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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요한복음 설교 모음

요한복음 20:30-31 절설교 모음

by Jessi J 2024.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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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기록된 목적/20:30-31

2001-09-15 16:25:43

 

우리들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을 때 종종 글 쓴 사람의 목적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글은 독자로 하여금 그 목적을 바르게 전하는 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목적을 가지고 주어진 글로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운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성경공부를 아무리 많이 하고 설교를 수없이 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불과 21장 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이지만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말씀의 목적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31절에......................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인 것과 이것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한다고 기록 목적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은 이 목적 하나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것 가운데 한 부분에 불과한데 이것을 기록한 목적은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공부하기 전에 먼저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명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말씀의 관계로 이루셨습니다. 아시는 대로 동물은 잡아끌면 되지만, 사람에게만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세기를 읽다 보면,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 입니다.

 

처음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말든지, 만들었으면 먹지 못하도록 분명한 어떤 대책을 세우셔야 했는데, 무방비 상태에서 먹지 못하도록 하신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오묘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동물처럼 본능을 따라 사는 존재로 만들지 않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취사선택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를 수도 있는 자유를 주시면서 동시에 자유에 따르는 책임도 주셨습니다. 선택은 자유이며, 운명은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있으되, 선택 다음에 되어지는 일은 심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존재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이러한 의미에서 대화적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순종함으로 사랑과 믿음과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없이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키우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함께 살아준다면 이런 가정은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는 그야말로 지옥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기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는 자유를 주시고 인간이 스스로 순종하게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아니할 수도 있는 자유를 주시고 스스로 우러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하나님은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일생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라. 그래야 건강하다.

 

그러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어찌하느냐고 묻는다면,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이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억지로 한다고 하면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고, 순종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나는 순종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그 순간만이 내가 인간이며,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입니다.

 

항상 스스로 선택하도록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며 무엇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무엇을 원치 않으시는지를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5:7-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일러주시면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를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을 잘 한 사람이었습니다.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해도 예! 했고

 

"네 독자 이삭을 바쳐라" 해도 예! 하고 순종을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본토 친척 그리고 독자 이삭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4: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정비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도 믿고 신뢰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섭리하시며, 말씀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감동 감화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이라고 할 때 우리는 입으로 주고받는 말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이란 범위가 아주 넓고 깊습니다.

 

말에는 입으로 하는 것 외에, 눈으로도 하고, 몸으로도 하고, 인격으로도 하고, 침묵으로도 말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내가 눈으로 본 바요, 귀로들은 바요, 손을 만진 바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내가 느꼈다"고 하는 말입니다.

 

가끔 성도들 가운데 "목사님 손 한번 만져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갑게 서로 악수를 합니다.

 

사실, 서로 만진다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이니까요. 이런 것들이 다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귀로 들려야만 말이라고 논리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란 논리적인 것만은 아니라, 직감적인 것도 있고 몸에 부딪쳐서 깨닫는 것도 있습니다.

 

천지에는 말씀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귀중한 말씀이 인격입니다.

 

말씀은 대자연을 통해서 보여 주는 것도 좋고, 귀로 들리는 소리도 좋고, 바람소리도 좋고, 공중에 나는 새를 보는 것도 좋지만 예수님을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음성을 듣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관계를 가지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말씀의 결정적인 상징, 즉 가장 중요한 상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친히 말씀하신 것만 말씀이 아니라, 병 고치신 것도 말씀이요, 어루만지신 것도 말씀이요, 걸어가신 것도 말씀이요, 침묵하신 것도 말씀으로, 33년 동안 행동하신 그 모두가 우리에게 향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오셨고, 인격으로 오셔서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대화의 관계로 맺어 주심에 감사합니다만, 반대로 많은 장벽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장벽이요, 문화의 장벽이며, 시간의 장벽이요, 공간의 장벽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게 되어, 여기에 계시면 저기에는 안 계십니다. 오늘 계시면 내일은 안 계시며, 동시에 많은 사람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또한 히브리말로 말씀하시니 애굽 사람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만약, 한국 사람인 우리가 거기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여기에 증거라는 길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 보았고, 그것을 다음 사람에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만나보니 예수는 이런 사람이다. 물위를 걷기도 하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도 했다"라고 자기들이 눈으로 본대로 열심히 증거합니다. 그러면, 이 증거를 듣고 다음 사람에게 또 전합니다. 문제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본 사람의 이야기를 내가 믿으면 본 것과 같습니다.(달나라 어윙대령)

 

 

 

우리에게는 이 증거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증거는 어떻게 전해집니까?

 

증거는 두 가지로 전해지는데. 하나는 전승이요, 또 하나는 기록입니다.

 

전승은 말로 전하는 것으로, 사도요한이 다음 사람에게 전하고 그 사람이 또 다음 사람에게 말하고, 또 다음다음 이렇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승은 단점이 있습니다. 처음 직접 본 사람이 전할 때는 실감이 나고 좋은데, 몇 사람 건너가다 보면 어디까지가 참말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말이란 시간이 갈수록 보태지기도 하고 감해지기도 해서 나중에는 아주 다른 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승의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처음에는 인격을 통해서 전해지고 설명된다는 입장에서 대단히 좋습니다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처음 초대교회 시절에는 기록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미가복음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실지로 베드로가 살아 있었으므로 마가복음을 보겠습니까? 베드로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베드로와 예수님이 함께 있을 그 당시의 이야기를 베드로로부터 들으면 더욱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말씀 그대로가 성경이었으므로 그 시대에는 기록이 있어도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전승으로만 충분했기에 기록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도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니 급해졌습니다. 드디어 사도 요한만 남게 되자, 그의 제자들이 찾아가서 부탁을 합니다.

 

"이제 선생님마저 가신다면 예수님의 제자는 없습니다. 제발 기록으로 남겨 주십시오"하고 부탁을 해서 쓴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본문으로 한번 봅시다.

 

30-31............................................

 

사도요한은 이 책에 기록한 것 외에도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이 많다고 했습니다. 21:25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의 행적과 생애 전부를 알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기록 목적을 가지고 기록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이 성경을 기록한 첫 번째 목적인 것입니다.

 

신구약성경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디를 읽어보던지 거기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제사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레위기에 있는 피의 제사는 십자가를 설명하는 것인데, 십자가 없이 이 제사를 보면 도살장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레위기는 십자가를 설명하는 책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보되, 어떤 예수님으로 보아야 합니까?

 

본문에 기록된 대로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역사적인 인물인데, 그 분의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어야 성경을 똑바로 본 사람인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메시아가 오시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메시아이심을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전체가 바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 믿게 되어야 성경을 똑바로 본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아는 데 가장 극적인 장면과 결정적인 인물은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직접적으로 말씀을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병 고치는 것을 본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그는 전형적인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갑자가 주님을 만나서 "주여, 뉘시옵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말씀에서 "네 알았습니다" 하고 굴복합니다.

 

저 분이 메시아이구나 하고 깨달았을 때, 그의 모든 것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울 서신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이방 사람들은 주라고 하며, 헬라 사람들은 로고스라 하며, 히브리 사람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이 모두가 예수가 하나님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책을 기록한 또 한 가지의 목적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다.

 

5:39절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믿을 수 있으며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요5: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겠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성경을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성경을 통해서만 예수를 만나고, 믿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문제는 곧 내 문제요, 성경이 기록된 것은 곧 내 생명을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내 생명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므로,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적 생명을 얻지 못하면 이제 동물적 생명만 남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의 그리스도적 생명은 말씀과 함께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는 말씀을 듣고 받는 대화적 관계입니다.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응답자로 살아야 참 인간입니다.

 

오늘도 성령과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의 응답자로 살아갈 때에,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영국의 국왕 윌리엄 4세가 죽던 날 밤, 궁중에서는 한 처녀가 여왕으로 추대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그녀는 64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영국의 번영은 빅토리아 여왕 때 성취된 것입니다. 일찍이 인류 역사상 빅토리아 여왕만큼 위대한 왕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무릎을 꿇고 성경을 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내가 여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치를 하게 해 주십시오"

 

빅토리아 여왕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해결했고 기도로 정치를 했습니다.

 

하루는 인도의 왕자 한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을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정치를 잘 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을 펴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뿐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많이 잃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이 성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서 이 성경을 통해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로다"(119:165)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 하리라"(22:6)

 

 

 

 

예수에 대한 요한의 증거/20:30-31

2001-11-06 20:02:53

 

요한복음 2031에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몇 가지 기적을 골라,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예수님의 강론을 곁들여서 요한복음을 적은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느냐, 안 믿는냐가 인생이 사느냐, 죽느냐에 관련되기 때문에 독자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썼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믿음이라는 낱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대신 믿는다라는 동사를 약 100회나 사용한 것으로 보아, 믿느냐 안 믿는냐의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주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무엇을 믿느냐에 대해서 명료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주 예수라는 인간, 나사렛 목수,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분이 바로 메시야(그리스도)이시며,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나사렛 예수가 겉보기에는 인간이었으나, 그는 초인의 모습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신뢰하며, 따르는 것이 믿음의 주요 골자입니다.

 

또 하나, 본서의 저술목적은 사람들이 예수를 바로 알고 믿음으로 인해서, 그를 통하여 생명을 누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종국에 가서는 모든 인간이 누구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서에서 말하는 생명은 비오스(목숨)가 아니라 죠애()를 말하는데 이것은 참 생명, 생명의 본질, 영생, 혹은 생명력을 뜻합니다. 특별히 본서에 기록된 일곱 가지 예수님의 대표적인 기적은 전부 생명, , 생명력에 관한 것으로서, 예수를 믿음으로 발생되는 사건들입니다.

 

이와 같이 본서에서는 공관복음서와 달리 천국의 진리와 윤리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생명과 영생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참 생명의 세계이기에 큰 차이는 없지만, 신학적으로 또는 의미상으로 생명이라는 말이 더욱 포괄적이고 실질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

 

1)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그 자체가 기적이며, 예수의 놀라운 능력, 신적 능력을 보여 주는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 역시, 같은 성격의 기적입니다. , 예수는 새 생명, 새 삶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확증하는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생명의 떡이 되심(635)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그 자체가 참으로 놀라운 기적으로서, 예수의 초인적 능력을 보여 줌과 동시에 그의 신적인 존재를 증명해 주는 사건입니다. 이 기적이 내포하고 있는 세 가지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영생의 양식되시는 예수님(62634)으로, 27절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라고 하신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생명의 양식(63451)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하셨습니다.

 

셋째, 참된 양식, 참된 물(65259)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5557).

 

2. 세상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

 

유대교에 있어서 장막절(초막절)은 심판의 날, 주의 날, 즉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을 건설하시는 날과 관련된 명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장막절에 예루살렘에 나타나시자 도성 안에는 그를 영접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들 두 무리가 양편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심판이 실현된 셈입니다.

 

또한 장막절에는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제단에 붓는 일을 했는데 이것은 하늘에서 비가 풍성히 내려 농사가 잘 되고 생활이 윤택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전의 등을 더욱 밝혀서 성전 구석구석을 환히 비추게 하는 예식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절기에 나타나셔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73738)고 하셨고,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생명의 원천이며, 인생으로 하여금 밝은 삶을 살게 하시는 참 빛이 되신다는 것이 요한복음이 보여 준 그리스도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참 생명이시요, 참 생명의 양식()이시며, 세상에 참 빛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3. 심판을 단행하신 그리스도

 

1) 소경으로 태어난 자를 고치심(9141)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은 95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처럼 예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는 어둠과 밝음을 갈라 놓으시며, 구원과 멸망을 단행하시는 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939). 이 말씀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영안을 뜨고 밝은 삶을 살 수 있으나, 반면 거절하면 어두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는 심판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2) 선한 목자와 삯꾼(10139)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하여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양의 우리 안에 있는 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자는 구원받은 성도이며, 반대로 양의 우리에 들지 못하는 자는 결국 길을 잃고 헤매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은 삯꾼과 길잃은 양들이었으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를 믿는 자들은 구원받은 양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1)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과 교훈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신 사건(11153)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으리 만큼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갈릴리 지역은 겨울에도 온화하고, 여름에는 무척 더운 지역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곧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 통례입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나흘이 되었다는 기록은 회생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를 다시 살게 하심으로 부활과 생명의 주되심을 입증했습니다.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 이상의 가치를 지닌, 값진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은 사건은 가룟 유다가 말한 것처럼 언뜻 보기에는 낭비요, 과대한 지출로 보입니다. 1년 동안 노동의 대가에 해당하는, 고가의 향유를 사람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는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판단은 전혀 달랐습니다. 죽었던 오빠 나사로를 살려 주신 은혜를 생각하는 누이동생의 마음에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되살리신, 그 은총에 대한 대가로 보면 그 향유 옥합은 결코 낭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함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물질보다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인류 전체를 살리시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의 가치는 삼백 데나리온에다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빚을 탕감하시려고 십자가에 자기 몸을 내어주셨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성령의 감화감동이 나타날 때 소유(To have)의 삶은 자연적으로 존재의 삶(To be)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부활이시며, 그의 부활은 만민에게 은혜와 용기와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주는 교훈(121236)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은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1219) 하리만큼 예수님에 대한 백성의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행진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셨으며,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까요?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십자가의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이상과 같이 요한복음에서 보여 주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요, 천국 건설을 위하여 심판을 단행하신 그리스도, 부활이요 영생이신 그리스도였습니다. , 사망과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 참 생명, 참 삶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역력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은 참 삶과 생명에 역점을 둠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이 개인의 생명력이 됨은 물론 모든 사회와 국가, 모든 문화의 생명력이 되신다는 사실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왜 기록하였습니까 /20:30-31/ 권오선 목사

2024-07-21 04:40:59

 

지난 주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 동안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열렸던 비젼트립 지도자 세미나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마지막 날 선교현지에서 위기가 닥쳤을 경우 대처 방법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의 중간에 복면을 한 사람들이 총을 쏘면서 강의실에 진입해서 무조건 책상 밑으로 들어가라. 안들어 가면 죽인다고 협박했습니다. 무서운 공포가 흐르는 가운데, 참석자 모두가 책상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실제상황이 아니라, 강의를 위해 기획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불안했습니다. 상황이 정리된 후, 선교사님은 실제 선교지에서 이런 위기가 닥칠 경우에는 무조건 그들의 요구대로 복종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가도 위기이고, 회사도 위기이고, 개인적으로도 위기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선교지에서 위기가 닥쳤을 경우에는 무조건 테러리스트들의 요구에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위기가 닥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위기를 극복하는 비결입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성경말씀에 더욱 복종하며 사십시오. 그래서 위기를 잘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학교 교사가 자기 반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성경에 무엇이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아이가 , 저는 잘압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 한번 말해보라고 하니까 우리 엄마 성경에는요 헌금봉투와 피자 쿠폰 두장, 로또 복권이 있구요, 우리 누나 성경에는 연애편지가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성경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축복이 가득 담겨 있는 축복의 저장소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죠지 워싱턴은 하나님과 성경을 알지 못하고서는 세상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선서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했습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오늘까지도 미국의 대통령들은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곧 있을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도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할 것입니다. 링컨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은 영국의 모든 영토를 버릴지라도 성경은 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성경을 귀하게 여기고 복종해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인들은 방법은 다르지만 성경을 귀하게 여깁니다. 어떤 교인들은 성경이 너무 귀해서 누가 만질까봐 높은데 올려놓고, 혹시 읽다가 떼 묻거나 찢어질까봐 잘 보관하다가 교회 올 때만 사용합니다. 어떤 교인들은 너무나 귀한 말씀이기에 늘 읽고 묵상합니다. 읽어서 떼가 묻거나 찢어질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읽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법으로 성경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귀하다고 고이 간직했다가 주일날만 사용하는 성도가 되지 마시고, 때가 묻고 찢어질지라도 열심히 읽고 묵상하는 성도님들 되십시오. 이런 성도들이 성경의 복을 받습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합니다. 이런 성도들이 항상 열매를 맺고, 형통한 삶을 산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신구약성경 가운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가장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문 30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적, 그리고 기적과 표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요한복음 2125절에서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어록이나 행적, 표적과 기사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선별하여 성경 속에 담았습니다.

 

성경을 왜 기록하였습니까? 본문은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기록하였습니다.

 

본문 30절을 읽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본문에는 성경의 기록 목적이 두 가지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 첫째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이고 헬라어로는 크리스토스입니다.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할 자임을 믿게 하는데 성경의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종교마다 구원관이 있습니다. 불교는 고행이나 수도를 통해서 신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속세를 떠나 고행과 수도를 합니다. 지금 한국과 전세계에 큰 위협이 되고 있는 이슬람교는 마호멧트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통일교는 문선명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선전합니다.

 

오늘날에는 종교다원주의가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떤 산이든 정상은 하나이지만, 올라가는 등산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땅에 물이 흐르는 수맥도 많지만, 수도 파이프로 나올 때에는 하나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와 구원의 길은 다양하지만, 천국이라는 정상에 가면 다 만난다는 주장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 본문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는 이름은 예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한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과 신약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인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원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제자들과 성도들은 모두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거나 높은 지위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인기인이라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진정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런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사시는 복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31절 하반절에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믿을 때, 생명과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처가인 사장이 남들도 자기처럼 공처가일까 궁금해서 하루는 사원들에게 아내가 무서운 사람은 다 자기 편으로 모이고, 무섭지 않은 사람은 저 편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전사원들이 자기 편으로 모이는데, 유독 한 사람이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사장은 신기해서 자넨 정말 아내가 무섭지 않은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원이 아니요, 오늘 아침 출근할 때 아내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고전적인 이야기지만, 많은 사람들을 웃겼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원조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좁은 길과 넓은 길을 말씀하시면서 넓은 길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멸망의 길이니까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좁은 길로 가야 영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이 보내신 예수를 믿을 때 받습니다.

 

이집트의 바로왕들은 죽으면 미이라 형태로 보존합니다. 현재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바로가 모세와 대결했던 라암세스 2세입니다. 이집트인들은 바로는 태양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살아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미이라를 만들어 보존합니다. 오늘날도 세계 재벌들이 죽으면 시신을 썩지 않게 보존한다고 합니다. 훗날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소망대로 언젠가 과학과 의학의 힘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시 살아도 죽습니다. 성경에도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 많습니다. 죽었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엘리야가 살렸습니다. 엘리사도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 예수님도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바울도 추락사한 유두고를 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 살아난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 죽지 않고 생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생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만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영생의 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몇 주 전에 동영상을 통해서 이슬람교가 무섭게 한국에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 전, 국가정보원에서 각 교단 선교 책임자들을 초청해서 이슬람을 좀 막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국가가 나서면 외교문제가 되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주면서 교회를 앞세우고 있습니다. 한국에 2%의 이슬람교도가 생기면 그때부터 폭력과 테러가 사정없이 일어난다고 국정원이 보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알라를 위해 폭력을 쓰고 죽이고 테러하면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산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생 얻기 위해서 인간의 생명도 파리 목숨처럼 날립니다. 특히 이슬람 세계에서 여성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합니다. 황당하고 거짓된 영생관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천국에서 영생한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떤 유혹이 오고 어떤 환란이 와도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 그래서 모두 영생의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예안가족 여러분!

 

성경은 우리의 지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책장에 장식하라고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에 두면서 나도 예수 믿는다는 것을 표시하라고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복종하는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구원 받고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성서주일을 맞으면서 성경을 많이 읽으시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셔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20:30-31/ 손재호목사

2021-04-17 11:06:14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요한은 이 말씀을 통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30-31).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 함이요,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는 역사와 그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 충만케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30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볼 때 요한복음에 기록한 표적 이외에 예수님께서는 더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저자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행한 모든 표적을 다 기술한 것이 아니라 그 중에 몇 가지만 골라서 기술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에게 따라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표적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기도 하고, 여덟 개의 표적이 기록되어 있다고도 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표적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표적을 넣느냐 안 넣느냐와 6장의 오병이어 표적과 풍랑을 잔잔케 하신 표적을 분리하느냐, 분리하지 않느냐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습니다. 저는 여덟 개의 표적으로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표적들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그러면 그 여덟 개의 표적들이 무엇이었습니까?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표적(1:35-2:12), 왕의 신하의 병든 아들을 말씀으로 살려주신 표적(4:43-54),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표적(5),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6:1-15), 풍랑을 잔잔케 하신 표적(6:16-21),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주신 표적(9:1-38),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표적(11:28-53),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표적(19-20) 등입니다. 이 표적들이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기술한 표적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표적이 여기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 외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이 여덟 가지의 표적만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 표적들을 기술한 목적 곧 요한복음을 기술한 목적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표적의 의미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독특하게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30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 앞에서 표적을 행했다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표적의 일차적인 목적이 제자들을 위함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표적과 기적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표적이란 히브리어로 오트’(t/a)라고 하며, 헬라어로는 세메이온’(shmei'on)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수십 번 나타나고 있으나, 신약에서는 세메이온이적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기사라고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말로 번역된 표적’, ‘이적’, ‘기사라는 용어에 대한 분명한 개념 정립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표적또는 이적기사라는 말이 때로는 비슷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수가 있으나 그 내용상으로는 각각 다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성경에 나타나는 표적이란 말은 일어나는 사건의 목적과 의미를 표현하는 용어이며, ‘이적이란 말은 일어나는 사건의 성질을 주로 표현해 주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세메이온이란 말을 우리 말 성경에는 이적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기이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을 기적혹은 이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기적을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자 요한이 표적이라고 하는 그 의미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목적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표적과 기적의 차이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적이란 단지 놀라운 현상을 가리킵니다. 비상식적이거나 경이로운 현상, 혹은 일반적이지 않은 초월적인 어떤 현상을 말할 때 우리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지난 번 칠레에서 광부들이 지하에 갇혔다가 한 사람도 죽지 않고 구조된 일과 같은 것은 기적입니다.

 

하지만 표적은 그것과는 좀 다르죠. 표적은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표적은 기적적인 사실이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보면 기적은 미라클’(miracle)이라고 하고, 표적은 사인’(sig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적인 일들을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나타내주는 표지로서의 표적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그 기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지로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처럼 하나님 나라를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자신을 왕으로 선언하고 계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5장 이하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산상수훈을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대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가르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어떤 자라고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기술되고 있는 이 모든 표적들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표적을 거부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표적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도록 초청받는 열린 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 이야기는 예수님의 표적을 알아차린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3:2).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오신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로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왜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을 기술하지 않고 여덟 가지만 기록했을까요? 그 이유는 이것만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목적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곧 이것만으로도 하나님 계시의 완전성, 충족성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에 이것만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충족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만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필요 충분한 것입니다. 더 이상의 계시가 추가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완성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는 끝이 났습니다. 곧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직통 계시니,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느니, 예언이니 하는 것은 다 마귀적이고 이단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31절을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저자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결국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읽고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요, 넓게는 성경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했는데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동의어입니다. 먼저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메시아라는 의미입니다.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 왕국을 속박에서 건지시고 그 나라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40-41절에 보면 초기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이 칭호를 붙였습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1:40-41).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이 칭호는 드물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 칭호는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8:36절에 보면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결코 혁명적인 운동을 시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로써 구약에 약속된 죄로부터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려 오신 분이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대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요한은 그 메시아가 이미 오셨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서는 가끔씩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34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이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1:34). 또한 1:49절에 보면 나다나엘이 이 칭호를 사용합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그리고 5:25절과 10:36, 1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몇 차례 사용하셨습니다. 먼저 5:25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10:36절에서는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11:4절에서는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유대인들에게보다는 이방인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는 명칭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표현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나타나는 본질의 통일성과 친밀한 교제와 독특한 가까운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것과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사역을 성취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신앙의 모든 영역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는 결과적으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에게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자기 의지와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믿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9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 곧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매우 강조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믿는다라는 단어가 무려 98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단어가 공관복음 곧 마가복음에서는 11, 마태복음에서는 14, 누가복음에서는 9번 밖에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비해 요한복음에서는 100회 가까이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한복음을 믿음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믿는다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20:31)에서도 나타날 뿐 아니라, 요한복음의 서두의 중심이 되는 요한복음 1:12절과 요한복음 3:16-18, 그리고 다양한 표적들과 그에 따른 강론들의 중심에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사람들을 두 부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로 나눕니다. 저자 요한에 의하면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가진 사람들(3:15-16, 36; 5:24; 6:40, 47)로서 빛 가운데 행하며(12:46),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받는 사람들(3:18; 12:48)로서 어두움 가운데 행한다고 했습니다. 확실히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현재의 삶과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근본적 이슈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요한복음에서는 믿는다라는 동사가 거의 100번 가량 언급된 것에 비해 믿음이라는 명사는 단 한 번도 사용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믿음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고양시키는데 주된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것에 기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요, 중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렇게 예배당에 모이고, 열심히 종교 사업을 한다고 하여도 변죽만 울릴 뿐입니다.

 

말라기 1: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의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믿으라고 한다고 해서 믿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들을 귀 있는 자만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을 귀가 생긴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서 살려주셨기에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귀가 있으니 아무나 들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들이 원하는 욕구를 채우기 위한 성경으로 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생명과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서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9절을 보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가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39절에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29절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40절에서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52-58절에서는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 생명을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7절을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왜 값없이 생명을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생명을 위해 어떤 조건도 만족시킬만한 수준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오직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값었는 선물입니다. 이 생명을 선물로 받았다면 부러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우리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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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쟾쇰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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