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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로마서 설교 모음

로마서 2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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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착한 사람인가? /롬2:1-16/ 곽창대 목사

2020-05-29 15:09:55

 

지난주일 1:18-32을 살펴보면서 이방세계의 타락과 타락의 처참한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그 타락과 참상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타락의 굴레에 매여 사는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피치 못할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것은 이방세계 전체가 다 타락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래도 선하게 살려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개탄하면서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 당시 이방세계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스토아학파의 도덕주의자들이 그랬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로마왕실의 가정교사였던 세네카입니다. 세네카는 로마사회 전반에 만연되고 있는 악의 참상들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도덕적 세계에로의 회복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도덕적 미덕을 찬양하고 모든 인간의 동등 됨을 옹호했습니다. 우상숭배를 비웃었고 위선을 폭로했으며 날마다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세네카는 로마사회에서 도덕적 안내자의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런 도덕주의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선다는 것입니다(1절 상반절). 하나님만이 심판의 자리에 앉으셔야 하는데 그 심판 자리에 자기가 앉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심판합니다.

 

더 나쁜 것은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들추어내었던 죄를 자신들도 범한다는 것입니다(1절 하반절). 단지 차이가 나는 것은 그 죄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난주일에 보았던 타락한 이방인들의 죄는 쉽게 노출됨으로써 도덕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습니다.

 

 반면에 도덕주의자들은 동일한 죄를 범하고도 들키지 않습니다. 머리가 비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죄를 들추어내어 거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위선’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도덕주의자들의 위선을 폭로합니다.

 

위선이 무엇입니까?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것이 위선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크게 흥분하는데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정당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자기의 죄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는 남보다 낫고 옳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들어있는 작은 티는 정확히 봅니다. 그래서 그 티를 빼지 않고는 못 견딥니다. 그런데 자기 눈 속에 들보가 들어있는데 어떻게 남의 작은 티를 볼 수 있을까요? 자기 눈 속에 들보가 박혀있으면 소경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남의 티가 더 잘 보인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눈에 박혀있는 들보가 이상한 들보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그 들보의 재료가 돋보기 유리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남의 눈에 들어있는 작은 티가 아주 잘 보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눈에 남의 약점과 실수와 죄가 환히 보이면 여러분의 눈에 돋보기 들보가 들어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자기 눈에 더 큰 죄악의 들보가 박혀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남의 눈에 들어 있는 작은 티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자들이 위선자입니다.

 

이런 위선자들이 선악을 판단할 때 그 기준이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항상 자기에게 유리한 기준을 갖다 댑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고 높은 기준을 적용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느슨하고 낮은 기준을 적용합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을 제 맘대로 변경하고 오용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행하는 위선자는 겉으로 아무리 고상하게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더 심각한 죄인으로 취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바울이 말씀합니다(2-3절).

 

그런데 더 놀랍게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으면 누가 받겠느냐는 식으로 교묘하게 신학적 논리를 폅니다. 4절입니다. 이 구절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형통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복을 받아 잘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로움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제 곧 풍성한 복을 내리실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이 같은 신학의 왜곡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때가 있었습니다. 이사야 시대였습니다. 그 때의 주류신학은 소위 ‘왕실신학’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의 왕에게 나아가 직언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북쪽 이스라엘이 망한 것처럼 남쪽 유다도 망하고 말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왕실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이사야를 이단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대치되는 거짓 예언이기 때문에 참고할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편 논리는 유다가 멸망할 수 없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다윗의 왕위가 이어져 내려온 나라요,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건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다를 지키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국가적인 참회를 촉구한 이사야의 말을 거부하고 계속 우상을 섬겼습니다. 지도자들은 자기 배만 채우기에 바빴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이방의 강대국들과 화친하려고 갖은 애를 썼습니다.

 

이런 유다에 대해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죄를 지적하고 살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여러 번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집을 부렸고 자기들의 신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쌓였던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것이 바벨론의 침공이며 그 결과로 유다가 망했습니다.

 

유다의 패망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2절을 다시 보세요.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됩니다. 그 진리란 5절입니다. 이 5절이 오늘 본문의 요절입니다. 어떤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간다고 말씀합니까? 고집을 부리는 자, 회개하지 않는 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자신에게 먼저 비추어보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나의 모습을 조사하면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에 자기는 그래도 남보다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고집을 부리는 자요, 교만하여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이런 자들은 회개의 자리로 내려갈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쌓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내세우는 자들을 향해 언젠가는 그들의 도덕적 수준을 만천하에 공개하시는데 그 날이 바로 ‘진노의 날’입니다.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입니다(5절). 대신에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는 즉시 용서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겸손히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비유입니다. 바리새인은 불의한 세리와 비교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착하고 의로운 지를 자랑하며 감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고개도 못 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세리를 의롭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인물 가운데 바리새인에 가깝습니까? 세리에 가깝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진노든지 용서든지 하나님의 판단은 항상 의롭습니다. 이것을 본문 6-11절까지 바울이 논증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항상 의로운 이유는 그 증거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증거란 각 사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를 따라 상과 벌을 정확히 내리십니다.

 

상에 대해서는 7절과 10절에서 언급합니다. 어떤 자가 상을 받습니까? 참고 선을 행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차별 없이 동일한 상이 주어집니다(10절 하반절). 그 상이 영생입니다(7절). 영생은 하나님과의 생명적 연합과 교제를 뜻합니다. 그리고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누립니다(10절). 그러므로 선행에 따라 하나님의 상급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선행에 따라 상급이 결정된다는 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한 이신칭의 교리에 반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바울은 앞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말씀했고 앞으로도 더욱 자세히 이 교리를 설명하는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착한 행위가 상급을 결정하는 근거가 된다고 말함으로써 이신칭의의 교리와 상충되는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 믿음이란 언제나 선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란 믿음으로 사는 자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행함이 따르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의 근거도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을 수 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따라 선행을 실천한 자는 하늘의 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벌 받을 자에 대해서는 8-9절에서 말합니다.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습니까?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8절)’ 즉 ‘악을 행하는 자(9절)’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을 따라 해석할 때 그런 자들은 자기의 죄를 가볍게 보는 대신에 남의 죄를 크게 봄으로써 판단하는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자칭 의로운 자, 자칭 선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진노하십니까? 진노와 분노로 갚으십니다(8절). 그들의 심령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9절). 이처럼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고집부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차별 없이 내립니다(9절 하반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근거가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심판의 날에 벌거벗은 자처럼 그 치부가 드러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고 정확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내면을 정확하게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11절이 바로 그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보다도 내면의 마음상태를 더 중요하게 보신다는 뜻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유대인의 경우와 이방인의 경우를 비교합니다(12-16절).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율법의 교훈을 자주 듣고 공부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율법을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13절). 만일 율법을 듣고도(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율법을 범한 자이므로 율법이 그를 죄인으로 정죄합니다(12절 하반절).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행치 않는 것은 집을 모래 위에 세우는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그 집이 크게 무너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율법의 자구만을 지키는 것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잘 헤아려서 온 마음을 다해 율법을 사랑하고 지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예로, 형제에 대해 노하거나 욕하는 것, 형제와 불화하는 것,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 이 모두가 형제를 살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율법을 지킬 때 겉으로 드러난 행위 이전에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판단하실 때 먼저 마음을 보십니다. 겉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마음으로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을 때 그는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로움과 착함을 자랑하며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버젓이 앉아있는 자는 위선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위선자들을 정확히 가려내셔서 심판하십니다.

 

이방인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유대인과는 달리 이방인은 율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마음에도 율법이 새겨져 있다고 말씀합니다(15절, ‘그 마음에 새긴 율법’). 이방인들이 외적으로는 율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마음에 어느 정도 기본적인 율법을 새기셨습니다.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이 도덕적 존재가 된 것입니다. 마음에 율법이 새겨진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무엇이 옳은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옳은 일을 행하고자 하는 내적 충동을 느낍니다. 그 내적 충동에 반하여 옳지 못한 일을 행했을 때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이것이 도덕적 인간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14-15절이 그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율법 없이 범죄 한 이방인도 내면에 기록된 율법과 양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인 됨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의롭다고 내세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도덕주의자들은 부도덕의 극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다른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기는 매 한 가지입니다. 오히려 자기의 죄를 알고도 은폐하기 때문에 그 위선의 죄가 더 악하다고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지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 16절을 보세요.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도덕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은밀한 것을 속속들이 찾아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것 안에 은밀한 죄악이 들어있는데 은밀한 죄란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은 죄를 말하는 동시에 율법과 양심이 그 감추어진 죄를 고발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래도 자신이 착한 자’라고 우기는 죄를 뜻합니다. 그것이 이미 5절에서 본 대로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죄’입니다. 이런 죄를 짓는 도덕주의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그러나 도덕주의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선언도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구원의 배경이 된다고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씀합니다. 16절을 다시 보세요. 하나님의 심판이 복음의 일부라고 바울이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이 도덕주의자들의 은밀한 죄를 여지없이 들추어낸 것은 그들을 심판과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머리에 쌓이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경고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와 회개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죄와 구원의 초청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서도 은총의 길을 항상 열어두고 계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겠습니다. ‘누가 착한 사람입니까?’ 이 질문이 오늘 설교의 제목이며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는 설교를 끝낼 수 없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말씀한 대로 이 세상에서는 자신이 비교적 착하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은 비교적 죄를 덜 짓고 남에게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짓말도 안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신세지기도 싫어합니다. 어쩌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남모르게 선한 일들도 할 뿐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불의에 항거하기도 하고 대의를 위해서 손해와 고난도 감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의 선함과 의로움을 인정받지 못할 때 참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 기준으로 남을 쉽게 비판합니다. 자주 남을 훈계하고 충고하려고 합니다. 누가 죄에 대해 이야기하면 자기는 언제나 떳떳하여 자기와는 별 상관없는 일처럼 여깁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믿기가 참 힘듭니다. 이런 자들이 착한 자가 아니라 위선자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고 모두 착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도 위선자가 될 소지가 큽니다. 잘 믿는 척 할 수 있습니다. 자기 판단이 옳다고 소리를 높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위선자를 더 크게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는 착한 사람은 어떤 자일까요? 착한 사람의 특성들 가운데 네 가지만 말씀드맀습니다.

 

1) 남을 비판하는 성향을 억제하는 사람입니다. 타인을 향해 비판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 인간의 고질적인 약점임을 잘 알고 조심합니다.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삽니다.

 

2)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죄에 대해 민감합니다. 양심의 소리에도 민감합니다. 이웃의 잘못을 보면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나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합니다.

 

3)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자신의 의롭지 못함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회개하는 세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가장 훌륭한 왕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보다 훨씬 위대했던 순간은 회개했을 때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이스라엘의 도둑이 바로 당신이요!”라고 지적했을 때 한 마디 변명 없이 참회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성도는 죄짓지 않는 자가 아니라 죄를 회개하는 자입니다. 자기의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가 착한 사람입니다.

 

4) 선행조차도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음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착함을 자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서울의 변두리였던 강서구 화곡동에서 매일 장거리 통학을 했습니다. 통학시간이 1시간 30분이나 걸렸습니다. 하교 시에는 아주 피곤했습니다.

 

 전철을 타고 종각 역에 내려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했습니다. 버스를 탈 때는 자리에 앉아가기를 바랐습니다. 한 번은 바라던 대로 금방 자리가 나서 앉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할머니 한 분이 올라오셔서 제 곁으로 비집고 들어오셨습니다. 마음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일어나서 자리를 할머니에게 권했습니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하시면서 저의 착함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부끄러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던 그 짧은 순간에 내면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창대야, 그래도 네가 일어서야지! 저 할머니가 네 어머니라고 생각해 보렴! 그리고 너는 예수 믿는 청년이 아니니?” 그 내면의 소리를 듣고 겨우 일어났습니다. 

 

할머니께 자리를 내어드린 후에 저는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 저를 깨우쳐주지 않으셨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그나마 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한 것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누가 착한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고 사람 앞에서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착한 자로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admin

 

댁쟾쇰줈

 

 

 

로마서 강론 7.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관하여 /롬2:1-11/ 정성택목사

2018-12-07 12:08:55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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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로마서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는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사건이 천지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의 상태가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혼돈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토후’의 뜻은 ‘무질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무질서한 땅에서 질서를 가져오게 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질서의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은 뜬금없이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의 흐름을 가지고 있으며 그 말씀이 있어야 할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지금까지 로마서 말씀의 흐름을 보면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복음의 대전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말하며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의해 이루어지는 완전한 은혜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는 개론적인 지식을 다루면서 복음의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지식과 구원을 얻게 하는 참된 믿음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바르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장 후반절에 가서 인간에게는 왜 복음이 필요한가? 구원이 왜 필요한가를 말하면서 그 이유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타나는 진노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복음과 구원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잘 알고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흐름을 따라 가다가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로마서 2장 1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왜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에 관하여 말씀을 전하다가 갑자기 남을 판단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에는 질서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2장의 말씀도 역시 복음과 관련된 아주 명확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고 시작되는 접속어가 있습니다. 이 접속어를 통해 로마서 1장 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련해서 '그 누구도 핑계 댈 수 없다'라고 하는 이 선언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I. 남을 판단하는 자란 누구를 말하는가?

 

로마서 2장 1절부터의 대상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지명하며 시작합니다. 여기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로마의 관리들을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래서 모든 재판이나 모든 판단들을 로마의 관리들이 해왔기 때문에 이것은 로마의 관리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두 번째는 이방인들을 판단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교회 안에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판단인가 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애초에 하나님에 대해 듣지도 못하였고 하나님이 계신지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고하면서 자신들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고 스스로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는 자신들과는 상관없고 이방인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혁주의 주석가들의 견해입니다.

 

* 무슨 근거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했을까?

 

1) 혈육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선조 때부터 혈육에 의해서 육적인 후손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7절에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방인들과는 다르고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났으며 스스로 괜찮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율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 18~20절에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그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잘 안다고 스스로 믿고 있으며 이방인들은 율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관습에 따라 육체의 할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 25~27절에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지켜야 할례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통과 관례를 따라 육체의 징표를 받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났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할례를 부적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근거를 통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라고 스스로 판단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의하면 유대인들도 진노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뭔가 착각을 하거나 잘못 알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착각에는 약도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의 판단을 가지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하나님이 주신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진리에 따라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앞에 너희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2장 5절에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고집 피우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회개치 않으면 안 됩니다.

 

II. 유대인들의 판단이 왜 틀리는가?

 

1.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혈육에 의한 후손이 아닙니다.

침례요한도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3장 9절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1)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믿음의 자손을 말합니다.

로마서 4장 13절에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복음은 믿음으로 얻게 되는 영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축복을 얻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2) 행실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자들이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3절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들이 행동이 나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의가 가득한 것과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악독이 가득한 것과 남을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우매하고 무자비한 열매들을 똑같이 맺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과 행실을 통해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분명히 믿음으로 얻는 것이 맞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 행실이 하나님의 백성의 행실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면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삶을 통해 참된 믿음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2. 율법을 받았다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2장 23~2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지만 율법을 행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고 유대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있다고 하나님이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거나 완전한 의를 얻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어서 진노를 받게 되지만 유대인들은 오히려 그 율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그 율법을 다 지켜서 진노를 피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았다고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전통과 관습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관습에 의해 징표로 할례를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2장 28~29절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종교적인 행위나 관습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예배를 100번 드린다고 해서 그 행위 자체가 공로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2장 11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배나 종교적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나님은 판단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유대인이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자신을 판단하는 것과는 다르게 혈통이나 종교적 행위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결단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심을 증거하고 있고 또한 이 판단이 바로 진리라고 기준을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2절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은혜의 복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은혜의 복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를 얻는 자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앞에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습니다.

 

III.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난 우리 성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성도로서 세상과 구별된 선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2장 6절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응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로마서 2장 9~10절에 나와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우리는 심은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문율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이 말씀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에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성도에게 오히려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약속대로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성도인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업적을 이루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면 성도답게, 집사면 집사답게, 목사면 목사답게 우리에게 주신 직분의 그 자리에서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한 열매이겠습니까? 미가서 6장 8절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면 반드시 우리의 믿음의 양심을 따라 선한 행실에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실에 대하여 반드시 보응하시는 하나님 또한 우리의 수고와 헌신에도 반드시 상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삶으로 믿음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의 삶으로 빛을 비추어야 하겠습니다.

 

2) 각자의 마음을 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서로가 그 마음을 속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까지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다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습관적으로 드리거나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 드리거나 억지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 새기기 위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교만하고 거짓된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꺾어 주실 것이고 선하고 정직한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여 주실 것입니다. 또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처지와 마음까지 다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참된 믿음에 대해서 진정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이 참된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된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하셨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사랑과 헌신의 삶을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성도로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증명할 수 있는 이러한 말씀의 삶, 순종의 삶, 선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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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너, 남을 심판하는 자여! /롬2:1-11/ 유기성 목사

2016-08-25 11:52:40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부인하고 마음대로 죄짓고 사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짓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짓는 죄보다 더 큰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롬 1:18-32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 가운데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하여 두손들고 “아멘”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키며 산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입니다. “옳소, 저들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찬 물을 끼얹는 선언을 하십니다.

 

:1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충격이라고 할 만한 선언입니다. 여러분, 이 구절을 평생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방탕한 사람과 그를 판단하는 사람 중 누가 더 큰 죄인 같아 보입니까?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어보았지만 여전히 불경건한 세상 사람들이 더 큰 죄인이라고 여겨진다면 마음이 새겨진 것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소위 믿음이 좋다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입니다.“새벽기도에 한 번도 빠지지 않는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습니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들이 무섭습니다.”

 

왜 무섭습니까? 신앙생활 열심히 할수록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영적 함정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도 모자라 울타리 율법까지 만들어 놓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음식에 집어넣는 양념까지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과시'로 변질되었습니다. 율법과 경건이 종교의 광기로 변하여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주신 율법을 가졌으며, 우상숭배도 하지 않고, 동성애도 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듯합니다.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만드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1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충격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에서 또 말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여” 정말 그럴까요? 남을 심판하는 사람들은 쉽게 인정하지 못합니다.

 

어느 교우는 성경공부를 하다가 항변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물론 내가 완전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목사님도 알다시피 나는 소망없이 사는 술주정뱅이나 창녀나 살인자나 폭력배 범죄자와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인정하셔야 합니다. 모두가 다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사람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지만 솔직히 자신이 지옥에 갈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세상에 참 나쁜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는 좋은 사람 편이구요! 주님께서 제 죄를 보는 눈을 열어주셨을 때에야, 세상에 저 보다 더 악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보다 더 악질인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여부를 진단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물론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죄를 덮어 버리자!’ 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죄를 짓고는 ‘비판하지 맙시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는 사람들은 정말 심각한 사람입니다.

 

죄짓지 않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문제는 철저히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죄를 다룰 때, “나는 의인인데, 너는 죄인이야!” 하는 태도를 가지면 더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 5:22에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하셨습니다.

 

:28에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으로 짓는 죄나 실제로 행하는 죄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비판하면 그 비판이 자신을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눅 6: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누군가의 죄를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였다면 자기도 심판을 받되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고 누군가의 죄를 용서하였다면 자기도 용서를 받되 풍성히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21세기 신학자 프란시스 쉐퍼는 이것을 ‘보이지 않는 녹음기’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재판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했던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 말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선민으로 택하심은 자랑하려고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작은 민족을 택하신 것입니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그런데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선민이라 교만하고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심판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그 죄를 회개하기를 오래 기다리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고 더욱 이방인들을 심판하니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4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의 죄 문제를 다룰 때, 명심할 것은 우리의 죄를 다루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으로 오래 참으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대만 제자훈련 세미나 질문 시간에 “교회는 적합하지 않은 목회자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요? (공개적인 답변이 불편하시면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쪽지 올라왔습니다. 대답해 드렸습니다. “그가 아버지나 형이나 동생이라면 어떻게 대할까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의 죄는 눈 감아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중 기준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라면 더 기다려 줄 수 있거나 부드럽게 충고할 것인데, 가족이 아니기에 엄격하게 말하고 대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옳고 바르게 처리했다고 해도 죄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목사에게 좋은 교인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 목회자에게 역사할 수 있습니다.“

 

롬 1장과 2장은 예수님께서 눅 15장에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와 똑같은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의 죄나 동생을 정죄하는 큰 아들이나 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탕자였고 다 구원이 필요한 아들이라는 것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바로 이 비유와 똑같은 의미로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이 탕자인 동생에 대한 말씀이라면 로마서 2장은 동생을 정죄하는 형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탕자의 형과 같은 사람으로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보다 아버지 마음을 더 아프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대부분 탕자의 형과 같은 부류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탕자같은 사람과 함께 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5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처음에는 버티다가 죄가 드러나면 꺽어집니다. 그러나 남을 심판하는 자는 좀처럼 그 죄를 회개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비명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비판을 잘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왜 그처럼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냐고 힐문하면 그는 자신의 성품이 너무나 솔직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아닙니다. 그는 자기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제일 큰 죄입니다.

 

철야기도 시간에 모두 다 기도하지 않고 자는 것을 보고 한 집사가 기도했습니다. “장로 집사 할 것 없이 다 자니 하나님 참 민망하시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깨어서 남 흉이나 볼 거면 너도 얼른 자거라”조크입니다만 새겨 들을 이야기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다가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때 프란시스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시스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처럼 살자는 것인데, 굶으면서 이렇게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열매맺어야 진짜입니다. :6의 말씀은 좀 충격적입니다. :6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 때,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여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7-11까지는 구원에 있어서 예수믿는 사람에게나 불신자에게나 이중 기준은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7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8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9 악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환난과 고통을 주실 것이요, 10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내리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무조건 용서받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 주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심판은 공평합니다.

 

:11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로마서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심판은 우리의 행함에 따라 내려진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으려면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믿었다면 반드시 행함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과 열매가 사과 나무를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와 뿌리로 사는 것입니다. 이 뿌리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열매가 돌 복숭아가 맺히면 큰일입니다. 나무와 뿌리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한없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음을 믿고,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 예수님이 마음에 임하셨음을 믿는다면 반드시 용서와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받았다고 믿으면서 남을 심판하는 자는 이와 같이 거짓 믿음,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사람이 성숙하는 과정에서 판단과 행동의 기준은 변합니다. 어릴 때는 오직 자신에게 좋고 싫은 것이 기준입니다. 좀 더 자라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 ‘내 편이냐 아니냐?’가 기준이 됩니다. 좀 더 성숙하면 ‘옳고 그른 것’이 기준이 됩니다. 아주 성숙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옳고 그른 것도 뛰어 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처음 도전받을 때, 대단히 불편한 진실입니다. 어떻게 ‘옳은 것을 포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른 것에 매여 전체를 큰 고통 속으로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툼과 분열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완벽주의, 율법주의, 자기 의가 강한 경우, 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다는 것이 우상이 된 경우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야 말로 옳고 그른 것을 뛰어 넘은 일입니다. 손양원목사님은 아들 죽인 원수를 양자삼았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뛰어 넘은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마음은 의지나 결단으로 극복이 안됩니다. 우리의 깊은 죄성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주 예수님을 바라볼 때만 극복됩니다.

 

지난 월요일 누군가에게 지적을 해야 할 것이 있었는데, 주님은 선뜻 동의하지 않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늘 명확한 확신이 들지 않으면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일 설교 준비를 하려고 본문을 다시 읽는데 “너 남을 심판하는 자여” 라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을 불러 지적하는 것이 옳고 그른 것에는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의 뜻이었느냐에 대하여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싫은 사람은 싫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나 교단이나 나라에 대하여도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찬의 은혜에 눈이 뜨인 후, 그것이 바뀌었습니다.

 

어느날 성찬을 받으면서 참회의 기도를 하는데,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준비 안된 자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성찬 떡을 먹으면서 나와 한 몸이 되는 것이 제겐 말할 수 없는 은혜이지만 주님께는 얼마나 큰 고통이 될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그동안 내가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만 기뻐하고 감사하였지 주님의 고통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제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했던 사람이 "내가 그렇구나" 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허물 많지만 교회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허물 많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영원히 마음에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방탕한 죄”보다 “판단하는 죄”가 더 크다! 모든 죄가 다 두렵지만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의 죄는 더 무서운 죄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판단하고 정죄하였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진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정상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admin

 

댁쟾쇰줈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말라 /롬2:1-8/ 김기석목사

2015-07-10 20:09:37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 ‘나는 다르다’는 오만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남북의 기독교인들이 평화통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광복 66주년이 곧 분단 66주년이 되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던 평화 통일의 길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새로운 긴장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참 슬픈 현실입니다. 박봉우 시인의 <휴전선>을 가슴 아프게 되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평화의 길, 화해의 길, 상생의 길은 예수를 길이라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마땅히 선택해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일체의 장벽들, 즉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죄인과 의인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사셨습니다.

 

에베소서의 저자는 이것을 장엄하고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2:15-16)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십자가를 꼭 붙들 때 너와 나를 가르는 장벽은 무너집니다. 우리 속에 여전히 차별심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님의 참 제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가장 심각한 분열은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의 자부심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한 멸시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까닭은 복의 매개자로 살라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특권으로 이해하고 사유화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나는 다르다’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건강한 관계맺음을 가로막는 질병입니다. 그런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다른 이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한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는 급기야 자기의 경건생활, 즉 금식과 십일조에 대한 자화자찬으로 이어집니다. 자의식이 넘치는 기도입니다. 아니,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노골적인 자랑질입니다. 하지만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눅18:11-13) 외적 종교의 척도로 보면 바리새파 사람이 칭찬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은 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허물과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 무지가 낳는 폭력

 

본문은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적시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유대계 기독교인’임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은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방계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시선과 말투에 담긴 우월의식을 보면서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계 기독교인들의 허위의식을 가차 없이 폭로합니다. 그들의 앎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앎과 분리될 수 없지만,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앎은 허위의식이 되거나 교만이 되게 마련입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보면 마치 상처 입은 초식 동물을 공격하는 맹수처럼 구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그들을 믿음 없는 사람으로, 파렴치한 사람으로, 비겁한 사람으로, 의리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제가 가장 경계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사람을 어떤 이미지 속에 가두는 일입니다. 자기가 잠시 경험했던 그 사람의 이미지가 마치 그 사람 자체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마치 유럽에 일주일 다녀온 후에 유럽 문화에 대한 책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일면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일면이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에 다른 면은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면만 보는 것이 편견입니다. 그런 이들은 눈이 한쪽에 몰린 ‘광어족’입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불쾌한 것은 남에 의해 규정 당하는 것입니다.

 

규정되는 순간 나의 다른 가능성들은 부정됩니다. ‘나쁜 사람’으로 규정되면 나는 선한 일을 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그를 마치 납으로 만든 상자 속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만나보면 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무척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사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해도 사정을 듣고 나면 그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본래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설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 혹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난 사람만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지금 세계는 참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미국 발 경제위기에 세계가 들끓고 있고, 영국에서 벌어진 폭동은 지금의 세계 체제가 활화산 위에 세워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불만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폭발 직전입니다.

 

사람들이 참 사나워졌습니다. 지금 자기들의 삶이 어려운 것은 외부에서 유입된 어떤 사람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탓하는 마음은 폭력으로 번지기 일쑤입니다. 노르웨이 학살극을 벌였던 브레이비크는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변화되어가는 유럽을 정화하기 위해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은 위험하고 더럽다는 생각 속에 이미 테러와 공포가 담겨 있습니다. 무한 경쟁에 돌입한 세계는 유토피아(utopia)가 아니라 디스토피아(dystopia, 암울한 세상)가 되었습니다.

 

‘너’를 인정하고 준중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야말로 지옥을 짓는 마음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금과옥조로 여겨야 할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남을 심판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내린다’고 말합니다.

 

• 회개의 기회

 

그런데 언제 그런다는 것이지요? 현실이 암담할수록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남을 모욕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순간 입술이 붓는다거나, 남을 멸시하는 눈빛을 보일 때면 즉시 다래끼가 난다든지,

 

남을 때리려는 사람의 손이 뺨에 가서 달라붙는다든지, 악의를 품는 순간 가슴에 통증을 느낀다든지…부질없는 상상이지만 가끔 이런 상상을 하면서 웃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발걸음은 너무 느립니다. 심판은 언제나 유보되는 것 같습니다. 악인이 번성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복제 인간 문제를 다룬 영화 <아일랜드>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미래 세계에서 사람들은 질병에 대비하기 위해 자기와 유전자가 똑같은 복제인간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유사시에는 그들의 장기를 이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복제인간들은 자기가 복제인간인 줄을 모르고, 환경재앙으로 지구가 멸망한 후에 자기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정체를 알게 된 링컨-6-에코는 맥코드라는 사내의 도움을 받아 갇혀 지내던 곳에서 탈출합니다.

 

그는 나중에 맥코드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요?” 잠시 망설이던 맥코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 그건 말이지…. 인간이 뭔가 간절히 바라는 걸 비는 대상인데 말이야…. 문제는 빌 때마다 그가 사람의 뒤통수를 친다는 것이지.” 공감하시는 분이 많으신 것 같군요.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심판을 즉각적으로 수행하시지 않는 까닭은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유예의 시간, 즉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지만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하나님의 분노의 손을 막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너그러우심, 오래 참으심을 하나님의 무능 혹은 무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좋을 대로 삽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일본을 떠올렸습니다. 얼마 전 일본 우익 인사들이 독도를 방문하겠다면서 김포공항에 와서 쇼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한 역사 교과서를 채택하는 지역이 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가깝지만 참 먼 나라입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 지사는 교과서에 종군 위안부의 존재를 기술하는 일을 반대한다면서, 위안부들 중에는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창부가 된 여자가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면 위안부를 불쌍한 피해자라는 관점뿐만 아니라 그 여성들의 비천한 본성 부분도 기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1994년에는 자민당 내에 ‘종전 50주년 국회의원연맹’이 만들어졌는데 그들의 활동 방침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일방적인 단죄와 자학적인 역사인식을 재검토하고, 공정한 사실의 검증에 입각해 역사의 흐름을 해명하고 일본 및 일본인의 명예와 긍지의 회복을 기해야 한다.” 그들은 진정한 명예와 긍지의 회복은 국가적 차원에서 참회하고 사죄하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1일 일본 법원은 일제에 동원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한국인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자신의 이름 혹은 가족의 이름을 명부에서 빼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불쾌하기는 할 테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정도의 인격권을 침해당한 것은 아니니 참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부러뜨려 놓고 불편하겠지만 잇몸으로 밥을 먹으라는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런저런 상황들을 보면서 ‘진노를 쌓는다’는 말이 자꾸만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만 인간의 오만을 무엇보다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심판은 반드시 옵니다.

 

• 발돋움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한 말이나 생각에 따라 갚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에 따라 갚아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남에게 보이려고 금식하고 또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어쩌다 선한 일을 하면 감사의 인사를 기대합니다.

 

바라는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선을 행할 마음과 능력을 달라고도 기도해야 하지만, 선을 행하고는 그 일을 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고도 마음이 더 옹색해지거나 어두워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옆 동네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이것과 통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梁나라의 무제武帝는 불교를 받아들여 수많은 절을 짓고 불서를 간행한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달마대사를 초대한 자리에서 물었다고 합니다. “내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마는 ‘무無’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고 합니다. 내가 굉장한 일을 했지 하는 자부심은 오히려 영혼에 독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선한 일을 하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복을 강제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그게 좋아서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자리에까지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또한 사욕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십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신 것처럼 살아갑니다.

 

혹시 ‘업신여기다’라는 단어가 하나님(神)이 없다고 여기는 데서 유래된 말은 아니겠지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벗이 되어 살아가는 평화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평화 통일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나라의 꿈을 우리 속에 심어주시면서, 그 꿈을 이루는 일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남북의 교류와 협력이 늘어나고, 군사적 적대 행위가 중단되기를 기도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분단 의식을 내몰고 평화를 만드는 자로서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상함도 해함도 없는 나라에 대한 주님의 꿈이 우리 마음속에서 그리고 분쟁의 땅인 한반도에서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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