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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창세기 설교 모음

창세기 11:1 - 9절 설교 모음 // 바벨탑 관련 설교 모음

by Jessi J 2025.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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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의 교훈 /11:1-9/ 김경진 목사

2023-12-21 06:34:35

 

<노아의 홍수 이후,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으며 하늘을 정복하고자 합니다.>

 

루이스 긴즈버그가 쓴 책 중에 성경의 전설들이 있습니다. 제목처럼 성경과 관련하여 유대인들 사이에 전래되어 오는 전설들을 다룬 책입니다. 내용 중에는 오늘 본문인 바벨탑 이야기도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에 등장하는 니므롯이라는 사람이 전설에서는 바벨탑을 쌓는 주인공으로 나오는데요. 성경에서 그는 시날의 네 성읍과 앗수르 네 성을 건축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 구스의 아들로 노아의 사대 손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니므롯과 그의 모사들이 바벨탑 건설을 결정하고, 시날 평야에 60만 명을 동원합니다.

 

탑을 쌓는 자들 중에는 세 종류의 반도(叛徒)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부류는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전쟁하자고 말하는 부류였고,

둘째 부류는 하늘에 올라가서 우상을 세우고 거기서 경배하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하늘에 올라가서 활과 창으로 그곳의 사람들을 파멸시키자고 말합니다.

 

탑을 건설하면서 무수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탑은 점점 더 높이 올라가게 됩니다. 이제는 밑에서 탑 꼭대기까지 오르는 데만도 일 년 정도 소요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건축자들에게는 사람보다 벽돌 하나가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떨어져 죽으면 슬퍼하지 않았지만, 벽돌이 하나 떨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통곡했다고 하죠. 벽돌을 다시 올리는 데만도 일 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목적을 이루겠다는 결심으로 결연했고, 이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계속해서 탑을 높이 쌓아갑니다. 마침내 높아진 탑 꼭대기에서 사람들은 하늘을 향하여 끊임없이 활을 쏘아대기 시작합니다. 되돌아오는 화살에 피가 묻은 것을 발견하고는 외칩니다. “우리가 하늘에 있는 모든 자들을 죽였다!”

 

여러분 중에는 성경을 읽으면서 바벨탑 이야기를 읽고, 의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셨을 줄로 압니다. 역사적인 관점을 따라 읽으신 분들은 수메르 문명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떠올리셨을 수도 있겠고요.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 발견되는 지구랏트라는 특별한 건축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관점으로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를 읽는 일은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의 흐름 속에서 보다 특별한 의미를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벨탑 사건 앞에는 살짝 긴 족보가 삽입되어 있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만, 이야기의 흐름상 바벨의 이야기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 후에 자리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12장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주목하며 방금 전 살펴본 전설을 하나의 도구 삼아 바벨탑 이야기의 의미를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시날 평야에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고자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앞서 경험한 홍수와 관련이 있겠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인류가 멸망당할 뻔한 경험이 바벨탑을 쌓게 된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심판한 하나님을 정벌하고자 합니다. 전설에 나오는 내용처럼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을 정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탑을 쌓습니다. 창세기 114절 말씀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11:4)

 

사람들이 말합니다. “탑을 하늘에 닿게 하자!” 무엇 때문입니까? 마천루 같은 큰 건물을 지어서 자랑해 보자는 의미겠습니까?

 

물론 마음 한편에는 있었겠지요. 그러나 전설과 연결해 보자면 그들 마음속에는 하늘을 공격하고자 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하늘을 정복함으로써 온 천하에 이름을 알리자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 흩어지지 않는 위대한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홍수를 예방하고자 했다면, 하늘까지 닿는 탑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전쟁을 치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탑 사건의 발단입니다.

 

이 주제는 바벨이라는 이름에도 어느 정도 암시됩니다. 흔히 바벨이라는 말은 혼잡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이해되어 오고 있습니다. 바벨이 혼잡하게 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고대 바빌론의 아카드어에서 ‘Babil’문이 있는 지역을 뜻하고, ‘bab ilu’(밥 일루)라는 말은 하늘의 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벨탑은 하늘로 올라가는 문을 뜻하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하늘로 통하는 문을 통하여서 하늘로 진격하여 하늘의 군사들을 무찌르고, 그들의 이름을 드높이고, 그들의 힘을 하나로 묶어 통일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늘까지 닿을 수 있다고 여기게 만든 위대한 문화도 있었습니다. 시날 평원의 위치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흘러내리는 하류 지역, 곧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역을 말합니다. 이 지역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바둑판처럼 평범한 대지가 끝없이 펼쳐진 것이고요. 큰 강 두 개가 흘러내리는 하류 지역인 만큼 주기적으로 흘러넘치는 홍수로 인하여 진흙이 가득한 평야였다는 점입니다. 널려 있는 수없이 많은 진흙으로 그들은 돌보다도 단단한 벽돌 굽는 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역청을 그 사이에 넣고 쌓으면 무너지지 않는, 아주 튼튼한 탑이 세워진다는 사실을 터득하고야 맙니다. 이 신문명에 그들은 환호하며 하늘을 정복할 야심찬 계획을 세워 나갑니다.

 

그런데 정말 하늘에 닿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흥미로운 말씀으로 그들의 계획이 터무니없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11:5)

 

 

<성경은 오르고 올라 하늘을 정복하려는 유한한 인간을 보시고 도리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땅에서부터 꼭대기까지 탑을 쌓아올리는 데만도 1년이 걸릴 정도로 높이 높이 올라가고 있는데, 성경은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는 것을 보시기 위하여 밑으로 내려오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자리에서는 아무리 높은 탑이어도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다닐 때 코넬 대학의 칼 세이건(Carl Sagan) 교수가 쓴 코스모스책이 발간되었습니다. 인기 있는 책이어서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읽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책에는 우주에 관한 충격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지구 은하계는 직경이 약 10만 광년(빛이 1초에 30km를 가는데, 이 속도로 장장 10만년을 가야 하는 거리)이고, 두께는 6,000광년이 되는 원반 모양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안에는 약 4천억 개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가 속해 있는 은하계 외에도 약 천억 개의 다른 은하계가 존재하며, 각각의 은하계는 또한 각각 천억 개 이상의 별들을 갖고 있다.” 가히 상상이 되지 않는 위대한 우주입니다.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칼세이건이 말한 예측도 수정해야 할 단계에 이를 정도입니다. 은하계의 숫자가 이미 관측 가능한 것만도 약 1,700억 개이며 전체적으로는 대략 2조개 정도라는 추측입니다.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얼마나 달려가야 합니까? 얼마나 가야만 인간이 우주 끝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또 얼마나 먼가요? 우리는 과연 하늘까지 닿을 수 있겠습니까?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전, 가깝게 지내던 신부님께 남긴 24가지 인생에 대한 절실한 질문들을 기록한 책이 2012년에 나왔습니다. 바로 잊혀진 질문이라는 책입니다.

 

책 중에는 이러한 작은 섹션 제목이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질까?’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전에 무신론자였던 안토니 플루는 DNA가 포함하는 정보의 내용을 연구하다가 신의 존재에 대한 견해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DNA에 내장된 엄청난 양의 정보에 경탄하며 이런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보는 것처럼 끝이 있고, 자가증식을 하는 생명체의 기원에 대해 만족할 만한 유일한 설명은 무한한 지성을 가진 설계자가 있다는 것이다.”

 

책에는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년에도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아인슈타인을 보며 한 제자가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미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데 어째서 배움을 멈추지 않으십니까?” 질문에 대해 아인슈타인이 뼈 있는 대답을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차지하는 부분을 원이라고 하면 원 밖은 모르는 부분이 됩니다. 원이 커지면 원의 둘레도 점점 늘어나 접촉할 수 있는 미지의 부분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지금 저의 원은 여러분 것보다 커서 제가 접촉한 미지의 부분이 여러분보다 더 많습니다. 모르는 게 더 많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데 어찌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설교를 들으시면서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나 우리 신앙이 반문명적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오해하시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바벨탑 이야기는 문명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하늘에 닿고자 하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언제나 큰 간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을 짓고, 범람하는 홍수를 대비하여 벽을 쌓고, 인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신약을 개발하고, 새로운 기술과 문명을 축적해 나가는 것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탑을 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인간의 죄성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이 내 손에 쥐어질 것 같지만 우리는 참으로 연약하고 모순투성이일 뿐입니다. 그저 인간일 뿐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을까요? 도시를 만들고 탑을 높이면서 홍수를 모면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토록 높이 세운 탑 주위에 지구 표면이 흔들리는 지진이 일어났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이 쌓아올린 엄청난 탑이 도리어 큰 재앙으로 다가오고 말았을 것입니다. 위대한 문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많은 사건들이 우리 곁에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과학의 첨예한 발전 속에서도 전 세계는 3년여 동안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가능하고 인권에 대한 의식이 최고조에 달한 지성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오늘, 그럼에도 우리는 지구 한편에서 수없는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어 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과연 위대한 문명이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까? 우리의 흩어짐을 면할 수 있습니까? 위대한 문명사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패권주의, 국수주의가 나타나며 전쟁이 발발되는 모습을 봅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지진과 기근과 화산 폭발과 홍수와 산불과 전염병과 쓰나미와 같은 것들이 우리 곁에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당시, 교회에서 목회할 때 만난 분입니다. 그분은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평생 의사로 계시다가 말년에는 신학을 공부하시고 목사님까지 되신 아주 훌륭하신 분이셨죠. 전문의도 여러 개 가지고 계실 정도로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당시 90세 정도가 막 지나가시는 연세였는데도 몸은 매우 건강하셨습니다. 식사할 때마다 그분이 하신 지론이 있었는데 반드시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론대로 그분은 정말 건강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함께 식사를 나눌 때에 많은 분들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데도 그분은 자리에 앉아 꿋꿋하게 음식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음식을 삼키듯이 먹으면 말리시면서 오래 못 산다고 사랑스런 말씀을 하신 귀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만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결국엔 몇 년 동안 병원에서 힘겹게 고생하시다가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인간이 참 연약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는 것,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하늘문이 되어 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는 길이 비로소 열립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정녕 하늘에 올라갈 수 있을까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12:2)

 

언뜻 보면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뼈 있는 말씀입니다. 앞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과 완전히 배치되는 말씀이기 때문이죠. 바벨탑을 지으며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다짐한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름을 내자!”

흩어짐을 면하자!”

위대한 민족이 되자!”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그의 이름을 창대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때에 비로소 그 이름이 위대하게 되고,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에 위대한 민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살아갈 때 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승리가 아니라, 그분의 손에 붙잡혀서 살 때만이 얻게 되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늘에 닿을 수 있습니까?

우리 역시 문명사회를 살아갑니다.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졌고, 발전된 의학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여러 정보에 의존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있습니까?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가면서 혜택을 받고는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큰 간격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 간격이 우리에게 증명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망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을 것이고, 병에 노출될 것이고, 혹은 사고에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게 끝납니다. 아무리 높이 올라간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종종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아래를 내려다 볼 때가 있습니다. 하늘 위에 있으면 밑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착륙할 때가 가까이 오거나, 이륙해서 막 올라갈 즈음에는 아래에 집들이 보이죠. 20층 빌딩도 보이고, 30층 아파트도 보이는데 위에서 보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듯한 평면일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유한한 현실에서 하늘과 잇닿으며 연결될 수 있을까요?

 

하늘과 땅, 땅과 하늘을 연결시켜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래 하나님과 함께하신 그분이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시기 위하여 먼 거리를 뚫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올라가려면 너무나 힘들고 먼 거리를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하늘과 맞닿을 수 있고,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바벨을 하늘의 문이라 명명하며 시날 평야의 사람들은 하늘로 올라가고자 높이 더 높이 탑을 쌓았지만, 하늘에는 오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하늘의 문이 되어 주셨고, 그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하늘로 가는 길을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문이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로 가득한 우리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이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계단을 만들고 사다리를 만들어서 죽음 너머 영생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 소망의 문을 열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 꽤 많고, 이 땅의 문명도 찬란합니다. 대단한 문명을 자랑할 만큼 대단한 인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 소망이 되십니다. 이 믿음 가지고 사순절을 기쁘게, 그리고 주님 바라보며 보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바벨의 꿈을 심판하시다 /11:1-9/ 이재훈 목사

2023-12-28 08:41:38

 

홍수 심판 이후 역사는 인간의 죄가 심판으로도 벗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창세기> 11장에 이르러 인류 전체의 타락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홍수 심판 이전과 마찬가지로 죄악이 극에 달했음을 한 사건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셨는데, 인류는 또다시 홍수 심판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112절을 보면 인구가 다시 크게 증가해서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 지금으로 말하면 아르메니아 고산 지대에 머물렀고, 고산 지대에서는 많은 사람이 살 수 없었기 때문에 평지로 내려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부만 이동한 게 아니라 당시로 보면 인류 전체가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 이동이 가능한 것은 언어가 하나였고, 단일 민족처럼 함께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성경에서는 시날 평원’, ‘시날 평지라고 밝힙니다.

 

이 지역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넓은 평야로서 과거 에덴동산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이 지역은 훗날 바벨론으로 알려질 지역입니다.

 

그들은 이 평지에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았습니다.

단지 탑만 쌓은 게 아니라 도시와 성을 건설했습니다.

고산 지대에서 살 때는 주로 나무를 사용했지만, 평지로 내려왔기 때문에 벽돌을 이용해서 건축했고, 탑을 쌓기로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 이름을 내고

 

그리고 그들이 말했습니다. ‘, 우리가 우리를 위해 성을 쌓고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자. 우리를 위해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4).

 

이 고백 속에 세 가지 죄의 모습이 표현됩니다.

 

첫째, ‘우리를 위해’, ‘우리 이름을 내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고 높이고자 했습니다.

, 우리가라는 표현은 그들이 하나 되어 움직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하나 됨이 아니라 죄로 인한 잘못된 하나 됨입니다.

 

당시 모든 인간을 하나로 묶는 죄의 무서운 힘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죄도 인간을 하나 되게 합니다.

죄가 연합해서 하나 되는 힘을 이루면 사탄이 인류 가운데 역사하는 힘이 크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제거하고, 온 인류를 무신론의 공동체로 묶고자 하는 무서운 죄의 연합입니다.

 

이 시대에도 수많은 사람이 진화론으로 창조를 부정하고, 거짓된 이념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죄의 힘을 빌려서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의 이름을 내고자 하나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이념과 제도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근 독일에서 성을 개인이 자유롭게 바꿀 수 있도록 하는 법이 통과 되었습니다.

어떤 수술 없이, 일주일 간격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신고만 하면 남성이 여성이 되고, 여성이 남성이 됩니다.

 

나라 전체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독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러 유럽 나라가 그 흐름으로 간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원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의 질서, 양성의 질서를 무너뜨림으로 하님의 존재를 거부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게 아니라 자신이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에게 있었던 동기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또다시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죄의 힘을 빌려 하나님을 대항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창조주를 기억 속에서 제거하고 싶은 사람들의 꿈입니다.

 

왜 인간은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일까요?

위대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확신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그 자체로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위대함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성취, 주어진 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이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가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못하기에 자신이 위대하다는 것을 확신시켜줄 것을 자꾸 행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바벨탑을 쌓고, 거대한 성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 닿는 탑과 의도적인 불순종>

 

둘째, ‘하늘에 닿는 탑을 쌓고자 한 것은 창조주의 영역에 도달하고자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 계속해서 바벨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 어느 기업, 어느 도시가 더 높은 건물을 세우는지를 경쟁합니다.

 

그러나 위성사진으로 보면 모두 그게 그것입니다.

땅에 있는 인간은 누가 더 높이 올라가는지를 가지고 문명을 자랑합니다.

 

그것이 기술력이자 능력이긴 하지만, 그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합니까?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여기게는 할 수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한국에 있다고 해서 나는 행복해라고 합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행복감을 줄까요?

고층 건물에 올라가면 더 불안할 것입니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이 더 불안할 것입니다.

우주를 여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인도가 달의 남극에 접촉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참 위대한 일이고, 성공적인 업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달에 오르고, 화성에 오르고, 목성에 오른다고 그곳에 하늘이 없을까요?

계속 올라가도 하늘은 여전히 하늘입니다.

 

하늘에 어떻게 닿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습니다.

 

셋째,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결의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하신 명령에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흩어지기를 거부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의 약속을 통해서 보호하시고, 보존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는데 믿지 못했기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흩어지기보다 하나로 존재하고자 했습니다.

 

고산 지대에서 평원으로 내려올 때도 같이 움직이고, 흩어지기보다 거대한 성을 쌓고 흩어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단순한 죄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반응하셨습니다.

인간들이 향하는 모습을 보고 ,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 우리가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자라고 했고,

하나님은 ,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이 쌓아 올리는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내려오셨다는 표현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시기 때문에 내려오셔야 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고,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허락 없이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내려오셨다는 표현을 쓰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높은 탑을 쌓아도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보셔야 할 만큼의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이 탑을 쌓아도 진정한 하늘로부터는 정말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벨의 꿈을 제어하고 중단시키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므로 바벨의 꿈을 심판하셨습니다.

 

 

<인간을 흩어지게 하려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한 민족으로서 모두 한 언어로 말하고 있어 이런 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 그들이 하고자 꾸미는 일이라면 못할 게 없을 것이다.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하게 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그곳에서부터 온 땅에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들은 성 쌓는 것을 그쳤습니다”(6~8).

 

인류가 흩어진 결과로 언어가 혼란해진 게 아닙니다. 언어가 혼잡해진 결과로 인류가 흩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바벨에 탑을 쌓는 그들의 꿈을 깨뜨리기 위해서 언어를 혼란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므로 점차 분열하게 되고,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위대한 성취나 도전도 하나님께 결코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흩으심으로 또 다른 심판을 하셨습니다. 죄로 결속된 하나 됨을 깨뜨렸습니다,

 

바벨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발랄입니다.

그 뜻은 어지럽혀지다’, ‘뒤범벅이 되다’, ‘혼란스럽게 되다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발랄에서 앞에 이 탈락하면서 바벨로 축약된 것입니다.

나중에 그리스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고,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언어가 혼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할 내용이 없을까 해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남승호 교수님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언어학에도 단일언어 기원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나라의 언어를 추적하면 약 7천 개가 있는데, 모든 언어의 밑바탕이 되는 하나의 일반 원리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언어학에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가설입니다.

7천 개나 되는 언어를 사람들이 노력하면 학습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혀 다른 언어인 것 같지만 보편적인 문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편적인 문법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언어를 학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하나의 언어였고, 그것이 흩어짐으로 혼란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언어는 하나였다는 보편 문법 가설도 주류 언어학에서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일반 언어학에서도 성경 말씀이 사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언어마저 진화론을 갖다 붙여서 하나의 단어 혹은 발음이 진화해서 문법적인 체계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습니다. 발생부터 언어로 체계화되는 모든 것에 진화론을 갖다 붙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오랜 세월 동안 진화론으로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한글이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발전한 것입니다.

함경도에서 이 나오고, 전라도에서 이 나오고, 점차 발전해서 한글이 나온 게 아닙니다.

 

언어학에서도 진화론을 대입해서 진화로 언어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 인간에게 능력을 주셨고, 인간들이 문법을 만들어서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흩어지게 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그 방법으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인간들이 흩어짐으로써 온 인류가 7천 개 가까이 되는 언어를 사용하고, 다양한 종족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온전히 구속하는 일>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온전히 구속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바벨의 꿈을 심판하시며 언어를 혼잡케 하신 사건과 반드시 함께 살펴봐야 할 사건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다락방에 모인 여러 나라와 민족 사람들, 바데 사람, 엘림 사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등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자신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었습니다(2:1~12).

 

여러 가지 해설이 가능합니다. 실제 그들의 체계화된 언어를 외국어로 듣게 되었다는 측면이 있고,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화란의 신학자는 이 사건을 해석하면서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원래 하나였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고도 했습니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재 되어 있는 보편적인 문법 지식에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써 자기 언어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된 것을 방언이라는 이름으로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인 역사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다시 성령의 역사로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벨탑에 내려진 심판을 회복하시는 역사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행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온 세상에 빠른 시일 내에 전파하기 위해서 이러한 역사를 일으키시기도 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흩어진 인류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바벨탑의 심판을 받아 바벨의 꿈은 깨어졌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가 진정으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바벨은 죄의 힘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지만,

이제는 성령의 힘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안티(Anti) 바벨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혼잡과 분열, 타락한 질서를 질서와 거룩한 하나 됨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죄 가운데 바벨탑을 쌓듯이 끊임없이 이 땅에 진화론, 무신론, 인본주의의 성을 쌓고 질서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창조자가 되려는 끊임없는 바벨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인간 스스로 성을 규정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바벨의 꿈입니다.

바벨의 꿈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 성령의 능력으로만 깨뜨려집니다.

 

세상의 이론과 논리로는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주인이 된다는데 무슨 말인가? 인간이 주인이 되고,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서 한다는데 왜 반대하느냐?”고 말합니다.

 

진화론, 무신론, 인본주의가 전 세계에서 제2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를 흩으시는 하나님 심판의 일종이었습니다.

죄의 힘으로 함께 모여 있던 인간들을 하나님이 거리두게 하셨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시대 바벨의 꿈을 저지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징계였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또 다시 바벨의 꿈을 이어가는 인간의 꿈을 제어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바벨탑을 만들어가는 인류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제 인류는 바벨의 꿈과 하나님 나라의 꿈 중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바벨의 꿈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여전히 기회를 주셔서 구원의 역사를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의 기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바벨의 꿈이 아닌 성령의 꿈을 좇아 살기를 축원합니다.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 /11:1-9/ 하용조 목사

2015-05-25 02:56:26

 

대홍수 사건 이후에 노아의 세 자녀는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에서 자녀를 낳았고 그 자녀들은 또 자녀를 낳아서 오늘의 인류를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1032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 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인류는 노아의 세 자녀를 중심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11장에서는 피부와 언어와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류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사는 누구든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경외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무시하며 물질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111절부터 10절까지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룹에 대해 말합니다. 바로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11절부터 32절까지로 󰡐셈의 후예󰡑들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룹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그룹은 함과 야벳 족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룹으로는 셈에서부터 아브라함까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에게서 아브라함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나오기를 원합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룹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썩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썩는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세상은 잘못된 신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룹들 가운데 함의 자녀인 구스의 계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계보 안에는 니므롯이라는 영웅이 있었습니다. 고대 역사를 보면 위대한 전사들이 세계를 지배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를 통해 역사는 지배되어 왔고 오늘날도 동일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109~10절을 살펴보면 구스의 아들인 영웅 니므롯은 시날 땅에 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땅은 역사의 기원이었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주변이며 바벨의 문화가 꽃피었던 장소입니다.

 

111절을 보십시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노아 홍수 이전에는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단어와 문법이 하나였습니다. 아마 그들은 셈족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썼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홍수 이전의 지명이나 인명이 모두 히브리어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에 하나가 언어입니다. 언어는 하나의 사상과 생각을 만듭니다. 사상이 없는 언어는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아직도 이 인간의 언어와 동물의 짖는 소리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겨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하나님을 떠나 찾은 시날 땅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는 말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거부합니다. 자꾸만 하나님을 떠납니다.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것이 있는 자녀는 부모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부모에게 가까이 가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잘못한 것이 없는 자녀는 부모를 좋아합니다. 부모를 만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죄가 없는 인간은 하나님을 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날수록 좋습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더 만나고 싶어집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까이 가고 싶고 호흡을 함께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이 두렵고 무섭습니다.

 

그가 심판하실 것 같고 비밀을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쫓아갔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어도 멀찍이 믿습니다. 교회에도 가끔 나오고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일찍 갑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회를 가깝게 하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친구가 좋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친구가 부담스럽고 오히려 세상 친구가 더 편하고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기 위해 에덴 동산에서부터 동쪽으로 가다가 만난 곳이 시날땅입니다. 처음으로 사람이 살 만한 곳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시날땅에 머무르기로 하고 그곳에서 그들의 이상 사회를 세우려는 야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여기고 살기 시작했던 곳이 바로 시날땅입니다. 바벨론 문화가 만들어 졌던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하나님을 피해서 살 수 없습니다. 하늘 끝에서도, 바다 끝에서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바벨론 문화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벽돌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토기 문화에서 벽돌을 만들어 낸 것은 천지개벽할 만큼 놀라운 사건입니다. 요즘 우리 시대의 위대한 발견은 바로 컴퓨터의 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싫든 좋든 컴퓨터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컴퓨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우리의 삶과 사고 구조를 바꾸어 줍니다.

 

벽돌을 만들게 된 사람

 

이 컴퓨터의 발견과 같이 그 당시에는 벽돌을 발견한 것처럼 놀라운 일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벽돌이 없었을 때의 사람들은 동굴 속이나 나무 위에 살거나 돌을 옮겨와서 지은 집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돌은 운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돌집에 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날 땅에서 많은 흙을 만나게 되었고 그 흙을 불에 구웠더니 아주 단단하고 쓸 만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을 발견해서 누구든지 집을 견고하게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혁명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점토로 벽돌뿐만 아니라 그릇도, 항아리도 만들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시대에 흙으로 무엇을 만든다는 사건은 문화적인 발전과 기술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자기들의 지혜와 기술로 인간의 위대함을 예찬했을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벽돌을 만든 것은 당시의 문화적인 혁명이었고 그들의 사고 구조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발견이었습니다. 벽돌을 구워 집을 짓고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항아리를 만들어 사용하는 일은 삶의 질을 높이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인간은 핵을 만들었습니다. 핵은 전력을 공급하고 인류의 복지와 평안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서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좋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쟁을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핵무기의 위협 아래 놓여졌습니다. 북한에게 미국이 벌벌 떠는 이유도 무식한 사람들이 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술 문명의 한계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벽돌 문화를 단순히 생활의 편리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벽돌 문화를 현대적으로 적용시켜 보면 과학기술 문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 생명에 도전하는 󰡐복제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기술은 엄청나게 발전되었습니다. 많은 기술들이 인간의 복지와 행복과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핵이 인간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었듯이 모든 과학기술 문명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을 종으로 만들고 비인간화하며 행복을 앗아갑니다. 자동차가 편리하고 좋지만 자동차 때문에 생기는 공해와 스트레스는 엄청납니다.

 

문명의 이기는 이기가 아니라 악기입니다. 오히려 인간을 빨리 죽게 합니다.

4절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벽돌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바벨탑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고상하고 위대한 존재가 아니고 이론대로 되는 존재도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론대로 라면 그 사회가 잘 될 것 같아 보이지만 실패했습니다. 그 이론들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악하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제도와 방법일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결국 악하게 사용합니다.

 

탑을 쌓는 이유

 

그들은 벽돌로 탑을 쌓기로 했습니다. 인간이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탑을 쌓은 이유는 첫째, 하늘 끝까지 가기 위하여 쌓자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반항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처음 뱀이 인간에게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며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이 되는 수단이라고 마귀는 인간에게 계속해서 하나님께 반항하기를 종용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반항할 때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자식이 대들 때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열매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들라 그러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속입니다. 이것이 바벨탑 사건에서 보여주는 영적 진리입니다.

 

인간의 최대 유혹은 신이 되려는 유혹입니다. 신이 되려는 유혹은 지배욕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사람들을 친구로 삼고 섬기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 위에 군림하고 싶고, 명령하고 싶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위기의 인간이 됩니다. 왜냐하면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갔을 때 조심하고 사람을 부리지 말고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치입니다. 사람의 정치는 사람을 부리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정치는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벽돌을 발견한 사람들은 인간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처럼 되자󰡑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동기는 󰡐우리 이름을 내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명해지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능 중에는 신이 되려는 속성이 있고 자기가 높아지려는 죄인의 속성이 있습니다.

 

며칠 전 정주영회장이 북한에 다녀왔습니다만, 아름다운 금강산에는 󰡐김일성 주체 사상󰡑이니 하는 글들로 도배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에 인간의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벨탑입니다. 어디든지 자기 이름을 내고 책상 위에도 󰡐회장󰡑이라는 직합을 드러내 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자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을 내자󰡑는 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좋은 말로 자신의 마음을 잘 감추고 있지만 모두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갈등합니다. 모두 자기 실속 채우기에 바쁩니다. 정의를 말하지만 자기가 권력을 갖기 위한 방법일 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세 번째,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고독함과 외로움이 있는 무서운 사회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시날땅에 왔을 때 그들이 발견한 구호가 있습니다. 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입니다.

 

인간이 발견한 구호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잘 뭉치는 사람들로 유명합니다. 무조건 뭉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뭉쳤는지, 무엇을 위해 뭉쳤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집단과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그룹이나 세력을 만듭니다. 그렇게 만든 것이 EC공동체이고 G7이며 UN입니다. 그런데 그 모임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이익만을 보호합니다. 전세계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를 도와주는 것은 자기의 나라가 살기 위한 방편입니다. 이것이 바로 흩어짐을 면하고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는 인간의 본질인 죄인의 모습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시편을 보면 󰡐하나님이 웃으시리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을 보고 하나님은 웃으십니다. 정당을 만들고 단체를 만드는 인간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은 웃으십니다.

 

바벨탑을 쌓는 일은 심각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것을 그대로 놔두면 구원의 길을 막아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바벨탑 쌓는 일을 막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의 죄를 홍수로 심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인류를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모두를 심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인간의 죄는 막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림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죄가 관영했을 때 유황불을 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왔던 것처럼 하나님이 오신 것은 기쁜 일이 아니라 죽음의 소식을 가져오는 슬픈 일이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복은 한 언어와 한 발음입니다. 홍수로 세상이 심판을 받은 후에도 언어의 복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언어의 복은 곧 의사 소통의 복입니다. 의사 소통이 되지 않으면 서로의 생각이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언어의 분열은 저주

 

부부가 싸우는 이유는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동기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지만 의사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싸우게 됩니다. 부부는 대화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하는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언어는 하나님이 주신 복이었는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이 복마저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언어의 복을 좋은데 쓰지 않고 하나님께 반항하고 자기 이름을 내고 하나님 없이 이상 사회를 만드는데 쓰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어를 분열시켰습니다.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바벨은 곧󰡐혼잡케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혼돈한 존재입니다. 역사는 혼돈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우리는 혼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질서가 생기며 대화가 생기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에는 언제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렇게 삼위 하나님이 함께 의논하십니다. 사람을 만들 때에도 󰡐우리󰡑형상을 따라 󰡐우리󰡑모양대로 만들자고 했습니다. 7절에서도 󰡐, 우리가 내려가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어가 혼잡케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많은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바벨탑 대신 한 장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다락방입니다.

오순절 날 다락방에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들에게 나타나서 사람들의 위에 임하여 있더니 성령의 충만함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새로운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언과 천국의 말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천국은 언어와 말이 하나입니다. 천국의 말은 곧 사랑이며 방언이며 기도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를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백인이나, 황인이 하나이며 무식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 하나입니다. 야만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입니다. 이방인이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한 언어, 한 영, 한 몸, 한 지체되는 것이 하나님을 믿으면 받는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마음에 갈등이 사라집니다. 부부와의 갈등, 친구와의 갈등이 사라집니다. 이 세상은 이기주의적인 집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공동체만이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한 주간을 하나님의 공동체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공동체와 다른 점과, 우리는 이 세상의 나라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는가를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생각해 보기 위해 공동체 축제를 엽니다.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결국 그들은 성 쌓기를 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바벨탑 안에서는 자신의 기술과 예술, 철학, 능력만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 물질 세계 속에서 살면 돈과 기술과 쾌락만 보입니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그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창공과 넓은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바벨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바벨탑을 쌓고 있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인간이 가야 할 길은 바벨탑이 아니라 성령이 임했던 다락방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나라와 언어와 천국이 회복될 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바벨탑을 쌓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바벨탑을 버리고

내 마음의 지성소에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이 임했던 오순절 다락방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벨탑에 내린 심판 /11:1-9/ 곽선희 목사

2014-11-19 13:09:01

 

얼마 전에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았고, 그리고 아카데미상을 휩쓸 었던 한 영화가 있습니다. 이 한편 의 영화는 하도 유명해서 아마 이 가운데 계신 여러분들도 대부분이 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제목은 '타이타닉'입니다. '타이 타닉'이라는 그 영어의 뜻도 强力無 雙, '가장 강하다'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있 었던 일이요, 역사적 사실을 극화한 것이올시다.

 

여러분, 생각을 좀 돌려서 1912년 으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 러분이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 일 겁니다. 1912년에 있었던 사건입니 다. 그때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British' 그들이 해양제국 의 명예를 걸고 영국의 영광을 만방 에 자랑하기 위해서 만든 배입니다.

 

그들의 능력, 그들의 지혜, 그들의 왕권을 다 동원해서 최고로, 최고를 자랑하는 그러한 배를 하나 만들었 습니다. 그것은 가장 호화스러운 배, 가장 큰배, 가장 튼튼한 배, 그 런 배를 만들었습니다.

 

좌우간 그 옛날인데도요, 지금도 이건 큰 겁니 다. 46,328톤 되는 배요, 길이가 259미터, 깊이가 20미터, 폭이 28미 터. 굉장한 배입니다. 이런 새로 운 배를 만들어 놓고 자랑했습니다.

 

이제 자랑하는 말을 들어보십시 다. '절대로 침몰할 수 없는 배, 입 바른 사람은 이렇게까지 말했습니 다.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 이렇게 자랑을 해요. 처음 출 항할 때에 온 세상이 떠들썩했습니 다. 그리고 이 배가 출항하면서 또 하나 기록을 내려고 했습니다.

 

그 것은 속도입니다. 대서양을 횡단하 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빨리 가 서 이 큰배가 크고 강할 뿐만 아니 라 화려할 뿐만 아니라 속도에서도 최고다 이거예요. 이 배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에 '이 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배다.' 이렇게 신문에 나 기를 바랬던 겁니다.

 

그래서 빨리 가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선주는 그 선장을 다그쳤습니다. 그냥 빨 리 가라고 최고 속도로 가라고…… 마침내 이 배는 파선이 됩니다. 산 산조각이 납니다. 2208명 중에 1513명이 이 배와 함께 수장되었습 니다. 해양 사고 중에 최고의 큰 사고였습니다.

 

, 이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배가 왜 침몰된 것 같습니까? 여기 에 메시지가 있는 겁니다. 특별히 현대인을 향한 과학을 숭상하는 현 대인, 자기 머리를 자랑하는 교만한 현대인을 향하여 메시지가 전해지기 에 이 영화는 유명해진 것이올시다. 인간의 교만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상징 적 의미와 메시지가 거기에 있습니 다.

 

본문은 노아 홍수의 이야기입니 다. 노아 홍수의 큰 심판을 기억하 고 있는 홍수 이후의 인간들이 어떻 게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직접 홍수를 본 사람은 없지만은 홍수에 대한 이야기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 의 악몽처럼 시달리고 있었던 같습 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방으로 동 방으로 옮겨가다가 시날 평지를 만 났을 때 이만하면 우리 거처가 되겠 다고 해서 거기에다가 거주지를 삼 고 이제 성을 쌓게 됩니다. 성을 쌓게 될 때에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잠재의식이 작용을 합니다.

 

'다시 홍수가 나면 어떡할까?' 이제 생각 했습니다. '홍수가 나더라도 끄떡없 는 그러한 성을 쌓자.' 여기에 탑이 라고 되어있지만은 고고학자들의 발 굴한 바를 보아도 그건 탑은 아닙니 다. 탑보다는 오히려 성입니다. 입 체적으로 만들어진 성입니다.

 

그대 로 둥글게, 둥글게 쌓아서 계속 올 라가는 겁니다. 이래서 본문에 보 는 대로 하늘 끝까지. 오늘의 상식 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구름 위 의 까지, 비는 구름에서부터 오니까. 구름 위의 까지, 하늘 끝까지 쌓아 서 설사 다시 홍수가 나더라도 끄떡 없이 안정을 유지하며 평안하게 살 아가자 이런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 앞에 합당 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여 기에 있습니다. 홍수 자체는 참으 로 비참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고 고학자들의 연구하는 대로도 그렇고 많은 학자들이 이 홍수라고 하는 것 은 이 지구 역사에 가장 큰 과학적 사건으로 그렇게들 말하고 있습니 다.

 

천지가 개벽되는 것이에요. 그 런데 이 같은 홍수라고 하는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저들이 이해했느냐는 것이지요. 홍수라고 하는 재난, 이 것만 생각하고 그 원인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이 문제입니다. 홍수로 진멸하시는 하나님이라면 홍 수가 아니면 불로라도 진멸하지, 원 인이 문제지요.

 

죄 때문에 홍수가 있었다면 죄만 없으면 되는 게 아닙 니까! 죄에서 떠나는 것이 재난을 면하는 길이지 이제 탑을 쌓는다고 되는 겁니까, 산을 만든다고 되는 겁니까, 배를 만든다고 되는 겁니 까? 노아 홍수의 원인, 도대체 그 원인으로 돌아가서 해결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재난만 면해 보려고 하는 이 얄팍한 생각이 이 같은 큰 또 다른 죄를 범하게 되었고요.

 

또 하나는 이 일을 주장하시는 것 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고로 하나 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말 씀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길이지, 이제 저들이 탑을 쌓고 그 위에 올라가 앉았다고 해결 이 되는 겁니까! 하나님이 문제지 요. 하나님과의 저들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거기에 관점을 두었어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 님 없는 불 신앙적인 안정을 꾀하려 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에 대한 믿음입니다. 노아 홍수가 끝날 때에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 여주면서 이것을 표적으로 해서 다 시는 이 땅에 물로 심판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비가 올 때마다 그들도 무지개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지 이제 탑을 쌓고 올라가겠 다는 이 미련한 생각이 얼마나 잘못 된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그 축복을 그들이 받아들이고 믿고 생각했더라면 이런 부질없는 일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걸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도 우리 인간에게 바벨탑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 세대에 바로 이 문제를 그 역사적인 그 옛 날에 있었던 바벨탑에서 다시 한번 조명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바벨탑의 의미가 뭐냐, 먼저는 이렇습니다. 공업화와 산업 화 안에 있는 인간의 교만을 말하는 것이올시다. 저들은 탑을 쌓았습니 다. 이 쌓는다는 것이 즉, 산을 만 든다는 것이고 높아진다는 것을 의 미합니다. 동시에 벽돌을 만들었습 니다. 이 보통 기술이 아닙니다.

 

저는 생각에 돌이 건축 자재 중 에 제일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 다. 그래서 돌집 하면은 ', 좋은 집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 니더라고요. 제가 이것은 만리장성 을 몇 번 가서 거기에 배운 겁니다.

 

만리장성을 보니까 옆에 쌓아 놓은 것은 돌이고요, 그 위에 풍화를 제 일 많이 맞는, 위에 깔아 놓은 것은 벽돌입니다. 흙을 빚어서 구워 만 든 겁니다. 이 돌은 좋아 보이지만 풍화작용에 약합니다. 그 결이 있 기 때문에 물을 빨아들이면서 이게 부서집니다. 그러나 벽돌은 이렇게 구워 만든 이 벽돌은 영구한 겁니 다. 정말로 오래가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평지에서 흙을 빚어서 구 워서 벽돌을 만들고 보니깐 기가 막 힌 거예요. 이것이 최고의 건축 자 재요. 이걸 가지고 저들이 이렇게 바벨탑을 쌓게 됐다. 공업화의 대 표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쌓아 올 라가는데 인간의 기술, 능력, 협동, 그리고 그 모든 능력을 다 해 가지 고 쌓아서 본문에 보는 대로 하늘에 닿도록,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지요. 아 그 집 좀 지었다고 어떻겠습니 까! 탑을 쌓았다고 문제 될 것이 없는데 하늘에 닿도록 여기에 문제 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장차 홍수 가 오더라도 문제없이 거기서 살자 뭐 그런 것 같아요. 이것은 한계를 초월하는 얘깁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 앞 에 겸손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본 이나, 능력이나, 지식이나, 지혜나 뭐 시간, 건강할 것 없이 그 무엇도 우리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 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훌륭한 학자, 하도 천재라고 하는 학자가 치매에 걸려 가지고 멍청해진 것을 보고 놀랐습 니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고장이 났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바보가 될 수가 없어요. 하루아침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 과학적 지식의 한계, 기술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한계를 모 르고 날뛰다가 지금 지구는 만신창 이 났습니다. 이 지구는 이대로 이 젠 더 존재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 다. 사람들이 하도 쑤셔 놔서요 다 못 쓰게 됐어요. 우리는 그럭저럭 살다 가겠습니다만은 다음 세대 사 람들 한심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려 는지…… 인간의 교만이 인간의 산 업적 교만, 기술적 교만이 우리 우 주의 또한 이 지구의 운명을 재촉하 고 있지 않습니까!

 

자 또 하나 봅시다. 가끔 보니깐 신문에 나는데 사람들이 등산하고 등산가들이 높이 올라갑니다. 탐험 가들이 올라가서 에베레스트 산 같 은 산에 올라가서 잠깐 깃발 하나 꽂고 좀 내려다보고선 내려오면서 하는 얘기가

 

"산을 정복했다."

산 이 비웃을 겁니다. 잠깐 왔다 내려 가면서 뭘 정복은 쓸데없는 소리. 인간이 하는 일이 다 이런 겁니다. 또 달나라에 잠깐 발 붙였다 돌아오 고서는

"달을 정복했다."

 

말조심하 세요. 이거 다 하나님 앞에 불경한 얘깁니다. 어디다 대고 정복이라는 말을 합니까! ? 뭘 어쩌자는 얘 기에요. 이게 다 교만이라는 걸 알 아야 합니다. 교만에 대한 심판, 그 게 바벨탑의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이름을 내자 그랬어요. 사람들 자기 이름 내기를 좋아합니 다. 특별히 우리는 더 그런 것 같 아요. 이 산업의 경우에도요 가만 히 보니깐 뻔히 다 망한 사업인데 진작 정리했으면 좋을 걸 '내가 누 군데 망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잖 아.' 그리고 버티다가 더 망한 답니 다.

 

벌써 망한 지가 언젠데, 정리해 고 할 것도 없어요. 정리된 지가 오래 돼서요. 그거 벌써 남의 것이 요, 자기 것이 아니에요. 이걸 인정 하지 않고 거드름만 피우고 명예만 가지고 무슨 재벌이니 가문이니 명 예니, 이게 망조라고요. 한국의 기 업은 봉건주의적 기업입니다. 자본 주의적 기업이 아닙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 교만, 이거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이름을 내자는 것.

 

또 미안합니다만 우리가 어느 세 계의 도시를 가던지 교회가 있는 곳 마다 두 교회가 있는 것을 아십니 까? 하나가 제일교회, 두 번째가 중앙교회, Central church 이건 꼭 있습니다. 없는 데가 없어요.

몇 백년 후에 교회를 지으면서도 제일 교회라고, 우리가 제일이다 이거예 요. 왜 중앙이다, 이게 다 교만입니 다. 그거 다 옳은 얘기가 아닙니다. 명예를 좋아하는 자기 자랑을 좋아 하는 사람들의 얘깁니다.

 

북한에 내왕하면서 그들과 얘기해 보니깐 참으로 이 어려운 것을 돕는 것은 기독교, 교회계통 아니고는 식 량이고, 의약품이고 뭐 돕는 일이 없다고 해요. 그래서 고맙게 생각 한다고 합디다. 그러나 한가지 얘 기하는 게 있어요.

"왜 그렇게 기 독교인들이 명예를 좋아합니까?"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요 쌀을 얼마 를 가지고 가서 그 국경지역 도시인 단동에다 갔다 놓고 이걸 쌀을 포대 에다가 조그만 종이 포대를 만들어 가지고 거기에다가 일일이 넣는데 거기에다가 아무교회, 아무개, 이름 까지 써서 여기다가 담아 와서 이 봉투에다가 담는데 사흘 걸렸대요. 이걸 압록강을 건너가지고 신의주에 갖다 놓고 또 다 뜯어버리는 게 사 흘 걸렸대요.

 

"왜들 이럽니까?"

그 러더라고. 이게 기독교인들이요, 심 지어는 성경을 외워요. 오른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 데 이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모른다 고 그래요. 여러분, 꼭 그래야만 되 겠습니까?

 

가끔 우리가 이렇게 북한의 어려 움을 도웁시다 그래 보면은 정면으 로 제게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어 요. 아주 투명성 있게 내가 가서 그 어려운 사람들을 어루만지면서 악수하면서 내가 쌀 봉투를 주여야 그래야 주지 누가 먹는지도 모르는 거 안 준다는 거예요. 참 야박하더 만요. 무슨 대단한 이름이라고 꼭 이래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명예욕 이것은 인간의 본 질적인 욕구입니다. 동물적 욕구를 넘어서는 것이 인간의 명예욕입니 다. 자 이것을 극복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참으로 문제가 됩니다. 이 름, 다 물 갔어요.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겸손하게 살아가십시다. 이 사람들 보니까 스스로 자기를 높이 면서 '온 천하에 이름을 내자', 위대 해 지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것을 용납치 않았습니다.

 

또 한가지는 '흩어짐을 면하자' 그 랬습니다. 이것은 집단화요 Urbanization을 말하고요 또 하나는 요 대도시화를 말합니다. 공업화, 기계화를 말하는 것이올시다. 이래 서 집단 이기주의요. 우리끼리 똘 똘 뭉쳐서 절대로 흩어지지 말자, 그래서 강해지자 이렇게 말하고 있 습니다. 이렇게 강해지자고 강해집 니까? 하나 되자고 해서 하나가 되 는 겁니까!

 

그 유명한 영화 '대부'라는 영화가 있지요. 이것은 마피아 족들의 그 생태를 주제로 한 것입니다. 거기 보면 마피아 족들이 늘 싸우거든요, 싸울 때마다 그만 양쪽이 다 피해를 입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요.

 

'이래선 안되겠다 우리 싸우지 말자. 이거 마피아 족들끼리 싸워서 되겠 냐!' 그래서 일곱 단체 대표가 모 여서 이제 연합운동을 합니다. '우 리는 절대 싸우지 말자. 형제 관계 로 지내자.' 그리고 연합하는 의식 을 취하는데 대단합니다. 그것은 역사상 그런 것은 다시없을 겁니다.

 

대표자들이 쭉 많은 사람들 보는 자 리에서 손가락을 입으로 깨물어서 피를 내 가지고 컵에다가 피를 쭉 따라요. 일급 사람이 이렇게 하니 까 이 컵이 다 찼어요 피로. 이걸 손가락으로 저어 가지고 돌아가면서 마십니다.

 

'우리는 혈맹이다. 피를 마셨다. 한 형제다. 절대 싸우지 말자.' 맹세했어요. 그 다음에 별것 도 아닌 사소한 일로 충돌되기 시작 해서 서로 싸우고 다 죽고 두 사람 남아요. 뭘 말하는 겁니까? '불의 한 일에는 하나됨이 없다.' 죄를 짓 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되지 못하 고 불의한 사람의 세계는 하나됨이 없다는 거, 그걸 말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도 보면 대동단결, 뭐 하나되어야 산다, 뭉쳐야 산다. 그 거 전부 독재자들이 하는 소리요. 하나되자고 해서 하나 됩니까! 죄 가 있고, 불의가 있고, 부정이 있는 데 어떻게 하나가 되냐고요. 하나 님이 심판 아니면 될 수가 없는 거 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는 그런 말을 했지요. 'Win-Lose'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다.' 요새 와서는 'Win-Win'이라고 합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이 지구촌은 아주 하 나가 돼 버렸어요. 과거처럼 이기 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고, 사는 자가 있고 죽는 자가 있고, 그런 시 대가 아닙니다.

 

이제는 'Win-Win' 이요. 다같이 살고 다같이 죽는 겁니다. 특별히 기술세대에서는 'Win-Lose'이렇게 했지만은 이제 창의력의 시대에는 오로지 'Win-Win' 다같이 이기는 그것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누 가 더 살고 못 살고 그런 얘기는 없 습니다. 누가 살고 누가 죽고, 누가 웃고 누가 뺏기고 그런 세대가 아닙 니다. 21세기는 다같이 살던지 다 같이 죽던지. 여러분 이건 잊지 말 아야 합니다. 우리만 흩어짐을 면 하자. 이런 이야기는 하나님이 기 뻐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교만한 사람 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심판의 방법이 아주 고차적입니다. 보통으 로는 성경에 보면 유황불로 멸하시 든지 지진으로 내리시든지 재난을 내리던지 전쟁, 혹은 기근, 혹은 질 병, 이렇게 심판을 내립니다만 은 오늘 본문에는 문화적 심판입니다.

 

언어를 혼잡 게 했습니다. 혼미하 게 했어요. 생각을 혼미하게 해서 스스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여 기에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언어 의 혼잡은 마음과 마음이 서로 멀어 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은 무슨 지식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가슴으로 하는 거예 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서로 사 랑하면 아무 말도 없이도 말이 됩니 다. 서로 교만하고 자기 생각에 집 착하면은 아무리 좋은 지식을 가지 고도 대화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 러분 부부 싸움할 때 보니까 다 목 소리가 크대요. 그리고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아요. 내 말만 하지. 조금 말하면 '가만히 있으라고 나좀 하자구.' 자꾸 말하는 사람뿐이지 듣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것 이 대화가 끊어진 거예요. 가슴이 막혔는데 그 까짓 말해서 뭐 합니 까! 그렇지 않아요? 참 놀라운 일 이에요.

 

저는 외국사람하고 사는 한국여자 를 만나 보았어요. 그 사람은 고등 학교밖에 못 나왔어요. 미국사람 아주 지식이 많은 사람하고 살아요. 그 어떻게 살까 본인한테 물어 봤어 요.

"너 영어 잘 못하지?"

 

"헬로 우, -케이 밖에 못해요."

"그럼 어떻게 무슨 재미로 사냐?"

"목사 님, 사랑을 말로 하는 겁니까!"

내 가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든지 말 할 수 있어요. 뭐 눈높이, 뭐 학력 높이 웃기는 말하지 마세요. 눈 높 이 맞췄다가 끝나고 말아요. 소용 없어요. 마음이요, 마음. 그런데 하나님께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 니까 그만 끝나고 말아 버려요.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황새하 고 여우가 어느 때 좋은 사이로 지 내면서 자기 집에 초대했다면서 여 우가 접시에다가 음식을 만들어 가 지고 먹으라고 내 놓으니까 황새가 어떻게 먹겠어요.

 

그냥 그대로 돌 아갔고요, 황새가 대신 또 여우를 초대했는데 거기서는 아예 호리병에 다가 음식을 갖다 놓았대요. 자기 는 주둥이가 기니까 그걸 먹지만 여 우가 어떻게 먹겠어요. 각각 자기 입장을 고집하면 아무 것도 안돼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얘기가 또 있 습니다. 악어와 사자가 싸우면 누 가 이길 거냐. 여러분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간단하지요. 물 속 에서 싸우면 악어가 이기고 육지에 서 싸우면 사자가 이기고. 뭘 복잡 하게 생각해요. 이와 같이 우리가 사람들이 조금만 입장을 바꾸면 별 것도 아닌 일 가지고 끝내 다투고 물어 찢는 거지요.

 

기독교 역사에 보면은 교회분열의 가장 큰 시초적인 분열이 로마교회 의 분열입니다. 그것은 하나는 헬 라 문화요, 하나는 라틴문화입니다. 자기 문화에 집착하고 상대방을 자 기 문화로 밀고 나갔습니다.

이 문 화적 차이, 즉 다시 말하면 언어적 차이가 교회 분열의 시작이었습니 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분열은 심판입니다. 이기주의에 대한 심판 입니다. 자기 모멸감에 대한 심판 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과 겸손을 요 구합니다. 오로지 십자가 안에 하 나가 있습니다. 교만하고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욕망과 불 신앙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보세요. 열 다섯 나라에서 온, 각 나라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있었으나 성령이 임할 때에 언어가 하나로 통 일됐습니다.

 

이게 방언이라는 거요. 성령이 감동할 때에 가슴이 뜨거워 질 때에 저들의 언어는 그대로 하나 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 됨은 목적이 아닙니다. 이건 결과 입니다. 겸손과 믿음에 대한 하나 님의 축복이 하나됨이올시다. 여러 분 이 세대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합 니다. 우리가 당하는 이 어려운 현 실 속에서 겸손을 배워야겠습니다.

 

마음을 열어야겠습니다. 이제 누구 도 정죄하지 맙시다. 누가 죽고 누 가 산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우린 다 한 배에 탔습니다. 배는 지금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 것도 꾸짖지 말고 서로 얼싸 안아야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 고 서로 수용하고 서로 용서하고 그 리하여 마음이 하나가 되고 겸손해 질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시 는 귀한 축복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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