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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로마서 설교 모음

로마서 7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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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17/ 나와 내 속에 거하는 죄 /롬7:14-25

2018-10-31 04:09:18

 

성도는 칭의 받은 순간부터 성화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따르지 않고 제힘으로 성화하려 하면 이상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 이 구절의 “우리”는 율법의 신령한 목적을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아는 성도지요. 그런데 그들 중에 “나”는 죄 아래 팔립니다. ‘팔리다’는 현재형 동사입니다. 죄의 종 신분은 아닌데, 죄 아래 팔리고 있는 이상한 상황이지요. 이 사람은 “육신에 속”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했으나 옛 본성에 따라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고전 3:1-3). 현재의 신분과 삶의 모습 사이에 모순이 있는 사람이지요.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율법씨 신부처럼 행동하는 사람, 영의 새로운 것 대신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려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이 존재를 주목합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 율법을 지키려는 ‘나’와 율법을 어기는 ‘다른 나’가 충돌합니다. 이 현상은 사도처럼 성숙한 신앙인도 경험합니다.

 

그런데 미성숙한 성도는 이 현상을 겪을 때 정체성 혼란을 느낍니다. 칭의 받고 구원 얻었다면 이런 현상이 없어야 할 것처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충돌 현상에 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런 현상을 경험하는 자로 구원을 확신하도록 도우려는 것이지요.

 

사도는 이 존재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16). 나는 내 소원대로 하지 않는 다른 내가 못마땅합니다. 다른 나는 율법이 정죄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는 율법과 같은 판단 기준을 가졌으며 율법의 선함을 인정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나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 다른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주하는 죄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인격체 전체로서의 ‘나’와 그 인격 속의 자리 잡은 부분으로서의 ‘다른 나’를 구별했습니다.

 

이런 구별은 사도가 두 가지 항목을 분석한 결과입니다. 첫째로 칭의 받은 자의 인격을 분석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

 

수많은 이단의 뿌리가 된 초대교회 영지주의 사상은 몸을 악하게 여기고 영혼만 선하게 여겼습니다. 사도가 그들처럼 ‘내 몸이 죄짓는 원흉이며 내 영혼은 선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칭의 받고 성숙한 “내 육신”에도 칭의 받기 이전처럼 선한 것이 없더라는 분석 결과를 그대로 알려준 것입니다.

 

칭의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의인으로 간주된 사람입니다. 의로움을 몸에 주입해서 의롭게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와 별도로 진단하면 칭의 받은 성도의 육신은 여전히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칭의 받은 자의 행위를 분석했습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19). 악한 본성의 뿌리에서 선한 삶의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칭의 받은 자도 옛 본성으로는 악한 열매만 맺습니다. 본성에 밴 죄가 의지력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칭의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기를 진정으로 ‘소원’합니다. 죄에 종노릇할 때와 다른 점이지요.

 

그러나 선하게 살 ‘능력’이 없다는 점에서는 죄의 종노릇할 때와 같습니다. 거룩한 삶은 성령께서 칭의 받은 자를 통해 맺는 성화의 열매입니다(갈 5:22-23). 그런데 본문은 성령님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만 언급합니다. 성령님과 별도의 나는 칭의 받은 이후에도 이전과 똑같이 성화의 열매를 맺는 일에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분석 결과 사도는 나와 다른 나의 정체를 확증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죄가 내 자아 속에 거주합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는 고백과 정반대 상태지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상태와 내 안에 죄가 거주하는 상태가 칭의 받은 사람의 인격 속에 공존합니다. 나와 내 안의 그리스도가 구별되듯 나와 내 속의 죄도 구별됩니다.

 

그러나 나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분리할 수 없듯이 나의 욕된 몸과 죄도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기까지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 다른 나를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구별해야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겪지 않고 구원받은 존재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분석 끝에 사도가 깨달은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 칭의 받기 전에는 한 가지 법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그때의 나는 악을 원하고 악을 행했습니다. 칭의 받은 후에는 선을 원하면서 선을 행할까요? 선을 원하면서 악을 행합니다. 두 가지 법이 동시에 내 행동을 지배합니다.

 

위선자는 이 사실을 숨기고 선한 척합니다. 완전주의자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이 땅에서 선한 나를 완성하려 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사실대로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자 죄짓는 현재의 제 모습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25). 선을 원하면서 선을 행할 영화 이후의 삶을 소망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도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22)라고 합니다. 중생하지 않은 자연인은 절대로 하나님의 법을 마음으로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속사람’은 칭의 받은 자아를 지칭합니다. 악을 행하는 다른 나를 ‘겉 사람’이라 부르면 정확하게 대칭되겠지요. 그런데 사도는 “내 속에 거하는 죄”(17)나 나와 “함께 있는” “악”이라 표현합니다(21). 다른 나는 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내 지체 속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 사람’이라는 대칭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칭의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신부이지만, 그녀 속에 있는 죄가 그녀의 몸을 율법씨 신부처럼 반응하게 합니다. 이렇게 신분과 다르게 행하는 육신을 사도는 “죄의 몸”(6:6), “사망의 몸”(24), “욕된 것”(고전 15:43)으로 표현합니다.

 

아무튼 한 인격을 두 존재가 지배하므로 이 땅에 있는 동안 칭의 받은 사람의 인격 속에는 치열한 전투가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3). 내 인격을 총괄하는 “내 마음의 법”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방향으로 진격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속에”있는 “죄의 법”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방향으로 진격합니다. 원리적으로는 칭의 받은 자의 인격이 마음의 법에 사로잡혀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죄의 법이 마음의 법을 압도합니다. 싸우기만 하면 마음의 법이 패배하고 죄의 법에 사로잡힙니다. 신분은 의인일지라도 죄와의 싸움에서는 번번이 패배하는 무력한 죄인이지요.

 

사도는 비참한 내 모습에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죄에서 건져낸 존재는 내가 아니었습니다.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존재도 내가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는 칭의 받은 자도 육신의 욕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법적으로는 죄와 율법에 대해 죽었어도 실제적으로는 죄와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갈 5:17-18).

 

내 힘으로는 절대로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결심하고 맹세해도 내 힘으로는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숙한 사도조차도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 보려는 자기 노력의 결과는 탄식이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려면, 칭의 받은 후에도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은혜 아래 있어야 합니다(6:14). 칭의처럼 성화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의 성숙성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즉시 눈을 돌리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데서 드러납니다(25a). 내 힘으로는 절대로 맺지 못할 거룩한 삶의 열매를 그분께서 맺으실 것이므로 감사하는 것이지요. 수영할 때 몸에 힘이 들어가면 물에 빠집니다. 빠지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물만 먹지요. 지도 교사는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말을 알아들었다고 해서 몸에 힘이 금방 잘 빠지지는 않습니다. 위기 상황에 당황하거나 긴장하면, 자동으로 다시 몸에 힘이 들어가서 물에 빠집니다. 그래도 교사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다 보면 점점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길 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칭의 받은 자는 사도의 교훈에 따라 자기 힘을 빼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b). 앞으로의 결심을 밝힌 것이 아닙니다. 힘을 빼고 제 모습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내 힘으로 전진하려고 허우적거리던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모두 맡긴 편안한 모습이지요. 내 힘으로 성화에 힘쓰면, 도덕성이 향상되어도 자기 의만 강해지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따라 반응하면, 도덕성이 향상될수록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립니다. 내 힘으로 거룩한 삶을 살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율법씨를 통해 성화의 열매를 맺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1세기는 구약과 신약 세대가 중첩했던 독특한 시기였는데, 성령을 모른 채 율법을 지켜 거룩해지려는 유대인 성도들이 이런 현상을 자주 경험했을 것입니다.

 

율법에 대해 죽었는데도 율법에 대해 죽지 않은 사람처럼, 영의 새로운 것 대신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려 했을 것입니다(7). 오늘날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응하는 대신 자기 육체의 행위로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순간에는 미숙한 성도든 성숙한 성도든 이런 현상을 종종 겪을 것입니다.

 

칭의 받은 자에게는 자연스럽게 거룩하게 살려는 소원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소원을 이루는 것은 내 능력과 열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열정이 그 소원을 이룹니다. 늘 죄에 지면서 살아온 것 같을지라도 지난 삶을 돌아보십시오. 힘을 빼고 하나님의 은혜에 맡길 때마다 그분의 은혜가 내 삶을 바꿔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리새파 출신의 사도조차 그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내 힘으로 과도하게 성화의 열매를 맺으려고 조급해할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마음의 소원과 실천하는 삶의 모습 사이에 갈등이 있는 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나를 성화로 이끌고 있음을 신뢰하고 현재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을 빼고 주님께 몸을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admin

 

댁쟾쇰줈

 

 

 

악한 영을 거부하십시오 /롬7:14-25/ 배의신

2018-02-21 16:54:29

 

로마서 7:14-25,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시지요? 그런데 사람이 사는 이 땅의 권세를 가지고 주관하는 존재가 악한 영들이라는 사실은 아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시적으로 사람이 사는 땅과 공중의 권세를 사탄의 세력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4:5-7절입니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그리고 에베소서 2:2절에서는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시며, 6:12절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한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탄과 악한 영들이 가장 강력하게 행사하는 무기는 이 세상의 영광과 쾌락과 부귀영화입니다.

 

악한 영들은 이렇게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욕망과 더러운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며 그것을 믿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분노와 염려와 슬픈 감정들을 집어넣습니다. 사람이 악한 영들이 주는 감정에 사로잡히면 분노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염려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속에 침투한 악한 영들에 의한 죄가 그 원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7-18절에서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자기 스스로가 혹은 자신의 감정이 이렇게 하는 줄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도록 깨끗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속임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했으며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창세기 3:7-8절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것이 죄의 시작이며 사탄의 속임으로 인한 더럽고 악한 감정들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는 이러한 악한 감정들을 부르는 악한 영들을 거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합니다. 즉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질적으로 악한 영들을 대적하여 물리칠 수 있는 길을 살펴보려합니다. 말씀들을 잘 듣고 깨닫고 담대하게 행하셔서 내 자신이 하나님께 속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 사이의 갈등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갈등은 크게 두 가지의 경우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 거듭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로 인하여 일어나는 삶의 갈등입니다. 다른 하나는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성화되는 과정에서 아직 불완전한 삶으로 인한 갈등입니다. 본문말씀의 내용을 살펴보면 후자가 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삶으로 인하여 영적인 갈등을 겪는 것입니다. 본문 22-23절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 말씀에서 “속사람”이라는 표현은 거듭난 사람에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8장에서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본문에서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25절에서 갈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등을 종식시키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말씀이 8장에서 전개됩니다.

 

8: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렇다면 이렇게 죄에서 해방되어 영적인 자유를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해답은 8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8:13-14절을 봅시다. “너희가 육체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말씀에서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영의 삶으로 육체의 욕망을 따르는 행실을 분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자신에게서 성령님의 역사와 악한 영들을 분리해야 합니다.

 

사탄과 악한 영들은 우리 육신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가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유혹을 뿌리며 정신을 조종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변장술에 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장술은 악한 영들뿐만 아니라 악한 영들에 사로잡힌 추종자들도 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후서 11:13-15절을 봅시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그래서 악한 영들은 자신의 정체를 은밀하게 숨긴 채로 사람들에게 악하고 더러운 생각들과 조급하고 난폭한 마음과 미움, 분노, 시기, 염려, 두려움, 절망 등의 감정들을 조장합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마음이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믿고는 갈등하고, 자포자기 하고, 스스로를 두렵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에서는 이런 육신적인 죄를 조장하는 것은 죄 즉 악한 영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육신의 일과 영의 일, 성령님의 역사와 악한 영들의 일을 분리해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분리해야 합니까?

 

전설처럼 내려오는 옛날이야기입니다. 어느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시험해보려고 한 가지 일을 계획했습니다. 도성에 사는 모든 백성들에게 꽃씨를 나누어주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사람에게 후한 상을 주겠다.’고 방을 붙였습니다. 사람들은 정성껏 화분에 씨를 심고 가꾸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싹조차 나지를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똑 같은 꽃씨를 구해서 키우기도 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꽃씨를 찾아서 심고 가꾸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 꽃이 필 무렵 왕은 ‘가꾼 꽃을 각자의 집 앞에 두어서 왕이 지나갈 때에 볼 수 있도록 하라.’고 방을 붙였습니다. 드디어 왕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날, 거리는 집집마다 내놓은 아름다운 꽃들로 아름답게 물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집 앞에는 흙만 가득 들어 있는 빈 화분이 있었습니다. 그 곁에는 아이가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 집 앞에 멈추어서 아이에게 ‘왜 꽃이 없으며,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다른 집은 모두 아름답게 꽃이 피었는데, 내 꽃씨는 싹이 나질 않아요! 그래서 울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은 그 아이에게 상금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은 백성들의 정직한 마음을 시험해 보려고 삶은 꽃씨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꽃을 ‘요화(妖花)’라고 합니다. 도깨비 꽃 즉 거짓된 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환경을 만나면 거의 대부분은 ‘다른 것을 심어서라도 꽃을 피우겠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이런 거짓된 유혹 뿐만 아니라 시기심, 더러운 말이나 생각, 난폭성 등. 자신이 당면한 상황을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려고 생각하는 순간에 악한 영들이 침투하게 됩니다. 이러한 순간에 악한 영들을 분리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즉 주님의 자녀로서 정직하고 진실한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은 거짓과 폭력, 음란함과 더럽고 추한 것을 좋아하며, 진실한 사랑과 성실함과 부드러움을 싫어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44절에서 악한 영들의 습성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그래서 에베소서 4:25-32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새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칩니다. 25-27절을 봅시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리고 31-32절입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서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처럼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과 악한 영들의 일을 분리시키고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을 따라가는 것이 악한 영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전파들이 끊임없이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지만 라디오, 텔레비전, 각종 무선기기들의 전파들이 각자의 주파수로 이 공중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든지 그 주파수에 맞추기만 하면 그 전파를 수신할 수가 있습니다. 사탄과 악한 영들의 역사도 이 전파와 같습니다. 사탄과 악한 영들은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역사합니다. 사탄과 그 악한 영들이 이 공중을 장악하고 온갖 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전파처럼 퍼뜨리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악한 영들의 생각과 일치되면 즉시 그 사람의 마음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29절에서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고, 5:3절에서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고 했고 골로새서 2:20-21절에서는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만일 악한 영들의 역사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면 지옥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16절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악한 영을 거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20절을 봅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왜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지 않고 밖에서 두드리고 계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들어가실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도 내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결단코 내 안에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변을 맴돌면서 틈이 생기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던 에베소서 4:27절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생각들이 일어날 때에는 단호하게 거부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9:1절에서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라는 말씀을 의지하여 분리하고 거부하십시오. 그리하여 성령님의 안정적인 인도하심을 받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admin

 

댁쟾쇰줈

 

 

믿음(5): 진정한 나 /롬7:15-25

2017-04-24 17:07:42

 

부활의 계절, 4월 첫주입니다. 사람이 갖는 최고 질문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러시아에 한 랍비가 있었습니다. 이 랍비가 인생의 이런 저런 어려움을 당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를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따라 골똘하게 그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고 있는 데 자기도 모르게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군부대까지 걸어가고 말았습니다.

 

보초를 서던 병사가 외쳤습니다. “누구요? 서세요. 여기는 안됩니다”. 랍비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통행이 금지된 군부대입니다. 랍비가 미안하다고 뒤돌아섰는 데 한참 가다 다시 병사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누구냐고요? 나도 그것을 묻고 있중이요”. 그리고 조용히 병사의 귀에다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 월급이 얼마요?” 병사가 놀라 대답했습니다. “월급이요? 월급은 왜 묻소?” 랍비가 말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면 당신의 월급의 두 배를 주겠소”.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누구인지 압니까?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한번도 제 눈썹을 제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눈에서 1센티도 안되는 데 말입니다. 제 신체의 비밀 하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제 머리에는 가마가 둘입니다. 아내가 머리를 만질 때마다 말합니다.

 

“당신 머리에 가마가 둘이야”. 그런데 그 가마를 제 눈으로 본 적은 없습니다. 사실 저희 아버지도 머리에 가마가 둘이 있고 제 아들도 둘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물려 받은 가마를 저는 제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몸만 그럴까요? 마음은 더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네 가지 “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는 나, 내가 모르는 나, 남이 아는 나, 남이 모르는 나,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면 누가 압니까?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독일의 본회퍼 목사님입니다. 이 분이 히틀러 반대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결국 순교하셨는 데 그때 감옥에서 쓴 시가 있습니다. 제목이 “나는 누구인가?” 입니다. 길어서 다 읽을 수 없습니다. 그 중의 한 토막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말하는 그 사람이 나인가? 아니면 내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해하고 그리워하다 병이 나고 누군가 목을 죄는 듯 숨을 몰아쉬며 색깔, 꽃, 새 소리에 굶주린 채 호의적인 말, 인간적인 친밀감에 목말라하며 횡포와 하찮은 모욕에도 분노하고 전율하고 큰일을 바라다가 절망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들을 걱정하다가 지쳐서 기도하고 생각하며 활동하기에는 피곤하고 마음이 허전해진 채 기진맥진하여 모든 것과 작별을 고하려고 하는 내 자신? 나는 누구인가? 그 사람인가? 아니면 저 사람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다른 사람인가?...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질문이 나를 비웃는다. 오 하나님!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의 것입니다“ (본회퍼, <옥중서신>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내가 누구냐고 물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내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롬7장에만 “나”라는 단어가 20번 이상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나”는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선한 “나”이고 또 하나는 악한 “나”입니다. 문제는 이 둘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내가 이기기를 바라지만 실제 악한 나가 이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 싸움이 내 속에서 너무 심하여 어떤 때는 죽을 것만 같다는 것입니다. 자,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는 누구일까요? 바울에게 있었던 두 개의 “나”는 누구일까요?

 

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두 개의 “나”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 싸움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어떻게 이것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우리 속에서 싸우는 두 개의 “나” 때문에 가책과 고통과 무기력속에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문제를 확실히 이해해서 우리의 삶이 반드시 승리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기 속에 죄가 거한다고 말합니다. 21절입니다.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은 자기 속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가 있는가 하면 악을 행하는 내가 함께 있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았다”는 것은 지적으로 알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적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말해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안 것입니다. 23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롬7:23, “내 지체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두 개의 “나”가 있는 데 그 중 하나는 죄의 법이요, 또 하나는 마음의 법입이라고 합니다. 이 둘은 서로 잘 맞지 않아 항상 투닥 투닥 서로 싸웁니다.

 

그중에서도 죄의 법이 더 강해서 내 마음의 선한 법을 자주 사로잡습니다. 바울은 “죄“를 “법”이란 말로 바꿔 쓰고 있습니다. “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통 때 법은 별 것이 아닌데 일단 법을 어기면 붙잡혀 감옥에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법은 power를 말하고 지배를 말합니다. 롬7:1절에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죄는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여 꼼짝 못하게 하는 power입니다. 힘입니다. 지배력입니다. 그래서 “법”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있습니까? 20절입니다. 롬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거한다”고 합니다. “거한다”는 말은 히브리어 “샤칸”, 집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죄는 내 속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오는 방문객이 아닙니다. 아예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 집에서 안 나가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바울이 구원받지 않은 것입니까? 아직 바울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까? 롬1장이 아니라 7장입니다. “롬1-3장에서 인간은 죄인이다. 롬3:21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죄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 그 피로 구원하셨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속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계좌이체하셨다.

 

그래서 우리안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았다. 그 결과 5장,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되었다.

둘째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를 받았다.

셋째 다만 이뿐 아니라 환란중에도 즐거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6장을 지나 7장으로 왔는 데 7:20,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있다?”. 23절, 그 죄가 나를 사로잡는다?“ 이해가 됩니까? 아니 하나님의 의가 우리속에 들어왔다면 우리속에 죄가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했다면 우리 속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죄가 없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구원받은 우리에게 죄가 거하다니 말이 됩니까?

 

그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를 지배하고 괴롭히고 있다니 말이 됩니까? 그래서 어떤 성질급하는 사람이 바울에게 항의합니다. “아니, 바울 사도님, 말이 안되잖아요? 당신안에 죄가 거한다는 것이 맞아요? 죄때문에 곤고한 자라고 한 말 맞아요? 어떻게 대 사도가 그럴 수 있죠? 하나님이 안 계신 것 아니예요?” 하면 바울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맞다니까요. 내가 날마다 그렇게 살고 있다니까요. 아마 당신도 그럴걸요.

 

한번 잘 살펴보세요. 그런가 안그런가”. 그러고 보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나도 내 안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보다 악이 강해서 내가 늘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가끔은 기도도 안되고 하나님도 없는 것 같고 믿음도 포기하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구원받지 않은 것도 아니고 집사, 권사가 아닌 것도 아니고, 모태신앙, 주일학교때부터 믿지 않은 것도 아니고, 부흥회때 방언받고, 새벽기도도 안하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여러분 속에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것때문에 힘들게 살고 있는 것 맞잖아요? 이유를 무엇이라고 둘러 대더라도 그 본질적인 이유는 죄 때문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잖아요?”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죄가 있다“. 이것을 인정하라는 것이 롬7장의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제가 며칠전 딤전1:15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말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면서 “나는 죄인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자기의 과거를 고백한 내용입니다.

 

그러면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할 때 그것을 과거형으로 말해야 합니다. “내가 전에 박해자였였고 폭행자였는 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였다“. 이렇게 말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나는 죄인중의 괴수“를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I am the worst sinner“. ”나는 지금 죄인중의 괴수다.

 

과거에 박해자였고 폭행자였는 데 지금도 죄인중의 괴수다“. 디모데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가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 주후 약 63-4년에 디모데서를 썻습니다. 내일 모레 순교할 바울, 그는 그때 거의 성자였습니다.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때 자신이 지금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나마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죄인이었지만 지금도 죄인이다. 죄인중의 괴수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롬7장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과거에 죄인이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지금도 죄인입니까? 욥기에서 최고의 감동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욥9:1-2절입니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욥이 그 길고 긴 고난속에서 발견한 것이 이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로우랴?” 몇 년전 제가 외국에 나갔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마침 비행기에서 신문을 보았는 데 올림픽 육상 경기에서 높이뛰기 하는 선수가 장대를 넘는 모습이 실려 있었습니다. 어떤 선수가 2미터 40센티를 뛰어넘었답니다. 사진으로 보았더니 대단합니다. 아슬 아슬하게 장대를 뛰어 넘는 데 스릴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비행기 창가에 앉아 있었는 데 마침 비행기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육상선수가 떠 오르면서 그가 뛴 2미터 40센티가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는 운동장에서 목숨걸고 뛰었겠지만 저 구름밑에, 어느 저 산밑에 작은 운동장에서 일어나 인간의 일이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로우랴?” 그럴습니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롭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구름 밑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속에 선과 함께 악이 있고 우리 속에 여전히 우리를 괴롭게 하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그것이 reality, 우리의 현실입니다.

 

 

나는 이미 거룩해졌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또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죄는 우리의 “현실적 자아”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0절도 다시 보십시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로다“. 죄는 우리 속에 거합니다.

 

그냥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 문제는 죄가 우리속에 거할 뿐 우리가 죄인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속에 죄가 거한다고 했습니다. 영어 NIV 번역으로 보면 ”It is sin living in me“. ”내안에 사는 죄“입니다. 죄가 내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는 아닙니다. 죄는 내 안에 살고 있지만 나는 죄를 가진 존재일 뿐 내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롬7장에 내 안에 죄가 있다고 3번 말했지만 우리 자신이 죄인이란 말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있는 자는 ”현실적인 나“입니다. 그러나 ”본성적 나“가 또 있습니다. 그 ”나“는 죄와 상관없습니다. 17절 봅니다. 롬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두 개의 “나”가 있습니다. 죄속에 거하는 “나”와 죄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나”입니다. 죄와 상관없는 나는 죄를 짓기 원치 않습니다.

 

19절입니다.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현실적인 나는 죄와 함께 삽니다. 그러나 본래적인 나는 죄를 싫어하고 죄를 미워합니다. 현실적인 내가 죄를 짓는다고 본래적인 내가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나를 성경은 “옛 사람”이라고 부르고 본래적인 나를 성경은 “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옛사람, 곧 죄가 거하는 우리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이 생겼는 데 그것이 본질적인 “나”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새로운 본성입니다. 그것이 롬7장에서 말하는 선을 행하려는 “나”입니다. 본래 죄의 지배를 받던 내가 그리스도의 피로 께끗해지고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의가 주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성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롬5:19을 보시겠습니까?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본성으로 변한 것입니다. 아담 이래 우리를 지배했던 옛 본성이 죽고 새본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안에 성령이 거하게 되었습니다.

 

고전3:16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죄를 다 없앴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단 받아들이고 죄를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 오래전 자녀들을 키우면서 경험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는 데 제가 집앞에 도착하자 멀리서 아들이 친구들하고 놀다가 “아빠”하고 달려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뛰어오는 아들을 보니까 옷이 온통 흙탕물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순간 제가 어떻게 할까 생각했습니다. 일단 아들을 피해야 하나? “너 옷부터 씻고 아빠한테 와” 해야 하나?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들은 달려왔고 제 옷은 순간 흙탕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한 것은 아들을 데리고 세면장으로 간 것입니다. 먼 훗날 제가 그 장면을 떠올리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아들의 옷이 더럽지 않았나? 왜 그때 씻기기부터 안하고 안아주기부터 했니?” 답은 딱 하나였습니다. 아빠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입니다. 은혜는 흙탕물부터 씻기는 것이 아니라 안아주기부터 하는 것입니다. “네 몸에 흙탕물 있잖아. 그것 씻고 와”. 마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괜찮아. 나는 네 아빠야. 내가 너를 안아줄게“. 그날 아들이 흙탕물을 묻히지 않고 달려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아들이 흙탕물 뒤집어 쓰고 달려왔다고 더 나쁜 아들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제가흙탕물 뒤집어 썻다고 아들에 대한 제 사랑도 흙탕물처럼 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은혜는 상대방에 따라 내 사랑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에 따라 상대방이 커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상대방을 고친 후에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일단 받아주고 고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속에 여전히 죄가 거하는 것은 맞지만 로마서 어디에도 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보고 “죄인”이라고는 단정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한 것은 롬3:21절 이전입니다. 롬3:21,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이후” 로마서는 한번도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사람일 뿐입니다.

 

죄인과 죄를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제가 2000년도 교통사고로 다리를 수술하고 무릎에 쇠를 박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보고 “목사님, 철들었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통사고 나고 철들었습니다. 그러나 제 몸에 철이 있다고 제가 철인은 아닙니다. 제 몸에 철이 있을 뿐이지 제가 마징거 제트는 아닙니다.

 

우리안에 죄가 거하여 우리도 모르게 죄를 짓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일 뿐입니다. 롬3:21절 이후 성경은 예수믿고 달라진 우리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의 이름을 붙여 주었는 데 그 이름이 “성도”입니다. 그 수가 무려 63번이나 됩니다.

 

 

자, 이 부분을 정리할 때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우리에게는 타락한 본성이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옛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나님의 의가 들어가자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본성이 바뀐 것입니다. 사람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죄가 남아 있습니다. 완전히 없으면 좋지만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몇 가지로 현대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금단현상이다. 금단현상은 마약을 끊은 사람의 후유증입니다. 헤로인이나 대마초같은 마약을 끊었지만 하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끊은 뒤에 몸이 떨이고 정신이 혼미하고 다시 마약하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되는 현상입니다. 금단현상은 마약하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하면서 갖는 부작용이 아니라 안하려고 하다가 생긴 부작용입니다. 견뎌내면 점점 마약이 멀어집니다.

 

두 번째 죄의 패잔병이다. 6.25 이후 공산당들이 지리산에 숨어 오랫동안 양민을 괴롭혔습니다. 괴롭힌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패잔병은 본진은 사라진 것입니다. 대장, 주력부대는 철수했고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군인 얼마가 남아 있습니다. 전쟁때보다 더 잔인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점점 세력을 잃고 있습니다. 시간문제입니다.

 

셋째 옛날 사귄 남자친구가 결혼한 옛 애인을 괴롭히는 것이다. 이미 결혼한 애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옛날 남자친구가 전화하고 몇 번 괴롭히지만 법적 권한이 없습니다. 여자만 흔들리지 않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죄가 우릭안에 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가진 의인이요,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새로운 본성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스도만 바라보라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두 개의 내가 서로 싸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25절입니다.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죄와 싸우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잘못이지만 죄를 지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더 잘못입니다. 다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할 일은 죄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녀가 나쁜 것을 좋아할 때 그것 하지 말라고 하지 말고 더 좋은 것을 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들이 어릴 때 닌텐도에 미쳤습니다. 하루 종일 그것만 합니다.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합니다. 고민을 많이 하다가 하루는 농구장에 데리고 가서 농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농구에 재미붙이다 보니 닌텐도를 안합니다. 그러다가 대학들어갔는 데 예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농구 끊으라 안 했는 데 슬금슬금 안하더니 여학생만 따라 다닙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은 더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을 버린다“. 자, 우리가 죄속에 사는데 죄와 싸운다고 쉽게 죄가 끊어집니까? 예수님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바라보면 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동쪽에서 해가 뜨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어둠과 싸우지 않아도 빛이 비치면 어둠을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죄 때문에 힘들어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더 사랑합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세 마디 말을 합니다.

 

첫 번째가 21절,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같은 21절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감히 아들이라 불러 달라고 말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19절, “나를 아들이라 부르지 마시고 종이라 부르소서”. 아들이 아니니 이제 종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죄를 지었다는 아들에게 옷을 입힙니다. 아들이 아니라는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 줍니다. 종이라 불러달라는 아들에게 신발을 신겨 줍니다.

 

 

왜 아버지는 이렇게 한 것입니까? 아들이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지만 그의 잘못보다 아버지의 자비가 더 컷습니다. 아들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아들의 잘못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잘못했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옷을 입힙니다. 옷은 사람을 입습니다. 사람에게 옷이 필요하지만 옷이 사람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옷을 입혀 주면서 잘못도 덮어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잘못한 것은 마치 더러운 옷을 입은 것과 같아. 더러운 옷은 벗고 다시 입으면 돼. 옷이 너는 아니야. 너는 옷보다 귀해. 옷이 잘못됐지 네가 잘못된 것은 아니야. 괜찮아. 힘내. 내가 옷을 바꿔줄게”.

 

아들은 자기가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고 말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줍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네가 잘못한 것은 맞아. 그렇다고 네가 내 아들이 아닌 것은 아니야. 내가 너를 낳았는 데 네가 아들이 아니라고 아들이 안되는 것은 아니야. 자, 반지를 끼어봐. 이 반지는 네가 내 아들이라는 신호야. 이 반지는 내 모든 재산이 네 것이라는 뜻이야. 내가 죽으면 네가 주인이라는 뜻이야. 네가 잘못했다고 내 아들이 아닌 것이 아니야”.

 

자기를 종으로 삼아달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신발을 신깁니다. 옛날 노예들에게는 신발이 없었습니다. 신발을 신기면 도망가기 때문에 신발을 벗겼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기를 종으로 여겨 달라는 아들에게 신발을 신깁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이니까 신발을 신고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너는 자유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 맞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로운 본성의 사람과 매일 죄를 짓고 사는 현실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둘이 싸워 자주 죄의 사람이 이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괜찮아. 너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의인이야. 너의 본성은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의로워졌고 너는 이미 나에 의해 받아들여졌어. 지금 짓는 죄는 죄의 패잔병이야. 곧 모두 사라질거야. 힘내”. 또 말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살아가지고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합니다.

 

“아니야. 너는 여전히 내 자녀야. 자, 네손에 반지를 끼워줄께. 아들이 한번 실수했다고 버리는 아버지는 없어. 괜찮아. 나는 네가 죄를 짓는 것보다 죄짓고 실망하여 낙심한 것을 더 슬퍼한단다. 괜찮아. 힘내”. “하나님, 이제 저는 종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합니다. “종이라니. 종 아니야. 내가 네 발에 신을 신겨줄게. 나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야. 너는 두려워 하는 종이 아니라 자유하는 아들이다. 자유를 누려라. 행복해라. 승리해라. 내가 너와 함께 할게. 네가 나와 함께 있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

(이윤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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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깨닫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롬7:7-14/ 유기성 목사

2016-08-25 15:55:36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영생을 얻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몸의 건강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아가고 약을 먹습니다.

 

몸이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은 대단히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육신 보다 더 중요한 영혼에 대하여는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리 사랑했던 가족이라도 그 육신은 장례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고인이 땅 속에 묻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육신만 장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이 육신 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몸만 귀하게 여기고 삽니다. 그러다가 죽는 순간, 절망합니다. 영혼은 어디로 가느냐 말입니다.

 

지진이나 해일 등 큰 사고가 생기면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평안합니까?

 

폴 워셔 목사가 오하이오 주에서 설교를 했을 때 일을 말했습니다. “설교를 막 끝냈을 때 아홉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일어서더니 이렇게 떨면서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강단에서 내려와 아이를 붙잡고 "아이야, 무슨 일이니?라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저처럼 사악한 죄인도 구원하실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엄마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그 때 교인들이 웃었습니다. 목사님이 웃는 교인들에게 말씀했습니다.

 

“웃지 마세요.” 지금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아시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그 아이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의 작은 죄가 심판을 받아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채 지옥에 가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영혼의 존재와 죄의 심각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죄 하나 때문에라도 우리는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르고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알지 못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율법주의자가 되지 말라’ 는 말을 듣다 보면 율법이 나쁜 것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율법이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롬 7:7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아니었다면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알지 못한다!’ 정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그 말이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습니다. “죄를 안 짓고 산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죄를 알지 못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탐심을 예로 듭니다, :7 ... 율법에 "탐 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탐심이 죄입니까? 몇 년 형입니까? 법정에 가면 탐심은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도둑질하고 살인하여야 죄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보면 탐심이 큰 죄입니다.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 계명을 보고서야 탐심이 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말씀이 눈에 들어오기 전에 남을 비판하는 것이 죄 인줄 몰랐습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저는 말씀을 알기 전에 염려가 죄 인줄 몰랐습니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어느 목사님께서 “나는 지옥 갈 죄인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라는 교인에게 눅 10:27을 읽어 주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의 요약입니다. 당신은 잘 지켰습니까?” 그랬더니 그 교인이 대답했습니다. ”제겐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율법이 하는 역할은 이처럼 우리 양심을 깨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죄를 짓고 살기 때문입니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사람들은 율법이 없었다면 죄 인줄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죽어 죄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4: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미국의 유명한 뉴스 해설가인 󰡐폴 하비󰡑(Paul Harvyy)는 추운 지방에 사는 에스키모들이 어떻게 늑대를 잡는가? 그 특별한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늑대를 잡기 위하여 날카로운 칼날에 피를 묻힌 후에 그것을 얼리는데 이것을 반복하면 나중에 칼날이 얼어붙은 피에 숨겨지게 됩니다.

 

이 칼날이 들어있는 피로 된 얼음덩어리를 늑대가 많이 다니는 툰드라(Tundra) 지역에 칼날이 위로 올라오게 묻습니다. 그러면 늑대는 피 냄새를 맡고 다가와서 얼어붙은 피를 혀로 핥기 시작합니다.

 

늑대가 계속 피를 핥아먹으면 날카로운 칼날이 나타나지만 늑대의 혀는 이미 차가운 얼음을 핥은 중에 감각이 없어져서 자기의 혀가 갈라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 줄을 모른 채 더욱 열심히 계속 핥아먹습니다. 드디어 늑대는 피를 많이 흘리고 쓰러질 때까지 피를 마시다가 죽는 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멸망시키는 마귀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도 죄에 대한 감각이 없는 우리에게 죄를 깨우쳐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나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사실은 죄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인격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1 죄가 그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나를 속이고, 또 그 계명으로 나를 죽였습니다.

 

죄는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더욱 죄에 옭아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알아도 오히려 더 죄짓게 만듭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 2권 4장에서 어린 시절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내게는 도적질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가난 때문은 아니었고 선행을 멸시하고 죄를 추구하는 강한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날 늦은 밤 소년들과 함께 배나무를 흔들어 배를 도적질한 후 돼지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오, 하나님! 그것이 나의 마음의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추구한 것은 죄악 자체였고 잘못 자체였고 부끄러움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율법이 오히려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9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10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아십니까?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알아야 회개도 할 것이 아닙니까?

 

어떤 남편이 결혼 30주년이 되어 아내에게 생일 선물을 특별히 해주고 싶었답니다. 선물을 고르기 어려워 아내가 원하는 것을 사주고 싶어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갖고 싶은 게 있으면 한번 얘기 해봐요”그랬더니 아내가 정색을 하면서 생일 선물 같은 것은 원하지 않으니 두 시간만 자기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완강하여 남편이 결국 아내에게 두 시간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아내의 생일 날,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나에게 두 시간을 주기로 약속하셨죠?” “그랬지” “그럼 지금 나에게 두 시간을 주세요.”

 

그러자 아내가 남편을 거실의 소파에 앉히고는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두 시간 동안 당신에게 이야기를 할텐데 당신은 그저 들으면서 ‘맞아, 옳아, 그렇지’ 만 해주세요.” 남편은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렇게 하지”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는 남편 앞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 만나고, 데이트하고, 약혼하고, 결혼하고, 시집살이도 하고 애 낳고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듣다가 사실이 아닌 것 같은 이야기도 나와 “여보, 그게 아니고, 그때 이랬잖아” 하였더니 아내가 “여보 두 시간만 두 시간만 제게 주세요. 당신은 그저 들어만 주시면 돼요”라고 말했습니다.

 

약속을 했으니 더 말을 못하고 듣기만 하는데, 한 10분쯤 들으니까 미치겠더래요.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많더랍니다. 그런 말을 듣기만 해야 하니 20분을 들으니 더 듣다가는 죽겠더랍니다. 그런데 한 30분쯤 지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30년을 같이 살았는데, 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몰랐을까. ‘내가 그때 그랬었나?

 

아내가 어느 날은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했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한 여자의 생애가 이럴 수가 있나. 그리고 내가 어쩌면 그렇게 무심하게 했으며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가 말입니다. 두 시간을 정신없이 말하는 아내의 말이 끝날 즈음에 남편이 울기 시작합니다.

 

아내가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여보 다 이야기했어요. 내 이야기 끝까지 들어줘서 고마워요.” 했을 때, 남편이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아내의 무릎을 붙들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아내에 대하여 너무 몰랐던 것이 미안했고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지도 못했음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여러분은 아내/남편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부모, 자녀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알기는 다 아십니까? 하나님께는 어떤 죄를 짓고 살았는지는 아십니까?

 

부흥회 때, 한 청년이 통곡을 하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내 마음은 왜 이렇게 더럽습니까? 하나님, 나는 왜 이렇게 죄가 많습니까?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나를 도와 주세요” 율법은 이 역할 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고,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자신의 죄를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서야 자기 죄를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면 구원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마틴 루터가 회심하기 전 회개의 역사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경건하게 수도하는 사제였지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였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주님께서 "마틴 루터야, 하나의 죄만 있어도 지옥이다 백 가지가 아니고 천 가지도 아니고 단 하나의 죄라도 영원한 지옥으로 가기에 충분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의 성경적인 근거가 무엇입니까?"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앞에서 몇 번이나 죄를 지었나요? 단 한 번이었습니다. 정말 단 하나의 죄가 있어도 하나님과 교제는 불가능합니다.

 

마틴 루터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지은 죄를 낱낱이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속까지 더러운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사제에게 가서 고백합니다. 어느 날 그 사제가 루터에게 "형제님, 다음부터는 고백할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를 하고 와서 고백 하십시오" 라고 권면합니다. 그 사제는 어둠 속에서 길 잃은 영혼이었기에 루터를 이해하기 못했습니다.

 

이런 고통을 겪고 난 다음에야 루터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루터를 위해 하신 일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루터가 말한 이신칭의 (以信稱義)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이신칭의 와는 극단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며 그들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사악한지 깨닫게 하신 적이 있나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여러분의 죄악을 보았습니까? 루터는 그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은 것입니다.

 

죄 중에 살면서도 회개가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큰일입니다.

 

마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죄인이요! 회개하시요!” 라고 말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수록 오히려 역효과만 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진정한 회개의 문이 열려 십자가 부흥이 우리 심령 안에서 일어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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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는 자, 예수께로 오라! /롬7:15-25/ 유기성 목사

2016-08-26 14:38:11

 

제가 1984년 진정한 회개와 회심을 체험하였을 때, 저는 다시는 마음으로도 죄를 짓고 싶지 않았고, 또 실제로 죄를 짓지 않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제 안에 여전히 죄가 역사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좌절하였는지 모릅니다.

 

욕심, 교만, 정욕, 불순종 등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괴로웠습니다. 목사인지라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서 몸부림치며 울며 기도하기도 많이 했습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인가? 나는 정말 거듭났는가?”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의 역사로 당황하며 좌절합니다.

 

갓 구원의 감격을 가질 때, 마음은 참으로 기쁨으로 가득 차고 모든 죄악에서 이긴 것 같고, 어떤 시험도 이길 것 같고, 하나님의 소망이 눈에 보이고,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이 상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죄는 다시 살아나고, 당신의 오래된 성질과 교만과 질투가 다시 찾아오고 성경 읽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전과 같지 않고, 전도의 열심도 식고 사랑도 갈수록 냉냉해 집니다.

 

죄가 다시 찾아 올 줄이야! 시험에 무력하게 쓰러질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우리는 세상의 죄인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여전히 죄인임을 느낍니다.그래서 때로는 구원의 확신도 잃어버리고 전도할 의욕도 갖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혼란을 경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롬 7: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

 

죄를 짓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15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자신의 내면에 여전히 죄와 악이 존재한다는 고통스런 사실입니다.

 

롬 7: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구원받은 자신을 여전히 죄짓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17 ...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20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22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불신자의 고백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고 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무나 비참하여 울부짖습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정신 차려야 합니다. 말씀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절망시키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가 여전히 죄에 무너지는 현실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죄짓게 될 때 우리가 느끼는 탄식과 절망감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 구절들이 불신자의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이런 애통함과 절망감은 불신자에게는 없습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구원받은 자는 성령의 근심을 느낍니다. 성령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삶을 살면 즉각 마음이 괴롭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살면 괴롭습니다. 십일조 못하면 괴롭습니다. 전도 않으면 괴롭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괴롭습니다. 성령께서 근심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에게도 죄책감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깊은 절망감은 없습니다.

 

2007 신년부흥회 때입니다. 집회가 끝난 후 당시에 중학교에 다니는 저의 둘째 딸이 제 방에 와서 펑펑 우는 것입니다, 부흥회에 참석하여 모두 다 큰 은혜를 받았는데, 자신에게는 예배의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다며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나 우는 딸을 안아주면서 위로해 주었지만 마음으로부터 너무나 기뻤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없다고 통곡하는 그 자체가 영적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학생 때 예배의 감격이 없다고 그렇게 울어보지 못하였거든요! 성령께서 제 딸 안에 강하게 역사하심을 느꼈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없어도 무덤덤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목사님께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제가 올바른 영적 상태인지 너무나 자신이 없고 불안합니다. 나는 17년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은 너무나 차갑고, 위험한 상태에 처한 것 같습니다.

 

󰡓 그의 말을 듣고 목사님은 성 버나드의 글에 나오는 한 구절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글은 그 청년처럼 자신의 마음이 굳어 있다고 고민하던 어떤 사람에게 버나드가 써 보낸 것입니다. “내 형제여! 자기의 마음이 굳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만이 마음이 굳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완고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만이 진짜 완고해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도 또 죄를 지어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 상담을 옵니다.그들을 두렵게 하는 성경이 히 6:4-6입니다.

 

히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저는 그들에게 이 말씀이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해 줍니다. 이 말씀이 지목하는 사람은 죄를 짓고도 죄책감도 애통함도 없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고 다시 죄를 지었느냐, 하는 것 보다 그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는 애통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면 “저는 죄를 하도 많이 지어서 저 같은 사람이 교회를 가면 다른 교인들까지 욕먹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죄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계속 죄를 짓고 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죄가 그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을 붙들고 “너 같은 놈은 절대 교회 가면 안 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인한 고통과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아닙니다.

 

청소년들이 가끔 어떤 나쁜 조직에 가담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조직이 정말 나쁘다고 판단이 되었으면 얼마든지 뛰쳐나오면 됩니다. 혼자 힘으로 어려우면 부모님이나 선생님, 경찰관의 도움을 입으면 간단합니다.

 

그런데도 조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 마음이 악한 자에게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이 그의 영을 사로잡아서 “너는 이 조직에서 절대로 나갈 수 없어. 만약 빠져나가면 너는 죽을거야.”라고 세뇌시켜 체념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유흥가 직업여성들의 90퍼센트가 ‘나는 이대로 살다고 죽을 수밖에 없어. 달라질 게 아무 것도 없어.’라고 생각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죄의 권세가 그의 영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히려 조심할 것은 죄로 인한 탄식과 몸부림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죄는 영혼의 암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를 짓고 사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의사 앞에서 암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충격과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절벽을 행하여 달려가는 열차에 타고 있음을 깨달은 충격과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영이 산 자에게 그러한 몸부림이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무슨 고통이나 몸부림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놀라운 승리를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니, 갑자기 왠 반전입니까? 왜 이 상황에서 주 예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입니까?

 

죄로 인하여 절망하고 몸부림치는 이들은 이 분위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 힘으로는 도무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박사라도 안됩니다. 성령 체험을 하였어도 우리는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욕심은 계속 일어나고, 교만한 마음, 시기 질투, 미움과 원망, 음란한 충동은 계속 일어납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훌륭한 성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죄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짓고 탄식만 하도록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능히 죄에서 건지시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이 죄로 인한 절망을 고백하면서 갑자기 주 예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것은 절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간 이래 모든 사람들이 죄의 종노릇하고 살았습니다. 그 악순환이 고리를 깨뜨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 나가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 안에 있는 자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죄의 권세에 끌려 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죽은 것도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육신의 역사는 여전히 만만치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온 인류가 꼼짝 없이 종노릇하던 그 죄성 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휘청할 때가 많고 넘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옛사람은 주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영으로 사는 새 사람으로 되어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온유하고 정직해도 나는 죽고 예수로 살지 않으면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중생했다고 말합니다. 죽고 다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이기지 못할 큰 죄가 없습니다, 이기지 못할 시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승리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5: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죄와 싸우다가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예수님께로 오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나 결심이나 노력으로 죄를 이기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죄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건지시고 이기게 하실 분은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죄에 대한 승리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주 예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 육신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 죄 중에 내버려 두셨습니까?

 

우리가 도대체 어떤 죄인이었는지 알게 하시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죄인도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을 통하여 악의 실아, 지옥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주 예수님을 의지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25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 한번 공부해 본 적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기지만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육신이 중요합니까? 마음이 중요합니까? 마음이 열쇠입니다. 인생은 마음이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전쟁이 있습니다. 영적 전쟁입니다. 전쟁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괴롭다 힘들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죄악과 전쟁을 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전에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죄에 끌려 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쟁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대장이시고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지키시기에 마귀는 우리를 만지지도 못합니다.

 

마귀는 육신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다시 차지하려고 집요하게 역사합니다. 삼키려고 우는 사자같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에게 질투가 나서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흔들리는 가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우리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땅 판 것이 아까워 거짓말로 헌금한 아니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하였습니다.

 

행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우리 이야기입니다. 죄사함을 받았다는 믿음만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받았다면 너무나 기쁘겠지요. 그러나 그 기쁨만으로 그가 다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실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 만달란트, 5조원에 해당되는 빚을 탕감 받은 자가 100데나리온 1,000만원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였다는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에 주님이 오시고 마음의 왕이 되시지 않으면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제가 죄로 인하여 극심한 내적 고통을 겪을 때, 주님은 제게 “죽으라” 하셨습니다. 저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조금도 가능성이 없다고 보셨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괜찮은 것도 있지 않을까요? 꼭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계속 실패하는 것입니다! 제가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은 그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때만 제 안에 예수님께서 주인 되시고 생명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제겐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을 때,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죽고 싶은데 이미 죽었다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 후부터 죄를 이기는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죄를 이기지 못하여 몸부림치는 제게 주시는 주님의 답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죄를 이기려면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며,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셨음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24 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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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우리도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롬7:18-25/ 주준태 목사

2016-09-30 16:12:00

 

세상 사람들은 의에 대하여 죽었고 죄에 대하여만 살아 있기 때문에 사실상 죄책감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죄의 어두움과 미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겨우 생각하는 것이 도덕이요, 양심수준 정도입니다.

그 양심이라는 것도 화인 맞은 마비된 양심인지라 벼락 맞아 깨어진 죽은 나무처럼 선악의 판단과 시비가 상황따라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그런데 신자는 다릅니다. 근본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았기 때문에 조그만 죄에도 가위눌려 괴롭기가 한량이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거룩함과 불의에 대한 갈등과 시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 32:3~4).

 

성도가 참으로 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가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민족 복음화를 말하고 세계 복음화를 말해도 내 자신이 복음화 되지 아니하면 다른 것은 공념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修身濟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을 다스린 후에야 나라를 돌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전도, 세계선교를 이루기 위해선 먼저 내 자신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성패와 진보는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시작됩니다.

 

오늘은 이 자신과의 싸움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그 진면목을 살펴보십시다. 세상과 마귀는 우리의 육신을 통해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잠깐 지나가 버릴 것이 본질적인 것처럼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 자신을 묶어버립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에 호소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 현란한 영광과 빛깔에 넋을 잃고는 내면세계를 개발하지 못하고 현상세계의 포로가 되어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면 우리 속에서는 거룩하게, 깨끗하게, 구별되게 살고 싶은 열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막상 선을 행하려고 하면 내 속에서 또 하나의 내밀한 저항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선을 행하려는 하나님의 법이 내 속에서 역사하는 것처럼 악을 행하려는 죄의 법이 또한 역사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이 이중성 때문에 성도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이중성의 성격을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두 소욕 때문에 영적으로 지치고 피곤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 힘과 힘의 싸움에서 종종 지게 된다고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오늘 본문에서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18~23).

 

우리는 바울처럼 이 기본적인 싸움에서 연속적인 패배를 경험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죄를 서로에게 고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종류의 위선이 생깁니다. 하나는 거룩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부끄럽고 두렵지만 조금이라도 자기보다 거룩하게 보이는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을 미화시키고 우상시합니다.

 

그 안에 동일시 되려고 노력합니다. 또 하나는 자기가 위선자이기 때문에 제 눈에 안경이라고 모두들 위선자로 몰아버리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증거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뼈아프게 느끼면서도 조금이라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공격하고 물고 늘어짐으로써 자기 합리화, 자기 변명으로 위장합니다.

 

그 안에 도피하고 안정을 얻고자 하는 것이지요. 터무니 없이 다른 성도를 높이는 것은 자기 경건에 자신이 없는 증거입니다. 별것도 아닌 것을 침소봉대하며 쉬지않고 입을 열고 떠드는 것도 자기의 경건에 확신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면서도 성도의 마음은 한결같이 아픕니다. 내가 이 위선의 탈을 벗고 살 수는 없을까?

 

우리는 죽으나 사나 하나님의 법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 속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니까요. 그러나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없는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결심합니다. 결단합니다. 그러나 또 깨어집니다.

 

자꾸만 깨어짐으로 마침내는 더 미안해서 견딜 수 없는 자리에 이릅니다. “오 하나님, 더 용서해 달라는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고백기도할 얼굴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모두가 이 지경에 와야 합니다.

 

내 속에 죄가 거하며, 육신으로는 죄를 따른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죄와 싸우려면 먼저 나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에 대한 올바를 진단이 없으면 싸울 때마다 지고 맙니다. 그렇게 싸워서 느는 것은 위선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리고 자신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Honest to God & Me). 신령하다고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깁니다. 그렇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반역적이며 죄를 향하고 있다는 그 전적 타락의 실재를 체험하기 전에는 이 전쟁, 곧 거룩하게 사는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죄 아래 팔려왔습니다. 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용감한 신자의 대표적인 경험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노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본질적인 죄의 근원으로, 원죄로 나아갑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주여 나는 뿌리 깊은 죄인입니다. 나는 완전한 죄인입니다“ 이 고백에서부터 승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죄와 성결에 대한 신화와 얼레를 많이 만들고 그 뒤에 숨고 있는지요? 나는 비교적 잘났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신령한 신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의와 결심과 성결 수준을 자랑합니다. 그것은 모두가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분명히 이렇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

 

그 다음에는 이 싸움이 언제까지 계속되는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거룩하게 사는 싸움은 한 번의 싸움이 아닙니다. 어떤 기간 동안의 싸움이 아닙니다. 한번 높은 고지를 점령한다고 해서 다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싸움은 순간순간의 싸움이면서 또한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싸움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권면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신앙생활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땅 위에서 우리가 긴장을 풀고 방심하면 그 시간부터 우리는 마귀의 조종 안에 들어갑니다. 큰 안식, 곧 주께서 놓아주시는 그 시간까지 우리 모두는 동일한 이 싸움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거룩함을 이룰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신 답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순간순간 믿음 안에서 예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11)

 

. 육체의 소욕은 달랠 것이 아니라 죽여야 합니다. 죽이는 것은 금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과 은혜로 됩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매일 죽고 예수 안에서 매일 산다는 것입니다. 성결은 전력처럼 쌓아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성령 안에, 말씀 안에 있을 때 승리합니다.

예수 밖으로 나가면, 나를 의지하면, 내 관록을 내세우면, 섰다 하면 넘어집니다.

 

바울은 롬 6:10에 기록합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깨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것이 습관이 될 때 쉬워집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면서 성화의 길을 걸으십시오. 그 길에서 나도 몰래 그리스도를 닮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우리들의 실패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깔끔한 처리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려다가 넘어지고, 연약해서 자빠진 것은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깨끗이 보혈로 씻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새로운 힘, 새로운 용기를 얻게 하시고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격려해 주십니다.

 

미가 선지자가 찬송합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8-19).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당하심으로 우리 죄를 처리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이 모든 일을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하고 철저합니다. 우리 죄짐은 사라졌다가 어떤 때 또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청소하신 것은 가루도 남지 않습니다. 흔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셨습니다(시 103:12). 동과 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습니다. 동과 서와의 무한한 간격은 우리들의 사함 받은 죄가 우리들에게서 떠나간 거리입니다. 그 견책과 저주는 결코 속함 받은 자에게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등 뒤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볼 수 없는 숨겨진 자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등 뒤에 던졌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도말하신 죄는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깊은 바다에 우리 죄를 던져 버리신다는 것이나 우리 죄를 발로 밟으신다는 것은 용서하신 죄는 결코 기억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어디 있으며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영원히 잊어버리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도말하신 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자라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우리 죄를 다시 볼 수 없는 야맹증 환자가 되셨습니다. 우리 죄를 다시 기억할 수 없는 건망증 환자가 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우리가 왜 용서받은 죄들을 자꾸 건져 올려서 죄책에 시달릴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옛 성도들처럼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요. 자신감을 가지십시요. 믿음을 가지십시요. 순간순간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십시요. 성령의 능력을 신뢰하십시요.

 

그 다음에 여러분의 잘못과 실패에 대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명료한 용서를 믿으십시요. 그분은 여러분을 단순하고 깔끔하게 용서하십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막 2:5)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7:47-48)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 눅 7:50, 눅 8:48)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또 다시 거룩을 이루어라. 거룩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라. 내가 보장이 되리라. 내가 밀어주리라. 내가 씻어주고 올려주리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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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실존적 진실과 믿음 /롬7:14-25/ 곽선희 목사

2014-11-25 20:32:06

 

자동차를 타고 운전하는 중에 라디오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간단한 이야기가 왠지 저는 꽤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생각이 나고 또 생각이 나곤 합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고등학교 교사직을 가지고 있던 어떤 여자가 남편을 사별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어서 살기가 막막해서 원치 않지만 할 수 없이 포장마차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라도 식구와 함께 먹고살아야하기 때문에……. 그 포장마차를 하면서 경험한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주 실감나는 얘깁니다.

 

초저녁이 되면은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젊은 사람들 이렇게 삼삼오오 그렇게 들어와서 포장마차 속에 들어와서 뭐 간단하게 저녁도 먹고 또 술도 마시고 이러는데 아주 반갑게 화기애애하게 출발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쩌다가 몇 잔 술이 들어간 다음에 주고받고 얘기하다가 한번 싸움이 붙으면요 거기 있는 집기까지 다 때려 부수는 거예요. 아시는 대로 포장마차는 좁기 때문에 저들이 무슨 얘기하는지 다 들리거든요. 일일이 다 듣고 있는 거거든요.

 

이 사람들이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와서 같이 식사를 하다가 왜 마지막에 이렇게 한바탕 싸움으로 끝날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싸우나? 이 교사출신의 주인아주머니가 연구를 했어요. 도대체 왜 싸울까? 돈 때문일까? 아니면 지위 때문일까? 가정 때문일까?

 

아 아니더래요. 꼭 싸우기 직전에 터지는 이유가 하나 있어요. 딱 한마디가 나오면 꼭 터지더래요. 여러 번 보니까 똑같이……. “사람이 그러면 못써.” 그러면 꽝하고 터지더래요. 아 참 이상하다. 어쩌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대요.

 

그저 이말 저말 하다가 마지막이 “사람이 그러면…….” 하면 사람이 어때? 꽝하고 그다음엔 그저 뭐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싸우는 거예요. 참 그게 도대체 뭘까?

 

여러분. 여러분 부부싸움하세요?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이 그러면 못써.”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꽝하는 거예요. 왜요? 이 존재와 진실이 공격을 받으면 못참는거예요. 내가 비록 돈은 없지만 존재는 있다.

 

내가 지위는 낮지마는 그러나 나는 인격은 있다 그 자부심이 있는 거예요. 이걸 건드리면 안 되는 거죠.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직장에서도 상사가 부하직원을 불러놓고 실수를 지적을 하고 혹은 충고를 할 때 오늘 당신이 만든 문서, 당신이 만든 프로젝트에 요거 요거 요렇게 잘못된 거 아니냐?

 

요렇게 고쳐라. 요렇게만 말해야 됩니다. 만일 사람이 그러면 못써. 그러면 일을 망가집니다. 이 사람이 이 충고를 듣고 나가면서 당신 사장자리에 앉아 있지만 사람은 내가 더 괜찮아요. 그래요. 안되는 거예요. 고 사건과 고 실수된 사건과 사람과를 별개시해야 되는 거예요.

 

그걸 같은 것으로 묶어버리면 안되는 거예요. 그건 못참는거예요. 내가 실수는 했어도 이건 내가 아네요. 내가 엄청난 실수를 했더라도 아 그건 실수지 나라는 존재는 이거 아니라 이거예요. 이거를 알아주길 바래요. 이것만은 지켜가길 원해요. 생각 그렇지 않습니까?

 

혹 어떤 때 실수를 했더라도 아 이거 뭐 그 조상 적부터 그래 이래 나오면 이 달라지거든요. 당신은 본질적으로 그래 그러면 아 큰일이죠. 요 사건은 Accident예요.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건일 뿐이에요. 당신은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게 어쩌다가 실수를 했군요.

 

이래야 얘기가 되는 거란 말예요. 그런데 그 실수된 사건과 그 사람의 본질을 묶어가지고 내던지면 아 이건 이거는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 거와 마찬가지예요. 견딜 수가 없는 거라고……. 이래서 터지더라…….

 

제가 그 아주머니 얘기를 이렇게 들으면서 한참동안 철학적으로 생각을 했어요. 깊은 의미가 있거든요. 저기……. 도대체 자기 자신 자신이 무엇입니까?

 

그래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기도시우 아이도스 Know Yourself, 너 자신을 알라, 자신을 아라. 뭐 철학적으로 뭐니 뭐니 우주가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본질이 어떻고 아르케가 어떻고 고만하고 네 자신을 알라. 그렇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겠어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합니다. 인간의 고독 인간의 불안 그 깊은 원인은 무엇일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꼭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불안에 떨게 되고 역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또 하나는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왜 보내셨나? 오늘 내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가? 도대체 나는 누구냐? 이걸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이죠. 또 하나는 생명을 바칠만한 일이 없어요. 일거리가 없어요.

 

이것을 위해서는 내가 죽어도 좋다 그런 확실한 내게 주어진 사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마다 어차피 현재에 삽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앞에 올 겁니다.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차피 현재에 사는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과거는 잘 알고 현재는 모르고 미래에 대해서는 그저 막연할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어디에 나타나는고 하니 여러분 장기를 두던가 혹은 바둑을 둬보세요.

 

장기 바둑 둘 때 참 재미있는 것은 두는 사람은 딱 마주앉아서 지금 신경을 쓰고 있는데 꼭 누가 더 잘 아느냐? 옆에서 훈수하는 사람들 꼭 그 사람들이 더 잘아요. 그 왜냐? 책임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래라 저래라 하다가 결국은 싸움까지 가는데 재미있는 거는 요 수를 놓은 다음에는 알아요. 지나간 다음에는 아 요랬어야 되는데……. 그거 모르는 사람 없어요. 그러나 고 바로 그 현재 고 시간에는 이게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지나간 다음에야 안다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멍청한 거죠.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데 담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바울 저는 이 로마서 전체 중에도 이 7장을 특별히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가장 위대한 사도바울의 자기고백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읽어보십시오. 7장 전체를 읽어나가는중에 깊이 명상하면서 읽어보세요. 깜짝 놀랍니다.

 

왜요? 어떻게 이렇게 정직할 수 있을까? 지금 로마로 보내는 편지입니다. 로마사람들은 사도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소문만 듣고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그분들에게 이 편지를 써 보냅니다.

 

써 보내면서 오늘 본문에 본바와 같이 옷을 다 벗어버리고 홀랑 벗어버린 것처럼 적나라하게 자기 모습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아 위대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만큼 정직하기는 힘들어요. 참 힘든 거예요. 이거는요.

 

유명한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 링컨이 남북전쟁을 할 때 그 참모인 장군하고 의견이 충돌이 됐어요. 아브라함 링컨은 이렇게 하자고 하고 장군은 저렇게 하자고 하고……. 한바탕 다퉜는데 아브라함링컨이 대통령이니까 윗사람이니까 맘대로 해버렸어요.

 

그 작전에 실패했어요. 완전 실패한 다음에 아브라함 링컨은 미안하니까 요새 같으면 전화로 하면 되겠지만 그 참모총장에게 편지를 써 보냈어요. 메모지에다가 큰 종이에다 딱 한자 아이엠쏘리. 아브라함링컨. 비서를 통해 보내주었어요.

 

참모총장이 딱 이걸 받아보더니 그렇지 않아도 지금 화가 나서 있는데 이 편지를 보니까 뎃스 리틀러스가이 그랬어요. 이 멍청한 녀석이라고……. 대통령 안 보는데서 욕하는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어요? 욕을 해버렸어요. 멍청한 녀석이라고……. 비서가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그리고 돌아왔어요. 갖다왔나?

 

갖다왔습니다. 편지 전했나? 전했습니다. 그래 편지 읽으면서 뭐라고 하는가? 아 이걸 바로 고할 수가 없잖아요. 아브라함 링컨이 웃으면서 빨리 말해봐, 솔직하게 말해라. 멍청한 녀석이라고 합디다. 아브라함 링컨 껄껄 웃으면서 아하 그 사람 사람 볼 줄 아누만 그러더래요. 참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위대하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 어 그거 실수 할 수 있는 사람이죠? 아 실수했죠. 깨끗하게 인정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위대하다는 거예요. 요래조래 변명하고 뭐 어떻고 어떻고 그 사람 초라해집니다. 아주 형편없어 집니다. 자 이거 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리차드 칼슨이라고 여러분 잘 아십니다. 우리는 사소한일에 목숨을 건다고 하는 책을 쓰신 분입니다. Don't sweat small stuff with your family.그런 책입니다. 그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불행과 근심과 스트레스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태어난다.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자기문제를 남의 문제로 내 책임을 사회문제로 돌리려고 하는 순간 스트레스가 다가오는 거예요. 일단 내 책임 이예요.

 

이건 내 잘못이야. 이것이 나 자신 이예요. 인정을 해야 됩니다. 남이 인정한다는 게 아네요. 내가 내 자신을 바르게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마음 이것만이 모든 스트레스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다시한번보세요. 오늘 본문에서 몇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나는 육신에 속하였다.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다. 중생한사람이요 대사도요 온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요 예수의 이름으로 감옥에 들어가서 매를 수없이 맞은 사람이요 성자 같은 사람이에요. 아니 성자죠.

 

그러나 아직도 나는 육신에 속했노라. 아 기가 막힙니다요. 나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사람이다. 육신에 속한, 욕망에 끌려 사는 사람이다. 인정을 했어요. 또한 두 번째로 보니까 죄 아래 팔렸다……. 무슨 말입니까? 한번 죄를 지면 이제는 죄의 노예가 됩니다.

 

그 죄가 나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한번 거짓말을 했다고 합시다. 바로 회개하지 않으면 거짓말 또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그 거짓말 회개안하면 또 또 거짓말을 계속해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사실도 기억해야하고 거짓말도 기억해야 되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이래서 인간이 다 망가지는 거예요. 그 진실한 것 밖에 없어요. 그 제때 회개하면 끝나는걸……. 어쩌다가 이걸 고만 고만 덮다보면 마지막에 아예 인간자체가 망가지는 거예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걸 인정했습니다. 죄 아래 팔렸다. 내게는 자유가 없다. 내가 지은 죄가 때때로 나를 지배하고 있다. 내 과거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아직도 끊어지지 않았다.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함은 있으나 행함은 없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은 가고 있다. 여러분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은 꼭 맛이 있고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때 재미가 있는 거예요. 그 자체가 성향 자체가 이 병든 체질이에요.

 

또 분문에 보니까 나는 나를 알지 못한다. 인정을 했어요. 무의식중에 나도 모르게 잘못되고 있어요. 나도 모르게 시험에 빠지고 있더라고요. 내가 뭐도 모르게 어떤 일을 저질렀어요. 이런 존재다 나는……. 난 이 정도다 이걸 인정을 했습니다.

 

나는 나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21절에 보면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가 행한 모든 것에 악이 함께 있다. 어거스틴은 유명한 말을 합니다. 참회록 속에서……. 하나님이여 내가 하는 생각 내가 하는 말 나 하는 행위 그 모든 것 중에 죄 아닌 것이 있었습니까?

 

죄 아닌 것이 있었습니까? 여러분 선한 일을 한다고 하죠? 거기 죄가 있어요. 좋은 일 한다고 하죠? 자기 자랑하고 있어요. 아니 이거 안 됩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는 바로거기에도 악이 있어요. 기도하는 그 속에도 또다시 시험에 빠지고 있어요.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 진실을 인정을 했어요. 결국 다섯 번째 보면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포로 되어서 끌려오는 자기 모습, 자기가 보고 있는 거예요. 객관적 시각을 갖고 있어요. 이 불쌍한 사람아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노예처럼 끌려가는 모습을 그는 보고 있어요.

 

제가 신학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기숙사 있었고요 기숙사에 요만한 책상하나 갖다놓고 고기 내 공부하는 자리 고 책상 바로 맞은 벽에다가 큰 글자로 플라이포로스 에고안드로포로스 헬라어로 크게 써놨어요.

 

다른 사람 모르게……. 그게 뭐냐고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프라오포로스 안드로포로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영어로 말하면 Oh poor man, 이 불쌍한 사람아. 그런 뜻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있어요.

 

자기 비참한 처지를 자기 알고 있어요. 글을 써놓고 늘 붙여놓고 한번씩 보면서 자기 실존의 고민을 되새기곤 했습니다.

 

여러분 전적으로 타락한 나를 인정할 때 전적인 은혜로 향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4세기에 벨기에의 레이몬드라고 하는 레이몬드3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왕이 되고나서부터 방탕해가지고 매일 연애만하고 많은 음식을 먹으면서 친구들과 파티만 하는 거예요.

 

너무너무 방탕하게 지내요. 백성들의 원한이 찼어요. 이걸 알고 동생이 반란을 일으켜서 형을 감옥에다 집어넣고 자기가 왕이 됐어요. 그리고 형한테 가서 한마디 했어요. 감옥 문을 요만하게 만들어놓고…….

 

형이 여기서 살을 빼고 이렇게 비대한거 날씬해져서 요 문으로 나오면 내가 다시 왕위를 형님께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좁은 문을 딱 만들어놓고 감옥에다 넣어둔 다음에 매일같이 진수성찬 음식을 넣어줬어요. 이제 이 사람은 레이몬드는 알아요.

 

이제 내가 이걸 먹지 않고 조절해서 몸을 빼면 다시 나가서 왕이 될 수 있다. 알지마는 아 요 냄새가 어찌 좋은지 요 음식이 얼마나 먹음직한지 이걸 끊지를 못해가지고 그냥 먹어 버려가지고 더 뚱뚱해가지고 감옥에서 죽었대요. 얼마나 참 미련한 사람입니까? 이거조금 금식하면 되는데 이걸 못이긴 거예요.

 

여러분 자신을 어느 정도 평가하고 있습니까? 나를 완전히 부정하고야 은혜를 긍정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워버리고 그리고 보세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는 죽었어요. 죽어 마땅한 자예요. 그리고 행동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할 때 바울은 이제 로마서 7장 끝과 8장으로 가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그리고 유명한 은혜 충만한 8장 그 은혜의 복음이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완전한 자기 부정 그리고 Total Grace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한 번 더 솔직하십시다. 그리고 나를 완전히 부정해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을 받아내십시다. 그래서 오늘 7장 끝에서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오직 예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한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5장에서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은혜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은혜 현재도 미래도……. 오직 은혜…….

 

 

-기 도-

하나님아버지

이 눈이 오는 아침이지마는 이른 아침에 성전에 찾아 나왔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재촉해주시고 거룩한 전에서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늘 듣는 음성입니다마는 오늘은 좀더 가까이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늘 읽은 성경입니다마는 오늘은 특별히 내게 주시는 확실한 말씀으로 듣게 하사 사도바울과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셔서 오직 은혜의 사람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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