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시작 /창1:1-2/ 이재훈 목사
2023-12-28 08:15:16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던지는 질문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사춘기 방황의 시절에 호기심으로 한번 던져 보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반드시 대면해야 할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시작을 알고자 하는 이유는 시작을 아는 게 자신을 올바르게 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고난을 당할 때 이 질문을 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서 있을 때 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이르기 전에 포기하고 맙니다. 방황하다가 끝나고 맙니다. 세찬 강물에 떠내려가는 통나무처럼 이 세상의 강물에 떠내려가듯 살고 맙니다.
깊은 고난 속에서 고난의 이유를 알고자 했던 욥도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이 고난이 나에게 주어졌습니까?”라는 질문을 파헤쳐 가면서 결국 이르게 된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입니다.
욥이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대답하셨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사람이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내가 네게 물을 테니 내게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아는 게 있으면 말해 보아라. 누가 그 크기를 정했느냐? 네가 아느냐?
또 누가 그 위에 줄을 쳤느냐?
그 단단한 기초는 무엇 위에 세웠느냐?
모퉁잇돌은 누가 놓았느냐?”(욥 38:2~6).
“빛의 근원지로 가는 길이 어디냐?
어둠이 있는 자리는 어디냐?
네가 그것들을 제자리로 데려갈 수 있느냐?
그것들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욥 38:19~20).
하나님의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그 질문은 욥이 원하는 대답과 동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오히려 질문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 질문의 요지는 “만물의 시작을 네 스스로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자신의 시작을 알 수 없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고난이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을 찾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사실만 인식할 수 있고, 그 때부터만 알 수 있기에 자신의 시작을 스스로 능력으로 알고자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철학적 사고나 과학적 연구로도 인간은 그 시작을 명백하게 알 수 없습니다. 피조물의 모든 원리 자체가 창조에 의해 생겨난 이후 결과이므로 창조 그 자체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이 제시하는 어떤 자료나 이론은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그 자체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광대함과 신비함은 과학이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이 주신 계시와 말씀의 증거를 통해서만 그 시작의 이유와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말씀은 이 모든 것의 시작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과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닙니다.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대답도 아닙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시작하셨다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1절).
성경은 모든 것을 시작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성경은 모든 것의 시작을 ‘창조’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창조’를 의미하는 세 가지 동사가 있습니다.
첫째, ‘바라’라는 동사는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로 이루어집니다.
이 동사의 주어는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아싸’라는 단어는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가지고 다른 물질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바라’는 ‘create’라는 단어를 쓰고, ‘아싸’는 ‘make’라는 동사로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우리말로는 ‘만들다’는 표현으로 쓸 수 있습니다.
또 ‘야차르’라는 동사는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의 물질을 새롭게 조성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가장 먼저 무에서 유를 창조할 때 쓰는 단어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있던 어떤 존재나 재료를 가지고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개역개정에서는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이미 어떤 물질이 있었던 것처럼 표현하지만, 이것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이 훨씬 낫습니다. NIV도 ‘비어 있다(empty)’고 썼습니다. 무를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을 설명할 때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는 표현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우연히 자연발생으로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또 이미 존재했던 어떤 물질로부터 우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에서 창조를 통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술가들이 무엇인가를 만들 때 대개 어떤 재료를 가지고 작품을 만듭니다. 재료의 제한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창의적인 아이디어라도 재료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창조하지 않으시고, 무로부터 창조하셨기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완전한 자유로 창조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에는 창조주의 흔적이 남겨져 있습니다. 아주 작은 생물, 미생물일지라도 하나님의 창조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 초월적, 실제적 영역을 포함>
모든 것이 시작된 태초(in the beginning)가 존재합니다. ‘태초에’라는 단어는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표현, 인간을 위한 표현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더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시작 시점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만물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인간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는 분입니다. ‘태초에’라는 표현은 창조의 정확한 시간, 연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창조가 구체적으로 몇 년 전에 되었는 지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 시작이 있었다”,
“그 시간의 출발이 있었다”고 말씀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역사 너머에 시작과 끝이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이 시작되었고, 우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게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기권과 우리가 딛고 있는 흙이 있는 땅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초월적인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함한 모든 초월적 영역,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실제의 영역을 포함한 것을 ‘하늘과 땅’이라고 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초월적인 세계와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의 세계 모든 것의 창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신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할 때 그 ‘하늘’과 ‘땅’은 대기권의 하늘과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적 실제, 초월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뜻이 오늘 삶 속에,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랄 때 ‘하늘과 땅’이 같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에 이어서 ‘곧’이라고 한 것은 해석입니다. 즉, 하늘과 땅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해석을 근거해서 <니케아 신경>에서는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이 쓰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것’이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열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시작한 시점이 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2절).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선포하고, 2절에서는 땅에 집중합니다. 1절에서는 ‘하늘과 땅’이 나오고, 2절에서는 하늘이 언급되지 않고 땅만 언급됩니다.
1절은 모든 것의 창조에 초점을 두었다면, 2절에서는 땅의 창조에 집중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1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가 지구 중심의 창조를 설명한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1절의 결과로 2절이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혼돈하여 공허하다’는 단어가 굉장히 부정적인 단어로 사용되었기에 1절과 2절에 큰 간격이 있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있는 많은 공백을 우리가 상상하며 해석하도록 하나님이 말씀을 기록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그 결과가 공허하고 혼돈하다면 하나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늘과 땅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설명 이후 2절부터 땅의 창조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서술적인, 주제상의 순서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땅의 창조를 이뤄가는 과정을 설명했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에서 3절 이하에 오는 6일 창조가 어떻게 형태를 만들고, 거기에 하나님이 내용을 채우시는 창조를 이루셨는 지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3절을 시간적인 관점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해석하면 늪에 빠집니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로힘, 성부 하나님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만물이 아들로 인해 창조됐고 아들을 위해 창조됐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지음 받았으며 그분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요 1:1~3).
여기서 ‘그분’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계셨다’고 말하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고 합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해 지음을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3절부터 어떻게 창조가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골로새서> 1장과 <요한복음> 1장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시작하신 이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하나님만 계셨고,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하나님이 외로워서가 아닙니다. 의지할 대상을 찾으신 것도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의존할 대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존할 대상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며 존재하는 대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속의 사랑, 성령 안에서 그 아들과 누리시는 사랑, 그 사랑이 흘러넘쳐 창조하셨고, 그 사랑을 받아 누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릴 대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 모든 것이라는 창조가 나 한 사람, 나같이 작은 존재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찾아오시고 붙잡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창조의 신앙입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주의 증언, 선언 그리고 대답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는 말씀은 창조주의 증언입니다. 창조의 유일한 목격자가 계십니다. 창조주 그분입니다. 모든 창조를 이루신 하나님이 창조 역사를 증언으로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기록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증언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라는 말씀은 창조주의 선언입니다.
성경은 창조를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언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을 이루신 하나님이심을 선언할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신론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창조주의 존재를 당연한 사실로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은 유물론을 배격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구별된 하나님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범신론을 배격합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입니다.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지는 종교, 철학, 사상, 신에 대한 관념 등 모든 것과 구별되는 게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선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는 말씀은 창조주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입니다. “너는 지음 받은 존재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다.
우리는 그분을 의지해야만 하는 피조물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우연히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창조주의 대답입니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우연히 존재했다고 하는 막연한 대답을 하면 막연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피조물을 신격화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새겨진 하나님의 흔적, 창조주의 솜씨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면 피조물 자체를 신격화합니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숭배를 가리켜 ‘인간의 자기기만이요 자기모순’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의 흔적이 나타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인간을 우상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두 구절의 창조 기록을 자신의 증언, 선언, 대답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창조를 분석하면서 지적 호기심을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탄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이 말씀은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가 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만드실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으면 아무것도 닌 존재가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만물이 창조된 것을 말씀하는데 단 한 절이면 충분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만들어진 창조를 설명하는데 1장의 30절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주제가 얼마나 심오합니까? 말씀이 단순한데 그 범위가 얼마나 광대합니까? 그런데 그 표현이 얼마나 간결하고, 과학적으로 얼마나 정확합니까? 전문적인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시작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입니다. 창조가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출발이고, 기초가 될 때 우리는 자신을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우상에서 벗어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되고, 참된 지혜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전도서> 12장에서 미래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미래를 꿈꾸라고 하지 않고 기억하라고 합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에게 축복된 미래를 가져오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지혜로운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창1:1-/ 양인국목사
2022-09-07 09:57:22
1. 올해도 정상적인 수양회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우리가 말하고 있는 정상적인 수양회란 서신의 가족들이 외부로 나가서 2박 3일 동안 함께 하며 갖는 수양회를 말한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올해로 세 번째 이와 같은 수양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형태로든지 수양회를 진행해 왔고 또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수양회를 통하여 필요한 은혜들을 허락해 주셨다.
올해도 수양회를 위하여 주신 말씀들을 “규모 있는 삶(살후3:7-12)”이라는 주제 아래 앞으로 4회에 거쳐 전하고자 한다. 여기 “규모 있는 삶”이란 믿음의 사람으로서 살아야 할 합당한 삶을 말하는데, 이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들이 있다. 그것들은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사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그리고 의미를 창조하는 노동에 대한 지식들이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어째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을 때 규모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이 말씀은 성경 66권의 배열 가운데서 첫 번째 책, 첫 번째 구절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창조주”라는 것을 선언함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지식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본문 자체가 이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천지(天地)”란 하늘과 땅 즉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것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것들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해 주지 않으셨다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것들이다. 실제로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문법으로 설명하면 보다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장은 주어와 술어로 구성되어 있고 술어는 항상 주어에 의존되어 있다. 이것은 한 문장에서 주어가 없다면 그 문장은 미완성이 될 수밖에 없고 내용조차 불분명하게 된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문장에서 술어에 해당되고 창조주 하나님은 주어에 해당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주어로서 인정되지 않는 곳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어째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첫 번째 책, 첫 번째 구절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선언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역사라는 문장에서 주어로 존재하시는 곳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삶이라는 문장에서 주어로 인정하는 곳마다 언제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충만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어로 존재하셨을 때 천지가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주어로 존재하셨을 때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어로 존재하셨을 때 오순절의 역사가 일어났다. 기드온의 삼백명의 군사가 어떻게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수의 미디안 군대와 싸워 이길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길 수 있었겠는가?이와 같은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건들 가운데 주어가 되셨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공동체나 특정한 사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어로 참여하셨을 때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고, 권력에 밀려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어로 참여하셨을 때 그는 자기 민족을 애굽의 노예됨으로부터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준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목동 다윗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을까? 지식에 대한 자만으로 가득 차 있던 바울이 어떻게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도 오직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주어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열왕들의 역사를 보면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과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하는 실패자들이었고 소수만이 자신과 이스라엘을 세워주는 성공적인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성공과 실패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의존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삶 가운데 주어로 인정했는가 아닌가에 의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 주어로 인정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잠언의 한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이 말씀은 하나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 주어로 인정하는 길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물론 여기 언급하고 있는 세 가지 조건은 서로 다른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세 가지 표현을 사용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주어로 인정하는 길이다. 여기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삶이란 항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사는 삶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삶 가운데 주어로 인정하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삶의 주어로 인정할 때 어째서 우리의 삶이 규모 있는 삶이 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처음 언급한 것처럼 술어는 주어가 있을 때만 한 문장으로서 완성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술어로 표현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주어로 인정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삶의 주어로 인정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해 주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충만하게 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옵소서. 아멘
창조주 하나님 /창1:1-/ 하용조 목사
2015-05-26 10:38:07
성경을 펼 때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말씀인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인간의 지성과 경험과 상식과 합리성으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분만이 성경을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신 책인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에 충만해 있을 때 그문이 열립니다. 비밀이 보이고 말씀이 드러납니다.
또한 성경을 공부할때 기억해야 할 말씀은 마태복음 5장 18절이하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했던지 이해하지 못했던지, 해석이 되던지 되지않던지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다 응답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 창세기 공부에 마음을 열고 정성과 뜻과 마음을 다하여 집중하시면 창세기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하나님의 음성들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첫번째 책이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여는 열쇠와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면 창세기를 여는 열쇠는 무엇입니까?
바로 1장 1절입니다.
‘선언’으로 시작하는 창세기
무슨 책이든지 서론이 있고 설명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시작은 설명이 없습니다. 단지 선언이 있을 뿐입니다. 놀랍고 신비스럽고 권세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설명도, 변명도, 논리의 전개도, 설득도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선포가 있을 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놀라운 진리의 선포를 믿고 고백하면 창세기가 전부 열립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믿지 못할 것이 없고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이 고백이 있다면 기적이 일어나는 일도 간단한 일입니다. 1장 1절의 말씀을 조금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태초에’라는 말을 빼고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 니라’가 됩니다. 이 말씀을 더 줄인다면 ‘천지를’이라는 말을 빼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느니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좀더 압축시켜 ‘창조’라는 말을 빼면 ‘하나님’만이 남습니다.
이 구절의 열쇠는 ‘하나님’입니다. 우주 만물과 사람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주만물의 중심과 인생의 중심도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나를 만드신 것을 믿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선포합니다.’라는 고백으로 창세기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논쟁하는 책이 아닙니다. 세미나를 하거나 연구하는 책이 아니라 선포하는 책입니다. 창세기는 특이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선포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본문의 주어는 ‘나’가 아닌 ‘하나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면 불행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 될 때 축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면 모든 문제가 안개같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와 능력과 신묘막측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중심의 축을 인간중심으로 바꾼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사탄에게 받은 유혹은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최대의 유혹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조금만 권력을 가지고 높은 위치에 있게 되거나 남보다 돈이 많거나 똑똑하다는 말만 들으면 신이 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는 유혹은 다른 사람을 종을 만드려는 지배욕에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을 자신의 수하에 두고 싶고 명령하고 통치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 신이 되려는 유혹의 첫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사상에서 가장 우리를 헛갈리게 것이 휴머니즘입니다. 굉장히 멋있게 느껴지지만 휴머니즘은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인권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권이 우상이 되면 신권이 없어집니다. 인본주의가 있으면 신본주의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빛은 어두움을 싫어합니다. 불의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을 싫어합니다. 정의로운 사람 옆에 있으면 자기의 불의가 비교되고 드러나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을 절대로 환영하지 않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영접지 아니하더라”라고 말합니다. 빛인 예수 그리스도가 왔지만 아무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캄캄한 어두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14편 1절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2편 1절부터 4절을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기름 받은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계속해서 “하늘에 계신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존귀와 영광받기 합당한 하나님
그렇습니다. 잠언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안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때에야 여러분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인생과 우주만물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논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세미나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책에 계시거나 도서관에 계신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경배하고 찬양할 때 그분은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논쟁하고 따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그 분의 위대하심과 영원하심과 거룩하심을 찬양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거룩과 능력이 여러분에게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내게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너희에게로 가까이 가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힘써 알자 여호와께 나아와 경배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릴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을 보면 네 생물이 나타납니다. 여섯날개가 있는데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라” 이 생물들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24장로들이 보좌에 계신 그분에게 면류관을 던지면서 죴흳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라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 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그분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참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과 거룩이 나타나며,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허다한 무리들이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흰옷을 입고 보좌와 어린양 앞에서 찬양하며 경배하는 놀라운 찬양의 광경을 볼수 있습니다.
여러분,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인생을 만드신 그 하나님을 선포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하나님의 영광앞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 1장 1절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성령세례받아야 창조신비 보여
창세기 1장 1절에서 우리는 몇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시며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태초에’라는 말에 있습니다.
‘태초에’라는 말은 인간의 시간이 시작된 바로 그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시간이 있다는 말은 공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공간없는 시간은 없고 시간이 없는 공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시간을 주셨습니다.
시간은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있는 것을 가리켜 ‘역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한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 이지만 하나님없이 만들어진 역사는 ‘인류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시간이 기준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이해하는데는 시간이 있습니다. 인간이해는 곧 시간이해입니다. 시간을 잘 이해할 때 믿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칠십 혹은 강건하면 팔십의 생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잘 써야 합니다. 시간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사탄에게 준 사람들은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쓰고 잘 선용한 사람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나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간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구원하라는 말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영광스러운 시간이요, 축복된 시간이요, 천년같은 시간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하고 파멸의 시간이 됩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어떻게 쓰여지느냐 또는 누가 잡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주인이 ‘나’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지 않아야 합니다.
시간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과 접붙혀질때 영원한 시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영원한 시간을 가리켜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가운데 거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우주 만물과 인생은 하나님이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도, 우리 인생의 주인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소유권이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갈등이 있는 이유는 소유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 땅이라고, 내 이름으로 땅문서를 썼기 때문에 자신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죽을 때 모두 놓고 가야 합니다. 땅문서도, 기업도, 반지도 모두 놓고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소유권이 아니라 위탁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끝날때 잘 돌려주십시오. 어떤 사람은 빌리고 나서 영원히 주지 않으려는 분이 있습니다.
물질도, 시간도, 건강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더 놀라운 축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창조’라는 뜻은 없는데서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은 있는데서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돈이나 권력, 젊음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비웃으십니다. 인간의 법칙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존귀와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기계가 고장났을 때 기계를 만든 사람에게 가져가면 금방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 가면 바로 해결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이름을 높여드리십시오. 그때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줄 믿습니다.
창조의 두번째 뜻
‘창조’라는 말에는 또 하나의 뜻이 있습니다. 창조라는 뜻은 없는데서 있게 할 뿐 아니라 만든 것을 통치하고 다스리시고 관리하고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마치 부모가 아이를 낳고 나서 부모역할을 다했다고 떠나는 부모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를 낳는 순간 부모의 눈은 반짝이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합니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먹이고, 병이 나면 걱정하고, 학교에 보냅니다.
창조는 세상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관리하시고 통치하시고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태양을 부인한다고 해서 태양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자신만 지하실로 갈 뿐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한다고 하나님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할 뿐입니다. 태양을 인정하십시오. 지하실에서 나와서 밝은 태양 앞으로 나오십시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걸어나오십시오. 하나님께 가슴을 열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쏟아질 줄 믿습니다.
창조에 있어서 깊이 생각할 것이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셨지만 그 창조의 과정중에 성령이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성령님을 만나면 창조의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세례를 받으십시오. 성령의 인치심을 받으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몸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묘막측한 것을 내 안에서 느끼기 시작합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을 보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와 함께 섰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시간을 만드실 그 때에 예수님이 거기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천지창조의 원리는 예수님을 영접하셔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그 창조의 하나님, 우주를 만드시고 신묘막측하게 나를 지으신 그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가운데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 때 이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나는 이것을 선포합니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립니다.’ 이럴때 창세기는 열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논쟁과 의심은 사라지고 그 안에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이 이 창세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서론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렸을 때 했던 질문 하나를 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나 혹은 여러분이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혹은 ‘하나님은 남자야 여자야?’
이런 질문에 대답은 이렇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만들어졌다면 하나님이 아닐것입니다. 단지 피조물일 뿐입니다. 창조자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피조물은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입니다.
그는 창조자이신 것입니다. 그는 영원전에 계셨습니다. 영원후에도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남자나 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남자와 여자가 다 있습니다.
그는 부분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그는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죽은 관념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기도하시면 응답해 주시는 그분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으십시오. 선포하십시오. 이 믿음을 가지고 창세기 여행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여기 머리숙인
당신의 종들에게
이 창세기의 1장1절의
위대한 선포와
믿음이 있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도신경 (1) /창1:1-
2011-01-14 17:26:20
창조주 나의 하나님
우리는 예배로 모일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늘 하다 보니까 자칫 잘못하면 기계적인 암송에 그치거나 혹은 입술에 붙은 무감각한 행위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혹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예배가 생동감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lip service)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구구절절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진실된 고백이 되도록 유의해야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따금 사도신경을 꼼꼼히 공부하는 게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금번 사순절을 보내면서 사도신경을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서론적인 이야기를 잠깐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 사도신경의 유래 :
기독교 역사 상 기독교 교리를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신앙 고백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신경’(Creed)이란 말은 신조 즉 믿음의 내용(믿는 바)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이라 부르는 것과 관련해서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12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작성해서 베드로가 로마로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확실한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에 의하면 사도신경은 특정한 사람이 작성한 게 아니고, 마치 꿀벌들이 갖가지 꽃들로부터 꿀을 모아 오듯이 사도들의 성경적 가르침이 전해져 오면서 오묘하게 요약된 역사적 산물이라고 합니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의 엑기스라는 뜻에서 ‘사도신경’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혹은 ‘성경 66권의 요약’이라고 보면 됩니다.
(2) 사도신경의 중요성 :
i) 기독교 신앙의 표준(바로미터)으로 구원 신앙의 유무를 판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세례를 줄 때 최소한 사도신경의 내용을 확실히 믿는지 확인하게 됩니다.(세례문답)
ii) 신앙 교육의 기초 자료로 매우 유익합니다. 사도신경은 간결하면서도 자녀들이나 초신자에게 꼭 가르쳐야 될 기본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iii) 이단에 대한 판별 기준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단은 교묘하게 성경을 변조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다를 異+ 끝 端) 사도신경의 구절 중 하나라도 가감하면 이단이 틀림없다고 보면 됩니다.
iv) 교회 공동체의 신앙 일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공동 고백입니다. 그래서 공예배 때마다 다함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3) 사도신경의 구조 :
i)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 - 전능하사 ~ 믿사오며
ii) 성자 예수님에 대한 고백 - 그 외아들 ~ 심판하러 오시리라
iii)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 - 성령을 믿사오며 ~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 나이다(성령+교회+구원)
이제 사도신경 본문으로 들어가서 오늘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대목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1] “내가 믿사오며” - 신앙 고백의 중요성
사도신경은 주로 예배 시간에 공동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도신경 본문을
보면 공동 고백이 아니라 개인적인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배 시간의
공동 고백은 어디까지나 성도 각자의 개인적 고백에 기초한 공동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 말 사도신경은 ‘내가 믿사오며’가 뒤에 나오지만 영문 사도신경을 보면 맨처음에 나옵니다.(I believe in God ... )
여러분, 왜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 중요합니까? 구원은 단체가 아니라 각각이기 때문입니다. 출생과 죽음이 각각이듯이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도 각각입니다. 천국은 ‘단체 입장 사절’입니다. 이따금 전도하다 보면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아, 제 아내가 교회 열심히 나갑니다. 저는 바빠서요 ... 나중에 아내 치맛자락 잡고 천국 갈랍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신앙도 각각, 고백도 각각, 구원도 각각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고백)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 ”(롬10:9)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 사도신경의 구절 구절을 정말 진심으로 믿고 고백할 수 있는지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죽 고백하다가 걸리는 대목이 있다면 곤란합니다. 반드시 이해하고 믿고 고백해야 됩니다. 막힘없이 구구절절 진실로 고백할 수 있다면 저와 여러분은 확시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 창조주 하나님
성경은 첫 구절에서 대뜸 이렇게 선언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라”(창1:1) 이 구절은 짧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존재 : 세상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들이나 무관심한 불가지론자(혹은 회의론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느니 없느니 따지고 논쟁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럴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직접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설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것이고 그나마 장본인인 뒤부아가 죽을 때 그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격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너무 당연하므로 모든 인간은 믿든지 말든지 둘 중의 하나를 결단하도록 성경은 촉구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몫입니다.
② 하나님의 창조 : 창1:~2:을 보면 우주만물의 창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초는 시간의 시작, 역사의 시초입니다. 즉 시간도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6일 동안에 걸쳐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창조였습니다. 하나씩 창조하실 때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고, 맨 마지막 인간 창조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창조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자연 과학 분야는 물론이고 모든 분야에까지 오염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은 진화론이 가설에 불과한데 ... 왜냐하면 진정한 과학적 사실은 실험을 거쳐야 되는데 지구 역사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추정할 뿐입니다.
더욱이 진화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허구성이 속속 밝혀져 왔는데 아직도 그것을 붙잡고 하나님의 창조 사실을 믿지 못해서 신앙 생활을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유수한 과학자들의 절반 이상이 하나님을 믿는 것만 봐도 되는데 ...) 창조과학회
자료에 의하면, 유인원으로 주장하는 쟈바인은 뼈 몇 개를 갖고 상상도를 그린
것인데, 나중에 장본인인 쟁 뒤부아는 임종하면서 그나마 원숭이 뼈였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은 등이 굽고 괴상하게 생겨서 유인원이라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조사해 보니까 유인원이 아니라 비타민 D가 부족한 곱추였음이 판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 같은 데서는 주마다 진화론과 성경의 창조론을 함께 과학 교과서에 수록하거나, 캔자즈 주 같은 데에서는 아예 진화론을 빼 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창조인가 진화인가의 문제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11:3 말씀대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니니 ...”(실제 믿음으로 아는 게 얼마나 많은가? 출생 배경, 지구 자전 공전, ...)
③ 하나님의 전능성 : 창조 사건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가장 잘 나타내 줍니다. 성경에 많은 기적들이 나오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보다 더 엄청난 일이 바로 창조 사건입니다. 창조한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빠라’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만 사용됩니다.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행위(creatio ex nihilo)를 묘사하는 단어입니다.(cf. 히브리어 ‘아싸’ - 기존의 물질을 갖고 만드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엘로힘인데 복수형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위엄과 전능성을 나타내는 복수입니다.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6일만에 그 광대하고 오묘막측한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면 그 어떤 기적도 가능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가능한 한 당신이 세워 놓으신 자연 법칙을 중심으로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섭리하십니다. 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십니다.(비상 섭리)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예수님의 동정녀 잉태,
오병이어 기적, 물 위로 걸은 것, 죽은 자 살린 것 등)을 신화나 지어낸 픽션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자이실진대 그런 것들은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과 인류 역사를 섭리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면 오늘날도 여전히 기적이 나타날 수 있음을 믿습니다.
④ 하나님의 절대 주권 :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므로 모든 우주만물에 대한 절대 소유권과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십니다. 당연히 우리 인간에 대한 절대 주권도 갖고 계십니다. 시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삼상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그러므로 세상 만사, 우리 개인의 생사화복이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 있음을 믿습니다.
[3]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성도의 자세
① 염려하지 말고 신뢰하십시오.
이 세상은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안합니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마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지뢰밭 같이 ... 그 가운데 아무리 나 자신이 혹은 서로 서로가 잘 챙긴다 해도 불안합니다. 가만 보면 사소한 것은 챙겨도 중대하고 심각한 일일수록 챙겨주지 못합니다. 부모라도 자식 대신 아플 수 없고, 부부라도 수술실에 따라 들어가서 참견할 수도 없습니다. (자식이 군대갈 때, 입시 치를 때, ...)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무능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면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사43:1~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 너는 내 것
이라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 시121:1~2,8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그러므로 전능자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 나의 하나님임을 확실히 믿으시고 염려 대신 신뢰함으로 평안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 중의 특권이 바로 기도입니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 ” 기도는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의 보고에 나를 연결시키는 것(connect)입니다. 전원에 연결시키면 아무리 큰 기계도 돌릴수 있듯이 기도하면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그 무엇도 하나님께서 넉넉히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상한 사람 되면 곤란합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전능자 하나님이 주신 기도의 특권을 잘 활용해서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③ 청지기의 삶을 사십시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by)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for) 창조되었습니다. 사43:7, 21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찬송이 되도록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주만물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시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이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 그런데 만물과 인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만물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예를 들어 시냇물은 아무 생각없이 졸졸 흘러 소리를 냅니다. 나무는 때가 되면 아무 생각없이 꽃을 피웁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주어져 있습니다. 즉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조물 중 걸작품입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산다니까 기분 나빠합니다. 아마 하나님 치다꺼리나 하다 인생 끝내란 말인가 하는 반발심리일 것입니다.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과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창조하셨고,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그만큼 축복해 주십니다. 즉 인간의 행복과 하나님의 영광은 동전의 겉과 속처럼 서로 밀착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자기 주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셔야 됩니다. 그게 청지기의 삶입니다. 그렇게 믿고 신뢰하고 주님 뜻대로 순종하면 반드시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내 마음대로 사니까 실수하지 하나님 뜻대로 살면 절대로 실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입술로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지 말고 마음 속에서 우러 나오는 고백과 더불어 매일의 삶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셔 그 능력을 체험하고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도신경(2) :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창1:1-
2012-04-06 15:30:03
오늘은 사도신경 두 번째 시간으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천지의 기원에 대한 설 중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따르는 설이 창조론과 진화론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둘 중에서 진화론은 거부하고 창조론은 받아드립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되는 성경이 창조론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경의 첫 번째 책의 첫 번째 장의 첫 번째 절인 창 1:1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선언하면서 시작합니다.
창 1:1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도미노 게임을 생각해 봅시다. 일정한 간격으로 블록을 세워놓습니다. 제일 앞의 블록을 쓰러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이 쓰러지면서 두 번째 블록을 쓰러뜨립니다. 이것은 또 쓰러지면서 세 번째 블록을 쓰러뜨립니다. 이것이 계속해서 진행되면서 전체 블록을 다 넘어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첫 번째 블록이 창조신앙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첫 번째 도미노입니다. 이것이 쓰러지면 하나씩 차례로 쓰러지게 되고 마지막까지 모든 것이 다 쓰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을 걸고 창조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히 3:4에 보면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는 서울에 수많은 집들이 있습니다. 그 집들 중에 단 하나의 집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저절로 그리고 우연히 만들어진 집이 없습니다. 단 하나의 집도 예외 없이 모든 집이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집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작은 집들도 만든 이가 있는데 하물며 이 광대하고 섬세한 우주가 만든 이가 없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님이 진화론자들이 우주가 우연한 폭발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는 주장을 비웃는 듯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들어보세요.
먼 훗날 공장에서 하는 일을 로봇이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전쟁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뒤에서 조종만 하고 로봇들이 현장에 나가서 싸움을 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지구에 화학전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다 씨가 없이 죽었어요. 로봇만 남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다음에 로봇들이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지? 설명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 자기 몸을 분석해 보니까 납도 있고 철도 있고 구리도 있고 아연도 있고 인도 있습니다. 땅을 조사해 보니 땅에 똑같은 성분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땅에 있는 것들이 어느 날 자기들끼리 폭발을 하면서 우리 같은 로봇들이 만들어졌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습니다. 이 어리석은 로봇들의 주장과 오늘 진화론자들의 주장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을까요? 천지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오늘 설교는 천지창조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창 1장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이 음성을 들으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와 상관없이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언제나 내 가까이에서 나를 도와주시는 친밀하신 하나님으로 믿어지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성경 사 66:1에서 하나님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도 땅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인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릴 수 있을까요? 저는 성경 안에서 우리가 세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드려야 함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첫 번째 방법은 십일조 생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 3:7-12을 보면 십일조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문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나님께서 답하십니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 받은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는 비결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3:7-12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로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를 받은 이유는 십일조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문을 열고 복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처남과 함께 작은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회사가 작으니 수입이 적었지만 그래도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내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자 처남이 말했습니다. “형님, 나도 예수를 믿지만 참 어리석고 답답하네요. 넉넉할 때 말이지, 이렇게 어려운데 무슨 십일조 떼고 감사 떼고 그래요? 우리는 넉넉할 때까지 십일조 안 해요. 하나님이 우리 사정 알 거예요.” 그래도 집사님은 부요하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손대면 안 된다고 하면서 계속 십일조와 감사 헌금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회사는 점점 더 어려워져서 5년간 더 내리막길을 걸어 결국은 두 사람이 갈라섰습니다.
여러분 망할 때도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입니다. 두 사람이 갈라서자마자 집사님의 사업이 기적적으로 잘 되어 큰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처남은 망해서 집사님이 처남 가족을 다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계산적으로는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축복입니다. 지금은 어려워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때가 되면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두 번째 방법은 주일성수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지키므로 모든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토요일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에서 제4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우리 개신교에서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안식일보다 더 중요한 신앙적 사건이 주일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 날 즉 주일에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일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도 바로 주일에 이루어졌습니다.
둘째, 초대교회 때 이미 주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성경과 초대교회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도행전 이후에 안식일이라는 말이 단 한번 골 2:16에 나옵니다. 놀랍죠? 한번이라니... 거기에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그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간의 갈등이 있었던 몇 가지가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음식문제로 갈등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무 음식이나 먹지 않았습니다. 율법에서 금하는 음식은 피하고 율법에서 정결하다고 하는 음식만 먹었습니다. 이것을 코셔음식법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갈등이 절기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명하는 절기를 지켰으나 기독교에서는 그 절기들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갈등은 초하루제사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안식일 문제였습니다. 만약 초대교회가 안식일을 지켰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안식일 문제로 기독교인들을 비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켰기 때문에 안식일문제로 비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토요일 안식일이 아니라 일요일을 주일로 지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유대인들에게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유대교의 전통을 뒤집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답이 골 2:17에 나옵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구약시대에 지켰던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은 그림자이고 그 그림자가 보여주는 것이 몸인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음식문제와 절기문제 그리고 초하루문제와 인식일문제가 새롭게 해석된 것입니다.
성경 고전 16장 앞부분에서 바울은 헌금에 관한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전 16:2에서는 “매주 첫날에(주일입니다)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헌금은 예배시간에 드리는데 매주 첫날 드렸습니다.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매주입니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가 기록될 당시에 이미 주일 예배를 드렸다는 말이 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의식과 신앙생활의 일면을 전해주는 2세기경의 문서인 [디다케]에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매주 첫날인 주의 날을 특별한 날로 알아 이 날에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감사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느냐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그 날에 공동체로서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롬 14:5,6을 봅시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바울은 음식문제와 주일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음식과 날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먹고 주를 위하여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세 번째 방법은 모든 일의 결정권을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종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결정권이 종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으로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핏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소유 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너무나 쉽게 결정해 버립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며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생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세 가지로 인정해 드려야 합니다. 첫째는 십일조, 둘째는 주일성수, 셋째는 모든 일의 결정권을 그분에게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홀로 일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 1:2에 보면 천지창조 당시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성경 요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천지창조뿐만 아니라 인류의 구원사역도 성부하나님 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부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셨고, 성령님은 구원을 적용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셨기에 그 계획에 따라서 예수님이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구원을 완성하셨지만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누구도 십자가의 도를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삼위하나님은 창조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사역도 연합해서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서로 연합하여 긴밀하게 협력하신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도 하나님과 연합해야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속에 오신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살기를 원하시는데 만약 내가 그분에게 길을 내드리면 그분이 나를 통해서 나가시는 것이고, 만약 내가 그분에게 길을 내드리지 않으면 그분은 나를 통해서 나가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나를 죽이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도 그분이 원치 않으시면 나의 원함을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어도 그분이 원하시면 하기 싫어하는 나를 죽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면 하나님이 역사를 하십니다. 나를 죽이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고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이 신령한 생활입니다. 하지만 나를 죽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요나는 알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지만 요나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적 중심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해야 하지만 내가 살아 있어서 내 뜻대로 행하는 것이 육신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신령한 생활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생활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당연한 그것을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 고집 때문에 인생에 아픔과 고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요나도 자기 고집 때문에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납니다. 그리고 요나는 바다에 던져집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물고기가 요나를 삼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는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기회를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십니다. 고난을 통과한 요나가 변화됩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나 자기 뜻대로 했는데 이제는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기 위해서는 나의 원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이런 생활이 바로 신령한 생활입니다.
3.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창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는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역사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인생의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됩니다. 시 107:19을 보면 고통을 만난 사람들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그 고통에서 건져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로 20절에서 하나님께서 고통에서 건지시는 방법을 말씀하는데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들을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금동에서 목회할 때 경험한 간증입니다. 우리가 세 들어 있는 건물에 이단이 들어와서 문제가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성경 시 16;6을 주셨습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저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김요한목사님이 저를 찾아오셨고 저와 교우들이 이곳에 와서 이곳에 계시던 분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변화되기를 원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건강상태가 결정되고 심지어 성격의 변화도 일어납니다. 간에 좋은 약을 먹으면 간이 좋아지고 위장에 좋은 약을 먹으면 위장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으면 여러분 안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여러분은 영육간에 강건하게 될 것이며 성경에 약속한 복들이 믿어지고 그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성경 읽기를 통해서, 또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인생에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의 한 안수집사님은 매출이 엄청나게 큰 회사의 대표이사입니다. 큰 회사의 대표이사이니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분은 주일 밤 예배는 물론 수요 예배, 새벽 예배에도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그 집사님이 목사님과 교회에 오신 강사목사님에게 식사대접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회사 일이 어렵고 힘들 때는 성경을 읽습니다.” 왜 어렵고 힘들 때 성경을 읽을까요?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집사님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이 만지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무슨 놀라운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창 1장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보시기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개인과 가정과 우리 교회와 이 나라와 저 북녘 땅과 이스라엘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은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창조’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아사’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말은 개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무로 의자를 만들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야차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모델을 앞에 놓고 그 형상을 본 따서 만드는 조각가의 작업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창조는 ‘바라’라는 말인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말합니다. 천사나 사탄 그리고 사람은 아사 창조나 야차르 창조는 할 수 있지만 바라창조는 할 수 없습니다. 바라 창조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이 주신 영감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내가 그야말로 바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놀라운 역사,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격이 바닥이어도, 내 능력이 바닥이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 인맥이 바닥이고 내 소유가 바닥이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놀라운 일,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바닥에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위대한 역사를 이룬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80세의 모세는 바닥이었습니다. 그는 늙었고, 말도 둔했고, 배경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창조적인 역사를 하시니 그가 그 당시 대제국의 바로왕 앞에 섭니다. 그리고 10가지 재앙으로 바로의 숨통을 조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 앞에서 하나님처럼 만들어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인생의 바닥에서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늘을 날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내 인생에 역사하시면 비록 지금 인격이나 능력이나 인맥이나 소유가 바닥이라도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성공 동기 연구원의 설립자인 폴 마이어 회장의 간증입니다. 그는 청년시절에 길거리에서 노숙자로 살았습니다. 한번은 그의 앞으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쑥 지나갔습니다. 폴 마이어는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구는 고급차를 타고 누구는 깡통을 차고 다녀야 합니까? 저도 정말 멋진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로수를 붙들고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쓰임 받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그처럼 거리에서 나무를 붙잡고 기도하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끈질기게 나무를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3일을 기도하자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어서면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사업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없으니까 세일즈맨부터 하겠습니다. 저에게도 성공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때부터 세일즈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일즈의 효율성을 위해 사장들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사장들은 대개 바쁘니까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끈질기게 나가니까 점차 한 사람 한 사람 사장들을 고객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장은 여러 핑계를 대며 계속 그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어느 날, 성경 약 1:5을 펴놓고 막 따지듯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구절을 보니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로 되어 있네요. 지혜를 구하면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이 말씀대로 제게 그 사장을 만날 지혜를 주소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려면 이 말씀이 틀린 것이니 성경에서 빼 주소서.”
그런 식으로 끈질기게 기도하자 마침내 지혜가 떠올라 사장한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사장님, 저는 날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데 왜 사장님은 한 번도 못 만날까요? 사장님이 하나님보다 높은가요?” 그리고 예쁜 포장지로 포장을 한 상자에 편지와 선물을 넣고 비서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이 편지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아 마침내 물건을 사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그는 30대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노숙자였으니 경제적으로 완전 바닥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붙잡고 매달리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창조적인 역사를 일으키셔서 거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백성들에게 비록 그들이 가진 것이 없어서 인생의 바닥 수준에 있어도 무에서 유의 창조의 역사를 만들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2. 하나님은 홀로 일하시지 않았습니다.
3.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4. 하나님이 만지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도신경강해-1 /창1:1-
2011-01-14 17:24:32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오늘부터 주일 낮에 사도신경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신경은 말 그대로는 12사도들의 신조(믿는 것)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고, 후대의 사람들이 사도들의 믿음의 문자화의 필요성을 느껴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성경을 가장 짧게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이 사도신경은 그 이후 모든 시대와 교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믿음의 근본 기초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사도신경을 잘 배워 우리의 믿음의 근본을 바르게 세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바로 당신을 창조하셨음을 알고 계시는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하신지요?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그 창조물 위에 우리 인간들이 가공을 한 것 일뿐이지요. 때로는 악하게 때로는 선하게 가공을 하였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 노력으로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찾다가 끝이 나고, 또 다른 사람이 찾다가 끝이 났습니다. 그렇게 한없이 찾다가만 끝났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너무 큰 보물이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사람에게 쓰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열심히 연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엄숙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선언인지요. 인간이 그토록 찾았었고, 찾고 싶었던 해답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인류의 빛입니다. 모든 인류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알게 된 사람은 이제 그 하나님을 섬기며, 그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이루어 가면서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찾기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고(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합니다. 인간은 그 한계 내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 밖의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대다수는 의도적으로 찾지 않음으로 책임 없이 아무렇게나 살고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음은 왜 그렇습니까?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순간을 그 누구도 다시 갈 수가 없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단지 믿을 뿐입니다. 진실하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찾고자 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그에게 하나님이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하고, 찾지도 않음으로 사람들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는 우연히 존재하게 된 존재가 아닙니다. 목적을 가지신 그 분이 우리를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 분은 인격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아무 이유 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가장 아름다운 목적을 위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이 땅에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물질의 일부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그 분은 좋으신 분이기에 우리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곧 선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조금 세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귀하게 창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우주는 더 어렵기 때문에 오래 걸리고, 동물은 짧게 걸리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단순히 말씀하심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가지는 말씀만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삼위하나님이 의논하시고, 흙으로 정성껏 만드시고, 그 안에 영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온 우주를 먼저 만들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인간을 아주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만드셨습니다. 자신의 형상 따라 너무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유일하게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귀하게 창조하셨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우리의 출생비밀입니까? 만약 우리가 우리의 출생비밀을 알 때 우리가 단지 원숭이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면 인간으로서 의미 있게 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출생비밀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다보면 인생이 뒤죽박죽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우리는 인생의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줄 잘못 서서 한 평생이 꼬이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런 일도 있습니다.
이 땅이 타락함으로 인해 빚어지는 아픔들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선하신 하나님임을 알기에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시 힘을 얻어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이 혹 죄로 물들어 불평등과 아픔들이 많이 있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자신이 창조하신 이 땅을 결코 그렇게 내 팽겨쳐 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아픔과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살아갈 이유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진공청소기와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저의 모든 슬픔과 아픔과 불평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그 말씀이 싹 쓸어갔습니다. 모든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멸시를 하나님이 쓸어가게 하시고 우리는 다시 우리를 귀하게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귀한 공주와 왕자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창조하셨기에 행복합니다
우주를 보면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금방 수긍하게 됩니다. 우주의 크기는 무한대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무한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단지 현재의 인간의 능력으로 측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장엄한 태양과, 신비한 자연의 조화들, 너무나 넓고 크고 질서정연한 우주를 보면 참으로 위대한 그 누군가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의심이 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 것(피조물)을 신이라 하며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침묵하고 계십니다. 어찌 하나님은 가장 귀한 인간을 그렇게 허물 많게 만드셨는지요? 아니 허물덩어리로 만드셨는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보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보는 인간은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가장 완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주를 만드시면서도 그렇게 힘들이지 않으셨는데 왜 유독 인간에게만 그렇게 소중하고 소중하게 만드셨을까요? 그 소중함의 핵심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인격입니다. 이 인격은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실패한 작품이 아니라 너무 완벽하기에 죄도 범하는 것입니다. 너무 완벽한 인격으로 만드셨기에 그 인격으로 감히 하나님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격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바로 그 한마디를 온 우주보다 더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을 위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바로 죄로 인하여 아픔과 고통이 있지만 버려진 삶이거나 무익한 삶이 아니라 가장 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계획에 의해 이 땅에 사는 것이요. 이 땅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삶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으셔서, 곧 능력이 부족하셔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타락하였고 그래서 우리가 버려진 존재라면 우리는 너무나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과 계획 아래에서 오늘도 여전히 가장 귀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기에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패작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작품입니다(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받아들이고 고백하게 될 때 가장 진주처럼 빛나지요).
"하나님이 전치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 말씀은 저에게 거대한 용광로와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어렸지만 중 3학년 때 이 말씀은 저의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찾아 고민하던 그 시절 이 말씀은 저의 모든 삶과 생각 등 모든 것을 녹여서 완전하고도 아름다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저의 모든 꿈이 이 용광로에 들어가서 새로 나왔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이름으로 등기된 땅 한 평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때문에 여전히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기에 이 땅에서 가슴을 열어 젖히고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가장 소중하다 말씀하시니 우주를 내 가슴에 품고 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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