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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일서 설교 모음

요한일서 5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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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이기라! /요일5:1-7/ 崔仁根牧師

2023-07-05 23:46:32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고난주일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거룩한 희생을 기리고 가슴에 새기는 기념비적인 날입니다. 또한 우리 인생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주님께서 극복하신 고난의 지혜를 얻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환난의 때요 고난의 때입니다. 미국과 전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로 전쟁보다 더 큰 피해를 입고 모든 사람들이 집안에 격리 되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같으면 지금쯤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회를 열고 거룩한 부활절을 기대하는 영적인 대축복의 계절로 은혜를 덧입고 있을 것인데 지금은 모두가 집안에 갇혀서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조차 모른 채 고통의 날을 보내고 있으니 참으로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리는 고난주일이니 고난 중에서도 예수님을 생각하며 지혜롭게 고난을 극복하여야 하겠고 험악한 이 세상을 이겨내야만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소중한 진리로 오늘 우리들을 권면하고 계십니다.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께로서 난 제대로 된 신자라면 고난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릴 대신하여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이 세상의 환난을 어떻게 극복하셨으며 오늘 우리는 또한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여야 하겠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위해 살을 찢고 피를 쏟아 거룩하게 희생하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한 순간도 잊지 말고 고난과 환난에서 승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로 힘차게 거듭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고난을 이기신 예수님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렇듯 당당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말로는 다 형언할 수 없는 이 세상의 그 모진 고난을 다 이겨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불의에 의한 것이었고 인간들의 악한 죄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셔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었고 칼과 창에 찔리셔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는 말씀과 같이 오직 우리들의 허물과 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탄 마귀와 짝하며 죄에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탄을 따르며 죄악에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이와 같은 우리들의 고난을 대신 지시고 우리들이 죽어야 할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단 한 마디의 원망도 하지 않으시고 그 모진 고난을 온 몸으로 다 이겨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이 세상을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시어 우리들의 영원한 구세주가 되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고난을 묵묵히 이겨내신 예수님의 숨은 비결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오직 하나 이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들을 한 순간도 버려두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도 잔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마 같은 그런 인간들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짐승도 아닌 사람을, 사람도 아닌 하늘의 하나님을 이렇게도 잔인하게 십자가에 못박아놓고 그 옷을 빼앗아 누가 가질는지 제비를 뽑으며 노는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폭도들도 예수님은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들을 사랑해 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고난주일에 우리들이 가슴으로 배우고 새겨야 할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의 계명을 남겨주셨던 것입니다.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말입니다. 무엇이 사랑입니까? 작은 것 하나라도 서로 나누며 도와주며 걱정해 주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모두가 다 총체적으로 힘들고 어렵지만 十匙一飯(십시일반)으로 나누기 위해 불우이웃돕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이 어려울 때 도와주고 챙겨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시애틀에서 한인은행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유니뱅크가 이웃돕기를 나서면서 5만 불을 내 놓았다기에 참으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방송인 원프리도 1천만 불을 내 놓았고, 아마존의 베조스도 1억불을 내 놓았다고 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너무나도 어려운 정목사님 가족이나, 식당을 하면서 가장 타력을 많이 받고 있는 김한준장로님, 권희승집사님이나 송혁집사님이 이웃을 돕겠다고 봉투를 들고 와서 이 종은 참으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비록 자신들도 힘들고 어렵지만 더 어려운 성도들이 있을 것이기에 적은 정성이라도 보태는 손길이기에 가슴 찡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뜨거운 사랑으로 환난과 고통을 이겨내셨듯이 오늘 우리들로 이와 같은 따뜻한 사랑으로 오늘의 고통을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Everett에 사는 선디 루터라는 42살의 한 여인은 남편과 사별하고 지난 8년 동안 6남매를 혼자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 되어 입원을 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6남매는 그런 엄마를 위해 병문안도 하지 못하고 집에서만 안타깝게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위독하다는 병원의 연락을 받고 아이들이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엄마 곁으로 가보지도 못하고 창밖에서 외쳤습니다. “엄마 사랑해!”하고 말입니다. 사경을 헤매던 엄마는 아이들의 그 소리, “엄마 사랑해라는 소리를 듣고서야 평안히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 아이들로부터 사랑을 확인한 엄마는 편히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큰 보물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

 

성경에는 이 세상을 이기지 못한 채 오히려 이 세상에 휩싸여 실패하고 망한 인물들의 이야기도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아간, 엘리사의 종 게하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분모는 바로 개인 이기주의였습니다. 앞에 말씀 드린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돕고 챙기는 사랑이 아니라 이웃도 하나님도 없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챙기는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실례로 가룟 유다의 생각과 가치관을 한 번 성경이 증거 하는 대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2:3-6)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이렇듯 가룟 유다는 은총 입었던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조차 비난하며 가로 막았습니다. 이러한 자가 과연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조차도 사랑하지 못한 채 이웃을 비난했던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님조차도 은 30에 팔아넘기고 돈을 챙겼습니다. 그는 악한 세상을 이긴 것이 아니라 그 악한 세상을 앞장서서 쫓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은 처참한 멸망으로 끝을 맺고 말았던 것입니다.

 

(1:16-18)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그는 결국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에 이와 같은 자를 하나님께서 만 세상 앞에서 이렇게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최소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자라면 인생이 우리들의 재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욕심으로 이스마엘만 낳지 않았어도 이 땅에 지금같은 비참한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네 후손은 이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셔도 아브라함은 조급한 자신의 불안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부인의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으므로 이 땅에 불행과 비극이 넘쳐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우리는 능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인간의 욕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엘리사의 종 게하시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욕심을 내어 여리고성에서 금덩어리를 취하였던 아간이나 동일하고, 영원한 인류 역사의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과 같은 어렵고 힘든 고난의 때에 우리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조급하지 말고, 또한 인간적인 방법을 찾지 말고, 묵묵히 이 세상을 이기시고 또한 이 세상을 이기라고 축구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끝끝내 승리할 수 있도록 인내로서 현실을 극복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최고의 승리자로 우뚝 서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던 성군 다윗은 지금도 외치고 있습니다.

 

(37:4-6)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고 말입니다.

 

이 세상을 이기라!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난국을 어떻게 타파하고 그 옛날처럼 평범 속의 축복을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사람도 아니고 경험자도 아니고 세상을 통달한 도사의 충고도 아닌 하나님의 방법이 있어 오늘 우리들에게 진정한 소망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놀라운 체험을 근거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고전15:57-5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 속의 사도들은 오늘 우리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환난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당당하게 이기고 승리하여 이토록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한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 영원토록 진정한 해답이 되는 성경의 진리인 것입니다. 더욱 깊은 믿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가 위험한 것은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백신도,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약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 나라가 국경을 걸어 잠그고 출입을 막으며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차단하기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거역한 다음 죄인으로 전락하자 그러한 우리들을 고치시고 구원할 수 있는 치료약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입니다. 이 약을 먹으면 그 무서운 죄악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이 만들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인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만들어지는 길을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셨습니다.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과 같은 엄청난 환난과 고통이 만연해 있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오직 한 길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을 만들어 주는 신약과 구약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마지막 시대에는 우리들에게 이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믿음에서 멀어지고 돈이면 만사가 다 되는 줄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21세기의 우리들에게 돈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시려고 이와 같은 환난을 주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사도 요한과 같이 고백하고 선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만이 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권세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믿음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소중한 말씀을 품에 품고 읽고 들으며 이 마지막 때에 복이 있는 자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하였던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의 일을 기록한 요한계시록에서 말세에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이 세상에 나타난 지난 12월 말부터 오늘까지 불과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시간 동안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감염 되었고, 6만여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이러한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 길은 오직 하나 말씀을 읽고 들으며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방법이고 사도들이 친히 실천하여 기적을 본,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처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엄청난 이 난국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당당하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축복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며 믿음으로 이 난세를 극복해 나가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세상을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 /요일5:1-5/ 조정의목사

2021-09-01 09:51:44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스포츠 경기(육상, 씨름)로 묘사한다(6:12; 딤후 2:5). 종종 스포츠 경기에서 응원하는 팀이 엄청난 상대 팀과 싸우는 경우, 기대를 별로 하지 않으면서도 점점 지는 모습을 보이면 답답하고 화가 난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씨름도 매우 유사하다. 우리 대적은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권세자, 통치자 마귀와 귀신들이고, 그들은 우리 육신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철저히 공략한다. 당신은 이기고 있다고 느끼는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아니면 전의를 완전히 상실할 만큼 크게 지고 있다고 느끼는가?

 

세상은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성경을 반대하고 거스르는 길로 빠르게 흘러간다. 말세에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과 돈과 쾌락과 죄를 사랑한다. 그에 맞서 싸우는 그리스도인은 종종 마귀나 세상은커녕 개인의 삶이나 가정, 교회에 일어난 죄와 싸우는 데도 힘에 부친다. 전혀 이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계속 넘어지고 퇴보하는 것 같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5).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는 말이다. 어떻게 최후 승리를 확신하는 것일까? 어떤 자가 이기는 자일까?

 

1. 이기는 자는 주를 믿는 자다(1, 4-5)

 

이기는 자”(: nike)라는 말을 자주 하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다. 요한은 부활의 주를 만나 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교회마다 이기는 자에게 약속을 주셨다.

 

에베소 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2:7)

 

서머나 교회: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1)

 

버가모 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2:17)

 

두아디라 교회: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2:26)

 

사데 교회: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5)

 

빌라델비아 교회: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3:12)

 

라오디게아 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것을 보면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혹자는 여기서 이기는 것이 오롯이 우리에게 달린 일이라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요한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1). 4절과 5절을 이어서 보라.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1절과 4-5절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자마다)

 

동사의 시제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언뜻 보면 우리의 믿음이 선행하고 그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영적 출생(거듭남)이 오며, 그 결과 승리를 얻는 것처럼 본문이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믿는 자믿다동사 시제는 현재형으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믿는 행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에서 나다동사 시제는 완료형이다. 과거 한 시점에 시작되어 계속해서 그 결과가 영향을 미치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올바른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태어나게 하신 자,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따라 거듭난 자는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속해서 믿고 고백한다. 바로 그런 자가 세상을 이기는 자다.

 

선행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역시 그렇다. 자기 노력과 열심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곧 하나님이 낳으신 것이다(3:8). ‘원하는 자,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다’(9:16; 참고. 1:13).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는 것이다(1:18).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본문에서도 요한은 맹목적으로 믿는 믿음을 말하지 않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것을 말했다(1, 5). 예수님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모두 다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반드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기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 스스로 혹은 남이 만든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승리하는 이유는 그들이 믿음으로 연합한, 그래서 영원히 사귐을 갖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셔서 반드시 그들을 이기기 때문이다(요일 4:4).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고(16:33), 바울은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라고 확신했다(16:20).

 

그리스도인은 싸움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계시록 20장과 21장을 보면 마귀와 그 수하들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고(20:10), 사망과 음부, 마귀와 세상을 좇던 자들(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 역시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20:14-15).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친밀한 사귐 곧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인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21:7).

 

그러므로 당신의 믿음을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두라. 지고 있다고 느껴질 때, 도저히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우리 힘이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을 확신하라(8:37).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고전 15:57). 지는 것처럼 느껴져도 절대 지지하는 팀을 바꾸지 말라. 결국엔 하나님 편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 풍성한 은혜로 당신을 하나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셔서 영생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이 당신이 끝까지 믿고 따를 분이다.

 

2. 이기는 자는 사랑하는 자다(1-3)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참된 믿음, 산 믿음은 그에 따른 행함을 맺는다(2:26).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께 믿음을 둔 자가 이기는 자이고, 그 믿음이 참되면 당연히 그에 따른 열매가 나타난다. 성경은 그 모든 행함을 요약하여 사랑이라 부른다.

 

1-3절까지 사랑은 두 가지 대상을 향해 나타나는데, 먼저 성도를 향한 사랑이다(수평).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 3절에선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주목한다(수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3). 2절에선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서로 별개의 행함이 아니라 단단히 결합된 행함이라는 걸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2).

 

여기서도 논리적인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앞서 우리의 믿음(신앙)이 새로운 출생을 가져오고 그 결과 승리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낳으시고 그 결과 하나님께 둔 믿음을 지속적으로 갖게 하신다고 배웠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이 승리를 가져오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참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열매다.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사랑이 없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가 사랑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사랑은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과 더불어 맺고 있는 영생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느끼게 해준다. 이로써 우리는 승리하는 자라는 걸 계속해서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처음부터 이를 분명히 한다.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낳으신 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 곧 형제, 자매를 사랑한다. 베드로는 이를 가리켜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벧전 1:22). 영적으로 태어난 자는 영적인 형제, 자매를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된다(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요한은 그래서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했다(3).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또 주시기 때문이다(4:13).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무겁지 않은 명령인가?

 

실제로 느끼기엔 그렇지 않을 수 있어도, 몇 가지 면에서 확실히 그렇다. 첫째, 유대인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만든 여러 가지 규칙과 전통은 사람을 옭아매고 결국 아무도 완벽하게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지옥 자식이 되게 하지만(23:15),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형제자매 사랑은 이미 온전히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법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법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법이다(5:1). 그래서 훨씬 가볍다.

 

둘째, 우리가 성도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이다(11:30).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성도를 기쁨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사랑과 순종을 별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한다말하면서 불순종하는 자를 악한 자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고(14: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14:15). 본문에서 요한도 아멘으로 화답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3).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우리는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다(2).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라. 그래서 사랑하기 쉬운 형제자매, 어려운 형제자매 모두를 뜨겁게 사랑하라(벧전 1:22; 4:8). 그러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뜨겁게 사랑하실 것이다. 성부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거처를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14:23). 무슨 말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영생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신다는 말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귀와 세상과 하나님을 미워하는 모든 자가 불못에 던져질 때, 하나님과 함께 이기는 자가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3. 적용

 

앞에서 다룬 믿음 그리고 사랑이 우리가 승리한다는 소망을 보게 한다. 그러면 실제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허락하신 믿음과 시작하신 사랑을 자라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기는 자답게 살 수 있을까? 바울이 고린도전서 924-27절에서 이기는 법을 이렇게 제시했다.

 

절제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허공을 향해 공격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규모 없고 무절제한 삶, 게으른 삶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상 적으로 성공한 자도 자기 일에 집중하느라 남들 다 알고 남들 다 하는 일을 과감히 버리고 관심 두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한다.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는 이들도 그러는데 썩지 아니할 것을 얻는 우리는 얼마나 더 절제해야겠는가? 모든 뉴스, TV 프로그램, 유튜브, 화제의 인물, 정치 경제적 이슈, 돈 많이 쉽게 버는 법, 예뻐지고 잘생겨지는 법 등을 알 필요는 없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더욱 알아가는 일, 그래서 하나님 자녀를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라.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라.

 

기도하라. J. C. 라일은 기도를 가리켜 믿음의 호흡이라고 말했다. 우리 믿음이 숨을 쉬려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오직 하나님께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신뢰하며 아뢰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믿음이 점점 연약해지고 거의 없는 것처럼 희미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런 믿음으로 마귀와 세상을 대적하며 산다면 우리는 이기는 자가 아니라 평생 패배자처럼 힘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목사가 성공적인 설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그 자신의 심령 속에 비밀스러운 무신론을 간직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그런 설교는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 거룩을 불러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이기는 자로 살려는 것은 그 자신의 심령 속에 비밀스러운 무신론을 간직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원에 이르는 열매가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떤 면에서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더 많은 절제와 더 많은 기도를 요구한다. 더 많이 절제하여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허락하신 믿음과 사랑을 기도와 절제로 더욱더 굳건하게 만들어 승리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우리가 적은 무리, 힘없는 패배자처럼 여겨질지라도, 결국엔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들과 딸로 승리의 보좌에 함께 앉아 다스리며 영생을 풍성히 누리게 되길, 이기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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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증거는 무엇인가? /요일5:6-12/ 조정의목사

2021-09-01 09:55:40

 

요한일서는 특별한 위험 가운데 처한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를 지키려고 사도 요한이 급히 처방한 백신과 같다. 교회를 위험에 빠뜨린 대상은 그리스도의 원수이자(요일 2:18, 22) 교회를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교사)였지만(요일 4:1), 그들은 한때 교회 구성원이었고 아마도 교사이면서 동시에 지도자였을 것이다(디오드레베, 요삼 9; 요일 2:19).

 

요한은 두 번째 편지에서 이런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요이 10-11). 요한은 그들을 적그리스도라 부르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로 성도를 미혹하기 때문이다(요이 7). 그런데, 무슨 근거로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있다고 말하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이 질문은 매우 적실하고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마다 성경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교회간판이 붙은 곳을 다닌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교사와 목사의 이름으로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요한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증거가 무엇인지 확실히 밝힌다(하나님의 증거).

 

그러면서 이 증거를 가진 자는 생명이 있고, 이 증거를 거부한 자는 생명이 없다고 말한다. 진짜 영생을 가진 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참으로 거하는 자를 이것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증거를 받지 않고 오히려 훼손하려는 자들을 멀리하라고 경고했다.

 

당신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고 있는가? 당신은 정말 영생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인가? 요한이 어떻게 그 증거를 제시하는지 살펴보면서 당신 스스로 점검해보고, 당신이 즐겨 듣거나 영향을 받고 있는 소위 교사’, ‘목사는 어떤지 분별하자.

 

1. 증거는 무엇인가?(6-8, 10-12)

 

본문의 핵심은 증거이다. 동사형 증언하다”(마르투레오)가 네 번, 명사형 증거()”(마르투리아)가 여섯 번, 총 열 번이나 등장한다. 본문은 증거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증언하시는지에 관해 주로 설명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증거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외적인 증거, 나머지 하나는 내적 증거이다. 둘 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제시하신다.

 

1) 외적 증거(6-8)

 

당시 교회를 미혹한 거짓 가르침이 그리스도가 누구인가’(기독론)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누구신지를, 하나님이 친히 증언하신 외적 증거를 통해 밝힌다. 무엇에 대한 증거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이다. 누가 제시하는 증거냐? 하나님께서 친히 제시하신 증거이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6-8)

 

플럼머는 신약에서 가장 난해한 말씀이 이것이라 말한다. 예수님이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피와 양수로 성육신? /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 / 성례? 물은 침례, 피는 성찬? “임하셨고부정과거분사, 단회적인 역사적 사건). 성령과 물과 피 셋이 합하여 하나라는 말은 또 무슨 말인가?

 

요한은 두 가지 외적인 사건,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신지 하나님께서 성령과 더불어 증언하신 역사적 사건을 물 그리고 피로 설명한다. 물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서 받으신 침례를, 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씻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가리킨다. 각각의 사건에 성령께서 함께하셨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각각의 사건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참으로 증언하셨다(14:17; 요일 4:6).

 

 

(요한복음 129-34)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

 

(12-4)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2:36)

 

성령 각각의 사건에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이

 

셋이 합하여 하나 예수님에 관한 공통된 증언, 하나의 주장을 한다(두세 증인의 충분한 증언효력, 19:15; 35:30).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표현에 주목하라. 당시 케린투스(도케티즘)라는 거짓 교사는 인간 예수가 침례 받을 때 그리스도가 임하셨고, 십자가에 오르기 전 떠나셨다고 주장했다. 요한은 그 거짓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하나님이 증언하신 외적 증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진리의 성령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의 침례뿐 아니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분명히 증거를 제시하셨다.

 

2) 내적 증거(10-12)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침례, 죽으심,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었다. 그래서 서신서 초반에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말했다(요일 1:1). 하지만 요한의 독자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60여 년이 흐른 뒤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증언하신 예수님의 외적 증거를 직접 경험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런 독자에게 요한은 내적 증거가 있다고 말한다. 10절을 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자기 안에 있는 증거곧 내적 증거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내적 증거를 오롯이 느낌이나 감정, 경험이라고 오해한다. 특별집회에서 순간적인 깨달음을 얻은 경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찬송했던 경험, 마음이 따뜻해지고 평안해지는 느낌, 이웃을 사랑하고 희생적인 돌봄과 나눔을 실천하는 삶의 경험 등.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내가 믿고 있다는 증거,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증거(영생의 증거, 생명이 있는 증거)라고 확신한다.

 

물론 신자 안에 있는 생명, 하나님과 누리는 영생의 결과가 위와 같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내적 증거는 절대로 외적 증거와 동떨어진 경험과 느낌이 아니다. 10절을 계속 보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고, 그분과 관계가 있다는 느낌이나 경험이 분명하고, 섬김과 봉사의 삶에서 보람을 느끼고 칭찬을 받아도, 사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결국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과 같다. 당신은 하나님이 친히 제시하신 아들에 관한 증거를 어떤 식으로든 왜곡하고 거부하면서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으로 믿고 따를 수 없다(당신이 한 말은 믿을 수 없지만, 당신은 믿어요?).

 

하나님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자 안에 생명을 주신다. 영생 곧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살아 있는 친밀한 관계, 영원한 사귐을 누리게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 안에 그 생명을 주셨다. 그래서 아들을 하나님이 증언하신 증거대로 믿는 자만이 생명을 얻는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그가 보내신 아들을 통해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들을 어떤 식으로든 왜곡하고 거부하면 생명이 없다. 11-12절을 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참고로 성령 하나님은 지금도 증언하시는 이로써 아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증언하신다. 그분의 나심, 침례,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 등 아버지께서 친히 증거하신 것을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하셨다. 그리고 오늘날 말씀을 접하는 이들의 영혼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증거를 받게 하신다. 하나님의 증거에 따라 아들을 증언하신다(15:26,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절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했다(참고. 살전 1:5).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령을 통해 계속해서 증언하고 계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다. 참 그리스도인은 모두 성령의 내적 증거를 받은 자들이다.

 

2. 증거를 받는다면?(9)

 

우리는 사람들의 증언도 중요한 증거로 채택한다. 우리는 몇 사람의 합의된 주장을 신뢰한다. 증인의 말이 일치하면 대체로 믿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제시하신 증거는 얼마나 더 크고 신뢰할 수 있겠는가? 믿어야 하겠는가?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증거를 보여주실 때 얼마나 더 그 증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9)

 

,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참 증거를 받아 아들을 제대로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자로서 우리가 반드시 견지해야 할 태도/자세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아들이 누구신지에 관한 증언뿐만 아니라 아들이 나타내신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 반대로 미워하시는 일 등에 관하여도 성경을 통해 증언하셨다. 성령께서 그것을 성경에 기록하셨다. 그러므로

 

첫째, 성경을 인정하라. 하나님의 증거를 무시하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성경을 시대착오적 주장이 섞인 고대문서로 보거나, 당시 문화와 관습에 매여있는, 제한을 받는 내용이라고 말하거나, 그래서 오늘날 독자의 상황에 맞게 내용이나 의미를 변경, 개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주의하라. 물론 성경은 당시 문화, 역사, 저자를 고려하며 해석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하나님의 증거인 성경은 결코 문화, 역사, 저자에 제한을 받는,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볼 때 오류가 있고 불충분한 책이 아니다.

 

성경(하나님의 증거)에 대한 태도가 곧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다. 성경의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만큼 인정하라. 하나님이 실수하지 않으시고 오류가 없으신 것처럼 성경 또한 그렇다. 오직 하나님으로 충분한 것처럼 오직 성경이면 하나님의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사는 일에 충분하다(딤후 3:16-17).

 

둘째, 성경을 사모하라. 진리가 무엇인지를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 그래서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인정하고 자유주의, 인본주의를 외치는 이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 중에 안타깝게도 성경을 사모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성경을 거짓과 싸우는 무기로 이용할 뿐,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고 알고 경험하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하나님의 증거로 활용하지는 않는다.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내시지만, 세상에서 가장 또렷하고 분명하게 자신을 나타내신 아들을 통해, 그 아들을 증언한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다. 이보다 더 좋은 증거는 없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119:14). 하나님의 증거를 멀리하고 사모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절대 사랑할 수 없다.

 

셋째, 성경에 순종하라.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물으셨다(6:46).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분이 말하는 것을 행해야 한다고 하신다. 성경은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그 말씀은 순종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모순이다. ‘나는 주님을 따르는 자이지만, 몇몇 동의하기 힘든 말씀은 따를 수 없습니다라는 말도 주님을 우습게 만든다. 성경에 순종하는 당신의 태도가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에 대한 당신의 사랑, 당신의 태도를 반영한다.

 

결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영생, 생명이 있다는 말은 더 이상 삶의 아무런 고난이나 핍박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죽을 것같이 괴로운 고난과 핍박 중에 부활의 능력,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이다. 세상의 온갖 거짓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미혹될 가능성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온갖 거짓에 파묻혀도 우리 안에 참 진리이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더불어 우리와 영원한 사귐을 가지신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고난은 끝나지 않고 거짓의 유혹도 점점 더 거세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모시고 그분과 함께 세상을 이기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증언하신 증거, 그 증거를 성령이 기록하신 성경을 가까이해야 한다.

 

성경을 인정하고,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에 순종하라. 그러면 우리는 베드로의 권면처럼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것이고(벧후 3:18),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한 사귐, 기쁨 충만한 영생을 누리며 모든 환난과 거짓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갈 것이다.

 

 

 

어떻게 영생을 누릴 수 있을까? /요일5:13-21/ 조정의목사

2021-09-01 09:59:06

 

13절은 요한일서 전체의 결론이자 요약이다. ’너희에게 영생이 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요한은 서신을 썼고, 단지 그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알고 풍성히 누리게 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알게 하려 함).

 

영생은 무엇인가?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살거나, 죽으면 천국 가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관계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관계가 영원히 회복되는 것, 그래서 믿는 순간부터 영원히, 이 땅에서 하늘나라까지,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친밀한 관계, 사귐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1:1-4; 17:3).

 

영생의 결과는 무엇인가? 영생을 가진 자는 어둠에 행할 수 없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기 때문이다(1:5-10; 3:1-12). 영생을 가진 자는 형제자매를 미워할 수 없다.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2:7-11; 3:13-24; 4:7-21).

 

영생을 가진 자는 거짓을 따를 수 없다. 진리이신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이다(2:18-29; 4:1-6). 영생을 가진 자는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세상이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2:15-17; 5:1-5). 이처럼 영생을 가진 자는 죄와 세상과 거짓과 미움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고 진리를 따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만을 사랑한다.

 

누구를 통해 영생을 누리는가?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얻는다.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이다(14:6). 그래서 아들에 관한 바른 진리, 아들에 관한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2:18-29; 5:6-12). 또한 우리가 영생을 계속해서 풍성히 누리게 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시다(3:1-3, “하나님의 아들그는영생이시라”, 5:20).

 

우리가 어둠에 행할 때마다 어떻게 어둠을 몰아내는가? 대언자와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다(2:1-6). 회개하면 용서와 깨끗게 하심을 받는다(1:9-10). 어떻게 서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바라봄으로다(3:16, 20-21; 4:7-21).

 

어떻게 거짓을 분별하고 진리를 따를 수 있는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보여주신 삶을 진리의 영께서 가르쳐 주신다(2:18-29). 어떻게 세상과 악한 자를 넉넉히 이길 수 있는가? 세상보다 크시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2:12-14; 4:4). 요한일서는 위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많은 주석가들이 14-21절을 편지의 추신(P.S.)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요한이 13절까지 쓴 편지에 누군가 추가한 내용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본도 이 부분을 포함하지 않은 사본이 없다.

 

또한 내용 면에서도 요한이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한 것은 탁월하다. 요한은 성령 하나님의 감동에 따라 영생을 누리는 비결을 강조하며 이 편지를 끝맺었다. 영생을 풍성히 누리게 하는 은혜의 방편, 바로 기도이다. 당신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영생을 풍성하게 누릴 수 없다.

 

1. 기도는 영생의 특권이다(14-15)

 

먼저, 기도는 영생을 누리는 자의 특권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 아버지께 언제든지 나아가 구할 수 있는 담대함을 얻게 되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14)

 

담대함은 친밀한 관계때문에 생긴다(그를 향하여). 남의 아버지에게 언제든 찾아가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다르다. 물론 존경심을 갖추고 무례하지 않게 구하지만, 아버지에겐 언제든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신가?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을 아시는 지혜와 지식이 무궁하신 아버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무한하신 아버지, 사랑과 인자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아버지. 졸거나 주무시지 않는 아버지, 너무 바빠서 우리 기도를 들을 시간이 없는 분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들으시는 아버지(15:29; 벧전 3:12). 기도는 하늘 아버지와 영생을 누리는 자가 언제 어디서든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런데, 기도는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지 않은가? 다른 신을 섬기는 이들도 언제 어디서든 자기 신에게 구할 수 있다. 무엇이 다른가? 누구를 향하여 구하는가가 다르다. 우리가 구하는 대상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고, 우상에게 구하는 자들의 신은 시편 135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다.

 

그들의 신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는 죽은 신이다(135:15-18). 그것을 의지하는 자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향하여 구하는 자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왕상 18:27).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는 그분이 들으신다는 확신을 갖는다.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기도할 때 아버지께서 들으신다. ‘, 잘 들었어라는 식으로 들으시는 게 아니라, 귀를 기울여 들으신다(10:17). 그리고 구하는 그것을 주신다. 응답하신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15)

 

우리의 기도는 두 가지 에 기초한다(안즉, 아느니라). 우리가 구할 때, 1) 하나님이 들으신다 2) 하나님이 주신다(구한 그것을 얻다, 현재형). 당신은 이것을 진실로 알고 믿고 구하는가?

 

어쩌면 당신은 무엇이든지구해봤으나 듣지 않으시고, 주시지도 않더라라고 푸념할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기도의 특권을 오해한 것이다. 14절에 보면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앞에 어떤 단서가 붙는가? “그의 뜻대로.”

 

우상에게 구하는 것과 참되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의 차이가 여기서 또 분명히 드러난다. 우상은 신처럼 섬기고 높이지만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얻기 위해 이용하려고 만든 대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다르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구한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뜻이 가장 선하고 복되다는 걸 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줄 믿는다(7:11).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뜻대로 구한다.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것을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때에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우리에게 주실 줄을 알고 믿고 구하는 것이다.

 

웨일스의 C. H. 다드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란 우리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전능하신 분의 힘을 빌어 오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재조정되고 그의 뜻을 성취하는 통로가 되도록 만드는 수단입니다”.

 

당신은 기도를 영생을 누리는 특별한 권리이자 은혜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가? 시편 기자는 이렇게 감격하며 고백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116:1-2). 짧고 피상적인 요구로만 채워진 기도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쏟아내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는 깊고 친밀한 기도를 쉬지 말고 드려라. 영생을 풍성히 누리게 될 것이다.

 

2. 기도는 영생을 회복한다(16-17)

 

다음으로 요한은 죄를 범한 성도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16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ask)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16-17)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독특한 표현이 계속 나와서 본문이 정작 무엇을 말하는지 집중하기 어렵다. 어떤 죄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지 아닌지 따지기 전에 먼저 요한이 영생을 누리는 이들에게 무얼 요구했는지 주목해 보자.

 

형제자매가 죄를 지속적으로 범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그들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그의 뜻대로구하면, 14). 우리는 요한일서 1장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하는 것이 죄라는 걸 배웠다. 모든 종류의 불의는 죄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반역하는 것이다. 우리는 형제자매의 속에서 일어나는 반항심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열매인 죄를 볼 수 있다. 계속해서 죄가 그들의 삶에 맺히는 걸 볼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로 기도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이 말은 요한일서 초반에 나온 것처럼 죄 사함과 깨끗하게 하심을 통해 다시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하신다는 약속이다(요일 1:9). 영생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기도가 영생을 회복하는 은혜의 도구라는 사실을 배운다(5:19-20).

 

다윗만큼 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있을까? 시편 51편에서, 밧세바를 범한 죄를 선지자 나단이 고발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구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51:10, 12). 우리는 자신의 회복을 위해 그리고 형제자매의 회복을 위해 이렇게 구해야 한다. 영생을 누리도록.

 

그러면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인가? 사망에 이르는 죄는 많은 죄 중에 특별히 무거운 죄를 가리키는가?(대죄/소죄). 실제로 육신의 죽음을 가져오는 죄를 가리키는가?(살인, 5,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고전 11, 만찬을 함부로 먹어 잠자게 된 성도들). 아니다. 요한일서 문맥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았는데도 의도적으로 그분을 거부하고 끝까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거부하는 죄를 말한다. 요한이 말한 적그리스도, 거짓 교사들이 범한 죄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성령께서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분명히 알리셨음에도 고의로 그것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자들을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이라고 평가했다(6:4-6). 종종 우리도 교회에서 함께 섬기다가 완전히 배교자가 되어 떠난 이들을 본다.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기도는 영생의 회복이 필요한 자에게 집중되어야 한다(16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하나님 편으로 혹시 투항할지도 모를 적을 위한 기도보다는 실족하여 하나님과 멀어진 전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온갖 죄로 영생을 거의 누리지 못하고 충만한 기쁨을 모두 빼앗긴 채 고통 중에 살아가는 형제가 있지 않은가? 의무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생명력 없이 살아가는 자매가 있지 않은가? 그들을 위해 간절히 끊임없이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생을 회복시킬 것이다.

 

3. 기도는 영생을 알게한다 (18-21)

 

마지막으로 18-21절까지 요한은 영생을 가진 자가 아는 것세 가지를 말했다(우리가 아노라(18), 또 아는 것은(19, 20)). 이 내용을 기도와 상관없이 다루는 경우도 있지만, 기도가 영생을 더욱 풍성히 알게 하는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에, 아예 관련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영생 안에 보장된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된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하신다(18)

 

요한은 영생을 가진 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는 것은 범죄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죄를 조금도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조금 전에 죄 범한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한 요한). 계속해서 죄인처럼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8:12).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리라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지키신다. 세상도, 마귀도 그 무엇도 절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10:29).

 

기도와 무슨 관계가 있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한 자)에게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있다(6:13). 하나님은 이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고,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악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된다.

 

2)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19)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사람의 소속은 명확히 두 개로 구분된다. 하나님 혹은 악한 자(세상).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영생을 누리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세상 사람은 모두 악한 자 마귀 아래 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 요한이 말한 세상의 무기로 마귀가 우리를 유혹할 때 어떻게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 힘 있게 살 수 있을까?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다(6:33). 우리의 소속을 분명히 만드는 기도이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세상의 달콤한 유혹이나 무서운 핍박 가운데서도 최후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는지 더욱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안다(20)

 

마지막으로 우리가 영생 가운데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 그분 자체이시다. 요한은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하나님)를 알게 하신 것을 안다고 말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르러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

 

어떻게 알게 하셨는가?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알게 하셨다. 예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본 적 없는 자들에게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1:18, 참된 자, 하나님). 그래서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어 그분 안에 있는 자는 그분과 더불어 하나님 안에 있게 되었다(14:20). 우리는 이 관계를 영생이라고 말한다. 예수님 없이는 영생이 없다(“영생이시라”).

 

요한은 마지막 명령으로 21절에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라고 썼다. 갑자기 왠 우상 이야기인가? 영생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다. 그 친밀한 관계 안에 아무것도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멀리하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잭맨은 하나님을 내 삶의 중앙에서 변두리로 밀어내려는 것은 무엇이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몰아내야만 한다고 말했다(255p).

 

반대로 하나님만 내 삶의 중앙에 두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바로 기도이다. E. M. 바운즈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표현이고 거룩한 친교에 대한 갈망이다”(674p). 그러므로 영생을 풍성히 누리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사랑의 능력으로 믿음이 굳건해집니다 /요일5:1-12/ 김병삼목사

2018-04-14 06:16:09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오늘 말씀은 조금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리 무거운 것은 아니라는 것,

둘째는 하나님께로 난 자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면 세상을 이기리라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증거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먼저 본문 1~3절을 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오늘 말씀은 가장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고, 가장 어려울 수도 있는 구절인 것 같습니다.

먼저 도식적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리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정말(온전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계명이 무엇일까요? 그 계명은 하라가 아니라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김관선 목사가 쓴 [리셋]이라는 책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통찰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계명입니다. 그 계명은 하라가 아니라 하지 말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사람됨이란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 아는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한 그것은 사람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파도 참고, 먹을 것이 없어도 참으면서 지켜야 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먹을 것은 충분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만 먹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면서 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먹지 말아야 할 이유도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살려면 그것만 먹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어렵지 않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어김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굉장한 무엇을 못해서가 아니라 매우 단순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으로써 죽습니다.

사람답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사람다운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보십시오. 우상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쉽습니까, 만들지 않는 것이 쉽습니까? 당연히 만들지 않는 것이 쉽습니다. ‘금으로 만들어라, 보석으로 장식해라하셨다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돈도 들고 고생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사람으로서 이것을 지키는 것이 쉽습니까, 지키지 않는 것이 쉽습니까? 다시 이렇게 묻겠습니다.

살인하는 것이 쉽습니까? 살인하지 않는 것이 쉽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보다 그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라는 광고 문구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했는가 보다 해서는 안 될 그 한 가지를 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관계가 깨지는 이유도 뭔가를 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될 한 가지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아니면 그 관계가 깨지는 것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신앙의 문제는 시간과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세상의 조롱과 비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도, 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가장 깊이 묵상하게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해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유석경 전도사가 쓴 [당신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서울대학을 나와 잘 나가던 그녀가 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미국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수련 기간을 가지던 중에 직장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고 투병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투병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시한부 선고를 받고 자신에게 주어진 최선의 삶을 살다 갔습니다. 그녀의 설교 가운데 종종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선교사가 되거나 오지에 가야 될 것 같은 마음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또한, 인생의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 고난을 주셨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종종 신앙이 좋은 자매들은 너무 신앙 좋은 남자를 만나 목회를 한다거나 선교사가 된다고 할까 봐 무서워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저에게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고,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했느냐고 물어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런 일이 결코 어려운 결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고 쉽게 내린 결정입니다.

 

제가 그 책의 내용을 다 옮길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내용입니다. 죽음 앞에서 그렇게 평안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고, 그녀가 늘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시한부 선고를 받는 순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철환 씨가 쓴 [연탄길] 세 번째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됩니다.

사랑은 자동차보다 빠르다.”

상준 씨는 울창한 숲 가까이에서 살고 싶었다. 포클레인을 이마 위에 이고 참나무 둥치를 기어오르는 장수풍뎅이를 어린 딸 손 잡고 바라보고 싶었다. 새로 이사 갈 집은 까막딱따구리가 가까이 사는 곳이었다.

 

밤이면 여기저기에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렸고, 창밖으로 손만 뻗으면 스트로브 잣나무 오솔길이 있었다. 새소리와 초록 바람 가득하니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집이었다. 네 식구가 해바라기 씨앗처럼 촘촘하게 살아간다 해도 그만이었다. 상준 씨는 이사 갈 집을 엄마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는 늘 바쁘다고만 했다. 아들을 떠나보내기 싫어 엄마는 상준 씨가 이사 갈 집에 가지 않았다. 상준 씨는 이사 가기 며칠 전에야 엄마를 데리고 이사 살 집에 갈 수 있었다.

너무 좋구나. 너무 좋구나. 산속이라서 너무 좋구나.”

 

엄마는 웃고 있었지만, 마음속 그늘이 선연했다. 십수 년을 코앞에 두고 살던 아들이 며느리와 손녀딸들 다 데리고 이사 간다는 말이 어찌 서운하지 않았겠는가.

엄마, 멀리 떠나는 거 아니니까 서운해하지 말아요. 걸어서 산 하나만 넘으면 되는데요. .”

엄마는 창밖을 바라보며 겨울나무처럼 쓸쓸하게 웃었다. 엄마가 서운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엄마가 기운이 없어 산을 넘어올 수 있나. 보고 싶으며 차 타고 댕기면 되지 뭐. 이제까지는 손녀들 보고 싶으면 슬리퍼 끌고 다녔는데, 그러지 못하니 마음이야 많이 허전하지.”

엄마의 말끝이 메였다. 늙으신 엄마에게 핀잔을 주었던 일이 생각났다. 코뿔소 한 마리가 상준 씨 마음을 뚜벅뚜벅 밟고 지나갔다. 상준 씨는 엄마에게 슬며시 거짓말을 했다.

 

내 걸음으로 빨리 걸으면 여기에서 20분이면 엄마 집에 갈 수 있어요.”

상준 씨는 40분 걸리는 거리를 절반으로 줄여 말했다. 엄마는 여전히 쓸쓸해 보였다. 짠한 마음을 햇살에 감추며 이사 갈 집을 나왔다. 상준 씨 발걸음이 무거웠다. 칠성무당벌레 한 마리가 종아리에 흙을 묻히고 풀밭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엄마. 나는 운동 삼아 걸어갈게요. 엄마는 차 타고 가세요.”

힘들어서 어쩌려고.”

매일 운동 다니는 길인데요, .”

상준 씨는 엄마를 먼저 차에 태워 보냈다. 상준 씨는 이를 꽉 물었다. 허리띠도 고쳐 맸다. 심장에 부르릉 시동을 걸고 상준 씨는 달리기 시작했다. 상준 씨는 굽 달린 구두를 신고 험한 산길을 말처럼 달렸다. 숨이 차올랐지만, 증기기관차처럼 바람을 뚫고 달렸다.

 

개미야, 길을 비켜라. 산딸기야, 길을 비켜라, 풍뎅이야, 어서어서 길을 비켜라.”

산벚나무들이 짝짝짝 박수를 쳤다. 나비와 꿀벌들이 짝짝짝 기립 박수를 쳤다.

 

상준 씨는 엄마 집에 도착했다.

상준 씨가 도착하자마자 엄마가 곧바로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상준 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상준 씨는 차오르는 숨을 꾹꾹 누르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왜 놀래요? 빨리 걸으면 20분이면 온다고 했잖아. 오늘은 딱 15분 걸렸네요, .”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고 상준 씨는 얼른 화장실로 들어갔다. 상준 씨는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며 화장실 편기 위에 앉아 있었다. 가슴이 뻐근했지만, 상준 씨는 슬며시 울음이 나왔다.

 

차보다 빨리 달렸구나.

눈물보다 더 빨리 달렸구나.

화장실 가득, 가랑비가 뿌옇게 내리고 있었다.

사랑은 자동차보다 빠르다. 사랑은 눈물보다 더 빠르다.

 

이 이야기가 바로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지 않나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

세상을 이기는 것은 세상의 방법이 아닙니다.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은 단순히 교회가 세상과 연결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세상에 영향을 주기 원한다면 세상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히브리서의 믿음의 영웅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한 이유는, 그들이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요즘 예배를 드리며, 우리가 찬송하며, 그리고 기도를 할 때, 가장 강조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그리고 완전함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 4~5절을 보겠습니다.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산정현 교회를 담임하는 김관선 목사가 2016[리셋]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하면서.

주기철 목사님에 대한 예화를 하나 들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한 뒤 우리나라는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북쪽은 김일성의 세력권 안에 있었습니다. 1947년 오정모 사모님에게서 유방암이 발견되자 장기려 장로님이 수술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손쓰기엔 늦었기에 장 장로님은 막내아들 광조에게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에 아들은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사나 싶어 막막했습니다.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지키고 있는데, 인민군 몇 명이 집에 찾아와서는 붉은 인민화폐와 지주들에게서 빼앗은 집과 땅문서 그리고 김일성 장군의 표창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항일 운동을 한 주기철 목사님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했습니다. 주광조는 내심 이제 살길이 생겼다고 좋아하는데, 오정모 사모님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 목사님이 이런 것 받으려고 순교한 게 아니다며 그것들을 내동댕이쳤습니다.

 

인민군이 돌아간 뒤 오정모 사모님은 섭섭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아들 광조를 부르더니 네게 줄 유산은 따로 있다면서 시편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37:25-26)

 

참으로 세상과 다른 유산을 물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산의 말씀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고아가 되어 월남한 후 열심히 공부한 주광조 장로님은 60세까지 극동 석유 사장을 지내고 70세까지 극동방송 부사장으로 월급도 받지 않고 방송선교를 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자는 세상이 보는 것, 바라는 것, 기준으로 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세상이 가장 믿는 숫자의 논리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시는 사람들은 숫자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이 전쟁에 나가기 전 함께 하겠다는 3만 명 중에서 하나님은 300명만을 데리고 가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9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힘을 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스라엘의 패망은 사람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쉐키나즉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더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하나님의 거룩함이 임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 버린 자리에 수치가 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도록 사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믿는 그 믿음이 넉넉하게 세상을 이기게 하는데, 우리의 고백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가 세상을 이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난 자임을 숨기는 것은 비겁한 일이고, 패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숨기고 싶은 유혹이 드는 때는 힘든 일을 만났을 때이기도 합니다.

니키 검블의 책 [인생의 의문점들]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젊은 경찰이 런던 북부에 있는 헨든 경찰 대학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당신이 런던 외곽을 순찰하고 있는데 근처에 있는 주유소가 폭발했다. 조사를 해보니 인도에는 구멍이 생겼고 옆에는 차가 뒤집힌 채로 널브러져 있다.

차 안에서는 강한 알코올 냄새가 나고 있다. 차 안의 두 사람 모두 - 남자와 여자 - 는 부상을 입었다. 그 여자는 지금 멀리 미국에 나가 있는 당신 구역의 경위의 아내이며, 당신은 그녀를 알고 있다.

 

오토바이를 몰고 지나가던 사람이 멈추어 서서 당신을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당신은 그가 무장 강도 용의자로 수배 중인 사람임을 알아본다. 갑자기 근처 집에서 한 남자가 뛰어나오며 자기 아내가 임신 중인데 폭발의 충격으로 곧 출산하려 한다고 외친다. 또 다른 사람이 도움을 청하고 있는데, 그는 폭발로 인해 가까이 있는 수로 속에 빠졌으며 수영을 할 줄 모른다. 정신보건법 조항들을 염두에 두고,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간략하게 써라.”

 

그 경찰은 잠시 생각한 후, 펜을 들어 이렇게 썼다.

제복을 벗고 군중 속에 섞이겠다.”

그의 대답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크리스천으로서 크리스천 제복을 벗고 군중 속에 섞이는것이 더 쉬울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 있든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구별되어야 하며,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빛이 빛날 때, 사람들은 그 빛에 끌리기 마련이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수많은 유혹과 협박입니다. 그 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을 지키면 승리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억울함을 견디고, 돈으로 해결하거나 권력으로 해결하려는 유혹을 참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듣는 치욕스러운 이야기들이 우리를 참 힘들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믿어 주심을 믿기 때문에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라야세상을 이깁니다. 대충 신상을 교양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전 시간의 요한일서 416절과 연관해본다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가 이기는 것입니다. 김영봉 목사님의 쓴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라는 요한일서 강해집에 보면 바로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이야기죠.

 

우리 교회가 기도하며 물질로 지원하는 선교사님들 중에 니카라과에서 10년 동안 의료 사역과 교육 사역에 헌신하신 분이 계십니다. 믿음과 인품이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좋은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능력 있고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분은 예일 대학교 근처의 어느 한인교회를 섬기시던 중에 니카라과에 대한 소명을 받으셨습니다. 대형 이민 교회들이 담임목사로 모셔가고 싶은 1순위 목회자인데, 그 모든 것을 사양하고 니카라과로 가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년 단기 선교팀을 보내면서 선교의 파트너로 사역해 왔습니다.

 

10년 동안의 헌신으로 인해 그 지역의 사역이 든든히 세워질 즈음, 지난 3월에 그분이 아주 불명예스러운 혐의를 뒤집어쓰고 구금되었습니다. 미성년자 성 매수라는 아주 수치스러운 혐의였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종교인의 스캔들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재판도 받기 전에 그분의 이야기는 지역 신문과 전국 신문에 기사로 다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한순간에 그분에게 등을 돌리고 천사 얼굴을 한 악마라고 비난했습니다.

 

수도 마나구아에 있는 한국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에서도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다 보니,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아는 분들은 말도 되지 않는 혐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지난 10년 동안 도시 빈민을 치료하는 메디칼 클리닉을 상당한 수준으로 키워 놓으셨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부패한 현지 관리들이 지속적으로 뇌물을 요구했습니다. 선교사님은 처음부터 복음에 어긋나는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었기에 그 모든 요청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마도 그것에 앙심을 품은 지역 관리들이 작정하고 함정을 팠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그로부터 100일이 넘는 나날 동안 협소한 감방에서 다른 죄수들과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예정된 재판은 이런저런 이유로 휴정을 반복했고, 선교사님과 선교사님의 가족들은 마음 졸이고 속을 태우며 하루하루 버텼습니다. 저와 우리 교회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분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니카라과가 얼마나 덥습니까? 그 무더위에 에어컨 시설도 없는 좁은 감방에서 기약도 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분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현지의 분위기는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사건이 영부인에게까지 보고되어 외국인의 성범죄를 척결하라는 특별 지시까지 내려졌습니다. 저도 그분을 돕기 위해 현지에 있는 대사관 직원들에게 연락해 보았는데, 풀려나지 못할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휴정이 반복되면서 재판이 늦어지자 또다시 금품 요구가 이어졌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전략 중 하나라고 합니다. 지칠 대로 지치게 재판을 끌어 결국 돈으로 합의하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주변에 돕던 분들도 합의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선교사님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워낙 사법 제도가 부패해 있기 때문에 명백한 알리바이와 증거가 있음에도 유죄 판결이 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분은 유죄 판결을 받는다 해도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깨끗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무슨 타협이냐며 거부하셨습니다. 마침내 100일이 훨씬 지나, 재판이 완결되었고 무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무죄 판결이 내려지고 난 후에도 절차가 있다며 한 달 동안 구치소에 더 붙들어 두었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분이 거둔 승리는 마침내 석방되었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승리는 끝내 믿음을 지켰다는 것이고 끝까지 의를 지켰다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주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이 그분으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만들었습니다. 그것밖에는 이 세상을 싸워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밖에는 우리의 마음을 압도해 오는 고난과 유혹과 시험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보다 더 강한 분, 세상보다 더 크신 분,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거하며 사귐이 깊어질 때 우리는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음모를 무력화시키고, 세속적인 욕망과 유혹을 이기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지키는 것입니다.

 

증거는 이것이니!

본문 7~8절입니다.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 세 번째 대지에서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지 상징적인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세 가지 중의 하나가, ‘이라는 것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며 증거된 모습은 아닐까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가 의미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피가 아닐까요?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값없이 흘리신 피야말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가장 명백하게 증거 하기 때문이죠.

 

성령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것이죠.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것보다 명확하고 큰 증거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 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가장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 아들이 우리 안에 있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구원받은 자의 삶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생명을 얻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본문 11절과 12절에 기초해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으면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증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후에 드러난 생명의 증거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똑같은 상황에서 요한 사도는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증거는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증거를 보여 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명백하게 알려 주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하여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그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다고 말이죠. 사도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그 사랑을 전하시니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예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비자 설림(說林)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정나라의 한 집에 아들이 다른 나라에 관리가 되기 위하여 떠나려 할 때 집에 남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부서진 울타리를 꼭 수리하십시오. 도둑이 들까 염려됩니다."

이웃 사람도 같은 충고를 했다. 그런데 곧 수리하지 않아서 그 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러자 집주인은 자기 아들이 선견지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충고를 한 이웃 사람은 도둑이 아닌가 의심했다.

 

같은 말을 하는데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듣고 다르게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동안교회 김형준 목사님은 요한 1511~12절 말씀을 설교하면서 이렇게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와서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목사님! 우리 동네 앞에 웬 사람이 트럭에 텔레비전을 가득 싣고 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은 우리 동네에서 유명한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입니다. 그런 사람이 전해주면 사실이라도 못 믿습니다. '저분이 또 거짓말하시는구나.'하고 생각하겠지요.

 

잠시 뒤에 동네 앞에서 장사하는 분이 "목사님! 목사님! 이상하죠. 어떤 사람이 트럭에 텔레비전을 싣고 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생각하겠지요. ', 동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긴 일어났나 보구나.' 그런데 믿으려 하니 저 사람은 평소에 하던 행실이 생각납니다.

 

"밑지는 장사입니다. 본전 밑으로 드리는 겁니다."하면서 장사를 하시지만, 나중에 굉장히 많은 이윤을 남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 말도 별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반신반의하고 있을 때, 아주 신실하고 거짓말하지 않는 오랜 친구가 와서 "목사님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웬 사람이 텔레비전을 우리 교회 앞에 세워놓고 동네 사람에게 나눠주고 있어요."

 

여러분께서 만약 저에게 그 말을 믿습니까?’ 하고 물으신다면 저는 믿는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은 신실한 사람이니까 그렇습니다. 거짓말을 한 번도 안 하셨을 뿐 아니라, 저하고는 아주 가깝기 때문에 그분이 하는 말을 다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예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전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전하는 사람이 누구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죠.

우리는 왜 요한 사도가 하나님에 대하여 그렇게 반복해서 이야기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43절 말씀을 보세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성경이 왜 끊임없이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fact’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믿는 믿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실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구는 둥글고, 지구는 자전하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한 유명한 말이 있죠. 지동설을 주장하는 그가 재판받을 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지구가 돈다는 것을 부인했지만, 나오면서 한 유명한 말 말입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런데 ‘fact’에 대한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감정이 작용합니다. 감정이란 변하는 것이죠. 기분에 따라 기복이 심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기쁠 때는 새가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슬플 때는 새가 운다고 느끼는 거죠.

그런데 감정이 불완전하고 위험한 이유가 있죠. 우리가 아무리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해도 날지 못하고 떨어져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은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fact’ 위에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사실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fact’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된 것이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진 것이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믿음인 이유가 아닐까요? 그렇게 알고 나니 오늘 본문의 9절과 10절 말씀도 풀리는 것 같습니다.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실하심이 우리에게 전하는 증거입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fact로 받아들이고 믿는 순간 그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그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아들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 능력이 됩니다.

그 능력으로 인해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길 힘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으로 담대하십시오 /요일5:13-21/ 김병삼목사

2018-04-14 07:01:53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는 줄을 또한 아느니라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하나님의 뜻대로

오늘 말씀 중에 아주 중요한 구절이 있는데, ‘그의 뜻대로 구한다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하는 것이 그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염려를 가지고 구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저 멀리에 한 그루의 나무를 발견했습니다.

저 나무 밑에서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내었고, 드디어 나무 밑에 도착한 그는 그늘 밑에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햇볕을 피하고 나니 이제 심한 갈증이 생깁니다. 그래서 시원한 물 한 잔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했지요. 바로 그 순간, 놀랍게도 나무에서 시원한 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나무는 생각하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나무였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그는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수영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그대로 이루어져서 수영을 하며 더위를 식힐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소원을 말했고, 그 소원은 모두 이루어져 너무나도 행복했지요.

 

그런데 문득 염려와 근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굶주린 호랑이가 나타나서 이 행복을 빼앗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말로 하자마자 생각한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나무는 사라지고 대신 굶주린 호랑이가 나타나 다시 뜨거운 사막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바라는 천국은 과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가득한 곳일까요? 이 지점에서 진리와 비진리가 갈라집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고 영원히 거할 곳에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가득 찬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주 시골에서 아이들과 노인들만을 데리고 목회하는 영동 물한 계곡의 김선주 목사가 쓴 [우리들의 작은 천국]이라는 책에서 아주 소박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설명하고 있더군요.

 

교육받지 않은 노인들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소그룹 설교는 재미있으면서도 긴장되는 순간의 연속입니다. 설교 중간에 엉뚱하게 툭툭 튀어나와 자기 얘기를 늘어놓아 설교의 방향을 바꾸어버리거나 메시지를 증발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얘기를 상처 나지 않게 보호하며 내가 의도한 메시지를 살리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엊그제 부활주일 주일학교 설교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예수님은 부활해서 어디서 살았어요?”

한 아이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 하늘로 올라갔다. 천국으로.”

 

그래서 나는 굳이 천국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싫어하는 나쁜 것들을 열거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들며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하나하나를 종이에 받아 적었습니다.

 

그리고 열거된 나쁜 것들에 순위를 매겨 그것들을 하나씩 빼 나갔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싫다고 빼자는 것을 다른 아이는 그건 내가 좋아하는 거라고 빼면 안 된다고 소리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싫어한다면 일단 그것을 빼기로 합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천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다 빠져버렸습니다. 나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싫어하는 것들이 다 빠졌네. 이제 좋겠다. 그치?”

!”

그런데 말이야,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친구는 좋아하는 경우도 있잖아? 우리는 그것들을 다 뺐어.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것도 다른 친구가 빼자고 해서 빼버렸다. 그래서 우리 천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

내가 싫어하는 것이라고 무조건 빼버린다면,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남기고 싶다면 다른 사람 역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싫다고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잖아? 명원이는 피자를 좋아하는데 지우는 피자를 싫어하고, 원민이는 사이다를 좋아하는데, 혜승이는 콜라를 좋아한다면 서로 좋아하지 않는 것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 빼버리면 내가 좋아하는 것도 누군가에 의해 빠져버리게 되잖아, 그치?

 

그렇게 하면 결국 천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곳을 상상해봐. 그리고 그곳을 누군가 천국이라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콜라도 없고 피자도 없고 엄마도 없는 그곳, 선생님도 친구도 없는 그곳, 이웃집 아저씨도 없고 강아지, 고양이도 없는 그곳. 어떤 사람은 강아지를 싫어하고 어떤 사람은 강아지를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선생님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선생님을 싫어하고.

 

천국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버리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곳은 아닐까? 나쁘다고, 싫다고 피하고 버리는 게 아니라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는 곳이 천국은 아닐까?”

…….”

우리 마음속에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좋은 것으로 바꾸는 마법이 있는데, 그걸 사랑이라고 해. 예수님은 최고의 마법사야. 천국은 춤추는 마법의 왕국이야.”

…….”

 

아이들이 집중력이 떨어지고 산만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화제를 돌려야만 합니다.

얘들아, 천국에 학교가 있으면 좋을까, 없으면 좋을까?”

그러자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 지릅니다.

당근, 없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러면 우리의 천국에서 학교를 빼버리자.

 

이번엔 아이들이 더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지릅니다.

앗싸^^ , !”

그런데 잠시 후 3학년 수민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방학도 없는 거 아니에요?”

…….”

아이들이 갑자기 혼란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바로 처방을 내렸습니다.

얘들아 천국은 언제나 방학이야, 계속, ~~ 영원히, 설교 끝!”

 

어떤 신학자가 기도에 대하여 이런 정의를 내렸다고 합니다.

기도란 사람의 뜻을 하늘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는 이렇게 기도를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주저하는 마음을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다.”

담대함은 어디에서 올까요? 담대함은 우리가 누군가를 신뢰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태생적으로 우리 인간은 자신을 믿을 만큼의 능력이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 14절은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보다 더 담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워가고 기도하며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가 믿고 안 믿고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하든 하지 않던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이루십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하는 순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는 방관자 혹은 무관심자로 남게 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아도 메시아는 오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믿고 기다린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오심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은 아무런 관계가 없죠.

이동원 목사님의 책 [이렇게 사귀라]에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아주 의미 있는 통찰이 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뜻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다락방에 모여 성령 강림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영광스러운 응답으로 성령께서는 오셨습니다

기도 없이도 성령께서 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 성령께서 오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위대한 주권적 드라마에 동참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삶의 위대한 특권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기도로 동참한다는 의미가 될 듯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그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담대하게 기도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담대하다!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가장 분명한 차이 가운데 하나는 염려에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 인간들에게 찾아오는 염려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우리가 모르는 것 때문에 찾아오는 것이죠.

종종 모험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아주 어두운 곳, 혹은 절벽 아래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향해 말합니다.

나를 믿고 뛰어내려.”

아무것도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두려움을 물리치는 것은 오로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함은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담대함은 우리로 하여금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담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올바른 것을 보지 못하고, 올바른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올바르게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세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담대함영생이라는 ‘key’를 가지고 보아야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뜻대로구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키로 맞추어져 있습니다. 영생을 사는 자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과 영생을 믿지 않는 자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같을 수 없습니다.

영생을 믿는 자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담대함으로 나아갑니다.

 

영생의 키를 가지지 못한 두려움은 우리의 공포심을 자극합니다. 두려움이 찾아오면 삶의 환경들이 과장되기도 합니다. 민수기 13장에 가나안을 정탐했던 12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가나안을 보고 모세에게 와서 보고하는데, 자신들을 메뚜기로 표현하죠.

 

가나안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 땅을 보고 두려움이 찾아오니 자신들이 메뚜기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메뚜기로 보이기 시작하니, 출애굽과 홍해가 갈라졌던 모든 기적도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있지 못합니다.

 

군대 이야기를 조금 할까요?

군목으로 전방에서 근무할 때, 새벽 시간이 되면 철책을 따라 병사들을 위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특히 신병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두려움입니다. 밤새 근무하는 동안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근무 시간이나 추위 같은 것이 아니라, 철책을 넘어올 수도 있는 적군에 대한 두려움이죠.

 

두려움이 마음속에 들어가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사람으로 보입니다. 전방을 뛰어다니는 노루가 북한군으로 보입니다. 해가 뜨면 정체가 드러나는데, 어둠 속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과장되어 보이죠.

 

그러고 보니 영생이라는 키가 진리로 인도하는 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밝히 드러나면 알게 되는 것을, 어둠 가운데서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것이죠.

 

김동길 교수의 책 [나이 듦이 고맙다]라는 책에 보면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추억하며 쓴 글이 있습니다.

 

어느 농가의 소가 새끼를 가졌는데, 그 집 어린 아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아버지, 소가 새끼를 낳으면 나 소 새끼 탈 테야.’ 그러자 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며 안 된다. 소 허리 부러진다.’고 했어. 아버지의 칼 같은 대답에 어린 아들은 떼를 쓰거든.

 

그래도 탈 테야.’ 아들의 그 말에 아버지는 더 화를 내며 안 된다. 그러면 소 허리 부러진다며 소리를 질렀지.

그래도 어린 아들이 말을 안 듣고 타고 싶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이번엔 채찍을 들어 어린 아들을 때리는 거야. 아들은 울고 아버지는 때리고 온 집안이 난리가 났어.

 

소는 아직 새끼도 낳지도 않았는데 소 새끼 타면 허리 부러진다는 말로 어린아이를 잡은 이 아버지야말로 얼마나 못난 아버지냐?

태어난 새끼를 직접 보면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이가 그때 가서 알아서 판단할 텐데 말이야.

 

일어나지도 않은 일, 우리가 보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염려의 이야기입니다.

 

또 아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 전체적인 결론의 말씀이 될 것 같습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 1서에서 유독 안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러 번 반복되는 단어입니다. 13, 15, 18, 19, 20절에서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말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면 우리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 하지 않는다.’라는 것인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 안에서 용서를 경험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면 계속해서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영어성경에는 ‘continue to sin’이라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참 신기하죠?

예수를 믿기 전에는 우리 안에 별로 죄의식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분명히 우리의 삶이 선해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해 인식하게 되죠. 거룩한 자 앞에서 거룩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의식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 사함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안고 살아가지만,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빛 되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계속해서 비추게 되면 점점 내 안에 있는 죄와 어둠이 물러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거룩과 순결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용서함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능력은 우리가 죄에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참 능력은 병 고치는 은사나 말 잘하는 능력, 혹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긍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에서부터 깨끗하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능력 있는 사람은 무엇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순결은 타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던 윤 일병을 구타하고 학대해서 죽게 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전모가 세상에 묻힐 뻔했습니다. 같은 부대 근무하던 21세의 김모 상병의 제보가 없었다면 말이죠.

 

사건 당일, 김 상병은 앰뷸런스 소리를 듣고 당직사관의 지시에 따라 의무반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가해자 중에 한 명으로부터 실려 간 환자가 윤 일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식당 근처에서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됩니다. 주범인 이 병장과 의무병들이 윤 일병을 수차례 폭행한 뒤 윤 일병이 몸을 떨고 오줌을 지리는 등 이상증세를 보이는데도 꾀를 부린다고 또다시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게 된 소식은 모든 의무병이 입을 맞춰 헌병대 수사관에게 냉동만두를 먹다가 쓰러졌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이 병장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으니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는 당부였습니다.

 

김 상병은 이 사실을 알려 준 지 상병에게 윤 일병이 깨어나면 사실이 밝혀질 테니 사실대로 보고하라고 했지만, 지 상병은 윤 일병이 차라리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결국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김 상병의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이대로 자신마저 입을 다물면 진실이 묻힐 것이고, 그러면 나중에 자기 아들이 군에 와서 이런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결국 포대장인 김모 대위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의 전말을 알렸고 이때부터 사건이 급반전되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윤 일병이 폭행당하는 모습을 44명의 군인이 단체로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복이 두려워 누구도 이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11명의 의무병은 폭행뿐 아니라 은폐에도 가담했습니다. 폭행의 주동자도 악하지만 가담하거나 은폐하거나 방관한 사람도 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의를 이기는 악에 편승하는 것도 악입니다. (김관선의 리셋중에서)

 

참된 것을 참되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을 이야기하므로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도 있고, 어떤 누군가에게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가운데 담대함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주님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해 주기를 바라고 착하다고 칭송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그 욕심은 우리에게 선명한 삶의 기준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무서운 장애물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게 돼도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때로 교회와 세상에서 이중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삶이 반복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그리고 이런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보아왔던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에 근거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고, 우리를 지키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18)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속성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를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맥락에서 보면, 악한 자 즉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고 해하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하용조 목사님의 책 [예수님과의 사귐]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스스로 죄에서 자신을 지켜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한다는 말씀이 18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세요.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이를 잘못 해석하면 하나님이우리를 지키신다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본에는 난 자가 자기를 지키며라고 되어 있다고 해석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지킨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라고 핑계하고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지켜서죄를 짓지 않게 합니다. 여러분, 자기 스스로 죄짓고 타락한 것을 누구에게 책임 전가하지 마십시오.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이라면, 유혹이 죄를 거부하여 사단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18절 하반절에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보다도,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스스로 죄와 싸워 이길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활용하면 죄를 짓지 않고 유혹에서부터 스스로 끊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유혹한 자도 문제지만, 유혹을 받는 자는 더 큰 문제입니다. 유혹한 자의 죄도 크지만, 유혹을 받는 자의 죄도 큽니다.

 

결정적으로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소속감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우리의 정체성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로 분명하게 사느냐는 것이죠. 이제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요구가 있습니다. 바로 소속감이죠. 그래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소속감이 아니라, 어디에 소속되었느냐는 사실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소속감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유명인과의 관계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함께했던 만남이나 단체들을 내세우는 것이죠.

 

크리스천들에게 자랑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닐까요?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과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은, 세상에 속하였다는 것과 완전히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세상은 멸망하고 없어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모해야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상을 사모하면 세상일을 하지만, 하나님을 사모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누려야 할 특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거나, 사람들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할 때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종종 옷 입으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로마서 1312절과 14절의 말씀입니다.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그 옷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될 것이며, 어떤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그 옷에 합당하게 우리를 대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한 해는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참 오랫동안 청문회와 재판이 열렸습니다. 계속해서 구속이라는 말이 나왔죠. 구속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구치소에 들어가고 죄가 확정되는 순간 죄수복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구치소에서 덮는 담요에도 법무부라는 글씨가 찍혀 있습니다. 죄 값을 치른다는 것이고,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습니다. 만약 감옥에서 나온 사람이 계속해서 죄수복을 입고 있다면 죄수로 대하지 않겠습니까?

또 중요한 것은 20절의 말씀인데요.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그분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영생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많은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자각하고 깨어있어야 하는 것은 우상을 멀리하는 일입니다.

우상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때문에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성공을 더 사랑할 때, 성공하려고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면, 쾌락을 위해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권력을 더 사랑하면, 권력을 좇아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상실합니다.

오늘 21절의 말씀을 보세요.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이 말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라는 권면의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누가 감히 세상을 이기려 하는가! /요일5:1-5/ 유기성 목사

2016-08-24 11:49:38

 

30분의 기적, 설교 준비하면서 주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30분 설교를 듣고, 믿음이 바뀌고 영적 눈이 뜨이고 삶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오늘 30분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아주 도전적인 말씀을 읽었습니다. 5절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상을 이긴다!’ 엄청난 생각이요, 위험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세상에서 성공할 꿈을 꿉니다. 누가 감히 세상을 이길 생각을 할 수 있겠으며 세상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이면 못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자기 세상을 이겨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요일 5:1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영이 다릅니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진정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은 성공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이겨야 할 곳입니다.

 

4절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 사도가 세상이라고 말할 때 의미는 초대교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을까요? 단순히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믿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예수 믿지 못하게 하였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예수님을 주님이라 왕이라 부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과 세상 원리와 세상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 법과 원리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을 싫어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만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혹이 더 무섭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을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는 생각하지 말고 세상에서나 성공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행복하라, 세상 재미를 즐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핍박받을 때 믿음이 더 좋아지고, 세상에서 실패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이 많은 반면, 세상 유혹 앞에서는 너무나 비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잊어 버리고 사는 것이기에, 세상만 바라보고 세상만 추구하고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살 것처럼 살면 겉으로는 얼마든지 예수를 믿어도 좋다, 교회 얼마든지 다니라, 직분도 가지라고 합니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줍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고 높아지고 성공하려고 애를 쓰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1726~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걱정하셨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마치 먹고 마시고, 학교에 가고, 일하고, 집 사고, 차를 사고, 시집 장가가면서 염려하고 애쓰며 기뻐하기도, 슬퍼하며 살 것을 걱정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지 못하고 세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의 비참함과 실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성경 실화가 롯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는 소돔 성에서 극적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녀에게 주신 한 가지 명령, 마지막 명령은 멸망하는 세상을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려운 명령입니까? 이것을 계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옥에서 건짐받는데 지옥을 돌아보지 말라고 한다면 힘들어요 하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마음은 온통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뿐이었고, 그녀의 모든 것을 소돔 성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소돔 성이 유황 불에 탈 때, 그녀는 돌아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도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으로 살다가 세상과 함께 망하자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공한 자였느냐?]를 물으시지 않고, [이기는 자였느냐?]를 물으신다고 했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2:7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고, 2:11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고, 2:17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받고, 2:26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고, 3:5 흰 옷을 입을 것이고, 그 이름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것이고 계 3:12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고 계 3:21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되리라]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라고 하는데, 결국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에녹은 세상을 이겼다, 아브라함도 이겼다, 이삭도 이겼다, 야곱도 이겼다, 요셉도 이겼다, 모세도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기는 자였던 것은 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 보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박해시대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슴에 품은 채, 죽이면 순순히 죽었습니다. 얼마나 무기력한 자들입니까?

 

그러나 그들이 핍박자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결국 로마를 기독교화하고 말았습니다.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믿어도 좋다고 칙령을 내렸습니다.

 

"기독교를 믿어도 좋습니다." 하는 칙령의 속뜻은 "로마 정부는 기독교에 대해 졌습니다. 없애려고, 없애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나는군요. 당신들이 이겼습니다."하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에 일본 당국이 교회를 누르기 위해서 온갖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그렇게 없애려고 애쓰던 한국교회에서 지금 5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일본에 파송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본에 단기선교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2002년 중국 공산당이 16차 공산당 전국대표회의에서 종교인의 입당을 허용했습니다. 중국 당국은 교회를 없애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박해 30년 동안에 교인들 숫자가 네 배 가까이 늘어나 있었습니다.

 

그 뒤에도 교회에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약 가운데 하나가 "종교인은 공산당 당원이 될 수 없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 당원이 되지 않으면 출세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당원 되는 것보다 예수 믿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기 위해 공산당을 탈당하겠습니다." "나는 예수 믿기 위해 군대의 장성 자리도 자원해서 내 놓겠습니다." 심지어는 "나는 예수 믿기 위해 전인대(국회) 대표 자리도 내 놓겠습니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결국 중국 당국이 '종교인도 공산당 당원이 될 수 있다'고 정책을 바꾼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감히 세상을 이기려고 하는 자입니까? 주 예수님을 믿는 내가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5절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성령님이 임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친자 확인을 위하여 유전자 검사라는 것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확인합니까?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심!”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것을 하나님의 씨!’라고 했습니다.

 

요일 3:9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어느 목사님께서하나님이 나를 갑자기 데려가시면 네 살된 어린 딸은 어쩌나?’갑자기 걱정이 되셨답니다. 그래서 딸에게 아빠가 갑자기 없어져도 천국에 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말했습니다.“아빠가 천국에 먼저 가면 너를 기다려줄게.”그랬더나 그 아이가“Thank you." 라고 하더군요. 너무 담담하여 다시 물었답니다. "그럼, 혹시 네가 먼저 천국 가면 아빠를 기다려줄래?”했더니그럼요.”했습니다.

 

네가 천국에 갈 줄 어떻게 아니?”“예수님이 내 마음 속에 계시기 때문이지요.” 네 살 어린이가 자기 속에 예수님이 계시고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는 세상을 이기는 자입니다.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큰 증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1...낳아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분이 낳으신 이도 사랑합니다.

 

2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낳았으니 낳아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한 하나님으로부터 난 모든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기쁨인 사람입니다.

 

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한 형제가 많은 핍박 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인 한 자매를 사랑하였습니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어. 힘들지도 않니? 안 믿는다고 해.”

 

그 때 그 자매가 그 형제에게너는 왜 굳이 그런 나와 결혼하려고 하니?”“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지!”“바로 그거야. 사랑하면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못하게 되거든.”

 

결국 그 형제도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살지만 의롭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열망이 곧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 안에 세상 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요일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주 예수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독일 히틀러에게 대항했던 마르틴 니묄러 목사님이 투옥되어 7년 동안 독방에서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갇혀있던 방에는 조그마한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이 창문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죄인의 목을 매는 밧줄과 교수대였습니다. 어떤 때는 사형당한 사람이 교수대에 매달려 있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사형대만 바라보다 보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자다가 꿈에 자기의 죽는 모습을 보면서 소스라쳐 놀라 깨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교수대에서 죽는 장면만 묵상하다가 갑자기 내가 왜 교수대만 묵상하는가? 깨닫고 주 예수님을 생각하였답니다.

 

그랬더니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살인자를 저주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나도 예수님처럼 죽어 예수님과 같이 천국에 살아야지.’라는 결단이 되더랍니다. 그러자 마음에 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 후부터 놀라운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 천사가 수종을 들었던 것처럼 마치 천사가 곁에서 자기를 도와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독방은 이제 주님과 속삭이는 밀실이 되었습니다.

 

후에 니묄러 목사님은 석방되었을 때의 느낌은 깊은 산 속이나 수도원에서 수도를 하고 세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제 설교한 지 30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30분의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갈망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세상을 이겨야지 하는 마음이 생겼느냐는 말입니다.

 

세상 성공은 부산물입니다. 주셔도 그만 안 주셔도 그만입니다. 이 말에 움찔하십니까? 아직 세상 성공보다 더 좋은 것을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누가 감히 세상을 이기려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확신하는 자입니다.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자는 세상이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 성공 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3층천에 올라가 본 사도 바울에게는 세상 성공이 배설물처럼 보였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성경에 보면 비유이지만 천국에는 길 포장재가 황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천국을 바라보면 황금이 도로 포장재처럼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주 예수님을 친밀히 알게 되면 세상 성공에 연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고난의 길을 가라’, ‘십자가를 지고 가라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것을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소망이 분명치 않는 사람에게는 헌신이 너무나 힘들어 도망 다닐 것입니다.

 

한 집사님, 삶의 실패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놀라운 삶을 사시고 계십니다.

 

너무 작은 돈을 잃고 너무나 큰 하나님을 얻었습니다.”이 말이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돈은 너무나 큰 것이고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자는 세상에 나갈 때, 생각이 다릅니다. ‘또 한 번 이길 기회가 왔구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시험은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승리할 기회입니다.

 

시험은 왜 칩니까? 합격하라고, 진급하라고, 상급생이 되라고 치는 것입니다. 시험이 올 때마다 두려워하지 않고, ‘또 한 번 이길 기회가 왔도다!’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생각이 달라지니 인생이 재미있는 것입니다.

 

두려움 대신 기대와 희망이 생깁니다. “주여, 이번에도 이기게 하옵소서.” 승리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영생의 선물, 천국의 시민권을 주실 때 그저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면 족합니다.

 

승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지금부터 마음에 예수님이 왕이 되시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부흥회 때, 남자 집사님 한 분이 한 주간 휴가를 내고 참석하셨습니다. 그 집사님은 직장 때문에 너무나 괴로워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사표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는 100일 아침 금식 작정기도를 하였으나, 아무 응답이 없어서 답답해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흥회 기간 중에 직장 안에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원망했으나, 직장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에 대하여는 한 번도 대적하고 싸워 보지 않았음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목사님, 오늘 답을 알았습니다. 저는 도망만 생각해 왔습니다. 아침 일찍 나와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을 꾸짖고 대적하겠습니다. 제 사명을 알았습니다.”

 

아직 세상을 이길 확신이 없으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주 예수님을 믿습니다. 저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 주시고 세상을 이길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생명, 주께 있습니다! /요일5:6-13/ 유기성 목사

2016-08-24 14:51:47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려면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6절 그는 물과 피를 거쳐서 오신 분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고백이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하지만 사실은 대단한 고백입니다. 당시에는 목숨을 걸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너무나 싫어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났습니다.

 

철학자인 헬라 사람들의 조롱거리였습니다.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은 하나님’, 너무나 어리석은 종교라는 것입니다. 로마 정권이 무자비하게 박해하였습니다. 로마 황제에게는 반란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마귀는 엄청난 이단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그 사람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핵심 신앙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시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셔야 했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 물과 피로 임하셨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6...그는 다만 물로써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로 임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왜 세례를 받으십니까? 온 인류의 속죄제물이 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음을 분명히 하신 사건입니다.

 

요한 사도는 또한 예수님께서 피로 임하셨음을 강조하였습니다. 피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신 것을 말하는데,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셨음을 부인하는 무서운 이단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셨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요한 사도가 제시한 증거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증언이었습니다.

 

7절 증언하시는 이가 셋인데, 8절 곧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 이 셋은 일치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하나님께서 직접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9...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 받으실 때 실제로 하나님께서 증언하셨습니다.

 

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변화산 상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어떤 고난을 당하고 죽으실 것을 의논하실 때, 하늘에서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17: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이처럼 하나님까지 나서서 증언하셨던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바로 이 생명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1절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바로 이 생명은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12절 그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확신을 갖게 하려고 요한일서를 쓴 것입니다.

 

13절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영원히 살 것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D.L. 무디가 65세 쯤 되었을 때, 신문에 무디가 나아가 들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무디는 다음 주일에 아주 불쾌한 말투로 이 기사 이야기를 꺼냈습니다.“여러분 오늘 아침 신문에 보셨지요. 날보고 늙었다고 그래요. 여러분 제가 늙었습니까?”교인들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제가 곧 죽을 줄 아는 모양인데, 저는 안죽습니다 100살은 살 거예요.” 교인들이 다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천년은 살 거예요" 그러자 다들 질리는 표정이었습니다. 무디의 말은 점점 과격해졌습니다.

 

"아니 나는 만년은 살 거예요. 아니 10만년의 10만년을 살겁니다. 아니 영원히 살 거예요. 나는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할렐루야!”그러자 모든 성도들이 얼굴이 환해지며 아멘!” 대답했습니다. 100살을 산다고 할 때는 망령이라고 생각했지만 영원히 산다고 하니 아멘입니다. 무디는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기사를 이용하여 영생에 대하여 증거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을 압니다" 하고 선언할 수 있습니까? 요한 사도는 안다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믿는다는 단어 보다 더 강력한 확신의 표현입니다.

 

난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아요와 나는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줄 믿습니다중 어느 표현이 더 강력한 확신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믿었다면서도 영생을 소유했음을 믿지 못하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윌버 채프만이 18세 때 디엘 무디의 집회 때 은혜를 받고 상담했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영생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아서 고민하였습니다. “제가 죽으면 천국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늘 불안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무디는 요한복음 5:24을 읽어보자고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무디는 채프만에게 물었습니다.“너는 예수를 믿느냐?”“, 믿습니다.” “그러면 너는 영생을 얻었느냐?”채프만은 그걸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무디는 다시 요한복음 5:24을 읽어 봐!” 하셨습니다. 다시 읽자 무디는 너는 예수님을 믿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믿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영생을 얻었냐?”“글쎄, 제가 그걸 잘 모르겠어요.”

 

무디는 다시 읽어 봐라!” 세 번째 같은 성경을 읽혔습니다. 그래도 채프만이 자신이 영생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무디는 큰 소리로 책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얻었다 하시면 얻은 것이지 네가 뭔데 감히 하나님을 의심하느냐!” 그 책망에 채프만의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틀림없잖아. 그러면 내게 영생이 있는 거구나!’

 

영생의 확신을 가진 후 그는 열심히 성경을 공부했고 신학교를 갔고 결국 무디의 후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한국에도 다녀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생을 소유했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풍성한 생명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10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을 뿐 아니라 풍성하게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도 생명은 가졌습니다. 영적 생명도 이렇게 가진 사람은 너무나 안타까운 것입니다. 한시간 두시간 상담을 해 보아야 영생을 가졌구나!’ 확인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다 이 사람은 생기가 넘쳐 흐르는구나!’ 인정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충만한 생명은 어떻게 가지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생명은 교리나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으로 사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 사도가 이 글을 쓸 때, 단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일 1:3 ...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요한 사도 안에 계셨습니다. 그러니 요한 사도가 얼마나 충만하였겠습니까?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도전합니다.

 

요일 2:28 그러므로 자녀 된 이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요일 5:12 그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영생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마음에 영생을 가졌다는 증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일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증언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증언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6:16-17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하였을 때, 어부였던 베드로는 가난한 시골 목수였던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크게 칭찬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라고 깨닫게 하고 믿게 하고 고백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시라고 믿는 것은 무슨 역사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렇게 믿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전 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하나님이 제자들의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그런데 지금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우리 마음에 임하신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육성으로 말씀을 들은 것을 우리는 성령님으로 우리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차이 뿐입니다. 주 예수님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그러시면서 무슨 말씀을 더 하셨는지 아십니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만 함께 하시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요한 사도하고만 함께 하시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함께 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고상한 일이겠지만, 주 예수님과 친밀해지고 하나가 되고 온전히 동행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명절에 순천향대학병원에 계신 어머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아직 식사를 하지 못하시고 혈변을 보시는 상태이신데, 항암 치료를 받고 싶지 않다고 하시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 솔직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사는 재미가 없어

 

여러분, 혼자 남을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준비되셨습니까? 사람들이 핍박하고 따돌릴 때가 올지 모릅니다. 그 때도 준비되셨습니까? 주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기쁘고 감사하고 충만하게 살 준비가 되셨습니까?

 

주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것입니다. 갈망할 것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진정 소중한 것은 주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깊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되, “오직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두 주인은 없습니다! 예수님 한분이면 충분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삽니다. 극단적으로 여겨집니까?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구요? 숨 좀 쉬고 살자구요?

 

부부 사이에서 융통성 찾고 숨 좀 쉬고 살자면 어떻습니까? 생명은 부부 관계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벌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영생을 믿으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결단이 됩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한가지가 부족하였습니다' 한가지가 부족하면 얼마나 신앙생활 잘 한 것입니까? 그는 돈,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생을 잃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 예수님 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까? 오직 주님입니까? 그것이 갈망입니다. 그 때 비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다시 복음 앞에 오신 백부장 선교사님, 너무나 위험한 나라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십니다. 어떻게 그런 사명을 감당하시나, 영생이 분명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장로님으로 교회를 건축하신 분이셨고 일가 친척이 다 예수님을 믿었으며 어려서부터 교회 열심히 다니고 나름대로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썽꾸러기였던 동생이 고2 때 변화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기쁨이 있음을 느꼈고, 틈만 나면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형 안에도 이런 기쁨이 있어? 구원의 감격이 있어?" 하고 물어오는데 동생 앞이라 "물론 있지!" 하며 허세를 부렸지만 솔직히 마음으로는 "아니야 내겐 없어!"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지만 힘만 들고 아무리 읽어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동생처럼 변화되는지 알 수 없어. 어느날 동생에게 솔직히 고백하였답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니?"

 

그랬더니 동생이 복음을 전해 주었는데 내용은 다 아는 것이었습니다. 고민이 되었습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고 같은 복음을 아는데 삶이 왜 이렇게 다르냐는 것입니다.

 

그 때 금식을 하며 새벽기도도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차츰 성령님의 깨우치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죄를 이길 믿음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그 때, "네가 고민하고 발버둥치는 너의 구원을 다 이루었다. 내가 너의 죄값을 다 치루었다."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미 다 이루신것이군요." "그 동안 왜 이것을 믿지 못하였을까?"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후 "구원해 주세요?' 가 아니고 "감사합니다'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이미 못 박힌 것"을 알았습니다.

 

'이미 죽었는데 나는 왜 여전히 살았나?' 고민하며 기도하는데, 갈라디아서 5:24을 읽으면서 눈이 열렸습니다.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미 못 박혔지만 계속 못 박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선교사로 나가도록 만들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그리스도이십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나 주 예수님의 생명이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찬을 받으러 나올 때, 지금까지 예수님을 마음에 분명히 영접하지 못하신 분은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었지만 풍성한 생명으로 살지 못한 사람은 이 시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 삶의 생명이요 왕이 되시기를 정말 원합니다

 

 

주님이 지켜주시므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요일5:18-21/ 유기성 목사

2016-08-24 15:24:45

 

요한일서 강해 마지막 설교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전하고자 하였던 메시지는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니 주님과 사귐이 있는 삶을 살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기쁨이 차고 넘치는 삶을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4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두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살며 사랑만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니라

 

그런데 초대교회에 죄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이 생겼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죄에서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기도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죄에 빠진 형제를 정죄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리하지 않으신데 우리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묻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정말 죄짓지 않고 살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요한 사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죄 짓지 않게 해주신다고 단언합니다! “죄짓지 말라도 아닙니다. “죄짓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18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않는다!”

 

요한일서 3:9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는 압니다.” 했습니다. 자신만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짓지 않는다!” 고 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강한 확신입니다.

 

그래서 난감합니다. 지금은 이런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아마 이 견해에 대한 지지자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진정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믿으면서, 사람을 지으신 것도 믿으면서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의 흐름을 멈추게 하시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믿으면서 죄짓지 않게 해주신다는 것은 왜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시는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실 놀라운 계획을 알게 하시고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에스겔 36:26-27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새로운 영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새 마음을 주시고.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신 다음 너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될 것이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들이 죄에서 승리하고 마귀를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임마누엘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18 ...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그 사람을 지켜주시므로, 악마가 그를 해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지켜주신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전남 어느 섬마을에 선생님 한분이 부임하셨는데, 너무나 진실하신 분이셨습니다. 마을 아이들이 너무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을 보고는 욕하는 것을 고쳐 주려고, 종이 10장씩 나누어 주고, 욕할 때마다 1장씩 빼앗도록 시켰답니다. 아이들은 욕 안하려고 긴장을 했지만, 안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서로 뺏고 뺏기면서 일주일 지난 후, 아이들이 욕표를 점검해 보니, 어떤 아이는 40장을 가진 아이도 있고, 한 장도 없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욕하고 뺏기기만 했지, 욕 듣고, 뺏을 재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라고 하시더니, 10대 매를 때리시는데, 돌아서서 세라고 하시더랍니다. 3대까지 맞고 더 이상 맞으면 죽을 것 같아서, 돌아 섰답니다.

 

그런데 돌아서서 선생님을 보는 순간, 선생님이 펑펑 울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 놈아 내가 너를 얼마나 믿었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다시 돌아 섰답니다. 나머지 매를 다 맞았는데, 하나도 안 아프더랍니다. 교실로 돌아와서 책상에 엎드려 울었답니다. “나는 커서 저 선생님처럼 될 거야이 섬마을 아이가 정태기 목사님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마음에 계시면서 죄를 지을 때마다 슬퍼하시며 고통당하시는 것을 느껴 보셨습니까? 만약 그것을 느낀 사람이라면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죄를 안 짓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죄에 빠진 믿음의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은 모순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다시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만있어도 주님이 알아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지 하는 자를 주님이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2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러면 악마는 주님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를 만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학생 제자훈련 중 한 전도사님이 제 마음 안에 음란과 교만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요? 결혼해도 될까요? 목회해도 될까요?” “음란과 교만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면 결코 결혼도 목회도 못합니다.

 

전도사님의 문제는 음란과 교만이 아닙니다. 주님과 관계가 친밀하지 못하여 음란과 교만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함께 하심을 정말 믿고 주님을 바라보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음란과 교만은 여전하지만 육신에 끌려가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육신의 소욕 때문에 낙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육신을 통하여 나를 죄로 빠뜨리려 한다그 사실만 명심하면 됩니다. 그러니 항상 나는 죽었습니다고백하며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의 역사 보다 주 예수님이 더 강하십니다. 우리를 능히 죄와 마귀의 역사에서 이기게 해 주십니다.

 

팀 한셀이라는 유명한 교육자가 [리더십] 책에서 10년 만에 만난 친구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10년 전에도 참 성실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10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 놀라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했고 기쁨과 확신에 넘쳐 있었습니다.

 

"그동안 네게 무슨 일이 있었니? 말해 줘봐" ", 로마서를 다시 읽고 내가 정말 죄인이라는 것과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셨음을 깨달은 후 부터야"

 

"그것은 전에도 마찬가지였잖아?" "맞아. 내가 죄인이라는 것은 항상 알고 있었지. 그러나 전에는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했었어. 그러나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었어. 늘 나 자신에 대하여 낙심하고 좌절했었지

 

그런데 로마서를 읽고, 두 가지 중대한 것을 깨달았어, 나는 죄인이고, 앞으로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거야. 나는 언제나 이기적이고 죄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 나는 이 진리를 받아들였어. 그 후부터 내가 죄를 범해도 좌절하거나. 죄책감으로 나를 쥐어뜯는 일을 하지 않고 주님께 고백하였어.

 

오래 전에 로렌스 형제가, ‘당신은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그저 하나님께 고백하고 나서 계속 살지요라고 말했다는데, 이제 로렌스 형제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그러나 두 번째 깨달은 것은 더 놀라운 것이었어. 그것은 내 안에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거야. 내게 좋은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난 그것이 주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았어. 그 후부터 나는 나를 통해서 주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지켜보는 재미로 살고 있어. 나는 그저 그 분이 하시는 일에 감사하고. 놀라고 기대하는 것뿐이야.

 

전에 나는 나의 죄 성을 바라보며 낙심에 빠져 살았지,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자신 안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 이제 난 항상 내 삶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고 있어. 이것은 일시적 감정이 아니야. 정말 생생한 사실이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이야

 

팀 한셀은 말하였습니다. “내 친구는 변화되었습니다. ‘나쁜 사람으로부터 좋은 사람으로가 아니라, ‘좋은 사람으로부터 놀라운 사람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게임 좋아하십니까? 스포츠 좋아 하십니까? 드라마 좋아하십니까?

 

이제부터는 죄 안짓는 게임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죄 안짓는 드라마를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진짜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진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면 됩니다.

 

19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온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9... 그런데, 온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악마가 하는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습니다.

 

요한일서3:8 죄를 짓는 사람은 악마에게 속해 있습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짓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악마의 일을 멸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참되신 분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신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그 참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 분이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요한 사도는 드디어 요한 일서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이제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21 “자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은 우상을 멀리하십시오.”

 

요한일서는 성경 중에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성경 중 하나입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도 나이가 많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마지막 말씀 중 하나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맨 마지막에 왜 우상을 멀리하라하셨을까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신상을 섬기고 귀신에게 점을 보고 신전에 들락날락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요한사도가 말한 우상 숭배란 예수님 대신 의지하고 바라보고 사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남편, 아내, 부모, 자식이 다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과 직업이 우상입니다. 최고의 우상은 자아입니다. 끊임없이 나, 나 하며 사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음 주부터 저는 6개월 안식년에 들어갑니다, 마지막 설교는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교회를 떠나 있겠기에 저도 요한 사도의 마지막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로빈 마이어스가 지은 [언더그라운드 교회]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한 젊은 목사가 새로운 교회에 청빙되었는데, 교인들이 만장일치로 자신을 청빙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부임한 후 사실상 만장일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의 만장일치였지만 실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투표 결과가 2342였습니다.

 

그 날부터 목사는 2만을 생각했습니다. '그 반대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그리고 결국 그 두 사람을 알아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1년이 지난 후 교인들은 그 목사를 내 보냈는데, 투표의 결과는 2342였습니다. 두 사람만 목사님의 연임에 찬성하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목사에게 교회나 교인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인에겐 목사가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안식년을 가진다고 교회를 걱정하는 이도 있고 자기는 어디서 은혜를 받느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이라도 저를 비켜나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지켜주시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저도, 교회도, 여러분도

 

정말 그런지 이번에 분명히 경험해 봅시다. 6개월, 24 시간 예수님 바라보는 특별한 기간으로 주셨다고 믿읍시다.

 

지난 목회자 워크샵 에서 한 사역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영성일기를 쓰고 24시간 주님 바라보는 것으로 끝입니까?" 저는 즉시 대답했습니다. “24시간 주님 바라보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닫는 귀를 열어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믿음을 길러 주시려는 것입니다.

 

장로님 한 분이 "목사님은 늘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가 되자고 했는데 구체적인 계획이 있습니까?" 질문하셨습니다. 저는 대답하였습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소문나기 위하여 무엇을 하려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우리 자랑이 되고 위선이 되기 쉬우며, 부담만 가중되어 오래가지도 못하고 진정한 열매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오직 예수님과의 연합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온 교회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안식년을 가장 잘 보내는 길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지내는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살아 볼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번 6개월을 영성일기를 쓰면서 매일 확인하고, 나눔방 통하여 서로 붙잡아 주며, 24 시간 예수님 바라보며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질그릇에 보화를 가졌으니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고 오직 순종만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스스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더 할지 말지는 6개월 후에 결정합시다.

 

그러면 주님이 반드시 죄를 이기고 거듭난 삶을 살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고, 주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4:1-9/요일5:1-4/ Greg Laurie

2015-06-23 15:01:19

 

만약에 누가 제게

 

목사님, 크리스천도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참고로, 칼빈주의 신학은, 성도가 한 번 받은 구원은, 결코 잃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받은 구원이, 진정한 구원인지 아닌지..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가 받은 구원이, 진정한 회심이라면..

그는, 자기가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가 처음에 받은 구원이

값싼 은혜로 통한 구원이거나,

자기 결단에 의한 구원의 확신이라면..

그가 받은 구원은.. 중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그가 받은 구원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었으니까요!

 

쉽게 예를 들어봅니다.

4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네 번 다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에는,

모두 네 종류의 밭이 나옵니다. 각각 길 가, 돌 밭, 가시 밭, 좋은 밭입니다.

 

길 가에 떨어진 씨는, 아예 싹도 나지 않았지만,

돌 밭, 가시 밭.. 싹이 나고 자랐습니다.

어느 정도, 복음의 씨앗에, 자기가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얘기입니다. 싹이 났다니까요!

 

그러나 돌 밭.. 흙이 얇아서, 즉 믿음이 얕아서.. 더 이상 믿음이 성장을 못했고요!

가시 밭.. 세상의 핍박, 재물에 대한 염려 때문에.. 더 이상 믿음이 성장을 못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

오늘날 우리 신자들 가운데, ‘돌 밭 신자’, ‘가시 밭 신자가 있다는 얘기이고,

그들이 구원 받을 수 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한 때는 돌 밭이었으나,

나중에 회개하고 좋은 땅으로 변할 수는 있겠지요.

 

그렇다면 좋은 땅..

아예 예수를 믿을 때부터, 진정 회개하고, 회심한 신자의 마음 밭을 뜻합니다.

 

이런 신자는.. 중간에 자기가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리기가.. 좀처럼 어렵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핍박도 이기고, 재물과 세상 염려도 이길 것입니다. 좋은 땅이니까요!

 

그러나 돌 밭, 가시 밭 신자

자기는 구원 받았다고 생각(사실은 착각)하지만, 그 구원을 중간에 잃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애당초 좋은 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쉽게 예수를 믿는 척 하다가.. 결국은 핍박이 올 때,

또는 세상 염려가 생기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길 때.. 그는 믿음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나는 정말 구원 받은 신자인가?> 하는 문제를 한 번 짚어보려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좋은 땅인가?,

혹시 나는 돌 밭, 가시 밭은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길 가는 고려할 필요 없습니다. 그는 아예 불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구원 받은 성도의 5가지 증거

 

진정 구원 받은 성도는, 좋은 땅

다음과 같은 5가지 증거가, 자기 삶에 골고루 나타납니다.

 

그럼 아래의 5가지 증거로,

내가 정말 회심하고, 예수를 믿는, 구원 받은 성도인가?’.. 한 번 각자 스스로 분변해 보십시다.

 

1. 구원 받은 성도는,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을 증거하며 삽니다.

 

요일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여기서 시인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공중 앞에서, 세상 속에서 시인하고 증거하는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전도입니다.

 

그러나 꼭 전도하지 않더라도,

직장에서, 친구 사이에서,

자기가 크리스천임을 공개적으로 시인합니다. 숨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 회심하고, 구원 받은 성도의 첫 번째 증거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직장에서, 친구 사이에서, 이웃 집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크리스천입니다라는 사실을, 내가 은근슬쩍 숨기고 있다면..

나는, 내가 받은 구원을 한 번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2. 진정 구원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기꺼이 지킵니다.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로다.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히 지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흠 없이 다 지킬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자원해서, 기꺼이, 계명을 지키면서, 세상을 이기며 삽니다.

 

그런데 일부 신자들, 즉 진정 구원 받았는지 여부가 불확실한 신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은, 그 계명을 지키지만,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구절은, 그 계명을 무시해 버립니다. 건너뛰어 버립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무관심한 신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신자는..

자기가 진정 구원 받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스스로 정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짐짝이나 멍에처럼, 내 어깨에 무겁게 여기는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결코 무겁게 여기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경가운데

아직도 어떤 구절이나, 어떤 분야의 말씀은,

내게 거부감이 들고, 순종해서 지키기가 꺼려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꾸려하지 말고, 그런 나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뭐든지 아멘,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3. 구원 받은 성도는, 죄를 지으면, 괴로워합니다.

 

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위 구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계속)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계속)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 그는 스스로 몹시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죄를 멀리하게 됩니다.

이런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죄를 계속 지으면서도,

괴로워할 줄도 모르고, 영혼이 아파할 줄도 모른다면,

그는 아직 구원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아니면, 구원 받았다 할지라도

잠시 타락해서, 마귀의 역사로, 자기 영안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죄를 짓고도, 그게 죄인 줄 모르고,

그래서 아파하지도 않고, 계속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의 뚜렷한 특징은,

죄에 대해 민감해지고, 죄를 두려워하고,

혹시 실족해서 죄를 지어도.. 자기가 곧 회개함으로써.. 계속 죄를 짓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30, 60, 100배의 결실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죄의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30, 60, 100배입니다.

죄는 눈곱만큼만 지어도, 그 열매는, 30배로 거둘 수 있다는데서..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만 30, 60, 100배의 결실을 거두기 바라지만,

내가 죄의 씨를 뿌릴 때에도, 30, 60, 100배의 결실을 거둔다는 사실을

꼭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라도 진정 구원 받은 성도는,

죄를 두려워하고, 가급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0배가 무서우니까요!

 

그래서 진정 <구원받은 성도, 즉 참 하나님의 자녀>,

자기 죄로 인한, 주님의 징계도 달갑게 받습니다.

 

물론 징계가 괴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 징계를 통해, 자기가 더욱 연단되고, 죄에 면역성이 강한 성도가 될 것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징계를 달게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지 못한 성도는, 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반발합니다. 원망으로 일관합니다.

심지어는 신앙을 버리기도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4. 참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를, 마귀의 역사로부터 지킬 줄 압니다.

 

요일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위 구절에서, 하나님이 저를 지키신다고 했는데,

, 하나님께서,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때 참 하나님의 자녀는, 그 주님의 역사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예를 들어, 마귀가 강력하게 역사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유흥업소, 하드코어 음란물 등입니다.

 

그러면, 참 하나님의 자녀는, 벌써 그런 지역을 가까이 가지도 않고,

몰라서 가까이 가게 되었을 때는, 성령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스스로 속히 빠져 나옵니다. 하드코어 음란 영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돌 밭, 가시 밭,

성령님이 자기 속에서 계속 신호를 보내도,

그 신호를 느끼지 못하거나, 아예 마귀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합니다.

 

위 구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고 할 때,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로봇이고, 하나님이 다 자동적으로 막아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물론 막아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의 감화로 도와주시지만,

최종 결정과 선택은, 나의 순종에 달린 것입니다.

자기가 실족해 놓고,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위 말씀의 뜻은,

내가 성결하게 사는 것은,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내가 마귀를 이기는 것도, 내가 마귀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도,

내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를, 보호해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에 다 맡겨버리면.. 극단적 칼빈주의가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인간의 책임에 돌려버리면.. 극단적 알미니안이 됩니다.

 

위 구절, 요일5:18절도 보면, 완전히 칼빈주의적으로 말씀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인간의 책임이 약간 숨어 있음을, 우리는 고려해야 합니다.

 

5. 참 구원 받은 성도는, 이웃을 사랑합니다.

 

요일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혼자 잘 믿는 것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는 반드시, 자기 주변의 다른 형제 자매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도와주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만 천국에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손잡고, 같이 가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 교회 공동체에 가입하게 되고,

그들과 함께 서로 격려하고,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다.

 

물론 자기 혼자 믿는 것은.. 쉬운데,

공동체에서 함께 예수 믿기는.. 쉽지 않고, 어렵지만,

 

참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다른 성도와 교제 관계를 가집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신앙으로, 서로 격려하며 교제합니다.

 

위의 5가지 내용들이.. 어렵다고요?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다시 칼빈주의적 관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저와 여러분이, 위 다섯 가지 길로 나아가도록,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소원을 두시고, 그 목적을 두시고,

우리를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가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계시니까요!

 

그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내가 따라가는 것이 순리요, 물결 흐르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결 흐르는 대로 사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물결을 거슬러 사는 것이 쉽겠습니까?

 

 

 

 

 

 

 

 

 

구원의 확신 /요일5:10-15/ 이동원목사

2014-11-29 10:49:40

 

가끔씩 만원 비행기를 타다보면 탑승 끝 무렵에 탑승하는 복도 입구에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서성거리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한 종류는 확인 받은 비행기 표를 들고 웃고 차를 마시고 대화하다가 맨 끝자락 시간이라도 여유 있는 표정으로 타는 사람들,

또 한 종류는 비행기 표는 가지고 있는데 좌석 배정을 못 받고(확인 받지 못한) 스탠 바이(stand-by)하면서 불안하게 기다리는 사람들,

 

또 한 종류는 비행기 표도 없이 혹시나 좌석이 있을까 하여 요행을 바라며 안절 부절 못하고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때 저는 교회 내에도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구원받고 구원을 확인한 확신있는 사람들,

둘째는, 구원은 받았는데 확신이 없는 사람들,

셋째는 구원도 못 받았고 확신도 없이 구원을 막연히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우리가 일생을 정리하면서 이보다 더 중요한 물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 물음은 일생을 정리하기 전에 신속하게 해결하면 할 수록 믿음 생활의 태도가 달라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해가 흘러가는데 구원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또 다시 새해를 기다리시는 분들은 안 계시는지요? 성탄은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를 출입하는 교인이면서 아직 우리 가운데 그분을 통해 구원받은 것을 알지 못하는 분들이 계신 것은 아닌지요? 도대체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알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우리의 구원을 확인해 볼수 있는 세 가지 방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확인할수 있을까요?

 

1. 구원의 주관적인 증거를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관적인 증거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로 오실 것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곧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한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래서 요한 일서5:1에서 이미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거하신 그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곧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보내신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다면 오늘 본문의 증언처럼 우리는 이미 영생을 소유한 구원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과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것은 또 어떻게 확인할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내 인생의 도상에서 내가 어느날 내 인생의 자리에 혹은 나의 마음에 예수를 나의 구주로 인격적으로 영접한 사실이 있었는가를 점검해 보시면 될 것입니다.

 

요한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집 문을 녹크하는 어떤 분을 내가 믿는다면 나는 그 믿음의 증거로 그를 내 집에 영접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만일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내 마음에 영접하셨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내 마음속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12절의 약속을 확인해 보십시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미 11절에서 사도 요한은 이이 이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안에 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영생을 소유하신 유일한신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자신안에 있던 이 생명을 인생들에게 나누어 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안에 있는 자 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이 자기 안에 없으면 영생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 내가 들고 있는 성경을 예수라 하고 볼펜을 영생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지금 이 볼펜은 성경안에 있습니다. 즉 영생은 예수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내 마음에 받아들인다면 예수만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안에 있는 영생이 내게 있는 것이지요. 반대로 예수가 내게 없으면 내게 영생이 없는 것이지요.)

 

주관적이긴 하지만 이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이제 내 안에 영생이 있다는 사실-이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다시 11절을 읽어보십시오.”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인생속에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사실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교회만 다니는 사람들을 가르쳐 흔히 명목상의 교인”(Nominal Christian)이라고 합니다.

 

가장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 교회 출석하는 교인들중 31%(한미준, Korea Gallup2004)가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고백을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 요한 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중 이런 명목상의 교인들이 다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리라(3:20)”.

 

이제 여러분이 목마른 인생을 사는 이유, 열정이 없는 인생을 사는 이유가 영생이 없어서라면 이제 네게 필요한 것은 금과 은이 아니고 영생의 주인인 내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그의 음성이 들리시는지요?

 

그러면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당신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그분에게 문을 열고 그분을 당신의 주인으로 영접하십시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 장기간 결석중인 낙심자 교우댁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꼭 만나고자 그가 피하지 못할 저녁 늦은 시간에 아파트 문을 두드렸습니다.

 

소리가 들리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반응이 없습니다. 할수 없이 메모지를 남기시고 발길을 돌이키셨다고 합니다. “다녀갑니다. 000목사-3:20” 그런데 다음주일 그 교인이 교회에 나와서 목사님 사무실에 메모지를 남겼답니다.

 

지난 밤 미안했습니다. 답례차 저도 다녀갑니다. 000교인-3:10“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그렇습니다.

두려워 말고 부끄러워도 말고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시고 이제 당신안에 영생이 있음을 확인하십시오.

 

2. 구원의 객관적인 증거를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 영접 사건이 내게 구원의 주관적 증거라면 구원의 객관적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본문 13절을 읽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여기 사도 요한은 이 요한 일서(이것-)라는 성경을 기록하는 목적의 하나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져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믿는자들에게 구원의 문서적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6:17-18에는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가지(약속과 맹세)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거짓말 하실수 없는 하나님이 약속하고 맹세하신 것이라면 얼마나 확실한 것일까요? 예수믿는 자들은 영생이 주어져 있다고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확인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어려서 부모가 너무 자주 너는 다리 밑에서 주어 왔다고 해서 중학교 다니던 시절 자기 출생에 대한 의심이 생겨 호적을 떼어 보고 비로소 의심을 버렸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6:18에는 성경을 사실(fact)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호적처럼 사실만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사실의 책을 믿으시면 우리는 의심하거나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믿는 것이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사실 아닌 것을 사실처럼 믿는 것이 미신이고, 분명한 사실을 사실대로 믿지 못하는 것이 불신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의 회의는 믿음의 근거를 사실에 두지 않고 감정에 두기 때문입니다. 좁은 외길 밤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고 하십시다.

 

이 사람의 이름을 믿음씨(Mr.Faith)라고 가정하겠습니다. 그가 만일 자기 앞에 걷는 사실씨(Mr.Fact)를 따라 걷는다면 사실은 언제나 사실이기 때문에 그는 똑 바로 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갈팡 질팡하는 감정씨(Mr.Feeling)를 따라 걷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그림 설명) ,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구주로 믿으십니까? 그분을 여러분의 구주로 초대하시고 영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보증합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은 것이고 영생이 이미 여러분안에 주어져 있다고.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이렇게 간증할 수 있으셔야 합니다. 나는 나에게 영생이 있음을 아노라고. 여기 안다는 단어는 가장 강력한 확신의 표현입니다.

 

난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아요와 나는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줄 믿습니다중 어느 표현이 더 강력한 확신을 나타내고 있는지요? 다시 한번 요일5:13을 읽으시고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3. 구원의 주관적인 체험을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 영접 사건이라는 주관적인 증거 그리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객관적인 증거외에 오늘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한가지 체험을 더 추가하여 권면합니다.

 

이 역시 주관적이긴 하지만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것으로 자신들의 구원의 확신 문제를 해결할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바로 기도응답의 체험입니다. 구원받은 것을 알고 싶으면 기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모든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전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드린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합의할 때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욕심에 근거한 것이라면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4:3)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합의하다고 확신할수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하게 기도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증언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줄을 또한 아느니라생각해 보십시오.

 

너희가 악한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 구하는 자에게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고 하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구한 기도를 외면하시겠습니까?

 

기도의 사람 프러시아 인으로 영국 브리스톨에서 사역한 죠지 뮬러는 그가 기록하고 기억할수 있는 것만해도 무려 5만번이나 기도응답을 경험했다고 간증했습니다. 5만번이나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5만번이나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할수 있단 말입니까? 5만번이나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부인할수 있겠습니까?

5만번이나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그의 자녀 그의 소유로 삼으신 것을 부인할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사실은 5만번이 아닌 단 한번의 기도응답으로도 내 인생이 바꾸어 질 수 있습니다. 저는 처음 교회 나가던 2년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기도가 너무 유치하고 기복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제가 교회만 나가고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간지 2년반 만에 정말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때 마침 친구가 선물로 준 고급우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잊어버리면 안되는데--생각하다가 기도해 볼까? 하는 맘이 들었습니다. 기도하자마자 다방구석이 생각났습니다. 달려가 보니까 우산이 거기 있었습니다. 남이 볼 때 하찮은 일이지만 제게는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기도가 터졌습니다.

 

기도의 세계가 열렸습니다. 그 다음부터 담대하게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기록을 다 아니해서 그렇지 그때부터 셀수 없는 숱한 기도의 응답이 기적처럼 제 인생을 만들어왔습니다. 우리 교회 개척의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기도의 응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기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분당에서 수지 건물로 이사할 때도, 다시 수지에서 분당 성전 건물로 백화점을 사서 이사 할 때도, 수지 성전의 짜투리 전면의 땅을 주실 때에도 기막힌 응답의 역사였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왜요? 그분이 우리의 아바, 우리는 그의 자녀 그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구원의 주님을 찬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구원의 객관적인 권위의 근거인 말씀과 우리의 구원의 주관적인 체험의 방편인 기도 응답으로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시고 이제 구원의 흔들림이 없는 확신-그 구원의 기쁨으로 남은 인생을 그리고 새로운 한해를 설계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을 이깁시다 /요일5:1-10/ 옥한흠목사

2014-11-11 20:38:59

 

요한 1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편지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빛 되신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믿음을 통해서만 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이전에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나를 연결시켜 줍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연결될 때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상수도 파이프와도 같습니다. 이 믿음의 파이프를 하나님의 생명수 샘에 연결할 때 이 믿음의 파이프를 통해서 생명수가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전선(電線)과도 같습니다. 이 믿음의 전선을 생명의 빛이신 하나님에게 연결할 때 우리의 전등에서 밝은 빛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처럼 생명이신 하나님과 나를 연결시켜 줍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가아사랴 빌립보에 가셨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얼마 안 있어서 십자가를 져야 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공생애를 결산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가셔야 할 때가 가까워 오는 것을 보시면서 함께 3년 동안이나 다니시면서 훈련시켰던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제자들은 주님의 질문을 받고 자기들이 들은 대로 여러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요한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엘리야라고 합니다. 혹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 대답을 듣고 계시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시몬 베드로가 옆에 있다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훌륭한 고백을 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나 하는 사실보다도 "예수님은 누구신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우리의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 멸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직위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같은 말인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왕,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에는 본래 왕이 따로 없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들인 사사를 통해서 직접 다스렸습니다. 그것을 신정 국가(神政國家)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주변 나라에는 왕이 있는데 이스라엘에만 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고 해서 처음으로 세운 왕이 사울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원해서 왕을 세웠지만 그들은 사울 왕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서 세워 주실 진정한 왕, 공평과 정의 그리고 완전한 질서로 통치해 줄 수 있는 참된 왕이 역사의 지평선에 나타나기를 몹시도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말에는 왕을 기다린다고 하는 고백이 먼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직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진리의 전달자, 진리의 교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고 하면서 자기 생각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참과 거짓을 분간하기 어려운 백성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에게 속으면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역사 속에 나타날 참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일은 모든 백성들의 모든 문제를 도맡아 담당하고 해결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 해결자로 등장했던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죄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어느 날 하나님이 기름 부어 주셔서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아 나타나게 될 참된 제사장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은 왕과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의 직분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있는 구세주를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은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 잘 복종하고,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기 위해서 잘 배우고, 제사장 되신 예수님 앞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그에게 모든 짐을 맡기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나의 왕, 하나님의 모든 진리로 가르치시고 온전한 진리 가운데 나를 인도하실 수 있는 선지자, 그리고 나의 죄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 그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까 평생을 교회에 적을 두고 다녔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하지 못한 사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542절을 보세요.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전도할 때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다"라고 고백했는데 여기에 기독교의 모든 메시지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110절 말씀을 보세요.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다른 형제들과 형제 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안에서 형제 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참 믿음을 가지면 주님을 사랑하는 같은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믿음을 의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는 다니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까?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합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 이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영원한 관계가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제일 순종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인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일 안 듣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파도나, 박 넝쿨, 심지어 벌레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인 요나만 순종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65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얼마나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에 괴로움을 주었으면 인간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실 정도이겠습니까?

 

도대체 인간이 어떠했는데요? 로마서 1장에 보면 인간의 타락한 모습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가 자유의지(Free will)가 아닙니까? 이 자유의지를 바로 사용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이 이상의 축복이 없는데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범죄하면 미물인 곤충이나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지시하는 대로 살면 정말 사람답게, 존귀하게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지시를 무시하게 되면 그 양심이 타락하고, 가치판단이 전도되고, 양심이 화인을 맞게 됩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부정 부패 아닙니까? 이것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자유당 때, 이승만 정부 때부터 그 당시 쓰는 말로 소위 ''(배경)이니 '와이로'(뇌물)니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점점 점점 더 해져서 이제는 '부패 불감증'이란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뇌물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십억 원을 받고도 떡 값이라고 하고 대가성 없는 정치자금이란 말로 넘어가고 맙니다. 국회에서 부패방지법을 제정한다고 합니다만 양심이 살아야 도덕이 서고, 도덕이 서야 사회 질서가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종교성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찾고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평화가 있고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면 나무나 바위, 그 밖에 우상을 섬기는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존귀하게 만드셨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될 때는 짐승보다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은 명령의 짐을 가볍게 합니다. 내가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말을 부담 없이,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기꺼이 행합니다. 사랑의 감격에는 모든 명령의 짐을 가볍게 해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창세기 2920절에 보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7년이란 세월을 봉사하는데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사랑하면 짐이 되지 않습니다. 짜증나지 아니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의 일을 하게 되면 수고는 되지만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봉사하면 그 봉사가 재미가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미국 시카고 연합 성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갔다가 그 근방에 새로 크게 부흥하는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시내에서 차로 4050분 거리에 수십만 평의 대지를 잡고 큰 교회 건물을 짓고, 큰 호수가 있고 주차장 끝이 잘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 교회의 특색은 교회당 유지를 여러 교인들이 팀을 짜서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봉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주간에 하루도 좋고, 한 나절도 좋고, 어떤 이는 두 시간, 세 시간 나와서 봉사하는데 그 얼굴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니까 보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새성전을 짓고 나가면 이와 같은 봉사팀으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려고 합니다. 새해가 되면 이 봉사팀을 모집할 터인데 여러분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봉사할 때 은혜가 넘치는 것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믿음이 승리한다고 했는데 누가 세상을 이깁니까?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태어난 경험이 없으면, 거듭난 체험이 없으면,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실이 없으면 신앙의 승리는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 중생한 사람만이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여기 '세상을 이긴다'고 했는데 이 '세상'이란 말이 23번 나옵니다. 세상이란 말은 이 지구 또는 인류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 그런 세상, 즉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자연도 사랑해야 합니다.

 

로마서 122절에 뭐랬어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사단에 의해 잘못된 영향을 받아 악으로 물든 이 지상의 모든 것, 그런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이러한 세상과 짝하게 되면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바울과 같이 전도하다가 바울 곁을 떠났는데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악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마귀에게 승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언제 이깁니까?

오늘 주신 말씀 45절을 보세요.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이겼다'하는 말과 '이겨야 한다'라는 두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이겼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리했지만 지금도 계속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고, 믿음에서 떠나도록 유도하며, 공격해 오는 사단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그의 제자 베드로에게 경고하셨던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해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사도 요한이 맨 마지막 부분에 항상 "이기는 자에게는"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기는 자입니까? 그러면 무엇으로 이깁니까? 믿음이 우리를 이기게 합니다. 믿음이란 처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부정적인 요소를 물리쳐야 합니다. 노만 빈센트 피일 박사가 재미있는 말풀이를 했습니다.

인간의 삶을 영어로 LIFE라고 하는데 앞에 있는 L자와 뒤에 있는 E자를 빼면 한가운데 IF 그러니까 '만약'이라는 글자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재를 표현하고 있는 LIFE라는 네 글자 가운데 절반이 '만약'으로 지칭되는 불확실성의 개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만약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란 단어에 '만약'이란 글자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절반은 '만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글자 풀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이 '만약'이라는 부정적인 요소를 우리의 삶에서 없애 버려야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믿음이 이렇게 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시시각각으로 도전해오는 이 세상의 세력과 싸워서 이기기를 원하십니까? 그 비결이 있습니다. 가령 사업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필요를 찾아라. 그리고 그것을 채워라"하는 말입니다. 이 창의적인 사상을 끝까지 수행하는 사람은 사업에서 성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실패를 지워 버리고 힘을 북돋우며, 두려움을 몰아내고, 의심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어떤 사람이든 성공적이고 승리적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이 말씀에는 우리가 세상을 이기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빌립보서 413절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정말 귀합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일에 대한 착상, , 동기, 그리고 그 일을 계속 밀고 나아가는 능력의 비결이 있습니다. 여기에 초능력을 발휘하는 적극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꼭 외우시기 바랍니다. 저는 누가 사인을 부탁하면 꼭 이 말씀을 써 드립니다. 세상을 이기는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이 세상을 이깁니다.

 

삼손을 보세요. 주께서 그에게 힘을 주실 때 사자를 동강이 냈고, 썩은 당나귀 뼈 하나로 천여 명의 블레셋 군대를 소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나니까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기적으로 건너고 여리고 성을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점령하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성 아이에서는 부끄러울 정도로 참패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간이란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떠나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아니한 이스라엘 군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과의 대전에서 승리했습니까? 그의 물매가 훌륭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해서 이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과는 싸우는 신령한 전쟁도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편이 되고, 주님이 내게 능력을 주시면 우리에게 닥쳐오는 어떤 마귀의 세력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37절에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마귀와 싸워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하시면 반드시 이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 이 세상을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의 능력 힘입어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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