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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로마서 설교 모음

로마서 13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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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빚 /롬13:8-10

2019-09-09 11:42:59

 

만일 세상에 기독교가 없었다면 인류의 도덕관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런 질문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기독교가 없었다면 인류의 도덕 가치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비 기독교인들은,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종교가 없다고 사람이 부도덕해지는 것이 아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기본적인 가치관은 비슷하다.”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유교 전통도 성숙한 도덕 윤리관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신앙이 있든지 없던지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살인이 나쁘다는 사실을 동의하고 도둑질, 간음, 거짓말, 불의, 부패, 폭력 이런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모든 나라의 법규는 거의 비슷합니다. 그 나라가 어떤 종교적인 가치를 가졌든, 어떤 전통을 가졌든 상관이 없이 세상의 모든 나라는 거의 비슷한 가치를 채택했고 그들의 국법이든, 그들의 사회 규범이든 비슷한 가치를 표방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인류의 가치에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냐? 그건 아니에요.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두 분야에 있어서 기독교만이 기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실패했을 때입니다. 세상의 윤리와 세상의 율법은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람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율법은 이래라 저래라 명할 뿐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긍휼을 베풀거나 용서하지 못합니다.

 

율법의 역할은 무엇과 같으냐면 검찰과 같습니다. 검찰이 기소하고, 구속하고, 죄를 입증할 뿐이지 사람을 변론하거나 두둔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의 중보자가 되시고 죄인의 친구가 되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았지만 진리와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잣대대로 살려고 하나 그걸 이루지 못할 때 긍휼히 여기고 친구가 되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기독교만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희생적인 사랑에 있어서입니다. 세상의 율법은 사랑의 필요성까지는 인정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지 못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지 못합니다. 율법과 은혜는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은, “사랑하거라.”라던가, “사랑해야 된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지 못하는데 오직 예수님만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내 생명을 너를 위해 주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때문에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 이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 나의 마음에 큰 고통 사라져.“ 예수님의 십자가에 인류를 희생적으로 사랑하신 하나님의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이 되느냐?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떤 원리에 의해서 우리의 죄사함을 주실 수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한 가지만을 알고 한 가지만을 가르치려고 하죠.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 값을 치러야 되는데 우리가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대신 당신의 목숨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게 하셔서 우리가 그 혜택을 입고 의롭다 함을 얻었다.

 

이것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 되느냐 하는 원리에요. 소위 대속의 죽음으로써의 십자가. 이 원리만을 우리가 따르려고 하는데 십자가에는 그 이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인간은 마음이 못되서 희생의 증거를 보기 전까지는 사랑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못되서 피를 흘리기 전까지는 누군가의 사랑을 믿으려고 하지 않아요. 사랑의 증거를 요구합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증거를 보이라.” 값비싼 희생을 치를 때만이 사람은 그제서야 그 사랑을 인정하려고 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의 희생의 증거를 봐야 못된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그제서야 믿죠. 부모의 주름살을 봐야 되요. 부모의 한숨을 들어야 되요. 부모의 눈물을 봐야 되요. 부모의 흰 머리를 봐야 그제서야, ‘아,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나보다.’ 이렇게 실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개구리의 심리에요.청개구리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자기의 못된 것을 실감하고 어머니의 무덤이 떠내려 갈까봐 비가 올 때마다 개굴개굴 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사람에게도 그러한데 하나님에게도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희생으로 그것을 증명하실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리신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사랑을 실감하는 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랑을 십자가에 비교하죠. 그 말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어렵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미운 사람 또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어려워요. 우리 모두 십자가를 지고 있어요. 이 십자가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반드시 십자가와 같은 어떤 희생만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고 사랑의 의무는 축복이요 특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에게 사랑의 의무가 없이 내 편한 대로, 내 멋대로 살 수 있었다면 우리 모두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사랑할 의무가 없이 사랑을 받기만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뻔하죠. 우리의 사는 모습이 뻔합니다. 여러분 삶에 희생적인 사랑을 할 필요가 없었다면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내가 희생을 해야만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내 인생에 없었다면 우리의 사는 모습은 뻔했을 것입니다. 보나마나에요.

 

그러나 희생적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우리 삶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헌신할 필요가 있고, 자기를 부인해야 되고, 인내해야 되고, 자기가 평소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해야 되고, 그래서 자기 혼자 살았다면 결코 살 수 없었던 더 풍성하고, 더 값지고, 더 보람 있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사랑할 의무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요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저 얄팍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다가 죽게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좀더 하나님을 닮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닮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에 사랑을 해야 되는 사람들을 주셨는데 그 사랑은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었어요. 그것을 실천할 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축복이에요.

 

사랑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사랑을 해볼 수 있는 기회, 이건 무슨 콩깍지가 끼어서 세상이 온통 핑크색으로 보이는 그걸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사랑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랑은 오래가지 않아요. 그런 사랑을 해본 적이 없더라도 내가 헌신적으로, 희생적으로 누구를 사랑할 기회가 있었다면 우리는 사랑할 기회를 얻은 것이고 그것이 진짜 사랑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고 보람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에요. 사랑의 빚. 세상에는 기독교인과 범죄자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사랑의 빚에 대해서, ‘내가 사랑의 빚을 졌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독교인이고, ‘세상이 내게 사랑의 빚을 졌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범죄자가 됩니다. ‘세상이 내게 빚을 졌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원망하고, 늘 불만하고, 그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 와중에 남들을 해칩니다.

 

남의 소유를 빼앗습니다. ‘세상이 내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반대로, ‘내가 사랑의 빚을 졌다.’고 믿는 사람은 무엇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갚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랑의 빚인데, ’내가 졌다.‘고 생각하는 것과 ‘남이 내게 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이 사랑의 빚을 지었다.‘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그 빚을 지었고 또 그 이외에도 나를 사랑해주었던 많은 사람들, 내가 받을 자격이 없지만 내 자격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본인도 행복하고, 남을 행복하게 하고 그리고 섬기면서 봉사하면서 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빚을 지지 않으셨습니까? 이제껏 좋은 것을 많이 누리고 살았다면 좋은 것, 남들보다 더 좋은 혜택을 누리고 살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았다면 그건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 사랑의 빚, 그 빚을 갚아야 됩니다. 빚이라는 말은 갚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빚을 예수님이 갚아주셨어요. 이제 우리거 할 일은 우리의 죄를 갚으려는 게 아니고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으로.하나님은 저에게 평강 중에 목회를 하도록 많은 은혜를 주셨죠. 저도 사랑의 빚을 많이 지었습니다.

 

이제 저도 그 빚을 갚아야 되는데 제가 여러분, 수년 전부터 선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특별히 유럽의 기독교 전통과 역사가 찬란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심령은 텅 비어서 그 조부와 조모들이 예배드리던 성당은 관광객으로만 가득차고 주일날 예배드리는 사람이 없어서 예배당이 술집으로 팔려나가고, 책가게로 팔려나가고 그리고 기독교의 전통은 있지만 믿음의 확신과 믿음의 전통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관망하는 것 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그리고 끝이 오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반드시 복음이 세계를 한 바퀴 돌고 끝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 한 번 복음을 받아들인 적이 있는 문명이라 할지라도 다시 한번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고, 다시 한번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할 필요가 있고, 이전에 믿었던 것과는 좀 다른 방법으로 이전에 저질렀던 과오 또 이전에 잘못 실천했던 일, 이전에 교회 실수 이런 것을 되풀이하지 않고 다시 한번 예수님의 정신을 발견해서 예수님을 순전한 마음으로 믿고, 가르치고 그래서 다시 한번 신앙의 부흥을 이룰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그냥 이론적으로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 하고자 하는 비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해야 될 필요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제 아내와 아이의 허락을 얻고, 더 이상 늙기 전에 아직 건강할 때 그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기쁜소식교회를 목회한지 20년이 되는 2020년 말에 이 일을 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나려고 합니다. 이건 몇 년 전부터 제가 준비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제 과거에 설교를 들어보셨던 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유럽 현지의 목회자들과 대화를 하고, 그들의 교회 지도자들과 대화를 하고,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 그리고 협력할 수 있는 부분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기존의 교회의 패러다임 뿐만이 아니고 새로운 방법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복음을 들을 수 있고 신앙생황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적인 일이고, 큰 스케일이고 또 많은 기도와 서포트가 필요한 일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제가 여러분들께 말씀드릴 수가 없고 오늘처럼 이렇게 조용히 들은 적이 처음이에요. 이렇게 집중해서 들으시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아요. 다들.

 

2020년 연말이면 아직 1년 반이 남았어요. 내일 일은 아무도 몰라요. 내일 살지 죽을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기 때문에 1년 반은 엄청나게 긴 세월이에요. 우리 모두가 충분히 준비하고 또 의견을 나눌 시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주의 종으로 부름 받으셨을 때의 일을 모르십니다. 저는 처음에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저는 주님이 저를 세상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셨다고 믿었어요. 세상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라.

 

그러나 목사가 되고 대한민국에 오게 되고 기쁜소식교회를 개척하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성도님들과 목회를 하게 되었지만 그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라고 했어요. 얼마나 일할 사람이 부족하면 하나님이 저 같은 사람을 쓰려고 하시겠습니까? “추수할 곡식은 많으나 일꾼이 부족하다.”고 하셨어요. 추수할 곡식은 많아요. 적다고 생각한다면 불신이에요. 추수할 곡식은 여전히 많아요. 일꾼이 부족해요. 일꾼을 우리는 키워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나라를 책임질 지도자를 키워야 될 필요가 있고 복음을 들고 이 시대에 유능하게 전할 수 있는 인물을 키워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국가에 지도자가 될 만한 인재의 풀이 얼마나 적습니까? 정치인들을 우리가 많은 기대를 품고 뽑아주지만 그들이 기대를 어긋나지 않습니까? 그만큼 인재가 없다는 얘기에요. 국가를 인도할 인재도 부족하고 복음을 들고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아요. 교회도 많아요. 신학교도 많아요.

 

그러나 정작 필요한 일에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것이 주님께 진 저의 빚이라고 믿습니다. 이건 제가 기도하고 제가 깨달은 것입니다. 가는 건 제가 가는 것이지만 이 일을 하는 것은 기쁜소식교회와 성도님들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 협조 그리고 서포트가 필요합니다.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성도님들, 형제, 자매 모두의 기도, 믿음, 협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제가 누차 말씀드렸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포화상태에요. 포화상태. 포화상태라는 말은 물컵에 소금을 넣었을 때 소금이 너무 많으면 더 이상 녹지 않을 때 포화라고 부르는 것처럼 한국의 기독교는 뭐가 너무 많아요. 교회도 많고 뭐가 너무 많아요. 사랑의 빚을 지었어요. 이 빚을 우리가 갚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경제를 살려주실 것을 기도하고, 나라가 다시 번영하게 되기를 기도하는데 이건 우리가 이제는 좀 베풀어야 됩니다. 우리만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우리만을 위해서 믿는 게 아니고 우리가 사랑의 빚을 진 자로써 베풀고, 섬기고, 주고, 심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복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길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건 유일한 길이에요. 더 많이 가지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고 이제는 우리가 좀 베풀고, 헌신하고 그리고 믿음을 심으면 주께서 기회를 주시고, 마음을 주실 때 그것이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고 그리고 여러분과 저와 저희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나아가야 될 길일 것입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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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롬13:8-10/ 유기성 목사

2016-08-26 16:43:37

 

오늘 설교 주제는 감을 잡으셨겠지만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하자’는 설교를 또 할 필요가 있습니까? 또 들으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하여 다시 설교해야 합니까? 대답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다 들 사랑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합니까? 여기에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었느냐?’ 하는 문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예수님의 제자인지, 사랑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곧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십계명과 그 외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모든 계명은 잘 지킬 수 있느냐? 어떤 기준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킨다고 보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답을 주신 것입니다.

 

:8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말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빚은 지지 말라 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라고 하였습니다.

 

롬 13:8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사랑은 줄 줄도 알아야 하고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빚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축의금은 빚의 개념인 것 같습니다. 받았으니 주어야 하고 주었으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주는 것이고 그저 받는 것입니다. 주고도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그런 사랑으로 살아왔습니다. 가족 사랑입니다. 가족 사랑은 빚으로 주고 받는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되돌려받기 위한 빚을 지우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사랑 준 장부가 있습니까? 자녀에게 사랑을 준 장부를 기록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은 다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우리가 이 사실을 명심하면 교회는 천국같이 됩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 누가 잘못하였으면 소문을 내시겠습니까? 입을 다물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말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흉을 보겠습니까? 아무 말 없이 도와주려고 할 것입니다. 가족은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합니다.

 

교인들을 정말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여긴다면 잘못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요 형이요 누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육신의 가족을 대하는 태도와 교인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면 그는 아직 온전히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육신의 가족은 100년도 같이 못 살 가족입니다. 그러나 교인은 영원히 함께 살 가족입니다. 천국에서의 우리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는 미워할 사람, 시기할 사람, 시험들 일, 싸울 일이 없습니다.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바로 그 천국을 경험하는 유일한 곳입니다.

 

한번은 교회 탁구대회 때 실력이 뛰어난 권사님이 1차전에서 지셨답니다. 그 날 상대 선수인 교우의 어린 두 아들이 아버지를 응원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너무나 간절히 아버지를 응원하는 두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이 경기를 이기면 저 두 아들의 실망의 마음이 얼마나 클까?’ 생각하여 져 주었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이런 교회에는 마귀가 틈을 타고 들어와 머리가 깨어지고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교회를 만들라, 이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열심히 지키지만 사랑이 빠진 경우를 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이 율법주의는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것을 지키는 일에 목숨을 겁니다. 열심, 또 열심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롬 13:9에서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랑이 빠진 율법주의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열심히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이따금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를 봅니다. 율법주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이 가장 큰 상처를 가정에서, 부모에게서 받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부모가 율법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철학계와 교육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존 듀이는 하나님의 나라 입장에서 보면 무서운 악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존 듀이는 무신론자였으며 미국 인본주의 연합회의 창설자이자 초대 회장이었다. 그는 “어디에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고 말하였다." 그는 진화론을 믿었고 전파했습니다. 진화론은 믿음입니다. 진화론이나 창조론이나 엄격히 말하면 과학이 아닙니다. 신앙입니다. 진화론은 무신론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후일 소련정부로부터 사회주의훈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죤 듀이의 부모는 매우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존 듀이같은 철저한 무신론자 아들이 나올 수 있습니까?

 

부모가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린 듀이에게 엄격한 신앙생활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면서 동시에 가난한 동네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아들이 저녁에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형사처럼 꼬치 꼬치 캐물었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듀이에게 기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품게 만든 것입니다. 죤 듀이는 주장했습니다, "어떤 신이나 우리를 구원한다는 약속이나 영원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들은 환상에 지나지 않거나 해로운 것들이다." "육체가 죽은 후에 생명이 영생하리라는 것에 대한 신빙성 있는 증거는 없다."

 

사랑이 빠진 율법주의 신앙은 이처럼 사랑하는 아들의 어린 영혼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 지키고 저것 지키는 식의 율법주의 신앙을 극복했습니까? 진정 사랑만 하는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지 않다가 배우자나 자녀들에게 쏟아 붓지는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율법주의 태도입니다. 그러면 나가서는 칭찬받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고 자라지 못한 자녀는 사랑에 대한 성숙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빈 말로 ‘사랑한다’꼬일 때, 맥없이 넘어 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너무나 큰 아픔을 남기는 것입니다.

 

한번은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라는 말씀이 제 마음을 마음 깊이 찔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작은 교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큰 교회를 보면 마음에 상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건물이나 교인 수나 교회 재정도 부러운데, 그 교인들의 믿음도 좋은 것을 보면 너무 속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우리 교회를 보는 마음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더 커지기만 원하고 더 세련되기만 추구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어떤 경우에도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랑이 있어야 진짜 큰 교회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답은 전혀 엉뚱한지 모르겠습니다.

 

문삼석 시인이 쓴 [그냥]이란 시가 있습니다.

 

“엄만/ 내가 왜 좋아?/ 그냥.....넌 왜/ 엄마가 좋아?/그냥.....“

 

사랑은 이처럼 그냥 되어야 진짜입니다. 사랑이 가장 힘든데 어떻게 ‘그냥’ 되어질 수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결코 안됩니다. 그러나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면 저절로 사랑하게 됩니다.

 

남편이 실직 후 6개월동안 말 안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 본 아내가 편지를 썼습니다. 그녀는 편지에 [당신이 자랑스런 이유]를 써내려 갔는데 무려 51가지를 썼습니다. 그것을 읽은 남편이 눈물을 흘리면서 처음 웃었습니다.

 

아내의 사랑도 낙망한 남편을 웃게 만들 수 있다면 우리 위하여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겠습니까? 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는 어떻게 건넜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주님이 하셨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사랑은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롬 13:10 ...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킨 것입니다. 우리로 사랑만 하며 살게 하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 마음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야구 못하는 야구선수 보셨습니까? 농구 못하는 농구선수 보셨습니까? 운전 못하는 운전기사를 보셨습니까? 저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조합입니다. 만약 자신에게 아직 사랑이 없다고 느껴지면 운전 못하는 운전기사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애통함과 갈급함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소문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최근 지방으로 이사를 가신 교우들 중에, 교회 정하는 문제로 우는 분이 계셨습니다. 얼마나 외로우면 그렇겠습니까?

 

주위 분들을 보십시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오신 분들은 무척 서먹하실 것입니다. 기존 교인들과 친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친해져도 이렇게 좋은데, 사랑하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꿈만 같은 말입니다. 그야말로 천국입니다. 이런 교회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을 대하여 섭섭함과 원한을 품고 있는 일이 없습니까? 남의 죄를 보고 비판했던 일은 없습니까? 몇몇 사람들과만 당을 짓지는 않았습니까?

 

불평불만을 퍼트렸던 일은 없습니까? 인색함으로 도움을 베풀지 못했던 일은 없습니까?

 

우리가 괜히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 사람이 잘못해서, 그 사람의 교만하고, 그 사람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어서, 그 사람이 신용이 없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죽지 않은 옛 사람이 주인 노릇하는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거듭난 참 자아로 살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만 하며 사는 삶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어떻게 살까?’ 하는 염려, 걱정을 다 주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니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지고 살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사랑만 하며 사는 것 뿐입니다.

 

변호사 밥 고프는 말했습니다. “거절하면 안되는 초대가 딱 하나 있습니다. 오직 사랑만 하며 사는 삶을 살라는 초대입니다. 이 초대장은 봉투에 담겨 오지 않습니다. 잠잠히 주님을 바라볼 때,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유한 삶으로의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라는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지금 당장 살 수 있는데 말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사랑만 하며 살라”고 초대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이 놀라운 주님의 초대를 흘려 보낼 이들이 있을까 안타깝습니다.

 

‘운전 못하는 운전기사’의 심정으로 사랑만 하기를 갈망하며 주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살도록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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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주 예수로 옷 입으라 /롬13:11-14/ 유기성 목사

2016-08-27 09:21:59

 

오늘 본문은 어거스틴이 이 구절을 읽고 회심하였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말씀입니다.오늘 이 말씀을 듣고 어거스틴처럼 주님의 음성을 듣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금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라’고 하십니다.

 

롬 13:11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난 주간 말씀을 묵상하면서 잠이 깨는 듯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겔 23:48 이같이 내가 이 땅에서 음란을 그치게 한즉 모든 여인이 정신이 깨어 너희 음행을 본받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심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음란에서 떠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강제로 음란이 그치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이 말씀이 두려웠던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에도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죽이는 일이 서슴지 않고 자행되고 있습니다. 낙태입니다. 그 뿌리는 음란함입니다.

 

부부가 아닌 사이에서 성관계가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재미로 여깁니다. 그 뿌리는 우상숭배인데, 오늘날 돈이 신입니다. 우리 사회의 죄악은 에스겔 당시 이스라엘보다 더 심각합니다. 그러니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죄악을 그치게 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집 앞마당에 포탄이 떨어지고 옆 사람이 죽어나가고 식량도 구하려고 울며불며 돌아다니게 되면 은밀한 죄는 끝납니다. 전쟁이 아니라도, 의사의 “암입니다” 라는 말 한 마디면 세상 재미가 유혹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런 지경이 되어서야 죄를 버릴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다루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꾸 심판을 경고하시는 이유는 심판하고 싶지 않으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이 임하지 않았을 때,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죄는 어쩔 수 없이 짓고 사는 줄 압니다. 결코 아닙니다. 음식에 작은 독이 들어가는 것은 괜찮습니까? 벌레 한 마리 들어가는 것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 독 보다 더 무서운 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까? 오늘 말씀에는 재림의 날이 가까웠다는 긴박감이 드러나 있습니다.

 

:11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습니다.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긴박감이 있어야 합니다.

 

한 전도사님이 “지금이 정말 마지막 추수 때인가요?”하고 질문하였습니다, ‘2,000년 내내 그렇게 위기를 조장하지 않았던가?’라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정말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이 마지막 때가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무서운 미혹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2,000년 동안 이 말씀으로 구원받을 성도들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것이 사실이고 ‘천국이 있고 영생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 어느 시대나 잠들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의사로부터 6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의사를 붙들고 2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주님 앞에 갈 준비, 죽을 준비가 안 되었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 목사님은 고침을 받았고 훌륭하게 목회하시다가 건강하게 은퇴하셨습니다. 그것은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 영적으로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은 어둠의 행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12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어둠의 행실은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은밀히 짓는 죄입니다.

 

:13 ...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람들이 보나 안 보나 똑같이 사는 사람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12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4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했습니다! :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빛의 갑옷을 입으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공개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임을 드러내고 살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은 학생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학생다운 행동을 하게 하려는 것이고 군인에게 군복을 입히는 것도 공개적으로 군인임을 드러내어 군인답게 행동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님의 사람임을 공개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13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란 말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행동하듯이’ 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겐 더 이상 이중적인 삶의 자세가 없어야 합니다.

 

항상 어디서든지 자신이 빛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는 이곳의 빛이다”

 

누구 앞에서나 먼저 “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언제 식사를 하든지 주님께 진실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무실 책상에는 언제나 성경책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만 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이것인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 같습니다. 손해도 보게 됩니다.

 

좋아하던 형제로부터 결별 선언을 받은 자매, 주님의 뜻이 아니라 믿어져서 성관계를 거부한 이후 형제가 자신을 멀리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인가요?” 울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표현했습니다. 그 자매를 위로했지만 저는 아주 잘된 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 자매도 결국 알게 될 것입니다.

 

한 형제는 직장 취직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기독교인이군요. 우리 회사에서는 기독교인이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묻더랍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대답하였더니 불합격 통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당하여도 예수님으로 옷 입고 사는 것이 너무나 복된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계 7:9-17에 보면 하나님 앞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오는데, 구원받은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결같이 “흰 옷을 입었다” 고 했습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라는 질문에 대답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여러분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부터 결별 선언을 받고 원하는 직장에서 거절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임을 당할지라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 복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은 휜 옷을 입고 살다가 주님 앞에 그 흰옷을 입은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 벌의 옷을 준비해 두었다가 교회에서는 예수의 옷을 입고 가정에서도 다른 옷 입고 직장에서 또 다른 옷 입고, 여행가서 또 다른 옷 입고 살지는 않지요?

 

어느 목사님께서 전철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칠순이 거의 되신 것 같은 옆자리 남자 어르신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답니다. 한 분이 나무라는 듯 말씀하시더랍니다. "넌 임마 예수도 믿고 그러는 놈이 그러면 되겠냐?"

 

다른 분은 묵묵부답이더랍니다. 주님이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넌 임마 예수도 믿고 그러는 놈이 그러면 되겠냐?"

 

:14에서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가지고 사는 우리가 어떻게 육신의 죄를 이기고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어느 목사님은 아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고쳐 보려고 매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다음에 또 거짓말하면 곱절로 때릴 것이라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매가 100대가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100대 때리고는 목사님이 고꾸라졌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다루었느냐?”

 

우리가 정말 죄를 이길 수 있을까요? 저는 도무지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자기 성질대로 믿는 것이라고 의심 없이 믿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저는 우리가 죄를 이기고 성질도 이기고 변화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옷 입으라는 말은 성경을 보니 진정한 세례 받은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란 옛사람이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만이 죄를 이기는 길입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그것은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우리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부산 세계로교회, 손현보목사님, 어느 날 한 남자가 집에 찾아와서 다짜고짜 목사님의 뺨을 때리더랍니다. 그 때 마음 속으로 주님께 물었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더랍니다.

 

“더 맞아라!” 그래서 아무 대항도 하지 않고 맞았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도 순하게 듣고, 잘 대접해 드렸답니다. 그가 나중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주님과 친밀한 사람은 비로소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항상 여호와를 자신의 앞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시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음란함도 주님을 바라보면 이길 수 있습니다. 요셉이 진정 주님을 바라보며 음란의 유혹을 이겼습니다.

 

창 39:9 ...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지금 교회에 성도를 무너뜨리는 무서운 마귀의 공격이 음란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 포르노와 싸움을 선포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여러 경로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 페이스북에 실어드렸지만, 조쉬 맥도웰은 현재 교회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은 포르노라고 하면서 음란함이 개인과 가정과 교회를 파괴시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어린아이들이 포르노를 보는 평균 나이는 4세에서 6세이다.”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포르노를 한다. 아마 그리스도인들 중 60퍼센트는 포르노를 볼 것이고, 20~30대중 열 명 중 아홉 명이 포르노를 본다.”

 

“술이나 마약에 중독된 것보다 포르노를 보게 되면 더 멈추기가 힘들다. 결혼하고 나서도 포르노를 보는 것을 멈추는 사람은 없다.

 

기가 막힌 것은 나라별 포르노에 사용되는 비용을 소개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포르노에 쓰는 돈은 중국은 42달러, 미국 47달러, 오스트리아 123달러, 일본 178달러이고, 한국은 565달러라고 했습니다.

 

“한국에 기독교 영성을 파괴시키는 것은 포르노다. 포르노는 사역까지 파괴시킨다. 대부분의 기독교 목회자들이 사역을 떠나라고 요구받았을 때 포르노가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며

 

“앞으로 10년에서 15년 사이에 한국에서 예수님께 오는 사람들 중에서 거의 대부분이 포르노를 볼 것이다. 아마 여러분 나라가 심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예배드리러 몸은 교회에 나와 있지만 마음은 음란에 사로잡힌 자가 많을 것입니다. 마귀는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마지막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포르노와 싸울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쓰는 영성일기입니다. 이것이 음란과의 전쟁임을 알았습니다. 음란과의 싸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지만 정말 해 볼 싸움이라 여겨졌습니다.

 

저는 복음만이 포르노를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여 예수님이 마음에 살아계신 것을 아는 눈이 뜨이는 것만이 포르노를 이길 유일한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증인으로 나서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어둠 속에 숨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후 혼자만의 은밀한 곳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큰 일 납니다.

 

영성일기,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 이해합니다. 마음도 공개하고 사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죄 무서운 줄 알아야 합니다, 죄의 힘은 은밀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안보는 것을 찾아 갑니다. 이러다 큰 일이 납니다. 왜 독약은 안 마시면서 은밀한 죄는 찾아 갑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영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20-30대 뿐 아니라 10대 우리 자녀들이 주님 안에 거하는 법을 배우도록 어른들이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옷 입고 살려면 예수님이 마음에 임하셨음이 믿어져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이 말씀을 읽고 회심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방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찾아 방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졌으나 회의가 일어나 교회를 떠나 마니교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러나 마니교에 진리가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함을 알았지만 마음에 확신이 생기지 않아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날도 밀라노(Milan)의 한 정원에서 하나님께 ‘내일이 아니라 오늘 진정한 구원의 길을 알게 해 달라’고 울면서 기도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때 아이들이 놀면서 노래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펴서 읽어라, 펴서 읽어라" 무엇인가 자신을 이끄는 것을 느끼고 앞에 있는 성경책을 펴서 읽었는데, 롬 13:13-14 오늘의 본문말씀이었습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어거스틴은 마음에 강한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이상 읽으려 하지 않았으며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절을 읽는 순간, 말하자면 안심의 빛이라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마음속에 스며들어 모든 의혹의 어둠이 말끔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그날 단순히 이 성경 말씀 내용을 읽고 깨달음이 있어서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성경을 읽는 순간, 주님이 살아계셔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계셨고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셨으며, 자신 안에 임하셨음이 믿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그 마음에 임하신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를 모든 방황에서 구원해 낸 것입니다 .

 

여러분, 마음을 지키며 살려면 주님을 향하여, 그리고 성도들 서로에게도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 안에는 있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지켜야 하고 이렇게 다음 세대도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가 음란과 싸우지 않으면 하나님이 강제로 음란이 그치게 만들 때가 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죄가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우리가 주 예수님으로 옷 입으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마귀를 우는 사자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센 사자도 고슴도치를 잡아먹을 수는 없습니다. 온 몸이 가시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마귀가 아무리 성도들을 집어 삼키려 하여도 예수님으로 옷 입은 성도를 삼킬 수는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깨어나고, 예수님으로 옷 입고 살면서 교회와 다음 세대를 음란에서 건져내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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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어둠을 탓하지 말고 세상의 빛이 되라 /롬13:1-7/ 유기성 목사

2016-08-26 16:38:42

 

여러분 중에 오늘 말씀을 읽고 마음에 반감이 일어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롬 13:1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독재권력, 부패한 권력, 부당한 권력을 옹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세상의 독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성경 본문입니다

 

실제로 독재와 부정부패에 항의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성경을 인용하면서 복종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독재정권 때, 데모하고 반정부 투쟁을 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성경 구절을 가지고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에 등을 돌리고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세상 권력자들도 성경 말씀을 오해하였고, 교회 목회자들과 교인들도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히틀러나 김일성 같은 악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 국가 권력을 무시하거나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4. :6에서는 이 세상 정부나 국가 혹은 관원에 대하여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에 비우호적이었고 심지어 적대적이었던 당시 로마 정부를 향하여 하는 말씀이기에 좀 당황스럽습니다. 당시에도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 권력을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제국이 사단의 도구가 되었던 것에 대해선 분명 비판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 정부가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는 역할을 하고 도둑을 잡고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무정부 상태가 더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세금을 내라고 했습니다.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복종할 것은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예수님께서 마 22:21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요 19:10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요 19:11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매다는 권세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에 의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권력, 김일성이나 나치 정부 같은 악한 권세에도 굴복(屈服)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악을 벌하고 선을 장려하고 도둑을 잡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복종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대하여는 당연히 불복종(不服從)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복종함으로 치러야 할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 앞에 절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아야 했기에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 풀무불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 때, 그들은 왕을 모욕하고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절하지 않음으로 받아야 할 처벌을 달게 받았을 뿐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황제를 경배하라는 요구에 불복종하여 순교(殉敎)했습니다. 일제 시대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정신적 기초라고 해서 살아있는 현인신 천황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것은 우상숭배이기에 우리가 할 수 없다.” 고 해서 수없이 투옥되고 순교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악한 권력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입니다.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지난 한국 역사를 돌아보며 교회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하는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정부 요직 곳곳에 들어가 있었지만 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하여 불복종함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이 너무나 적었다는 점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절망합니다. 세상은 너무나 악합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너무나 약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선으로 악을 이기란 말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다시 복음 앞에 집회 중에 임석순 목사님이 놀라운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될 때, 우리는 이미 하늘에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는 앞으로 죽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을 때 부활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이미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입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이고 하늘에 가서 시민권을 받은 사람입니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바로 믿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하나님 나라에서 온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에겐 이 세상이 외국입니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왔고 다시 거기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본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영상] (아주 작은 세포 하나에서 상상할 수 없이 큰 천체까지 비교해주는 영상)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 있는 내 문제는 또 얼마나 작은 것이겠습니까? 또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놀라운지 감이 잡히십니까?

 

이것이 보이면 어떤 문제도 달리 보입니다. 두려울 것도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고난,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따돌림,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사람은 미국가도 한국 사람처럼 사는 것과 같이 성도는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행 2장 초대교회 모습이 이해가 됩니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기에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원수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 뜻대로 살려다 고난을 받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는 사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 은밀한 죄도 지을 수 없는 사람, 두려움과 염려가 없는 사람,

 

1,000만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독재정권 때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데모를 안 한 것입니까? 그것도 역사를 보지 못한 잘못이지만 더 큰 잘못은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을 길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일찍 태어났다면 고종 대신 왕이 되었을 이재형이란 왕손이 있었습니다. 그가 26세 되던 해 경상도 풍기군수가 되었는데,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에 통탄하며 왕손의 특혜를 포기하고 평민이 되어, 가지고 있던 땅문서는 아내에게 주고 방랑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1904년 선영에 성묘를 하러가다가 엄귀현이라는 마부꾼을 만났는데 “나으리, 나으리”하며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친숙해진 어느 날 이 마부가 자기에게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나으리, 황송하오나 예수 믿으시지요!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나으리도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이재형은 마부꾼의 태도가 괘씸하였습니다 “건방진 소리 하지말고 말이나 잘 몰거라”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부꾼의 진정한 호소와 용기에 내심 놀랐습니다. 그래서 빈정대는 투로 물었습니다.“예수를 믿으면 마부꾼이 양반이라도 된단 말이냐?”그러자 마부꾼 엄귀현은 잠시 생각을 하고는 대답했습니다.

 

“나리, 예수 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양반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마부 노릇을 잘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리께서 예수를 믿으시면 제가 평생을 마부꾼으로 나으리를 모시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재형은 이 말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에 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좋은 것인가?”

 

이재형은 이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부인 정씨는 부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승동교회의 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가던 때였는데, 승동교회에서 부흥사경회가 열렸습니다. 부인 정씨를 따라 부흥회에 참석한 이재형은 자신에게 전도해주었던 마부 엄귀현을 만났습니다.

 

그는 교회의 영수였습니다. 영수는 요즘으로 말하면 장로에 해당하는데 손수 교회를 짖고 교회를 내 집처럼 돌보며 교회를 위해 일생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이재형은 “내가 교회 밖에서는 왕손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엄영수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깎듯이 모셨습니다.

 

이렇게 이재형은 왕손으로서 예수를 믿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는데 1914년 승동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1918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현 남대문 교회의 2대 목사로 나중에는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습니다. 왕손 이재형이 이렇게 된 것은 마부였던 엄영수가 진짜 예수쟁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학교가 바뀌고 직장이 바뀌고 군이 바뀌고 사회가 바뀔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까? 예수믿는 가정, 예수믿는 교회가 천국 같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믿는 나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이 악하다고 탄식하지 말고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우리가 진정 세상의 빛이 되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일어납니다. 빛을 이길 어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영국의 정치가로 회심 후, 한때 타락한 영국의 정치현실을 보고 정치인으로 살 것을 포기할 것인가? 심각한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국회가 당신의 사역지다” 라는 뉴턴 목사(찬송가 405장)의 조언을 따라, 마음을 가다듬고 영국의‘노예제도를 폐지’하였고, ‘영국 사회의 악습을 개혁’에 헌신했습니다.

 

당시 노예 제도는 영국 국가 수입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고 노예제도 지지파들은 상인, 재벌, 군인, 왕족, 귀족들을 망라한 거대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왜소한 체격의 윌버포스는 150번이나 되는 對국회 논쟁을 하였습니다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데, 노예 제도는 분명 하나님의 분노를 자극하는 일이다.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 제도를 갖고 있다니... 이러고도 오래 살아남은 제국은 역사에 없었다.” 라고 외쳤습니다. 결국 영국 국회는 노예 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이 일을 할 수 잇었던 것은 그가 빛이 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 불렀고,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세상을 변화시킬 아무힘이 없습니다. 할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우리에겐 정말 큰 힘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롬 13:1에서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 권세를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시장, 시의원들을 주관하시고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심을 믿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투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면 세상은 바뀌게 됩니다.

 

한 때는 독재 정권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탐심이 우리를 옭죄고 있습니다. 세금 문제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문제가 됩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한 집사님이 은혜의 눈이 뜨인 후 신앙적인 원칙으로 회사 경영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원들을 모아놓고 정직한 세금과 정직한 영업을 하기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핵심 중역들이 줄줄이 사표를 썼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영업을 할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자기가 창업했지만 자신의 회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회사의 진짜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알았습니다. 세상입니다. 자신이 사장이라고 회사를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영국은 더 했습니다. 그 때 웨슬리의 신앙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무리들로 일어났습니다. 영국은 피흘리는 혁명없이 근대화의 길로 들어설수 있었습니다.

 

남북 통일을 앞두고 지금 거룩한 무리들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터, 박람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돈이면 제일이라는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경영원리 대로 기업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주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 나라를 알면 그렇게 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한 남자집사님, 세금문제, 약간 억울한 세금, 그러나 다 내면 집 사라짐, 다 미리 처분하라! 어떻게? 정직하게 반응하세요!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믿습니까? 눈물을 흘렸습니다, 답은 알겠는데, 자아는 순종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승리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악하다고 한탄만 하면 안됩니다. 주 예수님을 바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흥을 일으킬 거룩한 무리에 동참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dmin

 

댁쟾쇰줈

 

 

 

다시 보는 로마서 40강 /롬13:11-14/ 박영선목사

2015-07-30 13:18:51

 

▶로마서 13장 11절에서 14절까지 말씀을 봉독해드립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일하시는 그 부대 틀 구조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부분을 지금 배우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에 순복하라 하는 것이죠.

세상은 다만 권력싸움밖에 어떤 목적과 의미를 부여할 데가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려하시며 복 주려 하신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런 역사관과 운명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네가 놓여있는 정황과 구조 속에서 네 역할 네 자리를 지키라

그래서 국세도 바치고 지방세도 바쳐라.. 하는 데까지 왔지요.

 

그러한 커다란 구조 틀 부대 같은 것들을

제가 다 이렇게 묶어서 컨텍스트라는 말로 지금 쓰고 있습니다.

 

컨텍스트는, 이것보다는 작게 문맥 정황 등에 쓰이는 단어이지만

저희 말을 아직 못 만들어서 적당한 단어를 못 찾아서

제가 그렇게 컨텍스트와 텍스트 이렇게 둘로 나눠서 쓰고 있습니다.

 

컨텍스트를 두려워 말라..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컨텍스트를 텍스트로 오해하지 말라.. 이런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만이 텍스트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대 사회 조건

이런 것들이 다 사실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조건들을

예수를 믿고 거룩한 목적을 부여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개선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된다.. 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거룩하고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보잘것없는 지위와 무력한 역할을 맡기시는 현실이 이해가 안 되고

너무 작다.. 그런 불평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마태복음 16장 24절은 잘 아는 구절이니까 외워보죠.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제자도에 관한 예수님의 유명한 요구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라는 존재와 가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하자면 권력을 가지거나

스스로를 증명할 어떤 재주를 가지거나

또는 좀 심하게 나가서 배알도 내놔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하나님이 우리를 컨텍스트 속에 넣어 놓으신다. 입니다. 여기가 어렵죠.

 

(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으니 중요한 지위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 자신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잘 아시잖아요.

 

예수님은 당시대 아무런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앞서 그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소리입니다.

존재도 신분도 아니고 그저 다만 소리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소리.

이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이 컨텍스트 속에 있습니다.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죽어나갈 것입니다. 죽음의 길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죽어버리면 그만인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컨텍스트 속에서 가지고 있는 지위와 역할입니다.

당연히 아멘은 안하시겠죠.

 

그것을 모르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여러분 모두에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매주 와서 이것은 억울합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이것을 개선하고 희망의 찬 어떤 답을 얻어가려고 매일 와서

매일 그 얼굴로 왔다가 그 얼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번도 그 약속을 한 적이 없는데

성경에 한 약속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여러분들은 그 암묵적으로 자신들의 안심과 자존심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는 못 한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러니 우리 잘 아는 시편 90편을 보시면 시편에 있는 유일한 모세의 기도문입니다.

이런 기도가 실려 있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 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 도대체 무슨, 무슨 기도 무슨 고백 무슨 탄식일까요.

모세는 120살을 삽니다. 40년은 바로의 궁에서 길러지고

그 다음 40년은 도망간 미디안 광야에서 그저 세월을 보내고

그저 그렇게 한 줌 재로 늙어가지요.

 

80살에 부름을 받습니다. 그 40년 동안 잘 아시는 대로

바로 앞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며 반석에서 물을 내며

하나님이 붙드시는 대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호렙 산에서 율법을 받고

그리고 저들의 불순종으로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며 다 죽습니다.

 

그 배경을 가진 지도자. 얼마나 인생은 짧습니까. 얼마나 인생은 못났습니까.

우리의 죄가 주 앞에 있고 주의 분노에 일식 간에 다 죽어버리는

참으로 헛된 못난 인생입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문은 그렇게 읽고 듣는 것같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못난 것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베푸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내셨습니다.

 

호렙에서 만나셨고

만나를 먹여 이 40년 동안 내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고

내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다.. 그것도 보이셨습니다. 그런 기도이지요.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저들의 실패는 다만 실패일까요.

저들의 못난 것은 다만 못난 것일까요.

 

거기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못난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능력으로 그들의 생애를 모든 인류에게

모든 후손들에게 유익으로 남기고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으로 둥실 솟아나는 하나님의 자기 본무는

이 못난 것 속에서 얼마나 크던가요.

 

우리의 죽어가는 인생과 우리의 못나고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인생 속에

하나님이 본문을 담으시겠답니다.

 

세상은 본문을 못 담죠. 마치 담아 보이죠.

문학을 보면 거기, 거기 곤혹이 있고 도전이 있고 절망이 있고 사색이 있고

감동이 있고 무슨 깊고 깊은 무엇이 있습니다.

 

예수를 보아도 그렇고 철학을 보아도

깊은 인간의 고뇌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떤, 어떤 그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는 본문이 없습니다. 왜요? 본문이란 죽음을 극복해내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에 다 굴복할 수밖에 없으면 무슨 사치를 하던 무슨 깊이를 가지던 그것은

그저, 그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기독교만 본문을 가지며, 부활을 용서를 회복을 승리를 영광을 영생을 잇게 하죠.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 인생 속에 담으시겠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자꾸 컨텍스트(자기 환경) 싸움을 하지요.

 

▶이사야 53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죠.

메시아는 이렇게 임할 것이다. 그 모습은 참으로 놀라워서 이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입니다. 예수 안에 하나님이 무엇을 담았죠?

세상 죄를 씻으시며 죽음으로 끝날 인생을 부활로 승리케 하시며

하나님을 떠난 폐허된 인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이 찾아 오사 우리와 화목하심이라

 

우리의 아버지가 되며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됩니다. 예수가 그것을 만드십니다.

그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그 길을 걸어야 됩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길을 걸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이 세상 이 세상의 조건 현실 구조 틀 배경 무대 속에 여러분을 넣어놓으셨습니다.

여러분만이 본문을 담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가서 가만히 계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진 지위와 역할을 감수하십시오.

 

▶빌립보서 3장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어떤 성취가 없습니다. 벽돌을 쌓고, 쌓고, 쌓고 해서 성취한 업적이 없습니다.

하루하루를 살라고 합니다.

 

‘나는 뒤에 것은 모른다. 나는 오늘을 산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오늘 내가 살아있음으로

하나님이 오늘이라는 컨텍스트 속에 본문을 담으려 하신다.

그렇게 이해하시라는 겁니다.

 

내 삶이 돌아보아야 무슨 가치가 있는가 어디까지 왔는가.

그런 것은 나는 모른다. 하나님이 나보고 하루 살라고 했다.

그 하루는 어떤 하루죠. 여러분 평생 겪으신 그 하루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하루고 벼락이 치는 하루고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나고

자기의 존재감이 가장 거부당하기도 하는 그 날 말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하여 본문을 담으시겠답니다.

 

그렇게 본인을 이해하고 하루를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같이 오직 보이는 것으로 의미와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다만 종교라는 이름으로 떼쓰는 사람이 불과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 같이 뭐라고 되어있었죠? 잠자지 말고 깨어있어라.

술 취하고 방탕하지 말아라가 나옵니다.

 

이 본문을 좀 더 확대한 것이 에베소서 5장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어둠이란 뭐에요. 갈 바를 알 수 없는 것이죠. 빛이란 뭐에요. 보인다는 것이죠.

뭐가 보여요? 여러분 인생이 존재가 무엇인지 보이는 거죠. 뭘 할 수 있다고요?

세상의 도전과 시험 앞에서 텍스트를 담아낼 수 있다고요.

 

컨텍스트 경쟁을 하지 않는다고요.

지위를 가져야하고/ 권력을 가져야하고/ 능력을 가져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다.’를 아는 자의 인내와 성실과 겸손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자의 믿음이 비전에는 깊이가 있을 것입니다.

 

▶매일 시험을 봤지요. 너는 무엇이냐 왜 그렇게 사냐.

매일 현실이 우리를 와서 도전할 것입니다.

 

네가 열심히 예수 믿어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사람들이 너를 알아 주냐고.. 계속 시험하고 도전할 것입니다.

 

무슨 효과가 있냐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게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억울하면 나갔다가 나중에 오십시오.

예수를 믿는 것을 스스로가 납득하여 그 인생을 살 자신이 없거든

그러니 기도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늘어놓는 지금 그 기도 말고

컨텍스트를 완화시켜달라는 기도 말고

내가 텍스트를 담아내는 존재라는 그것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15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너희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매일 매일 여러분의 삶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하시는 겁니다. 아직 안보이죠.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어리석은 자란 뭐에요.

자기역할 모르는 거죠. 자기 역할 모르는 것이에요.

 

이주일 씨는 예전에 유명했던 코미디언입니다.

못생겨서 써주지를 않아서 유랑극단 쫓아다니고

어쨌든 연예계에 데뷔를 하고 싶었는데

하춘화 씨 공연하던 공연장에 불이 났을 때 하춘화 씨를 구한 업고나온 덕으로

하춘화 씨가 밀어줘서 데뷔를 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한 단역을 맡게 되었죠. 어떤 환자가 죽게 되었는데

의사 가운을 입고 들어가서 눈을 까뒤집어보고 “운명하셨습니다.”

이 한 마디 대사를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일주일 내내 대사를 외우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되어 자기 순서가 되어서,

(환자의 눈을 살펴야 되는데, 너무 긴장해서) 자기 눈 까서 뒤집고 “운명하셨습니다.”

이러고 돌아와서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되었죠.

 

왜 자기 눈을 깠을까요? 연습을 했으니까요.

환자가 어디 있어요? 자기 연습을 혼자 했으니까, 자기 눈을 깠죠.

그러니 나가서도 그랬죠. 그래가지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이주일 씨가, 그 시대에 우리에게 줬던 위로는 꽤 대단했습니다.

그가 그런 조건 속에서, 스스로 웃을 수 있는 실력이 있다는 사실에

많이 위로를 받았습니다.

 

못생겨서 당하고 아무 연고도 없고 낙이 없다가

그렇게 대중에게 알려지고 유명해졌는데

그 유명한 것으로 잘못하지 않고, 본인의 못난 것을

그렇게 함께 은혜로 나눴던 흔치 않는 위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상을 받거나 확인하도록 보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까요. 얼마나 어려울까요.

 

그러나 만일 그것이 어렵고 그것을 뚫어낼 그것을 극복할 예수 믿는다는 말을

그것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되기 때문에 짚고 넘어가야 됩니다.

 

여기서와 같이 18절 유명하죠.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다. 는 무슨 이야기라고요?

생각 없이 넘어가지는 것이죠. 세월을 떠내려 보내는 것입니다.

 

술 먹는 것이 왜 방탕하냐. 술을 먹으면 깨어있을 수 없습니다.

의식이 책임이 자기 역할이 시간이 마구, 마구 지나가죠.

 

여러분의 인생을 마구, 마구 지나보내고

넋두리하고 분해하는 것으로 소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작음과 억울함을 그것을 품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은

가장 큰 지위를 가지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고뇌와 같습니다.

 

한 인간의 가치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고

그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국가나 사회나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인격자시고

우리가 하나님 없이 가져다붙이는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붙였던

어떤 덕목들과 이상들도 애국이나 인류애나 무슨 희생이나 무슨 유익이나

이런 것들은 무 인격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이해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다만 척하고 다만 순진하고 다만 겸손하고

보다 큰 하나님의 일하심을 담아낸 인격이 되는

여러분이 당한 현실을 인격이 감수해내는 울고 한숨 쉬며

그러나 도망가지 않는.. 그래서 하나님여러분을 통하여 기적을 이루십니다.

 

그 인생을 스스로에게 확인하십시오. 그 기적을 이루십시오.

어떤 조건 어떤 시대에도 동일한 하나님의 기적을 만나십시오.

성경에서만 보는 기적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에게서 보는 기적을

여러분의 생애에서 주인공이 되시고 그 주인공이 되는 그 복을 누리십시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롬13:11-14/ 하용조목사

2015-05-27 13:34:37

 

6.25가 공산당이 쳐들어와서 겪은 위기였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경제적인 위기는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경제 붕괴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경제 붕괴는 정치적 타락에서부터 옵니다. 정치가 타락하지 않으면 경제는 망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정치 밑에서는 좋은 경제가 서는 것입니다. 정치가 왜 타락하는지 아십니까? 정치가가 타락해서가 아닙니다.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견제할만한 도덕성이 없을때 정부는 타락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도덕성은 왜 타락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도덕을 지킬만한 영적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덕의 타락은 종교의 타락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목사가 맡은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종교가 전통과 타성과 물질에 노예가 되고 양적인 성장과 부에 만족하고 있을 때 국민들의 양심과 도덕은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4~5년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겪게 된 이 재난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 재난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민주정부가 탄생했을 때 참으로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우리나라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출이 많아지고, 올림픽을 치루고 나서부터 우리 사회는 우리를 경악케 하는 일들이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되었습니다.

 

계속 되풀이 되어 왔던 하나님의 경고

 

하나님은 그 동안 우리에게 많은 경고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만한 인간들은 권력과 돈을 믿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이것은 4~5년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권력을 믿고 기업을 분수에 넘치게 확장한 재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과격한 노조들이 일어났습니다. 노조들은 자신들의 조합을 정치세력화해서 전쟁에 가까운 투쟁을 했습니다.

 

철도파업과 현대노조파업을 기억하십니까? 또한 럭키그룹을 기억하십니까?

학생운동은 어떻습니까? 연세대학을 송두리채 불구덩이로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 몇년동안 우리 국민들의 도덕성은 어찌 되었습니까?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압구정동에 쾌락의 문화가 생겨났고 졸부들의 파렴치한 엽기적인 행각들은 지존파들을 낳았습니다. 지존파사건과 비슷한 사건들은 한달이 멀다하고 생겨났습니다. 급기야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습니다.

 

이것은 싸인이었습니다. 빨간불이 계속 켜졌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북한은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회개해야 할 그때 최고급수입품을 마구 들여왔습니다. 백화점마다 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사치품을 사들여 왔습니다. 쾌락문화는 온 세상을 뒤엎었습니다.

 

계속해서 지하철사고, 비행기추락사고가 일어나면서 백주에 인신매매가 자행되고 온갖 성적범죄가 우리나라 전역에 오염되었습니다. 영화, 잡지, 노래방, 이발소 할 것 없이 무차별공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주간지를 보십시오. 스포츠신문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을 상품화하기 시작했고 언론은 성과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신과 타협했습니다. 오늘의 운세를 점치기 시작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린 소녀가 임신 하고 젊은 여인들이 납치되어 창녀촌에 팔려갔습니다.

 

최근에는 우리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을 만큼 폭력사태가 심각해졌습니다.

우리 사회는 4~5년동안 끝없이 추락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맞지 않아야 합니까?

 

이 결과가 당연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경고의 붉은등을 켜고 계십니다.

 

몇년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좦 이것이 바로 구약의 잘못된 예언자들의 말이었습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를 용서하신다. 한번 봐주실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적당히 넘어가게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일은 심상치가 않습니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고통과 수모를 모두 겪어야 합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6.25입니다.

 

동터오는 새벽맞아 경성해야 할 신앙인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로마서 12장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받은 은사대로 살라 그리고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너를 핍박하는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는 말씀과 13장에서는 권위에 순종하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말씀을 마치고 난 사도바울은 13장 11절에서 크리스천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다가 이제 상황이 급박해졌으니 이 상황을 무시하지 말고 정신차리고 들으라고 분위기를 바꾸어서 말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지금은 자다가 깰 때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자다가 깰 때가 이미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일어나라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되었다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두번째는 우리 구원이 처음때보다 가까왔다고 또 한번 때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세가지 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현재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성화하고 있으며 마지막날 우리는 완전한 구원인 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같은 세 시제중에서 여러분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아도 용납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잘 알지 못하고 교회생활도 익숙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제 예수 믿은지 십년이 지났으니 장난하지 말고 감정놀이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또 변명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처음 믿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완성단계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초보단계가 아니라 이제는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을 책임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완성하는 단계에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

 

세번째, 12절을 보십시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는 말은 새벽이 가까왔다는 말입니다. 역사의 동이 트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았는데 어둠속에서 머뭇거리며 잠만 자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말씀때문에 어거스틴이 회심했습니다.

 

전에는 변명이 통했습니다.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잘못된 예언자들의 말이었습니다. 괜찮아, 하나님이 도와주실거야 평안이야

 

여러분, 새벽 닭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기상나팔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잠잘 때는 잠옷을 입습니다. 그러나 일터에 나갈 때는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나갑니다.

 

밤이 깊었다는 말은 새벽이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제는 자다가 깰 때이다. 구원은 완성단계이다. 지금은 깊은 밤이 아니고 동이 터오는 새벽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두움을 벗기 위해 해야 할 것들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너희들이 할 일은 어두움의 옷을 벗고 빛의 옷을 입으라라고 말합니다.

또 어두움의 옷을 벗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13절에서 어두움의 옷을 벗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14절에서 빛의 옷을 대신 입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13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어두움의 옷을 벗기 위해 해야 할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사회가 변화되어야 할 네 가지 영역이며 예수믿고 세례받고 교회에 와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여러분의 삶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네가지 영역입니다.

 

첫째는 낮에와 같이 단정한 삶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밤의 삶은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무슨 옷을 입었는지 무슨 얼굴색을 하고 있는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낮에는 잘 보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한 삶이란 투명한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투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투명해야 합니다. 가리면 안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리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말 못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어두움을 벗어버리라는 것은 당신안에 숨겨져 있고 어두운 부분을 숨기지 말고 모두 뒤집어서 보여 주라는 말입니다.

 

시골집에 가보면 마당에 수도가 있습니다. 그 수도주변에는 돌들이 놓여져 있는데 그 돌을 치우면 그 밑에는 지렁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지렁이들은 돌이 덮어 주어야 안심하고 살 수 있습니다.

 

지렁이는 햇빛을 보면 죽습니다. 여러분 위에 있는 돌을 치우셔야 합니다. 이것이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삶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어두움의 부분을 제거해야 합니다.

두번째 방탕과 술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도덕적 타락의 영역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술취하는 사회입니다.

 

우리민족은 술먹는 것이 특이합니다. 미국이나 구라파에서 식사할 때 술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의 음식입니다. 그래서 술먹는 매너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사람들은 마구 먹습니다. 깡술을 먹습니다.

 

군대에는 폭탄주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또 술을 먹어도 한번으로 끝내지 않고 1차, 2차, 3차로 먹습니다.

우리는 술먹고 자기만 기분 좋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아무데나 밖에 나가서 토하기도 하고 고성방가도 합니다. 술먹고 운전합니다. 자기 몸을 학대합니다. 인격을 학대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술문화입니다.

 

우리나라의 영화의 주인공은 술집여자입니다. 영자의 전성시대부터 시작해서 모든 주제가 술집여자입니다. 소재가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방탕하지 말고 술 취하지 말라 이것은 빛의 삶이 아니다. 어두움의 옷을 벗어 버리라

 

세번째 13절을 보면 음란과 호색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이미 바빌론의 음녀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되었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언론매체에 음란문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간스포츠 신문에 이상한 글을 실지 않으면 팔리지 않습니다. 모든 상술, 언론매체가 창녀들에게 잡혔습니다. 여러분이 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에게 잡힌 것입니다.

 

음란과 호색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벗어나십시오. 거기서 벗어나 거룩한 예수의 신부로 사십시오.

마지막으로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미움과 폭력입니다. 우리 사회는 미움과 폭력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거기에 한가지 더해 마약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것들입니다. 정치를 봐도 경제를 봐도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마치 밤에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전부 방탕과 술취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술이 없으면 사업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음란과 호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화입니다. 미움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어두움의 일을 벗지 않으면 심판이 옵니다. 심판이라는 말은 겁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지옥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제 정치라는 것이, 경제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못한 그 사람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지면 다리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있던 사람들도 다 무너집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도 떨어집니다. 다 죽습니다. 혼자만 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북한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진짜 불쌍한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회개 과정 거쳐 고난극복 앞장서야 할 성도

 

그런데 이것은 한꺼번에 기도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당해야 할 일, 마땅히 당해야 할 일을 당해야 합니다. 수모를 당해야 합니다.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회개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나라는 새로워집니다. 빛의 옷이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 하지 말라

 

빛의 옷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떠납니다.

우리에게는 어두움을 몰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빛을 받아들일 능력은 있습니다.

 

내가 어두움을 몰아낼 수는 없지만 빛이 내 안에 오면 그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는 줄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앞에서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 그분이 오시면 그 안에 있는 어두움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여러가지 환난을 겪어왔지만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은 너무나 심각한 것들입니다. 어떻게 나라를 살릴수 있겠읍니까? 우리 모두는 회개와 뼈아픈 고통을 참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몇몇 사람이 잘못했지만 우리 모두가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고, 욕하지 않고, 돌던지지 않고, 냉소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면서 이 일을 영적으로 우리의 책임으로 알고 십자가를 같이 지고 어린양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이 민족을 구원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은 교인밖에 없습니다. 소위 그래도 천국의 시민으로 구원받았다는 우리들이 이 난국을 구원해 내야 합니다.

 

욕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욕하지 마십시오. 분노를 터뜨리지 마십시오. 누군가에게 돌팔매질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욕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크리스천은 욕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세상의 소망입니다.

 

매주일 모이는 조직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군대조직도 안됩니다. 자발적으로 모이는 조직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이 회개하고 나라 살리기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은행에서 돈을 찾지 마시고 저금하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은행을 살려야 합니다. 자본금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달러를 사들이지 마십시오. 과거에는 사치품을 썼어도 이제는 사용하지 마십시오. 허리띠를 졸라매어야 합니다.

 

이 운동을 교회가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십시다. IMF가 우리를 통치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힘을 합한다면 돈을 빌려 오지 않아도 될지 모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때 미국교민들이 한국에 달러 보내기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천달러, 1백달러를 보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의 소망되어야

 

지금 세상사람들은 모두 힘들고 무서우니까 전쟁나서 도망가듯 도망갑니다. 온누리교회 교인들이 이것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부를 신뢰해주고 은행을 믿어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번 이 위기가 오히려 회개만 할 수 있다면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재기하고 자기 것만 챙기는 졸장부, 더러운 국민이 되느냐, 아니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훌륭한 국민이 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기회가 바로 이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위기는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정치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번 선거를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정말 기도하고 나서 하십시오. 대통령 잘 뽑는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분도 잘알고 있습니다. 이번이 정치를 바꿀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재벌들이 모두 부도가 났습니다.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대만의 중소기업 경제구조를 부러워합니까? 이제 우리에게 건강하고 실력있는 중소기업들이 살아날 기회가 생겼습입니다.

 

재벌중심의 경제구조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제는 건강한 중소기업의 성실한 사람들이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소신껏 성실하게 장사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사치품을 부끄러워서 쓸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다시 한번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입니다. 앞으로 몇년 고생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온누리교회에서 기도하는 기업가들, 성실한 기업가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미래산업에 알맞는 아이디어로 이 난시대를 극복해 나가 경제를 살려야 합니다. 경제가 살면 전도할 일이 생깁니다.

 

망한 나라가 가서 예수믿으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예수를 전하려면 그 나라 정치가 수준급이어야 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 하고 문화수준이 높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라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우리 민족이 잘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민족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감사드립니다. 북한만 다루시지 않고 우리도 다루시기 위해 채찍을 드셨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배를 움켜 쥐고 국민들을 격려하고 소망을 갖게 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구원은 처음 믿을 때보다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으로 사십시오 /롬13:8-14/ 이동원목사

2014-12-03 18:41:48

 

오늘은 십계명 강해 설교를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몇일 전 우리 교회 성도 한분이 십계명을 잘 기억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유머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제가 약간 바꾸어 보았습니다. 일부터 십까지 숫자로 암기하기 쉽게 만든 것입니다.

 

들어보시지요.

 

일(일계명)은, 일단 여호와 하나님만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라.

이는, 이상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

삼은, 삼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사는, 사업을 핑계로 안식일을 범하지 말라.

오는, 오마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라.

육은, 육신의 생명을 누구의 생명이든 귀히 여기라.

칠, 칠계는 부부행복의 근본임을 기억하라(칠보단장한 여인을 조심하라)

 

팔, 팔팔한 힘을 남의 것 빼앗는 일에 쓰지 말라,

구, 구라치지 말라.

십, 십원 이라도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이제 잘 기억하시겠지요.

 

오늘의 본문은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수 있다면 1-11장까지가 첫 부분인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설명하는 교리(칭의의 교리)입니다.

둘째 부분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속에 들어간 사람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윤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기독교 윤리의 근본인 십계명을 바울 사도가 다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 10절에서 바울사도는 한마디로 기독교 윤리의 핵심을 설명하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고 건강한 웰빙가정을 만드는 유일한 열쇠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다시 우리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사랑의 빚을 기억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이 말씀의 강조 점은 할 수 있는 한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중요한 전제는 우리는 모두 별수 없이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로마서의 서론인 로마서 1:14에서 자기 스스로도 빚진 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가 복음을 받아 드리고 예수를 믿는 순간 그가 비로소 빚지고 사는 인생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나 한 사람이 예수 믿고 복음을 받아 드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려야 했는지요?

 

우리는 기독교 역사의 도상에서 먼저 복음을 받아드리고 복음을 위해 수고한 모든 믿음의 선배들, 선교사님들,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양육하는 일에 평생을 바쳐온 모든 목회자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전해온 모든 전도자들에게 진실로 빚진 자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진실로 이웃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으시나요?

 

그동안 오늘의 나다운 내가 되어지기 위해 나를 가르쳐 온 모든 스승들에게 빚을 지지 않으셨나요? 마침 오늘이 6.25를 앞둔 주일인데 우리 나라가 오늘의 한국이 되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 오는 도상에서 이 나라를 지키는 일에 희생한 모든 분들에게 우리는 빚진자가 아닌가요?

우리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스스로를 인정하는 일에 인색한 면이 있습니다.

 

사실 세계 역사상 전쟁의 잿더미에서 이처럼 빨리 일어나 세계 여러 나라가 평가할 만한 경제 재건을 이루고 이웃의 소위 대국인 중국이나 러시아인들에게 까지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어 본적이 과거의 역사에 어느 때에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런 민족재건의 도상에서 땀흘리고 희생한 소위 산업화 시대의 우리의 선배들에게 얼마나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을까요?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에 보면 소위 유명한 절기의 제정은 모두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날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 그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명절의 존재 이유는 일종의 자녀 교육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출12:26-27에 보면 유월절 제정을 주께서 명하시며 이런 명절 제정의 의미를 친히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이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명절은 단순히 노는 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속에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도우심을 잊지 않도록 자녀들과 함께 기억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건한 히브리인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날 그날은 우리가 인생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포기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야드 바셈(Yad Vashem)이라는 유대인 학살 추모 기념관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경구가 쓰여 있습니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은 너무나 빨리 잊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채찍도 하나님의 사랑도 말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만은 기억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이라는 것은 크게 말하면 율법의 한 부분입니다. 율법은 십계명을 포함하여 무려 613개의 계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대하고 세밀한 계명의 내용을 들여다 볼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런 계명을 모두 지키는 일이 우리에게 과연 가능한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에서 바울은 새 언약아래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가르침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계명에 신경쓰지 말고, 사랑하는 일에만 신경쓰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율법은 절로 지켜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십계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십계명은 두 개의 돌비에 쓰여졌다고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

 

첫째 돌비에 1-4계명까지로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상을 만들고 경배하겠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경배하기를 소원하는데 어떻게 안식일을 지키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 돌비를 생각해 보십시오.

 

5-10계명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계명들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절로 지켜지는 계명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데 어떻게 이웃을 간음하며 이웃을 살인하고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겠습니까?

 

것이 바로 본문 9절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것과 그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 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그래서 8절에서는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했고, 10절에서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웃 사랑은 결코 하나님 사랑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결국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찍 성 어거스틴은 이런 위험하게 들릴수도 있지만 심오하게 성서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맘대로 하라”고. 결국은 사랑입니다.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사시면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질문은 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3. 오직 예수를 옷입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옷을 입는 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말에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정한 옷을 입으면 단정하게 행동하고 싶어집니다. 경건한 옷을 입으면 경건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야한 옷을 입으면 야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과거에 학생들에게 제복을 입힌 이유가 학생다운 행동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청년들이 군에 입대하면 군인의 옷을 입히는 이유가 군인 정신을 잊지 않고 행동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경찰이 제복 없이 돌아다닌다면 경찰의 위신이 서겠습니까?

 

그런데 바울 사도는 오늘의 로마서 본문에서 마지막 결론에서 우리가 사랑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예수로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14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의 옷을 입는다면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요? 예수님처럼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정말 예수로 옷을 입었다면 어떤 상황을 직면하든지 저 유명한 쵤스 쉘돈(Charles Sheldon)의 제안처럼 이 한가지 질문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같으시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 같으시면 무어라고 대답하셨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순간 오직 한 벌 옷을 입고 살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들입니다. 갈3:27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침례)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라” 우리는 벗을 수 없는 옷-예수의 옷을 입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수 있는 한 이 옷을 벗으려 합니다. 교회에 올 때 만 이 옷을 입으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옷을 입고 가정에서 살고 계십니까? 예수의 옷을 입고 직장 생활을 하십니까? 예수의 옷을 입고 사업을 하십니까?

 

아니면 우리는 여러 벌의 옷을 준비해 두었다가 교회에서는 예수의 옷을 입고 교회당을 벗어나는 순간 편리한 대로 이방인의 옷을 입고 사는 이중 삼중 다중인격의 인생들은 아닌가요?

 

한가지 물어야 할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의 옷을 입고 사는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의 인생이어야 하겠습니까? 그분의 옷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골3:12의 말씀을 보십시오.“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이어서 사도 바울은 14절에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긍휼의 옷을 입고 사십시오.

 

자비의 옷을 입고 사십시오. 겸손의 옷을 입고 사십시오. 온유의 옷을 입고 사십시오. 오래 참음의 옷을 입고 사십시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사랑의 옷을 입고 사십시오. 그분은 지극히 작은 소자 한 사람에게 베푼 사랑이 곧 내게 대한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이웃사랑의 시작은 본문 10절의 권면처럼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려는‘결심, 아니 ’이웃에게 피해나 부담을 끼치지 아니하려는 작은 배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주차할 때도 이렇게 주차하면 남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생각하는 작은 배려, 노약자나 장애 이웃들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도록 배려하는 작은 노력-바로 이런 행함이 율법을 이루는 사랑의 시작이라고 믿습니다.

 

‘TV에세이 좋은 생각’ 글모음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떤 암과 투병하시며 병석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식구들이 없을 때 외출을 하셨습니다. 식구들이 한바탕 소요를 하며 찾는 중에 아버지는 외출하신 지 서너 시간 후에 말없이 돌아 와 다시 병석에 누우셨다고 합니다.

 

‘어디 갔다 오셨느냐’고 자식들이 다그쳐 물어도 워낙 말수가 없으셨던 아버지는 대답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그후 갑자기 아버지는 병세가 악화되셨고 자식들은 그 몸으로 외출을 하셨으니 이 모양이 아니냐고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그로부터 몇 주를 지내지 못하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 병상 머리 위에 큰 봉투가 하나 있어서 열어보니 아버지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병색이 완연한데 억지로 웃으시는 모습이셨습니다.

 

그때 식구들은 비로소 그 사진이 아버지가 마지막 외출하여 찍으신 사진인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진 뒤에 아버지의 힘없이 내리 쓴 글씨가 눈에 들어 왔다고 합니다. “나 죽은 후 내 변변한 장례식 사진 하나 없어 당황할까봐 한 장 찍어 둔 것이니 장례식 조촐하게

 

치른 후 화장할 때 함께 태워 없애거라.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내 마지막 배려라고 받거라. 부디 자식들, 형제들, 그리고 이웃들 사랑하며 살거라” 이 글은 자녀의 이런 고백으로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요, 알겠어요, 그것도 아버지의 사랑인 것을. 그런데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불효가 적었을 것을 후회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당부처럼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배려하며 살겠습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십계명의 교훈과 사랑의 관계를 말해 보십시오.

 

2.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말해 보십시오.

 

3.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누어 보십시오.

 

4. 십계명 중 내가 제일 잘 지키지 못하는 계명은 무엇인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나누어 보십시오.

 

 

 

 

복음적 역사의식 /롬13:11-14/ 곽선희 목사

2014-11-20 05:31:58

 

희랍 신화에 레테호수의 이야기라는 그런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개 이렇습니다. 한 여인 이 스틱스강에서 이제 영원한 나라 로 강을 건너가려고 하는 시간입니 다. 뱃사공이 그에게 말해줍니다

 

"이 강을 건너기 전에 레테호수의 물을 마시고 갈 것인지 마시지 아니 하고 갈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결 정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에 이 여인은 다시 물어봅니 다.

"그래 이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뱃사공은 이제 말해줍니 다.

"이 물을 마시게 되면 지난날 의 괴로움을 말끔히 잊어버리게 됩 니다."

이 여인은 눈을 반짝이면서

 

"아 그럼 빨리 마셔야지요. 고통스 러운 일, 지난 과거들 말끔히 잊어 버리고 싶은데요"

했더니 뱃사공이 다시 한 마디 덧붙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 다. 이 물을 마시면 동시에 기뻤던 일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순간 여인은 고민에 빠집니다. 아 프고 괴로웠던 일 잊어버리고 싶지 요. 그러나 동시에 기뻤던 일도 다 잊어버려야 한다는 데는 문제가 있 습니다. 한참 생각하고 나서

"마시 지 안겠어요"하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 잊어버리고 몽롱한 가운 데서 평안하기보다는 차라리 고민하 며 고통을 느끼며 걱정하면서 행복 한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우리 는 뭐든지 다 잊어버렸으면 좋겠어 요. 글쎄올시다. 잊어버린다고 해 결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내 기억 에서 없어진다고 해서 사건이 없어 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1년을 보내면서 무엇인가 고민할 것은 고 민해야 됩니다. 생각할 것은 생각 해야 그에게 밝은 미래가 있는 것이 올시다. 아프고 괴롭고 쑤시지만은 그래도 생각해야 될 것은 생각해야 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혹은 시작하는 중간에든지 혹은 있던 일을 마감하 려고 할 때 우리는 꼭 네 가지 질문 을 하게 됩니다. 또 당연히 해야합 니다. 첫째는 손익계산입니다. 무 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잃었는가?

 

무엇을 얻을 것이며 무엇을 잃게 되 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 해야 됩니다. 백해무익한 것을 계 속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꼭 담배 피 우는 사람처럼. 제게도 나쁘고 남 에게도 나쁘고, 아무리 설명해도 백 해무익하다는데 그걸 피우면서 이리 저리 구박받으며 쫓겨다니는 걸 봅 니다.

 

참 안됐더라고요. 요새는 비 행장에서 이 사람들 아주 구박받거 든요. 비행기에서도 못 피우게 하 고 그래서 틈틈이 어떻게 좀 피워보 려고 하는 걸 보면 참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요. 어쨌든 손익계산이 분명해야 됩니다.

 

뻔히 손해나는 일을 알면서 그 일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유익하다면 무엇이 유익한가? 오늘 유익할 것인가 내일 유익할 것인가? 보다 더 먼 장래를 위해서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손익계 산에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목적을 물어야 합니다. 무 슨 일을 했던지 간에 무엇을 위하여 한 것인가,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었 나? 이제 다 지나고 나서 결산하면 서 물어봅시다. 정말로 목적이 무 엇이었나? 간혹 우리 교회 봉사하 는 분들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있어 요.

 

봉사는 열심히 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마지막에 보면 원망 불평이 요. 이제 나는 묻고 싶습니다. 도 대체 누구를 위해 한 일이냐고? 당 신이 일하는 목적이 무엇이었냐고?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 가 정말로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 하여 이 일을 해야 했던가? 목적을 재진단해야 할 것이구요 또 하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 되 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대개 보 면 그렇더만요. 일이 잘될 때는 재 수 좋았다, 그래버려요. 그 잘된 이 유가 있어요. 잘된 이유를 확실히 알아야 그것을 지속할 수가 있겠는 데 잘 된 이유에 대해서 깊은 연구 가 없습니다. 그저 넘어갑니다. 그 러니까 한번에 끝나고 말아요.

 

그 런가 하면 잘못되었다고 할 때는 이 것은 깊이 반성해야 됩니다. 아무 리 괴롭고 아파도 잘못된 건 잘못된 바를 알아야 됩니다.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팔자라 그래버리거든요.

잘못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잘못의 이유에 대해서 냉철한 판단 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악순환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어디까지 왔는지를 생각해야 합니 다. 다시 말하면 시점을 이해해야 됩니다. 과거는 현재로, 현재는 미 래로 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느 시 점에 있느냐는 겁니다. 잘 아시는 대로 그래서 일을 마감해야 될 사람 이 시작하겠다고 그러면 그것을 주 책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이가 많 이 들면은 이제는 하던 일만 하고 하던 일도 좀 줄여가면서 일을 해야 되는데 이제 와서 뭘 한다, 뭘 한다 그거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의 생각 입니다. 내가 이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이 뭔가?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카이로스, 이 프레젠트 타임은, 이 시간은 내게 뭘 말하고 있는가? 무 엇을 요구하는가?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 오늘 성경말 씀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 시기를 알라! 카이로스입니다. 크 로노스가 아닙니다 카이로스! 주어 진 시간, 이 시점에 의미를 바로 알 아라. 오늘이 몇 시입니까? 오늘 이 며칠입니까? 이거 모르면 안되 거든요. 저 브라질에 가니까 우리 선교사님이 수고하는 그 지역은 말 입니다 적도가 지나가는 지역 아니 에요. 그래서 여름, 겨울이 없어요. 없다 보니까 사람들이 춘하추동이 없어서 해 가는 걸 모른답니다.

 

나 이를 모른답니다. 실제로 자기 마 누라 나이도 모른답니다. 얼마쯤 됐을 거라고 그런데요. 얼마쯤, About. 그렇게 대답을 해요. 나이 를 물어봐야 대답이 없어요. 얼마 쯤 됐을 거라고. 그게 편하겠습디 다. 까짓 거. 대충 알고 사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 다. 이 시점. 내가 처한 시점에 대 해서 확실해야 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밤이 깊었다는 거죠. 지금 이 시점 이 깊은 밤으로 치닫고 있단 말입니 다. 밤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그 러면 내가 할 일이 뭐냐는 거 죠. 이 밤이 점점 깊어지면 낮이 가까이 왔다는 걸 의미하죠. 밤은 아침을 예고하고 있는 거예요.

 

낮은 저녁 을 예고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 런고로 밤이 깊었다 하는 이 현실 속에서 밤에서 밤을 생각해선 안되 고 밤에 침륜되고 밤에 젖어 들어서 밤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죠. 왜 냐하면 이 밤은 지나가니까요. 점 점 깊어지고 아침으로 향하고 있으 니까.

 

그 시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 다 그 말이죠. 경제, 정치, 문화, 도 덕, 그 모든 면에서 어두워졌습니다. 캄캄해집니다. 어두워졌는데 이 어 두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겁 니다. 경험하고야 깨닫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경험하기 전 에 알기 위해서 우리가 공부라는 걸 하지 않습니까?

 

공부라는 게 뭡니 까? 다른 사람이 미리 경험한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어서 전수해주어서 내가 경험하기 전에 아는 거죠. 자 시집가기 전에 시집살이를 알고 결 혼하기 전에 결혼을 알고 죽기 전에 죽음을 알고 그것이 바로 지혜가 아 닙니까. 왜 꼭 죽어야만 죽음을 알 겠습니까. 죽을 때 가서야 죽음을 알겠습니까, 미리 알아야죠.

 

그런고 로 밤이 깊었다, 할 때에 우리의 의 식도 밤에 묶여서는 안 된다는 거 죠. 캄캄한 밤에 살고 있어도 우리 의 생각만은 벌써 저 앞에 가 있어 야 되요. 저 아침에 가 있어야 한 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아침이 오 고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하는 겁니 다. 밤은 깊었다! 이 사실은 아침 이 다가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죠.

 

여러분,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완전히 밖에 서 하늘을 쳐다보며 밤을 지내본 일 이 있습니까? 우리 남자들은 군대 에 나가니까 말이죠. 저는 그 군대 나가서 보초 설 때 꼬박 서서 하늘 을 쳐다보며 밤을 지새우는 그런 일 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밤을 밖에 서 세워 보면 말입니다 특별한 게 있어요. 초저녁에는 빛이 없어도 좀 훤해요.

 

그러다가 점점, 점점 어 두워집니다. 그래서 밤 세시쯤 되 면요 깜깜해지면서 전혀 별빛 하나 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두 워졌다가 저 동쪽에서 새벽 별이 반 짝하게 떠오르고 훤해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동녘 쪽이 훤해지는 것.

얼마나 반갑고 신비로운지 알 수가 없어요.

 

밤이 깊었다, 이것은 아침 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의식해 요. 그래서 깊은 밤에서 아직 밤이에요. 점점 깊어만 가고 있어요. 이 깊어 만 가는 이 밤에서 우리는 저 아침 을 생각해야 한다 그 말이에요. 벌 써 우리의 생각과 느낌도 거기에 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오늘의 삶에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현실에 살면서 현실만 생각해선 안되죠.

 

젊었다고 젊음만 생각해선 안되죠. 우리는 다음 스 테이지, 다음 단계를 계속 생각하고 의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의식은 벌써 저 아침에 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유명한 역사가인 찰스 베어드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역 사가인데 어떤 분이 그에게 질문했 습니다.

 

"당신은 평생 역사를 연구 하면서 역사 연구를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간단하게 네 가지를 말해주었습니 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 이나 국가를 심판하실 때, 혹은 멸 망시키려고 할 때는 권세욕에 날뛰 게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요. 개인이나 국가나 간에 교만 하면 망해요. 교만해지기 시작하면

"아하! 끝났구나"

 

그렇게 볼 수 있 다 말입니다. 역사 속에서 깨달은 거예요. 교만하면 망하는 거예요.

그걸 꼭 잊지 말아야돼요.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기 때문이에요. 둘째 는 하나님의 맷돌이라고 하는 것, 심판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아주 천 천히 돌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돌지 않는 것도 같고 심판이 없는 것도 같은데 아니요.

 

악과 선, 불의와 의 를 아주 고르게 세밀하게 골라주시 고 심판하신다. 예외 없이. 절대 숨길 수가 없고 하나님의 공의가 세 밀하게 세밀하게 역사 속에 나타나 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는 벌이 꽃 속에 들어가서 꿀을 빨 아내는데 마치 강도질하는 거와 같 죠. 이 꽃, 저 꽃 다니면서 들어가 서 꿀을 빨아내는 것 허가도 받지 않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꿀을 도적 질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묘한 진 리가 됩니다. 이렇게 벌이 이 꽃, 저 꽃 옮겨다니면서 꽃의 술을 옮겨 놓는단 말입니다. 결국은 도적질하 는 것 같으나 벌은 꽃을 위해서 심 부름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는 악도 있고 도적질도 있고 강도도 있다 말이에요. 포탈하는 일도 있 고 많은 침략도 있는 것 같아도 결 국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더 귀한 일, 더 큰 일들이 아름답게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을 본다.

 

여러분, 전쟁 과 재난 엄청난 사건이지만 이를 통 해서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한 일들 을 이루셨어요. 그것을 역사에서 보았노라. 또 하나는 날이 점점 어 두워지면 별빛도 보이지 않고 아주 어두워지고 말 것 같지만은 아니요, 저 앞에 소망의 별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노라. 다 망하는 것 같은데 망 하지 않아요.

 

소망의 별이 나타나 는 것을 역사에서 보았노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심 판을 봅니다. 동시에 구원의 날이 가까워 왔습니다. 전에 보다 더 가 까웠다. 구원의 날이. 궁극적으로 는 구원을 보는 것이죠. 구원을 의 식하는 것이죠. 이것을 복음적 역 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심판 뒤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심판과 함께 구 원의 아침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경륜, 하나 님의 섭리, 오묘한 일들이 이루어지 고 있다 말입니다. 마태복음 24장 에 보면 24장, 25장 계속해서 예수 님께서 말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 다. 끔직한 이야기는 거기에 다 기 록되어 있습니다.

 

지진과 전쟁과 재난과 형제간에 미워하고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 고 하는 엄청난 혼란과 무질서와 고 통 이런 것들을 예수님께서 예고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 기서 두 가지 진리를 말씀합니 다.

"이런 어려운 세대가 오겠다. 점점 더 어두워지겠다. 그러나 이를 통 하여 복음이 전파되고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사의 식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 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마 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안 정이 없다고, 우리에게 평안히 없다 고 왜 이렇게 늘 세상은 흔들리고 있느냐 하지만은 아니요, 이 흔들리 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구 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나는 가 끔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북한에 교인이 얼마나 있습니까?"

 

"교회가 몇 개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 습니다.

"그 어려운 핍박 속에 교 인이 있을까요?"

그렇게 묻습니다 만은 저는 그럴 때마다 대답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습 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믿느냐고, 저는 때마다 다시 설명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1950년 중국 공산당이 교회를 다 문닫아 버렸어요. 중국 에 있는 모든 교회를 다 문닫아 버 리고 창고로 사용했습니다.

 

자 그 런데 82년에 이제쯤은 교회가 다 없 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 만만 하게 하도 세계에서 말들을 하니까 교회 문을 열어 보았더니 놀랍게도 6000만명의 교인이 있습니다. 지금 은 1억 2000만이라고 합니다. 저도 중국 지금 방문해 보면은 놀랍습니 다. 이 세상에 중국처럼 복음의 문 이 활짝 열린 곳이 없습니다.

 

예배 당은 마음대로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좌우간 마당에서, 이 땡볕에 마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300명 이 상이 모여 가지고요 나는 중국말로 하니까 무슨 말하는 지는 모르지만 목사님도 아닌 어떤 분이 올라가서 설교를 하는데요 좌우간 두시간을 합니다 두시간. 그래도 한 사람의 동요도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요, 얼마나 간절한 지. 이게 중국입니다.

 

공산주의 40 년 동안 무얼 한 거 같습니까? 하 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 거예 요. 평안할 때, 마음대로 복음 전할 때, 교회가 마음대로 모일 때, 그런 때에 300만 밖에 없었어요 교인이. 핍박과 환난과 고통, 많은 고난 속 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루 신 거예요. 이것이 복음적 역사의 식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은 우 리에게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낮 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

 

자 이런 밝은 아침이 오고있기 때문에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 밤이에요 지금은, 지금은 밤인데 이제 낮 이 올 거니까 아침이 다가오니까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 어두운 가 운데 있지 말아라 하는 거죠. 여자 분들 화장이라는 거 있지요. 밤 화 장이 있고 낮 화장이 있다고 그러데 요.

 

그 밤 화장이라는 건 좀 더 야 하게 해서 뭐 이렇게 하고 뭐 눈도 시커멓게 아이새도 하고 그리고 뭐 작은 눈도 크게 보이게 하고 뭐 어 떻게 깊지 않은 눈도 깊게 만들고 뭐 그렇게 재주를 부리는가 봐 요. 한데 단 알아야 합니다. 이거는 밤 에만 통하는 거예요. 불그스레한 촛불을 켜놓고 마주 앉아야 그게 그 거짓말이 통하는 거지 이 밤 화장을 가지고 대낮에 햇빛에 나가보세요.

 

정신나간 여자라고 그래요. 안 그 렇습니까? 이걸 우리가 알아야 되 요. 낮에 할 일이 있고 밤에 할 일 이 있어요. 밤에 할 일을 우리가 그대로 가지고 그 모습으로 낮을 맞 을 수는 없어요. 아침을 맞을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런고로 지금은 밤이요. 그러나 앞이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에 아침이 오고있으니까 우리는 낮에와 같이 밤에,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지금 빛이 보이질 않 습니다. 그러나 빛을 보듯이 밝은 햇빛 앞에 선 것처럼 그렇게 행하라 그 말입니다. 미국이 낳은 유명한 세계적인 목사 님 조나단 에드워드라고 있습니다.

 

그는 다섯 가지를 결심하고 한평생 지켜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첫 째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전력을 다 해서 주님의 뜻을 이룰 것이다. 둘째는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거나 욕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다.

 

셋째는 앙갚음을 하거나 혹 분하다 고 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에서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넷째는 걱정거리나 부끄러움으로 남을 일은 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으로 남을 일은 하지 않는다, 그걸 잊지 마세 요.

 

젊었을 때 되는대로 살아놓고 나이 많아서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고개를 들 수 없 는 사람들, 저는 그래서 결혼 주례 를 할 때마다 젊은 사람들한테 이야 기합니다. 오늘은 신랑, 신부다.

 

내일은 아버지, 어머니다. 조금 있 으면 할아버지 할머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을 때 되돌아보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다오. 간혹 보 면은요 그 잠깐에 순간 잘못하고 또 잠깐 참지 못하고 그래서 저 먼 훗 날에 후회하고 뉘우치고 이러지 말 았어야 하는데……. 참 괴로운 거 아닙니까?

 

부끄러움으로 남을 일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시간을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시간으로 보낸 다. 절대로 부정적이거나 절대로 소극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이렇 게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역사 는 윤회가 아닙니다.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그러하듯이 계속 앞으로만 갑니다. 그러나 우 리는 이 어두움 속에서 빛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 미래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세계를 바 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 고 마치 옷을 벗듯이 어두움의 일, 어두움에 관계된 거 다 벗어버립시 다.

 

그리고 빛에 갑옷을 입자. 환 한 밝은 빛,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할 때 아 침이 와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 다. 밝은 빛이 내게 다가와도 그는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구원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웠습니 다. 구원을 바라보며 새로운 역사의식을 가지고 다시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 니다.

 

 

 

◀ 지금은 각성이 필요한 때다 /롬13:11-14/ 옥한흠 목사

2014-11-11 15:44:16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정신이 번쩍 드는 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매년 한번씩 겪는 연말의 충격이 아닌가 합니다.

한 장 남은 달력을 쳐다보면서 또는 이제 하루 남은 한 해를 생각하면서 '벌써 세월이 이렇게 지나갔구나! 내 나이가 벌써 몇 살이지? 정말 너무 빠르다.' 하는 독백을 마음 속에 주고 받으며 충격을 받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합니다.

 

시인 이해인이 쓴 시구 가운데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12월만 남아 있는 한 장의 달력에서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시간의 소리들은 쓸쓸하면서도 그립고 애틋한 여운을 남깁니다.' 이 말에 연말이 되면 누구나 공감을 할 수 있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말을 맞아 우리는 다시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호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는 시점에서 내가 그 동안 잘 살았는지, 영적으론 건강한지, 혹 하나님 앞에 부끄럽진 않은지, 취해야 될 것과 버려야 될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1절 말씀을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선 여기에 직접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본문 자체가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영적으로 말하면 한밤중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온통 자기 자신, 돈, 쾌락에만 쏠린 한밤중의 상태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많이 쌓느냐, 어떻게 하면 많이 즐기느냐.'가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영적으로 한밤중에 사는 사람들이 범하는 죄와 그들이 추구하는 나쁜 것들을 6가지나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방탕입니다. 방탕은 글자 그대로 밤거리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추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이 어떤 모습인지 잘 압니다. 바로 술 취하는 것입니다. 이런 술 취함은 오늘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치유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병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가 술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주를 수입하는 국가'라는 악명 높은 별명을 얻은 지도 이미 오래 전입니다. 술 취하는 것을 이해하거나 동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술을 끊지 못하고 점점 취해 만 갑니다.

 

그 다음은 음란입니다. 음란은 금지된 침상에 오르는 악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10대라고 거룩합니까? 10대, 30대, 50대 구별이 없습니다. 얼마나 더럽고 악한 짓을 공공연히 하는지 모릅니다. 배웠든 안 배웠든 상관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음란에 눈이 충혈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호색이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는 사람들의 파렴치한 행동을 가리킵니다. 요즘 TV에서 신물 나게 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호색입니다.

 

이런 죄악들이 공공연히 저질러지고 있는 세상을 일컬어 하나님께서는 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죄악의 밤은 깊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을수록 여명의 빛이 뒤따라 옵니다. 이것은 영적인 진리에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까이 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구원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요즘 신문 보도 기사를 보면 경찰들이 주로 새벽 3시에 음주운전 단속을 나간다고 합니다. 그 때쯤 술 취한 사람들이 귀가하려고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왜 새벽 3시 이후에 난장판이 벌어집니까?

새벽이 가까이 오기 때문입니다.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옵니다. 우리에게 이런 어두운 밤을 보내는 아픔이 있지만, 그 반면에 구원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이 구원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확실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시점에서 구원을 말할 때는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고 중생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확신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예,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현재 시점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받았지만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최종적인 구원을 향해 가고 있는 노상에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또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미래의 시점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 있습니다. 이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리고 재림과 함께 우리에게 나타날 엄청난 영화를 가리킵니다.

 

그분이 재림하실 때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몸으로 다시 갈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신령한 몸으로 바뀝니다.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사는 축복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구원은 예수님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동시에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하나님 나라로 새 몸을 입고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엄청나고도 황홀한 영화가 지금 우리 앞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이렇게 어둡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어두워도 결국 이 어두움이 우리의 구원을 빨리 단축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정욕의 잠을 자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믿습니다. 방탕하고, 술 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고, 시기하고, 쟁투하면서 정신 없이 밤거리를 헤매는 인생을 사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의 수신자는 술 먹고 비틀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닌 예수 잘 믿는다고 소문난 로마 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곧 교회를 다니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깊은 정욕의 잠에 빠진 자는 없을지라도, 이 어두운 밤의 영향을 받아 모호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주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옷을 입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정욕의 옷을 입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는지, 정욕의 옷을 입었는지, 깊은 잠을 자는 사람인지, 조는 사람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운 이중생활을 할 수 있으므로 바울이 이 말씀을 성도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정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아."라며 나와 관계없는 말씀으로 보지 말고, 혹시 나도 세상의 영향을 받아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정욕의 잠을 자고 있진 않은지 한번 돌아봐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옷이 없어서 주일날 이상한 차림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가령 양복 저고리에 한복 바지를 받쳐 입고 나오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그런 사람을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봤습니다. 양복 바지에 한복 저고리를 입고 나오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한복 바지에 양복 저고리를 입고 나오는 사람은 가끔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어정쩡하면 안됩니다.

 

한복이면 한복이고, 양복이면 양복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으면 그리스도 사람답게, 정욕으로 옷을 입었으면 아예 세상 사람답게 생활해야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습으로 신앙생활하면 안 됨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똑같은 경고를 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여기에서 '너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 믿는 우리 모두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세를 놓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두운 밤이 짙어가는 시간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 뜻밖에 임할 수 있으므로 "술 취하지 말라. 방탕하지 말라. 염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재미있게 사는데 마음이 자꾸 끌려갑니까? 돈을 쌓는데 신경을 곤두세웁니까? 그렇다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는 드릴지 몰라도 잘못하면 잠을 자거나 졸 수 있습니다. 정욕의 옷을 입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자신을 돌아봅시다. 만에 하나라도 나에게 이런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스스로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만 사랑합니까?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헌신하려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자신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직접적인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로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간접적인 메시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간접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본문의 원래 뜻은 아니지만 본문을 읽으면서 연상되는 여러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 말씀을 마음에 묵상하면서 연달아 깨닫게 되는 진리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저는 간접적인 메시지라고 합니다.

 

지난 한해 동안 평범하게 반복하면서 보낸 365일을 돌아봅시다.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었는지 한번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는 사람처럼 한 해를 보냈는지, 혹은 깨어있는 사람처럼 한 해를 보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각성은 소망있는 미래를 꽃피우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세네 가지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즉 매일 매일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았는지 한 해를 돌아보자는 말입니다. 인생이란 생각보다 짧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이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욥기서 14장 1, 2절을 보면 얼마나 실감나게 이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이와 같이 인생을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짧다. 빠르다. 괴롭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생을 잠깐 살다 가면서 '세월아, 네 월아' 하며 적당히 살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스위스에 있는 한 유식한 노인이 컴퓨터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 80년을 분석해 봤다고 합니다. 그러자 80년 가운데 잠자는데 26년, 먹고 마시고 식사하는 데 6년, 사람을 기다리며 약속을 지키는 데 5년, 그리고 직장에서 일하는 데 21년을 보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소하게 들어가는 시간들을 계산하고 나자 실제로 '내 시간이다. 정말 가치 있고 보람되게 보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은 80년 가운데 2년이나 2일도 아닌 46시간 밖에 안 남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빠르고 짧은 인생이기에 우리가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서 관심사와 집중하는 일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논어라는 책을 성경처럼 읽진 않지만 그 책도 성인이 쓴 지혜의 글이기에 가끔 들어야 될 말씀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10대 중반부터는 '지학'(志學)이라 하여 학문에 뜻을 두고 살아야 된다고 합니다.

 

20대가 되면 '약관'(弱冠)이라고 하는데 어른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시기이므로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데 집중해야 된다고 합니다. 30대는 '이립'(而立)이라 하여 자기 전문영역에 기초를 열심히 닦아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는 꿈을 가져야 된다고 합니다.

 

40대는 '불혹'(不惑)이라 해서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 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됩니다. 이때는 자기 얼굴을 책임질 수가 있는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얼굴 값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50대는 '지천명'(知天命)이라 해서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로 전체를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고 모든 상황을 통합, 조정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지닌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합니다.

 

60대는 '이순'(耳順)이라고 하여 모든 면에서 원숙한 자리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이 때는 자기를 이을 후배를 양성하고 세우며,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데 전력을 쏟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지혜라고 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나이에 따라서, 인생의 계절에 따라서 자기가 성실하게 살아야 할 이유와 목표가 있는 법입니다. 적당히 넘기면서 보낼 수 있는 그런 인생이 아닙니다.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입니다. 따라서 낭비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잘못된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아 붓는 어리석은 나날을 지난 한해 동안 보내면서 살진 않았는지,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이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아니 지난 한해 동안 자신의 삶을 쓰레기통의 휴지처럼 아무렇게나 구겨 버리진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잘못을 고백하고, 다시는 이런 바보 같은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자다가 깨는 각성인 것입니다. 이런 각성이 없이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둘째로 얼마나 감사하며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감사할 것들을 무심코 넘길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감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는 일이 많습니다.

 

감사는 크고 화려한 무엇에만 해당되고, 작고 평범한 것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당연하거나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습관을 지니고 지난 한 해를 살았더라면 훨씬 더 건강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지난 주쯤 소망관 지하에 있는 사랑의교회 중보기도실에 가봤습니다. 그곳은 갈 때마다 은혜가 넘칩니다. 왜냐하면 중보기도하는 방마다 낮이고, 밤이고 기도하는 분들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침 제가 방문했을 때 2층에 빈 방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쇠를 얻어 그 방에 들어가 봤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는데, 중보기도에 대한 가이드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보기도 내용들이 환자를 위한 기도, 교회의 담임 목사와 교역자를 위한 기도, 그 밖에 특별기도, 긴급기도 등 기도해야 될 카드들이 항목마다 분류되어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환자를 위한 기도카드를 손에 들었는데 묵직했습니다. 곧 아픈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기도해도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기도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어느 자매가 내놓은 기도 제목입니다. "저는 변비가 너무 심해서 화장실에 들어가서 어떤 때는 두 시간 동안 씨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대로 안 되서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 기도제목을 읽으면서 뭔가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화장실에 들어가서 감사할 것이 한두 가지겠는가?' 이런 자매를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화장실에 앉아서도 불평하는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당연한 것 중 한 가지라도 감사하면 내 삶이 바뀔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합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나란히 나옵니다. 그 이유는 이 세 가지가 서로 맞물려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 하나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자의 마음 속에서 기쁨이 나오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됩니다. 감사하면 그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은혜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 줄 알게 되어,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같이 따라 다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았더라면 지난 한해 동안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살았을까요? 작고 하찮아 보이는 하나 하나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하나 하나에 감사의 리본을 다는 사람의 풍요로움을 누가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의 소박한 기쁨을 누가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행복을 누가 짓밟을 수 있겠습니까?

 

성탄을 앞두고 참 감동적인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이 보낸 선물입니다. 그분에겐 미안하지만, 제가 받은 감동이 있어서 익명으로 이렇게 인용을 합니다. 보통 목사에게 선물을 보낼 때면 정성을 쏟아, 어떤 때는 좀 비싼 것을 선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고 선물이 무수히 들어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끔 목사가 생각나서 보내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선물을 보냅니다.그런데 이 자매가 보낸 선물은 특이했습니다. 손수 정성을 다해 만든 쿠키를 종이 바구니에 담아 카드 하나를 끼워 보낸 것입니다.

 

그 쿠키 만드는 데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그 소박한 선물을 받아 들고는 전혀 새로운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건 뭔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카드를 열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목사님,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작은 정성을 드립니다. 저희 가정은 13평 짜리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지만, 늘 마음이 천국이랍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 글을 읽는 순간, '야, 이 자매는 정말 사소한 것을 놓고 감사할 줄 아는 자매이구나! 아무것도 아닌 것, 남이 불평할 수 있는 것들은 들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아는 자매구나! 그러니까 13평 아파트에도 감사하고,

 

그 감사가 넘쳐 기쁨이 충만하니까 천국을 이룬다고 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자 그 자매의 모습이 제 눈에 자꾸 떠올랐습니다. 물론 얼굴은 잘 모르지만 얼마나 그 자매가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감사하는 자의 마음에는 이와 같이 환경을 초월한 행복이 있습니다.

 

지난 한해 동안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봅시다. 기쁘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던 나날인데 감사가 부족해서 무심하거나 어둡게, 또는 불평불만을 가지고 보내진 않았습니까? 만일 그런 날들이 있었다면 다시 한번 각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이렇게 바보스러운 인생을 살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자만이 누리는 행복가운데 살지 못하고 환경의 노예가 되어 비참해지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바보 같은 인생 을 다시는 살지 않겠다고 각오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성실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그것은 의미를 잃어버린 텅 빈 인생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삶이어야만 의미 있고 보람된 알찬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야 짧은 인생을 길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만을 위해, 나만을 생각하면서 살면 그것은 텅 빈 인생입니다. 우리가 그런 인생을 살지는 않았는지 조용히 성령의 조명 아래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남을 위해 사는 삶을 살면, 나도 행복해지고 나를 보는 다른 사람도 행복해지는 법입니다.

 

미국 하버드 의대에서 보고서를 내면서 신조어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곧 '테레사 효과'라는 말입니다. 인도의 성녀, 테레사 수녀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버드 의대에서 테레사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 활동을 전부 연구하던 중 이 말이 생겼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테레사 수녀처럼 남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는 사람을 보면, 그리고 그런 사람을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까지도 착해지려는 마음이 몸에도 영향을 주어 신체 내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면역 물질인 IGA가 많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곧 테레사 수녀처럼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을 생각만해도 내가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기만 해도 내 마음이 착해지고 그것이 몸에 영향을 주어 면역체가 생겨남으로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테레사 효과입니다. 최근에 저도 이런 테레사 효과를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저런 사람이 있다니 인생 살 만하다. 정말 살맛이 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그런 생각을 하면 제 마음도 착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비록 그 사람만큼 살지는 못해도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우러나는 것입니다. 자연히 그것이 제 몸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테레사 효과라는 것입니다.

 

아마 다음 기사를 신문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 기사에 너무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 기사를 성경의 뒤쪽에 끼워 넣고 스티커로 붙여 놓았습니다. 성경을 펼 때마다 그 사람의 기사와 가족들이 활짝 웃고 찍은 사진이 나옵니다.

 

충남 공주 어느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이훈규 경장이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지위가 경장이니 박봉에 얼마나 어려운 생활을 하겠습니까? 그것도 20평 남짓한 작은 주택에 장인장모와 자기 부부와 다섯 살 난 쌍둥이, 그리고 갓 태어난 아들, 이렇게 일곱 식구가 산다고 합니다. 저도 그런 생활을 살아봤기 때문에 얼마나 여유가 없을지는 다 압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 순경이 어느 집을 찾았나 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이의 남매가 사는 집인데, 부모는 도망가버리고 없었습니다. 조사해 보았더니 호적도 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이었습니다. 부모도 없이 살면서 남의 집을 다니면서 훔쳐먹다가 이제 소문이 난 것입니다.

 

순경이 가서 보니 그 날 따라 찬물에 라면을 불려서 먹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지 가서 말도 한마디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아내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 아이들 너무나 불쌍한데,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서 키웁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아내가 펄쩍 뛰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자꾸 마음이 캥긴 나머지 남편이 출근한 다음 직접 그 아이들이 사는 집으로 가봤답니다. 가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오면서 내내 울었답니다. 그리고는 퇴근한 남편을 붙들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오자고 합의했습니다.

 

데리고 와서는 호적도 따로 만들고, 생활 보호 대상자로 지정받아 매달 받는 생활 보조금 26만원을 남매의 이름으로 통장에 저금을 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두 아이를 데리고 산 지가 6년이나 됐다고 합니다. 이제 그 아이들이 벌써 중학생이 됐습니다.

 

그 아이들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을 보면서 제 자신이 테레사 효과를 맛본 겁니다. '목사보다 낫다. 목사보다 열 배 낫다. 그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신나는 이야기이다. 정말 살맛 나는 이야기다.' 이렇게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잊지 않기 위해 그 기사를 성경 속에 끼워 놓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끔 교회 안에서 믿음은 좋아 보이는데 너무나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내 가정, 내 자식, 내가 편안하게 사는 것 밖에 모릅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만을 위한 기도로 그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3절의 말씀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남을 위해 살려고 하는 애틋한 마음을 가진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나 자신만을 생각하던 감옥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을 위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들이 헌금하는 것입니다. 드려진 헌금 가운데 상당 부분이 남을 위해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미 남을 위한 삶에 동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우리 마음을 나 중심에서 다른 사람 중심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 보십시오. 얼마만큼 남을 위해서, 그리고 남을 위하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며 알찬 삶을 살았습니까?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셔서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생활, 텅 빈 인생을 살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길 바랍니다. 이것이 자다가 깨는 자의 삶입니다. 새해를 앞두고 우리 모두 이와 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정욕의 잠을 자서는 안됩니다. 깨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말을 맞아 우리 삶을 한번 돌아봅시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고 다시 각성합시다.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습니까? 얼마나 감사하며 살았습니까?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습니까?

 

이 사실을 하나 하나를 점검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깨어나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삶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새롭게 각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연말을 맞아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자기를 돌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 어두운 밤과 같은 세상을 살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정욕의 옷을 입고 잠을 자진 않는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정욕의 옷을 입으면서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주여, 우리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고, 얼마나 감사하며 살았고,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는지 한해 동안 돌아보면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주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는 좋지 못한 삶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각오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소생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그리하여 우리 모두 자다가 깬 사람처럼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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