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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로마서 설교 모음

로마서 14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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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을 망치지 말라 /롬14:13-23/ 유기성 목사

2016-08-27 09:43:51

 

제게 있어서 너무나 원통한 일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싸우는 데로 여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말을 듣도록 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기에 더 속상합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일은 교인들도 싸우는 데 익숙해진 것을 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비난하고 회의 때, 다투고 대립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다 잘해보자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어릴 때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난 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새가족들이 그런 모습을 보면 정상으로 여기겠습니까? 서로 심판하고 다투는 일이 익숙해졌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독일의 속담 "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면 악마가 옆에다 예배당을 세운다. "

 

우리는 마귀에게 속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진정 제대로 은혜 받은 사람이라면 교회 안에서 다투는 일을 볼 때 세상이 뒤집어질 일이 일어난 것으로 여겨야 정상합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습니다. 그는 롬 14장 한 장 전체를 통하여 “교인들끼리 서로 심판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권면이 중요하지 않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 제 설교에 대하여도 그런 반응을 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다룰 현안이 얼마나 많은데 또 그 말인가?’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20 말씀을 보면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20 하나님이 이룩해 놓으신 것을 음식 때문에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저는 “하나님이 이룩해 놓으신 것!” 이란 표현을 읽고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이룩해 놓으신 것’은 새번역 성경 주를 보면 ‘교회 공동체’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한 영혼인데!’,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구원한 영혼인데, 어떻게 그리 쉽게 비난하고 다툴 수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운 교회인데’, 십자가에서 핏값 주고 사신 교회인데,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 되게 하여 이룬 교회인데, 어찌 그리 쉽게 싸우고 다투며 깨뜨릴 수 있느냐 말입니다.

 

만약 누가 우리 교회에 와서, ‘24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 ‘영성일기는 왜 쓰느냐?’ ‘성령의 하나됨이 가능한 일이냐?’ 한다면 제 속이 얼마나 뒤집어지겠습니까? 지금까지 어떻게 교회를 수습하고 세워왔는데, 그렇게 하느냐? 가만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지,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알 것 같았습니다. 정말 싸울만한 것으로 싸운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한 한인교회에서 싸움이 났는데 파송 선교사가 보신탕 먹었다고 계속 후원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가지고 싸우다가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먹는 문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가 겪은 교회 안의 다툼도 “이방 신전에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 먹어야 하느냐?” 문제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됩니까?

 

그러니 기가 막힌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서로 다투고 얼굴 붉힐 일이 있으면 명심해야 합니다. 그 문제가 하나님께서 십자가와 성령으로 이루신 교회를 분열시킬 만큼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문제로 큰 분열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2005.04.08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 조찬기도회에서 충현교회를 담임하셨던 김창인 원로목사님의 공개회개가 있었습니다,

 

󰡒1945년 해방 후 개신교는 일제 때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장로교와 고려파로 분열했는데,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이 나에게 있습니다. 광복 직후 평양 부산 등에서 몇몇 옥중성도들이 모여 재건교회를 하면서 함부로 입을 열어 다른 사람들을 저주했습니다.

 

우리가 교만해지면서 판단력이 어두워졌고 사랑이 없어져 우리와 뜻이 다른 사람과는 밥도 같이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마귀당󰡑이라고 공격했습니다.󰡓백발이 성성한 원로목사는 목이 메인 채 마지막으로 “하늘나라는 회개한 자만 간다고 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하며 고백을 마쳤습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할 때, 분명히 결단해야 합니다.

 

:13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항상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한 영혼인데, 비난하고 심판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운 교회인데, 싸워서 깨뜨릴 수 있느냐?”

 

:21 고기를 먹는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그 밖에 무엇이든지, 형제나 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고기 문제로는 다투지는 않지만 술을 마시는 문제는 여전히 예민합니다. 보수적인 교회 전통으로는 술을 마시면 타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해야 합니다. 술을 마신다고 지옥에나 갈 자처럼 그렇게 정죄할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는데 말입니다.

 

물론 술을 마시는 사람도 ‘술 마시는 것이 무슨 죄냐, 괜찮다.’고 우길 일도, 다툴 일도,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할 일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죄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술 마시면 죄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입니다

 

:23에서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23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근거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

 

술 마시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믿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구원해 주신 삶인데 그것 때문에 시험되는 사람이 있다면 술 하나 끊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15에 비판은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5 그대가 음식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비판을 받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글을 쓴 사람들 중에 자신의 글에 대하여 누가 비판적인 댓글을 달면 너무나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받은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정죄 받지 않는 은혜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정말 빛 가운데 모든 것이 환히 드러날 때, 여러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그 때 감추어진 허물이 드러나고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죄가 드러나고 자격이 안 된다고 판정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정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두려움에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숨기고 사는 자가 아닙니다. 죄인인 나는 죽었습니다. 그 증거로 우리 안에 성령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죄 받지 않는 은혜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요 감격스러운 일이요, 행복한 일입니다. 일평생 기뻐하며 찬양하며 노래하며 감격하며 춤을 출 일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일이 있겠습니까?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그 심판을 면제받았다는 사실을 알면서, 어찌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잘못을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한국교회는 진통 중에 있습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데 서로 비판하지 말라면 어떻게 변화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는 비판으로 변화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을수록 더욱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 되게 하신 교회입니다. 우리 마음에 임하신 주 예수님입니다. 여기에 한국 교회의 답이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부족하여 변화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놀라운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적어서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전 13:1에서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했습니다. 사랑 없는 천사의 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우리가 진정 잘하고 있는지, 자신은 진정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방은 괴롭다는데 자신이 사랑이라고 우기면 안 됩니다.

 

:16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18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무엇을 인정받아야 합니까? 오직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진정 교회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싶다면 자신이 지금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삼상 24장에 보면 사울 왕이 엔게디 광야에 다윗이 숨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 3,000명을 데리고 온 광야를 수색하던 중, 용변을 보려고 한 굴에 들어갔었는데, 마침 그곳은 다윗이 숨어 있던 굴이었습니다.

 

용변을 보는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다윗은 사울 왕의 옷깃만 베었다가 나중에 사울 왕에게 그것을 보여 주면서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그 때 사울 왕이 대답합니다.

 

삼상 24:16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다윗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원수에게도 인정받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그저 올바르게 사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예배 잘 드리고 전도 열심히 하고 부흥된 것이 교회 목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공동체입니다. 화해 사역이 교회의 본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해 드려야 하지만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화평하는 것과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19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은 자여야 하며, 24시간 주님과 동행하는 자여야 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교회를 믿어야 합니다.

 

보수적인 교회, 진보적인 교회, 신학도, 예배 분위기도, 교인들의 생활도 많이 다릅니다. 성령 파 교회와 경건파 교회도 많이 다릅니다. 예배 때 어떤 찬송을 부르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고 영생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쓴다면 서로 비판하고 싸우지 말고 자신의 믿음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22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비판하지 않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을 항상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잘해보고 싶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교인들이 행복해 하는 좋은 교회를 세워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지적으로 탁월하고 언변도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제 마음에 사람에 대한 판단과 종죄감은 계속 커져 갔습니다. 계속 좋은 교인, 유능한 부교역자가 없는지만 찾았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다가 ‘내가 너무 초라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사람을 판단하고 사람들만 의지하느냐?

 

내가 아직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함이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품을 수 있는 것인데! 큰 실수 할 뻔 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사람에 대한 판단과 정죄가 사라졌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한마디 해주고 싶을 때, 그 사람 안에 계신 주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 다음, 말을 해도 해야 합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어서 말을 하고 싶을 때, 교회를 하나 되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말을 해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모인 것, 누가 하신 것입니까? 봉사부서에 가 보세요, 누가 그곳에 가게 하신 것입니까?

 

항상 명심합시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망치지 말라!” 사람도 교회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쓰십시오 /롬14:13-23/ 이동원목사

2014-12-03 15:58:28

 

지미 카터 대통령이 퇴임 후에 열정을 가지고 봉사하는 사역가운데 하나가 해비타트 사역입니다. 집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역입니다.

 

작년8월 5일부터 일주일간 한국에서도 이 행사가 있어서 지미 카터가 내한한 일이 있었고 호서대학 정근모 총장 등이 이일에 헌신하고 있고 우리교우들 가운데도 이 사역에 헌신하고 계신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기자가 망치를 들고 못을 박으며 일을 하는 카터에게 '일하는 소감'을 물었을 때 그는 "나는 한채의 집을 지을때마다 단순한 빌딩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땅에 존재하는 이유가운데 하나가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세워주기 위해서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19절에서는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고 했고,이미 4절에도 연약한 자들이 주님에 의해 세움을 받아야 한다고 기록한바 있습니다.

 

여기에 쓰여진 '세움'이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에 '오이코 도메'라는 단어인데 오이코는 '집'(home,house)이라는 뜻이고, 도메(도메오)는 '세운다'(build)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섬기는 일은 이웃의 집을 세우는 일과 같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들에 대하여 하는 말을 듣고,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는 마치 이웃을 파괴할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난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마치 이웃의 집에 불을 질러 태우는 방화범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웃을 허는자 이기를 원하십니까? 세우는 자이기를 원하십니까? 세우는 사람이기를 원하신다구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웃을 세우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1.서로서로 판단치 말아야만 합니다.

 

롬14:1-12까지에는 소위 그리스도인이 자유할수 있는 삶의 영역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유할수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의견을 달리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특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혹은 어떤 특정한 날을 지켜야 하느냐 지키지 말아야 하느냐 등의 문제들입니다.

 

지금도 신앙의 본질문제가 아닌 이런 자유할수 있는 영역의 문제들로 인하여 언쟁을 하다가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깨어지는 경우들을 흔히 볼수 있지 않습니까!

 

어떤 교회가 열심히 교회당 건축해 놓은 후에 깨어졌는데 원인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커텐 색깔 가지고 싸우다 갈라졌다는 것이에요.

 

어떤 미국교회에서 싸움이 났는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가 보신탕 먹었다고 간증한후 이런 선교사를 계속 선교사로 인정하고 후원 할 것인가 말것인가 가지고 싸우다가 갈라졌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모든 비본질적 주제에 대한 논쟁들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본문13절에서 "서로 판단치 말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이런 논쟁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문제로 어떤 형제를 근심케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15절 말씀이 바로 그 증언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그것은 형제를 사랑하고 세우는 일입니다.

 

2.믿음강한 성도가 양보해야 합니다.

 

로마서 14:2에 의하면 모든 것을 먹을수 있는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이고 채소만 먹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다른 문제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아직도 주초문제가 신앙의 수준을 정하는 규례처럼 되어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담배문제는 성경에 기록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혹시 어떤 교우들에게는 충격이 될지 모르지만 저 설교의 왕자로 일컬어진 스펄존 목사님이 골초였습니다. 한번은 심지어 그의 교회 근처의 담배가게가 선전을 하기를 "스펄존 목사님이 잘 피우는 담배를 파는집"이라는 선전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누군가가 스펄존 목사님에게 전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러면, 이제는 내가 담배를 끊을때가 되었군요"라고 말씀하시더니 실제로 담배를 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교회 스탶이 "목사님이 담배피우는 것이 늘 신앙의 본질문제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왜 끊기로 하셨느냐?"고 묻자,

"나는 상관이 없는데 나 때문에 여러사람이 피우게 되고 건강을 해하게 된다면 내가 삼가야 하겠지요"하시더랍니다.

 

20-21절의 말씀이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거리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담배도 피울 수 있는 믿음이 강한 스펄존 목사님이 담배는 피우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담배를 거리낌으로 대하는 믿음 약한 성도들을 위하여 담배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이런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우리집에 아름다운 예술적인 누드화를 선물했다고 하십시다. 예술적인 조예가 있는 저희 부부는 이 작품을 예술적인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미적 관점에서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집을 방문하는 미적 안목이 없는 성도는 외설적인 것을 걸어놓았다고 시험을 받을수도 있을 것입니다.(사실 예술과 외설의 차이는 매우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요즈음 유머에 예술과 외설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보고나서 눈물이 나면 예술,군침이 돌면 외설/애인과 볼수 있으면 예술,친구와 보는 것이 편하면 외설/보고나서 마음의 변화가 생기면 예술,몸의 변화가 생기면 외설/비디오를 빌려주어서 돌아오면 예술,안돌아오면 외설이랍니다.

 

어떻게 할까요? 본문의 원리에 따르자면 나는 이것을 예술로 감상할 수 있어도 다른 이들이 외설로 오해한다면 이웃을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옳은 것인가가 아니라, 형제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때에는 언제나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들의 신앙의 논쟁의 자리에 들어가 보면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 껍데기를 가지고 논하다가 열올리고 열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형제들의 목장에서 정치문제, 요즈음은 경선 문제가 화제에 올려 질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배경, 출신지역, 인생경험에 따라 우리중엔 과거를 타파하기 위하여 기존질서에 노를 선포하는 ,노풍을 타는 사람도 있고, 이씨조선의 복귀를 노리는 이풍을 타는 분들도 있을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안에는 여도,야도 있어야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우리들의 교제에 상처를 받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런 문제를 피해가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교제의 깊이를 더해 갈 수가 있을까요?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본질적인 가치가 무엇입니까?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어떻게 의롭게 살고, 평화롭게 살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느냐-거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망치를 들고 집을 짓는 지미카터에게 "대통령을 지낸 분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 소감이 어떠한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대통령후에 이런 일을 하라고 대통령을 시킨 것 같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의 가치는 대통령이 아닌 이웃사랑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분이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날이 왔으면 하는 눈물겨운 바램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의 메시지를 해비타트운동 즉 사랑의 집짓기운동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본래 이 운동은 밀라드 풀러라는 변호사이자 사업가에 의해 시작된 운동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나이 28세에 백만장자가 되어 남부러울 것 없이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사랑하는 아내가 이혼선언을 하고 그에게서 떠나가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돈이 전부인줄 아는 남편의 인생에 환멸을 느꼈다"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고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는 진지한 신앙을 찾기 시작했고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제가 언젠가 말씀드린일이 있는 미국 조지아주의 클래런스 조던 박사가 이끄는 코이노니아 농장을 방문하고 인종을 초월한 공동체적 신앙생활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돌아옵니다.

 

그는 돌아오는 즉시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고 곧 자기의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살던 집을 제외한 일체의 재산, 자동차, 보트, 자가용 비행기 모두를 팔아 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역에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졸지에 백만장자에서 빈 털털이가 되었지만 그는 행복을 찾았고 삶의 참된 가치를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수여 받고, 말틴 루터 킹 인도주의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한 해비타트 관계자는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그는 욕심을 버려, 하나님을 만났고, 물질을 포기하고 가치를 발견했고, 특권을 포기하고 행복을 얻었으며, 자신을 버려 이웃을 찾았고, 쾌락을 잃어버리고 영향력을 남길 수 있었다"고.

 

저는 이 말을 읽으면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었는가 생각했습니다. 그의 일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특권과 물질을 포기하고 이웃을 구원하고 세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삶이 아니었습니까!

 

그의 희생, 그의 피 흘리심, 그의 섬기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여러분과 저라면 이제는 우리가 이웃의 덕을 세워야 할 차례입니다.

 

밀라드 풀러의 삶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의 신학을 가르켜 '망치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로마의 병정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망치로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깨닫고 새삶을 체험한 그는 새로운 섬김의 망치를 들고 이웃의 삶을 세워주는 일생을 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지미 카터도,

 

정근모 박사도 이제 사랑의 망치를 들고 이웃의 집을 세우고 그들의 새인생을 세워주는 일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힘겨워하는 이웃들을 세우기 위해 꼭 망치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목장안에서의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정겨운 악수, 중보의 기도, 소리없는 미소, 변함없는 관심--이 모든 것으로 우리의 이웃들은 새 인생의 집을 지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서로가 서로를 세워가는 인생을 사모하십시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핵심 원리 /롬14:13-23/ 이규현 목사

2020-12-25 08:40:12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믿는 것인가,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주제들이 떠오릅니다. 관점에 따라 믿음이 좋다는 것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로마 교회 안에도 먹는 문제를 두고 갈라졌습니다.

 

그 당시 시중에 나온 고기는 우상숭배하는 제물과 의미를 같이 했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거리낌 없이 먹는 부류가 있었고, 이전에 유대주의의 영향으로 먹는 것에 거리끼는 유대인 신자 그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거리낌 없이 먹는 사람을 강한 자로, 거리낌 때문에 먹지 못한 사람을 두고 믿음이 약한 자로 표현했는데,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는 것만으로 강한 자라 하지 않았습니다.

 

고기를 먹어도 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실족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배려하여 먹지 않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만 잘 믿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믿어야 합니다. 나만 잘나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인정해주어야 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먹는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는 로마 교회 안에 선을 그어주면서, 신앙 공동체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하는 기준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신앙생활에서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주기도문에도 ‘나라가 임하시오며’에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행1장).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미래에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이면서 지금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 의와 평강과 희락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면, 본질과 비본질의 차이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 문제는 비본질적인 문제,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의와 평강과 희락은 본질의 문제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과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와 연관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명을 설명하실 때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이루고 기쁨이 넘치도록 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당하고 옳은 것을 주장한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의 평강을 깨뜨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가를 평가할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평화롭게 이루어 가느냐는 중요한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적 가치가 ‘하나됨’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됨’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됨을 이루는 공동체이므로,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논쟁하고 마음이 나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도 하나됨을 이루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가정에서도 얼마나 성공하느냐, 어떤 집에 사느냐보다 가족이 하나 되는 것이 핵심이고 가치입니다.

 

우리가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분단되고 깨어진 관계, 단절된 국가의 운명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하나된 것이 깨어진 것이 민족의 역사 속에서 아픔으로 와 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됨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나와 다르다고 비판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좀 더 부드러워지고 넓어지고 깊어져 상대를 받아들여주는 용납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은 잃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하나됨을 지켜가는 이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신앙을 수직적인 것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평적인 관계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14:18~19)」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만큼 수평적인 인과관계도 중요하고, 이 둘을 분리시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의 균형, 이 두 관계에서의 샬롬을 늘 신경 쓰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목표입니다.

 

두 번째 기준은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의 편에서 고기를 먹는 것은 자유입니다. 마음껏 먹어도 되지만 문제는 그것을 보고 시험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유는 절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그것을 보고 시험에 든다면, 절제하는 것을 가리켜 강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고전10:23)」

 

라고 했습니다. 자유에 대한 멋진 정의를 내린 것입니다. 성숙이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에서 이타적 태도로 점점 옮겨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마음대로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라고 합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이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는가, 이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가를 물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옳은가에 몰두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문제는 옳게 산다는 것이 무기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면 그 옳음은 사실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붙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죄가 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고 시비를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죄가 되지는 않지만 성숙의 기준으로 본다면 문제가 되는 경우들이 우리 삶에서 참 많습니다. 죄의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덕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만 하더라도 복잡합니다.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건강상 좋지 않은 것들이 있고, 또 몸에는 좋더라도 정신 건강이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태국에 가서 관광을 할 때 좀 유별난 음식을 몸에 좋다고 막 먹는 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데, 이것은 먹어도 되지만 덕스럽지 않고 그것이 사회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직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국의 기독교 문화 속에서 술을 먹는 것을 자제합니다. 직분자가 술을 먹는 것을 연약한 사람이 보고 시험에 든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덕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긴 비행기 여행에서 잠이 오지 않아서 와인을 좀 먹어보면 될까 하고 와인을 조금 받았습니다.

 

너무 진한 것 같아 물을 가득 부어서 마시려고 하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목사님 안녕하세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술잔에 술이 가득 찬, 난처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목사님이 느낀 것이 피로나 잠을 위해서 마시려고 했던 생각이 짧았고, 나를 보고 시험에 든 신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뒤로는 마시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나의 행동을 보고 넘어질 수 있다면 내 행동은 절제되어야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제가 호주에 있을 때 보니 호주는 지천에 골프장이 널려 있고 골프가 대중화되어 있어서 목사님들이나 교민들도 많이 치고 그것이 사치가 아니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골프장에 이슬이 맺혀있을 때 흰 공이 포물선을 그리면 참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골프를 치는 것이 시험에 들 수도 있겠다고 설교를 하니 어떤 한 분이 “아멘”이라고 하셨습니다. 교민들 중에는 청소 일을 하면서 힘들게 사는 분들이 많고 한국적인 정서에서 보면 실족할 수도 있겠다 싶어 저는 골프를 치지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우리의 행동이 죄가 아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거침돌이 되어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덕스럽지 않다면 그것을 중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도 강한 사람이 있고 연약한 사람이 있고, 이제 막 온 사람이 있고 보수적인 사람이 있고 진보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자기 배경과 경험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평가할 때 때로는 연약한 자들이 넘어질 수 있다면 내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줄기차게 이 말을 합니다.

 

「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5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14:13,15,21)」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그 자유를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별 것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심각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초신자들은 오랫동안 믿어온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열심이 다른 사람에게 혼란을 줄 수 있고, 교회에 나오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면 그 일을 고려해야 합니다.

 

특히 직분자라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의 무게가 그 만큼 크고 책임이 큰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부모의 행동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큽니다. 자칫하면 신앙의 대를 끊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너무나도 모범적인 신앙인인 것 같지만 집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때 자녀들은 딜레마에 빠져 저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믿음 생활을 많이 했다고 하는 우리에게 큰 충격으로 와 닿는 메시지입니다. 나는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실족하게 만든다면 이것은 아주 심각한 범죄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신앙이 강한 자의 편에서는 뭘 그런 것으로 시험에 드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 관점입니다.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에도 시험에 듭니다. 상처를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잘못하면 교회를 떠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덕’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보다 나의 행동으로 덕을 끼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하고,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 보다 그 일을 통해 과연 덕을 끼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8:13)」

 

고 대단한 얘기를 했습니다. 누군가 실족하는 일이 있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숙이 아닙니다.

 

바울은 개인의 자유를 공동체의 덕이라는 기준 안에서 사용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그의 신앙 기준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유하십시오. 그러나 남을 실족하지 않는 덕을 세우는 일 안에서 자유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기준은 우리 신앙에 배타주의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자기신앙을 절대화하고 그 절대화된 신앙을 규격화해서 다른 사람도 그리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나 같이 믿어야 잘 믿는 것이라고 독선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사람마다 다르고, 신앙이 좋다는 기준도 여러 측면에서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는 책이 있는데 다양한 영성이 있고 어떤 것이 최고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자기의 신앙의 범위로 집어넣으려고 한다면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기다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신앙생활에서 ‘나는 너와 다르다’는 이분법적인 삶이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 구별이 특권의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 때문에 배타적이 되거나 나의 열심이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누가 봐도 결점이 없고 참 잘하는 분인데 왠지 만나면 거북스러운 마음이 드는 분이 있습니다. 모범적이지만 매력적이지는 않아서 함께 교제하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맞는 말만 하고 틀림이 없지만 듣고 있으면 기분은 별로 안 좋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대단히 거북한 존재였습니다.

 

이 아이러니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바리새인들도 처음 출발은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고 애를 쓴 것이지만, 변질되고 만 것입니다. 자신들의 열심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매도하고 비판하고, 극단적 종교 우월주의에 빠지면서 나중에는 예수님까지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에 앞장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열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고 착실하게 신앙생활하면서 모범적인 직장인으로 살 수 있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도덕적 우월주의에 빠져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고고한척할 때, 그런 사람은 직장에서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당신과 같은 속물과 다르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살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자꾸 이단화 되어서 우리 교회에 와야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노골적으로는 하지 않지만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열심에 도취되어 갈수록 세상 사람들과 거리가 멀어진다면 모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지나친 종교적 강요가 가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신앙의 열심으로 상대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자신이 무신론자로 살았던 이유를 그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문화에서는 기독교와 발길을 끊기는 어렵습니다. 가족, 친척에서 학교까지 기독교인이었지만 그가 만났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매정함과 오싹함, 독선, 빈틈없고 사랑과 배려를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율법의 잣대를 가지고 그 기준에 들지 않으면 엄격하게 처단하는 살벌한 문화 안에서 그는 기독교에 염증을 느꼈다고 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런 대사가 있었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사실 박찬욱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기독교인들에 대해 매섭게 비판한 것입니다.

 

굉장히 많은 것들을 가진 것 같고 잘난 척하고 뭔가 가르치려 드는 기독교인에 대한 대사인 것입니다. 죄악 많은 세상에 따뜻한 가슴으로 다가가지 않고 우리만의 천국을 만들려고 한다면, 세상은 우리에게 등을 돌릴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인도에 쓰나미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을 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자유와 긍휼이 없는, 영적 우월주의에서 나온 잘못된 평가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과 우리를 얼마나 멀어지게 만드는 냉혹하고 잔인한 평가인지 모릅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무례한 기독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매우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기독교인들의 독선적이고 오만한 태도와 연관이 많습니다. 신앙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태도는 비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특성상 독선적으로 비춰지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런 말씀은 타종교인들에게는 독선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 문화 속에 만연된 ‘모든 진리는 하나며, 어디로 가도 한 곳에서 만나고, 당신 안에 신이 있고 당신이 신’이라는 메시지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부합하는 매력적인 메시지이지만, 구원으로 인도하는 참된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독선적으로 보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 다가가야 하는가는 매우 중요하고, 지혜가 필요합니다.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보편적으로 많이 알려진 이 시대에서 우리의 전도방식, 비그리스도인들에 다가가는 태도는 새롭게 모델링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대립각을 세우고 우리가 믿는 것만 옳다는 식의 전도는 일종의 선전포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유일한 것이고 여기에 대한 신앙인으로서의 확신과 자부심은 필요하지만 안 믿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우리의 태도는 수정되어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겸손함과 온유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방식은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진리를 가졌다고 해도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잘못 행동하면 그 진리는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가끔 그리스도인 그룹이 절에 가서 땅밟기를 하거나 타 종교가 주류를 이루는 도시 한 가운데에 가서 노골적으로 통성기도를 하면서 무례하게 하는 경우는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을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확신과 담대함이 있어야 하지만 우월주의나 배타주의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가진 것을 존중히 여겨야 하고 그리고 공통점을 찾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허망하다는 불교의 가르침도 성경의 전도서의 말씀과 결론은 다르지만 일치하는 공통적인 접근이 있습니다. 이런 접촉점을 가지고 출발하여 복음으로 인도하는 진지함과 겸손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결코 오만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 우월주의로 다른 사람을 매도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죄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겸손과 사랑의 동기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세례는 죄를 씻음 받는 예식인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죄인과 같이 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볼 때,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필요한 모습으로 언제나 겸손하게 세상을 향해 다가가야 할 줄 믿습니다. 아무리 깊은 영적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겸손한 마음과 사랑으로 다른 지체들을 품고 배려하여 다가가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 하나님의 나라는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한 것을 가지고 벽을 높이 쌓아서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서 신앙의 경주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더 열심히 봉사하고 주를 위해 살아갈수록 더욱더 다른 사람들과 간격을 좁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야 할 줄 믿습니다.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 거침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자유로 공동체 안에서 하나됨을 이루어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과 덕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않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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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꿈꾸었던 교회 /롬14:13-23/ 곽창대 목사

2020-05-31 03:44:30

 

사도 바울 당시에 로마는 세계의 중심도시였습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습니다. 그 길로 모든 좋은 것이 로마로 들어왔고 거기서 세계 각처로 흘러나갔습니다. 로마가 세계의 문화와 정치와 경제를 선도했습니다. 

세계를 알려면 로마를 알아야 했습니다. 로마로 진입하지 않고는 출세했다고 말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은 로마시민이 되려고 애를 썼고 로마에 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시대에 사도 바울도 로마를 향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 때문에 로마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은 자기 출세를 위한 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꿈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때가 주후 35년경이었습니다. 선교여행을 시작한 것은 10년 후인 45년경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로마서는 3차 선교여행이 끝나가는 57년경에 고린도에서 썼습니다. 회심한 후 22년간, 선교여행에 뛰어든 지 10년간 바울은 경험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앞서가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거대도시 에베소에 하나님의 교회가 섰고 그 교회로 인해 에베소에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대도시 고린도에도 교회가 섰습니다. 역시 거기서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성취되어야 할 하나님의 꿈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온 세상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제국의 변화를 꿈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미 로마를 변화시키고 계셨습니다. 당신의 교회를 그곳에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꿈꾸시는 분입니다. 꿈만 꾸시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세계의 중심도시인 로마에 교회를 이미 세우셨습니다. 비록 그 당시는 초라해 보였지만 바로 그 교회가 로마와 세계를 새롭게 하는 복음의 센터요 생명의 샘터였습니다. 복음의 생수가 그곳에서 솟아나는 이상 로마는 새로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계도 새로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세계의 중심지 로마에 하나님의 교회가 이미 섰다는 소식은 바울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보다 훨씬 앞서 가시는 분이시며 자기보다 훨씬 열정적인 분이심을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열정을 체험하기 위해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싶었고 로마교회 방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로 로마교회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보게 했습니다. 그 일이란 로마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로마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세우는 일이 정말 중요한 것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로마가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복음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오려면 한 가지 길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으로 세워진 로마교회가 복음의 능력으로 강하게 무장하는 것입니다. 

 

로마교회가 복음으로 무장한 건강한 교회가 될 때 로마가 새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여 로마교회를 더욱 건강한 교회로 자라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일을 뒤로 미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로마서)는 바울이 로마교회를 위해 꿈꾸었던 내용입니다. 로마교회가 이런 교회가 된다면 로마는 새로워질 것이라는 꿈을 꾼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세계를 변화시킬 거대한 꿈의 성취를 위해 지금 아주 작은 그러나 아주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로마교회를 보다 더 건강한 교회, 성숙한 교회로 자라게 하기 위해 편지로 권면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꿈은 크게 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천은 작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꿈이 성취됩니다.

 

그러면 바울이 꿈꾸었던 로마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요? 로마를 변화시키는 교회, 로마에 하나님의 복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로마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몇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 서로 비판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1-12절까지의 요약입니다(‘그런즉’). 바울은 로마교회가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대신에 서로를 받는 교회, 서로를 귀히 여기는 교회, 서로를 환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하고, 비본질적이며 사소한 것들(음식물이나 날에 관한 규례 등)은 자유를 누리라고 했습니다. 그 모든 것 위에 서로를 관용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서 바울은 로마교회가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들 앞에 두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바랐습니다(13절).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치워버리는 교회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꿈꾸었던 교회는 혹 걸려 넘어질 것이 있는지 조심하는 교회입니다.

 

어린이들이나 노인들은 조그만 돌출물에도 걸려 잘 넘어집니다. 청장년들에게는 전혀 장애물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인데 어린이나 노인들에게는 장애물이 됩니다. 그 장애물에 걸려 넘어졌을 때 잘못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부주의했거나 다리에 힘이 없어서 넘어졌다고 그들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청장년들이 자기 수준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장애물로 여기지 않은 것이 문제이며 그래서 그 장애물을 치우지 않은 것이 잘못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여간 조심하지 않고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넘어지는데 그 넘어진 것의 책임이 믿음이 강한 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5절: 바울은 로마교회가 음식 때문에(비본질적인 문제로) 형제를 근심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식물보다 형제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16절: ‘너희의 선한 것’이란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치를 뜻한다고 보면 됩니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치란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교회가 복음과 무관한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면 복음이 비방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 가려집니다.

 

20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업이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19절)’입니다. 그런데 교회사를 보면 화평의 일을 도모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보다는 사소한 것들로 인해 서로 싸우고 갈라질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피아노를 예배실에 들여놓는 문제 때문에 교단이 갈라졌습니다.

어떤 교회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것 때문에 열심히 싸웠습니다.

교회에서 기타와 드럼을 친다고 청소년들을 크게 책망함으로써 많은 청소년들이 실망하고 교회를 떠났다는 얘기도 압니다.

 

어떤 교회는 아직까지도 윗 강대상과 아래 강대상을 구분하여 윗 강대상에는 여 성도들이 올라가지 못하게 합니다.

 

21절: 적극적으로 어떠한 성도가 성숙한 성도인지 말씀합니다.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위해서는 차라리 자신의 정당한 자유를 유보하고 포기하고 절제하는 성도가 성숙한 성도입니다. 이렇게 성숙한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고전 9:19-23)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속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바르게 드러나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전도로 유명한 ‘꽃동산 교회’(서울 상계동)는 어린이들을 얻기 위해 교회환경을 어린이에 맞게 꾸몄습니다. 어린이만 수천 명이 모이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얻으려면 젊은이처럼 되어야 한다. 찬송의 스타일이 달라지는 것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찬양은 참으로 영성이 깊은 것들이 많습니다. 어른들이 즐겁게 수용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그들을 용납하지 않으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노인들을 얻으려면 노인들이 와서 제 집처럼 느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자기주장만 해서는 안 됩니다. 노인들도 교회 일에 참여하도록 문을 열어야 합니다.

삶에 지치고 실패한 이들을 얻으려면 그들이 와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회환경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들도 교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름과 다양성을 축복으로 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획일화된 나라가 아닙니다. 다양한 문화와 노래와 언어들로 주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장구도 드럼도 징도 꽹과리도 사용될 것입니다. 각국에서 사용했던 각종 타악기와 현악기와 관악기가 동원될 것입니다. 랩이나 비트가 빠른 노래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경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미소 짓는 것, 용기를 내서 따라하는 것, 그것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다 받아들이시는데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게 옹졸한 것 아니겠습니까?

 

22-23절(14절):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믿음을 뜻합니다. 즉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형제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신다는 것을 아는 믿음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의심이 가는 일을 결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께서 우리의 양심에 확신을 주시는데 그 확신을 따라 흔들리지 말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요약하면 세 가지입니다. 바울이 꿈꾸었던 좋은 교회는

형제들이 걸려 넘어질 수 있는 걸림돌을 제거합니다.

형제의 신앙성장과 공동체의 화목을 위해 자신의 정당한 자유와 권리까지도 기꺼이 포기합니다.

그렇게 행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옳지 않은지 의심이 생기면 확신이 생길 때까지 유보합니다.

 

지금까지 말씀한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 구절입니다. 바울이 꿈꾸었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반영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우리들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 거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금방 읽었던 17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대표적인 특질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면 반드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열매가 맺힙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열매를 좋아하지 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사람들도 칭찬합니다(18절).

 

의: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란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의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의 나라입니다.

 

평강: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생기는 결과가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개인에게서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살롬의 나라입니다.

 

희락: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여기서 맛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의 나라입니다.

 

왜 로마교회가 이런 교회 되어야 할까요? 로마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와 세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계의 중심도시인 로마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로마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었으며 바울의 꿈이었습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 비폭력 인권운동을 펼쳤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외쳤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흑인이 백인과 진정한 형제가 되어 위대한 미국을 만드는 꿈이었습니다. 인종차별이 사라지는 미국, 흑인이 미국의 발전을 위해 앞장서는 나라가 되는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미국에 구현되는 꿈이었습니다. 꿈이 있었기에 그는 용감했습니다. 미국 시민이 지금도 존경하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여러분과 제게도 우리 한밭교회를 향한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꿈은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 꿈이 우리교회의 항구적인 비전올해의 교회표어와 5가지 주력목표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더 확장되고 구체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일터와 학교이기 보다는 예배와 교제공동체입니다. 오늘이 주일인데 주일예배를 드리러 오신 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에배 마치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교회는 뭔가 불편한 곳, 재미없는 곳, 일을 시키는 곳, 빨리 벗어나고픈 곳, 심각해지는 곳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교회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예배를 마치면 집으로 빨리 가기 위해 모이는 곳이 교회가 아니다.

 

예배 후에 삼삼오오 앉아서 차 한 마시면서 삶을 얘기하고 기도제목을 발견하는 곳, 휴식하는 곳, 새 힘을 공급 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다른 가족들과 함께 둘러 앉아 얘기꽃이 피어나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놀이동산이 되고, 청소년들에게는 꿈이 자라고, 청년들에게는 패기와 젊음이 발산되고, 젊은 부부들에게는 자녀들을 공동으로 양육하고, 장년들에게는 삶의 보람과 애환을 나누고, 어르신들에게는 천국의 소망을 확인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때로는 흥겨운 잔치가 벌어지고, 때로는 함께 울고, 거기서 우리의 사명을 확인하고 다시 세상으로 힘차게 나서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입니다.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계층 갈등, 빈부 갈등, 노사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이 심회되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갈등이 해소되고 대신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삶에 찌들린 자들이 들어와 휴식하고 새 힘을 얻는 곳

실패한 자들이 들어와 다시 용기를 얻고 일어서는 곳

배우지 못한 자들이 들어와 신령한 지혜를 배우는 곳

이혼한 자들이 들어와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을 만나는 곳

모든 죄인들이 들어와 죄에서 자유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곳

외로운 이들이 찾아와 친구를 사귀는 곳

 

건강이 좋지 못하거나 장애우들이 들어와 하늘의 위로와 평강을 맛보는 곳

누구나 들어오도록 문턱이 아예 없어진 교회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자기 집처럼 느끼는 교회

젊은이들이 몰려와서 꿈과 도전을 받는 교회

 

청장년들이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섬김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교회

노인들이 미래를 꿈꾸며 무릎으로 기도하는 교회

교회가 생겨야 할 곳을 보고 그곳에 교회를 분립하여 개척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건강한 교회는 상식을 뛰어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여기는 교회입니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모험을 감행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열정에 믿음으로 화합하는 교회입니다.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절망이 짙게 깔려있는 이 세상에 희망을 보여주고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생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 안에서 내가 삽니다. 그래야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꿈이며 우리의 꿈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우리교회로 오라!”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이 꿈꾸었던 교회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교회입니다.

 

<눅 13:6-9>에서 예수님께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를 구했는데 없구나!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열매 없는 나무는 쓸모 없는 나무입니다. 땅만 차지하고 있습니다. 땅만 버리는 나무입니다.

 

교회의 모습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한밭교회를 왜 여기에 두셨습니까? 이 땅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이 땅에 나누어주기 위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찍어 버리라는 주인의 명령에 과원지기는 대답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래도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그때 찍어 버리소서.” 여러분, 우리도 이 과원지기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해만 더 참으소서! 기회를 주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잘 가꾸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대전과 서구와 만년동의 과원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영혼 구원의 열매를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통하여 로마가 변혁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300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로마만 바뀐 것이 아니라 로마세계 전체가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거대한 꿈을 꾸었지만 바울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을 찾아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로마교회가 먼저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건강한 교회란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환영하는 교회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서로에게 거침돌이 되지 않는 교회입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한밭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꿈에 감격하는 교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admin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들/롬14:13-15/양향모목사

2019-08-26 23:07:24

 

성경말씀 그 어느 곳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 가 없을 정도로 다 필요하고 중요한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도 아주 귀한 말씀 한 구절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말씀은 15절의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 자신이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형벌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업차 다른 도시를 여행하던 어떤 교인이 한 도시의 커다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답니다.

예배가 끝나자 그는 목사에게 오늘의 예배와 설교가 매우 훌륭했었노라고 말하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님이 만일 제가 고용하고 있는 세일즈맨이라면 저는 목사님을 해고할 것입니다. 목사님의 표정, 목소리, 몸짓이라든가 기도, 성경 봉독, 설교의 논리 등은 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또 목사님의 설교는 크게 감동시켜 그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목사님은 제게 목사님의 설교하신 것에는 중심이 되는 핵심이 강조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설교를 하는지 그 목적을 잊어버리신 것 같습니다.

제가하고 있는 사업과 같은 경우 중요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에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오늘날 많은 교회의 설교가 또 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핵심을 놓쳐 버리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붙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핵심을 제처 두고 쓸데없는 것을 붙잡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뚝 솟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어 주셨다는 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의 핵심은 간곳없고 마치 우리가 윤리나 도덕이나 실천하려고 모인 사람들처럼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 좀 오래 교회에 다니고 자칭 신앙이 좀 좋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그런 의식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남들처럼 주일을 잘 지키지 않은 적도 없고, 술이나 담배를 피운 적도 없고, 남에게 피해를 입힌 일도 없고 바르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그런 윤리적이나 종교적인 잣대를 가지고 남을 비평하기를 잘합니다.

 

아이고 뭐 저런 사람이 교인이라고 교회에 다니나 한심하다

저렇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이 뻔뻔스럽게 교회에 잘도 다닌다.

교회에 다니려고 하면 행실을 올바르게 해야지 그렇게 살면서 무슨 천국타령이냐 라고 남을 비판합니다.

 

지금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은 네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대신하여 죽어주신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것은 또 다른 성도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들을 위해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못된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우리 스스로의 선행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를 아껴 주시고 기도해주시는 친척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혹 저를 만나거나 전화를 하면 저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 "양 목사 바르게 살기 위해서 목사가 되었으니 부모에게 형제들에게 잘하고 모든 일에 잘해야 되네"라고 제법 힘 주어서 권면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예 그래야지요 잘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스스로 바르게 살고 선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같이 스스로 선하게 의롭게 될 수 없는 불쌍한 인생들을 위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같은 것도 사랑해 주는 이가 있어서 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 대신 사형을 당해주시는 분이 있어서 그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는 이 사실 때문에 목사가 되었고 이 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나와 같은 죄인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저를 도덕군자로 성인군자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중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인이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형벌을 받아 죽으셨다는 바로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우리가 믿는 믿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혹시 여러분들 중에 아 양 목사가 도덕적으로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고 한다 앞으로 아무렇게나 살자 라고 말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오 분명하게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성도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이 악한 세상 이 썩어 가는 세상에서 바르게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바르게 살지 말자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하 수 없다는 것과 바르게 살수 없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주님께서 대신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핵심을 붙잡고 오늘 본문을 이해하시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1.형제들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말라

본문 13절 말씀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라고 했습니다.

1)"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10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에서 끌어낸 결론으로서 이제 더 이상 서로 판단(비판)하는 습관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나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 참 괴롭습니다.

왜 자식들이 부모님을 싫다고 하고 자꾸 부모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으려고 하는 지 아십니까

 

부모가 자식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간섭하고 비판하고 훈계하고 하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서 그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그런 비판세력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부모자식간에도 그렇다면 남남으로 만난 성도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칭찬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위하여 라는 이름 하에 더 이상 서로를 비판하고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라고 했습니다.

길을 가고 있는데 그 길에다가 발에 부딪힐 돌이나 장애물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그 길에다가 함정이나 덫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마련해주신 구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구원의 길에다가 부딪쳐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나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덫이나 함정을 파서 빠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구원의 길에다가 선행이라는 덫을 놓습니다

선행이라는 것을 강조한다고 누가 시비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 덫에 걸려 넘어져서 이 구원의 길을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구원의 길에다가 율법들을 늘어놓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늘어놓을 때 그것이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함정이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구원의 길에다가 종교적 열심들을 늘어놓습니다

금식기도를 하고, 방언을 하고, 신유의 은사를 받고, 예언을 하고, 어떤 기적적인 체험을 하고, 신비한 음성을 듣고, 귀신을 쫓아내고 하는 이런 것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이 길에 날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만 우뚝 솟아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는 길이 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그 어떤 것도 용납을 해서는 안됩니다

아무 것도 그것을 대치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음식물 자체는 속된 것이 없다

본문 14절 말씀에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라고 했습니다.

 

1)"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진리 안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진 확신이 스스로 자기 안에서 생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얻은 객관적인 진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복음 안에서 갖는 확신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 '그 자체가' 혹은 '본질적으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주신 음식물 그 자체'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먹는 음식으로 주신 모든 것 그것 자체에는 어떤 음식물도 속(俗)된 것, 즉 불결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먹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딤전 4:4에서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사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막 7:15-23)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 가운데는 모든 음식물이 그 자체는 깨끗하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는 창조 기사의 말씀에 근거를 두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힘입어 확실하게 그렇게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3)'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라고 했습니다.

어떤 음식들은 속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구약의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떤 음식물을 깨끗하지 않다고 그의 마음에 확신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아직 믿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런 그에게 있어서 그 음식물은 깨끗하지 않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하여' 율법이 부정하다고 선언한 음식이 더 이상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사랑으로 행하여야 한다

본문 15절 말씀에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식물을 인하여 근심한다고 했습니다.

식물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형제가 식물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괴로움을 당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어떤 규칙들이 아니라 우리 형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율법이 필요한 것이고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여러 규칙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런 규칙들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보아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그 사람의 약점과 단점들을 보아도 오히려 그 약점을 가지고 있는 형제를 이해하게 되고 불쌍히 여기게 되고 도와주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매정한 눈으로 보면 그 사람의 장점까지도 기분 나쁜 것이 되어서 시비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선행이나 종교행위들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면서까지 의롭게 해 놓으신 우리 서로를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마치기 전에 한 말씀 덧붙여서 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날 때부터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일평생을 술 한잔 안 마시고 담배한대 안 피우고 한눈 한번 팔지 않고 남에게 해로운 일 한번 하지 않고 바르게 살아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설교를 통해 그분들이 평생 고생하시면서 이루어 놓은 그 선한 일들을 평가절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좋은 술 담배 세상향락을 거부하고 일편단심 주님만을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들에게 특별한 상을 내리실 줄 믿습니다

별볼 일 없는 인생들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주님을 위해 이렇게 헌신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고 특별한 상을 내리신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다만 우리의 삶에 있어서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로 선하고 아무리 자랑할만한 삶이라고 해도 그 삶 자체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과 아울러 우리 형제들에게 그러한 삶을 살라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기준으로 형제를 판단해서도 정죄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서로가 서로를 사랑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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