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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21:15 - 17 절 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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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이 은혜를 만날 때 /21:15-19/ 김형익 목사

2023-11-17 08:24:18

 

베드로는 신약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수제자로 공식적 임명을 받지는 않았지만 많은 이들에게 그렇게 여겨졌고, 베드로전후서, 두 편의 신약 서신서를 남겼습니다. 동시에 그는 법정에 서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수치스러운 경력으로도 유명합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던 그 갈릴리 호숫가에서 다시 그를 제자로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그날 저녁 다락방에서 뵈었고(20:19-23), 8일 후에도 뵈었습니다(20:24-29). 모든 제자들이 다 그랬겠지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마음은 예수님을 뵈올 때 그리 편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처음 제자로 부르셨던 갈릴리(디베랴) 호숫가에서 새롭게 만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이나 던지시고는 그를 다시 제자로 부르십니다. 본문이 들려주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듣기를 원합니다.

 

1. 약함 (20:19-23, 24-29; 21:1-14; 26:33-35, 75; 14:72; 22:60; 삼하 11)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로 돌아와 오랜만에 예전에 하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밤새 수고했지만 아무 고기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해변에 선 한 사나이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면 잡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의 말대로 하여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고기를 잡았을 때, 요한은 그 사나이가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직감하고 주님이시다!”라고 외마디 말을 내지릅니다(21:7). 그들은 그렇게 다시 주님을 갈릴리 호숫가에서 만났습니다. 이 만남을 묘사하기 위해 많은 문학적 장치들이 사용되지만, 그것들을 다 설명하지 않고 본문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해변에 친히 마련해두신 식탁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계속해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거듭 부인한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심정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얼마 전 산헤드린 법정에 서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26:69-75; 14:66-72; 22:56-62; 18:15-18,25-27). 본문은 베드로의 이 실패 사건으로 시작해야 이해가 가능합니다. 네 복음서는 베드로의 실패 사건을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고만장한 베드로의 실패를 기록하기 위함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은혜의 작동 원리를 보여주시려는 것이 베드로의 실패를 네 복음서에 대서특필하신 성령님의 의도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그 저녁에 제자들이 주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시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까지 호언장담했습니다(26:33-35). 예수님이 잡히실 때, 베드로는 검을 뽑아 대제사장의 수하의 귀를 베는 호기까지 부리지만, 결국 주님의 말씀대로 그 밤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됩니다.

 

굳이 왜 이런 실패가 필요할까요? 이런 실패는 너무나 중요하고 우리 삶에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죄성의 깊이, 약함의 실존을 깨달아 알지 못하면, 은혜를 경험할 수 없고 주님을 섬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죄성의 깊이를 아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실패의 사건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 밤에 세 번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을 했습니다(26:75; 14:72; 22:60). 자신만만한 베드로가 이 실패의 순간에 얼마나 깊이 좌절했고 자신에게 비애를 느꼈을 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의 눈물은 베드로가 은혜를 받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눈물이었습니다. 좌절과 비애 그리고 실패는 하나님의 사람의 필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는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 자신의 약함을 보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구약의 위대한 인물 다윗의 처참한 실패를 성경이 자세히 기록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삼하 11). 다윗과 베드로의 실패 이야기는 우리의 약함이라는 실존을 보게 하는 장치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다윗의 비참한 실패를 통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그 실존을 깊고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2. 은혜 (21:15-16; 고후 12:8-10)

 

자신의 약함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조건입니다. 강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에게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은혜로 경험되지 않습니다.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은혜가 아니라 보상 만 있을 뿐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베드로식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그가 이미 은혜를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실패를 경험하기 전의 베드로라면, “바로 그겁니다! 주님, 저는 이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답니다.”라고 대답했겠지요. 그러나 실패를 통해 자신의 약함을 뼛속 깊이 알게 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21:15,16).” 베드로는 실패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약함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약함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약함은 부정적이며 부적절한 핸디캡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약함이 은혜의 필요 조건이며, 실패는 오점이 아닌 강점이라고 말합니다. 실패와 약함이 없는 곳에 은혜와 회복은 없습니다. 폴 워셔의 말입니다. “가장 성숙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세속과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에 맞서 고군분투할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도덕적 실패를 애통하지 않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애통은 회심의 한 증거입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실수와 실패를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은혜 안에서 자기 약함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은 놀랍습니다(고후 12:8-10). 그는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단정할 수 없지만, 그의 연약함과 관련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거절하셨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약함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약한 것들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 덕분에 약할 때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더 강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약함은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핸디캡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의 조건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 제목이 암시하는 바, 약함이 은혜를 만나는 순간입니다. 약함이 은혜를 만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약함을 기뻐할 수 있고 심지어 자랑하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약함은 은혜를 만나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자기 약함의 실존을 깨닫는 것이 가지는 부정적 이유도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자기 약함의 실존을 깨달을 때 그 안에서 자기 의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 의가 깨어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은혜가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약함은 핸디캡이 아니라 은혜를 만나게 되는 최적의 조건입니다.

 

3. 사랑 (13:36-37; 4:4; 벧전 1:8)

 

이제 오늘 본문을 살펴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 연거푸 물어보신 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왜 특별히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것을 다짐받으시고 새로운 각오를 다잡아 주실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시는 대신 왜 굳이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왜 중요한가, 얼마나 중요한가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본문 이해와 관련하여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신약성경이 쓰여진 헬라어에는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가 네 개가 있는데, 여기서 주님은 처음 두 번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ἀγαπάω)로 질문하셨고, 세번째는 친구의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φιλέω)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리아(φιλέω)로 대답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아가페를 100%의 사랑, 필리아를 60%의 사랑이라고 수치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실패를 통해 자신의 약함을 알게 된 베드로가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으므로 필리아로 두 번을 대답하자, 주님은 세번째로 필리아로 물으셨고 베드로도 필리아로 대답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가페와 필리아가 서로 혼용되는 개념이므로(요한복음 3:35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라고 할 때 아가페를 썼는데, 5:20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라고 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필리아를 사용함), 그 구분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 입장 또한 적지 않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해석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그것도 다른 제자들 앞에서 세 번 물으심으로써, 자기 의가 철저하게 무너진 베드로를 다른 제자들에게 입증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옆에서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면서, 그가 이전의 그가 아님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실패로 무너진 베드로를 공적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모든 성경 독자들 앞에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기 의가 깨어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서는 자신만만함이 사라졌고, 그는 자신의 죄성과 약함의 깊이를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전히 그리고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스스로 자신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 모두 대답합니다. 이전에는 주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대답했지만(13:36,37), 이제는 주님이 옳습니다. 주님이 저를 더 잘 아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기의 지식과 자신감이 아니라, 자기를 아시는 주님의 지식을 의존합니다.

 

, 이제 진짜 질문, 주님은 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특정한 기술이나 능력 또는 각오와 다짐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조건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 사랑이 따름과 섬김의 조건입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섬기는 길은 그저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결코 기쁨의 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의 고단한 여정 속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4:4).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성과만 만들어내면 되는 게 아니라, 주님은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네가 나를 따르는 길은 기쁨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조건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길의 끝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베드로전서 1:8).” 어떻게 초대 교회 성도들이 보지 못한 주님을 사랑하여 고난까지도 기쁘게 당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까?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1세기라는 고난과 박해의 시간에 주님의 신실한 길따름이들로 그 길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실패한 베드로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약함은 은혜의 필요 조건이고, 다시 이 은혜는 주님을 사랑하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첫번째 반응은 보지 못하는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을 위해 아무리 많은 활동을 해도 왕 자신에 대한 소홀함을 보상할 수는 없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위해서 하는 많은 일이 주님을 향한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성도들이 주님을 따르고 섬긴다고 하면서, 주님 자신을 소홀히 대하고 있는지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향해서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질문을 오늘도 던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4. 따름 (21:18-19; 1:29)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이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목양의 사명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셨는데(21:18), 이것은 21절이 설명하듯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3년 전 갈릴리 호숫가, 거의 그 자리에서 베드로를 부르셨던 그 부르심을 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21:19).”

 

왜 주님은 나를 따르라는 새로운 부르심을 주시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베드로가 배워야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육으로는, 육신의 방식으로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이지요. 자신만만함, 패기, 의욕, 각오와 의지로 주님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게 왜 안 됩니까?”라고 묻고 싶으십니까? “그렇게라도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훌륭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항변하고 싶으십니까?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말하자면 베드로가 결정적 실패를 경험하기 전의 모습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것의 결국은 자기 의를 높이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는 두 가지 중 하나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다른 무엇이 요구됩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이 고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로새서 1:29).”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를 의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 실력을 믿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걸어가는 길입니다. 날마다 은혜를 받지 않으면 그 사랑의 동력은 식고 맙니다.

 

그 은혜를 받는 길은 자신의 실패 속에서 약함의 실존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 수 없는 존재임을 진실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한 자는 설 수 없습니다. 아니, 자신이 강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설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없이 연약하고 작은 존재임을 알기에, 주님의 은혜가 날마다 필요해서 주님께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주님을 따라 이 길을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5. 교훈과 적용: 약함이 은혜를 만날 때

 

찬송가 중에 흑인영가의 번역인, [십자가를 질 수 있나?](461)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면, 누가 과연 제가 질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못 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요(16:24; 8:34; 9:23). 이 길을 피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 인생 중에서 우리가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옵션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 길은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십자가도 사랑할 수 있고 그 십자가도 영광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따름은 헛된 수고일 뿐입니다.

 

여기에 황금 사슬이 있습니다. 약함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결코 은혜를 알고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알고 누릴 수 없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야만, ‘두 팔을 벌리고 남이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감을 당할지라도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고 이 길을 걸어가는데, 다시 난관에 봉착합니다. 육신의 힘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싸움을 어느 순간부터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실패하고 넘어짐으로써 자신의 약함에 떨어집니다. 이 약함이 다시 은혜를 만날 때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다시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기쁨으로 주님을 따를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에서 나타나는 황금 사슬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자리에 계십니까? 이 황금 사슬이 끊어질 때마다, 다시 자기를 의지하는 자리에서 나와서 주님을 따르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황금 사슬은 성도의 삶에서 지속됩니다.

 

존 라일의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는 것으로만 만족하며 못박혀 죽으신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하지도 않는 이른바 교회 다니는 사람, 그저 예배 참석자들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 한 복판에 서 있는 사람들임을 아십시오. 이런 자리에서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는 약함이 은혜를 만나고 있습니까? 은혜를 만날 만한 약함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그저 강한 자입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그 일이 여러분의 삶에 깊게 경험되게 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강해 (156)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1:15-17/ 김형익 목사

2021-05-09 14:54:05

 

1. 왜 이런 사람을 쓰시는가?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하고 저주한 사람입니다. 그는 단순하기는 하지만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너무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이 사람에게 사명, 그것도 중차대한 사명을 맡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주님의 양무리 즉 교회를 돌보는 책임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사람에게 이토록 중요한 일을 맡기시겠습니까?

 

도대체 주님께서 무엇을 믿고 이런 사람에게 일을 맡기신다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을 단순하게 그냥 주님을 사랑하면 되지, 주님 사랑하면 다 되는거야하는 식의 교훈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까? ‘과거는 상관없어, 이제부터 잘하면 돼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가르침입니까? ‘주님은 쪼잔하게 과거는 묻지 않으신다는 결론을 내면 됩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던져야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왜 이런 사람을 쓰시는가?

 

2. 사람은 자신의 부패함을 알지만, 얼마나 부패했는지는 결코 모른다(17:9; 6:5; 8:21; 51:5; 15:19)

여러분 가운데 자신의 부패함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타락후 인간에 대해서 묘사할 때 초지일관 강조하는 교리이기도 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17:9)”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15:19).”

 

문제는 그 부패함의 깊이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점점 더 깨닫고 배우는 것이 이것입니다. 내 부패의 깊이를 내가 몰랐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점점 자신이 깨끗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늘 넘어지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 자기의 부패함의 깊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A. 자기를 믿는 자는 미련한 자다(28:26).

그것은 자기를 믿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부패함의 정도를 모르는 만큼 사람은 자기를 믿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를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과시하는 것이지요. 죄성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잠언에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28:26)”고 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자기를 믿고 자기를 증명하는 자들을 똑똑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들이야말로 미련한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베드로 안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13:37). 주님은 이렇게 말하는 베드로에게 그 밤 닭 울기 전에 그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감람산으로 가실 때, 주님은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31). 그러자 베드로는 기다렸다는듯이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몇 시간 전에 주님께서 자기가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반박합니다(26:33).

 

주님은 다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못박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는 자신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에 대해서 알고 계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로써 자기의 죄성을 표출하고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가 의입니다.

 

B. 그래서 사람은 실패를 경험할 때 놀라고 낙심에 빠진다.

자기 의는 바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을 잡으러 온 수백 명의 로마 군대 앞에 서있던 대제사장의 종을 베려고 검을 휘두르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의 신념과 말대로 갑니다.

 

제자들은 그 순간에 다 흩어졌건만, 그는 잡혀가시는 예수님을 따라서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용기있게 들어갑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습니다. 온기를 찾아 숯불 옆에 서 있던 베드로에게 대제사장 집의 종들이 묻자 그는 심문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순간적으로 그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밤에 세 번이나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그렇게 했을 때 주님과 눈이 마주 쳤습니다.

 

그 실패감, 좌절, 낙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는 자신을 믿었던 만큼, 놀랐을 것이고, 낙심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22:62). 이렇게 자기를 믿고 과신하며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 즉 자기의 부패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를 경험할 때, 자신에 대해서 실망스러운 사건을 경험하게 될 때 많이 놀라고 낙심에 빠지게 됩니다.

 

3. 육으로는 안 되고 영으로만 된다(8:5~7).

성경이 베드로에 관한 이런 자세한 이야기들을 써놓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베드로의 기질, 성품, 실패에 관한 이야기들은 네 복음서에 이렇게 대서특필된 것일까요? 이것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육(flesh)으로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육이라는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않은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의 본성과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은 전체가 부패한 죄성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자기 중심성입니다. 자아를 높이고 자아가 인정을 받아야겠다는 마음이요, 본능이요, 의지입니다. 자아가 우상이요, 신이 된 삶입니다. 이것은 자기 의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베드로가 자기 목숨이라도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호언장담한 것은 자기 의일 뿐입니다. 자기 의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혹해 보이리만치 그를 다른 제자들 앞에서 공개 망신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기 의에 대한 확신을 그렇게 철저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그것은 좀체 꺾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자기 의가 깨지지 않으면 주님을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5~7).”

 

이것이 육으로는 하나님을 도무지 섬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조건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가시려면 자기 의를 가지고는 갈 수 없습니다.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생활이 아니라, 종교적 모습으로 자기를 치장하며 자기 의를 쌓아가는 행위일 뿐입니다. 베드로는 그 모습으로는 주님을 결코 따르지 못합니다. 의욕도 좋고, 의지도 좋습니다.

 

그리고 진심인 것도 압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부패의 깊이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베드로처럼 통곡을 할 만큼 서글프게 자신의 부패를 알아본 적이 있습니까? 자기의 깨끗함, 자신만만함이 처참하게 무너져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예전의 베드로와 같은 수준으로 주님을 잘 따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4. 회복

사람이 실패를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주님이 사용하시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실패로부터 일으켜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패 경험이 아니라 그 실패로부터 주님께서 우리를 일으켜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A. 사랑은 용서의 토대 위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기 전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개인적으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만나신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4:34에는 주님께서 부활 후에 시몬(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또 사도 바울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나타나신 사람으로 제일 먼저 게바를 말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고전 15:5).”

 

주님은 부활 후에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만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성경이 여기까지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으로 보아, 주님은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진정한 용서의 토대 위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B. 공적인 실패는 공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전에 개인적으로 해결된 것을 왜 주님께서 또 제자들 앞에서 다루시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공적인 실패는 공적으로 다루어져야 하고 공적으로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이 지도자들의 문제일 경우에는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원리입니다. 저는 교회 지도자들이 소위 칠계를 범했을 때, 그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쉬쉬하고 더 이상 이 사건의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막음을 하고 그 사람에게 경고하고 넘어가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비성경적인 방식입니다. 또 그렇게 넘어진 사람을 감싸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결국 사람들이 다 알게 됩니다.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공적으로 그 죄나 실패를 다루지 않았기에 공적으로 회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하시는 것이 다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이 공적 회복의 절차를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5. 주님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용서의 바탕 위에서 이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질문을 세 번 반복해서 던지십니다. 세 번에 걸친 질문과 대답을 해석하는 데에는 한 가지 쉽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 말 성경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두 단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두 단어는 아가페와 에로스입니다. 아시다시피, 아가페는 이타적인 사랑, 완전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에로스는 남녀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와 함께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또 하나는 필리아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친구의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면, 아가페는 100%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때, 필리아는 60%의 사랑,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의 수치적 구분입니다. 주님은 처음 두 번 아가페로 사랑하는가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 다 필리아로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세번째로 필리아로 사랑하는가 물으셨고 베드로는 역시 필리아로 대답했습니다. 이것을 해석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첫째 해석은 주님께서는 두 번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가 물으셨는데,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게 된 베드로는 전과는 달리 인간의 최고의 사랑으로는 사랑하노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번째로 그럼 인간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근심하게 되었고 그렇게 사랑하노라 대답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낮아진 베드로, 자신의 부패를 인정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두번째의 해석은 아가페와 필리아의 구분은 여기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안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 아가페와 필리아는 구분 없이 함께 사용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한 예만 든다면, 요한복음 3:35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라고 할 때 아가페를 썼는데, 5:20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라고 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필리아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 적용하면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어떤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우리는 100% 정확하게 어떤 해석이 맞다고 결론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현재 제가 여러모로 살핀 결과, 가지게 되는 결론은 후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풀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처음 질문을 하실 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뒤의 질문들은 축약된 형태로 물으셨지만, 이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질문은 문법적으로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이 사람들을(친구들)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고, 둘째는 이것들(배와 그물과 이전의 직업)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 다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기질과 성격에 비추어, 주님은 세번째 의미로 말씀하셨을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말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하는 식으로 말한 것에 비추어 주님도 그런 식으로 물으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을 물으시는 주님은 좀 잔인해 보입니다. 그것도 다른 제자들 앞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자기 의가 철저하게 무너진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입증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앞에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기 의가 깨어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6. 베드로의 대답: “주님이 아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보면 그는 세 번 모두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말로 대답을 했습니다. 물론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대답에는 그 마음이 깊이 배어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변화를 베드로에게서 보게 됩니다.

 

A.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예전 같으면 그의 대답은 저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저는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라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는 그런 대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심리학적으로 자신감을 상실하고 좋은 자아상이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알게 된 것이지요. 자기 의가 깨어진 것입니다. 자아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의 부패함의 깊이를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씀한대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17:9)는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B. 베드로는 드디어 자신을 아시는 주님의 지식을 의존한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주님께 대한 신뢰로 옮겨갔습니다. 그는 주님의 지식을 의존합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주님의 지식과 말씀을 반박했던 그였습니다. 주님이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하시는데, 그는 따라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13:36~37).

 

주님께서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26:34~35). 그는 주님보다 내가 나를 더 잘 압니다 하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더 이상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자기 안에 있는 생각, 감정에 대한 주님의 지식에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아십니다. 제 마음의 모든 것을, 그리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것으로 저는 충분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오래 걸려서야 배웠습니다. 비참한 실패를 통해서야 배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아닌 자기 의지력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님을 따라오는 과정에서 이런 배움, 이런 깨달음, 이런 은혜가 있었는지 정직하게 묻고 싶습니다.

 

C. 신자는 넘어지지만, 믿음에서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는다(22:32).

베드로처럼 신자들은 넘어집니다. 이런 넘어짐이 없다는 것이 사실 문제입니다. 너무나 잘 하고, 너무나 훌륭하며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넘어짐이 없이 자신을 정직하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실패를 겪으면서 사람의 자아는 산산조각납니다.

 

자기 의가 무너집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런 실패를, 이런 부끄러움을 겪지 않으려고 애쓰고 매달리고 기도하지만, 사실은 그 넘어짐이 은혜라는 생각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넘어지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도리어 시작입니다. 그때 비로서 우리는 베드로처럼 말하게 됩니다. “주님이 아시나이다라고 말입니다. “”, “내가하는 식의 말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단이 제자들을 체질하겠다고 주님께 요청했고 주님은 허락하셨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특별히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22:32). 주님께서 베드로의 영원한 안전을 지키시듯이 자녀들의 안전을 지키십니다. 도리어 이 넘어짐은 베드로로 하여금 형제들을 굳게 하고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

 

7. 사명: “내 양을 먹이라”(10:7~16)

주님께서는 세 번을 물으셨고 베드로는 세 번 대답해야 했습니다. 그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한 것과 같이 세 번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그것도 세 번에 걸쳐서 주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여기에도 약간씩의 단어의 차이가 보입니다. 먹이는 것과 치는 것, 어린 양과 양의 차이입니다. 이것도 상세하게 구분하여 설명하는 시도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들이 모두 같은 의미, 주님의 양을 먹이는 목양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목양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양의 사명이 무엇에 근거하여 주어지는지를 보십시오. 베드로의 고백,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 위에 이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냥 자신만만함의 고백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의 능력을 알고 자신의 부패의 깊이를 아는 자의 고백입니다.

 

A.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양을 사랑하는 것이다(요일 2:9~10).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봅니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양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원리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에서 말씀했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원리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사람들,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는 모든 행위의 연료가 됩니다. 우리는 다 목사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목자의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중요한 지침을 줍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용서를 깊이 경험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그것은 당연히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B. 내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다(18:5~10; 20:28; 벧전 5:2)

여기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 양을 먹이고 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어린 양’, ‘내 양입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셨습니다(18:5).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하면서 말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20:28).” 후에 노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다른 목양의 책임을 맡은 장로들에게 부탁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벧전 5:2).” 오늘날 모든 목사와 장로들이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C. 주님의 양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는 목양(딤후 4:2)

주님은 내 양을 먹이고 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떻게먹이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먹이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8. 교훈과 적용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여러분은 무슨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겠습니까?

 

A. 자기 의가 깨어진 자리에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난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결론입니다. 자아가 산산조각나고 자신의 부패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는 계속해서 자기의 육신을 의지해서 주님을 따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는 한은, 결코 자기 부인도, 십자가 짐도 없이 그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자기 의로는 주님을 섬기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법이 없습니다.

 

자신만만함은 주님을 따르지 못할 금물입니다. 자기 의, 자기 신뢰, 자기 확신을 완전하게 버린 사람이 아니면 주님을 믿을 수 없고 따를 수 없습니다. 회심에서 일어나는 것을 바로 자기 의의 깨어짐입니다. 자아의 깨어짐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자기 의를 깨뜨리기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말씀으로 철저하게 다루십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말씀으로 자기 의, 자아를 산산조각 내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선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베드로에게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하게 우리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실력을 폭로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참된 믿음이 그 자리에서 서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은 육으로 주님을 따르십니까?

 

아니면 성령의 은혜로 변화된 심령으로 주님을 따르십니까? 여러분은 자신만만함으로 주님을 섬깁니까? 아니면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저는 한 발자국도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하는 고백을 가지고 은혜를 사모함으로 하루 하루 주님을 따르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부패의 깊이를 얼마나 인식하고 계십니까? 이런 자기 부인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결코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가슴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B. 기독교 신앙은 자신(인격, 실력, 신념..)이 아니라 주님의 인격과 말씀에 신뢰를 두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래서 자신 안에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인격, 실력, 신념 등에 자기의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전적으로 말씀 자체이신 주님의 인격과 쓰여진 말씀인 성경말씀에 신뢰를 두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자기 자신 안에 신뢰를 두는 사람은 언젠가는 넘어집니다. 그리고 그 넘어짐이 없이는 결코 주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C.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모든 필요충분조건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 내가 사랑한다고 하는 고백이 아니라, 주님이 내 마음을 아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모든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넘어짐, 실패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고백은 우리가 보통 노래를 부르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그런 수준의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자기 의를 깨뜨리는 이 싸움을 해왔습니다. 이것이 말씀 사역의 본질이고 영적 전쟁의 본질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 길이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 속에서 살아가는 그 끈질기고 강한 자기 의와 자기 확신과 자기 신뢰가 무너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산산조각나는 은혜의 역사가 아니면, 인간은 끊임없이 복음에 저항하고 하나님께 반역합니다. 저는 너무나 많이 봐왔습니다.

 

한편, 저 자신의 지난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바로 이것, 저의 자기 의를 깨뜨리시는 시간이었음을 압니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주님은 번번이 네가 할 수 없고, 네가 하는 일이 아니다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어떤 실패와 넘어짐을 겪었는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오래 걸려서 배웠는가도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 “주님께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면, “주님, 주님께서 해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준비된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주님 부인 사건은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네 복음서에 기록되어야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쓰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주님이 쓰실만한 사람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서 계십니까? 저는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말씀 사역을 통해서 여러분의 그 끈질기고 강하고 고집스러운 자아를 산산조각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렇게 해달라고 저는 기도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사니까요. 그래야 여러분이 비로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존 라일이 말한 것처럼, 여러분,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는 것으로만 만족하며 못박혀 죽으신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하지도 않는 이른바 교회 다니는 사람, 그저 예배 참석자들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 한 복판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나오십시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그 일이 여러분의 삶에 깊게 경험되게 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원한 사랑과 행복의 비밀 /21:15-17/ 유기성 목사

2016-08-04 16:05:4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제가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실패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 많으시니 실패자도 쓰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자만 쓰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 선뜻 아멘이 되지 않고 고개가 갸우뚱하실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한경직목사님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이셨고. 기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워지는 템플턴 상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한경직목사님은 일제 시대 신사 참배를 하셨던 분입니다. 탬플턴 상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이 고백한 사실입니다.

 

일제 시대를 청산하는 문제로 사회에서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습니다만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사참배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은 그가 참 신앙인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여길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아 일제 시대에 옥고를 치른 목사님들도 많은데, 하나님께서는 왜 신사 참배를 했던 한경직목사님을 들어서 한국 교회의 표상으로 만드셨을까요? 실패자를 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한경직목사님을 기억하기를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라 합니다. 아마 한경직목사님은 자신이 신사 참배했던 죄인이요 실패자인데, 주님의 은혜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평생 명심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경직목사님을 그렇게 큰 종으로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실패자가 아닌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27-2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실패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실패자요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이냐, 아니면 자신의 실패와 부족함을 감추고 오히려 자기를 자랑하려는 교만한 자이냐 만 있을 뿐입니다.

 

저는 실력있는 자, 성공한 목사가 되려고 몸부림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제 마음은 계속되는 긴장과 좌절과 열등감과 두려움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실패자라는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더 이상 제 자신을 꾸미거나 제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낼 이유가 전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제 약한 것 다른 사람보다 부족한 것 미련한 것을 쓰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놀라운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에 앞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맡아 목양할 책임을 베드로에게 맡기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하필 왜 베드로인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실패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엄청난 사명을 맡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으신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정확하게 사람을 보고계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이제는 베드로가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베드로가 무슨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자신을 믿지 않는 자가 된 것입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나 같은 자가 무슨 자격이 있나?’ 그런 베드로가 주님의 택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시고 그 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하셨습니다.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 베드로는 가슴이 져렸을 것입니다. ‘정말 내 마음을 주님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주님, 제가 비록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지만, 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를 주님이 다시 찾아주시고 제게 사명을 맡기신 주님을 저는 정말 사랑합니다.” 그렇게 세 번째 고백을 하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죄를 씻어주시고 교회와 양떼들을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그 사명을 받고 베드로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베드로도 한 때는 자신이 실패자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당당했고 자신이 있었습니다.

 

나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 주여,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죽을지라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ㅎ겠나이다. ’ 그랬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실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자기가 실패자라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이 사실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랬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올 때마다, 그가 큰 문제를 만날 때마다 베드로는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그 고백으로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에게 닥친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베드로를 통하여 하나님은 교회를 세웠고 위대한 일을 해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평생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능력이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사역하는 동안에 배신을 얼마나 많이 당했을까요? 베드로 속을 썩이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났을까요?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베드로가 이제 누구를 배은망덕하다, 배신자라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었지만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전혀 자격이 없었는데 사도로 세움받았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쓴 성경을 읽어 보면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말 용서의 사람이오,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벧전 3:8-9)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4:7-8)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알게 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용서의 사람, 사랑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 되기까지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기다리십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우리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런 복을 누리려면 명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완전한 용서의 사람, 진정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렇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한 신학교 교수가 설교에 관한 강의를 좀 특이한 내용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는 한 학기 동안 학생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비유를 주제로 설교하라고 하면서, 매 강의 시간마다 한 사람씩 각자에게 정해진 강의실로 가서 설교하도록 했는데, 시간이 임박하게 알려주어 그 강의실까지 가려면 서둘러야만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강의실까지 가는 길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랑자가 서 있도록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부랑자를 도와주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춘 선한학생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짧을수록 부랑자들을 돕기 위해 멈춘 학생들의 수가 적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설교를 하기 위해 서둘러 가면서, 그들은 그 설교의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용서와 사랑을 읽었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용서 받은 자라는 고백이 분명히 있습니까?

 

나는 말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영원히 버림받을 수 없는 실패자입니다.

그런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셔서 나는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이 믿음이 분명하십니까? 그렇다면 어찌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까?

 

일제 시대 소위 옥중 성도라고 불리는 분들은 핍박 중에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귀했으나 참 안타까운 것은 해방 후, 많은 옥중 성도들이 자신들만이 한국 교회의 진정한 지도자로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 교회를 분열 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교만과 비판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일제 시대 때 신사 참배했던 목사들은 전부 교회 강단에서 내려와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그 때부터 분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200548일 한국 복음주의협의회 월례 조찬 기도회에서 충현교회를 담임하셨던 김창인 원로 목사님이 공개 회개를 하셨습니다.

 

“1945년 해방 후 개신교는 일제 때 신사 참배 문제를 놓고 장로교와 고려파로 분열했는데,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이 나에게 있습니다.

광복 직후 평양, 부산 등에서 몇몇이 모여 재건 교회를 하면서 함부로 입을 열어 다른 사람들을 저주했습니다.

우리가 교만해지면서 판단력이 어두워졌고 사랑이 없어져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밥도 같이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마귀당󰡑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참으로 비통한 고백을 했습니다. 김창인목사님은 마지막으로 하늘 나라는 회개한 자만 간다고 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며 목이 메인 채 고백을 마쳤을 때, 백발이 성성한 원로 목사의 통한에 찬 고백에 참석한 사람들은 큰 박수를 쳤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은혜의 사람, 용서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왜냐하면 그 때부터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늘 웃는 얼굴에 보기만 해도 온유함과 사랑이 드러나는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분과 함께 지내면서 그 분이 본래부터 그렇게 사랑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 목사님의 학생, 청년시절, 교회 생활에 열심은 있었으나 지나치게 율법적이고 무서운 사람이었답니다.

 

그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도록 하라고 해서 며칠씩 왼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 적도 있었고,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는 말씀을 보고는, 고등학교 때 교회만 오면 울면서 회개했었답니다. 교회 어른들 중에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저 집사님은 아직 담배 피우고, 저 장로님은 새벽 기도회에도 안 나오고, 저 목사님은 그런 사람을 교회 중직으로 세운 것을 보니 삯군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답니다.

 

한 번은 교회 다니던 친구가 생활의 어려움과 여학생으로부터 실연당한 일로 음독 자살을 했는데, 병원에 가서 그 친구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며

네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야? 그렇다면 어떻게 자살을 할 수 있어?”

하고 책망을 했답니다. 그 친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더랍니다.

 

그러던 그가 시험에 빠졌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가려고 할 때 집에서 반대 하고, 등록금을 내 주시지 않아 등록을 못하게 될 때 엄청난 낙심이 왔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예수 잘 믿는 것 같았으나 한 번의 시험에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몇 년 동안 방황 끝에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자신의 교만 죄가 하늘을 찌를만큼 컸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답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실족시켰는가를 깨닫고 통곡하였답니다. 그런 자신을 용서하시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다시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답니다. 그 후 달라진 것입니다. 그의 실패가 그를 사랑의 목사로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의 사람이 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하셨습니다.

여기서 양이란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중에 가장 어려운 십자가가 사람 십자가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사람 십자가를 지고 고통 당하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가출한 청소년을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소년에게 탕자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이제라도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신발을 사주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 환영해 주실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 학생이 집으로 돌아간 후 다시 만났을 때, 반가와서 물었습니다.

 

그래. 아버지가 신발을 사 주시든?”

아니요, 발바닥이 터지도록 맞았는데요.”

금가락지를 끼워 주셨겠지?”

아뇨. 지갑까지 다 빼앗겼는데요.”

송아지를 잡아 주셨겠구나.” “아뇨, 나를 잡아 송아지에게 먹이려고 하시던데요.”

그렇습니다. 인간의 사랑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힘으로 사람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맡긴다.” 하시면서 요구하신 것은 오직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열쇠입니다. 능력입니다.

사람 십자가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 속에서 사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영원한 사랑과 행복의 비밀입니다.

 

제가 사역이 힘들고 사람 때문에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주님께 나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더는 못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제 한계입니다. 더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께서는 제게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아무 말을 못하였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 때문에 힘들다고 했는데, 왜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지, 어떤 때는 정말 답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으로 모든 위기를 이겨 나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 그것이 제게 말할 수 없는 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좋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가 좋은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만 나를 사랑하느냐 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나 가까이 하기 싫은 사람이 공개적으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 아무개 사랑합니다.” 하고 소리치거나, 벽에 누가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써 놓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죽을 맛일 것입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이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다 나를 사랑하세요!”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느냐?” 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사실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사랑의 프로포즈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로 믿어집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의 죄가 사해졌음이 믿어지느냐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프로포즈를 받은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십자가를 볼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중요한 것이 남았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할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고백을 이미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대답을 할 차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대답을 드린 사람입니까? 이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고백에 여러분에게 닥친 모든 시험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인생이 바뀝니다. 다윗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요한이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영원한 사랑과 행복의 비밀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어머니가 차려 놓은 밥상에서 생선 한 마리를 물고 마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보고 목사님이 야단을 치며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고양이도 자기 잘못을 알기 때문에 매를 맞을까봐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한 시간 정도를 그렇게 고양이와 씨름을 했답니다. 결국 고양이가 나왔는데. 기가 팍 죽어서 나왔습니다.

 

그 놈을 잡아서 야단을 치며 한 대 때려 주려고 손을 드니 눈을 꼭 감고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이 불쌍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해서 때리려는 손을 멈추고 그냥 꼭 안아 주었습니다. 꼭 안아 주면서 사람에게 말하듯 다시는 그러지 마. 그러면 안돼.” 하고 타일렀답니다.

 

그리고는 땅에 내려놔 주었는데. 그 날로 고양이가 거듭났다는 것 아닙니까! 고양이가 변하여 강아지처럼 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학교에서 돌아오면 달려오고. 목 위로 올라오고.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닙니다.

고양이는 개보다 야성이 강해서 주인이라도 사람이 있는데서 새끼를 낳지 않는데, 그 고양이는 목사님이 보는 앞에서 새끼 세 마리를 낳았답니다.

용서와 사랑은 삶에 기적을 낳습니다.

 

이제 요한복음 설교의 마무리입니다. 요한복음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결국 베드로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 저는 목사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하며 눈물로 기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인정하느냐?” “.” “그렇다면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여라!” 하셨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고민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제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용서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데이비드옥스버거 목사님이 쓰신 [용서를 통하여 오는 자유] (The Freedom of Forgiveness) 책에서 아주 놀라운 일을 목격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어느 날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미국 상원의원이 연설하기로 예정된 만찬에 참석했었습니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한 여 종업원이 디저트 그릇을 옮기다가 상원의원의 어깨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케이크와 레몬 소스가 상원의원의 코트. 넥타이. 셔츠. 무릎에까지 흘러 내렸습니다. 당황한 그 종업원이 상원의원의 옷에서 음식물을 털어내는 동안 상원의원은 그 종업원에게 거듭 괜찮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배인이 달려오고 주위 사람들이 다 일어나 둘러싸고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너무나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 때 상원의원이 여전히 얼굴이 빨개져 있는 그 여 종업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가까이 당겨서 뺨에 부드럽게 입맞춰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홍조가 사라지고. 대신 웃음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그 홀을 나갈 때는 얼굴에서 광채가 났고 생기가 넘쳤다고 했습니다.

 

옥스버거목사님은 상원의원의 행동이 가져다준 의미를 말하기를 그 상원의원은 젊은 여성이 평생 창피함을 느끼며 기억할 고통스러운 사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로 바꾸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용서와 사랑의 기적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주님께서는 남편을 사랑하느냐 아내를 사랑하느냐? 아이들을 사랑하느냐? 김 집사를 사랑하느냐? 부모님을 사랑하느냐?

교인을 사랑하느냐? 직장에서 동료들을 사랑하느냐? 묻지 않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고 반복하여 고백해 보십시오.

 

여러분, 언제 가슴이 저리도록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고백을 뜨겁게 해보셨습니까?

 

주님, 자격없는 사람 은혜 받았고,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용서받았고, 저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 지셨고,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고백은 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 고백을 주님께 하십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21:15-17/ 이재철 목사

2015-09-10 09:24:44

 

우리가 어떤 사람을 부를 때,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호칭이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호칭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자녀들을 부를 때 이름을 사용할수도있고, `애야'라고 말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놈'하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호칭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실은 우리의 인격과 성품, 나아가 생각과 철학까지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호칭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을 처음 만난 주님께서 게바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게바란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반석'이란 뜻이었습니다. 아람어란 앗수르 제국의 언어로써, 앗수르의 지배를 오래도록 받았던 이스라엘은 그때까지 아람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여태껏 중국의 한자를 병용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반석이란 의미의 새 이름을 주셨던 것은, 시몬이 반석과도 같은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반석이란 뜻을 지닌 헬라어가 `petros'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베드로라고 더 잘 알려진 이 이름은 본래 시몬의 본명이 아니라, 주님께서 시몬에게 지어주신 게바란 이름의 헬라식 표기인 것입니다.

 

평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시몬이란 유대식 이름의 호칭을 가장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있다.(7:40)' `시몬아 자느냐? 네가 잠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14:37)' 주님께서 평소에 베드로를 베드로가 가장 친근감을 느낄 유대식 이름 시몬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단순한 제자가 아닌 때로는 자식으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형제로 여기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최초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밝히셨던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며 주님의 말을 가로막고 나서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16:23)'그렇다고 이 이후로 주님께서 베드로를 계속 사단으로 취급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사단이라 호칭하시므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생각을 더 중시하는 것은 결국엔 사단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주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신 직후였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게 될 최후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절대 절명의 순간에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높은지 또다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침통하게 보시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극히 이례적으로 베드로라고 헬라식으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22:34)'- 베드로란 이름의 뜻은 반석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전혀 반석 같잖게 행동하는 그 한심한 순간에 오히려 반석이라 부르시므로, 어떤 경우에도 반석이어야만 할 베드로의 정체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대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매우 특이한 호칭을 사용하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15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15a)"

 

평소 베드로를 시몬이라 부르시던 주님께서 이번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본래 족보를 중시하던 유대인들은 제3자를 소개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누구의 자식인지를 밝히는 관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혹은 `나는 누구의 아들 누구입니다'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2인칭 상대에 대한 호격으로 이와 같은 호칭이 사용되는 예는 흔치 않았습니다. 굳이 사용한다면 상대에 대하여 격식을 갖추어 예의를 표할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상대를 존중히 여기는 표현인 셈이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예의를 갖추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신 것이 이번이 처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호칭을 예전에 딱 한번 사용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도대체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거침없이 고백하였습니다.`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주님을 향한 인간의 고백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극찬하시면서,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바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실 때에도 베드로에게 최고의 예의를 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한번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런대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을 한 번만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16절에서도 그리고 17절에서도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베드로를 향해 같은 자리에서 연거푸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호칭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모든 호칭에 의미가 있었음을 상기할 때 여기에는 필히 더 깊은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 주시기 위하여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호칭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셨겠습니까?

 

우리는 본문의 상황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님깨서는 새벽이 동트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으심으로,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잡히시던 밤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속죄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말해 베드로가 주님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기회를 부여키 위함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조건적인 필리아의 사랑으로 응답하였습니다.그러나 주님께서는 세 번째 질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 주심으로, 주님을 조건에 따라 제한적으로밖에 사랑하지 못한 베드로를 온전히 품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베드로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필리아의 수준에 있는 베드로를 온전히 품어 주시므로,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의 모든 죄와 허물과 잘못을 깨끗이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 사랑의 실체는 바로 용서였던 것입니다. 이 이후 만약 베드로가 본문 속의 갈릴리를 일평생 잊지 못했다면, 새벽이 동터 오는 이 갈릴리야말로 베드로 자신을 향한 주님의 위대한 용서의 선포식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를 선포하시는 이 극적인 순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의를 갖추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두 가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참된 사랑은 참된 용서요, 참된 용서는 반드시 상대에 대한 예의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참된 용서는 상대에 대한 존중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용서한다면 그에게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귀하고 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할 때 큰 은혜를 베푸는 시혜자가 됩니다. 시혜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곳에서 용서의 대상을 내려다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를 베푼 내가 언제나 그보다 우월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용서를 하고서도 그 대상을 존중하거나 그에게 예의를 표할수가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용서가 상대를 변화 시키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상대를 없수이 여기는 교만한 마음으로 행하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라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자기 과시적 용서는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철회되거나 상대에 대한 굴종을 강요하기에, 그곳에는 참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십시오. 진리의 배신자였던 우리를 구원하시고 더러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의 독생자를 친히 우리에게 보내어 주셨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예의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 주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향한 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예의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하찮은 우리와 날마다 함께 해주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지극히 존중히 여기고 계심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벌레만도 못한 우리에게 왜 이처럼 하나님의 예의를 다하시면서 우리를 존중히 여겨 주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용서며, 용서는 예의이고, 예의는 존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는 겸손한 용서이고, 그 겸손한 용서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담겨지고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참된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예의와 존중으로 귀결되는 참된 용서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내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사랑의 사람으로 바로 서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는 주님 호칭 속에서 우리가 두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주님의 용서를 믿는 자란 먼저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는 자요, 용서 받은 자신을 스스로 존중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기는 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긴 하지만 죄의식에서부터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난 안된 다고,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 할 수 없는 자는 자신을 존중할 수 없고, 자신을 존중할 수 없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설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그리스도인들 을 잡아죽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런대 그가 어느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용서하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루아침에 성인 군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시각각 엄습하는 죄의 유혹 앞에서 아직 정죄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수없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탄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7:2224)"

 

바울의 이 실패의 탄식은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정죄감의 노예 되었을 때 바울은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보다 과거의 죄가 더 크게 보였고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죄성이 더 중하게 여겨 셨던 까닭이 였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때 자신은 도저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였고, 당연한 결과로 그는 자신을 형편없는 자로 자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대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자포자기하던 사도바울이 마침내 자신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여기에서 너란 두말 할것도없이 바울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바로 바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의 선포였습니다. 그 용서의 근거는 재론할 것도 없이 주님의 용서였습니다. 주님께서 먹물보다 더 더럽던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지못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채 자포자기하며 탄식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를 확신할 때 바울은 주저 없이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셨거늘 자기가 자신을 용서치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기에 자기 또한 자기를 용서함이 마땅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저는 성경에서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있는 힘을 다해 외치는 바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외침입니까? 그것은 타인을 향한 외침이기 이전에 바울 자신을 향한 외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주님의 용서하심을 믿으므로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도 주님 안에서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 됨을 믿고 인정했을 때,

 

그는 평생 자기 자신에 대하여 예의를 다하며 자신을 존중하는 삶으로 일관했으니 곧 주님께 예의를 다하고 주님을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예의와 존중을 다 바치는 것이야말로 주님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자기 자신에 대한 최고의 예의요,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최상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면전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뛰어나가 땅을 치고 통곡했지만 그러나 자신에 대한 정죄 감으로부터 자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간밤만 하더라도 주님을 까마득하게 잊고 허망한 헛그물질만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다시 찾아 오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베드로의 자신에 대한 절망감이 얼마나 커 겠습니까?

 

난 안된 다고, 난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며 정죄 감에 몸서리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배신자였던 베드로를 용서하시면서 예의를 다해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불러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이만큼 존중하니 내가 존중하는 너를 너 자신도 용서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예의를 다할 정도로 너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으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하는 만큼 내가 사랑하는 너 자신에 대해 너 스스로 예의와 존중을 다하라는 촉구였습니다.

 

이 이후 우리는 사도행전 속에서 전혀 다른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사랑과 용서의 베드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예의와 존중을 다하는 베드로- 곧 거듭난 자기자신에 대해 예의와 존중을 다하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베드로로 부터 우리는 참으로 귀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자신을 먼저 용서할 줄 아는 사람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 된 자신에게 예의와 존중을 다 할줄 아는 자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예의를 다하며 존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에게 예의를 다 할 줄 아는 사람만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진정으로 믿는 믿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43:25)"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여호와께서)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03:12)"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0:15)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신 것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치 마십시오. 죄에 민감 하라는 말은 지금 죄와 맛서 싸우라는 것이지, 이미 회개한 것을 다시 기억하고 그로 인한 죄의식의 노예가 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함의 증거일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룟유다가 되지 마십시오. 가룟유다는 두가지의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주님을 판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유익에 따라 늘 주님을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의 더 큰 잘못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자살로 그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판 뒤에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서 받았던 은30냥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의 선한 양심이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채 정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가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믿음으로 자신을 정죄치 않았던들 그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그 누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죄의식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자포자기 하지 마십시오. 이미 회개한 죄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을 정죄치 마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므로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실 정도로 존중해주신 자신을 존중하십시오.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으십시오.

 

새로운 피조물답게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확신하십시오.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예의를 다하므로 거듭난 자신에 대해 예의를 갖추십시오.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주님을 은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용서하며 존중하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 역시 진리의 사람으로 굳건하게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면전에서 배신한 베드로도 되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죽이던 바울도 되었는데,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여버리기까지 했던 다윗도 되었는데 어찌 우린들 가능치 않겠습니까? 나로서는 불가능하지만 내게 하나님으로서의 예의를 다하시며 나를 존중해 주시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므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의 복음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주신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주님께서 존중해 주시는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우리의 삶은 늘 무기력했고, 무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신자였던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불러 주시고 용서해주신 주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예의를 다해 오늘 아침 우리를 다시 불러 주시고 품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용서케 하소서.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용서하신 주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시작됨을 잊지않게 하옵소서. 주님을 존중히 여기므로 새로운 피조물 된 나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 예의를 다하므로 거듭난 나 자신에 대한 예의를 갖추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사랑은 용서요, 용서란 예의요, 예의란 존중임이 이 세상에 보여지게 하옵소서. 그와 같은 삶을 통하여 우리 모두 사도행전 속의 베드로와 사도바울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하옵소서.

 

 

 

주께서 아시나이다 /21:15-17/ 곽선희 목사

2014-11-26 17:18:55

 

상담 전문가를 훈련하는 과정 중에 '좋은 질문하기'라는 과정이 있다고 합니다. 이건 무슨 말인고 하니 좋은 질문은 좋은 생각을 하게하고, 좋은 대답을 하게하고, 좋은 발상을 하게하고, 좋은 행동으로 사람을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질문하기' 훈련을 합니다. 여러분,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야기를 하면서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그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거죠. 좋은 질문을 하도록 우리 한번 우리의 생각과 습관을 고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질문은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인격의 발로이고 어떤 때는 신앙적 관점에서 오는 대단히 중요한 인간행위라고 전 생각을 합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어머니가 뭐라고 그럽니까? 참 장난꾸러기 아이들이니까 ", 오늘 또 싸웠냐?"

 

그러면 얘는 이 말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가만있자 내가 오늘 싸웠나? , 싸울만한 일이 있었어. 그럼 내가 조금 싸웠지 싸우기는.' 이쪽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답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안 싸웠단 말야!" 이렇게 돼버려요.

 

가령 아이들에게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었냐?" 하고 물으면 또 생각 하게 됩니다. '가만있자.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 그럼, 내가 오늘 좋은 일해서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일 있지.'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발상, 생각, 판단, 그리고 행동도 좋은 쪽으로 가게 된단 말예요.

 

또 직장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보고 대체로 제일 실수하기 쉬운 것이 그겁니다. "자기 어디 아파?" 물론 직장에서 돌아오면 배도 고프고 피곤하고 뭐 직장생활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좀 피곤하게 보이겠죠.

 

딴에는 안쓰러워서 딴에는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맹추 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자기 어디 아파?" 그럼 그때 가서 남편은 생각합니다. '가만있자 내가, 내가 어디 아픈가? 조금 머리가 아픈 거 같아…….' "밥 줘!" 그렇게 된단 말예요. 좋은 말이 나올 수가 없어요.

 

"자기 아파?"란 말처럼 맹랑한 말이 없어요. 여러분, 빨리 회개하고 그런 식의 자기 입장에서 직언해버리는 말은 오늘로 끝내세요. 내가 제일 곤란한 질문이 뭐냐 하면 오랜만에 만난 분들 보면 "목사님, 팍삭 늙었네요." 주를 달아요. 주를……. "목사님은 안 늙을 줄 알았는데요." 그래 내가 들여다보니까 "저는 아예 갔더라고요."(웃음)

 

문안으로 묻지만, 이 묻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 좋은 쪽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해야 되겠는데 이건 늙었다, 아프다 이러고 또 남편에게 아, "직장에 무슨 어려운 일 있어? 근심거리가 있나보지?" 이렇게 말 하면은 그때 가서 생각합니다.

 

'가만있자…….' 이제 생각을 합니다. 걱정거리를 만듭니다. 이제부터. 이래서 망조가 드는 거예요. 가령, 보자마자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오늘 얼굴에 빛이 나고 얼굴이 몹시 좋아 보이는데?" 그랬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때 가서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해요. 그건 엄청난, 엄청난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생각에로, 좋은 대답에로, 좋은 행동으로 사람을 인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Jimmy Carter)는 특별히 신앙이 좋은 분입니다. 그가 살아있는 신앙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속에는 하나의 좌우명이 나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그가 사실대로 고백을 합니다.

 

그가 사관학교를 마치고 임관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유명한 해군제독 릭 오버를 만나게 됩니다. 일대일로 만나는 그런 중요한 기회를 가졌는데 제독이 웃으면서 "그래 공부 잘했나? 성적이 괜찮았나? 힘들지 않았나? 사관학교 생활이 어땠어?" 이렇게 평범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 후에 "자네, 그 성적이 말이야, 최선을 다해서 얻은 성적인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카터는 생각합니다. '최선?…… 최선. 그렇죠." 그는 진실하게 말했습니다. "최선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죠." 제독은 무섭게 쏘아보며 말했습니다.

 

"어째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 카터는 일생동안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답니다. 어째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말합니다. 최선이란 뭔가? 최선, 최선, 최선이란 뭔가? 최선 앞에 내가 부끄럽지 않아야 되겠는데 최선이 뭘까?

그건 결과주의에 의해서 돈 벌었다는 얘기도 아니고요 출세했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했는가?

 

그는 최선을 이렇게 책에서 정의합니다. "최선은 집중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Concentrate, 그 일을 위해 집중하는 것이다." 공부할 땐 공부, 공부하면서 놀 생각하지 말고, 놀 때는 열심히 놀고, 걱정하지 말고 뭘 하든지 하는 순간 그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먼 산 바라보고 쓸데없는 생각할 것 없다. 주어진 일에 집중, 집중!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제가 운전을 많이 합니다. 좌우간 1년에 가만 보니까 35,000킬로를 뛰니까요…….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운전할 때는 옆에 누가 없어야 됩니다. 누가 옆에 있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면 벌써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음악을 틀면, 음악도 이상하게,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들으면 안 돼요. 보세요. "바다가 육지라면" 하면 바다 생각하고(웃음) 그렇죠? 그 가사 있는 건 나빠요. 일부러 가사 없는 것, 게다가 외국 사람들이 부른 건 가사 모르니까 그것이 집중력에 큰 도움이 되요. 어떤 때 정말로 집중해야 되고 졸릴 때는 음악도 끕니다.

 

? 집중에 방해되니까. 여러분, 듣는 것 보는 것 다 치우고 집중에 있어서 최선을 다했는가? 그렇습니다. 우리 학생들 공부하느라고 뭐 학원이다 뭐다 하지만 사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뭐라고 그럽디까? 학원 안 다녔대요. 가정교사도 없대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 간단해요. 공부시간에 집중만 하면 더할 것 없어요. 더할 거 없어요. , 그러면 여러분이 목사님이 어떻게 압니까하고 묻겠지만 이거 다 해봤다니까요. 강의 시간에만 정신 차리고 있으면 미안하지만 시험 준비 안 해도 되네요.

 

안 해도 1등할 수있더라구요. 집중해야 되요. 그런데 공부 못하는 놈은 공부할 때는 놀 생각을 하고, 놀 때는 공부할 생각하고 둘 다 못하는 거예요. 공부할 때는 공부만 집중…….

 

두 번째는 얼마나 즐기느냐 하는 거랍니다. 억지로 하는 게 아녜요. 하고 싶어 해야 돼요. 아니, 하고 싶다고 생각해야 되요. 그걸 즐기는 거예요. 뭘 해도 즐기는 거예요. ? 여러분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도 음식 만드는 걸 즐기는 거예요. 일을 해도 일을 즐기고 공부를 해도 공부를 즐겨야 그게 바로 최선 이예요.

 

세 번째는 감사하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좀 죄송합니다만 나이 드니까 이런 소리도 합니다. 제가 신학대학 다닐 때 1학년서부터 졸업할 때까지 1등 했거든요. 그 유명한 얘기예요. 좌우간 전교에 하나 밖에는 상을 안줬어요.

 

학교가 돈이 없으니까. 학급대로 주는 게 아녜요. 전교에 하나. 그런데 내가 그걸 3년 동안 계속 받았다니까요. 그래, 천재란 말 들었어요. 그렇잖아요? 그 왜 그랬을까? 물론 집중했지만 아녜요. 내게는 특별한 게 있어요.

 

그 기숙사가 내 고향이에요. 지금도 회현동 100번지가 그게 제 고향입니다. 제 호적입니다. 전 호적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내가 여기 와서 공부할 수 있다니…… ,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나? 내가 군대생활 3년을 해도 휴가 한번 못간 사람이에요.

 

방학을 한다 해도 방학 때 갈 때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 넓은 기숙사에 나 혼자남아서 겨울을 살았어요. 난로 하나도 없는데서 겨울을 지냈어요. 혼자서……. 그래도 나는 감사해요. 왜요? 북한에 어머니가 계시잖아요.

 

나 혼자 나와서 여기서 목사 되기 위해 공부할 수 있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나? 순간순간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는 거예요. 군대있을 때 입었던 바지하나 입고서 그걸 염색을 해가지고 5년 동안 입었어요. 춘하추동 없이……. 세 번 염색만 다시 했어요. 그래, 옷장은 필요 없어요. 입고 다니면 되니까.

 

그러나 나는 감사해요. ? 이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이거예요. 얼마나 감사한일이냐? 내가 어떻게 여기 와서 공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여러분, 그게 바로 최선이라는 것이에요. 결국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느끼며 한다는 얘기죠.

 

오늘 분문에 보면 아시는 대로 베드로는 주의 수제자로서 큰 실수를 했습니다. 아주 부끄러웠어요. 너무 부끄러워서 갈릴리로 가버리고 맙니다. 다시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세 가지 실수가 있어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라 했는데 그는 기도하지 않고 잤어요.

 

이게 첫째 실수요. 그 다음에는 멀찌감치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더니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어요. 모른다고만 했나요?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어요. 이런, 이런 참 창피한 사람이……. 이럴 수가 있어요?

 

이런 실수를 했어요. 너무 부끄러워서 제자의 거룩한 직분 다 사양하고 갈릴리로 다시 돌아가서 물고기 잡으려고 갔습니다. 그것이 세 번째 실수입니다.

 

밤새껏 수고했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런 지경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반가이 맞아주십니다. 할 말 많습니다. 예수님이 할 말 많습니다. 여러분, 충분히 알지 않습니까? '이놈아 왜 여기와 있냐?

 

부활한 거룩한 몸을 너희에게 보여주었는데 너 어째서 여기 와 있느냐? 어째서 여기 있어 이놈아!' 그렇잖아요? '그저 목숨이 달렸으니 무서워서 나를 모른다고 했다고 하자. 그저 한번 했으면 됐지 세 번씩이나 했냐?

 

또 맹세는 왜 했냐?' 할 말 많습니다. '어째서 여기 있느냐? 어째서 나를 모른다고 했느냐?' 할 말 많아요. 그러나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이런 질문은 없습니다. 그리고 딱 한마디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파스 메?" 하고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뿐입니다.

 

그 속에서 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는지 그 패인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네가 왜 나를 부인하게 됐는지 아느냐? 사랑이 없기 때문이야. 현재 네가 왜 이렇게 실의에 빠져 있느냐?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미래에 대해서 암담하게 느끼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그것도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베드로 자신의 깊은 곳을 파고듭니다. 베드로가 그 앞에 지금 온전히 포로가 되는 시간입니다. "아가파스 메?"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대답은 "아가파스 쎄"라고 대답해야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 오이타스 오티 필로 쎄" 라고 말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할 때 아니 친구의 사랑을 합니다, "필로 쎄" 그럽니다.

 

예수님 다시 묻습니다. "친구의 사랑은 하느냐?" 그럴 때 베드로는 할 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는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겸손해졌습니다. 이제 자기 자신은 다 없습니다. 낮추고 낮췄습니다.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결혼 상담을 해보면요 종종 그런 일이 많습니다. 결혼생활 20년도 하고 30년도 한 사람들을 보면 별 사람들이 다 있어요. 언젠가 한번 보니까 70이 넘은 사람들이 이혼하겠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아 그거 얼마 안 남았는데 살다말지……." 그랬죠. 그랬더니 거기도 이론이 있더만요.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남은 시간 제대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이혼하겠대요. 그 말은 되데요.

 

그런데 여러분, 그럼 내가 무얼 묻겠습니까? 제가 하는 언제나 똑같은 질문이 있습니다. "사랑해본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답은 똑같아요.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결혼은 하고 애를 낳고 수십 년을 살았는데도 사랑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대요.

 

내가 사랑했는지, 저 사람이 나를 사랑했는지, 사랑에 대한 확증이 없다는 거예요. 85세난 할아버지하고 80세 난 할머니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인터뷰를 하더만요. 그런데 그 재미있대요. 할머니보고 물어봤어요. "사랑한다는 말 해봤습니까?"

 

", 쑥스럽게 그건 왜?" 한 번도 해본일이 없대요. 그래서 또 물어보더만요. "만일에, 만일에 이렇진 않겠지만 죽었다가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어떡하겠습니까?" 하고 물어봤어요. 할아버지한테 물어보니까 할아버지 하는 말이 "좀 더 생각해보고요"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할머니한테 물어보니깐 ", 사랑이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사람은 내가 도와줘야 되요." 그러더라고요. 그저 엉성하지만 그게 사랑이죠. 저 사람에겐 내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다시 묻습니다. 사랑합니까? 사랑이 있었습니까? 아니 사랑하고 결혼했습니까? 젊은 사람들은 뭐 사랑한다고 난리를 치지만 어른들이 볼 때는 ', 난 아직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더라. 네가 뭘 아냐?

 

한평생, 한평생 공부해야 된다…….' 사랑이 도대체 뭡니까? 진실한 사랑은 이것뿐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가 아닙니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정체의식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내가 모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큰소리로 장담한때가 있었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

 

"어 그건 네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네가 알게 한 것 이니라." 오히려 이렇게 해석을 해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 와서 "내가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톨스토이의 사랑은 희망에 속느니보다 절망에 속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말합니다. "스스로 절망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자기 지식과 경험의 감옥 속에서 스스로 비관하고 있다." 여러분 왜 그럴까요?

 

사랑을 의심하지 마세요. 이미 사랑을 받았고 사랑 안에 내가 있는 거예요. 이 사랑을 아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내 마음 내가 모르겠습니다. 내 의지도 모릅니다.

 

다 주의 것입니다. 전에는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나는 주를 사랑하고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나만은 이렇다고 말했으나 오늘은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주께서 주신만큼 사랑할 수 있구요, 주께서 인정하시는 대로 나는 바로 그 사람이 될 것이구요, 주께서 힘과 은사를 주시는 만큼 주의 사랑에 보답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내 몸과 내 판단과 내 의지와 내 마음 전체를 그대로 바칩니다.

 

그대로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나는 주의 것입니다. 내가 사랑 한다, 뭘 한다, 이제 그것도 없습니다. 그대로 받아주세요. 진정으로 이것이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내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의 큰 사랑 속에 내가 있으니까.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 순간에 주님의 귀한 음성이 들립니다. "내 양을 먹이라."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주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마는 이제 보니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장담도 했고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처럼 그렇게 결심도 했습니다마는 너무도 초라했던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 큰 은혜 가운데에 항상 감사 감격하며 그렇게 사랑에 응답하며 사는 우리의 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께서 아시나이다 /21:15-17/ 곽선희 목사

2014-11-24 23:00:25

 

전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쓴 책 중에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중에 지미 카터가 한평생을 지향했던 그의 좌우명이 나옵니다. 그의 좌우명은 이렇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이 좌우명을 선택하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해군장교가 되기 위하여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 바로 직전에 그 유명한 해군 제독 릭오버 제독과 함께 면담할 기회를 가졌었답니다. 제독께서 이 젊은 사관에게 전술에 대하여 전략에 대하여 혹은 군인의 자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질문을 했습니다.

 

이 젊은 사관은 땀을 흘리면서 벌벌 떨며 대답을 했습니다. 얼마 이야기한 후에 화제를 좀 부드럽게 바꾸면서 말씀하기를 "공부는 재미있었는가? 성적은 어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지미 카터의 성적이 괜찮았었답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가지고 점수와 등수를 말씀드렸습니다.

 

제독께서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 성적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카터는 식은땀이 났습니다. 벌벌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최선을 다했는가?"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야 말씀드릴 수 없겠지요."

 

때 제독은 무섭게 쏘아보며 다시 질문을 합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대답을 못했습니다. 제독은 다시 물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라고 묻고 있는 않느냐?" 그는 더더욱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최선이라는 게 뭡니까?

 

최선이란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나 집중적으로 딴 생각 없이 내가 하는 일에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았는가? 얼마나 그 하는 일을 즐겼는가? 혹이라도 불평하던가 원망하던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면 그건 최선이 아니죠.

 

얼마나 하고있는 일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즐겁게 생각하고 했느냐. 또 주어지는 기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했느냐. 혹이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으면 그건 최선이 아니죠. 얼마나 충만히 감사했느냐. 시간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지식에 대하여 기회에 대하여 주어진 능력에 대하여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그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최선과는 먼 거리에 살았기 때문이요. 그는 다시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인생을 다 살고 나서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께서 내게 물으실 겁니다. 너는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그 두려운 질문이 가슴에 꽉 차게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업적이나 실적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성적이 좋으냐 나쁘냐 몇 등이냐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문제는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이죠. 이것이 인생을 질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양적으로 묻고 있지 않아요. 질적으로 묻고 있는 거예요. 최선을 다했느냐?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느냐?

 

여러분 주님 앞에 가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앞에는 실적이나 업적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문제는 주어진 현실 여건 속에서 내가 얼마나 최선을 충성을 사랑을 다했느냐, 그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께서 질문하시는 아주 엄숙하고 중요한 질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베드로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지어주었던 반석이라고 하는 그 유명한 이름, 베드로, 페트라스, 페트라 라고하는 그 이름이 아니고 낮추어서 원점으로 돌아가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를 같이하면서 깊이 생각해 보면 여러번 여러번 말로나 행동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마는 결정적인 것으로는 세가지 실수를 합니다.

 

그 첫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준비하려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실 때 베드로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깨어 기도하라.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죄 가운데 기도하지 않는 죄가 가장 큰 죄입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시고 시험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졌지만 기도없는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은 베드로가 약했던 게 아니에요. 상황이 잘못된 것도 아니에요. 베드로가 기도가 없었어요.

 

기도하지 아니한 죄, 깨어 기도하지 아니한 죄가 결정적인 죄요 실수요. 두 번째는 물론 여러분 아시는 대로 삼중 부인이라고 하죠. Threefold Deny,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합니다. 예수님 저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저 뒷전에 앉았다가 어린아이가 나와서 "당신이 갈릴리 사람이요 예수님의 제자"

 

아니라고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고 세 번째는 저주했어요. 삼중으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거야말로 씻을 수 없는 실수죠. 큰 죄를 졌지요. 큰 실수를 했죠.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님 부활하신 다음에 베드로를 만나주셨습니다.

 

여러 차례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래도 나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 앞에도 죄송하고 자기 자신을 볼 때도 무자격한 것을 알고 그는 갈릴리로 옛 생업을 따라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밤새껏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못잡고 허탈감에 빠져있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저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가 본래에 받았던 사명의 길을 떠나서 갈릴리로 돌아갔다는 것, 그 물고기 잡으러 갔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실수였습니까?

 

, 그런 가운데도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의 실수에 대해서 비판하고 원인을 추궁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랬느냐, 어떻게 그 지경이 됐느냐, 전혀 말씀하지 않습니다. 딱 한마디 물으십니다.

 

"아가파스메" 원문대로는 "지금 네가 현재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 말입니다. 현재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많은 말씀이 거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긴 원인분석적인 뜻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왜 나를 모른다고 하게 된 줄 아느냐? 니가 왜 이렇게 실수가 많고 이렇게 형편없이 된 줄 아느냐?

원인은 오직 하나, 사랑이 없기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같이 비참하게 됐느니라. 또한 현재 이 꼴이 뭐냐 이게. 3년 동안 메시아를 따라 다니고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갔어요. 왜 이 모양이 됐느냐? 이런 실망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 사랑이 없기 때문이에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같은 이같은 하잘 것 없는 형편없는 인간이 되지 않았느냐. 왜 이렇게 비겁한 인간이 되지 않았느냐. 또 하나는 네가 지금 미래를 걱정하는가 본데 예수님이 안 계시고 예수님이 안계시는 가운데에 나는 무엇을 할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를 그냥 둘 수가 없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되나. 그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 왜 이 모양이 됐느냐. 이것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절망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좌절이 없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운 가운데 대답합니다. "아가파스메"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물을 때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오이다 호티 필로세" 여기서는 "아가페?"라고 물었는데 대답은 "필로" 라고 대답합니다.

 

"플레오" 라는 말은 프랜드쉽. 친구라는 뜻입니다. 친하다는 정도예요. '희생적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물을 때 '친구의 사랑정도 합니다' 그 얘기예요. "아가파오세"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필로세"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좀더 내려가서 그 친구의 사랑마저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오이다 호티 필로세" 이렇게 대답하게 됩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주도권을 그리스도께 내드리는 것입니다. 아주 겸손해진 것입니다.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저도 생각이 있기에 그러나 내가 이지경이 됐지마는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다시 주님께 위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얼마 전에 96세 된 할아버지와 92세 된 할머니가 텔레비젼에 나와서 이렇게 인터뷰하는 걸 보았는데 결혼 70주년 기념이랍니다.

참 지긋지긋하게 같이 살았더만요. 근데 결혼 70주년 기념, 그런 프로그램에 나와가지고 이말 저말로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데 참 인터뷰 끝에 그 할아버지한테 아나운서가 짓궂은 질문을 했어요.

 

"만일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 부인하고 결혼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가만히 있더니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대답이 시원치 않더라구요. 그런데 할머니보고 물어봤어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 있다면 다시 이 남편과 결혼하겠습니까?"

 

했더니 대답이 전혀 다릅니다. "내가 돌보아 주어야죠." 뭐 사랑한다 안 한다, 결혼한다 안한다가 아니고 저 사람에겐 내가 필요한다 이거요. "내가 도와줘야 됩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더라구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처럼 어려운 말이 없어요. 사랑이 에로스냐 아가페냐 이건 굉장히 중요한 철학적 이론입니다. 그러나 쉬운 일입니다. 에로스라는 사랑은 항상 나를 중심합니다. 나를 위해서 저를 사랑하는 것이고 내게 저가 필요하고 내가 저를 돕고 그래서 사랑의 이름으로 자식을 괴롭힙니다.

 

보세요. 사랑의 이름으로 남편 못살게 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아내를 죽입니다. 다 사랑이라고 합니다. 왜요? 그건 자기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아가페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그분으로 중심이 옮겨갑니다. 그에게 맡깁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사랑하는 그것마저도 당신이 압니다 그거예요. 욥기 2310절에 보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나의 운명, 그에게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현실, 주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 만이 아십니다' 하는 겸손한 고백이 있는데 베드로가 말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C.R. Rogers 라고 하는 분이 심리학에 있어서 심리치료 방법의 삼원리를 말합니다. 심리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 혹은 병든 심리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세가지 절대 조건이 있다. 첫째가 무조건적 존중함이 있어야 한다. 수평적인 것이 아니요. 내려다보는 것도 아니요.

 

높이 보는 거예요. 사랑의 대상을 높이는 거요. 나보다 훨씬 높이는 거요. 그가 아십니다. 그 존중이 없는 사랑이란 정신적으로 허약해집니다. 그것이 정신병을 만드는 겁니다.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입니다. 당신이 훌륭합니다, 당신의 뜻이 옳습니다, 당신 생각이 옳습니다,

 

존경하는 바로 그런 심리가 건강한 심리를 창출한다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공감적인 이해입니다. 내 뜻을 남에게 이해시키려고 하지 말고 그의 뜻을 받아들여 이해의 공감대를 이루어야 되요. 그것이 사랑이에요. 그리할 때 건강해질 수 있어요. 내가 사랑하는 분의 뜻을 내가 수용할 수 있어야됩니다.

 

전혀 수용할 마음이 없어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뜻을 밀어붙일 생각밖에 없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이런 공감적인 충분한 이해가 따라가야 비로소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 있고 세 번째는 믿음과 진실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데 대한 믿음이올시다. 사랑하면 믿어집니다.

 

믿어지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직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 앞에 정직합니다. 그때에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심리학 이론을 내놓고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내 마음도 내 뜻도. 내가 지금 이 정도 입니다마는 주님은 아십니다. 내가 이 모습이요 처절합니다마는 주여 주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아주 겸손합니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말하면 에로스적 사랑이 아가페적 사랑으로 바뀌는 시간입니다. 그 동안은 자기 중심적으로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자기 출세를 위하여 자기 장래를 위하여 자기 영달을 위하여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소리 고백했던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아가페로 돌아갑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받고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아가페적 응답을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독선과 아집에서 떠나서 겸손과 헌신으로 돌아가며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면서 주님 앞에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변화 심리학자인 안소니 로빈스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책 가운데 Awake the Giant within 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이 책은 무려 세계적으로 천만권 이상이 팔린 베스트 셀러입니다. 1997년 국제 상공회의소가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 열 사람 중에 이 사람을 꼽고 있습니다.

 

그의 이론입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살아가기 위한 건강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자신의 감정을 극복해야 합니다. 현대인으로써 중요한 것이 감정 문제요. 이 감정을 방임하고 있어요. 감정을 다스려야 돼요. 여러분의 실수가 다 어디서 온 겁니까?

 

잘못된 감정을 내버려두었거든요. 자기 감정을 자기가 바로 통제할 수 있어야한다. 또한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절제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됩니다. 무질서하게 살면서 건강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건 미신입니다. 이걸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건강을 잘 관리해야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경제를 관리해야 됩니다. 인간관계를 관리해야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말하는 말은 시간을 정복해야 됩니다. 여러분 내가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주어진 시간을 정복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시간 안에서 최선으로 사는 거죠. 낭비되는 시간이 없어야 되요. 꽉꽉 채워가지고 살아야돼요. "시간을 정복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정복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시간을 무엇으로 다스리겠습니까? 사랑한 시간만이 시간이요 미워한 시간은 빼앗긴 시간이에요. 이걸 잊지마세요. 사랑으로 꽉 찬 시간만이 살아있는 시간이에요. 섭섭해하고 불면하고 원망하고 그건 다 낭비된 시간이에요.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의 일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one condition!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 대답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만이 아십니다." 아주 겸손하게도 신앙적으로 새로운 고백을 하게 될 때 주는 그에게 다시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사 지난날의 그 많은 실수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현재 이 시점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 그 크신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모든 생각을 다 버리고 새롭게 정리하고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겸손한 사랑의 응답을 할 수 있게 하사 그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고 그리고 최선의 충만한 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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