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6 거룩한 우회 /출19:5-6/ 이익환 목사
2023-05-24 09:40:44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 19:5-6)
인생을 먼 길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왕이면 남들보다 빨리 목적한 곳에 도착하고 싶은 게 우리가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우리가 원하지 않은 우회로에 들어설 때가 있다. 대학 입시에 떨어지든지, 진급에 떨어지든지, 병에 걸려 일을 멈춰야 하든지… 그래서 남들보다 뒤처진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모두가 직진할 때 멈춰서 있거나,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면 조급한 마음이 들기 쉽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이르는 장면이 나온다. 가나안 땅으로 직행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들에게 시내산은 분명 지리적인 우회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서 일년 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들에게 시내산은 시간적으로도 우회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시내산’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야 했을까? 오늘은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인생의 우회로에 접어들 때 믿음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시내 광야에 이른다. ‘삼 개월이 되던 날’은 ‘세번 째 달이 되던 날’을 의미한다. 그들은 유대력으로 세번 째 달인 시반월에 시내산에 도착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을 놔두고 시내산까지 와야 했을까? 그것은 출애굽의 목적이 단순히 이 민족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지리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애굽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바로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정체성에 맞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존재로 세워져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가나안에 이르기 전 하나님의 언약에 눈을 뜨는 시간이 별도로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은 단순히 하나의 자유 국가가 되야 했던 게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이자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장소에서 그들과 거룩한 언약을 체결하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 장소가 바로 시내산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으로 직진하기 전,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세워지기 위해 ‘거룩한 우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어떠한 사명을 가진 자들인지 말씀해 주셨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이다. ‘소유’는 히브리어로 ‘세굴라(סגלה)’다. 세굴라는 ‘특별한 보물’이란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끼시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들은 다른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제사장 나라’가 되는 사명을 가졌다. ‘제사장 나라’는 히브리어로 ‘맘레켓 코하님(ממלכת כהנים)’이다. ‘제사장들의 왕국’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제사장은 누구인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복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통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군림이 아니라 섬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는 나라로 세워지기 원하셨다. 그리하여 이 민족을 통해 열방에 하나님의 복을 전하기 원하셨다.
한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사명을 주셨다. 거룩한 백성은 히브리어로 ‘고이 카도쉬(גוי קדוש)’이다. 카도쉬, ‘거룩한’이란 형용사는 하나님께나 붙을 수 있는 수식어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개 민족이 ‘거룩한 백성’이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닮은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라야 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시반월 여섯 째 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과 그에 따른 언약들을 주셨다.
이날은 출애굽 이후 50일 째 되던 날인 바로 오순절이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하그 마탄 토라 (חג מתן תורה)’라고 부른다. ‘토라를 주신 절기’란 뜻이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자신들이 하나님과 결혼한 날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이 날 받은 십계명을 결혼 언약 문서로 여긴다. 유월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작되었던 출애굽 구원의 역사는 이처럼 오순절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들은 단지 해방된 노예가 아니라 오순절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언약 백성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 백성으로 존재하도록 그들에게 토라를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시내산에서 1년의 시간을 머물게 된다. 이것은 그저 우회하거나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준비되는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레위기서 전체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이곳에서 일년간 성막을 준비한다. 하나님은 성막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출 29: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이 성막 위로 구름이 떠오를 때 이스라엘은 이 구름을 따라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멈춰서야 했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부터 안식일을 지키고, 성막 중심으로 살아감으로 거룩한 나라가 되었다. 이 민족 자체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갔기에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이다.
신약 성경에도 우회한 사건이 있었다. 예수님은 승천 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보낼 때까지 너희는 예루살렘에 머물라’.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에 머물며 기도했다. 함께 모인 자가 약 120명이었다. 그들은 하늘 아버지가 보내실 것을 받기 위해 한 곳에 멈춰 선다. 그들은 복음 들고 산을 넘기 이전에 기도의 자리에 머문 것이다. 일종의 우회다. 그들에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열방으로 직진하는 것보다 성령을 통해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을 받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들은 멈춰 서서 성령의 능력이 임할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오순절 날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된다. 구약의 오순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졌다면, 신약의 오순절,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지게 된다. 이처럼 유월절에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구약과 신약 모두 오순절을 통해 완성된다.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의 삶이 바뀐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도 이 날 이후 완전히 달라진다. 이후 제자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베드로는 신약의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한다. 벧전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정체성이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데는 목적이 있다.
단지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허락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 열방을 축복하는 제사장으로 세우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때로 우회로로 인도하신다. 토라와 성령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우회로를 기꺼이 믿음으로 따라간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오순절에 토라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제자들처럼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자로, 제사장 나라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를 얻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얻는 데는 다른 조건이 필요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누가 맺을 수 있을까? 그것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된 자가 맺는 것이다.
그것은 군림하기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제사장으로 섬기고 축복하기 위해 사는 자가 맺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거룩한 백성이 맺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오순절에 임했던 말씀과 성령의 계시가 반드시 필요하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성품과 삶의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애굽의 노예처럼 생존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우리의 정체성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는 일에 관심을 갖고, 그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성령을 통해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갖고 있었던 관점이 바뀌었다. 그랬기에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헌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관점이 죽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 되는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오순절 시내산에서 토라가 주어짐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탄생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주어짐으로 교회가 탄생했다. 주님과 하나되는 연합이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이 우회하고 있는 시간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콜링하시는 시간일지 모른다. 새로운 정체성을 세우라고, 보다 분명한 인생의 방향을 세우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회로를 허락하신다. 그러한 시간이 단지 염려와 불안으로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욱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주님의 소유된 자로 거듭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이 우회의 시간에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나의 자아와 뿌리 깊은 인본주의가 무너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애굽의 습관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시간이 돼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는 시간이 돼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가나안이 허락되었을 때, 우리는 시대의 우상 앞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계속해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어려운 시대 단지 살아 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존재로 살아가는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다. 이러한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는 일에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시내산에서! /출19:1-6/ 김병삼 목사
2016-03-14 10:51:53
5.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
[출애굽기 19장 1-6절]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르비딤에서 무슨 일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지 삼 개월 만에 시내 광야에 이르게 됩니다.
(지도를 한 번 살펴볼까요? 그리고 지금까지 여정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시내산에 오르면서 느낀 점을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시내산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하기 전에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 먼저 주목해 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출애굽한지 3개월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기적과 시련, 그리고 믿음의 시험을 거쳐 이르게 된 곳이 바로 시내산입니다. 그런데 2절에 보니까,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라고 말씀합니다.
설교 시간을 통해 소개하지 못한 장소 중에 ‘르비딤’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르비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죠.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르비딤의 일들을 짧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이들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1절)
참 신기한 것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노정대로 행하면서 겪게 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무슨 뜻이 있는 듯합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은 무엇일까요? 르비딤에 이르러 물이 없자, 이들은 여지없이 목마르다고 물을 찾으며 불평합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3절)
참 대단한 민족이죠?
마라의 쓴 물과 엘림을 경험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르비딤에서 또 불평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반석을 치자 물이 나와 백성이 먹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을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5절)
이 명령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장로들에 대하여 화가 나셨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 백성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어떻게 장로들까지 하나님을 향하여 모세를 향하여 그렇게 불평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결국, 그들의 불평에도 기적을 경험하지만, 명예로운 기적이 아니라 경고와 수치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7절)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경고는 버리심이 아니라 돌이키심 혹은 신앙의 점검을 위함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심과 그들을 보호하심을 르비딤에서 다시 보이십니다. 어쩌면 마라의 쓴물 이후에 엘림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출애굽기 17장 8절을 보세요.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그때에 모세가 산꼭대기에 서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드는 동안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는 유명한 사건, 즉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붙들고 지팡이가 내려오지 않게 함으로 전쟁에 승리함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제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부르게 됩니다.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16절)
기준이 필요하다!
시련 가운데 반복되는 불평, 그럼에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확증이 필요한가요?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시내산에 이르셔서 뭔가 원칙과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따라야 할 규칙과 율례, 십계명을 시내산에서 주시게 됩니다.
제가 1013년 2월 7일 페이스북에 ‘기준’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기준!"
초, 중, 고 시절 운동장에 모일 때면, 여지없이 선생님이 한 사람을 지목했습니다.
"기준!"
그러면 모든 학생이 기준을 중심으로 대열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좌로 벌려, 우로 벌려, 뒤로, 앞으로…."
어떤 명령이 떨어져도 기준은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오늘 새벽 출애굽기 묵상 중.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삼 개월 만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마주하시고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앞으로 살아가는 날 동안,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기준을 정해 주신 것이죠.
가끔 우리는 택함 받은 자신이 기준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종종 있지요. 그래서 우리의 삶과 주변이 어지러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일을 해결하는 방법!
하나님의 기준에서 어그러진 주변을 하나씩 교정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요즘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와 장로, 가정에서, 나라에서조차.
"서로 생각을 맞추고 뜻을 정하려고 하니 힘들 수밖에요. 탐욕스런 인간들의 뜻이 어떻게 맞을 수 있나요? 하나님을 중심으로 서로 뜻을 맞춰가야죠."
이 거룩한 기준의 직무를 택하신 백성에게 주었다는 것. 우리가 내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우기지만 않는다면 진정한 기준의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세요!
우리 인생의 광야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나를 지목하셔서 말씀하시네요.
"너 지금부터 기준이다!"
왠지 마음 뿌듯하지 않나요?
당신 주변에 어그러진 일을 기준 앞에서 교정하는 하루가 되기를.
이제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속도가 아닌 방향에 대한 문제를 점검하기를 원하십니다.
방향이 없는 열심이 얼마나 무의미합니까? 군대에서 사람들을 참 참을 수 없게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무조건 삽을 주고 땅을 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메웁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참 힘들죠. 이유 없는 일을 시키는 것처럼 고단한 것이 없습니다.
비전 없는 분주함은 곧 지치게 합니다. 가치 없는 열심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스티븐 코비의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라는 책의 앞부분에는 스티븐 코비와 결혼한 딸의 대화가 나옵니다.
출산 후 아이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자기 일을 거의 하지 못하는 딸이 푸념을 한다. "아버지, 이 어린아이 하나를 키우느라고 내 할 일을 전혀 못 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없어요. 이것이 일종의 시간 낭비는 아닌가요?"
그때 스티븐 코비가 이렇게 말한다. "시간관리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마라. 달력은 없애버려라. 그리고 지금 네가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를 돌보는 것을 감사하고, 즐기도록 하여라. 명심해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방향이다."
우리는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시간에 쫓겨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늘 부족한 것이 시간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3개월 동안 광야를 지나왔습니다. 이제 얼마를 더 가야 할 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제부터는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느냐의 문제보다 이들이 올바른 방향을 향해 가느냐는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확신은 무엇보다 신뢰의 문제고 관계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을 버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언약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산에서!
아직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하나님의 산에서 삶을 정렬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군에서 사격 훈련을 할 때면 엄격하게 군기를 잡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무서운 군기는 정신을 차리게 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훈련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힘을 빼는 이유에서죠. 이 두 가지 과정을 통해 오직 사격의 타깃에 집중하도록 하고,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입니다.
저는 출애굽의 과정을 시작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건너 마라와 엘림을 경험하게 하시고, 르비딤을 통과한 후 시내산에 이르게 하신 것은 이제 목표를 분명히 할 시간이 되었다고, 광야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산에서 진지하게 재정비하자는 의도가 아닐까요?
한번 영상으로 시내산을 살펴보세요.
완전히 돌로 된 산입니다. 2,200m 정도 되는 산이죠. 무척 힘들게 올라왔습니다. 아마 모세의 시대에는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 모세 기념교회가 있고, 수도원이 있는 것으로 봐서 못 올라갈 산은 아니고 우리 인생에서 힘들지만, 하나님을 마주 대해야 하는 순간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 3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3절 말씀을 보면서 모세가 하나님께 먼저 올라갔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올라오게 하셨는가?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지난 3개월을 지나며 하나님께 물어야 할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홍해, 마라와 엘림, 므리바, 아멜렉과의 싸움을 거치면서 이대로 이스라엘을 이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시내광야에 오는 동안도 그렇게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앞으로 가나안까지 가려면 더 큰 어려움이 있을 텐데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중요한 시점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큰 문제가 꼭 필요한 시점에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죠. 그래서 열심히 살지만, 잘못된 목표를 향해가는 우리가 힘들고 불행한 거죠.
그런 점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라는 말이 출애굽 여정 가운데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이스라엘과 모세를 인도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죠.
애굽을 나올 때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오면서 있었던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죠. 훈련과 시험, 믿음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시내광야에서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결단을 요구하시려고 모세를 불러올리셨던 것 같습니다. “이제 ‘정체성’을 분명히 하자, 너희가 왜 고생하는지, 왜 이곳을 지나가야 하는지, 내가 왜 너희를 불렀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올리시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둘의 가능성이 다른 사람에게는 상치되는 것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일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오면서 심각하게 하나님께 인생과 미래를 물어야 할 시점을 아는 사람, 그는 자신이 산 것 같아도 하나님과 함께했던 사람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계획과 자신의 의도가 일치되는 삶, 사실은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신앙의 단계가 아닐까요?
우리는 종종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번에는 하나님의 뜻과 제 계획이 같았으면 좋겠어요!”
이 말은 그동안 내 삶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과 어긋나는 것이 참 많았다는 것이죠. 우리가 계획을 세웠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우리의 삶을 틀어 놓으실 때가 많았죠. 물론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계획이 너무 감사하지만, 그 시간을 지날 때 절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세의 삶, 그리고 그의 지도력이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이유입니다.
어쨌거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에서 만나 의도하신 계획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계획을 보다!
본문 4~6절입니다.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셨고 보호하셨는지를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에 보면,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기쁘고 행복한 일인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요?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이 구별하셔서 영원히 함께 하자는 사랑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말세의 때가 되면 하나의 현상이 있는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이 자라나면 모든 불법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이 땅의 문제는 “불법이 성행하는 것”을 해결하려고 하기 전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으면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관심과 멀어지면서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도 무시하게 됩니다. 폭력과 살인 간음과 사기가 난무하는 이 세상이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를 위해 인내하며 돌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신혼부부가 결혼하고 아침밥을 해준다! (요즘은 여자가 남자를 위해 해준다!는 기준은 아니겠지요) 어쨌든 기쁨으로 해주던 일이 지루해지기 시작합니다.
아침밥을 해주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됩니다.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 삶이 지치게 합니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전의 관계와 일상을 요구하기 전에, 이전에 가졌던 그 사랑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확인되지 못한 사랑에서의 요구들은 더 큰 문제들을 낳게 되죠.
시내산에서 맺어진 언약은 무거운 율법의 짐이 아니라 ‘사랑의 언약’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또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맞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다음 문제입니다. 진짜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시내산에서 일어난 일이 하나님이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 다음 구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 5~6절입니다.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은 부담을 지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신하여 중보합니다. 축복을 빌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시던 때가 생각나시나요? 창세기 12장 1~3절에 보니까,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이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의 집에 들고 나는 이들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이제 성도들이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누군가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살아가는 여러분 때문에 가정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크리스천 때문에 회사와 나라가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경제적인 축복, 관계의 축복, 그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언젠가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꼭 목사님과 붙어 다녀야겠어요. 목사님과 다니면 좋은 일이 참 많이 생겨요!”
제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자신을 보며 “저 사람하고 다니면 좋은 일이 없어! 가능하면 피해 다녀!”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큰 저주입니까?
그뿐만 아니라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하게 되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의 자격이 아닌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자아 정체성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목적이 생기면 특별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목적(P.U.R.P.O.S.E)이 분명한 사람은
일곱 가지 면에서 보통 사람과 차이가 있다고 했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① Pray(기도) :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더 기도하게 됩니다.
② Unite(연합) :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있어 더 연합하게 됩니다.
③ Risk(위험) :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믿음의 모험과 그에 따른 위험을 더 감수합니다.
④ Plan(계획) :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대로 자신의 인생과 가정을 세웁니다.
⑤ Observe(통찰) :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보통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사물과 사건을 통찰하게 됩니다.
⑥ Sacrifice(희생) :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하나님과 가족과 교회를 위하여 더 희생합니다.
⑦ Expect(기대) :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보통사람들보다 더 기대하게 됩니다. 위대함은 꿈의 차이에 있고 꿈의 차이는 기대감의 차이입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는 ‘성급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 이스라엘 백성은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릅니다. 모세의 소식이 없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동요하자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 절하라고 합니다. 우매한 대다수는 당장 자신의 문제와 가려움을 긁어 줄 사람과 상황을 원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그렇게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
유사 신앙과 진리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진리는 절대로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치를 보시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계획대로 우리를 인도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진리 가운데 서겠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분별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아정체성은 우리의 삶을 독특하게 바꿔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 출애굽의 영광과 광야의 고난을 경험하게 하셨다면, 우리도 기꺼이 죄로부터의 출애굽을 체험하는 영광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시내산은 어디인가요?
여러분을 부르시는 그 자리가 어디인지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율법의 축복 /출19:1-9/ 하용조목사
2015-05-27 15:27:18
많은 소유가 있음에도 불안하고 절망을 느낌은 진정한 가치와 소망의 문제
매일매일 잘 먹고 잘입고 좋은 차타고 좋은 집에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는 살다가 가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배부르고 등따뜻하면 행복한 법입니다. 그것은 행복의 첫걸음이요 기초입니다. 그것을 빼고 어떤 형태로든지 행복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북한의 참혹한 현실을 보십시오. 고깃국에 쌀밥 먹을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더 깊은 의미의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합니다.
정말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차 타고 좋은 데서 산다고 행복할까?
그렇지 않습니다.
구라파나 미국이나 일본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 나라의 자살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살만한 나라일 수록 자살율이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먹을 것이 없거나 환경이 나쁠까요? 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회를 자세히 살펴보면 부유층이나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 중에 허무주의자가 많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나 행복이 물질적인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데 있으며 영적인 데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것에서부터 행복은 시작되지만 정신적, 나아가 영적인데서 그 행복이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물론 광야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기본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입니다.
따라서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어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문제,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교육도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충족되었다고 광야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이틀이 아닌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목마를 때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고, 먹을 것이 없었을 때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떼가 먹을 것이 되고, 바위에서 샘물이 나고, 원수가 공격했을 때 그 원수를 물리친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버틸수 있었던 더 중요한 버팀목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고 영이시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분인데 그 분을 구체적으로 내 삶에서 만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대한 비밀스런, 그러나 기초적인 축복을 주셨지만 진정한 축복으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닌 말씀인 하나님과 동행하는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았던 가장 핵심적인 축복은 율법과 성막입니다.
오늘은 율법의 축복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그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자신의 율법,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살아야 할 원칙, 지침서로 주셨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 먹고 그 말씀과 동행하여 삶으로써 광야같은 세상에서 40년을 아무 문제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쓰라린 고통이 변하여 축복이 되는 것을 맛보고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을 사는 비결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만약 여러분에게 있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 속에 있고, 율법과 동행하며 산다면 분명히 이 광야같은 세상은 천국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19장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애굽을 떠나서 삼개월이 되던 때입니다. 그들은 유월절이 있던 니산월에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삼월이 되었고 고대하던 시내산이 있는 광야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가야할 곳은 모래가 있는 광야가 아니었고 시내산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내산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왜 시내산으로 가야만 했을까요? 시내산에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언제든지 시험이 들면 은혜받았던 처음의 장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그 장소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회복이 됩니다.
시내산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명령을 받았던 그 자리입니다. 바로와의 열번의 투쟁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물없는 곳에서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고, 먹을 것이 떨어진 곳에서 만나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났던 사막길을 건너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을 내렸던 시내산으로 삼개월만에 도착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드디어 시내산 앞 광야에 온 백성이 장막을 쳤습니다. 모세는 홀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그 당시는 아무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약시대 사람들은 얼마나 축복을 받고 사는지 모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막았던 휘장을 찢어지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날수 있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절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특별한 사람만 하나님을 만나고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벼랑끝에 서서 커튼뒤가 아닌 정면에서 모세가 만난 하나님
이것은 아주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그때 그의 인생에 가장 고통스러운 절망과 좌절의 끝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벼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벼랑끝에 한번씩은 서보게 됩니다. 그럴때 인간은 정직해 집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소망없이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양떼들을 돌보며 살고 있었습니다. 소망없이 양떼를 몰고 시내산 한 기슭을 걷고 있었을 때 떨기나무를 본 것입니다. 그 떨기나무는 불꽃이었습니다.
불이 타고 있는데 나무는 타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입니다. 보통 불은 전부 다 타고 말지만 하나님의 불은 타는데 타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인생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이 은혜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때입니다.
모세는 거기 서 있는 불꽃에 빨려 들어갑니다. 불에 가까이 접근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지금까지 모세는 하나님을 커튼 뒤에서 만났습니다.
40년동안 분명히 하나님은 계시는데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분과 대면해야 합니다. 그 분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분이 수면에 떠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동안 모세의 삶을 인도하고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과 정면으로 만나야 했는데 그 하나님을 여기서 만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명령을 내립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려 하노라
하나님이 자기 꿈을 모세에게 이야기 합니다.
애굽의 간역자들의 손에서 4백년 동안 매일 고통을 겪으며 고생하는 내 백성의 신음소리를 듣고 내가 그들을 건져 내겠다.
이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꿈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 아들아! 나는 온누리교회를 통해서 이런 일을 하고 싶다. 너희를 통해 내가 21세기에 이런 일을 하고 싶다. 너희 민족의 통일을 이뤄주고 싶고 전세계의 모든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하는 일에 너희 교회를 사용하고 싶다좦 좥내가 내 백성을 구원해야 겠다는 하나님의 꿈이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명령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40년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광야에 홀로 버려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무능할 때 하나님은 유능해집니다. 여러분이 포기할 때 하나님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모세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모세는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할 수 없다, 불가능 하다, 나는 입이 둔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집요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모세!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가야 한다.
아마 오늘 이런 명령을 여러분에게도 내리실지 모르겠습니다.
모세는 권력의 화신인 바로와 대면하러 애굽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바로와 싸울 때 모세는 데모하지 않았고 여러 사람의 힘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혼자였습니다. 영적싸움은 혼자 하는 것입니다.
열번의 무서운 영적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싸움에는 장자가 모두 죽는 끔찍한 일들까지 생깁니다.
그러나 그 싸움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홍해 앞에 그들이 섰을 때 그들은 절망이라는 이름 앞에 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로와의 싸움보다 더 깊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가 보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사막이었습니다. 원수들이 자기들을 공격하는 핍박이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 광야의 고난을 통과하여 이제 모세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주었던 그 명령을 의지하여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이 명령을 내렸던 그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애굽에서 행한 모든 일은 너희가 한 것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
그 이야기가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에게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가?
4절을 보시겠습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은 애굽에서 행한 모든 일은 너희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번의 싸움과 홍해를 가른 것은 모세가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는 하용조목사나 장로님들이나 부목사님들이 다 일으켜 세운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저는 그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헌금과 은사와 노역을 사용하셨을 뿐이지 실제로 행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하게 한 것은 바로 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어려운 천신만고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난 것은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를 안은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날개로 보호해서 여기까지 인도해 낸 것이라고 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항상 숨어계시지만은 않고 수면에 부상하듯 나타나셔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해서 독수리 날개로 업듯이 그들을 보호했는가? 그 험한 광야생활과 그 어려운 싸움에서 투쟁하게 하면서까지 여기로 오게 했는가?
그것은 하나의 약속, 축복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5, 6절에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간역자의 손에서 건져내고 홍해를 건너게 하고 그 험한 광야를 통과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내 백성을 삼기 위함입니다.
너는 내백성이다. 너는 내 것 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너를 구속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양자로 삼기 위하여, 내 자식을 삼기위하여, 내 상속자를 만들기 위하여, 내 거룩한 백성을 만들기 위하여, 버려진 사람이었고 마귀의 자식이었지만 마귀자식으로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내가 너를 건져내기 위하여, 내가 너를 축복하고 내가 너를 내 소유로 만들기 위하여 내가 너를 건졌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그 댓가를 치루면서도 우리들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여러분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댓가를 치루어도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너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내 소유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너는 내꺼야라고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물론 싫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좋지 않겠지만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꺼야! 너는 내 소유물이야! 내 백성이야
이렇게 소유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내 말에 순종하고 내말을 지키면 이런 축복을 주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시내산에서 주신 이 언약의 내용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조금 더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내산의 계약이 신약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주기 위하여 너를 애굽땅에서 내가 불러 내었고 광야의 그 험한 골짜기를 건너서 여기까지 오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들은 왕같은 제사장입니까? 택하신 족속입니까?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백성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 모세를 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이것이 설교의 모범입니다. 설교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선포하면 백성들이 아멘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당신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이 축복들이 다 여러분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라는 말씀을 선포했더니 백성들이 일제히 응답하여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말로 응답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멘입니다. 설교들을 때 아멘으로 받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축복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를 보게 됩니다. 첫째는 어떻게 이 약속이 우리에게 올 것인가?입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한 것은 너를 낮추시고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여러분을 낮추시고 시험하여 말을 듣는지 듣지 않는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것은 순종과 헌신입니다.
그래서 순종과 헌신이 중요합니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과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여러분이 능력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기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모세가 다시 한번 시내산에 올라가는데 굉장히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결입니다. 불꽃나무 가까이 모세가 다가왔을 때 모세야! 모세야! 가까이 하지 말라 너 있는 곳은 성결한 곳이니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라고 막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축복의 산으로 올라가는 비결의 첫째는 순종이요. 그러나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순결과 거룩, 즉 성결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요구한 것은 능력이 아니고 순결입니다.
순종과 성결앞에 하나님은 기가 막힌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8절을 보십시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절에서는 나팔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20절에 이르러 연기가 자욱한 시내산 꼭대기에 여호와께서 강림하시고, 그 곳으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구름 속에서 천둥과 번개 속에서, 나팔소리와 함께 연기가 자욱한 위엄과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가득 찼습니다.
저는 온누리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서 이 성전에 들어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감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있는 사람이 들어오자 마자 꼬꾸라지고 귀신이 떠나가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내산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꽉 찼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소리지르고 싸우고 방자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 곳을 어찌 성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곳은 시장바닥입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장식하여도 그 속에서 서로 싸우고 소리지르고 세상의 방법이 모두 묻어난다면 이곳은 시장바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거룩과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 있는 곳입니다.
그 때 그 곳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셔서 첫째는 너는 내 것이라, 내 백성이다, 너는 제사장이고 내가 너를 축복해 주겠다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 다음 그 연기와 나팔 소리와 번개와 천둥과 불속에서 모세를 부릅니다. 왜 부르는지 아십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축복의 열쇠입니다.
20장 1,2,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 수 있는 지침서들이 선포됩니다.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말라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받는 것만큼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율법은 완전하고 의롭습니다. 율법은 축복입니다.
시편 19편 7절에서부터 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광야같은 캄캄한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소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춥고 배고픈 이런 기막힌 광야라는 악조건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40년동안 승리하며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율법이었습니다.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승리하며 사는 비결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세상에 제일 웃기는 사람들은 주일 한번 예배드리고 신앙생활 잘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저께 먹은 밥이 내일 배고픈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 음식은 오늘 먹어야 합니다. 오늘 잘 먹었다고 하더라도 그 배부름이 내일까지 가지 않습니다. 내일 먹을 양식은 내일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배불리 먹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올 것을 당부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새벽기도회에 1천여명이 찼으면 좋겠습니다. 새벽기도에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은 집에서 큐티를 하십시오. 말씀으로 매일 30분 이상은 묵상하여야 합니다.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먹으면 하나님이 내 속에 내주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살 수 있는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외롭고 고독하고 속상하고 상처받는 모든 이유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배고프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아무리 때려도 아프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을 건들면 아픈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이 건강하면 파도가 치고 폭풍우가 몰아쳐도 요동치 않습니다. 세상에 불경기가 와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붙잡고 광야생활 40년을 버텼던 것처럼 말씀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움으로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온누리교회가 창립 13주년을 맞으면서 하나의 전환점을 갖게 됩니다. 자동차운전의 예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3단으로 달리다가 4단으로 달리기 위해 기어를 바꿀 때입니다. 새롭게 변할 것입니다. 지나온 것들을 뒤돌아보며 이제는 온누리의 비전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일대일을 잘해 왔습니다. 우리 교회 상표가 두개인데 일대일과 큐티입니다. 큐티 하지 않는 사람은 온누리교회 교인인지 아닌지 의심해도 괜찮습니다. 일대일 하지 않는 사람은 온누리교회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부목사님들에게 나부터 일대일제자양육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들이 누구에게는 기회를 주고 누구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느냐 왜 편애하느냐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저부터 일대일제자양육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니. 부목사님들도 다 일대일제자양육을 하라고 했습니다. 일대일제자양육프로그램을 가르칠 수 있는 일대일지도자 과정을 마친 수료자 50%가 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모두 다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축복인 것을 깨닫고 도전 받으십시오. 배울 때보다 가르칠 때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배울 때는 졸지만 가르칠 때는 눈 똑바로 뜨게 됩니다. 배울 때는 결석해도 되지만 가르칠 때는 절대로 결석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보다 성숙해지려면 가르치는 자리로 빨리 들어가야 합니다. 한 영혼을 안고, 고민을 해 봐야 합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이런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광야에서 받는 축복은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번 연단한 금처럼 아름답고 순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말씀을 연구하십시오. 최소한 하루에 30분이상 말씀과 동행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은 광야에 사는 여러분에게 축복을 허락하여 주실것입니다.
독수리 날개로 보여주신 은혜 /출19:1-6/ 곽선희 목사
2014-11-27 08:52:15
카프마 부인의 「광야의 샘」이라고 하는 유명한 저서가 있습니다. 그 책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카프마 부인의 본인의 생생한 경험이기도 합니다. "나는 누에고치를 관찰하다가 바늘구멍만한 작은 구멍을 통해서 나오는 나비가 천신만고 끝에 나오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가위로 구멍을 넓혀 주었다.
그랬더니 나비가 쉽게 나왔다." 여러분은 보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어렸을 때 이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누에고치에 구멍이 뚫립니다. 꼭 바늘 구멍만한 동그란 구멍입니다. 그 구멍을 통해서 나비가 나옵니다.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되어 나오려고 할 때 좌우간 한나절 고생을 합니다. 작은 구멍으로 나오느라고 푸득거리는 것 참 불쌍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카프만 부인이 가위로 구멍을 넓혀 주었더니 나비가 쉽게 나왔어요. 그리고 카프만 부인이 넋두리를 합니다. 너무 재미있는 얘기입니다. "나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과 자비가 크다." 그렇게 스스로 만족했습니다.
하나님은 요 작은 구멍을 통해서 나오게 해서 나비를 고생시키는데 그 부인은 구멍을 크게 뚫어 주어서 나오게 했으니 하나님보다 자기의 자비가 더 크다고 스스로 만족해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는 몰랐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작은 구멍으로 나올 때, 애를 쓰는 중에 영양분이 날개 끝까지 공급되고, 마찰하면서 강해진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결국 자기가 가위로 구멍을 뚫어서 꺼낸 쉽게 나온 나비는 다 죽었고 그 작은 구멍을 통해서 큰 고생을 하며 나온 나비는 살아서 알을 낳게 되더라 하는 겁니다.
여러분,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꼭 편하기만 해야겠습니까? 꼭 편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어려운 고난을 통과하고 있다면 이 과정이 있어야하겠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음성도 있고 하나님의 축복도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는 3가지 절대 요건이 있어야 한다. 첫째, Need of Significance. 의미의 필요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가는 의미와 그 중요성, 존재의 의미를 꼭 가져야 됩니다.
어쩌면 이 존재의 의미를 향해서 우리는 많은 시련을 겪어 나가는 것입니다. 아니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 앞에 많은 시련들이 있습니다. 둘째, Need of Security입니다. 안정성의 필요입니다. 평화가 뭐냐? 참 평화가 뭐냐?
그것을 일생동안 배우는 겁니다. 돈인 줄 알았는데 돈이 아니에요, 정치인줄 알았는데 정치도 아니요, 명예인줄 알았는데 명예도 아니요. 좋은 집에 살면 평화가 있습니까? 아니 그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한 평생 참 평안이 무엇인가를 공부해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Need of Belongings입니다. 소속의 필요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가정이 뭔지,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돈 얼마는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에요, 직장에 나간다는 게 중요해요. 자, 이런 것들이 다 우리 무엇을 말해 줍니까?
'21세기 장수비결'이라고 하는 작은 Article이 '리더스다이제스트' 7월호에 실린 것을 읽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장수하려면 쉽게 말해서 '적게 먹어라.' 그저 많이 먹으면 일찍 죽어요. 그러니까 알아서 하세요. 적게 먹어라.
그 다음에 '친구를 사귀어라.'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결혼하라' 그랬어요. 결혼하면 남자는 7년 더 살고 여자는 3년 더 산답니다.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몸을 움직여라.' 그리고 '적포도주를 마셔라.' 뭐 이렇게 몇 가지로 요약해서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결혼하라, 친구를 사귀어라' 이 무슨 말입니까? 소속감을 가져야 한다 이거예요. 우리는 독립, 독립, 자유, 자유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생명을 보존하지 못해요. 소속관계를 분명히 할 때 건강해 질 수 있고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소속이 필요합니다.
본문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합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난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입니다. 본질상 노예로서 노예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숙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큰 기적으로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은 동시에 애굽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런고로 심판과 구원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때때로 구원만을 바라고 왜 구원이 속히 오지 않느냐고 답답해하지만 구원이 있기 위해서는 심판이 있어야 합니다. 심판과 동시에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건 하나의 귀한 은사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작품입니다. 이 귀한 역사적 작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과정과 준비가 있어야 했던 겁니다. 애굽 사람에게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에게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습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했다. 그걸 기억하라.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구원해 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큰 기적을 통해서,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홍해를 열고 닫아서 사건을 통하여서 이스라엘을 구원했고 그 사실을 잊지 말라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걸 잊어서는 안 되죠. 이걸 잊어버릴 때마다 불평이 생겨요. 이걸 잊어버릴 때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에서 떠났던 것을 볼 수 있고 또 이걸 잊어버릴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했고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물론이거니와 신명기 32장 10절로 12절에 보면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에 있는 말씀은 모세의 마지막 설교 중에 나오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광야에서 저들을 만나 주시고 호위하시고 보호하시고 자기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고 독수리가 독수리 새끼를 보호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호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도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 독수리라고 하는 것, 독수리 날개라고 하는 그 말 그 속에 엄청난 귀한 복음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독수리, 독수리는 새 중에 왕입니다. 마치 우리가 짐승 중에는 사자가 왕인 것처럼 날짐승 중에는 독수리가 왕입니다. 힘세고 위엄 있고 자유와 용맹의 상징이 독수리입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비행기를 타고 날아 봅니다만 그것은 뭐 별거구요.
독수리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참 자유롭고 멋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서히 날개를 쫙 펴고 이렇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참 자유롭고 축복받은 짐승이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날갯짓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대로 쭉 몇 미터나 되는 그 큰 날개를 펴고 공중을 배회합니다. 이 얼마나 굉장합니까?
그래서 독수리를 우리가 자유와 용맹의 상징으로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총 48종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도 손을 댈 수 없고 올라가지도 못하는 벼랑 높은 곳에 둥지를 만듭니다. 둥지는 직경이 2.7m 크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둥지의 무게가 2t입니다.
그러니까 독수리가 이 둥지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겠는가를 알 수 있죠. 2t짜리 둥지를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알을 낳고 새끼를 낳아서 키웁니다. 그리고 먹이를 향해서 독수리가 급강하할 때는 180km로 날아옵니다. 시속 180km로 내달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90km의 반경을 자기의 왕국으로 삼고 지경을 배회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고 합니다.
독수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새끼를 훈련시키는 장면입니다. 자기 새끼를 훈련시킵니다. 그 높은데서 새끼가 어느 정도 크면 새끼를 벼랑으로 떨어뜨립니다. 발로 밀어서 강제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또 새끼는 죽는다고 버둥버둥 하면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독수리는 멀리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잘 지켜보다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급강하해서 툭 채가지고 그 날개위에 올려놓고 다시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다시 떨어뜨립니다. 이렇게 계속 훈련을 해서 독수리가 독수리답게 살도록 그렇게 키워갑니다.
여러분, 새끼 독수리를 발로 밀어서 땅으로 떨어뜨릴 때, 그 새끼 독수리는 얼마나 어미를 원망하겠습니까? 얼마나 원망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이 과정은 꼭 있어야 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독수리의 특징은 나는데 있습니다.
하루 종일도 날 수 있고, 기류를 타고 이리저리 날 수 있는 그것을 훈련을 시킵니다. 또한 강한 날개를 가지게 합니다. 강한 날개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자꾸 움직여야 됩니다. 많이 날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강하게 만들어서 독수리로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독수리는 독수리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떨어뜨리고 땅에 닿기 전에 급강하해서 업어서 다시 올라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독수리는 독수리 새끼에게 고통을 가합니다. 고통을 줍니다. 이 고통은 필수적입니다. 민족이건 개인이건 고통 없이 민족이 강해질 수도 없고 개인이 사람 될 수도 없어요. 편안하게 살아서는 안돼요. 아무짝에도 못써요. 요새 우리 그런 거 많이 보지 않습니까?
거 부잣집 아들들 그 군대에 나가서 한 3년 가서 고생하고 오면 좋으련만 그걸 안 보내려고 요리조리 피해놨다가 이제 와서 뭐 정치가로 내세우고 경제가로 내세우려니까 군대 안 갔던 것 때문에 길이 막히는 것 아닙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군대 안 내보냈던 그 부모들이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보낼 걸 하겠지만 늦었어요. 벌써 망가진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아 그까짓 3년 좀 고생하면 안 되나? 당장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전쟁이 나도 그렇지.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을 가합니다.
두 번째는 지켜봅니다. 고통을 가하고 내버려 두는 게 아닙니다. 멀리서 지켜봅니다. 절대 버려두지 않습니다. 아니 버려지지도 않습니다. 먼 길을 내보내고 지켜봅니다. 독수리는 독수리 새끼를 지켜봅니다. 그 떨어지고 있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독수리 새끼의 능력과 형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가 어느 정도 날 수 있다는 걸,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다는 걸, 독수리는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절대로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눈이 있고, 하나님의 팔이 함께 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독수리 수준까지 가르칩니다. 자기와 같은 수준에까지 하루 종일 날수도 있는 그런 독수리, 독수리 수준에까지 독수리를 훈련시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말로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사건 속에서 가르칩니다. 이론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절절한 사건 속에서 스스로 깨닫도록 하시는 거예요.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도 없어요. 그냥 내버려 둬요.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이것이 하나님의 교육법입니다. 우리를 가르치는 법이예요. 사건 속에서 사건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독립 운동가이며 신앙인인 도산 안창호 선생을 여러분이 아십니다. 그는 참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요. 훌륭한 신앙인이요. 교육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임종 시에 목사님의 손을 꼭 붙잡고 들릴까 말까한 가느다란 목소리로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낙심하지 마세요. 하나……." 거기까지 말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아니었겠습니까.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 민족의 수난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드시 해방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간증하면서 세상을 마쳤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을 놀라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무 충격적입니다. 요새 초등학교 학생들을 놓고 설문조사를 해보았답니다. 아이들에게 글을 쓰라고 했답니다. 6.25가 뭐냐 하고 물었더니요 이조의 역사 중에 하나가 아니겠냐고 생각한데요.
이조 500년 역사에 있는 얘기가 아니냐고? 요새 어린아이들 6.25를 모릅니다. 전혀 모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신명기, 민수기 계속 말씀하십니다. 애굽에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잊지 말아라.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라. 그래서 장막절을 지키라. 여러분, 유월절은 애굽에서 나오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요,
장막절은 광야에 살던 생활을 기념하게 하기 위해서 지금도 지킵니다. 장막절에는 자기 집에서 살지 않습니다. 엄연한 자기 집을 놓고 광야에 나가서 그 뜨거운 데서 천막을 쳐놓고 일주일을 살아야 합니다. 이거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옛날에 이렇게 고생했다는 걸 몸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스운 얘기지만 바빠서 못 나가는 사람은 자기 마당에다라도 천막을 쳐놓고 자야 됩니다. 방 안에서 자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천막에서 자야 됩니다.
왜? 이스라엘이 그 옛날에 천막 속에서 40년을 살았으니까요.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그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라. 그거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과거를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과거에 매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이 과거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 거룩한 은혜를 가슴깊이 감격하는 그런 순간들이 이어져야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discipline - 훈련과정이 있습니다. 그의 교과과정대로 그의 지혜대로 우리는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장 나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으로 그렇게 키워가야 합니다. 그렇게 자라가야 할 것이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이 거룩한 은혜를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6.25를 광산에서 강제노동수용소 광산에서 맞았습니다. 내 일생에 가장 어렵고 어렵게 지낼 때 바로 거기서 6.25를 만났습니다. 뼈아픈 경험입니다만 그때는 참으로 위험하고 하루하루가 이렇게 힘들 수가 없었습니다. 방에 이부자리도 없습니다.
가마니때기를 펴 놓고 지푸라기를 깔아 놓았습니다. 입은 채로 누웠다가 그냥 일어나면 그게 침실입니다. 식당은 없습니다. 그저 조그마한 구멍으로 밥과 국을 내주면 고거 받아 가지고 풀밭에 앉아서 먹고 그릇을 놓고 나가면 그게 바로 식사입니다.
아침, 저녁 시간도 없습니다. 어두운 때 일어나서 어두운 때 저녁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광산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어려운 시련을 민족과 함께 개인적으로도 겪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걸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시련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있는 겁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련입니다. 그런고로 그 크신 역사에 독수리 날개로 지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은혜를 믿고 온전히 순종하고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살아갈 때 진정한 자유함이 그에게 함께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6.25의 아픔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사이에 다 잊어버렸고 그리고 오늘도 원망과 불평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처럼 우리도 이 자유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음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독수리 날개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게 하시고 그리고 그 감격과 은혜로 오늘의 모든 문제를 다 풀어갈 수 있는 온전한 자유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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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출19:1-6/ 곽선희 목사
2014-11-24 15:48:16
불확실한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절대 필요요건 세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건 심리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입니다. 'Three Needs' 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첫째가 Need of Significance 입니다. 중요성의 필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미의 문제요, 삶의 뜻의 문제요, 존재의식의 문제요, 보람의 문제요, 삶의 질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거보다 확실히 물질적으로는 여유가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이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옛날만큼 행복하지를 못합니다. 행복지수는 바닥으로 헤맵니다. 모두가 죽고싶다고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람을 잃어버렸습니다.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내가 정말 살아야 하나?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또 주위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의미가 있나?' 얘들이 크면서, 조금 크기 시작하면 어거지를 쓰고 울 때가 있지요. 일부러 사고도 내고. 왜요? '이 가정에 내가 얼만한 존재인가?'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래요.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그걸 알고 싶은 거예요.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게 아니고 보람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보람이 없으면, 못사는 겁니다.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니고 숨을 쉰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올시다.
그러면, 나의 존재의 의미. 그것을 알고 깨닫고 그것을 확대 확장하고 그것을 높일 수 있을 때, 나라는 존재는 그만큼 의미가 커지고 삶의 가치가 높아지는 거예요. 그럴 때 거기에 행복이 있고, 또 살아갈 수 있는 힘도 있는 것이올시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왜 비참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필요가 없는 것 같거든요. 이 사람에게도, 저 사람에게도 난 귀찮은 존재 같아요. 벌써 정신적으로 그는 갔어요.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여러 사람에게 불편만 끼치고 있다. 자, 이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게 산 것입니까? 죽은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되면,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조건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란 무엇입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안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려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 속에 내게 향한 사랑이 있고 나의 삶의 의미가 있고 내 삶의 가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유명한 윤리학적 명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식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나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이웃이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는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실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엄청난 가치가. 거기에 나의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 하는 뜻이올시다.
또 하나는 Need of Security입니다. 안정성의 필요입니다. 불안을 싫어합니다. 위험을 싫어합니다. 위기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평안을 촉구합니다. 의식주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정신적 안정입니다.
이것을 찾지 못해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오락을 하고, 몸부림을 칩니다. 밤마다 댄스홀에서 발광하는……. 왜들 이러는 겁니까?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했어요. 근심과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어요. 이 자유의식을 찾아서 저렇게 발광을 합니다만은 점점 더 무서운 함정으로 빠질 뿐이고 마음의 평안은 없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아 술을 마신들, 술을 깰 때 가서는 더 비참합니다. 더욱더 비참합니다.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을 찾아 마음의 평안을 찾아 안정을 찾아 헤매는 이 모든 노력이 바로 이것과 같은 거예요. 다 부질없는 노력입니다.
그러면, 참 안정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발견할 때까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발견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내 존재를 발견할 때까지는 절대로 Security 라는 것은 없습니다. 거기만이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셋째는 Need of Belong입니다. 소속의 필요입니다. 고독은 죄입니다. 고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고독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고독의 엄습되어 헤어날 길이 없어요. 소속을 잃어버렸어요. 내가 누구에게 속한 것입니까?
그래서 가정이다, 친구다, 공동체다, 그룹이다…… 하는 모든 문제가 바로 여기에 걸리는 겁니다. 소속감을 찾기 위해서. 소속의 확인을 위해서. 그런데 '내가 속한 그곳이 나의 삶의 의미를 찾아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부질없는 짓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되었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큰 가정에 한 식구가 되었다고 하는 것, 그것 외에 참된 소속은 없습니다.
애당초 세상에 날 때부터 시작해서 그의 은혜 가운데 살았고, 그의 은혜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의 거룩한 사역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 소속을, 본질적 소속을 분명히 하는 순간, 삶의 보람을 찾게 되는 것이올시다.
본문에 보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완전히 노예화 되어버린 그 백성을, 그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나님께서 구속하십니다. 그래서 큰 이적으로 구원해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에 광야에서 훈련을 시킵니다. 교육을 시킵니다. 가나안 족속, 가나안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New Orientation을 시키는 그런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계시하고, 말씀하시고, 교육하시고, 훈련하시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인도하십니다. 그에게 뭘 묻는 것이 아니에요. 주도적으로 인도하십니다. 인도하고,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설득을 하고 깨달을 때까지만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머리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자기가 경험한 것만큼 밖에는 깨달을 수가 없어요. 그런고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도하시고, 많은 사건에 부딪히게 하시고 '언젠가 알 것이다' 그런대요. 여러분, 우리가 자녀교육을 어떻게 합니까?
때로는 아이들을 설득을 시켜서 '이것이 좋으냐, 싫으냐? 어떡하면 이것이 좋은 것이다, 저것이 좋은 것이다' 가르쳐 주지만은 그게 통합니까? 어느 결정적인 시간에 가서는 "따라와." 그리고 저만큼 가서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내 나이 되면 알 것이다. 네가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면 내가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거 아닙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창조적으로 훈련하십니다. 이래서 창조적 훈련, 창조적 교육, 창조적 사랑을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신명기 32장 10절로 12절에 보면 모세의 마지막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 광야에서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주 절실한 함축성 있는 깊은 말씀을 듣게됩니다. 이제 그는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그렇게 이 백성을 인도했느니라."
아주 귀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독수리라는 것은 새 중에 왕입니다. 힘세지요 위엄있지요 자유롭지요 그리고 용맹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해할 자가 없습니다. 그가 날개를 쭉 펴고, 푸덕거리는 것도 아니고, 쭉 펴고 기류를 타고 하루종일 이렇게 하늘을 나는 것을 보면 정말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독수리입니다. 독수리는 이 지구상에 48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둥지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아주 벼랑, 높은 바위산 벼랑에다가 둥지를 틉니다. 그리고는 그 둥지의 직경이 무려 2.7m나 됩니다. 둥지를 들어보면 무게가 2톤이랍니다.
그런 엄청난 큰 둥지를 만들어놓고 거기서 새끼를 낳고 기릅니다. 이제 그가 먹이를 향해서 아주 급강하 할 때는 시속 180km로 달린대요. 여러분 보셨습니까? 전 시골서 자라면서 많이 봤어요. 봄에 병아리를 키우게 되면 마당에 닭들을 많이 키우는데 아 이 독수리가 와가지고 좌우간, 우리가 농담으로 그랬습니다.
저놈들이 십일조 가져간다고 그랬어요. 그저 얼마나 많이 잡아가는지, 빙빙 돌다가 그대로 그냥 내려 꽂아가지고, 딱 부르 쥐고 하늘로 올라가면 도리가 없는 겁니다 이거는요. 그저 먹이로 얼마를 줄 수밖에 없어요. 이게 독수리입니다.
자, 그런데 그는 90Km 반경 넓은 곳을 자기 영역으로 하고 그 안에서 왕같이, 왕노릇 하며 사는 거예요. 자, 그런데 문제는 이 독수리, 오늘 본문에는 새끼를 훈련하는 이야기 나옵니다. 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자유롭게 나는 법. 기류를 타고 하루종일이라도 날 수 있는 그 법을 가르치고, 또 강한 날개를 줍니다.
강한 날개가 거저 생깁니까? 이걸 알아야 합니다. 많은 시련 속에 얻어지는 거예요.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단련을 통하여 강한 날개를 줍니다.
또한 독수리로서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독수리로 독수리답게 사는 법, 사냥하는 법, 높은 곳에 집을 짓는 법, 모든 것을 일일이 전수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느냐고요? 오늘 본문에 뚜렷이 나타납니다. 어지럽히며 새끼가 얼만큼 컸을 때 떨어뜨립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떨어뜨리면 이 새끼가 풀렁풀렁풀렁풀렁 날면서 푸덕거리면서 '아이고∼나 죽는다' 그러죠. 독수리는 멀리서 지켜봅니다. 거리를 재고 시간을 재면서 지켜보다가 땅에 딱 닿기 직전에 급강하 해가지고 탁 받아서 날개 위에 올려놓고 다시 올라갑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떨어뜨립니다. 또 이렇게 합니다. 수 없이 반복해서 강한 날개를 만들어 줍니다. 잘 날 수 있는 독수리로 키워 가는 것이올시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기는 위기일 뿐입니다.
독수리에게는 그 위기를 통하여 훈련하는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새끼에게 고통을 가합니다. 가혹할 정도로 고통을 가합니다. 그 새끼를 막 밀어서 땅으로 떨어뜨려요. 그때 그 새끼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어미는 날 왜 이렇게 괴롭히나? 날 죽일 작정인가?'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손을 안 쓰면 손이 약해집니다. 발을 안 쓰면 발이 약해집니다.
눈을 안 쓰면 눈도 약해집니다. 머리를 안 쓰면 멍청해집니다. 결국은 힘이라는 것은 이렇게 강하게, 고통을 가하면서 얻어지는 것이에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요새 우리 가정에 아이들을 너무 과잉보호 해가지고 이게 바로 문제예요. 참 어느 때, 내가 책을 보면서 한참 웃었습니다. 신혼여행 간 아들이 신부한테 얻어맞고 엄마한테 전화 걸면서 "엄마……" 하고 운답니다.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전부 그대로 보호하고, 대신해주고, 대신해주다 보니까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이 모양이 되었거든요. 강하다는 것은 뭡니까? 홀로 서야되는 거고요 사건에 부딪혀야 되는 거고요 도전적으로 부딪히면서 배우는 거 아닙니까?
제가 늘 생각합니다만은 여러분,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요. 자전거 뒤에서 붙들고 있으면 자전거 배웁니까? 넘어지든 쓰러지든 무릎이 깨지든 간에 손을 놓아야지. 손을 놓고 밀어버려, 그냥. 그래야 자전거를 배우지. "야 너 무릎 깨진다, 목 부러지면 죽는다"
그러면 못배웠지요. 그러면 끝났지……. 안그렇습니까? 세상에 위험이 없는 게 어디있어요? 강하게 힘을 준다는 말은 내버린다는 말이에요. 제발 좀 버려두세요. 제발 좀 간섭하지 마세요.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요새 아버지 어머니들이 도대체 너무 간섭이 많고, 심지어는 나까지 괴롭혀요 전화 걸어가지고. "목사님, 우리 아들이, 우리 딸이 어떻게……." 내가 간단히 그래요. "전화 끊습니다. 그만두세요" 끝,
이래버리고 말아요. 하도 기가 막혀가지고. 아 왜 그렇게 자꾸 쓸데없는 간섭을 하는 거예요? 얘들이 뭐, 결혼생활이 어떻고. 저들끼리 좀 싸우라고 그러세요. 원래 1년 동안은 전쟁이거든요.
싸워가면서 정이 드는 거지, 맞아가면서 사는 거고. 뭘 그렇게 야단합니까? 안그래요? 맞으면서 정드는 거고 다 그런 거예요. 뭘 그렇게 야단하고 벌벌 떨고… 안 죽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왜 이렇게들 쓸데없는 간섭을 합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는데 독수리가 새끼를 가르치는 것처럼 고통을 가합니다. 가혹하게, 그리고 지켜봅니다. 멀리서 지켜봅니다. 시간을 재고, 거리를 재가면서 빙빙 돌면서 지켜보다가, 그런가 하면 절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급강하 해 가지고 날개에 얹어가지고 올라갑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는 시골서 자란 덕에 이걸 많이 보았거든요. 실감이 납니다만은 여러분, 상상을 해보세요. 이것이 사랑이에요.
그는 주도적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그 새끼가 무엇을 원하는 가를 원치 않아요. 다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의 길이 아니고, 어미의 길로 his way, his initiative, 이것이 그를 주도하는 것이에요.
그의 길로 가르칩니다. 절대 안일하게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평안하게 하지 않습니다. 능력과 지혜와 사랑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훈련을 통해서 역경과 부딪히면서 견뎌나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을 여러분이 아십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소망을 이룬다. 그런고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확실히 강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확실히 지혜가 있습니다.
그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로 며칠 전에도 이스라엘 대사하고 점심을 같이 하는데 "당신들이 이렇게 강하고 참 지혜로운데 어디서 왔느냐?" 그러니까 "Expectation and hope" 소망, 소망이다. 그럼 소망은 어디서 왔느냐?
많은 고통에서, 많은 시련에서, 남보다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강해진다는 거에요. 그도 걱정을 하더만요. "우리 중학교 고등학교 아이들이 멍청해요." 그거 좀 가르치는 방법 없냐고. 우리도 고민이라고 제가 그랬어요. 왜요? 겪은 바가 없거든요. 어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제가 옛날에 혼자 나와서 고학을 하고 지낼 때, 배고플 때가 많았어요. 어쩌다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든가 하게 되면 그 밥을 이렇게 퍼주는데 지금도 이렇게 생각이 나요. 여러 그릇 중에 제일 큰 그릇, 조금이라도 밥을 더 넣은 것, 그것이 내게로 왔으면 좋겠는데 그 달라고는 못하고, 기다리다가 그것이 내 차례로 오면 '오늘은 좋은 날이다' 그랬어요.
여러분, 홀로 서고 사건에 부딪혀서 이것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나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지혜요 나로 바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이스라엘이 강한 것은 많은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고 이스라엘이 강한 것은 남보다 더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그 지혜를 얻은 것이에요.
여러분, 한국, 우리 인구가 얼마입니까? 이 좁은 땅에……. 우리가 강합니다. 각 나라에 가서도 제법 다 잘 살아요. 어디서 왔느냐고요? 간단합니다.
6·25를 겪었거든요. 6·25를 겪었어요. 그 전쟁이 우리로 하여금 이만큼 강인하고, 이만큼 지혜롭고, 오늘 같은 IMF같은 큰 사건도 넉넉히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체질이 된 것이죠. 하나님은 이민족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말합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잘 지키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리라." 제사장은 바로 영적 대표자요 지도자요 치유자요 구속하는 자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든 민족을 대표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카프만 부인의 '광야의 샘'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그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누에고치를 들여다보니까 누에고치의 구멍이 직경 한 2mm 정도밖에 안되는 구멍이 빠끔 뚫립니다. 구멍이 뚫린다고요.
그래 보면은 거기서 그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서 나오려고 합니다. 몸부림을 칩니다. 흔들흔들 합니다. 그거 애쓰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천신만고를 하는 거예요. 애쓰고, 그 좁은 구멍으로 나오려고. 그래서 카프만 부인이 '내가 긍휼을 베풀어야지'하면서 가위로 잘라서 구멍을 넓혀줬다는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그렇게 편안하게 나온 나비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더랍니다. 그는 가위로 자르면서 그랬대요.
"내가 하나님보다 자비가 더 많다" 그랬대요. 그랬더니 그건 죽었어요. 그 좁은 구멍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는 동안에 비로소 그 영양이 온 날개로 뻗치는 거예요. 온 몸에 근육이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강한 마찰과 함께 전체 체력이 강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살아남는 건데 제가 뭘 안다고 구멍을 넓히고 편하게 나오게 했더니 '그만 내가 나비 하나를 죽여버렸다' 하고 뉘우쳤다는 거 아닙니까?
때때로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까? 왜 이러해야 되나? 믿으세요.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내게 향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사랑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사건마다 이 사건들을 통하여 더 높은 길로, 더 바른 길로 더 강한 세계로 인도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믿고 순종하고 따르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고 우둔한 저희들,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 시련을 우리는 시험으로 받고 때로는 저주처럼 생각하고 괴로워 한 때도 많았습니다만은 우리의 부족함과 허물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선하신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주께서 베푸신 긍휼과 사랑, 그리고 그 창조적 능력을 깊이 생각하며 믿고 신뢰하고,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해서 주의 약속하신 바 대로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고, 이 어려운 세대에 큰 역사를 감당하는 이 민족 이 나라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독수리 날개 같은 은혜 /출19:1-6/ 곽선희 목사
2014-11-18 14:03:37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내용가운데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 간으로서 살아가는데는 절대 필요한 세가지가 있어야 한 다고 합니다. 인간은 동물 이 아닙니다. 동물은 음식 이 있으면 되고 그리고 누울 장소가 있으면 됩니다. 동물 학적 욕구 그런 생리학적 욕 구가 아니고 인간이기에 인 간만이 가지는 욕구가 있고 이에 필요한 요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인간존재로 존재하기 위해서 세가지가 있어야 하 는데 그 첫째가 뭐냐하면은 중요성이라고 하는 것입니 다. need of significance 의미가 있고 삶에 뜻이 있어 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 시 말하면 자기 존재의 의미 를 느낄수 있어야 하고 자기 존재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 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 랑을 먹고 살고 보람을 먹고 산다 뭐 그런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 렸을때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삽니다. 받아야만 삽니다. 그래 부모님의 사 랑을 독차지하고 있다가 동 생이 태어나면 여기서 사랑 을 빼앗기게 될때에 그때에 아이들이 그걸 견디지 못해 서 뭐 병도 나고 혹은 이상 성격이 나타나기도 하고 그 럽니다. 아주 참을수가 없 는 것입니다.
뭐 우주가 무 너지는것 같은 그런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말 이야 하든 못하든 그는 내가 받던 사랑을 지금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렸 을 때는 무조건 사랑을 받아 야 살고 그 다음에는 사랑을 하면서 삽니다. 사랑을 하 면서 존재의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제가 북녘땅 평양에 갔을 때 그들이 제 어머니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제 어머니가 마흔한살에 저 를 낳고 귀하게 키웠는데 저 를 남쪽으로 보내놓고 어머 니는 오직 아들을 위해서 기 도하는 것으로 생을 보냈습 니다. 예배당은 불타 없어 졌는데 그 불타 없어진 빈터 에 가서 거기에 가마니데기 를 쓰고 엎드려서 밤을 지새 우면서 어머니는 아들을 위 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결 과 호적상으로 나타난대로 그들이 말씀해 주는데 어머 니가 94세까지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본래가 좀 몸이 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94세까지 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면 어머니를 뵐뻔 했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들으면서 그날 저는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무슨 힘으로 살 수 있었을까? 생 각해 보세요. 음식이 좋습 니까? 여건이 좋습니까? 전혀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 이지만은 오로지 아들을 생 각하고 아들을 사랑하고 아 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 으로 살때 그는 94세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 는 힘입니다.
독신과 결혼한 여자를 생각 해 보십시다. 누가 오래 살 것 같습니까? 누가 건강할 것 같습니까? 아, 우리 생 각에야 아이들한테도 시달리 지 않고 남편에게도 시달리 지 않고 오직 자유롭게 훨훨 자기 마음대로 사는 독신여 자가 건강할 것 같지 않아 요.
그런데 통계학적으로 그렇 지 않습니다. 독신여자가 병 이 많고 통계학적으로 단명 합니다. 카톨릭 수녀의 수 명이 40입니다. 생각해 보세 요. 그러니까 밉건 곱건 미 워할 사람이 있든 사랑할 사 람이 있든 뭐 하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 남을 수 있는거예요. 사랑하며 살 고 사랑 받으며 살고 여기서 삶의 보람을 만들어 내는 것 이요.
심리학자 웅비에스마의 유 명한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안다는 것 자체가 다 른 사람들로부터 알려진 바 에 의해서 자기를 아는 거예 요. 그래서 사람마다 자 여 러분 여기 오실때도 하다못 해 한번이라도 거울을 보고 얼굴을 찍어 바르고 왔어요.
그건 뭘 의미하는 거예요.
요새들은 보니까 남자들도 무슨 향수를 그렇게 많이 저 는 아주 향수를 알레르기가 있어서 싫어하거든요 아 딱 옆에 앉으면 그렇게 냄새가 지독해요. 누구 좋으라고 그 짓을 하는거요. 다 알게 모 르게 무엇인가 다른사람에게 서부터 좋은 인상을 받고저 하는거요. 돈 버는것도 바 로 그런거구요. 공부하는것 도 자기 존재의 가치를 높이 자는 거죠. 알거나 모르거 나 이것이 바로 significance 요. 그것이 절대 필요한 것 이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뭡 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위 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값을 지불했어요. 그럼으로 써 내 값은 얼마냐? 예수께 서 나를 위하여 죽으실 만큼 의 값이예요. 그 지불된 대 가에 내 삶의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예요. 그 의미를 알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 인 입니다.
또한 두번째는 need of security입니다. 안정성에 필 요를 합니다. 그러니까 의식 주의 분야에서 안정,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건 동물적인 것이고 정신적으로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 합니다. 모두가 평안한 마 음을 원합니다.
그래서 화 목을 찾아 헤맵니다. 화목 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 다. 원수 맺고는 살수 없는 게 인간이요. 뼈가 썩어요. 병걸릴 수밖에 없어요. 어 느때라도 마음을 완전히 풀 고 화평의 사람이 되어야 peace maker가 되어야만 살 아 남을 수가 있습니다.
남을 죽일려다가 자기가 먼저 죽어요. 이걸 잊지 말 아야 합니다. 사람은 이래서 평안을 위하고 샬롬입니다. 평안속에서 살게 되어 있어 요. 그걸 추구하고 그리고 필요해요. 세번째는 need of belonging 입니다. 소속관리올시다.
이 소속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끈끈한 정을 가지고 가정이 라고 하는 연대속에 살고 친 구와 더불어 직장과 더불어 나라와 더불어 민족과 더불 어... 이게 뭡니까? 이렇게 서로 소속되고 끈을 느껴야 되는 것이예요. 그래서 고독 은 죕니다. 절대로 고독할 수 없습니다. 고독을 느끼 는 순간 그 존재는 벌써 떨 어지고 있고 타락되고 있는 것이예요.
자, 우리 모두가 하나다. 넓은 가정을 느끼고 모든 넓 은 사랑을 느끼고 있을 때 그 존재가 인간의 존재가 건 강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시기, 질투, 증오 그것은 결코 그 사람을 사람되지 못하게 합 니다.
사랑과 화평 사랑하 고 사랑 받는 거기서만 육체 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 로 건강할 수 있단 말입니 다. 이런 존재 이런 사람으 로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으 로 키워져야 합니다. 여기 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 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 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 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동안 노예생활을 했습 니다. 그 430년이라는 수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430살 나이 먹 은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 까 노예중에 노예중에 태어 난 것이에요.
수십대를 지 나가서 그러니까 노예로 태 어났고 노예로 성장했고 노 예로 살았을 뿐이요. 노예 생활이 그들에게서는 아주 체질화 된것이예요. 깊이 체질화 되었어요. 문화화 되어 버렸는데 이같은 불쌍 한 사람을 주께서 구원하셨 습니다. 이건 기적이요. 이 자체가 큰 기적으로 애굽에 서 구출하시고 시내 광야에 갖다 놓은 다음에 이제 하나 님께서 그들을 훈련시키십니 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시키는 말씀중에 그 총 체적 말씀이 오늘 본문에 있 습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 에서 구원해 냈느니라. 너 희는 애굽에서 지금 여기에 왔느니라. 이제 나와 너와 의 관계는 이러하다. 하나 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독수 리 날개로 너희를 보호하실 것이다. 독수리 날개라고 하는 상징적 용어로 그 하나 님과 백성과의 관계를 이렇 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11절에 가 서 보면은 모세가 사십년동 안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 야에서 인도합니다. 지도자 로 살고 나이 많아서 세상을 떠나게 될때 그 세상 떠나기 직전에 사십년의 생을 돌아 보면서도 똑같은 말을 합니 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복음 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 끼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 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엊는것 같 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세요. 바로 이것입니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보호하셨다. 이렇게 한마디로 말씀하십니다. 그 깊은 뜻이 있습니다.
독수리가 뭐냐? 독수리는 새중에 왕입니다. 힘과 위 엄의 상징이요, 자유와 용맹 의 상징입니다. 높이 날아 서 하루종일이라도 날개를 펴고 지류를 타고 날아 가는 걸 보면 독수리 장관입니다. 천하무적입니다. 그에게 당 할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독수리입니다. 그의 기상을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해서 독수리를 자기의 표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독수리가 이 지구상에는 48종이 있다 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둥 지를 틀때도 집을 지울때도 말입니다.
누가 침해할 수 있는데다 가 하지를 않고 깊은 산 높 은 벽 바위 위 그 벼랑 위에 다가 떡 둥지를 트는데 그 둥지가 무려 직경이 2.7m 무려 3m 나 가까운 그런 큰 둥지를 틀고 그 둥지를 털어 보면은 둥지 하나가 무려 2 톤 나가는게 있다고 그래요.
그렇게 큰 둥지를 만든 다 음에 그 속에서 삽니다. 새 끼를 낳고 말입니다. 그리 고 그가 먹이를 향해서 쏜살 같이 머리를 챌려고 내려갈 때에는 시속 180k 가 나간 다고 그래요. 그런가 하면 그는 한번 날때마다 직경 90k 를 반경으로 해서 멀리 날아다니면서 먹이를 구하고 이렇게 배회하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이게 독수리 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독수리와 새끼의 문제입 니다. 그가 그 둥지에서 새 끼를 낳아서 이걸 깨워가지 고 큰 다음에 어느정도 먹이 를 줘가지고 크고 날때쯤 되 면 말입니다 오늘 성경 말 씀대로 그는 새끼를 그 벼랑 에서 떨어뜨려요. 발로 밀 어서. 떨어뜨리면 새끼가 그 높은데에서 떨어지면서 죽는다고 퍼둥거립니다.
퍼 득퍼득... 거릴꺼 아니겠어요. 아, 떨어져 죽는다 원망도 하겠지요. 아이구 너무 가 혹하다. 나를 어쩌라고 때 려 밀고 죽일려나 하겠지요 만 퍼둥거리고 있을때에 땅 에 닿기 직전에 멀리서 지켜 보다가 획 내려와서 등에 차 고 올라갑니다. 갔다가 둥 지에다가 놨다가 조금 쉬어 가지고 또 합니다.
하루종일 며칠동안 이 짓 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독수 리로 하여금 그 새끼로 하여 금 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독수리가 나는 법을 가르치 고 또 날개를 강하게 만듭니 다. 그리고 독수리로서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사 는게 독수리다. 독수리로 태 어났다고 독수리가 아니다. 훈련을 시켜서 건강한 위상 의 독수리를 만들어 낸다 그 말이요.
여기서 생각해야 됩니다. 그에게 새끼에게 고통을 가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기 때 문이예요. 보이는 것 가지 고 안돼요. 우리로 말하면 말로만 안돼요. 모범을 보 이는 것 가지고 안돼요. 날 면서 나를 따르며 날아라. 이것가지고는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벼랑에서 떨어뜨려 요. 직접 몸으로 경험하도 록 사건에 부딪히도록... 그 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많은 공부 를 했어요. 대학이 얼마나 많습니다. 뭐 경제학 정치학 뭐 도덕 뭐니 그 많은 날 배 우고 가르친다고 했지만 하 나도 제대로 된게 없어요. 이제와서 딱 부딪히고 나니 까 이제 조금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아요.
말로는 안돼요. 도덕강연으로 될 수 있는게 아니예요. 이래서 벼랑에서 떨어뜨리듯이 말이예요. 아 주 이젠 죽었다 이젠 끝났다 할만큼 이렇게 되더라 그말 이요. 그러나 어미 독수리 는 멀리서 지켜봅니다. 퍼 득퍼득 날면서 그저 퍼둥거 리면서 떨어지는 것을 다 지 켜봅니다. 어느정도의 힘이 있는지 어느정도에 날수 있 는 능력이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켜보다 가 떨어지기 직전에 그는 내 려와서 그를 등에 엎고 올라 갑니다. 절대 버려두지 않 습니다. 보호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지켜보고 보호하고 있고 때로는 행동으로 직접 역사해서 보호합니다. 그리 고 독수리의 수준까지 필요 한 모든 능력을 그에게 공급 해 주는 것입니다. 독수리 가 가져야 할 지혜, 독수리 가 가져야 할 능력, 그 강함, 이것을 철저하게 훈련시켜 나가더란 말입니다.
카프만 무인에 「광야에 샘」이라고 하는 서적이 있 는데 그 책에 나오는 얘깁니 다. 어떤 날 그가 아주 주 의깊에 누에고치에서 그 번 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누 에고치를 보면 거기서 바늘 구멍만한게 뚤립니다. 보셨 는지 모르지만 시골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데 바늘구멍 만한 동그란 구멍이 뚤리고 거기에서 나비가 나옵니다.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되어 나올때 좌우간 하루종 일 걸립니다. 몇시간 걸려 서 조금씩 조금씩 나오면서 고생을 합니다. 날개죽지 하나가 나오고 퍼둥거리다가 또 한쪽이 나오고 퍼둥거리 다가 또 몸이 안나와가지고 퍼둥거리고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하루종일 그짓을 해 가지고 겨우 나옵니다. 나 와 가지고 몇 바퀴 돌다가 푸둥하고 날아 올라갑니다. 이걸 보았어요. 이걸 지켜 보다가 아휴 그렇게 고생스 럽게 나오는구나. 그래 가 지고 그 구멍이 너무 적다고 생각을 해서 가위로다가 구 멍을 크게 뚫어 줬어요. 뚫 어 주니까 그 나비가 쑥 나 오잖아요. 그 나오는걸 보 면서 이 카프만 부인이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사랑이 더 많다. 내가 더 자비가 크다. 저 고생하지 않도록 내가 나오게 해 주었으니 내 가 더 훌륭하다. 하고 혼자 서 빙그레 웃었더랍니다. 그리고 지켜보았더니 그렇게 꺼내 놓은 나비는 날지를 못 합니다. 빙빙빙빙 돌다가 그대로 죽어 버리더랍니다. 결국은 자기가 자비를 베풀 어서 번데기가 나비로 변하 는 시간에 그를 편하게 해준 줄 알았더니 자기가 나비를 죽인것 밖에 안되더라는 거 예요.
왜그럴까? 연구를 해 보 니까 그 나비가 작은 구멍으 로 나오면서 몸부림을 칠때 그 몸에 있던 번데기 몸에 있던 영양이 날개로 건너 갑 니다. 영양가가 날개로 건 너가면서 날개가 힘을 얻습 니다. 그 좁은 공간으로 나 오느라고 몸부림을 치는 가 운데 온 몸이 운동을 해서 힘을 얻어 가지고 그렇게 나 와야 그 다음에 날아 갈수가 있더라는 것이예요. 그래서 내가 어리석은 짓 감상적으 로 해가지고 그저 나비만 몇 마리 죽였구나 하고 회개했 다고 합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에게는 가혹하리만큼 깜짝놀랄만큼 아이구 이제는 죽는다 할만 큼 어려운 일들이 주어집니 다. 그러나 여러분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 나님의 지혜의 일환입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 습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교과과정이 있습니다.
God's curriculum, God's dispensation 하나님의 훈련 과정에 있습니다. 이것을 통 해 가르칩니다. 이것을 통해 훈련합니다. 강인하게 합니 다. 강하게 합니다. 평안한 가운데 이런사람 이런인격은 절대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시는대로 이스라엘 민족 대단한 민족이지요.
우리는 지금 뭐 일류대학 떠들어봐야 아직도 노벨상 하나도 받은 사람이 없어요. 대만도 받았고 일본도 받았 는데 한국은 이게 뭡니까? 일류대학 물 다 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자존심도 없습니까? 그래 누가 말합 니다. 일류대학 말할려거든 노벨상 몇 받은 다음에 얘기 하라구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 강한 이스라엘은 조금만 민족 500만밖에 안되지만은 노벨상 받는 사람 가운데 민 족적으로 보면은 60%입니 다. 이제 할말 있습니까?
오늘도 우리가 이 경제문 제 있지만은 이 경제를 흔드 는 자들이 바로입니다. 유 대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들이 이렇게 강하게 된 이유 가 뭐냐? 남보다 특별히 고 생을 많이 했잖아요. 참 이 스라엘 민족이야말로 지독하 게 뭐 지금도 그저 그게 뭐 사는겁니까? 언제 총소리가 날른지 몰라요. 그래도 그 고난속에서 강한, 강한 민족 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기적이라는것이 사람을 편 하게 하는것이 기적이 아니 에요.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기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안 일한 생활을 하도록 번영, 자유를 누리도록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 기적은 사람을 만드는 거 요.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 는 거예요. 거기에 위대함 이 있어요. 우리의 방법이 아니고 그의 방법이에요.
my way 가 아닙니다. his way 거기에 있습니다. 거 기에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 고,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마음을 뜨겁게 하는 부 분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명령을 따르면 제사장 나라 가 되리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제사장 나라가 누 굽니까? 하나님과 백성 사 이에 있는 중간에 있는 존재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전적으로 하나 님을 섬겨서 하나님의 말씀 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 워서 백성에게 가르치고 백 성을 치유하는 사람들이요.
엄격히 말하면 다른사람 다 타락돼도 이 제사장들만 하나님 앞에 굳게 서면은 그 나라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 다. 이것이 제사장이요. 이 스라엘의 역사에 보면 레위 사람들 제사장들 통해 이루 어지는 역사를 많이 읽을 수 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리라. 너희를 먼저 선택할 것이다. 내가 너희 를 통해서 만백성을 다스릴 것이니라. 너희의 섬김을 받을 것이니라. 너희는 대 표적 백성이 될 것이니라. 치유자로 내가 너희를 쓸 것 이니라. 말씀하십니다.
독립운동에 참 귀한 선구 자였고 수고 많이 하신 신앙 인인 도산 안창호 선생님, 이 안창호 선생님이 임종하 게 될때 목사님이 옆에 서서 기도하고 장로님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목사 님의 손을 딱 잡고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순간 그는 나 즈막하게 들릴까 말까 한 목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더라고 합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하.. 그리고 운명하셨습니 다. 하.. 다음에 무슨 말씀 을 하고 있었을까? 하나님 이 우리 백성을 구원하실 것 입니다. 꼭 그말을 마지막 으로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 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낙 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교과과정이 있습니다. 여기 에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새끼 독 수리같은 우리가 이제 우리 의 방법을 다 포기하고 이제 누구도 원망하지 맙시다.
그리고 그의 길 그의 섭리 그의 지혜 그의 인도하심에 그대로 의지하십시다. 사랑 하며 순종하고 감사함으로 순종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는 분명히 당신이 원하는 제 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되게 하실 것입니다.
시내 광야에서 /출19:1-6/ 이동원 목사
2014-11-28 16:00:22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 리챠드 바크의 <영혼의 동반자>중에서 “무언의 약속”이라는 시가 인용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우리의 무언의 약속 때문이었다./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몹시 지쳤거나 아프거나 다쳤을 때나/ 또는 심한 충격을 받았을 때는 다른 한 사람이/그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고도원의 멘트가 실려 있었습니다.
“좋은 사이는/ 무언의 약속으로 살아갑니다./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고/ 말없이 상대의 눈물을 닦아 줍니다./ 좋을 때, 잘 나갈 때도 무언의 약속은 힘을 줍니다./그러나 어렵고 힘들 때, 아프고 지쳤을 때/더 빛이 나고 더욱 큰 힘을 발휘 합니다.”
우리는 아무와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네 삶의 장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사람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약속은 희망이 되고 기대가 되어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어 주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행진해 가는 과정에서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과 맺게 된 소위 ‘시내산 언약’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러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을 떠난지 3개월이 지나가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 시내 반도에 들어와 드디어 시내 산이 위치한 시내 광야에 도착한 것입니다.(지도 참조)
2절에 보면 시내 광야 산 앞에 장막을 쳤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산이 ‘시내 산’입니다. 여러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만, 아직도 가장 유력한 전승에 의하면 이 산의 위치는 성 캐터린 수도원이 위치한 곳에 있는 성지 순례 객들의 발걸음이 머무는 지금의 ‘제벨 무사’, 모세의 산이라고 불리워지는 그 곳입니다.
사실 여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과의 약속의 실현이었습니다. 출3:12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예배하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드디어 그 산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마침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인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새로운 또 하나의 중요한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바라보며 자신의 백성들이 그들의 행군을 완주해 주실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한 약속의 책(구/신약)을 주시며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의 순례의 행진을 완수하실 것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기억하고 있어야 할 하나님의 기대는 무엇일까요?
1. 우리를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사용하실 기대입니다.
시내산 언약의 내용을 5-6절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정확하게 말하면 3가지의 약속이 있습니다.
첫째, 내 소유(보물, 왕의 보물, segulla)가 되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제사장 나라가 되겠다는 것이고, 셋째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핵심은 제사장 나라입니다. 제사장이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중보자 곧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내산 언약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선택된 민족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는 민족, 그리고 민족과 민족사이에서 더 나아가 모든 민족들과 하나님을 맺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는 민족이 되리라는 기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한 민족을 향한 기대로 나타나 있습니다만, 신약에서는 이스라엘 대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교회가 바로 이런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기대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우리가 ‘만인 제사장직’ 혹은 ‘전신자 제사장직’(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라고 부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으로 살던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된 것만 해도 감사한데 다른 이웃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일에 특별히 주님 모르는 백성들을 주께로 인도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
열방을 복음화하는 일에 여러분과 저를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히5:4을 보실까요?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제사장 직분은 존귀한 직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이 존귀한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분들을 보셨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과 비교될수 없는 한 지역이 아닌 세상 모든 열방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의 명예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제사장, 하나님의 특별한 보물 ‘세굴라’이십니다. 감동하십니까? 감격하십니까?
2. 우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함께하실 기대입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존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훈련의 시간을 잘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자기의 백성들을 쓰시기 위해서 훈련을 하십니다. 때로 훈련은 아프고 고통스러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훈련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훈련을 두려워 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이 훈련을 받는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 본문의 약속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4절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여기 시내 광야까지 오는 동안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나르듯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챤 환타지 작가인 톨키엔의 작품(반지의 제왕, 호빗)에 보면 주인공이 결정적인 위험에 처할 때마다 독수리가 등장합니다. “독수리다! 독수리가 온다!” 그리고 주인공은 구원을 받고 보호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부모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어떻게 훈련하시는지 알고 계시지요? 새끼 독수리가 성년이 되면 아빠 엄마 독수리는 벼랑 모서리에 지어진 보금자리를 파헤쳐 새끼를 밀어낸 다음 벼랑 바깥으로 인도합니다.
두려움에 잠긴 그를 창공으로 날려 보내면서 “날아라. 넌 창공을 날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독수리다!”고 외칩니다. 한동안 필사의 날개 짓을 하며 나르던 새끼 독수리가 힘에 부쳐 날개의 힘을 잃고 공포의 추락이 시작되면 재빨리 부모 독수리는 하강을 하며 새끼 독수리 아래 내려가 그 넓은 날개를 펴며 말합니다.
“걱정 말아. 아빠 엄마가 함께 하고 있어. 잘 했어. 다음에 넌 더 높이 나를 수 있어” 이 과정이 반복되며 마침내 새끼 독수리는 부모 독수리의 도움 없이도 혼자 나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부모 독수리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넌 이제 혼자 나를 수 있지만 그러나 이 부모의 도움이 필요할 땐 넌 큰 소리로 우릴 불러. 우린 저 높은 곳에서 너와 함께 하며 너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말이야” 다시 이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여는지--[잊지 말아라]” 신31:11-12을 읽어 보십시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할렐루야! 그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이 광야 길을 두려움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영광스런 제사장으로 쓰시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살아갈 기대입니다.
본문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제사장 공동체로 그리고 명예로운 제사장으로 쓰임받기 위해 꼭 한 가지 조건을 첨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내산 언약을 ‘조건부 언약’(conditional covenant, if-covenant)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언약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쓰임받기 위해 필요한 언약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본질입니다. 이제 잠시후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 율법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게 됩니다.
이 율법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요구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체험하고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이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어 제사장 나라로 쓰임받기 위해 필요한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자, 5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실까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if you obey me) ‘내 언약을 잘 지키면’(if you keep my covenant) 너희는 모든 민족중에서 내 소유(보물)가 되겠고”
자, 여러분, 하나님의 보물스런 존재로 쓰임 받다가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게 서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쓰레기처럼 살다가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서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과 저의 몫입니다.
제사장 나라로 보물같은 존재로 쓰임 받는 인생을 사모하신다면 우리는 이제라도 주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율법을 지키며 살아갈 이유입니다. 어둠의 인생을 살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악한 귀신이 7개나 그 안에 있어 그녀의 인생을 쓰레기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녀가 주님을 만나고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 시작하자마자 그녀는 교회 역사상 가장 거룩한 여성 지도자중 한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쓰레기 마리아가 보물 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어둠의 여인이 빛의 여인이 된 것입니다. 날마다 죽지 못해 살던 여인이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악녀 마리아가 성녀 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마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로마에 고용된 세리였습니다. 민족을 등치고 살던 민족 반역자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여 무거운 세금을 부과함으로 어려운 이웃들이 더 어렵게 살도록 만든 돈의 노예였습니다.
그가 세관에서 들고 장부를 기입해 내려가던 펜은 부정과 거짓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제자가 된 후 그는 파티를 열어 과거와의 결별을 선언합니다. 그는 이제 함께 하던 동료 세리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늘 세금 장부만을 들여다보던 그가 구약성경을 읽어가며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구약성경은 약속의 책이었습니다
. 그가 만난 예수는 정녕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 구세주였던 것입니다. 그는 로마 정부와 유대 세관청을 속이기 위해 언제나 들고 쓰던 동일한 펜을 들어 이제는 마태의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자신이 기록한 마태복음서의 마지막 지상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까지 나아갔다고 교회의 전승은 증거합니다. 쓰레기 인생이 보물인생이 된 것입니다.
민족 반역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다시 광야 길로 나아가시겠습니까? 약속의 땅을 향하여 말입니다.
하나님 날개 위에 업혀 사는 성도/출19:4-6
2011-04-11 14:58:04
“성령 충만 하십시오! 신앙의 길을 잘 달리시길 바랍니다. 결코 물러서지 말고, 이 번 한 주간도 하늘의 큰 면류관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래 전에 스위스의 어느 날 밤, 알프스 산을 오르려고 하는 등산객들이 한 산장호텔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등반의 어려움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번 등산은 바람과 눈이 많이 내려서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날씨가 좋아지면 산에 오릅시다.’라고 어떤 한 사람이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제안을 들은 다른 한 사람이 하는 말이 ‘저 정도의 산은 문제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내일 아침 일찍이 혼자서라도 올라가려고 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먼저 제안을 한 사람이 ‘안 됩니다.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저 산을 오르려면 꼭 안내자를 동행하고 올라가야만 합니다.’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막무가내로 ‘나는 안내자가 필요 없습니다. 저런 산쯤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라고 우기다가 결국 결론을 맺지 못하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함께 잠을 잤던 사람들이 깨어나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그 산을 혼자서 정복할 수 있다고 우기던 사람이 이미 산으로 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일기가 나쁘니 곧 되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하며 기다렸으나, 하루가 지나도록 그 사람은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걱정이 되어 더 이상 그대로 기다릴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수색대에 신고를 하고, 그들과 함께 그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수색대가 산 중턱에 이르러 실력 있는 산악인들이 자기 이름표를 매달아 두는 말뚝을 보니 ‘나는 안내자가 없이도 할 수 있다.’라고 글이 적혀있는 하얀 천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색대는 그가 그 곳까지 왔었음을 확인하고,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보니, 낭떠러지에 한 남자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그 시체는 바로 안내자 없이도 혼자서 등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들어가기 전에 비록 예화로 말씀을 드리지만, 이 내용 속에는 오늘날 우리 믿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아주 적절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듯이 우리 믿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혼자서는 결코 험난한 이 육신의 세상을 올바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시내 산에 당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통의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는 과정 중에 하셨던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능력으로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사랑을 베푸시어, 그들을 건져 내셨음을 은유적으로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지켜야 할 바를 지시하신 내용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잘 지키면,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됨으로서 제사장의 나라가 되며,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임을 고하라고 하신 말씀이셨습니다.
이와 같이 전지전능 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대로 행하며 순종하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넘치는 사랑과 능력을 한없이 부어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구체적으로 나타나셔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의 세상 및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으로 우리 모두의 세미한 것까지도 절대로 감출 수가 없으며, 예전에나 지금이나 절대적이고 포괄적이며 동일하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이 추하고, 더러운 육신의 세상에서 고통과 환란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신속하게, 강력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도 오늘 주신 이 말씀에 힘입어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들의 인간적인 삶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내려놓고 의지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똑 바로서서 간구하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원하시는지를 깨달아 우리 모두의 심령 속에 새겨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속하게 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이사야서 40장 27절을 찾아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아멘!
하지만 문제는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수많은 성도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간구함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지 않음에 그동안의 믿음을 쉽게 포기하거나, 낙심하는 분들이 우리들 주변에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많은 성도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면서 온전한 믿음에 바로서서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신속하게 임하신다.’라고 말하면, 간혹 어떤 성도 분들은 반신반의하며 의심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40장 3절을 통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었으나 그 말씀대로 결과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직도 우리들 주변에는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임하신다.’라는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받아들이는 분들이 계셔서 말씀을 통하여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인 즉은,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임하신다.’라고 함은 저와 여러분들이 고통과 환란 중에서 부르짖으면, 우리들이 원하고 바라는 시간에 즉각 이루어 주신다. 라는 뜻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저 같은 경우에는 무엇을 생각만 해도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아시고 즉각 이루어 주시는 경우도 수없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온전한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은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해석을 못해서인지, 그렇잖으면 알면서도 모르는 채하는지는 몰라도 이러한 진리의 말씀을 다른 뜻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원칙은 뒤로한 채, 설교를 할 때도, 전도를 할 때도, 무조건 하나님만 믿으면, 매사에 잘 먹고 잘 살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곧 해결함을 받는다고 장담들을 합니다.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왜곡된 성경지식에 속아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실망을 하고서 하나님을 떠나 세상 속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또한, 어떤 성도들은 믿음의 기초가 부실하여 기복적인 신앙생활에 얽매여 어려운 환경과 조건을 만나면, 이를 감당치 못하고 흔들리는 믿음 속에 살아가는 형식적인 성도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은 구원을 통한 온전한 믿음위에 바로서야 비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보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진리의 말씀을 먼저 깨달아 행하면서 상대에게 그 말씀의 진리를 올바로 가르치고 제시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의 그러한 믿음을 먼저 보시고 건져 주어야 할 적기라고 생각되시는 때, 즉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우리 믿음의 성도들에게 가장 알맞은 시간이 되면, 주저하지 않으시고 놀랄 만큼 빠르게 역사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이러한 온전한 믿음으로 준비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상황에 따라서 ‘이후’가 아닌, ‘지금 당장’에라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나의 간구가 내게서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시기가 ‘지금’이 아닌, ‘이후’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나 자신의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마음은 가능하면, ‘지금’이라도 당장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간구하고 바라는 모든 것들을 이루어 주시고, 응답해 주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5절에 보면,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라며, 다윗이 하나님의 자애로운 사랑을 노래로 표현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인 5절에 보면, “너희가 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조건부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소유’란 단순히 가지고 있는 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특별히 관리하는 귀중품으로서, 외부로부터 그 어떠한 상해도 받지 않도록 보관되어 있는 ‘보물’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인 4절에서는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핵심은 ‘보았느니라!’의 히브리어로 ‘라아(ahl)’라고 하는데, 이는 시각을 통하여 보는 정도가 아닌, 실제로 체험을 통하여 이미 알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내’가 되면,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보배’가 되고, 보배 된 ‘내’가 되면, 하나님께선 ‘나’를 위하여 신속하게 움직이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보물인 우리들을 잃어버리기 전에, 아니! 상실하기 전에 미리미리 아시고 옮겨 놓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문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날개는 하시라도 급박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고난과 환란에서 건져 주시기 위하여 언제나 어느 때나 항상 우리 곁에 펼쳐 놓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상황에 처할 때일수록 당신의 날개위에 업히길 기다리고 계심을 믿으시고, 항상 온전한 믿음으로 하루라도 빨리 신속하게 하나님 등에 업혀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게 붙어있기를 원하십니다.
어미 독수리의 날개에 업힌 독수리 새끼들은 지기들의 어미가 하늘높이 날아도, 결코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어미의 날개는 강력한 힘을 지닌 자기새끼들의 보호처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은 노아의 방주는 40주야간 엄청난 비가 쏟아져 내렸으며, 그 물이 땅 위에 150일 동안 온 땅에 창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곳도 허술함 없이 완전무결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도 그 어떠한 고통과 환란 중에 있을지라도 완전무결 하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끝까지 인내함으로 모두 다 맡기시고, 기다려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께만 온전히 의지하고, 잠잠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은 ‘내 자신’이 연약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란 사실을 진실한 믿음으로 시인하고, 매사에 ‘나’라는 자신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그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주시려고, 환경과 조건을 통하여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소유된 자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결코 시시한 임시 미봉책을 절대로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의 세상 사람들이 감히 따를 수 없는 강력하고 완벽한 방법을 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어떤 엄마가 여섯 살 된 자신의 딸아이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라는 진리를 심어 주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딸아이는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며 무서움으로 인하여 울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내가 거짓말한 것과, 친구와 싸운 것, 그리고 나의 나쁜 마음을 다 보고 계신다.’라는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아무리 달래고, 이해를 시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는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한참을 기도하던 그 아이가 ‘엄마!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보고 계셔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 하신대요!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을 모두 다 이미 용서해 주셨대요!”라며 기쁜 얼굴로 엄마한테 뛰어 오더랍니다.
사랑하는 우리 벧엘교회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저와 여러분들의 주관자이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하나님이시기 전에,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오늘부터라도 저와 여러분들은 그 어떠한 고난과 환란이 내 영, 육간의 삶속에 급습할지라도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결코 절망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 옆에는 항상 강력하게 우리 모두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이 우주 만물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또한, 더럽고 추악한 마귀, 사단들까지도 말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 어떠한 것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능가하는 것들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독수리 새끼들이 어미의 날개위에 붙어서 아무리 높은 곳을 향하여 날아갈지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펼쳐주신 날개를 꼭 붙잡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안전하게 지낼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있어서 안전(安全)이란 온전한 것과, 탈이 없는 것, 그리고 위험이 없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삶들은 거친 광야와도 같아서 온전한 안전이란 없습니다.
때문에 어느 순간에 어떠한 일들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닥칠지 모릅니다. 그리고 오늘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끔찍스런 각종 자연재해와 또한, 인간들로 인하여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사건, 사고들을 보십시오!
때문에 각종 질병과 건물붕괴, 그리고 화재와 비행기 또한, 자동차나 배,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가지 사건, 사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기도 합니다.
또한, 올 여름같이 이상기온으로 말미암아 어떤 나라는 혹서로 인하여, 또 어떤 나라는 혹한으로 인하여, 또 어떤 나라는 홍수로 인하여, 또 어떤 나라는 지진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살아서 움직이는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어떠한 경우라도 안전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지만, 우리들의 능력과 힘 그리고 우리들이 생각한대로 절대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와 여러분들이 거하는 이 세상의 삶속에서는 ‘안전’이란?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다. 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아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 품인 말씀 안에서 진실한 믿음으로 순종하며 거할 때, ‘온전한 안전’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갖추고, 가졌을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 ‘안전’의 복을 주시지 아니하면, 이 세상 그 무엇에서도 안전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온전한 안전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 안에 거할 때만이 확실하게 보장받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또한, 각종 공사현장에서 ‘안전’ 표시가 된 헬멧을 쓰는 이유는 그곳이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리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안전’ 표시란? 안전을 바라는 사람들의 하나의 방편일 뿐, 한편으로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언제나 갑자기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은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과 능력만이 온전한 안전을 부여받을 수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독수리가 하늘을 날고 있을 때는 이 육신의 땅에 있는 장애물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까닭은 저와 여러분들의 온전한 믿음이 장애물 위로 저 높이 날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주석의 거장인 매튜 헨리(M.Henry)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방어선이요! 하나님의 능력은 그 무엇도 무너뜨릴 수 없는 방어벽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신속함이 필요할 때는 신속하게, 강력함이 요구될 때는 강력하게, 안전을 요할 때는 안전하게 역사를 취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온전히 업히시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불가능도 없고, 그 어떠한 실수나, 오류도 없으며, 제한도 없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육신의 삶 속에서 아직도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은총을 입지 못하고, 고통과 환란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의 믿음을 통한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우리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로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온전한 믿음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덧입고 사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날개에 온전한 믿음으로 업히기만 하면, 보지 못하는 소경들도, 걷지 못하는 장애자들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자들도,
물질이 없어 가난한 자들도, 각종 병이 시달리는 자들도, 마귀, 사단의 함정에 빠져 귀신들린 자들도 안전하게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지로 갈 수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온전한 믿음의 성도들임을 확신하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의 심령을 통해 질문하고 계심을 믿으시고, 크고 담대히 이렇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큰 소리로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함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인정하시고 베푸실 때, 항상 감사한 심령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명하실 때, 온전한 믿음으로 순종하고 복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내 날개에 업혀라!’ 할 때, 업히시고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매사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저와 여러분 모두의 심령 속에 들어있는 이 세상의 속한 모든 것들을 다 꺼내어 주님 앞에 모두 다 내려놓고, 정결하고 깨끗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한, 온전한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날개에 업힘은 이 육신의 삶 속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확실하게 빠르고, 쉬운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진실한 믿음으로 온전히 섬기는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방패이시요! 도피성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고, 항상 주님의 품 안에서 떠나지 말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나라에 희귀한 것만 갖고, 희귀한 음식만을 즐기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임금은 기가 막히게 맛이 좋은 요리를 먹은 후, 감탄을 금치 못하여 그 음식을 만든 요리사를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 요리사에게 ‘아주 맛있는 요리를 만들었구나! 네가 바로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일등 요리사로구나! 그래서 내가 너에게 상을 주고 싶은데, 네가 제일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요리사는 ‘임금님! 음식 맛이 좋은 것은 제 기술만이 아닙니다. 좋은 야채를 판 사람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그 상은 채소장수에게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겸손히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그래? 그럼 채소장수를 불러 오너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왕궁으로 불려온 채소장수가 임금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면서 ‘임금님! 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야채만 팔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마땅히 좋은 채소 농사를 지은 농부이옵니다.’라며, 그도 겸손히 임금의 명령을 정중히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그래? 그렇다면 그 농부를 데려 오도록 하라!’고 또 명령을 내려 그 채소를 가꾸었던 농부도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왕궁으로 불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는 두려움에 떨면서 임금 앞에 섰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앞서 있었던 자초지종을 그 농부에게 이야기를 하자, 그 말을 듣고 있던 농부는 그 자리에서 펄쩍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 황송합니다만 저도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저는 그저 씨만 뿌리고 가꾸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햇볕을 주시는 분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만약에 그 분이 안 계셨다면 저의 채소는 싹도 틔울 수 없었을 것이며, 이렇게 훌륭한 야채를 기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감사와 영광은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을 마치기 전에 여러분께 몇 가지 묻겠습니다.
* 지금까지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께 온전히 털어놓고, 아뢰지 못한 것들이 있으십니까?
* 지금까지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하게 행하지 못했음을 인정하십니까?
* 지금까지 여러분은 하나님께 항상 지금의 사정과 형편만을 한탄하며, 원망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 지금까지 여러분이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의 마음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지금까지 여러분이 살아온 것들이 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 지금까지 여러분이 한 일에 대해서 진정으로 눈물 뿌리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온전한 심령으로 돌아온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전폭적으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십니까?
* 하나님께서는 독수리 날개위로 저와 여러분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올라오기만 하면, 우리들 모두에게 신속하게 임하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믿으십니까?
* 하나님께서는 독수리 날개 위에서 저와 여러분이 떨어지지 않고, 강력하게 붙어있기를 원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 하나님께서는 독수리 날개 위에서 저와 여러분이 항상 안전하고, 평안하게 지낼 것을 원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그동안 우리 모두가 행했던 믿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뒤돌아보시고, 꼭 독수리 날개에 업혀가는 온전한 믿음의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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