되다”(in vain) 혹은 가치가 없다”(worthless)는 말로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호칭해서는 안된다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하거나 가치없게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이 명령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명령이 준행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마당이 무엇보다 우리 가정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바로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부되기로 서약하고 하나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시작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웰빙가정을 만드는 열가지 법칙 그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가정이 되십시오입니다.

 

1. 왜 주님의 이름이 존중되어야 할까요?

 

두가지 이유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받을수 없나니 천하사람중에 구원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4:12)고 했습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에서 친히 예수가 되어 이땅에 오신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봉독한 빌립보서 2장에서의 바울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하나님과 동등이시고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자신을 비우시고 이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의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한 대속의 제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예수의 이름보다 더 소중하고 더 위대하고 더 고귀한 이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찍이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였을 때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를 통한 메시아의 출생을 예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1:21) 91장 찬송가의 작시자 리디아 박스터(Lydia Boxter)"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왜 주님의 이름이 소중합니까?

 

그분의 이름으로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온 세상의 구원의 소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심판받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서 2장 본문에서 예수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이땅에 오셔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10에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아니라면 언젠가 강제라도 그렇게 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심판의 날인 것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는 또한 심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구원이지만 동시에 그의 이름은 심판입니다. 고후5:10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앞에 나타나게 되어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신 분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은 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심판하실 분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처방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3 계명은 그런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은 죄라고 합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한다는 말입니까?

 

2.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할수 있을까요?

 

두가지로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가 직접적인 형태에 속한다면 또 하나는 간접적인 형태라고 할수 있습니다. ,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여기서 망령되다는 말은 가치가 없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이름을 가치없게 하는 것일까요?

 

1) 직접적으로 주님과 관련된 것들을 함부로 말할 때입니다.

 

20장의 10계명을 번역하면서 공동번역이나 표준 새 번역은 “-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하나님이나 예수라는 단어(Gosh, Jesus)가 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가장 고귀한 단어가 가장 비속한 욕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사단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추하게 변질시키는 일- 그것이 바로 사단의 전문사역입니다. 우리들 성도들은 특별히 이런 언어 사용에 사단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건전한 유머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계를 넘어선 농담으로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부를수 없다고 해서 여호와란 이름대신 아도나이(Adonay)라고 대신 표기하는 전통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신앙적인 언어사용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언어는 가치 전달의 수단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경박하게 사용할 때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의 가치를 농담수준으로 격하시킬지 모릅니다.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 앞에서 주님의 교회나 주님이 쓰시는 사역자들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들의 언어를 통해 가치를 학습받고 있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교회나 메신저를 실컷 비난하는 부모들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어떻게 신앙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자라 날 것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평생의 목회 생활을 통해 자녀들이 신앙을 따나는 가정에서 두가지 원인을 관찰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모들이 교회 생활은 하지만(심지어 직분도 갖고 있지만) 가정에서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모범을 배우지 못한 가정, 그리고 부모가 늘 교회나 사역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상을 갖고 있는 가정들이 결국은 신앙전수에 실패하는 것을 봅니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말이 씨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말을 바꾸십시오. 경건한 말, 거룩한 말, 따뜻한 말, 긍정의 말들을 말해 보십시오. 가정이 바뀔 것입니다. 자녀가 바뀔 것입니다.

 

2) 간접적으로 주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처럼 암시할 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께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주인이시라면 이제 부터는 그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그런가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할 때 기도할 때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시인되고 고백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진학지도를 할 때 혹은 취업 선택을 할때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허락한 은사보다 혹시 부나 출세나 명예를 더 고려하도록 영향을 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로는 예수를 주라고 가르쳐 놓고 실제로는 돈이 주라고, 인기가 주라고, 명예가 주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저는 오늘날 우리 자녀들의 신앙생활의 최대의 장애가 바로 이런 크리스쳔 부모들의 이중적인 가치관, 이중적인 행태 혹은 일관성이 없는 자녀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오늘의 부모들의 망령된 모습인 것입니다. 제가 이런 부모들에게 호소할 말은 꼭 하나입니다.--“제발 망령 부리지 마십시다

 

3.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존중할수 있을까요?

 

두가지 결론적인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1) 매일의 일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예수의 이름을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의 신앙생활은 시작됩니다. 이제 그 이름으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찬양은 그 이름을 칭송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 이름으로 주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를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그의 이름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의 이름으로 모여 그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이름 때문에 살고 그 이름 때문에 죽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우리의 존재의 이유이며 우리의 행복의 비밀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이름을 높이는 삶인 것입니다. 장애 시인 송명희는 그 이름의 비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수 없네/그 이름속에 있는 비밀을/그 이름속에 있는 사랑을/그 사랑을 말할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못해서/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우리의 예배로 기도로 전도로 사랑함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그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2)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우리에게 비록 물질적인 손해가 있어도 주님앞에 바른 결정을 내려보십시오. 그 일이 비록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어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가치있는 결단을 내려보십시오.

 

이사할 때, 취직할 때, 사업을 전환할 때, 자녀의 진학지도에 성경적인 가치관이 반영된 결정을 내려보십시오. 그때 비로서 당신의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이 주님의 사람인 것을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서 당신의 가정은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가정이 되고, 당신의 인생은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린 삶으로 결산될 것입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자녀중에 한 사람이 부스에게 다가와서 아버지, 힘드시겠지만 여기 서류에 서명해 주시면 재산 정리의 어려움을 피할수 있게 되겠습니다고 말하자 부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그앞에 펼쳐진 서류에 그가 가까스로 힘을 내어 서명한후 그 서류는 봉해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세상을 떠난후 가족들이 서류를 열었을 때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직면해야 했습니다.아버지 부스가 남긴 마지막 서류 싸인에는 부스 자신의 이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 그 서류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그가 마지막 까지 남기고 싶었던 이름, 그가 세상을 떠나가는 순간까지 붙들고 있었던 이름, 그의 자녀들이 또한 붙들고 살아주기를 기대했던 이름, 아니 그가 그의 가족들에게 남길수 있었던 최대의 유산은 돈이 아닌 예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저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3계명을 통하여 직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서 주님의 이름이 얼마나 존중되고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안식을 지키는 가정 /20:8-11/ 이동원 목사

2014-11-28 15:45:05

 

자주 쓰여지는 영어 표현 가운데 집에 오신 손님에게 편하게 하시라고 권할 때나 또는 어디에서나 편한 마음으로 적응해 달라고 부탁할 때 "make yourself at home"(자신의 집에 계신 것처럼 스스로를 편히 하십시오) 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집은 안식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하루종일 직장에서 땀흘려 일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집은 안식의 둥지로 우리를 기다립니다. 집에서의 안식으로 우리는 다시 새 힘을 얻어 다음 날 일터로 향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집에서 적절한 안식을 취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방향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안식을 지켜야 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제가 "안식을 지키는 가정이 되십시오"라는 설교 제목을 주었더니 교회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가정이 되십시오"가 맞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출애굽기 본문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되었지만 성경 전체를 보면 성경은 7일중 하루만이 아닌 안식 그 자체의 중요성을 매우 포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4:11에도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을 지키는 가정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을 지키면 안식이 우리를 지켜 줄 것입니다.

 

사실 엄밀하게 성경적으로 관찰하면 안식은 일주일에 맨 끝에 지켜야 할 날이 아니라, 일주일에 맨 처음부터 지켜야 할 우선순위의 명제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은 맨 나중 제6일에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창조된 후 처음 맞이한 인간의 첫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인간은 일하고 쉰 것이 아니라 쉬고 일한 것입니다. 쉼에서 온 에너지, , 능력으로 6일을 버티고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다른 무엇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하나님의 우선순위적 배려였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가정들에서 관찰되고 경험되는 갈등의 근본 원인이 바로 안식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가정, 소위 웰빙가정의 열가지 법칙중 제4의 법칙은 "안식을 지키는 가정이 되십시오"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 가정이 안식을 지키는 가정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 먼저 엿새동안 즐겁게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계명중 제4계명을 기억할 때마다 통상적으로 이 계명이 안식만을 강조하는 계명만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본문 9절은 안식의 중요한 전제로서 엿새동안의 성실한 노동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실한 노동이 달콤한 안식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9절을 읽어보십시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힘써 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약에서 바울사도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고 했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노동관으로 인하여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나 근면한 노동문화가 꽃피우고 경제적인 선진 사회가 되도록 기여하였습니다.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가 그의 유명한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지적한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모든 직업을 소명으로 생각해서 열심히 일했고, 돈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기에 벌은 돈을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고 저축했으므로 이런 정신이 근대적 자본주의의 발전을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노동은 형벌이 아니라 특권입니다. 종종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분가운데 인간이 노동하게 된 것이 타락의 결과 혹은 형벌의 결과라고 오해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실 것은 인간 타락이전에도 인간에게 일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2:15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아담)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타락이 이 가져온 변화는 즐거운 일을 괴로운 일에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다가 괴롭게 느껴지거든 타락의 영향인줄 아십시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일의 태도에도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괴롭게 일해서는 안됩니다. 즐겁게 찬양하며 일해야 합니다. 일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일할수 있는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즐겁게 일하셔야 합니다.

 

저는 집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인 주부들의 경우에도 그것을 가사 노동으로 생각하고 집에서 즐겁게 일하실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 양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가정에 자녀가 여섯이나 있었는데 자녀들이 엄마에게 시시때때로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엄마, 자녀를 여섯 둘려고 본래부터 계획하신 건가요?" 그러면 이 엄마는 기분이 좋을때는 예외없이 ", 하나님의 사랑이고 축복이지 뭐"하고 대답을 하신 답니다. 그러나 기분이 안 좋을 때 이 질문-계획하고 우리 여섯 자녀를 두었느냐?-을 받을 때는 어김없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 하나님의 심판이야, 심판." 아닙니다. 성경은 자녀를 기업이라고 선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양육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안식을 지키는 성경적인 웰빙가정 세움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우리 가정의 모든 식구들이 먼저 열심히 일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육체의 안식으로 행복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엿새동안 일한 후에는 일곱째 날 "--아무일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1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아무일도 하지 말라"입니다. 모든 일을 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안식은 '샤바트'인데 일을 그친다는 뜻입니다. 영성 신학자 마르바 던은 그의 명저 "안식"에서 일을 그칠뿐 아니라 생산과 성취도 그치고 근심, 걱정, 긴장도 그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소유하려는 노력도 그쳐야 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도 그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쉬면 마치지 못한 일이 큰 일 날 것 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어쩐지 내가 움직이고 감독하여 오늘도 모든 일을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맡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내가 하나님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한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되기를 그치고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출20:11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안식일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예비하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손해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르바 던은 그녀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서부 개척시대에 한 무리의 포장마차가 미국의 중부 도시 센트 루이스를 떠나 서부 오리건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모두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어서 안식일에는 이동을 안하고 쉬었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어서 일부 사람들은 폭설이 내리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안식일에도 계속 달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그들은 두 팀으로 나누어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쉬는 팀과 안식일에도 달리는 팀으로 말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말할것도 없이 안식일에 쉬는 팀이 더 빨리 오리건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충분히 쉰 그 활력으로 엿새 동안 더 빨리 더 힘차게 달릴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바 던은 이 이야기의 결론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명을 존중하는 자들을 존중하신다".

 

비슷한 인류의 역사적 경험의 사례가 있습니다. 소련에서 공산당 혁명이 성공한 후 공산당 지도자들은 회의를 거쳐 노동자들의 생산량을 높이고자 기독교 문화의 산물인 제7일 주일 휴무를 깨려고 10일 동안 일하고 쉬게 하였습니다.

 

결과는 엉망이었습니다. 아픈 사람, 병든 사람, 속출하는 사고등으로 시행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일요일 휴무로 돌아갔습니다. 쉴때는 쉴수 있어야 합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죽어라고 일하다가 죽는 사람들입니다. 주께서는 여러분과 저의 행복을 위해 안식을 지키게 한 것입니다. 육체의 안식으로 행복을 지키십시오.

 

3. 영혼의 안식으로 거룩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안식하면 일반적으로 육체적인 안식을 먼저 떠올리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안식입니다. 영적인 쉼이 없이 우리의 안식은 온전할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참된 쉼을 모르고 사는 인생들에게 영적인 쉼을 주고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11:28)고 우리를 초대하지 않으셨습니까? 인생이 쉬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죄의 짐 때문이고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구원은 안식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에 들어간다말은 구원을 경험한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4:10에서 이런 경험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영적인 쉼이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계속해서 양식을 공급받고 거룩해져 갈 때 영혼의 부요함, 평안함, 신선함, 기쁨이 보존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목적으로 일주일의 하루가 구별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10계명의 4계명을 서술하는 본문 11절에서는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룩이라는 단어는 본래 히브리어의 '카도쉬'"따로 떼어놓는다,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이 날을 구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성경을 읽고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를 하면서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는 시간으로 삼아왔던 것입니다.

 

히브리 인들은 안식일을 뜻하는 보다 더 고급한 단어로 '샤바트'대신에 '메누하'(menuha)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메누하는 충만한 평화, 아름다운 고요함, 건강한 힘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아무것도 안하는 날이 아니라 기쁨과 축제의 날인 것을 기억하기 위해 이 단어를 함께 사용해 온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영생을 가르쳐 "영원한 메누하"라고 불렀습니다.

 

23편에 "그가 나를 푸른 풀밭(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2)고 할 때 '쉴만한 물가'가 바로 메누하인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남길수 있는 최대의 유산은 행복한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국보다 더 좋은 더 축복된 환경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가정이 영원한 안식의 집 천국과 비슷한 환경을 갖고 있다면 어떤 자녀가 가출하며 어떤 자녀가 탈선하겠습니까?

 

우리들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우리의 가정을 안식하는 환경으로 만들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대인들이 안식일 전날부터 기쁨으로 안식일을 준비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준비할 책임이 있습니다.

 

미리 안식일 음식을 준비하여 안식일은 주부도 편히 쉬면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독서하고 가벼운 산책을 하면서 가족끼리의 즐거운 대화를 가졌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영혼의 안식으로 거룩한 은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는 저녁이 되면 두 개의 촛불에 불을 밝힙니다. 하나의 촛불은 출애굽기의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명령에 대한 순종이며, 또 하나의 촛불은 신명기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에 대한 순종을 뜻합니다.

 

두개의 촛불이 켜지면 가족 대표가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합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당신의 계명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자 우리에게 안식일의 촛불을 밝히라고 명하신 당신을 송축하나이다./우리의 처소를 밝히는 안식일의 촛불이 우리 가족을 비추는 평안과 행복이 되게 하소서./오 하나님, 이 거룩한 안식일에 우리를 축복하사 당신의 영광으로 우리를 비추소서./우리의 어둠을 밝히시며 우리와 온 인류, 특별히 당신의 자녀들을 진리로 영원한 빛으로 인도하소서. -."

 

이런 기도, 이런 찬미, 이런 예배 곧 영혼의 안식으로 거룩함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아름다운 안식을 지키는 가정, 진정한 웰빙 가정이 사모되지 않으십니까? 안식을 지키는 가정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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