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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로마서 설교 모음

로마서 15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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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의 기적 /롬15:1-13/ 유기성 목사

2016-08-27 09:48:56

 

롬 15장은 로마서 결론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하면서 정말 하고 싶은 말씀이 여기에 나옵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된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된 교회’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바로 하나된 교회입니다. 자주 설교하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할 때마다 제 마음을 무겁게 하는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가 굳이 하나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정말 교회가 하나될 수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되지 않고도 잘 지내왔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때로 싸우기도 했고, 갈등은 늘 있었지만 그렇다고 교회가 전도를 못했습니까? 예배를 쉬었습니까?

 

놀라울 정도로 하나된 교회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교회들이 대부분 지탄의 대상입니다. 이단 논란을 빚는 교회는 한 결 같이 일사분란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한 일에 얼마나 쉽게 하나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되자’는 말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되자고 하면서 무서운 독재를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 여러 의견이 있고, 어느 상황에서나 반대 의견이 있는 것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판단 기준은 언제나 성경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요 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교회가 굳이 하나가 되지 않아도 된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이처럼 기도하셨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교회의 하나됨은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하루는 6.25 전쟁에 대해 너무나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따로 만났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든 것은 6.25 전쟁 직후였다면, 이 정도 다른 마음만 가지고도 서로 죽이고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은 한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전쟁의 씨앗이 있습니다. 지금도 6.25 전쟁에 대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만나, 속에 가진 생각을 있는 그대로 나누게 된다면 얼굴을 붉히며 논쟁하는 정도를 넘어 주먹다짐까지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음날 새벽,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때, 마음으로부터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님, 우리 모두 다 진정 주님을 바라보게 해 주옵소서!”기도하는데, 통곡이 되고, 발을 구르며 온 몸을 비틀며 기도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통일의 때가 점점 다가오는 이 때, 우리는 정말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되지 못하면 통일은 오히려 우리 민족에게는 큰 위기의 때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달라지고 속이 드러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깨어지는 가정, 깨어지는 교회를 보면 항상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됨을 힘써 지키지 않으면 어느 순간 마귀에게 당하고 맙니다.

 

프랭크 루박은 [권능의 통로]에서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 대부분 지옥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천국이 임하여 지옥을 몰아내기 전까지 우리가 지옥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하나됨의 은혜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하나되지 못한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익숙하다고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고 분별해야 합니다.

 

:6에서 우리가 한 마음일 때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 4:3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하나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과연 교회가 하나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이 100이면 100, 1000이면 1000 다 다른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가 하나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교회를 하나되게 이루실 분은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고후 13: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하나되게 하시지만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

 

성경의 진리를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은 믿음이 있고 없고도 아니고 옳고 그른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하고 약한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있다면 믿음이 약한 자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라는 것입니다. 약한 자를 돌보아주라는 것은 강요하거나 지적하거나 공격하거나 조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몸이 약한 사람,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합니까? 도와주지요! 맞습니다. 복음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은 사랑이고 하나됨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아볼로가 설교하는 것을 듣고 그가 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부부는 아볼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불러 진정한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후 아볼로의 말씀 사역은 강력해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진리에 대하여 논란이 생기면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강한 것입니다. 신념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리더쉽이 강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면 싸움이 됩니다. 진리를 믿으니까, 조급함 없이 하나됨을 지키면서도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롬 15:1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좋을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롬 15:2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행 6장에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헬라파 유대인의 구제 문제로 분란이 일어나자 다수인 유대파 교인들이 헬라파 교인들을 집사로 뽑아 해결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다운 결정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렇게 하면 시험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권하는 것은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죽기 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온갖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마음에 영접한 것입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당시 초대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도무지 하나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유대인을 구원하시려고 유대인의 종이 되셨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으니, ... 또한 이방인을 구원하시려고 이방인도 받아들이셨습니다.

 

:9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 예수님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10-11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지식인과 무식한 사람,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 남자와 여자,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사람조차도 용납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믿기만 하면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여러분의 죄가 사함 받은 것을 믿습니까? 믿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이제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을 믿습니까? 믿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하나되게 하실 것을 믿습니까? 아멘입니다. 이 믿음도 성령께서 하실 것입니다.

 

이필찬교수님은 예수님께서 함께 밥 먹는 것을 자주 언급하였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성찬을 하셨고, 부활 후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셨고

 

계 3:20에서도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밥 같이 먹는 것을 이리 자주 말씀하셨을까요?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밥은 가족과 친구와만 먹습니다. 음식 규례가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밥을 먹자고 하는 것은 한 가족이라, 한 형제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한 몸으로 받으셨습니다.

 

롬 6장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산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을 통하여 계속 확인해 주십니다.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그러나 나만 예수님과 한 몸이 된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면 독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 안에서 교회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2006년 9월 교역자 퇴수회 때, 모든 교역자들이 한몸됨을 결론삼기로 결단했습니다. 목사, 전도사들 사이에 한 몸이 되지 않고서야, 어찌 교회가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믿음의 싸움이었습니다.

 

선포는 했지만 앞이 캄캄했습니다. 부목사님들이 더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영성일기를 쓰면서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과만 친밀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목사님들과 진정으로 하나되는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된 교회를 세워야 하지만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마귀가 교회가 그저 하나되도록 내 버려둘 리가 없는 것입니다. 강한 확신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인내와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5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그러므로 계속하여 주님을 바라보고 영분별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이전 교회에서 목회할 때, 교회 안에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를 미래 비전을 함께 나눌 사역자 모임을 가진 날, 그 동안의 교회의 변화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계시던 장로님 두 분이 불만을 하나 둘 내어 놓으셨는데, 이것을 나무라는 한 장로님으로 인하여, 육박전에 가까운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모임은 폐회기도도 하지 못하고, 장로님의 고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끝이 났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의 악몽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제 목회는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날 저녁, 저는 잠을 자지 못하였습니다.

 

새벽이 되었는데, 새벽기도회는 인도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회를 향해 가다가, 갑자기 어제 밤에 된 일이 우리교회의 부흥을 저지하려는 마귀의 역사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 사건의 발단이 된 장로님의 문제가 아니라, 마귀의 역사에 대비하지 못했던 나의 불찰임을 깨달았습니다. 교회 앞에 왔을 때, 저는 혼자 소리처럼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무리 괴로워도 마귀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겠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교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의견은 저를 격려하면서, 문제가 된 장로님을 징계하거나, 내 보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뒤로 물러가지 말고,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속에서 또 하나의 무서운 마귀의 역사를 보았는데, 그것은 미움과 정죄와 분노였습니다. 교회는 더 큰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기도하던 중, 성령님께서 제가 죽어야 할 때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저는 두 장로님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오히려 두 장로님이 문제로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다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부임한 이후, 하나 둘 교회체질을 바꾸어 왔던 것들을 다 원위치로 환원시켰습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는 길은 이 길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반발하는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요청했습니다. “모든 미움이 사랑으로 바뀔 때까지는 기도하고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 3개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계속하여

 

“오직 성령께서 장로님들과 온 교인들의 마음이 하나되게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두 장로님도 처음에는 잔뜩 긴장한 채, 모든 면에서 경직되어 계셨으나, 3개월 쯤 지난 후에는 제 진심을 이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에서도 미움과 원망이 떠나갔음을 느꼈습니다.

 

꼭 3개월 뒤에 장로회를 소집했습니다. 그 자리에게 장로님들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성령 안에서 일치를 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날 모두 함께 기도하며, 토의하였습니다.

 

지난 상처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모두 자신의 생각은 내려놓고, 오직 [우리 교회를 향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어디에 있는 지] 만 찾았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기 진심으로 원했습니다. 드디어 그 날 밤늦은 시간, 저와 모든 장로님들은 교회가 나아갈 7가지 기본 방향에 대하여 일치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 다음 주, 주일예배 때, 장로님들과 일치를 본 7가지 교회 방향에 대하여 교인들에게 발표한 후, 눈물과 감격으로 [일치의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그 날 많은 교우들이 울었습니다. 우리는 결국 성령의 인도를 받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 그 교회는 급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분열의 위기를 맞았을 때,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우리 교회의 특성, 다양한 교인들,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진정 마음이 하나되지 못하면 이 축복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하나됨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 얼마나 오래 나왔느냐에 따라 나뉘지 않기로,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로 해야 합니다. 재산, 사는 지역, 학력, 직업, 출신 교회, 고향 그 어떤 것으로도 나뉘지 않기로 약속합시다.

 

하나가 되어 기쁨과 평화가가 충만한 교회 공동체, 이것이 악한 세상을 사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13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아멘!

 

admin

 

댁쟾쇰줈

 

 

 

주님이 하셨습니다! /롬15:14-19/ 유기성 목사

2016-08-27 09:55:15

 

2015년은 주일마다 로마서 강해 설교를 들었던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어야 합니까?

 

로마서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로마서 강해설교를 들은 사람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그저 듣고 안 들은 차이입니까? 로마서 강해를 들었는데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다면 로마서 강해설교를 들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까? 로마서 강해 마지막 부분에 와 있는 우리는 이 관심을 가지고 로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혀주었습니다.1장부터 8장까지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었으며, 이제부터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장부터 11장까지 유대인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다음 12장부터 15장까지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사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자신의 삶에는 어떻게 적용하였는지 지극히 개인적인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때문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16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내게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실 제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점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으로 이렇게 할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들은 가족 친지, 친구들로부터 이해받기 힘듭니다. 하물며 사도 바울 당시에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헌신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받기 힘들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나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목베임을 당하여 순교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될 줄 잘 알고 그 길을 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 사도 바울 자신의 아이디어나 계획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어떤 세상이 되었습니까?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방인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온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이 같은 세상이 올 줄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붙잡혀 살았던 것입니다.

 

롬 6:8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라고 하였는데, 사도 바울이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8에서 매우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18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루어 놓으신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이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예수님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후자였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의 삶이었고, 우리가 로마서 복음을 제대로 읽고 들었다면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0에서 분명한 사역의 원칙을 하나 말씀합니다.

 

:20 나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진 곳 말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삼았습니다. 나는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다가 집을 짓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한 민족에게라도 복음을 더 전하려는 열정 때문에 아무도 복음 전하지 않은 민족들에게만 가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선교는 당시 시대 여건 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무모한 일이었으며, 늘 중단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요원의 불길처럼 세계로 퍼져갔습니다, 세계사가 그것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성일기 세미나를 인도하러 갈 때마다 느낍니다. 지금 시대에 일기를 쓰고 살아라, 이제부터는 마음 까지 열고 살아라, 하는 세미나이니 얼마나 따분한 세미나이겠습니까? 그런데 누구나 싫어할 것 같은 이 세미나, 얼마나 뜨거운 반응인지, 제가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부흥회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런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될 것 같은데 안 되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안 될 것 같은데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이처럼 주님이 이끄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 옳거나 좋아 보이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끄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부관계나 자녀 교육이나 직장생활이나 교회 생활이나 오직 주 예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우리 삶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나로 말미암아 역사하셨다”고 간증할 수 있게 됩니다.

 

:22-24을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했고 스페인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당시로는 땅 끝이라고 여겨졌던 곳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방향을 틀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24 그러나 지금 나는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이방인 선교, 이제 막 시작이고 한도 끝도 없는 일인데, 예루살렘 교회에는 왜 간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항상 주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마음대로 했다면 그는 바로 로마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로마는 당시 세계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먼저 들렀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께서 이끄시는 삶을 살았음을 말해줍니다.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의 이방인 교회가 구제헌금을 모았기에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전달한 다음 로마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구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 이방인들에 대하여 완전히 마음 문이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방인 선교에 대하여 의심하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정말 주님의 역사일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 아니야?” 게다가 이방인 교인들에게 할례 받아야 한다는 등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강했습니다,

 

주님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도 원하셨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을 먼저 원하셨습니다, 15장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흉년든 예루살렘에 이방인 교회의 헌금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매우 힘든 길입니다. 여행이 힘든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마음이 닫혀 있는 유대인들이 힘든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30-:32까지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화를 당하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갈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의 성령께서 강권하셨기 때문에 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기가 막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도 바울은 로마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안전하게 로마로 오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문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로마서를 읽었다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살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시켜서 이루어 놓으신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는 삶은 정말 복된 삶입니다. 물론 여러분에게 주님께만 순종하고 산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복음을 알게 된 후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순종해 보려고 애를 쓰면서 제 삶이 너무나 불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대학원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부산제일교회로 갔습니다. 안산광림교회에서 초청을 받았을 때, 온 교인들의 허락을 먼저 구했습니다.

 

창천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을 때, “돌짝밭 길 외면치 않겠습니다.” 고백한 까닭에 선한목자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순간순간 제겐 너무나 두려웠지만 오직 주님만 따라 살려 했기에 지금 여기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제 5살짜리 아기 엄마가 고민을 상담하였습니다. 이 아이가 유치부 예배를 드릴 때 눈물이 난다는 것입니다. “엄마 나 왜 그래? 왜 눈물이 나는 거야?”엄마는 어린 아이가 은혜를 받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네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그런 거야?’ 라고 대답해 주었는데, 아이는 너무나 실망하더랍니다. ‘

 

또 그 이야기냐?’는 표정으로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이 계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데, 아이는 전혀 감격도 안 되고 놀라운 일도 아니고 엄마가 늘 하는 이야기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놀라운 일에 대하여 왜 우리 아이는 놀라지 않고 따분하듯 듣는 것일까요?” 라고 물어왔습니다.

 

사실 제가 그랬습니다. 그것도 고등학생 때, 주님께서 제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듣고 은혜받기 보다 좌절했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믿는 척 할 뿐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주님께서 다시는 음란한 것들을 보지 않겠다고 약속하라 하셨을 때, 한 시간 동안 괴로워하다가 “죄송해요” 하고, 일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복음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니 그 복음이 귀한 줄 몰랐습니다.

 

여러분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십니까? 로마서에서 놀라운 십자가 복음을 듣고도 그것으로 그치시렵니까?

 

지난 주간 영남권 영성일기 세미나가 열렸던 대구 칠성교회 장로님 한 분이 손주를 보시면서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고 고백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 같은 이 표현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얼마나 손주가 사랑스러우셨으면 손주를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는 것일까? 그래서 손주의 손을 만지고 뺨을 부비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제 마음이 그러합니다. “주여,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주님을 보고 싶습니다.”

 

“주님을 더 분명히 보아야, 저는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정말 그렇게 사랑스러울까요? 어린 손주를 보시면서 너무나 사랑스러워 하시는 할아버지 장로님을 통하여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손주가 할아버지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일까요? 계속 돌보아주어야만 하고, 어리광이나 부리고, 해 달라는 것만 많은 손주인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리 사랑스러우니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확증해 주셨습니다. 어제 큐티 중 붙잡은 말씀입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열쇠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입니다. 로마서는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루어졌음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보시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실’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런 사랑의 교제 중에 살게 된 것입니다. 주님과 이런 교제를 나누기에, 무한 반복되는 것 같은 일상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시련의 때에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고난의 시간이 지나가 버린 것을 깨닫게 됩니다.

 

로마서는 놀라운 성경입니다. 주님과 친밀하고 사랑이 넘치는 교제의 눈을 열어줍니다.

 

순종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해 줍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은 단순하고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 예배에 오신 그 감각으로 모든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왜 나오셨습니까? 재미있어서 오셨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오셨습니다. 편히 쉬려고 오셨습니까? 다 아니실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오셨습니까? 여러분 마음에서 주님이 이끄셔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하셨습니다!”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만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모든 삶을 주일 예배 드리듯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길, 반대가 많은 길이라도, 고생의 길, 두려운 길이라도 생명이시고 왕이신 주님께 순종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 대하여 “주님이 하셨습니다.” 하고 간증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오직 주님께 순종만 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admin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 /롬15:18-19/단12:9-10/고전2:4/ David Wilkerson

2015-06-22 09:54:35

 

◑1. 마지막 때는, 강력한 교회가 나타나리라고, 다니엘서에 예언되어 있다.

 

▲나는 여러분과 하나님의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비전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떠할 것인지

성경이 명확하게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미국교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가증스러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미국 전역과 전세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에 맞게 살아가는

남은 교회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 교회들은 거룩한 삶을 인도하며,

의를 설교하고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살아있으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고

예수님을 위한 강한 영향을 주는 생명체이며 완전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종파들은 대부분 성령 없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임재가 없으며 모든 영적인 은사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능력, 회개 또는 구원의 메시지가 없는 일종의 종교예식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들은 세상과 편안하며 영적이기 보다는 정치적입니다. 그들은 죄를 달랩니다.

즉 동성연애를 방관하며 이혼을 간과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비웃으며

천국, 지옥, 회개 그리고 심판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내던집니다.

 

그런 교회들은 심지어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의아해 합니다.

그 교회들은 너무 차갑고, 약하고 겁이 많아서 세상이 그 교회들을 조롱합니다.

그 교회에는 영향력, 존경, 사회에 대한 영향 등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사단을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 교회는 사단의 군대를 지옥으로 몰아냈으며

기도로 감옥의 문을 열고 통치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어떠한 무기도 그 교회에 대항해서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초기 신자들은 그러한 믿음과 능력을 갖고 있어서

저는 자들이 일어나 뛰고 거지들이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하였고

듣지 못하는 귀를 열었고 모든 종류의 질병을 고쳤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죽은 자들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1세기 교회의 복사본이나 반복판이 되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초대교회보다 훨씬 더 강력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훨씬 더 강력한 예수님의 나타나심과 더불어

더 힘 있고 더 강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성령으로부터의 기름부으심이 클 것입니다.

오순절보다도 더 강력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마지막을 위해서 가장 좋은 포도주를 아끼십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이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는 어떤 예언적 진실이 잠기워져 있으며

마지막 시대에만 그것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단12:9-10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세상에서 새로운 일들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일들은 이미 성경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자신이 이것들을 보았으나, 그의 모든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지혜를

가지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하니라...."(8절)

그러나 오늘날 성령은 이러한 것들을 영적이고 분별력 있는 성도들에게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2:9-10)

 

▲성령은 우리에게 이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바로 지금 주님은 주님의 마음을 따라 강력한 그러나 겸손한

그리스도의 군대를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현대적인 교회를 세운, 말씀에 갈급한 ‘남은 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지옥의 문이 결코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위한 무대가, 지금 설치되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뜨겁고, 미지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의 기초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지상의 어떤 권력도 그것을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래에, 나 Wilkerson이, 마지막 시대의 남은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생각하는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2. 다시 한 번 복음이 완전히 선포될(fully preached)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다음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직 이 세대에 "완전히 선포되지"(fully preached) 않았습니다!

 

몇몇 하나님의 남종과 여종의 사역을 제외하고 오늘날 우리가 듣는 복음은

바울이 이야기한 "완전히 선포된"(fully preached) 복음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세대에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fully preached" 롬15:19

 

그리고 그는 완전히 선포된 복음을, 말보다 훨씬 이상 가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선포하는 말에, 능력이 뒤따르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롬15:18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단지 나의 선포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말이 기적적인 행위들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섰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롬15:19

 

▲만약 바울이 자신의 말을 따르는 기사와 표적없이 전하고 가르쳤다면

그의 메시지는 온전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것은 완전히 선포된 복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고후12:12

 

이 구절에서 바울의 말을 주의해 보십시오.

표적, 기사, 능력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이러한 말을 들을 때 겁을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이러한 말들이 사악한, 능력에 주려있는 설교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가증스러운 것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는 완전히 선포된 복음의 통탈할만한 왜곡을 보아왔습니다.

많은 지혜 있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믿는 이들이 충격을 받거나 억울함을 당했습니다.

그들을 거짓 선지자들이, 초자연적인 역사를 조롱하고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짓말장이들은 완전히 선포된 복음을

자존심과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활동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그것들이 TV와 신문에서 저주를 받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행상주의,

연출법, 거짓 치유, 확증되지 않은 주장, 돈을 쫓는 것, 과장 등을 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눈에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사 가운데 가장 부끄러운 에피소드중 하나가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성공의 복음"이 따라왔습니다.

이것은 그 왜곡을 가중시켰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복권에 당첨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유하게 된다는 약속,

자동차, 옷, 땅, 집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왜곡들이 많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목사들과 전도사들과 평신도들을

완전히 선포된 복음의 진리로부터 돌아서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표적과 기사, 기적 등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는데 능하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의 치료자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강하게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위대한 초자연적인 역사가 신약의 교회에서는 아무 왜곡없이 일어났습니다.

광고나 쇼맨쉽, 혹은 모든 능력이나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 하나 없이 말입니다.

 

▲이 바울의 사역은 본보기를 제공합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너무 긴 설교를 해서 유두고라는 한 젊은이가

창문 문지방에 앉아있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 소년은 3층에서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유두고가 죽은채 들려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20장.

 

바울이 아래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모든 사람을 조용히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행했습니다.

그는 죽은 젊은이의 몸위로 자신의 몸을 뻗쳤습니다.

갑자기 유두고에게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 젊은이는 부활했습니다.

죽음에서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능력있는 기적입니까!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바울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무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두고를 그의 전도여행에 동행하여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도록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던 젊은이를 보라. 하나님은 그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위대한 믿음과 능력의 사람, 바울의 설교를 들으십시오"라는 팜플렛도 없었습니다.

 

아니 그 일은 일어나지 조차 않은 것 같았습니다.

대신에 모든 사람이 단지 3층에 다시 올라가서 성찬식을 갖고 바울은 계속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성경은 유두고를 더 이상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왜일까요?

교회에서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상적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완전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는 표적과 기사가 따랐습니다.

이 강력한 역사가 성도들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 위대한 역사는 "특별한 기적(special miracles, 희한한 능)"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행19:11-12

 

이 "특별한 기적(special miracles, 희한한 능)"은

당시 신자들의 일상생활과 예배에서 기대되는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위해서

팡파르가 울리는 거대한 집회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이 능력의 역사를 주님과 동행하는 매일의 삶의 한 부분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만약 선포(preaching)만으로 하나님의 열망을 채울 수 있다면

미국은 오래 전에 그리스도께 속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만으로.. 보시다시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에서 3개월간의 대담한 선포(즉 설교)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 (9절)

 

에베소는 불경하고, 우상숭배가 많은 마술에 빠져든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마술책과 주술, 묘기, 마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3개월간 용감히 선포한 후 그들은 더욱 더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바울의 손을 통하여 특별한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갑자기 아픈자가 고침을 받았고 저는 자가 건강한 다리를 갖게 되었으며

눈먼 자의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표적들을 목표로 고의적으로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이런 표적들이, 자연스럽게 동반되었습니다.

 

그때가 에베소의 사단의 권세가 물러나기 시작한 때입니다.

스게와라고 하는 제사장의 일곱 아들은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바울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에게서 악귀를 쫓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안에 있던 군대는 그들을 대항하여 공격했습니다.

그들의 옷을 찢고 격렬하게 그들을 쳤습니다.

그들은 발가벗은채 소리지르며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도망쳤습니다!

 

이 말이 전 도시에 퍼졌습니다.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17절).

사람들은 "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사단의 능력보다 뛰어난 권세를 갖고있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도시의 광장에서 큰 불을 놓았습니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19절)

 

수 천 권의 귀신을 쫓아내는 법, 마술, 신비과학, 마법에 관한 책들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완전히 선포된" 복음을

표적과 기사와 능력의 행사와 함께 접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3.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설교와 교육 이상의 것들을 하도록

계획하고 계십니다.

 

나는 복음이 능력과 성령의 나타내심 -능력의 기사를 행하고 복음이 사실이라는 것

을 증명하는 것- 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완전히 선포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바울은 대담하게 증언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2:4

 

희랍어로는 여기에 "증거를 가지고"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나는 증거를 가지고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과 성령은 기사를 통해 나를 도우십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히브리서 2:4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바울의 메시지를 표적과 기사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히2:4

 

▲신약의 성도들은 한가지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행4:30

 

이 사도들은 완전한 복음을 전파하며 어디든 갔습니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나니" 행2:43.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행5:12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5:16

 

▲마지막으로, 완전히 선포된 복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표적과 기사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가장 결론적인 구절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나니.. 행14:3)

 

이 구절은 사도들이 오랫동안 담대히 섬기며 은혜와 회개에 대해 선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가 그들의 손으로 행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오늘날의 교회는 약하고 비효율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더 이상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능력의 행사를 행하시기를

그만두셨다고 가르칩니다. (소위 은사중지설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언제 이런 초자연적인 활동이 멈췄는지 아무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죽었을 때 기적이 멈추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적이 멈춘 것이 약 AD 150년 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께서 "이만하면 됐다!

나는 지난 수 천 년 동안 표적과 기사를 믿는 자들을 위해 행했다.

그러나 지금 너희들은 완성된 성경을 갖고 있고 더 지혜롭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중단하겠다. 더 이상 기적, 표적, 치유는 없다!"라고

말씀하신 날이나 주간이나 달이나 해를 감히 찝어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들 뒤에는 놀라운 속임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시대에는 사탄이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사를 가지고" 등장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살후2:9)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인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막13:22

 

생각해 보십시오. 사단, 거짓 그리스도인, 거짓 선지자, 모두가

자신의 메시지를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지고 확인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를, 그런 강력한 표적을 행하는 사단에게 노출시키시고

강력한 무기나 초자연적인 역사없이 우리를 내버려 두실것이라고 믿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단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나 하나님은 할 수 없으시다"라고 이야기하는

교회를 가지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남은 교회가

...두루 나가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막16:20

※“따르는 표적”입니다. 표적이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의 무리들 가운데 있는 모든 거짓 표적과 기사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의 막대기가 바로오의 뱀을 삼킨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이 마지막 시대에 모든 사단의 악한 역사를 삼켜버릴 것이라고

나는 대답할 것입니다.

 

사단의 업적은 하나님의 믿을 수 없는 표적과 기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의 기사는 진짜이며, 진실되고,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잘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그 기사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평범한, 거룩한,

구별된 성도의 손으로부터 뿜어나올 것입니다.

 

이 성도들은 은밀한 자기 기도의 골방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은 작지만 준비된 군대로서 믿음으로 가득차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 열망이 없을 것입니다.

 

팡파레가 없이도 그들은 병원으로 가정으로 길가로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병자의 손에 손을 얹고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보게될 것입니다.

 

그들은 사단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지위나 권세를 던져버릴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너무나 강력해서 그들의 기도는 복음을 위하여 전세계를 열어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그들의 능력의 역사로 확인하실 것입니다!

 

 

◑4, 이 마지막시대의 남은 교회는 떡으로만 살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이 하나님이 쓰시기에는 너무나 평범하다고 생각한다면 주의 깊게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그의 마지막 시대의 사역을 이름있는 전도사나 목사를 통해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만으로는 하나님의 영의 거대한 움직임을 다룰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주부, 십대, 나이 든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역사를 행하시는 것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을 필요로 하실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군대는, 떡으로만 사는 습관을 뗀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예수님은 사단이 광야에서 돌을 떡으로 바꾸어 보라고 시험했을 때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떡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자연적인 물질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음식, 집, 옷, 노동, 봉급을 포함합니다. 떡은 생계

즉 그 자체로는 악하지 않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상의 것들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후략)

 

...................... 길어서 후략한 부분 ..........................

 

▲그러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들만을 위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삶은 직업, 집, 지불해야 할 돈으로 싸여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도는 자기들의 필요, 자신들의 상처, 자신의 문제,

자신이 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떡으로만 살고있습니다!

 

물론 직업을 가지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명예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 떡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일생의 시간을 그저 생존하는 데에만, 즉 먹고 사는 데에만 사용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배우자를 찾는 것만을 생각하며 모든 시간을 허비합니까?

그들의 기도중 얼마가 하나님께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달라고 요청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까! 그들은 떡으로만 사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많은 부부가 자기 자녀의 문제를 가지고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까?

이 한가지의 문제가 그들의 모든 생각과 모든 기도를 삼켜버립니다.

그들은 한 가지 필요, 즉 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10절)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하나님의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 말입니다!

 

지난 6개월동안 가장 많이 생각해온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시간과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까?

주로 떡의 문제나 개인적인 필요였습니까?

 

떡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여러분에게 생명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광야에서 살고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일어나서 떡을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떡을 주시자 그들은 고기를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개인적인 필요를 채워달라고 외쳤습니다. 40년 동안 매일 그러했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그것은 지루함, 고역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위해서 그런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그분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살아야 한다! 나는 네게 떡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말아라. 계속 나아가라! 내가 네게 말하였다. 그곳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강과 나무와 숲과 초원이 있는 땅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땅이 너희의 것이 되기를 원한다!"

만약 여러분의 전생애가 생존하는데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예수님에게 사로잡혀 그의 말씀안에 자라며 당신의 마음을 신랑을 위해 꾸며진 신부로서 준비시키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루하며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와서 생명의 일부분을 이곳 저곳에서 맛볼 수 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생명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은 떡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기르고 계십니다. 대신에 그들은 밤 12시에도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생존의 광야에서 살아가는데 지쳤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떡으로만 살아가는 젖을 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이 받는 훈련은 성령으로부터 와서 비밀스런 기도의 골방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자신을 끊임없이 준비된 상태에 있도록 준비하는데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시대의 군대의 모든 구성원은 반드시 중심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대한 마지막 부으심을 행할 자세를 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요한은 "주를 위하여 준비된(prepared) 백성을 준비시키기(make ready) 위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선포, 자신의 마음을 준비시키라는 백성들에 대한 부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디모데후서 2:21)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prepare)그만 섬기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새로운 일을 하실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사무엘상 7:3) 또한 다윗은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라고 말했습니다.(시편 10:17)

이 마지막 구절에서 다윗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알기 위한 간단한 3단계의 계획의 틀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께 청원함(기도함)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마음을 준비함

하나님은 여러분이 알도록 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세계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가장 많은 성령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잔에서 부어주실 것입니다. 커다란 회개가 여러분의 이웃과 직장동료와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 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느곳에서든지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은 교회에서 돌아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을 찾을 것입니다. 그들은 준비된 마음을 갖고있는 사람을 필사적으로 찾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수만명의 평범한 종들을 그분의 마지막 시대의 사람 대 사람의 사역에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안에서, 여러분을 통해서 지금 그분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광야의 생활을 인내하면서 그냥 앉아계십니까?

오늘 하나님께 고백하십시오. "오 하나님 제 인생이 가치가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지금 절망의 광야에서 떡으로만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고 싶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빠지십시오. 매일 주님을 찾기를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시키는데는 혁명적인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의미와 완전함이 있게 되는 것은 이러한 준비를 통해서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감정과 성품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안에 있는 능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준비된 것을 보시면 그분의 사역을 하기 위한 놀라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앞에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여러분은 악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 르호보암이 마음을 오로지하여(not prepared his heart)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함으로 악을 행하였더라 (역대하 12:14)

우리는 이시간에도 능력의 역사를 위하여 자기 백성을 준비시키시는 권능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이사야 42:13)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시키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한 마지막 시대의 부으심을 위해 무장되고 준비된 종이 되십시오. 그러면 이 마지막 시간에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안에 살아오시는 것을 보게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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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이웃을 기쁘게 하라 /롬15:1-7/ 하용조 목사

2015-05-27 00:29:38

 

로마서 12장 이후의 개요를 한 눈에 잡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외우고,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이후 개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12장 이후에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크리스천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입니다.

 

12장에서는, 크리스천의 삶이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며

13장에서는, 크리스천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4장에서는, 크리스천은 믿음이 연약한자를 비판하지 않고 돌보는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14장과 15장이 비슷합니다)

 

▲15:1,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섬기라.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버려진 수많은 영혼들과 가난한 영혼들과 외롭고 고독한

영혼들을 돌보고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시간과 돈과 모든 것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강한 자는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문제는 자기만 해결되면 모두 해결됩니다.

 

결국 문제는 자신의 문제입니다.

싸움은 마귀와의 싸움이 아니고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마귀와 싸워서 여러분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패배하는 이유는 여러분 자신이 자기 안에서 먼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5:1a, 왜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까?

 

세상에는 강한 자가 판을 칩니다.

그리고 강한 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약한 자의 약점을 이용해서 존재합니다.

 

여러분의 형제의 약점이나 부인의 약점으로 장난하지 마십시오.

남편의 약점을 가지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약점이 있다면 보호하십시오.

그 약점은 여러분이 사랑해야 할 부분입니다.

 

왜 우리는 연약한 형제의 약점과 치명적인 상처를 보호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덕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휴머니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선행이나 윤리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인임을 알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병도, 절망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었다면, 우리는 살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나 실수를 지적하시고 심판하셨다면

이곳에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이 눈감아 주시고, 못 본 척하시고, 안들은 척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 은혜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의 연약한 형제를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연약한 점을 비판하지 말고 감싸주라는 것이 롬14장과 15장에서

반복적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약한 자를 도와주면 그때부터 예수님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건 없이 용서해 준다든지,

그 사람의 약점을 덮어주면 놀랍게도

 

바로 그 순간에 가슴속에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말과 옳은 말로 비판을 해도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15:1b,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가 좋은 옷 입는 것, 학교에 가는 것 등 모두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반지가 맞느니 안 맞느니, 화장품이 내 얼굴에 맞느니 안 맞느니 하는 모든 것도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남편이 존재합니다.

 

또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아내가 존재한다는 것도 믿으십시오.

그러면 가정에 평화가 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를 기쁘게 하지 말라. 너의 쾌락을 위해 살지 말라’ 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롬15:2, 이웃을 돕되, 덕을 세워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롬15:2

기쁘게 하는 데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고 술집을 데려가서는 안 됩니다.

 

남을 기쁘게 한다고 도박장에 데려가지 마십시오.

그것은 선을 이루는 것도 아니고 덕을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남을 도와주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롬15:3, 그리스도를 본 받아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15:3

 

왜 우리가 남에게 선을 베풀고 약자를 도와주고 가난한 자를 도와줍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비와 도덕심으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

 

노인들을 도와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도덕성에 기초해서 하는 것이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 이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자기를 기쁘게 하면 안 됩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지만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1절을 보십시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따라서 다른 사람을 위해 고생할 때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하는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 나만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 일을 하게 된 것도, 여러분이 손해 보는 것도 축복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떠나고 당신 혼자 남아서 청소하게 되는 것도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 한해를 그렇게 사십시오.

 

나를 기쁘게 하면서 살지 말고, 자식들과 부모를 기쁘게 하면서 사십시오.

이 목적을 가지고 사십시오.

 

‘내가 회사를 다니는 목적은 사장을 돕기 위해서 다닌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복이 옵니다. 과분하게 일하십시오.

 

정해진 시간만 일하지 말고 시간을 넘어서 일하십시오. 그러면 복이 옵니다.

성경의 놀라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전서 2:22~24절을 보십시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집도 없으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여러분,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셋방에 사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자기 집이 없다는 것을 너무 불평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그런 집도 없었습니다.

 

▲롬15:4, 성경의 교훈을 따라서 살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15:4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 시간도 없이 모두 빼앗긴 삶을 살았습니다.

 

‘내 시간이 없다. 내 공간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정상입니다.

내 것은 모두 남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삶입니다.

그러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건강도 시간도 빼앗기는

사랑의 착취를 당하면서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하나님 섬기다가 죽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배부르게 살다가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고통 없이 죽는 것을 원하십니까?

그것도 복일 수 있지만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수 있다면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분만을 위한다면 병들어 죽어도 좋습니다.

 

▲예수님을 본 받아 살 때... 민족의 소망이 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우리에게 소망을 주려함이었습니다.

예수님만 계시면 절망가운데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정신 차리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는 너무나 분수에 넘치게 살았다’고 하면서

전 국민 적으로 허리띠 졸라매고 살기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 선포 시점이 IMF 이후였던 것으로 추정)

이렇게 5년만 산다면 우리나라는 잘 살 수 있습니다.

위대한 국민이 없이, 어찌 위대한 정부가 있을 수 있습니까?

 

위대한 정치가들이 위대한 정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국민이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채찍질하면서 검소하게

전 국민이 4~5년 산다면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좋습니다. 떵떵거리고 살 때보다 살맛이 납니다.

온 국민이 모두 긴장하고 회개하려고 하는 이것이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하면 축복이 옵니다. 북한은 배고파서 망한 민족이 되고

우리는 배불러서 망한 민족이 됩니다. 우리는 배고파야 합니다.

사람만 죽지 않으면 됩니다.

 

▲롬15:5~6,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15:5~6

우리 하나님은 기다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인내와

우리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안위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갖게 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복된 삶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약한 자’는 누구인가?

 

*일차적으로 율법이 정한 음식 규정을 까다롭게 지키는 유대계 신자들

*의심하는 가운데 고기를 먹는 헬라계 신자들 고전8:7

 

‘강한 자’는 율법에 대한 보수적 입장을 보이는 자들로 볼 수 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도, 고기, 마실 것, 술, 안식일, 유대인의 절기 준수

등으로 서로 많은 갈등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물론 넓게 '신앙이 약한 자, 어린 자' 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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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바울의 소명 /롬15:17-33/ 하용조 목사

2015-05-25 03:05:24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지만, 동족을 사랑한 바울

 

오늘 우리는 로마서의 결론 부분에서 사도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자기 민족을 향해 절규하고 있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회개하고 예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는데

선택받은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거부하고 복음을 거부하고

구원을 거부하는 것을 생각하면 사도바울은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롬9:1~2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가 큰 근심이 있는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내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예수에게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천국의 생명책에 자기의 이름이 빠지게 될지라도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고통은 사랑하는 자기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을 위해 소명 받은 바울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것을 이룬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의 간절한 꿈은 ‘민족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사도바울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에게 이방인을 위하여 살라고 명령했습니다.

 

여러분, 은혜란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은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데 일생을 바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이방인을 위해서 순교하는데

바울의 생애를 바치기를 원하셨습니다.

 

16절에서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싶은 것이 자신의 마음이지만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된 것이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자기의 뜻을 이루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16절에서 자신을 이방인을 위하여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고민은 자신을 설명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부족하고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십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분도 있겠지만

 

어떤 분은 대답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의 소명이 확실한 사람이 부럽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복음의 제사장입니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입니까?

당신이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받았든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가정에서 일을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혹은 한국에서 살든지 아프리카에서 살든지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 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희미하고 불안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삶이 분명하지 않고 환경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이 말을 아직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냐고 물을 때 ‘저는 대통령인데요, 저는 장관인데요,

저는 사장인데요’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사장이건 대통령이건 노동자건 간에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인가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방인을 위한 일꾼’이라고 자기가 헌신할 대상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시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

 

예수 믿는 한 자매가 불교를 믿는 집안에 시집을 갔습니다.

제사를 지내야 하는, 예수를 제대로 믿을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는 이 집에 보내진 선교사다’라고 생각하고 20~30년을 버티고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30년후 에 그 집안이 예수 믿는 가정으로 변할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는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직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

 

우리가 직장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이 직장에 보내주셨다.

내 월급을 반으로 줄여도 상관없다.

나는 월급 받으러 온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분명한 하나님의 일꾼이요, 복음의 제사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는 생애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쓰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싶어 하는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로마서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한 가정에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과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아서 딸은 ‘나는 시집가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살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미국으로 시집을 가야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 딸의 심정,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일 수 있고 사도바울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동족을 두고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 기막힌 심정이 로마서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소명)을 듣는 자

 

▲농촌으로 전도하러 떠난 목회자

 

제가 최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지난 12월에 교회를 사임한 강동진 목사님입니다. 그분은 제 눈치를 보지 않는 자유함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농촌목회를 위해 충북 보은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저는 이 교회에서 더 일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면서 가야한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웃으면서 거절하는 사람이 무서운 법입니다.

가기로 결정하고 인사까지 했지만 저에게는 그를 향한 미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설득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

‘온누리교회에 있으면서 그곳에 파송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습니다. 할 수 없이 저는 잘 가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도 무섭지 않고 아무것도 무섭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인구 3, 4만 명이 있는 그 지역에 가서 예수를 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목사라는 자격을 포기하고 농사꾼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분이 그 일을 한 번 정도 생각해 본 것이라면 그렇게까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기 때문에 할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 일생을 서울에서 살지 않고 교회도 없는 시골에 가서 살겠다’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다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환경을 만듭니다.

좋은 환경을 쫓아다니고 좋은 조건을 쫓아다니면 행복할 것 같지만 결국 불행합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직업이나 위치가 분명하고, 사무실에 내 자리가 분명해야 만족합니다.

그것을 빼앗으면 모두 가버립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빼앗아도 있어야 합니다. 월급을 주지 않아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서든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자기를 가리켜 ‘나는 이방인을 위하여 하나님이 특별하게 세워주신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에게 이런 믿음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일을 꼭 해야 한다. 내 생명 끝날 때까지 이 일만은 굶더라도 죽더라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하겠다’ 이런 마음을 갖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16절을 보십시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목표는 한가지였습니다. 곧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꿈은 자기의 사랑하는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을 제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교사가 나오고, 목사가 나와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구원의 축제가 이루어지는 제물로까지 바쳐지도록

하게 하는 것이 바울의 꿈이었습니다.

 

▲다른 일에는 침묵함

 

그래서 그에게는 소위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그 자존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7,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사도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절제 하겠다는 것입니다. 말할 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 시대에도 할 말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 외에는!

 

▲사명과 십자가 이외에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남을 비판하고 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른척하고 오직 이방인을 위하여 나를 부르신 그것만을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고전2:2에도 사도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것은 반지성주의나 비지성주의적인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지성의 세계와 학문의 세계와 상식과 합리성의 세계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결혼도 중요하지 않았고 어떤 위치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처녀지라도 좋다.

 

그는 죄수도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갇힌 몸이 되어도 아무런 갈등이 없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렇게 많은 매를 맞았어도 찬송을 불렀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지성이 뛰어나고 의식이 뚜렷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보면 거세된 사람이요 편협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19절과 20절을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복음을 알고 난 후에 자기 자신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살던 지역도 민족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다른 사람이 전도한 곳에서는 전도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소리입니다. 복음의 경쟁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개척정신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곳에만 찾아 가겠다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의 싸움은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기득권 싸움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만들어 놓은 곳에 가서 앉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그런 기득권과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며 개척정신을 갖습니다.

남이 전도하지 않는 곳, 처녀지를 향해 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경쟁이 아니라,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었다.

 

제가 온누리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이곳에 땅을 준비하고 목회를 하라는 초청을 받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일 년 동안 고민한 것은 가까운 곳에 충신교회가 있고 영락교회, 사랑의교회, 소망교회가 있는데 왜 여기에 교회를 또 세워야 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잘못하면 경쟁하기 쉬워집니다. 차라리 선교를 하러 나가거나 농촌에 가서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고민했습니다.

 

일 년 만에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신 것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 의도했던 교회, 사도행전에서 보여주었던 교회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가능한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생각을 할 때 제 가슴에 불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교회라면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바로 12년 전의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전도한 곳에서는 사도바울은 전도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곳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미지의 세계로 가야하고, 기득권을 포기하고 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로마를 넘어서 스페인으로! 롬15:22~33

 

이제 우리는 로마서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22~2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로마의 유혹에 빠지지 않다

 

이 곳에서 두 절을 주의하여 보십시오. 먼저 2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로마가 아니라 서바나였습니다. 서바나는 지금의 스페인입니다.

그 당시 세계관에 의하면 서바나는 지구의 끝이고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전설적인 그 곳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기 위하여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고 이것이 로마서입니다.

 

그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로마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로마는 그 당시 전 세계의 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로마의 유혹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쓴 진짜 이유는 서바나로 가기 전에 로마에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그들로부터 지원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하여!

 

사도바울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쳤습니다.

그 정도로 일을 했다면 기득권에 안주할 수도 있습니다.

원로목사가 되어 자기가 고생한 것만큼 남은 여생을 편안히 지내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거절하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합니다.

지구의 끝이고 죽음의 땅이라고 하는 서바나에 관심이 있고 그곳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한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서 죽겠다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는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인 위구르족, 하나족과 같은 미전도종족을 입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풍토병도 있습니다.

또한 그들을 전도하려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받아야 할 한 사람의 영혼이 있다면 그곳에 가겠다고 말합니다.

28절을 보면 복음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고한 대가로 열매를 따먹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십시오. 이것이 복음의 개척정신입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 위에 있지 않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있고 한 나라가 있다면, 한 민족이 있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거기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30절 이후에 3가지 기도부탁을 합니다.

 

첫째는 전도하는 그 지역의 사람들이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합니다.

 

둘째 부탁은 이방인들이 바울에게 헌금을 했는데 그 헌금으로 인해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로마에 가는 여정을 인도해 주실 것과 장차 서바나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고 로마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은 땅 끝에 한 영혼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그 곳까지 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사도바울의 이 뜨거운 심장이 여러분의 혈관 속에서 똑같이 맥박하기를 바랍니다.

 

온누리교회를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미전도 종족으로 가게 하십니다. 언젠가 여러분이 갈 수도 있습니다.

 

한 영혼이 있다면 우리는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은 서바나로 가기 위해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주님, 여기에 머리 숙인 당신의 종들에게 성령이 임하사

 

저들의 마음이 복음으로 불타게 도와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축복해 주시고

 

복음의 제사장으로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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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내게 주신 은혜 /롬15:14-21/ 곽선희 목사

2014-11-25 16:15:16

 

몇 년 전에 제가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상하이대학에 8명의 교수가 오찬을 같이 한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제가 주고받은 이야기 경험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고 또 잊을 수 없는 제 추억이 되고 있습니다.

 

8명의 교수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7사람의 교수가 그 한교수를 몹시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분이 영어를 잘해서 모처럼 통역을 세우지 않고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는데 한사람 되게 좋아하고 자랑하고요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부러워해요.

 

도대체 그것이 뭘까? 해서 물어봤더니 이 사람은 한국 사람하고 살아요. 한국여자하고 사는데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운 거예요. 그래 내가 가만히 있겠어요? 그게 무엇을 의미 하는 거냐? 하고 물었더니 제가 들어본 대로는 이건 신학적 문제더라고요.

 

참 중요한 문제예요. 어떻습니까?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내가 시장도 보고 밥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뭐 어떤 경우에도 그게 우리의 문화예요.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중국 사람은 반대예요.

 

당연히 남자가 해야 되고 시장도 남자가 봐야 돼요. 뭐 여자는 손 하나 까딱 안 해요. 가만히 앉아있어요. 남자가 저녁에 늦게 들어와도 음식준비 해놓는 법이 없어요. 돌아와서 준비해서 대령을 해야 돼요.

 

이게 종래의 중국문화거든요. 자 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데 어떻습니까? 중국 사람은요 정 남자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히 자기가 해야 될 일인데 저녁에 늦게 돌아오면 그 부인이 음식을 준비해놓는단 말예요. 이건 있을 수가 없어요. 이건 너무너무 행복한거예요.

 

그런가하면 여자입장에서 볼 때는 아내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기가 해야 될 일을 남편이 해주잖아요. 시장도 봐주지요. 또 맛있는 중국음식을 만들어주잖아요. 끼마다……. 그러니 이런 고마울 때가 어디 있어요.

뭐 설거지같은 거 손도 못 대게 하는 거예요. “그건 당연히 남자가 할일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고맙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전적으로 은혜라고요. 당연히 내가 할일을 저가 해주니까…….

 

오직 은혜……. 그런데 이게 만약 반대로 만나면 절단난답니다. 이게……. 그래서 중국사람 남자가 한국여자하고 살면 잘살아요.

그런데 한국남자가 중국여자하고 살았다간 끝이에요. 오로지 율법이니까? 이건 율법과 은혜의 관계다 생각해보세요. 당연히 내가 해야 될 일을 저가 해줘요. 이 바로 은혜라고요. 공짜죠. 그게 은혜요 그게 선물이란 말이올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책이 하나 있죠?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 참 베스트셀러로 여러 해 동안 많은 사람에게 읽혀진 작은 책입니다. 꼭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 저는 이 책을 조그마한 책입니다.

 

읽으면서 너무 많이 웃고 너무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책인데 이 책을 쓴 스펜서 존슨박사가 또 다른 책을 하나 또 썼습니다. 그 책은 선물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The Present. The Present, 선물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내용은 줄여 말하면 대개 이런 겁니다.

 

한 소년이 성인이 되기까지 성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이 무엇일까? 가장 소중한 선물은 무엇일까? 그걸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합니다.

 

자 병도 들어보고 실패도 하고 연애했다가 배신도 당하고 뭐 여러 가지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참된 삶은 무엇이며 참 선물은 무엇일까? 그런데 그 지혜로운 노인이 있었는데 그에게 가끔 가서 의논을 합니다. 이건 무슨 뜻일까요?

 

가장 귀한 삶은 무엇일까요? 선물을 무엇이 될까요? 그런데 이 노인이 일러주질 않습니다. 당장 대답해주지 않고 세월이 가면 알거다. 네가 친히 경험하면서 배워야 되느니라. 하다가 상당히 성인이 된 다음에서야 비로소 일러줍니다.

 

가장 귀한 선물을 현재다. 현재……. 여러분 영어로 present라는 말은 선물이란 말도 되고 현재란 말도 됩니다. present……. 그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현재가 선물이요 선물이 현재예요. 현재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최고의 선물을 받은 거예요.

 

내 가진 바를 모르고 현재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현재가 가장 큰 선물이다. 그리고 현재를 아는 것이 그 의미를 아는 것이 그걸 선물로 깨닫는 것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마스터키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현재 과거에서 매이지 마시고 현재가 중요해요. 허망한 꿈을 꾸지마시고 현재가 중요해요. 하나님은 현재라고 하는 선물을 내게 주셨어요. 젊었건 늙었건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큰 선물을 받은 거예요.

 

뭐 이 예수소망교회 참 큰 선물입니다마는 특별히 나는 이 본당에 들어설 때 오르간소리가 나는데……. 물론 제가 여러 교회를 얼마나 많은 교회를 다닌 거는 아닙니다마는 뭐 세계의 여러 교회를 다녀봤지만 이 오르간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 좋다. 좌우간 이거 끝내주는구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말 좋은 오르간을 우리가 가졌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좋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지금 받은바 내가 처해있는 처지 이걸 알아야 됩니다. 가정? 이 별거 아네요. 남편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제 남편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내 아내를 만났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에요.

 

행복한 사람이다 하는 말이올시다. 그러나 어쩌면 반대로 생각해서 내가 윗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역사적인 실수다. 이건 하나님도 실수한거다. 이딴 생각을 하고 그 많은 세월을 살아가고 있으니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요.

 

오늘 내가 만난사람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특별히 개인적인 고백을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 말을 바꾸면 내게 주신 선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 있어요. 은혜는 곧 거저주시는 것이요 거저주시는 바는 바로 선물이란 말예요.

 

그 특별히 로마서 12장 3절이나 특별히 갈라디아 2장 9절에서는 내게 주신 선물을 앎으로 내게 주신 은혜를 앎으로 저들이 나에게 교제의 악수를 청했다는 유명한 말도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

 

일단은 이 은혜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율법이냐? 은혜냐? 모든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자가 믿음의 사람이요 율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무서운 율법의 멍에가 주어지는 것이에요.

 

여러분 생각하세요. 부모님의 사랑을 받을 때 이건 내가 수고해서 받는 겁니까? 아내의 사랑을 받을 때 내가 이거 돈 주고 사는 겁니까? 내가 이 건강을 지킬 때 그래 내가 위생을 잘 지켜서 건강한겁니까?

 

그 대가로? 물론 그런 것도 좀 있지요. 하나 아니올시다. 적어도 은혜의 사람으로 생각할 때는 건강한거 선물이요 재물도 선물이요 기회도 선물이요 자녀도 선물이요 안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것이 선물이에요.

 

어떻게 내 노력 내수고로 될 수 있는일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내게 거저주시는 선물이다, 은혜다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은혜라... 이것이 믿는사람의 고백입니다.

 

크로딘 박사는 원래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작가로 유명해진사람입니다. 그가 아주 산간벽촌에 있는 광산촌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을 때 아주 유명한 큰 병원에서 크게 활동하던 간호원하나가 억울하게 오해를 받아서 쫓겨나서 이 광산촌에 와서 일하는 어여쁜 간호원 하나가 있었어요.

 

그는 쫓겨 온 것만도 억울해요. 이 광산촌에 사는 것도 억울해요. 또 억울한 게 있어요. 그가 수고하는바에 비해서는 너무 월급이 적어요. 박봉이에요. 그 수고한데 대하여서는 전혀 뭐 10분의 1도 안되는 적은 봉급을 받으면서 일하는 거예요.

 

그런데 일할 때 그 얼굴은 너무 밝아요. 찬송하며 웃으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하고 퇴근시간이 지난다음에도 집에 가지 않아요. 남은 잔여 일을 하고 너무 즐겁게 일하는 거예요. 그때 클로린 박사가 보다보다 못해서 한마디 했어요.

 

“당신은 일한 만큼의 대가도 받지 못하는데 이 산간벽촌에 와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기쁨으로 일할 수 있냐?”고……. 그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월급이 작기 때문이죠. 정당한 월급 받고 하면 내가 상품이 되고 하나의 고용인이 되지만 나는 월급과 상관없이 일하는 그 기쁨 때문에 나는 자유로울 뿐이다. 나는 돈에 팔린 사람이 아네요. 하고 싶은 하니까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제 가치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니까요. 제 삶의 가치는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니까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가치를 인정하면 그 인정을 받는다는 확신이 있을 때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는 것이에요.

 

또한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은혜라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자에게 은혜가 있다는 것이죠. 세상에 은혜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마는 은혜를 은혜로 모르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아내의 소중함을 몰라요. 죽을 때가서야 고맙다 한마디하고 죽더라고요.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어디 있어요.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아주 술을 많이 하는 그런 순경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그 부인 참 좋은 여 집사님인데 그저 매일 밤 술 먹고 들어와서 발길로 차는 게 일이에요. 말이 아니라 발길로 차면서 또 한마디 한데요. 술 먹은 김에……. 너 빨리 죽어라 그런대요.

 

그래야 내가 내 애인하고 살꺼다 그딴 소리 한대요. 세상에 이런 모욕적인 얘기가 어디 있습니까? 이 말을 들어가면서도 잘 순종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 부인이 덜커덕 부인병에 걸려서 중앙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어요. 수술 받을 때 제가 심방을 갔었어요.

 

마침 남편이 왔어요. 그 딱 앉혀놓고 제가 한마디 했죠. 그 부인이 그래도 남편이 방문해줬다고 고마워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못된 놈을 뭘 반가워하세요? 그랬죠. 아니올시다 그래요. 그담에 그 남편보고 한마디 했어요.

 

당신 그저 술만 먹고 들어오면 마누라보고 죽으라고 했다며? 그런데 뭘 여기 방문했나? 지금 죽을 준비하는데……. 그랬더니 그때 한말이 제가 잊지 않습니다. “아니올시다. 제가 못돼서 말은 맘대로 했지마는 제게는 가장 소중한 여자입니다.

 

이 사람보다 더 귀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이 한마디를 듣고 또 부인은 고마워가지고 목을 놓고 울더라고요. 참 여자란 게 그렇다만……. 그 한마디에 그만 감동이 되가지고 우는걸 내가 보고 참 세상 요지경이라고 생각했어요.

 

여러분 은혜는 은혜로 아는 자에게만 은혜예요.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도 많잖아요. 이게 다 어디서 오느냐? 은혜를 은혜로 모르기 때문에…….

 

그러면 은혜는 은혜 될 때에 어떤 조건이 있냐? 딱 두 가지뿐이 없어요. 하나는 믿음이요 하나는 겸손이에요. 믿음을 가지고야 은혜가 되고 믿을 수만 있을 때만……. 그런고로 또 하나는 겸손이에요. 그런고로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서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알게 만드는 것이에요. 겸손한자에게만 은혜가 있어요.

 

자 보세요. 부부간에도 겸손해서 나보다 남편이 낫다할 때 은혜가 되고 아내가 나보다 낫다고 할 때 언제나 그래요. 심지어 자식을 놓고 보아도 자식이 나보다 낫다……. 나 같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저런 귀한 자식이 있다니……. 이게 얼마나 행복한거예요. 겸손할 때만 은혜가 있는 거예요.

 

저는 며칠 전에 어느 대학총장님께서 진갑 요새고희가 되었어요. 70세……. 그 잔치에 갔다가 아주 희한한 소릴 한마디 들었어요. 왜냐하면 그 부자간이 전부다 좀 유머가 많은 사람들인데 아버지가 나와서 오늘 이렇게 제 잔치에 오셔서 감사 합니다 인사를 했고요 아들보고 나와서 인사하라고 했어요.

 

그 맏아들 떡 나와서 하는 말이 “저는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아버지를 부러워합니다. 그 이유는 나 같은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그러더라고요. 참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더라고요.

 

“지금 내가 아들이 있지마는 아들이 나만큼 될 것 같지 않아 걱정입니다. 나 같은 아들이 있다는 게 이게 보통 행복입니까?”그러더라고요. 저거 말 되긴 되는데 되게 건방지구만……. 다들 많이 웃었습니다마는 참 그 주고받는 대화 속에도 늘 큰 기쁨이 있더라고요.

 

여러분 기본자세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면 모든 것이 은혜요 믿으면 모든 것이 은혜로 그 의미가 바뀌는 것이에요.

 

특별히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은혜라는 것이 생산적입니다. 은혜는 깨닫는 것만 아니요 느끼는 것만 아니요 은혜 되면 벌써 달라지는 게 있어요. 얼굴부터 달라지죠. 그래서 우리 교회 예배 마치고 나갈 때 얼굴 보면 내가 압니다.

 

은혜 받은 사람……. 얼굴 환하고요. 아직도 무슨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 가지고 잔뜩 찌푸리고 나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아직 은혜 못 받았어요. 은혜가 뭡니까? 은혜는 바로 생산 내 얼굴을 바꿔요 내 마음을 바꿔요 내 감성을 바꿔요 내 운명을 바꿔놓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또 변화시키는 것이에요. 사도바울은 생각합니다. 나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 이방에서 태어난 그 자체가 은혜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 세상에 낫다는 것 자체가 은혜다……. 이렇게 그는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것이 은혜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갔는데 길을 딱 막고 “어찌하여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나를 강제로 불러서 하나님의 사람 되게 했다.

 

아니 예수를 핍박하다가 벼락 맞아 죽어 마땅한 사람인데 어찌 나를 이렇게 그리스도의 종 만들어서 복음을 전하며 살게 하셨을까? 감사한일이다. 다메섹에서 나를 부르신 주님……. 감사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어요. 그 은혜요. 그러나 바울의 은혜 관에 있어서는 가장 핵심적이고 제가 생각할 때 중요한 은혜가 또 있답니다. 그것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의 고백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제가 아는 대로는 그건 간질병 이였어요. 병이 있었어요. 종종 쓰러졌어요.

 

그래서 누가라고 하는 의사를 동반시켰어요. 한평생 누가가 같이 다녀요. 그 때문에 누가가 사도행전을 쓰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왜 이 병을 고쳐주지 않았을까? 왜 고쳐주지 않으면서 내게 있는 내 은혜가 족하다. my grace ....... 유명한 말입니다. 너 그대로 병든 그대로 네 형편 그대로가 내가 네게 준 은혜다. 그것은 만족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응답을 그는 감사하게 받고 이제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왜 내게 병이 있냐구요? 그래야 겸손하니까……. 왜 내게 가시가 있냐고요? 그래야 오직 주님만 의지하니까……. 놀라운 신비로운 응답을 얻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어떤 경험을 했습니까? 쓰라리고 아픈 경험이 있고 과거가 있습니까? 현재가 있습니까? 묻지마세요. 믿음으로 수용하세요.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세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great grace. 가장 큰 은혜 위대한 은혜라는 것을 그냥 수용하세요. 그럴 때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은혜의 능력을 그는 믿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은혜는 생산적이에요. 은혜는 sharing해야 되는 거예요. 나 혼자 가지고 있어서는 안돼요.

 

같이 나누어야지요. 오늘 성경말씀에 분명히 말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하여 너희들에게 권면하노라. 은혜를 같이 나누자는 거예요. 은혜야 은혜는 점점 파급되어 나가야 되는 것이에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페에르 쌍소라고 하는 분의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 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작은 것에 만족하라. 작은 것에 의미를 깨달으며 만족하라. 또 하나는 소박한 삶에서 기쁨을 누리라. 뭐 굉장해야 되는 거 아네요. 소박한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껴진 것은 이겁니다.

 

“기쁨을 만드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기쁨을 만드는 능력……. 네 스스로 이것 다른 사람에게까지 슬퍼하는 자를 기쁘게 만드는 거 기쁨을 생산하는 그 능력이 있어야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하는 말입니다.

 

강철 왕 카네기를 여러분이 아시죠? 그가 아주 어린아이일 때 어린아이일 때 어머니의 손에 붙들려서 시장에 갔더랍니다. 여기저기 물건을 사게 되는데 얘가 앵두를 가득히 수북이 쌓아놓은 그 앞에 딱 서서 움직이질 않아요.

 

엄마가 불러도 까딱도 안 해요. 저게 먹고 싶어서……. 그래 그걸 알고 상점 일하시는 할아버지가 와서 “얘야, 저거 먹고 싶으냐?” “먹고 싶다” 고……. “그러면 내가 한 웅쿰 한줌 네가 가져라. 그리고 먹어라.” 그랬어요. 안 먹어요. 엄마가 그 얘기를 듣고

 

“야 할아버지가 너 그거 한 웅쿰 가지라는데 가지고 가자. 먹어라.” 안 해요. 끝내 안 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와서 한 웅쿰 집어주었어요. 이걸 받아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래 엄마가 가게 문을 나서면서

 

“야 야 왜 너는 한 웅쿰 먹으라고 했는데 먹지 않고 할아버지가 줄때까지 기다렸나?” “엄마 그거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손이 크거든요.” 내손이라는 거 몇 개 안 집히잖아요. 할아버지 손으로 주어야 많지……. 역시 부자 될 만 하죠?

 

여러분, 내가 무엇을 한들 대수롭겠습니까? 하나님이 해주실 때 하나님이 은혜주실 때 거기에 은혜가 있는 거예요. 아직 불만과 원망과 실망이 있습니까? 그 원인은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세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늘 내가 되었노라.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여러분 은혜가 헛되지 않고 또 다른 은혜의 열매를 맺는 생산적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은혜로 저희들을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는 끝없이 은혜의 길로 인도하시건만 어느새 우리는 교만해서 내 수고로 대가를 거두는 것처럼 내 노력의 결과로 따라 사는 것처럼 착각하는 미련한자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도대체 이 어려운 세상에 사는 것이 은혜요 오늘이 은혜요 현재가 은혜임을 알게 하시고 그 은혜의 깊은 뜻을 알아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주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는 은혜의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로 받아 주십시오 /롬15:1-7/ 이동원목사

2014-12-03 15:46:54

 

오늘 주일은 공식적으로 모든 목장교회가 준비를 마치고 목장을 오픈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서울 어느 아파트 청약 경쟁률에 44:1이라는 사상 최고를 기록하며 밤새 인산인해를 이룬 청약자들의 물결이 쇄도했다는 기사를 읽은바가 있습니다.

 

지구상 어느곳에도 유례가 없는 이런 기이한 현상은 소위 시세차익을 노린 떴다방을 동원한 비정상적인 아파트 투기열기 때문이라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속에서 우리교회도 아파트 오픈 하우스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청약을 넣으시면 우리의 가정의 경계선이 확장되어 몇 개의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게 될 것입니다.

 

새 가족, 새 친구를 사귀시면서 가족의 영역이 확대되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몇 푼의 시세차익이 줄 수 없는 참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아파트 평수를 넓혀가도 채워지지 못했던 마음의 외로움이 극복되고 진정한 사랑의 충만함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참된 사랑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사는 이웃들을 섬기고 돕고 살면서 우리의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사랑하게 된 지체들과 더불어 영원히 거하게 될 천국맨숀을 더욱 흠모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오픈하우스 행사에 참여하시는 방법은 열린 마음으로 잠간의 시간만 내시면 됩니다.

 

아직도 주저가 되시면 우리교회 떴다방-목장사역 센타에 연락하시면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 떴다방이 노리는 것은 시세차익이 아닌 여러분의 행복입니다.

 

목장안내서를 잘 읽어보시고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목장을 방문한후 청약을 넣으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이 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이 가져 주셔야 할 단 한가지의 마음자세는 이미 목장안에 있는, 혹은 목장을 방문하는 누구라도 기쁘게 받아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기쁘게 서로를 받아드리는 마음'--이것은 앞으로도 건강한 목장공동체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1세기의 로마제국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당시의 전세계에 안정적인 정치적 평화-'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선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현상과 상관없이 로마인들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사도였던 바울은 이런 로마의 희망은 로마에 이미 존재하던 가정교회뿐이라고 확신했고(롬16:3-5에 보면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의 집에 있는 교회를 위시하여)이런 로마교회의 복음전도의 노력을 격려하면서 로마교회가 더많은 이방인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15:9절이하) 무엇보다 서로를 수용하는 열린 자세임을 강조하고자 로마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의 3차 전도여행의 말미에서(주후57-59년사이)

 

그리스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목장교회를 정비하고 오픈하면서 새롭게 만나게 될 이웃들을 어떻게 잘 받아 드릴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1. 주님의 조건없는 용납을 기억하십시오.

 

7절에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서로를 수용하기 위한 제일 중요한 출발점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드린 것"을 묵상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가 어떻게 우리를 수용하셨습니까? 한마디로 하면 '무조건적인' 것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시고 사랑하시고 우리대신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자들이 되었다면 이제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조건없이 받아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우리 공동체안에 나아오는 사람들을 일단 받아주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당신이 회개하면 받아 주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받아주고 회개하도록 도우십시오.

 

제가 신학교에서 소위 조직신학(기독교 교리)을 공부하는데 칼빈주의 구원론에서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 순서에 의하면 믿음이 먼저이고 회개가 나중에 나옵니다. 저는 이것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탕자의 사건'을 묵상하다가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받아 주겠다고 하였다면 그 회개가 진정한 회개가 되었을까요?

 

돌아오는 아들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그는 정말 아버지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뉘우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회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도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나요? 나같은 죄인 이 모습 이대로 십자가 앞에 나아와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시인했더니 나를 자녀로 받아주시고 용납해주신 그 큰사랑을 깨닫고 비로소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그렇게 받아주는 연습을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2. 이웃의 연약함을 담당할 각오하십시오.

 

이웃을 조건없이 수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웃들의 연약함이 내 눈에 보일 때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그 연약함을 우리가 담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 이웃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저 사람, 저럴 수 있나?"하기보다 그래서 "저 사람 곁에는 내가 필요하겠다"고 느끼며 그 곁에 서서 그의 조력자가 되어 그를 섬김으로 그를 유익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태도야말로 부부관계의 본질이요, 가족이 존재하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인간성의 불완전성 때문에 연약함은 인간됨의 피할 수 없는 존재의 양상인 것입니다.

 

건강한 가족은 상처주지 않는 관계가 아니라, 상처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건강한 목장교회 생활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밥퍼 최일도 목사님이 쓰신 최근의 책 "참으로 소중하기에 조금씩 놓아주기"마지막 문단에는 이런 말이 씌어져 있습니다.--"피를 나눈 가족만이 가족은 아니다. 한 핏줄이기에 가족이 아니라, 가족이 되었기에 우리는 한 핏줄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조그만 위기에도 무너지지만 나눔의 사랑은 크고 깊은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이제는 굳이 자식에게서, 아내에게서, 내게서만 희망을 찾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내 원하는 희망의 보따리가 너무 크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희망의 존재들, 가족. 하지만 기쁨과 믿음과 사랑만 나누는 것이 가족은 아니다. 아파하고 미워하다가 화해하고 용서하고 상처까지 끌어안아야 비로소 가족이다."

 

그러나 이런 관계형성을 위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도전해야할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기쁘게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연습입니다.(1-2절의 말씀)그러나 여기서 기쁘게 한다는 말은 감상적인 제스츄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이웃의 유익을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기쁘게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게임의 숙제인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단회적 사건이었지만, 이 십자가로 새 삶을 얻은 사람들은 다시 이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바울은 가르칩니다.(로마서6:10-11)

 

본문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하여 죽고(자신을 기쁘게 아니하고), 이웃을 대하여 사는(이웃을 기쁘게하는) 부활의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연습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용납하는 공동체가 되어갈 수 있습니다.

 

3. 주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이웃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큰 그림을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우리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낼 때 제일 쉽게 보일 수 있는 반응이 무엇이겠습니까?

 

비판하는 것입니다. 제일 어려운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상대방의 행동이 내 맘에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격려하는 일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은 어떤 프로젝트를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이 우리의 프로젝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믿음을 세우고 그리하여 공동체의 믿음을 세울 수 있다면 이 더 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좋아함과 안 좋아함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일에 사랑으로"인 것입니다.

 

교회역사에 보면 교회가 어두울 때는 예외없이 교회가 본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고 비본질적인 것을 이슈화하고 논쟁에 빠져 들어갔을 때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콘스탄틴대제가 기독교 국교를 승인하고 교회당 건축을 한후 제일 먼저 일어난 교회내 논쟁가운데 하나가 교회내 어떤 그림으로 장식할 것인가, 그 그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프레스코 논쟁).

 

중세기 암흑기 카톨릭 교회내 논쟁가운데 하나는 바늘위에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올라설 수 있는가 라는 이슈였습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망하기 직전에 이슈중의 하나는 사제가 입는 가운의 길이가 얼마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였습니다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의 교회내에는 이런일이 없을까요? 어떤 교회는 교회당 건축후 커텐 색깔 가지고 싸우다가 갈라진 교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교회 와서 제일 큰 관심이 벽에 무슨 그림 걸어 놓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들은 교회 와서 제일 큰 관심이 주보입니다. 좋은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는 교회입니다.

좋은 교인은 어떻게 전도 할 것인가? 어떻게 더 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할 것인가? 어떻게 더 잘 이웃들을 사랑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는 교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바로 더 큰 그림인 것입니다. 큰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작은 불만을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5-6절, 다시 7절의 강조)자신의 생각이나 기호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주된 관심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내 이웃들이 구원받고 교회의 건강한 지체가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생각을 언제든지 유보하고 이웃을 받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의 일화하나만 소개함으로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한때 남아프리카연방의 통합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남아프리카 추장 여러 명을 여왕의 왕실에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리 사전 오리엔테이숀이 있었지만 추장 한명이 포크와 나이프가 불편하게 느껴지자 손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함께 있던 영국 각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긴장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여왕이 빙그레 웃더니 나이프와 포크를 제쳐놓고 손으로 먹기 시작하더랍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모든 만찬객들이 여왕을 따라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손님들은 기분좋게 식사를 마쳤고 여왕의 남아프리카 통합제의에 흔쾌히 협력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그날 더 큰 그림을 본 것입니다. 만일 그 날 여왕이 이 손님들에게 무례하다고 큰 소리쳐 책망을 했다면 얼마나 국가적으로 더 큰 손해를 보았을까요? 지혜로운 여왕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우리교회 모든 교우들이 이런 큰 그림을 보며, 큰사랑으로 목장안에 들어가 목장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본 받아서 /롬15:1-6/ 곽선희 목사

2014-11-23 05:58:30

 

심리학 이론 중에 에니어그램이라고 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일반적인 것입니다. 헬라어로 아홉이라는 숫자를 에니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게의 단위인 그램(g)을 더해서 복합어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에니어그램, 그런 아주 상식화된 이론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본성은 순수하게 다 같은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인간은 다 꼭 같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합니다. 직면하는 냉혹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 유형이 변하고 또 발전되기도 하고 그러면서 대체로 봐서 아홉 가지로 아홉 가지 유형으로 이렇게 나타나게 됐다, 하는 심리학적 이론의 전제입니다.

 

이 이론을 가지고 소위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은 수행 지침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어떤 존재로 또는 인간관계로 살아야 성공적으로 살수 있을까? 하는데 이 이론을 적용하기도 하고, 특별히 여러분의 가정생활 자녀교육 사회생활 모두에 있어서 이것을 알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하는 그러한 말씀이고요.

 

특별히 사업하는 분들은 인사관리에 있어서 혹은 조직운영에 있어서 이 이론을 조정해 나아가는 그런 경우가 많고 특별히 어떤 기관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 아주 심리학자를 불러서 이 유형을 잘 구별해 놓고 거기에 적절하게 안배, 배치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적이다 하는 것이죠.

 

이 아홉 가지 유형이라 하는 것은 대체로 이런 것입니다. 긴 설명을 드리지 못합니다만은 첫째가 개혁자형입니다. 이것은 고도의 윤리성을 지닌 사람이고요. 도덕적으로 완벽주의를 기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성실하고 정직합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이렇게 정직하고 성실한 것까지는 좋은데 이런 사람들이 대게 편협합니다. 그게 약점이에요. 자기 하나는 정직한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를 못해요. 또 둘째는 협조자형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감정이입이 잘 되고 애끓는 마음과 감정이 풍부합니다. 이것은 좋은데 이 사람은 너무 감정적이라서 의지가 약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 때로는 지성적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동기부여자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감이 있고 야심가이고 최고가 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항상 최고가 되겠다는 그런 사람인데 고집이 셉니다. 그래서 또 힘듭니다. 그리고는 예술가형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직관적이고 동정심이 많고 그리고 개성이 강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울하기도 하구요. 정서적으로 강한 대신에 이 사람은 쉽게 말해서 광기가 있습니다. 그래 예술가하고 살려면 각오해야 됩니다. 가끔 미친 짓을 하는데 이걸 수용하지 못한다면 예술가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 어떤 때는 천사 같고 어떤 때는 악마 같고. 그렇다고 해서 불평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예술가와 사는 팔자니까 그건 각오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사상가형이 있습니다. 이것은 탁월한 지각을 가졌고 탐색지능이 있습니다. 어느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시 좀 괴벽하고 편집병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 다음엔 충성가형이 있습니다.

 

감정에 호소하고 사랑 받는 사람이고 장난기도 있고 유머도 있고 환심도 사고 아주 충성가형, 아주 좋아요. 그런데 이런 사람은 너무 의존형입니다. 그 이상은 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이게 또 문제라구요. 충성을 잘하는 사람, 큰 일은 못합니다.

 

자, 그 다음에는 만능선수형이 있습니다. 순발력이 강합니다. 신바람 나게 삽니다. 그러나 이런 만능선수형이라는 사람들은 확실히 즉흥적이고 광적일 때가 많고 지구력이 약합니다. 그 다음에 도전자형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일단 옳다고만 생각하면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아주 의지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대개 보면 오만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곤 아홉번째가 중재자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수용능력이 많습니다. 신뢰할 수 있고 느긋하고 낙천적입니다. 이런 중재자형은 참 덕망이 있다고 우리가 말합니다만은 이런 사람들은 유약하고 수동적입니다. 너무나 수동적이라서 무슨 큰 일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 이렇게 아홉 가지 나누어 보았습니다. 어느 거 하나 마음에 듭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완전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고 완벽한 사람이 있느냐 이거예요. 그걸 아셔야 되요. 이런 의미에서 흔히 말하는 완전한 사람은 없어요.

 

이런 장점이 있는가 하면 저런 단점이 있어요. 그런고로 우리는 장점을 극대화하면서 단점을 서로 이해하고 덮어가면서 수용해야만 가정도 사회도 직장도 편할 수가 있고요.

자기자신을 볼 때도 자기장점을 극대화할 것이고 단점을 줄이도록 노력할 것이지 결코 어느 단점이 있다고 해서 나는 쓸모가 없다던가 나는 교양이 없다던가 나는 구제불능 하다던가 자기자신을 그렇게 비하할 필요도 없다 그말이예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남편이건 자녀건 나 자신이건 간에 항상 이런 장점 그 장점을 더 크게크게 인정을 하고 키워가고 단점은 내가 스스로 이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하고 받아들이면서 이거를 잘 교정하고 극소화하도록 힘써나가는 것, 그게 지혜올시다.

 

자, 이제 한번 깊이 생각하십시다. 예수 믿는다는 게 뭡니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가 뭐냐하면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올시다. 예수 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여러분이 잘 압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귀한 고백입니다. 그 고백 속에 예수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는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이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큰 역사를 이루어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셔서 자기 피를 가지고 제사를 드려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런 제사적 기능을 이루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동시에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율법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가치관에 대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가르치는 분이요 동시에 가르치기만 하는 게 아니요. 본을 보였어요. 그리고 그는 왕이십니다. Living Christ, 그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우리의 심령과 우리의 세계와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왕이십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은 두 번째 문제인 선지자의 문제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로만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행동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그것까지 가르쳤습니다. 이건 절대로 비참한 일이 아니에요. 이것이 행복의 길이요, 이것이 잘사는 길이요, 이것이 가치 있게 사는 길이요,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어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행복하게 사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어요. 모본을 보였어요. 그는 우리의 생의 패러다임이 되는 것이죠. 우리의 성품, 우리의 인간됨에 아주 표본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중생하고 그 다음에 성화의 과정은 이제 일생동안 가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이올시다. 이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수님처럼 병 고치고 예수님처럼 서른세살에 죽어야하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이런 형식적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의 인간됨입니다. 사람됨을 우리가 본받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말씀에 오늘 이것을 요약해서 간단하게 몇 말씀으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냐구요. 우리 죄를 우리의 약점을 담당하신 분이올시다. "담당하셨다" 그랬어요. 담당하셨다. 아주 중요한 말씀이에요. 오늘 여기 보니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약한 것을 담당하고, 그랬어요. 그 담당한다는 말 한마디가 아주 중요한 것이올시다.

 

강한 자가 누구입니까? 강자, 이 뭐 권력자요 정치가요 돈 많은 사람이요 무슨 씨름선수요 뭐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정말로 정신적으로 강한 자가 누구입니까? 인격적으로 성품적으로 강한 자. 세 가지로 요약해 봅니다. 먼저는 이해에 있어서 강한 자예요.

 

내가 넉넉하면은 이해할 수 있어요. 이런 사람도 이런 환경도 저런 것도 다 넉넉하게 이해할 수 있어요. 이게 강한 사람이에요. 이걸 이해를 못하고 조그마한 일에서 걸려서 넘어지고 오해가 되고 뭐 원수 맺고 울고 짜고 절망하고, 이건 약한 것이죠. 뭐 흔히들 속되게 말할 때 '밴댕이 속 같다' 그러잖아요. 그 쪽은 약한 거예요. 약해서 민감한 거거든요.

 

그만큼 만사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약자예요. 그런데 강한 사람은 언제나 넉넉합니다.

뭐 놀랄 것도 없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거든요. 그래서 뭐 좋은 사람도 사랑하고 못된 사람하고도 같이 지내고 이럴 수 있어요. 이해, 이해를 하는 거예요. 언제나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고 또 역사의 의미도 이해하고 환경이 말해주는 그 방향도 이해하는 것이죠. 그 이해, Understanding Mind가 넉넉합니다. 이 강한 것이에요.

 

우리가 자녀들을 이해하잖아요. 어린아이들이 뭐 어쩌고어쩌고 해도 어른은 어른스럽게 이해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손자하고 싸워요. 나이가 다시 거꾸로 돌아가서 열두살이 되었거든요. 이게 문제라고요. 넉넉함이 없어요. 여유가 없어요. 이게 바로 강하다는 것이고요.

 

그 다음에는 이 깨달은 바 진리를 자기 생활 속에 구체화할 줄 알아요. 이게 능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오늘 여기서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들으면서 바로 '아, 그렇다. 그런고로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하고 적응할 수 있고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런 소화능력이 있는데, 어떤 분은 이걸 못해요. 그래서는 그 말씀은 좋은데 나와는 관계없다 이거에요. 그 말씀은 나와 관계없는 거다. 또 어떤 때 좀 생각을 해보아도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건 대책이 없어요. No idea, 이게 바로 약한 것이에요.

 

그래서는 진리는 진리대로 신앙은 신앙대로 행위는 행위대로 성품은 성품대로 따로따로 사는 거예요. 영영 이렇게 살아요. 이게 바로 약한 사람이에요. 그러면 강한 사람은 진리를 한마디를 배웠든 두마디를 배우는 데로, 자기 생활 속에 이걸 실천 적응해 나갑니다.

 

그 다음에 또 강한 사람은 실천 지구력이 있어요. 알기는 하는데 행하지를 못해요. 사랑해야 될 줄 알면서 사랑하지 못해요. 용서해야 될 줄 알면서 용서하지 못해요. 용서했다가도 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요. 이게 바로 휘청휘청이요.

 

약한 것이죠. 그런데 강한 사람은 한번 시작했다 하면 끝이에요. 요새 눈이 많이 와서 좀 보행이 어려웠습니다. 새벽기도회 때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이 왔습디다만은 아주 많이 못나왔어요. 그래 내가 속으로 생각했어요.

 

뭐 눈이 온건 온 거예요. 어렵긴 어려워요. 그래 그것 때문에 내가 일생 한 맹세를 여기서 굽힐 수 있어요? 누가 가로막을 거예요? 또 어떤 때 우리가 한 약속을 그것을 못해서 되겠어요? 자 우리가 이 실천의지, 그게 문제라고요. 문제라고요.

 

어떤 학생들 보니까 뭐 공부, 그거 박사공부 하는 거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요. 5년 6년 수고해 가지고 마지막에 논문을 쓰는데 이게 잘 안되는 거예요. 그때 가서 날보고 물어봐요. "계속할까요 말까요? 뭐 그거 뭐 박사 해봤댔자 그거 뭐 별로 길도 없고 취직도 못되는데 할까요, 말까요?

 

요사이 뭐 50%도 취직 안된답디다." 그건 그래. 그렇지요. 그래서 나는 그랬어요. "별거 아니다. 박사란 게 별거냐? 하지만 시작했으니 끝내라." 시작한걸 끝내지 못하면 한평생 그것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한대요. "아, 사내놈이 시작했으면 끝을 내야지 이제 와서 무슨 딴소리냐? 지금까지 6년 동안 수고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마저 해버려" 했더니 고민하더라구요. 그게 바로 약한 거죠. 이게 바로 사람의 마음이에요.

 

그러면 강한 자, 이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그래서 이해도 못하고 구체화도 못하고 실천도 못하고 꾸준하게 끌고 나가지도 못하는 이 약한 자를 어떡하면 좋겠어요? 그걸 이해하는 것이죠. 담당하는 것이죠. 나아가서는 내가 대신하는 것이죠.

 

약한 자의 약점을 내가 담당한다. 여기에 "파스타제인"이라는 말은 짐을 진다는 뜻이에요. 그의 짐을 내가 대신, 자발적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는 것이요. 여러분 잘 외우는 성경구절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도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대신 내가 맞을 것을 그가 맞아요. 내가 받을 비방을 그가 받아요. 그 성품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은 담당하는 것이에요. 책임을 대신 지는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의 마음이에요.

 

제가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경험한 그 이야기는 정말 두고두고 제 마음에 늘 다시 한번 회상이 됩니다. 의사로 분주하게 다니는 부인이 어떤 날 보니까 자기 남편이 밖으로 돌다가 에이즈 병에 걸려 가지고 왔어요. 기가 막힌 거예요.

 

그는 남편을 앞에 놓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의사로서 바삐 돌아가느라고 아내 구실을 못해서 당신이 밖으로 돌다가 이렇게 됐으니 이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대로 죽으면 당신을 죽인 내가 어떻게 평안하게 살수 있겠느냐고 여기서 둘 다 같이 에이즈 걸려 가지고 죽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좋겠다고. 10년 동안 별거하던 사람이 다시 만났어요.

 

다시 부부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에이즈 환자하고 죽기를 결심하고. 이 뜨거운 사랑으로 인해서 두 사람이 다 건강해 졌어요.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현장에서 이 말을 들을 때 저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는 기억입니다.

 

여러분, 누구 책임입니까? 모든 문제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보면 나 책임 다했다. 밥을 안 줬냐? 옷을 안 줬냐? 학비를 안 줬냐? 너 할 일이나 해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에요. 너희들이 잘못된 거 가출한 거 내 책임이다.

 

남편이 밖으로 도는 거 내 책임이요. 아내가 잘못하는 거 내 책임이요. 내가 담당을 하는 거예요. 저주를 받아도 내가 받는 거예요.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우리는 어쩌면 내 책임까지 남에게 돌리려고 하는 세상이에요.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그가 담당하셨어요. 우리의 약점을 다 담당하셨어요. 자기 책임으로 돌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어요. 성품 자체가 약한 자의 약점을 비판하지 않고 내가 대신 자발적으로 담당하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어요.

 

그런가 하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 egocentric, 자기 중심적인 마음, 이거 한 번 탁 떼버리고 지나가 볼까요? 뭐 이제까지 나 중심으로 살았으니까, 뭐 이젠 나이도 한 50 됐으니까, 이제부터는 나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것 없이 살아보겠다고 한번 확 뒤집어 보세요.

 

새로운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나를 잊어버리세요. 내 명예, 내 지위, 내 뜻, 내 고집, 뭐 다 잊어버리세요. 나를 기쁘게 하는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면은요 여러분 신비로운 기쁨을 신비로운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다음에 보니까 "이웃을 기쁘게 했다" 그랬어요. 이것이 강한 의무입니다. 모든 일에서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을 편하게 하고 남의 이름을 높이고 바로 그것이 행복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수학분야에 있어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졌던 사람 기꾸찌 라고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기꾸찌 교수가 옥스퍼드 대학에 다닐 때 역시 수학의 천재가 돼서 항상 1등만 하는 거예요. 영국 백인들이 기분이 나빠요. 자존심이 상해요. 아니 이 동양사람한테 우리 이 영국사람이 지다니. 근데 이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항상 2등을 하는 거예요.

 

그걸 넘어서지를 못해요. 이런 경쟁관계에 있었는데 마침 기꾸찌가 독감에 걸려 가지고 몇주간 동안 학교에 못나왔어요. 이것을 알고 '옳지, 이번 학기는 브라운이, 백인이 1등할 것이다' 생각을 했는데 웬걸요. 또 기꾸찌가 1등을 했어요.

 

알고 보니까 브라운이 매일같이 강의들은 걸 노트를 가지고 가서 이 기꾸찌 친구에게 전달강의를 했어요, 매일같이. 왜요? 당신이 감기로 인해서 1등에서 내려앉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이거예요. 얼마나 깨끗한 마음이에요? 남을 기쁘게 하고 그래서 밀어주고, 이해해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그것이 남을 기쁘게 하는 비결이에요.

 

EQ라는 말을 우리가 쓰고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감정상태를 자기가 알아내는 것이에요. 아이들도 보니까 어떤 때 입이 쭈욱 나와요. 그래서 "너 삐졌냐?" 그러니까 "나 삐졌어" 그러더라고요. 그거 EQ가 괜찮은 거예요.

 

내가 지금 잘못되고 있다는 걸 내가 알아야 되요. 그걸 모르는 게 이게 바로 멍청한 거죠. 내 감정을 내가 알고 그 다음에는 내 감정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알고 그 다음에 이것을 바르게 표현할 줄 알고 그 다음에는 이웃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내가 잘 수용할 줄 알고 그리고 모든 이웃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해 나가는 사람, 이게 바로 "EQ가 높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로 생각하시죠?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인이 됐다면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성품을 하나씩하나씩 본받아 가야하는 것이에요. 정말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뜨겁게 사랑하면 닮게 돼있어요.

 

아내건 남편이건 누구든 간에 열렬히 사랑하면 알게 모르게 그를 닮아가는 것이에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에요. 앙망하고 사랑하고 높이고 존경하면 그리스도의 마음 본받아갑니다. 본받아서 그의 길을 따라 우리도 행복하고 그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는 것이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주저하고 기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더하사 참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가게 하시고, 그 성품 그 가치관 그 귀한 뜻이 바로 우리의 것이 되도록 그리스도를 가까이 본받아 갈 수 있는 주의 사람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받음직한 봉사 /롬15:30-33/ 곽선희 목사

2014-11-19 14:09:14

 

4살 난 어린아이를 위해서 어머 니가 그와 함께 잠자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늘 건강하게 해주시 고, 또 총명있게 자라게 해주시 고…"이렇게 기도하다가

 

"어머니 말 씀 잘 듣게 해주시고…"그렇게 기도 했단 말입니다. 그 늘 기도하는 소 릴 듣다가 이 4살 어린아이가"엄마 오늘은 내가 기도할께"

 

"그래라"얘 가 기도하는데"엄마가 내말 잘 듣 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각각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자 기에게 유리한 서원을 내놓고 있습 니다. 어머니라면은 내가 진정 애 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랑 하는 것이 정말 바로 사랑하는 것일 까, 그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 야 할 것인데, '나는 다 잘하고 있 고, 저 애가 내 말을 잘 듣게 해달 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각자 자기 나름에 소원만을 열심히 구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미국에 칼럼리스트들이 여론 조사를 해서, 한 연구 보고서 를 내 놨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 과 비기독교인의 비교하는 그러한 비교 도표입니다. 헌신 봉사를 중 심으로 해서 비교한 결과 이렇게, 이런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게 되었 다고 합니다. 첫째는 '봉사 참가 지 수', '봉사활동에 얼마나 참가하고 있는가'하는 겁니다.

 

이 조사해 본 결과 단연 '기독교인들이 월등하게, 뭐 잘 믿거나 못 믿거나 훨씬 더 많 은 사람들이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 더라'하는 것이구요. 두 번째는 '포 용력지수', 그 말은 하나님께 헌신하 고, 특별히 인종 문제가 복잡한 나 라이기 때문에, 그 '인종차별', 이 문 제에 있어서 얼마나 포용력이 있나' 또 '가난한 자와 부한 자, 얼마나 넉 넉하게 포용을 하고 있는가'. 포용 력 지수를 평가 해 보았다는 겁니 다.

 

그러면 '얼마나 관용할 수 있느 냐'하는 것이 그 지수가 되겠습니다. 또 하나는 '가정 안정지수', 뭐 '이혼 문제라든가 이런 불안에 떨지 않고, 아이들도 부모님의 뜻을 따라서 성 실하게 잘 자라주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가정 안정지수라고 해서 평 가 해 보았는데, 이것도 월등하게 기독교인들이 더 낫구요. 마지막에 '행복감 지수'입니다.

 

그것은 '베푸 는 삶을 통해서 스스로의 행복을 얼 마나 만끽하고 살아가는가'하는데, 이 만족도가 60%라고 했습니다. 60%의 사람들이 '우리는 만족합니 다.' 그렇게 생각했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네 가지에 의해서 우 리를 평가한다면, 여러분 자신들을 평가한다면, 얼마의 지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 봉사생활 금년에 얼마나 했습니까? 얼마나 좀 너그러운 사람이 됐습니까? 가 정은 얼마나 더 안정이 됐습니까? 여러분의 행복감은 어느 수준에 있 습니까? 스스로 물어야 할 것입니 다.

 

인생은 받는 것보다는 주는 일에 서 기쁨을 찾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한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0 장에 볼 것 같으면, 35절에 예수님 친히 하신 말씀을 바울이 인용합니 다. '받는 것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주는 자에게 기쁨이 있다. 주는 자에게 행복이 있다.' 여러분 이 주는 행복의 진리를 터득하기까 지는 여러분은 영영 행복을 모르고 말 것입니다. 이 진리만은 논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행동 으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는 특별한 진리입니다. 자 이제, 자녀와의 관계를 한번 보십시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위해서 수고합니 까? 수고하는 그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는 자라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기다가 밑천을 들여가지고 본전 뽑을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불 만이 많습니다.

 

그 키우면서 얼마 나 재미있습니까? 그것으로 벌써 기쁨을 다 얻은 거예요. 뭐 효도하 라고 강요할 거 없습니다. 본전 다 찾은 거예요. 그걸 잊어서는 안돼 요. 베푸는 재미, 키우는 재미, 수 고하는 재미, 그 자체가 행복이었더 란 말이죠. 그런고로 인생은 항상 베풀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행복할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된 존재입니 다. 이것이 바로 성숙된 인격입니 다. 삶의 질을 여기서 높여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임종하게 되면, 마지막 으로 크게 뉘우치게 된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는 사람이 착해지니까요. 최소한도 임종에서는 착해지니까요. 그 순간 세 가지를 후회가게 되는 데, 그 첫째가 베풀지 못한 겁니다. '좀 더 베풀 수 있었는데, 좀 더 줄 수 있었는데, 내가 왜 주지 않았나.' 그대로 그대로 생각이 납니다.

 

'좀 더 넉넉하게 주면서 살 수 있었는 데…… 이렇게 쥐고, 모아봐도 먹지 도 못하고 가는 걸 좀더 좋은 일하 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걸' 이것이 큰 후회, 첫째 후회입니다. 둘째가 참지 못한 것. '조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 그렇습니다. 세 번째가 '좀 더 행복하게 살수도 있었는데, 좀 더 즐길 수 있었는데,

 

뭐 그렇게 아웅다웅 싸우고 울고불 고 할 필요가 없었는데, 얼마든지 즐겁게 살수 있었는데, 나는 왜 이 렇게 사람이 못돼 먹어서 나 괴롭 고, 남 괴롭히고, 그렇게 살아야 했 던가?' 이것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후회입니다.

 

여러분 정말 받는 데 만 급급하고, 못 받는 원망, 더 가지 고 싶은 욕심, 여기서만 버둥거리고 있기 때문에 영영 행복할 길이 없습 니다. 문제는 베푸는 생각을 해보 십시다. 베풀기 위한, 한번 마음을 가져 봅시다. 그리하지 않고는 절 대로 여러분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 베푸는 자가 누굽니까? 우리 생각에는"아! 돈 많은 사람이 주는 거지. 아,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 나야 구제 받아야 할 대상인데 누굴 구제한단 말이냐."라고 생각하겠죠. 아니 그렇습니다. 지금은 문전에 오는 거지가 없지만, 옛날에는 거지 가 많았죠. 얻어먹으러 오는 사람 이 많았는데, 그 거지들 말에 의하 면요. 대문이 크고 담장이 높은 집 에 가서는 얻어먹지 못 한답니다.

 

욕만 먹고 나온답니다. 재수 없다 고, 아침부터 뭐 얻으러 온다고. 아 주 가난한 집, 대문도 없는 집에 가 야 넉넉히 얻어먹는다고 합니다. 구제를 부자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돼요. 성공한 사람이 구제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사 업이 망한 사람이 구제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돕게 마련이지, 부한 사람, 그 사람들은 돈에 미쳐가지고 요. 정신없어요. 내버려두세요. 어림도 없습니다. 어렵고 가난한, 바로 그 형편에 있는 사람이 진정으 로 마음을 쓸 수가 있는 것이에요.

 

또, 누구에게 주어야 되느냐 하 는 겁니다. 우리는 그 쓸데없이 괜 히 돈 있는 사람에게 주느라고 문제 예요. 뭐 사과상자니 뭐니 해가지 고 말이야. 이게 우리의 선행은 전 혀 보상할 수 없는, 대신 보답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주어야 되는 것이에 요.

 

그걸 있지 말아야 돼요. 내 친 척, 내 아는 사람, 뭐 주변에, 그게 아니구요 날 찾아오지도 못하고, 내 가 와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바 로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 12절에 서 '부한 자는 너의 잔치에 초청하 지 말라' 그랬어요. '초청하면, 다시 그 사람이 너를 대신 청할 것 아니 냐.' 그러면 쓸데없는 거죠. '대신 청할 수 없는, 보답할 수 없는 바로 그,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어떻게 해야되는 겁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읽 게 됩니다. 저는 몇 일전에 미국으 로 여행을 가면서, 집회 인도하러 가면서 비행기 안에서 참 많은 마음 을, 아픈 마음을 뉘우쳐 봤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내 앞에 앉은 의자 에 점잖은 미국사람 내외분이, 백인 인데, 한국에 와서 고아를 데리고 가는 거예요. 아직 낯을 가리지 못 하는 어린애, 칭얼거리는 애를 하나 딱 안고, 이걸 가면서요. 열시간동 안 내내 아버지가 돌봐요. 그것 또 이상하데요. 그 어머니는 까딱도 안 해요. 옆에서 구경만 하고, 아버 지가 그 애를 안고 그 애쓰는 걸 볼 때요,

 

나는 저렇게 오랫동안 애를 안아 본 일이 없어요. 이렇게 정성 스러울 수가 없어요. 그렇게, 아이 를 분명히 한국아이인데, 고아를 하 나 데리고 가면서 그렇게 정성을 다 하는 걸 보고, 제가 많이 생각했습 니다.

 

저 사람들은 여기까지 와서 저 애를 데리고 가는 데, 우리는 도 대체 고아를 팔아먹는 나라가 됐으 니, 이래가지고도 복 받겠다고? 조 심하세요. 무슨 복이 온다는 얘기 입니까 이 땅에. 도대체 이게 될 말입니까? 바로 그 얘기를 '아 저 사람 참 훌륭하다고'. 마침, 내 옆 에 미군, 옛날에 장성이 왔다가면서 옆에 앉았어요. 그 얘기를 주고받 았더니, 자기 말이라고는 안하데요, 꼭 자기 같은데 말은 안하면서

 

"아, 내가 아는 사람은요. 아 지금 아이 가 다섯인데 남의 아이가 또 다섯이 에요. 그 집에 가면 아주 와글와글 하는데 아 나는 그 집에 갈 때마다 너무 행복하게 보이더라"고, 아 또 그러고 나니까 점점 더 부끄러워져 서, 아 그렇게 민망한 줄 모르겠어 요. '어쩌다가 우리는 이렇게 이 모 양이 됐나……' 생각이 들어요. 복 달라고 열심히 소리만 질렀지, 복 받을 만한 짓을 하지 못해요 도대체 가요.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보십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소 아시아 전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건 개척교회를 하는 겁 니다. Church Planting을 하는 거 거든요. 아 전혀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만드는 거예요. 교회를 세워요. 지 금 아직도 이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익숙하지도 못했는데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놓고,

 

"자, 헌금합시다."연 보하자고 저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 들이 지금 흉년들어서 굶어 죽어 간 다고,

 

"당신들도 소식 들어 알잖습 니까? 우리가 도웁시다!"

 

정성껏 헌 금을 했어요. 이 연보를 예루살렘 으로 송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특 별히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는 많은 헌금을 해 가지고 이번만은 내가 직 접 가지고 갈 것이다. 친히 가지고 간다고, 소중하기 때문에, 마음을 담 아 가지고 가야겠기 때문에 또, 특 별히 중요한 것은 이 헌금을 한 이 이방교인들에, 이방사람들에 마음, 사랑을 전달하고 싶어서 이 헌금을 손수 가지고 갑니다.

 

여기에는 큰 위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너무 위험해요. 이번에 갔다가는 살아남기가 어렵겠다는 걸 알고 있 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쓴 겁니 다. 내가 로마로 가고 싶은데, 만일 에 여차해서 못 가더라도 이 편지로 대신하고 싶어서 쓰게 된 편지가 로 마서입니다.

 

그러면 그 성금을 이 위험을 무릎 쓰고 직접 가지고 갑니 다. 그러나 이것을 받은 예루살렘 이 결코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를 죽일려고 들었고, 죽이지 않고 는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도 바울이 결국은 많 은 핍박을 받고 갇혀가지고, 로마로, 죄수의 몸으로 상소해서 로마까지 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 것 이에요.

 

그런데 지금 로마에 편지를 합니 다. '내가 예루살렘에 대한 섬기는 일, 받음직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섬김은 섬 기는 거지요 분명히. 돈은 가지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받 음직한 것이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주는 자의 마음입니다.

 

먼저는 주는 자 의 마음이 뜨거워야됩니다. 던져주 는 게 아니에요. 억지로 주는 거 아니에요. 불가피해서 주는 게 아 니에요. 자랑삼아 주는 게 아니에 요. 높은 자세로 주는 게 아닙니다. 주는 자의 마음, 물질이 아니고 사 랑을 주고, 희생을 주고, 죄송한 마 음으로 주고 그래야 된다는 거죠. 더구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야 하 는 거죠. 아쉬운 마음으로.

 

여러분 자녀교육에 있어서 아이 들의 용돈 때문에 고생하십니까? 또 아이들의, 자녀교육에 문제가 있 습니까? 말 한마디에 달린 거예요.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더라도 줄 때

 

"미안하다. 더 잘해주고 싶은데 요 것밖에 없어서 어떻하냐? 네가 우 리 집에 태어나길 잘못이지. 아버 지 재주 없고, 내 재주 더 없고. 그 러니까 요것밖에 없지 않니? 그저 다른 집에는 더 잘해 주더라마는 나 는 못 해주니 미안하다."

 

이러면서 주어야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하지요.

 

"야, 왜 이렇게 용돈이 많으냐? 남에 집 아들은 조금 쓰드 만 너는 그 모양이냐?"이렇게 나오 죠? 얘들이 얼마나 머리가 빠른대 요.

 

"아버지 골프 한번 치는데 얼 마인줄 아세요? 다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술좌석 한번 벌이면 얼만 줄 아느냐고요?"

 

말은 안하지만 속 은 멀쩡합니다. 이 아들이 어떻게 잘 되겠습니까? 보세요. 마음이 없잖아요. 마음을 주지 못하고 있 잖아요. 그러니까 주는 사람의 마 음은 언제나 '미안합니다.'하는 마음 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아쉬운 마 음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부모에 게 효도할 때에도

 

"더 잘해주고 싶 지마는 그저 형편이 이래서요."

 

이 런 마음이래야지."뭐 그만하면 됐 지 뭘."그딴 소리를 하면 안되는 겁니다.

 

탈무드에 재미있는 소리가 있어 요. 어떤 왕이 있는데, 왕에게 외동 딸이 있는데, 병이 들어서 죽게 됩 니다. 죽어가니까 왕이 너무 다급 해서

 

"이 딸의 병을 고치는 자는 사 위를 삼고, 내 대를 이어서 왕을 삼 겠습니다. 왕을 만들게 되겠다. 왕 위에 오르게 해 주마."

 

방을 붙였어 요. 먼먼 나라에 있는 어느 삼형제 가 산골에 살았는데, 이 삼형제가 보화, 신기한 보화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큰형은 멀리 보는 망원경 을, 천리를 보는 망원경이 있어요. 그래서 그 망원경으로 이 사실을 보 게 됐어요. 방 붙인걸 보게 됐고, 또 둘째형은 말입니다, 그 옛날에 있잖아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양탄 자, 아 그거 하나를 가지고 있거든 요. 이거를 타고 이제 가게 되는 거예요.

 

거기까지. 세 번째 동생은 말이죠. 어떤 병이라도 요것만 먹 으면 낫는 귀중한 사과 하나를 갖고 있어요. 자, 이 삼 형제가 멀리서 보고, 양탄자를 타고 와서 이 사과 를 주워서 이 공주가 병이 나았어 요. 이제 사위를 삼아야 하는 데, 여기에 공을 세운 사람이 세 사람이 에요. 어느 사람을 사위로 삼아야 하느냐 이겁니다. 여기에 대한 탈 무드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망원경은 도로 가져가면 되고, 양 탄자도 도로 가져가면 되고, 사과는 먹어 없어졌으니까 당신이야말로 큰 희생을 한거요.". 그 사람이 왕이 됐답니다.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사랑이란 희생해서 내가 없어져야 지. 아직도 멀쩡한데요.

 

무슨 사랑 이 그런 게 있나요. 그런고로 주는 자의 마음이 얼마나 지극해야 하는 가. 나 자신이 사라지는, 거기에 진 정한 주는 자의 마음이 있는 것이구 요. 또 하나는 신앙적이고, 절대적 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하고 비 교 할 것 없어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요. 하나님께로 나는 많은 것 을 받았습니다. 그 받은 마음에서 적은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받은 마음에 대한 감사가 이렇게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누구에게 주느냐 할 때는, 전혀 보답을 바람이 없이 줘 야됩니다. 보상을 바람이 없이, 전 혀 기대를 걸지 않고. 인사도 안 해도 좋아요. 전혀 상관이 없이, 조 금이라도 그 어느 누구라든지 보상 을 바라는 마음 없는 봉사이어야 한 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음을, 사랑을 그래요. 똑같은 일이라도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언제 한 번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저 지난 삼월 달에 북한 나진에 갔을 때 그때 만 해도 삼월 달에는 추워요, 북한은. 그래서 차를 타고 가다가 식량을 구 하러 다니느라고 보따리를 지고서 여기저기 다니는 사람을 많이 보는 데, 마침 넓은 벌판을 지나가게 돼 서 차를 세우고

 

"가는 길까지 태워 다 드릴테니 타십시오. 같은 방향 이니까"

 

타라고 그래서 탔어요. 보 니까 옷을 입었는데, 방한복이 괜찮 아요. 좋은 옷을 입었더라구요. 그 래서

 

"아이구, 동무 옷이 참 좋습니 다.""이거요 평화그룹에서 보내 준 겁니다."

 

저희 교회가 북한을 도울 때에 그 이름이 '평화그룹'입니다. '소망교회'가 아닙니다. '평화그룹' 이라는 이름으로 주는데요. 그렇다 고 그래요. 그 옆에 있던 사람이 한 마디, 그 말을 안 했어야 되는 데

 

"이분이 평화그룹 이사장입니 다."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이구, 감사합니다."그래요. 딱 쳐다보더니요 깜짝 놀랄 말을 합니 다.

 

"소망교회에서 보내온 것이 제 일 좋아요."

 

그래요. 만일에 "소망 교회에서 보낸 것이 제일 못 돼요."

 

그러면 난 큰일날 뻔했어요. 어떻 게 고마운지……. 여러분 어떤 일 이던 간에 베풀 때는 정말 정성을 다해야돼요. 마음을 주는 것이니까 요. 성의를 다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하는, 선한 일하는 사람은 결과 에 연연하지 마세요. 이 어떻게 되 느냐, 어떻게 되느냐. 가끔 보니까 그런 말 많이 해요. 뭐 쌀을 보냈 더니"누가 먹나요."

 

말이 많아요. 아무가 먹던 별생각 다하네. 당신 이 주는 것만 주세요. 누가 먹느냐 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거구요. 그거 그런 것 신경 쓰다가 평생 그 인색한 노릇하다가 끝나지요. 줄 때는 그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내 손에서 떠난 것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드렸으면 끝난거 죠. 어떻게 쓰여지느냐는 묻지 마 세요. 하나님이 들어서 '오병이어' 처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기 적을 낳을테니까, 두고보세요. 그걸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 더 있습니다. 선한 일 하 고 잊으세요. 탈무드에 그런 말 있 어요. '내가 누구를 줬는 지를 몰라 야 하고, 받는 사람은 주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는 거 예요. '누구로부터 받았다'할 때는 벌써 얘기가 달라진다는 것이에요. 의미가 없어요. 잊으세요. 예수님 말씀대로,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오 른 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얼 마나 강한 말씀입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라.' 참 내가 유감 스러운 말을 듣습니다.

 

"뭐, 돕자, 돕자하는 거, 뭐 도울 마음은 있습 니다마는 내가 가서 주고 악수해야 만 주겠데요. 누가 받는지도 모르 는 거, 안 준다."

 

그래요. 이게 한 국 교인들이요. 요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수준이 이 정도입니 다. 이게 무슨 구제요, 선한 일입니 까? 아무가 받으면 어때요? 잊어 버리세요. 내가 얼마를 줬는지 기 억지도 말아야 돼요. 누구 줬는 지 알아서 뭐해요?

 

내 기억에서 다 잊 어 버렸어요. 그런 돈의 숫자 필요 없어요. 미안하지만 제가 저희 교 회에서 회보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회보 가운데 보면은 주보가 전부 그 자랑이죠. 고아원 방문, 양로원 방문, 어데 얼 마 주고, 어데 좀……. 난 이거 보 기 싫어 안 해요. 그 무슨 소용 있 단 말입니까? 그 기억이 무슨 소용 있어요? 이건 교회답지 못해요. 이거는 하나님의 일도 아니에요. 깨끗한 마음으로 잊어버리세요. 나 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요. 그 마음이라야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려 운 시대를 맞았습니다.

 

"하필이면 IMF시대에 왜 저런 말을 할까?"하 겠죠? IMF시대니까 이 말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삶을 질을 높여 사 십시다. 베푸는 마음만이 높은 질 의 생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 장 28절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있 어요. '이제는 구제할 것이 있기 위 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제 손으로 수고하여', 이자받 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손으로 수고하여,

 

여러분, '난 밥 먹 을 것이 있다. 그러니 나는 그냥 있어도 된다.' 그러겠습니까? 아니 오, 잡수실 것이 있거든 이제부터는 구제할 것을 위해서 일하세요. 무 엇이라도 하세요. 이것은 나를 위 한 것이 아니오. 내 처자식 벌어 먹이기 위한 것이 아니오. 구제할 목적으로 돈을 버는 것이오. 구제 할 목적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에요.

 

과거보다 더 열심히, 열심히 뛰세요. 뭐라도 해서, 더 벌어서, 좀 더 주의 일 하겠다고, 난 밥 먹을 것이 있으 니까, 그저 이자받아 가지고 가만히 놀겠다고. 그러니까 가만있으니까 아주 가만히 있게 되고 말지. 여러 분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을 하세요. 땀을 흘리세요.

 

자, 그 뿐만 아닙니다. 오늘 본 문대로 받을려고 하는 기도에서 이 제는 주려는 기도요, 베푸는 기도요, 또 받음직하게, 내가 돕는 그분들이 받음직한 것이 되기 위하여 기도합 니다. 바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 의 가치를 높여 줄 것입니다. 여기 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길이 막힐 때 /롬15:22-29/ 이규현 목사

2020-12-25 06:33:21

 

우리가 계획하고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는데 그 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애물들이 앞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리 내 힘으로 풀어보려고 해도 해결이 안 되면 우리는 절망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해답을 주는 본문입니다. 로마서를 정리하면서 바울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는 여러 번 방문을 시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서 당시의 제국,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것은 당연하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를 가려고 한 것은 로마를 경유하여 서바나, 지금의 스페인에 가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바나가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복음의 열정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그는 늘 새로운 사역지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바울은 남의 터 위에 집을 짓지 않겠다고 했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곳에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며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개척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가 로마에 가고 싶어 했던 마음이 사도행전에도 나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19:21)」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했던 것은 관광이나 비즈니스가 아니고 오직 한 가지, 복음을 위해서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로마에 가려고 하는데 로마의 길은 막히고 정반대의 상황으로 꼬였습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먼저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에 차이가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증거를 향한 강한 의지가 있었고 열심히 달음질하며 살았습니다. 열정이 강한 만큼 가고자 하는 길이 막힐 때 힘들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확실하게 밀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자 하는데 길이 막히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고 할 때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해지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꿈이 있는데, 하나님을 향해 가슴이 뜨거워지고 의욕이 넘칩니다. 무엇이든지 하면 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밀고 나가면 상황은 전혀 아닌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집니다. ‘이상하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이 밀어주셔야 하는데 왜 이렇게 막힐까?’

 

이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의 핵심은 타이밍입니다. 하나님은 최적의 때에 최상의 환경을 열어 일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 하나님의 타이밍을 이해하지 못하면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셨다면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과 고집대로 밀고 나가면 문제가 터집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가장 정확한 때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늦어 보여도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추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일이 엉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에 대해서 이루시겠다는 확신을 주셨는데 문제는 ‘언제’입니다. 언제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언제라는 ‘때’ 보다 하나님의 목적과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게 하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그 때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이 일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나의 욕망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이것을 분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장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원망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탐정소설을 읽다 보면 흥미진진합니다. 독자들은 긴장감에 빠지지만, 작가는 그 장면에서 긴장하지 않습니다. 스토리의 전체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그런 분입니다.

 

하나님은 타이밍의 귀재이십니다. 성경에 많은 예가 있지만, 에스더서가 좋은 예입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이 강력하고 흥미진진하게 역사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왕의 신복인 하만이라는 사람이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아 죽이고, 그것을 시작으로 유대민족 전체를 몰살하고자 하는 거대한 음모를 행합니다. 하만의 악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될 때 모든 것이 끝이 날 것처럼 보입니다.

 

악이 스피드 있게 진행될 때 선은 숨도 쉬지 못하고 답답하게 진행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를 죽이기로 한 전날, 저녁에 왕이 잠이 오지 않아 왕실의 실록을 읽습니다. 왕은 모르드개의 업적을 알게 되고 이후에는 정말 죽어야 할 사람은 하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왕이 잠이 안 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한 순간에 하나님의 개입이 빛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절묘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성경 전체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만났을 때, 뒤에는 애굽의 군사들이 쫓아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정확한 시간에 홍해를 가르셔서 통과하게 하시고, 애굽의 군사들은 바다에 수장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정확하게 일하시는 절묘한 역사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동시에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역사의 핵심 안에는 하나님의 카운트다운이 있습니다. 정확한 시간에 그 일을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면서 시간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돌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한계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삶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시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는 길이 막힐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좋은 길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타이밍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더 낫다고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때를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지금 일이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그 손길,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지금 비록 가는 길이 막혀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은 막힘이 아니라 인도하심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가는 길이 막힐 때 시간에 초점을 맞추면 초조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통제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절)」 모든 걸음 속에 하나님이 당신의 시간을 가지고 움직이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당장 지금 무엇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행동이 느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장 최상의 순간에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바울이 로마를 가고자 했던 계획이 여러 번 막혔지만 마침내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그 자세한 내용이 사도행전 후반부에 나옵니다. 바울은 죄수가 되어 로마 황제의 심판을 받으러 호송되어 갑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잠시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바울이 그토록 복음을 위해 헌신해왔는데 인간적으로 보면 참 기구한 운명 같습니다. 자칫하면 사자의 밥이 될 수도 있고 칼에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인생이 그토록 가고자 하는 길이 막히더니 이제 로마로 죽으러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살았던 사람의 길을 척척 열리게 하지 않으시고 왜 죄인으로 가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의 인도가 당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 살면 고난이 올 것이라는 것을 배워 알고 있는데 막상 우리에게 그런 일이 닥치면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우리 인생의 막힘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후에 많은 유대인 동족들이 바울의 신변을 노렸습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생명의 위협이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혼자 로마로 가게 되었다면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에 칼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죄인으로 호송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호송하는 군인들이 재판을 받기까지 철저하게 지켜주어서 안전하게 로마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로마로 가는 교통비가 만만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돈 한 푼 들지 않고 배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또 무엇보다 로마에 있는 동안 재판을 받을 때는 로마의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소에는 도무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바울이 원하던 바입니다.

 

바울과 많은 사람들이 탄 배가 유라굴라 광풍을 만나 죽을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안심시키고 하나님의 구원과 복음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로마여행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는 바울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열렸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풍성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사건에서 한 가지 이상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한 가지의 일 속에서 수많은 비밀들을 숨겨놓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어주십니다. 우리는 당장 무엇이 안 되면 죽느니 사느니 야단입니다. 우리는 빨리 되는 것을 원합니다.

 

신자들도 기도를 하면 빨리 응답되기를 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헬라어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정확한 때를 말합니다. 그때는 마치 만삭의 여인이 아이가 나올 때가 되면 아무도 막을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때가 찬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가장 적절한 때에 모든 상황과 여건이 무르익어 최적의 상황이 되는 것, 때가 찬 것,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그때가 가장 좋은 때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 완전 안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뜻이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기 원한다면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느긋해져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를 가고자 한 계획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을 로마로 보내기로 작정하신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바울의 심장에 심어주셔서 바울이 가도록 하신 것이고, 그 ‘때’가 차서 로마에 호송되어 가지만 그 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완전한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기억할 것은 나의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입니다. 일이 잘 안되면 좌절하고 울고불고 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에 대해서도 부모들이 너무 실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만히 보면 부모의 욕심과 의욕이 너무 강해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자녀에게 두신 뜻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자녀에 대한 욕망이 안 따라주고 늦어지는 것 같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의 뜻이 너무 강하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에 초점을 맞추면 유라굴라 광풍을 만난 것과 같이 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나의 고집이 꺾여 말랑말랑해지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내 욕망을 내려놓는 과정입니다.

 

무엇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너무 안달하지 마십시오. 기다리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히려 계획한 것들이 너무 쉽게 이루어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좋은 것은 하나님이 기다리게 하십니다.

 

우리의 힘과 방법을 동원하여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지만, 신앙생활에서 기다림을 훈련하지 못하면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황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는 기다림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그 기다림에서 실패하면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의 삶 가운데 참 귀한 은혜는 기다림을 통한 은혜였습니다. 그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 우리를 테스트하시고 믿음을 점검하시고 단련시키십니다. 아무리 좋은 뜻과 계획을 주셔도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들어 가십니다.

 

저는 1990년 12월 호주에 가서 뜻하지 않게 이민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개척된 지 11개월 만에 비자문제로 한국으로 나와 영주권을 기다리며 재입국을 기다리는데 그 시도가 계속 무산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고 저와 같은 경우로 비자를 받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한 달이 넘고 1년이 넘고 20개월을 기다렸습니다. 그 시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며 생각을 바꾸라, 하나님의 다른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호주 교회 성도들도 흔들리며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회는 20개월 동안 담임 목사를 기다리고 있고, 저는 한국에서 백수로 있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기다릴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저는 마치 바울이 로마로 가고 싶은 것처럼 저는 시드니로 돌아갈 이유가 있었습니다. 단 한 사람의 교인이 있다면, 돌아가리라 했습니다.

 

그 분명한 확신은 하나님이 저를 이민목회로 부르신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의 수많은 방황하는 영혼들을 보여주시며 그 땅에 헌신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길이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고 한국으로 나왔는데 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부르신 그날 밤, 이민법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정확한 때에 저희 가정을 호주에 재입국하게 하시고 사역을 하게 하셨습니다. 1994년 12월, 다시 호수로 돌아가자 마치 기름에 불을 붙인 것 같은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호주로 들어가서 정신없이 기쁨으로 행복한 목회를 하는 20년의 사역을 하는 즈음에 한국 교회로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수영로교회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도 안정되었고, 50대 중반의 나이에 사역지를 옮기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저희 네 식구가 투표를 해보았더니, 저 외에는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20여 년 전의 한국에서 호주로 들어갈 때, 조국 교회를 향한 불붙는 심정을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현실의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 지상의 교회의 허약함과 부조리함, 한국교회의 쇠퇴가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호주에 돌아가서 몇 년 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조국교회의 재건을 위해 힘쓰고 싶다고 했던 그 비전을 하나님께서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20년의 호주의 사역을 내려놓고 한국교회의 부르심 앞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20년이 지나 한국교회를 섬길 수 있는 마음을 다시 주신 것은 20년 전에 이미 주신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이민목회가 제 생애의 마지막인줄 알았습니다. 거기에서 삶을 다 바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주로 떠날 때 가졌던 조국교회의 부흥과 회복에 대한 저의 비전을 놓치지 않고 저를 이끄셨습니다.

 

바울의 심장에 심겨진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했던 것은 바울이 가졌던 비전이었지만 하나님이 심령 속에 주신 비전이었습니다. 그것처럼, 조국교회를 향한 사랑과 회복에 대한 열정이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기로 한 것입니다. 종은 자신이 선택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따라야 합니다.

 

사도행전 28장 16절 이후를 보면 드디어 바울이 로마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높은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얻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소원은 개인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정하심 속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목표한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절망하며 살아가지 않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목표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때는 우리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언제 그 일이 이루어지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내가 그 일을 하려는가를 확인하십시오. 그 ‘때’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가장 좋은 때에 이루어주십니다.

 

그 소원과 열망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었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바울이 탄 상선이 유라굴라 풍랑을 만나 그야말로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일어나 당당하게 지휘를 합니다. 마치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습과 같습니다.

 

평소에는 자랑하고 대단한 것 같은데 풍랑이 한번 일어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들이 빛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심하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로마로 가게 하실 것입니다.”

 

라는 담대한 선포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거룩한 소원, 오래전에 가졌던 로마를 향한 비전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풍랑이 일어도 하나님이 이끄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향해 염려하지 말라고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배를 타고 가면서 풍랑이 일어나고 온갖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담대함의 배경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 거룩한 소원과 비전, 하나님을 향한 뜻을 붙들고 있다면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실 것이고, 인생의 모든 방해물이 있어도 우리의 목적을 이루실 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로 가는 길을 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정확한 때에 기가 막힌 방법으로 바울을 로마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소원과 비전이 무엇입니까. 그 소원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이루실줄 믿습니다. 그것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소원과 아름다운 비전을 많이 가지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자신감과 담대함이 되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승리 예감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가끔 해외에 집회를 갈 때, 비행기가 많이 흔들리면 저는 걱정을 안 합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사명, 그것이 저의 안정감입니다. 오히려 비싼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습니다. 사명이 끝나면 데려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떨어져도 하나님의 백성은 수직 상승합니다. 사명이 있다면 그 사명을 이루실 것을 믿고, 믿음 안에서 현실을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막히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놀라운 카이로스의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dmin

 

 

 

성도의 교제 /롬15:22-29/ 곽창대 목사

2020-05-31 04:09:10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사도 바울은 주님께 받은 은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넓은 지역에 풍성히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생애목표였습니다.

 

그 생애목표를 이루기 위해 바울은 미래를 계획했는데 그 계획은 여행계획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나누기 위한 사도 바울의 여행계획이 오늘 본문의 주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22-24절: 로마교회를 거쳐 서바나(스페인, 이베리아 반도 전체, 그 당시 로마제국의 서쪽 끝)로 가기를 원한다.

2) 25-29절: 그러나 먼저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해야 한다. 그 후에 너희 로마교회로 가겠다.

 

바울 사도는 3단계 여행계획을 세웠습니다.

고린도(지금 로마서를 쓰고 있는 장소)에서 예루살렘까지: 장거리 여행은 대부분 배를 타고 갔기 때문에 배를 타고 간다면 적어도 1300km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2400km

로마에서 스페인(로마 제국의 서쪽 끝)까지: 1100km

 

모두 4800km를 항해하는 계획입니다. 그 당시 이렇게 먼 거리를 범선을 타고 항해하는 것은 아주 위험했습니다. 무슨 일을 당할지 예측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신의 여행계획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미 마음이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사업, 직업, 학업, 가사일, 교회일)에 마음이 내킵니까?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그 일이 즐겁지 않습니다. 짐이 될 따름입니다.

 

어떻게 하면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 사명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에 즐거움이 생깁니다.

 

<선교사들이 오지로 들어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이 벌써 그곳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고백합니다. 안식년을 맞아 고국을 찾아왔는데 빨리 선교지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한국이 낯선 곳으로 느껴지고 왠지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선교지가 고향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는 한국에 나오기만 하면 온 몸이 쑤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교지로 들어가면 희한하게 싹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마음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지에서도 기쁘게 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그 일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인지 아닌지를 생각하십시오! 사명은 벗어 던져야 할 짐이 아닙니다. 축복의 짐입니다. 사명은 져야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9-30)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지워주시는 짐은 쉽고 가볍습니다. 그 짐을 사명과 복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지면 능히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돌파해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사역자원서를 주보에 삽지했습니다. 주님의 일에 즐겁게 자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위험한 장거리 여행계획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밝히고 있는 것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 왔던 계획이었고 이제 그 계획을 마음에 확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확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길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주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주님께서 주신 복으로 생각할 때 마음이 확정되고 기대감으로 가득 차오르게 될 것입니다. 행복은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감으로 무장될 때 생깁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그리스 남부)에서 로마교회에 보낼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는 고린도에서 서쪽에 있습니다. 뱃길로 약 1100km 됩니다. 예루살렘은 고린도에서 동쪽에 있습니다. 뱃길로는 약 1300km입니다. 

 

고린도에서 볼 때 예루살렘(동쪽)과 로마(서쪽)는 정반대편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되돌아서 로마로 가는 길은 고린도에서 바로 로마로 가는 것보다 2600km나 더 항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여행을 계획한 것은 그만큼 예루살렘 방문이 바울에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방문이 바울에게 중요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25절을 보세요. 예루살렘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26절에서 부연 설명한대로 구제헌금을 전달하는 일입니다. 마게도냐(그리스 북부)와 아가야(그리스 남부) 사람들 즉 바울이 세운 헬라 지역의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어려운 형편을 듣고 구제헌금을 모았습니다.

 

구제헌금 한 것을 26절 하반절에서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다.”고 표현합니다. 여기 “연보하다”는 단어는 원어로 “코이노니아”입니다. 다르게 번역하면 “공동의 몫으로 내어놓다.”는 뜻입니다. 공동의 몫으로 내어놓는 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씀한 대로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입니다. 돌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는 것, 더 나아가 함께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루살렘 교회로서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전체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왜 예루살렘 교회가 가난하게 되었는지 오늘 본문에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어느 정도 정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아가보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행 11:27 이하 참조)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 타격을 받아 가난하게 된 성도들이 경제적으로 회복하기가 아주 힘들었던 같습니다. 게다가 성도들이 직장을 얻거나 상업에 종사할 때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점점 더 경제적으로 곤란하게 되었고 급기야 교회 전체가 가난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예루살렘 공회가 열렸던 주후 50년경,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 베드로, 요한 사도가 바울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갈 2:10 참조). 그 부탁을 받은 바울은 자기가 세운 이방인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호소하면서 구제헌금에 동참해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바울의 권고를 듣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자신들도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즐겁게 헌금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자랑스럽게 칭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26절 하반절, 27절 상반절) 반복하면서 그들이 기뻐서 헌금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이 당연히 해야 할 의무였다고 강조합니다. 하면 좋고 안 해도 되는 헌금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의무헌금이라는 뜻입니다. 27절을 보세요. 구제헌금이 성도의 의무요 책임인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빚”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방인 성도들이 유대인 성도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무슨 빚을 졌습니까? “영적인 것”을 빚졌습니다. 영적인 것이란 복음입니다. 복음 전파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이방에 복음을 나누어준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복음(영적인 것)을 받았다면 이방인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에 무언가를 주어야 하는데 지금 예루살렘 교회에 필요한 것은 “육적인 것”이었습니다. 생계유지를 위해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보내어야 마땅하다고 바울이 말씀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의 교제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마음과 함께 “육적인 것”도 나누어야 합니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보물을 형제에게 나누지 않고는 진정으로 형제지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사랑하면 간이라도 떼어줍니다.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는 내가 무엇을 얼마나 주고 있는지를 보면 압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선교사를 사랑하면 그 선교사에게 선교헌금을 보내는 것,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요청을 따라 자원하여 헌금하고 그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도록 바울에게 맡겼는데 이것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 자신이 직접 선교사를 돕고 이웃을 구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윈 손이 모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교회에 헌금하는 것,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여러분을 대신하여 그 헌금을 이곳저곳에 나누는 것입니다. 교회가 헌금을 공정하고 지혜롭게 잘 사용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도들이 있으면 교회가 적극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농어촌 교회를 더 많이 도와야 합니다.

 

 개척교회도 도와야 합니다. 외국노동자들이나 탈북자들도 도와야 합니다. 해외 선교사들에게도 할 수만 있으면 넉넉하게 선교비를 보내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우리교회가 하나가 되어 구제와 선교를 위해 풍성한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선교와 구제를 위해 어떻게 여러분의 헌금을 사용하고 있는지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구제금은 비공개로 나눕니다. 장학은 교회 내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에게 교회 밖 대학생들에게도 일 년에 두 번 지급하고 있습니다. 목장마다 매월 5만원 정도를 교회에 헌금하는데 교회가 그만큼의 액수를 더 보태어서 각 목장과 매칭된 교회와 선교님께 송금합니다. 

 

목장과 매칭되지 않은 교회, 기관, 선교사들에게도 교회가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습니다. 대전에 세워진 총회 선교센터가 2010년에 건립되었는데 우리교회도 5천만원 헌금했습니다. 다음세대를 양성하는 전국SFC의 교육훈련센터 마련을 위해서도 5천만원을 헌금했는데 지금 서울 구의동에 건물을 매입하여 리모델링해서 다음세대를 잘 훈련하고 있습니다. 

 

고신교회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고려신학대학원의 목사후보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목양장학회에 매년 천만원을 수년간 지원하고 있습니다. 연합여전도회에서는 사랑나눔바자회 수익금 중에서 6백만원을 만년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매년 지원해왔는데 올해로 9년째가 됩니다.

 

 지난주일 당회에서는 지진으로 크게 파괴된 인도네시아 빨루지역의 복구비로 백만원의 헌금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이 되는데 그 기념으로 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3.1운동 기독교인 민족대표 16인의 행적을 담은 책자를 발간하는 일에 우리교회가 2백만원을 후원하기로 결의했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써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에 쌓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아껴 쓰고 이웃과 다음세대와 선교를 위해서는 풍성하게 나누어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장기적으로 후원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가난한 교회를 물질로 돕는 것이 중요할까요? 왜 선교지의 교회를 후원해야 할까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난한 교회 혹은 선교지의 교회가 형제교회, 자매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한 백성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아주 중요하고 시급한 일로 생각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만 믿으면 되지 구약의 의식적인 율법을 준수할 것까지는 없다고 이미 예루살렘 공회에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을 모든 교회가 흔쾌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와중에 음식문제나 절기문제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시비가 붙었습니다. 그 여파로 교회 안에서나 교회들 간에 분쟁과 분열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복음의 능력을 세상에 널리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한 편으로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미 세워진 교회들이 복음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도록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하나 될 수 있을까 바울이 생각하다가 그 좋은 방안으로 구제헌금을 생각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로부터 부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서로 한 형제교회인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으로 구제헌금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해 구제헌금을 기쁘게 모금하여 전달한다면 이방인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요, 예루살렘 교회가 그 구제헌금을 감사히 받는다면 그 또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교회를 환영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제헌금을 통해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목적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서쪽으로 항해하는 대신에 정반대 방향인 예루살렘에 먼저 가려고 계획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큰 교훈을 받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한밭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른들과 청년들과 어린이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건강한 자와 환우들이 서로를 돌봄으로써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지체의식, 형제의식으로 단단히 결속되어야 합니다. 이웃 교회들과도 할 수만 있으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매개로 하든지 하나가 되어 함께 하나님의 선한 일에 진력할 때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구제헌금을 전달한 후에 로마교회를 잠시 방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8절입니다. 서바나(스페인)로 가는 길에 잠시 로마교회에 들리겠다고 합니다.

 

왜 스페인에 가려고 계획했을까요? 23절을 보세요. “이 지방”이란 19절에서 말한 대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를 말합니다. 지중해 동부 지역입니다. 바울은 이 지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평가했습니다(23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그래서 바울은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서유럽을 다음의 목표로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해 전부터 로마제국의 서쪽 끝인 스페인 개척선교를 꿈꾸어왔는데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길이 막혔는데 이제 그 길이 열리고 있음을 감지한 것입니다.

 

바울로 하여금 스페인으로 향하지 못하게 한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22절). 그 중의 하나는 구제헌금 모금이 생각대로 잘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지지부진한 교회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구제헌금을 독려하는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내기도 했습니다(고전 16장, 고후 8-9장 참조).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고 있는데 얼마 전에 고린도교회가 구제헌금에 동참함으로써 구제헌금 모금이 완결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한 후에 오랫동안 소원했던 스페인 선교를 감행할 계획을 바울이 세운 것입니다.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로마교회를 잠깐 방문하겠다고 한 것은 20절에 말씀한 대로 바울의 선교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로마에 교회가 서있기 때문에 거기서 오래 머물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꼭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를 24절에서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로마교회)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스페인으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너희를 보고

 

왜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직접 보려고 했을까요? 29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나누어주기 위해서입니다. 편지를 통해서도 이 복을 나누고 있지만 얼굴로 대면할 때 더더욱 신령한 복을 나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란 무엇일까요? 롬 1:11-13을 보세요.

 

(롬 1:11-13)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기 위하여 (복음을 해설함으로써)

로마교회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로마교회가 복음의 말씀 위에 든든히 서도록)

서로의 믿음으로 피차 안위함을 얻기 위하여

열매 맺는 교회 되도록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뱃길로 약 2400km나 되었습니다. 거기서 스페인으로 가려면 또다시 1100km를 항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스페인까지 바로 직행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를 중간 귀착지로 삼은 것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로마교회의 따뜻한 영접을 받고 몇 날을 푹 쉬면서 성도의 따뜻한 교제를 나눈 다음에 스페인으로 떠나기를 바랐습니다.

 

<요즘 선교사님들께서 고국을 잠시 방문하시거나 안식년이 되어 본국사역을 하실 때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합니다. 이유는 교회마다 선교사님 오시는 것을 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우리교회를 방문했으면 좋겠습니다. 선교관을 마련하여 언제라도 쉬었다가 가시게 하면 더 좋겠습니다. 이유는 선교사님과 교제하는 것은 잃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께서 우리교회를 방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한 복을 갖고 오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리로(스페인으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보내준다”는 것은 후원교회가 된다는 뜻입니다. 선교사에게 필요한 물자와 돈을 제공하는 것, 때로는 선교여행의 일부만이라도 동행할 자들을 붙여주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가 서유럽 선교에 가장 유력한 후원교회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은 로마가 아주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서유럽 개척선교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큰 역할을 기대했습니다. 지금까지 동부 지중해 지역의 선교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는 안디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로마가 되어야 할 것으로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로마로부터 서유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가 제2의 선교본부가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와 함께 일하고 싶었습니다. 로마교회의 후원을 받는 선교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 더 효과적으로 서유럽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도 선교사님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가 선교사님들 사이에서 후원교회로 삼고 싶은 제1 후보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선교사님께 인색하지 않은 교회, 언제라도 따뜻하게 영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적어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만남의 교제, 주고받는 교제, 기도의 교제입니다. 기도의 교제에 대해서는 다음주일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교제는 만남의 교제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려고 계획했습니다. 로마교회를 방문할 계획도 세웠습니다. 만남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서로 만나야 합니다. 성도 간에 만남의 교제가 없으면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교회의 큰 모임과 작은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십시오. 큰 모임은 공적인 예배모임입니다. 

 

주일오전예배 오후예배,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목장연합기도회 등입니다. 작은(소그룹) 모임으로는 목장모임, 지회모임, 위원회모임, 중보기도모임, 삶공부 등이 있습니다. 교회의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면 여러분의 신앙이 바르게 자랄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주고받는 교제로 발전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의 교제는 주고받는 교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교회에 신령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인방인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보내었습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나눔으로써 교제했습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로마교회 성도들도 서로 주고받는 교제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그리스도의 풍성한 축복을 가지고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을 즐겁게 환영하고 얼마간 편히 쉬도록 접대를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스페인 개척선교에 적극적인 후원교회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로써 하나님의 복음이 땅 끝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와 성도가 왜 만나야 합니까? 교회들도 서로 만나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교사님들을 환영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선교지를 방문해야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은혜를 받았습니까? 우리교회가 주님께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예, 충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크고 놀라운 은혜를 넘치게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나누기 위해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나누려고 함께 만나 교제하면 그때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 한 구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히 10:24-25)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열심히 모여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구제와 선교를 통해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admin

 

 

교회가 교회를 돕는 것의 의미 /롬15:22-33

2019-11-30 15:57:25

 

이 세상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들 중에는 재정적으로 넉넉한 교회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법상 공식적인 표현은 아닙니다만, 흔히 자립교회라고 하고, 미자립교회라고 합니다.

 

교인들의 헌금을 통해서 교회의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있고, 그렇지 못하여 다른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재정적으로 자립하여 넉넉한 교회는 부족한 교회를 돕고, 재정적으로 부족한 교회는 넉넉한 교회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일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여유 있는 교회는 돕는 일에 인색하거나 그 일에 대해 교만해지려 합니다. “우리는 몇 개 교회를 돕고 있다”라고 자랑하려 합니다. 반면, 부족한 교회들은 넉넉한 교회에 후원 요청하는 것을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운 마음을 가집니다. 우리 시대의 양극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회들이 아직은 훨씬 더 많이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성경에서는 재정이 넉넉한 교회로 하여금 “너희들이 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다. 그러니 자랑하라.”라고 가르칠까요? 성경에서는 넉넉하지 못한 교회로 하여금 “너희들이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 항상 고개를 숙여서 넉넉한 교회에 요청해야 한다.”라고 가르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교회가 교회를 돕는 것을 가리켜 ‘디아코니아’(diakoni,a), 즉 ‘섬김’과 ‘봉사’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교회가 교회를 돕는 것을 매우 당연한 일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넉넉한 교회는 부족한 교회를 돕고, 부족한 교회는 여유 있는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 서로 섬기며 참된 다아코니아(섬김과 봉사)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 사실이 로마서 15:22-33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Ⅰ. 본문 해석

 

본문의 배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갈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전에도 로마 교회에 방문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가지 못하였는데(참고. 1:13), 이제 곧 방문할 것을 로마서라는 편지를 통해 알리고 있습니다(22-23절).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에게 가기 전에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할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25절) 예루살렘에 들린 뒤에 로마에 갔다가 서바나(스페인)로 갈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28절)

 

바울은 로마로 갈 것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로마여행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예루살렘에 가는 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방문 계획과 목적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까? 그리고 그것을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무엇을 가르치려고 할까요?

 

26절을 보시면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얼마의 금액을 헌금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고린도후서 8:1-5에도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모여진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은행의 온라인 이체방식을 통해서 전달하면 간단하겠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니 바울이 직접 들고 가는 것입니다.

 

 

헌금전달 = 성도를 섬기는 일

 

그런데 25절을 보면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헌금을 전달하러 간다”라고 말하지 않고 “성도를 섬기는 일로 간다”라고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31절에도 보시면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섬기는’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디아코니아’(diakoni,a)인데, 우리 말로 번역하면 섬김, 봉사, 사역이라는 뜻입니다. 한글성경은 ‘디아코니아’라는 말의 의미를 잘 파악하고 “내가 헌금을 전달하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라고 하지 않고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7절에는 헬라어로는 조금은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긴 하지만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을 헌금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섬기고 봉사하며 사역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통해서 ‘헌금’의 의미, 헌금이 다른 교회를 돕는 일에 사용되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고후 8:4,19-20; 9:1,12-13에도 사용됨).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돕는 일은 단순한 이웃돕기가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낯선 사람들에게 베푸는 선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섬김과 봉사입니다.

 

 

기쁨으로 섬긴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

 

다른 교회를 돕는 일이 단순한 이웃돕기가 아니라 섬김과 봉사이기에 26절에 보면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고, 27절에서는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위치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는 일을 단순히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섬기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감당한 교회들의 ‘섬김’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일이 로마로 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기에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여행일정을 알리는 것입니다. 단순히 여행 일정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드러낼 성도들의 ‘섬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Ⅱ. 헌금을 통한 섬김과 사역

 

헌금을 통해 섬기는 우리들

 

여러분들은 매주일 예배 중에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헌금 시간이 있으니까 할 뿐, 그 헌금이 어떻게 쓰여지는 지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심지어 예배 중에 드려진 헌금이 목사에게 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드리는 헌금은 교회의 재정을 위해 수고하도록 부름 받아 섬기는 집사들에 의해 교회 안팎의 여러 용도로 사용됩니다. 말씀봉사자를 위한 생활비(고전 9:4-14; 딤전 5:17-18), 성찬음식 구입비, 교육비, 전도비, 구제비(행 4:32-37), 선교비(빌 4:15-19), 예배당 유지를 위한 비용, 그 밖에 여러 용도로 지출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교회를 돕기 위해서(행 11:27-30; 롬 15:26; 고전 16:1-4) 사용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가 마땅히 행해야 할 디아코니아, 즉 섬김과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들이 드린 헌금은 섬김과 봉사의 방편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드린 헌금이 재정적 도움이 필요한 교회에 전달되어 섬김과 봉사로 사용됩니다.

 

 

경험담

 

제가 말씀봉사하고 있는 교회는 재정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몇몇 교회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우리교회를 후원하고 있는 어떤 교회의 목사님께 “후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섬길 수 있어서 감사하지요.” 여전히 많은 교회들이 디아코니아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통해 사역하는 우리들

 

앞서 말씀드리기를 ‘섬기는’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가 섬김, 봉사라는 뜻 뿐만 아니라 ‘사역’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단어가 사도행전 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에서도 사용되는데, 여기에서 사도의 직무에 해당하는 ‘말씀 사역’이라는 번역의 원어가 바로 ‘디아코니아’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난외주에는 “헬. 말씀의 봉사에”라고 되어 있어서 ‘디아코니아’(봉사)가 사용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은 섬김과 봉사의 일일 뿐만 아니라 사역이기도 합니다. 흔히 말씀 사역(디아코니아)을 감당하는 목사, 강도사, 전도사를 가리켜서 ‘사역자’라고 합니다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들만이 사역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사역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예배 중에 헌금을 드리고, 그 헌금은 곧 ‘디아코니아’(사역)에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마땅한 의무

 

교회가 교회를 돕는 것은 마땅한 의무입니다. 섬김과 봉사요,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감당할 일입니다. 오히려 도울 수 있는, 아니 섬길 수 있는 형편에 처한 것으로 감사해야 하며, 섬길 교회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현재 다른 교회를 돕고 있는 교회도 언제 어느 때에 도움을 받을 처지에 놓일지 모릅니다. 갑자기 예배당에 화재가 발생한다든지 하는 불확실한 미래는 언제든지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와 동일한 고백을 가진 고신교회가 섬길 것입니다.

 

 

Ⅲ. 섬김을 넘어 교제로

 

교회의 한 몸됨

 

교회가 교회를 돕는 것은 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가 감당한 것은 그 교회들이 멀리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교회는 유대인들의 교회요 한 교회는 이방인들이 교회이지만, 영적으로는, 본질적으로는 하나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

 

이 사실은 헌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 26절을 보시면 ‘연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헌금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koinwni,a)라고 되어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교제’ 혹은 ‘사귐’라는 뜻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고 할 때의 ‘교제’가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재정이 넉넉한 교회들이 그렇지 않은 교회를 돕는 것, 부족한 교회가 여유 있는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예배 중에 드려진 헌금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도들이 바친 헌금이 다른 교회로 전달되면서 자동적으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고백이 헌금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교회를 돕는 것은 성도의 교제요,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편이며, 우리의 고백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교단 교회의 하나됨

 

기독교보나 월간 생명나무 같은 교단의 언론은 교단 내의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하는데 특히 교단 내 어려움을 당한 교회나 목회자가 있을 때에 알리는 일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교단의 개체교회와 성도들은 어려운 일을 당한 교회와 목회자를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한 교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갖습니다.

 

 

 

받음직한 봉사 /롬15:30-33/ 곽선희 목사

2014-11-19 14:09:14

 

4살 난 어린아이를 위해서 어머 니가 그와 함께 잠자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늘 건강하게 해주시 고, 또 총명있게 자라게 해주시 고…"이렇게 기도하다가

 

"어머니 말 씀 잘 듣게 해주시고…"그렇게 기도 했단 말입니다. 그 늘 기도하는 소 릴 듣다가 이 4살 어린아이가"엄마 오늘은 내가 기도할께"

 

"그래라"얘 가 기도하는데"엄마가 내말 잘 듣 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각각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자 기에게 유리한 서원을 내놓고 있습 니다. 어머니라면은 내가 진정 애 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랑 하는 것이 정말 바로 사랑하는 것일 까, 그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 야 할 것인데, '나는 다 잘하고 있 고, 저 애가 내 말을 잘 듣게 해달 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각자 자기 나름에 소원만을 열심히 구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미국에 칼럼리스트들이 여론 조사를 해서, 한 연구 보고서 를 내 놨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 과 비기독교인의 비교하는 그러한 비교 도표입니다. 헌신 봉사를 중 심으로 해서 비교한 결과 이렇게, 이런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게 되었 다고 합니다. 첫째는 '봉사 참가 지 수', '봉사활동에 얼마나 참가하고 있는가'하는 겁니다.

 

이 조사해 본 결과 단연 '기독교인들이 월등하게, 뭐 잘 믿거나 못 믿거나 훨씬 더 많 은 사람들이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 더라'하는 것이구요. 두 번째는 '포 용력지수', 그 말은 하나님께 헌신하 고, 특별히 인종 문제가 복잡한 나 라이기 때문에, 그 '인종차별', 이 문 제에 있어서 얼마나 포용력이 있나' 또 '가난한 자와 부한 자, 얼마나 넉 넉하게 포용을 하고 있는가'. 포용 력 지수를 평가 해 보았다는 겁니 다.

 

그러면 '얼마나 관용할 수 있느 냐'하는 것이 그 지수가 되겠습니다. 또 하나는 '가정 안정지수', 뭐 '이혼 문제라든가 이런 불안에 떨지 않고, 아이들도 부모님의 뜻을 따라서 성 실하게 잘 자라주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가정 안정지수라고 해서 평 가 해 보았는데, 이것도 월등하게 기독교인들이 더 낫구요. 마지막에 '행복감 지수'입니다.

 

그것은 '베푸 는 삶을 통해서 스스로의 행복을 얼 마나 만끽하고 살아가는가'하는데, 이 만족도가 60%라고 했습니다. 60%의 사람들이 '우리는 만족합니 다.' 그렇게 생각했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네 가지에 의해서 우 리를 평가한다면, 여러분 자신들을 평가한다면, 얼마의 지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 봉사생활 금년에 얼마나 했습니까? 얼마나 좀 너그러운 사람이 됐습니까? 가 정은 얼마나 더 안정이 됐습니까? 여러분의 행복감은 어느 수준에 있 습니까? 스스로 물어야 할 것입니 다.

 

인생은 받는 것보다는 주는 일에 서 기쁨을 찾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한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0 장에 볼 것 같으면, 35절에 예수님 친히 하신 말씀을 바울이 인용합니 다. '받는 것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주는 자에게 기쁨이 있다. 주는 자에게 행복이 있다.' 여러분 이 주는 행복의 진리를 터득하기까 지는 여러분은 영영 행복을 모르고 말 것입니다. 이 진리만은 논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행동 으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는 특별한 진리입니다. 자 이제, 자녀와의 관계를 한번 보십시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위해서 수고합니 까? 수고하는 그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는 자라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기다가 밑천을 들여가지고 본전 뽑을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불 만이 많습니다.

 

그 키우면서 얼마 나 재미있습니까? 그것으로 벌써 기쁨을 다 얻은 거예요. 뭐 효도하 라고 강요할 거 없습니다. 본전 다 찾은 거예요. 그걸 잊어서는 안돼 요. 베푸는 재미, 키우는 재미, 수 고하는 재미, 그 자체가 행복이었더 란 말이죠. 그런고로 인생은 항상 베풀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행복할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된 존재입니 다. 이것이 바로 성숙된 인격입니 다. 삶의 질을 여기서 높여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임종하게 되면, 마지막 으로 크게 뉘우치게 된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는 사람이 착해지니까요. 최소한도 임종에서는 착해지니까요. 그 순간 세 가지를 후회가게 되는 데, 그 첫째가 베풀지 못한 겁니다. '좀 더 베풀 수 있었는데, 좀 더 줄 수 있었는데, 내가 왜 주지 않았나.' 그대로 그대로 생각이 납니다.

 

'좀 더 넉넉하게 주면서 살 수 있었는 데…… 이렇게 쥐고, 모아봐도 먹지 도 못하고 가는 걸 좀더 좋은 일하 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걸' 이것이 큰 후회, 첫째 후회입니다. 둘째가 참지 못한 것. '조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 그렇습니다. 세 번째가 '좀 더 행복하게 살수도 있었는데, 좀 더 즐길 수 있었는데,

 

뭐 그렇게 아웅다웅 싸우고 울고불 고 할 필요가 없었는데, 얼마든지 즐겁게 살수 있었는데, 나는 왜 이 렇게 사람이 못돼 먹어서 나 괴롭 고, 남 괴롭히고, 그렇게 살아야 했 던가?' 이것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후회입니다.

 

여러분 정말 받는 데 만 급급하고, 못 받는 원망, 더 가지 고 싶은 욕심, 여기서만 버둥거리고 있기 때문에 영영 행복할 길이 없습 니다. 문제는 베푸는 생각을 해보 십시다. 베풀기 위한, 한번 마음을 가져 봅시다. 그리하지 않고는 절 대로 여러분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 베푸는 자가 누굽니까? 우리 생각에는"아! 돈 많은 사람이 주는 거지. 아,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 나야 구제 받아야 할 대상인데 누굴 구제한단 말이냐."라고 생각하겠죠. 아니 그렇습니다. 지금은 문전에 오는 거지가 없지만, 옛날에는 거지 가 많았죠. 얻어먹으러 오는 사람 이 많았는데, 그 거지들 말에 의하 면요. 대문이 크고 담장이 높은 집 에 가서는 얻어먹지 못 한답니다.

 

욕만 먹고 나온답니다. 재수 없다 고, 아침부터 뭐 얻으러 온다고. 아 주 가난한 집, 대문도 없는 집에 가 야 넉넉히 얻어먹는다고 합니다. 구제를 부자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돼요. 성공한 사람이 구제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사 업이 망한 사람이 구제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돕게 마련이지, 부한 사람, 그 사람들은 돈에 미쳐가지고 요. 정신없어요. 내버려두세요. 어림도 없습니다. 어렵고 가난한, 바로 그 형편에 있는 사람이 진정으 로 마음을 쓸 수가 있는 것이에요.

 

또, 누구에게 주어야 되느냐 하 는 겁니다. 우리는 그 쓸데없이 괜 히 돈 있는 사람에게 주느라고 문제 예요. 뭐 사과상자니 뭐니 해가지 고 말이야. 이게 우리의 선행은 전 혀 보상할 수 없는, 대신 보답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주어야 되는 것이에 요.

 

그걸 있지 말아야 돼요. 내 친 척, 내 아는 사람, 뭐 주변에, 그게 아니구요 날 찾아오지도 못하고, 내 가 와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바 로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 12절에 서 '부한 자는 너의 잔치에 초청하 지 말라' 그랬어요. '초청하면, 다시 그 사람이 너를 대신 청할 것 아니 냐.' 그러면 쓸데없는 거죠. '대신 청할 수 없는, 보답할 수 없는 바로 그,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어떻게 해야되는 겁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읽 게 됩니다. 저는 몇 일전에 미국으 로 여행을 가면서, 집회 인도하러 가면서 비행기 안에서 참 많은 마음 을, 아픈 마음을 뉘우쳐 봤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내 앞에 앉은 의자 에 점잖은 미국사람 내외분이, 백인 인데, 한국에 와서 고아를 데리고 가는 거예요. 아직 낯을 가리지 못 하는 어린애, 칭얼거리는 애를 하나 딱 안고, 이걸 가면서요. 열시간동 안 내내 아버지가 돌봐요. 그것 또 이상하데요. 그 어머니는 까딱도 안 해요. 옆에서 구경만 하고, 아버 지가 그 애를 안고 그 애쓰는 걸 볼 때요,

 

나는 저렇게 오랫동안 애를 안아 본 일이 없어요. 이렇게 정성 스러울 수가 없어요. 그렇게, 아이 를 분명히 한국아이인데, 고아를 하 나 데리고 가면서 그렇게 정성을 다 하는 걸 보고, 제가 많이 생각했습 니다.

 

저 사람들은 여기까지 와서 저 애를 데리고 가는 데, 우리는 도 대체 고아를 팔아먹는 나라가 됐으 니, 이래가지고도 복 받겠다고? 조 심하세요. 무슨 복이 온다는 얘기 입니까 이 땅에. 도대체 이게 될 말입니까? 바로 그 얘기를 '아 저 사람 참 훌륭하다고'. 마침, 내 옆 에 미군, 옛날에 장성이 왔다가면서 옆에 앉았어요. 그 얘기를 주고받 았더니, 자기 말이라고는 안하데요, 꼭 자기 같은데 말은 안하면서

 

"아, 내가 아는 사람은요. 아 지금 아이 가 다섯인데 남의 아이가 또 다섯이 에요. 그 집에 가면 아주 와글와글 하는데 아 나는 그 집에 갈 때마다 너무 행복하게 보이더라"고, 아 또 그러고 나니까 점점 더 부끄러워져 서, 아 그렇게 민망한 줄 모르겠어 요. '어쩌다가 우리는 이렇게 이 모 양이 됐나……' 생각이 들어요. 복 달라고 열심히 소리만 질렀지, 복 받을 만한 짓을 하지 못해요 도대체 가요.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보십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소 아시아 전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건 개척교회를 하는 겁 니다. Church Planting을 하는 거 거든요. 아 전혀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만드는 거예요. 교회를 세워요. 지 금 아직도 이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익숙하지도 못했는데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놓고,

 

"자, 헌금합시다."연 보하자고 저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 들이 지금 흉년들어서 굶어 죽어 간 다고,

 

"당신들도 소식 들어 알잖습 니까? 우리가 도웁시다!"

 

정성껏 헌 금을 했어요. 이 연보를 예루살렘 으로 송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특 별히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는 많은 헌금을 해 가지고 이번만은 내가 직 접 가지고 갈 것이다. 친히 가지고 간다고, 소중하기 때문에, 마음을 담 아 가지고 가야겠기 때문에 또, 특 별히 중요한 것은 이 헌금을 한 이 이방교인들에, 이방사람들에 마음, 사랑을 전달하고 싶어서 이 헌금을 손수 가지고 갑니다.

 

여기에는 큰 위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너무 위험해요. 이번에 갔다가는 살아남기가 어렵겠다는 걸 알고 있 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쓴 겁니 다. 내가 로마로 가고 싶은데, 만일 에 여차해서 못 가더라도 이 편지로 대신하고 싶어서 쓰게 된 편지가 로 마서입니다.

 

그러면 그 성금을 이 위험을 무릎 쓰고 직접 가지고 갑니 다. 그러나 이것을 받은 예루살렘 이 결코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를 죽일려고 들었고, 죽이지 않고 는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도 바울이 결국은 많 은 핍박을 받고 갇혀가지고, 로마로, 죄수의 몸으로 상소해서 로마까지 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 것 이에요.

 

그런데 지금 로마에 편지를 합니 다. '내가 예루살렘에 대한 섬기는 일, 받음직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섬김은 섬 기는 거지요 분명히. 돈은 가지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받 음직한 것이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주는 자의 마음입니다.

 

먼저는 주는 자 의 마음이 뜨거워야됩니다. 던져주 는 게 아니에요. 억지로 주는 거 아니에요. 불가피해서 주는 게 아 니에요. 자랑삼아 주는 게 아니에 요. 높은 자세로 주는 게 아닙니다. 주는 자의 마음, 물질이 아니고 사 랑을 주고, 희생을 주고, 죄송한 마 음으로 주고 그래야 된다는 거죠. 더구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야 하 는 거죠. 아쉬운 마음으로.

 

여러분 자녀교육에 있어서 아이 들의 용돈 때문에 고생하십니까? 또 아이들의, 자녀교육에 문제가 있 습니까? 말 한마디에 달린 거예요.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더라도 줄 때

 

"미안하다. 더 잘해주고 싶은데 요 것밖에 없어서 어떻하냐? 네가 우 리 집에 태어나길 잘못이지. 아버 지 재주 없고, 내 재주 더 없고. 그 러니까 요것밖에 없지 않니? 그저 다른 집에는 더 잘해 주더라마는 나 는 못 해주니 미안하다."

 

이러면서 주어야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하지요.

 

"야, 왜 이렇게 용돈이 많으냐? 남에 집 아들은 조금 쓰드 만 너는 그 모양이냐?"이렇게 나오 죠? 얘들이 얼마나 머리가 빠른대 요.

 

"아버지 골프 한번 치는데 얼 마인줄 아세요? 다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술좌석 한번 벌이면 얼만 줄 아느냐고요?"

 

말은 안하지만 속 은 멀쩡합니다. 이 아들이 어떻게 잘 되겠습니까? 보세요. 마음이 없잖아요. 마음을 주지 못하고 있 잖아요. 그러니까 주는 사람의 마 음은 언제나 '미안합니다.'하는 마음 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아쉬운 마 음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부모에 게 효도할 때에도

 

"더 잘해주고 싶 지마는 그저 형편이 이래서요."

 

이 런 마음이래야지."뭐 그만하면 됐 지 뭘."그딴 소리를 하면 안되는 겁니다.

 

탈무드에 재미있는 소리가 있어 요. 어떤 왕이 있는데, 왕에게 외동 딸이 있는데, 병이 들어서 죽게 됩 니다. 죽어가니까 왕이 너무 다급 해서

 

"이 딸의 병을 고치는 자는 사 위를 삼고, 내 대를 이어서 왕을 삼 겠습니다. 왕을 만들게 되겠다. 왕 위에 오르게 해 주마."

 

방을 붙였어 요. 먼먼 나라에 있는 어느 삼형제 가 산골에 살았는데, 이 삼형제가 보화, 신기한 보화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큰형은 멀리 보는 망원경 을, 천리를 보는 망원경이 있어요. 그래서 그 망원경으로 이 사실을 보 게 됐어요. 방 붙인걸 보게 됐고, 또 둘째형은 말입니다, 그 옛날에 있잖아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양탄 자, 아 그거 하나를 가지고 있거든 요. 이거를 타고 이제 가게 되는 거예요.

 

거기까지. 세 번째 동생은 말이죠. 어떤 병이라도 요것만 먹 으면 낫는 귀중한 사과 하나를 갖고 있어요. 자, 이 삼 형제가 멀리서 보고, 양탄자를 타고 와서 이 사과 를 주워서 이 공주가 병이 나았어 요. 이제 사위를 삼아야 하는 데, 여기에 공을 세운 사람이 세 사람이 에요. 어느 사람을 사위로 삼아야 하느냐 이겁니다. 여기에 대한 탈 무드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망원경은 도로 가져가면 되고, 양 탄자도 도로 가져가면 되고, 사과는 먹어 없어졌으니까 당신이야말로 큰 희생을 한거요.". 그 사람이 왕이 됐답니다.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사랑이란 희생해서 내가 없어져야 지. 아직도 멀쩡한데요.

 

무슨 사랑 이 그런 게 있나요. 그런고로 주는 자의 마음이 얼마나 지극해야 하는 가. 나 자신이 사라지는, 거기에 진 정한 주는 자의 마음이 있는 것이구 요. 또 하나는 신앙적이고, 절대적 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하고 비 교 할 것 없어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요. 하나님께로 나는 많은 것 을 받았습니다. 그 받은 마음에서 적은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받은 마음에 대한 감사가 이렇게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누구에게 주느냐 할 때는, 전혀 보답을 바람이 없이 줘 야됩니다. 보상을 바람이 없이, 전 혀 기대를 걸지 않고. 인사도 안 해도 좋아요. 전혀 상관이 없이, 조 금이라도 그 어느 누구라든지 보상 을 바라는 마음 없는 봉사이어야 한 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음을, 사랑을 그래요. 똑같은 일이라도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언제 한 번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저 지난 삼월 달에 북한 나진에 갔을 때 그때 만 해도 삼월 달에는 추워요, 북한은. 그래서 차를 타고 가다가 식량을 구 하러 다니느라고 보따리를 지고서 여기저기 다니는 사람을 많이 보는 데, 마침 넓은 벌판을 지나가게 돼 서 차를 세우고

 

"가는 길까지 태워 다 드릴테니 타십시오. 같은 방향 이니까"

 

타라고 그래서 탔어요. 보 니까 옷을 입었는데, 방한복이 괜찮 아요. 좋은 옷을 입었더라구요. 그 래서

 

"아이구, 동무 옷이 참 좋습니 다.""이거요 평화그룹에서 보내 준 겁니다."

 

저희 교회가 북한을 도울 때에 그 이름이 '평화그룹'입니다. '소망교회'가 아닙니다. '평화그룹' 이라는 이름으로 주는데요. 그렇다 고 그래요. 그 옆에 있던 사람이 한 마디, 그 말을 안 했어야 되는 데

 

"이분이 평화그룹 이사장입니 다."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이구, 감사합니다."그래요. 딱 쳐다보더니요 깜짝 놀랄 말을 합니 다.

 

"소망교회에서 보내온 것이 제 일 좋아요."

 

그래요. 만일에 "소망 교회에서 보낸 것이 제일 못 돼요."

 

그러면 난 큰일날 뻔했어요. 어떻 게 고마운지……. 여러분 어떤 일 이던 간에 베풀 때는 정말 정성을 다해야돼요. 마음을 주는 것이니까 요. 성의를 다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하는, 선한 일하는 사람은 결과 에 연연하지 마세요. 이 어떻게 되 느냐, 어떻게 되느냐. 가끔 보니까 그런 말 많이 해요. 뭐 쌀을 보냈 더니"누가 먹나요."

 

말이 많아요. 아무가 먹던 별생각 다하네. 당신 이 주는 것만 주세요. 누가 먹느냐 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거구요. 그거 그런 것 신경 쓰다가 평생 그 인색한 노릇하다가 끝나지요. 줄 때는 그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내 손에서 떠난 것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드렸으면 끝난거 죠. 어떻게 쓰여지느냐는 묻지 마 세요. 하나님이 들어서 '오병이어' 처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기 적을 낳을테니까, 두고보세요. 그걸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 더 있습니다. 선한 일 하 고 잊으세요. 탈무드에 그런 말 있 어요. '내가 누구를 줬는 지를 몰라 야 하고, 받는 사람은 주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는 거 예요. '누구로부터 받았다'할 때는 벌써 얘기가 달라진다는 것이에요. 의미가 없어요. 잊으세요. 예수님 말씀대로,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오 른 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얼 마나 강한 말씀입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라.' 참 내가 유감 스러운 말을 듣습니다.

 

"뭐, 돕자, 돕자하는 거, 뭐 도울 마음은 있습 니다마는 내가 가서 주고 악수해야 만 주겠데요. 누가 받는지도 모르 는 거, 안 준다."

 

그래요. 이게 한 국 교인들이요. 요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수준이 이 정도입니 다. 이게 무슨 구제요, 선한 일입니 까? 아무가 받으면 어때요? 잊어 버리세요. 내가 얼마를 줬는지 기 억지도 말아야 돼요. 누구 줬는 지 알아서 뭐해요?

 

내 기억에서 다 잊 어 버렸어요. 그런 돈의 숫자 필요 없어요. 미안하지만 제가 저희 교 회에서 회보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회보 가운데 보면은 주보가 전부 그 자랑이죠. 고아원 방문, 양로원 방문, 어데 얼 마 주고, 어데 좀……. 난 이거 보 기 싫어 안 해요. 그 무슨 소용 있 단 말입니까? 그 기억이 무슨 소용 있어요? 이건 교회답지 못해요. 이거는 하나님의 일도 아니에요. 깨끗한 마음으로 잊어버리세요. 나 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요. 그 마음이라야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려 운 시대를 맞았습니다.

 

"하필이면 IMF시대에 왜 저런 말을 할까?"하 겠죠? IMF시대니까 이 말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삶을 질을 높여 사 십시다. 베푸는 마음만이 높은 질 의 생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 장 28절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있 어요. '이제는 구제할 것이 있기 위 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제 손으로 수고하여', 이자받 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손으로 수고하여,

 

여러분, '난 밥 먹 을 것이 있다. 그러니 나는 그냥 있어도 된다.' 그러겠습니까? 아니 오, 잡수실 것이 있거든 이제부터는 구제할 것을 위해서 일하세요. 무 엇이라도 하세요. 이것은 나를 위 한 것이 아니오. 내 처자식 벌어 먹이기 위한 것이 아니오. 구제할 목적으로 돈을 버는 것이오. 구제 할 목적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에요.

 

과거보다 더 열심히, 열심히 뛰세요. 뭐라도 해서, 더 벌어서, 좀 더 주의 일 하겠다고, 난 밥 먹을 것이 있으 니까, 그저 이자받아 가지고 가만히 놀겠다고. 그러니까 가만있으니까 아주 가만히 있게 되고 말지. 여러 분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을 하세요. 땀을 흘리세요.

 

자, 그 뿐만 아닙니다. 오늘 본 문대로 받을려고 하는 기도에서 이 제는 주려는 기도요, 베푸는 기도요, 또 받음직하게, 내가 돕는 그분들이 받음직한 것이 되기 위하여 기도합 니다. 바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 의 가치를 높여 줄 것입니다. 여기 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롬15:30

2021-02-22 14:44:29

 

롬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지난주에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 문장은 비기독교인들에게도 호소력이 있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생의 행복이 아닐까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랑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뜨겁게 사랑하며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이 아니더라도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며 무심코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허투루 살겠습니까? 1분 1초를 아까와 하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것입니다. 말 한 마디, 미소 한 번이 소중하고 내 손으로 쓰다듬고 안아주고 눈물 흘리며 남은 하루를 뜨겁게 사랑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 이 환경도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불편을 겪고 나서야 코로나 이전의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습니다. 마음대로 학교 가고,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회식하고, 함께 여행 가는 평범한 일상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지금 코로나 때문에 제한받고 있지만 현재의 환경조차도 감사해야 합니다.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환경에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뜨겁게 사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에를 들면 요즘 집합 금지 명령 때문에 함께 만나 식사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해서 배달을 시켜주면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영상 통화를 통해서 먹방을 하면서라도 대화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현재의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뜨겁게 사랑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 이 사람도 고맙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가 안 좋으면 서로 원수라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한쪽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런 말을 합니다. “속 썩이는 남편이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 낫구나.”

 

현재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100%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들을 불편하게 생각하면 그 사람들도 그걸 알아차리고 나를 더욱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만이 있지만 그 사람을 고맙게 생각하면 그 사람들도 알아차리고 변화가 되어서 나에게 더욱 고마운 사람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수준이 비기독교인들보다 높습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원수까지 뜨겁게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동원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데 하라고 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다름이 아니 원수였던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 성령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보혜사 성령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은 태초에 자기 형상을 따라서 우리를 만드실 정도로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신 사랑이었습니다. 또한 죄 가운데 빠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아들이 비참하게 고난당하고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죽고 싸늘한 시신으로 무덤에 삼일 동안이나 갇혀있기까지 아무 일도 안하시고 참으신 사랑입니다. 원수 된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이 성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신적 지위를 내려놓고 종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신 사랑입니다. 인간이 겪는 연약함과 유혹과 핍박과 수치를 다 겪으신 사랑입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신적 권능을 사용해서 그 고통을 줄이거나 피할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견디신 사랑입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과 물 한 방울까지 흘려서 우리 죄를 씻어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를 향하였습니다.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에 성령님의 사랑은 많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사랑이라는 표현이 오늘 본문에 대한 나옵니다. 성령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날까요?

 

 

1. 성령님의 뜨거운 사랑은 그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말세에 성령이 두 번재 보혜사로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와 영으로 강림하시어 33년 동안 계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영으로 오셨습니다. 영으로 오신 후에 지금까지 2000년 넘도록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이게 바로 성령님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행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 성령님의 뜨거운 사랑은 죄가 많고 추한 인간의 육체 안에 친히 들어오심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도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제한적으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즉 삼직 직분자인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임하셨습니다. 그것도 한시적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명이 끝나면 떠나셨습니다. 사명이 끝나지 않았어도 그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신약 시대에는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믿는 자,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임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임하셨다고 했는데 신약 시대에는 아예 안에 들어와서 거주하십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보혜사는 늘 옆에서 함께 지내면서 위로하고 도와주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신 동안 1차 보혜사이셨는데 성령님은 예수님을 대신하는 2차 보혜사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보혜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예 내 안에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거룩하신 성령님이 우리 육체 안에 들어오시는 것은 결코 즐겁거나 반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더럽고 냄새나고 누추한 집에 가서 살기를 원합니까? 누구나 깨끗하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집에 가서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령님은 더럽고 냄새나고 누추한 내 육체의 집에 들어와서 살고 계십니다.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자기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던 성령님이시기에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시기에 부정한 내 육체 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죄로 인하여 오염된 나를 그대로 둔 채로 내 안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은 나를 깨끗하게 하시는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내가 여러 방법, 여러 사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거나 읽게 하셨습니다.

복음을 듣는 순간 성령은 내가 죄인인 것과 그 죄로 인하여 무서운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다시 사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게 하시고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는 순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이 오시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이 때 나의 육체가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이 깨끗하게 됩니다.

내 영혼을 거듭나게 즉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더 이상 죄로 오염되지 않고 즉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거룩한 영혼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내 영혼과 연합되십니다.

내 육체는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영혼을 깨끗하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셨기에 내 영혼과 연합되어 함께 하십니다.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 성령님의 뜨거운 사랑은 구원받은 이후에 내 육체가 죄를 짓더라도 나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떠나지 않으시는 이유는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우리 영혼은 깨끗하게 되었고,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언제라도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체는 여전히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우리 육체는 언제 깨끗하게 될까요?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 때 생명의 부활을 하여서 죄가 없는 거룩한 육체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여전히 죄의 본성이 있는 육체를 입고 살아야 합니다. 구원 받았어도 우리는 내 영혼과 육체가 각각 서로 다른 소원을 가지고 있어서 충돌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영혼은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고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수준이 점점 높아지게 됩니다. 이게 바로 영적 성장이고 성숙에 이르는 것이요 성화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신 이유는 바로 구원 이후에 우리가 천국 갈 때까지, 예수님이 오시는 날까지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서 성화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계시는 것입니다. 안전하게 천국 입성할 수 있게 하시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세상을 따라 죄악을 좇아서 살게 되면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시기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시기할 정도로 성령이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약4: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또한 성령은 시기할 정도로 사랑하시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내가 세상과 죄악에 빠져서 허덕일 때에도 성령은 내 안에서 나를 위해서 친히 기도하십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4. 성령의 뜨거운 사랑은 성령을 통해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성령님이 내게 오시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이 내 안에 실제적으로 부어지게 됩니다. 그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롬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은 이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저 하늘보좌로부터 우리 심령 가운데 실제적으로 부어졌습니다. 내게 오신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성령이 통로가 되시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진 것입니다. 마치 우리 집에 수도는 수도관을 통해서 들어온 것과 같습니다. 핸드폰 중계기가 지역마다 있습니다. 그 중계기를 통해서 우리는 전파를 수신하고 정보를 받게 됩니다. 핸드폰 중계기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선 정보들은 중계기를 통해서 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물붓듯이 부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 때문에 뜨겁게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떤 남자 분이 탕자처럼 살았습니다. 술과 도박에 빠져서 지냈습니다. 그는 목사였던 아버지가 기도하여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하나님께 목사로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그것을 거부하고 세상길로 간 것입니다. 술주정뱅이 남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은 신실한 신앙인이었기에 인내하면서 남편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남편은 부인이 천사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새벽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부인이 써넣은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수유리 너머로 갔다.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약을 먹고 죽을까 아니면 손목을 그어서 죽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취할 길이 아님을 나는 한 번 더 확인하고 되돌아왔다.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위해 내게 주신 남편이므로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하라 명령하시므로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의 약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잖아요.”

 

남편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인이 독실한 신자이니 자신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능히 이겨내고 만족하며 살고 있는지 알았는데 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수와 같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며 기도해주는 아내를 통해서 어려서부터 이론적으로만 알던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독특한 음악 세계를 보여주고 1등을 차지한 가수 이승윤씨의 아버지인 이재철 목사님입니다. 이 목사님은 아내를 통해서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고 변화가 되었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사모님이 자살 충동까지 느꼈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속 썩이는 남편을 끝까지 사랑하게 하신 분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셨습니다. 성령님은 사모님 안에서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자살 충동을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한 번 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사랑하며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아버지의 서원 기도를 거부하고 세상을 향해서 나갔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이재철 목사님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편지를 읽는 순간 성령님은 이재철 목사님의 마음을 감동하여 아내의 일기장을 읽었을 때 단지 자책하는 마음만 같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리 안에 지식적으로 존재하던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이 살아 역사하는 사랑이 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거룩하신 성령은 누추한 내게 오셨습니다. 나를 뜨겁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들을 때에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 순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이루셨습니다. 여전히 내 육체는 누추하지만 거듭난 내 영혼과 연합하여 계시면서 나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나를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성령의 사랑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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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교제 /롬15:30-33/ 곽창대 목사

2020-05-31 04:12:33

 

성도의 교제는 적어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지난주일 강해 시에 말씀 드렸습니다. 만남의 교제, 주고받는 교제, 기도의 교제입니다. 오늘은 기도의 교제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의 교제는 기도를 통해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교제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려면 먼저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30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성도 여러분, 믿음이 성숙한 자는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즐겨 부탁합니다. “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주세요! 당신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제 사정은 이렇습니다. 제 기도제목은 이렇습니다. 저와 힘을 같이하여 기도해주세요!” 믿음이 성숙할수록 기도부탁을 잘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들을 보면 자기가 세운 교회들을 위해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세우지 않은 로마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롬 1:8-10)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이렇게 편지 서두에서 로마교회를 위해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지를 밝힌 바울은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주십시오!” “나와 힘을 같이하여”라는 뜻은 “싸움에 동참하다, 함께 싸우다, 열렬히 동참하다”는 뜻입니다.

 

“나의 기도에 여러분들도 합세하여 기도해주십시오! 내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는 몇 가지의 기도제목은 정말 중요한데 나와 동일한 마음을 갖고 열심히 기도해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 힘써 기도하듯이 여러분들도 나를 위해 힘껏 기도해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엡 6:18-19)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교우들의 집을 교역자들과 목장의 식구들이 심방할 때 그 가정을 위해 기도를 적어도 여섯 번은 합니다.

 

1) 집에 들어가 앉자마자 주님께서 이 집에 평안 주시기를 잠깐 기도합니다.

2) 가정의 형편을 듣고 당면한 기도제목을 받습니다. 찬송 부른 후에 부탁받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3) 교역자 중에 한 분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4) 말씀을 나누고 온 가족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살도록 제가 기도합니다.

5) 이어서 축복기도 함으로써 예배를 마칩니다.

6) 다과를 앞에 두고 동행한 교역자나 목자가 감사기도 합니다.

 

심방 가기 전에도 기도하고 심방 후에도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합니다. 왜 이렇게 기도를 많이 합니까?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관하여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일수록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기도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형제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남을 위한 기도를 흔히 중보기도라고 하는데 중보기도도 마찬가집니다. 중보기도를 하면 할수록 중보기도의 위력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더욱 중보기도자로 헌신합니다. 자신도 다른 형제들에게 기도를 즐겨 부탁합니다.

 

남을 위한 기도 즉 중보기도가 왜 중요할까요? 그 이유를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중보기도를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30절을 다시 보세요. 사도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도 중보기도를 귀하게 보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책을 고를 때 어떻게 고릅니까? 신뢰할만한 사람이 좋은 책이라고 추천하면 그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책을 펼쳐서 추천의 글들을 읽을 때 책에 대해 큰 기대감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중보기도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분을 소개하는데 그 분이 예수님과 성령님이십니다. 왜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중보기도를 우리에게 강력하게 추천하십니까? 좀 전에 말씀 드렸듯이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중보기도를 귀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기도에 헌신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는데 거기서도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중보기도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즐겨하시는 일이 중보기도입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기도조차 할 수 없을 때라도 성령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바울 자신이 힘을 다하여 기도합니다. 하늘에서는 예수님께서 바울을 위해 중보기도하십니다. 바울의 심령 속에서도 성령님께서 중보기도하십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중보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령님과 자신의 기도에 뭔가 부족해서 로마교회에 중보기도를 요청했을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로마교회에 중보기도를 요청했을까요? 중보기도의 지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로마교회가 합세하여 중보기도 하는 것은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중보기도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중보기도자이신 예수님과 성령님까지도 교회 안에서 중보기도자가 많이 일어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그 가운데 임재하시고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 힘써 중보기도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3을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중보기도는 상당히 안전합니다. 

 

중보기도는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기도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하나님께서 잘 들어주십니다. 중보기도가 왜 중요할까요? 삼위 하나님께서 중보기도를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2) 중보기도가 중요한 것은 중보기도가 성도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아주 좋은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사정을 알고 그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형제의 사정을 끌어안고 중보기도하다 보면 사랑이 힘차게 발동합니다. 형제의 문제가 내 문제가 됩니다. 형제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성도를 사랑으로 결속하는 아주 좋은 방편입니다.

 

기도에 관한 진리 하나를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기도하는 자만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기도에 관하여 또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면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으며, 형제를 위해 기도하면 할수록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이처럼 중보기도와 사랑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바울은 30절에서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중보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아주 중요한 일은 성도와 성도를 사랑으로 결속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가운데 그 첫째가 사랑입니다. 성도들 간에 사랑의 결속이 견고하게 되도록 성령님께서 교회에 중보기도를 강력하게 천거하십니다. 중보기도 없이는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바울이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형제들아”라고 부른 후에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형제로 받아준다면 나를 위해 기도해주셔야 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서로 형제가 된 것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편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한 형제 된 자들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중보기도는 형제의 마땅한 도리요 사랑의 첫 출발입니다. 중보기도 없이는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밭교회를 사랑하면 교회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가 성령님의 사랑으로 풍성하려면 중보기도가 확산되어야 합니다. 중보기도는 성도의 결속을 강화하는 강력한 방편입니다.

 

3) 기도를 부탁하는 자에게 큰 유익이 있기에 중보기도가 중요합니다.

 

바울이 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을까요?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한 기도제목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꼭 필요한 기도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로마교회 성도들의 기도에 힘입어 바울 자신의 마음이 먼저 평안하고 든든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의 중보기도로 자신이 완전히 감싸이기를 바랐습니다. 

 

하늘에서는 예수님께서 중보기도 하시고 자기 속에서는 성령님께서 중보기도 하시고 주위에서도 자기를 위해 중보기도 한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중보기도의 지원과 보호 속에 바울이 있는 셈입니다. 바울은 중보기도를 마치 생명싸개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중보기도를 영적 전쟁터에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참호로 생각했을 뿐 아니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반드시 무장해야 할 공격용 무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자는 담력과 평강을 얻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형제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 부끄럽게 생각지 마십시오! 설교 서두에 말씀 드렸듯이 믿음이 성숙한 자일수록 기도부탁을 잘 합니다.

 

우리교회에 중보기도팀이 있습니다. 중보기도팀은 여러분의 기도제목을 더 많이 접수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중보기도 카드에 기록하여 교회에 내시면 중보기도팀이 수시로 기도합니다. 수요기도회 때도 교우들이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목장모임에서도 기도를 부탁하시면 목원들이 적극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속히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4) 기도를 부탁받고 기도하는 자에게도 영적으로 큰 유익이 있기 때문에 중보기도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한참 기도하신 후에 와보니 제자들이 모두 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와 함께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남을 위해 기도하면 자신의 믿음이 먼저 견고해져서 지신에게 다가오는 시험을 이기게 합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면 사랑의 위력을 경험합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실 놀라운 미래를 소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중보기도에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습니다. 그 열매가 바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입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에 헌신하면 놀라운 신앙세계를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부탁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 사도가 로마교회에 부탁한 기도의 제목은 세 가지입니다. 31절에 두 가지, 32절에 한 가지입니다.

 

첫째 기도제목은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구원을 받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곧 방문하게 될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위험을 감지했기 때문에 그 위험에서 보호해주시기를 주님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바울을 미워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한다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위험했습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자기와 함께 힘을 합하여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신변보호를 위한 기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이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가 중요하기에 우리는 이웃을 위해 기도할 때 반드시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 저 성도를 악에서 보호하여 주소서! 악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우리 성도들에게 이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악한 자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항상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보아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어두운 곳, 가장 부패한 곳, 악이 기승을 부리는 곳이 정치세계입니다. 그 배후에 어둠의 영들이 아주 강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싸우고 나누어지고 과격해집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치가 부패하면 할수록 백성들이 온통 정치에 희망을 건다는 것입니다. 정치만 잘 되면 이 나라가 잘 될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탄이 주는 속임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판에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들을 악에서 구하여 주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할 수 있게 하소서! 자리에 연연하지 말게 하소서! 하나님의 심정으로 바른 소리하다가 힘이 모자라 주변으로 밀려나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자가 아니라 바른 소리하다가 그냥 초라하게 쫓겨나는 편을 택하게 하소서!”

 

선교사님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중국에서 선교사님들이 계속 추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님들도 추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산권을 비롯하여 이슬람권, 불교권, 힌두권과 환경이 열악한 오지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 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부탁한 둘째 기도제목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만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이방인 교회의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가 즐겁게 수납하는 것은 단순히 구제헌금을 주고받는 차원을 넘어서 양 교회 간에 영적인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제목은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 기도가 정말 필요합니다. 저는 세상정치 때문에 교회가 나누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탄이 그걸 노리고 있습니다. 정치에 관하여 우리는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교회 안에서 마음이 갈라지고 서로 싸우고 나누어진다면 사탄의 간계에 넘어간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왕으로 모신 단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님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희망을 걸고 함께 기도함으로써 더욱 결속을 강화해야 합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남북 갈등, 이념 갈등, 지역 갈등, 세대 갈등, 노사 갈등, 빈부 갈등으로 대립되고 있는 이 땅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교회의 연대입니다.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조직적인 연대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형제의식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이웃교회를 경쟁상대로 보지 않고 서로 잘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교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의식의 전환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웃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농어촌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세계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교회를 위해 우리가 나누어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한 셋째 기도제목은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교회 방문을 위해 서로 잘 준비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만남을 준비하는 기도입니다.

 

좋은 만남, 유쾌한 만남, 의미 있는 만남을 원한다면 반드시 준비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만남일수록 착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준비하는 것, 아주 당연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한 가지 면에서 다른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만남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킵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넘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만남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준비한 만남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만남이 되기에 서로에게 정말 유익하고 유쾌한 만남이 됩니다.

 

저는 이사심방 병원심방 새가족심방 때 심방하는 저희들만 아니라 심방을 받는 가족들이 아름다운 만남을 위해 기도로 준비한 것을 생생하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심방이 즐겁고 은혜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주일의 만남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목장모임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지회모임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삶공부 모임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무슨 모임이든지 기도하면서 만나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 그 모임에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할 것입니다.

 

불신자와 만날 때에도, 거래처 사람들을 만날 때에도,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연애할 때에도, 선을 볼 때에도 기도하십시오. 무슨 모임에 가더라도 기도하고 가십시오. 그래야 분별력이 생기고 유혹이나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자신은 물론 상대를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즐겁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32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울은 세 가지 기도(신변보호와 교회의 하나 됨과 만남을 준비하는 기도)를 부탁한 다음에 로마교회를 위해 축복기도를 하고 마무리합니다. 33절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평강의 하나님’이란 하나님께서 평강의 근원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4중의 평화입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누리는 평화: 회심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근원적인 평화를 누립니다.

2) 근원적인 평화는 내적인 평안으로 이어짐: 하나님의 품에 안김으로써 내면에 평안이 가득하게 됩니다.

 

3) 이런 사람이 Peace-maker(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들어가는 곳에는 반드시 이웃과의 평화가 확산됩니다.

4) 성경이 최고의 복으로 꼽는 살롬(하나님의 모든 복으로 꽉 차다는 뜻임, 최고로 복된 상태): 29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으로서의 평화가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넘쳐흐르게 됩니다.

 

이 평화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했습니다. 이처럼 기도로 교제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 내리길 기원합니다. 평화의 기원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이 시간, 기도의 교제에 헌신하기로 결단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어있습니다. 형제를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형제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중보기도로 엮여있는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악한 세력에서도 깨어지지 않습니다. 중보기도는 교회를 믿음의 공동체, 소망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로 만드는 접착제와 같습니다.

 

중보기도의 속력은 빛보다 빠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드린 중보기도가 예루살렘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이 로마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이미 중보기도를 통해 로마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환영했습니다. 중보기도가 예루살렘 교회와 로마교회에 침투하여 놀라운 변화를 이미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야말로 교회를 교회되게 한다.” 기도의 교제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아주 강력한 힘입니다.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부흥시키십니다. 기도에 헌신하십시오! 중보기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십시오! 기도로 생동하는 성도들과 한밭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admin

 

 

평강의 하나님/롬15:33/양향모목사

2019-08-26 23:37:15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느 곳이나 전쟁의 위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서로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전쟁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총과 칼을 가지고 서로를 죽이고 죽는 전쟁도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어떤 분들이(1968년 윌(Will)박사와 아리엘 듀란트(Ariel Durant) 박사) 역사를 깊이 연구하던 중에 "이 지구촌에 전쟁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는 것을 자세하게 면밀하게 계산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지난 3000여 년 동안 3500번의 전쟁이 있었고 전쟁이 없는 해는 10%에 불과한 300여 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지구 상에는 90%의 날들이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고 지난 100년, 20세기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서 약 9억이라고 하는 인구가 여기서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예일대학에 역사와 문명을 가르치는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교수라는 분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왜 전쟁이 있게 되었는가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전쟁의 원인을 총괄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상대가 두렵기 때문에 너무 두렵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발작을 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자기와 혹은 자국에 이익을 추구하면서 그 때문에 전쟁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명예를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기 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싸움을 걸고 이겨서 자존심을 살리려고 전쟁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두려움 때문에 혹은 이익을 위해서 혹은 명예를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다투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에도 이렇게 분쟁 상태에서 전쟁 중에 있는 나라가 80여 개국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런 전쟁만 없다면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다면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위해서 세계 여러 나라들은 핵폭탄이나 생화학 무기들을 생산하기에 열을 올리고 있고 이미 만들어진 무기만 해도 이 지;구를 수십 번이나 날려 버릴 수 있는 엄청난 무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과 옛 소련의 군비 경쟁이 한창이었을 때 양국이 가진 핵탄두는 지구를 41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날마다 3만5000여명이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전쟁을 위해 전세계가 쓰는 돈은 연간 55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전쟁이 그칠 줄 모르고 일어나고 있는 이 세상에 우리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으로 불려진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바울은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내는 서신서를 마감하면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물론 16장에도 여러 인사말과 부탁들이 계속해서 기록이 되고 있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마무리를 하면서 인사를 하는 인사 중의 한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께서 평강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평강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면서 이 말씀을 소개하겠습니다.

 

 

1.평강의 하나님이

오늘 본문 말씀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 이라는 말은 바울의 다른 서신서에서도 축도 중에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 평강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영혼의 평온함과 만족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면서 살고 있지만 참된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몰라보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1)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무엘상 17장에는 그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거대한 장군 골리앗과 대항하여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주머니에 물매 돌을 넣고 나아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7)라고 했습니다.

 

골리앗에게 있어서는 불레셋 나라에 있어서는 우리 하나님이 전쟁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전쟁이 사람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도구로 사용을 하고 계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 만물의 창조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우주 만물의 섭리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를 다스리고 보존하시고 통치해 나가시고 계십니다

 

그 통치의 한 방편이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인생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딴 길로 갈 때 전쟁을 통해서 인생들을 다스려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2)이 세상 사람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로마서 1장 18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했습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베푸셨음을 믿지 않고 부인하는 자는, 곧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막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는 것"(롬1:24 참조)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시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서구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마약과 폭력 섹스와 향락의 문화로 전락을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버리고 교회를 떠났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여 그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자유롭게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 속에 더러움에 내어 버림을 당한 불쌍한 인생들이라는 것입니다.

 

3)이 세상 사람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하고,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고, 심판 후에는 영원한 천국이 있고 영원히 고통을 받는 지옥이 있습니다.

 

강력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가 모든 것에 대해서 시간을 바쳐 생각해왔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인 죽음에 대해서만은 고려하지 않았구나"하면서 탄식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스펄젼(Spurgeon)목사님은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젊은이들이여, 어떤 감상(Sentiment)도 죽음을 준비하라는 경고를 막지 못하게 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참다운 목회자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축복만 말하지 않고, 죽음과 심판 영원한 운명을 깨우쳐 주며 영혼 구원에 중점을 두는 목사라고 봅니다.

 

전도서 11장9절에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말씀하셨고

 

전도서 12장14절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리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선악간에 행한 대로 재판을 하셔서 영원한 지옥에서 그 행한 죄악대로 형벌을 받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는 신분이므로 죄인들이 심판 받는 자리에 절대로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우리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전쟁을 통하여 인생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진노하심으로 아무렇게나 살도록 내어 버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최후의 심판을 통하여 정확하게 그들이 행한 죄악대로 벌을 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평강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좀 악한 사람이 한 사람 있어도 정말 괴롭습니다

그 사람이 여러 가지로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행복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너희 모든 사람과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라고 했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가 되는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을 드린 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쟁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 심판 하시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를 이미 청산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죄악을 예수님의 구속하심으로 이미 다 용서를 받았고 다시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희들과 너희 모든 사람들과 라고 하시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을 모시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 감격하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늘 기억하시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 축복을 모르고 다시 하나님과 전쟁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을 받으려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원수 관계가 있다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알게 모르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면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전쟁 관계로 진노 아래 심판 받는 자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이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아무리 다급한 일이 있다고 해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은 평강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모든 무리가 되는 일 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함께 계실지어다

그 평강의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그 평강의 하나님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누구나가 다 외롭습니다.

돈이 있어도 형제가 많이 있어도 권력이 있고 친구가 많이 있어도 어차피 결국은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들이 나를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돈도 권력도 젊음도 청춘도 형제도 부모도 아내도 남편도 결국은 나를 떠나고 혼자 남게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내 육신마저도 나를 배반하고 떠납니다. 이빨이 빠지고 머리가 빠지고 살도 빠져나가고 기력도 없어지고 시력 청력 기억력마저 없어지는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배반하고 떠날 때 나의 손을 붙잡고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시는 그 분이 우리 평강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이 전쟁과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으로 여러분 앞에 나타나신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말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일이 그 일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이 축복을 드립니다

이 평강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admin

 

 

나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롬15:30-32/양향모목사

2019-08-26 23:36:49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호흡과도 같은 것이어서 쉬지 말고 늘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기도하며 살지만 기도처럼 아리송한 것도 없을 정도로 좀 애매한 것이 기도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서 모든 계획을 세우시고 그 뜻대로 실행해 나가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뜻을 찾는 것이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우리가 기도한다고 바꿀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두 가지의 생각이 다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말도 성경 말씀이고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뜻대로 해 나가신다는 것도 성경 말씀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하고 그 응답을 받아서 기쁨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아무리 기도를 해도 아직 응답을 받지 못해서 기도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의 세계에서도 어떤 사람은 목회가 잘 안되어서 40일 금식 기도를 한번 하고 은혜를 받고 능력을 받아서 목회를 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목사님은 40일 금식 기도를 했는데도 오히려 사람만 나빠지고 목회를 포기할 정도가 된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잘 못해서 기도하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기도의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기도의 목적이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떼를 쓰는 기도라서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바른 방법으로 정말로 나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인간 구원을 위한 기도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식이 잘 되기를 눈물로 기도를 하지만 모든 자녀들이 다 그렇게 잘 되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잘되기를 바라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이 다 잘되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극 소수의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고 우리처럼 보통 사람들은 기도할 필요도 없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기도란 말의 참된 의미를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란 그 목적이 나의 뜻 나의 목표를 달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도란 내 생각과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에 세우신 그 계획대로 하나님께서 예정해 두신 그 길대로 가게 해 달라는 기도여야 합니다.

기도란 내 생각의 부족함과 내 능력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기도는 언제나 반드시 꼭 해야 되는 것임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기도해 봤자 내 뜻대로 잘 안되니 포기하고 그저 세월 따라 하나님의 섭리 따라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 생각대로 되든지 안되든지 내 뜻이 관철이 되든지 안되든지 성도는 기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외에도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을 자랑하고 그 복음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기도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가 왜 기도해 달라고 했으며 무엇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본문 30절 말씀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자기 개인의 부탁이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그가 전하는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권위로 부탁을 하는 것이니까 꼭 그렇게 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적당히 시간이 나면 좀 해 주고 안되면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꼭 좀 기도를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또 기도를 부탁하면서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사랑"이란 "성령님이 지니고 있는 사랑", "성령님이 성도에게 부어 주시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위엄과 권위로 기도를 부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성령님께서 성도들 마음에 부어주신 그 사랑으로 기도를 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미루어 볼 때 기도란 그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반드시 꼭 해야 되는 아주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이 본문을 강해 하면서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그 중요 내용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1)기도는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적인 승리를 모두 거두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 믿음 안에서 안식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만약에 기도가 전투하는 것처럼 씨름하는 것처럼 꼭 해야 될 필요한 것이라는 성구를 가르쳐 주시면 자신이 그렇게 기도하겠노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때 한 목사님이 말씀을 하시기를 로마서 15장 30절이 그 대답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라고 했는데 그 말이 그 기도의 필요성에 대한 해답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힘을 같이하여"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쉬나고니조마이(συναγωνιζομαι)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함께"라는 쉰(συν)이라는 말과 아고니조마이(αγωνιζομαι)라는 말이 합하여 된 말입니다.

아고니조마이라는 말은 상을 타기 위해서 다투다, 투쟁하다, 경기하다, 애쓰다, 힘쓰다, 싸우다 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쉬나고니조마이라는 말은 단순히 함께 힘을 같이한다는 말보다는 함께 힘을 합하여 싸우고 투쟁하고 힘쓰고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란 대강 적당히 하거나 말거나 가 아니라 이렇게 함께 힘을 합하여 싸우고 투쟁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도란 쓸모없는 연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살면서 전투하는 교회로 살고 있습니다.

사탄의 여러 가지 유혹과 방해 공작과의 전투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사탄이 귀신처럼 해괴한 모양을 하고 칼이나 총으로 덤비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돈으로 때로는 이성으로 때로는 평안함과 나태함으로 쾌락으로 우리와 한판 전투를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 전투에 꼭 필요한 무기라는 것입니다.

 

2)기도는 유효하다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두 번째로 기도는 쓸모없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기도는 효력이 있는 유효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5:15절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이 기도를 받았지만 예루살렘에서 붙잡힌 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수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해도 소용이 없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죄수로 잡힘으로 오히려 비용도 들이지 않고 죽이려는 사람들의 위협에도 보호를 받고 무사히 그가 바라던 로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을 우리가 압니다

 

때로는 기도가 우리의 요구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하는 우리를 변하게 하고 또 다른 방법으로 더 좋은 결과를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그 효력을 발생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기도는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를 잘 못 이해하는 자들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기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계획 속에 우리의 기도도 포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계획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꼭 기도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4)기도는 어렵다

기도는 영적인 전투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기도가 즐겁고 하기 쉬운 것이라면 누구나가 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오락이 아니고 또 전투의 상대자 사탄이 우리가 기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또 우리 마음속에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어렵습니다.

 

또 우리는 성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빨리 빨리를 좋아하고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란 그렇게 조급하게 빠르게 응답이 오는 것이 아니기에 조급한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어렵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가 이해되고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방법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응답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어렵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런 어려운 요소들이 많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거나 중도에 포기를 많이 합니다 그럴수록 기도는 중요한 것입니다

 

5)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기도할 것을 권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기도하심으로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수많은 주의 백성들이 기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기도는 매우 중요한 것이며 꼭 필요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본문에 바울은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여 주라"고 기도를 부탁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성도들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본문 31절에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이 바울과 힘을 같이하여 기도할 제목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1)예루살렘에 있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서 구원(보호)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이란 복음에 대적하는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특별히 유대교에 충성을 다하다가 기독교인이 된 바울을 엄청 미워했습니다

사람들을 바울을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처음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 올라간 일이 있는데 그 때 이미 바울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어서 바울이 피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복음을 싫어하고 복음에 대항하는 세력이 많이 있습니다

밖으로는 다른 종교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또 이 세상 사람들도 괜히 미운 눈초리를 보냅니다

안으로는 이단들과 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이 참된 복음만을 바로 전하게 해 달라고 반대 세력들을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자기의 봉사(섬김)가 받음직 한 봉사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두 번째 기도 제목은 나의 섬기(봉사)는 일이 받음직한 봉사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의 성도들이 정성스럽게 헌금한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도우러 가는데 걱정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아직 유대주의와 바리새인 기질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 자존심 때문에 이방인 교회의 정성을 받지 않으려고 할까 봐 그것이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호의를 무시하지 않고 기쁘게 받을 수 있는 마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저와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도 이런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로 성도들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좋은 마음으로 호의를 베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좋게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자존심 오해 과거에 받았던 상처들로 인해서 교회의 호의를 목사의 호의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가 하는 일들을 이해하고 그 정성을 잘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3)로마교인들과 만나서 평안히 쉬게 되기를 위한 기도입니다.

세 번째의 기도 제목은 로마교인들을 만나 편안히 쉬게 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 서로 위안을 주고받음을 말합니다.

바울 편에서는 위험과 봉사를 마치고 로마교인들 편에서는 나를 위한 염려가 지난 후에 우리가 서로 위안을 받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 전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성도들과 더불어 즐겁게 평안히 쉬기도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안식도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의 뜨거운 기도가 있을 때 목사가 목회 일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 다른 종교와 세상과 대항해서 싸울 수 있도록

온갖 사이비 이단과 복음을 무시하는 잘못된 신학을 가진 집단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하는 일들이 성도들과 이웃들에게 잘 받아 들여지며 모든 성도들과 함께 더불어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분은 저를 위해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수행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dmin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라 /출3:1-10, 롬15:30-33/ 박한응목사

2017-08-11 10:27:29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은총이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연일 30도를 넘나드는 찌는 듯 한 폭염도 어느새 한 고비 꺾인 것 같습니다. 아직도 더위는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머지않아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다가 올 것입니다. 오늘이 절기상으로 處暑입니다. 處暑가 지나면 모든 식물들의 물오름이 멈추고 생장이 멈춘다고 합니다.

 

내 고향교회에 허장로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 장로님은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싸리를 베어다가 광주리를 만들고 채반을 만들고 여러 가지 가구를 만드는 기술입니다. 그런데 處暑 전까지는 싸리를 베어오면 껍질이 잘 벗겨지는데 處暑가 지나면 껍질이 벗겨지지 않아서 큰 가마솥에 넣고 삶아야 껍질을 벗길 수가 있기 때문에 處暑 전에 싸리가지를 많이 베어 온다고 합니다.

 

 

아직도 한낮에는 폭염이 계속되는데 이와 같은 더위 속에서도 연일 밤낮 없이 계속되는 농사일에 얼마나 고통이 많으십니까? 이런 때일수록 우리 성도들은 믿음이 식어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더욱 분발하여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믿음이 식어졌거나 열심히 떨어졌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어디서 떨어졌는지 돌이켜 회개하고 처음 믿음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오늘은 1년에 한 번 지키는「교역자 보건 주일」입니다. 교역자 보건 주일은 매년 8월중에 한 주일을 정하여 지키는 것인데 이날은 특별히 교역자 즉 목사와 사모님의 건강을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사랑으로 헌금도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출애굽기와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오늘의 목회자 즉 목사가 누구이며 그를 위하여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출애굽기의 말씀은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에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사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로마서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본문 3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오늘 교역자 보건주일에 꼭 맞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여러분의 심령의 문이 열려져서 큰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1. 그러면 먼저 모세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세는 한 때는 대단한 야망을 가지고 애굽의 차기 대권 주자로서 큰 꿈을 키워 나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의의 사건으로 인하여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고 그는 모든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도망을 하여 미디안의 이드로 라는 사람의 집에 숨어서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화려했던 애굽의 왕족의 옷을 벗고 목동의 옷을 입고 양치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서 모세는 결혼도 하고 아들딸도 낳습니다. 그러기를 4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평범한 사람으로 일생을 마치는가 싶었는데 하루는 호렙산 기슭에 이르자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하나님의 부름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어 애굽에서 430년 동안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이끌어 내어 너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부름을 받은 모세는 그 후에 어떻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까? 과연 모세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나는 지난 3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나의 가장 이상적인 목회의 모델을 누구로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모세를 꼽습니다. 모세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목회자입니다.

 

 

(1) 모세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백성들이 모두 연합을 하여서 모세를 반대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행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씀하기를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고 하였습니다.

 

 

(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인도하는 목자요 인도자입니다.

 

애굽에서 430년을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로만 전하여 듣던 가나안땅에 갈려면 반드시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길만 아는 인도자가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인도할 인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도자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3) 모세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나왔지만 모세에 대하여 항상 불평하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도가 지나치면 작당을 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모세를 돌로 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럴 때마다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4)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을 멸하시려고 할 때 목숨 걸고 중보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출32:31-32)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누구를 위하여 대신 중보의 기도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모세는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라고 기도하였고 스데반은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고 하였습니다.

 

 

2. 그러면 목사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목사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목사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종이 아닙니다. 돈 많은 장로의 종도 아니고, 속 썩이는 권사의 종도 아닙니다. 까시러진 집사의 종은 더 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대로 행하고 그 말씀에 따라서 죽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사람이 판단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사람이 판단하게 되면 반드시 상응하는 하나님의 벌이 있습니다.

민수기 12:1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병이 들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목사는 성도들을 천국까지 인도하는 인도자요 성도들을 푸른 초장으로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요10:15절 말씀에 보면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목회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다면 좋은 직장을 찾아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는 교회를 위하고 성도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는 사명감이 없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신학대학을 나왔다고 다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기 싫다고 안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명감이 없으면 못합니다. 그래서 목회는 목숨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딴 길로 가게 됩니다. 딴 길로 가면 반드시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초원에 무리지어 살고 있는 초식동물들은 항상 무리를 지어 이동을 합니다. 그러다가 한 마리가 무리에서 이탈이 되면 맹수의 공격을 받아 잡아먹히게 됩니다.

 

 

(3) 목사는 생활의 제약을 많이 받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참으로 생활의 제약이 많이 있습니다. 행동과 활동이 부자연스럽습니다.

 

 

(4) 목사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직업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목사라는 직분은 직업이 아니고 사명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한 방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직업이란 말을 종종 쓰게 됩니다. 세상에 수천수만 가지의 직업 중에 목사라는 직업은 그리 대우받지 못합니다.

 

한 가지 예로써 우리가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목회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직분인데도 목회자가 되는 것에 대하여는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목회자를 제외한 일반 기독교인의 대부분이 자기의 자녀들 중에 목회자를 만들겠다고 하는 일에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자녀들 중에서도 목회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친구 목사 중에 과년한 딸을 둔 목사가 있는데 중매가 들어오는 곳 마다 목회자에게서 중매가 들어오고 이 딸은 한사코 목회자에게는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한답니다. 그래서 노처녀가 되었습니다.

 

 

(5) 목회자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배척을 당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믿었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여 당시 노예 한 명을 살 수 있는 가격인 은30냥에 팔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믿었던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을 당하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끝까지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믿고 기도하라고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잠만 잤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믿고 기대하였던 교인들이 실망을 주고, 또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준 교인에게 배척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교인이 좀 믿을 만하고 그래서 교회 일을 좀 하리라고 믿고 일을 맡기면 여지없이 실망을 안겨 주곤 합니다. 저사람 집사 직분 맡겨주면 잘 하겠지, 저사람 권사 직분 맡겨주면 잘 하겠지 라고 생각을 하였는데 여지없이 실망만 안겨줍니다.

 

 

(6) 목사는 항상 긴장하고 쫓기는 생활입니다.

 

잠시도 마음을 놓고 편안히 잘 수가 없습니다. 밤중에 전화벨 소리만 나도 깜짝 깜짝 놀랍니다. 교인들 중에 무슨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도 또는 성도들의 가정에 환난이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자책감에 사로잡힙니다.

 

교인 중에 누가 병이 나서 앓게 되면 혹시 내가 앓아야 할 것을 저 성도가 대신 앓는 것은 아닌가하고 두려운 마음까지 들곤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느 성도가 하루만 교회에 안나와도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성도의 가정에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가정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할 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7) 목사는 항상 약자입니다.

 

교인들의 가장 큰 무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 교회 안 나간다’ 는 말입니다. 분명히 교회를 다니는 것은 교회를 위한 것도 아니요, 목사를 위하는 것도 아니요,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기 위한 것입니다. 목사나 교회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구원을 책임 져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 믿음 가지고 자기가 구원받아 자기가 천국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툭하면 ‘교회 안 간다’ 는 말을 떡먹듯이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집안에 무슨 일만 있어도 ‘교회 안 간다’ 부부 싸움만 해도 ‘교회 안 간다’ 자식이 속만 썩여도 ‘교회 안 간다’ 고 합니다. 그러면 또 목사는 심방을 가서 “왜 그러십니까? 나오셔야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하며 온갖 말로 설득하고 해서 다시 나오게 하니까 이제는 이것이 큰 무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럴 때 목사의 심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목사직 당장 그만두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그만두고 싶은 목사, 그만 둘 수 없는 목회」라는 책을 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약한 것이 목사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대부분 권투를 좋아합니다. 왜냐 하면 링에서 코피 터지며 때리고 싸우는 것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대리 만족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소를 키워도 코뚜레 하는 것이 없지만 전에는 송아지를 사다가 코뚜레를 하여 코뺑이를 매놓으면 그 소는 죽을 때까지 그 코뚜레를 벗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작은 아이라도 그 코뺑이만 당기면 등치 큰 소도 끌려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사라는 코뚜레를 한번 해 놓으면 평생을 끌려 다닙니다. 집사가 끌어도 끌려가고 권사가 끌어도 끌려가는 것이 목사입니다.

 

그러니까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낚시를 하는 목사님도 있고, 또 어떤 목사님은 볼링을 하고, 어떤 목사님은 바둑을 두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 할 줄도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아까워서 못합니다. 그런데 소비할 시간이 있으면 난 책 한 장이라도 더 읽습니다.

 

 

(8) 목사도 사람입니다. 신이 아닙니다.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도 있을 수 있고 또 잘못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감정도 있고 또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병도 날 수 있습니다. 목사를 신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목사보고 신앙생활 하면 실족함을 느낍니다. 절대로 사람보고 목사보고 신앙생활 하면 안 됩니다. 예수만 바라보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실수하고 잘못할 때 그 실수를 잘 감싸줄 수 있는 차원 높은 믿음의 성도가 필요합니다. 바람 불 때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있는 성도가 교회에는 있어야 합니다.

 

롬16:2절 말씀에는 겐그리아 교회의 뵈뵈를 사도 바울은 ‘나의 보호자’ 라고 하였습니다. 또 4절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도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무슨 말을 못합니다. 꼭 어린애 같이 무슨 말만 하면 혼났다고 하고 야단맞았다고 하며 삐집니다. 마치 임금님 뾰루지 같습니다.

 

목사가 가장 괴롭고 힘들 때는 불신자들에게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이 어려울 때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목사의 진심을 몰라줄 때 가장 괴롭고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그 아픔을 몰라줄 때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요12:27) 라고 탄식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눅22:40) 고 하셨습니다.

 

 

(9) 목사는 항상 교회와 교인 생각만 합니다.

 

목사는 어디를 가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불안합니다.

저는 기도원을 가든지 지방에서 교역자 부부 수양회를 갔을 때도 자꾸만 교인들에게 전화를 해서 별 일 없느냐고 하는 것을 보고 다른 목사가 나보고 하는 말이 이런데 나오면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그리고 모든 교인들은 똑같이 사랑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우리 모든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을 하면 나는 새벽마다 제단에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데 성도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병원을 옮겨도 퇴원을 해서 집에 와도 전화 한 통화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병원까지 심방을 갔는데도 왜 왔느냐고 핀잔을 주고 오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심한 모멸감과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옛 말에 열 손가락 중에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겠느냐? 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여럿을 키우다 보면 그 중에 유독 몸이 약한 자식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주렵도 많이 떨고 다른 아이보다 오히려 더 먹이려고 애쓰는데 이상하게 병약한 자식이 있습니다. 때로는 소아마비나 어떤 이유로 장애자가 될 수도 있고 간혹 정박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런 자식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사랑을 쏟게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목사가 교인들을 어찌 차별하고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를 더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기도하는 중에 이런 기도도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3. 이제는 목사의 건강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1) 과거에는 목회자의 건강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목사는 쫄쫄이 굶어야 하고, 가난해야 하고, 병들어 죽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뿐만이 아니라 목사가 병이 나면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 ‘영력이 약해졌다’ ‘은혜가 떨어졌다’ 는 등의 말로 목사를 매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목사의 건강에 대하여 인식도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목사가 건강해야 교회 일도 잘 할 수가 있고 교인들을 잘 돌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2) 과거에는 단순하던 목회가 현대의 목회는 점점 다양화되고 다원화되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1960년대의 통계에 의하면 목사의 하는 일이 104가지로 나와 있는데 현대의 목사가 하는 일은 254가지로 배 이상 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방면에 팔방미인으로 뛰어야 하니까 인간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그 많은 일들을 감당 할 수가 없습니다.

 

 

(3) 목사는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교인들의 지식과 수준이 향상되고 현대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서 반대로 목사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현대 목회자들의 70%가 신경성 위장병을 비롯하여 병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스트레스는 각종 병과 정신 질환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 국민 일보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왜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우는 목사가 각종 암과 병을 앓고 있는가?」 그 원인은 바로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목사는 육체적인 노동자가 아니고 정신적인 노동자입니다. 그래서 항상 긴장해야합니다. 잠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습니다. 교인 100명이면 100명이 모두 긴장의 대상자입니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모두가 시어머니입니다. 교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예> 대전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의 사모님은 큰 꿈을 가지고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 신학교에서 뜻 맞는 전도사님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첫 목회를 나왔는데 아주 가난한 교회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교인이 열 명도 되지 않았는데 그 교인 중에 속장 한사람이 교회만 오면 교회와 주택을 삿삿이 다니면서 잔소리를 해 댑니다.

 

어찌나 사사건건 시어머니 노릇을 하는지 그 사모님은 어린 나이에 주일날이 돌아오는 것이 겁이 났고 수요일이 돌아오는 것이 겁이 났습니다. 교인들 만나는 것도 겁이 났습니다. 교인들만 보면 반가운 것이 아니라 가슴이 뛰고 겁부터 났습니다. 급기야는 정신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감리교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기독교 세계」가 있습니다. 그 잡지에는 매월 별세하신 목사님들의 사진이 실립니다. 내용을 보면 40대 50대 목사님들이 지병으로 앓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즘에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는 목사님도 많습니다.

 

 

(4) 목사는 각종 질병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감염의 위험이 항상 뒤따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병원 입원실에 가보면 어린아이들은 절대로 병실에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 하면 감염의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아무리 이라고 하여도 교인들의 아프다면 무슨 병이라도 찾아갑니다. 그 병이 전염성이 있든지 없든 지를 막론하고 심방을 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병이라도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장례식장이 생겨서 거의 초상이 나면 장례식장에서 처리를 하고 상조회에서 합니다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인들 중에 초상이 나면 수세를 거두는 일이라든가 염습을 하는 일 등 이런 일도 해야 합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고향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 여자 청년이 죽었는데 폐결핵으로 오래 앓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까 토혈을 하고 죽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시신을 거둘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할 줄도 모르는 내가 바깥에 있는 어른들에게 물어물어 시신을 수습한 적이 있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동안도 여러분들이 부족한 저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여 주신 것을 잘 압니다. 그 기도 때문에 제가 오늘까지 목회 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목사가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오늘「교역자 보건 주일」을 맞이하여 앞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고 부족한 저를 위하여 기도로 도와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아 멘>

사도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부탁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롬15:30-32)고 간곡히 당부를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제부터 부족한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또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축복으로 갚아주실 줄로 믿습니다.<아 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에 여러분이 받을 상급과 목사가 받을 상급은 다릅니다. 그런데 그 목사가 받을 상급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꼭 한 가지 있는데 바로 마10:41절의 말씀입니다.

 

(마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목사의 이름으로 목사를 영접하는 자는 목사의 상을 받을 것이요” <아 멘>

아무쪼록 제가 대우 잘 받으려고 하는 말이 아님을 분명히 믿으시고, 오해 없으시기 바라며, 한 심령도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1년 중 단 한번 지키는「교역자 보건 주일」을 맞이하여 더욱 관심과 사랑으로 기도해 주시고 협력하는 성도가 되어서 이 부족한 종이 받을 상급을 여러분들도 모두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받음직한 봉사 /롬15:30-33/ 곽선희 목사

2014-11-19 14:09:14

 

4살 난 어린아이를 위해서 어머 니가 그와 함께 잠자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늘 건강하게 해주시 고, 또 총명있게 자라게 해주시 고…"이렇게 기도하다가

 

"어머니 말 씀 잘 듣게 해주시고…"그렇게 기도 했단 말입니다. 그 늘 기도하는 소 릴 듣다가 이 4살 어린아이가"엄마 오늘은 내가 기도할께"

 

"그래라"얘 가 기도하는데"엄마가 내말 잘 듣 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각각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자 기에게 유리한 서원을 내놓고 있습 니다. 어머니라면은 내가 진정 애 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랑 하는 것이 정말 바로 사랑하는 것일 까, 그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 야 할 것인데, '나는 다 잘하고 있 고, 저 애가 내 말을 잘 듣게 해달 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각자 자기 나름에 소원만을 열심히 구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미국에 칼럼리스트들이 여론 조사를 해서, 한 연구 보고서 를 내 놨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 과 비기독교인의 비교하는 그러한 비교 도표입니다. 헌신 봉사를 중 심으로 해서 비교한 결과 이렇게, 이런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게 되었 다고 합니다. 첫째는 '봉사 참가 지 수', '봉사활동에 얼마나 참가하고 있는가'하는 겁니다.

 

이 조사해 본 결과 단연 '기독교인들이 월등하게, 뭐 잘 믿거나 못 믿거나 훨씬 더 많 은 사람들이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 더라'하는 것이구요. 두 번째는 '포 용력지수', 그 말은 하나님께 헌신하 고, 특별히 인종 문제가 복잡한 나 라이기 때문에, 그 '인종차별', 이 문 제에 있어서 얼마나 포용력이 있나' 또 '가난한 자와 부한 자, 얼마나 넉 넉하게 포용을 하고 있는가'. 포용 력 지수를 평가 해 보았다는 겁니 다.

 

그러면 '얼마나 관용할 수 있느 냐'하는 것이 그 지수가 되겠습니다. 또 하나는 '가정 안정지수', 뭐 '이혼 문제라든가 이런 불안에 떨지 않고, 아이들도 부모님의 뜻을 따라서 성 실하게 잘 자라주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가정 안정지수라고 해서 평 가 해 보았는데, 이것도 월등하게 기독교인들이 더 낫구요. 마지막에 '행복감 지수'입니다.

 

그것은 '베푸 는 삶을 통해서 스스로의 행복을 얼 마나 만끽하고 살아가는가'하는데, 이 만족도가 60%라고 했습니다. 60%의 사람들이 '우리는 만족합니 다.' 그렇게 생각했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네 가지에 의해서 우 리를 평가한다면, 여러분 자신들을 평가한다면, 얼마의 지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 봉사생활 금년에 얼마나 했습니까? 얼마나 좀 너그러운 사람이 됐습니까? 가 정은 얼마나 더 안정이 됐습니까? 여러분의 행복감은 어느 수준에 있 습니까? 스스로 물어야 할 것입니 다.

 

인생은 받는 것보다는 주는 일에 서 기쁨을 찾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한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0 장에 볼 것 같으면, 35절에 예수님 친히 하신 말씀을 바울이 인용합니 다. '받는 것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주는 자에게 기쁨이 있다. 주는 자에게 행복이 있다.' 여러분 이 주는 행복의 진리를 터득하기까 지는 여러분은 영영 행복을 모르고 말 것입니다. 이 진리만은 논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행동 으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는 특별한 진리입니다. 자 이제, 자녀와의 관계를 한번 보십시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위해서 수고합니 까? 수고하는 그 자체를 행복으로 여기는 자라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기다가 밑천을 들여가지고 본전 뽑을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불 만이 많습니다.

 

그 키우면서 얼마 나 재미있습니까? 그것으로 벌써 기쁨을 다 얻은 거예요. 뭐 효도하 라고 강요할 거 없습니다. 본전 다 찾은 거예요. 그걸 잊어서는 안돼 요. 베푸는 재미, 키우는 재미, 수 고하는 재미, 그 자체가 행복이었더 란 말이죠. 그런고로 인생은 항상 베풀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행복할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된 존재입니 다. 이것이 바로 성숙된 인격입니 다. 삶의 질을 여기서 높여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임종하게 되면, 마지막 으로 크게 뉘우치게 된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는 사람이 착해지니까요. 최소한도 임종에서는 착해지니까요. 그 순간 세 가지를 후회가게 되는 데, 그 첫째가 베풀지 못한 겁니다. '좀 더 베풀 수 있었는데, 좀 더 줄 수 있었는데, 내가 왜 주지 않았나.' 그대로 그대로 생각이 납니다.

 

'좀 더 넉넉하게 주면서 살 수 있었는 데…… 이렇게 쥐고, 모아봐도 먹지 도 못하고 가는 걸 좀더 좋은 일하 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걸' 이것이 큰 후회, 첫째 후회입니다. 둘째가 참지 못한 것. '조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 그렇습니다. 세 번째가 '좀 더 행복하게 살수도 있었는데, 좀 더 즐길 수 있었는데,

 

뭐 그렇게 아웅다웅 싸우고 울고불 고 할 필요가 없었는데, 얼마든지 즐겁게 살수 있었는데, 나는 왜 이 렇게 사람이 못돼 먹어서 나 괴롭 고, 남 괴롭히고, 그렇게 살아야 했 던가?' 이것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후회입니다.

 

여러분 정말 받는 데 만 급급하고, 못 받는 원망, 더 가지 고 싶은 욕심, 여기서만 버둥거리고 있기 때문에 영영 행복할 길이 없습 니다. 문제는 베푸는 생각을 해보 십시다. 베풀기 위한, 한번 마음을 가져 봅시다. 그리하지 않고는 절 대로 여러분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 베푸는 자가 누굽니까? 우리 생각에는"아! 돈 많은 사람이 주는 거지. 아,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 나야 구제 받아야 할 대상인데 누굴 구제한단 말이냐."라고 생각하겠죠. 아니 그렇습니다. 지금은 문전에 오는 거지가 없지만, 옛날에는 거지 가 많았죠. 얻어먹으러 오는 사람 이 많았는데, 그 거지들 말에 의하 면요. 대문이 크고 담장이 높은 집 에 가서는 얻어먹지 못 한답니다.

 

욕만 먹고 나온답니다. 재수 없다 고, 아침부터 뭐 얻으러 온다고. 아 주 가난한 집, 대문도 없는 집에 가 야 넉넉히 얻어먹는다고 합니다. 구제를 부자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돼요. 성공한 사람이 구제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사 업이 망한 사람이 구제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돕게 마련이지, 부한 사람, 그 사람들은 돈에 미쳐가지고 요. 정신없어요. 내버려두세요. 어림도 없습니다. 어렵고 가난한, 바로 그 형편에 있는 사람이 진정으 로 마음을 쓸 수가 있는 것이에요.

 

또, 누구에게 주어야 되느냐 하 는 겁니다. 우리는 그 쓸데없이 괜 히 돈 있는 사람에게 주느라고 문제 예요. 뭐 사과상자니 뭐니 해가지 고 말이야. 이게 우리의 선행은 전 혀 보상할 수 없는, 대신 보답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주어야 되는 것이에 요.

 

그걸 있지 말아야 돼요. 내 친 척, 내 아는 사람, 뭐 주변에, 그게 아니구요 날 찾아오지도 못하고, 내 가 와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바 로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 12절에 서 '부한 자는 너의 잔치에 초청하 지 말라' 그랬어요. '초청하면, 다시 그 사람이 너를 대신 청할 것 아니 냐.' 그러면 쓸데없는 거죠. '대신 청할 수 없는, 보답할 수 없는 바로 그,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어떻게 해야되는 겁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읽 게 됩니다. 저는 몇 일전에 미국으 로 여행을 가면서, 집회 인도하러 가면서 비행기 안에서 참 많은 마음 을, 아픈 마음을 뉘우쳐 봤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내 앞에 앉은 의자 에 점잖은 미국사람 내외분이, 백인 인데, 한국에 와서 고아를 데리고 가는 거예요. 아직 낯을 가리지 못 하는 어린애, 칭얼거리는 애를 하나 딱 안고, 이걸 가면서요. 열시간동 안 내내 아버지가 돌봐요. 그것 또 이상하데요. 그 어머니는 까딱도 안 해요. 옆에서 구경만 하고, 아버 지가 그 애를 안고 그 애쓰는 걸 볼 때요,

 

나는 저렇게 오랫동안 애를 안아 본 일이 없어요. 이렇게 정성 스러울 수가 없어요. 그렇게, 아이 를 분명히 한국아이인데, 고아를 하 나 데리고 가면서 그렇게 정성을 다 하는 걸 보고, 제가 많이 생각했습 니다.

 

저 사람들은 여기까지 와서 저 애를 데리고 가는 데, 우리는 도 대체 고아를 팔아먹는 나라가 됐으 니, 이래가지고도 복 받겠다고? 조 심하세요. 무슨 복이 온다는 얘기 입니까 이 땅에. 도대체 이게 될 말입니까? 바로 그 얘기를 '아 저 사람 참 훌륭하다고'. 마침, 내 옆 에 미군, 옛날에 장성이 왔다가면서 옆에 앉았어요. 그 얘기를 주고받 았더니, 자기 말이라고는 안하데요, 꼭 자기 같은데 말은 안하면서

 

"아, 내가 아는 사람은요. 아 지금 아이 가 다섯인데 남의 아이가 또 다섯이 에요. 그 집에 가면 아주 와글와글 하는데 아 나는 그 집에 갈 때마다 너무 행복하게 보이더라"고, 아 또 그러고 나니까 점점 더 부끄러워져 서, 아 그렇게 민망한 줄 모르겠어 요. '어쩌다가 우리는 이렇게 이 모 양이 됐나……' 생각이 들어요. 복 달라고 열심히 소리만 질렀지, 복 받을 만한 짓을 하지 못해요 도대체 가요.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보십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소 아시아 전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건 개척교회를 하는 겁 니다. Church Planting을 하는 거 거든요. 아 전혀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만드는 거예요. 교회를 세워요. 지 금 아직도 이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익숙하지도 못했는데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놓고,

 

"자, 헌금합시다."연 보하자고 저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 들이 지금 흉년들어서 굶어 죽어 간 다고,

 

"당신들도 소식 들어 알잖습 니까? 우리가 도웁시다!"

 

정성껏 헌 금을 했어요. 이 연보를 예루살렘 으로 송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특 별히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는 많은 헌금을 해 가지고 이번만은 내가 직 접 가지고 갈 것이다. 친히 가지고 간다고, 소중하기 때문에, 마음을 담 아 가지고 가야겠기 때문에 또, 특 별히 중요한 것은 이 헌금을 한 이 이방교인들에, 이방사람들에 마음, 사랑을 전달하고 싶어서 이 헌금을 손수 가지고 갑니다.

 

여기에는 큰 위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너무 위험해요. 이번에 갔다가는 살아남기가 어렵겠다는 걸 알고 있 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쓴 겁니 다. 내가 로마로 가고 싶은데, 만일 에 여차해서 못 가더라도 이 편지로 대신하고 싶어서 쓰게 된 편지가 로 마서입니다.

 

그러면 그 성금을 이 위험을 무릎 쓰고 직접 가지고 갑니 다. 그러나 이것을 받은 예루살렘 이 결코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를 죽일려고 들었고, 죽이지 않고 는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도 바울이 결국은 많 은 핍박을 받고 갇혀가지고, 로마로, 죄수의 몸으로 상소해서 로마까지 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 것 이에요.

 

그런데 지금 로마에 편지를 합니 다. '내가 예루살렘에 대한 섬기는 일, 받음직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섬김은 섬 기는 거지요 분명히. 돈은 가지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받 음직한 것이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주는 자의 마음입니다.

 

먼저는 주는 자 의 마음이 뜨거워야됩니다. 던져주 는 게 아니에요. 억지로 주는 거 아니에요. 불가피해서 주는 게 아 니에요. 자랑삼아 주는 게 아니에 요. 높은 자세로 주는 게 아닙니다. 주는 자의 마음, 물질이 아니고 사 랑을 주고, 희생을 주고, 죄송한 마 음으로 주고 그래야 된다는 거죠. 더구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야 하 는 거죠. 아쉬운 마음으로.

 

여러분 자녀교육에 있어서 아이 들의 용돈 때문에 고생하십니까? 또 아이들의, 자녀교육에 문제가 있 습니까? 말 한마디에 달린 거예요.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더라도 줄 때

 

"미안하다. 더 잘해주고 싶은데 요 것밖에 없어서 어떻하냐? 네가 우 리 집에 태어나길 잘못이지. 아버 지 재주 없고, 내 재주 더 없고. 그 러니까 요것밖에 없지 않니? 그저 다른 집에는 더 잘해 주더라마는 나 는 못 해주니 미안하다."

 

이러면서 주어야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하지요.

 

"야, 왜 이렇게 용돈이 많으냐? 남에 집 아들은 조금 쓰드 만 너는 그 모양이냐?"이렇게 나오 죠? 얘들이 얼마나 머리가 빠른대 요.

 

"아버지 골프 한번 치는데 얼 마인줄 아세요? 다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술좌석 한번 벌이면 얼만 줄 아느냐고요?"

 

말은 안하지만 속 은 멀쩡합니다. 이 아들이 어떻게 잘 되겠습니까? 보세요. 마음이 없잖아요. 마음을 주지 못하고 있 잖아요. 그러니까 주는 사람의 마 음은 언제나 '미안합니다.'하는 마음 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아쉬운 마 음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부모에 게 효도할 때에도

 

"더 잘해주고 싶 지마는 그저 형편이 이래서요."

 

이 런 마음이래야지."뭐 그만하면 됐 지 뭘."그딴 소리를 하면 안되는 겁니다.

 

탈무드에 재미있는 소리가 있어 요. 어떤 왕이 있는데, 왕에게 외동 딸이 있는데, 병이 들어서 죽게 됩 니다. 죽어가니까 왕이 너무 다급 해서

 

"이 딸의 병을 고치는 자는 사 위를 삼고, 내 대를 이어서 왕을 삼 겠습니다. 왕을 만들게 되겠다. 왕 위에 오르게 해 주마."

 

방을 붙였어 요. 먼먼 나라에 있는 어느 삼형제 가 산골에 살았는데, 이 삼형제가 보화, 신기한 보화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큰형은 멀리 보는 망원경 을, 천리를 보는 망원경이 있어요. 그래서 그 망원경으로 이 사실을 보 게 됐어요. 방 붙인걸 보게 됐고, 또 둘째형은 말입니다, 그 옛날에 있잖아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양탄 자, 아 그거 하나를 가지고 있거든 요. 이거를 타고 이제 가게 되는 거예요.

 

거기까지. 세 번째 동생은 말이죠. 어떤 병이라도 요것만 먹 으면 낫는 귀중한 사과 하나를 갖고 있어요. 자, 이 삼 형제가 멀리서 보고, 양탄자를 타고 와서 이 사과 를 주워서 이 공주가 병이 나았어 요. 이제 사위를 삼아야 하는 데, 여기에 공을 세운 사람이 세 사람이 에요. 어느 사람을 사위로 삼아야 하느냐 이겁니다. 여기에 대한 탈 무드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망원경은 도로 가져가면 되고, 양 탄자도 도로 가져가면 되고, 사과는 먹어 없어졌으니까 당신이야말로 큰 희생을 한거요.". 그 사람이 왕이 됐답니다.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사랑이란 희생해서 내가 없어져야 지. 아직도 멀쩡한데요.

 

무슨 사랑 이 그런 게 있나요. 그런고로 주는 자의 마음이 얼마나 지극해야 하는 가. 나 자신이 사라지는, 거기에 진 정한 주는 자의 마음이 있는 것이구 요. 또 하나는 신앙적이고, 절대적 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하고 비 교 할 것 없어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요. 하나님께로 나는 많은 것 을 받았습니다. 그 받은 마음에서 적은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받은 마음에 대한 감사가 이렇게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누구에게 주느냐 할 때는, 전혀 보답을 바람이 없이 줘 야됩니다. 보상을 바람이 없이, 전 혀 기대를 걸지 않고. 인사도 안 해도 좋아요. 전혀 상관이 없이, 조 금이라도 그 어느 누구라든지 보상 을 바라는 마음 없는 봉사이어야 한 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음을, 사랑을 그래요. 똑같은 일이라도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언제 한 번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저 지난 삼월 달에 북한 나진에 갔을 때 그때 만 해도 삼월 달에는 추워요, 북한은. 그래서 차를 타고 가다가 식량을 구 하러 다니느라고 보따리를 지고서 여기저기 다니는 사람을 많이 보는 데, 마침 넓은 벌판을 지나가게 돼 서 차를 세우고

 

"가는 길까지 태워 다 드릴테니 타십시오. 같은 방향 이니까"

 

타라고 그래서 탔어요. 보 니까 옷을 입었는데, 방한복이 괜찮 아요. 좋은 옷을 입었더라구요. 그 래서

 

"아이구, 동무 옷이 참 좋습니 다.""이거요 평화그룹에서 보내 준 겁니다."

 

저희 교회가 북한을 도울 때에 그 이름이 '평화그룹'입니다. '소망교회'가 아닙니다. '평화그룹' 이라는 이름으로 주는데요. 그렇다 고 그래요. 그 옆에 있던 사람이 한 마디, 그 말을 안 했어야 되는 데

 

"이분이 평화그룹 이사장입니 다."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이구, 감사합니다."그래요. 딱 쳐다보더니요 깜짝 놀랄 말을 합니 다.

 

"소망교회에서 보내온 것이 제 일 좋아요."

 

그래요. 만일에 "소망 교회에서 보낸 것이 제일 못 돼요."

 

그러면 난 큰일날 뻔했어요. 어떻 게 고마운지……. 여러분 어떤 일 이던 간에 베풀 때는 정말 정성을 다해야돼요. 마음을 주는 것이니까 요. 성의를 다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하는, 선한 일하는 사람은 결과 에 연연하지 마세요. 이 어떻게 되 느냐, 어떻게 되느냐. 가끔 보니까 그런 말 많이 해요. 뭐 쌀을 보냈 더니"누가 먹나요."

 

말이 많아요. 아무가 먹던 별생각 다하네. 당신 이 주는 것만 주세요. 누가 먹느냐 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거구요. 그거 그런 것 신경 쓰다가 평생 그 인색한 노릇하다가 끝나지요. 줄 때는 그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내 손에서 떠난 것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드렸으면 끝난거 죠. 어떻게 쓰여지느냐는 묻지 마 세요. 하나님이 들어서 '오병이어' 처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기 적을 낳을테니까, 두고보세요. 그걸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 더 있습니다. 선한 일 하 고 잊으세요. 탈무드에 그런 말 있 어요. '내가 누구를 줬는 지를 몰라 야 하고, 받는 사람은 주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는 거 예요. '누구로부터 받았다'할 때는 벌써 얘기가 달라진다는 것이에요. 의미가 없어요. 잊으세요. 예수님 말씀대로,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오 른 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얼 마나 강한 말씀입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라.' 참 내가 유감 스러운 말을 듣습니다.

 

"뭐, 돕자, 돕자하는 거, 뭐 도울 마음은 있습 니다마는 내가 가서 주고 악수해야 만 주겠데요. 누가 받는지도 모르 는 거, 안 준다."

 

그래요. 이게 한 국 교인들이요. 요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수준이 이 정도입니 다. 이게 무슨 구제요, 선한 일입니 까? 아무가 받으면 어때요? 잊어 버리세요. 내가 얼마를 줬는지 기 억지도 말아야 돼요. 누구 줬는 지 알아서 뭐해요?

 

내 기억에서 다 잊 어 버렸어요. 그런 돈의 숫자 필요 없어요. 미안하지만 제가 저희 교 회에서 회보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회보 가운데 보면은 주보가 전부 그 자랑이죠. 고아원 방문, 양로원 방문, 어데 얼 마 주고, 어데 좀……. 난 이거 보 기 싫어 안 해요. 그 무슨 소용 있 단 말입니까? 그 기억이 무슨 소용 있어요? 이건 교회답지 못해요. 이거는 하나님의 일도 아니에요. 깨끗한 마음으로 잊어버리세요. 나 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요. 그 마음이라야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려 운 시대를 맞았습니다.

 

"하필이면 IMF시대에 왜 저런 말을 할까?"하 겠죠? IMF시대니까 이 말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삶을 질을 높여 사 십시다. 베푸는 마음만이 높은 질 의 생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 장 28절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있 어요. '이제는 구제할 것이 있기 위 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제 손으로 수고하여', 이자받 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손으로 수고하여,

 

여러분, '난 밥 먹 을 것이 있다. 그러니 나는 그냥 있어도 된다.' 그러겠습니까? 아니 오, 잡수실 것이 있거든 이제부터는 구제할 것을 위해서 일하세요. 무 엇이라도 하세요. 이것은 나를 위 한 것이 아니오. 내 처자식 벌어 먹이기 위한 것이 아니오. 구제할 목적으로 돈을 버는 것이오. 구제 할 목적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에요.

 

과거보다 더 열심히, 열심히 뛰세요. 뭐라도 해서, 더 벌어서, 좀 더 주의 일 하겠다고, 난 밥 먹을 것이 있으 니까, 그저 이자받아 가지고 가만히 놀겠다고. 그러니까 가만있으니까 아주 가만히 있게 되고 말지. 여러 분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을 하세요. 땀을 흘리세요.

 

자, 그 뿐만 아닙니다. 오늘 본 문대로 받을려고 하는 기도에서 이 제는 주려는 기도요, 베푸는 기도요, 또 받음직하게, 내가 돕는 그분들이 받음직한 것이 되기 위하여 기도합 니다. 바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 의 가치를 높여 줄 것입니다. 여기 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는 자의 심정 /롬15:30-33

2014-04-02 15:53:46

 

현대인에게 가장 큰 죄가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공부하지 않는 죄라고 합니다. 굳이 애써서 배우려고 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편리한 것들만 찾아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발달된 물질문명이 굳이 좀 깊이 공부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무언가에 매여서 공부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컴퓨터라고 하는 기계를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가 있기 때문에 발로 뛰면서 연구하고, 땀 흘리며 찾아내는 수고는 미련한 것이 되어버렸고 클릭한번으로 족한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고 인간의 가치를 묻고 지혜를 얻는 그런 공부가 없어졌다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둘째는 실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아는 것이 정말 많은데 아는 대로 행하질 않습니다. 부득이 하다는 말로, 인간은 약하다는 말로 변명하면서 그나마 가지고 있는 지식을 그대로 생활에 옮기지 않는 것입니다.

 

말은 많고, 비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데 비해서 행하는 것은 적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의지박약 자처럼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현대인의 특징적인 죄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의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서로 공유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는 이 지식의 최고봉은 나 혼자만의 전유물로 남기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업의 노하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혹 알려주려면 돈을 받고 팔겠다는 심보입니다. 대기업의 비밀이나, 제품의 앞서가는 기술을 몰래 빼내서 해외로 팔아먹는 산업스파이들이 그들 아니겠습니까? 이 속에는 “그 누구도 나를 뛰어넘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는 일등주의가 빚어낸 부작용과 “어차피 내가 최고가 될 수 없다면 너도 일등이 되어서는 안 된다.” 는 철저한 패배주의의식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이기주의에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나만 잘 되면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세상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합니까? 세상과 똑 같이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뭔가 달라도 달라야합니다.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미국에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과의 삶에 대해 비교연구를 해봤더니 그 모습이 확연히 구분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 봉사활동에 얼마나 참가하고 있는가하는 봉사 참가 지수를 조사해 봤더니 월등하게 차이가 나더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훨씬 더 많이 봉사활동에 참가하고 있었고,

 

 

두 번째는 포용력지수에서 기독교인이 압도적으로 앞서더라는 것입니다. 인종이 복잡한 나라이다 보니까 인종차별이 극심한 곳이 미국입니다. 그런데 그 다양한 인종문제에 대한 포용력이 비 기독교인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고, 또 가난한 자와 부한 자의 차이 속에 얼마나 넉넉하게 포용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도 그 지수가 훨씬 높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가정의 안정지수입니다. 워낙 이혼이 많은 나라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부모들의 이혼 문제에 대한 자식들의 불안이 덜하고, 아이들도 부모님의 뜻을 따라서 성실하게 잘 자라주는 가정 안정지수가 월등하게 기독교인들이 더 나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복감 지수입니다. 베푸는 삶을 통해서 스스로의 행복을 얼마나 만끽하고 살아가는가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했는데 이 만족도가 60%라고 했습니다. 60%의 사람들이“우리는 행복합니다.”라고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이렇게 네 가지에 의해서 우리를 평가한다면 얼마의 지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봉사생활 얼마나 했습니까? 얼마나 너그러운 사람이 됐습니까? 가정은 얼마나 더 안정이 됐습니까? 여러분의 행복감은 어느 수준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인생을 받는 것보다는 주는 일에서 기쁨을 찾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행 20:35절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바울이 인용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여러분, 주는 자의 기쁨이 클까요? 받는 자의 기쁨이 클까요? 주는 자의 행복이 큽니까? 받는 자의 행복이 큽니까?

 

잘 모르시겠다면 줘 보세요. 베풀어 보세요. 줘보질 않았으니 알 수가 있나요.... 사람이 주는 행복의 진리를 터득하기 전까지는 영영 진정한 행복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숱한 진리가 있지만 이 진리만은 논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는 특별한 진리입니다.

 

사람이 가장 진실해질 때가 죽기직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죽기 전에 가장 착해지고 가장 진실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살아 온 삶에 대해서 크게 뉘우치는 단계를 거치게 되면서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첫째가 살아가면서 베풀지 못한 삶에 대한 후회입니다. “좀 더 베풀 수 있었는데... 좀 더 줄 수 있었는데.... 내가 왜 주지 않았을까...좀 베풀어야할 때 주지도 못하고 모아 봐도 가지지도, 먹지도 못하고 가는 걸 좀 더 좋은 일하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걸”하는 이것이 큰 첫째 후회입니다.

 

둘째가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랍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가 그렇게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세 번째가 행복에 대한 후회입니다.

 

“좀 더 행복하게 살수도 있었는데, 좀 더 인생을 즐길 수 있었는데, 그렇게 싸우고 울고불고 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 그렇게 나 괴롭고, 남 괴롭히고 살아야 했던가!”하는 후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을 때 이러한 후회가 없도록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보십시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전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를 세웁니다. 그러는 가운데 바울은 로마교회를 한번 방문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졌지만 사정이 있어서 로마교회를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로마교회 방문을 현재에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자기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서 구제헌금을 전달해야하는 임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흉년이 들어서 기근과 로마의 정치적인 박해로 인해서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이방의 여러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합니다. 그리고 이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바울이 직접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직접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소위 말하는 열심당 정도의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복음전하는 것을 방해하며 심지어는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위험한 곳입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마는 굳이 직접 그 곳으로 가겠다는 것은 정말 여러 이방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섬기고자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를 그 마음을 담은 헌금을 가지고 직접 가서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섬김과 봉사의 마음,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 싶은 마음이 바울에게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로 가고 싶은 마음은 깊은데 만일에 여차해서 못 가더라도 이 편지로 대신하고 싶어서 쓰게 된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오늘 편지글에 나타나는 바울의 가장 절박한 바람이 무엇입니까? 31절 중반 절입니다.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헌금을 가지고 가는데 그 곳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이 헌금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받는 사람이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니요. 당시 예루살렘교회성도들은 굉장히 배타적이어서 다른 이방교회가 주는 헌금을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성도들이 받을 수 있는 믿음이 될 수 있도록 로마교회에서도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것은 주는 자의 마음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를 위해서 걱정하며 염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냥 “받기 싫으면 관둬라. 줘도 안 받으면 네만 손해지 뭐!”그러고 맙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진정성이 없습니다. 애초에 정말 주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줘보고 안 받겠다면 그만이라는 것은 주려는 게 아닙니다. 주는 자의 입장에서 먼저는 주는 자의 마음이 뜨거워야 됩니다.

던져주는 게 아닙니다. 억지로 주는 것도 아닙니다. 불가피해서 주는 것도, 자랑삼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주는 자의 마음입니다. 물질이 아니고 사랑을 주고, 희생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는 자의 행복이 먼저입니다.

 

 

<걸리버 여행기>를 쓴 영국의 소설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가 어느 날 참으로 불성실한 하인을 데리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호텔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기 위해 하인에게 잠들기 전에 구두를 닦아놓으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구두를 신으려는데 구두가 닦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구두를 닦아 놓으라했는데 도대체 이게 뭐냐?”그랬더니 하인이 씩 웃으며 말합니다.

 

“주인님, 어차피 조금만 가면 곧 더러워질 텐데 닦으면 뭐합니까?” [스위프트]는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않은 채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하인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가서 지배인에게 뭔가를 부탁하더니 자리에 와서 앉았고 이내 [스위프트]의 식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스위프트]가 식사를 다 하도록 하인의 식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스위프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 이제 출발하자!” 그럽니다. 그러자 하인이 다급하게“주인님, 저는 아직 밥을 먹지 못했는데요!”합니다.

 

그때 [스위프트]가 웃으며 말합니다. “그까짓 아침밥 같은 거 먹지 않으면 어떠냐! 밥을 먹어도 어차피 조금 있으면 또 배가 고플 텐데!” 했답니다. 자신의 직무도 모르는 불성실한 하인의 정신을 고치는 말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는 것이 행복입니다. 봉사를 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반드시 주려하고, 받는 자의 마음까지 헤아리며 준비하는 주는 자의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무엇을 주더라도 진심으로, 봉사를 하더라도 마음으로부터 준비된 기꺼움으로 할 수 있어야합니다.

 

받으려고 하는 기도에서 이제는 주려는 기도, 베푸는 기도로 바뀌어야합니다. 바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항상 주는 자의 심정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사람을 보며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admin

 

 

사명자 /롬15:30-33

2013-12-24 14:20:52

 

박동한 선교사는 진흙쿠키를 만들어 먹는다는 아이티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박선교사는 대학을 졸업한 뒤 이랜드에 입사하여 재무본부장으로 회사를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운 주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비즈니스(business)와 선교사(missionary)의 합성어인 ‘비지너리’( businary)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휴가를 얻을 때마다 제 3세계로 단기선교를 나갔고 선교사들의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2006년 7월, 그는 자신의 모든 일을 내려 놓고 남미 도미니카로 직접 나갔습니다.

그는 편안한 삶을 내려 놓고 선교의 최전선에 서고 싶었습니다. 가난한 나라의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현장으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평생 비지너리의 삶을 살아온 박선교사의 삶의 경험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도미니카의 제2도시 산티아고에서 만성적자로 허덕이는 미션스쿨의 경영을 정상화시켰습니다.

 

비지너리의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니 도처에 할 일이 넘쳤습니다. 먼저, 도미니카의 인접국인 아이티의 굶주림이 보였습니다. 진흙쿠키를 먹고 있는 아이티의 어린이들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 박 선교사는 저 불쌍한 아이들을 아이티의 민족 복음화의 기수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는 대학생시절 가입한 CCC의 ‘순’ 전도 방법으로 아이티 사람들에게 전도했고, 100여명의 청소년을 키웠습니다. 지금 그들이 아이티 전국에 흩어져 선교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아이티에 무서운 지진이 일어나 굶주림이 더욱 극심해졌지만 박선교사는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선교로 아이티는 복음의 새시대를 꿈꾸며 나가고 있습니다.

박선교사 같은 분들이 우리 주위에 적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잘 살 수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험난한 땅으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세상의 스펙을 쌓으려고 힘씁니다만 하늘의 스펙을 쌓아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박 선교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을 거쳐 소아시아 지방 이어서 유럽 선교까지 기나긴 선교 여행을 3차에 걸쳐서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꿈은 어떻게 해서든지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는 로마에 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교회에 어려움이 생겨 많은 성도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이 경제적인 위기를 만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주고자 직접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작정했습니다.

평생의 소원인 로마 선교에 나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굶주린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평생 소원을 잠시 뒤로 늦추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의 굶주린 교인들을 돕는 것은 바울의 평생 꿈이었던 로마 선교까지 연기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에 더욱 굶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교인들은 그 사실을 알았고 어떻게 해서든 경제적으로 돕고 싶어 헌금을 모은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서로 돕고 살아야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교인들이 서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도행전 2장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제가 제자대학을 하면서 집사님들께 물었습니다. “집사님들은 성경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 집사님들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또 물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마땅히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집사님들은 성경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집사님들은 또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장 위의 말씀을 읽어 주고 제가 또 물었습니다. “집사님들은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본받아 참된 공동체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까?” 집사님들은 또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가지고 제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물었습니다. “집사님들은 교회에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원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집사님들은 교회에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집사님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시렵니까?” “예 그렇습니다.” “집사님들은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자 한참을 생각한 후에도 예 그러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이 시원하게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기를 원하십니까?” 이 물음에는 집사님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재차 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빼거나 더함이 없이 그 말씀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떡을 떼며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라는 말씀에는 담대하고 아멘하시더니,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라는 말씀에는 아멘을 하시지 않으십니까?”

 

이 때부터 많은 집사님들이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 대해 자신들만의 대답을 내 놓으셨습니다. 성경은 부분에 집착하지 말고,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둥, 지금의 시대에 적용되는 말씀이 있고 그렇지 않은 말씀이 있다는 둥, 지금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는 둥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습니다.

 

제가 또 물었습니다. “집사님들은 떡을 떼며 교제하라는 처음의 질문에는 그런 의견을 내지 않으셨고,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아멘하고 절대순종할 것을 고백하셨기에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토’를 달지 않으셨는데, 왜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라는 말씀에는 그렇게 많은 ‘토’를 다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다는 것이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 자의 모습입니까?”

 

우리는 지금 서로 책임이 없는 일에만 열중해서 공동체 운운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떡을 떼며 모이기를 힘쓰고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내가 조금만 희생하면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약간의 책임감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라는 말씀은 행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행하여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막중한 부담감에서 벗어나고자 그 말씀에 토를 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재산을 팔아 교회에 봉헌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책임있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서로 간에 책임이 없는 단체는 공동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간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적인 것에 대한 적극적인 책임이 필요합니다.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라는 말씀을 사도행전의 2장 말씀에서 빼버리면 공동체가 되기 위한 진정한 길을 막는 것입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인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예루살렘 교인들과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고자 그 교회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자신들의 어려움처럼 생각하고 돕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교인들이 서로 돕는 것은 중요합니다. 한 교회 안에서 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의 어려움도 돕는 것이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또한 적극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사도 바울에게는 죽으로 가는 길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혜스러워야 할 예루살렘은 핍박과 배척으로 피가 얼룩진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랬기에 잘못하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해 그곳에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의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외면하지 않으신 것처럼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용기란 비록 죽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그곳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말입니다. 박동한 선교사도 죽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아이티를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우리도 이 길을 가야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그가 은퇴할 무렵 늙고 몸이 약하여 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친구들은 사라졌고 자신의 강의에는 수강신청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어 그의 외로움은 더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를린 대학 공원을 산책하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공원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공원지기가 와서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은 누구요? 어디서 온 사람이요?” 공원지기는 문을 닫아야 하는데, 그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를 갈 곳이 없는 노숙자로 알고 갈 곳이 있는지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정신이 든 쇼펜하우어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걸 알았다면 이렇게 앉아 있지 않았을 것이요.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흘러 가는지 많은 고민을 했지만 아직도 그 해답을 찾지 못했소.

그러나 단 한 가지 아는 것은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 뿐이요. 우리는 생명을 뒤로 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소이다.”

 

사명 없이 사는 것은 실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이 있어야 생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 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이 주신 사명, 즉 주의 복음을 전하는 길을 가고 있습니까? 아직 가고 있지 않다면 지금 당장 그 길로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길을 떠나기 전에 로마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30-32절).

 

아마 로마 교인들은 아직 믿음이 약한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많이 못하는 이들이었을 텐데, 바울은 이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대 사도요 성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로마 교인들의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을텐데, 그런 자들에게서 자신이 무사히 살아나는 것과 예루살렘 교인들이 자신이 들고 가는 구제금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이 로마에 꼭 가서 로마 선교를 할 수 있도록 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아직 미약한 신자들의 기도도 하나님이 들으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들의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함께 협력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 또한 30절에서 ‘나와 힘을 같이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힘을 같이하여’라는 말은 ‘함께 투쟁하자,’ ‘협력자가 되자,’ ‘같은 목표를 두고 힘쓰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전투에 임한 군사들이 힘을 합하여 공동의 적을 무찌르는 상황을 연상시켜 주는 말로서 바울이 로마 교인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완전한 팀웍을 구축하기를 열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일을 혼자 다 할 수 없습니다. 초인적인 인간은 없습니다.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협력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 스스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같은 연약한 것들을 사용하셔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을 동역자로 사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파트너입니다. 하나님과 네트워크로 엮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선교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일을 위해서 나눔선교재단을 만들어 출발했습니다.

온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여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인적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어 기도와 헌신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말씀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교회의 인적 네트워크를 잘 활용하여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는데 유형, 무형으로 책임을 감당하는 참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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