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난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믿음 /요20:19-23/ 유기성 목사
2016-08-04 15:14:20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
지금 우리 교회에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교인들이 성령의 바람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성도의 비율은 작습니다.
분명히 모여 기도할 때 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의 바람을 느끼고 있는 성도들은 수적으로 보면 훨씬 작습니다. 그렇지 못한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더욱 힘들어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너무나 마음이 답답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다고 하는데 내겐 부흥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바로 그러한 교인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요즘에 영적으로 답답하고 메마르고 심지어 영적인 좌절에 빠진 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영적으로 소생하는 놀라운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답답하고 힘들다고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직전,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우리보다 훨씬 더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 영적인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좌절감 그리고 예수님을 버렸다고 하는 죄책감 때문에 마가 다락방에 있는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 안에 숨었습니다.
아리마대요셉과 니고데모 때문에 예수님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했지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도가 되었겠습니까?
찬양이 되었겠습니까?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로 3년을 따라 다녔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지 막연하고 후회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망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숨죽이고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마음에는 슬픔만 가득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 직전,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끝난 것같이 느껴졌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직전의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영적으로 답답하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흥이 임하기 직전, 누구에게나 영적인 답답함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부흥이 눈 앞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들에게 그런 변화가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 마리아는 슬펐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갈 때만 해도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았을 때만 해도 너무나 두려웠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마리아는 감격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는 마리아의 얼굴은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바뀔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삶이 이렇게 바뀝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걸어 잠군 것은 단순히 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문이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실패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꽉 닫혔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1절)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2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기도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주의 사도로 쓰시다니! 예수님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자로서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 자체를 제자들에게 위임해 주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전도할 복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전도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감격하였습니다.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도 많이 받았고 죽이려하는 자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핍박하는 자, 죽이려고 다가오는 자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 이 원수를 갚아 주소서.” 기도하지 않고 핍박을 하면 핍박을 당하고 죽이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그들에게 “당신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천국에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제자들이 용서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다시 용납해 주시고 받아주시고 다시 쓰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에 너무나 감격하여 가슴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계획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은 너무나 충격을 받았지만, 예루살렘은 여전히 조용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있었던 마가 다락방에는 세상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지만, 아직도 예루살렘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도마같이 여전히 믿지 못하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엄청난 태풍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진짜 태풍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역사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부으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배신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을 다시 복음의 사도로 쓰셨을까요?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무섭다고 도망 갔던 나약한 제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다시 사도로 쓰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배신한 사람을 다시 쓰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는 실패자를 쓰시는 완전한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성령님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22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성령님이었습니다.
두려워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 실제로 좌절에 빠져있었던 제자들, 죄책감에 무너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으로 그 제자들을 위대한 사도가 되게 만드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강해 설교도 이제 끝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부활 사건도 다 지나갔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이제는 중요한 부분은 다 지났구나.’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제부터 엄청난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끝나면 어떤 성경이 이어집니까?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무슨 책입니까? 제자들에게 임하신 성령 행전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복음서보다 더 엄청난 역사를 이루는 사도행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실패자를 쓰시는가? 성령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할 일은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제자들은 너무나 준비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준비가 된 것입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실패와 좌절입니다. 그들은 정말 철저히 실패했고 좌절한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내 의지로는 안된다! 내 결심으로도 안된다!’ 이것이 깨달아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님께 순종할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자기들은 그 예수님 곁에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은 오직 성령님에게만 의지하고 성령님에게만 순종하는 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깨달은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실패자를 쓰시는지 아십니까?
“이제는 오직 성령님만 의지할 사람이 되었는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실패와 좌절 조차 복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됩니다.
20세기 초반에 오순절 운동을 일으킨 스미스위글스워스 목사님, 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병 고침 받고, 14명의 죽었던 자가 그의 기도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하였고 공부도 하지 못하였기에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제가 설교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시도는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여보,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저는 당신이 오는 주일에 설교하기를 간절히 원해요.’ 라고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 보았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기 위해 써보지 않은 방법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심지어 목사님들이 하신 설교들을 1주일 내내 적은 적도 있습니다. 저의 아내의 바램, 저에 대한 사랑, 그녀의 소망이 틀렸다고 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설교단에 일단 올라서면 저는 그 동안 적어놓았던 설교들을 읽지는 않고 그 대신 ‘저는 설교 못하겠습니다. 저 대신 다른 분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한 차례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 차례 일어났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겠다고 설교단 앞으로 나오는 경우, 저는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영접시키는 것은 참 잘합니다. 제 아내가 설교하는 동안 제가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잘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일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설교만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님이 임하시자 저는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은 저의 것의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성령으로 채움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너무나 무능하고 자신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준비된 사람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제자들 뿐 아니라 온 예루살렘이 뒤집어집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지금 종교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지만, 성령님이 임하시면 완전히 해결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한국 교회를 사로잡으시면 온 백성으로부터 칭송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마가 다락방에 임한 성령 강림이 아직 끝이 아닙니다. 2천여 년 전에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였을 때 우리나라에 무슨 영향이 있었습니까? 여러분, 성령의 계획은 엄청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들끓었지만 전 세계는 여전히 조용했습니다.
요엘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신 지 2천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성령의 역사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만민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성령의 바람이 그것입니다.
요즘 부는 바람에서 가을을 느끼듯이 앞으로 이루어질 일이 눈 앞에 보입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이미 가을은 와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바람을 경험할 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우리는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예언이 무엇입니까?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집니다. 만민에게 성령이 부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과 우리의 경험은 동일합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주님을 만납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마 마음을 몇겹을 닫아놓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실패 때문에 좌절 때문에 상처 때문에 누구도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금 마음을 있는대로 닫아놓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닫아놓은 마음을 깨뜨리고 들어가십니다.
마가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처럼 마음을 닫아놓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오늘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찾아오십니다. 여러분,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기도하고 싶은 갈망이 없습니까?
말씀을 듣고 싶은 갈망, ‘나는 이대로 살아도 되는 것인가?’ 여러분 안에 이런 삶에 대한 변화와 ‘나도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을까?’ 하는 영적인 갈망을 한번도 안해 보셨습 니까?
성령의 바람이 강하게 부느냐 약하게 부느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바람이 부느냐 안부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아주 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약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성령님의 역사가 느껴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정말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기도의 갈망, 말씀에 대한 소원, 삶의 변화에 대한 갈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갈망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답답하다면 그것 역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분별해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성령님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해 보십시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두려운 가운데 믿음이 생기고, 위로가 느껴지고. 순간이라도 평안이 느껴지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제게 오세요. 저를 만나주세요.” 하고 기도만 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주님. 환영합니다, 주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깨닫는 순간, 성령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시는구나! 성령의 바람을 인식하는 순간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성령의 바람을 느끼신다면 여러분은 은혜의 강 가에 서 있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어오는 길목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답답함도 성령의 바람입니다. 갈급함은 더욱 성령의 바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에게는 인생의 끝이라고 말하는 순간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입니다. 죽음의 세력은 우리로 하여금 “끝장 났어!”라고 말하지만 부활의 주님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욥기에 보면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게 차라리 하나님을 원망하라고 말하자 욥은 욥기 23장 10절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단련을 통해 정금같이 나오기 위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11절에서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위에 너풀 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것 같이”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독수리에게 날개짓을 가르치듯이 우리를 고난으로 훈련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팔자나 운명을 믿는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창조 신앙을 가진 자 부활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고난이 독수리 훈련의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 모두가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부활의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보려고 무척 애를 써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좌절을 겪었습니다. 사랑이 능력이요, 순결이 능력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저는 할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은밀한 죄의 종이었고 자존심으로 뭉친 괴물과도 같았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자존심 때문에 용서를 빌지 못했습니다. 변명하고 합리화시키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제 자신이 미워지고 용서가 안되는데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위선자의 고민을 아십니까? 자신은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무대 위 광대와 같은 목사의 심정을 아십니까?
어느 사모님이 남편 목사님이 연구 대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강단 위의 설교와 실제로 삶이 어찌 이리 다를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정말 저는 제 자신이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도 제 자신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답은 없었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속일 수가 있었지만 가까이 있는 동역자나 아내는 얼마나 실망했겠으며 안타까워 했겠습니까?
그래서 "자격이 없으면 강단에서 내려 주시옵소서!"하는 기도를 몇 번이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죽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았다면 저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았습니다. “하나님, 저를 죽여 주십시오. 하나님 저를 죽여 주십시오.” 기도했지만 자아는 죽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6장 11절, 13절을 읽게 하심으로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
죽음은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으니 믿으라,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죽었습니다.” 가 제 노래가 되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놀라운 일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았습니다.
저도 믿음으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목회하지만, 때로는 피로감이 몰려올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 것인가?’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은 아닌가?’ 그 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다, 이제 은혜의 시작일 뿐이야!’
그렇습니다. 바람을 분별해야 합니다. 아무리 늦더위가 심해도 우리는 가을이 옴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하셨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진짜 하시려고 하는 일에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으로 답답하다고 낙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듣기는 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마음에 그려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역사, 온 세계 열방 가운데 부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정말 태풍이 불어오는 것같은, 태풍이 불어오지 직전에는 바람이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현재 여러분의 삶에 절망하고 있습니까? 영적으로 너무 답답합니까?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내게는 뭔가 잡히는 실체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심령에 오시기는 했는지 먼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다고 느껴지신다면, 내게도 성령의 바람이 부는 것은 사실이라고 자각이 되신다면 주님 앞에 나가 기도하십시오.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 제게 압도하는 능력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반드시 주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끝이 놀라운 삶의 시작이 됩니다.
“주님, 제 삶을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지금도 저를 만나주시는 부활하신 주님, 실망과 좌절과 낙심, 두려움 속에 있는 저를 성령의 권능으로 일으켜 주시옵소서.”
★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20:19-23/ 이재철목사
2015-07-30 20:31:59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사흘째 되는 안식일후 첫날, 즉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8주 동안 그날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뜻밖에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막달라 마리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녀의 삶 자체가 부활과 복음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같은 그녀의 삶이 얼마나 밝고 빛났을런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날 곧 안식후 첫날 저녁때에"(19a)
안식후 첫날 저녁이란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막달라 마리아가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며 기쁨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을 시각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본문은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19b)
그들은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마가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두려워서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제자였던 자기들에게도 위해를 가할까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겁을 먹고 있었던지 그들은 `문들을 닫고' 있었다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닫았다'는 동사 kle o는 걸어 잠구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하나의 문만을 잠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중 혹은 삼중으로 된 문들을 그들은 겹겹이 걸어 잠구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공포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믿지 않았을 때, 그 결과는 참혹한 두려움뿐이었습니다.
다락방에 숨어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과 집밖에서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증거하며 다니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비교하여 그려 보십시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란 호칭이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막달라의 창녀였었다는 전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났느냐 아니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아니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이처럼 엄청난 차이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걸어 잠군 것은 단순히 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걸어 잠구었던 것은 실은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마음의 빗장을 치고 있었습니다. 빗장 쳐진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불안과 불신만이 판을 치는 법입니다.
신앙이 무엇이겠습니까? 두려움의 빗장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의심과 불신의 문을 열어 젖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어 두려움과 불안과 불신의 빗장을 걷어내시고 밝은 세상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19c)
마침내 주님께서 제자들의 굳게 닫힌 내적·외적 문들을 친히 열어 주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찾아오시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굳게 닫힌 문들을 열어 달라고 두드리시지를 않았습니다. 손수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문을열어 주지 않는다고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의 한 가운데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나 자신이 어떤 이유로 인해 두려움에 떨며 문을 겹겹이 걸어 잠근채 다락방에 숨어 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내가 문을 열어 준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은 여전히 꽁꽁 닫겨진 채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누군가가 그 방안에 나타난다면 기겁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임에 그것은 귀신임이 분명한 까닭입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굳게 문이 닫혀진 방안에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그들의 두려움은 배가 되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누가복음 24장 37절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표현을 점잖게 해서 `영'이지 사실은 제자들이 `귀신'인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잖아도 겁에 질려 있는 제자들이 갑자기 나타나신 주님을 귀신이라 여겨 질겁을 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귀신의 특성은 몸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귀신이 아니셨습니다. 분명히 손과발, 몸을 그대로 갖고 계셨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일깨워 주심으로써, 제자 가운데 계신 이는 귀신이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직접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문을 두드리시지 않았습니까? 왜 문을 통해 들어오시지 않고 갑자기 나타나시어 제자들을 더더욱 놀라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공연히 제자들을 골려주시기 위함이아니었습니다.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제자들의 심령에 분명히 각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 지금 이 방의 모든 문들이 이중삼중으로 겹겹이 잠겨 있다고 치십시다. 이 방안에 있는 누군가가 방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밖에서 부수지도 않고서 귀신이 아닌 누군가가 이 방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뿐입니다. 20년전, 이 건물이 세워지기 전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때는 이곳이 허허벌판이었습니다. 그 벌판 위에서 이 방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에 섭니다. 그리고 다시오늘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면 문은 잠긴 채 그대로이지만 그는 이 방에 서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실 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귀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분명히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체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두드리시거나 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방에 나타나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인식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 당신을 가리켜 그토록 즐겨 사용하시던 `인자(人子)'―즉 `사람의 아들'이란 호칭을 부활 후에는 다시는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시공을 초월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본문 19절 종반절은, 시공을 초월하여 제자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첫마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d)
여기에서 평강이란 단어 `에이레네'는 히브리말 `샬롬'을 옮긴 것으로 그 뜻은 `평안' `평화' `화평' `평강'이란 의미입니다. `샬롬'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거나 헤어질 때 보편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만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저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귀신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21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a)
주님께서는 또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똑같은 인사말을 연거푸 두 번하는 경우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본문 26절 역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8일 후에도 문들이 걸어 잠긴 방안에 시공을 초월하여 나타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그때에도 역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기를 원하셨던 것이 평안이었음을 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두려움과 불신과 불안에서 벗어나 그들의 심령 속에 참된 평강이 충만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참믿음의사람이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강의 사람이어야 함을 일깨워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평강의 원천은 누구십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데 어떤 상황에선들 어찌 평강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앞에,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우리의 평강을 앗아갈 상황이 어찌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어찌 그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믿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건 평강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두려워 문을 이중 삼중으로 걸어 잠구고서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면서 그들에게 평강을 부어 주셨을 때 그들은 굳게 잠겨 있던 문을 비로소 활짝 열어젖힐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두려움의 문, 불신의 문, 불안의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골방에서 뛰쳐나와 이 평강을, 진리의 평안을, 참생명의 화평을 전하는 평강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떨던 베드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바울이 이 글을 쓸 때에 그는 로마의 감옥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로마의 감옥은 2중 3중으로 철문이 굳게 닫겨져 있었습니다. 지하에 있던 감옥은 암흑천지였습니다. 먹을 것이 제대로 제공될 리도 없었습니다.
모든 여건이 지옥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바울은 평강을 간직한 평강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철문이 겹겹으로 잠겨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암흑천지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기를 찾아와 자기 곁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성자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의 평강을 빼앗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생각해 볼 때에 저와 여러분 중 누가 지금 현재 더 평안하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여러분입니다. 저는 겨우 두 발만을 밑바닥에 맡긴 채 서 있는 반면에 여러분들은 저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의자에 맡기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앉아 있는 것보다 더 평안스런 자세가 있습니다. 아예 방바닥에 드러누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안식을 위하여 잠을 잘 때 서거나 앉아서 자는 경우가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드러누워서 잡니다.
그것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평안한 자세인 까닭입니다. 드러눕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온몸을 남김없이 온전히 방바닥에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을 바닥에 많이 맡기면 맡길수록 우리의 몸은 더 평안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닥을 믿지 못하면 우리를 맡길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이 강단이 곧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면, 저는 지금 두 발을 강단에 맡긴 채 평안스레 서 있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곧 의자가 쓰러질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평안히 앉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지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자는 평안히 누워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바닥에 많이 맡길수록 평안하지만 그것은 바닥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바닥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몸의 평안은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똑 같습니다. 하나님께 많이 맡길수록 우리는 평안을 얻습니다. 작게 맡길수록 우리는 그만큼 고통과 괴롬을 더 겪어야만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만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하나님의 온전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호텔방 옷장 안에 조그만 금고가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귀중한 것은 그 속에 넣어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안에는 언제나 이런 경고문이 놓여 있습니다.
`더 귀중한 것은 호텔 프런트에 있는 금고에 맡기십시오. 호텔 프런트에 맡기지 않은 물품에 대해서는 분실시 책임지지 않습니다.'
맡긴 것만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맡길 수 있는데도 호텔주인을 믿지 못해 귀중품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밤낮 불안해하는 투숙객이 있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잠시 이 세상에 투숙하고 있는 여행객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맡기는 만큼만 평안합니다. 그 분께 맡긴다는 것은 그 분이 결과를 선하게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어떤 상황 속에서건 그 분의 법도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맡길려면 손과 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맡기십시오. 평강의 하나님께서 평강의 삶으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 27)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문을 꼭꼭 닫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에게 평강을 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평강의 주님이시요, 전능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나 자신을 맡기는 자 되게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모든 두려움과 불안과 불신의 빗장을 열어 젖히고, 주님과 더불어 참 평강의 삶을 누리게 해 주시기를 평강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 멘 ―
요한복음 강해 (151) - 믿음이 서고 넘어지는 근거 /요20:19-20/ 김형익 목사
2021-05-09 14:35:38
1. 상황: 우리가 두려움, 실패감, 그리고 좌절감에 사로잡힐 때
오늘 본문은 첫번째 부활절 저녁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전해준 소식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과 세마포 수의만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님의 부활은 그들 모두가 확인한 바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이 전해주는 바에 의하면 여전히 그들은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그들의 주님을 잡아 죽였다면 이제는 자기들의 차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 있었는데 이 모인 곳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그 장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단지 도마를 제외한 열 명의 제자들만이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관계된 많은 제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문을 닫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잠가 두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단지 두려움 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마음은 계속 무거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잡히실 때 다 도망쳐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니 그들의 마음도 결코 실패감이나 좌절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서로가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실패자들의 모임, 좌절감에 사로잡힌 사람들 안에서 무슨 선한 것들이 나올 수 있었겠으며, 그들 중 누가 과연 이런 상황을 감당하고 능히 위로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고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런 상황을 만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실패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아닙니까?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참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2. 믿음이 넘어지는 근거: 자신을 바라보라
이럴 때 우리가 종종 취하게 되는 태도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책에 점점 더 빠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실패와 배신과 부인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면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길이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한 곳에 모여서 자신들을 보고 비판하고 반성하고 아무리 해도 여기에는 믿음이 설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스스로를 보고 반성을 하다가 결국에는 뿔뿔이 헤어지고 말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다가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았고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계속 보았고 자책했습니다. 결국 그가 택한 길은 스스로 목매어 죽는 일이었습니다(마 27:5). 자신을 바라보는 결과는 신앙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책과 죄성을 보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야 하는가? 성경은 자신을 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위한 준비일 뿐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신앙은 서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느 때라도 자신을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하여 거기서 끝난다면 신앙은 세워지는 대신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일이 정직하게 일어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는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의 구원받은 증거, 거듭난 증거를 찾아보려고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때로는 권장이 되고 바람직한 것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오직’ 이것만을 하느라고 모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여러분 안에서 진정한 확신과 기쁨에 이르게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혹 자신 안에서 거듭난 자녀의 증거와 열매들을 어느 정도 발견했다고 합시다. 내 안에서 발견한 증거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면, 저는 이것이 자신의 내면의 증거로 주님을 대신하는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오직’ 자신만을 바라볼 때 거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어떤 신앙의 증거들을 발견하려는 태도가 확장되면, 우리는 이런 저런 자기 의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읽고 기도하고 교회 봉사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자기 자신 안에서 구원의 증거를 발견하려는 숨겨진 동기에서 행해진다면 사람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오직 자기 의일 뿐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내면적, 외면적 체험으로 주님을 대신하는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믿음을 만들어내지도, 믿음을 세우지도 못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를 마치 내적 성찰의 종교처럼 내적 성찰과 내적 성찰의 방법들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팔렸었습니다. 그런 류의 책들이 기독교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저는 그 위험이 적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신앙은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교인들이 그런 책들에 의해서 신앙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해에 붙잡히게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가령 유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가 가르칠 수 있는 덕목은 자기 성찰과 같은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그 이상의 것을 줄 수 없기 때문이고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점에서 종교들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3. 믿음이 서는 근거: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두려움과 실패감,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 믿음이 무너져내렸던 제자들의 믿음이 다시 서게 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서는 열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이 전해주는대로, 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열쇠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믿음이 서는 근거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데서 세워지지 않습니다. 냉철한 자기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믿음의 유일한 대상인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만 서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 점을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닫고 모여 있던 그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던 제자들 가운데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기록하는데, 제자들이 처음에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습니다(눅 24:37). 말하자면 죽은 자의 혼령이 나타난 것으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져보라는 것은 영이 아니고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고, 특히 손과 발이라고 하심은 못박힌 자리를 확인하라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우린 여기서 주님의 부활하신 몸이 영화롭게 된 몸인데 왜 손발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여전히 가지고 계신가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부활할 때 삶에서 가졌던 상처들이 그대로 남을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 이 손 발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은 영광의 상처요, 당신의 구속하신 백성을 사랑하신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계속해서 주님을 묘사하기를 “일찍이 죽음을 당하신 어린 양”이라고 함으로써 당신의 죽으심을 영광스러운 구속을 위한 죽으심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무 기뻐서 믿지 못했습니다(눅 24:41).”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먹을 것을 달라고 하셔서는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심으로 당신이 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 20절 하반절에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이 분이 바로 십자가에 제물되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구주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일어난 결과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자, 두려움과 실패와 좌절감이 물러나고 그들에게 다시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이들에게 기쁨이 임했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믿었다는 참된 믿음의 열매가 다시 맺어졌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다시 섰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들이 본 것, 이것이 믿음이 회복되고 서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의 논지도 동일합니다.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볼 것을 요구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자기들의 처지, 자기들의 마음 상태만을 뚫어지게 주목하였더라면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사 40:31). 앙망한다는 말은 믿음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새 힘은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인데, 이것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가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달고 누구든지 그것을 보는 자마다 살 것이라고 하셨을 때와 같습니다(민 21:8~9). 불뱀에게 물린 자신들의 상처를 깊이 바라보면 낫게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입니다.
4. 우리는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는가?
제자들에게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그들 모인 자리에 찾아오셔서 당신의 사심을 친히 몸으로 보여주셨고 증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을 보았고 믿었고 그래서 기뻐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들에게 부활하여 살아계시는 구주를 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셨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오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에는 부활하신 몸을 가지고 이런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지만,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님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부활하셨고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이것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에 보면, 이 때에 주님은 구약 성경이 당신 자신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시면서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44~45을 봅시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는 아니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경을 토대로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5:39~4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 성경이 없이,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경 없이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근거 없는 신비주의이며, 이것은 어느 순간에라도 마귀의 미혹함을 받아 넘어질 수 밖에 없는 근거 없는 신앙의 형태입니다.
성경이 중심이 되지 않는 신앙은 앞에서 말한 주관주의로 갈 수 밖에는 없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 안에서 신앙의 근거들을 찾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아십니까? 그리고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왜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는 것입니까?
왜 성경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까? 성경으로 들어가지 않고서 신앙이 생기기를 바라고, 신앙이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거듭나고 회심하기를 열망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성경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정말 신앙이 성장하고 견고해지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성경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그리스도를 연구하고 이해하고 깨닫고 구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그렇게 참된 믿음의 증거들을 결핍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성경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지라도, 정작 성경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시간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볼 수 있는 것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 위해서 한 사람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목회자였던 존 에인절 제임스는 <구원을 열망하는 자들을 위하여>라는 명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증거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속죄의 충분성과 그리스도의 의의 완전성,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오라고 초청하시는 말씀의 보편성을 묵상하십시오.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근거들, 믿음의 정당한 이유를 살펴보십시오. 그렇게 할수록 여러분의 믿음은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믿음이 강화되면 될수록 여러분의 평안은 커질 것입니다.”
5. 주께서 마음을 열어주셔야 한다(눅 24:45).
그렇다면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배울 때 그리스도를 보기 위하여 우리가 유념해야 할 중요한 원리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읽은 말씀이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셨다고 했는데 여기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24:45을 다시 보면,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하지 않고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합니다. 마음을 여는 것, 이것은 여러분의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만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기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하는 일입니다(고후 3:14~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했습니다(고후 3:16). 이것이 중생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이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 없이, 내가 내 지적인 능력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알아보겠다고 하는 정신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조명하여 주셔서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갔을 때 복음을 전하는데 이 때 루디아라는 비단 옷감 장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이 여인이 바울을 통하여 전해진 말씀을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들어갈 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성경 말씀, 우리 주님에 대해서 계시하신 이 말씀을 읽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듯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말씀을 청종하게 하셨듯이, 제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깨닫고 부활하신 주님을 환히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로써 저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성숙해지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대하셔야 합니다.
설교를 듣는 것도 동일한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이 합당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마음을 열어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인용했던 존 에인절 제임스의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그리스도를 연구하고 이해하고 깨닫고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된 신앙의 부재는 이런 태도의 결핍에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만일 제가 설교를 할 때, 늘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에 주목하고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신앙의 어떤 증거들을 발견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하기를 애쓴다면 저는 거짓 교사로 판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주관성에 우리의 믿음의 토대를 두도록 말씀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늘 변하기 쉬운 우리 자신의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고 신실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토대를 두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에, 우리 신앙은 자기 안에서 어떤 근거를 찾는데 골몰하게 된다면 점점 더 혼란스럽고 흔들리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주목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은 너무나도 충분합니다.
나에게 어떤 체험이 부족해서 내가 못 믿는다고 말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풍성하고도 깊고도 충분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정진하십시오. 깊은 체험을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더 견고한 확신의 터를 닦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만일 이것이 부족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수단들을 많이 더하여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여기에 어떤 느낌이 필연적으로 주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제가 다른 기회에 좀 더 상세하게 다루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증거들을 발견하려고 고민하는 대신, 은혜, 마음을 열어주시는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십시오. 읽으십시오. 나아가 그 말씀을 연구하십시오.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씨름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는 정상적인 모든 자리에 참여하십시오. 이것만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사로잡는 두려움과 실패감, 혹은 좌절감들을 극복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기뻐했던 제자들과 같이, 그 참된 믿음의 자리에 서게 되고 그 안에서 견고해지는 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강해 (152) - 교회, 보냄을 받은 사람들 /요20:19-23/ 김형익 목사
2021-05-09 14:39:15
1. 믿음의 두 열매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오신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문안하셨습니다. 이것은 히브리말로 ‘샬롬’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인사입니다. 그러나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인사가 아니라면 성령님께서는 이것을 오늘 본문에 두 번씩이나 기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발을 보이신 후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자 다시 21절에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의미로 주님이 두 번이나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A. 평강(peace, 19, 21)
이 평강은 사실상 아담이 범죄한 후로 모든 인류가 잃어버린 평강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평강은 그 잃어버린 평강을 이제는 소유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 평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평안, 평강, 평화 혹은 화평으로 번역이 됩니다. 성경이 평강을 말할 때 두 가지로 구분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인의 가장 비참한 운명은 그들이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와 공존할 수 없고, 하나님의 공의는 거룩을 향하여 진노를 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1:20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화목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강의 첫번째 의미입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평화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peace with God)을 누리게 된 것을 주님께서 선언하십니다. 두번째 의미의 평강은 이 첫번째 사건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평안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완전한 평안을 말합니다.
똑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는 똑 같은 질의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 의미의 평안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구분하여 말씀하신 것이고(요 14:27) 세상이나 환경이 빼앗아갈 수도 없는 평안이라고(요 16:33)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 평안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평안이기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이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B. 기쁨(20)
주님께서 부활의 저녁에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평안만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불안함을 평안으로, 그리고 그들의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인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뻐하였습니다(눅 24:41).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주님께서는 잡히시기 전,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적어도 기쁨을 주실 것이라고 5번 이상 말씀하셨습니다(요 15:11; 16:20~22,24, 17:13).
그 성취가 아직 온전하지는 않아도 이제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후에 사도 베드로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라고 말했을 때 성도들 안에 온전하게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에도 인용했지만, 로이드존스는 이렇게 이 기쁨을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저녁에 제자들에게 주신 평안과 기쁨은 믿음의 참된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신뢰는 그 사람 안에 평안과 기쁨을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이런 평안과 기쁨을 우리가 누리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의 평안과 기쁨을 살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계신 주님을 참으로 신뢰하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야 하고 믿음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보내심(21; 17:18):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주님께서 이 자리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렇게 당신 자신을 보이시고 평안의 인사를 전하시고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도록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눅 24:45).
그런데 요한복음은 특별히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께서 부활의 저녁에 제자들에게 행하신 일은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신 일, 즉 파송이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두번째 평강을 전하시고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앞에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요한복음 17:18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다루려고 의도적으로 이 구절을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앞에서 평강과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은 파송의 전제조건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과 기쁨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는 보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이 보내심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은 보내심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서 ‘보낸다’는 두 개의 동사가 다른 것이 사용된 것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이 보냄을 받은 것과, 제자들이 보냄을 받은 것이 다르다고 말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억지일 뿐입니다. 그 두 동사의 의미의 차이를 정확하게 짚어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주님께서 17:18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같은 동사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성육신(incarnation)과 동화(identification)입니다.
A. 성육신(Incarnation)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성경은 성육신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사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피조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낮아짐, 비하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같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 낮아짐, 비하, 굴욕을 의미합니다. 살면서 이런 것을 경험하는 것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성공하고 더 이상 이런 낮아짐을 보지 않고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2006년 9월 10일 타임지(TIME)는 <하나님은 당신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시는가(Does God Want You To Be Rich)?>라는 주제를 커버스토리로 다루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Joel Osteen, T.D. Jakes 같은 목회자들은 물론 YES라고 대답했고 이런 ‘부의 복음’은 가짜 복음이라고 비난하는 목회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보통 미국의 소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요?
17%의 사람들은 ‘부의 복음’과 자신이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고, 61%나 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고 응답했고, 31%는 하나님께 돈을 바치면 하나님은 더 많은 돈으로 축복하신다는 것을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믿는다고 응답했습니다.
이 31%는 사실 ‘부의 복음’을 가르치는 미국 오순절 교회의 교인들 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주님의 성육신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살도록 하는 본이 아니라, 우리가 부자가 되도록 가난해지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적인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부요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도리어 성경은 이렇게 낮아지신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을 것을 요구합니다(빌 2:5). 그리고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그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받고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충분히 구약 성경을 통해서 설명해주셨고(눅 24:46)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그들이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 중 누구도 이 날 “아, 우리는 이제 부자가 되겠구나”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선명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이제 점점 그 뜻이 선명해지고 그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낮아지심, 비하, 굴욕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임을 말입니다.
B. 동화(Identification)
동화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시늉이 아니라, 주님은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면서도, 우리가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큰 개념입니다. 주님은 그냥 낮아지셨을 뿐 아니라, 사람이 되셨습니다. 죄인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아셨습니다. 친히 가난을 겪으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경험적으로 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버림 당함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사 죄인들과 같이 되심으로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주님과 같이 보냄을 받는다는 것은 이런 동화를 요구합니다. 이 동화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긍휼(compassion)입니다. 특별히 죄와 그 결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과 절망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같이 절대적 의미에서 성육신과 동화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처럼 보냄을 받는 우리가 낮아짐과 동화를 피할 수 있는 정당한 핑계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피해갈 수 없습니다.
C. ‘세상으로’(요 17:18): 적대적인 세상에 보냄받은 자들이 받을 보상(요 16:33; 마 5:10~12)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21절에서는 ‘세상’이라는 말이 생략되었지만, 17:18에서 주님은 그것을 분명하게 언급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보내셨고, 주님은 우리를 똑같이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유난히 ‘세상’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보편적인 창조세계를 의미합니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할 때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1:10).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대부분의 경우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구조, 인류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1:10 하반절에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는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사단의 세력 아래 있기에 하나님을 대적할 수 밖에 없습니다(12:31; 14:30; 16:11).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사랑해서는 안 될 대상입니다(요일 2:15~16).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하신 것은 멸망받을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요 3:16).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말씀은 바로 그 적대적인 세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1:10), 행위가 악하여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며(3:19),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7:7; 15:18; 17:14)으로 보내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보냄을 받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는 것입니다(16:33).
하지만 주님께서 이미 가르쳐주신 말씀에 비추어볼 때, 이런 환난은 사실 적대적인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 받는 보상의 증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세상에 보냄을 받은 신자의 영광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욕과 핍박과 악한 말을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는 이것이 하늘의 영광을 보장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러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과 승천의 영광으로 들어가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영광을 생각하십시오. 요한복음에서 처음부터 계속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을 왜 영광이라고 말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고난과 십자가는 영광의 시작, 영광의 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3. 성령을 받으라(22):
그런데 문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평안과 기쁨을 회복했으나 이것만으로는 이 보내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22).
이 구절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었던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 실제로 성령을 주신 것인가, 아니면 오순절에 오실 성령님에 대한 것을 상징적으로 약속하신 것인가?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분명히 사도행전 2장에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시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주님께서 행하신 행동과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A. ‘숨을 내쉬시며’(창 2:7; 겔 37:9)
‘숨을 내쉬며’라는 구절이 매우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단 한 번 여기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과 같은 단어가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인 70인경에 두 번 나옵니다. 먼저 창세기 2:7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흙으로 만들어진 생명 없던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산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님께서는 이와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심으로써 분명하게 주님께서 하신 일이 제자들을 이제 영적으로 산자로 만드신 일을 당신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에 근거하여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는 제자들의 중생이 바로 이 시점에 일어났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행하신 일은 구속이 새 창조임을 보여줍니다. 창조 때 행하심과 같이 주님은 십자가 구속 위에서 새 창조를 행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구약 본문은 에스겔 37:9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불어서 살게 하라’는 것이 같은 단어입니다.
여기서도 무수한 마른 뼈들에게 에스겔이 대언할 때에 뼈와 뼈가 서로 맞추어지고 뼈에 힘줄이 붙고 살과 가죽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들이 살지는 못했습니다. 이때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대로,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고 대언하자 뼈들이 곧 살아 일어나 극히 큰 군대를 이루게 되었다는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환상입니다. 소망 없이 죽은 자와 같이 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에 대한 놀라운 예언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바로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존재인 교회에 성령을 주심으로써 그 일을 할 수 있는 산 존재로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없이 그들은 이 사명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교회에 성령 주심을 더 이상 미루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요 7:39).
B. 교회의 권세: 죄용서의 특권이 아니라 죄용서를 선포하는 특권(23)
주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일이 어떤 의미인지는 23절에서 좀 더 드러납니다. 주님은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카톨릭은 주님께서 교회 곧 사제들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주신 것이라고 잘못 해석합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셨다거나,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을 들었던 사도들마저도 사도행전에서 마치 자신들이 죄를 사한다는 느낌이라도 주는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에 대해서 바르게 반응하는 자들을 향하여 죄사함을 선포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누구에게 이 권세를 주셨습니다. 일차적으로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 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주님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엡 2:20). 주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아니라 죄사함을 선포하는 권세를 교회에 주셨습니다. 이것이 합당한 해석입니다.
세상에 보냄을 받은 교회는 성령을 받아 살아난 교회이며, 이 교회는 적대적인 세상에서 능히 복음을 전하고 죄사함을 선포하는 권세를 가진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실 때, 주님께서는 이 세상 속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인 교회를 세우신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라는 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쓰는 것은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 근거 위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주신다는 것을 특별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성령을 받음으로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교회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과 같이, 우리 주님에 의하여 적대적인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정체성입니다. 그 세상은 우리의 불신 가정이기도 하고, 우리의 직장이기도 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낮아짐, 비하, 굴욕을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아파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우리가 당하는 욕, 핍박, 악한 말은 훈장이고 영광의 보증서입니다. 능히 감당하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20세기 최고의 선교찬송시라고 불리는 마가렛 클락슨 여사의 So Send I You 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으로 보냄받은 우리 부르심을 너무나 잘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So send I you” by E. Margaret Clarkson (1915~2008)
(고난을 위하여)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보상 없이 일하라고,
값도, 사랑도, 요청도, 알아줌도 받지 못하고 섬기라고,
비난을 견디고 경멸과 조롱을 당하라고,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나 하나만을 위해 수고하라고.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상처받고 상한 자를 싸매라고,
유리하는 영혼들을 위해
일하고 울고 깨우라고,
지친 세상의 짐을 지라고,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나를 위해 고난받으라고.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랑과 인정에서 굶주린 가슴을 안고
외로이 갈망하는 심령을 향해,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가정도 친척도 친구도 소중한 이도 버리고서
내 사랑 하나만을 알라고.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증오로 굳어진 마음을 향해,
보려고 하지 않아 멀어진 눈을 향해,
비록 피라도 소모하라고,
소모하고 아끼지 말라고,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갈보리를 맛보라고.
(승리를 위하여)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너로 강하여 이기게 하는 은혜로써
지옥과 흑암과 죽음과 죄의 권세를 이기라고.
세상을 이긴 내 이름을 너희에게 주어
내가 이긴 것같이 이기라고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묶여있는 영혼들에게로 가서
진리의 말씀으로 포로들을 자유케 하라고,
죄의 속박을 깨뜨리고 죽음의 족쇄를 풀어주어
잃어버린 자들을 내게 데려오라고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연약한 자들에게 내 힘을 알게 하라고
슬픈 자들에게 나의 기쁨을, 고통받는 자들에게 나의 완전한 평강을 알게 하라고,
내 능력, 내 은혜, 내 임재의 약속을 증거하여
영원한 열매들을 맺으라고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오래 참음으로 내 십자가를 견뎌서
어느 날엔가 십자가를 내려놓고 기쁨으로
“잘 하였도다. 나의 충성된 자여”하는 나의 칭찬을 들으라고
와서 나의 보좌, 나의 나라, 나의 면류관을 상속하라고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그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노라.
예수님의 부활과 제자들의 변화 /요20:19-23/ 송기성 목사
2019-01-19 08:16:11
인도의 수상 네루는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짐을 덜어 주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가 인간을 자극하고 이끌었던 힘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변화는 교회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의 문명과 개인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제자들의 변화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고 유력한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1.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뛰어난 통찰력과 영성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필립 얀시는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 (Finding God In Unexpected Places)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뜻밖의 장소 곧 세상에서, 일터에서, 깨어진 사회 속에서, 일간 신문에서 그리고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틈새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곳은 뜻밖의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모인 집의 문들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숨어 있던 그 집은 뜻밖의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감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그들을 잡으러 올까봐 초긴장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뜻밖의 장소에 찾아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며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 숨어 있었던 제자들은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신 평안과 기쁨이었습니다.
뜻밖의 장소로 친히 찾아 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불안과 두려움으로 고민하며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인종차별이 아주 심했던 조지아 주에는 공동묘지도 백인들의 공동묘지와 흑인들의 공동묘지로 분리되어 있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흑인들의 공동묘지에 백인 한 사람이 묻혀 있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만디(Mandy)라는 흑인 할머니 무덤 옆에 백인이 자기 묘 자리를 삼은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재혼을 하지 않고 흑인인 만디를 가정부로 두었습니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어머니가 없는 아이를 정성껏 키웠습니다. 이 아이는 친 어머니는 없었지만 전혀 사랑에 굶주리지 않고 성장했습니다.
가정부 만디는 매일 아침 이 어린 아들을 깨울 때마다 “Wake-up, God’s mornin’ is come!” , “일어나요. 하나님의 아침이 왔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처음에는 흑인 가정부가 “Good morning has come!” , “좋은 아침이 왔다” 는 말을 잘못 발음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라면서 “God’s morning is come!”, “하나님의 아침이 왔다.” 는 말로 알아 듣게 되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방학이 되어 집에 오면 만디는 언제나 “God’s mornin’ is come!” 하면서 그를 깨웠습니다.
그가 성공해서 국가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을 때 가정부 만디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즉시 내려가서 장례식을 치러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어머니처럼 그를 키워 준 만디의 시신이 묻히는 하관식을 지켜보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내가 죽는다면 나는 만디 여사 곁인 바로 여기에 묻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부활의 날에 그녀가 ‘일어나라, 나의 아이야, 하나님의 아침이 왔구나!’ 라고 다시 말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I like to listen that on Resurrection Day she’ll speak to me again and say, ‘Wake-up, my boy, God’s mornin’ is come!’)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하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4:27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아멘!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신앙을 갖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얻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평안과 기쁨을 얻은 제자들은 더 이상 마음에 근심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아침이 밝아왔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평안과 기쁨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불안과 두려움, 근심과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사명과 성령을 받게 됩니다.
미켈란젤로의 제자 중에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을 많이 그리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고전1:24) 줄 믿습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그 제자에게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을 그리게나. 죽음을 깨뜨리고 승리하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죄와 죽음의 정복자이신 주님을 그리게나” 라며 주님 부활의 신앙과 의미를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뜻밖의 장소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십자가 죽음과 아울러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였습니다 (요20:9) 베드로와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에 가서 무덤이 비어있는 것과 세마포가 놓여 있는 것도 보았지만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요20:10)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희망도 없고 용기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에 그들에게 남겨져 있는 것은 좌절과 절망, 낙심과 낙담 뿐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한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며 사죄의 사명과 성령을 주셨습니다.
2004년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물속에 30분이나 잠겨있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난 이남현 성악가의 이야기입니다. 전신마비 판정을 받고 입원해 있는 동안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에 있는 교회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너무 커서 어머니에게 “이제 교회 안 갈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고 찬양이고 다 하지 마세요!” 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직장 때문에 주말에만 병실에 오시는 아버지께도 “저 이제 하나님 안 믿을 겁니다. 그러니 교회 가자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이야기 끝에 “남현아, 너는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이야.” 라며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 마음이 굳어진 상태였지만, 이 말은 신기하게도 그의 가슴 깊이 박혔습니다. 당시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아버지의 믿음과 말씀대로 휠체어를 타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어깨 밑으로는 신경이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어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로 재채기를 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바퀴달린 성악가’ 라는 이름으로 성악과 찬양을 통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나는 장애인이라서 행복해요’ 라고 할 수 있다며 이남현 성도는 그의 책 <나는 지금이 좋다>에서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나는 제2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나는 지금이 너무나 좋다. 이전에는 이루고 싶었던 일들이 너무너무 많았지만, 지금은 작은 것 한 가지만 이루어 내도 얼마나 감사가 되는지 모른다.
주님을 원망하며 거부했지만 지금은 주님과 무척 친하게 지낸다. 부모님과 더 친밀해져서 좋고,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 좋고, 숨을 쉬며 향기를 맡아 좋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좋고, 노래를 할 수 있어서 정말 좋다. 만약 내가 장애인이 되지 않았다면 작은 것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보고, 듣고, 숨 쉬고, 말 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꿈 꾸는 것의 소중함과 희망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고 이후 나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고, 스스로도 더 노력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좋다.” 아멘!
부활신앙으로 사명과 성령을 받은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20:22-24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멘!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신앙을 갖는 사람들에게 사명과 성령을 받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사명과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결박과 환난을 기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결박과 환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마치기만을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사명과 성령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죽음을 깨뜨리고 승리하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좌절과 절망, 낙심과 낙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변화된 삶으로 성령에 매여 사명을 마치기까지 달려 갈 길을 완주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어느 날 아들에게 “내가 죽거든 장지 문제로 고민하지 말고 아무 데나 묻어 주기 바란다. 나는 바로 하나님께로 가게 될 테니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변화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평안과 기쁨, 사명과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실 주님으로 말미암은 평안과 기쁨, 사명과 성령을 받으셔서 변화된 삶으로 부활의 복음을 증언하며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기를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예수님의 부활과 제자들의 회복 /요20:19-23/ 송기성 목사
2019-05-21 03:04:40
C.S. 루이스는 크리스천의 장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덜 타락하거나 타락한 세상에서 떨어져 살아갈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타락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에게는 또 하나의 큰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타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은 결코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타락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타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첫째가 되고 으뜸이 되기를 추구했으며, 출세와 성공을 선호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대속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타락한 인간이며 비참한 존재인지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겪으면서 이젠 다 끝났다고 좌절했으며, 모든 것을 잃었다고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들은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제자들의 회복, 그것은 오늘 하나님께서 부활주일을 맞아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시는 은혜인 줄 믿습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은 평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내우외환’ 이라는 말이 있지요. 제자들의 사정과 평편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외적인 박해와 환난에 대한 내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 후 첫날 곧 부활주일 저녁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현실을 도피하고 피신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내우외환으로 인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오사 그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요20:19) 라며 평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시지 않고 그들에게 평강을 회복시켜 주시지 않았다면 그들이 겪는 불안과 두려움은 절망과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사람들, 현실을 도피한 채 문들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며 평강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평강을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석창우 화백의 이야기입니다. 195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그는 1984년 전기 안전 점검 중 2만2900볼트의 전기에 감전되어 양쪽 팔과 발가락 두 개를 잃었습니다. 열흘 만에 사경에서 깨어난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걷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1년 6개월 동안의 입원 생활 중에 그는 잃어버렸던 신앙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다’ 는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의수로 서예와 미술을 배워 많은 상을 받은 서예가가 되었으며 화백이 되었습니다. 그는 요즘 성경필사를 하면서 시력이 좋아지고, 통증이 사라졌으며, 말씀이 깨달아지는 기쁨 등 놀라운 경험을 한다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두 개의 발가락은 없어도 두 다리를 남겨 주신 것에 감사하고, 의수 끼우기에 적합할 만큼 팔을 남겨 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이것은 세밀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제 인생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설계하신 겁니다. 팔이 있어 내 마음대로 살아온 30년보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팔 없는 30년이 더 즐겁고 행복합니다.” 아멘!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 평안은 우리를 근심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평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평강과 평안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한 이후의 삶이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기쁘고 행복하다며 감사하시기를 부활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은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지요. 보지 않고는 믿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였을 때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20:25)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과 불신앙, 그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그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요20:18) 라고 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엠마오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의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마28:17).
그래서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요20:20). 결국 그토록 솔직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요20:28) 라며 그의 부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20:29) 라며 그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게 하시며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프랑스의 천재적인 수학자이고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이고 종교사상가인 블레즈 파스칼 (1623-1662) 의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발견을 탐구하던 그는 점차 물질 세계에서 영적 세계의 차원으로 그의 관심을 옮겨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가슴의 뜨거운 불, 확신, 기쁨, 평화 그리고 주님과의 일치감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철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수상록「팡세」에 그의 체험과 확신을 이렇게 고백해놓았습니다.
“은혜의 1654년11월23일 월요일 밤10시30분부터 12시30분까지의 뜨거운 불! 철학자나 과학자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확신! 확신! 가슴으로 느껴지는 기쁨과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며 당신의 하나님, 당신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하나님, 과연 당신의 하나님이심이 분명하다. 온 세계는 잊은 채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알지 못하였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당신을 알았나이다. 이 기쁨, 이 희열, 이 기쁨의 눈물!“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3:12)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은 담대함과 확신을 갖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의심과 불신을 떨쳐버리고 기쁨과 희열이 가득한 복을 받으시기를 부활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은 사명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사명자는 사명을 다하기까지 죽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영혼이 떠나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요19:30) 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사명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마땅히 사명을 다 이루신 예수님의 제자답게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명을 접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등 옛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열정과 충정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며 평강을 주신 후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시며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요20:21-23)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용서의 사명도 회복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그 생명의 숨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성령을 받게 하시며 용서의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그리고 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용서의 사명을 명하셨을까요?
1.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골3:13)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크게 용서하셨는지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가 쉬워집니다.
2. 원한은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욥기5:2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원한을 품고 살면 결국 자멸을 초래하고 맙니다.
3. 나도 앞으로 용서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막11:25)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 것만큼만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존 웨슬리 목사님에게 “나는 그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존 웨슬리 목사님은 그 사람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결코 죄를 짓지 말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용서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실 것이요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4-15)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사명은 용서하고 용납하는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성령을 받아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주시는 성령을 받아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받으며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부활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클레멘트 (Clement) 는 “주님은 우리의 일몰을 일출로 바꾸셨다” 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 세상을 캄캄케 한 일몰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어둠을 사라지게 한 일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제자들의 회복, 그것은 곧 우리의 일몰을 일출로 바꾼 역사적인 사건이며, 체험적인 간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평강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의심을 떨쳐 버리고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만과 분노, 원한과 증오를 떨쳐 버리고 사랑과 용서의 사명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회복의 은총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인생의 일몰이 일출로 바꾸어지시기를 부활하신 우리 주님 예수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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