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와 맺으신 은혜언약 /창15:1-21/ 김형익 목사
2021-05-06 04:28:49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은 일반은혜를 드러내는 특징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구원이나 구속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자기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되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전형적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은혜언약의 특징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1. 은혜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맺으시는, 맹세로 하신 약속(언약)이다.
은혜언약의 전형적 특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맺으시는 것이며 무엇을 하라는 조건이나 율법 조항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로 주어지는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이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고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언약의 형식을 사용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언약의 성격이 무엇이며, 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기를 기뻐하시는가를 조금씩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언약을 자기 백성에게 주실 때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약속의 언약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아담 이래로 지금 우리들 그리고 주님 재림 전까지 동일할 것입니다.
2. 아브라함 언약이 주어지기까지 구원에 관한 소망은 원시복음(창 3:15)밖에 없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담이 범죄한 후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동안 아담부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었겠습니까?
그들에게 주어진 그리고 그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담의 범죄 직후에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하실 때 말씀하신 원시복음입니다(창 3:15). 이것은 인류역사에서 그리고 성경에서 처음으로 선포된 복음입니다. 여인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입니다. 그 여인의 후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들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여인의 후손이 오실 것을 바라봄으로써 소망을 가질 수 있었고 그들은 그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선택하셔서 그에게 매우 구체적인 언약을 주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오실 구원자인 여인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오실 것과 가나안 땅에 오시게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사항을 얻게 됩니다.
3. 아브라함의 소명에서 죽음까지 아브라함에게 발생한 모든 사건은 언약의 특성을 설명한다.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것은 단지 그 정도의 정보를 더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선택하셔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언약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깊이 설명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소명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A. 부르심(행 7:2~3; 창 12:1~3): “내가 너를 축복하고 너를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
처음에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창세기 12장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을 때였고 우리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오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행 7:2~3).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다른 신들을 섬기던 사람이었으니까(수 24:2) 아마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보일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분적으로 순종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대가족이 함께 하란으로 갔던 것입니다. 거기서 거하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하란에서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창세기 12장에서 보는 장면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을 복주실 것이고, 또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전 생애는 결국 이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과 거기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이시고 확증해주시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이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아직 정확한 방식으로 언약을 맺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인 창세기 15장에서 보게 됩니다.
B. 언약을 맺으심(창 15)
이것은 우리가 조금 후에 자세하게 살필 것입니다. 하나님은 15장에서 당시 일반 사람들이 하던 방식처럼 아브라함과 언약을 정식으로 체결하십니다.
C. 언약의 증거로 할례를 명하심(창 17)
그리고 17장으로 가게 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증거로 할례를 하라고 하십니다. 이 할례는 십계명과 같은 율법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효력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 증거와 표시로서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음으로써, 아브라함과 그 자손은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다”라고 스스로 상기하고 또 세상 앞에서 그렇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마치 결혼 반지와 같은 것입니다.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음으로써 “나는 결혼한 사람입니다. 건드리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D. 언약을 확증하여주심(창 22:17~18)
아브라함의 삶의 절정은 그가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시험하시려고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바보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드릴 장소인 모리아 땅으로 가서 단을 쌓고 아들을 손수 묶어 제단에 올려놓고 아들을 향해서 칼을 들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 그를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리고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주십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천사가 아니라 성육신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라고 많은 학자들은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1인칭으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부분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수풀에 뿔이 걸려있는 한 수양을 발견하고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립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제까지 하신 언약의 말씀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증해주십니다. 그것이 17~18절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우리가 물을 수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 바칠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75세때 그를 부르셔서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고 이삭이 자라서 틴에이저가 된 이때까지 약 40여년을 그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많은 시련을 거쳐서 견고하고 성숙해졌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40년 믿은 사람 보면 그렇게 되는 것 봅니까? 여러분은 몇 년 믿으셨습니까? 그렇게 되셨습니까? 오늘 이 문제에 접근하는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 창세기 15장입니다.
4. 언약체결 의식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정식으로 언약을 체결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A. 왕의 하사(선물, 1절)
본문은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강대국 왕이 약소국의 왕에게 은혜로운 선물을 하사해주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상급이라는 단어는 군사로 출정한 사람에게 왕이 주는 보상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아브라함은 바로 앞에서 메소포타미아 동맹 왕들과의 전쟁을 치루고서 롯의 가족과 사로잡혀간 소돔 백성들을 구해준 후, 소돔 왕이 주는 전리품을 거절한 바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소돔왕이 내가 아브라함을 치부케 하였다고 말하도록 허용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다른데로부터 오는 것들에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소돔 왕에게서 포기한 부보다 훨씬 많은 보상물로 특별한 하사품을 상급으로 줌으로써 언약적 의무에 충실한 아브라함의 주목할만한 행동을 인정해주는 강대국 왕의 이미지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이시니 하나님의 선물을 하사받는 아브라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B. 언약을 자르다(cut a covenant, 렘 34:18~20)
본문에서 주목하게 될 가장 중요한 사건은 언약을 자른 사건입니다. 몇 번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고대 근동에서 언약을 맺는 방식은 짐승을 반으로 쪼개서 벌려놓고 그 사이로 언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에는 언약을 맺다라는 말이 ‘언약을 자르다’라고 표현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는 행위는 언약을 어길 경우에는 자신이 쪼개진 짐승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는 맹세 행위였습니다. 렘 34:18~20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보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대 말기에 하나님의 율법 언약을 범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피로 맺은 모세의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언약을 어겼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 저들이 그 쪼개진 송아지와 같은 신세가 되어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을 자르는 언약체결의식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C. 이상한 종주권 조약(7~11절)
그런데 여기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너무나 특이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종주권 조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밤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을 많이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그리고 이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서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도대체 자기가 어떻게 그 말씀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8).
그러나 하나님께서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지 눈치를 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짐승들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습니다. 비둘기는 몸체가 작기 때문에 제사를 드릴 때와 마찬가지로 쪼개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해진 후에 아브라함은 깊은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400년 동안 이방에서 객이 되어 섬기다가 그 섬기던 나라를 하나님께서 징벌하셔서 큰 재물을 가지고 거기서 나오게 하실텐데, 4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의 눈에 연기나는 화로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그는 보게 됩니다(17).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라고 말씀합니다(18).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횃불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잠든 중에 환상을 통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아브라함은 그 몸이 자동으로 자신도 그 횃불을 쫓아서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은혜언약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맹세로 되는 언약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은 언약을 지킬만한 신실함을 가지지 못한 인간이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수없이 실패를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만일 이 언약이 다른 종주권 조약과 같은 언약이었다면 하나님은 강대국 왕으로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셔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약소국 왕이 지나가야 하는 자리입니다. 약소국 왕이 언약의 내용을 지키지 못하면 그는 짐승처럼 죽을 것입니다. 이 종주권 조약은 언제나 약소국 왕에게만 의무를 지우도록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시는 조약은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지나가지 않고 하나님이 지나가십니다.
이것은 약속을 지키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이 끝까지 지시며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모든 저주를 하나님께서 직접 받으시겠다고 맹세하시는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형식은 종주권 조약과 같은 것이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의 일방적 맹세였습니다. 이렇게 강대국 왕이 자기 목숨을 걸고 맹세를 하는 형태의 조약은 고대 근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당신의 생명으로써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맹세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5. 하나님의 모든 자비와 용서의 근거는 아브라함 언약이다(출 2:24; 신 4:31; 왕하 13:23).
이 언약은 오직 아브라함 한 사람을 위해서 하신 약속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 모두가 다 이 약속의 은택을 경험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어기고 잘못 행할 때 그들을 용서하실 때마다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느 한 구석에서도 모세의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언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이 짐승의 피를 흘려서 그 피뿌림을 받고 언약을 비준했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은 행위의 원리에 근거한 행위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나올 때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합니다(출 2:24). 또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 행하여 언약을 어기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실텐데 이는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신 4:31).
여기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근거는 모세의 언약이 아닙니다. 여호아하스 왕 치하의 북왕국 이스라엘을 아람 왕 하사엘에게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왕하 13:23).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기억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심으로써 약속하신 맹세이기 때문입니다.
6. 아브라함이 언약의 영적 의미를 바라보다(히 11:8~19).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영적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A. 외부적이고 일시적인 것은 영적이고 영원한 것의 상징과 예표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리라고 가나안 땅을 지명하셨을 때에도 이것이 다가 아니라 이 외부적이고 일시적인 것은 영적이고 영원한 것의 상징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랬다는 것입니다(히 11:10).
그는 또 나온 본향 갈대아 우르가 자기가 돌아갈 곳이라고 생각했다면 얼마든지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텐데, 그가 바라본 것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이었다는 것입니다(히 11:16). 그는 외부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영적이고 영원한 것의 상징과 예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언약 체결의식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B.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거는 ‘구약성경의 골고다’이다.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독자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릴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든 요인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 그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심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댓가로 약속을 지키실 것을 맹세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만 할 의무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역사상 어떤 강대국 왕도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맹세로써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믿음이 만들어지는데에는 바로 이 사건, 하나님의 맹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아브라함이 세월을 보낼수록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비록 이 사건 후에 바로 아브라함은 육체를 따라서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 실패를 경험하지만, 이런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맹세를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독자 이삭을 하나님게 바치게 되는 자리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7.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이다(갈 6:14).
어느 신학자는 이 언약체결 사건을 구약성경의 골고다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율법 파기의 저주 아래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골고다 언덕의 그림자입니다. 실제로 언약을 범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언약이 믿는 자들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언약 파기에 대한 댓가를 지불함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눈 앞에서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신 하나님께서는 그로부터 2000년 후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땅에 오셔서 그 언약 파기의 책임을 홀로 다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아브라함이 쪼개서 피흘리고 죽게 한 그 짐승들과 같이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겨지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앞에서 하나님이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신 일은 하나의 퍼포먼스(performance)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 약속의 언약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이 될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과의 언약 조항들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을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심으로써 언약 파기의 저주 아래 홀로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2000년 전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의 책임을 지시고, 죽어야 할 아브라함의 아들 대신에 당신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저주 아래 두신 것입니다.
처음 아담이 범죄함으로 실패한 행위언약의 저주를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 담당하게 하심으로써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하시는 은혜를 무한히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입니다(갈 6:14).
아브라함의 신앙의 근거가 그가 보았던 하나님의 저주 맹세였듯이, 오늘 우리의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봄으로써 독자를 번제로 바치는 믿음의 자리에까지 이른 아브라함과 함께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당신의 맹세와 성취라는 한없는 은혜로 이루어주신 성 삼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시다. 아멘!
왜 믿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롬4:1-5; 창15:1-6/ 김형익 목사
2021-05-04 04:12:01
기독교 복음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믿음이 유일한 기준
기독교 복음이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다른 핵심은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가 행위의 구원을 말하는 반면, 기독교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행위나 선행이나 업적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다 라는 것이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있는 우리 모두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평가는 세상에서 하는 평가와는 전혀 다른 부분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우리를 교양과 학식과 재물과 직위와 인격 등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오면서 얻게 되는 아무리 많은 명예와 칭찬이 있을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살았을지라도 믿음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자인 것입니다.
주일학교 전도사를 하던 시절, 교회의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노래 가운데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습니다.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도 역시 믿음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읍니다.
떠오르는 질문들
하나님께서는 왜 믿음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믿음을 구원얻는 방법으로 제시하셨는가?
선한 삶을 살았는데 믿음을 갖지 않았다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것은 사람에게는 불공평한 처사가 아닌가?
이런 질문들입니다. 이 질문들은 마땅히 성경적으로 대답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적당히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고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설명을 주셨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일어난 일들?루터와 칼빈이 싸웠던 것들
먼저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 믿음과 관련하여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이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다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세 시대를 기독교회사의 입장에서 암흑 시대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중세에 예술과 문화와 기타 학문의 진보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화려한 로마 교황의 권세 아래 복음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가려졌다라는 표현을 쓸 때 중요한 핵심은 바로 믿음의 요소가 간과되고 경시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이 믿음을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이 하는 행위의 공로를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믿음과 동일한 비중을 두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뒤집은 사건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와 존 칼빈과 같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던 것들을 종교개혁의 다섯 Sola 들(Five Solas of the Reformation)라고 하는데,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a Fide(오직 믿음),
Sola Gratia(오직 은혜),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개혁자들은 이 다섯 개로 요약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생명을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셔서 교회의 복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싸웠던 것?오직 믿음
이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싸웠던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교가 강조하는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오직 믿음의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상고할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가 싸웠던 ‘오직 믿음’의 싸움은 결코 옛날 1세기의 유대교와 관련된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 본문을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싸움은 오늘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저와 여러분의 죄악된 본성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싸움이며 가장 무섭게는 카톨릭 교회가 아닌 개신 교회의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과 관련해서도 여전히 싸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이해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는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3장에서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의 교리를 설명한 후에, 이제 4장에 들어와서 그 예로 구약의 아브라함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는 이의를 달 수 없는 독보적인 인물입니다.
1절에 “그런즉 육신으로는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한 말은 아브라함이 얻은 것, 발견한 것, 깨달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하는 방식으로 설명을 해나가는 것은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2절에서 대답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믿음은 자랑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것은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행위로 된 것이면 자랑할 것이 있었겠다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은 본질적으로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자랑할 수 없다는 바울 사도의 논지가 강하게 깔려있는 것입니다. ‘자랑’의 문제는 ‘믿음’과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면 자랑할 수 없습니다.
행위로 구원받았다면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자기 힘으로얻은 것인양 자랑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한 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마치 물에서 건짐받은 자가 자앙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자랑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구원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겸손합니다.
바울 사도는 조금 더 깊이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3절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여기서 바울 사도는 창세기 15:6의 너무나 중요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 6은 이렇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러분, 이 구절은 신약 성경에서 세 번이나 인용이 되고 있는 구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본문과 함께, 갈 3:6과 약 2:23에서 인용됩니다. 중요한 구절임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보통 말합니다. 왜 그가 믿음의 조상인가 하면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기록된 첫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그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드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거나 의를 선물로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의를 주셨습니다.
다음 구절인 4절에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이 통상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는 방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군이 일을 열심히 하게 되면 받게 되는 임금을 ‘은혜’라고 여기지 않고 ‘당연히 받을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감사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유대ㅐ교에서는 아브라함과 관련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도움을 드린 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고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일한 것에 대한 댓가로 주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 바로 죄사함이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해석은 근본적으로 믿음과 행위를 반대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믿음을 하나의 계명과 행위로 여겨서 죄사함과 의로움은 그 믿음이라는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을 오해하는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래서 종종 이런식으로 말합니다: “나는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았는데, 넌 안 믿으니까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믿음은 구원의 원인이 아닙니다.
말은 맞지만, 태도는 틀렸습니다. 오해했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믿음을 구원의 원인이 되는 행위와 공로로 여긴다는 점에서 유대교의 해석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원인이거나 공로가 아닙니다. 구원의 원인은 오직 죄인을 믿음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이런 유대교의 해석을 바로 논박합니다.
바울 사도의 해석?오직 믿음
바울 사도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5절입니다.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아브라함이 죄사함을 받기 위한 한 가지 조건은 자기 후손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결국 다른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심어줄 민족이 될 것이라는 약속(창 12:1~3)을 믿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야심만만한 젊은이에게 주어도 그리 믿기가 쉽지는 않은 약속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받았을 때의 나이는 이미 75세였다는 사실도 놓치지 마십시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이미 가나안에 들어와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 추정은 16:3에 명시된 것인데, 15장의 사건과 16장의 사건 사이에 시간 간격이 거의 없이 이어지는 사건들로 이해할 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85세가 되었고 열 살 아래인 아내 사라의 나이는 75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약속된 자녀는 주어질 기미도 없고 오히려 그 가능성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15장 1절에서 다시 반복되어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회의적인 대답을 한 것입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3).
엘리에셀은 다음 구절에서 설명하는대로 아브라함의 집에서 길리운 종이었습니다. 이 말에 대하여 하나님은 ‘엘리에셀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 이라고 말씀하십니다(4절). 그리고는 아브라함을 그 밤에 장막 밖으로 불러내시어 하늘의 뭇별들을 세어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셀 수 없이 많은 밤하늘의 별들과 같이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5절).
이 때 아브라함의 불신과 두려움은 가라앉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6절).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성
이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은 아브라함 자신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없애셨고, 자기 영광을 더럽히지 않으시면서 아브라함을 온전히 축복하실 수 있게 되신 것입니다. 비로서 창 12:1~3에 선언하신 약속들을 이행하기 위하여 창조적인 능력을 아브라함에게 베푸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of Man)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아브라함이 이 의로움의 선언을 받을 당시 죄인이었고 경건치 않은 자(악한 사람)였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로마서 4:5에서 하고 있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아니, 구원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그에게는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신학적으로 ‘인간의 전적 부패’교리라고 합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분적으로 부패하게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더 이상 인간 사회에서 선을 외적으로 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사회적 수준에서의 선을 행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사실, 이것이 진정한 선함입니다?은 전혀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능력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믿음을 만들어낼 수 없고, 그 믿음을 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그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전혀 아무런 선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창 6:5; 8:21).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세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선하게 살았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다면 그것은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대답이 됩니다. 인간이 선하게 살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주관적 판단일 뿐입니다. 인간이 죄인인 이래로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의 기준에 미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법을 놓고 unfair 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세상의 재판관이 되겠다는 불경건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fair/unfair 의 기준은 이미 어긋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fair/unfair 의 기준이 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 될수록 그 자식은 여러분의 자기 확신, 자기 신뢰를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알면 알수록 자기를 더욱 신뢰하게 만드는 지식이라면 그것은 거짓된 지식일 뿐이요, 그 지식은 여러분이 아직도 자기 자신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의 반증일 뿐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로우심을 제대로 알게된 때가지는 결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에 대한 지식에 의해서 충분할만큼 깊이 영향을 받거나 감동을 받지 않는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 곧 구원을 주시도록 정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을는 도무지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교리는 인간의 전적 부패의 교리를 확증해주기에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시면서 당신의 선하심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방법
아브라함의 행위를 보면, 그가 의롭다함을 받기 전과 후에 모두 그의 악함을 드러납니다. 믿고 구원받으면 모든 죄와 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으로 죄사함을 주시고 의로운 자로 보시기 시작한 이후에는 비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축복된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은혜로운 분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것?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
아브라함은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유용한 봉사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그의 보호자가 되셨고 후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베푸심을 받는 피후원자와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믿음 곧 신뢰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후원자가 피후원자를 도와주려면 피후원자가 후원자를 신뢰하고 있으며 도움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의 경우가 가장 좋은 예입니다. 환자가 더 이상 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의사는 환자에게 더 이상 진료를 해 줄 수 없고 진료를 하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피후원자는 후원자에게 마땅한 인정과 영예를 돌려야만 할 것입니다. 후원자가 자기에게 베풀어주는 모든 필요한 도움들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불신의 상태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뢰의 관계 위에서 모든 선한 것들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는 베푸는 자에게 영광과 영예, 그리고 기쁨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은 이렇게 은혜로운 분으로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말은 찬양받고 예배를 받으시며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후원을 받는 자가 후원하는 자에게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뭔가를 준다면 그것은 전혀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후원자로 하여금 감사하고 신뢰하는 피후원자에게 성의를 다하도록 만드는 이 기쁨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은혜는 갚아야 할 빚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것은 감사이며 찬송일 뿐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예를 들어보지요.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베풀어주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바꿀수없는 기쁨인 것과 비슷합니다. 자식은 결코 아버지가 자식에게 베풀어주는 것의 크기에 상응하는 일-아버지가 매우 필요로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자식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아버지의 선한 인격과 자기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믿음과 신뢰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방법으로 믿음을 정해놓으신 것은 믿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행위로 얻는 구원은 더 이상 은혜일 수 없으며, 하나님도 더 이상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받으실 찬송도, 영광도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하신 성품은 모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행위의 노력을 통해서 얻어낸 대가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구원은 자랑을 수반합니다. 나는 이렇게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식으로 비결을 소개합니다. 내가 벌은 것 입니다. 그래서 벌지 못한 자들에게 자랑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하여 가진 태도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얻은 것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얻은 것이기에 자랑할 수 없고 오직 자랑한다면 그 구원의 선물을, 일한 것이 하나도 없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로 베풀어주신 그 선하신 하나님을 자랑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합니다(고전 1:31).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인생과 영원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주셨으며, 주고 계시며, 주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선하신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셨습니까?
그 선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와 기쁨과 감격과 찬송이 있습니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 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기도하는 자는 하늘을 본다 /창15:1-6/ 조용기목사
2020-03-22 03:12:04
“이 후에 야훼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이르되 주 야훼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야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세기 15장 1∼6절)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대화를 중지하고 마귀와 대화를 하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러다 결국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저주와 사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을 바라보는가? 매우 중요합니다. 똑같은 형편에 있어도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1. 당신은 어디를 바라보고 사는가?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기 천막집 안에서 밤에 잠을 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잠에서 일어나라. 빨리 천막에서 밖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천막 밖으로 불러내신 것은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천막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까 하늘이 안 보이지요. 천막 안에 있으면 천막 안에 있는 환경만 보입니다. 이미 75세가 되어버린 늙은 아내가 보이고 85세가 되어버린 늙은 자기 모습이 보입니다. 땅바닥을 바라보니까 먼지와 티끌만 보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답답하고 앞길이 캄캄합니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이 천막에서 나와 하늘의 별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믿게 되고 가슴속에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하듯이 우리에게도 “하늘을 쳐다보라. 너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보라.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본주의라는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와 지식과 경험과 감각을 가지고 판단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결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내일 일이 보이지 않으니 좌절하고 절망하고 불안하여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욥기 16장 6절에는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혼자 문제를 끌어안고 전전긍긍해도 마음이 답답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해도 여전히 마음이 답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우리가 당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중국에 사는 한 성도님의 딸이 신장염으로 몹시 고통을 당하였는데 매년 열리는 아세아성도방한대회에 와서 고침을 받았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도님의 사연을 보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간절히 구하는 자가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도가 자기 딸의 병을 치료받기 위해 아세아방한성도대회에 오려고 하는데 비행기 표를 구할 수가 없어서, 게다가 딸이 신장이 매우 나빠져서 5년이 넘도록 일주일에 두 번씩 투석을 받고 있었는데 요도염까지 심해져서 한국에 가면 죽을 것이라는 모두가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기도를 하면 성령께서 한국에 가면 반드시 낫는다는 메시지를 그 마음속에 심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비행기표를 구할 수가 없으니까 중국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한 것입니다. 기차를 타고 홍콩으로 가서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온 것입니다. 몸이 아픈 딸과 함께 그 먼 길을 여행했으니 그 믿음의 결단이 참으로 대단하지요. 두 모녀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한국으로 오는 동안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비행기에서 성회 관계자 만나게 하시고 그래서 마침내 오산리기도원에서 열린 성회에 참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저의 설교를 듣고 난 후, 기도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저와 함께 서계시는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얻어서 그 자리에서 저에게 안수기도를 신청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었는데 하나님께서 즉시 그 딸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만약 이 성도님과 딸이 환경을 바라보고 포기했더라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죽는다고 했지만 그분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니까 하나님께 그 딸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땅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고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바라보아야 가슴속에 소망을 품게 되고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늘
그러면 우리가 바라볼 하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 친자녀인 것입니다. 저 광활한 우주, 저 무수한 별들을 지으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을 믿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식 간에 얼마나 친밀하십니까? 여러분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직접 태어난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버지의 친자식이 되고 아버지께서 자기의 영을 부어 주셔서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육신의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하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로 16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야훼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들을 날리겠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사 41:14~16)고 말씀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 모습이 버러지 같을지라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면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한번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천막 밑에 좁디좁은 곳에서 탄식하지 말고 밖에 나와서 하늘을 한번 쳐다보십시오.
저 광대한 하늘, 저 무수한 별들을 지으신 이가 바로 우리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나를 생각하시고 나를 돌보시며 내 머리털 수도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27편 1절에 “야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만 바라봅니다. 땅만 바라봅니다. 그러니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로 쳐다보고 저 광활한 하늘과 저 무수한 천체를 만드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보내서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신 것을 알게 되면 어떤 형편에 있어도 강하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3. 십자가 대속의 그늘 밑에 거하라
그 다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늘은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는 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대속의 그늘 밑에 거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는 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가 기도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여러분과 나를 위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1절로~3절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멸시를 당하고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신 것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사야 53장 5절로 6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대속의 그늘 밑에 거하면서 죄 사함과 용서, 거룩함과 성령 충만, 치료와 건강,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 그리고 영생,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불뱀에 물려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고 하셨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다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로 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놀라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살이를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온 광야에 비유하셨고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뱀에 물렸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마귀에게 물려서 독이 올라서 죄짓고 불의하고 병들고 저주와 절망에 허덕이고 종국적으로 죽을 것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를 지나는 인생이 마귀의 독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마귀에게 눌린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언약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용서와 의를 약속해 주었습니다. 거룩함과 성령 충만을 약속해 주었습니다. 치료와 건강을 약속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을 약속해 주었습니다.
부활, 영생, 천국을 약속해 주었습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전인 구원도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무수한 하나님의 약속이 하늘의 별들같이 반짝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바라보고 먼지와 티끌을 바라보고 죄와 좌절을 바라보는 사람은 꿈도 희망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꿈을 얻고 믿음을 얻고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땅만 내려다보고 티끌만 바라보고 울지 마십시오. 천막에서 나와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뿌려 놓으신 저 별들같이 많은 약속을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고 꿈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고 입술의 고백이 달라져서 마침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천막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꿈과 믿음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별들과 같이 많은 약속을 준비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도해라. 내가 도와주겠다. 내가 너를 복 주고 싶다. 희망을 주고 능력을 주고 싶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으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나 과학이나 체험이나 감각이라는 천막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나는 못 해. 나는 안 돼.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절망이야. 나는 죽을 것이야.” 그렇게 하고 있으면 갈 곳이 없습니다. 이것을 탁 털어 천막 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천막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밀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너는 내 자녀요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해서 은혜를 예비해 놓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난 다음에 생각이 부정적이 되지 말고 긍정적이 되며 절망이 되지 말고 소망적이 되며 어두운 생각을 버리고 밝은 생각을 받아들여야 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밝고 맑고 환한 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미래는 지금보다 나아질 것을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을 것을 꿈꿔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꿈으로 가득 채워 놓고 우리는 주를 믿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외국인이 저를 보고 말하기를, “밤에 한국에 비행기를 타고 들어오는데 큰 공동묘지 같다.”고 말해요. 십자가가 너무 많아서 온통 벌겋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에게는 공동묘지로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축복의 상징으로 보인다.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이 우리 서울을 점령하고 있고 한국을 점령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죄 사함과 용서, 거룩함과 성령 충만, 치료와 건강,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 그리고 영생, 천국을 얻게 되니 축복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이 낙심되고 절망이 찾아올 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 가슴속에 희망을 품고 살 길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유기도>
병든 사람 다 일어나십시오. 문제를 가진 사람도 일어나십시오. 우리 손들어 아픈 자리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아버지여, 하나님 아들, 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땅만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지 못해서 무기력하게 되고 무능하고 되고 탄식하고 고통할 때, 마귀들이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우리가 예수 이름을 통해서 아버지를 찾아오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에서 건져주시기 바랍니다. 너희 마귀야,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너희에게 명하노니 이 시간에 물러가라! 머물러 있지 말라!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 일으키신 생명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오니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살길을 열어주시고 참 길을 열어주시고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 주 예수를 통해서 넘치는 생명을 부어주시옵소서. 건강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기적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건강을 원합니다. 우리는 기적을 원합니다. 우리는 승리를 원합니다. 우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별들을 헤아리고 별들을 바라봅니다.
별같이 많은 생생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마음에 별을 가지고 꿈을 품고 꿈이 가득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와 같이 계심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 성령이 우리 몸속에서 운행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 운행하는 곳에는 마귀가 다 쫓겨나가고 흑암이 사라지고 광명이 다가오며 아름다운 승리가 다가오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아브라함, 예수님의 예표 /창15:5-6/롬1:17/ 김성수목사
2015-07-14 14:22:19
기독교 신앙은, 머리로 뭘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지금까지 머리로 뭘 믿는 '개념'적 측면에서 접근해 왔다면,
앞으로는 (친밀한) 관계적 측면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믿음은.. 친밀한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의 번성의 의미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생육과 번성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의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의가 어떤 이(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장면이다.
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자손의 생육과 번성의 개념이 나온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지는데,
하늘의 별과 같은 생육과 번성의 약속이 주어진다.
‘네 자손이 이렇게 생육하고 번성할거야’ 하면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신다.
생육과 번성은 단순히 애를 낳고,
그것이 사람이 많아지고 하는 그런 차원을 훨씬 뛰어 넘는다.
하나님의 자손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생육과 번성은,
그 자손이 상징하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번성’이었다.
갈3:16에 ‘그 자손은 여럿이 아니라, 예수 한 사람 가리킨다’고 했다.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 생육과 번성은, 예수에게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할 것이었다.
단순히 자손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즉 구원받는 백성의 생육과 번성’이었다.
원래 첫 번째 아담에게 생육과 번성의 명령이 주어졌다.
그는 실패하고, 마지막 아담이 그 생육하고 번성을 성공해 낸다.
그런 과정에서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이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생육과 번성’의 언약을.. 자신의 삶을 통해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그 생육과 번성이 어떻게 성공되어졌는가?
그 주인공, 열매가 교회(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 교회가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되었는가?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손의 생육과 번성의 전제는,
그가 죽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친다.
모리아 산은, 나중에 골고다 언덕이다.
▲아브라함의 죽음을 통한 생육과 번성
아브라함의 자손, 그 자손을 생육하고 번성시키겠다는 것은,
먼저 ‘나는 너를 죽이겠다’는 뜻이다.
‘나는 널 죽여서, 의인 만들어서, 너로부터 내 백성을 생육, 번성 시킬거야!’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게 성경의 전체적 원리니까!
지금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대역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예수님께서 복의 근원이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다.
그게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의 생육과 번성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백세 낳은 아들의 심장에 칼을 들이댄다.
자신의 육적 자아의 죽음과 동시에, 한 편으로 자신이 죽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의 예표였다.
그전 까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과정에서 계속 참견을 했다.
‘하나님, 내가 죽으면 안 되니까, 내 마누라를 팔아서라도 내가 살께요.
왜냐하면 저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야 하니까요,
내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져야 하니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가 죽으면 안 되니까요!’ 하면서
마누라를 자기 대신 팔아먹은 것이다. 죽게 내몬 것이다.
그건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희생이었다.
그렇게 참견하고 나섰다가 아내를 2번이나 팔아먹었다.
거기에다 이스마엘까지 낳기도 한다. 자기가 뭔가 언약성취를 도우려고 한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성숙한 후에, 아브라함은 이제 '죽는 편'을 택한다.)
그런데 모리아 산에서는 이삭이 죽으면,
백세에 겨우 낳으면 애가 죽으면 이제 언약 성취가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이를 죽인다는 것은,
‘아~ 이 언약은 하나님이 성취하시겠구나!’ 이걸 믿음이라 그런다.
이게 육적 자아의 죽음이고, 자기 부인이다.
그래서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죽는다. (이삭의 번제물 바침을 통해)
거기서 그렇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죽여냄으로 말미암아
그가 복의 근원이 되고, 그가 예수, 의로운 자의 모형이 되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육하고 번성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의를 선물로 받은 의인들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육적 자아의 죽음을 경험한 것처럼,
자기 육적 자아가 죽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런 지향성으로 끌려간다.
성도들이 절대로 잘난 척 못하도록 하신다.
그러니까 믿음과 함께 그 동전의 앞과 뒤처럼 꼭 붙어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죽음/자기부인/자기 십자가이다. ‘내가 죽어야, 생육하고 번성하는구나!’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 있다. - 즉, 하나님 편에서 의무를 다 하시다.
자 그러한 자기 부인, 그게 생육과 번성의 필연적 전제이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은
복의 근원으로
즉,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난 널 죽여서 너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그 하늘의 복을,
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그들을 생육시키고 번성시킬 것이다.’ 라는
언약성취의 확약을 하고 계신다.
‘내가 그 생육과 번성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내고 말거야!’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는 것,
하나님은 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당신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내는 그걸 의라고 한다.
그게 의이다. (justice, righteousness를 더 자세히 설명하면, 실제로는 이런 개념이다.)
관계가 요구하는 그 의무를 성실하게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그 상태가 의이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의를 행하고 계신다.
즉, 하나님 편에서, 관계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계시는 것이다.
(인간 편에서 아브라함은,
그걸 믿었고, 또한 독자 이삭을 드리는 것으로
자기 관계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난 너를 죽여서, 역사 속에서 이 아담 안에 들어있는 널 죽여서,
반드시 널 내 백성으로 만들어내고 말거야!’ 하는 약속을 하셨고,
하나님 편에서, 그 언약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셨다.
그게 하나님의 의다.
아브라함은 ‘네 맞습니다.
제가 거기에 뭘 보태겠어요? 맞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실 겁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거 하나님의 의를 그냥 몽땅 받아들이는 거
그래서 실제로 독자 이삭을 드리기까지 했다.’
이것을 인간(아브라함)의 의라고 한다. 그게 의인이다.
※적어도 우리가 ‘창세기 아브라함의 하늘의 별과 같은 <생육과 번성>을 말하고,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친 것을 거론할 때,
‘그래서 부자 되었다. 영토가 확장되었다. 자녀가 많아져서 거부巨富되었다’
이런 관점으로 거론하는 것은.. 성경을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의 번성(축복)의 의미
성경은 복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의’란 무엇인가?
▲‘의’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수네’는 *히브리어 ‘차다크’
그 단어를 영어 성경은 justice(정의) 혹은 righteousness(의, 옳음) 이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우리 개역도 그런 의미에 따라서 ‘의’라고 번역했는데,
사실 그런 개념은, 헬라 철학의 영향 아래 있던 서방의 성경번역가들에 의해서
그 개념의 진의가 약간 잘못 전해져 내려왔을 수도 있다.
이 ‘의’라는 단어 ‘디카이오수네’는
헬라 철학자인 플라톤은 이 단어를 ‘justice(정의)’란 뜻으로 잘 사용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스러움 virtue’ 이라는 뜻으로 잘 사용했기 때문에
성경에 쓰여진 ‘의’ 디카이오수네 가
마치 인간의 ‘정의’나 ‘덕스러움’ 또는 ‘올바름right’ 정도로 번역된 것인데..
단순히 justice나 righteousness가 아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이 쓰던 의미이다.
그렇게 서방의 의의 개념은 rationale(근거, 레셔널)에 가깝지만,
동방의 의의 개념은 relation(관계)에 가깝다.
▲성경은 원래 헬라어를 쓰던 동방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지,
헬라 즉 서방문화권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동방의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디카이오수네 (의)’라는 개념은
그러한 인간의 덕스러움과 선한 의지를 가리키지 않고, ‘관계’의 용어다.
관계를 맺고 있는 두 대상이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내는 아름다운 상태가
‘디카이오수네’이다.
본문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있다’는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이 관계적 의무를 잘 감당하고 계신다.'는 뜻이 되겠다.
위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살펴보았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관계에 있어서, 그 언약적 의무를 잘 수행하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의’를
믿음을 통해
수여 받았다.
믿음은 영적 증거가 필요합니다 /창15:7-21/ 하용조 목사
2015-05-25 02:37:14
믿음의 사람 아브람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자녀를 제 때에 얻지 못했을 때 심각한 불안과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에서 길리 운 다메섹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아야 겠다는 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을 때 인간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그럴 듯 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과 감정에 맞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두려움에 빠진 것을 알고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결정적인 위기에 빠질 때 외면하지 않고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보고 계십니다. 아무때나 나타나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반드시 나타나셔서 격려해 주시고 다시 궤도를 수정해 주셔서 믿음의 길을 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의 두려움을 아시고 다시 그를 일깨워서 믿음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만 하지 않고 그를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아브람에게 하늘을 보게 하시고 무수히 많은 별들을 보면서 네 자손이 이렇게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순간 불안과 두려움, 회의와 갈등 속에 빠져 있던 아브람의 마음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믿음의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나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친절을 베푸신다는 사실 앞에 감동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이란 약속의 말씀을 계속 붙잡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싹이 납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어야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믿음이 회복되는 것을 보시고 너무나 기뻐하고 감격해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의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을 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은 그 믿음 하나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믿음의 증거를 구하는 아브람
아브람의 믿음이 회복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것은 아브람의 위대한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여호와를 신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로워지는 유일한 비결은 믿음뿐입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 신지 아브람에게 계시하십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 로라
인생의 참된 기초는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시작도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람을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끝도 책임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8절에서 아브람이 당돌하게도 하나님께 그 증거를 요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증거를 주십시오!”라고 당돌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아브람의 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들도 보이시고 말씀도 주셨지만 현실적으로 제게 자식이 없지 않습니까? 제게 자식을 주신다면 먼저 그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믿음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배웁니다. 첫 번째는 믿음이란 증거가 없어도 믿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는 그러나 그와 동시에 믿음에는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증거란 무엇입니까?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현실적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영적이고 내면적인 증거입니다.
영적인 증거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님의 내적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순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는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환상이 있었기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주님이 오시기까지 내가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영적이고 내면적인 증거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런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외적이고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증거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런 내면적인 말씀과 성령의 증거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어떤 위기와 환란도 모두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여러분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요구에 응답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증거를 달라고 했을 때 ‘그래, 알겠다. 내가 증거를 주마.’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의 형태가 좀 특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3년된 암소, 3년된 암염소, 3년된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과 계약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고대의 계약법이었습니다. 고대의 계약법은 짐승을 죽여서 쪼개어 마주보게 한 후에 그 사이를 왕래함으로 그 계약이 완성됩니다. 요즘에는 계약서를 쓰고 거기에 싸인을 하고 공증을 하면 그 법적 효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네가 만일 계약을 위반했을 때는 이 짐승처럼 너는 죽게 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10~11절을 읽어 주십시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시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제안한 방법에 대해 아브람이 순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그 모든 동물들을 취하며 그 시체를 반으로 쪼개어 양쪽으로 놓았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레위기 1장에 나타나는 제사는 짐승을 죽여서 불에 태우는 것이었으며 비둘기를 찢어야 했는데 여기서는 불태우지도 새를 쪼개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분명 제사가 아니라 계약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세상의 계약법대로 아브람과 계약하시길 원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적인 계약법을 통하여 아브람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내가 약속의 땅과 축복된 자녀를 너에게 분명히 주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아브람은 과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계약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궁금해하며 아침부터 이렇게 줄곧 기다리고 있습니다. 호시탐탐 시체를 노리는 솔개들 때문에 어디를 잠시 다녀 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 시체가 없어지면 그 계약이 완성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비우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오실 지도 모르기에 하루 종일 짐승의 시체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이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믿음이 생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현실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이 주어지지만 그 말씀은 현실화되지 않습니다. 약속의 말씀과 현실 사이에는 벽이 있습니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믿음이요 기다림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린도 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오래 참지 못하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상대방의 실수와 허물,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참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12절에 보면 ‘깊이 잠든 중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마도 하루종일 기다리다가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한낮의 뙤약볕에서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아브람은 잠든 사이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캄캄함이 그에게 엄습해 왔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그때에 예언이 들렸습니다.
13~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진짜 믿음을 가지면 예언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고 그분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일어날 일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나의 벗 아브람에게 무엇을 숨기겠느냐”하시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을 미리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하나님의 비밀을 압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언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미래에 대해서도 길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의 자녀에 대해서도 예언해 주시고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고 갈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좁은 길, 고난의 길을 가며 위기가 와도 그 길을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말씀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요 예언의 음성이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예언은 신약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예언과 성령님의 모든 예언은 계시록을 통하여 미래의 역사에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갈 것입니다. 사탄은 결국 패배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모든 예언들은 역사의 종말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지나가다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환상 중에 예언을 듣게 된 아브람은 형용할 길 없는 놀라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그때에 불이 나타났습니다. ‘연기 나는 풀무’ 곧 불을 담은 화덕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활활 타오르던 화덕 안에서 불이 갑자기 튀어나왔습니다. 그것이 ‘타는 횃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쪼갠 고기 사이로 그 불이 지나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싸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로 인을 치셨습니다.
이 불은 하나님의 불입니다. 하나님의 불이란 그분의 임재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란 곧 그분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불로 임재하시고 그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2~5절을 보면 모세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호렙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불을 만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는 산에 오르는 도중에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떨기나무는 불이 붙었지만 타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 불 속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불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자신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발에서 신을 벗어라.”
드디어 모세는 불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에서 모세는 또 한 번의 불을 경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바로의 손에서 탈출했을 때 그들을 인도했던 것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모세는 불기둥을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불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8절에 보면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을 때 또 한 번의 불을 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에 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연기가 나며 산이 진동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가 성막에 관한 말씀을 받을 때에도 이와 똑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불은 모세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도 임했습니다. 역대 하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치고 봉헌식을 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그가 봉헌 기도를 마치자마자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것입니다. 땅에서 오는 불은 하나님의 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은 하늘에서 내립니다. 인간으로부터 오는 불은 하나님의 불이 아닙니다.
그 불이 임할 때 하나님의 영광도 같이 임했습니다.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 가득해서 제사장조차 그곳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이 불은 솔로몬에게서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불은 엘리야에게 옮겨 붙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백5십명과 갈멜산에서 대결할 때였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짐승을 잡아 놓고 열심히 주문을 외기 시작했습니다. 춤을 추며 창으로 자기 몸을 찔러 피를 내며 소리 질러 기도하였지만 거짓 우상인 바알은 불로 응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쌓고 열 두 돌을 취한 후 그곳에 제물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에다가 물을 부은 후 소리지르지 않고 조용히 기도하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소제를 드리는 저녁 무렵 그는 간단한 기도를 올립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 기도를 드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 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 그것을 모든 백성들이 보고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 시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불은 엘리야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불은 오순절날 다락방에서 전심으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도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불은 지금 우리의 마음에서도 불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곳곳마다 성령의 불은 횃불처럼 지금도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믿음에는 불의 인치심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능력은 적극적 사고방식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 불의 능력입니다.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묵은 땅'을‘언약의 땅’으로
18절을 보십시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계약에서 내용만큼 중요한 것은 계약한 날짜입니다. 여기에 보면 ‘그날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한 날에 아브람과 더불어 계약을 하셨습니다. 계약 전까지는 자유롭지만 일단 계약하면 후회해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날에 여러분을 지키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아들을 보내시기로 결정하셨고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과장이 없으십니다.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불의 계약’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도 바로 이 계약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며 구원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귀찮다고 그만두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여러분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강에서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받을 때의 현실로 돌아 와 봅시다. 그에게 아기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람은 이 때부터 15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만사 형통하거나 당장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붙잡을 것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받은 것은 겨우 막벨라 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현실에서 소유한 것은 그것 하나였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그의 인생이 끝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람의 자손 가운데 예수께서 태어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되리라'는 말씀대로 구원받은 백성이 많아질 것이라는 말씀이 그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자들을 부르시는 그분의 놀라운 섭리가 바로 아브람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9~21절을 읽어 주십시오.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줄 땅이 바로 이 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땅은 새 땅이 아니라 묵은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이 살지 않던 땅이 아니라 이미 기존에 수많은 족속들이 살아왔던 그 묵은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새 땅을 주시지 않고 묵을 땅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묵은 땅을 주신 이유는 그곳을 기경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모든 이방 족속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천국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새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죄악으로 더럽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들어가서 여러분을 새사람으로 만들길 원하십니다. 묵은 땅을 기경해서 축복의 땅을 만들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안에 모든 축복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아브람이 받은 이 축복과 증거를 우리도 받게 됩니다.
아름다운 선택(1)비전 /창15:1-7/ 이동원 목사
2014-11-29 06:34:07
여러분은 세상에서 평균 연령이 가장 젊은 나라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지난 3년전 통계에 의하면 베트남이라고 합니
다. 이 나라는 인구의 61가 30세 미만으로 형성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점점 더 고령화되는 것과 대조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근교에서 열린 선교사 대회를 섬기고 돌
아왔습니다. 베트남을 다녀오며 저에게 남겨진 가장 강렬한 두 가지 인상은 자동차들을 제끼고 도로 전체를 점유한 채
바다의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오토바이들의 물결과 생동하는 젊은 인구들의 역동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이상
으로 제 마음을 부풀게 한 것은 제가 만난 선교사님들과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에서 자라나는 꿈이었습니다. 이것은 마
치 지금으로부터 30-40년전 한국인들이 가난했지만 꿈을 먹고 살던 그 시대의 젊은 한국인들을 연상시키고 있었습니
다. 아직도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더 이상 국민들은 사회주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찍 선교 학자인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가 2000년대의 가장 중요한 세계 변화의 한 특성으로
경제적 실용주의가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것이라고 예언한 현장을 저는 베트남에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2000년대의 문턱에서 한때 전쟁 당사국들인 미국과 베트남은 무역 협정을 체결하였고, 반국가적 범죄 행위를 하지 않
는 한 어느 정도의 종교 자유를 허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작년(2008년) 1월 베트남 내에서 개신교 대표 격으로
침례교회 선교를 공식으로 승인하여 미 남 침례교 국제 선교부 총재 랜킨(Rankin) 박사가 축하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
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선교사 대회도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다. 베트남 현지를 위시하여 인도, 말레이지아, 태
국, 인도네시아, 필립핀, 라오스등지에서 모여온 우리들의 파송 혹은 교단 협력 선교사님들 200여명과 함께 선교의 꿈
을 나누고 그들을 격려하는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창립될 때 우리의 비전의 하나가 적어도 우리 교회에
서 복음전도에 헌신한 지도자 3,000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었고, 그중에 십일조인 300여명은 타 문화권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는 일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은 그런 우리의 꿈의 현장을 확인하는 감격적인 자리이기도 했습니
다. 저는 오늘 <아름다운 선택>이란 새로운 설교 시리즈를 시작하며 첫 주제로 <비전>을 선택했습니다. 인간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사는 것은 어떤 꿈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
는 그 꿈이 어떻게 우리의 삶의 마당에서 우리의 욕심을 넘어선 하나님의 비전으로 실현되게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
다. 오늘 우리는 이런 비전의 도구로 인생을 사는 비밀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비전의
도구로 인생을 사는 비밀-무엇일까요?
1.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비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이 경제 대 공황에 직면했을 때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그의 유명한 대통령
취임사에서 두려움에 빠진 국민들에게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오직 두려움 자체뿐이다”(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비전을 주시기 전 먼저 그의 마음
에 존재하는 두려움의 장애물을 다루셔야만 하셨던 것입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사실 본문의
배경을 형성하는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한 전투에서 일종의 기습공격을 통해 승리를 거
두었습니다. 그러나 적들이 다시 전열을 정비해서 반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아직도 아브람
은 후사를 갖지 못한 때문에 이대로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가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자식은 바로 자신의 미래였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없다는 말은 미래가 닫혀 있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자식이 주어질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세월은 바람처럼 날아가고 있
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아직 구체적인 약속도 약속 실현의 징조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너와 함께 하고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너를 보호한다면, 그리고 너의 상급이 되어 너
에게 후사를 준다면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고 창조자 여호와가 말씀하십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백성들의 두
려움은 상황을 잘 인식하지만 바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상실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두려움이 내 인생의 마당에 임하거든 먼저 할 일, 하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아무리 내 인생이 사면초가이어도 열
린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지니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2. 구체적 비전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아브람의 기도가 드려집니다. 2절입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아마도
처음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이제나 약속하신 아들을 상속자로 주시려나 생각한 듯 싶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응답합니
까? 2절 하반부에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자신의 하인 중에 지혜로운
종(아마도 아브람이 언약의 땅으로 오던 중 다메섹에서 만나 데려온 종)으로 이미 상속을 결정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4절에서 하나님은 네가 기른 자가 아니라 네가 낳은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붙
잡고 살아 갈 비전을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시청각 교훈을 베푸시지 않습니까? 어느 별이 빛나는 밤 그를 데리고 뜰에
나서게 하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별을 세어보라고 하십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들 나 둘, 별 셋 나 셋하나님 너무 많
아 셀수 없어요” 그때 뭐라고 하십니까? “네 자손이 그와 같으리라” 이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비전은 곧 보이지 않는 미
래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비전의 창출은 “하나님, 무엇을 저에게 주시겠습니까?”라는
아브람의 기도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빌 하이블 목사는 “기도는 곧 비전의 모태라”고 말합니다. 기도에
서 비전이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저는 비전과 야망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 야망은 단순히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성경적 비전은 우리의
기도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꿈꾸지도 계획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
했을 때 하나님은 그로 애급에서 억압받고 있는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출애굽의
비전을 잉태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조국에로의 귀국의 꿈도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조국 예루살렘의 소
식을 듣고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성벽 재건의 비전으로 그 가슴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단순
한 인간적 야망으로 인생의 길을 걷고 싶습니까? 그러면 그냥 마음의 충동을 따라 가십시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인생
이상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창조주가 설계하신 최선의 인생을 갈망하십니까? 그러면 엎드려 하나님의 인도
를 구하십시오. 막연히 미래를 설계하고 싶으시다면 막연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구제적 성경적 비전을 받고 싶으시
다면 구체적인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하나님 내게 무엇을 주시겠느냐?”고 말입
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비전이 주어져도 비전이 보여도 그 비전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믿지 않으면 비전은 결국 몽상이 됩니다.
믿음이 비전을 잉태하는 첫 스텝인 것입니다. 하늘의 뭇 별처럼 자식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은 무
엇이었습니까? 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믿음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신 것
입니다. 그리고 그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꿈 꾸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 꿈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 하
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쓰셔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펼치고자 하십니다. 이런 비전의 사람들을 비저나
리(Visionary)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밤에만 아니라 오스 기니스의 말처럼 낮에도 꿈을 꿉니다. 그리고 진정한 비
저나리들은 비전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그 비전을 출산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이들이 바로 비전의 주인공이 되
고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집니다. 비전을 갖고 사는 사람과 생존만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비전을 선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생존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오래 사는 것’(장수)을 목표로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
습니다. 그러나 오래만 사는 것-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요 모델이 예수님이시라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오래 사신 분은 아니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인생을 누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의 인생을 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 구원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는 일
찍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말씀하셨습
니다. 그리고 그 많은 열매를 위해 그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꺼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선택은 죽음의 선택이
었지만 동시에 비전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으심의 결과로 구원받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분의 삶의 성공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은 우리 모두가 역사의
한 날 그분의 성공을 궁극적으로 선포하는 놀라운 축제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부르는 비전 찬송의 내용이 된 계7:9-10입니다. “이 일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큰 소리로 외쳐 이르
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그 날의 축제에 우리도 가슴 설레는 증인으로 서기 위해 비전의 사람이 되는 꿈을 꾸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선교
사 대회의 마지막 저녁 설교에서 그 자리에 모인 선교사님들에게 우리도 예수님처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들의 선
교지에서 12명의 현지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꿈을 꾸어보자고 도전했을 때 마침 그 자리에는 SK 건설의 베트
남 책임자로 와 계신 우리 교회 한 집사님(김 영섭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그분이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는 사무실에 들러 잠시 기도하던 자리에서 그분의 이런 감동적인 고백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 이 사무
실에 정확하게 12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제가 그들을 예수님의 12제자로 키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렇습니
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아니겠
습니까? 그러면 오늘 다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비전의 인생을 선택하시겠습니
까? 아니면 생존의 인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선택-비전입니까? 생존입니까?
의롭다 함을 얻은 믿음 /창15:1-7/ 곽선희 목사
2014-11-23 23:38:27
그러니까 1973년 그 어느 주일에 미국에 로스앤젤레스에 어떤 한인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할 그런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LA에 한인교회가 제 기억에 셋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때에 어떤 한인교회에서 주일날 낮예배 설교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게 됐는데 아시는 대로 예배순서는 이렇게 장로님이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성가대를 하고 그 다음에 설교하게 되는데, 그래서 이 설교 전에 있는 순서, 성가대나 혹은 이 장로님의 기도가 매우 중요한 것이올시다.
특별히 설교자에게 말입니다. 그날 장로님이 뭐라고 기도하시는고 하니 한국의 어려운 사정을 다 이야기하면서 전쟁의 위험이 있고, 먹을 것도 없고, 경제 공황이 있고, 공해가 심하고, 뭐뭐뭐뭐 다… 지옥 같은 한국에서 우리를 "우리와 우리가정을 가나안땅과 같은 지상낙원으로 옮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래요. 이 말을 듣고 나니까 설교할 마음이 없어요.
'도대체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설교하러 왔단 말인가.' 어떻게 화가 나는지. 자, 이거를 삭히느라고요 제가 성가대 하는 동안 이거를 삭히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주기도문을 몇 번 외웠어요.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시험에 들지……." 저 장로님 잊어버리고 나머지 교인들을 생각하며 설교하게 해달라고 제가 마음을 스스로 달래느라고 무척 애쓰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월요일 날 미국에 갔다가 토요일 날 돌아왔는데요. 전 주간에 신학대학에 강의가 있어서 이렇게 갔다왔는데 지금 미국엔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지마는 월드 트레이드 센타(World Trade Center)가 폭파하는 테러가 있었지요. 탄저균(Antrax)하는 그 밀가루 같은 거, 그것 때문에 편지봉투 뜯는 게 겁이 난 거예요. 이거 뜯다가 한번 코로 냄새를 맡으면 그냥 가는 거예요. 어쨌든 지금 미국은 난리가 났습니다.
그야말로 얼굴도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전후방도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 상황 속에 들어가 있는 미국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고 보니 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교회마다 교인들이 터지게 모이는 겁니다.
그 동안 교회를 등한히 했던 분들도 열심히 교회에 나옵니다.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에 L.A.에 있는 유명한 크리스탈 처치, 가든 그로브 처치, 그 교회 건축이래, 설립이래 지금 최고로 많이 나온다는 거예요. 주일마다 교인들이 많이 나와요.
서점마다 성경이 너무 많이 팔려서 동이 났어요. 이 두 가지가 달아진 거예요. 이제 아직도 미국이 지상낙원입니까? 아직도 이민 가고 싶습니까? 무엇을 믿고 사는 것입니까? 경제입니까, 정치입니까, 기술입니까, 지식입니까, 넓은 땅 덩어리입니까?
쏘 홧(So what)?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거요? 저는 미국에 갈 때마다 제일 부러웠던 건 땅덩어리입니다. 어디를 가나 얼마나 넓은지 '휴∼ 이건 정말 하나님이 불공평하다' 그런 생각도 했어요. 허나 요새 보니깐 그것도 아니에요. 아니더라구요.
여러분, 무엇을 믿고 무엇에 근거하여 안정을 찾을 것입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내 고향 내 친척 익숙한 바로 이곳이 제일 좋은 곳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전혀 보장도 없는 이방 땅으로 하나님은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고향과 친척 평안한 곳 안정된 곳을 떠나서 전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라. 분명히 히브리 11장 8절에서 보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그랬어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말입니다. 특별히 지명을 일러준 것도 아니고 방향을 제시한 것도 아니에요.
지시할 땅으로 가라! 떠나면 그때에 그때 그때 지시해줄 것이다.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고 지금은 없는 자식을 약속해 주시면서 "내가 네게 후사를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약속은 25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래 25년 동안을 어찌나 답답하게 살아야 했던가 말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않았다. 발붙일 만큼도 자기 땅에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한평생을 남의 땅에 나그네로 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나는 너의 방패니라. 내가 있어 네가 평안한 것이지 네가 땅을 가져서 평안한 것도 아니고, 자식이 많아서 평안한 것도 아니고, 정치가 안정돼서 평안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내가 한 말을 믿으라. 내 약속을 믿으라. 내 능력을 믿으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이렇게 해서 한평생 나그네로 살았으나 그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랬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의로 여기시고
. 이 한 요절은 아주 중요한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복음의 뿌리가 되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의로 여기시고.
먼저는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분들도 똑바로 알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는 자연을 위해서 자연법칙이 있습니다. 우주적인 무궁 무궁진한 법칙이 있어서 그 속에 삽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인격이 있습니다.
인격을 향한 하나님의 법칙이 도덕성입니다. 자유를 주었으나 그 자유 안에 도덕성이 있어요. 그래서 선하게 산 사람에게 복을 더하시고 악하게 산 사람에게 벌을 내리시고.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도덕적 법칙! 이것을 우리는 잠깐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는 사람의 의라고 하는 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하나님의 법에 얼마나 가까이 가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사는가, 얼마나 양심에 따라서 살아가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니는 의올시다. 의!
세 번째 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시는 의입니다. 그건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이건 '칭의'라고도 하고 '득의'라고도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져스티피케이션(Justification), 져스티파이(Justify) 의로운 게 아니야.
비커밍 져스트(Becoming Just)가 아니고요 Justify, 의롭다 하시는 겁니다. 의로 인정해 주시는 겁니다. 제가 젊었을 때 자 이거 의롭다 함, 의롭다함. 이거 아무래도 좀 법적인 용어거든요? 이게 우리에게 익숙지 않아요. '이걸 어떻게 우리 좀 쉬운 말로 바꿀 수 없을까?' 나름대로 연구해 봤는데 이것은 '보아준다' 그거예요.
안 예쁜 것도 예쁘게 보아준다. 실수한 것도 그 중심을 보고 잘한 일로 보아준다. 분명히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이 사랑으로 덮어서 불쌍히 여기시고 그것을 의롭다하시면 의로 보아주신다. 그거 기가 막힌 말씀이에요. 그 점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면은 자, 이제 이 죄인을 보고 '내가 너를 의롭다 하노라' 믿지를 않아요. 믿음이 생기지를 않아요. 아니 내가 분명히 죄인인데 어떻게 복을 받는다 말인가? 내가 분명히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용서했단 말인가. 증거가 없어요,
증거가. 그래서 소 잡아들이고 양 잡아들이는 제사법이 나온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 이제 그 순진한 양을 갖다가 양의 머리에다 손을 얹고 죄를 전가하는 의식을 한 다음에 그걸 죽여서 재단에다가 불태우라. 그 지글지글 타는 것을 보면서
"자 내가 너를 용서했다. 네 죄를 여기서 대신, 대신 양을 죽였으니깐 죄 값은 사망이지만 너는 살 것이다" 말씀하세요. 이 맥락에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어요. 그 희생을 치른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보라! 내가 너를 용서했느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느니라." 이제는 문제가 있어요. 그걸 믿어야 되는 거죠. 이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이 속죄와 이 대속의 은혜를 믿어야 되는 거예요. 나 자신은 불의하나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면 그만이에요. 그럼 믿어야되요. 나는 죄인이지만 내가 너를 의롭게 여기노라 하시면 이제는 믿어야 되는 거예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돼.
미국에 네브라스카 의과 대학 교수이고 심장의학 전문의인 로버트 엘리오트(Robert Eliot)라고 하는 박사님이 계시는데, 그는 심장병을 많이 연구하면서 이런 몇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사람의 이 병중에 가장 무서운 게 심장이요.
심장병의 그 근본은 스트레스요. 스트레스! 이 정신적 스트레스가 문제래요. 이것이 모든 질병의 근본인고로 자,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의 긴 경험 속에서 이렇게 정리해 줍니다. 첫째는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마라." 큰 일과 작은 일이 있지 않습니까.
언제든지 이 작은 일, 이 시시한 일, 이 별것도 않은 일, 여기 너무 연연하지 마라. 그 작은 일에 연연하면 이 병이 되는 거예요. 작은 일은 무시하라 그 말이죠. 자, 두 번째가 더 재미있어요. "모든 일은 다 작은 일이다" 그랬어요.
생각해보면 중요한 일이 아무 것도 없어요. 뭐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게. 안 그래요? 대단한 일이 없다고요. 그렇잖아요. 다 시시한 거예요 알고 보면. 세상사가 다 시시하고 너절한 거예요. 모든 것은 작은 일이다!
세 번째는 싸울 수도 없고 또 되돌려 받을 수도 없다면 있는 대로 용납하라. 의예요. 믿음으로 받아들이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 있었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것만이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게 뭡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벌써 사랑하셨어요. 벌써. 내 지은 죄대로 됐으면 벌써 망하고 죽고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텐데 이 살아있는 것만 가지고도 기적이야. 벌써 엄청난 사랑 가운데 내가 있어요.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 받아들이는 믿음! 이게 바로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로 돌아갑시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나약함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9절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죽은 자와 방불함을 알고도"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늘 말씀하세요. 내가 네게 아들을 준다, 아들을 준다. 아 그런데 뭐 나이가 벌써 100세가 가까워가거든요.
죽은 자와 같아요. 생리적으로 볼 때는 이미 죽은 거예요. 아내는 단산했고 남자는 늙었고. 뭐 그것 다 끝난 거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논리로부터 그는 벗어납니다. 이게 중요한 것이에요. 나약함을 알면서도. 그뿐만 아닙니다. 여러번 실패했죠. 그의 실패한 과거를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함도 알고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이 성경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이렇게 열거하면서 강의해 나가는 중에 아브라함 몫에 와서 아브라함의 얘기가 너무 기니까 한시간에 다하질 못해서 하루는 아브라함의 잘한 이야기하고 장점, 하루는 단점을 얘기했어요.
아브라함의 실수만 모조리 골라 가지고 쫘악 얘기했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갔더니 제 아내가 "여보 여보" 이리오라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그렇게 난도질을 해도 되는 거요?" 그래 내가 "내가 말한 가운데 잘못된 게 있느뇨?" 그러니깐 "아, 그러긴 하지만."
여보, 아브라함 실수가 많아요. 자, 땅을 준다고 했더니 흉년든다고 애굽으로 가고, 아들 준다했더니 좀 기다리다가 좀 맘에 안 들어서 또 첩을 얻었고요. 별 짓 다했지요 뭐. 실수가 보통 많은 게 아니에요. 거듭거듭 엎치락뒤치락. 요샛말로 인간적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세요. 오늘도 말씀을 하세요. "네 아내가 아들을 낳으리라." 이건 놀라운 얘기예요. 그래서 창세기 18장에 보면은요 이 이야기를 할 때, 바로 이거 낳기 전에 일년전입니다. 천사가 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사라가 저쪽 천막 뒤에서 웃었대요. 픽, 하고 '웃기느만. 이거 많이 웃기네. 내가 지금 단산한지가 언젠데 부부생활 그만 둔지가 언젠데 고목 나무 같은 난데 뭘?' 픽하고 웃었다는 거 아닙니까? 저 얘기가 지금 25년 전부터 듣던 얘기거든요.
웃어버렸어요. 천사가 "네 아내가 어찌하여 웃느뇨!" 이러니깐 사라가 겁이 나가지고 "안 웃었습니다. 안 웃어요." 참 하나님 좋은 분입니다. "그래그래. 웃었느니라" 그래요. "네가 웃었느니라." 인정해요. "웃을 테지. 그러나 아들을 낳으리라." 이 마지막 말을 믿어요.
이 사라가 위대함이 이거야. 이렇게 웃었다가도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믿었어요. 믿고 신방을 다시 꾸린 거예요. 믿는 것만 아니에요. 감성만이 아니에요. 그냥 단순한 기적이 아니에요. 행동으로 옮긴 거예요.
결국은 1년 후에 아들을 낳고 너무 좋아서 여기에 '기쁨이다' '웃음이다' 해서 이름이 '이삭'이에요. 웃었다 그거예요. 웃을만 하죠.
자, 보세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 같으면요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 그럴 때 웃었거든요. "취소한다" 그러지. 너 왜 웃었냐? 너 믿음 없쟎냐. 그렇지 않았어요. "웃었느니라" 하고는 그리고 "낳으리라" 그랬어요. 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입니까? 이 하나님을 믿었어요. 마지막 믿음! 이것이 바로 의롭다 함을 얻은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조카 롯을 위해서 전쟁을 치렀어요. 전쟁 끝에 불안이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이겼지만 저들이 동맹해서 쳐들어오면 속수무책이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방패가 됨이니라. 두려워 말라." 또 믿었어요. 또 믿었습니다.
창조신학자이자 영성치료자이기도 한 매튜 팍스(Mathew Fox)라고 하는 분이 오리지널 브래싱(Original Blessing)이라고 하는 책에서 그는 영성 회복의 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는 적극적 사고로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재임을 인정하라.
여러분, 사람을 낮춰 평가하지 마세요.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존재요. 하나님의 형상이 함께 하는 존재라는 자기 인식을 가져야 되요. 둘째는 자신을 비우라. 내 지식 내 논리, 특별히 자기 논리에서부터 벗어나야돼요.
다 버려요. 지식도 명예도 자식도 기회도 지혜도 없어요. 다 비워버려요. 깨끗하게 비워버려. 특별히 고집스러운 자기 논리로부터 온전히 자유해야 됩니다. 세 번째는 자신의 창조성을 인식하라. 하나님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통해서 역사하고 계세요. 창조성을 인정하고요.
그리고 변형된 삶에서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되요. 하나님은 아직도 내가 필요해요. 그 사랑 그 용서 그 인내 그 긍휼 속에 내가 있어요. 하나님께는 아직도 내가 필요합니다. 나는 소중한 존재예요. 이것의 나의 나됨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마틴 루터, 그의 신학은 철저하게 사도 바울의 신학으로부터 옵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아브라함의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중심입니다. 특별히 종교개혁자의 신앙에 중심입니다. 보세요. 분명히 종입니다.
그러나 양자 되어서 아들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는 아들입니다. 그런 고로 용서받은 죄인이요, 구속받은 의인이올시다. 그걸 믿어야 되는 거예요. 진노의 자녀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자기정체의식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여러분, 삶의 힘은 믿음이요. 물질이 아니고, 지혜입니다. 지혜가 아니고 의입니다. 의가 아니고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미국에 있으면서 밤늦게 텔레비전에 나오는 복음 주의자들의 부흥회 하는 장면을 여러 곳 보았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이 엄청난 사건을 앞에 놓고 하나같이 외치는 메시지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God still loves America. 하나님은 지금도 미국을 사랑하신다. 미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를 사랑하십니다. 모든 사건 하나 하나를 면밀히 깊이깊이 상고하고 명상해보세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그 의롭다 하시는 사랑을 내가 받아 드려야 됩니다.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할 때에 엄청난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여기에 개혁적 신앙이 있습니다. 기도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전화 속에서도 지켜주시고 많은 불꽃 속에서도 지켜주시고 지진과 재난과 가뭄과 홍수와 그리고 많은 전쟁의 위험에서도 지켜주신 하나님. 오늘도 의롭다하시는 주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간증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저 믿음을 우리에게도 주시사 이 어려운 세대에서 더 가까이 주의 사랑을 느끼며 확증하며 승리생활 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개혁신앙의 뿌리 /창15:1-7/ 곽선희 목사
2014-11-20 05:06:16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수도원 에서 기도와 명상과 고행을 통해서 그 영혼을 깨끗케 하고 또 하나님의 나라를 봉사하는 수도사였습니다. 수도사로 살아가는 동안 어째 인간 적으로 생각하면 죄를 지을래야 지 을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흔히 말 하는 '리얼 신(Real Sin)' 사실적 죄 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없으니 간음죄를 지을 수 없 고 사유재산이 없으니 도적질 할 것 도 없고 가족도 없고 또 나아가서 출세니 명예니 하는 그것도 없으니 까 인간적 욕망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 기 도, 명상하는 그것인데 그러나 그는 수도원에서 죄로 고민했습니다. 개 혁자 마틴 루터의 가장 심각한 고민 은 오직 하나 죄입니다.
죄와 의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죄, 내 죄, 내 죄, my sin, my sin, my sin 하며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죄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회개 하고 참회하고 고행을 해도 이것으 로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가 않는다 는 거예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걸 느꼈어요. 그는 당시의 수도사들이 가르쳐 준 대로 그대로 참회했습니다. 명상했습니 다. 고해했습니다.
그래 마침내 고 해성사라는 게 있지요. 그것은 고 해성사 하는 장소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면 잠시 후에 신부가 나와서 옆 으로 비스듬히 앉고 이제 그 귀에다 대고 자기 죄를 자복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런 고해하는 일을 하루 에 스무번도 더 했답니다. 가서 죄 를 고하고 돌아와서 또 고민돼서 또 가서 고하고 또 고하고……. 마지 막엔 신부가 너무 귀찮아 가지고
"루터야, 죄 좀 모았다 오너라"
그 랬다고 그런 전해지는 얘기가 있습 니다. 또 그랬을 거 같아요. 그는 죄로 인하여 많이 고민했으니까요. 아무리 참회하고 고해해도 그 마음 속에 진정한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 을 보지 못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지은 죄가 있습니다. 여 러분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가 지금 아무리 회개하고 뉘우치고 뭐 이제부터는 그런 일에서 떠났다 하더라도 이미 지은 죄가 어디로 갑 니까?
자 우리가 빚을 졌다고 생각 해 보세요. 빚으로 죄를 상징해서, 비유로 말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빚을 졌어요. 내가 이 시간에 뉘우 치고 이제부터는 바로 산다고 한다 고 그 빚이 없어집니까? 내가 사람 을 죽였다고 합시다.
내가 여기서 아무리 회개하고 빠르게 고행, 한 평생 내가 의롭게 산다고 몸부림을 친들 죽은 자가 살아납니까? 죄를 소홀하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미 지은 죄는 죄 대로 그대로 있는 것 입니다. 여러분 요새 뭐 어떤 사람 이 좀 잘못해 가지고 쫓겨다니다가 10년만에 이제 자수했다면서요? 바 로 살겠다고 자수했지만 덜커덕 감 옥에 들어가던데요. 이미 지은 죄 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는 이 죄가 나를 타락시켜서 죄의 결과로 내 속에 타락성이 있다는 것 을 또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내 가 지금 바르게 한다 뭘 한다고 몸 부림쳐봐야 그건 벌써 정상적인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 의 를 논해도 그게 의가 될 수가 없고 공로를 논해도 공로가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벌써 타락했기 때문에. 이 타락성이 무서운 것이에요.
그래서 정욕의 노예가 되고 불신앙의 노예 가 되고 때로는 사악한 마음이 이 마음속에 있는 것이거든요. 아직 큰 죄는 짓지 않는 거 같아도 죄로 인한 변질된 타락한 내 심령 이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죄요. 그런가 하면 미래로 지향하 면서 우리는 걱정, 근심이 많습니다. 불신이 있고 불안이 있고 또 하나님 의 약속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이 의심은 병이요 그 의심은 죄입니 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나 하 나님의 자녀 됨에 대해서, 내게 주 어진 미래에 대하여 의심이 많습니 다. 이것이 곧 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행을 통해서 해결해 보려고 할 때가 있습 니다. 수도원의 계율을 지켜 가면 되지 않을까? 그게 아무 소용이 없 습니다.
루터는 로마에 있는 '스칼라 산 타'라고 하는 성당에 갔었답니다. 지금 같이 교통이 편리할 때가 아닙 니다. 로마에 한 번 간다는 건 일 생의 한 번 큰 순례의 길입니다. 가서 '산타 스칼라'라고 하는 이 성 당에 들어가서 거기에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으실 때에 올 라가셨다고 하는 그 계단이 있습니 다.
28계단이 있는 그 나무로 된 계단, 그것을 콘스탄친 대제의 어머 니, 헬레나가 믿음이 좋아서 이것을 뜯어다가 로마에 갖다 놓고 이 스칼 라 산타 성당 안에다가 딱 갔다 놓 았습니다. 지금도 가보면 성 요한 성당 바로 옆에 있는데 그 예배당에 는 사람이 들어가서 예배하게 되어 있지 않아요.
그저 건물을 지어 놓 고는 한 가운데에 그 계단이 이렇게 놓여있습니다. 이천년 된 계단이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계단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 계단을 무 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 죄 사함 받 는다, 심지어는 연옥에 있는 죄인도 여기서 기도하면은 구원을 받는다 라고 그렇게 당시에 가르치고 있었 습니다.
이제 루터는 이 계단을 무 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면서 계단마다 올라가며 주기도 문을 외우면서 계속해서 올라갑니 다. 다 올라가서 보니 아무 해결될 것도 없어요. 이게 이런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더라고. 그 때에 마 치 큰 불빛을 보는 것처럼 어떤 전 광같은 말씀이 귀에 들려 왔다는 겁 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이까짓 것 무릎으 로 기어오른다고 죄사함 받는 게 아 니라는 것이죠. 여기서 소중한 것 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긍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우리가 의롭게 살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져 스티피케이션(Justification)',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이 자체, 이 중요 한 교리를 그는 발견하게 되고 벌떡 일어나서 신앙을 조정하게 되고 마 침내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내 의를 세 워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게 아닙니 다. 심지어는 지난날의 죄 때문에 내가 오늘 공로를 세운다고, 고행을 한다고 해서 나 자신의 과거의 죄나 타락된 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중요한 것 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디카이오' 라고 하는 말, 의롭다 함을 얻는다, 영어로 '져스티파이(Justify)', '져스 티파이'라고 하는 거예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의 관심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고 사회가 잘 되고, 못 되 고, 안 되고, 출세하고 못 하고, 오 래 살고 못 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어 디에 있습니까? 그래 오래 살아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잘 살면 뭣하 고 못 살면 뭣합니까? 좀 더 심각 하게 생각합시다.
적어도 이 고민 은 이 고민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해 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의 궁극적 관심입니다. 죄 문제, 이것은 내 죄 문제요. 여러분 아시잖아요. 그리 애써서 민주화 해 놓고 보니까 소용 있습니까?
그 래 요새 어떤 사람들은 글을 씁니 다. 민주주의의 종말이라고 그럽니 다. 왜? 죄 문제가 이렇게 남아 있는 동안 아무 소용없어요. 죄와 부정이 있는데 제도하나 바꾼다고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아무 소용 없는 거라고요. 점점 더 혼란의 구 덩이로 빠질 뿐이요.
문제는 의! 자 보세요. 그 많은 의! 뭐 정화, 개혁 해봐도 까딱도 하지 않아요. 뭐 3배나 더 한다면서요. 문제는 의의 문제가 남았어요. 우리가 잘 살고 못 살고도 의의 문제요, 죄와 의의 문제란 말입니다. 나라가 견 고하게 스는 것은 의(義)지, 사람 바 꾸고 제도 바꾼다고 되는 건 아니에 요. 이제쯤은 깨달아야죠. 문제는 내 마음속에 있는 죄, 자 이 문제요. 죄의 문제는 곧 하나님 앞에 의뢰의 문제입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어 떻게 설 수 있느냐?
하나님의 법 앞에 그 심판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냐? 의의 문제가 있 고. 자 이제 이에 대한 해결은 오 직 하나, 의롭다함을 얻는 그 길밖 에 없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나 칼뱅이나 간에 이 분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전승이나 어느 교 황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 성경 안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또 얻었습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의 신앙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얻었어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해답을 얻습니다. 성경 안 에서 사도 바울을 만납니다. 사도 바울이 '이름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다' 하는, '져스티피케이션 바이 페 이드(Justification by faith)', 이 문 제에 대한 깊은 해답을 바울을 통해 서 얻게 됩니다. 로마서, 갈라디아 서의 주제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다."
이것을 흔히 '칭의', '득의' 이 런 말로 우리가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내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 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 들이는 데 있는 겁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 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의 계시입 니다. 이 의로운 계시를 하나님의 의를 내가 수용함으로써 죄인이 의 롭다 함을 얻는다.
이것이 종교 개 혁 신앙의 뿌리입니다. 그래 바울 에게서 칭의(稱義)의 의를 배웁니다. 루터와 모든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 신앙의 근본이 됩니다. 여러분 그 런데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어디서 또 받아 들였느냐 하면 구약성경으 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 다. 오늘 본문 말씀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로 여기시고 ……."
그 말씀, 아주 중요하게 여깁 니다. 마치 사도 바울은. 다시 또 하박국 2장 4절에 가서 보면은
"의 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 과 같으니라"
이 두 말씀, 두 요절 이 말씀에다가 뿌리를 두고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를 전제합니다. 이 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고 죄와 저주로부터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을 설명하게 됩니다. 이 신앙을 그대 로 받아서 바울로부터 받아들여서 종교 개혁자의 신앙이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 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라"하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에 보 면은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 다.
"동으로 가랍니까? 서로 가랍 니까?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 까? 전혀 묻지 않습니다"
"고향을 떠나라! 익숙한 곳, 죄악의 도시, 과거, 옛날 생활……떠나라"
믿음으 로 떠납니다.
"지시할 땅으로 가라, 떠나면 지시하겠다 또 내가 네게 아 들을 주겠다 그래서 자자손손 이 축 복이 이어지도록 해주마"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때 나이 75세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아브라함은 정처 없 이 고향을 등지고 떠납니다. 이것 이 믿음이요.
그래 아브라함의 믿 음은 순종하는 믿음이었어요. 그러 기 위해서 자기의 익숙한 혹은 평안 히 살아오던 고향을 그 옛날 생활을 다 버렸어요. 그리고 대모험을 강 행합니다.
그것이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 펴보면은 그의 믿음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을 떠났지만은 일단은 떠났는데 그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흉년이 들 때 그는 애굽으로 갔습니다.
피난을 가버립니다. 그 믿음없는 짓입니다. 아 흉년이 들던, 살던 죽던 이 땅에 머물러야지 왜 하나님이 지시한 땅 을 떠납니까? 그는 그만큼 나약한 사람입니다. 일단 떠났는데 자 보 세요. 하나님께서 보호하지 않았더 라면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마누라 잃어버리고 자기도 죽을 뻔 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이 땅으로 돌 아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마"
했으면 기다려야 지. 좌우간 몇 십년이라도 기다려 야지. 그는 또, 또 실수를 합니다. 십년 쯤 기다려 보고는 '아 이게 어 쨌든 내 종자면 되지 꼭 그 마누라 여야만 될 건 없잖아?' 해석이 좋아 요. 그래가지고 또 제 멋대로 이스 마엘을 또 낳아 놓았거든요. 하나 님이 당장 책망하십니다.
"그건 아 니다 이거야. 그런 편법이 통하지 않는다. 네 아내 사라가 낳을 것이 다."이거예요. 자 그런데 창세기를 자세히 보면은 이제 마지막으로 25 년만에, 말씀하신 지 25년, 그가 백 세가 되었을 때에 이제 말씀하십니 다. 하나님께서
"내년에 아들을 낳 으리라."
그 때 나이, 벌써 자기 부 인의 나이는 단산한 지 이미 오랬어 요. 90세요. 그것이 생리학적으로 는 불가능해요. 생산적으로 볼 때 는 로마서 4장 19절에 있는 말씀처 럼
"마치 죽은 자와 방불한 자기를 알면서도……."그래요. 죽은 자와 방불한, 생식 능력에 대해서는 내외 가 다 죽은 자와 같아요.
이미 끝 난 지 오랬어요. 인간의 지식으로 는, 인간의 경험으로는. 그러나 아 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 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또 믿어요. 그래 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시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이 미 너무나 많이 실패했잖아요. 자 기 자신에 대해서 실패했고, 믿음 생활에 대해서 실패했고, 너무나 많 은 낙심한 잘못된 흔적이 있어요. 이 허물,
"하나님, 이미 나는 너무너 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습니다. 믿음대로 살지 못한 사람 아닙니 까?"
그런 가책이 있건만 하나님이
"네게 아들을 주리라"하면 또
"예"
하고 받아들입니다. 이 사람 여기 에 훌륭한 데가 있어요. 자기 자신 의 부족함이나 허물된 과거를 가지 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있다면 두려움 이 없어야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와 더불어 그가 이 본문 무려 15장 을 보았습니다만은 14장에 보면은 그가 나가서 전쟁을 하는 일이 있습 니다.
전쟁에 하나님의 은혜로 일 단은 승리했습니다만은 그 후속 결 과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요. 이제 저들이 다시 동맹해 가지고 쳐들어 오면 꼼짝 못하고 몰살될 수밖에 없 는 그런 처지입니다. 하나님은 함 께 한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 다. 두려워하지 말라!"
아브라함은 또 믿었습니다.
"예, 말씀대로 두려 워하지 않겠습니다."
손에 가진 것 도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것도 없어 요.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또 믿 습니다. 아주 훌륭한 분이에요. 그 뿐 아닙니다. 이렇게 믿고 그는 순 종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클라이 막스적인 얘기가 있지요.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쳐 라"
그럴 때에 그걸 바칩니다. 한 번쯤 의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식을 주 신다고 하신 말씀을 오래 전부터 들 어왔습니다. 이제 이 아들 장가도 가기 전에 이걸 바치라면 약속이 틀 리지 않습니까?"
대답할 만도 한데 그는 하나님께서
"바치라"
"그러죠"
그냥 바치려고 듭니다. 그때에 하 나님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에게 큰복을 주시고 네가 메시아의 조상 이 되리라는 것을 그 때 말씀하시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대단한 믿음입니다. 보세요. 이것이 믿음 입니다. 이렇게 믿을 때에 그 많은 허물, 그 많은 잘못, 많은 실수 다 덮어 주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이에 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 는 거예요. 이 믿음을 말하는 것이 에요. 그런고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거예요.
여러분 의라고 하는 것은 일단 도덕적 의가 있습니다. 내가 선하 게 살아서, 진실하게 살아서 의를 이룹니다 만은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두 번째는 회개의 의가 있 어요. 내가 스스로 회개하고 뉘우 치고 이제부터 바르게 살겠다고 몸 부림쳐도 사실은 지난날의 죄가 그 냥 남아 있습니다.
내 회개라는 것, 사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런고 로 오직 의롭다함을 얻는 길, 이것 밖에는 없는 거예요. 오직 은혜, 오 직 긍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우 리를 의롭다 하실 때만이 가능합니 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 한 전적인 신뢰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요, 전적인 헌신 입니다. 순종입니다. 여기에 용기 가 있는 것이올시다.
인도에서 한 평생을 선교사로 산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라고 유 명한 분입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디바인 예스(Divine Yes)'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69세 때 중풍 에 걸려서 보스턴 병원에 입원하고 5개월 동안 있는 동안에 이 책을 썼 습니다. 디바인 예스, 하나님의 말 씀에 대하여
"예"
하는 것이죠, 긍 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이죠. 하나님 의 말씀에는 언제나
"예"
가 있을 뿐이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는 중풍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간호원에 게 부탁했답니다.
"내가 잠에서 깰 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 니 일어나라!' 그렇게 나에게 말해 달라"고. 그는 언제든지
"일어나 라"
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 어요. 들려져야 된다는 거죠.
"나 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 어나라!"
하는 말씀이 귀에 확실하 게 들려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사 실로 그는 그렇게 듣고 그는 일어났 고 그 후 20년 동안을 계속해서 선 교사로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사가 무엇 입니까?
부하든 가난하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든 못 받든 그게 중요한 거 아닙니다. 우 리의 관심은 죄, 의,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깨 끗한 믿음,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살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를 기울이십시다.
"아브라함이 하 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셨 느니라"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뿌리 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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