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엡5:22-33/ 조정의목사
2021-09-01 05:06:13
하나님이 태초에 제정하신 가정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남자와 여자가 언약의 관계 안에서 신뢰와 책임이 따르는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생육 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채우기 위해 시작됐다.
하지만 사탄은 하나님 세우신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원했고 먼 저 가정을 공격했다. 하와를 시작으로 아담이 범죄하고 그 결과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녀도 죄로 물들었으며 만물이 타락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겠다고 약 속하셨고 하나님의 때에 그 약속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그 가정의 자녀를 구원하시며 곧 만물을 탄식에서 건져내시고 영원히 새롭게 하실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계획에 여전히 반대하며 끝까지 저항하고 있다. 구원받은 남편과 아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형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막는다. 여전히 사탄은 거짓으로 가정을 무너뜨리려 한다. 1) ‘결 혼이 내 행복을 위한 것이다’, 2) ‘부부는 결국 남이다’, 3) ‘남편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 아내에게 하는 맞춤 거짓말도 있다.
1. ‘아내는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라는 거짓말
남편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내는 특별히 더 ‘사랑’을 위해 결혼을 결심한다. 보통 남편은 그렇게까지 확인하려 하지 않지만, 아내 는 ‘나 사랑해? 얼마나 사랑해?’라고 계속 확인한다. ‘내가 사랑하 는 사람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 중 누구와 결혼해야 할까?’라는 질 문에 대개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야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여자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사실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사랑을 주겠다는 서약을 신실하게 이행하겠다는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나 서로 배우자에게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다.
결혼생활이 힘들고 때로 극한의 위기에 봉착하는 건 전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렇게 나를 대할 수 있어?’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어떻게 이렇게 나에게 무관심하고 배려가 없고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어?’ 사랑을 주기로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남편이 그 사랑을 주지 않을 때 약속한 대로 요구할 권리가 아내에게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탄은 아내에게 속삭인다. ‘이런 대우 받고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니?’ ‘남편 믿고 모든 걸 포기한 채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사랑받지 못하는 네가 얼마나 불쌍하니?’ ‘남편이 너에게 이렇게 말하고 행하는 걸 보면 절대로 너를 사랑하지 않는게 분명해, 너는 사랑을 정당히 요구할 수 있어’
사탄의 거짓에 속으면 아내는 분노와 원망에 휩싸이거나 깊은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남편에게 육신이 원하는 대로 불화살을 쏘아댈 수도 있고 반대로 입을 닫고 남편과 정서적인 거리를 둔 채 고립된 감정의 늪에 빠져들어 간다. 공격적인 반응 혹은 수동 적인 반응 모두 ‘나에게 합당한 사랑을 내놓으라’는 시위이다.
그런데, ‘아내는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은 남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 이유에서 분명한 거짓말이다.
첫째, 성경은 아내에게 사랑을 요구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본문에서 “아내들이여” 이후에 아내에게 주어진 명령은 분명하다.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24절). “아내도 자기 남 편을 존경하라”(33절). 사랑을 요구하라는 명령은 없다.
사랑을 많이 주는 남편만 존경하고 복종하라고 했나? 그렇지 않다. 본문엔 조건이 없고 오히려 ‘범사에 복종하라’는 일방적인 명 령이 내려졌다. 사도 베드로 역시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순 종하라”고 명령하면서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이유를 제시했다(벧전 3:1). 믿지 않는 남편 곧 말 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도 아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핑계가 될 수 없다(선하고 관용하는 자 vs. 까다로운 자의 대 조, 18절).
베드로는 아내가 따를 본으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예로 들었 는데,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기 목 숨을 보전하려 했던 남편이다. 아내가 보기에 얼마나 실망스러운 가? 정이 뚝 떨어질 정도로 사랑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했다(벧전 3:6). 남편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아내는 “선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랑받을 권리를 주장하라는 명령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둘째, 그리스도의 제자는 권리를 포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모든 제자에게 요구하셨다(마 16:24). 모든 권리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그리스도를 위해 내어놓을 각오를 하는 아내는 결혼생활 가운데 남편에게 마땅히 내가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랑을 내놓으라고 주장할 수 없다. 본문도 그런 맥락.
셋째,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다운 그림을 망치는 것이다. 결혼은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제정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드높이는 결혼 안에서 우리는 가장 큰 행복을 누린다. 그것이 하나님 제정하신 결혼의 원리이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는가? 남편과 아내가 각자 자기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때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다운 그림을 나타냄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서 바울은 아내에게 명령할 때 그냥 일반적인 명령이 아니라 24절을 보면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라고 명령한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기 때문이다(23절).
그리스도인은 때로 욥처럼 삶 가운데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만난다. 그때도 우리는 세상 가운데 우리 하나님이 선하고 인자하고 사랑 많은 전능자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주권을 인정하고 선하심을 믿는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아내는 남편이 어떠하든지 세상 가운데 교회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복종하는지 보여 줄 필요가 있다. 그것이 결혼 안에서 아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 는 방식이다. <래디컬> 저자 데이비드 플랫 목사는 <카운터컬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편을 존경하지 않으면 세상을 향해 교 회는 그리스도를 존경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다. 남편을 따르지 않으면 세상에 대고 그리스도는 좋을 가치가 없는 존 재라고 외치는 꼴이다. 남편을 두고 한눈을 판다면 그리스도는 그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셈이 다”(210p).
물론 남편은 예수님처럼 완벽한 사랑을 아내에게 공급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가정 안에서 맡은 역할이 달라 지진 않는다. 아내는 남편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 주신 자 기 역할에 충성하여 이 땅에 교회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나타낼 책임이 있다. 사랑을 강요하는 방식으론 안 된다.
2. ‘아내는 존중할 책임이 있다’라는 진리
성경은 아내에게 사랑을 요구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자기 권리와 목숨까지 내려놓을 각오를 하고 주를 따르는 아내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건 합당치 않다. 남편의 사랑이 부족하고 심지어 완악하더라도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여 교회가 그리스도를 얼 마나 사랑하는지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아내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엇일까?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내려놓는 제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남편의 사랑과 관계없이 신부인 교회의 신랑 예수님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을 나타내는 방식일까?
첫째, 희생적으로 존경하라. 본문은 33절에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고 명령한다. 아내가 남편을 존중하는 이유는 남편의 어떠함과 관계없다. 23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은 남편을 “아내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 물론 머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남편을 존경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못난 머리도 머리 임에는 틀림없다. 기능이 떨어지는 머리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본문과 유사한 가르침을 주면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라고 말했다 (골 3:18). 주 안에서 합당한 일. 주가 기뻐하시는 일. 주가 그렇게 요구하시고 기대하는 일이 아내가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가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고 권위를 주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당신의 말, 태도, 몸짓, 행동에 합당한 존경이 담겨 있도록 하라.
둘째, 자발적으로 순종하라. 본문이 여러 번 강조하는 명령은 “순종하라”이다(22, 24절). ‘순종’과 ‘복종’의 차이는 크지 않지만 ‘순종’은 자발적인 특성을 갖는다. 억지로, 할 수 없이, 의무적으로 하는 순종이 아니라, 진심으로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순종 이다. 그러므로 행동뿐만 아니라 태도나 자세, 감정도 따라온다.
성경은 아내가 남편에게 ‘범사에’ 순종하라고 요구하는데, 이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예외라고 봐야 한다. 순종이라고 하여 아 내는 열등하고 의견도 낼 수 없고 무조건 굽신거리면서 복종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선한 남편은 예수님처럼 섬기는 리더가 되어 아내의 필요를 잘 듣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을 선택하고 아내가 순종하도록 기다려주고 잘 이끌어 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요구하지 않을 때, 내가 원 하는 것과 다른 것을 요구할 때도 아내는 주께 하듯 기쁨으로 순종해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남편 위에 두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아내에게 두신 하나님의 역할에 기쁨으로 순종 하기 위해서 그리해야 한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다고 말했다(벧전 3:5). 남편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 여인을 세상에서 아름답게 만드는 메이크업이다.
셋째, 돕는 배필이 되어라. 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돕는 배필로 그의 아내 하와를 지어 온전하게 하신 것처럼(창 2:18), 아내는 남편과 한 몸을 이루어 남편 혼자 할 수 없는 것을 온전히 이루는 역할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창세기 말 씀(31절)을 인용하면서 두 사람이 “한 육체”가 되는 것을 큰 비 밀이라고 했다(32절). 한 육체로 기능을 다하기 위해 아내가 해야 할 일이 “자기 남편을 존경하”는 것이다(33절).
그러므로 아내는 자신의 주요 사역지가 남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똑똑하고 일 잘하고 훌륭한 인 물로 평가받아도 가정 안에서 남편을 돕는 배필로 거의 일하지 않거나 기가 세고 자기 고집이 세며 순응하기보다 반항적이라 오히려 남편이 아내 눈치를 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는가? 그 집의 실세는 아내라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남편의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 주라. 남편이 자기 역할에 충성하지 못할 때라도 나머지 반쪽으로서 남편을 세워주고 가정을 돌보고 적이 아니라 한 팀으로서 돕는 배필 역할을 다하라. 모든 리더가 그렇지만 가정의 리더 자리는 외롭고 무겁고 힘든 자리다. 아내만큼은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 세워주고 격려해주고 힘이 되어 주고 도와주는 일을 해야 한다.
3. 진리를 따를 때 사랑받는다
평소에 아내가 남편을 존중하고 순종으로 사랑을 표현하면서 남편의 부족함을 온전히 채우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남편이 악하게 행할 때 혹은 사랑 없는 태도나 행동으로 마음을 상하게 할 때 그때 진리를 따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사탄은 그때를 노리고 ‘넌 이보다 더 나은 사랑받을 권리가 있어’라고 속 삭인다.
버럭 화를 내든지 눈물로 원망을 쏟아내든지 침묵하며 냉전을 선언하든지 우울감에 빠져 남편과 잠시 단절되든지 여러 가지 사탄의 거짓에 속아 육신이 원하는대로 반응할 때 아내가 원하는 참 사랑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아내가 간절히 원하는 그 사랑은 반대로 진리를 따를 때만 얻을 수 있다. 중세시대 유명한 교부 어 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에 대해 아들 어거스틴은 이렇게 회상했 다.
“어머니는 결혼 생활에 불성실한 남편을 인내했으며, 그것 때문 에 결코 남편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초지일관 믿음 가 운데 남편을 위해 주님의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도 아내인 어머니를 품위 있게 대했습니다. 아버지가 어쩌다 화를 내는 일이 있어도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았고 대항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침묵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화가 진정된 후에야 비로소 조용히 잘잘못을 가렸습니다.
온순한 남편들과 결혼한 여인들이 이따금 매를 맞아 멍이든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남편을 욕하면 어머니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녀들의 잘못을 꼬집어 충고했다고 합니다. ‘결 혼 서약이 끝나는 순간부터 여자들은 스스로 남편의 충실한 종이 되었다는 문서를 받았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주인을 거스르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는 다혈질인 남편과 살았지만 한번도 매를 맞은 적이 없 습니다. 불화로 집안이 시끄러운 적도 없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남편을 비난하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고, 남편을 싫어하 는 얼굴빛을 본적도 없습니다. 여인들이 어머니의 순탄한 가정 생활과 인내의 비결을 물으면, 어머니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은 자 신의 소신을 말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와 상담한 후 그대로 실천한 여자들은 좋은 결과를 얻어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그렇지 못한 여자들은 계속 고통 속에 살았다고 합니다”(<참회록>, 179- 180pp).
모니카의 남편은 후에 주님을 영접하게 되고 아들은 교회를 여러 이단에서 보호한 훌륭한 주님의 일꾼으로 자랐다. 아들이 회상하는 엄마의 아내로서 모습이 이와 같았고, 하나님은 모니카와 그녀의 조언대로 성경적인 아내의 역할에 충성한 이들의 삶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셨다. 참 사랑을 받게 하셨고 구원의 역사가 남편과 자녀의 삶 가운데 일어나게 하셨다.
참 사랑은 죄 많은 남편이 결코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 사랑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참 신랑이신 예수님만이 보장하신다. 그분은 이미 당신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셨고 당신의 모든 연약함, 부족함을 거룩하게 씻어 영광스럽게 하실 때까지 신실한 사랑을 아낌없이 주실 것이다. 주님 사랑이 당신이 남편을 사랑 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이자 끝없는 원동력이다. 그 영혼에 주님의 사랑이 불타오르지 않는 사람은 남편을 희생적으로 존경하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면서 돕는 배필로 사랑하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그 사랑으로 온전히 만족하라. 영원한 당신의 신랑의 사랑으로 항상 당신의 마음을 채우라. 그리고 남편에게 그런 사랑을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말라. 남편 사랑을 조건으로 걸고 당신의 역할을 할지 말지 결정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만족하여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남편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에게 존경과 사랑과 순종으로 신실하게 대하라. 그런 아내에게 하나님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사랑을 부어주시고 육신의 남편을 통해서도 사랑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결혼을 위해 기도하는 형제들은 외모나 조건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부를 신부로 맞아라.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지혜로운 신부는 진주보다 귀하다(잠 31:10). 현숙한 아내를 얻는 것은 여호와의 은총과 복을 얻는 것이다(잠 18:22). 미혼 자매들은 그런 아내가 될 준비를 하고, 홀로 된 자매들은 참 신랑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신부인 교회로서 성도를 사랑하며 하늘나라 혼인 잔치를 예비하자.
가정에 관한 이 시리즈 말씀을 “사탄의 거짓말”이란 주제로 묶은 이유는, 오늘날 하나님이 제정하신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풍성히 누리는 기독교 가정이 드물기 때문이다. 마귀는 때론 위력이 조금도 없는 상상 속 원수 같지만 그리스도인 가정마다 갈등과 전쟁과 불만족이 쉬지 않고 일어나 상처와 쓴 뿌리로 곪아 터지는 걸 보면 사탄이 마지막 날이 다가올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며 발악하는 것이 분명하다. 거짓에 속지 말자. 진리로 무장하자. 성령께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당신의 삶을 충만하게 하시고 넉넉히 사탄을 이기고 물리치게 하시길 기도한다.
가정을 무너뜨리는 사탄의 거짓말: /엡5:22-33/ 조정의목사
2021-09-01 05:00:25
3.남편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
우리는 첫째, 결혼은 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탄의 거짓 에 속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제정된 결혼을 망치고 우리의 행 복도 놓친다. 둘째, 부부는 결국 남이라는 세상 거짓에 속아 하나 님이 짝지어주신 세상에서 가장 친밀하고 유기적으로 연합된, 생 명의 유업을 함께 이어받을 한몸의 관계에서만 누릴 수 있는 신뢰와 책임 있는 사랑을 맛보지 못하고 쉽게 벽을 세우고 갈라서려 한다. 오늘은 가정을 무너뜨리는 사탄의 거짓말 그중에서도 남편이 가장 많이 속는 거짓말을 살펴보기 원한다: 남편은 존경 받을 권리가 있다.
2008년 7월 결혼을 앞두고 “자존심을 세우지 않으면 결혼생활 이 평탄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내 자존 심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히 사랑하는 남편이 되어야겠다’는 각오 를 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더욱더 분명하게 깨닫게 된 사실은 나는 아내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권리가 박탈당하거나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과 존경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원망이나 분노가 치솟는다. 수시로 자존심 을 세우고, 권리를 보장받을 때까지 치열하게 싸운다. 최초의 가 정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너는 남편을 지배하려 하나 그가 너 를 다스릴 것이다”(창 3:16, 우리말성경)라고 심판하신 것처럼, 가정은 지금까지 권리를 찾으려는 전쟁이 쉬지 않고 일어난다.
1. ‘남편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라는 거짓말
그러면 ‘남편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은 왜 거짓일까? 에베소서 본문을 살펴보면 사도바울은 분명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 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는가?(22절). 본문의 마지막에도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는 명령이 있다(33절).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생각해 보자. 23절에 나오는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다. 자연스럽게 아내는 남편의 몸이 라 말할 수 있다. 머리는 몸에게 명령을 내리고 필요한 것을 공급 하며 다스린다. 몸이 머리의 말을 듣지 않는 걸 장애라고 말한 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도바울은 머리와 몸의 비 유를 들어 아내가 머리 된 자기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아내들도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할 지니라”(24절).
확실히 주신 명령이나 맡기신 역할을 생각해보면 남편은 아내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하고 아내는 남편의 말에 순종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남편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이 왜 거짓일까?
첫째, 성경은 아내에게 순종과 존경을 명령했지, 남편에게 그것 을 요구하라고 명령하거나 얻어낼 권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본문에서 아내들에게 주어진 명령과 남편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아주 명확하게 구분된다(아내들아, 남편들아). 각자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반영하는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는 말이다. 절대 이 말씀을 자기 권리를 찾는 말씀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가령 남편은 아내에게 순종할 것을 강요하고, 아내는 남 편에게 사랑할 것을 강요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남편이 주목해야 할 말씀은 “남편들아” 이후에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다. 남편이 가장으로서 아내가 하나님 뜻에 순종하 도록 돕고 인도하고 돌볼 책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내의 존 경과 인정과 복종을 마치 자신이 요구할 권리처럼 강요하고 그 권리를 찾기 위해 다투는 것은 절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이 아니다.
둘째, 만일 당신이 구원받은 남편이라면 더더욱 당신은 권리를 포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 라”(마 16:24). 그리스도 제자의 삶은 기본적으로 권리를 내려놓는 삶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 그것을 명확하게 말한다. 자 기 욕심, 자기 욕망, 자기 권리, 자기 유익 등을 그리스도가 요구 하실 때 부정하고 내려놓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다.
심지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요구하셨는데, 이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줄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 가…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 고”(눅 14:26).
상상해 보라. 남편이 가정에서 아내의 존경과 인정 그리고 즉각 적인 순종을 얻기 위해 자존심을 내세우고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 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를 지고 좇는 자의 모습이 되겠는가?
셋째, 그리스도가 남편에게 보여주신 머리 됨의 본에 역행하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에게 존경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본문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남편은 머리이 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인 교회를 대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대해야 한다.
본문이 묘사하는 그리스도의 머리 됨(리더십)을 자세히 살펴보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 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게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26-27 절).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자 신을 내어 주기까지 하셨다(25절).
존경받고 찬양받고 감사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께서 권 리를 주장하지 않고 겸손히 자신을 낮춰 자기 신부를 이토록 사랑하셔서 우리 남편들에게 본을 보이셨는데, 어떻게 남편이 아내 에게 권리를 주장하면서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자기를 내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교회로서 우리가 받은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 아닌가? 보여주신 본에 역행하는 것이다.
2. ‘남편은 사랑할 책임이 있다’라는 진리
남편은 아내에게 존경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성경이 그것 을 명령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는 주를 위해 마땅히 권리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며, 교회의 남편이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본은 권리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권위로 신부 를 죽기까지 책임지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면 남편이 닮아야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가정 안에서 남편 이 맡은 머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사탄이 말하는 거짓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알아보자.
첫째, 남편의 사랑은 자기희생적 사랑이다.
특히 한국은 오래전부터 유교의 영향으로 가부장적인 문화가 강 세를 띠었다. 오늘날 빠르게 변하고 있긴 하지만, 보수적인 문화 가 주류인 교회에서 성경이 말하는 가장, 머리 됨에 유교의 가르침이 섞여 있는 걸 자주 본다.
성경은 남편이 가정의 머리이며 하나님께서 가장인 남편에게 권 위를 주셨다고 말한다. 아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남편 입장에서 그 권위는 자기 유익을 위해 휘두르라고 주신 권위가 아니다. ‘내 가 가장인데’, ‘어디서 감히 가장이 말하지도 않았는데’라는 식의 태도는 성경이 아니라 유교 문화가 만든 폐해다. 형제, 자매 사이 의 성별에 따른 권위구조 역시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희생적이라는 것이다. 25절에 나오는 것처럼 남편이 아내에게 실 천할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그 교회를 위하여 자 신을 주신 사랑, 그 희생적인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 데 ‘섬기는 자’로 계셨던 것처럼 가장인 당신은 가정에서 ‘섬기는 자’, ‘희생하는 자’로 있는 것이 옳다. 그것이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몸인 교회에게 보여주신 사랑이기 때문이다.
둘째, 남편의 사랑은 책임지는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신부인 교회에게 쏟으신 사랑의 두드러진 특징은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26-27절을 보면 주님 은 교회를 깨끗하게 씻으시고 거룩하게 만드신다. 언제까지? 자 기 앞에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신부인 교 회로 세우실 때까지 끝까지 책임지고 돌보신다.
29절에는 다른 표현이 나온다.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양육 하여 보호하신다. 교회에 필요한 양식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잘 보살피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남편으로서 아내인 교회에 게 베푸신 사랑이 바로 이랬다. 그리스도의 머리 됨은 권리를 주 장하고 교회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끝까지 교회를 사랑으로 보살피고 그 필요를 채우고 온전하고 아름다운 아내가 되기까지 책임지고 돌보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아내의 흠이나 티가 반복적으로 나타날 때 남편은 권리를 내세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남편이 실천해야 할 사랑은 끝까지 그 약점 을 품고 거룩하게 씻어 영광스럽게 되도록 책임지는 사랑이다.
책임이 점점 사라지는 세상이다. 혼인신고 없이 사는 것, 동거하 는 것, 언제든지 책임질 일이 생기면 갈라설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에 기초하여 백성의 연약함에 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임지시는 사랑을 보여주셨다(헤세드). 이 세상에서 그 사랑을 가장 가까이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은 가정 그것도 끝까지 책임지는 남편의 사랑이어야 한다(32절).
셋째, 남편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랑이다.
에베소서 본문이 강조하는 남편과 아내 사랑의 목적이 바로 이것 이다. 세상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다. 그들이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참 사랑을 나타낸다(32절).
‘래디컬’의 저자 데이비드 플랫은 <카운터 컬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내를 함부로 대하면 그리스도는 백성을 학대하 는 분이라고 세상에 외치는 꼴이다. 아내를 무시하면 그리스도 는 거룩한 백성들과 교제하길 싫어하는 분이라고 설명하는 셈이 다. 아내를 버리면, 그리스도는 제 백성을 저버리는 분이라고 소 개하는 것이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 해 어떤 그림을 문화 속에 제기하고 있는가?”(209페이지).
남편들이여, 세상에 그리스도를 어떤 모습으로 나타내는가?
3. 거짓말에 속지 말고 진리를 따르라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탄의 거짓을 피하고 진리를 따를 수 있을까? 존경받을 권리, 순종으로 지지와 인정받을 권리를 요구 하고 얻기 위해 싸우기보다 희생적인 사랑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을까?
첫째, 사탄의 거짓을 대적하라(엡 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최초의 가정에 갈등이 일어난 건 사탄이 하와에 게 다가와 권리를 주장하라고 부추겼을 때, 거짓으로 속을 때였 다. 남편은 사탄이 오래된 이 거짓말을 듣는 순간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집안이 정리되어 있지 않고 할 일이 너무 많이 쌓여있다. 아내가 아이들과 씨름하느라 하루 종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민하는 남편은 싸움 을 일으키지 않는다. 문제는 사탄이 남편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는 것이다. ‘하루 종일 가족을 위해 희생한 남편이 이런 대우를 받는 게 억울하지도 않니?’ ‘밖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서 또 일한다고? 간곡히 예의 있게 요청해도 모자랄 판에 저렇게 명령 조로 집안일을 부탁한다고?’ ‘너는 존경받을 권리가 있어!’
사탄의 거짓에 속은 남편은 육신이 원하는 열매를 실컷 맺는다.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 모든 악독, 노함, 분냄, 비방. 그러면서도 자신은 절대로 옳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하지만 당신은 틀렸 다. 사탄에게 져서 옛사람의 습관대로 육신의 열매를 맺은 것이 다.
사탄이 당신을 속이는 그 순간이 바로 당신이 그리스도의 사랑 을 실천할 지점이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섬기는 자’, ‘희생하는 사랑’을 보일 것인가? 아내가 신경질이나 짜증을 섞어 반응할지 라도 당신은 그런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 게 인도할 남편으로서 어떤 사랑을 베풀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아내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친절하게 대하면서 내가 받은 사 랑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평소에 아무런 일이 없고 기분 좋을 때 누구나 어느 정도 희생한 다. 의지를 가지고 사랑을 실천한다. 문제는 사탄이 당신에게 권 리를 찾으라고 요구할 때, 그때 그 말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요구 하시는 사랑을 실천하겠냐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아름 답고 영화롭게 나타내는 남편의 사랑은 가정의 위기나 갈등 속 에 더욱 빛이 난다. 바로 그때가 당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 하기 위해 사탄과 더욱 거세게 싸워야 할 때이다.
둘째, 복음으로 무장하라(엡 6:13-17)
하나님은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다. 에베소서 6 장 13-17절에 보면 하나님의 전신갑주: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호 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가정을 무너뜨리려고 울부짖으며 찾아다니는 사자가 사탄이라 면 부지런히 그와 맞서 싸우기 위해 하나님 주신 ‘전신갑주’로 무 장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 가정 이 속수무책으로 사탄의 거짓에 속아 무너지고 망가지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어그러진 모습을 나타내는 건, 그들이 영적으로 탄탄 하게 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날마다 복음으로 남편과 아내가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단지 주 일 예배에 형식적으로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말씀으로 무장되어 예수님께서 마귀를 말씀으로 무찌르신 것 처럼 성령의 검으로 마귀가 거짓을 속삭일 때 쳐낼 수 있어야 한 다. 특히 남편들은 가정의 영적 리더로서 아내와 자녀가 영적으로 잘 양육 받고 있는지 보호받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괴한이 집을 습격하거나 아이들을 따라다닌다고 생각해보라. 남편이 깨 어 경계하고 집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에베소서 6장 18절에 나오는 것처럼 영적 전쟁을 염두에 두고 항상 깨어 구하고 성령 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드려라. 그리 고 가정에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고 있는 것처럼 영적 필요를 공 급할 책임을 다하라(아내에게 떠넘기지 말라).
말씀과 기도를 통 해 구원의 은혜, 복음의 진리, 믿음의 열매가 아내와 자녀의 삶 가운데 풍족히 넘치도록 그리고 남편 자신의 삶도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잘 무장되어 모든 사탄의 공격을 막아내도록 하라. 아직 결혼하지 않은 형제는 상대방의 기준을 세우기 전에 먼저 이런 남편의 자질을 갖추도록 노력하라.
성경의 두 번째로 가장 큰 계명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남편들이여 당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은 아내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희생적이고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을 당신이 받았 다면 그 사랑을 보여줄 가장 일차적인 대상이 아내란 말이다. 그 모습을 통해 세상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속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아내를 죽기까지 사랑하라. 자존심과 권리를 내려놓고 끝까지 사랑하라. 하나님께 서 이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당신과 가정에 축복을 더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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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무너뜨리는 사탄의 거짓말: /엡5:22-33/ 조 정 의 목사
2021-01-26 07:32:53
1.결혼은 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이 태초에 가정을 세우시고 나서부터 가정은 사탄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마귀는 최초의 부부 중 아내에게 접근하여 하나 님이 주신 역할을 무시하고 자기 육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도 록 거짓으로 유혹했고, 남편인 아담은 하나님보다 아내를 사랑하 여 거짓에 속아 죄의 열매를 받아먹었다.
결과적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 즉 노동의 고 통, 해산의 고통, 그리고 부부 갈등의 고통은 이후 세워진 모든 가정에 대물림 됐다(창 3장). 사탄은 지금도 가정을 무너뜨리려 한다. 최초의 부부에게 했던 거짓말을 지금도 똑같이 한다. 하나 님이 세우신 가장 기본적인 사회 구성인 가정을 무너뜨리면 교 회 그리고 사회 전체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가정 역시 사탄의 거짓말에 노출되어 있다. 사탄은 세상 사람과 미디어 매체 등을 통해 거짓 풍조를 계속해서 그리스도인 가정 안에 일으킨다. 하나님의 진리로 무장하고 있지 않으면 가정은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질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안전한 집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집 안에 있어도 사탄의 거짓말로부터 절대 안전하지 않다. 오직 성령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만이 우리를 거짓에서 보호한다
에베소서 5장 22-33절은 가정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가 가장 길 고 풍성하게 담겨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 가정을 무너뜨리는 사탄의 거짓말을 담대히 물리치고 오직 하나님의 진리를 따 라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건강한 가정을 세우기를 원한다.1.
1. ‘결혼은 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거짓말
많은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결혼한다. 결혼을 꿈꿀 때, 설레 고 기대하는 바는 주로 자기가 얻고 누리게 될 친밀함, 편안함, 행복 등이다. 결혼할 대상을 찾을 때 무엇을 보는가? 나의 마음을 만족시킬 조건(직업, 나이, 외모, 재산) 혹은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행복의 요건들이다.
왜 사람들이 결혼에 질리고 후회하고 결혼을 끝내려 하는가? 행 복하지 않아서다. 배우자를 충분히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서 죄책 감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다. 내가 기대한 바가 충족되지 않아 서, 내가 행복을 느끼는 것들이 결핍된다고 느껴서, 배우자가 나의 행복을 충분히 채워주지 않기 때문이다(예: 간음, 음행)
이처럼 사람들이 결혼을 시작하고 또 끝맺을 때 가장 중심이 되는 건 자신의 행복이다. 그들은 결혼이 자기의 행복을 위해 존재 한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참일까? 진리일까? 충격적이게도 결혼이 자기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건 거짓이다. 가정파괴범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거짓말이다. 많은 가정이 ‘결 혼은 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탄의 거짓에 속아 불행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2. ‘결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진리
결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몇 가지 확실한 근거가 있다.
첫째,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결혼을 제정하셨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창 1:27). 그 목적은 부부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충만하게 하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더 풍성하게 나타내기 위함이다(창 1:26).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창세기 2장 24절을 인용하면서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 지니”라고 말했다(31절). 모세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세운 최초의 가정이 앞으로 세워질 모든 가정의 청사진이 될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하나님은 아담을 잠재우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 하와를 만드셨고, 그녀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어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가정이 되게 하셨다(창 2:20-25).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담과 하 와 이후 모든 부부를 짝지어 주신 목적 역시 마찬가지다. 결혼은 하나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이 이를 위해 제정하셨다.
둘째, 최초의 가정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행 복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와를 찾아와 거짓을 말했다. ‘너 정말 행복하니?’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명령에 의문을 품고 자기 육신이 원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을 때 다시 말해 하나 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행복을 앞세웠을 때 여자는 범죄했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그분과의 관계에 집중하기보다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는 여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 자기 행복이 하나님 영광을 앞지르자 남자도 범죄했다(창 3:1-8).
오늘 본문도 가정을 다룬 본문인 5장 22절에서 6장 9절(넓게 부 모와 자녀, 종과 상전까지 포함) 앞뒤를 어떤 본문이 둘러싸고 있는지 봐야 한다. 본문 앞 말씀은 ‘육체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죄 가 아니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라’고 명령하고(5:1- 21), 본문 뒤 말씀은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를 대적하여 전신갑주를 입고 싸우라고 명령’한다(6:10-20).
그러므로 앞뒤 문맥 사이에 있는 오늘 본문에서 남편과 아내에 게 주어진 명령은 그리스도인 가정이 치열하게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을 묘사한다. 만일 우리가 마귀에게 져서 육체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한다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을 벗어버린다면, 최초의 가정처럼 무너지게 될 것이다. 가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가정이 존재하는 이유다.
셋째, 결혼은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한다. 본 문엔 우리에게 익숙한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남편은 아내를 사 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명령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일반적인 명령이다. 하지만 나중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각각의 명령에 아주 깊고 풍성한 의미가 있는 이 유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모든 명령의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언급 되셨기 때문이다(그리스 철학, 유대교 가르침에서 찾을 수 없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되 주께하듯 해야 한다(22절). 그 이유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기 때문이다(23절).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해야 한다(25절).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자 기 지체인 교회를 자신을 내어 주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역할을 힘 있게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근거가 그리스도께 있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리스 도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고 많이 경험할수록 가정은 그리스 도로 인해 건강한 기능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기능을 다 한다.
또한 가정은 그리스도로 인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 하여 존재한다. 남편과 아내는 가정생활을 통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다. 본문 32절을 보라.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비밀”(무스테리온)은 에베소서에 여러 번 나오는 표현인데 과거에 감추어 졌으나 하나님께서 마침내 드러내신 진리를 말한다. 에베소서 3장에서는 이방인이 유대인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지체가 되는 것,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비밀이라고 말했다(3:3, 4, 9). 오늘 본문에서 비밀은 32절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다. 성령이 교 회를 낳기 전에 그 누구도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신 부 교회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남편과 아내에게 주어진 모든 명령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 이 비밀을 그림처럼 보여준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 듯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고(24 절),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아내를 사랑한다 (25-27). 결국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향하여 하나님 주신 명령대로 순종할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 세상에 아름답게 드러난 다. 이처럼 가정은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한 다. 신자는 가정이 우리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3.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따르라
여기 사탄의 거짓말과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 ‘가정이 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거짓과 ‘가정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 한다’는 진리가 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좇아 살 것인가?
사탄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면 우리의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하지만 그가 내민 탐스러운 거짓을 한 입 베어 물면 결 국 하나님의 영광도 우리의 행복도 잃게 된다는 걸 처절하게 깨 닫게 된다. C. S. 루이스가 말한 것을 이용하여 진실을 말하자 면, 가정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면 우리의 행복도 얻을 수 있지만,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면 둘 다 잃게 된다.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부부가 서로를 대한다면 얼마나 서로에게 행복을 주겠는가? 그리스도처럼 아내를 보호하고 양육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남편.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아내.
문제는 자기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을 내버리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행할 때, 가정은 그리스도와 교 회의 관계에 대해 깨지고 어그러진 그림을 보여주고, 행복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가정을 무너뜨리는 사탄의 거짓말을 버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 가정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행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까?
첫째,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5:18)
남편과 아내에게 주어진 명령은 사람의 노력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문과 연결된 바로 앞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 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부부가 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역할에 충성할 수 있는 힘은 그들 안에 충만하게 거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다.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 하나님의 지혜(5:15), 주의 뜻 (5:17)을 이해하고 묵상하고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힘써라. 특별 히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도록 늘 말씀과 기 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단지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게 아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비춰 주시는 하나님 영광을 아는 빛을 보고 경험하고 사로잡히고 매료된다는 말이다. 사탄의 거짓을 뿌리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 가 얼마나 존귀하고 매력적인 분이 신지 충분히 경험해야 한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사탄이 내미는 여 러 가지 거짓된 우상이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일 것이다.
결혼을 꿈꾸고 기대한다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결혼을 꿈꾸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영 광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을 개인 그리고 가정의 목표로 삼아라. 하나님의 영광을 아름답게 나타내도록 배우자와 자녀에게 어떻 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있게 행하라(5:15). 자녀가 어려서부터 우리 가정은 하나님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가정이 라는 것을 보고 배우도록 하라. 성령 충만함을 받아 그리하라.
둘째, 복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라(6:11)
성경은 우리 싸움의 원수가 배우자가 아니라 마귀라고 분명히 말 한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아무리 사소해도 그 깊은 곳에 악의 영들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의 거짓말, 행복이 결혼의 최우선에 있다는 거짓말에 속지 말라. 독신의 경우 결혼이 행복의 필수조건 이란 거짓말에 속지 말라. 이 또한 자기 행복에 치중된 거짓말이다.
사탄이 욥에게서 행복의 조건을 모두 빼앗아갔을 때, 욥은 하나 님을 욕하지 않고 도리어 그분께 영광을 돌렸다. 당신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갈망하라. 그럴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시고 당신에게 더 큰 행복을 주실 것이다. 그분의 주권을 신뢰하고 선하심을 믿으며 ‘지금 너 행복하니?’라는 사탄의 유혹에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 나의 가 장 큰 행복이다’라고 응수하라. ‘하나님은 너의 행복에 관심이 없을 걸?’이라고 사탄이 또다시 도발한다면, ‘나의 영원한 복을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을 나는 신뢰할 거야’라고 말하라.
거짓말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을 복음을 통해 맛보았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으며, 앞으로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사탄의 그 어떤 거짓말도 그 사랑 앞에 힘을 잃는다. 그러니 복음으로 항상 무장하여 사탄을 대적하라.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의심과 불신과 불만과 염려의 목소리를 복음으로 하나하나 제거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 나아가 그 사랑을 깊이 묵상하라.
가정에서 한 사람만 복음을 믿는 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사람이 함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마귀의 거짓에 복음으로 맞서면 더욱 힘이 있지만, 혼자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에 맞서 복음으로 진리를 붙잡고 싸울 수 있다. 때론 하나님께서 이를 통 해 믿지 않는 배우자와 자녀를 구원하기도 하신다(고전 7:14, 16; 벧전 3:1). 그러므로 주와 동행하면서 맡겨진 역할에 충성하 라. 그렇게 하기 위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복음으로 무장하여 마귀의 거짓말과 싸워 이겨라.
하지만 항상 이런 결과가 생기진 않는다. 배우자나 자녀가 전혀 복음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복음의 원수처럼 행할 수도 있다. 그럴 때도 여전히 복음의 능력으로 살 수 있다.
극단적인 경우 믿지 않는 배우자가 자기 행복을 위해 결혼을 깨 고 가정을 떠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 성경은 이럴 때 갈라서도 좋다고 말한다(고전 7:15). 이것은 복음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복음을 거절한 자가 택한 죄의 결과를 부부로서 함께 경험할 뿐이다. 성경은 형제나 자매는 이 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홀로 믿는 자라면, 당신에게 어떤 상황을 허락하신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복음의 능력으로 살라. 성령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살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 함 없이 당신에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임할 것이다.
성경엔 결혼의 유비가 많이 등장한다.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은 선지자 호세아와 음란한 아내, 이사야, 에스겔, 예레미야에 등장 하는 신실한 남편과 음란한 아내로 묘사된다. 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결혼의 비유 그 마지막 장면은 참 아름다운데, 바로 계시 록에 기록된 거룩한 신부 교회와 교회를 위해 죽임 당하신 신랑 예수님의 혼인 잔치 장면이다.
참 놀라운 비밀 아닌가! 여전히 고멜처럼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한 우리지만,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당신의 아름다운 신부로 맞이할 것이란 사실이. 당신의 가정에서 이 놀라운 진리가 온갖 사탄의 거짓을 능히 이기는 힘 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스도를 위해 세워진 가정, 하나님 영광을 추구하는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가정을 무너뜨리는 사탄의 거짓말 /엡5:22-33/ 조 정 의 목사
2021-01-26 07:38:53
2.부부는 결국 남이다
건강한 가정 없이 건강한 교회는 있을 수 없다. 거짓의 아비 사탄 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가정을 세우신 날부터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계속해서 거짓말을 쏟아내고 있다. 갈등과 전쟁을 겪고 있는 가정마다 사탄의 거짓에 속지 않은 가정이 없다.
가정파괴범 사탄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가정을 무너뜨려 그것을 기초로 세워진 사회 그리고 교회까지 정복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사탄의 그 계략을 진리의 검으로 무찌르게 하신다.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반드시 사탄의 거짓말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야 한다(#1. 결혼은 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1. ‘부부는 결국 남이다’라는 거짓말
‘부부는 엄밀히 따졌을 때 남이다’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부모와 자녀는 같은 핏줄로 이어졌기 때문에 본 능적으로 끌리고 정이 가고 유대감이 생기지만, 핏줄이 다른 배 우자는 여차하면 남남이 될 수 있다는 거짓을 은연중에 믿는 사 람이 많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에서 배우자를 ‘물’로 보는 것이다. 혈육은 운명이지만 부부는 선택이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지만, 선택은 취소할 수 있다.
법률적으로도 부모와 자식 간에 연을 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만, 부부는 쉽게 남이 될 수 있다. 수많은 이유, 심지어 ‘성격 차이’ 라는 애매모호한 이유로도 부부는 이혼하여 남이 된다. 2019년 에도 약 11만 쌍의 부부가 남이 되었다(결혼은 24만 쌍, 50%). 그래서 많은 사람이 부부는 쉽게 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부가 갈등 중에 쏟아내는 말속에서도 ‘부부는 결국 남이다’라는 거짓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너희’, ‘우리 집’, ‘너희 집’이란 표 현에서 배우자는 ‘우리’에 속해있지 않고 ‘너희’에 속해있다. 부부의 갈등이 깊어질 때, 배우자는 쉽게 반대편에 두고 싸워야 할 적 이 된다. 자녀 같으면 잘 양육하고 보호하면서 사랑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것도 배우자는 잘 안 된다. 팔은 안쪽으로 굽는다고 하는데, 자녀는 팔 안쪽에 배우자는 밖에 있는 듯하다.
미움과 다툼이 생길 때 ‘어떻게 하면 배우자의 마음을 헤아려 정 서적, 감정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배우자의 필요를 공급하 고 잘 돌보아 어떻게 함께 기쁨과 만족을 나눌 수 있을까?’ 보다는 ‘저 사람은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모를 수 있지? 어떻게 저 남(여)자는 나의 필요를 공급하지 않고 도리어 내 기쁨과 만족을 빼앗아가는 걸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과 함께 행 복하기를 원합니다’가 아니라 ‘당신이 없으면 아마 더 행복할 겁니다’로 반응한다. 배우자는 이렇게 쉽게 남이 되고, 적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최초의 부부가 사탄의 이 거짓말에 속았다는 것이 다. 아담은 아내를 보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기쁨으로 노래하며 그녀와 결혼했지만(창 2:23), 범죄 후 하나님께 자기 아내를 가리켜 ‘당신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라고 불렀다(창 3:12).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배우자는 종종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지만, 너무도 쉽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남자 혹은 여자’가 된다. 쉽게 남이 된다. 그런데 부부를 그런 관계로 보는 것이 옳을까? ‘부부는 결국 남이다’라는 말은 참인가?
2. ‘부부는 한 몸이다’라는 진리
그렇지 않다. ‘부부는 결국 남이다’라는 말은 사탄이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부부를 남이라 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성경에서 가장 강력하게 연합한 친밀한 관계, ‘한 몸’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부부가 한 몸이라는 진리를 강력하게 확증하는 이유가 적어도 세 가지 있다.
첫째, 하나님은 부부를 한 몸으로 만드셨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두 사람을 부부가 되 게 하셨는데, 남자인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 몸의 일부 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창 2:21-22). 남편 아담은 아내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노래했는데(창 2:23), 단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내는 남편 아담의 몸에서 나와 결혼을 통해 다 시 아담과 한 몸을 이룬 것이다.
물론 실제로 남편의 몸에서 나와 아내로 만들어진 여자는 하와 가 유일하다. 하지만 최초의 부부는 이후 세워진 모든 부부의 청 사진 역할을 한다. 사도 바울은 본문 31절에서 창세기 2장 24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될지니”(미래형, 일반 원칙). 모든 남편과 아내는 부모에게서 떨어져 나와 두 사람 이 한 육체, 한 몸을 이룬다.
특별히 “합하여”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꼭 달라붙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같이 단단히 하나가 된 것을 가리키며, 부부가 두 인격체이지만 마치 ‘한 육체’가 된 것처럼 아주 밀접하고 친밀하고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성적, 정서적, 관계적, 영적으로 한 운명 공동체(벧전 3:7,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합하여”(수동형). 하나님이 모든 부부를 한 몸으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부부는 결국 남이란 말은 거짓이고, 부부가 한 몸이라는 것이 진리다.
둘째, 하나님은 부부가 남이 되는 것을 미워하신다.
부부는 결국 남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부부 가 남이 되는 걸 어떻게 보시는지 확인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말 2:16). 예수님은 바울이 인용한 창세기 말씀을 사용하시면서,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9:6). 남편과 아내를 한 몸으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으니 사람이 나누는 것은 죄라는 것이다.
‘이혼이 죄라고?’ 당신은 발끈할지 모른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듣는 사람들도 그랬다. 그들은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 서 이혼할 수 있게 하지 않았냐고 따져 물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나 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 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8~9).
이 말을 잘 생각해보라. 우리가 아무리 법적인 절차를 밟고 둘이 협의하여 이혼했어도, 하나님 보시기엔 여전히 한 몸이란 말이 다. 그래서 이혼한 사람이 재혼하면 전남편, 전아내에게 간음하는 것이고, 이혼한 사람과 재혼한 사람 역시 간음한 것이다. 사람이 나눴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부부를 한 몸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마 5:31-2; 막 10:11-12).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부부의 남남 됨은 첫째, 간음(마 19:9), 둘째, 불신 배우자가 갈라서기 원하는 경우(고전 7:15), 마지막으로 죽음밖에 없다(롬 7:2-3).
그 외 부부가 남이 되는 모든 경우를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가증 한 죄로 보신다. 왜그런가? 하나님께서 부부를 강력하게 연합 된 한 몸으로 만드시고 끝까지 하나 되길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부부는 결국 남이란 말은 아주 악하고 무서운 거짓말이다. 하나님께서 부부가 갈라서는 것을 미워하시고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 문이다. 하나님은 부부를 한 몸으로 창조하시고 계속해서 한 몸을 이룰 것을 요구하신다.
셋째, 하나님은 한 몸된 부부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한 몸 됨을 선포하신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명령한 본문 말씀이 일반적인 가족 구 성원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예의나 기본적인 원칙 이상인 이유는 그 근거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라는 큰 비밀이 제시되고 있어서다.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고,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한 몸 됨을 제대로 반영하고 선 포하기 때문이다.
28절 부터 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 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 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28~30절).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자신의 필요를 제때 공급하 고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연약하고 부족한 지체가 있어도 내 몸 이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고 아끼고 더욱 정성껏 돌본다.
그런데 성경은 남편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하 라고 명령한다.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몸에게 하듯 아내에게 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몸의 지체인 교회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신다.
부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세상에 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몸 됨을 보여준다. 배우자를 남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가정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언제든 남으로 여길 수 있는 분이라고 세상에 말하는 셈이다. 어떤 갈등과 어려움 속에서도 부부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가정은 그리스도와 교회는 절대 남이 될 수 없다는 진리를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다.
영원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영원한 신부 교회가 서로에게 머리 가 되고 몸이 되어 하나로 영원히 연합되어 있다는 이 큰 비밀을 ‘한 몸’을 이루는 가정이 예시로 세상에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사 탄이 부부의 하나 됨을 어떻게든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다.
3.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따르라
여기 거짓과 진리가 있다. ‘부부는 결국 남이다’라는 거짓과 ‘부부는 한 몸이다’라는 진리이다. 당신은 무엇을 따르고 좇을 것인 가? 사탄의 거짓에 속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할 것인가?
‘부부는 결국 남이다’라는 사탄의 거짓은 때로 당신의 감정을 어루만져 위로하고, 배우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죄채감을 줄이고,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행복을 가져다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탄의 거짓이 그러하듯 ‘부부는 남이다’라는 거짓을 따르면 결국 부부가 한 몸일 때 누릴 수 있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빼앗기고 하나님 주신 역할을 내팽개치게 되고 그리스도와 교 회의 아름다운 연합의 비밀을 세상에 어그러지고 망가진 모습으로 보여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실패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따를 것인가? 배우자가 남처럼 느껴질 때, 어떻게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애쓸 수 있을까?
첫째,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기억하라.
30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라고 말했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이 되었는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었는가? 그리스도의 신부 가 되었는가?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죄로 더럽혀졌고 주님의 원 수로 행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주시고 그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연약함과 더러움(죄와 허물)을 모두 씻어내시고 흠 없는 자기 신부로 거룩하게 세우신 것이 아닌가!
배우자가 남처럼 여겨지고, 원수처럼 보이고, 그의 연약함과 반 복되는 죄가 지긋지긋해서 멀리 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생길 때, 그리스도가 지금도 하고 계신 일을 기억하라.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이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일을 반복해서 저지르지 않는가? 그리스도를 반역하는 일도 수시로 하지 않는가? 그때 당신과 한 몸을 이루신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당신을 남처럼 내버리시는가? 멀리 두시는가? 아니 다. 그분은 자기 보혈로 맺은 언약에 신실한 사랑을 당신에게 날 마다 베푸신다. 정하신 그날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부로 자기 앞에 세우기 위해 늘 당신을 양육하여 보호하신다.
둘째,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따르라.
앞서 말한 부분이 복음을 기 억하고 복음의 능력으로 충전되는 것이었다면, 이제 그 복음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순종하는 일만 남았다.
사탄이 당신에게 ‘이건 남보다 못하다’, ‘남도 이렇겐 하지 않겠 다’, ‘너는 이보다 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속삭일 때 담대 하게 “나는 우리 부부를 한 몸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을 신 뢰해’라고 대답하라. ‘그렇게 한 몸이 되려고 애써봤자 너만 혼 자 희생하고 얻는 것은 하나도 없을 거야’라고 사탄이 꾸짖는다 면 “한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다운 연합을 드러내는 것이 내가 가장 얻기 원하는 것이고, 그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가정을 축복하실 거야”라고 응수하라.
마지막으로 청년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의 비밀을 알고 그것을 간절히 사모하여 부부의 한 몸됨을 이룰 수 있는 사 람을 결혼 대상으로 삼고 꿈꿔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나 라.
그리고 독신인 그리스도인 역시 그리스도와 교회의 한 몸됨을 실 천하고 나타내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교회의 각 지체 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때 이를 통해 충분히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다운 연합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다. 한 몸의 친밀한 연합을 교회 안에서 누릴 수 있다. 성도를 남처럼 여 기거나 몇몇 성도와 거리를 두며 살지 말고, 한 몸으로서 하나를 이루어 함께 살자.
예수님은 잡히시던 날 밤, 아버지 하나님께 제자들이 하나가 되 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하나가 된 것 같이 우리가 하나 될 때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다(요 17).
한 몸을 이룬 가정은 하나님 사랑을 풍성하게 경험한다. 한 몸을 이룬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흡족하게 맛본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룬 가정과 교회는 세상에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한 몸을 이룬 가정, 하나 되게 하신 교회를 힘써 지키자.
결혼할 때 맺은 약속 /엡5:22-27/ 유기성목사
2017-06-13 05:40:46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행복한 부부 생활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고리타분한 책이 아닙니다. 가정에 대한 좋은 책들이 너무나 많지만 어느 기간이 지나고 나면 서점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성경책은 여전히 서점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부부로 맺어주신 하나님은 아무 생각 없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정 설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행복한 부부 생활을 원한다면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은 가정의 중심은 부부라고 가르칩니다.
딸을 탁월한 음악가로 기르려고 일생을 바치다시피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딸은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지만 그 대가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잃어야 했습니다. 오직 딸만 위하는 아내로 인하여 남편의 마음에 심각한 상처가 생겼습니다.
남편보다 더 사랑했던 딸이었지만 그 딸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딸은 어려서부터 아빠 엄마가 헤어질까 노심초사하며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자랐습니다. 행복한 결혼이 어떤 모습인지, 남편과 아내는 어떻게 사랑하며 사는지 보고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엄마와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좋은 엄마가 되는 최선의 방법은 남편에게 좋은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자녀 교육이며 아이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부모가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부부가 먼저 연합한 다음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부는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습니까?
부부 문제는 복잡한데, 하나님의 말씀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예수님께 하듯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할 때 신랑과 신부가 맺는 약속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 잘못 만나서 불행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꼭 어떤 날에 결혼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수가 좋은 날 결혼했다고 잘 사는 것 아닙니다.
부부의 행복은 결혼할 때, 맺은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고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결혼할 때, 그런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는 남편에게 예수님께 하듯 순종하라’ 하셨습니다.
아내가 남편 보다 더 지혜롭고 섬세하고 똑똑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 하신 것은 남편을 행복하게 해 주는 열쇠를 주신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이기 전에 남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남자는 칭찬받고 인정받을 때 가장 행복하고,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 가장 불행해지는 존재입니다. 남자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흘러갑니다. 문제는 아내들이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남편을 돕겠는가?’ ‘내가 아니면 누가 남편에게 바른 말을 하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너무나 쉽게 남편의 단점을 지적합니다.
그것이 잔소리가 되고 면박도 줍니다. 잘 살아보자는 것이고, 남편을 위하여 하는 말이지만 그 때 남편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경험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자의 가장 치명적인 상처는 아내로부터 자존심의 손상을 입는 것입니다. 혹시 시집가는 딸에게 “처음부터 네 남편 잡아야 한다” 하는 어머니가 있다면 딸의 가정을 파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9세기 최고의 화가 중의 한 사람인 폴 세잔느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무명 화가 시절 밤새워 그림을 그리다가 원대로 그려지지 않으면 구겨서 바닥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그 구겨진 그림을 다시 잘 펴서 화실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면 세잔느가 다시 그립니다. 그것들이 유명한 그림이 되었습니다.
어떠한 남성이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이 비웃을 때 자기편을 들어 주고, 용기와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아내가 필요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장점은 남편에게 말하고 단점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요구하는 말은 줄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늘리면 남편은 훨씬 더 좋아집니다.
한 유명한 목사님께서 사모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사모님은 누군가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 사람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면 그 사람이 사모님을 힘들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사모님이 거실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또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또 사모님을 저렇게 힘들게 했나 하고 들어보니 목사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위하여 기도하더랍니다.
그 목사님께서 목회 잘하시고 부부가 행복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게리 토마스가 [사랑학교]에서 어느 고등학교 풋볼 시상식에 갔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수들이 연단에 올라가 상을 받는데, 학교에서 거의 모든 선수들에게 상을 주려고 온갖 명목으로 상을 만들어 시상을 하더랍니다. 최우수상을 받는 학생이 호명되어 강단에 오르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장려상 수준의 상을 받는 학생이 호명되어 강단에 오를 때, 비슷한 수준의 환호와 박수가 터지는 것입니다. 선수 본인은 부끄러워 악수도 제대로 못하는데, 그 부모와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환호는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학생을 향한 것 못지않았습니다. 거의 열광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때,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임이 깨달아졌다고 했습니다.
아내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은 여러분의 남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작은 무엇이라도 잘하면 그것을 마치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천재를 보는 것처럼 기뻐하고 환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아내도 그렇게 해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남편을 보면 잘하는 것이 보입니다.
제 아내가 어디서 말씀을 전할 때, “남편을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한 모양입니다. 그 말이 돌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무슨 천연기념물처럼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제 아내에게 정말 늘 예수님처럼 보일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제 아내의 믿음과 기대와 소원입니다. 그러면 제가 제 아내에게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계속 의식하게 되더라고요. 이것이 남편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았습니다.
아내의 인정을 받은 남편은 내일 떠오르는 태양이 기다려집니다. 용기가 생겨 좋은 남편이 되고 아내를 사랑할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아내는 더 고통스러워합니다. 남편이 사랑한다는데 왜 아내가 힘들어 합니까?
남편이 자기 식대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남편이 부모도 사랑하고 직장도 사랑하고 축구도 사랑하고 술도 사랑하고 미스 킴도 사랑하고 그리고 아내도 사랑한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아닙니다.
성경은 남편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참으로 사랑스럽고 매력적이기에 십자가를 져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갖 죄를 짓고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것을 다 보셨으면서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하나님께 우리를 변호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흠이 없는 거룩한 신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말은 아내가 무슨 잘못을 하든 죄를 짓든, 다 남편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한 유명인이 결혼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그녀와 만나고서 모든 일이 너무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무슨 일이 잘못되면 아내를 버리겠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지독한 이기주의입니다.
함께 살아보면 아내에게 티와 주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결혼 후 가사에 전념하다 보면 화장도 못하고 늘어진 티셔츠와 무릎 나온 바지를 입고 살게 됩니다. 이때 화려하게 꾸민 여인이 옆을 스치고 지나가면 아내는 순간 멍해집니다.
여기에 아내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부족해도 사랑해 줄까?’ ‘내가 나이가 들어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이런 아내의 두려움을 남편이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아내의 티와 주름을 없애는 약을 남편이 가지고 있습니다. 아내의 허물을 남편이 대신 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는 아내는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어집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됩니다.
어느 남편이 “나도 감정의 동물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물은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동물이 되면 안 됩니다.
남편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사랑스럽게 만드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아내도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아내를 보는 제 눈이 달라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에는 남편의 눈으로 아내를 보았으나, 이제는 주님께서 아내를 보는 관점으로 아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제 아내일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하는 딸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생각의 변화였습니다.
남편은 얼마든지 아내의 허물을 대신 질 수 있습니다. 딸에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사랑입니까? 누구와 비교하지 않으며 조건에 따라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특징은 딸의 허물을 기꺼이 대신 진다는 것입니다. 딸이 어디 가서 무엇을 잘못하여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면 아버지는 얼른 달려가서 딸을 뒤로 감추고 말할 것입니다.
“제가 이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제가 다 책임질게요! 아 아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남편 여러분, 장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딸인 여러분의 아내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남편도 그렇게 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 딸과 아내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이 순간 헷갈리면 안 됩니다. 아내입니다. 딸에게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아내에게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딸은 자식이지만 아내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요셉 집사님, [결혼을 배우다]
나는 결혼한 후, 한동안 나를 위해 아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기도드릴 때 주님은 내게 이런 마음을 주셨다.
“네 아내를 사랑하고 사랑해 줄 사람을 찾고 찾다가 가장 사랑해 줄 사람으로 너를 찾았단다.” 순간 놀랐다. 나를 위해 아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철저한 착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내를 사랑해 줄 사람으로 나를 찾으셨다’ 이것을 깨닫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루는 아내가 아파서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 때 내가 아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기도는 전혀 예상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주님, 나와 아내가 한 몸이라는데, 나는 아프지 않은데 아내는 이렇게 아파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나는 한 몸인데 나는 이렇게 멀쩡합니다.” 기도는 점점 절박해져갔고 내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님, 아내의 아픔을 내게 주세요. 그리고 내가 가진 평강을 아내에게 주세요. 우리는 한 몸인데 아내 혼자서만 이렇게 아파하고 있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세요. 내가 아플 게요.”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회개하며 울었다.
이런 사랑이면 아내가 어떤 형편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부는 침실의 순결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언젠가 배우자와 사별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날 어떤 심정이 될지 잠시만이라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 중 가장 친밀한 관계가 부부입니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을 내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영원히 후회를 남길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장 큰 고통은 배우자 이외의 이성에게서 기쁨을 찾으려 한 일일 것입니다. 자신과 한 몸인 배우자를 불행하게 해 놓고 자신이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부부가 싸우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부부는 이기고 지는 싸움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 중 어느 한 쪽이 이기면 반드시 상대방은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부부는 한 몸인데 배우자가 상처를 받았다면 그 역시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아내와 싸우면 항상 내가 이긴다”고 호언장담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다들 부러워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느냐 물으니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해서 다들 웃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한테 물었습니다. "여보 내가 잘못한 걸 알면서 왜 자꾸 나한테 져 주는 거야?" 그러자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한 몸인데 내가 나와 싸워 이겨서 뭐하겠어?"
부부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순종하려고 해도 안돼요” “사랑하려고 해도 안돼요” “이젠 지쳤어요, 포기하고 싶어요” 라고 말합니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젠 정말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순종하게 해 주시고 사랑하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정이 천국 같게 해 주십니다!
이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 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오늘 같이 더워도 우리는 겨울 준비를 합니다. 겨울이 온다는 것을 믿으니까요!
예수님을 믿은 우리 부부는 순종하고 사랑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믿으면 그 길로 가게 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선 배우자에게 행복을 요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행복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하나씩 주님께 순종만 하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예수님이 손님이실 때는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무런 역사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인의 자리에 서시게 될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행복을 회복하지 못할 부부가 없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결혼식 주례에서 한 말이 있습니다.
“사랑이 여러분의 결혼을 지탱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이 여러분의 사랑을 지탱해 줄 것입니다”
살아보면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싸우고 헤어지면 끝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은 헤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미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지켜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하고도 행복하지 않는 순간이 오거든, 결혼할 때 약속을 잘 지켰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배우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주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부부로 거듭나기를 축복합니다.
찬양 604장
남편의 사랑, 아내의 행복 /엡5:25-33/ 유기성 목사
2016-08-27 14:13:36
여러분의 가정이 예수님 안에 행복하기를 축복합니다. 가정의 행복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해 주시지 않으시는가? 고민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하게 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게 해 주시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런지 아닌지 이번 한 달 동안 말씀을 통하여 확인해 보시고, 해결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남편에게 주신 말씀,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남편들은 별로 긴장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가정 상담을 했던 남편 중에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신 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남편들은 한결같이 “목사님, 저도 아내를 사랑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전에는 사랑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아내가 고통스러워합니까? 남편이 자기 식대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돈 10만원을 누구에게 줄 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현금으로 줄 수도 있고 수표로 줄 수도 있고 온라인으로 송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상대방에게 받고 싶은 방법을 묻지 않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로 아내가 원하는 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내의 죄를 대신 남편이 대신 짊어지는 것입니다.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예수님은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자신을 주셨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한 희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하는 일마다 너무 사랑스러운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져주신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남편이 예수님처럼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이처럼 아내의 허물과 죄까지도 대신 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로맨틱한 사랑을 하다가 결혼을 하지만 결혼한 후 ‘좋아지는 감정이 더 이상 계속 일어나지 않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됩니다. 배우자의 허물이 보이고 배우자의 몸매가 달라지고 흰머리가 나고 주름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병들고 실패하고 고생을 함께 합니다. 그러다 보면 감정적으로 뜨거운 사랑은 식게 마련입니다.
“정말 천생연분이고 운명적인 사랑이라면 이렇게 감정이 식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고도 다시 한 번 뜨거운 감정이 일어나는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이런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되는 아십니까? 나이 들면 외롭고 처량하고 고통스럽고 추한 사람이 됩니다. 가정을 위하여 심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행복을 거둘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겠다고 한 약속, 사랑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고 30년 40년 50년 60년을 살았던 사람은 가정이 간증이요 영광이 됩니다.
부부 생활은 뜨거운 감정에 의하여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결혼할 때 한 약속 때문에 지켜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 하신 것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언제나 사랑스럽기만 한 여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앞둔 신부에게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해도 사랑해 줄까?’ ‘내가 나이가 들어서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남편이 뜨거운 감정이 일어나는 사랑만 사랑인 줄 안다면 아내는 정말 두려울 것입니다. 평생 사랑스러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야 할 것입니다.
데이트할 때는 상대방으로부터 사랑받으려고 잘난 모습만 보여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결혼한 다음에도 계속 그렇게 해야 한다면 끔찍한 것입니다. 결혼 한 다음에는 더 이상 꾸미고 감추지 않아도 되어야 합니다.
두려움 없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내의 두려움을 풀어주라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교회가 항상 사랑스러워서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26에 보면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더럽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까? :27에 보면 티나 주름 잡힌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티나 주름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제가 어려서부터 경험한 교회는 문제투성입니다. 많은 친구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허물 많은 교회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드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깨끗하고 거룩해라 요구하지 말고 남편이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깨끗하게 해주고 주름을 펴주어야 합니다.
만약 딸이 어떤 잘못을 했다면, 아버지는 달려가서 딸을 뒤로 감추고 피해자에게 말할 것입니다. “제가 아버지입니다. 제가 책임질게요! 아 아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이것이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딸과 아내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아내입니다. 딸은 자식이지만 아내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편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이혼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부부가 이혼도 한 가지 가능성이라고 생각하기에 이혼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아무리 잘못했어도 아무리 부담스러워도 끝까지 참고 돌봅니다. 부모 자녀 관계는 끊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부는 어떻습니까? 자녀 사이 보다 더 가까운 관계입니다. 한 몸이니 말입니다. 머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머리를 잘라낼 수 있습니까? 머리를 잘라내면 자신이 죽습니다.
부부로 살다보면 두 사람이 한 몸이라는 믿음이 시험을 받을 때가 오게 됩니다. 그 때, “역시 우리는 한 몸이 아니구나.” 하면 안 됩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한 몸임이 느껴질 때 믿으려 하면 평생 한 몸 됨을 누리지 못합니다, 결혼했으면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엡 4:3에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셨는데, 부부야말로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일도 아내 모르게 했다면 남편이 잘못한 것입니다. 아내와 하나 됨이 깨뜨려졌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을 하지 않았냐고 주장하지만 말고 아내가 겪는 고통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몸이 아니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남편은 항상 아내 편이 되어야 합니다. 한 몸이니 말입니다.
아담이 마귀를 따라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 한 일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지은 죄가 아내 때문이라고 고소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향하여 “당신, 왜 이래!” 하면 안 됩니다.
“나는 왜 이렇지!” 해야 합니다. “아내를 변화시켜 주소서”가 아니라 “나를 변화 시키소서” 해야 합니다. 아내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마귀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내 외에 다른 여인에게서 기쁨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과 한 몸인 아내를 불행하게 해 놓고 어떻게 행복할 것을 기대하느냐 말입니다.
남편은 말 한마디라도 아내를 세워주고 기쁘게 하고 힘이 되는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남편의 사랑 표현은 다른 사람들의 사랑 표현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내밀한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의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열 가지 장점 보다 한 가지 단점이 크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의 한 마디는 아내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남편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의 허물을 대신 져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믿어질 때, 아버지처럼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 아내는 비로소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없이 행복한 것입니다.
왜 그것을 못합니까? 돈이 듭니까?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까? 마음만 바꾸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웃집 남자가 그렇게 해주면 큰일입니다.
부부관계는 장사처럼 이득과 손해를 따지는 관계가 아닙니다. 다들 동의하시지요? 그런데 왜 남의 결혼식에 가서는 신랑이 손해니 신부가 이익이니, 말하는 것입니까?
배우자를 택할 때, 자녀를 결혼시킬 때, 그 사람과 결혼하면 우리 집안에 어떤 이익이 될까를 계산하는 것입니까? 장사는 적게 투자하고 많이 받아야 성공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부부 사이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불행한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도 이런 마음을 버려야 하지만, 결혼한 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배우자가 나에게 실망스럽게 행동하기 때문에 나도 더 이상 결혼의 의무를 다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혼을 장사나 사업이라고 여겼다는 말입니다.
내가 얼마 주면 얼마를 돌려받겠지 하는 이익 계산이나 하고 있는데 어떻게 결혼생활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남편은 아내에게 무엇을 받는 것을 기대하고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니까 그 행복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흘려 보내주려고 결혼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만 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입니다.누구나 데이트를 하다가 사랑에 빠지면 엄청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당신만을 사랑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야” “세상 끝까지 함께 할 거야” “그 무엇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거야”
제 정신이 아닙니다. 장사를 이렇게 하면 다 망합니다. 그러나 결혼은 이런 약속으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기르는 것을 주고받는 거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말 안 듣고 속 썩이면 내 버리지 않습니다. 물론 자녀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어떤 부모나 가지고 있지만, 태어난 갓난아이의 가능성을 따져보고 젖을 물리는 엄마가 있습니까? 우리는 자녀에게 계산 없는 사랑을 베풉니다. 그럴 수 있으면서 왜 배우자에게는 계산을 앞세웁니까?
그래서 본 훼퍼는 사랑이 결혼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 사랑을 지켜 준다고 했습니다. 미혼인 청년들, 착각하면 안 됩니다. 결혼한 부부들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면 됐지 결혼식이 뭐가 필요해” “그런 결혼 서약, 다 형식이야” 아닙니다. 결혼식은 지금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의미도 있지만 장래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의 머리되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엡 5:23에서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했는데, 이 교훈에 오해가 많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남편은 아내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여 권위주의에 빠진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 함은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하니 잘 때, 머리는 이불 덮어주고, 엉덩이는 이불을 덮어주지 않게 됩니까? 머리가 아프면 열만 나도 입원시키고, 발목은 부러져도 내버려 둡니까? 아닙니다. 몸의 한 부분이라도 아프면 머리도 아픕니다. 몸매에 대하여 누가 염려합니까? 허리입니까? 엉덩이입니까? 머리입니다. 이것이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뜻입니다.
남편이 머리이기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가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머리가 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아내가 아니라 남편이 할 일입니다.
딤전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기도해야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남편이 담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내를 통하여 맺는 남편은 부끄럽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해 와도 담임목사님이 연락해 오지 않으면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가장이 있는데, 하나님인들 어찌 그 가장 일에 간섭하시겠습니까? 가장이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해 보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해야하기에 스스로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많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랑은 거짓말입니다. 아내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도 아내를 위하여 기도하면 사랑하게 됩니다.
남편이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고 마음이 굳어 버렸고, 병들어서 사랑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도 사람인데 어떻게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내어 주셨음을 알고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자기 안에 왕으로 계심을 정말 알게 되면 남편 안에서 은혜와 사랑이 흘러넘치게 마련입니다. 그 첫 번째 혜택을 아내가 받는 것입니다.
남편이 이처럼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하는 이유는 마귀가 가정을 파괴하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족들에게 주시는 말씀 후에 무슨 말씀을 하였는지 아십니까?
엡 6:12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에 대함이라
마귀가 욥의 가정을 무너뜨리려고 무섭게 시험하였을 때, 가장 큰 위기가 욥 2:9에 나옵니다. 아내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욥 2:10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다행인 것이 남편인 욥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 후 욥의 아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편의 믿음을 따라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나중에 욥에게 복을 배나 주실 때, 자식을 다시 열 명이나 낳을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남편이 성령 충만해야 남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영성일기를 쓰면서 아내에 대한 생각보다 주님을 더 생각하는 것이 위기라고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면 아내에게 너무 소홀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을 제게 알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아내를 위하고 사랑함을 알았습니다.
결혼식 때, 신부 아버지가 딸의 손을 사위에게 넘겨줄 때, 어떤 심정일까요? ‘내가 사랑한 것처럼 자네가 사랑해주게나!’ 할 것입니다.
주님은 남편인 제게 아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아내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사랑하라”
전도 열심히 하는 목사님이 하루는 알콜중독자인 동네 사람에게 전도하려고 찾아갔는데, 그날따라 심방이 너무 많아 피곤하여 전도를 가면서도 그 사람이이 집에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답니다. 한번 그 사람에게 붙잡히면 3-4시간은 꼼짝 없이 술주정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집에 없더랍니다. 너무 기쁘더랍니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어서 몇 번이고 문을 두드리다가 결국 문고리 붙잡고 기도하고 돌아왔는데, 돌아오면서“잘됐다.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기도회 때, 주님께서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답니다.
“너는 어떻게 전도를 목사의 마음을 가지고 하냐?” “내 마음을 가지고 해야지!”주님의 말씀에 꼬꾸라져 깊이 회개하였답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남편의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할 때"(엡 6:29) 행복을 느낍니다. 남편은 아내로부터 보호를 받을 때,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죄인들이 구원받을 때, 예수님은 행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희생만 아닙니다. 남편의 구원이고 특권이고 행복입니다.
이처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예수님과 하나 됩니다.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영적 지도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가정을 위하여 남편이 바로서기를 기도합시다. 남편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기도하고 자녀는 아버지를 위하여, 부모는 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혼자되신 분은 참 남편이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내의 순종, 남편의 행복 /엡5:22-24/ 유기성 목사
2016-08-27 14:07:30
결혼 생활, 부부 생활을 위하여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팀 켈러의 [결혼을 말하다]입니다.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을 설교 중에 전해드리겠지만 다 전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여러분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달이니 가정을 주제로 설교 하는구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애통해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눅 17:28에서 마지막 때에 롯의 가정과 같은 가정이 많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 심판을 받던 날, 천사들이 롯의 가정에 찾아와 빨리 떠나야 한다고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롯의 가족들은 허둥대기만 했지 선뜻 떠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위들 때문입니다. 사위들이 소돔이 곧 멸망한다는 말을 농담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위들을 설득하다가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천사들이 강제적으로 롯의 가족들을 끌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엄히 지시하기를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까운 소알 성으로 급히 도망가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롯의 아내가 문제였습니다. 소돔 성을 막 빠져나오는데, 뒤로 유황불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에 소돔에 두고 나온 재산 생각에 그만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들이 마지막 심판 날 성도의 가정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환란을 주어 믿는 자라도 배교시키려 할 때, 세상 유혹으로 성도들을 유혹할 때, 이단들이 기사와 이적으로 성도들을 미혹할 때, 배우자와 부모와 자식들이 흔들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정말 가정을 믿음으로 세우고 지켜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먼저 아내에게 주신 당부입니다. 그것은 “남편에게 주께 하듯이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혼할 때 아내가 하는 서약이기도 합니다.
결혼할 때 했던 서약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약속이 하나님 앞에서 배우자에게 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부가 결혼할 때 어떤 서약을 했는지 기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약속을 하고 잊어버린 사람을 어떻게 취급하십니까? 결혼식 때 서약을 잊은 사람은 자신이 그 사람인 것입니다.
많은 부부가 결혼과 동거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모릅니다. 약속이 있고 없는 차이입니다. 약속이 없었거나, 약속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거창한 결혼식을 치르고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마쳤어도 동거하는 관계입니다. 결혼은 아내는 복종하겠다. 남편은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결혼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아내는 결혼할 때, 남편에게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입니까? 결혼 생활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그 어떤 관계보다 두 사람을 친밀하게 합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보다 더 가까운 관계입니다. 벌거벗고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입니다. 그 말은 서로의 결점과 허물까지 다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당신은 어쩌면 겁이 많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아주 이기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융통성이 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쉽게 삐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성격이 거칠거나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산만하고, 무신경하며, 둔감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일 수 있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일 수도 있고, 조급하고 신경질적인 성향일 수 있습니다.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독립적이어서 남에게 부탁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커서 진실을 은폐하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열심히 일만 하는 부류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인색해서 남들에게 야박하다는 소라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성격적인 결함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부모 형제나 친구들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 사람들과 관계가 어려워지지는 않습니다. 별로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함께 사는 배우자에게는 다릅니다. 이런 허물들은 배우자의 삶에 직접적이고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깊은 상처를 줍니다.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배우자에게 허물이 있고 그로 인하여 실망하고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받았을 때, 부부의 관계를 지키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결혼식 때, 하나님 앞에서 했던 서약 때문입니다.
호머의 [오디세이]에 보면 오디세이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리스로 돌아가는 길에 사이렌 섬을 지나가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이렌 섬을 지날 때, 여인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미쳐버려 바다에 빠져 죽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오디세이는 선원들에게 밀랍으로 귀를 막으라고 지시하는 한편, 자신을 돛대에 꽁꽁 묶고 무슨 소리를 지르든 무시한 채 앞만 보고 계속 가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섬을 무사히 지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혼 서약은 배우자에게 실망하여 마음이 사납게 일렁일 때,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까지 자신을 돛대에 묶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린다 웨이트 (Linda Waite)는 [이혼이 당신을 행복하게 하나요?] Does Divorce Make People Happy? 라는 책에서“아무리 불행한 결혼 생활을 꾸려 가는 부부라도 이혼하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면 적어도 3분의 2는 5년 안에 행복해질 수 있다”했습니다. 자그마치 3분의 2입니다!
우리에게는 문제가 너무 많고, 사랑은 변덕스러워 부부관계는 언제든지 산산이 부서질 만큼 약합니다. 하지만 결혼 서약이 우리가 성숙해지고 다시 사랑할 수 있기까지 지켜주는 울타리 역할을 해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루이스 스미디스(Lewis Smedes)는 말했습니다. “결혼할 당시에는 장차 아내와 함께 무슨 일올 겪고 어디에 이르게 될지 눈곱만큼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25년 뒤에 어떤 모습이 될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내가 얼마나 변할지 또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지금까지 아내는 적어도 다섯 명의 다른 남자들과 살아왔습니다. 다섯 사내 모두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습니다. 예전의 나와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이름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이름마저 없었다면 내가 누구였는지조차 찾기 힘들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아내에게 고마워하는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모님은 목사님이 결정하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단 순종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즉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제 남편이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다고 하는데요,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생각 같습니다.
하나님, 제가 남편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제 남편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하나님. 제 남편의 생각을 바꾸어 주십시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목사님의 생각이 잘못되고 아내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많더랍니다. 그 다음부터는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그 사모님은 목사님이 무슨 일을 하면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더라도, 잔소리 하려다가도 “참, 잘 하셨어요. 어련히 생각하셔서 그렇게 했겠어요?”한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다시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기도하고 순종하고, 순종하고 기도하면, 반드시 남편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쉬운 길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굴욕적이고 시대착오적이고 불가능한 요구로 받아들여지기도 할 것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했다가 가정이 망하면 책임은 누가 질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아내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부와 부모자녀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엡 5:18-21까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삶은 먼저는 하나님께는 항상 감사 찬양이고 사람들에게는 서로 복종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먼저 가정생활에 적용하라, 아내가 남편에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키기 힘든 말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아내가 남편에게 주께 하듯 복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주께 하듯 복종하는 아내가 있다면 얼마나 놀라워하겠습니까? 이 말은 단순히 남편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이전처럼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셨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주님은 지금 우리 안에 임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살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습니까? 주위의 사람을 주께 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엡 6: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삶의 원칙입니다. 더 이상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정말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을 가장 먼저 남편에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벧전 3: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이 두려움은 공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두려운 분이면서 또한 너무나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어려우면서도 한없이 친밀한 분입니다. 이 마음이 성령 충만함입니다. 그 때,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존 하이드 선교사로 인하여 1904년 인도에 대 부흥이 일어났을 때 이야기입니다. 존 하이드 선교사님이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준비기도를 했습니다. 친구 팽원 존스선교사가 보니 12시간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후 얼굴이 환하여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놀라운 환상,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얼굴에 빛이 나며 기쁨으로 가득한 존 하이드 선교사의 말을 듣는데 팽원 존스선교사의 눈에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늘 듣고 알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한 말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말씀이 그 때처럼 생생히 느껴졌던 때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녁을 먹는 것도 잊고 몇 시간 동안 오직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했습니다.
그리고 시알코트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가 넘쳐 흘러간 것입니다. 인도 부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존 하아드 선교사님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12시간 동안 주님과 함께 거한 것입니다. 설교 준비만 그렇습니까? 가족을 사랑하는 일에 더욱 그렇습니다.
남편에게 복종하기가 힘들다면 주님과의 은혜의 자리에 늘 머물 시간을 더 가지면 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은혜만 사모합니다.” 언제까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까? 흘러넘칠 때까지입니다.
조상이 바이킹이요, 해적이었던 유럽이 어떻게 기독교 사회가 된 줄 압니까? 당시의 해적들은 배를 타고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바다를 무대로 강도질을 일삼던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여자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 여인들은 허구한 날 울고 지내지 않고 해적의 아내가 되었지만, 여기에 보내신 뜻이 있는 줄 알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남편을 잘 섬기고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잘 양육했습니다. 그래서 해적들이 변해서 기독교인들이 되었고, 저들이 개척정신과 신앙을 합쳐서 청교도, 퓨리탄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남편도 아내를 무서워합니다. 자신의 모든 비밀과 허물을 다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 보다 더 잘 압니다. 자신이 형편없는 속물이라는 것을, 심지어 괴물 같다는 것을 아내는 압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 앞에서 가장 쉽게 무너집니다. 배우자가 그러한 부정적인 부분에 대하여 지적할 때, 아픔은 너무나 큽니다. 어떤 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려고 하고 화를 내 보기도 하지만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다가 스스로 무너집니다.
많은 남편들이 자신을 향해 ‘바보 같다. 멍청하다. 실패자다 낙오자다. 속물이다. 괴물이다’고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반응이 남편을 이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이러한 상처와 좌절을 단번에 뒤집어엎을 존재가 들어왔습니다.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사하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어 새 생명의 삶을 살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하시는 가장 먼저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배우자의 마음의 상처와 좌절을 극복하게 돕는 일입니다. 배우자의 마음에 쌓여진 과거의 부정적인 평가와 상처를 깨끗이 씻어주고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어 주는 일에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아내의 사랑과 칭찬은 남편의 깊고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미국 유일의 4선 대통령이고 경제대공황을 극복하고 세계 제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루즈벨트 대통령 뒤에는 그 부인 엘레나 루스벨트가 있었습니다. 루스벨트가 39세 때, 뜻밖에 척수성 소아마비 증세로 의족을 하고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열등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장애인인데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오?”엘레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럼 내가 그동안 당신의 다리를 사랑한 줄 알았나요?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삶이예요” 이 말에 루스벨트는 새로운 용기를 얻었고, 1932년 그는 장애인임에도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고 하면 그렇게 기쁘지는 않답니다. “그 사람이 나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런데 아내가 칭찬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나를 완전히 알고 나의 허물과 문제를 너무나 정확히 아는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의 칭찬과 격려는 남편에게 너무나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남편은 아내에게서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면 남편은 좋겠지만 아내인 나도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대답은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주면서 보상으로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행복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경험하지 않습니까? 배우자의 행복을 위하여 오직 섬기려 하면 배우자도 행복하고 자신도 행복해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과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으로 배우자를 대하기 바랍니다. 배우자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피차 순종하라 /엡5:21/ 유기성 목사
2016-08-25 16:01:42
이번 코스타 때, 코스타 국제총무인 유임근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상담하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다 들 '잘하고 싶은데 안된다'고 하더랍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될까? 잘 믿어보고 싶은데, 안 믿어지고, 바로 살고 싶은데, 삶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답니다.
그러다가 이성교제가 깨어져 고민하는 한 청년과 상담하다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게 되어 괴로와하는 청년들에게 물어 보았답니다. "너는 데이트에 대한 베스트셀러라고 인정된 책을 읽어 본 적 있니?" 그랬더니 대부분이 읽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이성교제에 대한 책 한 권 읽어 보지 않고 이성교제에 실패하고 괴로워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성교제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평생이 걸려있는 문제이고, 인생의 질적 차원이 좌우될 문제인데, 그 문제에 대한 책 한권 읽어 보지 않고 예비결혼학교에 참석해 보지도 않고 이성을 만나고 교제하려고 하느냐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이런저런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 고민하는 일이 많으실텐데, 그 문제를 다루어 주는 책 한권이라도 제대로 읽어 보셨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의 답이 성경에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괴로워하고 답답해 하지만 말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국민일보에서 둘 다 환갑을 넘긴 어느 집사님 부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집사님 부부도 부부 싸움을 하지만 늘 잘 화해한다는 것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여보 해가 지는구먼∼!' 이라고 말했습니다.
부부싸움 후 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말도 안하고 있다가도 서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에베소서 4장 26절에 있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라는 말씀을 떠올리면서 두 사람의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해가 넘어가기 직전에 어느 한편이 "여보! 해가 지는구먼∼!"
이라고 하면 다른 한편이 "그래요? 알았어요∼!"하면서 응답하면 부부싸움이 종료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식사 후 감정을 삭인 후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말씀이 하라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부부 간에 다툴 때가 있을 때, 해질 무렵 자신이 먼저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한마디 덧붙여 "사랑하는 여보! 해가 지고 있네∼!" 친구에게도 ‘해가 지고 있어~' 하고 먼저 화해의 메시지를 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교훈은 간단합니다. 일부러 한 절만 택했습니다.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순종하라”
이것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모든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답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하기 전에 “성령 충만을 받으라” “주께 찬양하는 삶을 살라” “범사에 주님께 감사하라” 하면서 주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다음부터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가족들 서로 서로에게 지켜야 할 교훈을 주시는데, 아내는 남편에게 주께 하듯이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인과 종 사이에 대하여 말씀하는데, 종은 주인을 주께 하듯 섬기고 주인은 자신도 섬길 주님이 계신 것을 명심하고 종들을 압박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교훈들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순종하라!” 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선뜻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얽매여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에게 얽매이는 것조차 싫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 아닙니까? 롬 1:28에서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얽매여요? 특히 아내나 자녀도 마찬가지이지만 남편이나 부모 입장에서는 당혹스럽기까지 한 말씀입니다. 솔직히 살아 보면 가족의 존재조차 부담스럽게 여겨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맥스 루카도"가 쓴 [예수님처럼]이라는 책에서 "매임병"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 우리의 사람관계에서 "매임병"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임병은 가족이나 직장 동료, 교인들 같이 꼼짝없이 매인 사람들 때문에 생긴 병인데, 증상은 짜증, 자주 화를 내는 것, 분노폭발, 속이 타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 특히 가장 가깝고 행복해야 할 가족 간의 문제로 힘들어하는 이들은 성경이 주는 하나님의 해답에 주목해야 합니다.
남편들이 모여 대화하다가 결론 하나를 얻었답니다. “아내에게 매여 사는 것이 차라리 편하다” 어느 목사님께서 이 이야기를 듣고 ‘성경에 기록해도 될 만큼 진리다’라고 해서 웃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 말씀이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살아보니까, 옳더라 하는 고백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얽매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이제부터는 적극적으로 가족들에게 순종해 보십시오. “내가 당신 말대로 해 볼게” “아니 내가 당신 말대로 해 볼게” 그러면 모든 가정 문제는 해결되고 가정은 천국이 됩니다.
한 성도가 이혼문제로 상담을 요청해 왔는데, 어머니를 모시게 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답니다. 어머니를 모실 때, 아내와 의논하였지만 1년이 지난 후, 시어머니와 아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화가 난 남편이 이혼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 분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요즘 가정의 위기는 하나님 앞에서 한 결혼 서약은 어겨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준비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사진 찍는 것 보면 놀랍니다. 경복궁에 갔다가 남산에 갔다가, 한강에 갔다가 옷을 열 번도 더 갈아입고, 앉아서 찍고, 서서 찍고, 둘이 입 맞추고 찍고 영상도 영화처럼 만듭니다. 신혼여행도 멋있는 곳으로 다녀옵니다. 결혼식 비용은 엄청납니다. 그렇게 하면 잘살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결혼식을 하였는데, 이혼율이 세계 제일이고 자살율이 세계 제일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혼식은 거창하게 했지만 결혼식 때 맺은 약속은 너무나 쉽게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후, 서원을 안 지키면, 벌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결혼식 때, 엄숙히 서약했다는 것은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과 배우자와 하객들 앞에서 하는 공개 약속입니다.
[나 000은 /그대 000를 /아내로 맞아, 이제부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평생토록 괴로우나 /즐거우나,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어떤 환경 중에서라도 그대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순종하여, 오늘의 이 약속을 지키기로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굳게 다짐합니다. 아멘]
그러므로 부부 갈등이 생길 때, 서로 어떤 서약을 했었는지를 읽어나 보아야 합니다. 서약한 대로만 살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결혼하는 자녀들에게 “처음부터 확 잡아야한다” 하면 안됩니다. “처음부터 확 잡혀라” 해야 합니다.
어느 아버지가 대학 입시 준비를 하는 딸이 안스러워, 영양보충을 하러, 곰탕 집에 갔답니다. 아버지는 딸의 그릇에 다데기를 듬뿍 넣고, 후추도 넣어 주려고 하자, 딸이 자기는 다데기와 후추가 싫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정색을 하며, “무슨 소리야. 이렇게 해야 맛있는 거야. 잔말 말고 넣어” 했답니다. 그 날 딸은 다시는 아버지와 밥 먹으러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 입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제인 아담스는 평생을 미국 시카고 빈민굴에서 문제아들과 함께 보냈는데, 만나는 부모마다 이런 말을 했다. “딸이 엄마와 얘기하고 싶어 하거든 지금 오븐에 음식이 타고 있어도 먼저 딸과 이야기하세요. 아들이 아버지와 얘기하고 싶어 하거든 가게 문을 닫고라도 아들의 말 상대가 되어주십시오. 그것이 돈을 버는 것입니다.”
1889년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아버지를 일찍 여이고, 알콜 중독자인 숙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또 한 아이는 사랑이 풍성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는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입니다.
두 사람은 2차 세계대전에서 만났고, 한 사람은 분노의 독기를 발산했고, 56세에 지하 방공호에서 자살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평화를 외치다가 80세에 눈을 감았는데, 세계가 애도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어릴 때 그 마음에 분노가 심어졌습니다. 그것을 품고 평생을 산 것입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분노가 심겨지는 것을 결코 작게 여기면 안 됩니다. 아이들이 화를 내는 것을 야단쳐 눌러 버리면 이 아이는 화를 품게 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엡 4:26-27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하고는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했습니다. 자녀가 화를 풀지 못하면 마귀가 틈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많은 청소년들 문제가 다 이런 원인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순종하려면 주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아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피차 순종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오신 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으며,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우리에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바라보면 가족들에게 더 이상 요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바꾸려 하지 않게 됩니다. 가족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그를 기쁘게 해 주게 됩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순종하며, 부모도 자녀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이처럼 가족들에게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가족에게 순종하게 하시는 것은 가족으로 매여 사는 것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복인 것은 잘난 사람과 함께 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마음에 드는 사람과만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뿐입니다. ‘함께 사느냐?, 혼자 사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복을 주셔서 허락하신 것이 하와를 만들어 함께 살게 하신 것입니다. 가정은 그 자체로 축복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딸을 예고에 보낸 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딸은 남달리 피아노를 잘 쳤습니다. 어려서부터 상이라는 상은 휩쓸 정도로 피아노를 잘 쳤습니다. 예고를 졸업할 때, 그 실력을 인정받아서 독일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가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독일로 출국하기 얼마 전 딸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서 병원에 가 보았더니 3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을 찾아가서 기도부탁을 하면서 고백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제 딸에게 한 말은 '밥 먹어! 피아노 쳐!' 두 마디 뿐이었습니다”그러면서 부탁했습니다.“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우리 딸에게 '먹어!, 쳐!‘ 말고 다른 말도 해 주고 싶어요" 하지만 그 집사님에게 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잃어 본 사람들은 비로서 깨닫게 됩니다. 좋은 사람과 살아서 행복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함께 사는 것 자체가 행복인 것입니다.
유대민족이 2000여년 동안 그토록 무서운 시련을 당하면서도 망하지 않았던 까닭은 그들이 비록 나라가 없었고 영토가 없었어도 신앙으로 하나 된 가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왕 되심은 우리가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종은 주님께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차 서로 서로에게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순종입니다. 그래서 영성일기를 순종일기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복되려면 반드시 가족에게 매여 사는 것을 복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에게 매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24 시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얽매인 삶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 완전히 매인 자가 되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 외에 다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술이 없이는 밥을 먹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술을 딱 끊었습니다. 술 마시는 것이 자유입니까? 술 안 마시는 것이 자유입니까?
방탕하게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경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 짓고 사는 것이 자유입니까?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자유입니까?
이처럼 예수님에게 매여 사는 것이 복이듯이 가족들에게 매여 사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매여 살면 반드시 가족들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주님이 그렇게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아내 순종 남편 사랑,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논쟁할 것 없습니다.
모두 다 ‘나 죽고 예수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죽으면 순종이 나오고 남편이 죽으면 사랑이 나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배우자를 위하여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배우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아내는 순종하게 되고 남편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2년 전 연 초에 금식기도를 하였는데, 금식을 바치는 날, 개를 집에 데리고 오기로 결심하였다는 말을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말렸습니다. 제 아내가 개를 싫어하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왜 개 문제가 생겼나면, 미국에서 공부하던 큰 딸이 외로우니까 개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귀국하게 되면서 기르던 개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저의 집에는 불편한 기류가 생겼습니다.
저는 개를 좋아하지만 아내가 싫어하니 아내 편을 들어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허전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살수가 없다 면서 딸을 타이르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딸은 도저히 개를 떼어 보낼 수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택이 단독주택에서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아내가 개를 더 이상 기를 수 없다고 결정을 하고 개를 외삼촌 집으로 보냈습니다. 너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개를 기르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제 딸의 마음은 거절감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저희 내외가 비울 때에 개를 집에 데려왔다가 돌려보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아내가 개를 데리고 와야 하겠다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 아내가 울면서 금식기도 중에 주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딸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개를 데리고 오너라 하고 말했습니다.
자초지종 금식 중에 주신 주님의 마음을 이야기 하고 주님이 나를 받으실 때, 아무런 조건 없이 받으셨다. 내가 너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는 의미로 아무 조건 없이 개를 데려오는 것을 허락한다고 했습니다. 그날 아내도 엄청 울고 큰 딸도 울었습니다. 딸이 하염없이 울더랍니다. 그리고 제 딸 속의 응어리가 씻겨나간 날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배우자가 회개하고 변화되기를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모나 자녀가 변화되기를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께서도 아무 일을 못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와 사랑과 기쁨을 공급받는 사람은 어떤 가족에게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가정이 살고 우리가 사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피차 순종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세우시기를 축원합니다.
행복한 부부를 위하여 /엡5:22-33/ 하용조 목사
2015-05-26 14:45:48
가정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
‘행복한 부부’란 많은 것을 소유하고,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고, 무언가를 성취한 부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부가 바로 행복한 부부입니다.
행복한 부부가 행복한 가정을 만듭니다. 그렇다면 행복한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성경의 원리를 기초로 세워진 하나님 중심의 가정을 말합니다.
창세기에 가정을 이루는 세가지 요소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입니다. 가정의 창설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빠지면 가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 중심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중심이 될 때 어떤 위기와 역경도 다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가정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권위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붕괴는 권위가 없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남편의 권위가 무너질 때 가정은 붕괴됩니다. 권위가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정의 중심이 되면 비록 남편과 아내가 실수하더라도 그 가정의 권위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세가지 요소 중 두번째는 ‘에덴동산’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환경을 에덴동산처럼 쾌적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에덴’이라는 아름다운 동산에 두셨습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해도 환경이 나쁘면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의 공간때문에 싸웠던 것처럼 서로 다툴 수 있습니다. 환경을 잘 만드는 것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비결 중 하나인 것을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가정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가정에는 부모, 부부, 자녀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입니다.
동양 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부모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온데 간데 없고 온통 부모와 자녀에게 모든 시간을 다 빼앗깁니다.
부부중심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에 헌신하다보면 막상 부부사이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통해 본 가정은 하나님중심이었고 에덴이 중심이었으면서도 부부가 중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는 죄가 개입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창세기에서 배울 수 있는 가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남편에게 아내가 모르는 죄가 있다든지, 아내에게 남편이 모르는 죄가 있으면 안됩니다. 부부사이에 죄가 있을 때 가정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가장 행복한 부부의 성경적인 조건은 서로에게 죄를 숨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서로에게 숨기는 죄가 있는 가정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 죄를 다 떠나보내기를 축원합니다.
숨겨진 죄를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집, 좋은 차와 명예를 갖는다고 할지라도 그 가정은 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죄’입니다. 에덴동산에 죄가 찾아와서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났고 생명나무는 감추어지게 되었고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는 세상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성경적인 가정은 성경의 원리 위에 세워지는 가정이요, 이 지침을 꼭 붙들고 지켜나가는 가정입니다. 이런 가정은 결국 마지막 때에 승리할 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행복한 가정은 행복한 부부에서 시작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남편이 주축이 되어서 살아가는 가정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5장 22, 23절과 마태복음 19장, 창세기 2장에서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적인 원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우리 가정에도 적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가정은 ‘독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독립되지 않으면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부모가 연로하셨거나 홀로 되셨을 경우 함께 살아야 하겠지만 이런 경우일지라도 가정이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더 이상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성숙을 의미합니다. 독립할 능력이 없을 때 결혼을 하면 위기가 찾아 옵니다. 결혼을 했지만 부모의 영향권 안에 있게 되고, 종속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과 ‘부모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부모를 공경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진정한 가정, 부부는 부모의 영향권에서 떠나 독립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원리를 부모와 자녀 모두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에게는 자녀를 떠나 보낼 용기가 있어야하며, 자녀에게는 부모의 도움을 되도록 거절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숙한 태도를 보일 때 가장의 권위가 생기고, 가정에 독립성이 생기며, 하나님의 가정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갈 수 있습니다.
물론,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남의 도움없이 살 수 있는 성숙한 단계로 들어서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돕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스스로 가정을 세워나가기 위해 노력할 때 권위를 회복하게 되고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얻게될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완전한 독립을 해야 남편은 아내와 온전히 연합합니다. 부부는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치관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차츰 서로 닮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부부들은 결혼한 후 서로가 서로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근본부터 버려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 함께 가야 합니다. 부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1+1=1’ 이것이 결혼의 공식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일치되는 것입니다.
영적질서가 있는 가정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영적질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하와보다 먼저 지으셨습니다. 이것은 남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는 가정의 영적 책임자요,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여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와를 부르시지 않고 아담을 부르셨습 니다. 그런데 아담은 가장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하와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남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정의 영적 질서입니다.
한편, 여자는 ‘돕는 배필’입니다. 이것이 여자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남편을 고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부부싸움은 부인이 남편의 버릇을 고치려고 하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돕는 자로 부름을 받았지 선 생님으로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모든 여자 여러분, 남편을 자신 또는 다른 남편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남편은 고유한 오직 한 사람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에게 지나친 것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남편은 당신의 종이 아닙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일 뿐입니다. 남자를 조종하고, 요구하고, 고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남자에게는 약점이 있고 따라서 실수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보완하는 존재가 바로 여자입니다. 본문말씀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해야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에서 벗어나면 가정은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은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며, 아내는 교회가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먼저 해야 합니까? 남자가 먼저해야 합니다. 남자가 영적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악처도 사랑하면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모든 실수도 남자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방법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고 자랑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무례히 행하지 말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성내지 말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할만한 것을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부부는 사랑할만 하지 않더라도 사랑하기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은 들으십시오.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가 변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아내는 남편들에게 대들지 마십시오. 이것이 아내에게 유익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항상 경어를 쓰십시오. 말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남편의 머리에 올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또 남편의 발 밑에 있지도 마십시오. 항상 남편의 옆구리에 있으십시오.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갈비뼈’는 ‘옆구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자의 현주소입니다.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부부
진정으로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 해야 될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부부만이 건강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자아상이 건강하지 않은 부부는 열등감, 비교의식, 우월감, 오만, 교만, 좌절감 등으로 뒤범벅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문제 자체보다 열등감, 우월감등이 문제가 됩니다. 결국, 이런 마음의 상처는 모든 관계를 왜곡시키고야 맙니다.
따라서 내적인 상처는 치유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인격과 삶이 하나님 앞에서 거듭날 때 이것이 가정 생활의 기초가 될 것이며 축복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적인 부부상에 대해서 몇 가지 나누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먼저 치유를 받으십시오. 옛 사람이 죽어야만 신앙생활, 가정생활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당해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상처를 받지 않는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상처를 받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지 마십시오. 그래야 인격이 건강해 집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부부는 모두 다 인격적으로 건강하게 치유되며 옛 사람이 변화되어 새 사람으로 되시길 축원합니다. 부부사이에 무슨 말을 해도 상처가 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속는 것이 있습니다.
가정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부부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정이 존재하는 것이지, 가정을 위하여 가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정을 너무 강조하고 부부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하나님은 간 곳이 없고 가정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녀 교육이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부모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잃지 않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부부의 비밀 /엡5:22-33/ 이동원목사
2014-11-30 09:36:58
한 세상 평생을 살아가며 우리는 여러 유형의 다양한 공동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가장 의미있는 두 개의 공동체가 있다면 가정과 교회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절정이 바로 가정의 탄생이라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인 십자가 사건의 결과가 바로 신약 교회의 탄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세상에 태어나며 경험하는 첫 공동체가 가정이라면,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며 경험하는 첫 영적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가정의 기초가 부부관계라면,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부부관계의 진정한 교훈을 우리가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에서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교회라는 현장에서 가정생활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이 주일이 되면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신경쓰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 양육의 열쇠를 자녀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부부관계에서 출발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자녀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잘해 줄 것인가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부부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자녀 양육의 문제는 저는 부모의 무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의 과잉관심, 과잉 보호에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오늘의 부모들은 부부관계의 불건강함을 자녀들에게 쏟아 붓는 물질적인 보상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제공할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부부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유산으로 남겨 주는 것입니다. 얼마전 우리 교회 주일학교 교육 목자들과 자리를 같이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목자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그들이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만장일치로 대답한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부모가 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부관계의 성경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부부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됨이며 결혼의 서약은 하나됨의 서약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본문 31절에서 결혼을 정의하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부는 마땅히 하나되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을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성적인 연합인 것입니다. 그 누구와도 나누어 가질수 없는 부부만의 육체적인 하나됨-이것이야말로 부부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하나됨을 상징하는 그림같은 비밀인 것입니다.
31-32절을 읽어보십시오. 바울사도는 이것을 큰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비밀의 다른 그림을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서 찾습니다.
우리 주님과 성도가 하나됨과 같이 부부도 하나가 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처럼 가정붕괴의 위기의 시대에서 우리 부부가 어떻게 진실로 하나되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부부는 피차에 복종해야 합니다.
본문의 시작은 22절입니다. 그러나 22절 이하의 교훈의 전제를 이루는 것이 바로 21절의 말씀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22절 이하의 부부관계의 교훈을 다루면서 성경은 먼저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의 복종의 교훈이 아내만을 향한 일방적인 복종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작업이 아닙니다. 22절 직전에는 21절이 있다는 것만 유의하시면 됩니다. 21절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가 서로에게 피차에 복종한다면 부부가 하나의 팀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왜 우리가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수 있습니다만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부부사이에서도 손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다 보면 갈등을 피할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기심을 극복할수 있겠느냐가 관건입니다. 바울은 이미 그 해답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라고 말씀합니다.
남편도 그리스도앞에 아내도 그리스도앞에 나와서 그리스도의 주권앞에 서로의 이기심,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분의 주인되심을 경외하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은 남편도 아내도 아니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주인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때 비로소 주안에서 서로를 높이며 서로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2:5에서 바울은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빌2:6-8)마음이 아니십니까?
우리 부부가 만일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마음)만 가질수 있다면 피차에 기쁨으로 서로에게 복종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우리 부부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를 높여 드리고자 하는 그 마음의 자리-거기에서 우리 부부는 비로소 각자의 이기심을 넘어서서 피차에 기쁨으로 복종함이 가능할수 있는 것입니다.
2.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하나되어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남편의 아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아내를 향한 교훈과 남편을 향한 교훈이 동시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시면 바울사도는 아내에게 보다 훨씬 더 많은 지면을 남편에게 할애하고 있습니다.
(25절 이하에서 33절까지) 부부관계의 온전한 연합을 깨트리는 쪽이 아내라기 보다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남편들의 아내사랑의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사랑의 방법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28절에 보면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할지니”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몸을 사랑합니까? 몸을 사랑하려면 몸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가 몸에 필요에 민감하지 못하면 무의식속에 몸을 학대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들은 스스로 자기가 아내를 학대하고 있다고 생각치 않지만 아내들은 남편에 의해 학대당하고 느끼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들이 아내의 정서적인 필요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자기 주장으로 아내를 이끌어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시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가치감을 존중함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3:7에서 “남편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자로 알아 더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남편이나 아내가 다 그릇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다 깨지기 쉬운 그릇 상처받기 쉬운 그릇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아내들은 더 그렇다(더 깨지기 쉬운 그릇)는 말입니다. 정서적인 감수성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수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남편들의 무례함으로 아내들이 상처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 사랑의 시작은 이런 아내의 마음을 보호하려는 배려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귀히 여기라’는 말을 보석처럼 여기라는 말로 번역한 학자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 사도 바울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아가페의 사랑으로 남편들은 아내에게 접근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십자가의 사랑은 아주 단순하고 중요한 한가지 전제에 기초한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께서 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가셔야 했습니까? 그만큼 그는 우리의 존재를 귀히 여기신 때문입니다.
이런 존재의 가치감이야 말로 아가페 사랑의 기초인 것입니다. 오늘 고통받는 아내들의 목소리는 하나입니다. ”제발 나(아내)라는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당신의 말로 행동으로 보여만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가정의 붕괴의 위기는 아내의 존재의 가치감을 너무 쉽게 유린하고 박탈해온 남편들에게 90%의 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흥미있는 사실은 자기 아내가 남편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아내의 90%는 자기라는 존재가 남편에게 짓밟히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남편과의 동침을 거절하는 것은 자신을 지키려는 마지막 자존심의 발로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자리가 축복의 자리가 되려면 평소에 아내 사랑이 앞서야 합니다. 우리가 몸을 잘 돌보면 몸이 우리를 지킬 것입니다.
주님의 가장 큰 기대는 당신의 신부인 교회가 영광스럽게 세워지는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본문은 남편의 존재이유가 자기 아내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아내가 건강하면 가정이 건강해 집니다. 가정이 건강해지면 세상이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기를 결심하고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3. 아내는 남편을 높여주어야 합니다.
가정 회복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남편에게 있다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정 세우기의 역할에서 아내가 결코 책임 면제된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으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5:22-23)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내의 책임 가운데 하나가 남편을 머리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머리는 리더십의 상징입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리더십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가정에 리더십의 상징인 아버지를 주신 이유는 땅의 아버지를 통해서 자녀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를 아버지 되게 하는 것이 아내의 책임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면 자녀들이 또한 리더십의 상징을 잃어버립니다.
아동 범죄 연구소에 나온 통계를 보니까 교도소에 수감된 문제아들의 45%는 아버지와 함께 자라나지 못했고, 다른 40%는 아버지를 미워하며 자라났고 다시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준 제1원인은 어머니인 것으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자녀를 건강하게 키우고 싶으면 아버지를 집에서 세워 주십시오. 심리학자들은 인간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열망을 가르쳐 “father-hunger"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우리 자녀들의 마음속에서의 아버지 이미지를 결정하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입니다.
남편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세우고 아버지를 세울 때 그것이 바로 자녀의 미래를 세우는 것임을 잊지 알아야 합니다.
”아바의 자녀“라는 책을 쓴 작가 브래너 매닝이 어느날 뉴욕의 전철을 탔는데 아이들 넷을 데리고 탄 흑인 어머니가 어린아이들이 울고불고 전철안을 돌아다니는데 무표정하게 방관하는 것을 보고, 보다 못해 참다못해
“부인, 어떻게 아이들을 타이를수는 없으신가요?”했더니 부인이 의외로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글세 저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이럴 때 늘 아버지의 말을 들어 왔는데 어제 애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이 순간 그는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존재를 감동으로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이 하늘 아버지처럼 완벽한 존재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을 통해 하늘 아버지의 존재를 배워가야 한다면 우리의 어머니가 그 아버지를 세우고 높이는 중보자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누군가가 아버지에 대해 “아버지의 인상”이란 제목의 시를 남겼습니다. “내가 네 살때 아버지는 전능한 신이었고 요술쟁이 산타 였지. 그러나 내가 7살이 되자 아버지는 할수 없는 일이 많으시고 모르는 것이 많은 무능자이셨다.
내가 14살이 되었을 때 그는 캐캐묵은 귀찮은 꼰대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27살 결혼 나이가 되자 그는 다시 내게 조금은 필요한 존재가 되었지. 내가 35살이 되자 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의견과 충고를 처음으로 묻기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50세가 넘어서자 나는 아버지가 이럴 때 이떻게 하셨을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60세가 되자 나는 너무나 그의 의견을 필요로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계시지 않았다.”
아내 여러분, 당신의 남편을 좋은 아버지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를 당신의 주님으로 섬겨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남편을 리더로 세우신 주님께서 당신의 가정의 주인, 가정의 아바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남편, 당신의 주님과 하나되어 인생을 건강하게 여행하는 행복한 비밀의 주인공이 되실 것입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오늘의 부부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들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2.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할 순종의 의무를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나누어 보십시오.
3.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할 사랑의 의무를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나누어 보십시오.
4. 각자의 부부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깨달음과 결단을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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