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영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7:1-9, 롬11:17-22
2018-02-21 16:44:22
이사야 7:1-9,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더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5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7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로마서 11:17-22,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 들어가는 말
한 가지 물어봅시다. ‘여러분의 삶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연(偶然)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하나님의 경영하심이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4:24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고 하셨으며, 요한복음 1:1-3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우연은 없습니다.
즉 세상에는 우연처럼 일어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경영하지 않으신 일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시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주제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사야서 본문을 포함하는 7장부터 12장까지는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앗수르의 멸망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시작 부분인 본문말씀은 북이스라엘 멸망의 시초가 되는 사건인 북이스라엘이 아람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남 유다의 왕은 12대인 아하스였습니다.
아하스 왕은 B.C.735년부터 721년까지 16년간 유다를 통치했고, 아들을 우상 제물로 바치고 성전을 부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앗수르와 동맹하는 등 악한 왕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아하스 왕은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아람과 동맹을 맺고 침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셨습니다. 본문 4-9절까지가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전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6-7절을 봅시다.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그리고 9절하반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와 동맹을 맺고 북이스라엘에 대항했습니다. 결과는 북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앗수르 동앵에게 패배하여 많은 사람이 앗수르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아하스가 악한 왕이었지만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생각하시고 남 유다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임마누엘 징조까지 주셨습니다.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처럼 본문을 포함하는 이사야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일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본문말씀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의 경영하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앞의 9장과 10장에서 바울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임마누엘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한 것이 11장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한 남은 자들을 통하여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갔지만, 때가 되면 이스라엘이 모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분명하게 표현하셨습니다.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되어 좋은 열매를 맺되, 만일 나쁜 열매를 맺으면 그 가지 역시 잘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에서 표현하신 하나님의 경영하심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자신의 뜻을 추구한다면 똑같이 제거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본문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주권과 경영하심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믿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땅의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심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5:10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리고 요한계시록 21:8절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신뢰하고 순종하십시오.
도자기 그릇을 판매하는 가게에 중년의 남자 손님이 왔습니다. 그 남자는 그릇의 이모저모를 살피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그릇 하나를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그 그릇으로 가게에 진열된 그릇에 살짝 부딪쳐서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물었습니다. “손님, 왜 그러십니까?” 그 남자는 “그릇을 부딪쳐 보면 그릇의 품질을 알 수 있어서 그렇소. 주인 이신가 본데 그런 것도 모르시오?”라면서 그릇들을 하나하나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더니 그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이런, 아무리 그릇을 찾아보아도 마땅한 게 없군. 하나같이 품질이 별로야. 울리는 소리가 맑고 청아한 게 없어!”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 남자의 행동을 보고 있던 주인이 그릇 하나를 주면서 “그럼 제가 쓰는 그릇으로 한 번 시험해 보시지요.” 그 남자는 반신반의하면서 주인이 준 그릇으로 다른 그릇들에 부딪쳐보았습니다. 그러자 한결같이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났습니다. “어, 아까까지는 그릇들의 소리가 둔탁했는데…?!” 주인이 그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손님이 가져오신 그 그릇의 품질은 혹시 검증해 보셨나요?” 주인이 자신의 그릇으로 그 남자의 그릇에 부딪쳐 보자 둔탁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의 그릇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사람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릇 가게에 왔던 그 남자처럼 자신이 철석같이 믿는 자신의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도 그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회들이 겪고 있는 ‘세속화’라는 심각한 아픔도 역시 이러한 자기 기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12:28절에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시며, 누가복음 17:20-21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주님이 다스리시는 교회가 곧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모든 것의 기준이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기준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욕을 먹고 배척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본문 9절에서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굳게 믿으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경영을 굳게 믿으라는 말입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이 비록 하나님을 거역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셨지만,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시고 계획하신 경영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으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경영하심에 사람이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본문 전체를 읽어봅시다.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하나님의 경영하심에 합당하게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게 됩니다.
이사야 14:27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다음 날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다가 가버나움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따라온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15:4-5절을 봅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가지는 뿌리와 줄기가 경영하는 대로 부지런히 양분을 흡수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믿고 성실하게 순종하면 아름답고 복된 삶을 이루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집중합시다.
잠수함에서 어뢰 발사 연습을 할 때는 회수가 가능한 연습용 어뢰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발사된 어뢰가 목표물에 명중할 경우에는 쉽게 회수할 수 있지만, 표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갈 때는 영원히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함대 소속 잠수함 가운데서 훈련용 어뢰를 가장 많이 잃어버린 기록을 세운 잠수함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도저히 명중률이 개선되지를 않았습니다. 그 잠수함의 함장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최후의 방법으로 어뢰수들의 외출 상륙증을 모두 거두어서 연습용 어뢰탄두에 넣고 밀봉해버렸습니다. 연습용 어뢰를 회수하지 못하면 아무도 외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 후 그 잠수함은 백발백중으로 표적을 명중시켰습니다.
집중력은 간절함에서 나옵니다. 반드시 명중 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명중의 비결입니다. 간절한 사람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냅니다. 예레미야 29:12-13절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함에 응답하시고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이 없으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믿지도 순종하지도 않게 됩니다. 이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영하심에 집중하여 온 마음을 두고 믿음으로 순종하고 따라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신 모든 경영이 이루셔서 진정한 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접붙임을 얻었은즉 /롬11:13-24/ 최동규 목사
2020-02-22 05:42:08
실패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이방 성도가 가지지 말아야 할 자세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도는 유대인이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에 이방인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전령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13).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을 위한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까닭이 이방인이 본질상 유대인보다 더 가치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도는 그가 맡은 직분에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 중에 얼마라도 더 구원하기를 갈망합니다.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4). 명목상의 하나님 백성 중에는 복음의 대적자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체념하고 무관심하거나 멸시하여 공격하는 것은 복음의 전령에게 마땅치 않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저주받을 짓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해야 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저주받은 냥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 받은 후에도 가장 먼저 유대인 예배 공간인 회당부터 찾아가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경륜 순서처럼 항상 유대인부터 먼저 고려했습니다. 먼저 언약 백성과 언약의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고, 그들이 거부할 때 언약 밖에 있는 불신자에게 복음 전했다는 것입니다.
회당 중심의 유대인들은 계속 사도가 전한 복음을 대적했고 사도는 결국 이방인 중심으로 사역으로 전환합니다. 회당을 떠나 따로 성도를 위한 예배와 교육 공간을 마련했지요(행 13:46, 19:9). 그럴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방인의 사도 사역에 충실함으로써 그들 중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바랐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심령을 잔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신앙적 모범생에게만 소망을 두게 하지 않습니다. 명목상의 하나님 백성을 향해서조차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측은지심을 유지하게 합니다.
복음은 어떤 죄인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거만하고 완고한 죄인에게도 복음 선포를 중단할 수 없습니다. 결심해도 중단하지 못합니다(렘 20:9). 복음의 대적자조차도 충성스러운 복음의 전령으로 바꾸는 복음의 능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화될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붙듭니다. 그 간절함은 전령의 삶에 다양한 형태로 투영됩니다.
낙심해서 뒤로 물러서는 형태는 아닙니다(히 10:38-39). 사도는 로마 방문 길이 막혔어도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믿음으로 전진했습니다. 글을 통해서라도 복음을 전하려고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자세로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에 충실하며 자기 재능을 다했습니다(고전 9:16).
하나님 백성을 향한 사도의 마음은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소극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희망적 미래를 바라보는 적극적인 반응이지요.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5). 지금의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영적인 소망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를 살린다는 소식이 아니지요.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자를 살린다는 소식이라서 복음입니다.
그러니 영적인 시체 같은 사람이라도 복음 앞에서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의 영적 실패를 지켜보는 일은 무척 힘겹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절망하지 않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천하 만민으로 복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한 구속 경륜을 헤아리며 소망을 품습니다. 인간의 완고함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강한 줄 신뢰합니다.
사도는 지금 막연한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소망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합니다. 16-17절은 언약적 구속사 관점으로 해석하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 구약의 언약 백성에게 주신 제사 규례를 보면(민 15:17-21),
첫 곡식 가루가 거룩할 때 떡덩이 전체를 거룩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을 때, 출애굽 세대뿐 아니라 그들의 후손 전체가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되었습니다(출 19:6). 유대 민족의 뿌리인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을 때도, 그와 그의 후손들 전체가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 당사자와 그의 후손 전체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적 구속사에서 아브라함은 모든 언약 백성의 뿌리입니다. 유대인으로 구성된 하나님 백성은 참감람나무입니다. 그들 중 “가지 얼마가 꺾여졌”습니다(17a).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썩은 가지를 솎아내는 가지치기였습니다. 하나님은 꺾인 가지 대신 야생 “돌감람나무”를 “접붙임”하셨습니다(17b).
돌감람나무 가지는 이방인으로 구성된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들은 잘려나가지 않고 남은 참감람나무 가지와 함께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17c). 이 비유는 좋지 않은 나무 둥치에 좋은 가지를 접붙이는 통상적인 원예 방식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적 복을 유대인 남은 자와 함께 이방 성도가 누리게 하신 오묘한 구속 경륜을 표현하기에 적절합니다.
옛언약 백성과 새언약 백성이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었습니다. 뿌리를 통해 똑같은 진액을 받습니다. 신구약의 연속성과 통일성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새언약 백성이 그들 앞에 자기를 높여 우쭐할 것은 없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18a).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권면을 듣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을 박해하고 추방하고 십자군을 통해 대량 학살했습니다. 우쭐하는 태도는 유대인 육백만 명(유럽 거주 유대인 2/3)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비극도 낳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라는 주홍글씨를 유대인에게 붙여놓고 증오했지요. 유대인을 지옥의 땔감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으로 여겼던 유대인처럼 말이지요. 진정으로 복음을 깨달았다면, 그들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우쭐하는 것은 복음에 합당한 반응이 아닙니다.
값없이 은혜를 받아 한순간에 회심한 사람은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회심 순간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향해 영적 자만심을 품을 수 있습니다. 왕년에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조차 자랑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율법에 얽매이지 않은 통 큰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경건한 척하지 않고 본성에 솔직한 죄인이었기에 내가 너희보다 낫다는 우쭐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지요.
이런 마음가짐은 율법을 무시하는 방탕한 삶을 낳기 쉽습니다. 그러니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는 우월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8b). 하나님의 언약을 보존하고 계승한 유대인 남은 자들과 사도들 덕분에 우리도 언약의 복에 참여합니다. 언약 백성 공동체가 나를 낳은 셈입니다.
언약의 복을 보존하고 전수한 기관은 언제나 언약 백성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지요. 오늘날 복음을 떠난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욕먹어 마땅할 각종 썩은 냄새를 풍기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도처럼 명확하게 지적해야 합니다. 하지만 언약 공동체인 교회 자체를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을 향해 복음을 수호하고 선언하는 유일한 기관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환멸을 느껴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교회를 이탈한 사람 중에는 교회에 남은 자보다 더 빨리 바른 신앙을 잃고 세속화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내가 언약 백성을 보전하는 듯이 우쭐하지 않아야 합니다. 언약 백성이 나를 보전한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넘어지지 않습니다(고전 10:11-12).
모든 사건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며 우쭐함을 정당화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19). 그 말 자체가 틀리진 않았으나 구속 원리가 무엇입니까?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20).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으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바른 믿음에 거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빌 2:12).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21). 왕께서 아끼는 자는 왕에 대한 경외심을 익혀야 합니다. 경외심 없이 왕을 가까이하는 일은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암 3:2). 접붙임 받았다는 사실 만으로 바른 신앙 위에 선 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본 사람은 그 복음을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22a). 구속사는 언약 백성일지라도 대적하는 자들을 잘라버리시는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를 다 찍어버리십니다(요 15:2). 믿음의 열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 때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계속 그 가지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쭐하는 가지는 잘려나갑니다(22b). 잘려나갔던 언약 백성도 불신에서 돌이키면 다시 회복됩니다(23a).
원예 상식으로는 썩어서 잘라 낸 가지를 다시 접붙일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접붙이실 능력”이 있습니다(23b). 이러한 회복은 놀랄만한 것이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는 것이라 한 것이지요(15).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24). 이 문단이 개인 구원 문제를 다루지 않고, 언약 백성 유대인 전체의 미래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만 보고 엄위를 보지 못하는 성도는 율법폐기론자가 되기 쉽습니다. 유대 율법주의를 조롱하는 우쭐하는 마음이 은혜를 핑계로 방탕한 삶을 살게 합니다. 복음의 은혜를 입으로는 철저하게 주장할지라도 그의 삶에는 복음적인 가치관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에서 복음에 합당한 열매가 보이지 않는 현상은 그가 여전히 본성대로 사는 썩은 가지여서 뿌리로부터 진액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가치관은 본성을 거슬러 맺힙니다.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려나간다는 준엄한 사실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복음의 은혜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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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넘어짐과 구원 /롬11:11-16/ 이건기목사
2019-10-25 04:17:14
성경의 가장 신비로운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구원받을 수 없게 되었는데, 바울은 11장에서, 먼저 ‘하나님이 모든 이스라엘을 버렸는가?’를 질문했다. 이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했고, 그 이유를 2가지로 제시했다.
① 개인적인 증거였다. 바울은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인데, 버림받지 않았다.
② 성경의 증거였다. 엘리야 때에 하나님이, 7,000명의 경건한 사람들을 남겨 두신 것처럼,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자기 백성을 남겨두셨다고 했다.
1. 이스라엘은 완전히 넘어졌는가?(11上).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신다고 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다, 실족했느냐(엪타이산, 프타이오), ‘실패하다. 죄를 짓다.’는 말씀이다. 먼저 이스라엘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고 질문했다. 실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복음을 거부함으로, 완전히 넘어져서,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나?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이스라엘이 넘어진 것은, 일시적이며, 그들은 마지막 때에, 다시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에, 그들을 포로가 되었다. 그들이 주변 국가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거나, 압제받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완전히 멸망하도록, 버려두지 않고, 징계를 통해 돌아오도록 만들었다.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면, 언제든지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지,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서 그들은 로마에, 나라를 빼앗기게 만들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19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디아스포라로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넘어짐은 완전히 망함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다.
그들을 다시 독립시켜 주었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가 있다. (11下)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오래 동안 버린 이유를 2가지로 제시했다. ① 하나님이 보내준 메시아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② 이방인을 먼저 믿게 하고, 후에 이방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개시키려고 계획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파하게 했다. 이로 인해 이방인들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을 유대인들이 보고, 그들로 하여금 시기와 질투가 나게 만들어서,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한다고 했다. 사도 바울이 처음부터, 이방인 전도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말했다.
유대인들은, 과거의 사울처럼 화를 내며,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다. 성전 밖으로 내몰려고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떠밀어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겠다는 청년들이 결사대까지 만들기까지 했다. 이런 유대인들이, 시기 나도록 멋있는 삶을 보여, 구원해야 한다.
2. 유대인의 넘어짐과 이방인의 풍성함(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된다고 했다.
하나님은 이방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희생시켰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처럼,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희생시킨 것이다. 구약에서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이방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낙망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아브라함의 혈통만을 믿고, 안심하던 유대인들이 쓰러지고, 낙망하던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동안 유대인의 하나님이라고 알았던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도 됨을, 드러나게 되었으니, 유대인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었다.
풍성함(플루토스)은 ‘표, 가치 있는 물품’을 말한다. 유대인의 실패가, 도리어 하나님을 온 세상에 알리고, 확장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마치 이와 같다. 유대인은 하나님이라는 횃불을, 그들만 위한 것이라고, 단지 속에 꽁꽁 감추어두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이 넘어짐으로, 단지를 깨트려서, 온 세상에 횃불을 드러내서, 밝히게 만든 것이다.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그들만 소유하였던 하나님이,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넘어짐으로, 세상은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그 복음을 이방인에게 주셨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그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사도행전에서 이런 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들과 바울은, 항상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사도들을 박해하거나 죽이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할 수 없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했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유대인의 실패를 이방인을, 풍요롭게 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복음 거부는. 오히려 세상에 복음이 확장되게 만들었다.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한 일이, 이방인에게 축복이 되었다면, 유대인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세상에 더 큰 축복을 줄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 중에서, 선택한 백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그 수가 다 차면, 하나님은 다시 닫았던 이스라엘의 눈과 귀를, 열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완성은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이방인들에게도 큰 복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올 때에,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영원토록 계시면서, 그들의 왕이 되실 것이다.
구멍 뚫린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구멍을 먼저 막아야만 한다. 이것이 이스라엘이다. 유대인들이 돌아오면,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선교에 힘을 써야 한다.
3. 영광스러운 직분(13-14).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로마 교회 성도들의 대부분은, 이방인이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음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기에,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었다. ‘영광스럽게 여겼다.’(독사조)는, 원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이다. 생명을 살리는 직분이었기에,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가 이방에 교회들을 많이 세우고, 전도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영혼들이 구원 받지 못한다면, 사도의 직분은, 결코 영광스러운 직분이 될 수 없다. 사도 바울보다도, 이단들을 더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교회로 끌어 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영혼을 살리는 구원이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사람이, 그곳을 다녀도, 그의 직분은 결코, 영광스러운 직분이 될 수 없다. 바울은 이방인을 구원하는 사도로, 자기 직분을 영화롭게 만들었다. 그 직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그 일에 충성함으로, 그 직분을 영광스럽게 만들었다.
바울은 다시 이방인을 통해, 자신의 혈육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원했다. 이렇게 되면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직분은 한층 더,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바울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거룩한 복음 전파사역을, 남을 시기하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시기심이 모두 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시기심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나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악한 것이나, 가지면 안 될 것을 탐하면, 그릇된 것이다.
그러나 선한 것을 갖기 원한다면, 나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유대인을 시기하게 했던 것은, 악한 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시기심을 유발하여, 복음을 믿게 만드는 일은, 좋은 일이다.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그들을 버리는 것은, 유대인을 외면하고, 버린다는 말이 아니다. 유대인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세상이 화목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나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기도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만큼 기쁜 일이라는 말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이방인을 사랑할수록, 동족에 대한 사랑도 커졌다. 동족이 핍박할수록, 골육의 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더욱 뜨거워졌다.
나 같은 사람도 구원되었다면, 이방인이나 그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라고 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유대인 선교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방인 선교와, 유대인 선교는,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구원 사건은, 다시 유대인들의 구원에 자극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거역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이방인을, 화목하게 만들었다.
이제 하나님은 다시, 이방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온 세상에 영생의 축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다. 선하신 하나님은, 후에 유대인의 회복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온 세상에 더 큰 복을 주실 것이다.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바울은 위에서 말한 것을 입증하기 위해, 2가지 비유를 제시했다. 바울이 ① 비유는 첫 열매와 떡의 비유다. 바울은 첫 열매가 거룩하면, 그 나머지 떡도 거룩하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서, 소제로 드렸다. 이때 제사장은 모든 떡을, 하나님께 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그 떡 중에, 일부분만 대표로 드렸다. 이 경우에 떡 중에, 일부분이 드려지면, 나머지 떡도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민15:19-21).
이스라엘은 처음 익은 곡식을, 하나님께 드렸다. 구약에 제사를 드릴 때, 맥추절에 드리는 곡식은 가루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가을추수 때, 처음 익은 곡식을 거두어서, 그것을 떡으로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렸다.
처음 익은 곡식 가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가을에 추수해서, 떡덩이로 만들어 드리는 것은 성도를 말씀한다. (고전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고 떡 덩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나가 된 성도를 말씀한다. 처음 익은 곡식 가루를, 하나님이 받았다면, 그 다음에 드리는 떡 덩이도, 하나님이 받는다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첫 열매로 드려졌다.
② 바울이 제시한 두 번째 비유는, 뿌리와 가지의 비유다. 바울은 나무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거룩하다고 말한다. 뿌리가 거룩하니까, 가지도 거룩하고, 하나라는 말씀이다. 거기에 붙어 있기만 하면, 하나임을 말씀하고 있다.
첫 번째 처음 익은 곡식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무의 뿌리가 하나님께 드려지면,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도,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그 나무뿌리에 붙어 있어야 하고, 이방인 중에서도 그 나무뿌리에 붙어 있으면, 양분을 공급받아 살게 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뿌리와 같고, 믿는 우리는 가지와 같다. 그래서 우리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누구든지 뿌리에 연결되어 있으면, 열매를 맺게 된다. 물론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거룩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나 되고 붙어 있고 있는 자가, 구원받은 거룩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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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33/ 접붙임을 얻었은즉 /롬11:13-24
2018-10-31 03:33:29
실패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이방 성도가 가지지 말아야 할 자세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도는 유대인이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에 이방인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전령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13).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을 위한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까닭이 이방인이 본질상 유대인보다 더 가치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도는 그가 맡은 직분에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 중에 얼마라도 더 구원하기를 갈망합니다.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4).
명목상의 하나님 백성 중에는 복음의 대적자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체념하고 무관심하거나 멸시하여 공격하는 것은 복음의 전령에게 마땅치 않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저주받을 짓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해야 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저주받은 냥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 받은 후에도 가장 먼저 유대인 예배 공간인 회당부터 찾아가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경륜 순서처럼 항상 유대인부터 먼저 고려했습니다. 먼저 언약 백성과 언약의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고, 그들이 거부할 때 언약 밖에 있는 불신자에게 복음 전했다는 것입니다. 회당 중심의 유대인들은 계속 사도가 전한 복음을 대적했고 사도는 결국 이방인 중심으로 사역으로 전환합니다. 회당을 떠나 따로 성도를 위한 예배와 교육 공간을 마련했지요(행 13:46, 19:9).
그럴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방인의 사도 사역에 충실함으로써 그들 중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바랐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심령을 잔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신앙적 모범생에게만 소망을 두게 하지 않습니다. 명목상의 하나님 백성을 향해서조차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측은지심을 유지하게 합니다.
복음은 어떤 죄인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거만하고 완고한 죄인에게도 복음 선포를 중단할 수 없습니다. 결심해도 중단하지 못합니다(렘 20:9).
복음의 대적자조차도 충성스러운 복음의 전령으로 바꾸는 복음의 능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화될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붙듭니다. 그 간절함은 전령의 삶에 다양한 형태로 투영됩니다. 낙심해서 뒤로 물러서는 형태는 아닙니다(히 10:38-39).
사도는 로마 방문 길이 막혔어도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믿음으로 전진했습니다. 글을 통해서라도 복음을 전하려고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자세로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에 충실하며 자기 재능을 다했습니다(고전 9:16).
하나님 백성을 향한 사도의 마음은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소극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희망적 미래를 바라보는 적극적인 반응이지요.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5). 지금의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영적인 소망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를 살린다는 소식이 아니지요.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자를 살린다는 소식이라서 복음입니다. 그러니 영적인 시체 같은 사람이라도 복음 앞에서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의 영적 실패를 지켜보는 일은 무척 힘겹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절망하지 않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천하 만민으로 복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한 구속 경륜을 헤아리며 소망을 품습니다. 인간의 완고함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강한 줄 신뢰합니다.
사도는 지금 막연한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소망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합니다. 16-17절은 언약적 구속사 관점으로 해석하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 구약의 언약 백성에게 주신 제사 규례를 보면(민 15:17-21), 첫 곡식 가루가 거룩할 때 떡덩이 전체를 거룩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을 때, 출애굽 세대뿐 아니라 그들의 후손 전체가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되었습니다(출 19:6). 유대 민족의 뿌리인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을 때도, 그와 그의 후손들 전체가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 당사자와 그의 후손 전체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적 구속사에서 아브라함은 모든 언약 백성의 뿌리입니다. 유대인으로 구성된 하나님 백성은 참감람나무입니다. 그들 중 “가지 얼마가 꺾여졌”습니다(17a).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썩은 가지를 솎아내는 가지치기였습니다. 하나님은 꺾인 가지 대신 야생 “돌감람나무”를 “접붙임”하셨습니다(17b). 돌감람나무 가지는 이방인으로 구성된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들은 잘려나가지 않고 남은 참감람나무 가지와 함께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17c). 이 비유는 좋지 않은 나무 둥치에 좋은 가지를 접붙이는 통상적인 원예 방식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적 복을 유대인 남은 자와 함께 이방 성도가 누리게 하신 오묘한 구속 경륜을 표현하기에 적절합니다.
옛언약 백성과 새언약 백성이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었습니다. 뿌리를 통해 똑같은 진액을 받습니다. 신구약의 연속성과 통일성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새언약 백성이 그들 앞에 자기를 높여 우쭐할 것은 없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18a).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권면을 듣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을 박해하고 추방하고 십자군을 통해 대량 학살했습니다. 우쭐하는 태도는 유대인 육백만 명(유럽 거주 유대인 2/3)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비극도 낳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라는 주홍글씨를 유대인에게 붙여놓고 증오했지요. 유대인을 지옥의 땔감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으로 여겼던 유대인처럼 말이지요. 진정으로 복음을 깨달았다면, 그들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우쭐하는 것은 복음에 합당한 반응이 아닙니다.
값없이 은혜를 받아 한순간에 회심한 사람은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회심 순간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향해 영적 자만심을 품을 수 있습니다. 왕년에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조차 자랑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율법에 얽매이지 않은 통 큰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경건한 척하지 않고 본성에 솔직한 죄인이었기에 내가 너희보다 낫다는 우쭐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지요. 이런 마음가짐은 율법을 무시하는 방탕한 삶을 낳기 쉽습니다. 그러니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는 우월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8b). 하나님의 언약을 보존하고 계승한 유대인 남은 자들과 사도들 덕분에 우리도 언약의 복에 참여합니다. 언약 백성 공동체가 나를 낳은 셈입니다.
언약의 복을 보존하고 전수한 기관은 언제나 언약 백성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지요. 오늘날 복음을 떠난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욕먹어 마땅할 각종 썩은 냄새를 풍기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도처럼 명확하게 지적해야 합니다. 하지만 언약 공동체인 교회 자체를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을 향해 복음을 수호하고 선언하는 유일한 기관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환멸을 느껴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교회를 이탈한 사람 중에는 교회에 남은 자보다 더 빨리 바른 신앙을 잃고 세속화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내가 언약 백성을 보전하는 듯이 우쭐하지 않아야 합니다. 언약 백성이 나를 보전한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넘어지지 않습니다(고전 10:11-12).
모든 사건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며 우쭐함을 정당화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19). 그 말 자체가 틀리진 않았으나 구속 원리가 무엇입니까?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20).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으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바른 믿음에 거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빌 2:12).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21). 왕께서 아끼는 자는 왕에 대한 경외심을 익혀야 합니다. 경외심 없이 왕을 가까이하는 일은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암 3:2). 접붙임 받았다는 사실 만으로 바른 신앙 위에 선 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본 사람은 그 복음을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22a). 구속사는 언약 백성일지라도 대적하는 자들을 잘라버리시는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를 다 찍어버리십니다(요 15:2). 믿음의 열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 때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계속 그 가지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쭐하는 가지는 잘려나갑니다(22b). 잘려나갔던 언약 백성도 불신에서 돌이키면 다시 회복됩니다(23a).
원예 상식으로는 썩어서 잘라 낸 가지를 다시 접붙일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접붙이실 능력”이 있습니다(23b). 이러한 회복은 놀랄만한 것이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는 것이라 한 것이지요(15).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24). 이 문단이 개인 구원 문제를 다루지 않고, 언약 백성 유대인 전체의 미래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만 보고 엄위를 보지 못하는 성도는 율법폐기론자가 되기 쉽습니다. 유대 율법주의를 조롱하는 우쭐하는 마음이 은혜를 핑계로 방탕한 삶을 살게 합니다. 복음의 은혜를 입으로는 철저하게 주장할지라도 그의 삶에는 복음적인 가치관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에서 복음에 합당한 열매가 보이지 않는 현상은 그가 여전히 본성대로 사는 썩은 가지여서 뿌리로부터 진액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가치관은 본성을 거슬러 맺힙니다.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려나간다는 준엄한 사실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복음의 은혜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admin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 /롬11:13-24
2016-05-10 19:17:45
바울의 사도직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워졌다. 바울 스스로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그릇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는 내 골육의 얼마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자기의 직분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 얻게 하고 열방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할 때 그 구원의 복을 보고 유대인들도 시기가 나서 예수의 복음을 믿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마24:14에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바울도 결국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라 믿고 그 때 구원이 완성되고 끝이 올 것을 확신한 것이다.
지금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이다. 다만 롬11:25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일 뿐이고 마침내는 롬11:26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부름을 받은 바울에겐 유대인을 향한 동족 구원이 피 끓고 있었다. 동족 구원을 포기할 수 없는 바울은 이방 땅으로 선교하러 가면서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해 어느 한 편을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았다.
참감람나무로 소개되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1. 거룩한 동족들이다. (롬 11:16)
롬11: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처음 익은 곡식 가루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법이다. 레2:1 이하에 기록된 소제 제사는 감사의 제사다. 죄를 해결하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를 봉사 제물로 드리는 제사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는 이스라엘 조상이다.
이스라엘 조상이 하나님 앞에 선택 받은 민족으로 처음 익은 소제가 되었다. 그래서 거룩하다. 이방인들이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아니다. 그러므로 떡 덩이도 거룩하다.
거룩한 곡식 가루로 뭉친 떡이 거룩하듯 이스라엘 조상으로부터 만들어진 유대인들 역시 거룩한 백성이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는 뜻도 같은 의미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시작된 선민의 뿌리에서 나온 유대인들이기에 거룩하다. 유대인은 바울에게 있어서 거룩한 동족들이다.
2. 꺾여진 동족들이다. (롬 11:7)
롬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거룩한 동족들이 꺾여졌다고 한다. 그 꺾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롬11:20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믿지 아니한 것이 가지 치기를 당한 이유다.
왜 유대인들은 믿지 않는가? 언약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은 유대 종교를 형성할 때까지 언약을 지키므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옳다. 구약의 시대는 그렇다. 지켜야만 되는 것이 언약이다. 이 구약의 시대는 모세부터 세례 요한 때까지이다.
마11:13~14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새 언약의 피를 흘리셨다. 십자가의 피가 새 언약의 보증이다. 새 언약은 지키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이다. 율법은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의를 가르치지만 복음은 믿음으로서 의로워짐을 가르친다.
원 가지인 유대인들은 이 예수를 새 언약으로 믿지 않는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의로워질 수 없다. 옛 언약만 붙들고 지키려고만 하기에 율법은 내가 율법을 지키므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알게 해주는 문학 선생이다. 그래서 결국은 꺾여진 가지가 된 것이다.
새 언약인 예수를 믿어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그렇다고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는 것이 아니다. 마5:17의 말씀처럼 오히려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믿는 자가 된다는 것은 율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수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자의 의는 율법을 더 잘 지키게 된다. 예수님도 마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3. 장차 구원 얻게 될 동족들이다. (롬 11:23~24)
롬11: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구원과 회복은 하나님 소관이다. 꺾는 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소관이지만 다시 접붙이는 것도 하나님의 소관이다. 본래가 이스라엘은 원 가지다. 우리 이방인들은 사실 돌감람나무다. 롬11:24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원 감람나무 가지, 즉 선민 유대인의 장점이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유대인을 잘 모른다. 유대인을 무조건 외면한다. 그러나 공헌한 것이 있다.
롬9: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롬9:5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롬3:2의 말씀이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인류에 대한 유대인들의 공헌, 원 가지로서의 공헌은 계시된 말씀을 전해준 것이다. 구전→토판→양피지→파피루스로 적어 보관하고 오늘까지 말씀을 전해 준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씨로서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 원 가지 유대인을 통해 베들레헴 땅에 탄생하셨다. 그러니 유대인을 적대하지 말라. 이스라엘을 사랑하라. 그 땅에도 한 번 가보자. 이스라엘의 땅, 이스라엘의 백성, 그 원 가지의 장점을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러나 원 가지가 꺾인 것은 사명 망각 때문이다. 선민으로서 우월감만 가지고 선민이라는 자기 만족에만 빠져서 살았다.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하는 사명을 버리고 원 감람나무 가지의 열매를 맺지 않았다. 타락하고 우상 숭배하고 패역하고 배반하여 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이기에 절대 꺾이지 않는다는 왜곡된 마음으로 살았다.
성전이 있으니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왜곡으로 살았다. 이것이 잘못이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꺾이었으나 하나님은 이 원 가지인 유대인들을 버려두지 않는다. 접붙이실 능력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였으니 유대인들이 새 언약의 복음을 믿는 날이 온다. 믿게 된다.
롬11:24을 다시 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이방인들의 복 받은 이야기다. 예수 믿고 이방인들이 영적 이스라엘이 된 이야기이다. 그런데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능히 구원을 얻게 될 동족들이다. 하나님이 때에 유대인들은 모두 구원을 받고 회복된다는 것을 바울이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에 대한 희망에 비해 구원 얻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바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돌감람나무로 표현된 이방인에 대해
1. 아무 짝에도 쓸모없던 사람들이다. (롬 11:17)
롬11:17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이방인은 구별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돌감람나무란 아무 짝에도 쓸 수 없었던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러나 거룩하지 못한 이방인도 사용하셔서 택하셨다는 말이다. 참감람나무 진액을 받게 했다는 것은 쓸모 있게 바꾸었다는 말이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의 열매 맺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접붙임이란 선택이 없었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던 사람들이다.
2. 선택 받은 것에 겸손해야 할 사람들이다. (롬 11:18)
롬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거룩하거나 거룩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뿌리 때문이다. 선민 유대인의 우월감도,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의 우월감도 다 잘못된 것이다.
뿌리이신 하나님의 언약, 섭리, 구원 계획에 의해 쓰여지는 것 뿐이다. 즉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접붙임 앞에 겸손해야 한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접붙임 받은 특별한 선택을 감사 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
3.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이다. (롬 11:21)
롬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원 가지가 자기 우월감에만 빠져서 사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니 버리신 것처럼 돌감람나무도 사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언제든지 꺾일 수 있다. 꺾이지 않고 거룩한 가지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복음을 전한 것처럼 우리도 힘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마음 안에는 인류 모두의 구원, 유대인들까지의 구원이 들어있다. 원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우리들이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고 우리 교회 돌비에 새긴 것처럼 세계 선교에 충성을 다하면 인류 구원은 완성되고 주님은 그때 오신다.
세상의 끝, 종말은 그제서야 오고 주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신다. 그날을 기다리며 사명자가 되자. 사명에 깨어 있고 사명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되자. 그래서 쓸모가 없었던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제사장 나라가 되고 끝까지 거룩한 나라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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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롬11:25-36/ 유기성 목사
2016-08-26 16:04:16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미국에 가서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영성일기를 써 보십시오”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기?” 하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무슨 능력이 나타나는 집회도 아니고 천사의 말을 듣는 집회도 아니고, ‘일기’를 쓰라니 힘들어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기를 써 보신 이들은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갔더니 영성일기에 대한 말씀을 영상으로 보고, 혼자서 6개월 일기를 쓰신 남자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영성일기 세미나 중 그 분이 만나는 사람들 마다 얼마나 강력한 증인이 되어 주셨는지 모릅니다. 늘 함께 하시는 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롬 11장에서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롬 9, 10, 11장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대인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거부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자기가 택하신 백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우선 사도 바울 자신을 보라고 했습니다. “나를 보십시오. 나는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라새인으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자였지만,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사도가 되었습니다!” 유대인 중에도 택함을 받아 예수님을 믿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엘리야의 예를 들었습니다. 왕상 19:10-14에서 엘리야가 "주님, 그들은 주님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주님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습니다. 남은 자는 나 혼자밖에 없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 찾고 있습니다." 하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왕상 19:18에서 "내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내 앞에 남겨 두었다" 하신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유대인들 중에 여전히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5-28에 보면 두 가지 놀라운 말씀을 하시는데 첫째는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둘째는 결국은 온 이스라엘도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신비한 비밀’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단순히 유대인을 위한 예언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25에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라고 말하였는데, 예수님께서도 하신 말씀입니다.
눅 21:24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이 말씀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 의하여 문자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때부터 이방인의 때가 시작됩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을 떠나 안디옥으로 로마로 서진하면서 영국으로 미국으로 한국으로 전 세계로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때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예수님의 재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 24:14에 보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 된 후, 이 세상의 종말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때가 찬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마지막 남은 최후의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31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하면서 사도 바울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3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36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특히 감격했겠지만, 우리도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지금 역사가 그 시점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음을 너무나 분명히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종말에 대한 성경 말씀을 결코 구름 잡는 말씀이 아닙니다. 노아 시대, 소돔과 고모라 당시 사람들처럼 무시하고 살면 큰일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확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것도 확실하다고 장단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죽을 것이라는 것만큼은 너무나 분명한 현실입니다.
저의 아버님도 어머님도 다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가까운 분들 중에 이미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분명한 사실인 죽음에 대하여는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개인 뿐 아니라 이 세상 역사에도 종말이 있습니다. 성경만이 이 세상의 종말이 있을 것을 정확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징표 중 하나가 유대인들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종말에 대한 이 메시지는 곡해되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1948년 5월 14일 마침내 1900년간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로 극적인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회복을 단순히 롬 11장의 성취라고 보는 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닙니다. 친 이스라엘 국가의 입장을 취하고 반 팔레스타인 정책을 지지해야 하는 근거도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중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은 제거되어야 한다면 이런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을 확신하며, 누군가는 유대인의 영적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고 전도도 해야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편에 서라는 것은 아닙니다.
롬 11장에서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항상 지키시며 보호하시고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택하신 자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누구나 안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택함을 받은 자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는 주 예수님과 연합한 자입니다.
주님은 도둑같이 오신다고 하셨는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심판을 받을 자에게나 도둑같이 오신다는 것이 구원받을 자에게는 결코 도둑같이 오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살전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주님은 도둑같이 임하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는 천국 가서야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아닙니다. 주님이 이미 마음에 임하심을 알고 주님과 늘 동행하는 자입니다. 주님과 늘 동행하는데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욥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성자 프란체스코>에 삽입된 짧은 우화입니다. . 옛날에 평생 완전함에 도달하고자 애를 쓴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가기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밤낮없이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죽음의 날이 와 천국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거기 누구시오?”
수도자는 대답했습니다. “접니다.”그러자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여기는 둘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수도자는 다시 세상에 돌아와 열심히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운명의 시간이 와 하늘로 올라가 천국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거기 누구시오?”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접니다.”
수도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여기는 둘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수도자는 다시 세상에 떨어져 전보다 더 치열하게 수도를 하다가 백 살 노인이 되어 죽은 그는 다시금 천국의 문을 두드렸지요. “거기 누구시오?”
또 다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때 수도자는 황급히 대답했지요. “당신입니다. 주님, 당신이에요!” 그러자 즉시 문이 열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종말이 가까웠다는 말을 들을수록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자에게는 반드시 증거가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롬 11장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방인을 구원하고, 또 어떻게 해서든지 유대인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도 반드시 이 사랑이 있습니다. 성경은 죽은 후에 다 사라지지만 사랑은 영원히 남는다고 했습니다.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안타깝게도 종말이 온다고 외치고, 자신이 순결한 주님의 신부라고 주장하는 이들 중에 영적으로 거친 이들이 많습니다. 인터넷에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사이트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정결한 신부가 되라는 식의 표현은 매우 신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들어보면 두렵고 어둡고 염세적이고 분리주의적입니다. 성경을 근거한다고 하면서 날짜와 징조만 따집니다.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은 다 가짜 신자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자들끼리 모여 살아야 한다!” 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종말론은 조심해야 합니다. ‘거룩한 신부’라는 집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시한부 종말론이 미혹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두려움을 심어 주면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결국 유대인들도 다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 중 하나는 이방인들이 교만하여 유대인들을 멸시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코 교만하지 말라, 유대인들 앞에서 우쭐대면 안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뿌리는 유대인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이방인들은 원가지가 아니었고 접붙침을 받은 가지임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21에서는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접붙은 가지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핵심은 이방인들이 항상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2에서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22 ...그대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이 그대에게 인자하게 대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도 바울이 우려한 일이 지난 2000년 동안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은 무자비하게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진정 주님을 맞이 할 준비가 되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진정 준비된 주님의 신부는 지금부터 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열매는 사랑으로 소문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을 준비하고 사는 자입니다.
코스타 30주년 감사대회 때, [순교]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에 고 배형규목사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폐회예배 때, 설교자이신 김창근목사님께서 제주 영락교회에서 목회할 때, 배형규목사를 만났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고통스런 얼굴로 자신에게 배형규목사에 대한 기억은 부딪힌 기억 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순교하신 영상을 보면서 마음에 내내 섬겨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마음 아팠다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서 아이들과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도록 공부방을 열어 주었는데, 교회 와서 공부는 하지 않고 노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공부방을 닫아 버렸답니다. 그 때, 청년이었던 배형규목사가 와서 자신은 어디 가서 공부할 데가 없다면서 항의하며 울었던 적이 있었답니다. 그 때 그 청년 배형규를 품어주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순교한 영상을 보면서 너무 부끄러웠다. 사랑하고 품지 못함을 깊이 후회 왜 사랑만 하지 못하였을까?
여러분, 주님을 맞을 때, 후회될 일을 하고 살지는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과 화평한 관계를 갖지 못하면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유대인, 이방인 문제가 우리 가정에 교회 안에 있습니다. 주의 오실 때가 가까운 줄 안다면 정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오늘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해도 못하겠습니까?”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러분,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 하나 제대로 지키고 살았다면 벌써 세상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 이 계명 하나만 끝까지 지키며 삽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사랑만하며 살려면 더 큰 사랑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영성일기를 쓰면서 일어난 변화는 주님과 친밀해지고 하나 되고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웠다고 여기저기 말하는 지금이야말로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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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의 마지막 드라마 /롬11:25-29/ 이동원목사
2014-12-03 18:46:03
드라마는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끝난 MBC드라마 "내 이름은 김 삼순"의 마지막 회의 경우 무려 남한 인구 50,5%가 시청했다(국민의 절반이상)는 통계가 보도되었습니다. 드라마의 힘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하나는, 시청자들이 드라마의 배역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동일시 현상' 때문입니다. 내가 마치 김 삼순이 된 것처럼 가정하고 김 삼순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삼순이가 내가 하고 싶은 행동,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하고 싶은 욕까지 대신 해주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다음 사건의 '예측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가 다음에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에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류 역사의 가장 흥미롭고 가장 심각하며 가장 위대한 드라마가 지금 이스라엘 땅에서 진행중인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가르쳐 많은 성경학자들은 "인류 구속사의 마지막 드라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프러시아의 황제였던 프레데릭 대왕(Frederick the Great King)은 어느 날 궁중 전속 목사를 불러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증거를 아주 단순하게 직설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때 궁중 전속 목사가 "그러면 아주 단순하고 직설적인 증거를 말씀드리지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민족의 존재 그 자체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롬11장을 통해 바로 그런 증거를 제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역사를 주의해서 보면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섭리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으며 우리가 지금 역사의 어떤 시점에 와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예수님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을 둘러싼 세 가지의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질문과 관련된 인류 역사의 세 가지의 단계적인 발전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무엇일까요?
1. 이스라엘의 불 신앙-왜?
여러분,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민족이요 그렇게 메사야를 기다려 온 민족이면서도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을까,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오늘 로마서 11장에 보면 바울 사도 자신이 이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1:1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이 맨 먼저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 것이라면 도대체 왜 그들 대다수가 믿지 않는 자리에 있게 되었을까요?
바울 사도는 본문 25절에서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비밀 혹은 신비라고 증언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비밀이고 무엇이 신비란 말입니까? 25절을 읽어보십시오
.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준하게 된 것이라"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불신하고 복음을 거절한 것이 오히려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기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 보내시면서 마태 복음 10장에 보면 소위 '열린 문 선교 정책'을 가르치셨습니다.
만일 어떤 마을에서 복음 전하는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거든 무리하게 거기서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고 너희를 거절하는 그 집이나 성에서 발의 먼지를 떨고 다른 집 다른 마을로 가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마태10:14참조)
이것을 가르쳐 선교학자들은 '열린 문 선교 정책'(open-door mission policy)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원칙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 땅에 복음을 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예수님을 거절하자 자연히 다른 마을, 다른 지방, 다른 국가 곧 이방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것을 알고도 허용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신비하신 섭리의 비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고 주께 돌아옴의 기회가 될 것을 전지하신 주께서는 미리 아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이 롬11:12에서는 어떻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이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롬11:17이하에서는 소위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즉 돌 감람나무와 같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접붙임이 됨으로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같은 뿌리의 진액을 받는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인간이 미쳐 예측하지 못한 신기한 섭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2. 이방인의 시대-언제까지?
그러면 도대체 언제 얼마동안이나 복음이 이방인중에서 증거 되는 시간을 하나님이 허용하셨을까요? 바울 사도는 본문 25절에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라고 대답합니다. 여기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라는 표현과 매우 유사한 표현으로 예수님은 일찍 이방인의 때(시대)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눅21:24을 보십시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이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주께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이와 같은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황제가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에 군대를 이끌고 진격함으로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방인의 때가 시작된 것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로 사마리아로 안디옥으로 로마로 서진하면서 영국으로 미국으로 한국으로 그리고 오늘날 전세계 열방 가운데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에 주께서 복음 증거자들을 전세계에서 일으키시사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기까지 복음의 역사를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얼마동안 이방인의 때가 계속 될까요?
누가복음의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 의해 밟혀있는 동안은 이방인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이방인의 때가 끝나 가는 중요한 시대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누가 오늘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지배아래 있습니까? 벗어나 있습니까? 묻는 다면 그 대답은 'Yes and No'입니다. Yes라고 말하는 이유는 아직도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그 자리는 소위 마호멧의 승천을 기념하는 이슬람 성전인 오마르 성전 혹은 바위 돔 성전이라고 불리우는 '멸망의 가증한 것'
(마태24: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 거기에 있고 이슬람들이 아직도 그 성전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지배아래 있지 않다(No)고 말해야 하는 중대한 역사적 변화의 드라마가 지난 5-60년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AD70년 예루살렘 멸망이후 근 이천년동안 이방인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던 이스라엘 땅은 전반적으로 1948년 5월 14일 하나의 국가로 기적적인 부활을 함으로 이미 회복이 시작되었고, 그리고 1967년 6월에 있었던 소위 6일 전쟁으로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그 땅은 이미 이스라엘의 통치아래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하면 저와 여러분은 오늘 날 이방인의 시대가 끝나 가는 가장 흥분된 역사의 교차로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방인의 때가 끝날 무렵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사건이 일어 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복음의 전 세계적 전파 2)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 사건 3)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재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직전에 일어날 가장 중요한 두가지 사건은 복음의 전 세계적인 전파와 이스라엘의 회복인 것입니다.
마태24:14을 보십시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서서히 우리가 그런 시점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위클리프 성경 번역자들은 아마 2020년대 말에는 세계 거의 모든 부족어로 성경번역 작업이 마무리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인류 역사의 마지막 남은 최후의 드라마는 이스라엘의 회복인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회복-어떻게?
이방인의 때가 끝나 가는 마지막 징조는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이 문제를 중심으로 성경을 연구해 보면 이스라엘의 회복은 대체로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1)백성들이 고토, 시온에 돌아와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을 회복하는 것,
2)국가적으로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고 3)영적인 회복인 것입니다. 저는 이미 앞의 두 단계는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1)고토에 돌아와 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미 1800년대 말부터 하나님은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토로 돌아가게 하는 시온주의 운동을 일으키십니다.
고토 이스라엘에는 AD70년 이후 노예가 되어 로마와 전세계로 흩어져 갔고 이스라엘 땅에는 불과 2만명 내외의 이스라엘 백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1880년대 말에서 1903년까지 약 1만명이 돌아오고 1914년까지는 약 8만 5천명이 돌아옵니다.
세계 제1차 대전 기간 주춤하던 이 현상은 1917년 영국의 발포아(Balfour) 선언이후 물밀 듯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문자 그대로 동서남북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소련에서 시리아에서 이란에서 이라크에서 인도에서 중국에서 동유럽에서 독일에서 스페인에서 영국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사43:5-6의 예언의 성취라고 할만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이것은 겔 37:21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바 열국에서 취하여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그리고 마침내 1900년간 나라 없이 떠돌던 선민들이 1948년 하나의 공동체로 국가로 극적인 부활을 하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해골 골짜기의 해골들이 거대한 군대가 되어 일어나는 기적이 바로 이 공동체의 부활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미 롬11:15에서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사용해서 이방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놀라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의 사건은 영적인 회복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이것을 예언하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26절의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이것이 문자 그대로 문자적인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의 약속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거절했던 불경건에서 돌이킬 것이며 그들의 죄가 사함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6-27절) 이런 영적인 회복이 없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겔36:24-26의 말씀은 바로 이런 영적인 회복의 예언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깨우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사용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롬11:11에서 이방인의 구원이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예루살렘 대 행진은 단순한 성지 순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깨우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복음을 통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해를 촉구하고자 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약 300명을 위시하여 약 2,500명의 한국 교회 성도들이 오펠광장에서 국제 컨벤숀 센터에서 이스라엘 사상 유례없는 최대의 복음 집회를 갖고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평화의 행진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머지않아 이스라엘에, 예루살렘에 큰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복음이 시작되었던 그 곳으로 이방인을 깨우던 복음이 다시 돌아가 이스라엘을 깨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약하신 대로 역사속에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준비하러 가는 저와 성도들을 위해 여러분도 기도로 함께 주실 것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할렐루야!
<설교 적용 질문>
1. 롬 11:1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비유를 설명해 보십시오(11:16-24).
3. 25절의 바울이 전하고 싶어 했던 신비(비밀)는 무엇입니까?
4. 26절의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를 설명해 보십시오(15절과 비교하십시오).
5. 우리가 구속사의 마지막 드라마에 동참하는 길을 나누어 보십시오.
자랑할 수 없는 이방인들 /롬11:17-34/ 하용조목사
2015-05-27 12:58:35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가 개인의 구원,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라면 9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구원, 곧 인류의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강원도만한 크기의 땅에 인구 5백40만~50만 정도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군사적으로 이스라엘과 PLO의 대립관계 같은 식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교회도 중국이나 스리랑카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처럼 그저 이스라엘을 선교대상국가 중 하나로 봅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견 해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이방세계를 하나로 보고 이스라엘을 하나로 봅니다. 모든 이방세계가 구원받고,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우주적인 영원한 계획이 완성되는 것, 이것이 성경적인 구원론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이 인류의 구원이요 구원의 완성이라고 교회는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구원의 뿌리
먼저 구원의 뿌리에 대 해서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나를 택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셔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에는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원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 내가 받을 자격이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심판받아야 할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천국백성으로 만들어주셨다는 이 감격스러운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감격으로, 이 감사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감격과 감사대신에 원망, 불평, 불순종, 교만, 종교적 기득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선택받은 백성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실패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이방인들의 구원의 뿌리는 이스라엘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이방인들은 구원받은 것을 감격해 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구원에 감격해 하면서, 구원의 뿌리를 생각하면서 자만하거나 자긍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우리 이방인 크리스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에게 교회도 많아지고, 믿는 사람도 많아지니까 거꾸로 우리가 이스라엘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느껴져서 우리는 영적으로 자고하고 자만해 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은 결코 자랑할 수 없다. 결코 교만해서는 안된다. 너희의 축복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잘 살펴 보아라.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로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16절을 보시겠습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여러분, 떡덩이가 거룩해서 가루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첫 열매 즉 가루가 거룩하기 때문에 떡덩이가 거룩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이 거룩하기 때문에 이방인이 거룩한 것입니다.
꺾여진 가지,접붙여진 가지
좀더 구체적인 비유를 17절에서 보게됩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이 비유는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비유입니다.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꺾여져서 돌감람나무가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꺾여짐이 이방인의 접붙임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꺾여짐이 없었다면 이방인의 접붙임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방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들이 잘났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믿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로 믿습니다. 하지만 한 3년 정도 지나면 율법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처음믿으면 감사와 기쁨이 있지만, 오래 지나면 이스라엘처럼 강퍅해 집니다. 교만해지고 감격을 잃어버립니다.
17절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서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돌감람나무의 뿌리는 어디입니까? 바로 참감람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뿌리입니다. 참감람나무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돌감람나무가 은혜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참감람나무가 꺾어진 것은 돌감람나무에게는 은혜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만하거나 교만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18절에서 가지의 비유를 듭니다. 18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찌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가지가 우선이 아닙니다. 뿌리가 우선입니다. 뿌리가 있기 때문에 가지가 있고, 가지가 있기 때문에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거룩하기 때문에 뿌리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뿌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가지가 거룩한 것입니다.
여기서 뿌리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리고 「가지」는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된 모든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는 그 사람의 영적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적태도에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배여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오만하고, 방자하고, 겸손이 없고, 기쁨도 없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자랑한다면 이 사람이 받은 구원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태도는 항상 겸손하고, 눈물이 있고, 온유하며, 감격이 있습니다. 이 감격은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서 전할 정도인 것입니다.
이방인 사도의 가슴앓이
로마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들을 향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믿는 사람을 핍박하다가 예수를 알게 되었고, 그 후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가게되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하게 하시고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주셨구나!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그는 복음을 부인한 자기 동족을 생각했습니다. 가슴앓이가 있었는데 바울의 이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기쁜 일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아, 이스라엘아하셨던 그 마음을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지난 2천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2천년의 기독교 역사란 간단합니다. 모든 이방인이 구원받는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이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빌립보로, 아덴으로, 고린도로, 에베소로, 그리고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뒤집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로마가 어떻게 기독교국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로마는 전 유럽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유럽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우주적인 것이고 전 인류가 받아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카톨릭의 핍박과 학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유래없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미국은 그 후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열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었던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전세계의 복음화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미국이 복음을 받고 나서부터입니다. 이 미국을 통하여 전 세계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로, 남미로, 아시아로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1백년 전에 한국이 복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만, 우리나라가 이스라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성경과 무슨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무당의 자식이요, 역사적으로 단군을 믿고 산 민족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서 선교사를 보내셔서 이 땅이 눈을 뜨게 하셨고, 세계에서 유래없는 기독교 강국을 만드셨습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셔서 기독교 지성인들을 만드시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제사장 나라로 만들어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이렇게 전 세계가 사도행전 1장 8절 이후로 복을 받았지만, 그러나 이 축복의 발상지였던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메시야를 거부하고 영적 빈곤상태에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고, 복을 받았습니다. 전 유럽, 전 미국,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모두 복음을 받게 되어서 이제는 기독교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AD와 BC를 쓸 만큼, 역사는 기독교 중심으로, 예수 중심으로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 카드, 이스라엘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기 쉬운 메시지를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함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9장과 10장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와 믿음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행위와 율법으로 나가려고 하는 기득권을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여지없이 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원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실패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잘못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의 영적인, 구원론적인 의미는 19절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희생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온 인류의 구원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양이 된 것 처럼,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이 희생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그들이 학살을 당하고 전 세계로 방황하게 된 것은 그들이 메시야를 죽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오만하고 자긍하면 안됩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때문에 이스라엘이 희생당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6백만명이 희생당할만큼 큰 죄가 어디있겠습니까? 2천년동안 전 세계를 떠돌아다녀야 할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왜 그런줄 아십니까?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차기까지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돌아오고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역사가 완성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돌아오기까지 이스라엘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겪으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을 많은 다른 국가중의 한 국가로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남겨두신 마지막 카드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성취
이스라엘이 실패해서 이방인이 구원을 받았다면,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서 충만하게 되면 이 세상이 얼마나 많은 복을 받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감정적으로, 민족적으로 굉장히 먼 나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을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은 약 1천만명이라고 합니다. 미국에만 6백만명이 살고, 뉴욕에만 2백만명이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소련과 유럽에 많은 유대인들이 지금도 유리하며 살고 있는데, 놀랍게도 5년전부터 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든지, 고국으로 돌아온다든지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이 응답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줍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요? 고난때문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일제시대와 6·25와 보릿고개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살면 예수믿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국민소득이 1만불이 넘고, 민주화가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인권에 더 관심을 갖게됩니다. 쾌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여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신앙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먹고살기 어려울 때, 한국교회는 그때 부흥했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순수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은 그 고통 가운데서 마음의 문을 열고 메시야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통계를 보니까 구 소련에서 돌아오는 유대인들의 50%가 예수님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과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예언한 것들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루살렘은 황무지입니다. 누가 그들을 도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셨듯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겸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을 뿐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무엇을 더 아끼신다는 말씀입니까? 원가지를 더 아끼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입니다. 이방인을 위하여 평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내가 저주를 받을지라도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희생시키셨습니다. 희생을 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은 이스라엘을 볼 때마다 아픕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회복되기를 원하십시오. 이스라엘은 자체힘으로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방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듯이, 이스라엘은 우리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접붙여질 때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나님에게는 두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정의이십니다. 이것을 여기서는 인자와 엄위라는 말로 썼습니다. 여기 한 죄인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죄인을 대하면 그 죄인은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공의로 나가면 이 죄인은 살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사랑과 용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정의로 판단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나를 대해주시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의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자신이 정의롭지 못한데 어떻게 남에게 정의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정의로 대하면 다 죽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되는 말씀입니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이스라엘이 다시 믿으면 접붙임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실줄로 믿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건져주실줄로 믿습니다.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불러 모아주시고, 이제 그들에게 복음의 계절이 올 것을 믿습니다.
그 일을 여러분과 제가 도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나의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평안을 비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없이 역사의 완성은 없습니다. 예레미야 31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흩으셨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예언입니다. 역사는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진정한 구원은 개인의 구원에서 시작되어서 민족구원을 넘어서서 온 인류의 구원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방인을 통해서 얻게 하십니다. 이것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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