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그 후 /요21:1-6/ 박요한목사
2024-05-02 00:31:25
중국 송나라 때 기록된 '벽암록'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줄탁동기' 라는 말이 있습니다.
'줄탁동기'는 암탉이 알을 품고 있다가 병아리로 태어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줄' 은 병아리가 알 속에서 나갈 때가 되었다고 알을 톡톡 쳐서 어미 닭에게 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탁' 은 어미닭이 병아리의 신호를 받고 알 껍질을 쪼아서 깨뜨려 주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동기'는 정확하게 같은 때 같은 시간에 '줄'과 '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줄'과 '탁'은 어느 한쪽이 빨라도 안 되고 늦어도 안 됩니다.
'줄'과 '탁'이 정확하게 이루어질 때 건강한 병아리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만약 병아리가 알 속에서 톡톡 치면서 신호를 보냈는데 어미 닭이 알 껍질을 깨뜨려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대로 아직 병아리로 다 자라지 않았는데 어미 닭이 알 껍질을 깨뜨려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줄'과 '탁'이 동시에 잘 이루어져야합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도 '줄탁동기'가 잘 이루어져야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면 우리는 그 신호에 맞춰서 반응해야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줄탁동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심지어는 의심하는 도마에게 못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 주시면서 부활사실을 확인까지 시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3년 반 동안 예수님께 훈련받았던 일들을 실행하면서 제자의 길을 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로 나가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바람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다를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자"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로 나가서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서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잡혔습니다.
나중에 세어보니까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할 문제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제자들이 '왜 고기를 잡으러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까? 아니면 옛날처럼 다시 어부생활로 돌아 간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사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삶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은 7명입니다.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2명 그래서 7명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나머지 가룟 유다를 빼고 4명은 어디 잇습니까?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간 7명이나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은 4명의 제자나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역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제자들이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얘기들을 나누었을까? '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어쩌면 옛날이야기를 많이 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옛날에 자기 고기 잡는 실력이 대단했었다는 이야기, 옛날에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의 이야기, 옛날 같이 고기가 많지 않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앞으로 자신들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할지 미래에 대한 염려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물질은 힘찬 그물질이 아니라 희망을 잃어버린 힘없는 그물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괜히 배타고 고기 잡으러 나왔다고 후회하는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고속버스 기사님이 안내방송을 했습니다.
"승객 여러분! 잠시 후 이 차는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합니다. 우리 버스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러자 고속버스 안에 잇던 승객들이 갑자기 술렁이면서 난리가 났습니다.
"아니, 우리는 광주 가는 고속버스를 탔는데 왜 부산으로 온 거요?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그 때 당황한 기사님이 버스에서 내려서 앞에 잇던 행선지를 보더니
"죄송합니다. 제가 차를 잘 못 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ㅏ들이 배를 탄 것은 분명히 잘 못 탄 것입니다.
타지 않아도 되는 배를 탔습니다. 시간을 허비하고 잠도 못자고 힘들게 고생만하고 고기도 못 잡고 희망도 없는 배를 탄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비전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타지 않아도 되는 인생의 배를 타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의 그물질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주님이 주시는 비전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붙잡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뒤에 잇는 말씀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수출에 구운 생선과 떡을 제자들에게 조반으로 제공하셨습니다. 그리고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내 양을 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또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근심하면서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살ㅇ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분명한 비전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한 사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분명한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분명한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이 주신 비전,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걸었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정치가였던 '윌리엄 윌버포스'는 25세 때 예수님을 믿고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찾은 것입니다.
그것은 '대영제국의 노예제도를 폐지하자' 는 목표를 세우고 정치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30세 때 영국하원의원에 당선 되었습니다. 그 후에 38세 때 영국의회는 노예무역 폐지를 결정했습니다. 62세 때는 영국에서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72세 때는 영국에서 노예해방법이 통과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예해방법이 통과 되고 2개월 후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일평생 재촉하신 이는 주님이셨다." 고 고백한 것입니다.
'윌리엄 윌버포스' 는 자신의 생애를 걸고 주님 앞에서 해야 할 분명한 비전이 있었고 그 비전이 성취되었으며 많은 흑인들이 자유를 얻었고 그는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생애를 걸고 달려가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일을 재촉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이후에 베드로는 단 한 본도 자기 정체성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을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처럼 '베드로'처럼 주님이 주신 사명을 붙잡고 주님의 재촉을 받으며 오직 그 길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에게는 4가지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두 번째는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세 번째는 스승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사명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화초는 아름다운 꽃으로 새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과일은 아름다운 맛으로 짐승들은 맛있는 고기와 가죽과 털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줘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특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특별한 목적과 사명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세 번 태어나야합니다.
첫째는 육신으로 태어나서 사람이 되고 두 번째는 영적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세 번째는 사명자로 태어나서 사명을 감당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성도는 사명자로 태어나서 사명을 감당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 영력과 지력과 체력과 경제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가게하십니다.
베드로는 사명 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목숨을 잃을까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사명 자, 방향을 잃고 고기 잡으러 갔던 사명 자였는데 이제는 자신의 생애를 건, 자신의 목숨을 건 사명 자가 되었습니다.
부요하게 사는 사람이 회갑잔치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짐승을 잡아서 손님들을 대접할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닭에게 말했습니다.
"이번 잔치를 위해서 네가 죽어줘야겠다."
그러자 닭이 펄쩍 뛰면서 말했습니다.
"제가 새벽마다 깨워드리고 알도 낳아주는데 너무 아쉽습니다."
주인은 닭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개에게 말했습니다.
"이번 잔치를 위해서 네가 죽어줘야겠다."
그러자 개가 염려하면서
"제가 밤 낯으로 집을 지키는데 제가 없어도 괜찮겠습니까?"
주인은 개도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소에게 말했습니다.
"우 선생! 이 번 잔치를 위해서 우 선생이 죽어서 잔치를 즐겁게 해야겠소!"
그러자 소가
"저는 평생 논밭을 갈고 짐을 나르며 살았는데 제가 없으면 누가 그 일을 합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또 소도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돼지에게 말했습니다.
"돈 선생 이 번 잔치를 위해서 돈 선생이 죽어서 잔치를 즐겁게 해야겠소!"
그러자 돼지가 평생 먹고 놀고 싸기만 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결심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주인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이 한 몸 바쳐서 주인님의 잔치를 즐겁게 해 드리겠습니다. 주인님! 물 끓이세요." 하고 작렬하게 죽어 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은혜 주님의 사명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어부 출신인 자신을 불러서 제자 삼으신 주님의 은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는데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이 자신을 믿고 피 값으로 사신 양들을 맡기시는 주님의 은혜를 가슴 저리도록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생애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칼 힐터' 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행복의 원천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더욱이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살 때 가장 행복하고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살아서도 행복하고 죽어서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살아서도 존귀하고 죽어서도 존귀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2000년 전의 사람이지만 그 당시에도 존귀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우리 앞에서 존귀한 사람이고 천국에서도 존귀한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명자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내적, 외적 행복이 있습니다.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금생과 내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아마추어 성도가 아닌 프로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아마추어는 취미생활로 합니다. 그러나 프로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자신의 생애를 겁니다.
우리는 프로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베드로처럼 생애를 걸고 생명을 건 프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 뒤에 18절 말씀부터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명을 감당하다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충성심을 아신 것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베드로가 로마 황제의 핍박을 피해서 로마를 떠났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환상 중에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로마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라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도미네? "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버리고 떠난 로마로 내가 가노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제가 가겠나이다. 주여! 제가 가겠나이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극에 달했던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베드로 뿐 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고기를 잡으러 갔던 야곱은 예루살렘에서, 도마는 인도까지 자서 또한 다른 제자들도 순교자가 되기까지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오직 사명을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걸었습니다.
예수님과 '줄탁동기' 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 가치관, 패러다임, 비전을 일치시키십시오.
주님이 맡기신 일, 주님이 원하시는 일, 내가 주님 앞에서 해야 할 사명 붙잡고 사시어서 주님과 여러분 사이에 '영적 줄탁동기' 가 이루어지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 그리고 그 이후 - 제자들③ /요21:1-7/ 안두익목사
2024-04-05 05:19:10
여러분에게 문제를 하나 내 드리겠습니다. 잘 들으시고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실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큰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고, 수술을 받고 얼마 후에 그 사람은 의식이 돌아와 깨어났습니다. 그가 깨어나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그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큰 상처로 인해 머리와 팔다리에 붕대를 감고 온 몸이 고통스러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의사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환자분은 교통사고를 당해 큰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사고 당시 뇌에 심한 충격을 받았고,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에 문제가 생겨서 기억상실증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의사에게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느냐?’고 묻자, 의사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칫 기억을 되살리려다가 시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환자분이 직접 하셔야 합니다. 환자분은 기억을 되찾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시력을 잃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자,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동일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시력을 잃더라도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더라도 시력을 갖는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이 남자는 며칠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과거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제 시력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보다는 지금 이 순간부터 앞으로의 남은 삶까지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계속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남자의 말에 공감하십니까?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과거의 삶과 경험이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과거가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해보면 우리의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의 실수나 잘못을 우리는 바로잡을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과거가 ‘닫혀진 문’이라고 한다면 미래는 ‘열려진 문’입니다. 꿈을 꿀 수 있고, 도전해볼 수 있고, 새로운 뭔가를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 미래가 모두 희망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희망을 갖고 도전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과거의 풍요나 행복보다는 미래의 희망과 기대가 훨씬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열려진 문인 내일을 희망하며 살았는가?’ 아니면 ‘닫혀진 문인 과거만 회상하며 과거에 사로잡혀 살았는가?’하고 말입니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한 질문은 ‘나는 지금 내일의 희망을 품고 설레는 가슴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과거에 내가 세워놓은 업적이나 공로에 사로잡혀 지난날의 나만을 추억하며 살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 디베랴 바닷가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6명의 사람들은 3년 동안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입니다.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과 직업, 심지어 가정을 뒤로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지난 날의 꿈도 열정도 희망도 다 사라졌습니다. 미래를 향한 그들의 꿈은 온데 간데 없이 과거로 돌아가서 고기잡는 어부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에겐 낙심과 좌절에 찌들은 모습입니다. 미래를 향한 희망을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패배자의 모습입니다.
14절에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무슨 말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이들에게 두차례나 다가 가셔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은커녕 낙심에 젖어 자신들이 지난 날 살았던 고기잡이 직업으로 그물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패자요 패배자들입니다. 한때 주님 쫒겠다고 가정도, 배도 그물도 던진 저들이지만, 이젠 다시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다가 오신 것입니다. 그들이 지난 날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겼던 그 가치를 버리고 이젠 고기잡는 어부의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밤샘을 했습니다. 그물을 던지고 다시 끌어올리기를 반복한 것은 중노동 중의 중노동입니다. 지금 그들은 매우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뜻밖에 주님께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가갔습니다.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이른 새벽, 그것도 인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닷가에 떡과 생선이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제자들은 그 음식물에 감히 손을 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우두커니 있는데, 주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떡을 가져다가 주시고 또 맛있게 요리한 생선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누구 한 사람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들리는 것이라곤 바닷가에서 부서지는 파도소리 그리고 바람소리뿐이었습니다. 그 정적 속에서 요한복음 마지막장 마지막 단락의 막이 오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자신들이라면 이 최후의 극적인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지, 우리 각자 이 상황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다. 내가 지난 3년 동안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먹여 주고 입혀 주었으며, 나의 마지막 진액이 다하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던 나의 수하들이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했습니다. 공개석상에서 나를 욕하고 저주하면서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신이 내게 안겨 준 것은 처참하면서도 고독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배신자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배신자들이 내 앞에 앉아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내 입에서 과연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며 귀를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라면, 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후회할 망정 일단 배신자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부터 휘두르고 볼 것입니다.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상기시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나를 배신했는지 그 이유를 따지려 들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지나간 과거는 모두 불문에 붙인 채 다시는 인간답잖게 배신자가 되지 말 것을 점잖게 그러나 따끔하게 훈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들에게 보복을 가하시거나 배신의 원인을 규명하시려거나 훈계하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에게 단지 이렇게 물으셨을 뿐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먹으로 때린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를 따지거나 훈계를 한다고 해서 다시 배신치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기회만 닿으면 몇 번이고 다시 배신하는 법입니다. 15절을 보세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지금 주님 앞에 사람이라고는 11명의 제자들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이란 베드로를 제외한 10명의 나머지 제자들을 뜻하게 됩니다. 즉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른 10명의 제자들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보다'란 단어 우측 상단에 ’2'란 숫자가 붙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아래쪽 주 난을 보면 2번에 ’혹 이것들보다'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가리키는 ‘이것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제자들의 삶의 터전인 갈릴리 바다를 의미합니다. 지금 제자들 앞에 놓여 있는, 방금 잡은 생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모든 것으로 여기며 살아 온 세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말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헛 그물질만 하던 갈릴리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 ‘네가 이 공허한 갈릴리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고 있느냐?'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주님과의 약속을 망각하면서까지 소유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었던 물고기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 ‘이제 곧 썩어질 이 소유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께서는 팔을 벌려 이 세상을 가리키시며 물으셨습니다. ― `네가 공동묘지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 덧없는 세상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께서는 이 아침 우리 앞에 서시어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며 불끈 움켜쥐고 있는 그것을 가리키시면서 묻고 계십니다. ―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의 이 질문에 응답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참된 신앙은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마침내 침묵을 깨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15b)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였다'고 과거형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주를 사랑하고 있다'고 현재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주님보다 허망한 갈릴리 바다를 더 귀하게 여겼었기 때문입니다. 곧 썩어질 생선에, 덧없는 세상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도 주님도 망각한 채 밤이 맞도록 헛 그물질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내가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노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어떻게 주님을 부인하고 이젠 실패의 자리에서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면 또 감정이 앞선 영웅적인 고백입니까? 아닙니다. 앞으로 보시면 알겠지만, 베드로는 바로 이 시점부터 한 생을 변함없이 주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이토록 엄청난 고백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까? 이는 베드로 앞에 계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셨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부활의 주님 앞에 다시 섰을 때 그가 밤이 맞도록 생존을 위해 살아왔던 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덧없는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입니다. 주님 없는 세상을 목적으로 삼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지를 통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내가 지금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내가 이제는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노라'고 3번씩이나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 고백 앞에 믿어주시고 사명을 주시는 주님을 보고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도대체 이들이 제대로 배우기나했나요? 가진 것이 있나요? 있는 것은 고집만 있고 자기감정에 안 맞으면 반항하기 일쑤인 이들이 무슨 희망이 있기에 또 끌어 앉으신다는 말입니까? 보세요.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양을 먹이고 치라는 것은 주님의 양을 맡기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는 전적으로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바보 같은 사랑이 어디 있나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짝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느라 하나님께 눈길도 한 번 안 주는데,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우리를 못 견딜 만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대체 무엇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해달라고 호소하고 계신 것일까요? 대체 우리는 무슨 권리로 하나님의 사랑에 이토록 무심할까요? 하기야 자식이 부모 생각하는 것 봤습니까? 부모는 버림받아 시설에 있으면서도 밤낮 자식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누가 고마우십니까? 저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참 고맙더라고요. 아내가 저에게 무엇을 할 때 가장 고마운가? 요리, 안마, 이런 것보다 몇 백 배 더 고마운 것은 저를 믿어주는 겁니다. 제가 참 믿지 못할 사람인데 너무나 믿어줍니다. 암으로 고생한 이후에 참 저 하나만을 믿고 따라 준 아내에게 잘 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당신은 목회 잘 할 수 있어. 당신은 훌륭한 목사가 될 수 있어!" 라고 믿어줍니다.
어떤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자랍니까? 믿어주는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자라납니다. 가만히 관찰해보면 지식이 많은 부모, 훌륭한 부모 밑에서 훌륭한 아들이 계속해서 나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이 많으면 의심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시골의 부모님들은 농촌에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공부가 뭔지도 모르고 아들을 유학 보냅니다. 아들이 가끔 거짓말을 합니다. "등록금이 필요합니다." "책을 사야 합니다. 쌀을 팔아 부치세요." 그 돈을 받아 아들은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시골의 부모는 전혀 모르니까 공부하는데 이렇게 돈이 드는 줄 알고 쌀 팔고, 밭 팔아서 도와줍니다. 거짓말도 한두 번이지, 어머니의 지성으로 계속 오는 쌀을 어떻게 견딜 수 있습니까? 그러다가 자신이 회개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나와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대장부가 됩니다. 믿어 주었습니다.
얼마만큼 믿어주어야 합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하루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하는 것을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 잘못하고 일곱 번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해도 그 사람을 믿고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너무나 사람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변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내가 회개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번 붙은 딱지를 떼려고 하면 10년이 걸린답니다. 믿어 주어야 합니다. 오늘 해변의 만찬은 그 어떤 시간보다 희망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기쁨이 일어나는 꿈을 갇게 하는 회복의 현장입니다. 자!! 밖에는 동녘의 여명이 밝아오고 부활의 그 광채는 해변가를 비취고 있습니다. 그 부활의 역사는 배신과 상처투성이인 제자들의 패배를 잊게 하고 다시 사명의 현장으로 향하게 하는 주님의 승리였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늘의 꿈을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앞뒤가 꽉 막혀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는 희망을 갖는 것이 믿음입니다. 꿈을 꾸되 세상의 허황된 것을 꿈꾸지 않습니다. 비전을 갖되 세속적 가치를 따라 얻어지는 것에 목표를 두지 않습니다. 보다 큰 세상,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들에 내 삶을 맡기며 삽니다. 그게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좀 실수도 덮어주고 그리고 끌어 앉아주고 용기를 줄 줄 아는 곳,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어머니
품 같은 교회만 오면 가슴이 뭉클 해지는 곳, 아무리 미움이 있고 원망이 있어도 내가 받은 그 사랑 때문에 오히려 섬길 줄 아는 표용력이 있는 현장, 이곳이 바로 부활의 현장입니다. 이 역사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식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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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는 누구를 통하여 흐르는가? /요21:1-25/ 유기성목사
2023-05-13 00:01:48
선한목자교회에서의 저의 목회와 삶을 돌아보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면 “은혜는 목사님만 다 받으셨나봐요! 전 은혜가 뭔지 모를 삶을 살았어요”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저만 받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도 못하겠고 은혜의 통로가 되지도 못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인 요 21장에 보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은혜의 통로가 되는 사람의 조건이 너무나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신을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첫째는 은혜는 실패자를 통하여 흐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였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고기잡는 어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부로 돌아가서도 밤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교회와 성도들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엄청난 사명을 실패자였던 베드로에게 맡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베드로가 실패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이 많으셔서 실패자도 쓰신 것이 아닙니다. 실패자만 쓰십니다. 그런 사람만이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얼마 전만 해도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죽을지언정 주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쓰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자임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의 열등감으로 괴로와 할 때, 고전 1:27-29을 묵상하였었습니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붙잡고 3일을 고민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해하고 믿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 선택만 있을 뿐임을 알았습니다. 삼일째 되는 날 성경책을 끌어안고 “주님, 믿겠습니다”고백하고는 통곡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이 엄청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일어났습니다.
목회를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께서 제 실패를 통해서 역사하셨구나!’ 깨달아졌습니다.
그러니 은혜인 것입니다.
두번째는 은혜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통하여 흐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시고, “주를 사랑합니다” 할 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을 치유해 주시기 위한 일이기도 하였지만 베드로에게 양 떼인 성도를 맡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우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랑만 하는 자입니다.
베드로가 누구를 배은망덕하다, 배신자라고 라고 정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어떤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쓴 성경을 읽어 보면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는 정말 용서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사랑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사랑만 하라“
그러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중에 가장 어려운 십자가가 사람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무슨 힘으로 사람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저도 사역이 힘들고 사람 때문에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마다 주님은 장로님을 사랑하라, 부교역자를 사랑하라, 교인들을 사랑하라, 아내를 사랑하라, 딸들을 사랑하라, 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습니다. 그러면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에서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속죄주로 믿지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어떤 사람과 친해진 뒤에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과 친해지려면 그 사람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자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귀히 여기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을 계속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예수동행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면서 율법주의자 성향인 제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정말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세째로 은혜는 마음대로 살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그를 통하여 흐릅니다.
저는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 행복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하여도, 환경에 대하여도 짜증내고 화내고 조급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무엇 보다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저를 쓰시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젊어서는 꿈도 계획도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8“...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꼭 늙어서만 아닙니다. 인생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을 받아들이느나, 거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옆에 있는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약간은 화가난 듯 반응하셨습니다.
:22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사실 요한도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신 것입니다.
요한은 원래 성품이 불같은 사람으로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혈기와 야망, 계획을 다 버려야 했고 그래서 기도의 사람,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살지 못함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마음대로 살지 못해서 문제가 아니라,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에 문제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대로 안된다 탄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대로 안되기로 따지면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 같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베드로나 사도 바울은 마음대로 살았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제 삶을 돌아보니 정말 마음대로 살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목사가 되는 것도 그랬습니다. 은퇴하는 것도 제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이끄셨고 저는 순종할 뿐입니다.
은퇴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은퇴 이후는 더 제 마음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에는 그것이 안타깝고 힘들고 화가 나고 어떻게 해서든 제 뜻대로 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가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중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1966년-76년에 있었던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에 의하여 혹독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중국 가정교회는 이미 공산당 하부조직이 된 삼자교회 가입을 강요받았고 거부하면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그 때 감욕에 가는 것이 두려워 삼자교회에 가입한 목사님들이 많았고 끝까지 삼자교회 가입을 거부한 목사님들은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의 결과가 생겼습니다. 삼자교회에 가입한 목사님들은 대부분 일찍 죽었고 감옥에 간 가정교회 목사님들은 장수한 것입니다.
문화대혁명 때 삼자교회 목사님들도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너무 고통이 심하여 자살한 목사도 생겼을 정도였습니다. 그 충격으로 대부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 중에 감옥에 있었던 목사님들은 혹독한 비판에서 오히려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고 비교적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건강해진 것입니다. 또한 문화대혁명 기간 감옥에 있었기에 당시 유럽과 미국에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경 중심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느껴지지도 흐르지도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좋고 싫은 것이 너무 많고 ‘마음에 드는 사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남이 끌로 다니는 삶을 살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따라사는 삶의 방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고 주님이 보내주신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진작 내게 주어진 모든 환경이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이다 생각하고 오직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만 생각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마음대로 살려니 힘들지 마음대로 살지 않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강처럼 흘르지 못한다면 세가지를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자신이 정말 실패자임을 인정하고 매사에 주님만 의지하고 사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만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정말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오직 그것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찬양: 온 맘 다해
다시 한 번 만져주소서 /요21:1-14/ 유기성 목사
2016-08-04 15:56:52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
추석이라 고향을 찾아가신 교우들도 꽤 많으시고 또 추석이기 때문에 특별히 저희와 함께 예배드리시는 분들도 또 많으십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이 특별한 주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추석이기도 한데 추석 선물이 될만한 설교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했었는데, 오늘 이 설교가 여러분에게 추석 선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절기는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한 소식 뿐입니다. 심심찮게 자살의 소식도 들려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안타까운 것은 꼭 문제가 어려워서, 희망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낙심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절망스럽기 때문에 살 희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낙심의 영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절망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그 영향이 있고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무서울 정도로 낙심의 영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낙심의 영에 공격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낙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목사가 교회에 파송을 받아가서 첫 설교를 했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는 교회 문간에서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심술궂게 생긴 영감님이 목사에게 말했다.
“설교를 원고 보고 읽으면 어떡해? 그리고 읽는 것도 시원치 않고. 내용도 형편없었어!"
신임 목사는 너무나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온 친절하게 생긴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목사에게 말을 했습니다.
“아, 그 영감 말 듣지 마세요. 그 영감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옮기는 것 뿐이예요.“
여러분, 낙심이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리 폭포수 같이 부어져도 전혀 느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낙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폭포수같은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나는 아니야!’하는 그 사람에게도 폭포수 같은 은혜를 부으십니다. 그런데 낙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나는 모르겠어. 하나님이 나에게 아주 조그마한 은혜라도 주시면 좋겠어.’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낙심입니다. 그런 뜻에서 지금 낙심에 의하여 마음이 무너지신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제자들에게 그보다 놀라운 일이 어디 있겠으며 그 보다 더 흥분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아고 제자들은 오히려 낙심에 빠져 있음을 봅니다.
두 번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결론은 다시 어부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왜 이럴까요? 어째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제자들은 더 낙심한 것입니까?
어떤 분이 미국에서 유학할 때 선배 한 사람과 한 방을 썼었는데, 그 분의 성격이 유별나서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답니다. 후배라 무엇이라 말할 수도 없어서 참고 1년을 살았지만, 결국 다른 사람과 살겠다고 방을 바꾸어 달라고 했답니다.
그 후 이 분이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게 되어 한 연구 단체에 지원을 하게 되었는데, 까무라치게 놀란 것은 면접관이 바로 자기가 그토록 싫어서 방을 바꾸어 달라고 했던 그 선배였답니다. 얼마나 낙담이 되었는지 몰랐답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 심정이 꼭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 우리는 끝났다.’ 하는 마음이 들었고, 결국 디베랴 바다로 돌아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들의 마음은 더 무너지더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인정해 주실까? 말도 안돼. 우리가 알아서 피해야지.’ 그런 마음이 들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직접 만나고도 제자들의 마음은 더 비참해져서 스스로가 알아서 비켜드리고 다른 사람을 불러다가 예수님의 제자 삼으시고 주님이 하실 일을 하시도록 자기들은 알아서 비켜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고기 잡이 하러 돌아갔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혹 낙심의 영이 역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잃어버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복을 달라고 구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를 기억이나 하실까? 내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어주실 리가 없어. 내가 그동안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렸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살았던 적이 얼마나 많으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쓰시겠어?’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신앙적인 좌절이 오는 것은 절망인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어려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반드시 나에게 역사한다는 것이 믿어지면 어려움은 어려움이 아니지만,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을 거야. 기도해도 이제는 소용이 없어.
이런 생각이 들 때는 끝나는 것입니다.
이런 낙심이 찾아올 때 꼭 기억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 앞에 설 면목이 없어서 축복이 믿어지지도 않고 기도할 용기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죄를 짓고 실패하고 낙심스런 일을 만나도 판단은 바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고, 마귀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가 다시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아주 무너져 버리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던 우리가 어떤 실패 속에 있던 하나님의 계획은 다시 우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절대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낙심하게 될 것에 대하여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베드로와 제자들의 낙심 뒤에는 마귀가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아주 주저 앉히려고 발광을 한 것입니다.
낙심에 빠지면 아무 것도 안 들리고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마귀가 하는 참소만 들립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들으면서도 ‘나는 아니야!’ ‘나는 용서받을 수 없어. 하나님은 나를 떠나셨어!’ 하는 마음 밖에 들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낙심에 빠졌기에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은혜와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마디도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평안을 주노라” 하시면서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 용서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용서하고 다시 세우실 뜻이 아니라면 제자들을 만나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이 있으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면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베드로와 제자들이 ‘주님이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구나.’ 깨달을만도 한데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안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이 들리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더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막아 죽이는 로마 병정들을 향하여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고 기도까지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가 어떤 시험을 당할 지도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 시험에서 다시 일어나기를 기도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낙심에 빠지고 나면 세상 없는 말씀을 주셔도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는 것이 기가 막힌 것입니다.
낙심은 믿음을 빼앗아갑니다. 한 쪽만 보게 하고 한 쪽만 듣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식대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에 대하여 실망하셨을 거야. 버렸을 거야. 나같은 자가 무슨 관심이겠어?’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생각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기본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그렇게 많은 말씀을 직접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이 기본적인 믿음 하나 제대로 가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고는 ‘나 같은 자는 스스로 알아서 물러가야 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지만 낙심스런 순간이 닥쳐봐야 우리 믿음이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믿어지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주님을 나를 버리지 않으셨고 하나님은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수렁에 빠졌어도, 사람들이 다 나를 손가락질하는 자리에 있어도 그것이 믿어집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 형편에서도 주님의 사랑과 용서, 우리를 향해 복주시려는 계획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낙심이 죄입니다. 너무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감사할 제목도 있는데, 스스로 포기하고 낙심하고 무너진 경우를 보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꼭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여전히 사랑하시고 능히 일으키실 수 있는데, 우리가 낙심하여 “나는 안돼. 나는 끝났어.” 하고 있으면 죄에요 아니에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낙심은 무서운 죄입니다. 수많은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낙심하면 자녀들은 절망인 것입니다. 남편이 낙심하면 아내가 어떻게 삽니까? 아내가 낙심하면 남편은 무슨 힘으로 삽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심정은 그보다 더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든지 다시 일으키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려내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도 우리가 낙심해버리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이제 끝났어! 기도할 힘도 없어! 믿어지지 않아!“ 우리가 이러고 있으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어떻게 하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가 낙심에 빠지면 주님도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하나님 심정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낙심이 있으면 열심히’ 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열심이 없어서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디베랴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을 세 번째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은 얼마나 무너지셨을까요? 두 번씩이나 제자들을 만나주셨으면 이제는 확신을 가질만도 하지 않습니까? 다시 일어날만도 하지 않습니까?
두 번이나 만나서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다시 고기 잡이하러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심정은 정말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차라리 포기해 버리시고 될만한 사람들을 붙들고 일하시지.’ 이런 생각도 들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도 말씀해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정말 처절하게 낙심에 무너져서 고기 잡으러 갔지만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한 베드로는 큰 고기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그 때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즉시 예수님께 달려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숯불을 피워놓고 떡과 고기를 구워 제자들에게 먹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밤새 고생하는 것이 안스러워 많은 고기 떼를 몰아 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낙심을 이기고 다시 일어설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보다 더 큰 용서의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정말 용서해 주시는 거구나! 예수님께서 다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구나! 다시 제자로 여겨주시는구나!’
수영 강사인 어떤 자매가 어린이들에게 물 위에 뜨는 것을 가르칠 때 경험한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들을 밑바닥에 발이 닿지 않을 만큼 충분히 깊은 물 속에 데려가서, 물 위에 등을 대고 누워보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강사인 자기에게 매달리고 어떤 아이는 할퀴고 머리카락을 웅켜잡고 무엇이든지 붙잡으려고 발버등을 친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결국 물 위에 누울 수 있게 되고, 물이 그들을 오히려 지탱해 준다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 그들의 얼굴에 피어나던 놀라움과 미소는 참으로 보기 좋답니다. 일단 물 위에 뜰 수 있게 되면 그 다음 과정부터는 순조롭게 잘 치러나간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게 되는 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이란 죽을 것 같은 낙심 속에서도 예수님만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오신 주님은 낙심 중에 있는 우리에게도 다가 오십니다. 어떤 낙심스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성령의 동행하심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갖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믿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보스턴의 한 보호소에 앤(Ann)이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아빠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다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마저 죽자 앤은 충격으로 미쳤고 실명까지 했습니다.
앤은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괴성을 질렀습니다. 결국 앤은 회복 불능 판정을 받고 정신병동 지하 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모두 치료를 포기했을 때 노(老)간호사인 로라(Laura)가 앤을 돌보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로라는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사랑을 쏟았지만 앤은 담벼락처럼 아무 말도 없었고, 앤을 위해 가져다 준 특별한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앤은 그 간호사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2년 뒤 앤은 정상 판정을 받아 파킨스 시각장애아 학교에 입학했고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으로 밝은 웃음을 찾았습니다.
그 후 로라가 죽는 시련도 겪었지만 앤은 로라가 남겨준 희망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에도 성공했습니다.
수술 후 어느 날, 앤은 신문기사를 봤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 앤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은 못 가르친다고 했지만 앤은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요."
결국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최대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냈습니다.
헬렌켈러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나 그녀의 스승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를 안고 있는 헬렌켈러를 전 세계가 놀라게 한 인물로 만든 사람이 바로앤설리반 (ANN SULLIVAN)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로라가 앤설리반에게 한 것처럼, 앤설리반이 헬렌켈러에게 한 것처럼 주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의 눈을 뜰 때까지 우리를 다시 만져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는 기적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낙망과 두려움과 염려하며 평생을 살 것인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살려면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보라”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그 음성에 순종하여 그물을 오른 편에 던졌을 때 큰 고기만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망에 좌절에 매이지 않고 예수님을 경험할 때,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막연하게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기도하라! 신뢰하라. 감사하라. 찬송하라. 성도들과 함께 연합하라!’
그렇다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인생에는 회복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리차드범브란트목사는 1948년 루마니아 비밀 경찰에 의하여 투옥되어, 20년 가까이를 옥에서 살면서 신앙을 버리게 하려는 공산 당국에 의하여 엄청난 고문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가 옥에 갇힌 지 수년 동안 일체 면회조차 없다가 한 번은 감옥에서 방송을 하기를 가족 면회를 허락하니 집에다가 엽서를 보내라는 것입니다. 면회하는 날 면도를 하고 새 내복을 입고 마음이 들떴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면회를 나가는데, 범브란트 목사님에게만 아무도 면회를 안 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엽서가 아내의 손에 들어가지도 못했음을 알 수 없는 이 분이 혼자 남아있는데, 방송이 나오기를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데 나중에는 흐느끼며 울었답니다.
몇 년 동안 아내와 아이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날은 만날 수 있으리라.’ 어린 아이처럼 들떴었는데,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다니! "그들은 더 이상 네게 관심이 없다." 나중에는 몸부림을 쳤습니다.
다음 날 동료들이 돌아 왔습니다. 아내를 만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비웃습니다. 도무지 들을 수 없는 더러운 말을 합니다. 그 때 방송이 다시 나옵니다.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안 계신다." 그런데 자신이 그 말이 믿어지기 시작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어떻게 믿을 지켰는데, 하나님 이게 뭡니까?' 그런데 그 순간 성경에 나오는 배교의 때가 이를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셨던 때 여인들을 생각했습니다. 그 여인들도 나처럼 이렇게 절망스러웠겠지! 그러나 그들은 울면서도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다!’
그 시간 범브란트 목사님은 자신을 하나님께 다 드렸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란과 혼돈 속에서 자신의 모든 판단까지 하나님께 다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는 그냥 울 것입니다. 무덤 곁에서 울던 여인들처럼! 나는 그냥 울 것 입니다. 그는 결국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루마니아에 다시 기독교 부흥의 때가 왔습니다.
아무리 낙심이 되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면 깜짝 놀라는 은혜의 회복을 얻게 됩니다.
저는 그동안 “난 안돼요! 난 자격이 없어요! 난 못해요!” 하나님께 수도 없이 부르짖었습니다.
습관적인 죄로 무너졌을 때, 설교 후 좌절감이 들 때, 교인들이 저로 인하여 상처받았다는 이들을 볼 때
“하나님, 보셨잖아요. 저는 이런 자예요. 제가 못한다고 했잖아요.” 저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을 주시지 않아서 제가 제대로 목회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모세가 호렙 산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 사명을 받았을 때, “저는 못해요. 저는 부족해요. 다른 사람을 보내세요.” 했던 그 모습이 바로 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부족함만 계속 보았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베푼 것들을 보아라!’ 저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제게 있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끝도 없이 나왔습니다. 특히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님이 오신 것만 해도 충분하였습니다.
저게 없는 것이 1% 라면 제게 주신 것은 99% 였습니다. 저는 받은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저는 낙심될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다시 만져 주셨습니다.
지난 주간 부모를 위한 젊은이 교회 특별 새벽기도 때, 한 자매가 고백하면서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를 말했습니다. 엄마는 98점을 받아도 모자란 2점에 대하여 책망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때마다 가슴이 오그라지는 고통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항상 없는 것 그 몇 가지만 붙들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보는 눈만 뜨이고 나면 얼마나 주신 것이 많은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왜 낙심하십니까? 베드로보다 더 실패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큰 실패자 베드로도 치유하여 주의 큰 사도로 쓰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부활절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부활절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낙심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낙심케 하는 영아 떠나가라! 나는 주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십자가에 호소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크고 놀라운 것임을 믿습니다.
“주여, 다시 한번 만져주소서. 말씀하소서. 귀 기울이겠습니다!”
◀ 갈릴리바닷가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요21:1-14/ 옥한흠목사
2014-11-11 19:46:42
오늘은 전 세계 교회가 기뻐하는 부활 주일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향해서 천사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16:6).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느니라"(3,4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16,17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 이 얼마나 장엄한 부활 선언입니까?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듣고 믿어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녀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은 40여일 동안 제자들과 자주 만나셨는데, 21장은 제자들을 공적으로 만나신 세 번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들이나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 외에 열 제자들과 한꺼번에 만나셨고, 나중에는 도마까지 포함한 열 한 제자들과 함께 만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보면 다시 일곱 제자를 찾아오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이 본문 말씀의 내용을 읽을 때마다 참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는 이 본문을 참 사랑합니다. 읽고 묵상 할 때마다 참 좋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새 몸으로 부활을 하셨으니 그리고 그는 몹시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존재가 되셨으니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것이라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오신 예수님, 고기 잡는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시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답지 않게 너무나 인간적이다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이게 좋은 거예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주님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셨다고 해서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그런 자리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역시 우리와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인간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진한 감동이 몰려오는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6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만나 뵌 후에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갈릴리에 가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와서 그들은 여러 날을 아마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오겠다 약속을 안 하셨으니까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여러 날 보내다 보니 자연이 아마 좀 적적했던 것도 사실이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갑자기 '나는 오늘밤 고기를 좀 잡으러 가야 되겠어.' 이렇게 말을 던지니까 다른 6명의 제자들도 '우리도 따라 갈게.' 그래 가지고 이 7명의 제자가 바다로 가서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밤에 나갔습니다.
왜 갑자기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려고 했을까? 이것을 놓고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요. 어떤 분은 '3년 전에 예수님을 따라 가느라고 인정사정 없이 다 내 버리고 갔던 배요, 그물을 다시 베드로가 손에 들고 배를 타고 갈릴리로 나갔다는 것은 그는 영적으로 이미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영적으로 병이 들었고 타락했는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지금 잘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차례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심한다든지 타락했다든지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런 해석이 우리에게는 공감을 느끼게 합니다.
'베드로와 그 제자들은 갈릴리에 와서 여러 날을 있으면서 생활비를 충당해야 될 어려움이 직면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황소 같은 장정 7명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 빈둥거리는 것, 이것은 쉬운 일 아닙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시골의 정서상 그것은 용납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또 고향에 있는 형제, 친지들 앞에서는 그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언제 오실 지 잘 모르는 판국이니까 '주님이 오실 때까지 뭔가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나는 고기 잡아 와서 그걸 팔아서라도 살겠다.' 아마 베드로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해석이 어떤 면에는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신앙은 참 좋아 보이는데 자기 생활에 무책임한 사람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하기 싫으니까 날마다 기도하네, 전도하네, 그런 데 관심을 가지고 매일 소일하는 사람,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 보겠다고 고생을 하고 있는데 자기는 날마다 교회에 와서 빙빙 도는 사람, 저는 정상이라고 보지 않아요. 남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딱한 처지에 있으면서, 3D든 4D든 가리지 아니하고 소매 걷어붙이고 일할 생각을 해야지, '이 일은 힘들다, 저 일은 남의 눈에 망신스럽다' 하면서 일은 별로 하지 아니하고 성경공부 열심히 좇아 다니는 사람, 나는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도 그들의 생활은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배를 탔다고 보고, 또 잘 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3년만에 다시 그물을 싣고 바다로 나갔기 때문에 아마 처음에는 손발이 잘 맞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하던 일이라도 한 3년 가까이 손을 떼고 있다가 다시 잡으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요.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갈릴리 고기잡이는 야간 작업인데 그날 따라 이상하게 고기가 잡히지를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땀을 흘리며 그들을 열심히 그물을 던졌다 당겼다 해 보았지만 허탕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심정이 착잡했을까요?
아침이면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항구로 돌아가리라 기대했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새벽녘에 멀리 떨어진 해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사이 우리말로 말하면 '고기 좀 잡았느냐?'
이런 소리를 지르는 분이 할 분 서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맥 빠진 소리로 '아무 것도 못 잡았소.'하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고 있던 요한이 알아차렸습니다. 물가에서 소리를 지르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 그리고는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주님이 서 계신다.'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빈 그물을 던지고 있는 갈릴리 바닷가에 와서 서 계신 부활의 주님, 상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밤새도록 허탕만 치고 있던 제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그 바닷가에 오셔서 조용히 지켜보고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 여러분, 영적인 상상력이 있으면 최대로 동원해서 한번 그 아름다운 장면, 그 감동적인 장면을 한번 그려보세요. 언제부터 부활의 주님은 그 바닷가에 와서 서 계셨을까?
초저녁부터일까? 밤중부터였을까? 아니면 새벽 바로 그 때 오셨을까? 저는 밤새도록 주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밤에 계셔도 어두워서 제자들이 볼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또 날이 새어서 제자들이 누가 서 있는 것을 보아도 예수님이 자기를 그들에게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면 제자들은 절대로 발견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예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한 십 리 길을 같이 동행한 일이 있었지요. 두 제자는 낯선 사람이 옆에다가 오기 때문에 같이 동행할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고는 같이 가기로 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은 성경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도 느꼈습니다만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는 자만이 발견하게 되 있어요. 나중에 그들이 그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주님은 그 앞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예수님이 꼭 그 시간에 오셨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 그물을 던지고 끌어올리고 한 마리도 못 잡은 허탈감을 가지고 또 던지고 아주 힘든 수고를 밤새도록 하고 있는 그 갈릴리 바닷가에 주님은 오래 전에 와서 계셨고 밤새도록 일하고 있는 제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셔도 전혀 잘못된 것 아닙니다. 한번 물어 볼까요? 이 자리에 주님이 계셔요? 안 계셔요? 부활하신 주님 이 자리에 계셔요? 안 계셔요? 언제부터 계시나요? 예배 시작한 10시부터 계시나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그물을 던지는 바닷가에 와 서 계십니다.
제자들이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했더니 큰 고기 153마리가 잡혔어요. 조그마한 그물에 153의 고기가 바동거리는 것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신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물은 찢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밤새도록 빈 그물을 가지고 고생한 것은 나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생각하니 헛수고가 아니었습니다. 빈 그물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홍해가 앞을 가로막는 위기가 있었기에 바다가 갈라지는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목이 타는 갈증을 경험했기에 큰 바위가 갈라지면서 생수가 솟는 놀라운 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이 고생을 했기에 떡 5덩이,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그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을 하였기에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자마자 낫게 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빈 그물을 가지고 밤새도록 고통하고 고생하는 것,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헛수고가 아님을 믿습니다. 일시적인 고통은 될 수 있고, 한동안의 눈물과 한동안의 어려움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부활의 주님 만나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고통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당신의 그물이 비어 있습니까?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습니까?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 바닷가에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용히 펴놓고 눈을 감고 묵상하면서 읽어보십시오. '아, 이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이구나. 주의 음성이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빈 그물을 가진 자는 그 음성을 더 빨리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다락방에서 말씀을 나누는 중에 다른 형제들의 입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구나. 저 이야기는 나를 위한 이야기야.' 손을 털고 배에서 내리라고 하시는지, 아니면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는지,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빈 그물을 채우는 비결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고기 잘 잡는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그래서는 안될 사람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자신 있게 세상을 살다가 갑자기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빈 그물의 인생을 체험하는 되는 사람이 왕왕이 있습니다.
아마 '내가 그런 사람이다'하고 마음에 짚이는 분들은 귀를 기울이세요. 또 나도 그럴 위험이 있다 하는 분들도 귀를 기울이세요. 빈 그물의 인생이 된 다음에 부활의 주님이 옆에 서 계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 과거의 돈으로도 명예로도 살 수 없었던 하늘의 부활을 그 빈 그물에 가득히 채우는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 안에 많아요. 저는 좀 극단적인 예가 될 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예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을 때, 4년 동안 많은 강의를 들었습니다.
영문학을 했기 때문에 들어도 될 강의, 들을 필요도 없는 강의, 이것저것 주어서 들었는데 그 많은 강의 중에서, 지금도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제 마음에서 깊은 자국을 남긴 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강의가 있어요. 그러므로 '대학에서 당신 제일 감동 있게 들은 강의가 뭐냐?'
하면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딱 이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하시는 분들 강의 잘하면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있던 오화섭 교수가 한 학기 동안 제가 다니는 성균관대학교에 와서 희곡을 가르쳤습니다.
drama를 가르쳤어요. 영문 drama를 가르쳤는데 그 당시 강의 제목이 Arthur Miller가 쓴 'Death of a Salesman' 즉, '세일즈맨의 죽음'이라고 하는 유명한 희곡을 한 학기 동안 강의했어요. 저는 자랄 때부터 청교도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연극하면 귀를 막는 사람이었습니다. '
그것은 마귀가 작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자랐어요. 연극이다, 드라마다, 춤이다 이런 소리하면 이것은 완전히 타락된 예술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랐기 때문에 아주 흥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교수가 와서 강의를 하는데 저는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습니다.
'야, 드라마가 이런 것이구나. 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예술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워가 있구나.' 하는 것을 제가 비로소 알게 됐지요. 그래 가지고 한 학기 동안 그 시간은 정말로 제 정신 다 빼앗기고 들었어요. 참 감동적인 강의였습니다. 명강의였어요.
그래서 그 분을 늘 기억하고 있는데 그 분에게 그 당시 아주 총명한 딸이 한 분 계셨어요. 연세대를 나오고 그리고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딸인데 '성야'라고 하는 희곡을 발표해서 데뷔를 했고, 그 후로 작가로 배우로 방송인으로 또 수필 작가로서 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숱한 소녀들의 편지나 엽서에 그녀의 글귀가 인용될 정도로 사랑 받는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오혜령 씨가 최근에 '당신 없는 인생은 빈 그물이오니'라는 책을 내 놓았어요. 그래서 제가 관심이 있어 가지고 사서 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그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한번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분이 지금까지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는 제가 그 책을 사 보았어요. 그는 미션 스쿨을 다녔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요. 그러나 흔히 똑똑한 지성인들이 잘 빠지는 길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안 믿으려 하고 신앙생활은 인생의 실패자들이나 매달리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곁길로 가는 그런 사례들이 많이 있어요. 교만한 거지요. '나는 그물을 던지면 얼마든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하는 자기 과신 때문에 이 오혜령 씨도 예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금부터 한 20여 년 전 위암과 임파선 암을 진단 받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일 달력의 숫자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나가면서 죽을 날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자가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혈변을 보는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매주마다 꽃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백합50송이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반시간 가까이 꽃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순간 그는 정신없이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직감적으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찾아 오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그물이 텅 비어 있을 때 주님께서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왜 죽음의 한복판에까지 따라 오시는 것입니까?' 그 말을 내 뱉고 나자 그 동안 주님을 나 몰라라 하면서 마음대로 살았던 자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아졌습니다. 며칠동안 화선지에 붓글씨로 자기 죄를 회개했습니다.
수십 개의 양초가 녹아 내릴 때까지 회개하고 또 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기를 반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며 예배를 혼자 드리고 있었는데 온몸의 오한이 덮쳐 왔습니다.
'이제 죽는 시간이 다가 왔구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너무 추워서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 어깨에 복숭아 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또 복수로 차 올랐던 배가 꺼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아 계신 주님이 자기를 찾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그물은 고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는 경기도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버림받은 노인들을 돌보는 평화의 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는 하루 9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에 바친다고 합니다.
그가 쓴 글을 제가 읽다가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 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 없이 한평생 수고해 보아야 우리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 비록 저희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당신을 지금 당장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희의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당신께 대한 신뢰 속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각오가 설 때 저희 행위에 방향과 성취가 부여됩니다.
당신은 가장자리에 계시지만 늘 저희에게 그물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던지라고 분부하고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날마다 호숫가에서 저희를 기다리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너무 영감 있고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이와 같은 고백을 해야 될 분들이 이 자리에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이 서 계시는 것을 보자 급히 뭍으로 나왔습니다. 와서 보니 숯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고 그 위에는 떡과 생선이 향긋한 냄새를 피우며 익어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 더러 잡은 고기를 좀 더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고기를 더 많이 숯불에 얹어서 구웠습니다. 준비가 다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13절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예수께서 가셔서, 자기가 직접 가 가지고 숯불 위에 있는 떡을 가져다가 베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일일이 떡을 갖다 주시고, 그 다음에는 생선도 숯불 위에서 뜨끈뜨끈한 그 생선을 또 베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 에게 갖다 주고 일곱 제자에게 다 갔다 주셨습니다. 이게 13절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에요? 어린아이를 앉혀 놓고 열심히 먹이려고 하는 어머니 같은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밤새도록 고기 잡다가 지치고 배고프고 한기를 느끼는 제자들에게 이것만큼 반가운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아침해가 두둥실 떠오르는 바닷가에서 따뜻하게 데운 떡과 생선으로 배를 불리면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해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리고 긴장했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온유하신 부활의 주님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그 시간을 보내는 제자들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참 좋은 예수님이시다, 부활의 주님에게서 느끼는 인간미, 참 인간적이시다 하고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인간적이다. 부활하기 이 전에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지신 주님이 이런 행동을 하셨다면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기 구워서 갖다 주시고, 떡 구워서 갖다 주시고, 너무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이 이런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분이 지금 내 곁에 계시고, 내 마음에 계신다는 것을 느끼는 것,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4장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그래요. 우리의 연약함을 다 동정합니다. 배고픈 것 아닙니다. 지친 것 압니다. 밤새도록 잠자지 못한 것 압니다. 실패로 인해서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압니다.
기분 좋은 것도 없고 마음이 끌리는 것도 없는 지친 인생임을 우리 주님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 이렇게 말씀하시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따끈한 떡을 가지고 따끈한 생선을 가지고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린도후서 9장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얼마나 아름다워요?
여러분 만약에 상황을 좀 바꾸어서 예수님이 이렇게 했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아 녹초가 되어 가지고 지친 제자들이 물에서 올라오는데 예수님께서 근엄한 얼굴로 '자, 전부 이리 모여. 나하고 기도하자.' 만약 그랬다면 어떨까요?
또,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요. '너희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잖아? 분명히 이유가 있을 꺼야. 나하고 그 이유를 좀 분석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자. 전부 모여.' 아마 그랬다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나 그 분위기가 살벌할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잖아요? 가뜩이나 베드로와 같이 며칠 전에 자기를 가장 중요한 순간에 3번이나 부인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할 말씀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요즈음 말로 손 좀 보아야 할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밤새도록 떨었던지 못 먹었던지 상관 않고 '베드로, 이리 좀 와. 너 양심이 있냐? 없냐?' 이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얼마든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고 싶은 모든 말씀을 가슴에 묻어 두시고 예수님은 부지런히 떡을 떼어서 제자들을 먹이시고 생선을 구워서 먹이시고, 추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려고 애를 쓰시는 모습,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여러분, 사람에게 영은 육보다 중요합니다. 사실입니다. 영적인 문제는 육적인 문제를 앞섭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를 다루기를 원하는 사람일수록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느끼고 있는 요구에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배가 고픕니까?
먹을 거 줘야 해요. 병으로 고통 합니까? 그들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동참하는 자세를 가져야 돼요. 우리가 거룩한 일을 다루면 다룰수록 좀더 인간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장황한 설교?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잠을 자지 못한 자에게 성경공부? 그렇게 감동적인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상당히 사납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런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좀더 인간적이 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람이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여유가 있다, 정말 훈훈하다, 포근하다, 이렇게 느끼지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밤새 헛수고를 하고 있는 제자들을 바닷가에 서서 지켜보신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빈 그물을 가득히 채워 주신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지금까지 우리는 지치고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 숯불에 떡을 굽고 고기를 구워 일일이 먹여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연약한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해 너무나 인간적인 부활의 주님을 이제 우리는 한 평생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빈 그물을 가지고 땀을 흘릴 때든지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 올 때나 항상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혼자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좋으신 주님, 어떻게 말하면 너무나 인간적인 주님, 이 분을 우리는 모시고 이 험한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외로울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했습니까? 혼자 교통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픕니까? 혼자 흐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내 빈 그물을 던지며 고생하는 그 바닷가에 서 계십니다. 이 자리에 실패하고 빈 그물을 계시는 분 있나요? 이 가운데 배고픈 분이 계시나요? 이 가운데 잠자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있는 자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만나세요.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오스왈드 샌더스가 소개한 우리가 잘 아는 시 하나 있지요? '모래 위의 발자국' 열 번, 백 번 들어도 은혜스러운 시가 되어서 제가 다시 한번 전문을 놓고 읽어보았습니다. 여러분, 눈을 조용히 감으시고 한번 감상을 해 보세요. 제가 목소리는 신통치 않지만 한번 읽어 드릴게요. 참 은혜스러운 시 아닙니까?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 위에/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 쌍은 내 것 또 한 쌍은 주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그 곳에서/ 내 인생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자주 내 인생 길에는 오직 한 쌍의 발자국만 보였네/
그 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펐던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당신은 저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 그러나 보세요/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그때 거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나요?'/ 주님께서 대답하셨다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이여,/ 나는 너를 사랑하였고 너를 조금도 떠나지 않았단다./ 너의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쌍의 발자국 그것은 나의 발자국이었느니라./ 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너무 좋으신 주님, 부활의 주님, 영원히 살아 계신 주님, 우리 모두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우리가 심히 지쳐 걷지 못할 때에는 우리를 등에 업고 걸으시는 주님, 그분이 오늘 우리의 주님이시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생명을 다시 한번 가슴에 불태우면서 우리 매일매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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