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통과 슬픔이 오는가 /출14:5-18/ 조용기목사
2018-07-17 00:51:34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야훼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절)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애굽을 등지고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들이 겪은 슬픔과 고통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큰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앞에는 홍해가,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바로의 명령에 따라 습격해 왔습니다.
앞에는 홍해수요 뒤에는 애굽 군대라! 진퇴양난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올 한해를 보내고 이제 새해를 맞이하게 될 때, 돌이켜보면 우리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앞으로 나가려고 해도 막혔고 뒤로 돌아설 수도 없는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 걸까요?
1. 어둠이 있어야 빛이 나타난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두움에 있다가 들어오면 빛이 대단히 선명하게 보입니다. 요사이 도시든 농촌이든 밤하늘에 은하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어렸을적에는 하늘에 은하수가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했는데 요사이는 그렇치 못합니다. 나쁜 공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도시에 불빛이 너무 찬란해서도 그렇습니다. 전깃불이 너무 찬란해서 그 빛이 빛을 잡아먹어 버립니다. 우주에서 지구로 다가오는 은하수 같은 것은 도시에서 빛이 나는 전등불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어둠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빛의 소중함을 알지 못합니다.
노르웨이의 리우칸이라는 마을은 100년 전 생긴 마을인데 높은 산 아래의 깊은 계곡에 있기 때문에 산 그림자에 가려서 1년중 반이상을 햇빛을 볼 수 없습니다. 햇빛을 못 보면 우울증이 많이 생겨납니다. 마을사람들은 햇빛을 보기 위해 차를 타고 옆 마을로 가거나, 높은 산에 올라가 햇빛을 받으면서 스키를 타거나, 마을에 있는 케이블을 타고 뒷산에 올라가서 햇빛을 보았습니다.
햇빛을 보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100년 이상을 버티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4년 전에 이 암울한 마을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한 예술가가 산 위에 거대한 거울을 세웠어요. 거울 세 개를 세워서 햇빛을 동네로 비춰주니까 동네가 다 기뻐했습니다. 햇빛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더 잘 깊이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둠을 느껴본 사람만이 빛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고난 후에 다가오는 평안과 기쁨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해 놓았습니다. 그 고난을 당하고 나면 기쁨과 즐거움은 더 깊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오기까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거친 광야에서 험악한 삶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 험악한 상황을 극복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기적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느끼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명기 8장 2절과 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야훼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을 겪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애굽을 떠난 것인데 왜 이런 시련이 다가오는 것일까요? 출애굽기 14장 12절에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기 전, 모세에게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자기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는 것 보다 애굽에 살면서 애굽 사람의 종노릇하는 것이 좋겠다는 불신앙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광야로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들은 벌써 마음속에 불신앙이 꽉 들어찼습니다. 하나님 계신 것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이 있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다 가운데로 건너게 하시고 바로의 군대를 수장시켰습니다. 바닷물이 갈라지고 따라오던 애굽 군대들이 전멸되는 것을 보고 나서야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고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나?”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불신앙이 사라지고 신앙이 살아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14장 31절에 “이스라엘이 야훼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야훼를 경외하며 야훼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야훼인 줄 알게 된 것입니다. 고통에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통에서 건지시고 이런 경험을 통해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 있습니다. 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면 강풍이 불 때 쓰러지고 맙니다. 미국에 가면 큰 나무들이 길거리에서 뿌리가 뽑혀서 넘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에는 땅이 너무 기름져서 기름진 땅에 나무를 심어놓으니까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아니하고 자라서 나무에 바람이 불어오면 쓰러지고 뿌리가 파헤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에 와서 길거리에 보면 바람이 불어도 큰 나무가 많이 파헤쳐 넘어진 것이 없습니다. 한국은 땅이 척박하고 양분이 많지 않아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뿌리를 깊이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 나무들은 바람이 불어도 쉽게 뽑히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평탄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고난이 다가오면 신앙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아주 척박한 생활환경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기도에 응답을 받아서 살아온 사람은 여간해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고난중에도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서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와서 응답을 받고 쓰러지지 않습니다. 척박한 땅에 심겨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립니다. 그래서 웬만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는 나무처럼 인생도 고통과 슬픔을 통과할 때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도 광야를 지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괴로움을 이기고 나면 하나님께서 평안과 기쁨의 삶을 예비해놓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고 나가면 기쁘고 즐거움이 다가오지만 기쁨과 즐거움만 기다리면 고난이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왜 어두움을 겪게 하는지 하나님 앞에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3.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하여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합니다. 그 어려움을 겪고 나오면 기쁨과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괴로움을 견딘 분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한없이 고통을 당한 하나님의 아들을 가슴에 모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힘을 얻어 어려움을 이기게 되고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메마른 겨울환경이 지나고 봄기운이 다가오면 가는 곳마다 산천초목이 생기가 넘쳐나는 것처럼 예수님을 우리안에 모시면 생기가 우리 삶 속에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헐벗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우리 저주를 다 청산했기 때문에 생기가 예수님께서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시고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예수님 속에서 생기가 우리에게 넘쳐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어려운 삶, 생활의 저주를 주님께서 청산해주셨습니다. 또 우리가 병들어서 고통당하는 질병도 담당하셨고 우리의 질병도 추함도 담당하셔서 피를 흘리심으로 다 없애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모시면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죽음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 이렇게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된 상태를 체험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예수님 죽은 예수님 모시지 않습니까? 죄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우리가 모시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생명의 역사가 우리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장 23절)
십자가에 매달려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청산해주신 그 은혜를 우리가 소유했다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장 13절) 종교로써 우리를 부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우리를 부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찬양하고 기도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생기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의로움이 우리 의로움이 되고 예수님의 거룩함이 우리 거룩함이 되고 예수님의 건강이 우리 건강이 되고 예수님의 축복이 우리 축복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이 우리 부활 승천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장 13절)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장 22절~24절)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명하면 그 믿음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이루어지는 것,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시험과 환난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기도하면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역사가 우리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선언을 늘 해야 됩니다. 시편 21편 2절에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창조적인 긍정적인 입술의 고백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대로 역사해주십니다.
3차원의 물질생활을 딛고 4차원의 영의 세계로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장 11절~13절)
어떤 사람이 도공을 찾아갔습니다.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들고 도자기를 만드는 곳에 가니까 눈에 띄는 두 개의 화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굉장히 광채가 나고 다른 화분은 빛이 나지 않고 어두컴컴합니다. 똑같은 화분인데 왜 그럴까 궁금해서 질문했더니, 하나는 불도가니를 통해 불로 구웠고 또 하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 시험을 당하게 하는 것은 빛나는 신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불 시험을 당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빛난 천국의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름답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을 통과해야 아름다운 도자기가 탄생하듯 사람도 고통과 슬픔을 통과할 때 더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편71절)
생각을 긍정적으로 해야 합니다. 유한양행의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님은 신실한 크리스천인데, 미국에서 숙주나물 사업을 해서 돈을 굉장히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숙주나물 장사 초기에는 쉽지않았습니다. 그 당시 숙주나물은 미국인들에게 생소했기 때문에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뉴욕 시내의 복잡한 출근길에 숙주나물을 배달하던 트럭이 상가건물을 들이 받아서 트럭에 싣고 있는 숙주나물을 뉴욕의 온 길거리에 쏟아놓게 되어 대혼잡이 일어났습니다. TV방송국에서 나와서 촬영하고 라디오에서 방송하고 신문에도 보도가 됩니다.
유일한 사장은 ‘이제 망했다’는 생각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살았는데 왜 나를 이렇게 버립니까? 나는 이제 빈 손들게 됐습니다.” 하염없이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TV나 라디오 신문사에서 사고를 보도하면서 숙주나물의 영양소 등 긍정적인 기사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양사람들은 고기 섭취량이 많기에 나물을 같이 먹어야 한다는 보도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을 차릴수 없을 정도로 매출이 늘어났습니다. 나물장사로 돈을 번 유사장은 제약회사를 세울수 있었고 세계적인 제약회사로 발돋음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불가마를 통하게 하십니다. 불을 통해 빛나게 하십니다. 고난이 다가온다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고난이 오히려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하나님이 나에게 좋게 해주신다는 그런 생각을 해야 빛과 어두움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들이 머리 위로 날아다녀도 우리가 실제로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들이 우리의 머리 위에 둥지를 틀면 그건 문제가 달라집니다. 둥지는 틀지 못하게 해야 됩니다. 마귀가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너는 망했다’라고 속삭이며 우리의 머리에 둥지를 틀면 부정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둥지를 틀지 못하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마귀의 둥지를 대신해 성령님이 둥지를 틀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암송하여 머리에 늘 간직하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안 된다. 할 수 없다’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둥지를 틀지 못하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쫓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이 마음속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만들어야 우리 생활이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7장 19절에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야훼가 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말의 열매를 창조하셔서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인생이라는 밭에 말이라는 씨를 뿌리고 삽니다. 긍정적인 말을 심으면 긍정적인 열매를 수확하고, 부정적인 말을 심으면 부정적인 열매를 수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괴로움을 통해서 더 아름다운 신앙을 창조해내고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게 하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여러분 머리에 성령께서 둥지를 틀게 만들어서 성경의 말씀이 머리에 꽉 차있으면 그 말씀이 씨앗이 되어서 씨가 뿌려지는 것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출14:1-3 출14:13-14/ 김병삼 목사
2016-03-21 15:55:51
.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 “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홍해 앞에서!”
오늘 홍해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과 불신앙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아니, 우리 인생은 언젠가 만나는 자신의 홍해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은 인생의 홍해를 만났을 때 ‘어떻게?’라고 묻지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무엇보다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물음이 있죠?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지?”
그러나 인생의 홍해 앞에서 다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홍해 앞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 ‘왜?’라고 묻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셨는지, 나에게 왜 이런 일을 행하셨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까? 조바심을 내기보다는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보게 되지요.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그 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 순간부터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며 기대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1월에 성혜 자매의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미스 유니버스대회에서 떨어지고 나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미스코리아에 나가게 된 것도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영향력 있는 청소년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한 일인데….
미스 유니버스에 출전한 일도 분명한 확신 가운데 일을 진행하고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무모한 일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확신이 분명했는데. 최종 15명에도 들지 못했을 때, 담담하게 그 일을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마음이 잘 정리가 안 된다고 말입니다.
제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성혜야, 그리고 권사님! 지금까지 된 일에 대하여 의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으면 떨어지고 붙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딸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했으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죠. 그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일까요? 단지 준비한 사람들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다를 뿐이잖아요. 가만히 기다려 보세요.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해 보세요.”
‘홍해 앞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실 때, 홍해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단지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셨을 뿐이고, 그들은 확신 가운데 따라 나왔을 뿐입니다. 홍해 앞에서 당황스러운 것은 ‘우리가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고,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홍해는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 홍해 앞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확신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망연자실합니다.
우리는 종종, 아니 참 많이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큰일 났어요!”라는 말을 하며 호들갑 떠는 경우를 봅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너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났을 때 그러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출애굽 했지만, 그들의 믿음이 홍해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처럼, 베드로 역시 예수님과 함께했지만, 신앙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가 변한 것을 보세요.
이미 예수님을 곁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시던 예수님이 없는 상태에서 제자들은 박해의 시기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자신의 친한 동료였던 야고보가 잡혀서 순교를 당하고 자신은 감옥에 끌려가서 순교의 순간을 기다려야 하는 때, 바로 날이 밝으면 순교를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전날 밤 호들갑 떨지 않습니다.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사도행전 12장 7절에 보니까,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홍해 앞에서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 인생의 홍해 앞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홍해 앞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당황하게 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다 읽지 않았지만, 출애굽기 14장 1~2절을 보면 조금 명확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이게 무슨 말인가요?
굳이 홍해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닷가에 이끌어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돌이켜’라는 말에 조금 주목해 볼까요? 예전 성경에는 ‘돌쳐서’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현재 진행하는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되돌아가서 진을 치라는 것입니다. 얼핏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요,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을 친 장소는 홍해를 앞에 둔 아프리카 북쪽의 광야 끝이었습니다. 대다수의 학자는 이 위치가 지금의 수에즈만 북방 16km 지점의 비터 호수 근경으로 추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을 치라고 하신 장소는 앞은 홍해 바다이고, 양옆은 험한 산지로 막혀 있어 지리적으로 후퇴하거나 빠져나갈 다른 통로가 없는 막다른 장소였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갈 때, 당연히 홍해가 아니라 해안을 따라 난 길로 갈 줄 알았습니다. 역사 이래로 아프리카에서 중동 지역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앞은 바다로 막히고 옆은 산으로 막힌, 길이 아닌 길로 접어들었던 것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지도자의 어리석음을 흉보며 이스라엘 백성을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준 것을 후회하던 바로는 마침내 특별 병거 6백 대와 애굽의 모든 군대를 총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해왔습니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오직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시 자기의 종으로 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는 열 번에 걸친 무서운 재앙, 특히 자신의 장자를 비롯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를 잃는 참혹한 재앙을 당하고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애굽의 종으로 삼으려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던 것입니다.
3절에 이 모습을 보고 바로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하리라”
바로가 생각해도 이스라엘 백성이 돌이켜 바닷가에 장막을 친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믹돌은 애굽의 동쪽 끝 국경 지역이고 그 양쪽에 비하히롯과 바알스본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앞에는 바다고 믹돌의 망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니, 애굽 군대가 쳐 내려가면 진퇴양난에 빠지게 될 형국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모르겠습니까? 3절의 “멀리 떠나”라는 말이 사실은 ‘혼란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로 갈지 모르고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잘못 가도 한참 잘못 간 것이죠.
좀 전에 보았던 2절에서 참 의미 있는 두 개의 지명이 나옵니다.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은 ‘구출’이라는 의미가 있고요. ‘바알스본’은 ‘바알이 내려다본다,’라는 뜻입니다.
참 흥미롭죠?
홍해 앞에서 그리고 자신이 예측할 수 없었던 인도하심 앞에서 이들은 두 개의 가능성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출을 받든지, 아니면 이전에 섬기던 우상 앞에 항복해 버리든지 절대적인 위기와 선택의 순간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홍해 앞에서 위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옛 생활로 돌아가 우상숭배를 하든지, 아니며 그 위험한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든지.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오늘 참 흥미로운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이켜 지금 이 홍해 앞에 이르게 하셨다면, 혼란스럽게 떠들 일이 아닙니다. 이미 이 지경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죠. 본문 13~14절을 보십시오.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홍해 앞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처음으로 하신 명령이 무엇인가요?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고 가만히 서서”
말씀을 묵상하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때는 우리가 잠잠한 시간이라고. 우리가 심적, 육적으로 잠잠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를 떨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 민족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두려워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두려움이란 놈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우리가 제어할 능력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에 처한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두려움이란 말이죠. 잘 이해가 안 되나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젊은이가 전쟁에 나가 23만 명 정도가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에서 자식을 염려하다 죽은 부모의 수가 100만이 넘는다고 하죠? 어떤 근거인지는 모르지만, 두려움과 걱정이라는 적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약점 가운데 하나가 너무 쉽게 두려움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죠? 성경에 “두려워 말라!”라는 말이 365번이나 나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증명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시작할 수 있는 타이밍은 두려움이 사라질 때입니다. 두렵게 하는 상황이 아니라 두려움을 누르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말입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공포가 노크할 때 믿음이 나가봤더니 아무것도 없더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잠잠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저는 종종 그런 상상을 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에 대하여 우리는 참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런 상황에 부닥쳐 있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맞이했을까요? 그 순간에 홍해가 갈라지리라는 것을 기대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문제가 닥쳤지만, 문제의 해결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면 참으로 분주하고 번잡하게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을 해 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진퇴양난의 순간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어떤 해결 방법이 있을까요?
수치스럽게 사느니 장렬하게 물에 빠져 죽을까요?
이왕 죽느니 자신들을 괴롭혔던 자들과 싸우다 죽을까요?
아마도 가장 신빙성 있는 방법인데, 창피한 일이지만 목숨을 구걸하고 항복하는 일?
출애굽기 14장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하나님은 수치를 당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는데, 이들은 수치를 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목숨이 가장 귀하다고 여기면 목숨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초라해지죠.
과연 이 홍해 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다급함 앞에서 인간들의 보편적인 모습 중의 하나는 늘 ‘비난할 대상’을 찾는 것이죠. 사실 이들이 모세를 안 따라왔으면 될 일입니다. 그들도 같은 꿈을 꾸던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 순간에 모세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모세의 탄생에서부터 10가지 재앙과 출애굽의 역사를 볼 때, 그 원인이 출애굽기 2장 24절에 아주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홍해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신음하고 고통에 울부짖었던 것을 잊은 모양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기적으로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손길과 계획이 순식간에 홍해 앞에서, 그리고 그들을 뒤쫓아 오는 거대한 군대 앞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애굽의 군대를 보니 하나님의 계획도 보이지 않고, 인도하시는 하나님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물론 우리가 삶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4차원적인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라 ‘홍해 앞에서’ 무엇을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바다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들 앞에서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음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그들이 살았지만, 바다에서 몰살한 애굽의 병사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이 산 것을 기억하지만, 목숨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자꾸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생명이 주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생명 주께 있네.
능력 주께 있네.
소망 주께 있네.
주 안에 있네.”
그래서 하나님을 믿을 때 생명을 다해 믿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해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힘을 빼고, 우리의 능력이 아닌,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나안으로 향하기 위한 하나님의 첫 번째 계획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힘을 빼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여름 바닷가에 가면, 혹은 수영장에 가면 반드시 구조대원들이 높은 곳에 의자를 마련하고 쌍안경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조난을 당해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신속히 헤엄쳐 가서 구조하려고 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 구조대원의 발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이 빠져 죽습니다. 몸을 맡기세요. 몸을 맡기세요. 해도 맡기기는 뭘 맡겨. 더 매달리니까 그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턱을 들어서 주먹으로 때리라는 것입니다. 때리면 기절합니다. 기절하고 늘어지면, 몸을 맡기기 때문에 물속에서 건져 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맡겨야 해요. 물에 빠진 사람 건지는데도 맡기지 아니하면 같이 빠져 죽는 것처럼 이 세상에 문제를 당해서 하나님께 나와 부르짖을 때 주님께 온전히 맡겨야지 내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버둥을 치다가는 낭패와 실망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주님이 도와주실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밤새도록 일어난 일!!!
본문 21절을 보세요.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말씀을 묵상하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큰 동풍이 불고서 바닷물이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가 남의 일처럼 보일 때에는 스펙터클한 일이지만,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역사는 긴 밤을 지새우는 가슴 졸이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그 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요?
그래서 또 하나의 단어를 생각해야 합니다.
13절의 “가만히 서서”라는 말인데, 영어 성경에는 “stand fir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서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말고 서 있으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이루어질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며 참 이해할 수 없었던 말씀 가운데 하나가 ‘열 가지 재앙’이었습니다.
한 가지 재앙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일인데, 어쩌면 계속해서 바로의 마음이 바뀌고,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그 시간을 견디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무서워도 흔들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가만히 서서 견고히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홍해 앞에서의 시간은 인생의 결전의 시간입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내쫓았다면, 그 믿음으로 견디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밤새도록 몰아치는 동풍을 견뎌야 합니다.
당시 동풍은 아라비아에서부터 몰아치는 ‘시로코의 열풍’ 즉 죽음의 바람입니다. 그런데 그 바람이 이스라엘에는 생명의 바람, 기적의 바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누군가는 밤새도록 동풍이 부는 동안 더 큰 두려움과 의심에 휩싸여 있지 않았을까?
사실은 기적의 순간보다 기적이 일어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더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기적은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견디는 믿음의 시간이 폭발하는 순간이라는 생각, 믿음의 결정체라는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기적이 일어나면 그 사건이 믿음의 흔적이 되고, 기념비가 됩니다. 본문 31절을 보세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글쎄, 제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기는 하지만 그렇게 바람직한 신앙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능력을 보고 믿었던 백성은 앞으로 일어날 광야의 수많은 사건 가운데서, 환란이 일어날 때마다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기적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만을 바라보는 자들의 신앙은 변하지 않습니다.
소위 무속적인 신앙이 무엇인가요? 끊임없이 표적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기적을 믿습니다. 기적이 보일 때 믿음이 좋은 것 같으나 기적이 사라지면 하나님도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기적을 믿는 사람들은 또 다른 기적을 보면 그 기적을 따라갑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 성도들이 “신실하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기적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어디든지 가려는 자들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만 찾아다닌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똑같이 믿지 않는 자들과 같이 불평하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데 기도해서 안 되면 세상 사람과 똑같은 불의한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언젠가 일본의 후쿠시마에 갔을 때입니다.
젊은 가이드가 목사님들과 함께하면서 참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합니다.
소위 접대하는 관광을 안내하게 되면 못 볼 것을 참 많이 경험한답니다. 참 말쑥한 신사들이 술 접대를 받으며 저렇게 변할 수 있고, 성을 파는 여성들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집에 돌아갈 때가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내와 딸의 선물을 사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방법입니다. 접대로 무엇을 해 보려고 하고, 공짜로 주는 것이라면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받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아무리 계속돼도 변하지 않는 백성을 보게 됩니다. 홍해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볼 때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을 바라보면, 내 삶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의 [춤추시는 하나님]이란 책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내 일에 늘 방해물이 끊이지 않는다고 항상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해물이 바로 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우리 인생의 길에는 수없이 많은 방해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방해물이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장기 환자를 보살피는 일이 있습니다. 힘 드는 방해물이지만,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장애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일이 있습니다. 평생 짐입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치매 노인을 치다꺼리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 큰 방해물입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이 모든 것이 다 나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당한 방해물이 있습니다. 홍해도, 애굽 병거도, 배고픔도, 고기 먹고 싶음도, 목마름도 모두가 걸림돌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씩 해결하면 해결되는 기쁨이 있고, 가나안이 보입니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다!”
아무리 부인해도 저도 아버지의 그늘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인해도 하나님을 믿는 한 하나님의 그늘서 살아갑니다.
시편 91편 1절에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그늘서 살고, 아내는 남편의 그늘서 사는 것이 이 세상 사람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러나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곧 하나님 품 안에서 사는 사람은 전능하신 자의 그늘서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기적이 있어서, 홍해가 갈라져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지존자의 그늘에 거하는 자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물이 갈라지는 기적을 보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을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믿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또 다른 기적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지존자와 동행하는 사람들이 복된 것입니다.
출14:13/ 하늘을 바라보라/ 조용기 목사
2015-12-10 13:27:41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14장 13절
옛날에는 여름이 다가오고 장마철이 되면 작은 마을에 걸쳐놓은 다리가 물에 넘치게 되어 사람들이 다니기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그 다리를 건너가는데, 먼저 앞서 건너간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하늘을 쳐다보고 유유히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은 다리 중간에 주저 앉아가지고 벌벌 떨고 걸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처음 건너간 사람이 고함을 칩니다. “이 사람아! 물을 보지 말고 하늘을 봐!” 그 조언대로 하늘을 쳐다보니 두려움이 사라져서 다리를 건넜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같은 원리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 어려운 일을 바라보고 주위 환경을 바라보면 좌절하고 절망해서 무릎이 오그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일수록 하늘을 쳐다보고 주위 환경을 쳐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 성도들의 새벽기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한국 성도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집에서 고민하지 않고 새벽에 일찍이 교회 나와서 기도하면서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기도할 때, 마음에 담력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고, 그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새벽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00만명 이상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43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시에 애굽에서 떼를 지어 나오니 그 장면이 얼마나 장관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에 따라 애굽에서 당당하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이 변한 애굽의 바로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곧장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포로로 잡기 위해서 따라왔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두려움이 들어왔습니다.
두려움에 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모세야, 우리 도로 항복하고 돌아가서 사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경을 보았고, 애굽의 바로왕의 대군과 눈앞에 펼쳐진 홍해를 보았습니다. 홍해를 건너가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수 있는데 거기에 배도 없고, 다리도 없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라.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애굽의 군대도, 홍해도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은 주위 환경을 바라보나 모세는 고개를 들어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는 두려움을 주는 모든 환경적인 요인 앞에서도 “구원을 행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지도자 모세 한 사람의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유유히 건너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1. 요셉의 시련과 도우시는 하나님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중 요셉은 열한 번째의 아들이었습니다. 요셉은 다른 형제와 달리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목동으로서 양치는 삶에 만족하면서 꿈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제들과 같이 양을 치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꿈에 밭에 가서 추수를 하는데 자기 단은 서고 형제들의 단이 자기를 둘러싸고 절을 하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자 마자 형들을 보고 “형님들, 형님들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추수하러 가서 곡식 단을 묶어 놓으니 형님들의 단이 전부 내 단을 둘러서 절을 하더이다”라고 꿈 이야기를 하자 다른 형제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이게 미쳤구나. 이 자식이!”라고 반응했습니다. 그 후 또 꿈을 꾸었고, 그 꿈 역시 형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형님들 오늘도 또 꿈을 꾸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나를 보고 절을 하더이다”라고 하자 이번에는 아버지 야곱이 “야 이놈아 무슨 그런 꿈을 꾸느냐? 해와 달과 열한 별이라고 하면 해와 달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말한 것이 아니냐? 내가 너의 형제들과 더불어서 너에게 절한단 말이냐?”라고 요셉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생각하고,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앞서갈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사람의 꿈을 들어보면 압니다. 꿈을 마음속에 갖고, 그 꿈을 생각하고 그리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꿈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목사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교인을 도와주기 위해서 예배를 드릴 때는 반드시 그 마음속에 꿈을 심어줘야 하는 것입니다. 꿈이 그 마음속에 들어가면 그 운명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형들이 양떼를 치는데,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으로 음식을 가지고 형들이 있는 들판으로 나왔습니다. 그 형제들이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봐라. 저기 꿈꾸는 자가 온다. 우리가 요셉을 죽여 버리고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라고 모의했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저 꿈꾸는 아주머니, 꿈꾸는 아저씨, 꿈꾸는 청년, 꿈꾸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것은 놀라운 칭찬입니다. 운명을 달리 할 수 있는 것은 꿈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꿈을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꿈을 주십니다.
결국 요셉은 17살에 형들에게 잡혀서 아라비아의 대상에게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애굽으로 팔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하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서 시위대 뜰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3년 동안의 종살이, 감옥살이 가운데서도 그가 낙심하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꿈꾸는 사람으로 꿈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꿈은 믿음이 있어야 움직입니다. 꿈은 믿음이라는 팔다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삶에 영적인 큰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고난이 다가와도 요셉은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확실히 가슴에 품고, 그 꿈이 이루어짐을 믿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잊지 않았고, 애굽의 종살이 하는 가운데서도 계속 꿈을 꾸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바로왕 다음으로 높은 권세인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2. 빼앗길 수 없는 갈보리 십자가의 은혜
제가 오늘 빼앗길 수 없는 꿈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몸으로 다 청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속에 꿈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청산하고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제하시고,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다음 채찍에 맞아서 우리의 병을 전부 대신 청산해 버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 무덤에 들어갔으나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밑에 나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 오중복음을 믿으면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함이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꿈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진다고 입으로 늘 말하기 바랍니다.
저는 50년의 목회생활 동안에 십자가를 늘 바라보고 꿈꾸며, 십자가가 이루어질 줄 믿고 입술로 시인한 결과에 이 오중복음을 다 체험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단순히 종교만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꿈을 꾸고, 그를 통해서 우리가 전인구원을 얻어 변화된 사람이 되어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께서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예수를 믿어도 꿈이 없는 사람은 종교를 믿는 것이고, 그의 삶에는 아무런 효과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꿈이란 현재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죄가 용서함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꿈 꿀때 그대로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성령 충만하고 방언을 하게 되는 것을 꿈꾸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순간에 성령이 오셔서 충만하게 하시고, 방언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꿈꿀 때,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라고 하면 그 축복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건강하다’고 늘 생각하고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질병이 떠나가고, 건강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고 살아난다’고 믿으면 그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다음에 모든 삶에 전인구원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뜻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밤잠 자지도 않고, 열심히 일한다고만 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사회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으로 말하면 운이 좋아야 되고, 배경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운도 없고, 배경도 없을 지라도 교회 와서 십자가를 통해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꿈꾸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끝까지 견디면 성령께서 그 모든 일들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십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꿈꾸고, 믿으며, 모든 두려움을 제하여 버려야 합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믿음의 반대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이는 파도를 보며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믿음이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믿음의 마음이 생겨나고,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작은 믿음이라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작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산을 옮기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서 이 세상에 살아나가야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낙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가 어떨 때는 두려움을 주는 환경을 바라보고, 또 어떨 때는 자기를 바라보고, 어느 순간 믿음이 들어오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왔다갔다 정신 차리지 못하면 이 사람은 결국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가다가 빠진 것은 물 위를 걸어갈 때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으니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서 평안히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으나 환경으로 자신을 눈을 돌리자 두려움이 다가와 풍랑이는 파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만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가면 반드시 환경을 이길 수 있는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가 눈을 돌이켜 환경과 자기를 바라보면 두려움이 들어오고 결국에는 낙심하고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주님을 바라보면 믿음이 생기지만 환경을 바라보면 의심과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과 그 말씀을 바라보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기도해도 기적을 체험할 수 없으나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의 인생은 늘 기적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믿고, 그 다음은 인내하고, 견뎌야 합니다. 오래 참는 것입니다. 요사이 사람들은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로마서 5장 3절에서 4절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믿음의 영웅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10분 더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있기 때문에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의 선물을 주십니다. 그러나 요즘은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선물의 소포가 다시 돌아와서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다리지를 못하고 좀 기도하다가 포기해 버리니 하나님이 선물 소포를 보내주셔도 받을 주인이 없어져 그만 도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함으로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여 하나님이 주신 응답의 선물을 모두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입으로 자기를 격려하고, 자기의 신앙을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 때에 하나님만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향해 소리 내어 긍정적인 믿음의 선언을 했습니다. 다윗은 시편 62편 5절에서 6절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스스로에게 ‘하나님 때문에 내가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자기를 보며 격려했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 그저 하나님에게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난 다음에 조용히 앉아서 “용기야, 하나님이 너와 같이 계신다. 알지? 용기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 찢기고 피 흘려 너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너를 귀하게 여기신다. 알지? 용기야, 낙심하지 말아라”라고 내가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입술로써 자기 자신을 격려하고 자기 자신에게 힘을 주고 나아가면 우리는 굉장히 큰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에는 실제로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스스로를 축복해도 그 말씀이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다른 사람에게도 격려하고, 축복하는 말씀을 해 주시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실제로 큰 축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축복 받도록 말씀을 늘 긍정적으로 하기 때문에 제 말을 들은 사람에게는 결국 희한하게 축복이 다가오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꿈을 가지고 그 꿈을 믿고, 그것을 자기에게 입으로 늘 시인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성령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응답을 받지 못하면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이 주신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최근에 제가 놀라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한 자매님이 자기 남편하고 마음이 안 맞아서 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하니 결혼해서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화해를 위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가 잘 몰라서 당신하고 살지 못하고 이혼을 했는데, 우리 새로 시작하자”라고 하니 그 남편이 하는 말이 “이 여자가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구나? 나에게 이혼을 선언하고 이혼서류까지 다 정리한 지금, 도로 합치자고? 다시는 전화 걸지 말아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전도를 받아 순복음동경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출석한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과 다시 재결합이 되고, 남편이 함게 교회에 출석하며, 찬양대에서 봉사하는 모습을 늘 기도하면서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 사람도 예수님을 믿게 되고 나와 재결합된다. 함께 교회에 출석할 것이고, 찬양대로 봉사할 것이다”라는 말로써 늘 자기를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또 전화를 걸었습니다. “우리 만나자!”라고 하자 그 남편의 대답은 변함없이 “내가 도로 너에게 돌아갈 줄 아느냐? 다신 전화 걸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부인은 상냥한 어조로 남편에게 “나는 당신하고 재결합하는 것을 마음속에 상상하고 꿈꾸고 있고, 믿고 있다. 반드시 당신은 나하고 재합할 것이다”라고 답해주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그 마음속에 꿈을 꾸고, 꿈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서 전화를 거니깐 남편의 마음이 부드럽게 누그러 들었습니다. 남편이 “참 지독하다. 정말 나하고 다시 살겠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자매가 “옛날에는 예수님을 안 믿고 당신하고 이혼했지만은 이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나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그 자매의 기도대로 이 부부는 재결합하여 마음이 새로워지고, 남편도 그 자매를 따라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교회의 여러 가지 봉사활동에 협조하고, 남편은 찬양대에서 봉사하며 완전히 하나가 됐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이런 재미가 있어야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속에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모습을 늘 상상하고, 꿈꾸고, 믿음으로 행하고, 창조적인 선언을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을 주는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보고 살기를 바랍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 땅과 그 가운데 있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기도-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환경은 칠흑 같은 어두움으로 두려움과 공포와 좌절을 가져오지만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주신 영롱한 꿈을 바라보기를 결단하오니 하늘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고백을 통하여 승리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믿음이 곧 길이다 /출14:10-16/ 김기석목사
2015-07-01 18:52:14
● 바로의 후회
사람은 누구나 후회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이란 선택이고, 선택은 취할 것(取)과 버릴 것(捨)을 가리는 것입니다. 삶이란 모호한 것이기에 우리의 선택이 늘 옳을 수는 없습니다.
'그때 그 인연을 소중히 했어야 했는데', '그때 그 기회를 꽉 잡아야 했는데', '그를 택하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 없이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거짓말이든지, 망각의 결과이든지, 자기 합리화의 과정일 것입니다.
저는 많이 후회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후회도 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 후회가 퇴행적인 삶을 부른다면 그건 이중의 실패입니다. 물론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의 목적은 바른 길을 찾아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종류의 후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후회입니다. 열 가지의 재앙을 경험하면서 그는 신적인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광야로 나가는 것을 허용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썰물처럼 애굽을 떠나 광야로 향했을 때 뒤늦은 후회가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대제국의 왕으로서 신적인 존재로 추앙 받기까지 하는 자기가 제대로 힘 한번 못 써보고 굴복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14:5)
노예를 해방한다는 것은 애굽의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곧바로 바로의 지도력에 대한 의혹으로 이어질 것이고, 민심은 급격히 이반될 것임을 그는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군사 동원령을 내립니다. 장군들로 하여금 특별 병거 육 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몰고 나가 히브리인들을 몰아오라는 것입니다.
무장도 하지 않고, 군사 훈련도 받지 않은, 그리고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뒤섞여 있는 노예들을 붙잡기 위해 이런 군사력이 꼭 필요했을까요? 아닐 겁니다. 바로는 자기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백성들에게, 히브리인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말입니다.
● 백성들의 후회
후회하는 것은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풍을 떠나듯 흥겹지는 않았겠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간다는 사실에 그들의 마음은 어지간히 설레었을 것입니다. 갈대 바다 옆에 진을 치고, 좋은 꿈꾸라고 서로 축복하면서 잠자리에 들 무렵, 그들은 멀리서부터 지축을 흔드는 요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젊고 건강한 이들이 달려나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얗게 질린 채 진영으로 달려옵니다.
큰 일 났다고, 이제는 다 죽었다고, 애굽의 군병들이 끝도 없이 밀려오고 있다고, 그들은 아예 울부짖으며 외칩니다. 그들의 울부짖음은 백성들을 급격한 공포와 두려움의 벼랑으로 몰아갔을 겁니다.
두려움은 일쑤 원망의 대상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또 다시 노예의 멍에를 안기려는 바로와 그의 군대를 향하지도 않았습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자유의 꿈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자기들을 그런 운명으로 인도한 모세를 향합니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외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그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14:11)
죽음의 공포가 몰려오자 자유의 금빛 꿈은 돌연 빛을 잃고 굴종과 생존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억압과 공포에 길들여진 노예들의 슬픈 모습입니다. 이것은 수 천년 전 중동의 변방에서 잃어난 몽매한 과거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도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속물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괜히 어려움을 자초할 게 뭐냐고,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제일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을 굳이 모나게 살 게 뭐냐고, 타협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일 백 번 고쳐 죽어/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수가 있으랴' 하는 정몽주의 丹心歌보다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하는 이방원의 何如歌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실상 자유의 길은 위험과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바로의 힘을 잘 압니다. 바로라는 단어만 들어도 그들의 몸은 반응을 일으킵니다. 기억은 몸에도 새겨집니다. 매맞고 자란 개는 막대기만 보아도 꼬리를 사립니다.
구체적인 두려움과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거기에 비해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후회와 원망과 아우성, 이건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한 어쩔 수 없는 히브리인들의 한계입니다.
● 모세의 선택
이제 바로와 백성들 사이에 서있는 모세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세의 두 얼굴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담대한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워하는 모습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안돈시키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13-14)
모세는 출애굽 사건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상기시킵니다. 계획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끌어가실 분도 하나님이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참으로 대책 없는 믿음입니다.
말발굽 소리와 병거의 요란한 굉음에 비해 이 말은 얼마나 연약합니까? 아무리 억누르려고 애써도 속절없이 두려움이 찾아와 슬며시 그의 가슴을 짓누릅니다. 백성들 앞에서는 그리 할 수 없지만 홀로 있는 자리에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찌 해야 합니까?"
아무도 그를 대신해서 선택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자리에서 그는 처절한 고독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영혼의 어둔 밤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14:15a)
그의 연약한 믿음에 대한 책망처럼도 들리지만, 이 음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약이기도 합니다. 부르짖음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었고, 하나님은 기꺼이 그의 마음에 들어와 두려움을 몰아내십니다.
밤이 낮보다 밝다는 말이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밤에 영혼이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고독의 심연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굳은 믿음을 붙잡았습니다. 살다보면 어려운 일도 겪게 마련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오직 하나님을 향할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은 우리 삶에 개입해 주십니다.
언젠가 들은 노래 가운데 '슬픔의 파도에 떠밀려도 희망의 해안에 닿는다'는 노랫말이 나옵니다. 모세는 두려움의 파도에 떠밀리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희망의 해안에 당도했습니다.
모두가 두려움에 밀려 아우성을 치는 그 혼돈의 시간에 홀로 희망의 등불 하나를 밝히는 사람, 모두가 뒤로 돌아서 바로의 위세를 바라볼 때 홀로 하나님을 향해 서는 사람, 바로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이들입니다. 이제 모세는 명령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믿음이 곧 길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라."(15b)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그들 앞에는 넘실거리는 물 밖에 없습니다.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앞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따를 수 없는 명령입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거래가 아닙니다. 계산에 재빠른 사람들은 믿음의 길을 걷기 어렵습니다.
우직한 사람이라야 믿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베드로는 '오라'는 명령에 사납게 일렁이는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을 응답으로 알고 죽음을 향해 온 몸을 내던졌습니다. 百尺竿頭進一步, 이게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군대가 바로 등뒤에 닥쳐온 그 순간, 진퇴양난의 위기 상황에서 믿음을 요청 받고 있습니다.
순종에 이르는 믿음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바다로 걸어 들어가든지, 현실적인 위협에 굴복하여 무릎을 꿇든지 이제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노예적인 굴종의 과거보다는 위험이 따르는 자유의 미래를 택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압니다. 그들 앞에 바다가 길을 열어 준 것을 말입니다. 믿음이야말로 길입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자신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4.15 총선이 끝나고 이제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현하기 위해 각 당이 애쓰고 있습니다. 보기 좋습니다. 진작에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분명한 것은 이제 뒤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소의 혼란의 있더라도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춤추는 별을 낳기 위해서는 혼돈이 필요하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입니다. 혼돈을 거치면서 우리는 더 큰 질서를 만들어갑니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는다지요? 때로 우리 마음이 흔들릴 때에도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인권이 유린되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했던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됩니다.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존중되고, 몸과 마음에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 비정규직 노동자, 노인과 어린이, 그리고 소외계층들이 인간대접을 받으며 사는 새 역사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한 발을 물 속에 들여놓았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은 주님께서 이미 앞서 걸으신 길입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의 권능은 바로의 군사력보다 위대합니다.
이건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일을 보면서 이따금 속상할 때도 많지만, 마침내 정의를 이루실 하나님이 계시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b)
홍해 앞에서 /출14:10-14/ 이동원 목사
2014-11-28 20:58:25
작년(2007)년 4월 영국 헴프셔 주에서 6개월 된 키노스라는 허스키종 견공이 담벼락 틈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머리가 끼어 목을 뒤로 빼지도 앞으로 밀어내지도 못하는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견공의 주인은 이 급박한 상황을 인터넷에 올려 도움을 호소했다고 합니다.(사진)
이런 상황을 한문 고사성어로 무엇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앞으로 갈수도 뒤로 물러 갈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다행이 이 견공은 소방 구조대에 의해 구출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한국의 유수한 회사 입사 시험에 ‘진퇴양난’을 영어로 표현해 보라는 면접시험이 출제되었다고 합니다. 10명중 9명은 대부분 장황한 여러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여 이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고 합니다.
단 한 사람만이 간단한 한 단어로 명답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 명답은 ‘딜레마’였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딜레마’(dilemma)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가지 다 바람직하지 못한 대안사이에서 직면하는 선택의 상황이라”(A situation requring a choice between equally undesirable alternatives)고.
어제 성남 아트 센터에서 여러 교우들과 함께 감상한 ‘뮤지칼 버스’의 상황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시끄러운 시골 동네 사람들을 싣고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던 길에서 버스가 브레이크 고장을 일으킵니다.
한쪽은 절벽, 한쪽은 낭떠러지인 내리막길을 간신히 잘 피해 내려왔나 싶었는데 충돌 완충을 위해 건초더미로 돌진하던 중 버스 기사는 건초더미 앞에선 한 아이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를 피해가려면 버스안의 7명의 승객의 목숨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진퇴양난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상황도 동일했습니다. 숙곳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군대의 추격을 받게 됩니다. 출14:6-7에 보면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추격해 온 것입니다. 당시의 세계에서 최고로 훈련된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추격한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는 홍해 바다 히브리어로는 ‘얌숲’(yam-suph)갈대 바다(Reed Sea)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바다를 홍해(Red Sea)라고 부른 것은 산호초의 빛깔이 때로 붉은 색조로 이 바다를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의 위치로는 수에즈 운하 북서쪽의 한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운하가 자리잡고 있어 수심이 변화되었지만 모세 당시에는 홍해의 연장으로 여전히 깊은 수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홍해 지도) 뒤에는 바로의 군대, 앞에는 홍해 바다가 넘실대는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인생의 도상에서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날 때 우리가 할일은 무엇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까?
1.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을 향하여 모세가 전달한 첫째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13절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경계하십니까? 두려움은 우리의 마음과 판단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상황이나 환경보다 더 두려워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인 것입니다.
미국 경제 대 공황 중에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에게 “우리가 두려워 할 오직 한 가지는 두려움뿐이다”(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라는 유명한 대국민 연설을 남겼습니다. 두려움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려움은 인간 생존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도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정도를 지나친 두려움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 후서 1:7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과도한 두려움이 임하거든 이것이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서 온 것임을 즉각적으로 인지하셔야 합니다. 마귀는 두려움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두려움을 대적하십시오.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에게 나아오십시오.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도 다행스럽게도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10절의 마지막 부분을 주목하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은 두려움으로 절망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순간 모든 두려움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의 포로가 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오거든 두려워하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그것은 적어도 시선을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전능 자요 사랑이신 하나님께로 옮기는 기적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2.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르짖어 기도하셨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릴 때가 된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기도는 더 이상 ‘부르짖음의 간구’가 아닌 ‘침묵의 기도’혹은 ‘관조의 기도’(contemplative prayer)입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충분한 간구가 이루어진 상황이나 혹은 주께서 일하실 때가 차시면 그는 반드시 우리에게 침묵을 요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침묵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상황을 온전히 주께 맡겨 드림의 선포이며 이제 그가 일하실 공간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제발 주님께 기회를 드리십시오. 여리고가 무너지기 전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온전한 침묵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런 경우의 침묵은 포기가 아닌 기다림이요, 지켜봄이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너무 설치기 때문에 주께서는 일하실 챤스를 갖지 못하실 수가 있습니다.
해변이나 수영장에서 섬기는 구조대원들이 제일 구조하기 힘들어하는 대상들은 맡기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구조대원들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힘 빼세요. 맡기세요. 숨을 쉬세요” 그것이 오늘 본문의
“가만히 있으라”(Be still)는 말씀입니다. 왜요?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옛날 수도자들은 낮은 기도와 깊은 기도의 차이를 거울과 창의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거울을 보면 자신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낮은 단계의 기도에서는 거울처럼 아직도 자신의 고통, 자신의 소원, 그리고 자신의 욕망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기도는 창과 같아서 거기에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창 밖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 낮은 기도에서 깊음의 기도로 나아가는 중요한 길을 ‘잠심(潛心)의 과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잠심은 잠잠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잠잠해 질 때 우리의 마음은 맑은 창이 되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고 기뻐합니다. ‘잠심’의 반대는 ‘분심(分心)’입니다. 분심은 여러 가지 염려와 욕망으로 나누어진 마음입니다. 이런 분주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하지 않으셨습니까? 바쁘고 분주할수록 잠심을 배워야 합니다. 잠잠한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3. 믿음으로 홍해 바다를 향해 나아가셔야 합니다.
부르짖는 간구와 잠잠한 기도 다음으로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14:15에 보면 이제는 기도를 멈추고 행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이제 전진 명령이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주의하실 일이 있습니다. 아직 바다는 갈라지기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라는 명이 내린 것입니다.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오직 하나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넘실거리는 홍해를 바라보며 그들은 담대한 첫 걸음을 내디디어야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들에게 믿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당시의 상황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11:29을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무엇으로 건넜다고요?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본질은 다시 무엇이겠습니까?
히11:1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렇습니다. 그들은 바다 길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믿음의 첫 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는 갈라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둘러싼 상황에 전혀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바다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첫 걸음을 내디디시겠습니까?
제가 막 사역을 시작할 무렵 저의 가정에는 경제적인 부채(부친의 사업 실패로 인한 것)의 홍해가 저와 우리 가정을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전혀 해결의 길은 보이지 않았고 방금 목회 사역을 부목사로 시작한 저에게 주어지는 정말 말도 안되는 월급으로는 가능성 제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비록 부모님의 부채였지만 해결해야 하겠다는 부담이 제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얼마간의 기도 후 채권자들을 만나서 부친 대신 제가 빚잔치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뜻 밖에 그들은 이자 없는 원금만으로 제가 책임을 지는 것으로 하고 모든 것을 청산하는 일에 동의하기로 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이 빚을 청산한다는 것은 아득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첫 걸음을 내디디기로 했습니다. 당시의 부목사 월급에서 거의 절반이 저희 가정의 부채 상환으로 빠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우리 가정은 어느새 부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가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믿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에 일어난 더 큰 기적은 이 과정에서 저희 가족 거의 전체가 돈의 부채보다 더 무서운 죄의 부채에서 청산함을 받고 구원 받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저의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을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제가 한일은 그냥 이 문제를 주께 믿음으로 맡겨 드린 일뿐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주께서 친히 해결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 가족들은 외아들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정을 돕고 계심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저의 형제들부터 시작하여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씩 주께 나아오기 시작했고 나중에 부모님까지 그렇게 나아오시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숙제였던 저의 부친까지 마지막 병석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천국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저는 어제 밤 우리 교우들과 뮤지칼 버스를 감상하며 그런 주의 사랑이 새삼 상기되어 어제 밤 내내 주체하기 어려운 감사의 눈물이 제 가슴을 적시게 되었습니다.
서론에 소개한 뮤지칼 버스의 진퇴양난은 어떻게 해결되었을까요? 뮤지칼 버스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난 버스를 이끌고 내리막길을 운전하던 기사는 마침내 버스 승객 7명을 살리기 위해 건초더미 앞에 서서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던 한 아이를 희생시키기로 작정하고 고장난 버스로 아이를 넘어가 건초더미 속에 버스를 세우게 됩니다.
승객들은 버스에서 살아 나온 후 비로소 자기들이 타고 있던 버스가 넘어간 그 아이가 기사의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외의 구원을 경험한 이들 모두는 충격 속에 새 인생의 길을 찾아 버스를 떠나게 됩니다.
이 뮤지칼은 마지막 이런 노래로 엔딩의 막을 내립니다. “누군가가 사랑했기에, 누군가가 희생했기에 이제 우린 새로운 삶을 살아갈수 있어요” 그렇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의 애끓는 그 사랑으로 우리는 마침내 홍해를 열고 바다 속 새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아직 우리 가운데 주님을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 모두 오늘이라는 인생의 홍해 앞에서 이 사랑을 만나시기를 기도합니다.
가만히 서서 구원을 보라 /출14:10-14/ 곽선희 목사
2014-11-25 15:52:43
아프리카 선교사를 지망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많은 공부와 수련기간을 끝내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기로 결단하고 배를 타고 출발을 했는데 이 배가 풍랑을 이기지 못하고 파선이 됩니다.
그는 배가 깨지는 순간 “아 이제 나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죽은 줄 알았는데 다행히 널쪽 하나를 붙들고 생명을 부지하게 됐습니다. 널쪽 하나에 의지하면서 “아 이제는 살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며칠동안 굶고 표류하다가 아주 조그마한 섬에 아프리카 해안 한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정신을 차려보았습니다. 했더니 흉측하고 잔인한 식인종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겁니다. 그는 또 “아 이젠 죽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좀 원망조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돈벌자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자는 것도 아닌데 아 선교하러 왔는데 어째서 이렇게 운명이 이렇게 고만 꽉 막히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는 이제 꼼짝 못하고 죽었습니다.”하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때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오는데 “너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고 있지 않냐?” “그러면 어찌할까요?” “네 앞에 반짝이는 빛나는 파란 돌 하나가 있지 않느냐? 그 돌을 저 추장을 향해서 한번 힘껏 던져보라.”
그랬어요. 돌을 집어서 추장의 이마를 향해서 던졌습니다. 이 돌이 이마에 가서 딱 꽂히면서 추장이 벌렁 자빠지며 죽었습니다. 그때에 이 청년은 ‘아 이제 살았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넌 이제 진짜 죽었다.”고……. 우리 사람들은 죽었다 살았다 합니다. 몹시……. 이젠 죽었다 했다가 아 이제 살았다 그러고……. 사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아직도 뭘 살았느니 죽었느니 그게 다 살았기 때문에 하는 소리죠. 넌 이제는 진짜 죽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이렇게 참 하나의 드라마처럼 계속 반복되어 갑니다. 죽었다했다가 이젠 살았다했다가 아니 이제는 정말 죽는가보다. 그렇게 오늘까지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합니다. 이것은 33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430년이란 숫자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본래 이 사람들은 흉년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갔던 귀족입니다.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있었을 때 되어졌던 일 아닙니까? 그 귀한 손님이요 귀족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마는 43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저들은 애굽사람의 노예가 되었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 지금 60만이라고 하는 숫자가 전부다 노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노예 된 사람이 아니고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화된 그런 사람들입니다. 전혀 아무생각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같이 애굽사람을 섬기며 사는 것이 좋다. 차라리 자유의 몸으로 광야에서 죽기보다 애굽사람을 섬기며 거기에 사는 것이 낫다 이정도의 사람들입니다.
어떻습니까? 제대로 된 사람들이라면 노예로 한평생을 살기보다 자유의 몸으로 여기서 죽는 것이 좋다 뭐 그래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야 사람다운 거 아닙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은 몸만이 아니라 신분만이 아니라 의식까지 노예화 되었다. 이 문화화라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의식까지 완전히 노예 문화화 되어서 아주 자연스럽게 불편 없이 애굽사람을 섬기며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 살기 바라는 그런 사람들 이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큰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모세라는 지도자를 준비해놓으시고 그를 부르시고 그를 보내시고 그와 함께하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게 됩니다.
노예생활에서 구원합니다.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역사입니다. 모든 역사가들이 말합니다. 60만 명의 노예가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인간역사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민족은 영원하다 나라는 어떻다 하지마는 사실은 없어진 민족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고 보면 우리도 8.15 해방같은 거 놀랍지 않을 수가 없어요. 만일에 8.15 해방이 없이 그저 또 몇 십 년 지나갔다면요 아마 다 망가지고 말았을 겁니다.
저는 어렸을 때 그런걸 보았습니다. 일본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가미다라는게 있어요. 요만한 나무궤상자로 만든 거……. 아 심지어는 친일파들 거 일본사람들한테 아첨하는 사람들은 그것까지 자기 집에 갖다놓고 일본사람 흉내를 내고 살았어요.
아 엄연히 한국 사람인데 일본사람들의 하오리라는 커다란 옷을 입고 게다짝을 끌고 이러고 다니는걸 자랑삼는 아 못된 것들이 있었어요. 뭐 해방 뒤에 다 두들겨 맞았지만 말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게……. 그런걸 봤어요.
집에서도 한국말을 못하게 했어요. 아 일본말만 쓰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랬어요. 전부 일본화, 일본화, 일본화 되어갑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니 노예화되었다 이 어떻게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 구원될 수가 없어요. 상상도 못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로 확실히 이스라엘은 출애굽 했습니다. 애굽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기위해서 열 가지 재앙이 있었습니다.
자 이제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이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려고 할 때 그건 이루게 되어있어요. 여기에 상당한 경륜이 있습니다. 깊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바로 왕을 향해서는 회개의 기회를 준거죠. 10번이나…….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지 않습니까? 여러 번 여러 번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릎을 꿇도록 계속 역사합니다.
난 그 바로 왕을 생각할 때마다 천하의 미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 재앙을 두어 번 받아보고 손들었으면 되잖아요? 그 열 가지 재앙을 다 받을게 뭐있어요. 참으로 미련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쫓아왔다가 홍해에서 죽어버렸단 말입니다.
참으로 완악함이 무엇이며 강퍅함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극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연 구원을 받게 되지만 구원이 뭔가?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애굽사람에게 내리는 그 사건들을 역력하게 체험하도록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구원을 체험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합니다. 그들은 감격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고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는 약속을 믿고 그다음에는 뭐니 뭐니 해도 모세입니다. 모세라고 하는 능력의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저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믿고 모세가 인도하는 대로 저들은 광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오늘 성경은 자세하게 말해줍니다. 홍해의 광야길 로 인도합니다. 홍해의 광야길……. 원래 그 노정을 가만히 보면요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동쪽으로 가야합니다. 그 스웨즈 운하가 있는 곳이 아닙니까? 그렇게 해야만 됩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그냥 동쪽으로 인도합니다. 동쪽으로 인도하면은 홍해를 만나게 됩니다. 홍해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홍해의 광야길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인데 왜 이쪽으로 가는 겁니까? 아니 상식으로 보아도 북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가야 됩니다.
그런데 동쪽으로 가서 앞에 가서 홍해를 딱 직면하게 됩니다. 이제 이 백성이 어디로 갈 것입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왜 이렇게 막히느냐 이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이 14장 1절부터 보면 자세하게 설명해줍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백성에게 한 번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결정적으로 경험하게 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너가게 하고 홍해를 건너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무서워서 애굽으로 가자 할 것이다. 그러므로 no return, 귀로를 차단한 것이에요. 다시 애굽으로 못 가게…….
여러분, 하나님의 귀한 뜻을 잊지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귀로를 차단합니다. 다시 세상으로 못 가게……. 다시 세상 사람으로 살지 못하게 차단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 그런데 홍해에 앞에 섰을 때 상상해 봅시다.
60만 대군이 홍해 앞에 왔습니다. 앞에는 홍해라고 하는 바다가 넘실거립니다. 그런데 뒤에는 애굽군대가 따라옵니다. 문자 그대로 독안에 든 쥐입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군대 좌우에는 절벽입니다.
꼼짝 못하고 갇혀서 애굽군대의 그 복수하는 보복전에 살육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였습니다. 바로 그 시간입니다. 저들은 원망했습니다. 저들은 아우성을 쳤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아니 원망하면서도 위트가 있더라고요.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리로 데려다가 여기서 죽게 하느냐? 참나! 애굽에 공동묘지가 없어서 여기까지 끌어다가 우리를 죽일꺼냐? 아 애굽에 있을 때 그냥 놔둬라 그러지 않았느냐? 우리 이 바로를 섬길 테니 건드리지 마라 그랬는데 왜 우리를 끌어다가 여기서 죽게 하느냐? 그렇게 원망하는 거예요.
아주 논리적이에요. 거기 뭐 위트도 있어요. 하나님을 원망하고 동시에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리고 더욱더 처참한 것은 차라리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낫지 않았느냐? 그게 더 좋았는데 왜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느냐?
참 세상에 출애굽을 원망하는 거예요. 오늘 이렇게 자유롭게 된 것조차도 원망하고 있어요.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에게 욕 돌렸습니다. 자유자체를 부인합니다. 어째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겁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애굽에서 역력하게 경험했던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본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은혜로운 체험을 망각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과거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미래도 없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에 대한 바른 은혜의 해석을 가진 사람만이 미래를 가질 권한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우리가 있어요. 이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역력히 보여준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오늘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말입니까?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잊어버렸습니다. 현실이 좀 어렵다고 해서 미래를 부정합니다. 현실이 고달프다고 해서 앞에 있는 세계를 망각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가나안땅을 잊어버렸어요. 그리고 원망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현재에 집착하는 사람 현재만 생각하면서 과거의 은혜도 모르고 미래의 약속도 잊어버리게 될 때 원망하게 됩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가만히 있어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가만히 있어서 구원을 보라. 가만히……. 왜요? 생각 좀 해라. 과거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지 않느냐?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시편 46편에 보면 말씀합니다. Be still know that I am God.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재미있는 그저 아무 관계없는 얘기 같지마는 재미있는 추억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63년도 처음 가서 유학을 할 때 여름방학동안 그저 뭐 시간도 보내고 또 애들하고도 사귀고 뭐 좀 용돈도 좀 벌고 그러냐고 여름 방학 때 YMCA에서 하는 캠프에 회목으로 갔던 일이 있습니다.
거기 초등학생들 중학생들 고등학생들 이렇게 3주간동안을 한 주간씩 데리고 있어봤는데 거 애들이 얼마나 떠듭니까? 미국아이들이…….
그런데 그 파인채플 이라는 게 있어요. 거기 보면 들판이 있고 소나무 숲이 있는데 소나무 숲 가운데를 다 나무를 베고 동그랗게 아주 거기다가 노천예배당을 만들어놨어요. 잘 만들어놨어요.
그 소나무 숲 속에다 이렇게 만들어놓고 거기다가 오르간도 준비해놓고 강대상도 잘 만들어놨어요. 그런 파인채플이 있었는데 그 채플로 향해서 가는 길에 얘들이 그렇게 떠들다가도요 그 채플 안에 딱 들어서면 조용합니다.
그 문간에 들어설 때 크게 써 붙였어요. Be still know that I am God.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다시 뒤집어 말하면 조용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어요. 조용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요.
시글시글하고 떠들고 불평원망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볼 수도 없어요. 성경은 말합니다.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이 무슨 말입니까? 비판하지 말어, 원망하지 말어 또 생각 그 굴리지 말어, 그 잔재주 굴리지 말어. 조용하라.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는 것이죠.
여러분, 아 우리는 지금 할말이 많습니다. 대통령이 망언을 해서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보통 무식한 사람이 아네요. 이건……. 어데다 대고 그런 망언을 하는 겁니까? 우리 신앙인으로 볼 때는 한심해서 세계가 부끄러워요. 할말이 많습니다.
생각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조용하여……. 뭐 미군이 간다 온다 생각이 많습니다. 경제가 어떻게 되느냐? 세계가 어떻게 되느냐? 유가가……. 뭐 이거 다 생각하다간 미칠 지경입니다.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어봅시다.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귀한 말씀이올시다. 판단중지 령을 내려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입니다. 에포케와, 판단중지 옳으냐 그르냐 이럴까 저럴까 잠깐 멈추세요. 조용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십시다.
한 청년이 산에 올라갔다가 깊은 산을 다니다가 고만 밤에 실종되었습니다. 길을 잃어서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오직 의지하고 있던 조그마한 전등마저 고만 떨어뜨려서 깨지고 말았어요.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알 수 없는 난감한 처지가 됐습니다. 또 비바람이 치면서 그냥 벼락을 칩니다. 꽝꽝합니다. 그래서 그는 번개가 무서웠습니다. 번개가 칠 때마다 거 머리위에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온 몸이 녹아지는 거 같아요.
발발발발 떨고 있었습니다. 번개가 번쩍할 때마다 “아고 죽었다, 아고 죽었다.” 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번개에 대해서 익숙하기 시작했습니다. 번개가 번쩍할 때마다 세상이 환하게 보이니까 길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는 번개와 친해졌습니다. 번개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어요. 번갯불을 보면서 그는 밤중에 산을 내려올 수가 있었습니다.
때때로 우리 앞에 원치 않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변론을 벌이지 맙시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습니까? 원망하지 맙시다. 하나님께는 뜻이 있으니까, 하나님께는 계획도 있으니까, 하나님께는 지혜가 있으니까……. 그에게는 커리큘럼이 있으니까 우리는 조용히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원망할 이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으로 있어진 일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늘도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성적 비판을 멈춥시다. 이성의 비판을 제한하십시다. 그리고 말을 줄입시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여호와의 구원을 다시 확인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고 우리 생각을 혼란케 하는 일들이 있고 어찌하여 이런 일들이 있어야 하는지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제는 막다른 골목처럼 딱 막힐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고 아니 이제는 죽었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러나 그 모든 어려운 사건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여 주의 크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면서 조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고 굳게 닫힌 문이 열리기도 하며 우리 앞의 홍해가 활짝 열리는 기적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14:10-25/ 앞으로 나아가라 / 한경직 목사
2014-08-26 22:29:5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오늘 읽은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아갈 때에 당한 첫 큰 위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가는 것을 다시 사로잡기 위하여 그 군대를 데리고 그 뒤를 쫓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실로 진퇴양난의 큰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앞에는 홍해로 가로막혔고, 뒤에는 애굽의 마병들이 그들을 쫓아옵니다. 겁에 질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나와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야단을 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또한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일발의 순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였습니다. “네가 왜 엎드려 부르짖기만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길게 얘기할 것 없이,
이 때에 모세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명령대로 그 백성을 인도하여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홍해는 갈라졌고, 이스라엘 백성은 무사히 홍해를 지나갔으며, 오직 애굽의 군대들만 물 속에 장사지낸 바 된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라” 곧 전진하라. 오늘 아침 잠깐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진은 생의 법칙입니다. 성장이 생의 법칙입니다. 발전과 향상이 생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처음 지으신 후에 전진하라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혼돈한 우주가 질서 있는 우주로 전진하였습니다. 암흑한 우주가 광명한 우주로 나아갔습니다. 무생물의 우주가 생명 있는 우주로 나아갔습니다. 하등동물만 있던 우주가 고등동물로 가득 찬 우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신 후에도 오직 전진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인적으로도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문화적으로도 전진하고, 도덕적으로도 전진하고, 특별히 영적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매일 전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노라”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많은 신앙의 용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12장 1절에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곧 전진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우리에게 교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1장에,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곧 전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앉은뱅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또한 전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 명령에 순종하여 온 세계를 향한 전진의 발자취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로, 유다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온 세계로, 곧 땅끝까지 전진하도록 교회는 언제나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가 생전에 꼭 서반아(西班牙 스페인의 음역)에까지 가서 전도하기를 애쓴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때에는 서반아 서편으로는 땅끝이 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이 전진하라는 명령에 순복해야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국내 전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외국선교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교회 안의 일만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회, 민족, 아니 전세계 인류를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옛날부터 교회 교육만 한 것은 아닙니다. 곧 주일학교 교육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일반 사회를 위하여 중학, 대학 등 학교 교육을 언제나 힘쓴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이들만 상부상조하는 것은 부족합니다. 일반 사회를 위하여 구호하며 봉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아원이나 경로원이나 모자원이나 병원이나 기타 모든 봉사기관을 설립하며 운영하여 온 것입니다. 교회 안살림만 잘하기를 힘써도 아니됩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까지 살 만한 사회와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사회 정의구현에 항상 큰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공헌한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모든 방면으로 전진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국가도 역시 그렇습니다. 국가도 전진하는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향상하고 전진하는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좀더 번영하고, 좀더 자유롭고, 좀더 평화롭고, 좀더 평등하고, 누구나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로 날마다 전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도시의 발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농촌도 같이 발전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특별히 새마을 운동 같은 것은 매우 귀한 운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국민의 하나로서 전진하는 국가를 이루기 위하여 또 헌신하고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세계도 또한 전진해야 합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빈궁이 없는 번영의 세계로, 억압이 없는 자유의 세계로, 미신이 없는 참 종교의 세계로, 공해와 오염이 없는 깨끗한 세계로 전진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대를 우주 세대라고 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곧 지금은 우리 인류가 우주를 향하여 전진을 시작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 같이 세계 인류는 힘을 모아 전진해야 합니다. 전진은 하나님의 명령이올시다. 전진은 하나님의 뜻이올시다.
그런데 이렇게 전진하려면 경계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전진을 방해하는 것들이 더러 있습니다.
가령 뒤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종 뒤에 있는 애굽을 돌아봄으로 전진에 큰 장애를 입은 것입니다. 유명한 롯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께서 기억할 것입니다. 롯의 처는 유황불로 멸망을 당하는 소돔 성을 떠나 나와 전진하다가 뒤를 돌아보아 그만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둥은 전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권하기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향하여 달음질하라”고 권합니다. 뒤를 돌아보지 맙시다. 오직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갈 것뿐입니다.
또 전진하다가 어떤 이는 피곤해서 쓰러집니다. 곧 낙심합니다. 전진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매우 힘듭니다. 그러므로 전진하려면 피곤하나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견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일찍이 들으니, 어떤 금광회사의 기사가 금광을 찾는 중에 한번은 오래 전에 금광을 하다가 그만 둔 폐광을 발견하였습니다. 여러 면으로 조사해 보니 그곳에 아무래도 꼭 금이 있을 줄로 생각이 되어서 다시 옛 광산을 파기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조금 파다가 보니 큰 곡괭이 하나가 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루는 다 썩었습니다. 훔치어 보니 단단히 박혔습니다. 애를 써서 그 곡괭이를 뽑고 보니 그 곡괭이는 바로 흔히 하는 말대로 노다지, 곧 금덩이 속에 박혔더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옛날 어떤 한 광부가 금을 캐다가 곡괭이가 깊이 박혀서 도무지 빠지지를 않으니까 그만 낙심해서 파다가 그만 둔 모양입니다. 조금만 더 힘썼다면 많은 금을 캐었을 것입니다. 전진하다가 어려움이 있다고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7전 8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서도 여덟 번째 일어나서 전진을 계속해야 합니다.
전진할 때에 물론 종종 큰 난관을 당합니다. 태산준령이 가로막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홍해 바다와 같이 장강대하가 앞에 놓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말렉과 같은 원수가 대적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에 큰 믿음과 용기로써 역경을 돌파하고, 모세와 같이 홍해를 건너야 합니다. 전진에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를 다 건너서 마지막에 가데스라고 하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가나안 복지가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는 가까운 곳입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열두 지파 중에 족장 열두 사람을 택해서 가나안 복지를 탐정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명을 받아서 가나안 복지로 비밀히 들어가서 40일간을 동서남북으로 그 땅을 자세히 탐지하고, 모세에게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보고를 합니다.
“그 땅은 가보니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 열매가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하나를 둘이서 겨우 메고 온, 에스골 골짜기에서 따온 큰 포도송이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백성은 비록 강하여 보이고 성곽도 든든해 보이지만, 우리가 곧 올라가서 공격하면 능히 이길 수 있겠습니다. 우리 곧 올라가서 이 땅을 쟁취하십시다.” 이렇게 두 사람은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밖에 열 사람은 다르게 보고를 했습니다. 이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가보니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입디다. 그뿐만 아니고, 거기 사는 사람들은 다 거인입디다. 특별히 아낙 자손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만났는데, 그 사람들은 키가 얼마나 큰지 우리와 비교하면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그저 메뚜기처럼 보입디다. 우리는 도저히 올라가 칠 수가 없습니다. 못갑니다.” 이렇게 보고를 했습니다. 이 보고를 듣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많은 사람들이 이 다수가 이렇게 보고를 하니 그만 낙심되어서 대성통곡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압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전진해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로 되돌아와서 근 40년간이나 광야에서 뱅뱅 돌기만 했습니다. 그동안에 어떻게 되었는지 압니까? 애굽을 떠나온 어른들은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직 나아가 점령하자고 외치던 여호수아와 갈렙만 살아서 그 후에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습니다.
깊이 들으세요. 후퇴는 파멸을 의미합니다. 전진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전진하지 못하는 교회, 전진하지 못하는 나라는 결국 패망하고 맙니다. 오직 전진이 생의 법칙입니다. 전진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난관이 있을지라도 오직 전진하는 이가 승리합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갑니다. 전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세요.
사도 바울은 전진하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리빙스턴도 흑암대륙을 향하여 용감히 홀로 전진해 나아가서 위대한 아프리카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옛날 미국의 청교도들도 용감히 전진하여 대서양을 건너가서 새 대륙에서 교회를 세우고 자유의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교회도 꼭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 영락교회는 과거 20년간의 뒤만 돌아다볼 필요는 없습니다. 본 교회도 오직 앞으로 전도, 교육, 봉사 모든 방면에 적극적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첫 지도자 모세가 죽은 후에 새 지도자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에서 담대히 요단강을 건너고 전진해서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고 온 가나안 복지를 쟁취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은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전진하는 그리스도인들, 전진하는 한국의 교회, 전진하는 우리나라 한국, 전진하는 세계를 이룩하도록 오직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들이 들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엎드려 부르짖기만 하느냐. 백성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우리 하나하나가 앞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우리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교회가 되고,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가는 나라가 되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앞으로 나아가는 세계가 되도록 아버지께서 축복하여 주시고, 우리 하나하나가 이 위대한 전진의 반열에서 내가 진 책임을 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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