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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시편 설교 모음

시편 84편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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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84:1-8/ 곽선희 목사

2014-11-27 13:39:55

 

백화점 왕 워너 메이커(John Wanamaker)의 생애를 담은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워너 메이커가 어느 날 벤저민 해리슨(Benjamin Harrison)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정중하게 회답을 했습니다.

 

"나는 주일을 성수합니다. 주일날은 꼭 교회에 나가야 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해야 합니다. 또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이 일을 계속하지 못한다면 장관직이라도 맡을 수 없습니다." 라고 회답을 합니다.

 

해리슨 대통령은 이것을 참작해서 주일날 교회 나가는 것과 교회학교 교사하는 것을 100% 허락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허락하겠으니 그런 조건으로 장관직을 맡아 주면 좋겠다고 해서 그는 체신부 장관이 됐습니다. 그 후에 그는 매 토요일이 되면 교통이 불편한 옛날에 그 느린 기차로 워싱턴 디 씨에서 필라델피아까지 타고 갑니다.

 

그리고 여전히 주일날마다 교회에 나가서 성수주일하고, 예배드리고, 주일 학교 어린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장관직 4년 동안 무려 20만 킬로미터를 기차로 여행을 하면서 그렇게 성수주일을 하고 봉사했습니다. 한 기자가 물었답니다.

 

장관직이 주일학교 교사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때 그는 대답했습니다. "장관직은 몇 년하고 마는 것이고 교사는 평생 하는 것이요. 장관직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만, 내가 하는 이 거룩한 일은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이고 나만이 하는 일입니다."

 

19살 때에 교회학교 교사로 임명이 되어서 85세까지 67년 동안 교회 출석을 개근하고, 교회 봉사를 성실하게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는 인물입니다.

 

다시 생각합시다. 67년간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한 그러한 인물입니다. 존 워너 메이커, 그는 백화점 왕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만 백화점 왕 이전에 그는 철저히 주일성수하는 사람이요, 교회를 중심으로 산 사람이요,

 

교회학교 봉사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거기에 온 생을 기울인 사람입니다. 이것은 주업이고 나머지 모든 일은 부업이라고 생각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현대인의 불행을 말하면서 누제닉 노이로제(noogenic neurosis)를 말합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하면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찾지 못할 때 다른 사람에 의해서 휘둘림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면서 내가 나로 사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 내가 살아야 하고 내 존재가 없는 생을 살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의 말이 너무 의미가 있기에 한번 소개합니다.

 

첫째, 거울에서 눈을 떼라. 그리하면 세상이 보일 것이다. 너무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여러분, 거울을 얼마나 보십니까? , 아주 예쁜 여자하고 사는 분이 한 분 계시는데 제가 얼마나 복이 많으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그런 말 말랍니다.

 

자기가 가만히 보니깐 매일 2시간 동안 거울을 본대요. 여러분, 거울에서 눈을 떼세요. 자기 얼굴 더 들여다봐야 별거 없습니다. 달라질 것도 없고 점점 볼 상 없어집니다. 거울에서 눈을 떼라. 비로소 세상이 보일 것이다. 비로소 다른 사람이 보인다.

 

나 자신을 보는 생각, 나 자신에게 도취되는 것, 나 자신에게만 집중적으로 집착하는 그 생각 포기하라. 그러면 순간 다른 사람이 보이고 세상이 보일 것이다. 이 얼마나 귀중한 얘깁니까? 이기적인 생각,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바른 세상을 살 게 될 것이다.

 

또 하나는 하루하루를 잃어버린 어제라고 생각해라. 오늘 내가 하루를 살 때, 이건 축복이에요. 내가 어제를 잃어버리고 괴로워했는데, 어제 뭔가 잘못했고, 어제가 아쉽고, 어제 실수한 게 많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있는데,

 

오늘이 있다는 것은 잃어버린 어제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또다시 잃어버리지 않도록 한순간 한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고, 어제를 잃어버리고 후회하던 같은 후회를 오늘과 내일은 하지 않도록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장 귀중한 얘기는 이것입니다. 셋째, 사랑하고 봉사하고 헌신할 대상이 있거든 자기를 아끼지 마라. 아꼈다가 다른 데 쓸 것 없어요. 그냥 쏟아 버리라는 거예요. 사랑하고 헌신할 것을 찾았거든 거기다가 온 생을 쏟아 부어버리라.

 

그러면 가장 성공적인 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 많은 것을 위해서 애쓰고 삽니다만 정말 내 온 생을 다 쏟아 부을만한 일을 만났으며 또 그렇게 쏟아 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바로 이것을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의 시는 다윗의 시요, 다윗의 시 중에 아주 대표적인 유명한 시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이 왜 복되고 다윗이 왜 다윗 되었는가 하는 그 핵심을 말해주는 부분입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목장에서 양을 치던 단순한 목동이었습니다.

 

초라한 목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스라엘의 왕이 됐습니다. 그 왕이 되는 과정도 드라마틱한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그는 큰 실수를 했습니다.

 

백성 앞에나 가정 앞에나 누구에게도 이보다 부끄러울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다윗을 좋아하십니다. 그가 선한 사람도 아니고, 그가 의인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다윗을 사랑하십니다.

 

구약 성경에 다윗이라는 이름이 800번 이상 나옵니다. 어쩌면 사람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다윗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다윗은 의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그에게 무엇이 있느냐? 정직한 마음이 있어요. 그에게는 겸손이 있고, 정직함이 있고, 진실함이 있었더라는 거예요.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냥 추상적인 게 아니었어요.

 

구체적이었어요. 성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이 구체화됩니다. 어찌 생각하면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모든 허물을 다 용서하세요. 다 덮어 주세요.

 

하나님의 용서처럼 완전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용서한다고, 용서한다고 했다가도 며칠 있다 보면 또 아무 때 그랬지? 하고 나옵니다. 10년 묵은 것까지 나옵니다. 10년 전에 뭐가 어쩌고, 뭐가 어쩌고 말이에요. 인간의 용서라는 게 그저 그래요. 하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엄청납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성경을 읽다가 신약부터 먼저 보려고 마태복음을 읽어 나가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그래서 그 마태복음 1장 읽어보면 '낳고'만 있어요. 낳고, 낳고, 낳고……. '많이도 낳았다.' 그래 내가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게다가 조금 더 커서는 이 '낳고, 낳고'는 보기 싫어서 안 봤어요. 그거 딱 빼고 그 다음부터 성경을 읽었는데 - 제 기억에 17살 때입니다. '아니지! 낳고 낳고도 성경이다. 읽어야지.' 한 말씀 한 말씀을 다 읽기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이렇게 읽어나가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전 그 말에서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 때 경험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굽니까? 그런데 족보에다가 까지 그렇게까지 밝힐 거 없잖아요. 그저 맥락대로 보면다윗이 솔로몬을 낳고해도 되거든요. , 거기다가 왜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라고 박아 놓았습니까? 원 세상에 이렇게, 이건 너무 솔직해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 왕이 그 요사스런 밧세바의 아들이더라구요. 어찌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용서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밧세바와 다윗과의 관계가 그게 얼마나 엄청난 죄입니까? 간통죄에 살인죄에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 용서하시고 그 둘 사이에서 지혜의 왕 솔로몬이 태어나고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 참 하나님 좋은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그런 줄 알고 믿으세요. 걱정 말고 믿으세요. 어두운 과거를 괴로워하지 마세요. 이게 하나님이요. 좌우간 더 얘기할 거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했어요.

 

그러면 사랑받을 만한 그릇이 어디 있었나? 그건 성전 사랑하는 마음이에요. 그가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들어올 때 너무너무 좋아서 겉옷이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왕이라는 체통을 생각하지도 않고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어요.

 

사울왕의 딸인 미갈 왕후가 그것을 보고 "저런 베들레헴 목동 같은 놈 봤나. 저렇게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저거, 저거 춤을 추고 있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다윗이 이것을 뒤늦게 알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법궤를 이 성으로 모셔 들이니 너무 기뻐해서 춤을 추었는데 네가 나를 업수이 여겨?' 그래가지고 그 다음부터 미갈을 가까이 하지 않았답니다.

 

요샛말로 생과부가 된 거예요. 보세요. 다윗은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구체적으로 나타났어요. 그래서 그는 성전을 지을 준비를 했습니다.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짓습니다만 실제 그것은 다윗이 지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사랑합니다. 여호와의 집을 사랑합니다. 사실은 솔로몬이 성전 짓기 전이니까요. 이 성전이라고 해봐야 수달피 가죽으로 된 천막집입니다. 낡아빠진 몇 백 년 된 천막입니다. 이 천막, 이 성막을 그리 사랑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이 성막을 바라보며 그렇게, 그렇게 행복해 했어요.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했어요. 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가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돼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오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 시는 다윗이 피난의 길을 다닐 때 쓴 겁니다. 성전을 사모합니다. 성전이래야 천막입니다. 그런데 사랑합니다. 사모합니다. 너무 사모해서 마음과 육체가 쇠약했데요. 상사병까지 걸렸어요. 그리고 제비와 참새를 부러워했습니다.

 

제비, 참새는 마음대로 날아가는데 나는 어째서 이렇게 멀리 성전에서 멀리 나와 있더란 말이냐.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냐? 그래서그는 문지기로 있는 것도 좋습니다.’ 그랬어요. 성전 가까이만 있다면 문지기로 있는 것도 좋습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그건 천막이에요. 화려한 성전이 아니에요.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 성경은 말합니다.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온의 대로, 하나님의 전으로 가는 큰 길이 마음속에 있어요.

 

여러분, 저는 목사이기에 이래저래 임종을 볼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임종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소원이 뭔지 아십니까? 뭐 아들 만나겠다, 딸 만나겠다, 뭐 어쩌겠다, 그런 얘기 조금 하다가 그거 다 지나간 다음에 마지막 가까워지면 딱 한마디가 나옵니다. '

 

목사님, 교회 한번 나가보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예배 시간에 한 번 더 교회에 나가보고 죽었으면…….' 이게 마지막 소원이에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 때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어서 한 번 더 교회에 나가게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기도 하지만, 내 속으로는 이런 생각도 한답니다. '

 

진작 그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았을걸, 진작 그런 마음으로 일생을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그렇게 살았다면 세상이 달라졌을 거예요.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어요. 순례자의 마음이에요.

 

성전을 생각하면 기쁘고, 성전으로 가면서 기쁘고, 눈물 골짜기로 통행해도 샘이 솟아오르고, 마침내 주의 전에 거해서 찬송할 때 이보다 행복할 수 없어요.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성전에 딱 들어서면서 오르간 소리를 들을 때, 오르간 소리만 나도 벌써 가슴이 편안해지고 어떤 때는 눈물이 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여러분, 제게 일생 동안에 정말 이제는 더 어찌할 수가 없는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나가던 교회, 고향 교회, 그 고향 교회가 폭격 맞고 불타는 걸 보면서 저는 산을 넘었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예배당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남한에서라도……. 제가 몇 년 전에 북한에 갔습니다. 예배당은 다 없어지고 터도 없어요. 다 갈아서 밭을 만들었더라구요. 제가 밭 한 가운데 서서 그 교회가 있던 그 자리에 서서 한참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옛날 그 자리에 있었던 교회를 생각하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이 예배당을 다시 지어야 할 텐데……. 들리는 말로는 바로 그 자리에 예배당이 있던 그 터에 저의 어머니는 매일 아침, 매일 밤 나가서 기도하셨답니다.

 

눈이 하얗게 오는 날도 가마니때기를 쓰고 거기 엎드려 기도하고, 새벽에 눈 속에서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그래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한다.' 어떤 것으로 표현이 돼야겠습니까?

 

시온의 대로가 있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구체화되어야 돼요. 다윗은 말합니다.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성전으로 가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성전에 거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교회 중심, 주일 중심, 예배 중심, 말씀 중심. 그래서 우리 예배하는 사람들, 하나님 섬기는 사람들은 늘 성전을 바라봅니다. 여러분, 집에서 기도할 때도 가능하면 성전 쪽을 향해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지만 성전에 가 있는 그 마음으로 성전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꼭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쪽을 향해서 문을 딱 열어 놓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마음들이 뭘 말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절절한 사랑의 표현이에요. 다윗이 이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했어요.

 

심지어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거기서 샘이 솟아오릅니다. 이 성전에 가까이 가면은 모래 바람이 부는 데가 있어요. 여리고 골짜기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막 눈물이 나와요. 이 눈물을 다 통과하고 나면 아름다운 성전 뜰에 도달하게 된다 하는 그런 말씀이죠.

 

키에르 케고르(Kierkegaard, Soren) 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는 「이것이 저것이냐」 하는 그의 책 속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의 단계는 첫째가 미학적 단계. 젊었을 때는 쾌락과 신기함을 쫓아서 삽니다.

 

아주 다 예술가에요. 시 한 수는 써 봤고,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단계가 지나가면 둘째, 윤리적 단계로 의무적으로 삽니다. 결혼했으니 살아야 되고, 백성이 됐으니 세금내야 되고, 전부 의무적입니다. 의무에서 사는 것은 아주 피곤합니다.

 

미학적 단계는 지루함으로 끝나고, 윤리적 단계는 언제나 허전합니다. 피곤합니다. 세 번째 단계가 종교적 단계입니다. 죽음을 알고, 끝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힘을 다해 세상에 대해서 절망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마음으로 사는 거죠.

 

하나님과 confrontation - 직면,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것, 그런 마음을 점점 확실하게 확대해 가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여러분,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성전으로 향하는 마음, 성전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습니다. 요새 와서 매스미디어 시대가 되니까 걸핏하면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목사님, 목사님 제가 교회 나가서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보다 '텔레비전으로 봤어요, 인터넷으로 봤어요.' 목사가 들을 때 제일 좋지 않은 인사가 뭔지 아십니까? 목사하고 만날 때, 말조심해야 됩니다. '목사님, 오랜만입니다.'

 

이거 나쁜 말이에요. 하하하. 목사님보고 오랜만이라면 그거 어떻게 된 거예요? 또 그런가하면텔레비전에서 봤습니다.’ 섭섭해요. 텔레비전이 아니에요. Face to Face, 얼굴과 얼굴을 봐야지 텔레비전이나 보고 앉아서 되겠어요?

 

여러분, 전에 월드컵 할 때, 우리 교회의 정몽준 집사님이 거기 있기 때문에 축구 경기하는 표를 많이 보내왔어요. 하지만 저는 갈 시간이 없어서 다 줘버렸거든요. 연세대 교수님인 박준서 교수님이 날 만나더니 월드컵 경기 하는 곳에 가봤냐고 물었습니다.

 

"안 가 봤는데요." ", 그 표 보내왔을 텐데……." "여러 번 보내 왔는데 다 남 줬는데요." 그 교수님은 십만 원짜리 표를 사가지고 네 번이나 갔다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미쳤냐고 했더니 그것 모르는 소리랍니다. 텔레비전 암만 봐도 소용없답니다.

 

현장에 가서 같이 떠들며, 이 화끈한 걸, 텔레비전이나 보고 앉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그래요. 그러고 나서 명언을 한마디 합니다. 이거 잘 들으세요. '연애소설 아무리 보고 눈물 짜봐야 연애하는 것만 못해.' 연애소설 보는 것하고 연애하는 것하고 같으냐고? 옳은 말입니다.

 

여러분, 텔레비전 좀 그만 보시고 인터넷 자랑하지 마세요. 그런 인사하지 마세요. 그런 인사는 고맙지 않아요. 이 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여기서 내가 이렇게 봐야지 그래야 그게 예배요.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거예요. 그 마음이 중요한 것이에요.

 

요새 매스미디어 때문에 텔레비전 보다가 신앙 비틀린 사람들 많아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만나는 것, 이 자체가 순례의 길이요, 하나님 앞에 나가는 길입니다. 복 받는 길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다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의 순례의 길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성전을 사모하며 살고, 주의 전을 사랑하며 살고, 주 앞에 나오는 마음으로 살고, 주의 집에 거하는 자의 축복을 누리며 살도록 큰 은혜를 더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 /84:5-7/ 이동원목사

2014-11-30 21:01:21

 

부모를 따라 8살의 어린나이로 미국에 이민 가서도 조국 대한민국을 잊지 못하고 태국마크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에 출전하여 체조선수가 되어 반드시 금메달을 따겠다고 결심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꿈은 거의 현실로 이루어질 것 같은 가능성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나이 15살에 올림픽 유망주를 기르는 미국 펜실바니아주 앨런타운 파켓 국립 체조훈련센터에 미국 중학교 대표 선수중 한 명으로 뽑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해 자기 생일을 이틀 앞둔 1983 7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에 앞뒤 공중돌기라는 어려운 공중회전 연습을 하다가 목을 쭉 늘인 상태로 턱을 땅에 받고 떨어져 사지가 마비되어 평생을 휄체어를 타야하는 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체조를 할 수 없다는 운동선수로서는 일종의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가 이 선언을 받는 그날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병원에서 식탁 쟁반을 집어던지며 한바탕 소동을 벌립니다.

 

모든 꿈은 사라졌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재활훈련을 받으며 운명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눈물 골짜기였습니다.

 

긴 이야기를 줄이자면 그런데 하나님은 이 소년을 다시 눈물의 골짜기에서 건져 내시고 그를 우리 시대의 기적의 주인공으로 만드십니다.

그는 콜럼비아 대학 공중 보건학 석사학위, 명문 다트머스 의대를 거쳐 하바드 의대 인턴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한후 마침내 세계 최고의 병원인 존스 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 수석 전문의가 됩니다.

 

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이제 세상 모든 재활 환자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 기적의 주인공이 얼마 전 KBS 인간 극장에도 방영된 이 승복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는 새로운 베스트셀러가 되어 우리 시대 절망의 골짜기에 던져진 모든 사람들에게 기적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시편 84편은 흔히 순례자의 시편으로 불리워집니다.

 

이 순례자들은 초막절 같은 절기를 맞아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꿈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가 눈물의 골짜기로 불리우는 메마른 골짜기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절망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 순간 이 절망에 빠진 골짜기의 순례자들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고 일어나 다시 꿈의 도시 시온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서두에는 고라 자손의 시, 깃딧에 맞춘 노래라는 소개말이 붙어 있습니다.

 

고라 자손들은 아삽차럼 또한 회막이나 성전에서 노래하는 일에 종사한 싱거였습니다., 그들은 깃딧(오늘의 기타와 유사한)이라는 악기를 타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례의 길에서 역경을 이긴 승리의 간증을 노래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에서 배우는 레슨,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가 할일은 무엇일까요?

 

1.하나님의 비전을 잉태하십시오.

 

꿈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다시 꿈을 가질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만일 우리를 둘러 싼 환경만을 의존하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경우 즉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더 이상 희망을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사람들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황속에서도 그 마음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의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것입니다. 과거 순례자들이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이 바로 이런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 먹을 나무 열매도 마실 물도 변변치 않은 메마른 골짜기를 며칠씩 지나야 하는 고난의 행군을 연상해 보십시오. 히브리 사람들은 이런 골짜기를 바카(Baca)의 골짜기 곧 눈물의 골짜기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 골짜기는 실재하는 지명이라기 보다도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는 메마르고 황량한 골짜기의 상징일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지난 4월 레바논을 방문하면서 헬몬산 서쪽으로 펼쳐진 이런 어두운 계곡을 멀리서 바라보며 지나간 경험이 있습니다.

 

안내하시던 분이저곳이 바로 바카의 골짜기의 하나입니다고 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순례자들이 이런 골짜기에서 주저앉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시온의 대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시온으로 가는 대로(하이웨이)가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것이 바로 비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고단하고 어두울수록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을 꾸어야 합니다.

 

다시 이승복씨의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가 체조 선수로서 모든 꿈을 포기한 자리에서 어떻게 다시 꿈을 꿀 수가 있었겠습니까? 두 가지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간호 조무사가 던져준 책 한권 과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그 책은 재활의학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하워드 러스크 박사가 쓴돌봐야 할 세상’(A world to care for)이라는 책이었는데 그 책을 읽은 소감을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강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꿈을 잃어버리고 텅 비어버렸던 내 가슴에 새로운 설렘이 찾아왔다. 나는 가슴이 콩닥 콩닥 뛰는 소리를 들었다. 닥터 승복 리, 닥터 리, 장애인 의사 닥터 리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보다 더 중요한 책이 그가 꿈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것은 성경이었습니다. 그가 휠체어를 몰고 대학 캠퍼스를 지나가던 어느 날 같은 또래의래리 실버라는 이름의 친구가 접근하여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4년 전 예수님을 영접하고 크리스챤이 되었습니다. 저는 친지들과 가족들에게서 쫓겨났지만 나는 나에게 새 생명, 새 인생을 주신 그분을 이제 떠날 수 없습니다.”

 

이어서 그는 내가 만난 그분 예수님을 소개하는 성경의 이야기를 쉽게 설명해 주겠다고 하면서 우리 교회에서 가르치는생명의 다리로 복음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 다리 예화를 듣고 교회를 전에는 형식적으로 나가던 그가 1987 4 27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거듭납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말씀들을 암송하기 시작하면서 한 견고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위해 계획을 갖고 계시다. 그냥 계획이 아니라 완벽한 계획이다.

 

나를 어디에 쓰시려는 걸까? 무엇이든, 나는 그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다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전이 아닙니까? 눈물 골짜기를 지나십니까? 인생의 꿈이 사라지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책, 성경을 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비전을 간직하십시오.

 

2.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십시오.

 

우리가 눈물의 골짜기에 던져질 때 우리를 더욱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위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위로 자가 되어야 할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우리를 외면하고 아니 오히려 고난 중인 우리에게 더욱 절망스러운 말로 상처를 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이 승복씨도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지가 마비되어 누워있는 그를 찾은 부모의 제일성은네가 엄마 아빠 말 안 들어서 벌 받은 거야, 체조하지 말라고 그랬잖아였습니다.

 

그가 처음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을때 그가 주변에서 들은 말은 모두가 절망적인 만류뿐이었다고 합니다. “메디칼 스쿨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야. 의사가 아무나 되는 줄 아니. 미안한 이야기지만 자네는 주사기조차 제대로 사용할수 없어요. 매스도 들수 없구요. 해부학 실습에 참여할수 있다고 생각해요?등등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그의 위로 자였던 것입니다. “나는 가장 좋은 것을 너를 위해 예비해 주었다고 말씀하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위로 자가 등장합니다.

 

콜럼비아 공중 보건대학원의 원장이었던 앨런 로젠필드 학장이 뜻밖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승복, 자네는 정상인보다 더 훌륭해. 자네는 반드시 해 낼 수 있을거야. 흰 가운을 입은 승복이 멋지겠는데--자네가 원하면 내가 기꺼이 추천서를 써주겠네

 

그는 믿음으로 의과대학에 지원서를 보내고 1993 4 30일 아침 성경을 열었습니다. 시편 126 5-6절 말씀이 그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는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의대에 합격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녕 그의 위로자 였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누구에게 위로를 구하십니까?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6절입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 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시나이다.” 실제로 메마른 중동의 골짜기에도 샘이 솟는 곳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서프라이즈(surprise)라고 할까요? 그리고 실제로 늦은 비는 3-4월에 오지만 초막절 순례자들의 여행 계절인 10-11월에도 이른 비가 내려 계곡을 적시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일어납니다. 기적은 기적을 믿는 자에게만 일어납니다.

 

이 승복씨 책의 제목의 표현을 빌리면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너무나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셨습니까? 기적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위로를 체험하십시오. 눈물의 골짜기에도 많은 샘이 예비 된 것을 믿으십시오.

 

3.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십시오.

 

사람들이 제공하는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위로는 많은 경우 위로 그 자체로 끝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위로는 받았지만 환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은 위로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여기 힘을 얻고--그 다음에 어떤 약속을 하십니까? ‘얻고, 더 얻어마침내 시온에 도달하여 하나님 앞에 서 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입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약속을 주장하십시오. 사람이 손을 든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은 일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인생 순례의 여정에 이런 절망스런 골짜기가 기다리는 이유가 바로 우리로 하나님의 능력만 의뢰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고후1:8-9에 보면 바울 사도도 어느날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고백합니다.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읽어보실까요?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줄 알았으니--”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어지는 사도의 고백에서 그가 이런 절망적 상황을 탈출한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그것이 바로 비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백에서 이 골짜기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도의 승리의 고백을 접하게 됩니다.

 

다시 고후1:10입니다. “그가 이 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비밀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이 승복 형제를 다시 일으킨 것도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이 승복 형제는 단순히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에게 복음을 전해준 형제의 인도로 네비게이토 선교회에 가입하여 신앙훈련을 받고 복음 전도에 헌신합니다.

 

여름 방학이면 그는 칼리포니아로 그리고 그의 조국인 한국으로 달려와 전도에 헌신합니다. 다시 찾은 조국에서 그는 아직도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은 불편한 환경속에서도 휠체어를 타고 조국의 거리를 누비며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불편은 했지만 마음속에는 하늘의 기쁨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존스 합킨스 병원의 의사가 된 그는 이제 그의 장애가 축복이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장애인 환자들 앞에서 씩씩하게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웃으며 진료하는 그의 모습 그 자체가 환자들에게는 감동이며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마음을 닫고 있었던 환자들도 그를 만나면 마음을 열고 그의 손이 닿고 나면 새 힘을 얻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마술의 힘을 가진 사람, 수퍼 맨 닥터 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마술의 힘이겠습니까?

 

닥터 리의 간증처럼 그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일 따름입니다. 이 능력을 경험한 인생의 순례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눈물의 골짜기에서 일어나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힘을 얻고 더 얻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그리고 이 책의 첫 장에는 실제로 이 승복 형제가 좋아 한 글로리아 게이노의 노래가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안간 힘을 썼지/부서진 마음의 조각들을 붙이느라 정말 힘들었어/나 자신을 불쌍해하며 많은 밤을 보냈어/나는 울곤 했지/하지만 이제 나는 고개를 높이 들고 있어/보여? 나는 이제 새로운 사람이야/난 이겨 낼 거야/난 이겨 낼 거야

 

눈물 골짜기를 지나고 계십니까?

이 골짜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고라의 자손처럼, 이 승복 형제처럼 노래를 부르십시오.

 

 

 

 

admin

 

댁쟾쇰줈

 

가장 복된 사람들 /84:1-12/ 조학환 목사

2022-12-27 11:47:34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탁기는 살 엄두도 못내고 있었고, 네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 두 아들이 얼마나 개구쟁이인지 운동화를 사주면 불과 몇 달 못가서 다 떨어뜨리곤 하여 신발을 사주는 것조차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 집의 남편이 아내에게 헌 세탁기라도 사주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신문 광고란을 뒤져서 중고 세탁기를 내놓은 집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집을 찾아가긴 했는데 그 집이 너무나 크고 훌륭한 저택이었기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집의 주인부부는 얼마나 친절한지 그를 아주 반갑게 맞이하며 차를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이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주인 부부는 세탁기를 그냥 주겠다고 하면서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점심때가 되었으니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한사코 붙잡는 바람에 그는 식사 대접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또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데 우리집에는 아들 셋과 딸이 하나있는데 이 녀석들이 얼마나 개구쟁이인지 운동화를 사주면 몇 달이 안가 다 떨어뜨려서 운동화를 사주는 것도 수월치 않다는 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던 주인집 부인의 얼굴에 점차 어두워지더니 드디어 눈물을 흘리며 방안으로 급히 뛰어 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당황한 그는 급히 사과를 하였습니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부인에게 혹시 실례가 되는 말을 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그냥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한 말이었는데 무슨 무례한 일이라도 제가 저질렀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인집 남편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실수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의 부인이 운 것은 당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아이 때문이랍니다. 당신은 아이들이 신발을 너무 험하게 신어서 금방 떨어뜨려서 걱정이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그 반대입니다. 우리에게 자식이라고는 열두살 난 어린 딸 하나 밖에 없는데 그 아이는 태어나서 한번도 걸음을 걸어 본적이 없답니다. 만약 우리 딸아이가 신발을 신고 뛰어 놀며 장난을 쳐서 한 켤례만이라도 떨어지게 만들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이상 행복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행복과 불행은 서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행복이 있는 곳에도 불행의 요소가 있고, 불행이 있는 곳에도 행복의 요소는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행복과 불행은 같은 지붕 밑에 살고 있으며, 성공의 옆방에는 언제나 실패가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자신의 삶을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나는 정말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외적인 조건에 있어서는 많은 다른 상황이나 환경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외적인 상황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상황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행복의 요소와 불행의 요소를 동시에 찾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상황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똑 같은 상황속에서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행복의 요건은 그 상황이 어떠하냐 하는 것보다는 그 상황속에 잠재되어 있는 행복의 요소들을 찾아서 얼마나 나의 것으로 만드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여건들을 찾아서 누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즉 자족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4:11,12)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말처럼 그는 어떤 환경속에서도 기뻐하며 찬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정녕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무엇보다도 여러분에게 주어진 여건속에서 행복의 요소를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행복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여러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자꾸만 먼데서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을 다른 사람이나 조건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만약 이러 이러한 것만 있다면, 내 남편이 이런 사람이라면, 내 아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주기만 한다면, 혹은 내 자녀가 이런 자녀만 된다면, 혹은 나에게 돈이 얼마큼만 있다면, 내가 좀더 조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내가 좀더 능력있는 사람과 결혼 했더라면 하면서 지금 없는 것들만을 헤아리면서 그러면 나도 행복할텐데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결코 어떤 조건에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있는 것을 누릴줄 모르고 없는 것만 생각하며 그것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러한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현재 속에서 만족의 여건을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겐 그런 조건들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찾아보면 사실 행복의 요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별로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부족한 것 따지자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 따져도 수없이 많습니다. 자족하는 마음만 가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주의 은혜가 족합니다라고 말할수 있을 만큼의 환경은 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있습니다. 추위와 비바람, 눈보라를 막아 줄 아늑한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목마를때 마실 물이 있습니다.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습니다. 자유와 평화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하, 자 맑은 물, 높고 푸른 하늘, 이 아름다운 사계절이 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주님의 전에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귀한 축복의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저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영광의 나라가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습니다. 죄사함의 은총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도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우리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아무 것도 따질 것 없이 사실은 우리가 이 거룩한 하나님의 전에, 이 영광의 보좌 앞에 앉아 있다고 하는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의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주의 집에 거하는 삶?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여러분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까? 물론 세상에서 60, 70, 100평의 초호화 저택에서 온갖 문화시설들을 갖추어 놓고 사는 것도 그 나름대로는 기쁨도 즐거움도 자부심도 있을 것입니다. 그 나름대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별것 아닙니다. 아무리 100여평의 초호화아파트에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렇게 좋은 줄을 모릅니다. 오래 지나면 그저 그렇거니 하면서 살뿐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아무리 좋은 장난감을 주어도 몇번 가지고 놀면 그만 싫증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그들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고, 불만족한 것들이 있습니다. 설령 완전히 만족하며 산다고 해도 그것도 결국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썩어지고, 없어지고, 내가 떠나든지 그 물건이 떠나든지 양단간에 누군가는 떠나서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 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제법 오래전에 국민일보에 30대 은행 지점장이 자살한 사건이 실려 있었습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36살로써 모 은행의 지점장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은행에 입사하여 12년간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고속 승진을 하여 36살의 나이에 은행 지점장이 되었고, 예쁜 아내와 결혼을 하여 세 자녀를 두고 남 부러울것이 없이 오손도손 살아가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은행의 동료들은 어디 설악산이나 제주도 어디쯤에서 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가 자살하리라고는 아무도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EF소나타 승용차가 동작대교 위에서 발견되고, 경찰이 수색한 결과 동작대교 아래 물속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명예퇴직을 권고 받고나서 그로 인한 허탈감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겨우 나이 36살에 명예 퇴직을 귄고 받고 보니 그야말로 너무나 인생이 무상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지난 12년동안 남보다 빨리 승진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바쳐 회사를 위해 일해왔는데 이제 겨우 36살에 명예 퇴직을 권고 받고 보니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위하여 정열을 바쳐 일해왔는지 그 허탈감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일해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뿐이다. 아내와 아들에겐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이 허탈감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그렇습니다. 그는 적어도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성공한 샐러리맨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엄청난 삶의 중압감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성공하기 위하여 죽도록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세상적인 안목에서는 성공을 했습니다. 고속승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으로 허탈한 것이었습니다. 설령 그런 극단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그저 기간만 조금 길어질 뿐이지 결과는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열심히 수고해서 다 이루었노라고 생각이 드는 그 순간에 다시금 허탈감이 찾아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찾는 하나님의 집, 그리고 장차 우리가 가서 거하게 될 영원한 본향집, 우리 주님이 계신 그 집에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육체를 입고 사는 지금은 우리도 때로는 힘이 들고, 외롭고,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위로하심과 힘주심으로 그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밀려오는 고독과 허탈감을 얼마든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영원한 생명을,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누리는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잠시 기쁘다가 시들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좋다가 잠시 후에 권태증이 나는 그런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이 아닙니다. 거기서 누리는 기쁨은 완벽한 것입니다. 시들지 않는 것입니다. 쇠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그 어떤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 그야말로 말그대로 완전히 영원하고도 완전히 완벽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우리들보다 더 복된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우리보다 복받은 사람입니까? 누가 우리보다 더 부유한 사람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동시에 세상에서도 재물도 많고, 권세도 있고, 지식도 있고, 인품도 높고, 얼굴도 잘 생기고, 능력도 많고 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다면 그야 물론 금상첨화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혹 있다해도 세상의 것은 별 것 아닙니다. 곧 싫증나고 썩어 없어지고 사라져 버릴 것들입니다. 그리고 설령 나는 세상적으로는 아무것도 갖추어져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사실 찾아 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공연히 내게 없는 것을 헤아려보면 한탄하며 원망하며 불평하며 살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더 좋은 것을 놔두고 썩어 없어질 것이 없다고 한탄하며 투덜거리며 살 일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썩어 없어질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권세있고, 가장 능력있고, 가장 선하시고, 가장 거룩하시고, 오직 유일하게 생명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저 영원하고도 완전한 천국의 기쁨의 누릴 사람들입니다. 저 영광의 나라에서 완전한 기쁨과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야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84:5)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의 집에 거하므로 주님으로부터 현재 이 세상을 이길 새로운 힘을 공급받으며, 그리고 저 영원한 주님나라를 바라보며 날마다 날마다 시온을 향해, 주님 계신 곳을 향해 달려가는 그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간절히 주를 바라보는 자에게 더 크나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은혜주심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심지어 오늘 10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러니까 차라리 하루를 살더라고 하나님의 전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곳이 있어도 하나님의 뜰만은 못할 것이므로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궁정에서 주님과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장막 속에서 먹고 마시고 놀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훨씬 더 복된 인생이므로 세상의 대궐같은 집에 주인노릇하며 대접받으며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궁정에서 문지기를 할망정 거기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저 잘 먹고 잘입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다가 멸망 길로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못 먹고, 못 입고, 설령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멸시를 당한다 해도, 차라리 문지기가 된다해도(사실은 그렇게 될 리가 없지만) 하나님 전에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말할것도 없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준다해도 하나님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과 기쁨과 은혜와 생명의 은총과는 바꿀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복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행복의 조건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이 있고, 더구나 우리는 이미 영원한 천국을 향한 티켓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완전한 능력자이시며, 지혜자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우리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된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때로 힘이 들때나 외로울때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장차 누릴 그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영광과 기쁨을 지금 더욱 앞당겨 누리기 위하여 더욱 주님의 전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의 전을 가까이하며, 저 주님 계신 영광의 보좌를 바라보며, 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시온성을 향해 날마다 달려가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께서는 여러분들이 이미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진정한 예배 /84:1-7/ 전승문 목사

2023-08-07 14:10:06

 

사람은 영과 육 이렇게 두 가지 요소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육은 흙에서 온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이 분리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흙에서 온 육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영과 육 그 중간에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사람은 이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육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영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영이 없는 동물이나 식물은 영적인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만 영적인 마음을 품은 영적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 중 유일하게 사람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겁니다. 동물 중에는 머리가 좋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돌고래는 IQ 80이나 된다고 합니다. 원숭이 중에 보노보 침팬지라는 것이 있는데 그 침팬지는 IQ가 무려 120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원숭이는 다양한 감정을 표출할 수 있고, 잘만 훈련시키면 사람과 대화를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불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능이 아무리 높아도 그래서 온갖 행위가 가능해도 예배는 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영이 없는 짐승들은 예배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사람이 사람다워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구별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방법이 바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그럴 마음이 있는 사람만, 예배드릴 마음이 있는 사람만 드립니다. 그래서 마음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사람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나쁜 마음을 먹으면 나쁜 사람이 되고 착한 마음을 먹으면 착한 사람이 됩니다. 나쁜 사람, 착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은 마치 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을 담으면 물그릇이 되고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함이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 마음에 영을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영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육적인 사람은 그 마음이 육을 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이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마음이라는 이름의 그 그릇에는 어떤 것이 담겨있습니까?

 

코로나19의 확산세가 다소 주춤한 가운데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2.5단계서 2단계로 낮추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한조치가 완화되었지만 교회만은 예외라고 합니다. 교회만큼은 아직 모이면 안 된다고, 교회에서 모이는 것은 불허한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감히 예배드리는 것을 허락하고 말고 할 수 있습니까? 국가가 어떻게, 정부가 어떻게, 거룩한 예배를 불허한다고 금지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교회는 하늘에 속한 기관입니다. 예배는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이건 땅에 속한 자들이 감히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행히 정부에서 다소 조치를 완화하여 다음주일부터는 소규모라도 대면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하지만, 예배가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드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는 예배할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사실 그동안 이 문제를 놓고 많이 기도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꼭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여야 합니다. 누가 뭐라던, 무슨 일이 일어나던, 반드시 모여야 합니다. 모여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우리 성도들이 모여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린다면 크게 기뻐하시며 그 예배를 받아주실 겁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상황에 따라서는, 어디에서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면 하나님은 다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만약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교회 모든 성도가가 다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직장이나 학교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성인들은 비교적 담담하게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지만 어린이들이나 학생들은 경우가 다릅니다. 지금도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데 만약 교회가 대면예배만을 고집한다면 그래서 정부조치에 반하는 예배를 드린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얼마나 비난을 많이 받고, 얼마나 더 힘들어지겠습니까? 특히 우리 아이들이 우리 청년들이 얼마나 더 어려워지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렇게 비난을 받게 되면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교회를 많이 떠나지 않겠습니까? 또한 그렇게 되면 전도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들어지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모여야 합니다. 누가 뭐라던,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당연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모이기를 원하시는지 그걸 물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예배당에 모여 다함께 드리는 그 예배뿐이라면, 하나님이 오직 그 예배만 받으신다면 우리는 당연히 모여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드리는 예배만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예배도 받으신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하나님이 어떤 것을 원하실 것 같습니까? 모든 것을 다 감수하고, 장차 선교에 지장이 있게 될 것까지 감수하고, 뿐만 아니라 자칫 하다가는 예배가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는 것까지 감수하고, 한 자리에 모이기를 원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어디에서 예배드리는가?’ 이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사실은어떤 마음으로 예배드리는가?’ 이것입니다. 장소가 어디든 진정한 마음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지만 좋은 예배당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지라도 그 마음이 옳지 않다면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어떤 마음인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가?’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성경은 명확하게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처소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실까요? 하늘나라에 계실까요? 아니면 예배당에 계실까요? 코로나로 인해 예배당에 모이지 못하고 이렇게 비대면으로 예배드리는 지금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실까요? 백향목으로 멋진 성전을 지은 솔로몬이, 그러나 그 성전을 봉헌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왕상 8:27)” 아무리 멋진 성전을 건축했어도, 아무리 대단한 성전을 건축했어도 그곳에 하나님을 모실 수는 없다는 겁니다. 세상의 그 어떤 성전도 심지어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실만한 처소는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솔로몬의 이 기도가 오늘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성전(聖殿)이라는 말은 거룩한 집, 거룩한 장소라는 뜻입니다. 어디가 거룩한 곳일까요? 어디가 진정으로 거룩한 성전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그 어디든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곳이 바로 진정한 성전, 진정으로 거룩한 곳입니다.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불타는 호렙산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3:5)”

 

사실 그곳은 그동안 모세가 수없이 지나다니던 곳입니다. 40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양을 친 모세니 안 다닌 곳이 없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곳은 양들이 수없이 밟고 다니던 곳입니다. 또한 그 떨기나무는 그동안 양들이 수없이 뜯어먹었던 그 나무입니다. 하지만 그 날에는, 그 날만큼은, 그곳은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 그곳에 하나님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인 겁니다. 그래서 그곳이 성전이 된 겁니다. 그 광야가 그 떨기나무가 진정한 성전이 된 겁니다.

 

오늘은 지금 이 순간에는 어디가 성전일까요? 어디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일까요? 우리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정한 성전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곳도 하나님을 모실 만큼 거룩한 곳은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한 곳 우리 마음뿐입니다. 오직 마음만이 영을 담을 수 있는 곳,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마음이 다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청결한 마음, 깨끗한 마음, 다시 말하면 회개한 마음, 그 마음에만 하나님이 임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겁니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태 5:8)” 그러니까 정말로 중요한 것은어디에서 예배드리는가?’ 이것이 아닌 겁니다. 오직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가?’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의 마음이 청결한 마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는 청결한 마음,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은 회개한 마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고라자손들의 시입니다. 고라자손은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하던 분들입니다. 찬양 외에도 성전의 여러 가지 일을 담당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성전에서 멀리 떠나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시인이 성전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가 시편 84편입니다. 시인은 성전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체바오트(יהוה צבאות)! 큰 군대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는 것을 보면 이 시인이 어떤 힘에 의해 멀리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찾는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이 이름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체바오트가 아닐까요? 세상을 힘으로 다스리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도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시인이 다시 이렇게 노래합니다 :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하나님의 궁정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뜰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전이라는 뜻인 겁니다. 그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에 시인의 영혼이 쇠약해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안타까움에 그 영혼이 쇠약해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온 마음과 온 힘으로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무엇을 부르짖고 있을까요? :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참새와 제비는 마음 놓고 성전에 날아들 수 있는데 시인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너무 멀리 있어서 성전을 찾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시인은 성전에서 마음 놓고 예배하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부러워합니다 :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 그래서 항상 찬송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동안 30년 가까이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 곁으로 가시는 성도님들을 많이 지켜보았습니다. 그동안 많은 성도님들이, 나이가 많아서 혹은 질병으로 인해 하나님 곁에 가시는 것을 지켜보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성도님들의 마지막 소원은 누구나 같았습니다. 바로 성전에 다시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예배당에 가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평생토록 드리고 또 드렸던 그 예배를 다시 한 번 드리는 것 그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목사님! 교회 가고 싶어요!” “목사님! 예배드리고 싶어요!” 이것이 성도님들의 한결 같은 소원이었습니다. 시편 84편을 지은 시인도 바로 그 마음으로 노래하는 겁니다. 사실은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대다수 성도님들도 같은 마음일 겁니다. 특히 우리 교문교회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실 겁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너무너무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시온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그 언덕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마음에 그 성전을 향한 큰 길이 열려있는 사람,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그리운 성전에 직접 갈 수가 없지만, 그래도 그 마음에 그 중심에 성전으로 달려가는 큰 길이 열려있는 사람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비록 몸은 가정에서 영상으로 예배드리고 있지만, 마음에는 성전을 향한 큰 길이 열려있는 사람인 겁니다.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거라고 말씀합니다 :

 

“그들이 눈물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눈물 골짜기, 바카(בָּכָא) 골짜기, 눈물이 쏟아지는 고난의 골짜기, 그리워서 울고 힘들어서 울고 답답하고 억울해서 울고... 그렇게 눈물 나는 골짜기... 그러나 그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샘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샘이, 곳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른비가 복을 채워줄 거라고 했습니다. 이른비는 마침내 가뭄이 끝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처음으로 내리는 비입니다. 이른비가 온다는 것은 긴 가뭄이 끝나고 이제는 곡식을 심을 수 있는 농사철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힘드십니까? 어려우십니까? 성전이 예배가 너무너무 그리우십니까? 그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여러분의 앞날에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눈물골짜기를 지나는 여러분의 앞날에 많은 샘이 있을 것입니다. 바카골짜기를 지나는 여러분의 앞날에 틀림없이 이른비가 내려 복을 채워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될 겁니다 :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체바오트! 그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힘을 더하여 주실 겁니다. 그래서 이 고난의 날들을 이겨내고 반드시 시온에서 성전에서 다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많은 종교학자들이 앞으로는 종교가 소멸하는 시대, 종교가 없어지는 시대, 이른바 탈종교화 시대가 될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는 다 없어져도 끝까지 남을 종교 그것은 개신교라고 합니다. ? 어째서 다른 종교는 다 없어져도 우리 개신교는 남을 거라고 하는 것일까요? 잘 모이니까! 그렇습니다. 이유는 그 한 가지입니다. 모든 종교 중에 가장 잘 모이는 종교 그것이 바로 개신교 곧 교회인 겁니다. 정부에서 우리 개신교만, 교회만, 예배를 간섭하고 있습니다.

 

성당은 가만 두면서, 사찰도 놔두면서, 교회만 간섭하는 겁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는 것일까요? 왜 교회만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교회가 가장 잘 모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만 모임이 왕성하기 때문인 겁니다. 성당은 가만둬도 원래 잘 안 모이는 곳입니다. 사찰도 모임이 잘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워낙 잘 모이는 곳이라 그래서 그러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살아있으니까, 교회는 생명력이 왕성하니까, 그래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 맙시다. 비록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지만 이게 최선이지만 반드시 금방 좋은 날이 올 겁니다. 우리는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참담한 마음으로 루스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던 야곱이 신령한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 여러분의 집이 하나님의 집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의 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배자의 사랑 노래 /84:1-/ 최종혁목사

2023-05-17 05:14:23

 

무언가를 좋아하면 티가 날 수 밖에 없다. 축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일 년 동안 축구 한 번 하지 않고 중계도 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축구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독서가 취미라는 사람 집에 제대로 된 책장 하나 없고 최근에 읽은 책이 20년 전에 읽은 교과서라면 그 사람이 스스로 뭐라고 말하든 그의 취미는 독서가 아니다.

 

취미는 독서가 맞는데 돈이 없어요, 시간이 없어요는 책 읽기 싫은 사람의 핑계일 뿐이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위해 무엇이 되었든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시간을 사용하고 돈을 사용한다. 에너지를 사용한다. 거기에 우선순위를 둔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티가 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정상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티가 난다. 그 사람을 자주 생각한다. 일부러 생각하기도 하고 생각하지 말아야지 해도 자꾸 생각이 난다. 심하면 그래서 어떤 일에 집중하기 어렵기도 하다. 함께 있고 싶다. 그 사람 집 근처만 가도 좋다. 그 사람이 머물렀던 자리도 좋다.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다. 좋은 일이 있든 슬픈 일이 있든 그것을 나누고 싶다. 뭔가 좋은 것을 주고 싶다.

 

그렇게 나에게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 오히려 더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이상한가? 아니다. 그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물론 전혀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행동하면 집착이고 스토킹 범죄가 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면 이런 마음이 있고 그것이 겉으로 티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렇지 않을 때 그 진정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전에 주일오후성경공부를 할 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특징을 이렇게 정리했던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며 따르는 자들이며 사랑하는 자들이며 섬기는 자들이며 본 받는 자들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기 사용된 동사들은 목적어만 바뀌면 다른 종교들에서도 다 사용할 수 있는 동사들이다. 세상이 우리를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무엇을 혹은 누구를 믿는지, 따르는지, 섬기는지, 본받는지만 다를 뿐 종교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방금 의도적으로 하나의 동사를 뺐다. 바로사랑하는이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목적어를 바꿔도 다른 종교에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신을 믿으라고 하고 섬기라고 한다. 따르고 본받으라고 한다. 하지만 사랑하라고는 하지 않는다. 종교는 어떤 면에서 보면 신과의 계약 관계를 말할 뿐 그런 인격적인 관계를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그 무엇보다하나님 사랑하기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계시는 분이시고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특징은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기독교를사랑의 종교라고 말할 때 왜곡된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한편 옳은 면이 있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사랑의 관계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따르고 본받는 것도 다른 종교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는 다르다. 다만 겉보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티가 나기 때문이다.

 

시편 84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노래로 그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시를 읽어보면 저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티가 난다. 마치 연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 혹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즐거움으로 흥얼거리며 노래하듯 이 시편은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

 

저자는고라 자손이다. 고라는 모세에게 반역하여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세 아들은 살아남아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을 했다. 찬송하는 일도 했지만(대하 20:19), 빵 굽는 일과(대상 9:31) 문지기로서의 일도 했다(대상 9:17-19; 26:1). 따라서 이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 예배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하고 또한 하나님께 함께 하기를 원한다. 아마 후대에는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성전을 찾아 오는 사람이나 같은 마음으로 이 사랑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예배자의 사랑 노래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노래다. 오늘은 이 시편을 통해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함께 점검해 보고 또 도전을 받기 원한다.

 

이 시편은셀라’(4, 8)를 기준으로 3단락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리고 각 단락에는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지가 선포된다. 또 하나 주목해 볼 만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다양하고 반복되는 표현들이다. 저자는 하나님을 그냥 당신(“”)라고만 하지 않고 다양한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모함(1-4)

 

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저자는 감탄으로 시작한다. 사랑스럽다는 것은 장막 자체가 로멘틱한 장소라거나 미학적으로 뛰어남을 의미하기 보다는 장막이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다. 이 장막은주의 장막이다. “여호와의 궁정()”이기도 하다. 비록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은 아닐지라도만군의 여호와”, 즉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지니신 왕이 거하시는 장소(, 4)이기 때문에 그곳은 왕궁이며 많은 사랑을 받는다.

 

시편의 저자도 그렇게 주의 장막을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다. 사실 그의 사랑은 상사병에 가까울 정도다. 그는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해질 정도였다. 사모한다는 것은 간절히 원한다는 의미로 부정적으로는 욕심과 탐욕이 포함되기도 한다. 시편 17:12에서는 사자가 그 움킨 것을 찢고 싶어한다고 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 그만큼 강하게 원하는 것이다. 쇠약함은끝나다. 소진되다는 의미다. 이사야 15:6에서 풀이 마르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여호와의 궁정을 사랑해서 거기 거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컸고 그 감정에 잠식당할 정도였다는 말이다.

 

또한 저자는라는 일반적인 표현 대신내 영혼”, “내 마음과 육체라고 표현했다. “내 영혼은 그의 진심을 드러내는 표현이고, “내 마음과 육체는 그의 전부를 통칭하는 표현이다. 내가 진심으로, 나의 전부가, 거짓된 것 하나 없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대체 그 장막이 뭐길래 그러는 것일까? 장막 자체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그곳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지만 그곳에 특별한 임재를 두시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타지에 가면 집이나 내 방을 그리워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단순히 건물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사람들) 때문에 그리워한다.

 

특히나 구약 시대에 성막이 가지고 있던 상징적인 의미는 오늘날 우리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하나님으로 생각할만큼 타락했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나 그것이 놓여있던 성막은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종교인들은 멀리 계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버리고 보이는 것을 섬겼던 것이 문제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끼고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서의 성막을 자연스럽게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랑을 시편 기자는 또 이렇게 표현한다.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여기서도 참된 예배자의 올바른 자세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지만 동시에 나의 왕이고 나의 하나님이기도 하시다. 즉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서 높이지만 동시에 나와 가까우신 분으로서 친밀하게 느끼는 것이다. 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분으로 느끼고 있다. 하나님과 더 친밀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참새가 부럽고 제비가 부럽다.

 

어떤 학자들은제단에 참새와 제비가 둥지를 틀었으니 제단이 사용되고 있지 않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여기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제단의 사용 여부가 아니라누가 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느냐. 참새와 제비가 더 가까이에 있다. 물리적으로 더 가까이에 있기도 하고 시간적으로도 그렇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살림을 차렸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과 가까이 거하고 있었다. 시편 기자는 그것이 부러웠던 것이다.

 

짝사랑을 해본 사람은 무슨 감정인지 이해가 쉬울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누가 같이 있으면 그 사람이 부러운 것처럼, 여기 시편 기자는 다른 사람들(제사장들)은 고사하고 하찮은 새들도 부러울 지경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가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정말로 복된 사람은 이렇다.

 

84: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성소에 예배하러 오는 자들은 어찌 보면 하나님의 집에 손님으로 오는 자들이다. 시편 기자는 그렇게 잠시 예배하기 위해 오는 사람보다 항상 그곳에 살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면 그것이 참된 복이라고 말한다. 할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사모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원하고 더 오래 머물고 싶어한다. 다른게 아니라 그것을 진정한 복으로 기쁨으로 여긴다.

 

다음 절로 넘어가기 전에셀라가 있으니 잠시라도 각자 자신을 돌아보길 바란다. 나는 하나님을 사모해서 다 가까이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은지, 그것을 진정한 복으로 여기고 있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하나님과 관계된 것,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을 내가 즐거워하는지, 아니면 부담스러워하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구약 시대에 누군가 하나님은 너무 사랑하는데 성전에 나아가서 예배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그래서 4년에 한 번 정도만 예루살렘에 가겠다고 했다면,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첫사랑을 버렸거나 애초에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을 돌아보라.

 

하나님께 나아감(5-8)

이어서 시편기자는 또 다른 복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4절에서는 정말 이상적으로 가장 복 있는 자에 대해서 말했다면, 여기서는 현실적으로 복 있는 자를 말한다.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다. 여기서는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라고 표현되었다. 본래는시온이라는 표현이 없지만 결국 7절에서 이 사람은 힘을 얻어 나아가서 시온의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있는 길은 시온을 향해 있는 길이 된다. 그래서 번역자들이 시온을 추가한 것이다.

 

항상 하나님께서 계신 장막에 살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적으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은 항상은 아니더라도 그나마 자주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멀리 사는 사람에게는 아주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살 곳도 정해주셨다. 하나님께서 거주하게 하신 곳에 사는게 필연적으로 불행하게 될 수 밖에 없다면 뭔가 이상하다.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시편 기자의 말이다. 예루살렘에서 먼 곳에 살아도 하나님께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고 또한 때를 따라 실제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으면 된다.

 

골딩게이, 592-3, “절기에 예루살렘에 갈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 뿐 아니라 그곳에 계시는 여호와께서 먼 곳에 살고 있는 백성에게도 힘과 보호가 되어 주시는 진짜 하나님이심을 생각하게 된다.”

 

항상 예루살렘에 있을 수는 없어도 그 마음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대로를 둘 수는 있다. 그렇게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삶 또한 복된 삶이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어지는 6-8절의 말씀은 중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시온을 향해 가는 순례길에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힘을 주신다는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위에서 말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며 힘을 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편 84편의 전체 맥락을 고려해보면 실제로 하나님의 임재를 향해서 가는 순례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시편 84편은 삶에서 개인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보다는 실제로 예배의 장소로 나아가는 것을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정말로 시온의 대로가 마음에 있는 사람이라면 시온을 향해서 실제 발걸음을 옮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자들의 모습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묘사했다.

 

84:6–8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사실 번역상의 어려움이 좀 있는 말씀이지만 전체 의미를 이해하는데 문제는 없다. “눈물 골짜기는 대부분 성경의 각주에 표시된대로 본래바카 골짜기. 그런데 그런 골짜기가 성경에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관련 문헌 등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바카의 발음이울음, 흐느낌과 같다는 것에 착안하여눈물 골짜기로 번역이 되어 있다. 바카가 발삼 나무를 의미한다고 보는 경우도 많다.

 

무슨 골짜기든지 뒤의 말씀을 보면 메마름으로 상징되는 골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메말라 목마른 곳을 지날 때라도 하나님께서 샘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실 것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시온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그 길에도 계시기 때문이다. 시온에 있는 자들에게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 길이 쉬운 길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힘을 얻고 더 얻어 순례자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사모하던 그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살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다시셀라가 나왔으니 잠시 묵상을 해보자. 예배의 장소에 대한 부분이다. 예수님은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4:21). 장소에 관계 없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예수님을 통하여 임할 것임을 말씀하셨고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배의 장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모여서 드리는 예배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고 몸을 가진 사람은 모이려면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배당 혹은 일반적으로 교회라고도 불리는 장소에 모여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교회는 구약의 성전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이 성전을 대체했다거나 그런 말이 아니라, 예배의 장소라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교회의 정규 예배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예배의 장소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떻게 해야하는가이다. 질병 때문에 그런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직장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가정의 특수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지난 몇년간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서 아얘 전체가 모이지 못했던 상황도 종종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좋지만 교회에 올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마음이 편치 않을 수 있다. 앞서 말씀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하고 모이기를 사모하기 때문이다. 교회가는 상황이 생겨서 너무 마음이 편하다면 그게 오히려 문제다. 교회에 가지 못해서 마음이 편치 않을 때, 5절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를 두는 것이다. 교회에 가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자로서 사는 것이다. 그 역시 복이 있는 삶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예배의 장소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더 사모해야 한다. 시온의 대로를 마음에 품고 있지만 말고 그 길을 따라 순례의 발걸음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 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함께 모였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더욱 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사모하는 것 자체가 평소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배의 장소를 더욱 사모하여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과 함께함(9-12)

끝으로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 들어온 자로서 기도한다.

 

84: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먼저는 일반적인 기도의 내용 중 하나인 왕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하나님이여, 우리 방패인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는 여기 기도의 맥락에서 왕을 말하고 왕이 그 나라를 보호하는방패로서 불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왕조차도 진짜이시고(3) “방패이신(11) 하나님의 돌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자신이 진짜 왕의 궁정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고 감격하여 말한다.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실제로 예루살렘에 얼마나 머물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자의 마음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더 좋다. 악인의 장막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낫다. 여기서 성전 문지기는 아마 고라 자손이 성전 문지기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되었을 것이다.

 

사실 성전 문지기는 우리 입장에서는별 것 아닌 일을 하는 사람’, ‘하찮은 사람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누구든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특권을 얻은 사람이었다. ‘내 하나님의 집 문 앞에 서 있는 것이가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 악인의 장막에 들어가 사는 것보다 차라리 문앞에서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더 좋다는 의미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와 있느냐의 문제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유는 이렇다.

 

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하나님을 직접적으로라고 표현한 것은 성경에서 여기가 유일하다. 하나님이 해의 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유일한 빛이 되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풍성한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시는 방패시다. 하나님이 없는 것은 해가 없는 삶이고 방패가 없는 전투다. 절대 살 수 없고 이길 수 없다.

 

우리 삶의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우리도 영화를 누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정직하게 행하는 자, 즉 하나님을 사랑하여 사랑 가운데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이보다 좋은 분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마지막으로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했다.

 

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성소에 있든, 문 앞에 있든, 순례길에 있든, 집에 있든, 논밭이나 직장에서 일을 하든,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 밖에는 우리의 복이 없다( 16:2). 그러니 하나님 밖으로 나가지 말고 하나님 안으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자. 오직 사랑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 삶과 우리의 모임이 의미있음을 기억하자.

 

도전

언젠가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집에 살게 될 것이다. 어떤 괴로움이나 두려움, 불안함도 없이 살게 될 것이다.

 

21:3–7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롱디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장거리 연애 정도가 될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과 우리는 롱디 커플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롱디 커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주 연락하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 관계가 유지된다. 사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정확히 그렇지는 않지만, 비슷한 면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를 두고 계속해서 시온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그렇게 하고 이렇게 함께 모여서 하는 모든 것을 통해 그렇게 해야 한다.

 

힘이 들 땐 하나님께서 눈물 골짜기로 지날 때 샘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자(6).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임을 기억하자(11). 그리고 결국 우리가 이 순례의 길을 끝내고 이 땅의 시온, 예루살렘이 아닌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7), 그리고 그곳에서는 성전 문지기가 아니라(10) 그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기억하자(4). 우리는 정말 복 있는 자들이다.

 

 

 

성전 문지기가 좋사오니 /84:1-12/ 허창수목사

2022-06-30 08:27:45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까? 집도 부모도 없는 고아가 매우 불행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매우 불행합니다. 배신을 당했다든지,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고, 애인으로부터 혹은 사회로부터 속기만 한 사람들은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믿을 것이 없는 사람은 매우 불행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소망도 없습니다. 그래서 살았으나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성도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매우 큰 행복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2:8).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은 무한한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리고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불행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할 일이 없어서 하루를 지겹게 지내고 있습니다. 봉사의 대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일거리나 섬길 수 있는 대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내 자신을 바치고 수고하는 희생에서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수고하므로 맛보는 기쁨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0절에주의 궁전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84편은고라의 자손의 시입니다. ‘고라는 레위의 증손으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여호와께 반역하다가 땅이 그 입을 벌려 삼킬 때 250명이 죽었습니다. 그때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고(26:11) 성전 문지기와 전병을 굽고 진설하는 떡을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대상9:19,31,32). 고라의 자손들은 성전에서 찬양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고라 자손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므로 행복했습니다. 고라 자손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며 그 말씀에 은혜를 받는 성도가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문지기란 가장 낮은 직분입니다. 성전 문지기란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피는 봉사직분 입니다.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을 가장 큰 기쁨이요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대통령을 서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행복을 느끼기보다 괴로운 것입니다. 여기 저기 비난의 소리가 들려오지요, 잘하느니 못하느니 온갖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물며 죽이려고 하는 음모도 있기 때문에 맘대로 다니지도 못합니다. 잠도 마음 놓고 잘 수 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봉화 마을에 들어와서 첫 마디가야 좋다라고 외쳤습니다. 상당한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다는 것도 며칠이 못되어 죽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였습니다. 왕이란 최고의 직위입니다. 그러나 왕위가 그렇게 행복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대적이 많았습니다. 하물며 아들 압살롬이 왕이 되고자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차마 아들과 싸울 수 없어 왕위를 내놓고 피난을 했습니다. 이산 저산을 방황하며 숨어 다녀야 했습니다. 밤이면 광야에 누워 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그리운 것은 왕궁이 아니라 성전이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1). 주의 장막 성전이 그리웠습니다. 당시주의 장막은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웅장한 성전이 아닙니다.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천막입니다. 그 안에 법궤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그 주의 장막이 그리웠습니다. 화려한 왕궁을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성막을 사모했습니다. 성막에 들어가서 제사지내는 것이 소원이였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보면 시골 마을 한 가운데 십자가를 높이 세운 교회당을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특별히 중국을 처음 여행했을 때 생소한 경치를 눈여겨보다가 마을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교회당을 보고 매우 반가웠습니다. 누군가 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생각할 때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장막을 사모하여 쇠약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3)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그리고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다’(4)고 했습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나와 여러분들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나와 여러분들이 복이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들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있고, 기도가 있고, 하나님의 응답이 있으니 우리의 영혼이 살아 숨 실 수 있는 곳입니다.

 

북한에 성도들은 성전도 없이 지하에서 숨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올라와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드리는 우리들을 보고 복있는 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날아다니는 제비도 제 집이 있는데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성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성전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자신이 복있는 자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전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나 자신이 복있는 자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집에서 주를 찬송하기 때문에 주의 집에 사는 자가 복입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불러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찬송은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입술에 발린 찬송은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시간에 불러드리는 찬송이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몇 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보기에는 찬송을 근성으로 부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찬송은 찬송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의 집에서 주께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에 복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5),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지친 몸과 영혼이 성전에서 다시 힘을 얻고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세상을 살며 지친 성도들에게 성전은 에너지를 보충하는 곳입니다. 자동차가 기름이 떨어졌을 때 기름을 가득히 채워주는 주유소와 같습니다.

 

주의 집에는 시온의 대로가 있기 때문에 주의 집에 사는 자가 복입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5). ‘시온의 대로란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성전은 천국으로 가는 대로가 있습니다. 교회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대로입니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금 나와 여러분은 시온의 대로가 있는 주의 집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기 때문에 축복입니다.

 

주의 집에는 복을 채워주는 이른 비와 많은 샘이 있기 때문에 복입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6).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이 삶 속에서 수없이 부딪히는 고난과 그로인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고난을 당하지만 주의 집에 많은 샘물이 있고 이른 비로 복을 채워주시기 때문에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입니다.

 

성경에는를 복의 상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가뭄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농작물이 말라 죽고, 마실 물도 없다고 합니다. 이럴 때 비가 오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기갈을 당할 때 주의 집에서 많은 샘물과 이른 비로 복을 채워주시기 때문에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의 집을주의 궁정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궁정이라고 해서 왕궁처럼 크고 웅장한 것이 아닙니다. 해달의 가죽으로 덮은 성막입니다. 광야에 부는 바람으로 모래 먼지가 덮인 성막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궤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죽으로 덮인 성막은 하나님의 집이며 주의 궁정입니다.

 

주의 궁정다른 곳’, ‘한 날천 날’, 그리고악인의 장막성전 문지기라는 대조를 하므로 하나님의 전에 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어떤 영예를 누림보다 비록 미천하고 보잘 것이 없는 문지기로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 것이므로 가장 행복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하루 사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을 사는 것 보다 낫다는 고백입니다. 하루를 살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좋다는 말씀입니다. 문지기란 성전에서 가장 비천한 신분입니다. 그러나 주의 집에서는 문지기로 봉사하는 기쁨을 아는 성도 고백입니다.

 

허기동 할머니가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에게 집에 가자고 말하더랍니다. 입원한 환자가 죽을 때가 되면 집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집으로 모시지 않고 병원에서 임종을 했습니다. 죽음 심리는 자기가 평생을 살던 집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성도가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했을 때 마음에 소원이 성전에서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 한번 드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주의 전에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다는 고백입니다.

 

주의 전에서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문지기는 누구보다도 가장 힘들고 낮은 직분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잠들 때도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성전 문지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핍니다. 악한 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합니다. 성전의 거룩함을 지키는 사명자입니다. 행여나 악한 자가 성전에 들어오게 되면 성전의 거룩함은 상실되기 때문에 문지기의 사명은 귀중합니다.

 

오늘의 성전 문지기는 성전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일하는 성도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으로서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문지기가 사명을 잘 감당하지 않으면 악한 자들로 인하여 거룩함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문지기가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사탄의 소굴이 됩니다. 그래서 성전 문지기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성전 문지기는 한가하게 시간만 보내는 직분이 아닙니다. 잠시도 한눈을 팔든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깨어 정신을 차리고 문지기직을 잘 감당할 때 성전은 거룩하며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성전 안에는 제사장도 있고 서기관도 있고 장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문지기는 가장 낮은 직분이지만 성전의 거룩함을 책임을 진 매우 중요한 직분입니다.

 

찬송을 부르며, 세상에서 지친 영혼이 힘을 얻고, 시온의 대로가 있고, 많은 샘물과 이른 비로 복을 채워주는 주의 집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복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복을 받았습니다. 주의 장막에서 문지기가 좋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믿음을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아버지 의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최고의 축복임을 감사하며 오늘도 마음껏 주를 찬송하며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자의 노래 /84:1-/ 조정의목사

2020-09-18 02:51:34

 

그리스도인은 나그네로서 이 세상을 산다. 우리의 본향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나님 나라이며, 이 땅에선 외국인과 거류민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나그네의 또 다른 이름은 예배자이다. 예배자는 이 땅에서 자기 삶을 영적 예배로 하나님께 바친다. 본향에 이르러 영원토록 천사와 성도가 함께 할 일도 예배이다.

 

오늘은 특별히 예배자로 살아가는 교회가 하나님께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 예배자의 노래로 무엇을 고백할 것인지 시편 84편을 통해 살펴보기 원한다.

 

스펄전을 비롯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시편 84편을 150편의 시편 중 가장 아름답고 사랑받는 시편이라고 말했다. 고핫의 후손인 고라 자손, 성전의 문지기와 음악 담당인 그들이 만든 찬송시이며, 깃딧이라는 블레셋 가드 지방과 관련된(혹은 포도주틀, 포도주 제조하며 부른 노래와 관련된 멜로디) 기타 모양의 악기에 맞춰 노래가 만들어졌다(대상 26:1).

 

시편 84편은 시온의 노래로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와 주제가 매우 유사한데, 예배자인 시편 기자가 하나님계신 성전을 사모하며, 그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 중에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온전히 신뢰하는 고백이 담겨있다. 이 시편을 통해 오늘날 예배자인 그리스도인, 예배 공동체인 교회가 같은 고백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1.사랑합니다(1-4)

 

 

1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예배자의 첫 번째 노래는사랑합니다이다. 하나님에 대한 시편 저자의 사랑은 1-12절까지 계속해서 표현되지만, 특별히 1-4절에서 아주 분명히 볼 수 있다.

 

시편 기자가 사랑을 고백하는 대상은만군의 여호와이시다. 천군을 거느리신 절대군주,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노래한다. 대단한 힘을 가진 초월적 존재를 막연히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가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분으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를 나타내며, 시편 기자는 3절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며,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한다.

 

예배자는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노래한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시는 절대적인 능력의 하나님이다. 동시에 그분은 예배자의 하나님이시며 예배자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은혜로 그 백성과 언약의 관계를 맺으셨다.

 

하나님이 맺으신 관계 안에서, 예배자는 하나님께 사랑을 노래할 수 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가?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1). 주님이 계신 장막, 성막(성전)이 참으로 사랑스럽다고 고백한다. 건물이 아니라 그곳에 계신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때문에, 그분이 자기 이름을 두고 계시고, 자기 백성을 만나주시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 장소를 사모하는 것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2). 시편 기자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전인)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내 영혼그리고내 마음”, “내 육체”, 한 마디로나의 전부가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합심하여 몰두한다.

 

시편 기자의 영혼은 여호와의 궁정, 앞서 말한 것처럼 그분이 자기 백성과 만나주시는 그곳을 너무나 사모한 나머지 쇠약해졌다( 40:7, “풀은 마르고”). 풀이 마름같이 영혼이 시들시들해지거나 사라져버릴 것 같은 간절하고 강렬한 사랑의 표현이다.

 

시편 기자의 마음과 육체는 하나님을 향해 크게 소리 지른다. 괴로움과 애통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와 교통하시고 교제하시며 은혜와 영광을 친히 베푸시는 그분을 사모하기 때문에 크게 부르짖는 것이다.

 

이 땅의 예배자로 살아가는 교회가 부를 노래는 어떠해야 하는가? 교회도 하나님께사랑합니다라고 전심으로 노래해야 한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교회의 하나님, 교회가 영원히 섬기는 왕이시다. 그분이 인격적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방법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통해서다. 한때 하나님의 원수였던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그분이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고백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거처로 삼으신 교회(건물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임), 영원히 거하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해야 한다. 사모하여 괴롭고, 간절하다 못해 애절하게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영혼과 육체와 마음을 다해 그분께 사랑 고백을 드리자. 크게 부르짖으며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자.

 

하나님에 대한 시편 기자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질투로 변한다(3-4). 악한 질투는 잘못된 것이지만, 참된 사랑은 질투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걸 보며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편 기자의 질투 대상은 첫째 새들, 둘째 제사장이다. 먼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전 번제단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참새와 제비를 떠올렸다. 돌로 만든 번제단 사이사이에 새들이 둥지를 마련할 공간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성전의 넓은 뜰 주변에 집을 짓고 사는 새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참새나 제비는 그렇게 값이 나가는 새가 아니었다. 한 마디로 흔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새들이 여호와의 제단에 집을 짓고 산다. 참 부러울 따름이다.

 

4절에 나오는 것처럼 둘째로 부러운 대상은 제사장이다. 그들은 주의 집에 산다. 여호와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 시편 기자가 사모하는 그곳에 상주한다. 시편 기자가 영혼과 마음과 육체를 다해 찬양하기 원하는 주님을 그들은 항상 찬송한다. 일 년에 세 차례 성전에 모여 예배하는 순례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부러운가!

 

하지만 만일 시편 기자가 오늘날 교회를 볼 수 있었다면, 그는 새들이나 제사장보다 우리, 즉 교회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교회의 머리 곧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다( 10:31).

 

새들이 여호와의 번제단에 깃들어 산 것보다 훨씬 더 귀한 하나님의 제단, 십자가에 우리는 깃들어 산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성전이라는 제한된 장소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주의 집에 사는 존재가 되었다. 친히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주의 집이 되게 하셨다. 교회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 공동체다. 각 사람은 삶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모일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깃들어 사는 은혜 받은 백성이란 사실을 확증하신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그분께 바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와 영원한 화목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힘은 그분에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우리 하나님을사랑합니다라고 노래하자.

2.갈망합니다(5-8)

 

 

5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그들이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두 번째 예배자의 고백은갈망합니다이다. 5-8절은 예배자가 시온산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걸을 때 사모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갈망하며 인도하심을 구하는 노래다.

 

5절을 보면 예배자의 마음에는시온의 대로가 있다. 히브리시 본문에는시온이라는 단어가 없지만, 주님께 힘을 얻은 순례자의 마음으로부터 뻗어난 넓고 큰길은 분명히 시온을 향하여 나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원하는 소원, 갈망이 있는 것이다(7,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예배자의 갈망은 자기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는 주께 힘을 얻었다. 주님께서 예배자의 마음에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소원을 넣어주시고 불러일으키신다.

 

순례자의 길은 멀고 험하다. 도로가 잘 닦여 있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쉴만한 휴게소가 갖춰진 것도 아니다. 환경이나 기후가 좋지 않다. 광야의 건조하고 모래가 많은 길을 걷는 것은 정말 수고스럽다. 시편 기자는 그런 험난한 순례길을 가리켜눈물 골짜기라고 불렀다(6).

 

발삼나무가 있는 건조한 골짜기를 가리키거나 발삼나무를 뜻하는 히브리어 바카아와 발음이 거의 비슷한 바카하, “눈물골짜기, 고생과 수고가 넘쳐 눈물 나는 골짜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 길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위로가 넘친다. 그 순례의 길,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줄 것이다(모두 미래형). 하나님께서 이른 비로 웅덩이를 채워 마시고 쉴 수 있는 샘을 많이 순례의 길 중에 준비해주실 것을 갈망하고 간구하는 고백이다.

 

순례의 길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는가? 결국은 7절에 노래하는 것처럼 예배자들이 힘을 얻고 더 얻어(필요할 때마다 힘을 계속해서 공급받아), 결국엔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날 것이다.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각기 목적지인 시온에 도착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 그곳에서 다른 예배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노래하게 될 것이다.

 

시온을 향한 대로를 마음에 품도록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 시온까지 여러 가지 수고와 고난을 감수하며 도달하도록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한다.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예배자의 기도는 갈망의 기도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기도한다. 주님께서 그 마음에 불러일으키신 대로, 그 마음에 있는 대로를 따라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서게 해달라는 기도다.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언제나 힘을 주셔서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애굽 땅까지 선하게 인도하신 것처럼, 예배자는 야곱의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에 응답하셔서 갈망하는 순례의 길을 무사히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오늘날 예배자인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예배 공동체인 교회가 갈망하며 부를 노래 제목은 무엇인가? 우리도 함께 모이는 것을 갈망해야 한다. 각자 있는 곳에서 함께 모이는 곳에 이르도록 주께서 우리 마음을 강권하시고 인도하신다. 당신의 마음엔 교회를 향한 대로가 있는가?

 

조금 더 확장해서 우리는 인생 자체가 순례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나님 나라에 각기 나타나기까지 눈물골짜기를 걸어야 한다. 하지만 이 길을 기쁨으로 걷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걸음걸음마다 인도하시며 은혜의 샘물로 힘을 얻게 하시고 위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라. 마침내 주를 뵙고 예배하고픈 갈망을 담아 순례의 길을 걷도록 힘을 얻고 또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3.신뢰합니다(9-12)

 

 

9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10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마지막 예배자의 노래는신뢰합니다이다. 마지막 12절에 만군의 여호와를 다시 한번 부르며,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노래했다. 주를 의지하겠다는 결단의 표현이며, 그것이 참으로 복되다는 걸 믿는 신뢰의 노래다. 왜 주를 신뢰하는 것이 복인가? 하나님이 예배자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보자.

 

예배자에게 하나님은 방패시다(9, 11). 모든 위협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말이다. 특별히 주님은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시며 그를 통해 백성의 안위를 보호하신다. 오늘날 세우신 권세를 통해 교회를 고요하고 평안하게 살도록 보호하시는 것과 같다(딤전 2:1-2).

 

여호와 하나님은 예배자의 해가 되신다(11). 모든 생명과 에너지를 공급하신다는 말이다. 여호와는 예배자에게 은혜와 영화를 주신다(11).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다. 영광을 나타내신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내려온다( 1:17).

 

나아가 여호와는 예배자가 정직하게 행할 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하나도 감추거나 감하여 주지 않으시고, 주 앞에 정직하게 살아갈 때 그분의 모든 은혜를 풍성히 베푸실 것이다.

 

예배자가 언약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여호와께서 이런 분이시라면, 이렇게 자기 백성에게 인자와 은혜가 풍성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라면, 예배자의 따라오는 이 고백이 참으로 자연스럽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와 함께 하루를 사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 사는 것보다 낫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좋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턱에 서 있는 것이 좋다이다. 문 앞에 서 있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아무 집에라도 들어가서 사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편 기자는 악인의 장막에 거하며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성전 문턱에 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노래한다.

 

우리도 이와 같은 신뢰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악인과 함께 이 세상에 사는 것보다 천국 문턱에 서 있는 그것을 더 바라고 있는가? 천년만년 사는 것보다 주와 함께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진실로 고백할 수 있는가?

 

그러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그분이 나의 방패이시며 해이심을 굳게 믿어야 한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직한 삶을 살아갈 때, 당장 눈앞에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아끼지 않고 베푸실 것을 믿어야 한다.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는가?

 

코로나 19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다시 한번 이 세상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임을 피부로 와닿도록 느끼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병균이 세계 모든 사람을 위협하며 우리 인생이 풀처럼 금방 말라버리는 인생이라는 진리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 이 험악한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가? 짧고 허무한 인생 그 길에서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노래를 부를 수 있나?

 

첫째,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 영혼을 쇠약하게 만들 정도의 강렬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랑의 대상, 하나님을 노래한다.

 

둘째,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에 하나님에 베푸실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또 얻어 마침내 그분 앞에 나타날 것을 갈망한다. 우리는 인도자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셋째,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주시고 모든 위험에서 보호하시며 걸음걸음마다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믿음을 둔 하나님 그분을 노래한다.

 

아직 이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대로가 열리기를, 하나님이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일으켜주시길, 그래서 이 복된 길을 함께 걷기를 기도한다. 예배자로 사는 이들이여! 함께 노래하자.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갈망합니다. 하나님 신뢰합니다. 이 노래가 우리가 함께 그리고 각자 처한 곳에서 날마다 부를 예배자의 노래가 되길 바란다.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 /84:1-12/ 오주철목사

2019-12-10 13:19:53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그저 막연하게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깊이 알아감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시고 위대하심을 점점 알아가면서 그분을 마음 깊이 경외하고 사랑하고 신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들을 음미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깊이 알아가는 가운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역사의 시기에 자신의 어떠하심을 그분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씩 계시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장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계시해 주셨을 때의 구체적인 역사의 정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속 역사의 어떤 역사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  그런데만군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으로 불려진 것은 한나의 입을 통해서입니다.  한나는 사사시대의 말기에 남편 엘가나로부터 사랑 받는 아내였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남편 엘가나에게는 브닌나라고 하는 첩이 있었는데, 그녀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브닌나에게 많은 멸시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절기가 되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실로에 갔을 때 한나는 자신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이렇게 서원 기도를 합니다.  사무엘상 1 1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첩 브닌나에게 무시를 당하고 짓밟힘을 당하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나는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 당시에 힘이 없었던 이스라엘이 강한 이방나라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당해야만 했던 처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적에게 멸시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분은 여호와이시라는 의미에서 저들은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무엘상 17장에 가면 다시 불리워집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만군의 여호와를 참으로 의지하는 신앙이 없이 오랜 세월 동안 블레셋에게 짓눌려 살았습니다.  더구나 사울 왕을 비롯해서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위세 앞에 눌려서 40일 동안이나 벌벌 떨며 갖은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윗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뿐이심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할례 받지 못한 골리앗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며 싸움을 걸어오는 장면을 보고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자의 지팡이를 들고 손에 물매를 들고 이렇게 외치며 골리앗을 향해 당당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무엘상 17 4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만군의 여호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여호와 체바오트라고 부릅니다.

 

만군에 해당하는체바오트군대들’, 또는많은 군대를 의미하는 말로써 일반적으로 번역하자면하나님은 군대들의 주인이시다는 뜻입니다.  , ‘여호와 체바오트의 역사적인 의미는만 명의 군인을 거느린 여호와라는 말로서 어느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이 힘 있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이 표현이 282번이나 등장하는데, 이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에는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은 천군 천사들을 군대로 부리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윗은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한나와 다윗,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들을 멸시하고 짓밟고 괴롭히는 원수들 앞에서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아감으로써 힘든 인생 여정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도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성경에서여호와 체바오트로 소개되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하나님일까요?

 

첫째로, 그분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오늘 본문인 시편 84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시편 84편은 고라 자손의 시편으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했을 당시에 이방 땅에 강제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성전과 그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을 애타게 사모하면서 드린 기도시입니다.

 

  시인은 새들을 부러워하고, 절기를 지키기 위해 시온을 향하여 순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정도로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탄식하면서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9절에서 시편 기자는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방패이신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군대를 거느리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들의 든든한 구원자요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시편 기자는 방패이신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어떤 어려운 삶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하심을 요청할 때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심리적인 부담이나 장애물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예들 들자면, “내 삶이 주님 보시기에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할 때 내가 무슨 염치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보호해 달라고 요청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 앞에서 도움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과 함께 또 하나 부르고 있는 명칭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로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아니 야곱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우리는 흔히 믿음의 조상들을 말할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라는 조상들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서 가장 질이 낮은 조상님이 계시다면 그가 바로 야곱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야곱은 가장 욕심이 많았고, 가장 교활했고,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 하필이면 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약점 많은 야곱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천군천사들의 보내서 야곱을 보호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하셨을까요?  야곱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을 때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였을 것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14년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사기도 좀 치고 해서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외삼촌에게 경제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힌 후에 외삼촌의 집을 떠나갑니다.  때문에 한편으로는 외삼촌 라반이 복수의 칼을 들고 종들과 함께 자신의 뒤를 추격해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장자의 권한을 빼앗긴 분풀이로 형 에서가 자신을 추격해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한 부대가 등장하여 야곱을 호위해서 앞으로 인도해 갑니다.  창세기 32 1절과 2절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은 기도한 후에 등장한 일련의 군대 호위를 받으면서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군대라, 하나님이 보내셨구나.”  그리고 그 땅의 이름을마하나임이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마하나임하나님의 캠프’, 혹은하나님의 진지라는 뜻입니다.  모든 시련을 뒤로 하고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야곱에게 천사들의 호위가 시작되자마자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든든한 진지로 구축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이제 무엇을, 그리고 그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시편의 기자가 굳이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자신들의 처지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죄와 허물이 있는 부족하고 초라한 사람들이지만 당신의 언약과 신실하심을 따라 보호해 주시고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격이 없었던 야곱을 보호하시고 도우신 바로 그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본래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저와 여러분, 우리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이름이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천군천사를 통한 군대를 보내어 에워싸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의 이름을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목소리 높여 불러보십시오.

 

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여!”

 

우리가 그렇게 부르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군대를 거느리고 계시다가 우리의 부르심과 동시에 그의 군대인 천사들을 파견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그 하나님께 도우심과 보호를 요청하는 일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지금 자신의 군대인 천사들을 파견할 준비를 마치시고 저와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천사들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히브리서 1 14절에 보면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성경은 천사들이 여러분과 저를 돕고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영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직 저와 여러분, 우리를 섬길 목적으로 이 위대한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군대의 사령관이 되시는 그분에게 속히 SOS를 타전하십시오.  그의 이름은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두 번째로, 그분은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확실하다면 이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안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일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로 부르면서 여호와의 성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주를 예배하는 장막, 주의 임재가 있는 성전에서 진정한 영혼의 안식을 경험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런데 그는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와서 오랫동안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 예배를 상실한 채 살아왔습니다.

 

성전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여호와의 궁정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자신의 영혼이 기진맥진할 정도라고 고백합니다.  마치 집을 잃어버린 외로운 사람처럼 그의 영혼은 집을 떠나 방황하던 한 마리의 참새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102 7절에서 그와 같은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옛날 한국식 기와집을 연상해 보십시오.  겨울철 처마 밑에 둥지를 만들고 거기에 들어가 있는 새들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런 둥지를 만들지 못하고 겨울철에 파르르 떨며 지붕 위를 배회하고 있는 불쌍한 참새들의 이미지를 한 번 그려보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그 누구도 받아줄 곳이 없고, 둥지를 만들 곳이 없었던 이런 참새 같은 영혼들을 주님의 성전이 받아주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많은 새들이 깃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주의 성전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이 새들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오랜 세월동안 방황하던 자신의 영혼이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성전에서 참새와 제비 같은 자신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체바오트.”  그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품 안에서 비로소 안식을 얻은 기쁨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4절에서 시편 기자는 그가 새롭게 얻은 이 참된 행복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지금 시편의 기자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행복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집이 이제는 나의 집이 된 것입니다.  혹여 우리들 가운데 아직도 영혼의 집을 갖지 못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내가 교회에 나오지만 뭔가 이 교회가 내 집이 아니고 남의 집처럼 느껴지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영혼의 모태와 같은 곳입니다.  초대 교부들은 종종 이런 말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어머니로 섬기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

 

다시 3절에서 묘사된 주의 성전에서 집을 얻은 행복한 참새, 행복한 제비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행복한 참새입니까, 아니면 외로운 참새입니까?  제가 제비냐고 묻지는 않겠습니다.  이 시간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참새입니까, 외로운 참새입니까?”

 

아마도 우리 한국 유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유머가 있다면 참새 시리즈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참새의 연약한 이미지가 이 땅을 살아왔던 슬픈 민초들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었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포수가 쏜 한 방의 총에 전기 줄에서 맞을 것을 두려워하고 떨던 참새의 이미지 속에서 불행하고 안전함이 없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이 유머 속에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참새 시리즈의 시대적 변화 그 자체가 우리의 사회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참새 시리즈가 처음 탄생한 것은 60년대였다고 합니다.  60년대 가난했던 시절에 태어난 최초의 참새 시리즈는 전기 줄에 나란히 앉은 부부 참새 중 하나가 포수의 총을 맞고 떨어지면서 한 말입니다.  여보, 내 몫까지 살아주오.”  가난했지만 낭만이 있었던 그 시대의 풍경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90년대에 와서는 아주 바뀝니다.  포수가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쏘아서 떨어뜨리자 추락하는 새가 하는 말이왜 나만 쏴요, 재도 쏴요.”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훨씬 더 살벌해집니다.  총 맞은 참새가왜 나만 쏴요, 재도 쏴요라고 하자, 총을 맞지 않은 참새가 이렇게 말합니다.  재 아직도 안 죽었어요.  한방 더 쏴요.”

 

민심의 변화를 보여주는 유머입니다.  관용을 상실하고 이웃을 상실한 이 시대의 상징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화는 놀랍게 발전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함은 사라졌습니다.  그 마음에 참된 안식과 평화가 없이 우리의 영혼이 방황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미래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쉴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진실로 믿으시면 영혼의 기나긴 방황은 끝날 것입니다.  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 그분은 우리의 안식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보금자리에서 이제는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마지막으로, 그분은 우리의 권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앞에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불려졌던 때를 말씀하면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무엘상 17 45절은 소년 목동 다윗이 거인 장군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면서 외쳤던 말씀인데, 다시 한 번 다같이 힘차게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여기에서 다윗이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여호와 체바오트입니다.  그는 거인 골리앗 앞에서 당당하게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나아간다고 외쳤습니다.  결국 그는 여호와 체바오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기적 같은 승리를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독교 신앙을 소유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수동적인 은총들을 약속합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 보호의 약속이 그렇고, 안식의 약속이 그렇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를 두려움에서 보호해 주실 것이고, 방황하던 우리를 안식의 자리에로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이런 수동적인 은총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약속 가운데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인생은 전쟁터입니다.  이 살벌한 전쟁터에서 적을 물리치고 앞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힘입어 구체적인 승리를 경험하게 하는 약속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바로 그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아무리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적인 상황이 그에게 불리해 보여도 그는 보이는 상황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거느리시는 군대를 믿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담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본문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체바오트를 의지하는 자, 주를 신뢰하는 자, 주를 믿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으로 만군의 여호와를 믿는 순간, 참으로 그분을 의지하는 순간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랬을 때 우리의 믿음은 권능의 통로로 역사할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2년 동안 병치레하느라 모든 재산을 다 낭비했습니다.  그래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넘치고 있었지만 그 많은 장애물들을 헤치고 나아가서 드디어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 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스쳤겠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당신의 옷자락을 스치고 있는 손길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 여인은, 저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누가는 누가복음 8 46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앎이로다.”

 

예수님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손을 댄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바로 순간 성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그 여인에게 흘러갔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권능의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믿는 자를 찾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믿으면 지금도 그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많이 읽혔던 책 가운데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Chicken Soup for the Soul)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실화로 소개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미국에서 고든과 신디라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아주 어린 딸 타냐가 있었습니다.  어린 딸 타냐가 어느 날 자신의 집 부엌 오븐 옆에서 놀다가 마침 오븐 위에 올려놓았던 펄펄 끓는 물 냄비를 건드려서 그 물이 얼굴 위로 쏟아져 중화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어린 딸 타냐는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고 수술을 받습니다.  대 수술이었습니다.  긴 수술이었습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이 부부에게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은 큰 화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뉴스뿐이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다급해진 엄마 신디는 소파에 엎드려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예수님, 어떻게 해요.  예수님이 직접 들어가 주세요.  예수님이 만져 주셔요.  예수님이 고쳐주세요.  예수님이 직접요.”

 

한 참 기도를 하는데 누가 와서 툭툭 건드립니다.  보니까 이들이 나가는 교회의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이 교인 두 사람과 함께 와 있었습니다.  저희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도하러 왔습니다.”  이들 두 부부의 손을 잡고 기도하던 목사님이제가 들어가 보지요.”  목사의 신분을 밝히고 잠시 수술실의 허락을 받고, 목사님과 교인 두 분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고 나와서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기다려 보십시다.”  그리고 목사님 일행은 떠나갔습니다.  하루 밤을 지샌 다음 그 이튿날 아침 이들 부부는 허락을 받고 타냐가 입원하고 있는 병실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보니까 타냐는 잠들어 있었는데 딸의 얼굴을 보고 부부가 깜짝 놀랍니다.  화상이 씻은 듯 흔적을 감추었습니다.  아주 깨끗한 얼굴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이 놀라운 기적 앞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함께 오셔서 기도해 주신 두 분이 누군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들 두 사람에게도 찾아가서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아주 의아해 하며 이렇게 말하시더랍니다.  저는 집사님 한 분하고 찾아갔었는데요.”  아닙니다, 목사님.  목사님과 두 분이 함께 오셨잖아요.  여보, 그렇잖아요?”  남편도 확인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니라고, 자신은 집사님 한 분하고 둘이서 갔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냐, 세 사람이냐를 놓고 한참을 논쟁하다가 목사님이 갑자기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 그렇군요.  또 한 분은 예수님이 직접 오셨거나 예수님이 보내신 천사일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자 신디는 또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참, 맞아요, 목사님.  저도 깜빡 잊었습니다.  제가 기도하면서 예수님이 직접 오셔 달라고 기도했거든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의 이름이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백성들이 힘들고, 아프고, 어려워하는 삶의 자리마다 부르면 천사를 대동하고 달려오셔서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금년 한 해, 아니 우리의 일평생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나약한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어리석은 관계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어색한 관계도 회복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육신의 아버지와 든든한 관계를 맺듯이 내 생명의 아버지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과의 든든한 관계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단은 모든 축복의 첫걸음입니다.  결단 없이 일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자리에 앉았다가 그냥 가지 마시고 결단하십시오.  결단을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이제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믿으며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가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지렁이 같은 너 인간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여기 이곳에 왔습니다.  종교적인 장난을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오면 무슨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자 왔습니다.  연약하여 왔습니다.  넘어져서 왔습니다.  실망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보호해주시고 안식을 주시며 권능을 주시는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가 계십니다.  그분이 보내시는 천군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를 곤고하게 하는 일들이 있을 때마다 그것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십시오.“너는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할렐루야!”

 

 

 

 

예배드리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84:1-12

2018-10-30 05:51:32

 

바울은 생애의 마지막이 다 되어갈 때,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리고 믿음의 자손인 우리들에게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경건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심장이 멈추면 인간이 죽듯이, 예배가 멈추면 신앙도 죽습니다. 뇌가 거의 다 죽은 식물인간도, 만약 그의 심장이 뛴다면, 소생의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심장이 멈춘다면, 인간은 곧 바로 죽습니다. 혈액과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인체는 죽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심장부인 예배가 죽는다면, 그리스도인은 곧 바로 죽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식물인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건 훈련의 핵심은 예배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우리는 무엇보다 예배를 드리는 훈련을 열심히 합시다. 자주 모이자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예배를 자주 드리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감격에 겨워 많은 예배를 드렸는지는 몰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예배가 점점 더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 변해 갔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예배 중에 잡담하거나 좁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예배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예배의 횟수를 좀 줄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주일 오후 예배 금요 철야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구역예배를 제외한다면, 우리교회는 한 주간 동안 단 세 번, 주일 낮 예배 저녁예배 수요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예배마저 소홀히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예드리기가 그렇게 힘드십니까? 일주일에 심장이 세 번도 안 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 그런 심장은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은 한 번도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뇌가 멈추어도 심장은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잘 때도 심장은 자지 않고 일합니다.

 

그런데 경건의 심장, 신앙의 핵심인 예배를 일 주일에 단 세 번도 못 드리시겠습니까? 심지어 주일 예배마저 빼먹는 성도들을 볼 때마다 저의 마음은 참으로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성도의 영혼이 죽어 가는데, 어찌 슬프고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슬프시고 안타까우시겠습니까?

 

미국 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자카리 테일러 장군이 헌법에 의해 1849 3 4일에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는데, 마치 그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신앙이 독실한 테일러 장군은 취임을 거절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행사이므로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간청했으나, 전혀 먹히지 않았습니다. 헌법에 따라 임기가 만료된 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폴크는 대통령 직에 하루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주일 12시부터 월요일 12시까지 24 시간 동안 그 자리를 메꿀 임시 대통령을 상원이 선출해야 했습니다. 상원은 상원의장 대이빗 라이스 앨치슨을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임시 대통령 앨치슨 상원 의장은 토요일 밤에 잠든 후에 하인이 깨워주지 않아 자신의 임기를 잠으로 다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도 분명히 문제가 많은 나라이지만, 미국이 세계를 이끄는 강대국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나라를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지 않겠습니까?

 

1924년 올림픽 경기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여기에 참석한 선수 중에는 스코틀랜드의 육상 선수 에릭 리델이 있었습니다. 그는 100미터 경기에 참전하기 위하여 여러 달 동안 맹훈련을 했습니다. 올림픽에 참여한 스포츠 기자들은 리델 선수를 100미터 경기의 우승 후보로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경기 일정이 주일에 잡혀 있어서, 그의 마음에는 심한 갈등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조국의 명예를 위해서는 뛰어야 하지만, 신앙 양심으로는 도저히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운동장을 달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믿은 그는 경기를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팬들은 크게 실망했고, 그를 격찬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바보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며칠 후 그 주간에 뛰게 되어 있던 스코틀랜드의 400미터 경기 선수가 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리델 선수는 자기가 훈련한 경기 종목의 4배나 되는 힘든 경기지만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100미터 경기 선수가 400미터 경기를 47.6초의 기록을 세우고 당당히 우승을 했습니다. 그 후에 에릭 리델 선수는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서 평생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1945년 중국의 군인 캠프에서 세상을 마쳤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를 뜻하는 영어 워십(Worship) Worthship에서 유래하는데, "워스'(Worth)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워십, 즉 예배는 '가치를 돌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로 앞의 두 사람은 대통령직과 올림픽 우승컵보다 하나님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일을 빼먹을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직과 우승컵을 포기할지언정,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들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로 여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온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는 고된 순례의 길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84편은 84란 글자 밑에 보시면 괄호하고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깃딤에 맞춘 노래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냥 고라 자손이라 했기 때문에 이 시를 누가 썼느냐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고라는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다가 저주를 받아서 땅이 갈라져서 죽고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도 그때 죽었습니다. 그러나 고라자손은 그때 다 멸망하지 않고 남아서 그들도 레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찬양하는 일을 맡아서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비의 죄 때문에 아들이 망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 것입니다.

 

영장이란 말은 찬양대 지휘자를 말합니다. 깃딧은 곡조의 이음입니다. 많은 핮자들은 이 시는 다윗이 썼서 고란자손을 통해 성전에서 부르게 했다고 합니다. 쓴 때는 압살롬의 반역 때로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내 주고 광야로 도망을 가면서 쓴 시로 추정을 합니다. 먼저 1-7절까지는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주일 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에배드리는 시간을 사모하는 내용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했는데 언제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분이 어떤 분임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간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와 앉아 있는데 내가 바라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하는 태도가 제대로 나오고 방법이 제대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라했는데 이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능력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은 잘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니까 만군의 여호와라고 고백은 하면서 그 분을 나의 왕으로 모시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일이 안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성도는 하나님의 장막을 너무나 사랑하고 사모한 나머지, 몸과 마음이 쇠약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순례의 길에 오른 그는 성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참새와 제비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을 얼마나 지극히 사랑하는지 절절히 느껴오지 않습니까?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성전에 거하는 자가 누릴 복은 무엇입니까?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복을 누립니다.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도 물론 크게 기뻐하시겠지만, 찬송을 드리는 자도 큰 힘을 얻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인생은 눈물의 골짜기입니다.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눈물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눈물의 골짜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다 웃는 것처럼 보여도, 겉으로는 행복해 보여도, 베게와 이불을 한숨과 눈물로 적시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럴 때에 불신자들은 우상을 향해 소리치지만, 복 있는 성도들은 성전에 나아와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립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여기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성도는 만군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란 전쟁에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란 조상과 민족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저는 야곱과 같이 속임에 능하고 약삭빠른 사람이 왜 '이스라엘'이라는 놀라운 이름을 얻었는지, 의아할 때가 많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야곱을 편애하시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삼촌 집에 도망하는 중에 광야에서 어둠과 추위와 배고픔에 떨 때도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에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던 그는 하나님에게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에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이처럼 야곱은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담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길 원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정말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날이 그 어떤 날보다 더 기쁘고 좋습니까? 악인의 호화로운 거실보다 차라리 성전의 문지기가 되고 싶을 만큼 성전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들에도 계시고 산에도 계십니다. 악인의 장막에도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 가장 가까이 오십니다. 예배 중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오시는 것을 느낍니다.

 

찬송과 기도와 헌금으로 우리만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과 성찬을 통해, 위로와 채찍질을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이 시간, 이 날, 이 사건보다 더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하나님은 눈물의 골짜기를 비추시고 인도하시는 해요, 원수와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방패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서 은혜를 주시고, 원수 앞에서 영화의 관을 씌워주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는 좋은 것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숨을 멈출 때까지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을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마음에 있는 시온의 대로 /84:1-12/ 유기성목사

2017-06-12 21:41:04

 

84:1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3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4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 (셀라)

 

5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8 주 만군의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야곱의 하나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셀라)

 

9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10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11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12 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가장 큰 관심이 하나님의 나라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일까?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일까?’ 그러면서 놀라운 만남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하형록 목사님을 만났던 것도 그 만남 중 하나입니다.

그는 심장 이식 수술을 두 번 하고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회사를 설립하였는데,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자를 돕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회사 경영의 원칙을 잠언 31장으로 삼았습니다. 94년부터 잠언 31장으로 신입사원을 면접하고 직원 훈련을 했습니다. 그것이 [P31]이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시민은 확실히 구분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시민의 특징 중 하나는 마음에 천국을 향하여 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5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 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새번역에서는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 길에 오른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개정역에서는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시온 산을 말하는데,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시민에게는 마음에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큰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것입니다.

 

시편 84편은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난 순례자의 심정을 노래한 것입니다. 순례자에게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10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시민들의 마음이고 갈망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집은 보잘 것 없는 장막이었습니다. 시인은 왕궁도 보았고 부자 집들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하나님의 장막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84:1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4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 (셀라)

이 마음이 시온의 대로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음을 느끼며 행복했습니다.

오늘 교회에 나오면서 마 13:44에서 말씀하신 보화를 발견한 농부같이 기뻤습니다.

그것은 제 마음에 계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길이라 하셨습니다.

 

어려서는 어머니가 계신 곳이 집입니다. 결혼해서는 아내가 있는 곳이 집입니다.

순례자가 사모하는 성전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전입니다.

시편 기자에게는 시온 산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우리에겐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나는 구원을 받았을까?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왕실 목사님에게 물었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나요?” 그 목사님은죄송하지만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죽어 봐야 압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왕은 낙심하여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다른 목사님이 여왕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여왕이시여,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을 읽어 보십시오

 

요일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믿음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예수님이 마음에 임하셨다는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붙잡으면 믿어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저는예수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계시다는 복음을 고2 때 처음 들었습니다. 그 때 그 말씀은 저를 오히려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오히려 제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란 증거처럼 여겨졌습니다. 제 안에 계시다고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때 주님은 그 말씀으로 저를 사로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데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이 지나고 지금 저는 “24 시간 주님을 바라봅시다!” 하고 외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안에 길이 있는지 찾기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제 마음에 대로가 생긴 것입니다.

 

시온의 대로는 히브리어 원문이 '메실라'로서 '쌓아 올리다'란 뜻인데, 이것은 자연적으로 난 길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길, 곧 돌을 쌓아 올리고, 다져서 만든 길을 뜻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포장도로, 고속도로입니다.

 

마음의 시온의 대로도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마음의 길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누구나 마음에 길이 생깁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시온으로 가는 순례 길을 찾기 매우 힘든 상태에 있습니다. 겨우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길만 보이는 정도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지 않는 길처럼 잡초가 무성해지고 나중에는 어디가 길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길을 잃는 사람도 있습니다.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여러분, 죄가 무서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마음에 있는 시온의 대로를 지워버리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저 한번이 아닙니다. 한번 죄를 지으면 그것은 다시 죄를 짓게 만드는 엄청난 힘이 됩니다. 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를 계속 짓게 되면 나중에는 죄를 의식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사와 이적까지 행하고도 주님 앞에서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하는 말씀을 듣는 자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잃기 전에 속히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시온으로 가는 길은 생겼는데, 몸은 자꾸 다른 길로 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가야 할 길은 저긴 줄 알면서, 몸이 자꾸 다른 길로 간다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당장 병원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그렇지는 않습니까? ‘기도해야지, 성경 읽어야지, 용서해야지, 사랑해야지 기뻐하라 두려워 말라압니다. 잘 압니다. 그런데 그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사람처럼 주님께 고쳐달라고 울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걸어가지 못하는 길은 아직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너무 작은 분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아예 존재감이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청장년 성도 한 분이 상담을 해 오셨습니다. “자위행위 하면 정말 안 되나요? 혈기왕성한 나이인데 성매매를 하는 것 보다는 낫잖아요?”

자위행위가 죄냐 아니냐를 떠나서 주님이 함께 하셔도 할 수 있느냐 아니냐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니 이런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 일학년 때,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고 너무나 죄책감을 느꼈지만 다시는 그런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하지 못했습니다. 음란을 버리는 것이 너무 삭막한 삶을 사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저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5년 뒤 기도회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제가 거룩한 목사가 되는 것입니까?” 물었을 때, “혼자 있을 때,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하시는 말씀에 꼬꾸라졌습니다. 그 때는 달랐습니다. 25년 동안 제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생긴 것입니다. 제게 주님은 크신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서울대 노천강당에서 2016년 가을 서울대 개강집회,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 후에 한 학생이 기도회를 인도하면서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계셨음에도 마치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처럼 살았던 것을 회개합시다.”하고 기도제목을 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왕따 될까, 무시당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까봐 염려함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오늘 제가 주님을 무시하고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이 학생의 문제는 마음에 시온으로 가는 길은 있지만 그 길은 대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계셨지만 크신 주님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시온의 대로는 우리가 매 순간 주님을 따라 순종의 걸음을 내디뎌야 생기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들이 순탄히 시온에 다다르는 것은 아닙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게 되면서 순례의 길을 포기할 위기를 수도 없이 만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다시 일어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뵐 것입니다.

 

성도들이 천국을 향하여 가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5 말씀처럼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어야 갈 수 있습니다. 눈물 골짜기를 수도 없이 지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이 길이 살 길이다! 이 길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주님은 계속하여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앞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계속 우리에게주님을 바라보라, 주님께 순종하라하십니다.

 

여러분,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이 되려면 항상 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 졸업할 때,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라찬송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려 했지만 성공하고 싶었고 고생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주님을 만나고 주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깨닫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옥토밭을 찾아다니지 않고 돌짝밭 사명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눈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처음 말씀이 제게 임했을 때, 그것은 제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대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보기 바랍니다. 육신의 죽음이 눈앞에 왔을 때를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3에서 성전에 집을 짓고 사는 새들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3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시편 기자는 새들을 보고 자신들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시편을 쓴 이는 고라의 자손입니다. 고라는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인물인데, 사사건건 모세를 대적하다가 그와 동조한 250명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땅 속에 매몰되어 죽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하나님께서 고라의 아들들은 죽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다윗 왕의 특별한 배려로 성전을 섬기는 자들로 복권하게 되었습니다.

고라의 자손들은 참새나 제비 같이 하찮은 존재도 싫어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 고라 같은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였습니다. 지독한 이기주의자요, 자기 의가 충만한 자이며, 은밀한 죄의 종노릇하며 살던 자였습니다. 마땅히 죽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자였는데 하나님은 십자가의 은혜로 천국에 우리가 있을 처소를 예비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로 성전 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시온으로 가는 대로가 있어야 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도 작아 보이고 좁아 보이면 그 길로 못 갑니다.

용서하기 힘든데, 용서하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사랑, 정결함, 정직함, 주는 일, 큰 길이 아니면 갈 수 없습니다.

 

계속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순종의 걸음을 내디디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시온의 대로가 됩니다. 주 예수님은 크신 주님이 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교제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함께 시온의 대로를 가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못 갑니다.

그래서 영성일기 통하여 마음을 열고 사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더 깊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에 있는 시온으로 가는 순례 길을 서로 점검해 주어야 합니다.

 

찬송합시다 524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기도

주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 된 자가 되었음을 감사합시다.

우리 안에 있는 시온을 향한 길이 점점 넓어지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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