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사랑함을 알리라 /계3:7-13/ 유기성목사
2018-04-06 04:40:19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이 말씀하신다. 8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보아라, 내가 네 앞에 문을 하나 열어 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다.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9 보아라, 내가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네 손에 맡기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10 인내하라는 내 말을 네가 지켰으니, 온 세상에 닥쳐올 시험을 받을 때에, 나도 너를 지켜 주겠다. 시험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닥치는 것이다. 11 내가 곧 가겠다. 너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서,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12 이기는 사람은,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 그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또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의 몸에 써 두겠다. 13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한마디로 설명 드리면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교회들의 이름으로 택해진 교회입니다. 아무리 좋은 교회도 40~50년 동안 명성을 유지하기가 힘든데 2,000년이 넘도록 좋은 교회라고 기억된다는 것은 황홀한 일이지 않습니까?
도대체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빌라델비아 교회를 묵상하다가 몇 년 전 이태리에 갔을 때 방문했던 발데제 교회가 생각났습니다. 그 때, 프랜시스와 왈도의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었는데, 프랜시스와 왈도는 12세기 동시대 사람이었고, 똑같이 부자였었고, 둘 다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당시의 타락한 교회와 신앙을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두 사람 다 교황에게 가서 자신들이 깨달은 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청원하였으나, 프랜시스는 받아들여져 나중에 성인으로 추대되기까지 했지만 왈도는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왈도를 따르는 무리들은 상상할 수 없는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왈도가 이단으로 낙인찍힌 결정적인 이유는 성경을 읽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앗시시에서 본 프랜시스는 심각하게 우상화되어 있었습니다. ‘청빈’, ‘순결’, ‘순명’을 절대 규칙으로,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라는 소명을 감당하였던 프랜시스는 ‘예수님의 화신’으로 떠받들어졌습니다.
프랜시스가 죽을 때, 큰 성당을 짓지 말라는 유언장까지 남겼는데, 교황이 유언장을 불태우고 프랜시스가 죽었던 조그마한 성당을 보존하기 위해 그 위에 엄청나고 화려한 성당을 지었습니다. 프랜시스의 유해를 보존한 성 프랜시스 성당은 규모가 엄청나고 화려했는데, ‘청빈’의 사람을 기리기 위하여 엄청난 부를 긁어모으는 이 모순을 무엇이라 설명해야할지 난감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왈도를 따르는 무리들로 인하여 시작된 발데제 교회 예배당은 너무나 단순하고 소박하여 오히려 감동이었습니다. 발데제 교회 어디에도 왈도의 초상화나 동상이 보이지 않았고 주 예수님과 말씀만 드러나 있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제 손을 끌고 성 프랜시스 대성당과 발데제 교회를 보여주시면서 말씀하는 것 같았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공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님만 바라보라.’,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하지 말고 성경 말씀을 생명처럼 중요하게 여기라.’, ‘말씀대로 살고 전할 때, 고난이 닥치는 것은 영광이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빌라델비아 교회가 발데제 교회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문을 하나 열어 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8 ... 보아라, 내가 네 앞에 문을 하나 열어 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귀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제가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 정말 부러운 것은, 주님께서 :9에서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내가 사랑하는 교회이다.” 라며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황홀한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도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제겐 그런 갈망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욕심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갈망을 가지라고 이 편지를 읽게 하신 것이지, 부러워만 하라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신 것은 빌라델비아 교회도 주님을 사랑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이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비밀로 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이런 갈망을 가지는 것은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니 당연히 주님도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저 사랑하시지요?” 질문해 보십시오. “아니.” 하는 대답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게 단정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아니.” 라고 대답할 사람은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라고 불렀다면 그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심겨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말했습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아니, 그런 애매한 말 말고 좀 더 확실한, 조금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하시는 분이 있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조금만 주님을 바라보고 살면 누구나 주님과 사랑에 빠져들게 됩니다.
지난 주 중학생 한 명이 제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그 학생은 미국 유학을 가면서 제게 기도해주기를 바라 찾아온 학생입니다.
그는 부모를 떠나 유학을 가서 혼자 지내게 되면서 제 설교를 듣고 영성일기를 쓰게 된 모양입니다.
그의 메일을 몇 부분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목사님의 영성일기에 관한 설교를 듣고 예수님과의 하루는 어땠는지,, 주님께 고백하고 싶은 점들을 적기 시작했는데. 정말 목사님 말씀대로 광야같이 외로운 유학생활에, 자기 전 주님께 쓰는 일기가 제 삶을 이끌어줄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되어가고 있어요! 사랑스러운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도 깨닫게 되구요, 정말 하루 동안 주님을 생각하는 횟수가 확연히 늘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사명을 가지고 유학생활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유학할 그곳이 저의 예배지라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께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을까 하다가 ‘주님의 생명을 가지고 나아가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졌습니다. 저는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아직 저를 내려놓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젠 고백할 수 있어요. 나는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 목사님,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주님 덕분에 삶이 변하는 것을 느끼게 되구요, 사랑을 결심하게 됩니다.
감사드립니다!! 항상 파이팅 하세요!!! 목사님을 응원합니다.
중학교 2학년 학생도 주님을 바라보니 주님과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교회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행위를 다 보셨기 때문입니다.
:8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였는데, 유대인으로부터 무서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모른다 하지 않았던 것을 주님이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도 “네 행위를 안다”는 똑같은 말씀을 들었지만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입니까?
:10에서 “인내하라”는 주의 말씀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소중한 신앙의 열매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 받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란과 유혹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인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주님은 :10에서 계속하여 빌라델비아 교회에 앞으로 ‘온 세상에 닥쳐올 시험’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가 “인내하라.”는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주님은 또 :11에서는 “내가 곧 가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환란을 당하고 있던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말할 수 없이 큰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랑하는 주님을 곧 만날 생각을 하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다른 것은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너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서,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은, 능력은 작고 환란은 큰 것입니다. 그런 중에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이것이 무슨 능력이고 복이겠습니까? 조롱거리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었습니다.
이 인내는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사랑하니 말씀을 붙잡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능력이 작아도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고난 중에도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간 열렸던 다시 복음 앞에 집회 셋째 날, 러시아 김요단 선교사님이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는 일을 앞에 두고 ‘우리는 무능력으로 충만하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말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무능력으로 충만하단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았습니다. 무능력으로 충만한 사만이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능력으로 충만한 사람을 택하십니다. 그러니 능력이 작은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쉽습니다.
사 49:6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크시다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모든 일이 다 쉽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란이 와도 인내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주님과 사랑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이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환란이 아니라 성공하고도 망하는 자가 됩니다.
성공은 산의 정상과 같아서 오래 누리지 못하고 순간에 지나갑니다. 성공하고 난 다음, 주님의 임재를 훈련하기 어렵습니다. 너무 바쁩니다. 게다가 성공에 취하여 정신을 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성공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회로 사용하다가 어느덧 내려오게 됩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두려움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이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맡긴 자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병장 출신과 사단장 출신에게 군 문제에 대하여 물으시는 것이 다릅니다. 일반 사람과 법관 검사에게 사회 불의에 대하여 물으시는 것이 다릅니다. 많은 사람이 성공했던 그 시절 하나님을 위하여 제대로 충성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후회하고 괴로워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빠지는 함정이 교회를 성장시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도 한동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잘못된 생각인 줄도 몰랐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속히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예배당 크기나 교인 수나 좋은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능력을 추구하고 자신의 능력에 작다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사람은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비록 능력은 작을지라도 주를 사랑하기에 주님의 말씀에 ‘아멘’하며 인내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교인들은,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목회하며 설교하기를 원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죽을 각오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죽임을 당했습니까? 왜 야고보와 스데반이 죽임을 당했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만 살려 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죽음도 각오하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살면 세상이 우리가 예수 믿는 것에 대하여 핍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 하면 적대적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아니고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 받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 앞에서 책망 한마디 듣지 않고 칭찬만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과 사랑에 빠지면 책망 받을 일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게 됩니다.
주위 사람들이 우리가 일상의 어떤 형편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인내하며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을 본다면 주님이 친히 “내가 저를 사랑한다.”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받게 되는 성찬은 주님과 포옹하는 시간, 입맞춤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또 주님의 사랑을 받는 순간입니다. 우리에게 성찬 받을 믿음이 있다면 주님이 친히 “내가 저를 사랑한다.” 선포하시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12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12 이기는 사람은,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 그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또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의 몸에 써 두겠다.
첫째,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결코 다시 내쫓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도성(새 예루살렘)의 이름, 예수님의 새 이름을 기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너를 사랑함을 알리라.” 하신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도 주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함을 알리라” 하시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때 우리 교회 또한 주님께서 “내가 이 교회를 사랑한다.” 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찬양 “어찌하여야”
그 피로 날 구하사 죄에서 건지셨네 하나님께 영광 날 사랑하신 주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3:7-13/ 오주철목사
2018-03-29 02:04:53
오늘 우리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가운데 여섯 번째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주님의 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빌라델비아’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필리아’와 ‘형제’라는 ‘아델포스’가 합성된 단어로서 ‘형제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사데로부터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버가모 왕국에서 중간 지점에 속해 있었던 도시로서 그 당시 헬라의 언어와 풍습과 문화를 퍼뜨렸던 헬라문명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의 지리적 위치는 사실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이 도시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이었습니다. 주후 17년에는 지진이 일어나 사데와 빌라델비아를 포함한 열두 도시를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델비아는 지진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위험 가운데 노출되어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두 차례의 큰 지진으로 도시의 건물들은 안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열악해져 갔습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도시의 북쪽에 화산 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비옥한 그 평야에서 재배되는 포도와 그로 빚은 포도주가 매우 유명했습니다. 도시에 살던 주민들은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이주하여 포도 농사에 주력했습니다.
이러한 도시의 특징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 도시를 지키는 수호신은 ‘술의 신’으로 불리는 ‘디오니소스’였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의 다른 지역이 그러했듯이 빌라델비아도 역시 수많은 헬라 신전과 많은 우상숭배가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빌라델비아는 ‘작은 아테네’로 불리웠는데, 이것은 빌라델비아 지역의 영적 특성을 능히 가늠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도시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어떤 과정을 거쳐서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초기 기독교 역사가인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주후 100에서 160년경 ‘암미아’라는 여 선지자의 탁월한 헌신으로 교회가 왕성하게 발전했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방금 말씀을 드렸듯이 두 차례의 큰 지진으로 빌라델비아 교회가 직면했던 상황은 매우 척박했습니다. 거기에다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는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두고 죽이는 것을 선민의 사명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 핍박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피비린내 나는 순교의 칼날 앞에 맞서야 하는 고통을 매일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척박한 환경에 놓여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본문 7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여기에 보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고 하시면서 ‘다윗의 열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윗의 열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본문인 이사야 22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22장 15절과 1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었도다.”
여기에 보면, 국고와 왕궁을 맡은 ‘셉나’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히스기야가 통치하던 때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최고의 권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아주 심각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어려웠던 시기에 16절에 보면 “너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 판국에 자기를 위하여 크고 화려한 무덤을 만들고, 자기를 위해 처소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자기 살 길만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백성들이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울 때 자기만 살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해야 합니다. 같이 살아 갈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만을 위해 묘실을 팠습니다. 자기 살 길을 다 만들어 놓고, 죽고 난 후까지를 준비했습니다.
셉나가 이처럼 호화로운 묘실과 집을 짓기 위해서는 많은 재물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와 왕궁의 살림을 맡았던 그는 재물을 횡령하거나 유용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나라 전체를 부패하게 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
공처럼 둥글게 말아서 광막한 곳에 던져버리신다고 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네 머리채를 잡아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렸다가 놓아버릴 것이다. 그러면 공처럼 날아가 시야에서 사라지리라. 아무도 모르는 곳까지 날아가 떨어져서 거기서 죽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셉나와 같은 지도자가 일어나면 안 됩니다. 교회에도 셉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으면 안 됩니다. 교회가 어려운데 자기만 살겠다고 나간다면 셉나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공처럼 돌돌 말아 가지고 광막한 곳으로 날려버리신다고 하십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아주 멀리 날려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대조적으로 20절부터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될 것이며, 내가 또 다윗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요한계시록의 본문과 똑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충성스러운 신하 엘리아김을 세우는데 그를 가리켜 ‘내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로 순종하는 종입니다. 그 종을 세우셔서 전권을 맡기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 집의 열쇠를 그에게 맡겨서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도록 만드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이사야 22장의 말씀을 머릿속에 두면서 요한계시록 3장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생각하면서 말씀을 하실 때, 7절에 보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 열면 닫을 사람이 없는 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을 하시는데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열쇠’는 주님의 주권을 상징합니다. 우리 주님은 인생의 천국과 지옥 결정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 결정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일단 열어 놓으면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분이 닫아놓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진실하시고 거룩하신 주님의 결정은 결코 변개됨이 없습니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셨다고 했습니다. 열린 문을 두시고 열어 놓으셨기 때문에 능히 닫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열린 문’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위해서 성경의 몇 구절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14장 2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문이 열려야 합니다. 이 문이 열려져야 복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열린 문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고린도전서 16장 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여기에 보면, 복음을 증거할 때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력이 나타나서 문이 활짝 열렸다고 했습니다. 결국 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열린 문’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입니다.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문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고 믿을 때 대적하는 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나타나는 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복된 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할 때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기 때문입니다. 전도할 수 있는 문도 여시고, 전도할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도 여십니다. 아무리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활짝 열어놓으시기 때문에 효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열린 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놓으셨다는 것은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대적을 물리치는 것은 전도 사역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일과 사역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놓으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문을 활짝 열어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고,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열린 문을 주셔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문을 열어주시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이 귀한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여기에는 책망이 전혀 없는 교회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사데 교회는 칭찬은 없고 강한 책망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 일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칭찬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문을 열어 놓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칭찬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부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함께 주님으로부터 칭찬의 말씀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내외적으로 많은 핍박과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빌라델비아는 당시에 매우 가난한 도시였습니다.
주후 17년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인해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지진의 충격이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지진들이 충만한 빌라델비아시’라는 별칭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요한 사람들은 도시 밖으로 나가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폐허와 같은 도시 안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본문 9절에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라고 했습니다. 사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선민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모이는 곳을 ‘유대인들의 회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모임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사탄의 회당, 유대인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빌라델비아에는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따라 살기가 참으로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역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세나 경제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말씀을 충성되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지킨 믿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이 과거뿐 아니라 현재도 계속해서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의 말씀을 지키며 그분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한 상황을 보면서 사데 교회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데 교회는 큰 능력을 가진 교회로서 매우 부유했습니다. 외부로부터 어떤 공격도 받지 않았던 평온한 교회였습니다. 외적인 모습을 보면 사데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부러움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한 마디의 칭찬도 받지 못하고 오직 책망만 받았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참으로 말씀을 지키기가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작은 능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배반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신 이유입니다.
두 번째로,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칭찬은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여기에서 ‘인내의 말씀’이란 인내하면서 끝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런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는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 고난이 있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참지 않으면 결코 지킬 수 없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말씀을 듣고 받는 이 순간에는 은혜를 받고 좋아하지만 이 말씀을 들고 삶의 현장으로 가보십시오. 현장으로 가서 말씀을 지킬 때 그곳에서 인내가 필요 없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을 지키려면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고난을 참아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 인내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정말로 여러분의 인생에 넓은 문을 활짝 열어주시기를 원하신다면 주의 말씀을 지켜보십시오. 형편이 어렵더라도 한 번 고난을 각오하고 말씀을 지켜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지키다가 고난이 올 때 제발 도망가지 마십시오. 지금의 처한 상황은 어렵고, 형편은 참으로 힘들지만 작은 능력이라도 고난 중에서 인내하면서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 그가 참된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 그리고 참 신자를 주님께서 보시고 그냥 두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참 신자를 정말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앞에 열린 문을 열어주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 어렵다고 해서 도망가지 말고 그 자리에 계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체험해 보십시오. 내 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 역사하시게 해야 합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 나의 인내의 말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 인내의 말씀을 지키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믿음을 배신하고 쉬운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발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조금 어렵다고 해서 넓은 길로 가버리면 그의 결국은 영원한 멸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작은 능력을 가지고 인내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의미에서 신실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 인내의 말씀을 지키십시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소수가 있어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들로 인하여 그 교회를 귀하게 보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 능력을 가지고 인내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여기에 보면,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인내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현재 고난을 당하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위로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장차 주님의 재림에 직면에서 임할 대환난은 너무도 극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천국 구원이 이미 약속되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주님이 속히 오시면 올수록 그들이 당하는 현재의 고난의 기간은 줄어들게 됩니다.
게다가 대환난의 때에 불신자들이 당하게 될 고난에 비하면 현재의 고난은 아주 미약할 것입니다. 때문에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고통당하는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인내의 말씀을 지켰는데 이와 같은 좋은 신앙의 상태를 계속해서 붙잡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면류관은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주시는 면류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한 부분은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시작은 잘 하지만 끝은 잘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처음에는 시작을 잘 합니다. 그러나 도중에 어려운 일을 당하면 포기하고 끝까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며 주의 말씀을 지키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끝까지 굳게 잡아서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시면서 이기는 자에게 네 가지 약속을 보장해 주십니다.
첫 번째는, 사랑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을 증거로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박해하고 훼방하던 유대인들 중에 몇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을 증거로 확실하게 보여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다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인내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는 자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그것을 증거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누가 보아도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작은 능력 가운데서도 인내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시면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증거를 세상 사람들에게 징표로 보여주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십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대환난이 있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환난은 그런 대환난이 아니라 로마 세상 전체에 임하는 환난을 말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에서는 ‘때를’이라고 했지만 원어에서는 ‘때로부터’라고 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때로부터’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난이나 시련‘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환난이나 시련 ‘가운데서의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것은 로마의 대 박해가 일어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 박해를 아예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운데서의 보호’하신다고 하면, 시험은 당하지만 그 시험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하지만 그 시험 속에서도 결국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을 해석할 때 ‘가운데서의 보호’로 해석을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로마의 대 박해 속으로 말려 들어가 박해를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에 교회와 성도들은 승리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실 때 우리들을 질병에 들지 않게 하시는 은혜도 주실 때가 있지만, 우리로 질병에 들게 하지만 그 질병을 통해서 유익을 보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는 은혜도 있지만,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유익을 보게 하시는 은혜도 있습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는 고백처럼 고난 속에서 유익을 보게 하는 방식으로 보호해 주시는 역사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속에서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찬송할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해 주십니다.
본문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특별히 이 말씀은 당시 빌라델비아가 당한 상황을 이해하시면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드린 것처럼 주후 17년과 60년에 빌라델비아에는 대지진과 이후에 계속된 여진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빌라델비아 주민들은 대부분 도시를 떠나 성벽 밖에다 작은 집이나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진은 여러 곳에 세워진 신전들도 무너뜨렸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전을 떠받치고 있던 기둥들은 무너지지 않고 곳곳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이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었던 그들에게 이기는 자는 성전의 기둥이 되어 결코 다시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분명한 약속이었겠습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전’이란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고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의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기둥’이란 어떤 건물이나 단체를 떠받치고 있는 중추적인 요소로서 일반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중요성과 흔들리지 않는 견고성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이 약속은 천국에서 승리한 자의 위치가 기둥처럼 귀하고 보배로울 것인데, 그것이 영원토록 부동하고 불변할 것이라는 약속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둥은 건물 안에 있어서 건물 전체를 떠받치게 됩니다. 그래서 기둥은 중요합니다. 기둥이 무너지면 건물은 다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기둥 같은 존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인내의 말씀을 지키며 승리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기지 못하면 그는 천국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둥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침을 받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이기면 이후에 천국에 갔을 때 바깥이 아니고 안쪽에서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뵙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광의 차등’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에도 상급의 차등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평생을 헌신하며 충성한 사람과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가 받는 상급이 똑같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공평한 것입니다. 해의 영광이 따로 있고, 달의 영광이 따로 있고, 별의 영광이 따로 있는 것처럼 주님 나라에 갔을 때 영광의 차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능력을 가지고 인내의 말씀을 지켜 이기심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기둥 같은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는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네 번째는, 이기는 자에게 영광스런 이름들을 기록하신다고 하십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세 개의 영광스러운 이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성도에게 새겨지는 것은 분명히 그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뜻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자 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소유된 자임을 공식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성, 곧 새 예루살렘의 이름입니다. 이것은 그 이름이 새겨지는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공식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통치와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가 있는 우리가 사모하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 천국의 시민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새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주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이름입니다. 이렇게 신비한 이름을 성도에게 준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주권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자 위에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삼중적으로 성도의 신분과 지위와 소속을 보장하고 보증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에서 강조하는 말씀은 작은 능력을 가졌지만 끝까지 말씀을 지키며 주님께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내세울 것이 없는 작은 교회에 불과했습니다. 주변에 악한 세력을 대처할만한 능력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작은 능력이라는 말이 이 교회의 형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모든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꿈꾸고 선망하는 대형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작고 영향력도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떤 교회보다 강했습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켰으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비록 작은 능력,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인내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신분과 지위와 소속이 보장되는 생명의 이름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기둥 같은 존재로서의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빌라델피아 교회 /계3:7-13/ 이동원목사
2014-12-05 04:25:37
190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 제1차 대전과 2차 대전사이를 살면서 당시의 시대정신을 매료하던 맑스주의(Marxism)에 빠져 처음에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가 이내 이상과 현실의 엄청난 괴리를 경험하고 공산당을 탈당하고 다음에는 다시 독일의 히틀러 추종자가 됩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그는 또다시 히틀러의 광신적이고 전제적인 획일주의의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뉴질랜드로 망명한후 인류 근세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책 한권을 써내게 됩니다.
이 저서의 이름이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이라는 책이고 저자가 유명한 칼 포퍼(Karl Popper,1902-1994)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의 어떤 주장이 과학적인 타당성을 지니려면 “내 주장이 틀릴수도 있다”는 소위 사고의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내 생각이 틀릴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방성이 과학을 발전시키고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의 사회가 어느 정도 열린 사회가 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 우리 한국인에게는 ‘열려 있다’는 말이 가장 낯익게 다가온 것이 아마도 ‘열린 음악회’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후 교회 예배에서도 ‘열린 예배’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교회명중에서도 ‘열린 교회’ ‘열린 문 교회’라는 간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상호중에도 ‘열린 식당',‘열린 공간‘등의 명칭등이 등장했고 ’열린 학교‘ ’열린 교육‘이 주창되고 심지어 정당명에도 ’열린 우리당‘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열린 사회‘는 새로운 사회의 통념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데올로기를 뜻하는 말에도 ’열린 진보‘ ’열린 보수‘라는 단어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열려 있다'는 말은 개방성을 뜻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경우는 긍정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세 역사에는 대원군당시 그의 힘찬 기백과 신념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문을 닫는 '쇄국 정책'을 선택함으로 돌이킬 수 없는 국익의 손실을 초래하게 된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1세기의 소아시아에 존재하던 한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던 사도 요한이 이 교회에게 주께서 그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열린 문, 즉 열린 기회에 효과적으로 응답함으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열린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이런 1세기의 교회를 통하여 21세기의 우리 교회가 어떻게 열린 교회가 되어 이 시대에 우리 교회에 맡기시는 미숀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교회가 바로 빌라델피아 교회였던 것입니다. 사데에서 동남쪽으로 40km지점에 위치한 빌라델피아 도시에 위치한 교회였습니다.
1. 빌라델피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
7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여기서 그리스도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이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타트(John Sttot)는 여기 다윗의 열쇠는 메시아되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메시아되신 주님이 이 권세의 열쇠를 가지고 교회앞에 문을 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문을 열수도 닫을수도 있는 권위를 갖고 계시는데 그분이 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그가 활짝 기회의 문을 여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수 있는 기회의 문을 그리고 사랑할수 있는 기회의 문을 여신 것입니다. 그는 한번 문을 여시면 우리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십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문제는 이 기회앞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느냐는 것입니다.
2. 빌라델피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
1세기의 빌라델피아 교회는 이런 열린 기회앞에 효율적으로 응답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다시 8절의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함께 책망이 없었던 두 교회중 하나였습니다. 도대체 어떤 교회이었기에 책망없이 오직 칭찬만을 들을수 있었을까요? 서머나 교회는 박해받는 교회였습니다. 주님 때문에 박해받고 순교하는 이들에게 주께서 무슨 책망을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빌라델피아 교회의 경우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그 원인이 선교명령의 순종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청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심정을 감동시키는 시키는 두가지 사건은 순교와 선교라고 할 것입니다. 내가 아직 순교하지 않고 살아있거든 선교하십시오.
다시 8절을 살펴보면 빌라델피아 교회는 규모상으로는 작은 교회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교회의 사이즈가 아니라 순종의 여부입니다. 선교 명령에 순종하느냐는 것입니다
. 주님의 선교명령은 다시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수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전도의 명령이고, 또 하나는 사랑의 실천명령입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이 두가지 명령에 지속적으로 순종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실 빌라델피아 교회라는 명칭도 그래서 지어졌는지도 모릅니다.
빌라델피아라는 말은 본래 필로스(사랑)와 아델포스(형제)라는 두 단어의 결합입니다. 본래 버가모 왕국시대 이 지역의 통치자였던 유메네스 2세(Eumenes)는 전장에 나갈때마다 정치와 군사 지식이 탁월했던 동생 앗탈로스 2세(Attalos 11,BC159-138)에게 내정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민의 지지도가 높았고 인기가 많았던 그를 로마정부가 이용할 목적으로 그에게 왕위에 오르도록 충동했지만 앗탈로스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형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르쳐 ‘앗탈로스의 형제애“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빌라델피아라는 말의 유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터키어로 ”알라세히르“(Alasehir)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도시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놀라운 형제사랑을 나누며 동시에 이런 사랑에 목말라하던 도시인들에게 열심히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이었는지요! 얼마나 본받을 교회인지요!
3. 빌라델피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약속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약속은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으로 나눌수가 있습니다. 소극적인 약속은 9절에 의하면 빌라델피아 교인들을 괴롭히던 유대인들 가운데 몇 사람이 회심하고 돌아올 것(얼마나 격려가 되었겠는가!)이며 10절에 의하면 그들에게 장차 다가올 환난과 박해의 시간에 주께서 그들을 특별히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인 약속으로는 12절에 의하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둥같은 존재로 공동체로 쓰임받다가 주앞에 기둥처럼 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이 필라델피아 교회가 있던 알세히르의 도시 현장에 가면 6세기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사도 요한 교회에 6개(밖으로 3개가 드러남)의 거대한 돌기둥들만이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1절 말씀은 빌라델피아 교회 성도들이 이 상급을 잃지 않도록 면류관을 받도록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아야 하리라고 권면합니다.
4. 빌라델피아 교회에서 배워야 할 웰빙교회의 비전
21세기의 교회가 1세기의 칭찬받은 빌라델피아 교회에서 배워야 할 웰빙교회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 교회가 빌라델피아 교회처럼 열린 교회가 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가지 해답을 얻을수 있습니다.
1) 불신자를 향한 전도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교회앞에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문이 닫힐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고 지금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기회인 것입니다. 지금 열려진 기회를 잃지 말고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할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옛날 그리스 시라큐스라는 도시에 동상이 서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동상인데 앞머리는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 동상인데 어깨가 아닌 발에 날개를 달고 있었다고 합니다. 동상아래는 이런 글귀가 새겨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리시퍼스. 그대의 이름은?-기회. 그대는 왜 날개를 발에 달고 있는가?-더 빨리 나르기 위하여. 그대의 앞머리는 무성한 이유는?
-내가 올때 사람들이 쉽게 붙잡도록. 그대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기 어렵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기회의 속성인 것입니다. 전도에 관한 한 결코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그리고 모든 타당한 열린 방법으로 전도하십시오.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가 배로 여행하다가 어느날 탬버린을 치며 우수꽝스런 모습으로 배의 갑판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저명한 영국의 작가요 시인인 키플링(Rudyard Kipling)이 “아니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천박한 악기로 소리를 내며 걸어오십니까?고 빈정거리자 그는 유명한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이여, 만일 내가 물구나무를 서서 두발로 탬버린을 두드려 한 생명이라고 구원할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오"
저는 이것이 바로 열린 그리스도인, 열린 지도자. 열린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최근에 싱가포에서 셀 교회를 하는 페이스 공동체 침례교회(Faith Community Baptist Church) 로렌스 콩(Lawrence Khong)목사는 복음 마술을 배워 집회에서 마술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그의 전도 방법이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비판에 직면하자 대답을 요청하는 스탭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비판은 기꺼이 참조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판에 대답할만큼 제게 한가한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죽어가는 저 영혼들에게 저는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도 방법론에 대한 찬반을 떠나 그의 불신자들을 향한 그의 열려있는 마음이 소중하지 않습니까? 건강한 성도는 열린 성도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열린 교회입니다.
2) 먼저 성도들 상호간에 마음의 문이 열려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이 교회 밖 세상에 나아가 담대하게 전도하려면 먼저 우리들 그리스도인 공동체안에 세상에서 경험될수 없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작은 힘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안에 사랑이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불신자들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묘사가운데 제일 많이 출현하는 증언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비두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Pliny the Younger,62-113)는 로마의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서“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무리들은 목숨을 걸고 서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랑이 어떻게 21세기 교회안에서 다시 한번 나누어지고 실천될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가 만일 주일 예배만을 의지하는 공동체라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12명 미만의 목장 교회에 모든 성도가 반드시 소속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큰 교회이면서도 빌라델피아 교회처럼 작은 교회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이 작은 교회의 모임에서 당신의 마음을 여십시오. 당시의 삶의 고통과 아픔을 말하십시오. 그리고 이웃들의 고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거기서 서로에 대한 진실한 이해가 시작될 것입니다. 사랑이 시작될 것입니다. 치유가 경험될 것입니다.
그 열린 마음의 자리에 성령이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한 교회를 경험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한줌 밖에 안되는 목장의 식구들인 우리가 우리의 작은 능력으로 선교와 사랑의 명령에 순종을 결단하는 그 곳,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21세기의 빌라델피아 교회가 태어남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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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9/ 이런 교회, 이런 신자 되게 하소서! /계3:7-13
2020-01-21 05:50:21
1. 사랑의 도시에 세워진 교회
오늘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서 여섯 번째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빌라델비아는 사데 동남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원 도시로서 교통의 중심지였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또 산업발달로 富를 축적한 도시였을 뿐 아니라, “작은 아테네”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문화가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이러한 표현을 오늘 이전의 도시들에 관한 설명 때에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비롯한 초대 교회 성도들이 당시 사회에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거점인 도시에 교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는 리디아(Lydia) 왕국 시대에는 “칼라테부스(Callatebus)”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주전 159년부터 138년까지는 페르가뭄(pergamum, 버가모)의 앗탈루스(Attalus) 2세에 의해 ‘빌라델비아’라고 명명되었습니다.
① 그런데 이 빌라델비아라는 이름의 뜻이 아주 깊습니다.
빌라델피아는 헬라어 필로스(φιλος)와 아델포스(αδελψος)의 합성어입니다. 필로스는 ‘사랑’이라는 뜻이고 아델포스는 ‘형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필라델피아는 ‘형제사랑’이라는 뜻이지요. 이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주전 2세기, 버가모의 왕 ‘유메네스’에게는 ‘아탈루스’라는 동생이 있었는데요. 이 아탈루스는 왕인 형을 너무나 사랑하고 또 왕에게 충성함으로서 ‘필라델푸스(Philadelphus)’, 즉 ‘형제 사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유메네스 왕이 암살당해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아탈루스는 도시를 새롭게 재건하여 그 이름을 ‘빌라델비아’, 즉‘형제 사랑’이라고 지어 형에게 獻呈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죽었다던 형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아탈루스는 왕위를 형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때 아탈루스의 부하들은 형을 죽이고 왕위를 지키라고 권했지만 그는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어느 시대고 명예와 욕심에 사로잡혀서 부모고,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내고, 형제고, 친구고 간에 싸우고 죽이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아마도 아탈루스에게 형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빌라델비아는 피바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탈루스의 사랑은 대단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가 세운 빌라데비아라는 도시는 그런 깊은 의미를 가진 도시였습니다.
② 그런가 하면 빌라델비아는 포도 농사와 포도주 생산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빌라델비아의 최고신은 술의 신인 디오니시우스였지요.
이것은 빌라데비아가 밤만 되면 도시 전체가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합니다.
③ 세 번째로 빌라델비아는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도시였습니다. 아주 왕성한 지진대 위에 세워진 빌라델비아는 일곱 번의 큰 지진으로 도시가 완전 폐허가 되었고, 특히 주후 17년과 23년에는 엄청난 지진으로 도시가 거의 완전 파괴되었으며, 그것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신도시로 다시 세울 정도였습니다.
이런 배경과 역사를 가진 빌라델비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언제,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암미아(Ammia)’라는 분이 세웠다고 전해지며, 주후 100년에서 160년경까지 크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2. 주님이 사랑하시는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7).” 여기에 표현된 예수님은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분입니다. 더렵혀지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섞이지 않고, 순수함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인격과 삶이 거짓이 없으시며, 참이시고, 또한 온전하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열쇠란 열고 잠그는 쇠붙이로 ‘어떤 일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나 요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지신 ‘다윗의 열쇠’란 모든 문을 열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비밀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절대 권세와 절대 권능을 상징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가진 열쇠는 천국의 열쇠이며(마16:19), 사망과 음부의 열쇠(계1:18)이기도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세상의 모든 것을 열 수 있고 또 닫을 수 있는 분입니다.
1) 칭찬하신 교회
이런 주님께서 먼저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8).” 여기에 나오는 ‘문’, 특히 ‘열린 문’이라는 말은 앞서 말한 열쇠와 그 뜻이 통합니다.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당신의 문을 잠가두거나 닫아둔 것이 아니라 활짝 열어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열린 문으로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말씀이, 은혜가 항상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도와 교회의 입장에서는 그 열린 문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는 말씀은 대단한 칭찬이자, 칭찬을 넘어 복된 말씀입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들을 누리는 교회요 성도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교회, 말씀의 문, 은혜의 문이 열려있는 교회, 기도의 응답이 열려있는 교회는 얼마나 복된 교회입니까?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러 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역시 하늘에서 땅으로, 천국에서 이곳으로 향한 문이 활짝 열려있기를 소원합니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시는지 구체적인 이유가 나옵니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이것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비해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한 것이 훨씬 컸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분량’이라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만큼, 가진 만큼 살아간다’ 할 때 ‘분량’이라는 말을 쓰지요. 적게 가진 사람은 그만큼, 배우지 못한 사람은 그만큼, 약한 사람은 그만큼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신이 가진 것보다 훨씬 큰 믿음과 순종과 행함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말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에베소 교회처럼 탁월한 교사들에게 배워서 지식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두아디라 교회처럼 돈이 많아서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으며, 또 사데 교회처럼 별 어려움 없이 평안한 교회였던 것도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서울의 내로라하는 큰 교회들을 보십시오. 국회의원, 장차관급 고위 인사들, 대기업 오너들이 즐비합니다. 우리 지역만 해도 ‘이번 지방 선거 때 교인들 중에 몇이 당선되었다’며 자랑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 노예 계층의 사람들, 직물 피혁 포도주 공장의 직공들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약한 자들의 교회, 가난한 자들의 교회, 힘없는 자들의 교회였다는 말이죠. 이렇게 빌라델비아 교회는 교인의 수가 많지 않았고, 교인들 중에 유력인사 힘 있는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 불신 사회와 유대인들의 거센 도전을 막아 줄 만한 사람이 없는 교회였는데도 주님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시대는 ‘숫자가 힘이고 능력’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다수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숫자가 많은 것이 진리가 되고, 승리의 비결이 되고, 또 힘이 된다는 뜻입니다. 즉 많아야 이기며, 많은 것이 성공이며, 또 많은 것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인 수가 많아야 부흥한 교회이고, 교인이 많은 교회의 목회자가 성공한 목회자’라고 인정받습니다, 또 ‘숫자가 많아야 힘이 있고, 힘이 있어야 큰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교회 안에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교회의 최고 목표는 성장입니다. 빨리 성장해서 대교회가 되는 것이 주님이 오시는 것보다 우선입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의 교회였지만 끊임없이 계속되는 훼방자들의 도전에도 끄떡하지 않고 이겨내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자신에게 아무런 의지할 것이 없는 교회는 모든 문제의 해결이 간단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 엎드려 기도하고, 성도들이 늘 하나 되어 서로를 붙들어주고, 그러면서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줍짢게 조금이라도 가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의지하고, 때로는 그것을 서로 주도하느라 갈등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다른 교회들을 통해서 보았습니다만, 교회가 세속화되고, 교인들이 타락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 ‘사회생활하려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로 세상이나 사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의지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리고, 더욱 서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이 가져야, 힘이 있어야 이긴다는 것은 거짓된 복음입니다. 성경은 가진 것이 없어도, 숫자가 적어도, 가난하고 약해도 이기는 법을 말씀합니다. 여러분도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작은 것으로 승리하는 자 되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칭찬은 무엇입니까?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신자와 교회가 주님을 배반하는 경우는 먹고 살아가는 것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을 경우, 또 생명의 위협이 있을 경우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일, 그리고 니골라가 배교한 일 등이 그 경우입니다. 또 일제 강점기 때, 국가의 이름으로 신사참배가 강요될 때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이름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우리의 생명과 가족들의 생명까지 위협해 온다면 과연 거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절개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칭찬받아 마땅한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약속을 주십니다.
2) 약속과 상을 주신 교회
①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9).” 이것은 어떤 약속입니까?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며, 복음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유대인들이 복음과 교회로 돌아와 주님의 백성이 되는 일들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하여 일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약속은 놀랍습니다. 죄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것인데, 그 일이 바로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② 이어지는 또 다른 약속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10~11)”입니다.
예수님은 인내로서 말씀을 잘 지켜낸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두 번째 약속을 하시는데요. 그것은 장차 다가올 엄청난 환난과 그 시험을 이기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초대 교회가 당한 시험과 환난은 상상 그 이상이고,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의 교회들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만은 살아남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어느 누구도 빼앗지 못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③ 이러한 약속은 보다 구체적인 상급으로 이어집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12).”
여기에 ‘기둥’이 나오고 ‘기둥에 이름을 기록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은 지진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서론 부분에서 빌라델비아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도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본, 대만, 중국, 남미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터키나 인도 등은 지진이 많은 나라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사진으로 보시는 것처럼 원자폭탄에라도 맞은 듯이 도시 전체가 쑥대밭이 되고 폐허가 되었고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포탄이나 비행기가 떨어뜨리는 폭탄의 경우 한 번 떨어진 자리에 다시 떨어질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군사 지침은 포탄이나 폭탄이 떨어진 자리로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지진은 한 번 발생한 그 자리에서 다시 발생하는 확률이 정말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진설계가 정말 중요합니다. 지진에 대비해서 내진설계가 잘 된 건축물일수록 그 어떤 지진에도 끄떡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당시에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건축물을 세운 사람은 그 기둥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거나 왕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지진이 많은 지역에서 무너지지 않는 건축물이나 쓰러지지 않는 기둥처럼 교회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여러 지진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와 성도들은 잘 견디고 넘어지지 않는 교회였다는 말입니다. 즉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지진,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일어나는 시련을 잘 견디어 이겨내었기에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로운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일어났던 지진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빌라델비아는 포도 농사와 더불어 포도주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섬기면서 밤이면 도시 전체가 술에 취해 비틀거렸습니다. 바로 이 술에 취해 비틀거림이 지진과도 같았다는 것이죠.
② 두 번째 지진은 9절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델비아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그것을 무기로 교회와 성도들을 사회적, 경제적, 신앙적 측면에서 괴롭혔습니다. 바로 그것이 반복되는 영적인 지진이었던 것이죠.
이러한 지진에 대해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상적으로, 인간적으로 의지할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온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매사에 주님만 의지하고, 매사에 엎드려 기도하고, 매사에 성도들끼리 하나가 되어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영적인 지진을 이기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에도 끊임없이 지진이 일어납니다. 본인에게, 배우자에게, 자녀들에게, 직장에,… 그런 모든 지진들이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즉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여러분의 능력보다 작은 것이라면 괜찮지요. 그러나 여러분의 능력보다 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부분 너무나 버겁고 힘들어 포기할 수 있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신보다 훨씬 덩치 큰 시련과 고난을 잘 이겨내었습니다. 그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갖가지 지진을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3. 사랑받고 칭찬 듣는 교회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러 주에 걸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1차 수신자들인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이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분석해 보면 세 교회는 칭찬과 함께 책망도 들었고, 두 교회는 칭찬은 한 마디도 없이 책망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교회는 책망은 한마디도 듣지 않고 칭찬만 들었습니다. 그 두 교회가 바로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빌라델비아 교회가 들은 칭찬은 어떤 것입니까?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작은 능력으로 믿음의 큰 역사, 큰 본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세상적으로 작지만 주님 앞에서는 큰 교회였다는 말이죠.
두 번째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고 칭찬 들었습니다.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던 것이죠.
세 번째로 주님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칭찬하셨습니다(10).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 또 그 말씀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도 여려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이제는 옛말이 되어갑니다만, 그 말은 결코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사람의 칭찬, 심지어 때로는 말뿐인 칭찬까지도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동네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골칫덩이 소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 아이가 커서 뭐가 될까”하며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할머니만은 달랐습니다. 늘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말을 잘하고 사람 끄는 재주가 있어” 라고 말했고, 소년은 그 말을 가슴에 새겨졌으며, 결국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습니다. 후에 그는 세계적 부흥사가 되었는데요. 그가 누군가 하면 바로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입니다.
사람들은 20세기에 그런 부흥사가 있었다는 것이 전 세계인의 복이라고 말합니다.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말썽을 피우고, 사고를 치고, 때로는 다른 아이들까지 몰고 다니면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그의 장래를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너는 리더십이 뛰어나! 군인의 기질을 타고 났어” 라고 말해주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말이 가슴에 남아있던 그는 후에 군인이 되었는데요. 그가 바로 죤 맥아더 장군입니다.
칭찬 한 마디가 사람의 일생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칭찬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의 효과가 이러하다면 하나님의 칭찬은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점에서 칭찬만 들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큰 일, 믿음의 역사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핍박과 역경 가운데서도 주님과 그 이름을 모른다는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환경이 달라진다고 해도 그 이유 때문에, 또 육체의 요구 때문에 말씀을 어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늘로부터 문, 우리 주님이 오시는 문이 항상 열려있고, 은혜의 문, 복의 문이 항상 열려있기를 바랍니다. 즉 주님의 사랑이 늘 넘쳐나고, 또 주님의 칭찬만 들으시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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