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21:24 - 25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11. 11.
728x90
반응형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21:24-25

2003-05-28 15:08:31

 

 

요한복음은 많은 사람들이 두 번의 결론이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20:30-31절이 책의 첫 번째 결론이고, 오늘 본문을 두 번째 결론으로 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21장만의 결론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24절의 '이 일들'은 가깝게는 디베랴 바닷가에 부활하신 주님이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4절에서 말하는 '이 일들'이 요한복음 전체를 말한다고 해도 별 무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요한복음에 두 번의 결론이 있다고 하는 견해 보다는 한 번의 결론이 있는데 그 결론이 오늘 본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20:30-31절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 정도로만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서론과 1장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세례 요한의 증거와 본문의 제자의 증거가 요한복음의 앞과 뒤에서 서로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1:6-8절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그리고 1:19,33-34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자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는데 그 자신도 누구인 줄 알지 못하다가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즐 알고 증거했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24절 한 절만을 강론하도록 하겠습니다. 24절은 크게 두 문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일들을 증거하고 기록한 제자에 대해서 말하고 난 뒤, '우리'라는 표현으로 제자의 증거를 추인해 주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의 공동체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자가 증거하고 기록한 것에 대하여 교회가 확증해 주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이 일들을 증거하고 기록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사람'21:20절 이하에 나타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던 자입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로서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묻던 자입니다. 이 제자는 21:23절이 말하는 것처럼 베드로와 달리 오래 동안 살아 있어 아직도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증거하고 기록한 것을 ''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는 '진리'라는 말씀과 서로 통하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이 ''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진짜냐, 가짜냐를 판별할 때 이 말을 쓰기도 하고, 또한 사실이냐, 아니냐를 말할 때 이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24절이 이 일들을 증거하고 기록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라 이해를 합니다.

 

물론 그런 뜻도 있겠지만, 여기서 ''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사실이라 하는 것과는 조금 더 다른 뜻이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19:35절의 ''은 사실 증거의 관점이 훨씬 크게 나타납니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직접 본 것을 증거하니 그 증거가 사실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은 본 대로, 들은 대로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로 한정지어 볼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내에서 이러한 사실 증거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31-37절입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세례 요한이 증거하는 것은 사람의 증거요 예수님이 하시는 역사로 증거하는 것 보다는 못합니다. 즉 세례 요한이 본 대로, 들은 대로 증거해도 그 증거는 ''과 거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아무 때에도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아무 때에도 아버지의 형용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은혜와 진리'를 모세의 율법과 대비시키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17절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모세도 세례 요한도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과 형용을 하나님 품 속에 독생하신 아들보다 온전히 듣거나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28-35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웠더라"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도 바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영광과 모세의 증거에 함께 똑같이 참여하지를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의 영광에 온전히 함께 할 수가 없어서, 그들은 대제사장이 나아가는 자리와 제사장이 나아가는 자리, 이스라엘 백성이 나아가는 자리가 나뉘어 있었고, 함께 그 영광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세로 말미암은 구약의 증거는 하나님 아버지로서 아들 안에 나타내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새로 나는 것, 위로부터 나는 것, 거듭남을 말했던 것입니다. 3:10-12절에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예수님께서 아는 것과 본 것을 사실대로 증거하여도 니고데모는 믿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3:31-34절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며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이처럼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은 위로부터 난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이 참입니다. 모세가 증거한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되시다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그 안에서 증거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15:26-2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성령이 오시면 그가 주님을 증거하실 것이요, 제자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증거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성령이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신데 제자들도 이 진리의 영의 증거에 함께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예수의 하신 일, 그가 하신 역사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6:7-8절입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 일로 말미암아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증거하신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20:21-23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주님과 같은 일로 세상에 보냄을 받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고 아버지의 하신 일을 독생자로 증거하셨던 것과 같이 제자들도 이 일에 참여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증거하는 것은 주님과 같은 영광의 일입니다. 17:22절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모세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지 못하고 그 얼굴에 수건을 가리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의 권세를 끝내심으로 우리는 모세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자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17:20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이제 교회는 제자들의 증거를 따라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합니다.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아버지의 영광에 아무런 간격이나 가리움이 없이 우리가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배역하며 흩어지는 제자들을 위하여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증거자로 ''된 삶이요, 위로부터 난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움없이 세상에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참 삶'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의 행한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21:25

2003-05-28 15:08:00

 

 

요한복음을 오늘 마지막으로 설교합니다. 2년간 요한복음 강론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을 더욱 잘 알게 되었습니다. 거의 끝부분에 와서 이제 돌이켜 보니까 처음 부분 강해했던 것들을 많이 교정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여러분 앞에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그만큼 성장시키신 것이 아닌가 하는 감사도 한편으로 매우 큽니다. 이 요한복음 21장만 보더라도 이제까지 단순하게 보아왔던 관점을 많이 바꾸게 하였던 게 사실입니다. 그저 부록이나 후기 정도로 알고 있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 21장은 요한복음에 없어서는 안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고, 부록이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총결론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인 25절도 그냥 복음서를 마치면서 저자가 심심풀이로 붙여둔 것으로 보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혹자는 요한복음 저자 외에 다른 편집자가 자신의 말을 여기 덧붙인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구절을 자세히 살피면 전혀 그런 주장이 맞지 아니함을 아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구절이라는 뜻입니다.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에 저작 당시의 과장법이 쓰여졌다고 말을 합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문학표현 방식의 하나라고 합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너무 많다는 것을 과장법을 통해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찬송가 404장에 있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는 가사와 같은 방식의 표현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 랍비가 쓴 글을 소개하는데 우리 찬송가 가사와 매우 흡사합니다. '만일 모든 하늘이 종이가 되고, 모든 나무가 펜이 되고, 모든 바다가 잉크가 된다 하더라도 내 스승들에게서 배운 지혜를 다 기록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그럼 본문 구절이 단순하게 과장법으로만 되어 있는지 알아 보십시다. 우선 이 구절과 유사한 20:30-31절과 비교를 해 봅시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믿게 하려고, 그리고 생명을 얻게 하려고 ..."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는데 오직 이것들만 기록해서 믿게 하고 생명을 얻게 하려 했다는 말입니다. '표적'이란 말은 이적과는 다릅니다. 즉 무엇인가 알게 하고 보여 주려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많은 것들 중에 어떠한 목적을 위해 선택을 해서 기록을 했다는 점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많은 다른 표적들 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목적에 가장 잘 맞는 표적들을 뽑아서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기록되지 아니한 많은 다른 표적들은 이 책에 기록된 표적들과 무엇을 알리고 보이는 목적에 있어서 서로 다를 수가 있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즉 기록된 표적들과 기록되지 아니한 표적들은 다르다는 점에 강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표적'이란 말 자체가 같은 것이 여러 번 반복된다는 의미가 없다는 점을 우리가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21:25절은 이와 다릅니다.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는데 오직 이것을 기록했다는 말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다 기록하면 세상이라도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는 말은 표현방식은 비슷하지만 그 중심적인 뜻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를테면 오늘 본문 구절은 아주 많다는 점을 더 강조하고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표적'이라는 말 대신에 '예수의 행하신 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점도 다릅니다. ''이라고 하는 말은 '표적'이라는 말과 달리 비슷한 것이 여러 번 반복될 수 있다는 의미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낱낱이 기록하면 매우 많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 일이 제각각 뚜렷한 특징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많기는 하지만 굳이 다 일일이 기록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치 초등학교 졸업식 때 6년 개근상을 받는 어린이는 별로 많지 않지만 정근상을 받는 아이들은 매우 많은 경우가 있지요. 그럴 때 정근상을 받는 아이들의 이름을 전부 하나하나 다 부르지 않고 '아무개 외 몇 명'이라고 전체 상을 받는 아이들 수를 불러 주고는 그 상을 받는 대표자 한 아이만 나오게 해서 상을 줍니다. 즉 나머지는 '이하동문'이라는 말이죠. 이러한 경우는 같은 상이 아주 많을 때 하나하나 똑같이 다 내용을 반복해서 말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쓰는 말입니다. 시간도 많이 절약하고요.

 

오늘 본문의 뜻은 바로 그런 것을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의 행하신 일이 대표이기도 하면서 그와 같은 일이 수없이 반복되며 그 양이 아주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과장법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생명력 있게 끊임없이 계속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25절과 13:1절이 서로 요한복음 후반부에서 앞과 뒤를 맞추면서 매우 짜임새 있는 결말을 25절이 나타내고 있다고 봅니다. 그냥 뒤에 붙여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 '끝까지'라는 말을 '이외에도 많으니'라는 말과 서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고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로 가셔서 함께 계시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함께 성령으로 거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끝에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럼 '예수의 행하신 일'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가장 가깝게는 21장의 내용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 보아도 크게 무리하지는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1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의 목자장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그들을 먹이셨던 주님과 같이 제자들도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르거나,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처럼 오랫 동안 죽지 않고 주님을 따르거나 서로 방식은 다르지만 둘 다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즉 예수의 행하신 일이 많다는 말은 '끝까지' 계속해서 내 양을 먹이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다 기록을 할 수가 없는 것이 과장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현재도 한 사람의 회고록을 쓴다고 하면 그 책이 얼마나 두껍습니까!

 

이렇게 보는 견해는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지지를 받습니다. 요한복음 13:9-15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발을 씻기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것과 같은 일을 이제 제자들이 서로 발을 씻김으로 계속되고 낱낱이 기록하기에 너무 많은 씻김이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6:12-13절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께서 제자들과 세상에 함께 계셔서 지금 이를 것이 많다고 하여도 제자들이 감당을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즉 예수의 행하신 일,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다시 오심으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면 제자들은 모든 진리를 다 감당합니다. 제자들이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을 낱낱이 다 기록하면 세상이라도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1-3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목자를 치면 양들은 흩어질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면 모든 제자들은 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행하신 일, 즉 세상을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환난을 당해도 세상을 이기는 이김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이것을 낱낱이 다 기록하면 세상이라도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다에 오셔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153마리의 큰 고기를 잡게 하시고 그들에게 조반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서원하도록 해서 주님의 양을 먹이는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주님을 따르는 삶을 통해서 주님은 교회를 먹이십니다. 목자장으로서 제자들과 교회를 주님이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행하신 일이십니다. 이 일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서 만유보다 크신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도록, 하나의 양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님께서 지키고 함께 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죽고 없지만 교회 안에 목자를 세워서 주님의 양을 먹이는 일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고 이것을 다 기록하여 책으로 두기에는 세상이라도 부족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은 곳에 오셔서 평강을 주시고 주님과 같은 일을 하도록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시고, 믿음 없는 도마에게 친히 몸으로 증거하셔서 믿음을 주신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홀로 고아처럼 세상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먹이시고 기르십니다.

 

요한복음 14:11-21절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함이 우리 중에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기를.

 

 

 

 

요한복음 강해 (157/최종) - 너는 나를 따르라 /21:18-25/ 김형익 목사

2021-05-10 00:10:55

 

오늘 요한복음을 마치면서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명령은 베드로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를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에, 베드로에게 주님의 양을 먹이고 치라는 사명을 주셨고 이제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실제로 주님을 따라갔고, 지난 2000여 년 동안도 예수를 자기의 구주와 주로 고백하는 수많은 제자들이 그렇게 주님을 따랐습니다.

 

1. “나를 따르라는 것은 소수의 헌신된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다.

우리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대면하면서 피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교회의 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와 제자를 편의대로 분리시킨 일입니다. 헌신하지 않은 채 구원만 받는 신자와 헌신된 제자인 그리스도인의 구분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신약성경을 조금만 정직하게 읽어보아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존 맥아더의 말입니다. “매우 명백하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는 메시지는 결코 예수님이 전하신 메시지가 아니다. 복음은 그 어떤 도덕적 요구도 하지 않는 안일한 믿음주의(easy believism)로 대치되었다.” 안일한 믿음주의라고 말한 것은 오늘날 천박해진 복음주의에 가장 알맞은 말입니다.

 

믿기만 하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 그리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정말 이런 것입니까? 주님을 믿기만 하고 따르지는 않는 것이 가능합니까? 구원과 제자도를 나누는 것이 가능한가 말입니다. 사람이 삶의 방식과 가치체계,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여 복종하지 않은 채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회심은 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리스도를 구주로만 모시고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것은 가능합니까? 아무 영적 헌신도 뒤따르지 않는 회심, 성화 없는 칭의야말로 우리 시대의 교회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사실상 부끄럽게도 이런 거짓 신자들로 넘쳐납니다. A. W. 토저의 말입니다. “주님은 그분이 명령을 내리실 수 없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대면할 때 우리가 처해있고 수없이 익숙하게 들어왔던 이런 뿌리깊은 오해를 인식해야만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제대로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거듭나 회심을 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2. “나를 따르라는 것은 매력적이고 안락하고 편리한 삶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

먼저 주님께서 이 명령을 주실 때 의도하지 않으신 것을 짚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의 의미는 조엘 오스틴과 같은 거짓 교사들이나 적지 않은 이 시대의 교회 강단에서 약속하는 것과 같이,

 

나를 따라 오면 네 마음이 편안함을 느끼고 불행한 결혼생활이 행복해지고, 자식들이 변하고, 경제적 곤궁함을 벗어날 것이며 풍요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을 사는 우리는 다 예외 없이 편안함, 안락함, 풍요를 원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생각들과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적당히 섞어서 우리 마음에 일어날 수도 있는 모든 불안함, 불편함을 제거하려고 해왔다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나를 믿기만 하라는 명령으로 대치되어 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Kyle Idleman은 자신이 설교와 가르침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가능한 한 매력적이고 안락하고 편리한 것으로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팬인가, 제자인가> Not a Fan을 썼습니다. 그는 여기서 아주 명료한 구분을 이렇게 합니다. “팬은 와서 환호하라는 메시지를 듣고, 제자는 와서 죽으라는 명령을 듣는다.” 18절 말씀을 어떻게 읽어도 우리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매력적이거나 안락한 삶을 약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죽을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 두 가지 그리스도 따름

여기서 하나 구분하고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크게 두 차례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두번째 경우가 오늘 본문에 나와있다면, 처음의 경우는 베드로가 고기를 잡고 있는데 주님께서 그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을 때입니다(4:19). 처음의 부르심은 주님을 따름으로써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경험하고 배우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렇게 주님을 따름으로서 주님 자신을 알고 배우고 경험한 바, 이제는 주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신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부르심의 명령 모두 전적인 따름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지 않고서는 주님을 배우고 알 수 없습니다. 평생을 멀찌감치서 주님을 따르며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그 사람의 영혼에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주님을 배우고 알게 되고 마침내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짐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첫번째 부르심에 순종해야, 비로서 우리는 나를 따르라는 두번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전혀 따르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교회를 다니면서 소위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실로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 자리에 계시다면 속히 거기서 나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4. 그리스도를 따름의 전제는 거듭남과 회심이다.

이 차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첫번째 따름으로 주님을 진정으로 배우고 알게 될 때 일어나는 것이 회심입니다. 회심이란 회개와 믿음을 합한 신학적 용어입니다. 회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형편없는 죄인인지를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보이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기 의와 자아를 처음으로 깨뜨리십니다. 그러나 회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만을 믿고 살아온 그는 이제 자기 신뢰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자신의 전적인 신뢰를 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과 복음은 그 인생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로이드존스가 말한대로,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설명이 가능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실, 복음이 내게 큰 의미가 없는데, 주님을 따르라는 식의 이런 이야기는 어불성설이 아닙니까?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복음이 내 가슴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열정을 불러일으킨 것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찌 주님을 따를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다 대고 주님을 따르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 복음 앞에서 일평생 붙잡고 살아가던 자아가 산산조각난 사람들, 그래서 오직 주님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이 명령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로 이 시점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건으로 인하여 자아가 산산조각난 후에, 그를 회복시키시고 이제 나를 따르라는 이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전제는 거듭남과 회심입니다.

 

왜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다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좀 더 설명드리겠습니다. 지난 주에도 우리가 상고했듯이, 육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결코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일향 자아를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불경건한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를 높이 쌓아가게 됩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베드로가 자기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신, 그런 마음을 주님께서 아신다고 대답했던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내려놓고 주님의 아심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은 베드로의 장래에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한 일종의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리고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를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장래에 대한 어떤 기대치나 확실한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베드로의 장래를 아시는 주님의 지식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절은 주님의 이 말씀이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말씀하심이며 이 베드로의 죽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이 될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마음에는 아직도 얼마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트라우마가 지워지지 않았는데, 주님께서는 너도 나처럼 십자가 죽음을 죽을거야. 그러니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가 따를 수 있겠습니까? 거듭남과 회심으로 씻을 수 없는 자기 죄악이 용서받은 것을 경험한 사람, 그 사랑이 부어지는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린 사람만이 주님의 명령대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용어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율성과 자치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최고의 권위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삶의 전 영역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다수와 다수의 견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단순한 원리에 동의하고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데이빗 플랫이 그의 책 <래디칼>에서 소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즉 그리스도의 주권에 삶의 전 영역을 복종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해보고 괜찮다고 생각해서 믿고 안 믿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은 것은 무엇이든지 순종하기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일 이렇게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한다면, 이것은 온갖 희생과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피할 수 없게 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의 삶은 위험을 무릅쓴 삶이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은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우리는 그것이 어느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행하실 것임을 알고, 우리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결과는 주님의 몫입니다.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믿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대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합니다(11:6).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금신상을 섬기라는 느부갓네살 대왕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는 풀무불 속에 던져져 죽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17~18).” 바라는 결과는 있지만 그것도 주님의 몫입니다. 그들이 할 것은 드러난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였던 에스더를 보십시오. 그는 민족의 멸절의 위기 속에서 왕 앞에 나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물론 그녀는 왕이 홀을 내밀어 살기를 원하고 자기 민족을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주님의 몫입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4:16).” 이것이 위험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랬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하셔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것인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가 다 아는 길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알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실 것을 알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바울 사도처럼 아는 것은 환난과 결박 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뭔가를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주님은 베드로의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죽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모르지만, 주님은 아십니다. 이 주님의 지식을 의존하고 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를 기다리는 것은 이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주저 없이 그 길을 걸어갔고 결국은 네로 황제 치하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는 것이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약속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외로움, 조롱당함, 거부당함, 고난 입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의 삶의 최우선순위는 언제나 그리스도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

저는 오늘 여러분이 살아오신 삶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신 일이 있는가 물으려고 합니다. 그냥 걸어보는 모험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복음과 믿음 때문에 위험을 무릅써 보셨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믿음을 입증해 보신 적이 있는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끝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이 될 것입니다. 삶을 통해서 믿음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사람이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법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하면 요한복음이 쓰여진 시점은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를 한 후였습니다. 19절 말씀은 이미 베드로의 순교의 죽음을 알고 있는 신자들에게 쓰여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 이것보다 더 신자의 삶에 영광스러운 순간은 없습니다. 다 죽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계산한 시간에 오지 않습니다. 보장도 없는 언젠가를 되뇌는 대신에, 지금 살아있는 순간에 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인생 미련에 한과 서러움과 답답함을 안고 죽어가는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죽음을 여러분의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얻기를 정말 바란다면, 지금 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인생의 시간에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의 죽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이 될 것입니다.

 

7.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조심할 것

주님의 말씀을 듣던 베드로는 뒤에서 주님을 좇아오는 제자, 요한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입니다. 그리고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주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할 일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어떤 의도로 이렇게 말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님이 가르쳐주신 교훈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획일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순교가 아닌 죽음으로 에베소에서 죽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순교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요한과 같은 사도를 볼 때 어떨까요? 베드로는 순교하게 하셨지만, 요한은 오래도록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어떤 차이도 없이 둘 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제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일찍 순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오래 살게 두사 그로 하여금 요한계시록도 쓰게 하셨습니다. 사명이 다르고, 그 내용이 다를 뿐입니다. 이 두 사람은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8. “너는 나를 따르라.”

여러분, 믿는 사람만이 따르고 따르는 사람만이 믿습니다. 독일의 신학자이며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명저 <나를 따르라>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부르실 때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주와 복음을 인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순종을 해왔습니까? 레오나드 레이븐힐 목사는 이렇게 도전합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영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차 그날이 이르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이라도 영적으로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실 때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저는 이 말에 덧붙이고 싶습니다. 죽음을 지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때, 부끄러워 하지 않는 죽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을 죽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21:15-25/ 옥한흠목사

2014-11-11 19:55:19

 

건강한 모습으로 여러분이 예배에 나오셔서 우리 하나님 앞에 찬양과 경배 드리는 모습을 보는 저의 행복을 여러분이 상상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심으로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승리할 수 있는 삶을 소망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어느 수필 작가가 한국인의 포장 감각에 대해서 쓴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가방 사고를 하는데 한국 사람은 보자기 사고를 한다는 말을 그가 하고 있습니다.

 

보자기와 가방이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인데요, 보자기가 가방에 비해서 크고 작고, 희고 검고를 막론하고 두루 감싸듯이 한국인은 본심을 포장해 가지고 희비애로를 남에게 감지할 수 없도록 하는 경향이 크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감정 노출을 잘 안 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보자기처럼 두루두루 싸 가지고 남이 잘 보지 않도록 하는데 익숙하다는 말입니다. 부부 사이나 부모 자식간에 감정의 표현이 매우 인색한 것은 이런 문화적이고, 민족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을 퍽 쑥스러워 하고 심지어는 함부로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 좀 경솔한 사람처럼 우리가 생각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입에 담지 않는 것이다 하는 이상한 주장도 하는 사람을 제가 보았습니다. 아마 이런 것을 일컬어서 포장 감각이니, 보자기 사고니 하는 재미있는 표현으로 설명을 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희비애로를 남에게 잘 나타나지 아니하는 심리를 가진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읽으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이나 베드로를 향해서 물으시는 주님의 그 태도가 퍽 자연스럽지 못하다 하는 느낌을 받으실 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베드로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대답을 해야 되는 궁색한 처지에 몰린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질문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대답을 듣는 자리에 일어나는 놀라운 이적들을 아시나요?

 

사랑의 고백 한 마디로 병석에서 툴툴 털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서 다시 새 출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요. 눈물로 지새던 사람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오는 아름다운 모습을 여러분이 기억합니까?

 

이만큼 사랑은 대단한 것입니다. 세상살이에만 사랑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고백이 오고 가는 그 자리에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납니다.

 

내 마음을 열고 '주님 사랑합니다' 내 입으로 '주님 사랑합니다' 내가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세상적으로 아무리 높고 대단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도 우리의 창조자 되신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사랑합니다' 이 말 한마디 하는 곳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 우리는 다 말을 할 수 없어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성령의 인도와 성령의 감동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침 햇살에 따스하게 비치는 해변가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 나오지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아가파스 메'하는 헬라어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질문을 하셨는데, 여기서 '이 사람들보다'하는 말이 있지요? 이것을 '이것들보다' 하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번역해도 옳은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이 사람들보다' 하는 말로 번역하면 누구를 가리키는가?

 

아마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이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지금 아침 식사를 마친 6명의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너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말로 질문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만약에 '이것들 보다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말로 해석한다면 도대체 이것들이 뭘까?

 

아마 갈릴리 바닷가에 매어 놓은 고깃배, 그 다음에 아침에 잡은 신선한 고기들, 아니면 사람들이 마음을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주변에 있는 것들을 가리키면서 '너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마 그렇게 질문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인지 물건인지 우리는 어느 것이 주님이 의도하신 진짜 내용인지는 우리가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베드로야, 너 정말 날 사랑하니?'하는 것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물으시는 질문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자마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그러하외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

 

이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조금 숨을 돌리고 나서 주님이 똑같이 질문하시는 거예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역시 대답했습니다. '주님 아십니다. 내가 주님 사랑하는 줄.' 베드로가 마음을 놓고 이제는 예수님의 질문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또 한번 주님이 물으시는 거예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때는 '아가파스 메'가 아니고 '필레이스 메' 단어를 바꾸었어요. 우리말로는 다 사랑한다는 말로 번역합니다만 원문에는 단어가 달라요. 베드로가 그 질문을 받자마자 이제 마음에 불안이 생기고 근심이 생겼어요.

 

'왜 이렇게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실까? 나를 못 믿어해서 그럴까? 아니면 내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내가 지금 건성으로 대답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인가?' 불안했어요. 그러나 그는 다시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님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내 양을 먹이라.'

 

어떤 성경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할 때 왜 '아가파스 메'하다가 '필레이스 메'하고 마지막에는 단어를 바꿀까? 왜 아가페의 사랑을 물으셨다가 나중에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물으실까?

 

이걸 가지고 굉장히 심오한 해석을 하는 것처럼 장황하게 설명을 합니다만 저는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요한복음을 우리가 전체적으로 볼 때에 사랑한다는 말을 사용하는 헬라어 용어는 아가파스라고 하는 단어나 필레이스라고 하는 단어나 서로 호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꼭 이 단어는 여기에만 쓴다, 저 단어는 저기에만 쓴다 그렇게 되 있지 않아요. 서로 뒤섞어 사용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상한 이야기하는 것은 좀 우습고요.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당시에 사용하던 말은 헬라어가 아니고 아람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람어에 그렇게 단어가 구별이 되는지 말하기도 어려워요.

 

그저 중요한 것은 '베드로야,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3번이나 이 어색한 질문을 하셨을까? 예수께서 왜 이렇게 3번이나 다잡아서 물으셨을까? 여기에 진리가 있어요. 오늘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 이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3가지 이유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를 영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며칠 전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마친 다음에 주님이 새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럴 때 베드로는 굉장히 우쭐했어요.

 

여러분 요한복음13장에 넘어가 보면 찾을 수 있습니다. 너무 우쭐했어요. '나는 형제도 사랑한다, 나는 내 이웃도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 그래 가지고 1337절에 보면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 말을 바꾸면 '주님, 나는 내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던져야 하는 위기를 만나자 그의 모든 것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고, 자기 혼자 살아 남기 위해서 얼굴을 싸고 줄행랑을 쳤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후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여러 날을 통곡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는 배신자였습니다. 실패자였습니다.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어요. 더욱이 그는 지금 영과 육이 지칠 대로 지쳐 있는데 자기가 부인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지금 자기 앞에 와 계시지 않아요?

 

그리고 아직도 못 박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손으로 '배고픈데 먹어라.' 고기를 구워 '이것도 먹어라.'하시면서 자기들을 위해 섬기고 있는 주님이 지금 눈앞에 계시지 않아요?

 

차라리 예수님이 자기를 보고 '이 못난 놈 같으니'하고 호통을 치면서 망신을 주든지 꾸중을 했다면 오히려 속이 후련하겠는데, 전혀 자기 과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시지 아니하고, '배고픈데 먹어라. 추운데 불 옆에 오라.' 이러면서 자기를 위해 주니 우리말로 말하면 환장할 노릇이에요.

 

베드로가 어디 제대로 먹기나 했겠어요? 그는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고개를 떨군 채 조금씩 사그러들고 있는 숯불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 뻔합니다. 그 숯불은 자기가 예수를 부인하던 자리에서 활활 타고 있었던 장작불을 상기하기에 아주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그쳐 묻는 예수님의 질문은 마치 자기가 세 번이나 황급하게 나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것을, 그 악몽 같은 순간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너무나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그가 그 질문을 받고 대답하면서 얼마나 속으로 울었겠습니까?

 

분명히 베드로는 병자였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믿음도 자신감도 긍지도 용기도 다 구멍 나 버렸습니다.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요. 예수님이 이와 같이 처절하게 병들고, 처절하게 지쳐 있는 그를 향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또 하필이면 왜 '베드로야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묻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까? 시몬이라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옛 이름입니다. 왜 옛 이름을 들먹이면서 사랑하느냐고 물으실까?

 

아마 제 생각에는 주님의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베드로야, 너 나를 모른다고 3번 부인했지 않니?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나를 모른다고 부인한 그 자아는 베드로가 아니고 너의 자아였을 꺼야. 자신만만하고 사랑한다고 소리치던 너의 옛 자아가 나를 부인한 거야.' 하는 것을 아마 깨우쳐 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3번이나 반복하신 이유, 그것은 베드로의 과거를 추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전하는 질문이었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묻는 사람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남보고 사랑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철면피예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요. 베드로를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베드로야, 너 날 사랑하니?'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질문 안에는 나는 너무나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3 번 받으면서 예수님의 강한 사랑에 그 심령이 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속에 남아 있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불씨가 나무 타는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고 있는 것을 그는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는 예수님이 자기를 가장 필요로 하실 때 냉정하게 버렸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사랑에 터치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어색하지만 부끄럽지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3번하면서 베드로는 치유 받고 있었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입었던 깊은 상처로부터 그는 아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치유합니다.

 

사랑은 잘못된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이 순간 베드로가 얼마나 완전하게 치유를 받았는지 여러분, 베드로의 남은 인생을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전후서를 보십시오. 또한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다시 자기 과거를 가지고 씨름하고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는 모든 과거의 실패와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씻음 받고 거기에서 자유함을 받은 사람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치유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마음이 그를 일으켰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 중에 오늘 이 시간 치유 받아야 할 형제 자매들이 많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베드로처럼 세상에 나가서 예수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세상을 살아 보려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이 자리에 나와 있는 형제 자매들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에 두고 죄와 타협하면서 한번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하다가 남는 것 하나 없이 빈 손 들고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아니면 베드로처럼 남이 모르는 죄를 범하고 마음에 죄책감과 고통을 안고 너무나 아픈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앉아 있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찬송을 불러도 마음이 시원치 않아요. 말씀을 보아도 그 말씀이 마음에 닿지를 않아요. 생각은 온통 사방으로 흩어져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어요.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 아마 마음은 더 텅텅 빌 지 몰라요. 이런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요.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압니까, 여러분? 사랑이요. 지금까지 헛된 사랑을 추구하면서 헛된 것에 미쳐서 내 젊음 바치고, 헛된 것에 쫓겨서 정신없이 살다가 입은 상처, 세상 사랑 가지고는 치유 못해요.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그 사랑만이 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이 치유 받아야 될 형제 자매들 이 자리에 많은 줄 알아요.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기를 원합니다.

 

들으면 내가 깨어납니다. 그 말속에는 뭐가 있어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하는 주님의 음성이 담겨 있어요. 그 사랑에 터치되는 심령마다 어떤 상처를 입었던지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 씨름하던지 어떤 실패를 맛보았던지 어떤 나락에 떨어져서 고통을 하던지 간에 상관없어요. 그 능력 있는 주님의 사랑이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므로 우리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베드로처럼 들읍시다.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백합시다. '주님, 나 사랑합니다. 주님, 부끄럽지만 주님 사랑합니다.'하고 고백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면 그 고백하는 순간마다 우리의 상처가 나음을 입고 아물어지는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사람 있지요? 헨리 나우웬이라고 하는 분, 제가 참 존경하는 분인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나의 은총이 네게 있으라고 말하는 작고 세미한 소리가 있습니다.

 

이 소리야말로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음성입니다. 그러나 이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고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듣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뭔지 압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고독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침묵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듣고자 하는 몸부림입니다. 그럴 때 나는 너를 사랑해 하는 주의 음성이 들립니다.' 여기에 더 하나 제가 붙입니다. 동시에 기도는 뭡니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는 나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할 때에 우리는 치유 받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마음에 짐이 무겁지요. 답답하지요. 고통스럽지요. 베드로와 똑같습니다. 그럴 때 주님 바라보고 '주님, 그래도 난 주님 사랑해요.'하고 여러분이 말을 하십시오.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능력이 우리를 치유하시는 줄을 우리는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왜 예수님께서 3번에나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요구했을까? 베드로의 사도직을 회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온 세상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이렇게 놀라운 명령과 함께 부름 받은 것이 사도직인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주님이 '내 양을 치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는 사도직의 또 다른 한 면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한평생 두 가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이요, 사람을 낚는 일이요, 전도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주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돌보고 먹이고 인도해야 되는 사역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사역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순간, 이 영광스러운 사도직에서 그는 탈락되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시다.' 하고 3번 고백하면서 그가 치유 받자마자 그 영광스러운 사도직에 그는 다시 복귀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맡기는 교회를 일컬어서 내 양이라고 말합니다. 내 어린양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양이 누굽니까?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양이 누굽니까? 우리 모두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양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양입니다. 할렐루야!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입니다. 장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재림하실 만유의 주되신 그분의 어린양들입니다. 할렐루야! 이 양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맡겼습니다.

 

양 떼를 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가 양 떼를 치는 일이 아닌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을 보면 야곱이 양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놓고 이렇게 말하잖아요.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면서 눈 붙일 겨를도 없이 20년을 보냈다고 하지 않아요. 그야 말로 완전히 양들하고 같이 뒹굴면서 사는 생활이니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다윗이 뭐라고 그랬어요? 어릴 때 양치면서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사자나 곰이 와 가지고 양을 훔쳐 가면 자기 생명 내놓고 뒤따라가서 사자와 싸우고, 곰과 싸우면서 양을 그 입에서 건져내었다고 그랬지요. 양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요?

 

주님의 양인 교회를 목회 하는 것, 즉 목자로서 교회를 돌보고 먹이고 또 교회를 인도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라고 말합니다. 목회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목회는 밤낮이 없어요. 24시간 불침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목사 되겠다는 분들이 많이 나오는 것,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시는 은혜가 있어서 그런 지는 모르지만 목사직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겉으로 보면 굉장히 화려해 보일 수도 있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양을 치다가 보면 양은 별의별 놈이 다 있잖아요? 이제 갓 태어나 가지고 걷지도 못하는 놈이 없나? 다리 부러진 놈이 없나? 짐승에게 끌려 가다가 살아 남은 병신 된 놈이 없나?

 

여러분, 어떤 놈은 잘 먹지 않고 어떤 놈은 천방지축 아무 데나 들어가는 못된 버릇이 없나?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다 끌어안고 보호하고 먹어야 되니, 목자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런데 교회 안에도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요. 그것 다 이야기하자면 한이 없지요. 사랑스러운 사람도 있고, 너무 너무 골치 아픈 사람도 있고, 보기만 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너무너무 애를 먹이는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에는 은혜 받는 것 같은데 나가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되는 그런 사람도 있고요. 하여튼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별의별 사람이 누굽니까? 그 별의별 사람이 누구냐? 주님의 양입니다. 할렐루야!

또 여러분 교회에 보세요.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는 은혜 받고 다 좋아합니다

 

, 마귀는 이 바깥에서 연대를 동원해 가지고 대기하고 있어요. 하여튼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끌어내 가지고 자기편을 만들고, 아니면 유혹을 해 가지고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으려고 벼르고 있어요. 목사도 끌어내리고 장로도 끌어내리고 순장도 끌어내리고, 심지어 순진한 어린아이까지라도 믿음에서 떠나서 세상에서 마귀 짓을 할 수 있도록 하려고 갖가지 유혹을 합니다.

 

덫을 쳐 놨어요. 함정을 파 놨어요. 그러니 목회가 뭡니까? 그와 같은 마귀의 궤계를 꿰뚫어 보고 양 떼들을 돌보고 마귀에게 끌려가는 자를 다시 구원해야 되고 유혹에 빠진 자를 치유해야 되는 게 목회 아닙니까?

 

얼마나 힘들어요? 98년도 미국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목회자 중에 90%가 목사 일은 참 보람있지만 너무너무 스트레스 받는다고 고백을 한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사실이에요. 그래서 목회자들에게는 1년에 한두 번은 꼭 쉬는 기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요.

 

그리고 이 한국 목회는 또 이상해요. 세계 다 다녀 보지는 않았지만, 세상에 한국 사람, 한국 목사들만큼 극성맞은 목사가 없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제일 독한 독종 공산주의자가 되고,

 

예수를 믿으니까 또 제일 독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목회를 하니 제일 독한 목회를 해요. 제가 독하다는 말을 해 미안하지만. 새벽3, 4시부터 일어나 가지고 새벽 기도 한다고 야단치지 않나, 일주일에 철야를 몇 번 하지 않나, 웬만하면 산에 올라가서 풀뿌리를 잡고 씨름을 하지 않나,

 

모이면 주여 삼창을 부르면서 야단법석을 떨지 않나. 하여튼 극성이에요. 그러니까 그 열심히 많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펄펄 뛰는 양들을 끌어 나가자니, 목사가 어떻게 살아 남겠어요? 한번 생각을 해봐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양들을 맡기려고 할 때에 조심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아무나 맡길 수 있어요? 안되죠. 그러니까 조건을 딱 하나 걸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 양을 맡깁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힘들기 때문에. 주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주인의 양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으면 그 양을 자기는 삯꾼처럼 먹일 거예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 양을 맡깁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니까 자기 양을 먹이라고 하지 않아요?

 

여러분, 교역자만 양을 돌보는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목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어린 생명들을 돌보는 주일 학교 교사들, 이웃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말씀과 기도로 섬기는 순장들,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항상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전도인들,

 

그리고 어려운 인생의 문제를 안고 잠을 자지 못하며 씨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치유하려고 하는 상담자들,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메말라 있는 자들에게 이런 저런 모습으로 그들의 상한 심령에 주님의 사랑을 담아 주려고 하는 봉사자들, 이런 모든 사람이 작은 목자들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이들이 하는 일이. ? 그들에게 주님이 자기 양을 맡겼으니까요. 할렐루야!

 

여러분, 주변을 보세요. 우리가 조금만 신경 쓰면 행복할 수 있는 사람, 조금만 손을 내밀면 인생의 새로운 단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다 목자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양들입니다.

 

여러분, 이런 양들을 돌보는 아름다운 목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이 아름다운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기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왜 주님께서 세 번이나 연거푸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가 하면, 베드로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사랑은 진정한 헌신을 가능하게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하고 3번이나 고백하니까 주님께서는 대단히 엄숙하고 진지한 예언을 하십니다.

 

베드로의 장래를 놓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18절 우리 같이 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것은 베드로의 죽음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19절에 말씀하고 있지요?

 

베드로는 젊었을 때에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던진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랑으로 치유 받은 다음, 그는 남은 몇 십 년 동안 젊었을 때에 주의 복음과 주의 양들을 위하여, 주의 교회를 위하여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헌신했습니다.

 

젊은 사람이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자신감이요, 비전이요, 청지기적 정신입니다. '하늘에 닿을 수 있는 탑을 쌓겠다'고 하는 위대한 꿈을 가지고 뛰는 것이 젊은 시절입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꿈과 긍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뛰어야 합니다.

 

비록 그 꿈이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문제가 안돼요. 젊었을 때는 뛰어야 합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뛰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늙을 때가 옵니다. 인생의 겨울이 옵니다. 인생의 겨울이 오면 질병이라든지 또는 점점 없어지는 힘의 한계성이라든지 또 기회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라든지 원치도 않는 무거운 짐들을 져야 되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주님이 뭐라고 그래요? '베드로야, 네가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와서 네 팔을 벌릴 거야.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거야.' 이것은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순교할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순교하게 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설에 전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3번이나 부인한 죄인입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못 박혀 죽습니까?

 

나를 거꾸로 매달아 주십시오.' 그래서 그는 흰 백발을 휘날리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그가 원하는 죽음은 아니었어요.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그 잔인하고 끔찍한 십자가를 그는 원한 것은 아닙니다.

 

이게 인간 본성이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간다고 그랬지요.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만 그는 그 십자가를 지기를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십자가를 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울부짖고 기도했던 겟세마네 동산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약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야, 너는 네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끌려가서 네 팔을 벌리리라.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죽음을 죽으리라.'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대로 그의 말년에 십자가를 지고 죽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지만,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라면 십자가도 그는 마다하지 아니하고 지고 걸어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젊음, 늙음을 어떻게 보내고 싶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힘으로 주님의 사랑의 힘으로 베드로처럼 젊을 때를 보내고, 늙을 때를 마무리하는 아름다운 은혜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젊었을 때 주님의 양들을 돌아보는 일에 쓰임 받기를 바라며, 늙었을 때에도 비록 쓸모가 없는 몸이 될지는 모르지만 내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그런 멋진 삶을 우리가 살기를 원한다면, 예수님 사랑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성령이 임하여 계십니다. ', 성령이시여, 이 시간 상처 입은 자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을 향하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한번 고백해서 안되면 두 번 고백하게 하시고, 두 번 고백해서 안되면 서번 고백하게 하시고,

 

내 상처가 아물 때까지 내가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때까지 주여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 사랑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성령이여, 이 시간 임하여서 우리의 젊음을 주님의 교회와 양들을 돌보는데 쓰임 받는 멋지고 영광스러운 젊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이 시간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의 늙음도 우리의 죽음도 주의 영광을 높이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주님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여러분 이와 같은 기도가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주님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마무리를 합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마무리를 하고 마지막 붓을 놓으면서 아주 재미있는 말을 한마디했어요. 25절 넘어갑니다.

 

여러분 같이 읽고 끝내겠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여러분 믿으세요? 좀 허풍 떠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이 말씀 안에는 굉장히 심오한 진리와 은혜가 담겨 있는데, 제가 무슨 설명을 하는 것보다도 유명한 또 위대한 성경 학자인 윌리엄 버클리가 아름답게 그 내용을 서술한 것이 있어서 그대로 소개합니다.

 

한번 잘 들어보세요. '사도 요한은 붓을 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을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단지 그에 대한 단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경이로운 일들이 아무리 놀라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앞으로 체험하게 될 것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카테고리들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기에는 무력합니다. 인간의 책들은 그리스도를 담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아릴 수 없는 승리, 다함이 없는 능력, 그리고 제한 없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지고 자기의 복음서를 끝맺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환상적인 말입니까? 예수 안에는 끝이 없습니다. 무한합니다. 얼마나 그 은혜가 풍성한 지요. 그것을 요한이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주님 사랑합시다. 사랑하면서 승리합시다.

 

 

 

은혜는 누구를 통하여 흐르는가? /21:1-25/ 유기성목사

2023-05-13 00:01:48

 

선한목자교회에서의 저의 목회와 삶을 돌아보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면 은혜는 목사님만 다 받으셨나봐요! 전 은혜가 뭔지 모를 삶을 살았어요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저만 받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도 못하겠고 은혜의 통로가 되지도 못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인 요 21장에 보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은혜의 통로가 되는 사람의 조건이 너무나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신을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첫째는 은혜는 실패자를 통하여 흐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였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고기잡는 어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부로 돌아가서도 밤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교회와 성도들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엄청난 사명을 실패자였던 베드로에게 맡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베드로가 실패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이 많으셔서 실패자도 쓰신 것이 아닙니다. 실패자만 쓰십니다. 그런 사람만이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얼마 전만 해도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죽을지언정 주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쓰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자임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의 열등감으로 괴로와 할 때, 고전 1:27-29을 묵상하였었습니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붙잡고 3일을 고민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해하고 믿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 선택만 있을 뿐임을 알았습니다. 삼일째 되는 날 성경책을 끌어안고 주님, 믿겠습니다고백하고는 통곡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이 엄청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일어났습니다.

 

목회를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께서 제 실패를 통해서 역사하셨구나!’ 깨달아졌습니다.

그러니 은혜인 것입니다.

 

두번째는 은혜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통하여 흐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시고, “주를 사랑합니다할 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을 치유해 주시기 위한 일이기도 하였지만 베드로에게 양 떼인 성도를 맡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우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랑만 하는 자입니다.

베드로가 누구를 배은망덕하다, 배신자라고 라고 정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어떤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쓴 성경을 읽어 보면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는 정말 용서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사랑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사랑만 하라

그러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중에 가장 어려운 십자가가 사람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무슨 힘으로 사람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저도 사역이 힘들고 사람 때문에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마다 주님은 장로님을 사랑하라, 부교역자를 사랑하라, 교인들을 사랑하라, 아내를 사랑하라, 딸들을 사랑하라, 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습니다. 그러면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습니다에서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속죄주로 믿지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어떤 사람과 친해진 뒤에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과 친해지려면 그 사람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자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귀히 여기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을 계속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예수동행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면서 율법주의자 성향인 제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정말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세째로 은혜는 마음대로 살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그를 통하여 흐릅니다.

저는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 행복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하여도, 환경에 대하여도 짜증내고 화내고 조급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무엇 보다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저를 쓰시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젊어서는 꿈도 계획도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8“...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꼭 늙어서만 아닙니다. 인생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을 받아들이느나, 거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옆에 있는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약간은 화가난 듯 반응하셨습니다.

:22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사실 요한도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신 것입니다.

요한은 원래 성품이 불같은 사람으로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혈기와 야망, 계획을 다 버려야 했고 그래서 기도의 사람,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살지 못함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마음대로 살지 못해서 문제가 아니라,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에 문제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대로 안된다 탄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대로 안되기로 따지면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 같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베드로나 사도 바울은 마음대로 살았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제 삶을 돌아보니 정말 마음대로 살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목사가 되는 것도 그랬습니다. 은퇴하는 것도 제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이끄셨고 저는 순종할 뿐입니다.

은퇴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은퇴 이후는 더 제 마음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에는 그것이 안타깝고 힘들고 화가 나고 어떻게 해서든 제 뜻대로 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가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중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1966-76년에 있었던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에 의하여 혹독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중국 가정교회는 이미 공산당 하부조직이 된 삼자교회 가입을 강요받았고 거부하면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그 때 감욕에 가는 것이 두려워 삼자교회에 가입한 목사님들이 많았고 끝까지 삼자교회 가입을 거부한 목사님들은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의 결과가 생겼습니다. 삼자교회에 가입한 목사님들은 대부분 일찍 죽었고 감옥에 간 가정교회 목사님들은 장수한 것입니다.

 

문화대혁명 때 삼자교회 목사님들도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너무 고통이 심하여 자살한 목사도 생겼을 정도였습니다. 그 충격으로 대부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 중에 감옥에 있었던 목사님들은 혹독한 비판에서 오히려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고 비교적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건강해진 것입니다. 또한 문화대혁명 기간 감옥에 있었기에 당시 유럽과 미국에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경 중심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느껴지지도 흐르지도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좋고 싫은 것이 너무 많고 마음에 드는 사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남이 끌로 다니는 삶을 살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따라사는 삶의 방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고 주님이 보내주신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진작 내게 주어진 모든 환경이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이다 생각하고 오직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만 생각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마음대로 살려니 힘들지 마음대로 살지 않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강처럼 흘르지 못한다면 세가지를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자신이 정말 실패자임을 인정하고 매사에 주님만 의지하고 사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만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정말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오직 그것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찬양: 온 맘 다해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