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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창세기 설교 모음

창세기 39장 설교 모음 (요셉의 형통)

by Jessi J 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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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선택한 성공 /39:1-6/ 곽선희 목사

2014-11-23 23:54:43

 

MBC 문화방송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드라마였던 '성공시대'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199711IMF의 한파가 밀어닥치는 그 어려운 때에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프로였습니다. 지난 114일 박세리 선수 편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마는 주제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성공의 원동력이 무엇일까? 어떻게 해서 성공을 했나? 하는 것을 말해주는 그러한 의미 깊은 그런 테마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 다시 말해서 성공시대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그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그들은 운명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처한 처지가 숙명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것이 공통점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재능을 살렸습니다. 희한한 어떤 다른 능력 다른 환경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즉, 천재적 능력이나 높은 기술적 능력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재능을 작던 크던 그것을 다 통해서 성실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했습니다. 아니 일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 즐겼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박세리양으로 말해도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그 딸을 골프선수를 만들기 위해서 피나는 아주 엄하고 고된 훈련을 시켰습니다. 담력을 키운다고 해서 어린아이를 공동묘지에 갔다버리고 왔습니다.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메고 산을 오르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15층 아파트를 아버지는 승강기 타고 올라가면서 "너는 걸어올라 오라. 뛰어 올라 오라. 세 번씩 뛰어올라 오라." 뛰어내리고 뛰어오르고……. 이렇게 해서 힘을 키웠습니다. 또 그는 아주 엄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무섭게 책망을 했습니다. 호되게 훈련을 시켰지마는 중요한 것은 이 박세리양은 골프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좋아했습니다. 내가 결혼을 한다면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가하면 그 박세리양이 제일 무서워하는 말이 뭐냐하면 "그따위로 하려면 골프 그만둬!" 그 말이 제일 무서웠답니다. 왜요?

 

골프가 즐거우니까. 그렇게 무서운 훈련을 받으면서도 골프만은 즐겁게 생각을 했어요. 그게 성공의 비결이에요. 즐겼어요. 더욱 중요한 것은 남들은 이런 사람들을 보고 성공했다고 하지만 본인들은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남들이 성공했다고 축하할 뿐이지 본인은 아니요. 왜요?

 

아직도 아니니까. 좀 더 두고봐야 할 문제니까. 이것이 복이 될는지 화가 될는지 Nobody knows. 그런 고로 이 성공이라고 하는 과정 속에서 현재라고 하는 시점을 성공의 종착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거예요. '나는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가 이렇게 부정하고 있고요. 또 흔히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분들에게 이 성공시대에 나와달라고 부탁을 했지마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절을 했습니다. "남들은 뭐라고 하는지 몰라도 나는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절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네번째는 이 사람들은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그 어려운 환경을 오히려 기회로 삼았습니다. 기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처한 이 역경 이 자체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 성공이란 소유도 지식도 지위도 명예도 아닙니다.

 

성공이란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고 어떤 지위에 올랐느냐가 아니요. 얼마나 알고 있느냐 이것도 아닙니다. 성공이란 존재의 문제입니다. Being입니다. Being에서 becoming 으로 갑니다. 그래서 되어야할 존재로 향해 가는 과정입니다.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공이란 되어지는 과정일 뿐이지 성공이란 어떤 상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성공한 자로 계속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왔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스스로 행복하냐. 그것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남이 뭐라고 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행복해야 됩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야됩니다.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어야 됩니다. 혼자만의 행복은 성공이 아닙니다.

 

삶의 가치란 오히려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올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했느냐 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또 문제 있습니다. 어떤 사람으로 남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어떤 사람으로 남느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느냐. 거기에 성공을 말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 중에 아파치족이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역사를 잘 모르지만 영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여러 인디언 중에도 아파치족은 가장 강한 그런 족속이었던 같습니다. 어느 아파치족의 추장이 나이 많아서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때 후임을 정하기 위해서 많은 시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체력·지혜·인품이 출중한 사람을 고르기 위해서 활쏘기도 하고, 말달리기도 하고, 씨름도 하고, 여러 퀴즈도 내고, 많은 시험을 거쳤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였지마는 다다 떨어져 나가고 세 사람이 남았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 하나가 추장이 될 때에 그 추장은 말하기를 "너희는 저 뽀얗게 보이는 저 높은 산정에 올라갔다가 내려 오라". 길도 없는 험한 산을 죽기살기로 세 사람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려왔는데 한사람은 산정에만 있는 특별한 꽃 한 송이를 꺾어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이 산꼭대기에 있는 꽃입니다." 또 한사람은 매끈매끈한 돌을 하나 가지고 와서 "이것이 산정에 있는 특별한 돌입니다. " 하고 내려왔어요. 산정까지 올라갔던 증거입니다. 세 번째 사람에게 "너는 무슨 증거가 있느냐?" 그러니까 "저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추장은 대노했습니다. "산정에 올라가라고 했는데 어째서 넌 그냥 내려 왔느냐!"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먼산 넘어 저쪽을 보고 왔습니다. 거기는 아주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비옥한 땅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머지 않아 저 산을 넘어 저쪽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하겠습니다.

 

아주 비옥한 꿈을 미래를 보고 왔습니다." 그럴 때에 나이 많은 추장은 "네가 다음 추장이다." 그를 임명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보다 멀리 보다 더 먼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거기에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요셉이라는 사람, 그는 성공한 사람의 대표자입니다. 그가 총리대신이 되었다고 해서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신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실했습니다. 자기 자신 앞에 신실한 사람이요. 그리고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믿어주었습니다. 진실을 믿고 그 능력을 믿어주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는 empowering leadership을 가졌습니다. 다른 사람을 신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신바람 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일하게 하고, 능력 있게 하는 empower leadership. 그래 그가 일하면서 많은 사람이 기쁨으로 힘차게 일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비록 그는 노예였지마는 정신적으로는 주인이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렸을 적에는 특별하게 유달리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노예로 팔려간 다음에는 노예 중에서도 그는 인정을 받고, 많은 사람에게 신임과 존경을 받고, 오늘 성경말씀대로 '가정 총무를 삼으니라.' '아무 것도 관계하지 않고 네 맘대로 하라.' 모든 것을 내 맡겼습니다.

 

그만큼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죄수가 되었을 때는 같은 동료 죄수들로부터 그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왕 앞에 섰을 때에 전적으로 왕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것이 요셉입니다.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인격이었습니다. 그러한 인품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성공입니다. 그는 환경과 관계없이 살았습니다. 환경이 어떻게 바뀌던 그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진실했고 성실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과거의 노예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의 과거가 어떻습니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형이 동생을 팔아먹었습니다. 그것도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노예로 한번 팔리면 일생 노예입니다. 그 자손도 노예입니다.

 

차라리 죽이는 게 났지, 그 비참한 노예……. 동생을 팔아먹었습니다. 친형이 동생을 노예로 팔았는데 이렇게 팔려간 요셉입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그 한을 생각한다면 아마 정신병이 돼 죽었을 거예요. 가슴이 터져서 죽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그는 지난날을 깨끗이 잊었습니다. 한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한이 있었던 것은 압니다. 어려운 고비를 넘었습니다. 그러나 한풀이에 남은 일생을 다 바쳐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은 한입니다.

 

그것으로 지나가야지 이제 그 한을 풀어 보겠다고 거기다가 운명을 걸어요? 또 하나의 비참한 것이에요. 지난날의 억울한 것도 억울한데, 이제 또다시 소중한 현재와 미래를 그 과거에 바쳐 버릴 것입니까? 과거 때문에 망쳐야 되는 것입니까? 요셉은 그런 점에서 훌륭합니다.

 

그 억울한 한을 품고도 자유했습니다. 온전히 자유한 심정으로 살아서 그리고 전혀 소망이 없는 노예생활에서 말입니다. , 잘해도 노예고 못해도 노예고 노예로 살다 노예로 죽을 것이요. 진실할 건 뭐 있고 충성할 건 뭐 있습니까?

 

모든 노예가 그랬듯이 그는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그에게 도덕성을 물을 필요는 없는 것이에요. 옛날부터 그런 논리가 있지 않습니까? '가난은 무죄다! 피압박자는 무죄다!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도적질 할 수 있다!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내가 좀 빼앗아도 죄가 안 된다.' 너무나도 억울함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요셉은 이 논리에서 벗어났어요. 완전히 자유했습니다. 아무 소망도 없는 노예생활이지마는 그는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실하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정체의식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했습니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설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가 용모가 아름다웠더라. 아담하였더라. 이 보디발의 이 주인의 아내가 이 남자를 탐을 냈어요. 어느 조용한 시간에 끌어들여 가지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자' 했죠. "안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안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상이니까 그 옆에 우상이 있는데, 그 우상에다가 치마를 벗어서 갖다가 덮어놓고 보라고 못 보지 않느냐고 괜찮다고. 그때에 요셉이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믿는 저런 우상은 못 보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그런 고로 안됩니다."

 

이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갑니다. 그래도 그는 성실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경건하게 신앙인의 정체의식을 분명히 하고 거기다가 운명을 걸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살든 죽든 진실할 것이요 성실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The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간단하게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십자가 앞에서 계속적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기 부정적인 생활이다. 십자가 앞에서 욕심도 버리고 질투도 버리고 시기도 버리고 절망도 버리고 명예욕도 버리고 다 버리는 거요. 깨끗하게 버려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어디까지 버렸느냐, 그것의 그의 경건이다.

 

또 하나는 신앙인의 생활이란 순례적인 것이다. 순례자를 보세요. 그는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종착지가 아닙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필그림(Pilgrim), 순례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집이 있다고 내가 오래 살 것입니까?

 

돈이 있다고 오래 살 것입니까? 이 땅은 내가 머물 곳이 아니요. 그건 분명합니다. 다 버리고 다 떠나야 합니다. 가끔 아들 딸 시집 장가 다 보내놓고 두 늙은이만 앉으니까 너무 허전해 가지고 앵앵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울긴 뭘 울어 본래 그랬던 건대요. 앞으로도 그럴 건데요.

 

인생은 나그네요. 하나의 순례자의 길을 가는 것이에요. 그런 고로 절제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에요.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욕심을 부릴 것이 하나도 없어요. 마음 둘 것도 없고요 훨훨 털고 일어서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돼요.

순례의 길을 가고있는 것이요. 하늘나라를 향해서 말입니다. 요셉은 그러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먼 길을 바라보고 오늘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오늘 본문성경에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시고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렸다 그랬어요. 이 점이 너무 아름다워요. 요셉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 집에 복을 내리신 뿐만 아니라 보디발이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우리 집에 복덩어리가 들어왔다. 저 사람 때문에 우리 집에 복을 주시는 구나. 우리 농사가 저 사람 때문에 잘되는구나. 내가 하는 일이 저 사람 때문에 잘되는 구나.' 복의 근원이 됐어요. 그런 감동을 주었어요. 그런 확신을 주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특별히 창세기 45장에 가서 그는 유명한 간증을 합니다. 형님들을 만났을 때, 형님들이 벌벌 떨며 두려워 할 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나를 팔아먹어서 내가 팔려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리로 보내신 것입니다." Not sold but sent, 나는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의 사명자의 의식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중국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군자가 가지는 수치가 있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군자오치(君子五恥)라고 합니다. 다섯 가지 수치가 있는데, 첫째는 예의를 갖추지 못하는 것, 이게 군자 수치예요. 두 번째는 마음속에 성의가 없어요. 성의가 외모를 따르질 못해요.

 

그 진실과 성의가 없는 것, 그게 군자답지 못한 거예요. 또 하나는 내실이 없는 거예요. 겉보기만 뻔지르르하고 실속이 없는 거예요. 그건 군자답지 못한 부끄러운 거예요. 자신의 역량을 모르는 것이 군자의 부끄러움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아무 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 하는 것 같은, 그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요. 군자는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아야합니다.

다섯째는 행한 일을 끝까지 이루지 못해요. 시작했으면 끝내야죠. 마지막을 잘 마치지 못한다면 그는 군자답지 못해요. 군자의 부끄러움이예요. 요셉은 시작도 좋았고 과정도 좋았지만 마지막은 더더욱 좋았습니다.

 

여러분, 그가 선택한 성공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바른 길이었습니다. 그의 성공의 길은 오직 성실함이었습니다. 신임 받는 인격이요 주도적 인격이요 그리고 결국 복의 근원이 됐습니다. 복의 근원이 됐습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성공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공을 막연히 기다리면서 오히려 성공을 역행하며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복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성공적인 길을 가게 하시고 그 어디서든지 주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의식을 분명히 하고 나 스스로 은혜에 살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은혜의 길로 인도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그런 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형통의 축복을 주소서 /39:1-6/ 유은호목사

2023-05-16 10:04:14

 

기원후 1세기초 로마의 소설가 오비디우스(Pūblius Ovidius, BC 43-AD 18)변신이야기(AD 8)라는 소설을 섰습니다. 변신이야기윌계수가 된 다프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의 최고의 신 욥피테르의 아들 아폴로는 아름다운 다프네를 보자마자 일방적으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폴로는 다프네에게 내가 그대를 뒤쫓는 것은 사랑 때문이오라고 하면서 다프네를 뒤쫓았고, 다프네는 도망쳤습니다.

 

아폴로는 다프네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은 최고신 욥피테르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노래와 악기를 잘 연주하며, 의술을 발명하고, 약을 만드는 기술도 가지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다프네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겁이 나서 계속 달아났습니다. 마치 이 장면은 사냥개가 토끼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빠른 발로 먹이를 뒤쫓고, 토끼는 살기 위해 줄달음치는 장면과도 같았습니다.

 

아폴로는 다프네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바싹 달라붙었습니다. 이제 달릴 힘조차 없는 다프네는 안색이 창백해 졌습니다. 그 순간 다프네는 너무 급해서 아버지 저를 도와 주세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다프네의 가슴위로 엷은 나무껍질이 덮였고, 머리카락은 나뭇잎으로, 두 팔은 가지로 자랐습니다. 발은 질긴 뿌리로 변했습니다. 얼굴은 [월계수]나무 꼭대기 줄기(우듬지)로 변했습니다. [다프네는 월계수 나무로 변해서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오비디우스/ 천병희 옮김, 변신이야기(파주: 숲출판사, 2017(2), 49-55.).

 

이 작품은 인간이 원하지 않는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리를 묘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언제나 안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삶에는 위험과 위기도 함께 있습니다. 이 위험과 위기에서 벗어나는 삶이 형통한 삶입니다.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432절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 하나님이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48:15)”고 말씀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지켜주실 때 모든 위험과 위기를 건너고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새해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해 주셔서 모든 위험과 위기를 건너고 형통한 축복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요셉은 바로왕의 신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리게 됩니다. 요셉으 노예로 팔려다니는 인생의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 바로 전에는 요셉은 형들의 모함으로 구덩이에 빠져서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요셉을 지켜주셔서 구덩이에서 죽지 않고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노예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어린 요셉이 부모님에게 칭찬을 받으며 살 때와 비교한다면 청년 요셉의 인생은 위험과 위기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 선교사로 계시는 동기 형님이 계십니다. 그 부인 선교사님도 같은 동기입니다. 신학대학 동기 부부입니다. 그 동기 형님은 보통 신학대학에 들어오는 나이보다 여섯 살이나 더 많아서 들어왔습니다. 왜 그렇게 늦게 신학대학에 들어왔냐고 물어보았더니 20대 초반에 몸이 아파서 몇 년동안 병원에 입원을 했었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회복 될 것 같지 않은 병에 걸려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같이 병을 치유받고 신학대학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동기 사이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선교사님의 부인도 동기였는데 그분은 믿음 좋고 인기가 많았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남편 선교사님은 나이도 많고 가진것도 없고 크게 내세울 것도 없는 분인데 두 분이 결혼을 해서 주위에서 부러움을 많이 샀습니다. 지금 와서 동기 형님에게 어떻게 결혼하게 됬냐고 이유를 물어봐도 자기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 동기 형님은 인생의 젊은 날에 고난과 위기를 만났지만 하나님이 형통한 길을 주셔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믿음 좋고 인기있는 부인과 결혼도 했습니다. 그 사모님이 그 형님을 볼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고 좋게 생각하고 결혼을 한 듯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떠날 수 없는 선교의 길을 두 분이 우크라이나로 떠났습니다. 인생에 고난과 위험과 위기가 있어도 하나님이 형통한 길을 주시면 위험과 위기를 이기고 형통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위에 하나님의 형통한 축복이 늘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읽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3절에 그의 주인이 보니까 여호와께서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비록 요셉이 노예로 보디발의 집에 팔려왔지만 요셉은 더 신앙을 붙잡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보니까 요셉이 집안 일에 크고 작은 일을 할 때 요셉이 일하는 곳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일이 잘 되는 것을 목격한 것 같습니다. 주인이 볼 때도 하나님께서 요셉의 인생에 형통함을 주시는 것은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제가 아주 오래전에 T.V에서 본 미국 드라마 가운데 맥가이버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미국 첩보원 맥가이버가 천재적인 임기응변과 기지를 이용하여 수많은 일들을 해결해 나아가는 드라마입니다. 맥가이버는 작은 칼 하나와 나이프와 테이프를 가지고 다니면서 맨손으로 주위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를 사용해서 적들을 물리치고 사건을 해결하는 그런 드라마입니다. 맥가이버가 가는 곳에 해결이 안되는 일이 없이 범사에 모두 형통했습니다.

 

요셉을 묵상하다보니까 맥가이버 시나리오를 쓴 작가가 혹시 요셉을 모델로 해서 이 극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새해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셉과 같이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주셔서 여러분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여러분이 가시는 곳마다 어려운 문제들이 모두 해결 되어 다른 사람들이 볼 때도 어떻게 저 사람은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는 지 여러분을 보고 하나님이 저 사람과 함께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정도로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주인 보디발이 요셉을 자기 집의 총무로 맡기고 자기의 소유를 요셉에게 맡기고 모든 것을 관리하게 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 온 사람입니다. 그런 요셉에게 집안의 모든 소유를 다 맡기고 관리를 할 만큼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축복을 하시니까 요셉이 자신의 소유를 맡아서 관리를 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인생을 형통하게 축복을 하시니까 요셉이 노예로 팔려 온 집에서 인정을 받고 가정의 총무가 되었습니다. 새해에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형통한 축복을 주셔서 여러분이 어느 곳에서 일하시든지 인정을 받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영락교회를 세우신 고 한경직(韓景職, 1902-2000) 목사님이 1929년 미국에서 유학을 할 때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당시에 폐결핵에 걸리면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병을 치료 받았습니다. 1933년 한경직 목사님이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위의 동료들이 한국 기독교회의 중심지인 평양에서 목회를 하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한경직 목사님의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평양에서 목회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서북쪽 끝 압록강변의 신의주에 있는 한 작은 시골 교회의 나이가 많으신 장로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한경직 목사님에게 우리교회는 예배당도 없고, 낡고 작은 사택밖에 없지만 부임해 주기를 부탁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신의주 교회(2교회)로 부임했습니다.

 

그곳에 가셔서 하나님이 형통한 축복을 주셔서 예배당도 짓고, 크게 부흥을 했습니다. [훗날 한경직 목사님은 북쪽에 공산당들 때문에 남쪽에 내려와 영락교회를 세웠을 때 북에서 내려온 많은 사람들이 영락교회에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희생정신을 가진 겸손한 한경직 목사님에게 하나님께서 형통한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자기들도 한 목사님 곁에서 하나님의 형통의 축복을 받고 싶어서 였을 것입니다.] (한경직, 한경직 구술 자서전(서울: 두란노, 2010), 182-189, 216-233.).

 

오늘 본문 5절을 읽겠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자기 집 소유를 맡은 총무로 임명한 때로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습니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잘 믿으니까 구덩이에서 죽을 뻔 했을 때도 살려주시고,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 와서도 가정 총무가 되고 요셉 때문에 그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훗날에는 애굽의 총리도 됩니다. 나 한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으면 내가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가족과 주위의 사람들이 복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새해에는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을 잘 믿어서 여러분 개인이 형통한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으로 인해서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어떤 성도가 형통한 축복을 받는 지 많이 보아왔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가진 성도는 위험과 위기가 와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위기를 넘기고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새해 여러분 모두 요셉과 같이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믿으셔서 모두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우리 모든 성도가

요셉과 같이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믿어서

새해에 어떤 위험과

위기가 닥쳐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39:1-6

2023-03-18 00:08:30

 

요셉이 형들에 의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서 오늘 본문 말씀에 와서 보면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을 보면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고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그러자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샀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 3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요셉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을 보았습니다. , 여호와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5절 말씀에 보면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할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겼습니다. 주인이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했습니다. 주인이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모든 소유를 주관하게 할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본문 6절 말씀에 보면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는 말씀은 본문 2절 상반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라고 했습니다. 또 본문 3절 상반절 말씀에 보면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언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습니까?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할 때입니다.

즉 요셉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평안할 때도 함께하시고, 요셉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집에서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평안히 살 때도 함께 하시며 꿈을 두 번이나 보여 주셨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하며 고난 당할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채색 옷도 입지 못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아버지 집에서 먹던 집밥도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과 평안할 때도, 고난 당할 때도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본문 뒤에 있는 말씀에 보면 요셉이 감옥에서 생활할 때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계셨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집에서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살 때도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하며 고난 당할 때도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본문 뒤에 9절 하반절 말씀에 보면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처럼 평안할 때도, 고난 당할 때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는 말씀은 본문 2절 중반절 말씀에 보면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또 본문 3절 하반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인이 여호와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습니다.

 

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면서 요셉이 하는 일을 도우시고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형통한 자가 됩니까?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형통한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형통이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자라크라고 하는데 뛰어넘다 건너가서 번영하다는 뜻입니다.

 

즉 인생의 장애물을 뛰어넘어서 번영의 길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인생의 고난을 건너서 번영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형통이라는 말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모든 일이 잘되고 잘 풀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형통 자라크는 인생의 장애물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고 잘 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형통한 자가 됩니다. 요셉은 어려움을 극복하게 나갔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갑자기 종노릇하게 되었으니 적응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몸은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마음은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또 생각해 보십시오. 누명을 쓰고 감옥 생활할 때에도 얼마나 억을 했겠습니까? 감옥 생활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요셉은 어려움을 극복해 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해 내고,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인생의 어려움은 누구나 겪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번 여름에는 수도권에 집중호우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피해를 본 사람들도 많고 생명을 잃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집중호우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에게도 쏟아지고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사람에게도 쏟아졌습니다.

 

인생의 고난도 그렇습니다. 인생의 고난도 누구에게나 오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하고 형통한 자가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고 형통한 길로 나아가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는 말씀은 본문 4절 말씀에 보면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라고 했습니다.

 

또 본문 6절 말씀에 보면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소유를 요셉의 손에 위탁했습니다. 주인이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대단한 신뢰입니다.

 

생각해 보면 보디발의 집에는 다른 종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오래된 종, 나이 많은 종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 총무로 삼았습니다. , 보디발의 집에는 소유도 많았을 것입니다. , 가축. 그리고 돈다발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다 맡겼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요셉이 정확하게 일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을 보고 여호와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면

절망을 합니다.

원망을 합니다.

신세타령을 합니다.

자포자기 하기도 합니다.

술독에 빠져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이 꿈을 이루실 줄 믿고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현재 주어진 일이 비록 종노릇하는 일이라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의 신뢰를 얻어 형통한 길로 나아가는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사람의 신뢰를 얻어 형통한 길로 나아가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는 말씀은 본문 5절 말씀에 보면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할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라고 했습니다.

 

요셉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습니다.

 

요셉을 위하여보디발을 위하여가 아닙니다. 요셉을 위하여 입니다.

 

요셉은 요즘 말로 하면 복덩이입니다. 복덩이가 굴러들어왔습니다. 성경적인 말로 하면 복의 근원입니다. 요셉으로 인해서 보디발의 집에 복이 굴러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은 복덩이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 되어 복의 근원이 되는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실패같은 성공 (1) /39:1-23/ 김형익 목사

2021-05-05 06:04:38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아마 성공이 실패처럼 보일 때가 아닐까요? 결국 그리스도인은 두 개의 시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현실의 눈과 믿음의 눈입니다.

 

성공이면 성공이고, 실패면 실패지 실패 같은 성공이 어디 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믿음의 눈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질문입니다. 요셉의 삶은 바로 이 문제를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요셉이 족장이었던 아버지 야곱의 특별히 사랑받는 아들의 자리에서 형들의 미움을 받아 결국 애굽으로 팔려가 보디발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로의 시위대장의 집의 노예로 다시 팔렸다는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자고 했던 것은 낮아짐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놀라운 시작을 예고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저 낮아짐, 한 번의 낮아짐 자체가 이제 바로 뭔가가 시작되겠구나 라고 기대를 하게 만들고 또 즉각적으로 뭔가 신분 상승이나 연봉의 증가나 하는 식으로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꼭 그렇게 우리의 시간표를 따라서 우리의 기대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어렵게 하는 것이 이런 문제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때가 우리의 때와 다르고,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과 다른 것 말입니다. 우리가 배운 원리 하나를 가지고 대입하고 맞춰보면 꼭 그렇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할텐데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하나님의 두려울 정도로 자유로우신 주권과 선택을 우리의 얄팍한 신학적 지식이나 논리 속에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릅니다. 요셉은 이것을 참 놀랍게 보여주는 한 인물입니다.

 

1. 낮아짐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놀라운 시작을 예고한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의 명제를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낮아짐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놀라운 시작을 예고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줄거리를 전체적으로 잠깐 살펴보지요.

 

A. 족장 야곱의 사랑받는 아들에서 애굽인의 노예가 팔리다(1).

요셉은 사랑받는 왕자 같은 자리에서 애굽인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엄청난 변화인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더 이상은 내려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어느 정도 그의 예상은 맞아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보디발은 그를 인정하여 집의 모든 일을 책임맡는 집사와 같은 자리로 그를 임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자체도 놀라운 성공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애굽 사람의 노예였지, 결코 이전의 영광을 누릴 수는 없었습니다. 결코 우리는 이것을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B. 누명을 쓰고 죄수로 감옥에 들어가다(19,20).

인생이란 것이 이렇게 한동안 잘 나가는 듯 하지만 곧 암초를 만나게 되고는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계속 젊은 요셉에게 추파를 던졌고 결국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왔던 상황보다도 더 악화되었고 요셉은 더 낮아졌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꼬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누가 보아도, 요셉의 삶은 정말 비참한 삶이었고, 정말 안 풀리는 삶이지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이 이렇다고 느끼신 적은 없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때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본문을 통해서 하고 계십니다.

 

2.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형통함’(성공)의 의미

많은 사람은 인생을 형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집들에는 가화만사성같은 액자가 걸려있는 것을 쉽게 봅니다. 집은 화목하고 만사를 성취하고 싶다는 말이지요. 만사형통이란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마 저의 할아버지도 그런 뜻에서 제게 형통할 형자를 주신 것 같습니다. 게다가 더할 익이니까, 말하자면 제 이름 뜻이 만사형통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서도 만사형통을 원하지 않는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에서, 또는 하나님께서 형통함 또는 성공이라고 말씀하실 때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A. 형통함은 세상적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다(2,3,23,21; 29:9; 1:7).

본문은 유독 형통함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합니다. 2, 3, 그리고 23절에 그 단어를 쓰고 있는데 거기마다 형통함을 설명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형통함이 내가 내 실력으로 이루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형통케 하신다는 개념입니다(3,23). 그러나 세상적 형통함의 개념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형통했다고 한다면 요셉이 종의 자리에서 풀려나고 애굽에서 자수성가하여 성공했다고 할 때 세상은 형통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가 앞서 간단하게 39장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았듯이, 요셉이 종이 되고 또 누명을 쓰고 감옥을 들어가는 모든 상황에서 형통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 보자면 나중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요셉이 형통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장면에서는 형통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고 여기 요셉이 한참 낮아지고 억울함을 당하는 장면에서 성경은 그가 형통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성경에서 형통하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형통함이란 개념을 사용하시는 의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개념으로 보자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삶을 사는 부자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유명한 자와 힘있는 자는 다 형통하지 못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형통함의 기준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2)라는 표현을 성경이 사용할 때 단순히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집에 거할 때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보다 인격적이고 친밀한 함께 하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모든 거듭난 신자들과 함께 하시고 결코 그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고 모든 불이익과 손해를 감당하면서도 그분을 마음 중심으로 사랑하고 살아가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함께 하신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아버지 집에 있을 때 미숙함을 드러내는 사람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놓치면 안 될 것은 그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을 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인데, 이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우리가 추측하기로는 바로 거듭남으로부터 나오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옳고 그름의 도덕적 잣대가 아니라 선과 악, 죄인식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잠시 후에 살펴볼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29: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이 구절은 어떤 의미에서 형통함을 말하고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있는 그 일을 형통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어디로 가든지형통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이 말의 뜻은 어떤 형편과 어떤 상황 속에서도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 어떤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형통함의 의미가 아니라, 형통함의 의미는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내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이것을 교회 역사 속에서 순교를 당했고 혹은 신앙으로 말미암아 많은 고난을 당하고 혹 고문을 당한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형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함께 하셨기 때문에 절망을 소망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어디로 가든지형통했던 것입니다.

 

저는 최근 새벽기도에서 욥기를 설교하기 위해서 묵상하는 가운데,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목사가 된 분인데, 루마니아가 공산화된 후 14년간 옥고를 치루면서 말로 할 수 없는 고문을 견딘 살아있는 순교자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혹독한 고문의 자리에서 그리고 홀로 독방에서 보낸 그 많은 시간 동안에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셨던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이 당하고 있던 이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표현은 이런 특별한 의미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형통함을 이런 방식으로 주시는가? 그냥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으로 하시면 좋겠는데, 그 상황에 그대로 머물게 하시면서 형통함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데에는 목적과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인데, 이로써 먼저 그 사람 자신을 훈련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장과 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깊은 하나님의 목적을알았습니다.

105: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언제까지 연단을 하십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공연히 우리를 고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고생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십니다.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애굽의 문화를 배웠고, 왕실 가까이에서 귀족의 문화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었던 기간은 상당한 기간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열 일곱 살에 팔려와서 바로 보디발의 집으로 왔고 그가 감옥에 가서 보낸 시간은 약 2년 이상이라고 볼 때, 그리고 그가 바로 앞에 섰을 때의 나이가 30세였으니까 아마 그는 보디발의 집에 10년 정도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서 뿐 아니라 감옥 그것도 특별히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서도 관리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요셉이 어찌 꿈만 가지고 애굽이라는 큰 제국의 총리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비록 고생스러운 과정이기는 하였지만, 거기서 애굽의 문화를 익히고 특히 귀족 문화를 배우게 하셨고 관리 능력을 길러주셨던 것입니다. 실로 요셉이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보낸 13년의 시간은 낭비된 시간이 아니었고, 오히려 형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가 105:19에서 여기에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는 하였을 때에 요셉 자신을 위한 것 말고 다른 하나님의 계획도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시면서 상황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웅대한 목적을 이루어가십니다. 요셉이 팔려와서 지내는 기간동안에 하나님은 야곱의 온 가정을 다루시는데 특별히 유다의 이야기가 38장에 실려있습니다.

 

그야말로 실패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팔렸지만 형통했고 유다는 그를 팔았지만 형통하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가정 전체가 거짓음모를 안고 살아가면서 형통할 수 없었습니다. 늘 죽음의 그림자가 그 집안을 덮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상황에도 개입하셨습니다. 이것도 우리는 차차 보게 될 것입니다.

 

B. 형통함은 눈에 띄는 어떤 것이다(3,5,21~23)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형통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인데, 그것은 또한 사람의 눈에 띄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3절에 보면 보디발(주인)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또 여호와께서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요셉을 주관적으로 보면서 느낀 것일 수도 있지만 성경은 더 나아가서 설명합니다. 5절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책임을 맡으면서부터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현저하게 요셉이 그 집의 책임을 맡기 전과 후가 차이가 나는 것을 보디발은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보디발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의 증조부인 아브라함 부터 시작해서 그의 조부 이삭과 부친 야곱에게 약속하신 언약입니다. ‘너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비록 요셉은 종에 불과했지만, 어디로 가든지 그의 삶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미치는 삶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었습니다. 지금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요셉이 훌륭하게 해서 이렇게 되었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증조부 때부터 약속하신 것은 얼마나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요셉의 형통함은 눈에 띄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감옥에서도 반복되게 됩니다. 감옥에서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셨다고 21절은 말합니다. 감옥의 관리책임자는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겠지만, 요셉이 특별한 신의 도움을 받는 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것은 요셉이 훌륭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올라서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란 것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얼마나 세속적 성공의 개념에 속는 것인지 모릅니다. 요셉은 죄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냥 죄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죄수였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함이었고 이 형통함은 그가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주목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입니다.

 

그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살든지 그것이 도둑질이요, 악한 일이 아니라면 그의 존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의 존재는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목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의 형통함은 감옥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그는 감옥에서조차 모든 책임을 맡는 자가 되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지, 그리고 무엇을 하시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형통하게 하시는 일에는 제한이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C. 순결을 지킨 결과는 억울한 누명과 감옥행이었다.

요셉이 순결을 지킨 결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믿음을 지키고 살려고 하다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악한 자들에게 똑같이 악으로 대하지 않음으로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는 하나님이 아시고, 또 아는 사람은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실패가 아니라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겉으로 볼 때 요셉의 인생은 점점 더 내리막길로 치닫는 것 같지만, 믿음으로 살면 살수록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상처이고 실패의 옷을 입은 영광스러운 승리인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이런 승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이런 실패 같은 성공 속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 비밀을 아십니까?

 

3.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2:1~11)

오늘 본문에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입니다.

A. 아들이 종이 되다(1).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의 자리에서 종의 형체를 가져 인간으로 오신 그 모습이 요셉의 삶 속에 깊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B. 형통한 종이 되어 온 집이 축복을 누리게 하다(5).

그는 비록 종이 되지만, 형통한 종,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종으로서 보디발의 온 집에 축복을 베푸는 통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구주로서, 온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도록 오셨습니다.

 

C. 범죄자로 여김을 받았다(20).

요셉은 죄가 없었지만 범죄자로 여김을 받은 것과 같이, 복되신 구주께서도 죄가 없으셨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내어 주었습니다.

 

D.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23).

요셉이 비록 종으로 팔려왔고, 감옥까지 가게 되지만, 겉의 모습은 실패자의 모습이었지만, 그는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신 인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지만, 나사렛의 목수로 이 땅에 사셨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형통한 종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그 손으로 성취하는 종이었습니다.

 

이처럼, 요셉의 삶의 한 장면 한 장면, 한 모습 한 모습은 얼마나 우리 구주의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자인지 모릅니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놀라운 그림자를 요셉이란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4. 적용과 교훈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A. 당신의 성공과 실패의 관점을 조정하라.

먼저, 여러분 참 성공이 무엇인가 하는 성경적 관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적 성공의 잣대로 우리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비관하거나 자만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상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적 성공의 잣대로 여러분의 삶을 평가하고 비록 세상적으로는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진정한 성공을 추구하고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세상적으로는 실패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영생하도록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하여 살아가십시오. 순간 순간을 만족하고 그저 한 평생을 위한 것만을 위해서 여러분의 소중한 인생을 다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처럼 보이는 실패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도의 소명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 같든지 실패하는 것 같든지, 자녀들이 여러분의 눈에 자랑스럽든지 그렇지 않든지,

 

여러분이 건강하든지 건강하지 않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형통한 삶을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떤 상황에 데려다 놓으시든지 여러분은 형통한 삶을 추구하십시오. 성도의 인생이 복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B.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참으라(12:1~3).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에게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의 가장 극적인 예를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의해서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실패 같은 성공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가장 비참한 자요, 우리의 믿음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극심한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던 초대교회의 흩어진 신자들을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우리의 평생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살아간다면, 이기지 못할 시험은 없을 것이며, 견디지 못할 실패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바로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의 삶이며, 영광스러운 승리인 것을 영원히 알게 될 것입니다.

 

 

실패같은 성공 (2) /39:6-23/ 김형익 목사

2021-05-05 06:08:05

 

지난 주에 우리가 상고한 말씀은 성경적 형통함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패 같은 성공은 결코 그냥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명백히 실패라고 보이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은혜의 증거를 보게되고 자신을 굴복시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형통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 그 자체가 형통함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다 실패냐?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인생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가진 기준으로 볼 때 실패가 다 실패는 아니다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관점, 성경의 관점을 취하여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여호와께서 특별하게 함께 하셨던 요셉

그리고 한 가지 제가 이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 꼭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어떻게 그 젊은 시절을 혼자서 보낼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 일곱 살에 팔려와서 애굽의 총리가 되기 전까지 노예가 되어 보낸 10여년과 감옥에서 보낸 2년 여 모두 13년 동안 그가 어떻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그 어린 나이에, 젊은 시절에 그는 오기와 복수의 칼날을 하루 하루 갈면서 보냈었다면 이해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가 어떻게 그 긴 시간을 쓴 뿌리 없이 보낼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대로 이해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는 것 밖에는 찾을 수 있는 열쇠가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을까요?

 

얼마나 그 은혜가 실제적이고 컸으면 그는 복수심을 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이해하면서 자기의 인생에 주셨던 계시로서의 그 꿈을 성취해 주실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신앙은 우리의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깨닫는 것?다 아는 것이 아니라?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복수심과 쓴 마음과 모든 오기를 다 녹여내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우리를 고생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었던 어떤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그 사람을 향한 우리의 적개심과 복수심을 우리 속에 쓴 마음으로 품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건이 결코 실패같은 성공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듯이 우리와 그 상황 속에서도 함께 해주셨다면,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면 우리 역시 요셉처럼 복수심과 오기를 내려놓고 갈 수 있을 것이고 또 우리의 그 고생과 실패는 실로 실패같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구하십시오.

 

오늘 이제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실패 같은 성공의 두번째 특징입니다. 첫째가 하나님과 함께 함이었다면 둘째는 부정적 의미로 죄와 함께 하지 않는 것임을 성경은 같은 본문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2. 형통함은 죄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10).

신자의 삶이 순탄하고 죄가 멀리서 그를 보고 피해가는 삶이 아니듯이, 요셉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집안의 전권을 다 맡기고 다만 자기 식료 외에는간섭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6). 이때 본문이 덧붙이고 있는 것은 요셉이 정말 잘 생긴 미남 청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음에 하려는 이야기가 연결되는 고리가 있습니다.

 

A. Mrs. 보디발 스캔들(6~18)

바로 이 때 터지게 된 사건이 Mrs. 보디발 스캔들이었습니다. 요셉은 나름대로 성실하고 지혜롭게 일을 해서 보디발의 집에서는 안정적 위치를 확보하기에 이르렀고 시간도 꽤 많이 흘러서 10여년 가까이 되었을 때입니다. 요셉은 이제 20대 후반의 청년이 된 것입니다. 오랫동안 요셉을 지켜보던 보디발 부인은 드디어 어느 날 요셉을 유혹하였습니다.

 

요셉은 분명하게 그녀에게 말합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8,9).

 

여러분, 여기서 이 요셉의 말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요셉에게 주인이 분명하게 금한 것은 그의 아내였다는 것입니다. 앞에 6절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는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식료는 바로 자기 아내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유할 수 있는 것이거나, 관리를 맡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보디발 한 사람과만 관계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i. 죄의 끈질김(10a)

비록 요셉이 이처럼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지만 보디발 부인의 유혹은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10절에는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결코 한 번의 실패로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단호해도 죄는 계속해서 끈질기게 성도의 삶의 주변을 결코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일 매일을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 매 순간 순간을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사단에게는 방학도 없고, 불철주야 성도들을 넘어뜨리고자 부단히 애를 쓰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그렇고 교회를 향해서도 그런 것입니다. 요셉은 매일 이 문제를 다루어야 했고 싸워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매일 죄와 싸우고 사십니까?

 

ii. 요셉의 영(적 감)(9,10b,12)?하나님과 죄에 대한 감각

요셉이 만난 것은 결코 쉬운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혈기왕성한 젊은이였고, 그집의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말입니다. 부인의 청을 거절하는 것이 요셉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요셉이 모를리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런 상황을 만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이 내 인생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저 사람이 내 인생의 최소한 앞으로 몇년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느낄 때, 여러분은 약해지지 않습니까? 요셉이 만난 상황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결코 어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직장 보스나 어떤 사람이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의 악한 결정을 당신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분, 우리 미래를 좌우하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밖에는 안 계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 믿음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 앞에서 모든 믿음을 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자기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왕 앞에서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권세를 기억했습니다. 그의 세 친구들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들 역시 자기들의 영혼을 책임지시는 하나님께 자기들의 생사를 맡겼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이런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믿음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은 자기 주인인 보디발에게 득죄하리이까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한 영적 감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살아있는 감각이고, 둘째는 죄에 대한 감각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미숙한 소년으로 처음에 등장하지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었습니다(37:2).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의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은 바로 영적 감각, 거듭난 사람에게 주시는 영적 감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을 대학으로 보내게 될 때,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한 이 세대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순결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적 타락이 심각해진 이 시대로부터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프로그램 가운데 순결서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그 프로그램을 한 아이들 가운데 결혼하기까지 순결을 지키는 비율은 그 프로그램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비율과 거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바로 요셉에게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감각과 죄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본성에 속한 감각입니다. 죄인식과 죄를 이기는 능력은 결코 프로그램으로 주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물론 거듭난 사람은 절대로 범죄치 않는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하나님과 죄에 대한 감각으로 인하여 죄와 싸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이길 수 있으며, 또 실패하더라도 주께로 돌아가 사죄의 은총을 얻음으로 회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결코 이런 순결서약 같은 프로그램을 받은 청년이 아니었지만, 그는 영적 감각으로 이 싸움을 대하였고 또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늦어도 중고등학교 때까지 분명한 거듭남의 은혜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자녀들을 기르면서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기도의 제목이요, 영적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죄와의 싸움의 문제는 비단 자녀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혈기왕성한 청소년이나 청년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이 늘 경험하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늘 매일 매순간 죄와 싸우고 살아가신다는 사실을 의식하십니까?

 

우리들 역시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을 늘 죄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으며, 특히 오늘날과 같은 시대는 과거에 비하여 더욱 더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의 도구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식의 약화이고, 그것은 죄와의 타협 때문입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리게 되면 교회는 동시에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교회가 타락하기도 하지만, 성도들의 삶이 죄와 타협해서 살아가기에 교회가 타락하기도 합니다. 사실상, 이 둘은 함께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를 잃고 강단에서 바르게 증거되지 않는다면 성도들의 삶은 힘을 잃고 죄와 싸우지 않으며 타협하고 공생관계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원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대로,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우고 사십니까?” 요셉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피흘리도록 죄와 싸우는 모습입니다. 그는 감옥에 가도록 죄와 싸웠습니다. 여러분이 죄와 싸우는 것은 어쩌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쌓아올린 모든 경건이 범죄하는 사건 하나로 다 물거품과 같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큰 죄가 아니라 작은 죄 하나로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 우리는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단 한 번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종종 보아와서 이런 이야기가 결코 낯선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죄의 무서움, 죄의 비참함을 기억하십시오.

 

iii. 상황을 만들지 않음.

요셉은 이런 영적 감각이 있었기에 첫째로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10절 하반절의 표현입니다.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 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합니까? 그래도 부인의 생각이 좀 바뀌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들어봐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요셉은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는 자리와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죄와 유혹을 상대할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첫번째 지침입니다. 대개 유혹에 굴복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은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요셉은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았고, 그녀와 함께 있지도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형통함이라면 그 여인과 함께 있지 않는 것이 또한 형통함이었습니다. 죄와 함께 하는 성공이 있다면, 거짓 위에 세워진 성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공처럼 보이는 실패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성공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여러분을 유혹하는 상황은 어떤 것입니까? 그 상황 자체를 떠나시고 만들지를 마십시오.

 

iv. 도망함.

요셉이 그 다음으로 보여준 행동은 도망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요셉이 그런 상황을 피하였지만 불가피하게 자기도 모르게 그 상황이 오고 말았습니다. 요셉이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집에 들어갔을 때 마침 보디발 부인 외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보디발 부인이 만들어낸 상황이었을지 모릅니다. 그 부인은 요셉의 옷을 잡고 늘어졌습니다. 요셉은 이러지 말라고 앉아서 사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도망했습니다. 어쩌면 요셉 자신도 버려둔 옷이 거짓 증거의 물증이 될 것이란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피했습니다. 죄를 이렇게 두려워하는 감각이야말로 오늘날 이 세상의 기준과 감각에 익숙해져서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거듭난 성도들에게 영적 감각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B. 순종이 시련을 가져오다.

결국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요셉은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유혹에 실패한 보디발 부인의 요셉을 향한 애정은 증오로 둔갑합니다. 보디발 부인은 집의 사람들을 다 불러서 인종간의 감정을 부채질하는 말로 요셉에게 누명을 씌웁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남편이 오기까지 그 증거물을 옆에 두고 있다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었다고 말합니다. 그 여인은 남편에게도 일말을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유혹을 피하고 죄와 싸워서 이긴 결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형통함일 수 있습니까? 이것이 성공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결과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유혹을 피하고 죄와 싸워서 이기는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신앙이 나에게 불이익을 주고 손해를 끼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신앙을 지키는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그렇게 살아오셨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그렇게 산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C. 보디발의 태도와 조치(19~20): 사람도 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보게 되는 것은 이 스캔들에 대한 보디발의 태도와 조치입니다. 아내의 이야기를 들은 보디발은 심히 노하였다고 본문은 전합니다(19).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가 요셉에게 노하였다고 쓰지 않은 것입니다.

 

대개 노하는 것이 어떤 인물에 대한 것일 경우에는 요셉에게 노하였다고 쓰는 법인데, 보디발은 요셉에게 노하였다고 하지 않고 그냥 심히 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 조치를 보십시오. 그는 자기 아내를 희롱한 자가 있다면 그를 누구이든지 죽일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자였습니다. 게다가 요셉은 그 집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이 자기 아내를 범하려고 한 요셉에게 내린 벌은 그냥 자기 집에 있는 궁중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집어넣는 일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비록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입니다. 보디발은 자기 아내를 알았고 요셉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비록 자신의 체면과 아내를 위해서 요셉을 감옥으로 보내지만, 그는 적어도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Mrs. 보디발 스캔들의 진상을 어느 정도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3.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2:1~11)

오늘 본문에서도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입니다.

 

A. 유혹을 받지만 죄를 범하지 않았다(6~12).

요셉은 유혹을 받지만 죄를 범치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시험(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를 범치 않으셨습니다.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B. 거짓고소를 당하고 누명을 쓰지만 변명하지 않았다(13~18).

요셉은 죄를 범치 않았지만 거짓 고소를 당하고 누명을 쓰게 되지만, 한 마디도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거짓 증거를 받아 십자가를 지셨지만, 털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C. 보디발은 요셉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19~20).

보디발은 요셉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보디발은 요셉이 죄를 짓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을 정죄하여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로부터 빌라도는 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19:4,6).

 

4. 교훈과 적용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을 정리합니다.

 

A.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십시오’(12:4).

오늘날 죄와 싸우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적습니다. 죄인식이 없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늘 마귀의 관찰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외가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 만큼 우리는 혼자 있을 때에도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셔야 할 것은 죄와 싸우는 일입니다. 피흘리기까지 싸울 각오로 싸우십시오. 피흘리기까지 싸우라는 말은 전쟁터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라는 말씀입니다. 전쟁터는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죄와 싸우다가 죽으면 그는 영생을 얻는 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싸워서 죽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해서 그 죄의 값은 다 치루시기 위해서 죽으셨고 이로써 죄 자체를 정복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싸우시면서 피를 흘리셨고, 조롱을 견디셔야 했으며, 죄와 싸우시면서 수치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싸우셨고 이기셨습니다.

 

여러분, 성도는 죄와 싸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죄와 싸우지 않습니다. 그는 죄의 친구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순간 여러분은 죄의 원수가 됩니다.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는 이렇게 죄와 싸우는 것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고 속으로 정직하게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께 나오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의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죄와 싸우셨고 십자가 죽음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B. 죄와 싸워 이겨서 얻게 되는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실패같은 성공이다.

요셉이 죄와 싸워서 이긴 결과는 억울한 누명과 감옥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이런 일을 얼마든지 겪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내가 죄와 싸우는 것을 못 보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내 인생의 최선을 위해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죄와 싸워 이겨서 얻게 되는 실패는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패같은 성공이며, 주 안의 형통함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 /39:23/ 주준태목사

2017-08-09 04:02:42

 

하나님이 왜 우리와 함께하십니까? 하나님이 왜 사람과 함께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첫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고 그 가운데 사람들을 지으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저는 종종 자녀를 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자녀와 대화가 됩니까? 그 대화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들의 기본적인 고백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당신께 속하였나이다 나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며 당신의 충실한 종입니다(44:5), I belong to the Lord”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둘째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이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한 다음 하나님께 받은 심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체적으로 반드시 한번 죽는다(9:27)는 것이며 또 하나는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라(6:3)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신 다음 상황이 완전히 반전됐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11:25-26).

 

과연 그날부터 예수 믿는 자에게는 완전히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체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고리입니다.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천국으로 직행합니다.

 

죽음은 천국으로의 해방입니다. 또 하나의 탈출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이 육신의 제한에서 벗어날 순간을 고대했습니다. 족장 야곱은 숨을 들이쉬면서 예언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놓으소서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49:18).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23-24).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16:22)”

 

그렇습니다. 이신론, deism은 계시도 기적도 부정하지만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고 말씀하시므로 하나님 창조사역의 연장 선상에 부활 영광의 완성이 있음을 내다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4:17아브라함이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셋째 이유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음 받은 것은 모두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풀 한 포기도, 곤충 한 마리도 뜻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볼 때 무명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유명합니다.

 

16:4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계획을 성취해 가실 것입니다.

 

요셉의 신앙인식에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 우주와 역사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나 예사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성실하게 다루었습니다. 정직하게 행했습니다. 공정하게 살폈습니다. 그래서 친위대장에게도, 간수장에게도, 바로라고 불리우는 애굽 왕에게도 신임을 받았고, 그들은 한결같이 그에게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요삼 1:12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볼 때 데메드리오는 온 교회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뭇 사람에게도 그리고 진리이신 주님께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주님의 증인 사도 요한에게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올바른 신앙인식을 가진 사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거룩한 인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은 무언가 다릅니다. “나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삽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가십니다이런 신앙고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어딘가 다른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종들에게도 주님께도 인정과 신임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요셉 같은 삶을 신앙고백으로 증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확실한 보증수표 같은 사람, 한결같이 충성된 삶, 언제든지 믿을 수 있는 푸근한 신앙인격의 사람으로 성숙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어떤 열매가 그 삶 가운데 맺힙니까?

 

첫째, 그 삶에는 보람과 가치감이 있습니다. 서울 여자들이 가장 잘 쓰는 말 중에 하나가 지겨워 죽겠다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요셉은 고생스럽고 억울한 삶을 살았지만 지겨워 죽겠다는 인상을 쓰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습니다. 그 생생한 꿈은 역경 중에서 더욱 영롱하게 빛났습니다.

 

그는 그 꿈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꿈을 거슬려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꿈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이 꿈꾸시는 바로 그 사람이다그는 삶의 보람과 가치감을 상실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소망의 빛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유와 평안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환경은 우울했지만 심령은 명랑했습니다. 돈은 없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부유했습니다. 육체는 고달팠지만 영혼은 강건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종들 중에 뛰어났고, 죄수 중에 빛났으며, 신하 중에 가장 믿을 만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여러분의 이웃에게 소망의 빛이 되시고, 맛없는 삶을 맛 있게 하는 소금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그 삶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대하 16:9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했고, 4:13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만족한 능력을 공급받았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이르소서(40:8)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41:25)”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임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고 그에게 지혜를 주시고 사람 앞에 은총을 입게 하셨습니다. 그가 구한 기도를 응답하셨고, 그가 증언한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했으며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는 한결같았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당신의 종이오니 내 생각을 주장하시고 내 말을 다스리시고 내 행동을 주관하소서. 그리하여 사람이 이기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범사에 승리하소서사실 그가 기도하는 것보다 더 강하게 주님 자신이 안타깝게 그를 주장하고 계셨습니다.

 

마음을 쓰고 계셨습니다. 그의 마음이 위로 향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안위하여 주셨습니다. 그가 손을 들었을 때 주께서 그의 손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의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항상 넘치게 채워주셨습니다. 그의 손으로 하는 일들에 형통함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함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그는 모든 일에 먼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보증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약속을 주시고 확신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습니다(4:1). 40일을 금식하신 후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긴 다음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순절의 예고와 같았습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권능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성령의 권능으로, 전도도 성령의 권능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큰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가득한 마음입니다. 요셉의 마음은 두렵고 떨리는 대신에 담대함과 여유와 평안이 넘쳤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하려고 작정했을 때 하나님은 그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하셨습니다.

 

그가 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시고 그가 구하지 아니한 것까지 주셨습니다. 19장 므나 비유에서 또 한 므나를 가지게 된 사람이 말합니다. “나에게는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주인이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간절히 원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있기를 구하는 자가 너무나 적기 때문에, 당신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여러분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신임하시기 때문에 더 많은 능력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일을 맡기시면 감당할 힘도 주십니다.

 

다윗은 그런 확신으로 가득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23:4). 이 세상의 어떤 험한 상황에서 어렵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되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내적 평안과 확신을 유지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짧은 세상이지만 주의 일에 많이 수종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의 삶에는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존중이 가득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로 유지되는 세계입니다. 정치적인 질서가 있고, 경제적인 질서가 있고, 학문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신 질서를 존중할 때 우리는 우리의 분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K. Hilty). 요셉은 형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보복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친위대장에게 억울한 매를 맞았다고 혁명을 도모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은혜를 저버린 사람이라고 해서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적 상처를 가진 채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렸습니다(8:23). 그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피난처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 붙어있음으로 치유받고 위로받았습니다.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힘을 얻었습니다(40:31). 아침 햇살 같은 얼굴을 가지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의식불명, coma 상태가 되어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짖밟히기도 하고 무시당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때는 틀림없이 오고 있었습니다.

 

30세가 된 어느 날 그는 문득 떠오르는 별이 됩니다. 애굽 총리가 된 것입니다. 그후 80년간 새로운 차원에서 그는 주님을 섬겼습니다. 110세가 된 어느 날 그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비치는 하늘나라의 별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5:24).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의 소유물로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을 바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 헌신과 드림이 너무나 귀하고 드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여러분의 삶 속에 온갖 은사와 능력과 기회를 몽땅 부어주십니다.

 

삶의 보람과 가치감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모든 숙제를 감당할 만한 만족스런 지혜와 넉넉한 능력을 베푸십니다. 때가 되면 높여주십니다. 큰 평안으로 지켜주시다가 하늘에서 큰 상급을 안겨주십니다. 부디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복락을 누리십시오.

 

prayer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 분명합니다(3:5). 자나 깨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내가 무의식, coma 상태에 있을 때도 거기 주의 명령이 있는 줄 믿나이다. 주와 함께 깨어 있게 하소서. 주와 함께 더 많은 일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주님이 함께하시는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옥에 갇혔으나 형통한 사람 청년 요셉 /39:19-23/ 이상호목사

2017-02-24 10:27:23

 

사람들은 하는 일마다 형통(亨通)하기를 기대합니다. 형통(亨通)의 사전적 의미는 "온갖 일이 뜻대로 됨"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업이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계획하는 대로 일이 척척 진행되어서 크게 성공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또한 가정이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은 공부 잘하고 남편은 돈 잘 벌어오고 건강하게 살기를 소원합니다. 젊은 청년들은 사랑에 형통하기를 기대합니다. 능력있고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서 헤어지지 않고 사랑에 골인하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이 모든 일에 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작한 사업이 불경기를 만나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빚만 늘어나는데 형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정이 불화하여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속썩이고 남편은 남편대로 술먹고 부부싸움이 끝일 날이 없는 가정을 형통한 가정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실패하여 자신감을 잃은 청년을 보고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것이 형통이지, 모든 일이 뜻대로 안되는 것을 형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형통의 상황과는 전혀 반대의 사람을 가리켜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청년 요셉입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배다른 형제들의 질투와 시기 속에서 어렵게 자랐습니다. 결국 형들의 미움이 극에 달하여 자신을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자신을 끔찍히 사랑하시던 아버님은 이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며 자신의 옷을 찢고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고 몸부림 쳤습니다.

 

노예로 팔려온 것도 억울한데 주인집에서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어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삶이 어떻게 형통한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39:23)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이 불통(不通)하여서 하는 일마다 꼬이고 얽혀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안되는 정도가 아니라 누명을 쓰고, 온갖 불이익을 당하고 있습니다. 뒤로 넘어졌는데 코만 깨진 것이 아니라 눈, , 귀 할 것 없이 모두 깨지고 찢어진 형국입니다.

 

재수가 없어도 너무 재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리시는 건지 시험하시는 건지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요셉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실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청년 요셉은 동의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며 자신을 돌보아 주신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에 보니까 요셉이 탈출하려고 노력했다는 기사가 없습니다.

 

어려운 현실에서 탈출하려고 힘만 기울였다면 보디발의 집에서 집사의 위치에 있을 때 얼마든지 돈을 훔쳐서 이스라엘로 야반도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한번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요셉은 하나님이 뜻이 계셔서 자신을 인도하고 있음을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어떤 곳에서도 일하며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스스로를 수양하고, 연마하며, 신앙을 키우는데 전력하였습니다. 그렇게 13년이란 세월을 보냈습니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관원장을 통하여 바로에게 불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한순간에 일약 애굽의 총리로 임명되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을 세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41:39~41)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동안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하는 일마다 불통하여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서 젊음을 다 보내는 처량한 신세의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리지 않았다면 오늘의 영광은 없었을 것입니다. 보니발 아내에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총리가 되는 길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형통케 하신 것이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성도님들의 삶은 어떠하십니까?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십니까? 하는 일마다 형통하지 못합니까? 가정이 불화하고 어렵습니까? 믿음의 눈으로 보시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님들의 어려움을 통하여 기적의 길로 이끌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어려운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은 무엇인가 훈련하시기를 바라십니다. 믿음의 훈련, 기도의 훈련, 희생의 훈련을 시키기 원하십니다.

 

 

청년 요셉은 항상 충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에게 팔려왔을 때도 요셉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신앙은 더욱 커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보디발은 이러한 요셉을 주목하여 본 후 자신의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요셉이 평소에 자신을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연단 받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보디발의 아내 사건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하나님께 득죄 할 수 없다"는 신앙으로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혈기가 가장 왕성할 사춘기 때 아름다운 주인의 아내가 유혹하는 것을 거절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요셉이 늘 자신과의 싸움에서 영적으로 무장되어있지 않았다면 결코 이길 수 없었던 시험이었습니다.

 

정욕에 넘어가 미모에 유혹당하지 마세요. 젊어서 여호와 하나님, 창조자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젊음을 승화시켜 하나님의 뜻에 맞춰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훈련시키기 원하십니다. 독수리가 자신의 새끼를 모질게 훈련시켜서 훌륭하게 키우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기의 백성을 연단하여 강하게 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요셉을 보면서 그 어려운 시련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이기는 자에게 주는 약속이 많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첫째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먹게 하리라" (2:7)

 

 

 

 

둘째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2:1)

 

 

 

셋째는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주시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2: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넷째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다섯째 이기는 자는 생명책에 이름이 분명하게 기록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5)

 

 

 

이 외에도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시련과 시험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충성하고, 최선을 다하여 신앙생활에 임해야 합니다. 느긋하게 신앙생활하면서 이기기를 바라는 것은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 걸어가면서 1등 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요셉은 최선을 다하여 모든 시련을 이겼습니다.

 

 

 

하나님이 시련을 주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우리는 요셉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 요셉에게 주신 시련의 목적은 바로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요셉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을 만났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45:5)

 

 

 

하나님이 자신의 종을 훈련하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노아가 일백년 동안 멸시와 천대 속에서 방주를 지은 것도 생명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연단 받은 것은 생명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엘리야가 36개월 동안 광야를 유리하며 방황한 것도 생명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거지처럼 살았던 것도 생명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온갖 시련과 고통속에서 결국 십자가를 지신 것도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의 모든 고통과 시험과 연단과 고난 뒤에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항상 숨어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생명을 구원하는데 부름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극복했다는 사실입니다. 불평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자 힘썼습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왔을 때 무슨 생각이 앞섭니까?

 

이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슨 역사를 이루시려는가 하는 믿음이 앞섭니까?

 

아니면 무조건 불평과 원망부터 앞섭니까?

 

 

 

요셉의 고난은 요셉 자신의 생명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난은 자기가 사랑하던 가족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살렸고, 주변 국가들을 살렸습니다. 요셉의 고난을 통과하는 믿음이 없었다면 칠년 동안의 흉년으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고난은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우리들의 고난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무엇 때문에 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까? 무엇 때문에 내 가정이 화평하지 못합니까? 그 모든 어려움을 통하여 기도의 사람, 충성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여러분은 깨닫고 계십니까?

 

 

우리들의 삶은 유한합니다. 이세상의 안락한 삶에 푹 빠져서 영원한 생명을 잃을 것이 두려워 하나님이 여러분을 훈련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독수리처럼 둥지에 가시를 집어넣어 스스로 둥지를 박차고 하늘을 날도록 훈련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지십니까?

 

 

고난 뒤에는 반드시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형통해서 감옥간 요셉을 바라봅시다. 요셉을 감옥에 보내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슬픔이 위로 될 것입니다.

 

인자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요셉의 고난을 통하여 요셉을 훈련시키시고 형통케 하셨던 것처럼, 우리 청년들에게 고난을 통하여 형통케 하시는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 생명을 구원하고, 이기고 또 이기는 역사가 바로 나 자신과 우리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충만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dmin

 

 

당신에게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39:21-23/ 오주철 목사

2016-04-05 10:56:50

 

어느 날 자동차를 타고 가던 맹구가 정신병원 앞을 지날 때 타이어에 펑크가 났습니다. 그 바람에 바퀴를 지탱해주던 볼트가 풀어져 하수구 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맹구는 속수무책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신병원 담장 너머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환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세요!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남은 세 바퀴에서 볼트를 하나씩 빼서 펑크난 바퀴에 끼우고 카센터로 가세요."

맹구는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당신 같은 분이 왜 정신병원에 있나요?"

그러자 그 환자가 버럭 화를 내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야 임마! 나는 미쳤기 때문에 여기에 온 거지, 너처럼 모자라서 온 게 아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왜 여기에 왔을까요? 우리는 모자라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미쳤기 때문에 왔습니다. 나를 강권적으로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기 때문에 여기 이 자리에 왔습니다. 오늘 여기, 이곳 주님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간에 아주 아름답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제가 죽은 자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은 유가족에 대해서 결례가 되기 때문에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천하에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분명히 죄악입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천국에 갔을까요, 지옥에 갔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합니까?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자살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분명히 잘못된 자기 이기주의의 극단적 행동입니다.

 

이 같은 극단적인 자기 포기는 살아있는 가족들과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런 죽은 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결코 바른 신앙적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의롭지 못한 죽음, 극단적 이기주의적인 자기 포기에 따른 이런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비슷한 이야기도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덕이 되지 않고 은혜가 되지 않는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이야기는 우리의 거룩한 영적 흐름을 방해할 뿐이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복음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만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에 부드러운 눈으로 한 번 옆 사람을 가만히 보시기 바랍니다. 부드러운 눈으로 세상을 한 번 보십시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눈인사를 좀 하십시오. 부드러운 눈으로 옆 사람들을 한 번 보십시오. 이 아침에 강하게 우리들의 심령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 모질고 못되고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고 부딪히는 사람들이 다 못되고, 다 나쁘고, 모두가 자기 이기주의적인 사람들만은 아닙니다.

아직도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아직도 이 땅의 사람들은 내가 판단하고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망망한 대해에서 난파하여 표류하는 배를 본 적이 있습니까? 왜 표류합니까? 엔진이 고장나서 그렇습니다. 엔진만 고장나지 않으면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다시 여호와의 신으로 권능의 채움을 받으십시오.

 

내가 여호와의 신으로 다시 내 삶에 권능의 채움을 받으리라!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모든 자기 파멸의 씨앗을 거룩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좇아 내십시오. 내 안에 있는 모든 부정과 불신과 미움과 좌절과 자기 파괴의 영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태워 버리십시오. 인생은 표류하는 난파선이나 떠다니는 뗏목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 깊은 산골을 헤치고 계속해서 나가는 생명이 있는 물고기를 보십시오. 역류하지 않습니까? 솟아 올라가지 않습니까? 방향 감각만 살아나면 뭘 해야 한다는 자기 삶에 대한 그 사명화 된 목적 의식만 부여되어 있으면, 기억하십시오. 어떤 어려움과 난관이 앞을 가로막아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놀라운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언제나 불확실한 상태에서 불완전한 사람들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내 상황이 불완전하다든가, 내 현실이 불완전하다든가, 내가 정확하지 못한 사람이라든가 그것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완벽한 조건을 갖추기를 기대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완벽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있는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당신에게 붙잡혀 순종하고 의지하는 이 한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신 역사가 내 생애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하나님이 내 삶의 증인이 되시옵소서!"

 

"나는 비록 약하나 주 예수는 강하다.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 곁에 가까이 가려네"

 

그렇습니다. 나는 분명히 부족합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내가 믿고 의지하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강하십니다. 그분은 능력이 많으십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 곁에 서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목사인 제가 여러분을 보면서 고민하는 것은 '진리를 찾을 것인가, 위로를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위로를 찾기 위해서 이곳에 나온 것은 아닙니다. 위로를 찾고 간다고 하면 그것은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네가 위로를 찾았으니 네가 자유케 하리라"는 말이 없습니다.

 

진리를 찾으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알지니, 하나님을 알지니, 그리스도를 알지니 그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진리를 찾으십시오.

 

"! 이것이로다!" 내 영혼이 깜짝 놀라서 경악하는, 내 삶이 감화와 감동으로 "이것이로구나!" 온 몸이 오싹거리는 하나님의 절대 전능에 생포되는 사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에 생포되는 사건,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어떤 진리에 눈을 뜨는 사건, 이 사건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서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농부가 작은 텃밭에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씨를 심습니다. 그 때 작은 씨를 심고 자라는 것을 지켜보고 김을 매주고 그 결실을 보는 만족! 생명을 키우는 소박한 그 자유의 맛! 현재의 위치에서 미래에 있어야 할 그 위치를 옮겨가면서 나타내는 그 자유의 감격! 이것이 농부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올 때의 발걸음과 갈 때의 발걸음이 달라지리라. 올 때의 표정과 갈 때의 표정이 달라지리라. 올 때의 눈빛과 갈 때의 눈빛이 달라지리라. 무엇보다도 올 때의 내 생각과 갈 때의 생각이 달라지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삶이 상품이 아닌 이상 어차피 완제품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우리가 늘 보는 아름다운 분재가 있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이 분재에 벌레가 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벌레를 잡겠다고 매일 비판의 약과 판단의 약만 계속 뿌리면, 꽃도 열매도 다 죽이고 결국은 나무도 죽이고 맙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를 완전하게 만들겠다고 계속해서 비판과 판단을 하면 결국 내 나무도, 내 생명도, 내 열매도 꽃도 다 죽이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한 상태, 불완전한 환경, 불완전한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됩니다. 그러므로 비판하지 마십시오. 판단하지 마십시오. 남을 비판하지 말고 나도 비판하지 마십시오. 남도 판단하지 말고 나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인생을 달려갈 때 남들이 좀 어정쩡하다고 보면 어떻습니까? 좀 고개가 삐딱하면 어떻고, 손이 좀 이상하게 저으면 어떻습니까? 걸음걸이가 좀 절룩거리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완벽한 폼을 겨루는 장소가 아닙니다. 완벽한 자아를 다루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남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폼은 좀 부족해도 모든 고통을 뛰어넘은 지구력과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재미에 취하는 그런 것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나름대로 도움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좋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어도 자신의 마음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자신의 생각이 오염되면 결국은 모든 것이 오염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화가 철철 넘쳐흐르기를 축복합니다. 변화에 대한 지혜와 행동에 대한 열정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땅에는 영원한 안전지대란 없습니다. 다만 변화에 대한 끝없는 기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면 자멸하고 맙니다.

 

이 변화의 속도를 어떻게 하면 탈것인가? 빌게이츠가 말하는 빛의 속도도 결국은 변화의 속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순간 순간마다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옥토의 법칙으로 일하십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25%의 사람만이 변화의 물결을 따라갑니다. 또 그 중에 10%의 사람만이 변화의 물결을 확실히 주도합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것과 신앙을 갖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 10%의 물결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손길에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10%의 변화를 주도하는 정확한 사람만 있으면 세상까지도 뒤엎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경지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변화를 주도하는 10%의 물결 속에 들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왜 사람들은 이 변화를 저항할까? 왜 이렇게 변화가 힘든 것일까? 변화를 저항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먼저 그들은 통제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면 변화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상상력의 부족, 자기 안일에 안주해서 인간은 누구나 현상유지 본능에서 잠자려고 합니다. 귀찮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변화를 거부하고 지금의 상태에 눌러 앉으려는 이유는 변화에는 언제나 그에 따르는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버드 바겟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장애물이란 당신이 목표에서 눈을 뗄 때 당신 눈에 보이는 무서운 것들이다."

 

목표가 아닌 것은 대개 장애물입니다. 목표라는 것은 수많은 장애물 속에 우뚝 솟아 있는 푯대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과 부족함을 보기 전에 그들에게 주어진 목표를 먼저 보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것을 전제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장애물은 감사의 조건이었습니다. 땅을 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취할 것이냐의 문제로 보았던 것입니다. 놓여진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놓여진 문제 속에서 무엇을 먼저 보느냐가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입니다.

 

변화에 민감하며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문제를 장애물로 보지 않고 징검다리로 봅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문제란 모두가 장애물입니다. 그 장애물은 언제나 크고 복잡합니다.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문제는 자신을 낙담시키기 위한 걸림돌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과거에 기초하여 현실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과거가 좋았다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과거에 누리던 것들을 그리워합니다. 과거에 하던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미래에 기초하여 현실을 초월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미래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것들을 소망합니다. 그것이 지금보다 훨씬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가슴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처럼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영신제단의 성도 모두가 미래에 이루어질 것들을 소망하면서 그것을 이야기하는 꿈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는 불신앙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과거란 본질상 진노의 자녀된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의 사람들입니다. 현실을 살고 있지만, 현실을 초월하는 미래의 사람들입니다.

 

현실 앞에 닥친 장애물 너머에 있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긍정적인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장애물 앞에서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쓰신 일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의 환경이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미래가 없는 사람은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계획이 없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습니다.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없습니다.

 

변화가 없기 때문에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장애물 너머에 있는 미래의 푯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변화에 마지못해서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배움을 멈춘 사람은 성장을 멈춘 것입니다. 성장을 멈춘 사람은 이미 늙기 시작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젊다는 것입니다. 늙은 사람은 배우지 않습니다. 배울 수 없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성장을 멈춘 마음은 이미 죽은 마음입니다. 성장은 바로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변화를 위한 진실한 작업입니다.

 

변화는 논리적으로는 이해되지만 현실은 잘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가 변한다, 내 기업이 변한다, 교인이 변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낳은 내 아이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태도 하나를 바꾼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는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힘들고 어렵기에 변화가 되면 기적이 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면 살 길이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도 기적과 살 길이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화의 목적이 분명치 않을 때는 사람들이 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싫어합니다. 변화에 대한 보상이 분명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라가 왜 이렇습니까? 변화를 주도하는 지도자 집단이 신뢰와 존경을 잃어버리면 국민들은 절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안 하면서 왜 우리보고 하라고 하느냐? 지금 우리 나라는 여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기득권의 포기라든가 헌신과 협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는 그들에게서 헌신과 협조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개혁되지 않는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헌신과 신뢰와 미래에 대한 아름다움이 없으면 백성들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참여하지 않으면 기적도 보상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의 제일 큰 약점은 어떤 일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전부 구경만 하고 비판과 판단 속에 안주해 있습니다. 변화를 주도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변화를 저항합니다. 전통은 변화와 개혁을 거부합니다. 변화를 위한 수고의 두려움에 사람들은 주저하고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수고를 두려워하면 변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화에는 칭찬과 격려와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변화에 대한 과정이 이해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변화를 따르지 않습니다. 변화의 흐름에 뒤떨어지면 폐기물이 되고 맙니다.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의 결과물입니다. 변화하지 못하면 마른 가지처럼 용도 폐기가 되고 맙니다.

 

변화만이 살 길입니다. 변화만이 나라가 살 길입니다. 민족이 살 길입니다. 사회가 사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교회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변화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면 교회도 죽은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묘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으로 왔든지 하나님은 그 모습 그대로 다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대로 두기를 원하지 안는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놀이터에 옷도 예쁘게 입고, 모자도 예쁘게 쓴 4살 된 아이가 있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이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잠깐 두고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가게에 갔습니다. 엄마가 없는 사이에 이 아이는 흙을 입에 묻히고, 강아지가 눈 똥을 손에 묻히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엄마를 보자 이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울고 불며 난리를 칩니다.

 

이때 이 아이의 엄마가 오물이 묻고 흙이 묻은 이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그냥 주겠습니까? 아이의 고집 앞에 지겠습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고집 앞에 그렇게 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집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 내릴망정 절대로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주지 않습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고집을 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적 원리는 대단히 깊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샘으로 데려가서 씻기시고 새로운 옷을 입하시기 원하십니다.

 

자기 아집과 고집으로부터 탈출하면 살 길이 있습니다. 탕자가 당한 모든 고통의 원인은 어리석음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늘의 깨달음을 찾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을 때 그 모든 고난은 한 순간에 다 없어졌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내 잃어버린 아들이로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로다" 이 회복의 역사, 생명의 역사는 오늘 이 자리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변화란 회개의 내용입니다. 변화란 헌신의 핵심입니다. 변화한 사람은 헌신할 수밖에 없고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란 충성과 헌신의 최종 목적입니다. 변화를 통해 성장하면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변화했노라고 말하면서 헌신이 없고 충성 봉사가 없다면 그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헌신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충성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앞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변화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변화 받고 크게 주 앞에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개척자입니다. 여러분은 탐험가입니다. 우리가 밀림 한 가운데 놓여지면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침반입니다. 똑같습니다. 아직 탐험되지 않은 미래의 영역을 향하여 믿음이라는 나침반을 들고, 하나님의 능력에 취하여 또 변하고 또 변하며 모험해 가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가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실수가 죄가 아닙니다. 실패도 죄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보며 변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여러분 속에 신령한 것을 채우십시오.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능력에 사로잡힘 바 되는 경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힘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면 우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하여 변화의 역사와 물결과 파도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변화가 철철 넘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십대의 나이에 역사의 격동 속에서 세상 한가운데로 내버려졌던 한 젊은이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17살에 꿈을 꾸었습니다. 역사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국가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미래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중동 팔레스타인 일대에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어마어마한 비전을 주었습니다.

 

21세기 우리의 앞날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자손이 어떻게 될까? 사랑하는 여러분,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꿈이 없으면 방자해 집니다. 꿈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꿈이 없으면 답답해집니다.

 

사람은 사명적 존재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큰 것에 미치지 않으면 시시하고 작은 것들이 달려듭니다. 큰 것에 미치시기 바랍니다. 이 사명을 위하여 오늘도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사명 때문에 버림당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변화를 시도하는 꿈쟁이들을 버릴 때가 있습니다. 형제가 버릴 때도 있습니다. 가정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조직이 버릴 때도 있습니다. 깊고 깊은 캄캄한 수렁에 떨어졌습니다. 형제들이 버린 굴속에서 요셉은 무엇을 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이 가는 곳마다 사람이 돕고, 가는 곳마다 형통하는 역사가 일어났을까?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시므로 그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두 가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깜깜한 그 웅덩이 속에서 요셉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래도 변화는 일어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캄캄한 칡흙같은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이든, 사회적인 문제이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래도 내 삶에는 반드시 위대한 변화는 일어난다!"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람이 배신한 것을 하나님이 배신한 것처럼 그렇게 길길이 뛰지 마십시오. 만일 요셉이 그랬다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역사는 일어난다" 이 말을 요셉은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서 요셉은 무엇을 했을까? "그래도 변화는 일어난다" 여러분, 아무런 기도가 되지 않을 때 이렇게 외치십시오.

 

"그래도 변화는 일어난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하도록 하신 수업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이 수업을 받지 못했다면 14년간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렇게 형편없던 나라를 이끌어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변화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를 만들려고 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당하는 내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세계를 만들려는 기회라는 사실을 믿으시고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본질이 명확하게 되는 것은 변화를 행동으로 끌어내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 하나님을 믿기에 교회와 사회에서 변화의 파도를 일으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가니까 3천명, 5천명의 사람들 가운데 변화의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들어가니까 로마가 들썩들썩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저들이 변화의 능력인 성령을 힘입고 나가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묻습니다. "저들 가운데 나타나는 이 능력이 무엇이냐?" 온 도성을 소란케 하는 사람들이라고 별명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은 감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명상도 아닙니다. 신앙은 도덕 군자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윤리학자를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점잖은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거룩한 바른 능력에 취하여 이 험난한 어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증거자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윌리엄 제임스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정 위대한 발견은 태도를 바꾸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좋은 것도 나쁜 태도로 보면 나쁜 면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나쁜 것도 좋은 태도로 보면 그 속에서도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꿈의 사람 요셉이 가는 곳마다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 시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서 미래를 향한 변화의 물결이 출렁거리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며 가는 여러분의 걸음걸음마다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내 가정이 변화되고, 내 자녀가 변화되고, 이 민족이 변화되는 한 알의 밀알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한 심령 심령을 통해서 사랑하는 영신 제단에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 황무한 이 땅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dmin

 

 

잘못된 대우를 받았을 때 /39:10-20

2011-10-04 16:38:40

 

인간 사회는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씨줄 날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처를 어떻게 해야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동물의 왕국이라는 TV프로그램을 보면서 동물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정글의 법칙에 큰 관심을 기울여 보았었습니다. 동물의 세계에도 계급 차별이 있습니다. 왕초가 있고 그 다음 부하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라는 부하들은 왕초에게 도전하고 왕초는 부하들을 다스리고 억압하다가 늙고 힘이 없으면 쫓겨나게 됩니다. 쫓겨난 동물은 결국 무리에서 사라지고 혼자 외롭게 정글 속에 살게 되는데, 약육강식의 법칙이 바로 정글의 법칙입니다.

 

인간사회도 이와 같이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서로 간에 긴밀한 관계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에는 언제나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아 마음에 깊은 원한과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집단에서 쫓겨나서 멸시와 천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그것을 치유하지 못해서 슬픔을 마음속에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될까요?

 

1. 요셉이 당한 억울한 일

 

세상에 살면서 꿈을 품은 사람은 언제나 고난과 핍박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꿈을 품은 사람을 죽이려 하지만 일단 가슴에 꿈을 품은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 속에 4차원의 영성인 을 가지고 있습니다. 꿈은 3차원적인 현실을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요셉이 그와 같았습니다.

 

자신의 꿈을 질투한 형들에게 억울하게 들에서 잡혀 발가벗김을 당하고, 마른 우물에 던져졌다가 아라비아 상인에게 종의 값을 받고 팔렸습니다. 그는 17살에 아버지와 가정을 떠나 멀리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서 애굽 왕의 경비대장 보디발의 집 하인이 됐습니다. 그 집에서 일을 하는데 꿈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형통함이 따르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있으니 보디발의 집이 잘되고 모든 것이 형통하니까 요셉을 가정총무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보고 마음에 흑심을 품고 자꾸만 꾀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라 그 꼬임에 빠지지 아니하고 저항했습니다. 하루는 대낮에 종들이 모두 일하러 갔고 보디발의 아내가 나오다 보니 요셉이 대청마루에 나와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때다싶어서 달려들어 그를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놀라서 자신의 옷을 벗어놓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 순간 요셉을 흠모하던 마음이 미움과 원한으로 변한 보디발의 아내가 고함을 쳤습니다. “사람 살려라밭에 나가 있던 종들이 돌아오고 주인도 돌아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옷을 들고 흔들면서 저 놈이 나를 겁탈하러 왔다가 내가 고함을 치니까 옷을 벗어 놓고 도망쳤다라고 외쳤습니다.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변명을 할 수도 없고 본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증거로 옷은 남아있으니 무슨 말로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요셉은 평생 나오지 못하는 시위대 뜰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여전히 그 마음속에 꿈을 품고 있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요셉은 마음속에 꿈을 품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요셉이 우리보다 위대한 점입니다.

 

그 당시 감옥에 있으니 얼마나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겠습니까? 대소변을 감옥에서 해결하고 빵조각 하나 던져 주면 받아먹는 비위생적인 곳에서 2년이 넘도록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왕궁에서 사람들이 와서 요셉을 찾았습니다. 요셉이 나가니 갑자기 이발을 시키고 옷을 입히고 왕궁수레에 태워 왕에게로 갔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누구도 해석하지 못한 왕의 꿈을 듣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왕이 무릎을 치고 기뻐하며 자기 반지를 뽑아서 끼워줬습니다. 그리고 수레에 태우니 모든 관리와 백성들이 요셉에게 엎드렸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도 꿈을 버리지 않으면 꿈이 결국 성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삶이 고달퍼 괴롭고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절망 상태에서도 꿈을 갖고 있으면 꿈이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찬 꿈을 가슴속에 품고 포기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환경이 다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렵고 고통스럽고 쓴물이 넘쳐나는 환경일 수가 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 사이를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꿈을 가질 수 있도록 마련해 주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우리가 꿈을 가질 수 있는 터전이 됩니다. 요셉이 13년 동안 그 험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꿈을 버리지 않았을 때 꿈이 요셉을 이끌어 갔습니다. 요셉이 나중에 형들에게 말하기를 형들은 나를 해하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이것을 영광이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50:20)고 한 것입니다.

 

마음속에 꿈을 품고 있으면 해하려고 해도 그것이 오히려 선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헬렌 켈러는 시각, 청각의 장애를 지닌 복수 장애자였지만 장애인으로서 처음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또 작가와 사회사업가로 활동하며 빛의 천사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련은 있으되 꿈이 없는 것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시련은 다가옵니다. 헬렌 켈러에게는 눈으로 못보고 귀로 못듣는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꿈을 버리지 않으니까 꿈이 그녀를 역사에 남는 인물로 만든 것입니다. 시련은 있어도 꿈은 버리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대조동에서 천막치고 가마니 깔고 개척할 때 마음에 잊어버리지 않는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려 비쩍 마르고 옷 한 벌 겨우 입은 열네 살 먹은 소년이 한 겨울에 여동생과 함께 손을 잡고 우리 천막교회에 왔습니다. 잘 보니 그 소년은 시력을 잃은 장애인이었습니다. 눈뜨기 위해서 천막교회에 왔는데 내가 아무리 안수해도 눈이 떠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너무 불쌍히 생각돼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육신의 눈은 감겼지만 영의 눈은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더니 후에 하나님께서 그 꿈을 통해서 그 사람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나중에 대통령 참모까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강영우 박사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나는 그의 과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천막교회의 구석에서 여동생과 함께 쭈그리고 앉아있던 그도 꿈이 있으니까 그 꿈이 그를 붙잡아 이끌어서 미국 대통령의 참모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아들들은 첫째는 외과 의사로 둘째 아들은 최근에 대통령 비서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신문을 통해 보았습니다.

 

헬렌 켈러가 말한 것처럼 시련은 반드시 다가오지만 꿈을 갖지 못한 것이 참된 비극입니다. 마음속에 십자가 구속의 꿈을 담고 있으면 그 꿈이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고난은 있으되 꿈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당하신 억울한 형벌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인간을 구원하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헌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마다 남녀노유 빈부귀천 신분의 고하를 불구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423절에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좋은 일이 생겨났었습니다. 사람들은 좌절과 절망에서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하며 환영하고 고함을 치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그 발 앞에 깔고 하던 그 군중이 일주일 후에는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아라! 못 박아라!”고함을 쳤습니다. 한주일 전에 그렇게 찬양을 하던 그 군중이 순식간에 악마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높여 고함쳤습니다.

 

이 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 정말 억울하다하는데 예수님이 당한 이 사건은 형언할 수 없이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그 억울한 일을 당하고 무덤에 들어가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흘 만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무의미한 죽음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짊어진 은혜의 십자가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울하게 못 박았지만 하나님은 배후에서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청산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었으므로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죽음을 멸하시고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또 성령을 주시고 치료를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영생복락을 주시는 희망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종교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영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3. 내가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을 때

 

내가 억울하고 잘못된 대우를 받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요? 우리는 요셉과 예수님을 통해 억울한 누명을 덮어쓰고 고통을 당하더라도 꿈을 버리지 않고 희망을 갖고 있으면 반드시 영광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환난과 고통은 그 후에 영광과 승리를 반드시 가지고 오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이익 되는 것도 손해되는 것도 축복이 되는 것도 저주가 되는 것도 우리가 끌어안고 참으면 결국에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그냥 인생이 아니라 비빔밥 인생인 것입니다. 비빔밥에 보면 콩나물도 있고 고추장도 있고 파도 있고 나물도 있고 마늘도 있고 밥도 있고 온갖 것 다 있습니다. 그러나 섞어서 먹으면 맛이 있거든요. 결국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비빔밥처럼 만들어서 우리 보기에는 성공과 실패, 고통과 즐거움이 함께 비빔밥이 된 것 같아도 종국적으로는 맛이 있고 영양분이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9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하신다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좋은 일을 예비해 주십니다. 좋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결국에는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생각하고 성급하게 말하고 성급하게 행동해서 다 집어치워 버려라하며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손 털어 버리면 반드시 낭패에 처합니다. 오래오래 참고 또 오래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조금 참고 또 좀 더 참고 또 조금 더 참고 나중에 한계점에 도달할 때까지 참고 있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3절로 4절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난 뒤에는 반드시 소망이 옵니다. 좋은 일이 생겨날 것이라는 소망이 옵니다. 환난만 있고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은 죽음의 시작이지만 소망은 생명의 시작인 것입니다. 환난을 참고 기다리면 환난은 결국 소망을 낳게 됩니다.

 

영국의 격언에 보면 인내와 기다림은 희생 이상의 큰 일을 한다고 했으며, W. 벤은 말하기를 인내와 신앙은 산이라도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시인이요 평론가 사무엘 존슨은 위대한 일은 강인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내와 기다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하고 믿고 기다린다는 것은 큰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인내를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해 주시기를 기다리는지 못 기다리는지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인내와 기다림이 있으면 그 뒤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0절에 보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삶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으므로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해 가슴을 치게 될지라도, 사람들이 다 나의 억울함을 동정하지 않고 돌봐주지 않을지라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편에 서계십니다.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눈 딱 감고 믿고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2010년에 올해의 부부상을 받은 이상택 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상은 전적으로 아내 황영희 씨의 헌신과 인내 덕분이라며 모든 공을 아내에게 돌렸습니다. 두 분은 대학 동창으로 만나서 결혼해 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결혼 5년 째, 시부모님과 식구들을 모시고 살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시어머니가 아들 부부의 신앙을 미워하며 더구나 예수 믿는 며느리를 무척 미워했었습니다. 황영희 씨는 8명이나 되는 식구를 봉양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신앙생활에 대한 핍박으로 인해 더욱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황영희 씨는 시부모님은 물론 남편에게 조차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시댁 식구들을 섬겼습니다. 그녀의 인내가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내 아들이 죽어도 예수는 안 믿는다고 하던 그 시어머니가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고 며느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전도하고 섬겨준 것을 감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내의 신앙으로 온 가족을 전도한 두 사람은 이제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려고 그 꿈을 품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내하며 감사하니 결국에는 넘치는 축복으로 하나님이 채워 주시지 않습니까?

 

삶속에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 마음이 미움과 원한으로 부정적이 되면 더 큰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과 원한을 빨리 십자가 밑에서 씻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도 있지만 잊어버려야 될 것도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잊어버려야 됩니다. 남에게 받은 은혜는 물에 새기듯이 잊고 남에게 잘못 대우 받은 원한은 돌에 새기듯이 마음에 새기고 두고보자! 너 잘되는 것 한번 보자!” 그렇게 이를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도 고통스럽고 남도 고통스럽고 삶이 어둡고 캄캄해지는 것입니다. 삶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 마음이 미움과 원한으로 부정적이 되면 그것이 끝없는 시련과 고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긍정적이 되고 건강한 모습을 생각하고 꿈꾸며 믿음과 소망으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탄식은 버립시다. 차라리 어리석은 자가 됩시다. ‘저 사람이 미쳤다는 말을 들어도 좋으니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감사하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견딥시다. 그러면 좋은 날이 반드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몰이해를 당했다고 원통하고 탄식할지라도 이것을 알아주시고 합력하여 유익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기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어 우리가 좋은 열매 맺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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