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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창세기 설교 모음

창세기 32장 설교 모음 (얍복강가에서의 씨름)

by Jessi J 2023.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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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독한 자의 기도 /32:22-32/ 곽선희 목사

2014-11-26 15:02:23

 

캐더린 마샬(Catherine Marshall)이라고 하는 교수님은 자신의 Beyond Ourselves라고 하는 유명한 저서에서 두 종류의 기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늘 기도하지만 그 성격을 잘 분석해보면 두 종류의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의 기도는 Panic-Prayer 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공포의 기도입니다. 슐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의 그 철학에서도 말합니다마는 종교적 심성은 근본적으로 두려움에서 시작합니다. 두려움. 하나님이 멀리 계시고 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로 인해 그 능력이 너무 무섭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포에 쫓기는 마음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복을 달라고 빌더라도 복 받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지요.

 

자기 행위 그대로는 복을 달라고 할 처지가 못 되는 거예요. 자신의 모든 실수와 허물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움 가운데서 벌벌 떨면서 드리는 공포의 기도입니다.

 

두 번째의 기도는 Relinquishment Prayer 라고 합니다. 이것은 포기하는 기도입니다. 보다 심리학적인 설명입니다마는, 이것은 자신의 요구, 자신의 의지, 심지어는 자신의 소원까지도 다 포기합니다.

 

그 동안에 너무 자기 자신에 집착해서 고집도 많았고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어요. 내 생각은 이런데 하나님은 왜 내 생각을 몰라줄까? 왜 내가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데 나를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왜 내가 원하는 길로 하나님은 나를 돕지 않을까하고 많이 생각해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떤 면에선 기도가 다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왜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압니까? 모릅니까? 그래서 뭘 모르시는 하나님께 알려드리려고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래야 되는데, 저래야 되는데…… , 그렇지 않습니까? 심리적으로 잘 분석하면 다 원망조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나 이제는 이것을 포기하는 거예요. 내가 잘못됐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내 욕심, 내 의지 깨끗하게 포기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당신 맘대로 하십시오. 그편이 낫겠습니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이후로는 난 아무 말도 안할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렇게 포기하는 그런 기도입니다.

 

여러분, 미국을 여행하시게 되면 혹 텔레비전에서 이분의 얼굴을 TV에서 보시게 될 것입니다.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 Speals)라고 하는 흑인 여성 말입니다. 그녀는 참으로 불행한 과거를 가진 여자입니다.

 

그녀는 사생아였고, 가난했으며, 몸도 뚱뚱했고 미혼모였습니다. 어쩌다가 결혼하지도 않고 애까지 낳았습니다. , 이정도 되면 참 불행한 여자죠.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가 사용하는 자신의 전용용어입니다. "And So What?" "그러니 어쩌란 말이야? 내가 이런 처지다. 이런 일이 있다. So What?, 그러니 내가 어쩌란 말인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이러한 특별한 자기철학을 가지고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립니다.

 

헤리스 인트렉티브(Harris Interactive)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미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방송인으로 그녀는 3년 연속 1위를 했어요. 또 수입도 방송인 중에 최고입니다. 그런 유명한 분입니다. 오프라 윈프리. 타임지는 그녀가 20세기의 위대한 인물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 그러면 그녀의 생활철학을 보십시다. 삶의 원칙은 이렇습니다. 첫째, '상처를 지혜로 바꾸라.' 상처를 입었다면 좌절하지 말고, 그것을 지혜로 바꾸라는 것, 이것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상처받으면 남을 원망하다 맙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상처는 유익한 것입니다. ? 지혜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그녀 개인으로도 엄청난 상처를 입은 생애입니다마는 모든 것을 지혜로 바꾸는 그런 용기가 있었습니다. 실수한 것을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영 구제 불능인 것입니다. 상처를 지혜로 바꾸라.

 

또 그녀는 말합니다. '매일의 경험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라.' 경험을 중요하게 여겨, 그것에서 교훈을 얻고, 철학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사소한 일들에서 듣고, 보고, 경험하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마치 여행하는 사람이 여행하면서 자기가 보고 듣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내가 가야할 길은 따로 있어요. 내 눈앞에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겠죠.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말해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들이에요." 그런고로 사소한 일까지도 소중하게 여기며, 버릴 것은 없고 버려서도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 한 가지는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는 습관을 키워라.'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감사하는 습관을 키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녁마다 구체적으로 오늘은 이런, 이런 일을 감사하다고 기록 하면서 구체적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에게 칭찬을 하시더라도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칭찬이란 구체적으로 하면 칭찬이고 추상적으로 하면 아첨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도 구체적 이어야지 추상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구체적으로 감사해야지요. 이것을 감사합니다. 저것을 감사합니다하고 말입니다.

 

술 많이 마시는 그 남편하고 살면서 아내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그래 뭘 감사한데?" 그래서 대답하기를 "매일같이 술 먹으면서도 건강하니 감사, 맑은 정신으로 집에 돌아오는 일이 없는데 제집 찾아오니 감사, 저 정신 가지고 어떻게 살겠나 했는데도 제대로 돈버니 감사한다"

 

그렇게 줄줄이 감사하다고 하니까 남편이 "고만해라. 예수 믿어줄게" 그러더랍니다. 감사를 구체적으로 해야지 막연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감사에 대해 구체화해 나가는 습관을 키우라는 겁니다. 그것이 미래를 향한 창조적 생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꿀 수 있는 꿈 중에 가장 큰 꿈을 꾸라.' 자신이 꿈꾸는 만큼 미래의 자신이 결정될 테니까 큰 꿈을 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지향해서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과 인터뷰를 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모두 이 네 가지 철학을 따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아픔을 가지고 얘기하더라도 "Don't Give up! 절대로 그건 버릴 일이 아니다. 당신의 경험은 소중한 것이다" 그렇게 나옵니다. 오프라의 철학을 우리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의 성경말씀에 보면 야곱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에 둘째 아들입니다. 엄청난 꿈을 가진 사람이요, 욕망이 있고 또 지혜로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동생으로 태어나서 형의 축복을 받겠다고 몸부림친 사람이고 그것을 받아낸 사람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을 대표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축복을 받으려고 근면했고, 성실하기도 했습니다. 온 생애를 통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79절에 보면 130세가 되었을 때 바로왕 앞에 서서 그는 일생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냈고, 후회되는 것이 많고, 너무나 상처가 많은 그런 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130세가 되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야곱에게 특별한 계기가 왔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홀로 남아서 기도합니다. '홀로'라는 말이 그렇게 인상 깊게 들려옵니다. 고독했습니다. 실존적으로 고독했습니다. 이 고독을 알기까지 많은 상처를 입었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실존적 고독을 아는 그 시간까지 말입니다.

 

UCLA의 라저 굴트(Roger Gould)라고 하는 교수님이 소위 말하는 성인심리발달과정에 대해서 아주 권위적인 책을 많이 썼는데, 성인 즉 16세로부터 60세를 넘어서까지 나이 연령에 따른 심리발달단계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것을 이 시간에 다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16세부터 60세가 넘어서까지 성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분의 말대로 성인은 7단계를 거치는데 첫째가 도망시기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도 도망가고, 학교에서도 도망가고, 도망하려고 몸부림치는 시기입니다. 누구든지 도망하려는 마음이 다 있습니다. 도망갔다가 불량아이가 되고 못 도망가면 사람이 되고 그런 거지. 다음이 탐색시기, 그리고 투쟁시기, 회의시기, 불안시기, 회고시기, 마지막에 성숙기……. Period of Mellowing!

 

성숙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시간에는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하나 깨닫습니다. 나는 혼자다! 나는 혼자다! 여러분, 나는 혼자라는 말을 '아 망가졌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은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며 죽어가는 사람은 인생을 아직 못 배운 사람이입니다. 이제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성숙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모든 것을 소화합니다. 모든 것을 아름답고 의미 있게 수용하게 됩니다.

 

야곱은 집념의 사나이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삼촌댁에 있는 동안에 하란에서 20년 동안을 살면서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모든 사람이 감동할 만큼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가정을 이루었고 부자도 됐고 열한아들의 아버지도 되고 대가족을 이루게 됩니다.

 

, 그리고 - 하긴 아내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겐 얘기가 안 됩니다만 - 이 사람 아내가 넷이예요. 아주 넉넉하게 됐단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말씀대로 그는 홀로 남았습니다. No Use! 아무 소용없었어요. 그 재산도 그 많은 자녀들도 그 많은 아내도 아무 소용없었어요. 위로가 없는 시간입니다. 홀로 남아서 기도하게 됩니다.

 

형님이 자기를 만나러 온다는데 400명을 거느리고 온답니다.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불확실합니다. 살리려고 오는지 죽이려고 오는지 분명한 것은 20년 전에 자기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불안합니다.

 

불화로 인해 고민합니다. 화목하지 못했기에 고민합니다. 화목이 이렇게 중요한 줄을 몰랐습니다. 화목 없이도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권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올시다. 불화하고서는 행복할 수는 없었어요.

 

불화한 것에 대한 고민이 마음에 깊이 압박감을 줍니다. 또 한 가지는 죄의식입니다.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스스로 항변해왔습니다. 아버지는 속였지만 형님은 속인일이 없다고. ? 죽 한 그릇 주고 거래했잖아요.

 

Deal Out. 내가 정당하게 거래해서 죽을 주고 장자명분을 산건데 말입니다. 스스로 항변해봅니다마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아녜요. 양심은 말합니다. '이놈아, 거짓말하지 말아. 그게 될 수 있는 얘기냐?' 내면의 고민이 있어요. 내면의 세계에 해결하지 못하는,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난할 때 가장 고독하게 됩니다. 배고파서 배가 아픈 게 아닙니다. 배고프면 슬퍼집니다. 굶어보셨습니까? 정말로 고독함 중에 제일 큰 원인입니다. 또 하나는 병입니다. 병들 때 고독합니다. 자식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돈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 소용없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그리고 사회적인 소외로 고독의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야곱은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서 방법을 다했습니다. 성경에 자세히 보면, 형님에게 먼저 예물을 보냈습니다. 혹이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해서 가족을 분산시키기도 했습니다. 형 앞에 무릎을 꿇어 자신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주인이요 자신은 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굴복하기도 했고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했다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애를 다 써봤습니다.

 

그러나 고독합니다. 이제 홀로 남아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였습니다. 간절히 목숨을 걸고 기도한 결과로 이름이 바뀝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야곱은 간사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마라. 이스라엘이다." '이쉬'는 이겼다는 뜻이고, ''은 하나님을 지칭하므로 '하나님을 이겼다.' 네가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 엄청난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성경을 자세히 보면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마라. 그리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라."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계속해서 읽어 나가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할 때 혹은 야곱에게 말할 때도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 하나님, 야곱이란 이름은 계속 따라다닙니다. 그만큼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너는 옛사람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다. 오늘까지 살아온 생은 야곱이지만, 오늘 이후의 생은 내가 너를 이스라엘로 부른다. 너는 이스라엘로 살아라. 이스라엘로 살아라. 새 이름으로! 새 사람으로! 새 소망으로!"

 

야곱의 기도는 실존적인 기도입니다. 모든 것, 모든 수단 다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던 순간과도 같은 그런 맥락의 기도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살라하십니다. 새해가 새해되는 것은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사는 그런 생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저희들을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진 줄 알았으나, 가진 것도 없고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했으나 된 것도 없습니다. 나 홀로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 그것만이 나의 생의 의무임을 알게 해주시옵소서. 주의 음성을 바로 듣고 주의 음성에 응답하며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사는 오늘과 내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과 씨름하다 /32:1-32/ 김형익 목사

2021-05-04 09:41:52

 

오늘 본문은 야곱의 생애에서 28장의 벧엘 사건과 함께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였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성경 이야기를 들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주 인상적으로 뇌리에 박혀있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그 천사와 씨름했다는 것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동시에 많은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호기심어린 질문들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과 같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 빚어가시는 방법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1. 순종 뒤에 따라오는 시험(1~23)

야곱은 하나님께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31:3).

 

A.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다(1~2).

이제 길르앗 산을 지나 하나님께서 조부 아브라함에게 주신 가나안 지경으로 들어가게 되자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야곱을 환영해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야곱이 만나게 될 위험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겠다고 하는 하나의 상징적 약속이었습니다. 야곱이 여기서 만난 천사들은 한 둘이 아니라 군대라고 표현해야 할만큼 많은 천사들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군대가 과거에 만났던 위험?라반?으로부터 야곱을 지켜주었고, 앞으로 야곱이 만나게 될 모든 위험 특별히 에서로부터 야곱을 지켜줄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짧은 이 두 구절(1~2)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상황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확신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하나임과 같은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B. 시험: 모든 상황이 겉으로는 마치 하나님이 나의 반대편에 서신 것처럼 보인다(3~8).

그러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아가면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여 살고자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고 고난이 심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아니 더 많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 야곱은 이제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먼저 에서에게 사신들을 보냅니다. 야곱에게 중요한 것은 에서가 과연 자기에 대한 감정을 풀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이 일에 대하여 아무런 전갈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신을 보내는 야곱의 마음 속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일이년이 아니라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는 장자권으로서의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집착은 이미 많이 사라졌고,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도우시고 축복하시는 분이라는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것을 실제로 경험하였습니다. 야곱은 사신들에게 주는 메시지에 자신을 에서의 종이라고 칭하고 에서를 주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신들이 야곱에게 가져온 소식은 정말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메시지를 그들은 가지고 왔습니다. 에서는 400명을 데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에서가 왜 이 400명을 데리고 왔는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합니다. 야곱을 환영하고 주변민족들로부터 호위해주기 위해서라고 하기도하고(33:12), 야곱 스스로가 생각했듯이 야곱을 대적하기 위한 군대로 데리고 오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떻든 야곱은 이 소식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고 답답해했습니다(7). 즉각적으로 야곱이 취한 조치는 자기의 모든 혈육과 육축과 재산을 두 떼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에서가 한 떼를 치면 한 떼라고 살아남아야겠다는 심사였습니다.

 

야곱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듣고 순종하여 귀향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라반의 추적을 당하여 혼이 났었지만 그 위기는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앞에는 400명의 군대를 거느린 에서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순종함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시간의 연단을 통하여 견고한 믿음의 순종이 되게 하십니다.

 

순종하면 시험이 온다는 사실을 예상하셔야 합니다. 성도들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순종 이후에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종 이후에 펼쳐지는 시험의 상황은 마치 외면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의 반대편에 서계신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반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주시는 시험이었으며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시험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C. 야곱의 첫번째 기도(9~12)

야곱은 여기서 비로소 처음으로 기록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28장에서 야곱이 기도를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실 수 있으나 거기서 야곱이 한 것은 사실 서원이었지, 기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기도를 합니다. 저는 야곱이 이전부터 이미 중생한 신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오면서 본격적으로, 제대로 기도하는 삶을 살아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삶은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헤세드였을 뿐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무력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날 기도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무력함의 이유입니다. 마귀가 그런 신자를 건드리기 위해서 굳이 애를 써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이 당면한 두려움의 상황은 야곱으로 하여금 드디어 기도를 하게 합니다. 사람은 두려움 앞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도가 다 좌절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이제까지 정말 깊게 제대로 기도를 해보지 않았던 야곱이 이제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감사한 일은 하나님께서 기도하지 않는 우리를 기도하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원리들이 있습니다.

 

i. 언약의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한다(9).

야곱은 하나님을 부르는데,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야곱이 언약의 관계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을 가르쳐주실 때, 부모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방식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한 가지 뚜렷한 원칙은 신앙이 전수되고 가르쳐지는 주된 수단과 환경은 목사와 교회가 아니라 부모와 가정이란 사실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배워지는 것입니다. “아버지(어머니), 저는 아직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저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어머니)가 섬기고 사랑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버지(어머니)를 통해서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정상적이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 하나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께 그는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어떤 분께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ii. 자신의 합당치 않음을 인정한다(10).

자신의 합당치 않음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의 합당한 자세입니다. 기도자의 합당한 자격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자기가 조금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여기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는 성경에서 언제나 짝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묘사입니다.

 

은총은 바로 헤세드입니다. 진리는 에메트라고 하는 히브리말인데, 참된 진리를 의미할 뿐 아니라 신실함(faithfulness)를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는 무궁한 은혜를 야곱에게 베푸셨고 신실하셨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지난 20년의 삶을 통해서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왔던 야곱이 이제 크게 두 떼나 되는 많은 가족 그리고 종들과 가축들, 재산들을 가진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헤세드임을 그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지금 하나님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와 진리에 조금도 합당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헤세드와 에메트를 드리지 못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스럽지도 못했고, 신실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리의 기도의 자세를 생각하게 합니다(18:13).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니까?

 

iii.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9,12).

야곱이 하나님께 자신을 형의 손에서 건져주시기를 간구하는 이 기도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에 철저하게 근거하고 있고 그 약속의 말씀에 자신을 던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고향으로 가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하는 것이 9절입니다.

 

그는 밧단아람에서 주신 명령과 벧엘에서 주신 약속을 함께 상기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또 기도를 마치면서 12절에서 벧엘에서 말씀하신 약속을 다시 한 번 주장합니다. 형 에서가 자기와 자기 처자를 치게 되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는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 약속을 다시 주장합니다.

 

D. 야곱의 인간적 생각: 기도와 삶이 따로 갈 때(13~23)

아마 야곱은 사신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적잖은 시간 기도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마도 밤을 거기서 보내면서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13).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하고 난 후에, 야곱의 머릿속을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생각들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야곱적인 생각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도 얼마든지 경험되는 현실입니다. 열심히 기도를 했고 마음이 편안해져서 눈을 뜨고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머리가 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삶이 얼마든지 따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얼마든지 이렇게 따로 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영적 교만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 은혜를 구하였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했습니다. 뭔가를 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날이 밝자, 야곱은 우선 자기의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해서 예물을 골라냅니다.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입니다(20). 야곱은 오직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습니다.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려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물의 규모와 순서를 매우 심리적으로 배열하였습니다.

 

1열에는 암염소 200, 2열에는 수염소 20, 3열 암양 200, 4열 수양 20, 5열 젖나는 약대 30과 그 새 끼, 6열 암소 40, 7열 황소 10, 8열 암나귀 20과 그 새 끼 나귀 10이었다. 이런 예물의 긴 행렬을 보내면서 각 떼를 맡은 종들에게는 에서에게 할 말을 들려주었다. ‘이것은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입니다’(18).

 

그는 이렇게 인간적인 계획 속에 들어감으로써 실제로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루 종일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을 골라서 먼저 보내고 나서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 그리고 열한 아들로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합니다. ‘밤에 일어났다는 표현은 야곱이 느끼던 두려운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야곱은 모든 것을 보냈습니다. 가족들, 소유들. 이제 그는 혼자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걸어보지 않은 여정을 떠났던 때와 같이 그는 이제 혼자입니다.

 

2. 싸움을 거시는 하나님(24~32)

야곱의 기도와 삶이 달랐다는 것은 이야기가 아직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아직도 하나님은 야곱 안에서 하실 일이 많이 남아있으신 것입니다.

 

A. 준비: ‘홀로 남았더니’(24)

때는 여전히 밤입니다(22).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또는 이삭에게는 거짓된 에서로서 남아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홀로 남아있는 그는 그냥 야곱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시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심이 많은 만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데에도 너무나 많은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족관계나 가까운 인간관계 혹은 우리의 소유 등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시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은 홀로 남아있는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분명하게 만나시려고 하실 때에는 우리를 외롭게 만드십니다. 모든 관계들로부터, 모든 소유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시고 우리를 혼자 있게 만드십니다. 그런 모든 것들과 결부되어 있는 나가 아니라 그냥 홀로 있는 나 자신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준비입니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수식들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놓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 고독은 영적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였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삶의 모습이 지나칠 정도로 고독한 시간과 장소를 가지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독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견딜 수 없이 고독한데도 도무지 고독한 시간과 장소를 가지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력한 그리스도인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도움이나 보호나 재산이나 혈육이나 어떤 것으로부터도 떨어져서 홀로 남았습니다.

 

B. 밤에 찾아온 씨름군: 야곱이 씨름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씨름하신다.

야곱은 지금 모든 처자들 그리고 모든 소유를 보내고 홀로 있습니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그 때 갑자기 누군가 힘센 자가 야곱을 강하게 붙잡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순간에 야곱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에서가 보낸 암살자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하는 의문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야곱을 심하게 붙잡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압니다(28,30). 그분은 성육신하시기 전의 예수님이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천사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언약의 사자이신 예수님을 말씀하는 표현입니다(12:3~4).

 

12:3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12:4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주목할 것이 있는데, 씨름을 거는 자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씨름군으로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씨름을 거셨고 그와 씨름을 하셨습니다.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외롭고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이런 싸움을 걸어오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야곱을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리까지 데려가시기 위해서 씨름군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설교의 제목은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다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시다라고 해야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 자기 힘이 완전히 깨어지기 까지는 절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잡지 않는다.

씨름은 3분 정도 하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밤중에 시작된 이 씨름이 다 끝났을 때는 해가돋았다고 했고(31) ‘날이 새도록씨름하였다고 했으므로(24) 적어도 동트기 전의 새벽녁까지는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야곱이 이 낯선 씨름군과 씨름을 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영적인 기도의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육체적인 씨름을 해야했습니다. 밤에 찾아온 씨름군은 강했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모든 힘을 다 해서 이 씨름을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 씨름군은 전능한 능력을 다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인간의 모든 능력의 한계 속에 계셨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기기 힘들다고 느끼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그러자 환도뼈가 빠지면서 순간 야곱은 씨름을 하는 모든 힘을 잃고 맙니다. 야곱의 환도뼈를 친 것은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였습니다. 야곱은 처음에 자기 방식대로 자기 힘으로 씨름을 했습니다.

 

하지만 환도뼈가 위골된 후에는 단순히 축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무력하고 절름발이가 되어서 그는 절망적으로 그분을 붙잡았습니다. 이것이 더 이상 씨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는 야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육신의 힘으로 씨름하지 않고 그냥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이 완전히 깨어져서 자기 힘에 거는 모든 희망을 다 접기 까지는 절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잡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무력함과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힘의 근원이라고 믿었던 환도뼈가 위골될 때까지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잡고 그 축복을 간절히 구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자기 힘으로 씨름을 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는 우리의 환도뼈를 치십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별볼 일 없는 존재인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알게 하시고 더 이상 내 힘으로 하는 씨름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을 놓지 않고 그 은혜와 축복을 간절히 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뜻에 굴복하게 하사 당신의 형상을 우리 속에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내 힘으로, 이를 악물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기도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야곱이 환도뼈가 위골되기 전까지 했던 씨름입니다.

 

그런 기도, 그런 신앙은 정말 꺾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힘과 자기 열심과 자기에게 있는 특별한 무엇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이것을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힘으로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달라붙어서 그 은혜와 축복을 간절히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야곱이 그랬듯이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그리고 신앙을, 기도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우고 있습니다. 목회는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제게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은 결코 머리로 알아서 되는 지식이 아닙니다. 삶으로 배우는 지식입니다. 고통을 통해서만 배우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로 인하여 우리의 환도뼈가 위골될 때에만 배울 수 있는 진리입니다.

 

D. 절뚝거리는 승리자: 야곱이 이스라엘로.

환도뼈를 친 씨름군은 날이 새려 하니나를 놓으라고 말하지만 야곱은 놓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제 자기를 이긴 씨름군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에 날이 새려 하니나를 가게 하라는 말씀에서 더욱 분명하게 그 씨름군의 정체는 드러나게 됩니다. 야곱은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내가 놓아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제는 씨름이 아니라 그를 끝까지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거의 매달려 있는 형국이라고 이해를 하면 될 것입니다. 그 씨름군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것은 야곱의 정체성, 지금까지 야곱이 짊어지고 살아왔던 야곱의 문제의 핵심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자기의 정체성을 고백해야 합니다. 야곱은 이제 말합니다.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했고 자기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될 때 까지는 복을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까지는 무려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는 사깃군이요, 거짓말쟁이요, 남의 발뒷꿈치를 잡는 자였습니다. 그는 형을 속였고 아버지를 속인 자입니다.

 

씨름군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줍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과 또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명령하신다또는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많은 인간들과 경쟁을 해왔고 또 싸워서 이겨왔습니다. 형 에서를 속여서 장자권을 빼앗았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희대의 속이는 자 라반도 이겼습니다.

 

그런데 다 이겼는데 정작 이 순간에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이기고 얻은 것은 20년의 객지에서의 고생이었습니다. 라반을 이기고 얻은 것이 가족들과 가축들과 재산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것은 자기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무엇이 이기는 것이고, 무엇이 지는 것인지를 배웁니다.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로 얻는 승리는 절뚝거리는 승리였습니다. 자연적 힘으로가 아니라 영적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삶을 주신 승리였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말씀한 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는 말씀과 같습니다(고후 12:10). 야곱은 육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기도로 이 씨름을 이깁니다.

 

야곱이 자기 힘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인정할 때 야곱이 이기도록 져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믿음의 인내를 인정해주셨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힘이 다했을 때도 이 씨름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붙잡았습니다. 결국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하는 모습입니다.

 

3. 생각

이제 우리는 몇 가지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을 정리하고 생각하고자 합니다.

 

A. 기도하지 않고 사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무력함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지 않는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기 전에도 거듭난 신자였을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기도하는 성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의 힘으로 성취를 하면서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의 인생에 면면히 드러나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씨름을 하기 전의 야곱의 삶은 기도하지 않고 사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과 그 무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을까요? 그런 상태에서 무력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씨름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를 맛보기 까지는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삶과는 결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야곱을 이 씨름의 현장으로 이끌어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밤에 야곱을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키사 홀로 남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그냥 두시지 않으시고 야곱을 얍복나루로 인도하여 내셨듯이 우리를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또 우리는 그것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B. 나는 자기 힘으로 싸우는가, 기도로 싸우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통하여 물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힘으로 씨름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기도로 씨름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자기 힘의 근원이라고 믿고 생각하는 무언가가 깨어지는 경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이미 그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붙잡으셨습니까? 혹 그런 자리에 지금 계십니까? 정말 슬픈 것은 그런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힘을 내려 놓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열심으로 기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조금도 기도하지 않고 있는 셈이며, 조금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멋진 승리자, 조금도 상처가 없는 승리자가 아니라, 절뚝거리는 승리자가 되는 것이 성도들인 우리의 영광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모든 삶의 소망이 끊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태를 몸소 겪으시고 절뚝거리는 승리자, 상처입은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완전하게 굴복시키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잔인한 자비는 야곱에게가 아니고, 우리들에게도 아니며 바로 하나님의 독생성자이신 그리스도께 온전하게 다 부어졌던 것입니다. 절뚝거리는 승리자인 성도는 어떤 모습일까요? 절뚝거리는 승리자인 목사는 어떤 모습입니까? 주님께 묻는 저의 질문입니다. 상처투성이의 승리자는 사람의 관점으로는 진 것같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긴 자입니다.

 

C. 지금 나의 씨름은 밤에 찾아온 씨름군과의 씨름이 아닌가?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처해계신 어려움은 그것이 고난의 상황이든, 두려움의 상황이든, 혹시 그 밤에 야곱을 찾아가셨던 그 씨름군과 씨름을 하는 상황은 아닐까? 이런 저런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찾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입니다. 야곱은 처음에 이 씨름군이 누구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밤에 찾아온 씨름군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름군은 날이 밝기 전에 물러갔습니다. 이 씨름은 처음에는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 씨름군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혹시 자기 힘으로 열심으로 꺽이지 않으려고 지지 않으려고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지 못하고 그 축복에 매달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D.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씨름군은 떠나고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을 보고도 자기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하면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다고 성경기자는 매우 의미있는 세밀한 묘사를 해주고 있습니다. 절뚝거리는 승리자인 야곱은 이제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씨름이 여러분의 씨름이 되시길 바라고, 여러분이 아무 상처없는 승리자가 아니라 절뚝거리는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서 비로소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야곱을 이 자리까지 데리고 왔듯이 오늘 우리의 인생도 그 자리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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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2-29/ 항복하면 이기고 다투면 진다/ 조용기 목사

2014-09-16 19:16:07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항복하면 이기고 다투면 진다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차세계대전때 독일과 일본은 미국 중심의 연합군에게 지고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 두 나라는 똑같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세계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대단히 궁핍한 나라에서 대통령과 각료들이 모여 나라 살림을 부요하게 하는 방법을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장관이 그 해결법으로 독일과 일본처럼 연합군에 대항하여 전쟁을 한 후에 항복하자는 안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연합군의 도움으로 경제적 번영을 독일이나 일본처럼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대하여 대다수가 반대했습니다. 그 이유인즉 연합군과 전쟁을 했다가 이기는 날이면 그 뒤에 책임을 어떻게 지겠냐는 것입니다. 지면 좋지만 이기는 날이면 낭패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웃고 지나갈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하나님과 다툼이 일어났을때 속히 항복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의 삶을 살지만 하나님과 다투되 이기어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하면 그 이후의 삶은 낭패에 낭패를 거듭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야곱의 얍복강 나루터 씨름

 

우리는 첫째로, 야곱의 얍복강 나루터 씨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0년 전에 형을 속이고 형과 다투어서 형의 얼굴을 피하여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친 야곱이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처자를 거느리고 많은 짐승떼와 함께 형이 사는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된것입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형에게 사자를 보내어서 자기가 돌아온다고 연락을 하니까 형이 절치부심 20년 동안 복수할날을 기다리다가 동생이 온다는 말을 듣고 40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생을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이 말을 들을 야곱은 간담이 서늘해 졌습니다.

 

창자가 녹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처자들과 짐승떼만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는 이 강 이편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형이 처자와 종들을 치면 도망치고 그렇지 않으면 건너가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처자들은 죽더라도 자기는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211절에 보면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라고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자기 혼자 얍복 나루터 이편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정황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어둠속에서 한 장정이 나타나서 야곱하고 씨름이 벌어졌습니다. 추측한데 그 장정은 가족들을 다 강건너 보내 놓고 너 혼자 있느냐! 너도 가족과 함께 그곳으로 건너가라.” 그렇게 강권할 야곱은 그렇지 않겠다고 저항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창세기 3224절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아무 이유없이 씨름할 턱이 없습니다. 그 장정은 야곱보고 이 약삭빠른 놈아! 처자는 죽어도 너는 살겠다는 것인가? 함께 건너가라!” 그러나 야곱은 처자는 죽더라도 내가 살아야지. 나는 못건너 갑니다.” 그러면서 다툰 것 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장정이 강요를 하고 끌어 내려고 해도 야곱은 버팁니다. 마치 외양간에서 끌려 나오지 않는 소를 끌고 나오려면 소는 뒷걸음질 치고 주인은 땡기고 하는 그 모습인 것입니다. 넘어지고 매어치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그러면서도 야곱은 기어코 버티고 그는 항복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맹렬히 밤새 씨름했지만 야곱이 항복지 않으므로 새벽 미명에 그 장정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 절름발이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냥은 도저히 항복을 안하니까. 항복을 안하면 하나님이 도와 주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환도뼈를 쳐서라도 그를 깨어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3226절에 보면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은 환도뼈가 어그러져서 절름발이가 되었으니 이제는 축복을 받지 않고 그 사람을 보내었다가는 자기는 절망입니다. 도망치는 능력을 잃은 것을 깨달은 야곱은 항복하고 복을 구하여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이라는 말은 사기꾼이라는 말이고 이스라엘이란 말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자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3228절로 29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하고 밤새도록 씨름하신 분이 다른분이 아닌 하나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고 말했기 때문에 밤새도록 겨룬 분이 다른 분 아닌 성육신 하기전에 계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밤새도록 씨름해서 결국은 아침에 환도뼈가 어그러져서 항복해서 패했을때 그 이름이 사기꾼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자로 변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과 씨름하여 야곱이 졌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이긴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기면 진자가 되고 하나님과 씨름해서 지면 하나님이 이긴자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씨름해서 자기 고집대로 이기면 하나님이 도와 주실수 없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 삶에서 진자가 되고 하나님과 씨름해서 항복하고 패배하면 하나님이 붙들어 도와 주시므로 이 세상살이에 이긴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패하므로 이긴자가 된것입니다.

 

호세아 123절로 5절에 보면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항복한 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이겼으면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지고 항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자로 명명해 주시고 그와 같이한 것입니다.

 

이사야 4114절로 16절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지렁이 같은 야곱입니다. 하나님 앞에 졌습니다. 이제는 두손 들었습니다. 아무런 발버둥을 칠 수 없는 지렁이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뭐라고 말합니까?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야웨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것이라지렁이가 되면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살아서 바둥거리면 하나님이 도와 줄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를 삼아서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며 작은 산들로 겨같게 할것입니다. 지렁이가 된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는 이가 날카로운 타작기계가 되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크고 적은 산들을 부서 뜨려서 성령의 능력으로 바람에 날릴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깨어져서 항복하고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그를 죽이려고 온 형의 마음도 변화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형이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올때는 분도막심하여 한칼에 야곱을 날려 버릴려고 작정하고 왔습니다만 야곱은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에서의 마음을 하나님이 변화시키셨습니다.

 

창세기 334절에 보면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죽이려고 온 사람이 동생을 얼싸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울었습니다. 그 마음에 크나큰 감동과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죽이러 온 에서가 오히려 야곱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앞잡이가 되겠다고 자원하게 된 것입니다. 죽이려고 불같이 달려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로 일시에 야곱을 오히려 호위하는 호위대가 된것입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하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한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지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게 해주시고 하나님께 이기면 우리는 집니다. 그런데 야곱처럼 좀처럼 우리가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너무나 씨름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면 안하겠다고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주일인데 교회가라.” “안가겠습니다.”

 

씨름을 합니다. “십일조 내라!” “못내요.” 씨름을 합니다. “전도하라!” “부끄러워 할 수가 없어요. 안해요.” 우리는 너무나 하나님과 씨름을 많이 합니다. 야곱은 환도뼈를 쳐서 어그러져서 절름발이가 되어 절망에 처하니까 항복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을때 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골에는 소가 재산 밑천이 아닙니까? 집에 불이나서 타게 되면 먼저 소부터 끌어내야 됩니다. 소가 있으면 그 집은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소를 잃어 버리면 일어나지 못합니다.

 

불이 활활 붙는데 마굿간에 들어가서 소를 끌고 아무리 끌어 내려도 소는 안나옵니다. 불이 활활 타니까 마굿간에서 안나오려고 합니다. 이럴땐 소 여물통을 뒤엎어야 됩니다. 소가 보는 앞에서 자기가 먹는 밥통인 여물통을 뒤엎어 버리면 소는 순순히 끌려 나옵니다. 소가 생각하기에 여물통이 뒤엎어지는 것 보니 이건 내집이 아니구나. 이제 여기는 끝이났다.”

 

사람도 소처럼 아무리 하나님이 따라오라 해도 안따라올때 사람의 여물통을 뒤엎어 버리면 나옵니다. 제가 45년 목회하면서 보니까 병으로 때려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사업이 망하면 손들고 나옵니다. 밥통이 엎어지면... “~ 이것 더 이상 살수 없구나.” 손들고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매를 맞아야 항복을 하게 되니 이것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매를 맞기전에 항복하고 나오면 승리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크고 적은일에 하나님과 다투고 씨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오늘 둘째 생각하고 싶은 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보십시오.

 

예수님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난 다음에 그는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 마음속에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씨름한 것처럼 자기와 씨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으로 오신 이상 인간적인 삶의 애착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려고 할때에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세상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생각하고 심히 번뇌했습니다.

 

마태복음 2638절에 보면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들어 가실 때 제자들로 말씀하기를 내 마음이 심히 번뇌하여 죽게 되었다. 마음이 죽을정도로 번뇌를 한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상죄를 다 담당하고 몸찢고 죽을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주님이 그것을 면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에서 최후로 몸부림 친 것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반발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려고 할때 자기 속에 형언할수 없는 번뇌가 다가온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싸움은 아닙니다.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는 기도의 몸부림을 쳤습니다. 기도의 씨름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39절로 45절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자기와 씨름했습니다.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쓰디쓴 고난을 옮겨 주옵소서. 두 번째도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러나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세 번째 또한 주님께서 그렇게 기도해서 완전히 자기를 쳐서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고 복종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번뇌를 가지고 몸부림을 치신 것을 알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2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땀이 피방울이 되도록 주님께서는 몸부림치고 기도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고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기 전에 자기의 마음과 이 무시무시한 씨름을 하신 것을 볼때에 우리에게 그런 씨름이 없다고 볼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한번 하나님께 항복했으면 다시 뒤돌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체포 되어서 가야바의 뜰에서 또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수없는 모욕과 곤욕을 당하실때도 예수님은 저항하시지 아니하시고 아무말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이상히 여겼습니다.

 

내가 너를 죽이고 살릴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어찌하여 내게 변명도 안하고 대답도 안하는가?” 예수님은 장엄하게 침묵을 지켰습니다. 왜냐, 이미 십자가에 죽기로 각오하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맡긴 이상은 가타부타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관하게 침묵을 지키고 그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하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이사야 53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653절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예수님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잠잠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기 때문에 잠잠한 것입니다. 로마군단의 한 영은 최대 6천명의 보병대에 기병대까지 합친 규모로는 12억이면 7만이 넘는 천군을 동원하시고도 남으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구하면 7만명 이상 되는 하늘의 군대를 하나님이 동원해서 나를 건진다.”는 것입니다. 천사 7만명을 동원하면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 당신을 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항복한 예수 그리스도,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 그리스도를 능력으로 부활시켜서 영원히 이기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면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전히 하나님께 항복하고 당신 자신을 내어 맡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승리자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530절로 31절에 보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그는 하나님께 짐으로 구주와 임금으로 이기게 된것입니다. 그는 죄와 세상과 마귀의 병과 저주와 죽음을 영원히 이길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 항복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기고 하나님을 이기면 우리는 영원히 패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씨름과 승리 비결

 

셋째로, 왜 우리는 하나님과 늘 씨름을 합니까?

 

우리의 삶속에 씨름이 많은 것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어찌하든지 피해보려고 자꾸 꾀를 부리기 때문에 우리가 야곱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말은 사기꾼, 꾀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꾀돌이가 되어 가지고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안지키고 피하고도 한번 믿어 보겠다 그렇게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되 축복은 계명을 지켜야 얻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축복은 계명을 지켜야 받는 것입니다.

 

신명기 281절로 6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구원은 예수 믿으면 남녀, 노유, 빈부, 귀천없이 구원받지만 축복은 계명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록 팰러 1세는 평생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쓴 미국의 거부였습니다. 역사적인 거부였던 록 팰러는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첫 번째 여인에게 버림을 받은 남자였습니다. 가난하고 장래성이 없어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결혼한 부인이 버리고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세계적으로 세가지 기적을 일으켰는데 가장 가난했던 자가 가장 부유하고 되고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남에게 나누어 주고 건강하고 장수했다는 것입니다.

 

록 팰러가 세가지 기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주일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다는 점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나이라고 버림받았지만 하나님께 충성은 열심이었습니다. 주일날 한번도 예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춤추는 곳이나 유흥장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고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고 매일 감사기도를 한번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성경을 매일같이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늙어서 눈이 어두워졌을때는 성경을 읽어줄 사람을 채용해서 귀로 성경을 들으면서 말씀을 날마다 대면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믿음으로 훌륭하게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그는 순간 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애써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고 미국 역사상 손꼽는 가장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는 다는 것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계명을 안지키려고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이혼합니다. 왜 이혼합니까? 성격차이로 이혼한다고 그럽니다.

 

남편과 아내가 성격이 맞지 않으면 자꾸 충돌하기 때문에 같이 살지 못하고 이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성격차이가 생겨서 자꾸 충돌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성격이요, 품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에 복종하고 따라가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지 하나님의 품성을 거역하고 내뜻대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과 성격차이로 부딪혀서 결국에는 하나님과 다투게 돼지요. 우리는 항상 계명과 다투고 씨름하는 나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로마서 722절로 24절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것 여러분의 고백이 아닙니까? 내 속으로는 하나님 법을 사랑하고 계명대로 살고 싶은데 내 육체에 한 다른 법 죄의 법이 있어 나를 끊임없이 사로잡아 죄의 법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에 무수한 갈등이 생기고 기도할 때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몸부림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뿐 아니라 삶의 우선 순위로 하나님과 늘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할 것 먼저하고 나중할 것 나중에 하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보다 내 개인의 생각과 욕심을 먼저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하게 되고 하나님은 하늘나라와 하늘 의를 먼저하고 그 다음 너의 일을 하라.” “아니올시다. 내 생각과 내 욕심을 먼저하고 그 다음 내가 하나님 일을 하겠습니다.”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에 들어간 육군 신병이 군대생활 하면서 일생 추억에 남을 만큼 좋은 군인이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보다 선배된 병장에게 물었습니다. “군인생활을 좀 깨끗하게 명예롭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자세히 가르켜 주십시오.” 선배 병장은 껄껄 웃으면서 군대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는 것은 간단하다.

 

무조건 하고 상사에게 복종만 하면 된다. 군대생활이라는 것은 명령에 복종하는 생활이니까 서라면 서고 앉으라고 앉고 자라면 자고 깨라면 깨고 전쟁에 전진하라면 하고 죽으라면 죽고 복종만 하면 군대생활 잘할수 있다.” 한참만에 사병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군대에서 대령님이 명령을 하는데 중령님은 또 다른 명령을 하고 소령님은 또 다른 명령을 하고 대위님은 또 다른 명령을 하면 어느 명령을 따라야 합니까?”

 

그러니까 병장이 껄껄 웃으면서 이사람아! 명령이 여러 계통에서 나올때는 제일 높은 사람의 명령만 들으면 된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제일 높은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어떤 명령이 와도 우리는 하나님 명령에 복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을 안하고 다른 명령을 듣고 가려니까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명령, 마귀의 명령을 따르려고 하니까 우리의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영광과 예수님의 뜻을 우선 구하면 우리 마음속이 편안하게 됩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부정이나 사기사건의 장본인들이 교회 출석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텔레비전에 흔히 볼 수 있는 감옥가는 많은 사람들중에 성도들이 있고 집사, 안수집사, 장로, 목사까지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믿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었다가 그런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구원 안받은 것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보다도 내 생각과 내 욕심을 먼저 쫓다가 그런 어려움에 처하게 된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이 그것입니다. 우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항상 매일매일의 생활에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보다도 나의 생각과 나의 욕심을 먼저 구하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현실적인 씨름인 것입니다.

 

호세아 126"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

 

사명의 부르심에 우리가 복종하지 않으므로 늘 씨름을 하지요. 요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20여일만에 니느웨를 멸망 시키겠다.” 그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멸망 받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앗수르가 늘 이스라엘을 침공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요나는 애국심이 발로해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욥바에서 배를 타고 니느웨의 정반대인 가시스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갈등이 났지요. 도망치는데 그냥 가만 있습니까? 파도가 대적하여 배 안에서 어마어마한 풍랑을 겪고 결국에는 사공들이 그를 물에 던지는 큰 시련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 갈등이 오고 그런 씨름이 옵니까? 사명의 부르심에 불복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도, 봉사, 선교, 헌신, 희생등의 하나님의 명령이 임했을때 이를 저항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차타고 들어오면서 저 입구에서부터 집사님들이 새벽에 와서 안내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나는 올때마다 느낍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월급 받는 것도 아니고 고용받은 것도 아닌데 새벽 5시쯤 벌써 나와서 일하자면 벌써 2, 3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순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명을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에 순종하지 아니할때는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데 자기는 안하겠다고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씨름해서 이기면 지고 져야 이기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사 한분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일본에 가서 선교사가 되라 그렇게 했는데 그는 하나님 내가 교회를 한국에서 세워서 일본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겠습니다.” 그리고 순종 안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변역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네가 일본에 가라했는데 아니요. 나는 한국에서 교회를 세워서 많은 선교사를 양성해서 일본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할줄 아느뇨?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지 그는 결국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가 어느정도 성장, 발전했는데 교회에 큰 분쟁이 생겨서 교회가 풍비박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교회를 지켜달라고 기도할 때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네가 일할곳이 아니지 않느냐? 나는 너를 일본에 가라고 했는데 너는 왜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러므로 너가 목회하는 이 목회장소가 풍비박산이 되지 않느냐?’ 그는 크게 회개하고 그 교회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일본에 건너가서 지금 일본에서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의 부르심에 불복종할 때 끊임없는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임하십니다. 그 임하신 사명을 등한이 여기면 안됩니다. 그것에 복종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중국의 순임금이 하루는 신하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명령을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너희에게 망태기 하나씩을 줄터이니 내가 정한 우물에 가서 물을 하나 가득히 망태기에 담아서 오너라.”

 

그런데 15명의 신하에게 망태기 하나씩을 주었는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망태기는 엉성엉성하게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물을 어떻게 망태기에 담아 옵니까? 14명의 신하는 망태기를 가지고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망태기에 물을 담아오라는 임금님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못담아 오다가는 혼이 날테니까 에라 줄행랑을 치자.” 도망을 치는데 그중에 한 사람은 우물에 가서 망태기에 물을 담습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망태기에 부으니까 다 빠져 버렸지요. 또 퍼서 담고 또 퍼서 담고. 아침부터 해가 질때까지 물을 퍼 담았습니다.

 

사람들이 다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저런 멍청이 같은 놈이 어딨느냐?” 그러나 이 사람은 임금님이 명령했기 때문에 자기는 불합리한 일이라도 명령에는 복종해야 된다. 저녁이 되어서 이제는 우물에서 물이없습니다. 하도퍼서 망태기에 부었기 때문에 우물에 물이 없었어요. 그래서 물이 있는가 없는 살펴 보려고 우물밑을 보니까 우물 밑바닥에 큰 금덩어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는 금덩어리를 건져 내었습니다.

 

그래서 망태기에 담고 임금님에게 가서 임금님! 하루종일 물을 퍼서 망태기에 담아도 물은 다 빠져 나가고 물은 남지 않지만 나중에 우물물이 말라서 보니 금덩어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임금님에게 가져 왔습니다. 임금님이 껄껄 웃으면서 내가 일부러 우물속에 금덩어리를 넣어 놓았느니라. 내 명령에 복종하느냐 복종 안하느냐 시험을 해보았는데 14명은 다 도망을 쳐버리고 너만은 우직스럽게 순종해서 나의 명령을 지켰으니 금덩어리는 네것이다. 가져 가거라.”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내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안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이해가 되든 이해가 안되든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라고 하실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이해할 것이 아니라 순종할 것입니다. 이해는 그후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순종이 먼저 실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항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시편 2510"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고린도후서 10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베드로전서 56절로 7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하나님을 이기려고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기꾼이라는 이름인 야곱으로 인생을 살면서 항상 시련과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태어났을때는 다 야곱입니다. 꾀돌이입니다. 사기꾼들입니다.

 

그래서 늘 시련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면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나님의 은혜로 복과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면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자라. 졌는데 하나님은 이긴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졌으나 인생사에는 하나님이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항복한 자만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야곱으로 일생을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 살것이냐 하나님과 씨름해서 져서 이스라엘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 하셔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승리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결정해야 되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삶속에 다가온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들은 이모저모로 피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변명을 말하고 하나님과 다투고 씨름하고 하나님을 이기려고 할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등대를 이기려고 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의 등대인 하나님을 이기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비켜 서지를 않습니다. 비켜 설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항복하고 비켜서고 명령에 순종해야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 삶속에 그렇지 못할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크고 적은 일에 너무나 하나님과 다툽니다. 하나님 이해할수 없다고 자꾸 고개를 흔듭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해할 것이 아니라 복종할것밖에 없사오니 복종하고 순종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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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2-32/ 하나님의 손에 상처 입은 자 /조용기 목사

2014-09-12 10:44:22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손에 상처 입은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은 천상천하를 다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지배하시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오리는 항상 종이 주인을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라봄과 같이 하나님을 앙망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로 복종하는 종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또한 목자로서 당신의 백성을 양무리로 돌보아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으로서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토기장이십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가지가지 원하는 것을 당신의 원하는 대로 만드시듯이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뜻대로 만드신 그릇입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원대로 만드는 그릇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모신 우리들이 반드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할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영원 전에 우리 일생을 다 정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에 해와 달과 별들이 생기기 전에 영원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일생을 낱낱이 정해 놓았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편 13916절로 18절에 보면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 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 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이 말씀에도 보면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탯줄이 끊어지기 전에 이미 내 일생을 하나님께서 주님의 책에 다 기록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세상 사람이 말하는 운명이요 팔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이 한계선을 우리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넘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레미야서 14절에 "야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복중에 짓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알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태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선지자로 구별하였으니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우리를 여기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14절로 17절에 보면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고 했습니다.

 

바울 선생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택함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그에게 계시하셔서 하나님의 종으로 일생을 보내도록 작정하셨다고 그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떨까요? 여러분, 우리 같은 사람은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도 아니고 바울과 같은 사람도 아닌데 하나님이 나같이 평범한 사람도 알고 계셨을까요?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에베소서 13절로 5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창세 전에 하늘과 땅도 짓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나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해 놓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 되시고 처음과 나중이 되시고 시작과 끝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영원에서 영원까지를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연히 오다가다 여러분 불러서 예수 믿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억억만 년 전에 이미 여러분을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선택하시고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도록 예정하셔서 그 뜻대로 오늘날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온 우주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오직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대적해서 일어서는 자는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의 예정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알고 하나님을 섬겨야 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와 계획을 좇아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린아이로 태어나서 너는 어떤 소년기, 어떤 청년기, 어떤 장년기, 어떤 노년기를 보내라, 하나님이 계획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일의 때를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때를 모르고 그것을 인간의 힘으로 뛰어넘으려고 부딪치면 주먹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75세가 되매 하나님의 때가 되어 하나님의 계획대로 가나안에 가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121절로 42절에 보면 75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기의 뜻대로 살려고 여러 번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뛰어 넘어서 자기 생각대로 살려고 했지만 오직 거기에는 낭패와 실망,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그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서 일생을 이미 계획해 놓으신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17세에 하나님의 때가 되므로 그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험하고 혼란스러운 길로 이끄셔서 30세가 되매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도록 하나님이 설계해 놓으신 것입니다.

 

아무도 막을 수가 없어요. 그가 17세 때 자기 형제들의 배반을 받아서 애굽의 종으로 팔린 것도 나중에 보니 다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서 10년 동안 잔뼈가 다 굵도록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며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또 모함을 덮어쓰고 시위대 뜰에 갇히고 슬픔과 슬픔이 연속하고 고난과 고난이 연속했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계획하셨습니다. 때가 되매 30세에 그는 바로의 부름을 받아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고 온 천하에 굶주림이 있을 때 자기 아버지의 가족을 다 애굽 고센 땅에 불러서 가뭄을 이기고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게 도와주고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존하고 거기에서 430년 동안 이스라엘 70명이 3백 만으로 거대한 민족이 되어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나라를 세우도록 하는 하나님의 그릇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의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이끌어 간 것이지 요셉이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된 것은 아닙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40세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독립을 하겠다고 애굽 땅에서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그는 바로가 체포하려고 하매 겁이 나서 미디안 땅으로 도망쳐서 미디안의 나그네가 되어서 40년을 목동으로 지냈습니다.

 

그것이 다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을 자기가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보다 40년이나 앞장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다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 80이 되매 하나님의 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오매 하나님께서 호렙산 가시넝쿨에 나타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의지하고 홍해 수를 건너서 애굽으로 건너가 3백 만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40청춘에 못한 일을 80세에 어떻게 하느냐고 자기는 눈도 어둡고 귀도 둔하고 들어도 잘 깨닫지 못하고 혀도 뻣뻣하고 이제는 너무 늙어서 못하겠다고 하다가 하나님께 혼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같이 하니 가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때가 오매 하나님께서 80된 모세를 사용해서 40청춘에 하지 못한 그 위대한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제쳐놓고라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여러분을 벌써 만세 전에 하나님이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고 예정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자세한 모든 계획이 다 작성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로 태어나서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분의 생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 주고 사셨으므로 여러분은 현재와 미래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 아셔서 역사 하십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대로 "네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은 '하나님이여 나를 위한 계획을 주님께서 내게 보여 주시고 나를 위한 계획대로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주님 앞서서 뛰지 말게 하옵시고 주님의 인도를 거역하지 말게 도와 주시옵시고 주님의 정한 계획대로 따라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에 대한 정한 때가 있으므로 믿고 기다려야 될 줄 알고 성급하게 뛰지 말아야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때가 오기 전에 일어나서 뛰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가 오지 않으면 아무리 사람으로 애를 써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발걸음을 옮기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 전도서 31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천하가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목적과 떼를 정해 놓았는데 그것을 앞질러서 행하려고 해도 안됩니다.

 

바울 선생은 하나님의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열심이 특심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이 사는 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증거 했는데 소아시아, 나아가서 중동, 그리고 인도, 중국 이 방대한 지역, 수많은 사람이 사는 이곳에 가서 내가 복음을 증거 해야겠다 해서 바울 선생은 아시아에 복음을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66절로 10절에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계획을 다 세우고 뛰어 나갔으나 하나님의 계획은 아시아에 오는 것이 계획이 아니요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비두니아에 가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이 막았습니다.

 

그래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가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구래서 비로소 드로아에서 엎드려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보았습니다.

 

꿈에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을 시켜서 이리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매 비로소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하나님의 때가 온 줄 알고 그들은 아시아로 가지 않고 유럽으로 건너가서 3백 년 이내에 유럽을 완전히 복음화 시키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2천 년 후에야 아시아에 복음의 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2천 년 후에 아시아에 복음을 증거할 계획을 가지고 아시아에 복음을 증거할 때를 두셨는데 바울 선생은 2천 년 앞서서 아시아에 오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성령께 꾸중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아시아에 성령이 임하시고 우리 한국 땅에 하나님의 거대한 성령의 봉화 불을 올려놓아서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유럽에 복음을 증거하고 온 세계에 복음을 증거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때입니다. 사람의 힘과 능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되느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상처 입은 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때를 잘 알지 못하고 그 경계선을 뛰어 넘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인생을 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상처 입은 상처를 가지고서야 비로소 깨닫고 깨어지고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계획을 자기 뜻대로 이루려고 계획했습니다. 하나님의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를 이를 것이라고 그 어머니 리브가를 통해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형 에서가 대를 이을 것이 아니라 야곱이 대를 이를 것이라고 말씀했는데 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하나님 앞서서 자기가 이루고 자기가 성취하려고 하나님의 계획을 자기 힘으로 강제로 하려고 형을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도록 만들고

 

아버지가 눈이 어두운 기와로 형의 옷을 입고 들어가서 아버지 앞에 형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장자에게 주는 모든 축복의 기도를 다 받고 형이 이 사실을 알고 죽이려고 하매 달아나서 외아저씨 집에 가서 20여 년 동안 종살이를 한 것입니다.

 

그는 외아저씨 집에 가서 자기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만큼 외아저씨에게 속임을 당하고 열 번 이상 임금을 외아저씨가 속이고 그는 수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고향 산천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매 자기의 처자들을 이끌고 이제는 하나님이 마지막에 복을 주어서 거부가 되었는데 많은 소 떼와 양떼와 염소와 짐승 떼를 거닐고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고향 땅에 돌아올 때 그 마음에 늘 걸리는 것이 형을 속이고 왔으니 20년 동안 형이 자기를 용서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자를 미리 보내어서 세일 땅에 있는 형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우 야곱이 돌아옵니다.'

 

형이 불같이 들고일어나더니 온 자기 개인의 군대를 일대 소집을 하니 삼백 명의 군인들이 전부 창, 칼을 들고 완전 무장을 하고 그리고 순식간에 야곱을 향해서 전진해 옵니다. 이것을 보고 기절초풍을 한 사자가 앞서 뛰어와서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말도 마십시오. 형이 분노해서 노도해서 삼백 명의 개인이 기른 사병을 거느리고 창검을 들고 당신을 습격해 옵니다. 이제 우리 다 죽었습니다." 야곱은 간담이 녹아집니다. 뼈가 쓰리고 무릎에 힘이 다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마지막 살 궁리를 했습니다. 자기의 짐승들을 다 건너 보내고 종들을 다 건너 보내고 처자도 다 얍복강을 건너 보내고 자기는 얍복강 이쪽에 혼자 남아서 이제 야곱은 최후로 자기의 인생을 자기의 꾀대로 한번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형이 와서 짐승들을 빼앗고 종들을 치고 내 처자를 칼로써 베면 나는 여기서 달아난다. 내 한 몸이라도 살아야지. 난 도망칠 것이다.' 얍복강을 건너가면서 그의 처자들이 말합니다. "여보, 당신은 안 건너와요?"

 

"아빠, 아빠도 와. 빨리 와." ", 나는 여기 할 일이 많아. 먼저 건너가세요. 얘들아, 너희 먼저 건너가라." 그러나 야곱은 속으로 '이제 마지막 보는구나. 내일이면 너희들을 에서의 칼날에 다 죽고 나는 두 다리가 튼튼하니 도망칠 것이다.

 

미안하다. 그러나 내가 살고 봐야지. 별 도리 있나.' 그리고 그는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럽기에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했습니다. '내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저를 보고 고향산천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돌아오는 중에 이렇게 형이 삼백 인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니 이제 나는 절망 아닙니까? 하나님이여 나를 구출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살려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키가 구척장신인 분이 뛰어오더니만

 

"야곱아, 건너가라. 처자들이 있는 데로 건너가라." "내가 왜 건너가요? 안 건너가요." "건너가서 살든지 죽든지 함께 하라." "아닙니다. 나는 살아야 되요. 처자가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 되요."

", 이 못난 놈아, 건너가라." "안 건너가요." " 건너가라니까." "왜 내가 건너가요?" 그래서 씨름이 붙었습니다.

 

그 천사가 누구냐? 야훼의 사자는 신약에는 언제나 예수님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건너가라고 하고 야곱은 안 건너가겠다고 하고 예수님이 밀면 자기는 더 크게 예수님을 밀고 예수님이 발을 걸어 넘어뜨리면 자기도 예수님의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고 밤새도록 레슬링을 합니다.

 

얼마나 고집이 센지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가겠습니다 하는데 죽으면 죽었지 안 가겠다고 합니다. 날이 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 주님께서 손을 들어 그의 다리를 쳤습니다.

 

? 다리를 믿고 있기 때문에 팔을 믿었으면 팔을 치겠는데 튼튼한 두 다리를 믿고 서 있기 때문에 다리를 쳐버리니까 환도 뼈가 어그러져서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일어나니까 쓰러지고 일어나니 쓰러지고 자기가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님을 부여잡고 이제 날 절름발이를 만들었으니 나는 도망도 못 칩니다. 나를 축복해 주셔야지 날 축복 안 해주면 이제 난 못살아요. 이제 나는 내 꾀를 의지할 수 없고 내 두 다리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당신만 의지하오니 당신 나를 복 안주면 나는 이제 끝이 났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이제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 자라고 해라." 그리고 떠났습니다. 그는 일어나 보니 다리가 절뚝절뚝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도망 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상처 입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들어 쳤으니 하나님께 상처 입은 자가 되어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상처 입은 사람은 별 도리 없이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 따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따라 가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절뚝절뚝거리면서 얍복강을 건너면서 처자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부인과 아이들이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온 몸이 다 할퀴고 옷도 찢어지고 절뚝절뚝하니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하나님께 상처 입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태양이 떠올랐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상징적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밤에 밤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얻어맞고 환도뼈가 어그러지고 회개하고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 그 인생에 태양이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책임집니다. 보십시오. 처자들 다 뒤에 두고 짐승들 다 뒤에 두고 종들 다 뒤에 두고 자기가 제일 앞섭니다.

제일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이 이제는 다 뒤로 세우고 자기가 제일 앞에 서서 형이 삼백 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 그를 향해서 걸어갑니다. 형이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죽이려고 달려오다가 보니까 저기에 머리를 헝클어지고 얼굴은 상처를 입고 옷은 다 찢어지고 이렇게 해서 형에게 옵니다.

 

형이 "저것 죽여서 뭣하겠나?" 그만 형의 마음속에 가련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형제의 정이 솟아오른 것입니다. 그는 그만 말에서 내려서 뛰어와서 그 동생을 끌어안고

 

"이놈아, 나를 속이고 나를 배반하고 도망한지 20년만에 돌아온 모습이 절뚝발이가 되어서 돌아오느냐? 그 모습이 뭐냐? 이 상처를 입고 이렇게 찢기고 절름발이가 되고." 그러자 동생이 형에게 엎드려서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형님이 나를 이렇게 영접해 주니 내가 이제 살았습니다." 형이 등을 두드리고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자기 군대를 둘러보고 "내 동생을 호위하라. 이 가족들을 호위하라." 죽이려고 온 사람들이 호위군대로 변화되다니. 이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노릇입니다.

 

운명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호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가 하나님께 상처를 입고 절뚝발이가 되어서 아제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갈 때 하나님이 이제는 당신의 계획과 당신의 때를 따라 그를 이끌어 갑니다.

 

어두운 밤은 지나가고 광명한 태양이 그의 속에 떠올랐으며 이제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난 후에야 자기 고집이 깨어지고 순종과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대다수의 여러분들은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얻어맞은 그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상처를 입고 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을 순종하고 믿고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하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매맞은 상처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상처가 우리에게 외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도 현재도 미래도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오직 우리의 삶의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청지기로서 야곱처럼 상처를 입어 절뚝거리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따라가는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 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전지전능 무소부지하신 절대 주권자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품에 품고 가길 원하시지만 타라가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교만하고 오만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때를 짓밟고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때대로 살려고 하다가 하나님을 거역한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할 수 없이 우리를 쳐서 하나님의 손에 상처를 입어야 우리가 깨닫고 회개하고 깨어지고 주님의 계획과 주님의 때를 따라 가는 우리들이 됨을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원통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주님께서 상처를 입히실지라도 하나님 앞에 믿고 순종하는 백성으로 만들려고 애쓰시는 하나님 감사하옵나이다.

 

하나님께 상처 입은 것을 아버지여 등한히 여기지 말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상처 입은 것을 귀하게 생각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깨닫게 도와 주시옵시고 깨어지게 도와 주시옵시고 믿고 순종하고 헌신하고 따라가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조건 없이 무조건하고 군소리하지 말고 잔소리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운명, 하나님이 주신 팔자, 하나님이 주신 때를 받아들이고 걸어가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마라 /32:21-32/ 이종철목사

2022-05-13 12:59:02

 

(21)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야곱 같은 인격도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완벽한 사람들만 있다면 우리는 절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는 야곱이 있고 신약에는 베드로가 있어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음에도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가 된 베드로가 사랑스러운 것은 그가 우리와 동일한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기꾼 인생 야곱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야곱과 싸웠던 사람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야곱입니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원 뜻은 발뒤꿈치라는 뜻이지만 의역하면 사기꾼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야곱과 그 형 에서는 쌍둥이입니다. 같은 날 태어났는데 에서가 먼저 나오고 야곱이 뒤따라 나왔는데 야곱이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이유는 자기가 먼저 나오기 위해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이름이 발뒤꿈치곧 야곱이라는 이름입니다(25:26). 아무 지각이 없는 태아가 이런 욕심을 부리는 것도 특이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이름을 붙여준 그 부모들도 특이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유명한데 야베스는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야베스를 고통스럽게 나았기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런 고대인들의 태도는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앙에서 기인합니다. 긍정적으로 설명하면 이런 운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것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 그대로 야곱은 다른 사람의 발뒤꿈치를 잡으며 사는 사기꾼 인생을 살게 됩니다. 특히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합니다. 장자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권을 말합니다. 하루는 형 에서가 사냥을 나갔다가 기진맥진해서 돌아왔습니다. 마침 그때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가 팥죽 좀 달라하니 형의 장자권과 바꾸자고 합니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삽니다(25:33). 두 번째는 이삭이 나이가 들어 마지막 축복의 기도를 장자인 에서에게 해주려 하였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형 에서인 것처럼 분장시켜 장자의 축복권을 대신 받게 합니다. 그때 속은 것을 안 에서가 분노하며 하는 말이 이러했습니다.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27:36)

 

형제간의 갈등은 성경의 중요 주제중 하나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질투해서 최초의 살인을 행했습니다. 오늘 야곱과 에서의 갈등이 그렇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애굽의 노예로 팔았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중 동생인 에브라임이 더 큰 자가 될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형제 간의 갈등은 성서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현대 우리 가족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애들도 그렇지만 형제간에 왜 그리 싸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장자는 자기 권리를 지키지 위해, 차자는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싸웁니다. 이 두 관계에서 장자는 가진 자입니다. 장자가 모든 권리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가끔 그 당연한 순서를 바꿈으로써 장자가 경계하도록 만듭니다. 복음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에게 넘어간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에게 특권을 없습니다. 오직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분한 형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계획합니다. 이를 두려워 한 야곱은 형의 눈을 피해 자기 외삼촌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으로 멀리 피신을 갑니다. 야곱을 연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외삼촌 라반도 야곱 못지않은 사기꾼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하나님이 훈련시키실 때는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야곱은 라반의 딸 중에서 동생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라헬을 얻기 위해 7년 동안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첫날밤에 삼촌 라반이 보낸 것은 언니 레아였습니다. 레아가 아름답지 못해 시집 못갈 것을 염려해 먼저 보내던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까지 얻기 위해 야곱은 7년을 더해 도합 14년을 봉사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삼촌 집에 총 20년을 머무는데 라반은 열 번이나 야곱을 속였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을 떠나며 밧단아람에서의 20년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 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31:38-41)

 

야곱은 밧단아람 학교에서 삼촌 라반으로부터 지독한 인격훈련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연단시켜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듭니다. 한 사람이 위대해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의 언약이 사람을 만듭니다. 형 에서로부터 사기를 쳐서 장자권을 빼앗았지만 하나님은 이제 그 축복에 맞는 인격을 갖추도록 야곱을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아내들과 열두 자녀와 재산을 소유한 한 가문을 형성하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형 에서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에서가 고향에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 사람을 보내서 동정을 살피게 합니다. 그 사자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32:6) 야곱은 두려워졌습니다. 형 에서가 사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데 이것이 자기를 해치기 위해서 오는지 환영하기 위해서 오는지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이 때도 역시 야곱은 자신의 약삭빠른 머리를 굴리기 시작합니다.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를 두 떼로 나눕니다. 그래서 만약 한쪽을 치면 다른 한 쪽은 도망가려는 계산입니다.

 

야곱의 교묘함은 이런 위기의 때에 기도를 잊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329-12절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기도 중 가장 긴 기도입니다. “9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32:9-12)

 

과연 야곱다운 기도입니다. “일전에 베델에서 하나님 저 축복하시기로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대로 오늘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그 핵심은 형 에서의 손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하는 입니다. 그때 베델에서도 야곱은 이기적인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나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내가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아주 이기적이지만 야곱의 강점은 그래도 하나님께 매어 달린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기적인 기도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기꾼이라도 기도할 수 있는 권리는 있습니다. 착한 사람의 단점은 착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죄송해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매어 달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야곱은 역시 도로 야곱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고 난 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야곱은 이번엔 뇌물 공세로 갑니다. 염소 양 약대 소 나귀들을 모두 세 떼로 나눕니다. 그래서 에서의 무리가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의 종 야곱이 주인 된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입니다하고 말하라고 시킵니다. 연거푸 세 번의 예물을 받도록 한 것이지요. 물질 공세엔 사람들이 약하지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렇게 모든 안전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기도도 했지요, 인간적인 계획도 세웠지요. 그러나 그래도 불안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야곱의 불안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밤중에 모든 아내들과 자녀들과 소유물들을 강을 건너보냅니다. 그리고 혼자만 강 저편에 남았습니다. 야곱은 왜 남았을까요?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면 기도하기 위해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야곱의 불안감을 잘 보여줍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과 씨름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라고 밝혀집니다. 이 사람이 야곱과 밤새도록 씨름을 하는데 야곱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는 야곱의 자아나 야곱의 생각이 완강함을 보여줍니다. 이때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넘어뜨립니다. 환도뼈는 엉덩이 아래 대퇴부 뼈로 생식기와 관련된 중요한 부위이며, 힘의 근원입니다. 환도뼈를 쳤다는 것은 야곱의 인생 방식을 꺾었다는 상징입니다.

 

악착같이 자기만 믿고 살아온 인생이기에 절대로 자기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야곱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면 남을 속여서라도 얻어냈던 사람입니다. 야곱은 완벽하고 자기 계획에 철저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형 에서의 손에 의해서 그동안에 쌓아왔던 그 모든 것이 허물어질 수도 있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이 순간에 그 환도뼈를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환도뼈를 치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물질의 환도뼈를 치시기도 하고, 건강의 환도뼈를 치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자식의 환도뼈를 치시기도 하고 자존심의 환도뼈를 치시기도 합니다. 형편없이 무기력한 인생을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두 손 들고 하나님께로 나옵니다. 오늘 야곱이 그렇습니다. 무기력한 인생이 된 야곱은 하나님께 내게 축복해 달라”(26)고 간구합니다. 저는 이제야 야곱이 제대로 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기도를 했지만 자기 머릿속에 모든 계획을 세워두고 드리는 형식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코너에 몰렸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상태로는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어린 아이처럼 무기력한 가운데 축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환도뼈를 꺾이는 경험을 하고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몇 년 전 현대 아산의 회장 정몽헌씨가 자살을 해서 사회에 그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그분의 유서에서 이런 글을 보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했습니다. 어리석은 행동하는 저를 여러분이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정 회장이 어리석다고 말한 행동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판단하기에 가장 어리석은 행동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지 않고, 자신이 감당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연약해서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 실수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지려 하면 제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환도뼈가 꺾였을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나님께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응답하여 야곱에게 정말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야곱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야곱이 대답합니다. “야곱입니다다른 말로 사기꾼입니다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마라. 이제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과 겨루었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 존재가 바뀐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안에는 자기 힘을 의지했다면 이제는 철저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과 싸우지 않고 하나님과 승부를 하는, 하나님과 겨루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을 묻지만 하나님은 그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들에게 계시된 것은 출애굽기 3장의 모세 때에 처음이었습니다. 이때까지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등으로 불렀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싸움이 마칠 무렵 날이 밝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이 장소를 브니엘이라 부릅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몸소 싸웠다는 것이 한편 송구스럽기고 하고 한편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제 이스라엘로 변화되었습니다.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야곱은 그 태양을 마주보며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걷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날 아침 모든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위력입니다. 이제는 진정으로 형 에서에게 무릎을 꿇고 형님을 형님으로 인정합니다. 333절을 보십시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에서가 처음부터 야곱을 죽이려 왔는지 환영하려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얍복 강에서 씨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용서합니다. 에서가 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내 동생아라는 말에서 이미 화해는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10절입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두려워했던 형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 전날 밤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을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형 에서의 얼굴에서 전날 밤 씨름하던 하나님의 얼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자 인간과의 화해는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 생각과, 내 욕심대로, 내 방식대로 살아가다가는 우리는 벼랑 끝에 몰리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신뢰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는 믿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야곱이 자기 힘과 꾀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존하는 방식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 영혼에 평화를 주시고, 사람을 상대해서도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야곱은 평생 환도뼈를 절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불편한 다리를 통해서 매일같이 이 믿음의 진리를 배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노력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목표가 우리 영광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을 이루는 방식도 내 생각과 힘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무기력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인생이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삶입니다. 이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평온케 하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야곱 /32:22-31/ 이동희 목사

2021-03-20 09:35:46

 

1.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와서 애굽 왕 바로를 만나게 하자 바로 왕이 야곱에게 노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야곱이 나그네처럼 살아온 세월이 130년이 되었습니다. 내 조상들의 나그네 생활에 비하면 내 나이가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47:7-9) 야곱은 자신의 생애를 험악한세월로 표현했습니다.

 

험악한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인데, 이 말은 자질이 부족하다.’ ‘열등한 자질’, 그리고 흔히 자신이나 타인을 해하는 도덕적 결함을 지닌 성품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기도의 응답으로 태어났지만,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 뜻은 발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찬탈자등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야곱은 일찍부터 교활하고 비열한 인간이었습니다.”(성경백과사전)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보다 더 큰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할 지도자로 세우실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3:6)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시편은 인생들에게 지혜롭고 복된 삶을 위해 오직 야곱의 하나님께만 의지하며 살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6:2-5)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으로 돌아오라며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예수께서도 부활에 대해 말씀을 가르치실 때, 출애굽기 3:6 말씀을 인용해 말씀하셨습니다.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자손, 야곱의 자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도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불리우도록 섭리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야곱처럼 자질이 좀 부족할지라도,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을지라도, 성품적으로 열등할지라도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2.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보다 먼저 나오려고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듯이, 그는 악착같은 데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면모는 세상에 동생으로 태어났지만 장자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데서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얻기 위해 어머니와 한패가 되어 형으로 위장하여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마침내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고야 맙니다. 참으로 야곱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의 이러한 성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삼촌집에서 7년 동안을 종살이 하다시피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삼촌에게 속아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야곱의 집념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삼촌의 요구대로 7년을 더 종살이 한 끝에 마침내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맙니다. 물질에 대한 집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세기 3140절을 보면 자신의 탄탄한 기업을 위해 6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를 털어놓고 있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릎 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그렇게 해서 야곱은 세상적으로 보면 성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큰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31:3) 야곱은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밧단아람을 떠나서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남들이 보면 금의환향하는 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은 평안치 못하고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형 에서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차지한 일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아무런 대책없이 고향에 돌아간다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임에 틀림없었던 것입니다. 20년 동안 한을 품고 살았던 형 에서가 야곱을 그냥 놔 둘리는 없고 죽이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

 

형이 나를 죽이려 대들면 어디로 어떻게 피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형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까?” 등 등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가 한 가지 잔꾀를 냈습니다. 종들 가운데 사리분별이 있고 똑똑한 사람 몇 사람을 불러 형 에서에게 먼저 가서 이렇게 전하며 설득해보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동생 야곱이 큰 거부가 되어서 금의환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따뜻하게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엄청난 재물 공세로 형의 기를 한번 꺾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치사한 탈을 벗어버리지 못한 발상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종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것은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 에서가 잘 훈련된 군사 400명을 이끌고 야곱을 죽이기 위해서 올라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야곱 일생일대에 최대 위기를 맞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여기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즉시 자기의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한꺼번에 다 몰살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떼를 먼저 보내서 형이 치면 나머지 한 떼라도 챙겨서 도망치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야곱은 20년만에 처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다급해지니까 하나님을 찾아 이렇게 기도합니다.

 

(32:11) 내가 주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를 내 형 에서의 손에서 구해 주소서.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했으면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텐데, 여전히 따로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가축들 가운데 좋은 것들을 골라서 형 에서에게 예물로 보냈습니다. 하나님께 물론 기도는 하지만, 물질을 가지고 형의 마음을 한번 녹여 보겠다는 것입니다.

 

(32:20) ‘당신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습니다 하고 말하라야곱이 이렇게 한 것은 먼저 선물을 보내 형의 감정을 누그러지게 한 다음에 그를 만나면 그가 자기를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야곱이 자신의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형 에서를 만나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없이, 재물을 가지고 형의 마음을 달래보려는 잔꾀는 터무니없는 수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방어책으로 처자식과 모든 재산을 먼저 강을 건너게 하고 자신은 강 저편에 남아 있었습니다.

 

만약에 우려할 만한 사태가 발생하면 자신의 몸만이라고 살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의 성격 그대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필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회개기도라기 보다는 어떤 일에든 기를 쓰고 달려드는 그의 자세, 결코 어떤 일이나 사람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삶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야곱이 지금까지 하고자 했던 일에서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불굴의 투지와 집념으로 성공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자기의 힘과 의지 하나로 언제나 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인간적인 투지력과 집념들이 언제나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마음에 들어가실 자리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부르긴 했으나 정말로 그의 인생 가운데 필요한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기 인생의 액세서리 중의 하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왔던 길을 돌아갈 수도 없는 삶의 최대 위기를 만나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무서우리만치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느새 날이 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직도 변화되지 못한 야곱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습니다. 엉덩이뼈는 것은 다리와 허리사이를 연결시키는 둥근 칼처럼 생긴 그 부위입니다. 그 뼈가 위골되면 제대로 걸을 수가 없게 됩니다. 최악의 경우에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지 않아도 내 다리 믿고 도망치려 했는데, 엉덩이뼈가 위골되니 이제는 도망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기도합니다.

 

(32:26) 그분이,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나를 축복해 주시지 아니 하시면 절대로 못갑니다. 한 마디로 최후 순간까지 발버둥치는 처절한 모습이었습니다. 실로 지금까지 야곱의 생애는 발버둥치는 삶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힘과 집념 하나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가리지 않고 살아왔고 그렇게 해서 나름대로 성공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엉덩이뼈가 위골되고 나니까 더 이상 발버둥쳐 보아야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그 상태로는 만약 형 에서가 추격해올 경우 도망칠 수도 없이 꼼짝 달싹없이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 매어 달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밖에 자기를 살려줄 분이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굴복한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어찌 그 이름을 모르시겠습니까? “야곱입니다이는 사기꾼 야곱입니다, 재물로 사람의 마음을 사보려고 했던 치사한 놈 야곱입니다, 지렁이같은 야곱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힘과 집념, 의지로만 살고자하는 교만한 야곱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그런 삶을 살았던 야곱입니다,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 살았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털어놓고 회개하는 대답입니다.

 

남들에 비하면 열등한 자질과 도덕적 결함을 지닌 자신의 모든 성품 등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라.”며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의 과거를 다 청산 시켜 주시고, 깨끗한 새 출발을 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음흉한 데가 있었고, 계산에 밝았고 남의 뒷전에 더 관심을 가졌던 야곱이었건만, 이제 그는 새 사람의 모습으로 강을 건널 태세를 갖춘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길고 긴 밤이 지나갔습니다. 나루터에 아침이 찾아 왔습니다.

 

그 고독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었던 순간들,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되어 절대 지지 않으려고 힘을 쏟던 발버둥의 시간들이 다 지나가고 새 아침이 왔습니다. 뼈가 부러져 절고 있었지만 얍복 나루를 떠나는 야곱의 마음에는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평화와 안식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내 힘, 내 지혜, 내 능력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늘 날이 서있었고, 긴장되어 있었으며, 고독하고 외로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믿고 의지할 분이 생겼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들어 오셔서 그의 인생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더 이상 발버둥치며 온갖 잔꾀를 부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형 에서에 대한 모든 두려움이 일시에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홀가분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긴장 속에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안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얍복 강가에서의 체험을 기념하여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고서도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 며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부른 것입니다. 육적으로만 살아왔던 자신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기념하는 그 자리가 브니엘이었습니다.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듯 기도하여 새 이름 이스라엘로 변화된 그 아침이 <브니엘의 아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브니엘을 떠날 때 해가 떠올랐습니다. 그 햇빛 아래에서 에서와 야곱은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형제로 되돌아갔습니다. 에서는 아우의 모든 죄과를 용서하였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전 재산을 형에게 선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형님이 저를 이렇듯이 사랑으로 맞아 주시니 형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브니엘의 아침> 햇살은 원수가 변하여 형제가 되며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되는 새 빛이요, 새 생명의 능력입니다. 야곱은 엉덩이뼈가 부러져서야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스라엘이 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그 순간 야곱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불리워지게 된 것입니다. 엉덩이뼈가 위골되는 고난이 아니었다면, 야곱은 결코 이 믿음의 자리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고난을 가리켜서 3의 성례전이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고난과 위기를 통해서 우리가 온전한 믿음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고난은 가장(假裝)한 축복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변장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고난과 위기를 만날 때 그것은 하나님 앞에 필사적으로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습니까? 야곱을 새롭게 변화시켜 축복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엉덩이뼈가 위골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주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삶에 엉덩이뼈가 위골되는 경우를 당하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줄을 믿으시고, 야곱처럼 내게 축복해주시지 아니하면 결코 놓지 않겠습니다.’며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마침내 <브니엘의 아침>을 맞이 하게 될 것입니다.

 

엉덩이뼈가 위골되는 것과 같은 고난과 위기가운데, 뜨거운 눈물과 필사적인 기도는, 반드시 여러분을 <브니엘의 아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자신이 변해야 문제가 해결되는 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는 그대로 있으면서, 형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를 깨우쳐 축복하시고자 엉덩이뼈를 치시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켜 브니엘의 새 아침을 맞게 하셨습니다.

 

야곱아! 문제는 너에게 있다. 너의 형 에서가 문제가 아니다. 네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축복하시고자 엉덩이뼈를 치신 것이었습니다. 야곱처럼 엉덩이뼈가 위골이 될지라도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며 결사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홀로 남아 씨름하듯 밤을 새며 결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엉덩이뼈가 위골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국 축복을 받아내고 이름마저 이스라엘로 새로 얻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선고에,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심히 통곡하며 결사적으로 기도할 때, 생명을 십 오년이나 연장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 주시겠다.’는 약속을 얻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100년을 살 것처럼 일하고, 내일 죽을 것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성도 여러분을 위해 <브니엘의 아침>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성품과 자질이 조금 부족할지라도, 성격과 도덕적 결함이 있을지라도 그 성품과 자질, 그 성격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무릎을 꿇을 때, 야곱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에게 브니엘의 아침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대면하여 주실 것입니다

 

 

 

3. 야곱은 영적인 것에 대단한 열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수세기 후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물려받은 이름인 야곱을 지적하면서, 그가 하나님과 씨름하며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 보이라고 촉구했습니다. 호세아12:3-5을 보겠습니다.

 

(12:3-5)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야곱에게는 성격과 성품, 그리고 자질 면에서 부족하고 여러 가지 단점들과 약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복을 추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남다른 열망을 지닌 야곱에게는 숱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도전과 힘든 환경 등의 도전에 대해 물러서지 아니하고 맞서 씨름을 했습니다. 축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과의 싸움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딸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라반은 이를 이용해 라헬과의 결혼을 미끼로 7년을 땀 흘려 일하게 만들었습니다. 야곱은 7년을 수고한 끝에 드디어 라헬과 결혼했지만, 첫날밤을 보내게 된 여인은 라헬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라반이 야곱을 더 부려먹기 위해 라헬을 레아로 바꿔친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다시 협상합니다. 7년을 더 봉사하면 라헬을 아내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꾹 참고 7년을 더 수고했습니다.

 

야곱은 그 후에도 가축 떼를 모으기 위해 6년을 더 수고하게 만들었던 그의 약삭빠른 장인 라반도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야곱은 모든 손실을 감수했고, 방목지에서 수고해야 하는 고통을 겪었으며, 그의 품값도 열 번이나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20년이라는 힘든 세월이 지난 후, 야곱은 드디어 밧란 아람을 떠나게 되면서 라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31:40-42입니다.

 

(31:40-42)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라반뿐 아니라 그의 아들들마저 야곱을 내버려두지 않을 기세였습니다.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재산으로 저처럼 큰 부자가 되었다.”(31:1) , 야곱이 20년 동안 피땀흘려 모은 재산을 약탈하고자 했습니다.

 

야곱에게는 집안에서도 골칫거리와 싸워야 했습니다. 네 여자, 즉 그의 아내 라헬과 레아, 그들의 하녀 빌하와 실바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기와 다툼과 경쟁도 참아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가 관리해야 할 열한 명의 아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모든 것을 인내하며 참아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그 비결을 창세기 31:42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31: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야곱이 그 모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하셨다.” 는 믿음이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도중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28:13-15입니다.

 

(28:13-15)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는 이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여러분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이 말씀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어떠한 사람과 환경의 도전에도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루기 힘들고 마찰을 일으키기 쉬운 사람들과 참기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게 될 때,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를 성숙시켜주시고 결국 형통케 하실 하나님만을 열망하며, 인내의 믿음으로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야비한 사람들과 괴로운 환경들이 우리를 품위 있게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말없이 참고 복종했던 그 20년 세월이, 야곱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이 되었고, 그는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형성해야 하는 일을 위해, 그를 준비시키시려고 다루기 힘든 사람들과 환경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삶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지, 야곱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는 이 말씀을 굳게 잡고 일하고 견디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밧단 아람 라반의 집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즉시 순종했습니다.(31:13) 야곱은 20년 전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요단을 건넜던 초라한 행색(行色)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어디로 가든지 지켜주시며 항상 함께 하시므로 거부되어 고향을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형 에서와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지만, 이제 형 에서가 야곱의 발목을 잡을 태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먼저 하나님과 겨루어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마주 대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싸움을 먼저 끝내야 했습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과 싸웠지만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꽉 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해주길 바랐고, 그렇게 할 때까지는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해가 뜰 때까지 하나님과 씨름을 벌였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한순간에 야곱을 거꾸러뜨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씨름을 멈추고 항복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존 칼빈(John Calvin)하나님은 왼손으로는 우리와 싸우시고, 오른손으로는 우리 편을 드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믿음을 굳게 잡으며, 하나님이 주고 싶어하시는 복을 구할 때, 우리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2:42)고 말할 때, 사용하시던 왼손을 멈추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에 승리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저(A. W.Tozer)하나님은 하나님께 먼저 정복당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온전히 복을 주실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정복될 때에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환경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가 하나님고의 씨름을 멈추고 매달리기 시작하자 그의 패배가 승리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그 씨름을 통해 새롭게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정복되었을 때,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을 때, 변화되어 승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엉덩이뼈를 치시고 그를 절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격언처럼 그는 비록 절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가족에게 돌아갔을 때, 그들은 그가 저는 것을 보고 분명히 어찌 된 일인지를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또 새로운 이름도 갖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야곱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사실대로 야곱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야곱은 지난 날 장자의 축복을 받고자 형 에서로 위장하며 아버지 이삭이 너는 누구냐?” 고 물었을 때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27:32)며 거짓말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괴로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것은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시기 전에 속임수로 점철된 그의 과거 삶을 고백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물음에 야곱이니이다.”고 대답한 것은 마침내 자신과 하나님께 자신이 사기꾼, 발뒤꿈치를 잡은 자, 찬탈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도덕적인 결함과 열등한 자질, 그리고 성품과 성격에서 여러 가지로 약점과 단점들을 하나님에 내려놓고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신 이유를, 분명히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항상 너와 함께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사람과 겨루어 이기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전 존재를 내려놓고 회개하므로 하나님과 겨루어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위한 승리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께 정복당해야 했습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2,500번 이상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께만 축복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시기 바랍니다. 엉덩이뼈가 위골되어 다리를 절게 될지라도 하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야곱, 이스라엘은 다리를 절며 가족들에게 돌아갈 때 해가 돋았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새날이 시작된 것을 의미했습니다. 야곱은 집에서 도망치는 도망자로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가면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이스라엘로 변화되어 새로운 삶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야곱과 다를 바 없이 성격이나 성품, 그리고 자질이나 도덕적 품성에서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야곱의 심성과 특성이 우리 속에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41:14)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서의 야곱을 의미합니다.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 허무했던 야곱의 삶을 유익한 삶으로 변화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항상 너를 지키며 너와 함께 하여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기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32:21-32/ 계강현 목사

2020-07-12 15:03:59

 

세계 역사도 그렇고, 운동경기도 그렇고,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turning point’라는 게 있다. '전환점' 혹은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는 계기'를 의미한다. 중년에 접어들어 욕심을 따라 살아온 지난 전반인생을 반성하고 회개하며, 그 시점을 turning point로 삼아 남은 후반인생은 오직 주님만 위해 살아야겠다하고 결단한 크리스천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

 

오늘 우리는 야곱의 인생에서 그런 turning point와 같은 얍복 강가의 사건을 접하게 된다. 야곱은 고향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형에서와 화해하는 일이다. 그러나 형에서는 군대를 거느리고 야곱을 죽이려 오고있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기도도 하고 선물도 보내지만, 그 마음에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야곱은 그 밤에 가족과 소유를 다 보내고 얍복강가에 홀로 외롭게 남아있었다. 바로 그때 어떤 사람이 등장했고, 야곱은 그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야곱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의 둔부의 힘줄을 쳐서 위골이 되게 했다. 의학적 용어로 고관절이 위골된 것이다. 야곱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었고,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 사건은 유명한 만큼이나 궁금한 점들을 있다. 우선 갑작스럽게 등장한 어떤 사람이 야곱과 씨름을 했다고 하는데, 그는 누구인가? 그것은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씨름했던 그 사람이 결국 야곱을 축복해주었고, 야곱은 그곳 이름을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이라 불렀다.

 

결국 그 어떤 사람이 바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천사였다는 얘기다. 구약시대에는 때때로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오신 적이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도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야곱과 씨름을 하셨던 것입니다. 또 다른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을 하셨을까? 또 왜 야곱의 고관절을 위골시키셨을까? 또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었을 때 무슨 의미일까?

 

1. 하나님이 왜 야곱과 밤새 씨름하셨을까?

 

하나님이 왜 야곱과 씨름하셨을까? 일단 씨름을 했다는 것은 누가 더 강한지 힘을 겨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강한지 야곱이 강한지 내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힘으로는 야곱을 이길 수가 없었다. v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게 참 이상하지 않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을 이기지 못하시다니 말도 안 된다. 그래서 이 본문을 많은 분들은 야곱이 밤새도록 철야하며 사생결단의 기도를 한 것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이 우리가 목숨 걸고 기도하면 마지못해 지는 척 들어주신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그냥 기도만 들어주시지 왜 굳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셨을까?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씨름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심심하셔서 장난삼아 야곱과 씨름하는 게 아니다. 이 씨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들려주고자 하시는 의미심장한 말씀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지금까지 야곱의 생애는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했고, 그 씨름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이겨먹기 위해서 하나님과 싸우면서 살아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결코 야곱을 높이는 것도 아니고, 칭찬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야곱을 준엄하게 꾸지람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의 지난 생애를 놓고 보면 한 마디로 남의 발목을 잡는 인생이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형에서의 발목을 잡고 세상에 나올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오죽하면 그 부모가 아이 이름을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뜻으로 야곱이라고 지었겠는가?

 

야곱은 그 이름대로 한 평생 남의 발목을 잡아서라도 자신의 욕심을 이루며 살아왔다. 하나님이 언약의 상속자로 이미 복중에서부터 정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팥죽 한 그릇에 형에서의 장자권을 사고,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쟁취하였다. 이런 모습이 바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며 산 인생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신다.

 

하나님을 이기기 위한 야곱의 싸움은 벧엘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라반의 두 딸을 동시에 취하고, 또 여종을 통하여 경쟁하듯이 아이들을 낳은 것이 바로 그런 씨름이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인간의 수단방법으로 재물을 취득한 일도 비슷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하신 언약을, 큰 민족과 복의 근원을 야곱 자신의 힘으로 이루고자 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형에서의 문제를 야곱 자신의 생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 역시 하나님과 힘을 겨루고자 하는 씨름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야곱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언약의 상속자로 부름을 받았다고는 해도, 여지껏 살아온 야곱의 모든 인생이 전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사랑하긴 하지만, 결코 인정하거나 칭찬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것이 결코 잘한 일이 아니다. 이는 언약 백성의 합당한 모습이 아니란 말이다.

 

혹시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위골시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고관절이 위골되면 사람의 상체를 지탱해주고 하체를 연결시켜 주는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야곱은 더 이상 하나님을 대항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께 항복하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혹시 우리도 하나님이 치셔야만 할 허벅지 관절이 남아있지 않은가? 내 욕심, 내 인간적 이기심과 자존심과 이성적 판단, 교만과 고집과 불순종의 악한 습관들 하나님이 날 치실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워서라도 이기고자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무엇인가?

 

아직 고관절이 위골되지 않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매 맞기 전에 깨닫고 정신 차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그러나 대체로 인간은 고집스럽기 때문에 매를 맞지 않고 스스로 정신 차리는 사람이 드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 야곱과 비슷하다.

 

2. 하나님께서 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을까?

 

야곱의 고관절을 위골되었을 때 이미 날이 밝아 오고 있었고, 하나님은 가려고 했다. 야곱은 자기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매달렸다. 그때 그 사람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순순히 자기 이름을 대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v28)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어봤을까? 다 아신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물어 본 까닭은 야곱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잘 알고 있는가? 나는 누구며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야곱은 자기 이름 그대로의 인간성을 가지고, 그 이름의 뜻 그대로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발목을 잡으면서 살아왔다. 형의 발목을 잡았고, 아버지 이삭의 발목을 잡았고, 외삼촌 라반의 발목을 잡았다.

 

야곱은 지금까지 살면서 속이고 기만하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방해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은 자신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말할 때, 지금 자기라는 인간이 그런 인생을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숙연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슨 뜻일까? v28,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시면서 그 뜻까지 직접 설명해주셨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 ‘사람들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게 뭔가? 이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야곱이라는 이름과 그 의미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야곱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 위해 발목을 잡는 인생을 나타내는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사람들과 싸워서 이겼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야곱이나 이스라엘이나 그 이름의 의미가 똑같은 것 아닌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야곱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라고 하셨기 때문에, 야곱과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다른 의미일 것이다. 과연 그게 무슨 의미일까?

 

이 질문에 대한 열쇠는 호 12:3-4b에 있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앞에 부분은 겨루어 이겼다는 것이고, 뒷부분은 울며 그에게 간구햇다는 것이다. 야곱의 얍복강가의 기도는 두 파트로 나뉜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했다. 하나님과 싸우면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거짓과 술수와 책략을 동원하여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하려고 싸웠다. 야곱은 하나님과 싸우면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버티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고관절을 얻어맞고 난 후 야곱은 무력한 자가 되었다. 전혀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근본적으로 꺾어서 그렇게 고집스럽게 자기 힘과 지혜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려고 한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된 야곱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야곱은 울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한 것이다. 자기 교만과 자기 신뢰를 다 버리고 회개의 눈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였다. 자기의 힘으로는, 부패한 지혜와 속임과 술수로는 결코 그가 사모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만 그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였다. 바로 이런 모습, 이 은혜를 구하는 모습, 하나님께 간구하는 이 믿음의 태도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요, 참으로 바르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고, 또 사람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하나? 절대로 하나님과 싸우려고 대항하지 말라. 사람과 싸워서 이기려고도 하지 말라. 부부가 싸워서 이겨서 뭐 하겠나? 둘 다 패배자가 될 뿐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싸워야 한다. 믿음으로 싸우는 것은 내 욕심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이다. 내가 죽을 때 살게 된다. 내가 내려놓을 때 축복이 손에 주어진다. 내가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다. 기독교의 역설적 진리이다.

 

전에는 내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를 써가며 이겼던 삶이었다면, 이제는 다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만이 나의 축복을 보장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맡기고 기도하며 사는 것이다.

 

사역을 할 때도 내 힘과 지혜와 사랑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공급하시는 힘과 지혜와 사랑으로 사역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바르고 합당하게 하나님과 또 사람과 싸우는 것이요. 하나님도 이기며, 사람도 이기는 비결이다. 이런 믿음의 방법으로 싸울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주시고, 승리를 안겨다주신다. 우리를 축복해주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불렀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뜻이다. 야곱은 비록 다리를 절면서 얍복 강가를 떠났지만 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환하게 돋아 그를 비춰주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후반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야곱에서 이스라엘의 승리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자기가 승리하려고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인생이 된 것이다. 그의 다리를 저는 것이 그의 turning point의 흔적이 된 것이다. 우리도 오늘을 그날로 잡아 승리의 남은 인생을 살지 않으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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