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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로마서 설교 모음

로마서 15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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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자리 교회 /15:1-6/ 김기석목사

2018-08-02 02:47:29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한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향 현존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교회 설립 11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법 긴 세월을 우리는 풍상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교회는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그때 그리스도는 친히 그 구원의 능력으로 임재하시고, 믿음을 불러일으키시며, 죄인을 거룩한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모든 사람을 이끌어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십니다(레슬리 뉴비긴, [교회란 무엇인가?], 홍병룡 옮김, Ivp, 2010920, p.58).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러주셨으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앞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었던 이들의 헌신 덕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4:37)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 또 그것을 누리고 있으니 삶은 고마움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두어 누리는 사람의 의무는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뭔가를 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심고 있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불러주신 것은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안병무 박사님은 기독교인의 삶을 -향 현존이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은 벗어남이고 향은 지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낯익은 세계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 나아가라 이르셨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새로운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로마 제국의 압제 하에 신음하고 있던 이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 삶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시간적으로는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 미래의 꿈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공간적으로는 예속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유의 새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실존적으로는 욕망에 매여 살던 타락한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며 사는 본래적 존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낯선 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마음 쓰며 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고 바꿔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붙들고 살고 있는지요? 괴테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장미꽃으로 촘촘히 둘러싸인 십자가가 서 있다.

누가 십자가를 장미꽃으로 장식하였는가?

그 험한 십자가를 사방으로 부드럽게 둘러싸기 위하여

花環은 부풀어지고 있다.”

(J.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김균진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79130, p.42에서 재인용)

 

우리는 피가 뜨거운 서른 세 살의 젊은이가 졌던 그 고통의 십자가를 장미꽃으로 장식하여 숭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교회의 중심은 십자가여야 합니다. 그것은 남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놓는 사랑의 표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길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약점 돌보아 주기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논의를 마친 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어떤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를 세세히 가르쳤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늘 분별하며 살아야 하고, 믿음의 분수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비천한 사람들과 사귀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늘 정신을 차리고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살아야 합니다.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도 말아야 하고, 그들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도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런 삶을 위해 구체적 지침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15:1)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제1의 원리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이 강한 사람은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적 뿌리가 없기에 율법이나 전통에서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활달하게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는 조금 달랐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율법 조문에 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리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것이 진리의 세계에 텀벙 뛰어드는 일을 망설이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유대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신자들의 그런 흔쾌하지 못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사랑으로 기다려주는 일을 통해 세워집니다. ‘자기에게 좋을 대로처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더뎌도 괜찮습니다. 내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려 하기보다는 사랑으로 서로의 입장이 되어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 올리신 기도는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17:11, 17)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들과만 살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이들에 따르면 가끔 공동체에 회의를 느끼는 것은 그 집단이 지향하는 가치관이 달라서가 아니라, 사소한 생활의 습관 때문이라 합니다. 치약을 짜는 방식에서부터, 양말을 벗어놓는 방식까지 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람들이 모여 이룩한 꽃밭과 같습니다. 이런 조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아가페적 공동체

공동체의 가장 아름다운 실례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공동체적 사귐 속에서 하나이십니다.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 가운데 에로스는 대상이 가진 아름다움 때문에 그 대상과 합일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이것은 보통 ‘~ 때문에 하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조건인 무엇 무엇’, 즉 아름다움, 귀여움, 젊음, 기백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아가페적 사랑은 서로 이질적임에도 불구하고 통일적 하나-을 이루려는 욕구입니다. 흔히 이것을 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김용규 선생은 아가페적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컨대, 아가페는마치 여러 가지 악기들이 서로 다른 각각의 역할을 오히려 굳게 지킴으로써 다성성polyphony을 가진 하나의 음악을 이루어 내는 교향악symphony처럼서로 다른 개체들이 모여 서로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함으로써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공동체를 마침내 이루어 내는 사랑입니다.”(김용규, [], Ivp, 2018328, p.799)

 

자기 소리를 높이는 순간 교향악의 조화가 무너지듯이 교회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어떠한 강제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본문 말씀은 더욱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2). 이것이 공동체를 세우는 제2의 원리입니다. 몇 해 전, 작곡가인 이건용 선생님이 쓰셨던 알토들의 존재감이라는 칼럼(중앙일보, ‘삶의 향기꼭지, 2015825)을 읽다가 저는 눈이 확 떠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합창에서 알토 파트의 존재감은 약하다. 다른 파트들에 비하면 확실히 그렇다. 소프라노의 존재감은 분명하다. 우선 합창의 네 파트 중에서 제일 높은 성부를 부른다. 잘 들린다. 또 소프라노는 거의 항상 주선율을 맡는다(중략).

 

소프라노는 음악을 리드하는 역할을 맡으며 그 음악의 표정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베이스는 합창에서 화음의 기초이자 기둥이다. 소프라노가 선율로서 합창을 리드한다면 베이스는 화성으로 음악의 틀을 만들어 준다. 다른 파트와는 움직이는 원리가 다소 다르다. 그래서인지 저음이지만 잘 들린다.“

 

소프라노와 베이스는 합창 전체의 윤곽을 만들기 때문에 이 두 성부를 외성(外聲)이라고 하고, 그 윤곽의 내부를 채우는 테너와 알토 두 성부를 내성(內聲)이라고 한답니다. 테너는 고음이기 때문에 잘 들립니다. 물론 어려움도 있습니다. 높은 소리를 작게 불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음이 떨어져 눈총을 받기도 합니다. 이들에 비하면 알토는 이도 저도 아닙니다.

 

선율을 책임지는 것도 아니고 화성 진행의 기둥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여성의 저음이어서 소리가 약하다. 다른 파트들에 묻혀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아마추어들이 소프라노가 되고 싶어합니다. 존재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용 선생은 알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알토는 우선 합창에 볼륨감을 준다. 스스로의 소리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전체의 합창 소리를 풍부하게 만든다. 알토는 협력자다. 소프라노와 협력하여 이중의 선율선을 만들기도 하고 테너와 협력하여 화성을 완성한다. 만일 색채감이 많은 화성을 사용하고 싶다면 내성, 특히 알토의 협력이 절실하다.”

 

음악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만 제게는 이게 바로 교회의 구성 원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알토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사람들, 협력하는 사람들,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는 이들 덕분에 교회는 날마다 든든히 섭니다. 그들은 공동체에 유익을 주고 덕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3)기 때문입니다.

 

은혜 안에서 살다

인간은 저마다 우주의 중심인데, 어떻게 이렇게 남 좋을 대로 살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의 마음과 접속될 때 우리는 자아의 한계를 돌파하여 다른 이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지셨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다는 말입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가 한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을 늘 모시고 살 때 우리는 나와 다른 이들을 성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시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농부들은 4월 초순부터 못자리를 시작합니다. 저는 농사 경험이 없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눈여겨본지라 그 광경을 눈에 그릴 수 있습니다. 농부들은 좋은 흙을 퍼 와 잘게 부순 후, 커다란 체를 세워놓고 흙을 흩뿌려 고운 흙을 얻습니다.

 

그 흙에 거름을 뿌려 섞은 후 며칠 전부터 물에 담가놓아 발아시킨 볍씨를 모판에 뿌립니다. 그리고 그 위에 짚을 얇게 깔아주기도 합니다. 그런 후에 못자리에 옮겨놓았다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논에 옮겨 심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농부들의 고된 노동 속에 담긴 그 정성이 제게는 예배처럼 느껴집니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못자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팔려 거칠어진 우리 마음을 하나님 사랑의 체로 걸러내고, 성도들과의 친밀한 사귐이라는 거름을 섞어주고, 발아된 말씀의 씨를 그 마음 밭에 뿌리고, 때가 되면 각자의 삶의 자리에 옮겨 심는 것이야말로 이 땅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배는 교회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완성됩니다. 각자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생명과 평화의 꽃을 피우며 살아야 합니다. 설립 110주년을 맞이한 우리 교회가 생명의 못자리, 평화의 못자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하나됨의 기적 /15:1-13/ 유기성 목사

2016-08-27 09:48:56

 

15장은 로마서 결론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하면서 정말 하고 싶은 말씀이 여기에 나옵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된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된 교회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바로 하나된 교회입니다. 자주 설교하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할 때마다 제 마음을 무겁게 하는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가 굳이 하나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정말 교회가 하나될 수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되지 않고도 잘 지내왔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때로 싸우기도 했고, 갈등은 늘 있었지만 그렇다고 교회가 전도를 못했습니까? 예배를 쉬었습니까?

 

놀라울 정도로 하나된 교회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교회들이 대부분 지탄의 대상입니다. 이단 논란을 빚는 교회는 한 결 같이 일사분란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한 일에 얼마나 쉽게 하나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되자는 말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되자고 하면서 무서운 독재를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 여러 의견이 있고, 어느 상황에서나 반대 의견이 있는 것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판단 기준은 언제나 성경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교회가 굳이 하나가 되지 않아도 된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이처럼 기도하셨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교회의 하나됨은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하루는 6.25 전쟁에 대해 너무나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따로 만났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든 것은 6.25 전쟁 직후였다면, 이 정도 다른 마음만 가지고도 서로 죽이고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은 한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전쟁의 씨앗이 있습니다. 지금도 6.25 전쟁에 대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만나, 속에 가진 생각을 있는 그대로 나누게 된다면 얼굴을 붉히며 논쟁하는 정도를 넘어 주먹다짐까지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음날 새벽,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때, 마음으로부터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님, 우리 모두 다 진정 주님을 바라보게 해 주옵소서!”기도하는데, 통곡이 되고, 발을 구르며 온 몸을 비틀며 기도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통일의 때가 점점 다가오는 이 때, 우리는 정말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되지 못하면 통일은 오히려 우리 민족에게는 큰 위기의 때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달라지고 속이 드러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깨어지는 가정, 깨어지는 교회를 보면 항상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됨을 힘써 지키지 않으면 어느 순간 마귀에게 당하고 맙니다.

 

프랭크 루박은 [권능의 통로]에서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 대부분 지옥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천국이 임하여 지옥을 몰아내기 전까지 우리가 지옥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하나됨의 은혜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하나되지 못한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익숙하다고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고 분별해야 합니다.

 

:6에서 우리가 한 마음일 때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 4:3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하나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과연 교회가 하나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이 100이면 100, 1000이면 1000 다 다른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가 하나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교회를 하나되게 이루실 분은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고후 13: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하나되게 하시지만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

 

성경의 진리를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은 믿음이 있고 없고도 아니고 옳고 그른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하고 약한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있다면 믿음이 약한 자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라는 것입니다. 약한 자를 돌보아주라는 것은 강요하거나 지적하거나 공격하거나 조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몸이 약한 사람,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합니까? 도와주지요! 맞습니다. 복음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은 사랑이고 하나됨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아볼로가 설교하는 것을 듣고 그가 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부부는 아볼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불러 진정한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후 아볼로의 말씀 사역은 강력해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진리에 대하여 논란이 생기면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강한 것입니다. 신념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리더쉽이 강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면 싸움이 됩니다. 진리를 믿으니까, 조급함 없이 하나됨을 지키면서도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15:1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좋을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15:2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6장에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헬라파 유대인의 구제 문제로 분란이 일어나자 다수인 유대파 교인들이 헬라파 교인들을 집사로 뽑아 해결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다운 결정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렇게 하면 시험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권하는 것은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죽기 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온갖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마음에 영접한 것입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당시 초대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도무지 하나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유대인을 구원하시려고 유대인의 종이 되셨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으니, ... 또한 이방인을 구원하시려고 이방인도 받아들이셨습니다.

 

:9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 예수님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10-11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지식인과 무식한 사람,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 남자와 여자,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사람조차도 용납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믿기만 하면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여러분의 죄가 사함 받은 것을 믿습니까? 믿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이제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을 믿습니까? 믿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하나되게 하실 것을 믿습니까? 아멘입니다. 이 믿음도 성령께서 하실 것입니다.

 

이필찬교수님은 예수님께서 함께 밥 먹는 것을 자주 언급하였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성찬을 하셨고, 부활 후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셨고

 

3:20에서도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밥 같이 먹는 것을 이리 자주 말씀하셨을까요?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밥은 가족과 친구와만 먹습니다. 음식 규례가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밥을 먹자고 하는 것은 한 가족이라, 한 형제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한 몸으로 받으셨습니다.

 

6장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산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을 통하여 계속 확인해 주십니다.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그러나 나만 예수님과 한 몸이 된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면 독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 안에서 교회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20069월 교역자 퇴수회 때, 모든 교역자들이 한몸됨을 결론삼기로 결단했습니다. 목사, 전도사들 사이에 한 몸이 되지 않고서야, 어찌 교회가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믿음의 싸움이었습니다.

 

선포는 했지만 앞이 캄캄했습니다. 부목사님들이 더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영성일기를 쓰면서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과만 친밀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목사님들과 진정으로 하나되는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된 교회를 세워야 하지만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마귀가 교회가 그저 하나되도록 내 버려둘 리가 없는 것입니다. 강한 확신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인내와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5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그러므로 계속하여 주님을 바라보고 영분별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이전 교회에서 목회할 때, 교회 안에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를 미래 비전을 함께 나눌 사역자 모임을 가진 날, 그 동안의 교회의 변화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계시던 장로님 두 분이 불만을 하나 둘 내어 놓으셨는데, 이것을 나무라는 한 장로님으로 인하여, 육박전에 가까운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모임은 폐회기도도 하지 못하고, 장로님의 고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끝이 났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의 악몽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제 목회는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날 저녁, 저는 잠을 자지 못하였습니다.

 

새벽이 되었는데, 새벽기도회는 인도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회를 향해 가다가, 갑자기 어제 밤에 된 일이 우리교회의 부흥을 저지하려는 마귀의 역사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 사건의 발단이 된 장로님의 문제가 아니라, 마귀의 역사에 대비하지 못했던 나의 불찰임을 깨달았습니다. 교회 앞에 왔을 때, 저는 혼자 소리처럼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무리 괴로워도 마귀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겠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교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의견은 저를 격려하면서, 문제가 된 장로님을 징계하거나, 내 보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뒤로 물러가지 말고,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속에서 또 하나의 무서운 마귀의 역사를 보았는데, 그것은 미움과 정죄와 분노였습니다. 교회는 더 큰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기도하던 중, 성령님께서 제가 죽어야 할 때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저는 두 장로님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오히려 두 장로님이 문제로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다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부임한 이후, 하나 둘 교회체질을 바꾸어 왔던 것들을 다 원위치로 환원시켰습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는 길은 이 길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반발하는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요청했습니다. “모든 미움이 사랑으로 바뀔 때까지는 기도하고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 3개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계속하여

 

오직 성령께서 장로님들과 온 교인들의 마음이 하나되게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두 장로님도 처음에는 잔뜩 긴장한 채, 모든 면에서 경직되어 계셨으나, 3개월 쯤 지난 후에는 제 진심을 이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에서도 미움과 원망이 떠나갔음을 느꼈습니다.

 

3개월 뒤에 장로회를 소집했습니다. 그 자리에게 장로님들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성령 안에서 일치를 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날 모두 함께 기도하며, 토의하였습니다.

 

지난 상처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모두 자신의 생각은 내려놓고, 오직 [우리 교회를 향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어디에 있는 지] 만 찾았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기 진심으로 원했습니다. 드디어 그 날 밤늦은 시간, 저와 모든 장로님들은 교회가 나아갈 7가지 기본 방향에 대하여 일치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 다음 주, 주일예배 때, 장로님들과 일치를 본 7가지 교회 방향에 대하여 교인들에게 발표한 후, 눈물과 감격으로 [일치의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그 날 많은 교우들이 울었습니다. 우리는 결국 성령의 인도를 받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 그 교회는 급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분열의 위기를 맞았을 때,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우리 교회의 특성, 다양한 교인들,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진정 마음이 하나되지 못하면 이 축복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하나됨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 얼마나 오래 나왔느냐에 따라 나뉘지 않기로,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로 해야 합니다. 재산, 사는 지역, 학력, 직업, 출신 교회, 고향 그 어떤 것으로도 나뉘지 않기로 약속합시다.

 

하나가 되어 기쁨과 평화가가 충만한 교회 공동체, 이것이 악한 세상을 사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13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아멘!

 

 

주님이 하셨습니다! /15:14-19/ 유기성 목사

2016-08-27 09:55:15

 

2015년은 주일마다 로마서 강해 설교를 들었던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어야 합니까?

 

로마서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로마서 강해설교를 들은 사람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그저 듣고 안 들은 차이입니까? 로마서 강해를 들었는데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다면 로마서 강해설교를 들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까? 로마서 강해 마지막 부분에 와 있는 우리는 이 관심을 가지고 로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혀주었습니다.1장부터 8장까지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었으며, 이제부터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장부터 11장까지 유대인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다음 12장부터 15장까지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사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자신의 삶에는 어떻게 적용하였는지 지극히 개인적인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때문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16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내게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실 제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점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으로 이렇게 할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들은 가족 친지, 친구들로부터 이해받기 힘듭니다. 하물며 사도 바울 당시에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헌신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받기 힘들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나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목베임을 당하여 순교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될 줄 잘 알고 그 길을 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 사도 바울 자신의 아이디어나 계획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어떤 세상이 되었습니까?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방인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온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이 같은 세상이 올 줄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붙잡혀 살았던 것입니다.

 

6: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라고 하였는데, 사도 바울이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8에서 매우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18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루어 놓으신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이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예수님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후자였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의 삶이었고, 우리가 로마서 복음을 제대로 읽고 들었다면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0에서 분명한 사역의 원칙을 하나 말씀합니다.

 

:20 나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진 곳 말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삼았습니다. 나는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다가 집을 짓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한 민족에게라도 복음을 더 전하려는 열정 때문에 아무도 복음 전하지 않은 민족들에게만 가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선교는 당시 시대 여건 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무모한 일이었으며, 늘 중단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요원의 불길처럼 세계로 퍼져갔습니다, 세계사가 그것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성일기 세미나를 인도하러 갈 때마다 느낍니다. 지금 시대에 일기를 쓰고 살아라, 이제부터는 마음 까지 열고 살아라, 하는 세미나이니 얼마나 따분한 세미나이겠습니까? 그런데 누구나 싫어할 것 같은 이 세미나, 얼마나 뜨거운 반응인지, 제가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부흥회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런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될 것 같은데 안 되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안 될 것 같은데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이처럼 주님이 이끄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 옳거나 좋아 보이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끄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부관계나 자녀 교육이나 직장생활이나 교회 생활이나 오직 주 예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우리 삶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나로 말미암아 역사하셨다고 간증할 수 있게 됩니다.

 

:22-24을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했고 스페인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당시로는 땅 끝이라고 여겨졌던 곳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방향을 틀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24 그러나 지금 나는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이방인 선교, 이제 막 시작이고 한도 끝도 없는 일인데, 예루살렘 교회에는 왜 간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항상 주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마음대로 했다면 그는 바로 로마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로마는 당시 세계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먼저 들렀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께서 이끄시는 삶을 살았음을 말해줍니다.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의 이방인 교회가 구제헌금을 모았기에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전달한 다음 로마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구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 이방인들에 대하여 완전히 마음 문이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방인 선교에 대하여 의심하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정말 주님의 역사일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 아니야?” 게다가 이방인 교인들에게 할례 받아야 한다는 등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강했습니다,

 

주님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도 원하셨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을 먼저 원하셨습니다, 15장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흉년든 예루살렘에 이방인 교회의 헌금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매우 힘든 길입니다. 여행이 힘든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마음이 닫혀 있는 유대인들이 힘든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30-:32까지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화를 당하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갈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의 성령께서 강권하셨기 때문에 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기가 막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도 바울은 로마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안전하게 로마로 오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문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로마서를 읽었다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살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시켜서 이루어 놓으신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는 삶은 정말 복된 삶입니다. 물론 여러분에게 주님께만 순종하고 산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복음을 알게 된 후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순종해 보려고 애를 쓰면서 제 삶이 너무나 불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대학원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부산제일교회로 갔습니다. 안산광림교회에서 초청을 받았을 때, 온 교인들의 허락을 먼저 구했습니다.

 

창천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을 때, “돌짝밭 길 외면치 않겠습니다.” 고백한 까닭에 선한목자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순간순간 제겐 너무나 두려웠지만 오직 주님만 따라 살려 했기에 지금 여기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제 5살짜리 아기 엄마가 고민을 상담하였습니다. 이 아이가 유치부 예배를 드릴 때 눈물이 난다는 것입니다. “엄마 나 왜 그래? 왜 눈물이 나는 거야?”엄마는 어린 아이가 은혜를 받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네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그런 거야?’ 라고 대답해 주었는데, 아이는 너무나 실망하더랍니다. ‘

 

또 그 이야기냐?’는 표정으로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이 계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데, 아이는 전혀 감격도 안 되고 놀라운 일도 아니고 엄마가 늘 하는 이야기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놀라운 일에 대하여 왜 우리 아이는 놀라지 않고 따분하듯 듣는 것일까요?” 라고 물어왔습니다.

 

사실 제가 그랬습니다. 그것도 고등학생 때, 주님께서 제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듣고 은혜받기 보다 좌절했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믿는 척 할 뿐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주님께서 다시는 음란한 것들을 보지 않겠다고 약속하라 하셨을 때, 한 시간 동안 괴로워하다가 죄송해요하고, 일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복음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니 그 복음이 귀한 줄 몰랐습니다.

 

여러분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십니까? 로마서에서 놀라운 십자가 복음을 듣고도 그것으로 그치시렵니까?

 

지난 주간 영남권 영성일기 세미나가 열렸던 대구 칠성교회 장로님 한 분이 손주를 보시면서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고 고백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 같은 이 표현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얼마나 손주가 사랑스러우셨으면 손주를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는 것일까? 그래서 손주의 손을 만지고 뺨을 부비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제 마음이 그러합니다. “주여,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주님을 보고 싶습니다.”

 

주님을 더 분명히 보아야, 저는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정말 그렇게 사랑스러울까요? 어린 손주를 보시면서 너무나 사랑스러워 하시는 할아버지 장로님을 통하여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손주가 할아버지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일까요? 계속 돌보아주어야만 하고, 어리광이나 부리고, 해 달라는 것만 많은 손주인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리 사랑스러우니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확증해 주셨습니다. 어제 큐티 중 붙잡은 말씀입니다.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열쇠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입니다. 로마서는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루어졌음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보시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실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런 사랑의 교제 중에 살게 된 것입니다. 주님과 이런 교제를 나누기에, 무한 반복되는 것 같은 일상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시련의 때에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고난의 시간이 지나가 버린 것을 깨닫게 됩니다.

 

로마서는 놀라운 성경입니다. 주님과 친밀하고 사랑이 넘치는 교제의 눈을 열어줍니다.

 

순종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해 줍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은 단순하고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 예배에 오신 그 감각으로 모든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왜 나오셨습니까? 재미있어서 오셨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오셨습니다. 편히 쉬려고 오셨습니까? 다 아니실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오셨습니까? 여러분 마음에서 주님이 이끄셔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하셨습니다!”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만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모든 삶을 주일 예배 드리듯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길, 반대가 많은 길이라도, 고생의 길, 두려운 길이라도 생명이시고 왕이신 주님께 순종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 대하여 주님이 하셨습니다.” 하고 간증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오직 주님께 순종만 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생활이 주는 유익 2 /15:1-2/ 김병삼 목사

2016-03-16 15:36:07

 

[로마서 151-2]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지난 시간에는 중보기도의 유익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꺾어도 되는 기도라고 말입니다.

또한, 중보기도의 동역자가 된다는 것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이며 주님의 몸된 교회의 리더로 세워주신 목회자에게 중보기도가 얼마니 힘이 되는지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중보기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영적 싸움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중보기도가 얼마나 큰 능력이 되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 중요한 사역의 하나인 중보기도를 통해 만나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보았던 중보기도에 대한 이야기로 열어보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중보기도 운동을 확산시킨 피터 와그너 박사의 기도 동역자 신디 제이콥스가 어느 자매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신디는 그녀가 기도하는 지하실을 내려가 봤습니다. 거기서 종이 상자가 놓여 있는 작은 깔판을 발견했습니다. 신디는 저기 있는 저 깔판은 뭐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자매는 , 제가 기도하는 곳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디는 깔판 위에 무릎을 꿇고 사진으로 가득한 종이 상자를 집어 들었습니다.

 

이것들은 다 뭐예요?” “기도해 주는 사람들의 사진들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세요?”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지요.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제게 가져왔습니다.”

하며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제 되었다!”라고 하실 때까지 기도한다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하나씩 사진을 넘기는 신디의 가슴에 감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진 위에 눈물로 얼룩진 자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매에게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줄 수 있는 마음을 심어주셨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

이 땅 위에는 누군가를 위하여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무거운 짐을 지고 기도하는 용사들 말입니다.

 

이것은 때로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시키시는 일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도 종종 그런 기도의 경험이 일어납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갑자기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그런 마음 말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초청받아 설교해야 할 때면 종종 강단 뒤에서 그런 기도를 하곤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제가 준비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나요? 하나님, 여기에 저를 보내신 이유가 누구 때문인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 누군가를 위해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지난해 알래스카에서 연합집회를 인도하고 난 후의 일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저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이번 집회는 제 동생을 위해 열렸습니다. 목사님이 알래스카에 오신 이유는 딱 제 동생 하나 때문인 것 같아요.”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적어도 말씀을 전하기 전에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 것이, 그 누군가에게 역사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제가 만나 교회에서 처음으로 청년들을 맡아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청년 예배를 현대예배라는 이름으로 바꾸면서 막 부흥하고 있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예배를 마친 후 여자 분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교인은 아니었지만, 찬양이 좋아 참석했던 한 권사님이었는데, 저에게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지난밤에 만나 교회 꿈을 꾸었습니다. 글쎄 만나 교회 청년들이 본당을 가득 메우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꿈을요.”

저는 그 당시에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 정말 좋은 꿈을 꾸셨군요. 감사합니다.”

 

100여 명밖에 모이지 않는 청년들과 함께 200석이 채 되지 않는 청년 예배실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렇게 큰 시온 성전을 가득 메운 청년들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정말 꿈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여자 전도사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다른 교회에서 사역하는 전도사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서 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저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는데, 만나 교회 청년들이 본당을 가득 메우고 찬양과 기도를 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가 그 비전에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기도의 하모니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도 같은 비전을 가지고 청년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만나 교회 부흥에 대한 비전이 아니라 분당과 성남지역에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영적 부흥에 대한 비전이었습니다. 만나 교회가 청년들의 영적 부흥을 위한 센터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비전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에 순종하며 나갈 때, 기도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청년공동체가 몇 번 깨지는 아픔도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기도의 씨가 자라고 있음을 봅니다.

 

중보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한다는 것은 인간들이 경험하는 좌절의 순간에 무릎을 꿇지 않고 극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변화산 기도회를 인도하면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시험하는 가장 큰 유혹은 돈도 명예도, 성적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좌절절망입니다.

 

좌절이 무서운 것은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위해 기도를 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기도를 믿는 자의 특권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도하는 그 순간 우리에게 소망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통 가운데 있는 로마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로마서 55절의 말씀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을 부끄럽지 않게 하십니다. 이 믿음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쉴 수 없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요?

 

 

약한 자들을 위하여

오늘 본문은 특별히 강한 자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연합하며 기도하는 것은 혼자 하는 기도보다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중보기도 팀들이 기도 합주회혹은 ‘seed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전도서 412절의 말씀을 보세요.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 가운데 종종 불협화음이 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참 분위기가 좋을 것 같은데 영적 교만이 틈타면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기도가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떤 면에서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의 질서를 잡아주는 듯합니다. 영적 수준이 다르듯 기도의 수준도 다릅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기도하는 자의 기준이 아닌 함께 기도하는 사람 혹은 기도 대상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어느 감리교 목사님의 간단한 수필 가운데 나오는 글입니다. (한희철 목사님의 글)

매주 토요일마다 원주에서 모이는 한 모임이 있습니다.

 

어느 날인가 조금 먼저 나가 모임을 기다리게 되었는데, 마침 모임을 하는 방 한구석에 기타가 있어 집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잡아 보는 기타였는데, 기타는 줄이 모두 풀려 음이 제각각이었습니다.

 

맨 아랫줄부터 음을 맞추기 시작하는데, 세 번째 줄에 이르러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음을 조이고 풀고 하는 나사가 고장이 나 꼼짝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나사는 요지부동, 꼼짝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기타 줄을 맞출 길이 없어 기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기타를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음을 맞춰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맨 아랫줄 음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나사가 고장 나 풀 수도 조일 수도 없는 세 번째 줄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음이 전체적으로 낮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기타 음을 모두 조율할 수가 있었습니다. 낮은 기타 음에 맞춰 노래를 부르니 그건 그것대로 좋았습니다.

 

낮은음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를 때 문득 마음속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우리네 삶이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 하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가 중보기도를 할 때, 어떻게 하면 멋진 기도의 하모니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능히 믿음이 강한 자가 담당해야 할 부분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415절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우리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없어 스스로 설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함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강한 자, 많이 가진 자, 잘 생긴 사람, 많은 재능을 가진 자를 기준으로 하지 않습니다.

 

중보기도는 우리에게 부담이 됩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짐이 됩니다. 아마 초대교회에도 함께 신앙 생활하는 공동체에 짐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누군가의 짐을 진다는 것은 버거운 것입니다.

 

나의 짐 위에 남의 짐을 더 얹는다는 것이 왜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갈라디아서 62절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일방적으로 짐을 져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짐을 지는 것입니다.

혹시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그럼 이 이야기의 새로운 버전도 아시나요? 우리가 아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개미는 열심히 일해서 겨울을 준비하지만, 베짱이는 놀고먹다 추운 겨울에 구걸한다는 비참한 이야기.

 

그런데 새로운 버전에서 이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베짱이가 없는 곳에서 개미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답니다.

개미가 열심히 일한 것은 본래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개미가 일하도록 베짱이가 열심히 노래를 불러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베짱이는 사라져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개미가 일하는데 옆에서 노래를 불러줘야 한다는 것이죠.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짐을 진다고 생각하지만, 기도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납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길입니다. 사랑의 법, 생명의 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짐을 질 때, 기쁨으로 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짐을 진다는 것을 부담으로 생각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짐을 질 때 결코 손해 보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사역하면서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가장 멋진 표현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8절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역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바라보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그래서 그는 늘 자신의 양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옥중에 있으면서도 안심이 되지 않아 편지를 많이 썼던 이유가 바로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처음 목회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은혜를 받고 목회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되면서 제가 기도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며 어떤 장로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제 마음의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교인들을 생각하며 우시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나에게도 저런 마음을 주세요. 교인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저 마음을 주세요.”라고 기도했던 그때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픔을 알고, 내가 느낀다는 것이 무거운 짐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사역자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많이 아프던 때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이 저의 문제가 교인들의 문제를 보면 제 가슴에 담아 둔다는 것이죠. 오히려 의사가 저에게 조언하더군요.

 

목사님! 어렵고 힘든 이야기를 들으면 던져 버리세요. 하나님께 맡기세요. 왜 목사님이 그걸 끌어안고 고민하세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회 초년병시절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억울한 말을 들을 때, 혼자 흥얼거리던 찬양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준 이 모든 괴롬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Action Plan -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오늘 우리는 아주 중요한 중보기도의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이 기쁨이 불의한 기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라도, 짐을 지는 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헤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부분이 우리가 아주 심각하게 묵상하며 기도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되는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선을 이루고” “do what is for his good”

덕을 세우도록” “build him up in the Lord”

 

첫째로, “for his good”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나에게 돌아올 어떤 이득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기도는 온전히 그 사람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과 봉사하는 삶을 살다가 스스로 실족하고, 스스로 상처를 받는 것은 꼭 세상의 원리인 “give and take”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보기도의 원리는 오직 그 사람을 위하여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중보기도가 당신 마음속에 보상심리로서 작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중보기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인데, 자신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중보기도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거나 기쁨을 이루는 일이 되지 못합니다. 이 부분에서 중보기도는 세상의 원리와 분명히 구분됩니다.

 

예를 들면, Regan이라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도움을 받으면 자신도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입증했습니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한 그룹에는 실험협력자가 밖에 나갔다 오면서 음료수를 두 병을 사서 오고, 다른 그룹에서는 자기 것만 사 가지고 오게 시켰습니다.

 

그다음에 실험 협력자가 복권을 팔도록 했는데, 음료수를 얻어먹은 그룹에서 복권을 두 배 이상 샀다는 것이죠. 이런 현상을 호혜성의 법칙이라고도 말을 합니다.

 

즉 도움을 받으면 돕고 싶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이 호혜성의 원리를 이용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매우 있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매우 있습니다.

 

사실은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경우가 아주 많이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여기에도 어른들이 많이 계시는데,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들이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한다고 합니다. 노인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고, 작은 호의를 공짜로 계속해서 베풉니다.

 

그리고는 물건을 소개하지요. “안 사셔도 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그러면 그 노인들은 받은 친절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친절보다 더 큰 손해를 감수하고 물건을 사게 됩니다.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는 몹시 나쁜 상술이 있습니다.

로버트 치알디니가 쓴 [설득의 심리학]이란 책에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속아 넘어가는지를 실험을 통해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서 기부금을 모금하는 사람들이 만원이나 이만 원 정도 되는 어떤 티켓을 사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내키지 않는 경우에 쉽게 거절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천원이나 이천 원 정도 되는 아주 작은 물건이라도 사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큰 것을 거절한 사람은 상대방의 작은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사는 경우가 매우 있다는 것이지요.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았을 때쯤에는 물건 판 사람이 사라진 다음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중보기도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기도입니다. 내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바라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위대함은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아주 강력한 도전은, “당신이 하는 행위가, 당신의 기도가 결국은 당신을 기뻐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덕을 세우는 것이란, “build him up in the Lord” - 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우리가 특히 주의해야 하는데,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지만, 그 기도의 내용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인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제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여러분이 여기에서는 아멘을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실천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언젠가 청년들과 함께 가평에 있는 야전 수송학교를 위문하고 설교하고 왔을 때의 일입니다. 아들을 군에 보낸 부모님도 몇이 함께 갔습니다.

 

그중에는 바로 그 부대로 오게 될 아들을 둔 부모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군 생활을 하게 될 부대가 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또한,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조마조마하겠습니까?

 

이러한 상황 가운데 신앙을 가진 부모가 주님 안에서하는 기도란 어떤 기도고, 어떤 기도가 을 세우는 기도일까요?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가 가야 하는 군대를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가도록 기도하는 것, 아니면, 군대에 가더라도 가장 편한 곳에 가도록 중보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우리 자식 중에 누군가 편안한 곳으로 나온다면 힘든 그 자리는 누군가 들어가야 할 자리가 아닐까요? 내 아들을 위한 기도가 누군가의 아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면 덕을 세우는 당당한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중요한 기도는 내 아들이 어떤 곳에 가느냐가 아니죠. “하나님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 아들이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사명과 책임을 피해 가는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중보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과연 그 기도가 주님 안에서 세움을 받는 기도냐?”라고 말입니다.

 

이제 자녀들을 위한 중보기도의 내용이 바뀌어야 하지 않나요?

오늘 중보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짐을 질 정도의 분량이 되어 가는 듯합니다.

 

이 땅의 많은 부모가 대학 입시를 앞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좋은 대학?” 그런데 그 대학의 정원은 정해져 있습니다.

 

정원이 정해져 있는데 기도하는 부모가 그 학교의 정원보다 많으면 하나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기도를 들어주셔야 할까요? 부모의 노력, 기도의 양이 필요한가요? 그러면 그 양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나요?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의 자녀들이 가장 적절한 곳에 쓰임 받기를 위해 기도하지 못할까요? 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지 못할까요?”

우리 아들이 서울 대학에 필요하다면 꼭 보내주세요.

 

우리 아들이 실패의 아픔을 맛보아야 한다면 잘 감당할 수 있는 아들이 되게 해주세요.

우리 아들이 실력은 안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당신의 손길을 깨달을 수 있다면 은혜를 허락해 주세요.

 

그러나 우리 아들이 노력하지 아니하고 은혜로만 살아가는 아들이 되지 않도록 실패와 좌절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면 인도해 주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움 받는 아들이 되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안에서 세움을 받는 그 누군가의 모습을 그려 보세요.”

당신의 가치로 세워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을 말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는 그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많은 빚을 지고 있는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부채를 탕감하는 누군가의 손길이 덕을 세우는 것인지, 어려운 시기를 인내하면서 이겨내는 것이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인정하시나요?

 

만약 전쟁에 나가 있다면, 전쟁에서 나오는 우리의 행동은 훈련된 것들이 아닐까요? 왜 군인들이 훈련을 받나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이지요.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습관화된 훈련이 필요합니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훈련이 무엇일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 어쩌면 나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 같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특별한 영적 훈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기도의 습관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여러분의 삶에 어떤 시간을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예수님은 주로 새벽에, 그리고 한적한 곳을 찾아서 기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에서 홀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새벽예배의 전통은 길선주 목사님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 교회의 Trade Mark처럼 되어버렸는데,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가장 유익한 전통임과 동시에 가장 힘든 전통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꼭 새벽에 기도해야 된다, 혹은 어떤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의 삶에서 정해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군 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환자들을 대상으로 점호가 시작되기 전 시간에 꼭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새벽예배와 똑같이 저녁 9시에 매일 기도회로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벽이냐 밤이냐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영적 생활을 습관화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장소가 핵심은 아닙니다.

 

그러나 새벽이나 밤에 교회에 나오는 것이 유익한 것은, 집보다는 교회가 기도하기 좋은 장소요, 한 사람보다는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기도의 불이 붙을 수 있으며, 주일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나무 생각을 매일매일 묵상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늘 곁에서 떠나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이죠.

 

문제는 우리가 어느 시간에 기도하느냐가 아니라, 기도가 지속적인 습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보좌의 방에 들어갈 수 없는 시간은 결코 없습니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에게 어떤 사람이 기도의 습관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매일 여러 시간을 기도합니다. 늘 기도 속에서 살지요. 걸을 때나, 누울 때나, 일어날 때나 언제나 기도합니다. 그러고 응답은 항상 옵니다.”

 

사단은 기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어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늘 방해합니다. 기도의 습관을 지니려고 하는 우리에게 사단은 여러 가지 전략을 동원해 우리를 막을 것입니다.

 

사단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그림자가 기도하는 사람을 덮고 있을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보내는 편지에서 영적 싸움에 대하여 이렇게 권면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에베소서 6:11)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에베소서 6:16)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믿음의 방패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를 공격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격을 에베소서에서는 불화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중보기도란 불화살을 소멸하는 믿음의 방패와 같은 것이다!”

사단은 오늘도 우리에게 불화살로 공격합니다. 그것이 질병이든, 경제적인 어려움이든, 이혼의 위기이든, 자녀들의 문제이든, 혹은 미움과 분노로 인해 잠 못 이루는 것이든 우리를 공격하죠. 이 공격을 받는 순간 영적 침체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리고 불화살이 우리에게 떨어지면 모든 것을 순식간에 태워버릴 수 있습니다.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리는 것이죠. 이때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믿음의 방패를 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았던 글래디에이터같은 영화를 떠올리면 좋을 듯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쓰던 방패는 길이가 1m 20cm가 넘었다고 합니다. 몸을 움츠리면 그 방패로 충분히 몸을 가릴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그냥 들고 다니지만, 전시가 되면 가죽으로 만든 부분을 물로 적시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화살이 날아와서 방패에 꽂히면 곧 소멸이 되도록 말이죠.

 

사단이 아무리 불화살을 쏴도 믿음의 방패만 있으면 곧 소멸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 모두에게 사단의 시험은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렸습니다.

 

여러분의 영성을 방해하는 모든 시험에 대하여 믿음의 방패를 외치십시오.

또 한 가지 상상해 봅시다. 방패를 든 군사들은 개별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영화 장면을 찾으면 좋을 듯)

 

불화살이 빗발치듯 날라 올 때, 이들이 모여서 진을 짜는 모습을 말입니다. 화살이 들어올 빈틈을 주지 않고 물샐 틈 없이 진을 짜는 것입니다. 진을 짜지 않아 소멸되지 않고 불붙은 화살이 뒤로 떨어지면 불이 타들어 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어도, 내 가족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화살을 맞으면 나에게로 불이 번져오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왜 우리가 동역하며 기도해야 하는지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지난 시간에는 교회와 목회자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결국 중보기도가 나를 지켜주는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함께 중보기도의 진을 짜고, 믿음의 방패를 들어야 합니다.

 

악한 자의 불화살을 소멸해야 합니다.

우리가 공격하는 마귀를 막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귀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귀의 공격을 소멸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보기도의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당신은 누구와 함께 기도의 진을 짜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단히 훈련해야 하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그리고 바뀌어야 할 기도의 내용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성지순례에서 그 답을 얻다 /15:13-21/ 김병삼 목사

2016-03-10 11:41:58

 

7 - 로마에서

 

7. 사명

[로마서 15:13-21]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막으셔도

로마는 사도 바울에게 특별한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 가고 싶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던 곳이 로마였습니다.

 

로마서 1522절을 보면,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라고 되어 있지요. 결국, 마지막에는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서 2년여를 머물다가 순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소원하던 로마에는 가지 못했지만, 로마교회와 사도 바울 사이에 교제가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쓰는데,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그곳에서 귀한 믿음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만나죠, 그런데 그들을 로마에 보냅니다.

 

로마서 163~4절을 보세요.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가장 사랑했던 동역자를 보내며 문안하게 했던 곳이 로마입니다. 로마에 대한 사도 바울의 애틋한 사랑은, 어쩌면 그들이 당하고 있는 상황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로마서는 특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소망과 인내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들 역시 교회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는 A.D. 56~57년경으로 추측합니다. 가장 완숙한 그의 신학적 결정체를 담아내고 있고요.

로마가 당시 세계를 지배하며 내걸었던 정책이 'pax Romana'이었습니다. 피지배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관용하는 것이죠, 단지 황제를 숭배한다는 조건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글라우디오 황제(42-54)때 전도를 금지합니다. 글라우디오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추방한 듯합니다(18:2).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로마인들과 함께 잘 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아는 자들은 절대로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죠.

 

그런데 몇 년 후 글라우디오는 감옥에 갇히고 그가 양자로 입양한 후계자 네로가 왕위를 차지합니다. 네로는 다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의 귀환을 허용합니다. 집을 되찾고 거주 구역을 재건한 유대인 공동체는 더 이상의 말썽을 피하려고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상황이 됩니다.

 

유대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을 당하는 상황이죠. 고린도와 아덴에서도 있었던 일들이 로마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인구는 100만 명 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그 중의 절반이 노예였습니다. 로마는 당시 귀족과 특권층에게는 살기 좋은 곳이었지만, 노예들과 도시 빈민들에게 아주 비참한 도시였을 것입니다. 더더욱 그런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달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소망의 복음, 은혜의 복음, 의의 복음은 로마 교인들에게 무척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64년에 시작될 네로 황제의 큰 핍박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그의 길이 막혀도 그의 사역은 막히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늘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고린도와 아덴에서의 경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맥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요. 오늘 본문 16절을 보세요.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죠.

 

사도행전 17~18장에 나오는 것처럼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겠습니까?

유대인들의 고소로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히는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다면 마지막에 로마에 갈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소원은 자신이 생각했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계속해서 진행되었던 것이죠.

우리가 선을 행하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나와 방법이 다를 뿐이죠.

 

얼마 전 어떤 교인과 함께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라는 것이죠. 친척들의 모임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이 못살면 체면이 안 선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축복만을 누리면 영성이 떨어집니다. 고난이 사라지면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로마서의 복음이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은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복음을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사람들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한, 복음의 능력은 가장 어렵고 힘든 곳에서 역사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국의 한 청년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를 지망했습니다. 수속절차를 거의 끝내고 마지막으로 출발을 확인하려고 뉴욕에 갔는데, 거기서 그만 선교사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불합격된 것입니다.

 

이유는 그의 부인이 아프리카의 기후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체질임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부인과 함께 고향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헌신의 각오를 했는데 이루지 못하니 실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선교사로 가지는 못하지만, 돈을 열심히 벌어서 선교사의 일을 돕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 청년의 아버지는 치과 의사였는데 부업으로 교회의 성찬식에 사용하는 포도즙을 만드는 사업을 했습니다. 청년은 자기 아버지의 그 사업을 인계받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돈을 쓰겠다는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사업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결심한 대로 사업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돈을 정성껏 헌금하였습니다. 그는 한 영혼이라도 먼 이국에서 주님께 인도되는 것을 기뻐하며 거액의 선교비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이 바로 Welch이었고 그가 만든 포도즙이 그 유명한 Welch 포도즙입니다. 지금도 그의 가족들은 좋은 포도즙을 계속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참 멋진 고백이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에게서 로마는 막으심으로 말미암아 열린 사역의 지평이었습니다.

그의 갈망과 하나님의 길이 같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막혔던 길이 뻥 뚫려 있음을 발견하는 것 말입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3)

 

은혜가 혔는엇인가요? 막혔지만, 더 이상 막히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인가요? 지금 자신 앞에 펼쳐진 삶을 즐기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에는 편지를 쓰는 사도 바울에게 그의 갈망이 막혀있으나, “그 은혜로 말미암아이방인을 위해 사역하고 있음을 간증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로마에 가지 못했지만, 로마에 있는 교인들을 위해 소망을 이야기하고, ‘인내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랑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생의 수치를 자랑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지 못한 것, 복음을 전하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버림을 받고 능욕을 당하며 매를 맞았던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7~19절 말씀을 보세요.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17절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었다면, 어떻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인생이 자랑스럽겠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일은 내 꿈이 깨어져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지 않으면, 내가 알지 못하면, 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섬기는 일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섬김이란 부리는 자의 능력이 드러나고, 부리는 자의 계획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가 초창기 BTD영성 훈련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섬기는 사람들때문이었습니다.

처음 영성훈련을 시작하기 위해 다른 community를 통해 훈련받고 온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똑같이 섬긴다고 하는데 방법이 다른 것 때문에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꼭 이렇게 싸우면서 해야 하는가?

그런데 그 일을 계속하게 하였던 것은, 싸우는 사람은 싸우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더라는 것이죠. 그것이 저로 하여금 멈출 수 없게 만들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영성훈련이 이제 13년이 됩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을 돌이켜보면 저도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영성훈련을 통해, 중국, 사할린, 뉴질랜드, 제주도, 동경에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CTS, CBS 직원들에게, 그리고 많은 한국교회 사모, 청년, 대학생, 청소년에게 복음을 전하고,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BTD 영성훈련을 보면서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지금 팀멤버들의 봉사를 보면 철저한 순종과 섬김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렇게 아름답게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갈등을 안고 싸우던 때, 힘들던 때도 자랑스럽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섬김과 신앙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이루어 놓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고린도 전서 22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많이 배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움의 방식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지난 두 주를 통해 배웠지요.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그가 그렇게 열심히 변증했던 것은 그가 가졌던 학문 때문에 가능했고, 고린도에서 그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회당에서 유대인을 중심으로 목회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시가 있는 것을 잘 용납할 수 없었죠. 그가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질병이 나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고린도 후서 12장에서 그가 세 번씩이나 간절하게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 역시, 그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을 봐도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방식대로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의 영성과 그의 재능, 그가 활용할 수 있는 많은 것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결과도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계획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것이 그가 바로 살아 있고 사역해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멋진 말인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사건을 보고 판단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사건과정으로 봅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게 되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19절입니다.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지나놓고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중에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본질적인 것에는 부수적인 사건들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문제는 본질에 집착하지 않고 부수적인 것에 매달린다는 것이죠.

참으로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이 기적을 행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기적들을 통해 복음의 도구가 되게 하셨던 것이죠.

 

복음을 전할 때, 귀신들이 떠나갔습니다. 병자들이 나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병이 나아야, 기적이 일어나야 복음이 전해질 것으로 생각해서 표적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복음의 본질을 벗어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에 관한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프란시스가 그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시내로 가서 설교를 합시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로 나가 걸어 다니며 시장의 갖가지 모습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둘이서 나누고 또 자신의 영적인 체험에 대해서도 대화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 프란시스의 제자가 깜짝 놀라서 외쳤습니다.

 

"어쩌죠.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걸 깜빡 잊었어요."

그러자 프란시스가 웃으며 제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형제여 우리가 시내를 걸어 다니던 모든 시간 동안 우리는 설교를 한 것이요. 사람들은 우리를 보았고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을 거요. 그리고 우리의 표정과 행동들을 보았을 거요. 그것이 바로 우서의 설교였소."

 

그리고 나서 프란시스는 덧붙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이것을 기억해 두시오. 우리가 만일 걸어가면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설교의 참뜻을 잃어버리고 있는 거요."

 

 

사명

오늘 본문의 결론은 어쩌면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명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을 전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쉬운 길을 가지 않기로 한 것이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쉬운 길을 갈 것인지 어려운 길을 갈 것인지. 그런데 어려운 길을 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도 많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좋은 교인을 보면 부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교인이 되기까지 누군가에 의해 복음을 들었을 것이고, 훈련을 받았을 것이라는 과정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복음의 역사는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오늘날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은 교회를 키우는 것과 생명을 살리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 들어서 일대일 제자양육을 강조하고, 모든 목회자로 하여금 목양하도록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양하지 않는 교인들, 생명을 잉태해 보지 않은 교인들은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그가 생명을 얻은 기쁨은 늘, 생명에 빚진 자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생각을 해보셨나요?

 

아주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후 독일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마틴 니뮐라라는 목사가 '2차 대전 책임 백서'라는 것을 발표해 굉장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에 대해 그는 히틀러를 비방하기보다는 독일 교회와 하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로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가 히틀러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지나가는데 제 뒤에 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께서 '너는 왜 나를 믿지 않았느냐?'하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아무도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소리가 익숙해서 돌아보니 그는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이 사건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은. 그때까지 그가 죽기를 바란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은 것에 모두 책임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삶이 자유롭지 못하고 삶이 공허하고 불안하고 뒤틀려 있는 사람들 그래서 인생의 자리에서 악을 쓰고 있는 이웃들 그들이 느끼는 삶의 절망에 저와 당신은 책임이 없습니까?

 

사도 바울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듣지 못한 자가 듣게 되고, 보지 못한 자가 보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신 때문에 말입니다.

 

사명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당신에게 펼쳐진 모든 삶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음을 믿으며,

결코 놓지 못할 일이 있다는 것이죠.

 

지난주 교회 리모델링을 놓고 최종적인 회의를 했습니다.

천장의 공조 시스템 공사를 다시 해야 하고, 3층의 로비와 아이들을 위한 공간,

그리고 사각으로 되어 있는 성가대석, 2~3층 통로를 만드는 일,

 

영상장비, 음향장비를 지금 있는 것을 가지고 사용한다 해도 꽤 돈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헌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그리고 교회가 더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지 않기로 선포한 상태에서 말입니다.

 

더는 교회를 짓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사명이 무엇인가요?

요즘 중국에서, 북한에서, 전국 각지에서 세계 곳곳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소식을 접하며, 우리 교회의 사명은 큰 건물을 가진 큰 교회가 아니라, 복음의 영향력을 가진 큰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를 다시 고치는 것에 대하여 대부분이 아직 알지 못하지만, 너무 사치하다는 이야기들이 떠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큰 본당과 3~8층 까지를 새롭게 고치는데 17억이 드는 것, 냉난방을 포함한 전체 공조 시스템을 고치는데 17억 정도가 소요되는 것,

음향과 영상, 조명 장비를 교체하고 보완하는데 37억 정도의 돈이 드는데, 그만큼 하나님께서 쓰실 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고민을 했습니다.

70억의 가까운 헌금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 더 옳은 일은 아닐지,

제가 교인들과 함께 그 정도의 돈을 가지고 건물을 사서 나가면 또 하나의 교회가 세워지지 않을까도 고민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나 교회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교회가 여기에 세워진 이유, 무엇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는 지 말입니다.

한국에 있는 모든 방송국과 배를 타고 나가는 사람들, 목회자 없는 세계 곳곳에서 우리 교회 예배를 인터넷으로 DVD로 드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 교회에 주신 특별한 사명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슴을 뛰게 했던 사명이, 여러분과 우리 교회에는 무엇인가요?

 

 

 

 

 

옳다는 것 때문에 성질부린다 /15:2-/ 박영선목사

2015-07-30 14:17:35

 

예수를 잘 믿으면, 뜻밖에 에 기울어지게 된다.

*: , righteousness, justice

 

그래서 예수를 잘 믿는 사람 중에, 성질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가 옳다고/의롭다고 스스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은 잘 못 믿는 것임)

 

내가 옳다는 자기 의에다가

명분’.. 그 일을 하는 목적이 선하다는 게 보태지고

헌신’.. 거기에다 그 일을 하는데 충성심, 헌신까지 덧붙여지면

도저히 말릴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아마 과거에 군사혁명 하신 분들이.. 이렇게 무장해서 무모하게 밀고 나아갔다.)

 

예수님은 의로우셨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을 존중(사랑)하셨다.

다시 말해서, 관용과, 너그러움, 미소로 사셨다. 여전히 의로우시면서도.

 

사람이, 옳고 또한 명분에 사로잡혀 있으면

자칫 잘못하면 사람이 삼엄해 진다.

표정이 굳어지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미소가 사라진다.

 

여러분, 진지한 태도는 좋은 것이나, 그러나 심각/삼엄해 지는 것은.. 좋지 않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사람이 사나워진다는 것이다.

자기가 옳다는 이유(일방적 착각) 때문에.

 

그래서 도저히 그에게 쉽게 접근할 수 없고,

용기를 내어 접근해서, 말을 붙여 보지만, 대화가 안 통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옳은 사람의 문제이다.

 

1. 그러므로 옳은 주장을 펴실 때, 미소를 잃지 마시라!

예를 들면,

교회는 이러 이러해야 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이런 거야!’

우리는 지금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해!’

 

이렇게 교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말은,

미소를 띠고 주장하시라는 것이다.

 

미소를 잃고, 사납게 자기주장을 앞세우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의 주장(주님 뜻)을 획일적이고 강제적으로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이다.

 

2. 교회, 목회의 비결은 끝까지 기다리는 것

그러면 옳은 주장을 발설하지 말라는 뜻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자기 주장이 아무리 옳더라도,

남들이 자기 주장에 자발적으로 따라 줄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라는 것이다.

성질부리지 말고. 미소를 유지한 채로.

물론 시간은 꽤 걸릴 것이다.

 

하나님은.. 미숙한 우리 각자를 끝까지 인내하시며 기다리며 받아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자기의 의의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셨다면.. 우리 중에 아무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교회에서) 미숙한 우리 각자를 끝까지 받아주시며 이끌어 가시는데,

자기가 옳다는 사람, 남들을 받아주며 기다리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이 대결하면, 사람이 진다.

그래서 옳은 주장을 펴던 사람이, 결국에는 시험 들어 나가 버린다. 중간보다 더 못하게 된다.

 

올바른 명분이 결과를 만들어 내지 않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교회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기 바란다.

그게 하나님이 교회에서 일하시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복지부동하고,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서 활동하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활동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라. (가정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 원리다.)

 

 

3. 교회의 성패는 (조직이나 행정에 있지 않고) 우리 각자에 있다.

 

여러분, 멋지고 훌륭한 교회를 만들려고 애쓰지 마시고,

행복한 교회를 만들어보려고 애써 주시기 바란다.

 

다시 말해서, ‘교회라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교회라는 나 자신 한 사람이

교회에 와서 행복해 하고, 누리고, 따뜻한 교제를 나누고..

이러는 가운데.. 차츰 우리가 행복한 교회가 되어가는 것이다.

 

사납게 지도부에 대시하고,

의롭게 무슨 발언을 강력하게 말하고,

위에서 지도부가 좀 더 활발하게 움직여 줘야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라.

(만약 그렇게 대시하는 사람이 지도부가 되어보면, 상황이 현재보다 훨씬 더 악화된다.)

 

행복한 교회는, 지도부 몇 사람이 행정을 잘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만약 오늘 우리 교회가, 행복한 교회가 아니라면,

그 책임은 우리 각자에게 있는 것이다. (지도부가 아니다.)

 

(교회인) 우리 각 개인이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면,

그런 사람들이 모인 우리 교회는, 저절로 행복한 교회가 된다.

 

나라 문제도 마찬가지다.

미숙한 사람들은, 나라가 잘 못 되면 그 탓을 자꾸 제도나 조직에 돌린다.

(그러면서 자기 개인의 책임은 슬그머니 감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데모 한다.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는 길은, (조직과 행적적 우수성도 필요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우리 국민 각 개인에게 달려있다.

각 개인이 스스로 근면, 성실, 납세,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삶의 질을 높이고, 격이 있는 국민으로 살면.. 그제야 나라가 변하는 것이지,

정치, 사회와 제도의 개혁은.. 겉만 개혁되지, 속으로 바뀌는 것은 없게 된다.

 

그래서 저도 설교할 때, 사회적 이슈를 잘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분은, 우리 목사님은 현실 참여 안 하시는 분인가? 생각한다)

사실은 우리 각자의 개인적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저와 여러분 각자가, 건강한 소시민이 되는 길이,

명분을 가지고, (미소를 잃은 채로) 힘주어 말하는 것보다

나라를 위해서 백 번 더 낫다.

제가 교회 이야기를, 나라를 빗대어 설명해 보았다.

 

열심 있는 것실력 있는 것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은 있는데, ‘실력이 부족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실력은,

자기가 옳은 주장과 옳은 명분을 갖고 있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이 따라줄 때까지 기다려 주는실력이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만 갖고, 실력 없이 뛰어들다가

결국에는 중간보다 더 못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박영선 목사님) 설교를 모호하다고 평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한국 기독교의 큰 틀을 짜는데, 제가 끼어들고 있다고.. 저는 스스로 생각한다.

 

제 설교는, 주로 큰 틀에서 논의되어진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집의 지붕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요즘 가전제품이 해마다 신제품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LCD TV에서 LED TV로 바꾸는 사람도 있고,

냉장고와 컴퓨터를 더 새것으로 교체하는데 열심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제가 주장하는 것은

빨리 지붕을 잘 씌우자는 것이다.

큰 틀을 잘 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집의 지붕(큰 틀)이 허술한 가운데,

아무리 안에 가전제품을 신제품으로 집 안에 들여다 놓아도,

비 한 번 오면 끝 장 난다.

 

그래서 저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하려고 하고,

하나님 나라(여기서 말하는 '')를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제 각각 역할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 /15:1-7/ 김기석목사

2015-06-29 21:00:30

 

본문에 나온 한 대목을 택해서 제목으로 정해놓고, 가만히 보고 앉아있자니 우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받으라'는 말이 갖는 다의성 때문이었는데요. 물론 여기서 '받으라'는 말은 서로 용납하라는 말이겠습니다만,

 

사사건건 남의 말을 물고늘어지고, 툭하면 뜸베질하는 소처럼 이마를 들이대면서 대거리하길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가운데서 오늘의 본문을 혹시 그런 자기 행위의 성서적 근거로 사용하려는 분은 없겠지요.

 

 

믿음이 강한 자, 약한 자

 

바울 사도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강한 사람은 힘이 세다거나, 돈이 많다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말이 아니라, 확고한 믿음의 바탕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믿음이 좋다, 혹은 강하다 하면 여러분 누가 떠오르세요? 흐르는 물처럼 막힘 없이 기도하는 분인가요? 아니면 쇳소리를 강하게 넣어가면서 기도하는 분인가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하루하루가 소중한 날임을 알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항상 자기의 삶이 누군가를 위한 선물이 되기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변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일을 이루실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어떤 일이 자기 뜻대로 성취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자기의 욕망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직 믿고 의지할 구석이 많아서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시골 할머니 이야기 아시지요?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뜨거운 신작로를 걸어가시는 데, 마음 착한 택시 기사가 차를 세우고 가시는 데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까 타시라고 했대요. 할머니는 참 고맙다며 차를 타셨는데, 기사가 백 미러를 통해 보니, 할머니가 짐을 그저 이고 계시더래요. 의아하게 여긴 기사가 물었겠지요.

 

"아니, 할머니 왜 짐을 머리에 이고 계세요?" "이 늙은이를 태워주는 것만도 고마운 데 어떻게 짐까지 맡겨?" 마음 착한 할머니의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시겠다고 하시는 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 짐을 짊어지고 힘겨워합니다.

 

마치 '근심·걱정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조차 싫다'는 식으로 우리는 그 속에 한사코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을 믿어 자유를 맛본 사람들이 볼 때, '염려하는 것'을 자기의 소명인양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믿음이 강한 이들에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비웃거나, 외면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약한 부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칼 야스퍼스는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Mensch-sein ist Mensch-werden)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고정된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히 다른 존재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정죄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성장해야 할 사람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웃들의 따뜻한 배려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변화는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경험할 때 가능한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바울은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이해이고, 믿음인 것입니다.

 

 

선함을 일깨우는 사람

 

바울은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독일의 순교자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기독교인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라고 못박듯 말했습니다.

 

이 말씀이 별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어떻게 사람이 먼저 남을 기쁘게 하면서 살아, 제 코가 석잔데?' 정말 그래요. 하지만 이 말씀을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건 없어요. 조금씩이나마 우리 마음을 남을 기쁘게 하는 방향으로 조율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우리가 이기심에 사로잡혔다 해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다시 한번 마음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어요. ', 이번에도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했네.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자기 마음을 자꾸 살펴야 해요. 중요한 것은 마음의 깨어남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들 속에 있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천사와 악마의 싸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마음을 쓸 때마다 우리 속에 있는 천사가 힘을 얻고, 또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그들 속에 있는 천사도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한 일을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착한 일을 하고 있지' 하는 자부심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선행을 이용해서도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했다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도 마음에 기쁨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가 죽지 않았을 때입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의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우리는 괜한 짓을 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때 사탄은 미소를 짓습니다. 칭찬을 기대하며 하는 선행은 결코 ''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행하는 사랑의 행위만이 우리 품성을 아름답게 만들고,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런데 늘 남을 배려하며 사는 삶은 좀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바울의 대답은 싱거울 정도로 단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 그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이 더 필요합니까?

 

 

보살핌의 윤리

 

이제 '서로를 받으라'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맘에 드는 사람도 있고, 맘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不好에 따라 사람들을 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인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이의 존재를 문제삼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 사람, 어쩐지 재수 없어', '주는 것 없이 미워', '생각만 해도 짜증나'……저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사실 그런 말들은 우리 속에 있는 폭력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육체를 입은 것이 나찌의 유대인 학살이고, 인종차별주의이고, 성차별주의입니다. 우리는 그런 말들을 통해 자기 성장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합니다.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때는 언제입니까? 저는 그것을 '보살핌' 속에서 찾고 싶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누구나 자연발생적인 보살핌의 충동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 개나 고양이·토끼 등 애완동물을 보살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다움은 그런 자연발생적 보살핌의 충동에서가 아니라, 힘들지만 누군가를 보살피려는 의지적인 노력에서 빛을 발합니다. 노인이나 장애인들을 돌보는 사람들도 대개 처음에는 그들을 회피하고 싶은 자기의 감정과 싸웁니다.

 

하지만 자기 감정을 달래면서 그들을 위해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기 속에 고여오는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그의 영혼은 한 단계 고양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사시던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이 께름칙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각별히 보살피셨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다가가셨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여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이방인들과의 접촉도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을 보고 점잖지 못하다고 했을 때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드러내보이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9:12)

 

 

'Be the Supporters'

 

우리가 내 감정의 좋고 싫음을 떠나서 서로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베드로를 끝없는 용서와 사랑과 인내로 갈고 다듬으셔서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지나친 열심 때문에 자기와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박해자가 되었던 바울을 변화시켜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우리들을 변화시켜 성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한 생명 한 생명에 대한 깊디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할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우리 속에 진리를 낳아줍니다. 그 진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그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 달 전 'Be the Reds'의 물결이 이 땅을 붉게 물들였던 것처럼, 서로를 지지해주고, 보살펴주자는 'Be the Supporters'의 물결이 이 땅을 뒤덮게 되기를, 그리고 우리도 그 물결의 일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북돋는 사람들 /15:1-7/ 김기석목사

2015-06-29 11:05:47

 

쏘로우의 콩밭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데 엉뚱하게도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1817년에 태어난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한적한 월든 호숫가로 들어가 지급자족하는 삶을 살면서 아주 소중한 글을 많이 남긴 문필가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운동도 그에게서 받은 사상적 감화였다고 할 정도로 그는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월든}에서 쏘로우는 자기가 가꾸었던 콩밭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콩두둑의 한쪽 끝에는 떡갈나무 관목의 숲이 있어서 그 그늘에서 쉴 수 있었다. 다른 끝에는 검은딸기밭이 있었는데, 김을 한 차례 매고 돌아올 때마다 푸른색의 딸기들은 한층 더 색깔이 진해져 있었다.

 

나의 매일의 일과는 풀들을 뽑아버리고 콩대 주위에 새 흙을 덮어주어 격려하며, 이 황색의 흙이 자신의 여름 생각을 쑥이나 개밀이나 피 같은 잡초가 아니라 콩잎으로 나타내도록 설득하며, 그리하여 대지가 '!' 하고 외치는 대신 '!' 하고 외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월든}, 185)

 

 

그는 일상적인 노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콩밭을 일구다가 쉴 수 있는 그늘이 있어서 좋고, 김을 매고 돌아서면 벌써 색깔이 달라지는 딸기를 볼 수 있어서 좋은 것입니다.

 

쏘로우는 풀을 뽑고 콩대 주위에 흙을 북돋워주는 것을 콩대를 격려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는 또 황색의 흙을 설득해 잡초가 아니라 콩잎을 내도록 합니다. 그래서 자라나는 ''은 흙의 자기 표현이요 긍정이 됩니다.

 

 

은혜로운 말 한마디

 

저는 흙을 설득하고 격려해 아름다운 소출을 내도록 돕는 쏘로우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삶의 모델을 봅니다. 흙이 쓸려나가 뿌리가 드러난 식물에 흙을 덮어주고 다독거려 격려하듯이, 삶에 지치고 낙심한 이들을 보듬어안는 사람들의 모습이야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지쳐 있어서 다른 일을 돌볼 염()을 내지 못합니다.

 

항상 해야 할 많은 일에 치여 살아갑니다. 일을 마치고 나서 그늘에서 잠시 쉴라치면 또 다른 일감이 우리 옷자락을 잡아당깁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은 창조적 노동이 되지 못하고 마지못해 하는 노동, 곧 소외된 노동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 속에 남을 위한 여백이 없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내 짐이 무거워 비틀거립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우리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말 한 마디만 들으면 언제 그랬냐 싶게 마음의 시름을 털어내기도 합니다. 어느 자매의 고백입니다.

 

 

공연히 웃음이 나오고 만나는 이에게마다 장난을 걸고 싶은

기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날인데도 이토록 기분이 좋은 건

동료들에게 들었던 격려의 말 때문입니다.

 

복잡한 일을 처리하느라 주위를 돌아볼 틈도 없이

한 달을 달려왔는데 남은 건 육신의 피곤함뿐이었습니다.

제가 해낸 일이 잘한 건지 남들에게도 필요한 일인지

자신이 없고 오직 일에만 매달려 끌려온 심정이었습니다.

 

잘했던데. 아주 근사해.

밤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야.

한마디 한마디 감사로움을 표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한 달의 고생이 말씀히 씻겨갔습니다.

 

 

이 자매의 동료들은 말 한마디로 행복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말 한마디로 천국을 만들기도 하고, 지옥을 만들기도 합니다. 말은 독약이 되어 사람을 해치기도 하고, 해독제가 되어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는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9:14) 하고 기원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이 주님께 열납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영성생활의 근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위의 자매는 따뜻한 한 마디 말에 한 달여의 고생과 시름을 잊었습니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 이 자매는 자기의 못남을 발견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자기는 다 잘하고 있는데 잘못되는 것은 다 남 탓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세상이 각박하다고 불평만 하면서 자기가 세상을 메마르게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발견과 새로운 삶에 대한 눈뜸, 친절한 격려와 감사의 말 한 마디가 해낸 일입니다.

 

상대방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그의 좋은 점과 유능한 점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잘 표현해 주십시오.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패배주의적인 생각에 젖어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들이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리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은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심려할 줄 아는 사람

 

우리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배웠습니다. 또 그렇게 고백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한 영혼을 마음을 다해 돌보지는 못했습니다. 나의 격려가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서지 못했고, 낙심한 영혼을 북돋워주기 위해 그의 곁에 머물지 못했습니다. 바빠서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이 나의 마땅한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우리 앞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돌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학교문을 박차고 나온 아이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물론 그들은 모범생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 좀처럼 들어오려 하지 않는 말썽꾸러기들입니다.

 

좋게 보면 개성적인 아이들입니다. 그렇지만 남다른 개성은 무질서해 보입니다. 그래서 질서를 대변하는 이들은 그들을 몰아냅니다. 하지만 그들을 끌어안으려고 노력하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천하의 말썽꾸러기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삶의 맛을 돌려주려고 노력하는 선생님들 말입니다.

 

학생들에게 자기 존중감을 되찾게 해주려고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학생들과 함께 뒹구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저는 깊이 감동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는 예수님의 벗들이었습니다. 세상이 각박하다고는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천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어버린 채 무너져내리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려고 애쓰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참 거룩한 이들입니다. 아마존의 숲이 있어 우리가 숨을 쉬고 살듯이 이런 이들이 있어 이 세상은 그래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만 그래야 하고, 우리는 아니랍니까? 왜 우리는 관객이 되어 그들에게 박수만 치고 있나요? 우리도 이제 이 아름다운 일들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얼이 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의 삶을 단순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15:1-2)

 

 

약한 이의 힘이 되어주는 것, 이웃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위'입니다. 우리가 성도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사람다움이란 다른 이를 위해 마음쓰는 데서 나타납니다(心慮).

 

지하철에서 남을 위해 좋은 자리를 남겨두고(다리를 벌리고 앉는다든지, 의자 위에 물건을 모시고 가는 일 따위도), 공공장소에서 목소리를 낮추고(휴대폰 예절), 직장에서 동료들의 불편을 해소해주기 위해 마음 쓰고, 내가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작지만 이런 일들이 우리 몸에 밸 때 우리는 좀 더 영성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15:3). 즉 그리스도는 사사로운 욕망에 굴복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라고 어찌 편하고 싶지 않으셨겠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거듭거듭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를 세우십니다. 머리를 곧게 드신 것(頭直)이지요. 예수님이 항상 당당하실 수 있었던 것은 사욕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이를 배려하다가 스스로 굴욕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나의 선의에 대해 반응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공격적으로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게 아니지 하다가도, 어느 순간 짧은 인생 내가 너무 소극적으로 사는 게 아닌가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도 온갖 모욕을 다 참으셨습니다. 옷을 벗기우고, 갈대를 손에 들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침 뱉음을 당하고, 갈대로 머리를 맞기도 하셨습니다(27:28-30).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굴욕감을 느끼지는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손에 못질을 하는 군인들과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미움과 적의를 온 몸으로 받았지만, 그것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고 사랑으로 바꾸어내셨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진정한 주체가 되는 길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뜻이 같게 하여 주기를, 그리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성도들이 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와는 생각도 다르고, 처해 있는 입장도 다른 이들이 있습니다. 살아온 여정이 다르니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다름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다면 문제입니다.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다른 것을 다르게 놔두지 못하고 같은 것의 틀 속에 집어넣으려 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는 더 큰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최고'라고 떠드는 못난 자아가 사라져야 합니다. 남에게 평화를 주는 사람은 예외없이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아'의 집착에서 해방되었기에 다른 이들과 잘 지낼 수 있고,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크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 자기를 낮출 때(subjection) 비로소 인간다운 주체(subject)가 됩니다.

 

지금까지의 우리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북돋는 사람으로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그들에게서 그런 소중한 것들을 덜어내고 헐어내는 사람으로 살아왔습니까? 주님은 바울을 통해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선을 이루는 길이고 덕을 세우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마음 쓸 때,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 주려고 몸을 낮출 때 주님은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주시고, 더 큰 버팀목이 되어 우리를 세워 주실 것입니다. 형제와 자매의 필요에 응답할 태세를 갖추고 살 때 우리는 하늘의 신비에 눈뜨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사 마인드 /15:19-23/ John Piper

2015-06-23 00:36:37

 

바울의 프런티어 개척 정신 (=선교사 마인드)

 

사도바울이 자신의 선교에 대해 생각한 방식은 상당히 놀랍습니다.

15:19~23절을 읽어보면, 선교에 대한 그의 사고방식은 매우 독특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소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 들어보십시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본문의 바울처럼 소명을 받지는 않지만,

일부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바울이 받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소명을 받을 것이고,

모든 교회에, 이렇게 바울처럼 선교회 횃불을 드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15: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 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일루리곤, 현재는 알바니아입니다. 그리스의 북부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사도바울이 허풍이 심한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착각을 하는 것인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예루살렘부터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I have fulfilled gospel

 

아니, 예루살렘부터 일루리곤(알바니아)까지 그 광대한 지역을

자기가 얼마나 위대하게, 그것도 단시일 안에 사역을 했는지..

내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어지는 23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이 지방에 더 이상 일할 곳이 없고’ .. 15:23

 

이 지방은 문맥이 19절부터 연결된다고 볼 때

예루살렘부터 일루리곤까지를 뜻합니다.

19절에는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다고 하더니

23절에는 이제는 이 지방에 더 이상 일할 곳이 없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바울의 말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지역교회 목회와 최전방 선교가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선교사입니다.

그는 지금 지역교회 목회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서신서를 읽어보아서 압니다.

에베소, 빌립보 등 자기가 개척한 교회가 서 있던 지역에도,

아직 불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신자들은 사실 수적으로 극소수였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이 지역에 일할 곳이 아직 많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지역에 일할 곳이 이제 없다라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는 이 지역에 일할 곳이 아직 많다라고 말해야 하지만,

사도바울이 이 지역에 일할 곳이 이제 없다라고 말한 이유는,

 

이제 그 지역에, 작더라도 어떤 교회들이 세워져 있어서,

그 교회들이 아직 전도 못 받은 그 지역 사람들을 담당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니까,

이 지역에 일할 곳이 이제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19, ‘예루살렘부터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라는 말씀도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이미 주요 도시들에 자신이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고,

이미 교회들이 세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 지역에 복음의 교두보(그 거점을 통해서 확산이 되는 시발점)가 마련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염두에는 항상 프론티어(최전방)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 그 프론티어로 나아가는 것

- 그것이 바로 선교사의 마인드입니다.

 

지역교회 목회자의 마인드는..

지역교회를 든든히 지키면서, 그 지역복음화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교사의 마인드, ‘지역교회 목회자의 마인드가 다릅니다.

 

그런 바울의 선교사적 마인드프런티어(변방) 개척정신

이어지는 구절에도 명백히 나타나 있습니다.

 

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의 대도시들, 필라델피아, L.A. 워싱턴, 뉴욕 등

이런 도시들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미신자들이 살고 있지만,

사도바울은.. 그것은 지역교회 목회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선교사의 마인드는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입니다.

 

선교사의 마인드는 이어지는 구절에도 계속됩니다.

 

: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들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 이미 교두보가 마련된 지역은 뒤로 두고, 지역교회 목회자들에게 맡기고,

아직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들으리라!’

하는 것이 바로 선교사의 마인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도 건너뛰려고 합니다.

 

15:22~23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로마에 주저앉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로마는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짧은 기간 로마에 머물며 교제한 후에는)

너희가 서바나(스페인)로 보내 줌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는, 로마서만 보내고 건너 뛰려고 하는 이유는,

거기에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원칙(선교사 마인드)은 바로 이것입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15:20

 

그러니까 이미 교회가 서 있던 로마도,

바울 자신이 들어가서 굳이 또 무슨 교회를 세울 필요가 없고,

로마를 건너뛰고, 너희의 보내줌을 받아서, 스페인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사 마인드입니다.

 

선교사 마인드는, 목회자 마인드와 다릅니다.

서두에서, John Piper

모든 사람이 이런 선교사 마인드를 하나님께 받은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이런 바울과 같은 선교사 마인드를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져 있는 곳은 제쳐 두고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 교회가 없는 곳으로 무모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 방식이, 가장 옳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역교회 목회자 마인드도 필요합니다.

 

미국의 도시들에는, 이미 교회들이 세워져 있지만,

여전히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성실히, 꾸준히 전하는 지역교회 목회자도 반드시 필요하고,

아시다시피 또한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러나 일부이지만, ‘선교사 마인드프런티어 개척정신을 가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오늘날 절실하게 필요하며,

우리는 그런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후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국내에도 불신자가 수두룩한데, 왜 복음을 반기지도 않는 나라에 가느냐?

거기는 죽도록 수고해도, 열매도 별로 없는데..’ 라면서

애써서 가는 선교사들에게, 답답한 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선교사 마인드는.. 바울처럼..

지금 본국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졌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본국에는 더 이상 일할 곳이 없다고 여기고는,

(‘여긴다는 말은.. 나머지 할 일은, 지역교회 목회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

즉 중국의 변방 산악지대, 인도 북부, 회교국가, 힌두교국가 등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나라들의 특징은,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위험하니까요.

-아무도 선교사를 환영하지 않는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회교국가, 힌두교국가에서는,

(오늘날 남아있는 미전도종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들입니다.)

선교사가 오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 원치 않는 지역으로 들어가다 보니까,

-돌에 맞았고,

-채찍질을 다섯 번이나 당했고,

-큰 막대기(태장)로 맞는 형을 세 번 당했으며,

-셀 수 없이 감옥에 갇혔고,

-길에서, 도시에서, 시골에서.. 어디를 가든지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변방(프런티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교는.. 초청 받아 가는 곳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의 입국을 환영하는 나라가 있다면.. 거기는 선교지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바울처럼 선교적 사명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비록 소수라도

좀 래디컬radical한 바울 타입의 사람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또 그런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서 나타날 때에도.. 그들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목회자적 마인드

늘 변방을 향하는 선교사적 마인드’ (본문의 바울의 마인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무모하다는 식으로 비판하면 안 될 것입니다. 해외 선교

 

가시적 성과, 인격적 감화 2437

 

 

 

 

예수를 본 받아서 /15:1-6/ 곽선희 목사

2014-11-23 05:58:30

 

심리학 이론 중에 에니어그램이라고 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일반적인 것입니다. 헬라어로 아홉이라는 숫자를 에니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게의 단위인 그램(g)을 더해서 복합어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에니어그램, 그런 아주 상식화된 이론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본성은 순수하게 다 같은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인간은 다 꼭 같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합니다. 직면하는 냉혹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 유형이 변하고 또 발전되기도 하고 그러면서 대체로 봐서 아홉 가지로 아홉 가지 유형으로 이렇게 나타나게 됐다, 하는 심리학적 이론의 전제입니다.

 

이 이론을 가지고 소위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은 수행 지침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어떤 존재로 또는 인간관계로 살아야 성공적으로 살수 있을까? 하는데 이 이론을 적용하기도 하고, 특별히 여러분의 가정생활 자녀교육 사회생활 모두에 있어서 이것을 알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하는 그러한 말씀이고요.

 

특별히 사업하는 분들은 인사관리에 있어서 혹은 조직운영에 있어서 이 이론을 조정해 나아가는 그런 경우가 많고 특별히 어떤 기관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 아주 심리학자를 불러서 이 유형을 잘 구별해 놓고 거기에 적절하게 안배, 배치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적이다 하는 것이죠.

 

이 아홉 가지 유형이라 하는 것은 대체로 이런 것입니다. 긴 설명을 드리지 못합니다만은 첫째가 개혁자형입니다. 이것은 고도의 윤리성을 지닌 사람이고요. 도덕적으로 완벽주의를 기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성실하고 정직합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이렇게 정직하고 성실한 것까지는 좋은데 이런 사람들이 대게 편협합니다. 그게 약점이에요. 자기 하나는 정직한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를 못해요. 또 둘째는 협조자형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감정이입이 잘 되고 애끓는 마음과 감정이 풍부합니다. 이것은 좋은데 이 사람은 너무 감정적이라서 의지가 약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 때로는 지성적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동기부여자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감이 있고 야심가이고 최고가 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항상 최고가 되겠다는 그런 사람인데 고집이 셉니다. 그래서 또 힘듭니다. 그리고는 예술가형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직관적이고 동정심이 많고 그리고 개성이 강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울하기도 하구요. 정서적으로 강한 대신에 이 사람은 쉽게 말해서 광기가 있습니다. 그래 예술가하고 살려면 각오해야 됩니다. 가끔 미친 짓을 하는데 이걸 수용하지 못한다면 예술가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 어떤 때는 천사 같고 어떤 때는 악마 같고. 그렇다고 해서 불평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예술가와 사는 팔자니까 그건 각오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사상가형이 있습니다. 이것은 탁월한 지각을 가졌고 탐색지능이 있습니다. 어느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시 좀 괴벽하고 편집병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 다음엔 충성가형이 있습니다.

 

감정에 호소하고 사랑 받는 사람이고 장난기도 있고 유머도 있고 환심도 사고 아주 충성가형, 아주 좋아요. 그런데 이런 사람은 너무 의존형입니다. 그 이상은 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이게 또 문제라구요. 충성을 잘하는 사람, 큰 일은 못합니다.

 

, 그 다음에는 만능선수형이 있습니다. 순발력이 강합니다. 신바람 나게 삽니다. 그러나 이런 만능선수형이라는 사람들은 확실히 즉흥적이고 광적일 때가 많고 지구력이 약합니다. 그 다음에 도전자형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일단 옳다고만 생각하면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아주 의지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대개 보면 오만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곤 아홉번째가 중재자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수용능력이 많습니다. 신뢰할 수 있고 느긋하고 낙천적입니다. 이런 중재자형은 참 덕망이 있다고 우리가 말합니다만은 이런 사람들은 유약하고 수동적입니다. 너무나 수동적이라서 무슨 큰 일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 이렇게 아홉 가지 나누어 보았습니다. 어느 거 하나 마음에 듭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완전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고 완벽한 사람이 있느냐 이거예요. 그걸 아셔야 되요. 이런 의미에서 흔히 말하는 완전한 사람은 없어요.

 

이런 장점이 있는가 하면 저런 단점이 있어요. 그런고로 우리는 장점을 극대화하면서 단점을 서로 이해하고 덮어가면서 수용해야만 가정도 사회도 직장도 편할 수가 있고요.

자기자신을 볼 때도 자기장점을 극대화할 것이고 단점을 줄이도록 노력할 것이지 결코 어느 단점이 있다고 해서 나는 쓸모가 없다던가 나는 교양이 없다던가 나는 구제불능 하다던가 자기자신을 그렇게 비하할 필요도 없다 그말이예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남편이건 자녀건 나 자신이건 간에 항상 이런 장점 그 장점을 더 크게크게 인정을 하고 키워가고 단점은 내가 스스로 이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하고 받아들이면서 이거를 잘 교정하고 극소화하도록 힘써나가는 것, 그게 지혜올시다.

 

, 이제 한번 깊이 생각하십시다. 예수 믿는다는 게 뭡니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가 뭐냐하면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올시다. 예수 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여러분이 잘 압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귀한 고백입니다. 그 고백 속에 예수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는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이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큰 역사를 이루어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셔서 자기 피를 가지고 제사를 드려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런 제사적 기능을 이루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동시에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율법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가치관에 대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가르치는 분이요 동시에 가르치기만 하는 게 아니요. 본을 보였어요. 그리고 그는 왕이십니다. Living Christ, 그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우리의 심령과 우리의 세계와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왕이십니다.

 

, 그런데 오늘 본문은 두 번째 문제인 선지자의 문제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로만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행동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그것까지 가르쳤습니다. 이건 절대로 비참한 일이 아니에요. 이것이 행복의 길이요, 이것이 잘사는 길이요, 이것이 가치 있게 사는 길이요,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어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행복하게 사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어요. 모본을 보였어요. 그는 우리의 생의 패러다임이 되는 것이죠. 우리의 성품, 우리의 인간됨에 아주 표본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중생하고 그 다음에 성화의 과정은 이제 일생동안 가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이올시다. 이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수님처럼 병 고치고 예수님처럼 서른세살에 죽어야하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이런 형식적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의 인간됨입니다. 사람됨을 우리가 본받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말씀에 오늘 이것을 요약해서 간단하게 몇 말씀으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냐구요. 우리 죄를 우리의 약점을 담당하신 분이올시다. "담당하셨다" 그랬어요. 담당하셨다. 아주 중요한 말씀이에요. 오늘 여기 보니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약한 것을 담당하고, 그랬어요. 그 담당한다는 말 한마디가 아주 중요한 것이올시다.

 

강한 자가 누구입니까? 강자, 이 뭐 권력자요 정치가요 돈 많은 사람이요 무슨 씨름선수요 뭐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정말로 정신적으로 강한 자가 누구입니까? 인격적으로 성품적으로 강한 자. 세 가지로 요약해 봅니다. 먼저는 이해에 있어서 강한 자예요.

 

내가 넉넉하면은 이해할 수 있어요. 이런 사람도 이런 환경도 저런 것도 다 넉넉하게 이해할 수 있어요. 이게 강한 사람이에요. 이걸 이해를 못하고 조그마한 일에서 걸려서 넘어지고 오해가 되고 뭐 원수 맺고 울고 짜고 절망하고, 이건 약한 것이죠. 뭐 흔히들 속되게 말할 때 '밴댕이 속 같다' 그러잖아요. 그 쪽은 약한 거예요. 약해서 민감한 거거든요.

 

그만큼 만사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약자예요. 그런데 강한 사람은 언제나 넉넉합니다.

뭐 놀랄 것도 없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거든요. 그래서 뭐 좋은 사람도 사랑하고 못된 사람하고도 같이 지내고 이럴 수 있어요. 이해, 이해를 하는 거예요. 언제나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고 또 역사의 의미도 이해하고 환경이 말해주는 그 방향도 이해하는 것이죠. 그 이해, Understanding Mind가 넉넉합니다. 이 강한 것이에요.

 

우리가 자녀들을 이해하잖아요. 어린아이들이 뭐 어쩌고어쩌고 해도 어른은 어른스럽게 이해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손자하고 싸워요. 나이가 다시 거꾸로 돌아가서 열두살이 되었거든요. 이게 문제라고요. 넉넉함이 없어요. 여유가 없어요. 이게 바로 강하다는 것이고요.

 

그 다음에는 이 깨달은 바 진리를 자기 생활 속에 구체화할 줄 알아요. 이게 능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오늘 여기서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들으면서 바로 ', 그렇다. 그런고로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하고 적응할 수 있고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런 소화능력이 있는데, 어떤 분은 이걸 못해요. 그래서는 그 말씀은 좋은데 나와는 관계없다 이거에요. 그 말씀은 나와 관계없는 거다. 또 어떤 때 좀 생각을 해보아도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건 대책이 없어요. No idea, 이게 바로 약한 것이에요.

 

그래서는 진리는 진리대로 신앙은 신앙대로 행위는 행위대로 성품은 성품대로 따로따로 사는 거예요. 영영 이렇게 살아요. 이게 바로 약한 사람이에요. 그러면 강한 사람은 진리를 한마디를 배웠든 두마디를 배우는 데로, 자기 생활 속에 이걸 실천 적응해 나갑니다.

 

그 다음에 또 강한 사람은 실천 지구력이 있어요. 알기는 하는데 행하지를 못해요. 사랑해야 될 줄 알면서 사랑하지 못해요. 용서해야 될 줄 알면서 용서하지 못해요. 용서했다가도 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요. 이게 바로 휘청휘청이요.

 

약한 것이죠. 그런데 강한 사람은 한번 시작했다 하면 끝이에요. 요새 눈이 많이 와서 좀 보행이 어려웠습니다. 새벽기도회 때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이 왔습디다만은 아주 많이 못나왔어요. 그래 내가 속으로 생각했어요.

 

뭐 눈이 온건 온 거예요. 어렵긴 어려워요. 그래 그것 때문에 내가 일생 한 맹세를 여기서 굽힐 수 있어요? 누가 가로막을 거예요? 또 어떤 때 우리가 한 약속을 그것을 못해서 되겠어요? 자 우리가 이 실천의지, 그게 문제라고요. 문제라고요.

 

어떤 학생들 보니까 뭐 공부, 그거 박사공부 하는 거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요. 56년 수고해 가지고 마지막에 논문을 쓰는데 이게 잘 안되는 거예요. 그때 가서 날보고 물어봐요. "계속할까요 말까요? 뭐 그거 뭐 박사 해봤댔자 그거 뭐 별로 길도 없고 취직도 못되는데 할까요, 말까요?

 

요사이 뭐 50%도 취직 안된답디다." 그건 그래. 그렇지요. 그래서 나는 그랬어요. "별거 아니다. 박사란 게 별거냐? 하지만 시작했으니 끝내라." 시작한걸 끝내지 못하면 한평생 그것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한대요. ", 사내놈이 시작했으면 끝을 내야지 이제 와서 무슨 딴소리냐? 지금까지 6년 동안 수고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마저 해버려" 했더니 고민하더라구요. 그게 바로 약한 거죠. 이게 바로 사람의 마음이에요.

 

그러면 강한 자, 이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그래서 이해도 못하고 구체화도 못하고 실천도 못하고 꾸준하게 끌고 나가지도 못하는 이 약한 자를 어떡하면 좋겠어요? 그걸 이해하는 것이죠. 담당하는 것이죠. 나아가서는 내가 대신하는 것이죠.

 

약한 자의 약점을 내가 담당한다. 여기에 "파스타제인"이라는 말은 짐을 진다는 뜻이에요. 그의 짐을 내가 대신, 자발적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는 것이요. 여러분 잘 외우는 성경구절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도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대신 내가 맞을 것을 그가 맞아요. 내가 받을 비방을 그가 받아요. 그 성품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은 담당하는 것이에요. 책임을 대신 지는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의 마음이에요.

 

제가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경험한 그 이야기는 정말 두고두고 제 마음에 늘 다시 한번 회상이 됩니다. 의사로 분주하게 다니는 부인이 어떤 날 보니까 자기 남편이 밖으로 돌다가 에이즈 병에 걸려 가지고 왔어요. 기가 막힌 거예요.

 

그는 남편을 앞에 놓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의사로서 바삐 돌아가느라고 아내 구실을 못해서 당신이 밖으로 돌다가 이렇게 됐으니 이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대로 죽으면 당신을 죽인 내가 어떻게 평안하게 살수 있겠느냐고 여기서 둘 다 같이 에이즈 걸려 가지고 죽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좋겠다고. 10년 동안 별거하던 사람이 다시 만났어요.

 

다시 부부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에이즈 환자하고 죽기를 결심하고. 이 뜨거운 사랑으로 인해서 두 사람이 다 건강해 졌어요.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현장에서 이 말을 들을 때 저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는 기억입니다.

 

여러분, 누구 책임입니까? 모든 문제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보면 나 책임 다했다. 밥을 안 줬냐? 옷을 안 줬냐? 학비를 안 줬냐? 너 할 일이나 해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에요. 너희들이 잘못된 거 가출한 거 내 책임이다.

 

남편이 밖으로 도는 거 내 책임이요. 아내가 잘못하는 거 내 책임이요. 내가 담당을 하는 거예요. 저주를 받아도 내가 받는 거예요.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우리는 어쩌면 내 책임까지 남에게 돌리려고 하는 세상이에요.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그가 담당하셨어요. 우리의 약점을 다 담당하셨어요. 자기 책임으로 돌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어요. 성품 자체가 약한 자의 약점을 비판하지 않고 내가 대신 자발적으로 담당하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어요.

 

그런가 하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 egocentric, 자기 중심적인 마음, 이거 한 번 탁 떼버리고 지나가 볼까요? 뭐 이제까지 나 중심으로 살았으니까, 뭐 이젠 나이도 한 50 됐으니까, 이제부터는 나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것 없이 살아보겠다고 한번 확 뒤집어 보세요.

 

새로운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나를 잊어버리세요. 내 명예, 내 지위, 내 뜻, 내 고집, 뭐 다 잊어버리세요. 나를 기쁘게 하는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면은요 여러분 신비로운 기쁨을 신비로운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다음에 보니까 "이웃을 기쁘게 했다" 그랬어요. 이것이 강한 의무입니다. 모든 일에서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을 편하게 하고 남의 이름을 높이고 바로 그것이 행복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수학분야에 있어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졌던 사람 기꾸찌 라고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기꾸찌 교수가 옥스퍼드 대학에 다닐 때 역시 수학의 천재가 돼서 항상 1등만 하는 거예요. 영국 백인들이 기분이 나빠요. 자존심이 상해요. 아니 이 동양사람한테 우리 이 영국사람이 지다니. 근데 이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항상 2등을 하는 거예요.

 

그걸 넘어서지를 못해요. 이런 경쟁관계에 있었는데 마침 기꾸찌가 독감에 걸려 가지고 몇주간 동안 학교에 못나왔어요. 이것을 알고 '옳지, 이번 학기는 브라운이, 백인이 1등할 것이다' 생각을 했는데 웬걸요. 또 기꾸찌가 1등을 했어요.

 

알고 보니까 브라운이 매일같이 강의들은 걸 노트를 가지고 가서 이 기꾸찌 친구에게 전달강의를 했어요, 매일같이. 왜요? 당신이 감기로 인해서 1등에서 내려앉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이거예요. 얼마나 깨끗한 마음이에요? 남을 기쁘게 하고 그래서 밀어주고, 이해해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그것이 남을 기쁘게 하는 비결이에요.

 

EQ라는 말을 우리가 쓰고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감정상태를 자기가 알아내는 것이에요. 아이들도 보니까 어떤 때 입이 쭈욱 나와요. 그래서 "너 삐졌냐?" 그러니까 "나 삐졌어" 그러더라고요. 그거 EQ가 괜찮은 거예요.

 

내가 지금 잘못되고 있다는 걸 내가 알아야 되요. 그걸 모르는 게 이게 바로 멍청한 거죠. 내 감정을 내가 알고 그 다음에는 내 감정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알고 그 다음에 이것을 바르게 표현할 줄 알고 그 다음에는 이웃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내가 잘 수용할 줄 알고 그리고 모든 이웃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해 나가는 사람, 이게 바로 "EQ가 높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로 생각하시죠?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인이 됐다면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성품을 하나씩하나씩 본받아 가야하는 것이에요. 정말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뜨겁게 사랑하면 닮게 돼있어요.

 

아내건 남편이건 누구든 간에 열렬히 사랑하면 알게 모르게 그를 닮아가는 것이에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에요. 앙망하고 사랑하고 높이고 존경하면 그리스도의 마음 본받아갑니다. 본받아서 그의 길을 따라 우리도 행복하고 그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는 것이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주저하고 기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더하사 참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가게 하시고, 그 성품 그 가치관 그 귀한 뜻이 바로 우리의 것이 되도록 그리스도를 가까이 본받아 갈 수 있는 주의 사람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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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내게 주신 은혜 /15:14-21/ 곽선희 목사

2014-11-25 16:15:16

 

몇 년 전에 제가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상하이대학에 8명의 교수가 오찬을 같이 한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제가 주고받은 이야기 경험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고 또 잊을 수 없는 제 추억이 되고 있습니다.

 

8명의 교수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7사람의 교수가 그 한교수를 몹시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분이 영어를 잘해서 모처럼 통역을 세우지 않고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는데 한사람 되게 좋아하고 자랑하고요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부러워해요.

 

도대체 그것이 뭘까? 해서 물어봤더니 이 사람은 한국 사람하고 살아요. 한국여자하고 사는데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운 거예요. 그래 내가 가만히 있겠어요? 그게 무엇을 의미 하는 거냐? 하고 물었더니 제가 들어본 대로는 이건 신학적 문제더라고요.

 

참 중요한 문제예요. 어떻습니까?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내가 시장도 보고 밥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뭐 어떤 경우에도 그게 우리의 문화예요.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중국 사람은 반대예요.

 

당연히 남자가 해야 되고 시장도 남자가 봐야 돼요. 뭐 여자는 손 하나 까딱 안 해요. 가만히 앉아있어요. 남자가 저녁에 늦게 들어와도 음식준비 해놓는 법이 없어요. 돌아와서 준비해서 대령을 해야 돼요.

 

이게 종래의 중국문화거든요. 자 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데 어떻습니까? 중국 사람은요 정 남자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히 자기가 해야 될 일인데 저녁에 늦게 돌아오면 그 부인이 음식을 준비해놓는단 말예요. 이건 있을 수가 없어요. 이건 너무너무 행복한거예요.

 

그런가하면 여자입장에서 볼 때는 아내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기가 해야 될 일을 남편이 해주잖아요. 시장도 봐주지요. 또 맛있는 중국음식을 만들어주잖아요. 끼마다……. 그러니 이런 고마울 때가 어디 있어요.

뭐 설거지같은 거 손도 못 대게 하는 거예요. “그건 당연히 남자가 할일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고맙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전적으로 은혜라고요. 당연히 내가 할일을 저가 해주니까…….

 

오직 은혜……. 그런데 이게 만약 반대로 만나면 절단난답니다. 이게……. 그래서 중국사람 남자가 한국여자하고 살면 잘살아요.

그런데 한국남자가 중국여자하고 살았다간 끝이에요. 오로지 율법이니까? 이건 율법과 은혜의 관계다 생각해보세요. 당연히 내가 해야 될 일을 저가 해줘요. 이 바로 은혜라고요. 공짜죠. 그게 은혜요 그게 선물이란 말이올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책이 하나 있죠?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 참 베스트셀러로 여러 해 동안 많은 사람에게 읽혀진 작은 책입니다. 꼭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 저는 이 책을 조그마한 책입니다.

 

읽으면서 너무 많이 웃고 너무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책인데 이 책을 쓴 스펜서 존슨박사가 또 다른 책을 하나 또 썼습니다. 그 책은 선물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The Present. The Present, 선물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내용은 줄여 말하면 대개 이런 겁니다.

 

한 소년이 성인이 되기까지 성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이 무엇일까? 가장 소중한 선물은 무엇일까? 그걸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합니다.

 

자 병도 들어보고 실패도 하고 연애했다가 배신도 당하고 뭐 여러 가지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참된 삶은 무엇이며 참 선물은 무엇일까? 그런데 그 지혜로운 노인이 있었는데 그에게 가끔 가서 의논을 합니다. 이건 무슨 뜻일까요?

 

가장 귀한 삶은 무엇일까요? 선물을 무엇이 될까요? 그런데 이 노인이 일러주질 않습니다. 당장 대답해주지 않고 세월이 가면 알거다. 네가 친히 경험하면서 배워야 되느니라. 하다가 상당히 성인이 된 다음에서야 비로소 일러줍니다.

 

가장 귀한 선물을 현재다. 현재……. 여러분 영어로 present라는 말은 선물이란 말도 되고 현재란 말도 됩니다. present……. 그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현재가 선물이요 선물이 현재예요. 현재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최고의 선물을 받은 거예요.

 

내 가진 바를 모르고 현재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현재가 가장 큰 선물이다. 그리고 현재를 아는 것이 그 의미를 아는 것이 그걸 선물로 깨닫는 것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마스터키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현재 과거에서 매이지 마시고 현재가 중요해요. 허망한 꿈을 꾸지마시고 현재가 중요해요. 하나님은 현재라고 하는 선물을 내게 주셨어요. 젊었건 늙었건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큰 선물을 받은 거예요.

 

뭐 이 예수소망교회 참 큰 선물입니다마는 특별히 나는 이 본당에 들어설 때 오르간소리가 나는데……. 물론 제가 여러 교회를 얼마나 많은 교회를 다닌 거는 아닙니다마는 뭐 세계의 여러 교회를 다녀봤지만 이 오르간소리를 들을 때마다

 

, 좋다. 좌우간 이거 끝내주는구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말 좋은 오르간을 우리가 가졌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좋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지금 받은바 내가 처해있는 처지 이걸 알아야 됩니다. 가정? 이 별거 아네요. 남편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제 남편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내 아내를 만났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에요.

 

행복한 사람이다 하는 말이올시다. 그러나 어쩌면 반대로 생각해서 내가 윗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역사적인 실수다. 이건 하나님도 실수한거다. 이딴 생각을 하고 그 많은 세월을 살아가고 있으니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요.

 

오늘 내가 만난사람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특별히 개인적인 고백을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 말을 바꾸면 내게 주신 선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 있어요. 은혜는 곧 거저주시는 것이요 거저주시는 바는 바로 선물이란 말예요.

 

그 특별히 로마서 123절이나 특별히 갈라디아 29절에서는 내게 주신 선물을 앎으로 내게 주신 은혜를 앎으로 저들이 나에게 교제의 악수를 청했다는 유명한 말도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

 

일단은 이 은혜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율법이냐? 은혜냐? 모든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자가 믿음의 사람이요 율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무서운 율법의 멍에가 주어지는 것이에요.

 

여러분 생각하세요. 부모님의 사랑을 받을 때 이건 내가 수고해서 받는 겁니까? 아내의 사랑을 받을 때 내가 이거 돈 주고 사는 겁니까? 내가 이 건강을 지킬 때 그래 내가 위생을 잘 지켜서 건강한겁니까?

 

그 대가로? 물론 그런 것도 좀 있지요. 하나 아니올시다. 적어도 은혜의 사람으로 생각할 때는 건강한거 선물이요 재물도 선물이요 기회도 선물이요 자녀도 선물이요 안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것이 선물이에요.

 

어떻게 내 노력 내수고로 될 수 있는일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내게 거저주시는 선물이다, 은혜다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은혜라... 이것이 믿는사람의 고백입니다.

 

크로딘 박사는 원래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작가로 유명해진사람입니다. 그가 아주 산간벽촌에 있는 광산촌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을 때 아주 유명한 큰 병원에서 크게 활동하던 간호원하나가 억울하게 오해를 받아서 쫓겨나서 이 광산촌에 와서 일하는 어여쁜 간호원 하나가 있었어요.

 

그는 쫓겨 온 것만도 억울해요. 이 광산촌에 사는 것도 억울해요. 또 억울한 게 있어요. 그가 수고하는바에 비해서는 너무 월급이 적어요. 박봉이에요. 그 수고한데 대하여서는 전혀 뭐 10분의 1도 안되는 적은 봉급을 받으면서 일하는 거예요.

 

그런데 일할 때 그 얼굴은 너무 밝아요. 찬송하며 웃으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하고 퇴근시간이 지난다음에도 집에 가지 않아요. 남은 잔여 일을 하고 너무 즐겁게 일하는 거예요. 그때 클로린 박사가 보다보다 못해서 한마디 했어요.

 

당신은 일한 만큼의 대가도 받지 못하는데 이 산간벽촌에 와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기쁨으로 일할 수 있냐?”……. 그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월급이 작기 때문이죠. 정당한 월급 받고 하면 내가 상품이 되고 하나의 고용인이 되지만 나는 월급과 상관없이 일하는 그 기쁨 때문에 나는 자유로울 뿐이다. 나는 돈에 팔린 사람이 아네요. 하고 싶은 하니까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제 가치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니까요. 제 삶의 가치는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니까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가치를 인정하면 그 인정을 받는다는 확신이 있을 때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는 것이에요.

 

또한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은혜라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자에게 은혜가 있다는 것이죠. 세상에 은혜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마는 은혜를 은혜로 모르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아내의 소중함을 몰라요. 죽을 때가서야 고맙다 한마디하고 죽더라고요.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어디 있어요.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아주 술을 많이 하는 그런 순경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그 부인 참 좋은 여 집사님인데 그저 매일 밤 술 먹고 들어와서 발길로 차는 게 일이에요. 말이 아니라 발길로 차면서 또 한마디 한데요. 술 먹은 김에……. 너 빨리 죽어라 그런대요.

 

그래야 내가 내 애인하고 살꺼다 그딴 소리 한대요. 세상에 이런 모욕적인 얘기가 어디 있습니까? 이 말을 들어가면서도 잘 순종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 부인이 덜커덕 부인병에 걸려서 중앙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어요. 수술 받을 때 제가 심방을 갔었어요.

 

마침 남편이 왔어요. 그 딱 앉혀놓고 제가 한마디 했죠. 그 부인이 그래도 남편이 방문해줬다고 고마워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못된 놈을 뭘 반가워하세요? 그랬죠. 아니올시다 그래요. 그담에 그 남편보고 한마디 했어요.

 

당신 그저 술만 먹고 들어오면 마누라보고 죽으라고 했다며? 그런데 뭘 여기 방문했나? 지금 죽을 준비하는데……. 그랬더니 그때 한말이 제가 잊지 않습니다. “아니올시다. 제가 못돼서 말은 맘대로 했지마는 제게는 가장 소중한 여자입니다.

 

이 사람보다 더 귀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이 한마디를 듣고 또 부인은 고마워가지고 목을 놓고 울더라고요. 참 여자란 게 그렇다만……. 그 한마디에 그만 감동이 되가지고 우는걸 내가 보고 참 세상 요지경이라고 생각했어요.

 

여러분 은혜는 은혜로 아는 자에게만 은혜예요.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도 많잖아요. 이게 다 어디서 오느냐? 은혜를 은혜로 모르기 때문에…….

 

그러면 은혜는 은혜 될 때에 어떤 조건이 있냐? 딱 두 가지뿐이 없어요. 하나는 믿음이요 하나는 겸손이에요. 믿음을 가지고야 은혜가 되고 믿을 수만 있을 때만……. 그런고로 또 하나는 겸손이에요. 그런고로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서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알게 만드는 것이에요. 겸손한자에게만 은혜가 있어요.

 

자 보세요. 부부간에도 겸손해서 나보다 남편이 낫다할 때 은혜가 되고 아내가 나보다 낫다고 할 때 언제나 그래요. 심지어 자식을 놓고 보아도 자식이 나보다 낫다……. 나 같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저런 귀한 자식이 있다니……. 이게 얼마나 행복한거예요. 겸손할 때만 은혜가 있는 거예요.

 

저는 며칠 전에 어느 대학총장님께서 진갑 요새고희가 되었어요. 70……. 그 잔치에 갔다가 아주 희한한 소릴 한마디 들었어요. 왜냐하면 그 부자간이 전부다 좀 유머가 많은 사람들인데 아버지가 나와서 오늘 이렇게 제 잔치에 오셔서 감사 합니다 인사를 했고요 아들보고 나와서 인사하라고 했어요.

 

그 맏아들 떡 나와서 하는 말이 저는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아버지를 부러워합니다. 그 이유는 나 같은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그러더라고요. 참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더라고요.

 

지금 내가 아들이 있지마는 아들이 나만큼 될 것 같지 않아 걱정입니다. 나 같은 아들이 있다는 게 이게 보통 행복입니까?”그러더라고요. 저거 말 되긴 되는데 되게 건방지구만……. 다들 많이 웃었습니다마는 참 그 주고받는 대화 속에도 늘 큰 기쁨이 있더라고요.

 

여러분 기본자세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면 모든 것이 은혜요 믿으면 모든 것이 은혜로 그 의미가 바뀌는 것이에요.

 

특별히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은혜라는 것이 생산적입니다. 은혜는 깨닫는 것만 아니요 느끼는 것만 아니요 은혜 되면 벌써 달라지는 게 있어요. 얼굴부터 달라지죠. 그래서 우리 교회 예배 마치고 나갈 때 얼굴 보면 내가 압니다.

 

은혜 받은 사람……. 얼굴 환하고요. 아직도 무슨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 가지고 잔뜩 찌푸리고 나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아직 은혜 못 받았어요. 은혜가 뭡니까? 은혜는 바로 생산 내 얼굴을 바꿔요 내 마음을 바꿔요 내 감성을 바꿔요 내 운명을 바꿔놓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또 변화시키는 것이에요. 사도바울은 생각합니다. 나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 이방에서 태어난 그 자체가 은혜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 세상에 낫다는 것 자체가 은혜다……. 이렇게 그는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것이 은혜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갔는데 길을 딱 막고 어찌하여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나를 강제로 불러서 하나님의 사람 되게 했다.

 

아니 예수를 핍박하다가 벼락 맞아 죽어 마땅한 사람인데 어찌 나를 이렇게 그리스도의 종 만들어서 복음을 전하며 살게 하셨을까? 감사한일이다. 다메섹에서 나를 부르신 주님……. 감사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어요. 그 은혜요. 그러나 바울의 은혜 관에 있어서는 가장 핵심적이고 제가 생각할 때 중요한 은혜가 또 있답니다. 그것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의 고백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제가 아는 대로는 그건 간질병 이였어요. 병이 있었어요. 종종 쓰러졌어요.

 

그래서 누가라고 하는 의사를 동반시켰어요. 한평생 누가가 같이 다녀요. 그 때문에 누가가 사도행전을 쓰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왜 이 병을 고쳐주지 않았을까? 왜 고쳐주지 않으면서 내게 있는 내 은혜가 족하다. my grace ....... 유명한 말입니다. 너 그대로 병든 그대로 네 형편 그대로가 내가 네게 준 은혜다. 그것은 만족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응답을 그는 감사하게 받고 이제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왜 내게 병이 있냐구요? 그래야 겸손하니까……. 왜 내게 가시가 있냐고요? 그래야 오직 주님만 의지하니까……. 놀라운 신비로운 응답을 얻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어떤 경험을 했습니까? 쓰라리고 아픈 경험이 있고 과거가 있습니까? 현재가 있습니까? 묻지마세요. 믿음으로 수용하세요.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세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great grace. 가장 큰 은혜 위대한 은혜라는 것을 그냥 수용하세요. 그럴 때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은혜의 능력을 그는 믿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은혜는 생산적이에요. 은혜는 sharing해야 되는 거예요. 나 혼자 가지고 있어서는 안돼요.

 

같이 나누어야지요. 오늘 성경말씀에 분명히 말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하여 너희들에게 권면하노라. 은혜를 같이 나누자는 거예요. 은혜야 은혜는 점점 파급되어 나가야 되는 것이에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페에르 쌍소라고 하는 분의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 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작은 것에 만족하라. 작은 것에 의미를 깨달으며 만족하라. 또 하나는 소박한 삶에서 기쁨을 누리라. 뭐 굉장해야 되는 거 아네요. 소박한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껴진 것은 이겁니다.

 

기쁨을 만드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기쁨을 만드는 능력……. 네 스스로 이것 다른 사람에게까지 슬퍼하는 자를 기쁘게 만드는 거 기쁨을 생산하는 그 능력이 있어야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하는 말입니다.

 

강철 왕 카네기를 여러분이 아시죠? 그가 아주 어린아이일 때 어린아이일 때 어머니의 손에 붙들려서 시장에 갔더랍니다. 여기저기 물건을 사게 되는데 얘가 앵두를 가득히 수북이 쌓아놓은 그 앞에 딱 서서 움직이질 않아요.

 

엄마가 불러도 까딱도 안 해요. 저게 먹고 싶어서……. 그래 그걸 알고 상점 일하시는 할아버지가 와서 얘야, 저거 먹고 싶으냐?” “먹고 싶다……. “그러면 내가 한 웅쿰 한줌 네가 가져라. 그리고 먹어라.” 그랬어요. 안 먹어요. 엄마가 그 얘기를 듣고

 

야 할아버지가 너 그거 한 웅쿰 가지라는데 가지고 가자. 먹어라.” 안 해요. 끝내 안 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와서 한 웅쿰 집어주었어요. 이걸 받아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래 엄마가 가게 문을 나서면서

 

야 야 왜 너는 한 웅쿰 먹으라고 했는데 먹지 않고 할아버지가 줄때까지 기다렸나?” “엄마 그거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손이 크거든요.” 내손이라는 거 몇 개 안 집히잖아요. 할아버지 손으로 주어야 많지……. 역시 부자 될 만 하죠?

 

여러분, 내가 무엇을 한들 대수롭겠습니까? 하나님이 해주실 때 하나님이 은혜주실 때 거기에 은혜가 있는 거예요. 아직 불만과 원망과 실망이 있습니까? 그 원인은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세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늘 내가 되었노라.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여러분 은혜가 헛되지 않고 또 다른 은혜의 열매를 맺는 생산적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은혜로 저희들을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는 끝없이 은혜의 길로 인도하시건만 어느새 우리는 교만해서 내 수고로 대가를 거두는 것처럼 내 노력의 결과로 따라 사는 것처럼 착각하는 미련한자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도대체 이 어려운 세상에 사는 것이 은혜요 오늘이 은혜요 현재가 은혜임을 알게 하시고 그 은혜의 깊은 뜻을 알아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주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는 은혜의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받음직한 봉사 /15:30-33/ 곽선희 목사

2014-11-19 14:09:14

 

4살 난 어린아이를 위해서 어머 니가 그와 함께 잠자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늘 건강하게 해주시 고, 또 총명있게 자라게 해주시 고"이렇게 기도하다가

 

"어머니 말 씀 잘 듣게 해주시고"그렇게 기도 했단 말입니다. 그 늘 기도하는 소 릴 듣다가 이 4살 어린아이가"엄마 오늘은 내가 기도할께"

 

"그래라"얘 가 기도하는데"엄마가 내말 잘 듣 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각각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자 기에게 유리한 서원을 내놓고 있습 니다. 어머니라면은 내가 진정 애 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랑 하는 것이 정말 바로 사랑하는 것일 까, 그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 야 할 것인데, '나는 다 잘하고 있 고, 저 애가 내 말을 잘 듣게 해달 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각자 자기 나름에 소원만을 열심히 구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미국에 칼럼리스트들이 여론 조사를 해서, 한 연구 보고서 를 내 놨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 과 비기독교인의 비교하는 그러한 비교 도표입니다. 헌신 봉사를 중 심으로 해서 비교한 결과 이렇게, 이런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게 되었 다고 합니다. 첫째는 '봉사 참가 지 수', '봉사활동에 얼마나 참가하고 있는가'하는 겁니다.

 

이 조사해 본 결과 단연 '기독교인들이 월등하게, 뭐 잘 믿거나 못 믿거나 훨씬 더 많 은 사람들이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 더라'하는 것이구요. 두 번째는 '포 용력지수', 그 말은 하나님께 헌신하 고, 특별히 인종 문제가 복잡한 나 라이기 때문에, '인종차별', 이 문 제에 있어서 얼마나 포용력이 있나' '가난한 자와 부한 자, 얼마나 넉 넉하게 포용을 하고 있는가'. 포용 력 지수를 평가 해 보았다는 겁니 다.

 

그러면 '얼마나 관용할 수 있느 냐'하는 것이 그 지수가 되겠습니다. 또 하나는 '가정 안정지수', '이혼 문제라든가 이런 불안에 떨지 않고, 아이들도 부모님의 뜻을 따라서 성 실하게 잘 자라주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가정 안정지수라고 해서 평 가 해 보았는데, 이것도 월등하게 기독교인들이 더 낫구요. 마지막에 '행복감 지수'입니다.

 

그것은 '베푸 는 삶을 통해서 스스로의 행복을 얼 마나 만끽하고 살아가는가'하는데, 이 만족도가 60%라고 했습니다. 60%의 사람들이 '우리는 만족합니 다.' 그렇게 생각했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네 가지에 의해서 우 리를 평가한다면, 여러분 자신들을 평가한다면, 얼마의 지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 봉사생활 금년에 얼마나 했습니까? 얼마나 좀 너그러운 사람이 됐습니까? 가 정은 얼마나 더 안정이 됐습니까? 여러분의 행복감은 어느 수준에 있 습니까? 스스로 물어야 할 것입니 다.

 

인생은 받는 것보다는 주는 일에 서 기쁨을 찾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한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0 장에 볼 것 같으면, 35절에 예수님 친히 하신 말씀을 바울이 인용합니 다. '받는 것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주는 자에게 기쁨이 있다. 주는 자에게 행복이 있다.' 여러분 이 주는 행복의 진리를 터득하기까 지는 여러분은 영영 행복을 모르고 말 것입니다. 이 진리만은 논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행동 으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는 특별한 진리입니다. 자 이제, 자녀와의 관계를 한번 보십시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위해서 수고합니 까? 수고하는 그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는 자라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기다가 밑천을 들여가지고 본전 뽑을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불 만이 많습니다.

 

그 키우면서 얼마 나 재미있습니까? 그것으로 벌써 기쁨을 다 얻은 거예요. 뭐 효도하 라고 강요할 거 없습니다. 본전 다 찾은 거예요. 그걸 잊어서는 안돼 요. 베푸는 재미, 키우는 재미, 수 고하는 재미, 그 자체가 행복이었더 란 말이죠. 그런고로 인생은 항상 베풀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행복할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된 존재입니 다. 이것이 바로 성숙된 인격입니 다. 삶의 질을 여기서 높여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임종하게 되면, 마지막 으로 크게 뉘우치게 된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는 사람이 착해지니까요. 최소한도 임종에서는 착해지니까요. 그 순간 세 가지를 후회가게 되는 데, 그 첫째가 베풀지 못한 겁니다. '좀 더 베풀 수 있었는데, 좀 더 줄 수 있었는데, 내가 왜 주지 않았나.' 그대로 그대로 생각이 납니다.

 

'좀 더 넉넉하게 주면서 살 수 있었는 데…… 이렇게 쥐고, 모아봐도 먹지 도 못하고 가는 걸 좀더 좋은 일하 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걸' 이것이 큰 후회, 첫째 후회입니다. 둘째가 참지 못한 것. '조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 그렇습니다. 세 번째가 '좀 더 행복하게 살수도 있었는데, 좀 더 즐길 수 있었는데,

 

뭐 그렇게 아웅다웅 싸우고 울고불 고 할 필요가 없었는데, 얼마든지 즐겁게 살수 있었는데, 나는 왜 이 렇게 사람이 못돼 먹어서 나 괴롭 고, 남 괴롭히고, 그렇게 살아야 했 던가?' 이것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후회입니다.

 

여러분 정말 받는 데 만 급급하고, 못 받는 원망, 더 가지 고 싶은 욕심, 여기서만 버둥거리고 있기 때문에 영영 행복할 길이 없습 니다. 문제는 베푸는 생각을 해보 십시다. 베풀기 위한, 한번 마음을 가져 봅시다. 그리하지 않고는 절 대로 여러분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 베푸는 자가 누굽니까? 우리 생각에는"! 돈 많은 사람이 주는 거지. ,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 나야 구제 받아야 할 대상인데 누굴 구제한단 말이냐."라고 생각하겠죠. 아니 그렇습니다. 지금은 문전에 오는 거지가 없지만, 옛날에는 거지 가 많았죠. 얻어먹으러 오는 사람 이 많았는데, 그 거지들 말에 의하 면요. 대문이 크고 담장이 높은 집 에 가서는 얻어먹지 못 한답니다.

 

욕만 먹고 나온답니다. 재수 없다 고, 아침부터 뭐 얻으러 온다고. 아 주 가난한 집, 대문도 없는 집에 가 야 넉넉히 얻어먹는다고 합니다. 구제를 부자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돼요. 성공한 사람이 구제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사 업이 망한 사람이 구제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돕게 마련이지, 부한 사람, 그 사람들은 돈에 미쳐가지고 요. 정신없어요. 내버려두세요. 어림도 없습니다. 어렵고 가난한, 바로 그 형편에 있는 사람이 진정으 로 마음을 쓸 수가 있는 것이에요.

 

, 누구에게 주어야 되느냐 하 는 겁니다. 우리는 그 쓸데없이 괜 히 돈 있는 사람에게 주느라고 문제 예요. 뭐 사과상자니 뭐니 해가지 고 말이야. 이게 우리의 선행은 전 혀 보상할 수 없는, 대신 보답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주어야 되는 것이에 요.

 

그걸 있지 말아야 돼요. 내 친 척, 내 아는 사람, 뭐 주변에, 그게 아니구요 날 찾아오지도 못하고, 내 가 와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바 로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12절에 서 '부한 자는 너의 잔치에 초청하 지 말라' 그랬어요. '초청하면, 다시 그 사람이 너를 대신 청할 것 아니 냐.' 그러면 쓸데없는 거죠. '대신 청할 수 없는, 보답할 수 없는 바로 그,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어떻게 해야되는 겁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읽 게 됩니다. 저는 몇 일전에 미국으 로 여행을 가면서, 집회 인도하러 가면서 비행기 안에서 참 많은 마음 을, 아픈 마음을 뉘우쳐 봤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내 앞에 앉은 의자 에 점잖은 미국사람 내외분이, 백인 인데, 한국에 와서 고아를 데리고 가는 거예요. 아직 낯을 가리지 못 하는 어린애, 칭얼거리는 애를 하나 딱 안고, 이걸 가면서요. 열시간동 안 내내 아버지가 돌봐요. 그것 또 이상하데요. 그 어머니는 까딱도 안 해요. 옆에서 구경만 하고, 아버 지가 그 애를 안고 그 애쓰는 걸 볼 때요,

 

나는 저렇게 오랫동안 애를 안아 본 일이 없어요. 이렇게 정성 스러울 수가 없어요. 그렇게, 아이 를 분명히 한국아이인데, 고아를 하 나 데리고 가면서 그렇게 정성을 다 하는 걸 보고, 제가 많이 생각했습 니다.

 

저 사람들은 여기까지 와서 저 애를 데리고 가는 데, 우리는 도 대체 고아를 팔아먹는 나라가 됐으 니, 이래가지고도 복 받겠다고? 조 심하세요. 무슨 복이 온다는 얘기 입니까 이 땅에. 도대체 이게 될 말입니까? 바로 그 얘기를 '아 저 사람 참 훌륭하다고'. 마침, 내 옆 에 미군, 옛날에 장성이 왔다가면서 옆에 앉았어요. 그 얘기를 주고받 았더니, 자기 말이라고는 안하데요, 꼭 자기 같은데 말은 안하면서

 

", 내가 아는 사람은요. 아 지금 아이 가 다섯인데 남의 아이가 또 다섯이 에요. 그 집에 가면 아주 와글와글 하는데 아 나는 그 집에 갈 때마다 너무 행복하게 보이더라", 아 또 그러고 나니까 점점 더 부끄러워져 서, 아 그렇게 민망한 줄 모르겠어 요. '어쩌다가 우리는 이렇게 이 모 양이 됐나……' 생각이 들어요. 복 달라고 열심히 소리만 질렀지, 복 받을 만한 짓을 하지 못해요 도대체 가요.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보십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소 아시아 전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건 개척교회를 하는 겁 니다. Church Planting을 하는 거 거든요. 아 전혀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만드는 거예요. 교회를 세워요. 지 금 아직도 이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익숙하지도 못했는데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놓고,

 

", 헌금합시다."연 보하자고 저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 들이 지금 흉년들어서 굶어 죽어 간 다고,

 

"당신들도 소식 들어 알잖습 니까? 우리가 도웁시다!"

 

정성껏 헌 금을 했어요. 이 연보를 예루살렘 으로 송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특 별히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는 많은 헌금을 해 가지고 이번만은 내가 직 접 가지고 갈 것이다. 친히 가지고 간다고, 소중하기 때문에, 마음을 담 아 가지고 가야겠기 때문에 또, 특 별히 중요한 것은 이 헌금을 한 이 이방교인들에, 이방사람들에 마음, 사랑을 전달하고 싶어서 이 헌금을 손수 가지고 갑니다.

 

여기에는 큰 위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너무 위험해요. 이번에 갔다가는 살아남기가 어렵겠다는 걸 알고 있 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쓴 겁니 다. 내가 로마로 가고 싶은데, 만일 에 여차해서 못 가더라도 이 편지로 대신하고 싶어서 쓰게 된 편지가 로 마서입니다.

 

그러면 그 성금을 이 위험을 무릎 쓰고 직접 가지고 갑니 다. 그러나 이것을 받은 예루살렘 이 결코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를 죽일려고 들었고, 죽이지 않고 는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도 바울이 결국은 많 은 핍박을 받고 갇혀가지고, 로마로, 죄수의 몸으로 상소해서 로마까지 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 것 이에요.

 

그런데 지금 로마에 편지를 합니 다. '내가 예루살렘에 대한 섬기는 일, 받음직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섬김은 섬 기는 거지요 분명히. 돈은 가지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받 음직한 것이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주는 자의 마음입니다.

 

먼저는 주는 자 의 마음이 뜨거워야됩니다. 던져주 는 게 아니에요. 억지로 주는 거 아니에요. 불가피해서 주는 게 아 니에요. 자랑삼아 주는 게 아니에 요. 높은 자세로 주는 게 아닙니다. 주는 자의 마음, 물질이 아니고 사 랑을 주고, 희생을 주고, 죄송한 마 음으로 주고 그래야 된다는 거죠. 더구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야 하 는 거죠. 아쉬운 마음으로.

 

여러분 자녀교육에 있어서 아이 들의 용돈 때문에 고생하십니까? 또 아이들의, 자녀교육에 문제가 있 습니까? 말 한마디에 달린 거예요.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더라도 줄 때

 

"미안하다. 더 잘해주고 싶은데 요 것밖에 없어서 어떻하냐? 네가 우 리 집에 태어나길 잘못이지. 아버 지 재주 없고, 내 재주 더 없고. 그 러니까 요것밖에 없지 않니? 그저 다른 집에는 더 잘해 주더라마는 나 는 못 해주니 미안하다."

 

이러면서 주어야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하지요.

 

", 왜 이렇게 용돈이 많으냐? 남에 집 아들은 조금 쓰드 만 너는 그 모양이냐?"이렇게 나오 죠? 얘들이 얼마나 머리가 빠른대 요.

 

"아버지 골프 한번 치는데 얼 마인줄 아세요? 다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술좌석 한번 벌이면 얼만 줄 아느냐고요?"

 

말은 안하지만 속 은 멀쩡합니다. 이 아들이 어떻게 잘 되겠습니까? 보세요. 마음이 없잖아요. 마음을 주지 못하고 있 잖아요. 그러니까 주는 사람의 마 음은 언제나 '미안합니다.'하는 마음 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아쉬운 마 음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부모에 게 효도할 때에도

 

"더 잘해주고 싶 지마는 그저 형편이 이래서요."

 

이 런 마음이래야지."뭐 그만하면 됐 지 뭘."그딴 소리를 하면 안되는 겁니다.

 

탈무드에 재미있는 소리가 있어 요. 어떤 왕이 있는데, 왕에게 외동 딸이 있는데, 병이 들어서 죽게 됩 니다. 죽어가니까 왕이 너무 다급 해서

 

"이 딸의 병을 고치는 자는 사 위를 삼고, 내 대를 이어서 왕을 삼 겠습니다. 왕을 만들게 되겠다. 왕 위에 오르게 해 주마."

 

방을 붙였어 요. 먼먼 나라에 있는 어느 삼형제 가 산골에 살았는데, 이 삼형제가 보화, 신기한 보화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큰형은 멀리 보는 망원경 을, 천리를 보는 망원경이 있어요. 그래서 그 망원경으로 이 사실을 보 게 됐어요. 방 붙인걸 보게 됐고, 또 둘째형은 말입니다, 그 옛날에 있잖아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양탄 자, 아 그거 하나를 가지고 있거든 요. 이거를 타고 이제 가게 되는 거예요.

 

거기까지. 세 번째 동생은 말이죠. 어떤 병이라도 요것만 먹 으면 낫는 귀중한 사과 하나를 갖고 있어요. , 이 삼 형제가 멀리서 보고, 양탄자를 타고 와서 이 사과 를 주워서 이 공주가 병이 나았어 요. 이제 사위를 삼아야 하는 데, 여기에 공을 세운 사람이 세 사람이 에요. 어느 사람을 사위로 삼아야 하느냐 이겁니다. 여기에 대한 탈 무드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망원경은 도로 가져가면 되고, 양 탄자도 도로 가져가면 되고, 사과는 먹어 없어졌으니까 당신이야말로 큰 희생을 한거요.". 그 사람이 왕이 됐답니다.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사랑이란 희생해서 내가 없어져야 지. 아직도 멀쩡한데요.

 

무슨 사랑 이 그런 게 있나요. 그런고로 주는 자의 마음이 얼마나 지극해야 하는 가. 나 자신이 사라지는, 거기에 진 정한 주는 자의 마음이 있는 것이구 요. 또 하나는 신앙적이고, 절대적 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하고 비 교 할 것 없어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요. 하나님께로 나는 많은 것 을 받았습니다. 그 받은 마음에서 적은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받은 마음에 대한 감사가 이렇게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누구에게 주느냐 할 때는, 전혀 보답을 바람이 없이 줘 야됩니다. 보상을 바람이 없이, 전 혀 기대를 걸지 않고. 인사도 안 해도 좋아요. 전혀 상관이 없이, 조 금이라도 그 어느 누구라든지 보상 을 바라는 마음 없는 봉사이어야 한 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음을, 사랑을 그래요. 똑같은 일이라도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언제 한 번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저 지난 삼월 달에 북한 나진에 갔을 때 그때 만 해도 삼월 달에는 추워요, 북한은. 그래서 차를 타고 가다가 식량을 구 하러 다니느라고 보따리를 지고서 여기저기 다니는 사람을 많이 보는 데, 마침 넓은 벌판을 지나가게 돼 서 차를 세우고

 

"가는 길까지 태워 다 드릴테니 타십시오. 같은 방향 이니까"

 

타라고 그래서 탔어요. 보 니까 옷을 입었는데, 방한복이 괜찮 아요. 좋은 옷을 입었더라구요. 그 래서

 

"아이구, 동무 옷이 참 좋습니 다.""이거요 평화그룹에서 보내 준 겁니다."

 

저희 교회가 북한을 도울 때에 그 이름이 '평화그룹'입니다. '소망교회'가 아닙니다. '평화그룹' 이라는 이름으로 주는데요. 그렇다 고 그래요. 그 옆에 있던 사람이 한 마디, 그 말을 안 했어야 되는 데

 

"이분이 평화그룹 이사장입니 다."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이구, 감사합니다."그래요. 딱 쳐다보더니요 깜짝 놀랄 말을 합니 다.

 

"소망교회에서 보내온 것이 제 일 좋아요."

 

그래요. 만일에 "소망 교회에서 보낸 것이 제일 못 돼요."

 

그러면 난 큰일날 뻔했어요. 어떻 게 고마운지……. 여러분 어떤 일 이던 간에 베풀 때는 정말 정성을 다해야돼요. 마음을 주는 것이니까 요. 성의를 다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하는, 선한 일하는 사람은 결과 에 연연하지 마세요. 이 어떻게 되 느냐, 어떻게 되느냐. 가끔 보니까 그런 말 많이 해요. 뭐 쌀을 보냈 더니"누가 먹나요."

 

말이 많아요. 아무가 먹던 별생각 다하네. 당신 이 주는 것만 주세요. 누가 먹느냐 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거구요. 그거 그런 것 신경 쓰다가 평생 그 인색한 노릇하다가 끝나지요. 줄 때는 그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내 손에서 떠난 것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드렸으면 끝난거 죠. 어떻게 쓰여지느냐는 묻지 마 세요. 하나님이 들어서 '오병이어' 처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기 적을 낳을테니까, 두고보세요. 그걸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 더 있습니다. 선한 일 하 고 잊으세요. 탈무드에 그런 말 있 어요. '내가 누구를 줬는 지를 몰라 야 하고, 받는 사람은 주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는 거 예요. '누구로부터 받았다'할 때는 벌써 얘기가 달라진다는 것이에요. 의미가 없어요. 잊으세요. 예수님 말씀대로,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오 른 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얼 마나 강한 말씀입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라.' 참 내가 유감 스러운 말을 듣습니다.

 

", 돕자, 돕자하는 거, 뭐 도울 마음은 있습 니다마는 내가 가서 주고 악수해야 만 주겠데요. 누가 받는지도 모르 는 거, 안 준다."

 

그래요. 이게 한 국 교인들이요. 요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수준이 이 정도입니 다. 이게 무슨 구제요, 선한 일입니 까? 아무가 받으면 어때요? 잊어 버리세요. 내가 얼마를 줬는지 기 억지도 말아야 돼요. 누구 줬는 지 알아서 뭐해요?

 

내 기억에서 다 잊 어 버렸어요. 그런 돈의 숫자 필요 없어요. 미안하지만 제가 저희 교 회에서 회보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회보 가운데 보면은 주보가 전부 그 자랑이죠. 고아원 방문, 양로원 방문, 어데 얼 마 주고, 어데 좀……. 난 이거 보 기 싫어 안 해요. 그 무슨 소용 있 단 말입니까? 그 기억이 무슨 소용 있어요? 이건 교회답지 못해요. 이거는 하나님의 일도 아니에요. 깨끗한 마음으로 잊어버리세요. 나 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요. 그 마음이라야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려 운 시대를 맞았습니다.

 

"하필이면 IMF시대에 왜 저런 말을 할까?"하 겠죠? IMF시대니까 이 말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삶을 질을 높여 사 십시다. 베푸는 마음만이 높은 질 의 생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 28절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있 어요. '이제는 구제할 것이 있기 위 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제 손으로 수고하여', 이자받 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손으로 수고하여,

 

여러분, '난 밥 먹 을 것이 있다. 그러니 나는 그냥 있어도 된다.' 그러겠습니까? 아니 오, 잡수실 것이 있거든 이제부터는 구제할 것을 위해서 일하세요. 무 엇이라도 하세요. 이것은 나를 위 한 것이 아니오. 내 처자식 벌어 먹이기 위한 것이 아니오. 구제할 목적으로 돈을 버는 것이오. 구제 할 목적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에요.

 

과거보다 더 열심히, 열심히 뛰세요. 뭐라도 해서, 더 벌어서, 좀 더 주의 일 하겠다고, 난 밥 먹을 것이 있으 니까, 그저 이자받아 가지고 가만히 놀겠다고. 그러니까 가만있으니까 아주 가만히 있게 되고 말지. 여러 분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을 하세요. 땀을 흘리세요.

 

, 그 뿐만 아닙니다. 오늘 본 문대로 받을려고 하는 기도에서 이 제는 주려는 기도요, 베푸는 기도요, 또 받음직하게, 내가 돕는 그분들이 받음직한 것이 되기 위하여 기도합 니다. 바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 의 가치를 높여 줄 것입니다. 여기 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받아 주십시오 /15:1-7/ 이동원목사

2014-12-03 15:46:54

 

오늘 주일은 공식적으로 모든 목장교회가 준비를 마치고 목장을 오픈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서울 어느 아파트 청약 경쟁률에 44:1이라는 사상 최고를 기록하며 밤새 인산인해를 이룬 청약자들의 물결이 쇄도했다는 기사를 읽은바가 있습니다.

 

지구상 어느곳에도 유례가 없는 이런 기이한 현상은 소위 시세차익을 노린 떴다방을 동원한 비정상적인 아파트 투기열기 때문이라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속에서 우리교회도 아파트 오픈 하우스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청약을 넣으시면 우리의 가정의 경계선이 확장되어 몇 개의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게 될 것입니다.

 

새 가족, 새 친구를 사귀시면서 가족의 영역이 확대되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몇 푼의 시세차익이 줄 수 없는 참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아파트 평수를 넓혀가도 채워지지 못했던 마음의 외로움이 극복되고 진정한 사랑의 충만함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참된 사랑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사는 이웃들을 섬기고 돕고 살면서 우리의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사랑하게 된 지체들과 더불어 영원히 거하게 될 천국맨숀을 더욱 흠모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오픈하우스 행사에 참여하시는 방법은 열린 마음으로 잠간의 시간만 내시면 됩니다.

 

아직도 주저가 되시면 우리교회 떴다방-목장사역 센타에 연락하시면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 떴다방이 노리는 것은 시세차익이 아닌 여러분의 행복입니다.

 

목장안내서를 잘 읽어보시고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목장을 방문한후 청약을 넣으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이 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이 가져 주셔야 할 단 한가지의 마음자세는 이미 목장안에 있는, 혹은 목장을 방문하는 누구라도 기쁘게 받아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기쁘게 서로를 받아드리는 마음'--이것은 앞으로도 건강한 목장공동체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1세기의 로마제국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당시의 전세계에 안정적인 정치적 평화-'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선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현상과 상관없이 로마인들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사도였던 바울은 이런 로마의 희망은 로마에 이미 존재하던 가정교회뿐이라고 확신했고(16:3-5에 보면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의 집에 있는 교회를 위시하여)이런 로마교회의 복음전도의 노력을 격려하면서 로마교회가 더많은 이방인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15:9절이하) 무엇보다 서로를 수용하는 열린 자세임을 강조하고자 로마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의 3차 전도여행의 말미에서(주후57-59년사이)

 

그리스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 그러면 이제 우리가 목장교회를 정비하고 오픈하면서 새롭게 만나게 될 이웃들을 어떻게 잘 받아 드릴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1. 주님의 조건없는 용납을 기억하십시오.

 

7절에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서로를 수용하기 위한 제일 중요한 출발점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드린 것"을 묵상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가 어떻게 우리를 수용하셨습니까? 한마디로 하면 '무조건적인' 것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시고 사랑하시고 우리대신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자들이 되었다면 이제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조건없이 받아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우리 공동체안에 나아오는 사람들을 일단 받아주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당신이 회개하면 받아 주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받아주고 회개하도록 도우십시오.

 

제가 신학교에서 소위 조직신학(기독교 교리)을 공부하는데 칼빈주의 구원론에서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 순서에 의하면 믿음이 먼저이고 회개가 나중에 나옵니다. 저는 이것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탕자의 사건'을 묵상하다가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받아 주겠다고 하였다면 그 회개가 진정한 회개가 되었을까요?

 

돌아오는 아들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그는 정말 아버지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뉘우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회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도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나요? 나같은 죄인 이 모습 이대로 십자가 앞에 나아와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시인했더니 나를 자녀로 받아주시고 용납해주신 그 큰사랑을 깨닫고 비로소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그렇게 받아주는 연습을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2. 이웃의 연약함을 담당할 각오하십시오.

 

이웃을 조건없이 수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웃들의 연약함이 내 눈에 보일 때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그 연약함을 우리가 담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 이웃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저 사람, 저럴 수 있나?"하기보다 그래서 "저 사람 곁에는 내가 필요하겠다"고 느끼며 그 곁에 서서 그의 조력자가 되어 그를 섬김으로 그를 유익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태도야말로 부부관계의 본질이요, 가족이 존재하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인간성의 불완전성 때문에 연약함은 인간됨의 피할 수 없는 존재의 양상인 것입니다.

 

건강한 가족은 상처주지 않는 관계가 아니라, 상처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건강한 목장교회 생활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밥퍼 최일도 목사님이 쓰신 최근의 책 "참으로 소중하기에 조금씩 놓아주기"마지막 문단에는 이런 말이 씌어져 있습니다.--"피를 나눈 가족만이 가족은 아니다. 한 핏줄이기에 가족이 아니라, 가족이 되었기에 우리는 한 핏줄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조그만 위기에도 무너지지만 나눔의 사랑은 크고 깊은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이제는 굳이 자식에게서, 아내에게서, 내게서만 희망을 찾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내 원하는 희망의 보따리가 너무 크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희망의 존재들, 가족. 하지만 기쁨과 믿음과 사랑만 나누는 것이 가족은 아니다. 아파하고 미워하다가 화해하고 용서하고 상처까지 끌어안아야 비로소 가족이다."

 

그러나 이런 관계형성을 위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도전해야할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기쁘게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연습입니다.(1-2절의 말씀)그러나 여기서 기쁘게 한다는 말은 감상적인 제스츄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이웃의 유익을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기쁘게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게임의 숙제인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단회적 사건이었지만, 이 십자가로 새 삶을 얻은 사람들은 다시 이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바울은 가르칩니다.(로마서6:10-11)

 

본문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하여 죽고(자신을 기쁘게 아니하고), 이웃을 대하여 사는(이웃을 기쁘게하는) 부활의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연습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용납하는 공동체가 되어갈 수 있습니다.

 

3. 주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이웃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큰 그림을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우리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낼 때 제일 쉽게 보일 수 있는 반응이 무엇이겠습니까?

 

비판하는 것입니다. 제일 어려운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상대방의 행동이 내 맘에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격려하는 일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은 어떤 프로젝트를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이 우리의 프로젝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믿음을 세우고 그리하여 공동체의 믿음을 세울 수 있다면 이 더 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좋아함과 안 좋아함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일에 사랑으로"인 것입니다.

 

교회역사에 보면 교회가 어두울 때는 예외없이 교회가 본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고 비본질적인 것을 이슈화하고 논쟁에 빠져 들어갔을 때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콘스탄틴대제가 기독교 국교를 승인하고 교회당 건축을 한후 제일 먼저 일어난 교회내 논쟁가운데 하나가 교회내 어떤 그림으로 장식할 것인가, 그 그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프레스코 논쟁).

 

중세기 암흑기 카톨릭 교회내 논쟁가운데 하나는 바늘위에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올라설 수 있는가 라는 이슈였습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망하기 직전에 이슈중의 하나는 사제가 입는 가운의 길이가 얼마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였습니다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의 교회내에는 이런일이 없을까요? 어떤 교회는 교회당 건축후 커텐 색깔 가지고 싸우다가 갈라진 교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교회 와서 제일 큰 관심이 벽에 무슨 그림 걸어 놓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들은 교회 와서 제일 큰 관심이 주보입니다. 좋은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는 교회입니다.

좋은 교인은 어떻게 전도 할 것인가? 어떻게 더 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할 것인가? 어떻게 더 잘 이웃들을 사랑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는 교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바로 더 큰 그림인 것입니다. 큰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작은 불만을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5-6, 다시 7절의 강조)자신의 생각이나 기호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주된 관심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내 이웃들이 구원받고 교회의 건강한 지체가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생각을 언제든지 유보하고 이웃을 받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의 일화하나만 소개함으로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한때 남아프리카연방의 통합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남아프리카 추장 여러 명을 여왕의 왕실에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리 사전 오리엔테이숀이 있었지만 추장 한명이 포크와 나이프가 불편하게 느껴지자 손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함께 있던 영국 각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긴장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여왕이 빙그레 웃더니 나이프와 포크를 제쳐놓고 손으로 먹기 시작하더랍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모든 만찬객들이 여왕을 따라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손님들은 기분좋게 식사를 마쳤고 여왕의 남아프리카 통합제의에 흔쾌히 협력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그날 더 큰 그림을 본 것입니다. 만일 그 날 여왕이 이 손님들에게 무례하다고 큰 소리쳐 책망을 했다면 얼마나 국가적으로 더 큰 손해를 보았을까요? 지혜로운 여왕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우리교회 모든 교우들이 이런 큰 그림을 보며, 큰사랑으로 목장안에 들어가 목장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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