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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로마서 설교 모음

로마서 7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3.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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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사망에서 해방 /7:20-8:2/ 유은호목사

2022-02-18 08:14:31

 

1993년에 돌아가신 한국 현대불교에 큰 업적을 남긴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은 조선 500년과 외세에 의해 약화되고 변질된 불교를 다시 재건하고 개혁하는데 앞장섰던 분입니다. 성철 스님은 수행을 하기 위해 8년 동안을 누워서 잠을 자지 않고 앉은 채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했으며,

 

자기 근처에 아무도 못 오게 하고, 수행하는 주위에 철조망을 쳐 놓고 10년동안 말을 하지 않는 묵언수행(默言修行)을 했습니다. 성철 스님의 수행 때문에 세속화된 현대 한국불교에 정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평소에 사람들이 성철 스님을 보려고 찾아와도 성철 스님은 피하면서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습니다.

 

한 기자가 인터뷰를 하려고 하니까 성철 스님이 내 말에 속지 말라 나는 전부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요. 나는 거짓말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니까 내 말에 속지마라.”고 했습니다. 성철 스님이 돌아가실 때 다음과 같이 유서를 써 놓았습니다. “한 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업 하늘에 가득차 수미산 보다 더 하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갈래이니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 있다.”

 

1. https://www.youtube.com/watch?v=O0aMhKVA_MU

2. https://www.youtube.com/watch?v=wkGf7OPfmdo

3. https://www.youtube.com/watch?v=PTlst_k0-fw

4. https://www.youtube.com/watch?v=7NRANZ_pWsg

5. https://www.youtube.com/watch?v=JIdA6nABLvI

 

성철 스님이 평소에 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니 속지 말라고 하는 거나 유서에 한 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업 하늘에 가득차 무간지옥에 떨어진다는 등 평범하지 않은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아마도 겸손의 표현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단순히 겸손의 말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이상합니다.

 

오히려 성철 스님의 진실이 담겨져 있는 듯 합니다. 그 말은 평생을 어려운 수행을 하고 얻은 진짜 깨달음의 내용일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나는 죄를 많이 지은 죄인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최고의 수행을 한 사람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그런차원에서 성철 스님은 진짜 수행을 참 수행자이며, 정직한 사람같이 보입니다. 성경에 성철 스님과 비슷한 고백을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분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15절에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성철 스님은 자신의 죄가 너무 많아 수미산보다 더하다고 자기 죄가 많은 것은 깨달은 사람이라면, 바울은 자신이 모든 죄인보다 더 악한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달았은 사람입니다. 다만 여기에 더해서, 바울이 성철 스님과 다른 점은 그 죄를 지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담의 원죄가 인류에게 전가되어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어떻게 아냐면 죽는 것을 보면 압니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형벌로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죄로부터 구원 받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 밖에 없습니다. 2022년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님을 믿고 죄로부터 구원받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읽겠습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9-31절에는 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애정과 의리를 배반하는 것)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라고 했습니다.만약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한다면 그 원인은 내 안에 있는 죄때문 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제 별명이 자랑의 선지자였습니다. 친구들이 제가 입만 열면 자랑을 한다고 해서 저에게 붙여 준 별명입니다. 아마도 제가 열등감이 많아서 자랑할 것도 안되는 것을 가지고 입만 열면 자랑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저에게 별명을 저 준 친구에게 별명을 저주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 친구는 시기의 선지자라고 별명을 지어주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어떤 친구는 매사에 참지 못하고 안달을 한다고 해서 안달의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죄가 있는 곳은 피곤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읽겠습니다. 바울은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이 자신을 사로잡는 것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곤고하다고 말한 뜻은 죄의 포로가 되어 기진맥진해진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죄의 포로가 된 인간은 그 죄책감 때문에 인생이 그 죄에 끌려다니다가 마침내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댓가는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결국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평생을 죄의 노예로 살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5세기 서방 라틴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타락 전 인간의 상태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posse peccare sive non peccare) 양쪽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선택했습니다.

 

아담의 타락후에 인간은 이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non posse non peccare)상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죽지 않을 수 없는’(non posse non mori)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죄 때문에 필연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좌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4절에서 바울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고 탄식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자기의 의지로 아무리 죄를 이겨보려고 해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에 죄의 노예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엄청난 수행을 하고 노력을 해도 마지막에는 아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하면서 죄로 인해 정죄감을 느끼며, 탄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이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해야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81절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 밖에 있는 사람은 날마다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2022년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은혜가 임하여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927년 미국에서 태어난 짐 엘리엇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과서 위에 작은 성경을 들고 다니며 성경을 전하고, 식사전에 기도하고, 암송카드로 암송을 하고, 정오에는 시편을 읽고 기도를 했으며, 친구들에게 천국과 지옥을 전하는 신앙좋은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후 대학에 들어가서 레스링 선수를 하면서 체력을 연마했습니다. 왜냐하면 훗날 선교사로 나갔을 때 체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짐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선교사로 나갈 것을 준비했습니다. 짐은 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짐은 마침내 학교를 졸업하고 인도와 에콰도르 중 한 곳을 선택해서 선교사로 가려고 했습니다. 짐은 인도보다는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에콰도르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짐은 에콰도르 카추아 족으로 들어갔습니다. 짐은 에콰도르에서 5년을 선교사로 사역을 하는 동안 원주민을 저도하며, 2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학교 건물도 짓고 성경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짐의 마음에는 아직도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하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우카 족은 아직도 원시적인 삶을 살면서 백인만 보면 죽이는 잔인한 인디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짐은 카추아에 머물지 않고 아우카족의 언어를 배워서 아우카 족의 언어로 된 누가복음을 번역했습니다. 아우카 족 마을 상공에 비행기를 타고 가서 물건과 음식을 비행기에서 내려 주면서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짐은 비행기에서 내려서 아우카 족에게 복음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195618일 일요일 29살의 청년 짐 엘리엇은 6년간 위해서 기도해왔던 아우카 족의 사람들의 창에(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짐이 죽고 난후 그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써 있었습니다. “아버지, 제 생명을 취하소서, 주님의 뜻이라면 제 피를 취하소서. 주님의 삼키는 불로 제 피를 태우소서 제 것이 아니기에 아끼지 않겠습니다. 주님 다 가지소서, 다 가지소서, 제 생명을 세상을 위한 희생으로 부으소서, 피는 주님의 제단 앞에 흐를 때만 가치있는 것입니다.”(엘리자베스 엘리엇/ 윤종석 옮김, 전능자의 그늘(서울: 복있는 사람, 2002), 37, 58, 75, 80, 180, 216, 374-375, 392, 400).

 

짐 엘리엇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짐은 예수님 안에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위해 죽음의 길로 가고 싶은 열정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8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두 가지 큰 과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이며, 둘째는 사망 곧 죽음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인생이 기쁘고 즐겁지가 않습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는 오직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죄와 죽음의 문제에서 해방될 때만이 기쁨과 평안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만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2022년 여러분 모두 예수님 안에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기쁨과 평안과 자유가 넘치는 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죄를 깨닫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7:7-14/ 유기성 목사

2016-08-25 15:55:36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영생을 얻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몸의 건강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아가고 약을 먹습니다.

 

몸이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은 대단히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육신 보다 더 중요한 영혼에 대하여는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리 사랑했던 가족이라도 그 육신은 장례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고인이 땅 속에 묻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육신만 장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이 육신 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몸만 귀하게 여기고 삽니다. 그러다가 죽는 순간, 절망합니다. 영혼은 어디로 가느냐 말입니다.

 

지진이나 해일 등 큰 사고가 생기면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평안합니까?

 

폴 워셔 목사가 오하이오 주에서 설교를 했을 때 일을 말했습니다. “설교를 막 끝냈을 때 아홉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일어서더니 이렇게 떨면서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강단에서 내려와 아이를 붙잡고 "아이야, 무슨 일이니?라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저처럼 사악한 죄인도 구원하실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엄마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그 때 교인들이 웃었습니다. 목사님이 웃는 교인들에게 말씀했습니다.

 

웃지 마세요.” 지금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아시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그 아이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의 작은 죄가 심판을 받아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채 지옥에 가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영혼의 존재와 죄의 심각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죄 하나 때문에라도 우리는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르고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알지 못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율법주의자가 되지 말라는 말을 듣다 보면 율법이 나쁜 것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율법이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7:7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아니었다면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알지 못한다!’ 정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그 말이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습니다. “죄를 안 짓고 산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죄를 알지 못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탐심을 예로 듭니다, :7 ... 율법에 "탐 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탐심이 죄입니까? 몇 년 형입니까? 법정에 가면 탐심은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도둑질하고 살인하여야 죄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보면 탐심이 큰 죄입니다.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 계명을 보고서야 탐심이 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말씀이 눈에 들어오기 전에 남을 비판하는 것이 죄 인줄 몰랐습니다.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저는 말씀을 알기 전에 염려가 죄 인줄 몰랐습니다.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어느 목사님께서 나는 지옥 갈 죄인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라는 교인에게 눅 10:27을 읽어 주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의 요약입니다. 당신은 잘 지켰습니까?” 그랬더니 그 교인이 대답했습니다. ”제겐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율법이 하는 역할은 이처럼 우리 양심을 깨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죄를 짓고 살기 때문입니다.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사람들은 율법이 없었다면 죄 인줄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죽어 죄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4: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미국의 유명한 뉴스 해설가인 󰡐폴 하비󰡑(Paul Harvyy)는 추운 지방에 사는 에스키모들이 어떻게 늑대를 잡는가? 그 특별한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늑대를 잡기 위하여 날카로운 칼날에 피를 묻힌 후에 그것을 얼리는데 이것을 반복하면 나중에 칼날이 얼어붙은 피에 숨겨지게 됩니다.

 

이 칼날이 들어있는 피로 된 얼음덩어리를 늑대가 많이 다니는 툰드라(Tundra) 지역에 칼날이 위로 올라오게 묻습니다. 그러면 늑대는 피 냄새를 맡고 다가와서 얼어붙은 피를 혀로 핥기 시작합니다.

 

늑대가 계속 피를 핥아먹으면 날카로운 칼날이 나타나지만 늑대의 혀는 이미 차가운 얼음을 핥은 중에 감각이 없어져서 자기의 혀가 갈라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 줄을 모른 채 더욱 열심히 계속 핥아먹습니다. 드디어 늑대는 피를 많이 흘리고 쓰러질 때까지 피를 마시다가 죽는 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멸망시키는 마귀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도 죄에 대한 감각이 없는 우리에게 죄를 깨우쳐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나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사실은 죄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인격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1 죄가 그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나를 속이고, 또 그 계명으로 나를 죽였습니다.

 

죄는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더욱 죄에 옭아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알아도 오히려 더 죄짓게 만듭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 24장에서 어린 시절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내게는 도적질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가난 때문은 아니었고 선행을 멸시하고 죄를 추구하는 강한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날 늦은 밤 소년들과 함께 배나무를 흔들어 배를 도적질한 후 돼지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 하나님! 그것이 나의 마음의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추구한 것은 죄악 자체였고 잘못 자체였고 부끄러움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율법이 오히려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9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10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아십니까?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알아야 회개도 할 것이 아닙니까?

 

어떤 남편이 결혼 30주년이 되어 아내에게 생일 선물을 특별히 해주고 싶었답니다. 선물을 고르기 어려워 아내가 원하는 것을 사주고 싶어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갖고 싶은 게 있으면 한번 얘기 해봐요그랬더니 아내가 정색을 하면서 생일 선물 같은 것은 원하지 않으니 두 시간만 자기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완강하여 남편이 결국 아내에게 두 시간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아내의 생일 날,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나에게 두 시간을 주기로 약속하셨죠?” “그랬지” “그럼 지금 나에게 두 시간을 주세요.”

 

그러자 아내가 남편을 거실의 소파에 앉히고는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두 시간 동안 당신에게 이야기를 할텐데 당신은 그저 들으면서 맞아, 옳아, 그렇지만 해주세요.” 남편은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렇게 하지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는 남편 앞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 만나고, 데이트하고, 약혼하고, 결혼하고, 시집살이도 하고 애 낳고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듣다가 사실이 아닌 것 같은 이야기도 나와 여보, 그게 아니고, 그때 이랬잖아하였더니 아내가 여보 두 시간만 두 시간만 제게 주세요. 당신은 그저 들어만 주시면 돼요라고 말했습니다.

 

약속을 했으니 더 말을 못하고 듣기만 하는데, 10분쯤 들으니까 미치겠더래요.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많더랍니다. 그런 말을 듣기만 해야 하니 20분을 들으니 더 듣다가는 죽겠더랍니다. 그런데 한 30분쯤 지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30년을 같이 살았는데, 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몰랐을까. ‘내가 그때 그랬었나?

 

아내가 어느 날은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했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한 여자의 생애가 이럴 수가 있나. 그리고 내가 어쩌면 그렇게 무심하게 했으며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가 말입니다. 두 시간을 정신없이 말하는 아내의 말이 끝날 즈음에 남편이 울기 시작합니다.

 

아내가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여보 다 이야기했어요. 내 이야기 끝까지 들어줘서 고마워요.” 했을 때, 남편이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아내의 무릎을 붙들고 울었다고 했습니다아내에 대하여 너무 몰랐던 것이 미안했고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지도 못했음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여러분은 아내/남편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부모, 자녀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알기는 다 아십니까? 하나님께는 어떤 죄를 짓고 살았는지는 아십니까?

 

부흥회 때, 한 청년이 통곡을 하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내 마음은 왜 이렇게 더럽습니까? 하나님, 나는 왜 이렇게 죄가 많습니까?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나를 도와 주세요율법은 이 역할 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고,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자신의 죄를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서야 자기 죄를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면 구원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마틴 루터가 회심하기 전 회개의 역사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경건하게 수도하는 사제였지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였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주님께서 "마틴 루터야, 하나의 죄만 있어도 지옥이다 백 가지가 아니고 천 가지도 아니고 단 하나의 죄라도 영원한 지옥으로 가기에 충분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의 성경적인 근거가 무엇입니까?"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앞에서 몇 번이나 죄를 지었나요? 단 한 번이었습니다. 정말 단 하나의 죄가 있어도 하나님과 교제는 불가능합니다.

 

마틴 루터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지은 죄를 낱낱이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속까지 더러운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사제에게 가서 고백합니다. 어느 날 그 사제가 루터에게 "형제님, 다음부터는 고백할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를 하고 와서 고백 하십시오" 라고 권면합니다. 그 사제는 어둠 속에서 길 잃은 영혼이었기에 루터를 이해하기 못했습니다.

 

이런 고통을 겪고 난 다음에야 루터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루터를 위해 하신 일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루터가 말한 이신칭의 (以信稱義)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이신칭의 와는 극단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며 그들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사악한지 깨닫게 하신 적이 있나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여러분의 죄악을 보았습니까? 루터는 그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은 것입니다.

 

죄 중에 살면서도 회개가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큰일입니다.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죄인이요! 회개하시요!” 라고 말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수록 오히려 역효과만 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진정한 회개의 문이 열려 십자가 부흥이 우리 심령 안에서 일어나기를 기도합시다.

 

 

 

절망하는 자, 예수께로 오라! /7:15-25/ 유기성 목사

2016-08-26 14:38:11

 

제가 1984년 진정한 회개와 회심을 체험하였을 때, 저는 다시는 마음으로도 죄를 짓고 싶지 않았고, 또 실제로 죄를 짓지 않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제 안에 여전히 죄가 역사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좌절하였는지 모릅니다.

 

욕심, 교만, 정욕, 불순종 등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괴로웠습니다. 목사인지라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서 몸부림치며 울며 기도하기도 많이 했습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인가? 나는 정말 거듭났는가?”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의 역사로 당황하며 좌절합니다.

 

갓 구원의 감격을 가질 때, 마음은 참으로 기쁨으로 가득 차고 모든 죄악에서 이긴 것 같고, 어떤 시험도 이길 것 같고, 하나님의 소망이 눈에 보이고,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이 상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죄는 다시 살아나고, 당신의 오래된 성질과 교만과 질투가 다시 찾아오고 성경 읽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전과 같지 않고, 전도의 열심도 식고 사랑도 갈수록 냉냉해 집니다.

 

죄가 다시 찾아 올 줄이야! 시험에 무력하게 쓰러질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우리는 세상의 죄인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여전히 죄인임을 느낍니다.그래서 때로는 구원의 확신도 잃어버리고 전도할 의욕도 갖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혼란을 경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

 

죄를 짓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15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자신의 내면에 여전히 죄와 악이 존재한다는 고통스런 사실입니다.

 

7: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구원받은 자신을 여전히 죄짓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17 ...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20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22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불신자의 고백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고 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무나 비참하여 울부짖습니다.

 

:24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정신 차려야 합니다. 말씀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절망시키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가 여전히 죄에 무너지는 현실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죄짓게 될 때 우리가 느끼는 탄식과 절망감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 구절들이 불신자의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이런 애통함과 절망감은 불신자에게는 없습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구원받은 자는 성령의 근심을 느낍니다. 성령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삶을 살면 즉각 마음이 괴롭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살면 괴롭습니다. 십일조 못하면 괴롭습니다. 전도 않으면 괴롭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괴롭습니다. 성령께서 근심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에게도 죄책감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깊은 절망감은 없습니다.

 

2007 신년부흥회 때입니다. 집회가 끝난 후 당시에 중학교에 다니는 저의 둘째 딸이 제 방에 와서 펑펑 우는 것입니다, 부흥회에 참석하여 모두 다 큰 은혜를 받았는데, 자신에게는 예배의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다며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나 우는 딸을 안아주면서 위로해 주었지만 마음으로부터 너무나 기뻤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없다고 통곡하는 그 자체가 영적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학생 때 예배의 감격이 없다고 그렇게 울어보지 못하였거든요! 성령께서 제 딸 안에 강하게 역사하심을 느꼈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없어도 무덤덤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목사님께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제가 올바른 영적 상태인지 너무나 자신이 없고 불안합니다. 나는 17년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은 너무나 차갑고, 위험한 상태에 처한 것 같습니다.

 

󰡓 그의 말을 듣고 목사님은 성 버나드의 글에 나오는 한 구절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글은 그 청년처럼 자신의 마음이 굳어 있다고 고민하던 어떤 사람에게 버나드가 써 보낸 것입니다. “내 형제여! 자기의 마음이 굳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만이 마음이 굳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완고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만이 진짜 완고해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도 또 죄를 지어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 상담을 옵니다.그들을 두렵게 하는 성경이 히 6:4-6입니다.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저는 그들에게 이 말씀이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해 줍니다. 이 말씀이 지목하는 사람은 죄를 짓고도 죄책감도 애통함도 없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고 다시 죄를 지었느냐, 하는 것 보다 그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는 애통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면 저는 죄를 하도 많이 지어서 저 같은 사람이 교회를 가면 다른 교인들까지 욕먹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죄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계속 죄를 짓고 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죄가 그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을 붙들고 너 같은 놈은 절대 교회 가면 안 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인한 고통과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아닙니다.

 

청소년들이 가끔 어떤 나쁜 조직에 가담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조직이 정말 나쁘다고 판단이 되었으면 얼마든지 뛰쳐나오면 됩니다. 혼자 힘으로 어려우면 부모님이나 선생님, 경찰관의 도움을 입으면 간단합니다.

 

그런데도 조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 마음이 악한 자에게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이 그의 영을 사로잡아서 너는 이 조직에서 절대로 나갈 수 없어. 만약 빠져나가면 너는 죽을거야.”라고 세뇌시켜 체념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유흥가 직업여성들의 90퍼센트가 나는 이대로 살다고 죽을 수밖에 없어. 달라질 게 아무 것도 없어.’라고 생각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죄의 권세가 그의 영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히려 조심할 것은 죄로 인한 탄식과 몸부림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죄는 영혼의 암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를 짓고 사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의사 앞에서 암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충격과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절벽을 행하여 달려가는 열차에 타고 있음을 깨달은 충격과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영이 산 자에게 그러한 몸부림이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무슨 고통이나 몸부림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놀라운 승리를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니, 갑자기 왠 반전입니까? 왜 이 상황에서 주 예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입니까?

 

죄로 인하여 절망하고 몸부림치는 이들은 이 분위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 힘으로는 도무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박사라도 안됩니다. 성령 체험을 하였어도 우리는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욕심은 계속 일어나고, 교만한 마음, 시기 질투, 미움과 원망, 음란한 충동은 계속 일어납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훌륭한 성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죄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짓고 탄식만 하도록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능히 죄에서 건지시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이 죄로 인한 절망을 고백하면서 갑자기 주 예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것은 절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간 이래 모든 사람들이 죄의 종노릇하고 살았습니다. 그 악순환이 고리를 깨뜨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 나가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 안에 있는 자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죄의 권세에 끌려 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죽은 것도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육신의 역사는 여전히 만만치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온 인류가 꼼짝 없이 종노릇하던 그 죄성 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휘청할 때가 많고 넘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옛사람은 주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영으로 사는 새 사람으로 되어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온유하고 정직해도 나는 죽고 예수로 살지 않으면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중생했다고 말합니다. 죽고 다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이기지 못할 큰 죄가 없습니다, 이기지 못할 시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승리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5: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죄와 싸우다가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예수님께로 오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나 결심이나 노력으로 죄를 이기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죄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건지시고 이기게 하실 분은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죄에 대한 승리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주 예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 육신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 죄 중에 내버려 두셨습니까?

 

우리가 도대체 어떤 죄인이었는지 알게 하시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죄인도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을 통하여 악의 실아, 지옥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주 예수님을 의지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25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 한번 공부해 본 적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기지만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육신이 중요합니까? 마음이 중요합니까? 마음이 열쇠입니다. 인생은 마음이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전쟁이 있습니다. 영적 전쟁입니다. 전쟁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괴롭다 힘들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죄악과 전쟁을 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전에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죄에 끌려 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쟁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대장이시고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지키시기에 마귀는 우리를 만지지도 못합니다.

 

마귀는 육신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다시 차지하려고 집요하게 역사합니다. 삼키려고 우는 사자같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에게 질투가 나서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흔들리는 가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우리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땅 판 것이 아까워 거짓말로 헌금한 아니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하였습니다.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우리 이야기입니다. 죄사함을 받았다는 믿음만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받았다면 너무나 기쁘겠지요. 그러나 그 기쁨만으로 그가 다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실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 만달란트, 5조원에 해당되는 빚을 탕감 받은 자가 100데나리온 1,000만원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였다는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에 주님이 오시고 마음의 왕이 되시지 않으면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제가 죄로 인하여 극심한 내적 고통을 겪을 때, 주님은 제게 죽으라하셨습니다. 저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조금도 가능성이 없다고 보셨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괜찮은 것도 있지 않을까요? 꼭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계속 실패하는 것입니다! 제가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은 그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때만 제 안에 예수님께서 주인 되시고 생명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제겐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을 때, “나는 죽었습니다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죽고 싶은데 이미 죽었다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 후부터 죄를 이기는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죄를 이기지 못하여 몸부림치는 제게 주시는 주님의 답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죄를 이기려면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며,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셨음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24 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자기 내면적 갈등이 없는/있는 성도 /7:24

2015-08-07 08:26:20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7:24

 

이해하기 쉽게, 먼저 주제 요약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듣기는

예수를 잘 믿고, 은혜 체험을 깊이 하면

늘 기쁘고,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그런 충만한 성도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사실이다. 그런 일면이 있는 반면에,

아래의 일면(자기 죄와의 갈등, 싸움, 7:24절 본문)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어쩌면 우리는 성경을, 또한 우리 신앙생활을.. 일면만 보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내 신앙이 정체되었다면, 그 이유는,

(내가 너무 잘 믿어서 내적 갈등이 없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가 너무 잘못 믿고 있기에.. 전혀 영적인 갈등이 없는 것이다.

 

아래 설교문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아무리 신앙의 깊은 경지에 올라가도.. 내적 갈등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반된다는 것이다.

 

갑자기 마더 테레사의 고백(그가 커다란 신앙의 내적 갈등을 겪었다는 내용)이 생각난다.

그가 겪은 갈등이, 정말 크리스천의 정직한 고백이라는 생각이 든다... /

 

 

1.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 아니라는 주장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4

이렇게 말하는 ’, 그가 과연 누구냐 하는 논란이다.

 

바울의 고백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

주로 신학자들의 이론적 주장인데,

-본문의 나를 불신자로 본다.

-혹은 바울이 예수 믿기 전 과거 자기 모습을 돌아본 것이라고 본다.

-또는 성령을 아직 받기 이전의 신자의 모습’..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본문에서 이 사람은 율법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율법을 지킬 능력은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도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19, 22절을 근거해서,

죄로부터 해방된 거듭난 크리스천이

어떻게 여전히 자기를 죄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상적인 크리스천은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믿음 좋은 바울이, 자신을 그렇게 믿음 없는 존재로 말할 리 없다는 것이다.

 

바울의 서신서에 보면,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이후에 굉장히 자부심을 갖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것과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라서.. 바울이 아닌 것으로 본다.

 

비슷하게, 율법을 원하고 율법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어떤 어정쩡한 상태의 사람’(성령 빋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는 신학자도 있다.

 

(물론 이 관점1.을 우리는 지지하지 않는다.)

 

 

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라는 주장

 

현재 바울이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기 속에 죄에 대한 싸움과 갈등이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갈등하는 사람이,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설교의 주제

 

우리가 1년 내내 교회를 다니고, 나름 열심히 예수를 믿었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갈등이 만약 한 번도 없이 한 해를 지내왔다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적일 가능성이 크다.

 

정리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이것은 큰 죄를 지은 사람의 고백도 되겠지만,

-열심히 날마다 죄와 싸우는 신실한 크리스천의 고백도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고백이 없는 사람은

-큰 죄를 짓지 않은 성숙한 크리스천의 삶의 고백이 되기도 하겠지만,

-죄에 대해 무감각한, 죄와 전혀 싸움이 없는, 타협하는 크리스천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설교문이 주장하는 관점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특별히 우리 삶의 현실을 볼 때,

본문 롬7:24절의 고백을, 바울의 자기고백으로 본다.

어거스틴, 캘빈도 바울의 고백으로 본다.

정상적인 신자도 충분히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라고 한탄하는 사람이, 불신자일 수 있겠느냐? 라는 주장이다.

 

불신자가, 자기 죄 문제에 대해서 한탄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이런 탄식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은혜를 맛 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자기 죄악에 가슴을 치면서 한탄하며,

이 끊어지지 않는.. 여전히 나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나는 그 앞에 굴복하고 마는 그 죄 앞에서 안타까워하고, 비탄에 빠지지 않겠는가!

 

특별히 솔직히

나 요즘 기도생활을 제대로 안 했더니, 기분이 영 안 좋아!’

라고 말하는 불신자 보셨는가?

 

내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어서 요즘 너무 힘들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참 신자이다. 나이롱 신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오직 신실한 신자만이, 7:24절의 탄식과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시험 못 봤다!’라고 말하는 학생은, 사실은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다.

다 맞았는데, 그 중에 한 두 개만 틀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부 못 하는 학생은, 아예 그런 갈등이 없다.

 

또한 불효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사실은 효자인 경우가 많다.

진짜 불효자는.. ‘/불효에 대한 개념 자체가 아예 없다. 그게 자기와 관련 없는 일이니까!

 

아주 믿음직한 크리스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죄악의 문제 때문에

여전히 힘들어하고, 버거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이런 사람들이 꽤 있다.

 

심지어 목회자 자신도 그러할 수 있다.

오히려 불성실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신앙에 갈등이 전혀 없다.

자기 신앙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자기가 잘 믿는다고 생각한다.

 

성 프란시스는 종종 동굴 속에 들어가서 기도했는데,

그 분이 종종 눈에 안 보여서, 하루는 제자들이 프란시스를 몰래 뒤따라가 봤다.

그는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있더라는 것이다.

무슨 기도를 하는지 들어봤더니

 

하나님, 부디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하시고,

저의 죄악됨을 절대로 잊지 말게 하시고, 나의 이 비통한 죄악이

내 속에서 계속해서 깨달아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사람이 주님의 빛 앞으로 가면 갈수록, 진리 앞에 정직하게 서면 설수록,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있지만,

동시에 자기 연약함, 추함, 더러움을 깨달으면서 비탄함도 동시에 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정상적 모습이라는 것이다.

은혜의 충만과 기쁨 가운데, 비통함이 함께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비통함이 없이

일년 내내 은혜, 충만, 기쁨만 넘친다면..

그게 정상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자기 죄에 대한 갈등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성자라서가 아니라, 무감각해서 그렇다.

 

신앙의 갈등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엄연히 두 욕심 사이에서 살아가는 전쟁터와 같은 존재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사이에서

끝없이 다툼을 경험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아무리 성령충만을 받고, 삼층천에 갔다 오더라도.. 면제되지 않는다.

 

바울의 서신서를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눈다면

초기에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고전15:9 나는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다. 이렇게 설명했다.

 

중기에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는

3:8 나는 성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다..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의 사역 말기에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딤전1:15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라고 했다.

 

바울은, 자기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자신의 비천함을 더욱 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사도들 중에 성도들 중에 죄인 중에 괴수로 점점 더욱 낮아졌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7:24절의 곤고하다는 바울의 고백은,

5:17절의 고백과

고전15:9, 3:8, 딤전1:15절의 고백과 연관해서 볼 때

바울의 고백이 맞고,

또한 우리 모두의 고백인 것이다.

 

 

마치는 말

 

도대체 내게도 정말 쉽게 극복되지 않는 어두움들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10, 20, 30년 그 갈등이 계속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갈등을 이기고 극복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갈등을 포기하고 회피해 버리는 것이다.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물론 어느 나라처럼, 과도한 청교도주의로 나가고,

과도한 결벽주의로 나가서 (성령의 역사를 잃어버린 채로 윤리적 노력만 강조하는 것)

오히려 신자들을 질리게만들면 안 되지만..

 

오늘날 기독교의 타락을 염려하는데, 그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강단에서부터 그 죄와의 갈등이 가물에 콩 나듯.. 나오는 것이다.

목회자 자신들에게서부터 그런 갈등이 없기 때문인지,

두루뭉실 넘어가는데서..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영혼이 병들어 가고 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인가?’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사실인가?’

내가 주의 종이 맞는가, 혹시 가면을 쓴 것은 아닌가?’

 

물론 이런 갈등을 하는 이유는, 성숙과 발전과 성화를 위해서다.

정상적인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는.. 그런 갈등이 반드시 동반된다는 것이다.

(잘못되면, 더 자포자기에 빠질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안 되고..)

 

만약에 금년 한 해를 살아오면서,

이런 갈등 한 번 해 보지 않고 지내왔다면,

-예수를 정말 잘 믿어서.. 그럴 수도 있고,

-예수를 정말 잘못 믿어서.. 그럴 수도 있는데,

전자보다는, 후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예수를 잘 믿으면 잘 믿을수록, (전자인 경우에도)

더 갈등도 많아지면서, 깊어지면서

그러면서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성화sanctification에 이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빛을, 그 성령의 감화를 내게 비춰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내적 갈등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성화도 없다는 것이다.

 

 

.................................... 더 읽으실 분 ..................................

 

요즘 들어 깨닫고 묵상하는 것이 있다.

성화에 관련해서 기독교에 양극단이 있는데,

 

한 쪽은 이신칭의로 의롭게 되었으니, 아무 내적갈등과 싸움이 없다는 개념이다.

그런 죄와의 갈등과 싸움을 해 봐야.. 되지도 않으니.. 포기하거나 덮어두는 것이다.

이신칭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라는 뜻인데, 거기서 더 나가면 안 된다.

거기서 더 나가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니, 죄와 싸울 필요 없다는 큰 잘못이다.

 

다른 쪽은 성령충만하고 은혜의 체험을 하면.. 완전성화에 이른다.

그래서 죄지을 욕구도 없어지고, 죄와의 싸움도 없어진다... 이것도 극단이다.

(과거에 이 블로거에서 이런 논지를 폈던 적이 몇 번 있었던 것 같다. 죄송합니다.)

 

물론 거듭남과 새로워짐의 능력은 굉장한 것이다. 내면과 본질이 변하는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선언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자기 내면이 변화되어, 과거처럼 죄지을 마음이 활활 불타오르지 않고, 그게 싫어진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너무 커서, 우리를 아담 타락 이전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것도 사실이다. 거듭남은 내면의 본질적 변화인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이 블로거에서 이런 논지를 강조했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왜 죄의 유혹이 완전히 내게서 사라지지 않는가?

어제는 성령충만 했는데, 오늘은 왜 또 그것이 식는가?

예수님의 보혈과 속죄의 능력이, 완전하지 못하고 부분적이란 말인가?

 

굳이 신학적으로 대답을 찾으면, ‘이미 아직 already, not yet’이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 내 죄의 속죄, 내면의 새사람으로의 변화..

그게 지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이미 아직 already, not yet’이다.

(이 개념에 대한 설명은 목사님께 물어보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에서,

아무리 은혜 체험, 거듭남, 성령충만, 믿음충만 하더라도,

여전히 롬7:24절의 갈등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바울처럼, 마더 테레사처럼!

 

내가 깊이 은혜 체험하고, 성령충만을 받았으니, 이제 다 되었다!’

이렇게 마음 푹 놓고 있다가는.. 사탄에게 크게 당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평생 갈등만 하고 살 것인가? 7:24절의 바울처럼?

그런데 그 대답은 롬8장에 있으므로, 8장을 더 깊이 연구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도입 이야기, 나 자신에 대해 객관적이 되기 어렵다.

우리가 누군가와 논쟁을 벌이다가,

내가 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꽤 설득력 있게 상대방에게 들려지도록 하기 위해서

잘 쓰는 말이 객관적이란 표현이다.

 

나 지금 굉장히 객관적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거든!’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한다.

 

그런데 사실은, 수학공식 외에, 객관적인 상황은 과연 뭐가 있을까?

 

심지어 객관적 사실이라는 과학도,

과학자의 어떤 개인적 가치관이나 세상을 보는 눈에 의해서,

사실fact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다.

 

내가 객관적이 되기란 참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본인의 경험, 성향, 어려서부터 배웠던 문화적 가치관,

세상을 바라보는 틀.. 이런 것들을 깨뜨리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내가 굉장히 객관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해도

사실 말 그대로 객관적이 되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하다.

 

이런 사실을 전제로 해서,

오늘 가급적 최대한 객관적으로..

우리 각자 자신을 한 번 들여다보고자 한다.

 

 

7:24절의 우리 모두를 빗대어 말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내용은 아님)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하는데,

7:7절부터 시작된다.

7:6절까지는 우리라고 표현하다가, 7절부터 로 바뀌었다.

 

바울이 지금 자기를 빗대어 뭔가를 설명하고 싶어하는 데,

는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고,

 

자신을 빗대어, 자신의 안타까운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 모두의 연약함을 대리 표현하는

그런 표현은 아닐까? , 복된 회개

 

 

 

 

 

 

실존적 진실과 믿음 /7:14-25/ 곽선희 목사

2014-11-25 20:32:06

 

자동차를 타고 운전하는 중에 라디오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간단한 이야기가 왠지 저는 꽤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생각이 나고 또 생각이 나곤 합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고등학교 교사직을 가지고 있던 어떤 여자가 남편을 사별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어서 살기가 막막해서 원치 않지만 할 수 없이 포장마차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라도 식구와 함께 먹고살아야하기 때문에……. 그 포장마차를 하면서 경험한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주 실감나는 얘깁니다.

 

초저녁이 되면은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젊은 사람들 이렇게 삼삼오오 그렇게 들어와서 포장마차 속에 들어와서 뭐 간단하게 저녁도 먹고 또 술도 마시고 이러는데 아주 반갑게 화기애애하게 출발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쩌다가 몇 잔 술이 들어간 다음에 주고받고 얘기하다가 한번 싸움이 붙으면요 거기 있는 집기까지 다 때려 부수는 거예요. 아시는 대로 포장마차는 좁기 때문에 저들이 무슨 얘기하는지 다 들리거든요. 일일이 다 듣고 있는 거거든요.

 

이 사람들이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와서 같이 식사를 하다가 왜 마지막에 이렇게 한바탕 싸움으로 끝날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싸우나? 이 교사출신의 주인아주머니가 연구를 했어요. 도대체 왜 싸울까? 돈 때문일까? 아니면 지위 때문일까? 가정 때문일까?

 

아 아니더래요. 꼭 싸우기 직전에 터지는 이유가 하나 있어요. 딱 한마디가 나오면 꼭 터지더래요. 여러 번 보니까 똑같이……. “사람이 그러면 못써.” 그러면 꽝하고 터지더래요. 아 참 이상하다. 어쩌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대요.

 

그저 이말 저말 하다가 마지막이 사람이 그러면…….” 하면 사람이 어때? 꽝하고 그다음엔 그저 뭐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싸우는 거예요. 참 그게 도대체 뭘까?

 

여러분. 여러분 부부싸움하세요?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이 그러면 못써.”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꽝하는 거예요. 왜요? 이 존재와 진실이 공격을 받으면 못참는거예요. 내가 비록 돈은 없지만 존재는 있다.

 

내가 지위는 낮지마는 그러나 나는 인격은 있다 그 자부심이 있는 거예요. 이걸 건드리면 안 되는 거죠.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직장에서도 상사가 부하직원을 불러놓고 실수를 지적을 하고 혹은 충고를 할 때 오늘 당신이 만든 문서, 당신이 만든 프로젝트에 요거 요거 요렇게 잘못된 거 아니냐?

 

요렇게 고쳐라. 요렇게만 말해야 됩니다. 만일 사람이 그러면 못써. 그러면 일을 망가집니다. 이 사람이 이 충고를 듣고 나가면서 당신 사장자리에 앉아 있지만 사람은 내가 더 괜찮아요. 그래요. 안되는 거예요. 고 사건과 고 실수된 사건과 사람과를 별개시해야 되는 거예요.

 

그걸 같은 것으로 묶어버리면 안되는 거예요. 그건 못참는거예요. 내가 실수는 했어도 이건 내가 아네요. 내가 엄청난 실수를 했더라도 아 그건 실수지 나라는 존재는 이거 아니라 이거예요. 이거를 알아주길 바래요. 이것만은 지켜가길 원해요. 생각 그렇지 않습니까?

 

혹 어떤 때 실수를 했더라도 아 이거 뭐 그 조상 적부터 그래 이래 나오면 이 달라지거든요. 당신은 본질적으로 그래 그러면 아 큰일이죠. 요 사건은 Accident예요.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건일 뿐이에요. 당신은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게 어쩌다가 실수를 했군요.

 

이래야 얘기가 되는 거란 말예요. 그런데 그 실수된 사건과 그 사람의 본질을 묶어가지고 내던지면 아 이건 이거는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 거와 마찬가지예요. 견딜 수가 없는 거라고……. 이래서 터지더라…….

 

제가 그 아주머니 얘기를 이렇게 들으면서 한참동안 철학적으로 생각을 했어요. 깊은 의미가 있거든요. 저기……. 도대체 자기 자신 자신이 무엇입니까?

 

그래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기도시우 아이도스 Know Yourself, 너 자신을 알라, 자신을 아라. 뭐 철학적으로 뭐니 뭐니 우주가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본질이 어떻고 아르케가 어떻고 고만하고 네 자신을 알라. 그렇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겠어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합니다. 인간의 고독 인간의 불안 그 깊은 원인은 무엇일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꼭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불안에 떨게 되고 역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또 하나는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왜 보내셨나? 오늘 내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가? 도대체 나는 누구냐? 이걸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이죠. 또 하나는 생명을 바칠만한 일이 없어요. 일거리가 없어요.

 

이것을 위해서는 내가 죽어도 좋다 그런 확실한 내게 주어진 사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마다 어차피 현재에 삽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앞에 올 겁니다.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차피 현재에 사는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과거는 잘 알고 현재는 모르고 미래에 대해서는 그저 막연할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어디에 나타나는고 하니 여러분 장기를 두던가 혹은 바둑을 둬보세요.

 

장기 바둑 둘 때 참 재미있는 것은 두는 사람은 딱 마주앉아서 지금 신경을 쓰고 있는데 꼭 누가 더 잘 아느냐? 옆에서 훈수하는 사람들 꼭 그 사람들이 더 잘아요. 그 왜냐? 책임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래라 저래라 하다가 결국은 싸움까지 가는데 재미있는 거는 요 수를 놓은 다음에는 알아요. 지나간 다음에는 아 요랬어야 되는데……. 그거 모르는 사람 없어요. 그러나 고 바로 그 현재 고 시간에는 이게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지나간 다음에야 안다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멍청한 거죠.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데 담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바울 저는 이 로마서 전체 중에도 이 7장을 특별히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가장 위대한 사도바울의 자기고백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읽어보십시오. 7장 전체를 읽어나가는중에 깊이 명상하면서 읽어보세요. 깜짝 놀랍니다.

 

왜요? 어떻게 이렇게 정직할 수 있을까? 지금 로마로 보내는 편지입니다. 로마사람들은 사도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소문만 듣고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그분들에게 이 편지를 써 보냅니다.

 

써 보내면서 오늘 본문에 본바와 같이 옷을 다 벗어버리고 홀랑 벗어버린 것처럼 적나라하게 자기 모습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아 위대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만큼 정직하기는 힘들어요. 참 힘든 거예요. 이거는요.

 

유명한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 링컨이 남북전쟁을 할 때 그 참모인 장군하고 의견이 충돌이 됐어요. 아브라함 링컨은 이렇게 하자고 하고 장군은 저렇게 하자고 하고……. 한바탕 다퉜는데 아브라함링컨이 대통령이니까 윗사람이니까 맘대로 해버렸어요.

 

그 작전에 실패했어요. 완전 실패한 다음에 아브라함 링컨은 미안하니까 요새 같으면 전화로 하면 되겠지만 그 참모총장에게 편지를 써 보냈어요. 메모지에다가 큰 종이에다 딱 한자 아이엠쏘리. 아브라함링컨. 비서를 통해 보내주었어요.

 

참모총장이 딱 이걸 받아보더니 그렇지 않아도 지금 화가 나서 있는데 이 편지를 보니까 뎃스 리틀러스가이 그랬어요. 이 멍청한 녀석이라고……. 대통령 안 보는데서 욕하는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어요? 욕을 해버렸어요. 멍청한 녀석이라고……. 비서가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그리고 돌아왔어요. 갖다왔나?

 

갖다왔습니다. 편지 전했나? 전했습니다. 그래 편지 읽으면서 뭐라고 하는가? 아 이걸 바로 고할 수가 없잖아요. 아브라함 링컨이 웃으면서 빨리 말해봐, 솔직하게 말해라. 멍청한 녀석이라고 합디다. 아브라함 링컨 껄껄 웃으면서 아하 그 사람 사람 볼 줄 아누만 그러더래요. 참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위대하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 어 그거 실수 할 수 있는 사람이죠? 아 실수했죠. 깨끗하게 인정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위대하다는 거예요. 요래조래 변명하고 뭐 어떻고 어떻고 그 사람 초라해집니다. 아주 형편없어 집니다. 자 이거 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리차드 칼슨이라고 여러분 잘 아십니다. 우리는 사소한일에 목숨을 건다고 하는 책을 쓰신 분입니다. Don't sweat small stuff with your family.그런 책입니다. 그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불행과 근심과 스트레스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태어난다.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자기문제를 남의 문제로 내 책임을 사회문제로 돌리려고 하는 순간 스트레스가 다가오는 거예요. 일단 내 책임 이예요.

 

이건 내 잘못이야. 이것이 나 자신 이예요. 인정을 해야 됩니다. 남이 인정한다는 게 아네요. 내가 내 자신을 바르게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마음 이것만이 모든 스트레스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다시한번보세요. 오늘 본문에서 몇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나는 육신에 속하였다.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다. 중생한사람이요 대사도요 온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요 예수의 이름으로 감옥에 들어가서 매를 수없이 맞은 사람이요 성자 같은 사람이에요. 아니 성자죠.

 

그러나 아직도 나는 육신에 속했노라. 아 기가 막힙니다요. 나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사람이다. 육신에 속한, 욕망에 끌려 사는 사람이다. 인정을 했어요. 또한 두 번째로 보니까 죄 아래 팔렸다……. 무슨 말입니까? 한번 죄를 지면 이제는 죄의 노예가 됩니다.

 

그 죄가 나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한번 거짓말을 했다고 합시다. 바로 회개하지 않으면 거짓말 또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그 거짓말 회개안하면 또 또 거짓말을 계속해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사실도 기억해야하고 거짓말도 기억해야 되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이래서 인간이 다 망가지는 거예요. 그 진실한 것 밖에 없어요. 그 제때 회개하면 끝나는걸……. 어쩌다가 이걸 고만 고만 덮다보면 마지막에 아예 인간자체가 망가지는 거예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걸 인정했습니다. 죄 아래 팔렸다. 내게는 자유가 없다. 내가 지은 죄가 때때로 나를 지배하고 있다. 내 과거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아직도 끊어지지 않았다.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함은 있으나 행함은 없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은 가고 있다. 여러분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은 꼭 맛이 있고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때 재미가 있는 거예요. 그 자체가 성향 자체가 이 병든 체질이에요.

 

또 분문에 보니까 나는 나를 알지 못한다. 인정을 했어요. 무의식중에 나도 모르게 잘못되고 있어요. 나도 모르게 시험에 빠지고 있더라고요. 내가 뭐도 모르게 어떤 일을 저질렀어요. 이런 존재다 나는……. 난 이 정도다 이걸 인정을 했습니다.

 

나는 나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21절에 보면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가 행한 모든 것에 악이 함께 있다. 어거스틴은 유명한 말을 합니다. 참회록 속에서……. 하나님이여 내가 하는 생각 내가 하는 말 나 하는 행위 그 모든 것 중에 죄 아닌 것이 있었습니까?

 

죄 아닌 것이 있었습니까? 여러분 선한 일을 한다고 하죠? 거기 죄가 있어요. 좋은 일 한다고 하죠? 자기 자랑하고 있어요. 아니 이거 안 됩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는 바로거기에도 악이 있어요. 기도하는 그 속에도 또다시 시험에 빠지고 있어요.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 진실을 인정을 했어요. 결국 다섯 번째 보면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포로 되어서 끌려오는 자기 모습, 자기가 보고 있는 거예요. 객관적 시각을 갖고 있어요. 이 불쌍한 사람아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노예처럼 끌려가는 모습을 그는 보고 있어요.

 

제가 신학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기숙사 있었고요 기숙사에 요만한 책상하나 갖다놓고 고기 내 공부하는 자리 고 책상 바로 맞은 벽에다가 큰 글자로 플라이포로스 에고안드로포로스 헬라어로 크게 써놨어요.

 

다른 사람 모르게……. 그게 뭐냐고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프라오포로스 안드로포로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영어로 말하면 Oh poor man, 이 불쌍한 사람아. 그런 뜻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있어요.

 

자기 비참한 처지를 자기 알고 있어요. 글을 써놓고 늘 붙여놓고 한번씩 보면서 자기 실존의 고민을 되새기곤 했습니다.

 

여러분 전적으로 타락한 나를 인정할 때 전적인 은혜로 향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4세기에 벨기에의 레이몬드라고 하는 레이몬드3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왕이 되고나서부터 방탕해가지고 매일 연애만하고 많은 음식을 먹으면서 친구들과 파티만 하는 거예요.

 

너무너무 방탕하게 지내요. 백성들의 원한이 찼어요. 이걸 알고 동생이 반란을 일으켜서 형을 감옥에다 집어넣고 자기가 왕이 됐어요. 그리고 형한테 가서 한마디 했어요. 감옥 문을 요만하게 만들어놓고…….

 

형이 여기서 살을 빼고 이렇게 비대한거 날씬해져서 요 문으로 나오면 내가 다시 왕위를 형님께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좁은 문을 딱 만들어놓고 감옥에다 넣어둔 다음에 매일같이 진수성찬 음식을 넣어줬어요. 이제 이 사람은 레이몬드는 알아요.

 

이제 내가 이걸 먹지 않고 조절해서 몸을 빼면 다시 나가서 왕이 될 수 있다. 알지마는 아 요 냄새가 어찌 좋은지 요 음식이 얼마나 먹음직한지 이걸 끊지를 못해가지고 그냥 먹어 버려가지고 더 뚱뚱해가지고 감옥에서 죽었대요. 얼마나 참 미련한 사람입니까? 이거조금 금식하면 되는데 이걸 못이긴 거예요.

 

여러분 자신을 어느 정도 평가하고 있습니까? 나를 완전히 부정하고야 은혜를 긍정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워버리고 그리고 보세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는 죽었어요. 죽어 마땅한 자예요. 그리고 행동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할 때 바울은 이제 로마서 7장 끝과 8장으로 가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그리고 유명한 은혜 충만한 8장 그 은혜의 복음이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완전한 자기 부정 그리고 Total Grace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한 번 더 솔직하십시다. 그리고 나를 완전히 부정해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을 받아내십시다. 그래서 오늘 7장 끝에서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오직 예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한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5장에서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은혜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은혜 현재도 미래도……. 오직 은혜…….

 

 

-기 도-

하나님아버지

이 눈이 오는 아침이지마는 이른 아침에 성전에 찾아 나왔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재촉해주시고 거룩한 전에서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늘 듣는 음성입니다마는 오늘은 좀더 가까이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늘 읽은 성경입니다마는 오늘은 특별히 내게 주시는 확실한 말씀으로 듣게 하사 사도바울과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셔서 오직 은혜의 사람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로잡힌 것을 보는 사람 /7:14-25/ 곽선희 목사

2014-11-20 15:28:11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이라고 하는 책은 이제 는 고전입니다. 아마 대학시절에 모두가 한번쯤은 읽었었으리라고 생 각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라고 하는 책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인간상 을 지적하는 이야기, 재미있는 설화 가 있습니다.

 

어떤 농부 한 사람이 아침 일찍이 맨발로, 양말도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도시로 뛰어들어갔습 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궂은일을 해서 그 날 따라 돈을 많이 벌었습 니다. 한 켤레의 양말을 사서 신고 또 구두를 사서 신었습니다. 그리 고도 돈이 꽤 많이 남았습니다. 이 것을 가지고 그는 술을 마셨습니다.

 

만취상태가 돼 가지고 비틀거리며 자기 집을 향하여 시골로 돌아오다 가 길 한 가운데서 그는 취기가 너 무 높아져서 만취된 상태로 길에 누 워버렸습니다. 아주 큰 대자로 벌 떡 누워서 잠을 자는데 마침 마차 하나가 지나가다가 마차를 세워놓고 마차에 탄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 다.

"이 사람아 길을 비켜. 만일에 비키지 않으면 그대로 네 다리 위로 지나가 버리고 말 것이다. 네 발 위로 지나갈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 니다. 만취된 농부는 그때야 눈을 뜨고 정신을 좀 차리고 하는 말입니 다. 자기 발을 보고 양말과 신을 신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의 발 이라고 생각하지를 않고

"지나가거 나 말거나 마음대로 하시오. 이것 은 내 발이 아니니까"

 

라고 말했습 니다. 세상에 자기 발, 자기 발이 신발을 벗었을 때 자기 거라고 생각 하고 술 취한 가운데 신발을 신어놓 고 이것은 내 발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마음대로 지나 가라고 이 만취한 사람의 형편없는 소리, 우습게 들리지요. 바로 인간 의 혼란스러운 모습이 이러하다는 겁니다. 그래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말을 하지 않습니까.

"키노시 아우 토스"

유명한 말이죠. Know thyself,

"네 자신을 알라"

 

하고 말 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슬픔, 우리 가 가지는 인간적 괴로움이라는 것 은 전부 후회스러운 일들입니다. 그 후회스러움의 근본은 내가 나 자 신에게 속았다는 겁니다. 무엇인가 좀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아무 것도 몰라요. 뭘 열심히 번 줄 알았는데 정산을 해 보았더니 적 자투성이예요. 아무 것도 번 게 없 어요.

 

나는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주 무능해 요. 최소한도 그래도 남보다 좀 낫 겠지 하고 제 잘난 맛에 살았는데 이제 보니까 다른 사람은 다 훌륭하 고 내가 형편없어요. 이걸 깨닫게 될 때 비참한 거죠. 내가 나에게 속은 겁니다. 여기서 자기 상실의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절 망하게 됩니다. 왜 자기를 잃어버 리게 되느냐?

 

그 근본은 동일시하 는 착각 때문입니다. 여러분 돈을 벌었다고 해서 그 돈과 내가 하나가 되는 건 아니에요. 나는 납니다. 돈을 벌어서 좀 부자가 되었다고 해 서 내가 커지는 거 아니죠. 나라는 인격은 나대로 있는 거예요. 그런 데 돈이 있을 때에 내가 커지는 줄 로 자기를 부풀려 생각을 하고 돈이 없으면은 자기 인생도 다 망가진 것 처럼 착각을 하는데 그런 거 아니에 요.

 

나라는 존재와 돈을 별개요. 또는 때로는 지식이 있을 때, 남보 다 좀 뭘 좀 더 알고 똑똑하면은 아 주 기고만장하고 자기 존재가 무슨 굉장한 줄 아는데요, 그리고 남을 무시하고. 그러나 알고 보세요. 별 거 아니에요. 안다는 거 그거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것과 나 자체와 는 그것도 별개예요. 그런데 이것 을 지식과 나를 하나로 생각하는 데 서부터 문제가 되는 것이거든요.

 

때로는 남이 내게 하는 평판이 있지 요. 남들이 뭐 그 사람 잘났다, 많 이 안다, 천재다 뭐 이러잖아요. 남 이 나더러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나 는 천재 아니거든요. 아무리 훌륭 하다고 해도 훌륭하지 못한 건 내가 잘 알아요. 그 자기 페이스를 자기 진실을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되는 데 남의 평판에 의해서 오르락내리 락하는 이 시원치 않은 존재, 이 인 격 이것이 바로 문제란 말입니다.

 

남이 평판해 주는 자기와, 자기 자 신과를 동일시하는 바로 거기에 허 점이 있는 겁니다. 때로는 과거가 문제입니다. 나를 따라 다니는 아 픈 과거, 그건 어디까지나 지나간 겁니다. 오늘의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일 뿐인데 지난날에 의해서 오늘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보겠지 요. 그러나 나는 아니요.

 

나는 과 거와 관련을 끊은 사람이요. 바로 그런 인식을 가지지 못하고 여전히 지난날의 나는 실패한 사람, 지난날 의 나는 방탕했던 사람, 지난날의 나는 이런 결점이 있는 사람, 이 전 과자 같이 여기에 계속 매여있으면 나라고 하는 소중한 존재가 증발해 버리고 말아요. 이 또한 불쌍한 사 람이죠. 또 어떤 사람은 미래에 대 한 꿈에 사는 사람이 있어요.

 

그 꿈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 어요. 마치 뭐와 같은고 하니 어떤 사람은 돈을 번 게 아니에요. 벌기 로 계획한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벌겠다 생각하고 미리 돈을 꾸어서 다 써버려요. 이런 정신나간 사람, 벌 셈치고 쓰는 거예요. 그것처럼 이 허황한 꿈을 꾸고 이 뜬구름 쫓 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벌 써 마음이 부풀어 가지고 있어요.

 

이게 정신병자 아니에요? 이런 사 람이 바로 자기 상실증에 빠진다 하 는 얘깁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 현장에서는 자기를 잃어버리기가 쉬 워요. 또 이 자기를 객관화하지 못 할 때에 자기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혹 이런 거 보셨어요. 장기 나 바둑을 둘 때 보면요 거기에 앉 아 가지고 대결해서 두는 사람은 정 신이 없어요. 그런데 옆에서 구경 하는 사람들 훈수하는 사람이 수를 잘 봐요. 그것은 객관화 할 수 있 으니까요. 그 사람이 아는 게 더 많아요. 요렇게 하면 된다, 요렇게 하면 된다. 그런데

 

"네가 앉아 해 봐"

그러면 저는 못해요. 그게 뭘 말하는고 하니 인식의 객관화라는 것이죠. 현장에 뛰어들면 아주 몽 롱해져요. 또 남의 일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있는데 자기 문제로 부 딪치면 아주 무능해지고 만단 말이 에요. 그런고로 인식의 객관화가 필요합니다.

 

오늘 성경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 해야 합니다. 이 정직하기 위해서 는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이런 재 미있는 책이 있어서 많은 사람, 온 세계 사람들에게 현재 읽히고 있는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 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 Don't Sweat the Small Stuff with Your Family 그런 책인데요. 이 사소한 일에, 시시한 일에 너무 마음을 쓴 다는 거죠. 그래서 불행해진다. 이 리차드 칼슨(Richard Carlson) 의 유명한 책입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읽히는 책입니다.

 

요새 1권이 나왔 다해서 2권이, 속편이 또 나와서 우 리에게 읽혀지고 있습니다. 이 책 이 말하는 내용이 뭐냐? 저는 이래 생각합니다. 모든 문제는 밖에 있 는 게 아니고 나 자신에 있는 것이 다. 그래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을 해요. 결 국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모든 불행과 근심, 심지어 스트레스 라고 하는 것도 자기 내부에 있는 거예요. 그런고로 자기 자신에 대 한 문제, 자기 진실에 대한 것을 바 로 찾으라. 그러면은 당신이 그렇 게 걱정하는 큰 문제가 아무 것도 아닌 문제로 풀릴 수가 있을 것이다 하는 것이죠. 문제의 해결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 고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실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똑바로 알아 야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인정해야 됩니다. 알지요. 알면서 도 인정하지를 않아요. 거기에 문 제가 있는 것이에요. 허상에 매여 삽니다. 거품을 붙들어 보려고 합 니다. 거짓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 다. 오늘 본문성경에 나타난 이 말 씀은 로마서 한 중심에 있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저는 이 로마서 7장 을 읽을 때마다 언제든지 사도바울 의 위대함을 알고 있습니다 만은 더 더욱 위대한 것을 느끼게되고 부럽 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위대 하게 보일 때가 있어요. 아주 감동 하면서 이 책을 읽고 때로는 눈물로 이 성경을 읽게 됩니다. 왜요? 바 울은 너무나 정직해요. 너무 위대 합니다. 정직함에 있어서 위대합니 다. 그의 마음은 단순합니다.

 

아주 Simplicity, 단순해요. 보세요, 로마 교회는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 닙니다. 모름지기 사도바울에게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로마로 돌아 가서 거기서 교회를 세운 겁니다. 그러니까 로마교회에서 모인 교인들 은 사도바울에 대해서 높은 존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얼굴을 보 지 못했거든요. 바울의 얼굴은 못 보았지만 바울에 대한, 바울로부터 예수 믿은 사람들이 여기서 전해주 었으니까. 그 분들은 사도바울은 위대한 사도라고 이렇게 높이높이 존경하고 있거든요. 바로 자기 얼 굴을 보지 못한 바로 이 사람들에게 지금 편지를 쓰는 겁니다. 기독교 교리와 복음에 대해서 전반적인 메 시지를 보내면서 어찌 이렇게 정직 할 수 있습니까?

 

아 자기에게도 장 점도 있고 단점도 있겠지요.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겠지요 만 은 자기 자신의 그 깊은 어두운 면 을 그대로 말하고 있어요. 다 노출 하고 있습니다. 옷을 활짝 벗듯이 말이에요. 솔직하기 이를 데 없습 니다.

 

그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이 렇게 진실하고 이렇게 정직하고 이 것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나는 육에 속하여"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 위대한 말입 니다. 그는 지식의 부조리를 말합 니다. 내가 안다고 하나 아는 대로 살지 못해요. 내가 느끼고 있다, 원 하는 것이 있지만은 원하는 대로 행 하지 못해요. 이 비참한 자기 모습 을 고대로 말합니다.

"육에 속하 여"

엄청난 말입니다. 당연히 영에 속한 사람이어야지요. 육신에 대한 생각은 싹 없어야지요. 그러나 그 렇지 않아요. 바울은 말합니다, 나 는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마틴 루 터는 인간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마치 기수에게 끌려가는 말과 같 다."

좋은 말이 펄펄 뛰면서 소리 를 내고 뛰고 있지만은 자기가 뛰는 게 아니에요. 그 위에 타고있는 기 수가 고삐를 쥐고 가라는 대로 가는 거예요. 오늘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육에 속해서, 여전히 육신에 속해있다는 것이죠. 그뿐입니까.

"육에 팔렸다"

 

그랬어요. 아주 팔 렸다, 그래서 나는 알지 못한다. 무 의식중에 죄를 짓고있어요. 의식 이전에, 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이 잠재의식 속에 거기에 죄가 아직도 있어요. 그래 죄에 끌려가는 존재 다. 내게는 자유가 없다고 고백합 니다.

 

여러분 잘 아는 유명한 개그 맨 전유성씨라고 있어요. 개그맨 중에 공부를 제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보는 그러한 분으로 알려져 있 지 않습니까? 이 전유성씨가 쓴 책 의 제목이 너무 재미있어요.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 어떻습 니까?

 

개그맨 다운 얘기지만 굉장 한 메시지가 있는 얘기예요.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 말을 바 꾸겠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은 다 맛이 있다. 보지 말라는 것은 다 매력이 있다. 이 소리요. ? 왜 그렇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 인간 속에 있는 악이거든요. 자 보세요. 하라고 하는 일이 재미있어야지요. 당연히 해야할 일이 즐거워야지요. 그런데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즐겁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만 재미가 있는 거예요. 먹지 말아야하는 음 식만 맛이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병자예요. 내 몸에 좋은 것만 먹고 싶고 맛이 있게 느끼는 사람이 건강 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먹어서는 안될 것만 맛이 있는 거예요. 그것 이 무얼 말하는 겁니까? 내 속에 악이 있어요. 어딘가 팔려 있어요. 묶여있어요. 끌려가고 있다 그 소 리예요. 사도바울은 특별히 말합니 다.

"내가 선을 행하고저 하는 거 기에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참으로 진실합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때 선한 일을 해요. 순수한 마음으로 선한 일을 했습니다. 그 러면 끝까지 순수해야지요. 그런데 왜 칭찬 받으려는 마음이 있지요?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요?

 

그러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린 겁니까?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 선한 일을 한거냐구요? 그래 예 수님 말씀이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 이 모르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 까? 내가 교회 봉사한다.

 

좋은 일 을 한다. 친절하게 한다. 악수를 한다. 반갑게……, 좋은 일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속에 요기에 딴 생 각이 있거든요. 중요한 것은 자기 가 모르고 있거든요. 내 속에 악이 있다는 것을 내가 선한 일을 하는 속에 악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 은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르고 있어 요. 여기서 엄청난 모순에 빠지는 것이에요.

 

사도바울은 여기에 위대 한 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악과 위선과 거짓에 젖어 살 아가면서 어디까지가 의인지, 어디 까지가 선인지 모르고 그냥 흘러가 고 있어요. 그러나 바울은 아니요.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자기를 객관시 할 수 있는 객관화 능력이 있었어요. 자기가 자기를 볼 수 있는 눈이, 그게 다른 거예요. 그래서 말입니다.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포로 된 상태, 비참 한 자기 모습, 이 형편없는 인간을 저 멀리서 바라보았어요.

"야 이놈 아!"

 

자기가 자기를 볼 줄 알아요. 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제가 신학 대학에 다닐 때, 나름대로 경건하게 살려고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 보 려고 하고, 앞으로 목사가 돼서 좀 가장 거룩한 목사로 살아보겠다고 나름대로 노력은 해 봅니다.

 

이 뜻 대로 잘 됩니까 어디? 그래 제가 공부하고 있는 기숙사 방 거기에는 커다랗게 써 붙였어요. 아주 고상 하게 헬라어로 써 붙였어요.

"탈라 이폴로스 에고안트로포스"

써 놓으 니까, 가끔 친구들이 저 무슨 뜻이 냐고,

"거 알 거 없어, 나만 알면 돼!"

 

"탈라이폴로스 에고안트로포 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 다!"

이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 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왜 이렇게 이렇게 모순덩어리냐 말야, 아는 대로도 못하겠고 행하고 싶은 대로도 못하겠고, 모처럼 선한 일 한다고 그 속에 악이 있고, 그래서 나는 뭐냐 도대체 이게…….

 

"오호 라 이 불쌍한 사람아, 이 가련한 사 람아"

그런 뜻입니다. 자기가 자기 를 가련하게 볼 수 있었어요. 그러 므로 바울은 위대한 것이에요. 전 적인 타락, 전적인 무능을 알았습니 다. 그런고로 내가 어디까지 왔던 지 이대로가 은혜예요. 이대로가 은혜예요.

 

가끔 그런 얘기를 들어요. 어떤 분들은, 아 그 어느 장로님 그 거……, 아 그 장로라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고……, 뭐 어쩌고저쩌 고……, 그런 얘기하는 사람이 있어 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 믿으니까 그만하지, 그 사람이 안 믿었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어요.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여러분 스 스로도 못마땅해요,

 

자기 자신이 못 마땅해요. 왜 어쩌다가 이 모양이 냐 이 나쁜 놈아, 그래 심판하지 마 세요. 예수 믿어서 그만한 거예요. 은혜 안에서 내가 이만한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래서 말합니다.

"오 직 은혜 안에서"

 

오직 은혜 안에. 나의 나됨은 오직 은혜로 된 것이 다.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 늘 내가 있다. 은혜 안에 있는 자 기 정체를 확인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에요.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 다.

 

아주 부인에게 꽉 쥐여사는, 철 저하게 쥐여사는 남편이 있었는데 아이가 여섯이에요. 어느 날 부인 이 시장에 갔다 오면서 예쁜 장난감 인형을 하나 사 가지고 왔어요. 뭐 여섯 명이니까 다 줄 수는 없고 하 나 딱 사 가지고 와서 하는 말이

 

"가장 말 잘 듣고 얌전하고 말대답 하지 않고 전적으로 나에게 순종하 는 사람에게 그런 아이에게 요것 주 겠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여섯 명 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는데

"그러면 아빠잖아"

 

그러더랍니다. 전적으로 순종하고 사세요. 그게 행복한 거 예요. 오직 은혜로 내가 있음을 알 고 은혜로 미래가 있어요. 은혜의 말씀께 100%, 100% 순종합니다. 이것에는 후회가 없어요. 감사와 찬송만이 있을 뿐이에요. 그래 사 도바울은 말합니다.

"사망의 몸에 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님께 감사하리로다."

오직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그 속에 내 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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