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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에베소서 설교 모음

에베소서 4:1 - 16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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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공교회 /4:1-6/ 임영수목사

2014-12-14 14:45:16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몸담고 살아갈 참된 공동체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인의 경우 이상적인 교회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적인 교회 공동체를 찾기 위해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찾고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나 교회를 발견하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평생 그러한 공동체를 만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오랜 기간 스위스 보세이 인스티튜트에서 성서연구원으로 일했던 수잔 데 디트리히(Suzanne De Dietrich) 여사는 그의 "증거하는 공동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현대인은 웅성거리며 복잡한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이보다 더 고독한 삶도 일찍이 없었다. 가족이나 사회 공동체 모두가 구심력을 잃고 원심력에 의해 각자 뿔뿔이 흩어져 정신생활이 날로 공허해가고 있다. 오늘날 어디서든지 사람들은 '공동체'에 굶주리고 목말라 있다.

 

그러나 과연 공동체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치 않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전정한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를 사회에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소명과 책임을 끊임없이 요청받고 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선발된 공동체요 증거의 공동체로서 이 세상으로 다시 파송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이다."

 

사도신경의 교회에 대한 명제는 바로 공동체와 관련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그러한 이상적인 공동체가 바로 이 세상에 있는 교회이니 교회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것은 참된 공동체로서 지향해야할 방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제시하는 참된 교회 공동체는 "거룩한 공교회-거룩한 보편적 교회"입니다. 거룩하고, 보편적이란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한 고백을 할 때에는 현재 세속화 되어있고, 분열이 극심한 현실의 교회를 바라보며 충성을 다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거룩하고, 보편적 교회를 희망 가운데서 바라보며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의 교회에 대한 고백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있는 교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다짐이 있게 됩니다. 이 고백은 우리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사교 집단과 같은 수준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해 가고자 하는 결의를 새롭게 하게 됩니다.

 

교회의 본질은 거룩성과 보편성에 있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망각해 버린다면 그 때 교회의 생명은 끝나게 됩니다. 거룩이라 할 때 그 의미를 교인들의 삶의 질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문화적 전통에서 이 거룩은 점잖음, 윤리적 완전성으로 이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거룩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거룩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 받았고, 현재 부름 받고 있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 무리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무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존재 과제가 있습니다. 교회에는 이 세상에서 그를 부르신 분의 부름에 어떻게 반영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존재 과제가 있습니다.

 

얼마만큼 이 과제를 신실하게 바르게 파악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거룩한 교회로 되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제가 수행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 가운데는 그의 삶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끊임없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 운동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거룩한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보편성입니다. 보편성은 종족, 계급, 지역을 초월해서 전 세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리고 인간의 모든 이기적인 분리주의를 타파하고 일치를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 방식이 교회의 보편성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 후에 카톨릭 교회를 '기독교 교회'(Christian Church)로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인 보편성 때문입니다. 카톨릭이란 말 자체가 '보편적' 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사명 자체가 보편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를 세상에 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도적 특성은 시대에 따라서 그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계속 계승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전 역사를 통해 교회가 지금까지 몸부림 치면서 고민해온 문제는 보편성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자기 형체와 일치의 문제 였습니다. 자기 시대에서 어떻게 자신의 존재 방식을 표현하며, 어떻게 서로 다른 존재 방식 가운데서도 분열하지 않고 일치를 이룰 수 있는가 라는 문제는 교회가 갖고 있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보편성에 관련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주일에 남아공화국에 있는 어떤 교회에 오직 백인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교회에 흑인이 들어갈려고 했습니다. 그 때 흑인이란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교회 뜰 한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어떤 사람이 교회 마당에서 서성대고 있었습니다. 흑인이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 예수님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왜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밖에 서 계십니까?' 라고 흑인이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백인이 아니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고 했습니다.

 

교회가 거룩성과 보편성을 포기해 버릴 때 거기에는 예수님도 역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경고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진실되고 참된 것이 되려면, 교회는 자기 시대에서 언제나 인간의 이기심, 분열과 맞서 싸우고, 정의와 평화를 인류 전체의 목표로 지향해 갈 때입니다.

 

그러면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가 되게 하는 그 본질적 요소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배입니다. 여기서 예배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은 종의 삶으로 표현되는 디아코니아(diakonia),즉 봉사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길입니다. 거룩한 교회의 길은 그리스도와 일치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산 제사""영적인 예배" 가운데서 드려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회개, 묵상을 통한 의식과 가치 및 행동의 철저한 변화와 영감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봉사의 삶에는 영적 고갈과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육적인 욕망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언제인가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불란서에 장 바니에라는 사람에 의해 설립된 "악슈"라는 정신 장애인을 위한 공동체 마을이 있습니다. 그 곳은 장애인을 집단적으로 수용하는 시설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헌신자들과 장애인들이 몇 명씩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 마을입니다.

 

헌신자들은 그러한 삶을 동해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르는 삶을 배우고, 장애인들은 그들을 통해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 곳에는 신분의 차별이나 종족의 차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 한 가운데에는 조그마한 채플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헌신자들이나 장애자들이 무시로 들어가서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며 영적 재충전을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헌신의 삶에 파고드는 무의미성과 영적 고갈, 인간적인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형의 공동체를 보면서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 공동체 상을 상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로흐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도신경의 의미에서 교회는 자기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자신에 만족하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예배의 프락시스 (praxis)에서 존재한다. 예배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를 하나님과 세계를 위한 기독교의 봉사를 의미한다. 이 두 의미에서 교회는 결코 교회 중심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포괄적인 지평으로 내세워진다. 교회는 처음부터 외향적인 공동체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예배는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절실한 것,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다. 성령의 일이고 신앙의 행위이다."라고 했습니다.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가 지향해 가는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그가 선포하신 것도 역시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위에 있습니다. 교회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교회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할 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인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전망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행동하고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미래며 교회의 미래는 세상의 미래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 세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새로운 인류의 시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미래에서 그 운명이 규정지어진 무리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의 공동체로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교회는 세상에 있는 동안 어떤 제도나 규칙을 절대화 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의 표준은 언제나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빛 가운데서 자신을 비춰봐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교회는 모든 세상적이며, 인간적인 얽매임과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유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서 있는 교회는 그 어느 순간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자족할 수 있는 순간은 없습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한 후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주 파선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 어느 위험한 해안에 한때 볼품없는 작은 인명 구조대가 있었습니다. 건물이라곤 오두막 한 채뿐이었고 보트도 작은 것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헌신적인 몇 명의 회원들이 끊임없이 바다를 지켰고, 그들은 자신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밤낮으로 바다에 나가 유실된 자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많은 생명들이 이 훌륭한 작은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었으며 그래서 이 본부는 유명해졌습니다.

 

구조된 자들 중 몇 사람과 또한 인근지역에 사는 여러 사람들은 이 구조대와 연관을 맺고 이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의 시간과 돈을 제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보트들을 더 구입했고 새로운 승무원들을 더 훈련시켰습니다. 작은 구조대가 점점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인명 구조대에 가입한 새 회원들 중 어떤 사람들은 건물이 너무 볼품없고 시설이 빈약하다고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다로부터 구조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기 위해서라도 좀더 편안한 장소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상용 간이 침대를 훌륭한 침대로 갈아치우고 확장된 건물 안에 좀더 훌륭한 가구들을 갖다 놓았습니다. 이제 그 구조대는 그 회원들을 위한 대중적인 회합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을 일종의 클럽처럼 사용했기 때문에 그곳을 아름답게 다시 치장했고 멋있게 꾸며 놓았습니다. 이제 회원들은 인명을 구조하는 임무를 위해 바다에 나가는 일에는 점점 관심을 잃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명 구조원들을 새로 채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명 구조의 주제는 여전히 클럽 장식들 가운데서 돋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클럽 가입식이 거행되는 방에는 여전히 예식을 위한 구조선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회합 때, 클럽 회원들 가운데서 불화가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클럽의 인명구조 활동이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닌데다가 클럽의 정상적인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구조 활동을 그만두기를 원했습니다. 어떤 회원들은 인명 구조야말로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하면서 계속 인명 구조대라고 불리워야 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투표 결과 결국 패배했으며, 만일 그들이 그 지역에서 조난 당한 사람들의 생명을 구조하기 원한다면 아래편 해안에서 그들 나름의 인명 구조대를 새로 세울 수 있다고 통보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새로 생긴 이 인명 구조대는 옛날 구조대가 겪었던 똑같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구조대는 일종의 클럽으로 발전해 버렸고 그래서 또 다른 인명 구조대가 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되었으며, 만약 우리가 오늘날 그 해안을 방문한다면, 우리는 그 해안에 서로 배타적인 수많은 클럽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바다에서는 여전히 파선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데오도레 위델(Theodore Wedel)이 현대 교회의 실상을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봉사가 없는 교회의 모순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봉사를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거룩"이며 축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축복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성령의 첫 걸음 지며, 성령의 종착지점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는다고 계속해서 말하지 않고서는 성령에 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교회를 성령의 역사로서 전적으로 정립하려 하지 않고서는 교회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교회는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동력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교회를 믿습니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교회의 크기, 재정의 풍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에 대한 희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교회가 세상에서 그의 거룩성과 보편성을 지켜갈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4:1-8/ 곽선희 목사

2014-11-25 09:32:26

 

예일대학의 심리학과 석좌교수인 로버트 J. 스타인버그(Robert J. Steinberg)라고 하는 교수님의 저서인 Successful Intelligence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유명한 저서 속에 나오는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 시간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똑똑이와 똘똘이가 있었습니다. 똑똑이라는 아이는 학교에서 최우등을 하는 아주 똑똑한 아이입니다. 아주 공부를 잘하는 그런 아이고 똘똘이라는 아이는 동네에서 소문난 개구쟁이이고 사실은 말썽꾸러기 아이입니다.

 

이 두 친구가 같이 산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산에서 큰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똑똑이가 호랑이를 딱 보는 순간, 똑똑한 머리로 계산을 했습니다. “호랑이가 250밖에 있다. 시속 50로 달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17.88초에 다가올 것이다. 그 다음에는 죽는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듣고 똘똘이는 운동화 끈을 풀어서 다시 꼬옥 매고 있는 것입니다. 똑똑이가 말했습니다.

 

, 이 멍청한 놈아, 네가 뛰어 봤댔자이지 어떻게 호랑이보다 빠르게 뛸 수 있겠느냐?”하고 말을 했더니 똘똘이가 씨익 웃으면서 한마디를 했습니다. “아니야, 나는 너보다 빨리 뛰기만 하면 되거든.” 알아들으셨습니까?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과 똘똘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말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지만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식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진리 적용 능력이 없습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그것들을 어떻게 생활 속에 옮길 것인가? 특별히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이것을 대처해야 하느냐, 하는 그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 중에 있는 한마디가 생각이 납니다.

 

사자가 산에서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 사흘을 굶으면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토끼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숲 속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가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했습니다.

 

나 좀 살려다오. 내가 죽는다.” 그러니까 토끼의 마음이 감동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나뭇가지 하나를 굴려서 그 곳에 던져주었습니다. 이것을 의지하고 사자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와놓고는 토끼보고 하는 말이 내가 몹시 배가 고픈데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그러니 토끼가 깜짝 놀라서 세상에 이런 의리 없는 짓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당신이 죽을 것을 살려주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래도 된다 안 된다는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여우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여우가 지혜를 내었습니다. 사자보고 사자왕이여, 이 토끼가 임금님을 구원해주기 전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습니까?” 사자가 함정으로 풍덩 들어가더니 이렇게 하고 있었지그랬습니다.

 

여우가 그럼 그냥 그렇게 계십시오라고 한 후에 토끼야 가자하고 그냥 갔다고 합니다. , 어떻습니까? 사람이든 짐승이든 자신의 본래성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도대체 내가 본래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가끔 제가 북한 평양을 가는데 열 한번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여러 사람이 다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갔다오신 분들의 이야기가 너무 힘들더라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계속 감시를 받고 잠깐 밖에서 산책을 하려해도 안 된다고 하고

 

감옥처럼 불안하고 불편하다고 그렇게 불편한데 왜 평양에는 자주 가십니까?” 라고 묻는 말에 저는 당신과 저는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저는 북한에 갈 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북한에 가보면 내가 거기서 태어났고 자랐고 또 거기서 감옥에도 가 보았고 매도 많이 맞았고 또 젊었을 때이지만 광산에 끌려가서 공사 일을 했습니다.

 

그 곳은 그저 집을 엉성하게 지어놓고 이부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흙밖에 없는데 지푸라기를 놓습니다. 외양간과 마찬가지입니다. 지푸라기를 가득 놓고 그 위에서 잡니다. 오물만 없을 뿐이지 지푸라기 위에, 외양간 같은 데서 입은 채로 누웠다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잠입니다. 이러면서 하루에 수수밥 두 끼를 조금씩 먹고 일을 해야 되는데 여기서 일을 하다가 여기에서 죽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내게 참 좋은 기회를 주어서 탈출을 했고, 북한을 탈출해서 남쪽에 나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 불쌍한 형제들을 위해서 내가 지금 다소나마 저들을 돕기 위해서 북한을 방문합니다. 이게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내가 만일 북한을 떠나지 못했다면 지금 저 처지에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바로 저 중에 내가 하나일 것이다생각하면 깜짝 놀랍니다.

 

나는 북한에 내릴 때부터 사실은 마음으로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와 감격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방문하고 옵니다. 왜요? 내가 피난을 못 갔으면 저렇게 되었겠구나...”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제가 세례를 베풀고 그리고 지금 신앙생활을 잘 하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지금 불과 23년 밖에 안되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는 요새 집에 가도 감사하고 직장에 가도 감사하고 교회가면 물론 눈물로 감사합니다.” 왜 그러느냐?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이렇게 생각한대요. “내가 만일에 예수를 안믿었다면 첫째, 내가 저 여자하고 안삽니다.

 

그리고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집안은 엉망이고 사업은 망했을 것입니다. 뻔합니다. 이것을 틀림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좋은 가정을 이루고 이렇게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고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게.” 감사 감격한다고 그럽니다. 여러분, 본래성을 잊지 마십시오. 혹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꿈에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교회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원천적으로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죄악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를 구원해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습니다.

 

이 부르심이란 것은 우리의 과거의 모든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았다,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이 부르심 속에 삶의 의미가 있고 부르심 속에 미래를 향한 약속이 있습니다. 과거의 청산이 있고 미래를 향한 약속이 있습니다. , 이제 우리가 현재라는 시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압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습니다. 그 과거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설대로는 갈대아 우르는 우상이 많은 도시요, 그 아브라함의 아버지도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그럽니다.

 

만들어서 그 우상을 파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집의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과거로부터 떠나라. 지시할 땅으로 가라. 떠나라. 가라. , 이 부르심 속에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약속의 땅을 지향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러나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은 믿음 생활에 종종 휘청휘청한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면서도 많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넘어지기도 하고 저렇게 쓰러지기도 하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을 아시지요. 애굽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애굽에서 사백년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이 말은 자세히 들어야 합니다.

 

이 이스라엘 전 인구가 노예생활 중에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사백년을 산 사람을 거기에 없습니다. 노예생활에서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어갈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부름 받은 백성이요 부름 받은 선민입니다. 이제 어떻게 되야 하겠습니까?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야겠는데 믿음으로 살지를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종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생각하자면 노예로 살다가 죽을 팔자인데, 안 그렀습니까? 자유의 몸으로 광야에 와서 죽어도 행복한 것이죠. 죽어도 만족한 것이죠.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도 하고 모세를 죽이겠다고도 했습니다.

 

결국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크게 책망하셔서 광야에 엎드러져서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죄목이 무엇이냐? 하나입니다. 원망죄요.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 원망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현실 속에 하나님의 부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부르셨고 지금 내가 사는 생활도 부르심의 생활입니다. 부름 받은 생활이기 때문에 절대로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현실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언제인가 한 번 텔레비전 방송을 보니 95세된 노인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데, 아나운서가 집요하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건강 비결이 무엇이십니까?” 그러니까 할아버지께서 빙글빙글 웃으시면서 딱 한마디를 하는데 의미심장한 말을 하셨습니다. “마누라 속썩이지 말아. 그래야 오래 살아.” 알아들으셨습니까?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그 부인이 잘났던 못났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입니다. 남편이 맘에 들던 안 들던 모든 현실 이대로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부르심의 생활입니다. 여기에 학술적으로 말하면 Effective Calling이라는, 효과적 부름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부름에 합당한 생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 모세는 애굽에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도망다니는 도망자의 생활을 사십년을 했습니다.

 

나이 팔십세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노인입니다. 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오로지 부르심만 듣고 부르심에만 응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대 역사를 이루지 않습니까.

 

부르심에 합당하게. ,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지요 세리 마테를 부르셨지요 주의 종들을 부르셨지요 특별히 기독교를 핍박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아, 어찌하여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다메섹 도상에서 강제로 부르셨습니다.

 

그는 부름에 응답하여 부름에 합당하게 한평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아브라함, 모세, 혹은 믿음의 조상들뿐이겠습니까?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또 미래를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의롭다 하시고 십자가로 값을 지불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오늘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 부름 속에 내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제가 목회생활을 하면서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제가 결혼주례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득이 손님으로 참석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계셔서 주례자로서가 아니라 손님으로 참석했다가 정말 일생 다시 보지 못할, 또 보아서는 안 될 그런 사건을 보았습니다.

 

시간이 되었는데 신부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삼십 분이 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술렁술렁하더니 손님들이 다 가버립니다. 그 서있는 신랑이 너무너무 안쓰러워서 저는 한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마지막에 신랑이 미안합니다인사 한마디 하고 저도 돌아왔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신부에게 옛날 애인이 있었답니다. 신부 애인이 있었는데 이것이 과거 청산이 잘 안되어서 미장원에서 화장을 하고 나오는데 납치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결혼식장에 들어와야 될 시간에는 벌써 기차를 타고 대전을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되겠습니까? 여러분, 과거 청산 없이 새살림을 꾸미려다가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았으면, 이제 과거는 청산되어야 합니다. 어떤 모습이던 간에 묻지 마세요. 잘낫든 못낫든, 의인이든 죄인이든, 과거에 속한 옛사람의 모습을 깨끗이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야 부름에 합당한 생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곧 감사하는 마음이고 곧 감격하는 마음이고 부름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 나를 부르셨는가, 나를 어디로 부르셨는가,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 그것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또 주어진 신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어떻게 얻은 신분입니까? 어떻게 공부한 것입니까? 어떻게 은혜를 입었습니까? 이 귀한 은혜를 입고 헛되이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건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소중히 여겨야 하고 부르심 속에 감취어진 약속된 미래를 항상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대로 겸손하게 온유하게 사랑으로 살 것이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 이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하는 재미있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존 그레이라고 하는 박사님께서 삼십년 동안 인간관계를 연구하고 상담하고 그리고 나서 간증 삼아서 쓴 책입니다. 재미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눈에 반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한 후에 하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때는 언제나 상대방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자 보십시오. 남자가 여자보고 남자가 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여자가 남자보고 여자가 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여자는 여자고 남자는 남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결론은 간단합니다. 남자는 남자로 사랑하고 여자는 여자로 사랑을 할 것이고,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I love you, You love me, 하루종일 해도 안됩니다. 하나되는 길은 오직 하나,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합니다. 같은 목적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하워드 크라인벨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교회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란 마치 오케스트라와 같다. 여러분, 오케스트라 구성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관악도 있고 현악도 있고 타악도 있고 여러 가지 악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악기가 있습니다. 수백 개의 악기가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다같이 악보에 충실해야되고, 다같이 지휘자를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휘할 때 지휘자는 절대군주입니다.

 

여기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나팔을 잘 분다고 혼자서 소리를 크게 내었다가는 일어서서 나가야합니다. 혼자서는 잘하지만 오케스트라에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 사람이 여러 소리를 내는 것 같지만 오로지 지휘자를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의 작품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잘난 사람 때문에 말썽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이 필요 없습니다. 오케스트라가 되야 하니까, 화음이 되어야 하니까. 하나가 되어야 하고 작품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케스트라를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니 주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다. 하나다. 그런데 본래도 하나요 미래도 하나다. 우리 나라에는 참 고질적인 병이 하나 있습니다,

 

세계관 속에. 그것이 무언가 하면 반상 계급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반, 상놈 뭐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전부가 나는 양반이다그럽니다. ‘너는 상민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나와 너는 같은 사람이긴 하다만은 너와 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뿌리가 다르다. 조상이 다르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꼭 다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뿐입니까?

 

죽은 다음에도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덤을 만들고 망부석을 세우고 비석을 세우고. 세워봤댔자지 속에서는 썩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과거도 다른 것이 없고 앞으로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같다는 것만 알면 간단합니다.

 

부부간에도 보십시오. 같은 것이 대부분이고 다른 것은 조금입니다. 같다는 동질성을 극대화하면 간단히 해결이 되는데, 근본적으로 다르고 교육이 다르고 지식이 다르고 눈 높이가 다르고... 다르긴 무엇이 다릅니까? 많이 알면 무엇합니까?

 

좀 있으면 치매에 걸리고 말 것인데. 아무 소용없습니다. 지식이라는 것도 별것이 아니고 건강이라는 것도 별것이 아닙니다. 지금 같은 배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므로 부르심에서 하나이고 약속에서 하나입니다.

 

과거도 하나이고 미래도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되게 하신 것, 벌써 하나입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너희는 깨닫고 지켜가라, 그 말입니다. 본래가 하나입니다. 앞으로도 하나입니다.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켜라.” 오늘도 다시 말씀하고 계십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한 일원이 되게 하시고 한 식구가 되게 하시고 교회를 섬기며 살게 하시고 부름받은 사람으로 부름 받은 운명의 길을 그 소망의 생을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원하오니 부르심에 합당한 생을 살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시고, 주의 부름에 조용히 순간 순간 응답하며 확실하게 부름에 합당한 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셩경적인 교회(3) /4:11-16

2014-11-04 11:35:55

 

성경적인 교회란 제목으로 세 번째 설교한다. 첫 번째는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고린도전도 1:2의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조직신학자 루이스 뻘콥은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3가지 특성을 말하였다.

 

1)통일성,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며 모든 신자가 그의 몸이 되는 신비적 지체이다.

2)거룩성,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고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전이다.

3)보편성, 교회는 모든 시대와 족속을 다 포함하는 신자들의 모임이다.

 

이 세 가지 특성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문안한 인사의 내용 중에 담겨 있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내가 출석하고 몸 담고 있는 교회에 대하여 바르게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어떤 교파에 속한 교회인지? 어떤 신학적인 입장을 가진 교회인지? 그 뿌리는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욱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과연 우리 교회는 성경적인 특성에 부합되는 교회인지를 알고 배워야 한다. 그 판단의 기준은 성경이다.

 

두 번째로 살펴본 것은 성경에서 모델이 되는 교회를 찾아 보았다. 지난 주일 소개한 데살로니가교회가 성경적으로 모델이 되는 교회였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교회와 같은 교회에 대한 열망이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길 축원한다. 오늘은 3번째로 목사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한다. 이 주제는 4년 전에도 같은 본문과 주제로 설교한 적이 있음을 먼저 말씀을 드린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선물이 2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성경이요 다른 하나는 목사이다. 왜냐하면 성경적인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이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는 목사에 대한 두 가지 오해가 있다.

 

1)목사를 하나님의 대리자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목사의 기도에 효력이 있고, 응답이 되고, 축복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지나치게 담임목사 의존증이 있다. 당회장 목사님이 기도하고, 설교하고, 심방해야 은혜 받고,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물론 목사님의 영향력이 있기는 하나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2)목사직을 부정하는 것이다.

 

일부 무교회주의자들, 형제교회, 지방교회에 속한 자들이나 일부 선교단체가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교회의 제도를 부인하고 목사직을 인위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지나치게 만인제사장직을 강조하므로 나타난 부작용이다.

 

그러나 목사직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성경에 대한 무지와 오해이다. 성경은 목사직에 대하여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목사직이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은사라고 증거하였다.

 

 

1.어떤 사람이 목사가 되는가?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교회에 주신 직분 4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그중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는 일에 기초적인 역할을 감당한 직분들이다.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은 예수님의 12제자를 가리키며, 선지자는 초기 교회 당시에 있었던 직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들이었다(11:27, 21:10-11).

 

복음 전하는 자는 당시 순회 전도자를 말하며 오늘날은 선교사와 같은 사역자들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사도, 선지자는 초기 교회 시대에 존재했던 직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사도나 선지자는 없다. 대신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도 초기 교회 시대에 있었던 특별한 직분이었다. 오늘날에는 선교사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직분이 바로 목사와 교사이다. 목사와 교사는 한 직분의 두 가지 역할이라 말할 수 있다. 함축하면 목사이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양무리를 치는 것(보호)과 가르치는 일이다. 이 일들을 통해 교회를 견고하게 세워가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중 에베소 지역의 목회자들을 밀레도로 초청하여 이렇게 권면하였다.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

 

그렇다면 목사직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검증된 사람들에게 목사직을 부여하게 된다.

 

1)외적 부르심에 대한 증거 - 주변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추천을 받은 자여야 한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집사를 뽑을 때에도 성도들의 추천을 받았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듣는 자를 추천했다. 목회자는 말할 것도 없다.

 

2)내적 부르심에 대한 확신 -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는 자여야 한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이 목사가 되면 사명감 없이 사역을 감당함으로 본인도 고생하지만 가족이 함께 고생한다. 자신 스스로 검증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있다.

 

딤전 3: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오늘날 한 사람의 목사가 되기까지 과정을 소개하자면, 4년제 대학이나 또는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3년 과정의 신학대학원을 마쳐야 한다. 그리고 1년 후에 강도사 고시를 합격한 후에 1년 후 목사고시를 합격하면 1년 후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일반대학 출신들은 6, 신학대학 출신들은 10년이 걸린다.

 

우리 총회에서는 30세 이상 결혼한 자에게 목사 안수를 준다. 교단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이와 같은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한 사람의 목사가 교회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끼치는 지도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목사직의 근거는 성경에 있고,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대단히 소중한 직분이다.

 

 

2.목사는 어떤 일을 하는가?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

 

온전하게 한다는 강력하게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군사로 비유하길 좋아했다.

 

딤전 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목사는 그리스도의 강한 병사를 만들어가는 교관과 같다. 만약 목사가 성도들은 강하게 만들지 못하면 그들은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다. 교관은 무작정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다. 훈련의 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 최종적인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것이다.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다. 사람들을 불러 내셔서 훈련을 시키셨다. 제자 훈련이다. 사도 바울은 개인 훈련 쪽에 은사가 있었다.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일대일 제자훈련 동반자반과 양육자반.

 

이유는,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2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봉사의 일은사역을 말한다. 훈련받지 않은 병사는 전력이 되지 못한다. 사격에서 100발을 쐈는데 한 발도 표적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이유는 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과 대적하면 혼비백산 도망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훈련 받은 병사는 능숙하게 무기를 다루며 일을 처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훈련되지 않은 성도가 봉사의 일을 하게 되면 효율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시험에 들어 도중하차 하기 쉽다. 교회 다닌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봉사의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훈련되어진 성도가 봉사의 직분도 은혜롭게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디오드레베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교역자들과 소수의 직분자들만 뛰어 다닌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단지 예배꾼에 불과하다.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목사의 사명이 교회당 건축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교회로서의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협력하고, 조절하고 통제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을 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동역자로 함께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는 수준까지 끌고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은혜가 충만한 교회, 사랑이 충만한 교회, 진리가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런 교회를 소개하고 있다. 데살로니가교회이다.

 

살전 1:6-8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목사의 소망, 목사의 보람은 성도들이 성장하고, 성숙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가는 것이다. 숫자를 늘리고 건물을 크게 확장하는 것이 소망이자 보람이 아니고 교회의 주체가 되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것이다.

 

 

3. 목회자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1) 신뢰하고 존경할 것

 

살전5:12-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2) 순종하고 복종할 것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3) 충실한 협력자가 되라

 

16:3-4.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4) 주의 종에 대하여 격려자가 되라

 

딤후 1:15-18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딤후 1: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1)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 - 부겔로와 허모게네

2) 힘이 되어 주었던 사람들 - 오네시보로, 16, 뵈뵈, 브리스가와 아굴라등..

 

어느 젊음 목사의 고민이란 책을 읽으면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목사가 젊으면 경험이 없다. 나이가 많으면 너무 늙어서 젊은 감각이 떨어진다. 자녀가 많으면 애들이 너무 많어. 없으면 본이 되야지. 목사가 원고를 보고 설교하면 너무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 원고 없이 설교하면 깊이가 없어! 낡은 양복을 입고 다니면 빈티 내내. 사례를 많이 받으면 돈을 너무 밝혀, 적게 받으면 목사는 청빈하게 살아야 해. 사모가 교회 일을 많이 하면 사모가 너무 설쳐. 가만 있으면 꽉 막혔어. 맨 마지막 말은 내보내야 겠어!

 

 

결론적 요약

 

 

야구를 보통 투수 놀음이라 부른다. 투수 혼자 경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야구에서 투수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보통 70% 이상의 비중이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목사의 비중이 그만큼 크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목사직을 허락하신 것이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2가지로 요약된다.

 

1)목사로 부름 받은 사람들,

 

교역자들은 목사의 직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본연의 직무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감당토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근래에 목사직을 가지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분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목사로서 본연의 직무에서 벗어난 것이다. )한상렬목사

 

2)성도들

 

목사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위해 기도해서 목회 본연의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동역하고 협조해야 한다. 목사도 인간인지라 실수도 하고, 허물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럴 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덮어주고 더 잘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4:1-4 사도신경(11) 거룩한 공교회인 것을 믿습니다

2010-07-02 11:44:50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이야기이다.

존 웨슬리가 기도하다가 깊이 잠이 들어 천국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가 천국에 들어서기 전에 천국 문을 지키고 있던 천사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나와 함께 영광스런 복음 운동인 메소디스트(Methodist)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얼마나 천국에 들어와 있습니까?” 그 천사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 명부를 한참 뒤져보더니 미안하지만 감리교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깜짝 놀란 웨슬리는 다시 물었다. “나의 신앙은 잘못된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영광스런 칼빈의 5대 교리를 강조하던 장로교인들이 다 천국에 온 모양이지요? 그들은 몇 명이나 왔습니까?” 천사는 한참을 뒤져보더니 미안하지만 장로교인은 한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우리 종교개혁은 대단한 실수였나 보군요.

 

그러면 천주교인들이 다 온 모양인데 그들은 얼마나 들어와 있습니까?” 이번에도 천사의 대답은 똑같았다. 웨슬리는 천사의 대답에 큰소리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왔단 말이오?” 천사는 방긋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이 천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인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이 와 있습니다.”

 

이것은 웨슬리 목사님의 꿈 이야기이지만 당시 종교개혁자들과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각을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마치 내 교단, 교파, 교회가 가장 옳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다. 간혹 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믿음이 대단한 것처럼, 자기가 마치 그 교회를 세운 사람처럼 어깨에 힘을 주고 신앙생활하는 것을 본다. 물론 개척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반대로 자신은 큰교회 다닐 능력이 없는 사람이고, 뭔가 부족한 사람인 것처럼 주눅들어 신앙생활하기도 한다

 

. 절대 아니다. 웨슬리의 꿈에서 천사가 대답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어디나 모두 동등하다. 성도들도 동등하다. 하지만 교회의 크기와 내 믿음은 동등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르다.

 

내가 하나님과 얼마나 교제하고, 주님을 사랑하느냐가 내 믿음이기 때문이다. 직분도 믿음의 크기와 전혀 상관없다. 착각속에 빠져 교만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된다. 우월주의와 바리새적 형식주의에 빠져 있기에 오늘 한국교회는 많은 안티를 만들었고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책임임을 느낀다.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반기독교운동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야 한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에 기독교에 관한 내용이 있으면 아래 댓글에는 엄청난 수준의 비난과 욕과 저주가 적힌 것을 볼 수 있다.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라는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는데 바이블 19세금 지정 촉구를 위한 10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세뇌적으로 무분별하게 성경을 가르치면 안된다는 의도이다. “사회악 기독교를 몰아냅시다. 밤하늘을 더럽히는 붉은 공해, 기독교안티는 나라사랑입니다같은 배너가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14,000명의 회원이 활동하며 기독교를 박멸하는 것을 그들의 사명으로 외치고 있다. 그들은 교회를 개집, 기독교를 개독, 목사를 먹사로 부르며 폄하한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우리가 올바르게 신앙생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에서 상처받고 떠난 이들이 대부분 안티 기독교로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싫은 것보다 교회가 싫은 것이다. 자신들이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받은 상처를 더 많은 이들이 받지 않게 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고 믿으며 기독교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좀 더 지혜롭게 믿어야 한다. 그들의 주장 대부분이 소수 크리스챤의 이야기이고, 허무맹랑한 이론이기도 하지만 우리 크리스챤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회개와 각성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가 무엇인지 올바른 교회론의 정립이 절실하다. 교회가 본질에 충실하게 사명과 역할을 감당해 나갈 때 세상속에 빛과 소금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11번째로 사도신경의 고백을 나누려 한다.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바로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올바른 교회론 위에 올바른 크리스챤들로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왜곡된 교회론은 엉터리 크리스챤, 상처주고 아픔주는 크리스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당신은 교회를 간단히 어떻게 정의하겠는가? 국어사전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신자들의 공동체라고 잘 정의하고 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이다.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교회가 된다. 그래서 교회는 아름답고 멋진 건물을 세우는 일보다 공동체, 사람들을 세우고 키우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 건물은 예배를 드리는 곳이어야지, 행사나 음악회 같은 용도로는 절대 빌려줄 수 없다고 한다. 이는 교회를 건물, 성전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교회를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정의 내린대로 믿음의 사람들을 올바로 세워 세상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장소의 개념보다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 많은 경우, 교회를 건축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아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본다

 

. 때론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아 교회가 전쟁터가 되고, 교회가 두 개로 분열되는 아픔을 통해 많은 이들이 신앙을 버리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교회는 건물, 교회 재산, 인간의 욕심이 아닌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개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 소자중에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하면 그 사람은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18:6)고 말씀하신 주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교회의 본질을 표현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 (1:22-23, 고전 12:12-27, 4:15-16, 1:18, 2:9-10, 19), 하나님의 백성 (고후 6:16, 벧전 2:9-10), 하나님의 성전 (고전 3:16-17, 2:21-22, 벧전 2:5), 그리스도의 신부 (5:23-32, 고후 11:2), 하나님의 가족 (딤전 3:15, 5:1-2, 고후 6:18, 12:50, 1:12), 성도의 공동체 (고전 1:2),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7) . 폴 미니어는 그의 저서 Images of the Church in the New Testament에서 교회에 대한 신약의 이미지 96가지를 열거하였다. 이것을 간단히 줄인 것이 니케아신경이라 생각한다.

 

최초의 공식적인 세계교회 신조인 니케아신경은 "una, sancta, catholica et apostolica ecclesia, 하나의 거룩하고 세계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라고 고백한다. 이것을 전 세계교회는 교회의 4대 속성(단일성, 성결성, 세계성, 그리고 사도성)이라 부른다. 우리 사도신경은 4개를 더 줄여 거룩한 공교회라고 2가지로 축약했다. “교회는 거룩하다, 교회는 공교회다의 의미를 통해 우리가 올바른 교회론을 정립하길 바란다.

 

1)교회는 거룩하다.

교회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의도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교회 sancta ecclesia"가 되어야 하는 운명에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5:25-27)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셨다.

 

비록 교회의 성결성이 "그 자체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몰트만)이며, "그리스도 즉 머리가 거룩하다는 사실 때문"이지만 말이다. 신약에서 신자 개인을 서술하는 "성자 hagios"라는 단어가 단수형으로 사용된 적이 없으며 항상 집합적으로 "성도 hagioi"라고 호칭되었다. 그러므로 ecclesia와 성화의 개념은 불가 분리하며, 교회는 성화의 공동체, 즉 성화의 실체가 나타나는 장locus이다.

 

주님은 개인의 거룩보다 교회의 거룩을 요구한다. 교회는 도덕적 공동체이며, 따라서 교회의 도덕적 수준은 항상 세상의 그것보다 높아야 한다. 교회의 거룩은 세상의 죄와 흑암의 세력과 성공적으로 싸워 이기는 유용하고 설득력 있는 도구가 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거룩은 우리가 생명처럼 지켜야 할 본질이기 때문이다.

 

족제비과에 어민(Ermine)이라는 동물이 있다. 이 동물의 털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다. 순백의 털은 고가의 장식품으로 팔린다. 그런데 어민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종의 결벽증이다. 이 동물은 자신의 털을 깨끗하게 간직하는 것을 생명만큼 소중히 여긴다. 사냥꾼들은 어민의 이런 본능을 이용해 사냥을 한다. 노련한 사냥꾼들은 어민이 사는 구덩이 입구에 오물을 잔뜩 뿌려놓는다.

 

다만 하나의 출구에만 오물을 뿌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 사냥개를 대기시켜놓는다. 그러면 어민은 순백의 털을 오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안전한 출구를 포기하고 사냥개가 있는 죽음의 출구를 선택한다. 자신의 몸에 오물이 묻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무엇을 느끼는가? 뭐 그런 어리석은 동물이 있어? 아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처럼 순수하고 이와 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스데반처럼 믿음을 저 버리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순교자의 열정을 배워야 한다. 어민 족제비 같이 깨끗함을 지키려는 태도가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개인이 죄성으로 물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거룩한 교회라고 부른 것이다.

 

거룩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신성은 신비한 사색이나 열정적인 열심, 자발적인 고행에 있지 않다. 그것은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처럼 행하는 것이다. Holiness does not consist in mystic speculations, enthusiastic fervors, or uncommanded austerities; it consists in thinking as God thinks and willing as God wills.(John Brown)

 

거룩한 척하는 행동이 아닌 주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우리가 거룩함을 잃어버린 이유는 주님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라고 질문한 후 성령께서 주시는 대답을 듣고 순종할 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처럼 안식일, 절기, 관습같은 형식과 틀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 의도를 따라 생활하는 모습을 친히 보여주셨다. 오늘 우리도 아버지의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틀을 과감하게 깨야 한다. 나도 모르게 세상과 담을 쌓은 것을 부숴야 한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잘못된 신앙의 틀도..

 

토마토효과라고 들어보았는가? '토마토를 먹으면 70세에도 자식을 볼 수 있다.', '토마토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의 얼굴이 파랗게 된다'하는 유럽의 속담이 말하듯, 토마토가 건강에 좋다는 뜻도 아니다. 철분과 비타민이 풍부하며 10대 건강식품, 슈퍼푸드로 선정되고 전립선암 예방에도 탁월하고 대표적인 알칼리성식품이기 때문이 아니다. 토마토효과란 불필요한 일을 굳게 믿는 것을 말한다. 불필요한 것, 거짓된 정보, 사실을 진리처럼 믿고 있는 현상을 토마토효과라고 부른다. 어쩌면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기 위해, 틀을 깨기 위해 나누고 싶다.

16세기경. 토마토는 넓은 이파리 덕에 관상용으로 길러졌다.

 

열매는 특이한 향으로 구충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소문은 이 열매를 먹게 되면 곧 열이나게 되고 죽게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토마토를 절대로 먹지 않았다. 그런데 1820, 미국 뉴저지주의 존슨 대령이 이 식물을 기르지 말라는 법령이 내려지자 그에 반대하기 위해서 한 결심을 하게 된다.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 열매를 먹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수군대며 불쌍한 사람 하나 죽어나가겠군하며 웅성거렸고, 존슨은 자신의 테이블 위에 놓인 토마토를 먹기 시작했다. 존슨이 입에 한입 베어 문 순간 심약한 여자들은 기절했다. 하지만 존슨 대령은 토마토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토마토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 이처럼 토마토를 키우며 먹기까지는 200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래서 토마토 효과란, 아무 근거 없는 추측 때문에 불필요한 일을 굳게 믿는 심리학적 용어로 쓰인다.

 

교회는 거룩하다. 불필요한 일을 어리석게 믿는 자가 아니라 본질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틀에 박힌 꽉 막힌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언제나 Yes하는 열린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로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2)교회는 공교회이다.

공교회는 헬라어로 catholica ecclesia, 영어로는 catholic Church이다. "카톨릭 catholic"이라는 말은 "katholikos"에서 왔는데, 카톨릭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제외하지 않는 전체를 의미한다. 인종과 민족과 지역과 언어와 문화와 성별과 연령과 모든 사회 집단을 포함하는 "세계적인 교회 "를 말한다. 구약교회는 이방인 즉 세계의 모든 다른 민족을 배제하는 민족 교회였고,

 

또한 자기 백성 중에서도 여자, 어린이, 그리고 장애인을 제외하였다. 인류는 타락의 결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수많은 집단으로 끝없이 분열되었으며, 약한 집단을 차별하고 억압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인류의 모든 분열되고 적대적인 집단들을 자기 안에서 통일하기 위해서였다(1:10,22) 오늘 말씀처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3)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것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도 이것을 망각하기에 교회는 엄청난 분열과 싸움을 즐겼다.

 

장로교의 분열만 살펴봐도 엄청나다. 1954년에 기장이 분열되어 나가고, 1959년 예장은 다시 합동파와 통합파로 분립 하게 되었다. 이후 합동파는 100여개로 갈라섰다. 10년전만 해도 교단이 다르면 설교자로 세우지 않았다. 그만큼 교회의 분열의 골은 깊었다. 공교회, 즉 세계적인 교회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사도신경을 잘 외우면서...

 

세계에는 9천개에 달하는 교단들이 있다.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는 2절의 말씀처럼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가능하다. 한국교회에 이런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이 있어 소개하고 오늘의 설교를 마무리하고 싶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 우리나라의 신분제도가 철폐되었지만 한국교회 초기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질서가 여전했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는 새문안교회이고 두 번째는 곤당골교회인데 여기에 백정인 박성춘이 출석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양반들이 자기들 자리를 따로 만들어 달라고 선교사에게 요구했지만 거절하자 홍문동교회를 세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곤당골교회는 부흥한 반면, 홍문동교회는 교인도 없고 설상가상 교회에 불이나면서 3년 후인 1898년 다시 두 교회가 합쳐졌다. 그러다 1905년에 예배당을 인사동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지금의 승동교회가 된다. 그런데 1911년 이 승동교회에서 백정 박성춘이 양반들을 제치고 초대장로가 되면서 당시 양반들이 교회를 나가 지금의 안동교회를 설립했다.

 

또 하나의 교회는 1893년에 세워진 연동교회인데 이 교회는 갖바치를 비롯한 천민들과 서양에 관심이 많았던 양반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교회였다. 문제는 교회가 부흥하자 1904년에 첫장로를 세워야 했는데 양반이 아닌 갖바치 출신 고찬익이란 분이 장로가 된 것이다. 천민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도 상당히 양보한 것인데 설상가상 양반들이 갖바치를 장로로 섬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를 계기로 연동교회의 양반들이 교회를 나와 세운 교회가 묘동교회’(대치동)이다.

 

이처럼 우리 나라에 들어온 복음은 신분사회를 철폐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이 역할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기도 했다. 그런데 승동교회나 연동교회와 다르게 자기 집안의 하인이 먼저 장로가 되었지만 교회가 분열되기는 커녕 더욱 아름다운 선례를 남긴 교회가 있다. 김제 금산교회 조덕삼 장로님(1867-1919) 이야기다.

 

김제의 용화마을은 교통의 중심지였는데 마방의 주인이 지역에서 가장 큰 부자였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바로 조덕삼이다. 그가 테이트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1905년 봄부터 자기 집 사랑채를 내어 예배를 보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금산교회의 시작이다. 여기에 이 집의 마부요, 머슴인 이자익(1882-1959)이 주인 조덕삼과 함께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1906530일 주인과 머슴이 함께 세례를 받았다. 또한 한 주후에 함께 집사로 임명을 받았다. 하지만 조덕삼은 조금의 불만도 없이 이자익과 함께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그러다 1년 후 교회가 부흥되면서 금산교회에서도 한 명의 장로를 뽑게 되었다. 장로 후보는 교회에서 가장 열심인 조덕삼과 이자익이었다. 상식적으로 조덕삼은 이자익의 상전이고 나이도 15살이 많았으며 금산교회의 터를 마련해준 인물인데 투표결과 머슴 조덕삼이 장로가 되었다.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상전인 조덕삼이 이자익의 설교를 들어야 하고, 함부로 반말도 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머슴을 도와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회가 웅성웅성했고 갈라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런데 그때 조덕삼 집사가 테이트 선교사에게 발언권을 얻어서 교인들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조덕삼은 이처럼 자신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이 먼저 장로가 되었지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뿐만 아니라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 신학공부를 지원했다. 그리고 이자익이 목사가 되자, 1915년에 자신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을 금산교회로 모셔 당회장 목사로 깍듯이 대접을 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런 장로님이 있었기에 이자익 목사님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로교 총회장을 세 번이나 하셨고 대전신학대학교에는 이자익 기념관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할 뿐이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이자익목사와 조덕삼장로를 모델삼아 겸손과 온유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줄로 하나되는 교회를 세워가고 싶다.

 

몇 번 말씀했듯이 냄새 펄펄 나는 노숙자가 들어와도 향기나는 것처럼 반갑게 맞아주는 교회, 돈과 명예, 권력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는 교회, 서로의 불신, 오해, 미움 때문에 분열되기보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용납하는 성숙한 공동체, 그래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하나됨을 지키는 사랑의 공동체가 우리 동탄성지교회가 되길 소원한다. 교회는 거룩하며 세계의 모든 교회는 하나임을 고백하며 내 교회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줄 아는 성지가족 되길 축복한다.

 

 

 

 

우리 교회 좋은 교회 /4:11-16/ 홍문수목사

2024-05-17 06:58:36

 

오늘은 신반포교회 창립 70 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 지난 70 년 동안 은혜로 함께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 아울러 교회의 지체로 지금까지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

 

교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한 그 즉시 교회의 멤버가 된 겁니다 . 물론 여기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의 교회 즉 우주적 교회 (Universal Church)를 말합니다 . 창세 이후 오늘날까지 , 그리고 종말의 날까지 전 세계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입니다 . 멤버 (member)라는 단어 자체가 지체라는 뜻입니다 . 그 모든 성도로 구성된 전체 교회는 장차 천국에 다 함께 모일 겁니다 . 그런데 지상에서는 한꺼번에 모일 수 없죠 . 시대와 지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부득이 특정한 시대 특정한 장소에 나누어서 모이게 되는데 , 그게 바로 지역교회 (local church)입니다 . 그러니까 신반포교회는 2024 년 현재 서울 신반포에 성도들이 모이는 지역교회입니다 . 이런 지역교회들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성령으로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우주적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 그런 점에서 우리교회도 중요하지만 다른 교회들도 중요합니다 . 함께 지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어쨌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는 신반포교회의 멤버가 됐습니다 . 많고 많은 교회 가운데 어떻게 신반포교회의 멤버가 됐나 ?

 

내가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 결과입니다 . 이웃 남서울교회와 붙어 있으니까 재미있는 일이 가끔 생깁니다 . 어느 성도가 지인에게 소개받아 남서울교회로 간다고 하다가 우리교회에 들어왔습니다 . 안내위원이 주는 주보를 받고 보니까 신반포교회인 겁니다 . 그제야 두 교회가 나란히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 그런데 다시 나가기도 뭐해서 본당에 들어와 예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 그런데 그 시간에 은혜를 받았고 그냥 눌러 앉기로 하고 신반포교회 성도가 됐습니다 . 실수 같지만 교회를 선택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적으로 신반포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고 생각하고 교회와 더불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여러분 , 교회 생활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 신앙생활의 3 대 원리 (하나님 중심 , 성경 중심 , 교회 중심 )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적잖은 사람들이 교회를 소홀히 여깁니다 . 특히 요즘엔 가나안 (교회에 안 나가는 ) 성도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죠 .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밝힌 사람들 중에 20%가 넘는다고 합니다 .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그 숫자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 어느 신학자가 목회자 세미나 강사로 가서 참가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

 

현재 한국교회에서 최대 교단은 어느 교단입니까 ? 그러자 참가자 중에 대답이 나왔습니다 . 예장 합동입니다 . 강사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 다른 참가자는 예장 통합이라고 했습니다 . 강사는 그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 다른 교단은 모두 작은데 , 그러면 어느 교단이지 ? 그때 강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가나안 교단입니다 ! 함께 웃었지만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입니다 . 다른 건 혹시 혼자 해도 (혼밥 , 혼공 , 혼영 , 혼놀 등 ) 신앙 생활은 혼자 (혼신 ) 해서는 안 됩니다 .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인생에 유익이 없습니다 .

 

D. L. 무디에게 한 청년이 찾아와서 당돌한 질문을 했습니다 . “선생님 !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까 ?” 무디가 대답했습니다 . “그렇소 .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 외쳤습니다 . “그렇다면 굳이 교회에 꼬박꼬박 나갈 필요가 없잖습니까 ?” 무디는 잠자코 난로 안에 타고 있던 조개탄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 시뻘겋던 조개탄이 잠시 후 시커멓게 됐습니다 . 이윽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 “청년 , 조개탄이 꺼졌네 .” 청년은 얼굴이 빨개지며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했다고 합니다 .

 

그렇습니다 . 교회에 잘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할 때 영적으로 건강해집니다 . 그리고 모든 삶이 은혜 가운데 형통하게 됩니다 .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 “ ...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반포교회 멤버로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함으로 영혼이 건강해지고 형통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1] 내 인생의 중심 : 교회 은혜의 공동체 , 사랑의 공동체 , 사명의 공동체

 

교회의 중요성에 관해 보충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교회는 한마디로 말하면 내 인생의 중심 (center)입니다 . 교회는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로 내가 소속되어 다른 성도들과 함께할 때 인생의 큰 유익을 얻게 됩니다 . 4:16 “(예수 그리스도 )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 말씀을 잘 분석해 보면 ,교회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진 공동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은혜의 공동체 :

 

첫째로 ,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 이런 말이 있습니다 . 교회는 어머니의 품과 같다 ! 우리는 그 품에 안겨서 영혼의 평안을 맛봅니다 . 그리고 신령한 은혜의 젖을 먹습니다 . 그럴 때 영혼이 강건해집니다 . 영혼이 강건해지면 생활에도 활력이 넘칩니다 . 결국 축복된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은 기도문이면서 동시에 신앙 인생의 법칙입니다 .

 

사랑의 공동체 :

 

둘째로 ,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 인생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며 살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세상을 보면 사람들이 반목하고 질시합니다 . 불화와 갈등으로 힘들어합니다 . 그러다 보니까 사람을 기피하게 되고 자칫 군중 속의 고독 을 경험하게 됩니다 . 이게 다 인간이 본질상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 다행히 십자가 대속으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이루게 됩니다 . 그런 사람들이 있는 가정은 행복해집니다 .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로 큰 가정과 같습니다 . 인종 , 성별 , 연령 , 고향 , 학력 , 직업 , 경제력 , 성격 등이 달라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는 병원 심방이 어려워졌는데 예전에는 빈번했습니다 . 환우에게 찾아가 말씀 전해드리고 기도하면 큰 위로를 받습니다 . 치유와 회복도 빠릅니다 . 같은 병실의 환자 중에는 그 모습을 부러운 눈빛으로 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 가까이 가서 인사하며 말을 걸면 반가워하고 어떤 분은 자기도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합니다 . 슬플 때 함께 슬퍼하며 위로하고 , 기쁠 때 함께 기뻐하며 축하해 주는 게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

 

사명의 공동체 :

 

셋째로 , 교회는 사명의 공동체입니다 . 교회는 천국 대사관입니다 . 대사관은 자기 나라의 문화를 전파하고 자기 나라에 가는 사람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줍니다 . 그와 같이 교회도 복음을 전파하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면서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 죄악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 사랑으로 변화시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 세상은 죄악으로 인하여 불의와 부패 , 편견과 갈등 , 무지와 가난 , 질병과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면서 지상명령 (Great Commission, 28:18~20)을 주신 겁니다 . 그 명령을 교회가 감당해야 합니다 . 혼자서 어려우니까 함께 하는 겁니다 . 4:11~12 “11 ...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목사 (교사 )를 주셔서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 그 역량으로 함께 봉사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아 장차 천국에 들어가지만 , 구원 이후 이 세상 살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주님이 평가하시고 천국의 상급을 주실 겁니다 . 기왕이면 상급을 받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 또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기쁨과 보람이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

 

이따금 이런 성도를 봅니다 . 선교에 귀하게 헌신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 선교하는 교회를 만나서 선교를 배울 수 있게 돼서 정말 감사합니다 .” 정말 그렇죠 . 헌신이 귀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아무리 잘났어도 혼자서 사명을 담당하기는 어렵죠 . 그래서 교회가 좋은 겁니다 .

 

[2] 은혜 70 : 우리 교회 좋은 교회

 

우리 신반포교회가 지난 70 년 동안 잘 달려왔습니다 .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 아울러 수많은 성도들의 헌신 덕분입니다 . 1954 8 명의 성도가 시작했는데 지금은 수천 명 성도의 공동체가 됐습니다 . 더욱이 이 지역은 물론이고 국내외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교회가 됐습니다 . 세계 곳곳 , 심지어 듣지도 못했던 나라들까지 선교사를 파송하고 , 국내외에 교회와 학교 , 병원 등을 건축하고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파해 온 일들을 생각하면 정말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 그 가운데 성도 개개인이나 가정도 영육 간에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 60:22 말씀대로 된 겁니다 .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잘 아시는 대로 제가 우리 교회에서 30 년 이상 목회를 했잖아요 . 그러다 보니까 오랜 세월 수많은 성도들을 겪어 보았습니다 . 얼마나 귀한 분들의 눈물의 기도와 땀의 헌신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 이미 천국에 가신 분들도 있고 여전히 교회 곳곳에서 기도하며 헌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 그런 가운데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됐습니다 . 지상교회가 다 그렇듯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 감히 좋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신반포교회 라고 하면 교계에서 건강하게 선교하는 교회 로 알아줍니다 . 이따금 교계 신문이나 방송에 소개되기도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목사의 이름이 드러납니다 . 그럴 때면 송구한 마음이 듭니다 .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도들이 했으니까 말입니다 . 사도 바울이 그런 심정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 로마서 16 장을 보면 , 그는 서신을 마무리하며 성도들에게 일일이 그 이름을 부르며 문안 인사를 합니다 . 읽는 우리 입장에서는 낯선 이름이 많이 나와서 불편하지만 , 그가 굳이 많은 이름을 열거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 바울 자신이 위대한 게 아니라 동역한 성도들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겁니다 .

 

마치 영화 상영 후 맨 마지막에 자막으로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 (ending credit)와 같습니다 . 그 영화를 만드는 데 참여한 모든 사람을 자막으로 소개하는 겁니다 . 배우들이 앞에 나오지만 배후에서 수고한 감독과 제작자 , 그 외에 촬영 감독과 기사 , 음악 담당자 , 미술 담당자 , 분장 담당자 등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수고했습니다 . 그 사실을 기억하고 알리고 싶은 겁니다 . 저도 신반포교회 70 년 역사의 엔딩 크레디트를 올리고 싶은데 너무 많아서 여의치 않네요 . 이 시간 은혜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 ,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올려 드립니다 .

 

[3] 소망 100 : 더욱더 좋은 교회를 지향하며

 

이제 신반포교회는 70 주년을 넘어 소망 100 년을 바라봅니다 . 예수님이 언제 재림할지 모르지만 100 주년까지 , 그리고 재림의 그날까지 더욱더 좋은 교회를 지향해야 합니다 . 개인 성도가 예수님을 모델로 계속 성화하듯이 교회도 계속 부흥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 이를 위해 주마가편의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 우리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우리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한 남자가 길을 걷다가 길모퉁이에서 나무를 심는 노인을 보았습니다 . 잠시 도와 드리다가 여쭈었습니다 . “어르신 , 언제 열매가 열리나요 ?” 그러자 노인이 대답합니다 . “30 년 후에 .” 그 말을 듣고 남자가 말합니다 . “죄송하지만 어르신이 그 열매를 드시겠어요 ?”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 “당연히 못 먹죠 . 내가 어렸을 적에 마당의 나무 열매를 따 먹었소 . 할아버지가 심고 아버지가 가꾸었죠 . 나는 그분들이 한 대로 하는 것뿐이오 . 자손이 먹으면 그것으로 기쁜 거죠 .”

 

그렇습니다 .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배들의 헌신의 덕을 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 이제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할 때입니다 . 현실이 녹록지 않습니다 . 저출산 시대에 세속화도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그런 가운데 다음 세대가 혹시라도 여호수아 사후의 사사시대처럼 될까 두렵고 떨립니다 .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 더 많은 땀을 흘리며 헌신해야 합니다 .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남은 생애 하나님이 기쁨과 축복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 그리고 다음 세대가 우리보다 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고 각처에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 더 나아가 위대한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를 이루어 마지막 시대에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그렇게 되면 자자손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축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 아무쪼록 이런 비전을 품고 소망 100 년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저와 여러분 , 그리고 신반포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성례식 /4:11-16/ 이춘구목사

2024-04-07 23:16:12

 

이번에 중동의 사우디의 빈 살만 왕세자가 소공동에 있는 한 호텔을 통째로 빌렸다는 것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분은 자기 재산만 1400조라고 합니다. 한국에 와서 1박하는데 호텔에서 왕세자가 머무는 방은 하루밤 자는데만 2200만원입니다. 어마어마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어느 호텔이든지 그 입구에 보면 호텔의 수준을 나타내는 표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경우에는 무궁화가 1개이면 그저 그런 호텔, 2개이면 조금 좋은 호텔이고, 3개면 아주 좋은 호텔, 4개이면 특급호텔, 5개이면 그 이상 좋을 수 없는 초특급 호텔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무궁화 대신에 별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까 별이 다섯 개가 달린 호텔이면 초특급 호텔인 것입니다.

 

미국의 '스탄 톨러와 알란 넬슨'이란 두 사람이 ’Five Star Church‘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이 두 사람은 별 다섯개 짜리 초특급 호텔이 되는 것은 그 호텔의 크기나 호화로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의 질에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교회도 마찬가지로 크기나 모이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한 섬김의 모습에 따라 별 다섯 개 짜리 교회가 되기도 하고, 네 개 짜리 교회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스탄 톨러와 알란 넬슨'이란 이 두 사람의 생각은 다분히 경영학적인 생각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성경적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 한사람이 바로 교회의 품격이요, 교회를 세상에 보여주는 가치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오늘 이 성찬에 동참을 하지만, 내가 이 예식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느 누구가 자신의 의로 자신의 공로로 이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먹고 마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떡을 들고 잔을 마실 때마다 나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은 목숨인데, 내가 누구 때문에 죄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깊이 생각을 해야합니다. 나의 삶, 나의 사역, 이 모든 것을 통 털어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주님을 높이는 것과 연관이 되지를 않는다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을 대할 때 나는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을 마음에 두고 살고 있는가 하는것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거대한 세속도시의 한복판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그것은 건강한 교회에 대한 비전입니다. 당시 에베소 도시는 온갖 우상이 난무하고 음란이 가득하고 물질 만능주의로 길들여진 곳입니다. 이 거대한 에베소 도시 한복판에 세워진 에베소 교회는 정말 외형적으로 보면 힘없고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을 것 같은 곳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비전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세상 앞에 시시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유명한 교회론을 이야기합니다. 본문 12절에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 그리스도의 몸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 말은

 

.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11절에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여기 삼으셨다는 말은 개혁 한글에 보면 주셨다는 단어로 나옵니다. 이 주셨다는 단어는 7절과 8절에도 나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나니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누가 은혜를 주셨습니까? 누가 선물을 주셨습니까? 누가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주셨습니까?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온전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가 헌금 내서 지었다고 내 교회가 아닙니다.

 

내가 목회한답시고 내 교회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는 민주적이어야 한다며, 교회의 주인은 평신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Democracy(민주주의)가 아니라 Theocracy (하나님 중심주의)입니다. 대중의 의견이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곳입니다.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반복되어 나타나는 단어가 있습니다.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한글 성경이 너무나 단순하게 번역을 해놓아서 주고받는다 할 때의 그런 단순한 의미만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저는 '주셨다'라는 표현보다 '샤워하다(shower)'라는 표현이 원문의 뜻을 드러내는데 보다 적절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샤워하면 흔히 몸을 씻는 것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샤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바깥에 나가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젖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마치 폭우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또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이 엄청난 희생을 하신 이유는 바로 주님의 보혈로 세워진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세워지길 원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 바울은

 

.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12

사람을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마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입니다. 가정에 새로운 식구 한사람이 들어와도 그 가정에 엄청난 영향을 줍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더래도 여러 가지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까? 직장도 신입 사원 하나를 뽑아도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칩니다. 그만큼 사람을 세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말은 교회의 질서와 사역을 말합니다. 여기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은 교역자가 일입니다.

 

성도들 중에 다양한 은사를 잘 계발해서 전문적인 사역자로 가르쳐야 합니다. 여기 온전하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바로 잡다의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병원에서 부러진 뼈를 맞추거나 어부가 찢어진 그물을 수리할 때, 또는 범죄한 사람을 바로잡는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둘째로 온전하다의 또 다른 뜻으로는 준비시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준비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로 준비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 일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노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다 전문가로 세워야 합니다.

 

2)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왜 몸에다 비유했을까요? 바로 머리되신 주님과 지체인 우리가 유기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주님은 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이 은사는 계급이 아닙니다. 교회를 섬기기 위한 영적 질서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십니까?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다양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로 나가야 그것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지체가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다양한 지체 중에 하나라도 이상이 생기면 온몸이 다 고통을 받습니다. 여러분도 느끼시지만, 건강에 얼마나 중요합니까?

 

제가 코로 나 후유증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쳐진게 있는데 바로 걷기 운동을 자주 합니다. 일주일에 3-4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땀이 나도록 걸을려고 애를 씁니다. 자양동을 돌거나 아니면 건대 호수를 중심으로 돕니다. 그런데 걷다 보면 아픈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뇌출혈이나 뇌경색 등으로 인해 반신이 마비된 분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어떤 분은 어림잡아 30-40십대로 보이는 분들을 보면 찹찹한 마음이 듭니다. 뇌출혈과 뇌경색이 어떻게 오는지 아십니까? 뇌에는 수백 수천개의 실핏줄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느 한 핏줄에 콜레스테롤이 쌓이고 피딱지가 앉습니다. 그 핏줄이 자기의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게 되고 결국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됩니다.

 

뇌에 피가 가지 않으면 여섯 시간 안에 병원에 가서 그 혈관을 뚫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뇌는 죽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죽은 뇌는 영원히 다시 살릴 수가 없습니다. 핏줄 하나가 막히면 그 부근에 있는 뇌가 죽어버립니다. 이런 증상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실핏줄 하나가 자기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가운데 교회가 마음에 안든다고 다퉈보세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나만 고통 받습니까? 온 가족이 고통받게 되고, 주위에 있는 세상이 다 불행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성숙해야 합니다. 13-14

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14절에서는 그 기준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여기 요동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요동은 바닷가에서 파도가 치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파도가 엄청나게 밀려와도 요동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요동합니까? 첫째는 사람의 속임수때문입니다. 잘못된 교리에 속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간사한 유혹이라고 했습니다. 이 유혹은 속임수를 말합니다. 사회학자들이 군중은 어리석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선동에 잘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선동은 주로 속임수와 거짓말로 합니다. 예를 들면 지난 2008년도 청계 광장에서 광우병 사태로 미국산 소고기를 불매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어느 방송국이 쓰러져 가는 소를 광우병 소라고 소개함으로 나라 전체가 엄청난 혼란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쌧발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그(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말입니다. 주님을 더 많이 닮아가고, 주님의 선한 일꾼이 되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주는 성숙한 믿음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오늘 참 무서운 병이 많습니다. 희귀한 불치병 가운데 하나는 프로제리아라는 병이 있습니다. 일명 조로증입니다. 이 병은 주로 아이들에게 걸리는 병인데 아이들이 출생하여 자라다가 2개월쯤부터 3년 사이의 아이들에게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 병이 오면 어느 날부터 성장이 멈추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세포가 정상인보다 10배나 더 빨리 늙어갑니다. 그래서 체구가 왜소해지고 탈모증세가 나타나고 어린 아이인데도 피부주름이 노인처럼 되고 어른처럼 동맥경화증에 걸리고 노쇠현상이 급격이 나타나 나이는 분명 어린아이인데도 생김새는 노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부분 10년 정도 생존하다가 생물학적인 노화과정을 다 거친 후 죽는다고 합니다. 성장을 안 하고 도중에 멈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되고 인격이 자라야 됩니다. 이는 너무너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자라지 않는 발육부진의 자녀를 둔 가정에 둔 부모는 얼마나 고통이 큽니까? 발육이 멈춰버린 교인들만 그득한 교회에 가 보세요. 기도하지 않습니다. 봉사가 없습니다. 헌신도 열심도 없는 그런 모습으로 바짝 메말라 있어요. 좋은 교회가 되려면 목회자로부터 어린이까지 계속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성장하고 계십니까? 나는 주님이 서 계신 곳까지 가기 위해서 얼마나 성장합니까?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준비하고 열심히 기도합니까?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 얼마나 은혜를 사모합니까? 은혜를 받기 위해서라면 천리만리라도 달려갈 만큼 갈급한 심령이 있습니까? 여러분 내가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쳐서 날마다 복종시킵니까? 아예 그런 노력 안하면 문제가 일어나요. 특별히 교회 안에 중직을 맡은 분들, 내가 직분만 맡으면 다 된 줄 알고 그 다음엔 성장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다른 교회를 가면 그런 사례를 너무 너무 많이 봅니다. 직분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모두가 자라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우리는 감히 우리 스스로는 이 식탁에 초대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베푸신 은혜의 식탁에 나와 이 세상의 최고의 만찬을 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뗄때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대할 때, 도대체 내가 누구이길래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터뜨려 나를 구원의 자녀로 삼으셨는가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동성교회는 주님의 교회요, 바로 우리교회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교회입니다. 그래서 매일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교회가 위기 가운데 든든히 설 수만 있다면, 교회가 부흥할 수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동성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주님을 머리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 이 동성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특별히 코로나 위기 속에 교회가 많이 힘이 듭니다. 자식이 아플 때 더 마음이 쓰이고 더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더 교회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더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교회를 위해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세례교인으로 세워지는 분들과 성찬에 동참한 모든 분들이 건강한 교회로 섬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길 축원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십시오 /4:1-6/ 이재훈 목사

2023-12-22 11:37:01

 

하나 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하나되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 됨을 지키며,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십시오.

 

올해 온누리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개인과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교회에 이 말씀을 적용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교회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때때로 교회가 교회를 위해 존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교회는 천국의 대사관입니다. 대사관은 언제나 본국의 뜻을 따라야합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뜻을 드러내는 공동체로 존재해야 합니다.

 

교회학자 하워드 스나이드는 오늘날의 교회가 기독교가 아닌 교회교가 되어가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신앙이 교회 안에 갇혀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교회에 갇힌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신앙을 교회생활로 국한 시킵니다.

 

그래서 생활이나 역사속의 신앙이 아니라 교회 울타리 안에 갇힌 신앙에서 머물게 됩니다. 이들은 교회생활이 곧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성도는 신앙이 생활이 됩니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합니다. 반대로 교회 울타리 안에만 머무는 성도들은 교회 안의 활동에서만 영적인 의미를 찾고, 교회 밖의 생활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이끄심

 

에베소서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교회의 모습을 배우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시각을 넓혀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깨닫고 지평을 넓히는 곳입니다. 교회는 헬라어 에클레시아에서 유례 되었는데 여기서에크‘~으로부터를 의미하고 레시아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즉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선택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은 문제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혼돈 때문입니다. 그 혼돈이 생기는 이유가 스스로 교회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서 교회를 선택하면 혼돈이 생기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중요한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8: 30).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선택하해서 부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선택은 우리가 시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내게로 올 수 없다’”(6: 44).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신 예수님

 

참된 교회가 되려면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 모두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 중에 만약 부르는 사람이 나였다면 절대 부르지 않았을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한 사람씩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과 당시 바리새인들의 제자훈련 방식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의 제자훈련은 제자가 스승을 선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탈락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한 사람씩 부르시고 한 공동체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를 보십시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죄인 중의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을 가리켜 세리와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세리 마태가 회개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정치적으로 극우파들은 폭력과 무력을 통해서라도 세리와 로마제국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은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열심당원입니다. 그 열심당원 중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세리 마태와 열심당원 시몬이 만났을 때 긴장감이 없었을까요. 아마도 긴장감이 엄청났을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핵심멤버는 어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직업과 환경 등이 모두 달라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신 이유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부르심의 놀라운 비밀

 

예수님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부르지 않았을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공동체에는 함께 있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부르심을 받아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그들도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한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 갇힌 몸인 나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십시오”(1).

 

에배소서 1장부터 3장까지의 내용을 보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 없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선택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한 공동체들 이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 없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부르심을 받았으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해야합니다.

 

합당하다는 의미는 저울의 무게를 동등하게 맞춘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권면한다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의 모든 내용을 근거해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순서와 원리

 

사도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난 다음에 그것을 근거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성도들에게 권면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순서입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난 다음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순서가 바뀔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십시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십시오.

 

율법은 율법대로 행하면 축복하겠다고 했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축복했으니 받은 축복과 은혜에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니 하나님의 가족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몸 안에 들어왔으니 그 몸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네 종류의 하나 됨

 

온전히 겸손하고 온유하게 행동하고 오래 참음으로 행동하되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2~3).

 

하나 됨은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네 종류의 하나 됨이 나옵니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하나 됨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떻게 하나 되셨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 되어 역사하고 계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본성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인 예수님의 두 개의 본성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예수님의 신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 됨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육신의 옷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입니다.

 

넷째, 지체들끼리의 하나 됨입니다. 첫 번째 하나 됨이 두 번째 하나 됨을 만들고, 두 번째 하나 됨이 세 번째 하나 됨을 만들었습니다. 세 번째 하나 됨은 네 번째 하나 됨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구원의 순서입니다.

 

이 순서를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오. 지체인 우리가 하나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전도됩니다. 우리의 하나 됨을 보며 예수님의 비밀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밀을 알게 되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하나 됨 지키는 다섯 가지 태도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 됨을 지키면 나타나는 다섯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겸손, 둘째 온유, 셋째 오래 참음, 넷째 용납하는 것, 다섯 번째는 화평입니다. 다섯 가지 태도를 나열한 순서마다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겸손으로 시작해서 화평으로 끝났습니다. 겸손은 마음의 태도입니다. 화평은 관계 속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 됨은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제도를 통해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오는 하나 됨은 내면의 겸손이나 화평에 이르는 과정이 아닙니다. 이 태도를 가지는 데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겸손입니다. 겸손은 마음을 낮은 곳에 두는 것입니다. 겸손과 굴욕은 갖은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이고, 같은 취급을 받는데 어떤 사람은 괜찮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불쾌해합니다. 괜찮다고 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굴욕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태도의 차이입니다.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지만, 타인에 의해 강제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굴욕을 느낍니다.

 

문제는 겸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짜 겸손은 자신이 겸손한 줄 모르는 것입니다. 겸손을 가장한 교만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교만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면 하나 됨이 주는 화평을 누릴 수 없습니다.

 

 

화평을 이루게 하는 온유, 오래 참음

 

두 번째 단계는 온유입니다. 온유는 약한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강함입니다. 그러나 통제된 힘입니다. 부드러운 힘입니다. 모세는 온유했지만 연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었습니다.

 

힘을 쓸 때 쓰고 쓰지 않을 때 쓰지 않는 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온유는 견딜 수 있는 힘입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버틸 수 있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예수님이 온유를 배우면 마음에 쉼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면 쉼을 얻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쉼이 없는 이유는 겸손하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갈등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은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분노와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서로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용납이라는 뜻은 상대방에게 시간을 준다는 것입니다. 여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변화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변화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더라면 제자들은 모두 탈락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지 않고 우리를 용납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고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여유와 여지를 허락하신 것처럼 상대방이 변화될 수 있도록 여지를 주는 것이 용납입니다. 용납할 때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며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해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4~6).

 

일곱 번씩이나 하나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한 소망, 한 몸, 한 성령,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을 일곱 번에 걸쳐 강조하면서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은 하나의 진리이기 때문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면 모든 교리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또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이라는 소망으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부르심의 소망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라고 말하거나 머리가 발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더 약해 보이는 몸의 지체들이 오히려 중요합니다(고전 12:20~22).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눈이 손에게, 머리가 발에게,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 지체가 다른 지체에게 필요 없다고 말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필요 없는 지체가 없고, 연약해 보이는 지체가 더욱 중요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주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내세울 것이 없고,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구원을 스스로의 업적이나 공로,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십시오. 하나 됨을 힘써 지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원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성령 안에 한 몸으로 부르셨음을 감사합니다.

부르심을 따라 하나 됨을 힘써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교회의 성장 /4:11-16/ 조향록목사

2023-10-05 15:05:46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역사와 만물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메시아) 그리스도이십니다. 전 역사의 중심 초점이요, 우주와 만물의 핵심이며 존재하는 것들(생물, 무생물)의 생명이요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장에서 창조의 동참자이시오 종말의 완성자이십니다. 모든 가시적 물질적의 행적 존재들의 생명이요, 그 본체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 될 것으로 여겨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선악과 실낙원 사건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교란됨으로부터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하나님의 역사는 마침내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사 인간을 대신한 속죄의 제물이 되어 비로소 만민을 구원하신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가 승천하신 후에도 그의 몸으로, 즉 구원 역사의 가시적 유기체로서 교회를 세우셨고 영으로만 임재하시는 성령으로서 교회의 역사와 구원의 사역을 지속 발전시켜 가십니다.

 

생명 나무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 속에 심어진 하나님의 생명 씨앗이며 땅 속에서 움트고 자라 지상으로 나와 싹트고 자라며 잎이 나고 가지가 뻗고 꽃이 피며 열매맺는 생명 나무요, 포도나무요, 알곡이 맺히는 곡식 나무입니다. 무시 무동하고 무위 무상한 토양같이 진흙 밭 같은 세상에 이 생명 씨앗이 떨어져 거죽은 죽고 속 생명이 자라므로 땅이 땅값을 하듯 세상과 역사가 제 값을 찾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저 많은 종교기관, 많은 사회단체나 조직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씨앗이며, 그 유일한 생명 나무며, 이 교회는 하나님의 전 역사의 구원사의 주역이요 핵심이요 우주 만물의 존재하는 존재들의 중심축(中心軸)이 되는 기관입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이 사실을 인류의 문화사(文化史)의 과정에서도 입증하였습니다.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살아온 이래 많은 민족이 그대로 자기 문명 모든 종교 등 자기 문화를 꽃피우고 살아왔는데 그것들은 때가 오면(春夏秋冬) 죽어 소멸되었고 또 소멸되어 가는데 오직 기독교와 그 문명은 계속 상승 곡선을 이루어 자라가고 있다 했습니다.

 

교회는 우주와 역사의 중심축(中心軸)이다.(2:11-22)

사도 바울은 이 교회의 성장사는 두 개의 측면으로 관찰했습니다. 하나는 수평선적, 즉 역사의 측면으로 관찰했고, 다른 하나는 수직선적 측면으로 설명했습니다. 역사적 측면이라 함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처음 한 인간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형성하게 하시고 때가 되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십자가로 이 민족 종교의 담을 헐고 세계와 인류의 보편 종교로 구원사의 영역을 확대하셨습니다.

 

수직선적 측면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를 중심 초점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지는 수직선적 믿음의 고백으로 내실 있는 질적인 성장을 확충시켜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중심축을 돌려 동서남북 모든 각들이 하나의 원을 이루어 통일되는 생명체로 운동하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 십자가의 중심축인 예수님은 지상의 역사 속에서는 그리스도 몸으로 돌게 하고 그 다양한 기능은 하나로 통일하는 진동의 무한 동력은 성령의 역사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조화 통일되고 양과 질이 균형있게 움직이며 생명의 성장을 가속화시켜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장의 최종 목표점은 어디까지인가? 그것은 에베소서 4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며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유기체, 즉 공동체이니 공동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어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스스로 자라며 스스로 세우느니라. 역사 속에 현존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즉 생명체, 때문에 잠시도 정지됨이 없이 자라가고 세워 가는 존재, 존재하는 것의 고정적 양식이 있습니다.

 

교회는 자라 가는 생명체입니다.

자라 가는 생명체의 두 측면의 하나는 수평적 성장 측면입니다. 수평적 성장은 공간적으로는 지구라는 이 공간을 확대하여 가는 선교 지평의 확장입니다. 이 측면은 양적 성장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서도 누룩 비유, 촛불 비유 등에서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요새 교회의 성장도는 양적 성장이냐 질적 성장이냐 하고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 성장은 양적 질적 총체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다만 인간이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아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일시에 완전을 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조차도 성경에서는 그때마다 하나님이 그의 사역자들과 함께 하셔서 진행시켜 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서 언제나 게으르지 말아야 할 과업은 역시 양적 성장입니다. 위에서 말 한 대로 교회는 모임의 공동체입니다. 불교와 같이 모임, 즉 사회를 외면하고 떠나 혼자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성도들의 모임,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며 살아가는 신앙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임의 성장은 역시 교회의 성장을 의미함은 당연합니다. 사도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장점은 잘 모이는 모임에 있습니다. 교회의 모임이 식어지는 서구 교회들을 그렇다고 알찬 교회라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해서도 부단한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은 교회의 양적 성장에 있어서 그 영역을 세계에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개교회의 성장 뿐 아니라 교단의 성장, 국내 성장 뿐 아니라 교회의 선교지는 국제적으로 확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50억 인구 중에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인류가 3/2도 훨씬 넘습니다. 기성교회들과 선진 서구 기독교 국가들은 혹시 무관심해도 하나님은 지금 그 영혼들을 잊어버리고 앉아 계시지 않습니다.

 

교회 성장의 또 다른 측면은 수직선적 관계의 증진 확충이라 했습니다. 이 점을 질적 성장이란 말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 질적 성장으로는 개인 신앙의 성장과 교회 공동체의 성장도의 두 측면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의 신앙의 성장과정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처음 믿을 때는 어린아이 신앙 시절이라 하면 이 아이 신앙은 점점 자라가야 하고 또 어른 신앙으로 성숙하여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교회 교우들에게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서 늘 권고했습니다.

 

신앙은 한 시기에 나의 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자라 가는 신앙 체험에 깊이와 신앙 이해의 넓이와 신앙 생활의 성숙도로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생명 활동의 성장은 영적 체험의 성숙성을 더욱 깊게 합니다. 신앙의 수직선적 성장은 인간의 실존적 신앙 체험과 병행합니다. 인간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생소한 체험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그 만남을 경과한 후에야만 그 만남의 의미와 내용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의 현장은 가시적, 그리고 평범한 일상적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누구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직접 대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물체도 태양에 직접 접근하여 자기를 보전할 수 없듯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스스로 사람을 만나실 때 인간이 접근하고 소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모습으로 나그네, 노인, 환상, 그리고 구름 속, 가시덤불 속, 빛으로, 음성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인간은 기적을 원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 기적의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만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만남은 일상적 사건 속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현장에서는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그 사건은 지나놓고서야 다시 회고하니 그것이 하나님 만남의 사건이었음을 인식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성경에서의 모든 신앙 고백이 그러합니다.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 만남의 신앙 고백의 연속 속에서 신앙이 깊어지고 높아가기 때문에 이 보화는 받은 자 밖에는 알 수 없는 신비한 은총입니다. 이 신앙 체험은 자기의 체험이기 때문에 천지가 뒤집혀져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른 말을 해도 거기에 현혹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신앙 공동체인데 구성원들이 저마다 받은 바 신앙의 다양한 체험들이 신령한 은총을 증폭시키고 조화를 이루어 공동 신앙고백으로 자라갑니다. 이것을 다양성 속의 일치라고 합니다. 교회는 신앙의 다양성을 용납하고 동시에 서로 보완하고 연결하여 신령한 유기체를 성장시켜 갑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장을 주도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오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심은 교회를 하나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은 교회를 인도하심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은 교회의 인도자이심을 재삼 강조했습니다. 여기에 큰 신비가 있습니다.

 

교회도 조직이 있고 질서의 유지를 위한 규범과 제도와 법규가 있으며 직제의 종류와 권위의 소재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2천년을 지나오는 동안 많은 내부적 시련과 타락과 모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교회로서 성장하여온 것은 다만 한가지 교회의 모든 것들의 최종 결정권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교회 활동 사역의 최전선 지도책은 성령에게 맡기고 내게 말라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사람이 이끄는 기관이 아니라 성령이 이끌어 가는 기관이라 함은 교회 자체의 역사적 체험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기록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이끌어 가신다는 고백입니다. 사람이 역사한 것 같았는데 지나고 보면 성령이 역사한다는 고백입니다.

 

교회가 성장의 활동 영역, 하나님이 일하실 영역을 사람이 침범하지 않고 잘 순종하면 교회가 화목하고 교회가 조화되고 교회가 성장합니다. 교회의 성장은 혹은 신앙의 성장은 위와 같이 내부적인 측면에서의 성장 과정도 깊이 이해하여야 하지만 그중 한가지는 외부적 영향에 대한 교회의 성장 측면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의 유기체의 소장(消長)에서도 적응되는 문제입니다. 마가복음 426, 27절에 매우 적극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며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그 다음은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다.\"

 

교회 성장의 의무적 조건이라 함은 물론 좋은 외부적 조건과 나쁜 외부적 조건을 의미합니다. 좋은 조건이라 함은 신앙과 선교의 자유 보장의 정치적 조건이요 복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민족적 인간적 수동 태세가 좋은 것이며, 나쁜 조건은 반기독교, 반종교적 민족 문화, 반종교적 풍토와 정치적 조건 등입니다. 아직도 이 지구상에 아랍권과 불교, 유교 문화권 등이 남아 있어 좋은 조건을 갖지 못합니다. 북한의 경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더군다나 씨가 뿌려졌다 해도 어느 때 큰 핍박이 밀어 닥쳐 일시에 소멸되거나 지하에 숨어 잠자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을 썼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땅에 씨를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라고 썼습니다. 밤에도 자라고 낮에도 자라고 사람이 잘 때도 자라고 깰 때에도 자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만은 외부적 조건이 좋을 때도 물론 잘 자라지만 외부적 조건이 극심히 좋지 않을 때도 그 나름대로 자라간다는 매우 적극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표현만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역사, 신앙의 역사가 이 사실을 극명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초대 기독교가 3백년간의 시련과 박해를 겪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돌아보니 참으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앙 체험을 가진 이들이 고요한 바다에서는 물론 \"이 세상 풍랑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라고 찬송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황금은 수천 도의 불 속에서 단련되어 순금으로 빛나는 것처럼 한 개인의 신앙도 시련과 환난 속에서 더욱 굳어지는 것입니다.

 

() 김교신 선생은 그의 산상수훈 연구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란 구절을 해석하면서 본래 누가복음에서는 그저 가난한 자라 했는데 가난이 왜 축복이 되는가? 자기가 경험해 보니 가난도 큰 축복이더라. 양식에 걱정이 없고 여유 있게 살 때에는 하루에 한 번 하던 기도를 저녁 먹을 양식을 걱정하게 되고 배고파지니 하루에 세 번 네 번 기도하게 되니 이것이 축복이 아니겠는가고 썼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존 번연은 16년 간 런던 타워에 갇혀 있으면서 유명한 천로역정을 썼고, 빅토르 위고는 8년 간 감옥생활 속에서 레미제라블을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의무적 시련 속에서 뼈가 자라고 정신이 자라고 신앙이 자라고 영적 체험이 성장합니다. 중세기는 서구의 암흑시대라 하지만 그 시대에 사역한 성 프란시스코 같은 성인은 지금까지도 배출하지 못했고 그 시기에 창제된 그레고리오 성가집은 지금까지도 카톨릭 교회의 공식 예배 성가로 공인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산 속과 동굴에서 주로 하던 많은 성자들의 신앙 저작, 신앙 체험, 전도열과 봉사 활동은 현재 교회가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식을 낳아 키워보는 일이 없었다면 하나님 사랑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는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며 더군다나 부모의 가슴을 태우며 배반한 탕자를 가져본 부모는 아마도 하나님 앞에 나와 몇 갑절의 눈물을 더 쏟고 통회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가난 때문에 타락하고 범죄 하는 사람 숫자보다는 부요함으로 타락하고 범죄 하는 사람 숫자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대충 예수 믿는 시늉만 하던 분들이 미국에 이민을 와서 일시나마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것을 보니 그것도 감사합니다. 고향 생각, 친구 친척 생각, 고국 생각이 그립고 마음 달랠 길이 없어 헤맬 때 그래도 어디나 계신 하나님을 찾아 눈물을 쏟고 나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니 그래저래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가 감당치 못할 시험과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 했습니다(고전10:13). 신앙인은 시련이 오면 그것도 그대로 받고 평안이 오면 그것도 그대로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밤에도 자라고 낮에도 자라 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내 속에서 형체도 갖춰가고, 체력도 건강해지고, 정신도 강해지고, 믿음도 견고해지게 자라갑니다.

교회의 성장 도는 양적으로 측정할 수도 있고 질적으로 측정할 수도 있습니다. 물질적 축복과 교회의 양적 성장으로도 측정할 수 있고 또 그와 반대의 경우에도 그것보다 더 귀하고 값진 내면적 영혼의 부요함, 풍성한 은혜의 부요함으로도 측정됩니다.

 

교회의 성장이 어디에까지 이르는가?

위에서 말 한대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지니라\" 합니다. 교회는 역사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생명체는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함이니라\"(1:23). 우주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 안에서 충만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시 구원이 어느 구석에도 빈 구석이나 모자람이 없이 알차게 충만하여지는 그 때까지입니다.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속량하시고 모든 것을 구원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종말까지입니다. 시간으로 시작하여 시간으로 끝나는 역사가 다시 영원에 이어지는 그 날까지 자라 가는 기관이 교회입니다. 이 세상이 모두 교회가 되고 이 역사와 인간과 만물이 그리스도안에 통일되고 충만하게 되는 때 그 날에는 교회는 없어집니다. 묵시록 21장에 그 성 중에는 성전이 없다 했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친히 그 백성들과 항상 함께 계시는 때문에 예배 처소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언제일 것인가?

최근 샌디에이고 대학에 계신 성서학자 리처드 엘리옷 후리이즈맨(Richard Elliott Friedman) 교수가 Disappearance of God란 책을 썼습니다. 매우 흥미가 있어서 재차 구독했습니다. 간단히 추려서 말씀드리면 그 책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자기가 구약성서를 개관하여 보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자기 형상을 닮게 지어 그에게 이 세상 관리를 맡겼는데 처음 갓난아이 같은 인간이기에 백가지 만 가지를 모두 하나님이 관리자로 삼고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과 토론하게 되며 선악과를 따먹고 실낙원의 비극이 생겼는데 그 후에 노아, 그 후에 아브라함, 그 후에 모세, 그 후에 예언자들 이렇게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책임은 점점 더 무겁게 그리고 하나님은 점진적으로 뒤에 숨어버리는 과정이었고 맨 나중에 예언자 에스라 느헤미야서에 이르러선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이 인간들의 활동 기사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바로 이러한 구원사를 집중적으로 요약하였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는 즉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상황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20세기가 시작되는 무렵 프레드릭 니체, 도스트엡스키에서 하나님의 죽음을 선언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실이 미쳐버린 니체의 마지막 생애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21세기를 맞는 이 시기는 인류의 정신사에 있어서도 종말론적 세기인데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발달이 하나님이 없이도 살만큼 발달하여 가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죽었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인간의 성숙한 모습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이제야 대견하여 만족해하실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야말로 모든 종교가 그 시발점은 신을 두려워서 멀리 하거나 달래거나 경외하는 것으로서 시작되었는데 이제 인간이 제 몫을 다하게 되면서 정말로 하나님과 동행자 친구가 되어 사는 시대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Divine Human Balance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몫의 일만 인간이 인간의 몫의 일을 함으로서 균형도 유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몫의 일은 무엇인가?

이것은 내 생각입니다. 1차적으로 아직도 하나님이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과 사에 관한 일, 인간과 역사의 운명에 관한 일, 우주의 종말과 그 이후에 관한 일, 즉 인간 운명, 역사의 운명, 우주의 운명에 관한 일은 과학자의 힘으로는 아직 풀지 못했고 또 풀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만물을 잘 관리하고 보호하고 육성하고 개발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권한이며 사명입니다. 인간은 인간과 더불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 인간과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어 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간에 한계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것은 항시 조화와 균형, 한계와 개성과 생명 그것들의 균형 조화입니다. 실낙원은 그 한계를 파괴시킨 행위입니다. 그 한계와 균형을 깨면 전부가 파괴되고 파멸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면 인간도 파멸하고 하나님은 설자리를 잃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이 또 한가지 지극히 중요한 일이 남았습니다. 그것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 구원의 역사 일의 동역자가 교회요 신자입니다. 인간이 제자리에 서지 않으면 만물이 제자리에 서지 못합니다. 인간이 창조의 본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딸로 되돌아가면 그때는 하나님과 에녹처럼 동행하고 예수님 말씀의 친구가 되어 묵시록 21장에의 천국에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 되시고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뻐 춤추는 축제의 종교는 기독교가 최고입니다. 우리가 우리 생활 속에 가정과 직장과 삶의 모든 분야에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사실은 기막힌 사건이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비록 거울 속으로 보는 것처럼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하나님 나라 생활을 약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아직도 미숙하여 하나님과 친구가 되고 동행, 동조, 종사자로서의 감격까지는 체험하지는 못하나 그 사랑의 젖 맛을 일부분이나마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인생이 점점 더 성숙하여 사람이 사람 몫의 일을 다하고 아들이 아버지가 안방에 앉아 쉬고 있어도 아버지께 걱정을 끼치지 않고 집안 처리를 잘해 가면 그 때는 정말 아버지에게 효성을 다하는 아들이 되고 아버지도 기뻐하시고 마음을 놓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어쩌면 하나님만이 책임 맡고 있던 인간과 역사의 운명에 관한 사안까지도 그 아들과 협의해 가면서 결정할 것이요 또 우주의 시작과 종말 이후를 어떻게 하며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하여서 그 비밀을 인간에게 알려주실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그 시기가 바로 구원 역사의 완성을 보게되는 때입니다. 실로 영광스러운 때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상가들은 인류의 정신사적으로 볼 때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 들어서는 이 때를 종말적 시기라고 말합니다. 종말적 시기는 종말적 신앙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게 될 교회의 신앙의 성숙을 재촉할 때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자 /4:15-16/ 유기성목사

2019-05-24 03:04:19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는 참으로 놀라운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님 그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온 교인들이 하나 되어 주님의 몸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얼마 전 교역자 수련회에서 도전 골든벨 시간을 가졌는데, 제게 문제를 하나 내라고 하여 아주 쉬운 문제를 내었습니다. ‘담임목사 생일이 몇 월 며칠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다 아시지요? 그러나 의외로 정답을 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1225일이잖아요? 우리 교회 표어가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이니 예수님이 담임목사이시잖아요. 저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세워진 종일뿐입니다.

 

이것이 말만 아니라 실제가 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갈망입니다.

또한 모든 교인들이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역자 수련회 마지막 저녁 기도회에서 결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붉은 긴 끈을 준비하고 한 사람씩 일어나 사랑의 공동체를 위하여 결단하는 고백을 하고는 붉은 끈을 붙잡았습니다.

 

그렇게 다 고백하고 나니 모두 붉은 끈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이미지였습니다. 그 시간교회에 돌아가서도 보이지 않지만 이런 끈으로 우리가 하나 되어 있음을 항상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정확한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끈, 주의 보혈의 끈으로 묶여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주님과 묶여 있고 또 한편으로는 교인들 서로 서로에게 묶여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러므로 예배당만 왔다 갔다 하면 안 됩니다. 지난 날 어떤 시험이 있었고 어떤 상처가 있었다 하더라도 교회로 모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어릴 때, 교회에서 받은 상처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게 교회가 없었다면, 또 교회를 떠났다면, 지금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문제 많은 교회에서 저는 주님을 만났고 구원을 받았고 믿음이 자랐습니다.

 

성경에 보면 마지막 때에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 같겠고, 노아 시대와 같으리라고 했는데 지금 그렇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 교회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곧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극도로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홍수 심판 때 노아와 가족들을 그 방주를 통하여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원의 방주인 주님이 주인인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축복이며 또한 거룩한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비전이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에는 눈에 보이는 예배당 건물도 있고 교인도 있고 많은 사역이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영적 뿌리입니다. 그 뿌리가 바로 예수님과의 연합인 것입니다.

 

이번에 교육관을 건축합니다.

교회의 영적 뿌리를 건강하게 하자면서 왠 건물을 짓느냐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다음 세대들도 주님과 하나 되고 주님과 동행하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각한 미세 먼지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형편은 그보다 훨씬 심각함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시대입니다. 북한 공산당만 아닙니다. 학교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진화론을 진리처럼 가르칩니다.

 

동성애 등 반 성경적인 생각들이 세력을 얻고 있습니다. 미디어와 인터넷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문화를 어려서부터 경험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은 미세먼지로 자욱한 곳에서 숨 쉬고 사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런 일입니다. 우리 자녀들, 다음 세대들이 겪는 어려움은 더욱 큽니다.

 

혼탁한 공기만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세계는 더욱 중요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였을 때, 당시 청년들은 나라에 대한 꿈을 잃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이 술집에서 부르던 노래가 <희망가>였습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이 아니 족할까

 

나라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니 부귀와 영화만 바라자는 것입니다. 당시 시대정신이었습니다. 나라의 영토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영토도 모두 빼앗겼습니다. 그것을 안타까워했던 남궁 억 선생이 팔도강산 구석구석 교회 앞마당에 민족의 혼이 담긴 무궁화 심기 운동을 펼치고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찬송가 580[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입니다. 이 찬송은 곧 일제에 의하여 금지곡이 되어 부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벨론 세상에서 다니엘로 살아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생각을 신앙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돈과 성공과 재미가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 자녀들이 믿도록 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주님과 동행하자.” “주님만 바라보자.” “주님과 하나 되자.” 외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한 목사님 아들이 배다니엘, 9세 초등학교 2학년, 매일 저녁 제 설교를 틀어달라고 한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예배드리라고 하면서 아들이 설교를 한답니다. 아버지 노트북으로 설교 원고를 작성하지만 한 번도 원고대로 설교하지는 않는답니다. 그러면서 설교하는 아들 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배다니엘 설교 동영상]

 

한 아이 한 아이가 다 소중합니다. 결코 전체 수로 계산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입니다.

 

안데스산맥 꼭대기 어디쯤, 따가운 햇살을 받은 얼음덩어리 위로 맺힌 조그만 물방울 하나가 골을 따라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리다가 차츰 다른 물방울들과 어울려 결국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아마존 강물이 되어 일초에 약 2억 리터씩 대서양에 민물을 쏟아 넣습니다.

 

한 아이가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는 일이 이처럼 소중한 사역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어린아이 때 생명의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게 된다면 어른이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랍게 쓰임 받겠습니까?

 

지금 우리 교회는 청년들과 고등학생, 중학생, 어린아이, 유아들이 교육관을 지어야 할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아주 먼 곳에서도 아이들이 교회로 옵니다. 이것은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중등부가 없어, 고등부가 없어 아이들이 떠나가는 작은 교회들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마음은 무너집니다. 그 아이들이 우리 교회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맡았으면 잘 길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아이들이 진정 예수님으로 살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왜 우리 교회로 보내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함을 강조하는 교회이기에 보내는 것입니다.

 

가출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이요셉 목사님이라는 젊은 목사님이 [지금 가고 있어] 라는 책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대를 향하여 두 가지 죄, 방임죄와 직무유기죄를 짓고 있다고 했습니다.

 

현행법에 방임죄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거나 막을 대책을 세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가 수행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때 성립하는 죄입니다. 직무유기죄는 국가의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직무 수행을 거부하거나 유기하는 죄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대에게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과 다음 세대들이 세속화에 빠져드는데도 내버려둔 죄와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정당한 사유 없이 다음 세대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내버려 둔 죄 말입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하여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정확한 십자가 복음을 알게 해주고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히 동행하게 해주는 일입니다.

다음 세대들 안에 예수동행운동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다음 세대 안에 예수동행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교회들의 원망과 비난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젊은이교회 청년들 안에서 예수동행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청소년, 어린아이들 중에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예수님과 동행하게 해주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어른들, 부모인 우리가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만 다니는 식으로 신앙생활하면 우리 자녀들이 다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다음 세대, 자녀들에게 예수님과 친밀한 삶을 사는 어른, 예수님과 하나 된 교회를 보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는 알아.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을 보았어. 진짜 예수님의 교회가 존재해, 내가 본걸.” 이라고 말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부모로서 할 일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인 어른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교육관 건축을 하자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동안 예배당 건물을 증축하는 것을 극도로 억제했습니다.

그런데 거리로 뛰쳐나간 아이들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하지만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오는 우리 자녀들을 영적으로 바로 세워주는 일도 해야 하겠기에 아이들에게 신앙교육을 제대로 시키려고 의논하다가 교육관도 건축하자는 의견이 모아진 것입니다.

 

가르치려면 모여서 말씀과 은혜를 나눌 장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하지 않고 공부방을 마련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주변의 건물이나 학교를 임대하여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길게 보면 재정이 더 들게 되며 아이들에게 최선의 공간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우리 교회 부지 안에 하늘꿈학교 교사를 건축하였습니다. 탈북청소년들에게 한국에 왔으니 예수 잘 믿으라, 공부 열심히 하라 말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통일이 되면 북한 각 마을에 들어가 북한의 탁아원을 위탁 운영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르칠 교재와 교사를 양성하고 있으며 동시에 어린이센터 건축 준비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자녀들을 위한 교육관도 건축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육관 건축을 결정하고 기도로 준비하면서 이 일이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에 중요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돈이 있어 짓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하여야하기에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건축을 하자니 다음세대를 위한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늘 다음세대 다음세대 하였지만 이번처럼 담임목사인 저나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교사들과 교인들의 마음이 간절해진 적이 없었습니다.

 

헌금을 해야 하니 꼭 이렇게 해야 하나?’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음 세대를 믿음으로 세울 영적 교육 컨텐츠가 준비되었는지도 철저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건축헌금을 작정하기 위하여 이 일을 왜 해야 하나, 꼭 해야 하나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교육관을 건축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이 깨달아졌습니다.

 

앞으로 지어질 교육관은 다음세대를 잊지 않게 하시는 기념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관 건축을 계기로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을 교회의 최우선 사명으로 삼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교육관 건축 자체가 주님과 동행하는 또 하나의 교회 역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온 교인이 교육관 건축에 다 참여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은행에서 건축비를 융자해주겠지만 은행 돈이 아니라 부모인 우리의 헌금으로 지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교회 어른들의 진심과 사랑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교인이 벽돌 한 장 쌓는 일에 동참했다고 하면 얼마나 의미가 크겠습니까?

또한 이번 헌금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기회입니다. 재정의 부담이 있지만 주님께 드리는 기쁨으로 바뀔 것이고 말할 수 없는 복의 씨가 될 것입니다.

부탁드리는 것은 힘을 다하여 헌금하되 가족이 하나 되어 결코 헌금으로 싸우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교회는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만 힘쓰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십니다. 교육관 건축 역시 주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기도합시다.

이제 주님과 연합한 교회 성도들이 하나 된 교회가 세워지게 하소서.

그리고 주여 우리 자녀들에게 영적 센터가 세워지게 하시고 다음세대에 예수동행운동이 일어나게 하소서.

 

찬양: 우릴 사용하소서

 

 

 

사랑 안에서 세워지는 주님의 교회 /4:15-16/ 유기성 목사

2016-08-25 11:03:50

 

4:15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16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오늘은 일년에 한번 있는 당회가 열리는 주일이기에 교회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교회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는 분들에게는 실망이 될지 모르지만 오히려 이 설교에서 은혜받아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교인들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16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이 진리를 정말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라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충격입니까?

 

주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 계실 뿐 아니라 지금 교회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하여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있으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믿는 척, 아는 척, 들어 본 적이 있는데 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만일 진리가 아니라면 거짓말을 하는 교회를 왜 다닙니까?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교인들과 연합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교회가 무엇을 잘못하면 흔히 교회가 왜 이래?”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과 교회가 하나라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옆에 앉은 교인이 한 몸처럼 여겨집니까?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교회에 등록하지 않고도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는 지역 교회에 소속되지 않았지만 우주적인 교회의 일원이야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쳐치온더웨이 교회의 잭 헤이훠드목사가 어느 주일, 교회 방문 카드를 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본교회명을 쓰는 난에 그리스도의 몸이라 적었고 교회 주소를 묻는 난에는 전세계라고 적은 것을 보았답니다.

 

어느 군인이 서울 거리를 다니는데 헌병을 만났다고 합시다. 헌병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봐 멈춰! 자네 부대가 어디야?” “특별히 소속된 부대가 없습니다.” “이 친구 제 정신이 아니잖아? 빨리 말해, 소속이 어디야?” “저는 대한민국 군대 소속입니다 제 상관은 대한민국 대통령입니다, 본부는 서울 용산 국방부 본부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 이 병사는 즉시 영창에 들어갈 것입니다. 군인이면 반드시 소속 부대가 있는 것처럼 모든 교인도 지역교회에 소속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받은 시험과 실망과 마음의 상처가 많아, 교회에 깊이 소속되고 싶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으로 주신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과 같습니다. 가정에도 문제가 많지만 가정은 근본적으로 복이지 부담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어려서 교회에서 받은 상처가 많았습니다. 목사가 되고도 교회에서 받은 상처가 많았습니다. 실망도 좌절도 눈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게 교회가 없었다면, 또 교회를 떠났다면, 지금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에서 저는 주님을 만났고 구원을 받았고 믿음이 자랐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알겠어요! 알겠다구요! 교회, 필요합니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개인적으로 신경쓸 일이 너무 많아서 교회 일은 나중에 섬기겠습니다. 일단 나 자신이 살고 나서야 교회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교회가 얼마큼 중요한지 모르기에 하는 말입니다

 

교회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입니다. 노아 당시 세상이 극도로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구원의 방주를 만들라고 노아에게 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했지만 노아의 여덟식구는 오랜 세월을 흔들림없이 계속해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덕분에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때에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 같겠고, 노아 시대와 같으리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이 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 교회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쁘다고 뒤로 물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호화스러운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 앞에 아름다운 신부가 걸어 나올 것입니다. 그 신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바쁘다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유일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천국 복음을 전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선언하셨습니다. 다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는 이 통치와 다스리심이 아직 온전히 완성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때까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선포하고 드러내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얼마나 큰 힘이며 복인지 모릅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부담이 아니고 복입니다.

 

세싱에 천국같은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도 어쩔 수 없이 약하고 악한 사람들인데,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어떻게 천국같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그러면 좌절과 실망만 커집니다" 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많이 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건 복음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한 몸된 교회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세우십니다.

 

:16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건설하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몸이 자라나며, 몸이 건설된다.” 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주님이 친히 세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때까지 그냥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날만 기다리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주님이 친히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마가 다락방 120문도에게 성령이 임하신 후, 교회가 생겼는데, 그 첫 교회가 천국같은 교회였습니다.

 

2:44-45에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했습니다. 한마디로 교인들 사이에 내 것 네 것이 없어지고, 서로 필요한대로 함께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왕되심을 고백하고 사는 것입니다.

 

:15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머리가 그리스도이신 교회입니다.우리는 쉽게 내 교회’, ‘우리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 말 속에 소유의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지켜야 할 것이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아파하고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은 세상의 타락이 아니라 교회의 타락입니다. 이 세상의 타락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심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것은 가장 경계하고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어떤 위정자라도, 어떤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도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낮아져야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고백하려고 무시무시한 로마의 권력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순교도 감수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 장로, 돈 있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힘 있는 사람이 높아지려는 것은 큰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높아지고 주장하고 대접받는 것을 포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결정을 하든지 이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만 생각합시다외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뜻이기에 자신의 주장, 계획을 꺽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마음조차 바꾸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순종한 기억이 언제입니까? “나는 죽었습니다고백하였기에 경우 버틸 수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 담임목사님을 새로 모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여러 목사님이 지원하셔서 마지막 투표를 앞둔 날, 새벽에 장로님 한 분이 하나님께 좋은 목사님이 결정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물으시더랍니다, “너는 네가 원하지 않는 목사가 선정되어도 순복 할 수 있겠느냐?”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사는 훈련이 되신 장로님이신지라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고 즉시 대답하였답니다,“! 주님! 제가 원하지 않는 분이 되어도 순복 하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네가 원하는 목사가 아니더라도 네가 원하는 목사처럼 사랑하며 섬길 수 있겠느냐?” 그 질문에 장로님의 마음 중심이 다 드러났답니다,

 

하나님은 장로님의 마음 속을 조금도 숨길 수 없이 다 보고 계심을 알았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로님 마음에 이 목사님은 절대 안 된다고 판단하며 미워했던 것과 다른 목사님이 오시면 사랑하며 섬기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그 순간, 장로님은 주님 앞에 무너지며 펑펑 울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목회자를 향하여 이 분은 절대 안 된다고 판단하며 미워했던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주께 고백하며 저의 순종을 올려드렸습니다. “주님! 제가 원하지 않는 분이 오시더라도 제가 원했던 목사님처럼 사랑하고 섬기겠습니다

 

우리가 매사에 이런 자세로 예수님께 순종하면 예수님이 머리되신 교회가 세워집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려면 정확히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5에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바로 세우는 방법에 대한 명확한 기준입니다.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올린 글이 짧지만 오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되 온유한 그릇에 담아서...”

 

우리가 다른 교인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야 예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 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십자가로 소멸한 것, 그리스도의 육체로 헐어 버린 것은 먼저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과 사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원수되었던 자들 사이에도 일어난 것입니다.

 

10장에 보면 초대교회에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빌레몬서을 읽어보면 초대교회에 주인과 종이라는 신분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여기에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가 드러납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헐렸다고 노래하면서도 옆 사람들 사이에는 오히려 겹겹이 두꺼운 벽을 쌓고 사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 끼리 같은 교인들 사이에도 서로 남남인 것처럼, 혹은 원수인 것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어느 교인이 한 몸이라 느껴지지 않거나 하나되기 싫을 때, 어떻게 합니까? 사도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하신 말씀이 그 해답입니다.

 

4:2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가지라!” 그렇습니다. ‘주 안에있으면 누구와도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인턴전도사로 있었던 김태훈목사님은 어릴 때, 깡패같은 학생이었다고 간증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 깡패같은 학생이었냐면, 제가 그때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깡패가 아니라 깡패같은 학생인 것입니다. 한번은 어머님이 학교에 불려 오시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저와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학교에 오셔서 학생주임 선생님으로부터 저희들의 만행을 다 들으셨습니다. 저희들은 밖에서 부모님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오신 어머니들은 각자 자기 아들들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밖에 나가면 그렇게 무서울 것 없는 친구들이 하나같이 어머니에게 뒤통수를 맞으며 등짝을 맞아가며 집으로 향하는 것을 뒤에서 보면서 참 재밌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옆에서 저에게 한마디도 안하시고 아무 행동도 없이 그저 묵묵히 걸어가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제가 어머니께 엄마 미안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선생님은 참 이상하더라. 우리 아들을 엄청 나쁜 애로 알고 계시더라. 이 얘기 저 얘기 하길래 그냥 안 듣고 다른 생각하다가 나왔어. 우리 아들이 이렇게 착한데 선생님이 오해하고 계시더라..그렇지?”

 

그 이후로 저의 행동은 어머니가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친구들이 집을 나가자고 할 때, 저는 어머니 때문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심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순간에도 저는 어머니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저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고 화나게 해도 어머니 때문에 참았습니다. 저의 마음은 온통 어머니께로 향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저의 허물 때문에 대신 창피를 당하셨으면서도, 저를 끝까지 책임지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저의 잘못을 오히려 용서해 주셨고, 저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저의 목숨을 주고 싶은 사람을 한사람만 말해보라면 저는 주저 없이 어머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제가 죽음가운데 있을 지라도 그 목숨을 걸고 저를 구해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은혜가 이렇게 크다면 예수님의 은혜는 얼마나 큽니까?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하나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새가족이 있습니다. 새가족이 교회에 정착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음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에 든다, 안든다 하는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함께 하는 교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부모라도 자녀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것입니다. . 우리가 서로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관심은 이름을 기억하는 것

 

내가 간호학 수업을 시작한 지 두 달 남짓 되었을 때, 수업시간에 퀴즈시험을 보게 되었다. 나는 세심한 학생이었는데, 시험지를 대강 훑어보고는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마지막 문제가 우리 학교에서 청소하는 '그 여자의 이름은 무엇이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학생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청소하는 여자를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키가 크고 검은 머리였으며 나이는 50대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이름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마지막 문제를 답할 수 없었고, 그 문제는 공란으로 해서 답안지를 제출했다. 수업이 끝나기 전 한 학생이 마지막 문제가 퀴즈점수에 포함되는 지를 물었다. 그러자 교수님은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중요한 사람입니다. 단지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미소를 짓고 인사하는 정도일지라도, 그들은 모두 여러분의 관심과 돌봄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 교훈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후에 나는 우리 학교에서 청소하는 그 여자의 이름이 '도로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는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어 인도한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0:30).

 

- David Gibson / 목회와 신학 지난호에서 발췌-

 

새가족 과정이 너무 길지 않느냐는 불만도 있습니다. 10주나 할 이유가 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입니다. 가정에 새가족이 생기는 과정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임신히여 아기를 출생하려면 10달이 걸립니다.

 

남녀가 만나 결혼하기까지 10주면 짧은 것입니까? 긴 것입니까? 우리가 새가족 과정을 10주를 하는 것은 더 기다릴 수 없어서 10주만 하는것이지 10주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고는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봐,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경우는 큰 예배당을 보면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고, 세상과는 전혀 디른 가치관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용서와 포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대교회가 세상 의 비난을 받는 것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닙니다. 다르지 않아서입니다.

 

한 몸이 된 교인들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교회를 세우려면 하나되라는 성령의 역사에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한국 교회 현실은 정말 답답합니다. 우리가 가진 힘은 너무나 작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우리 교회를 세우며, 우리가 어떻게 한국 교회를 세우나?’ 좌절할 만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몸이라는 진리에 소망이 있습니다.

 

혈루병 앓던 여인이 예수님께 손을 대니 예수님이 부정하게 되었습니까? 혈루병이 치유되었습니까? 우리가 죄인인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어 우리와 한 몸, 한 생명이 되시면 예수님이 더러워집니까? 우리가 깨끗해집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어 교회와 한 몸이 되면 우리를 통하여 교회 공동체가 주님과 하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해지고 주님과 하나되면 교회는 바뀝니다.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그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되는 것만 분명하면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기도합시다. 예수님이 왕이신 진정한 교회를 이루게 해 달라고, 우리가 한 가족임을 보는 눈을 열어 달라고,

 

 

 

하나되는 기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4:1-6/ 유기성 목사

2016-08-10 15:27:06

 

목회자의 목회자라고 불리는 유진피터슨(Eugene H. Peterson) 목사님이 The Unnecessary Pastor라는 책을 쓰셨는데, 우리 말로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 라는 좀 과격한 제목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유진피터슨 목사님에 의하면 껍데기 목회자란 어떤 목회자이냐면 열심히 설교하고 심방하고 상담하고 교인 훈련시키고 교회를 성장시키려하는 목회자입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의 목회자들은 대부분 이런 유형에 속해 있습니다.

 

이런 목회자가 왜 껍데기 목회자입니까? 목사가 예수님을 대신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목회자일수록 목회자 자신이 교인들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스스로 교회 안에서 자신이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목사 자신이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교회에서 교인들이 목회자를 찾는 조건은 교회의 골치 아픈 크고 작은 일들 대신 맡아서 처리해 줄 목회자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경영자나 관리자인 목회자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직접 예수님을 따라 가야하는 귀찮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진피터슨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무익함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좋은 목회자라고 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정말 필요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필요한 일이란 목회자 자신도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교인들도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가장 놀라운 축복은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로부터 특별히 가르침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8: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러나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상상하기도 싫은 무서운 결과가 생깁니다. 그것은 너도 나도 자기가 예수님의 인도를 받았다고 하면서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하면서 다투며 분열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해결하기 힘들고 무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의 무덤 위에 세웠다는 성묘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당은 그리스정교회, 콥트교회, 시리아교회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데, 회당을 분할하여 제각기 고유 영역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교회당을 개축할 당시 서로 자기들 이권만 주장하다가 하마터면 건물이 무너질 뻔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한꺼번에 경쟁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그 소란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작가 마크트웨인이 이런 조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개와 고양이를 한우리에 집어넣어 보았더니 잘 어울려 살았다.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우리에 넣어보았더니 얼마 후에 친구가 되었다.

 

이번에는 침례교인과 장로교인 그리고 천주교인을 한우리에 집어 넣어보았다. 그들은 바로 싸움을 시작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격렬히 싸웠다."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나 마음 아픈 조크입니다.

 

유명한 부흥사, 빌리썬데이 목사님이 시카고에서 대집회를 인도하면서 하루 저녁은 하늘을 향하여 크게 소리 지르더랍니다. “여보시오 베드로 사도님! 저기 침례교인 있습니까? 없어요? 감리교인은요? 장로교인은요? 없다구요!”

 

이단, 이단 하지만 가장 큰 이단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교인들에게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인도함을 받으라고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교인들을 너무 신비주의에 빠지게 하거나 교회가 혼란스러워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는 불가능합니다. 목사에게 순종하라고 해서 하나 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인도하심을 받으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오늘 말씀이 주는 교훈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도를 받았다고 하면서 다투고 분열한다면 그가 예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모든 말이 다 거짓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2-3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 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3절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성령님께서 이미 하나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 뿐입니다.

 

1절에 그러므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1장부터 3장까지의 말씀을 다 받는 의미도 있고, 바로 앞에 있는 말씀인 예수님 우리 마음에 계시니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심을 정말 알게 되면 인격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겸손하라 온유하라 오래 참으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하나되라는 말씀도 노력과 열심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겸손하게 되고 온유하게 되고 오래 참게 되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게 되고 모이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 마음이 갈라지고 싸우다가도 존경하는 분이 오시면 그 분으로 하나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있다고 언제나 하나 됩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싸울 수 있습니까? 가룟유다가 아닌 다음에는 싸울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영원한 천국에서의 생활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싸우지만 천국에 가면 사랑하며 살 것이고, 여기서는 죄 지으며 살지만 천국에 가면 천사처럼 살 것이고, 여기서는 슬프지만 천국에 가면 기뻐하며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어떻게 싸우고 죄짓고 우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닙니다. 여기서 사는대로 천국에 가서 삽니다. 그 말은 여기서 천국에서처럼 살지 못하면 천국도 못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21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가 난감한 일을 겪으셨답니다. 예식 시간이 되었는데 신부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삼십 분이 지나면서 하객들이 하나 둘 가버렸지만 혼자 서있는 신랑이 너무너무 안tm러워서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신랑이 "미안합니다!" 인사하기에 돌아왔답니다.

 

뒤에 알고 보니 신부에게 옛날 애인이 있었답니다. 그 과거 청산이 잘 안되어서 미장원에서 화장을 하고 나오는데 납치를 당했다고 합니다. 결혼식장에 들어와야 될 시간에는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과거 청산 없이 새살림을 시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기서 사는 대로 천국에서도 삽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가서 만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없는 일은 여기서도 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여기서부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워치만니의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국 교회 성도 한 분이 어느 날 자기 논의 물이 자꾸 줄어드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아래 쪽 논 임자가 자기 논에서 물을 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상대로 회복시켜 놓으면 그 이튿날 또다시 수로를 터놓는 것입니다.

 

'이럴 수가 있나?' 너무 화가 났지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이런 경우는 화를 내도 싸워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정말 잘못하였잖아요.”그러나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기도하는 중에 "너는 올바른 일을 위해서만 살겠느냐? 그 이상으로 살 수는 없겠느냐?"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뜻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깨달음이 와서 이튿날은 일찍 일어나 자기 논의 수로를 아랫 논으로 돌려 먼저 물을 받은 다음에 자기 논에 물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아랫 논 주인이 찾아와서 울더랍니다.

 

"내가 몸이 아파 농사를 지을 힘이 없어 논에 물을 대기 어려워 맞아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당신의 논의 물을 빼낸 것인데, 오늘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인이시군요, 저도 이제는 당신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더랍니다.

 

우리는 본성상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볼 때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11:19-20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교회가 이처럼 성령 안에서 하나 되면, 교회는 더 이상 담임 목사의 교회도 장로의 교회도 아니고, 진정한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금식도 많이 하고 성경을 백 번 정도는 읽었고 영적인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세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이고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김길 목사가 [증언] 이라는 간증 책을 썼는데, 거기서 예수제자훈련학교에서 겪었던 일 하나를 말하였습니다. 훈련에 참가한 이들 중에 도무지 용납이 안되는 형제가 한 사람 있었답니다. 모든 학생들과 간사님들이 그를 대하기 힘들어했는데, 남이 잘못하는 것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그는 결단을 해야 했답니다.

 

한번 욕을 해주고 훈련을 그만둘 것인가, 아니면 그를 용납하고 훈련을 마칠 것인가? 그 때, 바로 이런 상황이 훈련이라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판단하지 않고 훈련을 받기로 했답니다.

 

그리고 그 결단에 대한 표시로 자신에게 들어오는 재정 후원금의 10분의 l을 그에게 헌금하기로 결정했답니다. 재정이 흘러가니 마음이 흘러가고 점점 그와 친해졌답니다. 니중에는 간사님들이 그의 좋은 형으로 있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때론 상처도 받고, 마음에 억울한 일도 생깁니다. 우리 안에 미움도 올라오고, 분한 마음도 올라옵니다. 성경은 이런 마음조차도 없는 것이라고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 영적인 눈이 뜨여야 합니다. 마귀가 움크리고 우리를 삼키려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일 3:14-15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런 순간에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동원목사님이 미국에서 목회하실 때, 한국 아이들을 입양한 미국 부부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행사를 열었답니다. 한 미국 목사님 부부가 당신 자녀 3명이 있는데도 한국 어린이 3명을 입양했고, 그 중 둘은 장애 어린이임을 보고 물었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까?”그 때 그 목사님께서 질문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묻더랍니다. “당신과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세요?”“우리가 다 비정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양자 삼아주셨어요! 그래서 나도 그런 아이들을 보면 사랑스러워지는 것이지요.”그 말을 듣고 감동도 받았지만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어떤 사람도 용납할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미국 감리교회에서 파송했던 스크랜톤선교사는 의사였습니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선교사들을 '양도깨비'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전덕기라는 17세 청년이 어느 날 양도깨비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가서 기와 조각을 던져 양도깨비의 집 유리창을 박살냈습니다.

 

그는 양도깨비가 화낼 줄 알고, 정면 대결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양도깨비는 미소를 띠고 오히려 따뜻한 말로 전덕기를 위로하였습니다. 이 날 청년 전덕기는 스크랜톤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남대문시장의 천민과 상인들을 위해 희생적인 목회를 했고, 민족운동의 선구자가 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조사옥목사님이 번역하신 책, [어둠속에 빛나는 등불을 들고]는 스티븐메트카프 선교사님의 전기인데, 이 선교사님이 영국 사람인데 중국에서 태어나 십대 때 2차 대전이 일어나 일본 포로 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스런 시절을 보내었던 분입니다.

 

일본군의 잔혹함을 보면서 일본 사람을 증오하였는데, 그 수용소에서 에릭리델 선교사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뀝니다. 에릭리델 선교사님은 1924년 파리 올림 픽 금메달리스트입니다. 육상 100m가 주종목이고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인데, 결승전이 주일에 열려서 포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재능을 아까와한 이들이 400m 경기에 출전하게 하여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는 모든 명예와 부를 다 포기하고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였는데, 일본 포로 수용소에서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와 성경공부 시간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논쟁이 일어납니다. 에릭리델 선교사님은 메트카르에게 일본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도무지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일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보라고 권합니다, 그는 순종하여 억지로 일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전쟁이 끝나고 일본 선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선교의 열매가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 되기 어려운 민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역주의, 학연주의, 연고주의, 세대차 등은 통일을 앞둔 우리 민족의 고민입니다.

 

월드컵 축구대표팀 감독은 얼마나 영예로운 자리입니까? 그런데 좋은 성적을 거두고도 사표를 냈습니다. 모두 다 더 감독일을 맡아달라고 했지만 가족들이 말렸답니다. 네티즌들의 도를 넘어선 비난을 견디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런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 될 길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에서 해결됩니다. 분열과 미움, 비판과 증오가 십자가 복음에서 해결됩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십자가 복음은 바로 우리 민족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과 교회의 사명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 됨은 단지 교회 만의 일이 아닙니다.

 

민족의 문제를 풀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일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 보세요. 예수를 믿어 보세요. 우리 민족이 하나 되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영광, 교회 공동체의 영광은 하나 됨입니다. 4-6절까지 계속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6절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 됨, 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서 그렇게도 보고 싶어한 가장 중요한 기대였음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하셨을 때 무엇이라 기도하셨는지 아십니까?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가 될 때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던 것입니다.

 

오늘 받는 성찬은 예수님과 하나 되고 성도들과 하나 되는 기적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 성찬을 받기 전에 미워하고 판단하고 갈라졌던 일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하나 되는 기적이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민족에 일어나기를 기도합시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봉사 /4:7-12/ 이동원목사

2014-11-30 10:09:00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 출석하다가 교회 출석을 중단하고 있는 교우에게 쓴 권면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답신은 사실상 또 하나의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진정한 신앙생활을 위해 꼭 예배에 출석해야하고 교회 봉사를 해야 할까요? 저는 요즈음 저 혼자만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유지를 통해 믿음의 삶이 가능한가를 실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교회 없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할까요?”

 

목사님이 다시 답신을 썼습니다. 이렇게 쓰셨다고 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군대에서 훈련이나 소집에 불응하는 군인이 정상일까요?

 

세금을 내지 않고 투표하지 않는 시민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베이스캠프 없이 등정하는 등산가가 정상일까요? 병원이 없이 치료를 구하는 환자가 정상일까요?

 

학교나 스승이 없는 학생이 정상일까요? 벌집이 없이 날아다니는 벌이 정상일까요? 팀을 생각하지 않는 축구선수가 정상일까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의 교회 생활은 정상이신지요?

 

본래 과학자 아이슈타인은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국 독일이 나치의 학정아래 신음하고 있었을 때 희망을 접지 않고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조국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작은 교회 공동체의 진지함을 지켜본 어느 날 그는 회중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내가 교회를 오해했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자녀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부모를 섬기고 형제자매와 교제하고 가정에서의 봉사의 경험을 통해 정상적인 인간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집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형제자매와 교제하고 교회 봉사의 경험을 통해서 정상적인 신앙인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봉사의 상처의 경험이 있었던 분들은 교회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봉사를 기피하는 영적 알레르기성 질환의 증세를 갖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상처를 넘어선 유쾌한 봉사가 가능할 수 있을까요?

 

1. 각자의 영적 은사를 따라 섬겨야 합니다.

 

본문 에베소서는 바울 사도가 교회론을 전개하고 있는 서신 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장까지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세상을 향한 비밀로서의 공동체를 교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4-6장까지는 교회에 속한 지체된 성도들의 교회 생활을 실천적인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런데 4장의 첫 머리 부분에서 성도의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다음으로 무엇보다 중요하게 강조한 것이 은사를 따라 섬기라는 것입니다.

 

7-10절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그분은 그는 이제 승리자로서 고대의 승리자들처럼 자신의 백성들에게 그가 정하신 분량을 따라 우리 각자에게 각기 다른 선물 곧 은사들을 하사하셨다는 것입니다.

 

11절은 이런 다양한 교회내의 리더십의 은사적 직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대표적인 것들로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그리고 목사와 교사가 있다고 기록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레이 스테드만(Ray Stedman) 목사는 1972년에 출간한 기념비적 책인 몸의 생활’(Body Life)라는 책에서 이 네 가지 은사적 직분들을 우리 몸의 네 가지 계통에 비유하였습니다.

 

사도가 우리 몸의 골격 계통(몸을 만드는 뼈대, 사도는 교회 개척)이라면, 선지자는 몸의 신경 계통(머리에서 명을 받아 온 몸에 전달, 선지자는 교회의 질서를 세움)이고, 전도자는 소화 계통(밖에서 음식을 취하여 몸의 한 부분이 되게 함,

 

전도자는 불신자를 구원하여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함) 그리고 목사와 교사는 순환 계통(피가 온몸으로 영양을 전달, 목사와 교사는 말씀을 가르쳐 성도를 양육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계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 다른 역할을 감당할 따름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가장 단순한 분별 방법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으시면 됩니다.

 

두 가지가 다 만족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음악은 좋아하지만 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제가 찬양대에 들어가든지 지휘를 하겠다고 덤비면 큰 일 아닙니까?

 

우리는 은사가 없는 사람들을 자기 사역의 파트너로 끌어들여도 안 됩니다. 제가 처음 나가던 교회에서 부목사님의 강요로 제가 성가대에 꼭 한번 선일이 있습니다. 제 목소리가 베이스로 천부의 목소리라는 등등의 말로 저를 유혹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제가 테너와 베이스의 경계선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른 쪽 사람을 따를지--왼 쪽 사람을 따를지--저는 그 환난의 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스스로를 시험해 보시고 내가 교회내의 어떤 사역에 참여했을 때 가장 보람을 느끼는지를 확인해보시고 그 일이 내게 진정한 영적 기쁨을 주거든 그 사역에 평생 헌신하시면 됩니다.

 

2. 자신을 넘어 서로를 온전케 해야 합니다.

 

은사 발견은 봉사 사역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자기 은사에 합당한 사역을 발견하셨다면 그 일에 충성하십시오. 그런데 그 사역함에 아주 중요한 경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사역을 결코 일 중심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 사역은 철저하게 관계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적 사역은 결국 이웃을 섬기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의 가장 큰 함정은 자기만족의 수단화입니다. 물론 자기 은사에 맞는 일을 하면 거기에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은사(카리스마,karisma)라는 말의 어근은 카라’(kara)로서 '기쁨' 혹은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자기 은사 혹은 재능에 맞는 일을 하면 누구나 신바람이 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봉사는 이런 자기만족에 목표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섬김의 결과로서 이웃이 유익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의 표현을 빌리면 이웃을 온전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동일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동역하면서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나의 동역자가 자신의 은사적 가능성을 더 개발하게 되어 어느 날 그가 나 못지않게 혹은 나보다 그 일을 더 잘하게 되었다면 이것이야 말로 사역의 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역의 현장에서 항상 동역자를 의식하고 그가 모자라는 측면을 어떻게 채워 줄 것인지 혹은 아직 개발되지 못한 그의 은사가 어떻게 꽃을 피우도록 도울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때로는 나의 동역자가 은사적으로는 나를 이미 추월하는 진보를 보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 태도가 이웃들에게 시험거리가 되고 있다면 이 부분을 어떻게 보완하도록 도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기에 누구도 도움이 불필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타인의 도움이나 섬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3. 직분을 봉사의 영성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된 단어는 온전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키 워드입니다.

 

(개역 개정판은 전에 온전하게 하며온전하게 하여로 바꿈--온전케 함이 여러 가지 일중의 하나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을 나타냄) 그러나 온전해 지는 도움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온전케 됨으로 해야 할일이 봉사라는 것입니다.

 

영적 성숙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먼저 봉사의 장에 뛰어들면 그는 자신도 힘들고 이웃에게도 짐 거리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여기서 온전해진다는 말은 본래 뼈를 맞춘다는 뜻을 갖습니다.

 

탈골된 사람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가 어떻게 몸을 제대로 움직여 봉사 활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뼈를 맞추고 치유되는 일이 선결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정도 회복의 징후가 보이면 그는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할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 내에는 언제나 두 가지 바람직하지 봉사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한 종류는 기본적인 치유도 되지 않고 기본적인 영적 성숙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봉사한다고 하면서 다른 교인들에게 상처만 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직은 내게 치유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온갖 치유집회만을 따라 다니면 봉사의 기회는 접어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짧은 인생에 언제 섬김의 열매를 갖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어느 정도 내게 믿음의 확신과 치유의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된다면 겸허히 섬김의 자리에 서십시오, 그리고 봉사의 일을 하십시오. 여기서 봉사의 일은 철저하게 섬김의 일’(the work of service)입니다.

 

여기 봉사’(service,diakonias)라는 단어에서 집사(deacon)이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디아(dia)와 코니아(konia)두 단어의 결합인데 코니아의 뜻은 먼지란 말로 합하여 먼지를 턴다는 뜻입니다. 집사는 먼지를 터는 사람, 청소하는 종입니다.

 

계급이 아닙니다. 본래 고대 교회에서는 교회 모든 직분을 통칭하여 집사라고 불렀습니다. 집사는 가장 대표적인 직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철저하게 계급이 아닌 봉사의 직분일 따름입니다.

 

직분 수여는 좀더 잘 봉사할 수 있도록 봉사의 마당을 제공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직분을 받은 분들은 이제 좀더 허리를 굽히고 손에 수건을 들고 이웃들 앞에 서야 합니다.

 

오늘 저녁에 12주년을 축하하며 임직식이 있는데 이 임직되는 분들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의식을 갖기 전에 먼저 하신 일이 봉사의 가장 힘든 일들을 경험하시는 일이었고,

 

마지막으로 지난 월요일 화요일 새벽에 세족식을 가지심으로 우리가 앞으로도 해야 할일이 바로 이런 섬김의 일인 것을 다짐하셨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한국 교회가 질적으로 성숙하려면 이 봉사의 영성이 성경적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최고의 과오가 있었다면 직분을 계급화한 것입니다.

 

이라는 단어까지도 계급화하여 우리는 종을 종님이라고 부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종은 맡겨진 일만 성실하고 겸손하게 감당하면 됩니다.

 

4. 궁극적으로 몸 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본문 12절 마지막에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내 직분과 봉사의 궁극적인 초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가를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입니다.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빌딩’(building)한다는 말입니다. 세우는 것(빌딩)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허는 것 곧 파괴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질 때 교회는 진실로 세상의 소망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 봉사를 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날마다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의 섬김으로 우리 교회가 좀 더 든든하게 좀 더 아름답게 잘 세워져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섬기는 분들의 태도나 방식이 그릇되었을 때 교회가 한 사람의 부덕한 일꾼 때문에 온 교회가 흔들리고 몸살을 앓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제발 흔드는 자나 허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본래 흔드는 일은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22:31에 보면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요구하였으나세우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움은 단순한 조직의 세움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교회원을 성숙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교회가 일한다는 뜻은 교회가 교인들을 통하여 일하는 것을 뜻합니다.

 

교인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은 장성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세워질 때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그들이 살고 있는 모든 삶의 장에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어지는 본문 13절이하에서 바울 사도가 지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제가 좋아한 미 상원 원목이었던 리챠드 하버슨 (Richard Halverson)목사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한때 제가 미국에서 사역하던 지역의 목회지였던 미국 워싱톤의 매릴랜드의 제4 장로교회의 목사로 목회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가 한번은 워싱톤 밖으로 여행을 갔다가 비행기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가 착륙준비를 하면서 워싱톤 상공을 비행할 무렵 마침 비행기 창가에 앉아 있었기에 창 밖으로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당 건물이 보고 싶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원을 그리며 방향을 틀면서 자기 교회가 보일 듯 보일 듯 하다가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백악관이 보이고, 어린이 병원이 보이고, 국방성이 보이고, 조지타운 대학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느닷없이 이런 건물들에서 일하는 자기 교회 형제 자매 집사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는 갑자기 무릎을 치면서

 

그래 맞아 나의 교회는 저 리버 로드 선상에 있는 교회당만이 아니야.

이 모든 곳 나의 백성들이 흩어져 일하는 모든 곳에 나의 교회가 있는거야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한분 한분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서 예배하고 말씀으로 훈련받는 동안 은혜 받고 새 힘 얻어

그리고 다시 흩어져 우리의 마을,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 우리의 사업장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의 빛을 발하며 사는 것을 보는 것-이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봉사도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 이웃들을 격려하고 세워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에서만 큰 소리 치는 자가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큰 소리 치며 승리하는 자들이 되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존재의 이유요, 셀 교회 비전이요, 제직을 세우는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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