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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에베소서 설교 모음

에베소서 1:15 - 23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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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에 대항하는 습관 만들기 /1:18/ 김병삼목사

2023-04-18 23:44:29

 

면제되지 않는 시련

오늘은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 나오는 글로 말씀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시험지에 선택 문제가 나왔을 때에는 자기가 풀 수 있는 문제인지 여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필수 문제가 나왔을 때에는 어찌 되었든지 간에 최선을 다해 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답안을

제대로 못 쓰더라도 어느 정도의 점수는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풀지 않으면 단 한 점도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시련에 대항하는 습관 만들기입니다. 만일 이 시련이라는 놈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을 피하는 습관에 대하여 공부하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시련이란 놈은 우리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대항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은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인생 가운데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가 말했던 것처럼 시련과 시험은 우리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필수 문제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시험이 없게 해 주세요라고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정재은 자매가 설희라는 배역을 맡은 뮤지컬 영웅을 관람했습니다. 영웅 안중근 보다는 인간 안중근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영웅 독립투사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안중근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거사를 거행했는지, 그리고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교수형에 처하는 밧줄이 내려진 자리에서

장부의 뜻을 끝까지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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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의 태양 광활하나 대지 우린 어디에 있나

잊어야 하나, 잊을 수 있나 꿈에 그리던 고향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 하늘에 대고 맹세 해본다. 두려운 앞날, 용기를 내어 우리 걸어가리라

눈물을 삼켜, 한숨을 지워 다시 걸어가리라

어머니, 어머니, 서글피 우시던 모습 날이 새면 만나질까 멀고 먼 고향 너무 그리워

기적소리가 우리의 심장 고동치게 하리니 조국을 향한 그리운 마음 눈시울이 뜨겁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 하늘에 대고 맹세해 본다,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우리 뜻 이루도록

 

하늘이시여, 지켜주소서 우리가 반드시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가장 복되게 만드는 것은 시련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이기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주면서 묵상팀에게 자유로운 느낌을 이야기 보라고 했습니다. 한 분이 이렇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께 대항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시련에 대항하라~ “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거나 대항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대개

시련이란 우리가 원치 않던 일들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시련에 이기는 방법은 대항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그 시련에 맞서는 것이죠. 여기에서 함께라는 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시련에 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련을 당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묵상 팀의 어떤 분은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종종 그런 표현을 잘합니다. 예전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마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데 그냥 무기력하게 서서 쫄딱 다 맞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우산을 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니 우산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있은 채 말이죠. 손에 우산을 들고 있으면서 폭우를 그대로 맞고 있을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거예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을 때, 신앙이 깊지 않았을 때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막상 어려운 일을 만나면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돌아보면 챔버스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믿음을 연단하는 시험을 허락하시고 그 어려움들을 적

절하게 극복하는지를 보셨던 것 같아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고난은 이상한 게 아니며 자연스러운 거

라고 성경은 말씀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바람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아

. 삶에 어려움과 고난이 없기를 바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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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버스는 묵상 글에서 시련은 주의 자녀들을 자녀답게만드는 일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자녀다움. 자녀답게 산다는 것은, 서두에서 말하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낸다는 말인 것 같아요. 자녀는 부모의 가르침대로 그 가정의 문화 속에서 성장하며 부모를 닮아갑니다. 긍정하든지 부정하

든지와 상관없이 나이를 먹어가며 어느새 점점 부모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님들 또한 연약한 인간이므로 자녀 교육을 포함한 삶의 모든 부분에서 시행착오를 거쳐

가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우리를 자녀답게 만드는 고난과 시련에도

 

주님께 저항하지 않고 신뢰함으로 받아들이고 의지하면, 점점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지

않을까 생각되어집니다. 우리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드러나야 한다는 말은 자칫 너무 추상적이고 어렵게만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를 닮듯,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결국 나의

성품의 변화, 인격의 변화를 이루는 것이 나를 통해 예수님이 드러나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챔버스는 이 과정 가운데 주님이 드러나실 수만 있다면 아무리 아픈 고통이라도 인내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인내가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내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굉장

 

히 수동적이고 소극적 의미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챔버스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함

께 뛰어넘는 적극적인 의미의 인내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크고 작은 시련이 계속되는 삶에서,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인내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 같다

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생활에서 의미 없는 고난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으니까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1:18)

 

사도 바울은 변화된 이후, 자신의 소망이 아닌 하나님의 소망을 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부르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어드리는 삶은,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어

조금 더 나를 죽이고, 조금 더 희생하고, 조금 더 손해보고, 조금 더 사랑해야 하는 삶이 아닐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제는 저에게 우산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18:29)

습관을 주제로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택받은 목적을 실현하며 살아야 합니다. “당신이 구원받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받은 구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옛 생활 방식을 고집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정결하게 하셨다는 것은 거짓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어려움과 시련이 있습니다. 왜 구원받은 우리의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 없는 인생을 주시지 않습니다. 시련과 어려움을 적절하게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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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시편 1829절을 인용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때, 세상에서 만날 시련을 면제해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라고 해서 시련이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면제되지 않는 시련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삶의 습관은 이렇습니다. “불 시험이 오면 일어나 대처하십시오. 만일 그 불 시험이 당신의 죽을 육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드러낼 기회가 된다면 아무리 아픈 고통이라도 인내하십시오.”

요한계시록 310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하신 칭찬이 나와 있습니다.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챔버스는 그의 책 [오스왈드 챔버스 하나님의 사랑]에서 인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인내는 시험을 전제로 한다. 사람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어 시험한다. 끊어지지 않고

얼마나 견디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팽팽하게 당겨보는 것이다. 바이올린 줄 같은 경우 가장

높은 음은 가장 강하게 당겼을 때 난다. 인내하는 힘이 셀수록 음이 높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내하는 성도일수록 하나님을 위한 삶의 소리가 곱다. 주님께서는 결단코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시련을 주지 않으신다. 우리가 슬픔과 재난과

 

비참이라고 말하는 것을 하나님은 연단이라고 하신다. 우리 귀에는 불협화음으로 들리는데

하나님께는 아름다운 소리로 들린다. 당신이 꾸지람을 받을 때 실족하지 말라. 주의 연단을

멸시하지 말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9).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쉼의 시간을 주시면 주님의 치유의 잎사귀 안에서 평안하게 쉬라. 챔버스는 시련이 올 때 일어나 대처하라고 합니다. 그 대처는 인내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하나님의 사랑]에서 말한 것처럼, 인내하는

성도일수록 하나님을 향한 삶의 소리가 곱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습관을 만드는 방법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제가 만나교회 공동체와 설교를 하면서 참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의 추억혹은 간증이라 불리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기념비라는 말이 종종

등장합니다. 지금 떠오르는 것 중에 하나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넌 후

12지파가 돌 하나씩을 가져와 길갈에 기념비를 쌓은 일입니다. 여호수아 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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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21.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22.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경험한 기적이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또 다른 환란을 만났을 때, 그 기념비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지를 생각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념비는 늘 하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무엘 상에 보면 두 종류의 기념비가 나옵니다. 하나는,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인

사무엘 상 712절에 나오는 기념비입니다.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이 기념비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하나님께서 도우셨음을 고백하는 기념비입니다. 이때까지 이스라엘은 늘 블레셋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여호와의 법궤도

 

빼앗겼던 상황이었습니다. 늘 패배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전쟁도 객관적

전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이 불리한 싸움에서 사무엘은 이런 작전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무엘 상 73.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그런데 이와는 달리, 한 사람의 인생이 파멸로 이르게 되는 다른 기념비사건이 나옵니다. 사무엘 상 1512절 말씀입니다.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이 사건은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과

 

사울왕은 승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신의 기념비가 얼마나 오랫동안 효력이 있겠습니까? 나이가 들면 힘이

다하게 될 것이고, 수 없이 많은 다른 환경들이 찾아올 텐데, 과연 그 모든 것을 제어할 능력이

사울에게 있을까요?

자신의 기념비가 변화된 환경에서도 힘이 될까요?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다가오는 시련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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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이미 그 때의 그 사람이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오류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천년만년 힘과 권력을 휘두를 줄 안다는 것입니다. 시련에 대항하는 습관을 세우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는 기념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함께 고난을 경험하고 함께 고난을 헤쳐 나가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 이들이 서로를 위해 중보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불평하지 않기

시련에 대항하는 습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련을 당할 때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습관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습관시리즈를 시작하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버릇과 습관은 다르다!

버릇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습관은 의도적으로 우리들의 삶에 젖어드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불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본능 아니겠습니까?

 

좋은 습관은 우리의 자연적 본성을 이기면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불평하면, 우리의 자연적인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성품이 드러납니다. 불평하지 않기 위해서는 시련에 대항하는 우리의 영적 자세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그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드러나는 것이요 하나님께

명령하려는 마음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분명하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명령하려는 마음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께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영성가인 엔드류 머레이가 아주 중요한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을 남겼습니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어둠 속에서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목록을 작성했다. 1895년에 그는 잉글랜드에서 등이 몹시 아파 고생하고 있었다. 몇 년 전의 부상 때문이었다. 어느 날 아침, 그가 방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여관 주인이

왔다. 아래층에 묵고 있는 여자가 큰 어려움에 처했는데 혹시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앤드류 머레이는 뭔가가 적힌 종이 한 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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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위해 적어 둔 충고입니다. 이걸 그녀에게 전해 주십시오. 그녀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역경의 시간에 이렇게 말하라. “우선, 그분이 나를 여기로 데려오셨다. 내가 이 협착한 장소에 있는 것은 그분의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안식할 것이다.”

 

그 다음엔 이렇게 말하라. “그분이 사랑으로 나를 보호하실 것이고, 이 시련 중에도 그분의 자녀로서 행동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하라. “그분이 시련을 축복으로 만드실 것이고, 내가 배워야 할 교훈을 가르치실 것이며, 주려고 작정하신

은혜를 부으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라. “그분의 선하신 방법과 시기는 그분만이 아신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라. “나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훈련 아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부름 받은 이유는 하나님께 명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종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름을 받은 이유를 깨달을 때, 주님은 기꺼이 우리를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먹이고 양육하십니다. 그러니 시련이 올 때 대항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맞서면 용기가 생기지만, 뒤 돌아서면 두려움이 쫓아옵니다. 시련에 맞서지 못하고 도망하면, ‘도피가 습관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제 이야기로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시카고에 유학하던 시절 1년을 지났을 때였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은 제가 미국에서 시작한 공부가 M. Div

 

과정이었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신학 공부를

다 마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일반적으로 석사과정은 전공분야만 하면 되지만, 이 과정은 목회자가 되는 모든 영역을

다루어야하기 때문에 학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양이 너무 많은 과정입니다. 당시 영어가 되지 않는 저로서는 참 따라가기가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목사 안수까지 받은

내가 이 어려운 과정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핑계가 자꾸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런 고민의 순간에, 시카고 지역 한국 목회자들이 모이는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장 나이 어린 목사 중에 하나였고, 기타를 메고 찬양인도를 하고 레크레이션을

인도하고 있을 때였죠. 잠깐 쉬는 시간에 까마득히 높아 보이는 선배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제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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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아무래도 좀 쉬운 과정으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선배 목사님이 제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조언을 한 마디 해주셨습니다. “김 목사님, 한 번 포기하면 또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니 끝내세요.”

그 말이 얼마나 귀하게 들렸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끝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미국 학생들도 3년에 마치기 힘들다는 과정을 저는 2년 만에 마치게 되었고, 박사과정으로

들어가 학교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영어는 여전히 저에게 큰 장벽이었고, 경제적인 여건도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큰 교훈과 새로운 습관이 저를 잡아 주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빨리 마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가 목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아무리 간절해도 공부를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보다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 때의 경험이 저를 많이 붙잡아 주었고, 그 경험이 저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종종 저의 수첩에는 ‘check lists’가 있어서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피하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또 이렇게 다짐합니다. 피하고 싶은

그 일이 사실은 제가 지금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이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필요한 것은 회피가 아니라,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기 있게 대면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오늘 하루 또 실수 합니다. 주 뜻 이루며 살기엔 부족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연약하고 실수하고 넘어진다고 생각할 때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시련 가운데 가장 큰 힘은 소망입니다.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 한 시련은 끝이 아닙니다. 어떤 개그맨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우리가 흔히 성공과 실패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말이라고요. 성공은 있지만 실패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성공하지 못한 과정

있을 뿐이지 소망을 버리지 않으면 아직 실패한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1:18)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는 소망도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소망을 붙들고 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니, 시련이 올 때 마다 소망을 부여잡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구속언약 (2) /1:20-23/ 김형익 목사

2021-05-06 03:44:37

 

지난 주일 우리는 성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한 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맺으신 구속언약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의 창시자가 되시고,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언약의 실행자가 되시며, 성령 하나님은 언약의 적용자가 되신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중보가 되시기를 자원하심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택한 자들을 위한 언약의 보증인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받을 모든 율법의 저주와 죽음의 형벌을 대신해서 받으셨으며 율법의 모든 의를 이루심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그 보증인이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자를 그리스도처럼 보셔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볼 내용은, 이 구속언약의 중심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조건을 다 성취하심으로써 어떤 보상을 얻으시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구원이 그 보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하신 일: 몸을 예비하시고(10:5; 1:35; 4:15; 고후 5:21) 성령을 부어주심(3:34; 42:1; 61:1; 4:18~21).

본래 구속언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셔서 율법에 온전히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은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야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16).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를 보내셨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이 모든 언약의 조건을 실행할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제공해주셨습니다. 가령, 죄의 오염에서 면제된 몸을 주시기 위해서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사 여인에게서 나게 하신 것입니다(1:35). 이로써 사람이 되셨지만, 죄는 없으신 사람으로 오셨습니다(4:15; 고후 5:21).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해주셨습니다(10:5).

 

또 그 아들이 세상에서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습니다(3:34; 42:1; 61:1; 4:18~21). 그러나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또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구속언약의 조건을 다 이루셨을 때, 성부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 보상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언약의 조건을 다 성취하셨다는 의미(19:30)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남기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까(19:30)? 구속언약의 모든 조건을 남김없이 다 성취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단지 십자가 죽으심만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에서 시작하여 인간으로서 사셨던 33년의 생애, 그리고 율법 아래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신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이 모든 구속언약의 조건을 다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더 남겨진 일이 없습니다.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남겨진 것은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위한 구속언약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몫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성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일을 받으시고 그 아들에게 보상을 주셔야 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언약이라는 것은 조건과 보상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조건은 하라또는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 조건 성취에 따라서 보상과 형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맺으신 구속언약 속에서 당신의 조건을 온전하게 만족시키셨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보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 보상이 무엇입니까?

 

성부 하나님의 첫번째 보상, 부활(2:32; 3:15; 4:10; 5:30; 10:40; 13:30,33,34,37; 8:11; 10:9; 1:20; 2:12; 벧전 1:21; 16:8~11; 2:25~28).

 

첫번째 보상은 죽은 아들을 살리시는 성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성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라고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보십시오. 그는 성령의 충만을 입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고 했습니다(2:32).

 

성부 하나님께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신앙고백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많이 반복됩니다(3:15; 4:10; 5:30; 10:40; 13:30,33,34,37; 8:11; 10:9; 1:20; 2:12; 벧전 1:21). 성경에서 이 부활사건은 단순히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고만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영원 전에 성 삼위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구속언약의 조건과 보상이라는 관점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가령, 16:8~11에서 보게 되는 메시야 시편의 내용이 바로 그 구속언약의 성부 하나님 편에서의 보상을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성자의 신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날 바로 그 구약의 구절을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선포하는데 끌어옵니다(2:25~28).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과 언약 조건의 성취를 성부 하나님께서 다 성취된 것으로 받으시고 주신 첫번째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보상(1:20~22): 승천, 보좌에 앉으심,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권세,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심, 교회의 머리되심.

보상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읽으신 본문을 살펴보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사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셨고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그 이름을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1:20~22).

 

이 구절들을 바울 사도가 쓸 때, 그는 분명히 영원 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 언약하신 그 보상의 내용을 주시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앞서 썼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던”(1:4~5)

 

바로 그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언약의 성취를 받으시고 주신 보상으로서 소개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구절들입니다. 여기는 받으신 보상이 전체적으로 설명되어있습니다. 부활, 승천, 보좌에 앉으심,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권세,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심, 교회의 머리 이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언약 성취에 대한 보상으로써 성부 하나님께서 주시도록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심(4:15; 5:23): 교회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여기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 하나를 좀 더 확대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4:15; 5:23). 그리스도께서는 언약의 보증인이 되셔서 피흘리심과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남김없이 다 받으시고 우리를 대신하셨기에 더 이상 그리스도의 언약의 보증되심을 믿고 고백하는 자들이 치루어야 할 댓가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자들이,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가 대표가 되셔서 그분의 의로움을 믿음으로 거저 받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더 이상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죄인이 된 인류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즉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3:9),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주 음성 외에는 더 기쁨 없도다라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영적 주소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것이요, 그것이 또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교회는 참 교회, 비가시적 교회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그가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가입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약의 보증인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게 되고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참 교회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보상: 아들에게 주신 사람들(110:1~4; 6:37,39, 44)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그들을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또한 영원 전의 구속언약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의 시편에 예언된 내용입니다. 시편 110:1~4을 보십시오.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언약 성취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성부 하나님의 맹세입니다(110:4).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110:3).

 

이것보다 확실한 예언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신약성경에서 우리가 최근에 상고한 바 있는 요한복음 6장을 보십시오. 37절에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이미 성부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서 그렇게 주기로 된 자들, 즉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39절에서도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을 때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4절에 내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도 같은 맥락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누구냐하면 사람 편에서 설명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보증이 되셨음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참 교회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보상: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심(17:24; 4~6; 고후 4:6)

이 내용을 가장 자세하게 볼 수 있는 본문은 요한복음 17장입니다. 이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메시야로서의 마지막 사명을 남겨두시고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신 위대한 본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하신 것이 성자 그리스도의 사역이었습니다. 언제 무엇을 하라고 주셨습니까? 영원 전,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서 구속언약이 있었다는 것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이 언약 조건의 성취를 근거로 하여 주님은 보상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5절입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제 영광의 보좌에 다시 오르셔서 본래의 영광을 누리시며 성 삼위 하나님의 기쁨을 나누시기를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언약의 직무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택하신)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주님은 언약 직무를 성취하심으로써 아버지의 택하신 자들을 당신의 것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다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이것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언약의 직무를 근거로 하여 주장하실 수 있는 보상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으로 주어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5:22~33) 그리스도께서는 성자 하나님의 본래의 영광을 보여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신부인 교회는 이 근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확실성은 신부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 하라고 주신 일을 다 이루셨다는 사실에 달려있는 것이기에 세상은 변해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이야말로 신부가 가지는 최고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기 시작한 사람들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했습니다(고후 4:6).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추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보상: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심(2:33; 14:27; 16:7).

여기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보상 가운데 또 하나를 보게 됩니다. 바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신 일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보내신 것과 같이, 성령 하나님을 보내지시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으며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는 믿을 길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성령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특별한 방식으로 교회에 부어지셨습니까?

 

왜 주님의 성육신과 함께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 때였습니까? 이것도 역시 영원 전에 맺어진 구속언약의 내용이었다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후,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2:33). 보혜사 성령님은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분이십니다(14:27).

 

내 이름으로 보내신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메시야로서 성취하신 언약의 모든 조건들 위에 근거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의 사역을 다 이루신 근거 위에서만 오시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는 주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16:7).

 

여기서 주님이 떠나신다, 가신다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시고 승천하셨을 때, 그 성취의 근거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의미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택한 자의 심령에 적용하시는 것(고후 4:6; 3:18).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자의 심령 속에 적용해주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모든 댓가를 치루셨고 언약의 조건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 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사람들인 교회를 주셔야 합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령 하나님을 교회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모든 택한 자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믿을 의지를 주시고, 믿음을 주십니다. 중생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님을 보내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영원 전에 인간의 구속을 계획하시는 성 삼위 하나님의 구속언약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어디에서도 당황스러움이나, 조급함을 가지고 말씀하시거나 기도하시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을 이루시되,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의 비추임을 받고서 비로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고후 4:6).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주의 영광을 보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되는 변화,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고후 3:18). 이 모든 것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언약 직무 성취에 근거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의 미래 영광(21:1~5)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주제는 하나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미래 영광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 21:1~5입니다.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고 있습니다(21:1). 그것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는 전혀 다른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죄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오염되어서 다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어있는 세상이었고 그 결과로 죽음과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런 모든 죄악과 죄의 결과들을 다 멸하시고 심판하심으로써 새로와진, 구속함을 받은 새로운 질서를 가진 세상이었습니다.

 

또 사도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새 예루살렘이란 다름아닌 교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신부의 모습이었습니다(21:2). 그 모습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순결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완성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주름잡힌 것이 없는 그리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미래의 영광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이 모습으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러기에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화될 자들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참으시고 인내하시고 기다리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근거에서 우리가 이런 은혜를 입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언약을 성취하신 근거에서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또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라는 음성입니다(21:3~4).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이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압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맹세가 이루어질 것을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모든 고난과 눈물과 슬픔을 참을 수 있습니다. 인내함으로 우리는 그날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날이 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잘잘못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되신 성육신과 율법 아래 사심과 그분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구속 언약의 성취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 우리의 거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아멘!

 

 

 

예수님으로 충만하신 교회의 영광 /1:20-23/ 유기성 목사

2016-08-10 11:44:41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1990년대 미국 안에 새로운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교회는 쇠퇴하고 있었고 한국 교회는 크게 부흥하고 있어서 미국에서도 많은 목사님들이 한국 교회를 배우려고 왔습니다.

 

한국 교회 새벽기도회를 보고 또 한국 속회 제도를 보고 감동을 받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미국 안에 새로운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교회 현장을 보려고 미국을 갔었습니다. 충격도 받고 도전도 많이 받았습니다.

 

1995년에 미국에서 급성장하는 교회들을 탐방을 갔을 때, 일정에 시카고 제일감리교회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감리교회가 급성장하는 교회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해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탐방 일정 중 유일하게 한때 부흥했었으나, 지금은 쇠퇴한 교회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가게 된 교회였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 가서, 부흥하는 교회와 부흥이 사라진 교회는 공기 조차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교회 예배당 의자에 앉아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하나님, 저는부흥하는 교회에서 사역하기 원합니다. 제가 목회하는 교회의 성도들은 부흥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부흥이 있는 교회와 부흥이 사라진 교회 두 교회를 비교해 보면 아마 여러분들도 다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부흥이 있는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겠다.’하는 소원이 마음에서부터 일어나게 됩니다.

 

부흥이 일어나는 교회에 다니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교회 부흥에 대한 갈망을 부어주시는 날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교회 생활에 대해서 좀 따분하게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부담스럽게 여기시는 분들도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 드리려고 교회는 오셨지만, 여러분들에게 교회 생활 좀 열심히 하시자,

 

교회를 위해서 이런 일 저런 일을 맡겨 드리면서 책임져 달라고 하면 한사코 거절하고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그렇게 되면 그만 다른 교회로 떠날 마음을 가진 분들도 틀림없이 계실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놀라운 곳이며 교회 속에 담은 하나님의 계획과 영광이 얼마나 크신지를 모르니까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대한 눈이 열리고 나면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내가 어떤 일을 섬기면 좋을까?’하는 마음에서부터 소원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 하나님의 부흥이 이루어지는 꿈을 꾸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런 부흥을 일으키는 시발점으로 삼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지금이라도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부흥되는 모든 비밀을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교회가 정말 어떤 곳인지 알게 되면 교회 생활이 너무나 재미있고 흥분됩니다.

 

여러분 모두 다 그런 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고 싶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마음 눈이 더욱 밝아져서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면서, 교회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은 번제단이나 성소, 성전에 충만함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때때로 불로, 구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예수님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은혜 충만, 진리 충만, 생명 충만으로 33년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가 승천한 후 약속대로 보혜사(성령)로 다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또 드러났습니다. 마가 다락방 120문도에게 성령이 임하시 고 제자들은 모두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담대하게 전도할 때 하루에 3천명씩 5천명씩 구원받기도 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이 사람들이 성령께서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냥 구원받게만 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 모여 이루어진 새로운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여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계속해서 해나가도록 하셨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도록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델 하우스처럼 하나님이 교회를 쓰시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영광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거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눈 앞에 펼쳐질텐데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드러내는 영광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지켜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 무리 속에 있음을 믿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 속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것이 바로 교회 안에 하나님이 주신 영광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친히 세우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예수님을 세우셨다고 했는데, 얼핏 보기에는 잘 이해가 안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비중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서 보고 나면 교회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다시 예수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온 세계 곳곳에 예수, 예수, 예수의 이름이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는 교회를 위한 성경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처음 교회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 구절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교회에 대한 최고의 찬사요 최고의 정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놀라운 곳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을 드리면, 온 만물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 속에 들어가 보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동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산에 들어가거나 바다에 가서 보면 거기서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새로워지고 뭔가 가슴에 감동이 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물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 있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동안 교회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또 때때로 교회 안에서 사람들에게 상처 받은 것 때문에 교회는 다녀도 너무 깊이 관여하고 봉사하는 것은 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알고 나면 전혀 달라집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란 말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가득한 곳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어떤 곳이냐 하면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지배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만물 위에 있는 존재입니다. 정말인가? 믿어지지 않을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만물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영적인 수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면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정말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또 지금도 헌금하고 계시고. 그러나 이 예배당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교회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에 엄청난 권세를 주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교회는 단순히 주일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곳이 아닙니다.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의 모델 하우스이고 잃어버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창조된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당이 있느냐 없느냐, 예배당 건물이 크냐 작으냐는 것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배당이 없어 다른 건물을 빌어서 쓰는 교회도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예배당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누구의 것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라는 것 때문에 어떤 교회도 귀합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교회를 무시하거나 비난하거나 허물면 안됩니다. 이따금 교우들을 만나면 교회에 실망하거나 또는 상처를 받았다거나 또는 교회의 문제를 보고 교회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분들을 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을 소홀히 여기거나 무시하거나 심지어 부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여 하나님께서도 오래 참으시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는 믿지만 제도적인 교회는 안 나갑니다. 또는 주일만 잠깐 갔다가 오지 어느 교회에도 등록을 안하고 신앙 생활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다 이유는 있지만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곧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생활로 인해서 상처가 좀 있다 하더라도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고 비난하고 교회를 허무는 일을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허물과 문제를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고 제자 되는 첫 걸음은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5:25-30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예수님은 피흘리기 까지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피흘리기까지란 교회가 그렇게 허물과 문제가 많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사랑하시고 깨끗하고 영광스런 교회로 만들어 세우시고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비난하고 공격하고 허무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해도 교회를 깨끗하게 바르게 영광스럽게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부족하고 문제 많은 것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교회가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물로 씻으시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허물이 있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거룩하게 만드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본래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티도 있고 주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 바로 잡아주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교회를 위해서 지금도 뜨거운 사랑으로 교회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29절부터 30절을 보면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교회를 사랑하시면 복을 받습니다. 그것보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마음에 내가 교회는 다니기는 했지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어느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인가 찾는 마음은 있지만,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처럼 섬겨야 되겠다는 마음은 아직 없습니다.’ 하는 분들은 오늘 마음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같이 교회 생활하면서도 교회에서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하나님 말씀처럼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가?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이 진짜 교회의 머리 되심을 철저히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나오셨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여러분, 그 사실을 절대 잊으시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안내를 서시든, 찬양대를 하시든, 교사를 하시든 교회의 무슨 위원회 위원이 되어서 회의를 하든 여러분이 교회 일을 할 때 항상 마음 속에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결정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시키는대로 해야 한다,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생각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정말 힘쓸 일이 좋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되시고 모든 성도들은 한 몸인 교회입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지시, 판단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누가 세웠든지 누가 헌금을 했던지 상관없습니다. 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담임목사일 것입니다.

 

닉슨 대통령 보좌관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회심한 이후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가 된 챨스 콜슨이 회심 후 처음 미국 어느 큰 교회에서 주일 1, 2부 예배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1부 예배 때, 강단에 섰는데 성령님께서 정말 강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어떻게 말했는지도 모르게 자신도 뜨거운 감동을 증거하고 기도를 하고 마쳤는데, 회중들이 한 사람도 움직이지 않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계속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2부 예배를 준비하고 있는데 부교역자 한 사람이 와서 2부 예배 때는 설교가 끝나면 담임목사님께서 나오셔서 기도를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2부 예배는 1부 예배와 달랐습니다. 설교 후에 담임목사님께서 나오셔서 기도를 인도하실 텐데 1부 예배 때처럼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 할텐데 하고 생각하니 너무나 긴장이 되더랍니다.

 

1부 예배 때의 성령의 감동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전하려 했지만 모든 것이 짜여진 각본처럼 생각되고, 시간 안에 마쳐야 한다는 것도 신경쓰여서 진땀만 흘리다가 간증이 끝나고, 담임목사님께서 나오셔서 기도를 인도하셨는데, 회중들 중에 기도하는 이는 몇 안되고 대부분 자리에서 일어나더랍니다. 예배가 마친 후 챨스 콜슨은 주일 설교방송이 녹화로 나가는 것을 알고 2부 예배는 망쳤으니 1부 예배 간증을 방송으로 내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목사님이 안됩니다. 안돼요 2부 예배 것이 더 좋습니다.”고 말하더랍니다. “아닙니다, 1부 예배 것이 더 좋습니다했더니 자꾸 2부 예배 것이 더 좋다고 하다가챨스 콜슨 씨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이 교회는 챨스 콜슨 씨의 교회가 아니고 담임 목사님의 교회라는 것을 생각하셔야지요.”하더랍니다. 담임 목사보다 더 은혜로운 설교를 방송에 내보낼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섬기는 일은 이 모양입니다. 알기는 다 정확하게 압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신 것. 교회는 항상 예수님이 중심이셔야 되고 주님께서만 영광 받으셔야 되고, 예수님이 시키는대로 해야 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 막상 교회를 섬기고 들어가 보면 이 교회는 누구 교회지요? 담임 목사 교회처럼 우리도 모르게 말이 나옵니다. 우리도 얼마나 쉽게 교회를 내 교회’, ‘우리 교회라고 말하는지 모릅니다. 단지 소속을 의미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그 말 속에 소유 의식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방법대로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내게 말씀해주실 것이라고는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교회에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기도를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가 의논해서 우리가 원하는 방법대로 모든 문제를 처리해 갑니다. 다른 교회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 내 교회가 아니니까. 우리는 교회를 정말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이 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 영광을 성경에서만 읽고 끝납니다. 실제로는 교회 영광을 드러내는 경험을 못합니다. 교회에서 지도자를 세울 때 정말 잘 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생각, 마음, 감정 모든 면에 있어 예수님이 왕이신 사람이 교회 지도가가 되면 교회 일을 처리해 나갈 때 항상 예수님이 원하는대로 지시하는대로 교회가 갑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하고 예수님이 왕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사람들에게 드러나기 원하고 높아지기 원하고 자기 원하는대로 되어야 기분이 좋으면 절대로 예수님이 왕이신 교회를 섬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하면서 여러분은 원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꺾고 교회를 위해서 섬기셨던 일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또 그와 같은 일이 생길 때 여러분이 마음도 바꾸어서 기쁘게 감사하므로 교회를 위해서 섬기셨던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 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교회를 세울 지도자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 지도자들 중에 그런 의식을 갖고 있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금방 안색이 달라집니다.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한번은 어느 교회 장로님께서 제게 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교회에서 새로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후보 목사님이 두 분이셨는데, 그 중 한 분이 장로님이 원하신 목사님이셨습니다. 최종 투표를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장로님이 새벽기도회에 나와 기도를 했습니다.‘하나님, 오늘 좋은 목사님을 결정해 주십시오. 정말 좋은 목사님이 결정되기 바랍니다.’그러나 마음으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목사님이 결정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답니다.‘네가 원하는 목사가 아니고 네가 반대하는 목사가 오늘 결정이 되어도 너는 순종하겠느냐?’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랍니다. 얼른 대답을 못하겠더랍니다. 생각을 해보니까 내가 목사님을 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정하는 것인데 오늘 인사위원회에서 투표를 해서 내가 원하지 않는 분이 더 표를 얻으시면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야 되지 않겠는가?’그래서 대답을 했답니다.

 

제가 원하지 않는 목사님이 결정이 되어도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그랬더니 그 다음 질문을 바로 하시더랍니다.‘네가 원하지 않는 목사가 결정이 되어도 네가 원하는 목사가 담임자가 된 것처럼 그 분을 위하고 사랑하고 섬기면서 교회를 섬길 수 있느냐?’그냥 인정은 할 수 있겠지만 내가 마음을 바꾸어서 모시기 원하는 목사님에게 하듯 그 분에게 할 수 있을까? 정말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 내가 아직까지 예수님을 정말 왕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주님이 결정하시면 내 생각과 달라도 당연히 예수님이 왕이시니까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내 마음 속에 내 생각 내 판단 내 고집이 이렇게 많구나.’ 그래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고백을 했답니다.‘만약에 제가 원하지 않는 분이 결정됐다 하더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그 목사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여러분, 이런 지도자들이 서면 교회는 너무너무 놀랍게 주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세상을 이길 모든 힘을 얻고 갑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다 보여주고 싶습니다. 신문기자 방송기자 우리 교회에 와서 한달 동안 캠프를 차려놓고 우리 교회 모든 것을 다 취재해 가시오. ?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니까. 교회는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 걸고 지켜야 할 것이 교회가 진정 예수님의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다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2년 전부터 우리 교회가 섬기는 한 교회에서 지난 주간 교역자 모임이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면서 감격해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이 그 교회에 매 주일 가서 함께 예배드리면서 교회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작년에는 교육관도 마련하도록 섬겼습니다. 이번 어린이 초청잔치에 18명 새신자 어린이들이 왔다고 합니다. 교회 창립 이후 처음 한달 동안 2명의 새가족 어른이 오셨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일이 있는데, 목사님 자신이 전도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교회가 부흥된 것 보다 더 기뻤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되심은 동시에 모든 교인들이 한 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역시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성도들은 성령님이 이끌어서 교회로 모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냥 교회로 온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여러분 마음을 자꾸 교회로 와야 된다고 해서 교회로 온 것입니다. 교회 때문에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나고 상처가 많은 사람도 오늘 왜 오신 줄 아십니까? 성령님이 교회에 가라고 해서 교회에 온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님이 하신 일입니다. 배경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출신도 다르고 공부한 것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성별도 달라도, 다른 사람을 허물하지 않고 다 몸처럼 여겨지도록 만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예수 믿는 것 하나 때문에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교회가 정말 성령의 역사로 세워지면 우리는 마음 안에 어떤 갈등이나 분열의 씨앗을 품지 않게 됩니다. 만약 그런 마음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한 몸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워낙 서로 다르니까. 그것은 마귀가 육신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깨뜨리고 성도들의 관계를 깨뜨리려고. 잘 분별해야 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는 미움, 판단하는 마음이 생길 때 십자가에 못 박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용납하고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으니까.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어쩌면 그렇게 하나 되는 마음을 주시는지.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교회가 영광스럽게 드러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것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예배당이 크지만, 건물로는 이보다 훨씬 큰 건물이 많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놀랍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이야기해도 세상 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처럼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여러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교회이고 이런 교회를 세우는 일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신나는지 모릅니다. 우리 생애에 있어 이보다 더 귀한 사명은 없습니다.

 

터툴리안이 고백한대로 그리스도인처럼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하고 전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이요,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는 증거입니다.

 

130년 전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시에 있던 제일침례교회에서 인종차별 때문에 흑인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쫓겨난 흑인들은 제 2침례교회를 세웠는데 그 후 100년 간 두 교회는 반목을 계속해왔습니다. 그러다가 1991년 교인 300명인 제일침례교회는 이제 3,000명의 교인을 자랑하는 제2침례교회에게 공개적으로 과거에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곧 두 교회는 합동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서로 도우며 일해 가고 있다고 합니다. 교인으로서 가장 후회되고 부끄러운 일은 서로 다투고 갈라지는 일입니다. 그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마귀에게 완전히 속고 휘둘린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만 따지면 속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다른 사람을 품어주게 합니다. 같은 성도들끼리 뜨겁게 사랑하게 합니다.

 

저는 지난 날 설교 잘하고 교회 성장시키면 제 할 일은 다 한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생각이었는지 깨닫습니다. 이제는 좀 변했습니다. 그래서 참 다행입니다. 이제는 교회를 진정 예수님의 몸으로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부흥, 부흥 하면서도 부흥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교회가 커지고 교인 수가 많아지는 것이 부흥이 아니었습니다. 부흥은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교인들이 서로 한 몸이 되는 교회가 되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교회가 하나 됨을 갈망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을 사랑하기를 소원하였습니다.‘다른 사람들에게도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주자.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들을 존중하자.’우리가 그런 교회만 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는 성령의 바람에 날려다니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게 하셔서 되는 교회가 됩니다. 여러분, 그보다 신나는 삶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머리 되시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려면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언제나 왕이시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하도 못해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위해서 모여도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교회의 모든 귀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가 핍박 중에도 온전히 지켜지고 오히려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교인이 되면 제일 먼저 배워야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게 목마른 교회는 반드시 부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에 모여서 교회 일을 섬기면서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끼리 모여서 우리 생각으로 결정해서 어떤 일을 합니다. 잠깐 기도는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들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정말 사모하는 이는 소수입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예수님이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정말 믿고 우리자 예수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교회는 얼마나 놀랍게 바꾸어지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나아갈 길이 무엇이지 가르쳐주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끼리 모여서 자기들이 합리적이고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결정들을 내립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교인도 교회도 많습니다.

 

자신과 교회가 하고 있는 일들이 옳은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해보는 사람 조차 찾아보기 힘듭니다. 전통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세대 간에 삶의 환경에 따라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됩니다. 서로 자기가 좋은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준이 예수님이 아니고 자신이 되면 이렇게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 살던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참회하고, 핏빛보다 더 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울게 만들고, 자신이 예수를 못 박은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가던 길을 돌아가게 하는 것,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누구도 알아주는 사람 없지만 예수처럼 살고 싶고 예수처럼 죽고 싶어 하는 일이 공부해서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인생의 수많은 문제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비극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어둠 속을 걷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본 영혼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온전히 돌아가면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만 바라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 기도해도 반드시 응답되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예수를 간절히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얘야, 곤고하게 사는 너에게 내가 무엇을 해주랴?”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예수님 한분이면 충분합니다.” 이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다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셨고,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교회에 필요한 모든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저는 우리 교회 건축비도 예수님으로부터 온다고 정말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계속 바라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이 다 주십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 전체를 다 바꾸어 놓으십니다. 교회 뿐만 아니고 우리 삶 전체를. 다 좋은 것은 다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의 삶도 바꾸어지고 교회도 다 바꾸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늘 문을 활짝 여십니다.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이 주신 계획이 엄청납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나는 지금까지 그런 교회 본 적이 없네. 여러분 그러시다면 오늘 무엇을 믿을지를 선택하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이 살았던 경험을 믿으실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실 것입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교회에서 모일 때 마다 언제나 예수님이 왕이심을 선포하고 예수님이 지시해주시기를 바라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주님만을 구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말씀 그대로 경험되어지고 드러나는 교회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서야 나라가 삽니다. 민족이 삽니다. 그리고 이 민족을 이끌어갈 지도자들이 일어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날마다,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가득히 나타나도록 사십시오.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해 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하고 그리스도 없는 세상 때문에 아파하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 때문에 즐거워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교회가 설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같이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의 삶 속에 이 교회 안에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 민족 가운데 일어나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정말 놀랍게 드러나는 그 교회 세워주소서. 주님 제가 그 교회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 세우는 일에 저를 써주시옵소서. 주 예수님만 바라봅니다.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구원의 완성 교회-1 /1:17-23/ 박영선목사

2015-07-30 10:31:04

 

(에베소서 117~23)

 

교회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마태복음 1616절 이하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에 예수님께서 이 반석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했던 그 교회 설립은 무엇에 근거하여 교회가 서는가 하는 것이고 에베소서 1장에 있는 교회의 설명은 교회가 무엇을 목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신약의 서신서들은 다 잘 아시다시피 이미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들입니다. 기모데서나 기도서 같이 개인에게 보낸 편지가 있긴 합니다만 거의 대부분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고 지금 읽은 이 본문에 의하면 예수를 믿었기에 구원을 얻었기에 그들을 위하여 이 기도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구원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이죠.

 

거기에 뭐가 등장하냐면 18절에 보는 바와 같이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알기를 원한답니다. 이것을 풀어서 얘기하자면 너희에게 시작되고 허락된 구원이 어디로 가며 어디까지 가며 무엇을 목적 또는 목표로 하고 있는가를 알기를 원한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강의에 맨 서두에서 구원에 대한 설명을 할 때 대부분 기독교 신앙과 구원을 이해할 때 구원파적인 오해를 쉽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예수를 알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그 경험과 변화는 너무나 분명하고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대부분 구원을 확실하고 분명한 칭의의 부분에서 다 이룬 것으로 오해할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이후에 성화라는 것은 점진적이고 어느 날 무엇 때문에 어떻게 크는 지 모르듯이 마치 사람이 밥 먹고 크듯이 산삼 먹고 크는 게 아니라 그 밥에 그 나물 먹고 크듯이 그날이 그날같은 기억할 수 없는 무수한 나날들을 거쳐서 조금씩 조금씩 커듯이 성화는 사실 그렇게 자라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자기도 모르게 구원파적인 구원관을 가집니다. 구원이 다 끝난 것 같이 왜냐하면 그 분명한 체험, 확인, 이런 것들로 인해서 성화의 과정을 구원 얻은 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쓸모있게 사는 것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깨우침이죠, 우리는 아직도 완성해야 할 구원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이 구원을 논하는 것은 굉장히 넓은 범위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자리까지가 구원입니다.

 

그래서 여기 너희가 지금 구원을 얻었는데 너희가 아직 가야할 데가 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고 19절에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구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어떤 능력을 동원하고 있는지 알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20절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그를 죽이시고는 여기 없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낸 얘기를 하는 중이 아니고 죄와 사망에서 꺼냄을 받은 자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랑과 능력으로 예수를 주셨는가 하고 얘기할 때 대부분의 성도들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이해합니다만 본문에서 보다시피 여기는 그 내용이 없고 살리신 부분이란 말이죠.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마태복음 2818절이 연상이 되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쥐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하는 이야기. 이 부분이 교회라는 이 대목이 말하자면 메시아 사역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 구원 사역은 십자가와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그 때는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합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그의 영광의 찬송이라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까지의 구원의 완성에 이를 것입니다. 이 일을 우리 지난 시간에 확인한 바와 같이 우리가 갈라디아서 220절에 있는 바와 같은 성도들은 구원함을 얻은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내가 산다하는 말의 실제적 내용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산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산다, 예수께서 우리와 연합하여 우리의 머리가 되셨다는 이 교회론에 관한 이해가 한국 교회는 아주 부족하고 그런 차원에서 대부분의 한국 교회 성도들이 신자된 이후의 신앙 현실에 대한 완성을 향하여 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성경적으로 턱없이 부족해서 많은 오해를 시행 착오를 만들어냅니다.

 

그 문제들을 앞으로는 중점적으로 다루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가봅시다. 고린도전서 1212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13)

 

구원을 얻은 자가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는 나중에 한번 더 남은 시간들 속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보기보다 여러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하여 우리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 성령께서 임하는 구원 받은 자의 자리에 온 것도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게 되신 거죠.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게 되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성령 세례라고 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세례를 주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 것. 이것을 또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영어 표현이 필요한데요, '?? ??(10:18) by holy spirit into the body of christ.'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고린도서 1213절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가는 세례를 받았다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성령 세례입니다.

 

보통 우리가 성령 세례라고 얘기를 하면 '?? ??(10:50) by jesus christ into the holy spirit.'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받은 모든 이들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세례를 받았다. 그것도 성령 세례라고 얘기합니다.

 

보통 우리가 시중에서 쓰는 성령 세례는 체험적이고 감격적이고 하는 신앙상의 개인 신앙상의 문제들을 논할 때 보통 인용하고 있죠. 조금 다른 것입니다. 오늘은 그쪽으로 가지를 칠 수 없으니 계속 하겠습니다.

 

성경이 하는 얘기는 구원을 얻으면 예외없이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된다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까 본문으로 택한 에베소서 1장에서 그를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와 일치하는 것이죠.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온 구원에 관한 칭의와 성화에 관한 여러 설명들 속에 이미 설명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6장으로 가보시죠. 로마서 65.

 

(로마서 65~8)

 

이 얘기의 의미들을 이제 아실 겁니다. 예수는 죽으심에도 우리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죄와 사망에 대해서 우리를 죽이시기 위하여 당신이 죽으시고,

 

예수의 죽으심 속에서 그와 연합되어 우리가 죽었고 그의 부활에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부활하심에 우리가 연합되어 예수의 부활에 우리가 함께 동참할 부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연합은 죽으심에도 연합되어있다시피 부활에도 연합되어있다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앞의 연합이 십자가라면 뒤의 연합은 교회라.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9절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59)

 

예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논하면서 살으심으로 인한 구원을 얘기하고 있죠. 죽으심으로 인한 구원은 십자가입니다.

 

살으심으로 인한 구원은 교회입니다. 아직도 예수께서는 그의 성도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메시아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구요. 모든 성도들이 십자가의 연합, 십자가 사역으로 인한 구원을 얻었듯이 교회로 인한 구원을 얻고 있고 얻을 것입니다.

 

이쪽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진행형과 미래형으로 얘기하는 것은 그 완성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이 두 부분이 다 구원 전체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으로부터 성화되고 완성되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에 근거하며 그 일을 실패치 않도록 하나님이 이 구원에 예수를 우리와 묶어서 이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로 인한 구원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며 십자가가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믿듯이 동일하게 교회가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묶여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 속에 아직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 참 감사한 일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가보시죠.

 

(에베소서 24~6)

 

함께라는 게 왜 붙어다니나 잘 보세요.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게 완료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거기에 우리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뜻으로는 이미 완료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우리가 연합되어 있어서 이 작정이 이 약속이 취소되거나 변계될 수 없다는 것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 성도들이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어떤 의미고 그것으로 어떤 효과를 얻었는지 우리가 다 압니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하여 우리를 그 몸으로 불러 연합한 자 되어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가 성경은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23절이 그 얘기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묶으셨습니다.

 

이 설명은 에베소 뿐만 아니라 에베소 골로세, 교회를 중점으로 다루는 서신서에 아주 넘쳐나는 표현들입니다. 에베소 314.

 

(에베소서 314~19)

 

이 기도는 지금 아까 에베소서 1장에서 본 바와 똑같은 기초 속에 있어요. 너희가 구원을 얻었기에 내가 이 기도를 한다.

 

에베소 1장에서 한 기도는 너희가 얻은 구원이 무엇을 목표하고 있는가를 보라.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를 알아라. 였다면 에베소서 131절 이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는 것을 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알리고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 구절을 보죠.

 

(에베소서 320~21)

 

교회 안이라는 말이나 예수 안이라는 말이 같은 의미라는 거죠. 사실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우리 얼마든지 십자가의 은혜를 간증하고 감격해 하는 사람들이 우리 얼마든지 만나고 당연히 여기고 그런 감격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전히 연합하여 그의 인도하심 속에서 충만해지고 복되게 실패 없는 그 구원의 여정을 보호받고 인도함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 감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신자된 현실이 너무 보잘 것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고 성경적 시각으로 보면 아멘, 할 수 있는 감격이 얼마든지 나올 것으로 기대를 하고 강의를 계속해 봅시다. 에베소 413절입니다.

 

(에베소서 413~16)

 

또 충만이죠, 이 말 자주 나와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어떻게 자라느냐. 어떻게 이 완성이 충만이 이루어지느냐. 머리가 몸에 요구한다는 거죠. 모든 사람은 다 그 머리만큼 크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는 것만큼 크는 겁니다.

 

머리가 생각하고 머리가 목표하지 다른 지체들은 그 기능을 가지지 못합니다. 다른 지체들은 다 언제든지 게으를 소원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머리가 일어나라, 이빨 닦아라, 공부해라 하는 것입니다.

 

머리는 누구라구요? 그리스도라구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를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골로세서 1장으로 갑시다.

 

(골로세서 19~12)

 

이건 어찌 읽으면 신자된 당연한 도리, 신자된 종교적 어떤 책임들, 이런 것으로 읽혀질 수 있습니다. 보다 교회론적인 이해를 갖고 읽으면 이 내용은 훨씬 달라집니다. 이어서 13절 봅니다.

 

(골로세서 113~23)

 

이 긴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 조금 전 설명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구원을 얻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자하는 윤리성과 도덕성의 개념에서 종교성을 발휘하는 신자의 책임을 가지는 그런 요구 정도가 아니고,

 

너희가 너희 마음대로 살던 죄와 사망의 자리로부터 구원함을 받아 예수 안에 있다 이거죠, 예수 안에 있는데 앞에 우리가 읽었던 9절 이하에 읽었던 내용이나 13절 이하의 내용이나 동일한 종교를 가진 자는 신앙을 가진 자는 윤리 도덕 이상의 종교성을 가져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것은 영역적인 이해보다 훨씬 앞서는, 성경에서의 표현은 나라라는 것은 통치입니다. 예수의 통치 아래, 예수님이 왕 노릇하시는 나라에 우리가 보냄을 받습니다. 그의 명령, 통치에 순종하는 자 되는 것이 여기 나열된 모든 신자의 당연한 종교적 덕목들의 근거요 이유인 것입니다.

 

종교적 덕목들이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것을 요구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골로세서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이 얘기를 같이 묶고 있고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죄와 사망, 흑암의 권세로부터 그 아들의 나라로 우리를 구원하여 예수의 통치를 받게 하고 예수 안에 우리 성도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거하사 그 아버지의 충만하신 것이 우리의 머리시요, 우리의 통치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얻은 백성들을 충만케 하는 것. 이것이 구원의 완성이며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그가 교회의 머리고, 그 안에는 아버지의 모든 충만하심이 거기 있다. 그리하여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함이라.

 

그래서 우리는 교회론에서 중요한 기본적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그리스도의 통치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만. 이런 것들을 기본으로 가지고 좀더 내용과 현실적인 신앙의 현실적인 이해를 돕는 시각으로 오면 이 교회론 안에 무엇이 있느냐면 충만이라는 말과 흠없음이라는 말이 대표적으로 등장합니다. 충만과 흠없음. 에베소서 522절입니다.

 

(에베소서 522~27)

 

여기 등장하죠 다시. 나중에 이 대목은 따로, 성령 충만을 강의할 때 하겠습니다만 부부에 대한 설명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인 것인데 어떤 것이냐면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여기는 일차적으로 십자가로 인한 구원, 죄 씻음 같은 것들과 함께 말씀으로 말미암는 그 성화의 완성이 이어 나오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울 것입니다. 대단하죠?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에베소서 23절식으로 얘기하자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뭐가 충만이죠?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만이 될 것입니다. 자기 앞에 그리스도 앞에 그 교회가 영광스러운 교회로 설 것입니다.

 

해서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 없이 거룩하고 흠없게 될 것입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흠없게 되고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채워지는 영광된 자리로 갈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교회가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메시아 사역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에베소서 13절에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13~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은 다만 십자가만이 아니요 교회까지 포함한. 아주 신적 범위와 경지와 내용의 그런 설명들입니다. 뭐라 그랬다구요?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없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6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완성, 흠없는 거룩, 신적 충만으로 인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함께하고 계십니다. 골로세서 2장입니다. 뜻밖에 서신서는 교회론인데 우리가 대부분 놓치고 있지요, 오늘 여러분께 설명하는 이 내용이 성경이 얼마나 자주 반복되고 있는가, 찾아보면 참 놀랍습니다. 골로세서 26절입니다.

 

(골로세서 26~7)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 주를 위하여 살자. 맞습니다. 주를 위하여가 아니라 주를 의지하여 살자. 그래야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이제 내일은 다 끝났고, 보답하는 일만 남은 것 같이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아직도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 남아있고 그것이 우선하는 복입니다.

 

(골로세서 28~19)

 

예수 믿는 자들에게 아주 구체적인 일종의 분별과 가르침이 여기 나옵니다. 16절에 있는 바와 같이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이런 걸로 싸우지 말라 이겁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던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는 걸 무너뜨려도 좋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규칙, 법 같은 것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지 말아라는 겁니다. 법이란 다 일종의 가이드 라인입니다. 그것 자체가 내용이거나 그것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일종의 이정표이며, 안내판 같고 이런 것들이지 그것들이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내용입니다. 동일하게 18절에,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쫓아 헛되이 과장한다 그럽니다. 체험하는 것,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 그보다 더 확실한 감격과 확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체험이, 자신의 확신이, 그것이 근거가 되지 말아라는 겁니다.

 

언제나 모든 근거는 예수께로 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쫓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전 제가 잘 아는 교회에서 구원파에 열심인 분이 있으셨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누구든지 붙잡고 구원의 감격과 열심을 불을 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감격이 있어요. 체험이 있고. 못 고칠 병에서 치유함을 받은 아주 놀라운 간증도 있죠. 저희 어머님이 그렇게 부러워 하시는 겁니다. 저희 어머니는 아시다시피 이 잘난 아들을 목사로 둔 어머니요, 또 아버지도 훌륭한 목사님이셨던 그런 훌륭한 사이에 낀 권사님이십니다.

 

가정 예배를 보다가 제가 어느 구절을 설교했더니 저희 어머님이 거부권을 행사하셨어요. ', 그렇지 않다더라.' 아니 어머니, 이런 말씀입니다.

 

'그 양반이 그렇지 않다더라.' 그 분이 맞는 게 아니고 성경의 본뜻은 이겁니다. '야 그러지 말아라, 그 사람 얼마나 열심인지 아니. 불을 토한다 야.' 불 토하는 게 신앙은 아닙니다. 저희 어머니는 아직도 항복을 안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보통 신앙에서 갖고 있는 기준점들은 뜻밖에도 성경이 아닌 적이 많습니다. 성경의 어느 한 부분, 그 자체는 진리입니다만 그것을 근거로 하여 신앙 전체를 여러분이 새로 재단하시면 내용 속에서 제거되는 것이 있고 내용 아닌 것이 포함됩니다.

 

머리를 붙들지를 아니하는 자,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니라. 사실 교회 생활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개개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는 사실과 동일한 신앙과 소망을 가지고 믿음의 공동체로 조직되어 있는 이 모든 것이 다,

 

얼마나 중요한 신앙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손길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 초월, 감격, 능력, 이런 것들이 균형과 조화와 질서를 놓치지 않도록. 체험한 내용, 얻은 바 감격의 기적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의 어느 자리에 있는가를 확인하여 하나를 체험하여 체험하지 못한 다른 모든 것들을 믿음과 약속으로 소유하는 그런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당한 신자요 교인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붙드는 것이요, 여러분의 확신을 헛되이 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당한 신앙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분별과 올바른 자라남이 교회 안에서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 가운데 늘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신년 /발바닥 사랑 /1:15-23/ 김기석목사

2015-07-12 16:59:21

 

[그러므로 나도, 주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서, 여러분을 두고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내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우리의 목표

 

새해 첫 주일 아침,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넘치시기를 빕니다. 요즘 제 입에 뱅뱅 도는 노래가 있습니다. "새 시대는 새 사명을 우리에게 주나니 진리 따라 사는 자는 전진하리 언제나"(찬송가5863절 중).

 

새해는 새로운 삶을 향해 길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부탁이자 명령입니다. 금년 첫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우리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청파교회의 표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이 우리가 언제든 갈아입을 수 있는 겉옷이 아니라면, 우리를 근사하게 치장하기 위한 가면이 아니라면,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존재라면, 우리는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 늘 그리스도인다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혹은 생명의 향기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

 

합니다. 우리가 일상의 자리에서 기독교인답게 산다면 세상이 지금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가끔 길거리나 버스 혹은 지하철에서, 음식점에서 서로를 집사님혹은 권사님으로 호칭하는 이들을 보며 낯을 찌푸릴 때가 있습니다. 마치 그 공간에 자기들만 있는 것처럼 처신하는 이들을 보면 속상합니다.

 

믿음은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상식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신자이기 이전에 좋은 시민이어야 하고 좋은 이웃이어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신앙은 자기 만족거리일 뿐입니다. 옛 선비들은 신독愼獨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홀로 있을 때도 스스로 삼간다는 말입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는 <임제록>의 한 구절을 수첩에 적어놓고 지낸 적이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제 안의 중심을 잃지 말고, 선 자리가 어디이든 늘 진실하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뜻이 바로 이겁니다.

 

오래 전부터 저는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사는 이들의 삶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묵상을 통해 생명과 평화야말로 우리가 삶으로 구현해야 할 신앙적 목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첫 사람을 축복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생명을 지키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런데 죄가 세상에 유입된 후 죽임의 문화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할 마땅한 관계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불화 세상, 불통 세상이 시작된 겁니다.

 

샬롬이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기본적 정서는 불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생명평화의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매년 교회가 지향해야 할 그해의 목표를 정할 때마다 많이 고심했습니다. 몇 해 동안은 세상의 선물로 사는 우리를 목표로 했었고, 지난해까지는 생명의 바람, 평화의 물결 되어를 우리 목표로 정했었습니다.

 

그 목표를 조금은 이루었지만 그것은 다만 부끄러운 정도의 성취일 뿐입니다. 올해는 교회의 목표를 새롭게 정했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소서’. 이전까지는 행위의 주체인 우리의 의지가 강조되었다면, 올해는 주님이 주체가 되시어 우리를 이끌어 달라고 청하고 싶습니다. 해가 갈수록 저는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우리 목표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형성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후 철저히 변화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박해하는 자로 살던 그가 기꺼이 박해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는 말은 일종의 각체험覺體驗을 구상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이전에 실상이라 여겼던 삶이 허상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육체의 욕망, 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일2:16)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 나가자 그는 자유로워졌습니다. 고난도 죽음도 그의 내면에 깃든 자유를 뒤흔들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대신 그 복음에 매인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지중해 세계의 많은 도시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베소도 그중의 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많은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복음은 옛 세계를 흔드는 태풍이었습니다.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지배자와 피지배자, 부자와 가난한 이들로 갈린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질서의 세상이 혼돈으로 바뀌는 것 같았습니다. 남과의 구별됨 혹은 차이를 통해 권력을 누렸던 이들에게 복음은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위험한 사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회적 차별이 무의미해집니다. 골로새서는 그것을 인상깊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3:11)

 

초대교회의 최대 매력은 이런 경계의 철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곳에서 사람들은 깊은 일치를 체험했습니다. 너와 내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감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 시련과 위험을 함께 겪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경쟁이나 지배가 아니라 우정에 근거한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감격적으로 인식했습니다. 사람들 위에 거들먹거리며 군림하던 이들에게 그런 세계는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세계는 와서는 안 될 세계입니다.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간 바울은 관헌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아니니아는 변호사 더둘로를 앞세워 총독에게 바울을 심문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24:5)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은 불편부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불의한 세상을 폭로하고, 그 세계에서 짓눌렸던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들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깨우는 이들입니다. 세상은 그런 길을 걷는 이들에게 십자가를 안겨줍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디딤돌입니다. 바울은 어려움 속에서도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성도를 향한 사랑을 확대해나가는 에베소 교인들을 기억하며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부르심의 소망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 그리고 성도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신앙이란 이처럼 눈 떠감의 과정입니다.

 

복음의 능력

 

성도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 오롯이 드러났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절망의 심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서 사람들은 함께 함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였고, 맛보았고, 기꺼이 새로운 삶을 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집을 열어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고, 자기 곳간을 열어 배고픈 이들을 먹였습니다.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들을 친교의 식탁으로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일으킨 변화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처럼 사건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서 가장 힘차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상처 입은 어린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선언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바치는 사랑이야말로 세계의 축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우리는 자기애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이들의 모임인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강력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몸을 빌어 이 세상을 보시기에 참 좋았다하셨던 그런 세상으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삶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몸이 불편한 이를 위해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일을 해보셨습니까? 그보다 더 좋은 경험이 또 있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몸이 되어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교우들을 보며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뜻있는 삶을 위해 안락한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들이 참 많습니다. 공동체 정신이 사라진 도시에서 마을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이들도 있고, 학교 밖으로 내몰린 청소년들을 사랑으로 품기 위해 진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귀농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는 이들도 있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시민들이 연대하고 협력하는 공생의 삶을 모색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생업을 제쳐놓고 적정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일에 헌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쪽방촌 사람들을 돕는 일, 노숙인들의 자활을 지원하기 위한 협동조합 형성에도 우리 교회가 동참할 수 있어 참 기쁩니다.

 

아래로 흘러가라

 

바울 사도는 참된 예배란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12:1)이라고 말했습니다. 개문류하開門流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을 열고 아래로 흘러가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육신의 신비이고, 신앙생활을 알차게 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머리와 마음으로만 믿지 말고 이제는 몸으로 우리 신앙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사랑은 발바닥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발바닥이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다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발바닥이 이어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

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

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

내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

그 영혼의 낙인이 바로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최후의 날

하늘은 단 한 가지만을 요구하리니

어디 너의 발바닥 사랑을 좀 보자꾸나"

--박노해, <발바닥 사랑> 전문

 

우리가 머리로 하는 사랑을 넘어 가슴으로 하는 사랑에 이르고, 또 그 사랑을 넘어 발바닥으로 하는 사랑에 당도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이 드러날 것입니다.

 

새해 첫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교회 안에서 역동적으로 일렁이는 모습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 꿈이 몽상이 아닌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굳은 결의가 필요합니다. 교우 여러분, 올 한해 내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드리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계시의 영을 주소서 /1:15-19/ 곽선희 목사

2014-11-23 23:43:04

 

'기본으로 돌아가자' 하는 이름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요새 유행하는 말입니다. '탱크주의'로 유명한 MIT 공대의 박사인 배순훈 교수가 쓴 책입니다. 이 책 중에서 그는 창의력 개발을 위한 다섯가지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현대를 살아가려면, 현대에 살아남으려면 결코 자본이나 지식이나 기술이나 흔히 말하는 정보, 이것가지고 살지 못합니다. 이제는 창의력이 있어야 삽니다. '정보시대'란 말을 합니다. 그것도 과거에 속한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지식이 정보입니다.

 

그러나 창의력은 미래로 향하는 것입니다. 미래로 향하는 지식이 아니면 결코 이 세대에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조그만 사업을 하나 해도 남 하는 대로 했다가는 끝나는 거예요. 남 그거해서 돈 벌었다, 하는 순간 벌써 이젠 그건 끝나는 거예요.

 

그걸 따라가다가는 아주 다 원자본까지 다 망치는 거예요. 결국은 작은 일도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일이 아니고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창의력 개발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먼 얘기가 아니고 아주 현실적인 절박한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창의력을 개발하려면 첫째로 '프라블럼 데피니션(Problem definition)' 문제를 정의하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뭔가? 도대체 내가 추구하는 문제가 뭔가? 적어도 why 라고 하는 말을 세 번 이상 물으라는 거예요. ?, ?, ? 이 일을 해야 되느냐?

 

목적 의식이 분명해야 되요.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느냐? 그리고 왜 나는 이 일을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분명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분명치 않게 허우적거리듯이 이것도 한번 해보고 저것도 한번 해보고 이생각도 한번 해보고 저 생각도 해보고 이래가지고는 안되는 것이에요.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문제의식을 분명히 해야 된다. 두 번째는 '프레퍼레이션(Preparation)'이올시다. 철저하게 공부하라는 것이죠. 내가 정한 이 일, 이 사업, 이 아이디어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해야돼요. 많이 연구를 해야돼요.

 

얼마나요? 꿈을 꾸어도 그 꿈을 꿀 정도로. 자나깨나 집중적으로 그 연구를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인큐베이션(Incubation)'이올시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미 연구했지만은 많이 연구하고는 까맣게 잊어버리라는 거지요. 여기서 여유를 가져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중요한 시간이에요. 인큐베이트(incubate) 라고 하는 말은 원래가 '닭이 알을 품고 부화를 기다리는 과정'을 말합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닭이 알을 품고 있어요. 뜨뜻하게 자기 체온으로 계란을 데우면서 계속 부시럭거리고 계란을 굴리더라고요. , 이래서 속에서 병아리가 되어 나오는데, 병아리가 되어나올 때까지는 여전히 계란이에요. 동그란 계란 뿐이요.

 

그러나 그 속에서는 지금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그런 과정이란 말이에요. 이런 인큐베이션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공부한 그 마음, 이제 그 아이디어를 숙성시키는 과정이 필요해요. 숙성시키는 과정.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그 일에 너무 집중하면 안돼요.

 

너무 집착하면 정신병자가 되요. 다른 아무생각을 할 수가 없고, 더 귀한 생각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되요. 그러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잠깐 까맣게 잊어버려야 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빙산이라는 것은 수면 위에 나타나는 것이 그 전체의 8.3%라고 합니다.

 

수면 아래에 있는 그 빙산이 91.7%입니다. 인간의 능력도 지금 생각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내가 가진 능력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내가 가진 기억력,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인간은 적어도 자기가 최대한도의 능력을 발휘하고 지식을 얻었다 한들 자기가 가진 잠재력의 10분의 1 밖에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이걸 아셔야 됩니다. 특별한 계기가 올 때 이 엄청난 능력이 작용하는 거예요. 그런고로 그 큰 능력을 위해서 잠깐 우리는 까맣게 잊어버리고요 조용하게 생각을 숙성시키는 그런 과정을 가져야 됩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 이 올시다.

 

조명이라고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번쩍하는 것이,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것을 포착해야 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살아오는 과정에도 번쩍 좋은 생각이 있었지요. 그런데 놓쳤지. 그만 놓쳐버렸단 말이에요.

 

번쩍 번쩍 생각이 나는데 이것을 잘 붙잡아야 되는데 100가지를 붙잡으면 그중에 하나가 진짜에요. 아흔아홉가지는 공상이에요. 그건 잘못된 거예요.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번쩍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영감이라고도 하고 성경에서는 계시라고도 하겠지만 어쨌든 번쩍하는 생각을 포착해야됩니다.

 

그리고 '팔로우-(Follow-up)' 이제는 거기에 계속 집중적으로 생각해서 붙잡은 생각을 완전히 성숙시켜야 됩니다. 거기서 성과를 맞아야 되는 것이죠. , 이렇게 과학적으로 주장합니다.

 

여러분, 지식이란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계시적 지식이요, 하나는 실증적 지식입니다. 합리성과 귀납성, 이걸 따라서 증명되지 않는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 하면 꼭 몸으로 경험하는 것만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아니올시다. 생각으로 경험하는 것도 경험이에요. 그런데 전혀 실증될 수 없는, 전에 생각지도 못했고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그러한 특별한 경험이 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잘 붙들어야 되는 거예요. 잘 받아들여야 되고 잘 소화해야 되는 겁니다.

 

또 하나의 지식은 실증되는 지식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우리 경험에서 검증될 수 있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막의 교부로서 영성의 대가이기도 했던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라는 사람은 인간의 감정에 잘못될 수 있는 방향, 그리고 극복해야할, 잘못되기 쉬운 습관을 세가지를 지적합니다.

 

이것이 있는 동안은 새로운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다시 말하면 계시적 지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올시다.

 

첫째가 비탄입니다. 나는 쓸모없다. 이미 과거에 실패했다. 그런고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 비탄하는 것이에요. 이미 자기자신을 포기해버렸어요. 이러한 사람에게는 영감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분노올시다. 너무 억울하고 분한 일들이 있었어요. 여기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는 동안에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 마음에는 번쩍 지나가는 것도 없어요. 'CEO가 되는 길' 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Lessons from the Top' 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50명의 CEO를 연구해 보니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어요. 누구를 미워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원수를 갚고, 이런 마음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어요.

 

창의력이 없다는 것이에요.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또 하나는 '나태' 올시다. 게을러빠진 사람에게는 영감이 없어요. 부지런해야 되요.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주 부지런한 성격의 사람에게 새로운, 번쩍하는 아이디어가 함께 하는 것이에요.

 

다시 말씀을 드리면 지식이란, 아는 지식이 있고 알려지는 지식이 있습니다. 내가 내 생각, 내 경험을 통해서 공부해서 알 수 있는 지식이 있어요. 그런 때는 내가 주체고 내가 공부하는 내용이 객체가 됩니다.

 

그러나 그 객체가 인격인 경우에는 얘기가 다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그가 내게 알게 하는 것이올시다. 이게 물건이 아니에요.

 

사람이요 혹은 때로 인격인 경우에는 이제는 그가 나에게 알게 해줄때만 압니다. 그가 내게 알게 해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물건인 때는 두드려보고 알고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알 수 있지만, 이 사람이 사람이에요. 인격이에요. 울면 슬픈가 보다, 웃으면 기쁜가보다 할 것이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이거 두드려 본다고 압니까? 이거는 저분이 나에게 자기 자신을 알려줌으로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두가지 지식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내게 알려주셔야만 내가 아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계시의 영, 계시의 지혜를 말합니다.

 

여기에 ''이라고 제가 번역을 했는데, 우리 본, 지금 읽은 성경책에는 '계시의 정신' 그랬습니다만은 그 밑에 ''이라고 다시 번역을 고쳐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영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확실히 '프뉴마' 라고 하는 것은 ''이라는 뜻입니다.

 

프뉴마 소피아스 카이 아포칼루프세오스, 라고 하는 말은 프뉴마, ''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적으로 중요한 인식론적 진리가 있습니다. 적어도 무엇을 알려면은 절대 3요소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대상이요 하나는 주체인 나요 그 다음에는 빛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무엇을 '본다' 할 때 보려고 하는 물체와 볼 수 있는 ''과 그리고 ''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객체와 주체와 조명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죠. 여러분, 아무리 귀한 것이 여기 있어도 내가 눈을 감고 있으면 볼 수가 없어요.

 

내 눈을 뜰 때만 볼 수 있지. 그런데도 내 눈이 뜨여졌고, 보았다 하더라도 빛이 없으면 못봐요. 지금 여기서 환하게 다 보고 있지만은 깜깜한 시간이 오면은 앞에 무엇이 있던 없던 알 수가 없고, 내 눈을 아무리 떴다 하더라도 내 눈은 말짱 헛것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인식론의 근본이에요. 조명이 없으면 안되는 거예요. 바로 몇주일 전에 제가 '요로결석'이 생겨가지고 참 되게 아픈 시간에 밑에서 진통제를 맞고 기다렸다가 또 맞고 세 번을 맞고 올라와서 설교를 하는데요 몽롱하더라고요. 아무것도 안보여요.

 

그야말로 뿌연걸 그걸 놓고 그런 가운데서 설교한 일이 한번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잘 보이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내가 보려고 해도 내 눈이 흐려지면 안되고요. 내 눈이 아무리 밝아도 빛이 없으면 못 봅니다. 빛을 주는 것만큼만 보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되요.

 

그런고로 오늘 성경말씀은 계시의 영을 주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계시의 영을 주십시오. 아무리 똑똑하고,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다한들 계시의 영이 어두워지면 아무 소용없어요. 오늘 우리는 그런 것을 많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상식이하의 실수를 합니다. 왜요? 어두워졌어요. 마음이 어두워졌어요. 조명이 없어요. 이게 얼마나 불행한 일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이 다 아무 소용없어지고 마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 즉각적으로 해설을 하십니다. '그건 네 혈육이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네게 알게 한 것이니라. 그런고로 너는 복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시의 영을 주어서 하나님을 알게 하고 나 자신을 알게하고 세상을 알게하는 것, 그 사람은 복된 사람이올시다. 그런고로 오늘 본문에 '계시의 영을 주시사 하나님을 알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을 알 때 나를 알고 나를 알 때 세상을 알게 되는 거죠.

 

또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세요.' 주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름받은 자의 미래, 소망에 대해서 알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과거가 문제가 아닙니다. 미래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있는지, 이걸 똑바로 알고 오늘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계시의 영을 밝혀 줄 때 비로소 미래를 내다 볼 수가 있어요.

 

또한 성도의 기업이 어떠함을 알게 해주십시오. 궁극적으로 예수믿는 사람의 마지막 종착점, 마지막 기업,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통과할 때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만은 문제는 저 가나안 땅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가나안 땅에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만 있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어떤 고난이라도 다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마지막 성도의 기업에 대해서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올시다.

 

또한 베푸신 능력, 이 귀한 약속에 대한 믿음이 내게 능력을 줍니다. 현재적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 죄를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허영을 이기고 방종함을 이기고 죽음을 이깁니다. 원수를 사랑합니다. 사랑의 능력, 엄청난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깊은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아인슈타인 박사의 말입니다. "What I Belive" 라고 하는, '나의 신념'이라고 하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이다. 신비야말로 모든 과학과 예술의 진정한 원천이다. '신비' 바로 계시의 영, 영감, 그것이 과학과 예술의 원천이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섭리, 그것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보다 더 멀리 봐야 됩니다. 오늘이 아니라 멀리. 저는 오래 전에 읽은 글을 생각합니다.

 

우리 정치가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 생각이 나요. 처칠경에게 물어보았어요. "정치가에게 가장 갖추어야할 자격이 뭡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는 딱 한마디로 대답하는데 "최소한 2년을 앞서 볼 수 있어야지. 좀더 멀리 볼 수 있어야지."

 

다른 사람보다 멀리, 최소한 2년을 내다 봐야돼요. 발등의 것도 못보면 되겠어요? 백성들은 못봐요. 그래도 지도자들은 보다 먼 것을 봐야 되요.

 

요새 이런 재미있는 우스갯 소리가 있어요. '평등 시리즈'라고. 들어 보셨을 겁니다. 요새 몇 일 전에 들었는데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뭐냐면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등이 온다는 거예요. 뭐 옛날에 공부한 거 다 말짱 헛것이에요. 뭘 알긴 뭘 알아요. 컴퓨터를 압니까,

 

뭘 알아요. 그래서 40이 되면 옛날에 대학을 나왔던 안나왔던 몽땅 똑같습니다. 그래서 '지식의 평등화가 온다' 그러고요. 50이 되면 외모의 평등화가 온데요. , 거 맞더만요. 젊었을때는 예쁜 사람도 있고, 좀 덜 예쁜 사람도 있습니다, 확실히. 그러나 50이 넘으면 똑같아요. 그것만은 잊지 마세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감자같이 생겨가지고 50이 되면 모조리 다 똑같아요. 같습

 

니다. 괜히 뭐, 이제 가서 두들기고 맛사지 해봐야 별거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 다음에 60이 되면은 성의 평등이 와요. 도대체 남녀가 다 섞여버려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가 없어요. 주책이 없다, 이거지요 뭐. 그리고 70이 되면요 건강의 평등이 와요.

 

건강한 사람도 그만, 건강 못한 사람도 그만, 어차피 다 그만큼 그만큼 늙어가는 거예요. 다 평등해요. 80이 되면 80대가 되면 재물의 평등이에요. 돈이 있으면 뭐해요, 먹지 못하는 거. 집이 좋으면 뭘하고 못하면 뭘해요.

재산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걸 알아야 되요. 평등이요. 90이 넘으면요 생사의 평등이요. 살았으나 사는 것이 아니고 죽으나 사나 그게 그거예요.

 

그 참 재미있는 얘기예요. 이게 뭡니까? 내다봐야돼요. 오늘 여러분 아이가 그대로 있습니까? 10년후 20년 후 그 앞을 훤하게 보세요. 평등한 거예요.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어요. 이걸 알아야지요.

 

그리고 우리의 종말을 내다볼 수 있어야 됩니다. 마지막 종말이 어디입니까? 호세아 46절은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그래요. 참 지식, 바른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거예요. 왜 모르게 되었느냐고요?

 

죄가 있고 증오가 있고 시기가 있고 끝없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에요. 욕심 때문에 눈이 어두워졌어요. 마음이 흐려졌어요. 계시의 영이 떠났어요. 그 마음에는 번쩍 하는 것이 없어요. 참 의욕이 없어요. 이래서 세상은 어지러워지는 것이올시다.

그런고로 계시와 지혜의 영, 계시의 영을 주십시오, 기도해야겠어요. 경제의 문제도 정치의 문제도 아닙니다.

 

세상, 국제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계시의 영을 주십시오. 저 미래가 밝게 보일 때 현재를 알 수 있고 나의 나됨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계시의 영을 주십시오"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끝없는 욕심과 허영과 세상적 욕망에 사로잡혀 우리 마음이 어두워진 지 오래됐습니다. 주여, 우리 눈을 밝히시고 계시의 영을 주시사 우리 앞에 있는 소망도 알고, 우리 앞에 있는 기업도 알고, 내가 가고 있는 운명의 길을 바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계시의 영을 주시사 어려운 세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주의 음성을 조용히 들을 수 있게 하시며 바로 응답하며 늘 승리생활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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