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문 모음/요한일서 설교 모음

요한일서 4장 7절 이하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2. 1.
728x90
반응형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벧후1:5-7, 요일4:7-16

2022-07-09 10:26:58

 

신성한 성품 (벧후1:5-7)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사랑이라는 단어가 우리말에는 한 단어로 표현되지만 헬라어는 4가지로 다르게 표현이 됩니다.

 

*에로스: 연인간의 사랑

*스톨게: 가족간의 사랑

*필리아: 우정적인 사랑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

 

누구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19,8~9)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어떻게 사랑하셨을까요

 

1) 독생자를 보내주신 사랑입니다(9)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우리를 살리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3:16)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아 주신 사랑입니다(10)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화목제가 필요했습니다. 구약의 짐승의 제사로는 온전한 제사가 되지 못하여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셔서 우리 죄를 간과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자녀삼아 주셨습니다

 

 

3) 성령을 보내주신 사랑입니다(13)

 

(요일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인간은 연약합니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불기둥.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염려, 근심, 불평이 변하여 감사가 되게 하십니다.

 

 

2.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15)

 

(요일4:15)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1)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시인하는 것은 생명을 거는 것이고, 시인하려면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입술로만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손님을 가정에 영접하였다는 것은 그 분과 교제하고 대화하고 섬겨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홀로 버려두는 것은 영접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인한 사람은 그분과 기도로 대화 하고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 받들어 순종해야 합니다.

 

 

2) 그 사랑을 알고 믿고 더욱 의지하는 것입니다(16)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반항만 한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101가지 작은이야기'라는 책에 나온 글을 소개합니다.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한 소녀가 어느 날 밤 화재로 할머니를 잃고 불길 속에 갇혀 있고 이웃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만 있을 때 한 남자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소녀를 구하고 사라졌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소녀에게는 소녀를 돌봐줄 일가 친척이 아무도 없었습다.

마을에서는 누가 소녀를 돌볼 것인가를 두고 회의가 열렸는데 아이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교사, 넓은 농장이 있는 자연 속에서 건강하고 안정되게 키울수 있다는 농부, 소녀에게 필요한 모든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는 부자가 소녀를 돌보겠다고 나섰지만 소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때 회의장 뒤쪽에서 한 남자가 앞으로 걸어나와서 두 팔을 내밀었는데 그의 두 손과 팔은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이 분이 바로 저를 구해주신 분이세요!"

소녀는 자신을 불구덩이에서 구해준 그 남자를 단번에 알아보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나갔습니다.

 

 

3)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5:3)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22:37~37)

 

베다니마을의 마리아는 값비싼을 향유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께 부어드렸는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한 일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서든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3.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합니다(11~12)

 

(요일4:11-12)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 서로사랑하는 것은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일4:20-21)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2) 말로도 사랑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25:35-36)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25:40)~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마음 속에는 근본적으로 사랑이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내용입니다

 

구두장인인 세묜이 하나님에게 벌을 받고 세상에 온 천사 미하일을 돌보는 사건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미하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세 가지 문제에 대한 답을 얻어야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가지 문제는

 

1.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2.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입니다.

 

하늘에서 쫓겨나 알몸으로 교회 앞에 쓰러져 있는 미하일에게 구두수선공이 다가왔습니다. 미하일은 세묜의 첫인상을 보고 '저런 사람이 날 어떻게 도와줄까'라고 낙심했으나 예상과 달리 세묜은 돌아와서 자신을 구해줬고, 그의 아내도 처음엔 무작정 화를 냈지만 세묜의 말을 듣고 화를 푸는 것을 보고 미카엘은

 

1.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부자가 찾아와서 거드럼을 피우며 1년을 신어도 망가지지 않을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셰묜의 조수로 일하던 미하일은 슬리퍼를 만들었습니다. 셰묜은 크게 당황했지만 곧이어 그 부자의 하인이 달려와서 죽은 사람이 신을 슬리퍼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것을 보고 이 부자는 자기가 오늘 죽는 걸 모르니,

 

 

2.사람에겐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모두 잃어 죽을 것이라고 걱정했던 쌍둥이자매가 마음씨 좋은 마을 사람들과 양부모인 이웃 부부의 손에서 잘 자란 것을 보고 3.'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로 자라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 사랑을 아는 자는 어떤 사랑을 나눌까? /요일4:7-21/ 조정의목사

2021-09-01 09:48:00

 

성경에서 사랑 장을 찾으라고 하면 대부분 고린도전서 13장을 꼽는다. 하지만 사랑이 언급된 횟수를 고려하면 오늘 본문이 진짜 사랑 장이다(15구절, 27번 언급).

 

본문은 사랑이란 말을 많이 할 뿐만 아니라 진짜 사랑의 출처를 밝힌다. 바로 참 사랑이신 하나님이다. 많은 유행가가 사랑을 노래하고, 많은 시인과 작가가 사랑을 그려내지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거나 감정 중심적인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에 목말라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영원히 만족시킬 참 사랑의 출처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어떻게?

 

참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요한은 그분을 보니 은혜(신적 사랑)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고백했다(1:14).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는 우리는 그분이 나타내신 하나님의 참 진리 그리고 참 사랑을 아는 자다.

 

그런데 본문은 참 사랑을 아는 자마다 보이는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서로 사랑). 우리가 나누는 사랑은 참 사랑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기준이다. 또 하나님과 누리는 영생의 사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방편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당신이 나누는 사랑의 진실함을 검증하여 주시길 구한다.

 

1. 참 사랑의 출처(7-8)

 

사랑하는 자들아.” 사도는 주가 사랑하신 그리고 장로로서 자신이 돌보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 부르며, 사랑을 권면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우리가 서로 실천해야 할 일이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현재형) 순종해야 할 명령이다(요일 2:7-11; 3:13-24). 21절을 보면 요한은 이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주께 받았다고 말했다(13:34; 15:12).

 

그런데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세상이 정의하는 사랑과 다르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물론 모든 종류의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맞다(일반은혜에 따른 자녀 사랑, 부부 사랑, 불쌍한 이웃 사랑 등).

 

하지만 요한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참 사랑에 주목한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 나누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고(거듭나고), 하나님과 친밀한 앎, 친밀한 사귐을 누리는 자에게 공통으로 발견되는 사랑, 곧 하나님께 속한 참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8). 하나님은 사랑이신데(본성), 하나님께 속한 그 사랑,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사랑이 그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과 예전부터 관계가 없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호스가 수도에서 끊어진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나름 종교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 중에서 유독 사랑이 부족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오래 참지 못한다. 쉽게 화내고 거칠게 말하며 배려하지 않고 항상 자기 유익만 구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이 봐도 사랑 없는 자로 보인다. 이들을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 사귐이 있는 자로 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2. 참 사랑의 시작(9-11)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곧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다고 말한다(9). 여기서 첫째, 우리가 받은 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둘째, 우리가 서로 나눌 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참 사랑의 크기를 헤아려 보자. 9절과 10절은 유사한 내용을 두 번 진술하는 것 같지만 강조점이 각각 다르다.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9).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뿐인 유일한 아들을 말한다. 하나뿐인 아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뿐인 자녀를 희생시킬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일반은혜로 우리는 부모 사랑의 크기를 안다. 그래서 자녀를 내어준 사랑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정말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후 요한은 하나님의 참 사랑의 시작을 바라본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가 열렬히 그분을 사모하고 찾아서 그 대가로 사랑을 베푸신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원수, 죄인이었다(5:10).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수로 행하던 그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의인도 선인도 아니고, 원수를 위해 자기 독자를 죽기까지 내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5:7-8).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2:1),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관계를 영원히 회복시켜 자녀로 삼기 위해 당신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시작하신 참 사랑, 우리가 계속해서 받고 있는 참 사랑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누리는 사귐의 시작은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하나님과 우리가 지금 누리는 사귐도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누릴 영생의 사귐도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시작하신 그 참 사랑을 영원히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

 

그러면 두 번째로 우리는 서로 어떤 사랑을 나눠야 할까?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요구하셨다(13:34).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필요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기희생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을 베푸사 우리의 필요를 채우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다른 이의 필요를 보고, 먼저 찾아가 자기희생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을 베풀어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을 해야 한다(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참 사랑은 우리 안에 부어져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특히 형제자매)에게 흘러가야 한다. 그것이 참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자, 그분과 사귐을 갖는 자에게 마땅하다.

 

3. 참 사랑의 성취(12-18)

 

어떤 이들은 당위성만 가지고 설득이 안 된다. 그들에겐 보상(약속)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참 사랑은 신자의 의무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이런 축복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12)

 

12절은 요한복음 118절을 차용한 것 같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면 이제 세상에 하나님을 누가 어떻게 나타내는가? 요한이 말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참 사랑, 하나님을 더욱 또렷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 그 관계 안에서 온전히완벽하게가 아니라 계속해서 성취됨으로나타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5).

 

둘째, 성령께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알게 하신다(13)

 

하나님이 정말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알고 싶다면,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13절에 말하는 것처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완료형)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5:22).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사랑을 맺으면 맺을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으로 보증하시는 성령을 통해 더욱 확신한다(1:13; 4:30).

 

셋째, 우리의 믿음이 산 믿음임을 증명한다(14-16)

 

14-15절은 사도 요한을 비롯한 증인들이 보고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요한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라고 말했다(14).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는 자, 그분과 서로 사귐을 누리는 자는 반드시 사도들의 증언, 가르침을 믿고 시인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5).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사도들이 보고 증언한 세상의 구원자, 통치자,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고 시인하지 않으면 엉뚱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사도가 증언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이 참된 것을 무엇이 증명하는가? 단순히 바른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게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그의 믿음이 정말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인 것을 무엇이 확증하는가?(2:26)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16). 참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거하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 안에 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주신 하나님의 참 진리뿐만 아니라 참 사랑을 알고 믿고 그 사랑 안에 거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를 향한 자기 믿음이 지식에 머무는 죽은 믿음인지 산 믿음인지 알고 싶어 한다. 여기에 답이 있다. 참 사랑을 서로 나누는 것이 당신이 사랑의 하나님 안에 거하는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넷째,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한다(17-18)

 

모든 것을 환하게 아시고(심지어 속마음까지) 내 입에서 나온 말과 행한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신 분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을 기다리는 기분이 어떤가?

 

만일 두렵다면 그것은 형벌 때문이다.“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18). 그러면 심판 날에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을 가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다. 물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그 행위를 내세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3:18). 예수님의 행위가 하나님 장부에 적힌 모든 죄의 빚을 해결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참 증거가 서로 사랑임을 앞에서 살펴봤다. 그래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17).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아버지 하나님께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가신 것이 아니라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셨다.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셨기 때문이다(15:10). 우리도 그러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두려움이 없고 심판 날에 오히려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18).

 

4. 참 사랑의 적용(19-21)

 

서로 사랑할 때 이처럼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에 실패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점점 알 수 없게 되며, 우리 믿음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엔 심판 날에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된다. 영생을 가지고 있으면서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삶을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서로에게 실천해야 한다. 먼저 잊지 말라. 우리 사랑의 출처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 하나님에 대한 사랑, 성도에 대한 사랑 모두 참 사랑이신 하나님에게서 공급받는 힘으로 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은 쉬운데, 성도 사랑은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성경은 돌직구를 던진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말이 거짓말),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20). 칼빈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기 눈앞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시할 때 그것은 거짓 자랑이다라고 말했다(좁스, 233p).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더 쉬운 것을 못 하면서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사칙연산 못 하면서 미적분 풀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21). 그것이 주님의 계명이다. 예수님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한 것/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25:40, 45).

 

몇 가지 구체적인 적용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2:4)

 

세상은 갈수록 지독한 개인주의로 변해간다. 말세의 특징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딤후 3:2). 하나님 사랑의 특징은 자기희생 그리고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이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라. 자신과 가족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각각 다른 사람들의 유익도 추구하라.

 

둘째,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요일 5:16)

 

첫째가 주는 사랑이었다면 두 번째는 구원하는 사랑’, ‘보호하는 사랑이다. 성도가 주님 사랑 안에 거하는 일에서 멀어지고 있다면, 세상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면, 진리를 점점 떠나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보호하고 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가인처럼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불평할 수 없다.

 

셋째, 날마다 참 사랑을 채우라(요일 3:1-2)

 

우리가 나누는 사랑의 힘은 참 사랑을 알고 거하는 데서 나온다. 그 사랑에 감격하는 자만이, 그 사랑으로 채워져 성도에게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 사랑을 채우라. 하나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라.

 

 

 

사랑: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요구 /요일4:7-13/ 김병삼목사

2020-03-11 01:26:08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 .

우리의 신앙인 기독교의 권위는 무엇일까요?

권위주위권위는 서로 다릅니다. 권위주의는 없어져야 하지만 권위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문제는, 권위는 사라지고 권위주의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교회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때, 교회는 비로소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가장 강력한 권위인 사랑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7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일서 47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자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권위는 없습니다. 교회와 강단에서 선포되는 가장 강력한 것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형석 교수가 쓴 왜 우리에게 기독교가 필요한가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김형석 교수의 지인 중에 숙명여대 교수를 거처 차관을 지낸 분이 늘 하는 우스갯소리라고 합니다.

난 세상에서 아무도 무섭지 않은데 다만 우리 어머니한테는 꼼짝 못해. 어머니는 마땅치 않은 것이 있으면 가만 계시다가 , 이녀석아, 내가 너를 낳았다. 할 말이 있느냐?’하고 말씀하시거든

그 친구 어머니의 말이 바로 사랑의 권위입니다. ‘내가 너를 낳아서 길렀다하는 사랑의 권위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 장이라고 부릅니다. 이 장은 아마 사도 바울이 목회자로서 목양을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깨닫게 된 진리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무섭게 변질 될 수 있는지, 사랑이 없는 소망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를 교회 공동체를 통해 경험한 듯합니다.

 

믿음도 중요하고 소망도 중요하고 사랑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의 덕목은 모두 사랑안에서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죠.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몸을 내어줘 불사르게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사랑이 중요할까요? 사랑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좋은 것도 사랑이 없으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소망을 붙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때로는 그것을 위해 싸우기도 하지요. 그런데 사랑은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그 사랑이 어떤 정의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싸워서 한쪽만 남지만, 사랑은 둘이 함께 남는 것이니까요.

 

부부간에 서로 옳다고 싸우다 갈라지지 않습니까? 형제간에도 서로 옳다고 주장하다 얼굴을 보지 않고 사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정의는 자기 생각에 옳은 것을 주장하며 나의 편을 만들려고 하지만,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내가 그 사람 편이 되어주는 것이죠. ‘정의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정의밖에 보이지 않지만, ‘사랑의 눈으로 보면 내가 보지 못하던 것들도 보게 됩니다.

 

언젠가 예배 시간에 이런 실험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종이 하나에 점을 찍고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보이나요?” 사람들은 모두 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역시 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종이에서 점은 참 작은 부분인데, 그 점을 보느라 나머지 여백은 보이지 않는 것이죠. 사랑은 그 종이가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해 말씀을 준비하면서 묵상 팀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런 주제였죠.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는 가족들과의 관계였습니다. ‘사랑이 가장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곳은 세계적인 이슈나 정치적 이해관계 같은 것들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였습니다.

 

* 한 권사님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줄을 서있을 때, 갑자기 밀어닥친 사람으로 인해 화가 났답니다. 그런데 그런 무례한 사람에게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믿으니 억울하고 손해 볼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멋진 다리 근육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걸어서 올라갑니다.

 

* 한 분은 남편이 교회를 다니지 않던 시절, 일방적인 인내와 희생이 강요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같이 교회를 다니지 않을 때는 싸워서 내가 이기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먼저 예수를 믿게 되니 남편을 위해 참아야지라고 생각하는 때가 많아졌습니다.

지금 함께 기도하고 신앙생활하고 기도하는 남편과 가족을 보며 그것이 주님의 방법 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 한 장로님은 미션스쿨인 고등학교에서 김장환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청년시절에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결혼하면서 처가의 인도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는 아주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시켜서 아니면 식이었답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부모님 댁에 가면 늘 제사가 문제였고, 명절 때마다 절을 하지 않고 가족들 옆에 앉아 있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답니다. 어느 날, 제사를 지낸 후 산소에 가게 되었을 때, 절을 하고 싶지 않아서 가지 않겠다고 말해 부모님과 얼굴을 붉히는 상황이 된 것이죠.

 

하지만 장로님 부부는 집으로 가지 않고 부모님 댁으로 가 음식을 준비하고 부모님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모님은 깜짝 놀라시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니? 이게 예수 믿는 힘이니? 나도 좀 이 신앙을 알아봐야겠다.” 하시더니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셨습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봅니다. 옳고 그름으로 싸우거나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쟁취하려는 정의보다는 사랑의 힘이 훨씬 크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 사랑이 가진 능력은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 10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410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의를 따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조금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요구 사랑

C.S.루이스 교수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에로스에 의해 태어나고 스토르게에 의해 양육되고 필리아에 의하여 성숙하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완성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요구라고 잡은 이유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지 간에, 우리 모두는 이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이 사랑의 요구라는 것은 아주 특별합니다.

 

본문 요한일서 47-8절을 보세요.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압니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요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속에 하나님이 거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C. 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사랑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랑은 오직 한 가지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아가페라는 말인데, 요한일서에는 아가파오라는 동사만 28, ‘아가페라는 명사만 18회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아가페라는 말은, ‘주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조건을 뛰어 넘는 사랑, 철저하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입니다.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어느 부흥사 목사님의 이야기가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에 소개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두 분이 만났습니다. 한 목사님은 아들이 다섯이고 다른 목사님은 딸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대화를 하다가 딸만 있는 목사님이 친구 목사님에게,

 

자네는 아들이 다섯이나 되니까 하나는 내게 양자로 주지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이 무심결에 그러지 뭐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사모님께 얼마나 야단을 맞았을까요?

그래도 이 분이 워낙 의리파라서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다섯 중에 누구를 양자로 주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아들들이 잠들어 있는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곤히 자고 있는 아들 다섯을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어떤 아이를 양자로 줄까? 장남, 장남은 안 되지. 상속자인데 어떻게 다른 집에 주나?’ 그래서 첫째 아들은 제처 놓고 둘째 아들을 봅니다.

 

이 녀석은 다서 아들 중에서 제일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인데 안 되지그래서 셋째 아들을 보았습니다.

이 녀석은 나를 쏙 빼닮았어. 제일 미남이고. 셋째는 도무지 안 되겠어

이제 넷째를 보았습니다.

이 녀석은 병치레를 자주 하고 너무너무 불쌍해. 이 녀석을 줄 수는 없지

이제 마지막 막내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귀여운 막내를 어떻게 줄 수가 있나

한 아들도 주기 어려운 마음을 확인하고 난 그 날, 그 목사님은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 . ”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순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자격과 관계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할 만한 조건이나 관계를 요구하셨다면, 우리들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시기 바로 전, 제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절 말씀.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인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조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성령을 통해 우리들에게 알려 주셨고,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는 사랑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11-12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런데 이 마땅한 사랑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이사 심방을 갔다 특이한 이사 이유를 듣게 된 적이 있습니다. 앞집에 사는 사람이 크리스천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양보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었는데, 그 일이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파트 1층에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교패가 문에 붙어 있는 것이었답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이 지나가다 문에 붙은 교패를 보게 되는데, 과연 그 사람들이 우리집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염려와 고민 가운데 살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게 삶을 힘들게 한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우연히 동부코오롱 아파트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답니다. 그런데 만나교회를 아주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더니 주일이 되면 주변의 길이 막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 무엇인데?” 거기에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고 어쨌든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을 하더랍니다.

 

만나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억울한 일일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이런 인상을 가지는데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자신이 교회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사랑받는 다는 느낌을 받기보다는 그들로 인해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자면 서로에게 참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억울해도 할 수 없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 . .

자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면,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를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면, 그 신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10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아들을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주심으로, 우리가 어떤 존재임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오래 전 제가 만나교회에서 학생부를 지도하던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오늘 말씀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수련회를 가면 늘 말썽부리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몽둥이를 들고 군기 반장 역할을 했는데, 그래도 그 친구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쓴 작전입니다. 가장 말썽 부리는 친구 하나를 밤늦게 불러내서는 라면을 끓여 줬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캠핑 가서 밤에 끓여먹는 라면이 얼마나 맛있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라면을 먹고 난 후에, 그 말썽쟁이 학생에게 비밀은 꼭 지켜야해!”라고 속삭이는 것이죠.

 

하룻밤 사이 몇 명을 이렇게 불러냈습니다.

다음날이 되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말썽쟁이가 그렇게 쉽게 달라지겠습니까?

떠들고 장난을 칩니다. 그 때 저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눈을 찡긋합니다.

우리끼리 비밀이 있지?’ 라는 표시로 말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순한 양이 되어 버립니다. 자기 자신이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말을 듣도록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들과 나사이에 특별한 비밀을 만드는 것이죠. 특별한 일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저 라면 하나 끓여준 것만으로도 특별함이 생기고 삶을 교정하는 동력이 되는 데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은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아십니까?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나누어 보겠습니다.

 

미국에서 한 의사가 중동의 왕자를 수술하게 되었답니다. 어려운 수술이었기에 이 돈이 많은 왕자는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결과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왕자를 수슬한 의사는 왕자에게 얼마의 수술비를 받을까 고민했답니다.

그래서 친구와 의논을 하게 되었는데 한 1.000불 쯤 받으려 한다고 말하니까,

 

어떤 이는 수당까지 합쳐서 5000불은 받아야 적당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중동의 왕자가 부자이기에 5만 달러를 받아도 된다고 하더랍니다.

고민을 하던 의사가 자기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의논을 했더니, 목사님이 이르기를 중동 왕실의 왕자들은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합니다.

 

그들은 신분을 아주 중요시 생각하지요. 그러니까 액수를 적은 청구서를 보내지 마시고, 빈 청구서에다 왕자님의 신분에 합당하게 지불하시기를 바람이라고 적어서 보내십시오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대로 했더니, 왕자가 75천 달러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의사는 너무나 흥분해서 이 사실을 전화로 목사님에게 알렸답니다. 목사님도 물론 축하 해줬고요.

그런데 그 주말에 의사에게 목사님이 쓴 편지가 배달되었는데 감사헌금 봉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짧은 글이 적힌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형제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에 합당하도록 감사헌금을 내십시오라고 적혀 있더랍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신분인지를 안다면, 그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으로 행동이 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이 마땅한 이유는, 그 사랑을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권위는 그 사랑을 받은 확신 가운데 살아가면서 생기는 것입니다.

 

마땅한 일에는 수고가 따른다.

이제 오늘의 말씀 중에 11절 말씀을 주목해 보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411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1. Dear friends, since God so loved us, we also ought to love one another. (NIV)

 

NIV 성경의 표현 “We ought to love”‘must'보다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의무의 차원에서 말씀하셨다면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천하는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기 싫은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정의 내려 볼 수 있지요.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하며 데살로니가전서 13절에서

그대들에게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첫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표현하는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상대방을 당신보다 더 중요한 사람처럼 대접해 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주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수고가 필요한 일입니다.

요즘 저는 목회를 시작하고 가장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많이 생겨서가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만들었기 때문이죠.

 

지난해 아들과 딸이 다 결혼하고 난 후 혹시 아내에게 우울증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가능하면 밥을 같이 먹으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외부 약속도 많이 줄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둘이서만 외식 하는 시간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거의 매일 삼시세끼를 같이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많이 염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부부간에 큰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고 말이죠. 그런데 둘이 같이 식사를 하다 보니 밥을 할 때도, 밥을 먹고 치울 때도 내가 뭘 도와줄지 찾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둘이 있는 시간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작은 마음 하나가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될까?”

 

혹시 여러분들 중에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당신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낫게 여긴 경험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요한일서 413)라고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마음의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순간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 사랑의 중매자이십니다. 이 사랑의 중매자로 인해서 우리는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교인들을 너무나 몰라요. 글쎄 목사님이 보는 데서는 열심히 봉사하는데, 누가 보지 않으면 절대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말입니다.

 

글쎄,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이지 못할 텐데, 그 분은 그렇게 사랑의 수고를 하지 않고 마음이 평안할까요? 사람이 보는데서 그렇게 했다고 과연 사랑의 열매가 맺혀질까요?

 

사랑의 열매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음으로, 우리 육체의 소욕과 인간의 욕심이 꺾일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장례식에 가면 고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오는 도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어떤 목사로 기억할까?”

열심히 일한 사람, 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목회에 성공한 사람. . .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듣고 싶은 소리가 있다면, “우리 목사님은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셨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 장,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고린도전서 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강하게 와 닿는지 모릅니다.

다른 어떤 평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일을 했다 할지라도, 내가 사랑하지 못하는 한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사역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nothing"입니다.

존 오트버그(John Ortberg)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로 모든 가치의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 - 매춘부, 세금 징수원, 종교적으로 모자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열렬히 받아들였다. . .

그들(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려 하지 않았고, 간음한 여인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으며, 죄인의 의로운 자와 교제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으로 보게 되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른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세요. 수고한다는 것은 나의 욕망과 나의 방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에게 쉬운 방식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사랑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럽인지 미국인지 드넓은 초원이 있는 어떤 마을에, 진한 갈색의 멋진 종마가 풀을 뜯고 있다. 그 곁에는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고, 그 종마를 사랑하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멀리 출타하면서 소년에게 말을 부탁했다.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그 멋진 종마를 사랑하고, 또 그 말이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그 종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주어진 것에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종마가 병이 났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밖에 없었다.

 

눈물겨운 간호의 보람 없이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다리를 절게 되어버렸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그 말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후 말한다.

"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

 

스토킹(stalking)도 사랑의 한 단면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올바른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세족식이죠. 이 본문을 가지고 옥한음 목사님이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 내용 중에 저에게 아주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을 때, 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발을 닦을 때,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섬김의 방식입니다. 세수 대야에 물을 담을 때, 차가운 얼음물이나 80도가 넘는 물을 담아오면 발을 담근 사람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누군가의 발을 닦는데 물이 없이 맨 손으로 발을 닦으려 한다면 얼마나 뻑뻑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 사랑의 요구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이 마땅한 일을 위한 수고가 시작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방식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능력으로 온전하여 질 것입니다 /요일4:7-21/ 김병삼목사

2018-04-14 06:09:41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신앙에는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사실을 아는 것이죠. 하지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거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죄 사함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에 찾아오는 것은 기쁨입니다. 그래서 처음 은혜를 받으면 한없이 기쁘고 감격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쁨은 우리 삶에서 체험하는 기적과 풍성함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알지 못합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서 왜 요한 1서가 나중 순서에 오게 되었을까?”를 그냥 상상해 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알아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요? 진정한 사랑을 알고 깨닫고 행하게 되면, 깊고, 아픈 사랑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밤중에 아파트에 불이 났습니다. 잠에서 깬 엄마가 갓난 아들을 구하기 위해 이불에 싸서 안고 불길을 헤치며 나왔습니다. 다행히 아들은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전신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목숨은 건졌으나 얼굴과 온몸에 징그러운 흔적이 남았습니다. 아들은 성장하면서 엄마의 일그러진 얼굴이 싫었습니다.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고 엄마가 학교를 찾아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들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엄마가 아들을 불러 앉히고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불 속에서 아들을 구했으나 엄마는 화상을 입어 추한 모습이 되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눈물이 아들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아들은 엄마를 붙들고 통곡했습니다. 진작 말해 주지 그랬느냐고, 그랬으면 엄마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엄마가 아들에게 그 사실을 숨겨온 것은 다만 아들이 마음에 부담을 갖지 않고 밝게 자라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철이 들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해할 나이가 되었으므로 자초지종을 말해 준 것입니다. 아마도 그 날 이후로 이 아들은 엄마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나에게 기쁘고 즐거운 일인가, 아니면 무거운 짐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이 시간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시작부터 끝까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지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명확하게 확인하고 있죠.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 10절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그런데 이 말이 영어 성경에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말하는 부분입니다.

‘This is love’

그리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사랑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해야 하고, 그 사랑을 이해하려면,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강력한 것은,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 사랑을 말해도 가짜라고 말하는 시대에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랑이 가짜인 것은, ‘if’ 혹은 ‘because of’ 아니면, ‘in spite of’의 사랑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의심이 많고, 손해 보기를 싫어하는 우리가 가장 많이 품는 마음이죠. ‘제가 사랑한다면나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 마음에는 사랑에 대한 상처가 많습니다. 나는 사랑했는데 그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으로 인해, 사랑을 확인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겠다는 방어적인 태도입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유가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예쁘니까사랑한다고 말하죠. 그러면 그 예쁜 것이 사라지면 사랑도 끝나게 될 것입니다.

결혼할 대상을 찾을 때도 돈이 있으니까사랑을 시작하면 돈이 없어지면 그 사랑도 끝나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의 사랑을 가리켜 흔히 부모의 사랑이라고 말하죠. 그런데 그런 부모의 사랑이 실패로 끝나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녀들이 빗나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런데도 한없이 사랑하는데,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며 그 사랑의 결과를 얻으려는 조건들 때문에 또 하나의 이기적인 사랑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죠.

 

이런 가짜 사랑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중세시대 프랑스의 수도사였던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책에서 사랑의 단계를 넷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이기심으로 인해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장 원초적인 사랑의 단계입니다.

 

둘째,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만,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필요와 욕구가 채워지면 금방 식는 사랑입니다.

 

셋째 단계에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기쁘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넷째 단계에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잘 이해하기 힘들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 말씀 10절에서 말씀하는 사랑이 바로 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을 생각하니 나 자신이 너무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나를 사랑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죠.

 

조금 현학적인 말 같이 들리겠지만, ‘나를 사랑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겠죠.

베르나르가 묵상했던 글들이 우리 찬송가에 세 개가 있습니다.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

262장 날 구원하신 예수님입니다.

 

그 중에 85장 가사를 볼까요?

1.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4.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주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5.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로부터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서로 사랑함이 마땅합니다.

11절 말씀과 연관해 생각해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 됩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을까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소중한 존재로 느껴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나에 대한 존엄성(dignity)이 없는데, 어떻게 존엄한 행동이 나올 수 있을까요?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더 쉬워지는 것 같습니다.

교만과 자존감의 차이 같은 것입니다.

교만이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발로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자존감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신에 대한 신앙적 고백에서 나오는 것이죠.

 

교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만, 건강한 자존감은 하나님을 드러내고 누군가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자신을 자랑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고 듣는 우리가 불편하다면 교만혹은 자랑질하는 것이고,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듣는 우리의 마음도 기쁘다면 틀림없이 자존감으로 인한 신앙의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 영어로는 ‘ought to love’를 쓰고 있습니다.

조금 더 묵상하며 생각해 보세요. 조금은 비장하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무감이 단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사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목회와 신학]이라는 잡지에 오늘 본문으로 한 최석원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나는 1920년대 후반 매사추세츠주의 법정에서 일어났던 재미있는 사건에 대해 읽은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건은 부둣가를 거닐던 사람이 그만 로프에 걸려 차갑고 깊은 바다 속에 빠진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허우적대면서 도와달라고 소리치다가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그는 헤엄을 칠 수도 없었고 물 위에 오래 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멀리서 그의 외치는 소리를 들었지만 구하러 오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미터도 못 되는 거리에 젊은이 한 사람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이 와주세요, 난 헤엄칠 수 없어요! 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영에도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그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익사자의 가족은 그토록 무관심한 것에 분노한 나머지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판결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가족이 패소하고 만 것입니다. 약간 거리낌이 있었지만, 법정은 부둣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어떠한 법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무관심을 불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것이라고 말하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사랑을 의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초해 본다면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나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 맞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관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특징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절대로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보이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사랑하면 보이는 것이 있고, ‘보여지는 것이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이런 뜻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볼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보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김선주 목사가 쓴 [목사 사용 설명서]라는 책에 보면, 목회 현장에서 깨달은 소소한 이야기들이 정갈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 번은 교회에서 송이버섯을 잘 따는 권사님 한 분이 목사님에게 송이버섯 많이 나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곳 물항 계곡의 사람들이 능이와 송이버섯만 따서 보름 동안 천만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알려준 장소란 특정한 곳이 아니라, 어디 어디 봉우리, 어디 어디 골짜기였다고 합니다. 평생 산을 타며 산 사람이야 알겠지만, 목사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래도 그 권사님이 섭섭해할까 봐 버섯을 따려는 목적을 가지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답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을 번득이며 지팡이 끝으로 버섯이 있을 만한 곳을 찔러봤지만, 버섯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랍니다.

 

급기야 버섯을 포기하고, 목적을 버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아니 진작에 불고 있던 바람을 이제야 느끼게 되었습니다.

 

능이와 송이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주변의 많은 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도토리나무, 심지어 바위틈에 기생하는 이끼류 하나까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또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독버섯, 독버섯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이라는 인간의 수식어를 버리면 세상에 아름다운 버섯이 참 많습니다. 돈 되는 버섯, 먹을 수 있는 버섯이라는 이기적인 목적을 버리면 독버섯마저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주 흥미롭게 글을 보았습니다.

그렇구나! 우리가 보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리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니 사랑의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우리가 이기적이니 그렇게 이기적인 일들만 보이는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런 의미이겠구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목적을 가지고 보면 하나님이 그저 우리 삶의 수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겠구나!’

내 목적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결국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욕심으로 가득 찬 우리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모습에서 전혀 하나님의 모습을 세상이 보지 못하는 이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 사도가 참으로 안타까웠던 것이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성경을 묵상하니, 바로 전에 있는 11절이 더욱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하는 자들아! 아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묵상하며 다시 역으로 10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계속해서 반복되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반복할 때는 뭔가를 강조하기 위함이지요.

바로 사랑을 강조하고, 그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사랑이 여기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갑자기 그런 광고가 떠오르는군요. 제가 삼성에 대한 이야기도 설교시간에 했으니 애플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런 카피가 있습니다.

아이폰이 아니라는 건, 아이폰이 아니라는 것

애플이 자사 제품에 대한 대단한 우월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선전하는 것이죠.

아이폰이 스마트 폰의 대명사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스마트 폰을 사용해도 그것이 아이폰이 아니면, 아이폰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드웨어는 그럴듯하게 만들어 선전할 수 있지만, 진짜 아이폰은 아이폰이 가지고 있는 본질에 있다는 말입니다.

아이폰이 아니라는 건 아예폰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구요.

 

온전한 사랑이란

오늘 말씀의 결론적인 부분이 될 것 같습니다. 세상에 참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것은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귀한 것은 조건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땅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두 개의 온전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18절을 보겠습니다.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문맥상으로 볼 때, 17절의 말씀은 16절의 결과고, 18절은 17절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온전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데, 그 담대함으로 인해 두려움이 물러납니다.

 

다시 설명한다면,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우리 안에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증거요,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성락 성결교회 지형은 목사님이 아주 흥미로운 설교를 했습니다.

두 개의 16이라는 제목인데, 요한복음 316절과 요한 1416절의 말씀을 가지고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말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요한복음 316절은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 말씀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구원에 대한 질문했을 때, 대답해 주신 내용입니다. ,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더니,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거한다는 말은 산다는 말입니다. 16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중심 단어입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에 들어갔다면, ‘삶으로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화를 말하는 것이죠. 우리가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는 최종적인 목적은 칭의를 넘어서 성화로 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소망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믿음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믿음은 있으나 두려움 가운데 소망을 붙들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

 

그 사랑이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로마서 82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모든 것이 선을 이룸을 믿는 우리에게 어떻게 두려움이 거할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이 찾아올 수는 있으나, 그 두려움이 우리 안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아주 멋진 표현을 하나 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사랑의 소비자인 동시에 사랑의 생산자다!”

칭의와 성화가 소비와 생간의 관계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 삶을 허락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인생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삶을 바라보는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사건중심으로 삶을 볼 수도 있고 과정중심으로 인생을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자에게는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삶을 좌우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들은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의 하나님의 인도해 가시는 과정에서 해석되고 고백됩니다. 사건으로 인해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가운데 소망을 보게 되는 것이죠. 결국, 믿음과 소망이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주 명쾌한 신앙의 공식이 완성됩니다.

 

김영봉 교수가 쓴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라는 책에 보면, 사랑과 두려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사랑과 두려움은 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뭔가 짝이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호스피스 사역을 시작한 엘리바제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ebler-Ross)와 데이빗 케슬러(David Kessler)<인생수업>(Life Lessons)이라는 책에서 이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그 뿌리에서 두 개의 감정에 닿아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행복, 만족, 평안 그리고 기쁨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을 캐어 들어가면 그 뿌리가 사랑에 닿아 있고, 반면 분노, 증오, 근심, 가책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뿌리를 캐어 들어가면 두려움에 닿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사랑 혹은 두려움, 둘 중 어느 하나가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느낄 때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사랑이 사라지면 두려움이 자리를 잡습니다. 마치 빛이 없는 곳에 어둠이 들어차듯, 사랑이 떠나 없는 곳에 두려움이 임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완전한 사랑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사랑이 두려움을 이긴다는 것을 수긍하기가 힘들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사랑과 두려움은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순간 두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에 의심이 생기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오늘 말씀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을 사도 요한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습니다. 19절부터 21절의 말씀입니다.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우리의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그 완전한 사랑 안에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의지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의지의 한계를 벗어나면 그 사랑도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거한다는 증거는, 우리의 의지를 넘어서는 사랑이 형제 사랑으로 나타날 때입니다. 그때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들이 사랑해지는순간에 우리가 알게 됩니다.

 

 

 

천국을 바라보면 사랑을 갈망하게 됩니다 /요일4:17-21/ 유기성 목사

2016-08-24 11:42:53

 

대만 제자훈련 세미나에서 만난 중국인 목사님들, 처음 만났는데도 그렇게 사랑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서로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훈련 섬김이로 가셨던 교우들도 대만교회 교인들과 서로 연합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나 흐뭇하였습니다. 사랑은 성도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처음 교회에 오신 새가족이 주일에 교회에 오셨는데, 처음이라 두리번 거리자 안내하시는 교인 한 분이어떻게 오셨어요?”하고 묻더랍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돌더랍니다. 안내하시는 분은 그런 의도가 없었겠지만 참 센스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왔는데 어떻게 오셨냐니요?

 

이처럼 처음에는 서먹하던 교인들 사이가 친해지게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사랑하게 되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이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하나님처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사랑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17절에서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부어주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도 하나님 처럼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완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누가 가르셨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누가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으며, 누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으며, 누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까?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분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만드실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밥을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안하신 것이 아니라 못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기를 갈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우리가 사랑하도록 하실 수 있지만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우리가 사랑하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처럼 사랑하기를 밥먹는 것 보다 더 갈망하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기 때문에 갈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죽을 때 가서야 깨닫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리 가르쳐주셨습니다, 죽을 때 가서 깨달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생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산 자는 심판 날에 담대하다고 했습니다. 영생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절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있으니,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두려워서 심판 날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죽고 난 다음 어떤 처지에 빠질지 주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부자의 죄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특별한 죄가 나오지 않습니다. 날마다 잔치하고 산 것이 죄입니까? 부자의 죄는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자에게도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까? 그에게도 사랑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나 형제는 사랑했지만, 집 앞에서 굶어 죽어가는 나사로에게는 사랑이 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자의 죄였습니다. 여러분,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에는 분명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썼습니다.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런데 이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 구별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 길이 열렸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혈통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런데 요한 서신에서는 믿음을 사랑으로 바꾸었습니다.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것은 거짓말쟁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누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말만 믿는다고 했지 실제로는 믿지 않는 자입니다.

 

20...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믿음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증거, 곧 사랑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기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2절에서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믿음이라 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믿고 영접하여야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오셔서, 그의 삶을 바꾸셨다는 증거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도 의견 대립이 있을 수 있고 화를 낼 수 있고,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자신이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미움의 영은 사탄입니다.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베드로는 사도 바울로부터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이 일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명예에 심각한 손상을 입는 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도 바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랑하였습니다.

 

벧후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하나님처럼 사랑하여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18절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완전한 사랑이란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증거가 있으니 세상에서 좋은 것 다 빼앗기고 바보 소리를 들어도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 온갖 것을 다 가지고 누려도 마음이 불안합니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어떤 교우들은 죽을 때 편안하게 죽고 싶다고 기도부탁을 하시지만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두렵기만 하고 가슴이 뛰어서 견딜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평생 편안하게 잘 살았으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정이나 교회에서나 옳고 그른 것도 살펴야 하지만 사랑을 놓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단기 선교 여행을 가는 것을 부모가 반대합니다. 그래서 부모와 싸웠습니다.

 

선교회장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상식에 어긋났습니다. 그래서 회장과 다투었습니다.

 

세례냐, 침례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다가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언제나 사랑이 제일이며, 싸우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권사 취임예배를 하고 곧 장로 취임을 하지만 성도들 중에 봉사 열심히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못해도 교회 중직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21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237-40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2절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하나님처럼 사랑이 얼마나 중요하지 말씀하고 있는데도 왜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희미할까요? 천국, 지옥, 심판에 대하여 듣기만 했지 자신의 현실 문제라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바라보면 누구나 사랑만 하게 됩니다. 미워하고 원수맺고 싸우고 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싸이어에서 선교사로 평생을 사역하신 헬렌 로스비어 선교사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출신의 여의사입니다. 그는 선교지에서 일어난 반란 때 반란군에게 겁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그곳에 남아서 미워해도 모자랄 그들을 위하여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희생]이라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강사가 된 그녀의 얼굴은 보는 이들마다 천사를 연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전히 하나님처럼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 걱정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걱정이 왠 말입니까? 오히려 이기적인 여러분을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하실 주 예수님에게 기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사랑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해 달라는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면 반드시 주님이 사랑하게 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31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하시고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말씀하셨습니다.

 

철저히 이기적인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The Passion of Christ] 영상 한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이 영상을 처음 보는 분들은 충격을 받고 회개하며 또 감사하며 변화된 삶을 살아야겠다, 결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여러번 이 영상을 본 분들은 또 저 영상을 보여주시네.’ 하실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받아도 시간이 지나가면 다 흐릿해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 십자가 복음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도 다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면 달라집니다.

 

1만 달란트(5-6조원) 탕감받은 자가 어떻게 1백 데나리온(천만원)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할 수 있습니까? 탕감받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영상으로 보는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바라본다면 어떻겠습니까?

 

17절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사신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영상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바라보시는 장면을 기억해 보십시오. 정말 예수님을 그렇게 바라본다면 어찌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사건은 과거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매 순간 순간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을 24 시간 바라보는 자는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미움과 판단이 계속하여 일어납니다. 저절로 사랑만 하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중에만, 예수님 안에 거하는 중에만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천국과 지옥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살고 싶은 갈망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처럼 사랑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사랑하게 해 달라고 구하지도 않는 너무나 위험한 모험을 이제는 중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축복의 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담대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해 주시는 주 예수님이 왕이심을 고백하며 24 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라! /요일4:7-16/ 유기성 목사

2016-08-24 11:37:48

 

이스라엘 선교사님 한 분이 예루살렘 안에 있는 세 그룹의 기독교인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 아랍인 기독인, 외국인 기독교인이 있는데, 최근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놀랍게 늘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도 많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 오실 때가 가까왔다고 흥분하는데, 선교사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 부류의 기독교인들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믿고도 여전히 유대인, 아랍인 따지는 것은 그들이 진정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교인 수가 늘었다고 기뻐할 일만은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나야 진정 부흥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사랑으로 소문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진짜 예수 믿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7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권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누구나 이 말씀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 약간 주춤하게 됩니다.

 

8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사랑하자는 말과 분명 다른 느낌입니다. 12절 말씀에 이르면 숨이 막힙니다.

 

12...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도 요한이 말하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라고 명령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해야지결심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게 되어야 진짜입니다.

 

이것을 사랑의 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없기에 주님이 임하셔서 사랑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사랑의 부흥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두 집 살림을 하던 남편이 회개하고, 본 부인과 화합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이런 일이 이혼이 급증하던 미국에서 일어난다면 하고 부러워했을 정도였습니다. 참 성실하다고 믿었던 하인들이 숨겨 놓았던 죄를 회개하였고, 그 주인과 가족들은 그를 용서하였습니다.

 

한 부인은 자신의 음행을 회개하기도 했습니다. 사회하던 선교사가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남편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울면서 그 아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니 그 아내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매정하게 대한 것을 회개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미워하고 원망했던 일을 고백하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자 교회가 초만원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조롱하러 구경왔던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회개하였습니다.

 

1900년대 초 중국과 한국의 선교사로 일했던 요나단 고우포스선교사에 의하여 전해진 당시 일화들입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신유와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때,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가 사랑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16...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능력을 받았다고 교만하고 비판하고 욕심을 부리고 분열을 일삼는다면 잘못된 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9-10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 그 독생자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한 제물로 삼았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사랑이 아닙니다. 불같은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음식만 삼켜도 온 몸을 뒤틀면서 안절부절 못하는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신 사람이 어찌 이기적이고 냉정하고 무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사랑의 불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폭포수같은 사랑이란 표현에 거칠게 거부감을 표하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 아래 어디에 그런 사랑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자신은하나님의 폭포수같은 사랑을 받은 기억이 없다. 정말 그렇다면 말만하지 말고 느끼게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지만 은근히 부인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습니다. 얼굴을 보면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의 얼굴이 아닌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며 십자가 복음을 듣고도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영원히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하나님도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공부 잘하고, 착하고 열심히 충성하여 하나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이 종아하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더 좌절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환상 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습니다. 그 날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것이 저를 영원히 사랑하기로 결단하였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마음이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 열등감 때문에 몸부림칠 때, 고ㄹ니도전서 127-29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약한 자, 미련한 자, 멸시받고, 없고, 비천한 자를 택하여 지혜로운 자,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3일 동안 믿지 못하다가, 이 말씀은 무조건 믿어야 할 복음을 깨닫고 성경책을 끌어 안고제가 믿겠습니다.”하고 고백하는 순간 통곡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믿음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확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제는 십자가 복음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체험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2절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13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며 사는데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 한분이 너무 너무 좋아하는 자매에게 프로포즈를 하였는데, 자매 쪽에서 반응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결심을 했습니다. 하루에 한번씩 편지를 쓰자 그래서 하루에 한 번씩 사랑의 고백 편지를 썼어요. 그런데도 반응이 없자 형제는 하루에 세 번 편지를 쓰자 그래서 하루에 세 번씩을 러브레터를 써서 보냈습니다. 드디어 이 자매가 감동을 받고 결혼을 했는데 편지 배달한 사람과 결혼 했답니다. 자꾸 만나다 보니 정이 든 것입니다.

 

사랑은 이론이나 교리로 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만나고 교제하고 동행하니 누려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신 주 예수님을 믿으면 사랑해야 한다가 아니라 사랑하게 됩니다.

 

요한 사도 자신이 그 증인입니다. 그는 세상 욕망과 거친 성격으로 성격이 불같아서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요한 밖에 계셨던 주님이 성령으로 그의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회개할 것이 아니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오랜 여행을 하고 오셨는데 선물이 없다면 딸들이 회개할까요? 선물을 찾을까요? 찾을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내겐 그 사랑이 없지? 왜 사랑을 주시지 않나요?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대답하기가 힘이 드십니까? 그래서 사랑의 불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없어서 회개할 것이 있다면 사랑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소중함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돈을 구하고 건강을 구하고. 은사를 구했지 사랑은 구하지 않았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모르고, 그런 것들을 자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사랑이 없는 가장 큰 이유요 회개할 제목입니다. , 건강, 성공, 은사 보다 사랑이 더 큰 은혜요 축복인 줄 알면 반드시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김흥섭 판사에게 어느 날 젊은 부부가 성격이 맞지 않아 이혼을 신청하러 왔습니다. 이들은 아이 부양 문제와 재산 보상 문제로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때 김 판사는 이 아이를 누가 책임질 것이요? 하였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이에게 '너는 누구하고 살기를 원하느냐?' 물었습니다. 그때 아빠의 손과 엄마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 판사는 재판 일정을 한 달 연기하기로 하고 성경 한권을 사주면서, 고린도전서 l3장을 하루에 세 번 이상 한달 동안 1OO번을 읽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이 집에 돌아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후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욕심을 회개하고서 이혼 소송을 취소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면 주님은 우리가 사랑하며 살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사모님이 부엌을 엉망진창으로 해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사모님이 돌아 오시자, 다짜고짜 독하게 다구쳤답니다. 가만있는 사모님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당신은 오늘 딸이 소풍가는 날인 줄 아시기나 하셨어요? 새벽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바빠서, 미처 치우지도 못하고 기도회가 있어 갔기로서니 그럴 수가 있어요? 다른 집 남편들은 이럴 땐 치워 주기도 한다던데.”

 

궁지에 몰린 목사님은 온 집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답니다.“그래도 그렇지. 당신이 뭐 잘했다고 말대꾸야!”

 

그 때 교회 집사님이 찾아와서 몸이 아프니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에 방에 들어와 가슴만 답답하더랍니다.‘이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까? 아내는 무엇이라고 할까?’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나갔더니, 기다리던 집사님이 가버렸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죄인의 심정으로 그 집사님 집으로 심방을 갔답니다.

 

목사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을 하실 수 없으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월남전에 참가했다가 귀국한 한 장교가 배 위에서 항구에 인산인해를 이룬 군인 가족들을 보고 아내를 어떻게 찾나하고 고심했답니다. 아내는 손수건을 흔들기로 약속했는데 모두 다 손수건을 흔들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배 위에서 둘러보니 그 많은 사람 중에 손수건을 흔드는 아내의 모습이 한 눈에 척 들어오더랍니다.

 

오늘 하나님의 눈에는 누가 가장 뜨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는 자입니다.

 

얼마 전 한 자매를 만났는데나의 가장 기뻐하는 자이다.’하는 주님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누구도 사랑스러워 하지 않을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그의 마음에 나의 사랑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의 사정에 대하여 들어보았습니다.

 

그 자매는 너무나 어려운 형편에서 태어나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삶 때문에 그 마음 중심에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고 뜨거웠습니다.정말 하나님께서 약한 자 미련한자 멸시받는 자를 택하여 쓰심을 알았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사랑의 부흥을 구합시다! 그리고 순종만 할 뿐입니다.

 

 

사랑의 열매/요일4:7-12/ 이동원목사

2014-11-29 12:30:56

 

홍수가 나면 제일 흔한 것 제일 눈 에 띄는 것 많이 볼수 있는 것이 물 이죠 온 천지가 물입니다. 그러나 그때 가장 귀한 것은 아직도 물입니 다. 마실 물이죠 오늘 우리는 사랑 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TV를 켜도 또 뮤직 앨범을 들어도 또 영화를 가보아도 이 사랑 이라는 주제가 넘쳐흐르고 있는 세 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웃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아직도 사랑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왜 그럴 까요?

 

사람들은 아직도 진정한 사 랑, 참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약 성경이 쓰 여지던 그 당시에는 소위 희랍문화 권 안에서는 로마그릭 그리스 로마 문화권 안에서 그 사랑을 뜻하는 여 러가지 그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예 를 들어서 에로스라든지 휠리아 스 토르게이런 사랑을 뜻하는 여러 개 의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 경이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 에로스 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쓰여지지 않습니다. 휠리아는 좀 나오구요 스 토르게는 가끔 나옵니다.

 

아 참된 사랑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싶어하는 그 사랑 그 사랑을 표현하 기 위해서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그 당시에 사장되어 있던 단어 사람들 이 보편적으로 쓰지않던 죽어 있었 던 사어라고 할 수 있었던 단어 하 나를 끄집어 냅니다. 그래서 그 단 어를 재생시켰습니다.

 

그 단어가 바 로 아가페라는 단어 입니다. 아가페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요한 일 서에 보시면 아가페라는 단어가 동 사로 동사형 아가파오라는 단어로 28번 또 명사로 18번이나 등장합니 다.

 

아가페 사랑은 한 마디로 말하 면 주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조건 을 넘어서는 사랑, 타산이 없는 따 지지 않는 사랑, 철저하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할 때 상대방 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 이것이 아가 페적 사랑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예 수 믿고 구원 받았을 때 우리는 모 두 이 사랑을 접한 것 입니다. 처음 으로 가장 순결하고 가장 고귀한 그 런 사랑을 우리는 체험하게 된 것이 죠. 그런데 우리가 경험했던 이 사 랑은 그냥 정지된 사랑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은 우리 안에서 계 속 자라가야 합니다.

 

그 사랑이 우 리의 인격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에 보시면 성령 의 열매는. 하고 제일 먼저 강조 된 것이 뭡니까? 사랑이죠 근데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바로 아가페 입 니다. 아가페 자 우리가 이 가을 우 리가 맺어야할 사랑의 열매에 대해 서 우리가 좀 생각을 해 보고 싶습 니다.

 

왜 우리는 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어떻게 우리는 열 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장 그러 면 사실 고린도 전서13장 보다도 더 위대한 사랑장이 바로 요한 일서4장 인데 오늘 요한 일서 4장을 통해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싶어요 자 우리는 왜 이 사랑의 열매를 맺 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 첫째 대답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 이시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자 본문의 8절을 같 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8절 읽어요 시작!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 님을 알지 못 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 이심이라 여기 하나님이 뭐라 그랬어요?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 랑이시다 GOD is Love 사랑은 하 나님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의 속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하실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하시는 유일한 일 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자 생각을 해 보세요 하나님은 왜 우주를 창조 하셨습니까? 그가 사랑 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인격적 관계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이 만 물을 지으시고 그리고 만물 가운데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창조의 사건이 발생한 것 입 니다. 구원의 사건, 구속의 사건도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사랑의 관계 를 하나님과 온전히 회복할 수 있도 록 구원의 사건을, 십자가의 사건을 주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 입니다.

 

구원 사랑하시기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 입니다. 심판도 저는 사랑 때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사랑 하는 세계, 사랑하는 대상 안에서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하 나님은 심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밑바탕에서 도 그분의 사랑의 의지를 읽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천국을 준비하신 하 나님 왜 그럴까요? 사랑하시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성취하지 못 한 꿈, 미완성의 꿈, 혹은 깨어진 꿈, 이런 상처와 갈등을 경험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 상은 너무 불공평 한거야 세상은 정 의가 살아 있지 못하다고 우리가 탓 하는 경우들도 종종 있습니다

. 이 세상 뿐 이라면 이런 불평은 이런 원망은 타당한 것 처럼 들려집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꿈이 온전 히 이루어질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 의 공의가 완전히 만족될 수 있는 영원한 세상을 준비하셨습니다.

 

우 리 모두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는 불공평한 세상 그리고 원망스러운 세상이라고 말했던 우리 모두가 천 국에 가서는 모두 이렇게 말하게 될 것 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사랑이셔, 하나님은 사랑이셔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신 것 입니다.

 

자 바 로 그 사랑이신 하나님의 우리가 자 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도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합당한 줄로 믿습니다. 왜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느냐? 첫째 이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 째로 우리가 사랑 의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사랑의 계시자이시기 때문에 그렇습 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사랑 의 계시자,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 신자 이십니다.

 

자 본문의 9절을 같 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9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우리에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 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네, 하나님 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그랬어요 나타난 바 되 었으니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의 사건 입니다.

 

거기서 우 리는 참된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이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 도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 하시기 위해서 외아들 을 내어주신 사랑, 제가 처음 예수 믿고 이십대 초에 교회에 나가기 시 작했을 때 어느 부흥 목사님의 말씀 한 얘기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마음속에 촉촉한 감동으로 남아 있 어요.

 

어느날 목사님 두 분이 만나 서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목사님 한 분은 아들이 다섯이나 있습니다. 근데 또 한 목사님은 딸 하나 밖에 없어요 그래 서로 자식들 이야기 하 다가 여보,

자네는 말이야 아들 다 섯 씩이나 되니까 나 우리집에 양자 하나 보내지 그러지 뭐 하고 쉽게 대답을 했어요 그 분이 집에 가서 사모님에게 얼마나 야단을 맞았을까 요? 그러나 약속에 철저했던 그 분은 어 자기 의리와 약속을 지키고자 결심 했어요

 

그래 집에 가서 다섯 아들, 누워있는 다섯 아들을 보고 어떤 아 들을 양자로 친구에게 보낼 것인가, 장남, 장남은 안되죠 장남은 상속잔 데 둘째를 얼굴을 내려다 보았습니 다. 둘째, 다섯 아들 중에서 제일 똑 똑하고 제일 IQ가 높은 장래성이 촉망한 이 둘째 아들은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아들 을 봤어요 세번째 아들을 보니까 다 섯 아들 중에서 제일 자기를 닮았어 요 너무 너무 미남이에요 셋째 아들 은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네번째 아들을 봤습니다.

 

네번째 아 들은 다섯 아들 중에서 제일 병약하 고 병치례를 하고 밤낮 별별대고 너 무 너무 불쌍한 이 자식 넷째를 도 저히 줄 수는 없었습니다.

 

남은 다 섯번째 막내 막내 흐(웃음) 막낸데 말야(웃음) 제일 귀여운데 그래서 아들을 하나도 줄 수 없었던 이 분 은 그 날밤 요한 복음 316절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외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 외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기 위 해서 자진해서 스스로 그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습니다. 그 예 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 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로서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예수 님의 제자들 그 제자들의 특성은 사 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사랑의 열 매를 맺어야하느냐? 그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사랑의 계시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습니 까?

세 번째로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 어야 할 이유, 세 번째는 우리가 믿고 있는 성령님 그 성령님이 사랑의 중매자가 되시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은 사랑의 촉진자라 그래도 괞찮아요 사랑의 중매자 사랑의 촉진자 성령은 사랑 의 중매자 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를 맺어주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사 랑을 체험케 하신 것이 성령의 역사 입니다. 자 오늘 요한 일서413절 을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요 한 일서 413절 다같이 앍겠습니 다.

 

13절 다같이 시작!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 심으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그 분 안에 사랑의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고 또 그가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었다 이렇게 성경 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 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케 하시 고 우리로 하나님 앞에 가게한 사랑 의 중매자였습니다.

여러분! 이 중 매한다는 것이 참 중요하죠 중매 잘 만나서 일생을 행복하게 사는 분도 있고 또 중매 잘 못 만나서 굉장히 이상한 일 어려운 일들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길 들었어요 어떤 형제 한분이 어떤 자매를 너무 너무 좋아했어요 그래서 propose 하 고 또 사랑을 고백하는데 자매 쪽에 서 반응이 없는거에요 그래서 이분 이 결심을 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씩 편지를 쓰자 그래서 하루에 한 번씩 사랑의 고백 편지를 썼어요 그 러자 일주일이면 이 자매는 일곱통 의 편지를 받았답니다.

 

그런데도 반 응이 없는거에요 그래서 형제는 더 독한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하루에 세 번 편지를 쓰자 그래서 하루에 세 번씩을 loveletter를 쓰는거에요 하루에 세 번씩 편지를 써요 그래 편지를 얼마나 많이 받았겠어요 드 디어 이 자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어떤 사건이 일 어났을까요? 이 자매가 결혼을 했는 데 편지 배달한 우체부하고 결혼 했 답니다. 중간에 전달한 사람하고 어 떻게 된거에요 그 비슷한 체험을 저 도 했습니다마는 제 아내가 심부름 을 좀 다니다가 저를 사랑하게 되었 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말씀드릴 수 가 없습니다.

 

어쨌든 어 참 이 중매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성령님 이 사랑의 중매자 혹은 사랑의 촉진 자가 되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 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습 니다. 그 성령님은 지금도 사랑할 수 있는 energy와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하십니다.

 

디모데 후서 17절 에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 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 다 이렇게 번역되어 있는데 본래는 오직 능력의 영과 사랑의 영과 근신 의 영을 주셨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 세요

그 분은 우리 안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금도 공급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해야합니다. 여기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 는 어떻게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요?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에요?

 

저는 사랑의 열매라는 것은 하나님 사랑합니다. 라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에서 끝나 서는 안되요 그 고백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사랑해요 찬양했습니다. 거 기서 끝나도 안되요 그 사랑은 구체 적인 어떤 이웃을 향해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요한일서 4장의 결론을 아십니까? 결론은 마지막 21 절 입니다. 한 번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어요 요한일서 421절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421절 다같이 시작!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 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누구룰 사랑할 지니라?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자 어 떤식으로 전개 되었습니까?

 

우선 하 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사랑 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누구를 통 해서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서 어디에서 제일 잘 나타났습니까?

십자가에서 그리고 그 사랑은 누구 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전달 되었습 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사랑을 체험하고 또 그 하나님의 사 랑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이제 그 사랑은 누구에게 나타나야 한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순종 의식이에요 순종 의식, 더 중요한 것은 순종 의식 자 다시 한 번 이21 절 마지막 구절을 한 번 보시면 요 한일서 4장의 마지막 구절 우리가 이 뭐라그랬어요 계명을 주께 받았 나니 사랑하자 이 명령이 계명이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계명이다 이것 은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많은 명령과 교훈 가운 데서 가장 중요한 계명 이 명령을 주께 받았나니 명령은 순종을 요구 합니다. 그것이 명령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라면 내 사랑하는 주님의 명령이라면 나 는 마땅히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 고 살아야지 이런 순종의 의식이 얼 마나 있느냐 순종의 의식이 내가 정 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자 그 런 결단이 있고 또 그런 의지를 가 지고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 살고 있다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 앞 에 이 명령 앞에 순종해야지 이 순 종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11절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본문 의1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여기서 마땅하도다 라는 단어가 매우 강력 하게 강조된 단어입니다.

 

어떤 영 어 번역에 보시면 마땅하도다 이 표 현이 We 우리가 ought, ought love 이것은 must라는 조동사 보다도 더 강력한 뜻이에요 우리는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의뭅니다. 사랑은 의무입니다. 그것은 우리에 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자 우리가 순종하는 과정에서 뭐가 필요할까요 수고가 필요해요 사랑은 수고를 요 청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 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 속에 있 어요 교회 나가고 예수믿는데 사랑 해야겠다 이런 마음이 왜 없겠어요 그런 마음은 있어요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왜 사랑의 열매가 맺혀지 지 않을까요 사랑의 수고를 하지 않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데살 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할 때 그들에 게 사랑의 수고가 있다는 것을 칭찬 했습니다. 사랑의 수고 우리의 사랑 이 열매를 맺을려면 반드시 수고라 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런데 우리는 열매를 원하지만 수고라는 과정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 분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많 습니다. 사랑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 다. 또 사랑을 표현해야 할 여러가 지의 영역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 장 중요하게 사랑을 표현 할 수 있 는 방법 저는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복음 전해서 내 주변의 이웃들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것 보다 이웃 사랑의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면 수고를 좀 하셔야 죠 수고를 해야 열매를 다음 주일부 터 딸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 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감동적 인 한 이야기를 소개 할려고 합니 다. 전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어떤 분이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근데 제 가 알고 있는 고전하고 조금 달라요 제가 여러해 전에 그 미국에 살 때 그 Sunday School Times라는 주일 학교 교사들을 위한 잡지를 읽은 적 이 있습니다.

 

그때 이 얘기가 실려 있더라구요 Miss Thomson 이라는 여자 교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분은 교회와서도 교사를 했고 중 학교의 여선생님 이었습니다.

 

자기 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의 학생 가운 데서 Teddy Stellad라는 학생이 있 었대요 Teddy Stellad 근데 이 학 생이 여러 주간 동안 무단 결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왔습니다. 전활했지만 집에 연락이 되지 않습니 다.

 

그러나 이 분이 Christian 이었 기 때문에 그냥 제적 할 수가 없어 서 학교가 끝난 후 집으로 찿아 가 보았습니다. 가 보았더니 짐작 한 것처럼 가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출하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고 아버지의 술을 아들도 마 시고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 했어요 그래서 그 날부터 이 선생님은 학교 가 끝나면 이 학생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습니다.

 

꼭 찾아 가는거에요. 내일도 모래도 계속해 서 찿아 갔습니다. 그리고 Teddy에 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Teddy , 선생님에게는 소원이 꼭 하나 있어 선생님이 반에서 학생들의 이 름을 부를 때 소위 roll coll을하고 학생들의 이름을 부 이 가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많은 열매 가운데 내가 사랑하는 한 영혼의 구원의 열매를 바치는 일 그 사랑의 수고는 결코 지나친 수고 일 수는 없습니다.

기도 하시겠습니다.

 

 

 

 

 

원초적 사랑의 속성 /요일4:7-11/ 곽선희 목사

2014-11-23 07:08:25

 

요사이 유행하는 말 중에 '대책 없는 자'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제불능하고, 도대체 구제할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인가 한번 봅시다. 몽고반점을 중국 음식점이라고 우기는 사람, 이걸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L.ALos Angeles가 다르다는 사람. 으악새가 새의 이름이라고 우기는 사람. 제가 사전 찾아보았더니 으악새라고 되어있지 않고 억새라고 되어 있어요. 으악새는 방언이랍니다. 어쨌든 으악새는 풀 이름이지 새 이름이 아닙니다.

 

그런데 으악새는 새 이름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사람, 이 사람하고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컴퓨터 바이러스가 몸에도 전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랑받고 살면서 사랑을 모르고 사는 사람. 구제불능입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뉘우칠 때에는 또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하늘 아래 사랑이 있냐는 것입니다. 사랑을 부정하고 사는 사람,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대책 없습니다.

 

Cast Away 라고 하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지나갔습니다만은 아주 명화입니다. 그 내용 중에 보면 두 남녀가 열렬히 사랑을 하고 약혼을 하고 결혼날짜까지 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놀랜드' 라는 이 남자가 자기가 나가는 회사의 일로 인해서 그는 잠깐 출장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비행기 사고로 인하여 이 비행기가 추락되면서 그 비행기에 탄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놀랜드' 라는 사람이 남태평양 어느 무인도에 표류됩니다. 거기서 그는 살아남고 감격합니다만은 그러나 전혀 사람이 살지 않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아무도 다녀가지 않는 이 섬에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과일을 따먹고 바위틈에 은신하면서 이렇게 버티고 4년을 살았습니다. 그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 뜨거운 사랑이 그로 하여금 이 많은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뗏목을 만들어서 그 배를 만들었죠. 이렇게 띄워 가지고 나가다가 지나가는 상선에게 발견되어서 구출이 됩니다.

 

자기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자기 애인은 다른 사람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어요. 이 나라의 법은 실종되고 1년이 지나면 사망처리를 합니다.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장례식도 치르고 그럽니다. 그리고 정당하게 결혼을 하고 어린 얘들까지 낳았어요.

 

이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참으로 답답하고 괴롭지만은 사랑하는 사람, 모처럼 안정을 얻은 그 사람, 그 가정을 파괴할 수가 없어요. 그는 할 수 없이 물러섭니다. 그리고, 넓은 광야를 앞에 놓고 갈 곳을 잃었어요. '앞으로 가야하나? 뒤로 가야하나? 옆으로 가야하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리고 광야를 바라보며 방황하는 그런 장면으로 이 영화는 끝납니다. 여러분, 무인도에서 4년을 고독하게 가난과 고통과 어려움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었지만은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린 허탈감, 이제 그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유명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렇게 딱 한 문장으로 기록된 곳은 성경에 여기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생명이다. 이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사랑 없이 생명 없습니다. 살 수 없습니다.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사랑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사랑의 계시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다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확실하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다고요.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증거로 십자가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계시합니다. 내가 너를 이처럼 사랑했다고. 독생자를 주었다고. ? 그 속에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가 죄인을 사랑하는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희생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증거하고, 이제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믿으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믿으라, 이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 행복하라고. 또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을 받고 이 사랑을 베풀라고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어디 있습니까? 동물적 사랑과 인간적 사랑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동물이라는 것은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동물적 충동, 행복이올시다.

 

탄자니아나 케냐, 이런 데 가서 보면 넓은 벌판에 많은 짐승들이 사는 것을 봅니다. 짚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구경을 해보면 동물들은 정말 배만 부르면 만족합니다. 나는 그 들판을 지나가다가 사자들이 모인 곳, 잘 보기 힘든 곳이니까 사자가 한 30마리 있는 그런 자리를 그 소굴에 들어가보면, 전 재미있게 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자가 짐승을 잡아먹고 배가 부른 다음에 말이죠, 나무 밑에서 아주 벌렁 누웠어요. 벌렁 누워가지고 이리저리 뒹굴면서 낮잠을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옆에는 커다란 수놈, 왕 사자가 떡 버티고 앉아 있고 거기에는 여러 마리의 암놈 사자가 있고 그리고 새끼들이 이렇게, 그 가정을 거느리고 이러고 앉아있는데 꺼벅꺼벅 졸고 앉아있는데,

 

그 숫사자를 자세히 보니까요 얼굴이 만신창이더라구요. 그 가정을 지키느라고 죽을 고생을 한답니다. 그 왕권을 2년밖에는 지키지 못한답니다. 조금만 힘이 약해지면 다른 젊은 숫사자가 와서 점령을 해버린답니다. 그 사자도 편하지 않더라구요.

 

아주 힘든 생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저 '자네들도 별로 행복하지 못하겠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지나와 봤습니다. 동물은 이 본능적 욕구를 충족할 때 편안합니다. 인간은 그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이란 사랑을 깨닫는데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보면은 어떻게든지 사랑을 확인하려고, 스킨쉽을 통해서 가까이 손을 잡고, 비비고, 안기고, 무릎에 앉고 잠깐이라도 이 사랑 옆에서 떠날 때, 무릎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밀치던가 해보세요. ''하고 울고 사흘 후에는 감기 걸립니다.

 

아주 힘듭니다. 순간순간 자신만만하게 '우리주변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사랑한다' 그렇게 느끼고 있을 때만 행복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이고 원초적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지 않고는 못 살고,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 삽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확인하고 알고 깨닫고 느끼고 감사하는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설사, 좀 어려운 고난을 치른다 하더라도 사랑만 확실하면 살 수 있습니다. 넉넉히 살 수 있습니다. 질병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무너질 때, 나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이자 지능 연구의 대가인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urg)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유명한 사랑의 삼각 이론이 있습니다. '사랑은 마치 정삼각형처럼 삼각 균형이 잡힌 그 가운데에 참 사랑이 있다' 하는 것이올시다.

 

첫째 요소가 뭐냐하면은 Intimacy, 친밀감이올시다. 사랑은 친밀함을 느껴야 되요. '가까이 있다. 저와 나는 가깝다. 저는 나를 이해한다. 저는 나의 사정을 잘 알아주신다.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이렇게 친밀감을 느끼는 그런 정서가 이게 사랑입니다. '가까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비록 조금 떨어져 있어도 '가까이 있다. 저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친밀감, 그것이 사랑입니다. 두번째는 Passion 이올시다. 이것은 정열입니다. 사랑이 정열로 작용해서 로맨틱하고 어떤 때는 욕망으로 치닫습니다. 그래서 소유하려고 하고 꼭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 사실은 그 뿌리에 사랑이 있어요.

 

번째 요소는 Promise and Responsibility입니다. 이것은 약속과 책임이 있는 거예요. 책임을 지는 거예요. 약속이 확실하고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이게 믿어지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나아가서 책임을 집니다.

 

저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요 저의 실수가 나의 실수입니다. 저는 나와 상관이 없듯이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실수를 보더라도 그건 바로 내 책임이예요.

 

자식의 실수를 내 탓이라고 아내의 잘못도 내 잘못이라고 남편의 잘못도 그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고, 책임을 지는 마음이 그게 사랑이요. 무책임하게 비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은 바로 동체의식이거든요. 일체 의식이요.

 

하나로 생각하게 될 때 책임을 집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에요. , 그러면 여기서 이것이 삼각형처럼 꼭 균형을 잡아야 된대요. 왜냐하면 친밀감에 치우치면 감상주의자가 되요. 요새말로 '마마보이' 같은, 이런 것이 된다 이거예요. , 정열에 치우치게 되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정신을 못 차립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을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약속과 책임, 이 의무에 지나치게 치우치게 되면, 아주 메마르게 됩니다. 냉정하고 메마르고. 요새 말로 정열이 없어요. 그런고로, 이 세 요소가 함께 합쳐서 정삼각형처럼 이 세 변이 같은 길이로 균형있게 조화를 이루어야 참 사랑이다, 라고 합니다.

 

이제 이 사랑의 근본은 어디 있느냐 하면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순간부터 사랑의 성격을 떠납니다. 사랑은 받아들임에 있는 것이올시다. 받는 존재 의식이요 받는 감격이요 받는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5장에 있는 말씀을 전 개인적으로 많이 사랑합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혹이라도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함에 있어서 의심이 생길 때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믿어집니다.

 

'내가 연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자기 사랑을 확증해 주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 주셨다'고요. 그 때가 중요합니다.

 

연약할 때, 또 죄인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때 벌써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어요.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해서 사랑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의롭게 살고, 선하게 살고, 봉사한다고 이제서야 사랑을 받을 거라고, 보상적으로 사랑을 받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참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잘해서 사랑을 받는 겁니까? 그렇게 똑똑한 척 하고 계산 많이 하는 자녀는 사랑받지 못해요. 오히려 실수도 많고 부족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나를 많이 사랑한다''우리 아버지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한다'는 그 깨달음과 그 믿음이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예요

 

. 나는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거지요.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비유를 아시잖아요. 그가 집을 나가 버렸어요. 그리고 허랑 방탕했어요. 왜 안돌아 왔을까?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돈 벌어가지고 가야지, 출세해서 가야지, 내가 이 모양으로 갈 수 없지 않나?

 

체면, 위신, 생각하는 중에 그는 못 돌아왔어요. 바르게 돌아와 보려고 애썼겠지만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서 마지막에 굶어 죽게 되어가지고는 돌아옵니다. 돌아올 때에 아버지는 그를 환영하고, '소를 잡아라, 옷을 입혀라, 반지를 끼워라' 잔치를, 환영 잔치를 합니다.

 

아들은 너무 부끄러워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기에 저는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머슴꾼의 하나로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렇게 기뻐하고, 내 아들이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이렇게 기뻐하고 환영합니다.

 

그때 탕자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돌아올 걸.' 내가 집을 나갔으니 아버지도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고, 내가 아버지를 잊었을 때 아버지도 나를 저주하고 호적에서 지워버리고 잊어버린 줄 알았지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집을 나가 방황하고 있는 동안 그 아버지는 사랑했고,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게 아닙니다.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동안 탕자는 너무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올시다.

 

오래 전에 읽은 책 한 권의 이야기를 저는 늘 잊지를 않고 종종 생각합니다. 캐시라고 하는 여성이 대학을 졸업하고 아주 발랄하고 연애를 했는데 연애에서 실패하고 배신당하게 됩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집을 나가버립니다. 어머니가 말렸지만은 그는 집을 나갑니다.

 

넓은 세상에 가서 마음대로 살아버립니다, 그 젊은 육체를 가지고. 창녀가 되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마지막엔 마약 중독자까지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나고 나니까 몸은 시들고 병들고, 이제는 더 이상 살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는 죽을 때가 되었다. 강가에 나가서 투신자살을 하려고 내려다 보는데 강물에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비칩니다. 그때 비로소 생각했습니다. '10년 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늙었을까? 어떤 모습일까?

 

내가 어머니의 얼굴을 한번 뵙고, 그리고 돌아와서 죽을 것이다. 죽는 일은 바쁘지 않다.' 그래서 낮에 올 수가 없어서 먼 빛으로 보려고 밤에, 캄캄한 밤에 집에 돌아와 봤는데, 집안과 밖에 외등까지 불을 환하게 켜 놓았어요. '오늘 무슨 파티가 있었나? 왜 이렇게 불을 켜 놓았나?' 그런데 조용해요. '이상하다. 파티가 끝났는가?'

 

대문을 잠깐 밀어보았더니 잠그지 않았어요. '대문도 잠그지 않고 주무시누만.' 조금 더 미는데 ''하고 소리가 나자마자 안에서 어머니가 "캐시야" 그냥 맨발로 뛰어 나옵니다. 꼼짝 못하고 붙들렸습니다. "어머니, 어째서 이렇게 불을 많이 켜 놓은 것입니까?" 그때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네가 집을 나간 후 10년 동안 한번도 불을 끈 일도 없고, 문을 잠근 일이 없다." 케시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내가 집을 나가 방황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계속 나를 사랑하고 있었더라'는 것이에요. 돌아왔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그 아픈 마음으로 그 딸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이것을 모르고 방황한 것이예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한 게 아닙니다.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하고, 그런고로 벌써 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내가 죄인입니까? 더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내가 병들었습니까?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이지요. 내가 실패했습니까?

 

남보다 나는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에요. 받고 있는 것이에요.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은 믿음입니다.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한 이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진실한 자세는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 영원한 세계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낙심함이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보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마땅하다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핵심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런고로 내가 남을 사랑하고, 또 나 자신도 사랑해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엄청난 사랑 안에 있는 나, 사랑받는 나, 그 존재는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를 이처럼 사랑해 주시고 오늘도 사랑하시고 내가 주님을 잊어버리고 방황할 때에도 끝까지 사랑해 주시니 그 사랑, 깊이 깊이 깨닫게 하시고 감격하게 하시고 그 사랑 안에 충만함이 있게 하소서. 내가 처한 처지 이대로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며,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랑의 사람으로 그런 사람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 /요일4:12-21/ 곽선희 목사

2014-11-20 14:02:19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매일같 이 자다 깨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 는 것 같이 그렇게 급변하고 있습니 다. 특별히 이 세상이 향방없이 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미래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만은 미래학자의 말 치고 맞아 들어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미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치 럭비 공이 뛰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뛸 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변 화될는지 모르는 그런 세상, 불확실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 세히 살피면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 습니다. 어쩌면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더 확실하게 우리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 러분 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 노래라고 하는 것, 노래라고 하지 않았죠.

 

소리라고 했죠. 소 리, 가락, 그렇게 했습니다 만은 그 다음에 뭐 자꾸 변하는데 트로트, 재즈, 락앤롤, 비틀즈, 트위스트, 랩 그리고 발라드, 요새 와서 테크노. 아무리 제가 좋은 마음으로 이해하 려고 해도 이게 정말 노래인가,

 

이 발악인가 노래인가 알 수 없어요. 아무리 좋아지려고 해도 좋아지지 않더라고요. 저는 제 나이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합니다만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모든 노래, 어느 나라 노래든지 노래를 통 털어 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 떠 난 노래가 없습니다. 전부가 사랑 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 어버린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 는 사랑, 사랑이 주제가 되요. 그건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 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무서운 맹수들도 한번은 사랑해야 생명을 생산합니다. 또 사랑 속에서 생명 이 자랍니다. 고슴도치가 제 새끼 사랑하는 걸 보면 신기합디다. 그 렇게 사랑해서 생명은 태어나고, 키 워나고, 자라납니다. 그런고로 생명 안에 우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옛날 책이나, 혹은 목사님들의 설교 중에는 이것 을 가마에다 비유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옛날 얘기니까 그저 한 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가마꾼이 색시를 태우고 앞에서 가마꾼이 메 고 가고 뒷사람이 또 메고 갑니다. 이런 경우 앞에서 가는 사람은 앞을 내다보며, 앞을 환히 보면서 가마꾼 이 가마를 메고 갑니다 만은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안 보입 니다.

 

앞에는 가마가 꽉 막았는데 이걸 붙들고 갑니다. 이래서 옛날 어른들은 이걸 이렇게 설명합니다. 앞에 있는 가마꾼은 소망이요, 뒤에 딸려 가는 가마꾼은 믿음이요, 가운 데 있는 색시는 사랑이라고. 그래 서 신랑집에 가면은 이 두 가마꾼은 물러가고 가마는 해체됩니다.

 

그리 고 신부만 신랑 방에 들어갑니다 그 런고로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그렇 게 옛날 어른들은 비유해서 설명했 습니다. 사람은 확실히 사랑으로 삽니다. 죽을 사람도 사랑으로 인 해서 살아납니다. 어찌 생각하면 사랑 없이 되는 일은 다 죽음으로 치닫습니다. 오직 사랑이 있어서 살고, 사랑이 있어서 의미가 있고, 사랑이 있어서 소생하는 힘을 얻는 것이고 사랑이 있어서 병도 치유되 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을 때는 심지어는 죽음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참 사랑에 감격 하면 죽는 문제가 하등의 문제가 되 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위력 입니다. 월남전 때에 있었던 실화 입니다. 전세가 불리해 가지고 일 선에서 뒤로 물러섰습니다. 후퇴할 때가 이 작전이 제일 어렵습니다.

 

그 후퇴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총에 맞았습니다. 뒤에서 쏘는 총 에 맞아서 지금 비틀거리고 있습니 다. 이렇게 후퇴 먼저 한 사람들이 이쪽에서 보니까 저기에 비틀거리고 쓰러져 있는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 은가, 여기서 이 사랑하는 친구 하 나가 그 총알이 비오듯하는 가운데 를 뚫고 들어가서 저걸 구출하겠다 고 하니까 소대장이 말렸습니다.

 

"이미 총을 맞았고 피를 많이 흘렸 고, 저 사람은 살지 못한다. 굳이 네가 거기에 들어갔다가 너까지 죽 을 거 없지 않느냐? 가지 마라"

 

그 랬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거기 서 손을 들며 쓰러져있는 그 친구를 바라보고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그 대로 그 총알 속을 뚫고 들어가서 친구를 업고 나옵니다. 업힌 친구 는 귀에다 대고 자기를 업고 가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빙그레 웃으 면서

 

"네가 올 줄 알았다. 나는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나는 아무 여한이 없다"

그리고 죽 었어요. 죽은 시체를 업고 와서 내 려놓을 때에 소대장이

"거 봐라! 너 그거 죽을 사람, 어차피 죽을 사 람 살리려고 하다가 너까지 죽을 뻔 했다"

그럴 때에 이 친구는 말했습 니다.

"아닙니다. 내 친구는 내 등 에 업혀서, '네가 올 줄 알았다.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하고 죽었습니다"

 

여러분, 참 사랑! 위대한 사랑에 감격하면 뭐 고생이 다, 질병이다, 문제가 되지 않고 죽 음까지도 넉넉하게 넘어설 수 있는 것이에요. 결국은 사랑입니다. 이 귀한 사랑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예요.

 

둘째는 사랑이 병들어서 문제예요. 저마다 사랑을 외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 에요 병들었어요. 또 사랑에 거짓 이 문제입니다. 사랑에 속았어요. 거짓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실망하 게 합니다.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 도 있습니다. 사랑의 무지가 문제 입니다. 사랑이 없는 게 아니고 사 랑을 모르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사랑의 Discommunication입니다.

 

사랑이 통하질 않습니다. 분명히 사랑 받고 있으면서도 사랑의 의사 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 랑이 절단됩니다. 그 문제는 내가 믿질 않기 때문에. 분명히 사랑하 고 있고 사랑 받고 있는데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되고, 사 랑을 모르면 감격이 없고, 사랑을 모르면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랑의 원초적 속 성을 설명하는 귀중한 말씀이 이어 집니다. 사랑이 중생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이 참 사랑의 의미로 바꾸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 이 참 사랑으로 그 의미를 다시 찾 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 랑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 오늘 성경말씀은 위대한 말씀 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유명한 말입 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여러 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느껴봤습 니까? 우리는 간간이 결정적 시간 을 맞습니다. 어떤 경우에

"맞아,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크게 깨달 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부터 세상 은 달라집니다. 세상 역사가 바뀝 니다. 삼라만상이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완전히 사랑의 세계 를 보게됩니다. 제 개인 얘기를 해 서 미안합니다 만은, 전 어렸을 때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는 한 번도 맞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 버지로부터는 매를 많이 맞았습니 다.

 

때로는 이해가 되지만은 어떨 때는 왜 이렇게 자꾸만 때리시나 좀 불만도 많았습니다. 저는 날짜도 기억합니다. 열일곱살 되던 때, 그 때 마지막으로 맞았습니다. 그날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잘못이 아니었 던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슨 반항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설명 도 하면 안됩니다. 무조건 맞았습 니다. 저를 때릴 때에 어머니가 말 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가실 때에 딱 붙들고 한 마 디 하시는 것을 제가 문 안에서 들 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아들을 사랑하는 거요, 안 하는 거요?"

오 늘은 분명히 당신이 잘못했는데 왜 다 큰애를 말로 타이르지 않고 때리 냐고, 아버지는 이렇게 조용히 대답 합니다

"자식은 겉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야, 속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무슨 말을 . 그렇게 하느냐고, 사랑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고,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거지. 저 는 문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사랑 하긴 하는가보다. 그때부터 생각을 다시 돌리고 보니까 정말 아버지의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신 거예요. 과거도 미래도, 아버지는 엄청나게 나를 사랑했어요. 사랑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사랑이었어 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수 용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말씀을 듣습 니다, 사랑의 계시를 봅니다,

 

사랑의 영감을 받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면 어디를 보아도 다 하나님의 사 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사랑의 뿌리요, 사랑의 원초적 생명력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 니다. 자 그리고 오늘 성경은 우리 에게 일러줍니다. 그가 먼저 사랑 했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 하셨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사랑은 다 철 난 다음의 사랑입니 다. 사람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네 살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여러분 젖 먹던 생각이 난다면 그 사람은 다섯 살까지 먹은 사람이요.

 

결국은 가 장 소중한 사랑은 네 살 전에 있는 겁니다. 그 모든 소중한 사랑은 기 억에 없어요. 그런고로 사랑은 깨 달으면서부터 사랑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모르고 있어요, 엄청난 사랑 을 받고도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 래 사랑이 있느니 없느니. 사랑이 없으면 세상에 당신이 존재하질 못 해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 나를 사랑하시고, 벌써 오래 전 부터 내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 과 원수 되었을 때, 내가 아무 것도 모를 때 그는 나를 사랑하셨어요. 나는 때때로 내 손을 내밀고

 

"여기 다가 내가 원하는 걸 주세요. 그래 야 사랑이 아닙니까?"라고 고집을 피우지만,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 주시지 않는 것이 사랑이죠. 우리 는 자녀들이 뭘 달라고 할 때에 부 득불 가졌던 것도 빼앗을 때가 있어 요.

 

? 빼앗는 게 사랑이니까. 철 난다는 게 뭡니까? 철이 나고 부터는 그게 아니죠. 빼앗는 것도 사랑이고, 때리는 것도 사랑이고, 잔 소리도 사랑이고. 이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게 철이 난 것 이죠. 이제부터 알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보상으로서의 사랑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받은 사랑에 만족할 뿐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타 임즈가, 뉴욕 타임즈가 베스트셀러 로 제1위로 뽑은 책 한 권이 있습니 다. Chicken Soup for the Couples Soul 이라고 하는 그런 책인데요.

 

그 책의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 니다. 수잔 앤드슨이라고 하는 아 주머니가 있는데 설흔네살입니다. 직장여성입니다. 의사의 오진으로 인해서 그는 실명하게 됩니다. 장 님이 됐습니다. 참 마음이 괴로웠 지만은 1년 동안 치료받은 다음에, 그냥 집에만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 직장에서 잘 받아주어서 다시 직장 에 나가게 됩니다.

 

버스를 타고 직 장에 나갈 때 남편이 동행해 주었습 니다. 참 공교롭게도 남편의 직장 과 자기 직장은 정반대에 있습니다. 그 남편은 일찍 떠나서 자기를 데려 다주고 그리고 다시 자기는 자기 직 장으로 갑니다. 이렇게 얼마동안을 했는데 언젠가는 남편이 이렇게 말 합니다. 남편은 군인인데요,

 

여보, 내가 늘 이렇게만 할 수가 없구만, 시간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어 차피 당신은 언젠가라도 혼자 다녀 야 되겠는데 오늘부터는 혼자 직장 에 나가면 어떻겠냐고. 이 아내는 그때 몹시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 를 데려다 주는 것이 귀찮은 모양이 지?' 지겨우냐고, 내가 살아 있는 게 이렇게 불편하냐고, 짜증을 냈습니 다. 남편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러면 내가 도와주마 했는데 도 이 아내는 화가 났어요. 아니라 고 나 혼자 간다고.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직장에 나갔습니다. 하루 나 가고, 이틀 나가고, 보름동안을 나갔 습니다. 어느 날 버스운전사가 이 렇게 말합니다. 운전기사가 말하기 를

 

"아주머니, 참 복이 많으시네요. 부럽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아니 제가 이제 시각장애자인데 뭐가 이 렇게 부럽냐고 그러니까

 

"아닙니다. 아주머니가 여기 버스에서 내려서 저 사무실에 들어갈 때, 그때까지 저 밖에서 잘 생긴 군인 남자가 당 신을 매일같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들어갈 때 손을 흔들 었습니다"

그때에 이 부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내 남편이 나를 이렇 게 혼자 보내놓고 뒤따라와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뿐이지요. 이미 내 주변에는 벌 써 사랑으로 충만한 거지요. 문제 는 깨달음이 없는 거요.

내 마음이 완악해서 내 마음에 사랑의 기본 요 소가 없어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는 거죠. 오늘 성경은 다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벌써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랑이 뭐냐 하면서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 니다.

 

"네가 내게 대하듯 나도 네 게 대하겠다"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율법이요 사랑이 아닙니다.

"네가 어떻게 하든 말든 관계없이 나는 너 를 사랑한다"

독선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나는 너를 사랑 할 것이다"

그것은 집착입니다. 참 사랑은 이것들이 아닙니다.

"그리 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 가 너를 사랑할 것이다"

 

여러분 자 녀를 사랑하십니까? 자녀 사랑해서 효도 받고 싶습니까? 자녀 사랑하 면서 실망하십니까? 사랑을 다시 한번 점검하세요, 재진단 해보세요.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자식을 대 할 때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생각하세요. 그 고달픈 세상 을 살면서 나를 사랑하시던 그 어머 니의 사랑을 똑바로 생각하면 내가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여건에서 자식 사랑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을 알고 감격할 때, 이제 누구를 사랑 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성 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마땅한 것 이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요, 그건 공로도 아니요, 그건 자랑 거리도 아니요, 보상을 바랄 것 아 무 것도 없어요.

 

당연히 사랑해야 죠. 여기에는 아무 보상적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고 그랬어요. 사랑의 채널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아요. 사랑이 없는 사람은 부모 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고, 하나님도 몰라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 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내가 나 를 알고 이웃을 아는 것이에요. 여 러분 부모의 사랑을 고루고루 받은 사람은 그 성격이 아주 부드럽고 좋 아요. 어렸을 때 사랑을 바로 받지 못한 사람, 이거 삐뚤어져 놓으면 이건 구제불능이에요. 이것처럼 불 쌍한 게 없어요. 사랑이 궁핍해서, 사랑이 모자라서. 이런 심리학적 결론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사람은 절대 로 자살을 하지 않는답니다. 할아 버지, 할머니의 사랑은 좀 다르거든 요. 내 자식은 내가 때리는데 손자 는 못 때리거든요. 어느 쪽은 좀 맹목적이기도 해요. 그러나 이 사 랑을 받고 자란 자녀는 절대로 절망 하지 않습니다. 이게 생명의 힘이 요, 현대를 사는 생명력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두 려움이 없다고,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해도 두려움 이 없고, 이웃을 대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세상만사 아무리 바뀌어 도 환경과 아무관계 없습니다. 나 는 사랑에 취해 가지고 살아가고 있 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요새 말로 자신감이 넘치는 겁니다.

 

유명한 주석가 벵겔(Bengel)4단 계로 설명을 합니다. 사랑도 두려 움도 없다면 무지함이요, 사랑 없이 두려움만 있다면 율법이요, 사랑도 두려움도 다 있다면 갈등이요, 두려 움이 없는 사랑 그것이 믿음이라고 요. 참 사랑, 그 안에는 평화와 용 기와 창의력이 있는 겁니다. 사랑 은 억지로 갈취할 수 있는 것이 아 닙니다.

 

아무 보상도 바라지 말고 하나님이 벌써 나를 사랑하시고, 십 자가 안에 계시된 그 무궁무진한 사 랑의 진리를 항상 새롭게 깨달아 가 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 리는 나 자신도 사랑하게 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하나 님은 사랑이라 이것을 간증하며 항 상 자유하게 승리하는 그런 생을 살 아갈 수 있는 것이올시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