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는 자가 되라 /요20:24-29/ 이재철목사
2015-07-30 20:39:48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공포에 사로잡힌 채 문들을 꼭꼭 걸어 잠근 다락방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셨건만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그때가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가련한 제자들이 벌벌 떨고 있는 다락방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찾아 오셨습니다. `당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친히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왠 까닭인지 그 역사적인 순간에 예수님의 제자중 도마만은 그 현장에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타난 도마를 향하여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이것은 그저 한 번 만나 뵈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말해 `주님의 부활을 확인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증언을 들은 도마는 25절 하반절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b)
주님께서 돌아가신 직접적 사인(死因)이 되었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죽은 사람이, 그것도 시신이 무덤 속에 장사되기까지 한 사람이 몇 일 지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그날은 도마 역시 다행히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도마를 발견하신 주님께서 도마에게 다가가 하신 말씀을 본문 27절이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주님께서는 도마가 직접 보기를 원했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시며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말고 믿는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믿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당신의 부활'을 믿으라는 간곡한 당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순간 도마는 이렇게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무엇에 대한 감탄의 고백입니까? `부활의 주님', `주님의 부활'에 대한 감격에 찬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드디어 도마도 `주님의 부활'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결코 불가능한,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가능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분명히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 속에서 단 하나의 핵심적인 주제를 찾는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의 부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던 주님의 죽음은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영원한 부활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제자들이 이 이후 다락방을 열고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셨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핵심은 바로 부활에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신앙의 핵심 또한 부활이어야 합니다.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 할 이유도 없고, 또 사도 바울의 지적처럼 예수 믿는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지적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십시다.
"예수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今生)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7∼19)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므로 인하여 누구이든 단지 금생, 이 세상만을 목적하고 주님을 믿는다면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의 신앙이 아무리 출중하고 완벽하다 할지라도 그의 인생은 결국 이 세상의 땅 속에 묻혀 썩어져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기에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보다 더 강하고 더 소망에 찬 삶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어찌 절망치 않을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어찌 낙심치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부활을 믿는 연고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아도 어찌 버린바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부활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것은 어찌된 영문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시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심하던 도마는 부활의 주님, 주님의 부활을 본문 속에서 확인한 뒤엔 인도로 건너가, 거기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증거 하다가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순교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영원한 부활의 시작임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 생명의 종교라 부르는 까닭은 거기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곳에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가 아니라, 단지 죽음의 종교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부활 즉 생명의 상태가 그처럼 중요하다면 왜 죽음이 필요한가 라는 것입니다. 죽음없이 생명이 계속하여 지속된다면 그것이 더 가치롭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천년전 저 머나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 오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와 관련을 갖고 있음은 무슨 이유입니까? 왜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 되십니까? 무슨 연고로 우리는 그분을 믿고 있습니까?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단순히 그분의 육체가 아니었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허물과 죄가 함께 못 박힌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것은 그저 그분의 사지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죄악과 더러운 욕망이 매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죽음을 허물어트리고 영원한 생명, 참 생명으로 다시 사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우리 생명의 질이 전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더불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서의 우리는 영원히 죽고, 그분의 부활과 더불어 그리스도안에서 의인으로서의 우리가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죄인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그분은 불멸의 신 일수 있었을는지는 모르나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 우리를 위한 참된 그리스도일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은 너무나 당연할 수밖에 없었고, 그 죽음으로 인하여 그분의
부활은 당신 개인의 부활로 끝나지 않고 우리 모두의 부활로 귀결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죽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죄인된 내가 죽으므로 그리스도안에서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 영원한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야만 진정으로 살게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터득했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체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체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1∼42)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생명이란 썩을 것으로, 욕된 것으로, 약한 것으로, 유한한 육체의 것으로 끝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있기에 썩을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약한것이 강한 것으로, 유한한 육체의 것이 신령한 몸으로 새롭게, 영원히 세움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죽음이란 결코 피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허물어짐이란 절대로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죽어야 살고, 허물어져야 새로 세워짐을 아는 자들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죽고 허물어지는 것이야말로 그 생명의 가치와 질을 영원히 새롭게 하는 부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조국이 경제적으로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소위 `1인당 소득 1만불'과 `견실한 기초'를 자랑하던 이 나라의 경제는 불과 2주일만에 거들이 나고 말았습니다.
환율은 그 짧은 기간동안 두배 가까이 폭등한 반면, 주가는 바닥까지 폭락하고 있습니다. 상호 불신에 의한 금융 시스템 마비로 인해 매일 수많은 기업들이 속수무책으로 도산하고 있습니다.
일부 품목의 가격 폭등은 사재기를 불러일으키고 있고, 급기야는 국가 자체의 부도 위기를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까지 몰린 가운데 거의 모든 국민들은 좌절과 절망을 되씹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건 한 나라가 허물어져 내린다는 것은 그 국민에게는 말할 수 없는 수치요 절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절망 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절망보다 오히려 더 큰 소망을 지니고 있음은, 우리는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살고 무너져 내려야 새로이 세워지는 부활의 법칙을 확신하는 부활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후 410년 고트족의 침공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여겨졌던 로마의 도성은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허망하게 허물어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인들이 야만족으로 업수히 여기던 고트족에 의해,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대적할 민족이나 나라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의심치 않았던 로마제국이 유린당하면서 수도 로마의 도성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목격하는 로마인들은 좌절과 절망을 씹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순간에 도리어 말할 수 없는 소망에 차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 어거스틴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도성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그 유명한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집필하였습니다.
인간에 의해 세워진 불의와 부패의 도성이 허물어짐으로써 비로소 구축되는 `하나님의 도성'을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거스틴은 진정한 부활 신앙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고트족의 침략 사건 이후 로마가 모든면에 걸쳐 더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의해 지배되게 되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이 나라의 경제가 허물어져 내리는 이 사태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불의와 거짓 위에 세워진 사회는 사상 누각 일뿐이요, 사상 누각은 반드시 허물어지기 마련이며, 사상 누각이 허물어지는 데는 결코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것, 언제든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사태 속에서 주님께서 진정 허물어트리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만연되어 있는 부정과 부패의 사슬, 불의와 거짓의 고리가 아니겠습니까?
이 붕괴 속에서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리 위에 바로 세워진 바른 사회, 하나님의 공법이 물같이 하나님의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바른 나라 아니겠습니까? 이 혼란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더 이상 사상누각―한순간 순식간에 무너져 버릴 모래 위의 집이 아니라,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의 말씀―진리위에 결코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집을 지으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일터가, 우리의 손으로 행하여지는 일들이 거의 거짓과 부정직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손에 의해 작성되는 결산보고서, 회계보고서, 감사보고서, 업무보고서를 포함한 각종 보고서 중 거의 대부분이 실은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과 부정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에 이것이 마치 정상적인 듯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살려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이 땅에 1천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건만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께서 남의 손을 빌려 우리의 실상을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IMF가 우리 정부와 체결한 합의문에서 10여 차례씩이나 투명성을 강조하고, 대통령에 출마한 세후보의 각서까지 오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희들은 믿을 수 없는 상대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작성한 각종 서류는 신뢰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정한 선진국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기를 원한다면 더 이상의 거짓을 버리고 정직한 사회를 구축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IMF사태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계시는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작금의 사태는 결코 절망할 일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죽어야 살고, 허물어져 내려야 새로이 새워짐을 확실히 알고 있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사상누각에 안주하던 우리로 하여금 반석 위에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집을 세우게 하시려, 주님께서 20세기말 우리에게 허락하신 마지막 은총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진정 부활의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이상 절망치 마십시다. 스스로 허물어 터트려야 할 부정과 거짓과 불의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 버리고, 진리 위에 우리의 삶을 바로 세우기에 진력하십시다. 부활을 믿고 부활을 실천하는 우리 자신들로 인해, 머지않아 이 나라는 반석 위의 세워진 하나님의 도성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대강절 세 번째 주일을 맞는 이 아침,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의 입은 정의를 말했지만, 우리의 손은 불의와 부패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혀는 진리를 외치고 있었지만, 우리의 말은 거짓과 욕망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던 우리나라는 사상누각에 불과했으며, 사상누각은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이며, 사상누각이 무너져 내리는 데에는 결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음을, 우리의 살아 있는 동안에 확인시켜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죽어야 살고, 무너져 내려야 바로 세워진다는 부활의 법칙을 일깨워 주셔서 더 더욱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이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20세기 말 우리에게 베푸신 이 마지막 은총의 기회에, 우리의 손으로 모든 거짓과 불의와 부정과 부패를 철저하게 허무는 자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진리 위에서 우리를 진실되고 정직하게 바로 세우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을 믿고, 부활의 삶을 살며, 부활의 법칙을 실천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이 나라의 21세기가 진리의 반석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도성으로 부활하게 해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이 귀한 은총의 기회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감사 기도 드립니다.
보고 믿는 자와 믿고 보는 자 /요20:24-31/ 유기성 목사
2016-08-04 15:24:50
“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제가 어려서부터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믿는다. 믿습니다.” 하는데 믿음을 가졌다는 교인들의 생활이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믿음인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나중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깨우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치시려고 실례가 되는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고향을 떠나라고 하였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정말 겁도 없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단적으로 말할 때 썼던 표현 중의 하나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떠나라는 말씀에 떠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믿었기 때문에 그는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는데도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었고.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도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소년이면서도 9척 장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 장군 앞에서 아무도 그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지 않을 때 비록 소년이었지만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내가 너에게 나간다!”
그리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골리앗은 전혀 무섭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비로서 믿음이란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뜻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심판도 두렵지 않습니다. 심판이 있어 지옥이 있고 형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섭지 않습니다. 구원받았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믿어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것이 믿어지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더 이상 사람도 두렵지 않고 시험도 두렵지 않고 환란도 두렵지 않습니다. 무서운 것이 내 안에서 떠나버립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너무너무 놀라운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 한번도 그동안 우리가 살아보지 않았던 믿음으로 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아보았습니까?
여러분 성경 가지고 오셨지요? 성경을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 성경대로 살면 잘 살 수 있고,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하고 불행하게 된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만이 복의 근원이시고 우리가 잘 살고 못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은 지금 내 안에 계시면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은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정말 놀라운 삶입니다.
물론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는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의심많은 도마”란 오명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른 어떤 제자들 보다 열심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인도에서 복음을 위해 일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지금 인도에는 그의 선교를 기념하는 성 도마산과 도마 교회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다,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이들도 도마처럼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락방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다른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도마의 마음이 매우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도 않고, 도마는 아주 강하게 부정하면서
“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어!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자국을 내가 손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결코 믿을 수 없노라.”
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 싶습니다. 도마의 마음이 매우 강팍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만 합니다.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 성령 받았다 하면, ‘저 사람들이 이상해진 것 아니야?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나 저렇게 믿지.’ 하며 더 거부감을 갖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실제로 우리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고할 때 오히려 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이 이 자리에도 있으실 수도 있습니다. 도마가 그랬습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를 만나주셨다고 제자들이 이야기할 때 도마는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옆구리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은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청년 때 500여 명의 대학생들이 참석하는 한 여름수련회에 참여했었는데, 수련회 마지막 날 목사님이 예수님을 새롭게 믿게 된 사람과 그 동안 믿었다가 다시 헌신할 사람들을 찬송을 부르면서 다 앞으로 나오게 초청을 하더랍니다.
그 때 500명이 모두 단상에 나가는데 혼자서만 회중석에 앉아 있었답니다. 그 순간 이렇게 버텼답니다. ‘내가 나가나 봐라. 나는 안 믿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히 나타나셔야 믿지. 나는 저렇게 감정적으로 휩쓸려서는 안 나간다.
내 지성이 판단해서 확실하지 않으면 나는 예수를 안 믿는다.’ 그날 밤에 왠지 하나님께 화를 내고 씨름하다가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으로부터 고백하면서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팔일 후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을 때,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을 하신 것을 보면 도마의 말로 인하여 마음이 섭섭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도마는 예수님의 몸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러나 도마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제 보지 않고 믿는 시대가 올 것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시대가 올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대입니다. 우리야말로 보지 않고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이 땅에 계신 것은 40일에 불과합니다. 그 40일 동안은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을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그들을 당연히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면 더 잘 믿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 28:16~17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부할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습니까? 믿음의 역사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확인이 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내 안에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고 난 다음에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정말 그런 시대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증인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한번은 부흥회를 마치고 그 교회 성도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번 부흥회 때 설교 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오래 전 큰 은혜 체험을 하였으나 하나님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였고 죄도 너무 많이 지어서 회개 조차 나오지 않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부흥회도 사실 어떤 기대를 갖고 참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습관과 같은 태도로 참석하였었는데, 목사님 설교 중에 성령의 근심에 대한 말씀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답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저는 그 날 비로서 그동안 제 마음을 무겁게 하던 것이 내 안에서 계셨던 성령님께서 근심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너무 오래 방황하였습니다. 목사님, 제게 성령님이 여전히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분은 두 눈을 뜨고도 함께 계시는 성령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순간, 그의 영적인 눈이 뜨였습니다. 언제나 함께 계시며 말씀하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고 믿는 사람보다, 성령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더 잘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만나지 못했으나 예수님을 영으로 만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방인 복음화와 재림에 대한 영적인 진리를 사도들 보다 더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고후 5:16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베드로도 그렇게 인정하였습니다.
벧후 3:15~16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수제자 베드로도 알기 어려운 것을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자신이 듣고 본 바를 떨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쓰임 받은 것은 초반부에 잠깐이고 그 뒤는 다 사도 바울에 의하여 일어난 이방인 복음화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믿는 것과 성령님으로 믿는 것 중 어떤 것이 분명하고 더 정확할까? 성령님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회자 기도 모임에서 한 부목사님이 간증하였습니다. 지난 여름 행사로 몹시 피곤할 때, 수요예배 설교 준비로 고민하는데, 사모님이 영적 거장에 대한 책 100여 권을 사다 읽다가 “회개에 대한 주제로 설교해 보세요.” 하더랍니다.
설교 준비가 어려웠는데, 잘 됐다고 생각하고 마틴 로이드 죤스목사님의 책을 읽고 시편 51편 다윗의 회개를 주제로 두번 설교를 하였답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괴로웠답니다. 자기 안에 회개할 문제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 후 너무나 애통함이 밀려 왔습니다. 1주간 내내 십자가 보혈 예수님 이란 말만 나오면 눈물이 나서 일을 못할 정도였답니다.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절제를 위하여 기도 부탁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을 가지려면 성령께서 말씀으로 역사하실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이 교회 외에 어느 곳이 있습니까?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믿음으로 세워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를 놓지면 안됩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의심 많은 도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믿음이 무너졌습니까?
제자 도마가 의심에 무너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24절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도마가 그 날 왜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을까요? 늘 같이 있다가 그 날만 잠깐 볼 일을 보러 갔던 것일까요? 그런 뉴앙스가 아닙니다. 도마의 마음이 공동체에서 떠났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신 것을 보고 큰 낙담과 좌절에 빠져 이제라도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나서야지 다락방에 모여 있기만 하면 무엇하나?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완강하게 강팍한 말로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니까 도마로서는 너무 당황스러웠고, 예수님이 부활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생각까지도 하였던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거짓 소문이라도 솔깃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 정말이야?”
그런 도마가 다시 믿음을 회복하게 된 계기가 되는 사건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일어났습니다.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도마를 만나주셨습니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여러분, 도마가 그렇게 믿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혼자 있을 때에라도 찾아주실만하지 않습니까?
“도마야, 너 어떻게 그렇게 믿니? 한번 내 손을 만져보아라,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봐라.” 하시면서 도마가 혼자 있을 때에라도 예수님께서 은밀히 찾아가실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가 공동체와 함께 있을 때 만나주셨습니다.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도마는 완강히 부인하였지만 마음 한편에
“에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정말일까?” 하는 숨은 갈망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도마는 제자들과 늘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임마누엘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서 교회 공동체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늘 드리는 예배, 매일 똑같은 새벽기도회가 늘 그렇다! 별로 은혜가 안된다!고 그런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예배드리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예배를 늘 드리는 사람과 들쑥 날쑥 드리는 사람은 믿음에 차이가 큽니다. 늘 교회 공동체 안에 거하는 자여야 은혜의 순간이 찾아올 때, 그 순간을 놓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잊지 아니하고 그 시간에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은혜의 역사가 임할 때, 예수님께서 내게 성령으로 임하실 때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스개 소리이지만,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까? 비오는 수요일 밤에 주님 재림해 오실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지간한 사람이면 비오는 날 수요기도회에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그 시간에 오실 것이다. 도마는 정말 동의할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들과 함께 예배 드리는 시간이 어떤 때는 ‘바쁘고 할 일 많은 세상에 내가 언제까지 여기에 이러고만 있어야 되는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도마가 그랬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도마는 결정적인 은혜의 순간을 놓져버린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맡기는 사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얕게 경험합니다. 이 차이가 어디에서 올까요? 그저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고 은혜만 받고 “나는 일이 바빠서 그 이상은 못합니다.”
그렇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속회에서 선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기면 손사래를 치면서 “나는 그것은 못합니다.‘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맡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때에 은혜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명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주님을 경험하는 것에 너무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명 정도에 비례합니다.
목회자 모임에서 한 전도사님이 간증하였습니다. 그는 신학교를 수석 입학했지만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아서 10년이 넘도록 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하였던 분입니다. 그에게 성령의 역사에 대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담임 목사님께 ‘전도사가 방언도 못하느냐?’는 책망을 받고 기숙사로 가서 상급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방언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간단해. 희랍어 알파벳을 말해. 그것이 희랍어 방언이야. 히브리어 방언도 있고 제일 쉬운 방언이 일본어 방언이야. ‘다마네기쓰메끼리’ 계속 해 봐!“
그 말을 듣고 너무 실망하고 성령의 역사에 더욱 마음이 닫혔답니다.
그런데 전도사로 일하는 교회에 성령 충만한 목사님이 담임 목사님으로 오셨는데, 성령의 살아계심에 대한 갈망이 생기더랍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계시다면 저도 방언하게 해 주세요!“ 기도하며 날짜까지 정하였답니다.
그러나 어떻게 성령을 받는지 몰라 안타까와 하던 중, 어린이 수련회 때 강사님이 방언받기 원하는 어린이는 나오라고 하는 순간, ‘지금 방언 받지 못하면 안된다.’는 갈급함에 아이들 사이에 나가섰답니다. 그리고 10분 정도 후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답니다.
“내가 이런 고백을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
이 전도사님은 의심 중에도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에 성령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속회에서든 선교회에서든, 전도행사, 집회, 기도회, 섬김의 기회가 주어지면 힘들다 부담된다 하며 사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 공동체 예배공동체를 떠나면 죄의 법, 세상의 법에 사로잡힙니다. 혼자서는 믿음을 유지하고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성도의 존재는 너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의심 많은 도마와 같은 분이 있으십니까? 마음 속에 의심이 가득차 있고 두려움이 있어, 나는 정말 믿음은 모르겠고 마음 속에 도마와 같이 믿어지지 않는 것 밖에 없다.‘고 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으로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그 자리를 놓지지 않으면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예배 시간, 전심으로 예배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한번 예배를 드려도 예배 시간 전에 미리 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전심으로 예배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주의 역사를 기다리며 매번 은혜 받는 자리에 나가면 성령님께서 도마에게 역사하신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가 위대한 사도가 됐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찬을 통해서, 성찬은 정말 놀랍게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나와 한 몸이 되셨음을 보여주시는 시간입니다.
성령님으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을 믿음으로 우리가 취하는 것도 아니고, 성찬은 떡과 포도주를 우리에게 먹여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고 내 피라! 예수님과 우리가 어떻게 한 몸이 되었는지를 입으로 먹고 마시게 하시면서 확인시켜 주시는 시간이 성찬식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정말 마음이 열려 “주님, 제가 주님을 바라봅니다.”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성찬을 받으시면 여러분 마음 속에 믿음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정말 믿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이제 다같이 기도하시고 성찬을 받겠습니다.
도마 - 남겨진 삶에 치열했던 사람 /요20:24-29/ 김병삼 목사
2016-06-07 14:43:57
[요한복음 20장 24-29절]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
말없이 홀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을 다 버린 나그네
정녕 그 분이 내 형제 구원했나
나의 영혼도 구원하려나
의심 많은 도마처럼 물었네
내가 주를 처음 만난 날
위의 찬양은 오늘 도마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며 머릿속에 떠오른 찬양입니다. ‘도마’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의심 많은’이라는 말이죠. 오늘 본문 역시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난 이후에 신앙을 확실하게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도마를 생각할 때, 그의 신앙고백보다는 그의 의심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질책처럼 들리는 주님의 말씀(29절)에 의미를 많이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도마의 신앙과 고백을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하여 의심했던 것은 어떤 철학적, 신학적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가장 선명한 갈보리 ‘십자가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흔적을 만진 후 그가 한 신앙고백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도마를 ‘디두모’라 하는 도마로 불렀는데, 그 뜻은 ‘쌍둥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그가 제자가 된 배경은 나오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데 극적인 체험이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더 많습니다.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혹은 어떻게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주님의 곁에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공관복음서에는 그의 이름만 명시되지만, 요한복음에는 그에 대한 에피소드가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1~16절에 나오는 도마의 이야기를 어떤 목사님은 ‘용감한 비관주의’라고 표현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전갈을 받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만류합니다.
얼마 전에 그곳에서 있었던 일, 즉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베다니로 돌아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도마가 요한복음 11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아마도 도마는 진짜 그곳에 가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도마의 성격을 보건대, 그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먼저 보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의심’이 많았다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나사로의 죽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기회로 보셨지만, 도마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죠. 그러므로 그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한 말이 얼마나 심각하게 결단하고 한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베다니에서 주님이 죽임을 당하셨다면 기꺼이 그곳에서 도마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나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고별설교(요한복음 13~16장) 일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14장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라고 시작하는데, 의심이 많고 우울의 기질을 가졌던 도마는 근심하며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천국에 가신다고 말씀하시는데, 도마의 귀에는 ‘천국’보다는 ‘떠난다’는 말이 크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아마도 이러한 연유로 도마에게는 ‘의심 많은’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른 제자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사실은 의심이 많았던 도마 때문에 제자들은 아주 중요한 주님의 답변을 듣게 됩니다. 바로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이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지금 예수님의 제자 모두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 길이 정말 맞는데 확신이 서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의심이 많다기보다는 ‘솔직한’ 도마 때문에 모든 제자가 속 시원하게 답을 듣게 됩니다.
“내가 곧 길이다!”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을 확신 있게 가지 못하는 이유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거나 너무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요?
누군가 우리에게 길을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이 어디냐고?
한번 여러분의 입술로 그 길을 설명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설명을 듣고 올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가장 확실한 대답이 무엇인가요?
“조금 있다가 제가 집으로 갑니다. 저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십자가의 흔적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세 번째 에피소드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십자가의 흔적이 평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강이란 ‘문제없음’이 아니라, 문제로 요동치 않을 평강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서워 피신해 있던 제자들, 미래가 불투명하여 떨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20절에 보면,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흔적인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을 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흔적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을 보세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런데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쩌면 앞에 있었던 사건들로 미루어 보아,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죽지 못한 자신에 대하여 한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어쨌거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현장에 없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의심’의 자리가 되었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확신’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글을 썼더군요.
“저는 지금까지 학교를 25년간 다녔습니다만 결석이나 지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나 없을 때 중요한 걸 할까 봐’입니다. 가보면 별로 중요한 게 없는 날도 많았지만 말입니다.
어떤 분의 간증을 들어보니까 예수 믿은 후 교회 예배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분 역시 ‘나 없을 때 은혜가 내려서 나만 못 받으면 어떡하나’하고 말입니다.”
도마는 그 자리에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성령님의 위로와 평안을 받지 못했고, 다른 사람이 누리는 평강과 기쁨의 기회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당시 워싱턴의 한 교회에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 주일에 대통령이 예배를 드리러 오느냐는 문의였다고 합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대통령이 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꼭 오십니다.”
우리가 오늘 도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신앙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립’은 우리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마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니, 그의 기질에 대하여 ‘우울질’이었을 것으로 말합니다. 그에게는 조금 비관적인 모습도 있고, 극단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혼자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사랑했던 것만큼이나, 그리고 베다니에 나사로를 만나러 갈 때,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갈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상심이 무척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침울하게 우울한 상태에서 슬픔의 한 주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 말이죠. 그런 그의 우울함 가운데 제자들이 찾아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지만, 그 소식을 거부했습니다.
고립된 그의 시간이 기쁨을 경험한 제자들과의 시간도 거부하게 한 것이죠.
물론 도마가 다시 주님을 만나 부활의 신앙을 확증하게 되었지만, 고립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신앙의 독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실 사단이 우리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고립된 고독의 시간, 혼자 고민하며 우울한 시간을 지날 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죠.
성도 간의 교제가 중요한 것은 고독과 우울의 시간을 함께할 형제와 격려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권면한 이유가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참으로 힘든 것은 도마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성도의 교제가 더욱 필요한데, 자꾸 혼자 있으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의 신앙에서 참 중요한 것이 ‘공동체’성입니다. 함께하는 중에 힘이 생기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물론 고독의 시간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깊게 만들어 주지만, 그 신앙을 유지해 주는 것은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물론 도마는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의 신앙이 회복되었지만, 고립된 시간 동안 그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성도 간의 교제와 의도적인 공동체성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하이라이트는 예수님께서 고립되어 침울한 도마를 향해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세요.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도마를 위한 예수님의 방문!”
8일이 지났다는 것은 유대인의 시간 방식으로, 당일을 포함하고 있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한 주간이 지난 주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추측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모이기 시작했는데,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던 제자들이 다시 그날 모이게 되었던 것이죠. 그들이 주님을 만난 날 역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한 주일이 지난 ‘주의 날’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도 보면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날을 ‘주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7일 전과 같게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도마가 있었던 그 자리에서 제자들은 더는 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홀로 슬픔 가운데 있던 도마를 위한 말씀이 바로 ‘평강’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방문하신 이유는 전적으로 도마를 위한 자리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바로 도마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27절을 보세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에 ‘의심’을 가지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그만큼 삶과 신앙에 대하여 진지하다는 의미이고, 그 진지함에 대하여 답을 얻을 때 강력하고 치열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생각하고 가만히 역사를 들여다보면, 믿음의 방황을 심하게 겪었던 성 어거스틴, 그리고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마틴 루터, 목회자였지만 사역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가지고 고민하던 웨슬리도 의심의 나락에서 주님을 만나는 강력한 체험이 그들의 삶을 더욱 치열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슬픔의 심연 가운데서 낙심했던 사람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으실 수 있습니다. 어두웠던 시간만큼이나 열정을 향한 몸부림이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남겨진 삶이 치열했던 사람
본문 27~28절을 보겠습니다.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의 고백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정말 도마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았는지, 아니면 그 상처만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상처를 보고 만졌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가 의심했던 만큼이나 더욱 죄송스럽고 송구하지 않았을까요?
쉽게 주님을 믿었던 사람의 고백과 도마가 고백하는 ‘나의 주님이시요’라는 말이 같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은혜는 삶의 바닥에 있었던 사람에게 더 큰 것이 아니었을까요? 슬픔과 고독의 시간만큼이나 그 회복의 시간이 감격스럽지 않았을까요?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의심했던 순간 때문에 더욱 후회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갈 삶을 생각하며 더욱 치열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후 도마의 행적이 놀랍습니다. 그는 페르시아를 지나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합니다. 그는 제자 중에 가장 먼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칼라미나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무덤은 ‘마드라스’에 있으며, 그를 기념한 교회에는 “나는 당신을 예배하나이다”라는 도마의 마지막 말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지금 성경에는 들어와 있지 않지만, 외경인 ‘도마행전’에는 도마에 관한 여러 가지 행적이 나와 있습니다. 그가 직접 목격했던 주님의 십자가의 흔적이 그가 그렇게 쉽게 인생을 살 수 없도록 한 것이죠.
제가 오늘 말씀의 제목을 ‘남겨진 삶에 치열했던 사람’이라고 정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도마의 의심,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의 신앙고백이 남겨진 삶을 무척이나 치열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흔적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신 증거를 보는 순간, 자신에게 남겨진 삶을 그렇게 허송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자신에게 나타나 십자가의 흔적을 보여주신 주님을 바라보며, 누군가에게 자신이 경험한 이 놀라운 일을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런 그의 열망이 그를 먼 나라 인도로 내몰지 않았을까요?
그의 눈에 아직은 심판을 유보하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이 눈에 들어와, 늦기 전에 그 사랑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도마의 고백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한 자들의 삶은 놀랍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아시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장군출신으로 저술가였던 Lew Wallace는 세상을 놀라게 할 책을 쓰려고 했는데, 그는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불합리성과 모순을 폭로하려고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놀라운 사실들과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성경에 관한 많은 자료를 모으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반대하는 책제목까지 구상하고 1장을 썼으나 2장을 쓰다가 자기의 붓을 꺾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빠졌습니다. 새롭게 발견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충격을 소화하기 위해서 다른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이 소설과 영화로 되어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던 "벤허"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삶에 기대가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을 고백하고 나면 그의 삶이 치열해지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유명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님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받아들였고, 그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 기사였습니다. 모든 매스컴이 그의 고백에 침묵했다고 말이죠. 만약에 그가 동성연애자였다고 coming out을 했더라면 온 지면을 장식했을 텐데, 그의 고백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입니다.
세상은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를 원하고 그런 것이 뉴스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로 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치열하게 살아가며 세상을 바꿀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3장 1~9절에 보면 ‘회개와 심판’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시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치어 죽은 것을 말씀하며 이들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열매를 구했으나 삼 년을 기다려도 열매가 없으므로 찍어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회개와 종말을 연관 지어, 회개하지 않으면 ‘벌 받는다.’ ‘죽는다.’ ‘지옥 간다.’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거북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교회에서는 이런 약한 교인들의 마음을 이용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증거로서 헌금을 요구하고 교회건물을 지어 왔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회개와 종말이라는 이름으로 ‘부자유’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뭔가 교회 일을 하지 않거나 헌금을 하지 않거나 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은,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참된 의미를 왜곡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5절의 말씀을 보세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며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들이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것도 죄가 없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근방에서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로 주변 국가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 28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들이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휴양지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 심판하셨다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2011년 일본에서 발생한 동북 지방 쓰나미와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2008년 중국 쓰촨 성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4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2014년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탄 세월호가 침몰해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죄의 결과이거나 회개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회개한다고 이런 재앙으로부터 해방된다거나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면하거나, 죽음을 면하거나, 화를 면하기 위해 미리미리 회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죽어야 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참으시며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남겨진 시간이 각자 각자에게 다 다를 것입니다.
그것이 하루가 되었던, 1년이 되었건, 10년 100년이 되어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종말이 이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남겨진 삶에 만회할 시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4번째 도시인 첸나이에 가면 기독교적으로 볼 때 아주 의미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가 교회를 일곱 개나 세우고 순교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도마가 숨어서 기도하던 동굴과 순교한 언덕의 바위, 도마의 무덤 위에 세워진 ‘산토메 교회’가 있습니다.
도마는 왜 그렇게 멀리 떨어진 인도까지 가서 말씀을 전하다 죽었을까요?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어쩌면 가장 이해력이 떨어지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하여 많은 후회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일 의심이 많던 사람이 가장 먼 곳에 가서 말씀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로마에서 순교한 일, 그리고 도마가 복음을 전하다 인도에서 순교한 일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삶에서 나타난 치열함은 과거의 삶에 대한 후회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삶을 만회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몸부림쳤을까?
우리가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회개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축복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산 세월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들로 인해 열매 맺지 못한 우리의 삶이 후회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 수치스러움을 만회하기 위해, 열매를 맺기 위해 시간을 달라는 것입니다. 죽지 않기 위한 회개가 아니라, 남겨진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와 도끼의 비유는, 늦기 전에 회개해야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인생을 만회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시간, 하나님이 참으심으로 우리에게 덤으로 주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물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도마의 삶을 묵상하며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가졌던 절박함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살았던 그런 절박함입니다. 우리의 삶에 치열함과 절박함이 없다면 아직 우리에게 주님의 손과 발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져보지 못함 때문은 아닐까요?
의심과 절망의 순간이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지 못한 우리의 삶이 우리를 절망스럽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마지막 29절이 참 힘들게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무슨 의미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흔히 말하던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이 의심했던 도마를 질책하며, 너희는 도마와 같이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냥 제 느낌을 적어보고 싶습니다.
주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은 ‘물음’이 아니라, “도마야 네가 나를 보고 믿는구나! 그래 네가 나를 보지 못해 믿지 못해서 참 힘들었지? 그런데 이제 네가 진정으로 나를 네 삶의 구주로 인정했구나! 그래 장하다~”
저에게는 질책이 아닌 칭찬과 격려로 들립니다.
제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말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어쩌면 이 말씀이 주님을 보지 못하고 믿게 될 사람들에 대한 ‘영적 부담’ 혹은 ‘사명’을 도마에게 주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을 보지 못하고 믿게 될, 주님을 믿지 못하므로 아직은 심판이 유보된 사람들에 대한 사명이자 안타까운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도마는 복음을 들을 수 없었던 땅, 인도까지 갈 수밖에 없었지 않을까요?
아직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그러나 복된 사람이 될 그들을 위해 마지막 삶을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도마의 고백 말입니다.
회의를 극복한 사람 /요20:24-29/ 이동원 목사
2014-11-29 08:31:56
금년(2007) 8월 23일자 타임지의 커버 스토리는 “마더 테레사의 믿음의 위기”(Mother Teresa's Crisis of Faith)였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마더 테레사는 1979년 12월 11일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바 있었습니다.
인도 사리옷을 입고 샌들을 신고 상을 수상한 그녀는 수상 연설을 통해 이렇게 말한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그는 먼저 배고픈 자, 벌거벗으신 자, 집 없는 자중에 오신 분이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바로 그런 이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는 우리 마음에 계시며,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시며, 우리가 주고받는 미소 가운데도 계십니다.”
그런데 최근 마이클 반 델 피트(Michael van der Peet)라는 사제에게 노벨상 수상 3개월 전까지 보낸 편지를 통해 그녀가 고백한 믿음의 고뇌가 “와서 나의 빛이 되어 주시오”(Come Be My Light)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서 마더 테레사는 이런 정직한 믿음의 회의를 털어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듯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침묵과 공허가 너무 커서 그분을 보려 해도 보지 못하고 있으며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하고 있으며 기도의 혀를 움직이고자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영성학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부재”(Absence of God)의 경험을 가르쳐 “영혼의 어둔 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하는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이런 영혼의 밤을 지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어느 정도의 시간을 지나다 보면 반드시 어떤 시점에서 믿음을 회의하는 시기를 지나게 됩니다. 어떤 회의는 매우 파괴적인 것도 있을 수 있으나 그러나 모든 회의가 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린 아기가 좀 자라게 되면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말이 ‘왜’라는 단어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런 ‘왜’라는 질문과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직한 믿음의 회의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 하나인 도마가 이런 믿음의 회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이 눈앞에 등장하자 이것을 도마는 그의 상식적인 이성으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을 수도 수용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도마의 케이스를 통해서 믿음을 갖기 시작한 사람들이 조만간 반드시 부딪쳐야 할 회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믿음의 회의-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1. 회의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믿음에 대한 회의를 말하면 믿음 없는 사람으로 오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우리들의 신앙 풍토에는 아예 회의에 대한 생각을 말하지 않는 그리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정직한 모든 회의는 진지한 구도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실 때 저는 주께서 구도적 자제를 격려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지하게 구도하는 사람들은 결국 믿음의 해답을 얻고 믿음의 진보를 경험합니다.
여러분, 결코 질문하지 않는 학생들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된 케이스를 보신일이 있나요? 저는 20대초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정말 많은 질문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정직한 의심을 표현했던 도마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12사도중의 한 사람, 아주 소중한 예수님의 VIP가 된 것은 물론 인도까지 가서 선교하여 인도 선교의 문을 열고 순교하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정직한 의심에 쌓여 있다면 그것은 믿음 없음의 증거가 아니라, 유능한 전도자나 선교사가 될 징조인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25절에 나타난 도마의 솔직한 회의의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자, 이런 도마의 회의적 반응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님은 그런 반응은 마귀적이라고 책망하셨나요? 아니지요. 주님의 대답을 27절에서 읽어 보십시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은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믿음을 검증하고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네 안에 있는 회의를 극복하라는 격려가 아닙니까! 그것은 차라리 따뜻한 격려가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회의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고 있는 것이라면 진리를 두려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확인하십시다. 정직한 회의는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의를 진지하게 표현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토론하십시오. 연구하십시오. 주님은 정직한 회의를 환영하는 분이십니다.
2. 말씀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개 회의를 창조적으로 극복하고 믿음에 이르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구체적인 신앙 체험을 하거나, 말씀 연구를 통해 말씀을 신뢰하게 되는 이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특별한 체험이 가장 강력한 회의 극복의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회의를 극복하고 안정적인 신앙에 들어가려면 말씀에 대한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은 성경 자체의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벧후 1장 16절 이하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과 함께 소위 변화산으로 알려진 산상에 올라가 예수님이 모세, 엘리야와 함께 등장하여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시고 하늘의 문이 열리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리는 놀라운 체험의 목격자가 된 것을 회고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이런 신비한 체험보다도 우리가 믿음의 근거로 붙들어야 할 더 확실한 것이 있다고 그는 증언합니다. 벧후1:19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너희가 이것(성경 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다시 도마의 사건으로 돌아오십시다.
요한복음 본문에는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실제로 넣어 보았다는 증언이 없습니다. 유명한 화가 카라바지오(Caravaggio)는 도마가 실제로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는 것으로 그렸습니다만 그것은 성경의 기록과 다릅니다.
가장 성경적인 화가였던 거장 렘브란트(Rembrandt)는 오히려 도마와 제자들이 놀라와하는 모습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더 가깝습니다.(카라바지오와 렘브란트의 ‘의심하는 도마’그림 비교) 자,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십시다.
예수님께서 내 옆구리에 손을 넣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때 도마가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결국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주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도마는 처음 신앙의 증거와 체험을 요구하는 제자였지만, 그는 마지막 단계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말씀만으로’ 믿는 제자가 되어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믿음의 닻을 내리는 사람만이 견고한 믿음의 항해를 계속할 것입니다. 회의를 극복하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무엇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40년 동안 성경을 연구해 왔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성경은 ‘사실의 책’이라는 확신이 더해 갑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성지 순례 프로그램을 연례적으로 운영하는 이유도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란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기회를 드리고자 함인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실 아닌 것을 사실처럼 오해하고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분명한 사실을 거부하고 안 믿는 것이 불신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성경의 사실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번 이웃 사랑 축제에 믿음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 모든 분들이 새 생명 반에서부터 성경 공부를 시작하게 되시기를 간절한 맘으로 권면하고 싶습니다.
3. 공동체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회의는 극복할 수 있지만 모든 회의가 반드시 유용하고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회의는 불필요하게 우리가 만들어 직면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마가 회의에 빠지게 된 계기를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도마가 공동체를 소홀히 한 까닭이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24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열두 제자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만일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거기 있었다면 다른 제자들과 달리 혼자 회의에 빠질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러나 불행하게 그때 도마는 어떤 이유인지 제자들의 모임에서 이탈해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성숙하도록 하나님은 디자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고 말씀합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성도의 교제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 가장 중요한 교제의 장인 목장 교회에 꼭 참여 하십시오. 그 곳이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가족들을 경험하며 서로가 영적으로 자라가는 성숙의 마당인 것입니다.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던 계절인 청교도 시대에 청교도들은 이런 신앙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성수한다. 가능한 주간 성도의 교제 모임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성경적인 명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그들 나름의 아주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서로 서로 이렇게 모임 참석을 격려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신이 빠진 그날 모임에 주님이 특별하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부흥이 일어난다면 형제 자매여, 당신의 영적 손해를 상상해 보라”고.
만일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주님의 기대를 성취하기 위한 거룩한 모임들을 세상에서 친구들과 약속한 모임보다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Again 1907'부흥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미국의 유명한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그가 출석하던 워싱톤의 한 교회에 토요일 이런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합니다. “내일 주일에 루스벨트 대통령께서 교회 예배에 참석하시겠습니까?” 이때 그 교회의 행정을 담당하던 분이 아주 기막힌 전설적인 명답을 한 것으로 전해옵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석은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반드시 참석하실 것입니다. 그 분을 만나러 오시면 좋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분의 충고처럼 우리의 주일 모임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리고 목장 모임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위대한 영적 부흥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의 회의는 눈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견고하게 자라 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찬란한 빛을 발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낙심을 딛고 일어서는 법 /요20:24-29
2011-04-28 15:19:58
‘얄미운 여자 시리즈’란 유머가 있습니다. 10대에 얄미운 여자는 ‘얼굴이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여자’이고 20대에 얄미운 여자는 ‘똑같이 성형했는데 티가 안 나는 여자’라고 합니다. 30대에 얄미운 여자는 ‘실컷 놀고도 시집은 잘 가는 여자’이고 40대에 얄미운 여자는 ‘잘 쏘다녀도 자녀들이 공부만 잘하는 여자’라고 합니다. 50대에 얄미운 여자는 ‘실컷 먹는데 배가 안 나오는 여자’이고 60대에 얄미운 여자는 ‘남편이 돈 많이 벌어놓고 죽은 여자’라고 합니다.
요즘 세태를 잘 반영한 유머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남이 잘 되면 좋게 생각하기보다 얄밉게 생각합니다. 그만큼 칭찬에 인색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칭찬을 많이 해주십시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합니다.
어느 날, 캔 블렌차드가 씨월드를 갔습니다. 그때 3톤이 넘는 사나운 대형 범고래가 조련사의 신호에 따라서 물 위로 뛰어오르는 멋진 쇼를 펼쳤습니다. 쇼가 끝난 후에 그는 조련사를 찾아가서 범고래를 어떻게 그렇게 잘 훈련시켰는지 묻자 조련사가 대답했습니다. “고래도 사람처럼 잘한다고 칭찬해주면 더 잘합니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란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보면 ‘고래 반응’이란 말과 ‘뒤통수치기 반응’이란 말이 나옵니다. ‘고래 반응’이란 잘했을 때는 힘껏 칭찬해주고 잘못했을 때는 바로 질책하지 않고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게 유도해주는 것을 뜻합니다. 반대로 ‘뒤통수치기 반응’은 잘했을 때는 무관심하다가 잘못했을 때는 뒤통수를 치며 질책하는 것을 뜻합니다. 누군가의 실패와 실수는 그에게 사랑과 관용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입니다. 바로 그런 사랑과 관용이 영혼을 춤추게 하고, 가정도 춤추게 하고, 교회도 춤추게 합니다.
< 낙심을 딛고 일어서는 법 >
본문을 보면 주님이 낙심한 제자의 영혼을 다시 주님 품으로 이끌어 춤추게 하는 감동적인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처럼 낙심한 사람을 일으키고 그 영혼이 거룩한 사명을 향해 나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낙심과 두려움으로 모인 다락방의 문을 꼭 잠갔습니다(19절). 그때 예수님이 신비하게 나타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며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고 부활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없었습니다. 왜 없었을까요? 그 이유를 알려면 도마의 성향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도마는 쌍둥이 중에 하나였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그 이름이 한번만 기록되고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그 이름이 많이 언급된 것을 보면 요한과 가까운 사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격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변화받기 전의 청년 요한은 조급한 성격에 야심가였고 성격이 불 같아서 주님으로부터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도마도 그런 불같은 성격을 가졌을 것입니다.
또한 도마는 의심 많고 염세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머리가 비상했던 도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혼자 떨어져서 세상을 미워하고 저주했을 것입니다. 대개 시련을 많이 당한 사람은 세상을 잘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셀롯당원이 되려고 제자들의 모임을 떠나 셀롯당원 입당 수속을 밟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당시 셀롯당은 가만히 있으면 선인이 손해 보니까 선을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사람들의 결사모임이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1장에서 주님이 병든 나사로에게 가자고 할 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방금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는데 또 그곳으로 가시려고 합니까?” 그때 도마가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갑시다!” 그처럼 도마는 아주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처럼 열정은 필요하지만 때로는 그 열정이 극단으로 흐를 수 있기에 열정을 잘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엉뚱한 일에 열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아내는 남편이 생일을 한번 잊었다고 한 달 이상 말하지 않고 어떤 남편은 귀가했는데 아내가 자고 있다고 다시 집을 나가 버립니다. 도마도 속상하면 말없이 뛰쳐나가는 극단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뛰쳐나갔다가 나중에 뭐라고 합니까? “주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그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고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26절).
도마는 가까이서 만져봐야 믿음과 사랑이 생기는 줄 알고 있었지만 때로는 약간의 거리가 떨어진 것이 믿음과 사랑의 확인에 더 좋습니다. 가깝다는 이유로 무례하게 행동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허물없는 것’과 ‘무례한 것’은 다릅니다. 거리 없는 사랑은 맹목입니다. 때로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서로가 잘 보입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사랑과 믿음에는 ‘가까운 친밀성’도 필요하지만 ‘거리를 둔 존경심’도 필요합니다.
그처럼 도마는 의심이 많고 부정적이고 삶을 삐딱하게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송곳처럼 콕 찌르는 말을 하는 힘든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다시 그를 찾아오셔서 그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만약 그때 주님이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면 도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후 위대한 전도자가 되어 나중에는 인도에서 화살에 맞아 순교합니다.
결국 본문 26절에 나오는 ‘다시’란 단어에는 엄청난 복음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허물을 드러내도 외면치 않고 또 다시 우리를 찾아와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는 일은 있어도 주님이 우리를 떠나는 일은 없습니다. 실패했을 때 사람들은 다 우리 곁을 떠나도 주님은 그때 더욱 가까이 찾아오십니다. 그 주님을 붙잡고 일어서면 실패조차 성공으로 나가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2. 감정 터치를 해주십시오
본문은 실패한 사람을 일으킬 때 감정의 터치가 중요함을 잘 보여줍니다. 감정의 터치를 통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만날 때 그 만남의 의미가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학교에서 매 맞고 돌아와 그 말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매를 받아들이게 하면서도 자녀의 감정을 받아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자신들의 부끄러운 일을 굳이 부모에게 말하는 것은 자기감정을 알아달라는 뜻입니다. 그때 “네가 맞을 짓을 했겠지. 그것 가지고 뭘 그래?”라고 하지 말고 맞을 짓을 했어도 먼저 감정을 위로하십시오. “마음이 상했겠구나. 지금은 좀 풀렸니?” 그렇게 먼저 감정을 위로하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교육이 됩니다. 그러면 이미 인정을 받았기에 자신의 잘못도 순순히 인정하게 됩니다.
감정을 인정해주면 잘못도 인정하는 여유가 생기지만 감정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잘못도 인정하는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자녀의 감정을 무시하고 어른 입장만 내세우지 마십시오. 자녀들은 꾸중 들었을 때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대개 압니다. 그 잘못을 확인시키려고 하기보다 감정을 먼저 위로한 후에 그 잘못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항상 감정의 터치 후에 교육해야 참된 교육이 이뤄집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의심하는 도마에게 그를 탓하기보다는 그의 철없는 요청대로 “내 손을 보고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에 감동해서 마침내 “주님은 나의 주님이고 나의 하나님입니다.”란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28절). 그처럼 실패한 사람의 감정을 터치해주면 실패를 딛고 일어설 가능성도 커집니다.
주님처럼 감정 터치의 프로들이 되십시오. 성도는 남을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기독교인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물론 항상 남만 기쁘게 하며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남의 감정을 생각해 조금 더 남을 배려하며 살자!”고 다짐하는 마음이 진정한 성도의 마음입니다.
물론 남에게 선을 베풀 때는 “내가 이렇게 선한 사람이지.”란 자부심까지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선행을 통해서도 틈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한 후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영광을 받으면 그때 사탄은 미소를 짓습니다. 그처럼 칭찬을 기대하며 베푸는 선행은 ‘사랑’이 아니라 ‘자랑’입니다. 칭찬과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과 배려가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보상을 줍니다.
이제 서로의 감정을 만져주고 서로 받아주고 서로 살펴주십시오. 맘에 들지 않는 사람도 “그 사람 정말 재수 없어! 생각만 해도 짜증나!”라고 하지 말고 “그렇게 살면 얼마나 상처도 많고 외로울까?”하고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때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마음을 더 써줄 때입니다. 그러면 점점 자기 마음에 기쁨과 행복과 사랑이 고이는 것을 체험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그의 사업과 가정과 자녀를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3. 믿음 회복을 도우십시오
도마의 감정을 위로한 후 주님은 그의 마음이 열린 것을 보고 말씀했습니다. 본문 2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이 도마에게 가장 원하신 것은 바로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본 고로 믿지 말고 기적 때문에도 믿지 마십시오. 참된 믿음은 기적이 없고 어려움이 생길 때도 믿음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더욱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얼마나 귀가 닳도록 말했겠습니까? 그래도 도마는 무엇인가 보고 느끼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믿음보다 현상을 중시했고 자기이성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성이 아닌 믿음을 찾으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믿겠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믿는 자에게 아버지로서 만나주십니다.
왜 오늘날 사람들이 불안감이 커집니까? 인간의 옅은 이성적인 지식 때문입니다. 호머의 오딧세이를 보면 영웅 유리시즈가 사일런트 섬을 지날 때 마녀의 소리를 듣고 그것이 마녀의 소리임을 알았기에 불안과 공포로 몸부림쳤습니다. 그 후 시인 오르페즈가 사일런트 섬을 지날 때는 마녀의 소리에도 그냥 노래하며 지나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식과 믿음의 차이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불안이 있고 믿음이 있으면 불안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도마에게 주신 음성을 자신에게 주신 음성으로 듣고 기적적인 응답이 없어도 결코 주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마십시오. 사람은 마음이 있어도 다 돕지 못하고 돕더라도 때때로 잡은 손을 놓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파스칼은 팡세 430편에서 말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불행은 신으로부터 이탈하는데 있다. 사람에게서는 진리도 위안도 기대하지 말라.”
인간의 사랑은 순간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늘까지 함께 해주신 하나님이 내일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고통이 다가오면 그 고통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든지 아니면 그 고통을 감당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살다 보면 때로 막힌 문을 만날 때도 있지만 그때 포기하지 말고 계속 두드리고 밀쳐보면 언젠가 문은 열리고 바로 거기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길은 뜻밖에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서울 강남에 초등학교 3학년인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엄마에게 새벽기도를 같이 가자고 졸랐습니다. 어리다고 엄마가 새벽기도에 데리고 가지 않자 매일 새벽기도가 끝날 때까지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성탄절 2주 전에 교회 가다가 트럭에 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그 아이는 강남으로 이사하기 전에 서교동에 살았는데, 그 교통사고 며칠 전에 서교동에서 다니던 학교 선생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곳에 전학 와서 잘 지내고 있어요. 선생님! 저는 사랑하는 선생님도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선물로 보내는 성경을 꼭 보세요. 선생님! 사랑해요!” 그처럼 믿음이 좋은 아이가 교회에 가다가 트럭에 치어 죽었으니 얼마나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까?
살다 보면 때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왜 내 곁을 떠나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고, 왜 잘 믿으려는 자신에게 큰 어려움이 닥치는지, 또한 교회를 사랑하고 선교와 구제의 소명을 가지고 사업하는 자신의 사업에 왜 어려움이 생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믿음을 잃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사람은 대개 어떤 일에 대해 납득될 만한 설명을 요구하지만 때로는 설명되지 않는 신비가 있음을 인정할 때 믿음의 축복은 시작될 것입니다.
일전에 <덕이>란 SBS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덕이는 가족을 떠나면 충분히 잘살 수 있는데 끝까지 가족을 지킵니다. 그 모습이 현대의 삭막한 삶에 도전을 주었는데 그 드라마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래 전, 그 드라마 작가가 어린 딸을 화상으로 잃었습니다. 그때 마음의 깊은 고통으로 신음하던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와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때의 사랑과 감격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다가 마침내 <덕이>란 인물을 통해 그 주님의 사랑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은 기적을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풍랑이 다가오면 더욱 주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기도하는 계기로 삼으십시오. 그처럼 기적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찾고 기적이 없어도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찾는 초보신앙에는 큰 보람과 보상이 없지만 기적이 없어도 예수님을 찾는 성숙한 신앙에는 큰 보람과 보상이 있습니다.
< 아름다운 면을 향하십시오 >
믿음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현실은 펼쳐지지 않아도 인생 역전과 최종 승리를 확신하며 예수님을 붙잡고 아름다움을 향해 돌아서는 능력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상황과 사물에는 아름다운 면과 추한 면이 동시에 있습니다. 극한 고통을 가져다주는 기도제목이 나중에 축복의 원천이 될 때가 많고 반대로 “운이 좋았다!”라고 좋아하던 것 때문에 때로는 인생이 망칠 때도 많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전혀 달리 보입니다. 어둔 밤에 보면 모든 사물이 검은 실루엣처럼 보이지만 밝은 아침에 보면 그 모든 사물이 저마다 아름다운 빛을 뽐냅니다. 그처럼 어둔 면만 보면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염려되지만 밝은 면으로 보면 그런 대로 희망과 길이 곳곳에 많이 펼쳐져 있음을 깨닫습니다. 또한 사물과 상황의 밝은 면만 주로 보면 삶도 밝아집니다. 그처럼 밝고 아름다운 면을 향해 돌아서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십시오.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일인당 얼마씩의 빚을 진 나라라고 크게 염려했지만 88올림픽 전후에 있었던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그 어려움을 거뜬히 이겨냈습니다. 그 후 IMF를 겪었지만 또 다시 그 어려움을 멋지게 극복했습니다.
1980년대 미국은 거의 망할 것 같았습니다. 무역 적자가 극심해 미국의 부가 다 일본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본이 그 이상 유입되어 결국 미국은 1990년대부터 다시 세계경제를 호령했습니다. 지금 미국 경제가 어렵다지만 아직도 세계 경제는 미국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고 언제 또 반전의 역사가 생길지 모릅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다 망할 것 같지만 축복과 행복의 길은 여전히 많습니다. 행복은 ‘많이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 ‘많이 누릴 줄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채워져야 만족한다면 영원히 만족이 없습니다. 요새 자살 시도자가 많다지만 살면서 자살 충동과 이혼 충동이 한 번도 없었던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삶이 고단하면 스스로 망가지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만 그런 충동을 극복하고 인생을 속단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면서 축복과 행복의 불씨를 되살려 가면 얼마든지 멋진 역전인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다 끝장났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 다 끝장난 인생은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성도에게는 아무리 큰 시련이 있어도 그 시련 중에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손길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이 너무 섬세해 덤벙덤벙한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특히 경쟁사회에서 실패와 쓰라림과 상처를 많이 당하는 현대인에게는 더욱 믿음이 필요합니다.
전도할 때도 “당신은 못난 죄인이요!”라고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그 말을 안 해도 사람은 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삽니다. 그저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혼을 일으켜주시는 사랑의 주님’을 전하십시오. 사랑의 초청이 거절될 때도 많지만 그 거절은 영원한 거절이 아닙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그런 사랑의 초청을 얼마나 매몰차게 거절했었습니까? 거절을 거절로 보지 말고 더 큰 사랑을 보여 달라는 사랑의 요청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얼마 전에 <선한 목자장>인 요한복음 15장 강해를 하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이름을 한 명씩 불러가면서 해주는 기도다!” 그때부터 손가락으로 꼽으면서 현재 등록한 우리 성도들의 이름을 매일 새벽에 한 명도 빠짐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운전할 때도 손가락으로 꼽고, 목욕할 때도 손가락으로 꼽고, 잠들 때도 손가락으로 꼽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려면 복된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람은 축복한 말대로 됩니다. 그 축복의 말보다 더 귀한 것이 바로 축복기도입니다. 그래서 저도 성도들의 가정과 자녀와 사업의 축복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아직 주일성수에 기복이 있는 분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런 기도를 먼저 합니다. “하나님! 그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주일성수와 교회사랑을 통해 주님이 주는 축복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소서!”
요새 사람들은 땅 집고 헤엄치는 쉬운 삶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땅 집고 헤엄치면 수영의 참맛과 기쁨을 모르게 됩니다. 진짜 수영의 참 맛을 알려면 깊은 바다 속으로 쑥 들어가야 합니다. 그처럼 진리의 바다에 자기를 쑥 던져야 진정한 축복을 소유합니다. 이제 교회생활을 할 때도 봉사의 장으로 쑥 들어오고 교제의 장으로 쑥 들어오십시오. 그러면 더욱 큰 축복의 길로 향하는 선한 변화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요새 교회가 제 몫을 못한다는 탄식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자신이 제 몫을 다하면 됩니다. 사회가 더럽다면 자신이 비를 들고 지구의 한 부분이라고 쓸려고 할 때 그 맑은 샘물을 통해 세상이 조금 더 맑아질 것입니다.
요즘은 기독교인이 낀 술자리에서는 안주를 안 시켜도 된답니다. 기독교인들을 밀로 씹기만 해도 충분히 안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성도들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절망적인 한을 토하고 남의 흠집만 잡는 맹목적인 분노는 결국 자기도 해치고 사회도 더 어렵게 만듭니다. 이제 어둡다고 원망만 하기보다는 작은 등불이라도 하나 들고 어둔 세상에서 희망의 빛으로 살면서 결국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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