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와 성공 /롬11:11-16/ 하용조목사
2015-05-27 11:23:52
구원의 절정
성경의 가장 신비로운 주제중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왜 이스라엘의 실패가 모든 이방인의 구원이 되었을까요? 이것은 무척 신비스럽습니다. 또 한가지, 유대인들은 2천년 동안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고난을 겪은 민족입니다. 6백만명이 학살을 당했고 나라없이 전세계를 방황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은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전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비스럽습니다. 마귀는 우리들의 눈을 가리워서 이스라엘을 성경적인 관점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정치, 군사, 문화,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게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여느 나라와 같은 나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귀가 우리들의 눈을 가린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선교를 말하는 교회가 별로 없습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선교는 많이 이야기하지만,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고 이스라엘을 위한 비전을 가진 교회는 극히 드뭅니다.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축복의 근거로써의 이스라엘을 보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좧구원의 절정좩으로 말합니다. 로마서는 구원에 관한 책입니다. 1장부터 8장까지는 우리가 무척 좋아하는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방인의 구원, 자연인의 구원, 개인의 구원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9장부터 11장은 로마서 중에서 가장 배척을 받는 장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나하고 상관이 없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절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1장부터 8장까지는 개인의 구원을, 9장부터 11장까지는 온 인류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온 인류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구원, 이 두가지가 들어맞아야 역사의 마지막 때가 옵니다. 구원의 완성이 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2천명 선교사를 1만 2천 종족에게 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방인들을 어떻게 다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1만 2천 종족, 22억 인구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고, 중국만해도 12억의 인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하는 동안 인구는 계속 증가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몇 백년 몇 천년이 간다한들 구원이 완성되겠습니까?
여러분,이렇듯 이스라엘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없으면 선교의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선교가 끝입니다. 끝을 맡아놓으면 과정이 단축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와 민족적으로,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몹시 멀기 때문에, 또 강원도 땅덩어리만한 것이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전인류, 모든 이방인과 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창립 때부터 이스라엘에 대해 눈을 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참으로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2천/1만 비전을 갖게 되고 또 11년 만에 이렇게 큰 교회로 자라게 된 것은 우리가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남은 자로서 일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 민족과 교회와 개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자물쇠와 열쇠
특별히 로마서 11장에는 구원의 절정, 대단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11장 첫머리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라는 질문에 사도 바울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영원한 실패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중동의 한 모퉁이가 세계 뉴스의 촛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 참으로 신비스러운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찾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선교적으로 이스라엘과 우리와는 기가막힌 관계가 있습니다. 이방인을 자물쇠로 본다면 이스라엘은 열쇠입니다. 열쇠로 열어야 자물쇠가 열립니다.
여러분,절대로 이스라엘의 구원없이 이방인만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실족하게 하시고 실패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실족하고 실패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버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반드시 다시 찾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못박은 이후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자라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땅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가 보십시오. 지금 이스라엘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메시야를 배척합니다. 그도록 메시야를 배척하는 이스라엘은 멸망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택한 사람은 반드시 구원하는 것처럼 아무리 잘못하고 실수를 했어도 이스라엘을 다시 찾으시고, 부르시고, 회복하셔서 인류역사의 완성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하실 것입니다.
넘어지지 않을 만큼의 실족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지난주에 공부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 7천명을 남겨 두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하셨던 것처럼,
지금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남은 자들-여러분과 저, 성령받은 우리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회복케 하시는 것입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이스라엘이 실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기득권, 불신앙, 불순종, 오만 때문에 메시야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메시야를 환영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실패한 것입니다. 실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라고 합니다. 실패하긴 했는데 그 실패가 멸망이냐? 끝이냐? 패배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실족한 것은 분명하지만 망하기까지 실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실패는 하나님을 떠나고 구원을 잃어버리는 실패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예수를 믿다보면 실패하고, 실족하고, 탕자가 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망하진 않습니다.
여러분,죄가 하나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진홍같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 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을 구원하고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발을 잘못 디뎠습니다. 넘어졌습니다. 이 넘어진 것이 망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버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도미노현상과 같은 것입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보여준 적이 있는데 하나가 넘어지면 줄줄이 다 무너지는 그런 것을 도미노현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실족해서 넘어지면서 이방인이라는 도미노를 친 것입니다. 망하는 쪽으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이방인쪽으로 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없었더라면 이방인의 구원도 없었습니다. 이 얘기가 11절 중간에 나옵니다.
이 도미노현상처럼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복음이 이방인에게 급속도로 전해졌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로 복음이 퍼져 나갔습니다.
바울의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복음은 중앙아시아 뿐만아니라 터어키를 지나 지중해를 건너 빌립보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복음은 학문과 철학의 도시 아덴으로, 상업의 중심인 고린도로, 종교과 예술의 도시 예베소로 그리고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까지 침투해 들어간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온 유럽이 복음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개인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전 이방인들에게 2천년 동안 바람처럼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바람이 한국까지 온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이스라엘이 실패때문입니다. 이것이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유대인에서 이방인에게로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사람은 미국인이지만 사실은 유대인이 복음을 전해준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유대인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입니다. 베드로가, 스데반이, 빌립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열 두 제자가 그렇습니다. 그들이 창에 찔리고,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밀어뜨림을 당하고,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히고, 돌에 맞아 죽어가며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요, 유대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이것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부터 28장까지 보면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으며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 옥에 가두는 종교적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숨어 있던 사람까지 잡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순간, 바울은 그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그 사람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사도 바울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의 지성과 학문에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자기 직업 학문을 다 포기합니다. 자기의 모든 과거를 다 배설물로 여기고 그는 고독하고 외로운 전도자가 됩니다. 그리고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사도 바울이 처음부터 이방인전도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을 모아 놓고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과거의 자기처럼 화를 내며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성전 밖으로 내몰려고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내밀려고 하고, 바울을 죽이기 전에서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겠다는 청년들이 결사대를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유대인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유대인들은 귀를 막고, 눈을 막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할 수 없이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가니까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정신없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13장 4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의 이유입니다. 48절을 보면 이방인들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였는가 설명합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할렐루야 !
이것이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실패가 여러분 가정이 복음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병이 들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없는 실패는 영원한 실패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실패는 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실패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오만과 불순종과 불신앙과 종교적인 기득권 때문에 매를 맞았지만 그 결과 이방인인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실패가 부요함이 되거든...
12절을 보겠습니다.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의 실패는 세상의 부요함이요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충만함은 어떤 결과를 낳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에게 이런 복을 주었다면 이스라엘의 충만함은 어떤 결과를 낳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희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신 것처럼, 온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수준이 훨씬 높지만 영적인 수준은 형편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사막같은 이스라엘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헌금하고, 기도해주고, 교회를 세우고, 도와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을 돕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로 이방인이 구원받는 정도라면 그들의 충만함은 어떻겠습니까? 역사의 마지막 때에 그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역사를 완성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반드시 회복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11장의 결론입니다.
구원의 결론입니다.
구멍 뚫린 병에 물을 가득 채우려면 무엇부터 해야합니까? 먼저 구멍을 막아야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을 막아놓으면 이방인들이 겉잡을 수 없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고있는 전도방법으로는 10년, 20년 해야 겨우 몇 사람 전도합니다. 이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워지면 모든 구원받은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다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할렐루야 !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세지입니다.
시기하는 이스라엘
13절~1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생각하는 것과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생각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우리들은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 별로 큰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사람이 개나 돼지같은 이방인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죽는다는 것은 우리의 감정과 비교도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내가 이방인들을 위해 사도가 되었고 이것을 수치가 아닌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내가 예수믿고 구원받은 너희 모든 이방인들과 교회에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희생당하고 실패한 이스라엘은 한사람도 복음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내 민족, 내 골육 때문에 이렇게 속이 상한다. 이방인들을 내가 섬기지만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망한 내 민족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한 내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고 도와달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시기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중 몇 사람이라도 구원받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렇게 많이 예수를 믿지 않느냐? 이렇게 많은 교회가 있지 않느냐? 그러나 예루살렘에 가보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온누리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참 신비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교회는 창립 때부터 이스라엘 선교를 위해 일했습니다. 구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성경적으로 이해를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서 1장부터 지금까지 공부를 해오니까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부터 브리야트족, 베다족, 이반족, 투르크족, 아제르족, 하니족, 위그르족을 위해 기도할 때 북한을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여러분의 기도 속에 꼭 이스라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번에 열흘동안 이스라엘로 비전 트립을 갑니다.
이것은 성지를 순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도울까? 그래서 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옷 입고 가서 다 벗어 놓고 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구 소련에서 온 가난한 유대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핍박받고 힘들게 삽니다. 생명의 위협도 받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국제적인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돈이 많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많이 오기 때문도 아닙니다. 꼭 해야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고, 이스라엘을 얽매고 있는 마귀를 내쫓고 해야 세계선교의 고삐가 풀어집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들이 이번에 이스라엘로 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선교를 푸는 열쇠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15절을 보겠습니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다면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부활이 아니냐? 부활의 축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의 개인적인 실패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통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개인적인 실수와 실패때문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에게 구원이 되었다면 여러분의 실패와 좌절도 하나님에게는 복을 주시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대학에 떨어진 것이 신학교에 가는 계기가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 모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금년 한 해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의 비밀 !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 풍성한 축을 더하여 주실줄로 믿습니다.
admin
댁쟾쇰줈
자랑할 수 없는 이방인들 /롬11:17-34/ 하용조목사
2015-05-27 12:58:35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가 개인의 구원,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라면 9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구원, 곧 인류의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강원도만한 크기의 땅에 인구 5백40만~50만 정도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군사적으로 이스라엘과 PLO의 대립관계 같은 식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교회도 중국이나 스리랑카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처럼 그저 이스라엘을 선교대상국가 중 하나로 봅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견 해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이방세계를 하나로 보고 이스라엘을 하나로 봅니다. 모든 이방세계가 구원받고,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우주적인 영원한 계획이 완성되는 것, 이것이 성경적인 구원론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이 인류의 구원이요 구원의 완성이라고 교회는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구원의 뿌리
먼저 구원의 뿌리에 대 해서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나를 택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셔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에는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원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 내가 받을 자격이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심판받아야 할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천국백성으로 만들어주셨다는 이 감격스러운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감격으로, 이 감사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감격과 감사대신에 원망, 불평, 불순종, 교만, 종교적 기득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선택받은 백성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실패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이방인들의 구원의 뿌리는 이스라엘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이방인들은 구원받은 것을 감격해 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구원에 감격해 하면서, 구원의 뿌리를 생각하면서 자만하거나 자긍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우리 이방인 크리스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에게 교회도 많아지고, 믿는 사람도 많아지니까 거꾸로 우리가 이스라엘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느껴져서 우리는 영적으로 자고하고 자만해 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은 결코 자랑할 수 없다. 결코 교만해서는 안된다. 너희의 축복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잘 살펴 보아라.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로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16절을 보시겠습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여러분, 떡덩이가 거룩해서 가루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첫 열매 즉 가루가 거룩하기 때문에 떡덩이가 거룩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이 거룩하기 때문에 이방인이 거룩한 것입니다.
꺾여진 가지,접붙여진 가지
좀더 구체적인 비유를 17절에서 보게됩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이 비유는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비유입니다.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꺾여져서 돌감람나무가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꺾여짐이 이방인의 접붙임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꺾여짐이 없었다면 이방인의 접붙임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방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들이 잘났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믿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로 믿습니다. 하지만 한 3년 정도 지나면 율법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처음믿으면 감사와 기쁨이 있지만, 오래 지나면 이스라엘처럼 강퍅해 집니다. 교만해지고 감격을 잃어버립니다.
17절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서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돌감람나무의 뿌리는 어디입니까? 바로 참감람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뿌리입니다. 참감람나무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돌감람나무가 은혜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참감람나무가 꺾어진 것은 돌감람나무에게는 은혜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만하거나 교만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18절에서 가지의 비유를 듭니다. 18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찌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가지가 우선이 아닙니다. 뿌리가 우선입니다. 뿌리가 있기 때문에 가지가 있고, 가지가 있기 때문에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거룩하기 때문에 뿌리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뿌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가지가 거룩한 것입니다.
여기서 뿌리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리고 「가지」는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된 모든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는 그 사람의 영적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적태도에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배여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오만하고, 방자하고, 겸손이 없고, 기쁨도 없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자랑한다면 이 사람이 받은 구원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태도는 항상 겸손하고, 눈물이 있고, 온유하며, 감격이 있습니다. 이 감격은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서 전할 정도인 것입니다.
이방인 사도의 가슴앓이
로마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들을 향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믿는 사람을 핍박하다가 예수를 알게 되었고, 그 후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가게되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하게 하시고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주셨구나!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그는 복음을 부인한 자기 동족을 생각했습니다. 가슴앓이가 있었는데 바울의 이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기쁜 일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아, 이스라엘아하셨던 그 마음을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지난 2천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2천년의 기독교 역사란 간단합니다. 모든 이방인이 구원받는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이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빌립보로, 아덴으로, 고린도로, 에베소로, 그리고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뒤집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로마가 어떻게 기독교국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로마는 전 유럽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유럽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우주적인 것이고 전 인류가 받아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카톨릭의 핍박과 학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유래없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미국은 그 후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열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었던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전세계의 복음화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미국이 복음을 받고 나서부터입니다. 이 미국을 통하여 전 세계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로, 남미로, 아시아로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1백년 전에 한국이 복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만, 우리나라가 이스라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성경과 무슨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무당의 자식이요, 역사적으로 단군을 믿고 산 민족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서 선교사를 보내셔서 이 땅이 눈을 뜨게 하셨고, 세계에서 유래없는 기독교 강국을 만드셨습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셔서 기독교 지성인들을 만드시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제사장 나라로 만들어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이렇게 전 세계가 사도행전 1장 8절 이후로 복을 받았지만, 그러나 이 축복의 발상지였던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메시야를 거부하고 영적 빈곤상태에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고, 복을 받았습니다. 전 유럽, 전 미국,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모두 복음을 받게 되어서 이제는 기독교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AD와 BC를 쓸 만큼, 역사는 기독교 중심으로, 예수 중심으로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 카드, 이스라엘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기 쉬운 메시지를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함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9장과 10장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와 믿음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행위와 율법으로 나가려고 하는 기득권을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여지없이 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원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실패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잘못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의 영적인, 구원론적인 의미는 19절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희생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온 인류의 구원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양이 된 것 처럼,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이 희생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그들이 학살을 당하고 전 세계로 방황하게 된 것은 그들이 메시야를 죽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오만하고 자긍하면 안됩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때문에 이스라엘이 희생당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6백만명이 희생당할만큼 큰 죄가 어디있겠습니까? 2천년동안 전 세계를 떠돌아다녀야 할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왜 그런줄 아십니까?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차기까지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돌아오고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역사가 완성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돌아오기까지 이스라엘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겪으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을 많은 다른 국가중의 한 국가로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남겨두신 마지막 카드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성취
이스라엘이 실패해서 이방인이 구원을 받았다면,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서 충만하게 되면 이 세상이 얼마나 많은 복을 받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감정적으로, 민족적으로 굉장히 먼 나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을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은 약 1천만명이라고 합니다. 미국에만 6백만명이 살고, 뉴욕에만 2백만명이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소련과 유럽에 많은 유대인들이 지금도 유리하며 살고 있는데, 놀랍게도 5년전부터 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든지, 고국으로 돌아온다든지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이 응답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줍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요? 고난때문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일제시대와 6·25와 보릿고개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살면 예수믿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국민소득이 1만불이 넘고, 민주화가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인권에 더 관심을 갖게됩니다. 쾌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여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신앙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먹고살기 어려울 때, 한국교회는 그때 부흥했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순수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은 그 고통 가운데서 마음의 문을 열고 메시야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통계를 보니까 구 소련에서 돌아오는 유대인들의 50%가 예수님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과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예언한 것들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루살렘은 황무지입니다. 누가 그들을 도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셨듯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겸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을 뿐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무엇을 더 아끼신다는 말씀입니까? 원가지를 더 아끼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입니다. 이방인을 위하여 평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내가 저주를 받을지라도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희생시키셨습니다. 희생을 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은 이스라엘을 볼 때마다 아픕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회복되기를 원하십시오. 이스라엘은 자체힘으로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방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듯이, 이스라엘은 우리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접붙여질 때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나님에게는 두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정의이십니다. 이것을 여기서는 인자와 엄위라는 말로 썼습니다. 여기 한 죄인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죄인을 대하면 그 죄인은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공의로 나가면 이 죄인은 살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사랑과 용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정의로 판단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나를 대해주시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의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자신이 정의롭지 못한데 어떻게 남에게 정의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정의로 대하면 다 죽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되는 말씀입니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이스라엘이 다시 믿으면 접붙임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실줄로 믿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건져주실줄로 믿습니다.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불러 모아주시고, 이제 그들에게 복음의 계절이 올 것을 믿습니다.
그 일을 여러분과 제가 도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나의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평안을 비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없이 역사의 완성은 없습니다. 예레미야 31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흩으셨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예언입니다. 역사는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진정한 구원은 개인의 구원에서 시작되어서 민족구원을 넘어서서 온 인류의 구원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방인을 통해서 얻게 하십니다. 이것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구속사의 마지막 드라마 /롬11:25-29/ 이동원목사
2014-12-03 18:46:03
드라마는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끝난 MBC드라마 "내 이름은 김 삼순"의 마지막 회의 경우 무려 남한 인구 50,5%가 시청했다(국민의 절반이상)는 통계가 보도되었습니다. 드라마의 힘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하나는, 시청자들이 드라마의 배역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동일시 현상' 때문입니다. 내가 마치 김 삼순이 된 것처럼 가정하고 김 삼순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삼순이가 내가 하고 싶은 행동,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하고 싶은 욕까지 대신 해주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다음 사건의 '예측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가 다음에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에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류 역사의 가장 흥미롭고 가장 심각하며 가장 위대한 드라마가 지금 이스라엘 땅에서 진행중인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가르쳐 많은 성경학자들은 "인류 구속사의 마지막 드라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프러시아의 황제였던 프레데릭 대왕(Frederick the Great King)은 어느 날 궁중 전속 목사를 불러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증거를 아주 단순하게 직설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때 궁중 전속 목사가 "그러면 아주 단순하고 직설적인 증거를 말씀드리지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민족의 존재 그 자체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롬11장을 통해 바로 그런 증거를 제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역사를 주의해서 보면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섭리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으며 우리가 지금 역사의 어떤 시점에 와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예수님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을 둘러싼 세 가지의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질문과 관련된 인류 역사의 세 가지의 단계적인 발전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무엇일까요?
1. 이스라엘의 불 신앙-왜?
여러분,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민족이요 그렇게 메사야를 기다려 온 민족이면서도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을까,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오늘 로마서 11장에 보면 바울 사도 자신이 이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1:1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이 맨 먼저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 것이라면 도대체 왜 그들 대다수가 믿지 않는 자리에 있게 되었을까요?
바울 사도는 본문 25절에서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비밀 혹은 신비라고 증언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비밀이고 무엇이 신비란 말입니까? 25절을 읽어보십시오
.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준하게 된 것이라"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불신하고 복음을 거절한 것이 오히려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기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 보내시면서 마태 복음 10장에 보면 소위 '열린 문 선교 정책'을 가르치셨습니다.
만일 어떤 마을에서 복음 전하는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거든 무리하게 거기서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고 너희를 거절하는 그 집이나 성에서 발의 먼지를 떨고 다른 집 다른 마을로 가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마태10:14참조)
이것을 가르쳐 선교학자들은 '열린 문 선교 정책'(open-door mission policy)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원칙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 땅에 복음을 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예수님을 거절하자 자연히 다른 마을, 다른 지방, 다른 국가 곧 이방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것을 알고도 허용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신비하신 섭리의 비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고 주께 돌아옴의 기회가 될 것을 전지하신 주께서는 미리 아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이 롬11:12에서는 어떻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이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롬11:17이하에서는 소위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즉 돌 감람나무와 같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접붙임이 됨으로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같은 뿌리의 진액을 받는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인간이 미쳐 예측하지 못한 신기한 섭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2. 이방인의 시대-언제까지?
그러면 도대체 언제 얼마동안이나 복음이 이방인중에서 증거 되는 시간을 하나님이 허용하셨을까요? 바울 사도는 본문 25절에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라고 대답합니다. 여기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라는 표현과 매우 유사한 표현으로 예수님은 일찍 이방인의 때(시대)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눅21:24을 보십시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이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주께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이와 같은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황제가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에 군대를 이끌고 진격함으로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방인의 때가 시작된 것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로 사마리아로 안디옥으로 로마로 서진하면서 영국으로 미국으로 한국으로 그리고 오늘날 전세계 열방 가운데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에 주께서 복음 증거자들을 전세계에서 일으키시사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기까지 복음의 역사를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얼마동안 이방인의 때가 계속 될까요?
누가복음의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 의해 밟혀있는 동안은 이방인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이방인의 때가 끝나 가는 중요한 시대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누가 오늘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지배아래 있습니까? 벗어나 있습니까? 묻는 다면 그 대답은 'Yes and No'입니다. Yes라고 말하는 이유는 아직도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그 자리는 소위 마호멧의 승천을 기념하는 이슬람 성전인 오마르 성전 혹은 바위 돔 성전이라고 불리우는 '멸망의 가증한 것'
(마태24: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 거기에 있고 이슬람들이 아직도 그 성전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지배아래 있지 않다(No)고 말해야 하는 중대한 역사적 변화의 드라마가 지난 5-60년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AD70년 예루살렘 멸망이후 근 이천년동안 이방인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던 이스라엘 땅은 전반적으로 1948년 5월 14일 하나의 국가로 기적적인 부활을 함으로 이미 회복이 시작되었고, 그리고 1967년 6월에 있었던 소위 6일 전쟁으로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그 땅은 이미 이스라엘의 통치아래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하면 저와 여러분은 오늘 날 이방인의 시대가 끝나 가는 가장 흥분된 역사의 교차로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방인의 때가 끝날 무렵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사건이 일어 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복음의 전 세계적 전파 2)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 사건 3)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재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직전에 일어날 가장 중요한 두가지 사건은 복음의 전 세계적인 전파와 이스라엘의 회복인 것입니다.
마태24:14을 보십시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서서히 우리가 그런 시점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위클리프 성경 번역자들은 아마 2020년대 말에는 세계 거의 모든 부족어로 성경번역 작업이 마무리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인류 역사의 마지막 남은 최후의 드라마는 이스라엘의 회복인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회복-어떻게?
이방인의 때가 끝나 가는 마지막 징조는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이 문제를 중심으로 성경을 연구해 보면 이스라엘의 회복은 대체로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1)백성들이 고토, 시온에 돌아와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을 회복하는 것,
2)국가적으로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고 3)영적인 회복인 것입니다. 저는 이미 앞의 두 단계는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1)고토에 돌아와 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미 1800년대 말부터 하나님은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토로 돌아가게 하는 시온주의 운동을 일으키십니다.
고토 이스라엘에는 AD70년 이후 노예가 되어 로마와 전세계로 흩어져 갔고 이스라엘 땅에는 불과 2만명 내외의 이스라엘 백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1880년대 말에서 1903년까지 약 1만명이 돌아오고 1914년까지는 약 8만 5천명이 돌아옵니다.
세계 제1차 대전 기간 주춤하던 이 현상은 1917년 영국의 발포아(Balfour) 선언이후 물밀 듯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문자 그대로 동서남북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소련에서 시리아에서 이란에서 이라크에서 인도에서 중국에서 동유럽에서 독일에서 스페인에서 영국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사43:5-6의 예언의 성취라고 할만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이것은 겔 37:21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바 열국에서 취하여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그리고 마침내 1900년간 나라 없이 떠돌던 선민들이 1948년 하나의 공동체로 국가로 극적인 부활을 하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해골 골짜기의 해골들이 거대한 군대가 되어 일어나는 기적이 바로 이 공동체의 부활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미 롬11:15에서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사용해서 이방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놀라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의 사건은 영적인 회복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이것을 예언하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26절의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이것이 문자 그대로 문자적인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의 약속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거절했던 불경건에서 돌이킬 것이며 그들의 죄가 사함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6-27절) 이런 영적인 회복이 없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겔36:24-26의 말씀은 바로 이런 영적인 회복의 예언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깨우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사용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롬11:11에서 이방인의 구원이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예루살렘 대 행진은 단순한 성지 순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깨우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복음을 통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해를 촉구하고자 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약 300명을 위시하여 약 2,500명의 한국 교회 성도들이 오펠광장에서 국제 컨벤숀 센터에서 이스라엘 사상 유례없는 최대의 복음 집회를 갖고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평화의 행진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머지않아 이스라엘에, 예루살렘에 큰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복음이 시작되었던 그 곳으로 이방인을 깨우던 복음이 다시 돌아가 이스라엘을 깨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약하신 대로 역사속에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준비하러 가는 저와 성도들을 위해 여러분도 기도로 함께 주실 것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할렐루야!
<설교 적용 질문>
1. 롬 11:1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비유를 설명해 보십시오(11:16-24).
3. 25절의 바울이 전하고 싶어 했던 신비(비밀)는 무엇입니까?
4. 26절의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를 설명해 보십시오(15절과 비교하십시오).
5. 우리가 구속사의 마지막 드라마에 동참하는 길을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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