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중심적 예배 (13) - 예배는 삶입니다 /롬12:1-2/ 김형익 목사
2021-05-10 15:53:20
1. 예배는 삶으로 입증된다.
지난 주에 우리는 예배가 축도로써 마쳐지는 것만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가지고삶의 예배 속으로 들어가는 시작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사실, 의식으로서의 예배와 삶의 예배가 연결되는 것은 형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둘은 하나님은 왕이고 높임을 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단지 의식으로서의 예배만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 즉 삶으로서의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영적’ 예배라고 읽을 때, ‘영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요 4:24).
주님의 이 말씀에서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바로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영적’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헬라어 성경은 완전히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영적’ 예배라고 할 때 이것은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이 아닙니다. 본래 여기서 ‘영적’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라는 말인데, 이 말은 로고스와 같은 어근을 가지는 것으로 ‘논리적인’, ‘합리적인’ 또는 ‘말이 되는’이라는 의미입니다. 논리적인 예배, 합리적인 예배, 합당한 예배, 말이 되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가령, 표준새번역은 ‘합당한’ 예배, 공동번역은 ‘진정한’ 예배, 그리고 영어 KJV는 ‘reasonable’ service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왜 삶으로서의 예배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뒤에서도 강조하고 있듯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종종 감정을 포함하지만, 생각을 지배하는 지성의 영역을 더 가리킵니다. 사도는 분별하는 것과 함께 우리의 정신과 이성과 지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면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왕이 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말이 되는 것이고, 합당한 것이고 논리적인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매 주일 예배를 드리지만, 삶에서 우리 자신이 주인인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되고 모순투성이의 예배를 드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삶으로 입증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예배는 신학을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예배는 신학을 반영합니다.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신학은 우리가 삶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예배에 반영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학, 우리의 예배, 우리의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과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치 등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가 연결되어있을 뿐 아니라,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의식으로서의 예배가 성경적으로 드려져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예배의 문제를 다루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일계명과 이계명은 예배의 문제, 예배의 형식의 문제를 다룬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한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의 많은 부분이 예배와 관련된 규례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셨습니다. 오늘 이것을 종말론과 관련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3. 세 가지 종말론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
크게 우리의 종말론을 세 가지로 분류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종말론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우리의 예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A. 이미(already): 십자가 없는 부활?승리주의(triumphalism), 완전주의(perfectionism)
첫째는 ‘이미’로 표현되는 종말론인데, 이것을 ‘과도하게 구현된 종말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종말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정복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이 입장에서 신자는 이미 영광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것을 보통 승리주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양적인 성장과 외적 성공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또는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을 많이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적으로 이것은 양으로 측정되는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주의적 가르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죄를 초월해서 살 수 있다,
죄를 짓지 않는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견해에 서게 되면, 눈에 보이는 행위에 의존하기 쉽게 되고, 영적 훈련이나 성화의 방법들을 강조하면서 점점 더 영적이 되고 위로 올라가는 것을 삶의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게 됩니다. 자, 우리는 이런 가르침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그러면 이런 종말론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겪게 되는 고난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욥의 고난에 대해서 그의 세 친구들이 말하는 수준 이상을 벗어나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영역에서 우리가 도무지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놓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신학의 내용 안에서 고통스러워 하게 됩니다.
B. 아직(not yet): 부활 없는 십자가?패배주의, 반율법주의(anti-nomianism)
두 번째로 제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아직’의 종말론입니다. 이것은 ‘이미’의 종말론의 반대편에 있는 입장으로 ‘미흡하게 구현된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오직 않았고 멀었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이 입장에 서게 되면, 신자는 이 세상에서 고통과 박해를 받는 낮아짐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런 적대적인 세상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여기에는 패배주의적 경향이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겨주신 보화를 그저 잘 지키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 보다는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것, 생존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승리 혹은 죄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힘이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이 견해에 서게 되면 교회의 성장이나 그리스도인의 훈련 등에 대한 적극적 태도들에 대해서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기 쉽습니다. 또 이런 가르침은 반율법주의적(율법폐기론적) 경향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앞에 ‘이미’의 종말론이 십자가 없는 부활에 강조를 두고 있다면 ‘아직’의 종말론은 부활 없는 십자가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종말론의 입장은 다 한편으로 치우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C.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 십자가와 부활의 긴장 사이에서
그렇다면 성경적인 종말론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고, 오고 있으며, 올 것이다라고 봅니다.
여기서 신자는 은혜의 상태에서 영광을 상태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 약속과 영광의 땅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고,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순례자입니다. 마틴 루터의 말을 빌리면, 신자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죄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 지금 은혜 가운데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잣대로 측정할 수 있는 성공도 아니고, 혹은 고난과 가난, 어려움이 곧 신앙의 증거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평가하실 때, 세상적 성공이나 실패의 잣대, 외적인 열매의 다과가 아니라, 그의 순종, 신실함, 충성으로 평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 속에서 신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결과, 거룩해져 가는 변화와 죄를 이기는 승리를 경험합니다. 자신이 비록 죄와 싸우고 살아야 하고 때로는 죄에게 져서 괴로움을 겪게 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거나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이 죄의 실재와 늘 싸움을 피할 수 없으며 종종 낙심과 실패를 겪게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이 종말론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고난과 영광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라고 표현했습니다(고후 6:10). 이 종말론 아래서 신자는 외적인 성공에 처하기도 하고 실패에 처하기도 하지만 늘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어떤 종말론에 관한 신학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신학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하는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점에서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은 다 나름의 신학을 가진 셈입니다. 그래서 나쁜 신학은 신자의 삶의 건강에 치명적인 독소가 되어 건강을 심지어 생명을 해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신학은 어떻게 예배에서 반영되는 것일까요?
4. 믿음은 ‘봄(seeing)’에서 나지 않고 ‘들음(hearing)’에서 난다(롬 10:17~18; 8:24).
A. 믿음이 ‘봄’에서 날 때: 우상숭배적 경향, 은사주의
성경은 분명하게 믿음이 죄인 안에 생성되는 것은 보는 것에서 나지 않고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합니다(롬 10:17). 우리는 본성적으로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2계명에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떤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도 만들어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자기 백성에게 주셨고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그들 안에 자라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방식을 거부하고 보는 것에 집중하게 될 때, 마치 믿음이 ‘봄’에서 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예배는 어떻게 타락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미’의 종말론은 본질상 눈으로 보는 시각적인 부분으로 경사될 수 밖에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승리주의는 양적인 성장과 외적 성공의 표시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들음에서가 아니라 봄에서 난다고 여길 때, 예배는 우상 숭배로 흐를 위험을 필연적으로 안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했던 유대인들의 악하고 음란한 마음은 바로 이런 본성에 부합하는 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긴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눈 앞에서 자기들을 인도하는 신을 필요로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그들에게는 불안한 요소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눈에 보이고, 감각적인 어떤 볼거리들을 예배의 현장에 제시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무대 장식과 현란한 조명이 필요합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백성들의 마음에는 성취되지 않은 약속을 마치 자기들의 눈 앞에서 이미 성취된 것처럼 느끼고 싶어하는 죄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예배는 언제나 승리, 정복, 행복, 즐거움을 강조하게 되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기 백성들 안에 만들어내시는 은혜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 조작해내는 수준의 감정들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참되신 하나님의 속성들은 간과되게 되는 것입니다. 은사주의 교회들만 그런 것은 결코 아니고 이것이 보편적 교회들의 현상이 되었지만, 특별히 은사주의 교회의 예배일수록 이 볼거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B. 믿음은 ‘봄’에서도 ‘들음’에서도 나지 않을 때,
반면, ‘아직’의 종말론에서는 믿음은 사실, ‘봄’에서도, ‘들음’에서도 난다고 믿지 못하는 확신의 결여가 두드러집니다. 우리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퍼져있던 냉소적 경향을 여기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그 많은 하나님의 권능과 이적을 보았고 또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음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시 78:19).” 얼마나 악한 말입니까? 말하자면, 그들은 무덤덤하고 냉냉했던 것입니다. 예배와 관련해서는 이런 태도입니다. “아니, 예배드린다고 뭐가 변하겠어?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게 달려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 말씀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의 종말론에서 예배가 많은 볼거리들이 준비되고 감각적 추구를 열광적으로 한다면, ‘아직’의 종말론에서는 무미건조한 전통적 양식의 예배에서 조금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봄’에서도 ‘들음’에서도 난다고 여기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예배는 아무 기대도 없는 형식이고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출구는 오직 내세입니다. 내세 지향적 성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C. 믿음이 ‘들음’에서 날 때
그렇다면 성경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믿는 ‘이미 그러나 아직’의 종말론에서 예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걸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한, 성경을 읽고, 성경을 설교하고, 성경을 기도하고, 성경을 노래하려고 합니다. 예배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복음과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표현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만일 볼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주님께서 교회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신 성례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들려지는 복음과, 눈에 보이는 말씀인 성례가 그들의 예배의 중심이자, 전부가 될 것입니다. 이런 예배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고, 복음의 진리를 성령님께서 조명하심으로써 깨닫게 되고 그 말씀으로 변화를 받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약속에 기대어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5. 매 주일 예배에서 경험하는 복음이 믿음으로 살게 하는 동력이다.
예배에서 보고 느낀 짜릿한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깨달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생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여전히 살아서 매일의 삶 속에서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도록 역사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세대를 판단하고 본받지 않으며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눈으로 본 어떤 전율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합당한 예배, 합리적인, 논리적인 예배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순례자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순례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믿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하는 승리나 패배의 사건들에 연연해하지 않고, 의연하게 자기의 왕이신 하나님께 충성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내재하는 죄와 싸우는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립니다.
그의 인생의 초점은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는 매 주일마다 예배를 통해서, 그 예배 가운데 풍성하게 노래되고, 기도되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복음의 진리를 통해서 이것을 다시 확인하고 자신의 삶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다시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적 예배,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는 매 주일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로부터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admin
댁쟾쇰줈
우리가 드릴 합당한 예배 /롬12:1-2
2021-02-20 13:29:44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함께 모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예배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하는 예배가 세상의 골치거리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데요.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예배를 자기들 문제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예배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조건 예배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예배를 해야 합니다.
올 해 우리 교회 표제를 ‘합당한 예배, 풍성한 교제’로 정했습니다. 표제에 해당하는 성구가 바로 오늘 설교본문인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 합당한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영적 예배라는 표현은 좀 더 엄밀하게 번역해 보자면 합당한 예배입니다. 우리는 합당한 예배,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합당한 예배, 즉 이웃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예배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웃에게 복이 되는 합당한 예배를 해야 한다’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올 한 해는 합당한 예배를 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풍성한 교제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평생 합당한 예배를 하면서 풍성한 교제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세가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는 합당한 예배의 토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은 것입니다.
둘째는 합당한 예배의 형태입니다. 그것은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합당한 예배의 정신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1. 합당한 예배의 토대: 자비를 힘입었다
로마서 12장은 로마서의 제3부가 시작되는 장입니다. 1장부터 8장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는지를 다룹니다. 9장부터 11장까지는 그리스도를 부인한 유대인의 구원이 어떻게 되는지 다룹니다. 12장부터 마지막 장인 16장까지는 구원받은 신자의 삶을 다룹니다. 구원받은 교회가 드려야 할 예배를 다룹니다.
제3부를 시작하면서 이전의 내용을 요약합니다. 제3부의 기초를 놓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12장 1절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라고 시작합니다.
11장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우리가 구원받고, 이스라엘도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로마서에는 하나님의 의가 중심이지만 하나님의 의조차도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를 맛본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냉혹한 의가 아닙니다.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는 의가 아닙니다. 행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우리를 받아 주시는 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벌을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순종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런 이중적인 순종으로 인해 의를 획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그 의를 우리에게 돌려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죄인의 모습을 뒤집어 쓰셨습니다. 가장 흉악한 죄인처럼 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정의이고, 그 의의 기초가 바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자비에 근거하고 있고, 하나님의 자비는 정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모든’이 ‘올’all이죠? 올all이 듣기 좋죠? 내가 빠지지 않아서 좋습니다. 내가 소외되지 않아서 좋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차별성을 내세우고 싶어 하기에 올all을 싫어합니다. 모두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장 복된 ‘모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입니다.
그 ‘모든’은 정말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못 배웠다고 차별하지 않고, 여자라고 차별하지 않고, 나이가 들었다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를 맛본 자들입니다. 우리 삶의 토대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를 힘입은 것입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자비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정의요, 하나님의 자비인 그리스도 위에 서 있습니다. 이 자비로 인해 우리는 세상과 마귀와 자신을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를 힘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지금도 계속되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올 한 해도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을 복되게 예배하기를 바랍니다.
2. 합당한 예배의 형태: 몸을 드리라
사도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아니라 몸을 드리라고 말합니다. 왜 몸일까요? 몸을 드리라는 것은 제사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동물을 죽여서 제사를 드리듯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을 어떻게 사용하라는 것입니까? 세가지인데요.
첫째로, 몸을 ‘살아있는’ 제물이 되게 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제물이라는 말은 사망에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1절과 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신자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신자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 살아갑니다. 이제 기독교인을 정죄할 그 어떤 법도 없습니다.
둘째로, 몸을 ‘거룩한’ 제물이 되게 해야 합니다.
거룩한 제물이라는 말은 흠이 없는 제물이라는 말인데 이제는 우리 몸을 거룩하게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6장 19절에서 말씀합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신자는 자신의 지체, 자신의 몸을 부정과 불법에 내주면 안됩니다. 자신의 눈 입 귀, 자신의 손과 발을 의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몸의 모든 지체를 거룩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몸을 의의 병기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 끝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이 한번 더 등장하지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입니다.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삶을 말합니다. 내 생각대로, 내 욕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페이스북에 새해 인사말로 ‘2021년에는 우리 때문에 주님께서 기분 좋으셨으면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올 한 해에 항상 그럴 수는 없겠지만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한번씩 덩실 덩실 춤추시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영, 혼, 육으로 나누기도 하는데요. 오늘 본문에 말하는 몸은 사실, 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몸은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서의 몸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몸은 영, 혼, 육을 다 포함합니다. 사람의 다른 표현으로 몸을 말합니다. 제물로 바치라는 표현을 위해 눈에 보이는 몸을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 전체를 대표하는 몸을 말합니다.
즉, 너희 자신을, 너희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를 힘입었으니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제물처럼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몸을 불태워 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으로 행하는 작은 일들 하나 하나를 주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까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처럼 드리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의 몸을 고기덩어리처럼 보기도 하고, 상품처럼 취급하기도 합니다. 우리 몸은 전시되는 고기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사고 파는 상품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잘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을 결정하는 것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아니라 몸을 어떻게 놀리느냐 입니다. 올 한 해도 몸 사용법을 제대로 익혀야 하겠습니다.
3. 합당한 예배의 정신: 마음을 새롭게 하라
사도가 몸 이야기를 했는데 바로 다음 순간에 마음 이야기를 합니다.
몸을 드리라고 하고 난 다음에 바로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마음은 몸과 대립된 것으로서의 마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을 가리키기 위해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한 몸처럼 사람을 대표하는 것으로서의 마음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독교인은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입니다.
사실, 기독교인이 크게 달라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초대교회시대 문서 중에 하나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보면 기독교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남과 다르다면 영토가 달라서도 아니고, 하는 말이 달라서도 아니고, 의복을 입는 모양이 달라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네 고유한 도성에 고립되어 사는 것도 아니고, 특이한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며, 특별한 모양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의 운명이 정해주는 대로 그리스 도시들이나 야만인 도시에 거주하며, 의복이나 음식이나 그 밖의 생활 방식에 있어서 지역의 전통에 그대로 순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도 다르지 않게 사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서는 놀라운 모범을 보여주며, 그 모범은 누구나 자백하듯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기독교인은 같으면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인은 겉모습이 아니라 속사람이 새로워진 사람입니다. 세례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났기 때문에, 마음이 전적으로 새로워진 사람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 위해 먼저 언급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습니다. 이 세대가 어떤 세대입니까?
예수님은 당시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의 온갖 욕망대로 행하는 세대를 말합니다. 이런 현 세대와 달리 하나님의 백성은 ‘오는 세대’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현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현재를 향해 오는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은 이 땅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되 위로부터 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뜻대로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많이 말하는 것은 순종하기 싫어서 일 때가 많습니다. 굳이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지 않아도 되거든요. 그냥 순종하면 되거든요.
내가 생각한 대로 하고 싶으니까 기도해 보겠다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겠다고 합니다. 결국에는 자기 생각대로 할 것이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더 나아가서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새로워질 때에 손해가 되어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새로워질 때에 손해가 되어도 이웃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무언가를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돈을 섬깁니다.
한국 사람들은 아파트를 섬깁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은 오직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올 한 해는 합당한 예배를 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모여 예배해도 새로워진 마음과 몸으로 예배하지 않고서는 합당한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흩어져서 살아도 새로워진 마음과 몸으로 섬기지 않고서는 합당한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를’ 힘입었습니다. 우리는 몸 사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몸을 내어놓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좋은 생각을 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올 해 우리교회의 표제인 ‘합당한 예배, 풍성한 교제’를 기억하십시오.
합당한 예배와 풍성한 교제가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합당한 예배를 해야 풍성한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배와 교제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배 자체가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 성도들과의 교제입니다.
올 한 해 합당한 예배를 하고, 풍성한 교제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admin
참된 예배자가 되기로 결심하다 /롬12:1-/ 김병삼목사
2020-03-11 00:28:34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마음 갖기』는 모든 신앙인들이 가지는 고민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둘의 문제는 극단적으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같이 가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 전 동경에서 한 권사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가장 적절한 예화가 될 듯합니다.
이 권사님은 믿지 않는 가정에 시집을 갔습니다. 그렇게 힘들 줄 몰랐답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 보았듯이, 혼내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 .
진짜 힘든 것은 시누이 시집살이였답니다. 나이 어린 시누이가 얼마나 시기와 질투가 많은지.
아들이 귀했던 집안에 권사님이 아이를 낳았을 때, ‘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시누이가 박장대소를 하며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로부터 듣고 마음에 상처가 되기도 했답니다.
그 때부터 이 권사님이 마음에 결심을 했답니다.
“하나님! 우리 시누가 나를 질투하거나 미워하지 않도록 저보다 잘 되도록 축복해 주세요!”
그런데 정말 시누가 잘 되기 시작하더랍니다. 남편 잘 만나 시집을 갔습니다. 돈을 잘 벌고 못 벌고의 문제가 아니라, 남편이 시누를 공주처럼 모시고 삽니다.
시간이 지나 시누가 딸을 시집보내는데, 권사님 딸보다 훨씬 돈 많고 유명한 집안에 시집을 갔답니다.
가끔 시누 사위가 권사님 사위보다 키도 작고 얼굴도 못생겼다고 위안을 삼았지만,
‘저 얼굴을 평생 보고 살려면 힘들겠다고’ 생각해 보았지만,
시간 지나면 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 하는 생각도 들고, 결정적으로 그 사위가 강남에 있는 2천억이 넘는 건물을 가지고 어찌할까 고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가족들과 함께 가족여행을 떠나는 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복통이 시작되었답니다.
고통가운데 분위기를 깰까봐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해외로 여행을 가서는 일주일 내내 고생을 하고 돌아왔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물으시더랍니다.
“그렇게 배가 아프냐! 네가 축복해 달라고 기도해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시누가 축복을 받고 자신이 얼마나 편해졌는데, 자기가 예수님 믿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답니다.
너무나 힘든 고통 가운데서 드디어 다시 찬양이 나오더랍니다.
예배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마르다’의 세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발치에서 아무것도 신경 안 쓰고 말씀에 집중했던 ‘마리아’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분주한 세상에서, 어떻게 주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의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새해를 시작하는 주일에 ‘결심’이 중요한 것이죠.
지난 해 초에 저는 오늘과 똑 같은 본문으로 예배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얼마나 그 설교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라는 말을 강조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지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고 말이죠. 오늘은 이 부문에만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to 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ces, holy and pleasing to God--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 (NIV)
오늘의 본문은 우리 말 성경보다는, 영어 성경이 더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영어성경의 표현을 보면 ‘spiritual act of worship’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 풀어서 말씀을 본다면 이런 의미죠.
“예배란 영적으로 합당한 행위로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우리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섬김과 예배’를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경향을 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과 사역을 한다는 것 사이에서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말장난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하는 사역이 ‘일’이 되지 않으려면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영적 예배’가 되려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리는 헌신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일은 세상의 일과 구별되어야 하고, 세상과는 다른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이 ‘가치’ 구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정’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산제사가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영적 행위라면 하나님께 집중될 텐데, 우리는 계속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에 목말라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불리는 직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일에 쓰임 받는 도구라면 자랑하거나 내세울 것이 없을 텐데, 그런 외적인 것들이 우리들에게 점점 중요해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크리스천 스타트』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의사였는데 동네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많은 사람이 조문을 했다.
그런데 상주인 아들이 장례식을 집례 할 목사님에게 요청을 했다.
“저희 아버지의 교회 직분을 장로로 해 주실 수 없나요?”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할 때 교회 직분이 집사인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목사님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다시 물었다.
“경찰이나 군인이 공을 세우고 죽으면 1 계급 특진 같은 추서가 있는데 교회에서는 왜 그런 제도가 없습니까?”
이 아들은 집사인 아버지의 교회 직분을 계급으로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우리들이 세상적인 가치로 예배를 이야기 한다면, 오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가치로 우리가 하고 있는 사역들을 논한다면 우리는 참 바보 같은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왜 교회의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해야 하고, 왜 예배를 정성스럽게 준비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일에 서툰 사람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래, 아마추어 같이….”
그런가 하면 무언가 탁월한 것을 볼 때 이렇게 말합니다.
“역시 프로는 달라!”
저는 예배와 사역에 있어서 프로를 꿈꾸고 조금 더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꿈이 객관적 완벽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신앙적 고백을 하는 우리들의 ‘최선’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하심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분임을 우리가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선과 최고의 섬김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제사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 가축 떼, 곧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 드리는 것이라면 ‘흠 없는 수컷’을 골라서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이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종종 교회에서 최상의 것을 받치라는 말씀을 가지고 ‘헌금’ 강조의 수단의 논리를 적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에게 있어서 제사란 경제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소를, 어떤 사람은 양이나 염소를, 그러고 어떤 사람은 비둘기를 드릴 수 있도록 했고, 또한 어떤 경우에는 곡식을 가지고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시면서 과부의 작은 돈을 칭찬하셨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헌신의 가치’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말라기 1장 8절을 보세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며, 타락의 이유와 심판의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구약시대의 제사나 신약시대의 예배 모두가 ‘삶’의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레몬, 레몬에이드를 꿈꾸다』라는 책을 읽고 변화산 기도회 주제로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저자인 이재기 목사님이 저에게 새 책의 추천서를 부탁했는데, 『하나님의 사역레슨』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책에서 영감을 얻어 ‘예배와 섬김’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는 말씀의 의미가 ‘영적으로 합당한 행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즉, 우리가 삶과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합당한 예배’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예배’의 의미가 확장됩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나 사역도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오는 ‘예배’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트류오’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이 말이 ‘봉사’ 또는 ‘섬김’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어성경인 킹 제임스 번역본에는 이 부분이 ‘합당한 봉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아바드’라는 동사가 있는데, ‘섬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단어가 ‘예배 한다’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사용하는 ‘사역 한다’라는 말이 단순한 봉사와 일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을 ‘예배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로 사역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워렌 위어스비는 그의 책 『하나님의 일꾼과 사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원이 긍휼이 넘치는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일이 사역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사역한다’라는 말과 ‘하나님을 예배한다’라는 말은 동일한 행위입니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17세기 프랑스 파리의 갈멜 수도원에서 평신도 수도사로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는 수도원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정식 수도사를 하나님이 보낸 천사로 생각하고 자신의 부엌이 천국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부엌은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성소였던 것이죠.
그가 죽을 때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의 대답입니다.
“나는 내가 지난 40년 동안 했던 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역이 예배’라면,
우리는 제물이 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불의 전차』라는 책에서 주인공 에릭 리들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100m 선수로 출전해 400m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운 사람이죠.
그는 육상 스타였지만 중국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고 평생을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던 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갖고 나를 만드셨어,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나를 빠른 사람으로 만드셨지. 나는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껴!”
그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뛰었고, 그의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일을 열심히 하며,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일을 우리는 예배 혹은 사역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은 무엇인가요?
왜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고 이 자리에 있게 하셨나요?
그 일로 인해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때, 우리의 인생이 복된 것이 아닐까요?
저는 ‘예배’가 ‘축복’이라고 믿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확신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한다면 우리가 대충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닐까요?
저는 목사로서, 설교자로서의 부르심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설교준비를 하면서 희열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또한 설교 준비를 하며 고뇌하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종이 한 장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최선을 다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희열도 있고 고뇌도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표현이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고뇌를 통해 희열에 이른다!”
헛되지 않다는 믿음!
부르심이 분명한데, 어떻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최선’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바닥에 있는 힘까지 끌어올려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고뇌는 최선을 다하는 자와 함께 가는 친구입니다. 고뇌한 자만이 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에콰도르에 선교하기 위해 나갔던 짐 엘리엇은 선교지에 도착한 첫날 자신을 식인종으로 오해한 아우카보족에 의해 강가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보며 인생을 ‘낭비’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믿습니다. 그는 휘튼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 책상 위에 이런 글을 써 놓았다고 합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사역’은 우리의 일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믿음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끔 목회자들이 모이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인들 중에 가장 두렵고 부러운 사람이 ‘돈 안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이죠.
‘돈’이라는 가치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이유를 가진 사람이 무서운 이유는 돈에 의해 유혹받거나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예’를 바라지 않고 사는 사람이 무서운 것은, 명예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인 ‘부활 장’에서 사도바울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마지막 권면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절)
여러분들에게 돈 버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워렌 버핏과 식사 하려면 꽤 많은 돈을 내야 합니다. 밥을 먹으면서 그에게서 돈 버는 방법과 그의 지혜를 배우려는 것이죠.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워렌 버핏은 11살 때 처음 주식에 투자를 했다고 합니다. ‘시티서비스’라는 회사의 주식을 38달러에 구입했는데, 사자마자 27달러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는 끝까지 인내하며 40달러로 오를 때까지 기다렸고, ‘기다림’이야말로 투자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죠.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기다림’의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죠. 버핏이 대학원을 다닐 때, 그레이엄 교수라는 멘토를 만나 배운 것입니다.
“주가와는 무관하게 오직 회사의 가치만을 보고 투자하라!”
저는 오늘 우리의 사역을 워렌 버핏의 투자에서 원칙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사역에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기다림이 없이 열매를 맺는 일을 결코 없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치를 두면 주변 상황이나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예술 담당 디렉터였던, 낸시 비치가 쓴 『일요일의 한 시간』이라는 책에 보면, 자신을 속상하게 했던 사람들의 한 마디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건 그냥 교회 일이잖아요!”
이를테면 특송자가 별 준비 없이 특송 자리에서 노래를 하다가 “아이고, 기타 줄이 안 맞네요” 라고 하면서 기타 줄을 맞추고는 다시 시작하는 일. 왜 그렇게 했냐고 물으면,
“그건 그냥 교회 일이잖아요!”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그 일이 사역이고 그것이 예배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피 흘려 세워주신 교회에서 하는 일인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정해야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드리는 예배와 예배자로서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존귀한 일’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저에게 붙어 있는 닉네임이 있습니다.
“탁월한 예배인도자!”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다른 무엇에 탁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일에 가장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저와 만나교회를 비난하는 말을 합니다.
예배가 ‘쑈’냐고, 예배에 왜 ‘콘티’가 필요하냐고, 예배를 드리는데 왜 ‘기획자’와 ‘FD’가 필요하냐고, 예배를 드리는 에 왜 ‘리허설’이 필요하냐고,
그런데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예배이기 때문에 필요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가끔 저에게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아니, 목회자 세미나에서 제가 설교 준비하는 것과 우리교회에서 예배 준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목회자들이 질문하는 것입니다.
미리 설교준비를 다 해 놓으면, 예배 준비를 그렇게 열심히 하면 그 때 그 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고 어떻게 전합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렇게 한 번 준비해 보고 질문해 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참 놀라운 경험을 하는데, 1년 전에 준비한 설교 원고를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필요한 말씀을 준비하도록 하셨는지….
그리고 미리 준비를 해 놓으면 그 때 그 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고 내가 준비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참 신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준비보다 늘 탁월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설교와 예배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시는 지를 경험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분명한 것은 우리와 준비와 헌신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열정임이 분명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찬찬히, 그리고 주의 깊게 묵상해 보세요.
출애굽기 38장 21-31절에 성막을 만드는데 들어간 물품들의 명세가 얼마나 디테일하게 나와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는 레위기에 제사 드리는 방법을 그렇게 자세하게 기록해놓은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나요?
예배와 사역은 하나님과 관계된 일들이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준비하고 규모 있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이 ‘내 일’이라면 대충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땀과 눈물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세계 2차 대전에서 제임스 라이언이라는 일병을 구해기 위해 많은 희생이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라이언가의 아들 넷이 2차 대전에 참전했다 모두 죽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아들 제임스 라이언이 전쟁터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미국 정부는 밀러 대위가 이끄는 소대원들을 적지에 파견해 그를 구해내는 작전을 펴게 됩니다.
일병 하나를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죽는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보면, 나이가 많이 든 제임스 라이언 일병이 밀러 대위의 묘소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그 희생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평생 노력했습니다.”
그가 받은 은혜가 그의 삶을 치열하게 만들었고,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이죠.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인생을 위해 이뤄진 희생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그렇게 대충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사역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이 아니라, 나에게 임한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일’은 때로 우리들에게 무거운 짐과 버거운 의무지만, ‘은혜’로 행하는 일은 감사가 수반됩니다. 은혜로 하는 일은 크고 작은 일이 없습니다. 단지 감사함으로 할 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입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143장)
1.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2.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3.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4.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5.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아멘
늘 하나님 앞에서!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신실한 우리들의 모습은 사람들 앞에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위선’이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행한 일들이 사람들 앞에서 증명될 때 우리는 그것을 ‘헌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할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인격자’가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격이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운데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죠.
다른 한 편으로 말하면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나’가 인격의 참다운 정체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의 ‘나’는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겠다’는 고백 때문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그 고백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이죠.
앤디 스탠리 목사가 했던 말을 제가 인용했던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나요?
“인격이란, 일신상에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하나님 기준의 옳은 길을 가려는 의지다.”
인격이라는 것을 예배와 연결 지어 보면 시편 15편의 말씀이 아주 잘 이해가 될 듯합니다.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인격’이라는 말이 상당히 고상하게 들리지만, 사실 인격이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기본적인 생각들이 우리의 인격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다운 마음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마음이 인격을 만들어 가는 것이죠.
그래서 인격이란 ‘기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기본기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시편 15편을 벗어나는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재기 목사의 책에 보면 로버트 풀검이 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베스트셀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목대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이 유치원에서 배운 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죠.
* 모든 것을 나눠 가져라.
* 정정당당하게 겨뤄라.
* 남을 때리지 마라.
* 물건을 사용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제자리에 갖다 놓아라.
* 자기가 어지른 것은 자기가 치워라.
* 남의 것을 빼앗지 마라.
*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용서를 구하라.
* 식사하기 전에는 손을 씻어라.
* 용변을 본 뒤에는 반드시 변기 물을 내려라.
* 균형 잡힌 생활을 하라.
* 매일 무언가를 조금씩 배우고 생각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고, 공부해라.
* 경이로움을 느껴라.
* 물고기, 햄스터, 흰쥐, 스티로폼 컵에 심은 씨앗까지 모두 죽는다. 우리도 마찬가지임을 기억하라.
2020년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역’이 예배임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사역이라는 것은 그 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고, 우리가 하는 일이 예배가 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기로 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기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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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이런 것입니다! /롬12:1-2/ 김병삼목사
2018-06-25 10:11:26
다시 세워야할 사역의 기초 1 -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누군가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예배’하는가 하지 않는가가 중요한 기준입니다.
어느 미션 스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목이 학생들에게 예배 출석을 열심히 권고하는데 한 학생이 도무지 응하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답답해진 교목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 한 학생에게 예배를 드리지 않는 이유를 물었답니다. 그러자 학생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사님, 저는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예배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 학생이 아주 논리적으로 말을 한 것이죠. 묵묵히 듣고 있던 목사님은 그 학생에게 이렇게 말 했습니다. “학생! 지금 한 말을 거꾸로 한 번 해 볼 수 없겠나?”
잠시 머뭇거리던 그 학생이 순서를 달리해서 자신이 했던 말을 되뇌어 보았습니다.
“예배에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 했던 고백이 생각납니다.
“나는 앎으로 하나님을 믿으려 하였으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식적으로 아는 분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백하는 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고, 그 예배를 통해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가운데 아주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원칙과도 같은 것이죠.
무엇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적이어야 한다는 것,
예배는 우리의 몸을 드린다는 것,
우리가 몸을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룩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 우리는 세상과 구별이 되고,
그 구별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란,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사도바울이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 공동체에 ‘예배’에 관해 정의를 내려주는 것입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어는 ‘영적 예배’라는 것이죠. 앞에 있는 구절들은 영적 예배를 설명하는 말들이거나 전제조건이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지난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국민일보에서 주최한 행사에 사회를 맡아 참석하게 되었는데, 먼저 예배를 드리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소위 대선에 출마하는 사람들이 함께 자리를 했고, 설교를 마치자 참석한 후보들이 나와 인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물론 신문사에서 주최한 행사이고, 중요한 인물들이지만 예배시간에 대선 주자들이 인사를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단 한사람을 빼고는 자신들의 순서를 마치고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예배를 빙자해 하는 행사들이 참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예배의 모습은 아닌지.
또한 자신의 시간을 마치고 떠나는 사람들을 볼 때,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찮게 보이거나 무시하는 행동은 아닌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무시당하는 것을 예배라고 부를 수 있는 지 말입니다.
혹, 우리들이 예배시간을 빌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들을 이루어가고 있다면 그것이 예배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딱 걸리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 . .’이라는 말에 말입니다.
반대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지 않으면, 영적 예배가 될 수 없다는 말이겠지요.
2018년에도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공동체에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에 예배를 중심으로 모여진 회중이라면 어떤 예배를 드리는가가 그 공동체의 건강함과 진정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만나교회는 어떤 예배 공동체로 어떤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물론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에서의 부르심은 특별하지 않을까요? 만나교회의 사명과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슬로건’이라고 표현하는데 가장 명료한 존재 의미와 행동 강령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본래 ‘슬로건’이라는 말은 중세기 쯤 영국에서 나온 말입니다. 당시 영국은 남부 잉글랜드의 앵글로 색슨 족과 북부의 스코틀랜드의 켈트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두 종족은 오랜 전쟁으로 반목해 있었는데, 켈트족들은 전쟁에서 병사들을 모을 때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켈트의 용사들은 결집해 모일 때 흄! 흄! 이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때 흄은 켈트병사들의 주군인 영주의 성을 뜻 합니다. 이렇게 외치며 집결해 적들의 사기를 꺾고 켈트 용사들의 기세를 올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외치는 켈트족의 함성은 sluagh (군사) + gairm (외침) 이라 불렸고, 이 단어는 각 군사와 외침을 뜻하였으며 켈트어가 영어화 되면서 지금의 슬로건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면 만나교인들을 한 곳으로 모아 사기를 복 돋우고 영적 전쟁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슬로건은 무엇일까요?
“만나교회가 이 땅의 소망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소망을 던져 줄 수 없다면 더 이상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분명하다면 어둠과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소망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존재 이유를 위해 우리에게는 ‘사명 선언문’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이지요. 슬로건이 존재의 이유라면, 사명선언문은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지역과 세상을 섬긴다.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공동체이며,
모임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 불림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배 공동체로 모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될 때, 세상을 섬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신학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가능하다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늘부터 7주 동안 이런 신학적 바탕위에서 우리 교회가 해야 하는 사역을 구체적으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예배란,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시작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물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A. W. 토저는 그의 책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논쟁의 대상이 아니기에 기억할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당신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분이 질 수 없으시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분과 싸우든 간에 당신이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주는 내 조언은 간단하다. 싸움을 그만두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으라. 그리고 ‘오 하나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씀드려라! 그분의 손에 당신을 맡겨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 갈망’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영적 갈망에서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영적 날카로움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도 예배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에게 소개했던 민호기 목사님의 말이 있습니다.
“시계의 일은 시간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을 지난 여러분이라면 모두가 기억할 것입니다. 학교에 가고 싶은 날도 있고 가기 싫은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기 때문에 학교에 갑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는 가정으로 빨리 들어가고 싶은 날이 있는가 하면,
가정을 떠나고 싶을 때도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내가 가정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고, 어머니고 자식이기 때문에 다시 가정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점점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물’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예배의 기쁨과 감격은 두 가지 차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기쁨과 감격으로 인해 ‘제물’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제물이 되었을 때 찾아오는 기쁨과 감격입니다.
예배가 우리의 사명과 밀접하게 관계가 되어 있는 것은, “예배가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주목해 보세요.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절)
오늘 본문에서는 “제물”(제사)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 제사를 수식하는 말로 “거룩한 산”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습니다.
제사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레위기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하는 말은 제가 만나 교회 목회를 시작하면서 10번 이상 동일하게 했던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제사장을 중보자로 세우고 제물을 드리는 예식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있었고, 피를 흘릴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인 행위가 동반 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구약시대에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기 위해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왔을 때 누가 죽였을까요?
누가 각을 뜨고, 누가 내장을 다 긁어내고, 누가 번제단에 올려놓았을까요?
제사장은 단지 ‘instructor’의 역할 만을 합니다. 지시를 하면 번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이 그대로 따라 합니다.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이 흰 옷을 입고 와서 제물을 잡아들입니다. 목을 딸 때 피가 옷에 묻고, 내장을 긁어 낼 때 역한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제물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빙 둘러 서 있습니다. 제사를 다 마치고 나면 사람들이 흩어지는데, 누가 제사를 드리고, 누가 구경꾼인지 확연하게 구별이 됩니다.
제사를 드린 사람의 옷에는 피가 묻어 있고, 역한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한 번 그런 상상을 해 볼까요?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여기에 나올 때 단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나옵니다.
구경꾼으로 나와 예배를 드리면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을 제물을 드리고 난다면, 땀 냄새가 나고 수고로 인해 오물이 묻어 있어야 정상적인 예배자들이 아닐까요?
제가 단지 목회자이기 때문에 저만 예배를 마치고 나면 그 다음날 머리가 아파서 하루 종일 견뎌야 하고, 속옷을 갈아입어야 할 만큼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일까요?
아픈 마음, 상한 심령, 뜨거운 눈물이 제단에 뿌려져야 하고, 참 힘든 희생의 제물이 쏟아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보다는 마음을 드리므로 예배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은 드리기 쉽지만 몸은 드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6장 41절에서 잠을 자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입니다.
마음으로 구제를 하고, 마음으로 선교도 합니다. 마음으로 애국을 하기도 하고 마음으로 통일을 이루기도 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우리의 몸이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없는 예물을 원하시지도 않으시지만, 마음만 있고 몸이 따르지 않는 예배를 거룩한 예배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구체적인 헌신의 행위들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헌신이 드러나야 합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떤 분의 설교집에서 본 내용입니다.
외국의 어떤 목사가 퀘이커 교도들의 예배가 ‘참되다’라는 말을 듣고 그 예배를 배우기 위해 찾아갑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기도만 하고 예배를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다리다 지쳐서 이 목사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예배를 시작합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이 예배당을 나가는 순간부터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에드가 프랭크라는 사람이 [크리스챤 센츄리]라는 잡지에 발표한 ‘제단’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공장 작업대를 늘 제단으로 생각하였고, 어떤 이는 상점 계산대를, 어떤 이는 사무 보는 책상을, 또는 부엌 조리대를 거룩한 장소로 삼았다 … 평범한 환경이 길가의 성전이 되어야 하리라'.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예배는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물 된 우리가 삶으로 예배하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가 ‘영적인’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저는 예배의 형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릴 때 이런 말을 즐겨합니다.
“어떤 예배도 성경적인 예배란 없다.”
모든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이 모든 표현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단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면, 요한복음 4장 23-24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의 기준이란 “영”과 “진리”입니다. 어떤 형식으로 드려야 할 것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종종 교인들 사이에서 자신들에게 익숙하거나, 해오던 방식을 예배의 본질로 생각하며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아주 명확하게 예배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예배는 장소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우리들에게 익숙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예배의 중심에서 우리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있느냐를 묻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회에서도 신령과 진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형식의 대한 것들을 성전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신령과 진정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형식으로 예배하지 않으며 용납하지 못하고 마음이 불편해 지는 현상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정말 영적인 문제인가요? 아니면 예배의 형식의 문제인가요?
헌금의 방식/ 예배시간의 옷차림/ 예배시간에 사용되는 음악/ 같은 것들에 대한 의구심은 성경적인 문제인가요? 아니며 전통의 문제인가요?
본질적인 면에서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 즉 하나님께 대한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 표현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죠.
저에게 도전을 주었던 릭 워렌 목사의 말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졸게 만드는 것은 기적이다! 그런데 이런 기적이 교회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정신을 말하면서, 형식을 바꾸고 새롭게 하는 이유는 ‘변화’가 목적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표현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위한 최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용적인 면에서 ‘영적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영로교회를 목회하다 은퇴하신 정필도 목사님이 예배에 대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짓된 예배를 드리는지를 말하며 사용했던 예화 중에 하나입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5살에 왕좌에 올라 장장 72년을 집권했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나라가 부강해졌고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했습니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과 루브르 궁전을 건축했으며, “짐은 국가다”라고 호언장담할 정도였으며 일명 태양왕이라고 불렸습니다.
그 당시 페넬론이라는 궁중설교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왕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에 도착했을 때, 예배당에는 페넬론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왕이 왜 예배당이 텅 비어 있는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때 페넬론이 대답하기를 “저는 오늘 예배에 임금님이 참석하지 못하신다고 광고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진정으로 예배하러오고, 누가 왕에게 아첨이나 하려고 오는지 친히 보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내용적인 면에서 ‘영적인 예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중에 하나는 우리의 ‘자의적 선택’에 의해 예배가 좌우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서론 부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끊임없이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죠. 예배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가 자신의 감정적 만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죠.
선택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예배 회중을 또한 선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나는 저런 사람하고는 예배드릴 수 없어! 저 사람 때문에 나는 교회를 떠날 꺼야!”라고 하는데 우리 주님은 “바로 그 사람과 함께 예배드리기를 원해!”라고 말씀하시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영적 예배”라고 말하면서도 “관계”를 더 중요시 여기고 있지 않은지 말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인 관계가 될 때는 다른 회중이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관계가 깨어지면, 여러 가지 핑계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말씀을 하시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장 23-24절을 주목하십시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들이 얼마나 약합니까? 어떻게 이 문제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구약 시대에 보면,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는 억지로라도 화목하도록 시키셨습니다. 레위기 7장 15절에 보니까,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구약 시대의 제사에 보면, 드려진 제물은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화목제물은 예배를 드린 모든 공동체가 함께 즐기며 먹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화목제물을 나누는 데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제사로 드리는 소 한 마리는 1,300근에서 1,500근이 나갔다고 합니다.
제사장 몫인 제물의 가슴과 뒤쪽 다리 하나를 떼 내었다 해도 나누어야할 고기는 엄청난 양일 것입니다.
이 고기를 하루 이틀 만에 나누기 위해서는 한 두 사람과 나누어서는 안 될 일이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과 , 심지어는 “미운 사람”과도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법칙을 지킬 수 없게 되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누구나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아니 우리가 자랄 때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싸우고 난 아이들을 억지로 화해를 시킬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라고, 손을 잡으라고, 너희의 입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라고. . .
아주 어렸을 때는, 서로 안아주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힘든 행동을 통해서 무언가 화해와 사랑의 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어색하고 강요적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요와 어색함 속에서 화해가 이루어짐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영적인 부분에서, 영적인 예배에서 성공해야 온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기쁨은 구별과 관계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본문 말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신앙의 오류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전혀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일들을 응답으로 허락하신 일들을 보게 됩니다.
존 비비어의 [영적 무기력 깨기]에 보면 몇 가지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사무엘 상 8장 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을 찾아가 이렇게 부탁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이들의 바람을 하나님께 아뢰었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우는 일이 결코 현명하지 않은 이유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왕이 생기면 백성들의 아들들을 군사로 차출해 갈 것이라 경고 하셨고,
백성들은 왕을 위해 밭을 갈고 곡식을 추수하고 무기와 장비를 만들어야 할 것이고,
딸들은 요리와 청소, 향수 제조 같은 각종 노역에 시달릴 것이고,
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 올리브 과수원, 소와 양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아우성을 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 8장 19-20절.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그들은 하나님께 끈질기게 애원하여 자신들의 소원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었으나, 그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며 다른 백성들과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이룬 그 백성들은 하나님이 경고하신 그대로 고난의 시간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신비한 음식을 먹여 주셨습니다. 바로 ‘만나’였죠.
하지만 곧 이들은 이 좋은 음식에 신물이 났고 고기를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광야를 지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잊고 원망하기 시작한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고기를 주셨지만 결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죠.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시 78:29-31)
이들의 기도와 소원을 들어주신 분이 거짓신이거나 귀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이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졸라댑니다. 아직 돈을 관리할 능력도 안 되고, 아버지의 돌봄을 받아야 할 어린 아들이 말입니다.
그 아들의 소원은 아버지를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죠. 그러나 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우리에서 뒹구는 신세가 되어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원하고 요구하는 예배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순종보다 앞서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닌 제약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배는 그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찾기 위해 우리는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기 위해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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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드리는 예배 /롬12:1-2/ 유기성 목사
2016-08-27 11:20:51
우리가 자주 예배드리다 보니 무감각해질 수 있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배는 너무 중요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를 묶는 끈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다닌다는 말은 곧 그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끈도 예배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게 됩니다.
예배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우리가 바른 예배를 드리면 예배는 우리 삶을 바꿉니다.
한번은 미 해군의 대장 한분이 연설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 해군 특수부대 Navy SEAL에 36년간 몸 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 연설에서 자신이 navy seal 대원이 되기 위하여 처음 기초훈련 받을 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훈련은 대원으로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을 낙오시키기 위한 훈련이었기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매일 아침 교관들이 내무반에 나타나서 처음으로 하는 일은 침대를 검사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침대 모서리는 직각을 이루고 커버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고, 베개는 침대 머리판 아래 정중앙에 놓여있어야 하며, 여분의 모포는 선반 하단에 깔끔하게 개어져있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이것이 좀 우습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 교관들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진정한 전사, 험난한 전투로 다져진 SEAL 대원이 되길 열망하고 있었는데, 침대 정리 같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일에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하나 이해가 안 되더랍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작아 보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매일 아침 침대 정돈을 하는 것은 그 날의 첫 과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업을 완수했다는 뿌듯함과 다음 과업들을 수행할 용기를 주었답니다.
인생에 있어서 사소한 일조차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답니다. 작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큰 일 역시 절대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참한 하루를 겪고 막사로 돌아왔을 때, 깨끗하고 반듯이 정돈된 침대를 마주하는 순간, 내일은 나을 거라는 격려가 되더랍니다. 그 해군 대장은 결론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침대 정돈부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예배를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느냐 하면 예배가 신앙생활의 기본이고 예배를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켜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에 문제가 있다면 예배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최근 상영된 영화들은 기독교인을 이기적이고 비양심적이고 뻔뻔스럽고 이중인격적인 이미지로 그려 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기도제목입니다. 그러나 이 사회가 기독교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우리가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예배는 많이 드리면서 사회에 비친 모습이 이렇다면 한 가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실제로는 예배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예배는 예배 시간에만 드려지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히 권했습니다. 롬 12:1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사도 바울은 합당한 예배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했습니다.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은 몸으로 살아내는 모든 삶이 예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삶 속에서 순종하지 않고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순종의 삶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롬 15:5-6에서는 성도들과 하나 된 다음에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했습니다. 롬 15:5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성도들과 하나 되는 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싸우고 풀지 않았다면 예배 시간에 드리는 예배도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25:40에서 주위의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그대로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 25:40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러니 주위에 있는 어려운 자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도와주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만 예배드리는 것은 헛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기쁘고, 무엇 때문에 슬픕니까? 하나님 때문입니까? 돈 때문입니까? 직장 때문입니까? 사람 때문입니까? 바로 그것이 여러분이 누구를 예배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우리는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고 예배 후에 세상에 나아가 삶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다가 예배 시간에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와 삶의 구분이 없어야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 때 예배에 불이 임하게 되며, 예배는 우리 삶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교회 김대경 목사의 영성일기를 보니 하루는 급식 시간이 끝난 후 아저씨 한분이 오셨답니다. 늦게 식사하러 오셨나 해서, '식사 못하셨어요?'고 물었더니, 다짜고짜 자신을 '왜 불쌍하게 보냐.' 며 욕을 하더랍니다.
'기분 상하셨으면 죄송합니다.' 라고 말씀드리자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라고 하더니, '식사 맛있게 하세요. 아저씨'라고 하자 '내가 왜 아저씨야. 네 선배지, 선배님이라고 해''라고 하면서 계속 욕을 하기에, 주위 분들이 목사님을 밖으로 잠간 나가시라고 떠밀어 밖으로 나왔답니다. 밖에 있는 벤치에 앉으니 혈기가 올라오더랍니다.
'내가 왜 욕을 먹어야 하지.' '내가 뭘 잘못했지' 그러던 중, 오늘이 금요일인 것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예배가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화내면 예배는 없다." 그래서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교회에 들어가 커피를 타서 그 분께 드렸고 아저씨는 환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곧 예배입니다. 그러나 예배 인도자만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모든 예배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카일 아이들만이 쓴 [나의 끝, 예수의 시작]에 보면 프랭크라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장례식 이야기가 나옵니다. 프랭크는 오십 대 중반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소식을 듣고 그를 사랑하던 이들이 모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고인과 어려서부터 아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고인과의 추억을 나누는 시간에 그들 중에 몇이서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프랭크의 대학교 시절 친구들이었는데 그가 얼마나 술을 잘 마셨는지부터 낯 뜨거운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습니다. “이 친구는 차에 대하여는 까다로웠지만 여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만났죠."
유족들과 교인들은 그 말이 대단히 민망하였습니다. 그 때, 프랭크의 처남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알다시피 형님은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방금 친구 분들이 말씀하신 형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도 죽고 난 다음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알던 그 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 삶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예배하라는 것은 예배 시간이 아닌 모든 일상생활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 시간에나 바라보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 금요일 한화섭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성전에서 절기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건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성경 한 구절을 꼭 집어 읽어주셨습니다.
눅 2:44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이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이럴 수 있습니다. 그저 ‘주님과 동행하고 있을 거야!’ 하는 식으로 막연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지 분명해야 합니다.
그들은 절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곧 예배드리고 난 다음 바로 주님을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다가 예배가 끝나면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드린 후에도 예배하는 그 느낌으로 살아야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어제 큐티한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상치 못한 때에 주님이 오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 24:36 ...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하였습니까?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 :44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깨어 있고 준비하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모든 순간에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가정생활이 곧 예배요, 직장생활이 또한 예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상황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힘들고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조차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양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일기를 쓰시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성도가 “목사님께서 우리들에게 영성일기를 쓰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하고 물어왔습니다. 복음서와 서신에 나오는 대로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누렸던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이 예배가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영성일기는 선한목자교회의 독특한 영성 훈련이다’ ‘유기성목사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닙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을 잘 믿어보자”, “바로 믿어 보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예수님이지만 “24시간 예수를 바라보리라!” 곧 삶으로 예배하자고 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롬 12: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이 시대의 풍조의 핵심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와 상황에서 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과 다른 시간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 차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평소에 그러려니 하고 듣지만 감당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당하고 나면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는 말씀 때문에 분노하게 되고, 그렇게 말했다고 교회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부활의 주님과 부활의 생명으로 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대환란을 견딜 믿음으로 준비되었습니까? 주위에 믿고 의지할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먹고 입고 쉴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졌을 때
극심한 핍박과 두려움과 고통이 임할 때, 주님만 의지하고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영성일기를 쓰며 24시간 매일 매일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 보자는 것입니다.
이번에 속장 세미나를 위하여 설문을 받아보니 교인들 중에 많은 이들이 영성일기를 쓰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다’ ‘너무 바빠서 영성일기가 부담스럽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눅 14;16-24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큰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청함 받은 사람들이 뜻밖의 반응을 합니다.
눅 14:18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받고 이럴 수 있을까? 생각하다 자세히 읽어 보니, 이 잔치는 마지막 날 천국 잔치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날에 누가 밭을 샀으매 소를 샀으매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노라 하겠습니까?
이 잔치는 지금 같은 평소의 때, 하나님의 초청인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 자체를 싫어한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급한 다른 용무가 있어 시간을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의 이야기는 아닙니까?
명심해야 합니다. 평소에 주님의 부름을 거절하는 것이 결국 마지막 천국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딸과 함께 할 시간을 내지 못할 정도로 바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딸은 가출과 방황의 삶에 빠져들었습니다. 그제야 딸을 찾아 정신 상담을 하고 돌이키느라 너무나 많은 시간과 재정을 들이고도 회복이 되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삶으로 예배하라,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라, 소홀히 들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삶으로 예배하라! 는 것은 결코 부담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삶으로 예배하라, 너희 몸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정말 흥분되는 선언이요! 복음입니다. 부담되면 못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정말 복된 다른 길이 있습니까?
삶으로 예배하지 못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권력을 가지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높은 지위를 얻으면 어떻게 할 것인데요?
돈을 권력을 성공을 가지고 어떻게 하라는 건지도 듣지 못하면 그것들이 그에게 화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삶이 예배가 안 되는 자는 성공하고 망합니다.
‘삶이 예배가 된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성남 지방의 교역자들이 지난 2월 중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난 금요일, 만났는데, 모임의 분위기가 너무나 달라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식사하면서 나누는 대화도 너무나 은혜로웠습니다. 얼굴 표정이 달라 보였습니다. 성지순례 때, 큰 은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은혜 받으면 삶이 이렇게 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바로 드리면 주일 저녁 가정에서 우리 얼굴이 달라집니다. 월요일 직장에서 우리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목사님 한 분이 5번째, 성지순례, 이번에는 마음이 다르시더랍니다. 주님이 밟으신 바로 그 자리를 밟을 수 있겠구나! 걷는 것이 그렇게 기쁘더랍니다. 혹 언제 어떻게 주님의 발자국을 밟았을지 어떻게 알겠느냐면서 하루 만보씩 걸으면서도 행복하셨답니다. 그 말씀을 하는데 얼굴이 환하셨습니다. 제가 옆에서 그 말을 듣다가 가만히 그 목사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혹 알겠어요? 진짜 예수님의 발자국을 밟으셨을지!
그러나 성지에 가지 않아도, 주님의 발자국을 밟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 우리 안에, 우리는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 손을 붙잡고 사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삶으로 예배 하는 삶을 살아가자고 제안 하고 싶습니다. 정말 기대가 되는 복음,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예배 후에 지금 이 느낌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예배 시간에 모일 때까지 주님 손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주님 손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예배가 되고, 그렇게 삶으로 예배하다가 성도들과 함께 모여 예배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롬12:1-2/ 유기성 목사
2016-08-26 16:10:15
산부인과 의사를 하고 계시는 집사님으로부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산모 중에는 자연 분만을 하지 못해 수술을 받는 산모들이 있는데, 어느 날 수술을 받아야하는 산모에게 마취를 하기 위하여 심호흡을 하라고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산모가 너무 긴장을 했는지 입으로 심호흡을 하지 않고 말로 ‘심호흡’ ‘심호흡’ 하더랍니다.
그 집사님은 긴장하여 말로 심호흡 심호흡을 외치는 산모를 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심호흡을 하라 하시면 행동으로 심호흡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마치 말로만 심호흡을 외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이 웃으면서도 참으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정확히 아는 것은 중요하고도 귀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십자가 복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빌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사도 바울은 롬 12장부터 마지막까지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그 전체를 요약하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롬 12:1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산 제물”은 살아있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제물은 죽어져야 제물인데 제물이면서 살아있으니, “살아있는 죽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롬 6장에 나오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의 정확한 표현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라고 말합니다. :1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요 4:23 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는데, 그 예배자는 예배 시간에 예배당에 앉아 있는 자가 아닙니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몸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예배를 잘 드리는 기준은 [떠들지 마!]였습니다. 선생님 중에 매를 들고 예배를 [감독]하는 분도 계셨고, 예배 중에 뒤로 나가서 벌서기가 예사였습니다. 예배를 잘 못 배운 것입니다.
오래전 큰 교회 철야기도가 유명한 교회에 한 신문기자가 새벽에 교회에 갔더니 철야기도를 마치고 나온 교인들이 육교 밑을 뛰어 건너면서 버스를 타려고 달려가는 모습을 조롱 섞인 표현으로 취재하여 기사를 쓴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예배의 진정한 모습은 주차장과 엘리베이터 앞과 식당, 집에 가서 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예배입니까?
여러분 중에 이처럼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 너무 지나친 요구라고 여길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이 구절은 설교하기가 너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이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느냐, 바치지 않느냐?’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디에’ 우리 자신을 바치느냐? 는 문제입니다.
:2에서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 사람은 이 시대의 풍조를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풍조가 무엇입니까? 마 12:39에서 주님은 악하고 음란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악하고 음란한 세상 풍조를 본받고 따르게 하려고 보이지 않지만 엄청난 힘으로 우리 마음에 역사하고 있음을 아십니까? 우리가 보고 듣는 것에 의하여 알게 모르게 마음이 묶여 끌려고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바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1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사정한다. 부탁한다” “힘들겠지만 순종해 보거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야, 이런 권면을 받는 너는 복 받은거야!” 그런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은 우리는 이미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요! 성공에 대하여 죽은 자요! 오직 하나님을 대하여만 산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다윗은 참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행전 13:22 에 보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는 것 보다 하나님을 더 원했습니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다윗이 어렸을 때, 들판에서 양을 지키다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찬양을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다윗은 하나님을 좋아했고 사랑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라면 막춤도 출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삼하 6:14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이런 다윗의 춤을 아내 미갈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비웃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예배 중에 나와서 춤을 추면 느낌이 어떠세요? 이상하지 않겠어요?
시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것이 다윗의 진심이었습니다,
시 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친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이런 차이는 마음의 차이입니다. 어제도 결혼식 주례를 했지만 다들 기뻐하고 축복하지만 사실 결혼은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행위인 것입니다. 만약 사랑을 빼면 두려운 일이고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빠지면 두렵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목사님, 우리가 정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길이지만 또한 너무나 쉬운 길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힘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주님이 가게 해주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라도 주님과 동행하면 너무나 쉽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했습니다.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아직도 마음에 변화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심하고 절망하고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란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이루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경은 분명히 “옛 사람이 죽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미 저와 여러분에게 이루어진 일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 하였는데, 마음 역시 하나님이 새롭게 하십니다.
겔 36:26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래서 “변화하라”가 아니라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님을 닮아서인지, 성격은 온순한 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에는 분노가 이글거렸습니다.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잘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마음이 불편했고 속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반듯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1984년 회심을 경험했을 때, 제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제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교회를 성장시키는 목회를 하려고 몸부림을 치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제게 골고다 산상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는 체험을 주셨습니다. 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양손과 발, 머리에 흐르는 피, 그리고 옆구리와 심장에서 쏟아지는 피를 보았습니다. 저는 십자가 앞에서 꼬꾸라져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체험을 하고 난 뒤, 제 마음 안에 무엇인가 꺽어진 것을 느꼈습니다. 성공에 대한 열망이 꺽어진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 깊이 느낀 것 뿐인데, 엄청난 내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또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감사만 나왔습니다. 그리고 목회에 대한 생각도 사람에 대한 눈도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바꾸어 주시는 분입니다.그러나 가만있으면서 마음에 변화가 오기를 기다리면 안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주님께 열어야 합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 가장 큰 마음의 변화입니다.그리고 믿음으로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분별이 옵니다.
: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조사옥 목사님이 번역하신 책, [어둠 속에 빛나는 등불을 들고]는 스티븐 메트카프 선교사님의 전기인데, 이 선교사님은 영국 사람으로 중국에서 태어나 십대 때 2차 대전이 일어나 일본 포로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스런 시절을 보내었던 분입니다.
일본군의 잔혹함을 보면서 일본 사람을 증오하였는데, 그 수용소에서 에릭 리델 선교사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뀝니다. 에릭 리델 선교사님은 1924년 파리 올림 금메달리스트입니다. 육상 100m가 주 종목이고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인데, 결승전이 주일에 열려서 포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이들이 400m 경기에 출전하게 하여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는 모든 명예와 부를 다 포기하고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였는데, 일본 포로수용소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와 성경공부 시간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논쟁이 일어납니다.
에릭 리델 선교사님은 메트카르에게 일본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도무지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일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보라고 권합니다, 그는 순종하여 억지로 일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마음이 뒤집어졌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일본 선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선교의 열매가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안수기도 받을 때, 성령의 역사, 쓰러지고 방언하는 일로 분별할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마음에 회개가 일어나고 확신이 생기고 사랑할 마음 순종할 마음이 일어나면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참 은혜로운 세례 간증문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왕국이 있었습니다. 지혜롭고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왕국의 성곽을 지키는 장수중에 무술이 뛰어나고 지혜와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지혜에 감사할 줄 알았고, 주어진 일에 항상 성실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왕으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왕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다음, 적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에게 칼을 버리고 갑옷을 벗게 하였습니다. 성곽 밖으로 나가 적을 물리치되 주어진 권세를 쓰지 말 것이며, 다만 사랑으로 적을 물리치라 하였습니다.
자신의 권세와 힘과 능력과 지혜로 쉽게 적을 물리칠 수 있건만, 이를 사용치 말고 단지 사랑으로 적을 승복시키라 하십니다.―저는 성령에 의지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순종은 육체적 고통이 따르고, 사랑은 스스로를 희생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의 군병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승복하겠습니다.'여러분,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친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그러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치라 하였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ALL IN] 이란 책을 쓴 마크 배터슨 목사님은 “나는 당신이 알코올중독이나 거식증을 평생 잘 이겨낼 수 있을지 잘 모른다. 그러나 오늘 딱 하루 동안은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
다음 주나 다음 해를 걱정하지 말라. 오늘 하루를 꽉 차게 살아라. 24시간 동안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가? 유혹과의 싸움에서 오늘 하루 동안 이길 수 있는가? 당신이 분명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당신도 알고 원수 사탄도 안다.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라!”
하루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몸을 하나님께 바쳐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 289장
1. 주 예수 내맘에 들어와 계신후 변하여 새사람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맘에 오심
2. 주 예수 내맘에 들어와 계신후 맘령된 행실을 끊고
머리털 보다더 많던 내죄가 눈보다 더 희어 졌네
3. 내맘에 소망을 든든히 가짐은 주 예수 내맘에 오심
의심의 구름이 사라져 버림도 주 에수 내 맘에 오심
4. 사망의 음침한 골짝기가 다가 밝은 빛 홀연히 비쳐
저말리 하늘 문 환하게 보임도 주 예수 내맘에 오심
5. 내가 저 천성에 올라가 살기는 주 에수 내맘에 오심
천성에 올라가 주님을 뵈리니 그 기쁨 비길데 없네
후렴
주 예수 내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듯 내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맘에 오심
거룩한 산 제사란 1 /롬12:1-2/ Paul Washer
2015-06-19 14:00:21
로마서 12장 1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권하노니 I urge you *urge : 강력히/간절히 설득하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설교는,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 문법적인 설명, 커뮤니케이션 기술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간곡하게 설득하는 것인데 (우리 말에 '권하노니')
죽음, 생명, 천국, 지옥을 다루되, 그것을 간절히 설득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urge입니다.
설교는 진리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로 자신을 돌아보고, 그 진리를 받아드리도록 권고하고/ 권유하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너무나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하는 사람이, 잘못된 멍에를 지울 수 있고,
말하는 것 중에 아무리 적은 실수도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그 설교에 대한 책임을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듣는 청중도 책임이 따릅니다.
들었던 모든 말씀에 대하여 책임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설교는 또한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도 책임을 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할 때, 단지 사람들에게 '이것이 진리다' 라고, 무성의하게 말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설교는, 간절한 마음으로, 간곡하게 전달되어져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한 것처럼, 성경 말씀을 전심으로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권고하고/ 간구하고/ 호소하십시오.
▲그러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거기에 반드시 따르게 됩니다.
프란시스 쉐퍼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썼었죠.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는, 매번 회중들에게,
'그러면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리를 주어야합니다.
당신(신학교에서 신학생들 앞에서 설교)이 알고 있는 진리의 양(amount)을 자랑하지 말고,
당신의 삶을 통해, 당신이 먼저 살아낸 말씀으로.. 설교하십시오.
때로 저는 장황한 강해설교를 듣는데, 저에겐 단지 <신약 개론>의 책 소개처럼 들릴 뿐입니다.
그들은 신약의 역사와, 도시의 거대함 등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배경 지식보다 더 이상의 것을 말하기 원합니다.
설교에서는, 성령의 내적 음성이 들려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설교지요!
그리고 그 설교를 들었을 때, 들은 것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설교를 필요로 합니다. 성령의 권고로!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설교자는, 고상하게 보이나,
설교를 농담처럼 하며,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인 것처럼 횡설수설 합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진리를 가볍게 다루지 않고, 무겁고 엄중하게 다룰 설교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설교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에서, '영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출34:29)
엘리아도 하나님을 대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겉옷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왕상19:13)
설교자는, 청중앞에 서기 전에, 이렇게 먼저 하나님 앞에 서야 하고, 하나님을 대면해야 합니다.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당신들이 누군가에게 진리를 설교할 때,
그들이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그들이 그것을 행하도록 간청하고 호소해야 합니다. "권하노니 I urge you"
우리는 지금 너무나 피상적인 (겉껍질 뿐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영원한 삶, 생명의 말씀 등의.. 속 깊은, 무거운 주제들을 다루기 싫어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강단에 섰을 때는,
영원과, 경건한 삶의 중요성에 대한.. 그런 심각한 진리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저 농담이나, 세상 살아가는 삶의 요령이 아니라요)
설교를 좀 심각하게 serious 해야 합니다. (요즘 너무 가벼운 설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설교자가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어떤 사람에겐 '사망에 이르는 냄새'를,
어떤 사람에겐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까? 고후2:16
이것(생명에 이르는 향기)이 당신에게 부여된 의무임을 깨닫습니까?
당신은 코미디언이나 나레이터가 아닙니다. 줄거리를 이야기 하거나 교수처럼 박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에 여러분은,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지자가 그랬듯이, 당신은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당신들을 조정해서 맞추도록 align,
그들에게 간청하고 부탁하여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롬12:1절에서 말한 '내가 권하노니.. I urge you'의 의미입니다.
때로 만약 우리가 길거리에서 설교하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마치 휫 필드가 가졌던 마음처럼, 동일한 심정으로 외쳐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기 심령을 위해 울지 않는다면, 저라도 여러분의 심령을 위해서 울어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믿는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간절히 간청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주제가 되지 않으면, 그 대화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 말은, 물론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진리를 듣기는 하지만, '들은 말씀을 자기 등 뒤로 던져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의 모임일지라도
너무나 쉽게 우리는, 세상의 스포츠 이야기로, 대화의 주제가 바뀌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율법학자들과, 왕들과, 선지자들이 오래 동안 보기 원했던 (눅10:24, 마13:17)
그 복음이 성취되고, 이루어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소중한 말씀을 듣지만, 설교 시간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일상의 날씨에 대한 대화들을 나눕니다.
따라서 당신이 설교할 때, 사람들에게, 자신이 듣는 이 말씀은
너무나 무거운(중대한) 내용이며, 신자는 반드시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해서 살아야'하는 것임을 강조해만 합니다.
◑너희 몸을 드리라 Present your bodies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형제들에게 간곡히 권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바울은 무엇을 권고하고 있습니까?
그는 형제들에게 '그들의 육체를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저는 거의 30년간 크리스천으로 사역자로 하나님을 섬겨 왔습니다.
그 동안 제게도 멋진 차, 집, 음식, 그 외 여러 가지.. 육체를 위한 것에 제 마음을 빼앗길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뺏어갈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하고, 일부만 헌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고상한 (외적인) 우리 자신을 요구 하시는 게 아니고, 우리의 삶 전체를 온전히 요구하십니다.
즉 우리 마음과 아울러, 몸까지 헌신을 다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롬12:1
경건 훈련의 목적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훈련에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에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저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방은 드리고, 어떤 방은 숨기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전체가 그 분께 거하고, 또한 주님이 제 안에 거하시는, 그런 동행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문화 안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이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문화는, 마음을 드리는 것을 강조하지만, 몸을 드리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마음과 아울러 몸까지 다 헌신해야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Present your bodies!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지금 교회에서 설교하는 바,
주일 교회 출석, 교회 봉사.. 이런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그 진의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세세한 의미를 포함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 말씀의 의미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진정 당신의 하나님이면 그분께만 헌신하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편으로, 분명하게 '서라, 드리라 present'는 뜻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왕상18:21
한낱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도 섬기듯이.. 절뚝거리며 왔다 갔다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받으실 만하시고, 또한 그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중요한 존재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로 인해 더렵혀집니다.
교회들은 이것을 알아야 하며, 성도들은 깨달아야합니다.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는, 당신을 나타낼 뿐 아니라,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반영합니다.
따라서 당신이 만약, 세상을 따라 산다면, 당장 멈추십시오.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중단하십시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그렇게 드리십시오.
▲여기 우리 사역자들도 이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젊은 신학생 여러분들은,
지금 이 때는, 젊은 열정으로.. 주님을 뜨겁게 섬길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 젊음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이가 들어가고 쇠약해지고, 세월의 흐름 속에 육체가 약해질 때가 반드시 옵니다.
우리에게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우리 젊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일례로, 본문의 말씀을 붙잡고, 끊임없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그 사람은,
늙어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될 것입니다.
▲사역자 중에 일부는, 사역에서 큰 성공을 체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성공을 맛본 사람이,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목회적 성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다윗처럼) 영적전쟁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하는데
자신들이 충분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가야 할 때에 집에서 쉬고 있게 됩니다.
바로 그때 유혹에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우리는 지속적으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소유입니다. 우리 자신을 언제나 드려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바울사도는 당신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자기 생각'과, 겉으로 표현되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당신이, 죄인인 누군가에게, 그가 죄에 빠져 있음을 이야기하면
'책 표면으로 책 내용을 판단할 수 없다'고 그는 반박할 것입니다.
죄에 빠진 누군가를 지적하면
그는 '당신이 나의 행동을 정죄할 수는 있지만, 나의 마음을 판단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마음을 모른다'고, 그들은 말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 구절에서
"(마음 뿐만 아니라) 너희 몸을 드리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육체와 마음을 분리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면,
그건 우리 몸(육체)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중략)
▲히브리 민족 역사에서 세대를 거치는 동안 계속 강조하는 것은,
주 너희 하나님을 너의 온 존재를 가지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질투하시기까지 원하십니다. 당신은 그분의 것입니다.
당신의 이 모든 것이 그분 것입니다. 이제 더 당신의 삶이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의 호흡이 아닙니다. 더 이상 당신을 위한 심장도 ,손도, 발도, 눈도, 입술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그 분께 속하였으며,
우리의 모든 것이 말씀에 나타낸 그분의 성품과 뜻에 의해 그분에 의해 주관되게 됩니다.
이것이 청교도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가지고자 찾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행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인에 대한 종(노예)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너무 많은 크리스천들이, 귀에 구멍을 뚫고 목에 타투를 그리면서 ('나는 종입니다'라는 뜻으로)
그것으로 자신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봅니다.
어떻게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겁니까?
그러한 것들이 저에겐 당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영혼의 갈급함, 죄에 대한 애통함, 그 분 안에서의 기뻐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광스러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진정한 그분의 종인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당신의 행동이 당신 마음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어 줍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께 아첨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를 아는 누군가가 생각하는 내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기(신학교)보다 더 복음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당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헌신할 수 있다면.. 그곳은 바로 여기 신학교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에게 이것을 말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생명을 드리는 헌신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분께 매료당해 있지 않다면
그 험한 목회지인 선교현장에서 홀로 남겨질 때 당신은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학위를 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분이 당신을 취하여 그분께 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제물로 그 분께 드리십시오.
제물에 대한 것을 언급하려면, 손실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것의 비용에 대한 것을 계산해 보았습니까?
당신이 정말 그분과 동행한다면 거기에는 굉장한 손실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신에 대한 죽음이 있을 것입니다.
위대하고 최고의 것을 당신의 삶에 접목시키고 당신을
그분께 돌이키기 위해, 당신의 삶에서 버려야 할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 어떤 분이 저의 믿음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저는 에스겔 36장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그 분의 권능에 반응할 수 없게 하셨고
나의 강퍅한 육신의 마음으로는, 그분의 은혜에 반응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인도하심 속에, 나를 나의 죄 된 지경에서, 그의 은혜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의 추악함 속에서 모든 나의 우상을 제거하시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그것이 대가입니다.
당신 자신을 그분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자세를 훈련하십시오.
당신을 그분께 드림으로 그분이 당신을 통해 더욱 드러내십니다. (다음 호에 계속)
구원의 삶(1)/ 몸을 드리라 /롬12:1-/ 하용조 목사
2015-05-23 18:09:52
삶으로 드러나는 구원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대 드라마를 전체적으로 보았습니다. 구원은 개인의 구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개인의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으로 마무리됩니다.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 우리는 인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차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갑니다. 그러나 구원의 놀라움, 그 감격 때문에 그는 논리적으로 끝맺지 못하고 감격과 찬양으로 로마서 11장을 마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감격과 찬양이 있기를 바랍니다.
신구약 66권을 전부 읽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가지 책을 읽으면 성경의 중심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로마서,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세 책은 여러분들이 열심히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특별히 로마서를 중심으로 보면, 앞으로는 창세기가, 뒤로는 요한계시록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예언서를 정독하시면 성경의 중심사상을 분명하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구원은 이론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구원은 교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교리로 이해하기 때문에 능력이 없습니다. 삶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형식에 그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이 구원을 이야기하다가 그 구원이 찬송으로 변하면서 삶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로마서 12장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장 1절은 세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가 한 부분입니다. 중요한 핵심부분은 둘째부분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세번째 부분은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구원받은대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면, 그 구원받은대로 사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을 12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고 특별히 1절에서는 이것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7장에서 하셨던 산상설교가 생각이 납니다. 산상설교는 천국의 대헌장입니다. 이것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과 로마서 12장은 이런 의미에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자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그 핵심이 두번째 부분에 있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다음부분인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러므로라는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로마서 1~11장과 12~16장을 연결하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라는 뜻은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율법이나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의롭게 된다고 하는, 이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깨달았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구원받은 자로서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또 로마서 5장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구원받은 자로서 섰다면, 당신이 결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을 받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면, 성령의 법에 지배를 받게 되었다면, 당신은 이렇게 사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로마서의 구원의 핵심은 이런 개인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구원이 이방인들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요, 온 이스라엘까지 구하는 것이라면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원래 구원은 이스라엘에게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완악해 짐으로 말미암아 구원은 이방인에게로 갔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차기까지 이스라엘은 완악한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이방인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온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실패케 하셨고,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인하여 온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만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주적인 구원의 대 드라마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에는 당신이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면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처럼 세가지 중요한 내용을 이 그러므로가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 없는 사람은 구원의 삶도 없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열심히 살면 허무와 후회만 남습니다. 인생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가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 합니다. 이 해답을 가진 자만이 공부를 해도, 돈을 벌어도, 결혼을 해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론을 알아야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봉사는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알고 봉사하면 더욱 값지게 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어떻게 구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진 말씀
두번째 나오는 말씀은 형제들아입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형제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성경도 세상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택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요구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받고 행동하고 순종해야 할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듣고 은혜받으면 그래, 이건 아무개 집사가 들어야 해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들어야 합니다. 말씀은 내가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깨달은 사람에게 이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서 실망하고, 설교를 듣고 실망하고,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기독교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진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는 할렐루야 ! 아멘 !할지 몰라도, 집에서는 날마다 신경질을 내고 말이 거칠고 이기적이라면 그 사람을 보고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가 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구원은 있지만 구원받은 삶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가 이토록 타락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숫자가 많다고 진리가 아닙니다. 참된 진리는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만이 구원받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구원받은 자의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진 메시지가 아니라 여러분과 저에게 주어진 메시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나가서 떠들면서 전도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삶에 신실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의 삶을 보여준다면,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아도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이원론적인 삶을 삽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천국을 독점한 것같이 행동하다가도 교회 문을 나가는 순간부터 세상 사람으로 변합니다. 세상 법대로 삽니다. 세상의 방법대로 삽니다. 그러면서 다 그런거지라고 말합니다. 뭐가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고 교회에 들어와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어쩌면 세상에서 외로운 존재들입니다. 핍박받고 인기가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법대로 살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번째,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입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의 영적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을 이야기하고 구원받은 자의 삶을 이야기 하려고 할 때, 사도 바울은 얼마나 겸손하게 말합니까?
어떤 사람은 내가 진리를 다 아니까 내 말을 따르라 !라고 호통을 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야단을 치거나 꾸짖지 않았습니다. 비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많은 설교자와 윤리운동 실천가들은 꾸짖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를 꾸짖고 싶다면 여러분이 꾸짖지 말고 성경이 꾸짖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꾸짖게 하십시오.
내가 꾸짖으면 그 사람은 상처를 받습니다. 특별히 정의에 민감한 사람은 당신도 정의를 전부 실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 정죄를 받아야 하는 죄인인 것입니다.
심판자는 하나님 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우리는 서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서로를 축복하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정죄를 통해서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 변합니다.
충고하고 야단친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만 나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뿐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감싸주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사람들을 야단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얼마든지 야단치실 자격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야단치는 것을 많이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남편들이여, 아내 야단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십시오. 이해하십시오. 격려해 주십시오. 그러면 빨리 고쳐집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바가지 긁지 마십시오. 바가지는 소리만 나지 절대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격려하십시오. 사람은 사랑으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못된 자식을 고치려는 간절한 아비의 마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죄인이지만 우리 하나님의 법대로 한번 살아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 용기를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또 넘어지고 또 깨지지만, 오늘 이 말씀을 듣고 다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용기를 얻고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크리스천은 제물이다
그러면, 구원받은 자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먼저 정확한 정의부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1절 후반부에 나타나 있습니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예수믿는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사람, 이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천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사법을 가지고 크리스천의 삶을 설명합니다. 아주 독특한 설명입니다.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제물없는 제사가 있습니까?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 사람들은 음식도 하고 돼지도 잡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물입니다. 제물은 무엇입니까? 바쳐지는 것입니다. 희생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소나 양을 잡아 죽여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피를 뿌려서 내 죄를 대신하여 제물이 죽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내 죄가 용서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제물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한 제물이었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입니다.
제물은 말이 없어야 합니다.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왜 제물이 되냐?라고 하면 안됩니다. 제물은 자기 죄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때문에 희생을 당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구원은 없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이 세상을 위한 희생 제물입니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 쓰고 제물이 되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입니다.
이익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믿고 건강해지고, 부자가 되고 축복을 받는 것만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참된 모습은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가리켜 구원받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사야 53장 7절에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또 이사야 53장 5절에는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서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바꾸어서 읽으면 구원받은 자의 삶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그 리스도인의 찔림은 세상 사람들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리스도인의 상함은 세상 사람들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리스도인이 징계를 받음으로 세상사람들이 평화를 누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채찍에 맞음으로 세상사람들이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으면 그 사람을 가리켜 사람들은 빛 혹은 소금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왜 크리스천이 목말라 할까요? 헌금도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데 뭔가 허전합니다. 왜 그런줄 아십니까?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어딘가 외롭고,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몸을 드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이나 이념,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독합니다. 몸이 없기 때문입니다. 몸이 없으면 영도 없습니다. 영은 몸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영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몸입니다.
따라서 크리스천의 삶은 영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요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렇습니다. 마음으로는 벌써 선교사도 몇 번이나 하고, 십일조도 하고,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다만 몸이 따르지 못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내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간을 드리지 않고 어떻게 몸을 드릴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고상하게 플라토닉 러브, 정신적 사랑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정신으로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몸으로 사랑해야 하지 않습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영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몸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원하십니다. 몸은 시간이요 은사입니다. 찬양으로 섬기는 분들은 자신의 몸으로 섬기는 분들입니다.
저는 설교를 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돌보든지, 화장실 청소를 하든지, 주차안내를 하든지, 우리 몸이 움직일 때 신앙의 실체가 보이는 것입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관념적이 되거나 이성적이 됩니다. 현실이 없습니다. 몸이 없는 사람은 받을 축복도 없습니다.
참된 예배란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몸이 가면 마음이 따라옵니다. 그러면 몸이 건강해 집니다. 하지만 몸이라고 같은 몸이 아닙니다. 어떤 몸이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몸을 받지 않으십니다. 제사에서 흠없고 티없는 제물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의 깨끗한 몸을 원하십니다.
헌금이라고 같은 헌금이 아닙니다. 땀 흘리고,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는 헌금이어야 합니다. 먹고싶은 것을 먹지 않고, 사고 싶은 것을 사지 않고 드리는 돈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돈을 통하여 기적과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바쁘지만 하나님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에다가 우선순위를 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당신이 내 대신 가서 예배드리고 와.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다가 국회의원이 된 후 바빠서 교회에 못옵니다. 대신 다른 사람은 보냅니다. 몸이 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카터 대통령은 꼭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고, 아무리 국정이 바빠도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입니까?
이것이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은 형식이나 관념에 있지 않습니다. 몸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직장도 중요합니다. 봉사가 교회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직장은 여러분이 봉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여러분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왜 빨래만 하나?, 나는 왜 기저귀만 치우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곳이 예배의 처소요, 그곳이 예배입니다. 교회에 와서 드리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라 삶이 예배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선교지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변화시키라고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제물이 안된 사람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제물이 되십시오. 희생 양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 조직이 변합니다. 세상이 변합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게 됩니다.
몸은 깨끗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헌금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기도하는 돈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를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죽은 제사는 냄새가 납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 제사는 영향을 줍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열매가 있습니다.
이제 1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은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봉사(service)입니다. 참된 예배란 온전한 헌신과 봉사를 의미합니다. 헌신과 봉사가 없는 사람은 예배가 없는 사람입니다. 물질로도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헌신할 때 진정한 신앙이, 건강한 신앙이 자라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구원받은 자로서
제물되어 살게 하옵소서
제물 되었을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게
하옵시고, 희생하는 기쁨으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구원의 삶(2)/ 변화를 받으라 /롬12:2/ 하용조 목사
2015-05-23 18:07:28
너희는 이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하라
크리스천의 삶 - 제물
지난 주에 저희들은 로마서 12장 1절을 통하여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영적 예배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배라고 할 때 서비스(service)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의 뜻에는 예배란 뜻과 함께 봉사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으로 여러분께 봉사하고, 또 성가대 여러분은 목소리로 하나님께 봉사하고, 연주하시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주차봉사를 하며 삶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처럼 예배와 삶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예배와 삶은 하나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예배입니다. 그것은 노동입니다. 내 몸이 가는 곳이 예배할 처소입니다. 주일날 드리는 두시간을 따로 떼어서 예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포함해 삶 전체로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너무 나 놀라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외우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제물은 희생입니다. 희생이 없는 제물은 없습니다. 따라서 제물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제사에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경제계에도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제물은 자기가 잘못한 것 때문에 희생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크리스천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많고 예수믿는 사람도 많은데 왜 세상이 변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크리스천이 제물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제물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제물이 되라고 하면 하시겠습니까? 저는 예수는 믿지만 제물은 되기 싫습니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도 제물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희생양이 있으면 가정이 행복합니다. 교회에도 제물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 우리들이 들은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제물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즉, 제물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가리켜 크리스천, 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크리스천이 가는 곳마다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 가리켜 빛과 소금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두가지 원리
그렇다면 이 크리스천의 행동강령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두가지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지말라입니다. 둘째는 하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율법도 이 두가지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시대에 따라 가치관과 진리관은 달라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세상을 따라갑니다. 세상을 따라가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행을 따라가고 세상이 좋아하는대로 합니다. 하지만 진리는 영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따라가지 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원리입니다.
두번째 원리는 첫번째보다 적극적인 것입니다. 너희 심령이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게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게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아야 종은 일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뜻도 모른채 종이 제 마음대로 일을 하면 그것은 주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일은 열심히 했는데 주인과는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를 했는데 하나님의 뜻도 모른채 내 마음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서 그대로 해야 합니다. 더도 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심이 없거나 믿음이 없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시간과 돈, 건강을 다 낭비하고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2절을 보게됩니다. 1절이 크리스천의 삶을 정의하고 있다면 2절은 크리스천의 행동하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1절과 2절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을 전부 외우십시오. 이 말씀은 통채로 먹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라
먼저 하지말라는 소극적인 명령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예수믿고 구원받은 사람으로 잘 살려면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세상을 따라 살면, 세상방법대로 살면 예수믿는 삶을 살 수 없다.
문제는 내가 세상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에 있으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텐데 내가 살고 있는 현 주소가 세상 한복판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만나 일을 해야 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들은 우리와 생각하는 것과 사는 방법이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릅니다. 소속이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중심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갈등이 있고 고민이 있습니다. 세상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내게 접근해 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크리스천은 간첩과 같습니다. 간첩이 아닌 것처럼 삽니다. 그런데 밤만되면 무전을 칩니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살다가 밤만되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있지만 여러분들은 목적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물질 중심적이지만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목표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직업의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내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몇가지 모델들을 제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백년간 종살이를 합니다. 우리는 일제에 46년간 종살이를 했는데 아직도 일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상처가 많습니다. 그런데 4백년간 종살이를 했으면 어떻겠습니까? 정치 문화 경제 사고방식 모든 것이 애굽의 사람과 같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빼내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라는 사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셨습니다. 이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
여러분,
마귀가 여러분을 쉽게 놔주겠습니까? 쉽게 놔주지 않습니다. 뒷다리를 꼭 잡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마귀는 10번을 잡았습니다. 이런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예수를 잘 믿으려고 하면 꼭 뒷다리를 잡지 않습니까?
마귀는 쉽게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빼내셨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오래 사셨던 여려분,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4백년간 애굽의 때가 묻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할 수 없이 때를 벗기셨습니다. 그 때를 벗기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때를 벗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마실 것을 마시지 못하면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살 수 없는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셔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또 있습니다. 70년 포로생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가지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없애셨습니다. 그리고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방법대로 살지 않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들에게 배울 교훈이 있습니다. 그들은 2천년동안 전 세계로 유리방황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자식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이방문화 속에 살면서도 성경에서 금지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문화도 바꿨습니다. 비행기를 타면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이 먹을 수 있는 식사가 제공됩니다.
여러분,
세상이 이스라엘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이 세상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제는 얼마나 우리가 타협을 했는지 관공서에서 주일날 시험을 치릅니다. 세상 사람이 다 되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의 그 특이한 태도, 믿음, 생활을 다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을 보면 아주 적절한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은 변하기 때문에 세상을 좇아가는 사람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촌스럽고, 바보스럽고, 시대에 맞지 않는 것같지만 그는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 8절에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우리는 소속과 위치, 신분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에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우리의 임금은 예수 그리스도요, 우리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세상대로 사느냐 성경대로 사느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단호하게 구원받은 성도라면 세상을 따라가지 마라 !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 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저희 부모님을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적부터 교육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저희 집안은 피난을 내려와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희 부모님은 매일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제게 믿음이 없을 때부터 저는 그것을 보며 자랐습니다. 이것이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저희 집은 하루에 두번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날에는 밖에서 음식도 사먹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는 물론입니다. 언제나 교회중심의 생활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문화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같고 촌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자식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율법주의가 지나치면 오히려 예수님을 잃어버립니다. 그럼에도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만약 크리스천들이 주일날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면 주일날에는 오락성 프로그램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텔레비전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텔레비전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변화를 받으라
두번째로 적극적으로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변화를 받는다는 말은 거듭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란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듯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며 저주의 자식이며 사단의 자식이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고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변화없이 새출발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 모두가 거듭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 갈등하시는 분들은 오늘 거듭나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거듭나십시오. 거듭나야만 새로운 출발이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출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북한에 있는 사람이 남한에 내려와야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북한에서 자유롭게 살려고 해도 북한에 있는 한 자유는 없습니다. 사단의 손아귀에 있는 한 여러분들이 아무리 잘살고 싶고, 정직하고 싶고, 의롭고 싶고, 정직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마귀의 세력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어둠의 세력, 저주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빛의 자녀로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변화를 받습니까? 두가지 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인해 변화를 받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을 보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내 안에 있는 정죄감, 죄책감, 죄가 다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먹게 될 것입니다. 그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살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 살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성만찬 할 때 거듭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두번째,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사함을 받으면 생명의 성령이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변화되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이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선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부분이 아닌 온전합니다. 구약과 신약이 짝을 이루듯이 하나님의 뜻은 온전합니다.
여러분,
무엇이든지 알면 쉽고 모르면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쉽고, 모르면 어렵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거나 암에 걸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삶을 알게 되면 우리는 기쁘고 즐겁고 신이 납니다. 이것은 고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억지로 끌려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는데 그 길로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오기는 하지만 꼭 늦게 오고, 설교 시간에는 좁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충만함으로 삽니다. 7시에 오라고 하면 1시에 옵니다. 그런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연애하는 사람이 늦게 가는 것 보셨습니까? 7시에 만나자고 해도 그 전에 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고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쁨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돈이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병이 들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서 그분이 나를 지배하시고 다스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
종은 주인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알면 쉽고 모르면 어렵습니다. 목표가 없는 것을 가리켜 방황이라고 합니다. 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가기는 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돈을 버는 목적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래사는 이유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결혼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자녀를 교육하는 목적이 있어야 하며, 직장생활을하는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직장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재미있어 합니다. 상사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이 사람에게는 삶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변화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지난번에 어느 자매의 임종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주대학교 응급실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당신의 임종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당신은 의사와 간호사 외에는 만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십시오. 제가 전하면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전하면 믿을 겁니다.그랬더니 자매님이 웃기 시작합니다. 사명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죽는 순간에 사명을 발견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 그러더니 일반병동으로 옮겨갔습니다.
완전무장한 군인같이 온 몸에 바늘과 호스가 꽂혀있었지만 사명을 발견하니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분이 나는 오늘 죽지만 내 마음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고 전도할 때 그분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사명을 발견하면 응급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겨갈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나의 모든 실패를 바꾸어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며, 내가 저주라고 생각했던 삶의 모든 고통이 변하여 축복이 될줄로 믿습니다.
이 말씀에 매우 적합한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검증하는 방법이 세가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뜻은 기쁩니다. 영혼이 기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손해냐 이익이냐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한 길을 선택한 뒤 불안해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힘든 길일지라도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뜻은 계속 그 일이 기도제목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크게 두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이 있고 기쁨이 있고 온전합니다. 동시에 내 안에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흘러넘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가지를 배웠습니다. 세상을 따라가지 마라라는 것입니다. 외롭고 힘이 들지라도 그 길을 계속 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선택한 길은 옳은 길입니다. 두번째는 마음이 새롭게 되어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라. 그리고 그 뜻대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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