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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에베소서 설교 모음

에베소서 1:3 - 14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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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들 /1:3-14/ 류영모 목사

2022-08-15 09:20:11

 

I. 하늘에 속한 복

 

오늘은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에베소서 1:3~14의 말씀입니다.

 

저는 에베소서를 참 좋아합니다. 에베소서엔 구원의 비밀이 숨겨져 있고 교회의 신비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라는 비행기를 타고 높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가장 신비하고 존귀한 존재가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가장 신비한 공동체가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심장 중심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슴에 교회의 신비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출렁이는 바다의 표면만 보고 그것이 바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다 속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고기들과 해산물들이 있습니다. 바다 밑엔 금은 보석 석유 등 탄광 자원들이 묻혀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조직 교회의 표면만 보고 그것이 교회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눈으로 교회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실대고 보혈의 능력이 파도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운행하고 계십니다. 무한한 영적자원이 묻혀있습니다.

 

성도의 존귀 그리고 교회의 영광이란 주제로 에베소서를 기록한 저자는 에베소서 1:1-2 간단한 인사 후 3절 이하 본문 첫 문장을 기록하는데 자그만치 3절부터 14절 열 두절을 쉼표 마침표도 없이 한 문장으로 기록합니다.

 

헬라어 단어로 202개에 달합니다. 우리말 성경엔 여러 문장으로 나뉘어져 번역이 되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은 한 문장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헬라어 문장 가운데 가장 긴 문장입니다. 그 내용은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 나를 구속하신 예수님, 인치신 성령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예수님이 구속하셨고 성령님이 인치셨으니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할렐루야

하나님 찬양 할렐루야

예수님 찬양 할렐루야

성령님 찬양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오늘 본문은 찬송으로 시작하여 찬송으로 끝이 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43:21)

 

우리를 구원하여 자녀삼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매미는 단 2주일 - 보름을 노래하기 위해 10년 내지 17년을 거름더미 땅속에서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보름동안 노래하는 것이 좋아 맴맴맴맴 세상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릅니다.

 

뇌성마비 천재시인 송명희씨는 하나님 찬양합니다한 마디를 하기 위해 두 팔을 비틀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두 발을 버티고, 배가 꿈틀거려야 하는 모습을 곁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송명희처럼 매미와 같은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 성도의 찬양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찬송 대신 원망을, 감사 대신 불평을, 기쁨 대신 공허 가운데 살아갈까요? 현대인들이 왜 이토록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삶을 사는 것일까요?

 

왜 그토록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한 얼굴로 사는 것일까요? 육신의 배가 채워지지 않아 허할땐 밥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영혼이 허하고 마음이 공허할 땐 어떻게 그 허전함을 채워야 할까요?

 

심리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마음의 상처가 많을수록, 사랑의 결핍이 심할수록 마음의 구멍이 더 크다고 합니다. 허전함을 더 크게 느끼게 되고 잘못된 집착증이 심하다는 겁니다.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 웅덩이가 클수록 상처를 쉽게 받고 쉽게 허전해하고 땅의 것들에 집착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가슴에 뚫린 구멍과 상처는 땅의 것들로 매울 수가 없습니다. 환경이 좋아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요? 그 구멍은 이 지구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이 채워질 수가 있고 메워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3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10개월이 이 땅에 살아가게 될 8090년 우리의 삶을 좌우합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이가 상처를 받으면 이 땅에 살아갈 동안 장애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게 됩니다. 10달이 100년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죽을 수도 있고, 8090년 사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짤막한 이 땅의 삶이 영원을 준비하게 됩니다.

 

 

II.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

 

첫 번째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무엇인가 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 4-6절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선택의 교리를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혼란케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 전에우리를 선택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잘 압니다. 먼저 세상 만물이 창조되고 마지막날 마지막에 사람이 창조됩니다. 그런데 어찌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단 말입니까?

 

그러나 바로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나의 구원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엔크리스토.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엔크리스토란 말이 성경에 164회 정도 나옵니다. 내가 예정된 사람인지, 선택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이 언젠가부터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란 사실이 믿어집니다. 그러면 나는 이미 선택받은 사람이란 것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나를 선택하고 구원하고 성령으로 나를 돌봐주는 하나님의 자녀된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하나님은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합니다.”

 

어떤 분이 이 말씀이 이해가 안된데요. “아들이 몇이세요?” 그랬더니 아들이 넷이래요. “그러면 자녀 넷을 사랑하는데 권사님께서는 맡아들에게 1/4 사랑, 둘째 아들에게 1/4 사랑, 셋째 딸에게 1/4 사랑, 막내 아들에게 1/4 사랑, 1/4씩 나눠서 사랑하세요?”

 

그게 아니지. 아들 하나 하나 내가 가진 모든 사랑을 쏟아서 맏아들을 사랑하고, 둘째 아들 사랑하고, 셋째를 사랑하고, 넷째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알아 듣겠데요.

 

한국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은 나를 천만분의 1로 나누어서 사랑하시는게 아닙니다.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합니다. 온 우주에 나 하나만 남아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주셨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 - 택하신 자들에게 따르는 또 다른 하늘에 신령한 복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정결하게 살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거룩하지도 않고 흠도 많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 아찔 아찔 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자리에서도 미움과 더러운 생각이 지나갑니다.

 

심지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분노와 상처가 꿈틀거립니다. 입을 열면 험담과 부정적인 말을 뱉습니다.

 

이런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 흠이 없는이 말이 헬라어로 아모무스(amomous)라고 되어 있는데 신약성경에 8번쯤 사용된 이 말은 구약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때 예물에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랑 안에서 흠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도덕적 완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 존재가 거룩해졌고 흠이 덮여졌다는 법적인 선언입니다.

 

흠이 없다아모무스모무스”(momous)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조롱과 비난의 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내 죄를 덮어버리면 비난의 신 모무스가 두 눈을 부릅뜨고 내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의 완전한 능력, 완전한 거룩을 말합니다. 이게 영적인 복, 영원한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죄의 신 모무스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흠을 덮어 주신 궁극적 목적이 5절에 나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중에서도 최고의 복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복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다고 합니다. 이를 성경은 양자됨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어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음을 믿습니까?

 

 

III. 구속의 복

 

그러므로 두 번째 하늘에 속한 복은 예수님이 구속하셨다 입니다.

구속” - 값을 지불하고 구해준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노예 시장에서 나온 거예요.

 

한번 노예가 되어지면 노예는 자기 힘으로는 노예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누군가 부자 영감님이 값을 지불하고 내게 자유권을 주기 전까지 나는 노예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죄로부터 멸망당한 존재였습니다. 지옥의 권세로부터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가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죄를 십자가 위에서 해결하시고 우리 예수님 테텔레스 타이라고 외치셨습니다.

이 말은 시장에서 쓰여질 때는 구속 - 다 갚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가 깨진 것입니다. 이 죄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노예를 부리던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갚아버렸기 때문에 사단이 우리를 부리던 모든 권세로부터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시장적인 용어로 테텔레스 타이입니다.

 

성전의 용어로 쓰여질 때 양을 잡는데 흠과 티가 없는 양을 잡는다는 뜻입니다. 거룩하신 어린양 예수께서 우리의 속죄양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탕자가 되어 모든 것을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오는 자식에게 아버지가 옷을 갈아 입히라. 송아지를 잡아라. 금가락지 끼워라. 새 신발 신겨라. 잔치를 벌여라. 이것이 테텔레스 타이입니다.(15)

 

사람과 사람사이에 깨어진 관계가 회복된 것이 테텔레스 타이입니다. 죄는 분리를 가져옵니다. 이간을 가져옵니다. 테텔레스 타이. 이제 깨어진 모든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노예를 구속하기 위해서 값을 지불해야 되는데 이 값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받았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는 것이지요.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 그래서 구약에서는 예수님의 피 대신 짐승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지요. 주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구속하셨어요. 그분이 한번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원의 능력이 되는 거예요. 이것을 신학적으로 영단번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한번 죽었는데 영원히 효과가 있는 거예요. 한번 그분이 돌아가셨는데 영원한 생명들을 구원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게 영단번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희 딸이 어린 시절에 정말 깨물어 줄 만큼 이뻤어요. 여간 예쁜게 아니었습니다. 코를 보면 서양에서 수입해 온 코 같고, 눈을 보면 돈 많이 들인 눈처럼 보여졌어요. 한번은 청주 친구집에 갔더니 친구 목사가 제 딸이 탐이 났는지 팔라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장난으로 얼마 줄래?” 그랬더니 청주에 있는 파리를 다 잡아 주겠데요.” “, 이 사람아 청주에 있는 파리 다 잡아 준다고 내 딸을 팔 수 있나?” 그랬더니 그러면 한국에 있는 파리를 몽땅 다 잡아 주겠다고 팔래요. “한국에 있는 파리를 잡아 준다고 팔 수 있나?” 그랬더니 세계에 있는 파리, 똥파리, 쇠파리 다 잡아 줄테니 딸을 팔라는 겁니다.

 

여러분 세계에 있는 파리들 다 잡아주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만한 똥파리 쇠파리 다 잡아 준다고 제가 귀여운 딸을 팔겠습니까?

 

한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차원이 다르다세상에 파리들 다 잡아줘도 팔 수 없는 거예요. 피조물인 모든 인간을 합쳐도 창조주 하나님의 값을 치를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피조물인 모든 인간들 오고 오는 인간들을 다 구속하고도 남음이 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양으로 승부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한번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하늘을 살아가는, 하늘에 속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한방울이면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고도 넉넉히 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성령의 인치심

 

구원얻는 도리 1단계는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2단계는 예수님이 구속하셨고, 마지막 1314절 성령님이 인치셨으니. 성령님의 인치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예수님이 구속하셨고 성령님이 인치셨으니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어떤 마을에는 복음이 전해지고, 어떤 가정에는 복음이 전해지고, 어떤 나라에는 복음이 전해지는데, 어떤 나라 어떤 가정 어떤 마을에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게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복음이 너에게 전해진 것 그게 너의 복이니라. 내가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복이니라.

복음을 들었을 때에 저 말씀 내 것.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야. 성경은 나를 위해서 기록해 놓은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야.

이게 믿어진단 말이예요. 내가 똑똑해서 믿어진게 아닙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8:14-16)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11)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믿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자가 없느니라. 예수를 주로 시인할 자가 없느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마지막은 성령의 인치시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이시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도록 나를 방해하는 자가 있으니 그가 사단인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 못 가도록 자꾸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사단의 역사입니다. 예배에 가고 싶다. 말씀 듣고 싶다. 오늘 교회 가서 어떤 말씀을 내가 들을까? 설렘이 있다.

 

성령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너무 좋은 일이 많아서, 분주한 일이 많아서 말씀 듣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예배의 자리에 못 간다. 악령이 하는 것입니다. 똑똑해서 세상일이 분주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 피곤해서 말씀 듣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이 기가 막힌 작전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미워지는 것입니다. 늘 목사님이 좋고 목사님이 예쁘더니, 늙어도 뺀돌뺀돌하니 미워죽겠다. 그러면 그게 악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부교역자도 이쁜 사람이 없습니다. 저 사람은 시커멓게 생겼데. 키가 크게 생겼데. 뚱뚱하게 생겼데. 쓸데없는 것 가지고 시험 들어서 끙끙거리고 부목사들하고도 행복하게 지내지 못합니다. 그게 바로 마귀가 여러분을 유혹하게 된 것입니다.

 

이단에 빠지고 나면 그것으로 끝장난 것입니다. 귀에 설교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빨간 안경을 보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빨갛게 보입니다. 이단이 씌여주는 안경, 지옥안경을 씌어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지옥행 열차를 탄 것입니다.

 

인치심. 인을 쳤다. 도장을 찍었다는 겁니다.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들, 귀족들이 자기 재산, 말에도 불도장을 찍습니다. 소에도 양에도 전부다 불도장을 찍습니다.

 

자기 재산에 도장을 찍습니다. 이것이 인침입니다. 성령이 인을 치셨다는 것은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한다. 이는 내 자녀이다. 천국의 내 백성이다. 내 것이다. 누구도 손 못 된다는 얘기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는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을 쳤다는 것은 권위를 얘기합니다. 대통령이 다른 나라에 가서 싸인을 합니다.

대통령 물러났다고 그 싸인의 효력이 없어질까요? 대통령이 가서 싸인을 하면 대한민국 오천만 모든 국민들의 이름으로 사인한 것입니다.

한교총 싸인, 총회 싸인, 교회 싸인.

 

인을 치셨다는 얘기는 하나님이 인을 쳤기 때문에 그 누구도 손 못 댑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내가 이 세상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고 주여~ 지난 주간에 또 깨졌어요 그러고 와도 하나님이 그 구원 깨지도록 놔 두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예수가 믿어지십니까? 오늘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까? 성령이 함께 하십니까? 믿어졌으면 이제는 천사가 와서 아니라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구가 천만번 깨져도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V. 성령님의 보증

 

하나님의 선택, 예수님의 구속, 성령님의 인치심이 끝나면 마지막에 성령이 천국에 등록절차를 마쳐버립니다. 자동차를 구입하거나 집을 사면 등록절차를 마칩니다. 등기를 냅니다. 보증입니다.

 

14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것이 14절 성령님이 기업의 보증이 되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천국문에 들어설 때 마귀가 옆에 있다가 - 얘는 천국가면 안됩니다.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웃고 있지만 속은 썩었습니다. 교회 충성한 꼴을 못 봤습니다. 이 자가 천국 가면 되겠습니까? 그때 성령님이 내 곁에 계셔서 아버지 맞습니다.

 

그러나 이 자의 약함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피 흘려 모두 다 사해주셨습니다. 내가 성령의 인을 쳐서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천국의 백성입니다. 천국문이 열리면서 천군천사 나팔소리와 함께 우리가 천국문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왜 보증이 필요합니까? 천국 가는 그날까지 인간은 연약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도 약하고 너도 약합니다. 서로 불쌍히 여겨야 됩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악한 마귀의 악령들의 유혹이 그치지 않습니다. 걸핏하면 넘어집니다. 실망합니다. 실족합니다. 변덕스러운 인간을 구원이 흔들리지 않고 변덕부리지 않도록 변함없으신 성령이 보증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지난 한 주간동안 강사님들에게 이런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주세요 부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네 분의 말씀이 똑같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죽어야 된다. 이미 죽었다. 십자가 지고 사는 것이다. 십자군 정신이 아니라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야 된다.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 말씀은 차후의 문제입니다. 십자가에 본질은 예수님께서 만인간에 죄짐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치러야 될 죄값을 대속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내 죄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내 죄와 허물을 덮어서 마귀가 그 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내 죄가 옮겨진 것입니다. 흰눈보다 더 양털보다 더 깨끗하게 정결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가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게 출발이고 본질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사느냐? 이미 십자가 안에서 나도 죽었다. 십자가 지고 살아가는 것,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 손해 보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출발과 본질은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나도 죽었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오늘 우리의 승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승리를 내 것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결론예화

 

괌에 가 보셨습니까? 저도 괌에 집회를 갔다가 요꼬이 동굴이란 곳을 안내받아 갔습니다. 세계2차 세계대전이 끝이 났습니다. 일본군인 가운데 요꼬이라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괌에서 상륙했다가 혼자 산속으로 숨어 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줄 알지 못해서 땅굴을 파고 자그만치 27년간 밤에 몰래나와서 조그만 개울이 흘러갑니다. 물고기를 잡아먹습니다. 이른 새벽 밤에 풀뿌리를 뜯어 먹습니다.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습니다. 27년간.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나중에 이 사람을 발견하고 구하기 위해서 들어갔다가 안내를 합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우리가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웅크리고 사는 겁니다. 위축되어 사는 겁니다. 기죽어 살아가는 겁니다. 이미 전쟁은 끝났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보증이 되어주시고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우리의 당당한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이 날, 이 놀라운 구원의 승리가 오늘 우리 모두의 것이 이미 되었음을 선언하고 감사하는 이 시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 하나님이 다 정하셨는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 /1:3-19/ 김형익 목사

2021-05-16 08:17:59

 

지난 주일, 우리는 모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분이 나도 모세처럼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는 말하는 깊고도 친밀한 하나님과의 사귐을 경험하고 싶다고 느끼셨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칼 바르트가 하나님을 향한 불치의 향수병(incurable God-sickness)’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능은 식욕처럼 일어나 밥을 먹고 포만감을 즐기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본래의 본능을 저항하는 타락한 본능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거부하고 부담스럽게 여기는 죄성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기도하기 위해서는 늘 이 죄성과 싸워야 하고 이 싸움이 없이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최고의 즐거움으로 나아가려면 험난하고 좁은 의무의 길을 지나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과 성숙]이라는 큰 주제에서 [기도하는 신앙]이라는 소주제를 다룰 때, 우리 자신이 가진 기도에 대한 오해와 그릇된 태도를 돌아보고 교정하며 참되고 복된 은혜의 자리로 다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고백들이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6:11).”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43:4).”

 

1. 기도에 관한 질문, 질문들

 

우리가 기도에 관해서 가지는 질문들은 어린 아이같은 질문으로부터 좀더 신학적으로 표현되는 질문까지 다양하고도 많습니다. 기도가 그만큼 우리 신앙에 있어서 신비한 영역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에 관해서는 유난히 이상스러운 가르침과 경험들이 난무합니다. 관상기도나 향심기도 같은 신비주의 영성이 무분별하게 들어오고, 기도 응답에 관한 이상한 기도 신학이 만연하며, 온갖 나쁜 신학에 근거한 기도 경험들이 넘쳐납니다. 현실적으로는 소위 기도의 대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미숙하고 이기적인가 하는 질문도 나옵니다. 기도에 관한 질문과 이슈들은 정말 많습니다.

 

2. 기도한다고 상황이나 결과가 바뀌는가?

 

오늘 제가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서 주목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걸까요?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습니까? 시험보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합격합니까? 이것은 매우 와 닿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기도를 왜 하는가 하는 동기의 문제를 건드립니다. 만일 기도가 상황과 결과를 바꾼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정말 열심히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먹지 않고 금식하며, 자지 않고 철야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예배당은 밤이나 낮이나 기도하는 사람들로 붐빌 것입니다. 이런 열심은 기도가 상황과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독려하고 더 열심히 부르짖고 엎드리라고 말하는 데는 이만한 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것은 성경적인 방식입니까?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10년 전인 2007년에 미국 미니아폴리스에서 다리가 무너져 13명이 죽고 145명이 다친 적이 있습니다. 이때 미니아폴리스의 두 저명한 목회자가 낸 논평은 상이했습니다. 먼저, 존 파이퍼는 교량 붕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목적을 지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렉 보이드는 이 불행한 사고는 하나님의 주권과 무관하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런 사건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났다면 하나님은 거룩하지도 선하지도 자애로울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 괴롭고 부패한 세상에서는 다리들이 때로 붕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입장을 [개방적(열린) 유신론]이라고 부릅니다. 개방적 유신론은 하나님께서 미래의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시지 않으며, 현재의 일도 모두 주관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합니다. 이 입장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관심하시거나 불행한 일을 허락하시는 것처럼 오해하여 기도를 중단하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불행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는 이들에게 목회적 차원의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또 한 사람의 개방적 유신론자인 로저 올슨의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의 무지와 죄 때문에 때로 불행한 일이 발생하고 사악한 행위가 자행된다. 하나님이 은밀히 그런 일들을 계획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타락한 죄인들에게 좋다. 지금은 나의 뜻대로 되지 않고 너희 뜻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기도를 약화시키는가?

 

이들이 가진 잘못된 전제를 지적하겠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은 기도를 무용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사를 다 작정해 놓으셨다면, 기도가 무슨 소용이냐는 겁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가 기도해야 할 책임의 관계를 다루는 신학적 주제입니다.

 

위대한 개혁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가 기도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는 기도를 섭리의 항목 안에서 다루었습니다. 왜 기도를 그리스도인의 실천이나 성화 혹은 성령론이나 교회론의 항목 안에서 다루지 않고, 섭리의 항목에서 다루었을까요?

 

여러분 중 다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통해서 기독교 교리의 개요를 공부하였습니다. 섭리는 신론에서 다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목적을 따라 그리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영원 속에서 작정하시고 역사 속에서 창조와 섭리의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신대로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세상을 섭리로 보존하고 다스리십니다.

 

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에 우리의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바빙크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은 목적만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까지도 다 작정하셨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수단을 작정하셨다는 말에서, 우리는 기도가 차지하는 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기도의 응답을 작정에 연결하신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일반적인 숙명론 혹은 운명론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숙명론은 인간이 무슨 수를 써도 바꿀 수 없는 결정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이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는 방편으로 포함하여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따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르게 배운 그리스도인은 기도해봤자 소용없어!” 같은 말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도해봤자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기도를 당신의 목적을 가장 선하게 이루시는데 포함하셨고, 그 과정을 사용하시며, 그 과정과 목적 모두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을 유익하게 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는 기도를 섭리의 항목 아래서 다룬 것입니다.

 

가령,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은 사탄의 부추김을 받아서 욥의 재산을 공격했고 종들을 죽이고 소와 나귀 그리고 낙타들을 빼앗아 간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재산을 건드릴 권한을 주셨고 사탄은 당시 악명 높던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을 선택하였고, 그들의 악행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에게 자유가 없었을까요?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었는데, 사탄의 강제력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마귀에게 순종하여 욥의 재산을 친 것일까요? R.C.스프로울의 말입니다.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이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면, 욥의 가축이 강탈당하는 일은 일어날지라도,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났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유사한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팔려는 악한 생각으로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50:20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기서도 형들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되, 다른 수단을 통해서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기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방편으로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 하나님께서 이미 다 정해 놓으셨으니까 내가 기도해봐야 소용없어. 상황을 조금도 바꿀 수 없고, 결과도 바꿀 수 없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면서, “, 주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기도마저도 당신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는데 영광스럽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구해야 합니다.

 

, 그래도 하나님의 주권의 교리는 우리의 기도를 약화시키고 기도하려는 우리의 동기를 무력화시킨다고 말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도리어 우리의 무릎을 전능하신 아버지께 꿇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해도 소용없도록 결과를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당신의 목적 성취의 수단으로 포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예정을 확신한 바울 사도의 기도

 

20세기의 탁월한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사역에서 은퇴한 뒤에 많은 교회를 방문하면서 자신이 관찰한 바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드리는 기도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예배 시간에 드리는 기도의 내용은 아픈 사람이나 다른 희망 사항을 제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신자들은 기도할 때 더 이상 하나님의 속성이나 그분의 사역을 언급하지 않았고, 또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지도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교회의 예배 시간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기도에도 비추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 기도에는 이런 저런 희망 사항들을 언급하는 것 외에, 하나님의 속성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얼마나 언급합니까? 또 우리는 기도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을 돌립니까?

 

만일, 우리의 기도에서 이런 요소들을 발견할 수 없고, 그저 원하는 것들을 구하는 것 밖에 없다면, 도대체 우리 기도는 왜 그런 것일까요? 우리 기도는 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다르며, 왜 성경이 전반적으로 가르치는 기도와 다른 것일까요?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한 채 기도할 때 그럴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가 무시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깊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교리와 가르침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너무나 피상적으로 아는데 만족합니다.

 

정치의 문제, 연예계의 문제, 기타 사회적 이슈나 기타 관심 이슈들에 대해서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는데 반하여,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너무나 피상적 지식의 수준에 머무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기도의 가장 큰 장애물, 최고의 방해꾼 중 하나입니다. 성경의 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자연히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무시하게 되고, 거기에 남는 것은 오직 인간의 몫, 인간의 요구만 강조될 뿐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놀라운 선언을 담고 있는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정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선포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창세 전 하나님의 선택을 부인할 수 없도록 선언하는 구절입니다.

 

9,11절도 보십시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놀라운 예정 선언의 연속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믿는 사도 바울이 이 위대한 선언을 한 뒤에 바로 이어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15~19절에는 사도 바울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하나님께 사도는 기도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그렇게 분명하게 확신하는 사도 바울은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이것은 조금도 모순된 일이 아니었고,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구절의 의미를 깊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기도, 하나님의 주권을 확신했던 사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이 기도의 특징에 여러분의 주의를 끌고 싶습니다.

 

5. 사도의 기도의 특징: 감사와 찬송(11:33~36)

 

사도의 기도의 특징은 한 마디로 감사와 찬송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도가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을 수 있는 근거,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주관적인 상상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사도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15절에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했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그 정하신 뜻을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뜻이,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며(1: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며(1:5) 그리하여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기에 사도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이 되게 하셨고 그 기업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말입니다(1:11~14).

 

이 감사는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바라고 기도했던 것을 하나님께 응답해주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감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능가하고 초월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작정하신 일은 이루어질 것이며, 그 이루어주시는 바를 에베소 성도들을 통하여 보고 있기 때문에 혹은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치지 않는 감사를 돌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에서도 정확하게 같은 것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교리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가 하는 말이 로마서 11:33~36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것은 무엇보다도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기도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송영 중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슴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찬송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식하게 될 때, 가슴 깊은데서 터져나오는 기도입니다.

 

에베소서 1장이나 로마서 11장은 하나님의 주권이 결코 우리의 기도를 약화시키거나 기도의 동기를 무력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돌리는 감사와 찬송으로 더욱 온전하게 합니다.

 

6. 하나님께서 다 정하셨는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오늘은 여기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정하셨는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도를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정하셨고, 하나님의 작정은 목적과 함께, 기도라는 수단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을 바꿀 수는 없지만, 상황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 계획과 목적을 이루시는 도구로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기도는 단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을 바꾸는 용도로만 유용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말입니다(1:4).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성도가 기도해야 할 이유와 근거는 너무나 분명하고 강력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접근할 수 있고, 그 기도를 우리 자신의 간절한 기도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할 이유와 근거를 가질 뿐 아니라, 열정적으로 그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기도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할 때, 이런 복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우리 벧샬롬 교회에 깊이 그리고 널리 미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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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이 다른 이유 /1:3-/ 옥한흠 목사님

2015-05-11 22:39:29

 

구약에 약속된 복

 

신명기 28장으로 대표되는 복.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무병장수, 부귀영화, 만사형통,

 

자손번창, 머리 되고 꼬리 되지 않는 등의 여러 복들을 주신다.

 

 

신약에 약속된 복

 

구약성경에 나타났던 엄청난 복들은, 신약성경에 잘 보이지 않는다.

 

신약성경 어디를 뒤져봐도, 만사형통, 무병장수를 찾기 어렵다.

 

 

대신에, 부자 되려고 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서, 가난한 자가 복되다고 하신다.

 

(신약에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만 나오네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

 

오래 살 생각 말고, 주를 위해 언제든지 생명 바칠 각오 하라!

 

세상에서 환난, 핍박당해도 그것이 복이니까 기뻐하라....

 

 

어떻게 된 영문인지, 구약의 복이 신약에 와서 그 의미가 돌변했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킨다.

 

 

복을 보는 기준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한 마디로 답하면 하나님의 나라 때문이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팔레스틴에 지상천국을 이루고 온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세상적 왕국은 꿈꾸었지만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 없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먼저 가르치신 것은

 

회개하라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다.

 

그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복음서에 하나님의 나라110회 이상 반복되어 나온다.

 

 

 

 

이유는, 우리는 지상메시야왕국을 꿈꾸는 구약시대에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로 인해 복을 보는 기준이 바뀌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병장수가 무슨 절대적인 복이 되겠는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만사형통이 그렇게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귀영화 누린들, 세상 부귀가 그리 중요한가?

 

 

 

 

물론 무병장수, 만사형통, 부귀영화 이런 것들이 좋긴 좋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그런 것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도리어 우리 신앙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한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자칫 못 들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다.(14:17)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먹고, 마시고, 즐기고, 쌓아놓고 살고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는 것이 본질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백성들에게 진짜 복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축복, 마음의 평강,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 이런 것들이 진짜 복이다.

 

 

 

 

구약적 복은, 안 믿는 사람도 잘 받아 누리더라.

 

무병장수하는 사람들을 보라. 안 믿는 사람들도 많이 무병장수한다.

 

(어쩌면 믿는 사람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무병장수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받는 복일수도 있다는 뜻.

 

부자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안 믿는 사람도 부자 많이 된다.

 

하나님과 관계없이도 얼마든지 부자 될 수 있다.

 

 

 

 

믿음 좋은 사람도, 구약적 복을 못 받을 수 있다.

 

그 복 주면, 아마 득보다 해가 더 많다고 판단하셔서 안 주시나 보다.

 

 

 

 

대표적으로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했지만

 

구약적 복을 많이 못 받아 누린 것이 사실이다.

 

그는 헐벗고 굶주렸고 병들었다.(고전 4:11)

 

 

 

 

칼빈은 세계를 바꾼 십대 인물에 속할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의 신학이 워낙 탁월하고 성경적이어서 칼빈주의 계보가 생겼다.

 

그의 개혁신학은 장로교 및 미국 청교도 신앙과 사상의 뿌리가 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the 신학자'였다.

 

더욱이 가톨릭의 탄압에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인물이라면

 

하나님이 구약적 복을 듬뿍 부어주셔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의 전기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31세에 결혼했는데, 조건으로 오직 믿음 좋은 여자만 찾다보니

 

자식을 7명이나 둔 과부와 결혼했다. (부인 복 없었다)

 

 

 

그녀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몇 년 못 살고 죽었다.(자식 복도)

 

부인도 결혼 후 9년 만에 자식 7을 남긴 채, 먼저 소천했다.

 

그 후 그는 15년 동안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두통, 천식, 소화불량, 열병, 담석증 등 여러 질병에 시달렸다.

 

약 십년 동안 그는 위가 안 좋아서 하루 한 끼만 먹고 살았다.

 

(건강 복도 못 받았다)

 

 

 

 

그러다가 54세로 소천했는데, 생전에 그는

 

수 백 명 사람들이 수 백 년 동안 못 했던 일을 자기 혼자서 해냈다.

 

 

 

 

죽는 순간까지 그는 참 신앙인의 유언을 남겼다;

 

내 무덤에는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으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런 위대한 신앙인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구약적 복을 안 주셨다.

 

명예의 복은 주셨지만, (그것도 주로 죽은 뒤에)

 

건강의 복, 장수의 복, 가정의 복, 물질의 복- 아무 것도 안 주셨다.

 

 

 

 

그렇다면 칼빈을 보고, 우리는 복을 못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겠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장수의 복을 못 받은 사람,

 

배우자를 먼저 사별하는 슬픔을 겪은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재물의 복이 없는 사람들이여

 

나는 신앙이 형편없어서 그런지 복을 못 받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런 복은 절대복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런 차원의 복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없다고 나는 복을 못 받았다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는 복은 세 가지다.

 

 

 

제가 오랜 목회 생활을 하면서 깨닫는 것은

 

또한 오랫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는 것은

 

또한 인생을 오늘까지 살면서 경험을 통해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얻는 복이다.

 

 

 

1.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1:3)

 

다른 말로, 구원의 복, 영생의 복이다.

 

흠 없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우리 죄를 다 씻어 주시는 구속의 복,

 

성령으로 우리를 인 치셔서 하나님의 소유로 만들어주시는 복.

 

 

 

 

이것은 엄~청난 복이다.

 

이 모든 복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졌다.

 

천상의 복, 영원한 복, 절대적 복이요, 반드시 받아야 되는 복이다.

 

 

 

 

이 세상행복과 바꿀 수 없고,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는 복이다.

 

이 세상 명예와도 바꿀 수 없다.(찬송가 102)

 

구약의 모든 복을 다 끌어와서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복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대법원장이 되고나서 너무 신앙적인 발언을

 

하지 말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대법원장이니까.

 

그는 아랑곳없이 국회 청문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라고 선포했다.

 

 

 

그는 새생명축제 같은 기독교집회에도 대법원장 신분으로 담대하게

 

초청강사로 왔다. 그는 거기서 이렇게 간증을 매듭지었다;

 

만일 누가 나에게 예수님과 대법원장 자리를 놓고 어느 것을 선택

 

하겠느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주저없이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된 영생과 모든 영광은

 

세상 만사형통으로, 대법원장 자리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북한 성도들은 처절한 핍박가운데서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다.

 

아스팔트를 닦는 롤러 차 밑에 밀어 넣어 가루로 만들어 죽여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 이것을 놓치면, 아무 소용없으므로

 

그들은 담대히 핍박을 이기고 순교를 자청하는 것이다.

 

 

 

 

2. 자족하는 복

 

자기 형편을 놓고 팔자 타령하지 않고 만족하고 감사하는 복이다.

 

온 세상을 다 얻어도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다.

 

평범한 아파트에 살아도, 만족하고 자족하며 살면 행복자이다.

 

 

 

 

아무리 화려한 명예를 가지고도 불만족스럽게 사는 사람보다는

 

무명한 자기 존재를 놓고 감사하며 살면, 훨씬 복 받은 사람이다.

 

 

 

 

교회 안에도 보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자족하는 복을 많이 주신 것을 깨달았다.

 

만사형통, 부귀영화, 무병장수 잘 안 주셔도, 이 복은 주셨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감사하고 만족하는 복이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4:11)

 

배고플 때도, 배부를 때도

 

인기가 있을 때도, 인기가 떨어졌을 때도

 

몸이 건강할 때도, 몸이 약할 때도

 

어떤 형편에서도 스스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복이다.

 

이것이 보통 사람은 불가능하지만, 예수님 은혜로 가능하다.

 

 

 

 

3. 수고의 대가를 주시는 복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126:5)

 

 

 

 

이것은 하나님의 자연법칙이다. 자연법칙에는 무임승차가 없다.

 

가을은 뿌린 자에게만 축복이 된다. 열매는 고생한 자들만 거둔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되,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살아야 한다.

 

 

 

 

자족하는 복이 남용되어, 노력 없는 삶에 변명이 되어선 안 된다.

 

노력도 하지 않고, 경쟁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

 

자기 한계를 뛰어 넘는, 열심을 다하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훌륭한 정치인, 과학자, 경제인, 예술가, 목회자가 배출되야...

 

그런 위인이 되려면 남다른 노력 없이는 절대로 안 된다.

 

(자연법칙도 무시말아야...)

 

 

 

 

그런데 우리가 노력한다고 노력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수고의 대가를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누릴 수 없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127)

 

여호와는 죽이기도/살리기도, 가난하게도/부하게도

 

높이기도/낯추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삼상 2:6~7)

 

 

 

 

우리에게는, 우리가 수고한대로 30, 60, 100배로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큰 복이다.

 

 

 

 

결론 :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오벳에돔은 정성을 다해 법궤를 자기 집에 모신 결과

 

3개월 만에 큰 복을 받았다.

 

성경에 오벳 에돔 이름 뒤에는 종종 가 따라 다닌다.

 

그래서 주님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서 석 달 동안 머물렀는데,

 

그 때에 주님께서 오벳에돔과 그의 온 집안에 복을 내려 주셨다(삼하 6:11)

 

(그 외 삼하 6:12, 대상 13:14, 대상 26:5)

 

 

 

 

그러나 앞서 아비나답은 20년간 법궤를 자기 집에 모셨지만

 

전혀 복을 받지 못했다.

 

 

 

 

신약시대 우리 성도들은 우리 영에, 우리 가정에

 

법궤보다 더 생생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우리는 아비나답의 가정인가? 오벳에돔의 가정인가?

 

하나님을 귀찮은 뒷방 영감정도로 여기면서 억지로 가정예배를

 

드린다면... 아비나답처럼 아무런 복을 받지 못할 것이다.

 

텔레비전보다 못한 하나님을 섬기면서 복 받기를 기대하겠는가?

 

 

우리는 오벳 에돔처럼 하나님을 기뻐하며 섬겨야겠다.

 

그러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을!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37:4

 

 

 

 

 

 

 

 

찬미의 공동체 /1:3-6/ 이동원목사

2014-11-30 16:18:33

 

저는 에베소서를 여는 서론 부분을 읽고 있으면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의 서두를 듣는 것 같은 감상에 빠집니다. 잘 아시는대로 악성 베토벤은 남달리 고통스런 일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만성 성병환자에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폐결핵을 앓고 있던 어머니를 부모로한 극도로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17세에 어머니를 잃고 22살에는 아버지를 잃고 28살 때부터는 음악도에게는 치명적인 청각장애를 앓기 시작합니다.

 

32세에 그는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깊은 인생의 고뇌에 빠져 집 근처 오솔길을 걷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인생의 문을 녹크하는 운명의 문소리를 듣습니다.

 

그 순간 그는 이런 거친 인생의 운명을 차라리 사랑하고 노래하며 살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다다다~--/솔솔솔~-- 이 짧은음 세 개와 긴음 하나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교향곡 제 5운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에베소서는 바울사도가 전도하다가 잡힌 로마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인채로 기록한 서신입니다. 그런데 그는 13절의 이 편지의 서두를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합니다.

 

그는 그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겠다고 말할뿐 아니라 그에게서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고 기록합니다.

 

왜냐고요? 그가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지상의 고난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찬미를 강조할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과 우리에게 허락된 하늘에 속한 어마어마한 영적인 축복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이런 축복들을 상기시키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이유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이 에베소서 1장에 6절과 12,14절에서 반복됩니다. 아니 이 어마어마한 축복을 발견한 사람들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트로이라는 영화가 한국에 상륙하여 상영되고 있습니다만 1800년대 독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라는 소년이 7살 때 아버지가 성탄절 선물로 준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라는 책에서 호머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읽고 트로이라는 도시가 실제로 존재하는 도시일 것이라는 믿음을 갖습니다.

 

그의 나이 41세에 본격적으로 고고학자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그의 나이 51세되던 해 1871년 드디어 고대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할 뿐 아니라 유적 발굴의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보화들을 발견하고 세기의 부자가 됩니다.

 

그가 믿음으로 꿈꾸던 보화들을 눈으로 확인하던 순간 그는 얼마나 탄성을 발하며 감격해 했을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한 독일의 기자가 그가 부자가 된 것을 축하했을 때 그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언제나 부자였습니다. 내가 트로이에 대한 꿈과 믿음을 가지기 시작한 때부터 나는 이미 부자였으니까요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의 보화와 비교할수 없는 하늘에 속한 영적인 축복들에 대한 비전과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찬미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 공동체가 찬미하며 살아야 할 우리 위해 준비된 영적인 축복들은 무엇들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 축복들을 삼위 하나님이 베푸시는 순으로 소개합니다.

 

1. 성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부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축복은 선택’(election)양자 삼으심’(adoption)이란 두 교리적인 단어들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창세전부터 그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정하셔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래 그의 자녀가 아니었는데 은혜로 자녀가 되었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양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4-5절의 말씀입니다.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그분 보시기에 더럽고 추한 존재인가를 아시고도 우리가 마침내 거룩하고 흠이없는 자녀로 그앞에 설 것을 기대하시며 우리를 그의 자녀 삼기로 창세 이전부터 선택하시고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신문에 미혼모 자녀들에 대한 국내 입양문제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저는 미국에서 만났던 한국 아이들을 셋이나 입양했던 분의 기억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제가 미국 지구촌 교회에서 목회할 때 두세번 한국 자녀들 입양 가정들을 저희 교회에 초청하여 잔치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마침 저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분이 워싱톤 지역의 한국자녀 입양단체의 회장으로 미국 교회 목회자이셨습니다.

 

이 분은 자기자녀가 셋이나 되는 데도 한국 아이를 셋이나 입양한 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이 세 아이들이 조금씩 결함이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일부러 그런 아이들을 환영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보통 입양할 때 한국 사람들은 건강하고 잘 생긴 아이들을 데려오려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우리들 죄인되었던 자들을 그렇게 자기 자녀로 입양하지 않으셨냐고 저에게 오히려 반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와 자기 아내의 헌신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아주 작은 보답일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이 조건없는 선택과 양자됨의 은혜를 상기시키시며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하며 살아야 할 이유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6절을 읽어보십시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2. 성자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축복은 다시 구속(redemption)과 계시(revelation)라는 두 교리적인 단어들로 요약할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비밀을 계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구속이란 말은 본래 값을 치르고 다시 산다다시 사서 자유를 준다는 이중적인 뜻을 지닙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노예시장에서 사용되던 단어이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던 시절 노예를 거느리는 것은 신분의 상징이었고 당시 정복지에서 잡혀온 노예들은 고가로 거래되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한 노예를 두고 흥정을 벌려 비싼 값을 치르고 그를 산 다음 그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이제 당신은 자유인이요 부디 행복하게 사십시오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실제로 로마의 주인들 가운데 자비로운 주인들은 자신의 노예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는 일이 드물지만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속의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자 하나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와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실상 하나님 보시기에 죄로 말미암아 죄의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이땅에 오신 그분은 친히 그가 자신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피값으로 우리를 사시고 그는 우리에게 죄에서의 자유 곧 죄사함을 선언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에게 그는 이제 하늘의 비밀을 알고 사는 자가 되게 하는 축복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8-9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여러분은 누구에게 비밀을 알리십니까?

 

정말 친한 자가 아니면 안되지요? 제 비밀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제 아내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비밀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그렇게 친한 친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요한15:1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배워 알고 하늘의 뜻을 깨달아 아는 자로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이 아닙니까? 아니 이보다 더 놀라운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찌 찬양 안할 수 있겠습니까?

 

3. 성령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축복은 다시 인치심(sealing)과 보증(earnest)이라는 두 교리적 단어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1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그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인치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소유권(ownership)을 뜻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인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자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너는 내것이라”(이사야43:1)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나의 보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당신의 보배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여겨 주시고 그렇게 돌보아 주신다면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엇을 염려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우리의 기업에 성령으로 보증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성경에서 기업이란 성도들이 장차 올 세상과 이 땅에서 누리게 될 축복을 망라한 개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영접할 때 우리안에 오신 성령이 장차 우리가 누릴 모든 축복의 보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계약하면 먼저 보증금을 지불합니다. 이 보증금은 앞으로도 확실히 내겠다는 보증이요 이미 내기 시작한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확증이 아니겠습니까?

 

창세기에 보면(24) 아브람의 종이 주인 아들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러 가서 리브가를 만나자 마자 금은 패물을 꺼내어 주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이삭이 리브가에 줄것의 전부입니까? 아니지요. 그것은 장차 누릴 축복의 보증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곤고하다고 느끼십니까? 너무 황폐하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해 주십시오.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하고 마침내 거부가 된 그의 인생이 항상 부요하고 희망에 차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 목사 아버지의 가난과 실패로 그는 중학교로 그의 정식 공부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식료품 가게 점원, 외항선원등으로 전전하며 트로이를 말할때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트로이에 미친 그는 50이 되도록 사랑을 만나지 못했고 그는 뼈속까지 스미는 외로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국어인 독일어외에 7개국의 외국어에 정통할 만큼 외국어와 고고학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40이 다 되어 이제 막 잘되기 시작한 사업을 접고 본격적인 고고학 답사에 나서자 그는 또다시 미친 사람이란 사회적 낙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버티게 만든 것은 두가지 였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는 한권의 책에서 탄생한 트로이의 꿈이었습니다. 그는 이 꿈이 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릴적 부모에게 배운 기도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꿈꾸며 기도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는 그의 한 걸음 앞의 그 다음 다음 스텝을 인도하셨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신화를 현실로 바꾸는 기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발자취를 남기는 찬양 받기에 합당한 인생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우리도 이런 인생을 살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우리가 이 한권의 책-성경을 통해 하늘에 속한 축복의 부요함과 그 비전을 바라볼수 있다면 그리고 비전과 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앞에 기도할수만 있다면 우리는 진실로 노래할만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는 비전의 공동체 그 비전을 나누는 찬미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에베소서 1:1-14까지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정리해 보십시오.

 

2.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에베소서 1:12의 의미를 설명해 보십시오.

 

4. 목장 교회가 찬미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 할 일은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이보다 좋은 복이 없다 /1:3-/ 옥한흠 목사

2014-11-11 16:22:51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사랑의교회 주변에 있는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돌아오는 큰 부흥을 일으킬 수 있을까? "사랑의교회 때문에 예수 믿었습니다. 사랑의교회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하고 많은 사람들이 두 손 들어 환호하고 자랑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민 가운데 교회를 시작하고, 5년 후인 1983년도부터 대각성전도집회를 열었습니다. 지난 19년 동안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 복음을 들은 태신자 수는 30,000명을 웃돕니다. 그 가운데 17,000여명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겠다고 일어서며 카드를 제출하는 등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아름답고 귀한 일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10명 중 4명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만일 사랑의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무관심하다든지, 믿는 성도들만의 교회를 꿈꾼다면 이미 그 교회는 존재가치를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1:38) 그리고는 한평생 복음 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도 사도들과 지상교회를 향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28:19, 16:5).

 

그러므로 교회가 크다고 해서 전도에 무관심합니까? 그렇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 당장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영원한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안 믿는 영혼들을 보면서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애절한 연민의 정이 마음에 생기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병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성령이 탄식하는 심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생명인 것입니다.

 

미국에 가면 윌로우크릭교회라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미국 교회 중 가장 세계적으로 알려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상으로는 우리 교회보다는 좀더 오래됐지만, 규모상으로는 우리 교회 정도의 대형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특징은 지금까지 28년 동안 믿지 않는 이웃들을 전도해서 오늘의 교회를 이뤘다는 점으로, 아주 능력 있고 열정적인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실은 약 4,000석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약 4,500~5,000명이 앉을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미국 목사님들은 한 주에 두 번 이상 설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교회처럼 사람이 많아 5부까지 예배를 드리는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무조건 예배당으로 들어와 예배를 드려야 하므로 비디오실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따라서 4,000석 되는 예배당이 모자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고민 끝에 얼마 전 그 교회의 하이벨스 목사님은 옆에 있는 땅에 7,000석 교회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기공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마침 그 자리에 남가주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도 참석을 했었는데,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만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교회를 우리가 수천 억불을 들여서 짓기로 했는데, 이를 통해 우리 지역에 아직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고, 그들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하면서 그 목사님이 눈시울을 적시더라는 것입니다.

 

수천억 불에 이르는 막대한 돈을 투자하더라도 한 영혼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그 지역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꿀 수만 있다면, 방황하는 심령들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거듭나며 새 삶을 시작하는 능력이 나타날 수만 있다면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참 필요한 자세입니다. 그만큼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가장 우선해야 됩니다.

 

이제 대각성전도집회를 약 1달 반 남겨 놓고 있습니다. 이 기간은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확신한다면 아직도 구원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빚진 심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몇 가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이 좋아야 합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내가 안 좋은 것을 어떻게 남에게 권할 수 있습니까?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어도 내 입에 맞고 좋다고 생각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식당을 소개하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믿고 발견한 이 예수가 너무나 좋아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나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믿고 나서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돈에 사족을 못쓰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만큼 수전노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를 믿자 구원 받았다는 것이 너무나 좋아 돈에서 마음이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있는 돈을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막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희한한 일이 교회 안에 일어났습니다. 돈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돈에서 마음이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보고 싶어서 날마다 모이는가 하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행복한 모습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지켜보았습니다. 어제의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서부터 그들의 표정, , 삶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한마디로 너무나 행복한 사람들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사도행전 247절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는 말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칭송을 받았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 사람 하루하루 지겨워서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보이더니, 예수 믿고 나서 저렇게 밝고 행복한 사람이 되었네. 뭐가 있기는 있나 봐.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좋은가?" 하고 말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 이어서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도 한번 믿어봅시다." 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만 하면 "그래요. 한번 믿어볼게요. 당신처럼 그렇게 행복할 수 있다면 나도 믿어볼게요." 하고 교회로 들어오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표정은 밝아야 합니다.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행복해야 합니다. 조금 가난하고, 성공하지 못해도, 질병으로 고생을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보다 얼굴이 밝아야 합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우리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의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나가는 모든 성도들의 표정이 마치 천국에 들어갔다가 나가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길 건너편 술집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술 먹고 기분 좋아하는 우리보다 더 행복해 보이네."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을 그들이 귀담아 듣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구원의 축복을 얼마나 기뻐하고 감격해 하는지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자기가 3년 동안 애써서 개척한 에베소 교인들을 마음에 두고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회를 얻어 그들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 앉아서 펜을 들고 글을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가 얼마나 기가 막힌 복인가를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찬송하리로다.' 이 말은 '하나님이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좋은 복을 우리에게 주시다니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말한 후 이 복들이 어떤 복인지를 단순에 써 내려간 것입니다.

 

가슴에서 샘이 터져 나오듯 너무 흥분해서 정신없이 써내려 갔습니다. 그래서 3절부터 14절까지 한 문장으로 썼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번역 성경에서는 알기 쉽게 몇 절로 나뉘어 있지만 원문에는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너무 흥분해서 막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하늘에 속한 복이요. 신령한 복이요.'이라는 두 마디 말로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하늘에 속한 복이란 말 그대로 땅의 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땅에 살면서 얼마 동안 손에 쥐고 누리는 복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구원 받은 백성만 누릴 수 있는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이 얼마나 기가 막힌 지 성경에 보면 짤막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을 따라 산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하얀 옷을 입은 천사처럼 그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나라에 있어야 될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 내려와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하늘이 잠깐 제자들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늘의 문이 잠깐 열린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은 하늘의 그 황홀한 장면을 잠깐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있었습니다.

 

"주님, 여기가 좋습니다. 내려가지 맙시다. 오두막을 짓고 살아도 여기가 좋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주님이 이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구원 받았다'는 말은 '하늘에 속한 복을 얻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신령한 복'이란 말 그대로 육적인 복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44절 말씀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신령한 몸' 하면 우리는 육의 몸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으로 누리는 복이 아닙니다. 건강, 장수, 쾌락, 성공과 같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명성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 몸을 입고 영원히 즐길 수 있는 복을 말합니다.

 

바울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에 대해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에서 좀더 세밀하게 3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신분과 죄 사함 받는 축복, 마지막으로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토록 누릴 기업의 영광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이 이것을 써 내려가면서 흥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잠시 바울을 지키는 간수의 입장에 서 봅시다. 로마 감옥에서는 죄수들에게 간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죄질이 나쁜 죄수에게는 간수를 1:1로 붙여놓는다고 합니다. 또 죄수의 손에 쇠고랑을 채우고, 그 쇠고랑을 간수가 차서 감금하는 방식이 당시 로마 감옥의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바울을 그렇게 까지 감금하진 않았다 해도 그를 감시한 간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속으로 '불쌍한 사람, 어쩌다가 저 꼴이 되서 감옥에 들어왔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운명을 알 수 없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평생 그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재판 받은 후 사형장에 끌려가서 죽임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실로 어떤 운명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여야 정상인데, 오히려 펜을 들고 '찬송하리로다.'라고 편지를 쓰는 그의 표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쩌면 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그 눈에 눈물이 흘렀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글을 쓰다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하나님,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큰 소리로 외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를 간수가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무엇이 저 사람으로 하여금 저렇게 행복하게 만들까? 무엇이 저 사람의 얼굴을 평안하게 만들까? 나에게 없는 것이 어떻게 저 사람에게 있을까?' 이런 이유로 바울 곁에 접근했던 감옥의 간수들이 예수를 믿고 많이 돌아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행복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안 믿는 사람에게 예수를 이야기할 때 그들의 마음을 끌 수 있습니다. 너무나 좋은 것이 예수 믿는 것 아닙니까? 구원 받은 것 아닙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겠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도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은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 좋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교인들은 핍박으로 인해 마치 북한에 있는 성도들처럼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가족과도 흩어진 채 갑바도기아 같은 곳에서 토굴을 파고 들어가 살면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전서에 보면 그들이 날마다 기뻐했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찾아와 도리어 질문하곤 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기뻐합니까? 당신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만큼 그들은 달랐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이런 큰 기쁨과 감격이 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평생의 꿈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복을 받아서 건강하고, 장수하고, 부자가 되고, 자녀들이 번성하며, 명예와 권력을 누리게 되는 축복을 소유하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구약 전체를 보면 모든 초점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 요르단, 이스라엘, 시리아가 있는 팔레스타인에 들어가기 위해 예수 믿는 사람 있습니까? 그 땅에 들어가서 장수하고 건강하고 재산과 복을 누리기 위해 예수 잘 믿는 사람 있습니까? 떡 반죽이 복을 받고, 광주리가 복을 받고, 들판에 나가도 복을 받고, 집에 들어와도 복을 받는 등 그 땅에 들어가서 누릴 모든 복을 다 얻기 위해 예수 믿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내용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 다시 말해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하나의 예비적인 시청각교육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건강하기 위해서 예수 믿고, 오래 살고 싶어서 신앙생활을 잘 한다면 어이없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건강하고 싶으면 안 믿는 사람들 세계에 가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 장수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수백만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던 스탈린도 74세까지 살았습니다.

 

알다시피 김일성이나 모택동도 80세 이상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1호라 할 수 있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도 88세까지 살았습니다. 20세기 지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반 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많은 젊은이들을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던 버틀란드 럿셀도 98세까지 살았습니다.

 

또한 히틀러에게 매료되어 나치 정권을 미화시키는 영화를 제작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유혹했던 여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역시 금년에 100세입니다. 지금도 건강한 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일찍 세상을 떠나야 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오래 살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하나님을 모르고 거드름을 피우며 사는 재벌들에게 배우는 것이 낫습니다.

 

요즘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어느 부부를 아실 것입니다. 남편은 변호사요, 아내는 의사인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부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버는지 우리는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부부가 한달 수입을 70만원으로 신고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세금을 포탈하여 돈을 모아서는 재건축 아파트 17채를 전부 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전세를 얻으려는 돈 없는 서민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올려서 착취하고 자기의 호주머니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책임이나 이웃을 배려하는 양심, 자손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책임이 있어야 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돈을 모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돈을 모으려면 그런 사람들에게 배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다니면서 항상 생각은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을 가있어서 건강하고, 장수하고, 돈 벌고, 자식 잘 되는 것만 기도한다면 하나님도 머리가 아플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받는 복을 겨냥하여 기독교를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난 100년 동안 기독교에 큰 해를 끼친 지성인 중 한 사람인 심리학자 프로이드의 말이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는 소원성취다."라면서 빈정거렸습니다. 또한 "기독교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고안해 낸 하나의 환상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이렇게 천박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그런 사례가 많습니다. 외국에서 발표한 의학연구 결과에 의하면, 교회를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신앙에 따라 일관성 있고 경건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훨씬 잘 산다고 합니다. 그들의 자손들도 잘 됩니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에 살았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가 그것입니다. 그는 미국의 위대한 철학자요, 신학자요, 목사요, 부흥사였습니다. 그의 부인 사라는 자녀를 11명이나 키웠는데, 이로써 자손들이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00여년 지난 1900년도에 학자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손들을 분석하여 놀라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의 후손 1,400명 가운데 대학총장이 13, 교수가 65, 변호사가 100, 판사가 30, 의사가 66, 부통령, 지사 등의 고급 공무원이 80명이나 되어 총 30%가 넘는 사람들이 사회와 국가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경건한 가정의 자녀들과 후손들은 잘 됩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해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잘 믿으면 건강의 축복도 받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치고 알코올 중독자가 있습니까? 믿음 생활을 잘 하는 사람치고 날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골초를 봤습니까? 믿음 좋은 사람치고 마약에 손대는 사람을 봤습니까? 믿음 좋은 사람치고 여자들 뒤를 따라다니며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을 봤습니까? 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건강이 좋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연구 결과를 보면 동맥경화증으로 죽을 수 있는 확률을 비교해 보면 안 믿는 사람이 10명 죽을 때, 믿는 사람은 6명 죽는다고 합니다. 폐기종으로 죽을 수 있는 확률은 안 믿는 사람이 10명 죽을 때, 우리는 약 5명 죽는다고 합니다. 또한 간경화로 죽을 수 있는 확률은 안 믿는 사람이 10명 죽을 때, 우리는 2, 3명 죽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건강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잘 믿으면 결혼생활도 훨씬 행복합니다. 어떤 여론조사에서 "만일 당신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살고 있는 남편 또는 아내와 다시 결혼하겠는가?"라고 질문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결혼하겠다고 대답한 사람이 안 믿는 사람보다 믿는 사람이 2배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믿는 사람의 가정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적인 것, 세상적인 것도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정말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짜 복은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복을 성경에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육적인 복들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복들입니다. 어쩌다가 받을 수 있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약속한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바울이 너무나 좋서 소리쳤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얻은 구원입니다. 이 복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에 속한 육적인 복을 우리에게 약속하시지 않았을까요? 한마디로 허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을 들어서 세상적이고 육적인 복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폭로하셨습니다.

 

알다시피 솔로몬은 이 지구상에 태어난 사람 중 가장 부귀영화를 많이 누린 사람입니다. 모든 지혜자들을 능가하는 뛰어난 지혜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스스로 한번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고 고백합니다. "내 눈으로 보아 좋은 것은 다 내가 소유하리라. 내 마음에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해보리라. 그래서 무엇이 인생의 즐거움인지, 무엇이 인생의 쾌락인지 내가 알아보리라." 그리고는 자기가 마음에 원하는 것은 다 했습니다. 심지어 아내도 300, 후궁까지 합하면 1,000명의 이르는 미인들을 거느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2:11) 바람을 한번 잡아 보려 하십시오. 잡는 순간 빠져나가 버립니다. 순간적인 쾌락, 명성, 부요, 모든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을 다 지나고 보니 마치 바람 잡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상당히 지혜로운 것 같았는데, 사실은 조금 어리석습니다. 경험하기 전에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다 해 놓고 나서 알았다고 합니다. 사실 다 해보고 나서 그 헛됨을 알게 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을 보면 인생이, 또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복들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가치한 것인가를 깨닫기가 너무 어려운 것을 봅니다. 10대와 20대에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며 인생을 삽니다. 30, 40대가 되면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직 경력을 쌓고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데만 급급합니다. 50대가 되어서도 굽이쳐 흘러가는 세월의 급류소리를 듣지 못한 채 그 때를 넘겨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60대가 넘어갑니다. 머리에 흰 서리가 앉고 얼굴에 주름이 패이고 뱃살이 두터워지고 숨이 가빠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 하는 말이 자꾸 튀어 나오는 그 때가 되면 비로소 ', 인생이라는 것이 별거 아니구나.'를 깨닫는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그 후에야 깨닫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늦게 깨달았든 빨리 깨달았든 간에 인생의 진면목, 곧 세상에 있는 육적인 것의 실체를 보기 시작하면 허무함이 가슴을 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똑하고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아주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성공적인 인물로 모든 것을 다 손에 쥐고 누려본 사람입니다. 196172일 주일 아침, 그는 아이다 호에 있는 자택 로비에 앉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좋아하는 말, '무로부터 무에 이르는 짧은 날의 여행이 주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평소 그가 사용하던 총을 들고 나와 탄환을 놓고는 개머리판을 바닥에 고이고, 총구를 입안에 넣어 방아쇠를 당겨버렸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손에 쥐고 누렸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인생의 끝을 낼 정도로 지루해서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저는 성경을 읽거나 기도로 묵상하다가, 또는 조용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구원을 값없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저절로 소리가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저도 모르게 너무나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나도 모르게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감격이 막 치밀어 오릅니다. 돈이나 명예, 오래 사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어떤 세상의 것도 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이 구원,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주셨다는 것만 생각하면 그저 황홀해집니다.

 

우리가 이런 감격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야 얼굴이 달라지고 세상 사람보다 행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 믿으세요." 하는 말 한 마디가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감격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 감격을 가지고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좋은 복이기에 저는 사도 바울처럼 자주 기도합니다. 17절 이하에 바울이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좀더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이여, 나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이 주신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이여, 하나님나라에서 우리가 누릴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가를 좀 더 가까이 가서 볼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이여,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가를 좀 더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는 이 좋은 복을 주신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것입니다. 더 가까이 가서 그 복을 들여다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는 것만큼 더 행복한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무한 세상의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영원한 것을 향해 남은 생을 투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무한 것에 매달려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내가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려면 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은혜를 내 마음에 간직해야 됩니다. 이런 복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당당하게 나아가서 "예수 믿으세요." 하고 말할 수 있는 내면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을 회복하는 아름다운 한 주간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감사합니다. 아무리 쌓고 즐기고 과시를 해도 결국은 바람을 잡는 것 같은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오히려 약속하지 않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새 몸으로 누릴 수 있는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약속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귀한 복을 우리가 지금 손에 쥐고 있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마음에 이 귀한 축복을 간직하고 세상을 살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옵소서. 이 복이 얼마나 놀랍고 황홀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옵소서. 우리의 감정을 풀어주시옵소서. 우리의 어두운 눈을 주님께서 밝혀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행복한 얼굴로 우리 주변에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이번 대각성전도집회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영의 눈이 뜨여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1:15-23/ 유기성 목사

2016-08-10 11:27:44

 

한 청년과 상담을 하는데, 결혼할 자매가 교회를 다녀야 한다고 해서 교회는 왔지만 하나님이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답답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로 들리지도 않으니 억지로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청년에게 하나님을 호기심으로 알려 하지 말고 갈급함으로 알려고 할 때 믿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하나님은 안 믿어지는데 교회는 다니시는 분이 혹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겠다는 사람은 하나님만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죄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때가 어느 때인지 모릅니다. 살기는 살아도 지금이 어느 때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다 모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영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영 안이 열리지 않아서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인 것과 관련된 것은 다 모르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내 마음의 눈을 열어 보여주시면 깜짝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릐 세계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눈이 뜨이지 않으면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주셔도 전혀 모릅니다.

 

마태복음 1616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그 때 예수님께서 즉각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의 영을 주어서 알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그 순간에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영안이 열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더욱 영안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17절에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서 마음의 눈을 밝히사부르심의 소망과 성도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눈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가져야 할 눈은 마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영 안이 열리지 않으면 좋은 눈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영화 [낮은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37년 동안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아버님이 목사님이셨는데도 어릴 때 자라면서 교회 안에 되어지는 일들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가 있고, 하나님을 부정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마음을 정하고는 마음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열심히살아서 성공해 보려고 직장 생활, 사업도 하고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37살에 그만 시력을 잃고 맹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도 떠난 버린 뒤 절망하여 남 도움 받아서 이렇게 비참하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다고 자살을 하려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요한아 요한아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아니 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여호수아 1:5-6)”그 순간 37년 동안 하나님을 부인한 죄를 회개하였습니다.‘하나님이 계시구나.’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영의 눈은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간증하기를저는 장님이 되고 수지 맞았습니다. 눈으로 보는 37년 보다 앞 못 보는 7년이 오히려 행복하고 보람이 있습니다. 온 천하를 다 가져도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만족과 기쁨과 감사가 없기에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 다 잃어도 하나님을 찾은 후 감사가 있기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영 안이 열리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시구나.’ 그러나 하나님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때가 되면 누구나 다 하나님을 압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사람도 죽고 나면 다 압니다. ‘하나님이 계시구나!’ 그런데 문제는 지옥에 가서 알면 무엇하느냐 말입니다. 지옥에 가서 하나님이 계시구나.’ 알면 더 원통할 뿐입니다.

 

성경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그 부자가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옥의 고통에서 그는 더 이상 건짐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알아도 하나님과 내가 사랑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야 진짜 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우들에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므로 하나님도 알게 하시고 부르심의 소망도, 성도들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도 알게 하시고 그리고 성도들 안에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시다는 것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영안이 열리고 나면 하나님이 계시구나!’ 하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불러주시고, 나에게 하나님 나라의 엄청난 영광을 물려받도록 기업의 복을 주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내 능력이 되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도에게 주신 너무나 놀라운 복들을 다 깨닫게 됩니다. 성도의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풍성한 영광, 성도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능력에 대하여 알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만 알면 무엇합니까? 죽고 나면 누구나 다 알게 됩니다. 그러나 지옥에 가서 알게 되면 원통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도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된 것을 알아야 복된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소망이요 성도의 기업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유명한 주석가 메튜 헨리의 아버지 필립 헨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평민이었습니다. 그가 신분이 높은 여인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높은 신분에 속하는 그녀의 부모는 딸에게 충고하면서 이 사람 필립 헨리는 어디 출신이냐?”라고 물어보았습니다. 딸은 불후의 명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 몰라요. 그러나 제가 아는 확실한 사실은,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우리의 미래는 황홀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영안이 열려서 이것을 알게 되면 삶이 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은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시던 그 분이십니다.

 

영 안이 열리면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셔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셔서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을 가지게 하셨고,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분이십니다.

 

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런 놀라운 축복을 알고 나면 삶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고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아직 영 안이 안 열려서 이런 축복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짜증나는 일도 많고 좌절하는 일도 많고 원망 불평도 많게 사는 것입니다. 진짜를 못 보니까. 정말 받은 엄청난 복을 보지 못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로 인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도들 사이에 사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너무너무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말이니까.

 

여러분, 영안이 열려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복을 은혜를 알고 나면 여러분도 다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15-16절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믿음과 사랑, 이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영 안이 열리면 이처럼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믿음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믿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것입니다. 이 말은 두려움이 사라졌다, 염려가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고, 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어있고,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셨으니 도대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며 염려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말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니 마음이 평안하고 또 이것이 믿어지니 어떤 처지에서도 기쁜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마음이 평안하다, 기쁘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까? 영 안이 열려 하나님을 알게 되고 소망이 생기고 성령의 능력을 얻게 될 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정말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누리는 복입니다.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진짜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러한 삶이 믿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깨닫고 보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앞으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엄청난 복을 알고 나니까 지금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또는 전도하는 것 때문에 고난 당한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엄청난 믿음이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는 것은 또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람이 완전히 바뀌는 것 중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소망을 갖게 되고 성령의 능력을 알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었다면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사랑하지 못한다면 아직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가장 놀라운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용서하려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되는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내게 오셔서 내 마음의 눈이 밝히 열려 하나님을 알고 내가 받은 복, 은혜를 알고 내 인생의 마지막을 알고, 내 안에 오신 성령의 능력을 알고 나면 정말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살게 됩니다.

 

어제 6층 예배실에서 일본 전도 찬양예배가 있었습니다. 그 집회에서 캐나다 밴쿠버에서 온 한 일본 청년이 간증을 하였습니다. 캐나다에 유학을 와서 정말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이었답니다.

 

일본에서 살면서 좋아한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말하지도 못하였답니다. 술로 도박으로 기분풀이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긴 했지만,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였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누가 나를 사랑하여 줄 것인가? 믿어지지 않았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나와 예수님 안에서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신학생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정말 예수 믿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진짜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살지만, 사실은 혼자서 외롭게 고독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고 줄 줄도 모르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죄인인 나를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것이 정말 깨달아지고 나면 사랑을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마음의 눈이 열릴 때 영안이 열릴 때 우리 가운데 일어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 오늘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지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사랑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우들에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기도했는데 이것은 곧 그대로 우리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영국의 위대한 정치인 윌리암 윌버퍼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국회의원으로서, 영국의 노예폐지 운동을 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예 제도가 영국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윌리엄 윌버퍼스가 국회의원으로서 노예제도 폐지를 강하게 주장하면서 결국은 그가 세상 떠나기 바로 직전에 영국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게 됩니다. 그의 친구인 윌리암 핏트는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습니다. 정치적인 능력도 학문적인 자질도 더 탁월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윌버퍼스는 수상이자 친구인 핏트와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설교자는 당시 유명한 설교자인 리챠드 세실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날 윌버퍼스는 그토록 성령 충만한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고 여겨질 정도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친구인 핏트는 설교가 끝난 후 친구 윌버포스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오늘 설교 내용이 무엇이지?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그 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네.” 윌리암 핏트는 하나님의 진리가 전혀 이해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의 눈이 성령에 의하여 열려지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똑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영안이 열리는 것이 열쇠입니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하나님이 은혜를 적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세상의 영을 가지고 살면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오늘 정말 여러분 마음 안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갈급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중에 목사님, 저는 오늘 목사님이 설교하신 그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지 내가 정말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는지, 내게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졌는지, 내 안에 정말 성령님이 오셨는지, 제가 정말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그런 분이 계십니까?

 

아직까지 답을 얻지 못해서 답답해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에 대해서 갈급하고 여러분이 부름받은 것, 여러분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진 것,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을 진짜 여러분이 알고 싶다면 이미 성령님이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았는데 그런 갈급함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모르고 어떻게 가지고 싶어하겠습니까? 그게 좋다고 느껴지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영 안이 열리지 않아서 안타까우신 분이 계십니까? 정말 안타까우십니까?

 

그 갈급함이 사실이라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갈급함은 그 자체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알지 못하는데 갈급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진짜 정말 하나님의 은혜의 눈이 뜨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눈을 뜨게 되어있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약속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인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혈루병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 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감히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하였지만 옷 자락만 만져도 나음을 얻으리라고 믿는 갈급함으로 치유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갈급하면 반드시 응답받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고3 때 예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정말 제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고 싶은 갈급함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35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눈을 놀랍게 열어주셨습니다. 그 갈급함이 주님을 알게 해주시고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정말 갈급함이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복을 받은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안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적 갈급함이 정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기를 싫어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1:28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여러분이 마음에 진짜 주님을 원하시는지 아니면 솔직히 하나님이 부담스러운지 여러분이 대답하셔야 됩니다. 갈급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대답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진짜 내 마음에 오시고 내 주심이시고 내 왕이 되시는 것을 내가 정말 원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 마음 속에 예수님에 대한 갈급함이 생겨 예수님이 정말 내 안에 계실까?’ 그것을 정말 알고 싶었지만, 너무나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신학교 1학년 때,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고 얼마나 죄책감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괴로워하면서 회개하며 기도했지만, 다시는 이런 영화를 안 보겠다고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냥 괴로워만 하다가 끝났습니다. 솔직히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정말 마음에 모시고 이제는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은 돌아보지도 않고 오직 예수님 기뻐하시는 삶만 산다는 것이 제게는 부담스럽게 여겨졌습니다.

 

그것이 제 갈급함의 실체였습니다. 그러니 그 때는 예수님을 그렇게 밖에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예수님을 향한 제 마음의 수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알고 싶어하면서도 항상 예수님만 바라보며 사는 것은 솔직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아직 갈급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 저에게 예수님을 향한 진정한 갈급함을 갖게 하셨고, 저는 예수님을 아는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 주님께 제게 정말 예수님 한 분만 원하느냐? 예수님이 진짜 주님 되는 것을 네가 원하느냐? 계속해서 제게 도전해오는 것입니다. 제가 그때 주님 앞에 그렇다고 결단할 때마다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주님을 아는 눈을 그때마다 열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계심을 알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갈급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징말 살아계시는 것을 모르고는 나 죽을 것 같아.’ 이런 갈급함이 있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이 그 눈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마음 어디에 모시고 계십니까? 말씀 한 마디 못하시고 귀먹은 채 우두커니 계신 분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 안에서 어떻게 계세요?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주님이고 왕이시라면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예수 믿는 것이고, 진정 우리가 사는 길이요, 구원의 길이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을 아는 눈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진짜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때가 예수님을 진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의 왕이시다.’ 이제는 내 마음대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시니까. 그리고 내 인생은 완전히 예수님의 손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렇게 결단하고 예수님을 믿으실 때부터 여러분의 인생에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비로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구원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만 사는 것이 아니고 온 가족도 다 살리고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다 살려내는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 되심에 열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왕 되심을 정말 원하고 마음이 정말 갈급하면 다 눈이 열리게 되어있습니다. 놀라운 삶의 시작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예배드리지만, 정말 하나님을 경배하십니까? 하나님도 그렇게 보실까요? 정말 여러분들은 하나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배 드리는 것 자체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은 그냥 예배 시간에 앉아있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 드릴 때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를 드리면 우리 인생은 바뀝니다. 하나님은 진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는 지를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우리 삶은 반드시 변화되고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받게 됩니다. 성찬식을 호기심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성찬식은 호기심이 아니라 갈급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오늘 성찬을 하는데 무슨 은혜가 있을까?” 이런 태도는 호기심일 뿐입니다. 그 사람은 그저 떡과 포도즙을 먹고 마시는 형식적인 성찬식만 하고 맙니다.성찬식을 해도 끝나고 난 다음에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 본인이 성찬식을 그저 호기심 정도로 생각하고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워낙 믿음이 없으니 보지 않고는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찬을 베풀면서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눈과 눈으로 만날 때까지 이 떡이 내 살이고 이 포도즙이 내 피라.’ 눈으로 보고 그렇게 우리 주님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 성찬입니다.

 

예수님 앞에 서는 그 믿음 가지고 여러분이 성찬을 받으시면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은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서 무엇을 하지요? 불신앙 불순종 죄의 종노릇하던 여러분을 주님이 보혈로 다시 씻어주시고 예수님과 우리가 다시 하나 되는 은혜를 다시 주시고, 주님의 생명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우리를 묶고 있었던 모든 어두움의 권세는 다 풀어져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다시 시작하는 복을 받습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을까요?

 

내 마음이 진짜 갈급하면 성찬은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을 정말 무서운 저주와 같은 어둠의 권세에서 풀고, 질병에서 건지고, 여러분의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복된 시간이 됩니다. 주님이 눈을 열어주십니다.

 

나의 모든 불신앙, 불순종, 다 회개하고 예수님과 하나 되었음을 믿고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시간이 성찬입니다. 그 때 보혈로 정결케 하시며 예수님과 한 몸 되는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끝없는 욕심과 허영과 세상적 욕망에 사로잡혀 우리 마음이 어두워진 지 오래됐습니다. 주여, 우리 눈을 밝히시고 계시의 영을 주시사 우리 앞에 있는 소망도 알고, 우리 앞에 있는 기업도 알고, 내가 가고 있는 운명의 길을 바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계시의 영을 주시사 주의 음성을 조용히 들을 수 있게 하시며 바로 응답하며 늘 승리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1:3-14

2016-08-10 11:21:48

 

예수를 믿었다면 어떤 복을 받았는지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예수 믿고 무슨 복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정확하게 대답을 하시는 분이 드뭅니다. 자기가 어떤 복을 받았는지를 또 어떤 복을 받게 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도 예수 믿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는 성도가 많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 채 부모님 때문에 예수 믿었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이 언뜻 마음에 와 닿지 않을 것이고 내용 파악도 힘들 것입니다. 읽다가 주무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우리와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리고 쓴 책이 에베소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3절부터 14절까지 사실은 한 문장입니다. 우리나라 번역 성경으로는 문단을 나누었지만, 원문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라고 시작돼서 말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14절까지 계속 갑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 찬송합니다.”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서 고백을 하고 감사를 드리면서 14절까지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 또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라고 끝납니다.

 

원문에 보면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 하고 시작된 문장이 14절까지 한 문장입니다. 읽기도 숨이 찹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너무나 감격에 벅차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찬송이 터지니 거침없이 쉬지 않고 써내려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가기도 숨이 가쁠 정도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마 에베소서 13절부터 14절까지를 읽으시면 잠이 오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잠이 온다더니 수면제가 맞구나.’ 무슨 말인지 잘 따라가지지도 않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예수님 안에서 주신 복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면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차디찬 로마 감옥에서 썼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정말 놀랍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감격스러워서, 무엇이 그렇게 놀랍길래 그가 하나님 앞에 찬송을 올려드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우리 모두가 다 누리는 복인데 그 비밀의 말씀을 오늘 하나 하나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너무나 불행하게 여겨야 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가슴 벅찬 감격에 살 수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 누구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를 믿었다면 어떤 복을 받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의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에서는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택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피흘려 주셔서 모든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13절에 보면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으면 받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니고,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복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자녀 삼으신 것,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주셔서 속죄함 받은 것,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오신 것. 여러분이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서

 

예수 믿고 도대체 무슨 복을 받았느냐?” 하는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이 대답하실 정답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 가지를 대답하실 수 있다면 정답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복이 깨달아지고 누려지게 하면서 여러분은 평생 찬송하면서 사는 사람이 됩니다. 정말 감사만 하면서 사는 사람이 됩니다.

 

정말 감격스러운 것이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형편으로 오셨든지 간에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면 예수님 앞으로 올 자가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나님이 여러분이 알든지 모르든지 여러분을 택하여 주목하시고 주님께로 계속 부르시는 것입니다.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시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엇을 보고 택하셨을까? 내가 무슨 택할만한 조건이 있길래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는 것이지? 잘 믿어지지 않으시는 분. 하나님이 무슨 기준으로 여러분을 택하셨는지를 또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택하셨습니까? 고린도전서 127-29절에 보면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고전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안심이 되십니까? ‘하나님이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을 택하면 나는 자격이 없는데, 깨끗한 사람, 성실한 사람 이런 사람 택하면 나는 아닐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마음이 불안해지지 않아요? 우리가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자이기에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이 말씀을 믿을 때 모든 두려움, 염려, 열등감이 다 사라집니다.

 

지금 한국은 고아 수출국으로 유명합니다. 우리 땅에서 태어난 우리 핏줄인데도 많은 아이들이 외국으로 입양을 나갑니다. 그런데 입양하는 가정들을 보면 참 대단한 것이 아이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리고 또 건강한 아이, 똑똑해 보이는 아이를 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부러 장애인 아이들, 뇌성마비 아이들을 입양하는 가정도 많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일부러 그렇게 약한 아이,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택하여 가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약한 자를 택하시는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택했다는 사실을 정말 깨달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은혜를 알고 나면 사람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무엇도다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열등감, 다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내 약한 것 때문에 택하셨다니까. 감사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해주셨다는 것 너무 귀한 일이지만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 약해서 택함 받았으니까 그냥 감사 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이 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사해주셨습니다. 죄사함의 복이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에 받은 가장 놀라운 복입니다.

 

속죄함 보다 귀한 복은 없습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 카터 부부는 금슬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습니다. 이들이 하버드 랜드크리프 대학에서 강연을 끝내고 질문을 받을 때, 한 학생이 "당신들은 어떻게 그렇게 잉꼬 부부가 되었느냐?"고 묻자 카터가 대답했습니다.

 

"우리의 결혼에서는 사랑이 30%이고 나머지 70%는 용서였습니다." 그러자 아내 로잘린이 일어나서 카터의 대답을 이렇게 수정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결혼에서 사랑은 10%이었고, 90%는 용서였습니다." 이 말을 하자 모든 이들이 크게 웃으며 박수쳤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행복의 조건은 용서에 있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 사함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어떤 관계입니까? 용서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하신 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갑니다. 질병의 짐, 환란의 짐, 번민의 짐, 빈곤의 짐, 실패의 짐, 고독의 짐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중 가장 무거운 짐이 무슨 짐인 줄 압니까? 죄의 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짐에 눌려 삽니다. 이것이 가장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받은 가장 큰 복,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씻음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흘려주신 것 때문에.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여러분, 죽는데 복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 죽는 것을 불길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을 사()자가 있는 것을 꺼립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도 보통 4층은 없습니다. F라고 하고. 죽는 것이 싫어서 4자라고 쓰는 것 자체를 금기시합니다. 그런데 죽어도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죽을 때 복이 될까요?

 

여기서 말하는 죽어도 복된 이 복이 무엇입니까? 성공입니까? 죽을 때 성공이 무엇입니까?

 

어느 장로님이 수필에 쓰신 글을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친구가 공군 장성이었다가 퇴역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병실에 들어서자 그 친구가 다짜고짜 소리를 치더랍니다! 빨리 가서 먹고 죽는 약 가져와. 나 장군이야. 그런데 똥 오줌도 못 가리고 이렇게 기저귀 차고 누워있어서 되겠어? 먹고 죽는 약 가져와!”세상 복만 알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모르는 자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 죽을 때 무슨 도움이 됩니까? 돈 돈 하지만 죽을 때 돈이 무엇입니까?

 

사막에서 길을 잃은 자들이 사람들이 머물던 흔적을 찾아 마실 물이 있을까 뒤지다가 가죽 주머니를 발견하고 기대를 갖고 열어보니 보석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아무 것도 아니잖아!”죽는 순간에 이르르면 보석,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죽을 때 무엇이 그 죽음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까? 속죄함을 받은 것입니다. 천국 들어갈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복입니다. 죽음의 문제도 넘어가는 것입니다. 죽음 조차 복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죽어도 복된 자는 오직 하나 예수님의 보혈로 속죄함을 받은 자입니다. 천국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또 하나 놀라운 복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에는 엄청난 변혁이 일어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인치심이라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약속받은 모든 축복,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은 것과 예수님의 피로 속죄함 받은 것이 정말 우리의 것임을 보증해주기 위해서입니다.

 

14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우리는 이런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자녀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정말 알고 나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 염려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복을 받는데, 우리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 때문에 특별히 먼저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그럴만한 무슨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깨끗하게 살았던 것도 아닙니다.

 

오직 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주어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복을 언급할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이 복을 다 받게 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 자격, 출신,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중에 이 은혜를 못 받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남 보다 부족하게 받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여기 강단에 서있는 저는 많이 받았고 여러분은 적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 똑같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다 받았습니다. 차별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 복의 기준으로만 보면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중에도 어떻게 공평하십니까?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백년도 못 삽니다. 하늘의 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복은 예외없이 모두 다 공평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감사와 찬송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찬송으로 시작하여 찬송으로 끝난 것입니다. 찬송한다는 말이 네번이나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알고 나면 사도 바울뿐 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저 감사하고 찬송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도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해 보면 가슴 속에서부터 감사와 찬송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형편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늘의 신령한 복을 예수 안에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감사와 찬송 밖에 안 나옵니다. 그리고 그 감사와 찬송으로 성도들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하나님이 왜 만드셨을까? 왜 태어나게 하셨을까? 왜 나는 지금 살게 하셨는가? 궁금하시면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그 비밀을 깨닫고 실제로 그렇게 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찬송하며 사는 삶,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궁금하십니까? 오늘 말씀에서 정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양 인도자가 찬양을 인도할 때 조금 지나면 서서 찬양하자고 하는데, 힘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일어나라고 하는지 몰라. 다리가 아프게.’ 일어나서 찬양 하는 것 이유가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아는 사람에게는 앉아서 찬송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그렇게 찬송을 불렀던 그 심정 가지고 어떻게 앉아서 부릅니까? 그런데 하늘의 신령한 복을 모르는 사람은 10분 일어나서 찬송하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이제 앉으십시오.‘ 그러면 복음을 듣는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늘의 신령한 복을 깨달은 사람은 30분을 찬양을 해도 부족합니다. 그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부산제일교회 부흥회에서 찬양단으로 섬겼던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이번 부흥회 때 찬양을 섬겨달라는 부탁을 받고 속으로는 많이 기뻤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싶었습니다. 그 날부터주님, 사람들이 절 보게 마시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해주세요. 오직 주님께 기뻐 찬양하는 나를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여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며 찬양을 섬기려고 시간 시간 미친 듯이 뛰어 달려 왔습니다.

 

마지막 집회 저녁 말씀이 끝난 후나팔불 때 나의 이름찬양을 하는데 정말 하늘 나라에 입성하는 무수한 영혼들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은혜 받고 기뻐하다가 주님을 모르는 영혼들을 향한 성령님의 애통해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 동안 가족을 사랑하지 못했고 교우들과 교회를 사랑하지 못했고 이 땅을 사랑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애통해 하며 절규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가슴이 찢기고 아파 죽을 만큼 신음하시는 성령님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네 사는 자리에서 열심히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왜 몰랐느냐?’그때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대성통곡했습니다. 정말 애통해 하며 죽을 것 같이 울었습니다.

 

이제 저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주님, 이제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내 가진 것 모든 것 바울과 같이 배설물로 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았으니 주님께 갈 때까지 사랑만 하겠습니다. 가족들을 사랑하고 교회 사랑하고 주님 사랑하겠습니다.”

 

이렇게 찬양하는 믿음이 곧 성도의 능력입니다. 그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알고 나면 정말 속에서부터 막 찬양이 나옵니다.

 

지난 주간에 수요일 목요일 남성부흥회 강사로 오신 김하중 장로님을 보면서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는 최장수 대사였고 통일부 장관이었지만 지금은 공직에서 물러난 상태인 분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행복해하였습니다. 이유는 그가 바라는 복이 세상 성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허전해 하고 허탈해야 할 형편입니다,

 

그런데 김하중 장로님은 공직에서 물러난 지금 오히려 더 즐거워하며 만족해 하였습니다, 그가 누리는 기쁨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사로 있을 때보다 장관으로 있을 때 보다 지금이 더 기쁘십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기쁨 때문입니다.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주님과 만나 기도하고 말씀 듣는 것이 너무너무 기쁘시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감사보다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소유가 부족할 때가 아니라 우리가 받고 누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에 대하여 눈이 뜨이지 않았고, 세상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는 믿었지만 별로 복은 받지 못하였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늘의 신령한 복을 다 받았지만 그 복이 귀한 것을 모르면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모르면 그 엄청난 복을 세상 것과 바꾸게 됩니다.

 

, 세살 아이들이 만원짜리 돈을 가지고 있을 때, 과자를 주면 돈을 내어 놓습니다. 돈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았지만 그 복이 복인 줄 모르면 세상 것과 금방 바꾸어 버리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을 받고도 모르면 다 잃어버리고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택하심의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 뿐만 아니고 아예 목사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저는 목사로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한 동안 부담스럽기만 하였지 좋은 줄 몰랐습니다. 저는 그것이 제게 큰 굴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팔자에 매였다고 마음대로 살 수 없는 불행한 자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큰 아들로 태어나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진, 정말 팔자가 목사인 그런 느낌으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가를 몰랐으니까 그게 오히려 제게는 슬픈 조건이 되었습니다. 목사 안수 받기 전날 저는 슬퍼서 울었습니다. 복을 받아도 복을 모르면 다 잃어버립니다.

 

죄사함을 받은 것도 천국 뿐 아니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제가 겉으로만 모범생이지 실제로는 지옥에 갈 죄인임을 깨닫기 전에는 감격을 몰랐습니다. 속죄에 대한 메시지를 들어도 고난주간을 지나도 제 마음 속에 특별한 뜨거운 감동, 감격, 눈물이 없었습니다.

 

성령님이 제 안에 오신 것도 성령 체험을 하기 전까지는 교리적인 지식이었지 제 삶에 실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제 안에 계시다는 것 자체가 제 삶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이 젊어서는 부담스럽게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많은데, 성령 하나님이 내 마음에 계신 것이 어떤 때는 영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엄청난 신령한 복을 다 받고도 그 복이 복인 줄 모르면 전혀 찬송, 감사가 없습니다.

 

학생 때, 아버님 서재에서 설교집이나 신학책을 호기심으로 잠깐 들여다 볼 때마다 이런 내용을 본 기억은 있었지만 감격스럽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성령 체험 후 말씀을 보는 눈이 뜨이면서 제가 엄청난 복을 받고 있었음을 비로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형편, 처지 상관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 제게 이런 복을 주십니까?’형편을 떠나 환경을 떠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그런 찬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중에도 예수를 믿지만 그저 교회만 다닐 뿐이지 사도 바울처럼 그런 감격을 모르고 찬송을 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런 감격을 감사를 아직도 전혀 모르는 분이 있으십니까?

 

오히려 불평, 불만이 많고 마음에 상처도 많고 슬픔도 많고 우울하기도 한 분들은 오늘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성령님께서 여러분이 지금 받아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면 여러분이 그렇게 슬퍼하고 좌절하는 모든 조건이 다 의미가 바뀌어져 버립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이 믿어지지 않는 분들은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이들에게 주시려는 약속입니다.

 

부산제일교회 부흥회 이후 보내온 간증 중에 제가 두 분 것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번 부흥회를 많이 기대했고 간절하게 사모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보고 싶었고 이번에는 방언의 은사를 받고 싶었습니다. 부흥회 첫 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말씀이 제 마음을 찔렀습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믿어지지는 않았거든요. 목사님께서 앞으로 나와 기도 하실 분 나오라고 하실 때 저도 모르게 강단으로 올라갔습니다.

 

평소 제 성격으로는 절대 그럴 수 없는데, 갑자기 제 마음에 은혜 받는데 앞장서야겠다는 강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제가 하고자 하는 기도는 안 나오고 회개 기도가 통곡이 되어 나왔습니다.

 

둘째 날, 늘 주님과 대화하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묻고 매 순간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그 말씀이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요. 이 날도 제가 원하는 기도는 제대로 못하고 제 안에 말할 수 없는 감사가 나오면서 통곡이 되었습니다.

 

그 시간 십자가의 복음이 저에게 실제가 되었고 구원의 확신과 넘치는 감사를 주셨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것이 모든 문제 해결의 답임을 깨달았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답을 얻었습니다.

 

마지막 저녁 집회 때 방언을 뜨겁게 사모하면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혀가 이상해지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다음날 아침 집에서 다시 기도를 하는데 방언이 나오며 온 몸이 땀에 젖고 손이 하늘로 향하여 달달 떨렸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기도를 하고 나니 마음이 너무나 시원하고 평안했습니다. 제게 소망이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게 유익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노라하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 예배 드리면 신앙 생활의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머지 시간들은 세상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예수님의 존재는 안개처럼 희미해지고,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분간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제 인생의 가치 기준은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고 가족들 편안하게 생활하고, 좀 큰 집을 마련하고, 좋은 차도 타고, 좋아하는 취미 생활도 하고 조금 남는 것이 있으면 인심도 좀 쓰고 그렇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으로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집회에서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찔려왔습니다. 안개처럼 희미하여 어디 계신지 분간도 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존재가 언제나 제 마음에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흥회 마지막 날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하는 말씀이 제 마음을 쳤습니다.

 

작년 겨울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평생 과학자로 살아오신 아버님께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셨는데, 돌아가시기 두달 전 꿈 속에서 황금 옷을 입은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하시면서, 당신이 평생 읽었던 서적들과 알고 있었던 모든 지식들이 다 쓰레기임을 깨달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로서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아버님의 말씀처럼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지식이나 가치관을 내려놓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지금도 저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무지한 저에게 소리도 없이 모양도 없이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제 마음에 거하시길 소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서 기쁨을 모르고 지냅니까? 그래도 바울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찬송하고 안하고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이 찬송할 수 있습니까? “내가 복을 받은 자구나!” 확신이 생긴 자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어요! 여기서 은혜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으로부터 찬송이 나오십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신령한 하늘의 복이 너무 가슴에 넘쳐서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든 마음으로부터 찬송이 터져 나오십니까?

 

오늘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모든 이들에게 다 그 복을 받는 눈을 열리게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모하므로 주님을 붙들면 그렇게 됩니다.

 

주님! 세상의 박자에 이끌려 살지 말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은혜에 이끌려 살게 하옵소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천상의 노래를 영혼으로 부르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제 눈을 열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보게 해주옵소서. 세상의 복에 눈이 어두워서 진짜 복을 놓지고 사는 답답하고 어리석은 삶, 주님 이제는 완전히 바꾸어 주옵소서.”

 

 

복음의 능력 /1:3-6/ 박영선목사

2015-07-29 21:42:27

 

지난 시간에도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만 한국 교회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를 예수 천당이라는 이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 구원확신, 헌신, 천당, 이라는 조금 더 발전된 내용을 한국 교회가 가지게 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근데 이런 식의 이해가 예수를 믿으면 천당간다에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확신하여 살아생전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다라는 이해는 구원 자체에 대한 이해 발전은 없습니다.

 

구원 자체에 대한 이해는 거기에 진전이 없고 구원을 얻은 자가 가지는 보답, 이라는 차원에서의 헌신이 한국 교회의 중요한 신앙 행위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전에 핍박기에 최??(1:22) 목사님으로 인해 유명해진 예수 천당으로 표현되었던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에 관한 이해와 오늘날 평화기에 한국 교회가 부흥기를 가지고 그 헌신으로 열매를 맺어온 성공 시대에 가지는 구원에 대한 이해는 그런 의미에서 다 원색적이고 일차적인 죽어서 천당간다에서 발전된 것 이상은 없는 셈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가 남은 생애 동안 주를 위하여 어떻게 헌신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우리가 해결했다 할 수 있으나 구원 자체에 대한 이해는 아직 부족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성도들이 자신에 대해서만은 이제 더 이상 뭐 할 게 없는, 구원은 해결된 것 같은 확신을 가지게 되어서 신앙 생활이 타인을 위한 일, 대표적으로 전도나 선교로 내용이 이해되고 자신을 위하여 구원이라는 약속 속에 남겨진 일이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치 못하는 오늘날 한국 교회 신앙 형태를 낳았습니다.

 

다른 의미로 매우 구원파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에게 일어날 모든 구원이 끝났다라고 믿는 것인데 지난 번에 설명한대로 신분과 운명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으로써는 다 끝난 일이고 동시에 진행되고 완성되어야 할 구원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의 이해와 약속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라고 말씀드린 부분을 우리 한국 교회가 좀 더 이해해야할 것으로 믿습니다.

구원에 대한 말씀을 좀 더 성경적으로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13절 이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3~6)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3절에서 6절까지의 구원에 관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그의 은혜와 신실하심과 약속을 따라 예수 안에서 이루셨고 그리고 장차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자리까지 목적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부족해보인다면 11절을 봅시다.

 

(에베소서 111~12)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는 구원의 미래적 완성이 좀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구원은 지난번에 설명드린대로 이미 일어난 구원이 있고 진행되는 구원이 있고 기다려야할 약속의 미래에 완성되는 구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신학적으로 칭의, 성화, 염화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죄와 사망에서 꺼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찬송이 되는 자리까지 목적된, 그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12절에 있는 설명이 아주 기억할 만하죠?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더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은 구원받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찬송이 되는 겁니다.

 

은혜와 구원을 하나님 앞에 찬송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찬송으로 돌리는 것도 틀리지 않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의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고귀함과 복됨과 영광됨으로 인하여 구원 받은 그의 백성들이 영광에 지극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 이것이 구원에 대한 성경의 설명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을 확신하여 남은 생애를 주를 위해 산다는 헌신으로 일찍 연결되어서 쓸모 있는 인간이 자꾸 되려고 합니다.

 

큰일을 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일이 힘에 부쳐서 우리를 써먹으려고 구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우리를 목적으로 하고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가 은혜에 보답하느냐로 영광을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의 영광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라는 것이 구원에 가장 잘 나타난다는 차원에서 구원을 설명하고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가 드러나서 영광을 받으신다라는 차원으로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쓸모 있음, 능력이나 유용함의 문제가 아니고 됨됨이의 문제입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신적 의도와 내용으로 충만한 자의 아름다움, 영광, 거룩함, 이런 됨됨이를 따지고 있지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서 감동시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게 만들었냐는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헌신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항복,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소원들이 빚어내는 반응입니다. 쓸모 있고,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놀라움에 대한 반응입니다.

 

내용과 그로 완성되는 우리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걸맞는 영광에 대한 이해가 구원에 대한 본질적 이해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강조하다시피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시고 약속하시고 작정하셔서 우리의 생애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진행되어서 완성될 영광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서 조금 더 구원과 구원에 연결된 복음 문제를 조금 더 소상히 풀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1장으로 가겠습니다.

 

(로마서 116)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이란 뭐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게 복음입니다. 좀더 성경적인 의미를 충실히 살려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뭐가요? 복음이요. 복음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고 살아나셨다.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를 들어 에베소서 1장에서 이렇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7.

 

(에베소서 117~19)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9절 얘기가 그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백성삼기 위하여 어떤 능력을 도입했는지 아느냐. 어떤 힘으로 간섭했는지 아느냐. 어떤 능력과 열심을 동원하여 이 일을 진행하는지 아느냐. 이겁니다. 20. 그 능력이.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와 실제적인 힘을 다 포함하여, 그 능력이.

 

(에베소서 120~22)

 

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1: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두 가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 이게 복음이죠. 무엇 때문에 구세주가 오셨습니까.

복음의 목적이 먼저죠. 구원을 주시려고.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또 부활하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인한 구원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이 계속되는 사역 속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혜요, 사랑이요. 우리가 이해한대로 복음입니다.

 

구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복음과 구원의 관계는 보시다시피 복음은 구원을 시작하시고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며 능력이며 그 능력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고 부활하사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속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지금 시행되고 있는데 마치 우리는 십자가로 구원이 끝나버린 것처러 생각해서 죽을 때까지 이 은혜를 보답하기 위한 일을 하자라는 미션으로만 가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소중한 일입니다. 성도들이 마땅히 주를 위해 살아야하고 주의 뜻을 이루며 주의 나라와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을 아직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구원의 시작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도 지금도 과제거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며 진행되는 은혜요 복들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디모데전서 1장으로 가보겠습니다. 12절 이하에 복음의 자기간증이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112~16)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의 고백은 우리가 주로 바울이 유명한 사도요, 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구원에 대한 감격과 헌신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요,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를 맡기고 밖에 나와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교회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위해 쓴 편지 속에 나오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헌신과 열심을 강조하는 부분이 아니고 교회에서 무엇을 주의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다룬 부분입니다. 13.

 

(디모데전서 13~4)

 

딤전 1: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딤전 1: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다른 교훈, 이게 큰 문제였습니다. 어느때나 그렇듯이 기독교가 가지는 가장 큰 일차적인 적은 성경적인 내용 아닌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루는 교훈은 이단사설들이 아닙니다. 분명합니다.

 

예수 믿지말고 다른 거 믿자는 얘기는 분명 우리가 구분이 되는데, 이 디모데전서의 다른 교훈을 경계해라는 것은 이단사설이 아니고 같은 신앙을 논하고 같은 고백을 논하는데 빗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 일어나는 가장 큰 오류 중 하나입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이뤄가고 있는 그의 나라와 구원의 완성입니다.

 

이것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묻기보다 가르치고 주의를 주죠. 디모데야. 교회에 봉사하며 교인들을 교훈하며 가르칠 때에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내용으로 양식을 삼고 있는가를 봐라.

양식을 삼는다는 것은 그것을 먹어서 크고 있느냐. 그것을 먹고 싸우느냐, 그것을 먹고 크고 있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다른 교훈, 다른 교훈은 4절에 있는 것과 같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양식으로 준 것을 먹지 않고 놓고 이것 갖고 다른 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틀린 거라는 거죠.

 

옳은 데 다른 소리를 할 수 있어요. 이걸 먹으면 콜레스테롤이 올라간다든가, 이걸 먹으면 당뇨에 걸린다든가. 옳은 소리지만. 교회 안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은 이런 변론으로 인하여 누가 더 똑똑한 가로 오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 말이 옳을지라도 그렇게 해서 나는 너보다 똑똑하다 너는 나만 못하다라는 논쟁을 야기시킨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되는 것이죠.

 

경계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말씀을 허락하시며 함께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것은 그 안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으로 각각의 구원이 진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라나야 하는 것이다. 뒤에 이렇게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110)

 

딤전 1: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다른 교훈을 하는 자를 경계해라 하면서 나오는 말이죠. 바른 교훈은 무엇이냐. 바른 교훈이라는 것은 건강한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의학적 용어입니다. 먹고 커야 돼요. 건강해져야 하는데 논쟁을 해서 누가 옳으냐라는 우월감의 싸움을 하거나 지적 자랑을 하거나 양식 삼지 않는 일들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이단사설만큼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의 진전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5절에서 봤습니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이 뭡니까? 사랑은요, 가장 중요한 것이 잘난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제 12절 이하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자기간증을 연결해보게 되는 겁니다. 10절에 있었던 다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입니다.

 

경계의 목적은 5절에 있는 바와 같이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어야 하는데 이걸 가지고 싸움박질이나 하자 그러고 시비걸고 따져서 먹고 크지 않는 자가 잘못하는 것이다라는 거죠. 그러면서 11.

 

(디모데전서 111)

 

딤전 1: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그러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는 하지 말고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는 것은 다 복음이라구요.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이죠. 우리의 믿음, 가르침, 복음들은 다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가야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자신의 성장에 위해서 쓰여진다는 얘기는 듣고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듣고 선택한 걸로 끝나버렸습니다.

 

예수를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로 한 번 제시되고 믿은 다음에는 타인을 위해서만 가지 자기 자신 안에 구원의 완성이 계속되는 문제는 한국 교회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얘기입니다. 12.

 

(디모데전서 112~16)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의 능력은 나 같은 것을, 훼방자요, 죄인 중에 괴수였던 자를 여기까지 바꿔놓는 능력이니라. 이것을 서두에다 질문으로 만들었습니다만 겉으로는 비슷해요. 구원을 얻고 감격하고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해도 본문이 딱 들어맞아 보인다니까요. 바울이 훼방자요, 핍박자였는데 하나님께 구원을 얻고 은혜를 얻고 내 남은 인생은 주를 위하여 살겠습니다.

라고 이걸 이해해도 하나도 어색한 데가 없다니까요. 3절부터의 내용과 연결해보니까 지금 바울이 하고 싶은 얘기는 바른 교훈, 하나님께서 허락한 능력의 복음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겁니다.

 

이 무식한, 이 미련한 나를, 여기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얼핏 읽으면 그래도 알고 한 짓은 아니니까 용서할 만하다. 그런 느낌이 들 뻔하죠. 그게 아니고 정말 알짜 무식쟁이였다. 이겁니다.

 

성경에서 무식하다는 것은 죄의 큰 내용 중 하나입니다. 거역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큰 죄의 목록이죠. 그런데도 구원을 입어 이 자리까지 온 것은 본이 되게 하려 하셨다는 거죠.

 

내가 한 헌신이요 내가 한 작정이요 내가 한 감격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종까지 세워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어떤 은혜와 어떤 의지와 어떤 능력을 동원했는가를 보이시는 거라니까요.

 

복음이란 이런 것이다. 날 봐라. 이 장면에서 나를 본 받느 자 되라 그럴 때 신앙의 핵심을 말하는 것이지. 올바른 방향을 위해 본 받으라는 것이지 내 헌신과 결단, 의지를 본받으라 그러지는 않습니다.

 

우리 안의 요인과 우리 안의 조건이 있다고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말하자면 사도 바울의 고백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고백은 끝이 17절로 이렇게 마쳐집니다.

 

(디모데전서 117)

 

딤전 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왜 하나님께 하나님께 영광이 가겠습니까. 왜요. 하나님으로부터만 출발하고 하나님만이 하셨고 하나님께 속하신 것으로 채우시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허락하시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하나님께 감사로 갑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구원을 점검함에 있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믿음이 조건이 아니라는 걸 설명할 때 그랬습니다. 믿음의 법을 확인하는 법. 거기 자랑이 있냐, 없냐를 확인하기로 했죠.

나는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라고 믿음을 조건으로 삼으면 자랑이 되서 너는 왜 안 믿냐, 라고 말을 하게 된단 말이죠. 잘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결정하거나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믿게 된 것입니다. 이미 하나의 결과거든요 하나님 은혜의 결과인데 우리는 조건으로 인식합니다. 거기서부터만 의식이 있기 때문이죠.

 

구원에 관한 우리의 감각이 믿음, 혹은 회개로 시작되는 데 밖에 없습니다. 그 전은 감각이 없어서요. 믿음이니 회개니 다 감각이 회복된 것은 이미 살아난 증거거든요. 살아나야 생명이 돌아와야 믿든지, 선택을 하든지 회개를 하든지 할 수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신앙의 어떤 지점에 있어서 시작이던 과정이던 완성이던 성경이 우리가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를 물을 때는 언제나 이 판별식을 갖다대는 겁니다. 그게 자랑입니다.

 

바울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보십시오. 내가 나댄 것은 내 신 안이다. 하나님께만 영광.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은 지금 디모데전서에서 보시는대로 바울이 이해한대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대로 제대로 이해하자면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과정을 이루시고 끝내신다.

 

까지가 내용이면서 약속이면서 작정이요,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야 말 의지요, 능력으로 약속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 남을 위해서만 믿지 않고 구원을 먼저 얻었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 신자된 인생을 삽니다. 로마서 5장을 보십시다.

 

(로마서 51~2)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이 일들은 신앙적으로 디모데전서에 등장한 바와 같이 거짓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사랑으로 가는 것입니다.

 

능력으로 가지 않고 성품으로 간다는 걸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가는데, 문제는 두고두고 더 우리가 언급을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8장에. 사랑은 이런데까지도 등장합니다. 81.

 

(고린도전서 81~3)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지식과 사랑을 비교하고 있죠. 지식은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사랑으로 가야된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 는 건 옛날 고대 사회는 그 국가가 섬기는 신에게 제사로서 육류를 동물들을 제물로써 바치고 나서야 시장이 흘러나왔습니다.

 

육류 고기들은 다 우상 신에게 바친 제물이었습니다. 기독교 인들은 그래서 그것을 먹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고기 먹지 않겠다 했던 게 이것과 같은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제 고기 맛을 이미 들인 예수 믿는 사람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저 같이. 고기는 먹고 싶고. 고기 먹으면 우상 제물이라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 몰래 먹는 일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실제로는 신자들 속에 먹어도 된다. 왜냐. 우상은 없으니까. 우상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없는 거 아니냐. 없는 거 앞에 놔뒀다고 해서 왜 못 먹냐. 맞는 말입니다.

 

여러분 제사 음식 먹으셔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귀신이 돌아오지도 않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 잘난 건 알겠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신자를 위해 너 먹지마라. 그럽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고, 우상 제물을 먹는 걸 보면 하나님과 다른 신을 동시에 섬겨도 되나. 로마 시대에 여러 신이 있었잖아요. 아폴론, 주피터, 여러 신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로 그의 신앙을 혼돈시키고 약화시킬 수 있으니까.

 

네 음식으로 인하여 네 형제를 실족케 하지마라.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먹던지 마시던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가 등장하는 겁니다. 지식이 전부가 아니고 그것이 사랑으로까지 가야 한다.

 

이렇게 사랑이 오거든요. 우리가 우리 신앙을 점검할 때 여러분이 일 많이 하고 사랑이 없어지는 일은 잠깐인 거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일 경쟁을 벌여놓으면 싸움이 많습니다.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이런 이유로 등장합니다. 12장에 등장하는 모든 은사들을 13장으로 끌고 가는 가운데 연결 구절이 뭐냐면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큰 은사 그러면 사랑이냐.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보이겠다는 것은 분명 사랑이죠.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너희에게 좋은 길을 보이리라. 둘이 같으냐, 그렇지 않습니다.

 

큰 은사란 교회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라는 차원에서 기왕이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자 되라고 권면합니다. 무슨 은사던지 은사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다. 타인을 위한 것이다.

 

타인을 위하는 최고의 원칙은 사랑이다. 그래서 13장이 12장의 은사장을 이어서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사랑으로 연결되는 이유입니다. 사랑은 어떻다는 거죠.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굳히지 않고,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이겁니다. 2.

 

(고린도전서 132)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참 무서운 말입니다. 사랑 없이 하면 소용 없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적인 내용은 본체가 사랑이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사랑에서 나아가야 합니다.

 

영어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Withour love, I am nothing. 내가 없는 겁니다. 내가 사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우리의 본질이어야 합니다. 사랑에서부터 무슨 말이든지 나와야 합니다. 무슨 행동이든지. 하루 아침에 절대로 안 됩니다.

 

아는 데 30. 해야겠다 결심하는 데 30. 실천은 해보지도 못하고 보통은 돌아가시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싸움입니다. 이걸 우리가 평생동안 어떻게 배우느냐. 우리 인생 속에서.

 

내가 가진 열심. 내가 가진 고백. 내가 가진 소원. 그것이 실력으로 나타나기에 얼마나 많은 것을 넘어와야 되는가. 속에서 배우는 게. 결국은 무슨 싸움이냐면 내가 죽어야 된다는 싸움입니다.

의욕을 가지고 열심을 가져도 도무지 이 신앙의 완성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은 불을 붙여서는 안 일어납니다.

 

결혼식 주례할 때마다 하는 얘기입니다. 결혼할 때 부부가 사랑에 불타서 해요. 그때 사랑은 정열과 진심입니다. 우린 그게 단 줄 알아요. 살아보면. 정열과 진심으로는 사랑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끝나고 설문조사를 해야겠습니다만, 몇 달만에 부부 싸움을 하셨습니까. 3년이면 뭐 온갖 정이 다 떨어진다. 이게 뭐 통계인데, 우리가 왜 놀라냐 하면 진심과 열정이면 사랑이 성립이 되고 사랑이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믿습니다.

 

살아보면 그렇지 않죠. 사랑엔 더 많은, 다른 요소가 있다는 걸 배웁니다. 뭡니까. 오래 참는 겁니다. 우리 말은 좀 물러요. 영어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Long suffering. Love is long suffering. 환장하겠죠.

 

딱 맞죠 지금 형편에. 여러분, 참으세요. 애를 끊자. 누가. 평생 같이 살기로 서약한 배우자가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이 일본 해군을 놓고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집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면서 어디선가 ??(37:58),

 

나의 애를 끊나니. 마누라가 호각을 불곤 했던 모양이죠. 이거 해나가는 겁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얼마나 많이 기다려야, 얼마나 많이 참아야, 결국 어디로 가야만 되느냐. 자기가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게 사실은 신앙의 완성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대로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지어다.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자기의 신앙을 점검하시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진행하시고 베푸시는 은혜에. 여러분을 맡기는 참다운 헌신으로. 신앙의 기쁨.

 

인도함을 받는 여러분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업 /1:11-14/ 하용조 목사

2015-05-23 19:22:45

 

여러분,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우리 솔직하게 한번 말해 봅시다. 지금 이 시간 내게 무엇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결혼입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출세입니까? 아니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15:1절에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하나님이 복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마5장 이하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신 것을 보면 예수 믿고 천국의 유업을 소유한 자가 복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소유한 자가 가장 복 있는 자임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구속의 은총이며 사죄의 은총입니다.

7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옥에 갇혀 있는 사형수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가장 큰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입니까? 건강이니까? 결혼입니까?......세상에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죄용서는 받고 옥에서 나와 자유 함을 얻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결혼도 될 수 있고 건강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특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에게 가장 큰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용서뿐입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입니다. 죽을죄에서 용서받고 풀려나올 때처럼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한부 인생들인 우리에게 가장 큰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금이 제아무리 많다고 할 찌라도 금의 귀중성을 아는 사람에게 금은 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천국의 복을 아는 사람에게만이 천국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복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모든 것이 제아무리 풍성하였을 찌라도 그에게는 복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함께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탕자와 같은 인생들이 어떻게 잃어버린 기업을 회복할 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올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딤전1:14절에 보면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와 천국의 축복은 오직 우리를 위해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피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하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비밀이라는 것은 관계가 없는 자에게는 언제나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들어도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자, 다시 말해서 천국의 기업과 관계가 있는 자는 그 비밀의 내용과 중요성을 알려 줄 때에 즉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영원하시고 기쁘신 목적에 대한 신비한 계획,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사죄의 은총을 받고, 영생을 기업으로 얻게 된다는 놀라운 계획을 깨달아 알 때에, 그는 너무 감격하여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아버지라고 외친 것입니다.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며 누릴 수 있는 비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 은총입니다.

 

1:3,4,6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셨으며’ ‘그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신비한 계획에 대하여 엡2:11-223:1-13,그리고 6:19절에서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눈은 오직 믿음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1절에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하였는데, 원문에는 그 안에서 우리가 또한 기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천국의 기업뿐이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 용서함과 하나님의 비밀을 깊이 알 수 있게 되고 또 성령의 조명을 받아 지리를 깨닫게 되고 그리고 과거의 죄의 권세에서의 해방되었으며, 앞으로 미래의 영광에 대한 권리를 받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업이란 우리의 공로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과 모든 축복에 대한 권리를 부여받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기업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받는 축복과 미래의 받을 축복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복의 실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복의 근원으로 믿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누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복의 근원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는 성도들에게 영원한 기업이 되십니다.

 

3:24절에 보면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우리의 기업은 물질도 아니오, 사업도 아니오, 출세도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여호와는 우리의 상급이 되시며, 현재와 미래의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기업으로 자랄 수 있는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순종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복된 것이므로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복되고 영원한 기업을 받은 성도들이 하여야 할 일이 무엇 입이니까?

12절에 보면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복된 삶, 즉 세상의 빛과 소금의 생활을 말합니다.

 

가령 자녀들 가운데 하나가 막나니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한 다면 그것은 부모에게 큰 욕이 되는 것입니다. ‘저놈이 누구의 자식인지...저것을 낳고도 멱국을 먹었겠지.....’이것이야 말로 그 부모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녀는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어디서든지 그의 행실을 보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저 아이가 누구의 자녀인지 참 부럽기도 하다 내게도 저런 딸이 하나 있으면....내게도 저런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거야말로 그 부모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인정받고, 칭찬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은 일에서나 큰 일에서나 어제든지 꾸준하고 충성 되다고 하는 인정과 칭찬을 받을 때 우리의 적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말과 행실이 달라서는 안됩니다. 일치해야 합니다.

9:8절에 보면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 도다그랬습니다.

 

말로는 사랑과 화평을 부르짖지만 그 마음에는 여전히 미음과 시기와 악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어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있습니까?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지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성수 주일, 십일조 생활, 예배와 감사 생활, 봉사 생활 그리고 전도 생활에 즐거움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의 기업이요, 생명이요, 복의 근원이요, 기쁨의 근원이라면 우리 하나님이 좋아서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기업이 세상과 물질처럼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실 이것은 적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이런 한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업과 관계 있는 사람은 그 기업을 사모합니다. 기뻐합니다. 좋아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일 보다 무엇을 좋아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사랑의 대상이 되며, 영원하신 기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시온에서 찬송하기를 기뻐하며, 주의 일에 시중 들기를 즐거워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자들은 성경에 보면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에 있을 것이니 그들이 즐거움과 기쁨을 얻을 것이며, 슬픔과 한숨이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복되고 영원한 기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므로 받은 믿음을 통해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의 약속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므로 영원토록 불변한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복된 기업을 이제 부터 영원토록 누리시는 진정한 행복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1:4-6/ 옥한흠 목사

2014-11-11 16:05:19

 

짧은 한 생을 살면서 우리의 행동 기준이 될 만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과 삶의 질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곧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내 신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아주 소중한 자야. 나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하고 그 말을 믿고 그대로 말하는 사람은 벌써 행동에서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납니다. 삶의 질에 있어서도 다릅니다. 그러나 "내가 별 볼일 있나?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

 

하는 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내뱉는 사람들을 보면 행동도 그러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생활도 질적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흔히 세상에서는 성공이나 명성, 권력의 소유 여부가 그 사람을 재는 잣대가 됩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중요한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판단하는 물질 세계에 우리가 갇혀 있으므로, 자연히 남에게 드러나는 무언가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를 그런 식으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성공이나 권력, 명성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따라 평가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존재가치가 결정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고, 나를 누구로 인정하시며, 얼마나 귀한 존재로 보시는 가에 따라 나의 존재가치가 달라진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온 세상이 나를 중요하게 여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보시지 않으면 이미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온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라면 의미가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복 가운데 첫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입니다.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격상시켜 주시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가지고 몇 가지 핵심적인 용어들을 살피면서 이 사실을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5절에 나오는 '예정'이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그 깊으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인류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여 자기 아들로 삼으시겠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예정입니다. 단 특별한 기준도 없이 아들로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4절 후반절에 있는 말씀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로 삼으시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에 아들도 자신을 꼭 닮은 자녀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를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두고 있던 계획이 현실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단어는 4절에 있는 '선택'이라는 단어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곧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창세 전부터 얼마를 자기 아들로 선택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말은 우리가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역사의 일부가 되기 전부터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존귀한 아들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영원무궁 전부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과 딸로 그분의 가슴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우리를 낳아서 귀여워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아시고, 귀여운 아들로 보시고, 또 존귀한 자로 보시면서 사랑 어린 눈길로 주목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창세 전에 택하셨을까요? 5절 말씀은 그 동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의 됨됨이가 어떠하든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좋아서 무조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될 말씀이 있습니다. 4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5절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6절에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들입니다. 이것들은 다 동일한 말들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인류가운데서 얼마를 내 아들로 선택할 텐데, 그들을 너에게 맡기겠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아들을 삼으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후 그 선택한 자들을 예수님에게 맡기시면, 예수님은 그 선택된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서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72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만유의 주, 온 세상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미리 선택해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을 구원해서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644절에도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누군가가 예수님에게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셔야만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이끄십니까? 창세 전에 선택해 놓은 사람들을 이끄십니다. 여기에서 '이끌다'는 말은 '헬퀴오'(helkuo)라는 헬라어 말인데,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흔히 배가 고프면 나도 모르게 음식이 막 끌리는데 이때 이 단어를 씁니다. 마치 기중기에 스위치를 넣으면, 그것이 자석으로 변해 쇠붙이를 한꺼번에 끌어당기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은 때가 되면 예수님에게 이끌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끌어다가 예수님에게 붙여 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에 담긴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믿은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싶어서 예수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안 믿을 수가 없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이유일 뿐,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평가하면 그 뿌리는 무한히 깊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선택해서 아들로 삼으셨기 때문에 때가 되어 내가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서 예수님 앞으로 오게 했기 때문에 내가 믿은 것입니다. 그 배후에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와 작용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믿으면 나도 모르게 전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예수 잘 믿는 자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10, 20년이 지나도 아직 남편은 믿지 않습니다. 간혹 교회에 한번씩 나오기는 하지만, 믿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되는 분들은 어떻게든 남편이 예수 믿게 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아마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앞두고도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 남편이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남편을 예수님께로 끌어당기셨구나.' 하고 고백할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될 때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끌지 않아서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끌면 끌려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부터 자신의 아들로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때가 되면 반드시 끌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광대하신 분이십니다. 시편 1453절입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은 측량치 못하리로다." 얼마나 크고 위대한 분이신지 모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해 제일 실감나게 표현한 선지자는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4015절에서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다른 그 어떤 것들도 하나님의 광대하심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해 오늘날 현대 천문학도 증명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최신 과학기술을 동원해 허블우주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을 만들었습니다. 그 망원경은 150억 광년의 거리에 있는 천체까지도 관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의 일곱 바퀴 반을 도는 빛의 속도로 150억년이라면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빛이 150억년 동안 달려가서 도달한 거리 밖까지 계속되는데, 그 우주는 허블우주망원경을 가지고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아직 빛이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도달하면 그때는 더 넓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광대함을 가진 우주입니다.

 

그런데 이 광대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광대하실까요? 그런데 그 크시고 위대하신 분이 티끌보다도 못한 나를 창세 전에 선택하시고, 때가 되면 부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사실인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는 땅 넓이로 봐서는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한만 따지면 일본의 5분의 1도 안됩니다. 그런데 이 작은 나라의 대통령 아들이 된 것만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요즘 메스컴 보도를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대통령도 아닌 대통령 후보의 아들도 얼마나 대단하지 군대 문제를 둘러싸고 정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그 광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5715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셔서 할 수 있는 대로 인간은 하나님과 거리를 둘수록 평안하고 안전합니다.

 

하나님 앞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나아갈수록 인간은 불행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 거룩자이시기 때문에 죄 많은 인간으로서는 가까이 갈수록 불행한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접근 불가능할 정도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족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6:5)

 

토미 테니 목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주일날 그 목사님이 자기 친구가 목회하는 미국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예배를 드리면서 그 교회당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신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구약시대 때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성전 안에 연기가 자욱했던 것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온 교회당에 가득 느껴졌습니다. 이윽고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설교하기 위해 강대상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날 설교제목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라' 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시작하자 마자 갑자기 천둥 소리 같은 큰 소리가 나더니 설교하시려던 목사님이 2-3m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아크릴로 된 강대상은 넘어지면서 두 동강이가 나버렸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임재해 계셨던 것입니다. 2시간 반 만에 그 목사님은 깨어나셨지만 그 모든 장면을 본 교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비오 듯이 쏟으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시자 아무도 자신의 더러운 것을 숨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왔는지 예배를 8차례 드렸습니다. 그 다음 날도 저녁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회개하고 세례 받고 새 사람이 되는 일들이 한달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끔 어떤 깊은 뜻을 가지고 이런 사건을 일으키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드러내실 때가 있습니다.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는 누구도 아무런 반응 없이 버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티끌 가운데 앉아 있는 더럽고 추악한 우리를 자기 아들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기절할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적당히 알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숨을 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는 이런 놀라운 사실을 알되, 너무 피상적으로 알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진리가 우리 안에 역사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흥분시키지 못합니다. 우리의 모든 존재 구석구석에 이 놀라운 말씀이 주는 능력이 퍼져 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덤덤한 것입니다. 내 삶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만 입버릇처럼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큰 문제점입니다.

 

한번은 신문에 재미있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휴가를 마친 부시 대통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백악관 잔디밭에 내리는데, 그 옆에 부시 대통령의 새까만 애완견 바니가 함께 걸어 나오는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개가 자기 바로 앞에 걸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 온 세계를 손 안에 쥐었다 폈다 하는 사람, 엄청난 권력을 가진 절대 강자가 바로 자기 앞에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저 개가 알까?' 만일 세계 정상들만이 드나드는 백악관으로 자기를 끌고 들어가서 책상 옆에 앉게 한 이 남자가 누군가를 바니가 알았더라면 아마 기절해서 못 일어났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개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내가 슬퍼할 때 어깨를 두드리며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내가 힘들어서 고통 할 때 나의 짐을 대신 져 주시는 그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만일 광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진정 내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아들이라는 것을 내 존재 전체가 알고 전율할 정도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고 우리를 자기의 아들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좌절하고 앉아있다가도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아무리 슬픔을 당한 자리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 아버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뜨겁게 깨닫는다면 눈물 닦고 일어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이상 이 세상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권력자들, 성공한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 앞에서 기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반응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기에 답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좀 알게 해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에서 새로운 힘이 솟는 것 같은 은혜가 시시때때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험한 세상을 항상 기뻐하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을 성자로 추대할 때 여러 가지 요건들 중 특별히 중요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험하고 슬픔 많은 세상에서 남달리 기뻐하고 산 흔적이 있느냐?'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한 평생 남달리 기뻐했느냐가 성자의 자격 요건인 것입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요, 내가 그의 아들이란 사실 하나 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항상 기뻐할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달리 기뻐하고, 남달리 하나님 앞에 찬양하며 살았다면 그 사람은 성자 될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바울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더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나를 어떤 자리에 불러주셨는지도 마음을 열어서 깨닫게 해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으시고, 성령을 통해 그의 아들됨의 영광이 어느 정도인가를 때때로 보게 하시고, 느끼게 하시고, 감격하게 하시고, 찬송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광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일단 자기 아들로 부르신 사람에 대해서는 엄청난 사랑을 쏟아 주십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인자와 긍휼을 더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11) 악한 부모도 자식만은 버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모른다고 하시겠습니까?

 

대통령에게 따라다니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박지원 중독증' 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김 대통령의 마음에 항상 '박지원'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먼저 그 사람을 불러서 의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곁에 있으면 마음이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면 다 옳은 말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서, 하나님께서도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에 우리에 대해서 약간의 그런 중독증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바냐 317절에 이처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놓고 어쩔 줄을 몰라 하십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를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만 생각하십니다. 우리만 생각하면 기뻐하십니다. 밤낮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멀리 보이기만 해도 좋아서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들이 된 우리에게 중독증이 걸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아들 된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위험에서 건져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아버지가 되십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뭔가 의미를 던져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느 날 한참 곤하게 자고 있는데, 다섯 살 된 아들이 와서 아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말했습니다. "아빠. 나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래서 자다가 깨서 시계를 보니 새벽 245분이었습니다. "그래. 갔다 와. 저기 화장실이 있지 않니?" 화장실은 좁고 어두컴컴한 복도 끝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그럼 갔다 올께요." 하고는 화장실을 갑니다. 좁고 어두운 복도는 그 다섯 살짜리 아들에게는 아마 십 리 길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아마 양쪽에 붙어 있는 컴컴한 방에서는 갑자기 괴물이라도 뛰어 나올 것 같은 두려운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는 혼자 화장실을 가다가 중간에 되돌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빠 옆에 와서 "아빠. 아빠 같이 가. 아빠 같이 가." "너 혼자 가면 안되니?" "아냐. 아빠하고 같이 가면 좋겠어요." "그래. 그러면 같이 가자."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들 손을 잡고 긴 복도를 건너 화장실을 갔다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우리 중 지금 어떤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이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금한 돈이며, 집이 날라갈 위험도 감수하면서 사업을 시작합니다. 분명히 어둡고 긴 복도를 지금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좀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몇 가지 검사를 하고는 진단 결과를 1, 2주 동안 기다리면서 초조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어두운 복도를 혼자 걷는 사람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딸을 결혼시켰는데, 몇 년 안되어 부부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서 지금 밤잠을 설치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두운 복도를 지금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실직, 어떤 사람은 남으로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당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일들을 세상에 살면서 다 경험하게 됩니다.

 

몇 일 전 우리 교회 마당에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이 별로 없던 날이라 그 남자분이 교회에 왔을 때 유달리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와이셔츠에 양복바지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3살 정도 되는 사내아이와 5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 되시는 분은 성경을 펴 놓고 읽다가, 그 다음엔 노트에 무언가를 한참 쓰다가, 또 애들하고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그것도 오전 내내 그렇게 보내더니 점심 시간에 자리를 떴다가 오후가 되어 다시 아이 둘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되어 내려가 물어보았습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 저는 시골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기거할 때가 별로 없나 봐요?" ". 지방에서 왔는데 몇 달 전 하던 사업을 다 날려버렸어요. 그리고 아내가 지금 병원에 입원하고 있습니다. 제 형님 집이 이 근방에 있기 때문에 애들을 데리고 잠깐 왔어요." "아내가 지금 많이 아픈가요? 못 고칠 병인가요?" ". 못 고칠 병인가 봐요." 그 다음날 아침에도 7시가 못 되서 셋이 마당에 와 있었습니다. 인생의 어둡고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한 가장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통로를 지나든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복도로 지나갈 때 나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5살 짜리 어린 아들 옆에 아빠가 있으면 그 복도가 좁고 어둡고 길어도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도와주시는 우리 아버지가 곁에 계십니다.

 

지금 수재로 인해 고통 하는 사람들 중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절망적인 형편에 놓여 주저 앉아 눈물을 흘리지만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어둡고 답답한 골목길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바로 내 아버지,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이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어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그러나 이 소식을 우리만 알고 있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우리 이웃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세상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가는 길이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비 없는 자식처럼 제 맘대로 살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어야 됩니다.

 

제니스 조플린은 27살에 요절한 미국의 전설적인 로큰롤 가수입니다. 하루는 그녀가 잠을 자다가 잠이 든 채 문을 열더니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놀라 "제니스. 너 어디 가니? 뭐 하니?" 하고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그 딸은 아무 말도 안하고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너 어디 가니?" 하고 어머니가 재차 묻었습니다. 그러자 한참 있다가 "난 집으로 가고 있어요. 집으로 가고 있어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몽유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아버지 되신 그분을 반역하고 멀리 멀리 가면서도 속으로는 하나님께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을 아들로 삼으신 그 좋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들 한두 명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다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자가 누구입니까? 먼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 된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모두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항상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티끌만도 못하고 비천한 자리에 앉아 날마다 죄만 짓는 우리들인데, 우리를 창세 전에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사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토록 찬송하며 살 수 있도록 구원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날마다 우리에게 감격으로 다가오게 하시고, 이 감격이 우리의 존재 전부를 불질러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변에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모르는 불쌍한 탕자와도 같은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서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귀한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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