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문 모음/창세기 설교 모음

창세기 3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5. 9.
728x90
반응형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3:8-11/ 김기석목사

2022-08-02 08:32:27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물으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셨다.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숨바꼭질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서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입추 절기가 시작됩니다. 매미 울음소리가 절박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자기 때를 한껏 살아가는 식물과 동물 세계를 보노라면 이들이야말로 진짜 지혜자가 아닐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 속상해 하지도 않고, 누가 알아준다 하여 우쭐거리지도 않는 그 담담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최근 며칠 사이 학교 선생님들과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다들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대개는 다른 이들이 꺼리는 험지에 자원해서 간 분들이었습니다. 아이들 속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호명하거나, 상처를 감싸려 애쓰는 모습이 참 거룩해 보였습니다.

 

삼척에서 초등학생들과 동고동락하는 권일한 선생님의 책 <선생님의 숨바꼭질>을 서가에서 찾아 읽었습니다. 숨바꼭질 놀이를 해보지 않은 분은 없을 겁니다. 술래도 숨는 아이도 즐겁기만 합니다. 술래가 숫자를 세는 동안 아이들은 어디에 숨을까 잠시 고민합니다. 그러면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공간이 새롭게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술래의 눈길을 피해 한 장소에 몸을 숨긴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을 때 세상은 돌연 신비한 곳으로 바뀝니다. 그때 술래는 보물을 찾는 사람으로 바뀌고 숨은 아이는 비밀을 간직한 주인공이 됩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익숙한 공간을 낯설지만 신비한 곳으로 바꿉니다. 권일한 선생님은 숨바꼭질에 빗대 교사의 사명을 설명합니다. 교사는 꼭꼭 숨은 아이들의 마음을 찾는 술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마음 찾기 숨바꼭질이다. 슬픈 마음, 두려운 마음, 화난 마음, 외로운 마음을 감추고 누군가 찾아주기를 기다린다. 마음이 아파 숨었지만 혼자 남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아무도 아이 마음을 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른들이 바빠서 아이 마음을 모른다면, 자기들 일에 빠져 아이 마음을 살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놔둔다면? 혼자 하는 숨바꼭질은 비극이다. 숨바꼭질은 찾아내는 기쁨, 누군가 가까이 다가올 때의 긴장감, 발견되는 순간의 아쉬움이 있기에 재미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숨바꼭질은 잔인하다. 그러면 아이들이 저 여기 있어요. 이리로 오세요. 여기 있다고요!’ 하고 소리친다. 구석빼기에 숨어 자기를 봐달라고, 제발 찾아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마음을 읽어달라고 외치는 아이, 아무도 듣지 않아 서서히 마음을 닫아버린 아이, 기다리다 지쳐 웅크린 아이, 누군가 다가와 손 내밀어주기를 기다리는 아이…….”(권일한, <선생님의 숨바꼭질>, 지식프레임, p.6)

 

너무 잘 숨어서 술래가 도저히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를 파하고 저마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숨죽인 채 숨어 있던 아이는 나중에야 놀이가 끝났음을 알고 속상해 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숨바꼭질의 묘미는 잘 숨는 데도 있지만, 발견되는 데도 있습니다. 발견되었다고 하여 화를 내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숨바꼭질은 잔인하다’. 정말 그렇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따지고 보면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숨바꼭질을 하며 삽니다. 인간은 다면체입니다. 남들에게 당당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모습도 있지만, 한사코 숨기고 싶은 모습도 있고, 숨기고 있지만 발견되기를 바라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른들 속에도 울고 있는 아이가 있다는 말은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누군가 그 마음을 알아보고 함께 공감해줄 때 우리 속의 얼음이 녹곤 합니다. 처음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대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에 대한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 속에 있던 얼음이 녹아내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930년대의 신비주의 시인 이용도 목사는 원망, 불평, 이기심 등은 전염병과 같아 자신을 죽이고 남의 가슴에 살촉을 박아 죽게 하는 악독한 병균이지만, 그 모든 균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이 눈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동정의 눈물, 사랑의 눈물이 쏟아질 때 원망, 시기, 불평, 이기적인 행위 등 모든 불신의 병균이 다 죽고, 따스하고 온유하고 예쁜 새 마음이 돋아난다고 노래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으면 죽지도 않으려니와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신처럼 되고 싶은 욕망은 우리들 속에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는 강력한 특권이자 발언권입니다.

 

그것을 소유한 이들은 자기 의지를 다른 이들에게 부과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 수족처럼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들큼한 쾌락입니다. 그 쾌락에 중독된 이들은 자기 자신을 신적 존재로 여깁니다. 그런 허위의식을 부추기는 이들이 곁에 있다면 더 심각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바입니다만 지위와 사람됨이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이들일수록 겸손하게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신처럼 되리라는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가 맨 처음 직면한 것은 수치심이었습니다. 수치심은 숨기고 싶은 것이 드러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순간 그들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을 경험했습니다.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이라 경탄하며 서로를 바라보던 이들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시선 앞에 있는 자기를 의식했습니다.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자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엮어 몸을 가렸습니다. 수치심에 이어 찾아온 것은 죄책감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가 들려오자, 주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가 그렇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 남자를 부르시며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은 아담이 머무는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 속에 담긴 속뜻은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났구나입니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라는 말속에 힌트가 있습니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얼굴 앞입니다. 얼굴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일종의 은유로 여기는 게 좋겠습니다. 죄는 소외疏外시키는 힘 즉 멀어지게 하는 힘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반대말은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은 소외를 극복하고 가까워지게 하는 힘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무 뒤에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첫 머리에서부터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몸을 웅크린 이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죄가 벌려놓은 거리를 사랑으로 좁히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을 찾아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주님께로 돌아가자고 권고합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 살 길입니다. 히브리어로 회개를 뜻하는 테수바(teshuvah)돌아섬(return)’이라는 뜻도 있지만 대답(answer)’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응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감이 우리의 공로가 아닌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부르심이 없다면 응답도 불가능합니다. 예언서에는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초대가 넘칩니다.

 

지나온 길을 돌이켜 살펴보고, 우리 모두 주님께로 돌아가자.”(3:40)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6:1)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죄 지은 백성에게 염증을 느끼셨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내 곳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지은 죄를 다 뉘우치고, 나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다”(5:15a).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대개 환난과 고초를 경험할 때입니다. 생의 한 복판에서 주님을 찾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그 고통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면 그것을 복된 고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실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6:3).

 

지금 곤고한 시간을 보내는 분이 계십니까?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속에서 걷는 것처럼 삶에 지친 분들이 계십니까? 무의미의 심연 속에 갇혀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잠시 숨을 고르고 여명처럼, 가을비처럼, 봄비처럼 오시는 주님을 떠올려보고 느껴보십시오. 오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사나 경배가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특정한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지금 곤경에 처한 약자들을 돌보는 것, 냉랭한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이렇게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J. 헤셸의 말이 참 적실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 인간은 그분을 찾을 수 없다. 인간의 찾음 없이 그분은 도우실 수 없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사람을 찾는 하느님>,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136)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만, 하나님을 찾아내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 눈에 비늘이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 등의 죄가 우리 눈을 가려 오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인간은 오직 주님의 빛 안에서만 그분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어둠 속에 갇힌 존재임을 인정하고 빛을 갈망할 때 주님의 은총이 섬광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발견되기를 원하십니다.

 

희망의 뿌리

소년 시절의 예수의 모습이 성경에 딱 한 번 등장합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유월절에 예수는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저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습니다. 문득 예수가 어디 있나 둘러보다가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찾아다니다가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습니다. ‘사흘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그 사흘은 그들의 영혼이 까맣게 타들어간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온갖 나쁜 상상을 다 하면서 애를 태웠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흘 동안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사흘은 그믐달이 지고 초승달이 떠오를 때까지의 시간과 얼추 맞아떨어집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 개념입니다.

 

애를 태우며 소년 예수를 찾아 나선 그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에서 우리는 얼핏 인간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 희망의 뿌리입니다. 하나님과의 숨바꼭질,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찾아 나선 인간의 절박함이 만나 구원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일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가 평화와 입을 맞추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이 자부심과 긍지를 품고,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오해에서 확신으로 5 -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5) - 죄의 핵심 /3:1-7/ 김형익 목사

2021-05-10 08:58:07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무지가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계속해서 상고하는 말씀들의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신앙 생활에서 회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이 문제를 접근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 지난 두 주에 걸쳐 생각한 것이었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죄에 대한 왜곡된 이해도 가져온다는 것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죄를 바로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1. 죄에 대한 오해/불충분한 이해

죄는 무엇입니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죄의 개념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라/하지 말라조항들을 범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교회를 잘 다니고 있고 술 담배 하지 않고 기타 등등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수준에서 죄를 이해하고 있는 한, 그는 결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많이 넘어졌던 문제도 바로 이런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조항들을 범하고 범하지 않는 것으로 그들의 죄의 여부를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보다 더 많은 적용 관련 조항들을 만들어놓고 그것까지 지키는 열심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극악한 죄인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서 죄를 설명하는 가장 많이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하말티아입니다. 이것은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의미가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추상적인 단어로만 들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외에도 죄를 설명해주는 성경의 많은 방식들이 있습니다.

 

허물, 반항, 불순종, 불법, 적대감, 반역 등의 단어들이 성경에서 죄를 설명하는 개념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단어들의 의미를 공부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개념을 바르게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르게 이 개념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죄가 반드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죄에 대한 오해, ‘하라/하지 말라의 목록을 지키는 것의 차원에서 죄를 생각하는 것의 문제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죄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최초의 범죄 상황에 대한 성경의 설명

오늘 본문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상황을 매우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3장은 죄의 본질을 이해하게 하는데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A. 죄가 발생한 시점

먼저 우리가 이 본문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죄가 발생한 시점입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순간이 범죄가 발생한 순간일까요? 아니면 옆에 있던 아담에게 주어서 같이 먹었을 때 범죄가 성립된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범죄가 발생한 순간은 어떤 순간이겠습니까? 사실 성경이 매우 정교하게 이 내용을 기술하고 있으면서 보여주는 것은 인류 최초의 범죄가 발생한 시점은 그들이 그 금단의 열매를 먹기 전이라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뱀의 유혹을 받아서 하와의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본문을 살펴보지요.

 

B. 뱀과의 대화 속에서 하와의 생각의 변화?과장과 왜곡

뱀과 하와의 대화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두 가지 큰 문제는 과장과 왜곡입니다. 여기에 진리는 없습니다. 그래도 진리에 가깝다거나 절반의 진리는 되지 않는가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절반의 진리는 비진리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과장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왜곡이 이 대화 속에서 그리고 하와의 생각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첫번째로 보게 되는 왜곡은 뱀의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뱀이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매우 지능적으로 던져진 질문입니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던진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서 뱀은 간교하게 하나님을 왜곡하고 있고,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왜곡하여 보도록 유혹합니다. 그것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라는 말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것이었습니다(2:16). 하나님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마음대로 먹으라고 말씀하셨지만, 뱀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는가 묻습니다. 이것은 달라도 너무나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나쁘고 인색하고 너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그런 분이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와는 뱀의 말을 부인하고 나섰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라고 먼저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와가 무엇을 생략하고 있습니까? ‘모든이라는 말과 임의로(마음대로)’라는 두 단어를 생략했습니다. 이 생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와는 비록 뱀의 말을 부정했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것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그의 대답 속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뱀의 질문이 전면적인 하나님에 대한 왜곡이라면 여기 하와의 대답에서는 부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왜곡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말했습니다. 3절입니다.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세번째 왜곡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생략이 아니라 과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7).

 

하와의 말에서 어떤 과장이 나타났습니까? 그녀는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더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하와는 이 단어를 더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금하신 명령이 의미하는 것 보다 하나님을 매우 인색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의 말이 풍기는 하나님에 대한 뉘앙스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다고 창세기 2:9은 기록합니다. 동산 중앙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명 나무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생명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 전개를 통해서 볼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는 테스트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통해서 테스트를 통과했을 때 주실 상급이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테스트를 주시면서 내가 이런 상을 주려고 하는거야 하고 아담과 하와에게 그 상을 미리 보여주신 셈입니다. 그러나 하와의 말 속에 표현되는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기 보다는 하나님이 자신이나 아담에게 완전히 선하시지 않으며 오히려 최선의 것은 당신만이 홀로 가지시고 자기들에게 주지 않으신다는 느낌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이쯤 되자, 뱀이 이제 확실하게 그 과장과 왜곡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이것이 카운터 펀치였습니다.

 

4~5절을 보지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은 교만하게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의 의도까지도 왜곡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장과 왜곡의 절정입니다. 하와가 어느 정도 자신의 유혹에 틈을 제공하기 시작하자 뱀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결국에는 죽을 수 있을만큼 독을 뿌려놓는 일에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뱀은 정면으로 부인하여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이제 하와는 두 가지 약속 사이에서 어느 것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오직 한 가지 약속만이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두 개의 약속이 있습니다. 뱀이 준 약속, “먹으면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악을 알게 되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 누구의 약속을 믿을 것입니까? 어느 약속을 믿을 것입니까?

 

C. 하와의 태도의 본질

우리가 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뱀과 하와의 대화에서 하와의 마음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이야말로 성경이 죄에 대해서 설명하는 가장 최초의 원초적인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축복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서 자신들을 만들어 자신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법합니다. 하와의 말들이 그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와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그리고 언제나 자신들의 최선만을 공급해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최적의 환경 속에서 그리고 최적의 배우자와 함께 하나님의 주신 모든 은혜를 누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선하신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며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와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기 전에 이미 그런 변화가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결과, 자신과 남편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매우 바람직한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가 될 수는 있을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장기판의 말들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최초의 범죄가 발생한 시점이 언제냐 하는 질문에 답을 한다면, 그것은 하와의 마음 속에서 이 생각,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인류 최초의 범죄가 발생한 시점이 되는 것입니다.

 

3. 죄는 무엇인가?

 

A.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들에게 최상의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

그렇다면 죄는 무엇입니까? 이 최초의 범죄 사건에서 설명해주는 죄는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죄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죄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들에게 최상의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니엘 풀러(Daniel Fuller)가 자신의 성경의 일관성에서 내린 죄의 정의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죄에 대한 정의나 설명보다도 가장 성경의 내용에 충실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정의보다 더 죄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는 것, 그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결국 죄는 불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님께서 행하실 사역을 설명하시면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는데 그 죄는 바로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신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16:9).

 

죄 중의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지옥에 간다면 그가 행한 죄질이 나쁘거나 죄의 무게가 심해서가 아니라, 그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한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조금 더 나아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삶 속에서 선하신 하나님이신가를 물으면 사람들은 주저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와가 넘어졌던 바로 그 대목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결핍, 상실, 왜곡이 바로 죄입니다. 이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한없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완전한 기쁨?하나님께서 삼위 안에서 누리시던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가장 효과적으로 경멸하는 태도인 것이기에 죄입니다. 이 불신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동기를 완전히 모독하는 것입니다.

 

B. =영적 독립선언

죄는 또한 영적 독립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와는 뱀과의 대화 속에서 잔뜩 왜곡되어 버린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뻐하고 의지하여 살아가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마음 속으로 독립,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셈입니다. 그녀 자신의 창조주, 그리고 그녀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모든 환경과 세상의 창조주로부터 이 피조물은 감히 독립을 선언한 셈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믿지 않고 뱀이 준 약속을 믿고 행동을 취할 수 있었겠습니까? 뱀의 말을 듣고 그 나무의 실과를 보자, 정말 놀랍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래서 그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계속 옆에 서서 침묵으로 일관하던 남편 아담에게 주어 그도 먹게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아담의 속에서도 하와의 속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렇게 행함으로써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도 구속력도 지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주인은 그들 자신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서 가지고 태어나는 본성인 것입니다.

 

4. 복음서에서 죄의 본질을 설명하는 두 극단적인 케이스

복음서는 죄가 영적 독립선언이라는 사실을 두 개의 예로써 보여줍니다.

 

A. 부자 청년(19:16~22)

첫째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부자 청년의 예입니다(19:16~22). 여기서도 우리는 부자 청년의 생각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19:16).

 

예수님께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고 말씀하시자(17), 그는 자신이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합니다(18~19). 그리고는 아직도 뭔가 더 부족한 것이 있는지 묻습니다(20). 예수님은 정확하게 그가 말한 것, 그에게 부족한 것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21).”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고 성경은 슬픈 결론을 제시합니다(22). 이 청년의 마음에 숨겨진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죄를 자기가 알고 있는 계명들?‘하라/하지 말라의 목록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자신은 그것들을 어느 정도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만하면 과녁도 잘 맞추고 살아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무엇일까요?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자기가 그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게 되면 자기가 가게 될 길이 고생길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움직일 수 있는 중요한 가치는 돈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것을 범한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자기에게 최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게 했습니다.

 

그는 어쩌면 하나님은 자기가 기껏 모아놓은 재산을 빼앗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 재산이나 노리는 하나님으로 왜곡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자기의 갈 길을 간 것입니다. 그의 문제는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행했고 행하지 않았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모든 선한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B. 어린 아이(19:13~15)

두번째 케이스는 어린 아이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고(14), 마태복음 18장에서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3).

 

무슨 말씀입니까? 어린 아이는 자기를 낮춥니다. 자기가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 부모가 없으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만일 아이가 자기를 의지하기 시작하게 되면 그 아이는 이미 주님이 말씀하신 어린 아이가 아닌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철저한 의존성을 주님은 여기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리니까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는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말입니다. 정상적인 어린 아이가 부모가 자기에게 좋은 것을 줄지, 독약을 줄지 의심하고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는 부모가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임을 압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믿음이란 독립 선언이 아니라, 의존 선언입니다. 어린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5. 나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에게 최상의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믿는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언제나 여러분에게 최상의 것을 공급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그 신앙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무한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로 언제나 최상의 것을 공급해주고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믿는다면 그 신앙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과거에 대해서도, 여러분의 현재에도 그리고 여러분의 미래를 향해서도 여러분은 그 전능하신 선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믿는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여러분은 과거 지나온 여러분의 삶 전부를 돌아볼 때 과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과거의 모든 순간에 선하셨으며 최상의 것을 주고 계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현재에도 그렇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감사하십니까? 여러분의 미래에 하나님께서 역시 당신의 선하심으로 최상의 것을 주시리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래서 미래를 생각할 때 마음이 벅차오르고 기대가 되십니까? 저는 아직 복음을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의 선하심을 제대로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깊이 받아들이기 전에는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죄의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되신 성품, 그 선하심을 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뿌리 깊은 오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을 주신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 이 죄의 뿌리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과 믿음도 이 뿌리에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류는 마귀가 하와에게 심어놓은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인상,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인 오해로 지금까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을 일삼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가진 모든 고통의 원인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후손이 지닌 비극입니다.

 

이 죄는 결국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마귀의 약속을 믿고 마귀의 약속을 선택하여 따르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죄도 약속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기쁨과 소유, 행복과 명예 그 외의 많은 것들을 약속합니다. 뱀이 하와에게 말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손상시키고, 영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비참함이요, 무서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믿음을 실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 인생에 참으로 최상의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그것이 다양한 방식의 고통의 형태로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지금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16:6). 하나님은, 성경에 당신 자신을 계시하여 주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언제나 최상의 것을 공급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선하신 하나님을 의심하고 믿지 않는 것이이야말로, 죄의 본질이고 핵심이며, 선하신 하나님을 최고로 모독하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과연 이런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아직 믿고 있지 않다면, “참으로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알고 믿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이라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인간 불만족의 실체?세 개의 욕구

일상적(casual) 욕구

기본적(critical) 욕구

근본적(crucial) 욕구

 

 

 

노동의 의미 /2:15, 3:17-19/ 이동원목사

2014-12-05 20:36:05

 

지난 72일자 월요일 조선일보 경제란에는 한 몰락한 한국의 재벌 회장과의 흥미로운 인터뷰 기사가 실려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보신 분이 많을 거에요. 그 헤드라인 제목기사가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출근할 곳 있다면 부러운 일. 아침에 눈뜨고 싶지 않아요"

 

한국의 10대 기업 안에 들었던 한 몰락한 회장의 고백이 였습니다.

 

"출근할 곳 있다면 부러운 일. 아침에 눈뜨고 싶지 않아요."

 

이 삶을 사는 행복 가운데 하나가 일하는 행복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나간 주에 안식의 의미, 안식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 설교한 이후에 지나간 며칠동안 여러 성도들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안식하러 떠나신다고, 너무 많은 분들이 안식하러 떠나시겠다고, 감동을 받고 안식하러 가족들이 함께 가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 제가 안식에 대해서 과도하게 강조한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그래서 균형을 위해서 오늘은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교를 하기로 했습니다.

 

예로부터 철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은 인간을 가리켜 "호모 바베르" 노동하는 존재라고 불러왔습니다. 인류가 물어온 오래된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동물에게도 노동이 있느냐 동물들에게도 노동이 있느냐?

 

대부분의 학자들의 대답은 동물들에게도 생존을 위한 노동은 있다. 생존을 하기 위한 노동은 있지만 의미를 느끼기 위한 노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서, 그런 의미에서 노동이라는 것은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특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노동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노동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서 직접 듣고자 합니다. 노동의 의미,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는 노동이 무엇이 아닌가를 말씀 드리고 이어서 노동이 무엇인가? 그 적극적인 의미를 성경을 통해서 함께 찾고자 합니다.

 

 

 

첫째로 노동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닙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노동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317절 이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읽는다면, 저가 여기 피상적이라는 단어를 강조합니다. 피상적으로 읽는다면 노동이 형벌의 대가라는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 범죄의 결과로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에게 저주가 임한 것은 사실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땅이 저주를 받고 또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고 자연 속에서도 독소적 요소들이 존재하는 것은 타락의 결과다. 그러나 깊이 들어다 보시면 노동 그 자체를 하나님이 타락의 현상으로 설명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란 것은 뭐냐하면 타락하기 전에도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도 노동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둘을 선택했는데 창세기 3장이 아닌 창세기215절의 말씀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창세기21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이 아담을 지어 만드시고 그로 하여금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여기 중요한 단어 둘이 나오는데 "다스리고 지키게 하셨다" 여기 다스린다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야보타 뭐 야바타. 뭐 이런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꼭 같은 단어가 창세기 2장에 한번 더 나와요. 창세기25절입니다.

 

한번 보시면 창세기2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거기에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경작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그러니까 똑 같은 단어가 나와요 다스린다는 단어가.

 

그러니까 여기 창세기215절을 이렇게 읽어도 돼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그 동산을 어떻게요? '다스리고'가 아니고 "경작하게 하신" 경작하게 하셨다. 그러니까 노동하게 하셨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타락 이전에도 노동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타락이 노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그것은 즐거워 해야 할 노동이 괴로운 노동이 되었다. 이것이 타락의 영향인 것입니다. 즐겁게 해야 할 노동이 괴로운 노동이 되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하실 때 짜증나고 권태롭고 막 괴로우시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것이 타락의 영향이다" 타락의 영향인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이 인류역사와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가장 커다란 한 측면이 있다면 노동의 적극적인 의미, 혹은 노동의 신성한 측면을 강조해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제외한, 기독교 신앙이 부재한 모든 문화권에서는 사실은 노동을 부정적으로 인식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성서적 기독교 신앙이 심어지는 곳마다 문화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사실 한 세기 전만 해도 한국 사람들의 노동관도 매우 부정적 이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높아질수록, 양반일수록 일은 안하고 천한 사람일수록 일을 한다는 그런 생각이 소위 유교문화의 역기능적 영향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선교, 한국에 그 선교사들이 처음에 들어와서 그 선교를 할 때 선교 실화 가운데 이런 흥미로운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조 말기에, 마지막 황제 시절에 이미 기독교가 이땅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뭐 아렌 이라든지 이런 의사라든지 이런 분들이 황실을 출입하며 전도하는 일을 했습니다.

 

한번은 선교사 두 사람이 공터에서 테니스장을 만들고 테니스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하는 모습을 보고 가까이 지내던, 아마 장관쯤 되는 참판인가 하는 아주황실의 높은 분이 지나가시다가 선교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면서 "선교사님들 왜 그렇게 고생을 땀을 뻘뻘 흘리며 하십니까? 아래 것들을 시켜서 하시지요" 하하~~

 

이것이 우리 한국 사람들이 생각해온 그 노동에 대한 땀 흘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한 모습이란 말이지요. 아마도 저도 그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운동을 죽어도 하기 싫은 것 있죠. 할려고 노력은 하는데 잘 안돼요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딱 읽자 저에게도 영감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제가 운동을 못하니까 저를 사랑하신다면 앞으로 여러분이 제 대신 운동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하하~~,

 

그러나 이것이 성경적 노동관은 아니에요. 성경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가장 으뜸가는 제자인 바울 사도도 "너희가 일하기 싫거든" 뭐에요? "먹지도 말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노동의 적극적인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첫째로 노동의 한 부정적인 측면으로 노동! 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그러면 노동이란 무엇입니까? 둘째로 노동은 하나님의 소명이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따라서 하십시요 "노동은 하나님의 소명이다" 성경은 노동하는 그 자체를 귀하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또 노동이 노동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우리의 존재의 근본 목적과 관련될 때 비로소 우리의 행위는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위의 근본적인 목적, 아니 존재의 근본적인 목적, 우리가 존재하는 것. 사람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오래된 고백 가운데 하나가 뭐냐하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산다구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산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말씀, 고린도전서 1031절에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그 다음? "무엇을 하든지" 그건 노동행위죠.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렇다면 우리의 노동행위 그 자체도 무엇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번 더 깊은 질문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노동을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거에요? 우리가 그 말을 하기는 쉬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노동하자. 그러나 어떻게 노동을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까?

 

한번 여러분 자신에게 대답해 보세요. 대답이 잘 안되십니까? 질문이 너무 심오하다고 느끼십니까? 저는 심오한 질문 안합니다. 더우신데 여러분을 괴롭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조금도 없습니다. 쉽게 생각하세요.

 

, 어떻게 일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요? 간단해요. 일을 잘 하시면 되는 겁니다. 일을 잘하시면 되요. 일을 아주 잘해야 되요. 성실성만 갖고는 않되요. 잘해야 되요.

 

여러분 의사선생님 한 분이 아주 성실해요. 수술할 때도 너무너무 열심히 해요. 그런데 수술만하면 사람이 죽어요.하하~~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영광이 안됩니다. 일을 잘해야 되요. 그러면 우리가 일을 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어떤 사람도 모든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 잘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해야 되요. 그것이 자기의 직업이 되어야 되요. 그래서 노동은 우리를 직업의 자리로 인도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인가 잘할 수 있도록 각 사람에게 적합한 재능과 달란트와 그 다음에 은사를 주셨어요. 그래서 내 재능과 은사에 적합한 일을 하게 되면 너무너무 기뻐요. 그리고 잘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직업을 가지면 돈을 얼마나 벌 수가 있느냐, 이건 절대 그리스도 인들의 사고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자녀들의 직업지도를 할 때도 "! 이거 하면 돈이 잘 벌린다더라" 앞으로 우리 교인 가운데 자식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분이 계시다면 저의 이 말을 기억해 두세요. "그건 사람도 아니다"

 

그건 사람도 아니에요. 그건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그것은 성경적 가치관이 아니에요. 그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해줘야 되요. 또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되요. 그런데 이 두 가지 조건이 다 합격해야 합니다. 좋아한다고만 해서도 안되고 잘할 수가 있어야 되요.

 

저는 음악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합니다. 제가 음악을 전공하러 지금부터 길을 바꾼다고 하십시다. 어떻게 될까요? 저를 아는 분들만 웃고 계십니다.하하`~

 

그것은 저를 비참하게 하고 저의 음악을 접하는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저는 좋아하지만 잘할 수는 없습니다. 두가지 조건이 다 있어야 되요. 내가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어야 되요. 그것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직업일 가능성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고 우리를 섭리하시는 주님이라고 고백을 한다면 여러분 직업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창세기215절을 다시 한번 가만히 읽어 보십시요. 여기서 여러분은 주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창세기215절에 주어가 누구입니까? "여화와 하나님이" 이렇게 시작이 되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누가 그렇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담을 지어 놓으신 다음에 아담으로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개발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겠금 하나님이,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아담이 그것을 확신하고 일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에게 에덴동산을 맡겨주셔서 이 동산을 경작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시키셨다. 이런 확신을 갖고 그 일을 하는 아담은 얼마나 신바람이 났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맡기셨다. 나를 부르시고 일감을 맡겨주셨다. 그게 소명 이에요. 소명.

 

여러분, 직업이라는 말의 뜻이 바로 소명입니다. 보케이션이라는 말의 뜻이 본래는 소명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에도 어떤 하나님이 주신 일반계시 같은 그런 감동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옛날부터 직업을 천직이다 천직이다.

 

하나님이 주신 어떤 직업이 있는 거에요. 그것을 발견해야 되요. 돈이 잘 벌리는 직업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직업, 내가 좋아하고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직업, 그 일 가운데로 불러주시고 그 일을 하게 되면 우리가 기쁘게 합니다. 감격스럽게 감사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소명에 합당한 일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직업에 자기의 소명을 발견하고 일한다면 우리는 매우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업을 말할 때 마다 또 노동을 말할 때 마다 이 강단을 통해서 이 얘기는 거의 이제는 고전에 속한 예화가 되어버린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저도 다시 한번 들려드리겠습니다.

 

중세기 어떤 성당건물을 짓는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던 세 인부가 있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세 인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어요. 당신들 뭐하고 계십니까 거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첫째 인부가 대답하기를 "보면 모르오? 돈 벌고 있수다." 돈 벌고 있수다.

 

둘째 인부가 대답하기를 "보면 모르오? 돌 깍고 있수다" 돌 깍고 있수다.

 

그런데 세번째 인부가 대답하기를 "저요? 하나님이 시켜서 하나님 집을 짓지요"

 

하나님이 시키셔서 하나님 집을 짓지요. 똑같은 작업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지마는 이 세 사람의 태도는 얼마나 달랐을까요?

 

, 이 세번째 사람, 얼마나 신명 나게 문자 그대로 신바람 나게 그 일의 장에서 일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래서 노동을 소명의 차원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한평생 행복하게 일하기를 원하십니까? 노동이 하나님의 소명인 것을 발견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저는 노동이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시작했어요 "노동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노동은 하나님의 소명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는 않아요.

 

하나 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세 번째로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우리는 오늘의 메시지를 노동은 결코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노동이 하나님의 형벌이 아닐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고 본질적으로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설계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창세기 128절 한번 찾아보세요. 창세기128절 한번 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 창세기 128절 같이 읽습니다. 다같이 시작,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28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 첫 사람들을 창조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그들을 복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래서 우리가 자녀를 낳을 때, 그리스도인 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녀를 낳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렇게 말하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하나님의 축복 이에요. 자녀를 낳고 자녀를 키우는 행위가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복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고만 말씀만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뭐냐하면 땅을 정복하라 그랬거든요. 이 땅을 정복하라는 말이 이 땅을 마구 파헤쳐라는 말이 아니에요. 땅을 잘 경작하고 개발하고 관리하라! 땅을 잘 관리하라, 그건 노동행위에요. 그러니까 노동은 축복이라는 얘기에요. 자녀가 축복인 것처럼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는 행위, 다시 말하면 노동행위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노동이 축복입니까? 우리가 노동 함으로서 자신과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가죠. 또 노동의 결과로서 좀 여유를 얻게 되면 우리가 풍성한 삶을 엔죠이 하면서 질적인 삶을 이땅에서 누릴 수가 있지요.

 

그러나 기독교 노동관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노동으로 자신을 축복 되게 할뿐만 아니라 노동으로 이웃들을 축복 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 되게 할 수가 있어요.

 

, 내가 노동에서 버는 결과로 나 뿐만이 아니라 이웃들을 복되게 하는 것, 기독교의 노동관은 거기까지 나아갑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어요. 에베소서428절인데, 뭐 더운데 안 찾으셔도 되요. 그냥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네 손으로 수고해서 선한 일을 하라. 그런데 내 손으로 수고하고 선한 일을 하는 목적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맨 처음에? "빈궁한 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 하는 그 일의 목적, 혹은 목표 가운데 하나가 뭐냐하면 구제하기 위해서 일하라 이 말입니다. 열심히 일해 가지고 좀 다른 사람 많이 구제하기위해서 일을 하라.

 

사업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사업해서 고용을 창출하고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게 되면 그 사람들을 축복되게 하는 것이지요. 또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내가 자선하고 돌아보게 되면 이웃들을 복되게 하는 것이지요. 물론 구제 뿐만이 아니에요. 우리는 구제하기위해서 일해야 되고 또 선교하기 위해서 일해야 되고, 하나님 제가 좀 돈 벌어 선교하게 해 주십시요.

 

그것이 기독교 노동관의 목적이에요. 그러니까 구제하기 위해서 일하고 선교하기 위해서 일하고.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이런 사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참 그 말을 많이 했어요. "벌어서 남 주나?" 그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노동관은 벌어서 남 주는 것입니다. 남 주기위해서 버는 것이지요. 벌어서 우리 가족들의 생계도 유지하지만 그것들로 이웃들을 윤택하고 이웃들의 삶 속에 도움을 끼치기 위해서 우리는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 남들에게 축복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우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 저는 그래서 뭐 제가 평소에도 늘 기도는 했지마는 이런 말씀을 묵상하면서 야, 내가 우리교회 출석하는, 사업하는 분들을 위해서 좀 기도를 많이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좀 돈을 많~이 벌도록 기도해야겠다. 그래서 그 돈을 다~ 쓰도록 기도해야겠다 하하~~

 

그런데 후자는 별로 마음에 안 들지요? 앞에만 마음에 들고, 하하~~ 그런데 후자가 분명해야 앞에 것도 해야 될 이유가 있는 거에요. 괜히 돈 버는 것이 아니지요. 잘 그것을 가지고 나누기위해서, 축복하기 위해서.

 

 

 

제가 이번에 미국 갔다가 LA에서 이런 얘기, 어떤 목사님께 들은 얘기에요. 제가 본인하고 확인은 안 했지만 그 얘기가 많이 떠돌아 다니더라구요.

 

레이그 은혜교회라는 교회가 있는데 세계 선교선터와 또 교회당을 새로 짓는데 한 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우리 돈으로 환산을 해보니까 약 300억원을 헌금을 하셨어요, 300억원을. 그런데 목사님이 너무 놀래 가지고 제발 이렇게 많이 하지 말라고, 말려 가지고 반만, 150억원만 했다고 그러더라구요. ,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듣고 ", 우리교회 그런 사람 더도 말고 두명만 있게 하옵소서", 하하하~~

 

우리가 정말 기독교 노동관이란 것을 이렇게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가 일을 하고 땀을 흘릴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근면한 노동으로 우리자신과 우리 가정이 축복을 경험하고 더 나아가서 이웃들에게 축복을 나누기 시작할 수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축복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라고요. 바로 그런 의미에요 축복으로 세상을 넘치도록 정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이런 하나님의 축복된 사람들이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물어야할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일해야 될까요 어떻게?

 

우선 부지런히 일해야 겠죠. 잠언서는 우리가 일하는 태도를 개미에게서 배워야 한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근면하게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만 또한 그 부지런함이 과도해서 일 중독이 되는 것은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난 주일의 설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과 이번 주일의 설교를 종합하면 어떻게요? 쉬어가며 열심히 일하자 하하~

 

이 두가지 균형이 힘들지만 우리가 이 균형을 가져야 합니다.

 

 

 

소련 공산당이 그 쟈르 황제를,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주의 정권을 소련에 수립했을 때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이런 일을 시도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9일 동안 일하고 제10일에 쉬는 제도를 시작했습니다. 2년 반 동안 했습니다. 두가지 의도를 가지고 했데요.

 

첫째의도는 뭐냐하면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기독교는 제 7일마다 7일째 되는 날마다 교회가 모이니까, 주일마다 모이니까 아~열흘 만에 한번씩 쉬면 교회는 없어질 것이 아니냐.

 

또 하나는 뭐냐하면 아~ 7일마다 쉬던 것을 열흘마다 쉬게 되면 더 많이 일 하니까 그만큼 생산량이 증대될 것이 아닌가, 그런 의도에서 10일째 쉬는 제도를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 뭐 생산량이 향상될 줄 알았더니 형편없이 인민들이 병들기 시작하고 사기가 저하되고 일의 결과가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2년 반 만에 다시 돌아왔어요. 그래서 다시 제7일제도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과 제도가 옳았다는 사실을 공산주의자들도 경험을 통해서 다시 한번 증명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하는 동안 즐겁게 일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전도서322절에 보면은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라" 즐거워 하고 일하는 것처럼 축복이 없다. 축복가운데, 축복은 일할 때에 즐겁게 일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 받는다. 구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회복이에요. 다른말로 말하면 회복입니다.

 

여러분, 제가 아까 타락이 노동에 미친 영향이 무어라고 그랬어요? 타락이 노동에 미친 영향, 뭡니까? 즐거워 해야 할 노동이 어떻게요? 괴로운 노동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기대를 회복해야 되는데 회복해야 할 영역중의 하나가 무얼까요? 구원 받았다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할 때 아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람.

 

 

 

저는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즐겁게 일했던 한 사람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접한 일이 있습니다. 저가 미국에 살 때, 워싱톤에 살 때 볼티모어라는 도시가 가깝습니다. 거기 가면 "죤스 하킨스 하스피탈" 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병원이 있습니다.

 

그 병원에 그 칠드런 센터에 저의 교회 교인이 입원한적이 있어서 심방을 갔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 병원에 들어가서, 그 칠드런 센터에 들어가서 그 현관을 두리번거리다가 거기 판이 하나 붙어 있었어요. 좀 시간이 있었고

 

면회시간이 아직 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두리번 거리다가 현판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 뭐 "In memory of Brooks Robinson"이라는, 브룩스 로빈슨 이라는 사람을 기념하여, 그런 현판스토리가 붙어있어요. 누군가? 이렇게 들여다 보았어요. 야구선수 였어요. "서드 베이스 맨" 3루수 야구선수 였어요. 볼티모아 야구선수 였는데

 

제가 그 자리에 있던 미국 분들에게 좀 물어보았더니 다 알더라구요. 아주 유명했던 선수라고, 그런데 너무너무 3루수를 잘 한 거에요. 그는 게임이 있을 때마다 몸을 던져서 정말 자기의 전 존재를 던져서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가 항상 야구팬들을 열광시켰고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였다라고 합니다. 그는 동시에 기도에 힘썼고 아이들을 좋아했고 병원을 찾아와서 병든 아이들을 항상 방문하기를 좋아했고 막대한 현금을 항상 헌금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늙어서 이제 죽기 얼마 직전에 벌써 볼티모아시와 병원에서는 이 사람을 기념해서 칠드런 센터를 지을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한 사람을 보내어서 물었습니다. 무슨 질문을 했느냐하면, "당신이 죽은 다음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이 질문을 할 때 미리 벌써 그들은 현판에 새길 글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글은 뭐냐하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플레이를 했던 사람. 우리 어린아이들의 친구" 뭐 이런 말을 쓸려고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랬더니 뜻밖에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래요. "저요? 아주 즐겁게 플레이를 했던 사람으로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즐겁게 플레이를 했던 사람으로 기억해 주십시요.

 

그래서 그 말에 감동을 받아서 그들이 바꾸어서 했다고 합니다. 뭐냐하면 "정말 성실하지만 동시에 즐겁게 플레이를 했던 어린이들의 친구 부룩스 로빈슨을 기념하여"

 

그래서 그 현판이 새겨졌다는 스토리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노동관을 집약한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성실하면서도 아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람들.

 

 

 

저는 그것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였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30년 동안은 아버지 요셉의 목공실에서 일했는데 어떻게 일하셨을까요?

 

성경에는 거기까지 자세히 나와있지는 않아요. 그러나 성경 외 문서 왜경, 뭐 이런 곳을 들추어 보면 "예수님은 결코 그 아버지에게 목공실에서 일하면서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웃으며 즐겁게 일했다" 이런 기록이 남아있어요.

 

그는 즐겁게 30년 동안 육체노동 목수 일을 하시고, 또 공생애 3년 동안은 영적인 노동, 십자가를 지시는 일,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그 길을 그는 즐겁게 가시고.

 

이 말이 이해가 되실 줄 모르겠습니다 십자가로 가는 길,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저는 그분이 그 길을 즐겁게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원하시면 고통을 피할 수가 있었고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이것을 옮겨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그 분 안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의 뜻을 더 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 드렸습니다마는 십자가상의 주님을 공부하면서 저에게 참 인상 깊은 성경말씀 하나가 있었어요. 히브리서12장의 말씀인데 "저는(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기쁨으로 견디셨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 그가 십자가를 지시므로 구원 받아야 할 여러분과 저를 생각하시며 그렇게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시면서 그는 기쁨으로 십자가를 견디셨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팠을 것입니다. 괴로우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너무 아파요 그러나 즐거워요. 제가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구원 받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저는 기쁘게 이 십자가를 질 거에요. 그래서 그분은 기쁨으로 십자가조차도 질 수가 있었다면,

 

그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여러분과 저라면, 나머지 한평생 우리가 남아있는 여생동안 일할 때 어떻게 그분을 따라 일해야 할까요? 그분처럼 성실하게, 그분처럼 즐겁게, 그래서 내가 살다간 빈 공간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나를 회고할 때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어머니는, 우리 아버지는, 우리 집사님은, 우리의 친구는 성실하게 즐겁게 일하다 가셨다.

 

그것이 여러분과 저의 소명을 이루는, 노동의 소명을 이루는 축복된 삶의 모습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다 일어나서 우리 함께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짜증내지만 그 재벌회장의 고백처럼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고마워요. 일할 수 있는, 작지만 사업의 터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워요 가정 주부들, 내가 일할 수 있는 가정이라는 내 가사노동에 터전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보람된 일입니까? 왜 괴로워 할까요? 우리의 노동이 짜증스럽고 불평스러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뭔가 잘못된 거에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오늘 이렇게 기도해야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 저를 좀 치료해주세요. 다시 일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고 직장에서 사업의 장에서 가정에서 하나님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제 마음을 붙들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노동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이요 하나님의 축복인 노동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물로 받았사오니 주 앞에 참 존귀한 하나님의 성도답게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신실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당신의 백성들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축복하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분은 나를 지으셨기에 지음 받은 내가 잘못될 때 마다 그는 나를 다시 회복시킬 수가 있고 교정할 수 있는 치유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여호와 창조의 하나님 그러나 그는 또한 치유의 하나님, 그분이 오늘 노동의 장에서 직업의 장에서 사업의 장에서 때로 힘겨워 하고 비틀거리며 아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오늘 회복시켜주시고 또 직업을 찾아 고민하는 분들에게도 성령이 역사하셔서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참 어려운 직종도 세상 사람들이 험하다고 말하는 직종도 주앞에서는 거룩한 직종이기에 그것이 성직이기에 그것을 성직으로 여기며 그런 직업에도 도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이 늘어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이 주신 모든 직업을 소명의 장으로 생각하고 기쁘게 감격으로 그 모든 사역들을 감당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그는 여호와" 찬양하시겠습니다. 가사의 뜻을 기억하며

 

그는 여호와 창조의 하나님 그는 여호와 전능의 하나님

 

길르앗의 향료요, 반석의 하나님. 그는 여호와 치료의 하나님

 

찬양하세 할렐루야 찬양하세 오, 할렐루야

 

그는 여호와 전능의 하나님 그는 여호와 치료의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 샬롬 평강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 그는 여호와 치료의 하나님

 

찬양하세 할렐루야 찬양하세 오 할렐루야

 

그는 여호와 전능의 하나님 그는 여호와 치료의 하나님

 

 

 

여호와 이레 그는 나의 공급자 구원의 하나님 구주의 하나님

 

아들을 보내어 그를 증거하셨네 그는 여호와 치료의 하나님

 

찬양하세 할렐루야 찬양하세 오 할렐루야

 

그는 여호와 전능의 하나님 그는 여호와 치료의 하나님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의 창조자요 나의 치유자이신 하나님. 때로 나의 시각이 잘못되고 내가 삶에 대한 비전을 잃을 때 우리는 직업의 장에서 사업의 장에서 비틀거리며 내가 일을 이렇게 해야 하나 짜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치유해주시고 우리의 일터를 소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을 기뻐하고 귀히 여기며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수 있도록 주의 자녀들을 이 시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또 일을 찾고있는 성도들에게는 저들에게 은사와 재능에 적합한 직업으로 인도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돈 때문에 선택하지 않게 하시고 보람과 의미를 위해서 선택하게 하시고 때로는 그 일이 인간적으로는 힘겨워 보여도 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천하게 보여도 하나님은 이 모든 직업을 귀히 여기신다는 확신을 갖고 이것이 나의 미션의 장임을 기억하고 그 일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의 자녀들이 일어날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가정으로 사업의 장으로 직장으로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삶의 장마다 평강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네가 어디 있느냐? /3:7-12/ 이동원 목사

2014-11-29 07:56:56

 

어렸을 때 우리는 모두는 숨기장난 게임 혹은 술래잡기 게임의 경험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게임에서 숨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찾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까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숨는 자는 많이 노력할 필요도 없고, 숨어서 자기를 찾는 자를 엿볼 수 있는 쾌락을 경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찾는 자가 훨씬 더 고생을 하는 것이 이 게임의 속성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보여주는 인간의 역사에서도 진실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숨는 자이고, 하나님이 찾는 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 보면 잃은 어린양을 찾는 목자도,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도,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도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인간 처음의 타락의 장에서도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타락한 처음 인간 아담도 숨는 자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그런데본문 9절을 보면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아담을 부르시며 찾습니다."네가 어디 있느냐?".

 

왜 우리는 숨는 자가 되려고 할까요? 한 심리학자는 숨김에는 은밀한 쾌락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숨김으로 자기를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움이 드러나면 거부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들도 나를 거부하고, 하나님도 나를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김의 게임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숨어 있는 자리에 오셔서 우리에게 묻습니다."--네가 어디 있느냐?".

그렇다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그는 도대체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우리 인생은 그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것일까요?

 

1. 그는 누구이십니까?

 

적어도 처음 사람을 찾아오는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가지 속성을 알게 됩니다.

 

1) 그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제 아내가 가끔 신세 타령을 할 때마다 저에게 털어놓는 이런 불평이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절 몰라요.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해요. 주님 밖에는 요." 저는 제 아내의 이 말이 진리라고 동의합니다. 우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오직 한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창세기 본문의 10절 이하에는 하나님을 도피하여 숨는 아담의 모습에서 특별히 세 가지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선 10절에는 그가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과 두려워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 이야말로 타락한 인간의 실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벗음 자체는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2:25에 보면 "아담과 하와는 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니라"고 기록합니다. 부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가 인간을 찾아오자 마자 인간은 부자연한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죄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이런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첫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첫 사람은 그의 아내를 향해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런 상태를 정밀하게 묘사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부끄러움을 우리의 두려움을 그리고 우리의 분노를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는 알고만 계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2) 그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그는 우리의 어떤 문제도 해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의 전능성은 결코 폭력적인 능력이 아닌 부드러운 사랑의 능력임을 우리는 처음 인간을 다루시는 모습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가 놀라지 않도록 부드럽게 다가오십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이른 아침이나 잠든 한 밤중에 찾아 오셨다면 그들은 얼마나 놀랬을까요? 태양이 뜨거운 폭염의 한낮에 찾아 오셨다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더위를 식히는 시간,날이 서늘한 시간, 조용히 미풍이 부는 시각에 찾아 오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그들이 날이 서늘 할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기록합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가 당황하지 않도록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잔인하게 추궁하고 폭로하는 심판자가 아니십니다. 드러난 죄의식으로 부끄러워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하나님이 제일 먼저 행동으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3:21을 읽어보십시오."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벗음을 알고 부끄러워하는 죄인들에게 따뜻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인생이 안심하고 새날을 바라보고 일하고 활동하고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시는지요? 그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아실 뿐더러 우리의 삶의 모습을 사랑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Phantom of the Opera)을 기억하시는 분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본래 이 뮤지컬은 프랑스의 추리소설 작가 가스통 르루(1868-1927)1910년에 쓴 소설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흉측한 외모 때문에 가면을 쓰고 오페라 극장 지하에서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흉측한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미로같은 오페라 극장 지하의 비밀장소에서 홀로 숨어살고 있는 에릭을 사람들은 유령으로 생각합니다.

극장 전속 여가수인 아름답고 순수한 크리스틴을 짝 사랑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에게 음악수업을 시키던 에릭은 크리스틴이 어릴적 친구이자 극장 후원자인 라울과 사랑에 빠지자 크리스틴을 납치합니다.

 

크리스틴을 찾기 위해 극장 지하로 내려온 라울은 유령에게 잡히고 크리스틴은 라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에릭 과의 결혼을 약속합니다. 처음으로 에릭은 사랑하는 자 앞에서 가면을 벗습니다. 자신의 끔직한 외모 때문에 어머니에게서조차 키스를 받지 못한 에릭이었습니다.

 

뜻밖에 크리스틴은 에릭의 흉터를 보고도 그 흉터 난 얼굴에 키스를 합니다. 이 한번의 키스로 에릭의 마음은 녹아 내립니다. 에릭은 마음을 바꾸어 그녀를 라울에게 보내고 자신은 쓸쓸하지만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크리스틴의 사랑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담의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흉터 난 모습을 보시고 알고서도 그를 안아주시고 그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흉터를 보시면서도 그 흉터에 입을 맞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당신의 상처를 보시면서도 그 상처에 입을 맞추시고 그 상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은 단순합니다. 도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지 말고 수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건네주시는 사랑의 선물을 받으셔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이 전달되었을 때 그들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가죽옷을 받아 입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셔야 합니다. 이 가죽옷을 손수 준비하시고 만드시는 하나님에게 사랑의 수고와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가죽옷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생명있는 짐승이 희생되지 않았겠습니까?

 

피 흘림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피 흘림과 사랑으로 지어진 가죽옷을 건네어 주는 하나님의 손은 사랑으로 떨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는 다만 이 아름다운 첫 사람들이 이 가죽옷을 입어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랑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을 뿐입니다.

 

오래전 저의 첫 미국 유학 시절동안 도서관에서 읽었던 한 기독교 심리학 잡지에 취급되었던 케이스를 깊은 감동으로 읽은 기억이 새롭습니다. 뉴욕의 한 기독교 정신과 의사가 한 소녀를 치료한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 미성숙한 부부가 준비되지 않은 채로 결혼하여 여자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들은 알콜 중독에 마약 중독자들이었습니다. 부인은 시간이 흐르면서 정신 분열의 증세마져 보이며 아이를 귀찮아하기 시작합니다.

 

어느날 부부가 한 바탕 싸움을 한후 남편이 집을 나가 버리자 부인이 아직 세살도 안된 이 여자 아기를 번쩍 들더니 부엌의 닳아 오른 오븐위에 올려놓습니다.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이웃 집의 신고로 경찰이 도착하여 이 여자 아기는 목숨만은 구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중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됩니다. 화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치료되어 가고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이 소녀의 정신상태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해증세(자기를 칼로 찌르고)를 보이고, 사람들을 기피하고 입을 굳게 닫은 채 일체 말을 안하는 실어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소녀의 눈동자는 허공을 더듬고 항상 출혈되어 있은 채로 심각한 정신 불안 증세를 노출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녀에게 국가가 배정한 정신과 의사가 파견되어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만 좀처럼 증세는 호전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배정된 치료기간이 끝났지만 기독교 의사였던 그는 이 소녀가 너무나 불쌍히 여겨져 배당된 기간이상을 넘어서서 자원해서 이 소녀를 돕기로 결심합니다.

 

오래 동안 여러 가지 치료를 시도했습니다. 대화치료, 약물 치료, 음악 치료, 그림 치료등등을 시도했으나 별 효험을 거두지 못하던 어느날 이런 실험치료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이 소녀가 살던 모형 아파트를 만든 다음 아빠, 엄마 소녀 인형을 만들었습니다.

 

아빠 엄마 인형이 싸움을 합니다. 아빠 인형이 집을 나간 다음 이어서 엄마인형이 소녀 인형을 번쩍 들어 부엌 오븐위에 올려놓습니다. 그 순간 수년동안 닫혀졌던 소녀의 입이 열리면서 외마디 비명이 새어 나왔다고 합니다."난 너를 미워한단 말이야!"(I hate you!)

 

그런데 그 다음부터 이 소녀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현실에 직면하기 시작한 소녀는 그후 이 의사 선생님과 대화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도피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하루는 소녀가 치료중인 의사분에게 이렇게 묻더랍니다.

 

"선생님이 하나님이에요?"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의사이지"그러자 소녀는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의사 선생님처럼 나를 사랑하시나요?"

 

"그럼 사랑하시고 말고 그는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분이란다. 그는 우리를 향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시려고 그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란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또한 나를 너에게 보내신 분이란다."

이 하나님이 보낸 의사의 끈질긴 사랑으로 이 소녀는 마침내 회복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케이스는 상당히 극단적인 케이스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 어느 정도 이 어린 소녀가 앓고 있었던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우리가 만일 자신을 자학하고 있다면,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분노하고 싶다면 이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을 아십니까?

 

그분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해결하고자 자신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의의 가죽옷, 구원의 새 옷을 선물로 주시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만일 그분의 손길을 거절만 안하시고 수용하신다면 그리고 그분에게 여러분의 상처 난 인생을 내어 맡기신다면 여러분의 피 흐르는 알몸에 그는 따뜻한 사랑의 옷을 입혀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오늘도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씻어 주시며 우리에게 새 옷을 입혀 주시며 말씀하시는 그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시는지요? "이제 넌 피해 다닐 필요가 없어. 넌 부끄러워 할 필요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어. 넌 사랑 받는 내 자녀이니까!

 

난 너를 위해 새로운 내일을 준비했으니까. 그냥 이 구원의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되는거야.--". 오늘 다시 당신에게 들려주시는 당신의 창조자, 당신의 구원자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네가 어디 있느냐?--네가 어디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내가 널 찾고 있다고 이제 내 사랑을 받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지금이 네 삶을 바꿀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이 너의 부끄럼을, 두려움을, 분노를 끝낼 때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지금이 그때입니다. 지금이 당신이 당신의 영혼의 의사요 구주이신 예수님의 손길을 받아 드리시고 구원을 받으실 때입니다. 바로 지금이 말입니다.

 

 

 

 

 

 

원죄의 속성 /3:1-6/ 곽선희 목사

2014-11-27 08:38:08

 

어느 농촌에서 목회하고 계시는 목사님을 자주 괴롭히는 짓궂은 장로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장로님은 목사님을 뵐 때 마다 꼭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담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왜 선악과를 따 먹었을까요?

 

, 그거 안 따 먹었으면 오늘 우리가 고생을 안 할 건데요. 그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걸 왜 따 먹어가지고……" , 동산에 먹을 거 많은데 그건 왜 따 먹어가지고 오늘 우리까지 이렇게 고생을 시키느냐고 늘 그렇게 질문을 하는 겁니다. 왜 따 먹었을까요?

 

그 할아버지 할머니, 아담 하와가 원망스럽다는 이야기를 자꾸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이 나름대로 설명을 해 보았지만 영 설명을 들을 생각 안하고 그저 만날 때마다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어느 날 목사님의 생신이 되서 장로님들을 다 목사님 댁으로 초대했습니다. 옛날에는 아침에 잔치를 했거든요. 그래서 아침식사를 하러 오시라고 청했고, 장로님들이 다 오셨는데 맨 처음으로 이 장로님이 오셨어요.

 

그리고 목사님하고 둘이 앉아서 다른 장로님들이 오는 것을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다가 잠깐 밖에서 누가 찾는다고 하니까 목사님이 밖으로 나가시면서 장로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음식을 다 차려놨는데 그저 다 마음대로 보십시오.

 

하지만, 요 가운데 뚜껑을 닫아 놓은 거, 뚜껑을 닫아 놓은 요 그릇만은 열어보지 마세요." 그리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장로님이 이게 알고 싶은 거예요. 그것이 알고 싶어. 아니 왜 이 많은 것 중에 요 가운데 이상하게 생긴 요 뚜껑은 열어보지 말라고 했을까? 여러 생각 생각다 못해서 몰래 살짝 열었는데, 웬 일이예요.

 

그 속에 참새 한 마리가 숨어 있다가 푸르르하고 날아 버리는 거예요. 이 장로님이 참새를 잡으려고 이리 구석 저리 구석으로 뛰는데 먼지가 뽀얗게 되면서 난리를 치는데 목사님이 들어오셨어요. 장로님은 그저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아담 얘기 안 했대요.

 

여러분, 원죄라는 말은 영어로 original sin이라고 합니다. original sin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죄의 원인이 되는 죄.' 우리는 원죄하면 자꾸 아담과 하와의 죄만 생각을 해요. 거기다가 국한하려고 하는데 아닙니다. 죄의 속성은 거기서 형성이 됩니다.

 

그래서 original sin하면 죄의 원인이 되는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짓는 죄는 본죄라고 합니다. 본죄라는 죄를 짓고 살지만 본죄의 뒤에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내가 모르는 중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원죄라는 것이 있어요. 이걸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책 중에서 깊이 상고해 보면 그는 원죄를 딱 두 마디로 요약합니다. '원죄의 속성은 불신앙과 교만'이다. 그러니까 불신앙이란 쉬운 말로 말하면 의심하는 겁니다. 믿음이 흔들리면서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입니다.

 

자기 교만, 이것이 죄의 뿌리가 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반대로 말하면 믿고 겸손하면 원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과 그 소중한 겸손, 이것이 신앙생활에 있어 하나님의 자녀의 기본 속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에덴의 이야기는 그 만족한 낙원으로부터 범죄하여 실낙원한 이야기로서 아주 드라마틱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한 게 아니라 사건 속에서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심리 영성 치료 연구소라고 하는 게 있는데요. Institute for the Psycho- spiritual Health라고 하는 그런 특별한 기관에 교수로 있는 데이비드 베너(David G. Benner) 교수의 사랑에 항복하다라는 유명한 책이 한권 있습니다. 사랑에 항복하다, 뭔가 많이 생각하게 하는 그런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랑 받기를 그렇게 갈망하면서도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거죠.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을 믿지를 못해요.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을 수용하지 못해서 사랑받지 못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첫째, 두려움이다.

 

두려움 자체가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어요. 사랑이 흔들릴 때 두려운 마음이 생겨요. 그래서 새로운 변화에 대한 두려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자기 선택에 대한 두려움, 심리적으로 보면 이것들이 전부 사랑을 거부하게 만들어요. 또 하나는 죄책감이라는 겁니다.

 

이것도 사랑에 대한 의심에서 오는 것이에요. 어린아이들을 보세요. 혹 실수를 해서 뭐라고 야단을 맞아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사랑할거라는 데 의심이 없어요.

 

그래서 아무리 밀어도 엉덩이 들이대는 거예요. 안아 줄 거라고 생각하고. 이게 바로 어린아이들의 철저한 믿음이에요. 그의 사랑, 그의 용서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책감이 없어요. 또한 그 다음에는 자기 방어입니다. 사람은 자기 방어에 급급해요. 이것은 철저한 교만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겁니다.

 

, 이제 우리가 원죄를 생각해야 되겠어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스스로 가지고 있는 사랑, 이해하고 있는 사랑을 정리해보세요. 사랑은 모르고 만족하는 겁니다.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없어요. 사랑하니까, 꼭 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아요. ? 사랑은 믿으니까. 다 가질 필요도 없어요.

 

이대로 만족합니다. 다시 말하면 풍요의식입니다. 저의 것이 다 내 것이에요. 내 것이 다 저의 것이며 이제 더 알고, 더 가지고, 더 따지고, 더 소유하는 그런 욕망도 필요가 없어요. 그 때가 사랑하는 거예요. 네 꺼, 내 꺼하면 한평생 살아도 사랑이 아니에요. 그걸 아셔야 되요. 사랑에는 아무것도 몰라도 좋아요. 그대로 믿으니까 만족한 거예요.

 

그런데 오늘 에덴동산에 된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나를 믿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 하와가 하나님을 믿질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질 않았어요. 그 불신이 싹트면서부터 문제가 되는 거예요.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2:17)." You surely die. 반드시 죽으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죽을까 하노라(3)." 벌써 희석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불신이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구체적인 것은 뭐냐 하면 바로 금단의 열매에 대한 문제입니다. 금단에는 이유 있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금단의 이유가 있어요. 먹지 말라 했으면 먹지 말라는데 이유 있는 겁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이걸 꼭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니 먹어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여기서 의심과 교만이 함께 작용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어린아이들에게는 언제나 금단이 좀 많습니다. 가지 마라, 먹지 마라, 다치지 마라, 올라가지 마라, 내려가지 마라…….

 

아마 얘들이 좀 어른처럼 따져서 말을 하는 것 같으면 그럴 거예요. "말라, 말라, 말라만 하는데 하라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라는 건 하나도 없고 하지 말라는 것만 있어요. 하지만 하라는 것도 딱 하나 있어요.

 

먹어라. 그리고는 나머지는 전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뭘 하지 말라. 하지 말라.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서 만족하게 여길 때도 있지요, 그 하지 말라는 데는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인천에서 목회하면서 그 때 뭐 다 그랬지만 난방시설이 시원치 않아 방이 너무너무 추워서 방 안에다 난로를 놨어요. 연탄난로를 놨는데 집집마다 가보면 연탄난로 놓고 밖으로 이렇게 철망을 두르고 아이들이 거기에 가까이 못하게 합니다.

 

저희 집 난로는 그냥 놨어요. 교인들이 왔다가 그걸 보고는 '아니, 아 이거 철망을 둘러놔야지, 울타리를 해 놔야지 아이들 들어가면 어떡하라고…….' 우리 아이들은 그런 거 없습니다. 난로가 따끈따끈할 때, 전부 데려다가 한 번씩 붙였거든요. ! 하고 울었어요.

 

그 다음에는 절대로 가까이 안 갑니다. 여러분, 그 철망을 만들어 놓으면 아이들은 위로 올라가서 떨어져요.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가지 마라. 이유 있어요. 먹지 말라. 이유 있어요. ? 그 속에 사랑이 있어요. 뿐만 아니라 금단이라고 하는 말씀 속에 사랑, 사랑의 임재 의식이 있어요.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의 사랑의 간섭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항상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동산 중앙에 금단의 열매를 만들어 놨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금단에 이유 있다. 그런데 말이에요, 다른 말로 표현해 봅시다.

 

한계라는 것입니다. 다 먹을 수 있으되 하나는 안 돼요. 그와 같이 우리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있어요.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어요.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마다 오래 살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참 어지간히 애들 씁디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정말 오래 살아야겠습니까? 갈 때 되면 가야겠더군요. 어찌 생각하세요? 사람에게 죽는다는 것은 큰 복이라는 걸……,

 

여러분 북한 말로 할까요? 접수 할 겁니까? 이걸 접수해야 되요. 죽음은 안식이에요. 성경은 분명 안식이라고 말했어요. 죽는다는 건 좋은 거예요. 행복한 거예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부터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 외에 생각해 보세요. 지식의 한계, 소유의 한계, 능력의 한계, 시간이라고 하는 한계, 공간의 한계 속에 산다. 그대로 수용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오래 살고 싶습니까? 어떤 책에 그랬던데요? 그저 오래 살고 싶으면 칠십이 넘었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라. 어딜 다니고 살다가도 고향으로 딱 돌아가서 그 옛날에 태어날 때 살던 그 자리에서 그 때 먹던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야 오래 산대요.

 

자꾸 기어나가지 마세요. 뭐 어느 나라 간다. 어느 나라 간다하고 돌아다니다가 갔다 오다가 죽더라구요. 그러니까 그런 짓 하지 마세요. 그거 아니올시다. 고향,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게 중요한 겁니다.

 

왜요? 한계가 있으니까요.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에게 건강의 한계를 정해 주셨어요. 사도 바울에게는 꼭 건강 하나만은 있어야 될 것 같은데 No!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주었어요. 이것은 제가 아는 바로는 간질병 같은 것이에요.

 

늘 그것 때문에 고생했어요. 하나님 앞에 세 번이나 특별히 기도했지만 하나님 들어 주시지 않았어요.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한계를 딱 정했어요. 그만하면 됐어. 더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사도 바울은 이 한계를 받아들입니다.

 

나는 약할 때 강하다. 이 육체의 가시는 내게 필요하다. 꼭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면서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금단을 수용했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아시니까. 하나님이 나를 아시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니까. 그 사랑 속에 이 금단이 있음을 알고 믿고 만족하고 행복했더라면 에덴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금단의 한계를 넘어서 버렸어요.

 

요새는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게 하나 있어요. 거리 다닐 때마다 여자 같은 남자, 남자 같은 여자. , 어제는 어떤 남자 하나 봤는데 옆에서 저 사람 남자냐 여자냐 그래서 한참 보니까 남자 같더라구요.

 

얼마나 화장을 하고 뭐 모양을 냈는지 참 헷갈립니다. 남자는 남자로 살고, 여자는 여자로 살아야 되는데……. 이 한계를 벗어나면서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모든 면에서 문제가 복잡해지는 걸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 에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사탄, 이 어느 쪽에 말을 듣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게 중요한 겁니다. 어느 쪽 말을 들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분명 '정녕 죽으리라' 했어요. 사탄은 말합니다. '안 죽어' 그랬습니다.

 

어느 쪽입니까? 결국은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서 내가 그 분에게 종속되는 것이에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또한 오늘 성경에 보면 '그 아내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남편에게 주었더니 받아먹더라.' 딱 요렇게 돼 있거든요.

 

이게 마음에 안 들어요. 그 남편이 그래도 뭐라고 한마디 해야지……. '어쩌자고 그걸 땄냐? 너 크게 잘못했다.' 뭐라고 좀 한마디 해야 이 가정이 사는데, 둘이 꼭 같아요. 그냥 받아먹었어요. 그런데 전설에는 한마디가 있어요.

 

전설에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너 그거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너 죽게 되었다' 그랬더니, 하와가 하는 말이 '그래 좋겠수다. 나는 죽고 딴 여자하고 잘 살아 보세요.' 그랬대요. 그러니까 아담이 '그래, 그래 같이 죽자' 그러고 먹었다누만.

 

여러분, 하나가 된다는 것이 좋은 거 같고 화합이 좋은 거 같아도 이건 좋은 게 아니에요. 불의와 화합하는 것은 옳은 게 아니에요. 불신앙에 화합하는 것은 옳은 게 아니에요. 이걸 꼭 잊지 말아야 하구요.

 

그 다음에는 오늘 본문에 보니까 회개가 없어요. 이렇게 따 먹고 그만이에요. 두려움은 있는데 회개는 없어요. 변명은 있는데 진실은 없어요. 그리고 이 가정에 문제가 생겼는데 책임을 전가해요.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내 잘못입니다'라는 말이 없어요.

 

그래서 하와는 말합니다. '뱀이 먹으래서 먹었습니다.' 아담은 '아내가 주니까 먹었습니다.' 서로가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원죄의 속성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인간의 3가지 교만을 말합니다. 첫째가 권력의 교만. 한계를 넘어서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요, 더 가지려는 마음으로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둘째, 지식의 교만. 더 알려고 하는 것, 아니 어느 순간에는 지식에 대한 욕구마저 포기할 필요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이 바로 원죄에서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교만. 내 잘못은 없고 다른 사람의 잘못이 있는 것처럼 하여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됩니다. 여러분, 원죄에서 자유하게 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에덴을 회복할 수 있는 길. 그것은 바로 믿음과 사랑이입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만족하는 것입니다. 더 알려고 하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고 주신 바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며 행복한 것으로 알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를 마귀도 유혹하지 못합니다.

 

행복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시험이 없습니다.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실낙원에서 복락으로 향하는 길이 어디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많은 죄 중에 살지만 죄의 원인이 되는 죄를 잊어버리고 행함으로써 오늘도 그 결과만을 놓고 아파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불신과 의심과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교만, 이 모든 죄를 온전히 용서하여 주시고 십자가 안에 완전히 못 박아 버리고 이제는 사랑하며 이제는 믿으며 이제는 겸손하며 주의 주신 은혜에 늘 감사하는 믿음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3:6-13/ 곽선희 목사

2014-11-25 04:43:09

 

요새 서울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우리 교인들이 한 번씩은 다 보았으면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A Walk to remember라고 하는 영화입니다. 제목도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A Walk to remember, 그런 영화인데, 큰 감동을 주는 신앙적인 그런 영화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목사님의 딸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의 딸이 어렸을 때부터 백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딸의 소원은 기적을 바라는 것입니다.

 

기적밖에는 더 바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기적이 있기를 바란다고 늘 그렇게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도 기적적으로 고등학교 졸업할 때 즈음까지, 그래도 건강하게 지냈습니다.

 

남들은 옷을 반나체로 벗고 다닐 때에 이 학생은 늘 스웨터를 입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를 좋아하는 남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가까이 오면서 내가 너와 친구가 되겠다고 하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가 되는 것은 좋은데 하나의 조건이 있다고. 사랑하지 않기로, 사랑하지 않기로 한 후 친구가 되자고 합니다.

 

그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서로 같이 하면서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중에 점점 점점 사랑은 깊어졌습니다. 마침내 남자가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고, 사랑은 안 된다고. 끝내 비밀을 알았습니다.

 

내가 사랑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백혈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 죽을는지 모른다. 많이 고민을 합니다. 열렬히 사랑을 고백합니다. 심지어는 백혈병 환자인 것을 알면서 결혼을 하자고 합니다. 이런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될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다고. 왜 젊은 나이에 이렇게 가야 하는지, 남들처럼 대학을 갈 생각도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도 나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니 너무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좀 더 살고 싶다고, 행복하고 싶다고, 하나님이 원망스럽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둘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괴로워합니다. 몇 일 후에 만났을 때에 이 여학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지금까지 산 것이 기적이고, 참 사랑을 알고 참 사랑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너와 같은 착한 사람을 내게 주어서 사랑을 알게 해주셔서 이 어려운 고통과 이 고독을 쉽게 이길 수 있게 해 주시니 하나님께서 너를 선물로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을 인정합니다.

 

Reality를 인정하는 순간, 사실대로 인정하는 순간에 모든 것이 다 축복이요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더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애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고비를 잘 견딜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내게 주신 운명의 현실을 여러분이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내게 주어진 것,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믿음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내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내 현재의 현 주소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내과 의사들이 쓴 수필 가운데에, 제가 오래 전에 읽었지만, 내과 의사들이 제일 괴로운 시간이 언제인가 하면 환자를 다 진찰하고 나서 그 환자의 병이 깊었어요. 이제 진실을 말합니다. "의학적으로 당신은 6개월 밖에 살 수 없습니다.

 

어쩌면 며칠밖에 살 수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사형선고 같은 진단을 내릴 때에 괴롭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 같은 그런 시간이기 때문에, 또 이 의사의 무능함을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은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럴 때에 괴롭다는 것입니다. 더 괴로운 것은 이 분이 이 병을 가진 것은 대체로 보아서 3년 전에 있었던 어떤 큰 충격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3년 전부터 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알기는 오늘 안 것입니다.

 

이 환자가 진작 3년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좀 더 다른 의미로 3년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병을 고치고 안 고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3년을 얼마나 뜻있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던가. 이 사람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럭저럭 흐지부지 이렇게 잘 못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 마지막 3년을 잘 못산 것에 대해서 그것이 너무나 괴롭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실이 어디까지입니까? 오늘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이것은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뜻은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Location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Attitude를 묻는 것입니다. State를 묻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 아담아 네가 지금 어느 지경에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뜻을 알아야 합니다. 말뜻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는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시겠습니까? 알고 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스스로 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나는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고백해주기를 바래서 묻는 말씀입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숨은 사람은 가만히 있어야죠. "어디 있느냐?"하니까 "나 여기 있습니다"하면 되겠습니까?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할 때에 "어디 있냐?" "나 여기 있다" 그것이 얼마나 난센스입니까?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합니다.

 

숨었다고, 세상에 숨었다는 말처럼 바보스러운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숨었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과 아담과의 대화입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얼마나 한심한 그런 만남입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스스로 알길 바라고 스스로 고백하길 바라고 스스로 정직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했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거역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해 주기를 바래서 그런 대답을 기다리며 묻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하더냐? 왜 이런 것을 먹었느냐?" 잘 보십시오. 끝내 아담은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다윗처럼 정직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인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면 두려움이라고 하는 증상은 있는데 두려움의 원인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그 사실로 인하여 지금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두려움의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에 아픈 것은 알지만 병의 원인은 의사만이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과는 알면서 원인은 모르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사람들이 무려 70%가 한 번 이상 점을 본 일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 이 가운데 여러분도 많이 보았을 것 같은데, 뭐 토정비결이니 뭐니 해서 점을 들고 다니기에 그것이 무슨 짓이냐고 했더니 어떤가 해서 봤다나요.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그 뿐입니까? 그 중에 69%는 부적을 가진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 학교 갈 때에 할머니가 주머니에 부적을 넣어주더랍니다. 그래서 학교를 조사해보면 아이들 주머니마다 부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들 이러는 것입니까?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운명이 두렵고, 환경이 두렵고, 세상이 두렵고, 죽음이 두렵고. 두렵다는 것은 아는데 그것이 무엇 때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습니다. 범죄했다는 말입니다.

 

죄 때문이요. 알거나 모르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환경도 좋고 미래도 좋고 운명도 환하게 밝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을 거역한 죄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성경에 부끄러워하더라고 나와있습니다.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본래는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범죄함으로 인하여 부끄러움이 생겼습니다. 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마땅히 할 것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못 했을 때에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 공부할 수 있는데 안 했거든요. 부지런해야 되는데 안 했거든요. 당연히 해야할 일을 못했을 때에 부끄러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보니까 사람과의 관계가 부끄러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 만나는 것이 싫습니까? 전화하기도 싫고 전화 받기도 싫고. 가능하면 아무도 안 만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그 사람은 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반가워야 합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야 되는데 남들 다 웃을 때에 웃지도 않고, 자폐증 환자같이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며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그 원인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가 부끄러워하더라. 그것이 지금 현 주소입니다.

 

또 한가지는 변명과 핑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면 좋으련만 끝까지 그 말을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묻게 될 때에 회개할 시간에 회개하지 못하고 정직해야 할 사람이 정직하지 못하고 책임전가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하고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에 너무나도 안쓰러웠습니다. 창세기 2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 다음에 하와를 만드시고 하와를 하나님께서 중매해서 아담에게 인도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니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재미있는 유머가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아담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너무 예뻐서, 요렇게 봐도 예쁘고 부드럽고 상냥하고 너무 좋아서 "하나님, 어떻게 이런 사람을 저에게 주셨습니까?

 

얼마나 예쁜지..." 이렇게 감사기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예뻐야 네가 사랑하지 않겠냐?"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아담이 또 한마디를 하나님께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 사람이 맹할 때가 있거든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놈아, 그래야 너 같은 놈을 사랑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쁘고 아름답고 좋았는데 이제 와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저 여자가" 이 말의 책임이 누구입니까?

 

"왜 저런 여자를 주어서 죄를 짓게 만듭니까?"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하나님의 내게 주신 저 여자가 나를 범죄케 했습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여러분, 책임을 전가하는 것처럼 미련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헤매다보면 자기 정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그러면 책임인가는 어디에 갔느냐는 말입니다. 세상을 탓하지 마십시오,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탓하지도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원망이란 자꾸만 상승작용을 하여 하나님께 까지 올라갑니다.

 

원망하다보면 세상 탓하고 조상 탓하고 나라 탓하고 환경 탓하고 마지막에 하나님까지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 나의 상태가 어디에 있습니까? 절대로 변명하던가 핑계하던가 책임 전가하는 그런 초라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숨었다"고 했습니다. 정당화라는 방법으로 숨어버리고, 합리화라는 방법으로 숨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롤랜드 엘 워렌(Roland L. Warren)이라고 하는 분이 현대 사회를 대변화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충격적인 대 변화의 새대라. 그리고 깊은 사회면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다양한 조직과 기능이 관료화되면서 비인간화 되어가고 있다. 조직이 커지고 사회구조가 강해지면서 개인이라고 하는 인간존재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비인간화되어 가는 세상이라고 했고, 또 한가지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해석이 도덕적 해석에서 떠나서 임의적 해석으로 가고 있다. 절대기준에 의하여 도덕적으로 해석해야 할 문제는 어느 사이에 다 없어졌고 이제는 인위적으로 상황적으로 저희들 마음대로 정치적으로 임의해석을 하고 있다. 그것이 숨어버리는 일입니다.

 

또한 생산 우선적 가치가 어느 사이에 소비 우선적 가치로 변화하고 있다. 많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현대인들, 숨어버립니다. 스스로 자기를 숨깁니다. 가끔 부정문제 때문에 검찰에 끌려가는 분들 보십시오. 검찰청 앞에서 기자들이 물으면 절대로 결백하다고. 그런데 들어갔다가 못나오더라구요.

 

누구 한 사람 정직하게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형을 살고 나와도 자신이 억울하다고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망조라는 것입니다. 제가 캐나다로 집회를 다녀오면서 히딩크 리더십에 대해서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배울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어느 한 구석에 나타난 너무나 충격적이 말을 보았습니다. 그는 경기자들을, 선수들을 인도하는 가운데 이런 철학이 있습니다. "실수와 실력은 별개다." 실수했다고 해서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수와 실력은 별개입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 보십시오. 번번이 실수하는 사람을 내세웁니다. 믿어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력은 실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번 실수했다고 하면 다 끝난 줄로 압니다.

 

여러분, 오늘 이 아담이 실수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회개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다시 시작하라고 "Try again" 반드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고 변명하고 숨어버렸습니다.

 

숨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실낙원이 된 것입니다.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폭력화되고 정치화되면서 계속 숨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아"하고 말씀하시는데 히브리말로 아담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인생'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아" 하면 "인생아"라는 말도 됩니다. "네가 어디있느냐?" 현주소를 묻습니다.

 

제가 이번 여행 중에 또 한 권의 책을 보았습니다.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 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써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S.R. 코비박사(Stephen R. Covey)가 추천한 책입니다. Game Plan, 큰 제목으로 Game Plan이라고 했지만 부제목은 이렇습니다.

 

Second half를 위한 작전의 성공을 위하여. 인생의 전반이 있고 후반이 있습니다. 보자하니 여러분 지금 전반은 지났습니다. 절정은 후반이 있는 것이지 전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뿐입니까? 종반에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게임으로 보지 않으셨습니까? 연장전에 골을 넣으니까 골드 골을 하나 넣으니까 끝입니다. 인생은 종반이 결정합니다. 이 후반, 종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그런 책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제 과거를 더 이상 비판하지 마십시오.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고, 후반이 중요하고 종반이 중요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생아 너 어디에 있느냐?" 진실하게 응답하십니다. 정직하게 응답하십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미래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며,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숨어버리는 인간을 찾아와 부르시는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의 나된 현 주소를 알게 하시고 이 후반에 이어 종반에 이른 나의 생에 있어서 주님의 음성을 바로 듣고 바로 응답하며 정직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게 하사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기적 같은 은혜를 다시 힘입을 수 있는 오늘과 내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실낙원의 이유 /3:6-13/ 곽선희 목사

2014-11-20 03:56:03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늘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 브가 범죄한 일에 대한 불만입니다.

 

좀 어려울 때마다, 좀 힘들 때마다 '그 할아버지 할머니는 왜 그 선악 과를 따먹어 가지고 그 결과로 우리 까지 이렇게 고생을 시키나…… 그 에덴 동산에 살았으면 농사도 하지 않고 평안하게 잘 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쫓겨 나가지고 고생을 하 게 되나…….

 

원인은 아담과 이브,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문제다 이거.' 늘 이렇게 원망을 했는데 그 원망이 좀 지나쳤어요. 목사님이 이말 저 말로 설명을 해 봤지만은 영 들어먹 지가 않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댁 에서 이 장로님을 초청했습니다.

저녁 만찬을 청했는데 음식을 잘 차 려놓고 식사 기도를 하고 막 식사를 하는데 밖에서 손님이 찾아서 이 목 사님이 밖으로 나가시면서 하는 말 씀이,

 

"자 우리 기도도 다 했으니깐 식사를 먼저 하십시오. 다 같이 식 사를 하세요. 그건데 요 가운데 있 는 요 그릇, 뚜껑 닫아 놓은 건 그 대로 두세요. 제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제가 이것을 열어 보이겠 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은 참고 다른 것만 다른 모든 것만 잡수십시 오."

그랬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목 사님은 나갔어요. 식사하는데 이 장로님이 그것이 궁금해 못 견디겠 거든. 그것이 무어냐 이거에요. 마 침내 그것을 살짝 열어 보았는데 그 속에 새 한 마리를 잡아 넣으셨어 요.

 

"푸릉"

하고 날아올랐는데 아 이걸 잡을 재간이 있어야죠. 목사 님 들어오시기 전에 잡아서 다시 집 어넣어야겠는데 잡을 길이 없어요. 이리 저리 쫓아 다니는데 먼지가 자 욱합니다. 이제 목사님이 들어 왔 습니다.

 

"아니 여기 많은 음식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것을 열어 보 았습니까?"

그리고 목사님은 빙그 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아담의 후예입니다."

그랬어요.

여러분 에덴 동산, 분명히 낙원입 니다. 이 낙원을 우리는 왜 잃게 되었습니까? 왜 낙원에서 쫓겨났습 니까? 왜 실낙원에 살아야 합니 까?

 

이러한 이야기를 신학적인 용 어로서 원죄라고 합니다. 원죄라는 말은 '죄의 뿌리가 되는 죄' 그런 말 입니다. 죄의 원인이 되는 죄, 어떤 죄가 여기에 있을 때 우리는 그 죄 라고 하는 사건 하나에 집착합니다 만은 알고 보면 보이지 않는 원인이 있어요. 보다 더 깊은 곳에 뿌리가 있어요. 그것이 여기에 와서 결과 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인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원인 은 언제나 과거 상황입니다. 지나 갔지요. 그러나 거기에 원인이 있 었고 원인은 언제나 깊은 곳에 있어 서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야 말로 마음에 있는 것이고 내 성품에 있는 것이고 내 피 속에 있는 것이 고 내가 가진 좋지 않은 이런 나쁜 전 이해 혹은 잠재 의식 속에 있는 거예요. 자 이런 그 원인 그걸 우 리가 알아야지요. 왜냐하면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원인을 알아야하고 원인을 깨달아야하고 원 인을 발취해야하고 원인을 끊어 버 려야 됩니다.

 

그래야 해결이 해야 되는 거지 원인을 그대로 놓아두고 는 또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 고 또 더 큰 죄 더 큰 사건 더 큰 실수로 확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 다. 그래서 때로 우리가 실수도 하 고 실패합니다만은 그 실패나 실수 라고 하는 사건을 너무 그렇게 괴로 워 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깊은 원인만 알면 이 사건 때문에 내가 미처 몰랐던 원인을 알게 되어 서 그 원인을 바로 찾아서 해결할 수만 있다면 내가 당한 실수는 오히 려 보다 더 밝은 미래를 위해서 좋 은 지혜가 되고 밑거름이 되고 창조 적 삶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 니다.

 

에덴 동산을 잃어버린 이유가 어 디에 있습니까? 낙원이라고 하는 것, 이 에덴이라고 하는 낙원은 정 말 낙원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 어 놓은 넉넉하고 행복한 낙원입니 다. 그런데 문제는 금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 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이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하나님의 영역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세계요. 이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피조물 입니다. 피조물 된 위치에서 행복 해야 합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 니다. 보세요. 다 먹으라고 했습니 다. 그러나 하나는 아니다 그랬습 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먹 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 에게 엄청난 자유가 주어졌지만은 그 자유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며 살 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어진 인 간의 본질입니다. 이 속에 우리의 행복의 길이 있습니다.

 

스스로 선 택해야 합니다. 다 가지는 게 아니 요 다 먹는 것도 아니요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이 제한성 스스 로 제한하고 제한된 가운데서 그 속 에 있는 자유를 극대화하며 살아가 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서 금단의 열매 있는 그대로의 낙원, 거기에 행복의 근원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버린 것이 요. 깊이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다 가지려고 하지 말 것 이예요. 한계성 안에서 행복할 줄 알아야 합 니다. 부족함이라는 것은 다 가지 지 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필요 한 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요. 만족이라는 말은 다 가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꼭 필요한 것을 충 분히 가졌다는 뜻입니다.

 

충분함과 만족은 같은 게 아니에요.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행복하지 못한 사람, 내가 스스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불 행하면서 남을 행복하게 하겠다고?

뭐 희생하면서 행복하게 하겠다고? 거 반갑지 않은 소리요. 문제는 나 스스로 행복해야 비로소 남을 행복 하게 할 수 있고 또한 지금 행복하 지 못한 사람은 내일도 불행합니다.

 

사람은 오늘 내가 취하는, 내가 만 든 습관, 내가 만든 생활 철학과 가 치관만큼의 내일을 살 수 있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오늘 불행한 사람 은 내일도 불행합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하구요 또, 지금 내가 처한 이 환경과 처지에서 행복할 줄 모르 면 환경이 바뀌어서 다른 처지에서 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잘 알 지 않습니까? 행복한 사람은 어디 에 갔다 놓아도 행복해요. 불행한 사람은 아무리 장소를 옮기고 바꾸 고 사람을 바꾸고 별 짓 다 해봐도 안됩니다. 직장을 해마다 바꾸어도 그는 영영 불행합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이 에덴 동산 이대로 충 분히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왜 불 만이 있고 왜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들에게 불신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뱀이 찾아와 서 아담이 아닌 이브를 찾습니다. 그쪽에 헛점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브에게 말을 합니다.

"다 먹지 말라더냐?"

 

"아니, 다 먹으라는데 하나는 아니라더라."

이때부터 이 여자는 고 먹지 말라고 하는 금단의 열매, 거기다가 집착을 합니다. 바 로 이게 망조예요. 왜 그 아름다운 세상을 다 보지 못합니까? 왜 먹지 말라는 그것에만 마음을 씁니까? 그래서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도 하고 소담하 고 이리 쳐다보다가 실수하는 거예 요.

 

여러분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 습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 그 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먹는 날에 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이 하나 님의 말씀은 이제 전혀 기억하질 못 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보세요. 뱀이 와서

"다 먹지 말라 더냐?"

 

할 때에

"고건 먹지 말랬 다."

해 놓고 그만입니다. 그 뒤에 한 마디 더 했어야 합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다."

 

그 말이 빠졌어요. 보지도 말고 만지 지도 말라고 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먹으면 죽으리라는 말을 왜 그는 잊어버린 겁니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죠. 자기 욕망이 우 선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도 않았고 기억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했습니다. 누 가 뭐라고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에 요. 그의 양심의 문제예요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아 여기서 유감된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나는 늘 이 유감돼요. 자 이브가 어쨌든 실수 를 해서, 보고 따먹고 남편에게 줍 니다. 그 남편에게 주었을 때 제가 바라는 것은 그 남편이 이 실과를 들고 깜짝 놀라는 얘기가 없어요.

 

"어쩌자고 이걸 손을 댔느냐?"

왜 이 말이 없는지……. 참 예나 오늘 이나 남자들이 멍청해요. 이게 무 슨 짓이요. 그런데 전설에는 말이 예요, 이건 전설입니다, 성경에 없는 전설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열매를 자기가 먹고 남편에게 주었 을 때 남편이

"어쩌자고 그걸 땄느 냐?"

 

하고 물었거든요.

"이거 먹으 면 죽는다는데……"

그러니까 그 이브가 그렇게 말했답니다.

"그래 요. 나는 먹었으니 죽을 겁니다. 당신은 딴 여자하고 행복하게 사세 요."

그랬답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그래 그래 우리 먹고 같이 죽자."

그러고 먹었답니다. 아 멍청하기는 예나 오늘이나…… 이게 원죄적인 멍청이요 이게.

자 왜 이렇게 됐느냔 말입니다. 이 두 사람 대화 속에 하나님의 말 씀이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기 억하지도 않아요. 아주 편안하게 썼지요,

 

"먹고 남편에게 주었더니 남편도 먹었더라"

그게 끝이요. 이 런 유감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다 음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는 진 실하지 못했어요. 이렇게 먹은 것 을 알고 하나님이 그를 찾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얼마나 중 요한 시간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 각해 봅니다. 이 시간에 말이요

"하나님, 금단의 열매를 제가 먹었 습니다."

라고 이야기했더라면 제가 믿기는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자. 다시는 그러지마라"

 

라고 말씀 하셨 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어 요. 그런데 오늘 여기 보면

"아담 아 어디에 있느냐",

"내가 여기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묻는 것은 장소를 묻는 게 아니에요.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에요. 그 상태를 묻는 거에요. 내 영혼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 내 양심 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내 믿음의 상태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겁니 다. 그건데

 

"내가 숨었나이다"

이 게 대답입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 님의 말씀에 소통이 끊어졌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들을 수 가 없었기에 바로 대답할 수도 없었 어요. 참으로 유감된 시간입니다.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몹시 두려워 했습니다만은 회개는 없습니다. 이 게 문제죠. 사건은 있는데 진실이 없습니다. 벌벌 떨기는 하는데 회 개는 없습니다. 여기서 벌써 낙원 을 잃어버린 것이올시다. 그리고는 본문에 보는대로 변명에 급급합니 다. 책임 전가를 합니다. 참으로 유감 됩니다.

 

"내가 먹었습니 다"

라고 얘기를 못하고 책임을 어 디로 돌리고 있는 겁니까?

그런 얘기가 있어요. 운동을 하 는 사람들, 요새 건강을 위해서 운 동을 많이 하는데, 요 운동을 해 보 면 같이 운동을 하면 한 번만 운동 을 해 보아도 그 사람이 어떤 인격 의 사람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운동을 해 보면 꼭 진실형과 정직한 사람과 그리고 Proactivity, 주도성이 있는 사람과 또 어떤 사람은 변명형의 사 람이 있거든요. 어떤 사람은 이 운 동하러 가서 지금 운동하려고 준비 하는 시간에 벌써 미리 변명이 나옵 니다. 요새 내가 감기 기운이 있어 서 잘 안 될 거 같다고…… 뭐 언 젠 잘 됐나?

 

그런 소리하잖아. 이 게 벌써 빗나간 인간이에요. 뭐 운 동 무슨 그거 해 가지고 국제선수 되겠나 잘 하든 못 하든 그런 거지. 그게 뭐 거기다가 사소한 거에 목숨 을 걸어? 그럴 필요가 없는 거거든 요.

 

그런데 벌써 변명하기 시작하 죠. 일이 잘 안되면 날씨가 어떻고, 뭐 신발이 어떻고 뭐 옷이 어떻고 또 옆의 사람이 뭐 분위기를 잘 뭐 뭐 어떻고……. 뭐 너무 말이 많아. 도대체가 말이 많습니다. 마지막엔 일이 잘 안되고 집에 돌아오면 집에 와서 또 마누라와 싸웁니다.

 

니가 오늘 내가 아침에 나갈 때 잔소리를 하고 바가지를 긁어서 하루종일 재 수가 없었다 이거야. 거기다 책임 을 돌립니다. 이런 인간은 구제불 능이요. 어디 가서나 꼭 자기 책임 을 남에게 돌립니다. 이건 누구 때 문이요 이건 누구 때문이요 누구 때 문이요…… 뭘 누구 때문이야 자기 때문이지. 안 그래요? 바로 여기 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근데 오늘 이거는요 뿌리 깊은 죄 입니다. 원죄적인 죄라는 말입니다. 보세요.

"아담! 어찌하여 먹었느 냐?"

하나님이 문책할 때,

 

"제가 먹 었습니다"

하지 못하고

"이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아내에게 책 임을 돌립니다. 더욱이 이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어서 함께 하게 한 이 여자가 주어서 먹 었습니다. 하나님 책임이에요. 왜 이 여자를 나에게 주었습니까?

 

어 떤 때에는 너무 좋아서 뼈 중의 뼈 요 살 중의 살이라고 미치게 좋아하 더니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이 여자 때문에 망조가 들었습니다. 자고로 여자 때문에 망하지. 옛날 이야기 아니에요. 에덴 동산부터 그랬어. 이거 보세요. 이 여자로 인하여 이렇게 될 때 이걸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고 있어요.

 

이게 어 떻게 여자의 일입니까? 먹은 건 누 군데? 문제는 내가 먹었잖아요. 이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만일에 이 책임을 여자에게 돌린다면 이제 그 다음에 꼭 제가 거기 괄호하고 집어넣고 싶은 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말씀이 없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그냥 지나갑니다만은 저는 꼭 한 마디 하겠습니다. 하나님 대 신

 

"그렇다면 너는 누구냐? 너라는 인간은 뭐냐?"

이 말이요. 또 여자 에게 말하기를

"넌 왜 먹었냐?"

그 러니까

"뱀이 먹으래서"

 

"그러면 너는 누구냐? 뱀의 말이나 듣고 휘 청 휘청하는 도대체 너라는 존재의 주체는 뭐냐? 네 정체는 뭐냐"

고 묻습니다. 안그렇습니까? 먹으란 다고 먹을 것입니까 가란다고 가겠 습니까 마지막 선택의 결정은 내게 있는 거요. 그러면 내가 한 거지 어떻게 남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까? 저는 정말 유감스럽습니 다. 이때에

 

"하나님, 모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 제가 먹었습니다."

아 담이 이렇게 말했더라면 실낙원 되 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낙원이 있 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 의 마음 가정이 다 낙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주었 습니다.

 

우리 지금 다 넉넉합니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오히려 가 난하고 어려울 때보다도 우리의 마 음속에 낙원이 없습니다.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습니다. 실낙원 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신 과 공포와 거짓과 변명과 책임전가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 많 은 날 공청회를 해 보았지만 하나도 밝혀진 일은 없습니다. 여론은 많 습니다만은 진실은 숨겨지고 있습니 다. 그 깊은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 까?

 

뿌리를 뽑기 전에는 내가 낙원 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실락원 이 낙원에서 추방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낙원을 버린 것입니다. 복 락원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낙 원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얼마 전에 센프란시스코에 갔다가 거기엔 히피족도 많고 에이 즈 환자도 많습니다. 거기에 가서 제가 눈으로 보고 거기서 들은 얘기 입니다. 어떤 아버지는 에이즈 환 자로 인해서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 는 아들을 휠체어에 태워 가지고 거 리를 지나다니면서

"에이즈 환자를 사랑합시다."

 

그러고 혼자서 데모하 는 걸 봤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들은 얘기입니다. 어떤 부인이 여 자 의사였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의사 일을 열심히 하노라고 병원을 살리면서 그만 가정 생활을 등한히 했습니다.

 

남편은 혼자서 이리 저 리 방황하다가 그저 술도 먹어보고 아편도 해보고 이리 저리 밖으로 나 돌다가 마침내 에이즈 환자가 됐습 니다. 시커멓게 썩어 가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기가 막힙니 다. 바로 이 순간입니다. 아내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내가 한 남자의 아내로서 아내 구실을 안 해서 내가 할 도리를 하지 않았고 내가 병원 일만 하느라고 돌아 다니 면서 당신과 함께 하지 못해서 당신 이 이렇게 된거요. 이것은 당신 책 임 이전에 내 책임이라고……."

 

그 는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병들 게 했는데 당신이 이대로 죽어간다 면 내가 혼자 살아서 그 가책과 괴 로움 속에서 무슨 낙이 있겠느냐"

.

"나도 당신하고 같이 갈 거"

 

라고. 오랫동안 멀어졌던 사이인데 다시, 그 때부터 부부관계를 계속합 니다. 놀라운 것은 이 여자는 절대 로 에이즈가 감염되지 않는 겁니다. 얼마 지내가면서 보니까 남편도 병 이 나았어요. 뜨거운 사랑은 에이 즈 균도 죽이는 거예요. 이런 기적 이 있었어요. 사실입니다. 이걸 알 아야 합니다. 그들은 어디에 살던 지 지금 복락원 되어 사는 것입니 다.

 

잃어버린 낙원, 슬퍼할 것이 아닙 니다. 내가 처한 처지, 내 가정, 이 현실 속에 복락원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복락원 하고 사는 사람이 되야 내일의 하나님 나라도 소유할 수가 있는 것이올시다.

 

 

 

 

 

 

 

가죽옷이 세마포 옷이 되다 /3:21

2014-11-04 16:03:03

 

전화선을 자르면 수많은 코일이 합하여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66권 내내 흐르고 있는 전선이 6가닥이 있습니다.

 

1. 성경은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2. 성경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3. 성경은 죽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4. 성경은 율법과 복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5. 성경은 영적 전쟁이 흐르고 있습니다.

6. 성경은 메시야가 흐르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가면 나체촌이 있습니다.

근처에까지만 가보았습니다.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국에 갔을 때였습니다. 런던에 햇빛이 쨍쨍 비치는 날이 일년 365일중에 겨우 몇 십일일 정도라고 합니다. 그 나마 겨울에는 옷을 벗을 수 없습니다. 공원에서 옷을 다 벗고 누워있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러웠습니다.

 

독일 목욕탕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남녀 혼탕입니다. 남녀가 모두 벗고 목욕을 같이 하는 데 그렇게 자연스러웠습니다. 오히려 남자인 내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에덴이 그랬습니다.

죄를 모르면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언젠가 우리 강대상에 예배중에 바지를 벗긴운 아이가 올라와 다녔습니다. 전혀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죄를 모르면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러나 죄를 알면 부끄러움을 알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니라”(2;25)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3;7)

 

옷의 필요성

 

사람이 옷을 입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피부 보호입니다.

옷을 입어야 피부가 보호됩니다. 찢어지지 않고 다치지 않게 하여 줍니다. 추위에서 따뜻하게 하여 주고 더위에서 시원하게 하여 줍니다.

 

2. 수치 보호입니다.

부끄러움을 막아 주는 것이 옷입니다. 남녀가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고 살면 부끄럽습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18;8)

 

주님이 우리 곁으로 지나며보니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주님의 옷을 벗어서 우리의 벌거벗은 것을 가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수치는 주님이 가려주실 수 밖에 없습니다.

 

유럽 부흥회를 마치고 이스라엘에 들러서 성막 자료를 사오곤 하였습니다. 종종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이스라엘 비행기만 한번도 테러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검색이 철저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다니는 40, 50대 남자는 무조건 밀실에 들어가서 팬티만 입고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나는 이제 그런 일에 익숙합니다.

목사라고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여러 번 다녔다고 하여도 통하지 않습니다. 무조건입니다. 나는 너무나 모욕스러워 물었습니다.

 

꼭 이렇게 하여야 합니까?”

그 때마다 공항 관리는 말했습니다.

당신의 안전을 위하여서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그렇기 때문입니다. 벗었다는 수치입니다.

나치들은 유대인 여자들을 발가벗겨 남자 죄수 방에 넣기도 하였습니다. 옷을 수치를 가리는 목적도 있습니다.

 

3. 신분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었느냐를 보면서 그 사람의 신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경찰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우리는 금방 경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인복을 입었으면 군인입니다. 육해공군 옷이 다 다릅니다. 학생복을 입었으면 학생입니다. 의사 흰까운을 보면 의사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중은 승복을 입습니다. 목사는 강대상에서 목사 까운을 입습니다. 성가대는 성가대 옷을 입습니다.

 

옷은 신분입니다.

 

옷이 이 이상의 의미를 넘을 때 인간은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옷이 화려하여졌습니다. 옷에서 빈부의 차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옷이 유혹의 수단이 되면서부터 인간은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옷을 꾸미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은 타락하여졌습니다.

 

가죽옷의 가죽은 무슨 가죽일가요?

 

성경은 무슨 가죽인지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가죽인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소가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숨었습니다. 유대인의 전승은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그 날 타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숨어 있는 데 밤이 왔습니다. 자연적인 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미 자기가 타락하기 전에 루시퍼가 하나님에게 반역하다가 타락하여 내쫓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루시퍼와 그의 일당들 타락한 천사들을 흑암에 가두었습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6)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준 형벌인 줄로 알았습니다. 흑암은 형벌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밤새도록 회개하였습니다. 회개할 때 아침이 왔습니다. 자연적인 아침입니다. 인류 역사상 두 번째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회개하였기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알았습니다. 광명속에서 아담과 하와는 뿔이 하나인 소를 찾았습니다. 뿔 하나를 둘이 붙잡고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우리 속에는 선악이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부터 선과 악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선만 붙들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후 소를 잡아 가죽옷 두 벌을 만들어 같이 입었습니다.

이스라엘에 흘러 오는 유대인 전승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가죽옷은 양가죽인 것으로 유추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를 요한 계시록 13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 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13;8)

 

짐승은 앞으로 세워질 짐승 정부의 대통령입니다. 3성전이 세워질 때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짐승이라고 성경은 말하기에 그 정부를 짐승정부라고 말합니다.

그 짐승에게 경배한다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 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더라는 말이 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성경은 영국에서 번역하였던 King James Version을 번역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매일 읽고 있는 영어 성경책이 있습니다. 하루 10장씩 영어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NIV 성경입니다. 그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니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 한 자들이라.”

 

창세때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때부터 어린 양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은 창세때부터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창세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가죽옷입니다.

 

원문 성경인 헬라어 성경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속에는 죽음이 들어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명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벌금형이 아닙니다. 감옥형도 아닙니다. 사형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100만원 벌금도 아니고 3년 징역도 아닙니다. 죽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나대신 죽어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

 

구약은 소, , 염소 그리고 비둘기중에 흠없는 숫컷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었습니다. 이것을 대속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대속물은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에서는 동물이 대속물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대속물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이 들어있지 않은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대신에 대속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죽옷입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이기 때문에 동물피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피가 필요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지어 입은 옷은 무화과 나무 치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들어 입혀주신 옷은 가죽옷이었습니다. 가죽은 짐승이 죽어야 생기는 재료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피묻은 옷을 입힘으로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죽옷은 양 가죽 옷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막 성전에서 양, 염소 그리고 소는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밍크 코트를 입었다면 밍크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물개가죽 코트는 전천후 코트입니다. 겨울이나 여름에도 입습니다. 비오는 날이나 비오지 않는 날도 입습니다. 물개코트를 입었다는 말은 물개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악어 가방이 제일 좋은 가방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악어빽을 가지고 있다면 악어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었다는 말은 짐승이 죄인대신 죽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몇 마리 잡았을 가요?

 

성경은 양을 몇 마리 잡았는 지 말하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 마리로 안 되었을 것입니다. 두 명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4마리 정도는 잡아야 두 벌 옷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추측으로 끝냅니다. 상상입니다. 그러나 몇 마리 잡았는 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잡았을 까요?

지금 아담과 하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잡았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수치를 덮을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덮어 주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 입은 무화과 나무 치마를 벗기셨습니다. 그리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3;21)

하나님이 잡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당시 지구상에는 아담과 하와 외에 사람이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잡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잡아, 하나님이 옷을 지어 하나님이 입히셨습니다.

자기들이 만들어 입은 무화과 나무 치마로는 하나님앞에 수치를 가리울 수 없었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자기 힘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건져주어야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가슴 아픈 것이 있습니다.

세월호가 사고나고 2시간 30분동안 떠있었습니다. 해경들이 일찍 도착하고도 무서워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 하였습니다. 단 한 명도 가라앉고 있는 배 속으로 들어 가서 구명조끼를 입고 빨리 나와서 바다속으로 뛰어 들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배밖으로 나오는 사람들만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그 때 유리창 가에서 손을 흔들며 구해달라고 몸부림치는 학생들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자기 힘으로 한 명도 나오지 못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구해주어야 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양을 잡고,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하나님이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시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많이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이라”(15;16)

 

가죽옷은 최초의 제사입니다.

어느 분은 원제사(原祭祀)라고 말했습니다. proto-sacrifice라는 말을 썼습니다. 후에 하나님은 시내산 꼭대기로 모세를 불러서 제사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번제, 소제, 화목,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 5대 제사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첫 제사는 가죽옷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사장의 옷

 

제사장들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5대 제사를 드립니다. 소제 하나만 빼고 모든 제사는 제물을 잡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고 제물 가죽은 제사장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사람의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 곧 그 제사장은 그 드린 번제물의 가죽을 자기가 얻을 것이며”(7;8)

제사장들이 가지고 간 제물 가죽은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1. 구두 재료

2. 가방, 지갑등 장신구 재료

3. 성경을 베끼는 종이 대용 재료

4. 의류 재료

 

제사장들은 가죽옷을 만들어 입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짐작입니다. 제사장이 생긴 후 제사장들은 제물 가죽을 취하였습니다.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그랬습니다. 가죽옷은 제사장들에 의하여 이어졌을 것입니다.

 

제사장의 옷 세미포옷

 

제사장들은 세마포 옷을 입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흰 옷입니다. 제사장의 유니폼입니다.

 

예수님의 세마포 옷의 비밀

 

그런데 예수님도 세마포 옷을 입고 사셨음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19;23-25)

 

예수님은 입고 있는 옷 모두를 벗김을 당한 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모두 벗겼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예수님 당시 옷은 그대로 돈이었습니다. 직조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일일이 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손으로 일일이 한 올 한 올 짜야 합니다. 그래서 옷은 너무나 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부터 아침 9시 정도까지 계속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옷은 찢겨지고 피가 낭자하게 묻었습니다.

그래서 옷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병정은 네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부수입이 생겼다고 좋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다 벗긴 후에 나누어 가지면 술값정도는 나올 것같았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을 벗겨서 네 조각으로 나누었습니다. 각각 한 깃씩 가졌다고 한 것을 보면 네 명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옷 조각도 돈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피가 묻었어도 빨면 됩니다.

지금 성경 학자들은 네 조각으로 예수님의 나눈 것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복음이 퍼져 나갈 것에 대한 예표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겉옷을 벗기고 나서 속옷을 벗기려고 할 때 로마 병정들은 놀랐습니다. 속옷은 보통 옷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원문에는 <키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키톤이라는 말은 놀라운 단어입니다. 직조술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이지만 모두 한 조각입니다. 한 통으로 짠 옷입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이런 옷은 보통 사람이 입을 수 없는 옷입니다. 제사장들만이 특별히 입는 옷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정교한 옷을 만들고 또 아론을 위한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39;1)

 

제사장들은 성소를 섬기기 위하여 <정교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겉옷은 잘라서 나누어 가졌습니다.

 

정교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쉐라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너무나 정교하여 바느질 자국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제조된 옷입니다. 꿰메지 않은 옷입니다. 천을 잇지 않은 옷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역사가는 요세프스입니다. 요세프스는 이 옷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었다고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성경 기록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옷은 너무나 비싼 옷이라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통 채로 한 사람이 가져야 제 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 가졌습니다.

 

흔히 겉옷이 비쌉니다. 속옷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겉옷을 잘라서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속옷은 나누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키톤 이 옷을 입고 계셨음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옷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 가요?

예수님은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레위지파가 제사장 지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레위 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복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라틴어로 폰티텍스라고 합니다. 폰티텍스라는 말은 <다리는 놓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예수님의 겉옷을 벗기고 나자 키톤 제사장 옷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 로마 병정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 돈이 되겠다.”

일반 사람들은 말하였을 것입니다.

제사장 옷을 입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다.”

 

그래서 로마 병정들이 이 옷을 나눌 때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와 사람들이 있는 성소 사이를 막고 있는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래서 제사장 옷을 입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옷을 입으신 것은 예수님은 제물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제사장 옷은 제물을 다루기 위하여 입는 옷입니다. 키톤은 제물과 관계된 옷입니다. 전투복은 전투하기 위하여 입는 옷입니다. 우주복은 우주와 관계가 있습니다. 우주인들이 끼는 장갑이 있습니다. 우리 목장갑과 똑같이 보이는 데 제조비가 5천만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자 제물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신비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동물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제사장 예수님은 자기 몸을 제물로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예수님처럼 늘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고 대속물로 주시며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3;25)

세례요한도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1;29)

 

예수님은 제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제주도의 한라산은 보는 방향에 따라서 다르게 생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무디(Mood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인들은 잔인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범법자로 보았다.

여자들은 슬퍼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보았다.

예수의 어머니는 가슴 아파하면서 그리스도를 아들로 보았다.

제자들은 난처함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꺽인 소망으로 보았다.

병고침받은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은인으로 보았다.

백부장은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권세자로 보았다.

 

제사장들은 조소하면서 그리스도를 협잡하는 사람으롭 보았다.

천사들은 놀라며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보았다.

마귀는 당황하면서 그리스도를 여자의 씨로 보았다.

하나님은 사랑을 품으시면서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아들로 보셨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그리스도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았다.

 

세마포으로 싸신 예수님의 시신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어 있을 때 세마포로 시신을 싸고 있었다고 사복음서는 모두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2759절에서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1546절에서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2412절에서베드로가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 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1940절에서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마포 옷으로 싸인채 묻혀 계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세마포 옷을 잘 세마포가 시신있던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세마포 옷을 벗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옷은 세마포 옷이었습니다.

 

천국의 옷 세마포

 

그런데 우리들이 천국에서 입고 살 옷은 세마포 옷입니다. 그런데 그 옷은 피묻은 옷이라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19;8)

 

또 그가 피뿌린 옷을 입었는 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19;11-12)

 

우리는 모두 천국에서 세마포 옷 흰 옷을 입고 살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물이 될 때 입으셨던 옷입니다.

첫 열매되신 예수님을 따라 부활한 우리는 예수님같은 옷을 입고 천국에서 영원히 영원히 살 것입니다.

창세기의 가죽옷이 요한 계시록에서 세마포 옷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성경의 구원의 역사는 가죽옷에서 시작하여 세마포 옷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올바로 사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벗기시고 세마포옷으로 갈아 입이신 후 영원토록 천국에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박 근혜 대통령은 외국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옷을 바꾸어 입는다고 합니다. 옷을 보면 박 근혜 대통령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옷을 보면 그 사람을 압니다.

우리는 세마포 옷을 입을 것입니다.

지금 옳은 행실로 산다면 영적으로 세마포 옷을 입은 것입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