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요20:1-18/ 유기성목사
2022-09-22 10:49:31
요 20:1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4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5 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7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8 그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10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11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15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8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부활절을 앞두고 한 일간 신문 종교담당 기자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기자가 인터뷰를 마치면서 마지막 질문을 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솔직히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어 합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질문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심각한 도전이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부활절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날이지만 위험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기독교는 유일한 진리의 종교이든지, 거대한 사기꾼 집단이든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절과 성탄절은 세상의 반응이 다릅니다.
성탄절은 세상이 함께 기뻐해주지만, 부활절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아예, ‘거짓이다’, 좋게 말하면 ‘신화다, 집단 최면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안 믿는 것이 더 어려울 만큼 증거가 분명합니다.
첫째, 빈 무덤입니다.
올해 부활절 교회 로비 장식이 빈 무덤이지 않습니까?
로마 군인이나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시체만 보여주면, 교회는 벌써 끝났을 것입니다.
둘째, 사도들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순교하지 않고 벌써 도망갔을 것입니다.
셋째, 초대교회의 부흥입니다.
유대교와 헬라 철학과 로마 권력을 이긴 힘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말입니다.
넷째, 너무나 증인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고전 15:6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500여 성도들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그 중에 태반이나 고린도서를 쓸 당시까지 살아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말입니다.
다섯째는 부활의 첫 증인이 여성이라는 것입니다.
1세기는 여성들에게 유대 법정에서는 증언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교묘히 만든 신화”(베드로후서 1:16)였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첫 번째 목격자가 귀신들렸던 여성이었다고 쓸 리가 있었겠습니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빌라도나 헤롯이나 대제사장에게 나타나시지 않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벌써 끝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랬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한편의 권선징악 복수극 만화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이나 헤롯이나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모든 인류의 죄로 인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죄와 마귀와 사망의 세력이 꺾어졌습니다. 결국 사랑이 미움을 이긴 것입니다.
그러니 빌라도나 헤롯, 대제사장에게 복수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핵심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역사적인 사건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역사책에 예수님의 부활이 기록되었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조차 다른 제자들이 “내가 만났다” “우리가 다 보았다” 해도 “내 눈으로 보고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6.25 전쟁, 끊임없이 재해석하려 하고 사실을 왜곡하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고작 70년 전 사건입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일에 대하여 ‘신화였다 환상이었다’ 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받은 이유는 당시 통치자들이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도 다른 종교들처럼 전도자를 잡아 가두고 죽이면 없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도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죽여도 교회는 더 부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교회를 부흥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 마리아는 슬프기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달려 갈 때는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제자들에게 달려가는 마리아의 얼굴은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외쳤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부활절 예배 분위기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절 예배는 드리지만 부활절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동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명하십니다.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죽은 자’란 육신은 살았으나 영혼이 죽은 세상 사람을 말합니다.
‘잠자는 자’란 영생은 얻었으나 무기력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일어나라’는 것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면 화들짝 놀라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으로는 시체들 속에서 자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였습니다.
지금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오는 길에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다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스치듯이 만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마음이 예수님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제자들에게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외쳤는데, 누가복음 본문을 보면 제자들은 그녀의 말을 허탄하게 여기며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일어나 주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역시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고,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수건만 잘 정리되어 개켜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베드로와 요한은 ‘기이히 여기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대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무덤 밖에 서서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고 여기시는 분은 대답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님께 있습니까?”
시간 쓰는 것 보면 압니다. 돈 쓰는 것 보면 압니다.
오늘이 부활절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에 머물지 말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증거를 나열해도 안 믿을 것입니다.
우리가 대답할 것은 “부활의 주님이 지금 저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뿐입니다.
저는 부활을 어떻게 믿으라고 하느냐 하는 기자의 질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대답하였지만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어제 설교 준비를 하다가 본당에 내려왔습니다. 강단의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격한 애통함이 밀려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라는 대답을 하기에 제가 너무 초라하고 너무 무능하고 너무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주님 좀 더 분명하게 역사해 주세요!”
그러나 눈에 보이는 증거만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필요하면 지금도 오병이어의 역사나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이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변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기적보다 주님이 저와 함께 하시는 것이 더 큰 기적이니까요!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전하겠노라 고백하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일어서는데 제 간절한 마음과 애통함이 제 마음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아 주님이시구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주님은 결코 막연하게 믿을 분이 아니셨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2천 년 전의 빈 무덤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지금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려 구원하십니다.
죄 종노릇하던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하십니다.
죄와 악과 미움이 득세한 세상에서 주님과 동행하게 하십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의 소망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증거할 것은 ‘부활의 주님이 우리가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간증] 송한민 집사 정미연 집사
여러분도 부활의 주님과 동행함으로 부활 신앙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 무덤에 머물러
★ 마리아의 끈기 /요20:1-18/ 이재철목사
2015-07-25 01:16:10
◑마리아의 끈기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의 문이 열린 채, 마땅히 그 속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단숨에 달려가 제자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요20:2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없어 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사도들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1. 대부분 사도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눅24:11
사도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주님의 부활을 깨달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말을 허탄케 여기며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생시에 그토록 강조하셨던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수없이 듣긴 들었으되, 그 말씀을 머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을 다 흘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황량한 사막과 같은 심령을 지니고 있던 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허탄한 거짓말쟁이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심령은 진실을 담을 수 없는 밑 빠진 독이었던 것입니다.
▲2. 그러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즉시 일어나 주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과연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수건만 잘 정리되어 개어져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대로였습니다.
두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허탄한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그 현장에서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뛰어 너머,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던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할 차례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야 할 때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할 때였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바로 부활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깨닫지) 못하더라.” 요20:9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 다음으로 부활의 현장에 들어간
두 번째 증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에서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지도, 깨닫지도,
믿으려 하지도, 없어진 주님을 찾아 볼 엄두를 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안타깝게도 본문 10절이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 가니라." 요20:10
누가복음은 이때의 상황을 더욱 상세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 24:12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긴 했지만,
그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희한한 일이라 여기면서
그만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도들보다 좀 더 나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무덤까지 달려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참 생명이 없는 사람들에게, 오늘 이 세상은, 단지 ‘생노병사’만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연인은 오직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있을 뿐이기에,
그 심령 속에 생명을 머금지 못한 인간들은,
지금 살아있다 하더라도, 실은 '미래의 무덤'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많은 자연인들은, 부활을 사실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실에만 집착하면서 목숨을 걸고 삽니다.
그곳에 영원한 행복이 있는 양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3. 막달라 마리아의 생명에서 오는 끈기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다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한 자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제자들에게 뛰어가 그 사실을 알린 자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자기 집으로 되돌아감이 마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판에,
그녀에게 그 순간 달리 찾아 갈만한 곳이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원문 11절은 ‘그러나’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는 달리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로 갔습니까?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더니" 요20:11a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곳은 막달라 마리아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꺼려하는 묘지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이 사라져 버렸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의 무덤이라도, 하루에 연거푸 두 번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막달라 마리아는 비어 있는 주님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줄 알지 못했음에도
그 빈 무덤을 다시 찾아갔습니까?
왜 막달라 마리아는 그냥 집으로 되돌아 가버린 제자들과는 달리
홀로 주님의 무덤 앞에서 서럽게 울어야만 했습니까?
주님 생시에 주님께로부터 들었던 생명의 말씀들이 고스란히
그녀의 심령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 생명이, 그 생명의 능력이, 그 생명의 힘이 그녀로 하여금
다시 주님의 무덤을 찾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적 용
▲1. 무덤에서 생명의 예수를 발견하다
무덤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의 현장입니다. 사망의 확인장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생명을 머금은 심령을 지니고
다시 주님의 무덤으로 돌아갔을 때, 그곳은 더 이상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거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뵙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 곳은 죽음이 묻힌 무덤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진원지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의 현장이, 아무 생명이 없는 무덤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처럼 끈기 있게 예수님의 생명을 기대한다면,
무덤이 변하여, 생명의 주님의 부활의 임재가 충만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2. 생명의 예수는 끈기로 만난다.
제자들은 아예 포기했고,
베드로와 요한은 가까이 왔으나 포기했고,
막달라 마리아만이 끝까지 인내하며, 버텼습니다.
한 아기가 중병에 결려 고통 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포기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부모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 같이’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시103:13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이사야66:13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사랑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마음에 품고서, 엉엉 울며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듯한 그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요20:16
대사도 베드로와 요한마저 받지 못했던 사랑을 말입니다.
끈기 있게 매달려, ‘사랑의 주님’의 그 사랑을
마리아처럼 반드시 체험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주님을 버릴지 몰라도, 그 순간에도, 주님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을 깨닫는 사람만이... 마리아처럼,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 내가 모르는 순종의 역사 /요20:1-18/ 이재철목사
2015-07-25 00:59:29
아리마대 요셉은 몰랐을 것임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공동굴이나 자연동굴을 무덤으로 사용했습니다.
수의로 싸여진 죽은 사람의 시신은 동굴 속 의자 위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의 입구는 큰 돌로 막아 언제든 여닫을 수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시체가 완전히 썩고 나면
사람들은 무덤 문을 열고 들어가 유골을 수습하여 유골함에 넣은 뒤,
무덤의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나마 이런 가족 공동묘지가 없는 가난한 자들은
죽는 즉시 땅 속에 매장되어 버렸고, 흉악한 범죄자나 저주받은 자들의 시체는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일반공동묘지’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완전 새 무덤에 장사된다는 것은
여간 부자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가난한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의 경우에는, 시신이 그냥 땅 속에 매장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흉악범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졌기에
기드론 골짜기의 일반 공동묘지 속에 던져져야만 할 판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19:41~42.
예수님께서는 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빈민중의 빈민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장사된 일이 없는 완전 새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셨습니다.
아리마대의 거부 요셉이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새 무덤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단지 자기에게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을 사랑했기에
그렇게 했을 터였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의 그와 같은 행동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1. 첫째로 아리마대 요셉 때문에, 이사야53:9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죽음)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53:9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새무덤을 주님께 드리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이 땅속에 매장되거나 일반 공동묘지 속에 버려졌더라면
이사야의 예언은, 아니 구약성경은 거짓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2. 둘째, 아리마대 요셉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이 정말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아니었더라면,
주님께서는 땅속에서 온몸에 흙을 뒤집어쓰신 채 일어 나셨거나,(땅 속 매장)
기드론 공동묘지로 부터 다른 시체의 썩은 물에 흠뻑 젖으신 채
부활하셨을 터인데,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셋째, 무엇보다도 아리마대 요셉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가 꼭두새벽처럼 주님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시신이 비천한 자처럼 땅속에 매장되었더라면
어찌 막달라 마리아가 땅을 파헤치고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릴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흉악한 범죄자들의 시체가 우글거리는 기드론 공동묘지라면,
어찌 그녀가 겁도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엄두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완전 새 무덤에 안치되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목격했기에, 다시 말해 그 속에는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그녀는 연약한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 주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안았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몰랐을 것임
아리마대 요셉이 사랑하는 주님께 자신의 새 무덤을 드릴 때
이와 같이 위대한 역사가 그곳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행하는 일이 아무리 하찮은 일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은 상상치도 못할 위대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미약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잘 개어져 놓여있던 수의
그는 예수님의 머리를 감았던 천도 보았습니다. 그 천은 고운 베와 겹쳐 있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요20:7
안식 후 첫날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는 한숨에 달려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그 말에 놀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뛰어 왔을 때
과연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수의―즉 세마포와 수건만 놓여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쌓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요20:6~7
▲‘놓였다’ 와 ‘개켜 있더라’ - 부활의 증거물
‘놓였다’는 동사 kemai는 아무렇게나 놓아진 상태가 아니라
정돈되어 놓여 있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또 `개켜 있더라'는 동사 entuliss 는 마치 붕대를 감듯
정성을 다한 행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 버린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의와 수건만 남아 있되,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기록한 요한 사도는 무엇을 강조하려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결코 도난당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한 것이 사실이라면,
무장한 군인들이 서슬 퍼렇게 경비를 서고 있는 그 무덤에서
무슨 여유가 있다고 수의를 벗겨 정돈해 둔 뒤 시신만 훔쳐가겠습니까?
시간이 급한 만큼 수의가 입혀진 시신을 그대로 들고 가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수의를 아무렇게나 버려놓고 도주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채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와 수건이
무덤 속에 정성스럽게 개켜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무덤 속에서 부활하셨음을 웅변하는 말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아니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을 정성스럽게 개켜놓아 두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예수님 부활의 귀중한 증거품이 되었습니다.
▲질서 - 부활의 증거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는 그 부활의 현장에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는 무엇으로 남아 있습니까?
질서 정연하게 개켜진 세마포와 수건이었습니다.
만약 그 무덤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 무질서 하였더라면,
그것은 단지 무덤이었을 뿐이요,
예수님의 시신은 도난당했음이 분명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 있는 질서―그것이야말로 부활의 증거였습니다.
(오늘도 은혜 받은 사람의 증거, 은혜가 임하는 곳에는 - 질서가 있습니다.
자기 삶이 아무리 바빠도 정돈되어 있습니다. ‘정중동’입니다.
예를 들면, 잘 준비된 성가대는... 차분하고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덜렁대고 분주하다면... 내면과 외면이 모두 다 잘 준비되지 못한 겁니다.)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함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무질서하던 삶이, 생명의 질서를 되찾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함인지 아십니까?
이 생명의 영원한 질서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생명에서 오는 질서를 자기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하며 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이 질서를 생활화하고 매일 구현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질서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 생명이 무질서 속에 빠져 있다면 설령 그의 육체가 호흡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죽은 자와 진배없는 것입니다.
◑정리정돈
이것저것 할 일로 가득 찼던 책상과 책장을 정리하고 있는 제게
동료 수녀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넸습니다.
“일이 잘 안 풀리나보네요?”
“아! 예~”
왠지 제 영혼의 상태를 들킨 것만 같아 화들짝 놀랍니다.
그러고 보니 딱히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에는
습관처럼 제 주위를 정리하곤 합니다.
더러는 소소한 주변정리로 끝나지만,
책장은 물론 서랍속의 소지품까지 몽땅 꺼내어놓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가며 대청소를 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인연으로 만났던 이들에게서 받은 명함,
수첩 귀퉁이에 급히 적어놓았던 연락처들,
감명 깊게 읽었던 책에서 베낀 글귀 한 줄,
책상 언저리에 붙여놓았던 메모지들….
여기저기에 정리되지 않고 쌓아두었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비수녀시절 지도수녀님께서는
수도생활의 기본은 정리정돈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영혼이 정리정돈 되어있지 않으면 영성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서요.
생활이 정리되어있지 않는 것은 영혼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는 것이죠.
일상을 잘 정돈하는 일은, 어쩌면 흐트러져있던 마음을 추슬러 가며
주위를 둘러보게 하는 행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달의 한 번쯤은 바쁜 일 눈 딱 감고,
일상을 정돈하듯 내 내면의 일들도
그 분 앞에서 정돈하는 시간을 더불어 가져보는 것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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