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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로마서 설교 모음

로마서 8장 설교 모음

by Jessi J 2022.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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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확신하노니 /8:31-39, 12:11/ 김형익 목사

2022-08-09 10:46:47

 

우리가 이 땅에 오셔서 게임체인저가 되셨던 주님을 따라 게임체인저들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천상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관점은 결국 믿음의 관점으로서,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나그네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며,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의 주제는 확신입니다.

 

1. 우리에게 필요한 것확신 (8:36,38; 44:22)

 

종교개혁자 칼빈의 말대로, 이 땅에서 100% 순도의 믿음은 없고 이 땅에 사는 신자들이 가지는 모든 믿음에는 의심이 섞여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더 순전하고 견고한 믿음, 확신에 이르기를 바라지 않아도 되는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더 순전하고 견고한 믿음이 필요하고 확신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831-39절은 확신의 찬송, 승리의 노래, 로마서의 에베레스트라고 불리는 본문입니다.

 

로마서의 일차 독자들인 1세기 중반의 로마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믿음으로 인한 환난과 박해를 직면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물론 로마제국의 정치적 박해가 시작되기 전이었으므로, 주로 유대인들과 주변인들에 의한 사회적 박해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려고 시편 44:22을 인용합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6).”

 

삶이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 처하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 보통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건 아닌가? 하나님께서 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을 하시지 않으시는건가?” 하는 생각들이 밀려옵니다. 환난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이나 공부가 버거워서 스트레스가 쌓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믿음의 최소한의 적용만으로 살아보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박사 과정에 있는 한 청년이 이런 말을 제게 써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일도 너무 많고, 이기적인 동료들도 있고,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말씀대로 살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그냥 제가 손해만 안 보게 선을 긋고 불합리한 건 까칠하게 쏘아붙이고 마음을 닫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요.” 솔직한 심정이지요.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형제는 여기서 글을 끝맺지 않았습니다.

 

물론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단하게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약속을 붙잡고 마음이라도 말씀이 명령하는 대로 하고 싶어요.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지금까지 인도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다면, 지금 고단한 몸으로 순종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했는데, 확실한 약속에 뿌리를 두고 싶었어요.” 이것이 신자인 우리의 삶의 현장이고 우리가 날마다 감당해야 하는 싸움입니다. 여기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확신입니다.

 

바울 사도는 38절에서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말하지만, 이 본문 전체가 확신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칼빈은 31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는 모든 시험에서 우리를 붙들어주는 중요하고 유일한 버팀목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잘 대해주지 않으시면 세상 모든 것이 우리에게 미소를 짓더라도 도무지 확신을 가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반면에 하나님이 호의를 보이시기만 하시면 그 어떤 슬픈 일이 찾아 들더라도 넉넉히 큰 위로를 받으며 불행이 제 아무리 휘몰아치더라도 넉넉히 막아 낼 수가 있다.”

 

세상 사람이 모두 나를 등진다고 해도, 전능하신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내편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무엇을 견디지 못하겠습니까? 포기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이 위대한 본문의 요지는, 그리스도 안에 보장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의 성도들과 오는 세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확신케 하려는 것이 본문의 의도입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을 감동하셔서 쓰게 하신 이 말씀이, 오늘 본래의 의도대로 우리 모두에게 그 일을 할 수 있기를 구합니다.

 

2. 확신의 객관적 근거복음 (2:20; 4:13)

 

우리 시대 기독교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신앙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경이라는 객관적 계시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가 믿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신가 하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주요 개념들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지 않을 때, 신앙은 개별화되고 주관적이 됩니다. 느끼는 것이 곧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토대요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는 말씀은(2:20) 교회가 말씀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에베소서 4:13)”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 위에 세워지는 것이지, 아무리 강력한 체험이라 해도 그 변화무쌍한 느낌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주관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기도와 말씀 가운데 잘 살고 있을 때에는 복음의 은혜를 누리지만, 때때로 그렇게 잘 살지 못하거나 넘어질 때에는 복음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관심을 가지지만,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복음은 내가 개인적으로, 주관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기 전에, 하나의 객관적 사건이고 사실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님께 믿는 모든 자들의 모든 죄를 전가하셨고 그 죄에 대하여 율법이 정한 심판을 주 예수님께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쏟으셔야 할 모든 진노와 율법의 저주와 형벌을 남김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께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 일은 일어난 사건이고 사실이며, 객관적 복음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가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 복음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복음을 느끼라고 말하거나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이나 이런 말로는 확신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의 객관성에서 출발합니다. 감정적 차원에서 의심의 문제를 다루는 대신, 확실한 복음의 객관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3. 복음의 개관적 사실 (8:31-34; 15:18-19; 3:5-6)

 

1세기 성도들이 살던 사회적 환경은 꽤나 적대적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주변 현실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한복음 15:1819).”

 

그래서 31절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에게 유효한 말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에 다윗이 고백한 말입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편 3:6).” 그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5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본문 31절이 정확히 같은 것을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대적하는 자들은 언제나 있겠지만,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이나 효력을 미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더 나아갑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여러분은 바울 사도의 논리를 이해하십니까? 이제 바울 사도가 하려는 모든 말은 바로 이 구절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지금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일입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변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모든 논리는 이 객관적 복음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끼실 것은 전혀 그리고 결코 없다(32)”는 것이 사도가 복음을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이제 33-34절에서 사도는 마귀와 세상이 하는 일, 즉 고발과 정죄의 문제를 다룹니다. 먼저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과 나만 아는 죄를 마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발합니다. 그때 우리의 양심이 반응하게 되면 우리는 유구무언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우리가 복음의 사실을 안다면 우리를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33)?”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복음의 객관적 사실을 덧붙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 이 복음은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이기 전에, 일어난 사실이고 현재에도 그리고 영원히 유효한 사실입니다. 성도의 확신의 근거는 언제나 복음의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마르틴 루터는 마귀가 자신에게 두려움을 안겨줄 때마다, 그래서 공포가 엄습할 때마다, “나는 주 예수께로 세례를 받았다!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마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한대로, 세례를 통해서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가 되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세례가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인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신자들은 의심의 시간에, 두려움이 몰려올 때에 이렇게 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32b)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3b)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b).” 이 복음의 사실이 성도의 확신의 흔들리지 않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4. 복음의 적용 (8:35-39)

 

이제 바울 사도는 그 복음을 적극적으로 적용합니다. 35-39절은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선언입니다. 1세기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것만 같은 위기를 삶에서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벌거벗김을 당한 상태, 위험, 칼 등은 모두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겪고 살아가는 다양한 상황들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이어서 앞서 언급한 시편을 인용하면서, 도살 당할 양처럼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의 삶을 표현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 던져질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헬렌 로즈비어(1925-2016)는 콩고에서 사역한 영국의 의료 선교사였습니다.

 

그녀는 1964년 콩고에서 내전이 벌어졌을 때 철수하지 않고 병원을 지키다가 반군들에게 붙잡혀 5개월 간 갖은 폭행과 성적 유린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고통 속에서 보냈던 5개월 동안, 그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습니다. 욥이 그랬듯이, 그녀도 그 5개월의 시간 동안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이런 환난의 상황은 우리의 확신을 흔들기에 충분합니다.

 

엘리자벳 엘리엇(1926-2015)은 현대의 순교자인 짐 엘리엇의 아내였습니다. 대학을 마친 후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에쿠아도르 선교사로 가게 됩니다. 남편 짐 엘리엇과 네 명의 젊은 남자 선교사들은 당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던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경비행기를 타고 출발을 했습니다.

 

결국 다섯 명의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선교사들은 19561월 초 창에 찔린 주검으로 수색대에게 발견됩니다. 선교사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남편과 함께 선교지에 온 젊은 여성들은 하루 아침에 남편을 잃어버린 여인들이 됩니다. 그때 그녀들은 모두 무너지는 자신들의 믿음을 붙들기 위한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을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호레이쇼 스패포드(Horatio Spafford) 씨입니다. 변호사와 사업가였던 호레이쇼 스패포드 씨는 하나님의 종 무디의 신실한 후원자였습니다. 1871년 시카고 대화재 때, 전재산을 거의 잃은 스패포드 씨는 2년 뒤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영국 여행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은 업무를 마치고 다음 배로 따라가기로 하고, 아내와 네 딸을 먼저 영국으로 가는 여객선에 태우게 됩니다.

 

그 여객선은 대서양에서 다른 배와 충돌하여 침몰하게 되는데, 여기서 스패포드 씨는 자신의 사랑하는 네 딸을 모두 잃게 됩니다. 욥을 생각하게 하는 고난입니다. 실의에 빠진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영국으로 가던 중, 침몰 해역을 지나던 스패포드씨는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함을 경험하기 시작한 스패포드 씨는 그 감동을 즉시 찬송시로 쓰게 됩니다. 바로 이 찬송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말할 수 없이 깊은 상실의 고난을 겪은 스패포드 씨로 하여금 이런 평안을 누리게 했고 이런 찬송시를 쓰게 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실의 아픔 속에서 어떻게 이런 찬송시를 쓸 수 있었을까요?

 

스패포드 씨의 이야기는 바울 사도가 말하는 환난, 곤고, 박해, 기근 등이 우리의 믿음과 확신을 끌어내리는데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지 않습니까? 헬렌 로즈비어나 엘리자벳 엘리엇 또한 고난과 의심 속에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너지는 믿음을 붙들고 싸우는 그녀들을 붙들어 주셨고 마침내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점에서 37절은 이들 모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5. 이김의 방식 (12;11; 5:1-12; 고전 4:3-4; 1:19)

 

그들은 간신히 이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 싸움이 치열했고 그들의 믿음은 거의 미끄러질 뻔 하였으나, 그들 모두는 넉넉히 이겼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의 성격을 정직하게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어떻게 이겼습니까? 갖은 폭행과 성적 유린을 당함으로써 이겼습니다.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함으로써 이겼습니다. 처참하게 순교의 죽임을 당한 남편들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겼습니다. 사랑하는 네 딸을 모두 바다에서 잃음으로써 넉넉히 이겼습니다. 요한계시록 12:11입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요한계시록 12:11).” 이 구절은 성도들의 이김의 방식 즉 성도들이 어떻게 싸워 이기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사탄을 이깁니다. 그러나 그 뒤에 있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생명을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사탄을 이겼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타협하거나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원수를 이겼습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성도의 승리의 성격이고 방식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특징으로 팔복을 말씀하셨지요(5:1-12).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의 이김의 방식과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무시를 당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힐지도 모릅니다. 온유한 자는 어떻습니까? 짓눌림을 당하고 짓밟힐 뿐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는 이 세상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바보로 여겨질 것이고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도 적당히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도 교회에서만 애통해하며, 온유해도 적당한 선에서 그리 하고, 적당한 선에서 혹은 최소한의 선에서 신앙의 원리들을 적용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얻으며,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경험하고,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르고,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는 방식이 여기 있습니다. 무시를 당하면 무시를 당하십시다. 짓누르면 짓눌림을 당하자고요. 이 세상이 우리를 바보로, 혹은 이상한 자로 여기면 기꺼이 그런 자로 여김을 받읍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성도는,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의 상황에서 넉넉히 이기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은 모든 사람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경쟁하여 이기고 성공을 이룸으로써,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동일한 게임을 하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다른 게임의 법칙 아래서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부러워할만한 소위 성공한 삶을 통해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다루어야만 하는, 작지만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가지는 사회적 외적 조건들로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조건들에 의해 자신을 평가하고 바라보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내가 다니는 대학의 이름으로, 내가 일하는 직장이나 내가 받는 연봉의 크기, 내가 가진 학위, 전문 영역에서의 성취 등으로 우리는 세상의 판단을 받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것이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내리는 판단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여러분이 어떤 성공과 성취를 사회적으로 이루었든지 간에, 그것은 여러분을 치장하고 있는 옷에 불과합니다. 그 옷이 여러분 자신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이 문제가 중요한지 아십니까? 이런 태도는 결국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정체성과 가치의 새로운 기준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다시 31-34절로, 특별히 32절로 돌아가게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신자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실만큼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위하시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그 아들의 피로써 증명하신 사람이며,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간구하는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좋은 소식인 이유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이런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력하거나 잘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나를 하나님은 그렇게 인정하시고 선언해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결과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납니까?

 

우리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합니다. 악성 댓글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누군가 뒤에서 욕을 했다고 하면 화가 치밀어 잠이 안 오고, 누가 뒤에서 나를 칭찬했다고 하면 기뻐서 잠이 안 옵니다. 남들의 말에 죽고 삽니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에 매여서 살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지도, 자유롭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신자는 이렇게 살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남들의 평판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언제나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자유를 줍니다. 신자는 더 이상 세간의 평판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18개월 동안 수고해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고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 사도의 사도성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대목이지만, 바울 사도는 이렇게 씁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린도전서 4:34).”

 

다른 사람들의 판단 받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하등의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자신은 이 문제에서 비록 잘못이 없고 옳지만, 자신에 대한 자기 판단도 그리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판단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하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으로 강합니다. 누가 이런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고슴도치를 껴안고 피를 흘릴지라도 고슴도치를 사랑할 수 있는 강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복음의 이 능력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울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이 알게 되기를 기도했던,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입니다(1:19). 신자는 자신의 외적 조건들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우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실패자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주눅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대학과 높은 성적, 꿈의 직장과 고액의 연봉, 멋진 결혼과 넓은 집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것들로 하나님의 사랑과 여러분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필연 넘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은 대학과 성적, 꿈의 직장과 고액의 연봉, 멋진 결혼과 넓은 집, 멋진 몸매, 보석 같은 자녀들, 이것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 가운데 여러분이 지킬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다 주어진 것이고 지나갑니다. 이것들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들입니다. 다 흔들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보장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입니다(12:28). 흔들리는 것들에 연연하고 그것들이 우리 삶을 좌우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이 바로 이것을 보도록 주께서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29세에 에쿠아도르에서 순교한 짐 엘리엇의 대학시절 일기에서 찾은 유명한 문장입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서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여기에 우리의 이김이 있습니다.

 

6. “내가 확신하노니” (8:38-39; 고후 5:4; 6:12)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이것은 날마다 복음 안에서 이기는 자의 승리 선언입니다.

 

여러분, 종일 죽임을 당하는 양 같은 처지에서 살아갈지라도,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임스 보이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울의 확신은 개인의 강력한 느낌이나 인생의 호된 처지가 나아진다거나 우리를 끊는 요인 가운데 무엇 하나라도 해결된다거나 사라질 것이라는 신념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확신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하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바울 사도는 인간이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살아가는 사망과 생명을 언급합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지만, 성경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된다고 말씀합니다(고후 5:4). 때로는 죽음 보다 비참한 삶도 있지만, 그것 조차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내지 못합니다.

 

또 바울은 천사들과 권세자들을 언급합니다. 이는 선한 천사들과 타락한 악한 천사들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언급한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여기서 말하는 권세자일 것입니다(6:12). 우리는 이런 영적 싸움에 내던져지지만, 어떤 존재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습니다. ‘현재 일과 장래 일은 시간적 측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형편과 상황, 장래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것들 모두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어서 공간적 측면에서 높음과 깊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궁궐이든 초막이든 혹은 사도 자신이 지금 갇혀 있는 좁디 좁은 감옥이든, 어느 곳에 있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더 이상 세부적 항목들을 열거하지 않고, 하나님이 만드신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선언합니다.

 

7. 교훈과 적용 (3:17-18; 4:11-13)

 

여러분은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흔들리는 세상을 살면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이만하면 잘 풀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합니까? 말씀과 기도 생활을 잘 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1세기의 성도들처럼 자신들의 일상이 잘 풀리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잘 풀릴 가능성도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철저하게 복음의 객관적 사실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내 인생에 환난과 곤고, 박해와 기근, 가난과 실패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증거가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변한 것입니까? 우리는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금 나에게 선을 행하고 계시는구나 라고 생각해야 옳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 사도가 본문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환난의 요소들은 우리의 확신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패해도 괜찮아! 그게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을 좌우하는 게 아니란다. 너는 성공해서 더 사랑받고 실패해서 덜 사랑받는게 아니란다. 나는 너를 위해서 내 아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렴. 그럼 내가 너를 위해 아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것도 예수 안에 나타난 나의 사랑에서 너를 끊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거야. 그리고 기억해라. 내가 너를 위해 예비한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을 향하여 불만을 토로하던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듣게 되자 멋진 고백을 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생존의 모든 조건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113).”

 

복음은 부와 빈, 모든 상황에서 그 상황에 매이지 않고 살아갈 자유를 줍니다. 복음은 이렇게 강하고 든든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아는 자들이 가지는 확신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신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다른 게임을 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부르심입니다. 흔들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가 이 복음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자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며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랍고 흥분되는 일입니까? 이 부름을 따라, 믿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의 복된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admin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8:1-9/ 김기석목사

2022-02-02 12:17:54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불화 속에 있는 인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요즘 많이 허탈하시지요?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부동산 개발 비리 사건을 보며 많은 이들이 공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들이 어떻게 막대한 수입을 얻는지를 바라보며 국민들은 그저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몇 십 만원이 없어 난감해 하고 있는 이들이 많은 터에 수십 억, 수백 억 원을 아주 손쉽게 주머니에 넣는 이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속속들이 썩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 미가와 아모스의 말이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악한 궁리나 하는 자들, 잠자리에 누워서도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망한다! 그들은 권력을 쥐었다고 해서, 날이 새자마자 음모대로 해치우고 마는 자들이다.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든다. 집 임자를 속여서 집을 빼앗고, 주인에게 딸린 사람들과 유산으로 받은 밭을 제 것으로 만든다.”(2:1-2)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2:6-7a)

 

성실하게 자기 일을 수행하면서 근근이 사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 악한 일을 보며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악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가려질 수 없습니다. 백일하에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습니다.

 

악한 행실에는 보응이 따른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자행되던 일들이 이제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어둠으로 드러냅니다. 마틴 루터 킹 Jr. 목사는 도덕적 우주의 현은 길지만 그것은 정의의 방향으로 구불어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악을 징계하고 선을 북돋는 창조적인 힘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힘을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대박이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습니다. ‘놀랍다는 뜻의 감탄사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지만, 뭔가 예기치 않은 횡재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대박을 꿈꾸는 이들은 소소한 현실에 만족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결핍에만 마음을 쏟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질투와 선망 사이에서 바장이든지, 누군가에 대한 원망 혹은 분노의 감정을 품고 삽니다. 대박을 꿈꾸는 이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헛소리처럼 들릴 겁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만나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되고 싶은 나현실의 나의 분열 속에서 살아갑니다. 마음으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유쾌한 사람이 되고, 통 크게 나누며 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삶은 점점 여유가 없어지고, 염려와 근심이 확고하게 우리 의식을 사로잡습니다. 연대의 기쁨을 나누어야 할 이웃들은 경쟁자처럼 여겨집니다. 이러한 자기 분열 속에 있는 사람은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지만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는다고 아프게 고백했던 바울의 말은 참 정직합니다. 그는 자기 속에서 또 다른 법, 죄의 법이 자기를 확고하게 사로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격의 일부가 되어 스스로 떨쳐버리기 어려운 그 죄성을 자각했기에 그는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7:24)라고 탄식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무능을 솔직하게 인정했기에 그는 은총의 문턱에 당도했던 것입니다.

 

은혜 아니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깨달음입니다(5:20). 우리는 죄를 떨쳐버릴 힘이 없지만 하나님의 숨이 우리 속에 머물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는 순간 상황은 달라집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이들은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죄란 유죄선고를 말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죄와 사망의 법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매력을 잃는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3:7)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도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값진 진주를 구하는 상인이 그것을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13:45-46)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경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일러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2:29)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내적인 기질을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확신할 때, 다른 삶이 시작됩니다. 악한 말과 행실은 벗어던지고 정욕에 이끌리는 삶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이런 변화를 적절하게 설명할 말이 마땅치 않습니다만 성령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던 우리가 하나님을 마주보고 살 수 있도록 해주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등 돌림에서 마주 봄으로의 변화,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등 돌림은 관계의 파탄을 상징합니다. 마주 봄은 사랑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어둠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빛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의의 종입니다. 이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이제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는 자입니다(딤전 1:13-14).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8:3a). 여기서 육신을 뜻하는 헬라어 ‘sarkos’는 단순한 살덩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성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 전체의 연약함을 일컫는 말입니다. 몸을 가진 존재는 언제든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각종 욕구와 아픔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적절하게 충족되지 않을 때 비애감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그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에 대한 적대감도 품게 됩니다. 옛날 고행자들이 몸을 스스로 괴롭게 했던 것은 그 몸의 욕구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의 욕구를 부정하거나 다스릴 수 있다고 하여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고행을 특권으로 삼아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정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육신을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육신의 욕구를 영의 지배하에 두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고 계셨지만 죄 혹은 욕망의 포로로 살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우리 또한 죄의 법에서 벗어나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화된 삶이야말로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우리 마음의 주인은 누구?

지금 우리 마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신입니다. 바울은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생각이라 번역된 헬라어 프로네마(phronema)는 마음의 지향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마음에도 길이 있습니다. 마치 물이 늘 흐르던 길로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의 길은 늘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길입니다.

 

성경은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이라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달아난 것은 이 사람을 도와주다가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좀 달랐습니다.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이 생각의 방향이 행동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생명을 뜻하는 조에(zoe)’는 모든 생명 속에 깃든 활력을 뜻하는 말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의 충만함을 일컫는 말로 사용됩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생기 충만함을 제공합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일러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17:8)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우리가 고갈되지 않도록 해줍니다. 그가 맺는 또 다른 열매는 평화(eirene)입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불화와 갈등을 낳지만, 성령에 속한 생각은 평화를 낳게 마련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나로 인해 주변에 생명과 평화의 기운이 스며들고 있다면, 그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식 근거

이제 마지막 구절에 이르렀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8:9b). 눈치채셨겠지만 바울은 여기서 성령이라는 말 대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과 혼재되어 사용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속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훨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접속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칩니다. 또한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세상의 아픔과 곤고함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귀신 들린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을 마치 당신의 아픔인양 받아들이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과 연약함을 당신에게로 가져와 대신 앓으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53:4a). 사람들이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그리스도의 수난과 연결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영 혹은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 교회를 다녔다고 하여 기독교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 하나 얻지 못하면 우리는 가련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이 점점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주변화된 사람들의 살 권리가 점점 박탈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앓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세상의 고통을 치유하는 치유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잊혀진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고, 자기 권리를 빼앗긴 이들의 입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세계 성찬 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이 부어지기를 빕니다. 우리를 통해 생명과 평화가 이 땅에 유입되기를 빕니다. 아멘.

 

 

 

 

피 속에 담긴 사랑 /8:31-39/ 유기성목사

2021-08-31 10:40:07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긴 이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찬양하며 맞이했던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이처럼 환영을 받으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만 이 주간에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십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 대답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때, 다섯 번 피 흘린 기록이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피 흘리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실 때 피 흘리셨습니다.

 

채찍에 맞아 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대못에 박히실 때 피 흘리셨습니다.

옆구리가 창에 찔려 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피 흘려주셨기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마귀와 싸워 이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 생명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귀한 은혜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피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돌에 새긴 정도의 약속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각 나라에 신이 사람을 사랑했다는 전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이 사람을 구원하려고 피 흘려 죽은 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 속에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8:35은 너무나 강력하고 은혜도 됩니다.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부담스럽습니다.

 

:35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부분에서는 주춤하게 됩니다. 실제로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굶주림, 헐벗음, 위협이나 칼에 죽음을 당하게 될 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믿기란 너무나 힘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서운 핍박과 환란 중에도 넉넉히 이긴다고 했습니다.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사랑 때문입니다.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때문에 하나님께는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수석을 모으는 것이 취미인 어느 성도가 어느 개천가에서 좀 더 좋은 돌을 주우려고 자갈밭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가 발밑에 있는 볼품없고 조그마한 돌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돌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그 돌 속에도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고 모양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사방에 있는 모든 돌들이 다 귀하고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고는 그는 수석을 모으는 취미를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어느 한 사람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핏값 주고 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계속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흔듭니다.

우리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때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라는 것입니다.

13:1에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찬송 254[내 주의 보혈은] 5절에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영접한 자에게는 그 마음에 피의 증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의 은혜에 대한 믿음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그렇게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겐 너무나 막연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벽을 보고 사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사랑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뜨겁게 경험하게 될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는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눈이 뜨였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저를 너무나 사랑하고 계셨음에도 제가 주님을 바라보지 않았기에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만약 집에 갓난아이가 있다면, 집에 들어가서 그 아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 아이의 사랑스런 눈을 바라보고, 아이의 옹알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아무리 일에 지쳐 몸이 피곤해도, 천사가 자기와 함께 있다고 느껴져서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할 것입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날 것입니다. 표정이 환하게 바뀔 것입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마음이 기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여러분을 얼마나 생각하고 얼마나 사랑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 기준으로 보면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이 괴로운 일이 있어서 잠을 자지 못하고 힘들어해도 그 아기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그냥 잠만 쿨쿨 잘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 몸이 아파서 신음할 때도 그 아기는 무심히 저 혼자만 즐겁게 떠들며 놀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여러분이 죽더라도 그 아기는 누가 먹이고 입혀만 준다면 한동안 여러분을 잊고 지낼 것입니다. 그 아기는 여러분에 경제적인 도움을 조금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끊임없이 돈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억울한 마음이 듭니까?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자라 여러분에게 불평하고 심지어 대든다면 배신감을 느끼고 관계를 끊어버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 아이를 사랑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정확히 이해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죽고 천국에 가면 여러분의 일생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영화처럼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지도 못할 태어날 때, 어린 시절 된 일을 다 보게 될 것입니다. 부모님과 친척, 배우자, 자녀들과 친구들, 보는 내내 가물거렸던 기억이 조금씩 살아납니다.

 

어린 시절, 학생 시절, 결혼과 자녀 출생, 쉽지 않았던 가정생활, 직장 생활, 교회 생활, 그리고 노후생활, 죽음, 이렇게 영화가 끝납니다.

그 때, ,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구나!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함께 하셨는지를 다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어야 할 것은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 어떤 시험도 이길 힘이 생깁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찬양 중에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라는 가사의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의 앞길을 막는 비바람 중에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보혈에 담긴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성찬을 행하여 주님을 기억하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냥 ''라고 말하지 않고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찬을 받으라는 것은 피 흘려주신 사랑 가운데 살고 있음을 확인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전라남도 바닷가 어촌마을에 있는 교회 사모님이 영성수련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얼굴이 너무나 어두웠습니다. 그냥 전도사님이 좋아서 결혼을 했는데 목회자의 아내로 사는 일이 너무나 어렵더랍니다. 어촌 교회에 부임해 갔는데 바닷바람은 너무나 드세고, 사택은 천정이 무너질 것 같은데,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더 힘든 것이 주일에 몇 안 되는 교인들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교인들이 교역자를 불신하는 형편이라 이사를 할 때 누구 하나 웃는 얼굴로 맞아 주지도 않았습니다. 사모님이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답니다. 부임한 지 한 달이 되었지만 예쁜 딸에게 염분기가 많은 우물물로 세수시킬 수 없어 약수 로 세수시키며, 이삿짐도 다 풀지 않은 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계시기는 한 것인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야 할지 모르겠고 답답한 마음으로 수련회 일정을 따라가는데 성찬식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신을 위하여 찢기신 주님의 몸입니다하는 말씀에 아멘하면서 빵을 떼어 삼키려고 하는데 목이 메어서 빵이 넘어가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이것은 당신을 위하여 흘리신 주님의 피입니다.’ 하는 말씀에 아멘도 못하고 포도주 잔을 받았는데, 이 사모님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나를 붙잡으려고 애쓰지 마라. 이미 내가 너를 붙잡았다!󰡓󰡒사랑하는 딸아! 나를 붙잡으려고 애쓰지 마라. 이미 내가 너를 붙잡았다!󰡓난생 처음 들어본 하나님의 이 음성에 사모님이 그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통곡이 쏟아졌습니다. 울고 또 울었습니다.

 

󰡒이미 내가 너를 붙잡았다!󰡓 이 음성에 그간 눌려 있었던 심령의 모든 묶임과 답답함과 괴로움과 서러움이 한 순간에 풀어지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자존심마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예수님 한분이면 충분한 믿음으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집회 마지막 시간 간증 때,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이제 돌아가면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을 붙잡고, 우리 교회 교인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겠습니다.” 고백하며 우셨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들리지 않습니까? 󰡒이미 내가 너를 붙잡았다!󰡓

그 사모님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지금 십자가에서 그걸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떠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이 확신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이기지 못할 시험과 고난이 없습니다. 순종 못할 일이 없고 사랑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번 주간 십자가 부흥회를 통하여 피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그 사랑 (아버지 사랑 내가 노래해)

 

 

 

8:28/ 예수님을 믿는 자도 고난을 당하는가? /조용기목사

2017-08-02 06:59:57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을 안 당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고난은 다가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다른 점은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며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다 이겨서 승리의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 고난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며 모든 환경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1. 예수님도 당하신 고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모두 당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풍랑이 일어 배가 전복되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님도 그 배를 타고 그 강을 건너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풍랑이 심히 일어났는데도 배 안에서 주무셨습니다.

 

히브리서 415절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고난을 바라보고, 그 의미를 알고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35절로 38절에 보면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풍랑 때문에 절망적으로 좌절한 제자들이 주님을 깨웠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고 즉시 잠잠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4:39)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풍랑을 당하셨지만,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마귀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원수들을 다스려주신다고만 생각했지, 바람과 바다를 다스린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바람을 다스리시고 바다도 다스리십니다. 또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주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고난을 극복하는 십자가의 은혜

 

 

고난을 극복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고난을 당하지만, 골고다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고 믿으면 어려운 환경을 믿음으로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2:18)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고난을 피할 수 만은 없습니다. 그 고난을 올라타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수레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라는 수레가 우리를 태우고 고난에서 축복으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서 우리가 큰 기쁨으로 살 때에도 고난은 다가옵니다.

주님 왜 고난을 주십니까? 내가 나쁜 일도 안 했는데. 이 고난을 멀리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면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이 고난이 네가 꿈꾸고 있는 영광에 도달하는 시발점이다. 고난길이 너의 운명이 출발하여 성공으로 가는 길이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 앞에서 곡식단들이 일어나서 자기보고 절한다는 것을 말하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다고 말해서 가족들이 꿈꾸는 자라고 놀리며 굉장히 멀리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 꿈이 황금수레를 타고 도달했으면 좋겠단 말입니다. 요셉은 그 꿈을 꾸고 난 다음부터 고난이 다가왔습니다.

 

형들에게 붙잡혀서 마른 우물에 던져져서 죽게 된 고난의 출발로 행상들이 물건 팔러 애굽으로 가는데 종으로 팔려 종으로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서 고난 중에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쳐 그것이 문제가 되어 더 큰 고난인 시위대뜰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내 팔자가 왜 이러냐? 하나님의 꿈을 꾸고 약속을 받은 사람이 영광에서 영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서 고난으로 가니 웬일이냐?’고 한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고난이 알고 보면 영광으로 가는 수레인 것입니다.

 

 

우리가 큰 꿈을 가지고 있는데 편안하기만 하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큰 꿈을 가지고 있는데 고난이 다가오면 아 출발이구나이렇게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고난 지나면 또 다른 고난이 다가오고, 다른 고난이 지나면 또 다른 고난이 다가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종으로 팔린 그가 시위대뜰 감옥에 종신형을 받고 들어가 있습니다

 

. 거기에 들어가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졌는데 현재 처지는 버림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갔기 때문에 떡장관, 술장관을 만나서 꿈을 해석해 주고, 그것이 바로의 귀에 들려서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게 된 것입니다. 그 고난이 급속도로 변해서 애굽의 국무총리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영광에 도달한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와서 누군지도 모르고 절하고, 도움을 구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난은 우리를 좋은 일이 일어나는 곳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큰 영광은 큰 고난을 가져오고, 적은 영광은 적은 고난을 당하게 하는데, 고난을 당할 때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하지 마십시오. 요셉은 고난당했을 때, 불평을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고난이 다른 고난으로, 또 다른 고난으로 바통을 넘겨주면 그 고난은 수레가 되어 하나님이 예비한 영광으로 들어가게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당한 모습을 바라보고 마음속에 믿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게 되고, 허물을 사함 받고,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병이 고침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또한 우리의 저주를 대신해서 나무에 달렸으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음부를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 겁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부활의 생명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오중복음만 자세히 살펴보아도 거기에 속한 병이나 고통은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통하여 죄와 허물을 극복하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그 공로를 우리가 믿고 받아들여서 병을 정복해버리고, 가난과 저주를 예수님 십자가에 매달린 은혜를 받아서 이기고, 죽을 때에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낙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예수님이 모두 다 정복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예수님은 우리 귀에 대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나를 바라보고 고통을 바라보지 마라. 나를 바라보면 네게 은혜와 축복을 주고, 넉넉히 이기게 해 주겠다

 

 

그러므로 고난을 극복하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인 것입니다. 죄와 허물, , 저주, 죽음을 예수님께서 다 다스려 놓았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면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13:12)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5:13)

 

 

긍정적인 생각, 확고한 꿈, 흔들리지 않는 믿음, 창조적인 말씀의 선언을 성령께서 받으시고 우리를 위해 다스려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2절로 13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우리를 큰 축복으로 이끄는 수레이므로 고난이 올 때 너무 피하려고 애쓰지 말고 감사를 해야 합니다. 이 고통스러운 시련이 꿈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출발하는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언약을 이루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3. 예수님을 모신 성도의 정체성

 

 

성경은 우리를 질그릇으로 표현한 때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질그릇에 담긴 황금 보화라고 합니다. 우리 몸이 질그릇이면 예수님은 보배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고후 4:78)

 

우리를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고 사방으로 원수들이 욱여싸지만 우리들만 있는 줄 알았던 그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와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 답답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과 시작이요, 나중과 끝이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늘 답답하지 않습니다. 환한 곳으로 곧장 인도해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고후 4:9)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아도 마음에 버린 바 되지 아니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9) 완전히 넘어뜨려도 우리는 안 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11)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사는 동안에 예수로 말미암아 죽을 고생을 많이 하면, 그 다음에는 예수를 통해서 부활의 생명의 넘치는 은혜를 체험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을 내가 받아들이고 의지하면 예수의 부활도 내게 다가와서 나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35절과 37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을 죽인 세상에 마귀의 도구가 어디든지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죽인 것을 우리가 당하게 되면, 예수님의 살아있는 생명의 역사가 그 뒤를 따라서 우리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이 되면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어 있어요. 놀라운 체험을 그리스도 안에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풍성한 열매를 가지려면 그 조건을 구비해야 되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사과나무가 무조건 사과를 열매 맺지 않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적당한 햇빛도 있어야 하고, 적당한 비도 내려야 하고, 온도도 적당해야 합니다. 또 병충해도 입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면 나무에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되고, 확고한 꿈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야 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선언도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같이 일하시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생각이 있어야 성령께서 그 속에 들어와 있을 수 있어요.

 

꿈꾸는 사람이어야 성령이 와서 같이 꿈을 꾸어주지요. 믿음을 가져야,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믿으면 성령이 와서 같이 역사해 주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선언해주면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말을 이루어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면은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는 일하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리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의 말을 믿지 않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그 부모와 제자들만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가복음 538절로 41절에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굳게 믿고 나아갈 때, 성령께서 그 믿음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지 않은 곳에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은 우리가 장차 받게 될 영광과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후서 416절로 18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환난이 다가와도 우리가 환난을 바라보고 낙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환난은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 안내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67절과 시편11971절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잠언 173절에는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야훼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용하셔서 우리들을 교육시키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를 깨뜨려서 순종과 믿음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기도를 하게 되고, 주님 옆에 무릎을 꿇는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고난도 필요 없습니다만, 꿈이 있는 사람은 고난이 다가오면 육상경기를 할 때 준비호로록불면 뛰는 것처럼, 고난이 그 호루라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합니다. 그 고난 하나하나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라는 말씀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꿈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4차원의 영성이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입술의 고백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예수 믿고 구원 받게 해 주셨어도, 이 인생이 만들어지는 법칙을 따라서 우리가 살아야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찾아와서 여러분에게 고통을 가져오면 곧장 그 뒤에 보혜사 성령이 따라와서 그 고통을 우리가 타고 가는 수레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두고서 마귀와 성령께서는 늘 씨름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붙잡아서 이제는 죽이겠다고 생각하면, 성령이 그 뒤를 따라와서 성공의 깃발이 휘날리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세상에 환난, 고통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어디에나 환난과 고통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곳에 계신 것입니다. 소원을 갖고 꿈을 꾸고 있는 사람에게 성령이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령이 같이 와 계시고, 입술로 고백하는 데 성령이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항상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귀신이 와서 역사하지만, 그 뒤를 성령께서 따라와서 만사가 합동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과 곤고나 시련 당했을 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서 성공을 갖다 주는 것을 알고, 믿고, 감사드리게 되시기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가 인생의 바다에서 배를 타고 건너면서 고난이라는 폭풍을 만날 때, 함께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주님이 우리의 고난을 영광으로 이끄는 수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꿈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시고 영광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죄를 덮으시고 사용하시는 은혜 /8:1-/ 김병삼목사

2017-05-13 08:55:05

 

은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가? 아니면 사랑해야 할 인격인가?

문제는 우리에게서 은혜를 거두어 갑니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게 합니다.”

죄의 결과는 결코 덮을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가장 뼈아픈 죄까지도 구속하시고, 그 일을 선하게 쓰신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계속되는 은혜 이야기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 이야기의 가장 명쾌한 핵심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정죄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죄가 결코 가볍게 여겨진다는 말도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그 죄의 결박이 풀어지는 것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핵심이라는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92년 빌 클린턴이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의 일입니다. 클린턴은 타고난 정책 벌레라고 할 만큼 모든 현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거운동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모든 질문에 대하여 자세히 대답했지만, 명쾌한 이미지를 심지 못했기 때문이죠.

 

당시 그의 정책 고문이었던 제임스 카빌은 유심히 선거 운동을 지켜보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유권자들에게 확실하게 어필한 핵심을 강조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어느 날 카빌은 모든 선거운동원을 모아놓고 토론을 한 후에 화이트보드에 커다랗게 이런 글을 썼습니다.

 

경제라니까, 이 멍청아!”

그런데 놀랍게도 이 문장이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가장 성공적인 정책 구호가 됐다고 합니다.

포항 기쁨의 교회 박진석 목사의 설교문에 보면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외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정죄함이 없다니까, 이 멍청아!”

이것이 우리 신앙의 근거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이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죠.

로마서 520절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죄를 가볍게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닐까요?

 

이어령 교수가 쓴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라는 책에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속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사랑과 혁명을 대립의 개념이 아닌 융합 개념으로 보자는 메시지를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보십시오. 왼손이 손바닥이 위로 향한 채 펼쳐져 있고, 오른손은 손등이 보이는데, 쥐려고 하는 손입니다.

 

가룟 유다를 향해서, 악을 향해 내민 징벌의 손이지요. 펼쳐진 왼손은 죄인까지도 용서하도 받아들이는 손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이 두 손은 팔을 따라 올라가면 예수님의 얼굴에서 만납니다.

사랑과 징벌이 두 손으로, 좌우로 나뉘어 있지만, 예수님의 얼굴에 이르러서는 통합됩니다. 통합된 얼굴 위로 후광처럼 맑은 하늘이 보입니다. 팔을 따라 내려갈수록 어두워지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밝아져요.

 

이렇게 서로 분리되고 모순되었던 것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이고 피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늘로 향하는 사랑의 힘입니다. 혁명이냐 사랑이냐의 이항대립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의 공존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는 늘 죄와 함께 있습니다. 죄 없이 은혜를 이야기할 수 없고, 은혜가 없는 죄는 절망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나누려는 리 스트로벨의 [은혜 은혜 하나님의 은혜]에 등장하는 브래드 미첼 목사의 이야기는 또 다른 깊은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죄를 덮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은혜로 덮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합니다. 참 아픈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소망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이지요.

 

브래드 미첼 목사는 어느 날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교회의 강단에서 이렇게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저는 간음으로 혼인 서약을 어겼습니다. 하나님과 가족과 여러분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제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용서를 구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으시지만, 저는 이렇게 실망시켰습니다.”

 

그렇게 그는 강단을 내려와 뒷문으로 나가서 차를 몰고 아내 하이디에게 갔습니다.

그는 다음 예배 시간에 똑같은 고백을 되풀이할 때까지 둘은 내내 함께 울었습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를 걷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부부간의 부정(不貞)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교회에서 부정으로 인해 강단을 떠나야 했던 종교지도자들의 이야기를 기사를 통해 많이 접해 왔습니다.

 

아니, 누군가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는 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사자와 배우자들의 고통과 몸부림, 상실감과 굴욕에 대하여 말해주는 이야기들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목회자의 이야기입니다.

목회자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수없이 탕자의 이야기를 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성만찬을 하며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죄와 수치에 파묻히며 은혜가 한없이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또한, 결혼 서약을 어기고 공공연하게 자신에게 수치를 안겨준 남편을, 그것도 목회자인 상대방을 이해하고 은혜를 베풀 수 있을까요?

 

너무나 많은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했던 사람이기에 더욱 위선자로 느껴지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목회자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기에 더욱 힘들지 않았을까요?

남의 이야기에는 자신이 있는데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라면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목회자만의 이야기일까요? 목회자이기 때문에 더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모두 이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자유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 가운데 용서한다는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리 스토로벨 목사는 브래드와 하이디 부부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습니다.

그가 아는 한 이 둘은 더없이 올곧은 사람이었고, 믿음이 반석처럼 견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열정적으로 전하는 사람이었고, 늘 기도하며 다른 사람을 격려했던 사람, 진정성과 일관성 있는 정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정과 불명예라는 것이 얼마나 생소하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인지.

 

부부의 만남 이야기

브래드와 하이디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회 예배를 마치고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2년 아래 여동생의 친구였던 하이디를 브래드는 짓궂게 놀리고 괴롭히며 자랐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두 사람은 브래드가 열여섯 살 되던 해 다시 만나게 됩니다.

 

열네 살이 된 하이디의 귀엽고 앳된 얼굴과 금발 머리가 찰랑거리는 모습에 브래드는 마음이 요동치고 말았습니다. 그해 주말 16살과 14살의 두 아이는 서로를 미래의 남편과 아내로 마음속에 두었습니다. 서로에게 이상형이었고, 서로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둘이 다른 사람과 데이트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들이 얼마나 잘 맞는 짝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습니다.

 

둘은 똑같은 성경공부 교재로 공부하면서 각각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하는지를 편지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똑같은 기독교 대학에 진학하기로 하고, 졸업한 후에 결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브래드는 변호사가 되거나 돈을 잘 버는 직업에 종사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둘의 계획은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한 가지 예견하지 못했던 것은 브래드가 휘튼대학 중창단원으로 유럽을 여행하던 중에 성령의 감화를 받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성공적인 사역

목회학 과정을 마친 브래드는 인턴 과정을 지나 미네소타 주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여섯 가정밖에 되지 않던 교인들은 브래드의 흡입력 있는 설교와 친근한 스타일로 몇 년 새 400명 이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임기 중 교회는 더욱 성장했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는 게 참 좋았습니다. 그분의 임재를 즐거워하며 믿음 안에서 자라가는 그들을 보노라면 감격스러워요.”

 

그러던 그에게 더욱 좋은 조건의 사역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꽤 크고 혁신적인 교회 중 한 곳에서 그를 남성 스포츠와 기도 사역의 책임자로 부른 것이죠. 그곳에서도 사역을 잘 감당했고, 하이디와의 결혼 생활을 통해 자녀도 셋이나 두었습니다.

 

비교적 행복한 결혼생활이었지만, 매달 두세 번씩 주말마다 강연을 다니는 것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가중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에 브래드는 미시간 주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고, 성장이 멈춘 지역교회에서 교인이 6년 만에 1,800명에서 4,000명으로 늘어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례 받는 사람이 열 배로 급증했고,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도 헌금이 두 배로 많아졌습니다.

 

소그룹에 속한 사람의 수는 세 배로 뛰었습니다. 회중들의 칭찬이 이어졌고, 싹싹하고 격의 없는 그의 스타일 덕분에 영적으로 방황하던 많은 사람이 처음으로 과감히 교회를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지도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있는 설교로 자신들을 채워달라는 요구가 계속되었습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는 호감을 주는 스타일이었지만, 지도자들은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브래드의 교만은 지도자들과의 신뢰관계를 회복하는 것보다는 상황에서 도피하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하였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새로운 교회로 임지를 옮기는 것이었죠. 그곳은 현대식이었고 격식을 따지지 않으며 스포츠 사역이 활성화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피해 해결하려던 방법은 건강한 사고에서 나온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문제의 시작

도피하려는 마음에서 시작한 건강하지 못한 방법은 건강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당시 미시간 주의 주택시장은 암울했고,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이사하기 전 집을 팔아야 했는데 시간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딸은 전학하지 않고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세웠습니다. 남편은 동부로 가고 아내는 미시간에 남기로 한 것입니다. 대신 그가 매달 한 주씩 비행기로 집에 다녀가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1년 정도는 무엇이든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이 지나면서 부부 관계에 좌절과 긴장이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매달 한 번씩 남편이 올 때를 제외하고 둘의 소통은 전화와 이메일과 인터넷 화상 채팅이 전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서로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와 목회에서의 교만은 많은 불만족을 만들어냈습니다. 더 좋은 대우와 권리의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유혹의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습니다. 유혹의 시작은 미시간에서 날아온 이메일이었습니다.

 

브래드에게 한 유부녀가 신앙상담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역교회 목사에게 도움을 구하라고 권고했으나, 이 사람은 브래드의 도움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요구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목사가 영적으로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은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신앙 서적을 권해 주면서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전화 통화가 시작되었고 급기야 밀회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외도가 아닌 간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아내 하이디는 전혀 남편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믿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브래드는 죄에 빠져들면서도 자기기만과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교회가 해를 입을 테니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 주리라 생각한 것이죠.

 

사람들이 참 많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이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아직 죄가 차지 않아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죄를 회개할 수도 있고 아니면 죄가 가득 차서 그분의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브래드는 자신의 죄를 의식하고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관계를 끝내면 여자가 어떤 반응으로 행동에 나설지 몰라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발각될 일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왔고, 설교할 때면 자신이 위선자라는 생각에 공허하게 느껴지고, 사역에는 능력도 성령의 기름부음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이디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이사한 뒤, 남편의 설교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 왜 저러지?’

 

그의 설교에는 에너지도 없고 열정도 없었습니다. 몸은 구부정해졌고. 지금 생각하면 죄의 무게가 그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죠. 당시 상황을 브래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이 어찌나 무겁던지요. 설교하러 올라가기 전에 매번 하나님께 몽땅 자백했습니다. 끝없는 자백의 반복이었지요. 그래 놓고는 다시 위선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차단하다 보니 제 마음이 점차 무뎌지더군요.

 

중간에 관계를 끝내려고 적당한 시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이사 오면 그때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죄가 가득 차서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크리스천 상담사에게 전화했고,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이디에게 말해야 합니다. 말할 때는 짐을 꾸려 미리 차 안에 두십시오. 필시 아내가 떠나라고 할 테니까요.’

이제 브래드는 아내도 잃고 가정도 잃고 교회도 잃고 사역도 잃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죠.

 

죄의 결과

어느 날 밤 브래드는 아내 하이디에게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하이디는 충격으로 구역질하고 나흘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이 사람을 죽이고 나도 죽어야지. 그는 일자리를 잃을 거야. 모든 것이 날아가겠지. 그럼 생활비는 어떻게 대지? 아이들은 어떡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이제 어느 것 하나인들 그를 믿을 수 있을까? 오 하나님, 제게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이전 어느 때보다도 지금 필요합니다.”

 

적어도 자신들이 보는 관점에서 둘의 미래는 끝나 있었습니다.

브래드는 담임하던 교회의 지도자를 만났고, 사임했습니다. 주일에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오랫동안 준비하고 사역했던 강단을 떠나야 했습니다. 브래드는 아들과 두 딸에게도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이디와 자신의 부모에게도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을 자랑스러워했던 부모님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브래드의 가족은 살던 집을 나와야 했고, 어느 노부부의 집 위층에 세를 들었습니다. 의료보험도 은퇴 적금도 잃었고, 수입의 90%를 잃었습니다. 하이디는 직장에서 약간의 돈을 벌었지만, 목회만 하던 브래드가 할 일은 없었습니다.

 

결국, 지방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방송시간을 파는 일로 취직을 했지만, 너무 적은 수입이었고, 이 기간에 브래드는 자신의 혈장(血漿)110번이나 팔아야 했습니다.

 

그 둘에게 있어서 최악의 순간이었고, 상담사는 둘이 성병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절을 지키고 결혼했던 하이디에게 HIV 검사까지 받아야 하는 순간은 정말 당혹스럽고 인생의 불공평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브래드의 죄가 몰고 온, 끔찍하고 굴욕적인 결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은혜로해결의 과정

하지만 그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둘의 관계는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브래드의 간음이 하이디에게 깊은 고통과 참담한 후유증을 안겨 주었지만 온전한 용서를 위한 작은 여정의 발걸음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16포커스뉴스에 실렸던 목탄 화가 허윤희 씨의 이야기입니다. 이화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2004년 독일 유학 후 한국에 온 허 작가는 도구 없이 직접 손으로 목탄 작업을 합니다. 그녀가 아주 인상적인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에게 목탄은 실패가 허용되는 도구. 실수를 해도 문질러 지우고 고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화처럼 실패의 흔적을 완벽하게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허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실수의 흔적은 남는다. 하지만 그것이 모이면 오히려 작품이 깊어진다실수를 통해 길을 찾아 나가는 우리의 인생과 같다고 강조했다.

 

여기서부터 죄를 덮으시는 흥미진진한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가 브래드의 삶에서 펼쳐집니다. 비록 죄로 인해 사역과 가정이 깨어진 것 같았던 상황에서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일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그것은 하이디의 의지적 결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단은 예수님과의 견고하고 생생한 관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이디의 신앙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용서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요구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상대의 잘못이 사소할 때는 그것이 받아들이기 쉬웠지만, 지금 그녀의 상황은 전에 없던 시험에 부닥치게 된 것이죠.

 

계속 주님과 동행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마음을 따를 것인가?”

하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결론은 그리스도인들이 용서하고 싶은 일과 용서하기 싫은 일을 자기 마음대로 골라서는 안 된다는 거였어요. 성경은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말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빠져나갈 구멍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스도가 제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저도 브래드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한이 저를 삼킬 텐데, 원한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독이거든요. 우리가 계속 부부로 남게 될지는 저도 몰랐지만,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만은 알았습니다.”

 

용서는 순종의 문제입니다.

하이디에게 있어서 용서와 은혜는 결단의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은혜로 인한 용서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이디의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전혀 쉽지 않았어요. 브래드를 용서한다는 건 제게 정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모두 고통스러운 일이었어요. 하지만 예수님이 저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에는 비할 바가 아니죠. 그리스도가 겪으신 일에 비추어 볼 때 어찌 제가 브래드에게 용서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어떤 면에서 용서는 용서받는 브래드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하이디에게도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브래드의 감정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브래드가 자신의 잘못을 다 털어놓는다고 안도감이 들거나 평안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찾아온 것은 창피함이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자 수치스러웠습니다.

 

처음에는 아내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감추고 차차 하려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고, 히이디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이디는 예수님처럼 딱 한 번에 용서해 주었습니다.

 

물론 하이디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용서의 말을 건넸고 당시로써는 최대한 진심이었지만, 브래드를 향한 용서의 감정으로 느껴지는 데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이디의 말입니다.

 

저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어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우리는 결코 감정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는 없잖아요. 때로는 감정이 주님 앞에서 옳은 길을 가지 못하게 우리를 막기도 합니다. 제 마음속에 있는 용서와 제 감정이 서로 일치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어요. 감정이 훨씬 오래 걸리더군요. 정말 긴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용서와는 별개의 문제로 둘이 계속 부부로 남을 것이냐의 이슈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브래드는 화해를 원했고 결혼 생활의 지속 여부는 하이디의 결단에 달려 있었습니다.

둘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고, 여전히 자녀의 아버지였고,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되리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브래드가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부부로 살기로 하는 데는 두 달쯤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이디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브래드의 후회와 회개를 본 거죠. 그는 이 모든 일로 정말 마음이 깨져 있었어요. 덕분에 제 신뢰가 점차 되살아나더군요. 하나님이 이혼을 싫어하신다는 것도 알았고요. 갈라서는 건 제게 최후의 수단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죠. ‘하나님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제 마음과 생각을 빚어 주세요. 주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주세요. 주님처럼 사랑하도록 도와주세요.’”

 

이러한 용서의 과정을 통해 하이디는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의 문제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 은혜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습니다. 힘들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지금의 자신이 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정의 순간부터 하이디는 하나님의 손질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결단하지 않았으면 경험해보지 못할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가정을 돌보고 계심을 보여주셨고, 치유와 화해를 알려주셨습니다.

 

교훈

브래드가 단순히 하이디에게 용서받았다는 것에서 은혜는 그치지 않습니다.

하이디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남편이 정절을 지키지 않고 배신했음에도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가르침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브래드 역시 용서를 경험하고 수치와 자책에서 해방감을 느끼기까지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을 지나야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모든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정도만큼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브래드에게 있어서도 변명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었고, 누군가의 인정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교회 사역에는 스트레스가 많았고, 부부 관계 역시 원망하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적으로 신실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이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를 느끼려면 자신의 잘못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책임져야 했습니다. 교회 회중 앞에서도, 아내에게도, 그리고 자식에게도 변명하지 않고 시인했습니다. 무엇보다 수치심이 그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수치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게 아님을 자꾸 되새깁니다. 제가 과거에 한 일은 죄였지만 지금의 제 자아는 그것으로 규정되지 않고 제 미래도 그것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81절 말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슬퍼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상실감이 들 수는 있지만, 수치는 아닙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마음 아파할 수 있지만, 그것도 수치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것 역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후회스럽습니다. 하지만 수치는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사단이 가져다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분이 직접 수치를 당하시므로 우리가 수치의 형벌에 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모든 죄와 수치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고 은혜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제 중요한 것은 수치에서 벗어나 사실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징계의 유익을 알아야 합니다.

브래드에게도 죄의 결과로 인한 모든 책임과 징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의 결과 때문에 당하는 징계가 유익을 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 안에 거룩함과 의와 평강과 고침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려고 자기 죄의 결과를 외면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은혜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입니다.

 

죄를 직시하고, 죄의 결과를 직면할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사람들은 수치심으로 인해 사람들을 멀리하고, 모든 관계를 단절하려는 유혹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이디와 브래드는 그 과정을 견뎌냈습니다. 사람들과 만났고, 교회를 나갔으며, 크리스천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람들은 이 둘을 격려해 주었고, 지지해 주었고, 기도해 주었고, 지혜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단에서는 이 둘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받아주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회복시켜서 쓰신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브래드의 잘못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픔을 통해 더 좋은 부부가 될 것입니다. 이들의 아픔을 통해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들 부부는 부부 관계 바로 세우기”(Build Your Marriage)라는 이름의 사역 기관을 통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누군가 같은 아픔을 경험하고 찾아온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부부의 실패했던 삶의 이야기, 인생의 오점을 남긴 실수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쓰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동에 가면 카펫이 유명합니다. 손으로 짠 것도 있고, 기계로 짠 것도 있습니다. 기계로 짠 카펫은 흠도 실수도 없이 매끈합니다. 그렇지만 손으로 짠 것이 훨씬 값이 나갑니다. 이유는 실수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한 땀 한 땀 노력의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수로 망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실수가 만들어낸 흔적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박정근 목사님이 쓴 [복음의 자유를 누려라]에 보면 자신이 경험했던 은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한때 곁길로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가면 모든 것이 거룩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강의를 듣는데 정말 재미가 없어서, 수업을 빼먹고 다방을 밥 먹듯이 갔습니다. 그때 성적을 보면 낙제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다방의 담배 연기가 몸에 밴 채로 매일 저녁 형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찾아갔습니다. 형님이 그것을 왜 몰랐겠습니까? 제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도록 한마디도 하지 않던 형님이 하루는 저를 불러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어떻다고 생각하니?”

 

멋있지요.”

쭉 뻗은 전나무는?”

그것도 멋있지요.”

맞다. 둘 다 멋있지만, 하나님은 곧은 나무를 사용하신단다.”

제가 그런 방탕한 생활에서 돌이킬 수 있었던 이유는 형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열일곱 살이나 많은 아버지 같은 형님입니다.

 

형님은 끝까지 저를 기다려주셨습니다. 다방에 하루 종일 처박혀 있고, 몸에서 온통 담배 냄새가 나는 저에게 용돈을 주고 뭐 부족한 것이 없느냐고 물으면서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은혜로 대할 때, 그 사람이 쓴 무서운 가면을 하나씩 벗겨낼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가면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와 배우자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과감하게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도록 사랑으로 용납하고 포용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껴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은혜가 누군가의 신앙적 결단과 혹은 참 힘겨운 용서를 통해 흘러넘친다는 것입니다.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누군가의 힘겨운 아픔을 통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죄가 너무 쉽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발생하는 목회자들의 성적 일탈, 그리고 성도들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용서만 받는 우리가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용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죄를 덮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2012년 기윤실에서 목회자 윤리에 대한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전제는 성적위기와 일탈에서 회복된 사역자 혹은 성경의 다윗과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이죠. 한 신학자의 발표문이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이진 아웃을 말하고 싶다. 이것은 한 번 탈선한 사람에게 반드시 또 다른 기회가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한 번의 사건만으로도 그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두려워하고 절망해야 한다. 여기에서 한 번이란 피해자 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사건 하나를 말한다. 두 사람 이상을 성추행이나 성폭행한 사람은 환자이며 범죄자다.

 

미국의 국립 공원에서 한 번 사람을 해친 곰은 반드시 사람을 다시 찾는다. 그래서 그런 곰을 제거하는 것이 공원 관리원들의 중요한 임무다. 그런 짐승에게는 두 번의 기회도 주어질 수 없다. 하지만 두 번의 기회를 남용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짓밟은 자다.

 

그는 희생자들을 찾아가는 목회자만의 비밀 통로를 갖고 있다. 그를 치유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는 목회 사역을 떠나야 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로운 처분뿐이다.

 

깊은 절망에서 깊은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렇게 힘겹게 경험한 용서라야 죄를 덮으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진지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깊다는 것은 아주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주 심오한 자유의 선포입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 /8:29-39/ 유기성 목사

2016-08-26 15:26:25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매우 강력합니다. :35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에 여러분 중 대부분은 동의하실 것입니다. 은혜도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부담스럽습니다.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이 부분에서는 주춤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단 말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만한 것들입니다.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굶주림, 헐벗음, 위협, 칼에 죽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으란 말입니까?

 

질문, 잘못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정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사랑인지 분명히 확인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먼저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향한 사랑은 분명히 끊을 수 없는 사랑인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3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30에서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30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하여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과정이 네 단계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미 정하신"입니다. 둘째로, "부르시고"입니다. 세째로, "의롭게 하시고"입니다. 네째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미 정하셨고, 부르셨고, 의롭게 하셨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 "영화롭게 하셨습니다"입니다.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라고 미래형으로 말하지 않고 과거형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입니까? 우리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습니까? 뭔가 잘못 쓰여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복음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단지 죄사함만을 말하는 복음이라고 이해하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복음임을 깨달으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우리 안에 사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면 영화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것이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성찬식을 통하여 계속 확인해 주십니다. 주님이 영으로 우리 안에 오심으로 우리와 한 몸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지을 때마다 이 확신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때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라는 것입니다. 13:1에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1 그렇다면, 이런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십자가를 보면 너무나 감격스러워 할 말을 잃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31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34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국회의원이 인사를 하는데, 인사하는 태도가 사람마다 다름을 느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대하실 때 어떻겠습니까? 좋아서 어쩔 줄 모르실 것입니다. 믿어지십니까? 우리가 그것을 분명히 믿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 4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3:1 “너는 내 것이라”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다

 

그들은 어떤 백성입니까? 착하고 믿음 좋은 백성입니까? 아닙니다. :8에 보면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사랑하십니까?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7)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 안에 영으로 임하신 우리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 기뻐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하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짝사랑이 되고 맙니다. 짝사랑은 사랑하는 자도 괴롭고 사랑받는 자도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도 불행하게 사는 이들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려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살펴본 것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사랑임이 분명한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일까요?

 

:35 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인지는 환란과 곤고와 박해와 굶주림과 헐벗음과 위협과 컬로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 처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얄팍한 사랑은 핍박의 불로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 성도의 사랑은 핍박의 불로도 끌 수 없습니다. 마귀는 지금까지 신실한 성도들을 주님으로부터 떼어 놓기 위해 무진 애써 왔습니다.

 

:36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37에서 사도 바울은 이기고도 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힘입었다!” 너무나 놀랍고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교리나 신념이나 지식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힘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이기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끈을 놓치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성도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확신이었고 핍박 시대 초대교회 성도들의 확신이었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형편이 어렵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없다는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임하신 주님을 알고 그 주님을 사랑하면 고생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였던 아도니람 저드슨은 미얀마로 가기로 결심하고 아내 앤 저드슨에게 청혼하면서 장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따님이 저랑 결혼하면 아버님은 바로 내년 봄에 따님과 헤어져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보지 못하실 겁니다. 따님은 선교지에서 고난을 겪게 될 겁니다. 바다의 위험과 인도 납부의 치명적인 기후, 극심 한 가난, 모욕과 압제, 심지어 비참한 죽음에까지 노출될 겁니다.

 

그래도 저희의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늘 집을 떠나 따님과 아버님을 위해, 죽어 가는 유한한 영혼들을 위해, 시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돌아가신 분을 위해 허락해 주십시오. 곧 의의 면류관 을 쓴 따님을 영광의 세계에서 볼 소망으로 허락해 주십시오.”

 

앤의 아버지는 딸에게 결정을 맡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앤은 고민을 하다가 친구 리디아 킴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이 막지만 않으신다면 이 이교도의 땅에서 보낼 날이 기대 가 돼. 리디아, 이곳에서의 모든 안락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친척과 친구들을 향한 사랑도 접고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부르시는 곳으로 가기로 결십했어.”

 

저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그런 사랑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 순간에 제게 임하는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눈이 뜨였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임하신 것을 알게 되었고, 주님과 꾸준하면서 지속되는 교제를 통하여 사랑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 속상합니다.

 

필립 켈러 목사님이 쓰신 목자가 본 시편 23이라는 책에 보면, 필립 켈러 목사님이 언젠가 파키스탄의 사막에 체류하던 날, 갑자기 쏟아지는 억수 같은 비와 번개를 피하여 흙벽으로 된 조그만 움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둠침침한 움막 안에는 짐승의 분뇨가 타고 있어 매운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게다가 좁은 공간에 몇 종류의 가축들이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축 분뇨에서 나오는 냄새도 매우 고약했습니다. 한쪽 구석에서는 주인의 딸로 짐작되는 약해 보이는 십대 소녀가 아기를 안고 웅크린 채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움막 안에서 벽에 기대고 앉았는데,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그와 같은 음울한 속에서 지독한 냄새와 염소와 다른 짐승의 분뇨와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농부의 환경 속에서 성령님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분명한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사람들에게 찾아온 환경이다.󰡓천둥소리만큼이나 강력하게 그의 영혼을 두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이 엄청난 사랑에 눈이 뜨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라도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인생이 끝나 천국으로 갔을 때, 거대한 극장에 앉게 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예상치도 않게 극장에 앉게 되어 어리둥절할 때, 서서히 영화가 시작됩니다. 과연 무슨 영화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화면을 보는 데 대부분의 배역이 눈에 익습니다.

 

부모님과 배우자. 자녀들과 친구들,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물거렸던 기억이 조금씩 살아납니다. 어린 시절, 학생 시절, 결혼과 자녀 출생, 쉽지 않았던 가정생활, 직장 생활, 교회 생활, 그리고 노후생활, 그리고 죽음, 이렇게 영화가 끝납니다.

 

그 때, 고난과 헌신, 순종의 순간이 나오면 얼마나 감격스럽고 자랑스럽고 다행이겠습니까? 1:29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하신 말씀이 얼마나 분명히 깨달아지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결코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 안에 거한다면 이 세상에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고난이 올지라도 심지어 죽임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니,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고 깨끗하게 사는 이들이 이만큼만 이라도 존재한다면 우리의 가정, 직장, 주변 이웃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믿으니, 원수도 사랑하는 사람이 이 만큼이라도 이 사회에서 살아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믿으니 두려움과 염려가 없이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이 이만큼이라도 이 사회에서 살아간다면 아마 TV 방송국에서 날마다 취재하러 오고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보다 세상을 변화시킬 더 강력한 힘이 있겠습니까? 우리 가정이 왜 변화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여 사랑하기보다 사랑받기를 더 원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왜 진정한 천국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여 여전히 사랑받기를 더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역으로 우리가 가정을 변화시키고 일터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믿고 싶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분이 있다면 믿음으로 하나님, 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해 보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시지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그렇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에 주저합니다. 거짓말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피 흘려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이미 여러분 안에 오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 보라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행하여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과 사랑에 빠지게 해 주소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게 하소서!

 

 

 

 

부활절 /꽃 진 자리에 남는 것 /8:31-37/ 김기석목사

2015-07-06 19:37:48

 

[그렇다면, 이런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죽음은 최후의 말이 아니다

 

온 누리에 부활의 빛이 찬란한 오늘,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흐린 날씨조차도 우리 마음에 깃든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곧 정의라는 폭력의 신화에 짓눌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힘은 사랑과 희생임을 일깨우기 위해 애쓰시다가 주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이 실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드러내는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십자가 아래 서있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죄 없이 고통당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그들이 보인 조롱과 멸시는 힘이라는 물신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 힘이 정의라고 믿는 순간, 우리에게 남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힘을 손에 쥐는 것입니다. 둘째는 힘 있는 자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입니다. 문제든 어느 경우이든 우리가 인간다운 삶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힘이 정의가 아님을 단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솟아나는 새싹처럼 우리 마음에 경이로움을 안겨줍니다. 부활은 세상의 질서를 뛰어넘는 또 하나의 질서를 보여줍니다.

 

그 질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마치 시간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새로운 세상의 모퉁잇돌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세상의 임금들이 일어나 음모를 꾸미고, 주님의 뜻을 가로막으려 할 때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웃으신다. 내 주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2:4)고 노래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오만한 세상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파안대소입니다. 사도 바울은 호세아를 인용하여 죽음의 패배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15:55)

 

삶을 모른다면

 

부활의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더 이상 죽음은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흔히 죽음 이후의 문제인 줄만 아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할 현실입니다.

 

어느 날 季路孔子에게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삶을 모른다면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이면 焉知死리오, <<論語>>, 先進編 11) 하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문답을 두고 유교는 죽음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공자의 이 대답은 지금 여기의 삶을 소홀히 하면서 죽음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뜻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한번 주어진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聞道夕死라도 可矣니라, <<論語>>, 里仁編, 8)고 했습니다. 굉장히 비장하지요? 하지만 구도자의 자세는 이러해야 합니다. 이런 목마름이 없다면 진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는 사물의 당연한 이치일 겁니다. 만일 그것을 알고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뜻을 알고 사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몇 마디 말씀은 참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4:34)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5:19b)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여 준다.”(5:36)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양식으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면 됩니다. 우리가 누구를 본받으며 사는지를 보면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존재를 증언합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

 

부활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철저히 생명을 아끼고 존중하는 삶을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현장입니다. 사람들은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다 분주합니다. 이곳에 있으면서도 늘 다른 곳을 바라봅니다. 그러니 마음이 각박하고 황폐해져 다른 이를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어느 영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회전문 앞에서 다른 이에게 먼저 들어가라할 때 하는 말이 뭐지요?” 선생님이 기대한 답은 ‘after you’ 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뭐 그까짓 질문을 하냐는 듯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go away.’ 해석하자면 저리 가, 꺼져라는 뜻 쯤 될 겁니다. 우리 삶이 꼭 이렇습니다. ‘after you’ 해야 할 때 ‘go away’ 하며 삽니다. 늘 내가 우선입니다.

 

아이들이 먹는 과자에서 이물질이 나와도, 참치 캔에서 칼날이 나와도 회사는 쉬쉬 하며 숨깁니다. 알려지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처신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돈이기 때문입니다.

 

반찬을 먹음직스럽게 보이게 하려고 온갖 인공색소와 인체에 유해한 것들을 넣는 이들도 있습니다. 돈 때문에 마땅히 따라야 할 인간의 길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납치되어 살해된 이혜진 양과 우예슬 양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범인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psychopath)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란 겉은 멀쩡하면서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는 악마가 아닙니다. 다만 병들고, 파괴된 사람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깊이 병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유대계 이탈리아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자기의 경험을 담은 책입니다. 그는 자기가 그 참혹한 수용소에게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세상은 우리에게 짐승 같은 삶을 강요합니다. 많은 결혼 이민자들이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중국은 독립을 구하는 티베트인들의 외침을 무자비한 총격으로 막았고, 많은 나라들이 이 일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꽃 진 자리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이 날 이런 우울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에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 두려움 없이 생명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한 바울 사도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고발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환난도, 곤고함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협도, 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부활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쳇바퀴 속에서 살아가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지켜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는 친절과 따뜻함, 너그러움과 감사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어느 시인은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나는 그 절망의 자리, 꽃이 진 자리야말로 열매의 자리라고 말합니다(落花處餘實).

 

이혜진 양과 우예슬 양이 진 그 자리, 베트남 신부 쩐타인란이 죽어간 그 자리, 자유를 위해 흘린 티베트인들의 피가 흐른 그 자리에서 우리가 아무런 열매도 거두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찌 부활을 믿는다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는 이런 억울한 일, 원통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2008년에 부활을 고백하는 우리의 소명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이 각자에게 품부된 고귀한 생을 맘껏 누리며 사는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까닭은 주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류애라는 숭고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낙심치 않는 것도 주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참음으로 기다리는 신앙 /11:8-10/8:25/ 어윈 루처 Erwin Lutzer

2015-06-25 10:56:38

 

1. 아브라함이 바라본 땅은... 내세적인 땅

 

물론 아브라함이 바라본 땅은, 현세적/내세적 의미를 모두 포함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내세적인 하나님의 나라요,

그것이 이차적으로 현세적인 가나안 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1차적인 개념을 깡그리 무시한 채로

2차적인 '부동산 개념'으로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해하는 것은.. 큰 오해다.

2차적/현세적 축복으로 해석하려면, 반드시 1차적 해석을 먼저 한 다음에 가능할 것이다.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무슨 현세적복을 받기 위해 떠난 것이 아니었다.

스페인, 포르투갈이 신대륙을 향해 갈 바를 알지 못 하고 나아갔을때는,

상당 부분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누리려는 목적이 강했지만,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 것은

무슨 주인 없는 땅에 가서, 깃발 꽂고 자기 땅으로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이라고 할 때, 부동산에 민감한 한국인들에게는

그것이 현세적인 땅으로 여겨지겠지만,

이어지는 히11:10절에 보면,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영적인 도성>으로 봄이 옳다.

 

왜냐하면 사실 아브라함은, 생전에 어떤 성castle or city도 짓지 않았다.

만약에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현세적 성으로 이해했더라면,

살아생전에 그는 작은 도시 하나라도 지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318명의 가신과 노유 종을 합치면 1천명의 대가족을 거느렸지만

성경은 그가 장막에 거했다고 했지, ‘도시에 거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11:9

 

이는 그가 하나님이 지으실 영적인 도성을 일평생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11:10

사실 그는 보이지 않는 도성을 짓는데 성공했다.

이삭-야곱-12지파로 이어지는 훌륭한 믿음의 가문을 형성하는데 성공했고,

족장시대에 자기 사명을 성실히 감당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무덤 값을 4백 세겔 치렀다. 23:15

어떤 TV설교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 사방 땅을 주셨으므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복 받아, 동서남북 사방 땅을 차지하자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의 매장지도 없어서

헷 족속에게 4백 세겔을 주고 샀다고 한다.

동서남북을 차지하기는커녕, 실상은 매장지 하나 없었던 것이다.

 

여러분, 물론 그 땅은 약속대로 4백년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성경이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동서남북을 아브라함에게 주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고 하신 것이고

실제로 나중에 그 땅을, 4백년이 지나서, 여호수아 시대부터 주셨다고 해도

일차적으로 가나안을 눈에 보이지 않는 땅/도성으로 성경을 풀어나가야 한다.

 

그런 일차적 의미를 깡그리 무시하고

(무슨 토지공사 택지분양처럼) ‘땅을 차지합시다라고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관점이 얼마나 세속적/현세적/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뒤늦게라도 시각을 교정하고

성경을 제대로 올바르게 배워나가야 하겠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행인과 나그네라고 불렀다.

행인과 나그네는 아시다시피, 부동산 등기부원본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옵소서하면서 땅을 많이 차지하자고 격려하는 것은

(쉽게 되지도 않겠지만) 우리의 성경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교정해야 한다.

 

물론 아브라함 언약이 보이는 땅, 현세적인 땅을 당연히 포함한다.

그러나 일차적/영적인 의미는 보이지 않는 땅/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표이다.

그런 땅을 오늘날의 부동산처럼 해석하는 것은.. 해석상 오해이다.

 

 

2. ‘보이지 않는 것보는 것처럼 믿는 믿음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11:27

 

아브라함이 추구한 것은, 보이지 않는 도성city이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도성이었다. 11:10 whose architect and builder is God

아브라함도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히11:27)

보이지 않는 도성을, 보이는 도성처럼 건설하고 살았다.

 

보이지 않는 도성.. 신약적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kingdom of God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나라/도시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21:3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도성을.. 마치 보이는 도성처럼 일평생 짓고 살았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영생의 세계를 보이는 것처럼 믿고/건축하며/살아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큰 도시>를 세우기 좋아한다.

아주 크고 우람한 성/신도시 들이다.

수 백~수 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들은 해외관광을 다니면서

사람들이 세운 눈에 보이는 도시를 보고 감탄한다.

 

그러나 우리 눈이 바뀌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도시보다 더 중요한 눈에 안 보이는 도시가 있다고!

 

아브라함은 이 땅에 만리장성이나 ‘forbidden city/자금성같은

눈에 보이는 도시를 건축하려하지 않았다.

 

칼빈은 눈에 보이는 도시를 건축하는데.. 거의 실패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네바에서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의 도성을 재현하려고 했는지,

신정정치를 하려고 했는지 (교회역사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칼빈이 성공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종교개혁 신학을 정리함을 통해서

특히 <기독교강요> 및 여타 저술을 통해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의 건축에 성공했고,

그것은 후대에, ‘눈에 보이는 도시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런 예는 칼빈 말고도 얼마든지 더 있다.

오늘날에도 눈에 보이는 도시를 건축하는 사람은, 어쩌면 한 세대로 끝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를 건축하는 사람은, 그 도시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3.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4:18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8:25

 

성도는 보이지 않는 것보는 것처럼 믿으며 일평생 살아간다.

그래서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다. 일평생...

 

모세도, ‘보이지 않는 것보이는 것보다 훨씬 귀하게 여기는 안목이 있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보이지 않는 것)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보이는 것)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6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사모하는 믿음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11;16

 

모세는 본향을 사모하다가/바라보다가 죽었다.

자기가 원하던 것들을, 이 세상에서 다 차지하고, 만져보고

죽은 것이 아니다.

 

모세도 가나안 땅을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사모하다가 죽은 것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이 너무 현세적이어서

이 현세에서 다 성취하고/만져보고/가져봐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이 현세에서 못 성취하고/못 만져보고/못 가진 것들은.. 마치 없는 것처럼 허무하게 여긴다.

 

아브라함과 신앙의 모든 조상들은.. 사모하다가 죽었다.

하나님이 지으실 도성(11:10).. 다 지은 것을 못 보고.. 사모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물론 그 도시는 차츰 지어졌다. 2천년 후에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거의 완성되었다.

내 생애에 다 지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일생의 기도가... 이렇게 응답될 수 있다.

내 대에 응답되지 않더라도.. 내 다음 세대에 응답될 수도 있다. 아니 여러 세대 후에도 응답 될 수 있다.

 

신유기도의 응답도 궁극적으로 내세적으로 기대해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몸의 구속도 포함한다. *구속redemption: 속전을 치르고 구해낸다는 뜻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를 전인적으로 구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의 치료(신유)도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있다. 아무리 불치병이라도!

 

, 그 신유를 너무 현세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라. 그것은 오해다.

많은 사람들이, 암환자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온 교회 성도가 함께 기도했는데

결국 암환자가 죽자.. 시험에 든다. 혹자는 다시는 기도하지 않겠다고 한다.

괜히 응답되지도 않는 기도로, 하나님을 성가시게 하지 않겠다며.. 크게 실망한다.

 

여러분, 우리가 너무 현세적이라서

신유도 꼭 현세에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믿는다.

예수 믿으면, 영혼은 물론이요, 우리 몸의 구속도 반드시 일어난다.

그러나 그 신유의 기적이 꼭 현세적에 일어나야 한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내세에는 반드시 치료된다.

 

너무 현세에만 치우치는, 우리 신앙적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현세에서 내세까지.. 다 내다보고 계신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참음으로 기다리는 신앙>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사는 정체성이 나그네요 행인일진대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도성을 바라는 자들일진대

성도가 일평생 가져야 할 마음 자세는 ... 참음으로 기다림이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8:25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이시다. 11:6

그러므로 내 기도가 당장 응답 안 되어도... (하나님의 때에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기도하는(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고 했으니

기도가 내 세대에 응답되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내 기도가 영 소용 없는 것은 아니다.

응답은 안 되어도, 상은 받기 때문이다.

 

위에서 암환자 예를 들었는데, 기도응답이 안 되었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암환자의 기도는, 영생의 관점에서 볼 때 반드시 치료/응답될 것이고,

내 눈에 응답이 안 되어도..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기도의 상(하나님을 찾는 데 대한 상)을 반드시 받을 것이다.

(그 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마 하나님의 임재/동행/위로/기쁨 등이 될 것이다.)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5:17-18/8:2-4/ 마틴 로이드 존스

2015-06-17 10:22:29

 

율법과 선지자를 성취하신 그리스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절대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모두 성취되리라. (5:17,18)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율법을 성취하셨는가요?

이 질문은 너무나 놀라운 것으로 우리를 경배와 숭배로 이끕니다.

 

주님은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정확한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하셨습니다(4:4).

 

우리의 제한된 마음으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이 말씀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 아래 나셨다는 성육신에 관한

중요한 진리 중 하나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율법 위에 계시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

율법을 지키셔야만 했던 분으로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율법 아래 두셨을 때 만큼 분명하게

거룩한 율법의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특성을 보여 주신 적은 없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개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복음서를 읽으면

이 개념이 얼마나 완전하게 참된 것인가를 발견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인간의 대표로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심으로, 율법을 이루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셨는가를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빠짐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설명해 주셔서, 계속해서 율법을 확증하시고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주장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때에 '아무도 자신에게서 어떤 잘못도 발견할 수 없으며

자신에 대해 어떤 고소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에 대해 고소를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율법 앞에서 그분을 고발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충분히 성취하신 삶을 사셨고 완전하게 율법에 복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어떠한 작은 항목도, 일 점 일 획도, 범하거나 성취하는데

실패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탄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삶에서 율법 아래 복종하셨습니다.

 

2.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전() 믿음의 중심인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묻게 됩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만일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못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거듭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복음주의의 본질은 십자가에 대하여 말할 뿐 아니라

십자가의 참된 교리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순전히 감상적인 태도로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꾸짖으셨던, 이른 바 십자가의 비극을 생각하며

슬피 울던 예루살렘의 딸들과 같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우리에게 일종의 도덕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전() 목적이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안에서 연민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며,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일반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오직 율법의 관점에서만 이해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죄를 위하여

친히 자신의 거룩한 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정한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며, 율법이 선고하는 판결은 사형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짓고

그분의 거룩한 율법을 깨뜨린 모든 사람에게 필히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성취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죄의 형벌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 형벌은 죽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분께서 죽으신 이유입니다.

율법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과 형벌을

따로 따로 두실 수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심에 있어서

그분께서 법령으로 정하신 형벌을 집행하지 않기로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과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반드시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며,

여러분과 제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형벌이 그같이 십자가 죽음으로

집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형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법은 완전무결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 있는 거룩하며 흠없고 점없는

자신의 아들의 몸으로 죄를 처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율법의 성취라는 엄밀한 관점에서

십자가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해석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십자가 위의 죽음에 관한 성경적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께서 가장 이상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곧 죄로 인한 형벌을 친히 자기 안에 와 자기 위에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죽으심으로, 구약성경의 모든 예표를 성취하신 것을 봅니다.

 

레위기와 민수기를 읽어 보십시오.

태운 헌물과 희생물들에 관한 모든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장막과 성전 의식과 희생단과 씻는 물두멍 등에 관한 모든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이 상세한 말씀들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차린 빵과

대제사장과 기구와 기타 이 모든 것들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들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최종적으로 성취되어질 것들의

그림자요, 예표요, 대언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님은 실로 이 예표들 하나 하나를 문자적으로 성취하시고 수행하시고 실행하셨습니다.

 

혹자는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세부사항을 발견할 수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리가 되는 위대한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과 행하신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예표와 그림자의 완전무결한 성취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이시며, 주님은 헌물(offering)이시며, 주님은 희생물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하늘에 드리심으로 의식법의

전 항목을 그분 안에서 성취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

 

주님께서는 죽으심과 부활과 그리고 자신을 하늘에 드리심으로써

이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3. 우리를 통해서, 율법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주님께서 성령에 의하여

우리 안에서와 우리를 통하여 율법을 성취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8:2-4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논거(論據)입니다.

바울은 매우 분명하게 이것이 왜 주님께서 죽으셨는가에 대한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약하여 할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죄 때문에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이는 육신을 좇아 걷지 않고 성령을 좇아 걷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 방법을 함께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 주님이 친히 율법을 성취하신 방법과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5 장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그분은 율법의 의()를 성취하십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성취해야 합니다.

둘은 함께 역사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과 율법으로 사는 권능을 주십니다.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께 대적이 됨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아니할 뿐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느니라"라고

사도 바울은 같은 로마서 8장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받은 우리는 이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적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율법에 복종합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미워하며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에 복종합니다.

 

그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며 또한 그렇게 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육신을 좇아 걷지 않고 성령을 좇아 걷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을 다음과 같이 보십시오.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새언약을 맺고자 한다. 새 언약과 옛 언약과의 차이는 이같으니,

내 법을 너희의 생각과 마음에 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내 법을 너희 밖에 있는 돌판에 쓰지 않고 육체의 마음 판에 쓰겠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8장에서 다룹니다.

그는 8장에서 새 언약, 곧 새로운 관계를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 아래에서 율법은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율법을 성취하는데 열심이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림으로 이 모든 것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율법과 선지자들에 관한 입장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미 선지자들의 예언이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성취되었는가를 보여드렸습니다.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의 성취

 

참고로, 율법은 크게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삼분됩니다.

그 각각의 성취를, 살펴봅시다.

 

1. 의식법(제사법, 절기법)의 성취

하지만 아직 성취되어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율법은 어떻습니까?

제가 보여드린 바와 같이 의식법(儀式法)에 관해서는

이미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곳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의 삶에서 의식법을 준수하셨고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준수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의식법은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의 확증으로, 후에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죽으실 때, 이미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고,

마지막으로 성전과 성전에 속한 것들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단이시며, 희생물이시며,

씻는 물두멍이시며, 향이시며, 그밖에 모든 것 되심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레위기의 율법 조항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분께서 나의 태운 헌물이요, 나의 희생물이요, 나의 모든 것임을 보지 못한다면,

이 모든 의식법은 아직도 내게 적용되고 있으며,

내가 그것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실현된 것을 보며,

그분을 믿고 그분께 나 자신을 복종시킴으로써, 이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법에 관한 입장입니다.

 

2. 시민법의 성취

시민법은 어떻습니까? 시민법은 본래 특별히 하나님의 신정국(神政國)으로서

그 당시 특별한 상황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신정국가(神政國家)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사역의 말기에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의 왕국을 너희에게서 빼앗아,

그 왕국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는 마태복음 21:43의 말씀으로, 대언과 관련하여 전() 성경에서

가장 중대하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2:9,10 에서 새로운 민족이 교회임을 매우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정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시민법 역시 성취되었습니다.

 

3. 도덕법의 성취

이제 우리에게 도덕법이 남았습니다. 도덕법과 관련한 입장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기서 영원하고 영구한 것,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항상 존속해야 하는 관계를 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첫째가는 큰 명령이라고 칭하신 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명령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명령은 단지 신정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온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둘째 명령은 "그와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도 역시 이스라엘 신정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옛 의식법이 아니었습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 대한 영원한 상태요, 그분께 대한 우리의 영구한 관계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 신약성경에 의해 해석된 바와 같이 -

지금까지 존속해 왔듯이 지금도 존속하고 있으며,

시간의 끝까지 그리고 우리가 완전하게 될 때까지 존속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에서 사도는 서신서를 읽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죄는 여전히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의 깊게 상기시켰습니다.

 

요한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율법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봅니다.

왜냐하면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4).

 

율법은 아직 거기에 있습니다.

비록 내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비록 내가 유대인이 아니었을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죄를 범할 때 나는 율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현재 입장입니다.

 

미래의 궁극적인 성취

미래에 관하여 저는 단지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궁극적으로 왕국이 온 땅에 미칠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말하는 돌이 온 세계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이 지금 진행중이며, 마침내는 성취될 것입니다.

 

율법과 대언자의 일점 일획도 빠짐없이 완전히 실행될 것입니다.

율법을 깨뜨린 자는 궁극적으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결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내 뉘우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 죽는 자들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그들에게 내려질 선고는 "저주 받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가 될 것입니다.

그들을 그와 같이 정죄하는 것은 율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은 모든 점에서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제시된 것을 이용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의 표현인 율법의 정죄 아래 거할 것입니다.

 

결론.

마지막 질문은 필히 이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율법에 대한 관계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행위 언약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 장이 논증하는 전부입니다.

 

구원은 그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서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생활의 규칙으로서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에 관해서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말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그릇된 견해를 가지려 하며,

율법을 은혜에 반대되는 무엇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 때 율법의 언약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율법은 은혜와 반대될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은혜 언약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율법을 은혜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그리고 홀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율법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가 지금 너희에게 율법을 준다.

너희가 이 율법을 지키면 율법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요구의 참 특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죄의 심히 죄됨을 보여주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약속이 주어진 후 430 년 후에 온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로와 질 수 없다는 점과

우리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 속에 많은 대언과 많은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은 은혜로 충만하여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율법과 관련한 모든 희생물과 의식(儀式)도 역시

동일한 일을 행하도록 계획된 것임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구약 성경의 비평가들은 이러한 태운 헌물과 의식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며,

그러한 것들은 단지 유대인과 다른 이들이 사용한 것으로

비교종교의 관점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이교도 의식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약 복음을 실지로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모든 예식과 의식은 하나님께서 상세하게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으로 부르시고 "너는 삼가 모든 것을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만들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율법에 관한 이러한 모든 관점들이

단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율법에 관한 거짓 견해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동시에 사람들은 은혜에 관하여 거짓된 견해를 갖습니다.

그들은 은혜는 율법과 별개의 것이며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소위 도덕율폐기론(Antinomianism)으로서,

 

죄악되고 게으르며 나태한 형태의 영적 삶을 살기 위하여

은혜의 교리를 남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행하든 나는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며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 안에 거하겠느뇨?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은혜에 관하여 전적으로 잘못된 거짓 견해입니다.

은혜의 전 목적은, 어떤 의미에서, 단지 우리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문제점은 우리가 자주 이 점에서

거룩에 관한 거짓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과 성화(sanctification)를 받아야 할 체험으로 간주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은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받았다고 말하는) 소위 은혜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한다면,

여러분은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리적인 체험을 경험했는지는 몰라도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하며,

그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셨던 것처럼 의롭게 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분의 명령을 지키기를 열망합니다.

"나의 명령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 두 가지를 분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는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로 반드시 율법을 사랑하도록 인도하며

이 율법을 지키기를 열망케 하는 이 새 마음과 입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분의 권능으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19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이 명령 중 하나를 어기고

또 그와 같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누구든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것들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의 왕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죽으시기까지 삼 년의 짧은 기간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영원히 영존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주님은 이를 다시 강조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주님, 주님, 하고 말하는 자마다 하늘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요? 십계명과 도덕법입니다.

십계명과 도덕법은 결코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대속하시고,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정결케 하사

선한 일들에 열심인 특유의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디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 의가 성경기록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지 않고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너희가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주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어려운 것이었고,

동시에 영광스러운 진리에 관여되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율법과 예언자(구약성경)을 보고, 이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며,

율법에 관한 보다 깊은 견해를 주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관점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십자가 위에서 집행된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처형하셨다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속죄의 대속 교리는 그가 율법을 완전히 실행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완전무결하게, 능동적으로,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적극적으로

친히 율법에 복종하셨습니다.

 

모든 예표는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대언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구속 사역의 결과는 하나님을 거스려 율법을 깨뜨리고 있는

우리 비참한 반역자들에게 용서를 주는 것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 곧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 거룩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

놀라운 감정이나 체험을 경험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며,

모든 점에서 그분을 닮은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

 

내가 율법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마틴 로이드 존스

 

본문에 의하면 율법의 일점 일획까지 전부 없어질 수 있는 방법으로는

오직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 반드시 하늘과 땅이 없어지거나, 또는 율법이 성취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당신이나 내가 율법을 성취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율법을 없어지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율법이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동안

모두는 율법의 저주 아래 정죄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복음이 온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분의 일은 율법과 대언자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불의한 것이며 그분의 본성과 모순된다),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율법은 의로우며 하나님과 사람을 묶는 계약이다.

율법은 단순히 폐기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믿는 이들을 위하여

이 계약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셨다.

 

믿는 이들에게 율법은 지나갔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들은 육신을 좇아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좇아 걷는 자들이니라"(8:1).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의(,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믿는 이들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8:3,4).

 

율법은 하나님의 축복과 죄를 위하여 지불해야 하는 영원한 죽음을 얻기 위하여

의를 요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의롭게 사셨고,

그들의 위치에서 그들의 마땅한 죽음을 대신 죽으셨다.

 

참된 믿는 이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율법의 요구를 만족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요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되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율법의 정죄와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자유인의 간증 /8:31-39/ 곽선희 목사

2014-11-27 10:02:02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널리 알려진 유대인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Viktor E. Frankl)박사의 생생한 간증으로 그의 소중한 경험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죽음의 수용소에 끌려가서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 앞에 섰습니다.

 

그는 알몸이었습니다. 다 빼앗겼습니다. 홀랑 벗고 알몸으로 비밀경찰 앞에 섰습니다. 직업도 빼앗겼고, 의사 자격증도 빼앗겼고, 가정과 아내와 옷까지 다 빼앗겼습니다. 마지막으로 비밀경찰은 그가 차고 있는 시계를 보고 그것도 풀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시계를 풀어주었습니다. 조금 있더니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뽑아 놓으라고 그랬습니다. 한평생 끼고 있던 결혼반지도 뽑아서 주었습니다. 마지막 결혼반지를 빼앗기는 순간, 번개 같은 생각이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게슈타포여, 나에게서 당신이 빼앗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나에겐 아직도 남아 있소. 절대 빼앗을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내 마음 속에 있는 자유라는 것이요. 당신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내가 지금 당신을 사랑할 수도 있고, 용서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고,

 

그리고 당신이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내 마음에 평화는 내가 지키는 거요. 당신이 빼앗을 수 없는 나만의 자유, 이것은 내 것이요." 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거 아닙니까?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 그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물질이야 있다, 없다 하는 것 아닙니까?

 

건강도 있다, 없다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심령 깊은 속에 있는 자유함, 이건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제 아버지가 제게 가르쳐 준 교훈 중에 일생동안 잊지 않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옛날 신학대학에서 강의할 때에 이 말을 한번 했더니 얼마 전에 어느 젊은 목사님이 절 만나서 하는 말이 "목사님이 가르쳐 준 그 말을 나는 일생동안 내게 주신 좌우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래요? , 그게 뭔가? 나도 다 잊어버렸는데 무엇인지 말해 보게." 그랬더니, "목사님 아버님께서 가르쳐주신 교훈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를 문제시 하지 아니하면 문제가 안 된다.' 그겁니다."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내가 괴로움 당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저가 나를 아무리 미워해도 나는 저를 미워하지 않으면 그만이에요. 아무리 나를 괴롭히려고 세상이 이렇게 나를 들볶아도 내 마음에 평안은 내가 조용하게 지키는 겁니다. 자유!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가 내면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올시다.

 

심리학자 에릭 프롬(Erich Fromm)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서 그는 이렇게 논리를 전개합니다. 현대인들은 이전의 권위주의 사회에서 해방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정치적, 경제적, 혹은 가정의 여러 가지 많은 권위주의에 눌려 살았는데 여기서부터 해방되어야겠다고, 아니 해방됐다고 생각을 합니다. 가난에 쪼들리는 사람이 돈 벌었으니까, 맨 밑에 있던 사람이 이제 높아졌으니까, '자유다' 외쳐보는데 아니라는 것이죠. 익명의 권위, 보이지 않는 권위에 어느 사이에 노예가 되어 버렸더라는 겁니다.

 

'익명의 권위' 대단히 소중한 용어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에서는 개인이라는 게 없고, 개인의 자유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끌려가며 사니까요. 그러다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는 순간, 개인이 생깁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식이 생깁니다.

 

, 그런데 이 자기 자신이 없다가 있어지는 순간 자기가 자기에게 노예가 되더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있어요. 돈 없다가 돈 있으면 자유가 아니에요. 그저 사람들에게 억압을 받고 있다가 억압에서 풀려났다고 해서 내가 자유인이더냐 말입니다. 그게 아니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세심히 비판하며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첫째, 이익이라고 하는 것. 거기에 노예가 되었어요. 개인이 없을 때는 그저 끌려가며 살면 됐지만 이제 내 것을 챙겨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익에 눈을 뜨게 되요. 어떻게 하면 이익을 더 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얼마를 가질 수 있을까?

 

돈 벌기 위해서 혈안이 돼 버렸어요. 돈 귀신에게 홀렸어요. 정신없어요. 그래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도박을 하고, 뭘 하고, 뭘 하고 해서 돈만 벌면 내가 원하는 완전한 자유가 올 것이라고 착각을 했어요. 아니에요. 돈이 생기는 순간, 자신은 엄청나게 비참한 인간이 돼 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익과 경제성의 노예가 되고 시장성의 노예가 되요. 그래서 자꾸만 자신을 비교하게 됩니다. 이보다 저게 더 좋고, 저보다 이게 더 좋고 상대적 부, 상대적 빈곤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정신이 없어요. 그리고 요새 와서 가장 문제되는 거 하나 있지 않습니까?

 

여론의 노예가 되요.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나 해서 그래서 신경을 씁니다. 젊었다고 하나 늙었다고 하나……,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어제 저녁에도 어떤 분을 모임에서 만났는데 한 10년 만에 만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분이 나한테 인사를 하는데 잘 못한 것 같아요. 딱 인사하더니 "목사님, 건강하게 보입니다." 고거까지는 잘했어요. 그 다음 얘기가 "왜 이렇게 머리가 많이 빠졌어요?"

 

그랬어요. 아하, 이 사람, 이거 인사 잘 못하는군……. 그렇잖아요? 그 말 한마디 그거에, 그래 뭐 내가 할 말이 없더라구요. 내가 하고 싶은 말 딱 하나 있는데 '당신은 더 빠졌수' 그러려다가 그럴 수도 없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은 했습니다만 속은 '당신은 더 늙었어.' 그래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거 보세요.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나, 이거 신경 쓰는 거 그만합시다. 신문에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성형수술이라는 게 요새 유행 아닙니까? 이 가운데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성형수술 한번 이상 한 사람은 안 한 사람에 비해서 자살률이 3배가 높답니다.

 

이해가 갑니까? 아예 손을 안댄 사람은 그렇거니 하고 살아요. 대기 시작한 사람은 신경을 쓰는 거예요. 내가 이거 잘했나, 못 했나, 남들이 뭐라고 하나, 뭐라고 하나…… 마지막에 죽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참 비참한 거예요.

 

여론의 노예가 되는 것, 요새 보니 여론 때문에 사람들 신경 많이 씁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나? 아 그거 좀 잊어버리고 살면 안 돼요?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요? 한 세상 그리 살다 가는 건데 뭐 좀 초연할 수 없겠습니까?

 

여러분, 진정한 자유가 뭡니까? 참 자유는 내면세계에 있고, 그중에 가장 중요한 자유는 양심의 자유예요. 그리고 또 중요한 건 신앙의 자유예요.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이 자유할 때, 이보다 더 귀한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 자유인의 간증이 오늘 성경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32절 말씀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주었다는 얘기죠. 주었다면 받아야죠. 그런고로 받은 자의 마음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를 쳐다보면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절대적 풍요의식, 바로 그것이 믿음이에요. 안 그렇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당연히 주시죠.

 

안 줄 리가 없지요.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고 손자 손녀들이 있습니다만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신감이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주실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용서하실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줄 것이다. 자신만만한 거예요. 아니 나는 다 받았다. 아니 더 필요가 없다.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십자가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았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다. 은혜의 선물로 주신다. 그 첫째가 죄사함이요, 사죄의 은총입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것이 죄의 속박입니다. 죄를 지은 자마다 죄의 종이 됩니다. 죄를 다시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주의식에 삽니다.

 

아니 감기만 걸려도 저주받은 것 같아요. 아시겠어요? 그런고로 죄의식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 받았어요. 최고의 자유는 죄사함 받은 거예요. 그리고 죄책으로부터 벗어나는 거요. 저주의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로마서 8장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815절에 말씀합니다. 우리는 양자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양자의 영을 받고, 양자의 특권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특권, 이것이 바로 자유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은사를 주십니다. 여러분, 죄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이제 그 자녀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은 다 은사적인 것입니다. 은혜의 선물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하는 일은 다 그를 위해 하는 일입니다.

 

그저 이런 말도 하고, 저런 말도 하고, 또 혹은 잔소리를 한다 합시다. 혹은 때로는 매를 친다고 합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은사입니다.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은사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바로 자유인의 의식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34)."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누가 나를 심판하리요. 누가 나를 비판할 것이냐구요. , 굉장한 자유인의 간증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 꼭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항상 저주의식과 비판의식과 열등의식에 삽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얘기가 다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도 사랑이요, 질병도 사랑이요, 이러 이러한 일도 사랑이요. 뜻대로 안 되는 것 더 큰 사랑이에요.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임종 전에 드린 기도입니다. '하나님, 한평생 내가 기도했습니다만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 내 소원대로 됐더라면 아주 망가질 뻔 했습니다. 내 소원대로 안 된 것을 감사합니다.'

 

왜요? 그게 선물이니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소원대로 되면 됩니까? 안되죠. 이대로 내 처한 처지, 이대로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작품이요 최고의 선물이다. 그것이 자유의식이요. 자유인의 의식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37)" 그렇죠. 그가 나를 사랑하니 이기지 못할 시험이 없어요. 그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걱정할 것이 없어요. 그가 나에게 영원한 나라를 약속해 주었으니 내가 오늘 이런 일 저런 일로 마음 쓸 필요가 없습니다.

 

최종 종착지는 이미 결정된 것이니까 말입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넉넉히 이기는 이 사랑의 뿌리는 첫째는 용서요. 그 다음에는 대속이요. 그 다음에는 은사요. 그 다음에는 사명입니다. 이 사랑 안에 내가 살아가야 할 사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인도의 간디(M.K. Gandhi)의 중요한 일화가 있습니다. 영국에 부모님과 이주해 와 살면서 영국에서 자랐는데 자라면서 보니까 영국 아이들은 커요. 체구가 크고 인도사람들은 체구가 작아요. 그는 생각했습니다.

 

어렸을 때 생각하기를 '영국 사람들은 고기를 많이 먹어서 저렇게 크구나. 우리는 채식을 하니까 이게 빈약하구나. 그렇지, 우선 좌우간 몸부터 커야 하겠다. 그래야 뭐가 되지.' 그래서 몰래 몰래 고기를 사 먹었어요. 집에선 안 먹는 고기를 밖에서 자꾸 사 먹다 보니까

 

돈이 모자라서 아버지의 지갑을 훔쳤어요. 아버지의 돈까지 훔쳐가면서 고기를 사 먹었고, 또 영국 아이들이 하는 그대로 담배도 피우면서 육체적으로 먼저 건강해야 뭔가 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더랍니다. , 그래 육체적으론 좀 건강해지는 것 같은데 양심이 편하질 않아요. 못할 짓을 많이 해서 너무 괴로워서 할 수 없이 1년 후에는 아버지에게 장장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동안에 아버지의 지갑에 손을 댔고 고기를 사 먹었습니다. 뭐 어쩌구, 어쩌구 했습니다. 대단히 잘못했다는 편지를 썼더니 아버지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그 아들에게 그저 노발대발하며 크게 꾸짖을 줄 알았는데 웬걸요.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그 마음엔 착잡합니다. '네 마음이 내 마음이다' 하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끌어안으면서 '잘못된 줄 알았으니 됐다. 다시는 같은 일을 하지 마라.' 거기서 그는 용기를 얻고 생각했습니다. 사랑, 사랑의 최고는 용서다. 용서만이 자유함을 주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비폭력적인 사람으로 일생을 살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요. 넉넉히 이기는 자요.

 

빌립보서 413절에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것이 자유인입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자유인만이 할 수 있어요.

 

그 자유의 뿌리는 용서입니다. 여러분, 용서하는 자가 자유인이요. 용서받는 자도 자유인이요. 사랑의 뿌리는 용서에 있고, 용서받은 감격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해방은 방종이 아닙니다. 무질서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십자가 안에 감취어진 엄청난 자유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받아들이면서 사죄 받은 자의 감격, 용서받은 자의 감격, 엄청난 사랑을 받는 자의 자유함이 있을 때에 비로소 또다시 다른 사람을 자유케하는 능력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십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자유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물리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자유한 것 같으나 더 무서운 속박에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노예 상태가 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제 온전한 자유함이 있게 하시고 자유인의 간증이 있는 넉넉하고 충만한 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개혁신앙의 관심 /8:31-39/ 곽선희 목사

2014-11-25 09:50:27

 

베트남 전쟁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전투상황이 아주 불리해져서 후퇴를 하는 중에 한 병사가 뒤에서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안전지대로 대피한 중대 대원 중에 한 사람이 저 총에 맞은 저 병사는 내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구출하러 가야겠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듯 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이 친구는 총에 맞은 자신의 친구를 구출하기 위하여 그 무서운 장소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중대장은 말렸습니다.

 

안된다고. “그렇게 하다가는 너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고 위험하고 또 보건대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니 자네 친구는 벌써 죽었어. 그러니까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반드시 가야된다고 중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그 전쟁터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친구를 등에 업고 부대로 돌아왔지만, 생각대로 친구는 죽었습니다. 업혀 오는 동안에 죽었습니다.

 

그 때에 중대장이 말하기를 그것보라고 왜 고집스럽게 쓸데없는 일을 했냐고. 자네 생명도 참으로 위험했다고 그런데 자네가 업고 온 친구는 이미 죽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에 이 수고를 아끼지 않은 병사는 말합니다.

 

아니올시다. 내 친구는 내가 등에 업어서 이리로 데려올 때에 내 등에 업혀서 말하기를 네가 올 줄 알았다. 네가 반드시 올 줄 알았다. 나는 너와 같은 친구가 있으니 참으로 행복했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해 본 일이 있습니다. 누구의 사랑을 받아본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바로 그 같은 친구를 가졌기에 그 사랑을 경험했기에 그 사랑에 감격했기에 죽어가는 이 친구는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살고 죽는 일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살고 죽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내가 물질이다 성공이다 번영이다 자유다 뭐다 말과 문제가 많지만은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있습니까?

 

그래도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근심 걱정도 다 물러갈 뿐만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것입니다.

 

유명한 근대 신학자인 칼바르트라고 하는 교수가 어느날 시카고 대학에 방문하여 젊은이들에게 신학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다음에 젊은 친구 하나가 따라오면서 집요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교수님께서 쓰신 책을 다는 못읽었습니다만 몇 권을 읽었는데 감동적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해박한 지식에 저는 늘 놀라곤 했습니다. 한평생 저술 생활을 하고 가르치고 또 연구하고 그러면서 깨달은 진리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가장 중요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라고 한마디로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은 껄걸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닐때에 부른 찬송 한 구절을 외웠습니다.

 

“Jesus loves me bible said so;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예수사랑 하심은, Jesus loves me bible said so. 그것이 핵심이요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다 잊어버리세요. Jesus loves me. 예수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딱 한마디만 똑바로 알고 똑바로 느끼면 모든 문제는 다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문제, 그것이 마스터키요 그것이 생명선이요 모든 것을 이기는 힘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본문입니다. 여기는 세가지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승리, 둘째는 의의 승리, 셋째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오늘 먼저 생각할 것은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은사로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은사로 주신다. 그럼 우리 편에서는 은사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있습니까?

 

내가 얻은 일이 있습니까? 내가 성취한 일이 있습니까. 은혜를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압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런 이야기도 합니다. “내 마음대로 안된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영영 못쓸 뻔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잘 되는 일이건 안되는 일이건 때로는 우리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 것이라고,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실패든 역경이든 건강이든 질병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사람으로 볼 때에는 모든 것이 은혜요 또, 은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생각하면 기적과 같은 은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었다고 했습니다.

 

? 아들은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독생자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외아들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에는 게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아들을 내어주는 것 같은 그 엄청난 사랑으로 자기 희생을 지불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다면 모든 것이 어찌 주신 바가 아니겠습니까? 우스운 이야기이고 좀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은 전 어렸을 때에 어머니로 부터는 맞은 기억이 없는데 아버지로부터 많이 맞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십니다. 어쩌다 몇마디 하고 때리고는 설명도 없이 나가십니다. 중얼중얼 하십니다. ‘사랑한다면서 왜 때렸냐고 했다가 다시 맞았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전부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때에 맞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때 그렇게 엄한 징계를 받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피난을 나와서 군대에 들어가 있을 때에나 혼자서 고학을 할 때에 순간순간 어머니가 그립기도 하지만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나를 자주 때리시던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싶어요.

 

그 아버지의 채찍이 그립고 그 아버지의 징계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때 뭐라고 말씀 좀 하세요그러고 싶습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는 모든 것은 그대로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합니다. 주도적으로 사랑합니다. 주도적으로 창조적으로 사랑합니다. 그것이 은혜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은혜란 곧 이기는 힘입니다.

 

은혜를 아는 순간, 은혜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종교심리학자 애디 깁스(Eddie Gibbs)라고 하는 분이 깊은 연구 끝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각 좀 개인적으로 다른 체험을 가지고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에 공통점은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 안에서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가지는 이만큼의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살게 만든 것입니다. 네단계를 말합니다. 첫째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무관심한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무신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단계가 있고. 두번째는 막연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무언가 우리 인간의 의지 외에 큰 의지가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잘못했지, 우리 인간이 잘못했지, 우리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는가보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천벌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우리 인간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네번째 단계는 이제 이 모든 노력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됩니다. 오직 긍휼 오직 사랑 오직 은총만이 우리로 하여금 오늘이 있게 하는 것이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그런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보십시오. 이 과정 이 단계 전부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도적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을 어떻게 소화하십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대가를 그가 치르시고 우리를 의로 싸서 의로 옷입혀서 당신의 자녀로 맞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탕자가 돌아옵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돌아오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런데 나는 그 성경을 볼때마다 내가 아버지 입장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집을 나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꼭 한마디 하고 싶은데, 전혀 아무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또 한가지 있습니다. “네가 집을 나갔을 때에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느냐.” 꼭 한마디 하고 싶은데, 만일 그랬다면 이 아들은 조용히 집을 나가서 자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한마디의 말이 없습니까? 다시 한 번 잊지 마십시오. 탕자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로 영접한 것입니다. 전혀 관계없는 아들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오로지 아들로. 그래서 잃었다 얻었노라. 죽었다 살았노라. 내 아들이 돌아왔다.” 이렇게 환영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의를 주어서 영접한 것이요. 가끔 보면 부부간에도 다투다가 자녀간에도 가출한다 어쩌고... 꼭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의인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맞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No! 그것은 의롭다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완전히 의로 대하신 것입니다. 그 모든 부족함은 내가 대신 지불하고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자로, 가장 깨끗한 자로, 가장 의로운 자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즐기는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의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의 집에 가서 대접을 받으실 때에도 절대로 죄인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친구로 대하셨습니다. 똑같이.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오명을 받으시면서도 예수님은 새리의 집에가서 머뭅니다. 그들을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친구로 대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그대로 향유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의롭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의의 승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여기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이렇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종일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이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 사랑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순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참하게 죽어도 사랑이 있고 아무리 어렵게 고생을 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고난을 치르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러분, 참으로 사랑하면 병도 이깁니다. 원수도 이깁니다. 의심도 이깁니다.

 

죄를 이깁니다. 사망을 이깁니다. 위대한 역사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성경은 말합니다. ‘이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끊으리요. 그가 나를 의롭다 하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입니다.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당당하게 그리고 그 사랑을 깊이 깊이 간직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유명한 폴 틸리히의 이런말이 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숨길 수 없는 세가지 회색 어두움이 있다. 첫째, 공허감입니다. 가만히 보면 종종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공부하느라 정신없다가 그 다음엔 연애하느라고 한참 빠졌다가 그 다음엔 결혼을 해가지고 애낳고 키우느라고 정신이 없다가 애들이 다 결혼해가지고 나가고 그러니까 허전합니다.

 

허망합니다.” 왜요? 당신의 사랑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았거든. 정말로 사랑한 일엔 허망함이 없습니다. 사랑이 의미를 더하기 때문입니다. 참사랑 속에는 허망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공허감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죄책감입니다.

 

현대인들은 머리가 좋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복잡합니다. 이렇게 변명하고 저래서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지만, 그 양심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I.Q.90이하가 되는 사람은 절대로 자살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멍청하면 걱정도 없습니다. 똑똑하니까 생각이 많습니다. 이렇게 변명, 아무리 변명을 해보아도 내 양심은 나를 정죄합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안에서 회개의 용기를 얻을 때에 비로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 이 많은 죄책에서 아무도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술집으로 가고, 그래서 마약을 하고 그래서 폭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숨길 수 없는 죄책감, 여기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또한 공포감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암담하기만 합니다. 옛날에 제가 써놓은 제 학위 논문이 종말론입니다.

 

그래서 미래학에 대해서 Futurology에 대해서 제가 책을 비교적 많이 읽는 편입니다. 새로 나온다는 책이 나오면 제가 또 사서 읽어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래학을 아무리 보아도 결론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암담하다, 절망이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종말론과 미래학은 다릅니다. 여러분, 이 무서운 공포, 불확실함, 암담함, 절망이 밀려옵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입니까?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약속,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그 믿음 안에서만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아름다운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그 사람만이 모든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은혜 Sola Glatia! 모든 것은 은혜다. 절대적 은혜다.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Sola Glori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 다시 한 번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생각하십시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영광! 새로운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생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죄와 절망과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희들에게 오늘도 참 믿음을 일깨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믿음을 주시옵소서. 사랑을 주시고, 은혜를 알게 하시고,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확실한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은혜로 의로 사랑으로 승리하는 밝고 명랑한 오늘과 내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받은 바 은사의 확증 /8:31-39/ 곽선희 목사

2014-11-21 07:40:36

 

어떤 아버지가 사랑하는 그 아들과 함께 사막을 여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막은 불같이 뜨거워졌으며 아무리 걷고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답니다. 두 사람의 목은 타는 듯 마르고 지쳐 버렸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듯이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입니다. 더 이상 걸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이 자리에 주저앉아서 편하게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얘야, 조금만 더 가면 틀림없이 맑은 물과 마을이 나올 것이고 오아시스가 우리를 만나줄 것이다. 용기를 내라. 힘을 내렴" 하고 아들을 권면했습니다.

 

이렇게 조금 더 가는데 그 앞에 커다란 무덤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보는 아들은 더 절망에 부르짖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처럼 죽은 거예요. 우리도 이 사람들처럼 죽어서 여기에 묻히고 말 거예요. 이제는 절망입니다" 라고 할 때 그 아버지는 생각이 전혀 달랐습니다.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얘야, 무덤은 희망의 징조다. 무덤은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시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덤이 있다는 것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묻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심해라. 용기를 내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것이 무슨 징조이며 무엇을 확증해주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 증거를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까? 어떠한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망입니다.

 

그 어느 시간에도 소망이 있어서 살고 소망이 있어서 용기를 얻고 소망이 있어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소망이란 우리의 욕망을 이룬다는 것도 아니고 유토피아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소망은 곧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느끼고 사랑의 확증을 얻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아무리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더라도 사랑을 모르면 소용없습니다. 또 사랑의 깨달음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아들이게 될 때만이 사람이 능력으로 나타나고 생명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올시다.

 

데이비드 씨멘즈(David Simans)라고 하는 분이, 상담학을 담당하는 학자입니다. 일생동안 많은 사람들을 상담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문제를 듣고 같이 의논하고 해결하려고 애쓴 그런 분입니다. 그의 많은 경험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라고 하는 잡지의 기고한 논문 중에서 말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많은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정서적 문제의 주요원인은 첫째는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를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둘째는 그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베풀 줄 모르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을 베풀면서 참 사랑을 깨닫고 배우게 돼있는 것인데 말이에요. 베풀지 않으니까 받은 사랑도 모르게 되더란 것이죠.

 

여러분, 사랑이란 본래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전혀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오해하는 데서부터 불행을 사게 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는 그 동물의 세계를 이렇게 볼 때 제일 사랑스럽게 보이는 부분이 뭐냐하면 새입니다, . 그 새들 가운데 보면은 그 알을 몇 개 나아서 품고 고생하는 것, 그리고 그걸 깨워 가지고 새끼를 먹일 때, 아니 그거 보통으로는 젖도 먹이고 뭐 어떤 건 내버려두고 그럽디다만은 이 새는 그게 아니더라구요.

 

또 자기가 모이를 물어다 먹이는 것도 있지만은 어떤 새는 자기가 먹었어요. 먹었다가 그걸 토해 먹여요. 토해 먹일 때 새끼가 목구멍까지 주둥이를 넣어 가지고 꺼내먹더라구요. 그걸 몸을 비틀면서 먹이려고 애쓰고 받아먹는 그 관계는 기가 막힌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 잊지 마세요. 그렇게 애써서 정성껏 키웠다고 해서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효도하라고 안 한다구요. 효도를 바라지도 않아요. 훨훨 날아가 버리고 말아요. 그런데 이게 사람들은 새만도 못해요. 변변치 않은 사랑을 베풀면서 대가를 요구하는 거예요.

 

이게 망조라니깐요. 사랑은 절대적인 거예요. 왜요? 우리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잖아요. 엄청난 사랑을 받았어요. 그 받은 것이면 끝난 거예요. 이거 절대적 용서, 절대적 사랑을 받았고 이제 그 절대적인 사랑을 또 다음 세대 사람에게 베푸는 거예요. 베풀었으면 된 거예요.

 

더 이상 바래서는 안되는 거예요. 이게 사랑의 타락이라는 겁니다. 참사랑이란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이올시다. 이게 원천적 진리인데 이것을 떠나고 이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되 의롭다 하시면서 사랑하십니다. 죄인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고 자기의 의를 덮어서 의롭다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 오늘을 삽니다. 그 사랑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사랑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에요. 또 믿지 못하니까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이지요. 거기에 깊은 문제가 있는 거입니다.

 

저는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 비유를 가끔가끔 생각에 떠올리곤 합니다. 이 탕자가 집을 나갔을 때 어떻게 살았을까? 성경은 간단하게 그저 '허랑방탕하여' 라고 요렇게만 말했지만 그 많은 세월 허랑방탕만 했겠습니까?

 

사업도 해 봤지. 자기 딴에는 사업을 하고 돈을 벌고 그래가지고 부자가 되어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서 아버지 앞에서 한 번 아버지의 아들 됨을 자랑하고 싶었고 집에서 아버지를 시중들고 있는 형님 앞에 우쭐하고 싶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뜻대로 안되더라구요. 계속 실패하고 실패하고 그 타락성에서 벗어나지 못 할 때, 자 그는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다시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고 그냥 버텨보려고 생각했을 거예요.

 

마지막에 굶어 죽게 되니까 '아이고 이러다간 난 죽는가보다' 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 봤더니 아버지는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렇게 만족하게 기뻐합니다. 그리고 아들로 그를 영접합니다.

 

그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만은 그 때에 그 아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전 그걸 성경에 괄호하고 그걸 넣어봤으면 좋을 것 같아요. 꼭 이렇게 생각했을 거 같아요. '이런 줄 알았으면 진작 올 걸. 너무 많은 세월동안 나는 밖으로 돌았다. 너무 많은 세월을 잘못 살았다' 라고 생각했을 거란 말입니다.

 

아니 그렇겠습니까?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기에 믿지 못했기에 밖으로 나돌았던 거에요. 사랑을 몰랐던 거예요. 이미 사랑을 받았고 사랑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랑에 대한 수용성이 문제입니다. 오직 겸손한 자 만이 사랑을 믿을 수 있고 사랑을 믿는 자만이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에요. 생각하면 모든 것이 사랑이죠. 사랑 안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시카고 대학에서 강연을 했을 때 학생 하나가 딱 따라나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많은 책을 쓰시고 많은 연구를 한 평생 하시고 또 가르쳤는데 당신이 그 동안 연구하고 배운 심오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그는 말하기를 어렸을 때 부르던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한 말일세."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한 말이라고, 바로 그것이 내가 생각한 진리라고. 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이 한 요절을 읽고 두고두고 외우는 말씀입니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찾아 헤맵니다. 사랑 받겠다고. 사랑 받으려고.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 사랑입니다. 기다리는 사랑만이 아닙니다.

 

창조적 사랑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나타납니다. 왜 우리가 그 사랑을 모르겠습니까? 왜 그것을 은사로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왜 우리는 그것을 믿지 못합니까?

이것은 자기 의에 집착되었기 때문이에요. 오늘도 자기 의를 생각하는 그 고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나도 모르게 벌써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많은 사랑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또 그리고 현재 잡다한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만은 이 모든 사건들이 나에게 주신 사랑의 은사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빨리 깨달을수록 좋겠습니다.

 

이 모든 사건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내게 주시는 일이라고요.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앞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약속을 확증받게 됩니다. 틀림없이 앞으로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거니까 말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경험한 그런 내용입니다. 방직공장에 다니는 아주머니가 있습니다. 그 남편이 방직공장에서 일하다가 순직을 했기 때문에 그 부인이 대신 방직공장에 취직이 되고 이렇게 살아가는데 유복자를 낳아 가지고 기숙사에 갖다 놓고, 일하고 나와서 젖먹이고 일하고 나와서 젖먹이고 이렇게 키웠습니다.

 

어느 날 그 기숙사에 불이 났습니다. 불이 타오를 때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소방서원들이 말렸지만은 그는 그대로 뛰어들어가서 아이를 품에 안고 뛰쳐나왔는데 머리카락이 홀랑 타고 얼굴도 다 타서 얼굴이 얽었습니다. 그런 분입니다.

 

그 어린아이가 잘 자랐는데 얘가 철없을 때 유치원 다니고 초등학교 다니고 요럴 때입니다. 아이들은 서로 다투다 보면은 상대방의 약점을 꼭 건드리거든. 그래서 싸우게 되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너 어머니는 곰보다" 이런다 말이에요.

 

그러면 얘는 집에 돌아와가지고 엄마는 왜 남의 엄마처럼 예쁘지 않고 곰보냐고. 엄마는 왜 곰보냐고 그리고 박박 우는 거예요. 이런 답답한 일이 있나. 이게 기막힌 일이요. 걔가 좀 얼마 컸을 때, 엄마는 얘를 놓고 옛날 결혼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이렇게 예뻤다.

 

그런데 이러한 일로 인하여 너를 살리기 위하여 내 얼굴이 이렇게 됐다. , 이래도 보기 싫으냐?" 철없는 아이지만 그 엄마를 바라보면서 그는 울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그 다음에 누가 "네 엄마는 곰보다" 그러면 "어림도 없다. 우리 엄마는 천사다. 우리엄마는 세상에 가장 예쁜 분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을 확증 받고 보니까 이제는 엄마가 용돈을 주든 안주든, 책망을 하든 칭찬을 하든 어머니가 내게 대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사랑의 확증을 얻었거든요. 이제 아무 문제도 없는 거예요. 그런 어린애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아들을 주었다는 말은 사랑의 극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의 사랑이 없습니다. 내 목숨 주는 것 보다 내 아들 주는 게 더 어려운 거예요. , 보세요.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시는 그러한 사랑,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그럼 왜 안 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주시든, 안주시든 주시든 그건 전부 사랑이에요. 그건 전부가 사랑이요. 바로 이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믿으면 믿을수록 어쩌면 사랑의 사람, 용기의 사람,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다 하는 말씀이올시다.

 

여러 해 전에, 제가 우리 소망교회에서, 이 사무실에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 일생 오래오래 기억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안양 교도소에서 공교롭게 제가 들어가서 세례를 베풀 때 저로부터 세례를 받았어요.

 

여러 목사님들이 가서 일제히 세례를 주시는데 나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 청년 하나가 출소되어 가지고 제 방에 들어왔습니다. 전과 7범입니다. 절더러 직장을 소개하라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누군 지도 모르고 전과 7, 어느 직장에 내가 쉽게 소개하겠습니까?

 

그래 망설이고 있으니까 이 청년 하는 말이 "그럴 줄 알았다구요. 사랑을 외치고 사랑을 부르짖지만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아서 고아원에 내버렸답니다. 어디에 가서 사는 지 모릅니다. 자기 자식을 내버리는 그런 세상입니다.

 

내가 거기서 자랐고 열네살 때 담장을 넘어 도망을 해 가지고 오늘까지 이렇게 방탕하며 방황하면서 전과 7범이요. 이렇게 살았는데 사랑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쓸데없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사랑은 없습니다" 하고 몸부림을 치는데 아 이거 참 큰 일 났더라구요.

 

제가 다시 그 청년을 붙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들은 자기자식이기 때문에 먹이기도 하고 입히기도 한다. 그러나 너는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너에게 젖을 먹였어.

 

네 기저귀를 갈아 채웠다. 네가 모르는 사이에 너는 너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네가 살아난 것이고 건강하게 자랐고 네가 한번 농사한 일 없지만은 오늘까지 먹고 살았어. 이래도 사랑이 없다는 거냐? 너는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한 특별한 사랑을 받은 거다."

 

이 청년이 마음을 돌립니다. 고아원 원장을 생각하고 자기를 사랑해 주던 아주머니들을 생각하더라구요. 그러더니 목을 놓고 울어요. "내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정말 저는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어서더라니 "그 직장은 어떻게 하냐?" 그랬더니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만 알았으면, 나를 사랑하는 분이 있다는 것만 알았으니까 이제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굴이 환하게 돼서 인사하면서 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 자신도 크게 감격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문제의 근본은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내가 받은 사랑, 지금도 내가 그 사랑 안에 있음을 몰랐어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아들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 앞에 있는 것 전부가 은사적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혜적 선물이요. 카리스마요. 기프트(Gift). 그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은혜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그런고로 생각해야합니다. 나의 고독의 원인은 나의 고집 때문입니다. 내가 절망하고 있는 것은 내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랑을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과거에 이미 사랑을 받았고, 앞에 사랑의 약속이 있고, 오늘 내가 처한 처지 모든 현실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안에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향한 구체적인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 안에 내가 있고 그 사랑 안에 나의 삶의 의미가 있고 내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사랑하시는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에 사랑의 승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도 많은 은혜가운데 살면서도 무지몽매하고 또 교만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나만이 버려진 자인 것처럼 그렇게 고집부리면서 살아가는 저희들, 그리고 절망하는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십자가로 확증하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간직하면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의롭다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모든 것을 은사로 받고 그 은사 안에서 감격하고 그 은사를 누리고 기뻐하며 승리할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넉넉히 이기느니라 /8:31-39/ 곽선희 목사

2014-11-18 14:58:34

 

얼마전에 백두산 호랑이 를 생포하는 장면이 TV에 다큐멘타리로 나온 일이 있 습니다. 사냥개가 백두산 호랑이를 끝까지 추적하고 바위구멍까지 몰고 갑니다. 무서운 호랑이의 울부짖음과 그 아랑곳 없고 막 덤벼대는 사냥개들을 볼 수 있었습니 다.

 

그들의 당돌함에 오히 려 호랑이가 깜짝 놀라서겁 을 먹는 것 같았습니다. 불 타는듯한 눈동자나 그 거대 한 송곳니, 그 앞발을 막 휘 두르고 있지만은 그 위용 앞 에서도 당당하게 대들고 있 는 개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 다.

 

여러분 어찌 개가 호랑 이 앞에 대들 수 있겠습니 까? 그것은 바로 그 뒤에 어떤 맹수라도 제압할 수 있 는 포수가 총을 들고 서있기 때문입니다. 믿는데가 있어 서 개가 호랑이 앞에 대드는 겁니다. 당당한 겁니다. 결 코 비굴할 수 없습니다.

 

여 러분 믿는데가 있어야 이길 수 있는 겁니다. 힘은 그 믿는데에 근거하고 있는 겁 니다. 상황에 있는 것이 아 닙니다. 내가 무엇을 믿고 사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느낄때와 두 려움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사랑을 느낄때와 공포를 느 낄때에 사람의 능력의 차이 는 10배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때는 사람이 직역으로나 혹은 건 강으로나 어떤 능력으로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 을 다 발휘할 수가 없습니 다.

 

그러나 큰 사랑을 느끼 게 되면 상상할 수 없는 놀 라운 능력이 솟아 오릅니다. 병도 이기고, 지혜도 있고, 지도력도 생깁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신적 세계만이 아 닙니다. 의학적으로도 사회 학적으로도 또 교육학적으로 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 사랑을 느낄 때 큰 사랑에 감격하고 있을 때 자기가 가진 그 잠재의 모든 능력을 10분 발휘할 수 있습 니다. 공포에 떨고 의심하 게 되고 낙심하게 되면 자기 힘이 다 소진되고 맙니다.

 

가진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초라한 존재가 된다는 말씀 입니다. 1788년에 영국에 역사가 에드워드 기본 이라 는 사람이

 

"로마제국의 쇠퇴 와 멸망"

 

- The decline and for of the empire 라고 하는 유명한 그런 유명한 책 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는 이 책에서 로마제국의 그 멸 망의 원인을 다섯가지로 계 속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 째는 이혼율이 급증해서 인 간사회에 기초인 가정이 붕 괴되고 이로 인해서 가정 신 성이 무너지고 자녀들이 방 황하게 됐다는 겁니다.

 

그 러니까 한가정의 파괴라는 것은 지금 당장은 두사람 사 이의 문제같이 보이지만은 그것은 곧 자녀의 문제요 그 다음에는 사회의 문제요.... 나라가 망하는데 원인이 바 로 여기에 있다는 거예요.

 

가정붕괴. 이혼의 급증, 이 것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 예나 오늘이나 대단히 중요 한 결론입니다. 둘째는 높 아지는 세율과 계획성 없는 재정지출입니다. 낭비올시 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 지고 필요없는 낭비 바로 이 낭비성이 개인이건 나라건 다 망치는 것이올시다.

 

세 상에 제일 미련한 것은 벌고 쓰는게 아니라 벌 셈치고 먼 저 쓰는거죠. 그게 망조요. 빚낸돈 가지고 연락하는 것 처럼 바보스러운 일은 없습 니다. 뭐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낭비해서 망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비 정상적 쾌락의 추구입니다.

 

뭐 자극적인 것을 즐기고 원 형극장에서 그거 사람과 동 물이 싸우는 것을 보고서 함 성을 지르고 이 도덕윤리가 땅에 떨어집니다. 다시 말 하면 잘못된 쾌락, 비도덕적 인 쾌락을 즐겨나갈 때 그 사회는 무너진다는 소리입니 다.

 

또한 군비확장과 인구 감소입니다. 역시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쾌락주의에서 는 인구가 감소합니다. 다 섯째는 종교의 부패입니다. 도덕세계와 정신세계를 지도 하는 종교가 형식화 되고 생 명력을 잃게 될 때 결국은 그 사회도 나라도 다 무너지 더라. 많은 세월 로마의 역 사를 공부하고 다섯가지 결 론을 냈습니다.

 

자 이 이야 기는 결코 옛날 이야기가 아 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사 회의 이 현실로 지금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말씀이올시 다. 여러분 우리는 흔히 말 하는 승리라고 하는 말을 합 니다. 이긴다. 진다. 뭐 이런말을 합니다만은 승리라 는게 뭡니까?

 

이것은 하나 의 모든 것을 전쟁관계로 그 렇게 보는데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의 싸움, 하 나의 싸움이니까 이기고 지 는거죠. 자 이제 보십시다. 먼저는 정치적 승리가 있습 니다. 정치라는 것은 지배 력의 문제입니다. 힘겨루기 입니다.

 

지배를 당하느냐 지배하느냐? 그것이 정치적 싸움입니다. 여기서 좀 실 례지만은 '모택동어록집'에 있는 얘기를 제가 한마디 하 겠습니다. 재밌는 얘기예요. 총을 들지 아니한 싸움이 정 치다. 총을 든 정치가 전쟁 이다. 하도 오래전에 읽었 지만은 하도 재미있는 얘기 가 되서 마음에 늘 기억됩니 다. 그렇습니다.

 

총을 들지 않고 싸우는 겁니다. 이게 정치요. 그러면 이 싸움에 서 진다 이긴다가 뭡니까? 뭐가 이기는거고 뭐가 지는 것입니까? 결국은 지배당하 는 편이 진거고 지배하는 편 이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거에 이기면 지배 자가 되고, 지면 지배당하는 자가 됩니다. 뭐 그런거 아 닙니까? 힘겨루기입니다. 또 하나의 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제적 승리라 는 겁니다. 부하고 가난하 고, 가지고 못가지고, 실패하 고 성공하고.... 결국은 빼앗 기느냐 빼앗느냐? 많이 가 졌으면 얼마나 더 많이 가졌 느냐? 이것이 바로 경제 전 쟁입니다. 어떤때는 살아남 기 위해서 어떤 더 많은 것 을 가지기 위하여 무서운 싸 움을 벌입니다. 승자는 흔 히 말하는 부자요 재벌입니 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영 원한 승자가 없는 것 같습니 다. 세번째는 교육적 차원 에서의 전쟁입니다. 기술전 쟁입니다. 보다 더 앞선 기 술, 보다 더 많이 알고 뭐 그래야 이기는 거요. 뒤쳐 져 돌아가면 이거는 부끄러 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야 승 자로서의 영광을 누릴수가 있는 것이올시다. 특별히 이 바쁜 세상에 빨리 변하는 change 이 세상에서는 더더 욱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어느사이에 말귀도 못알아 듣는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싸움에 졌으니깐요. 비참해 집니다. 이보다 더 근본적 인 것이 바로 도덕적 전쟁입 니다. 인격과 양심의 문제 입니다. 진리의 문제올시다. 여러분 잘 아시는바와 같이 운동경기 같은 것을 보세요. 그것은 단순한 운동경기 같 이 보이고 힘겨루기처럼 보 이지만 거기에도 도덕성이라 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약물을 먹었느냐 안먹었느니 하는 도덕적 문제가 나오고 또 나아가서는 규칙을 지켜 야 됩니다. 여기서 규칙을 어기면 실격되고 맙니다. 규칙 안에서 되어져야 합니 다.

 

보다 더 정신세계가 있 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만은 결코 미워해서 는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뭐 많이 좋아하는건 아닙니 다만은 어쩌다가 텔레비전에 나오면 제가 그 복싱하는 권 투하는 것을 봅니다.

 

제가 권투하는 데서 보고싶은 장 면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렇게 피가 나오도록 때리 고 또 남 피나는 자리를 더 때려요. 그냥 무자비하게 내려치다가도 종만 땡! 하면 또 가서 끌어안는걸 볼 때 하! 인생사가 다 저러면 얼 마나 좋을까 저는 그것 때문 에 봅니다. fair play 절대 로 미워서 때리는게 아니예 요.

 

미워해도 안돼요. 그 누구처럼 남의 귀를 물어뜯 으면 나쁜 놈이예요. 그거 는 운동할 자격이 없는 거예 요. 세상에 힘겨루기가 있 기는 있지요만은 그러나 절 대로 미워해서는 안돼요. 진리성, 도덕성은 그대로 지 켜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서 어떻 게 살아도 누구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해서는 안돼 죠. 도덕성을 잃어버리면 다 실패하는 거예요. 또 좀 더 나아가서는 종교적 문제 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와 거룩함을 어떻게 지켰 느냐는 겁니다.

 

우리의 싸 움의 대상은 궁극적으로는 사탄이요, 악이요, 죄요, 자 기 종역입니다. 엄격히 말 하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 니다. 이제 이 싸움에서 좀 더 영적으로 종교적으로 생 각해야 겠습니다. 신앙적으 로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차원에서 승부가 가려집니다. 먼저는 믿음입 니다. 끝까지 믿으면 이긴 겁니다. 믿음이 없으면 진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유서라고 하는 디모데후서 4 장에서 말합니다.

 

"나는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

 

믿음, 믿음이 흔 들리면 진겁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 하나님의 의와 사 랑과 진리 그 거룩함에 대한 확실한 믿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돈은 잃어 버렸지 만 믿음은 얻었어요. 사업 은 실패했지만 모처럼 믿음 을 가졌어요. 그러면 결코 패자가 아닙니다.

 

믿음, 특 별히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 다. just be cation 의롭다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다. 다 시 말하면 의롭다 함을 입은 자기 존재에 대한 정체감에 대한 믿음입니다. 나는 의 롭다 함을 받았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떤일을 당 할 때마다 잘되든 못되든 사 탄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네가 당한 일은 죄 때문이 다. 너는 심판을 받고 있다. 너는 저주를 받고 있다. 하 고 마귀가 우리를 시험합니 다. 여기서 승리란 뭡니까?

 

아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 여 죽으셨고, 주는 나와 함 께 하실뿐더러 나를 의롭다 하셨느니라. 그런고로 나는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다. 확실한 믿음, 이 믿 음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모든 사건을 통해서 내가 하 나님의 자녀됨과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받은 거룩한 존 재임을 더욱 더욱 확인하게 됩니다.

 

이 믿음이 더욱 굳 건해 질 때 그는 승자올시 다. 이 믿음이 흔들리면 그 건 패자입니다. 그걸 우리 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 틴루터가 종교개혁을 감행했 을 때 뭐 여러 가지 적이 많 고, 비난이 많고, 뭐 적이 밖 에만 있는게 아니라 자기 동 기속에도 있어서 너무 너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가 종 교개혁을 해나갈 때 더욱 어 려웠던 것은 마음속에 있는 시험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말하면 마귀가 나를 시험하는데 너는 죄인이다. 죄인이 어떻게 종교개혁을 하느냐?

 

너는 더러운 존재 다. 네가 어찌 하나님의 일 을 할 것이냐? 너는 죄인이 다. 너는 허물이 많다. 너 는 구제불능이다. 마귀가 계속 시험을 합니다. 그때 에 그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 마귀를 향해서 잉크병을 내던져서 잉크병이 벽에 가 서 부딪혀 깨지면서 잉크자 국이 주루룩- 흘렀다잖아요.

 

내 그걸 책에서 읽고 그 장 소로 한번 갔었습니다. 가 서 그가 성경을 번역하고 있 던 바로 그 자리에 가서 잉 크병 자리가 여기에 있을텐 데 어디갔냐고 그랬더니 다 치워버렸다고 그래요. 왜 그걸 치워버렸냐고. 그 소 중한 것을 말이요.

 

그는 마 귀와 더불어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승리의 비결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늘 마 귀에게 대답했습니다. neverdleless - 그럼에도 불 구하고. 너는 죄인이다 라 고 말할 때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 랑하신다.

 

너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하 는 절대 은혜에 대하여 절대 은혜를 가지고 대항을 했을 때 그는 이겼습니다. 그래 종교개혁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 든 사건에서 믿음을 잃지 말 아야 합니다. 오히려 믿음 이 더 확실해져야 합니다. 시간시간 새로운 믿음을 가 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이웃에 대하여 이제는 더 확 실히 믿어야 합니다.

 

이제 는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의심은 사라지고 신뢰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때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예요. 그리고 또한 오늘 본문에 보 는바와 같이 이제 사랑에 대 한 확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을 믿 습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많은 사건을 통 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더 확실해 집니다. 여러분 이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미워하면 진 겁니다. 승리 는 사랑에 있습니다. 혹이 라도 미워한 일이 있었습니 까? 이제는 사랑하시기 바 랍니다.

 

이제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 람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이제는 비난하지 마십시다. 이 어려운 사건속에서도 서 로 비방하는 것은 아주 영원 히 구제불능한 망조입니다. 어려움이 있을수록 서로 존 경하고, 어느사이에 우리마 음 깊은곳에서부터 사랑하는 마음이 끌어올라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 랑하고요, 기업을 사랑하 고.... 바로 여기에 승리가 있 는 것이올시다. 유명한 마 틴루터 킹 목사님은 세상 떠 나기 직전에 유명한 설교를 남겼습니다. 그 설교중에 이런말을 합니다.

 

누가 나 에게 묻기를 내가 죽어 장례 식을 할 때 너를 위해서 조 사를 하는 사람이 너를 향하 여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주 기를 바라느냐? 라고 물을 것 같으면 나는 죽어서 관속 에서 이런 말을 듣고 싶노라 고 여기 누운 마틴루터 킹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 라고... 그 말 한마디가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더 이상 비방하지 맙 시다. 승리는 사랑에 있습 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 운 사랑을 느끼고 감격하고 그 은혜에 살뿐더러 동시에 이제는 이제는 남을 사랑합 니다. 사랑의 눈으로 봅니 다. 사랑의 귀로 듣습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는 것이예 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 고도 이제는 사랑만이 남았 습니다.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어요. 모든 사람이 다 고 맙고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 다. 여기에 승리가 있는 것 이예요. 많은 것을 가지고 도 남을 의심하면 진것이예 요. 높은 자리에 앉아서도 누구를 미워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구제불능한 사람이요 이미 패자예요. 그것은 하 나의 피해의식입니다. 승자 는 높은 차원에서 모든 사람 을 사랑합니다.

 

오직 사랑 뿐입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절망이나 낙심이나 소외감은 무서운 실패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제 십자가의 사랑을 확인 하면서 엄청난 사랑의 불덩 어리가 되었어요.

 

옛날 손 양원목사님에게 붙여 드렸던 이름처럼 사랑의 원자탄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거기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소망의 문 제입니다. 절대로 낙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시 는바와 같이 일이 어려워지 고 혼란해지고 많은 변화가 생길 때 변화가 생기면서 우 리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점점 어두워 집니까? 점점 밝아 집니까? 승리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세월이 갈 수록 점점더 밝아집니다. 소망에 세계가 확실해 집니 다. 그래서 로마서 53절 에서 말합니다. 환란중에서 도 즐거워 하니니 환란은 인 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소망을 이룬다. 모든 환란 이 우리의 소망을 순수하게 만듭니다. 믿어볼만한 건 믿었고 기대할것도 없는걸 기대했습니다.

 

소망의 가치 가 없는 것을 소망했습니다. 이 많은 진통속에서 밝은 소 망, 하나님의 약속, 영원한 세계, 신령한 세계를 향해서 종말론적 소망으로 그 소망 이 점점 더 분명해진단 말이 예요. 여기에 승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이 오 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은 먼저는 죽음의 세계를 넘 어서는 승리를 말하고 있습 니다. 사나 죽으나, 위험이 냐 칼이냐, 종일 죽임을 당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죽 음의 문제를 넘어서는 자에 게 진정한 승리가 있어요. 죽은 문제를 놓고 벌벌떠는 자에게는 그는 누구도 패자 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믿고, 그리스 도안에 새로워 지면서 죽음 의 세계를 넘어서는 아주 초 월적인 승리자로서 오늘을 살아야 하고, 또 오늘 본문 에 자세히 보면 현실을 넘어 서는 승리를 말합니다.

 

현 실은 복잡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 다.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그사람을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구원받은 자의 승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사입니다. 모 든 것이

 

신령한 선물이요. 하나님 이 내게 주신 선물이요. 좋 은 조건도 악조건도 건강도 질병도 형통도 실패도 모든 것이 내게 주시는 선물이요. 왜요? 하나님은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무엇을 아끼겠습니 까?

 

그런고로 모든 것이 내 게 주시는 은사라고 하는 그 해석력을 가져야 돼요. 은 사 아닌 것이 없어요. 알고 보면 다 선하시고 다 귀한 선물이요. 이 모든 일들이 내게 주신 선물이요. 거기 에 승리가 있는 거예요.

 

그 리고 나 자신에게 집착하는 생각에서부터 이것을 극복해 야 됩니다. 그래서 말입니 다. 나는 죽어져도 하나님 의 뜻은 이루어질 거예요. 내게는 실패가 있어도 하나 님의 일에는 실패가 없어요. 오히려 내 실패와 내 죽음과 내 당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 님의 위대한 역사는 더 크게 이루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어갑니다. 그러 나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 고 하나님의 복음은 크게 전 파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 았습니다. 이것에 승리가 있었습니다. 나 자신에게 집착할 때 모든일이 이렇게 엉키는 거예요. 그러나 크 고 놀라운 경륜속에서 나를 이해하게 될때 모든 것은 승리로 해석될 것이요.

 

좀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세요. 십자가 지시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엄청난 승전가입니다. 아직 도 할 일이 많아요. 33세에 죽어가면서 다 이루긴 뭘 이 루었어요. 그러나 내가 해 야 할 일, 나로써 해야 할 일, 내게 맡겨진 일, 다 했습 니다.

 

이제 이 사건을 통하 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크 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에 승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세요. 누가 우리 를 대적하리요. 천하무적이 요. 누가 우리를 송사하리 요. 우리의 일을 누가 침해 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죄인 취급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 시겠느뇨? 모든 것을 은혜 의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고로 이제 말합니다. 그 사랑하시는 자 그 사랑으 로 인하여 나는 넉넉히 이기 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에 진정한 승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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