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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일서 설교 모음

요한일서 4:7 - 21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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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사랑을 아는 자는 어떤 사랑을 나눌까? /요일4:7-21/ 조정의목사

2021-09-01 09:48:00

 

성경에서 사랑 장을 찾으라고 하면 대부분 고린도전서 13장을 꼽는다. 하지만 사랑이 언급된 횟수를 고려하면 오늘 본문이 진짜 사랑 장이다(15구절, 27번 언급).

 

본문은 사랑이란 말을 많이 할 뿐만 아니라 진짜 사랑의 출처를 밝힌다. 바로 참 사랑이신 하나님이다. 많은 유행가가 사랑을 노래하고, 많은 시인과 작가가 사랑을 그려내지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거나 감정 중심적인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에 목말라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영원히 만족시킬 참 사랑의 출처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어떻게?

 

참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요한은 그분을 보니 은혜(신적 사랑)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고백했다(1:14).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는 우리는 그분이 나타내신 하나님의 참 진리 그리고 참 사랑을 아는 자다.

 

그런데 본문은 참 사랑을 아는 자마다 보이는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서로 사랑). 우리가 나누는 사랑은 참 사랑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기준이다. 또 하나님과 누리는 영생의 사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방편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당신이 나누는 사랑의 진실함을 검증하여 주시길 구한다.

 

1. 참 사랑의 출처(7-8)

 

사랑하는 자들아.” 사도는 주가 사랑하신 그리고 장로로서 자신이 돌보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 부르며, 사랑을 권면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우리가 서로 실천해야 할 일이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현재형) 순종해야 할 명령이다(요일 2:7-11; 3:13-24). 21절을 보면 요한은 이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주께 받았다고 말했다(13:34; 15:12).

 

그런데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세상이 정의하는 사랑과 다르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물론 모든 종류의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맞다(일반은혜에 따른 자녀 사랑, 부부 사랑, 불쌍한 이웃 사랑 등).

 

하지만 요한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참 사랑에 주목한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 나누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고(거듭나고), 하나님과 친밀한 앎, 친밀한 사귐을 누리는 자에게 공통으로 발견되는 사랑, 곧 하나님께 속한 참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8). 하나님은 사랑이신데(본성), 하나님께 속한 그 사랑,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사랑이 그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과 예전부터 관계가 없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호스가 수도에서 끊어진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나름 종교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 중에서 유독 사랑이 부족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오래 참지 못한다. 쉽게 화내고 거칠게 말하며 배려하지 않고 항상 자기 유익만 구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이 봐도 사랑 없는 자로 보인다. 이들을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 사귐이 있는 자로 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2. 참 사랑의 시작(9-11)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곧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다고 말한다(9). 여기서 첫째, 우리가 받은 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둘째, 우리가 서로 나눌 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참 사랑의 크기를 헤아려 보자. 9절과 10절은 유사한 내용을 두 번 진술하는 것 같지만 강조점이 각각 다르다.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9).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뿐인 유일한 아들을 말한다. 하나뿐인 아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뿐인 자녀를 희생시킬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일반은혜로 우리는 부모 사랑의 크기를 안다. 그래서 자녀를 내어준 사랑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정말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후 요한은 하나님의 참 사랑의 시작을 바라본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가 열렬히 그분을 사모하고 찾아서 그 대가로 사랑을 베푸신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원수, 죄인이었다(5:10).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수로 행하던 그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의인도 선인도 아니고, 원수를 위해 자기 독자를 죽기까지 내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5:7-8).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2:1),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관계를 영원히 회복시켜 자녀로 삼기 위해 당신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시작하신 참 사랑, 우리가 계속해서 받고 있는 참 사랑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누리는 사귐의 시작은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하나님과 우리가 지금 누리는 사귐도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누릴 영생의 사귐도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시작하신 그 참 사랑을 영원히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

 

그러면 두 번째로 우리는 서로 어떤 사랑을 나눠야 할까?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요구하셨다(13:34).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필요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기희생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을 베푸사 우리의 필요를 채우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다른 이의 필요를 보고, 먼저 찾아가 자기희생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을 베풀어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을 해야 한다(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참 사랑은 우리 안에 부어져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특히 형제자매)에게 흘러가야 한다. 그것이 참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자, 그분과 사귐을 갖는 자에게 마땅하다.

 

3. 참 사랑의 성취(12-18)

 

어떤 이들은 당위성만 가지고 설득이 안 된다. 그들에겐 보상(약속)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참 사랑은 신자의 의무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이런 축복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12)

 

12절은 요한복음 118절을 차용한 것 같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면 이제 세상에 하나님을 누가 어떻게 나타내는가? 요한이 말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참 사랑, 하나님을 더욱 또렷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 그 관계 안에서 온전히완벽하게가 아니라 계속해서 성취됨으로나타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5).

 

둘째, 성령께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알게 하신다(13)

 

하나님이 정말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알고 싶다면,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13절에 말하는 것처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완료형)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5:22).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사랑을 맺으면 맺을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으로 보증하시는 성령을 통해 더욱 확신한다(1:13; 4:30).

 

셋째, 우리의 믿음이 산 믿음임을 증명한다(14-16)

 

14-15절은 사도 요한을 비롯한 증인들이 보고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요한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라고 말했다(14).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는 자, 그분과 서로 사귐을 누리는 자는 반드시 사도들의 증언, 가르침을 믿고 시인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5).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사도들이 보고 증언한 세상의 구원자, 통치자,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고 시인하지 않으면 엉뚱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사도가 증언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이 참된 것을 무엇이 증명하는가? 단순히 바른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게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그의 믿음이 정말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인 것을 무엇이 확증하는가?(2:26)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16). 참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거하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 안에 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주신 하나님의 참 진리뿐만 아니라 참 사랑을 알고 믿고 그 사랑 안에 거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를 향한 자기 믿음이 지식에 머무는 죽은 믿음인지 산 믿음인지 알고 싶어 한다. 여기에 답이 있다. 참 사랑을 서로 나누는 것이 당신이 사랑의 하나님 안에 거하는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넷째,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한다(17-18)

 

모든 것을 환하게 아시고(심지어 속마음까지) 내 입에서 나온 말과 행한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신 분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을 기다리는 기분이 어떤가?

 

만일 두렵다면 그것은 형벌 때문이다.“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18). 그러면 심판 날에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을 가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다. 물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그 행위를 내세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3:18). 예수님의 행위가 하나님 장부에 적힌 모든 죄의 빚을 해결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참 증거가 서로 사랑임을 앞에서 살펴봤다. 그래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17).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아버지 하나님께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가신 것이 아니라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셨다.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셨기 때문이다(15:10). 우리도 그러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두려움이 없고 심판 날에 오히려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18).

 

4. 참 사랑의 적용(19-21)

 

서로 사랑할 때 이처럼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에 실패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점점 알 수 없게 되며, 우리 믿음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엔 심판 날에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된다. 영생을 가지고 있으면서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삶을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서로에게 실천해야 한다. 먼저 잊지 말라. 우리 사랑의 출처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 하나님에 대한 사랑, 성도에 대한 사랑 모두 참 사랑이신 하나님에게서 공급받는 힘으로 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은 쉬운데, 성도 사랑은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성경은 돌직구를 던진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말이 거짓말),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20). 칼빈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기 눈앞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시할 때 그것은 거짓 자랑이다라고 말했다(좁스, 233p).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더 쉬운 것을 못 하면서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사칙연산 못 하면서 미적분 풀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21). 그것이 주님의 계명이다. 예수님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한 것/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25:40, 45).

 

몇 가지 구체적인 적용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2:4)

 

세상은 갈수록 지독한 개인주의로 변해간다. 말세의 특징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딤후 3:2). 하나님 사랑의 특징은 자기희생 그리고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이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라. 자신과 가족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각각 다른 사람들의 유익도 추구하라.

 

둘째,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요일 5:16)

 

첫째가 주는 사랑이었다면 두 번째는 구원하는 사랑’, ‘보호하는 사랑이다. 성도가 주님 사랑 안에 거하는 일에서 멀어지고 있다면, 세상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면, 진리를 점점 떠나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보호하고 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가인처럼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불평할 수 없다.

 

셋째, 날마다 참 사랑을 채우라(요일 3:1-2)

 

우리가 나누는 사랑의 힘은 참 사랑을 알고 거하는 데서 나온다. 그 사랑에 감격하는 자만이, 그 사랑으로 채워져 성도에게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 사랑을 채우라. 하나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라.

 

 

 

사랑: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요구 /요일4:7-13/ 김병삼목사

2020-03-11 01:26:08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 .

우리의 신앙인 기독교의 권위는 무엇일까요?

권위주위권위는 서로 다릅니다. 권위주의는 없어져야 하지만 권위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문제는, 권위는 사라지고 권위주의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교회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때, 교회는 비로소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가장 강력한 권위인 사랑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7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일서 47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자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권위는 없습니다. 교회와 강단에서 선포되는 가장 강력한 것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형석 교수가 쓴 왜 우리에게 기독교가 필요한가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김형석 교수의 지인 중에 숙명여대 교수를 거처 차관을 지낸 분이 늘 하는 우스갯소리라고 합니다.

난 세상에서 아무도 무섭지 않은데 다만 우리 어머니한테는 꼼짝 못해. 어머니는 마땅치 않은 것이 있으면 가만 계시다가 , 이녀석아, 내가 너를 낳았다. 할 말이 있느냐?’하고 말씀하시거든

그 친구 어머니의 말이 바로 사랑의 권위입니다. ‘내가 너를 낳아서 길렀다하는 사랑의 권위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 장이라고 부릅니다. 이 장은 아마 사도 바울이 목회자로서 목양을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깨닫게 된 진리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무섭게 변질 될 수 있는지, 사랑이 없는 소망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를 교회 공동체를 통해 경험한 듯합니다.

 

믿음도 중요하고 소망도 중요하고 사랑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의 덕목은 모두 사랑안에서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죠.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몸을 내어줘 불사르게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사랑이 중요할까요? 사랑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좋은 것도 사랑이 없으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소망을 붙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때로는 그것을 위해 싸우기도 하지요. 그런데 사랑은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그 사랑이 어떤 정의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싸워서 한쪽만 남지만, 사랑은 둘이 함께 남는 것이니까요.

 

부부간에 서로 옳다고 싸우다 갈라지지 않습니까? 형제간에도 서로 옳다고 주장하다 얼굴을 보지 않고 사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정의는 자기 생각에 옳은 것을 주장하며 나의 편을 만들려고 하지만,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내가 그 사람 편이 되어주는 것이죠. ‘정의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정의밖에 보이지 않지만, ‘사랑의 눈으로 보면 내가 보지 못하던 것들도 보게 됩니다.

 

언젠가 예배 시간에 이런 실험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종이 하나에 점을 찍고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보이나요?” 사람들은 모두 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역시 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종이에서 점은 참 작은 부분인데, 그 점을 보느라 나머지 여백은 보이지 않는 것이죠. 사랑은 그 종이가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해 말씀을 준비하면서 묵상 팀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런 주제였죠.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는 가족들과의 관계였습니다. ‘사랑이 가장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곳은 세계적인 이슈나 정치적 이해관계 같은 것들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였습니다.

 

* 한 권사님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줄을 서있을 때, 갑자기 밀어닥친 사람으로 인해 화가 났답니다. 그런데 그런 무례한 사람에게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믿으니 억울하고 손해 볼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멋진 다리 근육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걸어서 올라갑니다.

 

* 한 분은 남편이 교회를 다니지 않던 시절, 일방적인 인내와 희생이 강요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같이 교회를 다니지 않을 때는 싸워서 내가 이기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먼저 예수를 믿게 되니 남편을 위해 참아야지라고 생각하는 때가 많아졌습니다.

지금 함께 기도하고 신앙생활하고 기도하는 남편과 가족을 보며 그것이 주님의 방법 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 한 장로님은 미션스쿨인 고등학교에서 김장환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청년시절에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결혼하면서 처가의 인도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는 아주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시켜서 아니면 식이었답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부모님 댁에 가면 늘 제사가 문제였고, 명절 때마다 절을 하지 않고 가족들 옆에 앉아 있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답니다. 어느 날, 제사를 지낸 후 산소에 가게 되었을 때, 절을 하고 싶지 않아서 가지 않겠다고 말해 부모님과 얼굴을 붉히는 상황이 된 것이죠.

 

하지만 장로님 부부는 집으로 가지 않고 부모님 댁으로 가 음식을 준비하고 부모님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모님은 깜짝 놀라시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니? 이게 예수 믿는 힘이니? 나도 좀 이 신앙을 알아봐야겠다.” 하시더니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셨습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봅니다. 옳고 그름으로 싸우거나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쟁취하려는 정의보다는 사랑의 힘이 훨씬 크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 사랑이 가진 능력은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 10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410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의를 따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조금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요구 사랑

C.S.루이스 교수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에로스에 의해 태어나고 스토르게에 의해 양육되고 필리아에 의하여 성숙하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완성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요구라고 잡은 이유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지 간에, 우리 모두는 이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이 사랑의 요구라는 것은 아주 특별합니다.

 

본문 요한일서 47-8절을 보세요.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압니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요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속에 하나님이 거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C. 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사랑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랑은 오직 한 가지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아가페라는 말인데, 요한일서에는 아가파오라는 동사만 28, ‘아가페라는 명사만 18회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아가페라는 말은, ‘주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조건을 뛰어 넘는 사랑, 철저하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입니다.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어느 부흥사 목사님의 이야기가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에 소개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두 분이 만났습니다. 한 목사님은 아들이 다섯이고 다른 목사님은 딸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대화를 하다가 딸만 있는 목사님이 친구 목사님에게,

 

자네는 아들이 다섯이나 되니까 하나는 내게 양자로 주지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이 무심결에 그러지 뭐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사모님께 얼마나 야단을 맞았을까요?

그래도 이 분이 워낙 의리파라서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다섯 중에 누구를 양자로 주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아들들이 잠들어 있는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곤히 자고 있는 아들 다섯을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어떤 아이를 양자로 줄까? 장남, 장남은 안 되지. 상속자인데 어떻게 다른 집에 주나?’ 그래서 첫째 아들은 제처 놓고 둘째 아들을 봅니다.

 

이 녀석은 다서 아들 중에서 제일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인데 안 되지그래서 셋째 아들을 보았습니다.

이 녀석은 나를 쏙 빼닮았어. 제일 미남이고. 셋째는 도무지 안 되겠어

이제 넷째를 보았습니다.

이 녀석은 병치레를 자주 하고 너무너무 불쌍해. 이 녀석을 줄 수는 없지

이제 마지막 막내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귀여운 막내를 어떻게 줄 수가 있나

한 아들도 주기 어려운 마음을 확인하고 난 그 날, 그 목사님은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 . ”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순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자격과 관계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할 만한 조건이나 관계를 요구하셨다면, 우리들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시기 바로 전, 제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절 말씀.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인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조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성령을 통해 우리들에게 알려 주셨고,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는 사랑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11-12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런데 이 마땅한 사랑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이사 심방을 갔다 특이한 이사 이유를 듣게 된 적이 있습니다. 앞집에 사는 사람이 크리스천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양보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었는데, 그 일이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파트 1층에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교패가 문에 붙어 있는 것이었답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이 지나가다 문에 붙은 교패를 보게 되는데, 과연 그 사람들이 우리집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염려와 고민 가운데 살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게 삶을 힘들게 한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우연히 동부코오롱 아파트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답니다. 그런데 만나교회를 아주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더니 주일이 되면 주변의 길이 막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 무엇인데?” 거기에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고 어쨌든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을 하더랍니다.

 

만나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억울한 일일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이런 인상을 가지는데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자신이 교회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사랑받는 다는 느낌을 받기보다는 그들로 인해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자면 서로에게 참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억울해도 할 수 없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 . .

자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면,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를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면, 그 신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10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아들을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주심으로, 우리가 어떤 존재임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오래 전 제가 만나교회에서 학생부를 지도하던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오늘 말씀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수련회를 가면 늘 말썽부리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몽둥이를 들고 군기 반장 역할을 했는데, 그래도 그 친구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쓴 작전입니다. 가장 말썽 부리는 친구 하나를 밤늦게 불러내서는 라면을 끓여 줬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캠핑 가서 밤에 끓여먹는 라면이 얼마나 맛있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라면을 먹고 난 후에, 그 말썽쟁이 학생에게 비밀은 꼭 지켜야해!”라고 속삭이는 것이죠.

 

하룻밤 사이 몇 명을 이렇게 불러냈습니다.

다음날이 되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말썽쟁이가 그렇게 쉽게 달라지겠습니까?

떠들고 장난을 칩니다. 그 때 저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눈을 찡긋합니다.

우리끼리 비밀이 있지?’ 라는 표시로 말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순한 양이 되어 버립니다. 자기 자신이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말을 듣도록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들과 나사이에 특별한 비밀을 만드는 것이죠. 특별한 일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저 라면 하나 끓여준 것만으로도 특별함이 생기고 삶을 교정하는 동력이 되는 데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은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아십니까?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나누어 보겠습니다.

 

미국에서 한 의사가 중동의 왕자를 수술하게 되었답니다. 어려운 수술이었기에 이 돈이 많은 왕자는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결과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왕자를 수슬한 의사는 왕자에게 얼마의 수술비를 받을까 고민했답니다.

그래서 친구와 의논을 하게 되었는데 한 1.000불 쯤 받으려 한다고 말하니까,

 

어떤 이는 수당까지 합쳐서 5000불은 받아야 적당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중동의 왕자가 부자이기에 5만 달러를 받아도 된다고 하더랍니다.

고민을 하던 의사가 자기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의논을 했더니, 목사님이 이르기를 중동 왕실의 왕자들은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합니다.

 

그들은 신분을 아주 중요시 생각하지요. 그러니까 액수를 적은 청구서를 보내지 마시고, 빈 청구서에다 왕자님의 신분에 합당하게 지불하시기를 바람이라고 적어서 보내십시오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대로 했더니, 왕자가 75천 달러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의사는 너무나 흥분해서 이 사실을 전화로 목사님에게 알렸답니다. 목사님도 물론 축하 해줬고요.

그런데 그 주말에 의사에게 목사님이 쓴 편지가 배달되었는데 감사헌금 봉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짧은 글이 적힌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형제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에 합당하도록 감사헌금을 내십시오라고 적혀 있더랍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신분인지를 안다면, 그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으로 행동이 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이 마땅한 이유는, 그 사랑을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권위는 그 사랑을 받은 확신 가운데 살아가면서 생기는 것입니다.

 

마땅한 일에는 수고가 따른다.

이제 오늘의 말씀 중에 11절 말씀을 주목해 보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411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1. Dear friends, since God so loved us, we also ought to love one another. (NIV)

 

NIV 성경의 표현 “We ought to love”‘must'보다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의무의 차원에서 말씀하셨다면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천하는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기 싫은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정의 내려 볼 수 있지요.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하며 데살로니가전서 13절에서

그대들에게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첫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표현하는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상대방을 당신보다 더 중요한 사람처럼 대접해 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주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수고가 필요한 일입니다.

요즘 저는 목회를 시작하고 가장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많이 생겨서가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만들었기 때문이죠.

 

지난해 아들과 딸이 다 결혼하고 난 후 혹시 아내에게 우울증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가능하면 밥을 같이 먹으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외부 약속도 많이 줄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둘이서만 외식 하는 시간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거의 매일 삼시세끼를 같이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많이 염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부부간에 큰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고 말이죠. 그런데 둘이 같이 식사를 하다 보니 밥을 할 때도, 밥을 먹고 치울 때도 내가 뭘 도와줄지 찾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둘이 있는 시간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작은 마음 하나가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될까?”

 

혹시 여러분들 중에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당신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낫게 여긴 경험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요한일서 413)라고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마음의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순간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 사랑의 중매자이십니다. 이 사랑의 중매자로 인해서 우리는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교인들을 너무나 몰라요. 글쎄 목사님이 보는 데서는 열심히 봉사하는데, 누가 보지 않으면 절대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말입니다.

 

글쎄,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이지 못할 텐데, 그 분은 그렇게 사랑의 수고를 하지 않고 마음이 평안할까요? 사람이 보는데서 그렇게 했다고 과연 사랑의 열매가 맺혀질까요?

 

사랑의 열매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음으로, 우리 육체의 소욕과 인간의 욕심이 꺾일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장례식에 가면 고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오는 도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어떤 목사로 기억할까?”

열심히 일한 사람, 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목회에 성공한 사람. . .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듣고 싶은 소리가 있다면, “우리 목사님은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셨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 장,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고린도전서 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강하게 와 닿는지 모릅니다.

다른 어떤 평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일을 했다 할지라도, 내가 사랑하지 못하는 한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사역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nothing"입니다.

존 오트버그(John Ortberg)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로 모든 가치의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 - 매춘부, 세금 징수원, 종교적으로 모자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열렬히 받아들였다. . .

그들(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려 하지 않았고, 간음한 여인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으며, 죄인의 의로운 자와 교제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으로 보게 되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른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세요. 수고한다는 것은 나의 욕망과 나의 방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에게 쉬운 방식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사랑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럽인지 미국인지 드넓은 초원이 있는 어떤 마을에, 진한 갈색의 멋진 종마가 풀을 뜯고 있다. 그 곁에는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고, 그 종마를 사랑하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멀리 출타하면서 소년에게 말을 부탁했다.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그 멋진 종마를 사랑하고, 또 그 말이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그 종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주어진 것에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종마가 병이 났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밖에 없었다.

 

눈물겨운 간호의 보람 없이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다리를 절게 되어버렸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그 말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후 말한다.

"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

 

스토킹(stalking)도 사랑의 한 단면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올바른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세족식이죠. 이 본문을 가지고 옥한음 목사님이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 내용 중에 저에게 아주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을 때, 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발을 닦을 때,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섬김의 방식입니다. 세수 대야에 물을 담을 때, 차가운 얼음물이나 80도가 넘는 물을 담아오면 발을 담근 사람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누군가의 발을 닦는데 물이 없이 맨 손으로 발을 닦으려 한다면 얼마나 뻑뻑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 사랑의 요구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이 마땅한 일을 위한 수고가 시작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방식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라! /요일4:7-16/ 유기성 목사

2016-08-24 11:37:48

 

이스라엘 선교사님 한 분이 예루살렘 안에 있는 세 그룹의 기독교인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 아랍인 기독인, 외국인 기독교인이 있는데, 최근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놀랍게 늘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도 많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 오실 때가 가까왔다고 흥분하는데, 선교사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 부류의 기독교인들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믿고도 여전히 유대인, 아랍인 따지는 것은 그들이 진정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교인 수가 늘었다고 기뻐할 일만은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나야 진정 부흥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사랑으로 소문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진짜 예수 믿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7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권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누구나 이 말씀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 약간 주춤하게 됩니다.

 

8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사랑하자는 말과 분명 다른 느낌입니다. 12절 말씀에 이르면 숨이 막힙니다.

 

12...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도 요한이 말하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라고 명령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해야지결심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게 되어야 진짜입니다.

 

이것을 사랑의 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없기에 주님이 임하셔서 사랑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사랑의 부흥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두 집 살림을 하던 남편이 회개하고, 본 부인과 화합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이런 일이 이혼이 급증하던 미국에서 일어난다면 하고 부러워했을 정도였습니다. 참 성실하다고 믿었던 하인들이 숨겨 놓았던 죄를 회개하였고, 그 주인과 가족들은 그를 용서하였습니다.

 

한 부인은 자신의 음행을 회개하기도 했습니다. 사회하던 선교사가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남편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울면서 그 아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니 그 아내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매정하게 대한 것을 회개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미워하고 원망했던 일을 고백하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자 교회가 초만원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조롱하러 구경왔던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회개하였습니다.

 

1900년대 초 중국과 한국의 선교사로 일했던 요나단 고우포스선교사에 의하여 전해진 당시 일화들입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신유와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때,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가 사랑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16...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능력을 받았다고 교만하고 비판하고 욕심을 부리고 분열을 일삼는다면 잘못된 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9-10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 그 독생자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한 제물로 삼았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사랑이 아닙니다. 불같은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음식만 삼켜도 온 몸을 뒤틀면서 안절부절 못하는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신 사람이 어찌 이기적이고 냉정하고 무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사랑의 불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폭포수같은 사랑이란 표현에 거칠게 거부감을 표하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 아래 어디에 그런 사랑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자신은하나님의 폭포수같은 사랑을 받은 기억이 없다. 정말 그렇다면 말만하지 말고 느끼게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지만 은근히 부인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습니다. 얼굴을 보면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의 얼굴이 아닌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며 십자가 복음을 듣고도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영원히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하나님도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공부 잘하고, 착하고 열심히 충성하여 하나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이 종아하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더 좌절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환상 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습니다. 그 날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것이 저를 영원히 사랑하기로 결단하였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마음이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 열등감 때문에 몸부림칠 때, 고ㄹ니도전서 127-29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약한 자, 미련한 자, 멸시받고, 없고, 비천한 자를 택하여 지혜로운 자,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3일 동안 믿지 못하다가, 이 말씀은 무조건 믿어야 할 복음을 깨닫고 성경책을 끌어 안고제가 믿겠습니다.”하고 고백하는 순간 통곡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믿음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확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제는 십자가 복음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체험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2절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13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며 사는데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 한분이 너무 너무 좋아하는 자매에게 프로포즈를 하였는데, 자매 쪽에서 반응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결심을 했습니다. 하루에 한번씩 편지를 쓰자 그래서 하루에 한 번씩 사랑의 고백 편지를 썼어요. 그런데도 반응이 없자 형제는 하루에 세 번 편지를 쓰자 그래서 하루에 세 번씩을 러브레터를 써서 보냈습니다. 드디어 이 자매가 감동을 받고 결혼을 했는데 편지 배달한 사람과 결혼 했답니다. 자꾸 만나다 보니 정이 든 것입니다.

 

사랑은 이론이나 교리로 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만나고 교제하고 동행하니 누려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신 주 예수님을 믿으면 사랑해야 한다가 아니라 사랑하게 됩니다.

 

요한 사도 자신이 그 증인입니다. 그는 세상 욕망과 거친 성격으로 성격이 불같아서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요한 밖에 계셨던 주님이 성령으로 그의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회개할 것이 아니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오랜 여행을 하고 오셨는데 선물이 없다면 딸들이 회개할까요? 선물을 찾을까요? 찾을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내겐 그 사랑이 없지? 왜 사랑을 주시지 않나요?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대답하기가 힘이 드십니까? 그래서 사랑의 불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없어서 회개할 것이 있다면 사랑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소중함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돈을 구하고 건강을 구하고. 은사를 구했지 사랑은 구하지 않았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모르고, 그런 것들을 자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사랑이 없는 가장 큰 이유요 회개할 제목입니다. , 건강, 성공, 은사 보다 사랑이 더 큰 은혜요 축복인 줄 알면 반드시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김흥섭 판사에게 어느 날 젊은 부부가 성격이 맞지 않아 이혼을 신청하러 왔습니다. 이들은 아이 부양 문제와 재산 보상 문제로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때 김 판사는 이 아이를 누가 책임질 것이요? 하였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이에게 '너는 누구하고 살기를 원하느냐?' 물었습니다. 그때 아빠의 손과 엄마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 판사는 재판 일정을 한 달 연기하기로 하고 성경 한권을 사주면서, 고린도전서 l3장을 하루에 세 번 이상 한달 동안 1OO번을 읽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이 집에 돌아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후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욕심을 회개하고서 이혼 소송을 취소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면 주님은 우리가 사랑하며 살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사모님이 부엌을 엉망진창으로 해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사모님이 돌아 오시자, 다짜고짜 독하게 다구쳤답니다. 가만있는 사모님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당신은 오늘 딸이 소풍가는 날인 줄 아시기나 하셨어요? 새벽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바빠서, 미처 치우지도 못하고 기도회가 있어 갔기로서니 그럴 수가 있어요? 다른 집 남편들은 이럴 땐 치워 주기도 한다던데.”

 

궁지에 몰린 목사님은 온 집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답니다.“그래도 그렇지. 당신이 뭐 잘했다고 말대꾸야!”

 

그 때 교회 집사님이 찾아와서 몸이 아프니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에 방에 들어와 가슴만 답답하더랍니다.‘이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까? 아내는 무엇이라고 할까?’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나갔더니, 기다리던 집사님이 가버렸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죄인의 심정으로 그 집사님 집으로 심방을 갔답니다.

 

목사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을 하실 수 없으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월남전에 참가했다가 귀국한 한 장교가 배 위에서 항구에 인산인해를 이룬 군인 가족들을 보고 아내를 어떻게 찾나하고 고심했답니다. 아내는 손수건을 흔들기로 약속했는데 모두 다 손수건을 흔들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배 위에서 둘러보니 그 많은 사람 중에 손수건을 흔드는 아내의 모습이 한 눈에 척 들어오더랍니다.

 

오늘 하나님의 눈에는 누가 가장 뜨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는 자입니다.

 

얼마 전 한 자매를 만났는데나의 가장 기뻐하는 자이다.’하는 주님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누구도 사랑스러워 하지 않을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그의 마음에 나의 사랑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의 사정에 대하여 들어보았습니다.

 

그 자매는 너무나 어려운 형편에서 태어나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삶 때문에 그 마음 중심에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고 뜨거웠습니다.정말 하나님께서 약한 자 미련한자 멸시받는 자를 택하여 쓰심을 알았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사랑의 부흥을 구합시다! 그리고 순종만 할 뿐입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 /요일4:12-21/ 곽선희 목사

2014-11-20 14:02:19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매일같 이 자다 깨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 는 것 같이 그렇게 급변하고 있습니 다. 특별히 이 세상이 향방없이 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미래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만은 미래학자의 말 치고 맞아 들어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미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치 럭비 공이 뛰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뛸 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변 화될는지 모르는 그런 세상, 불확실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 세히 살피면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 습니다. 어쩌면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더 확실하게 우리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 러분 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 노래라고 하는 것, 노래라고 하지 않았죠.

 

소리라고 했죠. 소 리, 가락, 그렇게 했습니다 만은 그 다음에 뭐 자꾸 변하는데 트로트, 재즈, 락앤롤, 비틀즈, 트위스트, 랩 그리고 발라드, 요새 와서 테크노. 아무리 제가 좋은 마음으로 이해하 려고 해도 이게 정말 노래인가,

 

이 발악인가 노래인가 알 수 없어요. 아무리 좋아지려고 해도 좋아지지 않더라고요. 저는 제 나이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합니다만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모든 노래, 어느 나라 노래든지 노래를 통 털어 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 떠 난 노래가 없습니다. 전부가 사랑 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 어버린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 는 사랑, 사랑이 주제가 되요. 그건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곧 생명 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무서운 맹수들도 한번은 사랑해야 생명을 생산합니다. 또 사랑 속에서 생명 이 자랍니다. 고슴도치가 제 새끼 사랑하는 걸 보면 신기합디다. 그 렇게 사랑해서 생명은 태어나고, 키 워나고, 자라납니다. 그런고로 생명 안에 우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옛날 책이나, 혹은 목사님들의 설교 중에는 이것 을 가마에다 비유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옛날 얘기니까 그저 한 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가마꾼이 색시를 태우고 앞에서 가마꾼이 메 고 가고 뒷사람이 또 메고 갑니다. 이런 경우 앞에서 가는 사람은 앞을 내다보며, 앞을 환히 보면서 가마꾼 이 가마를 메고 갑니다 만은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안 보입 니다.

 

앞에는 가마가 꽉 막았는데 이걸 붙들고 갑니다. 이래서 옛날 어른들은 이걸 이렇게 설명합니다. 앞에 있는 가마꾼은 소망이요, 뒤에 딸려 가는 가마꾼은 믿음이요, 가운 데 있는 색시는 사랑이라고. 그래 서 신랑집에 가면은 이 두 가마꾼은 물러가고 가마는 해체됩니다.

 

그리 고 신부만 신랑 방에 들어갑니다 그 런고로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그렇 게 옛날 어른들은 비유해서 설명했 습니다. 사람은 확실히 사랑으로 삽니다. 죽을 사람도 사랑으로 인 해서 살아납니다. 어찌 생각하면 사랑 없이 되는 일은 다 죽음으로 치닫습니다. 오직 사랑이 있어서 살고, 사랑이 있어서 의미가 있고, 사랑이 있어서 소생하는 힘을 얻는 것이고 사랑이 있어서 병도 치유되 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을 때는 심지어는 죽음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참 사랑에 감격 하면 죽는 문제가 하등의 문제가 되 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위력 입니다. 월남전 때에 있었던 실화 입니다. 전세가 불리해 가지고 일 선에서 뒤로 물러섰습니다. 후퇴할 때가 이 작전이 제일 어렵습니다.

 

그 후퇴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총에 맞았습니다. 뒤에서 쏘는 총 에 맞아서 지금 비틀거리고 있습니 다. 이렇게 후퇴 먼저 한 사람들이 이쪽에서 보니까 저기에 비틀거리고 쓰러져 있는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 은가, 여기서 이 사랑하는 친구 하 나가 그 총알이 비오듯하는 가운데 를 뚫고 들어가서 저걸 구출하겠다 고 하니까 소대장이 말렸습니다.

 

"이미 총을 맞았고 피를 많이 흘렸 고, 저 사람은 살지 못한다. 굳이 네가 거기에 들어갔다가 너까지 죽 을 거 없지 않느냐? 가지 마라"

 

그 랬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거기 서 손을 들며 쓰러져있는 그 친구를 바라보고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그 대로 그 총알 속을 뚫고 들어가서 친구를 업고 나옵니다. 업힌 친구 는 귀에다 대고 자기를 업고 가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빙그레 웃으 면서

 

"네가 올 줄 알았다. 나는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나는 아무 여한이 없다"

그리고 죽 었어요. 죽은 시체를 업고 와서 내 려놓을 때에 소대장이

"거 봐라! 너 그거 죽을 사람, 어차피 죽을 사 람 살리려고 하다가 너까지 죽을 뻔 했다"

그럴 때에 이 친구는 말했습 니다.

"아닙니다. 내 친구는 내 등 에 업혀서, '네가 올 줄 알았다.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하고 죽었습니다"

 

여러분, 참 사랑! 위대한 사랑에 감격하면 뭐 고생이 다, 질병이다, 문제가 되지 않고 죽 음까지도 넉넉하게 넘어설 수 있는 것이에요. 결국은 사랑입니다. 이 귀한 사랑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예요.

 

둘째는 사랑이 병들어서 문제예요. 저마다 사랑을 외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 에요 병들었어요. 또 사랑에 거짓 이 문제입니다. 사랑에 속았어요. 거짓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실망하 게 합니다.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 도 있습니다. 사랑의 무지가 문제 입니다. 사랑이 없는 게 아니고 사 랑을 모르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사랑의 Discommunication입니다.

 

사랑이 통하질 않습니다. 분명히 사랑 받고 있으면서도 사랑의 의사 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 랑이 절단됩니다. 그 문제는 내가 믿질 않기 때문에. 분명히 사랑하 고 있고 사랑 받고 있는데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되고, 사 랑을 모르면 감격이 없고, 사랑을 모르면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랑의 원초적 속 성을 설명하는 귀중한 말씀이 이어 집니다. 사랑이 중생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이 참 사랑의 의미로 바꾸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 이 참 사랑으로 그 의미를 다시 찾 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 랑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 오늘 성경말씀은 위대한 말씀 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유명한 말입 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여러 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느껴봤습 니까? 우리는 간간이 결정적 시간 을 맞습니다. 어떤 경우에

"맞아,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크게 깨달 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부터 세상 은 달라집니다. 세상 역사가 바뀝 니다. 삼라만상이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완전히 사랑의 세계 를 보게됩니다. 제 개인 얘기를 해 서 미안합니다 만은, 전 어렸을 때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는 한 번도 맞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 버지로부터는 매를 많이 맞았습니 다.

 

때로는 이해가 되지만은 어떨 때는 왜 이렇게 자꾸만 때리시나 좀 불만도 많았습니다. 저는 날짜도 기억합니다. 열일곱살 되던 때, 그 때 마지막으로 맞았습니다. 그날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잘못이 아니었 던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슨 반항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설명 도 하면 안됩니다. 무조건 맞았습 니다. 저를 때릴 때에 어머니가 말 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가실 때에 딱 붙들고 한 마 디 하시는 것을 제가 문 안에서 들 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아들을 사랑하는 거요, 안 하는 거요?"

오 늘은 분명히 당신이 잘못했는데 왜 다 큰애를 말로 타이르지 않고 때리 냐고, 아버지는 이렇게 조용히 대답 합니다

"자식은 겉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야, 속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무슨 말을 . 그렇게 하느냐고, 사랑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고,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거지. 저 는 문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사랑 하긴 하는가보다. 그때부터 생각을 다시 돌리고 보니까 정말 아버지의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신 거예요. 과거도 미래도, 아버지는 엄청나게 나를 사랑했어요. 사랑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사랑이었어 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모든 일을 사랑으로 수 용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말씀을 듣습 니다, 사랑의 계시를 봅니다,

 

사랑의 영감을 받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면 어디를 보아도 다 하나님의 사 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사랑의 뿌리요, 사랑의 원초적 생명력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 니다. 자 그리고 오늘 성경은 우리 에게 일러줍니다. 그가 먼저 사랑 했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 하셨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사랑은 다 철 난 다음의 사랑입니 다. 사람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네 살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여러분 젖 먹던 생각이 난다면 그 사람은 다섯 살까지 먹은 사람이요.

 

결국은 가 장 소중한 사랑은 네 살 전에 있는 겁니다. 그 모든 소중한 사랑은 기 억에 없어요. 그런고로 사랑은 깨 달으면서부터 사랑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모르고 있어요, 엄청난 사랑 을 받고도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 래 사랑이 있느니 없느니. 사랑이 없으면 세상에 당신이 존재하질 못 해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 나를 사랑하시고, 벌써 오래 전 부터 내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 과 원수 되었을 때, 내가 아무 것도 모를 때 그는 나를 사랑하셨어요. 나는 때때로 내 손을 내밀고

 

"여기 다가 내가 원하는 걸 주세요. 그래 야 사랑이 아닙니까?"라고 고집을 피우지만,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 주시지 않는 것이 사랑이죠. 우리 는 자녀들이 뭘 달라고 할 때에 부 득불 가졌던 것도 빼앗을 때가 있어 요.

 

? 빼앗는 게 사랑이니까. 철 난다는 게 뭡니까? 철이 나고 부터는 그게 아니죠. 빼앗는 것도 사랑이고, 때리는 것도 사랑이고, 잔 소리도 사랑이고. 이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게 철이 난 것 이죠. 이제부터 알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보상으로서의 사랑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받은 사랑에 만족할 뿐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타 임즈가, 뉴욕 타임즈가 베스트셀러 로 제1위로 뽑은 책 한 권이 있습니 다. Chicken Soup for the Couples Soul 이라고 하는 그런 책인데요.

 

그 책의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 니다. 수잔 앤드슨이라고 하는 아 주머니가 있는데 설흔네살입니다. 직장여성입니다. 의사의 오진으로 인해서 그는 실명하게 됩니다. 장 님이 됐습니다. 참 마음이 괴로웠 지만은 1년 동안 치료받은 다음에, 그냥 집에만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 직장에서 잘 받아주어서 다시 직장 에 나가게 됩니다.

 

버스를 타고 직 장에 나갈 때 남편이 동행해 주었습 니다. 참 공교롭게도 남편의 직장 과 자기 직장은 정반대에 있습니다. 그 남편은 일찍 떠나서 자기를 데려 다주고 그리고 다시 자기는 자기 직 장으로 갑니다. 이렇게 얼마동안을 했는데 언젠가는 남편이 이렇게 말 합니다. 남편은 군인인데요,

 

여보, 내가 늘 이렇게만 할 수가 없구만, 시간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어 차피 당신은 언젠가라도 혼자 다녀 야 되겠는데 오늘부터는 혼자 직장 에 나가면 어떻겠냐고. 이 아내는 그때 몹시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 를 데려다 주는 것이 귀찮은 모양이 지?' 지겨우냐고, 내가 살아 있는 게 이렇게 불편하냐고, 짜증을 냈습니 다. 남편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러면 내가 도와주마 했는데 도 이 아내는 화가 났어요. 아니라 고 나 혼자 간다고.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직장에 나갔습니다. 하루 나 가고, 이틀 나가고, 보름동안을 나갔 습니다. 어느 날 버스운전사가 이 렇게 말합니다. 운전기사가 말하기 를

 

"아주머니, 참 복이 많으시네요. 부럽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아니 제가 이제 시각장애자인데 뭐가 이 렇게 부럽냐고 그러니까

 

"아닙니다. 아주머니가 여기 버스에서 내려서 저 사무실에 들어갈 때, 그때까지 저 밖에서 잘 생긴 군인 남자가 당 신을 매일같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들어갈 때 손을 흔들 었습니다"

그때에 이 부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내 남편이 나를 이렇 게 혼자 보내놓고 뒤따라와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뿐이지요. 이미 내 주변에는 벌 써 사랑으로 충만한 거지요. 문제 는 깨달음이 없는 거요.

내 마음이 완악해서 내 마음에 사랑의 기본 요 소가 없어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는 거죠. 오늘 성경은 다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벌써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랑이 뭐냐 하면서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 니다.

 

"네가 내게 대하듯 나도 네 게 대하겠다"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율법이요 사랑이 아닙니다.

"네가 어떻게 하든 말든 관계없이 나는 너 를 사랑한다"

독선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나는 너를 사랑 할 것이다"

그것은 집착입니다. 참 사랑은 이것들이 아닙니다.

"그리 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 가 너를 사랑할 것이다"

 

여러분 자 녀를 사랑하십니까? 자녀 사랑해서 효도 받고 싶습니까? 자녀 사랑하 면서 실망하십니까? 사랑을 다시 한번 점검하세요, 재진단 해보세요.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자식을 대 할 때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생각하세요. 그 고달픈 세상 을 살면서 나를 사랑하시던 그 어머 니의 사랑을 똑바로 생각하면 내가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여건에서 자식 사랑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을 알고 감격할 때, 이제 누구를 사랑 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성 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마땅한 것 이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요, 그건 공로도 아니요, 그건 자랑 거리도 아니요, 보상을 바랄 것 아 무 것도 없어요.

 

당연히 사랑해야 죠. 여기에는 아무 보상적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고 그랬어요. 사랑의 채널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아요. 사랑이 없는 사람은 부모 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고, 하나님도 몰라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 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내가 나 를 알고 이웃을 아는 것이에요. 여 러분 부모의 사랑을 고루고루 받은 사람은 그 성격이 아주 부드럽고 좋 아요. 어렸을 때 사랑을 바로 받지 못한 사람, 이거 삐뚤어져 놓으면 이건 구제불능이에요. 이것처럼 불 쌍한 게 없어요. 사랑이 궁핍해서, 사랑이 모자라서. 이런 심리학적 결론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사람은 절대 로 자살을 하지 않는답니다. 할아 버지, 할머니의 사랑은 좀 다르거든 요. 내 자식은 내가 때리는데 손자 는 못 때리거든요. 어느 쪽은 좀 맹목적이기도 해요. 그러나 이 사 랑을 받고 자란 자녀는 절대로 절망 하지 않습니다. 이게 생명의 힘이 요, 현대를 사는 생명력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두 려움이 없다고,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해도 두려움 이 없고, 이웃을 대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세상만사 아무리 바뀌어 도 환경과 아무관계 없습니다. 나 는 사랑에 취해 가지고 살아가고 있 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요새 말로 자신감이 넘치는 겁니다.

 

유명한 주석가 벵겔(Bengel)4단 계로 설명을 합니다. 사랑도 두려 움도 없다면 무지함이요, 사랑 없이 두려움만 있다면 율법이요, 사랑도 두려움도 다 있다면 갈등이요, 두려 움이 없는 사랑 그것이 믿음이라고 요. 참 사랑, 그 안에는 평화와 용 기와 창의력이 있는 겁니다. 사랑 은 억지로 갈취할 수 있는 것이 아 닙니다.

 

아무 보상도 바라지 말고 하나님이 벌써 나를 사랑하시고, 십 자가 안에 계시된 그 무궁무진한 사 랑의 진리를 항상 새롭게 깨달아 가 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 리는 나 자신도 사랑하게 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하나 님은 사랑이라 이것을 간증하며 항 상 자유하게 승리하는 그런 생을 살 아갈 수 있는 것이올시다.

 

 

 

 

요일4:7-21/ 사랑과 그 반응 / 한경직 목사

2014-08-23 17:10:2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오늘 아침 우리가 중점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十九절의 말씀이올시다. 그것은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는 말씀입니다. 아마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기 위해서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문체로 순하게 바꾼다면 그 두 글귀를 바꿔서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으로 우리가 사랑하느니라.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므로 우리도 사랑하는 생활을 하느니라이렇게 번역하여야 되는 줄 압니다. 간단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도 사랑하는 생활을 하여야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알면 더 큰복이 없는 줄 압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참으로 깨달아서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아래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고 하면 모세와 선지자의 대 강령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는 종교와 도덕의 완전한 생활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활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서 옵니다.

 

옛 날부터 오늘까지 세상에 많은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 혹은 철학자, 종교가들이 우주의 배후에는 어떤 지력이 있으며 어떤 법칙이 있다. 대 양심이 있으며 대 능력의 소유자가 그리고 대 의지가 있다는 등 여러 가지로 우주의 배후의 존재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합니다.

 

성신의 감화를 받은 사도 요한 은우주의 배후에는 사랑이 있다. 우주의 깊은 속에는 사랑이 계시다. 이 사랑이 곧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곧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본체는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시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과연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그 사랑이 우주에 차고도 넘칩니다. 사람의 사랑은 제한이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그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시편 기자가 노래한 것같이그 자비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자비하심이 영원함이로다했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잠깐 있다가 식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의 본체이시므로 그 사랑은 영원하고 변치 아니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습니다.

 

사람의 사랑이나 인심은 조석 변으로, 즉 아침저녁으로 사랑도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발적인 사랑이올시다. 누구나 시키는 피동적 사랑이 아닙니다. 자의적 사랑이올시다. 스스로 뜻하는 사랑이올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사람은 조건이 있게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나에게 좋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에게 싫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꽃은 고운 고로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아름다우니까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그런 까닭에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원수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죄를 미워하시지마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올시다. 이 사랑이 역사적으로 인간 사회의 인간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피 창조물을 통해서도 좀 나타났습니다.

 

태양의 양기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습니다. 뚜렷한 달빛 가운데서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산천 초목이나 오곡백과나 산 해 어물이나 자라는 풀, 웃는 꽃 가운데서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랑 이외에 하나님의 특별하긴 그 사랑 하나님의 본체이신 이 사랑,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무조건적이고 자발적 자의적인 사랑이 인간 역사를 뚫고 나타났습니다. 사도 요한 이 요한절에 선언하기를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인간 역사에 특별히 나타나서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 역사를 뚫고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 죽을 인생을 살리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시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올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어떻게 압니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 죄를 대속(代贖)하신 독생자를 보고서 압니다.

 

그리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로마서 절에우리가 아직 되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했습니다.

 

요한 복음 十六절에는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날뿐더러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배소서 절에서 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으로써 창세(創世)전에 우리고 하여금 흠 없는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기 전에 먼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찾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각각 여러분의 개인 생활을 살펴보세요. 여러분께서 여러분이 되신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서 금 생과 내생에 영원한 복을 받고 이만한 자리에 있게 된 것은 누구의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을 사랑하신 탓입니다.

 

몇 해 전에 서울대학 학생회에서 집회를 가지며 특히 나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가 제 과거의 생활을 돌이켜 생각해 본 정이 있는데 어느 때 그것을 깨닫지 아니 했으리 오 마는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특별히 깨달았습니다.

 

우선 세상에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로 하여금 내가 세상에 떨어지자마자 어머님의 부드러운 손이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내가 한두 살 때, 세상을 전혀 모를 때, 우리 부모의 손이 나를 길러주었습니다.

 

그 사상이 어디서 왔는지 모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점점 커서 걸어다니면서 교회에 나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 먼저 미국에서 선교사를 보내서 마 목사라고 하는 이가 내가 세상에 나기 몇 해 전에 벌써 우리 동네에 와서 작은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내가 좀더 장성해서 학교에 나가게 될 때 벌써 하나님께서 마 목사와 교회를 통해서 작은 교회학교를 세워주어서 내가 그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내가 세운 학교는 아닙니다. 그렇게 소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벌써 하나님께서 남가 이승훈 선생을 부르시고 그를 구원해 주시고 이 이 장로를 통해서 정주 오산에 좋은 애국적인 기독교학교를 이미 세워 놓았습니다. 내가 세우고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준비하셨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려고 생각하니까 벌써 하나님께서 멀리서 선교사 배의랑 박사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이미 평양에 숭실대학(崇實大學)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의 체험을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먼저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 하셨으므로 내가 신앙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작은 반응밖에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도 가만히 돌이켜 보세요. 어떤 목사가 추운 겨울에 어떤 곳을 가는 도중에 눈 위에 어떤 주정뱅이가 취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 옆에 같이 가던 사람에게 하는 말이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오늘 저 사람처럼 될 뻔하였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다 깨달았습니까? 이 사랑을 깨달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역시 우리 마음을 통하여 반응이 될 것입니다.

 

광선은 반사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서 반사가 됩니다. 여러분 달로 말하면 아무 광선이 없습니다.

 

그저 딱딱한 바위 덩이로 된 돌뿐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밤에 아름다운 달빛을 비추는지 아십니까? 태양 광선이 달을 비추어서 그 태양 광선을 달이 우리에게 반사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마음이 어둡고 캄캄합니다. 냉정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근본 사랑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만 생각하고 이기주의요 자기 욕심으로 가득한 것이 인생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어둔 마음을 비추게 될 때 그 마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비추게 됩니다.

 

그 반사는 두 가지 방면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하나님께 대하여 반사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했으니 나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겠다는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으니 나도 내 주님을 사랑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북받쳐 올라오게 됩니다.

 

본래 사도 바울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따라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후에 사도 바울이 많이 변했습니다.전에와 같이 지금도 내가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살던지 죽던지 몸으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를 원한다했습니다.

 

왜 그런 마음으로 변했습니까? 갈라디아 二十절을 읽어보세요.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했습니다. 왜 그런 마음으로 변했습니까?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셨기때문입니다.

 

전에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 자기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는 마음이 온전히 변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반사로써 그리스도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때에는 이런 의심이 들어오지 않습니까.과연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내가 과연 구원을 얻었는가 내가 과연 이 시간에 죽는다고 해도 곧 천당으로 갈 것인가?하는 의심이 들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 다른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은 그 말씀을 들어보세요.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게 여러 가지 허물과 부족한 것 많고 무엇 하나 옮은 것이 없고 아무리 부족하지마는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가운데 있습니까? 그 사랑이 있으면 여러분은 아무리 부족해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우리 사람의 마음가운데 일어나지 않습니다.

 

둘째로 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에게 반사가 됩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겠느냐?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은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람으로 반사됩니다. 어떤 나라에 가서 있는 선교사일지라도 고국과 친척을 떠나서 일생을 외국에 가 있다는 것은 큰 희생입니다. 보통사람으로 못할 일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최찬영 선교사를 외국에 보냈지마는 일생을 친척과 고국을 떠나서 딴 나라에 가서 몸을 주님께 바쳐서 그 나라의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도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특별히 제가 아프리카에 가서 그 기후가 나쁘고 전부가 정글 인 문자 그대로 원시적 사회 야만적 사회, 가운데 가서 일생을 몸 바치는 선교사의 모습을 가만히 옆에서 볼 때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특히 카메룬 어떤 지방에 가니까 미국에서 온 여자 의사인데 나이가 한 오십 가량 된 여자 혼자서 흑인 가운데 가서 병원을 설립해 놓고 흑인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접촉하면서 병을 치료해 주고 상처를 씻어 주고 여러 가지 병을 고쳐줍니다. 그 환자 가운데 추장이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은 아내가 一二七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여 의사의 아버지가 그 곳에 왔다가 열병으로 죽었고 그의 어머니가 또 죽었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둘 있었는데 둘 다 죽고 그 여자 혼자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는나 혼자라도 내 아버지의 일을 계속하겠다고 결심하고 의학을 연구하고 나와서 일생을 바친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 흑인들을 보면 사랑할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혹 여자를 새까만 얼굴에 분까지 발랐습니다. 그러나 곱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일생을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삽니다.

 

그 사랑이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랑이 왔습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으로 우리가 또한 흑인이라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반사올시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올시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 냉정하고 이 각박하고 쓸쓸하기 사하라 사막 같은 세상, 냉정하기 북극 같은 이런 사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시다.

 

우리가 무엇으로써 크리스마스를 바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 나보다 좀 더 불쌍한 사람, 나보다 좀더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 내 이웃에 있는 사람, 내 친척 누구든지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해 주는 기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다르게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요즈음 날씨가 몹시 추운데 왜 그렇게 추운지 그 이유를 설명하려는 사람이 혹 신문에 있습니다. 겨울은 으레 그렇게 추운 것입니다. 그런데 왜 겨울은 추운지 아십니까? 문제는 하나입니다. 저 아프리카는 겨울에도 덥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촛불을 켜놓으면 너무 더워서 초가 굽어진다고 합니다. 왜 겨울이 추운지 아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온대 지방에는 겨울에 해가 멀어집니다. 해가 멀어지니까 추워집니다. 이유는 그것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왜 냉 냉해지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에게서 우리 마음이 멀어지면 우리 마음이 냉냉해집니다.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려면 하나님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요일4:7-21/ 둘째 되는 큰 계명 / 한경직 목사

2014-08-23 19:17:47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十二三十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 교훈은 본래 구약 레위기 十九十八절에 있습니다. 두 주일 전에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그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둘째로 우리에게 교훈 하시는 말씀이 레위기 十九十八절에 있는 이 말씀,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 말씀이올시다.

 

하나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가르친 계명이올시다. 둘째는 우리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대한 의무를 가르쳐 주신 계명이올시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두 가지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곧 신앙과 도덕, 이 두 가지는 언제나 같이 가야 되는 것이올시다. 이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의 같은 점은 두 계명이 다 하나님의 명령이올시다. 또한 두 계명이 다 같이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표준에 있어서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첫째 계명은, 너희 마음과 목숨과 성품과 힘을 다하라. 다시 말하면 네 자신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되 그 표준은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그 점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 이 크고 둘째 되는 계명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 마음속에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장에 기록한 대로 우리가 읽어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이어 반문한 말씀이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배웠느냐?그는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올시다. 그는 이 두 가지 계명으로 대답하였습니다.첫째는 마음과 목숨과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대답이 네 말이 옳도다, 그대로 행하면 네가 살리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이 율법사가 계속해서 묻는 말이,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원해서 계속해서 묻는 말이그러면 누가 내 이웃이오니까?이 점을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서 거기 대한 해답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중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유대 사람이올시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대단히 험한 길이고 인가가 별로 없는 그러한 지대입니다. 얼마쯤 내러 가다가서 강도 무리를 만났습니다. 매를 맞고 돈을 다 빼앗기고 옷을 찢기고 인사불성이 되어서 길가에 넘어졌습니다.

 

마침 그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여리고로 내려가던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기는 보았지마는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역시 성전에서 일을 흔히 보는 례위 사람 하나가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례위 사람도 역시 불한당 만난 이 사람을 보기만 하고 그저 지나갔습니다.

 

그 후에 우연히 지나간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사람이 흔히 상종도 잘 하지 아니하는, 유대 사람이 흔히 멸시하는 이방인, 거의 이방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지나가다가 이 불한 당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자기가 타고 가던 짐승에서 내려서, 그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자기의 옷을 찌어서 상처를 싸매어 주고, 자기가 탓 던 짐승에 그 사람을 태워서 주막까지 와서, 하루 저녁을 같이 자면서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떠날 때에 돈 얼마를 주인에게 주면서 하는 말이내가 돌아올 때 부족하면 갚을 터이니 이 사람을 잘 치료해 주기를 바란다.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율법사에게 물으시는 말씀이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이 불한당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겠느냐?율법사가 할 말이 있습니까?자비를 베푼 그 사람이올시다.다시 말하면 사마리아 사람이올시다.

 

여기 계명이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때 흔히 바리새인들은 이웃은 물론 내 가까이 사는 사람들, 내 동리 사람들, 이웃의 범위가 널 대야 같은 동족들, 유대인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같은 혹은 헬라 사람 같은 사람, 이방 사람들은 원수라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그 때에 율법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은 이웃이라고 하는 것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우연이나 여러 가지 관계로 나와 가까이 접촉하게 되는 이는 다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친척이나 친구나 한 동리에 사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상점에서 만나는 사람, 공장에서 만나는 사람, 학교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 교회에서 접촉하는 사람, 누구든지 접촉하게 되는 사람은 다 우리의 이웃입니다.

 

여기에는 인종의 차별도 없고, 국경도 없고,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통신이 발전되고 교통의 모든 기구가 발단된 오늘날에 있어서 세계가 다 한 이웃이 된 이러한 때에 예수 님의 이 교훈이 얼마나 적절한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웃은 민족도 초월하고 국경도 초월하고 계급도 초월하고 누구든지 우리와 접촉하게 되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웃이 됩니다. ! 여기에 이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네 이웃이면 사랑하라는 말이올시다.

 

여기 어떠한 이웃은 사랑하고, 어떠한 이웃은 사랑하지 말라는 말 아닙니다. 이웃이면 누구든지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유대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이나 그것을 분별할 여유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접촉하게 되는 사람은 사랑하라. 이 뜻은 내 이웃이라면 유식하든지 또 무식할지라도 사랑하란 말입니다. 이 뜻은 내 이웃이 혹 부자든지 혹은 가난할지라도 사랑하란 말입니다. 어떤 때는 혹 부한 이웃을 사랑하기 쉽지마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반대될 때도 있습니다. 부자 이웃을 사랑하기가 대단히 어렵고 오히려 가난한 이웃이 사랑하기 쉬울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성공할 때만 그 이웃을 사랑하란 말 아닙니다. 그 이웃이 어떤 사업에 실패할 때에도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그 이웃이 내게 채권자가 될 때만 사랑하란 말이 아닙니다. 또 이웃이 내게 채무자가 될 떼에도 사랑하란 말입니다. 어떤 때에는 나의 채권자도 사랑하기가 어려운 때 많아요. 그러나 어떤 때에는 내 채무자를 더 사랑하기 어려운 때도 많아요. 채권자가 되든지 채무자가 되든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입니다.

 

혹은 어떤 때는 내 이웃이 나의 하는 사업에 경쟁자가 될 때가 있을 수도 있는 줄 압니다. 특별히 이웃에게 그런 줄 알아요. 나의 하는 사업에 경쟁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어떤 때는 나에게 유익을 주는 이웃은 사랑하기 쉽지마는 손해 주는 이웃은 사랑하기 어려운 줄 알아요. 그러나 손해 주는 사람이라도 이웃을 사랑하란 그 말입니다. 사실 이웃은 선하든지 악하든지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 님 말씀대로 하면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이올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되 그 표준은 무엇인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가 잠깐 알아듣기 쉽게 생각해 보려고 하면 우리가 우리 몸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계명의 뜻을 알아듣기 쉽습니다.

 

우선 소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우리 자신은 무엇 잘못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항상 양해해 주고 항상 용서하여 줍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안 했을지라도

 

그거야 하기 싫어서 안 했나? 그저 부득이해서, 그 때에는 너무 피곤해서 못했지.혹 어떤 때 안 할 말을 하고도,, 그거야 뭐 하고 싶어서 말했나, 거야 상대방이 먼저 잘못하니까 그런 말이 나왔지!그저 내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늘 양해해주고 항상 용서해줍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말은 네 이웃에 대해서도, 네 이웃이 잘못해도, 네 이웃이 무슨 실수가 있을지라도 항상 양해해주고 네 자신에 대해서 용서해 주는 것만큼 용서해 주어라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또 항상 우리는 내 자신에 대해서는 늘 잘못할지라도 노하기를 더디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노하는 때가 혹 있다고 할지라도 그 노가 오래 가지 아니합니다. 어떤 때는 무엇을 잘못하고 사실 내가 내 자신을 책망할 때가 있지요.내가 못된 놈이야. 내가 잘못했어!이렇게 내 자신에 대해서 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노함은 오래 가지 아니합니다.

 

잠깐 동안 있다가 그 노함은 곧 풀립니다.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말은 내 이웃에 대하여 노할 일이 있을지라도 할 수 있는 대로 조를 더디 하고, 혹 노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노를 오래 품지 말라고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내 이웃에 대한 분한 마음을 내 마음가운데 풀지 아니하고 오래 두면 내가 손해를 받고 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근 三十년 전에 청년 전도사로 신의주 제교회에서 일 볼 때에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곽산(郭山)에 김진근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한 번 신의주에 들어오셔서 저하고 조용히 함께 이야기할 때에 자기 경험담을 이야기해 준 그 말씀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그 김 목사님이 그 때 신학을 다 마치고 노회(老會)에서 이제 목사 장립(將立)을 받기 위해서 시취(試取)를 하는데 그 때 노회에서 시취하는 법은 시취 위원이 따로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노회 앞에서 아무나 이 사람도 묻고 저 사람도 묻고 그저 물어서 대답을 잘해야 그 다음에는 목사 장립을 시키던 때라고 합니다.

 

그저 그렇게 시취를 자기와 어떤 다른 분하고 두 분이 받았습니다. 아 그래서 묻는 말을 자기 생각에는 무던히 애써 다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여러 목사님들의 태도를 보니까 한국 목사들의 태도는 아 그저 뭐 목사 장립 할만하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분위기가 거의 그저 될 듯하더니 아 마지막에 어떤 선교사 하나가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고 하니거 나 보기에는 이 사람들이 아직까지 목사 장립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줄 생각합니다.하면서 반대를 합니다.

 

아 그러니까 그 때는 특별히 선교사의 발언은 대단히 소중히 생각하던 때인데 여러 한국 목사 장로들이 대체로 다 될 줄 이렇게 공기가 돌아가더니, , 이 선교사의 말 한 마디에 공기가 갑자기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는한 노회 기간 동안 연기하기를 동의합니다.』『재청합니다.이렇게 되니까 그만 목사 장립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 이제 자기 숙소로 가만히 돌아오게 되니까 자기 마음속에 분한 생각이 났단 말입니다.

 

아니 선교사로 와서 복음이나 전할 것이지 남의 목사 장립하는 데까지 참견할 것이 무엇 있나?분한 생각이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얼마 수에 그날 저녁 이 일을 가만히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각을 해보니까,그 목사와 자기와 무슨 사혐(私嫌)은 조금도 없는데 그 선교사가 그와 같이 말을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는 경험 많은 선교사인데 내가 아직까지도 좀 부족한 점이 있기에 한 동안 기다리라고 하겠지. 그것이 무슨 나를 미워한다 든 가 다른 생각으로 그런 것이 아닐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하자면 양해가 되었고, 그리고그 선교사가 내게 불리한 말을 했지마는 나는 이 노한 마음 분한 마음을 오래 품지 않겠다.하고 그것을 양해를 했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 때 똑같은 일을 당한 다른 한 분은 그 양해가 도무지 되지 않았습니다.

 

한 달 후에 만났는데도 그 때도 아직까지 분한 마음을 품고,에이! 그 선교사, 그놈!, 그저 그 분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그냥 오래 가지고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지마는 하여간 그 후에 그 다른 분은 결국은 교회 일을 보지 않게 되었더랍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좌우간 우리가 무슨 일로 분한 마음이 들어오든지 이 분한 마음을 풀지 아니하고 오래 두면 손해는 결국 내가 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서 떠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결국 내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태도입니다. 내가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죽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면 내가 다른 사람도 용서해야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시기하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언제든지 시기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기는 현미경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 물 같은 것도 보통 눈으로 보면 맑지마는 현미경으로는 암만 맑은 물이라고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는 더러운 벌레도 많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이 많습니다. 시기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암만 좋은 사람이라도 여러 가지 결점이 많이 나타난다 하는 그 말입니다.

 

그 대신 사랑은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방금 저 사람이 좀 부족한 것이 있지마는 이 앞에는 대단히 좋은 사람으로 될 것이다. 이렇게 항상 사람은 멀리서 보아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으로 본다고 하면 내가 다른 이웃도 사랑으로 보아라 하는 그 말이올시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하는 말이지마는 적극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선 우리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이내 물 가져다 마시고 추우면 이내 외투 가져다 입히고 더우면 부채질해주고 피곤하면 이내 자리에 뉘어서 쉬게 하고 병나면 이애 약 가져다 먹이고, 혹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으면 변명하느라고 분주히 돌아다닙니다.

 

,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그러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고 하는 말은 내 자신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내 이웃도 소중히 여겨라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을 보호하고 보양하고 평안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대접받게 하는 것처럼 내 이웃도 보호하고 보양하고 평안하게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내 이웃의 명예나 생명이나 재산을 보존하고 보호하도록 최선을 다하라 하는 그 말이올시다.

 

우리가 이렇게 이 계명을 생각할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생각은, 누가 이 계명을 능히 지킬 수 있겠는가? 아마 이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성경의 교훈을 그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제 자신이 이 계명을 지킬 수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것은 교역자의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제 책임인 줄 알아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능히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표준이 너무 높지 아니한가 하는 그런 기분이 다 있는 줄 생각합니다.

 

혹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그 표준을 좀 낮출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누구나 실행할 수 있게 그 표준을 얼마쯤 낮춘다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 가령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너희 짐에서 먹이는 고양이만큼 사랑해라. , 그렇게 표준을 좀 낮추어 말했다고 하면 여러분 그대로 다 실행할 것 같습니까? 아마 그렇게 표준을 낮춘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실행하는 이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어떤 부인들 보면 고양이를 굉장히 사랑합니다. 그만큼 이웃을 사랑했으면 다른 사람에게 성자라고 하는 말을 듣겠단 말입니다. 또 어떤 자기 집에서 기르는 개를 사랑하는 것 보면 굉장히 사랑한단 날입니다.

 

이웃을 사실 우리가 기르는 개만큼이라도 사랑한다고 하면 아마 그 사람 남에게, 그 사람 참 보통 사람 아니라.고 칭찬 받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런 계명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다 누구든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킴으로써 구원 얻으리라고 한다면 구원을 얻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도리를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구원 얻는 것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행함으로 얻는 것은 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과연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 구원을 얻은 사람의 생활의 최고의 표준은 이것입니다.내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왜 그런고 하니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의 하나님이올시다. 우리는 이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 우리 생활의 특색이 아무래도 사랑으로 나타나야 될 줄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현재 전 인류가 당면하는 최대의 문제들이 어떤 것인가 혹 생각해 보았습니까? 물론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남북을 통일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남한을 재건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물론 세계적으로 볼 때에 라오스 문제도 큰 문제입니다.

 

혹은 베를린 문제도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서 이 二十세기의 현대 문명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세계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세계 인류와 현대 문명을 보존하는 방법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문제는 온 세계 사람들이 당면하는 제일 큰 문제입니다.

 

이런 시대에 있어서 여러분 또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많겠지마는 특별히 이런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전 인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일까를 여러분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마 여러 가지 말씀이 있겠지마는 그 가운데 하나는 이 계명인 줄 생각합니다.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여라.

 

우리 인류가 내 이웃의 생명을 내 생명과 같이 귀한 줄 알고 내 이웃을 도와주기를 내 자신과 같이 도와줄 줄 아는 이와 같은 자리에 이르기 전에는 결국은 이 현대의 문명과 세계 인류를 보존할 길이 어디 있습니까?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전 세계 문제를 생각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서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지마는 이 모든 문제를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오늘날 한국의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다른 말씀도 많겠지마는 이 말씀이 적어도 그 가운데 가장 귀한 말씀 가운데 하나일 줄 생각합니다.

 

너희들이 어떻든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을 우리들이 먼저 배우고 우리들이 먼저 행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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