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드신 사람과 창조하신 사람 /창1:24-31(히11:14-16) 허창수목사
2022-06-29 10:11:36
종합병원에 장기이식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입원한 병동 바로 옆에 동물병동이 있답니다. 간이나 심장 같은 장기를 죽은 사람에게서 떼어서 이식을 합니다. 그런데 장기 이식을 받을 사람은 많은데 장기를 기증할 사람이 죽어야 이식을 받을 수 있는데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의사들은 동물에게서 장기를 떼어다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을 연구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장기와 흡사한 동물의 장기를 이식하는 연구를 하기 때문에 동물병동이 있답니다.
얼마 전에 사람에게 돼지의 간을 사람에게 성공적으로 이식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동물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쥐의 체질이 사람의 체질과 흡사하다고 해서 의사들은 쥐를 연구용으로 사용합니다. 쥐에게 암세포를 주입해서 암환자로 만들어서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투입해서 암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연구를 합니다.
인간과 동물은 어디까지 같으며 어디까지 다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박사들이 동물들을 연구를 합니다. 고고학자들은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의 뼈와 원숭이의 뼈를 밤낮으로 분석하고 비교하면서 인간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연구합니다. 사람이 언제 어디서부터 존재하였는가를 연구하여 원숭이가 사람의 원조일 것 같다고 합니다. 진화론적 원리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사실 사람과 동물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동물들에게서 문화를 배우고 생존경쟁을 배웁니다.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의 뿌리를 동물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뿌리는 창조의 원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어디서부터 시작했으며 어떤 존재이며 어디로 가는 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섯째 날에 땅의 짐승과 가축과 땅에 기는 것을 창조하셨습니다(21).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동물과 사람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25절에 땅의 짐승과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고, 26절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27절에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물과 사람과 같은 점이 무엇이며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동물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고(26).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27). 사람은 만들고, 창조하셨습니다. ‘만듬’과 ‘창조’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만듬’은 흙이라는 재료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창조’는 재료가 없는 데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만듬’은 동물과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창조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동물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동물과 사람은 흙으로 만드신 육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27)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중성인 존재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만드신 육체가 있고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에게는 만드신 육체만 있고 영혼은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만들어진 몸과 창조하신 영혼이 있습니다.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므로 생령이 되었습니다. 동물에게는 하지 않은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생령’은 생명이란 뜻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혼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께 찬송을 불러 드릴 수 있고 또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찬송도 기도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람이 죄를 범하므로 창조된 영혼은 죽고 만들어진 동물성만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영성은 죽고, 동물처럼 생존경쟁을 하며 살아야 하는 타락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하므로 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어져 버렸습니다.
이웃 동네 어떤 분이 보신하려고 개를 잘 먹여서 키워서 십리나 떨어진 읍내 개중탕하는 집에 끌고 가서 맡기고 개중탕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개중탕을 해서 잘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개가 찾아 왔더랍니다. 주인은 깜짝 놀라 중탕집에 전화를 했더니 사장이 즉시 와서 30만원을 주면서 미안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 사실을 절대로 소문을 내지 말라고 빌더랍니다. 개가 너무 좋아서 다른 개와 바꾸어 중탕을 한 것입니다. 개를 키운 주인이나 중탕집 사장 두 사람 다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개는 주인을 찾아와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하지만 주인은 그 개를 죽여 몸보신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주인을 보고 죽을 정도의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통령들이 개를 좋아한답니다. 대통령들이 외롭기 때문에 개를 좋아 한답니다. 정치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거실에 들어가면 개가 꼬리를 치며 반겨줄 때 정적들로부터 받았던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들이 개를 좋아 한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만 개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대통령들 모두 개를 좋아한답니다. 얼마 전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일본 아베 총리가 만났을 때, 푸틴 대통령이 하얀 개를 끌고 나와 아베 총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베 총리가 ‘개가 참 좋습니다’라고 하니까 푸틴 대통령이 ‘예 좋은 갠데 가끔 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개를 들여보내고 두 정상이 악수하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두 정상이 만나 인사도 하기 전에 개부터 먼저 인사를 시키는 것을 보고 개 정상회담을 했다고 평을 하였습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개를 좋아한답니다. 해외에 나갈 때는 언제든지 개를 데리고 다닌 답니다. 미국의 어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이런 말을 했답니다. ‘여러분이 혹시 나를 욕하거나 내 아내에게 욕하고 흉을 보는 것은 괜찮지만 저 개를 보고는 욕하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 대통령의 기념관에 대통령의 동상 앞에 개 동상도 함께 있는 사진을 TV를 통해 보았습니다.
사람답지 못하고 잘못하는 사람을 보고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니까 개들이 ‘개만큼 만 되어도 괜찮치’ 라고 한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개만도 못하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창조된 사람(영혼)이 죽고, 만든 동물성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죽으므로 개만도 못한 추악한 존재가 되어져 버린 것입니다.
동물들이 다른 동물을 죽이고 잡아먹는 것은 생존법칙입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면 절대로 다른 동물을 해치지 않습니다. 사자나 곰도 먹을 것을 주고 쓰다듬어주면 해치지 않고 좋아합니다. 개는 자기를 중탕해서 보신하려고 하는 주인에게 찾아와 꼬리치며 반가워합니다.
개만도 못한 타락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길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들의 죄를 담당시키시고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리십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오묘한 구원의 진리인 것입니다. 이 구원의 진리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육체는 세월이 지나면 낡아지고 쇠하여 지다가 결국은 죽게 됩니다. 동물이나 사람도 만들어진 육체는 날이 갈수록 늙고 병들어 죽게 됩니다. 시편146:4에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동물이나 사람의 몸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창조한 사람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전도서 3:21에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창조된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동물과 사람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나 동물의 만들어진 육체는 동물과 같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창조된 사람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진리 역시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이 진리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범죄하기 전에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는 영원 지향적인 존재이였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살았습니다. 창조한 영혼은 영원 지향적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도 창조된 사람의 영혼은 없어지지 않고 어디론가를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어디로 가는 가를 알지 못하여 온갖 설을 만들었습니다. 극락에 간다든지, 좋은 곳에 간다든지,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과 개념이 다른 하늘나라에 간다든지, 아니면 공중에 돌아다니는 귀신이 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이 어디로 가는 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성경은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히11:16). 믿음의 조상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본향을 찾는 자’라고 했습니다. ‘나온 바 본향’(히11:15)이란 나고 자랐던 곳이지만, ‘더 나은 본향’은 창조하신 영혼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이란 말은 창조된 사람이 원래부터 있었던 본향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저도 나고 자랐던 고향을 자주 그리워하며 기회가 있으면 만날 사람도 없지만 한 번씩 가서 둘러봅니다. ‘까마귀도 죽을 때 머리를 고향으로 돌리고 죽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기회가 있으면 가서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그 몸에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고 육체만 남습니다. 그러면 그 남은 육체는 흙에 묻어 장사합니다. 이것으로 창조의 원리가 끝이 아닙니다. 창조의 원리는 부활입니다. 죄값으로 육체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이 떠났지만 다시 창조의 원리를 따라 원래의 창조한 그 모습으로 다시 살아 나게 됩니다.
죽은 자가 언제 다시 살아납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주와 함께 잠자는 자들을 데리고 오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살전4:14절에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은 이미 죽은 자들의 영혼들입니다. 영혼들이 죽은 육체에서 떠나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영혼들이 예수님과 함께 올 것입니다. 무엇하려고 내려옵니까? 흙으로 돌아간 자신의 육체와 다시 결합하여 창조된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간 영혼과 다시 결합하여 창조당시의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한 사람은 다시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과 창조한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올라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모든 사람이 다 받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이와 같은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믿는 성도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합니다. 그곳에 가서 영원히 살 것을 믿고 바랍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과 창조한 사람으로 이중성입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므로 동물만도 못한 사람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창조한 사람으로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그리워하며 소망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더 나은 본향에 들어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믿고 바라는 성도는 어려워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그리운 본향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 없는 짐승들처럼 살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신령한 더 나은 본향을 바라고 사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더 나은 본향에 들어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부탁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 /창1:26-31/ 이백민목사
2020-06-23 03:56:32
(The Person who has the image of God)
평생을 후회할 것 없이 사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후회가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민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나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다시 돌이키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놀지 말고 공부를 좀더 열심히 했더라면,
아버지,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좀더 순종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동생에게 화내지 않고 좀 더 잘해 주었더라면,
처음 목회를 시작하여 어려웠을 때 좀더 잘 견뎠더라면,
허리 디스크 걸리기 전에 힘 자랑을 하지 말았더라면,
호주에 와서 처음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을 때 좀 더 신중하게 했더라면,
수도 없이 되돌리고 싶은 기억들이 많이 있지만, 이미 지나간 일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되돌리기에 늦지 않은 일들도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문제에 관하여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그 기회가 허락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되돌리고 내가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 보면서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1.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진화론은 사람이 진화의 과정에서 우연히 나왔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이나 짐승들이나 그 조상은 원래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진화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생물들의 조상은 같습니다.
진화의 과정에서 어떤 생물들은 원숭이 종류가 되고 사람도 짐승들의 한 종류로 분화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공룡도 약 2억년 전에 출현하여 6,500만년 전에 멸종하였다고 진화론자들은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요즈음 과학 잡지들에는 공룡들도 계속 진화하여 새종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닭의 조상도 공룡입니다. 새들이 공룡과 가장 유사하게 생겼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털이 제거된 새를 상상하면 공룡과 유사하다는 것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짐승은 짐승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첫 조상은 단세포나 아메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들, 바로 아담과 하와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공룡이 새나 닭이 된 것이 아니라, 공룡들은 공룡들이고 새들은 새들입니다. 아예, 공룡과 새들의 창조된 날이 다릅니다. 새들은 다섯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창 1: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공룡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창 1: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더욱 다른 점은 사람은 짐승들과 구분되어 특별히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것입니까?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에베소서는 태초에 창조된 사람의 모습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 God blessed man and woman
사람들이 복을 받고 살아가지만 그 복을 얼마나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달라집니다. 똑 같은 부모 밑에서, 똑 같은 환경 속에서 자란 자녀들 일지라도 자신이 부모의 복을 받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녀들이 있는 반면에 오히려 부모를 원망하고 살아가는 자녀도 있습니다.
골드코스트에는 구경할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스프링브룩이나 네츄럴 브릿지 같은 곳은 골드코스트를 짧게 다녀가는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골드코스트에도 이렇게 높은 산들과 큰 폭포가 있는 것을 보고 감탄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이것이 별 볼 것 없다고, 이게 뭐 대단하다고 그러냐고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을 알고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 아무런 복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창조된 복을 받았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을 주셨습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태초에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요 권리요 의무였습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땅과 물질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들을 정복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땅에 있는 생물들을 신이나 자신과 동일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거나 반대로 생물들을 학대하고 파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보호하고 다스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복 없는 삶을 살아가면 갈수록 만물들이 사람에 의해 더욱 학대 당하고 파괴되는 것입니다.
태초의 사람이 죄를 짓고 복 없는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사람만 탄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모든 만물들이 함께 탄식하게 된 것입니다.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3. 구원은 회복입니다. – The salvation is the restoration of you.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습니다. 사랑을 잃었습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의 형상을 잃었습니다.
구원은 잃었던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들, 탕자에 관한 비유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이 가져야 할 유산을 달라고 하여 아버지의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자신이 가졌던 것을 다 잃어버리고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으면서 굶주림에 지치고 고생을 한 후에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이 그리워져 다시 아버지를 찾아 집으로 돌아갑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이전의 위치로 다시 회복 시켜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났는지를 알게 되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져버렸는지도 알게 됩니다.
바울은 사랑은 어떤 것이라고 했습니까?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전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태초의 사람은 오래 참지 못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바로 자신의 자랑을 위해 살았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 보다 사탄의 유혹과 자신의 생각이 더 옳은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교만하였고 하나님께 무례히 행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싶어했기 때문에 불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선악과의 유혹에 하나님의 형상인 의와 진리와 거룩을 인간 스스로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과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다시 회복(중생, 거듭남)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본 받아는 삶을 살면서 회복하라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출산” 하나님의 축복인가? /창1:27-28/ 김병삼 목사
2016-03-23 18:42:26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요람에서 무덤까지. . . hot issues”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생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문제라는 단어가 거슬린다면 '과정'이라는 말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필수적인 인생의 과정이 어떤 사람에게는 불행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행복으로 찾아옵니다.
먼저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행복한 일입니까?”
“여러분에게 자녀를 낳는 일이 축복입니까?”
“여러분이 자녀를 낳아 양육하는 일에 기쁨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에서 부담을 느끼십니까?”
여러분이 지나왔던, 이제 자녀에게 찾아온 문제이든지 '결혼'의 과정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축복된 결혼을 할 수 있을까요? 결혼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나요?
이제 가정을 이끌어 가야 하는 경제적인 책임은 우리가 어떻게 돈을 벌며 그 행위가 'job' or 'vocation'의 문제 가운데서 고민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이제 죽음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옵니다. 어떻게 하면 멋지게 죽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인생의 문제가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되던가요?
이제 오늘부터 5주 동안 우리를 지으신,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인생의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아마 여기에 많은 분이 명쾌한 해답을 원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해답이 아닌 '원리'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원리에 대입해서 여러분이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어려운 질문 명쾌한 해답"이라는 시리즈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 아내가 그 설교가 끝나고 난 후 이렇게 평했습니다.
"분명히 어려운 문제였는데 해답이 명쾌하지 않았어!"라고 말입니다.
이번에도 어쩌면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피해갈 수 없는 문제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답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다섯 가지 불가능한 일이 있다!'
1. 결혼한 아들 엄마 편 만들기
2. 스님 머리에 삔 꼽기
3. 퇴직한 남편 공경하기
4. 앙드레김 검은 옷 입히기
5. DJ 비자금 캐기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성경의 원리 가운데 찾아가며 우리의 삶을 rebuilding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오늘 그 첫 번째 주제로 가장 원초적인 문제인 '출생'의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나눠 드렸던 설문 결과를 보겠습니다.(만나교회 홈페이지 예배 동영상 보기 참고)
1. 자녀를 안 갖는 이유는 경제적 이유가 83.3%로 1위를 차지, 2위는 심리적 부담으로 나옴.
2. 미혼의 경우 68.4%가 아이 갖기를 원한다고 대답.
3. ‘출산은 꼭 해야 한다.’라는 질문에 92.8%가 ‘예!’라고 대답.
4. 입양에 대한 생각은 찬성 55.6%, 반대 44.4%로 나왔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여러분의 인생에 그렇게 기쁜 일이었습니까?
창세기 1장 27-28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으며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출산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한 축복입니다.
창세기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리고 우리 인간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산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듯이, 우리를 통해 계속되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입니다. 그래서 축복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되고 우리의 선택을 벗어난 이 문제가 축복이 될 수 있을 때 신앙입니다.
지난 상해 코스타 마지막 날 밤에 상해 연합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이 기도회를 인도하는데 제 가슴이 뛰었습니다.
“하나님, 후진타오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이 땅의 인민들을 축복합니다. 하나님, 이 상해 땅을 축복하고 이곳에 보낸 유학생들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축복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에게 주신 곳, 내가 선 곳을 축복하지 못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왜 우리는 가장 소중하고 가장 가까운 것을 축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탄생이야말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가장 축복해야 할 일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출산이 이제는 축복이지 못한 세상에서…”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의 문제처럼 출산의 문제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즉 이 사회가 당면한 문제 때문에 출산의 문제가 야기되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여기에서 출산의 문제란 '불임'과 '저출산' 두 가지를 포함합니다. 삼성 경제연구소 최숙희 연구원은 [저출산 시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란 논문에서 저출산 유발 요인 4가지를 꼽습니다.
1) '소득요인'으로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즉 고용과 소득의 불안이 아이를 낳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
2) '자녀 요인'이 존재하는데, 양육비의 과다한 지출과 노후 부양에 대한 기대감의 감소는 자연히 아이를 낳는데 주저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
3) '가치관 요인'으로는 자기만족 위주의 가치관이 만혼과 독신을 주장하거나 이혼이 증가로 말미암아 가정의 안정성이 하락하게 된 것.
4) '사회 직장 요인'으로 양성 불평등과 남성 위주의 복지시스템은 가정과 직장의 양립이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통계를 통해 좀 더 명확해지는데, 매일경제신문이 네티즌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83.09%가 보육 여건과 교육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OECD 국가 주에서 사교육비 부담이 가장 큰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미 올해 신문지상을 통해 여러분이 많이 접해 보셨을 것입니다. “한국 출산율, 193개국 중 꼴찌”라는 기사를 말입니다.
2009년 5월 신문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드디어 2008년 기준 여성 한 명이 평생 낳는 자녀 수가 1.19명으로 홍콩 다음으로 낮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두다 보니까 많은 기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당장 이번 한 주간에 본 기사가 한국 사회 출산의 심각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10월 10일 자 조선 일보에서는 한 달 평균 1,800명씩 신생아가 줄어드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말합니다.
작년 하반기부터 나빠진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출산율은 더 저조해 질 것이며 출산율의 선행지표라 할 수 있는 혼인건수도 일제히 하락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7월에 비해 올 7월이 12.6%(3300)건이나 줄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종독감의 영향으로 임신을 꺼리는 여인이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내년이 범띠해라 “범띠나 말띠 여자는 팔자가 세다.”라는 속설에 따라 1년 후인 토끼띠에 아이를 낳으려는 계획도 하는 가정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2009년 10월 11일자 국민일보에서는 저출산의 원인을 결혼하지 않는 여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최근 5년 새 최고 두 배 가까이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출산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장려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통계청 관계자는 과거에는 ‘농촌 총각’이 사회문제였는데, 이제는 ‘도시 미혼’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결국, 출산의 문제가 외적인 환경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축복으로 인식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니 더는 출산이 축복으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가 얼마나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는지 모릅니다.
저출산 문제는 앞으로 다가올 10년 동안 한국 사회가 직면할 최대의 위기 요인이 될 것입니다. 1020년이면 65살 이상 고령인구가 15%를 넘어서고 2030년이면 24.3%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 이런 현상을 통계를 통해 접하게 됩니다. 2009년 5월 21일 통계청 자료입니다.
지난달 취업자 중에서 20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16.2%입니다. 그런데 20년 전인 1989년 4월에는 24.8%였습니다. 30대 역시 1989년 4월에는 27.5%에서 24.8%로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계속될 것이고 머지않아 우리나라 경제의 생산 주력인구가 40,50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주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노동력의 주력 인구가 자녀를 책임지고 부모님 세대와 고령화 세대에서 조부모의 세대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한 사람이 부양해야 하는 부담이 점점 커지게 되며 결국, 사회적인 문제 세대 간에 갈등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장수’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성경에서도 수없이 많이 장수의 축복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잠언 3장 16절을 보세요.
“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잠언 22장 4절(표준 새번역)에서도 겸손한 사람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얻을 보상이 ‘장수’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지속한다면 통계상 300년 후에는 이 지구에 한국사람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대로 간다면 2100년 한국의 인구는 현재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현재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평균 기대 수명은 79세입니다. 아마도 수십 년 내에 평균 수명이 100세를 넘길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할 것입니다. 오래 사는 장수가 축복으로 여겨지던 생각이 곧 인류의 저주로 바뀔지 모를 일입니다.
계속되는 출산과 맞물려 있지 않은 장수는 급속한 고령화로 말미암은 사회의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문제의 해결은 어디 있으며 지금 이 시대에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축복이 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1960년부터 2000년에 이르는 동안 정부가 홍보했던 캠페인 사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을 느끼시나요? 시대에 따라 바뀐 우리의 생각, 환경에 따라 늘 바뀌는 것이 진리가 될 수 없는 상황을 우리가 인정하게 됩니다.
저는 행복의 비결은 “정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신 원리에 바르게 선다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불임의 아픔과 가정의 위기
우리는 방금 의도적인 저출산의 문제와 그것이 일으키는 결과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와 아픔 중의 하나가 ‘불임’의 문제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가정의 위기와 당사자의 아픔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출산의 문제는 불임 가정에는 사치스런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세상이 참 불공평하지요. 일부러 낳지 않는 것도 불행이요,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는 것 역시 불행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 말씀이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선언일진데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겠습니까?
얼마 전 집회를 갔다 한 성도의 아픔을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던 집사님이 함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어서 아내는 산부인과로 남편은 비뇨기과로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남편에게 있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 가정에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보다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되었고 결국, 아이를 입양하는 쪽으로 합의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어느 영아원을 찾아 봉사하면서 입양할 아이를 찾고 있었는데, 6개월이 지났을 때쯤 아내가 임신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아픔이 그렇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남편은 애써 현실을 외면하려고 했고 그때부터 둘은 각방을 쓰면서 1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아마도 부인이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는 싸움을 하든지 갈라서든지 용서를 하든지 문제를 직면했어야 했는데, 남편은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자 생각을 하고 무관심하게 살아온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가게 되고 혈액형이 부모에게서 나올 수 없는 피라는 것을 아는 순간 현실을 다시 보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아내는 남편을 향해 분노를 쏟아 붓기 시작했고 늘 남편을 향해 ‘돈’타령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고 불안한 아내는 합의로 이혼을 하고 모든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교회에서는 서로 웃으며 봉사하고, 집에 오면 싸우고.
하지만, 양쪽 부모와 가족은 이런 상황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50kg을 갓 넘던 남편의 체중은 이제 100kg를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에게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살이 많이 오르자 잠을 잘 때면 코를 심하게 골게 되었고 ‘무호흡증’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죠.
그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무 감사하죠. 이렇게 살다보면 어느 날 자다가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여러 가지 말을 했지요. 상담을 하면서 여러 가지 말로 조언도 하고요. 그리고 그날 저녁 집회에서 그 많은 사람 중에 유독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1시간 30분을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해 설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설교가 시작하면서부터 그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의 아픔이 전해 오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에게 용서받지 못했던 시간, 오히려 무시당했던 것 같은 느낌이 이 여인을 얼마나 힘들게 했을까?
낙천적인 남편이 그냥 덮어 두기로 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왔지만, 모든 상황을 숨기며 안 그런 척하는 남편의 마음, 그래서 살이 찌고 무호흡증으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남편의 마음 또한 얼마나 아팠을까?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 제 방에 들어와 상담을 요청한 그분과 대화를 하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녀의 문제로 아픔을 가지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경에는 아이 때문에 아픔을 겪었던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아이가 없었던 사라의 아픔. 그래서 자신의 시녀였던 하갈을 대신 남편의 방에 들게 하고 얻었던 아들 이스마엘이 절대 축복일 수 없었던 여인.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남편의 또 다른 아내 브닌나에게 멸시를 당했고 그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 울며 기도하며 얻었던 아들이 사무엘이었던 것을 압니다. 사무엘 상 2장 20-21절을 보세요.
“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불임은 단순히 가정의 아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가정의 위기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이유 없는 불임으로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불임의 원인을 알기 때문에 과학에 의지하여 아이를 낳기 위해 애타는 많은 부부가 있습니다.
먼저 저는 성경을 통해 쉽게 아이를 얻는 기쁨보다 기다림을 통해 얻는 아이가 더 큰 축복과 기쁨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 때나 얻는 아이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귀함을 아는 것, 기다리는 것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왜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아이를 허락하지 않으시나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신가요? 저는 생명에 관한 한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 그 이유가 바로 생명에 있습니다. 오늘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가정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에서 실시하는 [헬로맘]이라는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 했던 분의 출산의 기쁨과 아픔의 이야기를 함께 보겠습니다.(만나교회 예배 동영상 보기 참고)
성경적 해답은 무엇인가?
저 출산에 대하여…
출산한 직장 여성들은 대부분 출산 휴가 3개월이 끝나는 즉시 복귀하지 않으면 일자리를 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만 1년까지 보장된 육아 휴직은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아기를 믿고 맡길 곳이 없어 친정, 시댁 할머니들에게 짐 지우고 이래저래 돈이 많이 듭니다. 직장생활도 빠듯합니다. 임신을 했든 어린 아이가 있든 상관없이 야근을 상시로 하고 회식에도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집에 돌아가면 할 일은 산더미 같습니다. 가사는 물론 자녀양육, 집안 대소사 모두 여성의 몫으로만 돌리는 풍토에서는 슈퍼우먼이 될 각오를 하지 않으면 결혼도, 아이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 세계 최저 출산율이지요.
2009년 5월 21장 문화일보 기사를 인용하겠습니다.
“출산 장려 운동의 성공담을 논할 때 프랑스를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 정부의 지원은 파격적이다. 출산과 양육 보조금으로 지원하는 액수가 국내총생산(GDP)의 4%를 넘는다. 한국은 GDP의 0.4% 수준이다. 프랑스에서 아이를 출산한 직장 여성은 최대 1년까지 100% 유급휴가를 받는다.
한국에서는 갖은 눈치를 보면서 두어 달 출산 휴가를 얻는다 해도 나중에 직장 복귀를 보장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국가적 지원 덕분에 1994년만 해도 유럽 최저수준인 1.66명에 불과했던 프랑스의 출산율은 지난해 2.02명으로 올라섰다. … 성공 요인을 꼽으라면 지도자의 철학이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이후 자크 시라크에서 니콜라스 사르코지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과 총리들이 직접 나서 ‘국가가 책임질 테니 낳기만 하라!’라고 독려해 왔다.”
대한민국이 맞이하는 위기는 교회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모든 교회의 교회학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 민족이 지구에서 사라질 종족 1호로 지목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교회에서도 더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쓰임 받을 사람도 없게 될 것이며 교회의 건물이 아무 의미 없이 비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 더는 고백되지 못하는 세상의 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2009년 8월 11일 자 조선일보에 보면 이런 Head Line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프랑스가 이슬람 공화국이 된다?”
현재 EU 인구의 5%가량이 이슬람이고 웬만한 도시의 10% 정도가 이슬람화되었습니다.
39년 안에 프랑스는 이슬람공화국이 될 것이며 네덜란드는 15년 안에 인구의 반을 무슬림이 차지하고 독일은 2050년 무슬림 국가가 된다는 기사입니다.
현재 유럽의 출산율 증가는 무슬림 이민자들에 의한 것이며 이슬람은 칼과 총, 폭탄 테러 없이 유럽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국 BBC 방송은 이와 같은 통계와 기사가 일부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보도를 했지만, 이미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는 남자 아이의 이름으로 가장 많은 7개 중에는 모하메드, 아윱, 메흐디, 함자 등의 이슬람 이름이 절반을 넘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것이 단순히 혈연의 축복을 넘어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쩌면 경제적인 안락함, 개인적인 이기주의의 추구가 이 땅에서 가장 강력한 사단의 도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를 바꾸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사실 우리 정부와 경제계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일하는 여성들이 마음 놓고 임신, 출산, 양육할 수 있도록 가족 친화적 직장 분위기, 일과 가정의 양립이 조화로운 업무 환경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를 교회가 먼저 만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희 교회가 사무엘 학교를 시작하고 종일 반 운영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다 일하는 부모가 아니지만, 신앙적 교육을 교회가 감당한다는 부분이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대한민국에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과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조직 중에 ‘리’단위까지 들어가 있는 조직이 단 하나 있습니다. 어떤 오지에도 세워져 있는 교회입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이 왕성하던 때 세워진 그 교회가 이제 해야 할 사명이 있다면 그 시골에 가장 고급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목회자의 가정과 교회를 통해 아이를 돌보는 시설이 세워져야 합니다.
마음껏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시골에 매년 어린이 놀이방을 겸한 공부방을 하나씩 지어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가장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영유아 시설이 세워져야 합니다. 당장 우리 교회에서는 여자직원들이, 사모님들이 좋은 재능을 아이를 키우다 보면 사용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도 교회가 해결해야 할, 그리고 선도해야 할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 사회가 혼란스럽고 어려웠던 때, 교회가 보육원과 양로원 보육시설의 90%를 책임졌던 것처럼 이 부분에 교회가 사명을 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도 만나교회가 희생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교회를 꿈꿔 왔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만나교회는 출산자들을 우대하는 교회가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이들을 위한 최고의 수유실을 새롭게 만들고 최고의 자모실을 만들려고 귀한 헌금을 투자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나교회의 가정이 건강해져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가정의 가치가 세워져야 결혼하는 가정이 자녀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교회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자녀를 더 갖지 못하는 이유가 경제적인 이유로 62.5%를 차지하지만, 92.8%가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시대의 소망을 주고 출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신앙적인 가치관을 지닌 가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제적인 이유와 여러 가지 환경으로 자녀를 가지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그 자녀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문을 위대하게 사용하신다는 믿음이 우리의 가정을 든든하게 세워줄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큰 축복의 말씀이 시편 128편이라고 생각합니다.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이제 오늘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출산의 문제가 아이를 갖지 않는 사람에게 가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면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불임 가정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말씀이 어떻게 동일한 축복의 말씀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2008년 4월 17일 자 국민일보에 차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이라는 코너에 나오는 글입니다. ‘불임’이란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1년간 있었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거나 아기를 이미 낳은 뒤로 2년 이상 임신을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의 조사로는 국내 난임 부부는 140만 쌍 정도로 추정되면 포천 중문의대의 윤태기 교수는 “난임은 치료 확률이 50% 정도로 추정된다.”라고 밝혔습니다.
전문가들은 난임 문제를 해결해 나가다 보면 저출산 문제의 큰 짐도 덜 수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현재 정부에서는 난임 부부에 대한 정책으로 저출산 분야 예산의 0.55%인 263억 원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사실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한다면 난임 부부가 치료를 계속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수준입니다.
전 보건 복지부는 2006년부터 난임 여성 치료비를 지원하는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게는 270만 원, 부부 월평균 소득이 448만 원 이하인 가정에는 150만 원을 최대 3회씩 체외수정 수술비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체외수정 시술에는 한 번에 300-500만 원씩 들기 때문에 보통 3회 이상 시술받고 약값 등이 더해지면 난임 치료에 1,000만~2,000만 원씩 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3회 시술을 가정하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90-690만 원, 나머지 지원 대상자는 450-1050만 원을 자신이 부담해야 합니다.
난임 부부에 대하여 소득별로 차등 지원하는 문제와 난임 치료에 초음파 검사부터 단계적으로 건강보험을 적용해야 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전문가들은 “난임 지원으로 출생률이 높아지면 건강 재정을 충당할 수 있는 인구가 늘어나는 셈”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저소득 층 위주로 체외수정 시술비를 지원하는데, 정부 지원을 받아 태어난 아이는 지난해 말 현재 1만 1,134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정부가 하는 일이 부족하다면 교회에서도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의 예산중에 일부를 필요한 불임 부부를 위해 후원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가치, 하나님의 축복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자녀를 가지 못해 많은 아픔을 가졌던 대표적인 여인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했던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에게서 자식을 얻기까지 얼마나 어려웠는지.
야곱이 사랑했던 여인 라헬이 자녀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다림이 있어야 했는지.
위대한 사무엘의 어머니가 자식이 없어 남편의 첩이었던 브닌나에게 당해야 했던 고통.
그리고 참 어려운 시간과 기도의 시간을 통해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녀 없이 고난을 겪는 부부에게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가정에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자녀를 얻은 간증도 있고 기도하며 준비한 시술을 통해 정말 귀한 아이를 얻은 가정도 있습니다.
또한, 이제 이 시대를 바라보며 가정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명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은 혈연중심으로 가족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6-50절의 말씀을 보세요.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대신 예수님에게서 가족이란 사랑의 관계를 중심으로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음을 성경에서 한결같이 증언합니다. 로마서 8장 15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갈라디아서 4장 5절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한가족이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불임 가정이 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과학도 귀합니다. 또한, 우주적인 관점에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귀한 자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어려울 때 서구사회에 입양되었던 아이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컸는지, 물론 비극적인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를 갖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우리 민족에게 그 은혜를 갚을 기회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선교학을 배우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가장 귀한 선교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보다 선교지의 아이들을 신앙으로 잘 양육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서 보내는 것입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셔서 새로운 민족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시는 율법이 무엇입니까? 레위기 19장 34절을 보세요.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지난 8월 신문에 보니까, 현재 우리나라에 거하는 외국인의 숫자가 2백만을 넘어섰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또한, 결혼한 다문화 가정의 90%는 외국인 아내를, 10%는 외국인 남편과 함께 사는 가정입니다.
또한, 앞으로 40년간 인구 감소를 막으려면 연평균 100만-300만 명 수준의 인구를 이민자로 보충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0만 명을 넘어서는 결혼이민자 즉 다문화 가정이 있습니다. 물론 점점 더 많아지겠지요. 또한, 불가피하게도 저 숙련, 저 임금 노동력이 많이 유입되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한 의료 법률 복지 정책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이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이 살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유럽의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는 이미 외국인 등록을 한 모든 외국인에 대한 사회복지 제도를 적용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번성한다는 것인, 이 땅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세요. 우리의 가정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입양’문화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가정에서 건강하지 못한 아이들이 자라고 그 아이들이 자라면 역시 건강하지 못한 가정을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를 행복한 가정에서 좀 더 행복한 하나님의 아이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입양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제가 입양에 대해 설교를 했더니 어떤 분이 항의했습니다.
“입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 나이가 몇인데 그런 말을 하세요.”
제 나이를 무척 많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눈과 귀를 열고 축복된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좋은 가정을 만들어줄 수 있는 모든 방법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아니었다면 불행했을 아이들이 행복한 가정에서 자랄 수 있다면 그 아이들이 또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부부가 가장 고민하고 기도하는 문제가 바로 입양의 문제입니다. 사실 두렵습니다. 어렵습니다. 이제 아이들을 다 키웠는데, 또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무척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 누군가의 생명과 행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희 부부가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가정이 필요한 아이에게 부모가 될 기회를 주세요.”
기다리는 중입니다. 입양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고치 않고 생명을 주셨듯이 우리가 고르는 선택이 아니라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우리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그런 아이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차적으로 선교사로 떠나는 가정의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주기로 했습니다. 아마 내년이 되면 저희 가정이 큰딸을 하나 얻게 될 것입니다.
지난해 한국일보에 보니까 차인표, 신애라 씨 부부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가슴으로 낳은 아이 예진이를 세 번째로 입양한 기사였습니다.
기사의 내용을 보니까 신애라 씨는 첫째 정민이와 둘째 예은이 때처럼 당분간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키우는 일에 전념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출산과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사역의 하나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부를 만드시고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참다운 가정의 모습,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가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절을 가장 빨리 앞당길 방법은 출산에 대한 신앙적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말씀이 바로 여러분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출산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신 창조의 행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계를 통해서 보는 것처럼 그래도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신앙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많은 어린이를 축복하셔서 매달 새아기를 축복하는 감격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아는 교회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우리 교인이 우주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건강한 가정을 통해 건강한 가정이 만들어집니다.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아는 가정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귀한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부모가 없는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주는 것 또한, 우주적 그리고 신앙적 관점에서 아름다운 출산이 될 것입니다.
출산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계속되는 창조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출산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아버지가 필요한 아이들에게 엄마와 아버지가 되어주는 것이 또 다른 의미의 출산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축복과 창조의 말씀이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고백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창1:26/요일2:6/ Zec Poonen
2015-07-15 20:26:08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게!
우리는, 내 신앙생활의 방향을, 올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심부름을 시킬 종이 필요해서가 물론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을 시킬 목적이라면, 이미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 보여줄 어떤 존재가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진리를 놓친다면, 종종 어떤 실수를 범하게 되는가 하면,
뭔가 하나님을 위해 빡세게 일하고, 봉사하는 것이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근본적 목적이라고.. 곁길로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시킬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니까요.
그런데도 신자들은, 종종 이런 곁길로 빠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근본적인 목적을 잊어버리고,
뭔가 자꾸 봉사를 빡세게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시리라고.. 그렇게 착각합니다.
봉사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요, 많이 해야죠.
그러나 그보다 그 중요한, 근본 목적을 망각한 봉사는.. 별로 쓸데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
“우리가 사람을,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창1:26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ccording to our likeness"
그런데 아담이 범죄할 것도, 미리 아심을 따라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창조되기도 전에,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사람을, 타락한 그 죄의 구덩이로부터 구원해 내실 섭리를.. 다 작정하셨습니다.
이렇게 창세 전에 미리 작정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역,
그 구원 사역의 주요 목적도,
원래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신자)들을,
다시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창세기와 아울러, 로마서에도
그 사실을 재차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8~29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을 구속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아담의 범죄로 인해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도덕적/성품적인 영역입니다.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창1:26절↑의 회복입니다.
▶구원은 - 하나님 형상의 회복
우리의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런데 오해하기 쉬운 것은, ‘믿음’이란 것을
그저 ‘지식적 믿음’, ‘교리적 믿음’으로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의 형상을 내 속에 회복’하는데 까지 눈이 열려야,
그게 바로 진정 성령의 감화로, 여러분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자기 결단도 아니요, 뭘 몰랐던 것을 배워서 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신비한 역사입니다. 말씀을 지식으로 믿는 게 아니라,
말씀을 통해, 내 내면에 성령의 감화 감동이 일어나는 초자연적 역사입니다.
그래서 진정 ‘구원’이 일어나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구원의 원래 목적인 ‘하나님의 형상 회복’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구원은.. 대단히 우려스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이십니다. 즉, 인간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두 번째 아담이란, 첫 번째 실패한 아담 대신에,
이제는 성공하는 모델이 되신 것입니다.
‘아담’이란 말에 유의하십시오.
우리 인류의 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신'이 아니라, ‘두 번째 아담’이란 뜻은,
완전한(성숙한, 구원 받은, 형상이 회복된) 인간(아담)으로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살 수 있어!’
참고로, 이것은 완벽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성품, 더 성숙되어져 가는 성품을 뜻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신부된 성도에게 뭘 원하시겠습니까?
혼수로, 많은 물질 가져오는 것을 원하실까요?
‘부리는 영’들인 천사들이 많은데, 많은 업적을 원하실까요?
그런데 만약, 신부의 성품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준비되지 못하면,
그 ‘연합(혼인)’은 결국 파경에 이르고 맙니다. 서로 안 맞으니까요.
아니, 그 전에 ‘혼인잔치’에 초대 받지도 못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담’은, 그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에게
자신을 따라오도록,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 (유혹에 넘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약1:13,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지만, 거기에 굴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마4:1~11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해도, 이단이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해도, 똑같이 이단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시고, 죄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은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성 Deity을 가지시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인성 humanity을 가지시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즉 믿음 생활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서 Deity 경배하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두 번째 아담으로서 humanity, 우리가 그 분의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3년 공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삶의 모범과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회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구원)이 무엇인지,
직접 몸으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앞서 달려가신 분 forerunner’ 이십니다.
히6:20 ‘그리로 앞서 가신 forerunner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앞서 달려가신 분’이란,
뒤따라오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시고,
모든 은혜의 수단(기도와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를 일관적으로 어떤 목표를 향해, 인도해 가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conform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단순히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것이었다면, 만약 그것이 전부였다면,
공생애가 3년 길게,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1주간만으로 충분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반을 사시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면,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그 많은 계명들을 주실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근본 목적이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 수많은 계명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신약에 대표적 계명은 산상수훈입니다.
하나님 나라(천국)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도, 우리의 성화로 인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는 것을, 불가능하게 여기고 지레 포기합니다.
쉽지 않은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성령님이,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을 거울처럼 환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성품을 본받아 살아가도록, 사역해 가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 주권으로,
우리 모든 삶의 정황, 삶의 환경들을, 같은 목적으로 섭리해 가십니다.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한 합력하여 선)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8~29
우리 삶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환경들은,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를 빚으시고, 변화시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십니다. 즉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구원’이란 말의 언어적인 뜻은, ‘어떤 위험한 상태(지옥)으로부터 구출’을 뜻합니다.
실제로 헬라어도 그런 뜻입니다. 전쟁/기근/위험 등으로부터 구출(구원)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저 ‘구출’하기만 원하실까요? ‘구출’도 대단한 것이지만, 소극적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더 적극적/근본적/광의적 표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이란 말만, 널리 쓰고 있는데요,
대신에
‘하나님의 형상 회복’, ‘그리스도의 신부’, ‘구원을 이루기(완성)’ 등을 자주 쓰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사람은,
그에게 성령님이 역사하시게 됩니다.
그 성령님의 역사가, 어떤 목표를 향해 나타납니까?
구원 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살도록.. 그 목적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숙해서,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양을 더욱 더 본 받을수록,
우리는 구원의 풍성함/하나님 나라의 복/하나님과 교제의 행복을 더욱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며,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려면
▶‘인류역사는, 군주나 장군이 아니라, 성자에 의해서 변화되어져 왔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어떤 정치적 힘도 아니요, 경제적 힘도 아닙니다.
사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정권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어도.. 크게 변한 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달랐습니다.
‘13세기의 성프란시스가, 당시 타락한 중세교회를 구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우리 각자의 가정을 보더라도, 그건 사실입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 기쁨, 은혜, 능력이 임하려면,
그건 가장의 가부장적 지도력(정치)에 의한 것도 아니요,
부모님의 경제력에 의한 것도, 더더욱 아닙니다.
부모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살 때,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 나라의 평안, 기쁨, 행복,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니라면,
예수님을 본 받은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 중에 한 분만 있어도,
정 그것도 안 되면,
이모, 고모, 삼촌 중에라도, 예수님을 본받은 집안 어른이 한 분 계시면,
그 가정은, 반드시 달라집니다. 살벌하지 않습니다. 으르릉 거리며 싸우지 않습니다.
명절 때도 화기애애 합니다. 온 가정에 평안이 깃드는 것입니다.
가정을 예로 들었지만,
직장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란, 이 현실 세상 가운데서도 ‘천국/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지옥 같은 삶, 못 죽어서 억지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천국은 1백평 아파트에서 산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아버지가 떵떵거리는 권력자라고,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성도’가 섞여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여종은, ‘여종의 신분’이었지만,
자기 상사를,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로 인도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가정/교회/직장의 천국을 원합니다.
그건 평수를 늘이고, 연봉을 인상하는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결정적 요인은 아닙니다.
결정적 요인은..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임합니다.
오늘 당신은, 당신이 처한 환경 가운데서 구원(하나님의 나라/천국)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비록 그곳이 감옥이라도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처한 환경이 지옥 같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비록 그곳이 호화 빌라 라도요.
▶마치는 말.
여러분, 천사가 인간에게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는 없습니다.
천사하고, 인간하고는 차원이 다르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간의 삶의 도리를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이셨거든요.
그래서 고전11: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삶은
그저 우리 인간의 존경의 대상일 뿐,
그처럼 본받아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푸닌은, 예수님이 굳이 육체로 오신 이유는,
바로 육체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살 수 있다는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제가 늘 자주 인용하는 요일2:6절을, 다시 한 번 인용하겠습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2:6
우리는, 내 신앙생활의 방향을, 올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엘로힘(Elohim) /창1:26-28/ 이동원 목사
2014-11-29 08:07:44
도장 새기는 집에 한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도장 하나 새기는데 얼마입니까?” “예, 천원입니다.”/“한자나 한글이나 값이 같습니까?” “예, 같습니다.”/“이름자가 길건 짧건 값이 같습니까?” “아, 물론이죠”/
이 말을 듣자 손님이 도장에 새길 이름을 내 놓았다고 합니다.
한 참을 들여다 본 도장집 주인이 묻습니다.
/“어느 것이 이름입니까?” “그게 다 이름인데요?”/“이게 한 사람 이름입니까?” “그렇다니까요?”/“아니 선생님, 이런 긴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있습니다.
제 아들입니다.”/“선생님, 혹시 저를 놀리시는 것 아닙니까?” “놀리다니요 분명히 제 아들 이름인데요” 도장 집 주인이 계속 못 믿는 표정을 보이자 손님은 호적등본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도장집 주인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원, 세상에 이렇게 긴 이름이 호적에 오르다니--”
거기에 적힌 이름은
“밝 차고 나온노미 새미나”였다고 합니다.
“복을 차고 나온 것을 남들이 샘낸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배우리 지음 [고운 이름 한글 이름]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제일 긴 한글 이름은
“황금 독수리 하늘을 날며 세상을 놀라게 하다”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긴 이름을 가진 사람은 유명한 피카소였다는 확인하기 어려운 유머도 전해집니다.
그의 훌 네임을 들어본 일이 계십니까?
“파불로-딩고-호세-프란시스코-드 파우라-호안-드로스-레메디-오스--크리스피노-드 라산티스마-트리니나드-루이즈-피카소.”
보통은 "Pablo Ruiz Picasso"라고 하지요. 피카소의 성격과 기질상 그런 이름을 가질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름은 캐럭터 곧 성격이요 기질이요 품성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께 연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하고 여럿입니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이런 다양한 이름을 소개할까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어떤 한 이름으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총체적으로 알아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참으로 누구인가를 이해함으로 우리는 그를 진실로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9:10에서“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첫째로 생각할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은 본래 “엘”(El) 혹은 “엘로아”(Eloah)의 복수형입니다.
엘이란 말의 뜻은 “강한 자‘ 혹은 ’능력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엘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에 200회가 등장하고 복수형 엘로힘은 2,500회나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에만도 31회나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창1;1에 “태초에 하나님이--”할 때에 하나님이 바로 엘로힘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을 통해 알아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1:1은 바로 엘로힘이 하늘과 땅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로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엘이라 하지 않고 엘로힘이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사역에 함께 동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엘로힘의 어미형 “im(him)"은 일반적으로 세가지 이상의 존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1:26에도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실 때 ‘우리’라는 복수인칭 대명사가 사용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천사를 동원하여 천지 창조를 하셨기 때문에 ‘우리’라고 하셨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성경 어디에도 천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라는 말은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일체적인 사역이 바로 천지 창조의 근원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가능한 해석은 히브리어에서 복수형은 종종 위엄이나 초월적인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매우 일관성있게 창조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결과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롬1:20을 보십시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현대 과학의 발달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과학은 아직도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한 부분을 터치하고 있을 뿐 창조의 대부분의 영역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창조의 신비를 알면 알수록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창조의 주님께 엎드려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찍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와 과학은 동일한 동기에서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창조세계의 신비에 대한 경외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엘로힘 하나님께 그의 피조물인 인생이 드려야 할 최고의 반응이 있다면 바로 찬양과 경배인 것입니다.
계4:10-11에 모든 시대를 대표하는 24장로들이 천국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드리는 고백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계4:11) 왜 경배합니까? 그가 만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찬양합니까? 그가 만물의 창조자 엘로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배우는 엘로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장은 엘로힘 하나님의 창조사역가운데서도 그 절정이 인간의 창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지 창조의 마지막 제6일의 마지막 창조사건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창1:26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여기 하나님이 바로 엘로힘이십니다. 그는 강하고 능력있는 분, 전능자이십니다. 그의 초월하신 능력으로 빚으신 최고의 걸작품이 바로 하나님을 닮은 인간인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인간의 존재보다 더 신비한 존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유명한 크리스챤 의사로서 작고한 폴 브랜드는 필립 얀씨와 함께 쓴 그의 명저 ‘오묘한 육체’에서 그가 의사로서 처음 살아있는 세포를 관찰한 감동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살아있는 세포의 존재야 말로 지상의 최대의 경이중 하나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진정한 생명의 경이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깨어있는 하루 종일 이 세포의 비밀을 경탄하며 말해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내 생애중 누구라도 이 세포의 신비를 설명하는데 성공한다면 나는 공중 광고문을 쓰는 여러 비행기를 전세 내어 하늘 높이 나르며 내 돈이 바닥날 때까지 온 하늘에 감탄 부호를 연달아 그리게 할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9개월에 걸쳐 정교한 방법으로 기능을 나누는 세포들--수십억개의 혈구가 생겨나고 수백만개의 간상체와 원추체가 생겨나는데 단 하나의 수정된 난 세포에서 10조개에 이르는 세포가 생성되고 그리고 마침내 한 아기가 인간이 태어난다.
도대체 그 무엇으로 이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우리가 할 일은 시편기자와 더불어 감격하고 감사할 일 뿐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신묘 막측)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4) 폴 브랜드의 묘사는 주로 우리의 육체에 대한 것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또 얼마나 신비로운 것입니까?
인간의 영혼이야 말로 하나님의 인격과 품성이 깃들어 있는 존재의 지성소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엘로힘 다음으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의 하나가 “그 종류대로”라는 말입니다.
말은 말같이, 소는 소같이, 사자는 사자같이, 원숭이는 원숭이같이 그 종류(종자)대로 지음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에게 오면 달라집니다.
사람은 사람같이가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같이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엘로힘 하나님은 당신의 놀라운 능력으로 당신을 닮은 존재를 지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처럼 인격을 가진 존재, 알고 느끼고 판단할수 있는 존재, 사랑할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요 기대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엘로힘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 드리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기대를 이루어 드리는 인생은 그와 더불어 교제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분과 교제의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분의 기대를, 그분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인생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가장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 교제의 회복을 기대하심이었던 것입니다.
고전1:9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엘로힘의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를 기다릴 뿐 아니라 우리와의 교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인간을 축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이 자신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축복하신 일입니다.
창1:28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엘로힘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축복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이 범죄할 때 하나님의 일시적인 징계와 심판은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3:33의 말씀은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보여주시는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로다” 징계가 본심이 아니고 축복이 본심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이 돌이킬 때마다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이 지난후 엘로힘 하나님의 첫째로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창9:1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축복의 사역이었습니다.
엘로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과 교제할 뿐 아니라 그분의 축복을 누리며 그분의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는 것을 기대하십니다.
최근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의 “긍정의 힘”의 저자이며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휴스턴 레이크 우드 교회의 목사인 조엘 오스틴은 축복을 사역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와 그의 교회의 교우들은 축복을 서약하고 축복을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그의 교회가 축복을 사역화한 이후--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놀라운 축복들을 경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비판은 마무리 건강한 비판까지도 악한 인생의 행동을 다소 늦추거나 교정할 수는 있지만 비판만으로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축복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내가 변하지 않는 이유-남편이 아내를 축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변하지 않는 이유-아내가 남편을 축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변하지 않는 이유-부모가 자녀를 축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변하지 않는 이유-자녀들이 부모를 축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축복의 기도만 하고 축복의 말만 하기로 결심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축복의 통로가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 날 것입니다.
방향만 바꾸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기로 결심해 보십시오. 그것이 회개입니다. 저주의 삶을 청산하고 축복의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비난과 비판의 습관대신 칭찬과 축복의 습관으로 돌아 서십시오.
고집스런 이기심의 항해를 청산하시고 항로를 바꾸어 보십시오. 지금 모습 그대로 가겠다는 것은 마귀가 내 마음에 심어놓은 고집입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배 한척이 칠흑같은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선장의 시야에 불빛이 들어옵니다.
너무 놀라서 긴급 무전을 타전하여 상대방에게 “방향을 동쪽으로 10도만 트십시오”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곧 답신이 돌아왔답니다. “그럴수 없소. 당신이 서쪽으로 10도만 트십시오.” 화가 난 선장은 다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해군 함장이다. 네가 항로를 변경하라” 몇초후에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이등수병이지만 그래도 제가 방향을 바꿀수는 없습니다. 함장님이 먼저 항로를 바꾸셔야 합니다.” 화가 극도로 치민 함장은 최후통첩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배는 전투함이다. 앞으로 전진한다” 그러자 퉁명스런 메시지가 돌아왔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여기는 등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남편, 아내, 자식에게) 회개를 요구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먼저 방향을 바꾸셔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르치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기 시작해 보십시오.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엘로힘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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