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문 모음/출애굽기 설교 모음

출애굽기 12:15 - 20 무교절에 관한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1. 9.
728x90
반응형

 

 

무교절에 관한 규례 /12:15-20/ 손재호목사

2021-04-22 08:50:06

 

우리는 지난 시간에 유월절 규례에 관하여 배웠습니다(12:1-14). 오늘은 무교절 규례에 대하여 배우고자 합니다. 무교절은 유월절 밤부터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과 무교절은 서로 긴밀히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무교절이란 무엇입니까? 15-16절을 보면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너희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제 칠일에도 성회가 되리니.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인의 식물만 너희가 갖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무교절은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곧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월절 규례에서 봤듯이 유월절 식사는 불에 구운 어린 양의 고기와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함께 먹는 것이었습니다. 쓴 나물은 애굽에서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유월절과 무교절을 통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오늘까지 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그것을 또한 자손들에게 계속해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무교절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거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게서 끊쳐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첫날과 마지막 제 칠일은 성회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자 먹을 식물만 준비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볼 때 무교절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교절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에게서 끊쳐질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7-20절을 보면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대대로 지킬지니라. 정월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칠일 동안은 누룩을 너희 집에 있지 않게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자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 무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쳐지리니. 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찌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교절을 지키라고 합니다. 무교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교절을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월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고 합니다. 그 칠일 동안은 아에 누룩을 집에 있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무교절 기간에는 무릇 타국인이든지 본국인이든지 유교병을 먹으면 이스라엘에게서 끊쳐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 받는 날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이었습니까? 어린 양의 희생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애굽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날에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를 것을 명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칠 때에 그 피를 보고 넘어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때에 그 피를 바른 이스라엘 집은 넘어가는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은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를 바른 집안에서는 어떠한 외부의 위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평안, 참된 안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개조차 그 입을 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월절과 함께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누룩을 넣은 떡 곧 유교병을 먹습니다. 그러나 무교절 기간인 칠일 동안은 누룩을 넣은 떡을 먹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에 집안에 누룩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칠일 동안은 누룩을 집에 있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교절 규례의 가장 중요한 규례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룩을 없애지 아니하고 누룩이 들어있는 떡을 먹으면 그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는 것입니다. 곧 무교절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교절 기간에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룩 없는 떡이 무엇을 뜻하기에 이렇게 누룩을 없애라는 것입니까? 이미 하나님의 진노는 어린 양의 피로 넘어간 것입니다. 더 이상 심판과 진노가 피 아래에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룩을 제거하지 않으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유목민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공동체에서 추방된다는 것은 거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을 무교절에 철저하게 집안에서 내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애굽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피 아래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그들 가운데는 애굽의 사상과 의식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서도 조금만 어려우면 어디로 가자고 합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6:2-3절을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어려움을 당하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애굽에서 노예 생활할 때가 좋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노예로 살지언정 마실 것과 먹을 것이 풍부한 그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애굽의 종이 되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가 하는 정신이 바로 애굽의 누룩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애굽의 풍요와 안락한 삶을 얼마나 동경하였을까요? 이러한 누룩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무교절마다 누룩을 내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누룩만 없애는 것으로 다 되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문자적이고 외식적인 것입니다. 평소에는 누룩 넣은 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교절에 누룩이 없는 딱딱한 떡을 먹습니다. 그 때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묻을 것입니다.

 

아빠! 엄마! 다른 날은 누룩을 넣은 부드럽고 맛있는 떡을 먹는데 왜 무교절에는 이렇게 딱딱한 떡을 먹나요?’ 이 때 뭐라고 대답하여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때 우리가 어떻게 애굽에서 구원 받아 나왔는지를 전달하면서 애굽의 종살이와 그들의 사고방식에서 탈출하여 나왔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애굽 나라와 다른 다스림을 받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자적으로는 무교절은 지켰을지라도 그 내용면에서는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교절을 지키면서도 마음은 늘 애굽을 그리워 한 것입니다.

 

애굽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누룩임을 알고 버리라고 하신 것인데 오히려 그들은 애굽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보혈을 바르고 나왔는데도 그 보혈의 능력 안에서 참된 생명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한 것은 그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누룩을 제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무교절을 문자적으로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온통 누룩덩어리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6:5-12절을 보면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쌔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8:14-21절에도 보면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어떻게 알아들었습니까? 칠병이어로 4천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였는데 이 떡을 가지고 오지 않는 것으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누룩이라는 말을 듣고서 먹는 떡으로 알아들었는데,

 

예수님은 누룩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도 역시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 두 곳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얼마나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순종하는 지파인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만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무교절을 지키지 않았겠습니까? 참으로 철저하게 무교절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제일 많이 저주를 받은 집단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들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그렇게 잘 지키지만 너희의 속에는 누룩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릇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더럽다는 것입니다(23:25-26). 회칠한 무덤이라는 것입니다(23:27).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한데 밖으로는 종교적인 것들로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누룩입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노골적으로 현실적인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천사도 없고 내세도 없고 부활도 없다고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언제나 현실중심적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하는 자가 바로 헤롯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권세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잘 보여서 왕의 지위를 가지고자 하는 자입니다. 유대 땅에서 살면서도 늘 지향하는 것은 로마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누룩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교절의 누룩을 제거하라는 것이 단지 누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사상, 애굽의 가치관, 애굽의 사고방식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이스라엘의 쓴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교회 안에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린 양의 피의 순전한 능력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변질시키는 누룩들이 얼마나 많이 침투하여 들어오는지 모릅니다. 성도란 이미 거룩한 떡에 참여된 자입니다. 누룩 없는 떡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성도들을 변질시키는 누룩이 침투하여 들오는데도 왜 방치하고 있느냐며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1-8절을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지역은 여러 가지 성적인 타락이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방인도 하지 않는 일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자를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무교절에 누룩이 들어있는 떡을 먹으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끊어지듯이 그들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는 것입니다. 성도란 누룩 없는 한 덩어리의 거룩한 떡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왠 누룩이 들어와서 퍼지게 하도록 내어 버려두느냐고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누룩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합니다(7)

 

. 이 말씀에서 볼 때 결국 누룩을 내어버리는 것이 무엇을 드러내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희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안에도 수많은 누룩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이러한 누룩이 들어와서 우리의 신앙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피를 부정하게 여기도록 온갖 세상 누룩들이 들어오고 있음을 알고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교훈과 사상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무엇을 증거하는지를 모르고 율법 조항을 지키는 것만이 최고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지킴은 결국 자기들의 자랑과 자기들의 의가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기 자신들의 기쁨과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외식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얼마든지 이러한 형태가 나올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현실 중심적입니다. 기독교의 복이란 전부 영적인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아버지께서 악인이나 선인이나 다 동일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추구하는 바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이 아닙니다.

 

믿음의 내용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5:8절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온전한 희생이 누룩 없는 순전하고 진실한 떡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무교절을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곧 거룩하게 된 떡에 붙어 있음이 무교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하고, 그 보혈의 능력을 찬송하면서도, 무엇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그리워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 누룩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인해서 계속하여 쓴 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쓴 뿌리가 나오지 않도록 두려움으로 자신을 살피고 교회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4-17절을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특히 15절을 보면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주의하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교묘하게 들어오는 누룩과 쓴 뿌리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될까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룩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완전성을 자꾸만 흐리게 만드는 사상과 교훈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러한 누룩을 주의하고 날마다 그 은혜를 사모하면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12:2).

 

이것이 바로 진정 날마다 무교절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무교절의 참된 의미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온갖 거짓 사상과 교훈들을 버리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직 우리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무교절의 의미 /12:15-20/ 이건기목사

2019-10-31 02:05:27

 

기독교 복음은 불교와 같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뜬구름 잡는 식의, 선문답이 아니다. 복음은 명확하다.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따라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명확하게 증언해야 한다. (23)에는 7절기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절기라고 한다. 이 절기에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들어있다. 전 세계 여러 민족의 절기와,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는, 분명히 다르다. 이는 단순한 절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1. 이스라엘의 절기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제정했다. 그래서 다른 민족들의 절기와 구별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는 특징이 있다.

 

세계 민족들의 절기들은, 민족의 자긍심을 북돋우기 위해, 때로는 과장이나 미화를 곁들였다. 절기를 제정한 주체가 사람들이기에, 다른 민족들의 절기와는 달리,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는, 하나님이 친히 제정했다. 따라서 과장이나, 꾸밈, 조작이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 가운데 제정되었다.

 

사건과 절기의 순서가 다르다. 다른 민족의 절기는,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기념해서 절기가 생겼다. 191931일에 독립 만세를 외친 날을 3.1절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민족이 해방되고, 빛을 본 날이 되었기에, 815일이 ,광복절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들은, 그 순서가 다르다. 먼저 절기가 만들어지고, 그 절기에 맞추어서 사건이 발생했다. 절기가 먼저 제정된 뒤에, 사건이 발생했다. 최대 명절 유월절을 예로 들면, 하나님은 애굽 백성을 칠, 마지막 장자 재앙이 임할 날짜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12:1-3)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모세에게 유월절의 계획을 말씀했다. (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모세가 모든 장로에게, 유월절 계획을 전달하여, 그대로 지키도록 했다.

 

(4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죽음의 신이, 이스라엘의 집을 넘어가도록 계획하고, 이를 유월절로 미리 정했다. 그런 다음에, 그 절기에 맞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표가 된다.

 

이스라엘의 절기들은, 천지창조 넷째 날에, 만들어졌다. (1:14)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여기서 계절”(모아딤)이 절기를 말한다. 따라서 여호와의 절기가 제정되었고, 같은 날에 창조된, 해와 달과 별들이, 그것에 맞추어 운행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천지창조 전에, 여호와의 절기를 제정했고, 이에 맞추어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고 죽음,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무덤에 장사됨,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 칠칠절(오순절)은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역사로, 이방인의 구원을 시작하는데, 이미 이루어졌다.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나팔절은, 그리스도의 강림, 대속죄일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유대인의 회개,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이다. 절기 안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프로그램이 암호화 되었고, 예수님의 공생애도, 절기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은, 나중에 이루어질 것이다.

 

(23:5-6) “첫째 달 열 나흗날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열 닷샛날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이레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114)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15-21)까지는 여호와의 무교절이라고 했다. 유월절 다음 날인 15일부터, 7일 동안 지키는 절기가 무교절이다.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 첫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다. 이를 초실절이라 하며, 처음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절기다.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안식일 이튿날(116)이 된다. 따라서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즉 이 3절기는 하나로 묶을 수도 있고, 하나씩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2. 우리의 모든 죄악을 해결한 예수님(12:15).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집에서 모든 누룩을 제거하라(15).

 

무교절을 지키기 위해, 무교절 첫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집안에 있는 모든 누룩(소다, 이스트, 베이킹파우더, 빵가루 등)을 철저하게 제거해서, 보이지 않게 해야 했다. 램프를 밝혀가며, 누룩을 찾았다.

 

집안에 있는 모든 누룩을 찾아, 땅속 깊이 파묻고, 무교절을 하나님 앞에서 지켰다. (15-21)까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만 먹는 절기이다. 무교병(마쪼트), 문자 그대로 없을 무(), 삭힐 ()’, 떡 병() “누룩이 없는 떡을 먹는 절기.

 

이는 (마짜쯔) “(물을) 빼다, 흡수하다, 장례 지내다, 묻어두다.”의 의미에서 왔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예수님이 누룩과 같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하나도 남김없이 짊어지고, 땅속으로 장사됨을 통하여, 다 이루어졌다. 무교절은 예수님의 장사됨의 예언이다.

 

무교병을 먹으라(15).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교절 기간에는 무교병을 먹었다. 유월절 저녁부터,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기 때문에, 유월절과 무교절을 합친 이름으로 무교병의 절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평소에는 유교병”(누룩 섞인 떡)을 먹었는데, 이 절기만큼은 누룩 없는 무교병을, 7일 동안 먹어야 한다. 만약 이 기간에 유교병을 먹으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끊어진다. 유월절의 무교병은, 죄 없으신 예수의 몸을 말한다. (26:26)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생명의 떡이 되는, 예수님을 받아들어야 산다. 성도가 죄사함을 받으려면, 죄 없이 죽으신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도는 죄사함을 받은 자다.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아야 한다. 무교병은 3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졌는데, 그 중간조각은 둘로 나뉘어서, 그 절반은 자기 베개 아래에 숨긴다. 절반은 참석한,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다.

 

3조각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씀한다. 성자인 예수님이 몸이 찌어졌고, 예수님의 몸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탁에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다. 떼어서 먼저 숨긴 반 조각은, 주님의 죽음과 장사를 상징한다. 식사가 끝날 즈음, 다시 찾아서, 올려놓는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한다.

 

유월절 저녁부터 지키는 무교절(18).

 

첫째 달, 그 달 열 나흗날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유월절 저녁부터 지켜야 했다. 이 규례대로 유대인들은, 지금도 무교절을 금요일, 해 질 때부터 지키고 있다.

 

예수님은 유월절인, 금요일 해 질 때에, 죽을 것이 예언되어 있다. (12:6) “이 달 열 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예수님이 해질 때, 즉 해질 때 시간, 오후 6시에 운명하면, 안식일 법에 위배되기에, 장래를 치를 수 없다. 지난 다음날에, 장래를 치를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시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교절인 토요일에는, 무덤 속에 들어가야, 예언이 성취된다. 그러니까 사람의 시간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안식일은, 금요일 해 질 때부터, 다음 날인 토요일 해 질 때까지다.

 

만일 예수님이 해질 시간, 오후 6시에 운명한다면, 금요일 안에 장례를 치를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무교절 예언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다 이루어진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해서, 약속을 지켜주었다.

 

그래서 해질 시간을, 정오 12시로 만들어 버렸다. (27: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유대인의 시간 계산은, 해 뜰 때부터 아침 시간이 시작되고, 해 질 때부터, 저녁 시간이 시작된다. 따라서 육시는 12, 정오를 말하며, 구시는 오후 3시를 말한다.

 

어두움이 임하는 시간은, 12시이고, 운명한 시간은, 오후 3시다. (27:3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렇게 해서, 안식일이 오기까지는, 3시간의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리마대 요셉을 감동시켜서, 3시간 만에 장례를 마치게 한다.

 

(23:50-54)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급하게 무덤에 들어가, (12:34) ”그 백성이 발교 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분이다.

 

예수님은 예언대로,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고, 급하게 무교절에 무덤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이와 같이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했음을 믿어야 한다.

 

노동을 금하라(16).

 

너희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가 되리니, 너희는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자의 먹을 것만, 갖출 것이니라.”

 

무교절의 첫날과, 일곱째 날은 성회이니,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모여야 했다. 이 규례의 의미는, 죄사함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의 행위, 인간의 공로를 섞지 말라.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죄사함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영원한 규례임(17).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 날을 지킬지니라.”

 

이단들은 시대 시대마다, 구원의 방법이 다르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구원 방법은, 영원하다고 말씀한다. 절대 변할 수 없는 영원한 규례다. 그 효력은, 믿는 우리에게 영원하다.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 받았기에, 기쁨과 감격으로 신앙 고백하고,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예배를 드림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았기에, 감사의 예배드리며(10:18), 죄 사함을 받았기에,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한다. 무교절은 우리의 주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고, 무덤 속으로 들어감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속해 주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모든 죄와 허물을, 깨끗이 용서받은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의 죄 사함에 확신이 있어야,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빨리 성장하게 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받음은 변함이 없는, 영원한 규례()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가,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15171031, 비텐베르그 정문에, 로마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공박하는, 95개 조항의 공문을 써서 붙인 후에,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다락방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을 때, 환상 중에 마귀가 나타났다.

 

마귀의 손에는, 루터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들이, 낱낱이 적혀 있는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 종이를 보는 순간, 루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때 마귀는 너같이 더럽고, 죄 많은 놈이 무슨 종교개혁이냐? 깨끗하지도 못한 주제에, 소동을 일으키느냐?”라고 조롱하며 비방했다.

 

그 소리를 듣고 루터는, 너무 부끄럽고 용기가 꺾여, 힘없이 주저 않으려는데, 그때 성령님이 그에게 말씀을 주셨다.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말씀에 용기를 얻은 루터는, 손에 들은 잉크를 마귀에게 집어던지며 말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노라라고 선포하자, 마귀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도망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죄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큰 소리로 선포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담으로부터 전가되어 온 원죄와, 조상들의 죄와, 내 생애의 모든 죄는 완전히 용서받았다!” 할렐루야! 이제는 마귀와, 죄와 저주의 모든 세력은 끊어졌으므로, 믿음으로 생활하고, 누룩 없는 무교병처럼 순결한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무교병을 먹으라 /11:1- 12:51

2011-06-03 16:38:44

 

2011년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로 교회 표어를 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큰 틀은 성경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기록을 하였고, 부활하신 주님도 땅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나라 왕이 어떤 권세를 가지신 분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 왕이 가지신 권세에 대하여 먼저 말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말하는 출애굽기는 여호와의 강한 손을 말하였고, 신약의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말하는 마가복음은 하나님 아들의 죄사함의 권세를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게 임한 왕의 권세가 무엇인지 우리가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까지 이 권세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부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거를 할 때 필요한 새로운 주제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왕의 권세 다음으로 무엇을 복음의 내용에 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왕이 가진 권세 다음에 이어져야 할 내용은 왕이 백성에게 주시는 생명에 대하여 증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왕이 가진 권세는 자기만을 위한 권세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자기 권세를 나타냄은 자기를 따르는 백성에게 이 권세로 생명을 주고자 함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와의 강한 손이 나타남은 10재앙인데 그 중에서도 유월절 재앙이 가장 큰 손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에 대한 모세의 기록을 출애굽기가 말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그 힘과 위력에만 치우쳐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먹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먹음은 곧 생명을 말하는 것이니, 막강한 권세의 나타냄을 말하면서 동시에 생명을 주심에 대하여 매우 크게 나타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규례에는 어린 양의 고기를 먹는 것과 쓴 나물과 아울러 무교병을 먹으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세와 생명과의 관계는 어느 나라의 어느 왕이든지 항상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명박정권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이명박대통령 후보가 가진 권세가 무엇인지 말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의 권세로 나라 백성에게 주는 생명이 무엇인지 알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이명박정부는 747정책을 제시했습니다. 자기가 왕권을 잡으면 대한민국에게 이러한 생명을 주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입니다. 747정책은 10년 안에 대한민국이 7%의 경제성장을 이루어내고, 국민소득은 4만불을 달성하며, 세계 7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명박정부의 핵심정책입니다. 이것은 바로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이렇게 잘 살게 하겠다는 것이지요. 즉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처럼 현재의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자는 어느 누구든지 이런 목표를 제시하고 약속하여 왕권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현대의 왕이 제시하는 정책과 오늘 본문에 기록된 유월절과 무교절의 생명이 비슷한 의미라는 것을 알자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애굽을 파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면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먹는 백성으로 살게 하며 그 생명의 잔치가 무교절의 7일로 확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 먹음이 무교절의 7일로 확대되어 첫 날에도 성회요, 마지막 날에도 성회로 큰 잔치 가운데 생명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한 구원의 생명의 축제를 7일 동안 열고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이 무교절에는 유교병을 먹지 않아야 하며 집 안에 누룩이 발견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절기에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제거됩니다. 즉 이스라엘 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교병을 먹는다는 것은 이제 애굽의 바로 왕에게 속하여 먹었던 생명을 끝내고, 여호와께 속한 백성으로 먹는 생명을 누리며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보았던 것처럼 애굽 온 땅에는 죽음의 재앙이 내려졌으나 유월절에 이스라엘 자손은 어린 양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로 피를 바르고 새 생명으로 먹는 것을 누렸습니다. 이것은 성소적인 교제입니다. 일년 한 차례 대제사장이 피를 뿌려 지성소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 보좌 앞에서 누리는 교제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구원은 항상 가족공동체로써의 구원입니다. 중풍병자의 사건은 사실 중풍병자의 믿음은 전혀 말하지 않고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말합니다. 이런 것 자체가 새로운 가족 공동체로의 구원을 말하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구원은 어린 양 한 마리에 참여한 식구로써 먹고 마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모인 공동체가 주님의 몸을 이루는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에 많은 교회가 있다고 해서 이곳 저곳에 다니면서 아무 곳이나 예배를 드리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생각 자체가 개인구원의 개념으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한 몸의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구원의 공동체와 새출애굽의 구원의 공동체 모두 다 어린 양에 참여한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누렸던 가족공동체로써 먹음으로 구원의 생명입니다.

 

유월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출애굽 구원에 있어 새로운 일입니다. 이 유월절에 7일 동안의 무교절 축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7일이라 함은 당연히 안식일 교제를 뜻합니다.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사람이 동참하여 그 기쁨을 함께 누리는 날입니다. 유월절을 천지창조와 같이 하나님의 새 일을 이루심이라 본다면, 무교절은 안식일 교제로 즐거워하여 출애굽 구원에 이스라엘 백성이 무교병을 먹음으로 함께 참여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생명의 완성과 치료, 그리고 회복은 항상 7일 규례로 되어 있습니다. 나병환자가 최료가 되어 회복하면 이스라엘 진 중에 들어와야 하는데 7일 동안 진 밖에 머물렀다가 들어와야 합니다. 유출병이 있는 자도 이레 동안 기다렸다가 정결예식을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구원의 생명의 완성일일 뿐만 아니라 생명이 회복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들어오게 되는 정결규례에도 적용이 됩니다.

 

그러면 신약의 마가복음은 어떻게 복음을 믿으라고 하겠습니까? 지난 주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 아들에 대해서 말한 후에 다시 제자를 부르심이 마가복음 2:13-17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으로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러분에게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마가복음에서 제자 부르심이 나오게 되면 그건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는 것임을 알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심을 통하여 주님은 죄사함의 권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레위를 부르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셔서 잡수신 일입니다.

 

이렇게 레위 제자를 부르심과 그의 집에 들어가 식사하신 일을 말씀한 후에 3:12절까지는 주로 먹음에 대한 문제와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출애굽기에서 무교절이 먹음에 대하여 말하고 안식일 규례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금식에 대하여, 안식일에 들판의 이삭을 잘라 먹은 것에 대하여, 그리고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친 일을 말한 후에 3:7-12절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나왔다고 말합니다. 이런 내용은 출애굽기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중다한 잡족과 많은 가축들이 애굽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하는 내용과 서로 병행합니다.

 

이렇게 보면 마가복음의 금식과 들의 이삭을 먹은 일, 그리고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일은 서로 별개의 사건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아들이 자기 백성에게 어떤 생명을 주는 왕인지를 말하기 위하여 먹는 것과 안식일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주었던 안식일과 생명을 대비시켜서 하나님 아들이 주시는 안식일과 생명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차례대로 보십시다. 마가복음 2:18-22절에는 금식에 관한 문제를 말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고 있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물은 사건입니다. 여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구약 백성입니다. 이들이 금식함에 대한 적절한 모델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여호와의 보좌 앞에 나아간 일입니다. 이 날에 이스라엘 회중은 전체가 다 금식을 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뵙는 생명의 교제를 누림에 있어서 이스라엘 회중들은 자신들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제자들이 누리는 교제는 이와 다릅니다. 그것은 마치 혼인집의 신랑과 함께 하는 교제와 같습니다. 혼인잔치 가운데 신랑이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는 교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 아들과 누리는 교제는 옛 백성의 교제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새 시대의 생명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유월절이 이스라엘의 새 생명의 시작이었듯이,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새로운 생명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낡은 부대 안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가 없습니다. 즉 옛 생명의 교제로 금식함을 통하여 누리는 일은 이제 아들 안에 주시는 생명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죄의 권세 아래 금식함을 통하여 누리던 생명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아들로 말미암아 죽음을 이긴 새로운 생명의 교제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안식일에 들판의 이삭을 잘라 먹은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생명은 안식일에 성소에 진설된 떡을 먹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것을 먹음은 생명을 누림이었고, 성소 밖에 있는 것을 먹음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아들과 함께 하는 생명은 들의 이삭도 진설병처럼 거룩한 떡으로 함께 하는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소 안의 생명과 성소 밖의 생명으로 나뉘었던 구약적인 생명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된 생명으로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성소 밖도 거룩한 양식으로 주셨으니 그 생명을 더욱 온전케 하시고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히멜렉 제사장 때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성소 안에 있던 진설병을 먹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만 먹어야 했던 떡을 다윗도 먹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나타남이었습니다. 더 풍성한 은혜였습니다. 그런 것처럼 이제 들의 이삭도 안식의 떡으로 주시는 참 주인이 오셨습니다. 종이 주는 안식일의 생명은 성소 안에 진설된 떡만 줄 뿐이지만, 주인이 주는 안식일의 생명은 성소 밖에 있는 것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치셨습니다. 그 사람은 구약의 안식일에 한쪽 손이 마른 채로 있어야 했습니다. 안식일에도 흠이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교절에 누룩이 조금도 집에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룩과 무교병은 함께 있어서는 안됩니다. 누룩이 없는 무교병으로 무교절을 지켜야 합니다.

 

그와 같이 안식일의 주인이 오셨을 때는 부정하거나 흠이 있는 자가 남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에 자기 백성에게 죄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생명을 주시지 않습니다. 온전한 생명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마가복음은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새 시대의 온전한 안식일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복음을 믿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권세가 있는 왕이 온전한 안식과 생명을 주신다고 증거하시니 이제 큰 무리가 그를 따라 나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왕을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고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이명박대통령을 이 나라의 왕으로 세운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가 경제적인 대통령으로 자기를 내세웠고 그 경제의 왕됨을 747정책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투표하여 왕으로 받은 것입니다.

 

무교절에 7일 동안의 안식일의 교제로 생명을 누렸으나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십시다. 48-59절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 먹이신 후에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천명을 먹이신 표적을 보고 주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찾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내가 주는 떡과 모세가 광야에서 주었던 떡을 대비시켰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떡은 영생하는 생명을 주지만 모세가 준 떡은 죽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주심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먹었고, 광야에서 모세로 말미암아 하늘의 만나를 먹었던 유대인들은 이 새로운 떡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하신 말씀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만나와 반석에서 나는 물을 먹고 마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먹고 마심도 죽음을 이긴 생명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자기 몸으로 주시는 생명의 떡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혀 새로운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떡을 먹음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생명의 떡을 먹음으로 아들과 같은 생명을 누리는 것이며 이는 죽음을 이긴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날에 주님의 떡상에 앉아 있는 것에 대하여 너무 모릅니다. 성찬에 참여하여 떡을 떼는 것을 하나의 절차나 기념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죽음을 이긴 생명의 교제를 누리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늘의 생명을 누림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제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워렌 버핏이라고 하는 세계적 갑부를 아실 것입니다. 주식 투자의 귀재여서 엄청난 수익을 얻어 손꼽히는 갑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람이 매년 행사를 벌이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자기와 식사를 한 끼 하는 것을 경매에 붙이는 것입니다. 2010년에도 이 경매가 있었습니다. 이 경매가 우리 나라 돈으로 자그마치 33억 원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왜 이 식사 한 끼를 위하여 33억원의 돈을 치르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는 아마도 워렌 버핏의 갑부된 비결을 듣고자 함이라고 판단합니다. 즉 워렌 버핏이 가진 권세를 33억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고, 그 권세를 한 끼 식사를 통해서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식투자의 비법을 한 끼 식사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찾았던 일과 같은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이 너희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나를 찾아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와 무교절의 생명을 얻었어도 그건 썩을 양식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우리가, 여러분과 제가, 이 주님의 떡상에 앉아 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왜 주일에 이 자리에 나와 이 주님의 상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헌신하여 이 생명의 상에 앉아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주시는 생명의 떡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몸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워렌 버핏과의 식사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의 식사입니다. 워렌 버핏은 주식투자의 비법을 전수하겠지만, 우리 주님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생명, 곧 죽음을 이기신 생명을 전수하실 것입니다.

 

이 주님의 상에 앉아 먹고 마시는 것은 고난을 묵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죽음을 이기신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죽음을 이긴 생명을 누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주일에 주님의 상에 앉아 먹고 마시는 생명을 헐값으로 매도합니다. 33억원의 값만도 못한 아주 천한 값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신 왕 앞에서 주님의 얼굴을 뵙습니다. 그 왕과의 교제가 이 떡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생명의 교제입니다. 이 생명을 먹고 마시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갑부가 되려고 하는 목표가 아니라, 하늘의 기업을 상속하고 하늘에 속한 생명을 누리려 함이 목표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고 죽음의 권세를 밟고 승리하도록 이 생명의 교제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신 승리가 나의 것이 되도록 이 생명의 식탁을 오늘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오늘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언약 식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참 생명이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 하는 생명의 나타남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음행한 자가 있었을 때에 사도 바울은 교회를 누룩이 없는 새 유월절 떡 덩어리로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5:6-8절입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는 누룩이 없는 순전한 떡이 되었습니다. 이 곳에 묵은 누룩이 없어야 합니다.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 온전히 지켜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지혜있는 자가 많았습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는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개인의 문제였을 뿐 공동체를 위한 지혜와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져 나가는 일에 그들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 교회가 누룩이 없는 떡 덩어리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 지체 중에 누가 힘들어 하며, 어려우며, 심지어 타락의 길을 가는지 생각하고 염려하며 지켜내야 합니다. 그럴려고 이 떡상에 우리가 둘러 앉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에 연합된 어린 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요즘의 교회는 오히려 세상의 먹고 마심을, 썩을 양식을 위하여 살도록 예배를 조절해 주고 있습니다. 1부 예배라도 빠지지 말고 드리되 빨리 가서 생업을 위해 일하라고 만들어 준 것입니다. 조그만 일이 생겨도, 조그만 몸의 아픔만 있어도, 너무 쉽게 주님의 상을 거절하거나 참여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타당하게 여김으로 온 덩어리에 퍼지게 한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 속에서 저희 교회가 있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이 교회를 세우게 하셨는지 아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교절 축제가 아닌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축제로 예배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곳에서 참된 안식이 나타나 온전한 생명으로 회복되어 주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살게 되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있어야 할 존재이유입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축제로 이 주일의 삶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교회의 생명이 세상에 흘러 넘쳐 세상에 온전한 안식과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주일에 예배함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써 하늘과 땅의 권세를 얻어 죄와 죽음을 밟고 승리하는 권세 있는 생명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하늘 공동체가 되도록 함께 협력하기를 원합니다.

 

 

 

 

20161211일 청년부 예배 설교 2017년 계획을 세우기전에(2): 무교절

 

 - 신민근 목사 

 

본문: 출애굽기 12:15 20

 

Intro

 

지난 주 설교에서 2017년 계획을 세우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바라봐야 할 곳은 내가 이루고자 하는 미래가 아니라, 나의 과거라고 말했었다. 우리는 어디서 시작하였는지, 즉 우리의 시작점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시작점은 우리의 목적지를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기에 그렇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미혹 당할 수 있다. 우리의 눈, 우리의 코, 우리의 귀가 우리를 미혹한다. 처음에는 목적지를 향해 분명히 가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눈이 보이는 대로 우리의 코가 냄새를 맡는 대로, 우리의 귀가 듣는 대로 우리는 목적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처음에는 가나안을 향해서 갔지만, 가는 길에 화려한 풍습과 옷에 미혹당했고 맛있는 음식에 미혹당했으며 가나안 백성은 강대해서 우리가 이길 수 없다는 절망적 소리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혹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무언가 길을 잃었을 때, 목적지를 찾기 위해 돌아가야 할 곳은 우리의 시작점이다. 우리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시작하게 되었고, 어린양의 피는 우리가 들어가야 할 목적지가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입성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여러분의 2017년 계획은 여러분의 삶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에 초점이 있는가 아니면 재산증식, 스펙증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가? 이게 매년 새해마다 유월절 제사를 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셨다.

 

이러한 유월절 제사를 마친 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로부터 7일동안 무교병을 먹는 무교절을 행하라고 하신다. 유월절이 우리의 시작점을 나타내고 있다면, 무교절은 우리의 부르심을 나타내고 견고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여러분, 부르심 하면 많은 경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 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것도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 제 부르심이 무엇인가요? 라고 질문했을 때 너는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 하고 어디어디에 가서 있어야 한다.” 라고 거의 대답해 주지 않으신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하나님 제가 어떤 일을 하기 원하십니까 혹은 어디로 가기 원하십니까 란 선택길 가운데 질문을 한다면 여러분은 많은 경우,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2007, 대학을 졸업하고 아프리카와 러시아를 놓고 어디를 가야 할 까 하면서 기도하면서 고민한 적이 있었다. 2006년부터 6개월 가까이 매일 기도했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하겠지만 그 때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응답은 황당하게도 나는 너가 어디를 가든지 상관없단다였다. 하나님은 부르심은 내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는 것 보다 더 높은 개념의 것이었단 얘기다.

 

오늘 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스라엘아 너희의 부르심은 이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을 준비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비교적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한 절씩 보겠다. 15절을 내가 읽겠다.

 

Body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 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유월절 제사는 하루 만에 끝났었지만 무교절은 7일동안 지키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교절에 가장 먼저 할 것은 무교병을 먹는 것이었다. 무교병은 베이킹 파우더가 안들어간 밀가루 음식이다. 이것과 비슷한 음식이 참 크래커 란 과자 아나? 그런게 있고 또 우리나라 음식으로는 수제비가 있었다. 너희는 일주일동안 참크래커하고 수제비만 먹으면서 지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첫날부터 누룩을 집에서 제거하라고 하신다.

 

누룩은 지금으로 말하면 베이킹 파우더라고도 말할 수 있고 곰팡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금이야 먹는 곰팡이 먹지 못하는 곰팡이 나늬어져 있어서 베이킹 파우더, 이스트 술곰팡이 이렇게 나누어져 있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밀가루나 곡식을 보존하다 보면 곰팡이가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그렇게 해서 술이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빵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가지고 있던 누룩에서부터 자연적으로 생겨난 곰팡이까지 모두 제거하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7일 내내 청소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가벼운 무게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15절과 19절을 보니 누룩이 발견되어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먹은 자는 이스라엘서 끊어질 것이라고, 즉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하여 질것이라고 까지 말씀하시면서 누룩을 철저히 없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누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상징하기에 이렇게까지 철저히 없애라고 하시는가? 성경에서 누룩은 죄를 상징하기도 하고 또한 반대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기도 했었다. 마태복음 13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룩으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신다. 그리고 또 반대로 마태복음 166절에서 누룩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비유하신다. 그래서 누룩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를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비유에서 나오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누룩의 확장성이다. 곰팡이는 변기에서도 자랄 정도로 생명력이 질기고 또 아무리 조금만 있더라도 그 확장성은 굉장하다. 끊임없이 번식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살아있는 생명체에서까지 번식하는게 곰팡이다. 그러므로 누룩을 제거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삶에서 부정적인 방향에서의 조그만 곰팡이라도 아주 작은 곰팡이라도 남겨두지 말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왜냐? 16절에 그 이유가 나와있다. 16절을 내가 읽겠다.

 

너희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가 되리니 너희는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자의 먹을 것만 갖출 것이니라

 

이 무교절의 7일의 첫날과 마지막날에는 성회를 가지라고 써있다. 지금으로 보면 7일 부흥회라고 보면 된다. 첫날과 마지막 날에는 커다란 부흥회 말씀 사경회를 가지라는 말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써 있지 않지만 레위기 23장과 민수기 28장에 보면 무교절의 7일동안 내내 속죄제를 드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있다. 속죄제란 나와 하나님 관계 사이에서 해결하지 않은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의미로 속건제는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서 해결되지 못한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무교절 7일동안 첫날과 마지막 날을 성회로 말씀사경회를 가져라. 그리고 무교절 7일동안 너희는 너희와 하나님 관계 가운데 조금도 거리끼는 것이 있어서 안된다. 집에서 조금의 누룩도 허용하지 않고 청소하듯이, 무교절 7일동안 하나님 앞에 거리끼는 죄가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제물을 드려 속제죄를 드려라. 무교절 7일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재 정립하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주 조그마한 누룩이나 곰팡이가 음식에 남아 있다 할 지라도 그것은 엄청난 번식력을 지니고 곧 그 음식을 덮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아주 조그만 죄라 할 지라도 그 죄는 커다란 번식력과 확장력을 지녀서 곧 한 사람을 장악해 버린다. 그렇기에 7일동안 하나님은 속제죄란 문을 열어주셨던 것이다. 아주 작은 거리낌도 아주 작은 죄악일지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아뢰고 해결하도록 말이다. 첫날에 거룩한 성회로 마음을 열어 죄를 깨닫고 마지막 성회에 하나님의 용서에 감사하며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는 것, 이것이 무교절의 의미였다. 이것을 왜 새해에 시키셨는가? 왜 매년 새해마다 유대인들에게 지키도록, 만일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것이라고까지 엄격하게 말씀하셨는가? 바로 다음 구절인 17절에 이유가 나와있다. 17절을 내가 읽겠다.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 날을 지킬지니라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무교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다음 구절에 한글 성경에 빠진 한 단어가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이란 단어다. 그래서 정확히 읽는 다면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왜냐하면..” 이렇게 읽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라고 하시고 왜냐하면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물어보자.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끄집어 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군대가 있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으로 군대의 조직적인 반격으로 이집트에서 나왔는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군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실 때 군대 라고 부르셨다. ! 저는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는 그냥 농부인데요? 상관없다. 이제부터 너는 하나님의 군대의 군사다. ! 저는 어린아이인데요? 상관없다. 너는 하나님의 군사다. 저는 젖먹이는 애 엄마에 불과한대요? 상관없다. 너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군사다.

 

여러분, 성경에서 나오는 부르심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심을 주실때 우리의 의견을 묻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부르심을 주실 때, 여러분에게 물어보지 않으신다. 그냥 주어질 뿐이다.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지금부터 약 3500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실 때에도 동일했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이 노예였었다. 나이가 어리건 많았건 여자건 남자건간에 모두 노예였었다. 군사 훈련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들을 부를 때, 하나님의 군대 라고 부르셨다. 부르심이 주어진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출애굽기 19장에 다시 한번 나온다. 196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 아론을 제외하고 하나님께 제사지내는 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집트 신들에게 드리는 방법은 많이 봤겠지만 하나님께는 어떻게 드리는 지 아무도 몰랐다. 출애굽기 19장은 아직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다. 나이가 어리건, 많건, 성별이 여자건 남자건, 심지어 노예건 자유인이건 상관없었다. 이들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버렸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능력, 은사, 상황에 상관없이 전 세계 모든 나라와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제사장이 된 것이다. 부르심이 주어진 것이다.

 

7일간의 무교절 동안 집안의 모든 누룩을 없애고 7일내내 속죄제를 드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그 어떠한 죄도 남겨두지 말라고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가나안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데 그들은 여호와의 군대의 모습으로 가게 될 것이다. 군대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군대로서 여호와를 대적하는 존재들과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훈련소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받는 게 훈련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잘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조직적으로 집단적으로 죽일 수 있는가를 훈련 받게 되고 그것에 필요한 무기들을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된다. 총이면 총, 대포면 대포, 탱크면 탱크 말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군대의 싸움은 우리가 훈련소에 받는 것 처럼 그러한 물리적 싸움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집트 왕이 홍해 앞에서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 했을 때, 전쟁은 하나님 혼자 하셨다. 불기둥으로 이집트 군대를 막으시고 홍해를 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신 뒤, 이집트 군대를 처리하셨다. 또한 광야에서 치뤄진 많은 전쟁들도, 그리고 여리고성을 점령하는 전쟁에서도 대부분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셨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버려둔 전쟁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함을 지키는 싸움터였다. 민수기 25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머물면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 이 여자들이 자신들과 동침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모압의 신에게 제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 했느냐, 민수기 252절에 보니 이렇게 써있다. “백성들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이 때 하나님은 막지 않으셨다. 물리적인 전쟁터에서 하나님은 군사력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열세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앞장서셔서 압도적인 힘으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군사들을 물리쳐주셨다. 그러나 거룩함을 지키는 전쟁터, 미혹과 유혹 가운데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미혹에 넘어갈 것인가 의 순간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맡기셨다. 왜냐하면 여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심의 장소, 그들의 전쟁터였기 때문이었다.

 

여러분, 죄는 놀라운 확장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한번 했으면 이 거짓말을 지키기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된다. 야동을 한번 봤으면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에 중독이 되어버린다. 도둑질도,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 미워해봐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미워진다. 내 머릿속에서 그 사람을 미워해야 하고 죽여야 할 이유가 수백가지 더 생겨난다. 이것을 이겨내려면 단 하나의 방법 밖에 없다. 바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곁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죄로부터 멀어진다. (반대로 하나님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죄와 가까워진다.) 바로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첫 해의 7일동안 철저한 속죄제와 성회로 하나님과 자신들을 가로막는 것들을 제거하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심은 바로 거룩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여러분 주어지는 것과 동시에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거룩해 진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거룩하게 살도록 하나님께 명령받는다. 로마서를 보면 1장부터 11장까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 거룩함을 설명한다면 12장부터 16장 전반부 까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살면서 지켜나가야 할 거룩함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 우리는 부르심을 생각할 때 특정한 일을 하고 특정한 장소에 가서 한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가는 것을 보통 생각한다. 이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 모세의 부르심은 이스라엘 백성의 리더였고 다윗의 부르심은 이스라엘의 왕 역할을 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도 모세나 다윗이 하나님 제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라고 물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대신에 그들은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거룩함을 지켜나갔다. 모세는 바로를 만나라는 하나님의 말도 안돼는 말씀을 지켜 행하였다.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으신 자를 함부로 죽이지 말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심지어 그가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죽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지켜 나갔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삶을 살다 보니 어느 새 왕이 되있었서 왕의 역할을 했던 것이고 리더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질문에 하나님은 대부분 대답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님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할 때 우리의 선택을 뛰어넘으셔서 일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렇다.

 

그러나 여기, 우리가 반드시 치뤄야할 전쟁터가 있다. 그것은 거룩함의 전쟁터, 우리 마음속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일상에서 매일 치뤄지는 전쟁터이다. 여러분, 사단은 여러분이 실패하도록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을 유혹하는 장면을 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최고의 부, 최고의 자리를 약속하지 않는가? 그것을 줄 테니 거룩함을 버리라고 하나님을 버리라고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을 유혹하는 방법대로 우리도 유혹한다. 최고의 것을 줄 테니 거룩함을 버리라는, 하나님을 버리라는 유혹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사단이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번 한 번만이야.” 혹은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것인데 뭐.” 혹은 너 이미 중독되었잖아?” 혹은 너가 성공하려면 이렇게 해야만 해. 다들 이렇게 하는데 너만 그렇게 주일날 교회에 봉사하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뒤쳐질껄?” 혹은 넌 이미 되돌아가기에 늦었어..”

 

이것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은 새해 첫 주간을 무교절로 보내며 성회로 속죄제로 보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거리끼는 것이 있는가? 나오라는 것이다. 다 나오라는 것이다.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하고 다시 한번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고 부르시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교회의 유일한 힘은,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힘은 바로 거룩함이다. 여러분은 세상 가운데 성공하기 위해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니라 승리하기 위해 부르심 받았다. 성공했다 할 지라도 거룩함을 잃어버렸다면, 내 중심 가운데 하나님이 없고 내 삶 가운데 말씀과 현실이 타협되었다면 그것은 구원을 이루지 못한 삶이다. 실패한 삶이다. 저주 받은 삶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실패한 것 처럼 보인다 할 지라도 거룩함을 지켜냈다면 내 중심에 하나님이 있으며 내 삶의 중심에 말씀이 버티고 있다면 그것은 승리한 삶이다. 복받은 삶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67절과 8절에 보니 이렇게 써있다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라고 되어있다.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나온 가장 무서운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

 

여러분 이제 2017년이 시작한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무엇을 거두고 싶은가? 거룩함인가 아니면 거룩함이 없어도 내 욕구에 대한 만족인가? 심은대로 거둘 것이다. 심은대로.

 

여러분 권면한다. 2017년이 시작하기 전, 하나님께 먼저 나아가라.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거리끼는 모든 것들을 예수님 앞에 토해내라. 그리고 거룩함을 회복하라. 여러분, 스스로가 알지 않은가? 내가 어디서 거룩함이 무너지는지. 지난 주에 얘기했지만 죄에는 패턴이 있다. 그 사람, 그 장소, 그 시간, 그 상황에서 죄를 짓는 다는 말이다. 이것을 끊어버려라.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패턴을 만들 수 있다. 기도하는 장소, 기도하는 시간, 말씀드는 장소, 말씀 읽는 시간을 만들어서 여러분 삶에서 패턴화 시켜라. 여러분 심은대로 거둘 것이다. 그러니 제발 2017년에는 좋은 것을 심어라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기원한다. 찬양하고 기도하자.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